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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30 (00:00:00)
<성주진 칼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성주진 교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이 말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날개가 있
는 것은 추락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다면 날지 않을 것이고, 날지
않는다면 추락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추락한 것에는 여전히 날개가 있
습니다. 이 날개가 치유 받고 새 힘을 얻으면 또다시 비상할 수 있습니다. 여
기에 모든 추락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소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삼손만큼 추락과 비상의 전환을 잘 보여주는 인물도 드뭅니다. 먼
저 삼손이 경험한 추락의 절정은 그가 힘을 상실한 일입니다. 한 때는 나귀
턱뼈 하나로 천명을 해치웠건만 이제는 한 사람도 상대할 수 없는 연약한 사
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무적의 용사가 원수의 조롱에
도 한마디 대꾸조차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
신의 것으로 과신하고 언제라도 원하는 때
에 필요한 능력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연약함을 보지 못하고 자기기만적인 자만심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주신 거룩
한 부르심과 은사를 가지고 파멸에 이르는 장난을 치다가 깊은 나락으로 떨어
진 것입니다.

삼손이 힘을 잃은 것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떠난 사실
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떠난 사실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없습
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 가운데 속할 것입니다. 하나님
이 떠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 자체가 말의 모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떠난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는 사
실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만듭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
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정녕 죄는 성도와 사역자를 무력하게 만듭니
다. 그리고 영적인 축복과 분별력을 빼앗아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거나 느끼
지 못하게 만듭니다.

삼손은 오늘날 세상 가운데 처한 성도 개인과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도와 교
회가 세상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지적에 직면해 있습니다. 여러 원인들을 열거할 수 있겠지
만, 삼손의 이야기는 교회의 영향력 상실이 성도들의 죄 때문이 아닌가 스스
로 돌아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삼손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랬더라
면 삼손의 이야기는 세속적이고 문학적인 비극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삼
손의 깎인 머리가 다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은
혜로운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시 자라기 시작한 삼손의 머리는 자격을
상실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목적과 은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은 깎인 직후부터 다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회복은 추락
의 동반자입니다. 아무 것도 그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는 것을 막을 수 없었
습니다. 사실 이것은 삼손 자신의 상태나 그가 처한 환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눈이 뽑혀서 앞을 보지 못하는 중에도 삼손의 머리카락은 자랍니
다.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하는 중에도 꾸준하게 자랍니다. 원수에게 수치와
조롱을 당하는 중에도 상관없이 자랍니다. 다곤 신전에
서 모욕을 당하는 가운
데서도 변함없이 자라납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침투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삼손의 회개, 곧 믿음의 회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회
복된 믿음은 지혜로, 행동으로, 그리고 기도로 나타났습니다. 삼손이 믿고 기
도하고 행동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다시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삼손이 추락
의 아픔을 딛고 재비상의 회복을 누리게 된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의
반전이었습니다.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에 기초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날개의 추락과 비상은 은혜와 믿음에 관한 양면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다시 날 수 없을 것 같은 추락한 날개를 어루만지며 탄식
하는 이들에게, 과거에 사용했던 날개는 여전히 가지고 있으나 어느덧 몸이
무거워져 날려는 의지를 포기한 사람들에게, 삼손의 다시 자란 머리카락은 새
로운 비상의 자리로 초청하는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81 no image <성주진 칼럼> 사랑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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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7 2003-07-09
사랑의 상처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얼마 전 남측 이산가족이 북측가족을 만나기 직전에 남긴 말 한 마디를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만나면 상처부터 확인해야지요.' 과연 그 분이 상처를 확 인했는지 그 후일담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어떤 상처는 이처럼 한 사람의 정 체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확인해주는 표지가 됩니다. 그 상처를 아는 모자 는 '아들아!', '어머니!'를 목놓아 부를 수 있습니다. '상처부터 확인해야지.' 이 말은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과 가진 대화를 떠오 르게 합니다. 도마에게 주님의 상처는 그분의 정체를 확인하는 표지였습니 다. 도마는 주님의 정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 상처가 의미하는 바 주님의 사랑과 주님 되심에 감격하여 외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 때 도 마가 느꼈던 감동은 지금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어 옵니다. 우리는 과거에 믿음의 형제자매나 동역자들에게 상처를 입은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다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게 되면 우 리는 그만 주저앉기 쉽습니다. 한 번 상처를 받은 후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 하면서 방관자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일수입니다. 상처는 아픈 법이기에 다시 는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누가 탓할 수 있겠습니까? 인지상정 인 것을요. 그러나 주님의 상처는 우리에게 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상처를 아느 냐?' 주님은 어떤 상처는 사랑의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과정에서 피차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불가피한 일인 줄 압니 다. 그렇기에 때문에 사랑하려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고통을 받고 상처를 입 는 것을 각오해야 됩니다. 죄 없으신 주님도 고통과 상처가 없이는 우리를 사 랑할 수가 없었는데, 하물며 죄 많은 우리야 오죽하겠습니까? 고통과 상처가 없는 사랑은 인간의 실제상황을 도외시한 환상일 것입니다. 사랑의 아픔은 일종의 성장통이 아닐까요. 아이들이 한참 아픈 다음에는 키 가 훌쩍 크고 성숙해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성장할 때 고통이 수반되듯 사랑 의 성숙에도 많은 아픔이 필요한 줄 압니다. 아무런 고통 없이 편하게 만 살아 가는 것은 우리를 신앙적으로 나약하게 만들고 깊은 관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고통을 두려워하고 상처를 겁내다가는 믿음과 사랑 의 진보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을 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형제에게 입은 상처는 사랑의 증거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 리를 사랑하셨기에 상처를 입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런 고통이나 상처가 없는 몸으로 주님 앞에 서있는 우리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봅니다. 우리는 어깨를 펴며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주님, 내 몸과 마음에는 상처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님은 과연 기뻐하실까요? '네가 사랑하지 않았구 나' 라고 슬퍼하실지도 모릅니다. 반면 상처투성이의 몸을 가까스로 추스리며 주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 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자신 없는 태도로 어렵게 말을 꺼냅니다. '주님,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 정도 아픔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뭐라고 말 씀하실까요? 아마도 '이 상처는 사랑의 상처구나!' 기뻐하실 것입니다. 주님 은 우리가 연약함의 증거로 알고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상처들을 오히려 영광 의 상처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진 '그리스도의 흔적'도 이 런 상처가 아닐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목적이 그저 아무런 고통 없이 편하게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본받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라면, 아픔과 상처 를 각오하는 것이 마땅한 줄 압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무 상처 없이 사 는 삶이 아니라, 혹 상처를 입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사랑을 계속하기로 결단 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면 받지 않아도 될 고통을 받는 경 우가 있습니다. 또한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면 입지 않아 도 될 상처를 입고 아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이 실상은 그 토록 행복한 일입니다. 이 아픔과 상처는 주님이 우리 마음에 심어두신 사랑 의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상처 난 두 손을 들어 우리의 자랑스러운, 그러나 아픈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80 no image <성주진 칼럼> 길 위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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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4 2003-06-25
길 위의 존재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방학을 앞둔 학생이나 휴가를 생각하는 직장인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 으로 들뜰 때입니다. 훌쩍 길을 떠난다는 것 - 그것은 낭만적이면서도 매력적 인 주제입니다. 이 방랑의 마음이 어디서 온 것일까요?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한 때의 일탈일까요? 버거운 짐에 대한 작은 반란일까요? 아마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아직 가지 않은 미답의 길을 가려는, 마음속 에 숨은 소원의 숨길 수 없는 표출이 아닐는지요. 이런 까닭에 길은 예로부터 인생행로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습니 다. 고전에서 길은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합니 다. 현대영화의 한 장르인 '로드 무비'도 인간이 길 위의 존재임을 확인해 줍 니다. 이 길 위에서는, 예를 들면, 소모품처럼 버려진 지치고 소외된 '잉여인 간'도 순수한 사랑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때때로 순례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의 조 상 아브라함도 약속의 땅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야 곱은 애굽의 바로에게 순례자의 정체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순례자의 이미지는 성도가 이 땅의 도성에 매어 사는 존재가 아니라, 천성을 목적지로 삼는 지향적 존재요, 성화의 길을 가고 있는 과정적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교회도 길 위의 존재입니다. 마가복음의 '길(호도스)' 주제는 주님 중심으 로 움직이는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터 좋은 곳에 뿌리내린 자생적 조직체가 아니라,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즉시로 길을 떠나 는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에서 안주하려는 성도와 교회가 주님을 제 대로 좇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라도 난관은 있습니다. 이 길은 오렌지 꽃향기가 바 람에 날리는 낭만적인 과수원길이 아닙니다.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야 만 갈 수 있는 '좁고 험한' 길입니다. 평탄한 길만을 바라고 길을 떠났다가 는 어려움을 당하면 쉽게 좌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십상입니다. 주님은 당 신의 손을 더 꼭 붙잡게 하시려 고 일부러 어려운 길을 택하실 수도 있습니 다. 그렇다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만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주 님은 우리를 위하여 쉴만한 물가와 누울만한 초장도 예비해 두셨습니다. 이 길의 기상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몰아치는 비바람과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가 가는 길을 가로막을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믿음이 좋다 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폭풍과 안개가 즉시 걷히는 것이 아니더라는 말도 듣 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안개 속 을 걸어가는 법을 알려주시고, 길을 잃지 않도록 손잡아 이끌어 주십니다. 그 리고 때가 되면 안개도 거두어 가십니다. 험한 길을 가다보면 쉽게 지치고 자주 넘어집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 목사 가 말한 것처럼 정상에 오르는 도중에 넘어졌다고 해서 산밑의 출발점으로 되 돌아가 다시 시작하지는 않습니다. 어디에서 넘어졌든지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길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고 고집하는 것은 잘못된 완벽주의입니다. 완전주의의 오류는 자기의에 집착 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새 출발을 지연시 키는 데 있습니다. 완전주의는 성화의 친구 같으나 실은 성화의 무서운 적입 니다. 길에는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무서운 유혹은 '애굽으로' 돌아가 려는 유혹이 아닐까요? 애굽을 떠났으면서도 옛날의 쾌락이 찾아오기 쉽도록 가는 곳마다 연락처를 남겨놓으려는 유혹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편하게만 가 려고 너무 많이 가져가는 것도 순례길에 지장이 될 뿐만 아니라, 도중에 안주 하고자 하는 유혹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애굽으로 다시 내려가지 말 라고, 간편한 행장을 갖추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길은 남이 대신 가 줄 수 없는, 내가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우리 각자 가 길 위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 길에는 동반자와 동 행자가 있습니다. 다가오는 휴가철에 주님과 함께 하는 특별한 여행을 계획하 지 않으시겠습니까? 멋진 여행이 되시기를(bon voyage)!
79 no image <성주진 칼럼> 가상인터뷰: 아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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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9 2003-06-12
가상인터뷰: 아모스 성주진 교수 -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경향각지를 돌아보신 줄 압니다. 선지자의 눈에 비친 한국사회의 모습은 어떠한지 몹시 궁금합니다. - 양을 치고 뽕나무를 키우던 전직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국사회의 급변하는 모습에 현기증이 날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어쩐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 다. 아마도 작금의 한국상황이 제가 사역했던 2,750년 전 북이스라엘의 상황 과 비슷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어떤 점이 비슷하다고 보셨는지요? - 먼저 배금사상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옛날에 나는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 는 티끌'을 탐하고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파는', 비정한 우상숭배 적 물질주의를 질타한 바 있습니다. 지금 한국도 황금만능의 풍조가 만연하 여 돈만 된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바로 이 것 때문에 나는 당시에 사회적 정의의 실천이야말로 경건의 참된 표지라고 강 조한 것입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화가 없습니 다. - 이윤추구와 생존경쟁이 불가피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는 말도 있습니다만.... -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건강한 경제활동과 아울러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제도 적, 개인적 배려가 가능한 줄 압니다. '사람얼굴을 지닌 자본주의'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 다음으로는 무슨 문제를 지적하시겠습니까? - 고삐 풀린 쾌락주의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차를 타고 지나면서 풍광이 좋다 는 곳마다 러브호텔인가 뭔가가 즐비하게 널려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도시 에는 무슨 살롱이네, 무슨 클럽이네, 무슨 촌이네, 각종 향락업소가 왜 그렇 게 많은지.... 성도덕의 타락이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 같습니다. 청소년들 도 인터넷상에서 불건전한 정보에 거의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다니, 한국 의 장래가 걱정됩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선지자께서는 가정문제도 간접적으로 지적하신 줄 압 니다만.... - 한국도 이혼문제가 심각한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이혼율이 벌써 세계 3위 에 이르고 세 집 걸러 한 집이 이혼을 하는 상황에서 특히 자녀문제는 심각 한 사회문 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 다'는 주님의 말씀을 모를 리 없는 그리스도인들도 높은 이혼율을 기록하고 있어 어떻게 봐야 할지 난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서는 진정한 행복 을 누릴 수 없습니다. - 아시다시피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성장을 기록했는데요. 여러 교회를 돌아보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크신 은혜를 베푸신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과연 복 받은 교회입니다. -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표정인데요. - 예배가 점차 형식화되면서 예배의 감격이 식어 가는 것은 아닌지요. 이에 따라 성도들의 삶은 점차 세속화, 무력화되는 것 같습니다. 교인들도 불순종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렸던 하나님의 심판을 교훈 삼아 '예언자적' 설교를 달게 들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다음 세대의 주역인 주일학교학생과 청년부 회원들이 예배와 설교에 '열광'할 수 있도록 교회가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해 야 한다고 봅니다. -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부흥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 회개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회개 없는 진리운동은 무의미합니다. 회개 없이는 진정한 부흥이 불가능합니다. 부흥은 방법과 프로그램이 아니 라, 성령으로 말미암는 생명과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힘써 여호 와를 찾고, 그분과의 거룩한 교제를 회복해야 합니다. 거룩한 백성의 자리를 회복할 때에만 한국교회는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주도 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선지자께서는 남쪽 출신이지만 북쪽에서 사역하셨는데 6.25를 앞둔 시점에서 분단된 한반도에 대해서 한 말씀 주시기 바랍니다. - 한국교회가 헛된 안전감이나 성취감에서 벗어나 남은 자의 인내와 믿음을 가지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으로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는 줄 압니다. 주 께서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 귀한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78 no image <성주진 칼럼> 차 한 잔의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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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17 2003-05-29
차 한 잔의 여유 성주진 교수/합신 구약신학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축복 가운데 가장 하찮게 여겨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 은 일상적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혹자는, 우리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일상적인 일들, 즉 먹고, 마시고, 쉬고, 출퇴근하고, 공부하고, 양육하 고, 살림하는 등의 일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일상적 요소를 최소화하고 그 자리를 종교적 활동으로 채우는 일이 경 건의 요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적 삶에 대한 이러한 과소평가는 아마도 일상 의 평범함과 반복성 때문일 것입니다. 평균적인 그리스도인에게는 평범한 일상은 제쳐두고, 비범한 일, 특히 기적 적인 일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확실히 수고로이 땅을 일구는 일보 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모으는 일이 훨씬 신나는 일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도 농사일은 뒷전으로 미룬 채 내리지도 않는 만 나를 주우러 광야로 나간 이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까마귀가 물어 다 주는 고기가 뻔한 먹거리보다 더 신령한 음식처럼 보일 것입니다.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일상적인 수고와 성가신 스캔들에 지쳐있다면 '영생의 물'을 한번 마심으로 영원한 해갈을 얻으려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더 큰 믿음과 헌신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요?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저지른 불순 종과 반역은 기적이 모자라서 생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매일매일 기적 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살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믿 는 이들에게 기적은 믿음의 성장을 가져다 주었지만, 기적을 요구하는 대부분 의 사람들에게는 더 큰 기적을 갈망하게 할 뿐,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습 니다. 일상의 삶을 낮추어 보는 또 다른 이유는 일상의 반복적 성격입니다. 누구라 도 아무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은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애써 밀어 올린 바 위가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이 확실하다면, 또다시 밀어 올리는 수고는 소외의 확인 외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치의 온갖 고문을 이겨낸 일단의 유대 인 포로들을 절망으로 이끈 것은 더 가혹한 고문이 아니라 흙더미를 반복적으 로 옮기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복적인 일이라고 반드시 무의미한 것 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반복적 일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거듭거듭 임하는 임재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조로운 반복처럼 보이는 우리의 일상 을 풍성한 의미를 담아내는 질그릇으로 빚어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 는 격식을 갖춘 종교활동에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짬 짬이 나누는 뜻밖의 담소와 차 한잔의 여유 가운데에서도 누룩같이 번져갑니 다. 모세와 기드온은 일상적 삶의 소중함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방문을 받 았을 때에 모세는 특별한 종교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기드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미디안 사람들이 무서 워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평범하고 초라한 그들의 일 상 속에 '침입'하셨습니다. 신약 경륜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일상의 삶 전체 로 확장되었습니다. 일상의 복됨은 역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궁극적으로 기초하고 있습니다. 주 님의 지상생활 은 인간 존재의 모든 양상과 삶의 모든 모습을 포괄하고 있었습 니다. 주님의 먹고 마심은 우리의 먹고 마심을 영광의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주님의 노동은 우리의 모든 수고를 하나님 나라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주 님의 일상은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처소가 되었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같은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일상의 삶이 다 은혜입니다.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드 려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상성은 피해야 할 번거로움이 아니라 기쁘게 누 려야할 축복입니다. 일상은 무의미한 시간 보내기나 목적 없는 일의 반복이 아니라, 풍성한 의미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전진하는 도도한 은혜의 흐름입 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삶은 하나님 나라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임할지 모르는 가운데 믿음과 기대로 팽팽하게 긴장된 활시위와도 같습니다. 이것은 일상의 평범함과 반복성에 지쳐 삶의 활력을 잃어 가는 우 리들이 회복해야 할 실천적 경건이 아닐는지요.
77 no image <성주진 칼럼> '다른 것'과 '틀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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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87 2003-05-14
'다른 것'과 '틀린 것'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다른 것입니까? 아니면 틀린 것입니까? '그 사람은 당신과 틀려.' '당신 생 각은 내 생각과 틀려.' 일상적인 대화에서 우리는 '다르다' 라는 형용사 와 '틀리다' 라는 동사를 혼동해서 사용하기 쉽습니다. 의미의 차이를 모르 는 바 아니면서도 실제로는 동의어처럼 사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단어의 혼동은 단순한 말실수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착각을 넘어 사회의식의 심층에 뿌리박은 것 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면 이 혼동은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다' 라는 인식의 틀에서 유래했을 것입니 다. 이러한 잘못된 동일시가 언제부터 생기게 되었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아마 도 나와 다른 것을 관용하지 못하는 사회풍조가 개념의 혼동을 만들어 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언어는 생각의 집이라고 아닐런지요? 전혀 다른 두 단어 또는 개념의 혼동 은 얽히고 설킨 두 집안 처럼 합리적인 판단과 우호적인 관계형성을 방해할 뿐 만 아니라, 사회문화의 발전에 지장을 초래할 것입니다. 나아가서 성경을 이 해하고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일에도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성경은 물론 다른 것과 틀린 것을 명확하게 구분합니다. 예를 들면 이 구분 은 사도 바울이 교회와 성도의 관계를 몸과 지체의 관계로 비유했을 때 기본 적으로 전제한 것입니다. 몸의 비유에서 지체들은 서로 다르지만 어떤 지체 도 결코 틀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서로 다른 지체들이 온전한 한 몸을 구 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대적으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음을 그림같이 보 여주고 있습니다. 신약의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 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상당히 다르고, 공관복음끼리도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틀리지 않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대표적 인 두 역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부터 열왕기까지의 역사와 역대 기의 역사는 서로 다른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같은 역사를 기술합니다. 그러 나 어떤 역사도 틀린 역사가 아닙니다. 이러 한 다름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다름은 원근감과 입체감을 줄뿐 만 아니라 다양한 의미와 적용을 통하여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사실의 총체성을 아름답게 펼쳐 보여줍니다. 다윗은 한 인격이지만, 역사적 인물이 자 메시야적 인물이요, 은혜의 통로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모델이면서 판단 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음악이 이러한 원리를 잘 보여 줍니다. 음악에는 여러 장르가 있습니다. 어 떤 장르에 속한 작품도 한 코오드만으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가지각색의 코 오드가 조화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고 다채로운 장르는 음악을 풍요하게 만듭니 다. 단순한 코오드만으로 구성된 작품은 얼마나 단조로울 것이며, 최소한의 장르만 있는 음악은 또 얼마나 빈약할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배척하고 끼리끼리 모여 사는 사회는 얼 마나 빈약할까요? 그러한 교회는 또 얼마나 초라하겠습니까? 획일적이고 무미 건조하며 조화와 이해와 관용과 사랑과 존중과 화합을 상실한 채 교조주의와 독단과 배척을 일삼는 교회는 결코 천사가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교회는 다른 것을 배척의 대 상으로 삼는 대신 협력의 파트너 로 인식하는 관용을 연습하는 복된 연병장입니다. 물론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틀린 것을 다만 다를 뿐이라는 주장의 무비 판적 수용은 상대주의에 함몰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상대주의의 논리 가 사랑과 관용의 이름으로 기독교의 절대적인 진리를 허무는 것을 방치해서 는 안됩니다.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구원의 절대적 진리가 있습니다. 다른 것을 틀리다고 말하고, 틀린 것을 다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개념의 혼동이자, 분류의 착오입니다. 우리는 먼저 진리의 영역에서 이러한 범주의 혼동을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혼합주의적 사회에서 우리는 먼저 말씀으로 연단되고 은혜로 넉넉해진 마음을 가져야 될 줄 압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구원의 절대적 진리를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독선적이지 않고, 분명한 입장을 지키면서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사랑과 지혜를 가꿔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76 no image <성주진 칼럼> 기독교적 대안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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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2 2003-04-30
기독교적 대안을 찾아서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이라크 전쟁이 끝난 지금, 과연 누가 승리자이고 누가 패배자인가를 묻게 됩 니다. 혹시 진정한 승자가 없는 것은 아닐까요? 아마도 이번 전쟁의 최대 피 해자는 무고한 희생자들과 더불어 기독교, 그것도 보수적인 개신교가 아닌가 합니다.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특히 중동국가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상당한 타 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아픔과 부담을 안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기독 교적 대안의 문제를 되짚어 보게 됩니다. 이번 전쟁에서도 당사국들은 자국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여러 논리를 동원하였습니다. 그중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논리는 역시 흑백논리 입니다. 미국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는데, 여기에는 자국이 무고 한 폭력의 희생자일 뿐만 아니라 정당한 공의의 심판관 및 집행자라는 자기인 식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후세인 독재정권은 미국은 사악한 침 략자, 곧 사탄이기 때문에 이에 맞서 싸우는 것은 성전 이라고 주장합니다. 전 쟁상황에서 당사국들은 대개 이원적 선악대결의 구도에서 명분을 찾습니다. 당사국들의 흑백논리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제삼국은 흔히 양비론 또는 양 시론을 표방합니다. 둘 다 나쁘다든지, 둘 다 일리가 있다는 식으로 곤혹스러 운 상황을 돌파하려고 합니다. 사실 이 땅에는 절대적으로 선한 국가나 절대 적으로 악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양비론과 양시론은 언제나 가능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판단과 실천적 결단이 불가피하게 요청되는 상 황에서 두 논리는 손쉬운 현실도피 수단으로 오용될 수 있습니다. 제3의 대안은 없을까요? 혹시 미국은 자국의 '진정한 힘'을 보여줄 좋은 기 회를 놓치지 않았을까요? '중생한' 지도자들이 '정의로운 전쟁'의 원칙을 충 실하게 따랐더라면, 지구촌의 목소리에 좀더 귀를 기울였더라면, 전쟁의 결과 를 좀더 심각하게 고려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성경은 역사의 진보를 가르치지 않습니다만, 흡사 옛날 로마 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기독교적 대안은 적나라한 힘의 과시와 요지부동의 흑백논리 앞에서 무력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흑백론과 양비 론의 한계를 뛰어넘어 갈등을 해소하고 구원을 이루는 제3의 신학적 대안을 제시하는 사실에 환호하게 됩니다. 수가성의 여인이 제기한 예배처소의 문제 는 동시대인이 직면한 종교적 흑백논리의 한 예입니다: '예루살렘인가? 사마 리아인가?' 예수님은 전혀 다른 차원의 대안을 제시합니다: '아버지께 참으 로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개역개정). 그리스도가 오신 이상 예배는 더 이상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에배는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성취이신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 됩니다. 윤리의 영역에서도 기독교적 대안제시의 필요성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가져다 줍니다. 예를 들어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양론은 우리로 '사형이 성경 적인가, 아닌가?' 자문하게 만듭니다. 구약에 언급된 사실만을 근거로 사형 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한, 이 주제는 간단한 흑백논리의 문제가 아 닙니다. 정의의 실현과 법과 질서의 유지 못지 않게 생명의 존엄성, 회개의 r 기회 부여 및 오심의 가능성도 중요한 고려사항입니다. 이 경우에 사형은 선 고하되 집행은 유보하는 방안은 정의의 요구와 사랑의 실천을 만족시키는 기 독교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세상에 맥없이 굴복하거나 경직된 대결주의로 치닫지 않고 믿음으로 지혜롭게 상황에 대처하는 일은 실천불가능한 이상이 아닙니다. 다니엘이 왕의 진미를 앞에 두고 무조건 순응하거나 어설프게 순교 적 자세를 취하지 않았던 것은, 그에게 당면한 난관을 극복하고 이방인들에 게 다가갈 수 있는 제3의 창조적 대안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 습니다. 날로 복잡해져 가는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하여 결정 하고 실천할 것을 끊임없이 요청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단적 흑백론 과 무책임한 양비론을 넘어 믿음과 사랑과 진리의 대안을 실천함으로써 하나 님 나라의 진정한 역동성을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일 것입니다.
75 no image <성주진 칼럼> 부활절 삼상(三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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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8 2003-04-15
부활절 삼상(三想) 성주진 교수 부활절이 다가옵니다. 부활의 의미를 묵상하다가 세 가지 상념을 떠올립니 다. 이 생각들은 나름대로 부활의 은혜를 새롭게 살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 생각은 예수님을 처음 영접했던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 느 수양관 잔디밭, 일단의 학생들이 차례대로 앞으로 나가서 장차 자신이 덧 입을 부활의 몸에 대하여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키 큰 미남으로 부활했 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예쁜 얼굴로 부활할 줄로 믿습니다.' 듣고 있던 이 들도 함께 웃으며 즐거워했습니다. 물론 성경은 그렇게 되리라고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이 회상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받으 신 상처는 그냥 남아 있습니다. 손과 발에는 못 자국이, 그리고 그의 허리에 는 창 자국이 선명합니다.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확신을 주었던 그 사랑의 상 처들을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려니 생각하니 주님의 부활에 담긴 사랑 에 다 시 한번 감격하게 됩니다. '주님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구 나.... 내 죄 때문에 생긴 그 보기 싫은 상처들을 영광스러운 훈장처럼 지니 고 계시다니....' 두 번째 생각은 '빈 무덤'으로 향합니다. '기독교는 무덤 없는 종교'라는 말 이 있습니다. 공자와 석가모니, 마호멧 같은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은 다 죽 어 무덤에 묻혔지만, 그리스도만은 무덤을 깨치고 살아나셨으므로 무덤이 없 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기독교에도 무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빈 무덤'입니다! '무덤이 없다'는 말과 '빈 무덤이 있다'는 말은 주님의 부활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무덤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이 죽음을 맛보지 않 고 직접 승천하셨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마치 주님의 부활이 없는 때 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독교의 사활이 걸린 진리의 문제입 니다. 나아가서 이 표현은 죽음 없는 부활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습 니다 . 반면 '빈 무덤'은 죽음 없는 부활이 불가능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십 자가 없는 부활을 구하지만 부활의 은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통과 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를 없이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서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그 무엇입니다. 십자가만이 부활에 이르는 길입니 다. 마지막 생각은 '능력이 없다'는 말에 미칩니다.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힘입 어 승리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고 말합 니다. 그러나 실상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부활의 능력을 이미 '소유하고' 있 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연합의 신비는 우 리로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주님이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 신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됩니다. 주님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지신 그대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남은 것은 우리가 그 능력을 활용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은 다양한 능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 바람, 태양, 원자 등 우 리가 아는 힘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에너지가 이 경이로운 우주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각양 에너지가 넘쳐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르거나, 활용방법을 모르거나, 또는 알고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력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무한한 능력을 이미 '소유'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소유한 부활능력을 '사 용'하는 일만이 남아 있습니다. 없는 능력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이미 주어진 능력을 사용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 과 복음을 나누고, 종교와 기독교를 가르는 차이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도 바울처럼 어찌하든지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됩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는 현재의 신앙 상태에 적당히 주저앉지 말고 '거룩한 충만'을 추구하는 자리로 나아오라고 우리 모두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74 no image <성주진 칼럼> 십자가의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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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1 2003-03-27
십자가의 수수께끼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지금 세인의 시선은 온통 이라크에 쏠려 있습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도 우리가 소망을 가지는 것은,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역사의 흐름을 결정짓는 근원적인 사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실 때문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의 소문이 흉흉할수록 역사의 주관자인 하나님을 믿 음으로 바라보며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더욱 갈 망하게 됩니다. 특별히 고난주간을 앞두고 십자가의 의미를 확인하고 그 은혜 안에 거하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믿는 일 에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시대가 다르고 인격의 개별성이 엄연한데 어떻게 죄 를 짓지 아니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요? 십자가는 세상의 지혜와 종교의 눈에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 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성경 안에 마 련해 두셨습니다. 성경은 먼저 대속의 원리가 인간의 합리적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 서 처음부터 계시하신 구원의 진리라는 점을 밝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깊 은 구렁텅이에 빠져 허덕이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우리 무리의 죄악을 자 기 아들에게 담당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 나님의 방법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방식은 제한되고 타락한 인간 이성이 고안해 내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대속의 길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은 자신의 누추한 의나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헛되게 노력합니다. 그러 나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참 구원의 길을 보여주시려고 이스라엘 의 역사와 제도 속에 대속의 진리를 새겨 놓으셨습니다. 희생제물은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대속의 진리를 보여주는 시청각 교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제도를 통하여 수천년 동안 안식일마다, 절기 마다,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이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개인의 마음속에, 이스라엘 백성의 의 식 속에 지울 수 없는 진리로 각인시켜 주셨습니다. 예수 님이 완전한 제물이라는 사실만 믿으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스라엘의 구원역사 속에 대속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 는 인식의 틀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즉, 언약을 통해서 연합의 원리를 가르치 신 것입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다윗 언약의 효력은 그 개 인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은 이들과 언약 안에서 연합되어 있 기 때문에 언약의 효력은 모두에게 미쳤습니다. 마찬가지로 새 언약의 백성 인 그리스도인들은 새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이 루신 모든 구원의 은총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구약의 제사는 바울이 강조한 칭의의 개념을 알기 쉽게 보여줍니 다. 제사는 죄인의 태도나 인격을 바꾸기 전에,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태도 를 먼저 바꿉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이 의인으로 변 화하기 전에 죄인에 대한 태도를 바꾸셔서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 다. 제사는 믿음의 작용에 대해서도 참여교육을 시킵니다. 예배자가 제물에게 행 하는 안수는 손을 살짝 얹는 행동이 아니라 자기 체중을 실어 짓누르는 행위 입니다. 이는 죄가 옮겨갔음을 상징하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이로써 예배자 는 자기의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어서 제물 이 자기 대신 죽임을 당하고 불살라지면 향기로운 냄새가 연기와 함께 하늘 로 올라갑니다. 예배자는 이 연기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기쁘게 받 으심으로써 자기 죄가 사함 받은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단순한 전쟁의 중지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서 누리는 완전한 평화입니다. 믿는 우리에게 십자가는 더 이상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아니라 확실한 구원의 진리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 는 삶은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첫걸음입니다. 대속의 십자가에 기초 한 복음만이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73 no image <성주진 칼럼> 상처입은 자존심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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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9 2003-03-13
상처입은 자존심 성주진 교수/ 합신구약신학 요즈음 머리 속에서 맴도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존심'이라는 단어입니다. 상처 입은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닌 가 뒤돌아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상처받은 자존심은 뒤얽힌 인간관계뿐 만 아니라 복잡한 국제관계를 이해하도록 돕는 열쇠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 다. 911테러로 미국의 자존심은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 끔찍한 테러는 수많 은 생명을 순식간에 앗아갔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이전의 미국과 는 전혀 다른 미국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탈레반 정권과 벌인 '테러 와의 전쟁'의 단호함과 이라크와의 전쟁에 대한 집요함은 미국이 입은 상처 의 깊이를 반영합니다. 이라크의 자존심도 만만치 않습니다. 느브갓네살의 바벨론을 꿈꾸며, '7000 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라크는, 이제 200년을 갓 넘긴 신흥강대국 미국과 자 존심 대결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대결은 종교적, 문명적, 경제적, 국제정치 적 요인과 맞물려 예측하기 어려운 복잡한 국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라크에 대한 대응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미국과 같은 나토 회원국임에도 불 구하고 오히려 러시아와 함께 미국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여기에 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유럽국가의 손상된 자존심이 얼마간 작용했을 것입 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학생 치사사건과 관련해서 미군법정이 내린 무죄 판결은 민족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 상처가 대규모 촛불시 위로 번졌고 지난해 대통령 선거에도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소파 (SOFA) 개정 요구의 근저에도 상처받은 민족적 자존심이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자존심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는 우리가 다 경험하는 바입 니다. 상처를 받게 되면 고통스럽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나의 아픔 에 압도되어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할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하여 각종 심리적 방어기재를 발동하게 됩니다. 나아가서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이 자리잡게 됩니다. 우리의 상한 자존심은, 때로는 정당한 존재가치를 입증하기 위하여, 때로는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갑니 다. 상한 자존심의 무서움을 아는 세상의 지혜는, 자존심의 상처는 절대 회복되 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원수를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경고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많은 경우에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 되는 줄 압니다. 그리스도인이기에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절대 적인 이해와, 목회자와 다른 성도에 대한 높은 기대 때문에, 오히려 더 큰 상 처를 쉽게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 습니다.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자 존심에 입은 상처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감사하게도 주님 의 영광스러운 복음에는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상처들을 은혜의 처소로 만드 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픈 상처를 통하여 자신을 다시 한번 돌 아보고 새로운 은혜를 덧입음으로써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 다. 요셉은 아름다 운 예를 보여줍니다. 형제들은 상한 자존심 때문에 요셉을 종 으로 팔았습니다. 자기가 끼친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입게 된 요셉이 처음부 터 보복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게 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달았 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진리는 요셉이 형제에게 보복하는 대신 그들과 그 후손을 사랑으로 보살피게 만듭니다. 자존심의 상처를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결국 상한 자존심의 치유는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아무리 원숙한 사람이 라도 인격의 고매함으로는 상처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나를 회 복시켜 주실 때에만 나의 참된 자존감이 회복되고,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도 치유를 받게 됩니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사랑을 통하여 우리의 상한 영혼 속 에 주님의 치유의 능력이 흘러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은 스스로 상처 를 받음으로써 죄인들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 의 능력입니다.
72 no image <성주진 칼럼> 린튼과 폴러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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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6 2003-02-26
린튼과 폴러첸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북한주민의 생존과 복지, 탈북자의 인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남북한의 통 일을 위하여 한국교회와 선교사를 비롯한 여러 단체와 많은 활동가들이 국내 외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 대열에는 고맙게도 외국인도 합류하 고 있는데, 두 사람만 예로 들어보라면 스티브 린튼과 노베르트 폴러첸을 꼽 을 수 있을 것입니다. 린튼은 구한말 미국 선교사인 유진벨의 외손자로 현재 북한의 결핵퇴치에 진 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북한(당국)과의 관계를 '손님-주인'의 관계로 규정하면서, 이 패러다임에 맞추어 자신의 활동의 범위와 성격을 조심스럽게 설정합니다. 정치 문제에 대한 불간섭, 자립을 위한 협력, 상대방의 자존심 중시 등이 다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는 결핵퇴치 등의 사업을 위하 여 북한을 60여회 방문하였는데, 이는 그의 사역원칙에 대한 북한당국의 신뢰 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폴러첸은 4년전에 독일의 '긴급의사회'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하였습니다. 초기에는 '공화국 친선메달'을 받는 등 큰 신임을 받았으나, 그의 인권요구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북한당국에 의해 사실상 추방당하고 맙니다. 그의 대 북관과 활동을 규정짓는 원형적 경험은 나찌 독일의 유대인수용소입니다. 그 는 침묵의 죄를 무겁게 의식하는 독일인으로서 북한의 실상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일이 변화의 지름길인 줄 믿고 대중과 언론의 이목을 최대한 집중시키 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두 접근방법의 논리와 전략은 자못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두 방법은 서로 모순된다기보다 다면적 이해와 추구라는 연구과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봅니 다. 오히려 우리는 전제된 공통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방법론은 민 족을 사역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습니다. 외국인이니까 당연할 수도 있겠지 만, 이들에게는 분명 민족의 논리를 넘어서는 사랑과 정의에 대한 확고한 신 념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민족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옵니다. 민족은 하나님의 세상경륜에 서 기본 틀로 작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유다 민족에 갇혀있 지 않고, 민 족과 국가를 아우르는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 사이에 구별이 없 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보지 못하는 이 시대에서 통일논의는 민족을 중심적 위치에 두어야 하지만, 이러한 자리매김은 편협한 민족주의나 무분별 한 통일지상론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민족의 논리가 지나치 면, 경직된 민족주의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보다 넓은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웃에 대한 가르침은 좋은 출발점입 니다. 여기에서는 민족의 같음이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의 절박한 필요와 이웃이 되라는 가르침이 강조됩니다. '지구촌'이라는 한 마을에 사는 우리 그 리스도인은 민족의 원리와 더불어 사랑과 정의라는 보편적 원리를 놓치지 말 아야 할 것입니다. 청지기론도 중요한 전망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언가를 주신 것은 나 만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자와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 나눔의 원 리는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 간에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충성된 청지기는 아까워서 움츠리 기보다 나눔의 통로가 되었음을 기 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가르침도 귀한 안목을 제공합니다. 인간은 타락후 에도 여전히 제한된 의미에서나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전히 인간됨을 소유한 존재, 돌이키면 언제라도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가 능성의 존재로 보는 인간관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다대수의 북한주민을 '인간 적으로' 이해하고 선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성경적 근거를 제공합니다. 지금은 낭만적인 통일론에 막연하게 안주할 때가 아니라 실제적인 통일을 구 체적으로 준비해야 할 때인 줄 합니다. 경제적인 준비만 가지고는 다 되었다 고 말할 수 없습니다.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지 않는, 상대적으로나마 도덕적 정당성과 사랑의 능력을 소유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 요긴하다고 봅니다. 그리 스도인은 이 일에 공헌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예 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구세주요 의로우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71 no image <성주진 칼럼> '허비'의 내면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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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4 2003-02-12
'허비'의 내면풍경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속사정은 겉보기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보잘것없는 것들 중에 사실은 값을 매길 수 없이 소중한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성도 의 실상에 대하여 같은 생각을 표현합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속사람에 대한 바른 인식은 겉모습 때문에 서글퍼진 우리의 심령에 승리의 위로와 승화된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헌신이라고 부르는 일들 중에는 효율성의 눈으로 바라 볼 때에 어리석은 낭비같이 보이는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다윗 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물물을 길어온 세 용사의 이야기나, 주 님을 위하여 최고급의 향유 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경우가 '허비'의 대표적 인 예일 것입니다. 이러한 허비의 내면풍경은 과연 무엇일까요? 위에서 예를 든 허비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그것이 사랑의 표지인 데 있습니 다. 사랑이 대가를 아까워하지 않는 한 허비는 사랑의 불가피한 표현입니 다. 사랑의 열병, 설렘과 상처 등은 사랑하기 때문에 지불하는 값비싼 허비 인 줄 압니다. 누구도 사랑을 위한 수고를 수고로 여기지 않기에 사랑의 수고 는 허비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온 우주와 역사를 통털어 가장 큰 허비 는 주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허비, 그 사랑이 우리에 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성도의 교제와 하나님 나라의 일에도 많은 허비가 있습니다. 시간과 물질이 낭비되고 인간관계가 손상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기도의 시간도 낭비 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서두르지 아니 하시기에, 사랑의 성숙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시간은 결 코 낭비가 아닙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은 성도가 허비한 사랑의 수고가 하나님께 드린 향기 로운 제물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허비를 가장 기쁘시게 받으십 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허비를 온 세상을 채워야할 복 음과 사랑의 향기로 받으셨습니다. 다윗도 그의 부하들이 바친 물을 하나님 께 전제로 부어드렸습니 다. 우리의 사랑은, 때때로 어설프고, 자주 서투르 며, 언제나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사랑의 허비를 아름다운 제물 로 받으십니다. 헌신의 신학적 동기는 헌신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향 기로운 제물인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허비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 니다. 주님 자신을 위해, 다른 영혼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를 허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랑과 헌신의 표지로서의 허 비는 하나님께서 가장 존귀히 여기시는 것이기에 영원에 대한 가장 효과적 인 '투자'입니다. 이는 세상적인 가치관을 뒤집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가치를 만들어 냅니다. 가치가 있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 라, 사랑함으로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 기독교적 사랑입니다. 허비같은 사 랑이 무한한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을 허비한 사람 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작은 사랑이 실천된 자리 에 하나님의 성소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헌신의 대상이 되었을 때에 그것을 마땅 히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세 용사가 떠온 물을 생명의 피로 인식하고 마 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의 가치와 성격을 알아 본 것입니다. 비 록 자기에게 준 것이지만, 하나님께만 합당한, 너무나 값비싼 헌신과 사랑이 기에,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 았다면,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탈취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야 가능한 줄 압니다. 먼저 하나님을 바 라봅니다. 하나님을 바라본 그 눈으로 자신을 바라봅니다. 전에는 다른 사람 이 죄인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내가 죄인 것을 알게 됩니다. 또 하나님을 바 라본 그 눈을 가지고 형제를 바라봅니다. 전에는 어줍잖게 여겨지던 행동들 이 이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아름다운 선물, 향기로운 제물로 보입니 다. 이것이 겉으로는 허비된 것처럼 보이는 우리네 헌신과 사랑이 보여주어 야 할 내면풍경이 아닐까요?
70 no image <성주진 칼럼> 신앙적 열심의 회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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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3 2003-01-28
신앙적 열심의 회복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의 구원을 완성하기 까지 결코 쉬지 아니하는 열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에 부 응하여 성도들도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길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열 심은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 그리고 성도의 삶과 활동을 특징짓는 사랑의 소 중한 특성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심이 지금 의심받고 있습니다. 아니 의심받은 지가 벌써 오 래 되었습니다. 사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이 있는 이들 중에는 열심의 동기나 태도, 그리고 결과를 놓고 볼 때 '이건 아닌데....' 하 고 생각하게 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성도 개인과 교회 전체의 열심에 대하여 미심쩍은 눈초리가 쏠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잘못된 열심을 비판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랑과 진 리에 기초하지 않은 무분별한 열심이 왜 없겠습니까? 잘못된 열심은 열심을 낼수록 해 를 끼치기 때문에 이런 열심은 차라리 내지 않은 것이 좋을 것입니 다. 열심 그 자체는 선이 아니고 가치중립적이기 때문에, 열심의 동기와 대상 을 비판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열심에 대한 비판이 진정한 열심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잘 못 행해 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열심이 식어 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많은데 궂은 일에 나서는 사람이 적습니다. 감독과 코 치는 많은데 막상 뛸 선수가 부족합니다. 옆에서 평하는 사람은 많은데 막상 팔을 걷어붙이고 땀을 흘릴 사람 또한 많지 않습니다. 취미생활을 열심히 하면 교양있는 것으로 좋게 보지만, 신앙적인 일에 열심 을 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말하기도 합니다. 열심을 내는 새신자 들에게 '조금 더 있어 봐라'고 말함으로써 만성화된 슬럼프와 의욕상실을 정 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를 유발 시키고 열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은혜의 도구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는 종말론입니다. 그리스도 의 초림과 재림은 성도가 열심을 내도록 격려 하는 신앙적인 근거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시한부 종 말론을 비판하고 피하는 과정에서 성경적인 종말론에 대한 실제적인 믿음에 손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종말론 신앙의 손상이 내세에 대한 소망의 약화를 가져옴으로써 교회는 소망이라는 인내와 열심의 동기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 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재림과 영광스러운 나라에 대한 신앙을 회복할 때 우리의 열심은 회복될 것입니다. 둘째는 상급론입니다. 건강과 재물의 축복에 치중하는 잘못된 상급론을 비평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경직된 비판은 아예 상급 자체를 부정하게 되 었고 나아가서는 상주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를 제한하게 되면서 하나님 이 마련하신 강력한 동기유발의 선물을 스스로 버리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습 니다. 상급은 없고, 어차피 천국은 가게 되어있다고 믿게 되면 열심은 식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 믿 을 때 열심은 되살아날 것입니다. 셋째는 기도입니다. 분명 잘못된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기도를 경 계하다가 아예 기도를 포기한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주님도 잘못된 기도를 비판하셨습니다만, 곧바로 바른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기도 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도와 관련하여 감정주의를 경계하다가 메마른 지성주의에 빠지고, 신비주의를 배격하다가 세 속적 냉소주의에 물들며, 불건전한 성령론을 경계하다가 치우쳐서 성령의 충 만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된 열심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비판만 하다가 열심 자체를 부 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잘못된 열심은 분명 경계해야 하지만, 이는 바른 열 심을 배움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들을 바로 사용 하고 바른 열심으로 잘못된 열심을 대체하기를 힘쓸 때 개인과 교회는 하나님 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하는 데 충분한 영적 온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69 no image <성주진 칼럼> 계획, 비전, 하나님의 뜻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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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0 2003-01-16
계획, 비전, 하나님의 뜻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의 축복에는 새로운 일의 시작과 더불어 미진한 일 의 새로운 시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새해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의 성품과 일하시는 방식에 부합됩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 라, 우리가 실패한 경우에도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다시 부르시는 분이 기 때문입니다. 새해는 새로운 응답을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 입니다. 새해를 물리적으로만 본다면 새해는 지난해의 연속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 은 지나치게 물리적인 시간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은 구속적인 의미 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새해는 물리적으로는 이전 해와 다름이 없었지만 유월절을 새해의 기점으로 삼음으로써 새로운 한 해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 속과 갱신의 장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간의 구속적 의미를 받아들이 고 하나님의 뜻대로 선용한다면 우리는 새해에 새로운 구속의 은혜를 경험할 r 수 있습니다.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헌 신을 다짐하는 일입니다. 새해가 되면 개인은 개인대로, 가정은 가정대로, 교 회는 교회대로 새로운 계획을 세웁니다. 이 계획에는 소위 비전, 곧 장기적 인 목적과 목표가 연단 위로 제시됩니다. 이때 새로운 '비전'과 각오는 변화 와 발전을 위한 실천에 원동력을 제공합니다. 새해에도 많은 분들이 이러한 목적으로 새로운 각오를 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상존하기 때문에 이를 짚고 넘어갈 필 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소위 비전은 개인적인 야망의 변장에 불과하다는 지적입니다. 사실 적 지 않은 경우에 개인의 이기적인 욕심을 비전의 이름으로 포장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둘째, 비전 운운은 매일매일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과 반대된다는 것입니 다. 미리 정해진, 비전이라는 이름의 계획을 추종하다 보면 그때그때 밝혀 주 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다는 비판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제한되게 주어지는 하나님 의 은사로써 비전의 피상적 보편화 또는 세속화는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의 경 험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지적입니다. 비전에 대한 이와 같은 비평은 오늘날 흔히 오용되는 비전이란 말의 취약점 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비판에 동감한 상당수의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에 계획대로 이루지 못했거나 다짐한대로 실천하지 못한 상처를 안고서 아예 계획을 세우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비평은 전적 부정의 의미가 아닌 철저한 교정의 필요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믿음으로 헤 아리며 나름대로 경건한 소원을 계획 속에 담아 실천하기를 힘쓰는 일 자체 가 부정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계획을 세움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결정론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곤란합니 다. 그렇다면 계획이 아주 필요 없거나, 하나님의 예정된 뜻을 발견하는 것 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일의 초점이 되어야 할텐데, 성경은 이러한 숙명 론적 발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흔히 사후에 '그럴 줄 알았다'라고 말합니다만, 미래는 예측불가능한 것이 그 특징입니다. 미지 의 미래를 억지로 알려고 하는 것은 시간과 정력의 낭비 일 뿐입니다. 계획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 맞추는 게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 다스림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계획의 가치는 삶의 방향과 원칙을 확인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실 천력을 높이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즉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 는 것을 목표로 삼고, 한 해 동안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 는 심정으로 계획하는 일은 믿음과 기도의 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계획을 세움에 있어 혹시 실패할까 미리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줄 압니다. 내가 세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반드시 실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획 에 대한 성경적인 태도는 '하나님의 뜻이면 우리가 이것저것을 하리라'는 것 입니다. 비록 부족한 계획이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대하는 것은 우리의 계획이 좌절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 입니다.
68 no image <성주진 칼럼> 아듀 2002 조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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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4 2002-12-26
아듀 2002 조망법 성주진 교수 새해에 대한 벅찬 기대를 가슴에 품고 새롭게 결심했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연말정산'을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지나가는 해를 되돌아보는 것은 조망의 의미가 있는 줄 압니다. 조망은 현실의 번잡함과 일상의 분주함에 갇혀 미처 보지 못했던 소 중한 의미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입니다. 여기저기 흐트러진 지나간 사건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일관된 은혜의 궤적을 찾아내는 작업이지요. 한 해를 의 미 있게 마무리하도록 도와줄 조망법 10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의 안목으로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 '세초부터 세말까지' 자기 백성들을 붙드시고 보살피시는 분입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면서 사랑하시는 자녀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에 대한 흔 들리지 않는 신뢰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어떤 경우에도 감사와 경외심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아버지 에 대한 자녀 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상 한 영혼을 치유하고, 초라한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회복시키 는 능력이 있습니다. 감사는 은혜의 언약을 갱신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셋째, 지나간 잘못을 찾아내어 용서를 받음으로 구속의 축복을 누리는 것입 니다. 불완전한 사람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불완전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상 처를 입기도 하고 입히기도 합니다.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만, 하 나님의 용서는 과거의 파괴적 영향을 뒤집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미 저질러진 성도의 잘못까지도 사용하셔서 현재와 장래의 유익을 계획하시 고 이루시는 자비와 능력의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죄책과 죄책감을 구별하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죄책과 죄책감은 다릅 니다. 보통 죄책이 있는 곳에 죄책감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 다. 둔감한 양심은 죄책이 있는데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반면에 약한 양심은 용서받은 죄책에 대해서도 여전히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은혜 의 조망은 막연한 죄책감까지 찾아내어 해결하고 떨쳐버리게 만듭니다. 다섯 번 째, 조망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합니다. 믿음의 조망은 하나님 의 역사를 분별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방향을 쉽게 가늠하게 합니 다.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부르심과 인도가 과거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서 나 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섯 번째, 커다란 성공이나 실패에 집착하지 말고 작은 순종을 중요하게 바 라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진학하는 대학과 학과는 성공과 실패의 척 도가 아닙니다. 선택하고 인도받는 과정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성공뿐만 아니 라 실패를 통해서도 그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일상에서 의 진실한 순종입니다. 일곱 번째, 하나님께 대한 약속을 지켰는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님 앞에서 어떤 일을 작정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됩니다. 그래 서 엘가나는 아내 한나의 서원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후에는 그것을 하나님 의 뜻으로 알고 순종하였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을 귀하게 여깁니다. 여덟 번째,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대해 얼마나 충실했는지 따져 보아야 합니 다. 사람마다 직업은 다르지만 주님 에게 받은 근본적인 소명은 똑같습니다. 주어진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룸으로 그분의 통치와 은혜를 나타내 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함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아홉 번째, 숫자의 증가보다 태도의 변화를, 능률의 향상보다 신앙인격의 성 숙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현대는 숫자와 능률을 숭상하는 시대입니다. 사업가 는 수입의 증대를, 직장인은 월급의 인상을, 학생은 성적의 향상을 추구합니 다. 이같은 추구가 믿음의 동기, 태도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조망의 포인트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돌아보는 일입니다. 막연하게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가장 가까 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있는 여러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 습니다. 내 이웃의 한 영혼과 그에 대한 태도의 변화 또한 조망의 초점입니 다.
67 no image <성주진 칼럼> 축복과 저주의 변주곡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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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31 2002-12-11
축복과 저주의 변주곡 성주진 교수/합신구약신학 지상에 존재하는 각종 종교와 문화의 근저에는 다양한 축복과 저주에 대한 개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불교의 철저한 인과응보 사상은 그 적용범위를 전 생에까지 확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상에서는 논리적으로 당 연한 귀결일 것입니다. 유가경전인 역경(易經)의 문언(文言)에도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 有餘慶), 적불선지가(積不善之家) 필유여앙(必有餘殃)'이라고 함으로써, 축복 과 저주의 개념을 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민간에도 '하늘이 무섭지 않느 냐?' '천벌(天罰)을 받을 X' 등의 말이 있습니다. '하늘' 과 연관된 죄와 벌 의 개념은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오랫동안 윤리도덕적으로 유효하게 통제하 여 왔습니다. 성경에도 축복과 저주의 언어가 많이 나타납니다. 저주는 피하고 축복은 누 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만, 성경의 축복과 저주가 흔히 오해되 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 다. 먼저 축복에 대한 오해와 오용의 예로는 번영신 학과 기복신앙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보다는 현세적 안녕과 물질적 축복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최근 유행하는 브루스 윌킨스의 '야베스의 기도'도 이런 점에서 잘못 활용될 위험이 있습니 다. '지경을 넓혀 달라'는 기도문 속에 과연 어떤 소원을 담겨 있을까요? 하 나님은 기도에 사용하는 말이 성경에 나온다고 하여 기도의 내용이나 기도자 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자판기같이 기계적으로 응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의 저주에 대한 오해의 예로는 거짓된 죄책감과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지배당하는 신앙생활을 들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당하는 어려움의 원인 을 조상의 잘못으로 돌려놓고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가계저주론'도 있습니 다. 또는 성경의 저주를 조선시대 구중궁궐이나 부두(Voodoo)교에서나 있을 법한 해코지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의 축복과 저주가 곡해되는 것은 본문을 문맥을 떠나 해석하기 때문입니 다. 어떤 말이나 표현, 그리고 개념까지라도 문맥을 떠나서는 그 의미를 상실 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축복과 저주의 본문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신학적 맥락을 떠나서 읽게 될 때 온갖 종류의 잘못된 해석과 적용이 나오는 것은 예상된 일입니다. 번영신학과 기복사상, 해코지론과 가계저주론은, 성경 의 축복과 저주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맺어진 독특한 언약관계에 기초하 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합니다. 언약적 축복은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할 것을 격려하는 데 목적이 있습 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방법은 율법 또는 계명에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의 결 과로 주어지는 언약적 축복은 '너희의 수고가 그리스도 안에서 헛되지 않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바울 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적 축복은 공로주의적 개념이 아닙니 다. 내가 순종한 것은 나를 축복의 자격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수혜 자로 만들뿐입니다. 나를 축복의 수혜자로 만드는 것은 나의 공덕이 아니라 나를 어여삐 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언약적 저주도 동일한 목적을 가집니다. 그렇기에 저주는 경계과 징계 의 기 능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때때로 이스라엘에게 비를 내리 지 않으시고 적군을 일으켜 곤경에 빠지게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을 언 약의 하나님에게로 돌이키시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약의 관점에서 축복은 긍정적 동기유발자요, 저주는 부정적 동기 유발자입니다. 이러한 축복과 저주의 언약적 성격을 생각할 때, 통상적으로 이해된 축복과 저주가 신학적 진술과 신앙적 실천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왜곡할 우려가 있습니다. 성경은 축복과 저주를 기계적, 인간중심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인격적, 하 나님 중심적으로 이해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축 복을 받은 자요, 저주에서 해방된 자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감격을 잃지 않 고 은혜 가운데 거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죄책의 결여와 거짓된 죄책감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확보된 풍성한 자유와 축복을 누리 는 첩경일 것입니다.
66 no image <성주진 칼럼> '아낌없이 주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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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1 2002-11-27
'아낌없이 주는 나무' 성주진 교수/합신 구약신학 나뭇잎을 다 떨궈버린 앙상한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문득 '아낌없이 주는 나 무'를 생각해 봅니다. 한 나무가 한 소년을 사랑했습니다. 소년도 나무를 사 랑했습니다. 마냥 좋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소년은 더 이상 나무 곁에 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소년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나무는 소년이 돈 을 원하면 돈이 될 사과를 주고, 집을 원하면 집을 지을 가지를 주고, 배를 원하면 배를 건조할 나무 기둥을 주었습니다. 소년이 노인이 되어 돌아왔을 때에도 나무는 더 이상 줄 것이 없음을 미안해하면서 소년이 앉아서 쉴 수 있 도록 마지막 남은 밑동을 제공합니다. 나무는 소년에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소년에 대한 나무의 사랑에는 모성적 특성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과 희생적 몰입은 남을 세워주고 채워주려는 아름답고 복된 삶의 특징입 니다. 이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 으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특별 히 애정과 안전의 보장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낌없이 주 는 나무'의 환대와 희생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 나님은 멀리 떠나간 아들이 삶에 지치고 피곤해서 돌아올 때마다 한결같은 사 랑으로 맞아주시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분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른 각도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소년이 나무를 사랑한 것 은 사실입니다. 나무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 속해서 나무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소년의 사랑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에도 여전히 미성숙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저 어려울 때 찾아와서 는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정도였습니다. 나무의 처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 다. 그렇다면 나무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나무는 소년을 늘 '얘야'라고 불렀습 니다. 그리고는 소년에게 늘 '놀자'고 청했습니다. 소년이 유년기, 청소년 기, 장년기, 중년기, 노년기를 거치며 급격하게 변화하는데도 나무는 소년을 여전히 어린이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함께 놀아주고 원하는 것을 희생 적으로 주는 것만으로 자신의 역할을 규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외형적 일관성 뒤에는 아이의 변화와 필요에 대한 무감각이 숨겨져 있습니다. 어릴 때 먹고 놀고 사 랑 받고 공급받는 것은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꼭 필요한 경험이지만, 나무는 소년의 감정, 도회지의 삶과 돈과 야망과 욕구, 그리고 안정과 쉼과 안식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무는 소년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나무의 소년에 대한 시선은 소년과 행복했던 어린 시절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적절한 시기에 소년을 독 립적인 존재로 내보내지 못했습니다. 내가 주고 싶은 것이 상대방이 진정으 로 필요로 하는 것과 다를 때 사랑은 이처럼 서로 엇갈리게 됩니다. 이렇게 교감이 없는 상황에서 나무는 소년에게 주는 것만으로 정말 행복했을 까요? '나무는 그저 행복했었지만... 정말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는 말에 는 나무의 비애가 배어 있습니다. 더 이상 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감정에 는 자기자신에 대한 연민이 엿보입니다. 이 글이 '자기중심적인 어머니들에 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쓰여졌다'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때 로는 아낌없 이 주는 것보다 절제된 사랑이 소년의 성장을 위해 더 유익한 것입니다. 진정한 자녀 사랑은 무조건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적절한 것, 더 좋 은 것, 즉 자립과 독립심을 키워 주는 것입니다. 자녀가 행복함으로써 행복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줌으로써 행복한 것이라면 문제가 있습니다. 자 기도취적인 만족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자녀가 가장 필요로 하 는 것은 아낌없이 받는 것보다 성숙으로 이끄는 사랑의 교제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상적인 읽기처럼 한결같은 태도로 우리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어머니 같은 존재는 정말 존귀합니다. 어린 시절에 무조건적 사랑을 경험해보지 않는 사람은 평생 자존감과 정체성의 확립에 곤란을 겪기 일쑤입 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품에서 근원적인 안식과 고향을 느낍니다. 그렇기에 소년에게 주느라 다 잘려져 나간 나무의 그루터기에 다시 자라나는 조그만 새 싹을 하나 그려 넣고 싶습니다. 자기 희생적 사랑이 새로운 탄생의 풍성함을 약속하는 성경적 원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65 no image <성주진 칼럼> '야고보의 유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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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5 2002-11-13
'야고보의 유골함' 성주진/ 합신 구약신학 최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근교에서 발견된 한 유골함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 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유골함이라는 주장 때문입니다. 측면에 주후 10- 70년경의 아람어체로 '야고보, 요셉의 아들, 예수의 형제'라고 암각된 이 유 골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실증해주는 최초의 고고학적 발 견'이라고 주장되기도 합니다. 연구를 주도한 프랑스의 금석학자 앙드레 르메르는 이 유골함이 예수님의 동 생 야고보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면서도 당시 예루살렘에는 요셉이라 는 이름의 아버지와 예수라는 이름의 형을 가진 야고보가 20명 정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유골함이 예수님의 동생 야고 보의 것이라는 주장은 어디까지나 정황증거일 뿐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신중 한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최근의 주장은 에발산에서 여호수아가 쌓은 제단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1982년부터 2년간 돌제단 구조물이 발굴되었는데 부근에서 토기 조 각들과 짐승의 뼈가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복원된 토기는 기원전 1200-1000년 경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출애굽의 '늦은 연대'를 따를 경우 여호수아 시대 와 엇비슷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로 여호수아가 이 단을 쌓았다고 단정하 기는 어렵습니다. 신빙성이 훨씬 떨어지는 주장으로는 법궤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법궤는 솔 로몬 이후 성경기록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 행방이 특별한 관심의 대상 이 되어 왔습니다. 그레이엄 헨콕은 십자군의 전승을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법 궤가 에티오피아 악숨의 한 교회에 보관중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법궤를 보 았다는 주장은 이외에도 여럿 있으나, 어느 것도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인디 아나 존스의 '레이더스'에 의하면 법궤는 지금 미국 국방성 창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라랏은 당시 우라우트 왕국의 히브리식 표기로써 방주가 머문 아라랏 산은 특정한 산보다는 광범위한 지역 을 가리킵니다. 그중 일년 내내 만년설에 뒤덮힌 아르 산이 유력한 후보지입 니다. 이곳에서 방주의 일부라고 주장되는 나무조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 프랑스의 탐험가 나비라의 방주 이야기가 유명하나,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수의도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인화된 얼굴 로 유명한 트리노의 수의는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과학적인' 증거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수의라고 주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수의'는 1988년에 14세기의 것으로 공식 발표되었습니다. 고고학적 발견에 대한 주장들을 보면서 우리는 한편으로 성경에 기록된 사건 은 시공간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초역사 적 공간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의 인물, 장소와 사건은 당연 히 역사적 연구대상이 됩니다. 고고학적 연구가 역사적 상황에 대하여 많은 도움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부 과도한 주장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고학은 대체로 어떤 시대의 생활상을 재구성할 뿐, 특정한 인물이나 물건 에 대하여 이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증명하지 않습니다. 즉, 고고학은 상 황적 개연성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개연성의 연구를 특정한 사실의 입증으로 비 약시켜서는 안됩니다. 앞서 언급한 유골함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 다. 그러나 이것이 그것이 아닐지라도 예수의 실존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 지 못합니다. 성경의 증거는 말할 것도 없고, 양식 있는 역사가치고 예수님 의 실존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유골함 하나에 예수님의 역사적 존재 여부가 달려 있는 듯이 말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유골함이 아니라고 판명될 경우에는 무어라고 말할 것입니까? '믿거나 말거나', '믿으면 좋고, 아니면 그만 두고' 식의 기독교라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습니다. 너무나 명확한 예수 님의 존재를 새삼 입증하기 위하여 과도한 주장에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불확실한 주장에 볼모 잡히지 말고 사실을 사실대로 과장 없 이 말하는 것이 영원한 진리와 그 능력을 믿고 전하는 이들이 취할 태도입니 다.
Selected no image <성주진 칼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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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1 2002-10-30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성주진 교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이 말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날개가 있 는 것은 추락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다면 날지 않을 것이고, 날지 않는다면 추락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추락한 것에는 여전히 날개가 있 습니다. 이 날개가 치유 받고 새 힘을 얻으면 또다시 비상할 수 있습니다. 여 기에 모든 추락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소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삼손만큼 추락과 비상의 전환을 잘 보여주는 인물도 드뭅니다. 먼 저 삼손이 경험한 추락의 절정은 그가 힘을 상실한 일입니다. 한 때는 나귀 턱뼈 하나로 천명을 해치웠건만 이제는 한 사람도 상대할 수 없는 연약한 사 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무적의 용사가 원수의 조롱에 도 한마디 대꾸조차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 신의 것으로 과신하고 언제라도 원하는 때 에 필요한 능력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연약함을 보지 못하고 자기기만적인 자만심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주신 거룩 한 부르심과 은사를 가지고 파멸에 이르는 장난을 치다가 깊은 나락으로 떨어 진 것입니다. 삼손이 힘을 잃은 것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떠난 사실 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떠난 사실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없습 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 가운데 속할 것입니다. 하나님 이 떠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 자체가 말의 모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떠난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는 사 실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만듭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 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정녕 죄는 성도와 사역자를 무력하게 만듭니 다. 그리고 영적인 축복과 분별력을 빼앗아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거나 느끼 지 못하게 만듭니다. 삼손은 오늘날 세상 가운데 처한 성도 개인과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도와 교 회가 세상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지적에 직면해 있습니다. 여러 원인들을 열거할 수 있겠지 만, 삼손의 이야기는 교회의 영향력 상실이 성도들의 죄 때문이 아닌가 스스 로 돌아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삼손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랬더라 면 삼손의 이야기는 세속적이고 문학적인 비극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삼 손의 깎인 머리가 다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은 혜로운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시 자라기 시작한 삼손의 머리는 자격을 상실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목적과 은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은 깎인 직후부터 다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회복은 추락 의 동반자입니다. 아무 것도 그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는 것을 막을 수 없었 습니다. 사실 이것은 삼손 자신의 상태나 그가 처한 환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눈이 뽑혀서 앞을 보지 못하는 중에도 삼손의 머리카락은 자랍니 다.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하는 중에도 꾸준하게 자랍니다. 원수에게 수치와 조롱을 당하는 중에도 상관없이 자랍니다. 다곤 신전에 서 모욕을 당하는 가운 데서도 변함없이 자라납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침투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삼손의 회개, 곧 믿음의 회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회 복된 믿음은 지혜로, 행동으로, 그리고 기도로 나타났습니다. 삼손이 믿고 기 도하고 행동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다시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삼손이 추락 의 아픔을 딛고 재비상의 회복을 누리게 된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의 반전이었습니다.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에 기초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날개의 추락과 비상은 은혜와 믿음에 관한 양면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다시 날 수 없을 것 같은 추락한 날개를 어루만지며 탄식 하는 이들에게, 과거에 사용했던 날개는 여전히 가지고 있으나 어느덧 몸이 무거워져 날려는 의지를 포기한 사람들에게, 삼손의 다시 자란 머리카락은 새 로운 비상의 자리로 초청하는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63 no image <성주진 칼럼> 은혜의 '색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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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7 2002-10-17
은혜의 '색깔론' 성주진 교수/합신 구약신학 오래 전에 검은 풍선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조지라는 청년이 길거리 에서 풍선을 팔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한 소년이 매대에 달린 빨강, 노 랑, 파랑 풍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소년이 묻습니다. "아 저씨, 검은 색 풍선도 뜰 수 있나요?" 조지는 잠깐 생각한 후에 부드럽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검은 풍선도 뜰 수 있단다. 풍선을 뜨게 하는 것은 풍선의 색깔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기체 이기 때문이지." 짐작하신 대로 소년은 흑인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비자발적 으로 학습된 열등감은 그의 자존감을 짓눌러 너무도 당연한 사실까지도 의심 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상처받은 흑인 소년과 같은 착각에 빠져 있습니 다. 사람을 '뜨게' 하는 것,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색깔'이라는 착 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직업의 색깔, 학벌의 색깔, 돈의 색깔이 행 복을 보장해 주는 줄로 알고 여러 색깔을 바꿔 칠하고 덧칠하고 염색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풍선을 뜨게 하는 것이 색깔이 아니라 속에 있는 기체인 것처럼, 인 생의 참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겉모습과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속 사람이 새로워질 때에만 우리네 인생은 비로소 '뜰' 수 있습니다. 오직 은혜로, 추락한 인생이 비상하는 인생을 산 대표적인 예가 므비보셋입 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추락하는 날개에 비상하는 힘을 공급하십니다. 그가 다윗의 왕궁에 들어가 왕의 식탁에 참여하 도록 초청 받은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의 색깔에 대하여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떤 조건도 달 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저는 다리를 고쳐오라고 하지 않았습니 다. 봐줄 만큼 걷는 법을 배워오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은혜는 불가능한 것 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리 그대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은혜의 나라는 색깔이라는 조건에 따라 초청 여부를 결정짓지 않습니다. 다윗이 보인 하나님의 은혜는 므비보셋을 왕의 식탁에 앉힌 일에서 잘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뜬' 것은 오직 왕의 언약적 호의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올 려놓으셨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질그릇 같은 인간의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질그릇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몽땅 연필로도 우등생은 100점 짜리 답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하 나님은 몽땅 연필 같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악기라도 대가의 손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으면 천상의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성이 감동적으로 그려진 또 다른 예는 다윗의 식탁인 줄 압니다. 그 자리에는 은연중 황태자임을 내세우는 암논, 아름다운 용모를 뽐내는 압살롬, 지혜로 유명한 솔로몬, 용맹스런 장수 요압, 제갈공명 뺨치 는 아히도벨, 그리고 굴지의 재산가 바실래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러나 므비보셋에게는 자랑할만한 것이 아 무 것도 없었습니다. 수치스러운 과 거, 상처와 회한 그리고 원망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것을 온통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전에 므비보 셋의 성치 못한 다리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은 표가 되었습니다만, 이제 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자랑하는 표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절 름거리는 다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잘난 사람만 이 왕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구나. 왕족이 아니라도, 왕의 원수 의 집안이라도, 절름발이라도, 왕의 은혜를 받을 수 있구나. 왕의 식탁에 초 대받을 수 있구나.' 다윗이 표방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은혜의 왕국입니다. 만일 은혜의 왕국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색깔을 바꿔 칠하기에만 분주하다면 이는 하나님 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같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리라'는 중심으로 산다면 은혜의 왕국은 더욱 확장되고 주님은 더 욱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62 no image <성주진 칼럼> '야사’ 신앙을 넘어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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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0 2002-10-02
'야사’신앙을 넘어서 성주진 교수/합신구약신학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 시간에 선생님이 간간이 야사를 들려주시던 일이 기 억납니다. 조는 아이가 있다든지, 학생들이 이야기해 달라고 조를 때에 비방 약처럼 사용했던 야사는 지루했던 역사시간에 활력을 불어넣는 청량제 역할 을 하곤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야사는 정사보다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와 성경 주변에도 야사가 끊이질 않습니다. 이러한 '기 독교적' 야사는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한국에도 토속적인 것뿐만 아 니라, 해외, 주로 미국에서 수입된 것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수입된 야사는 다양합니다. 상업주의적 영화의 재미를 등에 업고 유행하는 '수호천사' 야사는 이제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이야기가 되었습니 다. 미확인비행물체(UFO) 이야기, 엑스파일(X-file) 스타일의 각본들, 버뮤 다 삼각지역에 관한 전설, 환생과 결부된 이야기 등이 뒤덤벅되어 하나의 커 다란 정크 장르를 이루고 있는 듯합니다. 러시아 발 한 야사는 러시아 과학자 들이 지구 중심으로 땅을 파내려가다가 지옥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 다. 제법 학문적으로 멋지게 포장된 점술 야사도 있습니다. 몇 해 전 마이클 드 로스닌이 쓴 '바이블코드(Bible Code)'라는 책이 통계학이라는 학문과 컴퓨 터 프로그램의 기술, 그리고 성경의 권위의 옷을 입고 나타나 상당한 관심을 끈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인즉슨 히브리 모세오경의 글자를 컴퓨터를 이용하 여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하면 미래 사건에 대한 예언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 니다. 성경을 암호책으로 보는 이 같은 읽기 방식은 성경의 성격에 대한 오해, 사본의 문제, 문법적 역사적 해석의 무시, 퍼즐 맞추기식 성경해석, '숨은 뜻' 찾기 등의 온갖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 하였습니다. 토속적인 '기독교적' 야사들도 적지 않습니다. 무덤에 갇힌 처녀가 '부활했 다'는 이야기, 치유와 건강에 얽힌 미확인 보도들, 환상과 이상을 본 이야기 들이 아무런 사실확인이나 신학적인 검토도 없이, 다만 '은혜가 된다'는 이유 만으로 그저 받아들여지 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천박한 가십거리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교회사에도 기독교적 야사가 성경의 뒷받침을 받는다는 주장 아래 정사의 반열에 오른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중세 카톨릭 교회는 라틴어 불가타 번역 에 근거하여 결혼을 성례에 포함시키고, 제도적인 고해성사의 필요성을 교리 화하며, '성모' 마리아를 중보자의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이 신학적 야사 는 불가타 역의 오류가 밝혀진 후에도 거의 수정되지 아니한 채 그대로 내려 오고 있습니다. 성경의 오역과 관계된 야사는 역사가 깊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최대 걸작이 라고 일컬어지는 '모세상'을 보면 모세의 머리에 뿔이 나 있습니다. 또 뉴에 이지가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 유니콘(일각수)도 성경의 오역과 관련이 있습 니다. 이와 같이 교회와 성경 주변에 떠도는 이야기를 아무런 확인 없이 너무 쉽 게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하는 것 이 사실입니다. '내가 체험했다'는 일처럼 확신을 주는 것이 드뭅니다만, 체 험의 주관성과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 건전한 신앙생활의 기본임이 분명합니다. '내가 보았다, 체험했다'고 해서 모든 경우에 참이라고 주장하 는 '성급한 일반화'는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너무 쉽게 간증자를 세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된다고 봅니다. 우리의 신앙 은 '느낌과 끼'라는 감정의 불연속선과 '카더라 통신'의 장애를 넘어 성경에 계시된 불변의 진리에 맞닿을 때에만 견고한 기초를 확보한다는 사실을 확인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야사를 불식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은혜만 되면 무엇이든지 좋다는 풍조를 반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베뢰아 사람들처 럼 들은 것이 과연 성경에 부합한가 확인하는 일이 습관화되어야 될 것입니 다. 나아가서 순종과 실천의 삶을 통해 말씀의 깊은 맛을 체험함으로써 '정통 신학은 메마르다'는 잘못된 인식을 불식시키는 일이 필요한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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