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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no image <성주진 칼럼> 갈릴리 호수의 배 한 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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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1 2002-09-11
갈릴리 호수의 배 한 척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고고학은 얼핏 보면 따분한 학문같지만 때때로 문외한도 깜짝 놀랄만한 역 사적 발굴을 이루어냅니다.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 가운데서 우 리의 눈길을 끄는 것 중 하나는 예수님 당시 갈릴리 호수를 누비던 배를 거 의 원형 그대로 발굴한 일일 것입니다. 때는 1986년 1월이었습니다. 우기인데도 비가 내리지 않자 이스라엘 사람들 은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넉넉하던 갈릴리 호수의 수위는 갈수록 낮아져서 식수와 농업용수를 갈릴리 호수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들의 시름은 깊어만 갔습니다. 당시 주변의 키부츠에 살던 루판 형제는 드러난 뻘을 함께 걸으며 혹시 무 슨 유물이 없을까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이곳에서 값진 로 마 동전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눈에는 뻘에 묻힌 배의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난 것 이 보였습니다. 소식을 접한 고고학자들이 곧바로 달려왔습니다. 세심한 작 업 끝에 발굴된 이 배는 조심스럽게 운반, 복원되어 부근의 박물관 저수조에 보관되었습니다. 연대측정 결과 이 배에 사용된 나무는 주전 120년에서 주후 40년 사이에 벌목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시기적으로 볼 때 예수님과 제자들 이 이런 종류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다녔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거 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발굴된 배 자체보다도 이 배 가 발견된 상황입니다. 이 배는 호수가 파란 물로 넘실거릴 때 발견된 것이 아닙니다. 물이 넘칠 때 이 배는 물 밑 뻘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이 배가 발견된 것은 심한 가뭄 때문에 물 속 뻘이 밖으로 완전히 노출된 때 입니다. 난파선은 해저고고학자들에게 보물중의 보물입니다. 이 값진 고고학적 보물 이 가뭄이 극심할 때에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적 역설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의 최저점에서 최고로 보배로운 은혜 를 발견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잘 드러낸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인생 에서 두 번에 걸친 극 심한 가뭄을 경험했습니다. 특히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 문에 겪은 두 번째 가뭄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뭄 의 때에 왕궁의 풍부함 때문에 가려졌던 귀한 은혜의 보배들이 풍요의 거품 이 걷히자마자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가뭄을 겪으면서 그의 믿음은 정금같이 연단되었습니다. 정처 없는 도망 길 에서 그의 기도는 깊어만 갔습니다. 그의 사랑 역시 메마르기는커녕 더욱 더 풍요로워졌습니다. 피곤한 삶의 여정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 다 윗은 인생의 깊은 우물에서 가장 갚진 은혜의 선물들을 길어 올렸습니다. 그 리고 그 값진 믿음과 기도와 사랑의 보배들을 더욱 갈고 닦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언약궤의 동행을 거절하는 데에서 잘 나타납니다. 제사장이 강 권할 때에도 다윗은 왕위에 연연해하기보다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만이 이 루어지기만을 구했습니다. 원수의 저주에 대해서도 손쉬운 보복을 택하지 아 니하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에 모든 것을 맡겨버렸습니다. 다윗은 다시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제갈공명 같은 아히도벨이 적군에 가담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에 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곧바로 '화살기도'를 드렸습니다. 경황이 없을 때에 드린 그의 민첩한 기도는 그의 참된 믿음을 반 영하고 있습니다. 가장 기이한 것은 그의 사랑입니다. 반역한 아들 압살롬을 끝까지 사랑으 로 품으려는 다윗의 모습은, 타락한 아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어려움을 당하거나 배반을 당하면 우리의 마음은 얼마 나 움츠려들고 거칠어지는지요. 그러나 다윗은 눈물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믿 음과 기도와 사랑의 보배를 새롭게 발견하고 더욱 키워 갔습니다. 갖가지 영성 개발 프로그램이 나와 있습니다만, 고난을 강조하는 훈련 프로 그램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난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지도자 훈련 코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령의 메마름과 삭막함조차도 영 적인 깊이와 풍요로 반전시키는 일이야말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실 히 요청되는 경건의 지혜가 아닐는지요.
60 no image <성주진 칼럼>'진실게임'과 '진리실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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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8 2002-08-28
'진실게임'과 '진리실험' 성주진 교수/합신 구약신학 '진실게임'이라는 놀이가 있습니다. 주로 학생들 사이에 퍼졌던 오락의 일 종으로, 술래가 다른 사람들의 난처한 질문에 진실만을 말해야 하며, 만일 거 짓을 말하거나 말하기를 거부할 때에는 벌을 주는 식으로 놀이가 진행됩니 다. 모 교회 청년부 홈페이지 이름이 '진실게임'인 것을 보았는데, 이는 서로 가 서로에게 진실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자는 뜻인 줄 압니다. 전문적으로 기획된 진실게임도 있습니다. S방송사에서 방영하는 'L.L의 진 실게임'은 진실을 밝히는 과정을 대중오락 프로그램으로 구성하여 상당한 인 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여러 명의 가짜가 섞여 있는 시험집단에서 한 명의 진 짜를 가려내야 하는데,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구분하기가 여간 어렵 지 않습니다. 분장이 좋고 연기력이 뛰어난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이 보 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영화 '메멘토'도 진실게임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한된 기억을 가 진 인간이 진실을 아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를 자문하게 합니다. 주인공은 기 억의 한계와 기록의 제약 때문에 처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한 일의 진상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자기방어적 해석의 무의식적 경향도 한 몫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여야는 특정인의 병역면제 문제를 놓고 일종의 진실게임에 몰두해 있 습니다. 사활을 건 건곤일척의 삿바싸움이 진실의 링 밖에서 벌어지고 있습니 다. 그렇게 해서 풀릴 문제가 아닌데 말입니다. 각종 추측과 주장이 무성한 가운데 온 국민이 수사관이 되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어디까지가 진실 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아직 분별이 안 섭니다. 국민의 민주적 에너지가 쓸데없는 곳에 낭비되는 것만 같아 무척 안타깝습 니다. 무엇보다도 또다시 진실이 정치권력에 의해 좌우되고, 사실 규명에 대 한 국민의 기대가 좌절된다면 우리사회는 너무 큰 손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양측의 상반된 주장이 다 진실은 아닐진대, 조만간 사실 그대로가 밝혀지기 를 바라게 됩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냉정하게 지켜보면서, 우리에게는 보다 중요한 진리실험 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 진리 에 대한 진실게임을 끝내고 진리실험에 몰두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진리 실험이란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삶에서 실험되고 확인되는 일을 가리킵니다. 진리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늘어가는 시대에, 믿는 바 복음의 진리를 실천 함으로써 그 참됨을 드러내는 일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 상의 진실입니다. 미국의 복음전도자 무디의 진리실험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는 성경에 서 깨달은 진리를 그대로 시험해 보려고 애썼습니다. 그의 성경을 보면 T자 (tried; 시험해 봄)와 P자(proved; 증명됨)가 점철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의 전생애는 그가 사용한 성경의 여백과 더불어 진리에 대한 실험보고서가 된 셈 입니다. T목사의 진리실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신하기 위하 여 3년간 행한 '실험'은 구도적 진리실험의 한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의 진솔한 실험의 기록은 독자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줌으로써 느슨 해지는 기도와 믿음의 자세를 다시 가다듬게 만듭니다. 성경에는 기드온의 유명한 진리실험이 있습니다. 그가 두 번이나 양털뭉치 로 하나님을 '시험'한 것은 하나님을 불신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 다는 진리를 스스로 확인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확신시키기 위함입니다. 하 나님은 이러한 기드온의 진리실험에 눈높이로 낮아지셔서 기꺼이 그에게 자신 을 드러내셨습니다. 말이 신용을 잃고 말로 표현된 모든 진리에 대하여 의심이 제기되는 시대입 니다.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기독교는 독선적인 종교로 내몰리고 모든 '진 리'는 다 참이라고 주장하는 상대주의적 세계관이 인기를 얻어가고 있습니 다. 이러한 때 성경적 진리를 믿는 성도의 가장 효과적인 선교전략은 우리가 믿는 진리대로 살아감으로써 기독교가 말뿐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 도 시대정신을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거룩한 삶인 것을 기억 해야 될 때인 줄 압니다.
59 no image <성주진 칼럼> 기적의 이인칭(二人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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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9 2002-08-14
기적의 이인칭(二人稱) 성주진 교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 하오니, 어찌 사 람이라 하겠습니까?' 길동의 이 애끓는 대사는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립니다.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닌 '대감'이라고 불러야만 되는 비극적인 현실 앞에 서 길동은 비인간화된 자신의 비참함을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아버지와 의 바른 관계는 인간존재의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피차 바른 호 칭으로 불려질 때에만 가능하게 됩니다. '이인칭' 하면 보통 '너, 당신'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틴 부버의 생각을 빌어서 한 인격이 독특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다른 인격 을 부르는 모든 호칭을 이인칭이라고 정하겠습니다. 이러한 이인칭적인 관계 를 향한 염원은 보편적 현상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 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 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의 서두입니다. 인간관계를 노래하는 시로 소박하 게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남에게 바른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던 존재에서 의미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 시는 계속 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 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이번에는 나도 다른 사람에게 바른 이름으로 불림을 받는, 의미있는 존재 가 되고 싶어합니다. 이 시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렇게 나는 남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또 남도 나에게 의미있는 존재 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입니다. 의미있는 관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이름 부르기'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얼마 전 어떤 모임에서 뜻밖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난 적이 있 습니다. 나도 모르게 격식을 차린 말투로 인사를 하 자, 그가 대뜸 말했습니 다. '야, 너 보러 왔어, 임마.' 허물없이 부른 그 '임마'라는 호칭은 둘 사이 의 담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이전의 친밀감을 회복시키는 마력을 발휘하였습 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이인칭의 기적을 가장 깊고 독특 한 의미에서 이미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 게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하시고,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어 하나님을 '아바(아빠)'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이 호칭은 하나님 과의 본질적인 관계를 이름지어 줄뿐만 아니라,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지속 시켜 주는 기적의 이인칭입니다. 이 호칭은 상처투성이의 영혼에게 '사람은 너를 버려도 나는 결코 너를 버 리지 않는다'는 확신을 불러 일으킵니다. 버림받은 자신을 '너'라고 불러 주 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앞에서, 상처받은 우리의 고집센 자아는 그냥 무 너져 내립니다. 우리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감격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이상한 말 같지만 이 땅에서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만으로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불완전하거나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 사랑은 형제의 사랑을 통해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사람의 이름을 알고 살아갑니다. 친숙한 이름도 있지 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름도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 틈에서 관계의 상실 을 내심 두려워하며 교회를 출입하는 고독한 성도들도 있습니다. 이럴 때 '나와 너'의 의미있는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불 러 주신 그 귀한 이름 그대로 형제와 자매를 불러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먼 저 다가가고, 먼저 인사하고, 먼저 '이름'을 불러 기도하는 이인칭적인 교제 는 주님의 은혜로 사랑의 기적을 일으킬 것입니다.
58 no image <성주진 칼럼> 가면과 맨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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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8 2002-07-31
가면과 맨 얼굴 성주진 교수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이상한 그림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그 림에는 커다란 눈이 하나 그려져 있는데, 보통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신 다'는 표제를 달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림이 걸려 있는 방에서 며칠 동안 묵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림이 너무 신경 이 쓰인 나머지 그 앞에서는 도저히 옷을 갈아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큰 눈이 자기의 벗은 몸을 보지 못하도록 그림을 뒤로 돌려놓고서야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과도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 다. 온갖 죄와 허물이 드러나고, 치사하고 더러운 인격의 부분들이 여지없이 노출될 때, 우리는 그 사람처럼 '하나님, 잠깐만 보지 마십시오'라고 그림을 돌려놓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생각같이 되어야 말이지 요. 그렇다고 대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가면을 만들어 냈습 니다. 가면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게 해 주는 편리한 도구입니다. 이 요술 같은 가면은 인류 의 '위대한' 발명품이 아닐까요? 사실 가면은 인생들에게 숨쉴 공간을 마련해 주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 은 도덕의 가면 뒤에, 어떤 사람은 권위의 가면 뒤에, 어떤 사람은 아부의 가 면 뒤에, 그리고 어떤 사람은 황금의 가면 뒤에 숨어 자신의 진면목을 감춥니 다. 그리고 자기가 만들어 낸 이미지를 통하여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가면들은 일견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프라이버시를 지켜 줍니다. 종교적인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 가면을 씀으로써 자신의 참 모습을 숨기 고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값 비싼 많은 예물을 종교적 방패로 삼고 그 뒤에 숨어살기를 좋아했습니다. 바 리새인들은 율법적인 공로의 가면을, 도덕적인 사람들은 선행의 가면을 통하 여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현재 의 자기 모습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자신이 없다고 느낄 때마다 각종 가면을 만지작거립니다. 사실 '이 모습 이대로' 하나님을 대면하기가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요? 루터 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두렵기만 했습니다. 그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은혜 의 하나님을 만난 후에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아, 나는 하나님을 미워하였 다. 공의의 하나님을 미워하였다.' 하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루터의 절 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그대로 대면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좀 이상한 말 같지만, 사랑의 하나님이라도 대면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 니다. 요나 같은 선지자도 사랑의 하나님을 피해 도망을 쳤으니까요. 요나가 원한 사랑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자기가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 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 님의 사랑의 깊이와 폭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차라리 하나님 앞에서 도망 치는 길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분의 사랑의 온전성 가운데 만나 는 일은 평생의 과업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 하나님은 자기를 피하는 자녀들, 가지각색 의 가면을 쓴 자 녀들을 뜻밖의 장소에서 만나 주십니다. 정직하게 하나님을 대면하려고 몸부 림치는 성도들은 말할 것이 없고요.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가면 뒤에 숨은 큰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십자가 밑에서는 가면 벗은 지친 영혼을 만나 주셨 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크게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는 가면을 벗어던진 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감격과 환희가 있습니다. 이렇게 확인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모 든 것을 숨김없이 내놓게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교제의 친밀함입니 다. 나 같은 죄인을 만나시려고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임재 의 방식은 내가 뒤집어 쓴 두꺼운 가면을 쓸모 없게 만드는 은총의 정점입니 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숨은 곳까지 찾아오신 아빠의 사랑을 확인한 아이 처럼, 온갖 가면을 벗어던진 맨 얼굴로 기쁨의 환호성을 마음껏 내지를 수가 있습니다. '아빠가... 나를.... 사랑.... 하신대.'
57 no image <성주진 칼럼> 신앙적 편견의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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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7 2002-07-10
신앙적 편견의 극복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줄 압니다. 편견은 의식세계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편견에 따라 생각 하고 판단하며 행동하게 됩니다. 성화의 과정을 밟고 있는 성도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양한 편견 때문에 성장의 경험과 자유의 누림에 제약을 받는 것 이 사실입니다. 극복하기 힘든 편견중 하나는 지역적 편견입니다. 출신지 하나로 한 사람 의 인격과 능력을 도매금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갈릴리 출신이 라는 이유로 배척을 당하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지역적 편견의 피해자들 입니다. 아직도 선거할 때마다 지역적 편견을 부추기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 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정치적 편견은 정치적인 해석의 틀을 들이대고 지지하는 정당에 따라 사람 을 판단하게 합니다. 한나라당을 찍은 사람은 무조건 수구적이고, 민주당을 찍은 이는 무조건 진보적이라고 단정한다면, 이는 정치적 입 장에 대한 편향 적 시각을 인간이해의 기초로 삼는 일입니다.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정치적 성향의 다양성을 용납하지 못한다면 복음의 보편적 가치가 손상을 입게 될 것 입니다. 나름대로 소중한 개인적 체험이 특정한 성경해석과 결합될 때에도 고치기 힘든 신앙적 편견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방언운동이 한창일 때, 어떤 사람들 은 방언을 못하는 다른 교인들을 무시하고 방언을 못 하는 교역자의 설교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해석과 체험이 상승적으로 결합 되어 생긴 편견이 잘못된 행동으로 나타난 경우입니다. 구속사적 경륜에 대한 이해가 없이 방편을 목적으로 생각하는 경우에도 심 각한 신앙적 편견이 나타납니다. 유대인의 이방인에 대한 율법주의적인 편견 이 대표적입니다. 이 편견은 얼마나 뿌리가 깊은지 사도인 베드로조차도 처음 에는 이방인에 대한 신앙적, 민족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편견은 방치하면 약화되기보다는 더욱 강화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이 경우는 예외야' 하고, 어쩌다가 자 기 생각에 맞는 일이 생기 면 '그러면 그렇지' 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분명 한 것은 이러한 편견이 극복되지 않으면 믿음과 사랑의 진보가 심각하게 제한 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편견을 극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의 편견을 깨 기 위해서 이적을 동원하기까지 하셨으니까요. 그러나 자유케 하는 진리를 소 유한 성도가 여전히 편견에 얽매어 산다면 진리가 아닌 것에 종속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편견 가운데 안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편견을 극 복하고 자유케 하는 진리 가운데 살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비록 고통이 따를지라도 말입니다.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대면하는 일이 우선적입니다. 편견을 가 진 사람일수록 자기 견해를 확신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진리 의 말씀에 노출될 때에만 자기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 습니다. 믿음의 길로 들어선 나아만(왕하5)도 '씻어 깨끗케 하라'는 엘리사 의 말씀에 직면했을 때에야 그가 가진 사회적, 종교적, 민족적 편견이 드러났 습니다. 다음으로는 믿음의 순종이 필요한 줄 압니다. 나아만은 정 서적으로나 인식 적으로 자기의 편견이 완전히 극복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어렵사리 말씀에 순 종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그를 고쳐 주셨고, 그는 편견에서 자유로워졌 습니다. 선포된 진리에 대한 순종은 편견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편견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필요 가 있습니다. 나아만이 편견 때문에 지체하자 애가 탄 부하들이 상식적인 말 로 권면했습니다. 나아만은 그들의 말을 따랐습니다. 겸손한 경청으로 얻어 진 건전한 균형감각의 회복은 편견의 극복에 도움을 줍니다. 믿음을 가진 후에도 어떤 편견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나아만의 신관이 그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도 한 예입니다.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편 견에서 벗어난 베드로도 또다시 이방인 문제로 바울의 책망을 들어야만 했습 니다. 성화의 길을 마칠 때까지 성도는 이렇게 편견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행로에 진리에 대한 지속적인 인식의 개혁이 요청되는 이유가 바로 여 기에 있습니다.
56 no image <성주진 칼럼> '붉은 악마'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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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0 2002-06-26
'붉은 악마'라는 이름 성주진 교수(합신 구약신학) 한국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Red Devils)'가 이번 2002 월드컵에서 한국 축 구팀의 선전과 함께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12번째 선수임 을 자임하는 '붉은 악마'가 주축이 되어 펼친 열띤 응원전은 전세계의 수십 억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사실 '붉은 악마'는 기독교인들에게 껄끄러운 이름입니다. 하고많은 말 중 에 하필 '악마'라니. 게다가 빨간 티셔츠에 쓰여진 'Be the Reds'라는 로고 는 '붉은 악마가 되라'는 뜻입니다. 회원이 되라는 캠페인의 일환이겠지요. 이런 로고가 새겨진 빨간 티셔츠를 입고 악마의 '뿔'까지 동원되는 자리에서 응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붉은 악마'가 되어 버리는 셈 입니다. 이런 난처함 때문에 몇몇 기독교 단체에서는 응원단의 이름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직접 요청하거나, 기도회나 기자회견을 열기도 하며, '하얀 천사(White Angels)'라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만, 결과는 신통치 않 았습니다. 이제 세계인들은 한국축구 선수들의 뛰어난 실력과 한국민의 열정 적인 응원을 '붉은 악마'와 연결시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말은 의미를 담는 그릇이요, 언어는 사유제약성을 갖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응원단을 '악마'라고 이름한 것은 단순한 지시적 의미를 넘어 내포적인 의 미도 전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이냐가 관건입니다. 영 어 'devil'은 오래 전부터 일상화된 표현이 많아서 'Be a devil'은 '겁내지 말고 악착같이 싸워라'는, 종교적으로 상당히 탈색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 다. 그러나 우리말의 '악마'는 아직 그렇게까지 탈색된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대해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특 히 구약시대를 상기시키는 말들, 예를 들면 성전, 새벽 제단, 출애굽 작전, 여리고 작전, 가정의 제사장 등의 용어를 사용할 때 의도하지 않은 의미들이 따라 들어와서 마치 그리스도가 아직 오시지 않은 것처 럼 생각하게 되는, 원 치 않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언어의 사유제약성 때문입니다. 시장에서의 말도 미묘하게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사장님, 회장님', '사모 님, 어머님'을 연발하면서 손님에게 부여된 이미지에 걸맞은 상품을 구매하라 고 은근히 압력을 넣습니다. 상당수의 상업광고에서는 특정 물품을 사용하면 멋진 현대인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재미없는 낙오자가 될 것이라고 심리적 인 압박을 가합니다. 이런 경우는 언어의 사유조작성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언어가 잘못 사용된다고 해서 이것이 의미를 최종적으로 결 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의미는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성경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 의 성호가 들어 있는 자기들의 이름 대신에 이방신 명칭이 들어간 이름을 사 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이들은 고쳐진 이름을 목숨걸고 거부하기보다는 그 이름이 무력화시 키고자 하는 '여호와 신앙'의 본질을 변함없이 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잘못 된 이름으로 불리는 중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작정하고, 실제로 그렇 게 살아갈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된 이름과 상관없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 니다. 그 결과 이들의 바뀌어진 이름이 처음에는 패배의 상징이었지만, 나중 에는 여호와의 승리와 이방신의 무력을 보여주는 기념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참된 신앙은 오히려 잘못된 이름의 의미를 무력화시켰습니다. '붉은 악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불편한 이름이고, 또 바꾸었으면 좋을 이 름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모임의 이름에 과도하 게 집착하기보다는, 모임의 내용을 중시하면서 교회가 추구해야 할 가장 우선 적인 본분을 기억하고 힘쓰는 일이 중요한 줄 압니다. 그렇게 되면 혹 그 이름이 바뀌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교회가 종교적으 로 바르게 차별화되거나 '붉은 악마'가 탈색된 의미를 가지게 되어 우리가 우 려하는 바 개념적인 혼란이나 신앙적인 해악이 최소화되고 모임의 사회적 건 전성도 유지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붉은 악마가 되라'는 로고 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라는 도전으로 뒤집어 읽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55 no image <성주진 칼럼> 만보기와 삶의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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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1 2002-06-12
만보기와 삶의 행보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오늘도 나는 걷습니다. 가끔 빨리, 어쩌다 뒤로 걷기도 합니다. 이렇게 오 늘도 어제같이 또 걷는 이유는 만 보를 채우기 위함입니다. 만보기가 없다면 오늘도 이렇게 힘들게 걷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만보기를 차고 다니면 여러 가지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우선 '한 걸음 한 걸음이 의미가 있다(Every step counts.)'는 말이 문자 그대로 사실임을 눈으 로 보여 줍니다. 한 걸음 걸으면 한 걸음이 표시됩니다. 아무리 작은 걸음도 계산되지 않는 걸음이 없습니다. 아무리 큰 걸음도 걷지 않으면 숫자가 올라가지 않습니 다. '에누리'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헛되지 않 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오늘도 걷고 또 걷습니다. 가끔 숫자판을 들여다보고 작지 않은 만족을 느낍니다. '벌써 이만큼 걸었 구나.' 만 보를 채웠을 때의 기쁨을 그려보면서 미루고 포기하려는 유혹과 싸 웁니다. '조금만 더 걸으면 만 보가 되는데... 예 서 그만 둘 수는 없지.' 또 한 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익한 만보기가 때로는 매사를 숫자 중심으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만 보를 채우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은 환영합니다. 별로 내키지 않는 심부름이라도 만 보에 보탬이 될 것을 생각하면 싫지가 않습니 다. 어떤 때는 자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단 만 보만 넘으면 하기가 싫어 집니다. 나도 모르게 계산속이 되고 자기중심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우스운 일도 있습니다. 어쩌다 깜박 잊고 만보기 없이 집을 나섰을 때는 만 보기를 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걷는 것이 무의미해지고 열심히 걷고자 하는 의욕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만보기를 차지 않았다고 운동이 안 되는 것이 아닐텐데, 만보기 없이 걸으면 헛걸음한 것 같고 재미가 없습니 다. 이쯤 되면 만보기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될 정도입니다. 예수님의 5리.10리 비유가 생각납니다. 만보기 중심적 삶은 어떤 일이 숫자 에 도움이 되면 10리도 마다하지 않지만, 일단 만 보가 채워지면 5리는커녕 몇 걸음도 걷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게 만듭니다. 그런 태도 로는 '5리를 가게 하는 사람과 10리를 동행하라'는 말씀대로 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보기는 걸은 걸음의 숫자만을 나타낼 뿐 어떻게 걸었느냐를 묻지 않습니 다. 살살 걸어도 숫자는 올라가므로 구태여 힘들게 걷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렇게 요령을 피우고 숫자 채우기에 급급하다 보면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고, 질보다는 양, 내용보다는 형식을 중시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만보기는 또한 목적지를 묻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러 어디로 가는지 상관하 지 않습니다. 걸을 때 무엇을 생각하는지, 누구와 함께 걷는지, 걸으면서 무 엇을 하는지 묻지를 않습니다. 그저 걸음의 숫자만 기록할 뿐입니다. 이렇게 모든 삶의 행보가 만보기의 숫자로 환원되어 버립니다. 만보기는 구체적인 목표와 효과를 전제합니다: '오늘 걷는 만 보가 당신의 건강을 지켜 줍니다.' 그러다 보니 만보기 숫자를 건강지수와 동일시하기 쉽 습니다. 여기에 율법주의의 함정과 공로주의의 곁길이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 하기 위하여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은 참 좋은 일 이지만, 내 식 으로 달성한 목표량을 곧 신앙과 사역, 그리고 성숙의 정도로 착각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만보기는 율법을 많이 닮았습니다. 율법은 삶의 안내자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율법 을 잘못 사용하면 율법주의에 빠져서 율법의 원래 목적인 사랑의 실천을 놓 쳐 버리듯, 만보기도 잘못 사용하면 숫자와 건강을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보기를 원래 쓰임대로 지혜롭게 사용하면 삶에 리듬과 질서를 부 여하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율법을 규모 있게 사용하면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믿음과 사역의 행보를 내딛는 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만보기를 차고 집을 나섭니다.
54 no image <성주진 칼럼> 통각 시스템 작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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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3 2002-05-29
통각 시스템 작동중 성주진 교수/합신 구약신학 아픔을 느끼는 감각을 통각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전신에 정교한 통각의 그물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이 통각 시스템은 하나의 경고체계로서 우리 몸의 이상을 감지해 냅니다. 각양각색의 통증에 따라 초기에 증상을 찾아내 고 적절한 치료를 하도록 경고를 보냅니다. 이와 같이 정상적인 통증은 건강한 몸의 유지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감각 입니다.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통증은 하나님의 '실수'처럼 보일 수 있겠 지만, 통각 시스템은 창조의 걸작품이자 하나님의 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기독교 저술가인 필립 얀시는 여기에서 재미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경 고 시스템이 고통 없이 작동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아픔이 없이 도 문제를 찾아내서 치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살짝 알려주기만 주면 우 리가 알아서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대답은 단호합니다. 우리의 몸은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경고에 대해 서 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적당히 아파야만 대책을 강구하지 그렇 지 않으면 문제를 실감하지도, 반응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한센씨 병이 무 서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체의 통각 시스템은 구약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선 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지키는 통각 시스템이었습니다. 선지자들 은 특히 저주(징계)의 사역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질병을 알려주고 치료를 받도록 경고하였습니다. 때때로 이 경고는 큰 고통을 수반하였습니다. 엘리사 의 사역이 좋은 예입니다. 엘리사가 하루는 벧엘을 지나가는데 그곳 어린아이들이 떼거리로 몰려 나와 서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계속 조롱합니다. 이에 선지자가 돌아서서 여호와 의 이름으로 저주하자 숲에서 암콤이 나와서 42명을 죽입니다(왕하2:23-25). 선지자가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을 참지 못하고 저주해서 죽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열쇠를 사용하면 엘 리사의 행동과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벧엘은 당시 이스라엘의 왕도이자 우상숭배의 본산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 n은 자기 부모들, 즉 벧엘의 영적인 분위기를 가장 정직하게 나타내고 있습니 다. 따라서 아이들의 조롱은 온 이스라엘이 선지자와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척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대머리'는 아마도 선지직의 표지로써, 선지자에 대한 경멸의 뜻을 담고 있 습니다. '올라가라'는 말은 엘리야처럼 하늘로 올라가든지, 아니면 다른 데 로 가 버리라는 말로써, 결국 '이곳에서 꺼져라. 우리는 당신이 필요 없다'라 는 뜻입니다. 선지자와 함께 언약의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이 없 습니다. 따라서 선지자의 저주는 성깔 고약한 사람의 해코지가 아니라 언약에 근거 한 경고요, 처벌의 선언입니다. 선지자는 언약의 정신에 따라 배도하는 백성 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저주를 듣고 사자를 통해서 아이들을 죽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마 아이들은 자기 말과 행동에 대하여 책임져야 할 나이일 수도 있고, 또 그보다 더 어릴 수도 있습니다. 후자라도 문제는 안됩니다. 이 아이들의 죽음 은 '진멸'로써 배 반당하신 하나님이 배역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전쟁을 선포하 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배반함으로써 하나님의 원수가 되 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지자들은 언약공동체의 실상을 밝히 드러내고 아프게 경고하는 영적 통각 시스템이었습니다. 현대인은 어설픈 행복론을 따라서 정상적인 고통까지도 악이라고 생각하고 그 안에 담긴 사랑의 경고를 듣지 못합니다. 구원과 치유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마련하신 신령한 통각 시스템은 우리의 중생한 양심을 통하 여, 말씀의 진리를 통하여, 성령의 책망을 통하여, 그리고 사역자들과 형제 의 섬김을 통하여 작동중에 있습니다. 신령한 통각 시스템이 작동중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실제적 인 돌보심의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성도와 교회, 그리고 사회를 아프 게 일깨워 주는 이들의 경고를 배척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는 은혜와 성숙의 확실한 표지가 될 것입니다.
53 no image <성주진 칼럼>'짜가'와 가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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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1 2002-05-16
'짜가'와 가짜 성주진 교수/합신 '짜가'란 가짜 제품, 특히 가짜 명품을 가리키는 속어입니다. 가짜 버벌 리, 가짜 구찌, 가짜 푸라다.... 참 많기도 합니다. 이 '짜가'는 희한한 조어 법입니다. 가짜를 뒤집으면 진짜가 된다는 뜻인지.... 바로 여기에 '짜가'를 좋아하는 심리가 숨겨져 있는 듯합니다. 모조 명품은 꽤나 비싸게 팔린다는 보도입니다. 그만큼 찾는 사람이 많다 는 뜻이겠지요. 어떤 '짜가'는 속여 팔면 제조원가의 20배를 받고, 가짜인 것 을 알리고 팔아도 5배는 받는다고 합니다. 진짜와 비슷할수록 그 값이 비싼 것은 당연한 현상일 것입니다. 바야흐로 한반도에는 진짜 가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 짜가 바람은 명품 바람의 부산물입니다. 원래 명품 바람은 일부 부유층 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일기 시작한 줄 압니 다. 가진 돈으로 효용에 비해 비싼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허전한 마음을 채우 고 자기 만족을 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명품 바람의 밑바닥에는 명품이 소유자의 우월성을 나타낸다는 생각이 깔 려 있는 듯합니다. 명품은 소유자에게 나름대로의 가치를 부여합니다. 제대 로 된 가치관이 없는 사람은 명품이 주는 가치의 허상에 매어 달리게 될 것입 니다. 짜가 바람은 명품 바람의 하위문화요 대중화입니다. 명품 소유의 대중적 욕구와 타락한 상업주의가 이루어 낸 절묘한 합작품입니다. '이거 짜가야' 하 면서도 서로 좋아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우리를 서글프게 하는 것도 이 때문입 니다. 명품이라면 진짜와 가짜를 굳이 가리지 않는 것은 진짜가 아니더라도 유행 에 뒤떨어지지 않으면서 신분적 동일시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 다. 짜가는 진짜 명품족에게 소외당한 보통 사람들의 열등감을 보상해 주고, 나도 그들과 대등한 사람이라는 심리를 충족시켜 줍니다. 그러나 명품 사재기가 현상이 되고 짜가 사랑이 증후군이 되었을 때 문제 는 심각해집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소유를 '존재'로 착각함으로써 진정 한 자아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자아의 상실은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닌 허상의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명품의 소유가 같은 착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자기 가 가진 직분이 자기의 참 모습인 줄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나온 명 문학교가 곧 자신의 실력으로, 자기가 가진 이미지가 곧 진정한 자아로 착각 할 수 있습니다. '명품' 교회에 출석한다는 사실이 내 신앙의 고귀함을 보증하지 않습니 다. 유명한 목사님의 '명품' 설교를 듣는다는 사실이 나의 믿음의 품격을 반 영하지 않습니다. 교회당의 크기가 나의 인격의 위대함이 아니고, 회중의 수 가 나의 풍성함이 아니며, 재미있는 예배가 내 영혼의 즐거움은 아닙니다. 짜가 현상의 보편화는 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참과 거 짓, 진리와 비진리, 선과 악의 울타리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모양을 흉내냄 으로써 그 본질을 소유할 수 없기에 짜가는 생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동 차 엔진을 짜가로 한다면 치명적인 사고의 발생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911 테러가 왜 일어났습니까? 사건 자체만을 본다면 비행기의 조종실을 빼 앗겼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놀라운 문명의 이기가 무서운 살상무기가 되었 습니다. 우리 삶의 조종실, 영혼의 밀실을 누가 차지하고 있느냐가 진정한 자 아를 결정합니다. 외형의 모습이 아니라 깊은 내면의 존재가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구약에서 참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언약 안에서 찾았습니 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요 제사장의 나라였습니다. 이 정체성 때 문에 당시 초강대국인 바벨론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그 의 말씀이 있기에 더 위대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진정한 자아는 명품이나 모조품의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 에서만 발견됩니다. 곧,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진정한 만 족도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분 안에만 모든 부요함이 있습 니다. 진정한 자아의 발견과 진정한 부요의 누림만이 명품의 허상과 짜가의 유혹을 물리치고 '명품' 그리스도인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52 no image <성주진 칼럼> 속 '일천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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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1 2002-05-03
속 '일천번제'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한국교회는 '일천번제'라고 하는 독특한 연속헌금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 다. 예배마다 일정 금액을 헌금하되 일천번이 되기까지 계속하는 일종의 작정 헌금입니다. 이 헌금 형태에 대해서는 이미 본지에서 두세 차례 언급이 된 줄 압니다. 그래도 이 문제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해 보는 것이 혹 어떤 분들에게는 도움 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다시 다뤄 보고자 합니다. '일천번제'가 성경적인 것으로써 오늘날 드리는 헌금의 전형이 될 수 있다 고 주장하는 분들은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세웁니 다. '솔로몬이 했으니 우리도 한다'라는 식의 적용은 우선 그 단순성 때문에 호소력이 있어 보입니다. 나아가서 이 주장은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전무 후무한 지혜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매력이 있어 보입니다. 누가 이런 지혜를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구약의 한 인물의 행동을 신약시대에 교회적으로 일반화하거나 제 도화하는 것은 해석적으로 그 타당성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일천번 제 자체는 구약의 어떤 제사법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먼저 개역성경의 한글번역 '일천번제'가 '一千番祭'인지 '一千燔祭'인지 혼동을 주고 있어서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국한문혼용 개역성경은 후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자세히 보면 '일천'과 '번제'를 띄어서 정확하게 표기 되어 있습니다. 물론 히브리 성경 본문은 '일 천 번의 제사'가 아니라 '일 천 마리의 번제 물'을 의미합니다. 이에 따라 개역개정은 '일천 번제'라고 띄어 쓰고, 표준새 번역은 '번제물은, 일 천 마리가 넘었을 것이다'라고 풀어서 번역하고 있습니 다. 솔로몬의 예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려졌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한 번 제사에 얼마나 많은 희생제물을 드렸을까요? 한 번의 제사에 한 제물 씩, 도합 일 천 번의 예배에 일 천 마리의 번제물을 드렸을까요? 문법적으로 이런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예배가 개인 의 사적인 예배가 아니라 지도자의 국가적 행사로 드려진 예배임을 감안할 때 이런 해석은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설령 솔로몬이 한 예배에 한 마리의 번제물을 천 번에 걸쳐 드렸다고 하더 라도 솔로몬의 예배가 신약시대 신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 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의 이 제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당시의 이스라 엘 사람에게도 '규범'으로나 '모델'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솔로 몬 자신도 이런 예배를 늘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도 이런 예배는 매 우 드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오늘날 이 제사형태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헌금생활에서 하 나의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본받 아야 할 것은 솔로몬이 드린 번제물의 수효나 번제의 회수가 아니라 솔로몬 이 보인 예배의 태도와 정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자신이 먼저 아름다운 헌금생활을 감당해야 할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가 드리는 다양한 형태의 헌신과 헌금을 귀히 여겨야 함은 물론입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을 지 극히 사랑하여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것이 새벽기 도이든 수요 기도회이든 간에, 모든 것을 주께 드리는 마음으로 진정으로 자 원해서 헌금을 드린다면 이것은 솔로몬의 예배정신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누 가 이런 헌금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소위 일천번제 헌금이 어떤 기복적인 '소원성취'를 보장하는 기계 적인 수단으로 드려지거나, 자원하는 마음이 없이 억지로 드려진다면, 이것이 야말로 솔로몬이 드린 예배의 정신에서 매우 먼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 다. 분명한 것은 소위 일천번제 헌금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헌금의 규범으로 제시되거나 강요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나아가서 헌금의 형식과 숫자와 액수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즐겨 헌금하는 자세와 더불어 우리의 몸 전체를 거룩 한 산 제사로 드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51 no image <성주진 칼럼> "부~자 되세요"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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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2 2002-04-10
"부~자 되세요" 신드롬 성주진 교수(합신 구약신학) "여러분, 부~자 되세요. 꼭이요." 얼마 전 B사의 TV광고에 출연한 탤런트 K양이 설경을 배경으로 간절하게 외 치는 이 광고 문안은, 설날 이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신년 메시지 가 되었습니다. 몇 해 전만 해도 '나를 어떻게 보고?' 하며 불쾌하게 느껴졌을 이 '덕 담'이 이제는 사람들의 귀에 친근하게 들리는가 봅니다. 이제 이 광고 카피 는 점차 공감대를 넓혀 가면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기호 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와 상관없는 세상일만은 아닌 듯 합니다. 얼마 전에 우연 히 보게 된 한 문안 편지는 "목사님 사모님..!! 올해는 부부부부부부자 되세 요" 라고 끝맺고 있었습니다. 교회 건축중인가 보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구하는 자리에서 '부자 되라'는 당 부를 보는 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부자' 신드롬이 이제 교 회 밖의 현상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외환위기가 들이닥쳤을 때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당시 필자는 어떤 모임에 서 목사답지 않은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1억원이 생긴다면 그 돈으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대답은 각양각색이었지만, 하나같이 절실 한 필요를 담고 있었습니다. 적지 않은 경우, 자녀교육이나 부모봉양, 경조사 챙기기 등 통상적인 '사 람 노릇'도 쉬운 일이 아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상심한 어떤 성도가 "돈이 곧 인격이다" 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혹스러운 중에도 그분의 아픔 이 어느 정도 전달되어 왔습니다. 지금은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고 말들 하지만, 어려운 분은 여전히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라는 당부는, 외환위기의 광풍에 할 퀴인 생채기가 아직 아물지 않은 성도들이 한 번 가져 볼 수 있는 소박한 꿈 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제는 부자 되기 신드롬의 무차별적 공세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되짚어 볼 때가 되었습니다. 경제적 난관을 통과하는 동안 어떤 분은 주님에 게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이들에게 난관은 은총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 입니다. 반면에 난관 때문에 주님에게서 더 멀어진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신앙이 흐트러지고 식어지게 되었을까요? 나름대로 믿고 헌신 했는데 주님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낙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 재물 은 믿음의 정도에 따라 비례적으로 주어지는 반대급부가 아닙니다. 빈부는 여 러 요인의 복합적 작용의 결과로 빚어지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그릇된, 기계적인 보응 사상의 굴레를 벗어나 복음의 원리를 새롭 게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질 중심의 세속적인 상급의 논리가 해체된 자 리에서 주님의 은혜가 왕노릇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주머니 사정 을 신앙의 온도계로 오인하게 됩니다. 자기 경건이 물질로 보답 받지 못한다 고 생각될 때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단정하고 믿음이 식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고에는 물질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훨씬 더 고귀하고 아름다 운 선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기적적 방법을 동원해서 자녀 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시기도 하시지만, 흔히 물질적 축복을 유보하면서까 지 사랑하는 자녀에게 더 귀한 선물들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자녀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것은 자녀를 망치는 지름길이라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또한 지금은 신앙적 중심 이동을 단행해야 할 때입니다. 어려움을 거치는 동안에 우리의 신앙이 상당히 개인적 필요를 채우는 쪽으로 기울어 진 것이 사실입니다. 이 치우침이 타성으로 굳어지기 전에, 그 동안 접어 두었던 사랑 과 헌신의 내용들을 회복할 때가 되었습니다. 자기 연민을 벗어 던지고 신앙 의 무게중심을 예배와 섬김과 헌신 쪽으로 옮겨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치중하는 동안 우리의 심령은 피곤해졌고, 우리의 교회학 교 학생들은 줄어들었습니다. 우리의 전도와 선교는 위축되었으며, 우리의 기 도와 헌신은 약해졌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습니 다. "여러분, 성령 충~만하세요. 꼭이요."
50 no image <성주진 칼럼> "안 믿어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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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3 2002-04-08
"안 믿어지는데요?" 성주진 교수 (합신) "예수님의 부활요?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어 보려고 애를 쓰는데도 잘 안됩니다." 이렇게 드러내 놓고 말은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고민하고 걱정하 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 이러한 고민은 21세기의 그리스도인에게만 특별하게 있는 것이 아닙니 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똑같은 혼란을 경험하였습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절 아 침, '할렐루야'를 외치며 주님의 부활을 기뻐한 제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죽음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발생하는 일련의 사태를 보고 들 으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머뭇거리고 의심하였습니다. 분명히 하나님 을 믿고, 예수님도 사랑했습니다만,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의심의 그늘을 벗고 주님의 부활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까 요? 의심은 박수를 많이 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열심히 봉사한다고 수그 러들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더 왜곡되고 더 깊이 숨어 들어갈 뿐입니다. 의심을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문제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사실에 관한 문제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만 해결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감정의 과잉 과 의지의 강요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가 될 뿐입니다. 놀랍게도, 주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의심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더 큰 관심을 가지신 분은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가장 확 실한 해결방법을 가지고 제자들의 삶의 현장, 의심의 자리로 찾아가셨습니 다. 아직 지적으로 정리가 안된 제자들, 신앙적으로 혼돈되고 정서적으로 불 안한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만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가신 주님은 의심하고 당황하는 그들에게 믿음을 강요하지 않 으셨습니다. 믿으라고, 왜 믿지 못하느냐고 윽박지르지 않으셨습니다. 믿음 은 우격다짐이 아니라 설득이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경우가 바로 부활 사건입니다. 의심의 안개를 거두어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사실의 햇빛뿐입니다. 주님 은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제자들을 믿음의 자리로 초대하였습니다. 부활신앙 은 주 님의 설득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이 제시하시는 증거를 꼼꼼히 따져 보 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주님의 끈질긴 설득의 결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 물입니다. 주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빈 무덤을 보여주심으로 자신의 부활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도 빈 무덤의 침묵은 주님의 부활을 웅변적으로 보여줍 니다. 빈 무덤의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어떤 주장도 빈 무덤의 증거 앞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또한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심으로써 자신의 부 활을 설득하셨습니다. 무려 40일 동안, 기록된 것만도 10번 이상 나타나셨습 니다. 나타나신 가장 큰 목적은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이 보고 믿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이들 중 하나만 참이라도 주님의 부활은 확실한 것입니다. 주님은 나타나시고 또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확인시켜 주시고, 설 득하고 또 설득하여 부활을 믿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부활의 가장 큰 증거는 부활하신 주님 자신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은 사람들에게 제자들의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간접적으 로 자신의 부활을 설득하고 계십니 다. 겁많고 의심하던 제자들이 죽음을 두려 워하지 않는 확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생전에 주님이 하셨 던 일들이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변화와 연속성은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 외에 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살아 계신 주님의 역사는 주님의 부 활에 대한 확실한 경험적 증거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간신히 믿어지는 빈약한 사건이 아닙니다. 압도적으로 밀려 오는 진실의 물결입니다. 덮어놓고 믿어야 할 미심쩍은 사건이 아닙니다. 그 것은 가장 확실한 우주적 사건입니다. 때문에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의심은 탐구의 신호입니다. 진리에의 초대장입니다. 의심에 바로 대처 할 때 신앙의 도약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증거를 가지고 찾아오셔서 설 득하시는 주님을 정직하게 대면할 때 우리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하게 될 것입 니다.
49 no image <성주진 칼럼>안목의 선물(첫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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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4 2002-03-18
안목의 선물 성주진 교수/합신 구약신학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안목의 선물일 것입니다. 이러한 안목의 선물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 다면 우리는 순간마다 다양한 어두움을 경험하면서 영적 흑암 가운데에 앉아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선, 제가 받은 안목의 선물을 대략이나마 펼쳐 보여 드리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바라보는 안목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몇 해 전이 었습니다.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변화산 기도원에서 열린 한 집회에 참석하 고 있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뒷산에 올라가 이른 아침의 싱그러운 공기 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구부러진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문뜩 저 앞쪽에서 무엇인가 번쩍하고 빛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혹시 다이 아몬드가 아닐까? 호기심과 기대에 가득 차 가까이 다가가 보았습니다. 그것 은... 그것은 이슬방울이었습니다. 길가 웅덩이 옆 이름 모를 잡초의 이파리 끝 부분 에 이슬방울이 하나 달려 있었고,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이슬 방울을 오색이 찬란한 다이아몬드로 만드는 신비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각 도를 약간씩 바꿔 이리저리 살펴보니 한 다발이나 되는 다이아몬드들이 제각 각 빛의 향연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황홀한 광경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말대로 저는 당시에 "땅은 구석구석마 다 하늘로 빽빽이 들어차 있다. 사실 모든 떨기나무는 하나님의 불꽃으로 타 오른다. 하지만 오직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만이 그 앞에서 신을 벗는" 경험 을 한 셈입니다. 그 날 이후 자연은 제게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길가에서나 산 속 어디에서나 아침 이슬과 아침 햇살이 있는 곳에서는 이런 이슬방울 다이아몬드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각도를 맞추어 바라 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자연을 보는 안목은 마음에 큰 즐거 움과 삶에 위안을 가져다 줍니다. 신학교 시절, 성경에 대한 안목은 제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구 약을 더 공부하면서 저는 그 안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시각에 대하여 몹시 당 황한 적이 있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술한 것인데도 출애굽기와 신명기가 다 르고, 사무엘-열왕기와 역대기가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변증에 주력하여 어떻 게 조화시킬까 고심하였지만 지금은 다 초점 렌즈를 통해 보여주시는 말씀의 온전함을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신약을 읽을 때에도 특히 신약 저자들의 시각이 부활 이후의 관점이라는 사실 을 체감하게 되었을 때 신약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었다고 기억합니다. 부 활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신약뿐만 아니라 삶의 내용과 고통, 그리고 사역이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어두울 때의 방황과 회의까지도 부 활의 안목에서는 믿음의 발판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형제를 바로 바라 볼 수 있는 안목도 분명히 하나님의 커다란 선물 인 줄 압니다. 어쩌다 어떤 형제와 주고받은 상처는 쳐다볼수록 생생하고 그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또렷해져 갔습니다. '잊어버리자, 무시해 버리자' 되뇌 며 노력했던 많은 시도도 무위로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 형 제를 위하여 기도하기로 작정하였을 때, 그 형제를 보는 각도가 조금씩 바뀌 어지고 달리 볼 수 있는 안목이 점차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눈은 내 눈이지 만, 나는 내가 보고자 하는 대로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안목의 자유는 오 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 대한 좁은 안목을 넓혀 준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안 경을 통해서였습니다. 처음에는 믿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영혼 이 있는 줄로 잘못 알아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곤 했 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제한된 의미에서나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였을 때, 사람과 세상을 보는 안목이 바 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의 대상으로 서의 '세상'에 대한 안목은 왠지 불편했던 마음에 많은 자유를 가져다 주었습 니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과 사랑의 안목으로 하나님과 성도, 교회, 세상과 역사를 함께 바라보고 그 은혜의 경험들을 서 로 나누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형제와 자매된 독자들을 만나 뵙기를 원합니다.
48 no image <정창균 칼럼>예수를 먹은 흔적(마지막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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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7 2002-02-27
예수를 먹은 흔적 정창균/ 새하늘교회 목사 두만 강이 가까운 중국 땅 어느 구석진 곳에서, 북한에서 강을 건너 온 아 버지와 아들을 은밀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14살 된 아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온 마흔 두 살의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여 밤중에 찾아가 같이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나누며 두어 시간을 같이 보냈습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물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교제를 합니까?” 그가 대답하였 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란 친구 사이에는 서로 이야기도 하고, 만나서 신앙대화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고, 어 떤 식으로 교제하는 지도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막역한 사이가 아니 면 부인에게도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잘 말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게는 충격적인 말을 덧붙였습니다. “위험한 일이어서 서로 물 어보거나, 말을 하거나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 나 어떤 사람들은 서로 말을 하 지 않아도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알아보지 요?”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지금 북조선에서는 사람들 마음이 어찌나 악해졌는지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저만한 아이들까지도 한번 쌈이 붙었 다 하면 박이 터질 때까지 싸움을 합니다.” 열 네 살이라지만 열 살 정도 밖 에 되어보이지 않는 자기 아들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 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전에는 그렇게 싸웠었는데 이제는 싸울 일이 있어도 슬슬 피하면서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 람을 보면, ‘아 저 사람도 예수를 먹었구나’하고 감을 잡습니다. 그러나 물어보지는 못합니다.“ 그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것을 가리켜 ”예수 를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충격을 받은 것은, 북한과 같은 그런 험악한 여건 속에서도 예수를 믿 는 사람이 계속 생기고 있다는 사실과, 그런 환경 가운데서도 “예수를 먹은 사람”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알아보고 “예수 먹 은 사람”이라는 감을 잡을 수 있는 예수 믿는 사람의 흔적들을 가 지고 있다 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람을 믿으려들지 않아서, “나는 교회의 목사입니다”하고 큰 소리로 말해 도 “그래서 어쨌다는 거요?”하는 식으로 치켜올려 보는 정도가 되어버린 남 한 사회에서의 우리 신자들의 모습이 갑자기 부끄러워 졌습니다. 몇 년 전 부 산의 기차 간에서 만났던 이름 모를 사람의 모습도 생각났습니다. 그 사람은 어쩌다가 말문이 서로 열려 대화를 주고 받기 시작한 저에게, "한 국에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따져 물으면서, 자기는 아무런 차이를 볼 수 없다고 불평하듯, 질책하 듯 제게 따져 물은 것 입니다. 누군가가 저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 저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이구나!"하고 감을 잡을 수 있을 만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가 "예수를 먹은" 흔적들이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IMF 한파가 몰아치면서 파탄 난 나라의 온갖 처참한 모습이 온 나라를 벽지 바르듯 뒤덮어가고, 삶이 고달픈 많은 사람들의 감성이 메말라 가고 있을 때, "몇 줄 글이라도 써서 다만 몇 사람의 마음 한구석일 망정 어루 만질 수 있다면" 하는 작은 소망으로 "정창균 칼럼"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벌써 4년 가 까운 세월이 지났습니다. 주변의 잔잔한 이야기들, 그러나 진한 감동을 주는 사연들을 함께 나누며 마 음들을 어루만지고, 오른쪽 뇌들을 자극하여 감동을 주고 싶은 것이 글을 쓰 는 저의 작은 소원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아니고 사소한 일에도 진한 감동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칼럼을 한편씩 써나왔는데, 그것이 벌써 4년 세월이 되었고, 그간에 책 한권 으로 묶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목사들이 많이 모인 어느 곳에서 저를 보시 자, "아, 칼럼 쓰시는 목사님!"하시며 저를 알아보시고 그렇게 반가와 하시 는 오래 전에 은퇴하신 연로하신 목사님도 계셨고, 여러 다른 나라에 나가 있 는 분들이, 그리고 나라 안의 여러 곳에서 여러분들이 저의 칼럼을 즐겨 읽는 다며 저를 알아봐 주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칼럼을 쓰면서 별것도 아닌 나의 이야기들에 깊은 관심과 호의를 가지고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 한마 디는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정창균 칼럼을 사랑해주신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47 no image <정창균 칼럼>사랑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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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7 2002-01-09
사랑의 증거 정창균 목사/새하늘교회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케케묵은 이야기 하나가 떠오릅니다. 솔로몬의 재 판 이야기입니다. 각각 아이를 출산한 두 부인이 있었다지요. 그런데 한 부인 이 아이를 옆에 뉘어놓고 자다가 그만 잠결에 아이를 깔아서 죽였다지요. 자 기 아이를 잃은 그 부인은 옆에 있는 다른 부인의 아이와 죽은 자기의 아이 를 바꿔치기 하고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자기 아이를 죽은 아 이와 바꿔치기 당한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고, 그래서 두 어머 니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지 않습니까. 서로가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 고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겠지요. 서로가 하늘에 맹세코 자기가 옳다고 자기 주장을 하였겠지요. 서로가 살아 있는 그 아이가 자기의 아이라고 악을 쓰며 싸웠겠지요. 그러다가 결국 솔로몬 왕에게 판결을 받으려고 왔답니다. 그러나 지혜롭기로 소문 난 이 왕은 전혀 지혜롭기는커녕 무지막지하고 포악 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이를 둘로 쪼개어 반반씩 나누어 가지라!" 한 어머 니는 "좋다. 그렇게라도 하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사정하였습니다. "제발 그 아이를 쪼개지 말고 저 여자에게 주어서 기 르게 하십시오." 이 순간에 이 왕의 지혜가 빛을 발하였습니다. "이 아이의 진짜 어머니는 아이를 포기한 저 여자다. 이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라." 진 짜 엄마라면 자식에 대한 사랑의 증거를 대라는 요구였던 것입니다. 이런 순박하다 못해 유치하기 까지 한 재판 방법이 상대방의 의도를 미리 꿰뚫고 한 발 앞서가며 수를 쓰는 영악한 이 시대에도 통할런지는 모르겠습니 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솔로몬이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붙잡은 원리만은 만고 불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그것 혹은 그 사람의 유익을 무엇보다도 앞세운다는 사실입니다. 지도자들 사이에 싸움이 붙어서 교인도 두패로 갈라지게 되고, 그것이 그 지역의 화제거리가 되고, 교회는 점점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다는 어느 "싸우 는" 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이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가 계속 생각났 습니다. 서로가 "교회를 위해서"라고 할 것이지만, 교회를 위해서 한다는 그 싸움 때 문에 정작 교회는 가장 큰 손상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진 실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할 것이지만, 그 진실 하나 밝히자고 교회 전체를 교 회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이 무서운 사실을 보고나 있는 것인 지... 그간의 서운하고 억울한 내력을 밝히고 차제에 교회를 바로 세워야 한 다고 할 것이지만, 자기의 억울한 사정 하나 풀자고 온 교회를 쑥대밭으로 만 들어 가고 있다는 이 사실을 부러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공 의를 믿으며,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되심을 확신한다고 말은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이 손을 쓰실 여유도 없이 자기의 혈기로 교회를 온통 물들일 수도 있 다는 위험성을 감지하고나 있는 것인지... 모든 것을 제쳐두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그렇게 손상시키고, 그 교회를 향한 주님의 역사 진행을 그렇게 왜곡 해버리고 있는 일에 대하여 질풍노도처럼 닥쳐오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알 고나 있는지, 두려워나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진노는 상대방의 불의함 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일 것이고, 교회를 위해 싸운 우리에게는 승리의 면류관 이 씌워질 것이라는 엉뚱한 착각 속에서 안심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 떤 사람들은 교회를 위하여 순교도 한다는데, 우리는 교회를 사랑한다면서도 자신이 당하는 작은 억울한 일 하나 바로 잡기 위해서, 자신이 당한 서운한 일 하나 앙갚음 하기 위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자신의 의견하나 관철시키 기 위해서, 그리고 왜곡당한 자신의 작은 정당성 하나 입증하기 위해서 아이 를 반씩 나누어 가져도 좋다는 식으로 나오는 가짜 엄마처럼 그렇게 교회 생 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진짜 엄마라는 진실만 밝혀지면 아이는 반쪽으로 쪼개져 죽어도 상관없 다는 식으로 교회 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했기 때문이지요. 정말 교회를 사랑 한다면, 어떤 자기 희생을 치루면서라도 그 교회를 살리고 유익하게 하는 쪽 을 택하게 될 것이지요. 솔로몬의 재판에서 진짜 어머니 처럼 말입니다. 그것 이 바로 사랑의 증거아닌가요? 금년에도 큰 선거가 두 차례나 있다는데, 우리는 또다시 국가와 민 족을 들 먹이면서 사실은 자기의 야심을 채우려고 국가와 민족을 망치는 일을 스스럼 없이 하는 정치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 정치꾼들이야 본래가 그 러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를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 아닌가요? 자식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못키우는 한이 있어 도 아이를 죽게 할 수는 없다는 그 어머니의 정신을 가진 교회 지도자들이 많 아지는 한 해였으면 좋겠습니다.
46 no image <정창균 칼럼>은혜를 받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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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5 2001-12-19
은혜를 받은 자 정창균 목사/새하늘교회 유대 땅 나사렛에 한 처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약혼한 상태였습니다. 약혼을 했지만 남자와 육체 관계를 맺지 않은 순결한 처녀였습니다. 어느 날 가브리엘이라는 천 사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그 천사가 마리아에게 건넨 첫 마디 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것 이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처녀는 놀랍기도 하고, 고 민도 되었습니다.“이것이 무슨 말인가?” 천사는 이어서 왜 이 처녀가 은혜를 받은 자 인지를 밝히기 시작하였습니다. “네가 아이를 낳을 것이다.”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 을 것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이 처녀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어서 된 일이라는 것이었습니 다. 천사는 이 숫처녀에게서 태어날 그 아기의 이름까지 지정해주었습니다.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남자와 정을 통한 것이 밝혀지면 동네 사람들이 끌어다가 돌 로 쳐죽여 돌무더기에 묻어버려도 아무렇지 않은 그런 세상에 이 처녀는 살고 있었습니 다. 남자의 몸을 접한 적이 없는데도 아이가 생기는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놓고 “은혜 를 받은 자”라니... 사실이 밝혀지는 날에는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두려운 상황 을 놓고 하나님께 은혜를 얻어서 된 일이라니... 무슨 은혜가 이런 해괴 망칙한 은혜가 있을까? 마리아는 천사에게 되물었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나 는 남자와 몸을 부딪혀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 까?” 가브리엘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 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너에게서 나실 그분은 거룩한 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다.” 유대 민족이 대대로 그렇게 기다려 온 메시야의 오심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조상 다윗 의 위를 받으실 분이요, 영원히 야곱 집의 왕 노릇 하실 분이요, 무궁한 나라를 세우실 분”이 그의 몸을 통하여 오실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는 기다리고 있고, 마리아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마리아는 결단을 하고, 그의 입에서는 결단의 한마 디가 터져 나왔습니다.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주님, 그것이 주님 의 뜻이라면 저는 주님의 계집종이오니 주님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질 것 뿐입니다’ 그제서야 천사는 마리아를 떠나갔습니다. 이런 마리아가 헐레벌떡 자기 집 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세례 요한을 잉태하고 있었던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하여 말 했습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이 누가복음 1장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탄생 내력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 마다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리고 참 은혜라는 것이 무엇인가, 참 은혜를 받은 자는 누구인가를 곰곰 생각하곤 합니다. 내게는 원통하고 억울하고, 때로는 돌에 맞아 죽을런지도 모를 위험한 일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과 연관을 맺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은혜라는 말씀일텐데... 그런데 우리는 흔히 그 반대를 은혜로 생각하고, 기대하 며 사는 건 아닌지... 군사독재시절,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가 잡혀가서 고문을 받고 정신병원 입원으로, 자택 요양으로 억울한 세월을 보내며 한때 폐인처럼 되어버려서 그를 아는 우리 모든 사 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한스런 응어리를 갖게 했던 친구가 어제 찾아왔습니다. 우 리 나라 최고의 대학이라는 그곳에서도 최고의 수재라는 평을 들었던 친구였습니다. 몇 년 전 어느 곳에서 제 아내와 함께 만났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얼굴 이 몰라보게 평안해졌고, 건강해보였고, 생각도 말도 겸손하고 진지하고, 긍적적 이었습 니다. 얼마 전부터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 하고 보니 목사인 제 생각이 나고, 제가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존경하는 목사님이어서 보고 싶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는데 도중에 자리를 떠나 어디를 다녀오면 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앞이라 담배를 피울 수가 없어서 담배 한대 피우느라고.” 그 친구는 돌아가면서 한마디를 했습니다. “내 인생을 돌아보니 나에게 섭리가 있었어.” 지금까지의 자기의 인생이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그 섭리를 고마와 했습니다. 그는 또 말했습니다. “도서관에 수백만권씩의 장서가 있는 데 그중에 단 한권의 책만 남기라 하면 나는 성경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게 억 울하고 원통한 세상을 경험했으나 제 생각에 그 친구는 분명히 “은혜를 받은 자”였습 니다.
45 no image <정창균 칼럼>서로를 축복하며 사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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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9 2001-12-05
서로를 축복하며 사는 행복 정창균 목사/새하늘교회 지금은 너무 시간이 쫒겨서 엄두도 못내고 있지만, 언젠가 꼭 한번 써보고 싶은 책이 몇 권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축복 사역"에 관 한 책입니다. 내년에 혹시 시간이 주어지면 저는 꼭 이 책을 써볼 작정입니 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서로를 축복하면서 산다는 것, 그리고 서로 서로에게 축복을 받으면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리 고 그것은 큰 특권이기도 합니다. 남편은 머리로서 아내를 축복하고, 아내는 돕는 배필로서 남편을 축복하는 부부. 부모는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자녀들을 축복하고, 자녀는 태의 열매로 서 부모를 축복하는 가정. 목사는 목자로서 교인들을 축복하고, 교인들은 양 으로서 목사를 축복하는 교회. 그리고 각 교인들은 지체로서 서로 서로를 축 복하는 교회. 이것이 제가 사모하는 부부와 가정과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 나 오늘날은 가정이든지, 직장이든지, 사업장이든지, 심지어 교회에도 경고, 불평, 비난, 책임추궁, 지시, 반항, 갈등 같은 것들이 난무할 뿐, 서로의 눈 을 마주 보며, 손을 잡으며, 얼굴을 만져주며, 얼싸 안으며 서로를 축복하는 모습은 찾아보기가 아주 희귀해졌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축복할 권세 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축복은 그냥 듣기 좋은 말뿐인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이루어지는 능력이 부여된 특별한 권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이 믿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축복은 단순한 하나의 덕담으로 그치는 것 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특권을 사용하는 데에 너무나 인색합 니다. 때로는 이 권세를 사용하여 다른 이들을 축복하는 것을 아주 어색해 하 기도 합니다. 서로 찢고 뜯는 일을 훨씬 더 자연스러워할 때가 있기도 합니 다. 저의 세 아이가 다섯 살, 네 살, 한 살이었을 때, 저는 우리 아이들을 축복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면 세 놈이 나란히 누워 서 자는 모습이 어찌 그리 예쁘던지... 그리고 이 놈들이 내 자식이라는 사실 이 어찌 그리 가슴 뿌듯하 던지... 백원도 안되는 라면땅 한 봉지도 먹고 싶 은 만큼 사주지 못하는 변변치 못한 아비였지만, 여하튼 그 아이들이 내 자식 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제 가슴을 뿌듯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제 가 어렸을 때 큰 감동을 가지고 보았던 한 모습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어린 제 머리맡에 앉아서 잠들어 있는 저를 위해서 기도하시던 내 어머니의 모습이 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자고 있는 제 머리맡에서 저 를 칭찬하시며 저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와 덕담을 주고 받으시는 것을 비 몽사몽간에 들었던 기억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우리 엄마와 아버지가 나를 참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고 잠결에도 어린 가슴에 그렇게 기분이 좋았었 는데, 그 기억이 문득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자고 있는 우리 아이들 을 축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 아이의 머리맡을 차례로 옮겨 앉으며 때로 는 자는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고 큰 놈부터 차례로 축복의 기도를 하기 시 작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복스러워하고 대견스러워 하 는 내용의 덕담도 아이들의 머리맡에서 하였습니다. 이 놈들이 자라 면서 때때로 부모인 우리 부부의 속을 썩이기도 하고, 때로 는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들로 우리를 많이 불안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러 나 우리는 극단적으로 염려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그 놈들이 어렸을 적부 터 쌓아 온 축복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과정 과정에서는 많은 문제를 일 으키기도 하고 잠시 비뚤어지기도 할 것이지만, 그래도 결국은 부모인 우리 가 축복한 대로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냥 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아이들에 대하여 너무 자유방임하고 있다고 보였는지 자녀에 대하여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베짱이 좋으냐고, 부모로서 무책임한 것 아니냐고 핀잔 성 염려를 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의 이 름으로 그들을 축복한 것이 아무 것도 아닐 리가 없으니까요. 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하루 두 번씩 저를 축복하셨듯이, 나도 우 리 아이들을 그렇게 축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렇게 하기를 권하 고 싶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그렇게 축복하는 부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목사가 되어 품는 또 하나 저의 바램은, 우리 교우들을 축복하 며 목회를 하고 싶고, 우리 교우들의 축복을 받으며 목회하고 싶은 것입니 다. 성탄도 새해도 가까와 오는데, 이 계절에는 그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 을 앞세워 마음껏 서로를 축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을 축복합니 다.
44 no image <정창균 칼럼>감사절 아침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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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4 2001-11-22
감사절 아침의 소원 지난 주일은 추수 감사절이었습니다. 새벽기도 후 감사절 예배를 준비하 고 있는데 갑자기 엉뚱한 노래가락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피리 부는 사 나이. 바람 따라 가는 떠돌이. 멋진 피리 하나 들고 다닌다... 거친 비바람 이 불어도 모진 눈보라가 닥쳐도 멋진 피리 하나 들고서 언제나 웃는 멋쟁 이." 20년 가까이 전에 한창 유행하였던 송창식의 "피리 부는 사나이" 였습니 다. 문득 떠오르는 이 노래가락에 잠시 취하는 동안 생각은 다시 엉뚱한 데 로 뻗어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감사하는 사나이로 살고 싶다." 비록 바람 따라 사는 떠돌이 일찌라도 멋진 피리를 불며 떠도는 멋쟁이 사나이처 럼, 비록 이런 일 저런 일, 좋은 일 궂은 일, 기쁜 일 슬픈일, 바람을 마구 맞으며 살아도, 감사의 피리를 불며 사는 멋쟁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저의 소원이 되어 떠오른 것입니다. 그리고는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가는 나의 모습 이 미리 연상되기도 하면서 가슴이 뭉클해지기 도 하고, 눈물이 글썽여지기도 하였습니다. 무슨 이유로 감사절 아침에 송창식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은혜 의 끈나풀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저는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 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하나님께 그렇게 감사하며 살고 싶다는 소원이 생 겼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티끌만큼씩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이 또 하나의 감사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 전날인 토요일 저녁에도 우리 가족은 참 은혜스러운 경험을 하였 습니다. 나는 다음날의 감사절 행사를 점검하느라 밤12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 갔습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식구들을 비상소집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 섯 식구가 둘러 앉아서 감사절 전야제를 가진 것입니다. 우리 부부와 세 아이 들이 둘러 앉아서 각각 지난 일 년을 지내 오면서 감사한 일들을 이야기 하 며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슬프고 아팠던 일들도 나누며 감사하였습니다. 구 체적으로 생각해보니 감사한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힘들었던 일들도 지내놓 고 돌아보니 생각하기 따라서는 얼마든지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서로 손을 잡고 돌 아가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앞으로는 성탄절 이브만이 아니라, 감사절 이브도 지키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은혜로 운 감사절 전야 였습니다. 사실, 저는 감사할 일이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입니다. 저를 아는 많은 사 람들이 저를 부러워하면서 참 감사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많이 가진 사람입 니다. 작은 일에서 큰 일까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크게 감사한 것 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그렇게 감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언제라도 부를 수 있고, 붙잡을 수 있고, 아뢸 수 있고, 아무 때라도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고, 생떼를 쓸 수도 있고, 곡조가 어떻게 되든 마음껏 찬양할 수 있고, 하소연 할 수 있는 예수님을 내가 믿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 나 감사한지 모릅니다.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 이것은 모든 감사의 원동력입니다. 아름다운 하늘에 문득 시선이 멈추었 을 때, 흐드러진 꽃들을 보며 그 아름다움에 충격을 받을 때, 바르게 살고 헌 신적으로 살려고 애쓰는 착 하디 착한 교인 한 사람을 만났을 때, 거의 본능적 으로 터져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탄사는 내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나 도 모르게 나오는 감사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슬픔도 감사가 되고, 비극도 결국은 감사로 변하고, 고통과 괴로움도 끝내는 감사가 되는 비밀을 나는 내 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에서 발견하곤 합니다. 누군가 속을 썩일 때도, 마음 을 아프게 할 때도, 사는 것이 팍팍하고 서러울 때도, 나는 오히려 그것을 감 사할 수 있는 희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내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바람 따라 사는 떠돌 이 이면서도 언제나 멋진 피리를 불며 다니는 피리부는 사나이처럼, 온갖 어 려운 상황을 다 만나며 가는 나그네 인생길을 살면서도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 하는 사나이가 되고 싶습니다. 언제나 감사의 멋진 피리를 불며 사는 감사의 멋쟁이가 되고 싶습니다. 이것이 감사절 아침에 감사의 눈물을 찔끔거리며 새 삼스럽게 품는 나의 소원입니다. 그리고 모든 다 른 사람들도 이런 소원을 품 었으면 하는 것이 또 하나 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문득, 앵무새처럼 외우 고 다니던 말씀 한구절이 떠오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고 예 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43 no image <정창균 칼럼>왕따가 된 장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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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4 2001-11-08
왕따가 된 장로님 어느 시골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화목하게 잘 지내오던 교회에 문제 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젊은 장로님 두어 분을 중심으로 목사님에 대하 여 불평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그것이 점점 공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고, 급기야 나이드신 다른 장로님까지 한 덩어리가 되어 목사님을 노골적으로 반 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가장 나이가 많 이 드신 장로님 한 분만은 합세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장로들이 입장을 함 께 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지만 이 장로님은 끝까지 목사님을 두둔하며 입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웬만하면 목사님의 실수는 그만 덮어두고 화목하 는 교회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장로님들은 이 분을 목사편이 라며 따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동료 후배 장로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것입니 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교인들이 하나 둘 장로님들의 입장에 동조하기 시 작하더니 급기야는 교인들의 다수가 목사님을 반대하는 장 로님들의 편에 서 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교회를 떠나라는 장로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교인의 수는 목사님의 결정적인 실수가 드러나면서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교 회가 두 패로 크게 나누어지고, 서로의 사이에는 골이 깊어지려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나이가 가장 연로한 이 장로님은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목사님을 반대하는 교인들의 수가 많아지고 있으니, 아무래도 교회의 평안을 위해서 목사님께서 결단을 내 려주셔야 하겠습니다. 교회를 떠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이제 교회를 떠나 달라는 요청을 한 것입니다. 목사님은 많이 실망을 하셨습니다. 이 장로만은 자기 편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는데 변절하여 역시 장로 편에 섰다고 생 각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목사님이 노를 품고 이 늙은 장로님을 따돌리 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이 장로님은 동료 장로들에게도 왕따를 당하고, 그 리고 목사님에게도 왕따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장로님이 처음에 다른 장로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목사님을 두둔하고 나 선 것은, 장로들이 싫고 목사님이 좋아서 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목사님께 교회를 떠나시라고 권유한 것도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목사님을 배반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가지 이유, 곧 교회의 유익을 무엇보다도 앞세워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확신에 따라 취한 행동이었습니다. 몇몇 사람이 목사님을 배척할 때는 목사님의 입장을 강하게 보좌하여 속히 교회의 혼란을 제거하고 교회를 안정시켜야 된다는 생각에서 목사님의 편에 서서 그 몇몇 사 람들을 설득하였고, 이미 교회의 다수가 목사님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 버렸 을 때는 목사님이 속히 거취를 정하도록 요청하여 교회가 깨어지는 것을 막아 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것 이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것인가?" 그것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이었 습니다. 장로들은 결국 그 교회에서 뛰쳐나가 따로 교회를 세웠고, 장로들로 부터도, 목사님으로부터도 왕따를 당한 그 장로님은 결국 병든 아내의 간호 와 수발을 위하여 도시의 아들네 집 근처 교회로 옮겨가 거기서 만년을 보내 며 교회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이 어른이 바로 4년 반 전에 세상을 떠나신 제 아 버지였습니다. 어머니의 병 수발 때문에 도시의 형님댁 근처로 교회를 옮겨 오시고 한참 이 지났을 때 그분은 그 때 일의 전말을 제게 상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덧붙이셨습니다. "나중에는 목사님을 반대하는 교인들의 수가 많아져 서 내가 목사님을 찾아가서 직접 말씀을 드렸다. 이제는 목사님을 반대하는 교인들의 수가 많아져서 안되겠으니 교회의 평안을 위하여 교회를 떠나주셔 야 될 것같다고. 그랬더니 목사님이 안좋아하시더라." 평생 목회자의 길을 가 야할 제게 교훈 삼아 의도적으로 그 말씀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교회 의 유익을 우선으로 행동을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요즈음 이곳 저곳에 교회 의 유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유익을 행동의 최우선의 원리로 삼고 사는 사 람들 때문에 소란하고, 평안치 않은 교회들이 제법 있습니다.
42 no image <정창균 칼럼>망할 놈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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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3 2001-10-24
망할 놈의 친구 두어 주 전 참으로 끔찍한 사건이 부산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벌어졌습니 다. 학생 하나가 칼을 들고 교실에 들어와서 다른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자 기 반 친구를 칼로 찔러 죽인 것입니다. 요즘은 워낙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 한 사건들이 많아서 어떤 사람들은 그런 류의 사건들이 어디 그것 뿐이냐며 이 사건도 혀나 몇 번 차고는 금방 잊어 버렸을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것은 단순히 사람 하나가 다른 사람 하나를 칼로 찔러 죽인 그런 사건이 아닙 니다. 고등학생이 같은 반 친구를 교실에서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어찌 단 순히 수많은 살인 사건 가운데 하나일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그 아이가 그 런 방법으로 친구를 죽일 아이디어를 어디에서 얻었는가를 안다면 이 사건이 단순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 사건이 있고 며칠 후, 한 TV 방송에서 기자가 쇠고랑을 차고 있는 그 아이와 인터뷰를 하는 장면을 상세히 보여 주었습니다. "왜 그 친구를 죽일 생각을 하였는가?" "평소에 나를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도 다른 아 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나를 괴롭혔습니다." 기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어떻 게 해서 칼로 찔러서 그런 식으로 죽일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영화 '친 구'를 보면서 그렇게 죽일 생각을 했습니다." "어디에서 영화를 봤는가?" "영 화관에서 보고, 비디오 테이프 빌려다가 보고, 인터넷에서 보고... 그 영화 의 대사를 다 외웁니다." 기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특별히 어느 대목을 보 고 칼로 친구를 그렇게 찌를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 "그 영화의 대사를 다 외웁니다." 한국영화 사상초유의 흥행을 올렸다는 그 영화였습니다. 그 아이는 친구라 는 그 영화의 대사를 다 외운다는 말을 세 번을 반복해서 했습니다. 영화 전 체로부터 자기 가 한 행동의 영감(?)을 얻었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자기를 괴 롭히는 친구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을 불태우면서 그 영화에 몰입하여 반복적 으로 보았고, 그 영화는 어떻게 화끈하고도 영웅적인 모습으로 친구를 죽여 없앨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말하자면 "친구 "라는 영화가 친구가 친구를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서 친구를 죽이도록 교살을 한 것입니 다. "친구"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라면 그것이 영화가 되었든지, 책이 되었든 지, 만화가 되었든지, 그것을 본 다음에는 깨졌던 친구 사이가 회복되든지, 원한을 품었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든지, 멀어졌던 사이가 가까워 지고, 친구에 대하여 관심이 없던 사람이 친구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는 일 등 뭔 가 긍정적인 반응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정상적인 기대입니다. 우리 의 이러한 기대를 '그것은 모든 예술 활동이 설교가 되라는 유치하고도 전근 대적인 발상'이라고 치부해버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친구라는 영화를 보고나더니 친구가 친구를 그 방법 그대로 죽여버리고 싶어지고, 그래서 그대 로 일을 저질러버리고 말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모든 공 공성을 띤 활동들이 짊어져야 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인 것입니다. 친구 가 그렇게 잔인하게 친구를 죽이는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서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반어법적 메시지를 의도한 것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괴변성 변명을 아 무리 늘어 놓는다 하여도 그 영화는 여전히 폭력성 화끈함에 매료되는 일반인 들의 심리를 휘어잡아 흥행에 한번 성공해보려는 폭력영화인 것은 확실합니 다. 친구를 그렇게 죽여 없앤 그 친구는 참 망할 놈의 친구입니다. 그러나 사 람들의 심리를 잘 읽어내어 장삿속에 빠져서 그런 영화를 만들어내어 떼돈을 번 그 작자도, 그가 만들어 낸 그 영화 '친구'도 망할 놈의 친구입니다. 그리 고 그 따위 폭력 영화를 보고 그렇게 열광하고 좋아하여 장삿군에게 이용당하 는 이 놈의 세태는 더 망할 놈의 세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태는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우리가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망할 놈의 세상을 만들 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홧김에 씩씩거리다가, 문득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람은) 마 음에 가득히 쌓은 것을 밖으로 내놓는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 게 된다"(눅6:45). 친구를 죽인 그 친구도 그 못된 폭력영화를 대사를 줄줄 외울 정도로 그렇게 보지 않았어도, 그래서 마음과 생각을 그 악한 것으로 채 우지 않았어도 그 망할 놈의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우리가 무엇을 주로 보며 사는가, 무엇을 주로 들으며 사는가,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무엇 으로 채워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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