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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6 (11:43:26)

기독교 신앙의 신비에 대한 이해와 설교

 

박영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남포교회 담임목사 ]

 

 

 

<이 원고는 2012년 4월 16일 합신에서 있었던 합신교단 목회자를 위한

신비주의 운동과 신천지 이단에 대한 설교적 대응세미나 강의안입니다. >

 

 

 

들어가는 말

 

이번 세미나의 큰 주제가 신비주의에 대한 이해와 비판입니다. 원래 신비라는 것은 어느 종교에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신비가 없으면 종교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 이해되는 범위와 능력이라면 종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해될 수 없는 능력, 이해될 수 없는 방법, 이해될 수 없는 내용, 즉 성경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측량할 수 없는이라고 표현하는 더 깊고 높고 놀라운 것이 있어야 종교가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부정적인 신비주의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긍정적인 신비가 무엇인가를 다루고자 합니다.

 

1. 기독교 신앙의 신비

 

기독교 신앙에는 우리의 기대나 이해와 다른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구원의 목적이요, 다른 하나는 그 목적을 이루는 방식입니다. 전자는 구원이 영생복락이기보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후자는 그것이 고난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1) 구원에서 완성까지의 사이에서 직면하는 현실 : 환난

 

설교는 청중에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청중은 로마서 51-4절에서 얘기하는 바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하나님과 화목 되어 은혜로 들어가게 된 믿음의 자리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은혜 가운데 살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완성의 자리를 바라보는 그 중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로마서 53절은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고 함으로써 중간 과정을 환란의 시기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환란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본성이 요구하는 잘못된 신비로 빠지게 됩니다. 즉 신앙이 힘이 되며 환란을 해결하는 수단이 되고, 신앙을 가지는 것이 세상이 가질 수 없는 보상을 해줌으로써 신앙인이 된 것을 인정받는 어떤 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2) 면제되지 않는 고통 : 사망의 역사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0-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하느니라.(고후 4:10-12)

 

기독교 신앙인의 현실은 환란이며 고난이며 죽기까지 고통스러운 기간이라고 얘기합니다.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신자들은 자신이 당하는 현실적인 고난과 고통을 끊임없이 신앙으로 해결하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데, 성경은 신자들의 고통을 면제시켜주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십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나를 죽인 세상에서 너희가 살아야 된다고 분명하게 못 박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고통을 면하는 것이 신앙이고 보상이고 정당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신비를 몰라서 현실적 대안들이 비집고 들어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3) 환난이 이루어내는 것 : 영광

 

종교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기대는 종교가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요, 인정받는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의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에서 신비란 그것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거나 안전장치입니다. 물론 신비란 종교의 필수적 요소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신비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신비는 그 해결책도 아니고 안전장치도 아니고 권력도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417절에서는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씀함으로써, 영광으로 가지만 환란을 통해 간다고 서로 엮고 있습니다. 환난이 영광을 만든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시작한 신앙입니다. 영광을 약속받은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환란이기 때문에 적지 않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환란과 고통은 패하고 망하는 과정으로 보지 승리로 가는 과정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아주 중요한 답이 하나 있는데 빌립보서 25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4) 신자에게 고난의 의미 : 신자가 처하는 현실이며, 영광으로 가는 길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2:5-9)

 

우리는 많이 희생하고 충성하고 사역을 순종했기 때문에 영광을 받았다고 오해합니다. 우리가 앞에 있는 믿음으로 시작하여 영광으로 들어가는 자리의 고난을 희생과 헌신으로 바쳐 영광을 보상으로 받는 과정으로 이해를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낮추심, 종 되심, 섬김, 희생, 죽으심은 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영광으로 보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영광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탄생 즉 성육신을 놓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라고 했던 것과 똑같이, 그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선언함으로써 하나님은 낮아짐과 죽으심을 영광과 함께 묶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는 하나님에 대한 영광은 낮춤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높이실 수 있는데 낮춘다는 개념과 다릅니다. 섬기고, 군림하지 않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편들고, 용서하고 하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어디서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품으로 용서와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 나라는 다스리고 군림하는 나라가 아니고 섬기고 죽는 나라라고 끊임없이 강조하신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어떤 핑계와 타협점도 없습니다.

 

 

5)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신비 : 고난, 순종, 온전케 됨

 

예수님이 보냄을 받는 자리는 히브리서 57-9절 말씀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5:7-9)

 

비록 성자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셨지만 무슨 심한 고통과 눈물로 처절하게 기도할 일이 있었겠습니까? 설교자가 자기의 인생과 사역이 고달프고 이해가 가지 않고 죽을 것 같지 않으면 그는 아직 설교자가 아니고 꿈을 꾸는 자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나 초창기 설교를 보면 그때는 현실을 몰랐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정답을 알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는 설교가 살기가 둥둥합니다. 식칼 들고 날뛸 때입니다. 냉장고도 잘라서 요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하소연도 아니며 절망도 아닙니다. 주께서 거기까지 오신다는 것을 아는 초청입니다. 그 눈물이 있어야 청중들이 비로소 예수님의 품안에 안기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항복하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설교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그러면 부활은 언제 일어나는가? 와서 끌어안으시기만 하고 끝나는가? 그렇습니다. 부활은 주님 다시 오셔야 일어납니다. 우리 사는 동안 이것은 믿음으로 어떤 증거로 확인은 시켜 주셔도 완전하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6) 신앙생활의 본질적 덕목들의 의미 : 능력과 보상이 아님

 

골로새서 3:12-17은 골로새서 31절의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에 이어서 나오는 결론의 요구들로, 용서와 겸손과 이해와 사랑 등 신앙생활의 본질적 덕목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능력과 보상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겸손이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겸손 하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 기독교 신앙이 목적하는 성품으로 되어 있지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환란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신, 즉 영광을 군림하여 강요하는 힘으로 갖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비워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우선적으로 증명하시듯이 우리 모두에게 이 세상에서 섬기는 자리, 종의 자리로 가라고 불러내었다고 성경을 이해해야 맞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 이 부분을 이렇게 저렇게 한 번씩 언급하면 모든 성도들의 표정이 어두워집니다. 답이 없다는 실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덕목들을 신앙인에게 주어진 보상이나 능력이나 힘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2. 연속성과 반전의 신비

 

1) “약함강함의 연속성이 갖는 신비

 

죽어버리고 망하는 환난의 과정이 어떻게 영광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약함과 강함이라는 불연속이 연속으로 묶이는 모순이 어떻게 가능한지 중요한 힌트를 바울에게서 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사단의 가시를 빼어달라고 세 번 기도하고 주님으로부터 이 답을 받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 12:7-10)

 

절망과 죽음, 그리고 영광과 승리라는 서로 대립적이고 불연속적인 두 실체가 하나로 묶이는 신비가 소개됩니다. 내가 죽고 지는 것과 영광의 승리가 되는 것은 서로 다른 길입니다. 둘을 묶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은 이 둘을 하나님이 하나로 묶으시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묶으심, 그 불연속을 연속선상에 묶는 그 신비가 예수로 가능하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약할 때 강하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의 약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요청하여 그가 강한 것보다 더 강한 예수로 말미암아 그가 약할수록 예수의 임재로 인한 예수의 강함이 그가 강한 것보다 더 강한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자신의 약함이 강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여기 예수가 기독교 신앙의 이 고난이 왜 승리를 만드느냐, 고난은 실패와 멸망과 패망으로 가는 길인데, 분명히 하향 곡선인데, 상승 곡선으로 갔어야만 만나는, 그 정점에 있는 승리와 영광과 어떻게 둘이 묶일 수 있느냐할 때 그 둘을 묶는 신비로운 열쇠가 예수인 것을 증언하는 장면이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의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하고 약할 그때에 주께서 그에게 능력으로 머무실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약함을 하나님이 일하시는 성경적 신비로 이해합니다. 실패와 절망과 사망으로 끝나는 과정이 어떻게 모순 될 수밖에 없고 대척점에 있는 영광이라는 결과를 이룰 것이냐 할 때 거기에 예수가 등장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한계와 연약함이 만들어내는 한탄과 절망과 비명과 낙심이 어떻게 영광으로 묶일 수 있느냐에 대한 풀이가 나옵니다. 예수가 그 신비의 주인이십니다.

 

2) “죽음부활의 연속성이 갖는 신비

로마서 425절에는 구원론에 관한 중요한 설명이 나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

이 부분을 구원의 방법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더 크게 예수의 신비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가 우리와 동일시되고 우리를 죄에서 꺼내기 위해서 우리를 죽음의 자리까지 찾아오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와 함께 죽으셔야 함께 부활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내어줌이 되는 것은 그가 우리와 동일시되어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 죽음의 그리스도가 우리를 당신과 묶으심으로 부활해서 우리가 함께 해서 부활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겁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서 죽고 예수님은 혼자 살아계시고 이게 아니고, 우리의 부활을 위하여, 우리를 부활시키기 위하여 우리 죽음에 찾아오셔서 당신과 우리를 연합시켜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이것에는 모든 죽는 자들의 자리까지 찾아오시는 예수라는 것과 죽음을 부활로 바꿀 수 있는 부활의 반전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찾아와 끌어안아 부활에 참여시켜 죽음을 부활로 반전시키는 능력자로 소개됩니다. 예수는 죽음을 생명으로 반전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로마서 4장에 이 이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논하는 중에 그가 믿은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분이요, 죽은 자를 살리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이요 부활의 하나님입니다. 부정적으로 무한대로 간 자리도 뒤집어 반전시킬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안에서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증거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반전을 어떻게 이루시느냐 하면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만드는 창조 사역보다 더 들어가 죽음을 결과 시키고 죽음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형편의 자리까지 쫓아온 것입니다. 죽음이란 갈 데까지 다 간 것입니다. 그 죽음에서 부활로 뒤집으시는 것이 예수의 신비입니다. 예수의 부활에는 어떤 죄도 버리지 않고 모든 죄를 품고 죽고, 모든 죽음을 생명으로 반전시키는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죽음까지의 깊이와 부활로의 반전을 증거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고통과 절망의 깊이가 예수 안에서 영광의 실제적 내용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3)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 반전, 전복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논하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예수에게서 실제로 본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이 땅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붙잡고 있는 자들입니다. 설교자로서 우리가 찾아가는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국은 승리하시기를 위하여 죽음의 자리로 찾아오신 것 같이 그 믿음으로 찾아가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우리 설교자들의 성육신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결국은 승리로의 연속성을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현실적으로는 고통스럽습니다. 그 한계가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자리로 찾아감으로서 성도들은 절망과 자책, 혼란, 의심, 불안, 공포로 규정되는 지금의 신앙 현실이 아직 보답, 보상되지는 않고 현재 처해있는 현실과 단절되어 있는 부활의 결과로 반전된다는 것을 설교자에게서 봅니다. 그런 현실에서도 그가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는 것으로 그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경험은 우리를 분명히 넘어뜨리고 있고 낙심하고 절망하게 만들지만 약속된 부활의 승리는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환란은 현실이고 약속은 현실이 아닙니다. 그 둘이 설교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그것이 묶여 있듯이 설교자 안에 그것이 묶여 있습니다. 그가 낙심하지만 도망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극복했고 해결했기 때문에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것 같은 자리에서 아직 약속을 믿음을 설교하는 것에서 신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그 모순된 불연속인 두 현실과 약속을 묶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명보다 큰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능력이나 증거를 제시하는 것보다 큽니다. 설교자라는 한 육체를, 한 인격을 하나님이 세우셔서 이 일을 묶어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3. 설교자 : 기독교의 신비를 증거 하는 자

 

이런 이해 속에서 설교자의 책임이 새삼스럽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식으로 그 사역을 감당하는가 하는 것이 제대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불러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과정과 방법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이 신비를 풀어야 됩니다. 원래 신비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그 본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른 그의 아들이 영광의 자리로 가는 과정이 왜 환란이어야 하며, 왜 실패요, 죽임이어야 하는가를 풀어내어야 합니다. 여기에 설교자들의 중요한 이해와 성경적 확인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고난과 영광의 불연속성이 기독교 신앙 안에서 연속성을 가짐을 증거 하는 자입니다. 어떻게 죽음에의 위협과 절망으로의 자책이 영광을 이루는지 증거 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13절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1) 신비의 증거 : 내게 능력주시는 자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3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보가 될 수 있습니다. 설교 하고나면 누구나 느끼는 것은 창피해서 제주도로 도망가 버리고 싶고,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창피를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똑같이 포기하고 싶은 자리까지 보냄을 받습니다. 목사인 내가 설교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하루에도 골백번 나오는 자리로 보냄을 받습니다. 여러분 모든 현실을 사는 인생들이 겪는 것과 똑같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인생은 지지고 볶고 하루도 견딜 수 없는 고난 속에 우리를 몰아넣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이 필요하긴 한 거야? 소용이 있긴 있는 거야? 하나님이 내 사정을 알긴 아는 거야? 관두지, . 이만큼 속았으면 됐지. 그만하지. 죽는 게 낫지. 성도들의 이러한 현실과 동일한 고난과 고통의 현장에 목사가 대표로 서서, 그 고난과 고통을 감당치 못하는 비명과 절규 속에서 견디는 것입니다. 끝을 내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하나님을 늘 반대한 것이 아니라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정금같이 나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하셔야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못 견디겠습니다. 제 생일을 달력에서 빼 주십시오. 거기에 바로 욥기의 가치가 있습니다. 거기 믿음으로 시작된 은혜로 부름을 받은 자의 궁극적 승리를 가진 하나님과 우리의 현실사이를 묶는 신비가 있습니다. 둘이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데 어떻게 영광이 결실될 것이란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지는 반전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의 모든 것은 그래서 부끄럽고 막막하고 의심스럽고 처절한 현실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모든 고난을 감수함으로, 그 고난으로 피해를 입음으로 사람들은 그 안에서 생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힘이 육체가 아니며 우리가 받는 보상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핍박을 받고 결박을 받고 망해가고 고난 속에 있는 종을 통하여 신자들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입니다. 설교자는 그 존재로 그 소명으로 이미 시작하는 사역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현실에서 당하는 눈물과 아우성을 분노로 발산하지 않고 영광으로 이해하는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불연속의 고통을 예수 안에서 부활로 연결하는 실존이 되는 것입니다.

 

5) 영광으로 가는 길의 증거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교인들에게, “내가 살지 죽을지 모른다. 나는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 나는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내 몸에서 존귀히 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일뿐이다. 사실 죽어서 그리스도와 살게 되면 그것이 더 좋다. 그러나 너희를 위하여 내가 살겠다.”고 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데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빌립보서 1:20-26)

 

사도 바울은 로마 옥중에 갇혀있고, 살아서 나올지 죽어서 나올지 모르는 현실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 것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것이므로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 외에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따져보면 그는 죽는 게 더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에 들어가는 것보다 사는 것을 택하는 이유는 그가 살아 있는 것이 빌립보 교회에게 유익하기 때문인데 어떤 의미에서 유익하냐 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 같은 고난의 길을 사도 바울이 걸음으로써 그 고난과 환난이 궁극적 실패로 가는 길이 아님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며, 그런 점에서 자신은 고난의 인생을 계속할 마음이 있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내가 있으면 너희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그 도움이란 고난을 면하고, 마음이 평안해지고의 도움이 아니라 이 고난의 길이 망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사도바울쯤 되는 사람이 그 고난의 길을 감으로써 성도들에게 보여주어 믿음의 담력을 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편안히 지내는 것보다, 살아서 고난 받기를 택합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고백입니까?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보상이 없는 고난의 길을 너희를 위하여 계속 걷겠다. 그리하여 현실의 고난이 끝이 아니고 우리에게 약속된 것이 진실이고 실제라는 것, 곧 그것이 영광으로 가는 길임을 증거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내가 감수하는 것으로 한 육체 속에 묶여 있는 이 둘, 곧 고난과 영광을 묶는 작업을 너희에게 증거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희에게 보이는 일을 고난으로 내가 고난을 감수함으로 감당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그 위대함이 결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그 결과로 끌어안았느냐는 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죄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생으로 되살려 놓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사망을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으로 뒤집기 위하여 성육신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끌어안을 수 있는 자리로 찾아오십니다. 그것이 설교입니다. 모든 기독교 신앙인이 갖는 예수를 믿는다는 동일한 고백을 설교자가 어디로 묶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가 현실 속에서 절망하고 낙심하여 내 인생과 믿음 생활은 영광으로 가는 것과는 다르고 불연속이고 실패라고 느끼는 그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그것이 설교자의 필수 조건입니다. 설교는 행하기 이전에, 선포하기 이전에, 설명하기 이전에, 자기가 반전시킬 청중의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거기에 모든 설교자들이 괴로워하고 오해하는 이 문제가 있습니다. 왜 더 완벽한 믿음과 능력을 주시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나가는 말

 

설교자는 마법의 지팡이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전능의 기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청중을 뒤집기 위해서 그들을 내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자리까지 보내져야 합니다. 그것은 선교여행이나 심방을 가듯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는 동일한 현실 속에서 살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만 찾아갈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자기 청중의 삶과 현실을 모르면 설교는 뒤집을 전제 조건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울어야 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논할 때마다 너무 거룩하고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여러분이 죄인인 것 같이, 아니 죄인으로 울어야 합니다. 설교할 자격이 없고 오늘 하루를 버틸 힘이 없는 생활인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이렇게 능력이 없단 말인가로 우는 자만 강단에 올라설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난 이대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니까 나도 놓아두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모든 설교를 성립케 하는 유일한 시작입니다. 이 조건이 없으면 그 설교는 거짓말입니다. 넉넉해서 하는 설교는 없습니다. 넉넉함은 예수께서 우리를 어디까지 쫓아오셨는가를 알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괜찮다. 괜찮다.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와 절망은 하나님의 필요와 만족의 필수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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