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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 no image |특 강|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_김명혁 목사
편집부
1248 2017-08-02
특 강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_한복협회장 >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배타적인 독선이 아닌 “포용적인” “연합”과 “일치” 종교개혁의 핵심은 주님께서 짊어지셨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몸에 지니고 죄인들 구원에 전력하는 삶과 죽음 우리들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인간화되고 제도화되고 물질화되고 있던 로마가톨릭교회를 개혁하여 “복음”의 핵심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정성을 다 쏟아 바치면서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의 모토들을 내세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직 성경”보다 “오직 믿음”보다 “오직 은혜”보다 “오직 그리스도”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보다 귀중한 모토들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물려받아 몸과 마음과 삶에 지녀야 할 너무너무 귀중한 모토들과 고백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귀중한 모토들이라고 해도 “오직”을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강조하면서 “다른” 면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배타적인 입장은 조심하여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성경”을 관념적으로만 고백할 뿐 영적이고 생활적인 관점에서 무시하는 잘못을 범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믿음”을 말로만 고백할 뿐 삶을 무시하는 잘못을 범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신자들의 “믿음”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삶이고 “사랑”과 “착함”의 삶에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함께 “사랑”과 “섬김”을 너무너무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사도 바울은 “사랑”을 무시하는 “믿음”은 아무 쓸 데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고전 13:2). “오직 은혜”는 너무 귀중한 모토이지만 “오직 은혜”를 강조하면서 인간의 책임을 간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강조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자기의 “책임”을 너무 강조한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사도 바울이 강조한 너무 귀중한 모토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성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일반 은총을 무시하고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론으로 치우치는 소위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 monism)이 생기게도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은 아무리 강조해도 잘못이 없는 너무 귀중한 신앙의 모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언제나 잘못을 범하는 불완전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교황이나 목회자가 영광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잘못 가르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손양원 목사님처럼 자기가 높임이나 영광을 받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배타적인 독선이 아닌 “포용적인” “연합”과 “일치”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죄인들의 구원과 함께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시기 위함이라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과거의 역사를 전적으로 배타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올바른 신앙적인 전통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루터는 버나드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칼빈은 어거스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종교개혁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소신을 분명하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다른 종교개혁주의자들을 부정적으로 비판하면서 투쟁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조금씩 다른 주장을 했던 종교개혁자들을 각각 다른 입장에서 존중하며 배우려고 하되 “쏠라 루터” “쏠라 칼빈” “쏠라 웨슬레” “쏠라 쯔윙글리” 라는 모토를 내 세우면서 서로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전적인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서로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연합”과 “협력”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포용적인” “연합”과 “일치”를 위해서 수고를 많이 하고 있는 손인웅 목사님은 지난 2017년 4월 14일 “종교개혁의 모토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이해” 라는 주제로 모인 한복협 월례모임에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에 대한 평가와 이해” 라는 제목으로 발표하면서 교회의 일치와 평화와 하나됨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교회의 일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최고의 방법이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라는 개혁자들의 명제는 교회의 분열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의 회복과 교회의 일치에 의한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을 위해 항상 자기를 개혁해야 한다는 의미로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지 못하는 분열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케 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만들기 때문에 장차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책망 받을 엄청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일치를 이루어 교회의 평화가 세상의 평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한 마디 더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물론 오늘의 세계교회가 지향하는 “종교개혁”은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에로의 회복”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십자가 복음에로의 회복”을 이미 사도 바울이 시도했고 평생토록 추구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7-12). 사실 루터와 칼빈은 “오직 성경”의 모토를 내 세우면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즉 “십자가 중심적인” 성경관을 내 세웠습니다. “나는 고백한다. 내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덜 발견하게 될 때 나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더 많이 발견하게 될 때 나는 결코 빈곤해지지 않는다. 참된 사도의 직무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그의 직무를 전파하는 일이다”(마르틴 루터). “요컨대 전체 성경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아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자기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매우 적절한 말이다. 성경을 읽는 우리의 최대의 목표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요한 칼빈). 저는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의 특성을 세 가지로 이해하곤 합니다. 즉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절정을 몸에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성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극도의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을 지니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에로의 회복”인데 그것은 주님께서 지니셨던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을 몸에 지니고, 세상의 부요함과 지혜로움과 강함과 악함과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와 민족주의를 모두 벗어버리고, 죄인들 구원에 전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주님께서 짊어지셨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몸에 지니고 죄인들 구원에 전력하는 삶과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짊어지셨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죽음”을 몸에 지니고 땅끝에서 살고 있는 모든 종류의 죄인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펴는데 전력을 다하는 삶과 사역과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의 특성들을 몸에 지니고 살다가 죽으신 분들이 스데반 집사와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와 성 프랜시스와 토마스 선교사와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최권능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속화와 인간화와 분열과 분쟁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했던 “종교개혁”의 이념들과 그리고 무엇보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이 추구했던 “십자가 복음”의 특성들을 몸에 지니고 새로운 “복음적인 삶”을 조금이라도 살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을 몸에 지니고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여!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셔서 엎드려 울면서 회개하게 하시고 서로 끌어안고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게 하시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몸에 지니셨던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을 몸에 지니고 땅끝에서 살고 있는 모든 종류의 죄인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펴는데 전력을 다하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691 |신앙강좌| 성경적 종말론에 근거한 신앙과 삶 _김영호 교수 파일
편집부
2127 2017-07-19
<신앙강좌> 성경적 종말론에 근거한 신앙과 삶 < 김영호 교수, 합신, 신약학 > 재림의 임박성은 시간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이 과거와 현재에 이루신 사건에 있다 새 시대는 옛 시대와 공존하며 이미 시작됐고 장차 이뤄질 완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보이는 현실 앞에서도 부활과 재림 영광을 늘 눈앞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며 그 내용이 발현되는 장을 기도라 한다 세상의 끝은 언제 오는가? 사람들은 종종 질문한다. 삶이 지치고 힘들수록, 악과 어둠이 깊어질수록, 이 물음은 진지해진다. 지인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혹은 자신이 이 악의 피해자가 되거나 또는 심각한 위기나 죽음을 목전에 두면, 현실의 일부가 된다. 예수님은 왜 오시지 않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이 질문을 한다. 일차적으로 변증해야 한다. 단순히 “때”의 문제라기보다 우리 신앙의 내용 중 일부 또는 핵심이 틀리지 않았느냐 하는 공격이기 때문이다. “아빠, 예수님은 오신다 했는데, 왜 안 오셔? 아이들이 질문한다. “이스라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 10:23).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눅 9:27). 많은 아빠, 많은 엄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시원한 대답을 못한다. 물론 아이들의 질문은 어른들의 의식 속에서 진행되는 복잡한 논리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설명이 길어진다면, 플라톤의 짧은 단편 『파에돈』이나 『크리톤』을 기대한 아이에게 그의 『국가』나 『법률』을 읽어주는 격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잠시 멈추어 설 필요가 있다. 우리가 대답을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서 언어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반경이 그들보다 크지 않다는 반증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질문은 중요하다. 생각은 행동을 결정하는 출발점이기도 하고 그 사람의 삶이요 인생이기도 하다. “저리로서 ... 오시리라.” 매주 고백한다. 이 고백은 보이지는 않으나 어떤 세계를 그려낸다. 어느 도시 어떤 사람을 말하면, 그 모습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따라서 성경의 기록, 신약의 주장, 예수님의 언어를 선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의 현실(reality)과 다른 내용을 가질 수 있고, 신약의 주장과 예수님의 언어와 공명을 일으키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성경적 종말론 그러면 성경이 제시하는 “현실”은 무엇인가? 종말은 예정에 속한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가 아니니라”(행 1:7).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느니라”(단 2:21). 인간과 세계의 마지막에 대한 것들, 특히 그 “시점”에 관한 것은 하나님 지식과 의지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얼마나 깊은지, 예수님께서 자신의 인성을 따라 한 말씀에 따르면, 심지어 메시야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 어느 시 어느 때에 주님이 오실 것이다는 주장은 성경의 명백한 주장을 부인하므로 거짓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일에 대한 주장이므로 월권이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예, 뱅엘)의 연구에 들어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 이상이요, 신학자들(예, 슈바이처, 그래서)의 글로 교회와 학계에 들어와 있어 경계가 필요하다. 성경 종말론의 첫 원리, 그것은 종말이 하나님의 예정에 있다는 것이다. 종말은 임박해 있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 그 가지가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처럼, 이런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막 13:28-29).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하나님 나라가 곧 완성된다. 초대 교회는 이렇게 재림을 “임박하다” 의식했다. 역사상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도 임박성을 “시간”의 문제로 생각한다. 어느 “때”에 마지막 날이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 종말론의 첫 번째 원리에 어긋난다. “그 때와 그 시간”은 사람이 추측하여 알아낼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다. 나아가 예수님, 선지자, 사도들이 쓰던 시간 개념과 근·현대적 시간 개념은 같지 않다. 현대에도 많은 부분 그렇지만 고대에는 시간을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시간은 상대적이고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실체였다. 그래서 성경에서 동일한 마지막을 가리키면서도 날(들), 달(들), 해가 사용된다. 사람의 (심리적, 사회적) 시야에 이를 수 있으면 현재이고 그 밖에 있으면 과거나 미래이다. 이런 개념으로 하고 있는 “때”(시간)을 60분이면 1시간, 24시간이면 하루로 보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시간이 아니라, “어디”에서 임박성이 발생하느냐 물어야 한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임박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사건의 확실성 때문이었다. “너희 가운데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누가의 주장이다. 방식 차원에서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어 있다. 승천하신 그대로 다시 오신다. 하늘로 올리우시고 구름이 그 발아래 모이고 보이지 않게 되셨고 하나님 우편으로 가셨다. 그의 오심은 그 역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하나님 우편)에서 보이는 세계로 들어오시고, 구름을 타고 아래로 오신다. 사건 차원에서 과거와 미래가 하나를 이룬다. 승천, 그 이전 부활, 십자가, 고난, 지상생애, 성육신은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 사건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확실하다. 승천하신 것처럼 다시 오신다. 승천이 확실한 것처럼 다시 오심도 확실하다. 여기서 “임박성”이 발생한다. 승천이 눈앞에서 그림처럼 생생하듯이 재림도 생생하다. 승천이 부활에 근거하듯이 다시 오심도 부활에 근거한다. 여기서 “임박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지금 살아계신다(행 4:2; 고전 15:12, 14). 그의 이름이 교회에서 신자들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행 3:16, 21; 고전 15:25). 그분은 부활하신 결과 하나님의 통치권에 제한 없이 참여하신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거기서 “일어서 계신다”(행 7:55-56). 그리스도께서 교회에서 활동하시고, 신자들 삶에서 구체적으로 통치하시므로, 이 활동과 통치를 종말의 전조로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임박성”이 발생한다. 신약 임박성의 자리는 시간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이 과거와 현재에 이루신 사건에 있다. 종말은 현재에 들어와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4:17). 예수님의 인격과 함께 이미 와 옆에 있다(ἤγγικεν, pf). 하늘나라. “여기 계시지 않으시다. 살아나셨느니라”(눅 24:6). 부활. 언제 하늘나라가 오고 부활이 일어나는가? 마지막 심판 후 “오는 시대,” 죄와 악과 사망이 정복된 후 “새 시대.” 이것이 구약의 주장이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는 시대에 속한 일들이 이미 역사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예수님과 복음서 기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면 “현재 시대”는 어떻게 되는가? 파괴되는가? “오는 시대” (하늘나라)가 여기로 들어왔다고 하여 “현재 시대”가 없어지지 않는다. 대체되는가? “새 시대”(부활)가 출범하여 “옛 시대”를 바꿔치기하지 않는다. 두 시대는 공존한다. 이미 시작됐고 앞으로 이루어질 완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추수 이미지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추수의 시작을 알렸다. “이와 같이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들도 …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유기적 개념이다.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셨고 신자의 부활과 피조물의 회복으로 완성된다. 그리스도의 부활부터 신자의 부활, 우주의 회복까지가 하나의 단위이며 하나의 “종말시대”인 것이다. 성경적 종말론이 요구하는 삶 종말은 하나님의 예정에 속하고, 임박했으며, 현재에 들어와 있다. 이 사실들 전부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의 기초이다. 이 종말론은 어떤 삶을 요구하는가? 신자는 “종말이 현재에 이미 들어와 있고 완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으며, 그 끝이 임박했으나, 그 시기와 때는 하나님만 아신다”는 성경적 “시대관”에 맞게 살아야 한다. 이 사실이 명백해 보이는데, 그렇게 살지 않는 경우도 있는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신자는 현시대와 오는 시대의 공존 시대에 사는데 현시대는 보이며, 대체되거나 파괴되지 않았으므로, “권력”을 갖는다. 오는 시대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현실성을 인식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간단치 않다. 그러므로 성경은 보이는 것대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종말적 의식이 반영된 삶은 어떤 모습인가?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눅 12:40). 준비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안다. 예상과 다를 수 있지만 2경이든 3경이든 주님은 오신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도둑이 언제 오는지 알고 있는 집주인과 같다.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우선 행동이 아닌 생각의 문제이다.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행동이 나온다. “남녀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신다”(눅 12:45). 일상의 지향점을 주님의 부활과 재림 영광으로 삼아야 한다. “인자의 날은 번개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서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라 …”(눅 17:24-29). 여기에 “예수님의 다시 오심/사람들의 일상”이 함께 나온다. 그런데 중간에 인자의 고난에 대한 말씀이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예수님의 변형된 수단예고 공식이다. 그런데 삼일 만에 부활하리라는 부분이 빠져 있다. 그 자리에 인류의 일상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일상이 부활과 재림의 영광의 배후에서 진행되는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공존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이 사실보다 자주 잊는 것은 없다.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공존의 시대는 주님 부재의 시대처럼 보인다. 마치 불의한 재판관 앞에 있는 과부의 처지와 같다. 현실이 모두 반대하더라도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는 이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이가 가진 믿음의 내용이다. “현시대”의 구조에 순응해서는 안 된다. “이 세대(현재 시대)를 본받지 말라.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롬 12:2).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신자는 “현시대의 구조와 동일한 구조가 되어서는 안된다.” 신자는 이미 오는 시대에 속한 자로서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두 시대 사이에 신자가 있다. 현시대의 구조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익숙한 것들이므로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멀리하기 어렵다. 가만있으면 현시대의 구조에 들어가게 된다. 지금은 “종말 시대”이다. 십자가와 부활 이래 구약이 예언하고 선지자들이 고대한 나라(“새 시대,” “오는 시대”)가 이미 출범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한 신자는 이미 “그 나라에만 존재하는” 의와 생명과 평화를 현재에 누리고 사는 이들이다. 새 시대 백성이요 하늘나라 시민인 것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마치 무명의 랍비와 12명이 시작한 천국 운동처럼, 정원에 심긴 겨자씨와 같은 현실일 수 있다. 그래서 이 현실을 증거로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대로 있지 않느냐?”(벧후 3:4).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세에 기롱하는 사람들이다”(벧후 3:3). 이들이 다수요 이들이 세력이다. 여기에 신자의 갈등이 있다. 물리적으로 보이는 현실 앞에서도 부활과 재림 영광을 늘 눈앞에 두고 살아가는 것, 이것을 주님은 “믿음”이라 부르고, 그 내용이 발현되는 장을 “기도”라고 부른다(눅 18:1-8).
690 |신앙강좌| ‘믿음’을 아시나요?_조병수 교수 파일
편집부
1743 2017-06-02
<신앙강좌> ‘믿음’을 아시나요? < 조병수 교수, 전 합신총장_신약학 > 믿음은 태도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이다 믿음은 지식으로 안정되고, 감정으로 강렬해지고, 의지로 생동감을 가진다 진정한 믿음은 의심과 불신, 과신과 맹신에 맞서 싸워야 한다 열매 맺는 믿음은 내게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이 심어 주신다 여는 말 내가 매일같이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입니다. 때로는 교회의 여러 가지 모임에서, 때로는 신학교의 교정에서, 때로는 특정한 목적으로 형성된 기독교 단체들에서 늘 신자들을 만나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기독교 신앙은 자연스레 몸에 배어있고, 대부분의 화제로 신앙의 테두리에서 맴돈답니다. 어떻게 예배를 바로 드릴 수 있을까, 어떻게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등등의 아주 경건하고 신앙적인 대화가 날마다 우리의 입술에 오르내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익숙한 기독교의 삶을 살면서도 막상 모든 기독교 생활의 바탕이 되는 믿음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마치 중세시대에 평범한 유럽 사람들이 융성한 기독교의 문화 속에서 살지만 믿음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았던 것과 비슷합니다. 오늘날도 대부분 기독교 신자들이 기독교 문화에 익숙한 삶을 누리지만 실제로 믿음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어느 날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외치셨던 말씀을 기억한다면, 이렇게 무덤덤하게 살 수는 없겠지요.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던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말하는 이때, 과연 우리가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반대로 믿음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마치 흰 색을 설명하려면 흰 색 그 자체의 속성을 나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동시에 흰 색이 아닌 다른 색들과 비교함으로써 흰 색을 설명하는 것도 방법이 되는 것처럼, 믿음인 것과 믿음 아닌 것을 둘 다 설명하는 것은 조금 더 풍성한 설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1. 믿음 성경에 믿음이란 단어만큼 많이 나오는 것도 드물 것 같고, 믿음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나면 성경에 별로 남을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것이 결국 구약성경의 전체 요약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구약성경에는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는 거지요.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성경의 여러 부분도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답니다. 그러면 도대체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사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매우 막연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은 이런 막연한 질문에 대하여 우리에게 아주 구체적인 답변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그 대답을 찾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히 12:2)라는 겁니다. 이 말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믿음의 시작자이며 종결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믿음을 시작하는 분이며 동시에 믿음을 종결하는 분입니다. 세상에 기라성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만이 진정한 믿음의 총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무엇인지 예수님에게서 대답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와 완벽한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셨습니다. 이런 온전한 인격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주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하셨습니다. 또 어떤 때는 심지어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죽기까지 완전히 순종하는 자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을 때, 믿음이란 믿는 대상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전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태도가 아니라 관계라는 말씀이지요.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준 것은 하나님께 딱 달라붙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었고, 오직 하나님 은혜의 테두리 안에 머물렀습니다. 이런 인물들 가운데 다니엘이 대표적인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다니엘은 다리오가 통치할 때 사자 굴에 던져지는 치명적인 위험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구원을 받았을 때 성경은 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단 6:23). 다니엘은 당시에 수석총리였기 때문에 사실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완전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라붙어서 자신의 불리한 상황도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처신을 하였습니다(단 6:10). 도대체 이런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믿음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각오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또한 믿음은 수련을 통해서 생각을 견고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랍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음은 사람의 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사람의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하나님께서 먼저 믿음을 선물로 주시면, 우리는 그 믿음을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분석해보면 두 겹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의 안쪽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게 있고, 믿음의 바깥쪽에는 사람이 드리는 게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전에는 믿어지지 않던 것이 신기하게도 믿어지는 것이지요. 믿음은 사람의 반응이기 때문에 믿는 것을 더욱 잘 믿는 데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믿음은 받아들임이며 동시에 내어드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신의 인생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2. 믿음의 요소 그런데 믿음은 세 가지 요소를 필요로 한답니다. 그것들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입니다. 지정의라는 세 요소가 조화롭게 잘 어우러질 때 바른 믿음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지거나 모자라면 믿음에 상당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믿음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기우뚱거리게 되며, 심지어는 아주 볼썽사나운 모양을 가지고 맙니다. 지식은 믿음을 안정되게 만들고, 감정은 믿음을 강렬하게 만들고, 의지는 믿음을 살아있게 만듭니다. 지식 없는 믿음은 무지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지식과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만, 믿음은 지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병행할 때 견고해집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는 믿음은 아주 불안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우고 싸우면 승리할 것이라고 자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법궤라는 물체에 대한 신앙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율법의 말씀은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홉니와 비느하스를 비롯하여 많은 이스라엘 군사들이 죽임을 당하는 큰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감정 없는 믿음은 미지근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감정을 유발시킵니다. 믿음은 감정과 연결될 때 폭발적이며 열정적이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같이 뜨겁게 타올랐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요. 이와 달리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믿음과 관련하여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의지 없는 믿음은 주저하는 믿음입니다.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눈치만 보는 것은 바른 믿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옛날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다가 나라의 영적 상태를 곤두박질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은 의지로 표현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결단력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야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라는 요소를 가지면서, 각각의 요소를 절묘하게 표현합니다. 믿음은 지식으로 안정되고, 감정으로 강렬해지고, 의지로 생동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세 요소가 조화롭게 결합할 때 놀라운 열매를 맺는답니다. 3. 믿음의 반대 이제 이야기를 방향을 바꾸어보겠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았으니, 이제는 믿음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믿음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믿음 아닌 것들이 포진합니다. 한편으로는 믿음 아닌 것이 의심과 불신입니다. 의심은 믿음에서 조금 멀고, 불신은 믿음에서 아주 멉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 아닌 것이 과신과 맹신입니다. 과신은 믿음에서 조금 멀고, 맹신은 믿음에서 아주 멉니다. 불신 ← 의심 ← 믿음 → 과신 → 맹신 불신은 사람이 자신을 믿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이해하지도 못할뿐더러 믿음을 어리석게 생각합니다. 의심은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은 되어 있으나 자신의 주관이 약해서 늘 흔들리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의 설명을 따르자면 두 마음을 품고 있어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물 위를 걷다가 그만 바다에 빠져가고 말았던 베드로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과신은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나 자신의 주관이 강해서 성급하게 덤벼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여리고 성을 함락한 후에 아이 성과 전투할 때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이 저질렀던 실수를 연상시킵니다(물론 아이 성 패배의 원인에는 아간의 범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겠지요). 맹신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거나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은 헛수고라고 하셨지요.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절대로 맹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라의 임신이라는 사건은 믿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에 불가능한 것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없는데 불가능한 것을 믿으면서 아브라함을 모범으로 삼는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가는 동안 한편으로는 믿음 아닌 의심과 불신에 대하여 싸워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 아닌 과신과 맹신에 대하여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의심과 불신보다는 과신과 맹신이 더 간악하고 무서운 적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의심과 불신은 쉽게 판가름되지만, 과신과 맹신은 굉장한 믿음처럼 보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4. 믿음의 결과 이제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 간단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상하게도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작아집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가리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말한 것과 비슷합니다. 신자는 믿음이 깊어질수록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고백하게 된답니다. 옛날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되었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외친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의 일을 오래 한 후에 내린 결론은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이었습니다(딤전 1:15). 이처럼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식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스스로를 쓸모없는 자라고 여기며 무익한 종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이 점점 사라지고 하나님이 점점 드러나기를 소원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은 정지하고 하나님이 활동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약한 데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시계의 바늘은 제 힘으로 저절로 도는 것이 아닙니다. 태엽이(오늘날에는 배터리가) 작동해야 시계 바늘이 도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활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는 절대로 믿음이 시작될 수 없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밖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주실 때, 그 믿음이 씨앗처럼 자라서 열매를 맺는 법입니다. 맺는 말 예수님께서 어느 날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외치셨던 말씀을 기억한다면, 이렇게 무덤덤하게 살 수는 없겠지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우리는 진정한 신자로 믿음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버나움 백부장에게 탄성을 발하시며 주셨던 말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주어진다면 얼마나 복 될까요? - 이 글은 “개혁주의 생명신학으로 세상 읽기” 2017년 봄호에 실렸던 글이다
689 |특강| 구약성경과 기독교적 사회정의_현창학 교수 파일
편집부
1750 2017-06-02
<특 강> 구약성경과 기독교적 사회정의 < 현창학 교수, 합신, 구약학 > 성경적 사회정의의 첫 번째 차원은 불의가 제거된 사회를 의미한다 성경적 사회정의의 두 번째 차원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구약에는 “의”로 번역되는 ‘체뎈’(צדק)이 (명사, 동사 다 포함하여) 523회, “공의”로 번역되는 ‘미쉬파트’(םשפט)가 422회 나온다. 하나님의 성품과 활동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단어들인데 두 단어는 함께 쓰여 하나님의 의 또는 정의라는 뜻이 된다. 물과 공기가 소중하지만 너무 흔해서 고마움을 못 느끼듯이 이 단어들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인데도 너무 흔하게 나오는 관계로 오히려 적절한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등한시되어 왔다. 이 단어들의 빈도가 말하는 것처럼 구약 전체는 “바른” 세상, “바른” 나라를 구현하고자 하는 꿈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이 땅에서 “의”가 실현되는 나라를 만들기를 원하시고, 그로 인해 “산 위의 동네”로서 주변과 주변 국가에 본이 되며 복을 끼치는 샘이 될 것을 소원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도 기본적인 초점이야 두 말 할 나위 없이 개인 영혼의 구원과 성장에 맞춰져야 하지만, 거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응당 ‘바른 사회’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세상’을 실현하는 데까지 관심의 폭이 넓혀져야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의”의 실천이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복음의 본질에 속한 내용이다. 아모스나 미가 등이 말하는 ‘선민의 창조적 책임’이 그것이고, 월터스토프가 표현한 “세계 형성적 기독교”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개혁신학의 특징을 일컬어 “공적 신학”(public theology)이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개인적인”(personal) 것이기는 하지만 “사적인”(private) 영역에 갇히거나 거기에 머무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공적인”(public) 책임을 져야 되고 또한 질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신이 사는 지역 사회로부터 시작하여, 국가, 지구촌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인 책임을, 그리고 지구의 미래와 환경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라든지 그리스도인의 문화소명(cultural mandate)이라는 말이 모두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나나 내 가족의 안위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가치와 정신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개혁신앙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존재 방식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규정하셨기 때문에 삶의 태도(modus vivendi)로서 사회적 책임은 우리에게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까 어떻게 하면 화를 피할까 하는 토속신앙적 관심에만 머물러선 안 되겠고, 하나님의 관심에 우리 관심을 조율하여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바른 세상을 건설할까 하는 데에 의미와 지향이 맞춰져야 한다. 공간이 충분하지 않으니 성경 본문은 아모스 한 경우만 예를 드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다. 아모스 1-2장을 보면 먼저 이방의 잔학상(atrocity)을 말하고 그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신 다음에 결국 유다와 이스라엘에게까지 심판을 선포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잘못이 무엇이었기에 그들도 동일한 심판의 대상이 되는가. 다메섹이나 가사, 두로 등과 같이 잔혹하게 사람을 죽이거나 마을을 통째로 노예로 잡아 팔아넘기거나 반인륜적인 극악 범죄를 저지르거나 한 엄청난 것이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무시했을 뿐이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뿐이었다. 우상숭배를 했고, 사회의 약자를 억압하고 억울하게 하여 ‘사회정의’를 실현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산 위의 동네”가 되어 주변국의 본이 되지 못한 게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이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여 율법이 가르치는 삶을 살았다면 그것이 주위에 ‘문화적 능력’으로 작용하여 인접한 주변 세상이 그렇게 포악하고 비인간화한 세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중요한 이유이다. 아모스서는 그리스도인의 작은 순종이 세상의 부패와 불행과 비극과 슬픔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이요 엄청난 잠재력임을 엄중하고 또 엄중하게 교훈하고 있다. 의를 행하는 “한 사람”만 있어도 도시는 용서받을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말씀 또한 얼마나 의미심장한가(5:1).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극히 보잘것없는 필부필부일 뿐이며, 우리가 드리는 기도 역시 지극히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일상의 문제들을 아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연약한 개인은 역사와 하나님 나라에 아무 보탬도 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성경은 기도하는 백성이 꾸는 꿈과 지향하는 가치가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준다. 비록 삶의 무게에 눌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곤비한 삶이 매일 이어지는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복의 근원”이며 역사 변혁의 중심에 선 존재라는 사실을 한시도 망각해선 안 된다. 오히려 곤경에 처해 있고 연약하기에 우리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자들이다. 힘겨운 시간에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고(commit) 말씀에 순종할(obey)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미래를 여는 길이며,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선지자들의 설교 주제의 거의 정확히 반은 사회정의이다. 물론 나머지 반은 우상숭배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갖는 종교적 충성심만큼이나 우리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향한 태도에 관심을 가지신다. 구약을 공부하노라면 하나님이 가지시는 이 관심의 중요성으로부터 도저히 마음을 뗄 수가 없다. 우리가 구현해야 할 ‘사회정의’를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눠 생각하자. 하나는 말 그대로 불의가 제거된 사회라는 의미이다. 정직과 성실이 기본 가치가 되도록 ‘사회정신’을 세우는 일을 말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권력과 재화의 노예가 되어 바로 앞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불의한 일을 거듭 자행하면서 세상 전체를 불행하게 만들어 가는 몰락의 폭주기관차와 같은 것이 선지자들이 경험한 인간의 역사라는 악몽이었다. 우리 역사도 다를 바 없다. 우리 사회의 부패의 민낯을 극장식으로 학습시켜준 빼어난 학교 기능을 한 이번 사태를 지나오면서 한꺼번에 다 고칠 수야 있겠는가, 부디 문화가 되어버린 정경유착 하나만이라도 끊어낼 수 있으면 더 이상은 바랄 것도 없다는 간곡한 심정이다. 정직, 성실, 청렴이란 소프트파워 없이 선진국이 도대체 꿈이라도 가능한 것이겠는가. 건국은 되었지만 정신적 ‘설계’는 한 번도 된 적이 없는 나라, 항상 재화와 경제에만 열심을 냈지 사회의 ‘정신’을 세우는 일에는 한 번도 제대로 힘을 써 본 적이 없는 나라, “의”의 가치를 세우는 기회는 과연 언제 포착될 수 있을까. 바로 사는 데에 하나님의 복이 있다는 고통스러울 만큼 단순한 이 사실 하나를 신봉하고 거짓과 불의를 우리 문화에서 최대한 몰아내는 것이 사회정의이다. ‘사회정의’의 두 번째 차원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구약의 정의(‘미쉬파트’)는 단순히 “옳음”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동정심(compassion)의 다른 표현이다. 니버(R. Niebuhr)가 구약의 정의(justice)를 “가난한(약한) 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편의(偏倚)(a bias in favor of the poor)”라고 정의한 것은 유명하다. 구약에서 정의는 그저 공평한 것을 의미한 관념이 아니었고, 언제나 약한 자, 고아, 과부를 향한 자비를 의미했다. 우리에게 있어 사회정의가 제대로 자리를 잡으려면 약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훈련하는 것이 먼저요 기본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출 34:6 등). 하나님의 이 사랑, 이 인격을 모르면 구원은 반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인색하고 나밖에 모르고 살아온 우리에게 우리 주위의 약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잘 계발되게 하는 것이 사회정의의 출발이다. 또한 이 사랑은 지구촌 끝까지 나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사회정의란 그동안 보수교회에게는 여러 이유로 불편한 말이었다. 그러나 어느 진영이 먼저 이 주제를 점거했든지 이에 대해 손 놓고 있는 일은 ‘전체성경’(tota Scriptura)을 고백하는 개혁교회의 자존심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사회의 ‘정신’을 설계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가장 시급한 선택이다. 바르게 사는 길에 하나님의 복이 있다. “의”의 세상은 단순한 이념적 이상이 아니다. 사회의 운명과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결정짓는 절체절명의 선택이다.
688 no image |2017 신년기획| 기독교 상담학의 흐름과 이해<8>_홍구화 교수
편집부
1518 2017-05-24
2017 신년기획 / 최근 세계 신학의 동향과 한국적 현황 <8> 기독교 상담학의 흐름과 이해 < 홍구화 교수, 합신 기독교상담학 > 본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신년기획 “최근 세계 신학의 동향과 한국적 현황”의 연재를 마친다. 옥고로 참여한 필자들과 성원해 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편집자 주> 심리학을 일반 은총으로서 인간 이해를 높여 주는 학문으로 이해하고 상담에 분별력 있게 활용해야 기독교 상담자는 인간을 이해할 때 그가 처한 상황을 복합적으로 살펴야 한다 상담은 성도들의 전인적 성숙과 회복을 돕고 비그리스도인들의 전인적 필요를 채워 주며 복음 전도와 선교에도 기여한다 신약 성경 디모데후서 3장 1절에서 5절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고 물질만능주의와 쾌락주의를 추구하고 부모를 거역하며 충동적이고 교만하고 남을 비방하고 모함하고 사랑이 없으며 화해하지 않고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을 거역한 결과 전적으로 타락하여 본래의 하나님 형상을 거의 잃고 말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지 않고서는 사람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려고 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이 되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이 없으며 절제하지 못하고 돈과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기 쉽다. 기독교 상담학은 이렇게 부패하고 타락한 속성을 지닌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변화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한다. 미국에서 목회상담학이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신학 배경을 가진 목회 상담 신학자들에 의하여 태동하고 발전되어 왔다면 기독교 상담학은 주로 보수적인 신앙 배경을 가진 심리학자와 신학자들에 의하여 발전되어 왔다. 에릭 존슨(Eric L. Johnson)에 따르면 기독교 상담학은 계몽주의 이후 세속화와 모더니즘의 토대에서 발달한 심리학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따라 크게 다섯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평행 설명 관점이다. 이 관점은 현실 세계의 모든 차원, 즉, 신체적, 화학적,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신학적 차원을 모두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본다. 심리학과 신학은 차이점이 분명한 각 학문 분과이고 현실 세계의 각 차원은 해당 분과의 발달된 방법론에 따라 연구되어야 하고 각 분과 간의 경계선이 분명해야 한다고 한다. 심리학 연구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적절하게 수행할수록 심리학의 세속성에 대한 편견을 없앨 수 있다고 하며,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에 신학적인 문제들을 던지는 것은 심리학의 과학적 객관성과 진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계한다. 많은 기독교인 심리학자들이 내재적으로 이 입장을 따르며 현대 심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특히, 종교 심리학과 영성과 용서에 대한 연구, 심리치료에 대한 연구, 심리치료에 있어서 가치의 역할에 대한 연구, 긍정 심리학 등에 기여하였다. 둘째는 통합 관점이다. 이 관점은 현대 심리학과 상담학이 지닌 자연주의와 세속적인 인간론에 문제를 제기하며 다학제간 통합, 즉, 신학과 심리학의 통합을 추구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특별계시와 심리학이라는 일반계시를 통합하여 인간을 이해하고자 한다. 심리학을 성경과 일관성이 있도록 성경의 기초 위에 세우려는 게리 콜린스(Garry Collins)의 재건심리학과 기독교 세계관에 비추어 현대 심리학을 비판적으로 적용하려는 스탠튼 존스(Stanton L. Jones)와 리차드 버트만(Richard E. Butman)의 시도들이 이 입장이다. 통합 관점은 결혼, 회복, 자아 개념, 원가족 이슈 등의 심리학적 주제들을 기독교 신앙에 비추어 적용한 책, 프로그램, 그리고 상담센터 등을 통해 복음주의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통합 관점에서 지역 교회 사역의 일환으로 상담센터가 운영되기도 한다. 풀러, 로즈미드, 휘튼, 조지 팍스 대학, 아주사 퍼시픽 대학, 리젠트 대학 등 미국의 주요 기독교 상담 대학원들이 취하는 관점이기도 하다. 셋째는 기독교 심리학 관점이다. 이 관점은 철학의 공통 주제들을 기독교적 입장에서 발전시킨 기독교 철학자들(A. Plantinga, N. Wolterstorff, W. Alston, C. S. Evans)의 영향으로 시작되었다. 이 관점을 취하는 기독교 심리학자들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입각하여 인간에 대한 심리학 이론과 연구와 실제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이 관점은 상담에 있어 교회 전통을 중시하고 성경에서 상담 원리를 찾아 적용하는 데에도 적극적이다. 낸시 머피(Nancy Murphy), 반 루엔(Van Leeuwen), 폴 비츠(Paul Vitz)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댄 알렌더(Dan Allender)가 구약신학자 롱맨(Tremper Longman III)과 함께 신학적 기초 위에 심리학적 주제들을 다룬 역저들도 이 관점에서 나온 연구들이다. 넷째는 변형 심리 관점이다. 이 관점은 영적 형성(spiritual formation)과 영적 지도(spiritual guidance)에 관심을 가지며 통합 관점에서 분리되어 발전되었다. 또 기독교적으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만큼 신앙대로 사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변형 심리 관점은 심리학 연구와 상담 실제에 있어서 연구자와 상담자의 영적 변화와 윤리적 실천을 중요시한다. 영혼 돌봄의 모델을 기독교 영성의 역사에서 찾고자 한 데이빗 베너(David Benner), 게리 문(Garry Moon), 레리 크랩(Larry Crabb), 시앙 양 탠(Siang-Yang Tan), 테리 워들(Terry Wardle) 등이 이 관점에 서 있다. 다섯째는 성경적 상담 관점이다. 이 관점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실천신학 교수였던 제이 아담스(Jay Adams)에게서 시작되었다. 현대 정신의학과 심리치료는 세속적이고 정신 병리에 대한 이해가 결정주의적이고 인간 중심적이어서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반대된다고 본다.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nouthetic counseling)에서는 상담이 성경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며 죄가 심리학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일으키기 때문에 상담은 죄를 회개하게 하고 인간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한다. 또,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목회자가 주 상담자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68년에 기독교 상담 교육원(Christian Counseling and Educational Foundation, CCEF)이 설립되었다. 권면적 상담은 1993년에 성경적 상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아담스와 그를 따르는 밥 보브갠(Bob Bobgan)과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기독교 상담자들의 책과 상담에 대해 기독교를 세속적인 생각과 종합한다며 극단적으로 비판적이다. 아담스는 CCEF에서 심리학을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생기자 CCEF를 떠났다. 이후 데이비드 포울리슨(David Powlison) 등이 이끄는 CCEF가 성경적 상담을 주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특별 은총과 함께 일반 은총을 인정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교회는 심리학을 하나님께서 일반 은총으로 주신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학문으로 이해하고 상담에 분별력 있게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독교 상담자가 심리학을 상담에 활용할 때는 심리학이 가진 자연주의, 결정주의, 환원주의, 기계주의의 한계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상담자는 영적 실재의 존재와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다. 인간은 타고난 것과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을 이해할 때 어떤 한 부분으로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하지 않고 영과 육을 가진 전인(whole person)으로 보아야 한다. 전인적인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장해 갈 수 있다. 인간은 기계적으로 조작되어지거나 어떤 이론을 도식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므로 개별적인 특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에 비추어 심리학을 상담에 적용하는 것은 기독교 상담자의 신앙고백에서 나오는 책임이다. 기독교 상담자가 어떤 신학과 신앙을 고백하는가가 중요한 이유이다. 타락 이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인간의 마음(렘17:9)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어떤 영향을 받는지, 무엇에 취약한지 사단은 잘 알고 있다. 그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벧전5:8). 기독교 상담자는 심리적 어려움과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사단의 미혹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도록 돕는다. 인간의 심리적 약함과 결함은 타락의 결과이나 반드시 개인이 저지른 죄의 결과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범죄의 피해로 정신외상을 입게 된 사람을 상담하는 경우 용서하지 않는 죄를 깨닫게 하여 회개하게 하는 것을 상담의 목적으로만 삼을 수는 없다. 그 사람에게는 정신외상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상담기법들이 필요할 것이다. 또, 기독교 상담자는 인간을 이해할 때 그가 처한 상황을 복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의 신체적인 측면, 심리적인 측면, 사회적인 측면, 영적인 측면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한 측면이 취약해지면 다른 측면들에도 영향을 끼친다. 예컨대, 탐욕과 시기와 같은 마음의 죄로 우울하게 되면 잠을 잘 못자고 식욕이 떨어져 신체 건강도 나빠지고 사람들을 만나기도 싫어진다. 영적인 침체를 겪으며 하나님과 관계도 차갑게 얼어붙을 수 있다. 중병의 선고를 받아 우울해지고 사람 만나기도 싫어지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과 멀어질 수도 있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신학과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심리학은 서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기독교 상담학자들의 연구는 기독교에 기초하여 애착이론, 정신분석 이론, 대상관계 이론, 인지행동주의 이론, 정신병리, 부부상담, 가족상담, 긍정심리학 등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 상담을 통해 교회 내 성도들의 전인적 성숙과 회복을 도와 지역 교회가 든든하게 서 가도록 섬기며 비그리스도인들의 전인적 필요를 채워주며 복음 전도와 선교에도 기여하고 있다. <홍구화 교수> 일/문/일/답 1. 상담학에서는 적절히 활용되는 심리학의 기독교 활동에의 유입과 그 결과에 대한 불안의 시각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에 대한 조언은? 심리학은 사회과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칼빈 이래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특별은총과 함께 일반은총을 인정한다. 심리학을 기독교 활동에 적용하는 것을 불안해하는 시각은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하거나 심리학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데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합신의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린 사람을 시상하고, 교회에서 성경 읽기를 격려하며 성경 일독을 하면 성경을 선물로 준다고 하자. 이는 스키너의 조작적 조건형성의 정적 강화(positive reinforcement)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만이 완전하신데 심리학이 완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심리학은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칼빈이 지적하였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을 아는 지식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개혁주의 신학의 자신감을 가지고 심리학을 비판적으로 적용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2. 기독교 상담학자로서 동시대의 ‘내적 치유 상담’에 대한 견해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내적 치유 상담’이란 용어를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개인적으로 상담이론에서 ‘내적 치유 상담’이라는 한 분과나 이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지행동주의 상담의 심상기법, 게슈탈트 상담 기법, 경험주의 상담 기법, 정신역동 이론 등을 접목한 것에 이름을 붙여 대중성을 입힌 것으로 본다. 심리적으로 취약한 부분을 의인화하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에 심리적 의미 외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내적 치유에 성령님의 역사를 덧입혀 내적 치유 상담을 하는 경우도 있다. 성령님이 주권적인 은혜를 베푸셔서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치유가 촉진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지만 성령님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은혜를 베푸시거나 성령님을 우리 뜻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상담자는 모든 상담에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여야 한다. 3. 개인주의적 성향이 심화되고 접촉의 기회가 줄어드는 사회에서는 상호 역동적 상담이 쉽지 않고 부담스러워지며 상담의 왜곡이나 오해의 소지들이 많아져 더 조심스럽지 않을까 한다. 이에 대처하는 좋은 상담 활동의 방법을 말한다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진다고 해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회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주의 성향과 은둔형 외톨이는 다르다. 우리 사회에서 상담을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는 상담과 정신건강에 대한 이해 부족, 상담의 낙인효과에 대한 두려움, 한국의 가족 중심 집단주의 문화에서 가족의 비밀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의 부담, 체면 중심의 문화 등에 있다고 생각한다. 상담자와 내담자 두 사람의 인격이 만날 때 내담자에게 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런 면에서 두 사람 사이의 인격적인 만남이 제한되는 인터넷 상담과 전화 상담 등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정보 제공과 위기 개입 등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독서치료와 예술치료 등 매개체를 활용하는 경우들도 있는데 이런 상담에서도 상담자와 내담자간의 관계는 중요하다. 상담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내담자 보호를 위해 비밀보장의 원칙과 예외를 비롯하여 해로운 이중관계의 금지 등의 상담 윤리를 엄격하게 적용하여야 한다. 상담자는 상담의 효과를 위해 내담자와 친밀한 신뢰관계를 형성해야 하지만 힘을 가진 상담자가 심리적으로 취약한 내담자를 착취하거나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4. 한국에서의 목회상담을 포함 기독교 상담학에 대한 인식과 실황을 평가한다면? 한국에서의 기독교 상담에 대한 인식은 한국 사회에서의 교회의 영향력과 교회에 대한 인식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반인들은 기독교 상담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기독교 상담은 교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로써 기독교 상담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이러기 위해서는 기독교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사회의 공신력도 얻을 수 있는 커리큘럼과 훈련과정이 필요하다. 현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포함한 극소수의 학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기독교 대학교와 신학교들은 목회상담자 혹은 전문 기독교 상담자 양성을 위한 학위 과정과 훈련 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홍구화 교수 약력 ·고려대학교(B.A. 법학) ·고려대학교 대학원(M.A. in Law)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 ·Calvin Theological Seminary(Th.M.) ·Fuller Theological Seminary(Ph.D. in Clinical Psychology) <학위논문> ·Ethnic Support, Religious Support, Gratitude and Psychological Functioning in Korean American Christians (Ph.D.)
687 no image |2017 신년기획| 현대 선교학의 동향<7>_김학유 교수
편집부
1437 2017-05-10
2017 신년기획 / 최근 세계 신학의 동향과 한국적 현황 <7> 현대 선교학의 동향 < 김학유 교수, 합신 선교학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해를 맞아 본보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교수들을 통해 최근의 세계 신학의 동향을 알아보고 한국 신학계의 대응과 현황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편집자 주> 현대 선교 사상의 흐름을 요약하자면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로잔 운동을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선교 사상이라고 할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세계 교회 협의회(WCC)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선교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기반으로 유일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회개와 믿음, 영혼 구원과 교회 개척을 위한 전도 사역,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transcendency),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등을 강조한다. 반면에 후자는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연관된 주제들을 생략한 채 정치적 해방, 경제 정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타종교와의 대화, 종교 다원주의, 인간화, 선교사 모라토리움 등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갖는다. 1. 로잔 운동과 WCC 선교 사상의 대립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제3차 로잔 선교대회가 있었다. 로잔 위원회는 이 대회의 결과물을 ‘케이프타운 서약’(The Capetown Commitment)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선언문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발표된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과 198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발표된 ‘마닐라 선언’(Manila Manifesto)의 연속선상에서 발표된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자”는 로잔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구체화한 서약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주체가 되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 선교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문서는 21세기 교회가 당면한 사회적 변화를 직시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과 전략들을 매우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반면, WCC는 2013년 부산에서 제10차 총회를 열고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라는 주제로 모임을 가졌다. 그들의 선교 사상은 이번 주제에서도 잘 드러나 있는데 그들이 언급하고 있는 정의와 평화는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 열매로 맺혀진 정의와 평화가 아닌 매우 인본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인 정의와 평화를 의미한다. 그들은 “우리는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고 서로 배움으로써 정의와 평화를 위해, 그리고 아름답지만 한편 상처받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통전성을 보존하기 위해 함께 일하도록 부르심 받았음을 점점 더 깨달아가고 있다.”고 고백한다. 나아가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아가는 무국적자들의 인권에 대해 결의하기를 “WCC는 무국적자들의 이슈를 다가오는 제 11차 총회까지 WCC 프로그램을 진행함에 있어 가장 우선시하기를 요청한다”고 했다. 생명 보호 운동에 관하여는 “생태적인 회중” (eco-congregation)과 “녹색 교회”(green church)를 지양해야 할 것을 강조했으며, 경제 정의를 세우는 일에 교회들이 집중적으로 헌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빈곤과 불평등 및 환경 파괴에 관하여는 WCC와 회원 교회들이 민간 운동 및 시민 사회의 협력 단체들과 연합하여 함께 맞서야 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2. 진보적 선교 사상의 역사적 뿌리 에딘버러 선교대회(1910) 이후로 세계 선교 신학은 크게 둘로 나뉘어졌다. 에딘버러 선교 대회가 끝나고 전통적인 복음전파(전도)와 선교를 강조하는 복음주의 계열의 선교 신학과 기독교와 타 종교 사이의 연속성(continuity)을 인정하고 타 종교와의 대화를 부르짖는 진보적인 계열의 선교신학이 등장하게 된다. 에딘버러 선교 대회 이후로 전통적인 선교 개념이 서서히 쇠퇴하면서 진보적인 선교 사상이 차츰 득세하게 되는데, 이러한 진보적인 선교 사상은 ‘세계 선교사 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를 통하여 차츰 구체화되고 발전되어 갔다. 타 종교에 대해 지나치게 열린 자세를 지니고 있던 IMC는 종교 다원주의적 사상을 점차 확대해 가는 한편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함으로서 정치화 되어갔다. IMC의 이러한 진보적 선교 사상이 1952년에 이르러 매우 구체화되는데, 그 해 독일의 빌링겐(Willingen)에서 열렸던 IMC 선교 대회에서 선교 사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선교 사상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용어가 처음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교회가 선교를 주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의 각 영역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교회가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선교가 더 이상 교회의 전유물이거나 고유한 사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적 부조리를 물리적 힘을 통하여 해결하고, 경제적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착취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사회 구조를 개혁하고, 사회적 압박과 억눌림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곧 선교라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가 선교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 영혼 구원과 교회 개척이라는 편협한 선교 개념에서 벗어나서 사회의 전 영역에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선교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IMC의 이러한 진보적 선교 사상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WCC의 선교 사상은 총회를 거듭할수록 더욱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으로 변해 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WCC 선교 신학은 노골적으로 종교 다원주의적 입장을 지지하게 되었고, 더 강한 인본주의적 색체를 띄게 된다. 3. “케이프타운 서약”과 부산 선언문의 선교신학 1) 성경의 권위 케이프타운 서약은 성경의 권위와 절대성을 전제로 선교 신학을 전개하는 반면 WCC는 성경을 많은 정경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며 그들의 선교 신학을 펼쳐간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행위를 주관하는 궁극적이고 유일한 권위로 성경을 따른다. 우리는 성경이 구원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임을 엄중히 선언한다. 우리는 성경을 능가하는 또 다른 계시는 존재하지 않으며 최종적으로 기록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고히 지지한다.”고 고백한다. 2) 종교 다원주의 케이프타운 서약은 종교 다원주의를 거부하고 기독교에만 구원의 진리가 숨겨져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임을 믿는 반면 WCC는 모든 종교에 구원의 진리가 포함되어 있으며 어느 종교를 믿어도 영원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종교 다원주의의 압력에 굴복해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타협하도록 유혹받고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예언자들과 예수님의 회개에의 요청을 듣고 다른 신들을 버리며 하나님 한 분만 사랑하고 예배하기 위해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대신해 모든 형벌과 수치를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온전히 치르셨고 죽음과 악의 권세를 물리치고 모든 피조물을 위한 화해와 구속을 성취하셨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복음의 핵심을 구성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함은 물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고 사탄과 악과 죽음을 물리치며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실현하실 것을 가르친다. 3)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케이프타운 서약이나 WCC나 공히 하나님의 선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서로 다르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시고,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선교 목적을 수행하러 오신 분이고, 성령은 두 분이 이루신 선교 사역을 현 시대에 적용하고 수행하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 WCC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변혁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행위 전체를 가리켜 하나님의 선교라고 부른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교회 중심의 선교’(church-centered mission)를 강조하는 반면 부산 선언문은 ‘선교 중심의 교회’(mission-centered church)를 강조하고 있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성경 전체가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화해를 이루신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을 하나 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찬양케 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 말한다.”고 고백한다. 4) 총체적 선교 케이프타운 서약과 부산 선언문은 공히 ‘총체적 선교’(wholistic mission)에 대해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두 문헌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총체적 선교가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구원 받은 자들의 삶과 행위의 열매임을 강조한 반면 부산 선언문은 총체적 선교를 감당해야 하는 이유를 예수와의 인격적인 만남의 열매가 아니라 매우 도덕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동기에서 찾고 있다. 믿음의 열매로서의 사회 참여와 모든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연약한 도덕적 양심을 통한 사회 참여는 그 열매의 크기와 변화시키는 능력에 있어서 매우 다른 효과를 나타낼 것이 분명하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복음 전도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설득하는 것이며, 동시에 구세주이자 주님이신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이다... 복음 전도의 결과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연합, 그리고 세상에서의 책임감 있는 봉사 등을 포함한다... 우리는 복음 전도와 사회적, 정치적 참여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확증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5) 미전도 종족 부산 선언문에는 ‘미전도 종족’(unreached people) 선교에 관한 언급이나 관심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는 반면 케이프타운 서약에는 미전도 종족 선교에 대한 내용이 매우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미전도 종족 선교에 대한 관심과 주장은 제1차 로잔 대회에서 맥가브란(Donald McGavran)과 윈터(Ralph Winter)에 의해 제시되었던 주제였는데 거의 사십 년이 지나서도 재차 강조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미전도 종족 선교를 향한 로잔 운동의 관심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미전도 종족에 대한 관심을 조금도 담고 있지 않은 부산 선언문과는 매우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미전도 종족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긴박성을 갖지 못했던 것을 회개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신들의 언어로 갖지 못한 종족을 대상으로 한 성경 번역 사역을 서두른다.”는 케이프타운 서약은 세계 복음화를 향한 로잔 운동의 변치 않는 관심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6) 신학 교육과 선교 케이프타운 서약에 포함되어 있는 매우 흥미 있는 내용 가운데 하나는 신학 교육을 제공하는 자들이 신학생들에게 신학 교육의 본질과 목적이 선교적이어야 함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이다. 신학 교육의 목적이 신학 교육 자체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교회와 세상을 섬길 수 있는 학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교회와 세상을 바르게 섬기고 보다 효과적으로 섬기게 하기 위해서는 신학생들에게 반드시 선교적 마인드를 심어주고, 나아가 건강한 리더십 훈련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신학 교육의 본질과 목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신학 교육은 복음전도를 넘어서는 선교의 일부이다. 교회와 선교 단체들을 이끄는 우리는 신학 교육이 본질적으로 선교적 임을 인정해야 한다. 학문을 가르치는 기관에서는 신학 교육의 목적이 신학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선교를 돕기 위해 신학 교육을 제공한다는 선교적 목적을 의식적으로 확신해야 한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는 적당히 타협하는 제자도가 아닌 ‘급진적 제자도’(radical discipleship)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신속한 세계복음화를 완수하기 위해서 교회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철저한 제자도를 실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세계 복음화가 늦어지는 이유를 적당한 제자도나 타협적인 제자도에서 찾고 있다.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진정한 제자도를 삶으로 보여주고, 성도들이 보고 배운 제자도를 가정과 삶의 현장, 나아가 이웃과 이방인들에게 실천을 통해 보여 줄 수 있다면 세계 복음화의 과업은 보다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신학적 지식과 실천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 그 둘이 건강하게 통합되어 세계 복음화의 과업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김학유 교수 > 일/문/일/답 1. 한국 범복음주의 교계는 로잔 언약과 케이프타운 서약에 어떻게 반응했고 이를 얼마만큼 수용하여 실천하고 있다고 보는가? 한국 교회에 끼친 로잔 언약의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고 본다. 선교 지도자들과 선교에 관심을 지닌 소수의 목회자들 외에는 로잔 언약의 내용과 실천적 요구에 대해 충분한 상식과 이해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적다고 할 수 있다. 1974년 제1차 로잔 언약이 선포되었을 때만 해도 한국 교계가 세계 선교와 복음화에 상당한 열정과 관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로잔 언약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깊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1989년 “마닐라 매니페스토”와 2010년 “케이프타운 서약”이 발표된 이후의 반응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냉담했다. 몇몇 선교단체나 교회들을 제외하고 로잔 언약의 정신을 바르게 실천하는 교회들은 많지 않다고 본다. 2. 케이프타운 서약의 ‘교회 중심의 선교’(church-centered mission)와 부산 선언문의 ‘선교 중심의 교회’(mission-centered church)를 비교하여 더 설명한다면? ‘교회 중심의 선교’라는 말의 의미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계시와 구원의 비밀이 교회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교회만이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라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구원의 비밀을 간직한 교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사역이라는 말이다. 반면 ‘선교 중심적 교회’라는 말은 영혼 구원이나 영생과는 무관한 사회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선교는 전통적 의미의 선교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선교를 말한다. 세속적 일들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선교, 즉 정치, 경제, 문화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교회가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이 영혼 구원이나 영생과 같은 편협한 영역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대 사회적인 일에 직접 관여하여 가시적 변혁을 이끌어 내는 것임을 강조한다.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을 사회 구원과 맞바꾼 것이다. 전자는 개인의 변화를 통한 사회 변혁을 주장하는 반면 후자는 물리적인 힘을 통한 사회 변혁을 추구한다. 김학유 교수 약력 ·총신대학교 신학과(B.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 ·Tyndale Theological Seminary, Netherlands(수학) ·All Nations Christian College, England(M.A.)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USA(Ph.D.) ·Fuller Theological Seminary, School of World ·Missions(Visiting Professor) <논문> · 칼빈의 선교신학, 복음서 주석에 나타난 칼빈의 선교사상, 기독교 선교를 위한 신도(Shintoism) 연구 · 칼빈과 17세기 개혁주의 선교신학 · WCC 선교신학 비판 외 다수.
686 no image |특강| 그리스도인의 정치의식과 정치 행위_이승구 교수
편집부
1533 2017-04-19
<특 강> 그리스도인의 정치의식과 정치 행위 < 이승구 교수, 합신 조직신학 >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활동은 기독교적 유익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떤 정치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정치 행위를 해야 하는가?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삶의 전반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충실하기를 원해 왔다. 이런 폭 넓은 생각 때문에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의 그 어느 곳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곳은 한 치도 없다고 하면서 삶의 전 반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해 왔다. 화란에서 한 동안 약화된 듯했던 개혁신앙을 19세기 말에 다시 강하게 제시한 아브라함 카이퍼가 “영역 주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를 강조하고 실천하려고 하였는데, 그 이전에도 요한 칼빈이나 요한 낙스 등 많은 개혁 신학자들은 우리의 삶 전반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해 왔다. 사실 카이퍼는 칼빈 등의 성경적 사상이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라고 느꼈으며 그에 충실한 삶을 살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단순히 종교적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히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은 정치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한 영역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 왔다. 그러므로 개혁파 정치관은 기본적으로 정치 영역에도 미치는 하나님의 전적 주권(the sovereignty of God)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는 중세의 왕권 수호자들이 주장하던 왕권신수설(the Divine right of the King)이나 귀족들이 주장하던 입헌 군주론을 통한 왕권과 귀족권의 균형 주장,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강하게 나타난 주권 재민(sovereignty of the people) 사상과 대립되는 사상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들이 주권 재민을 강조하고 있고, 우리들도 이에 근거한 민주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권 재민을 분명히 천명하면서도 근원적으로 정치 영역에도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주의적 정치 방식을 옹호하지만 그 이상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칼빈이 살던 시대는 더 그렇거니와 카이퍼가 살던 시대에도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전적인 “다원적 사회”와는 성격이 달라서 그들이 한 말을 이 새로운 상황에 적절히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이 사회가 세속화된 세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정치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하나님의 주권을 사회 각 영역에 대해 주장하는 방식은 참으로 지혜로워야 하고 사랑에 넘치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주장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되면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이나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주장하게 될 것이고, 소극적으로도 기독교의 주장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타락한 후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homo homini lupus)의 장소인 이 세상에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이전투구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기득권과 유익을 지키기 위해서 이에 가세하는 형국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세상에 대한 분석의 하나인 헤게모니 이론(hegemony theory)이 옳다고 주장하는 꼴이 되고 만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 사회 속에 교회들이 그런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의 기득권을 주장하기 위한 방식으로 이 세상 정치 영역에 영향을 미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그것을 위해 정치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활동은 결코 기독교의 유익이나 기독교인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며, 가깝게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정치적 활동을 해야 하는데, 그 이유도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정치적 활동에 열심이어야 한다. 그것을 과연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탐구해야 하는 과제이다. 그것이 희생적 사랑을 보여 주셔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이렇게 구속된 사람들이 또한 피조물의 수준에서나마 그런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신 예수님의 뜻에 부합하며, 기독교의 성격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치적 행위도 구속된 사람의 성격에 부합하는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역사 속에서 나타난 구체적인 예들이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가 영국에서 노예무역 폐지를 위한 정치적 활동을 한 것이 이에 상당히 부합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예무역이라는 현실적인 악 앞에서 그것이 대영 제국의 경제에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당연시하거나 그것을 필요악으로 용인하였다. 그러나 바르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의식을 적용할 것을 윌버포스와 그의 동료들은 주장했던 것이다. 과거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구속된 사람의 의식에 충실해서 정치적 행위를 잘 감당해 왔다. 우리들도 그렇게 자기희생적인 정치적 활동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던 윌버포스 시대와는 다른 매우 세속적인 세상이어서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그러나 본질은 같은 것이다. 추상적으로 윌버포스의 사회는 기독교권이기는 했지만 실상 세속적 사회였으니, 그의 설득 노력이 훨씬 쉬웠다고 하기도 어려우니 말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복잡한 한국 사회, 한국 정치의 현실 가운데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정치 영역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고 피하는 것과 정치 영역에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의도로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참여 하는 것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이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이 우리가 회개할 죄악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치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데 과연 어떤 태도로 참여해야 하는가? 자신을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하는 것도 아니어야 한다. 둘째, 그러면서 우리는 정치가 그 자체로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 모든 것을 풀 수 있는 열쇠가 경제가 아니듯이, 정치도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만능열쇠가 아니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위해 정치 영역에 관여하지만, 이 세상의 사람들을 위해서 그것을 일반적인 용어로 풀어서 설명해야 한다. 셋째, 그러므로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는 우선 상대적으로 “덜 악한”(less evil) 것이 실현되도록 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선택의 경우에 있어서도 어떤 것이 덜 악한 것을 드러내는가 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특히 세속 사회에서는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덜 악한 것을 향해 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일반 은총 영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진정한 유익을 위해 일단 이런 상황 가운데서는 어떤 것이 덜 악한 것인지를 잘 생각하고 그것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넷째, 그러나 교회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나서서 그 선택을 대신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의 할 일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제시하고 그 원칙에 근거해서 복잡한 사회 속에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면서 깊이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지 않는 것은 각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권리와 판단 능력을 무시하고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원칙을 가르치고 그 원칙에 따라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이 양심을 따라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일단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각 교회 공동체가 이 상황 가운데서 자기의 역할을 하도록 하는 일을 하면서 모든 것을 귀정(歸正)하실 하나님의 큰 일을 기다려야 한다. 다섯째, 물론 모든 것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한다. 일반 은총 영역을 위해 기도할 때는 언급한 바와 같이 비교적 “덜 악한” 것이 일반 은총 가운데서 선택되도록 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반 은총 영역에 대한 우리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뜻의 실현을 위한 기도이기보다는 상당히 허용적인 뜻 내지 소극적인 뜻의 실현을 위한 기도의 성격을 가진다. 그렇기에 우리의 이 기도는 결국 특별 은총을 위한 기도로 변하게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특별 은총을 받아 제 정신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적극적인 뜻을 실현하는 데에로 나아가기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그럴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란다. 그 때는 각 사람이 적극적인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위해 기도하고, 선택하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네 교회 안에서 교회의 모든 일들을 이와 같이 해결해 가는 일이 이 세상에서의 그런 실현을 위한 좋은 준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685 no image |2017 신년기획| 세계 신약학의 동향과 우리의 나아갈 길<6>_김추성 교수
편집부
1470 2017-04-19
2017 신년기획 / 최근 세계 신학의 동향과 한국적 현황 <6> 세계 신약학의 동향과 우리의 나아갈 길 < 김추성 교수, 합신 신약학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해를 맞아 본보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교수들을 통해 최근의 세계 신학의 동향을 알아보고 한국 신학계의 대응과 현황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편집자 주> ‘양식비평’은 복음서를 난도질하였으며 ‘편집비평학’은 성경 기자들을 한낱 편집자로 전락시켰다. 오늘날 신약 학자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신약의 탈신학화와 탈교리화 현상이다. 신약학은 최근에 이르러 여러 신학 분과 중에서도 가장 각광받는 분야 중의 하나로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신약 성경 외의 다양한 문헌에 대한 활발한 연구와 더불어 학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분과 중의 하나이다. 제한된 지면에 다양한 흐름들을 모두 담을 수는 없으나 주요한 흐름들을 약술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1947년 베두인에 의해서 발견된 사해사본은 신약학계 전반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쿰란 동굴들이 지속적으로 발굴되었으며 쿰란 문서들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특히, 사해사본(DSS)은 구약 사본연구에 있어서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신약학자들은 사해사본과 신약의 관계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토론하여 왔다. 사해사본의 발굴로 인하여 요한복음의 유대적 배경이 헬라적 배경보다 중시되기 시작했다는 매우 긍정적인 공헌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중간기 유대문헌의 중요성이 이전보다 훨씬 중요하게 인정되고 있다. 신약학계에서도 중간기 유대 문헌을 생략하고는 토론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종교 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는 정경에 대한 강조(Sola Scriptura)로 인해 구약 외경이나 위경에 대하여 거부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학적 입장과 관계없이 이러한 문헌들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다소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비평학자들은 이러한 유대문헌들을 신약의 역사적 배경을 위해서 단순하게 활용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이것들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최근의 바울 신학의 새 관점 운동을 주도하는 E.P. Sanders는 중간기 유대문헌의 토대 위에서 바울이 당대의 유대주의를 오해하였다고 성급하게 결론 내렸다. 물론, 그의 유대문헌 연구 결과가 공정하며 편벽됨 없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여하간, 호불호를 떠나서 신약학계에서 유대문헌 연구는 이전보다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요한계시록 연구도 이미 괄목할만할 정도로 발전했으며 이를 위해 묵시문헌에 대한 연구도 많은 진척을 보고 있다.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헌의 관계에 대하여는 여전히 이견이 존재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긴밀한 관계가 인정되고 있다. 신약의 구약 사용은 신약학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분야 중의 하나이다. 이 분야는 신약 연구를 더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두고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신학적 전제들이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다. 신약과 구약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연속성인가 혹은 불연속성인가? 신약 기자들이 구약을 인용하는 것은 어떠한 정당성(Rationale)을 가지는가? 신약 기자들은 구약의 원래 컨텍스트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여전히 많은 난제들을 가지고 있다. 신약 기자들이 구약을 인용할 때 단순히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적 인용을 하고 있으며 신약 기자들이 깊은 신학적 이해를 가지고 있음이 인정되고 있다. 현대 신약학계에서 성경관은 끊임없이 도전 받고 있다. 계몽주의 이래 비평학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며 나름대로 계속 수많은 학설들을 발전시켜 왔다. 이들에게는 성경의 권위가 무너진 지 이미 오래이다. 복음서 연구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는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다. 라이마루스(Reimarus) 이래 시작된 역사적 예수 탐구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상이 신앙으로 채색된 예수상이라고 거부하며 복음서의 예수상은 실재 역사에 존재했던 예수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최근에 역사적 예수 연구 중 가장 과격한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운동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음서를 신뢰할 수 없는 책이라고 주장하며 복음서 중 믿을 수 있는 것은 기적이나 초자연적 기사들을 모두 제외한 16-17%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양식비평은 복음서를 난도질하였으며 편집비평학은 성경 기자들을 한낱 편집자로 전락시켰다. 복음서의 자료에 대한 가설들은 점점 더 발전하여 가설이 정설같이 간주되고 결국 가설에 가설을 더하는 현상들이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면, Q 가설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정교해지고 발전해가고 있다. 실로 Q 가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얼마나 논리 정연하게 발전시키고 있는지 놀라울 정도이다. 아직 Q에 대한 사본이 하나도 발굴되지 않았는데, Q 가설은 어느덧 학계에서 정설같이 여겨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사실상 신약의 사본은 5000 개가 넘는 데 성경보다 Q 가설에 매진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학자들이 가설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마치 이것이 진리인 것 같이 간주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약 연구의 과학성을 질문할 때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과학성이 과학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비평이론들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양식비평, 문학비평, 편집비평 등 이들은 예수님보다 공동체 연구에 더 집중하고 있으며 일치점보다 차이점을 더 극대화하고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방법론은 불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방법론을 유행 같이 좇고 발명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과는 참으로 거리가 멀다. 페미니스트(Feminist) 운동을 지지하는 학자들 중에는 성경을 재편집해서 다시 기록해야 된다는 과격한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성경은 가부장적 제도 하에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그러한 요소들을 다 걸러내고 다시 기록해야 한다고 이들은 강조한다. 이들에게 성경은 더 이상 권위 있는 경전이 아니다. 이들은 성경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권위를 모두 통째로 부정한다. 필자가 유학생 시절 199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던 SBL(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학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요한복음 학회를 참석하였는데 어느 페미니스트 여성 신학자가 요한복음 4장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참으로 신성모독적인 논문을 발표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평학자들 간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겠으나 이들은 기독교적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무신론 신약학자가 신약을 가르친다고 들은 적도 있다. 다원주의가 대학에 깊이 침투하여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미국과 유럽의 신학교에 팽배하다. 북미주와 구라파의 여러 대학에서 신학은 그저 종교학의 한 분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지난 해 한국에서 국제 SBL 학회가 열렸는데 마지막 날 축하 모임에 참석하였다. 외국의 어느 신약 학자가 자기의 출판물을 자랑삼아 이야기 하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그날 저녁 식사를 대접한 교회의 담임목사와 성도들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얼마나 낙심천만했을까. 비평주의자들은 불신앙적 전제를 가지고 성경을 무너뜨렸고 결국은 교회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흐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북미주를 중심으로 복음주의 진영의 약진이 거듭되고 있으며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복음주의 학회(ETS)의 회원이 되기 위하여는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무오성을 믿는다고 서명해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복음주의 진영에서 탁월한 학자들이 즐비하게 배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 학회에 몇 차례 참석해서 논문도 발표하고 사회를 맡아 회의를 진행한 경험이 있다.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시카고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은사들이 신약의 각 방면에서 활약하는 것을 지켜 볼 수 있었다. 이 분들이 비평주의의 거센 물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진리를 변호하고 증거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필자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필자는 박사 학위 논문을 집필할 때, 영국의 케임브리지에 있는Tyndale House에서 여러 달 머물며 연구한 적이 있다. Tyndale House는 세계적인 성경 연구소로 뽑히는 곳이다. 크지는 않지만 매우 정선되고 중요한 성경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어서 전 세계에서 성경학자들이 찾는 곳이다. 필자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성경학자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영국에도 비평주의 물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세계 여기저기에 남은 자들이 적지 않다. 오늘날, 신약 학자들이 경계해야 할 것을 꼽는다면, 신약의 탈신학화와 탈교리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신약학계에서는 정통 신학과 교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본래 성경신학이 학문의 공식적인 분과로 독립하여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J.P. Gabler(1753-1826) 이후이다. 성경신학은 조직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하였으며 가블러는 성경이 교리 모음집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가블러는 1787년 Altdorf 대학 취임 연설에서 성경의 역사적 연구를 위한 독립성을 선포하였으며 성경신학은 조직신학이 채운 족쇄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가블러가 왜 이렇게 조직신학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표명하였을까? 그는 조직 신학자들이 그들의 신학적 체계를 성경본문에 투입시켜 본문의 의미를 왜곡시켰다고 생각하였다. 가블러의 이러한 주장은 후대 비평 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뒤를 이어 브레데(20세기), 레제넨(21세기)은 모두 한결같이 역사와 신학의 분리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조직신학적 틀이나 교리의 틀을 과감하게 모두 던져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정경의 개념까지고 거부하며 그것도 교리의 일부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신약 학자들은 정통 기독교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정통 교리와 신학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비평 학자들은 더 이상 성경신학이라는 용어 자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을 문헌학적 언어학적 관점에서만 연구하는 경향이 강하게 있다. 신학을 배제한 성경 연구가 만연하고 있다. 비평학자들은 신학을 모두 배제하는 것이 참된 성경연구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우려가 되는 것은 이러한 비평신학에 오염된 학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간에는 적지 않은 긴장관계가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 여하간, 이 둘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지 서로 배타적인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오랫동안 발견하고 축적해온 신학과 교리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마치 21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인 양 주장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 끝으로, 필자는 한국 교회를 섬기는 신약학자로서 다음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철저한 성경관, 계시 의존 사색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관이 무너지면 결국 모든 방벽들이 하나씩 무너지게 되어 있다. 대학생 시절, 박윤선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힘주어 말씀하신 것을 잊을 수 없다. “온 세상이 성경을 안 믿어도 나는 성경을 믿겠다.“ ”내가 성경을 안 믿어도 나는 성경을 믿겠다.“ 당시에는 이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이해가 간다. 둘째,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 있어서 개혁주의는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성경을 통합적으로 보지 않고 지나치게 세분화시키는 것은 경향이 만연해 있다. 성경 전체의 통일성을 부정하고 다양성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통일성과 다양성을 균형 있게 제시할 필요가 있으며 더 나아가 주석과 신학의 통합을 지향해야 한다. 셋째, 교회를 세우는 경건한 신학 방법이 중요하다. 무릇 신학이 교회를 세우지 못하면 이미 신학의 사명에서 벗어난 것이다. Eta Linnemann이 지적하였듯이, 신학이 교회를 떠나 일반대학에서 자유롭게 연구되기 시작하며 신학은 급속도로 세속화되었고 결국 신학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결과가 발생하게 되었다. 신학자는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신학이 교회를 세우고 살리지 못하면 결국 신학교는 문을 닫게 될 것이다. 넷째, 신학적 사대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한국 신학자들은 서구의 신학자들과 보조를 맞추며 연구하되 한국 교회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제는 서양 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문제를 가지고 독창적으로 연구하며 사고를 펼쳐 나가야 한다. 한국 학자들은 성경을 가지고 우리 시대의 문제, 한국 교회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할 것이다. <김추성 교수> 일/문/일/답 1. 중간기 유대문헌의 연구를 통해 신약에서 긍정적으로 새롭게 조명된 부분이 있다면? 이미 신약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간기 유대문헌이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특히, 마카비 1서는 하스모니안 왕조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문헌이다. 이 문헌은 셀류커스 왕조의 핍박에 맞서서 Mattathias 제사장의 가문을 중심으로 경건한 유대인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투쟁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묵시문헌의 연구는 요한계시록 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요한계시록의 상징법, 반복법, 구약 사용 등의 이해에 있어서 묵시문헌 연구는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2. 한국 신약학계에서의 비평학적 활동의 현황과 대응은? 한국의 신약학회는 크게 둘로 나누인다. 비교적 온건한 보수 신학자들을 위한 ‘복음주의 신약학회’와 한신, 감신, 장신을 중심으로 한 ‘한국 신약학회’가 있습니다. 필자는 복음주의 신약학회 임원으로 오래 섬겨왔고 지금은 부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한국의 비평학자들 간에도 워낙 편차가 크고 넓어 일목요연하게 답하기는 어렵다. 한국교회의 보수적 신앙의 영향으로 아직은 한국 신약학회에 몸담고 있는 학자들도 서양의 비평학자에 비하면 비교적 온건해 보인다. 그러나, 한국 비평학자들 중에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학자가 있다. 더욱이 가장 과격한 ‘예수 세미나 운동’에 동조하는 학자들도 있어 매우 염려가 된다. 한편, 복음주의 진영에 소속된 신약학자들 중에 비평학자들의 전제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비평학 연구 방법론들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이렇듯이 성경신학 분야는 조직신학 분야보다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3. 한국적 현황 속에서 한국 교회의 문제를 생각하며 신약학을 한다는 의미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학생 시절 필자의 은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주석을 쓰는데 있어서 중요한 지침들을 준 적이 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한국 교회의 상황과 목회자들을 염두에 두고 주석을 쓰라는 것이었다. 이제는 한국 학자들의 수준도 놀라울 정도로 높아지고 그 저변도 넓어졌다. 그런데 한국의 신학자는 무엇보다도 한국 교회를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신학을 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 교회를 사랑하고 한국 교회와 사회의 문제를 가져와서 성경 본문으로 고민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한국 신약 학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김추성 교수 약력 ·총신대학교 교회음악과 (B.M.)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Th.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Ph.D.) <저서> ·『요한계시록 4-5장 연구 : 구약과 묵시문학 비추어』(예영) ·『요한계시록 연구』(경건)
684 no image |2017 신년기획| 기독교 교육으로 풍성한 목회를 경험하자 <5>_김만형 교수
편집부
4248 2017-03-22
2017 신년기획 / 최근 세계 신학의 동향과 한국적 현황 <5> 기독교 교육으로 풍성한 목회를 경험하자 - 현대 기독교교육학의 이슈들 - < 김만형 교수, 합신 기독교교육학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해를 맞아 본보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교수들을 통해 최근의 세계 신학의 동향을 알아보고 한국 신학계의 대응과 현황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편집자 주> 목사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앞으로 어떤 부분에 전문성을 가진 목사가 될까”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교회의 많은 사역들을 분석하면서 발견한 것은 교회 안에 가르치는 사역이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기독교 교육을 공부하도록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끔 목회자들이 묻는다. 앞으로 목회를 잘 하기 위해 좀 더 연구를 하고 싶은데 어떤 부분을 공부했으면 좋겠냐는 것이다. 주저하지 않고 확신 있게 답하는 것은 기독교 교육을 공부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육을 공부하므로 개인적으로 좀 더 부요하고 풍성한 목사가 될 수 있는 축복을 누렸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신학대학원에서 배우는 학문은 대부분 신학에 집중되어 있다. 바른 신학을 배우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이 바로 모든 사상이나 실천의 뼈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배우는 신학과 성경의 정보를 자기의 것으로 내면화시키고, 그것들을 확신을 갖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일에 있어서는 잘 훈련되지 못하는 것이다. 가르치는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라면 우선은 가르치는 내용(text)을 습득하고 그 내용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가르치는 내용을 받는 사람들(context)의 형편과 배경, 특징 등을 잘 이해하는 것이다. 가르치는 사역을 주로 하는 목회자들은 이 두 부분에서 잘 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 교육은 이 부분에 해답을 주는 학문이다. 기독교 교육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이야기 한다면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연결하는 학문이다. 성경의 내용과 학습자라는 사람, 두 부분을 잘 이해해서 학습자로 하여금 성경의 내용을 습득하고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교육을 잘 공부하면 우선 성경을 이해하고 메시지를 뽑아내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 또한 배우는 사람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특성을 이해하므로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좋은 리더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기독교 교육에 대한 역량을 키워야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 교육에 있어서 기독교 교육의 필요는 일찍이 인식되었고 그 자리매김을 한 지 오래 되었다. 많은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교육을 목회자 양성 프로그램(M.Div)을 위한 실천신학의 한 부분으로 좁게 생각하고 한 과목 정도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지만 이미 기독교 교육이라는 학문은 서구 신학대학원에서 한 학문의 영역(a discipline)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교(University, Graduate School)에서 기독교 교육은 독자적인 학교(School of Christian Education)로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교육은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연결하는 학문이다 한국 교회는 기독교 교육을 단순히 교회의 주일학교 교육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 학문이 출발한 서구 사회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영역을 포함하는 학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기독교 교육은 가정, 교회, 학교, 사회 교육 기관에서 어린이, 청소년, 장년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잘 세워지도록 돕기 위해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활동을 포함하는 학문이라고 정리될 수 있다. 기독교 교육이라는 학문이 다루는 주제가 광범위하고 종합적이기 때문에 주요 이슈를 몇 가지로 제한하기 어렵다. 그러나 시공을 뛰어 넘어 꾸준히 제기되는 중요한 이슈 몇 가지는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교육은 가정, 교회, 학교, 사회 교육 기관에서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통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잘 세워지도록 돕는 모든 활동을 포함한다 첫째는 철학적인 이슈로서 기독교 교육이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교육의 정체성을 다루는 이슈로서 늘 논의의 중심에 있다. 여기서는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교육의 목표는 무엇인지, 가르치는 사람의 역할은 무엇인지,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경적인 관점을 세우게 한다. 목회자나 기독 교사, 학부모에게 있어서 기독교 교육 철학을 정립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교육 철학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기독 교사들은 진정 기독교 교육의 차별성이 어디에 있는지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학부모들도 자녀들에게 기독교적인 교육을 보여야 한다. 성경적 관점으로 교육을 행하는 부분에서는 먼저는 성경을 주 교재로 삼되 일반계시를 잘 활용하는 것, 또한 성경을 가르치되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경험으로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치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도모하고, 아울러 가정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키워내는 것,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것, 이 모든 과정에서 성령께 민감해야 하는 것 등이 강조되고 있다. 둘째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영성을 훈련하는 것에 대한 이슈이다. 기독교 교육의 목표는 영적인 성숙이다. 이 영적인 성숙을 영성이라는 말로도 설명하는데, 그렇다면 이 영성은 무엇이며 이 영성을 키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또한 그 영성을 어떻게 훈련할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바른 이해는 모든 목회 활동과 교육 활동을 결정한다.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영적 성숙, 영성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의 균형을 이루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 교육 활동은 이 세 가지 요소가 충족되도록 디자인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 가정, 학교에서는 우선 하나님을 알도록 하고, 또한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 영향을 끼치도록 돕는 방향으로 교육이 디자인되고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는 사회문화적인 이슈로서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들의 특성은 무엇이며, 그들의 필요, 그들의 문화는 무엇인가, 어떻게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잘 가르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배우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바로 하지 못하면 사람을 잘 교육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 학습자의 오늘은 많은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한다. 문화인류학적인 배경, 그리고 사회학적인 배경, 발달심리학적인 배경 등이다. 건강한 교육을 위해서는 이 모든 부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우는 한 사람을 잘 돕기 위한 노력은 현대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강조되고 있는 한 부분인데, 이 이슈는 선교적 이해와도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이 선교에 있어서 기독교 교육 사역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넷째는 교육 방법론과 연관된 이슈로서 가르치는 과정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행동을 바꾸기 위한 접근 방법에 대한 주제이다. 기독교 교육은 행동의 변화를 목표로 한다. 단순한 정보 습득이 목적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 어떻게 하면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게 접근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아울러 어떻게 하면 학습자로 잘 배우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학습 이론, 교육 방법론, 소그룹 교육 환경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논의에서 핵심은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을 가장 잘 도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처럼 ‘여러 가지로’, 바울처럼 ‘모든 지혜로’ 할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다. 최근 다시 제기되고 있는 것은 의식(ritual)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가톨릭의 영향으로 외면되어 온 것인데 하나님은 이 방법을 적극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문화로서 삶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정보 보다는 더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행정과 연관된 이슈로서 리더십, 교회 행정, 갈등, 변화 등을 다루는 능력에 관한 주제이다. 기독교 교육 사역은 사람들과 주어진 기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사의 자질 문제, 교회나 가정,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갈등, 문제 등을 해결해야 하는 일들은 늘 상존한다. 이 모든 것들은 오늘날 기독교 교육의 중요한 이슈들로 부각되고 있다. 기독교 교육의 모든 이슈들에 대해 목회후보생들과 목회자들이 잘 훈련되어 풍성한 목회를 경험하기를 여기서 주로 논의 되고 있는 것들은 예수님과 같은 섬기는 리더십을 개발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일어나는 갈등을 잘 해결할 수 있느냐 등이다. 목회자들이 꼭 훈련되어야 하는 영역들이다. 이것들이 훈련되지 못해서 고통 받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는 제기된 이슈들을 다룰 수 있는 교수들이 충분하다. 다만 기독교 교육 과목이 대부분 선택이어서 모든 학생들이 이 부분에서 잘 훈련되지 못한다는 염려가 있다. 기독교 교육에서 제기되는 모든 이슈들에 대해서 목회후보생들과 목회자들이 잘 훈련되어 부요하고 풍성한 목회를 경험하기를 기대해 본다. <김만형 교수> 일/문/일/답 1. 동시대의 교회교육의 의미와 전망을 말한다면? 과거 교회가 사회를 리딩할 때는 교회교육이 사회교육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교육이 이론이나 실제에 있어서 더 영향력이 커 보인다. 그래서 교회교육이 그 영향력을 확대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심할 필요는 없다. 교회교육의 장점은 한 사람이 변화됨에 있기 때문이다. 그 한 사람이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가? 교회교육이 시간과 공간, 인력의 제약으로 인해서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그 성령의 은혜로 한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 이것이 교회교육의 강점이요 희망이다. 2. 의식(ritual)에 의한 교육은 유대식 교육의 특성이기도 한데 이를 적용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430년에 걸쳐 애굽의 문화와 노예의 문화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방법이 있다. 먼저는 그들로 사용하는 달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새로운 달력을 주신 것이다. 다음은 절기나 제사 제도를 통해 일정한 의식을 구체적으로 행하도록 해서 그 의식에 익숙하도록 한 것이다. 신앙이 생활과 삶이 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도 어떻게 보면 과거 수백 년의 유교 불교 문화권에서 지내왔다. 그 가운데서 익숙한 것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역자들이 사람이 참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필자도 이런 부분에 고민을 많이 했다. 그렇게 발견한 것은 신앙이 삶으로 구현되도록 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하셨던 달력을 바꾸는 일이나 일정한 의식을 행하도록 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특별히 가정에서 실시하는 크리스천 의식이 필요하다. 우리 가족이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보여줄 수 있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 보여 준 중요한 개념을 담는 의식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의식이 나중에는 형식만 남게 되는 위험이 있지만, 일정한 의식을 행하는 것은 신앙적 삶을 구현하도록 하는데 유익하다. 위험을 인식하고 긍정적인 요소를 적극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칼빈도 의식을 사용하는 것을 완전히 외면하지 않았다. 의식과 연관해서 성경에서 발견되는 핵심 요소가 있다. 말씀 중심이다. 가족 중심이다. 축복 기도가 있다. 만찬을 함께 하는 것이다. 이런 요소들을 살린 의식을 만들어서 가정에서 실시한다면 기독교 문화를 형성하고 삶의 변화를 도모하는데 유익이 될 것이다. 3. 근자에 관심을 끄는 소위 유대인 학습법(하브루타)과 기독교 교육의 접촉점은? 유대인 학습법으로 알려진 하브루타는 대화로 시작해서 질문, 토론을 거쳐 논쟁을 유도하여 그 과정을 통해 학습하도록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학습법의 장점을 말하는데 사실 이 방법은 성경에 많이 나타난다. 예수님이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질의응답을 하시면서 사람들의 생각을 자극하고 도전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방법은 유대인의 교육법이라기보다 오히려 예수님이 주로 사용하신 교육법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문제는, 하브루타는 너무 논쟁, 경쟁, 비판 중심의 대화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대화를 통한 교육은 서로 돕고, 상호학습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주는 개념이 더 강하다. 우리는 이런 성경적 교육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4. 기독교 교육의 이상적 결실을 위해 한국 교회나 가정의 교육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다음 세대 사역 전문가를 키워내는 것이다. 한국 교계가 다음 세대 교육을 이야기 하지만 정작 그 일을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을 세우고, 그들이 계속해서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일에는 실패했다. 교육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세워야 한다. 가정의 교육에서 이슈는 부모들의 기독교 교육에 대한 책임감이 너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 교육을 학교나 학원에 맡겨 버리는 것에 익숙하다. 교회 교육도 그렇게 접근한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익히고 그 말씀을 가르치고 모범을 보이는 것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다. 교회 생활과 밖의 생활이 너무 다른 것에 대해서 주의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결코 잘 자랄 수 없다. 가정교육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회복되어야 하고, 부모가 기독교 교육을 잘 이해해 기독교적으로 자녀를 키우도록 힘써야 한다. 이 부분은 지교회 담임목사의 이해와 도움도 필요할 것이다. 김만형 교수 약력 ·총신대학교(B.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 ·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M.R.E., Ph.D.) ·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Visiting Scholar) <저서> ·『SS혁신 보고서』(에듀넥스트) ·『 SS자녀 교육 보고서』(에듀넥스트) ·『 New SS혁신 보고서』(에듀넥스트)
683 no image |2017 신년기획| 최근 세계 신학의 동향과 한국적 현황 <4>_이승진 교수
편집부
4509 2017-03-08
2017 신년기획 / 최근 세계 신학의 동향과 한국적 현황 <4> 말씀과 상황을 연결하는 설교학 - 현대 설교학의 동향 - < 이승진 교수, 합신 설교학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해를 맞아 본보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교수들을 통해 최근의 세계 신학의 동향을 알아보고 한국 신학계의 대응과 현황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편집자 주> 현대 설교학의 동향은, 신설교학 운동과 탈자유주의 설교학, 성경적인 설교학, 그리고 목회 리더십과 결합한 설교의 네 가지 흐름으로 발전해 옴 한국 교회 안에 강해설교에 대한 높은 관심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이유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는 영적 권위가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의 중요한 관심사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logos)을 변화하는 상황(context)을 살아가는 신자들과 교회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학(homiletics)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신학(theology)과 변화하는 상황 속의 회중에게 설득력을 발휘하는 연설에 관한 수사학(rhetorics)이 결합된 학문이다. 성경을 해석하거나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에 담긴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의(doctrine)를 연구하는 이론 신학은 불변하는 진리를 탐구하지만, 실천신학에 속한 수사학과 설교학은 변화하는 시공에 속한 신자와 교회에게 설득력 있는 수사적인 전략과 효과적인 적용 방안을 탐구한다. 해 아래에서 진행되는 모든 소통(communication)이 의미의 공유(communion)라는 소통의 목적(purpose)을 효과적으로 성취하려면, 이 목적에 부합하는 메시지의 내용(content)과 함께 반드시 설득력 있는 형식(form)이 동원되어야 한다. 소통의 목적(purpose)과 이를 위한 메시지의 내용, 그리고 그 내용을 전달하여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효과적인 소통 형식(form)의 3요소가 하나로 결합할 때(사 55:8-11), 비로소 효과적인 소통을 통한 의미의 공유가 이루어진다. 7, 80년대 북미권을 중심으로 새로운 설교학에 관한 신학적인 관심과 학문적인 연구 결과물들이 쏟아졌다. 그 배경에는 다음 세 가지 문제의식이 존재한다. 첫째는 계몽주의와 근대의 합리주의가 등장하면서, 신자들이 예전처럼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설교 메시지를 더 이상 맹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새로운 사회 현상이 나타났다. 둘째는 20세기에 비약적으로 발전을 거듭하는 전자 미디어의 영향으로 이전에 메시지 송신자(speaker)나 메시지 내용 중심의 소통 구조가 메시지 수신자(receiver) 중심의 소통 구조로 변화하였다. 셋째는 설교학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신학 영역인 성경해석학의 영향이다. 20세기 초까지 맹위를 떨쳤던 역사비평적인 성경해석학이 퇴조하고 60년대 이후 정경비평(canonical criticism)이나 수사비평(rhetorical criticism), 또는 서사비평(narrative criticism)과 같이 문학비평(literal criticism)에 근거한 성경해석학이 등장하면서 문학비평의 영향을 받은 주석서들이 쏟아졌다. 그러자 설교학자들은 새로운 성경해석학의 영향으로 예전의 성경 해석과 설교에서 배제했던 본문의 문학 형식에 부합하는 설교 형식과 구성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의 성경 해석이 본문의 내용이나 의미를 찾는데 집중했다면, 문학비평적인 성경해석학의 등장으로 본문의 문학 형식과 그 의미를 전달하는 수사적인 전략과 의도를 좀 더 종합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이상의 배경 속에 등장한 70년대 이후 현대 설교학의 기본적인 동향은, 설교 형식을 중요시하는 신설교학 운동과 교회론에 기초한 탈자유주의 설교학, 성경적인 설교 내용을 위한 성경적인 설교학, 그리고 설교의 목적을 고려하여 목회 리더십과 결합한 설교의 네 가지 흐름으로 발전해 오고 있다. 첫째, 신설교학 운동(new Homiletics movement)에 속한 대표적인 설교학자들로는 프래드 크레독과 유진 로우리, 그리고 데이빗 버트릭이 있다. 프래드 크래독(Fred Craddock)은 <권위 없는 자로서>(As One Without Authority)에서 전통적인 연역논리의 설교가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의사소통에 익숙한 현대의 청중들에게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일방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청중의 자발적인 청취를 가능하게 만드는 설교 형식으로 귀납식 설교 형식을 제시하였다. 또 유진 로우리(Eugene Lowry)는 설교 준비 과정을 성경의 세계와 청중의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놓기(bridge model)나 서론-본론-결론으로 진행되는 건축술처럼 설교 메시지를 구성하는 개념들의 공간적인 배치의 관점에서 이해했던 전통적인 입장을 비판하였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는 사건으로서의 설교를 위한 플롯 중심의 내러티브 설교(narrative preaching)를 제안하였다. 그런데 신설교학자들이 청중의 자발적인 청취를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설교 형식들을 제안하였지만, 이들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설교 형식만을 강조하면서 성경 본문이 말씀하려는 메시지를 설교로 전달하는 과제는 등한시하였다. 그래서 찰스 캠벨(Charles Campbell)과 같은 탈자유주의(post-liberalism) 설교학자들은 <프리칭 예수>(Preaching Jesus)에서 설교 형식에 관한 신설교학자들의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설교에서 성경적인 메시지와 설교 형식, 그리고 신앙공동체의 영적인 성숙을 위한 설교의 목적이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서로 일치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신설교학자들이 내러티브(narrative)에 주목할 때 그 저변에는 설득력 있는 수사적인 전략으로서의 내러티브에 주목했다면, 탈자유주의 설교학자들은 성경의 구속사 내러티브를 통해서 독자와 청중에게 각인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그리스도를 닮는 교회의 속성을 강조하였다. 셋째로 설교의 목적을 좀 더 적극적으로 목회 리더십과 연결하려는 설교학자들도 있다. 존 맥클루어(John S. McClure)나 마이클 퀵(Michael J. Quicke)과 같은 설교학자들에 의하면, 앞의 주류 설교학자들이 성경해석이나 청중 개개인의 청취 문제에 집중하는 반면, 청중이 속한 신앙 공동체 전체의 변화나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서 발휘하는 목회 리더십의 문제를 놓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존 맥클루어는 <원탁의 설교단>(The Roundtable Pulpit)을 통해서, 그리고 마이클 퀵은 <전방위 리더십>을 통해서 목회 리더십을 발휘하는 설교 사역 전반에 관한 통전적인 설교학의 프레임을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현대 설교학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 성경적인 설교(biblical preaching)이다. 대표적으로 해돈 로빈슨(Haddon Robinson)이나 존 맥아더(John MacArthur), 그리고 제리 바인스(Jerry Vines)는 성경 본문을 강해하는 설교의 이론과 실제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시드니 그레이다누스(Sidney Greidanus)의 구속사 설교와 그레엄 골즈워디(Graeme Goldsworthy)의 성경신학적인 설교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란 개혁주의 설교신학의 표어가 ‘전체 성경’(tota scriptura), 즉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속 역사의 관점으로 보완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토마스 롱(Thomas Long)은 <성서의 문학유형과 설교>(Preaching and the Literary Form of the Bible)에서 설교자가 성경 본문 해석 과정에서 본문의 중심 사상(main idea)만을 가져올 것이 아니라 그 중심 사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데 동원되는 문학 형식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스티븐 매튜슨(Steven Mathewson)은 <청중을 사로잡는 구약의 내러티브 설교>에서 구약의 내러티브의 문학 형식의 수사적인 동력을 설교에서도 살려 낼 수 있는 방안을 소개하였다. 이상의 현대 설교학의 기본적인 동향에 대한 한국 교회 목회자들(설교자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한국의 신학교에서는 90년대 초반부터 현대 설교학과 신설교학 운동들이 활발하게 소개되기 시작하였고, 목회자들 역시 크래독의 귀납법 설교나 유진 로우리의 내러티브 설교형식에 대한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새로운 설교 형식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 90년대 이후 한국 교회의 설교 현장에서 전통적인 3대지 설교나 연역식 설교가 점차 퇴조하고, 그 대신 귀납식 설교나 1대지 설교가 점차 확산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교회 안에서 신설교학의 목회적인 영향력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관찰된다.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 때문이다. 먼저 한국 교회에서는 북미권의 설교학자들이 고민했던 권위의 해체 문제나 청중 중심의 민주적인 소통의 중요성이 북미권 교회처럼 그렇게 심각하게 부상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또 한국 교회 신자들은 설교의 소통 과정에서 자발적이고 민주적인 소통보다는 다소 수동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쪽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이유로는 한국 교회는 다른 어느 나라 교회 이상으로 성경 말씀에 대한 영적인 권위와 성경 본문 강해에 관한 관심이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90년대 이후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은 설교 형식에 관한 관심보다는 주로 설교 메시지의 성경 부합성과 회중 적합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강해설교에 대한 관심이 본문 연속 강독(lectio continua)으로 계속 이어지기도 하고,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의 구속사 설교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성경신학적인 설교가 계속 호응을 얻고 있으며, 개혁파 교회에서는 개혁파 표준문서들의 가치를 설교와 결합한 교리 설교나 성화 설교에 대한 관심도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한국 교회 안에 강해설교에 대한 높은 관심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는 영적 권위가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현대 신학이 점차 통합적인 학문의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목회 리더십을 발휘하는 설교나 기독교 교육에 기초한 설교, 또는 상담과 설교를 결합하는 방안에 관한 관심도 점차 고조되고 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 기복적이고 심리적인 위로를 담은 설교 메시지도 여전히 높은 관심을 유지하고 있다. 이상의 네 가지 주요한 설교학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설교학적인 질문들이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인간 설교자가 입을 열어 회중에게 선포한 메시지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확보할 수 있을까? 거짓 설교자와 참 설교자를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들리는 말씀(설교)과 보이는 말씀(교회의 표지)을 서로 일치시키는 설교 사역은 어떻게 올바로 감당할 수 있을까?(신 18:22) 성령 충만한 설교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설교학적인 질문 외에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교회와 신자들을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시공의 상황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재림 때까지 계속 이전의 해답이 더 이상 해답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전례 없는 상황을 향하여 달려가기 때문에 신자들은 결국 살아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새롭게 듣고자 교회 강단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화하는 상황에 속한 신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설교학의 탐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승진 교수> 일/문/일/답 1. 현재 한국교회의 설교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 보는가? 그동안의 설교의 문제점을 메시지 내용의 관점에서 볼 때 예전의 인본주의 설교나 율법주의 혹은 성과주의에 근거한 설교 메시지가 더 이상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또 설교 메시지를 전달하는 설교자(목회자)의 인격적인 진정성에 대해서도 의심을 받다 보니 심오하고 감동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예전만큼 호평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를 고려하면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강조하고 개혁파 설교자들이 꾸준히 설파해 왔던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을 설교자(목회자)가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여 살아내면서 성도들에게 구체적인 적용 점을 메시지로 전하고 삶의 모범을 제시하는 설교가 필요하다. 2. 주로 성경 강해를 많이 추구하는 현 단계 한국의 개혁주의 설교의 장단점과 바른 지향점은 무엇인가? 강해설교의 장점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궁금해 하는 신자들에게 본문의 분명한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해 준다. 다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성경이 증언하는 구속의 역사가 마치 성경 속에 갇혀 있는 듯한 오해를 초래할 수 있고, 신자들의 삶과 교회의 사역 속에서 그것이 현재진행형 사건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놓칠 수도 있다. 이런 면에서 개혁주의 설교의 올바른 지향점은 성경 본문이 의도하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현재화가 설교 시간만이 아니라 설교 이후에 교회의 공동체적인 사역과 신자들의 삶 속에서도 일어나도록 설교와 목회 사역을 잘 통합하는 것이다. 3. 설교 청중의 문화적, 세대적 성향과 동시대의 사회적 환경 등을 어떻게 고려해야 하는가? 설교에서 청중의 상황에 대한 이해는, 설교자의 초점이 본문 해석 다음에 오늘 청중의 현실로 옮겨오면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청중의 현실과 동일한 현실 세계가 본문 속에도 들어 있다는 해석학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성경 텍스트와 청중의 상황을 이분법적인 프레임이 아닌 한 덩어리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 본문 속에 오늘의 청중의 상황이 들어 있고, 오늘의 청중의 상황 속에 성경 본문의 메시지가 생생히 적용되는 것이다. 4. 한국교회 청중의 설교 이해력 제고를 위한 조언을 한다면? 청중들 자신이 더 관심을 갖고 성경적인 좋은 설교를 많이 들어 봐야 하지만 들은 메시지를 실천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설교 자체에 대한 이해와 지식보다 중요한 것이 설교를 통한 자신의 성숙이다. 또한 신학적으로도 성경신학이나 언약신학, 하나님 나라 등에 관한 신학 서적을 가능한 한 많이 접하면서 성경 전체를 통전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설교 메시지의 이해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 이승진 교수 약력 ·한국해양대학교(B.A. 기관학)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 ·Stellenbosch University (Th.M., Th.D.) <저서> ·『설교를 위한 성경해석』(CLC), ·『상황에 적실한 설교』(CLC), ·『교회를 세우는 설교목회』(CLC) <역서> ·『프리칭 예수』(CLC), 『설교학사전』(CLC), 『청중을 사로잡는 구약의 내러티브 설교』(CLC), 『건강한 교회를 위한 교리설교』(CLC) 외 다수.
682 |2017 신년기획| 최근 세계 신학의 동향과 한국적 현황 <3>_안상혁 교수 파일
편집부
4895 2017-02-21
2017 신년기획 / 최근 세계 신학의 동향과 한국적 현황 <3> 세계 역사신학의 동향 - 종교개혁사와 후기종교개혁사 연구를 중심으로- < 안상혁 교수, 합신 역사신학>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해를 맞아 본보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교수들을 통해 최근의 세계 신학의 동향을 알아보고 한국 신학계의 대응과 현황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편집자 주>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를 맞아 필자는 세계 역사신학계의 동향을 특별히 16세기 종교개혁과 17세기 후기 종교개혁(Post-Reformation) 시기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I. 종교개혁 연구: “다변화에서 통합으로” 1962년 독일 종교개혁사가 베른트 묄러(Bernd Moeller)의 ≪제국도시와 종교개혁 Reichsstadt und Reformation≫은 20세기 종교개혁사 연구에 있어 전환점을 마련한 저술로 알려져 있다. 묄러는 기존의 몇몇 인물중심과 교의적 관점의 종교개혁사 연구로부터 탈피하여 소위 사회사(social history)적인 접근의 필요성을 주창하였다. 1960년대를 기점으로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개혁사 연구는 그 주제에 있어 매우 다변화되었다. 일례로 종교개혁의 수용, 대중신앙, 도시연구, 종교개혁과 경제, 사회통제, 대중매체(소책자와 이미지를 통한 커뮤니케이션), 결혼과 성, 가족, 교육 등의 주제로 연구 범위가 널리 확대되었다. 역사신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제국도시들의 입장에서 독일 종교개혁을 연구한 하버드 대학의 스티븐 오즈먼트(Steven Ozment)나 제네바 컨시스터리의 회의록을 심도 있게 연구하여 칼빈의 종교개혁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시킨 미네소타 주립대학의 역사교수 로버트 킹던(Robert M. Kindgon)은 사회사와 교회사를 훌륭하게 접목시킨 대표적인 연구자들로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일평생 성경을 연구하고 번역하고 가르치고 설교한 루터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시도 사실 묄러가 단순하게 채색해버린 20세기 중반까지의 종교개혁자 연구물 가운데에도 예일대학의 롤란드 베인턴의 ≪내가 여기 있나이다 Here I Stand≫와 같은 수작이 존재했다. 그러나 마크 놀이 옳게 지적한 바와 같이 기존의 루터 중심의 연구가 적지 않은 문제점을 노출한 것도 사실이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는 루터를 교회 분열의 괴수이며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또한 각 시기의 정치적이며 사상적 견해에 따라 루터의 이미지가 때로는 독일 민족의 영웅으로 혹은 부르주와 혁명을 이끈 투사로, 그리고 심지어는 독일 나찌와 히틀러의 직접적인 조상으로까지 제시되기도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날 일군의 연구자들이 일평생 성경을 연구하고 번역하고 가르치고 설교한 루터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시도이다. 이와 무관하지 않게 1990년대 이후로 종교개혁사 연구는 한편으로는 기존의 다변화된 연구 성과들을 통합적으로 서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사의 성경적, 신학적, 사상적 기초를 더욱 심도 있게 연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오고 있다. 각 대학의 종교개혁사 커리큘럼에서 후스토 L. 곤잘레스 혹은 카터 린드버그의 개론서와 더불어 헤이코 A. 오버만, 데이비드 스타인메츠, 데이비드 백치, 알리스터 맥그래스 등의 저서들이 교재로 선택되는 현실이 이러한 흐름을 잘 반영한다고 하겠다. 또한 금세기 들어 루터와 츠빙글리, 그리고 칼빈 이외의 다른 종교개혁자들에 관한 연구가 활성화된 것 역시 고무적인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부써, 멜랑히톤, 불링거, 외콜람파디우스 등과 같은 지도자들은 물론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요하네스 아 라스코, 피터 마터 버미글리, 볼프강 무스쿨루스, 안드레아스 히페리우스, 제롬 잔키 등에 대한 연구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중세와 종교개혁 사이의 연속성/비연속성 논의는 종교개혁사 연구에 있어 빼 놓을 수 없는 핵심 쟁점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서는 후기 종교개혁 연구사 부분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2. 종교개혁과 후기 종교개혁: “단절에서 연속으로” 위트레흐트 대학의 역사신학자 빌렘 반 아셀트는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에 대한 한 세기의 연구 동향을 “단절에서 연속으로”라는 한 마디로 요약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연구자들은 종교개혁과 후기 종교개혁 사이의 차이점에 주목했다. 종교개혁의 신학은 “말씀의 신학”과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인 반면 개혁파정통주의 신학은 “예정론 중심”과 “합리주의 신학”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바르트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 전자의 작정신학과 후자의 언약신학 사이의 대립각을 세우는 시도(페리 밀러)도 유행했다. 두 시기 사이의 단절성은 “칼빈주의자들에게 대항하는 칼빈” 테제에 의해 자극적으로 표현되었다. 단절을 강조하는 논의들의 공통된 요소는 개혁파정통주의 신학 안에 있는 스콜라주의적 요소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한편 20세기 후반부터 후기 종교개혁을 연구하는 일군의 학자들?위트레흐트의 아셀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칼 R. 트루먼, 그리고 칼빈 신학교의 리처드 A. 멀러 등?은 개신교 스콜라주의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했다. 그 결과 대다수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에게 스콜라주의란 일종의 신학방법론이었다는 사실을 잘 드러냈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종교개혁의 전통으로부터 일탈한 것이 아니라 보다 정교한 학문의 방법론을 수단으로 활용하여 오히려 종교개혁이 발견한 성경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변증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종교개혁과 후기종교개혁의 연속성을 설명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넓게 보아 중세, 르네상스, 종교개혁, 후기종교개혁 시기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는 연속성/비연속성 논의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새로운 분파운동이 아니라 교회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상실되었던 초대교회의 공교회성을 회복하는 운동 20세기 중엽, 폴 O. 크리스텔러는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철학적 체계가 아니며 오히려 도구적 학문이며 문화적 프로그램임을 강조했다. 이와 무관하지 않게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중세 스콜라주의를 단순히 대체했다는 통념이 역사적 실재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한편 헤이코 오버만은 중세 말의 다양한 신학 전통과 그 가운데 종교개혁으로 계승된 요소들을 연구함을 통해 중세 말과 종교개혁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을 확인했다. 어떤 의미에서 리처드 멀러의 작업은 크리스텔러와 오버만의 시도를 16-17세기에 적용한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과장이 아닐 것이다. 중세와 종교개혁 그리고 종교개혁과 후기 종교개혁 사이의 연속성 논의에 있어 핵심쟁점은 “공교회성(catholicity)”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초대교회의 신학을 집대성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중세 말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의 새로운 부흥기를 통과하여 종교개혁으로 계승되었고 그것이 후기종교개혁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종교개혁은 새로운 분파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상실되었던 초대교회의 공교회성을 회복하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알기에 종교개혁가들 가운데 그 어떤 인물도 종교개혁을 분파운동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오늘날 로마가톨릭교회가 교회연합을 위해 개신교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는 순간에도 역사적인 종교개혁이 공교회의 전통으로부터 일탈한 분파주의 운동이었다는 전제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로마가톨릭교회의 에큐메니즘을 대표하는 학자 조지 H. 타바드가 그의 주요 참고문헌에서 오버만의 연구물들을 종종 누락시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3. 한국적 대응과 과제 리처드 멀러는 지난 한 세기의 칼빈 연구사를 정리하면서 연구물을 크게 두 개의 범주로 구분하였다. 재미있게 표현하자면 ‘자연식’과 ‘가공식품’의 구분이다. 물론 멀러는 ‘자연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주로 칼빈이 남긴 1차 문헌을 수집, 편집, 번역하여 출판한 연구물들을 가리킨다. 한국에서 종교개혁사를 가르치는 역사신학자로서 경험하는 수업 현장에서의 어려움은 우리말로 번역된 1차 사료가 너무나 적다는 사실이다. 프로이센 제국 때 시작된 바이마르판 루터전집이 완간되는 데 무려 125년 이상의 수고가 요구된 것을 감안할 때, 루터나 칼빈의 전집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 역시 많은 수고를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고, 한국 교회와 신학교가 기꺼이 감당해야할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복음과 바른 신앙고백에 기초한 참된 공교회성 연구와 교회연합을 위한 노력 경주해야 2차 문헌의 경우, 금세기 들어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성경주해가 다시 종교개혁 연구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물론 국내의 역사신학계는 지난 세기 동안 진행된 다변화된 연구의 긍정적인 결과물들을 활용하여 종교개혁 역사와 신학 연구에 통합적으로 반영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다만 종교개혁이 발견하고 후기 종교개혁이 계승한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종합적 연구가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현대 에큐메니즘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한 대표적인 도전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며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래 공교회성을 둘러싼 싸움은 변함없이 지속되어 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비록 한국 개신교회가 분열되어 있는 현실은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한 참된 공교회성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응답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공교회의 바른 신앙고백에 기초한 참된 교회연합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안상혁 교수> 일/문/일/답 1. 역사신학이 목회와 신앙에 주는 의미와 유익은? 역사는 정체성과 직결되어 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는 것은 자연스런 반응이다. 역사신학은 시대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원래 무엇이었고, 또 무엇인가를 설명해 준다. 특히 합신의 역사신학 강의들을 예로 든다면 개혁주의의 정체성과 개혁주의 입장에서 오늘의 우리와 다른 전통을 평가하는 것을 수업 목표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역사 신학은 개혁주의 목회를 추구하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개혁파의 스콜라주의적 접근의 방법론적 당위성이 있지만 그동안 개혁신학 자체의 과도한 사변화의 위험성은 없었는지 묻는다면? 신학의 사변화를 평가하는 기준들 중 하나는 신학과 목회현장의 관련성이다. 후스토 곤잘레스에 따르면 중세 신학교육과 목회현장은 분리되어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중세 스콜라신학은 사변화의 위험성에 크게 노출됐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비해 종교개혁과 후기종교개혁의 신학교육은 철저히 목회지향적이었다. 신학교육의 목표가 목회자 양성이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신학수업이 목회 현장과 분리되지 않는 한, 스콜라주의적 방법론으로 강도 높게 신학훈련 받았던 많은 청교도 사역자들은 목회 현장에서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한편, 근대에 들어와 대륙과 영미의 신학교들이 목회 현장의 변화와 필요 - 도시의 산업 노동자, 군인, 이주민, 서부개척 등이 동인이 된 - 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다. 특히 정통주의 말기에 신학자들과 교회가 신학논쟁에 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던 것이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된 하나의 역사적 배경으로 언급되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 최근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루터 전집 영문판(55권)을 번역 출판 중이고 고신 개혁주의 학술원에서 칼빈 전집을 데이터베이스화 했는데 칼빈 전집 문서 출판에 대한 개혁주의 측의 계획이나 진도는? 그리고 이에 대한 바람이 있다면? 총 59권으로 구성된 칼빈의 라틴어 전집(1863-1900) 중 처음 4권은 ≪기독교강요≫이고 31권이 구약과 신약에 대한 주석 및 설교이다. ≪기독교강요≫의 초판과 1559년 판, 그리고 주석 전체가 이미 영어와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또한 칼빈의 서간문 역시 한글로 번역 출판되고 있다. 나머지 중 주요 논문들 역시 “선집”의 형태로 번역 출판되었다. 요컨대 칼빈 전집의 적지 않은 부분이 이미 번역된 것이다. 물론 칼빈의 라틴어/불어 전집이 우리말로 번역 출판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한다. 한편 최근 들어 칼빈이 사용한 원문에 근거하여 이미 번역된 유명한 저작들을 다시 검증하여 우리말로 출판하기 시작한 것은 환영할 만한 변화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시도가 칼빈의 다른 저작들로 확대되어 일반 신자와 연구자들에게 큰 유익을 주길 바란다. 4. 현 단계에서 한국 교회가 초대교회의 공교회성을 회복하기 위해 해야 할 일 몇 가지를 든다면? 세 가지만 말하자면 첫째, 우리의 공예배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 기초한 바른 예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초대교회와 개혁교회의 선례를 따라 오늘날 교회도 신앙교육서를 활용하는 교회 교육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셋째, 공교회의 신앙고백을 계승한 교회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연대하며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들의 도전에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다. 5. 목회자나 성도들을 위한 역사신학적 필독서를 추천한다면? 역사 신학을 공부하는 최대의 장점은 1차 사료를 읽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목회자와 성도의 구별 없이 모든 신자들도 가능하면 초대교회로부터 17세기 청교도의 저작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인물들의 대표작 하나씩을 정독할 것을 권한다. 안상혁 교수 약력 ·연세대학교 (B.A., 사학) ·서울대학교 대학원 (M.A., 서양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M.Div., 목회학) ·미국 Yale University (Divinity / S.T.M., 교회사) ·미국 Calvin Theological Seminary (Ph.D., 역사신학) <저서> ·『언약신학 : 쟁점으로 읽는다』(영음사) <공저> ·『오늘을 살아내는 참된 종말신앙』(영음사) ·『교회는 개혁되어야』(영음사)
681 no image |2017 신년기획| 최근 세계 신학의 동향과 한국적 현황 <2>_이남규 교수
편집부
4595 2017-02-08
2017 신년기획 / 최근 세계 신학의 동향과 한국적 현황 <2> 현대 조직신학의 동향 < 이남규 교수, 합신 조직신학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해를 맞아 본보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교수들을 통해 최근의 세계 신학의 동향을 알아보고 한국 신학계의 대응과 현황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편집자 주> 현대 신학자들의 관심은 객관성보다 주관성, 성경 자체의 권위보다 성경의 기능 곧 인간에게 주어지는 의미로 옮겨왔다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등에서 정통신앙을 떠나온 현대신학 현대신학은 더욱 다양해졌고 여러 갈래이며 파편도 많다. 몇 가지 틀에 분류하여 설명하는 것은 벅차다. 한 가지 말한다면 현대신학의 흐름이란 성경의 권위를 내던짐과 동시에 정통교리를 처음엔 조심스럽게, 조금 후엔 서슴없이 대범하게 떠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과거에도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소치니(Faustus Sozzini, 1539-1604)가 합리주의적 성경 해석학을 들여왔고, 삼위일체를 부정했으며, 아리우스주의와 펠라기우스를 불러들였다. 그는 윤리를 중심에 두고, 관용, 다원주의를 옹호했다. 이런 면에서 소치니는 현재 자유주의 신학의 시초라고도 불릴 수 있다. 개혁신학자들은 일찍이 이런 흐름에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란 이름을 붙여 강력히 반대했다. 옛 개혁신학자들의 눈으로 본다면 현대의 많은 신학 사상은 아마도 소시니안주의의 다양한 분파들일 것이다. 소위 현대신학이란 다양한 역사비평과 함께 성경의 권위를 벗어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엔 성경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나중엔 교리적 사실로부터 벗어난 후 최종적으로는 성경을 인간의 글로 떨어뜨렸다. 그들 중 몇몇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정통 신앙을 벗어난다. 어떻게 성경에 호소하면서,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성경이 진술하는 명제를 그대로 받지 않는 방식으로 시도된다. 즉, ‘성경의 명제는 아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사람이 계시를 경험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칼 바르트)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많은 현대 신학자들의 관심은 객관성보다 주관성으로, 성경 자체가 갖는 권위보다 성경의 기능 곧 인간에게 주어지는 의미로 옮겨왔다. 이런 흐름은 최근에도 계속되어 ‘성경 해석자는 본문 자체를 명제로 받으면 안 되며 그것을 등장시킨 세계관을 읽어야 한다’(톰 라이트)는 의견을 우리는 만난다. 여기서 신학자는 본문의 명제를 걷어내면서 찾아낸 세계관을 우리 시대의 의미로 재구현하는 임무를 갖는다. 그런데 문제는 재구현된 명제가 성경의 명제와 부딪히고 완전히 반대되어도 이 흐름에서는 성경적이라고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모순적 상황인가? 문맥 안에 숨겨진 세계관을 읽어내는 인간 해석자에게 최종적 권위가 돌아가는 이런 방식은, "성경의 최고 해석자는 성경이다"는 루터의 명제와 부딪힌다. 따라서 우리가 신약과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2)으로 받는다고 했을 때, 그 해석권이 인간이 아닌 성경 곧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 돌아간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 본문 전체가 그 자체로서 최고의 해석자로 우리 앞에 있을 때 문화의 차이를 이유로 본문의 명제를 무효화하는 시도가 과연 정당한지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인 성경이 과거의 말씀이 아닌 지금 우리를 향하는 말씀으로서 우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히 4:12). 새로운 성경 해석의 틀 아래서 많은 현대의 신학자들은 성경이란 이름을 가진 채로 쉽게 정통신앙을 떠날 수 있었다. 신론으로 들어가 보면 무엇보다 삼위일체론이 크게 손상을 입었다. 일부에서 바르트가 삼위일체를 회복했다는 평가를 했지만, 그가 근대의 인격개념의 위험성 때문에 인격(persona) 대신에 사용한 '존재방식'(Seinsweise)은 오히려 양태론의 위험성을 남겼다.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구분을 없애버린 칼 라너는 양태론에 더 나아갔다. 일체에 대한 이런 지나친 강조보다 최근에 더 유행하고 있는 것은 몰트만 이후 큰 세력을 입은 삼위의 강조 또는 삼신론적 경향이다. 몰트만은 명시적으로 삼위의 존재론적 한 본질 개념을 버릴 것을 주장했다. 삼위의 관계성과 공동체적 하나됨을 강조하는 자기주장을 그 스스로 사회적 삼위일체라 불렀다. 성부, 성자, 성령이 페리코레시스(상호교통)를 통해 하나 되기 때문에 한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는 동방신학에 호소하지만, 동방신학자들은 본질의 일체로부터 삼위의 페리코레시스를 말했다는 것을 간과했다. 이제 몰트만은 이 페리코레시스에 인류와 피조세계까지 포함시키면서 만유재신론으로 나아간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는 현대신학에 큰 화제를 몰고 왔는데, 신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분열하고 갈등하는 사회와 정치의 여러 문제, 세계의 분쟁, 나아가 환경 및 생태계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좋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삼위일체에서 가족적 삼위일체까지 나아간 최근의 삼위일체 담론은 아직 몰트만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교리도 그 교리의 기능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25문). 삼위일체론은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통해 우리가 받은 것이다. 옛 신학자들이 말한 대로 성부 성자 성령에 어떤 구별도 없다는 자들에게 우리는 삼위를 말해야 하며, 하나님이 셋이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일체를 말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다. 최근에 나온 많은 책들은 정통신앙이 말해온 죄론을 크게 벗어난다. 그 중 몇몇은 타락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거절하면서 인간은 처음부터 모두 같은 한계를 갖고 태어난다는 결론으로 가서 펠라기우스에 이르렀고, 또한 인간 안에 처음부터 결함이 있었다는 마니교의 이원론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싸웠고 거절했던 두 이단에로 나아간 것이다. 여기서 죄는 인간이 원래 가졌던 어떤 결함의 결과로서 물리적인 악과 차이가 없게 된다. 따라서 죄책은 죄를 범한 개인이 아니라 그런 개인을 키워낸 사회구조에 돌아가고, 죄인에게는 형벌보다는 교정과 치유가 필요하다는 현대 사회 분위기와 잘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어떠한 신학적인 해결은 물론 실제적인 해결도 주지 못한다. 죄가 물리적 악이 될 때, 사람됨을 규정하는 양심, 도덕, 당위, 가치는 사라진다. 오히려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 묘사하는 인간이 훨씬 더 인간적이다. 즉 선하게 창조된 인간은 타락 후 전적 부패의 상태에 있으며(창 6:5; 렘 17:9), 개인적인 죄만이 아니라 전가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됨으로써 윤리적으로 연대한다(롬 5). 현대 신학자들이 간과하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부지중의 죄도 하나님의 형벌이 따르는 죄(민 15:29)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인간이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무한한 책임을 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아닌가? 죄가 형벌을 불러오는 범법이란 사실을 떠났을 때, 그리스도의 속죄사역도 정통신앙을 떠났다. 현대의 여러 신학자가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지칭되는 객관적 속죄, 즉 형벌 대속론을 포기하거나 반대했다. 화목의 능력을 말하기는 하지만, 최근의 경향은 크게 볼 때 화해를 신자 안에 있는 주관적 능력에 돌렸던 슐라이어마허 아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속죄사역의 일차적인 목적이라는 설명이 성경이 증언하는 복음과 속죄사역을 정당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를 감화시켜 우리로 하나님께 돌아서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 안에서 나타나게 하고, 우리의 사회의 여러 관계를 회복하고, 치유를 가져오고, 폭력을 비폭력으로 바꾸고, 피조물의 질서도 회복하게 하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가장 중요한 형벌대속사역을 버릴 때, 복음의 출발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은 사라져 버렸다. 안타깝지만 교회에서 사용되는 용어들도 더는 거룩, 죄, 심판, 대속, 구원이 아니라, 꿈, 상처, 치유, 비전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형벌 대속이 아니라 우리를 돌이키시고 그를 따르게 하기 위한 모범이라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구호인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도 전혀 다른 의미로 변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모범을 따르는 신실함이 되고 자신과 사회를 구원하는 것이 되었다. 이제 믿음은 그리스도를 신앙함이 아니라 그의 신실함을 본받는 것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바울이 수없이 외쳤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심(갈 2:13)과 그의 피로 말미암은 우리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의 구원(롬 5:9)이야말로 지금도 유일한 능력 있는 복음이다. 새로운 교리를 발견하고 발명하는 자들은 종종 자기들 자신을 종교개혁자들에 비유하곤 한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들의 교리가 새 교리가 아니라 옛 교리임을 증명하려 애썼다면 최근의 많은 이들은 ‘자기들의 교리’가 얼마나 많이 새로운가를 증명하려 애쓴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이남규 교수> 일/문/일/답 1. 성경의 최종적 권위를 훼손하는 현대 조직신학의 도전에 대한 개혁주의 조직신학계의 대응책은? 20세기 초에 미국 장로교에서는 존 그레샴 메이쳔을 중심으로 근본주의 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운동이 세속주의의 큰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실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주요 사명 중 하나가 올바른 옛것을 지켜내는 일이다. 그래서 여전히 조직신학자들은 책과 글을 통해 대응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신학자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시대 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과 신학교가 함께 믿음을 철저히 지켜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 현대신학의 새로운 교리에 대한 열망은 사회적 상황들에 대한 기독교적 고민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상황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교리가 잘못돼 그런 상황이 왔다거나 교리를 새롭게 바꾸면 답이 나온다는 생각이 잘못이다. 우리는 사회적 상황들을 보면서 복음이 진정한 답이 됨을 확신해야 한다. 또 정당한 사회적 관심을 갖되 먼저 개인의 믿음과 일상적 성경적 바른 삶으로 사회에 근본적 영향을 끼쳐야 한다. 3. 성경을 묵상할 때 적용적 상황 논리와 주관성의 문제를 잘 극복하려면? 성경 연구에 세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성경이다. 권위와 원천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믿음이다. 불신자에게는 성경은 하나의 좋은 책일 뿐이다. 그런데 이 둘만 있으면 가장 주관적인 상황, 즉 자신이 최고해석자가 되는 위험에 빠진다. 따라서 셋째로 교회의 표준문서들, 좋은 주석과 많은 선생들, 동료들과의 교통이 필요하다. 그래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과 함께 해야 한다. 4. 목회와 신앙생활에서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도구를 잘 활용하는 실제적 방법은? 개혁교회는 가장 많은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서를 유산으로 받았다. 교회는 이런 신조를 믿음의 고백만이 아닌 진리의 잣대와 교육용으로 사용해 왔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구원, 교회,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만나고 정리할 수 있다. 또 요리문답서의 십계명 해설은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5. 도움이 될 만한 최근의 조직신학적 도서를 추천한다면? 이승구 교수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와 김병훈 교수의 『소그룹 양육을 위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은 성도들에게 유익하다. 고전으로는 최근에 번역된 김영호 교수의 『게르할더스 보스의 개혁교의학』이 있고 다른 신학에 대한 평가로는 이승구 교수의 『우리 이웃의 신학들』이 있다. 더 세밀히 보려면 합신 교수들이 쓴 『노르마 노르마타』가 있다. 이남규 교수 약력 ·한양대학교 전자공학과(B.S.)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Th.M.) ·Theologische Universiteit Apeldoorn(Dr.theol.) <저서> Die Prädestinationslehre der Heidelberger Theologen 1583-1622, Reformed Historical Theology-Band 10,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09) <공저> 『칼빈과 종교개혁가들』(개혁주의학술원, 2012) 『칼빈 시대 유럽대륙의 종교개혁가들』(개혁주의학술원, 2014)
680 no image |신춘 - 특강| 신앙의 기준으로서 주어진 성경_최찬영 목사
편집부
1544 2017-01-25
신춘 _ 특강 신앙의 기준으로서 주어진 성경 < 최찬영 목사, 런던 다윗의교회 > “기독교는 이적과 표적이나 지혜의 말을 전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 전파하며,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역사하신다는 것 잊지 말아야” 신자들의 신앙 기준은 바로 성경이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이나 타협이 없다. 성경이 죄라고 하면 죄요 아니라 하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기도와 찬송과 물질을 드려도 성경을 기준으로 하지 않으면 이방인들의 종교 행위에 방불하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 이야기가 있다. 프로쿠르스테스는 행인들을 붙잡고 철 침대 위에 사람을 눕혀보고 침대 길이보다 긴 사람은 긴 부분을 잘라서 죽이고 침대 길이보다 작은 사람은 키를 늘려 죽이는 악당이었다. 후에 프로쿠르스테스는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데 프로크루스테스가 행한 그대로 그를 철 침대에 눕히고 그의 키가 침대보다 길자 그의 다리를 잘라 죽였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자신의 어떤 절대적 생각을 정해놓고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기준에는 한계 있어 세상의 삶처럼 신앙생활에도 기준이 있다. 기준이 없으면 신앙은 올바로 자라지를 못한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신앙을 갖게 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잘못된 신앙임에도 자신은 올바른 신앙이라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그런 착각은 결국 저주를 초래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위의 말씀을 보면 정통 기독교에서는 대단한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대단한 신앙을 가진 자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저 평범한 신앙이 아닌 능력 있는 신앙을 가진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대단한 신앙을 가진 자요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와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내게서 떠나라’는 저주를 받는다.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불법을 행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참된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닌 자기의 뜻대로 행하는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 신앙은 불법 야기해 법대로 신앙의 길을 걷는 자들은 좁은 길로 간다. 그러나 불법자들은 넓은 길로 간다. 법대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찾지를 않는다. 그러나 이 길이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이 좁은 길을 가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의 길이요 영생이다. 신앙의 기준은 성경인데 오늘날 성도들은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 이야기처럼 자신이 만든 철 침대를 기준으로 신앙을 이리저리 재면서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고 있다. 사사시대처럼 ‘사람마다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기만족을 이루는 종교행위일 뿐이다. 만일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경을 무시하고 신사도운동, 은사주의, 신비주의, 그리고 환상, 예언 등 비성경적인 프로그램을 성경적이라면서 성도들을 미혹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이런 것은 불법이요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이다. 비성경적 프로그램 용납할 수 없어 참 성도는 좁은 길을 가는 자로서 신앙고백과 성경 교리를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보다 체험이나 은사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한다면, 여러분은 이미 곁길로 간 것입니다 … 성경을 바르게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성경의 교리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성경의 중요성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자신의 신앙과 삶의 유일무이한 법칙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모든 신앙의 근거와 대상은 바로 성경입니다.‘ 체험 기적은 신앙의 기준일 수 없어 신앙의 기준을 체험이나 은사에 두지 말기 바란다. 체험과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았다거나 참 신자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 6:4-8). 사도적인 기적 곧 이적과 표적은 사도시대의 종료와 더불어 종식되었고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한 방편이었으므로 사도시대 이후로는 사라졌다. 물론 기독교가 기적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성경의 역사에 나타난 기적과 이적을 믿으며, 그것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이것을 행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임을 믿는다. 그러나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도시대적인 이적과 표적들에 대해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바울은 사단의 거짓 역사가 많이 일어날 것이라 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2:9-10). 기적 행함이 구원의 근거될 수 없어 B.B 워필드는 “초자연적인 은사는 사도시대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그 목적은 사도들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 목적이 달성된 후에는 은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칼빈도 “안수로 베풀어졌던 이적적인 권능과 놀라운 이적은 끝났으며, 이것들은 단지 얼마 동안만 올바르게 지속되었다 … 하나님이 이런 이적들을 중단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아주 저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왕국의 장엄함과 그 말씀의 위엄이 충분히 밝혀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고 했다.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 기독교는 기적(이적과 표적)이나 지혜의 말을 전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 전파하며,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역사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전 1:18-21). 십자가의 복음만을 바라보아야 참된 신앙은 눈에 보이는 어떤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식을 성령의 조명을 받아 알아가는 것이다.
679 no image |신춘 - 설교| 이방 땅에서 승리한 믿음_정종은 목사
편집부
1439 2017-01-25
신춘 _ 설교 이방 땅에서 승리한 믿음 < 단 1:1-21 > < 정종은 목사, 동백리교회 > 시작하며 요즘엔 신자들도 흔히 좋은 연봉만 보장되면 얼마든지 자리를 옮기곤 한다. 거의 빵이 삶의 주인이 되었고, 가나안의 바알신이 현실의 주인 행세를 한다. 그러나 이방에 포로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단호하게 마음을 작정했다. 포로인데 궁궐에서 식음하며 교육을 받는 건 엄청난 혜택이었다. 출세의 길이 환히 보였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선택했다. ‘좁은 길,’ 곧 성령의 음성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1. 다니엘은 하나님 중심으로 뜻 (마음, 믿음, 신앙의 결심)을 정했다 _ 1:8 세상 쪽이냐, 하나님 쪽이냐 결심을 바로 해야 한다. 성도는 내 의지보다도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마음을 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무슨 일을 결정하는데, 금전적 이익이 많아도 신앙적 손해가 있으면 그 일을 멈춰야 한다. 많은 경우 돈을 따라가다 신앙도 손해 보고 결국엔 이익도 잡지 못한다. 다니엘은 신앙에 위배되고 손해되는 일을 중지했다. 바벨론 우상 숭배에 연관된 음식을 거절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채식을 할 수 있었고, 다른 정치가나 관원들보다도 역량이 뛰어났다. 우상숭배를 안했어도 지혜와 총명이 바벨론의 박수와 술객보다 훨씬 뛰어났다. 단 5:11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들이라.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바벨론 사신들의 이 표현은 다니엘이 성령 충만한 사람임을 말한다. 이방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승리한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렵다. 하나님의 도우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사자굴과 풀무불에서 승리할 수 있다. 요셉이 국무총리로 발탁될 때도, 바로에게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창 41:38-39)라는 평가를 받았다. 신앙적 결단으로 하나님만 절대 의지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니 이방의 왕과 신하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2. 다니엘은 위기에서 세 친구와 합심하여 기도했다 _ 2:17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해몽하라는 어려운 명을 내리자 다니엘은 믿음으로 친구들과 합심하여, 밤새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폭군 느부갓네살의 꿈이나 고집은 다니엘과 친구들에게는 오히려 기도하며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일이 잘 돼도 감사, 안 돼도 감사하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롬 8:28).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잠 3:26 잠 16:20 렘 17:7). 생명이 달린 위기의 순간에 다니엘이 친구들과 합심 기도한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라는 응답을 받았고(2:19), 둘째, 다니엘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셋째,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예물과 향품을 드렸다(2:46). 넷째, 다니엘은 바벨론의 고위직 관리가 되고 친구들도 대우를 받게 했다(2:48-49). 3.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_ 3:18 느부갓네살 왕은 기어코 금신상을 만들어 절하라고 명했다. 일제의 동방요배, 신사참배 강요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세 친구는 절하지 않았다. 왕은 차마 죽이지 못했다. 풀무불의 형벌이 불가피했는데도 너무도 귀한 인재들이라 재차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왕에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이 일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능히 건져 주신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함으로 기꺼이 순교하겠다”고 했다(단 3:16-18). 왕의 사랑은 분노로 변해 그들을 풀무불에 던졌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했던 그들을 살려 주셨다. 풀무불 앞에서의 그들이 믿음을 고백한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구원을 받았다(26-27). 둘째, 이방 왕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을 찬송했다(28). 셋째, 전국에 조서를 내리고 하나님을 높였다(29). 넷째, 세 친구를 더욱 높였다(30). 끝내며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 궁궐에서 매 순간 신앙의 유혹을 받았다. 신앙을 지키느냐 버리느냐, 세상을 이기느냐 세상과 타협을 하느냐. 오늘 우리에게도 매 순간 사단의 시험과 유혹이 온다. 오직 믿음으로 승리해야 한다.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 중심, 믿음 중심의 삶을 살았다. 명예나 돈이나 생명보다도 하나님이 최우선이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권능이 임했다. 생명도 보존하시고 존귀함을 받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우상의 이방 땅에서 참 신으로 영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을 증거 하는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불신 세상에서 풀무불과 사자 굴 같은 시험이 와도 마음을 정해 주님만 믿고 의지하여 승리하는 성도가 되자.
678 no image |2017 신년기획| 최근 세계 신학의 동향과 한국적 현황 <1>_김진수 교수
편집부
2006 2017-01-25
현대 구약학의 동향 < 김진수 교수, 합신 구약학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해를 맞아 본보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교수들을 통해 최근의 세계 신학의 동향을 알아보고 한국 신학계의 대응과 현황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구약학을 필두로 각 과목들이 비교적 간략한 분량 으로 연재될 예정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편집자 주>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의심치 않음 자유주의 영향으로 성경 역사의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거부하는 경향 점차 확대되고 있어 역사와 성경의 모든 내용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확고한 믿음이 절실함 구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은 세상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거룩한 분이심과 동시에 세상을 지으시고 세상역사에 개입하셔서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특별히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일들이 왜곡되거나 망각되기를 원치 않으시고 그것들이 기억되고 보존되기를 원하신다. 일례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극적으로 승리한 후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사건을 책에 기록하여 후세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하라고 명하셨다(출 17:14).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기적으로 요단강을 건넜을 때에도 하나님은 이 놀라운 사건이 영원토록 기억되기를 원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개의 돌들로 후세대를 위한 기념비를 삼도록 지시하셨다(수 4:1-9). 그뿐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옛 언약백성들의 삶을 위한 교훈과 규례와 율법이 부모들에게서 자녀들에게로 계속 전수되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셨다(신 6:7; 11:19). 사실상 구약성경이 기록된 이유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과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서 행하신 일들이 후세대들을 위해 길이길이 온전하게 보존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전 10:1-11; 딤후 3:16-17). 교회는 이런 뜻을 받들어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성경에 기록된바 역사 속에서 일어난 수많은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하여 전적인 믿음과 신뢰를 보여 왔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교회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의심한다는 것이 도대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따라서 대다수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성경에 기록된 일들의 역사성에 대하여 회의를 품거나 의심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시와 산문 등 구약에 나타나는 다양한 문학양식들과 그것들이 가진 문학적 특성들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를 가지면서도 기록된 바의 역사적 진리주장을 수용하는데 어려움을 갖지 않는다. 학문의 영역에서 구약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도 적지 않는 수가 동일한 신앙적, 지적 기류를 호흡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의 믿음에 더욱 견고한 학문적 근거들을 제공하기 위하여 연구에 매진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연구결과들을 내어놓고 있다. 유럽에서는 화란의 아펠도른 신학대학과 캄펜 신학대학이 1999년부터 공동으로 진행해오고 있는 “연구프로그램”이 그런 노력의 하나이며, 미국에서는 롱(V. P. Long), 프로방(I. W. Provan), 롱멘(T. Longman) 등과 같은 복음주의 학자들이 기울이는 노력들이 대표적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만만치 않은 도전들이 있다. 이 도전들은 소위 역사비평학에 기반 한 자유주의적 성경연구의 흐름에서 오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점차 신학계 전반에 깊숙이 그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향으로 인해 성경역사의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거부하는 경향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것은 마침내 신학을 역사에서 분리하는 신학의 탈(脫)역사화를 가져오고, 더 나아가 성경의 메시지를 기껏해야 옛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나 저자의 정치적, 종교적 사상으로 돌리고 마는 이른바 성경학의 탈(脫)신학화라는 반어적 결과를 낳게 된다. 구약학의 이런 오도된 방향설정은 지난 20세기에 구약의 케리그마 또는 신학을 강조하면서도 역사문제에 관한한 비평적 입장을 고집하였던 폰라드(Gerhard von Rad)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또한 기독교 정경으로서 성경본문의 중요성과 권위에 우위를 두면서도 역사문제와 관련하여서는 폰라드의 입장에 머물렀던 차일즈(Brevard S. Childs)에게서 발견되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이런 흐름의 끝이 어디일까? 폰라드나 차일즈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구약성경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 또는 “계시”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어색하고 곤란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것은 지난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의 구약학계에서 이미 확인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이 기간 동안에 구약에 담긴 내용의 역사성에 대하여 이전 시대보다 더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는 두 가지 흐름이 구약학계를 빠르게 파고들었다. 하나는 1968년 뮬렌버그(James Muilenberg)가 주창한 수사비평(rhetorical criticism)으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구약성경의 문예학적 연구방법이다. 이 연구가 가져다 준 나름의 유익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 이름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이 방식의 활성화는 곧 역사적 관심의 쇠퇴를 의미한다. 여기서 구약은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는 역사기록이 아니라 작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문학적, 수사적 기교들을 동원하여 창작해낸 문학작품이라고 평가된다. 『성경 이야기의 기술』이란 책으로 국내에 알려진 알터(Robert Alter)는 이런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구약 내러티브를 그저 “산문픽션”(prose fiction)이라고 부른다. 다른 한편, 성경역사에 대한 급진적 태도는 이스라엘 역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역사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이 움직임은 코펜하겐 대학의 역사학자 렘케(Niels P. Lemche)와 톰슨(Thomas L. Thompson)이 주도하기에 “코펜하겐 학파”라고도 하며, 최소한의 것을 제외하면 구약에서 역사적으로 믿을만한 사실을 찾을 수 없다고 하기에 “미니말리스트”(minimalist)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구약에 기록된 대로의 이스라엘과 다윗왕국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들이 우리들에게 낯설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문의 장에서 이들은 뚜렷하게 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에 맞서는 학자들은 그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1995년 유명한 국제 학술지인 JBL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에 실린 논문들은 이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논쟁들이 얼마나 심각하고 치열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난 현재의 형편은 어떠할까? 오늘날 일각에서는 무신론적 과학주의와 진화론의 영향으로 구약은 희미한 역사의 잔재와 꾸며진 이야기와 신화들의 조합으로 평가되기도 하며, 아담은 인류의 조상일 수 없다는 주장까지 주목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형국에 이르게 된 원인들이야 다양하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성경본문을 대하는 태도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밝혔듯이 하나님은 역사에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으며, 그런 일들이 잊혀 지기를 원치 않는 그분의 뜻에 따라 구약성경이 기록되었다는 점을 가슴 깊이 되새겨야 한다. 역사를 포함하여 성경의 모든 내용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절실하다. 그것만이 세상의 이런 저런 시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우리 자신과 교회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검”이자 “방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500년 전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치며 성경의 권위 앞에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였던 개혁자들의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한 때이다. ● 김진수 교수 일문일답 1. 본문에 언급한 성경의 권위 문제 극복을 위한 한국 개혁주의 구약학계의 노력은? 혹은, 긍정적 도전 목표가 있다면? 한국 구약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런 문제들을 인식하고 구약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세계의 많은 학자들과 보조를 맞추어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오늘날 학문적 흐름이 다방면에서 오는 새로운 도전들 앞에서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 있기에 계시문서로서의 구약의 특성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본문에 더 깊이, 더 철저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헌신된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필자가 소장으로 있는 합신의 성경지리역사 연구소에서는 금년 4월 ‘아담의 역사성’에 관한 주제로 제1회 세미나를 개최하고자 준비하고 있다. 2. 최근 개혁주의(복음주의) 진영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구약학자와 연구 성과는? 어느 한 사람이나 그룹을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학자들마다 강점과 약점이 있기에 더더욱 평가하기가 조심스럽다. 한국에 비교적 많이 알려진 학자들이 여럿 있으나 유진 메릴(Eugene H. Merrill)이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 쓴 『제사장의 나라』와 『구약신학』이나 스티븐 뎀프스터(Stephen G. Dempster)의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읽는 구약신학』, 해석상의 문제가 없진 않으나 미국 남침례 신학교의 두 교수 피터 젠트리(Peter J. Gentry)와 스티븐 벨럼(Stephen J. Wellum)이 성경신학적 관점으로 언약을 풀어낸 『Kingdom through Covenant』를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꼽을 수 있겠다. 3. 목회자와 성도가 구약에 바른 관심을 갖도록 도움을 준다면? 에베소서 2:20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로 대표되는 신구약 66권 성경 위에 세워진다는 말과 같다.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도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교회의 삶과 성도의 신앙에 구약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보여주고도 남는다.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구약에 비해 신약에 더 친숙함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약의 모든 내용이 구약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약 없이 구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듯, 구약 없이 신약의 진리의 깊이와 넓이에 대한 통찰을 가질 수 없음도 꼭 기억해야 한다. 4. 목회나 신앙에 유익한 구약학 도서를 추천한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만큼 목회나 신앙에 유익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의 스승인 헨드릭 페일스(Hendrik G. L. Peels) 교수가 쓴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 구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여러 면들』과 영국의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Cristopher J. H. Wright)가 쓴 『구약의 빛 아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구약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구약의 빛 아래서 성령님을 아는 지식』을 추천할 만하다. < 김진수 교수 약력 > ·부산대학교 독문학과(B.A.)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in Philadelphia,(M.Div.수학) ·합동신학교(M.Div.) ·Westfalische Wilhelms-Universitat in Munster, Germany (고전어) ·Theologische Universiteit Apeldoorn in the Netherlands(Th.M., Th.D.) <저서>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열왕기 주해』(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677 no image |까치둥지에서 온 편지<11>| 세속정부와 신자의 길_변세권 목사
편집부
1455 2016-11-29
세속정부와 신자의 길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우리의 신앙을 좁혀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역사와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즉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그분의 의지와 목적을 상기해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따라 때와 기한을 변경하시고, 오만한 왕들의 피 묻은 홀을 부서뜨리시며, 용인할 수 없는 정부를 전복시키기에 통치자들은 이를 명심하고 두려워해야 늦가을의 정취를 더 느낄 사이도 없이 마음에 겨울이 먼저 온 것만 같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세상정부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혼란한 이 시기에 신자인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고유한 역할이 있음을 생각해본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신앙 수준이 사회적 책임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우리는 생각보다 실력없는 지도자, 실력없는 목사였다. 그러한 것에 비난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시대를 개혁하고 삶을 개혁한다는 것은 주장이나 구호, 명분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의 변화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역사는 무엇이고 인생은 무엇인가 고민하는 인간에 대한 사정과 이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 상황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하시려는 때까지 가야 한다. ‘차라리 죽여주십시오!’까지 가야 한다. 우리의 신앙을 좁혀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역사와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즉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그분의 의지와 목적을 상기해야 한다. 역사를 경영하시는 하나님 알아야 이런 차원에서 세속정부와 그리스도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면, 세상 통치는 근본적으로 교회 통치의 안녕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집권자를 임명하신 것은 그리스도인 약자로 하여금 이들의 도움과 지지를 받아 악인들의 악행과 불의의 희생물이 되지 않고, 고요하고 평안한 중에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원칙적으로 집권자들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사자와 대표로 여겨서 존경해야 한다. 문제는 불의한 통치자에 대한 관계이다. 악한 집권자들이 우매나 나태 그리고 잔인성과 타락으로 가득한 행실 등등을 위선적인 위엄으로 은폐할 경우 그러한 행동들 자체는 결코 칭찬할 수 없다. 하지만 집권자의 지위 그 자체는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여전히 영예와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중심으로 따르는 사람으로서는 그들의 포고에 순종하거나 세금을 내거나 공직과 국가방위 의무를 갖거나 그밖에 명령들에 복종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실증해야 한다. 통치권자들을 향한 복종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복종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복종하게 하려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까지도 명령하셨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여기에는 시민이 공중 앞에서 지켜야 하는 자제심으로서의 복종도 포함된다. 개개인 시민은 공적인 일에 간섭하여 공연히 집권자의 직무를 침범하거나 정치적인 행동을 하지 말아야하거니와 하물며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통치자에게 순종해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당연히 유의해야 할 일에 등한하며, 공적직무 수행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그저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불의한 통치자들이 이전에도 존재해왔었다. 그들에게서는 선행하는 자를 표창하며 행악자를 벌하기 위해서 임명된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사람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집권자로 인정하고 그들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할 때, 이러한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선하고 악하고를 떠나서 한결같이 거룩한 위엄을 지닌 합법적인 권력을 주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불의하고 무능한 지배자들로 말미암아 백성이 어려움을 겪을 경우, 그들을 타도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되고 도리어 백성의 사악을 벌하시기 위해서 세우신 하나님의 심판 도구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령 악한 통치자가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내리시는 진노의 도구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악한 지배자에게까지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통치에 복종해야 한다. 이런 생각은 보편적인 상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쉽게 이해되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중에 우리는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그 누구는 이해가 되겠는가! 하나님은 섭리로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라들을 배치하고 대통령이나 수상들을 임명하는 분이시다. 여호와는 당신의 뜻에 따라 때와 기한을 변경하시고, 당신의 뜻에 따라 왕들을 세우시고 폐하는 분이시다. 실례를 들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이방인 침략자 느부갓네살 왕도 실상은 악하여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각 나라의 왕들은 율법을 통해서 모든 자제와 근신하는 훈련을 받아야 했으므로, 당연히 왕의 입장에서 마치 권리처럼 이런 일들을 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백성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것을 권리라고 했는데, 이는 백성의 입장에서는 왕에게 복종해야 하되, 항거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불의한 왕을 통해 심판하시기도 느부갓네살 왕의 경우를 통해서 보듯이 악한 왕에게 복종하라는 성경의 실례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적용되는 특이한 경험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그가 통치자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이런 원리 때문에, 비록 포로로 잡혀간 입장이었지만 그러한 입장에서도 이스라엘이 평안하기 위해서는 바벨론 왕을 위해서 기도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를 평생 좇아 다니면서 죽이려고 했던 사울이었지만 그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두 번이나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죽이지 않았다. 우리 역시 통치자들로부터 부당히 학대당하고, 억울한 착취를 당하며, 공연히 모욕을 받고, 애매히 괴로움을 당한다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와 명령을 생각함으로써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어떤 비행이 있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에 대한 주님께서 주시는 채찍의 일원으로 징계를 받는 것이라고 자각하면서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정이나 힘들고 정신적 후유증도 있고 억울한 경우에는 직접 나서서 시정하려 하지 말고, 모든 권력의 주인이신 주님께 도움을 간청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반드시 정의가 살아나게 될 것이다. 불의한 법을 제정해서 빈민을 불공평하게 재판하거나 미천한 사람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과부에게서 토색하며,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은 모두 반드시 여호와의 멸망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만사 공명정대한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권능과 섭리가 뜻밖의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느 때나 공명정대하셔 가령, 예기치 않은 복수자를 일으켜 악한 정부를 처벌하고 압박받는 백성을 구출하실 때가 있다. 자기 백성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출하시려고 모세를 일으키셨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다른 의도로 노력하는 사람들의 열정을 인도하셔서 이 목적을 달성하신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행위가 어떻게 판단되던 간에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일을 성취하셔서 오만한 왕들의 피 묻은 홀을 부서뜨리시며, 용인할 수 없는 정부를 전복시키신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통치자들은 깨달아야 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집권자들의 권위를 멸시하거나 침범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야 한다. 난폭한 독재를 시정하며 처벌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권한이다. 어느 나라든간에 통치자들의 전횡을 억제할 목적으로 임명된 국민의 관리들이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옛적 스파르타의 왕들에 대립한 감독관들이 그렇고, 로마 집정관들에 대립한 호민관들이 그러하고, 아테네의 원로원에 대립한 지방장관들이 그렇고, 현재 각국의 국회가 중요 회의를 열 때에 행사하는 권한 같은 것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다. 이런 위치의 사람들은 통치자들의 방종한 횡포에 맞서 자신의 직책을 적극 행사하여 항거하여야 한다. 만일 그들이 군주들의 폭정을 못 본 채 한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자로 임명되었음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의 자유를 배반하는 것이므로, 엄연한 직무유기와 위선을 자행한 극악한 배신행위가 된다. 물론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도 항거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통치자들의 권위에 대한 복종의 당위성에는 한 가지 예외가 있으니, 곧 주안에서만 복종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는 일이라면, 제 아무리 권세가 당당한 통치자 앞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고난을 받더라도 굳세게 항거할 수 있어야 한다. 왕은 항거하는 사람을 가장 두려워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왕이었던 솔로몬은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왕의 진노는 살육의 사자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하늘의 사자인 베드로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선포한다. 오직 주안에서만 복종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통치자에게는 항거해야 우리는 통치자의 핍박을 두려워하여 경건을 버리기보다는 주님께 복종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얻어야 한다.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았고 이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셨다. 그러므로 누구의 종이 되어야 하겠는가? 통치자의 종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가? 성도는 악한 통치자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종이 되어서는 안 되며, 더욱이 그들의 불경건한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고 한 바울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두 개의 정부가 존재한다. 하지만 서로 대립되거나 반대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두 정부, 특히 세속 정부에도 그들이 ‘주 안에서 요구하는 것’인한 아낌없이 복종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나가는 것을 통하여 두 정부는 하나님의 섭리중에 합력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양하는 선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전의 안정되고 고요하고 평안한 삶이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다시 한 번 깨달으며 국가와 사회와 교회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며 기도한다.
676 no image |까치둥지에서 온 편지<10>| “교회의 진정한 개혁과 행진의 대열에 합류하라!”_변세권 목사
편집부
1607 2016-11-01
“교회의 진정한 개혁과 행진의 대열에 합류하라!”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언약 체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새 언약을 계시하는 모형” 가을이 깊어 간다. 이 계절에 인간적 고독과 사색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지나친 환상과 낭만은 우리의 기본 자아를 무너뜨리기 쉽다. 동서양을 무론하고 교회가 많이 타락해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즉각적인 심판을 유보하시면서 남은 자들을 부단히 일깨워주고 계시는 이 현실 앞에서 이제 진정 우리는 좀 더 개혁적인 삶을 살아야한다. 교회의 진정한 개혁과 행진은 나라고 하는 자기 자신의 적극적인 믿음의 행보 위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라도 자기 자신을 예외라고 하는 저주스러운 함정에 스스로 빠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항상 책임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해 부단히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언약의 관점으로 접근해 보면 이스라엘의 유다왕국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특징으로 다윗언약이라는 사상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은혜를 가리키는 것인데 곧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와 그의 후대의 나라가 어떠한 혼란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항상 다윗의 자손들이 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이다. 당시 다윗은 가나안 땅에 왕국을 건설한 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이 들어 하나님의 집을 짓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언약을 베푸셨는데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지으실 것이라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여기에서 일종의 언어유희가 나타난다. 다윗은 성전과도 같은 건물로서의 하나님의 집을 의미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가계가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서의 다윗의 집으로 바꾸셨기 때문이다. 이 다윗 언약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과 같은 신앙을 소유한 왕이 후손으로 계속 등장하여 왕조를 이루어나가는 데 있었다. 즉 그러한 다윗의 가계, 다윗의 왕조가 역사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지속되는 연속성이 있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어떠한 조건 하에서도 성취해 나가셨다. 물론 다윗 언약은 시드기야 왕 때에 와서는 결국은 끝을 맺었다. 그토록 다윗 언약의 패턴에 따라 끈질기게 이어져 나오던 유다왕국이었지만 결국에는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윗언약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다윗언약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성취되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모형이었기 때문이다. 본디 다윗 언약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에게 하신 언약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노아언약과 아브라함 언약 및 모세 언약과 한 줄기 기다란 축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다윗 언약까지 포함하면서 최종적으로 예레미아를 통해서 새 언약의 도래가 예고된 그러한 언약 체계 전체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성취될 새 언약을 계시하는 모형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새 언약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시는데 성도에게 이러한 구원이 임했다는 것을 자각시켜주는 뚜렷한 증거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아가 복종한다는 데서 찾아지게 된다. 이 복종하는 능력의 원천이 무엇인가하면 성령께서 성도의 생명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접붙여 주신 사실이다. 물론 매사에 완벽하게 순종하지는 못 한다. 옛 사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부패성이 습성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어제보다는 오늘은 더 낫기 마련이고 따라서 내일은 더욱더 낫다. 비록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할 수는 있겠지만 여하튼 멈춰 있지는 않는다. 기어코 전진하고 또 전진한다.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하나님의 학교라고 하는 운동장에서 부지런히 그리고 항상 전진하는 것이다. 성도가 은혜아래 있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성도가 은혜를 받았다고 할 경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시전반을 체계적으로 잘 이해하는 동시에 전폭적으로 신뢰하면서 적극 순종하는데서 온전한 모습을 나타내는 법이다. 이는 그의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약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혜를 누리는 성도는 자신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기를 그치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데로 전환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참으로 성도의 속에는 더 이상 옛사람의 생명력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약동하기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변화이다. 그러니 이 패역한 시대와 의연히 결연하고 나름대로 소수의 남은 자요, 따라서 현실적으로도 가난한 자로서 살아가기를 다짐하고 있는 우리로서 진정 그러한 사람이 되기로 원한다면 이 비극적인 시대를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예레미야처럼 이미 너무 울어서 눈물이 말랐는가? 루터나 칼빈처럼 할 만큼 했기에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것인가? 차라리 그랬던 것처럼 착각이라도 하고 있으면 좋겠다. 우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식은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아니, 사랑하는 것은 고사하고 성도로서 살아가야 할 최소한의 의무조차도 저버리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하자고, 선동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좀 더 엄격하여 개혁된 교회의 교회 구성원답게 치열하게 사는 것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울 만큼 배웠고 우리 각자의 신앙적 삶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를 구현하는 일과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고 확인할 만큼 확인했기 때문이다.
675 no image |까치둥지에서 온 편지<9>| 기독교강요 전함에 승선하라!_변세권 목사
편집부
1657 2016-09-21
기독교강요 전함에 승선하라!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교리교육의 중요성과 칼빈신학에 대한 이해와 적용의 필요성 요구돼” 지난 여름 대단했던 무더위와 폭염을 뒤로하고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변해간다. 다들 고생이 많으셨다. 요즘 필자는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다시 공부한다. 그동안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느라고 이제야 철이 들었나보다. ‘근본도 모르고 목회를 해왔구나!’ 하는 후회하는 마음이 든다. 목회를 하면 할수록 영혼의 공허감을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마음속에 ‘목사의 인격상의 결함은 다소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목사의 성경해석상의 결함은 어떠한 이유라도 용서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해석도 때로는 들어서 쓰시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 사역자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야한다. 그러던 중 얼마 전 합동신학원 2학기 개강심령수련회 강사로 다녀온 적이 있었다. 평소 설교를 잘 못하는지라 네 권의 기독교강요 개관으로 설교를 했다. 어떻게 보면 교수님들도 계시는데 주제넘은 짓을 하고 온건 아닌가하여 교회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얼굴이 부끄러웠다. 우리가 칼빈을 말하고 박윤선 목사님을 말하는 것은 그분들의 인간적인 면보다 그분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제일 깊이 이해하고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혹 우리가 선배들의 신학적 업적을 평가할 때도 인간적이거나 세상적 관점에서 보고 떠받드는 게 아니다. 세계 칼빈학회회장을 엮임한 헤르만 셀더르하위스는(Herman J.Selderhuis) 기독교강요 최종판을 방주(ark)에 비유하면서 예찬하였다. 방주 혹은 전함, 심지어는 화물선을 조종하여 대해를 항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칼빈은 그 일을 해냈다. 기독교강요 최종판은 이렇듯 배에 비유할 수 있다. 기독교강요는 1536년에 돛단배(sailboat)로 항해하기 시작했지만, 초판 6장에서 시작하여 최종판 80장으로 늘어난 화물선(cargoship)이 되어 신학적 화물을 나르는 상자로 가득 찼다. 칼빈은 이 책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 화물선이 전함으로 변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변호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이 전함은 복음을 공격해오는 원수들과 싸우며 잠수해있는 위협적인 세력과 오래 버티면서 때가 되면 반격을 개시할 요새들을 공격할 준비도 되어있었다. 기독교 강요는 다양한 기독교 사상가, 목사, 교수들이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고 교부와 스콜라 철학자, 교회개혁자들과 신비주의자가 시대의 홍수 속에서 살아남아 정돈된 피난처를 제공받을 수 있는 일종의 노아의 방주(a sort of Noah's ark)로 생각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주를 통해서만 이단과 불신앙의 물결 속에서 진리가 안전하게 보존 될 수 있다. 조병수 총장 역시 “개혁주의는 치사한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신학이 아니다”라고 하시면서 개혁주의 교회를 바다 위에 떠 있는 항공모함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교회인 이 거대한 항공모함이 최고의 전투력과 구축함, 호위함을 대동한 채 바다 한 가운데에서 전지하고 그 옆과 앞과 뒤는 비록 인간의 가능성에 무게를 둔 신학이나 교회이나 인생으로 비유하자면 즉 범선, 상선, 여객선, 화물선 등 다양한 배들이지만 그들과 함께 더불어 같이 함께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같이 가는 것이다.” 전함이라고 해서 작은 배들을 무시하고 배척하거나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따라오다 지치거나 배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언제나 달려가 도와주어 좌초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대의 조류나 항해의 조건에 따라 요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망망대해에서 복음의 진리를 가득 태우고 온갖 악조건과 싸워 나가는 것이다. 당당하고 위용 있게 자부심과 명예를 갖고 달리되 온유하고 겸손하면서도 개혁주의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행복한 신학이라는 것을 뭇 인생과 역사에서 펼쳐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방주가 완성되자 홍수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하지만 개혁주의, 즉 보수주의의 전통 안에서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교회의 정식 회원뿐만 아니라 신학자들을 계속 휩쓸었던 쏟아지는 신학 작품의 홍수 속에서도 굳건히 생존하게 만들었다. 칼빈은 자신의 책을 신학적 전투에서 사용하기 위한 무기창고로 생각하면서 집필하지는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 신학자의 임무는 사변가들의 귀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었다. 박영선 목사는 “신학교육은 전체신앙의 내용의 개관과 균형질서를 깨우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설교는 우리가 겪는 일상이 진리와 생명에 관한 현실적, 구체적 도전이라는 것을 밝혀 진정한 답을 성경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또 현실에 대한 분석과 이해에 대해 큰 통찰을 가지지 못하고 비난만해서도 안 된다. 더 좋은 신앙이 더 비판적이고 무서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지금은 목사의 진정한 임무회복이 필요한 때이다. 목사의 주된 역할은 설교와 목양이다. 물론 목양은 설교라는 토대 위에서 진행된다. 더욱이 성령께서는 설교라고 하는 도구를 사용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건전한 교리를 신자들에게 제대로 가르치고 설교해야한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의 교회의 개혁 혹은 참된 교회의 형성이란 신앙고백을 확정짓는 일이었다. 이 신앙고백의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어떠해야하는가는 이후 교회가 이에 기초하여 신앙고백을 확정하는 작업을 통해서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칼빈은 이것을 교회의 정체성 확립 및 유지와 연결시켰다는데서 다른 개혁자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만의 특유의 독창성이이라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교리교육의 중요성과 칼빈신학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와 적용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지금은 항상 지속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종교개혁의 원리가 이전 어느 때 못지않게 요긴한 때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나는 개혁되었는가’가 아니라 ‘나는 개혁되고 있으며 개혁하고 있는가?’이다. 가을도 곧 깊어지고 노회와 총회도 바빠지는 시간들이다. 우리 교회가 무엇인지 치밀하게 연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경적 교회 하나를 이 땅에 크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반듯하게 세워 놓고 가자. 혹 누가 심령이 메말라 교회를 찾아왔을 때 “어디 교회가 없어 합신교회를 찾아왔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한번 힘을 내서 잘해보자! 혹 우리가 어떤 면에서 비판을 하게 되더라도, 어디서 신학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무슨 오해가 있고 어떤 못난 모습이 있어도 그것은 교회를 위하여 참는 것이어야 한다.
674 |손에 잡히는 사본학 해설 <13>|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복음서의 조화_김진옥 목사 파일
편집부
1950 2016-09-06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복음서의 조화 < 김진옥 목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교수 > “복음서들의 다양한 서술에서도 베드로 신앙고백은 일치하고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고백은 교회를 세우는 기초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잘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고백하였다(마16:16).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고백은 베드로 자신에게서 온 ‘개인적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신적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정리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이와 같은 신적 고백을 기초로 세워진다. 교회의 기초가 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한 신앙고백은 역사적 사건으로 이를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공관복음에서 빠지지 않고 나타나며(마 16:16; 막8:29; 눅9:20), 요한복음에서도 발견된다(요6:69). 하지만 우리가 가진 성경의 본문 속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한 가지로 통일되지 않고 있다. 개역성경을 중심으로 보자면 마태복음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가복음은 “주는 그리스도이시다”,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시다”로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신앙고백의 기술 차이는 많은 신학적 사고와 논증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비평학자들은 여기서 시작하여 복음서 기술자의 신학적 차이를 말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특별히 공관복음과 비교해서 요한복음의 신앙고백이 명백하게 다른 것에 많은 신학자들은 주목해 왔다. 하지만 이 본문들의 이면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사본들 속에서 발견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개역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긋나 있지 않다. 종교개혁의 전통에 조금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공인본문(스테파누스 편집본) 속에서 요한복음과 마태복음 속에 나타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두 개의 갈림길에 설 수 밖에 없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다수사본과 같이 일치시킬 것이냐, 아니면 오늘날 우리가 가진 개역성경과 같이 불일치시킬 것인가? 요한복음 6:69에서 발견되는 사본 상의 이문들은 아래와 같이 네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1) 1. ‘그리스도, 하나님의 거룩한 자’: P66 2.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마16:16과 동일, 다수사본과 비쟌틴계 사본들 3.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에프렘 사본 등 4. ‘하나님의 거룩한 자’: P75와 알렉산드리아계 사본들 거의 모든 사본들이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을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는데 비평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계 사본들을 중심으로 매우 파격적인 ‘하나님의 거룩한 자’를 선택하였다. 19세기 이래로 비평사본학을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면서 요6:69의 신앙고백은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완연하게 기울어졌다. 이 중차대한 구절에서 오직 P75 사본과 알렉산드리아계의 사본이 말하는 부분만을 독점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와 평행하여 다른 복음서들과 조화를 이루는 본문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평학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P66 사본도 공관복음과 조화를 이루는 본문을 보이고 있음을 전혀 간과해서는 안 된다. Codex Cyprius(017, 9세기), 요6:69 개혁신학이 복음서를 이해하는 전통적 틀은 조화의 원리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요6:69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먼저 올바른 본문을 선택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가 고백한 ‘하나님의 거룩한 자’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피기 전에 이러한 본문선택이 합당한지 점검해야 할 것이다. 잘못된 텍스트를 가지고 그 해석에 고심하는 것은 참으로 시간 낭비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현재 개역성경이 취하고 있는 요6:69의 본문이 도태시키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 구절에서 복음서들 간의 조화를 크게 뒷받침할 수 있는 중요 사본들이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선택은 각자의 주관을 따르겠지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하나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1) NA28 요6:69 참고.
673 no image |까치둥지에서 온 편지<8>| 개혁주의 교회의 주류(主流)에 서라!_변세권 목사
편집부
1830 2016-07-19
개혁주의 교회의 주류(主流)에 서라!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배운 바 주어진 목회 사역을 인격적이고 모범적으로 감당해 나가길” 여러 날 비가온 뒤의 도시의 거리는 수채화처럼 아름다웠다. 잠시나마 깨끗하고 선명하니 보기가 좋다. 우리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께 속하여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인생과 신앙의 훈련을 받고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다. 어떤 일을 시작하려 할 때에 그것을 그렇게 시작하고 있는 목적에 대한 의식을 뚜렷이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도 소중하다. 이것이 불분명하게 될 때에 지속적인 열심이라든가, 또는 다른 일들과의 적절한 조화와 균등을 꾀하는 일에 실패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해 나아가야 한다. 젊고, 힘이 있고, 시간이 있을 때에, 주님께로 부르심을 받을 날이 이르기 전에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증대시켜 나가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하여 우리는 개혁주의 교회관을 따라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주류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 교단이라고 하면서 아니,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했다고 하는데 목회의 적용에 있어서는 타교파 교회들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종교 개혁기에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녹스의 주도로 종교개혁이 단행되었는데, 이때 존 녹스는 칼빈에게서 배운 신앙의 도리들을 가르치면서 교회를 세워나갔다. 이때 교회정치체제를 칼빈에게 배운 대로 함으로써 최초의 장로교회가 스코틀랜드에서 형성되면서 장로교회라는 명칭도 생겼다. 이 영향을 받아 미국에서도 장로교회가 생기게 되었고, 미국의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한국장로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개혁주의 신앙을 전수받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에 보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서를 신앙의 도리로 받아들인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의 장로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개혁주의 신앙에서 이탈했다고 단정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 여러 측면에서 개혁주의를 포기한 모습들이 보이고 있다. 사실상 신앙고백도 없고, 그에 걸맞은 교회정치도 없이 그저 성공주의 일변도로 치달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의 성경적 교회들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버렸다. 이 문제 앞에서 솔직해야 한다. 껄그럽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판단하거나 대응하는 입장이 되면 안 된다. 이런 처지에서도 우리를 비롯해서 남은 자들이 역사적 개혁교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개혁신앙을 계승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런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무슨 새로운 하나의 분파주의를 취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혹은 미리 어떤 사상이나 한계를 정해놓고, 거기에 억지로 맞추어 나가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럴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단지 역사 속에서 개혁교회가 표방해온 바, 그 신앙고백을 그대로 따르는 교회를 이루고자하는 것이요, 더 나아가 개혁교회사상이 마땅한 정통본류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복음주의권 목회현장에 눌려서 그 정통성을 유지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다. 일부러 다른 이들과 차별되어 별다른 교회를 이루어서 세상 앞에 드러내 보이는 교회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역사 속에서 시간세계를 달려 나온 교회의 병진(竝進)이라고 하는 것은 동일한 의식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신앙 활동으로서 발전해 나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계통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바로 이 역사적인 계통을 잇고 있는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계열에 서서 누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후대로 계승시키는 역할을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생명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성경적으로 바른 교회를 이루는 일과 구원을 누리는 일은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법이기에, 교회를 반드시 이루어야한다. 이때 사람의 생각에 좋은 제멋대로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경의 원리를 따라서 바른 교회를 이루어야한다. 이렇게 하려할 때에 자신이 속한 교회가 추구해나가는 신앙의 도리들이 과연 성경적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바로 신앙고백서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근거한 교회질서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교회가 역사 속에서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실제로 증거해 낸 신앙고백이 없다면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떠한 기준으로 교회를 이룰 수 있겠으며, 더욱이 그것이 성경적 교회요, 곧 정통교회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자기 주장만 드세게 내세우면서 그렇게 해서 세워놓은 거대한 규모를 증거와 세력인양 앞세우게 되면 그것이 진리가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지만, 이는 사단이 심어놓은 무서운 현상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 이런 현상들이 하나의 제도권을 이루고 있고, 엄연히 역사의 한 현장을 차지하고 있음에 따라, 아직 믿음이 어리고 연약한 성도들이 자기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교회들이 있고, 저마다 성경을 제시하면서 자기네가 정통 교회요, 바른 교회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주장을 한다. 하지만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갖다 대보면, 여지없이 비어있고 심지어 거짓된 모습의 교회가 한 둘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신앙의 양심상 도저히 그런 식으로는 교회를 이룰 수는 없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소중하고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예수그리스도의 그 엄청난 자기희생적 사랑에 근거하여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아무렇게나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함부로 교회를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역사적 개혁파 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에 철저히 뿌리내리고, 그러한 신앙고백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흐트러짐이 없도록 이끌어주는 교회질서가 없이는 아예 교회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에 확실해야 한다. 때로는 개혁주의권 목회자들이 원리에만 치중하다보니 자신의 인격과 사랑이 없이 교회를 무조건 비판하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의 실패를 그동안 많이 보아왔다. 우리는 은혜로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으로 겸손해야 할 것이며, 개혁주의 교회를 이루고 남은 사명도 주님의 은혜와 긍휼의 사역에 맡기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의 주류가 되어 배운 바의 주어진 이 사역을 인격적이고 모범적으로 감당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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