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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제대로 아는 자에게는

 

< 변세권 목사 · 온유한교회 >

 

 

“우리는 강요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로 사는 사람들”

 

 

또다시 춘설이 내리고 아파트 뜰 안의 꽃 몽우리들이 혼란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고 있다. 인간들은 쓰나미에 쓰러지고 동물들은 구제역에 죽어갔는데 긴 겨울 찬바람을 뚫고 용케도 살아온 자연이 위대하기만 하다.

  

이것이 어찌 자연뿐일까?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역사를 간섭하시지만 구원이 완성되고 심판이 이루어지기까지 이런 혼란과 훈련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리는 은혜로 다시 출발한 인생이다. 세상의 거대한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우리를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시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실패하든 고통스럽든 그런 삶의 과정과 공동체의 신앙훈련을 통해 우리를 더 속 깊은 사랑으로, 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깊은 지식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못난 것을 하나님도 아시고 우리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교회를 바라볼 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실천의 유무보다, ‘하면 된다’ 보다 기초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는 것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실천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다.

 

살면서보니 인간에게 옳은 것과 진심을 말하는 것은 어렵다. 몰라서 안 되는 것이 신앙이고 인생인 것 같다. 믿음이 모든 것을 알고 현실적인 것으로 보상이 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열매를 얼마나 맺었는가보다 열매로 증거되는 나무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라’는 것이다. 열매가 달리지 않았어도 그 열매의 나무로 존재하라는 것이다. ‘하면 된다’는 이런 식의 고민은 몇 몇 사람의 이야기지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 그래서 믿음으로 그 현실을 보는 것이다.

 

그런 것과 비추어 혹자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의 본질과 존재성, 정체성만 이야기할 것인가? 당연히 전도와 성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전도하면서 교회를 성장시켜야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어도 기초의 훈련을 받지 않는 한 나중에 일을 만들어놨어도 죄의 본성으로 우리는 또 돌아가서 같은 고민을 반복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참여하고 있는가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박영선 목사님 말씀처럼 옳은 것도 사랑이 아니고 진심도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고 고치는 일이다. 다만 진심, 다만 의, 다만 정답만이 답은 아닌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허물을 믿음으로 기다리고 참아주는 것이다. 부부사이가 나이가 들면 그냥 넘어갈 줄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사람에게는 기적이다. 체념이 아니고 사람이 사람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아는 것이다. 인간은 가진 것이나 배운 것으로 항복하지 않고 이해와 용서하는 성품 앞에 인격이 항복하는 것이다.

 

‘너희가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주님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도덕적 온전함도 아니요, 성결도 아니요, 성품적으로 놀라워해야 한다. 이런 곳에는 외형적인 비교만 있지 신앙의 방향과 내용을 가질 줄 모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 이것을 알면서도 세상에 붙잡혀 있다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정신 없는 그 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만들어져간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 일과 주어진 현실이 치열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는 사람에 대해서도 내 말을 들으라는 식의 무례함을 보이기도 한다. 상대방은 바보인가?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 하다보니 우리는 진실과 옳음과 효과가 있기만을 바란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강생은 논리도 강요도 필요 없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한히 일하시는 경우와 계획만이 자리하는 것을 믿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적극적인 측면에서는 사랑이고 소극적인 측면에서는 용서다. 성경이 가라는 대로 갈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용서하고 바보가 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열매 외에는 우리에게 더 이상의 자랑이 있을 수 없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다해놓고 ‘주여!’ 해서는 안 된다.

 

신앙은 하나님을 알아도 하루도 이 세상에서 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 관계속에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성질내고 복수하는 것으로 되는 사람이 아니고 우리의 못남에도 끊임없이 기다려주시고 강요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로 사는 사람이다.

 

사실 인생을 기가 막히게 아는 자에게 인생은 정상으로 못 가는 법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이게 말이 됩니까?’라고 질문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린 사람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현실의 많은 문제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의 못난 인생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쓰시고 잘난 인생은 쓰시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부르신 사랑으로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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