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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1 (21:12:44)

 

에밀리와 맺은 사랑이야기

 

< 김영숙 사모, 일산새하늘교회 >

 

사연 있는 사람과 같은 감정을 자신에게서 찾을 때 함께 위로 받게 돼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에 있는 유치원 종일반(Daycare)에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그 곳은 대부분 맞벌이하는 백인 부부들이 1-6살까지의 자녀들을 맡기는 곳으로 아이들이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지내는 곳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아이들이 오기 때문에 낮 12시가 되면 모두 낮잠 자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 시간이 되면 아이들이 나 먼저 등을 문질러 주세요라고 조르기 때문에 선생님들의 손길이 바빠집니다. 그런데 그 중에 에밀리’(Emily)라는 이름을 가진 4살 여자 아이는 낮잠 자는 시간이 되면 선생님도 부르지 않고 소리 없이 울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밀리! 선생님이 등을 문질러 줄까?”하면서 조용히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No!"라고 짧게 대답한 에밀리는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을 걸자 에밀리는 나를 쳐다보며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엄마 보고 싶어!(I miss mommy!), 엄마 보고 싶어하며 엉엉 우는 것이었습니다.

 

에밀리의 눈물을 보자 갑자기 나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며 목이 메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엄마 보고 싶어!(I miss mommy too!).”

 

사실 나도 한국에 계신 나이 드신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아들 여섯에 딸 하나 두신 어머니는 나를 만나면 하실 말씀이 너무 많았는데 그 많은 어머니의 이야기는 누가 다 들어줄꼬 생각하며 고국에 계시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운 마음을 가슴속에 꽁꽁 묶어두고 지내고 있던 터였지요. 그런데 한 번 눈물이 나오기 시작하자 타국 생활의 서러움까지 몰려와서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버렸습니다.

 

내가 공들여 말을 했는데 못 알아듣고 고개를 갸우뚱 할 때마다 자존심 상했던 일, 음식점 운영하는 학부형이 교사들을 위해 보낸 음식을 언제 먹어야 하는지 몰라 뒤늦게 갔다가 빈 접시만 바라보고 온 일, 자기들끼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 때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언제 웃어야 할지 몰라 일그러진 미소로 서있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가면서 외롭고 서러운 생각에 흐르는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에밀리는 내가 눈물 흘리는 것을 의아한 눈으로 잠깐 쳐다보더니 곧 잠이 들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난 낮잠 자는 시간이 되면 에밀리 옆으로 가서 그 아이가 요청하지 않아도 등을 긁어주고 만져 주면서 속삭였습니다.

 

에밀리! 난 너를 사랑한단다. 아주 많이. 그리고 나도 나의 엄마가 많이 보고 싶단다. 너처럼.”

 

때로는 영어로 말하고 때로는 한국말로 그 아이가 잠들 때까지 그 말을 반복했습니다. 에밀리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잠들곤 했는데 차츰 우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얼마 후에는 아예 울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밀리는 낮잠 자는 시간이 되면 나에게 눈으로 자기에게 오라고 사인을 보냈고 나 역시 행여나 다른 선생님이 그 아이 곁으로 갈 까봐 재빨리 에밀리 옆으로 가곤 했지요. 수업시간에도 에밀리는 늘 내 옆에 앉아 있어서 우리는 서로 사랑의 눈빛을 나누곤 했습니다.

 

어느 날 원장실에서 나를 급히 불러 가 보았더니 금발머리와 파란 눈을 가진 멋쟁이 한 분이 아기를 안은 채 장미꽃 화분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에밀리 엄마에요. 에밀리 동생이 젖먹이 아기여서 그동안 내가 유치원에 찾아오지 못했어요. 그런데 에밀리가 ‘Miss 이야기를 많이 해서 오늘은 꼭 만나고 싶어 찾아왔어요. 내 딸 에밀리를 많이 사랑해 주어 감사합니다. 에밀리가 그동안 종일반에 오는 것을 싫어했는데 지금은 아침부터 빨리 가려고 서두른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 때문이에요.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장미꽃 화분을 나에게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런 그분의 방문에 놀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지요.

 

에밀리가 있어서 나도 행복했습니다. 에밀리는 나의 좋은 친구이고 나의 위로자 였습니다. 에밀리가 있어서 나도 일터에 빨리 오고 싶었으니 오히려 내가 고맙습니다.”

 

유치원 원장이 뒤에서 우리를 보고 흐뭇한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동안 쳐져 있던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지금 내 곁에 있는 에밀리는 누구입니까? 그들에게 눈물 한 방울도 내 놓을 수 없는 메마른 내 심령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내가 작은 사랑 베풀 때 내게 더 큰 사랑이 돌아온다는 그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는 지금 섬기고 있는 사역지에서 얼마든지 제2의 에밀리같은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 자신도 바로 그 에밀리와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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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 no image |청진기로 바라보는 세상 <22>| 손자바보_전정식 장로
편집부
2027 2014-09-02
손자바보 < 전정식 장로, 남포교회 > “일상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진정한 지혜” 나이가 들면 아침잠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새벽이 되어 눈이 떠지면 다시 잠들기 어렵습니다. 그런 어느 날 새벽녘에 전화벨이 울립니다. 근처에 사는 아들네 집에서 손자가 열이 나서 힘들어 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맞벌이 부부인 아들네는 출근해야하니 손자가 아프거나하면 돌보는 일은 우리 몫이 됩니다. 얼른 대충 씻고 가보니 세 살 된 손자녀석이 열이 높아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손자가 아프게 되면 옆에 있어주며 병원에도 데려가고 약도 먹이고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러 가지 일 때문에 힘든 것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활발하고 밝은 녀석이 아프다고 기운 없이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정말로 내가 대신 아플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요즈음은 소아과 진료실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를 데려 오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일하는 엄마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경우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육아를 담당하는 경우 부모가 담당하는 경우보다 아이를 조금은 자유롭게 길러 아이들이 응석을 더 부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대 간 차이도 있겠지만 부모였을 때 자식을 대하는 경우보다 손자를 볼 때 더 사랑으로만 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들이 손자를 자유롭게 기르며 그렇게 사랑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핑계는 사람마다 매우 특이 합니다. 저는 이 녀석이 교회 복도에 걸려있는 여름 수련회 전교인 기념사진 속 수 백 명의 사람들 속에서 할아버지를 찾아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살 된 손자를 둔 한 목사님은 그 손자가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말해서 그럼 둘째는 누구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세상에 둘째는 없다는 손자의 대답을 듣고 자기 눈을 빼 주어도 아깝지 않은 손자라고 말하며 이 손자는 목사님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할아버지들은 온갖 이유를 갖다 붙여 손자들을 사랑하며 또 그들에게서 큰 위로와 기쁨을 갖습니다. 어쩌면 할아버지들은 손자들에게 매여 있지만 가장 행복한 존재이며 손자들을 대할 때 사랑이외의 다른 척도는 가지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수요일 저녁예배 때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청년이었던 때 회심하고 소명을 받아 목사가 된 후 선교사가 된 분입니다. 회심할 때부터 선교 활동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구체적인 간섭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늘 같이 하심을 간증하였는데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신앙적으로 온실 같은 환경에서 모태신앙으로 자란 저 같은 사람은 이런 분들을 보면 큰 부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성인이 되어 회심 사건을 겪은 사람들은 그 확실성 때문에 삶 속에서 실감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은 사람들의 눈에도 참 열심 있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랑과 함께 큰 상급을 받을 것이며 또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모태신앙으로 곱게 신앙생활을 하게 된 저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창조론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너무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에서 사랑과 긍휼이 많으시고 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칭찬과 사랑을 받으려면 삶 속에서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좀 더 열심을 내고 또 눈에 보이는 성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적지 않은 노력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손자들을 사랑의 눈으로 보며 배운 것은 참으로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권능과 영광의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을 보실 때는 존재론적인 사랑의 척도로 보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분 앞에 먼저 존재론적으로 바로 서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사람들에게도 칭찬 받는 업적을 위해 애쓰기보다는 일상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잔잔한 성화의 길을 걸어가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런 평범한 성도들과 함께 하시는구나 하는 고백이 가까이에 있는 혈육과 영적 후손들에게 넘치는 시간들을 만들고 싶습니다.
631 no image |치악골 아침사색| ‘저 들녘의 산들바람이 되어...’ _변세권 목사
편집부
1970 2014-08-05
‘저 들녘의 산들바람이 되어...’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부활을 믿는 기독교 신앙만이 우리 인생의 참된 가치 구현할 수 있어” 뜨거운 태양이 연일 작열하고 어쩌다 한 줄기 시원한 소나기도 지나간다. 그래도 감사하다. 비는 우연히 내리거나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격자의 생각과 계획, 목적과 의지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다. 비가 오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하심과 자비하심, 지혜 속에 있듯이 우리가 만나는 일 중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시지 않으시고 생각 없이 주시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 사회와 교회에 격려하고 위로하신 것을 감사해야한다. 그런 중에도 우리 사회는 ‘하면 된다’ 또는 ‘할 수 있다’는 결과 지상주의로 모든 것을 보상받는 그런 사회를 지향해왔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성공신화와 고도성장은 끝난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차분하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변해야한다. 세월호를 통해서 우리는 조국의 허상을 보았다. 우리야 기본적으로 세상에서 자유와 기쁨 행복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은총으로 받은 이 나라에서 사는 동안에는 무엇보다도 반듯한 리더십으로 법과 원칙 권위와 질서가 있는 공의로운 나라로 세워 가야한다. 또한 합리적 리더십으로 누구나가 용기와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는 공정한 나라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리고는 따뜻한 리더십으로 서로 공감하고,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고 함께하는 공생의 나라를 위해서 서로 훈련되어져야 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도 이런 사회정서에 편승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전파하지 못했다.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나중에 천국에 데려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땅에 있는 동안에도 무조건 열심히 소원하고 헌신하기만 하면 현실적인 보상이 이루어진다는 기독교 근본정신과 맞지 않는 욕심이 잉태된 교인들만을 양산해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부흥기를 지나 진정한 성경적 교회가 무엇이고, 실제적인 삶의 현실과 과정을 신앙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감당해 나가야 하는가를 말해줘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자기시대의 도전 앞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대답을 해야 할 시점이 왔다. 높고 깊으신 하나님의 세계와 역사를 보지 못하고 전통적인 한국교회의 어느 한 모습에만 갇혀있으면 늘 신앙이 가난하고 부족하게 된다. 늦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성경의 가르침대로 가야 한다. 목회자들도 성경과 신앙의 본질과 원리를 이제 가르치고 회복해야 한다. 박영선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우리의 이해와 열심위에 서 있지 않다. 어떤 성실한 손에, 어떤 운명적인 손아귀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매순간 다 만족스러운 것이 아닐지라도 외면할 수 없고 도망갈 수 없는 어떤 운명, 어떤 소원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교회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갈등하고, 의심하고, 거부하고, 고민하는 것까지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원래 거짓말투성이다. 추악하고 더럽고 썩어지고 그러다가 멸망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에만 부활과 생명과 진리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만이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위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그것에는 부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믿는 풍성함을 어디서든지 담아낼 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얽히고설킨 문제들에 대한 고통이요, 억울함이요, 분노가 있다. 그런데 정확한 원인도 없다. 내 마음에 들도록 다시 판을 짜야 된다고 우기는 것은 아직 삶을 모르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고집대로 뒤집지 않아야 한다. 속 시원하게 해결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교회에서 말할 때가 되었다. 교회의 새로운 비전은 진정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공동체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다. 벌써 8월이다. 박영선 목사의 표현대로 하나님은 아침마다 물을 길어 올리듯이 해를 띄우실 것이다. 매일 밤 이부자리를 펴듯이 밤하늘의 별을 펼치시고, 불을 켜시듯 달을 켜시고, 매일 그렇게 일하신다. 오늘도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시간과 공간과 자리에서 우리의 자리에서 책임지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번 주는 설교를 도전만 하지 말고 산들바람 같이 진정성과 경의, 담담함으로 춤을 추듯이 그리고 맛있는 밥을 짓듯이 그렇게 해봐야겠다.
630 no image |치악골 아침사색|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으로 살아가야 한다_변세권 목사
편집부
2092 2014-06-24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으로 살아가야 한다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때 이른 초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소낙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면서도 옷이 젖는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가슴에 남아있는 어떤 응어리가 풀리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무슨 정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마음이 아픈 건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다. 세상이야 세상적 사고와 원리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진리와 생명의 공동체라는 우리는 무엇이고 또 어떠한가? 가끔 보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순진하게 믿는 사람도 참 드문 것 같다. 그렇게 믿고 살다가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신자들을 만나면 괴이한 표정과 철학, 심리 상태를 보이고는 한다. 명분을 논하고 신앙의 내용을 논할 때는 그럴 수 없는 분명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더 치열한 현실주의자로 사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모든 일들은 우리 자신을 놀라게 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그 현실 사이의 간격을 도무지 메꿀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약속을 어떤 조건을 제시해야 유효한가를 고민하게 된다. 어느덧 명분화 된 목회와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우리의 기도의 내용에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가 없는 것 같다. 기껏 우리의 소원이라는 것은 그저 아프지 않고, 욕먹지 않고, 굶지 않고, 자식들만 잘되면 만족하겠다는 것이다. 남편승진, 자녀출세, 가족건강 등으로 대표 되서 타종교나 무신론자들이 구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세상은 아직도 죄와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함 속에 갇혀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믿음과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간의 괴로움이다. 여기에 갈등과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앞에 현실적인 기도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러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이 세상이 우리에게 도전하고 시험하는 그 어떤 힘보다도 하나님이 더 크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러나 그 단계를 지나서 그런 어려움과 시험들은 우리가 감수하고 가야되는 것으로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어려움과 고단함, 의로움과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 한다. 그 짐들은 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답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속들이 현실 속에서 세상적으로 증거 되거나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신약에서 그것은 순종과 인내로 묘사가 된다. 이런 고민들은 우리가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거기에 대하여 충분한 질문을 던진다. 박영선 목사님은 ‘탐심은 우리가 우리의 필요, 우리가 우리의 가치와 우리의 목적을 정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요구하느냐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라는 존재와 인생과 운명에 대하여 결정권자인 것을 말한다. 그것이 기도의 형태로 나타날지라도 하나님은 수단이 될 뿐이다. 하나님이 주인이지 않고 우리가 우리자신의 주인이 될 때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주권을 하나님께 넘긴다는 뜻이다. 곧 우리는 그 앞에서 그분의 통치와 인도를 요청하며 그것을 누리는 자가 되는 것을 기도라고 하고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무속신앙이나 범신론과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그런 개념보다 더 깊이 하나님 앞에서 받는 것들은 보상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같이 정성을 바쳐 얻는 보상을 노리는 샤머니즘도 아니고 도를 깨우쳐 어떤 경지에 가는 그런 종교와 윤리와 이상이 신앙도 아니다. 더 나아가 인과응보가 가지는 보응의 원리도 아니고, 권선징악으로 대표되는 윤리적 가치도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경건주의와 심지어 청교도주의도 뛰어넘은 개혁주의로 가야한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믿고 받는 것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의 진리 안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지식이 그의 전 존재를 변화시키는 인격과 삶의 문제이지, 어떤 몇 가지 사건과 은사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은 굉장히 높고 고귀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수준이었지만 인간의 종교성이 신앙의 내용으로 자리 잡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의하여 기독교를 재조명해야 한다. 이미 펼쳐진 것으로만 신앙을 대체하는 것은 위험하다. 개혁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계속 개혁되어져 가야 한다. 이 세상은 그 어떠한 사상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해결될 때는 또 다른 사상이 나타나는 법이다. 반면에 우리는 오직 기록된 말씀과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으로만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개인주의가 너무 팽배하다. 구원 받은 백성이면서도 신앙의 공동체라는 유기체적 교회론에 관한 인식 자체가 부족하다. 그러한 무감각이 우리와 우리 자신을 못 보게 한다. 우리는 이제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거듭난 자로서의 생명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으로 나타내야 한다. 저 너머에 새로운 거룩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소망하면서 모범으로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신자의 죽음마저도 주님을 증거하고 죽는 것이어야 한다. 그럴 때 이 땅에서 우리는 자기 부정,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에게 앞서 전달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지식으로 이천 년 전에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기억하는 것만이 구원의 전부가 아니다. 그 사건을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도 우리를 구원하고 만들어 가시고 쓰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인간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개혁주의 신앙으로 지켜야 한다. 어두워지고 어려워져만 가는 이 세상과 우리의 교회에 우리부터라도 한 줄기 밝은 빛을 드러내며 우리의 자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629 no image |치악골 아침사색| 우리는 가야 할 길을 가야 할 뿐이다_변세권 목사
편집부
2092 2014-05-13
우리는 가야 할 길을 가야 할 뿐이다 < 변세권 목사 · 온유한교회 > “생명과 진리를 가진 교회가 어려운 때에 해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4월은 가고 꽃은 피는데 그 님 오지 않고 그리운 날 또 다시 찾아온 5월의 편지.’ 참으로 애틋한 사연이다. 거칠고 탁한 저 비정한 바다 위에 꽃잎처럼 떨어져 간 자식들 때문에 슬픔과 분노의 밤은 길기만 하다. 도처에서 정부의 무능과 무사안일한 사회를 원망하는 목소리가 높다.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도 부끄럽기만 하다. 다 우리 지도자들의 잘못이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의 문제는 무엇일까? 모두가 다 도둑인 것이 만 천하에 공개되어서 아무도 정직과 성실을 시행하려고 마음먹는 자가 거의 없다. 더 큰 도둑이 왜 조금만 훔친 자에게 와서 큰 소리를 치느냐고 하고 있다. “네가 힘을 가졌으니까 큰소리치지, 그러니까 우리도 힘을 모아서 힘으로 대항하겠다.” 이것이 한국정치의 현실이고, 우리의 사회현실이다. 아무도 정직과 성실을 책임지지 않는다. ‘누가 해야 할까?’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만이 할 수 있다. 우리 외에는 아무도 생명과 진리를 가진 자가 없으며 하나님 앞에 선 자로서의 의식과 책임과 두려움을 가질 자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단순히 인간의 가능성과 ‘하면 된다’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에 맞춰 외형적인 종교의 명분과 형태에만 집착하고 그 형태와 명분을 신앙의 내용으로 채우는 데는 실패했다. 그동안 모든 게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기보다 이제야 여기까지 이르렀다고 이해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오답이 나오는걸 보니 보다 넓고 높은 차원에서의 깊은 성경적 이해가 필요하구나 하고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역사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을 다만 빨리지나가고 말아야 하는 곳이며 이곳은 오직 죄악만 가득할 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이라고 생각을 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오로지 전도의 일 만을 위해서 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교회가 오직 전도로만 치닫는 것은 그 열심과 진지함이 옳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럴 때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성경의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신앙고백 제정이 제대로 안 되었다는 것과 또한 생명분할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신학적 이론으로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먼저 성경론에 대한 위치를 이해해야 한다. 성경의 정체성은 신앙고백인데 그 때 구속사는 언약사를 중심으로 집행된다는 즉, 성경은 신조, 언약, 통치로 나아가야 한다. 또한 해석론은 성경의 연속성과 상이성을 정립하여 3대해석을 구분하고 해석도 지적유희와 즐거움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반드시 고백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때 신앙고백은 역사적 전통성을 이어가야 한다. 그러니까 해석은 상응, 고백, 연속으로 가야 한다. 그 다음은 교회론이다. 교회는 신앙의 어머니이다. 교회의 3대 표식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주재권과 임재권이 살아있어야 한다. 구원의 인식은 개인적으로 오지만 홀로 있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반드시 몸으로서의 교회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헌법이 필요한데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는 것이다(고전14:40). 개혁운동은 언제나 교회법을 통하여 신앙고백을 확정했다. 그래야 신앙의 질서가 확립된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자의 삶 속에 부여하신 소명을 기억하고 존경하는 일이다. 즉 교회는 표식, 헌법, 소명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목회자로서 이런 성경원리와 배경 위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며 목회를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처한 공동체에서 따뜻하고 경건하고 부드러운 적용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잘들 하고 계시는데 주제넘은 소리가 아닌지 모르겠다. 힘든 세상이다. 그러다보니 ‘이게 뭐야!’ 하는 원망이 많다. ‘죽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는데 왜 죽게 하시나?’ 그것은 우리가 진 것이 아니고 망하는 것 같고 죽은 것 같은데 거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활을 만들기 위해 예수께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이겨야 꼭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야 우리는 아프지만 웃을 수 있다. 웃어야 이기는 것이다. 그것은 실패와 실수로 억울하지 않다는 표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보고 생각을 해보라는 것이다. 네가 보복할 것 없다. 악을 해결하려고 화 내지 말라는 것이다. 시험들지 말고 너는 네 길을 가라는 것이다. “주님, 저 사람은요?” “그 사람은 놔둬라!” 예수께서 들어와야 한다는 말 일 것이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웃는 것은 속임과 가장이 아니다. 우리는 자기를 원망하는 얘기를 많이 하고 웃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 합신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부족하고 못난 사람들로 묶어놓으셨다. 그러다보니 죄책감도 때로는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길만 가면된다. 아직도 무슨 모임만 있으면 자꾸 자존심을 살리려고 한다. 거기에다 말도 재미없게 한다. 우리가 철 없을 때에는 정죄하고 분노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었고 이제는 웃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중에 누가 능력이 있고 누가 분별이 있겠는가? 때로는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억울해 하면서 잘 해보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말과 논리는 틀리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웃을 틈이 있어야 한다. 늦게라도 깨달은 게 다행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낮춰서 쓰신다. 그래서 우리는 큰소리치지 못하는 자리에 와있다. 우리교단은 큰 일을 하려하지 않고 무엇을 하는 교단인지 모르게 가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무능해서 좋고 순진해서 좋고 진실해서 좋다. 큰일을 하려고 하지 말자. 교권주의와 권위주의가 싫어서 이렇게 모이지 않았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길만 가면 된다. 욕심을 내면 안 된다. 나라와 민족, 사회가 어려울 때 신앙 환경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 빛이 있어야 한다.
628 no image |서간문| 사랑하는 정남 형제에게_이예원 목사
편집부
2855 2014-04-15
사랑하는 정남 형제에게 < 이예원 목사, 새동네교회 > “우리는 부활의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 형제와의 교제가 나에겐 너무도 소중한 시간이었답니다. 나 자신의 믿음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부활을 소망하고 있는지 곰곰이 돌아보게 되었답니다. 형제의 병세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래도 나랑 만났을 때에는 산책도 하며 이야기도 나누고, 함께 성경공부도 할 수 있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을 잘 준비하게 하시려고 그런 기회를 주셨나 봅니다. 형제도 알겠지만 우리 시대에는 많은 죽음의 전염병들은 사라졌지만 자살과 낙태, 기아와 폭력 등으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부정하며 죽지 않을 것처럼 스스로 속이며 결국 깊은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에는 많은 노인들이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요양원이나 병원에서 온갖 생명장치를 달고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 죽어 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노인들을 위한 보험들마다 잘 죽을 수 있는 것처럼 과대 포장되고 있으며, 노인들은 장례비를 위해 스스로 보험을 들어 자식들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누군가 말씀하셨듯이 현대인들은 사망(death) 자체보다는 죽어가는(dying) 행위에 더 관심을 쏟고 있다는 평가에 동감이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보여 주신 인생의 과정과 의미를 받아 드려야 합니다. 죽음은 모든 피조물 특히 인간에게는 피할 수 없는 죄의 대가로 주어진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그렇기에 인생을 무엇을 하며 살아왔고, 또 어떻게 죽느냐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 왔는지가 평가되는 것도 아닙니다. 소위 객사를 했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고, 병에 걸려 모진 고생을 하다가 죽는 다고 잘못된 삶을 살아 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없는 그 죽음만은 불쌍하고 비참한 인생임에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죽음은 분명 두렵고 근심을 갖게 하는 것이지만 우리 주님 안에서는 넉넉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그 것은 하나님의 부활의 약속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죽든지 간에, 우리 주님은 가장 비참하고 굴욕적인 십자가의 형틀에서 죽으셨음을 생각한다면 부활의 믿음으로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죽음은 소멸되는 것도 아니고 절망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탄생이 있다면 죽음도 우리 인생의 복으로 받아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에서 초등학생 자녀가 저에게 “목사님, 죽으면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데 왜 사람들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나요?”라며 아주 단순한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질문을 했지만 저에게는 그 질문이 제 믿음의 전부를 확인하는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죽음 자체가 두려워 죽음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합니다. 죽음은 무조건 두렵고 고통스러운 저주로 여길 뿐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주신 부활의 과정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외롭게 혼자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병원에서 죽는 사람들의 경우 심폐소생술을 하다가 죽기도 하고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는 상태에서 말 한 마디 못하고 인생을 끝내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가족과 교회 공동체 식구들과도 그간 살아온 인생을 정리하며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어지며 하늘의 소망으로 서로 위로하는 시간들을 보내는 것은 6개월을 연장하는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일이라 믿습니다. 죽음은 죄를 생각하게 하며, 우리의 무기력한 인생의 증거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끈임 없이 하나님을 붙들게 하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죽어 가는 과정과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우리는 이 믿음을 놓으면 안 됩니다. 형제처럼 젊은 나이에 심각한 병을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왜 하나님께서 형제에게 이 인생을 주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이 짧은 인생이 세상에서 말하듯이 불행하고 불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부활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짧은 인생은 불행이 아닌 행복한 인생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쳐 올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이별로 인한 절망감, 육체적인 아픔으로 겪을 고통들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사실적으로 직시하여 믿음의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며 넉넉히 이기며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더 이상 생명이 없는 최후의 종말처럼 심한 두려움에서 지낸다면 우리는 부활보다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불쌍한 종교인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과 동행하며 생활합시다. 형제나 나나 이 땅에서 얼마 더 오래 살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 하루 하나님을 사랑하며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며 살다보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다다르게 되겠지요. 부활의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형제와 함께 계시리라 믿습니다.
627 no image |청진기로 바라보는 세상 <21>| 착한아이 증후군_전정식 장로
편집부
2360 2014-03-11
착한아이 증후군 < 전정식 장로, 남포교회 > “성화의 과정은 과장하거나 연기할 필요 없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아이들은 경제적인 풍요 속에 온갖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배워야 할 것,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때로는 보기에 안타깝기만 합니다. 심지어 요즈음에는 ‘4당 3락’이라는 표현도 생겨 초등학생의 경우 다른 아이보다 4년 빠른 선행학습을 받게 해야 대학을 들어갈 수 있고, 3년 빠른 선행교육 만으로는 떨어진다는 말까지 학부모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교육환경은 한창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단계를 밟아 한 걸음씩 자라나야 하는 성장과정의 아이들의 입장은 전혀 생각지 않은 학벌, 스펙 지상주의에 물든 부모들의 조급한 교육열 때문에 야기된 문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부모들의 이런 건강치 못한 육아와 교육열로 인해 아이들에게 어른이 돼서도 큰 상처를 남게 되는 질환 중 하나에 “착한아이 증후군(또는 콤플렉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증후군을 보이는 아이들은 착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다는 두려운 믿음으로 인해 타인의 눈치를 보며 타인의 요구에 순종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남들이 보면 말을 잘 듣는 착한아이처럼 평가됩니다. 그러나 아이 입장에서 보면 다른 사람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주장이나 능동성이 없고 자기 모습을 감추고 착한 모습을 연기하게 됩니다. 이런 아이들은 싫다고 말을 하지 못하며, 자세히 보면 늘 눈치를 봅니다. 그리고 자기 주장을 쉽게 포기하며 항상 불안하고 심해지면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무기력하게 됩니다. 이런 콤플렉스는 바로 해결되지 않으면 그대로 성장하게 되어 성인이 되어도 착하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자신의 느낌이나 욕구는 늘 무시하게 때문에 자신은 늘 위축되고 우울한 감정이 가득하게 됩니다. 부모가 되면 누구나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이런 마음은 자연스럽고 또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여러 단계를 거쳐 성장해야 하는 자연 섭리를 무시하고 조급한 마음과 또 잘못된 육아관, 교육관을 갖게 되면 아이들을 이런 나쁜 상황으로 내몰 수 있습니다. 착한아이 증후군을 가진 부모들은 보통 말을 잘 듣는 것은 착한 것이며 좋은 것인데 반해 말을 안 듣는 것은 착하지 않으며 나쁜 것이라는 이분론적 교육관을 갖는다고 합니다. 또한 아이들을 평가할 때 아이가 갖고 있는 장점을 보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이들이 착한 행동을 계속 하다보면 착한아이가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조차 들게 합니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가 건강한 육아법을 가져야 하는데 아이에 대해 과도한 욕심과 기대를 키우지 말아야 하며,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아이가 늘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도 ‘네, 네’ 하는 착한 모습을 연기하지 않고 솔직한 마음을 보이더라도 부모에게 인정받을 수 있음을 믿게 해야 합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교회들은 안과 밖으로 큰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교회 밖 사람들이야 당연히 교회를 배척하겠지만 교계 안에서도 많은 개 교회와 교단들이 때로는 서로 원수 보듯이 눈을 흘기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장하는 것을 들어보면 모두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다고 하니 그 의도는 하나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모두가 긴장 속에서도 서로 착한 성도, 착한 교회인 것을 증명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들의 열심을 바라보는 다른 성도의 입장에서는 칭찬은커녕 성도로서의 존재감까지 무기력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제 사회의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의 나이에도 고쳐야 하고 더 연단되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저는 믿음의 성화 과정은 서두른다거나 열을 낸다고 빨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행위나 모습이 아닌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과장하지 않아도 되고 연기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과열된 곳에 있는 성도들이 주위 사람이나 세상 사람들의 평판에 휘둘리지 말고, 언제까지라도 우리의 성장을 기다려 주시고 또 감당할 짐만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서로 정직한 말만하고 솔직해지면 좋겠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이 해에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하나로 회복되는 일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626 no image |치악골 아침사색| 비관적 낙관주의의 모범으로 살아가자_변세권 목사
편집부
2267 2014-02-11
비관적 낙관주의의 모범으로 살아가자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가기를” 올 겨울은 큰 추위가 없어서 감사하다. 눈도 많이 내리지 않아 다행이다. 자연은총도 감사함으로 받으면 더 없이 감사한 것이 된다. 때로 우리가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꼈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간섭하신 손길이 멈춘 적은 없었다. 혹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마음이 들더라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좋은 환경과 좋은 여건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가 못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이 우리 신자에게 나쁠 것은 없지만 어차피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영원한 소망과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 하나로 살도록 부름 받았으니 인내하고 충성하며 살면 될 것이다. 그것도 세상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다짐하는 것을 말한다. 시대가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우리 신자들의 문제는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상되리라는 기대감에 대한 오해일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한국교회가 꽤 오랫동안 정당한 신앙의 보상을 현실적, 세상적으로 많이 강조해왔다는 점이다. 예수 믿으면 승리하고 형통하고,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크게 쓰임 받는다는 식으로 이 세상에서 누리는 보상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도 그렇고 우리가 살아온 현실을 봐도 그러한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그 간격에서 오는 혼란이 매우 깊다. 사실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부모의 심정과 같다. 그것은 마치 자녀가 부모에게 기대해야 할 것과 자기가 책임져야 할 것을 구별 못하는 모습과도 같다. 자식은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하지 않고 학교에 가서 공부만 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만 구하면 된다. 곧 우리 믿는 신자들이 가지는 정당한 믿음의 근거나 토대는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편드시고, 온 천하 만물의 주인으로서 우리를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에 있는 것을 믿는 것이다. 결국 신앙의 싸움은 예수를 믿는 것을 현실적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각오하느냐의 싸움이 된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 신자들의 기본적인 신앙의 원리는 비관적 낙관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요즘 회자되는 로망롤랑의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로 적용해보면, 나는 지성 때문에 비관주의자가 되고 의지 때문에 낙관주의자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신자들은 지성의 비관주의로 인간의 타락과 한계와 무능을 발견해야 하고, 이것 위에 거룩과 영생을 신앙의 공동체에서 의지적으로 훈련하고 살아가는 낙관적인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무런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명분이나 이해로 살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모세와 같이 할 수 없이 붙들어서 가게 하신다. 그것도 사역을 잘 해놓고 매일 욕먹고 져주면서 걸어가게 하신다. 예수그리스도 없이는 어떤 성공,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다. 자랑으로는 옳은 것의 내용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자랑으로 흘러서 사람만 죽이게 된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화를 내도 소용없다는 것을 이제 알아가게 된다. 오히려 말 안할 때 훨씬 인생이 겸손해지는 것을 배우게 된다. 죽지 않고 그 길만 따라가면 되는 것 같다. 목회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분노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면 사역을 멈추고 목회자 자신의 신앙과 인생의 부요함을 다시 찾아야 한다. 그동안 복수하고 성질을 냈으나 거기에는 항상 정답이 없었다. 목회자로서의 인생을 먼저 살 줄 알아야 하겠다. 정성을 드리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생각했던 것부터 버려야 한다. 믿음은 오늘도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길을 가는 것이다. 시대는 갈수록 험악하고 이제야말로 신앙의 본질적인 싸움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나님을 역사와 우주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비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인가 믿을만한 것을 남겨놓고 큰 소리 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놓쳐서는 안 된다. 때로는 우리의 한심한 설교, 나의 답답한 성격에서도 하나님이 영광을 담아낸다는 것을 알고 기죽지 않아야 한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통치와 복에서 도망갈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지성의 낙관주의 모범으로 기초를 삼되 의지의 낙관주의의 모범의 실천도 버려서는 안 된다. 올해도 우리의 인생과 직분과 사역에서 주님의 영광된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리를 성실하게 살아가기로 하자. 박영선 목사는 본인이 ‘예전에 비해 많이 훌륭해졌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참으로 겸손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 훌륭함은 이제 그 어떤 억울함과 오해도 받을 수 있는 자리까지 왔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조금 살아보니 이 세상에는 어떤 답도 없다. 우리 독자들끼리라도 늘 같은 편이라는 따뜻한 눈빛을 가지고 서로 격려하며 올 한해를 늠름하게 걸어가길 바란다.
625 no image |들꽃향기처럼| 소형교회의 비애_윤순열 사모
편집부
2484 2013-12-17
소형교회의 비애 < 윤순열 사모, 서문교회 > “대형교회 앞에서 몸부림치는 상가 교회들 현실 외면해서야” 노랗던 단풍이 흑갈색으로 변하고 하나둘씩 낙엽 되어 떨어지던 어느 새벽이었다. 4시 40분쯤 새벽 기도를 위해 교회 문을 열던 나는 교회 앞마당 앞에 세워놓은 작은 승합차를 보게 되었다. 그 승합차 옆면에 붙은 글씨에 약간 의아스러운 생각이 스쳐갔다. A교회라고 쓰여 있는 승합차였는데 그 차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3층 개척교회 차였다. 그 차가 서있는 곳은 우리 교회가 쓰레기나 재활용품을 쌓아놓는 곳 이어서 왜 저차가 저기에 세워져있고 뭐하고 있는 걸까? 많은 궁금증이 생겼다. 멀리서 그 차를 유심히 살피고 있는데 그 차에서 내린 한 남자분이 우리가 버린 박스 등 재활용품을 만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분은 목사님이 아니신가? 이 새벽에 재활용품 수거를 하고 계신단 말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빠르게 스치면서 내면에 작지만 심한 충격이 일었다. 나는 눈치챌까봐 재빨리 들어와 버렸다. 소문에 의하면 그 교회는 성도가 10여명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것도 친척들로 이루어진 성도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목사님이 호구지책으로 재활용 수거를 하고 다니시는 것이 아닌가? 몇 명 안 되는 성도를 데리고 목회하시면서 비싼 임대료 내랴, 자식들 데리고 생활하랴, 오죽하면 이 지경까지 내몰렸을까! 이른 새벽 아무도 없을 때 재활용품을 수거하러 다니시는 목사님! 마음이 몹시 아팠다. 그분은 십 수 년 간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신도시에 비싼 임대료를 내며 3층에 개척을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신도시 아파트사람들은 좀처럼 상가3층 교회 가지 않는다. 갔다 온 사람들 하는 말 너무 사람이 없어 부담이 된다나? 가슴 아픈 현실이다. 성도들은 대부분 사이즈로 교회를 선택한다. 넒은 종교부지에 아름답고 화려하게 교회를 지어 놓으면 입추의 여지없이 밀려드는 성도들로 교회 주차장이 난리가 난다고 한다. 우리교회 바로 앞에는 1000평이 넘는 예배당이 우뚝서있다. 우리 교회가 약 3개월 먼저 입당했는데 6층 높이의 예배당 가리개를 딱 벗기는 순간 나는 심한 위압감을 느껴 마음에 위축감 내지는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하였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남편은 나에게 심한 질책을 하였다 “교회가 무슨 쇼핑센터냐, 경쟁의 대상인줄 아느냐!”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그곳에 세운 교회를 보고 경쟁의 대상으로 보고 불안하여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질책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믿음이 없는지 천사표가 아니어서 그런지 솔직히 많이 힘들었다. 앞의 교회가 첫 예배를 드리는 날 20여 명씩 방문하던 새 신자가 한 명도 없이 다 사라져버렸다. 그 교회 앞에는 주차해 놓은 차가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전도는 하루도 쉬지 않고 뜨거운 여름날 발등이 새까매지도록 다니는데 마음은 기쁘지 않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내가 전도해 놓으면 앞의 교회로 가는 일이 비일 비재하였다. “교회가 너무 작네요. 교인이 많질 않아서 남편이 큰 교회 가자고 하네요.” 그래도 낮에는 이를 악물고 전도 보따리를 끌고 아파트 입주 전도를 하였고 밤이면 예배당에 엎드려 절규하듯 기도하였다. “하나님 어떻게 하나요! 도와주세요!” 그동안 벌려놓고 해결해야할 모든 문제가 내 앞으로 쏟아지는 듯하였다. 그렇게 하기를 2개월쯤 되었을 때 다시 새 신자들의 방문수가 예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교회가 너무 부담된다고 도망갔던 새 신자 부부가 돌아와서 등록하였다. 더 놀라운 일은 앞의 교회가 우뚝 서서 잘 보이니까 그곳에 왔다가 바로 앞에 있는 우리 교회를 방문하는 방문 자수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오히려 그 교회 때문에 우리 교회를 자연히 방문 하게 되는 득을 누리게 된 것이다. 우리 교회의 90% 이상은 앞의 교회를 갔다가 우리 교회에 온 교인들이다. 거의 처음부터 우리 교회에 온 사람은 없고 앞의 교회에 갔다가 마음에 안 들면 우리 교회로 오는 셈이다. 그러나 상가교회는 상황이 다르다. 아예 발걸음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니까 이런 대형교회로의 쏠림 현상 때문에 소형교회 내지는 상가교회는 기본적인 생계조차 어려워 이른 새벽에 박스 수거를 다니는 목회자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니 일부 목회자들은 많은 교인을 끓어 모으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맘모스 초대형 교회를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닌가? 맘모스 교회들만 찾는 교인들이나 목회자 모두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또한 기본적인 생계 문제에 시달리며 몸부림치는 상가 교회들의 현실을 한국교회는 절대로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624 no image |청진기로 바라보는 세상 <20>| 보물 상자_전정식 장로
편집부
2090 2013-12-17
보물 상자 < 전정식 장로, 남포교회 > “세상적 가치관 버리고 예수님 중심의 장성한 믿음의 사람 되길” 가을이 시작되면 아이고 어른이고 간에 독감 예방접종을 합니다. 그 덕분에 진료실은 아주 부산합니다. 그런 주간 어느 날에 세 살 된 귀여운 남자아이가 엄마 손에 이끌리어 진료실에 들어옵니다. 그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고, 작은 손에는 작지도 않은 상자가 들려져 있습니다. 아이는 주사 맞는 것을 두려워하였으나 진찰할 때에는 그래도 협조적입니다. 아이를 안정시키려 일부러 말을 건넬 때 대답도 잘합니다. 상자 안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미니카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엄마 말에 의하면 아이가 외출을 할 때나, 심지어 잘 때조차도 미니카들을 떼어 놓으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 두 살 가까이 되면 부모와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해 지고 또 사회성도 생기게 됩니다. 그런 과정 중에 엄마, 아빠, 가족 외에도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됩니다. 이때 가족이외의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는데다 또 엄마와 떨어져야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불안을 느껴 떼를 쓰거나 또는 특정한 물건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런 물건들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거나 또는 아기 때 쓰던 물건일 경우도 있는데 보통 인형이나 장난감, 때로는 담요 등이 있습니다. 이런 애착 대상은 어른들에게는 가치 없는 물건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불안을 해소하는 좋은 방편이 됩니다. 이런 증상은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게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치료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이들이 특정한 물건에 집착하는 모습과 유사한 행동이 병적인 불안장애에 빠진 어른에서도 발견되는데, 거의 쓸모없이 보이는 낡고 가치 없는 물건들에 집착하는 강박적 수집행동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치료의 대상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진료실에서 본 아이들의 커가는 모습과 그리고 교회생활에서 많은 초신자들의 신앙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사실 중 한 가지는 ‘어쩌면 그렇게도 믿음의 성장 과정이 어린아이의 성장과 유사한 점이 많은지’ 하는 점입니다. 또 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신앙의 자라는 과정이 남들과 똑같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성인이 되어 처음 믿음을 갖거나 모태신앙으로 자라다가 커서 자기의지로 믿음을 갖게 되면 누구나 열심히 교회생활을 합니다. 저도 언젠가부터 성경공부도 부지런히 하고 봉사활동도 적극 참가하게 되었고 또 때가 되어 교회 직분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직분을 맡게 된 이후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잘해야 된다는 부담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열심히 살던 저로서는 아직도 말하고, 생각하고, 깨닫는 것에 이 세상의 가치관이 큰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 앞에서도 역할이 있으며 믿음도 중요하지만 가시적인 열매를 맺는 행위도 있어야하고 또 교회 지도자일수록 높은 윤리기준을 가져야한다는 주장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교회 안에는 문제투성입니다. 또 그런 마음으로 교회의 모임에서 거침없이 옳은 말을 아끼지 않다보면 회의가 경직되고 서로 보기가 민망한 지경에도 이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해를 보내며, 지난 일 년 동안의 교회생활을 되돌아 볼 때, 어쩌면 저는 장성한 어른이 되어서도 아직 믿음의 수준이 어린아이와 같아 세상초등학문의 가치기준을 보물 상자처럼 붙잡고 세상학문의 기준으로 믿음을 말하고 생각하고 깨달았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새해에는 장성한 어른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듯이 세상의 가치관을 과감히 버리고, 장성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나의 말하고 생각하고 깨닫는 것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623 no image |치악골아침사색| 우리는 그 속에서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_변세권 목사
편집부
2314 2013-11-19
우리는 그 속에서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 < 변세권 목사 · 온유한교회 >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어떻게 이루어 가셨는지 확인해 보아야” 가을비를 맞으며 주변 숲속을 걸었다. 비에 젖은 낙엽들은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고 겨울은 벌써 저만치서 가까이 오고 싶어 안달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의 목회가운데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를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보통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태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시점을 먼저 떠올린다. 그것은 기도하고 회개했더니 구원이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인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죽으신 사건에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태어나서 예수를 믿게 되어 그 믿음을 고백하고 결단하여 신자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 예수는 2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서 믿게 되니까 이 시간상의 역순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결과부터 정해놓고 태어나서 믿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나중에 태어나지만 우리의 운명과 결과가 과거에 완료되었기 때문에 도망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은 반복되지 않는다. 마치 ‘너 나가서 잘 살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박영선 목사는 ‘재창조가 창조 안에 있는 창조라는 무한대를 쓰신다. 창조의 능력과 부활이 시간 속에서도 나타나서 시간이 역순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결정된 우리의 운명과 승리와 영광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삶의 정황에 펼치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구원받은 신자의 삶을 ‘주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라고 단지 외우고 고함만 지르는 식의 관념화된 깨우침으로만 기독교를 보지 말고 시간적 개념으로 보아서 함께 울고 함께하는, 그래서 그 한 사람이 겪는 인생의 순례가 시간과 현실 속에서 자라간다는 시간적 완성과 개념으로 살아야 한다. 성경은 사전식이 아니다. 성경은 이야기이며 세계관이다. 따라서 설득력을 잃으면 안 된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무슨 법만 보이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이상한 현상에 빠져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예수 이전의 인류와 예수 이후의 인류로 양분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전과 후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의 의미를 알고 현실이라는 과정을 알아야 한다.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제일 잘 나갈 때나 가장 좋을 때 쓰시지 않고 때로는 형편없이 부족하고 연약할 때 쓰시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때로 이 원리를 모르고 혼동하기 때문에 의심하고 갈등하고 체념하고 자폭하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잘못하면서 크는 법이다. 그리고 잘못할 수 있다. 그것은 법으로 규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다 못해 자식을 기르며 살아보면 다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되찾으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능히 구속을 이루어 가신다. 그래서 사람은 알고도 틀리고, 몰라서도 틀리고, 철없어서 틀리고, 경박스러워서 틀린다. 지난 시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수를 용납하셨기에 살 수 있었다. 다윗도 시글락에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은 곧 ‘내가 이렇게 못났구나!’하는 절망과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나?’ 하는 원망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신자의 구속받은 은혜가 일상생활과는 무관하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런 사고로는 사람이 훌륭해지지 못하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잘 참아 내지를 못한다. 바로 그 때 그 환경에서 어떻게 할래? 가 중요한데 말이다. 억울할 때 어떡할래? 오해받아서 어떡할래? 답은 모든 것을 인내하며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 목회하면서 이제 조금 배우는 것은 모세의 말대로 인생은 짧고 죄만 짓더라는 것과,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기도해서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내 하나, 자식 하나 감당하지 못하면서 겸손해지는 것이다. 사람은 고생하고 실패를 해봐야 겸손해지고 자기가 얼마나 못났는가를 알아야 겸손해진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리에까지 가야 담대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내가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째려보게 되어 있다. ‘까불지마! 나 그런 사람아니야!’로 자존심을 세우기보다 ‘정말 잘 났구나!’하며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나나 잘하자!’ 하며 각자 자기의 역할만 잘하면 된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최고 잘하는 것이다. 올 한 해의 시간도 마무리 되어가고 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셨는지, 어떻게 그 약속하신 일을 이루어 가셨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또 헤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승리, 영광, 자랑, 명예를 믿음으로 붙들어 안아 구속받은 신자의 생애 속에 더 누리며 펼쳐나가는 현재의 시간과 과정이 되었으면 한다.
622 no image |치악골아침사색| 하나님이 일하시는 길_변세권 목사
편집부
2230 2013-10-08
하나님이 일하시는 길 < 변세권 목사, 온유한 교회 > “세상은 교회를 이해할 수 없고, 교회는 세상을 설득시킬 수 없어” 올 들어 차별금지법반대, 종교인 과세반대, 담임목사 세습금지 등 주요 현안들이 교회와 교단, 또 사회적으로 많이 대두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단순히 사회적 가치관으로만 보기보다는 성경적 관점에서 그 비밀을 푸는 자세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사회적 약자가 꼭 성경적 약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에 대하여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교회는 뜻밖에도 사회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세상으로부터 공격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그들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를 믿는 신자들이다.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합의는 찾을 수 없다. 세상은 예수를 죽였고 우리는 예수를 믿는 신자들이고 예수 없이는 아무 것도 안된다고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교회가 교회로서 가지는 정체성이 무엇인가 할 때 우리는 예수를 믿는 자들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구원이 필요한 자라는 자기 실체에 대한 이해와 고백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다른 조건은 세울 수 없다. 따라서 ‘교회가 왜 그러는가?’라는 세상의 질문 앞에 우리가 늘 반성하고 성찰해야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그들에게 납득시켜서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할 방법은 없다. 한 마디로 세상은 교회를 이해할 수 없고, 교회는 세상을 설득시킬 수 없다. 세상은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그 어떤 이해나 관심도 없다. 그러니까 쓸모 있고 멋있어서 교회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 예수를 믿고 내가 오늘 하나님의 백성이 된 줄로 고백하노라’는 고백이 우리 교회와 신앙의 정체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각 개인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은 공동체로 모여 교회를 존속시키며 그것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증거 해야 한다. 저 사람은 우파이고, 나는 좌파인데 어떻게 같이 있는가? 우리들의 모임에 다른 것으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데 왜 같이 모여 예수를 믿는가? 하는 모든 오해 속에서도 우리는 공동체 안에 같이 나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지라고 세상에 교회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대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때 그것으로 교회의 본질적 정체성과 대등하게 놓고 싸우지 않아야 한다. 그런 것들이 본질적으로 최우선하는 우리의 정체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롭고 균형 있는 목회와 적용으로 나아가는 시야가 필요하다. 일단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면 그 일에 대해서 답을 해야 한다. 그러나 모두를 충족시키는 종결을 찾을 수 없음도 인정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 우리는 모든 회의와 대화와 과정을 항상 은혜가 되어 지게 만들어 가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우리는 깊은 배려와 생각 없이 이상하게 사람 잡는 연습부터 했다. 명예로운 길을 선택하는 연습을 하지 못했다. 그 뻔한 일에 늘 실수를 한다. 그래도 우리는 도망가지 말고 피하지 않되 그 가운데서 늘 잘 늙어가는 법을 배워야겠다. 우리는 그나마 하나님이 봐주셔서 여기까지 왔다. 무슨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적어도 목회자들만이라도 ‘그건 그 교회 문제야! 우린 떠들지 말자!’ 그런 자세가 일단 필요하다. 사회에서는 언제나 화풀이를 교회에 한다. 설혹 그런 일이 있어도 목사는 근신을 하거나 아니면 그 일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대해서 다른 변명이나 방법은 없다. ‘그러게요!’ 하는 식의 웃는 것 외에는 어찌할 다른 방법이 없다. 그 앞에서 겁을 내지 말자. 배짱을 가지자. 예수 믿고 나면 모든 게 다 만사형통한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실력 없는 자와 모자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단지 지금 하나님이 일하시는 중인데 그것을 모르는 것은 우리가 그 일에 수긍하지 않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됐구나! 오해받게 됐구나! 그래서 힘들어서 어쩌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차라리 훌륭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길을 가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길이다. 우리 교단은 행정이나 학문이 탁월하지 못해도 신앙의 자세가 순수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어디 가서 남들과 함께 보란 듯이 나설 자리가 없다. 목회는 인내의 싸움이다. 억울하고 힘들 때 무능해고 무시당하기가 쉽다. 그때 신앙인격과 체력으로 버텨내야 한다. 이럴 때 하나님께 맡기자! 울면 우는 대로 쓰시고 실패하면 실패한대로 쓰실 것이다. 누가 책임을 면해주는 것도 아니고 아무도 우리를 이해해주지 못하지만 오늘도 우리는 늠름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이 길을 또 걸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유난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을 때 일하시기 때문이다.
621 no image |청진기로 바라보는 세상 <19>| 뿌리 없는 열매_전정식 장로
편집부
2307 2013-09-10
뿌리 없는 열매 < 전정식 장로, 남포교회 > “자기를 소비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인공 될 수 없어” 한국 남자들이 모여서 담소할 때 빠질 수 없는 화제가 군대 이야기입니다. 저는 군복무 첫해를 전방에 있는 후송병원에서 군의관으로 지냈습니다. 더웠던 여름 어느 월요일이었습니다. 장교 숙소에서 늦잠을 자고 조금 늦게 진료실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환자 대기석에 앉은 전투복 차림의 환자들 중 어깨에 있는 계급장에 작은 별이 반짝 반짝 빛나는 환자가 한명 앉아 있었습니다. 순간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열이 엄한 군대에서 아무리 환자라지만 장군이 사병들 속에 섞여 앉아 군소리 없이 진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군복무 중 만났던 잊을 수 없는 존경스러운 분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최근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어 이제는 선진국 문턱에 가까이 왔습니다. 이에 힘입어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는 선진국에서처럼 소비문화에 젖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거나 스펙이 좋은 사람들이 명품을 쓰거나 고급 음식점, 고급 호텔을 다닐 때는 그 만큼 좋은 상품의 가치를 원하기도 하지만 그런 곳만 드나드는 상류사회의 이미지를 갖고 싶어 합니다. 이런 사회 풍조에서는 개인이 소비하는 물건의 상징을 통해 그 사람이 파악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소비 형태를 지닌 문화에서 일반 소비자가 상품을 살 때에는 그 상품의 효용성보다는 그 상품이 갖는 이미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명품을 살 때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그런 사람으로 대해주길 기대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병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대형병원을 이용하는 환자들 중에는 우리 사회에서 지도층에 있거나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환자들이 많습니다. 국가의 운영방침이 그러하지만 저명한 대형병원의 진료비는 상대적으로 비쌉니다. 대형병원에서는 환자들이 질환에 대해 설명할 때 쉽게 이해하며 치료방침에 잘 따르며, 또 돈이 없어 검사를 못한다고 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 진료하는 의사의 입장에서 참 좋습니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대형병원은 시설이 좋고 첨단 진료를 받아 안심이 되기 때문에 좋고, 또 우리 사회에서 최고의 시설을 이용하는 만큼 자기 자신도 그런 위치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 줍니다. 경영주 입장에서도 환자들이 몰려오는 만큼 큰 만족감을 갖게 됩니다. 세상 사람 모두에게는 아니지만 연관된 사람들에게는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의 진료 경험을 돌아보면, 사실 환자에게는 자기 병을 잘 낫게 해 주는 의사가 명의이자 좋은 의사가 되는 것이지 치료해준 의사가 저명한 사람인지 병원이 큰 병원인지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런 사회에 존재하는 교회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관련 미디어의 기사를 보면 많은 성도들이 대형교회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대형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은 대개 자기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릅니다. 특히 저명한 목사님이 있거나 사회활동을 많이 해서 사회에 이름 높은 교회의 성도들은 더합니다. 그런 교회의 신자들과 만나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담임목사님이나 교회의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런 교회를 다니는 자기를 알아달라고 하는 느낌을 줍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는 양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남에게 칭찬도 받고 대접받는 양자가 되고 싶다면 양자증명서를 어디서 받았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높으신 아버지의 이름에 걸 맞는 좋은 품성을 지닌 아들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르고 빠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소비자가 생활의 주인공이 되는 소비문화시대에 우리가 산다하더라도, 교회는 자기를 소비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될 수는 없으며 그런 신자들의 취향에 따라 교회가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 풍조에 휩싸이지 않는 것이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참 포도나무에 접 부쳐져 있기만 하면 참포도가 열린다는 약속도 있고 또 주시는 영양을 공급 받기만 하고 있어도 열매 맺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보다 그렇게 해 주시는 분이 고맙고 또 즐거워지는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620 no image |짧은 글, 긴 여운| 스펙(spec)인가, 스토리(story)인가?_장석진 목사
편집부
2465 2013-08-06
스펙(spec)인가, 스토리(story)인가? < 장석진 목사, 광주월산교회 > “하나님과 동행하는 스토리 만드는 것이 진정한 신자의 도리” 스펙(spec)은 specification의 줄임말로 2004년 국립국어원 신어자료집에 등록된 말이다. 통상적인 비지니스 용어로는 설비의 명세서, 또는 구조, 성능, 재질, 특성 등을 일컫는 말로 물건의 좋고 나쁨을 나누는 말이다. 요즈음 원래의 뜻에서 벗어나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학력을 포함한 학점, 토익점수, 해외연수 그리고 자격증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 말해준다. 즉 물건의 가치가 자신이 확보할 수 있는 외적 조건의 총체로서 사람의 능력이나 가치를 나타내는 명세서 또는 이력서로 변신되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스펙을 쌓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이끼지 않는다. 요즘 대학생들 10명 중 4명은 '스펙' 때문에 아르바이트 채용에서 불합격한 경험이 있다고 조사됐다. 스펙에는 용모도 들어가므로 남학생들도 성형수술을 한다. 화장하는 남자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최근 구직시장의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지난 20년간 스펙이 구직의 중요한 요소였다면 이제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토리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는 책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은 “스펙보다 스토리(story)를 만들라”고 주문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창의성이 묻어나는 스토리가 있는 “바이킹(viking)형 인재”의 채용이 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조류를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자. 바리새인들은 영적 스펙의 대가들이었다. 성경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철저한 종교생활을 지향했다. 정규적인 금식은 물론 텃밭의 채소에 대한 십일조까지 드릴 정도로 철저한 신앙생활을 추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들을 질타하셨다. 그 주된 이유는 그들에게 그럴 듯한 규율과 가르침은 있었지만 ‘행함’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행함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그들에게 화려한 영적 스펙은 있었지만 신앙의 진정한 스토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때 과연 우리는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성경의 에녹을 생각해 보자.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1-24). 에녹의 삶의 기록에는 스펙이 전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동행했던 아름다운 신앙의 스토리가 있다. 어느 인생이든, 어느 공동체이든 날마다 영적 스펙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하나님과 동행하는 스토리를 만들어가자. 당신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적인 스펙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스토리인가?
619 no image |치악골아침사색| 하나님의 일하심의 손길을 읽어내라!_변세권 목사
편집부
2460 2013-08-06
하나님의 일하심의 손길을 읽어내라! < 변세권 목사 · 온유한교회 > “오늘이라는 숙제를 하나님의 자녀로 대면하면서 살아가야” 교회 앞 화단에 피어있는 형형색색의 백합이 긴 장맛비에도 그 고운 향과 순결한 자태를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이은상의 동무생각의 노래구절이다. 문득 예수님의 말씀도 생각이 난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우리가 그동안 많이 외워서 익숙한 말씀이다. 그리고 많은 사역자들과 신자들이 이 말씀을 의지해서 큰 위로를 받고 살아간다. 그러나 현실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맹목적 낙관주의도 아니고 이 부분이 어려운 것 같다. 그러면 이 대목이 우리에게 왜 그렇게 중요할까?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를 믿고 믿음이 요구되는 신앙실천을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믿음과 실천에는 꼭 기독세계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영선 목사는 세계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는데 그것은,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라는 인간 활동영역에서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망라하는 인간의 경험과 사고의 모든 영역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만일 기독교 신앙이 세계와 역사, 인간의 존재와 의미, 운명이라는 더 큰 조건과 틀에서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지 않다면 우리의 신앙은 세상과 역사와 인생 속에서 종교라는 한 수단을 가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이 지금 일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뜻 역시 ‘내일을 안심하도록 확보하려고 오늘을 살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다. 내일을 안심해도 좋을 만큼 확보하려는 오늘로 싸우지 말고, 오늘은 오늘의 일로 채우고 내일을 내일로 채우라는 것인데 역시 이 부분이 어려운 것 같다. 그러면 내일이란 무엇일까? 내일을 오늘로 이해할 때 세상의 권력과 세상의 방법이라는 시각에서 이해하면 내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오늘 가만히 있다가 내일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경이 말하는 내일은 이런 이해가 있어야 한다. 내일의 끝은 종말이다. 종말은 세상이 심판 받는 날이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화되는 완성의 날이다. 우리가 내일의 연장선상 끝의 막연함과 눈과 구름 밖에 없으면 내일을 오늘 준비해야 맞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그 연장선상의 끝에 있다면, 또 기독교 종말론을 알고 있다면, 하나님의 시작과 만드심과 완성을 알고 있다면 내일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날로서 오늘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게 되는 것이다. 오늘이라는 숙제를 하나님의 자녀로 대면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종말과 연결되어 있는 자로 오늘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오늘 하루는 반복적인 일상이다. 아무 확인이 없고 밤낮 똑같은 일을 하는 막막함과 답답함이 견딜 수 없는 시험이 되고는 한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가치나 개념이 아니라 그 역사 속에서 배우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가 크는 것이다. 무엇이 큰가 할 때도 기다릴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은 늘 불안하고, 기다리는 시간은 늘 더디간다. 누가 문제가 있고 누굴 보기가 싫어도 그 사람들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늘 생각해야 한다. 그들을 다 받아주되 겁먹지는 말고 진지하게 살아가야 한다. 미화되고 완전한 것으로 사람을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하고 충성될 때에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은혜는 용서로만 온다. 용서 없는 은혜는 없다. 옳은 것에 내용이 없으면 사람을 정죄하게 된다. 우리가 설교를 할 때도 농사를 하고 밥을 짓듯이 해야 한다. 설교에 메시지가 없고 비판만 하고 그 비판한 것이 메시지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게 된다. ‘내가 살아보니까’가 아니고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하셨나이다’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넉넉함으로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이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것들로 역사하셨지만 앞으로의 세대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일하실 것이다.
618 no image |청진기로 바라보는 세상 <18>| 검은 머리, 흰 머리_전정식 장로
편집부
2549 2013-07-23
검은 머리, 흰 머리 < 전정식 장로, 남포교회 > “환아의 부모는 쉽게 접근하여 마음 놓고 대화할 수 있는 의사 선호해” 고령화 사회에 들어선 우리나라에서도 청년들의 일자리 창출 못지않게 직장의 정년제에 대한 논의가 뜨겁습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흰 머리로 대학병원에서 정년퇴임을 하고나서도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병원에 첫 출근하던 날 병원 경영자가 저에게 머리를 염색하면 어떠냐고 충고를 주십니다. 깜작 놀랐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희끗 희끗한 머리를 좋아했고, 아직 내가 노인이라는 생각도 없었고 지금의 헤어스타일이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 일하게 된 작은 동네 병원은 비교적 젊은 가족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있어서 그런지 소아과 환자가 많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환자는 감기나 설사 또는 예방접종을 위하여 내원하는 가벼운 경우이며 응급하거나 중한 조치가 필요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학병원에서 중한 환자를 주로 취급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환자를 보고 있는 셈입니다. 대학병원에서는 중하거나 진단이 어려운 환자가 많아 크고 작은 문제에서 교수의 의사결정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의사의 결정에 잘 따르며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아 주로 의사가 말하고 보호자는 듣는 편이었는데 새 병원에 와서 만나는 환자의 보호자들은 많이 달랐습니다. 특히 처음 아기를 기르는 엄마, 아빠들은 아기가 아픈 것에 관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 외에도 아기가 잘 자라고 있는지와 또 자라면서 보이는 모든 것에 관하여 궁금한 것이 많고 물어볼 것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진료를 마치고 진료실을 나갔다가도 다시 들어와 물어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대학병원에 있을 때처럼 일주일에 삼일만 진료를 합니다. 처음에는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환자를 봤습니다. 왜냐하면 새 병원의 경영자는 그래도 스펙이 좋은 대학병원 교수 출신의 의사를 초빙했으니 환자가 늘어날 것을 기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환자들은 그 동안 낯이 익은 매일 진료하는 젊은 선생님만 찾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카로부터 다급한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두 살 된 딸이 열성경련을 일으켜 한 대학병원에 입원했다고 합니다. 알아보니 신경전문 교수님이 잘 진료하고 계셨습니다. 조카는 아기가 퇴원할 때까지 밤에도 낮에도 저에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훌륭한 교수님이 돌보고 있는데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조카는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쉽게 물어보고 위로 받기가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새로 다니는 병원에서 환자들이 왜 젊은 선생님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기가 커가면서 안 아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 발달하여 아기들의 건강상태가 좋아지고 또 위생상태가 향상하여 과거보다 아기들이 아픈 경우가 적어졌습니다. 그리고 대가족보다는 핵가족이 많고, 아기들도 적게 낳기 때문에 부모들이 아기들이 아프게 되면 경험이 없고 또 가까운 주위에 도와주고 상담해 줄 사람이 없어 당황하게 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병원에 오면 환아의 부모는 병이 낫는 것도 중요하지만 물어 볼 것도 많고 또 심정적으로 의사로부터 병이 낫는다는 위로와 격려를 바라게 됩니다. 그래서 환아의 부모는 늘 쉽게 접근하여 마음 놓고 대화할 수 있는 의사를 선호하게 됩니다. 새로운 병원에 와서 이곳 환경에 어느 정도 적응하게 된 지금 출근 첫날 저에게 머리염색을 권유한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좀 더 환자들에게 가까운 의사가 되는 한 방편을 소개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제가 가진 외적 모양을 일부러 꾸미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환아의 부모가 원하는 만큼 위로와 격려가 되는 대화를 충분히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오늘따라 한 사람, 한 사람 진료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617 no image |가야산 골짜기에서| 산골 목수
편집부
2780 2013-07-23
산골 목수 < 김영자 사모 > 며칠간 라디오의 일기예보 시간에 중부 지역은 폭우로 인한 피해 사례와 또 남부 지역은 불볕더위 소식들이 계속되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산골은 며칠 동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흐린 날에 습기만 가득했는데 마침내 늦은 밤부터 벼락 천둥과 함께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면서 장마철인 것을 실감나게 하는 여름날입니다. 남편은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지붕을 완성시켜야 된다고 하면서 미완성의 지붕을 마침내 완성시켰습니다. 연일 30도가 넘는 뜨거운 날씨에 달구어진 지붕의 판넬 위에 안전띠를 메고 올라가 방수포를 깔고 그 위에 슁글을 입혀 완벽하게 지붕 공사를 끝냈습니다. 쏟아지는 장맛비에도 아무런 하자가 없는 지붕을 돌아보며 자신의 작품에(?) 매우 만족해하며 우쭐해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은퇴생활 3개월이 되었습니다. 은퇴 소식을 듣고 여러 곳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남편의 통화 내용 중에 거의 왜(?) 벌써(?)라고 묻는 말이 대부분이었고 기억에 남을 몇 분만 “은퇴를 축하합니다.”라고 하면서 남편의 심중을 이해하는 듯 했습니다. 또 먼저 은퇴한 선배 목사님께서는 “은퇴는 과일 나무를 본 가지에서 접 부치는 것”이라면서 우리들의 산골생활이 머릿속에 그려진다고 하면서 참 잘했다고 격려의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또 친구가 은퇴했다고 해서 아주 먼 곳에서 이곳을 방문한 목사님은 이곳을 첩첩산중이라고 하면서 안타깝게 생각하기도 했고, 어떤 친구는 창 밖으로 보이는 산과 들을 보면서 자기는 농촌형이 아니고 “도시형”이라고 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일단은 병원이 가까이 있는 곳이 좋다고 첨언도 해주십니다. 친구 목사님들이 돌아가고 우리 부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언덕 위의 하얀 집에서 땅을 밟아가며 자연과 함께 생활해 보는 것을 로망으로 꿈꾸어 보기도 하지만 어느 사모님의 말처럼 용기가 없고 도시의 문화와 편리함에 길들여졌기에 농촌생활은 항상 꿈과 바람 일 것이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요즈음 은퇴 소식을 듣고 회사 생활을 하는 둘째 아들이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주위의 은퇴하신 분들을 보면 3개월 정도는 자유로움에 즐거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할일이 없어서 무료한 시간 때문에 고민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3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과연 매일매일 즐겁고 행복한가? 하는 자문자답을 해 봅니다. 얼마 전에 후배 목사님 부부가 방문을 하고 가신 후 사모님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내용은 그 사모님 눈에 보이는 내 모습과 주변 정리가 되지 않는 상황을 보고 짠한 마음이 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항상 공식적인 모임에서 보아 왔던 모습이 아니고, 화장기 없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과 작업복, 그리고 남편의 바짝 마르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마음 여린 사모님의 눈에 짠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사모님에게 나는 사모님이 생각한 것만큼 나쁘지 않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니 편안하고 나름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사모님 눈에 비치는 것은 미완성 된 집과 어설프게 보이는 주변만이 보이겠지만 남편과 내 눈에는 완성된 모습의 언덕위에 하얀 집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무료하거나 따분한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느 날과 똑같은 아침이지만 더더욱 감사와 행복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제각기 풍기는 향기가 있듯이, 나무와 풀도 풍겨 내는 냄새가 서로 다른데 이것들을 구별하기 위해 눈을 감고 코를 벌름거리며 채소밭으로 가는 발걸음을 잠깐 멈추고 각기 다른 모습의 식물들의 냄새를 음미해봅니다. 요즘은 모종으로 심은 여러 가지 채소들이 잘 자라서 훌륭한 착한 밥상을 꾸미고 있습니다. 식사 때마다 텃밭에서 나는 신선한 채소를 먹으면서 우리는 이렇게 행복해 해도 되나 모르겠다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습니다. 개구리들의 합창으로 잠들지 못한 밤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난파된 배에서 구출되어 무인도에 있는 것처럼 외로움에 상실감을 느낄 때도 있지만 남편과 함께 매일매일 생활에서 부족하고 모자라도 감사하는 삶이 되기를 바라면서 우리들이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감사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뒷 베란다를 시공하기위해 각관과 C-형강을 구입하기위해 다니던 철강회사에 갔습니다. 물건을 구입하면서 그곳 사장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남편이 기분 좋은 환한 얼굴로 내게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곳 사장님이 손수 집을 건축하는 것을 보고 그 정도의 집을 짓는 것을 보니까 노하우가 있겠다고 하면서 주문 받은 창고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제 철강회사 사장이 일거리를 맡길만한 목수가 되었다며 즐거워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인정을 받은 남편이 집에 와서 하는 힘든 일에도 콧노래를 부르면서 목수로 인정받은 날이라며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 옆에는 가야산 골짜기에서 흐르는 개울이 있습니다.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고 가재가 가끔씩 보이기도 합니다. 굵은 빗줄기가 소강상태를 보이며 잠시 햇살이 비칠 때 어디선가 산비둘기 한 마리가 마당에 내려와 벌레를 찾는 모양입니다. 산비둘기를 보면서 장 콕토의 시를 읊어보기도 했습니다. 두 마리의 산비둘기의 사랑의 시를.... 마당에 조금 덜 마른 쑥으로 모깃불을 피워놓고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의 불협화음 속에서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곳을 쫓아 다녀 보며 동심으로 돌아가는 산골에서 이제 목사의 아내이자 목수 아내로서 남편이 만들어준 싱크대 앞에서 감사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616 no image |살며 생각하며| 두 남자의 눈물_김영숙 사모
편집부
2580 2013-07-23
두 남자의 눈물 < 김영숙 사모, 새하늘교회 >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돼” 얼마 전 필요한 책이 있어 교회에 들러 서재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데 남편이 우편물을 하나씩 펼쳐 보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편지를 펼쳐 보던 남편의 얼굴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무슨 편지이기에 저럴까 생각하고 있다가 눈가가 붉어진 그의 모습을 보고 덜컥 겁이 났습니다. ‘아니 무슨 편지이기에……. 혹시 누가 돌아가신 것인가?’ 그를 울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생일 카드였습니다. 미국 콜로라도에서 A 장로님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A 장로님은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서 목회할 때 같은 교회를 섬기던 분이셨습니다. 그 장로님으로 인해 시작된 갈등은 결국 우리가 교회를 사임하고 나오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 장로님이 이미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남편에게 생일카드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가족 외에는 잘 모르는 남편의 음력생일을 기억하시고 그 날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항공우편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정확하게 그 날 도착하지는 못했지만 그 장로님의 자상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분의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지난 일이고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 누가 그 문제로 말하는 사람도 없는 데 주소를 수소문하고 생일까지 기억해서 카드를 보내는 일은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그 분은 하셨습니다. 그 장로님은 그 카드를 눈물로 쓰면서 한편 기뻐하며 행복해 했을 것입니다. 남다른 생일 카드를 받고 눈가가 붉어질 것을, 그리고 행복해 할 목사의 얼굴을 이미 상상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오랜 세월이 지나 이미 빛바랜 앨범처럼 잊혀진 이야기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 아직 상처로 남아 있을지 모를 그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싶은 그 분의 마음이 전해져 왔습니다. 그 분은 또 이렇게 썼습니다. “목사님, 우리 온 교우들은 목사님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나이가 들어 철이 났는지 자꾸 목사님 생각이 나네요. 목사님, 언제 한 번 오실 수 없을는지요.” 두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고 계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았습니다. “얘들아, 잘 했다. 너희들은 다 형제간이야. 깨물면 안 아픈 손이 없듯이 난 너희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들이 아픈 마음으로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단다. 하늘나라에 오면 너희들은 영원히 같은 집에 살게 될 거야. 하루 종일 서로 얼굴을 보며 살게 될 걸! 그러니 세상에 사는 동안 용서하며 더욱 사랑하며 살아라.” 그런데 그 카드를 보고 가장 부끄러운 사람은 바로 나였습니다. 그 장로님과 갈등이 있을 때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한 마음이 앞섰으니까요. “여보! 교회가 분열되기 전에 조용히 이곳을 떠납시다. 우리가 떠나야 성도들이 두 편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고 주님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테니까요.” 말은 아주 신사적이고 그럴듯해보였는데 그것은 다분히 인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남편은 계속 기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더니 성도들의 마음을 잘 안돈시킨 후에 결국 사임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교회를 떠나오던 날 혼자 앉아 엉엉 소리 내어 울던 남편의 모습은 사역하는 동안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어려움을 주지 않고 조용히 사임하고 나와서 우리 만족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그 교회는 그 이후로 부흥이 되지 않은 것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그때 그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늘 가슴이 찡해지고 마음이 아리도록 그리워집니다. 주님!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습니다. 하나님이 값주고 사신 자녀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양이고 하나님의 교회인데 마치 저희의 양인 것처럼 착각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지만 다시 한 번 주신 사명 겸허히 순종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사드리는 것은 두 남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화해하고 용서하고 회복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물론 천국에 가서도 그 장로님과 기쁨의 악수를 나누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615 no image |짧은 글, 긴 여운|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_김영일 장로
편집부
2886 2013-07-09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 < 김영일 장로, 남서울교회 >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은 건물인 예배당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어” 하나님은 가난하고 통회한 심령이 건물 성전보다 훨씬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의 보좌이며 땅은 그분의 발등상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땅의 모든 문제들을 다스리시고 우주를 질서 있게 운행하십니다. 하나님은 태양보다도 더 밝고 별빛과 다이아몬드보다도 밝게 빛나는 보좌를 가지고 계시며 그토록 광대한 우주와 땅의 발등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어디에 무슨 집을 지을 수 있으며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의 거처가 될 수 있으며 어디가 하나님의 안식할 처소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우주보다 크고 광대하시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시며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서 갇힐 수 없으며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성전인 예배당에 제한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은 건물 성전인 예배당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스스로를 위하여 거할 집을 필요로 하신다면 우주보다 더 큰 하나님보다 더 큰 다른 집을 만드셨을 턴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우주보다 더 크시고 광대하시고 무한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인 성전에 갇히는 그런 제한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우주만물, 하늘과 땅을 가지고 계시며 사람이 만든 건물 성전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를 주목하시며 돌보십니다. 이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심령,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는 심령입니다. 세상의 힘을 다 빼고 그것은 무익하고 허무한 것이기에 자기가 주인 된 삶을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바꾸는 심령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사 66:1-2)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늘 기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를 받는 심령,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만족하고 감사하는 심령입니다.
Selected no image |살며 생각하며| 에밀리와 맺은 사랑이야기_김영숙 사모
편집부
2567 2013-06-11
에밀리와 맺은 사랑이야기 < 김영숙 사모, 일산새하늘교회 > “사연 있는 사람과 같은 감정을 자신에게서 찾을 때 함께 위로 받게 돼”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에 있는 유치원 종일반(Daycare)에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그 곳은 대부분 맞벌이하는 백인 부부들이 1-6살까지의 자녀들을 맡기는 곳으로 아이들이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지내는 곳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아이들이 오기 때문에 낮 12시가 되면 모두 낮잠 자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 시간이 되면 아이들이 “나 먼저 등을 문질러 주세요”라고 조르기 때문에 선생님들의 손길이 바빠집니다. 그런데 그 중에 ‘에밀리’(Emily)라는 이름을 가진 4살 여자 아이는 낮잠 자는 시간이 되면 선생님도 부르지 않고 소리 없이 울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밀리! 선생님이 등을 문질러 줄까?”하면서 조용히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No!"라고 짧게 대답한 에밀리는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을 걸자 에밀리는 나를 쳐다보며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엄마 보고 싶어!(I miss mommy!), 엄마 보고 싶어” 하며 엉엉 우는 것이었습니다. 에밀리의 눈물을 보자 갑자기 나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며 목이 메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엄마 보고 싶어!(I miss mommy too!).” 사실 나도 한국에 계신 나이 드신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아들 여섯에 딸 하나 두신 어머니는 나를 만나면 하실 말씀이 너무 많았는데 그 많은 어머니의 이야기는 누가 다 들어줄꼬 생각하며 고국에 계시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운 마음을 가슴속에 꽁꽁 묶어두고 지내고 있던 터였지요. 그런데 한 번 눈물이 나오기 시작하자 타국 생활의 서러움까지 몰려와서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버렸습니다. 내가 공들여 말을 했는데 못 알아듣고 고개를 갸우뚱 할 때마다 자존심 상했던 일, 음식점 운영하는 학부형이 교사들을 위해 보낸 음식을 언제 먹어야 하는지 몰라 뒤늦게 갔다가 빈 접시만 바라보고 온 일, 자기들끼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 때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언제 웃어야 할지 몰라 일그러진 미소로 서있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가면서 외롭고 서러운 생각에 흐르는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에밀리는 내가 눈물 흘리는 것을 의아한 눈으로 잠깐 쳐다보더니 곧 잠이 들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난 낮잠 자는 시간이 되면 에밀리 옆으로 가서 그 아이가 요청하지 않아도 등을 긁어주고 만져 주면서 속삭였습니다. “에밀리! 난 너를 사랑한단다. 아주 많이. 그리고 나도 나의 엄마가 많이 보고 싶단다. 너처럼.” 때로는 영어로 말하고 때로는 한국말로 그 아이가 잠들 때까지 그 말을 반복했습니다. 에밀리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잠들곤 했는데 차츰 우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얼마 후에는 아예 울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밀리는 낮잠 자는 시간이 되면 나에게 눈으로 자기에게 오라고 사인을 보냈고 나 역시 행여나 다른 선생님이 그 아이 곁으로 갈 까봐 재빨리 에밀리 옆으로 가곤 했지요. 수업시간에도 에밀리는 늘 내 옆에 앉아 있어서 우리는 서로 사랑의 눈빛을 나누곤 했습니다. 어느 날 원장실에서 나를 급히 불러 가 보았더니 금발머리와 파란 눈을 가진 멋쟁이 한 분이 아기를 안은 채 장미꽃 화분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에밀리 엄마에요. 에밀리 동생이 젖먹이 아기여서 그동안 내가 유치원에 찾아오지 못했어요. 그런데 에밀리가 ‘Miss 영’ 이야기를 많이 해서 오늘은 꼭 만나고 싶어 찾아왔어요. 내 딸 에밀리를 많이 사랑해 주어 감사합니다. 에밀리가 그동안 종일반에 오는 것을 싫어했는데 지금은 아침부터 빨리 가려고 서두른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 때문이에요.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장미꽃 화분을 나에게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런 그분의 방문에 놀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지요. “에밀리가 있어서 나도 행복했습니다. 에밀리는 나의 좋은 친구이고 나의 위로자 였습니다. 에밀리가 있어서 나도 일터에 빨리 오고 싶었으니 오히려 내가 고맙습니다.” 유치원 원장이 뒤에서 우리를 보고 흐뭇한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동안 쳐져 있던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지금 내 곁에 있는 에밀리는 누구입니까? 그들에게 눈물 한 방울도 내 놓을 수 없는 메마른 내 심령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내가 작은 사랑 베풀 때 내게 더 큰 사랑이 돌아온다는 그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는 지금 섬기고 있는 사역지에서 얼마든지 제2의 에밀리같은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 자신도 바로 그 에밀리와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습니다.
613 no image |치악골아침사색| 인생의 여정을 함께 걸으며..._변세권 목사
편집부
2314 2013-06-11
인생의 여정을 함께 걸으며... < 변세권 목사 · 온유한교회 > “우리 교단은 무능한 것이 가장 큰 강점” 지난 총회 교직자 수양회에서 강사들로부터 들은 이런저런 말씀으로 몇 주를 잘 버티고 있다. 그렇게라도 만나니까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더욱 용기가 났다. 지금까지 우리 교단은 우리의 것을 지키기에만 급급했다. 이제는 세상을 비판만 하지 말고 부드러운 대안을 제시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동안 우리 교단만이 안고가야 하는 독특한 사명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정체성과 함께 세상을 향한 폭이 넓은 행보가 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자기 경험, 자기 확신, 자신의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습관에 젖어 있었다. 예수를 믿고 들어온 감격과 확신의 입구만 있었지 그 방에 들어가서 다양한 용도의 기능이 있는 방안에서 누리고 쉬고 감사해야 하는 다양함과 풍성함은 몰랐던 것이다. 교회성장만이 오직 우리의 목표일 뿐 신학으로 이 오묘하신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하나님만이 진리와 의를 만들어내는 것을 증거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진심을 예의로 갖추지 않으면 반발하게 되어 있다. 우리 한국교회가 분명한 것은 좋은데 사회적 현실과 과정을 실력으로 담아내는 데는 부족하다. 그래서 율법주의와 공로주의 폐단이 아주 많다. 율법주의는 우리의 신자 된 현실을 이해하거나 점검하는데 있어서 늘 우리를 괴롭히는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우리의 기대만큼 우리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달라지고 싶고 신자로서 멋있어지고 싶은 소원이 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도 않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괴로움 속에서 자신이 안심하기 위해 결국은 공로주의를 택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상대방과 배역으로 놓여있는 인생의 스토리가 없고 교회만 다니면 안심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만들어 달라고만 기도한다. 그래서 다시는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게 이번 일 만큼은 꼭 처리해 달라는 식의 소원이 앞선다. 우리는 불신자에게 언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지 모른다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누는 것에만 강조점을 두고 우선 믿으라고 강요할 줄 밖에 몰랐다. 그러나 우리도 안 믿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그 사람이 언제 믿을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신앙이 없는데도 그 사람이 무엇을 잘하면 시기만 한다. 예수 믿고 훌륭해야 한다고 신앙의 잣대로만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문제인식이 잘되지 않는다. 박영선 목사의 지적처럼 “어떤 바보가 십자가에 달린 신을 믿겠는가? 어느 신이 자기를 믿는 사람을 위해 빌겠는가? 전지전능해야 믿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안 믿는 것이 상식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은혜 아래 있는 것이다. 은혜는 자기가 베푸는 게 아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러나 한 인간의 생애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바로가 왜 계속 악당역할을 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구약과 신약을 통해 계시와 역사를 써오심을 믿고 그분의 일하심을 볼 줄 아는 영적조망과 안목이 필요하다. 따라서 지금 억울하고 힘든 현실이 십자가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신자의 삶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로 반전되며 극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르면 인생과 신자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그 날이 그 날, 같은 것이다. 훌륭한 사람이 제 때 성공하는 것 보았는가? 이방인에게도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자원해서 밥 사고 생색내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믿고 사는 게 무엇인지 이제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하나님만이 하신다. 잘 사는 게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거기에는 문화와 가치, 안목의 공허감과 욕구와 갈증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바로 기독교 신앙의 충분한 것을 알려줘야 한다. 세상정치는 정의로 사회를 구원하자고 하지만 우리는 예수를 닮는 게 정치이다. 정의야 인정하지만 우리는 섬기는 것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게 된다. 그래서 둘을 열어서 붙이는 실력이 필요하다. 사람은 넓이를 알아야 그때 자기의 자리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실패하고 잘못해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바보 같았던 것, 무능했던 것, 모자랐던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한심하고 답답한데 도망갈 수 없는 그 현실을 걷는 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유가 없는 하루하루를 통해 우리의 인생을 채우고 다스리고 완성해 가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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