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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612 no image |청진기로 바라보는 세상 <17>| 광야에 있는 싯딤나무(조각목)_전정식 장로
편집부
3639 2013-06-11
광야에 있는 싯딤나무(조각목) < 전정식 장로, 남포교회 > “법궤의 재료인 싯딤나무는 광야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단단한 나무” 신록이 싱그러운 5월 초순에 벼르고 벼르던 출애굽 코스의 이스라엘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초행길이었지만 성경에서 익숙하게 듣던 이름들 덕분으로 마치 한 번쯤 와 봤던 곳을 다시 찾는 느낌이었습니다. 가이드를 맡은 모 목사의 성경 본문에 따른 자세한 소개와 묵상은 일정 내내 우리들을 은혜로운 시간으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출애굽 코스답게 첫 이틀 동안 성경에 등장하는 광야들을 답사했습니다. 시원한 냉방차 속에서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밑의 붉은 산들과 광야는 보기에 아름답기는 하지만 잠깐 잠깐 내려만 봐도 숨 막히고 뜨겁습니다. 썬크림을 바르고 모자와 썬그라스를 착용하고 또 수시로 그늘 밑에 앉아 쉬며 1달러하는 생수를 끊임없이 마셔대는 저는 이곳에서 살라고 하면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지나다 보면 연평균 강우량이 50mm도 안 되는 불모지인데도 불구하고 드문드문 나무들이 서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5m 정도도 못 미치는 나지막한 높이를 가진 이 나무들은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하여 볼품은 별로이지만 그래도 나무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그늘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주거지역 가까이 있는 광야에서는 목동이나 양이나 염소가 그 나무 그늘에서 쉬는 모습도 보입니다. 가이드는 이 나무가 바로 법궤와 성막에 사용된 싯딤나무(조각목)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싯딤나무는 아카시아와 같이 가시나무 중의 하나인데, 광야에 자생하는 몇 안 되는 나무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사해 지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라고 합니다. 싯딤나무는 백향목같이 훌륭한 목재감은 아니지만 그래도 재목은 견고하고 벌레가 갉아먹지 못하는 특성이 있어 내구성이 강하다고 하는데, 광야 같은 곳에 자생할 수 있는 장점이 되는 특성으로 작은 나무일지라도 그 뿌리는 70-80m 이상 깊이 내려가며 때로는 100m도 훨씬 넘게 뿌리를 내린다고 합니다. 성경 속에서 읽었던 싯딤나무는 귀한 곳에 쓰이고 또 금으로 입혀지는 영광을 얻기 때문에 훌륭한 목재감일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졌던 차에 싯딤나무를 실제로 보고는 사실 조금 실망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귀한 법궤와 성막에 싯딤나무을 사용하라고 지정하신 것은 이 나무가 가진 특성이 적절하기도 했겠지만 광야에서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상하신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자들은 믿음의 삶을 광야에 비유합니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특히 종교다원주의가 팽배하며 반기독교 정서가 농후한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척박한 현실 속에서 신자가 바른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적지 않은 이단들이 버젓하게 기독교와 교회라는 이름을 내세워 신자들을 뜨겁게 유혹하고 있으며, 그동안 바른 말씀과 바른 교회의 모습으로 신자들에게 큰 힘이 되어 온 복음진영이 일부 사람들의 경건치 못한 행위로 인하여 사회로부터 큰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처받은 신자들이 교회를 차갑게 떠나고 있어 어쩌면 신자들에게조차도 기독교는 마치 여러 종교들 중 하나인 것처럼 비춰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이렇게 된 현실에서 우리 자녀들을 위한 기도가 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지라도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자녀들이 바른 생명의 말씀에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됩니다. 아무리 광야 같은 척박한 세상일지라도 우리 모두 싯딤나무처럼 이런 사회 속에서도 바른 신자로 굳건히 설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내 마음은 생명의 말씀을 향한 갈급한 심령이 됩니다.
611 no image |가야산 기슭에서| 자유의 날개를 달다_김영자 사모
편집부
3091 2013-05-28
자유의 날개를 달다 < 김영자 사모, 전 채석포교회 > “가난했지만 은퇴 후에 약속 지키게 되었다며 하얀 집 지어준 남편” 아카시아 꽃이 산등성이를 따라 피어나는 5월 입니다. 며칠간 때 이른 여름 날씨로 앞뜰의 나뭇잎들이 축 늘어졌으나 이른 새벽부터 비가 오면서 생기를 띠고 푸르름은 더 청초한 빛을 자랑합니다. 남편이 목회를 은퇴한 후 새로 이사 간 곳은 마을에서 꽤나 떨어진 산골인데 눈앞에 펼쳐지는 신록의 그림은 날마다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새벽이면 산 아래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새들의 지저귐, 신선한 맑은 공기,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여유로움 등 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누리게 되었으니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후덥지근한 공기로 비가 올 것 같다면서 밖에서 비설거지를 했지만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집 안 한쪽 어디선가 “똑, 똑”하고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남편은 높은 사다리를 집안으로 들여와서 지붕 밑을 점검하며 양푼 몇 개를 달라고 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은퇴를 준비하면서 작년부터 가야산 기슭에 둥지를 틀 것을 결정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농촌의 현실을 보면서 남편과 같이 늙어 가는 성도들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한 해 한 해 성도들의 나이 들어 나약해지는 모습과 그들의 생활에 대한 염려, 그리고 그들 속에 있는 목사와 사모이기 전에 교회의 장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현듯 우리들이 사명감 대신 다른 이유 때문에 교회를 지키고 있는 삯군 목사는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많은 고민을 하였고, 좀 더 일찍 은퇴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 재정도 어려운 농촌교회에서 은퇴목사를 생각할 수 있는 경제력은 전혀 없었습니다. 남편은 그 손에 망치 하나 다루어 보지 못했으나 13년 동안 어려운 교회에 시무하고 교회와 사택을 손수 건축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운 건축 기술이 목회 은퇴금이라 생각하며 그 모든 것들을 상쇄시켰습니다. 젊은 시절 캠핑을 좋아했던 우리 부부는 1차 지붕과 시멘트 바닥만 시공된 곳으로 이삿짐을 옮기면서 은퇴 후의 제2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곳에 짐을 쌓아 놓았는데, 박스에서 짐을 풀 수도 없었습니다. 화장실과 물이 있는 고급 캠핑장이라 생각하면서 날마다 한 곳 한 곳을 시공하면서 생활한 지도 한 달이 되었습니다. 방 하나가 완성되면 그곳으로 박스를 옮기면서도 그 동안 누려보지 못했던 참 행복한 시간들과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거운 감사기도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커튼도 설치되지 않은 방에서 밤에는 별빛과 달빛의 환함으로 잠을 설치기도 했고 일이 힘들어 그냥 종이박스위에 털썩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땀을 흘리며 날마다 조금씩 집 형태를 갖추어가는 모습을 보며 성취감에 기뻤습니다. 목수와 일꾼에게 일을 맡기지 않고 남편 혼자서 손수 모든 일을 감당하면서도 몸은 힘들지만 진정한 휴식의 단 맛을 맛보며 한 곳 한 곳 완성시켜가고 있습니다. 이곳은 인가와 조금 떨어진 곳이라 전화와 인터넷이 되지 않는 곳입니다. 정리되지 않는 다랑이 논과 제멋대로 자란 풀들이 오솔길을 덮지만 새벽에 일어나 창밖을 보면 호수에서 올라온 물안개와 사방의 산들이 내 품는 공기의 산뜻함에 머리가 맑아집니다. 이웃들의 눈치가 보여 크게 틀어 보지 못했던 작은 진공관 앰프의 볼륨을 높이면서 클래식을 듣기도 하고, 이사를 하면서 이리저리 굴린 낡은 피아노에서는 조율이 되지 않은 소리지만 그 서툰 피아노 소리를 듣는 남편에게는 난 피아니스트가 되기도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한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아내의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 산 속에 하얀 집을 지어 놓고 그곳에서 음악을 듣고 글과 그림을 그리는 아내를 꿈꾸어 본다고 합니다. 결혼 약속할 때 가진 것이 몸 밖에 없던 가난한 청년이 그 약속을 은퇴 후에 지키게 되었다며 죽을 만큼 힘들고 피곤하지만 아내를 위한 것이기에 망치를 들고 걸어가는 모습에서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 공부 때문에 외국에 나가 있는 며느리로부터 시아버지의 은퇴 소식을 듣고 전화가 왔습니다. 반가움에 울컥하며 한 동안 말문이 막혔는데 며느리도 나와 같이 울먹거리며 “어머니, 인간은 모두 외로운 것이에요”라는 위로의 전화 한 마디에 또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기러기 가족이 되어 떨어져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한참 어린 며느리도 많이 외롭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큰 아들이 남편의 손을 보며 아버지 손이 노동자의 손처럼 너무나 거칠다고 마음 아파하면서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친구 목사님부부가 보고 싶다면서 이곳에 왔습니다. 이삼십 분이면 모든 가까운 읍내로 나갈 수 있지만 이곳은 산 속이라 생필품이 필요할 것 같다면서 마트에서 여러 가지물건을 사왔습니다. 심한 노동으로 살이 많이 빠진 남편을 보며 마음 아파하면서도 완성되어 가는 지붕 높은 하얀 집을 보며 감탄하면서 ‘자네가 자랑스럽네’ 하면서 남편에게 힘을 주기도 했습니다. 여러 가지 씨앗을 사다 심은 곳에서는 다양한 먹거리가 식탁에 올라와 우리들을 기쁘게 하였고 그 먹거리들을 정으로 담아 보내었습니다. 친구 내외가 떠났으니 마트 대신 5일장을 기억하며 예쁜 옷 대신 몸뻬 바지와 장화, 그리고 낫을 사기위해 홍성 장에 나가 보려고 합니다.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과 가야산 기슭에 제2의 삶을 살기위해 둥지를 틀어 희망의 날개를 달고 남편이 손 수 지어준 집에서 남편이 좋아 하는 친구들에게 산나물 반찬으로 식탁을 준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로 참 행복을 누리고 싶습니다. * 채석포에서 온 편지는 앞으로 가야산 기슭에서로 연재됩니다.
610 no image |<청진기로 바라보는 세상 16>| 시험보기 하루 전 (19)
편집부
4599 2013-05-14
시험보기 하루 전 < 전정식 장로, 남포교회> “교회 생활의 목표는 다 같이 시험에 통과하는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우리나라는 자타가 인정하는 IT 강국입니다. 그래서 저도 인터넷은 물론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실시간으로 정보를 입수하곤 합니다. 그리고 가끔 가까운 사람들이 보내주는 유튜브 동영상도 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 인터넷 뉴스에서 “시험 5분 전 우리 모습”이라는 재미있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한 살 정도 된 어린아이가 쉴 새 없이 눈을 굴리며 책을 읽어가는 모양을 보니 우습기도 했지만 어린나이부터 교육현장에서 혹사당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연상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보 홍수시대의 모든 분야가 그러하기는 하지만 특히 의학교육에서는 의사가 되기까지, 그리고 의사가 된 이후에도 수많은 시험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교육내용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은 혼자 해내기 힘들어 몇몇이 모여 그룹을 만들어 함께 공부하고 시험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룹에서는 서로 약한 점을 돕기도 하고 또 많은 과제를 나누어 분담하여 준비하곤 합니다.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시험인 경우는 미리부터 넉넉히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준비를 합니다. 이렇게 모여서 공부하는 것은 모두가 다 같이 시험을 통과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래서 경쟁 관계가 아니고 서로 돕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준비기간에는 우수한 사람이 동료의 부족한 점을 가르치며 도와주는데 시간을 많이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험이 코앞에 다가오면 동료의 모자란 점을 도울 여유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준비해야할 양이 많아 자기를 돌아 볼 시간도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 전 날이 되면 서로 대화도 못하고 각자 정리하느라 바쁩니다. 그래도 시험이 끝나고 그룹의 멤버가 모두 시험을 잘 통과하고 거기다 좋은 점수라도 받게 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교회를 이루는 신자들의 모임이 마치 통과해야 할 시험을 위해 모인 스터디 그룹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일생이라는 짧지 않은 준비 기간을 가진 신자의 길은 저에게는 의사의 길보다 훨씬 길고 깊고 또 어려운 과제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떠나지 않은 교회생활에서 좋은 지도자를 많이 만났고 또 좋은 성도들을 만나 교회생활을 하며 한 단계 한 단계를 지나 성도들과 함께 곱게 자라 지금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도 저에게 부족한 것이 있고 또 더 성숙해 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의 교회생활에서도 시험 준비 기간처럼 그룹 멤버와 함께 준비하며 나의 약점도 지적받아 고치고 또 동료의 부족한 점도 도와주는 그런 역할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교회의 어른인 장로가 된 이후에는 그런 마음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질 때면 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마음 속 깊이 그 근간에는 남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짙어 지고 남에게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옅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룹 스터디의 목표가 다 같이 시험에 통과하는데 있는 것을 잊은 것이 아닌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부끄러운 마음도 듭니다. 하여 대학에서 정년을 넘기고 또 손자가 커가는 지금의 나이 그리고 교회 생활에서 후배들의 좋은 활약을 보면서 지금 저는 여유 있는 시험 준비 기간이 아니고 시험 보기 하루 전날이라고 여기며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해 봅니다.
609 no image |청진기로 바라보는 세상 <15>| “훈수는 하지 마세요”_전정식 장로 (23)
편집부
2754 2013-04-16
“훈수는 하지 마세요” < 전정식 장로, 남포교회 > “교회가 부딪치는 안팎의 고난은 교회를 연단하는 계기가 되기도 해” 세간에서 “범생이”로 통하는 사람들 중 하나인 저는 꿈 많은 사춘기나 대학시절에도 그럴듯한 에피소드가 없습니다. 그 시절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학교에 다니기도 빠듯하기도 했지만 의대공부 따라잡기에 바빠서 옆을 쳐다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 기억은 교회, 학교 그리고 유일한 취미였던 테니스에 대한 기억이 다입니다. 덕분에 높은 테니스 수준을 유지할 수 있어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저와 같이 치는 것을 좋아하고 또 간혹 한수 가르쳐주면 그렇게 고마워하곤 했습니다. 장년이 되어 안정된 직장과 교회생활을 하게 되었을 무렵, 목사님들이 주축이 된 테니스 동호회에서 운동을 할 때였습니다. 그 당시는 사회에서 테니스가 인기였던 시절이라 많은 목사님들이 테니스를 좋아하며 또 열심을 내는 분들도 많았고 우리 동호회에도 새로 시작하고 열성적인 한 젊은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저는 목사님들과 운동할 때는 운동경륜도 쌓인 시기로 이기는 테니스가 아니라 즐기는 테니스를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새로 시작하는 목사님을 위한답시고 한 수 가르쳐주는 마음으로 훈수를 하곤 했나봅니다. 어느 날 저를 잘 모르는 그 젊은 목사님과 같은 편을 하고 게임에 진 다음에 분석해 주는 저에게 한 마디 하셨습니다. “집사님은 위력적인 볼도 못 치면서 자기가 고수인줄 아시나 봐요!” 그 순간 아차 쥐구멍이 어딘지 찾아보고 싶을 만큼 참으로 무안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취미로 운동을 하면서도 그 종목을 더 잘하고 싶어 노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냥 운동하는 자체로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더 잘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만일 누가 평을 하거나 훈수 같은 말을 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큰 실례가 되며 자존심을 크게 다치게도 합니다. 그런데 교회생활에서도 그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기로 작정한 이후에는 믿음을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성화의 과정을 차분차분 걸어가며 좋은 목회자의 인도에 따라 믿음의 선배들의 조언에도 귀 기울이고 성도들과 부대끼며 열심히 믿음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교회에 다니는 것을 격조 높은 문화 활동이나 고상한 취미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기가 높은 도덕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는 종교인이라고 생각하며 믿음의 성장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배에서 수준이 높은 성경해석이나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는 설교에는 만족을 얻지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 선포일 경우는 마음이 덤덤해지며 설교자가 남에게 훈수할 만큼 제대로 살고 있는지 따져보는 마음을 갖게 마련입니다. 사회 속에 존재하는 성도들과 교회에 대하여 전신갑주, 흉배, 검 등을 표현하며 완전무장하고 깨어 있을 것을 부탁하는 바울 사도의 말씀(엡 6:11-18)이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땅을 주시며 그곳에서 복 속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주의 명령을 마음과 뜻에서만 아니라 손목과 미간 심지어 문설주와 바깥문에 말씀을 기록하여 두고 생활 속에서 철저하게 지켜나가야 한다고 명령하시는 하나님 말씀(신 11:18-20)을 보면 믿음생활은 전쟁행위처럼 느껴집니다. 그만큼 우리가 조금만 방심하면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차이가 없어지고 교회가 사회의 친목단체나 문화 활동 단체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교회는 안팎으로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련은 오히려 우리가 잘못된 곳에서 돌아서고 또 교회가 바로 서는 좋은 연단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608 no image |들꽃향기처럼| 어머님 전상서_윤순열 사모 (22)
편집부
3150 2013-04-16
어머님 전상서 < 윤순열 사모, 서문교회 > “지금은 우리 모두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깨어 기도할 때” 따사로운 봄날 용산 전쟁기념관 안에 있는 지인의 딸 결혼식에 갔다가 너무 일찍 도착한 덕분에 기념관을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기념관 안에는 견학 온 학생들로 왁자지껄 하였습니다. 기념관 입구에는 낯선 이국땅에서 목숨 바쳐 한국을 지켜준 21개국 나라들과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져있어 내 마음을 숙연케 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중에는 필리핀과 에디오피아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쟁으로 초토화 되었을 때 한국을 도와준 국가가 놀랍게도 지금은 극빈 국으로 전락한 에디오피아도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기념관 안에는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모형 무기 영상물 등으로 전쟁의 참상을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영상으로 제작된 고지탈환 상황은 가슴을 졸이게 하였습니다. 1950년 3개월 만에 초토화된 서울의 참상은 너무나 처참하였습니다. 코를 틀어막고 남편의 시신을 찾고 있는 미망인들, 폐허가 된 집터위에서 울부짖는 어린아이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상 이었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군 복무중인 병장이 된 아들이 있습니다. 꽃다운 청춘에 쓰러진 군인들이 아들과 오버랩 되면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쓰러지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 왔습니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느낌입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는 잊혀져가는 천안함 사건이라는 제목 하에 아들의 묘비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에 3년 전 아들을 잃고 오열하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지금 우리는 적이 지척에서 위협하는데도 너무 태평합니다. 한국전쟁이후 60년 만에 놀랍게 발전된 한국의 문명은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켜 놓은 듯 합니다 오히려 외국에서는 우리나라가 불안해서 걱정들을 하는데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니 뭔가 거꾸로 된 것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관람실 중간 지점에 이르러서 너무 가슴 아린 전선의 편지 한편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머님 전상서라는 서두로 시작 된 편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두 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놓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제 귀속은 무서운 광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입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적이 덤벼 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디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엎디어 이글을 씁니다. 괴뢰군은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저희들 앞에 도사리고 있는 괴뢰군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저희들은 겨우 71명뿐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이!’ 하고 부르며 어머니 품에 털썩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제 손으로 빨아 입었습니다. 비눗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한 가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제가 빨아 입은 그다지 청결하지 못한 내복의 의미를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저는 그 내복을 갈아입으면서 왜 수의를 문득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님!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은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 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을 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왜 제가 죽습니까? 제가 아니고 제 좌우에 엎디어 있는 학우가 제 대신 죽고 저만 살아가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저의 어린 학도들을 불쌍히 여길 실 것입니다. 어머님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웬일인지 문득 상추쌈을 게걸스럽게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옹달샘의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벌컥 벌컥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어머님! 놈들이 다시 다가 오는 것 같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뿔싸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테니까요. 그럼 이따가 또..... 1950년 8월 10일 아들 이우근 이글을 쓴 이우근 학도병은 다음날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잠시 휴전 중에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깨어 기도해야 할 때가 지금 이때인 것 같습니다.
607 no image |치악골아침사색| 거룩한 성화의 수레바퀴 밑에서_변세권 목사 (28)
편집부
3119 2013-04-16
거룩한 성화의 수레바퀴 밑에서 < 변세권 목사 · 온유한교회 > “성도들의 삶은 자기 의를 뿌리 뽑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어” 교회 앞 화단에 벌써 개나리가 피고 가끔 보는 들고양이가 그 밑에서 평화로운 잠을 청하고 있다. 그 녀석이 깰까봐 얼른 피해주었다. 그래도 우리 교회 마당이 좋은가보다. 이렇게 들녘에는 봄이 왔건만 세상의 여러 정황은 아직도 겨울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가 사역을 할 때마다 구원의 감격과 주님을 사랑하는 진심을 기울인 헌신에도 불구하고 신앙현실은 좀처럼 만족스런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 같다. 거룩과 성결을 원하나 승리보다 실패가 더 많고, 헌신과 충성을 고백하지만 하나님은 관심이 없으신 듯 만족할만한 응답을 주시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구원의 감격 이후에 성장이 빠르고 믿음도 쑥쑥 크고 도덕적으로 훌륭할 뿐만 아니라 한 번 고백한 것으로 신앙의 흔들림이 없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참 부러웠다. 난 왜 저런 확신이 없을까? 그러나 백 번을 양보하고 이해하려고 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그런 길도 있으면 이런 길도 있다’는 목회적 안목으로 교회와 인생을 바라보게 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구원파적 구원관이 많았다. 그러한 신앙관은 점진적 성화에 따르는 시행착오나 실수들을 용납하지 않고 구원자체의 실패로 정죄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이런 논리는 보편적이지가 않다. 그들은 회심하기만 하면 마치 구원이 완성되는 것처럼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몇 달 가지 못한다. 도덕적, 신앙적으로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일예배시간도 회심기도를 해야 예배를 드린 것 같고 평생 죽을죄만 지었다고 매주 고백한다. 그것이 좋은 의미도 있지만 어느덧 습관이 되고 체념이 되었지 그렇게 회개기도를 했는데도 사람이 더 나아지지를 않는다. 이런 식의 전통은 사실 쉬워 보이는데 그대로 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다보니 신앙인들이 이중적이 되고 말았다. 명분과 현실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가 간증을 해도 죄 지은 이야기가 전부다. 회개 후에 사람이 어떻게 달라졌다는 신앙고백은 별로 없다. 믿은 다음에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긴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진심보다는 은혜가 앞서야 한다는 고백을 해야 한다. 다윗왕권의 영원함이 그의 실력이 아니라 메시야의 영원한 영원성에 근거했듯이 우리는 진심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선됨을 확인해야 한다. 역사는 우리가 시작이 아니고 누구의 결과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서구열강들이 앞서가서 식민지를 삼은 것 같이 우리도 이제 지지 말고 빨리 가서 부와 권력을 누리자는 식의 사고가 교회와 사회에 일반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그런 생각 속에는 잘한다, 못한다, 옳았다, 틀렸다만 있지 풍성함과 다양함이 없게 된다. 벽돌만 쌓았지 공간이 없는 것이다. 믿음만 좋으면 된다는 것이고 사람이 여유나 숨 쉴 틈이 없다. 철학과 문학과 역사와 문화가 없다. 인생과 시가 없다. 삶에 멋과 향기가 없다. 아파 죽겠다는 사람 앞에 ‘그건 말이야!’ 하고 설명하고 자꾸 강요만 한다. 이상하게 우리는 누구에게 배웠는지 말을 다 얄밉게 한다. 말을 너무 똑 소리 나게 한다. 칼빈주의! 합신이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속 깊은 이야기, 속상한 이야기 좀 하려고 하면 “됐거든!”이다. 그리고는 교단 행사나 중요하게 있어야할 자리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공부! 오직 믿음! 이다. 그런데 여기가 수상하다. 제대로 배웠으면 이럴 수가 없는 건데 왜 그럴까? 우리들이 물량주의 노예가 된 것이 문제이다. 물론 돈이 다가 아닌 줄도 안다. 요즘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일 시킬까봐 ‘아멘’도 잘 하지 않는다. 공통적인 분위기다. 헌금도 안하고 봉사도 안한다. 주말이 되면 놀러가기 바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전부 국가보고만 책임지라고 한다. 언제나 우리는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하고 가진 자를 탓 하면 안 된다. 무엇보다 분별과 책임, 절제가 중요하다. 이것은 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원망과 불평하는 습관만 갖는다. 언제나 성공 다음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 크면 전부가 아니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어야 한다. 누가 틀리고 다르면 ‘우린 그런 거 안 해!’만 있다. 공동체 안에서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욕을 먹는데서 도망가려고만 한다. 같이 욕을 먹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같은 편이기 때문이다. 설령 누가 잘못하면 철없는 기간인줄 알고 들어줘야 한다. 우리 각자가 어느 정도 일을 하고 인생을 살았으면 모든 것을 놓아주고 그러면서 짐도 져주고 때로는 욕도 함께 먹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그동안 예수님을 믿는다는 차별화만 시도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누가 더 잘 참고, 누가 더 양보하느냐의 싸움을 하지 못했다. 믿음을 갖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처럼 맡겼더니 죽을 것만 같은 것이어야 한다. 교인들의 사회생활을 보면 아슬아슬한 환경이 많다. 그런 현장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더라’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심하게만 해달라고 기도한다. 오해받지 않게 해달라고만 한다. 자책할 것이 없게만 해달라고 한다. 이 세상에는 안전한 것이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매일 새롭게 하는 것이 개혁주의인 것이다. 신학과 교리, 제도, 각오만 있다고 안전한 것이 아니다. 개혁주의에도 죄는 들어올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진실로 응답하시며, 신앙의 승리를 현실로 허락하신다. 그러나 이 승리는 대부분 성도들의 기대와 달리 사건적이고 결과적이기 보다 내면적이고 원리적이다. 즉 자기 의를 뿌리 뽑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고 박영선 목사는 지적했다. 오늘도 하나님이 은혜로 붙잡고 계셔서 거룩한 성화의 수레바퀴 밑에서 오히려 도망가지 못하며 사는 인생이 된 것에 감사해야 한다. 나라는 존재를 내 의지, 내 소원에 맡기지 말고 내어놓으라는 말씀 일 것이다. 어느 부분도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은 없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정황은 모두 도움이 되어 있을 것이다. ‘주님 뜻대로 저를 쓰십시오!’가 나올 때 까지 우리를 꺾으신다는 것에 기억하면서 우리 안에서 거룩한 비명이 나올지라도 묵묵히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시려는 것이 우리가 소원하는 것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606 no image |채석포에서 온 편지| 사람의 두 얼굴들..._김영자 사모 (16)
편집부
3045 2013-03-19
사람의 두 얼굴들... < 김영자 사모, 채석포교회 > “하나님이 계시므로 진실은 언제나 밝혀져” 며칠 전에 도배지를 구입하기 위해 서울에 갈일이 있었습니다. 시장이나 마트에서처럼 내가 필요한 물건을 곧 바로 구입할 줄 알았는데 장판지와 벽지의 카탈로그를 보여주고 다음날에야 구입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순간 난감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보다 다양한 제품과 좀 더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줄 알고 방산시장까지 갔는데 집으로 그냥 돌아가자니 순간 기름 값이 아깝고 억울해서 남편과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집이 아니면 잠을 설치는 나 때문에 집이 아닌 곳에서 잠을 자는 것을 특별한 일이라 생각하는 남편에게 오늘은 서울 아들집에서 자고 가자고 했더니 남편은 생뚱 맞는 소리를 한다고 하면서 어디로 전화를 했습니다. 남편의 친구 목사님이었습니다. 남편은 다짜고짜로 친구에게 오늘 밤에 밥도 사주고 잠 좀 재워 달라고 했습니다. 왜? 라고 묻지도 않고 흔쾌히 대답하는 것을 듣고서 잠시 머릿속에 생각했던 아들의 얼굴을 지우면서 아들보다 친구를 찾는 남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로 머리가 아프고 힘든 것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많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순간 엿 볼 수 있었고 이번만큼은 집이 아닌 곳에서 친구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나름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친구 목사님과 사모님의 건강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지만 편안하게 맞이해주는 따뜻한 마음을 보면서 그 동안 답답함으로 막혀있던 가슴을 펼 수 있었습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자고나면 새로운 꽃으로 매일매일 우리에게 선물을 주는 봄이 다가 오지만 내 마음은 아직 얼음덩어리가 풀리지 않고 더욱 추위를 느끼고 있는 한 겨울이기 때문입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이제 사람들을 믿을 수 없고 대인기피증으로 사람 만나기가 싫어졌습니다.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신뢰가 깨어지는 배신감을 느끼며 신의를 져 버리는 일들로 또 마음의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친구 집에서 편안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는 자동차에서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노랫말을 들어 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감동적인 글을 읽었습니다. 대법관이었던 김능환 씨의 일상생활을 적은 글이었습니다. “대법관 김능환”이 아니라 “편의점 사장 남편 김능환”이라는 제목의 내용이었습니다. 편의점을 경영하는 아내의 일터에서 법복이 아닌 잠바차림으로 박스를 옮기는 모습이 아주 행복하고 편안하게 보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재직 중 경력을 밑천삼아 대우받으며 큰돈을 벌면서 100세 시대의 이모작을 시작하려는 풍조가 난무한 세태에 신선한 충격이자 모두가 본받아야할 모델인 것 같았습니다. 가끔 이른 아침에 동네 이장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조용한 새벽을 깨울 때가 있습니다. 의료검사차가 왔으니 복지회관 앞으로 나오라든가, 어촌계에서 어민들이 조개를 캐는 날을 일러 주는 동네 소식들을 들을 때 어느 날인가 문득 어릴 때 일들이 그리움이 되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의 치마꼬리 잡고 따라 다녔던 교회의 일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그곳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내 기억으로 처음에는 가마니를 깐 곳에 앉아 예배를 드렸고, 내가 초등학교 들어 갈 쯤에서는 마루바닥이었습니다. 어릴 적 가장 부러웠던 것은 내 친구 언니였습니다. 그 언니의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와 더불어 친구 아버지인 최 집사님이 치는 교회 종소리며, 교회 확성기에서 울러 퍼지는 “멀리 멀리 갔더니.....”라는 찬송가 소리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친구 언니가 확성기에 대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교회를 알렸던 것 같습니다. 지금과 같이 길거리마다 난무한 현수막은 없었지만 오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나에게 이상한 버릇이 생겼습니다. 내게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머니는 어떻게 하셨을까? 그리고 성경의 무슨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셨을까?”라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어떤 법조인은 손에 찔린 가시는 시간이 지나면 그 가시가 빠지면서 상처가 아물지만 마음에 박혀진 가시는 평생에 빠지지 않는 다는 것을 명심하며 재판에 임했다고 합니다. 이제 신도이면서 농부 아내 김영자로 살면서 자유를 만끽하며 자연과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후 가장 먼저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 하셨던 것처럼 이번 부활절에는 나로 인하여 가슴에 가시가 박힌 자에게는 용서를 빌고 싶고, 야누스처럼 우리들 앞에서는 신의를 보였으나 혼란과 아픔을 준 분들의 잘못을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놀랍게 교통 정리를 하시면서 진실은 항상 밝혀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해와 진실이 밝혀지면서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고 햇살이 밝게 비치는 창가에 앉아 어머니가 항상 자주 부르셨던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를 불러봅니다.
605 no image |살며 생각하며| 인내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_윤순로 사모 (133)
편집부
5199 2013-02-19
인내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 윤순로 사모, 예사랑교회 > “하나님께서 나를 참지 않으셨으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 요즈음 나는 기도 중에 특별히 인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몸이 많이 아픈 이후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면서 계속 가려움증이 일어나 괴로움을 무척 느낀다. 만성 간염이라서 약도 되도록 먹지 않으려고 그냥 참으면서 욥의 고통을 생각해본다. 인생은 삶 자체가 고난이 아닌가? 그 고난을 즐기면서 살려면 많은 인내가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보면 즐거웠던 일도 많았겠지만 어렵고 힘든 시간들도 많았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인내하게 하시고 잘 감당하게 하심을 감사드린다. 30대 초에 교회사역 시기에는 멋모르고 열심을 내면서 시행착오로 웃고 울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시간들을 보냈다. 무엇보다 자녀들 교육하면서 내 의지대로 자라주지 않아 내 감정에 이끌려 양육하면서 지치기도 하였고, 특별히 큰 아이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심하게 반항하고 상처로 얼룩진 모습을 보면서 남편은 목회를 접으려고까지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 상황에서 나의 할 일은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간구하면서 그리고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인내하면서 아이를 품어주었다. 그러던 아이가 방황을 끝내고 정신을 차리고 자기의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인내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 끝까지 참아주면서 믿어주고 격려하면 때가 되면 저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 반짝이며 빛을 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부모가 인내만 한다면 말이다. 어찌 자녀뿐이겠는가? 부부도, 형제도, 성도도, 이웃도 그 누구와도 인내하면서 사랑으로 대하면 모든 문제가 문제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비단 사람과의 문제뿐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데 모든 당하는 일들이 참지 못하고 자기혼자서 해결하려는 어리석음 때문에 일어난다.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며 끝까지 인내하면서 주님을 바라보면 반드시 가장 좋은 답을 주시는 그분 때문에 행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인내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른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치듯이 읽었는데 얼마 전 육신적으로 큰 아픔을 겪으면서 인내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참으로 인내를 통과할 때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더 많이 체험한다. 그동안 살아온 것 자체가 인내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삶의 고비 고비마다 나를 훈련시키고 인내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참지 않으셨으면 오늘의 내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때론 육신의 심한 고통으로, 아니면 사람을 통하여 말할 수 없는 아픔으로 다가올 때 오직 피할 곳은 하나님 한분뿐이시다. 그 분께 나의 아픔을 토로하면 그 분의 위로와 함께 끝까지 인내하신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신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도 하나님의 인내였으며 앞으로의 남은 인생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살아가리라 믿는다. 결혼 31주년을 맞도록 행복한 결혼생활을 주셨고, 자녀들도 각자 자기의 짝을 찾아 복된 가정생활을 하게 하심도 감사하다. 이제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실 일을 기대하며, 그 주어진 일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주님 앞에 설 때까지 끝까지 인내하며 살기를 소망해본다.
604 no image |청진기로 바라보는 세상 <14>| 내가 보는 이정표_전정식 장로 (12)
편집부
2591 2013-02-19
내가 보는 이정표 < 전정식 장로, 남포교회 > “예수님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 되지 않기를” 요즈음 복지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는데, 육아를 위한 복지정책 중 하나로 영유아 무료 건강검진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저 출산 시대에 들어서서 부모들의 육아를 위한 경제적 부담을 줄여주기 위하여 국가에서 지원하여 무료로 아이들을 검진하는 제도입니다. 검진 진찰을 하며 아이들의 발육상태에 관해 상담할 때 부모와 의사 사이에는 아이들의 발육에 대한 인식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거의 모두 자기 아이는 다른 아이보다 크고 빨리 발달하기를 기대하며 평균보다 조금 쳐지면 마치 병에 걸리기나 한 것처럼 걱정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저는 검진을 통해 아이들의 건강상태와 함께 혹시 발달장애의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을 조기에 발견하여 도와주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장애가 예상되지 않는다면 모두 정상아로 판단합니다. 정상적으로 자라는 아이들 특히 기본발달을 하는 한 살까지의 운동발달과정을 잘 살펴보면 모든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전문적인 용어로 발달대원칙이라고도 하는데 이에 의하면 모든 아이들은 누구나 똑같은 발달과정을 밟는데, 그 과정의 순서가 똑같고, 또 그 일어나는 시기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현상은 아이들의 운동발달이 머리에서부터 발끝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아기들은 먼저 머리를 가누고 그다음 손으로 물건을 잡으며, 뒤집기를 하고 그 다음 스스로 앉고, 그 이후 혼자 걷게 됩니다. 그래서 머리를 못 가눈다면 운동발달이 하나도 된 것이 없으며 혼자 걷는다면 기본 운동발달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발달원칙의 지표가 있기 때문에 아이가 연령에 맞게 자라고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이후의 신자들의 믿음도 아이들이 커가는 것처럼 성장합니다. 주위에서 보면 처음 믿게 된 많은 사람들이 열심을 가지고 믿음 생활을 하기 때문에 믿음이 빠르게 성장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처럼 아주 공격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남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서 눈에 확 띄어야 신앙이 바르게 자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좋은 믿음의 선배들을 모델로 여러 가지 교회 봉사와 선교활동에 열심히 참석하고 또 교회 직분을 사모하며 적극적으로 교회생활을 합니다. 그리고는 봉사실적도 좀 쌓이고 또 교회에서 직분을 얻고 또 교회 사역에 이런 저런 영향력을 갖게 되면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특별한 은사를 받은 목사님이나 장로님, 권사님이 눈에 잘 띄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은사를 사모하고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역할이 주어지지 않으면 자기 믿음이 정체되거나 소홀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성도들이 사회에서 자기가치를 높이기 위해 애쓰는 방법처럼, 자기 믿음의 성장을 스팩 만들기를 통해 이루려고 하기도 합니다. 어느 쉬는 날 아침 조용한 시간에 마침 베드로 사도가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성도들에게 믿음 이후에 힘쓸 과제를 써 놓으신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말하자면 믿음을 갖게 된 이후 모든 성도가 자라야 할 과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은사나 사명에 관한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주시는 은사나 해야 할 역할 이전에 먼저 기본적으로 성도라면 누구나 성장해야 하는 이정표를 보여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늘나라의 확장을 위해 보탬이 되는 일을 하는 것보다 먼저 우리가 믿음의 과정을 잘 걸어가는 것을 더 원하시며 또 기뻐하실지 모릅니다. 올 한해 신자로서 누구나 자라야하는 믿음의 기본적인 과정을 충실히 걸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603 no image |채석포에서 온 편지| 어느 날 갑자기_김영자 사모 (146)
편집부
4498 2013-02-05
어느 날 갑자기 < 김영자 사모, 채석포교회 > “예기치 못한 일들 닥칠 때 ‘여호와 이레’의 감동 누리길” 학창시절에 우리나라의 겨울 날씨는 삼한사온이라고 배워서 알고 있었는데 어느 때부터 삼한사온이라는 단어가 실종되어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가고 연일 영하의 날씨에 마음까지도 몹시 추운 겨울입니다. 많은 눈이 내리고 몹시도 추운 겨울이면 따뜻한 장작불을 지피는 아궁이와 온돌방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남편은 겨울이 되면 항상 난로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 이웃 교회 목사님께서 난로를 구입해서 따뜻한 겨울을 보내신 것을 보시고 여러 곳을 기웃거리며 가격을 알아보았습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의 비싼 가격대의 난로가 있기도 했지만 나무가 타오르는 빨간 불꽃이 보여 지는 소박한 난로를 구입했습니다. 해마다 태풍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부러진 소나무들을 뒷산에서 가져오기 위해 지게도 장만 했으며 새로 장만한 난로 덕분에 그 어느 겨울보다 따뜻하고 낭만과 여유로움을 가지면서 많은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새해가 되어 사모세미나가 원주에서 있었습니다. 몹시 춥고 많은 눈이 내렸으며 강원도에 있어 각 곳에서 모이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많은 분들이 모였습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젊고 활기찼던 사모님들이, 여유로움과 더불어 머리에 잔서리가 많이 내리고 얼굴에 주름의 훈장으로 바뀐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사모님들이 많아져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모습들에서 세대교체가 되는 것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같은 노회 사모님들과도 만날 시간들이 거의 없었는데 한 방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교회와 가정이라는 카테고리 속에 빠져 있던 생활 속에서 며칠간이지만 자유의 시간을 갖는 그 시간들이 우리들에게 도전이요, 생활의 활력이 되기도 합니다. 마지막 날 밤에 노회 사모님들이 한 방에 다 모여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던 일들을 오랜 시간동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목회자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모인 우리들은 ‘너와 내가 아닌 우리’로 ‘하나’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본인들이 겪고 있는 시련과 아픔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사모님은 자기 교회 성도들이 다른 교회로 옮겨 간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또 한 사모님은 교회에서 가장 외적으로 봉사를 많이 하고 헌신적이라고 알고 있었던 중직을 맡고 있던 부부집사님들의 이탈과 목사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다음으로 목사님과 사모님을 사랑하며 목사님 부부를 영적인 부모라고 생각한다던 그들이었었는데 헌신짝 버리듯 그렇게 양심의 가책조차도 느끼지 못하면서 뻔뻔스러운 행동들로 마음들을 아프게 했던 이야기였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몇 교회 뿐의 일들만이 아니고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였고 그리고 한 여자의 남편이기 전에 목회를 동역하는 동역자의 고뇌를 생각하며 우리들은 같이 울었습니다. 농어촌에서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을 더욱 귀하게 여기면서 사랑을 주는데도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어찌하라는 말인지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일년 365일, 한 주일 아니 새벽마다 교인이 있든지 없든지 오로지 교회를 지키면서 항상 긴장 가운데 성도들만을 생각하는 목회자들의 마음을 아는 성도들이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도 해 봅니다. 그렇게 마음 아프게 하면서 속상하게 하고 떠나버린 성도들까지도 사랑하면서 말 한마디 못하고 몸과 마음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남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모님들은 연약한 여자이면서 한 남자의 아내일 뿐이었기에 우리는 하나가 되어 같이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는 간과 쓸개를 다 빼줄 것같이 하는 성도들보다 자기를 미워하는 동역자를 더 믿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모 세미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감기로 인하여 고열과 기침으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며칠 간 먹지도 못하고 잠들지 못하면서 그냥 아프고 싶어 병원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에게까지 감기가 옮겨지자 병원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사가 귀찮은 마음을 남편에게 말하지 못한 나는 자기 몸을 생각하지 않고 병만 키운 멍청한 사람이라고 잔소리를 듣고 말았습니다. 나 또한 어느 날,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처럼 새벽에 눈을 뜨지 않고 이대로 세상을 하직하고 싶을 때가 있어 멍청한 짓을 한 바보일 뿐이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며 믿고 의지했던 성도들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에 말문이 막히지만 화를 낼 수도 없어 마음껏 자리에 누워 아프고 싶었지만 그럴 자유까지도 내게는 없었습니다. 모든 일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듯이 이제 자유롭고 싶습니다. 한 여름 꽃이 귀할 때 백일 동안 꽃이 핀다는 배롱나무라고도 불리는 백일홍 꽃이 있습니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하지만 항상 꽃이 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또 내일을 기다리게 됩니다. 날씨가 추울수록 난로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공부할 때 양은 도시락을 난로에 얹어 놓고 점심을 즐겼던 추억도 기억하면서 고구마를 구워먹기도 합니다. 난로에 불을 지피다보니까 난로는 나무를 잡아먹는 하마입니다. 불꽃이 타오르다가도 주위가 서늘하다보면 불꽃이 사그라져 있고 불꽃이 꺼지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조금씩이라도 나무를 넣어주어야만 우리들에게 따뜻함을 줍니다. 그러다가도 어느 날 타오르는 불꽃이 다 사그라지고 결국은 재만 남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못한 일들이 닥칠 때도 있겠지만 그 때마다 ‘여호와 이레’이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믿으며 마음 아파했던 지난날들도 그리워 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602 no image |치악골 아침사색| 캄캄한 밤하늘의 빛나는 등대가 되어_변세권 목사 (169)
편집부
5370 2013-01-22
캄캄한 밤하늘의 빛나는 등대가 되어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세상의 무차별 공격 속에서 교회를 존속시켜야 할 책임 느껴야” 올 겨울 일찍 찾아온 추위가 신년 첫 날 내린 서설로 멀리 보이는 치악산 정상의 설경이 아름답기만 하다. 새해 들어 고민하는 것은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세상에는 공짜 점심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공평하게 하시는 것은 세상적 기준이 아닌 영적으로 죄인이라는데 있다. 공짜 점심은 인간은 무슨 일을 하면 다 생색을 내고 자기 공로를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해관계는 인간이 깨닫기 어려운 수준이기 때문에 매순간 우리는 고민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매번 우리는 죄책감을 갖게 되고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폴 투르니에는 “현대인들은 자기합리화와 타인의 행위에 대한 비난을 통해 죄책감을 억압하거나 반대로 자기잘못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본질적인 죄성을 인정하고 고백할 때에라야 진정으로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은혜로 나아갈 수 있다”고 역설한다. 우리는 오늘 행동에서 오는 죄책감이 아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오는 죄책감으로의 전환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회개와 용서, 고백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책감에 다 민감하다. 정죄, 비난함으로 자기의 죄책감을 얼렁뚱땅 넘겨버린다. 결국에는 어느 한두 가지 선행을 해놓고도 ‘나 훌륭한 사람이니까 누구도 건드리지마!’로 가서 자신이 기만당하며 사는 것조차도 모를 때가 있다. 죄책감은 무엇을 기준으로 근거를 가지는가? 사람이 사람에게 인정받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윤리, 상식, 권력으로 죄책감을 대신하려고 한다. 심지어 못견딜만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은 다 알고계셔!’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치부해버리고 만다. 옛날 선배 목회자들을 보면, 선비 사상을 가지고 목회를 많이 하셨다. 어떻게 해서라도 비난만은 받지 않으려고 했다. 오해 받는 것도 ‘내가 부덕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목회하면 사람이 항복하는 줄 알았다. 무흠하고 희생만하면 사람이 항복하는 줄 알았다. 지금은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지금의 시대는 성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목회해도 사람은 항복하지 않는다. 이렇듯 언제나 죄책은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는 날에는 죽는다는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따먹으면 죽는다는 존재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따 먹었느냐, 아니냐만 따지고 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회개와 은혜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인간이 행동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의 행동의 문제에만 사고가 고립되어 있다. 교회도 부흥기에는 숫자로 양적인 성장을 말했다. 그러나 지금같이 경제가 어렵고 사회가 혼란할 때 교회는 다시 본질적인 것을 찾아야만 한다. 국가도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성장에 무게를 둘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의 정신적인 성장의 문제에서 답을 먼저 찾아야 한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으로 후퇴할 데가 없다. 지금이야말로 교회란 무엇인가? 목사란 무엇인가? 성도란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할 좋은 기회다. 이제는 순교하고 각오만 하면 되는 시대가 아니다. 세상으로부터 교회가 공격을 당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변증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죽기까지, 어려워지기까지는 문제에 대한 인식을 거의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어떻게 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역사이다. 인간은 보통 무탈하고 고통만 없으면 다 되는 줄 알고 그냥 놔두라고만 요구한다. 편하게 사는 것을 신앙으로 본다. 하다못해 용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법에는 용서란 없지만 진정한 용서는 관계로 하고 인격으로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일찍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다. 그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었다. 그런데 그 법을 지키느라 하나님과의 관계는 멀어졌다. 어느 날 자기가 법적인 사람이 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는 로마서 4장으로 와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다시 말하면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 시니라’고 진정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실수와 게으른 것과 틀린 것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그래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끝나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이 복음의 선언이다. 목회자는 일반 성도보다 자질에서 더 나은 것이 아니라, 위치에서 조금 나을 뿐이라는 겸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서로 만나면 ‘고생하고 계시네요! 고생하고 있구나!’로 격려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싸우지 말고 속에 뭐가 근사한 것이 들어있는 사람처럼 가만히 등대같이 자기 위치에서 서 있으면 된다. 우리는 욕만 먹지 않으려고 신앙으로 가는 정당한 길을 놓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절대 힘으로는 항복하지 않는다. ‘목사님이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를까?’는 있어도 ‘목사님이 얼마나 속상하시면 저럴까?’는 없다.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으면 ‘목사님이 알아서 하셨겠지!’로 가야지, ‘목사님이 그랬단 말이야? 그게 정말이야?’로 가면 안 된다. 우리는 어느 날 서로에게 믿음과 기대가 없어진 것을 보게 된다. 성공시대에는 자기가 의도한 것보다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다. 옛날에는 방법론이 통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아니다. 외롭고 희생당하고 비판을 받는 시대이다. 우리 때는 이렇게 했다는 말이 지금은 통하지 않는다. 답이 없는 시대다. 지금 이 시대는 막막함과 싸워야 한다. 우겨도, 화를 내도 이유도 모르고 당해야 한다. 우리는 세속적 현상이 교회를 공격할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고 비전의 문제가 아니고 현실의 문제이다. 고민이 있다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 하는데 까지는 해야 한다. 그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그 다음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이 세상의 세속적 공격 앞에 세상이 감당치 못할 위대한 사람으로 교회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교회를 존속시켜야 할 책임만 있기 때문이다.
601 no image |청진기로 바라보는 세상 <13>| 손씻고 들어오세요!_전정식 장로 (23)
편집부
2668 2013-01-08
손씻고 들어오세요! < 전정식 장로, 남포교회 > “나중 믿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고도 아무 감각 없는 경우 많아” 오늘은 오랜만에 돌잔치를 앞둔 둘째 손자가 오는 날입니다. 하루 진료를 끝내고 발걸음도 가볍게 퇴근 했습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욕실에 들어가 손을 씻는데 마음이 바빠서 그랬는지 흐르는 물에 손을 잠깐 드리우고는 물기를 수건으로 닦았습니다. 언제 보았는지 아내는 “손 씻으러 왔다가 물만 묻히고 가지요” 하면서 ‘깊은 산속 옹달샘’ 곡조에 맞추어 노래를 합니다. 순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오기가 생겨 오늘 내가 손을 몇 번이나 씻었는지 아느냐고 항변했습니다. 주로 작은 아이들을 진료하는 저는 하루 종일 수도 없이 손을 씻습니다.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는 수십 번 손을 씻는 날도 있었습니다. 아주 작게 태어난 미숙아들은 너무 일찍 태어나 인체의 모든 기능이 모자라기 때문에 이런 아기들만을 위한 특수 시설인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양육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숙아는 특히 면역력이 약합니다. 그래서 누구를 막론하고 아기를 다루는 의료진은 철저히 손을 열심히 닦은 후 신생아중환자실을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손에는 늘 잡균이 있는데 이러한 잡균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병을 일으키지 않지만 면역력이 떨어진 작은 아기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손을 많이 사용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이나 작업을 하거나 청소를 할 때도 손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손은 깨끗한 것뿐만 아니라 더러운 것과도 접촉을 하기 때문에 누구나 손에는 잡균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잡균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눈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기 손에 그런 잡균이 생존하고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 손의 잡균이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고는 상상도 안 합니다. 저는 복음서에서 예수님 앞에 온갖 가난한 자와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무의촌에 세워진 무료 진료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온갖 약한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값없이 쉽게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상한 마음을 제사보다 귀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예수님을 만나고도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던 당시 유력한 종교지도자들은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모두 그 사회에서 인정받고 또 대접도 받고 있는 사람들로 자신들이 예수님의 고침이나 사함을 받아야하는 병자이며 죄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사회의 전통과 관념으로부터 오염된 믿음의 소유자들로 자기가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인지 못한 것입니다. 오염된 믿음의 소유자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이 아닌 저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처음 예수를 믿게 되어 교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모두 굳건한 믿음을 가졌을 것이라고 공통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성도들에게 일반 사회인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과 윤리 기준을 기대합니다. 그리고는 성도간의 교제가 깊어지는 과정 중에, 교인들 특히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기대 이하의 행동을 하면 큰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 까지도 생깁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먼저 믿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생활을 사회생활과 별반 다름없이 생각하기 때문에 나중 믿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도 아무 감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자기의 믿음 생활이 세상 가치관과 통념에 오염된 사실을 인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자신도 먼저 믿은 사람이요 또 사회 속에서 열심히 살면서 세상 가치관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저도 세상의 가치관에 오염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교회생활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하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9),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는 바울 사도의 말씀이 저에게 좋은 지표가 됩니다. 새해에는 환자를 위해 열심히 손을 씻는 것처럼 바른 교회생활을 위하여 세상적인 가치관에 오염되지 않도록 말씀을 읽는 시간을 더 가지며 기도하는 시간도 더 늘려야겠다고 다짐합니다.
600 no image |치악골 아침사색|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_변세권 목사 (19)
편집부
2786 2012-12-11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 변세권 목사 · 온유한교회 >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알지 않고서 신앙인 될 수 없어” 일찍이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님께 물었다. 여기에는 인간의 고뇌와 갈등, 후회와 절망이 있었다.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답을 하셨다. 전설에 의하면 후일에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하였다고 한다. 아마 그때서야 베드로는 비로소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는 사회적 현상을 보나, 그 현상들 밑을 흐르는 사상적 경향을 보나 기독교 신앙과는 사뭇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오늘날까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지 그 멸망의 배후에는 그 나라가 지켜야 할 고귀한 내용과 사상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외면 받은 결과로 멸망이 온 것을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마침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온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의 관리인 대통령이 정직하고 청렴하다는 것은 개인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정부 전체의 분위기와는 다른 것이다. 정부가 도덕성과 윤리성을 가져야 되는 것은 법을 시행하기 위함이며, 한 나라가 건강한 분위기를 갖고 범죄에 저촉되거나 도발하는 일을 차단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리고 그 법을 시행하기 위해서 관리는 청렴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사회를 건강하게 지키는 책임을 져야한다.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 식상해 있다. 국민들이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신자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선거를 얼마나 공정히 하느냐? 외교관계를 얼마나 잘 하는가보다 더 시급한 것은 국민들이 건강한 정신을 갖도록 책임지는 것이다. 정부가 가진 책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정부에 무엇을 바라야 되고 우리가 이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 어떤 책임과 안목을 가져야 되는가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이 나라에 충성을 해서 훈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 사회와 우리가 소속된 이 국가를 위해 내가 애를 쓰는 것이 효과가 있을 것이냐 없을 것이냐를 따지지 말고 우리는 이 사회에서 내가 맡은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국가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우리의 신자 된 책임인 것이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정직하게 살지 않고 성실하게 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야 한다.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세상이 어떻게 부패했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에 큰 영향은 없다. 조금 속상하고 고달플 뿐이다. 우리는 사회를 개혁하고 혁명을 일으키기 위하여 이 사회 속에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찍이 교회역사만 하더라도 유명한 신학자나 신앙인의 가치와 내용도 죄 문제였다. 사도 바울도 그의 사역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사역의 내용이었다. 어거스틴은 5세기에 펠라기우스라는 사람과 신학적인 논쟁을 벌여 기독교 교리를 확립했다. 칼빈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데 남까지 구원해줄 힘이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 로마 가톨릭과 교황청이 주장하는 면죄부나 교회나 성직자들로 대행하는 구원을 거부하고 각자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신앙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확고히 했다. 20세기 들어와서도 마틴 로이드 존스는 그의 설교의 초점을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싸움에 두었다. 신 신학이라 불리는 인본주의 신학을 공격한 사람이다. 기독교 신앙인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 공통되게 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왜 오셨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않고서는 신앙인이 될 수 없다. 동시에 이것이 확고하지 않고는 기독교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최근 들어 부쩍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화합내지는 범종교적인 연합 등의 이야기도 옳지 않다. 우리가 배타성을 갖자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배타적인 성격을 가져서가 아니라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기독신자들은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경제적 조건과 상관없이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우리의 신자된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떤 교파는 기독교가 한 사회를 책임지는 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교단이 있고 또 그런 교단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개인들도 있다. 그들이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 발전에 공헌한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기독교 자체는 그것을 책임으로 하거나 본질로 하거나 그것을 요구받지 않는다. 기독교 차원에서의 정의 혹은 선, 자비, 은혜, 사랑 같은 것을 이야기할 때도 그것을 한 운동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그 경지에 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오늘도 우리 내면에 있는 적을 몰아내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붙들어 매는 싸움으로 가는 것이지 전쟁을 하듯이 벌떡 일어나서 큰 세력과 흐름과 운동으로 한 사회나 한 시대의 분위기를 잡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내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지나친 감정적 주관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성탄의 기쁨보다 커서는 안 된다. 어느 모임에서 성도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들이 교회 걱정보다, 정치걱정을 더 많이 하고 계셔!”하는 소리를 듣고 민망했었다. 어떤 면에서는 신자들보다 우리 목회자가 더 정치에 집착을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만이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으며 이 세상에 서있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우리 때문에 오늘도 세상은 지탱이 되고 있고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을 계속하셔서 아직도 불러내야할 영혼들을 불러내시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논리와 세속적 사고에서 벗어나 비본질적인 것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우리가 맡은 책임을 완수하여 이 시대와 이 나라와 이 사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도록 하는 일을 잘 감당하는 시간들로 채워가야 한다. 시대가 변하여도, 권력이 바뀌어도, 기독교 신앙은 진리로서 세계와 국가와 우리의 인생을 밝힐 유일한 등불로 남아있을 것임을 기억하고 오직 주님 나라 완성을 위해서 걸어가야 한다.
599 no image |채석포에서 온 편지| 나, 그대 있음에...김영자 사모 (115)
편집부
4461 2012-12-11
나, 그대 있음에... < 김영자 사모, 채석포교회 > “새해에는 모두에게 서로 ‘그대’가 되어 기쁨과 슬픔 함께 나누길 기대해” 하늘이 캄캄해 지며 진눈개비가 세찬 바람에 날리어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12월 초의 아침입니다. 5년 전 이맘 때 태안 앞바다가 새까만 기름 덩어리로 뒤덮이면서 주민들에게 절망을 안겨다 주었던 그날이 떠오릅니다. 온 국민들의 성원과 사랑으로 어느 정도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고가 일어나기 전의 평상시와 같은 일상이 제자리로 돌아 온 것 같지만 상흔들의 모습들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5년 전 그 때도 새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었습니다. 후보들과 많은 정치인들이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기름 덮인 태안 앞바다에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듯이 봉사활동에 참여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하게 멀어져 가는 듯합니다. 아무리 큰 사건일지라도 내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아닌 사건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지만 당사자 자신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나 슬픔이 되어서 평생 그 일들로 인하여 살아가는데 많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연말이 되어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그 동안 배려해준 고마움을 한 장의 카드에 정을 담고 싶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림그리기를 좋아해서 몇 년 동안 사군자를 치고 있는데 이번에는 한지에다가 그 동안 학습한 솜씨로 부족하지만 정성을 담고 싶었습니다. 카드를 그리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는 중에 그 동안 간직해 둔 오래된 카드를 펼쳐 보게 되었습니다. 빛바랜 상자에는 오래된 카드가 많이 있었습니다. 보내 준 카드에는 남편과 성도들 그리고 많은 지인들과 제자들의 정성과 사랑이 담긴 것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아주 촌스럽고 오래된 카드 한 장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아들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고 말하는데, 그 아들이 중학교 3학년 때 아빠, 엄마에게 준 카드 한 장 때문이었습니다. 철없는 아이가 그냥 무심코 멋진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정돈되지 않은 글씨로 써진 “자랑스러운 엄마에게”라는 글을 보고 한참 동안 멍해졌습니다. 짧은 순간 내 자신을 반추해 보면서 자신에게 부끄러운 생각까지 들었으며 아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느라고 같이 해 줄 시간이 항상 부족했고, 생활도 어려워서 성장기에 많이 먹이지도 못한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중년이 되어 자기 가족을 잘 챙기는 가장이 되었고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아들이지만 그 아들들을 생각할 때는 많은 것들을 채워주지 못하고 부족하기만 했던 가난한 그 시절이 늘 생각납니다. 자녀를 가진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생각하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흐뭇해하면서도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깊은 슬픔과 아린마음이 샘솟아 눈물이 됩니다. 자녀들에게는 어머니가 항상 고향이듯이 세월이 지나 자기 나이가 몇 살인지 신경조차 쓰지 않을 때도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들의 마음은 한결 같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 흐린 날씨만큼이나 슬프고 울적한 마음이 가득 찬 날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시신을 기증받은 대학병원에서 어머니의 유해 화장과 안치 절차를 알려왔습니다. 2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를 또 한 번 다시 보내는 날이었습니다. 그 동안 시신 기증으로 인하여 어머니를 기억하기위해 갈 곳이 없었던 것을 섧게 여기면서 마음 아파해왔습니다. 2년 전에 장례를 치렀고, 다른 가족들은 외국에 있기도 하지만 남편과 둘이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어느 목사님 부부가 오셨습니다. 아무에게 알리지 않고 지나가는 말로 요즈음 많이 울적하다고 하면서 어머니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검정 양복에 넥타이까지 갖추어 입고 오셨습니다. 2년 전에 어머니를 보내면서 슬퍼했던 그 슬픔이 또 한 번 왔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주기위해서 그 자리에 함께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부부를 보면서 항상 이 세상에 혼자라고 생각했었는데 혼자가 아니었음을 알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항상 내 자신만을 생각하며 도시인답게 타산적이면서도 이기적이었던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중년이 된 아들들에게 어릴 때부터 항상 너희들 곁에는 엄마, 아빠가 있으니 모든 일을 소신껏 하라고 이야기했던 말들이 생각납니다. 내 아들들에게 그들이 찾는 곳에 가족이 항상 있다고 말했듯이 나로 하여금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눌 수 있는 모두에게 “그대”가 되고 싶은 바람입니다. 거실에 천정을 뚫을 것 같은 행운목이 있었습니다. 키를 조정하기위해서 여러 개로 삽목을 했는데 꽃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문득 밖을 내다보다가 그 곳에서 꽃을 피우기 위해 꽃대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 하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새해에는 모두에게 행운을 주는 행운목의 꽃처럼 모두에게 향기가 되는 “그대”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598 no image |청진기로 바라보는 세상 <12>| 작은 얼굴, 롱 다리_전정식 장로 (170)
편집부
6955 2012-12-11
작은 얼굴, 롱 다리 < 전정식 장로, 남포교회 > “외모를 중시하는 것은 우리사회의 풍조일 뿐 중요치 않아” 매주 목요일은 예약된 영유아의 건강상태와 성장, 발달을 점검하고 상담 하는 날입니다. 아침나절 일찍 12개월 된 여아를 데리고 엄마, 아빠가 찾아왔습니다. 여아의 건강상태는 좋았습니다. 그리고 벌써 혼자서 익숙하게 걷고, 또 단어도 엄마, 아빠 등 몇 개를 알고 구사하고 있습니다. 여아의 키는 80센티, 체중은 11킬로그램, 두위는 40센티로 키와 몸무게는 같은 또래의 평균치보다 꽤 높았으나 머리둘레는 평균치보다 약간 낮았습니다. 여아의 진찰 결과를 같이 들여다보며 상담할 때, 아기의 건강상태가 좋다는 이야기와 발달이 같은 또래에서 빠른 편이라고 설명할 때는 엄마, 아빠의 얼굴에 표정 변화가 없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다 아기의 키가 같은 또래 중에서 아주 크며 머리는 그에 비해 작다는 설명을 하니 엄마, 아빠의 표정이 환해지며 기뻐합니다. 아이들의 성장, 발달은 개인차가 커서 커가면서 달라질 수도 있으나 정상적으로 자라나는 경우 어렸을 때 키가 큰 아이가 커서도 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진찰결과를 상담할 때, 아이들의 키가 같은 또래에서 큰 편에 속한다고 하면 얼굴이 밝아지고 거기다가 작은 얼굴을 연상시키는 낮은 두위 계측치를 보면 부모들은 아주 좋아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의 양육에서조차 부모들이 신체의 외모를 중요시 하는 것은 우리사회에서 외모를 중요시하는 풍조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도 성형을 위해 우리나라에 입국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연예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도 입시, 또는 취직 면접시험을 위해 성형외과를 찾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저는 아이들의 건강진찰을 할 때 아이의 건강상태, 기능발달 상황, 성장계측수치 중에서 외모로 이해할 수 있는 성장계측수치보다는 아이들의 기능발달 상황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소견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체 성장에 관한 평가에서 발달지체가 예상되는 아주 작은 아이들이나 과도비만이 염려되는 비정상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정상에 속하는 아이들이 보기 좋은 체형을 갖고 싶어 하는 데에는 솔직히 의학적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아이들의 큰 키, 작은 얼굴을 좋아하는 경향에 대해 무덤덤하며 어느 정도 답답함을 느낍니다. 우리가 살면서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모와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판단의 근간이 됩니다. 왜냐하면 오래 동안 같이 지내보지 않고는 사람의 속내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 좋은 학벌, 경제력, 사회적 위치, 심지어 신체적 외모를 갖추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리고는 좋은 외모를 갖춘 사람은 당연히 좋은 평판과 대접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큰 교회, 유명한 목사님이 있는 교회를 좋아하고 자랑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런 교회의 목사님과 장로님이나 권사님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더 큰 존경을 받습니다. 저는 우리 교단이 바른 신학을 지향하는 교단이라 자랑스럽고, 우리교회가 말씀이 좋고, 또 훌륭한 성도들이 많은 교회라 좋아합니다. 그런 교회에서 장로가 된 이후 제가 갖춘 외모의 영향인지 교회 갈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먼저 저를 알아보아, 조금은 어색할 때도 있지만 대접 받는 느낌을 받아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신약은 물론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고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또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도 세시는 분으로 우리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별칭들 중에서 하나님이 스스로를 표현하신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을 생각해 보면(출 34:6 참조)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볼 필요도 없으시기도 하지만 도무지 우리의 외모에 관심이 없고 또 볼 의향이 없으신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애쓰고 보람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서 얻는 칭찬과 대접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는 어리석음과 부끄러움의 자책이 듭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 특히 교회 생활에서 누구의 뜻을 따르며 누구의 칭찬을 받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가 저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597 no image |청진기로 바라보는 세상 <11>| “내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_전정식 장로 (22)
편집부
2869 2012-11-27
“내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 < 전정식 장로, 남포교회 > “어눌하거나 모자란 표현에도 그 말을 하는 아이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어느 한가한 오후 진료시간에 집사님 한분이 2년 6개월 된 남자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엄마는 아이가 아직 말을 못한다고 걱정이 커서 일부러 휴가를 받아 진료를 받으러 왔다고 합니다. 진찰해보니 아기는 건강상태, 인지능력이나 청력 등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식구들이 하는 말을 다 알아 듣고 단어도 꽤 표현하지만 단지 문장력이 없었습니다. 아기의 발달은 개인차가 크고 또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보다 늦는 경향이 있으니까 만 3살이 되어도 문장력이 없다면 그때 정밀조사를 하자며 안심시키고 보냈습니다. 저도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었는데, 6개월이 지나서 집사님이 환한 얼굴로 다시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번에는 진찰이 아니라 아이를 자랑하러 왔습니다. 지난번 진찰 후 2달쯤 지나고 나서 갑자기 말이 트이더니 어른 같은 표현을 자주해서 놀랬다고 합니다. 엄마는 아이와 대화가 가능해 진 이후 아이의 마음을 잘 알게 되어 아이를 더 이해하게 되고 또 아이도 엄마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고 행복해했습니다. 진료를 하는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태어난 이후 모든 시기에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유난히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 시기는 아마도 아이와 대화가 가능하게 되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화가 가능해지면 부모는 아기를, 아이는 부모를 더 잘 알게 되어 인격적인 사랑이 깊어집니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말에 부모사랑은 내리 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아이와 부모와의 대화 역시 그런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화는 서로의 생각을 충분히 자유롭게 표현해야 제대로 된 대화라고 할 수 있는데, 아이들의 표현은 아무래도 부족하고 다양하지 못한데도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그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이미 알고 있으며 또 그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눌하거나 모자란 표현에도 그 말을 해주는 아이가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대화가 있는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얼마나 말이 어른스럽고 완벽하거나 아름다운지는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기도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직분을 맡게 되면 크고 작은 모임에서 대표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일예배와 같이 성도들이 다 모인 예배에서 기도순서를 맡게 되면 누구나 긴장을 합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서 주일예배 대표기도 순서가 되면 토요일 저녁시간 조용한 시간을 마련하여 미리 기도 준비를 합니다. 어떤 날은 기도 준비가 잘되어 곧 마무리할 때도 있지만 또 어떤 날은 준비가 되지 않아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대부분의 경우 기도의 내용이 강의안 같기도 하고 연설문 같기도 합니다. 아마도 제 마음 속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적어도 대표기도인 경우 완벽한 내용과 문장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내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 잊고 성도들이 듣기 좋게 매끈하고 아름다운 기도문을 작성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렇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난번 대표기도 준비하는 시간이 꼭 그런 경우였습니다. 자정이 되어도 준비가 덜 되었을 때 갑자기 그 아이와 집사님이 생각났습니다. 곧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새 종이에 새롭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머리카락 숫자도 세시는 분,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는 주님, 또 주시려고 우리가 말하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지며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596 no image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인생의 추락과 욕망의 함수 관계_최에스더 사모 (14)
편집부
3238 2012-10-16
인생의 추락과 욕망의 함수 관계 < 최에스더 사모 · 남서울평촌교회 > “막장 드라마 주인공들 천국에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 에덴 이후로 역사는 언제나 동일한 주제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늘어서는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고만고만한 줄거리로 죄인들의 갖가지 행보를 보여주며 한 마디로 ‘별 것 없는 인생, 별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게 주제인 것 같은데, 지나간 드라마를 주의 깊게 보면서 깊은 교훈을 얻다가도 그 드라마가 정작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시점만 오면 다들 이 주제를 잊어버리고 심각한 착각과 역겨운 도취에 빠지는 것 같다. 사람들이 쳐주는 박수와 환호와 부러움이라는 달콤한 환상에 빠져서 그걸 손 안에 쥐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자기가 한 때 품었던 꿈이, 그리고 자기 자신이 악취가 나도록 변질되고 썩어져버린 것도 모른 채 역사의 드라마에서 백사장의 모래 한 알처럼 존재감 없이 사라진다. 지금 한국교회를 부끄럽게 만드는 일련의 사람들과 그들의 꿈도 역사 속에, 말세지말(末世之末)에 새롭게 등장한 것은 아니었나보다. 아이들과 함께 시편을 묵상하는 요즘, 다윗의 시 가운데 마치 지금 한국교회를 보고 쓴 것 같은 말씀을 며칠 전에 읽고 깜짝 놀랐다. 시편 17편 14절 말씀이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자니이다.“ 하나님의 것으로 배를 불리고 자녀들도 만족하게 하고 남은 것을 그들의 아이들을 위해 놓아두는 사람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몫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에서 저 세상, 즉 구원받은 자들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을 영원한 천국에서는 받을 몫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은 이 말씀을 가만히 읽고 있으려니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그 시절의 다윗이 어떤 식으로든 다 지켜보고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직을 놓고 벌이는 각양각색의 막장 드라마를 여러 편 보면서 입맛이 떫고 쓰고 속은 더부룩하고 메스꺼워서 ‘토하여 버리리라’가 이런 기분인걸까, 가릴 수만 있다면 완벽하게 가리고 이 드라마들이 다 끝날 때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세상의 눈을 돌려놓고 싶었다. 바닷가의 모래 알갱이 정도의 존재감 밖에 없을 이런 인생들을 보지 말고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날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라고, 그들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고, 그들을 봐달라고, 그리고 우리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아무도 박수 쳐주지 않지만 묵묵히 주님의 길을 따라 걸으며 외롭고 고단한 삶이지만 성결과 경건으로 옷 입고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옵고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는(시 17:15)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국 교회의 목사들이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 누구인가. 이 길고도 긴 인생들의 드라마가 끝나고 하나님이 명장면, 명대사를 고르실 때 거기에 뽑혀 나갈 진정한 주인공들은 누구인가? ‘주말의 명화’ 시그널 음악이 깔리고 당대의 주인공들의 얼굴이 천국 시민 앞에서 클로즈업 될 때 지금의 막장 드라마 주인공 목사들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건 아닐지 정말 두렵다. 그들도 처음부터 막장 드라마는 아니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들이 추락하기 시작한 시점이 혹시 나의 지금인 건 아닐까. 내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이 거룩한 욕심이 무엇을 만나고 어떤 일을 겪으면서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남고 싶다는 악착같은 욕망이 되는 걸까. 아! 이 가시 같은 질문을 감사히 끌어안자. 날마다 이 질문을 벼리고 갈아서 꽉 끌어안고 살자. 내 양심을 호벼 파고 내 진심이 난도질당하여 내가 새로워질 수 있다면, 주님 앞에 가 설 수 있다면 기꺼이, 감사히 이 가시를 안고 살아가자.
595 no image |청진기로 바라보는 세상<10>| “교회 나오세요”_전정식 장로 (27)
편집부
2772 2012-09-28
“교회 나오세요” < 전정식 장로, 남포교회 > “아내에게 충고를 들을 때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고마움 느껴” 다양한 환자와 보호자를 만나다보면 가끔 엉뚱한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대학병원을 정년퇴임하고 작은 여성병원에 근무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입니다. 오후 진료가 거의 끝날 무렵 한 엄마가 6세 된 여아를 데리고 급하게 들어왔습니다. 환아는 2일 정도 감기 증세가 있다가 오전부터 수시로 토한다고 했습니다. 환아를 진찰해 보니 우하복부의 압통을 보이는 맹장염 소견이 있어 서둘러 초음파 검사로 확인한 후, 소아외과가 있는 병원에 연락을 하고 보냈습니다. 작은 병원에서 근무하다보면 수술이 필요하거나 응급조치가 필요한 환자는 큰 병원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퇴근 시간이 임박해서 그런 환자가 오면 무척 바쁘고 번거롭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 다른 병원에 보낸 환자가 어떻게 되었나하고 궁금하지만 많은 환자들을 보다보면 곧 잊습니다. 한 3개월이 지난 후 그 엄마가 손에 책 한권과 과자 한 봉지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때 환아는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잘 받고 후유증 없이 잘 나았다고 합니다. 그 엄마가 말하기는 환아가 진료 받고, 수술 받고 퇴원했던 것이 너무 순조로워 어린이의 맹장염은 다 그렇게 쉽게 진단되고 치료되는 것으로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린이가 맹장염이 걸린 경우 어린이는 병의 경과가 어른과 달리 전형적이 아니기 때문에 진단이 매우 어렵습니다. 요즈음은 초음파 검사가 보편화되어 진단에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도 많은 경우, 복막염 같은 합병증이 생긴 이후에나 진단되고 있어 고생하는 환아를 쉽게 만납니다. 환아의 엄마는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 엄마는 교회 친구들과 아기 키우며 아이들이 아픈 이야기를 하다가 한 집사님으로부터 「3분」이라는 책을 읽어보라는 권유를 받고 읽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 엄마는 책을 읽고 몸에 전율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 아울러 제 생각이 나서 한번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엄마는 고마운 마음에 그 책과 함께 엄마가 다니는 교회의 안내책자를 저에게 선물로 주며 교회에 나오라고 권유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 해졌습니다. “나보고 교회에 나오라고 하다니, 믿음의 경력이 얼만데, 그리고 한국교회에서 말씀 좋기로 유명한 교회의 장로인데...” 그러나 다음 순간 또 가끔 생기는 자책감이 엄습했습니다. “얼마나 사는 모습이 아니면 교회에 나오라는 말을 들을까?” 그래서 지체하지 않고 그 엄마에게 선물 고맙다고 하고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말을 잘랐습니다. 그 엄마의 얼굴에 잠깐 쑥스러운 표정이 지나갔습니다. 저녁에 퇴근하고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다 한 번 더 머리가 ‘멍’ 해졌습니다. 아내와 저는 가끔 저녁식사 후 동네에 있는 탄천 길을 산책하고 있습니다. 산책길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아내로부터 위안을 받고 하루 피로가 가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아내가 저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뜨거운 마음이 생기면 누구나 아무하고도 교회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잘 알면서 왜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말을 자르고 그 엄마를 쑥스럽게 했느냐고 타박을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참 무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 나이가 되고 이만한 위치에 와 있으니 제 주위에서 저에게 충고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 아내에게 충고를 들을 때면 무안함이 있으나 아직도 나는 더 훌륭해 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고맙습니다. * 「3분」: 미국의 한 시골교회 목사님의 4세 된 아들이 맹장염에 걸렸으나 합병증이 심해진 다음에야 진단되어 어렵게 수술을 받고 회복한 후, 혼수상태의 환아가 자신이 보았다고 하며 들려준 천국 이야기를 아버지가 정리하여 쓴 책.
594 no image |치악골의 아침사색| 어두운 밤하늘의 빛나는 불빛이 되어..._변세권 목사 (16)
편집부
2677 2012-09-28
어두운 밤하늘의 빛나는 불빛이 되어...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우리는 한국교회 앞에서 진리의 등대 역할을 해야 하는 역사의 동반자” 파란 하늘 아래 가을의 높은 햇살이 눈이 부시게 쏟아진다. 폭풍 뒤에 평온함이 있듯이 만남과 이별, 성공과 실패, 승리와 좌절, 칭찬과 절망은 모두 동음이의어일 것이다. 어느 것인들 신실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에 필요 없는 것이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총회임원의 임기를 마치고 교회에 돌아와 보니 그 어느 날보다도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푸근하고 편하기만 하다. 내가 입은 옷이 불편했었나보다. 이번 가을노회에 가서도 발끈해서 발언하지 말고 조용히 앉아만 있다가 와야겠다. 어느 것을 해봐도 ‘이것도 지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어느 때 보다 많이 든다. 누가 뭘 하든 크게 염려할 일은 아니지만 일단 총회든 노회든 봉사하고 싶은 분들에게 기회를 주고 추천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총회의 노회총대들도 교체해서 신선함과 도전을 주면서 선후배 세대가 함께 가는 분위기가 필요해 보인다. 특별한 사명이 있는 분들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는 사람만 가면 감각이 떨어지고 타성에 젖게 되고 기득권에 안주하게 되어 거기에도 죄가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죄는 윤리적으로나 명분적으로 틀리지 않는다. 그래서 보수주의, 개혁주의에도 죄는 들어오는 법이다. 그동안 우리 교단이 30년을 지나오면서 교단을 설립한 선배 세대들이 우리 곁을 떠나시기도 하고 세대교체에 많이 들어가 있다. 지난 교단의 역사 가운데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합신의 틀을 잘 보호해 주셨고 그 기초를 잘 닦아주셨다. 우리 교단의 나아갈 방향과 목적을 큰 그림으로 잘 잡아주셨다. 어떤 때는 수직적, 전통적 교단의 분위기가 아니라서 때로는 수평적, 개혁적 분위기 속에서 후배들 앞에서 자신감을 상실한 채 마음의 고생도 많으셨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크고 넓은 신앙으로 그 많은 부분들을 감당해 주셨다. 감사드려 마땅하다. 남은 사명의 시간동안도 인간의 가치가 분별에 있다고 할 때 결정해 내는 실력, 지혜의 실력으로 원숙하고 깊어지는 그윽함으로 후배들을 지켜봐 주셨으면 한다. 후배세대들은 이러한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여 선배들에 대한 감사함과 그 은혜를 누림으로 다음 30년, 50년을 준비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들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알았다. 우리는 합신이라는 결벽증에 걸려있었다. 누가 합신이 아니라고 했나? 이런 부분은 타인이 평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장에서 합신정신으로 목회하며 살아왔는가?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혁주의 사상에 깊이 젖어 있다 보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현상들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괜찮다. 다 하나님나라의 본질과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답답함을 느껴서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라도 선배들의 그 기초 위에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교단의 중심점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한국교계와의 관계성 차원에서는 정치적 기술이 필요하지만 한국교회의 신학적 이슈에 대해서는 합신이 방향과 정체성 차원에서 분명하게 한국교회 앞에 그 답을 제시하는 진리의 등대 역할을 해주어야만 한다. 교단도 작은데 신학적 입장이 정치적 상황에 가려지게 되면 그나마 타교단과의 차별성도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들은 나머지 많은 부수적인 적용들을 인생과 인간 역사와 세월 속에서 하나님의 간섭과 훈련을 받으면서 누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시대를 이어가야 한다. 대단한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이 있으면서도 모나지 않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실천을 펼쳐나가는 세대로 이어가야 한다. 우리의 신앙 수준은 언제나 진행형이다. 결과야 나아지겠지만 기대했던 것만 못해서 우리는 더 자책이 많은 인생이다. 완벽하고 경건하게 증언하는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거스르는 방법으로도 일하신다”고 하셨다. 목사는 뭘 잘못했을 때 좌절할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것을 마음에 그 짐을 지고 두고두고 기도하며 가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안심하는 가운데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할 때는 안 비켜주시고 우리가 약할 때에 길을 비켜 주신다. 누구를 비판해서 자기를 확인하는 사람은 바보인 것이다. 나 보다 못한 사람이나 교단이 있으면 정죄만 하지 말고 그들보다 나은 것을 말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진리를 지키는 정통하고만 꼭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옳다고 고집을 피워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신앙을 잘 지킨 자에게만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실패해도 다시 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른 신학사상을 지키되 지금까지의 순교적 차원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우리시대에 부드럽게 적용해서 나아가기를 힘써야 한다. 지금까지는 보수의 보람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외적으로는 조금 부족해보여도 내용적으로는 대화를 잘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설사 신학적 이슈가 있을 때 맞지 않아도 ‘입장을 같이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신 제가 오늘은 식사대접을 하겠습니다.’ 하는 자세라도 필요하다. 선배세대께서 ‘그동안 잘 지냈는가? 보고 싶었네!’라고 말씀하시면 “우리 교회에 오셔서 설교한 번 해주세요. 맛있는 것 대접하려고 좋은 집도 알아놓았습니다”라고 하면 어떨까? 합신의 신구세대가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일과 기적을 창출하시는 일에 다시 한 번 아름답게 쓰임 받았으면 한다. 그동안의 수고와 노력을 포함한 앞으로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어두운 밤하늘의 빛나는 불빛으로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다. 부디 하나님의 일하심을 거룩히 지켜내는 교단이 되자. 하나님의 기적이 꽃 피는 복된 사역과 인생이 되자.
593 no image |청진기로 바라보는 세상 <9>| 내가 받을 인사가 아닌데... _전정식 장로 (18)
편집부
2556 2012-09-18
내가 받을 인사가 아닌데... < 전정식 장로, 남포교회 > 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니 꽃들이 살짝 얼굴을 비치고 있습니다. 일기가 좋지 않거나 명절일 때에는 소아과 외래에는 환자가 뜸합니다. 그래서 진료실에 앉아 밖을 내다볼 여유도 있습니다. 마침 1.5Kg으로 태어났던 미숙아가 신생아중환자실에서 퇴원하며 엄마가 아기를 안고 인사하러 들렸습니다. 엄마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아기를 살려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며 은인처럼 대합니다. 자주 듣는 인사말인데도 그날따라 참 쑥스러웠습니다. 이 아기는 보통 아기들보다 체중이 절반도 안 되게 태어나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하였는데 상태가 좋아 미숙아들에게 흔히 생기는 합병증이 하나도 없이 잘 자라서 의료진에게 스트레스를 전혀 주지 않은 고마운 아기였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잘 극복하고 자라서 저는 아기에게 특별히 해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기 한 명 한 명을 잘 살펴보면 참 딱하고 안타까운 경우가 있습니다. 몇 대 독자라든가 10여년 만에 얻은 아기라든가 또는 현재로서는 치료방법이 미비한 희귀병에 걸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의료진도 부모와 함께 몹시 안타까운 마음으로 간절히 잘 낫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의사의 간절함도 병이 낫는 일에 큰 힘을 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의사는 교육과 경험을 통해 병이 낫는 길을 알지만, 병이 낫고 안 낫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며, 병을 낫게 하시는 분은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자나 보호자로부터 저 때문에 살았다는 인사를 들을 때면 그렇게 어색하고 쑥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저는 교회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성가대가 5개가 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2부 성가대에서 십여 년 봉사했습니다. 성가대는 예배를 돕기 때문에 헌신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개개인 성가를 연습하고 부를 때마다 은혜를 받습니다. 특히 절기에 드리는 찬양예배를 맡았을 때는 수개월간 연습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노고를 아시는 목사님은 성가대의 찬양 순서가 끝나면 수고한 성가대의 지휘자, 반주자, 솔로, 전 대원들을 일일이 소개합니다. 성도들은 소개될 때마다 박수로 격려와 감사를 표합니다. 그리고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성가대원으로 강단에서 찬양했을 때 그런 박수를 받으면 수개월의 수고가 더욱 보람차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악의 재능이 미미해 성가대에서 돋보이지 않은 평범한 대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강단 위에 자리 잡고 부르는 절기찬양 예배 때에는 틀릴까 보아 거의 립싱크 수준으로 노래를 하기 때문에 늘 찬양예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배에서 모든 것은 하나님께 향해야한다는 생각이 커서 그런지 목사님의 소개로 인사 받을 때는 ‘우리가 받을 인사가 아닌데’하는 마음이 들어 참 쑥스러웠습니다. 사람이 남의 덕을 보거나 좋은 일이 생겼을 때에는 자연스럽게 감사 인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사는 인사하는 사람의 덕목이지 인사 받을 사람의 당연한 몫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위와 같은 경우에 인사를 받을 때는 “땅에서 받을 것 다 받았으니 위에서 받을 것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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