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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2 |손에 잡히는 사본학 해설 <12>| 아멘(αμην)의 수(數)_김진옥 목사 파일
편집부
2158 2016-06-21
아멘(αμην)의 수(數) < 김진옥 목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교수 > “숫자상징의 해석적 도입은 신약의 의미전달에 부정적이라고 봐야” 이집트에서 발견된 기독교 파피루스 속에는 다양한 기독교 상징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상징들은 박해가 사라진 AD 4세기 후 기독교문서들 속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 상징들은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크리스토그람(Xristogram)과 십자가를 상징하는 비슷한 스타우로그람(Staurogram)으로 대표되며, 오늘날에도 로마카톨릭을 상징하는 문향과 기독교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십자가 속에서 발견된다. 그 가운데 숫자(수치)와 관련된 흥미 있는 표식들도 기독교 문서들 속에서 간혹 발견된다. 학술용어로 이소프세피즘(Isopsephism)으로 불리는 이러한 표식들 가운데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은 콥파(q)와 테타(θ) 두 글자로 이루어진 숫자상징이다. 기독교 편지나 문서들 처음과 끝에 때때로 등장하는 콥파와 테타는 대표적인 숫자상징이라 할 수 있다. 다소 생소한 헬라어 알파벳 콥파는 수치 90을 표기하기 위해 차용한 글자이며, 일반 문장에서 사용하지 않는 알파벳이다. 그 뒤에 오는 테타(θ)의 수치는 9이다. 이렇게 둘의 수치를 합하면 99가 되는데, 수치 99는 여러 가지 단어의 조합을 가능케 하여, 처음에는 비밀스런 암호처럼 느껴진다. 그 의미는 전통적으로 이레니우스의 해석을 따라 아멘(αμην)으로 해독된다. PSI 1) VIII 1342, 1 중요한 점은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신약성경 사본 어느 곳에서도 아멘을 콥파와 테타의 숫자상징으로 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필사에서 암호문과 같은 콥파와 테타를 이용한 아멘의 사용이 엄격히 배제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현존하는 어떤 신약 사본에도 콥파와 테타를 사용한 아멘의 흔적은 없다. 이런 점은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의미전달에서 숫자상징을 통한 비밀스러운 암호의 사용이 배제되었음을 간접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진리는 누구나 알기 쉽고 명확하게 전달된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말씀을 비밀스런 코드로 푼다거나 숫자화 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는 방법들은 적절하지 못하다. 곧, 하나님, 여호와, 주(큐리오스와 아도나이), 예수, 성령 등의 이름을 숫자로 종합하거나, 코드화 하여 비밀스런 의미들을 찾아내려고 하는 시도들은 전혀 올바른 해석방법이 될 수 없다. P46 빌4:23의 생략된 아멘2) 그러나 사실 숫자상징(isopsephism)을 통한 의미의 전달을 해석학적으로 연결해 볼 수 있는 성경본문도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계시록에 나오는 ‘육백육십육’이다. 계시록 13:18에서 나오는 사람의 수요 짐승의 수로 계시되는 숫자는 육백육십육이다. 이 숫자는 십진법에서 6이 연속적로 등장하는 ‘육육육’이 아니라, 헬라어의 수치로 따져 ‘육백육십육’(χξς: 600+60+6)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χξς를 ‘육백육십육’으로 번역한 개역성경의 번역은 적절하다. 계시록에서 짐승의 숫자로 제시되는 ‘육백육십육’을 푸는 해석의 원리는 고대로부터 난제에 속한다. 사도 요한은 이 숫자를 푸는 데 지혜를 요구하고 있다. 계 13:17절은 이를 ‘그의 이름의 수치’ 혹은 ‘짐승의 수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숫자상징(isopsephism)의 방식으로 푸는 것도 가능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이 같은 방식을 적용하여 보캄(Bauckam)은 육백육십육의 의미를 “네로는 짐승이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문장의 합으로 보았다.3) 비슷한 방식으로 이 숫자를 히브리어 알파벳 수치와 연결시키는 방법(geometria)도 고려된다. 흥미롭게도 그 의미는 히브리어 알파벳에서도 다시금 ‘카이사 네로’에서 풀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숫자상징의 해석적 도입은 아멘의 사용과 같이 신약성경의 의미전달에서 부정적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육백육십육을 알파벳의 단어의 조합으로 풀려고 할 때 많은 취약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해석방법을 취할 경우 성경말씀이 신비적인 암호문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배제시킬 수 없다. 때문에 개혁파 신학자들은 보편적으로 이러한 해석을 거절하였으며, 박윤선 목사는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성경말씀의 기록과 전달은 신비적 암호를 매개로 하지 않는다. --------------------------------------- 1) = Papiri greci e latini. (Pubblicazioni della Società Italiana per la ricerca dei papiri greci e latini in Egitto) 2) 개역성경에서는 ‘아멘’이 생략되었으나, P46은 포함하고 있다. 3) R. J.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Studies on the Book of Revelation, p. 390-404.
671 no image |까치둥지에서 온 편지<7>| 하나님도 자존심을 내려 놓으셨는데..._변세권 목사
편집부
1446 2016-06-21
하나님도 자존심을 내려 놓으셨는데...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세상과 하나님을 따르는 길이 어떻게 다른지 분별할 줄 알아야” 올 여름은 더위가 빨리 찾아오고 후텁지근한 날이 계속된다. 그래도 가끔 소나기가 지나가 다행이다. 늘 그렇지만 이 더위에도 마음이 차분하고 욕심을 낼 일도 별로 없다. 조용히 사니 찾는 이 없고 묻는 이 없으니 참 좋다. 그러다 혹 어떤 일에 성과가 있다한들 그것이 우리에게 뭐 그리 대단한 기쁨이 되겠는가? 세상을 보니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서 체면을 구긴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이는 것이 한 둘이 아니다. 그까짓 자존심이 뭐라고... 동료 목회자에게 져주고, 자식에게 져주고, 성도에게 져주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진작 져주었더라면 고생도 안하고 머리도 훨씬 아프지 않았을 것을...’ 평소 기다려주는 걸 잘하지 못하다보니 이제와 후회와 자성이 많다. 우리는 그 흔한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 한 마디 못할 정도로 자존심으로 가득하다. 아무리 교양이 있고, 신사인 체 하고 있어도 우리가 갖고 있는 비극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신뢰와 용서, 화해와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남보다 내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이해한다면, 맨 처음 가져야 하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 내가 방불하다는 사실이다. 남들이 나보다 나으면 나았지,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과연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생각을 가질 수 없다면,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갖다 붙일 것이 많다면 아직도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다. 사단이 우리를 조종하는 가장 큰 무기는 우월감이다. 그래서 죄가 죄의 형태를 가장 교묘하게 숨기고서도 죄의 실력을 가장 많이 발휘하는 것이 자존심이다. 자존심을 꺾으면 그는 참다운 신자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 마음의 문을 열고 내 안에 있는 물품들을 확인해보아야 한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존심만 우리의 뱃속에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사람이 자존심만은 양보를 못한다.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의 양보를 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화목케 하는 일을 담당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죄인 되었을 때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하셨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입을 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우리의 권리와 행해야 할 책임이 사랑이요, 화해요, 용서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이것부터 연습해야 한다. 우리를 붙잡고 있던 그 쓸데없는 자존심과 우월감에서 벗어난 자인 것을 실천해야 한다. 통계적으로 보면 일류학교 출신치고 괜찮은 사람이 별로 없다고들 한다. 일류학교 출신들의 가장 큰 약점은 그 학교들이 학교의 명예를 위해 개인들에게 너무나 많은 자신감을 심어주어서 질 줄 모르고 양보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빈정대고, 언제나 거들먹거린다. 우리는 누가 무엇을 잘 하는 것에 박수쳐 주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뭐 그 까짓 걸 가지고...” 그것밖에는 할 줄 모른다. 같이 죽으면 죽었지 남이 잘 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한다. 우리는 상대방을 낮추기 위해서라면 상대방도 죽이고 나를 죽여도 좋다는 끔찍한 생각을 하고 있다. 상대방을 살리는 것이 자기를 살리는 것임을 꿈에도 생각할 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과 ‘썩는 밀알이 되라’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진리인가? 우리는 해야 한다. 그것이 상대방도 살리고 나도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는 의례 고개를 돌린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 “누가 그렇게 했다며?” 못들은 척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살고 있지 않는가? 반면에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 시대에 하나님의 성전이 훼파되는 것을 허용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 역사 가운데 보내어 우리 손에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얼마나 대단한 하나님의 성의이며 의지인가를 알고 있다. 하나님도 자존심을 내려놓으셨는데 이제 우리도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세상과 하나님을 따르는 길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별하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길이 명예롭고, 어떤 길이 자랑인가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명예나 감사로 가는 인생인지, 이해관계나 심판이 두려워서 가는 존재인지 깨달아야 한다. 사람이 자신의 신앙이 고백과 증언이 되면 표정이 좋고, 강요와 의무가 되면 표정이 사나워진다. 우리가 바른 원칙을 갖고 열심을 낸다 해도 평생 교인 30-40명과 함께 교회를 이룰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만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할 뿐이다. 큰 것이라는 것은 양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수준이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님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큰 자가 섬기는 나라에 살고 있다. 자존심과 세상풍조와 싸우는 것이지 성경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목사라서 남들하고 싶은 것 못하는 것이 복이고 명예이다. 우리는 연륜이 쌓여가면서 외롭고 쓸쓸하다고 고집을 부릴 것이 아니라, 신앙의 무슨 증언을 교회에 남겨야 하는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괜찮다. 부족하고 작고 손해 본 것으로 네가 실패하지 않는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모습을 우리가 교회와 역사에 보이고 남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후손들이 겁이 나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미래교회 세대를 걱정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것은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무엇인가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서이다. 더운 날씨는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이번 주에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이 말하는 대로 뭐든지 해봐야겠다. 하나님도 자존심을 내려놓으셨는데 그까짓 자존심이 뭐라고...
670 no image |까치둥지에서 온 편지<6>| 하나님의 일하심에 풍성하게 젖어들라_변세권 목사
편집부
1549 2016-05-24
하나님의 일하심에 풍성하게 젖어들라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얼른 보상이나 업적을 받으려 하면 이처럼 치사한 인생도 없을 것” 꽃은 피고 지기 마련이다. 일찍 봄의 전령사 역할을 했던 봄꽃들이 그 자태를 감춘다. 다른 꽃에 비해 서둘러 나오느라 마치 옷을 입고 나오지 않은 것 같다. 대체로 봄꽃들이 성격이 조급하다. 열매가 없으니 말이다. 이것은 비단 꽃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도 일찍 출세를 하면 나중에 가서는 명예로운 결실을 거두기가 어렵다. 연예인들도 일찍 유명해지면 그 인기가 오래가지를 못한다. 3전 4기, 7전 8기, 134전 135기가 아름답고 나중에 보면 그 모습이 진지하고 세상을 많이 안다. 데이비드 부룩스의 [인간의 품격]에서도 삶은 성공이 아닌 성장의 이야기를 기술한다. 저자는 인간을 ‘뒤틀린 목재’로 보면서 누구나 결함을 지닌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란, 결함 있는 내면의 자아가 끊임없이 투쟁하며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겸손과 절제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외적 성공이 아니라 내적성숙에 둔다. 겸손을 망가진 자신의 모습을 날마다 되돌아보는 것에서 찾는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절대주권 신학과 개혁교회를 지향하는 우리는 개인의 삶이나 목회현장에서 대단한 결과들을 보고 싶어 한다. 여기에는 상대방을 빨리 설득하고 굴복시키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다 받아내시고 다 품에 안고 가시는 그 자체를 중요시 여기셨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설교로도 대단한 것을 할 수 없다. 한 교회에서 20년 동안이나 서로 만나고 보는 교우들에게 잘난 척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새로운 목회계발서를 만들 수도 없다. 그나마 조금 더 나은 인격으로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안고 갈 수 밖에 없다. 목사를 소품으로 써서 신자가 크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땅 끝인 것이다. 우는 자리, 할 말 없는 자리, 억울한 자리, 견딜 수 없는 자리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셨다. 우리가 사는 신앙여정의 길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음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당장은 거창한 일을 못해도 하나님이 우리와 묶어주신 이웃들 앞에서 우리는 그들을 외면하지 말고 끝까지 편들어주고 같이 울고 같이 웃어야 한다. 비록 그들을 도와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박영선 목사는 “우리같이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위해 하나님이 일하신다. 우리 인생의 매순간은 은혜를 드러내시기 위해 하나님이 당신의 성의로 마련하신 소품이요, 섬세하게 준비하신 장치이다. 인생의 모든 막막한 자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곁으로 미는 자리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신앙과정이 누적되어 충만해진 인생일 뿐이다. 토마스 포스터는 “문학과 독서의 효과는 발전적이지 않다. 그것은 누적적이다”라는 것이다. 신앙으로 말하면, 충만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은 결과나 업적 싸움이 아니라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난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의심, 불안, 시험, 고통 속에서 살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견디어 내는 것이 위대한 신앙이다. 얼른 성장하고 보상이나 업적을 받으려고 하면 이것처럼 치사한 인생도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았는가가 중요하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마귀의 유혹을 조심해야 한다. 인생을 사는 것이나 목회현장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많은 시간이 흐르다보니 누군가에게 할 말도 없다. 모두가 다 다르고 이중적이고 자기입장에서 후퇴할 마음도 없기 때문에 공연한 말을 해도 헛된 것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아침, 저녁으로 다르다. 나조차도 변덕스러운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사소한 것 밖에는 선택할게 없다. 그 선택된 것마저도 어떻게 견디어내며, 고쳐내며, 추스르는가가 있을 뿐이다. 목회가 참고 웃어주는 것 밖에는 달리 할 것이 없다. 심지어 우리가 따르는 개혁주의라고 해서 모든 것을 대변하지도 않는다. 하나의 기둥으로 다른 기둥을 이해해야 할 뿐이다. 다섯 개 중에 우리 것이 하나 일 뿐이다. 이 다섯 개 중에 우리가 조금 나을 뿐이다. 앞서서 가장 잘 붙드는 기둥일 뿐이다. 기둥만 다섯 개 있으면 안 되니까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신학을 가졌다는 것이다. 누구를 포용한다는 것도 무조건 합치자, 만나자가 아니라 우리 자리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지난 2천년 동안 교리적으로만 일하신 것이 아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잘 모른다. 인간은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폭이 넓어야지 자기 자신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를 이해도 하지도 못할뿐더러 하나님도 제한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고 있다. 놀라운 약속이다. 기어코 모든 것을 유익되게 해주겠다고 한다. 그러니 성공이 아닌 성장의 모든 과정에서, 인간의 약점과 한계의 현실이 가지는 진실에서, 목회현장에서, 같은 처지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풍성히 젖어들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주신 사명의 길을 길게 보면서 단단하게 걸어가야 한다. 때로는 안 되는 것 같은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669 |손에 잡히는 사본학 해설 <11>| 금식 논쟁_김진옥 목사 파일
편집부
1922 2016-05-10
금식 논쟁 < 김진옥 목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교수 > “한국교회는 기도와 금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건의 중요성 회복해야” 원문확정을 위해서 서로 다른 이문들을 진지하게 드려다 보자면, 신학 논쟁을 보는듯한 착각이 들 때가 있다. 서로 다른 본문들이 보여주는 차이는 단지 단어나 문장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그 사본의 신학적(신앙적) 입장을 대변할 때가 많다. 사실 원문확정에 대한 논의는 치열한 신학적 논쟁에 가깝다. 객관적인 사료로 여겨지지만 중요 사본들은 모두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적 색깔을 가지고 서로 대치하고 있다. 사본들은 어려운 문맥과 문장, 단어들 굽이굽이마다 서로 맞서서 대립하고 있다. 그 대립은 심지어 같은 사본을 기록하고 있는 필사자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사본들 간의 논쟁적 대립의 예를 기도와 금식에 관한 말씀인 마 17:21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 17:21은 현재 비평사본학자들의 손에서 편집삭제가 된 구절이다. 개역성경은 이를 ‘없음’으로 대체하고 있다. 삭제된 구절은 귀신들린 아이를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고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 아이를 고치시며 가르치신 내용이다. 생략된 마 17:21은 ‘기도와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런 종류의 것은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나갈 수 없느니라.” 사본들은 이 구절에서 논쟁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어떤 사본들은 이 구절의 삭제를 통해서 귀신들린 아이를 되돌리는 데 있어서 기도와 금식을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다. 서로 입장이 달랐던지, 시나이 사본의 수정자는 원본의 난외에 보란 듯이 가필도 하였다(사진참조). 개역성경은 비평본문을 따라 이 구절을 생략하고 있지만, 이곳에서 21절을 생략하고 있는 사본들은 의외로 소수이다. 반면 21절을 생략하지 않은 사본들은 여러 중요한 사본들과 비쟌틴사본들을 포함하여 압도적으로 다수이다. 그럼에도 비평학자들은 이 구절을 삭제하고 있다. 수정의 흔적 때문이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하기 원하는 이들은 마 17:21이 막 9:29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마 17:21은 막 9:29과 의미의 진행과 단어의 배열에서 평행을 이루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막 9:29에서도 마 17:21에서 보이는 사본 상의 이문이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막 9:29의 사본비평에서 비평학자들이 ‘기도’는 남겨놓고 ‘금식’만 삭제했다는 점이다. 마 17:21에서는 기도와 금식 전체를, 막 9:29에서는 ‘기도’는 남기고 ‘금식’만 삭제한 것이다. 그러나 막 9:29에서 기도와 금식 모두를 지지하는 증거들은 금식을 삭제한 사본들보다 더 우월하며, 다수이다. 비평학자들이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는 파피루스 사본(P45)도 ‘기도’와 ‘금식’을 지지하고 있지만, 이들은 ‘금식’을 누락시키고 있다. P45의 막9:29 1)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를 기도와 금식에 연결하는 것은 신비주의에 대한 우려로 개혁신학에서 조금 꺼려지는 본문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고 싶은 이유는 기도가 금식과 함께 연결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성도의 기도를 금식과 연결하는 것은 경건의 실천에 있어서 중요하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40일을 금식하셨는데 이는 기도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성도들은 회개할 때 금식하며 기도했고(삼하 12:16; 욘 3:5-8), 교회는 직분자를 세울 때 금식하며 기도하였다(행 14:23). 중요하고 위급한 순간마다 금식과 기도는 짝을 이루어 성도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였다. 이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금식과 깊이 연결시키고 계시다. 기도와 금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건의 중요성을 이곳에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다. 금식에 대한 폄하는 개역성경의 번역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고후 6:5과 고후 11:27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수고로움 가운데 ‘금식’(네스테이아)을 언급하고 있는데, 번역자들은 이를 ‘굶주림’이나 ‘배고픔’으로 번역하였다. 사도의 영광스럽고 거룩한 기도 사역은 이렇게 평가절하 되었다. ‘금식’이란 단어는 명사로 신약성경에서 모두 8차례 나타나지만, 편집비평에서 두 곳이, 한글 번역에서도 두 곳이 이와 같이 사라졌다. 성경본문 속에서 기도와 금식의 자리가 사라지고 위축되고 있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말세가 되니 사람들이 계속해서 기도의 자리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금식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은 더욱 희귀해졌다. 오늘날 우리는 곳곳에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이유가 기도와 금식을 포함한 경건의 부재 때문은 아닌지, 비평학자들의 손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기도와 금식의 흔적들이 자꾸 아른거린다. 1) P45에서 막9:29은 파피루스의 파손으로 온전하지 않다. 위의 사진을 보면 ‘기도’의 흔적은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식'이란 단어는 훼손되어 찾아볼 수 없다. 이 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지만, 판독자들은 '금식'이란 단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P45vid).
668 no image |까치둥지에서 온 편지<5>| 하나님께 영광을, 하나님을 영화롭게_변세권 목사
편집부
1415 2016-04-12
하나님께 영광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존재인 까닭에 밝히 주어진 진리를 보수하는 일에서조차도 치명적으로 무능력하기 마련” 복음은 그 성격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과 방법조차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진리를 포함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다. 이 본분을 이루는 방편과 수단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서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은 말씀이다. 따라서 교회는 성경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순복하여야한다.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은 영화로워지실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 된다. 성경을 충실히 따르는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을 생각할 때에 항상 잊지 말아야 할 전제가 있음을 선포한다. 그것은 인간의 전적 타락문제이다. 아담 안에서 옳다고 생각되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하는 이 중요한 사실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갖가지 타락한 경배형태에 빠져 버리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철저하게 부패했기 때문에 성경을 주셨고, 따라서 우리는 신앙을 진행함에 있어 성경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바 ‘계시의존사색신앙’ 원리를 추구해야 하는 존재론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방법과 수단을 불변의 법칙으로 알아야한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발생시키기 마련이고, 그로 말미암아 발생된 교회는 성경의 사명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결과가 교회이며,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성립한다. 또한 성경은 부족한 것이 없으며, 완전하며 충족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익한 호기심에 이끌려 자꾸 새로운 것을 계발하거나 개발하려 들지 말고 이미 수립되어있는 원리에 보다 더 충실하려고 노력해야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존재인 까닭에 밝히 주어진 진리를 보수하는 일에서조차도 치명적으로 무능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신학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보수적이어야 하며, 실천에 있어서 철저하게 개혁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조심해야 할 좀 더 깊은 부분에 대하여 확인 할 것이 있다. 이것은 ‘개인적 경건’을 띠는데서 멈출 일이 아니다. 교회 생활에 있어서 개인주의는 그것의 성격의 어떠한 여부를 떠나서 절대적 금물이다. 사실 오늘날의 교회가 너무 처참할 정도로 밑바닥까지 떨어져 버렸고,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 보니, 어쩌다 남다른 인품과 경건성을 구비한 사람을 보게 되면 우리는 한결같이 그것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게 된다. 그리고는 비록 작심삼일로 끝날지언정, 저마다 자극을 받아 새로운 각오와 결심 속에서 경건한자로 자라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렇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경건주의는 다른 한편으로 큰 오류를 낳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경건은 개인의 영성을 고양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경건은 교회를 이루는 질적 성장에 이바지하는 것으로서 나타날 때에 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교회를 섬기는 봉사의 성격을 띠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건이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는 일에 이바지 되지 아니하면, 그 경건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17세기에 발생하였던 방식으로 개인적 경건주의의 모습을 답습하면 안 된다. 이런 식의 영웅적 경건주의는 교묘하게 교회 안에 계층과 불화를 조장하게 된다. 진실로 성도란 복음 안에서 개인이기 전에 단체로서의 교회이며, 이 전체성 안에서 한 부분의 자리에 있다. 따라서 참된 경건 혹은 경건의 본질은, 자신의 속한 교회가 좀 더 교회다운 모습으로 자라가도록 하는 데에 있고 교회의 성숙에 이바지할 때 나타나는 것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성경은 교회원 개개인에게 위탁된 것이 아니라 사실상 교회공동체에 위탁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참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신자의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667 |손에 잡히는 사본학 해설 <10>| 위협 받는 주기도문_김진옥 목사 파일
편집부
1788 2016-03-29
위협 받는 주기도문 < 김진옥 목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교수 > “현대 사본비평학은 조화로운 사본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데서 시작해” 원문확정을 위해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사료 가운데 성구집(lectionary)도 포함된다. 성구집은 초대교회로부터 사용된 전통 있는 사료로 성경봉독을 위해서 제작된 말씀 모음집이다. 성구집은 사본학의 중요 사료 성구집에 담겨진 말씀은 인용문이기 때문에 이차적인 사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의 중요 본문들만을 간추린 편집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사본비평학에서 성구집에 담겨진 인용문들은 성구집(lectionary)의 이니셜인 소문자 l 로 표기하고 번호를 붙여 분류하였다(예: lectionary 24 = l 24). 현재까지 발견되어 참고할 수 있는 성구집은 2300개 이상으로, 적지 않은 숫자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성구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7/8세기이며(l 559), 이들은 모두 조화로운 비쟌틴계 다수 사본의 전통에 속해 있다. 때문에 비평 사본학자들은 자신들의 편집비평에서 10개 남짓 극소수의 성구집만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개혁주의 사본학에서 성구집의 자리는 작지 않다. 그 이유는 이들의 기록 연대가 비교적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공적으로 사용되어 읽혀졌다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성구집에서 발견되는 본문들은 교회를 통해서 검증된 긍정적인 본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반면에 성구집이 예식을 위해서 기존의 본문들을 수정편집 하였다는 점도 균형 있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8세기 성구집 사본의 예: l 269(마8:31-36) 성구집의 단골손님인 주기도문에도 사본상의 이문이 존재한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 편집성경(NA28, UBS5)에서는 “대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 삭제되었다. 보편적으로 비평학자들은 이 부분이 매끄러운 기도의 진행을 위해서 추가된 본문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매끄러운 주기도가 성구집에서 온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사본들 상의 증거’(外證)는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시나이사본과 바틴칸사본 등 소수의 유력한 사본들은 이를 생략하고 있다. 하지만 다수사본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본들은 생략된 본문을 포함하고 있으며, 어떤 사본들에서는 교리적 변호를 담은 변형도 발견된다. 1) 특별히 서방교회가 공인한 정경이라 할 수 있는 불가타가 이 부분을 생략하였다는 점과 성구집 2211번도 특이하게 이를 생략하고 있다는 점이 이들의 주장과 대치된다. 때문에 주기도문 13절 하반절은 교회의 필요에 따른 수정이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하였던 사본상의 이문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 구절의 본문확정에서 또다시 떠오르는 중요한 쟁점은 알렉산드리아 계와 비쟌틴 계의 대립이다. 짧고 어려운 본문의 경향을 보이는 알렉산드리아 계의 사본들은 13절 하반절을 생략하고 있고, 좀 더 길고 매끄러운 본문을 보여주는 비잔틴 계의 사본은 13절 하반절에 생략된 본문을 포함하고 있다. 현대 사본비평학은 일반적으로 다수사본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사실 현대 사본학은 문맥과 문장이 매끄럽고 조화로운 다수사본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데서 시작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도 큰 소실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감과 무오를 기초로 개혁주의적 성경원문을 구축하려 함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다수사본을 평가절하 하여 마 6:13 하반절이 교회의 필요에 의하여서 첨가되었다는 주장은 지나치다. 이 부분은 교회가 필요하여서 더한 본문이 아니다. 알렉산드리아계의 사본들은 6:13 하반절이 없는 주기도문을, 비쟌틴계의 사본들은 6:13 하반절을 포함한 본문을 가졌을 뿐이다. 그럼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사본학이 어떤 본문을 지지할 수 있는가? 칼빈은 현대사본비평에서 거의 요한복음의 본문으로 여겨지지 않는 요 7:54-8:9의 간음한 여인에 대한 구절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결론을 대리고 있다. “유익하게 적용할 수 있는 이 본문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2) 주기도문의 경우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완전하지 않은 비평 사본학자들의 편집이론을 따라 이 귀중한 기도를 굳이 삭제할 이유가 없다. 비평만이 좋은 대안일 수 없어 그 어느 누구도 주님이 가르쳐 주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나이다. 아멘”이라는 위대한 송영의 기도를 교회로부터 빼앗지 못할 것이다. 1) 대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나라가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소문자사본 1253 등). 2) 칼빈의 요한복음 8:3의 주석에서 참조.
666 no image |수필| 봄비 오던 토요일의 수채화_고숙경 집사
편집부
1540 2016-03-15
봄비 오던 토요일의 수채화 < 고숙경 집사, 열린교회 > “만년의 시간에 그 분의 삶은 엄청난 밀도로 내게 들어오고 있었다” 지난 토요일 봄의 전령사인 듯 화끈한 청혼 같은 봄비가 내렸다. 늘어지고 싶은, 늘어져야할 것 같은 토요일이지만 부지런을 챙겨서 하루를 엮어보았다. 인생의 남은 시간을 보내기위해 거처를 옮기신 분을 꼭 찾아뵙고 싶어 포천에 있는 호스피스 처소를 찾아 갔다. 내게 오라는 허락이 있어서 찾아 뵌 2층의 6인실 방은 병원의 복잡함을 벗어나 주님께서 이 분에게 베푸신 마무리의 시간이라는 은혜라 여겨졌다. 사람은 누구나 어김없이 정한 때에 부르신 분의 손길을 기다리며 산다. 내게 형님 같은 이 분은 나를 보고 싶었다며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렇게 두 손을 잡고서 나의 기도를 형님께 전했다. 구원의 확신,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달라는 나의 기도에 주님은 형님의 마음을 지어주셔서 감사하고 기쁜 기도를 드렸다. 나는 이러한 표현이나 분류를 대단히 사악한 지적 장난이라 치부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편리를 위해서 사용한다.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당신의 삶을 그저 어린 아이 같았다고 하셨다. 견딜힘도 없고 단지 다행히 큰 풍파 없이 살다 적당한 나이에 병이 들어가니 원도 한도 없다며 곧 갈 거 같다면서 인생의 선배로 여러 가지 말씀을 주셨고 나는 이에 너무도 감사하다 했다. 당신이 나를 좋아하여 할 말이 있다며, 일 년 사 개월을 먹지 못하고 이렇게 있다는 게 신기하다면서 먹을 수 있음도 감사고 모든 것에 걱정하지 말고 살라시는데 어쩌면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을 부르고 위로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흡사했다. 혹시나 내가 사는 일이나 자식 일에 골머리를 싸매고 살까 싶으신지 작은 이해에 연연해하지 말고 자식에게도 집착하지 말라시며 나머지 삶을 부부간에 사이좋게 잘 살라 하신다. 사실 이것도 나에게 가장 큰 숙제이지만 말 잘 듣는 나의 버릇을 발동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피도 살도 나누지 않은 인연. 한 때 건강하고 거침없고 어쩌면 오만함을 사양하기 어려운 시절에는 그냥 부모 잘 만나 철없이 자기 하고픈 대로 인생 사신다고 본인이 말씀하셨고 나도 그 이상 그 이하로도 생각하지 않고 나와 별 상관없는 분으로 여기고 지냈다. 건강에도 자신하여 한 참 아래인 내가 보기에도 참으로 생경한 인생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랬던 그 분이었는데 이제 만년의 시간에 그 분의 삶은 엄청난 밀도로 내게 들어왔다. 어찌하여 나를 좋아하신다는 건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저 진심을 다해 대할 뿐이다. 머지않아 형님은 주님의 품에 안기실 때가 올 것이다. 그 소식에 나는 자그마한 안도의 숨을 손에 쥘 거 같다. 들풀과 같은 나의 삶을 지으시고 빚으시고 존귀케 하신 우리 주님의 사랑. 이제 나는 그 사랑만을 전심으로 따라 가면 그 뿐이다. 삶은 지치라 주어지지 아니하고 모든 것은 사랑하는 분의 은혜일뿐이다. 주께서 왜 그 분을 만나게 하셨는지 빗속을 지나오며 나는 저 하늘 너머의 한 줄기 빛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이 땅에 보화를 쌓는 삶이란 무엇인가? 그 반대의 삶이란 또 무엇인가? 주님은 그것을 내게 묻고 계신다. 문득 바울 사도가 남긴 말씀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집에 돌아오니 마침 딸아이가 아름다운 몇 송이 꽃을 사들고 왔다며 더불어 몇몇 꽃 사진을 보여주었다. 딸아이의 마음처럼 나도 그 봄꽃의 아름다움을 그 어떤 핑계로도 흘려보내지 말아야겠다. 잠시 딸아이가 정색을 하며 현실의 난제들을 운운하기에 “공부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적당히 해. 우리는 감사와 기도로 사는 사람이다. 나머지는 다 따라오는 선물일 따름이야”라고 말해주었다. “네. 알겠어요. 엄마” 딸아이의 작은 목소리에 봄기운이 담겨있었다.
665 no image |까치둥지에서 온 편지<4>| 모든 인생과 일상에 주는 하나님의 도전을 보라!_변세권 목사
편집부
1400 2016-03-15
모든 인생과 일상에 주는 하나님의 도전을 보라!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때로 오해 받더라도 죽어나가는 것에서 신자의 본질 찾아야” 겨우내 까치둥지 안에만 갇혀있다 보니 답답함이 느껴져 밖으로 나와보니 교회안 보다 바깥의 봄바람이 더 훈훈하다. 세상의 소리는 경제가 어렵다 하고, 정치 쪽을 바라봐도 원칙도 소신도 없는 듯이 보인다. 북핵문제로 정국은 어지럽고 더 혼란스럽다. 이러할 때 우리 신자는 어떤 자세로 세상을 봐라보아야 하는가? 바람이 불면 바람 부는 대로, 흩어지면 흩어지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살아가는 길은 없을까? 내가 아니면 안 되고 내가 당선이 되어야만 하고, 내가 나라를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들 한다. 내가 교회를 이끌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오로지 성공과 승리위주의 문화와 가치만 존재할 뿐, 이해하고 용납하고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인내하는 사회 구성원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비정하기 그지없는 무서운 시대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어느 시대에 태어나 어떤 정치, 어떤 경제적 조건 속에 있었는가? 어느 부모 밑에서 어떤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는가는 별 차이가 없다. 그것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담아내려는 컨텍스트일 뿐이다. 우리는 유능하고 흠 없고 진실하고 헌신적인 조건에만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동일하게 일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예수를 담아내는 주인공일 뿐이다. “고난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고난으로만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모르면 현실을 인과응보로만 이해하게 되어 ‘잘 하면 복 받고, 못 하면 벌 받는다’는 고정관념으로만 가기 쉽다. 물론 이 틀은 하나님의 공의에 속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것보다 더 크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다. 무엇이 진전되고 무엇이 성취되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배역과 지위가 다르고 신분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때로는 약속된 부활이 오기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보면 아쉽기만 하고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하는 자책감마저 든다. 꼭 모르는 길을 걷는 것만 같다. 신앙생활의 막막함이 상승곡선은 없고 하강곡선으로 치닫는 것만 같다.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조용히 다가오는 하나님의 숨결은, 할 만큼 했는데도 가서 죽으라는 것으로 다가온다. 보람과 기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충성과 인내의 자리를 요구하신다. “뭐 이런 것이 다 있나?” 싶은 것이 정상이고, 분명하고 확신에 가득 찬 것은 수상한 것이다. 세상과 인생은 성공해야만 거기에 답이 있다고 우리를 속인다. 그러나 목회하면서 아무리 봐도 그런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부활을 약속받은 자로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때로는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과 갈등이 있을 때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가장 상식적인 미덕조차도 없다.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어줄 그 몇 초의 여유도 없다. 원래 얘기는 들어주는 것인데도 말이다. 무슨 얘기를 좀 하려고 하면 “그건 말이야!” 라고 하면서 단번에 말을 가로막고 만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이고, 교제가 무엇이고, 편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논리성으로만 말을 하면서 상대방의 인격과 말을 끊는다. 그 안에 미덕이나 위로나 이해가 없다. 모두가 경쟁적이고 성과적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를 자기 앞에 꿇어앉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끌어안고 가야하는 인생이다. 그러면서도 세상일도 교회 일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어느 날은 아내 하나 감당하지 못해서 무서울 때가 있다. “아, 나는 뭐가 이럴까?” 그것은 부부라 할지라도 믿음이나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강요하는 대상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해하며 죽어나가라는 것인데 일상생활을 믿음으로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지금은 죽음의 기간이기 때문에 해결되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때로 오해를 받더라도 죽어나가는 것에서 신자의 본질을 찾아야한다. 오늘 무슨 일이 생긴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자기 식으로 확인하고, 문제가 해결 되지 않으면 펄펄뛰고 고함지르는 것은 아직도 무엇인가 많이 부족한 경륜이다. “찔러라!” “나를 죽이지 않고는 이 자리를 지나갈 수 없다!” 하며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 우리는 겁을 먹어도 도망갈 수 없고, 핑계를 대도 도망갈 수 없는 자리에 와 있는 사람들이다. “이렇게는 못 살아! 더 이상은 안 해!”가 아니라 “오늘은 그만 자자! 일단 내일로 가보자!”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신자는 세상을 살면서 험한 꼴을 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어떻게 보면 ‘아멘’이 안 나오는 것이 기독교이다. 그러니 항상 서로 힘을 내야한다. 우리 교단은 타교단에서는 훌륭한 교단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정작 우리 안에서는 자존감과 기쁨이 없다. 남에게는 훌륭하게 보이는데 정작 본인은 허망한 길을 걷고 있다. 우리 교단이나 교회는 다른 교단보다 외부적 행사나 활동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홀로 있는 시간이 많고 적적할 때가 많다. 그럴 때 쓸쓸함과 외로움을 잘 이겨내야 한다. 박영선 목사님의 “모든 인생과 일상에 주는 하나님의 도전을 보라!”는 한 줄 평 처럼,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인생과 일상에 주시는 하나님의 도전을 바라보면서, 다만 이기고 승리하는 것이 전부인 이 세상을, 하나님이 주신 도전과 은혜로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현실을 더 부요하고 멋있게 살아내 보자.
664 |손에 잡히는 사본학 해설 <9>| 불가타(Vugata)의 위력_김진옥 목사 파일
편집부
1832 2016-02-29
불가타(Vugata)의 위력 < 김진옥 목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교수 > “원문을 확정하는 사본학에서 ‘오직 성경으로’는 가장 중요한 원리”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은 그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되었다. 사본학에서 이러한 번역본들은 헬라어사본들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번역본들은 그 언어에 따라 서방계(교회)와 동방계(교회)로 대별할 수 있다. 서방계로는 라틴어, 고트어, 슬라브어 번역들이 포함된다. 동방계는 라틴어 번역보다 시대적으로 먼저라고 평가받는 아람어 계통의 번역들로 시리아어나 콥트어 번역이 여기에 속한다. 신약성경이 먼저 아람어로 기록되고 그 이후에 헬라어로 번역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아람어 신약성경의 중요성은 매우 지대하다. 여러 언어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번역본은 라틴어 번역본이다. 5세기 초 교황 다마수스(Damasus) 1세의 요청으로 제롬(Hieronymus)이 번역하고 집대성하여 내놓은 라틴어 성경은 시간이 흐르면서 헬라어성경 이상의 권위를 가지고 군림하게 되었다. 교회는 제롬의 라틴어 성경을 “백성들 가운데 널리 퍼진(대중적인)” 뜻의 불가타(Vulgata; Vulgate)로 불렀다. 이 이름은 주후 4세기 이후로 16세기까지 교회의 역사에서 라틴어 성경이 가진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트렌트 종교회의(1546)는 불가타를 교회의 공식적 성경으로 결정하기까지 하였다. 16세기 불가타 성경이 교회에서 절대적으로 군림하던 때에 헬라어 신약성경이 편집되어 출판된다는 것은 매우 개혁적인 일이었다. 헬라어 성경을 편집하여 처음으로 출판한 사람은 당대의 유명한 석학 에라스무스였다. 불가타의 위력에 맞서 헬라어 사본들을 취합해 신약성경을 출판한 그의 업적은 교회의 개혁에 큰 유익을 가져왔다. 에라스무스의 신약성경 출판과 관련하여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일화는 요일 5:7-8(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이 셋이 하나이니라)의 사본비평과 깊이 연결된다. 에라스무스의 초상 - 그림: Hans Holbein der Juengere. 당시 교회에서 사용하던 라틴어성경에서는 요일 5:7절에서 “하늘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로고스)과 성령이니, 이 셋이 하나이니라. 땅에서도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의 부분이 추가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다소 길고 조화로운 비쟌틴계의 다수사본 속에서도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제롬의 초기 번역 속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 구절의 흔적은 후대에 교황 식스투스 5세와 클레멘트 8세 때 공식적으로 인정된 라틴어성경(불가타 클레멘티나)에서나 추적해 볼 수 있다. 이 구절은 당연히 에라스무스가 사용한 사본들 속에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헬라어성경 초판은 이것 없이 발행되었다(1519). 하지만 이 구절을 헬라어 편집에 끼워 넣기 원하였던 사람들은 이것이 추가된 헬라어 사본을 만들어서 에라스무스에게 가져왔다. 결국 1522년 개정판에는 삼위일체를 교리적으로 변호할 수 있는 이 부분이 덧붙여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 부분은 공인본문(textus receptus)을 토대로 번역된 킹제임스 번역성경 속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주후 5세기 이후 중요한 성경본문으로 군림했던 불가타의 후기 버전 속에 추가된 이와 같은 추가 본문은 개혁주의 사본학에 있어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화두를 던진다.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 성경 말씀을 덧붙일 수 있는가? 혹은 말씀보다 교회가 먼저인가? 이러한 물음은 ‘오직 성경으로’라는 개혁신학의 위대한 표제를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교회는 말씀보다 앞설 수 없다. 아무리 중요한 교리이더라도 말씀을 더하거나 빼면서 방어할 수 없다.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적 모토인 ‘오직 성경으로’는 원문을 확정하는 사본학에서도 중요한 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663 no image |까치둥지에서 온 편지 <3>| '소유를 넘어 공유의 섬김으로...'_변세권 목사
편집부
1479 2016-02-16
‘소유를 넘어 공유의 섬김으로...’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연합의 관계가 이루어진 사람은 교회 안에서 지체와의 수평적 연합관계를 반드시 이뤄야” 새해가 되면서 나 자신이나 교회가 새로운 사명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설날도 지났으니 이제 더 머뭇거릴 수도 없다. 그것은 개인의 소유를 넘어 우리 모두가 공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진정으로 이러한 삶을 살 때가 되었다. 구약과 신약의 총체적인 뜻은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느냐, 그렇지 않고 떡으로 사느냐의 문제이다. 출 16장이나 고후 8, 9장의 교훈은 우리의 삶을 평균케 하는 원리가 되고, 이것은 공유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칼빈의 교회론에서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연합의 관계가 이루어진 사람은 지체와의 수평적 연합관계를 반드시 이루는 것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섬김의 오묘한 연합이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정신세계는 물질문명의 척도에 따라 타락하는 법인데, 신자의 삶은 이렇게 차이가 난다. 이런 공유하는 삶은 교회 공동체의 지체의 연합적인 삶이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낼 때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공유주의를 제도화하자는 말이다. 필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을 전제로, 물질을 주신다는 것을 감히 단언하는 바이다. 사실 교회 안에서는 부의 불균형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신자가 당하는 고난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불치의 병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이제는 그만 데리고 가시겠다는 명백한 섭리이다. 그분의 은혜의 긍휼에 맡길 수밖에 없다. 또 하나는 경제문제이다. 교회 안에서 지체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함께 나누고, 함께 살 수 있을 때 그 신자는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칼빈은 “부자들의 의무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데 있다”고 했다. 신자가 혼자만 잘 살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는 텅 빈 생활인 것이다. 칼빈은 역시 그의 주석에서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공평과 균형이 있기를 원하신다. 즉 사람은 아무도 너무 많이 갖거나, 필요한 것도 가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자기 자신의 정도에 따라 궁핍한 사람을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고 했다. 앙드레 비엘레도 “만일 교회가 정말 이 가르침을 중요하게 여기고 제대로 실천했다면 공산주의자들이 이 근본적인 성경의 사상을 기독교 종교에서 떼내어 자기들의 유물론적, 전제주의적 견해에 접목시키는 일은 결코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교회 안에서의 빈부의 격차를 교회의 질서로 보았다. 엔드류 카아네기도 “어느 정도의 부가 쌓이면 그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라고 했고, 에릭프롬도 “물건과 소유에서 행복을 찾지 말고 존재에서 찾으라”고 했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은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신학이다. 신자의 온전한 거듭남은 풍성한 생명력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플라톤의 행복론도 조금 부족하게 소유하라는 것이다. 행복은 실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체는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질은 중용의 도리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내세를 바라보고 현세를 지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그분의 진리와 주권으로 하나님의 뜻을 더불어 함께 담아낼 수 있게 된다. 진정한 노후대책이란, 더더욱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일 밖에 달리 있을 수 없다. 우리 자신이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면서 사는 인생처럼 어리석고 가련한 인생도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가 소유일색의 환경으로 짜여 있어서 소유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욕망의 기차를 타고 멸망의 역을 향하여 겁도 없이 달리고 있다. 뺄셈의 소유에서, 덧셈의 공유로, 공유지수를 높이는 것이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비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공유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자식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소유로 생각하지 말고 자녀들에게 이제라도 부지런히 공유사상을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자녀나 후대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많은 유산을 물려줘서 자녀들이 행복한 것이 아니다. 소유로 가면 마이너스로 가는 인생이 되지만, 나눔을 실천하는 공유의 삶으로 가면 플러스 인생이 된다. 나누는 일, 공유하는 일, 베푸는 일이 오히려 제일 행복한 것이다. 소유는 순간이지만, 내가 나누는 것에 대한 의미와 보람은 영원하다. 소유는 쾌락은 있어도 보람은 없다. 보통은 자식에 관한한 우리의 소유욕은 하늘을 찌른다. 이것부터 고쳐나가야 한다. 서로의 환경이 서로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 우리는 다 가졌는데 왜 행복해하지 않는가를 고민하고 결단할 시점이 되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기독교 경제관과 사회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통장에 플러스가 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는 그 태도와 생각을 바꿔서 많이 나누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서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밝혀갈 때 행복한 삶이 되는 것이다. 이웃을 돕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어디서도, 언제라도, 무엇에서도, 누구에게서도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염려하지 말고 종교개혁의 상속자들과 그 후예답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신실하며 역사의 흐름을 이어받아야 한다. 이것이 개혁교회 신자다움이요, 우리의 조국과 기독교 세계 전체를 위해 할 수 있는 공헌이며, 인류에게 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봉사가 되는 것이다.
662 |손에 잡히는 사본학 해설 <8>| 노미나 사크라(nomina sacra)_김진옥 목사 파일
편집부
1849 2016-02-16
노미나 사크라(nomina sacra) < 김진옥 목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교수 > “교회에 미치는 이득 위해 성경 사본학은 겸손한 자세 요구해” 신약성경 사본들 속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기록방식 중 하나는 노미나 사크라이다. 라틴어로 ‘거룩한 이름들’을 의미하는 노미나 사크라는 사본들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들을 기록할 때 사용되는 전형적인 기록방식을 일컫는다. 거의 모든 성경사본들이 하나님, 주, 예수, 성령 등의 신명(神名)을 이 기록 방식을 따라 표기하였다. 노미나 사크라는 앞과 뒤의 알파벳을 사용하여 단어를 축약하고 그 글자들 위에 밑줄을 긋는다. 하나님을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θεος ⇒ θς. 노미나 사크라의 예: 바티칸사본(요1:1) - 바티칸사본의 팩시밀리 판: Bibliorum Sacrorum: Graecus Codex Vaticanus (rep. 1982). 노미나 사크라의 사용은 발견된 파피루스가 기독교적인지 아니면 이교적인지를 구분하는 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여러 가지 우상들을 신으로 섬겼던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들 속에는 신과 관련된 표현이 많기 때문에 이들이 기독교적인지 아니면 이교적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자주 있다. 이 경우 노미나 사크라의 존재여부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노미나 사크라는 이교적 편지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고대 성경 필사자들의 전통에서 어떤 이유로 노미나 사크라가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의도를 밝히는 것은 어렵지만, 노미나 사크라가 성경사본의 기록방식 가운데 독특한 점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표기 방식을 통해서 필사자들이 어떤 경외감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노미나 사크라는 신비적이거나 주술적인 표식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간혹 노미나 사크라의 해독이 해석자들 사이에서 혼돈스러운 경우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딤전 3:16에서 발견된다. 딤전 3:16은 빌 2:6-9과 같이 사도 바울의 기독론적 서술이 응집된 중요한 본문이다. 시내산사본의 원본은 관계대명사를 사용하여 ‘그는(ος)’하고 기록하였지만, 수정자들은 ‘하나님’으로 θε을 첨가하여 수정하였다(사진 참조). 시내산 사본의 수정자들은 원본에 기입된 ‘ος’를 노미나 사크라(하나님: θς)의 오기(誤記)로 간주한 것이다. 시내산사본: 딤전3:16 - 출처: http://www.codexsinaiticus.org 개역성경은 시나이사본과 바티칸사본의 원본을 따라 ‘그는’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 부분을 ‘하나님’으로 읽는 사본은 비쟌틴 계열의 수많은 사본들을 대표하는 다수사본(Mehrheitstext)이다. 계속해서 이 독본의 전통은 공인본문(textus receptus)과 이를 토대로 한 킹제임스 번역을 통해서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딤전 3:16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는 ‘그’를 ‘하나님’으로 바꿔 읽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며,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신앙고백하(려)는 사본이라 생각할 수 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 그러나 이러한 ‘의도적 판독(Entzifferung)’이 과연 올바른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거두절미 하고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ος)’를 노미나 사크라의 오기로 생각하여 바꿔 읽는 부분에 대해서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큰 이유는 사본상의 외적 증거 때문이며, 계속해서 딤전 3:16의 평행구라 생각할 수 있는 빌 2:6이 ‘그는(ος)’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딤전 3:16의 기독론적 서술은 빌 2:6 이하에 등장하는 ‘그리스도 찬송시’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그렇다고 여기 쓰인 관계대명사 ‘그를(ος)’을 ‘하나님(θεος)’으로 읽는 것에 대해서 틀렸다고 적대시 할 필요도 없다. 학문적이고 객관적인 사료의 검토가 성경사본학의 기본적 토대이지만 그 결정은 어느 정도 신학적 직관에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교회에 미치는 교리적 이득을 생각한다면 ‘그(ος)’를 노미나 사크라로 읽는 것이 더 유익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쉽게 결정 내릴 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시간 속의 묵상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661 |손에 잡히는 사본학 해설 <7>| 어려운 띄어쓰기(Scriptura Continua)_김진옥 목사 파일
편집부
2050 2016-01-12
어려운 띄어쓰기(Scriptura Continua) < 김진옥 목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교수 > “성경은 다양한 해석의 방향 속에서 하나의 진리 가르치고 있어” 사본들의 기록방식 가운데 중요한 특징은 이들이 모두 ‘띄어쓰기’와 ‘구두점’(문장부호) 없이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띄어쓰기와 문장기호 없는 기록방식은 고대의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학자들은 이것을 “글자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스크립투라 콘티누아’(scriptura continua 혹은 scriptio continua)로 규정하였다. 특별히 헬라어로 기록된 글들은 산문인지 운문인지에 따라 읽는 방식이 다르며, 띄어쓰기와 구두점이 없는 글을 읽기 위해서는 많은 숙달과 연마가 필요했다. 이런 이유로 헬레니즘 시대의 학생들은 헬라어를 습득하기 위해서 많은 교육을 받았으며, 주로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아를 교과서와 같이 암송하였다. 예) 전형적인 Scriptura Continua(P46) 신약성경을 비롯한 그리스어로 기록된 글들의 띄어쓰기는 중세에 이르러서야 도입이 되었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장과 절을 구분하여 나눈 사람은 스테파누스이며 근대적 의미의 문장부호가 성경에 도입된 것도 역사가 오래지 않다. 사실 띄어쓰기와 구두점이 없는 본문을 해독하는 일은 해석과 번역에 관련된 작업이기도 하지만, 이 분야는 일차적으로 사본비평학에서 다루고 있다. 파피루스나 양피지 코덱스에 쓰인 성경말씀들도 띄어쓰기와 구두점 없이 기록된 사본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구절에서는 해석이 난해한 경우가 발생한다. 간단한 문장에서는 큰 어려움이 없으나, 복잡한 문장일수록 그 어려움은 배가 된다. 때로는 띄어쓰기가 어려운 문장 속에 신앙의 교리와 관련된 중차대한 내용이 담겨지기도 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간과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구절은 요한복음 7장 37b-38절이다. 너무도 유명한 이 구절은 요한복음의 암송구절기도 하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그러나 이 구절은 구두점을 달리하면 아래와 같이 읽을 수가 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나에게 오며, 나를 믿는 자는 마실 것이니, 성경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러한 띄어쓰기는 헬라어의 일반적인 문법과 구조를 고려해 볼 때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오히려 이와 같이 읽는 경우 상반절에서 ‘목마른 자’와 ‘나를 믿는 자’가 구조적(의미적)으로 대구를 이룰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매우 파격적으로는 38절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생수’(살아있는 물)를 38절에서 잘라내어 39절에 연결하여 읽을 수도 있다.1) 이 경우에 ‘생수’는 절대소유격으로 해석하여 39절에 연결된다. 하지만 이러한 읽기는 ‘옛 지계석’을 옮기는 것과 같은 급진적인 것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원문이 기록된 고대의 사본들은 띄어쓰기와 문장부호 없이 기록되었다. 이러한 기록방식은 오늘날의 해석자들에게 많은 긴장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이들은 성경 말씀의 유연성을 간접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다양한 해석의 방향 속에서 하나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성경 말씀이 아니겠는가?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하나의 진리 속에는 많은 다양함이 내재한다. 1)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나에게 오며, 나를 믿는 자는 마실 것이니, 성경에 이름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강이 흘러나오리라. 물은 살아있으니, 이는 그가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라(사역).
660 no image |까치둥지에서 온 편지 <2>| 세속 정부의 역할과 존재 의미_변세권 목사
편집부
1527 2015-12-29
세속 정부의 역할과 존재 의미 < 변세권 목사, 온유한 교회 > 세상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이 세상은 사실상 이중의 통치에 놓여 있다. 곧 이 세상은 ‘권능의 왕국’과 ‘은혜의 왕국’으로 구분된다. 예를 든다면 ‘국가 통치’와 ‘교회 통치’로 구분할 수 있다. 국가를 다스리는 권력이 따로 있고 교회를 다스리는 권력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권력이 서로 충돌한다거나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세속 정치에 의한 국가 통치의 목적은 교회의 안녕을 위한 것이다. 곧 이 세상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성도의 영적 삶을 보호해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가령, 그리스도인들이 영위하는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필요한 경우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수호하기도 한다. 나아가 국가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회생활에 순응하도록 적응시킨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를 사회 정의와 일치할 수 있게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간에 불화가 생겼을 경우 서로 화해하게도 한다. 이렇듯이 국가 통치의 목적은 전반적인 평화와 평온을 증진하는 데 있다. 이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리자들을 통해 교회에 베푸시는 영적 통치의 목적은 이 세상의 초등학문을 벗어난 지상의 신자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시작하게 하며, 나아가 영원불멸의 복락을 맛보고 예상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맛보고 예상하게 해주며 교회를 구원론적으로 다스리는 분이시며 그의 왕국이 엄연히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그의 나라는 세상과 판이하게 다르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혜 안에서만 받는 영적 결실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무엇이든, 또는 어느 나라의 법률 하에서 살든 간에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의 초보적인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원칙적으로 세상 통치로부터는 자유로워야 한다. 하지만 이 자유는 그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특정한 한계 내에 머물러야 한다. 즉 세상 통치권을 인정하고 거기에 복종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기꺼이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세상 정부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생활 활동과 방도를 마련하는 데만 머물지 않고 나아가 그 이상의 일들도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공개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성이 보존되게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각종 사이비 종교들로 인한 혼란을 비롯하여 기타 건전한 종교에 대한 공공연한 방해가 발생하거나 만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정부 차원에서 치안을 유지하고, 시민의 재산을 보호하고, 인간 상호 간의 선한 교제를 가능하게 하고, 정직과 겸양의 덕을 보존하는 것 등은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통치자들을 기뻐하시고, 영예로운 칭호로 장식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적극 천거하신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은 ‘다스리는 일’을 하나님의 은사 중 하나로 해석하고, 일반은총 영역에도 해당된다고 보아 세속 정부에도 적용시킨다. 그러므로 집권자들은 ‘하나님의 대리’로써 봉사한다는 각성 하에, 임무에 대해서는 마땅히 용기를 내고, 대신 과오를 범할 경우 결국 하나님께 누를 끼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모든 집권자들은 율법의 ‘첫째 돌 판’에 대한 의무에 충실함으로써 사람들을 칭찬하는 까닭에, 과거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마음대로 행했던 ‘무정부 상태’를 악이라도 평했다. 여기에 덧붙여 율법의 ‘둘째 돌 판’에 대한 의무에도 성실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공평과 정의 수행에 힘써야 한다. 악인의 손에서 약자를 보호해야 하고, 범사에 공명정대한 판결을 내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야 한다. 통치권자들은 세속적 권력욕이나 탐욕과 명예욕을 멀리하고, 백성들 위에 교만하지 말며, 주야로 율법을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실현함에 힘써야 한다. 이러한 통치를 펼치라는 의미에서 집권자들은 범죄자들을 엄격하게 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무기로 받은 것이다. 우리는 경험에 의해서도 모든 정치 조직은 상벌에 의해서 유지되며, 따라서 상벌을 제거하면 규율은 붕괴되고 소멸된다고 했던 솔론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가령, 덕행에 명예가 주어지지 않는다 하면 공정과 정의에 대한 열의가 식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고, 범죄한 자들에게 엄격하게 벌을 주지 않는다면 악인들의 정욕은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오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 같은 분들은 이 두 가지 가능성을 종합해서 왕들과 집권자들을 향해 공평과 정의를 행하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659 |손에 잡히는 사본학 해설 <6>| 마르다에게 필요한 것은?_김진옥 목사 파일
편집부
1768 2015-12-29
 마르다에게 필요한 것은? < 김진옥 목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교수 > “사본 선택에 따라 성경의 뉘앙스 및 핵심적 의미까지도 달라져”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데는 중요한 계기가 있다. 필자가 처음으로 사본비평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주 오래 전 설교를 준비하면서 만난 마르다 때문이었다(눅 10:38-42). 잘 아는 바와 같이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영접하고 이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매우 분주하였다. 하지만 함께 도와야 할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분주해진 마르다는 마리아가 자기를 돕도록 예수님께 요청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 하거라”고 훈계하셨다. 이 일화가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의 훈계에 집중된다. 그러나 개역성경의 본문을 근거로 볼 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주신 훈계의 의미가 표류하고 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눅 10:42).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주신 훈계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일까? 성경을 묵상하는 분들, 특히 이 본문을 설교하려고 했던 분들은 한 번 쯤은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이 부분의 해석이 표류하여 불분명하게 된 이유는 사본들 상의 다른 본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두 종류의 이문들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1.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들로 염려하고 분주하나, 몇 가지 혹은 한 가지만 필요하다: 2.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들로 염려하고 분주하나, 한 가지만 필요하다 Codex Sinaiticus 눅10:41-42 <출처: www.codexsinaiticus.org > 첫 번째와 두 번째 본문 모두 유력한 사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몇 가지와 한 가지” 모두를 포함한 사본들은 P3 과 시나이사본이며, “한 가지만 필요하다”라고 기록한 사본은 P45, 75, 알렉산드리아사본과 다수사본(Mehrheitstext)을 포함한 대다수의 사본들이다. 중요한 점은 서로 계통이 다른 알렉산드리아 계와 비쟌틴 계의 사본들이 여기서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평본문인 NA28도 공인본문과 같이 “한 가지만 필요하다”를 선택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 단락의 해석에서 개역성경이 놓치고 있는 두 번째 본문을 유효하게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본문의 문맥은 “몇 가지” 대신에 “한 가지”를 선택할 것을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다. 두 번째 본문은 여러 가지 점에서 첫 번째 본문보다 더 분명하고 정합성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대접하는 이 단락은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훈계하시는 41-42절에서 결론적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선택한 한 가지를 칭찬하며 마르다에게도 필요한 한 가지, 곧 말씀을 들을 것을 요청하신 것이다. 마르다에게 필요한 것 한 가지는 다름 아닌 말씀을 듣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르다에게 주신 예수님의 훈계를 “몇 가지 혹은 한 가지”로 확대한다면 말씀의 의미는 산만하게 흩어져 표류하게 된다. 이 본문은 필자에게 사본비평학의 필요와 본문 선택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본문이었다. 어떤 본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성경의 메시지는 분위기와 뉘앙스, 심지어 핵심적인 의미까지도 달라질 수 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들로 염려하고 분주하지만, 정작 네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이니라”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것 단 한 가지를 마르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고 많은 분주함 가운데 살아가는 오늘날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은 더욱 절실하다. “몇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가 필요한 것이다.
658 no image |선교지 현장 리포트 <4>| 케냐 마사이 부족 여성의 할례 이야기_최현재 목사
편집부
1869 2015-12-02
케냐 마사이 부족 여성의 할례 이야기 < 최현재 목사,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 남가주노회 >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인격적인 행위들 이제는 사라져야” 한 유대인 가정으로부터 아들의 할례의식에 참석해달라는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고 배우며 듣던 친근한 말이지만 실제 행해지는 의식을 접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였다. 정원 큰 파티용 텐트에 유대인식 케더링으로 잔치음식을 배설하고 화려한 차림의 연주가들이 유대인 생음악을 연주하는 중에 어도브(메인 음식이 나오기 전에 서브되는 간식)를 먹으며 시작을 기다린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아버지는 난지 8일된 아기를 가슴에 품고 등장하여 레바이(랍비)앞에 선다. 그 랍비와 아기를 중심으로 가까운 친척과 지인들이 둘러서면 랍비는 희브리 말로 성경을 읽는다. 창세기 17장에 처음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언약에 얽힌 내용을 히브리어로 노래하듯 읽는 모습으로 여겨졌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10). 진지하게 의식을 행하는 그들의 모든 행위가 구약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기에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태어난 지 8일 만에 행하는 모습들,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되새기면서 아기의 입에 포도주를 천에 적셔 머금게 하고 랍비가 아기를 가슴에 안고 양피를 베어내면서 춤과 음악을 곁들여 한바탕 축제가 벌어진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할례의식과 그들의 축제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이 이미 밝혀졌다.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자지를 통하여 마음과 몸의 할례가 언급되면서 신약시대의 바울 사도는 로마서 2장에서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라고 가르치고, 갈라디아 교회의 중요한 이슈였던 할례 문제를 풀어나가면서 단호하고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됨을 강조하고 있다. 유대인의 할례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립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처럼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품고 있는 할례의식이 이집트와 중동 등 세계 곳곳에서 왜곡되어 행해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약 3시간 거리인 마사이 부족 마을 사람들을 방문하기 위하여 아침부터 며칠 동안 먹을 음식과 한 드럼의 마실 물을 싣고 그곳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 도로로 자동차로 달리기에는 다소 험하였다. 일반 도로에서 비포장 샛길로 들어서면서 차가 덜컹거리기 시작하던 중 먼지가 자욱한 길 중앙에 붉은 천을 온몸에 휘감고 분주히 우왕좌왕하던 한 무리의 마사이 부족 마을 사람들이 우리 일행의 차를 세웠다.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차창을 열고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당신들 중에 의사가 있습니까?’라고 말했고, 그 이유를 물으니 여기 죽어가는 환자가 있는데 치료해 줄 수 없느냐는 것이다. 필자는 자신이 의사라고 소개하며 그 환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되어 가서 보니 13세쯤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열이 펄펄나며 동공이 풀려있고 입에서 거품을 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것 같은 모습을 보고 필자의 판단에 이 환자는 침으로 치료해야 할 환자가 아니라는 판단을 하고 우리 일행의 차를 내주며 급히 병원으로 보낸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일은 마사이 부족사회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부의 상징은 소의 숫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한다. 즉 소가 많으면 부자이고 적거나 없으면 가난한 사람이다. 소의 수가 많으면 그만큼 할 일이 많아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 마사이 부족에게서 여성은 노동력의 상징이다. 여성이 집을 짓고 소가 먹을 꼴을 만들어 그들을 먹이며 돌보아야한다. 부인들은 소똥에 진흙 및 지푸라기들을 섞어 집을 짓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모기가 소똥 냄새를 싫어하여 그것으로 집을 지으면 그것들을 쫓을 수 있단다. 이렇다보니 소가 많은 부자는 일군이 많이 필요하고 그 필요한 일군들을 많은 부인을 거느려서 노동력을 확보해야한다. 가장의 집을 중심으로 하나의 원을 그리면서 부인들의 집이 들어선다. 가장은 매일 밤 자신이 원하는 부인의 집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일이 이렇다보니 부인들 사이에 질투와 시기로 싸우는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할례를 하면 여성이 가진 정상적인 감정 중에 하나인 질투하는 성품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리고 성욕도 없어지며 그로인한 성감도 사라진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부인을 많이 거느린다고 해도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부인이 한 사람 더 늘게 되면 다른 부인들이 더 반가워하고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 아이가 13세 정도의 나이가 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할례를 시킨다는 것이다. 마사이 부족에서 태어난 여성은 이 악한 관습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누구든지 그 나이가 되면 할례를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에게 위생관염이 없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깨끗지 못한 식칼과 같은 것을 갈아서 여성의 은밀한 한 부분을 도려낸단다. 이 과정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혹 면역이 좋은 건강한 처녀는 잘 아물어 무탈하지만 그렇지 못한 처녀는 이렇게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게 된다는 것이다. 문명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라고 하겠지만 그곳에서는 상식과도 같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케냐 정부에서도 이러한 악한 관습을 고쳐보려 시도해 보지만 마사이 부족들은 도시의 행정이나 법이 닿지 않는 깊은 오지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들을 통제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길에서 만난 그 마사이 부족의 어린 여자아이가 당해야하는 어처구니없는 여성할례, 그외 여러 나라 후미진 곳에서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여성을 향한 비 인격적인 행위들, 그것들은 분명 사라져야할 21세기의 악습임에 분명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전해 내려져 오고 있다.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게 하는 무서운 여성할례는 분명히 남성들의 이기적인 악한 성품에서 시작된 악습이다. 창세기 2장에 아담은 자신의 아내를 보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하지 아니하였던가. 뼈중의 뼈, 살중의 살이라는 최고의 표현이 타락하여 여성할례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케냐 나이로비의 오지 마사이 부족들가운데 살아가는 그들에게도 복음이 들어가야 할 이유이다.
657 |손에 잡히는 사본학 해설 <5>| 사본들의 전쟁, 알렉산드리아 계와 비쟌틴 계의 대립_김진옥 목사 파일
편집부
2006 2015-12-02
사본들의 전쟁, 알렉산드리아 계와 비쟌틴 계의 대립 < 김진옥 목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교수 > “어떤 본문을 선택함에 있어 개혁신학 보수할 수 있을지 고려해야” 현재 신약성경의 원문을 확정하는 데 사용되는 사료들은 약 25,000개 정도이다. 이들을 적절하게 비교하여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본의 특징을 따라 분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분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사본들을 계통에 따라 선구자적으로 분류한 학자는 벵겔(J. Albrecht Bengel)이었다. 지금까지 사본들은 여러 가지 계통으로 분류되었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분류하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알렉산드리아 계와 비쟌틴 계이다.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현대 사본학을 검토하기 위해서도 이 두 계통의 성격과 특징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알렉산드리아 계통으로 분류되는 사본들의 거점은 초대교회 기독교의 중심지라 할 수 있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오리겐과 클레멘트와 같은 교부들을 배출하고 교리신학교가 세워진 전통 있는 신학도시였다. 또한 데키우스와 발레리안으로부터 자행된 핍박의 역사도 간직한 알렉산드리아는 콘스탄틴의 종교화의(宗敎和議, A.D. 380)와 기독교국교화(A.D. 392)가 선포된 후 8세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기독교 도시였다. 이 도시의 신학적 전통을 내포하고 있는 알렉산드리아 계통의 사본들은 본문의 길이가 짧고 난해하며, 또한 사본의 수가 소수라는 점으로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이집트 계통으로도 불리는 이 사본들은 현대 사본학자들에게 중립적인 사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신약성경의 편집에서 가장 우선되고 있다. 이 계통 속에 P46을 비롯한 몇 개의 파피루스들과 시나이사본(Codex Sinaiticus), 바티칸사본(Codex Vaticanus), 알렉산드리아사본(Codex Alexandrinus)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맞서는 비쟌틴 계의 사본들은 주후 3세기 무렵 수리아 안디옥과 그곳의 신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루키안(Lukian von Antiochia)의 성경편집에서 그 계통적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때문에 현대적 비평사본학의 기본적 틀을 마련했던 웨스트스콧(B. F. Westscott)과 호르트(F. J. A. Hort)는 이를 시리아 계로 분류했다. 비쟌틴 계통의 사본들은 파피루스와 시나이사본의 발견 이전까지 ‘다수사본(Mehrheitstext)’으로도 불리면서 이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공인본문(textus receptus)을 통해서 16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지배했다. 이 계통에는 알렉산드리아사본 중 복음서와 에프렘사본을 포함해서 수많은 필사본들이 여기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비쟌틴 계통의 사본들은 알렉산드리아 계통에 비해 본문이 길고 평이하며,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점을 특징으로 가진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로부터 시작하여 종교개혁자 베자, 스테파누스, 스크리브너 그리고 공인본문을 토대로 번역된 킹제임스번역의 신약성경본문은 모두 비쟌틴 계열의 전통에 속한다. 두 계통의 본문이 보여주는 차이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의 전반에서 확인된다. 그 중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허다한 천군천사의 송영’을 기록한 눅 2:14이다. 그리스어 원문을 토대로 보자면 눅 2:14에서 두 계통의 사본이 보여주는 차이는 문장의 끝에 위치한 알파벳 단 한 글자이다. 이 구절은 이 알파벳 ‘시그마(Σ)’ 한 글자 때문에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현재 우리가 가진 개역성경은 시그마를 추가하여 어려워진 알렉산드리아 계통의 본문을 수용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는 자들 중에 평화로라.” 반면 시그마를 삭제한 비쟌틴 계통의 본문을 수용하면 이 찬송은 세 절로 끊어지는 운율을 확보하여, 시적인 미가 살아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강이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라.”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 눅2:14 (사진출처: www.codexsinaiticus.com) 위의 사진은 알렉산드리아 계통의 최선두에 있는 시나이사본이 비쟌틴 계통의 사본들과 아슬아슬하게 교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민의 흔적이다. 시나이사본의 수정자는 눅 2:14의 마지막 알파벳 시그마(Σ)를 삭제했다. 단어의 마지막에 알파벳 시그마를 추가하면 우리말 번역에서는 의역으로 잘 느껴지지 않지만, 그리스어 원문에서 천사의 송영은 상당히 난해하게 된다. 때문에 시나이사본의 수정자는 시그마를 지워버렸다. 이와 비슷한 수정의 흔적은 시나이사본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본들 속에서도 발견된다. 이와 같은 사본 계통의 차이는 다시금 사본학의 중요성과 아울러 개혁주의적 사본학의 필요성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그럼, 어떤 본문을 취하여야 할까? 두 개의 본문이 선택적으로 주어져서 어떤 본문을 취하던지 크게 오류가 없다면, 옳고 그름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기보다는 어떤 것이 더 유익한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어떤 본문이 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권위와 진리를 더 드러내며, 또 어떤 본문을 선택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하며, 개혁신학을 보수할 수 있을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탄생을 노래하는 천사 찬송의 오래된 버전도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강이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라”
656 no image |까치둥지에서 온 편지<1>| 교회의 시대적 사명 인식의 필요성_변세권 목사
편집부
1587 2015-11-03
교회의 시대적 사명 인식의 필요성 < 변세권 목사, 온유한 교회 > "교회는 각 시대마다, 또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 구성원들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다양한 생명의 특징을 나타내게 된다" "교회는 진리를 지키고 사수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각별한 각오를 가지는 데서 신령한 성도, 신령한 교회의 모습이 나타난다" 요즘 우리시대의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 문제로 교단들과 많은 교회들이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 현대 교회가 취해 나가야 할 신령한 교회의 역할은 무엇보다 시대적인 사명을 느끼고, 그것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1. 교회가 인식해야 할 시대적 특성 교회는 언제나 자기 시대에서 감당해야 할 자기의 몫이 있다. 교회들마다 이 시대적인 자기의 사명을 잘 깨달아야 하고,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는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서 배우는 바가 많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가 모든 시대의 모델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개혁운동을 하면,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가자 하는 등등의 구호를 부르짖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복음의 실상을 충분하게 파악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것을 갖춘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실상 많은 것이 부족한 교회이다. 교회의 정체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보다 풍성한 교회의 이론을 누리지도 못했다.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나중에 신약 성경이 다 기록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진정한 모델은 성경 전체의 사상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이때 교회는 각 시대마다, 또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 구성원들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다양한 생명의 특징을 나타내게 된다. 이런 까닭에 예루살렘 교회를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그러한 형태를 모방해 내는 것이 교회개혁의 본질인 듯이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기에 중세기에 종교 개혁자들이 교회를 개혁할 때에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성경 전체에서 교회상을 찾았고, 그것을 자기 시대의 상황이라고 하는 현실 속에서 필요한 정도에 맞도록 펼쳐나갔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 전체의 사상을 통해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충분히 배워야 한다. 이런 충분하고 확실한 교회상을 가진 것을 전제한 다음, 자기 시대의 성격을 잘 분석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데서 자신이 속한 교회가 감당해 나가야 할 사명이 어떠해야 하겠는가를 명확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2. 교회가 인식해야 할 사명 의식 교회가 사명을 깨닫는 과정이 그저 획일적으로 지역을 복음화 하자, 세계를 복음화 하자는 등등의 표어를 내걸고 성도들을 재촉하고 채근하면서 결국에는 자기들의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에 불과한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사명을 인식함에 있어서 항상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들의 교회의 특징, 혹은 개성 또는 인격을 먼저 잘 파악하는 일이다. 그런 다음에 자기 시대의 특징을 파악하고 여기에 비추어 교회가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식으로 시대적인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부러워하는 어떤 교회를 하나의 모델로 정해 놓고서는, 그렇게 똑 같이 되기 위하여 그 모델 교회가 취하고 있는 이런 저런 방법론들을 도입해서 그대로 적용해 나가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현대 교회의 모델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당시의 역사 속에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했다는 측면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예루살렘 교회가 3,000명 혹은 5,000명으로 불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을 주목하고 그것을 뒤좇아 가는 식으로 교회의 사명을 설정하고, 명분을 찾기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를 들먹이는 것은 방향이 빗나가도 크게 빗나가는 것이다.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들을 분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개혁 교회들은 그 시대의 교회로서 그 시대의 역사가 요청하는 문제에 직면하여, 자기의 몫을 담당했다는 차원에서 개혁교회로서의 교회 사명을 훌륭하게 감당한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 교회가 그 시대의 역사가 요청하고 있는 문제를 자신들에게 비추어 정확하게 파악하고 감당해 나가는 교회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로, 그저 크게 부흥한 어떤 교회를 모델로 삼고서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을 통하여 그와 같은 교회를 또 하나 만들어 보겠다는 방법으로 나아가는 것은 참으로 부족한 생각이다. 따라서 교회는 항상 자신의 형편과 상황과 처지에 맞도록 생각해야 한다. 이때 특별히 성도들은 일차적으로 신령하게 자라는 일에 온 힘을 써야 한다.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은 이 일에 누구도 예외 없이 책임감을 가지고 나서야 한다. 그래서 각인이 부지런히 자라나야 하고, 하나로 연합해야 하며, 통일성 있는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과정 속에서 교회에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사명을 구체적으로 감지하고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이 이런 원리에서 형성되고 찾아지며 누려지는 것을 통하여 성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반대로 오히려 역사를 역류해서 과거의 어떤 교회를 이 시대에 도입해서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식으로 교회의 사명을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는 자기 시대에 잘 알려진 어떤 유명한 교회를 본받아서 그와 똑같이 커지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3. 교회가 인식해야 할 구속사의 특성 보다 엄격한 의미에서 본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담당했던 일을, 오늘날의 교회가 재현할 수는 없다. 예루살렘 교회는 구속사의 전환기에 특별하게 탄생된 교회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는다. 여기서 오순절 성령 강림을 제시했는데 이 사건은 구속사에서 오직 유일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이라는 의미이고, 이 점과 관련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해야 한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유일무이하게 특별한 성령의 역사를 받은 것은, 그러한 역사를 받아야 할 만큼 자기 시대에 직면하여 감당해야 할 고유의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할 특별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의 능력을 받아야 했다. 그것은 이제 구약 교회를 종결짓고 신약 교회를 출발시키는 일이었다. 이 일 때문에 성령께서는 그렇게 강하게 역사해 주셨고, 그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의 주변적인 현상들도 많이 나타내셨다. 이는 달리 말하여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세상 앞에 교회의 정체성을 최초로 드러내는 사명을 감당해야 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세상 앞에 자기를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과연 교회가 어떤 존재이며 어떠한 생명력을 구현해 나가는 존재인가를 드러내 보여야 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이런 상황에 직면해 있었고, 그것을 감당하는 교회로서 존재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파악해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가 서 있었던 시대적인 상황에 비추어서, 그리고 그 교회가 존재했던 역사의 과정전체를 통찰하여 비로소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당시 교회는 아주 긴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이런 까닭에 성령의 강한 역사로 말미암아 그들의 열매라는 것도 신속하게 나오게 되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役事)라는 것도 증명이 되어야 할 형편이었기에 성령께서 많은 초월적인 현상들과 능력들을 베푸신 것이다. 여기에는 병 고침을 받는 역사, 방언과 같은 표적이 뒤따르는 일, 교회원들이 일치단결하여 유무상통하는 생활을 했던 일 등등이 있었다. 당연히 성령께서 배후에서 이 모든 일들을 주장하신 것이다. 이런 상황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역사와 시간, 상황의 간격을 한꺼번에 다 무시한 채로 오늘이라고 하는 현대의 시점에서 그대로 도입하여 재현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는 오순절 운동과 같은 것을 할 수 없는 것이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중세기 종교개혁도 같은 성격으로는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구속사의 경륜과 시대 자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4.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교회의 사명 초대교회와 중세기 개혁교회는 그들의 시대라고 하는 역사와 상황에 직면해 있었고, 오늘날의 교회는 현대라는 역사와 상황에 직면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성격을 전제하고 역사하신다. 이런 원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치하고 엉뚱한 주장을 하기 쉽다. 즉, 성경에 나타나 있는데 왜 오늘날 적용할 수 없느냐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건(事件)과 원리(原理)의 차이점을 구별하지 못해서 이런 유치함에 빠져드는가 하면, 구속사가 집행되던 때의 역사적인 상황과 성격까지 생각하는 좀 더 넓은 안목이 없어서 이런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신령한 성도란, 범사에 성령의 인도를 받들어 나가는 사람이다. 이때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일차적으로 자신의 ‘마음의 자세’를 분명하게 단속해야 한다. 자기 인생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확실하게 하나님께 맡겨야 함은 물론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면서 살아가는 사실이 실제로 있어야 한다. 이런 태도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데서부터 성령의 충만을 누리는 삶의 일보가 시작되는 것이다. 자기의 아성과 계획, 고집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고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해야 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려고 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데서 신령한 사람으로서의 일보를 내딛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범사에 진리를 좇으며 살고, 진리에 성립되어져 가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 교회는 신령한 교회로서 자라나가면서 아울러 각 교회의 정도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각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 개개인이 먼저 서로서로 느껴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적극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에 특별히 ‘전투적인 교회’로 세워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군사로 서 있다. 이는 교회가 항상 적과 대치해 있으며, 전투에 임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침노하는 수단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씨앗을 심으셨고, 이제 이 씨앗은 교회의 모습이 되어 누룩처럼 퍼져나가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항상 교회를 향해서 돌진해 오는 사단의 공격을 받게 된다. 사단이 교회를 공격할 때가 없으리라고는 아예 생각을 말아야 한다. 이렇게 교회는 자신을 공격해오는 적이 있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으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때 적이 공격해오는 양태가 있는데 그것은 사단이 집중적으로 공격해오는 부분인, 바로 진리의 영역이다. 세상은 교회가 진리를 벗어나고 이탈하게 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진리를 정면으로 배척하고 반대하는가 하면, 타협하고 양보하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교회에 대한 사단의 이러한 공격은 어느 시대를 무론하고 나타난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느 시대에나 감당하여야 할 사명 가운데 하나는 진리를 잘 보존하고 간수하며 후대로 계승시키는 일이다. 교회는 이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를 보존하기가 쉽지 않다. 사단이 이런 저런 핑계거리를 제시하면서 유혹하게 되면, 하나 둘 양보하다가 마침내는 진리로부터 이탈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마치는 말 교회가 하루아침에 진리를 부정하고 배척해 버리는 식으로 타락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작게, 혹은 적게 시작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하나, 둘씩 양보하고 타협하는 것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서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미미하게 나타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일과 관련하여 나타나지만, 급기야는 진리를 바꾸어 버리는 데로 나아가고야 만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를 지키고 사수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각별한 각오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하는 데서 신령한 성도, 혹은 신령한 교회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래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대적하는 세상을 항상 인식한다. 교회는 이렇게 세상과 싸울만한 인식을 가져야 하고, 능력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하여 하루도 쉬지 말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하며, 실천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살아갈 때에 신령한 성도와 신령한 교회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655 no image |선교지 현장 리포트 <3>| 복 터진 여인, 그녀의 후반기 인생_최현재 목사
편집부
1876 2015-09-08
복 터진 여인, 그녀의 후반기 인생 < 최현재 목사,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 남가주노회 > “남은 인생 자투리까지 하나님께 드려 쓰임 받는 그 모습이 아름다워” 일반적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고 바라는 일이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는 것이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으로 들려주신 말씀인 마태복음 6장에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하시며 공중의 새도 백합화도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신다 하신다. 다만 우리 인생들이 추구해야할 일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며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인생들이 추구해야할 진정한 복의 의미를 정의해 주신 것이다. 그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여성이 한분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 여성을 복 터진 여성이라 부른다. 이 분과는 의사와 환자로 처음 만났다. 치료를 하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참 복이 많은 여성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온 가족이 페루에서 6년, 일본에서 25년 동안 선교사로 봉사하였다. 특히 일본에서는 히로시마 원폭지역에 남아있던 방사능에 피폭되어, 그 후유증으로 암이 생겨 그로 인한 고통과 싸우면서 더 이상 선교사역이 불가능해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 험한 병고를 극복하여 이제는 건강을 회복하였다. 지금은 캘리포니아의 한 종합병원에서 환자들에게 건강한 식단과 생활 습관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 자녀들은 모두 장성하였고 이제 건강한 몸으로 혼자 살며 남은 인생을 즐기는 삶을 꿈 꿀만 하다. 그러나 그녀는 인생의 후반기에 그 모든 삶의 즐거움을 내려놓았다. 대신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쓰임받기 원하는 삶을 선택한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필자는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려야하는 여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몇 년 전 필자는 그녀와 인도의 선교여정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 여정을 함께하면서 그녀의 진가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와 필자는 인도의 콜커타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필자는 일주일 먼저 인도 북동쪽 뱅글라데쉬와의 국경지역이며 뱅골 호랑이가 산다는 순더반의 육백여개의 섬들 중 몇을 방문하여 치료사역을 해야 했다. 필자는 미국을 출발하여 두 번 비행기를 갈아타고 밤늦게 콜커타에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만난 함께 동역할 팀을 인도하시는 분이 “우리 팀은 오늘 밤 순더반 지역으로 3시간을 이동해야 합니다”고 말했다. 이때 필자의 몸은 이미 두 번의 비행 여정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누울 곳을 찾아 몸을 기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미 계획된 여정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밤에 덜덜거리는 버스 지붕위에 다시 짐을 올려 싣고 세 시간동안을 달려야 했다. 도착한 그 나루터에서 ‘아, 이제는 누울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도 잠시, 이제는 다시 모든 짐을 내려 나루터로 옮겨 배에 싣고 3시간을 더 달려야 한다니 기가 막혀 한숨만 터져 나온다. 칠흑 같은 흑암 중에 무거운 짐들을 들고 끙끙거리며 나루터로 옮겨 배에 싣고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며 새벽 3시반경에 도착하여 이제는 배에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가 동이 트면 바로 사역을 시작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여기 일행들과 달리 필자는 이 사역을 시작으로 콜커타에서, 그리고 비사카파트남에서 다시 캄보디아로 이동하여 여러 마을들을 다니며 사역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힘을 다 써버리면 남은 사역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한없이 몰려오는 걱정들과 함께 플래시를 들고 배에서 내려 섬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누울 곳을 찾아보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플래시 불빛 끝으로 보여 지는 사람 같은 물체가 어둠가운데 보였다. 자세히 보며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흙으로 지어진 움막 같은 곳에 들짐승처럼 웅크리고 누워 잠을 자는 현지 인도인을 보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귀한 사람이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모른 채 영 육간 이렇듯 짐승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그 배후에 역사하는 악한 마귀의 영이 얼마나 사특하고 교활한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사역으로 적게는 하루 30명에서, 한 섬에서는 몰려오는 환자들을 돌려보낼 수 없어 하루에 130여명을 치료해야 했다. 하루에 가장 많은 환자들을 돌보아야했던 날 시간을 정하여 환자수를 조정하려는데 기다리던 사람들이 돌아갈 수 없다며 떼를 쓰다가 폭력사태가 일어 날 것 같은 험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하였다. 곧 그들을 진정시키고 치료를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순더반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치고 그녀를 만나 또 다른 사역을 준비하기 위하여 콜커타로 돌아온 필자의 몸은 과로로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누적된 피로에다 몸살까지 앓아 목은 쉬고 온몸은 오한에 푹푹 쑤시고 심한 기침에 더 이상의 사역에 대한 의욕마저 상실한 상태였다. 콜커타로 이동한 필자는 그곳에서 약속한 대로 캐로린 선교사를 만났다. 그녀는 건강한 모습으로 필자와 함께 사역할 기대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러나 필자의 목의 통증과 함께 말을 할 수 없고 몸살에 두통 등 그야말로 중 환자의 모습에 많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런 필자를 위하여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 준 것을 잊을 수 없다. 우리 일행은 다음 사역을 위해 콜커타에서 비사카파트남으로 향하기전 남은 사역을 정리한 후 이제 마지막 밤을 콜커타에서 지내야하는데 그 작은 모텔에 남은 방이 한 개 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다른 방도가 없다는 판단으로 함께 방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두개의 간이 침대를 사용하여 작은 방에 키가 거인 같은 영국인인 아트와 미국인 캐로린, 그리고 필자가 함께 잠을 청해본다. 내일 새벽 4시 비행기로 떠나야 해서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 한시 경에 출발해야 한다. 매 시간이 고통으로 여겨졌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인 캐로린 선교사, 그리고 필자와 아트 선교사가 함께 방을 나누어 함께 사용해야 한다니 필자는 혼자 독방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방도가 없어 함께 밤을 지내야만 하였다. 한밤 중 키가 큰 아트 선교사는 세상모르고 코를 드르릉 골며 골아 떨어졌고 필자는 밤을 꼴딱 새우면서 기침을 해대는 중에 미국에서 독일을 거쳐 콜커타에 도착한 캐로린 선교사는 그 피곤한 중에서 잠을 자야하는데 잠 한숨 잘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필자는 이 모든 상황을 돌이켜 생각하면서 한없는 감사가 마음 저변에서 솟아오름을 느꼈다. 한 영국인 남성은 영국에서 콜커타로, 또 한 미국인 여성은 미국에서 유럽을 거쳐 콜커타로, 한국인 남성(필자)은 미국에서 독일과 콜커타 그리고 순더반을 거쳐 다시 콜커타로 와서 한 방에서 잠자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이해와 상식으로는 될 수도 없고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일이 아닌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복음과 예수님이 아니면 영국사람, 미국 여인, 한국 사람이 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들의 이런 불편함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감수할 수 있었을까? 캐로린 선교사의 모든 사역이 끝날 때까지 시종 미소를 머금고 감사가 넘치는 모습을 보며 남은 인생의 자투리 부분까지 하나님께 드려 쓰임 받으려는 그 모습을 보며 과연 그녀는 복이 터지게 넘치는 여성이라 여겨진다. 다시금 다짐해 본다. 앞으로 더욱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인한 모든 불편함과 고통을 기쁨 중에 감사함으로 감당하여 남은 생애에도 그리고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삶에도 하나남께서 부으시는 그런 복이 터져 넘치기를 기도드린다.
654 no image |치악골 아침사색|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신자의 운명'_변세권 목사
편집부
1867 2015-09-08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신자의 운명'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교회는 역사의 무대에서 교회다움을 과시하면서 계속 달려날 수 있기를” 아침, 저녁의 서늘함에 더위가 기세를 잃어가고 여름이 기울어가고 있다. 잠자리가 하늘 높이 나는 것을 보니 이제 완연한 가을로 접어드나보다. 어디서 불어오는 한 줄기 실바람 때문인지 풀벌레 떼창 소리에 발바닥이 간질거리는 느낌이다. 별들은 같은 괘도를 계속 돌고 있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해놓으셨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시에 이 모든 법칙들을 정해놓으셨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처음부터 평등한 관계로 창조되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인격적으로 억압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상호간에 지켜야 할 질서는 있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계급이나 신분상의 차이는 없다. 남편과 아내사이, 부모와 자녀사이, 상전과 하인사이에도 유지되어야 할 질서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질서가 계급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세계에서 오늘날처럼 마치 신분이나 계급의 차이가 상례화 된 것은 근본적으로 죄로 말미암는다. 죄의 일차적인 기능이나 능력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반원리들을 깨뜨리거나 왜곡시키는데 있다. 남편이 힘을 앞세워 아내를 마치 종처럼 부린다거나, 부모가 자녀들에게 또한 그렇게 하고, 사회나 직장의 경제 영역에서 돈을 권력처럼 행사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계급구조가 자리 잡게 된 것 등은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인간계의 모습이 아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마치 성경의 경제원리인양 기독교 안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지극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기독교 경제원리라는 주장은 아니다. 기독교 경제원리는 명백히 자발적 공유주의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구약역사의 실례를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는데, 즉 만나가 공동으로 분배되었다거나, 면제년 제도와 묶여있는 안식년제도 그리고 희년제도 등이 이것을 가르쳤고 그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교회가 출범하게 되었을 때, 그 두드러진 모습이 공유하는 삶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세월이 흐르면서 휴머니즘이 발달하고 점점 더 계몽사회가 됨에 따라, 겉보기에는 약자의 인권보호나 자유회복 문제가 상당히 발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지배세력의 부상 앞에서 여전히 또 다른 형태의 예속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죄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세계에서의 지배 및 예속현상은 시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반복 될 것이다. 빈부의 격차가 재물, 권력, 기술, 학력 등등의 모든 영역에서 터무니없는 정도로 벌어지는 현상과 그로 말미암은 부의 편중 현상은 단순한 경제논리나 구조상의 문제로만 치부될 수 없는 것이고, 반드시 그러한 경제 원리로만 몰아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곧 죄의 권세가 역사하는 차원에서 설명되어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차이가 적어도 교회 안에서만큼은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근본적으로 죄의 권세를 벗어버린 존재들, 곧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들로 다시 창조된 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렇게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은 자들로 변화된 모습을 가장 웅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어떤 모습이겠는가? 그것은 같은 지체들 간에 죄의 권세를 벗어버린 자다운 생명력의 활발한 교환일 것인데, 이것의 두드러진 현상으로 경제적 평등, 공유주의의 왕성한 지배력도 들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근본적으로 그러한 존재이다. 교회 안에도 당연히 질서는 존재하고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행여라도 그것이 지배계급처럼 행사되면 안 되는 것이다. 가령 목사와 일반 성도 간에, 또는 교회의 각 직분자들 간에 어떠한 계급적 차이도 있을 수 없다. 성도란 서로간의 '분별이 있을 수 없다'고 한 바대로, 서로간의 차별을 벗어버린 평등한 자들이다. 물론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차별 없는 삶의 특성은 공유주의로 표현되는 것 못지않게 다방면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즉, 많이 가진 성도가 적게 가진 성도에게,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고, 또한 상호간에 진실한 지체관계를 유지하는 일, 곧 각종 미덕발휘는 물론이고 상대방의 허물을 용납하고 사랑까지 베푸는 것도 있어야 한다. 성도의 모든 신앙생활은 항상 이렇게 자신에게 베푸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애절한 심정으로 느끼고 그에 보답하는 토대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스스로 외톨이를 자처하거나 반대로 독불장군 노릇을 못하게끔 되어있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구성된 생명력 자체가 상호간의 상합과 연락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방팔방에서 사랑이 점점 사라지고 불법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여기에는 교회라고 해서 자유롭지 않다. 교회에서조차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은 교회의 두드러진 속성이 소멸되는 현상이기에 여간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다. 성도의 특성은 서로 사랑하는데 있다. 물론 이 사랑이란, 성도들 상호간에 거듭난 본성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왕성하게 이루어내는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서로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목표가 뚜렷할 때만이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을 옷 입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혐의가 있는 자도 기꺼이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사랑까지 베풀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능력이 공동체 안에서 활발하게 역사하는데서 교회는 비로소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온 세상에 드러내게 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역사의 무대에서 더 더욱 교회다움을 과시하면서 시간세계를 계속 달려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적극적인 선이 사랑인 것을 알아야 한다. 옆에 있는 이웃에게 내가 깊은 존재가 되어 그렇게 옆 사람과 지체의 관계를 이루어가야 한다. 어떤 윤리와 법에 매달려 대상 없이 사심 없는 원칙만 남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창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무성함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자라나야 한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똑바로 마음을 먹고 시작하면 된다. 심지어 우리 자신의 못남 때문에 일어난 모든 일까지를 통틀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운명을 우리가 가진 진정한 사랑으로 완성해 가보자.
653 no image |IS 긴급진단 <2>| IS의 정체와 반인륜적 행위들_강승빈 목사
편집부
2047 2015-08-04
IS의 정체와 반인륜적 행위들 < 강승빈 목사, 합신총회 다종교문제연구위원회 전문위원 > 1. IS 조직원 규모 알-바그다디는 이슬람 국가 창건을 선언한 후 학자와 이슬람 율법 전문가, 판사와 군사 및 행정가, 의사, 전문 기술자들이 필요했다. 그는 “오 무슬림들이여, 서둘러 여러분들의 국가로 오세요. 그건 여러분들의 나라입니다. 서두르세요. 시리아는 시리아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라크는 이라크인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구는 알라의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다른 급진적인 단체들과 무슬림들이 참전하도록 선동했다. 미국 CIA의 추산에 의하면 IS 조직원은 2014년 9월 기준, 이라크와 시리아에만 약 31,500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의 전문가 히삼 알-하시미는 약 30%는 이념 때문에 참전한 것이고, 나머지는 70%는 두려움과 강제로 참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금년 2월 11일자 CNN 보도에서 미 국토부 안보위원회 청문회에서 국가대테러센터의 대표 니콜라스 라무센의 증언에 의하면 IS 전장에 참전 중인 전사들은 90개국에서 온 20,000명이 넘고 서방에서 참전한 전사들의 수는 대략 3,400명으로 추정했다. 대부분은 중동국가에서 참전한 인원인데 작년도 8월말을 기준으로 할 때 튀니지에서 3,000명, 사우디에서 2,500명, 요르단에서 2,089명, 모로코에서 1,500명 등이고, 프랑스에서 700명, 영국에서 400명, 독일에서 270명, 벨기에와 호주에서 각각 250명, 미국에서 70명 등이다. 2014년 11월 23일자 International Business Times의 영국판 기사에 의하면 버밍햄 시 노동당의 칼리드 마무드 의원은 영국 외무성에서 추정한 IS 참전자 숫자 4-500명은 과소평가한 것이고 실제로는 2,000명 정도라고 주장한 것을 고려한다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외국인 지하드 전사들이 참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재정 IS는 현금과 자산을 20억 달러 보유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무장 세력이 되었다. 그들은 장악한 지역의 상거래를 통제하고 세금과 수수료를 징수하고 있다. 처음에는 아랍 걸프국의 지원과 개인의 재정후원에 의존했다. IS는 현재 대부분 재정적인 자립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 수입원은 수중에 들어온 유전으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석유판매 수입에 세금과 통행료, 밀수, 인질들의 몸값 등이라고 한다. 작년 6월 IS는 모술을 점령하고 모술은행으로부터 425억 달러를 탈취했는데 IS가 점령지를 확대하면서 정치, 행정체제를 유지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3. 홍보 전략 IS는 인질들의 참수를 비롯하여 점령지에서 포로로 잡은 군인들이나 민간인들을 총살하거나 참수하고, 십자가형이나 교수형으로 처형하는 등 대량살상 장면을 담은 비디오 등의 홍보물을 제작, 배포하고 있다. 그들은 프로 홍보전문가들을 동원하여 세련된 홍보 전략을 펼치고 있는데 특히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의 소셜 미디어와 마케팅 전략을 통해 전 세계에서 전사들의 모집에 성공하고 있다. 그들만의 악명 높은 폭력성과 잔혹성을 통해 IS를 차별화함으로써 라이벌 지하드단체들의 멤버들이 IS에 가입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초기 IS의 뿌리가 되었던 알카에다는 영토가 없었지만 IS는 통치하는 영토가 있고 엄격한 사리아법에 따라 다스리고 있는 명실상부한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차원이 다르다. “IS는 스스로 진정한 지하드를 지속할 능력이 있다. 그들은 말만하지만 우리는 실천하고 있다 우리가 성취하고 있는 것을 보라. 우리는 뉴 페이스다. 우리는 말만 하지 않고 실천하고 있다.” 이런 선전을 대하는 전사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IS에 마음이 더 끌리게 될 수밖에 없다. 4. IS의 반인륜적 만행과 잔혹성 IS는 2014년 11월 13일자 홍보 동영상을 통해 22명의 시리아 군인들을 자원한 외국인 전사들을 참수 집행인으로 세워 함께 형장까지 행진을 하도록 한 다음 이들이 희생자들을 동시에 참수하는 집단참수 장면을 연출해 보여 주었다. 고도로 계산된 이런 전례 없이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의 영상을 공개함으로써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IS가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 일부를 장악한 후 보여준 악행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유엔인권사무소와 유엔 이라크지원미션 기관에서 작성한 29페이지 보고서에 의하면 2014년 6월 12일에 일어났던 학살사건에서 살라후딘 주에 있는 전 미군기지의 이라크 군인들과 보안담당자 1,500명이 IS 전사들에 의해 사로잡혀 살해되었다고 한다. 또한 400-500명의 여성들과 소녀들을 취하여 미혼의 소녀들과 여인들을 IS 전사들에게 포상으로 주고거나 10-12 달러에 성노예로 파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8월 7일 CNN 방송에 따르면, 미국 내 이라크 기독교인 단체 ‘칼딘 아메리칸’의 마크 아라보 대표는 “모든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IS가 ‘홀로코스트’를 벌이고 있다”면서 “이는 기독교 제노사이드”라고 주장했다. “아이들은 참수를 당하고, 어머니는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된다. 아버지는 교수형을 받는다.” 그리고 “참수한 아이들의 머리를 막대에 올려놓고 이를 공원에 둔다”면서 이를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라고 강조했다.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 이러한 참수형이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2014년 9월 5일 크리스천투데이에 의하면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의 도나텔라 로베라 조사관은 "IS가 북부 이라크 지역의 기독교인들과 다른 소수 종교인들을 상대로 '인종청소'를 자행하거나 이들을 추방시킨 증거를 수집했다"고 전했다. 야지디족 마을 공격으로 수백 명의 민간인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라크 인권장관도 “IS가 어린이와 여성을 가리지 않고 최소 500명 이상의 주민을 산 채로 매장하거나 처형했으며, 이와는 별도로 여성 300명을 납치해 노예로 삼았다는 정황이 담긴 현장 사진들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라크 성공회 캐논 앤드류 화이트 목사에 따르면 IS 대원들이 15세 이하 이라크 소년 4명에게 무함마드를 따를 것을 명령하였으나 그들은 개종을 거부하고 참수를 당했다고 한다. 그들은 “안돼요!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해요. 항상 예수만을 믿었어요. 우린 항상 예수님을 따르고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IS 대원들이 “무함마드를 따르겠다고 말하란 말이야!” 이런 위협에도 그들은 “아니에요 우리는 그럴 수 없어요!”고 개종을 거부했다. 그러자 IS 대원들이 소년들을 참수했다. 이들 외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참수를 당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소년들은 죽음 두려워하지 않고 모두 순교를 택했다. 결국 악마의 자식들이 이들 어린 믿음의 아이들의 순전한 믿음을 이길 수 없었다. 이 전쟁에서 진정한 승리자는 순교한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1982년에 모술에서 30km로 떨어진 곳에 있는 4세기경에 세워진 성 베남 수도원과 근접한 곳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참수한 형장을 둘러본 적이 있었다. 성 베남 수도원은 순교자 베남과 그의 자매 사라의 순교를 기념하여 세워진 수도원이었다. 참수 형장은 영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곳인데 순교자들을 참수하는 기요틴을 설치했던 흔적을 볼 수 있는 대리석 프레임의 창구가 있었다. 성인의 머리가 들어갈 만한 크기였는데 수급이 지하로 떨어지도록 설계되어 있었고 반대편에는 순교자의 시신을 던져 넣는 전신 크기의 창구도 있었다. 이라크에서 제일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모술지역이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곳임을 깨닫고 머리 숙여 그들의 희생에 감사하며 기도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 IS라는 적그리스도의 집단에 의해 또다시 순교자의 피가 뿌려지고 있는 데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금년 3월 20일 IS가 기독교 초기의 유산인 이 참수형장과 성 베남수도원을 폭파해버렸다. IS의 잔혹성은 무고한 인질 살해에서도 도를 더해 가고 있는데 2014년도에 미국인 세 사람과 영국인 두 사람, 독일인 한 사람 그리고 금년 들어 일본인 두 사람 등 모두를 참수하고 인질로 잡혀있던 터키인 조종사를 화형 시키는 극단적 야만성을 보여주었다. 그가 몰던 전투기의 폭격이 IS 전사들을 불에 타죽게 만들었으므로 그 조종사를 불 태워 죽이는 것은 그들에게 마땅한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변이었다. 금년 1월 19일 영국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2015아시안컵 축구경기 중계를 시청하고 있던 10대 소년 13명이 IS에 의해 대중들 앞에서 화염방사기를 이용해 화형에 처해졌는데 축구경기가 알라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으로 종교적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로 보기 때문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독일 국적의 시리아정교회 소속의 하투네 도간 수녀의 증언이었다. 2014년 12월 2일 독일 뮌헨의 다스 에르스테(Das Erste) TV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시리아 반군들이 개종을 거부하여 참수당한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모아 작은 바이알 병에 담아 개당 100,000달러에 팔고 있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무슬림들이 죽인 기독교인들의 피로 손을 씻으면 그들의 죄를 용서 받고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슬람의 구원론에 있어서 사이비종교적인 일면을 볼 수 있는 코메디 같은 예라 할 것이다. 5. 왜 끔찍한 참수형인가? IS는 수니 이슬람의 극단적인 해석을 고수하며 자신들만이 참된 신자들이라고 믿고 있다. IS 자신들 외에는 이슬람을 파괴하려는 불신자들로 보고 다른 종파의 무슬림들과 비 무슬림들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한다. 자신들의 종파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적이기 때문에 잔인하게 참수하고 십자가에 처형하는가 하면 집단 대량학살을 행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데, 그들은 “불신자들의 목을 치라”(꾸란 47:4, 8:12)는 꾸란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잔혹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알라가 명한 것이기에 양심의 가책이나 주저함이 없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참호 전투’로 잘 알려진 전장에서 항복해온 유대인 포로들은 700-900명을 참수하면서 “알라는 위대하다”라고 외친 것처럼 IS 대원들도 똑같이 행하면서 동일한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무슬림 역사학자 알 타바리와 이맘 알 와키디에 따르면 이슬람에 의한 초기 정복전쟁이 시작된 지 4년 내에 기독교인 33만 3천명이 죽임을 당했고, 10년 내에 추가로 100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따라서 무함마드와 후계자 칼리프 시대 이후의 이슬람 정복의 역사는 피로 물든 잔혹사이였다. 같은 이슬람 안에서도 이런 IS의 만행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다. 알카에다의 지도자인 아이만 알-자와히리는 그와 같은 잔혹 행위가 무슬림들의 마음을 떠나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꾸란의 계시와 무함마드, 칼리프들의 모범을 그대로 따르는 자들이 있는 한 지구상에서 무슬림 무장 세력에 의한 참수와 살해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6. 지하드는 모든 무슬림들의 의무이다. 이들은 왜 목숨을 바쳐 이슬람의 알라에게 충성을 다하는가? 그것은 알라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신실한 무슬림이 되기 위해서이다. 알라는 꾸란 45장 15절에서 바로 믿는 신앙인인 무슬림들이 누구인가를 정의해주고 있다. “믿는 신앙인이란 하나님과 선지자를 믿되 의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그들의 재산과 생명으로 성전하는 자들이 바로 믿는 신앙인들이라.” 알라의 사업을 위해 그들의 재산과 생명으로 성전(聖戰)하는 자들임을 분명히 계시한다. 따라서 이슬람은 성전(聖戰)의 종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IS는 성전을 하지 않는 온건주의 무슬림들을 적으로 간주한다. IS의 열혈분자들은 ‘인종청소’와 ‘종교청소’를 자신들의 거룩한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 이슬람의 세계관은 ‘평화의 집(Dar-al-Salam)’ 아니면 ‘전쟁의 집(Dar-al-Harb)’이다. 이슬람이 이상으로 하는 무슬림만으로 구성된 움마공동체가 평화의 집이다. 그 외의 세계는 정복의 대상으로 전쟁의 집이다. 알라가 “박해가 사라지고 종교가 온전히 알라의 것이 될 때까지 성전(聖戰)하라”(꾸란 8:39)고 명령했기 때문에 알라의 뜻이 이루어지는, 곧 온 세상을 이슬람으로 정복하는 그날까지 그들의 성전(Jihad)은 계속될 것이다. 7. IS를 격퇴시킬 수 있을까?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이슬람권 무슬림들의 65.5%가 IS와 같은 칼리프국가를 지지하고 있고, IS의 창건 선포와 계속된 승전으로 고무된 유럽국가 무슬림들의 지지와 지하드전사들의 참전이 계속 이어지는 상황에서 낙관하기 어렵다. 세계 전 지역에 흩어져 있는, IS에게 충성 맹세했거나 지지한 테러단체들이 많은 점과 IS 참전 후 유럽 각국으로 돌아왔거나 돌아오게 될 잘 훈련된 극단주의 전사들이 국지적인 IS식 지하드 전략을 동시다발적으로 펼치게 될 경우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을 퇴치시키기 위해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연합군에는 그들을 능가하는 전략이 없는 것 같다. 작년 12월 미군의 중동 특수작전 지휘관인 마이클 K. 나가타 장군은 “우리는 IS를 움직이는 힘을 알아내는 일을 시작도 못하고 있다.”고 인정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이상을 무력화시키지 못하고 이해조차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작년도에 오바마 대통령은 ‘IS는 이슬람이 아니다. 알카에다의 2군이다.’라는 식의 혼동으로 중대한 전략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6월 8일 까지도 IS를 다룰 “전략이 아직 없다(no strategy yet)”고 말했다. IS는 사담 후세인 치하의 엘리트들에 의한 치밀한 작전계획을 가지고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반해 IS전을 지휘하고 있는 현지의 최고 사령관과 연합군의 총사령관격인 오바마 대통령이 아직도 전략이 없다고 한다면 이 전쟁은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일 것이다. IS가 추구하는 전략은 현대전의 전략과 이슬람 창시이후 계속되었던 이슬람 초기 정복전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무함마드의 정복전략과 대를 이어 동일한 전략으로 그의 모범을 따랐던 칼리프들이 보여준 전통을 따르고 있고 그들은 승승장구 승리의 진군을 멈추지 않고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슬람의 본래의 모습으로 칼리프들의 전략으로 세계정복을 추구하고 있는 IS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리고 이런 급진주의 이슬람 확산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솔직히 말해 한국교회도 오바마의 말처럼 “아직 전략이 없다”고 대답해야 할 수밖에 없다. 8. 한국에서도 세력을 확장하고 결집하고 있는 급진주의 무슬림들 작년 11월말 기준 우리나라의 무슬림 인구는 2십만 명 정도인데 이슬람회의기구 의 57개 회원국에 속한 장기체류 외국인 숫자는 163,500명 정도라고 한다. 6,000명이 조금 넘는 유학생들도 포함된 숫자이다. 이중에는 이슬람 다이(선교사) 신분을 숨기고 입국하여 은밀히 활동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 문제는 이들 중 급진주의 세력들이 있다는 정보다. 지난 1월 18일 무함마드의 생일 축하 기념 퍼레이드가 있었는데 400여명의 파키스탄인과 방글라데시인 무슬림들이 모여 이태원에서 용산거리를 행진했다. 그때 이들의 손에는 들려있는 피켓에 “험담과의 전쟁 계속 진행하겠습니다”라는 경고문이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가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파리의 샤를리 에브도 주간 만평지의 본사 테러로 모두 12명이 살해된 사건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한국에 일하러 들어와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면서 우리 사회에 그들의 전쟁 의사를 분명히 전하고 있다. “계속 진행하겠다!”는 것은 지금까지 해온 그들 나름대로의 전쟁을 계속 진행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IS의 정복대상에 남북한(Koreas)을 명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한국도 결코 무슬림 테러의 안전지대가 아님을 알고 대비해야 하겠다. 국정원은 2008년도 국회보고에서 5년간 국제 테러조직원 74명을, 그 후 2014년도에도 52명을 색출하여 추방하였음을 보고한 바 있다. 국내법으로 처벌할 수가 없어 추방하고 있는 상황인데 테러방지법이 속히 제정되어야 하겠다. IS의 홍보전은 미디어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미려하고 낭만적인 지하드 버전으로 트위터 등 SNS를 통한 새로운 형태의 전략으로, 상처받고 소외된 소위 왕따 상태에 있는 ‘외로운 늑대’들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다. IS에 가입을 강요하지 않고 어떤 재정적 지원도 요청하지 않고 다만 자신들의 이념을 심어주는 한편 지역별로 모집책을 두어 자생적 테러세력을 확산시키는 전략으로 지구촌 정복을 도모하고 있어서 이런 범주에 속한 청소년들에 대한 대책이 강구되어야한다. 나가는 말 성경에 비추어보면 IS로 대변되는 이슬람은 “처음부터 살인자”(요8:44)였고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요10:10)이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적그리스도 영”(요일4:3)의 세력이며 “멸망의 종”(벧후 2:19)들이 분명하다. 우리가 이제라도 IS을 통해 종교의 모습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정치적인 이슬람의 실체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교회에서 이슬람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알고 교육하는데 앞장서서 한 영혼이라고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지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이슬람에 속아 넘어간 불행한 무슬림 이웃들을 구원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이 시대의 한국교회의 책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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