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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no image |살구나무그늘아래서| 깜깜할 때도, 알아보는 사람 없는 곳에서도_추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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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1 2009-07-08
깜깜할 때도, 알아보는 사람 없는 곳에서도 추둘란 집사_수필가,홍동밀알교회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기를” 사위가 이미 어두워진 때, 중학생 두 명을 태우고 마을로 돌아오는 길이었습 니다. 뒷차가 상향등을 비추며 꽤 오래도록 따라오는데 LED 전조등 불빛이 라 눈이 부셔서 자꾸만 신경이 쓰였습니다. 뒷차의 전조등 신경 거슬려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래, 너도 한번 당해봐라’ 하는 오기 가 일었습니다. 언덕을 넘고 커브 길을 지나 평지에 왔을 때 내 차의 속력 을 터무니없이 낮춰버렸습니다. 뒷차는 곧 눈치를 채고 추월하여 우리 차 앞 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때는 이때다 싶어 당해보란 듯이 나도 상향등을 켰습니다. 그렇게 해야 다음 에라도, 앞차와 일정한 간격으로 계속 달려가는 상황에서 상향등을 꺼주는 예의를 갖출 것 같았습니다. 통쾌했습니다. 또 후련했습니다. 그런데 그 통쾌함은 채 1초도 가지 않아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화 신슈퍼 앞 다리에서 좌회전하여 마을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뿔싸!’ 앞차 가 좌회전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마을 사람이라는 말인데……. 갑자기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고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 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속력을 최대한 줄였습니다. 앞차와 멀찍이 떨어져서 표시 안 나게 뒤따라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앞차는 그마저도 눈치를 챈 듯 속력을 더 낮추더니, 마을 진입로 중앙에서 아예 서버렸습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습니다. 눈썹 몇 번 껌벅이는 순간에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습니다. 차에서 내려 얼굴 좀 보자고 하면 어쩌나? 우락부락한 아저씨 가 삿대질을 하며 싸움을 걸어오면 어쩌나? 왜 하필 우리 마을로 들어오는 차란 말인가? 아, 이건 아닌데,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앞차에 바싹 다가가게 되었습니다. 차를 세우고 죄송하 다고 해야 할지, 모른 척 그냥 지나가야 할지 두 마음이 싸우기 시작했습니 다. “에잇, 나도 몰라!” 앞차를 스치듯이 지나며 속력을 다시 내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뒷차는 다시 상향등 을 켜고 내 차를 따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상 황이 한번 더 거꾸로 되었습니다. 뒷차도 ‘오냐!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괘씸한 생각이 들기는커녕 뒷차와 어서 떨 어져서 각자의 길로 가기만을 바랐습니다. 어찌되었든 없었던 일로 해버리 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방앗간 앞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우리집은 문산마을이었지만 중학생 한 명을 서근터 마을에 내려줘야 했기에 오른쪽으로 핸들을 틀었습니다. 서 근터 마을의 집이래야 몇 채 되지 않으니 뒷차가 따라올 확률은 별로 없었습 니다. 왼쪽 길이 더 넓은 길이고 문산마을, 원당마을, 김애마을로 연결되는 길이었 기에 뒷차와 떨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제발 다른 쪽 길로 가 주 기를 바라고 바라면서 우회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완전한 착각이었 습니다. 뒷차도 역시 우회전을 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외길이고 어느 집 앞에 차를 세우는지 뻔히 다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모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을 때, 갑자기 뒷차가 생각지 않은 샛길로 꺾어들 었습니다. 상황은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습니다. 뒷차는 틀림없이 우리 차 번호를 보았을 것입니 다. 우리 차 모델은 마을에서 한 대뿐이고, 번호판도 흰색 새 번호판으로 바 꿔달았는데 그 역시 마을에서 몇 대 안되기 때문에 차량번호를 잘 외는 사람 이라면 이미 내가 누구인지 다 알았을 것입니다. 교회의 집사라는 것도 알 지 모르겠습니다. 새벽기도 다닐 때마다 교회 언덕 밑에 보란 듯이 주차해 두는 것도 알지 모르겠습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아니, 민서엄마 아녀? 얌전한 사람이 이게 무슨 일이여? 교회 다니는 사람 이 그러면 되나? 안 그런 줄 알았더니 사람 다시 봐야겠네.” 귓가에 그렇 게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니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초보라 뭘 몰 라서 그랬구먼. 그런 때는 당신이 비상 신호등 몇 번만 깜박여 주면 뒷차가 알아차리는 거라구. 좋은 사람 만난 줄 알어. 나 같았으면 차에서 내려 멱 살 잡았을 거야. 학생들이 보고 배우지 않았을까 몰라.” 그렇지 않아도 요즘 주일낮 설교 시간에 ‘말’에 대하여 4주 연속 설교를 들으면 서 누가 들을까 하여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는 귀엣말조차도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고 배웠습니다. 말뿐이겠습니까? 나의 마음과 행동도 똑같을 것 입니다. 깜깜했고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한번 당해봐라’ 하는 심술을 부린 것인데 그 순간에 하나님한테 “주님 어떻게 할까요?” 한번만 물어보았더라면 이 같은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학생들이 보고 있었다는 것 도 깜빡,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깜빡 잊어버린 것입니 다. 깜깜할 때뿐 아니라 대낮이어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나를 모르는 사람들만 가득한 곳, 심지어 내가 나쁜 짓을 저질러도 아무 도 모르는 곳에서도 나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이 모조리 다 보 고 계신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1년 6개월짜리 초보운전자가 겁도 없이 까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맘 좋 은 운전자를 만나 불미스런 일은 피하였습니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당해보라는 심술 후회스러워 운전 예절에 대해 배울 수도 있었고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한 번 더 묵상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511 no image |채석포에서 온 편지| 졸업, 그리고 20년 후_김영자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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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7 2009-06-24
졸업, 그리고 20년 후 김영자 사모_채석포교회 “흰머리에 숨겨진 인내의 세월 소중하게 여겨져” 따가운 햇살로 인하여 짙은 녹음이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더운 열기가 가 득한 하늘에 에드벌룬이 높이 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냥 부럽기만 한 동창회 잔치 면 소재지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근흥초등학교 총동문회를 갖는다는 현수 막과 함께 체육대회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릴적부터 같은 동네에 살면 서 학교에 다녔던 형과 아우들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난 날들을 그리 워하며 같은 추억들로 인하여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기 위함입니다. 초등학교 때의 학교 운동장을 뒤덮던 만국기의 휘날림은 없었지만 추억의 사 람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그날만큼은 현재의 자신들의 모습들을 잊고 과거로 의 여행을 즐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도회지에서 학교를 졸업했고 전학 을 자주 다녀서 변변한 동창이 기억속에 남아 잊지 않아 동창회 모임들이 참 부럽기까지 할 때도 있었습니다.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은 잦은 이사로 인하여 동창이나 동문들을 제대로 갖 지 못하지만 부모님들이 생존해 있는 농촌의 사람들은 이웃들이 친척이고 형, 아우이며 그들만이 소유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끈끈한 정이 있는 것 같 았습니다. 잠시 여유를 갖고 젊은날을 회상해 보는 날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나 이를 먹어감이라 생각이 들 때쯤 남편이 신학교를 졸업한 지도 20년이 되어 20주년 기념행사를 갖기로 하였습니다. 마침 부족한 가운데 남편은 9회 동문회장을 맡고 있어 여러 가지로 신경을 많이 쓰는 것같이 보였으나 총무 목사님과 여러 동문 목사님들의 도움으로 용인 한화콘도에서 2박 3일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동문들과 부인들, 그리고 교수님들이 참석했습니다. 17쌍의 목사 님 부부와 17명의 목사님을 합하여 51명의 동기 목사님들, 그리고 교수님 4 분이 참석하여 20년 전의 모습을 기억하며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대화에 열 심이었습니다. 일반 사회인들과는 달리 목표가 같은 인생길을 살아가는 목사님들이기에 동 병상련을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일반학교와는 달리 신학대학은 특수 학교 라 같은 세대의 사람들만이 아니고 여러 계층의 학생들의 단체인지라 벌써 은퇴를 하신 목사님도 계시고 목회를 떠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시는 분 들도 간혹 있었습니다. 남편은 모임이 있기 전부터 감격하는 것 같았습니다. 38살에 처음 신학교를 입학하던 그 무렵과 졸업과 목회의 어려웠던 일들과 기쁜 때를 생각하면서 그 모든 것을 감사하며 울먹이기까지 했습니다. 지금은 동문 중에 세상을 떠 난 사람 하나 없지만 앞으로 20년후의 모임에서는 보이지 않을 얼굴도 있을 것이라면서 기뻐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젊은 교수님을 모시고 족구를 즐겼던 소장파 목사님들은 그 교 수님과 같이 족구를 하면서 학창 시절을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노장파 목사 님들은 은퇴 후의 계획들과 성장한 자녀들의 이야기들로 이야기꽃을 피우면 서 즐거워하였습니다. 남편들로 인하여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모님들의 대화도 재미가 있었습니 다. 교회의 규모를 떠나 자연인으로서의 여자인 것을 서로 인식하며 남편들 의 건강을 걱정하기도 하고 이제 갱년기에 들기 시작한다며 연상의 사모들 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웃기도 했습니다. 머리에 듬성듬 성 난 흰 머리칼과 굵 게 파여진 주름살과 뱃살에서도 인격적인 모습들이 보여지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꽃남들보다 멋지게 보였습니다. 네 분의 교수님들도 그때 그 모습들이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어렵게 느껴지 며 말 한번 붙여 보지 못한 사람들도 다같이 교수님들과 여러 가지 이야기들 을 나누는 모습들도 너무나 흐뭇하게 보였습니다. 세월의 흐름은 어찌 할 수 없는 것인지 건강 문제가 가장 으뜸으로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너와 나’가 아닌 ‘우리’였습니다. 그리고 가족이었습니다. 늦게 참석하면서 행여 과일이 부족할까봐 과일을 사 오는 목사님들도 계시 고 시간 시간마다 먹을 것을 챙겨주며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모습들이 아 름다웠습니다. 두고 온 교회와 가족들도 잠시 잊고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의 여행을 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20세기의 최고의 군인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 라져 갈 뿐이다”라는 말을 하고 8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동 문 목사님들의 얼굴 모습에서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자비롭고 인자한 모습 들이 삶의 흔적으 로 남아 있는 것도 참 좋았고, 그러한 목사님들과 동반자 로 두 손 잡고 같은 길을 걷는 사모님들의 성숙된 모습들도 또한 아름다웠습 니다. 나이가 들면 학식이나 부와 명예도 다 내려놓고 평준화가 된다고 합니다. 인 생은 정답이 없고 한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소망이 있 음을 감사하면서 흰머리에 숨겨진 인내의 세월을 소중하게 여기며, 촛불이 꺼지기 전에 가장 밝은 빛을 발하는 것처럼 섬기는 교회를 향하여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20년 뒤에도 다시 볼 수 있기를 집에 돌아오니 몸은 피곤해도 여러 얼굴들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태초에 하나 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을 생각 해 보았습니다. 10년 후, 그리고 20년 후에도 보았던 그 얼굴 모두 다시 보기를 간절히 소망 해 봅니다.
510 no image |노트북을 열며| 절망을 주의하라_변세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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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1 2009-06-11
절망을 주의하라 변세권 목사_온유한교회 “은사와 소명 묵묵히 감당하며 그 길 걸어가야” 지난 오월 말의 때이른 여름은 노 전대통령의 죽음만큼이나 뜨거웠다. 소탈 하고 진솔한 스타일로 친근감이 넘쳤던 국가 원로를 잃게 되어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5월 말 정치적 이해 관계와 권력 구조의 문제를 떠나서 노 전대통령은 참여정부가 지양했던 가치까지 모조리 부정당하는 상황이 되다보니 절망도 컸을 것이 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라고 말했던 키에르 케고르는 말이 생 각이 난다. 필자는 무슨 대단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때로 개인의 양심을 지키 기 위해서 또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혹 목숨을 끊는 일이 있다. 이 런 면에서 노 전대통령의 충격과 절망은 이해가 된다. 아무리 최고권력자라 해도 자식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 부모이고 인간이 아니겠는가? 우 리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열정’라는 책에서 존 고든은 이렇게 말했다. “용서하라. 당신에게 상처 를 준 사람, 당신을 배신한 사람, 당신을 잘못된 길로 이끈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버려라. 이런 나쁜 에너지들이 당신을 가득 채우지 못하게 하라. 부 정적인 에너지는 당신을 내리누르고, 좋은 에너지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다.” 사람들에게 실망하지 않는 것이 영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자기 관리’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시작했던 일이 별다른 진전없이 제자리를 맴돌아도 절대 실망해서는 안 된다. 계획하고 기대했던 결과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 거나 조직을 수정 보안하고 처음 시작했던 목표와 계획을 쉽게 취소하고 다 른 길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결과가 될 수 있다. 교회 성도수가 아무 리 노력해도 늘지 않는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면 안 된다. 나에게 주신 은사 와 소명을 묵묵히 감당하며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어떤 종류이던 우리를 낙심시키는 모든 실망을 주의해야 한다. 주변 사람들 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 일에 대한 실망, 봉사에 대한 실망을 경계해야 만 한다. 실망은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게 만들고 떠나게 만드는 가장 무서 운 부정적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가끔 교회나 인간관계에서도 어떤 일이 생기면 극단적으로 사고하고 관계를 단절하는 식의 자기 감정에만 충실하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런 경우 당황 하게 되고 더 무슨 말을 하기가 겁이 날 때가 많다.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내게 에너지를 더해주 는 사람과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사람이다. 좋은 아이디어를 주거나 긍정적 인 피드백,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사람들은 에너지 플러스형의 사람이다. 반면 에 “포기해! 넌 자질이 없어”라며 열등한 존재로 느끼게 하거나 의기소침 하게 만들고 의욕을 상실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 이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에너지를 더해주거나 아니면 조금 남아있는 그 에너지마저 바닥을 드러내게 만든다면 우리는 자신을 견뎌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필요하다. 훌륭한 멘토가 있어야 한다. 좋은 말 을 해주는 사람, 어떤 에너지가 필요한지를 알고 끊임없이 나를 채워주는 사 람이 있어야 한다. 나를 미심쩍어하고, 믿어주지 않는 사람을 설득하 느라 에너지를 낭비할 것 이 아니라 나를 믿어주고 격려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기적인 생각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과 함께 할 시간을 만 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절망을 이기내고 서로가 서로에게 에너지를 증가 시키는 좋은 방법이다. 어느 사회나 관계되는 모든 조직은 주류와 비주류가 있기 마련이다. 나를 찬 성하는 사람만 있는 반면 반대하는 사람도 꼭 있다. 나를 둘러싼 주변환경이 나 나를 반대하는 사람의 말로 인해 쉽게 상처를 받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 다. 절망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운명을 탓하기보다 삶의 훈련과 노력을 하 고, 현실을 보기보다 삶의 본질을 보고 살아야 한다. 현실보다 삶의 본질 보아야 오늘은 이 말씀이 더 생각이 난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 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4-25).
509 no image |하늘이슬로쓴편지|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_이영란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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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3 2009-05-13
하늘이슬로 쓴 편지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이영란 사모_좋은소식교회 “좋은 부모를 주신 하나님께 그저 감사할 뿐” “남편이 교회에 온대요!” 성경공부를 마칠 때쯤 그녀의 남편에게서 전화 가 왔다. 올해 세례를 받고 놀랍게 변화되고 있는 이 동네 아이 엄마다. 이혼까지 불사한다던 으름장 수그러들어 단단히 벼르고 온 그 남편은 아내가 종교를 즐기도록 허락한 것인데 성경공 부니 뭐니 하면서 빠지게 되면 이혼도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나님 은 창조자이시고 지정의를 가지신 가장 완전한 분이신데 아내가 다른 데 빠 지는 것은 괜찮고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건전한 가정과 인생을 사랑 으로 가꾸는 것이 싫으냐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치매걸리신 아버지를 14년간 신앙으로 섬긴 친정 어머니 이야 기를 했다.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수그러들며 “내 아내도 그럴라나?” 하 면서 슬그머니 돌아갔다. 그 이후로 자녀들에게 “사랑 이 가장 중요한거야” 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며칠 후에 나는 그 집에 초대받아 그 남편 이 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천사의 사랑을 매일같이 주셨다. 14년간 하루 하 루 병들어가는 남편을 아이처럼 품어 돌보게 하시다가 한점의 회한도 없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주고 2년 여 전에 아름답게 헤어지게 하셨다. 지옥일 수 도 있었던 세월에 오히려 천국을 누리게 하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어머니셨다. 심장수술 후 진행되던 망각의 삶은 인생이 죽어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 다. 70대에서 50대, 30대 그리고 결국 3, 4세 지능으로 떨어지고 종국에는 아기가 되어 다시 엄마의 태 속에 들어가듯 무덤에 들어가셨다. 그렇게 사랑 하고 집착하던 큰 딸인 내 이름도, 아내도, 자식들도, 교회도, 돈도 잊어버 리셨다. 한 때 난폭해지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러나 이내 순수하고 착하게 변 화되어 가셨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날이 언제냐고 손을 꼽아 주일을 기다리며 예배를 사모하고 진실하게 기도하셨다. 누구인지도 모를텐데 목사님만 보면 제일 반가와하셨다고 한다. 무심했던 아내에게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 밖에 없다고 무수히 고백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 아내에게 가까이 가시고 우리들에게 다가 오시던 아버지셨다. “그래, 정말 힘든 것은 없니? 정말 행복한 거지?”라고 물으셨다. 한번은 “하나님도 너무하시지! 네가 아들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하면서 한번 도 들을 수 없었던 속내를 드러내셨다. 그때서야 아버지께서 아들을 원하셨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아팠다. 한번은 아버지 뵙고 돌아가려는데 집 밖까지 따라나와 4만원을 손에 쥐어주 셨다. 그것이 큰 딸을 기억한 마지막 사랑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아내의 사랑 안에서 잊어가는 만큼 순수해지고 자유롭고 그래서 더 사랑받으 셨다. 참 많이 웃으셨다. 우리들을 웃게 하셨다. 삶을 살아내려고 가끔 숨이 턱까지 막힐 때는 아버지 생각이 난다.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아버지에게 좀 더 따뜻한 사랑과 격려가 필요했다는 것을 중 년의 고비를 넘어서야 깨달았다. 아버지는 참 강인하고 능력이 많으셨다. 딸 넷을 아버지 소원대로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게 하였고, 가정과 일가친척 r 들을 잘 세우기까지 많은 장애들을 이겨내셨다. 교회 건축에도 힘을 다하셨 다. 서른 여덟살 된 막내 딸이 시집가는지도 몰랐던 아버지였다. 결혼식장에 모 시고 갈 수 없었지만 아버지에게 “아버지, 오늘은 아버지가 걱정하셨을 막 내 딸이 결혼해요!”라고 말을 하며 나는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른 다. 자신의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하셨는지 얼마후 존귀한 성도의 모습으로 천국에 가셨다. 화내시던 기억이 없을 만큼 자애로운 기도의 어머니! 그 어머니에게 나는 “젊은 날 너무나 꼼꼼한 아버지 때문에 갈등도 많았지만 신앙으로 다 이겨 내시고 나이들어 병든 남편을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며 손주키우듯 사랑하셨 어요! 존경하고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신앙이 얼마나 위대 한 것인지 말이 필요없는 삶이었다. 치매 교육을 위해 정든 대치동 집을 떠 나 이사까지 하셨다. 아버지를 돌보는 것은 엄마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막내동생은 결혼 적령기가 훨씬 넘어가기까지 엄마와 함께 했다. 자유로운 직장 일을 하며 아 버지에게 글과 그림을 가르치고 친구가 되었다. 때로는 지치실까봐 몇번인 가 어머니를 국내로, 해외로 여행을 보내드렸다. 그 기간동안 아버지 식사 며 대소변을 책임지며 아버지와 함께 했다.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이 새록새록 솟아납니다. 아버지로 서 누구에게도 말못할 짐을 지고 묵묵히 견디시다 병이 드셨다는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아버지. 큰 딸이 참 이기적이고 나밖에 몰랐던 것 같아요.” 아 버지께서는 내가 검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기대하셨는데 원치않는 미대를 고 집부려 갔고 또 소명의 길을 걷고 그렇게 결혼했다. 물론 후에는 인정하셨지 만 항상 목회자의 아내의 길이 힘들까봐 걱정을 하셔야 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아버지 희생으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눈물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셨다는 것 을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임종을 앞두고 남편의 인도로 예배드린 후 나는 모든 가족 앞에서 울며 고백 했다. “아버지, 아버지, 너무도 감사해요, 그토록 딸 넷을 사랑하시고 최고 의 교육을 시키려고 애쓰시고 어려운 친척들과 교회를 위해서 그 모든 책임 다 하시느라 이렇게 죽어가는 삶을 살아주셨네요. 우리 모두는 아버지 때문 에 이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가장 훌륭한 분이셨어요. 사랑 해요, 아버지, 이제 편안히 가세요” 아버지의 병수발하신 어머니께 감사해 놀랍게도 나를 쳐다보는 그분의 그윽한 눈가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508 no image |노트북을열며| 매너 있는 목회가 필요하다_변세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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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4 2009-04-29
매너 있는 목회가 필요하다 변세권 목사·온유한교회 몇 년 전 영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남성들은 여성의 신체적인 균형을 중요하 게 생각하며 다정다감한 성격, 사회성, 가정에 대한 충실성을 강조했다. 여 성들은 남자들의 근육질의 가슴이나 멋진 육체, 사회적 능력보다 지적 능 력, 유머 감각, 신뢰감, 진실성, 따뜻한 성품에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 났다. 표정 연구가 정연아씨는 ‘성공하는 사람들에게는 표정이 있다’라는 책에 서 ‘매너는 매력이다’라고 했다. 매너가 좋은 사람들을 대할 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알기 때문이다. 남보다 지혜롭 고 성공적인 삶을 살려고 한다면 반드시 매너를 익혀야 한다. 매너는 타인에 게 호감을 주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매너는 가장 확실한 매력 매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타고나는 것도 아니 다. 매일 잠자기 전에 하루를 점검하고 반성하여 그 날에 잘못했던 것을 고 r 쳐 나가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우선 매력적이고 교양있는 사람이 되려면 정 확한 표준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같은 말이라도 기왕이면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표현하도록 말씨를 가다듬어야 한다. 말은 자신의 내면을 나타내므 로 그 사람의 교양이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말에 대한 매너가 그 무엇 보다 중요하다. 세련된 말씨와 품위 있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사람이 아름답다. 마지막으로 웃는 얼굴을 유지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멋진 웃음을 표현해도 그 얼굴을 유지할 수 없다면 애쓴 보람이 없다. 웃는 얼굴을 최소한 10초정 도 유지할 수 있도록 연습해보라. 미소에 능숙한 사람은 모든 면에서 자신이 있고 능력이 있어 보인다. 사람 은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내면화된 모습에 맞추어 행동한다. 자신감이 없 는 사람들이 차츰 어리석은 사람으로 변해간다. 매너는 아름다움이다. 내면 의 자기 모습이 인간관계에서 드러나는 자기 연출이다. 이런 매너로 평소 교 회생활에서도 더욱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과 친절을 나타내 보여 줬으면 한 다. 성도들은 목회자의 어떤 면에 매력을 느끼는가? ‘목회와 신학’에서 서 울 에 소재한 교회를 대상으로 갤럽조사를 실시했는데 성도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설교’였다. 목사는 곧 설교자라는 등식을 입증한 조사였 다. 목회의 절정은 설교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역이야말로 하나님 께서 목사에게 주신 가장 위해한 일이다. 하지만 목회란 성도를 사랑하고 마 음을 다해 돌보며, 성도들과 함께 삶의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목양적 성품 이다. 그것이 설교 능력보다 더 중요하다. 존 나이스비트는 ‘대형화 추세’라는 저서에서 말하기를 첨단 과학기술 사 회에서는 사람들이 고도의 접촉을 갈망한다고 지적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 은 개인적인 접촉, 인격적인 만남을 통할 때 가능하다는 이론이 제시되고 있 다. 교인들은 목회자에게서 ‘나는 당신을 돌보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적인 일뿐 아니라 당신을 돌보고 있습니다’라는 인식을 얻어야 한다. 현대는 인격적 만남 요구돼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내면의 성숙과 함께 주님께 대한 사랑과 경외심 으로 다른 사람과의 대화와 만남에서 매력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한다.
507 no image |살구나무그늘아래서| 마음은 다시 천국이 되고_추둘란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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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6 2009-04-29
살구나무 그늘 아래서 마음은 다시 천국이 되고 추둘란 집사_수필가, 홍동밀알교회 “지옥에 가서 우리가 저렇게 타 죽어야 하는데” 보름 전 목장예배 때의 일입니다. 남편은 한 목원의 밥을 많이 푸지 않았다 는 핀잔으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더니, 예배가 끝나면 1박 2일 워크샵이 있 어서 태안으로 곧바로 가야한다며 미안한 기색도 없이 말하였습니다. 유난히 남편 핀잔 가슴에 닿아 내 마음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고 목장예배 내내 나눔이나 기도에 집중하 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몸이 지칠 때로 지친 상태라 어느 때보다 위 로와 칭찬이 절실히 필요한데도 남편은 그렇게 하기는커녕 불난 집에 부채질 을 하고 만 것입니다. 작년에 비해 올해에 직장일과 부업의 양이 많아져서 종종거리며 일주일을 삽 니다. 그런 상태로 금요일 오후에 퇴근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와 목장예배 의 애찬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느 때면 예배 30분 전에 와 서 아이들을 봐주거나 쓰레기통을 비우 고 방청소를 해주던 남편이 그날따라 목장예배 시간에 목원들과 딱 맞춰 들 어오는 바람에 어떻게 청소를 하고 식탁을 차렸는지 정신이 나갈 정도였습니 다. 그런 사정을 뻔히 아는 남편이 핀잔을 하였으니 철커덕 마음의 문이 닫 혀 버렸고, 예배 끝나고 설거지도 나더러 하라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 다. 그 일로 드디어 부부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입장이 있고 이유가 있고 정당함이 있으니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싸움은 하루를 지나 이 틀, 사흘 계속되었습니다. 급기야 주일낮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이 나와 남편을 불렀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겉도니 서로에게 직접 말하지 말고 목사님을 거쳐서 말하도록 해 주 었습니다. 중간에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무려 3시간을 이야기했으나 결론은 나지 않았고 남은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목장예배가 다시 돌아왔고 편한 마음으로 애찬을 하지 못하니 나는 급기야 체하고 말았고 예배 중에 나이 많은 목원들 계신 데서 드러눕 고 말았습니다. 갈등은 계속되었습니다. 주말에 남편은 나를 뺀 채 아이들만 데리고 대천으 로 기차여행을 떠났습니다. 어차피 나는 부업 때문에 주말에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보란 듯이 나를 빼놓고 나들이를 가다니 가슴만 시렸습 니다. 그날 저녁, 사위는 어둑어둑해졌지만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서 여기저기 갈 데를 꼽아 보았습니다. 직장 동료에게 가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할까, 차를 몰아 아무 데로나 끝까지 가볼까 별의별 생각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갑에는 달랑 5천원밖에 없고 마땅히 반겨줄 사람도 찾지 못해서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방에서 풍선을 갖고 노는 아이들의 기분은 나의 기분과는 사뭇 대조적이었습 니다. 말할 힘조차 없어서 작은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렸습니 다. 성경공부 숙제도 덜 했건만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일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얼굴로 주일 예배에 참석했는데 예배가 끝난 뒤에 목원들의 따뜻한 인사와 격려를 받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그 격려로 성경공부에 참 석할 만한 힘도 얻었습니다. 그날 성경공부 시간에는 소각식을 가졌습니다. 자신의 온갖 상처와 치유 받 아야 할 일을 허심탄회하게 쓰고,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과 용서를 해 주어 야 하는 사람에게 적나라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어 편지를 써오는 것이 숙 제였습니다. 그리고 써온 것을 촛불 앞에서 읽고 항아리 안에서 소각하는 의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차례대로 집사님들이 기도하고 편지를 읽고 소각을 할 때마다 내 속 이 얼마나 후련해지고 통쾌해지는지 항아리에 새겨진 십자가 사이로 활활 타 는 편지의 불꽃이 보일 때마다 기쁨의 탄성을 지르고 싶었습니다. 불꽃을 보 며 지옥도 생각했습니다. 지옥에 가서 우리가 저렇게 타 죽어야 하는데, 편 지가 대신 타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드디어 나의 차례, 그리고 남편의 차례 가 되었습니다. 소각을 하고 온 사람에게 나머지 사람들이 합심하여 기도를 해주는데, 남편 은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느 때보다 목청을 드높여 기도하였습니다. 얼마나 홀가분하고 얼마나 개운한지 마음을 그렇게 짓눌렀던 모든 괴로움이 한번에 날아가는 듯하였습니다. 소각식이 끝나고 자리를 정돈할 때 나는 남편에게 ‘싸우는 거 재미없네요. 그만해요. 바가지 긁는 대신 기도할게요’라고 넌지시 쪽지를 건넸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내 마음은 분명히 지옥이었습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 앞에서 돌아앉아 울고 있는 내 모습만 느껴졌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가 불타 없어져 버렸 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내가 새사람으로 가볍게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마음은 다시 천국이 되었습니다. 이틀 후, 목사님한테서 문자가 왔습니다. 소각식 때 한 사람씩 안수기도를 받았고 말씀을 받았는데 그때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 기지 못하여…” 하나님이 나의 수고를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들고 피곤한 것도 아시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온갖 섬김도 매순간 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 속에는 천국과 지옥도 있어 기쁘고 좋았습니다. 그 어떤 위로보다 강하고 강하여 다시 일어설 힘이 솟았 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꺼내어 보며 주님 음성 다시 새기려고 당장 핸드폰에 메모를 해두었습니다.
506 no image |채석포에서 온 편지| 실종된 나의 문화생활_김영자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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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9 2009-04-01
실종된 나의 문화생활 김영자 사모_채석포교회 “5천원으로 5만원 어치의 행복을 느끼는 것이 비결” 거실의 한 쪽에 놓아둔 화분에서 보랏빛 꽃망울을 활짝 터뜨린 천리향이 향 기를 집안 가득하게 채우는 봄입니다. 남쪽에서 들려오는 봄꽃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봄을 맞으려고 여행길에 나서고 있습니다. 봄꽃 소식 벌써 서산까지 올라와 며칠 전 시찰회 모임을 갖는 교회의 목사님께서 사모님들도 초대하여 좋은 시간을 마련해 주어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영화도 관람했습니다. 영화는 얼 마 전 개봉하여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워낭 소리’였습니다. 팔순 농부 와 마흔 살 소 사이에 맺어진 삶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든 영화 였습니다. 영화를 같이 관람한 사모님들은 제가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즐거워했습 니다. 어느 사모님은 그 영화에 담긴 내용도 중요하지만 맛있는 점심과 영화 를 관람했다는 사실 때문에 즐거워하면서 오랜만에 문화생활 을 누렸다고 행 복해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가 경제발전으로 인하여 1일 생활 권이 되었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 들이 누리고 있는 문화생활은 생활환경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것처럼 문화 를 이해하는 것도 다를 것입니다. 나의 경우 도시 생활에 익숙하여 농촌에 서 생활하는데 많은 시행착오를 범하여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많이 있습니 다. 지금은 농사를 대부분 기계로 짓지만 전에 사람의 손을 빌려 모를 심고 거 둘 때는 시골학교에서는 작은 손이라도 집안일을 도와주라고 농번기를 정하 여 며칠 간 학교수업을 쉬기도 했습니다. 또 처음 초등학교 교사 시절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써레질’을 몰라서 국어사전을 찾아보고 가르쳤으나, 반 대로 도시 경험이 적었던 시절의 농촌 아이들을 교육 시킬 때는 지하도와 육 교를 설명하기 위해 그림괘도를 가지고 이해시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문화의 홍수 속에 살고 있어 우리들의 오감이 더 쾌락적이고 즐거운 것을 찾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오래 전 3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학교에서 자유학습시간에 아이들을 데리고 냇가에 가서 송사리를 잡 고 겨 울의 난방을 위해 산에 올라가 솔방울을 줍던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오늘날 부유함 속에서 빈곤을 느끼는 시대에 영화 한 편을 보고 행복을 느꼈 다는 사모님의 순수한 마음이 아름답게 느껴지면서도 웬일인지 모르게 가슴 이 찡하게 저려옵니다. 총동문회 때 자녀와 함께 참석했던 어느 사모님은 교회 사택은 난방이 잘 되 어 있지 않아서 춥고 샤워도 집에서는 할 수 없는데 아이가 너무나 좋아한다 고 했습니다. 군중 속에서도 고독을 느끼는 것처럼 문화의 홍수 속에 사는 현대인들도 문화의 빈곤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나름대로 즐겁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내 자신을 돌아봅니다. 도시 문화에 익숙했던 나 역시 모든 것들이 생소하고 낯설은 시골 생활에서 깊은 문화적 이질감을 느끼면서 외롭고 때로는 고독할 때도 있었습니다. 가 끔 볼 일이 있어 서울에 갈 때 남편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타조는 좋아하 는 붉은 클로버를 보면 눈이 돌아간다는데 당신은 서울에 가까이 오면 눈에 서 빛이 나고 목소리에 생기가 난다”고 놀리곤 합니다. 그러나 막상 서울에 가면 계획 했던 것과는 달리 오감을 즐겁게 하기 보다는 생활을 위해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보내고 맙니다. 그래도 시간적인 여유가 조금 있으면 동대문 시장에 가서 자투리 천을 사기도 하고 아름다운 가게를 찾아 작은 돈으로 몇 권의 책과 옷도 골라 봅니다. 호사를 부리며 인 사동의 화방을 기웃거려도 보지만 항상 아쉬움만 남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파김치가 되어 아쉬움뿐이고 초라하며 궁상맞은 자신에게 화 가 났던 일들이 기억납니다. 계절이 바뀔 때 싸게 구입한 자투리 천을 이용하여 재봉틀로 커튼을 만들어 요리 조리 걸쳐 보며 즐거워하면서 누려 보고 싶었던 도회지의 꿈을 상쇄시 키며 조금 서투르고 엉성하게 보이지만 작품(?)이라 생각하며 자족하며 즐거 워합니다. 때로는 생활의 이질감으로 외로움을 느낄 때 산책을 하다 우연히 발견한 풀숲에 숨어 핀 이름 모르는 작은 꽃의 신비로움에 감격을 하면서 즐 거워합니다. 농촌에 살면서 도회지 것을 가끔씩 그리워하는 것은 동료들과의 만남에서 그 들에게 소외되거나 퇴보된 삶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있었 나 봅니다. 문화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도회지의 사람들은 그들의 지친 삶에 서 쉼을 얻으려고 도시를 떠나 산으로 바다로 쉴 곳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 고 시골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도회지에서는 맛 볼 수 없는 공기와 자연을 마음껏 누리면서 도시의 편리한 생활 대신에 시골스러운 환경 속에서 살면서 도 불편 없이 나름대로 생활을 만끽하며 살고 있는 것을 부러워 합니다. 우리는 꽃 시장에 나가 꽃을 사지 않고 시장의 채소전에서 봄나물을 사지 않 고도 밭에 심을 채소의 모종을 하우스 속에서 기르면서, 그리고 둑에 돋아 난 쑥과 냉이 달래를 밥상에 올리면서 행복해 하며 갈증 난 문화를 잊어버립 니다. 축구나 야구의 경기를 보기위해 운동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과 같이 함 성을 지르지 못하지만 텔레비전 앞에서 승리의 기쁨도 나누고 패배의 아쉬움 도 전달받고 있으면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생활에 민감하지 못한 남 편은 남편대로 가끔씩 바둑을 즐기는 동료들과 모여 담소를 나누며 회포를 풀기도 하면서 문화적인 갈증을 해소하기도 합니다. 꽃샘추위로 인하여 꽃나무들의 꽃피움이 잠시 주춤하여 미루어졌지만 곧 온 세상이 꽃구름과 꽃 대궐 속의 터널 속에 빠 져 들면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모두 다 아름다워 세상을 지으신 분께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지 위에 핀 수많은 아름다운 꽃과 풀들로 인하여 행복해 할 것입니다. 가끔씩 물 속에 있으면서 목말라 하는 어리석음과 같이 오감을 즐겁게 해주 는 자연 앞에서도 연극과 영화를 관람한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며 남편에게 투정을 부려 보기도 했습니다. 행복은 작은 발견으로부터 시작해 매화 꽃이 활짝 핀 남쪽을 그리워하며 후리지아 한 묶음을 사는 나에게 곱 지 않는 눈길을 주는 남편에게 “5000원으로 50000원 어치의 행복을 느낄 것”이라며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봄의 문턱에서 내게서 실종된 문화생활을 누려 보려고 합니다.
505 no image |하늘이슬로쓴편지| 실패하지 않는 사랑_이영란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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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1 2009-03-18
실패하지 않는 사랑 “우리는 실패하나 주님의 사랑에는 실패 없어” 이영란 사모쪾좋은소식교회 늘 마음 쓰이는 아이들이 있다. 주일 예배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강구해 보았지만 늦게까지 컴퓨터 게임을 하고 아침 에 일어나지 못한다. 주일마다 늦잠 자는 아이들 2년이 다 되도록 평일에 만나왔고 주일예배를 드리기도 했는데 고학년이 되 면서 말도 잘 듣지 않는다. 늘 이름 불러 기도하며 자주 전화하고 적절한 기 회를 만들어 불러내 만나고 있다. 하루저녁은 밥을 먹은 후 찬양을 몇 곡 힘 있게 따라 부르게 하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삶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간곡한 권면을 했다. 중학생이 된 아이도 있었기에 더욱 간절했다. 그리고는 호소인지 교훈인지 분간이 안되 는 기도를 따라 하게 했다. “이렇게는 살 수 없습니다. 변화되게 해주세요. 컴퓨터, TV에 너무 중독되 어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게 해주세요, 꿈을 주세요,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갑자기 기도 소리가 커졌고 아이들도 교회가 떠나 갈 듯 크게 따라했다. 15년 전, 이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였던 나의 아들도 엄마의 기도를 따라했 다. 애간장이 끊어지듯 간곡한 절규 같은 기도였다. 아이로 인한 고민이 커 져만 갔다. 아이가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된 것이 없이 그 반대로 형성되는 것만 같았다.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나는 점점 고개 숙인 여자가 되었다. 아이를 잘 못 키웠다는 생각에 오그라질 대로 오그라진 작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이 아이만 아니면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을 텐데...’ 결국 나는 실패한 인생이 되었구나 싶었다. 얼마 전, 이 아이들 중에 한 엄마도 고통을 호소해 왔다. “거짓말하고 순수 하지 못한 이 아이 때문에 내 삶이 너무 복잡하게 꼬여왔어요. 친척들 가운 데도 매정한 엄마가 되게 만드는 아이가 정말 미워요, 이젠 포기했어요.” 핸드폰 요금이 엄청나게 나왔고 이성과 채팅한 것을 알게 되서 더 그랬다. 그동안 아이 문제를 간간히 토로해왔고 그때마다 힘들었던 내 이야기를 해주 었다. 교회가 아이를 돌봐주니 교회 멀리로 이사 도 못가겠다고 했던 그나마 희망을 갖고 있는 엄마다. 그 엄마에게 아이는 반드시 변화된다고 했다. 그 러나 아이가 변화되는 것은 엄마의 사랑 밖에 없으며 그 사랑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고 했다. 신앙생활을 하자고 간곡히 권했다. 나 역시 아이에 대한 미움과 엄마로서 실패했다는 엉키고 설킨 엄청난 실타 래 앞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독대하는 자리가 되었고 나는 아이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엄마로 변화되었다. 절망하는 내 안 깊은 곳에서 따뜻하고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네가 네 아이를 좋아하면 된다!’ 나는 깜짝 놀랐다. “좋아 하라고요?” 그때부터 나는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안아주기로 결정했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놀이공원에 단 둘이 다녀왔다. 토요일마다 책방에 데리고 갔다. 작 은 것부터 한 가지씩 하는 가운데 어느 때인가부터 아이에 대한 좋은 감정 이 생겼다. 물론 아이도 엄마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풀릴 수 없었던 실타래가 이렇게 풀려갔다. 엄마가 원하는 것을 아이가 원하게 되었으니 기 적이 일어난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아이들을 붙잡고 기도하는 중에 하루를 같이 지내야겠 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일예배에 참석케 하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 다. 주일예배에 참석케 하려고 교사들과 얼마나 맘고생을 했는지 지금도 고 통이 느껴진다. 부모의 부재 속에서 언제 전화해도 늘 컴퓨터와 TV 앞에 있 는 아이들이다. 아이들과 좀 더 가까워져서 서로 통해야 한다는 생각이었 다. 교사들과 의논해서 스케이트를 타고 게임도 하고 어린이 예수 영화도 보았 다. 신앙이 좋은 여자아이 세 명을 포함시켰다. 모두 8명이였다. 주일학교에 서는 한 달 전부터 고린도 전서 13장을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 이 아이들도 시간마다 몇 절씩 외우게 했는데 그날 밤, 남자아이 두 명이 밤 1시가 넘도 록 차가운 강단 미등아래서 읽고 또 읽으며 서로 암송을 하였다. 자라고 야단도 했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하며 외우는 아이들을 들여 보내고 나서는 그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아 “하나님, 이 아이들을 알고 계시 지요! 정말 소중한 존재가 아닌가요, 주님이 아니면 소망이 없습니다. 이 아 이들에게 복을 주시고 만나주세요, 준비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드렸 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설교할 때는 설교 내용에 맞추어 마치 준비라도 한 것처럼 아이들 입에서 파도를 타듯 성경구절이 터져 나왔다. 아이들의 미래 가 한층 소망스럽게 보였다. 우리 아이도 성경을 통하여 자신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중학생이 되어 서 아빠의 권면을 받아들여 팔일 만에 성경 전체를 통독했다. 책상에 15분 도 앉아있지 못하는 산만한 아이가 그 이후로 점차 변하기 시작했고 그 해 겨울에 신약을 또 한 번 통독하고 그 이후 10여 년간 성경을 읽는 청년으로 자라갔다. 공부 빼놓고 컴퓨터를 포함하여 온갖 잡기에 최고의 가도를 달리던 아이가 성경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바닥을 치던 성적을 올리려고 피눈물 나 는 노력을 했다. 미래를 준비하는 십대를 보냈다. 그렇게 말 안 듣던 작은 아이가 어느덧 하나님의 꿈을 품은 청년이 되어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다. 얼마 전에는 “엄마. 사람을 사랑함이 많아져 정말 행복해요”라고 하는 것 이 아닌가! 나는 이 아이들도 놀랍게 변화될 줄 믿는다. 중학생을 포함한 다섯 명의 남 자아이들을 데리고 잤던 남편은 장년예배 때 “장차 세상을 변화시킬 위대 한 존재들과 하룻밤을 같이 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아 이들 하나하나가 하나님 나라의 큰 나무가 될 씨앗들이다. 당장은 열매가 안 보이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딜 것이다(고전 13:7). 자식 때문에 불행을 호소하던 그 엄마도 내게 임했던 회개의 은혜를 통하여 자식을 사랑하고 좋아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이 작은 아이들을 끝까 지 인도하실 주님의 사랑 앞에 엎드린다. 하나님께 묵묵히 기도할 뿐 우리는 실패하나 주님의 사랑은 실패가 없으시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 어지지 아니하나”(Love never fails, 고전 13:8).
504 no image |채석포에서 온 편지| 뜨거운 김이 오르는 목욕탕에서_김영자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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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4 2009-03-04
뜨거운 김이 오르는 목욕탕에서 김영자 사모_채석포교회 “내가 먼저 마음 열 때 행복감 느끼게 돼” 봄이 되면서 밤낮의 심한 기온 차이로 뿌연 안개가 시야를 흐리게 하지만 안 개가 걷히면서 따스한 햇살이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온천 풍경 이제는 익숙해져 베란다에 있는 천리향이 꽃망울을 피운지가 오래되었는데 변덕스런 날씨로 인하여 활짝 꽃을 피우지 못하고 따뜻한 볕을 기다리고 있어 나의 관심을 갖 게 되었습니다. 봄볕에 두꺼운 외투를 벗고 가벼운 옷을 입으면서 겨우내 묵 은 먼지를 털어 내기위한 청소를 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워봅니다.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가 지난 지금 마을에서는 고추씨를 묘판에 심어 일년 농사를 준비하고, 어부들은 봄 바다에 꿈을 갖고 출어 준비에 한창 바 쁜 나날을 보냅니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작년의 유류 피해의 후유증으 로 고기가 이곳 바다를 떠나고 없어서 빈 그물로 돌아오는 날이 많다고 합니 n다. 그래도 걱정을 하면서도 매일 매일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바다에 그물 을 내립니다. 직장인들에게 휴가가 있듯이 농어촌에서도 농한기 중이어서 아직은 여가를 즐기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반상회 및 여러 종류의 친목계가 있어 여기 저 기 여행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마당발인 김 집사님께서는 제주도를 10번이 나 다녀오셨다며 환하게 웃으시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는 성도들과 같이 먼 곳으로 여행은 갈 수 없지만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온천이 있어 어른들 을 모시고 가끔씩 다녀옵니다. 처음 집사님 한 분이 같이 온천을 가자고 했을 때 너무 난감했었습니다. 성 도와 같이 목욕을 한 일도 없었거니와 그 누구하고도 목욕탕에 간 일이 없었 기 때문입니다. 단체로 온천에 갈 일이 있어도 몸 상태가 안 좋다고 양해를 구하면서 피했습니다. 몸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아는 사람들 에게 나를 보인다는 것이 부끄러워서였습니다. 채석포에 처음 왔을 때 어느 날 가까운 곳에서 야외예배를 드리고 온천에 가 기로 했습니다. 약속의 날이 되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핑계를 대자 니 성도들을 사랑한다고 말로만 하고 같 이 옷 벗는 것이 부끄럽다고 할 수 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회개의 기도가 나왔습니다. 목욕조차도 같이 할 수 없었음이 교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날이 왔습니다. 젊은 여자 집사님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허 리가 불편하고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는 연로한 집사님들을 모시고 여탕의 문 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옷을 벗고 어른들을 도와서 자리를 잡고 머리를 감 겨 드리고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몸을 씻겨 드리면서 회개와 기쁨의 눈물을 흘 렸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이 온 집사님들도 있었지만 나에게 몸을 맡긴 어른들 은 편안하고 고맙다고 몇 번씩 칭찬했습니다. 칭찬받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니 고 내 자신을 깨치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송구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여러 사 람의 등을 밀어주다보니 팔이 아프고 힘이 들었지만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 일을 시작으로 성도들이나 아는 사람들과의 목욕이 자유로워졌습니다. 연세가 많으셔서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자유롭게 목욕탕에 갈 수 없는 어 머니를 찾아 갔습니다. 목욕탕 안에 있는 긴 의자에 어머니를 눕히고 몸을 돌려가며 닦아 드렸습니다. 90세가 넘 어 힘이 없으신 어머니의 휘어진 몸과 앙상한 뼈만 있는 어머니를 보며 자꾸 내 몸에 물을 뿌렸습니다. 눈물이 보 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잘 찾아뵙지도 못하고 그렇게 당당하며 건강했던 어머니께 서 야윈 몸을 딸에게 맡기고 있는 모습에서 어머니에 대한 나의 사랑이 전달 되었나 봅니다. 딸이 어머니의 몸을 닦아 드린 것이 당연한데 나에게 고맙다 며 앙상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았습니다.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열 달을 있다가 세상에 나오는 인간은 누구나 물을 좋 아한다고 합니다. 갓난아이들은 몸에 물을 묻혀 주기만 해도 잠을 잘 자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편과 나도 가끔 채석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예산군 덕산리에 있는 온천에 갑니다. 우리가 있는 교회의 주위는 해송만이 보이는 이곳에서 계절을 느낄 수 없는 것들을 가는 길목들에서 보여 지는 초목들로 인해 봄이 오는 소리도 듣고 가 을의 황금빛 단풍을 보기도 하며 하얀 눈발을 즐기기도 합니다. 온천장 주인 인 권사님께서는 목회자와 가족들에게 온천 이용료를 수년이 흘러도 변함없 이 3000원만 받는 곳이 있습니다. 목욕을 할 때 많은 것을 생 각하게 합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태리 타올 로 몸을 문질러 때를 벗깁니다. 몸의 때를 벗기면 시원하고 개운 하듯이 내 영혼의 때도 다 벗겨지기를 원하면서 기도를 합니다. 나의 말 한마디로 인하 여 상처 받았을 영혼들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게으른 삶을 살았던 그 모든 것들을 낱낱이 토설해 보기도 합니다. 목욕할 때는 자유와 평등을 느낍니다. 젊은 사람들의 몸을 보며 나의 젊은 날을 돌아보기도 하고 구부러진 허리와 앙상한 어른들에게서 나의 미래를 보 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그 곳에서 일장춘몽 같은 많은 계 획과 도전도 꿈꾸어 봅니다. 손이 닿는 곳은 때를 벗길 수가 있는데 손이 닿지 않는 등이 문제입니다. 마 트에서 혼자 등을 밀 수 있는 효자손 같은 것을 샀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족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의 굳어진 입을 열기 시작하여 혼자 오신 분을 찾 아가 “등 좀 같이 밀까요?” 하고 먼저 등을 닦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혼자서 열심히 때를 다 밀고 등을 밀지 않으면 개운치가 않았는데 내가 먼 저 입을 여니까 상대방과 내가 기뻤습니다. 내가 조금 힘들어도 남의 등을 밀어 주고 온 날은 뿌듯함으로 행복했습니다. 사모세미나와 총 동문회에서 많은 말씀을 듣고 부질없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 게 살고 있는지 내 신앙을 반추해보며 더 가까이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다 짐도 해봅니다. 효자손만으로는 2% 모자라 요즈음 같이 하루 종일 안개로 인하여 햇빛보기 힘든 날에는 몸도 찌뿌드드 하고 기분이 우울할 때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목욕탕에 가고 싶습니다.
503 no image |살며 생각하며| 교회 개혁의 기준_촤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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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7 2009-03-04
교회 개혁의 기준 최재호_본보 객원기자 “교회는 말씀에 의해 세워지고 길러지며 인도된다” 우리는 교회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말들을 종종 듣는다. 교회개혁이란 용어 가 더 이상 우리에게는 낯설지도 어색하지도 않은 친숙한 단어로 다가오고 있다. 너도나도 부르짖는 교회개혁 혹자는 교회가 권력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는 교회가 비민주적으로 운 영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교회의 지각이 어두워져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참 뜻에 무지한 까닭이라 말하기도 하고, 각자의 진리 체계와 자신만의 신 (神)을 가진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탓이라 설명하는 이도 있다. 어쨌거나 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교회상을 가지 고 교회개혁을 부르짖고 개혁의 전사로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 그들이 바라는 개혁의 이유와 본질, 그로 인한 결과는 제각각 다르며 그 어떤 명확 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우리는 항상 교회란 무엇이며, 어떻게 교 회로서 바르게 서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여야 한다. ‘교회의 교회됨(개혁)’에 대해 원리적 고찰과 점검을 통해서만이 교회됨의 자리를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렇다면 과연 무엇이 교회개혁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구원과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 획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에서는 ‘신구약 성경말씀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유일한 법도(규칙)’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 말은 바 로 신구약 성경말씀만이 유일한 신앙과 삶의 표준임을 보여주며 교회개혁의 기준이 바로 성경말씀임을 확인시켜 준다. 우리 시대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관점과 가치를 가지고’ 교회가 개혁되어 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 로 절대기준이 되어야 할 말씀이 서야 할 자리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재 차 강조할 점은 교회는 절대로 민주적 운영이나 합리적 이성, 투명한 조직 운영, 사회적 베풂 등을 교 회가 지향해야 할 절대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 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근거하고 있는 기관으로서 교회는 반드시 말씀에 의해 세워 지고 말씀에 의해 길러지며 말씀에 의해 인도된다. 이 일을 위해 목사와 장 로, 집사 등 ‘직분’이 교회가운데 허락되었고 말씀에 의한 그들의 사역을 통해 말씀이 교회의 중심과 기준이 되어 교회됨을 이루고 보존해 가게 된 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체(媒介體)로 하여 성령 하나님께서는 효력있는 부르심 으로 선택된(예정된) 교회를 역사 속에서 부르시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 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어 상실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지 각하고 찬송하며 선포할 수 있도록 하신다. 오직 교회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각할 수 있으며 자신의 존재목적과 의무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 다. 이 일을 위해 성부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교회를 ‘선택’하셨고, 그 교회 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님은 고난과 대속의 죽으심을 ‘실행’하셨으며, 그분 의 때에 섭리를 통해 성령의 부르심으로 부르시어 계획하심을 ‘적용’하신 것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지으셨으며 우 리에게 그분의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일컬음 받을 수 있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허락하셨다. 우리는 쉼 없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살펴 그분의 영광을 투영할 수 있는, 그 분의 존재와 그분의 성품 나아가 그분의 뜻과 계획에 대해 알고 믿고 경배 와 찬송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말씀을 살펴 세상과 악으로부터 구 별하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함에 대해 자각해 나아가야 한다. 계시된 말씀에 입각해 있어야 말씀대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고 거부한 사단과 그들의 세력 들에게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될 때 하나님의 영광은 극명하게 나타나 게 될 것이다.
502 no image |살구나무그늘아래에서| 하나님이 살려주셨지_추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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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0 2009-02-25
하나님이 살려주셨지 추둘란 집사_수필가, 홍동밀알교회 “숨쉬는 순간마다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어” 얼마 전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세 살배기 남 자 아이가 콘센트에 젓가락을 꽂아 감전사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한순간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해 조금 전까지 함께 밥을 먹던 아이가 등 돌린 몇 초 사이에 주검으로 변했으 니 사고를 당한 엄마의 가슴이 얼마나 저리고 아팠을까, 그 마음이 열 번도 더 헤아려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달에 우리집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1 월 1일 오전이니, 잊어버리지도 않습니다. 자정에 송구영신 예배를 드린 터 라 여느 때보다 늦잠을 잤습니다. 나와 남편, 민해는 여전히 이불 속에 있는 데 부지런한 민서는 혼자 일어나 놀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잠에서 깰락 말락 한 상태였기에 ‘퍼퍼벅’하 며 폭죽이 연달아 터지는 듯한 소리에 용수철처럼 잠자리에서 튀어 나왔습니 다. 눈썹 몇 번 깜빡거릴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민서가 있는 곳에서 불 꽃이 튀고 있었고 연기가 군데군데 자욱하게 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순간 비명을 지르며 남편을 부르는 한편 민서를 찾았습니다. 민서는 불꽃에 놀라 소리를 지르고 내 비명에 놀라 한번 더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행히 민 서는 무사했습니다. 말 그대로 순간이었습니다. 1초와 2초 사이에 일어난 일 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꽃과 연기 사이에서 민서를 찾는 그 시간은 한없이 길 고도 무서운 시간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민서를 살피니 손바닥에 좁쌀만한 화상만 여남은 군데 있을 뿐이었습니다. 또 주위를 살피니 콘센트에 젓가락 두 개가 나란히 꽂혀 있 고 불꽃 때문에 하얀 그릇장의 표면에 탄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방바닥에 높낮이가 다른 장난감 상자들이 둥그렇게 줄지어 놓여 있는 것을 보면 평소처럼 드럼놀이를 한 게 분명합니다. 부침개를 부칠 때 쓰는 스테인 레스 뒤집개를 드럼 스틱 삼아 상자를 두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젓가락을 두 개나 꽂을 때까지 민서가 멀쩡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따름입니다. 민서가 상황을 설명할 수 없으니 이렇게 저렇 게 추측해 볼 뿐이지만 이번에도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민서를 살려낸 것이 지, 그 어떤 추측으로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민서는 이번뿐 아니라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뱃속에서 8개월 되 었을 때부터 하나님은 민서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날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가려다 무슨 마음에선가 외출하지 않고 집에 남았는데 아마 함께 나갔더라 면 민서는 지금 이 세상에 없을지 모릅니다. 집과 멀지 않은 곳에서 남편의 차가 충돌사고를 당하여 길가 밭으로 추락하 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눈썹에 남아 있는 흉터가 아직도 그날 의 사고를 말해주고 있는데 그때는 남편이나 저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전이 라 죄인 되고 원수 되고 연약했던 우리를 살피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손길 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어느 해 설 연휴에는 친정 가는 길에 좌회전하는 학원차량과 충돌하여 우 리 차를 폐차시키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빙판길이었고 맞은편에서는 덤프트 럭이 달려오고 있었지만 민서를 비롯한 우리 가족은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았으며 더 좋은 차를 렌트하여 친정 으로 무사히 갈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서울에서 온 손님과 함께 태안 바닷가에 나들이 갔을 적에는 운전 자가 졸면서 운전하는 바람에 국도에서 논둑으로 미끄러지는 사고가 났었습 니다. 무게중심이 위태로운 차에서 가만가만 내려 눈으로 확인하여 보니 몇 십 센티미터 차이로 경운기 진입로에 걸쳐지는 덕택에 논둑 아래로 곤두박질 치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있습니다. 바닷가에 석굴구이를 먹으러 갔던 날 민서가 식당 안팎을 드나 들며 뛰놀았는데 어느 순간 기분이 이상하여 민서를 찾았습니다. 주차장 바 닥에 앉은 민서를 보자마자 내가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더니 그제야 흰 색 승용차가 민서를 보고 놀라서 차를 세웠습니다. 움직이던 그 차의 바퀴가 정지된 곳은 다름 아닌 민서의 외투자락이었습니 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순간이었고 생각할 때마다 소름이 쫙 끼쳐오는 것 을 느끼곤 합니다. 그날 찍은 사진만 보아도 “하나님이 살려주셨지”하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부모이지만 언제 위험이 닥칠지 알 수 없고, 알았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그 숱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었으면 어찌 민서가 무사했 겠습니까? 이 육신의 눈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는 없으나 그 크신 손길 로 충돌해오는 상대편 차량을 밀어내고, 미끄러져 추락하려는 우리 차를 멈 추게 하시며, 심지어 흐르고 있는 전기를 일순간 막아주시는 그 손길을 절실 히 느낍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운증후군으로 인한 정신지체 3급의 장애아가 무어 그리 소 중하고 자랑스러우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민서 덕분에 우리 가정이 하나님께 로 돌아왔고, 민서 덕분에 관심도 없던 장애인들을 만나고 이해하게 되었고 장애인부모운동을 하게 되었고, 민서 덕분에 연고도 없는 마을에서 이웃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살고 있으며, 민서 덕분에 날마다 웃고 감동하며 살기 에 다른 가정이 아니라 우리 가정에 민서를 보내주신 것이 바로 복 중의 복 으로 여겨집니다. 이즈음에는 남편과 나의 입술이 아니어도 마을 사람들과 성도들의 입술에서 “이 가정에 민서가 없었다면 이 같은 복을 어찌 누릴까?” 하는 고백이 흘 러나오고 있습니다. 민서를 감당할 수 없을 것같아 두려워 흘리던 눈물이, 숨 쉬는 순간마다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감사하여 흘리는 눈물로 바 뀐 지 오래 입니다. 지금까지 민서를 지키시며 민서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일이 크지만 앞으로 는 또 무슨 일로 민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지, 민서의 키가 자 라고 속내가 자란 것을 볼 때마다 기대도 함께 커져 갑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돌보심 보여 나는 민서의 엄마입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를 선물해 주셨고 그 자리가 만족 스럽고 좋습니다. 행복합니다. 그 마음은 민서를 친히 지켜주시는 하나님만 이 아실 터입니다. 할렐루야!
501 no image |살며생각하며| 깔뱅의 기독교강요 - 그 보편함과 특별함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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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2 2009-02-11
깔뱅의 기독교강요 - 그 보편함과 특별함에 대해 리종연 목사·진명교회 “하나님과의 돈독한 사귐이 글 가운데 녹아져 있어” 사람들은 기독교강요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말한다. 괴이한 일은 신학자 같 은 부류들이 독무대처럼 깔뱅에 대해 말하면서 강요를 거들먹거린다. 어떤이 는 무슨 큰 오류나 결함이라도 찾은 양 떠벌이기도 한다. 기독교강요에 대한 평가 난무해 깔뱅의 다른 글들을 원전으로 읽어보았는가? 나아가 교회개혁 당시 여러 부 류 사람의 글들을 얼마나 많이 정확하게 읽어 제대로 깨달아 정리하고 있 나? 묻고 싶다. 어떤이는 지금의 상황을 앞세우면서 경거망동하게 코흘리게 앞에서 깔뱅의 해석을 깔아뭉개기도 한다. 불경건한 자들 앞에서 말이다. 옛 교회에서 말씀 을 다룬 선진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오늘날 교회를 올바로 섬기기 어렵다. 신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어떤 글보다 기독교강요에서 오해하는 경우 가 많다. 깔뱅보다 똑똑한 사람이 너무 도 많다. 바르게 접근하는 자세 가져야 강요의 성격과 틀거리를 로마 카톨릭의 토미즘을 흉내낸 것이라고 코웃음치 는 이도 있고, 네오 플라토니즘에 엮어서 고소하는 자들도 많다. 그런가 하 면 이른바 사도신경의 확대 정도로 지나치기도 한다. 초판과 마지막 판을 버 무려서 제 생각으로 덧칠하기도 한다. 우리가 적어도 성경에서 교회가 영적으로 어떠했는지를 궤뚫어야만 강요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개인의 경건 정도는 마땅하고, 시대의 역사적 사명 을 어떻게 구현했는지 교회의 처음부터 과정, 과정에 대해 한눈으로 통찰해 야만 한다. 게다가 한낱 개교회주의라는 이교주의 심보가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어떤지 를 통체로 놓고 헤아려야만 제대로 보인다. 좁은 소견으로 조잡 떨어야, 몰 상식 가운데 잘난 체 해봐야, 제 위치나 교회의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읽으나마나 이다. 자신의 역사적 위치에서 통찰해야 짜임새를 보면, 하나님에서 차름하여 그분의 나라에 관한 글로 마친다. 하나 님의 자기 계시를 사람에게 교회에게 어떻게 드러내시는지를 간단하게, 핵심 을 놓치지 않고, 냉철하면서도 불타오 르게 일관한 내용을 그린다. 이 안에 교회와 세상을 놓고 성도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섭리와 경륜을 펼치시는지 당 시의 한계 가운데 피땀을 짜내는 갓댐이다. 지난날 교회에게 주신 보편한 도리를 섭렵하면서, 당시를 주름잡으면서, 앞 날의 교회를 위한 징검다리를 성실하게 제시한다. 그 흔한 교리체계를 앵무 새처럼 엮어나가지도 않으면서, 제 상황과 위치에 기울어지지 않으면서, 특 별하게 거룩한 도리를 그려나간다. 적어도 열 차례 넘게 통독을 하지 않는다 면 감히 무어라고 강요를 말할 자격이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지 않 고는 올바로 받지 못한다! 여러 주제들을 살펴보아도 글로 표현하는 한계 가운데서 얼마나 겸손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서술하는지 같은 때 살면서 옆에 서 그를 지켜보는 듯하게 풀어나간다. 네 권의 어디를 펴본다 해도 유기적 인 체계라는 것을 단박에 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살매를 성경주석과 성경선포를 병행하면서, 원수들과 쟁투의 연속 가운데 강요를 다듬고 다듬었 다는 사실이다! 강요는 진리를 위한 투쟁의 산물 오늘날 삯꾼들이 널려있는 때, 학문수준과 인격수준에 구멍뚫린 가짜들이 즐 비한 때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놀라운 길잡이인지 모른다! 이른바 성령론에 넣고 생각할 만한 주제를 보아도 바른 개혁신앙이란 성령님의 사역을 어떻 게 힘입어야 하는지 참된 자유 가운데 거룩한 거을 너무도 뚜렷하게 가르친 다. 보편함과 특별함을 한 손에 잡고 시대의 사선을 넘어서 승리한 고백을 그린다. 강요의 첫째 책만 보아도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뜸으로 내세우면서 성경을 방편 삼으며 그 계시 내용은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이라고 멋지게 선언한다. 두째 책에서는 계시가 담는 뜻도 그러하지만 사람에게 나타내서 하나님을 증 거하시기에 사람의 주제파악을 위해 거덜내면서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이미 제시한 삼위일체를 전제로 그리스도의 신분과 중보직을 통해 그 실현을 가르 친다. 여기에서도 성경을 어떻게 다루는지 주목해야 한다. 세째 책에서는 성령님의 사역과 선한 일의 영원하신 뜻을 밝힌다. 이른바 틀 에 박힌 성화론이 아니다. 여기서도 은혜의 방도로서 성경의 쓰임새를 다룬 다. 십자가의 도리를 드러낸 것을 깨달아야 한다. 네째 책에서는 교회와 신국을 다룬다. 여기서 가르치는 교회의 본질 과 표지 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기독교의 보편함과 특별함 망라해 하나님을 알도록, 하나님 되심을 계심과 하심으로 알리시되, 하나님이며 사 람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인 작정의 실현으로써 교회의 완성을 내다 보면서 땅 위에서 신국의 백성인 성도들로 하여금 어떻게 드러내시는지 정리 한 글이다. 자신을 도무지 나타내지 않고 성경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려고 얼 마나 전력하는지 모른다! 이 사실을 교회와 그 지체를 쓰셔서 땅에서 어떻 게 드러내시는지 생생한 실제로써 알려준다. 어떤 곳에서는 옛날과 그 당시 일들을 보기로 내세움으로 얼마나 살아있는 글인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인문사회의 여러 글들을 직접 간접으로 제시한 다. 하나님의 영광과 오직 성경,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일성, 나아가 오직 성 령으로 거룩한 달음질인 시민권과 십자가를 도처에서 달군다. 신국의 도래 를 바라며... 신국 백성의 도리 정확하게 보여줘 예사로 현대 교의신학 체계를 앞세워 어느 부분을 도마에 올리기도 한다. 과 연 그럴 정도일까? 논리로 보아도 그렇고 성경에 비추어도 이렇게 균형있게 올곧게 적은 글이 얼마나 있는가? 지난날과 당대, 앞날을 내다보면서 교회 를 놓고 그 실제와 궁극의 영광을 이렇게 시원하게 풀어낸 글을 또 누가 썼 는가? 글 쓰는 목적과 방식, 마음이 글 가운데 그대로 녹아있다. 하나님에서 하나 님과 사귐을 이렇게도 통렬하고 예리하게, 헛점을 보이지 않고 철두철미 기 록한 글을 또 누가 적었는가? 깔뱅의 다른 여러 글들에서 거듭 확인해 보 자. 성경에서 비롯하여 삼위일체와 교회와 세상 가운데 신국을 질서있고 뜨겁게 그려나간다. 여기서 예정 가운데 부름받은 하나님 백성의 상태와 자세를 역 설한다. 성경이 무엇인지, 신앙고백이 무엇인지 밝힌다. 역사상 헛점 없이 기록된 강요(綱要) 기독교강요 네 권을 훑어보았다. 깔뱅의 숨결을 느끼는가? 그와 가까이 사귐 을 아는가? 어제의 교회와 내일의 교회 가운데 있는 교회로서 강요를 성령님 이 어떻게 쓰시는지 확신하는가? 강요를 올바로 받는다면 하나님은 읽는이에 게 무엇을 바라실까? 저마다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그저 신학작품의 하나로서 본다던가, 체면치레로 여기려고 들춘다던가, 시대 의 보편한 역사적 사명 을 잊고서 본다던가, 단지 지식욕으로 채우려 본다면 질못된 다가섬이다. 보편하면서도 특별한 성격을 전제하고 다가서야 한다. 지극히 적은 사람이 강요를 올바로 읽는다. 온전히 겸허하고 겸손하게 다가서야 신관에서 사관에 이르기까지 우리 자신은 어떤지 이 책으로 떠보자! 한 글짜 라도 가볍게 보지 말고 그가 얼마나 애통하는지 얼마나 사모하는지, 얼마나 열심있는지, 하나님을 따른 걱정에 사무치면서 읽자! 고린도후서에서 바울 의 고백과 시편에서 다윗의 고백과 같은 자리에서 확인해 보자!
500 no image |노트북을열며| 변덕은 변화를 가져온다_변세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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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0 2009-02-11
변덕은 변화를 가져온다 변세권 목사·온유한교회 “실패 통해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 성장하기 마련” “성을 쌓아 안주하는 사람은 반드시 망하지만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들은 살 아 남을 것이다.” 이 말은 트루크 제국의 명장 돈유쿠크의 말인데 현대인들 에게 유목민의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현대인들에게는 변화가 필요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비관론에 빠져있다. 예수를 믿은지 오랜 시간 이 지났는데도 왜 내 믿음은 늘 그 자리이고 마치 성을 쌓고 안주하는 것처 럼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변화도 목격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고민이 다. 우리는 아예 비관론에 빠져있다. 해봐야 믿음이 자라지 않고, 해봐야 목회 가 안 된다는 포기된 마음을 가지고 산다. 믿음은 정말 그렇게 비관적일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계신데 믿음이 성장하는 사람들의 인격적 특징은 변덕이 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세계 최대의 권력자 중 한 사람인 애굽의 파라오가 그 당시 얼마 나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는지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파라오의 위선 의 모습에 그리고 파라오의 이중적 인격에 실망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 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성장하는데 있어서도 변덕은 기본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변덕은 필수다. 변덕스럽지 않고 믿음이 자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남 자와 한 여자가 사랑하는 데도 변덕은 사랑을 연계시켜가는 필수 과정이 된 다. 한 중년의 아내가 남편에게 아주 그윽한 눈빛으로 물어보았다. “여보, 나 사랑해?” 아직까지 사랑이 남아있는 애처가는 어떻게 대답을 하는가? 아내 손을 꼭 잡고 아니면 아내를 안아주면서 “그걸 꼭 말해야 알아?” 그러면 서 다정하게 말해준다. 그러나 간이 큰 남자는 어떻게 말하는가? “내가 너 를 사랑하지 않아도 밥은 먹여줄테니 걱정하지 마라”고 대답한다. 엽기적 인 남편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째려보고 있다가 운동 복 들고 밖으로 나가 버린다. 이렇듯 사랑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는 법이다. 우 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변덕은 기본적인 과정이다. 결국 할거면 서도 못한다고 튕겨야 직성이 풀린다. 여기에 속는 목회자는 아직은 초보이 다. 그래서 목사들은 연말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모른다. 며칠 전 우리 교회에 설친교 모임이 있었다. 우리교회에는 김O숙 A, 김O숙 B,김O숙 C라고 하는 세 분 집사님이 계셨다. 김O숙이란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켠 뭐가 콱 막혀서 힌듯 가슴이 늘 답답했다. 뭐가 그리 섭섭하고 서운한 지 오랜시간 약속을 한듯이 세 사람이 야속하게도 다 그랬다. 그런데 어제 그동안 장기결석했던 a.b집사님이 평소 비주류은사(?)를 받은 권사님이 그들을 어떻게 교회로 데리고 왔다. 순간 장기 결석을 해서 올해 제직임명도 하지 않았는데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집사님들이 와서는 “목사 님, 죄송해요 속만 썩여드려서요... 앞으로 열심히 할게요” 말하는 것이 다. 나는 이것으로 오늘 상황이 종료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이 번에는 제일 젊은 여전도회 회장이 오더니 “목사님, 김O숙 C 집사님이 아저 씨하고 교회에 나오시려고 한 대요.” 순간 오늘 무엇엔가 홀린 줄 알았다. 그렇게 머리를 희게 만들어 놓았던 A, B, C 집사님들이 어떻게 한 날에 그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 한 순간에 그간의 마음 고생이 다 사라지고 “아! 이래서 목회를 이어가는구나” 했 다. 하기야 모세도 하나님 앞에 여섯 번이나 못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런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하나님이 파라오를, 모세를, 그리고 우리를 쓰시는 가 보다. 이스라엘 백성은 또 40년 동안 얼마나 변덕스러웠는가? 12제자는 또 어떠했 는가? 우리는 우리들의 믿음의 발자취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변덕스러운 신 앙 과정을 잘 참아내야 한다. 변덕의 과정이 없으면 성장이 없다. 우리 자신의 변덕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변덕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야 한다. 나아가 변덕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마침내 믿음의 정상에 오르게 되 기 때문이다. 변덕의 과정 통해서 성숙하기도 실패하고 넘어져도 그것을 견뎌 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상황가운데서 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세워주실 것이다. 우리는 성도들의 변덕을 기꺼이 받아주고 이해해 줄 때 또 다른 은혜가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필요 가 있다.
499 no image |선교지에서온편지| 복음의 소리로 바뀐 폭탄 소리/파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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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0 2009-02-04
복음의 소리로 바뀐 폭탄 소리 유OO 선교사·파키스탄 “테러의 현장에도 하나님의 역사 나타나고 있어” 2008년 10월 파키스탄의 페샤와시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부족들의 가족안전 대책회의 장소에 탈리반이 폭탄 테러를 감행하여 113명 정도가 사망하고 400 명 가량이 부상을 당했다. 이 일로 미국의 서너 차례 미사일 공격으로 탈리 반 37명이 사망하였다. 테러 끊이지 않는 파키스탄 버락 오바마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만약, 파키스탄에서 자체적으로 테 러를 근절시키지 못하면 우리 미국의 힘으로 종식시켜가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그후 2008년 11월 12일에는 국제단체 소속 미국인이 페샤와의 유니버 시티 타운에서 운전기사와 함께 피살당했다. 그 사건은 선교사 자녀들이 다 니고 있는 학교 앞에서 발생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 나에게도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 나를 유니버시티 타 운 바로 그곳에서 죽이겠다는 2번의 협박 편지와 총알을 동봉해서 보내왔던 것 이다. 이 일로 나는 안식년을 조금 앞당겨 그곳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즈 음 뉴질랜드 기도후원자인 피터 달이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 왔다. “어쩌면 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죽음 이 아닙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고 그들을 예수의 제자 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메일을 보면서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면서 마음속 으로부터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있는 사람 앞 에서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거야? 언제 담을 뛰어 넘어 나의 목숨을 노릴 지 모르는 테러분자들로부터 생명을 유지해가며 불안함으로 매일 밤 잠자리 에 들어가는 그 심정을 알고 이런 얘기를 한단 말인가? 선량했던 시민들이 언제 폭도로 변하여 우리를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인데 그리고 언제 총알 이 머리에, 가슴에 박힐지 모르는 상황인데 어떻게 이토록 쉽게 말할 수 있 단 말인가?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그리고 그의 말은 곧 나의 심 장 깊숙이 비수처럼 꽂혔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나에게 들려주시고 싶으 신 메세지가 아니였을 까? 영적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최전방에서 나는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싸워야 하는 대상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어 야 하는데 지금 내가 싸우고 있는 대상이 그들이 맞는가? 왜 이렇게 두려워 하는가? 내 눈에 보이는 소수의 극단주의 모슬렘 2% 때문인가? 나의 믿음은 2%가 부족했다. 동료들을 전쟁터에 남겨둔 채 나는 안전지대에 나와 있었다. 마음껏 자유를 느끼고 즐겁게 보내다가도 문득 전쟁터에 남겨 진 그들과 함께하지 못함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소수의 극단주의 모슬렘들(2-3%) 때문에 피해를 입고 있는 다수의 모슬렘 들, 생명의 존엄성을 알고 바른 교리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대다수 모슬렘들 도 “테러는 자신의 나라에서 사라져야만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 친지, 이웃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손 한번 쓰지 못하 고 바라보아야만 하는 현실 앞에 넋을 놓고 말았다. 나는 남몰래 흘리는 그 들의 눈물을 보았다. 그들의 눈물은 내 마음을 타고 내려와 나의 눈물이 되 어 버렸다. 몇몇의 미국, 영국, 말레이시아 선교사들도 그들의 눈물을 보았다. 선교사들 은 마치 우리 아버지 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처럼 지금 그곳에서 그들 과 같이 울면서 그들의 볼을 타고 흐르는 하염없는 눈물을 닦아 주고 있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소망 없고 희망 없는 그들에게 빛과 진리이신 예 수님을 전하고 있다. 페샤와에 사역하고 있는 몇몇 선교사들과 그들의 후원자들, 기도 동역자들 로 인해서 이곳저곳에서 열매가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겉 사람은 회교도이 지만 속 사람은 예수의 사람이 되어 있는 이들도 있다. 알려지게 되면 개종 했다는 이유로 집안 식구 모두 명예 살인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이들은 드러 내 놓고 신앙생활은 하지 못하고 있다.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는 군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믿음 있고 용기 있는 삼백 용사만을 택하라고 하셨고 그들이 수많은 적군과 싸워 이기게 하셨다. 이일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일을 많은 사람 들로 하여금 목도하게 하셨고, 영광 받아야 하는 분은 오로지 만군의 하나 님 여호와 한 분이심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못하실 것이 없는 전능 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 주셨다. 파키스탄 그곳은 지금 믿음 있고 용기 있는 삼백 용사와 같은 사람들을 위 한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긍휼 필요한 때 아울러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끔찍한 일들이 종종 벌어지고 있는 그곳에서 태 어나서 자라고 그 환경에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하 나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강한 위로와 용기와 격려를 그들에게 쏟아 부어 주 시도록 기도해 주기 바란다.
498 no image |하늘이슬로쓴편지| 하나님의 사랑이 희망입니다_이영란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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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7 2009-02-04
하늘이슬로 쓴 편지 하나님의 사랑이 희망입니다 이영란 사모_좋은소식교회 “하나님의 사랑은 부활로 죽음을 이기게 하셔” 밤늦은 시각 살포시 잠이 들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들의 전화였다. 피곤 한 목소리로 전화받던 남편의 목소리가 갑자기 활기가 있어지고 내용이 길어 지는 듯했다. 뜻밖에 아들의 전화 받게 돼 다음 날 자세한 내용을 들으니 한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을 이야기한 책을 읽 고 전화를 한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다는 것이 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뭉쿨했다. 아이가 몇 번이고 울었을 것이기 때 문이다. 실은 나도 그 책을 몇 년 전에 애절하게 애독했다. 기독교철학자요 신학자 인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라는 책이 다. 죽음에 대한 간증이면서도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고백이다. 격정없는 관 조의 문체가 사랑하는 사람과 이 땅에서의 이별을 더더욱 통곡하게 한다. 세상에서의 자 신의 진정한 끝을 의미하는 아들의 죽음, 그 통증을 겪어내는 신음들, 자기 뼈가 부서지고 미래가 사라진 그래서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아 무 의미가 없어진 그런 종류의 이별이었다. 먼저 간 아이의 마무리되지 못 한 논문 그리고 미래 비젼이 적힌 메모들과 모든 소품들이 무슨 의미가 있 나, 그 주인이 없는데...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 왜 그는 이때까지 자랐 어야 했나. 왜 이런 고통이, 죽음이 있어야 하는지, 왜 왜 왜 하나님은 왜! 아이의 죽음으로 그는 이렇게 아픈데 세상은 그냥 돌아가고 있다. 왜 저들 이 웃을까, 그의 흔적을 다 치우고 빨리 잊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라고? 그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모든 위로 가운데 진정한 상함은 없고 복음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놀라운 역전이 있다. 희망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우리교회에도 이 사랑을 알게 된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 때문에 그 아들을 죽게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네에서 전도된 그 녀 또한 어린 아들의 오래 앓아온 발작하는 병 때문에 하루도 편한 삶을 살 지 못했다. 이 제는 걱정이 없다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 다. 그 사랑이 오랜 세월 그녀를 묶고 있었던 올무에서 해방시켰다. 그녀는 이 사랑 만이 모든 인간의 삶의 해답이라고 하며 예수님을 믿은 지 넉 달이 채 안되었는데 전도의 열망을 갖게 되었다. 전도초청찬양집회에 동네 분들을 열 심히 초청했다. 두 달전 쯤 남편은 찬양 팀을 섬기는 친구 목사와의 대화 중에 개척교회를 섬긴다는 비젼을 듣게 되었다. 작년에 했던 찬양전도집회를 포기하고 있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절망과 상실 이 깊은 때에 참 희망을 전해줄 수 있게 되어 너무도 감사했다. 기도하는 가운데 ‘희망’이라는 컨셉을 정했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나 님이 찾으시는 그 사람을 찾자’는 현수막이 걸리고 연록색의 작은 나무가 그려져 있는 ‘희망콘서트’ 초청장에 성도들과 함께 작고 예쁜 낙엽을 일일 이 붙였다. 이 지역에서 그간 알게 된 사람들, 특히 아이들의 부모들 중심으 로 초청장과 작은 선인장 화분을 보내기도 하고 찾아 만나기 시작했다. 기도 중에 우리는 많이 울었다. 게으르고 무뎌진 우리에게 하나 님의 마음을 부어주심으로 흘리는 회개의 눈물이었다. 교회를 통해, 아들 주신 아버지의 사랑이 전해지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다시금 우 리 등을 밀어주시며 일어나 그 사랑으로 죽음과 절망의 종이 되어있는 영혼 들을 찾으라 하시는 것 같았다. 한 날은 금요기도회 중에 누군가 들어왔다. 끝나고 보니 교회 앞에서 좋은 인상으로 두어 번 안면이 있던 여자 분이었다. 지나다가 자기도 모르게 발 이 이끌려 들어왔다는 것이다. 성도들을 보내고 잠시 대화를 나누었는데 약 간 술에 취해 있었다. 가정사에 얽힌 어려움을 다 들은 후 남편은 말씀으로 위로하고 기도를 하자 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도 기도해보고 싶다고 했다. “예수님 아버지, 기도하고 싶어서 처음으로 한 번 해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 왔습니다. 하나 님, 제 손 좀 잡아주세요, 죽지 않고 그래도 여기 나왔잖아요, 하나님! 하나 님 손 좀 한번 잡아봅시다, 손 한번 잡아봅시다...” 어설프지만 애절한 한마디 한마디에 정말 가슴이 아려왔다. 다시금 하나님께 서 찾으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일에 우리교회와 깊은 교제를 갖고 있는 A국의 선교사님이 방문했다. 오후 까지 있으면서 말씀을 전해주었다. 서두에 과연 이 세대에 희망이 있는가라 고 물으셨다. 더불어 교회에는 희망이 있는가를 조심스럽게 도전하셨다. 그 분은 연속해서 희망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셨다. 어린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테러가 일어나 많은 아이들이 죽었고 선교사님 의 아들은 그 충격으로 7개월간 악몽에 시달리고 지금까지 성장장애를 겪게 되었다고 한다. 너무나 고통스러웠다고 하며 이러한 상태에서 선교를 계속 해야 하나 심각한 고민을 했다고 한다. 만일 죽기라도 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나님을 크게 원망하고 선교를 그만두었 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 고통가운데서 깨달았다고 하신다. 우리를 위 해 죽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말이 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 어떠한 고통의 사랑인가 하는 것이었다. 다시금 가정과 여러 죽음의 위기 가운데서도 새 마음으로 선교사역을 계속 할 수 있었다고 하시는데 깊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이 세대의 오직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이었다. ‘하 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 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26세의 아들을 산행 중 실족사로 갑자기 잃어버린 한 아버지! 자신의 미래 가 사라지고 그 삶이 완전히 부서졌던 월터스토프도 바로 그 사랑을 깨달았 다. 그 전에 잘 몰랐던 사랑! 아들을 죽음에 내어놓은 아버지! 자신의 눈물 프리즘 속에서 언뜻 본 눈물... 바로 하나님의 눈물이었다. 이 세상 역사의 중심에 그분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 고통이 있었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로 죽음을 이기게 하신 아 버지의 사랑을 알았다. 그는 그분의 눈물로, 그분의 죽음의 사랑으로 자신의 고통을 보고 나아가 세 상의 고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탄식너머, 이별너머, 죽음너머까지 보게 되었다. 비로소 절망과 죽음 그 이상의 무엇을 보게 되었다. 이제 이 땅에서 세상의 상처에 대한 동정심과 선함과 영혼에 대한 사랑이 확 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소중한 하나님 사랑 깨달아 “아빠, 학교 다녀왔습니다” 하며 집에 들어오던 아들의 음성! 그 음성을 하늘 나라에서 다시 듣게 될 날을...
497 no image |반듯하게 성경읽기(2)|'열린 눈, 닫힌 눈'(왕하6:8-23)_김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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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5 2009-01-21
'열린 눈, 닫힌 눈'(왕하 6: 8-23)이 주는 의미 김영철 목사, 미문교회 "세상에 속한 것과 하늘에 속한 것 구분할 줄 알아야" 본문은 마치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발생한 '두 나라간의 전쟁 이야기구 나'라고 쉽게 생각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싸우거나 아람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가 싸운 것이 아닙니다. 싸움의 성격부터 분명히 알아야 이 본문은 '아람 왕'과 '하나님의 사람'간의 싸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싸 움에서 아람 왕은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 하나 만을 동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싸움의 실제적인 주체는 아람 왕이라는 한 인간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싸움의 1회전은 머리 대 머리, 즉 지혜의 싸움입니다. 왕은 자신의 참모 들과 머리를 맞대고 작전 회의를 하며 작전을 세워 그대로 시행하려고 합니 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자기 사람을 시켜 그 작전을 무 효화시킵니다. 번번이 그랬습니다. 일방적인 싸움이었습니다. 2회전(14절부터)은 몸 대 몸, 즉 능력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 아람 왕은 많은 말들과 병거로 중무장하고 잘 훈련된 정예 부대를 투입하였습니다. 하 나님은 단지 한 사람만을 투입하였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맨손으로 투입 된 것입니다. 물론 불 말과 불 병거들도 등장하지만 이들은 유사시에 필요 한 예비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 다. 그래서 이 싸움에 직접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3회전(20절부터)에 이르러 싸움은 이미 끝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벼운 시 범 경기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어떠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특 별히 마련하신 무대(舞臺)인 것입니다. 시범 경기이므로 이번에는 이스라엘 왕을 잠시 시범 조교로 사용하십니다. 포로된 자들을 다 죽이려 하는 이스라 엘 왕의 청을 거절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포로 된 자를 긍휼히 여 기는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하신 결과는 무엇입니까?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아람 왕과의 싸움에 개입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백성들이 전쟁 에 져서 비참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 기에 기록자는 이 이야기 끝 부분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대로 이루어졌음 을 시사하는 말을 달아 놓습니다.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23 절). 이처럼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자를 통해 자기 백 성을 보호하십니다. 그분은 모세를 통해서도 그리하셨고, 사사들을 통해서 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왕들을 세워서 그렇게 하셨습 니다. 그러나 왕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적과 정반대로 나갈 때에는 강력 한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못되고 악한 왕 아합 때에는 엘리야를 세우셨고, 이제 아합의 아들 여호람 이 왕이 된 때에는 엘리사를 세우셔서 불쌍한 자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신 것 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이르매 진정한 의미에서 오직 하나 뿐인 '하나 님의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구약 시대의 모든 사역자들은 바로 이 '하나님 r 의 사람'의 그림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 아니 정확히 말해서 '하나 님이신 사람', 이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정작 문제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탄에 대한 싸움이 라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는 사람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것은 보이 지 아니하는 존재인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뜻을 추종하는 사 람들을 사용하여 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우리 자신의 악한 죄성(罪 性)과 못된 옛 성품을 교묘히 조종하여 싸움을 하도록 부추기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싸움은 조용한 것 같으나 치열하고 심각한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격렬한 싸움 - 하지만 닫힌 눈을 가진 자에게는 전혀 보이지 아니하 는 싸움 - 의 한가운데 우리 모두가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싸움을 느끼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편 어떤 사람은 이 싸움에 질 까 봐 심히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이 싸움은 길고 험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능력과 권세와 지혜를 다 주셔 서 하나님의 백성을 철저히 보 호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분은 이 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고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은 연약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며 또한 기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토록 중요한 사실을 알진대 과연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 가고 있는 것일까? 내 눈에 보이는 것,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인간이 가진 것, 이른바 자신의 재물이나 능력만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그 렇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닫힌 눈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아니하시 지만 온 세상을 지으시고 여전히 다스리고 계신 하나님, 특히 자신의 백성 인 우리를 철저히 보호하시는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열린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이것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그분께서 행하시 고 행하실 모든 일들을 볼 수 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이 믿음을 갖고 있다 면 우리의 눈은 분명히 열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눈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눈을 갖느냐에 따라 달라져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닫힌 눈을 갖고 보이는 것들, 이 세상에 속 한 것들, 잠시 뿐인 것들이 전부인 양 안달복달하며 살아갈 것인가? 열린 눈 을 갖고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에 속한 것들, 영원한 것들, 영원하신 하나님 과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 며 살아갈 것인가?
496 no image |채석포에서 온 편지| 달제(羍濟) 선생과 혜령(惠嶺)_김영자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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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8 2009-01-21
달제(羍濟) 선생과 혜령(惠嶺) 채석포교회 사모 김영자 "지도자의 가르침 받아드려 따라 간다면 훨씬 쉬워" 삼한 사온이라고 생각했던 겨울 날씨가 라니뇨 현상으로 인하여 언제 풀어 질 것 같지 않았던 강풍과 추위가 유리창에 비쳐지는 햇빛으로 우울하던 마 음까지 밝게 해주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서예 교습 참여하게 돼 어릴 때는 노는데 정신이 팔려 하루해가 짧다고 생각했었는데 세월은 흐르 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 이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해뜨는 것을 보기 위해 많은 곳으로 이동을 하게 됩 니다. 이곳 채석포와 이웃 연포 해수욕장에서도 해맞이를 위해 이곳을 찾아 주는 사람들에게 떡국과 함께 따뜻한 커피를 무료로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 간 목사님들께서는 송구영신 예배 때 성도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준비하느라 고 바쁜 시간들입니다. 우리들에게 새해 해맞이는 항 상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만 보면서 왜 해맞이 를 꼭 새해 첫 날 봐야만 하는 가하고 생각해 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가 새해 소망을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기도하는 것처럼 그들도 그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간구해보는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2년 전 서예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서예를 통해서 신앙적인 원리를 깨달은 것 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인습적이고 습관적인 삶에서 탈출하여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합니다. 가지고 있던 나쁜 습관을 고치지 못 하고 작심삼일로 끝날 수 있지만 또 새해가 되면 새로운 계획을 세워 도전 해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꿈꾸고 소망하는 일이 있습니다. 남편과 나에게도 하 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예"였습니다. 더구나 초등학 교 교사 시절에 제대로 배워 보지도 못한 채 아이들의 서예를 지도한 적이 있었기에 더욱 더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도서관에 책을 빌려 보면서 그곳에서 "평생학습원"을 개설하여 서 예를 가르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등록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그 리고 두 시간이었습니다. 등록한 후 첫 날 초등학교 입학생같이 설레는 마음으로 그곳에 갔습니다. 그 곳에 도착해 보니 이미 20 여명의 어르신들이 근엄한 얼굴로 자리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열심히 붓을 잡고 붓글씨를 쓰고 있었습니다. 이미 학습 이 시작된 시간이 2개월이 지난 뒤였고 그곳에 오신 분들은 직장에서 정년퇴 직하고 취미 삼아 오랜 시간을 학습한 분들이었습니다. 처음 소개를 받고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연필을 처음 잡을 때처 럼 너무나 서투르고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그 곳에 모인 분들은 연륜이 있 어 붓놀림이 유연한 것을 보고 부럽기도 하고 욕심도 생겼습니다. 남편은 평 소에 한문을 많이 알고 써보았던 실력으로 일취월장하였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서예교실에는 서예를 지도하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금년 춘 추 73세이지만 매우 정열적이며, 대한민국 서예비림협회 회장직을 맡고 계시 는데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전수해주고자 애쓰는 분입니다. 그곳 에 출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남편에게는 달제(羍濟 : 잃어버린 어린양을 구원한다), 그리고 나에게는 혜령(惠嶺 : 은혜의 동산) 이라는 호 를 지 어 주셨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분들이 서예를 학습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미 다른 곳 에서 배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나는 완전 초보였기 때문에 붓 잡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모든 필법을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대로 흉내 를 냈습니다. 어느 날 숙제를 내 주시면서 교본을 보고 그대로 써 오라고 하셨습니다. 남 편과 나는 그대로 써 오라고 하신 선생님의 말씀을 고지식하게 받아드려 자 를 가지고 글씨를 재어 보면서 오차가 없게 한문을 그려보았던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많은 분들은 이미 습득한 서법으로 붓을 놀리고 있지만 남편과 나 는 선생님의 손놀림과 시키는 대로 학습한 결과 가끔씩 과제물 제출에서 장 원을 먹기도 합니다. 옛 서예가는 백 번을 쓰면 본은 될 것이고, 천 번을 쓰면 잘 쓴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고, 만 번을 쓰면 명필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명필 소 리를 듣지 못한 다 하더라도 서예의 흐름과 글씨체의 모양, 그리고 거기에 대한 역사를 다능 박식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낍니 다. 나이가 많은 선생님께서는 자기가 돌아가기 전에 본인이 알고 있는 많 은 학 문을 우리들에게 전수해 주고 싶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선생 님께서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성경 말씀을 한문으로 써 주면서 모두 에게 그 말씀을 읽어 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를 대신해서 복음 전도자 가 되기도 합니다. 서예를 시작한 지도 벌써 2년이 되어 이제 조금은 붓을 잡게 되었음이 고마 워서 선생님께 크리스마스 때 카드를 드렸습니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축복 입니다"라고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피아노를 배울 때도 그랬고 지금 서예를 배우면서 설리반 선생님이 있어 헬렌켈러가 있듯이,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게 된 것이 나에게는 행복이었습니다. 서예공부를 하면서 매 시간마다 강조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서예에 임하 는 9가지의 기본적인 마음 자세를 갖고 직필현완법으로 붓을 잡고 붓의 면 을 바꾸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예의 요체라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말씀을 따라서 그대로 실행하니 이제는 조금씩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습니 다.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가르치리라는 믿음으로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서예공부를 하면서 신앙적으로 느 낀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지도하 는 신앙인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원리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 한 신앙인뿐만 아니라 오래된 신앙인 역시 목사나 혹은 다른 지도자의 가르 침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려서 가르치고 지도하는 대로 따라 간다면 그분의 신 앙이 바르고 잘 자라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대로 따라 가는 것이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고 늦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길이 바른 길이며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으 면 밝혀지게 됩니다. 어느 신앙인은 목사의 가르침을 가벼이 여기면서 신앙 생활을 함으로 뒤에 쳐지거나 신앙을 잃거나 시험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 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며칠 전 찾아 온 남편의 친구 부부와 팔봉산에 갔습니다. 이 근처에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정상에 올라오니 눈앞에 멀리 서해 바다의 망망대 해와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석양의 아름다운 풍광이 장엄하게 펼쳐졌 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포장되어졌던 생활들에서 벗어나면서 진솔함이 드러 나고 따뜻한 우정을 느껴 보기도 했습니다. 꿈 있는 교회 세우는 것이 새 해 목표 많은 사람들이 해돋이를 보며 한 해의 소망을 원하듯이 남편과 나에게도 새 해의 소망이 있습니다. 서예선생님이 아끼는 마음으로 "달제"와 "혜령"이라 고 이름지어 주었듯이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가르침과 사랑 속에서 "믿음과 사랑, 그리고 꿈이 있는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495 no image |살구나무 그늘 아래에서| 최고의 성탄 선물_추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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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8 2009-01-14
최고의 성탄 선물 추둘란 집사_홍동밀알교회 "다른 영혼들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기로 다짐해" 참 기쁜 성탄절이었습니다. 행복한 성탄절이었습니다. 해마다 행복했지만 이 번에 더욱 행복했던 것은 선물을 받으셔야 할 예수님께서 도리어 나에게 더 큰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성탄절, 큰 선물 받아 해마다 성탄 전야 발표회 때면 우리 교회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행복하고 즐 거운 잔치를 벌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생일잔치를 축하하기 위하 여 다섯 살배기 막둥이로부터 최고 연장자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 이 무대에 올라 찬양으로, 춤으로, 연주로, 연기로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재롱잔치를 벌이기 때문입니다. 주름투성이에, 허리마저 굽은, 일흔도 넘고 여든도 훨씬 넘은 할머니 집사님 들이 어린아이들처럼 긴장한 얼굴로 무대에 올라서서는, 두 손을 이렇게 저 렇게 올리고 내리며 '돈으로도 못가요- --' 율동을 하는 모습…. 육신의 나이 를 떠나,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아이들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본래 모습을 확인하는 참 귀한 순간이었습니다. 무대 위의 내가 선물이 되어 예수님께 드 려지기를 바라는 잔치였지만, 준비하는 과정이나 발표하는 그 자리에서 예수 님은 각 사람에게 더 큰 행복과 즐거움을 선물로 되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성탄절, 허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해진 박길이 집사님 댁을 심방하고 서 한 가지 선물을 더 받았습니다. 빙판길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성탄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꼼짝없이 방안에 누워 있던 박 집사님은, 함께 기도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기분도 좋아지고 허리를 훨씬 가볍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심방기도가 끝났는데도 모두들 일어설 마음이 없어 보였습니다. 뜨뜻 한 아랫목을 두고 차마 일어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65일 연탄과 군 불을 함께 때는 박 집사님네 아랫목은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면 성도들은 물 론이요 동네사람들까지도 저절로 찾아오게 만드는 '천연기념물 아랫목'입니 다. 그곳에 앉아 전날 성탄발표회 이야기며 예수님이 한 해 동안 베풀어주 신 은 혜를 서로 나누자니 얼른 엉덩이를 들고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아예 몸과 마음이 편안해져서는 너나없이 누워서 이야기를 하게 되니 소르 르 잠이 드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밥상이 들어와서 모두들 잠을 깨었습니다. 정 작 허리가 아픈 박 집사님은 주무시지 않고 뚝배기에 된장찌개를 끓여서는 상을 들여온 것입니다. 반찬이래야 김장김치와 동치미가 전부이건만, 아! 무 청시래기와 청양고추를 넣어 바글바글 끓인 된장찌개라니…. 아픈 허리 개의 치 않고 사랑으로 끓인 된장찌개는 입으로 들어갈 때마다 감탄사를 절로 나 오게 한, 또 하나의 성탄 선물이었습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하고 넘치는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성탄 선물을 받고 저는 그만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친구 인옥이가 쓸쓸한 성탄절을 보내지는 않았나 싶어 연락을 해보았습니 다. 암투병중인 인옥이는 남편·아이들과 떨어져 친정에서 지낸 지 한참 되 었습니다. 성탄예배라도 드렸나 싶었는데, 할렐루야! 몸 속의 암세포가 다 없어졌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순간, 한 번도 만난 적 없으나 내 친구라는 말만 듣고 가족처럼 기도해 준 목 사님과 사모님, 목자들, 목원들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무 엇이라고, 내세울 것 없는 시골 작은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이 드리는 그 기 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지…. 인옥이와 나는 서로 '기도의 빚진 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인옥이는, 얼굴 도 모르는 성도들의 기도 덕분에 병이 나았으니 '기도의 빚진 자요 행복한 사람'이라 말하였고, 나는 나대로 애초에 기도의 빚은 내가 졌으며 친구의 기도가 없었다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예수 믿으며 사는 삶 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살 뻔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십 대의 나는 하나님 없이 내 갈 길로만 가며 살았는데, 그 때 나를 위해 기도해준 친구가 인옥이입니다. 부모도 형제도 모두 믿지 않으니 그들이 해 주지 못한 중보기도를 인옥이가 대신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한 백성은 버리지 않는다"는 말을 해주며 끝까지 기도해주던 친구…. 그 기도대 로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고 찾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곳 홍동으로 보내 주셔서 예수님 닮은 성도들과 더불어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미리 맛보며 살 게 해 주셨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본 것은 세 번도 채 되지 않습 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늘 한 자매였고, 각자 어느 때 어느 장 소에 있었든지 동일하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라면 시공을 초월한 이런 중보기도의 기쁨을 어찌 이해하겠으 며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확실한 응답을 어찌 누 릴 수 있겠는지요? 인생 최고의 성탄 선물을 인옥이에게, 나에게 주신 주님! 연장해 주신 생명 으로 인옥이도 나도 이제 다른 영혼들을 위하여 더욱 열심히 기도하기로 결 단합니다. 연장된 생명만큼 더 봉사할 터 낮고 천한 나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만으로도 성탄절은 감사의 날이건 만, 친히 나를 위해 특별 선물을 준비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크고도 섬 세하여 더욱 큰 찬양을 올려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직 내 주 예수께 큰 영광과 찬송을….
494 no image |노트북을 열며|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_변세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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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7 2008-12-30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변세권 목사_온유한 교회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 끊임없이 점검해야" 새해가 되었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여전히 어둡다. 국가의 앞날 은 예측할 수 없는 불안으로 가득하다. 그런가하면 세계도 금융 위기로 진통 하고 있다. 개인적인 어려움도 마찬가지여서 가정에는 상처가 있고 공동체에 도 늘 이견이 있다. 세계 경제 어려움에 빠져 있어 우리는 지난 시간 신앙의 길을 걸어오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많이 엎드려 기도했으며 얼마나 많은 날들을 답답해하며 때로는 분노하고 억울해하며 고 민해왔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교회역사와 신앙의 전통에서 문제가 되 고 있을까? 그것은 교회의 교회다움의 정체성과 하나님께서 애당초 의도하신 교회의 모 습과 본질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박영선 목사가 추천한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을 보면 이런 원인에 대 해 "오늘날 현대 교회는 교회와 국가의 기형적 통합을 성취한 콘슨탄틴주 의, 이성과 신앙의 통전성을 해체한 계몽주의 그리고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개인들의 사상누각으로 변질시킨 개인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다"고 지적한 다. 기독교는 먼저 이런 로마의 국교로 인정되었던 콘스탄틴주의의 영향 아래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세상에 어떤 유익을 줄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했 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가 있어서 이 나라와 이 민족이 지켜진다고 생각했 다. 물론 그럴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원래 민족 과 국가를 벗어난 신앙공동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하나로 공동체 가 되고 경계가 없다. 각 교회가 주체가 되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일등국가가 되어서 경제적으로 잘사는 나라가 되게 해 달라는 논 리는 모순된다. 그런가하면 종교개혁 이후 르네상스를 맞이하면서 계몽주의인 인문주의와 합 리주의가 기독교를 또 위협했다. 기독교를 합리주의로 설명하여 합리주의적 기독교를 만들어냈다. 종교가 초월이 배제되고 의미만 남게 되었다. 의미를 본질로 보았다. 사실의 기록이 아니고 사실의 개혁이 아 니고 종교의 고백에 불과할 뿐이었 다. 슐라이어 막허와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의 초석을 놓고 믿음을 지성 화 했다. 믿음을 지성화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영성화시키는 것 이 맞는 것이다. 사람에게 말로해서 알아들으면 그것은 사상이 된다. 신앙은 열심과 논리로 설복 당하는 것이 아니다. 무식한 사람들을 세련되게 만드는 게 목회가 아니 다. 이것이 설교를 논리적으로 똑 떨어지게 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우리가 하는 것들은 우리의 실력으로 되지 않는다. 자기가 감동받은 것으로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언제 하나님이 결과를 주실 지 아무도 모른 다. 밀어 부쳐야 소용이 없다. 많은 일들을 만나게 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이 어느 날 선택하게 하신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 다. 또 하나는 다원주의다. 산업혁명이후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사람들이 사회적 으로 성공한 것도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 이후 물질의 풍요도 이루 었는데도 인간이 더 나아지지 않더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이 권위와 질 서를 이성과 과학을 동원하여 다원화시키기에 이른다. 전체를 보는 시각을 포기하고 어느 한 부분을 파편화 했다. 문제는 종교도 주관적이 되어 굳어져서 사람들이 피폐해졌다. 그래서 보상 이 나오고 이것이 안 되면 범죄가 발생한다. 이렇듯 우리는 인간, 이성, 과 학이 기독교 신앙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의 세력화, 지성화, 다원화를 경계해야 한다. 믿음은 보상이 아니고 지켜내는 것이다. 이제는 믿음을 세상적으로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밝혀줘 야 한다. 하나님 없이는 진정한 인간의 행복과 성취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하박국이 고민한 싸움은 현실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만 실현될 수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목회를 하다 보니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신 것 같은 갈등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보이는 증거도 내적 증거도 없는 것처럼 느껴져 겉으로 표정 이 없게 된다. 목사가 뭐 그러냐고들 한다. 어떻게 목회가 그렇게 서로 다른 지 모르겠다. 하나님은 고통과 시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하나님은 고통 과 시련으로 일하신다. 우리는 어려운 터널이 있을 때 어차피 내가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오해를 받는 일이 있을 때 에도 기가 막히게 오해를 받게 하 고 칭찬을 받을 때도 기가 막히게 칭찬을 받게 하는 법이다. 어떤 때는 하나님도 원망스럽고 교인들도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이럴 때일 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대하자. 우리 교단의 좋은 장점이 아닌가? 그러면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다. 외적인 문제에 답을 할 것이 아니라 내적 인 충성에 대답만 하면 되는 것이다. 새해가 여전히 밝아왔다. 그러나 역사에는 진전이 없다. 말씀을 통해서 볼 때만 역사가 보이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이 한 영혼을 만나셔서 그 영혼 을 간섭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불렀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사람을 도우 라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따르라는 것이다. 역사를 보는 자만이 진전 있어 우리는 모든 위치와 자세에서 주류가 잘 하는 것만큼 비주류도 잘해야 된 다. 우리와 다른 조건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 밝고 소망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493 no image |살며 생각하며| 교회와 미디어_박창욱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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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7 2008-12-30
교회와 미디어 박창욱 집사_양의문교회 "예배의 방편과 대상이 전도된 현실 심각해" 흔히들 마샬 맥루언(Herbert Marshall McLuhan, 1911-1980)을 시대의 예언가 라고 한다. 그가 영문학 교수로 토론토에서 쉰 두 살에 집필한 "미디어의 이 해"(Understandig Media)가 시대를 뛰어넘어 새롭게 조명을 받는 것은 우연 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 시대가 그의 예언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반증 일 것이다. 그의 평가 모두가 옳지 않더라도 말이다. 초미의 관심 끄는 맥루언의 예언 우리는 맥루언의 시대, 즉 그의 '예언의 시대'에 살고 있다. 끊임없이 진화 하는 인터넷과 전자신문, 고화질 HD 방송의 지상파, 위성, 케이블, IPTV의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통합 방송법을 비롯해 다양한 미디어 관계법의 테두리 에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생각과 삶을 저당 잡혀 살고 있다. 편리하게 도 각종 방송 기구와 조직, 그리고 대의민주주의는 우리가 원하 고 택하지도 않은 것까지도 결정해준다. 이 다양한 프로토콜과 사이버스페이스가 우리의 삶에 정확히 어떤 영향을 끼 치게 될지 누구도 선뜻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단지 일찍이 맥루언이 언급 한 "우리는 우리가 보는 대로 된다, 우리는 우리의 도구를 만든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의 도구가 우리를 만든다"는 전제를 실감할 뿐이다. 우리시대 교회 안에 미디어는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까? 역기능(逆機 能)은 접어둔 체 교회 안에 순기능(順機能)이라 일컬어지는 역할들이 과연 성경적인지 심각하게 되돌아 봐야 할 때가 되었다. 오늘날 교회가 대형화되고, 프랜차이즈화 되어 관리되어 가는 마당에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우스워 보인다. 그러나 미디어의 사용은 이미 뜨겁 고 간절함이라는 이름으로 찬양과 예배 가운데 깊숙이 침투해 있고 우리의 영혼을 끈임 없이 자극하고 있다. 편리와 실용이라는 명목에 자신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가는 모습들이 '불법의 사람'들과 흡사해 보인다. 과연 하나님의 영광이 이끄는 예배 가운데 미디어가 수단인지, 목적인지 물 어보고 싶다. 물론 예배를 돕는 수단과 방편 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나아가 눈여겨본다면 그것들은 예배와의 소원 한 관계를 넘어 무의식중에 신앙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고가의 미디어장비가 수반하는 재정의 문제도 동반한 체 말이 다. "상형 문자나 표의 문자 같은 차가운 미디어는 뜨겁게 외파(外破)하는 표음 문자인 알파벳과는 매우 다른 효과를 가진다. 알파벳은 추상적인 시각적 밀 도가 아주 높아졌을 때 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독점 현상들이 사람 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비개성적인 제국을 건설하고 다시 집단성에 호소하게 되자, 전형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쓰기라는 미디어를 아주 강렬한 형태, 즉 반복이 가능한 인쇄라는 형태로 가열했고, 그 결과 16세기에는 민족주의 나 타나고 종교 전쟁들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미디어의 이해 중에서). 맥루언은 미디어에 뜨거움과 차가움을 도입했다. 뜨거운 미디어란 단일한 감 각을 '고밀도'로 확장시키는 것으로 차가운 미디어의 상대적인 개념이다. 쓰 기라는 미디어를 아주 강렬한 형태, 즉 반복이 가능한 인쇄라는 형태로 가열 했고, 그 결과가 민족주의, 종교개혁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뜨거운 미디어란 단일한 감각을 고밀도로 확장시키는 미디어이다. 여 기서 고밀도란 데이터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한다. 사진은 시각적인 면에서 고 밀도다. 반면 만화는 제공되는 시각적 정보가 극히 적다는 점에서 저밀도이 다. 전화는 귀에 주어지는 정보량이 빈약하기 때문에 차가운 미디어, 혹은 저밀도의 미디어이다. 그리고 주어지는 정보량이 적어서 듣는 사람이 보충해 야 하는 연설은 저밀도의 차가운 미디어이다. 반면에 뜨거운 미디어는 이용자가 채워 넣거나 완성해야 할 것이 별로 없 다. 따라서 뜨거운 미디어는 이용자의 참여도가 낮고, 차가운 미디어는 참여 도가 높다. 맥루언은 우리시대에 "뜨거운 형식이 배타적이고 차가운 형식이 포괄(용)적이다"는 원리를 입증해 주는 사례들이 가득하다고 말하고 있다. 맥루언의 예언을 소개하고자 함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의 공예배는 미디어로부터 배타적인 영역에 서게 되었다. 우리시대 교회들은 미디어의 뜨 거움에 사로잡혀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가 어떤 예배 와 찬양을 받으시며 그 가 세운 교회가 어떠해야하는지, 주의 날이 어떻게 시 작되었고 어떻게 임하게 될지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 교단마다, 지역마다 편차는 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에서 미디어는 이 용되어 왔다.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유행을 조장해 미디어를 사용하지 않는 교회는 열등한 교회로 낙인되었고, 급기야 교회에서 성경을 몰아내고 말았다. 맥루언의 예언처럼 교회는 '기계장치 애호가'(나르코시스)로서의 나 르시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다. '감각마비의 혼수상태에 빠져 무한정 자신을 확장하는데 몰두'하고 있는 교 회들을 보면서 하나님과 교회를 돌아보는 일이 시급함을 다시 한번 느껴본 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우리의 죄로 미디어는 왜곡 되어 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 주의 날을 사모하는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 은 예배의 방편과 대상이 전도된 현실을 심각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배 방식이 결코 목적일 수 없어 여기에서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 '창조에 대하여'에서 말하고 있는 "성부, 성 자, 성령이 되시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권능과 지혜와 선하신 영광을 나타 내 시기 위하여 태초에 무에서 모든 것, 즉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을 지 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리고 지으신 모든 것은 다 선하였다"는 의미를 다 시 점검해야 하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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