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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552 no image |들꽃향기처럼|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_윤순열 사모
편집부
4298 2011-02-23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 윤순열 사모, 서문교회 > “드라마틱한 인생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 느껴져” 요즘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해같이 빛나리’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 그 겸손이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라는 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노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교회 황 집사님이십니다. 그 분은 이름처럼 황금같이 빛나는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그 분은 다리가 약간 불편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분으로 아주 충성스러운 분이십니다. 언제나 교회에 오셔서 기도하신 후 교회를 돌보십니다. 여름에는 화단에 꽃이 시들지 않도록 물을 주시고 요즘같이 눈이 많이 오는 때에는 아이들을 시켜서 눈을 말끔히 치워놓기도 하십니다. 자신은 다리가 불편하여 눈을 치우기가 힘들어 어린 딸들을 시켜 눈을 치우십니다. 사람들이 사용하고 더렵혀진 화장실 휴지도 말끔히 치우십니다. 남자 소변기도 락스를 가지고 깨끗하고 반짝 반짝 하게 닦아놓으십니다. 본당 휴지통 비우기, 교육관 휴지통, 주방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오물도 집사님은 얼굴한번 찡그리지 않고 다 치워서 교회당은 늘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토요일이면 온가족이 교회에 와서 주일날 점심식사준비, 주일학교 간식준비, 예배당 청소 등으로 정신 없이 바쁘게 온종일 교회에서 보내십니다. 전도하는 날이면 제일먼저 와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앞장서십니다. 아파트 층계를 오르내리기가 불편하므로 딸들을 앞장세워 전도지를 아파트 문틈에 끼워놓게 합니다. 몸이 성한 사람들은 바빠서 빠지기도 하지만 황 집사님은 한번도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유난히 추웠던 올 겨울 갑자기 추웠던 날 밤에 교회 수도 동파가 염려되었던 집사님 부부는 한밤중에 차를 타고 와서 주방에 난로를 피우고 수도를 살짝 틀어놓고 가는 세심함을 보여 저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습니다. 남편 강 집사님 역시 교회의 중요한 일에 앞장서는 충성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가정을 놀랍게 복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 가정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복된 손길을 생생하게 목격하였습니다. 몇 년 전까지 그 가정은 몹시도 어려운 형편에 처해있었습니다. 생활고를 해결해볼 방편으로 카드 돌려막기를 하다가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다. 식구는 대 가족이었습니다. 시어머니, 형수 없는 시 아주버님, 형님의 두 아이들, 집사님 가족 4명 등 이렇게 여덟 식구가 조그마한 연립주택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열악한 환경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황 집사님은 그 많은 대 가족을 거느리고 힘겹게 살아 가면서도 교회 일에 누구보다 충성스러우셨습니다. 집에서 쌓이는 스트레스는 하루에 한 번씩 교회에 와서 소리 높여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해결하곤 하였습니다. 남편 강 집사님은 새벽기도 차량운행을 도맡아서 하시므로 365일 새벽기도개근을 맡아 놓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정을 위해 놀라운 일을 계획해 놓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복을 받기 전에는 고통이 따라 오나 봅니다. 남편 강 집사님은 3D 업종에 근무하고 계셨습니다. 쇠 물을 녹여서 모형을 만들어내는 하청업체 직원으로 그 일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그 일을 너무나 성실하게 감당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장이 그를 부르더니 ‘며칠만 일하고 그만두라’고 하는 청천벽력 같은 통고를 내렸습니다. 갑작스런 해고통지에 강 집사님은 ‘어떻게 미리 예고도 없이 해고를 시킬 수 있느냐’면서 ‘며칠만 말미를 달라’고 사장에게 사정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사장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며칠 사이에 사장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요? 사장은 몸에 이상이 생겨 생사를 가르고 있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사장은 성실했던 강 집사님이 생각났고 그만 두라고 했던 그 회사를 맡아서 운영하라고 하면서 운영권을 넘겨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졸지에 쫓겨 날 뻔했던 회사를 이제는 며칠 사이에 운영자의 위치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역사로밖에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얼마 후 몸이 회복되었지만 별다른 일을 찾지 못하던 전 사장은 강 집사님이 CEO로 되어 있는 그 회사에 들어와서 강 집사님이 하던 힘든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일을 보면서 저는 하만과 모르드개가 떠올랐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드라마틱한 역사에 전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교회에서 안수 집사로서 십일조를 제일 많이 하는 복된 가정입니다. 교회가 재개발로 어려워졌을 지라도 그분들은 변함없이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철새처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성도들이 많은 시대에 모든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는 아름다운 가정입니다.
551 no image |수 필| 제임스의 이야기_김영숙 사모
편집부
3520 2011-02-23
제임스의 이야기 < 김영숙 사모, 일산새하늘교회 > “나는 성도들 앞에서는 사랑을 외치면서도 자기 아들이 나쁜 영향을 받을 것만 두려워하는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엄마였습니다.” 고등학생 제임스를 처음 만난 것은 남편이 미국 덴버에서 목회할 때였습니다. 제임스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가정 폭력자였고 어머니는 집을 뛰쳐나가서 자녀들을 돌보지 않아 제임스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결국 제임스 남매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고 있었는데 제임스의 친척들도 한인 사회에 소문날 정도로 온전한 가정이 없는 어려운 환경이었지요. 어느 날 제임스가 우리 교회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제임스의 표정은 매우 어둡고 반항이 가득 차 있어 불안해 보였습니다. 설교 시간에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어느 때는 쿨쿨 잠을 자기도 했지요. 제임스는 꾸준히 학생부 예배를 참석했지만 말투는 욕설에 가까웠고 말할 때도 발을 흔들거리며 불량스런 행동을 해서 온 성도들이 염려를 했습니다. 더군다나 학교를 결석하는 일이 잦아 퇴학 직전에 놓여있어 교회 부모님들은 그 아이의 사정이 안타까우면서도 자신들의 자녀가 나쁜 영향을 받을 것이 두려워 그 아이와 친해지는 것을 꺼려하기까지 했었지요. 부끄럽게도 나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가장 심하게 제임스를 거부했지요. 그런데 제임스는 내 아들과 같은 학년이어서 교회에서 늘 붙어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우리 집에 자주 오더니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친척집에 얹혀 살고 있던 그는 우리 집에서 지내는 날이 차츰 많아지기 시작했고 내 아들과 제임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밤을 새는 날도 많았습니다. 나는 제임스의 행동을 더 주시하게 되었고 미워하는 마음까지 생기더니 기도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요. 사모의 체면이 있어 걱정하는 모습을 숨기고 최대한 웃는 표정으로 제임스를 대했지만 내 마음이 드러났는지 제임스는 내 앞에서는 우물쭈물 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내게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엄마, 제임스한테 좀 더 잘해주면 안돼요?” “내가 지금 잘하고 있지 않니? 맛있는 것도 해주고........” “엄마, 그런 것말고 다정하게 말도 건네주고 등도 쓰다듬어 주고 그러면 좋겠어요. 제임스는 그런 사랑이 필요해요. 불쌍한 얘예요.”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더 이상은 기대하지 마.” 나는 쌀쌀하게 말하면서 돌아섰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임스의 불량스런 눈빛이 조금 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습니다. 나는 성도들 앞에서는 사랑을 외치면서도 자기 아들이 나쁜 영향을 받을 것만 두려워하는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엄마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교회 중고등부가 그 지역에서 열리는 학생 부흥 운동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흥운동에 참석하고 온 학생부 아이들이 달라지기 시작했지요.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경건생활을 한다며 세상 CD를 모두 버리고 복음송만 듣더니 교회에 모여 QT를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교회 점심시간에는 어른들 식사를 식탁에 다 나르고 난 후 가장 늦게 점심을 먹으며 기쁨의 미소를 지었지요. 그런데 그 중에 가장 많은 변화를 보인 사람은 바로 제임스였습니다. 제임스의 얼굴에 웃음이 깃들기 시작했지요. 걸음걸이가 달라지고 말투가 부드러워지고 예배드리는 태도가 달라지더니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염려와 불안을 단번에 깨뜨리신 분은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이기적인 사랑과 편견으로 뭉쳐진 믿음 없는 나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제임스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학생부 모든 영혼들을 함께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학생들의 성령 폭발로 인해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봉사하고 더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어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지요. 주님은 우리 두 자녀들까지 덤으로 은혜를 주셔서 우리 부부가 돌보지 못했던 자녀들의 신앙을 한 단계 더 올려놓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의대 공부를 하다가 잠시 방학을 이용해 한국에 다녀간 아들이 와서 전해 주는 이야기는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엄마, 제임스 소식 궁금하시지요. 제임스가 대학 다닐 때 어려움이 좀 많았지만 무사히 졸업을 하고 지금은 좋은 직장에 잘 다니고 있어요. 제임스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나도 놀랄 때가 많아요. 옛날의 제임스가 아니거든요.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님, 누나와 동생 모두 교회로 인도해서 지금 신앙생활 잘 하고 주일학교에서 봉사하고 있어요. 이제는 친척들도 한 명씩 돌아오고 있는 중이에요. 그리고 올 봄에 믿음이 좋은 가정의 아가씨와 결혼할 거예요.” 지난 날 나의 편협하고 옹졸한 생각들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더듬거리며 대답했습니다. “정말이니? 참 잘 되었네. 하나님이 하셨구나.” 그러나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임스의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였다는 사실입니다. 뒤돌아보니 어리석고 실수 투성이었던 내가 지금까지 사모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토록 오랜 세월을 기다리셨습니다.
550 no image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자세_최에스더 사모 (3)
편집부
4119 2010-12-22
동성애자들에 대한 자세 < 최에스더 사모 · 남서울평촌교회 > 동성애가 한국사회와 한국기독교내에 언제 어떤 식으로 주요 쟁점으로 떠오를 것인지 나는 꽤 오랫동안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대학생이 되어 성경을 자세히 읽고 공부하게 되면서 소돔과 고모라 성에 있는 롯을 구하기 위해 왔던 천사들이 그 성에 도착한 날 밤에 보게 된 그 일이 동성애와 관련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이미 서구문화의 한 가지 코드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동성애였고, 성경에서 죄로 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창세기의 롯의 그 날 밤의 사건의 전말은 나와 시간적, 공간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나의 도덕적, 윤리적 감성에 너무나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동성애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언제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이 시대, 이 사회에 그 문제가 등장할 것인지 지켜보게 되었다. 어쩌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어리석게도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결국은 멸망으로 치닫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일종의 종말론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팔짱을 끼고 서서 혀만 차며 세상을 보고 있기에는 내가 속한 교회공동체의 입장이 많이 다급해져버렸다. 동성애자 차별금지 법안이 입법기관에서 통과되어 세워지면 이런 저런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동성애자들이 지목하는 그 종교란 바로 우리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기에 왜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왜 우리는 덜컥 가슴이 벌렁거리며 절대로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을 꼭 붙들고 있는 사람처럼 긴장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고민을 좀 깊게 하자니 그들이 참으로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들도 우리 자신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동성애를 죄로 정하셨다. 분명한 사실이다. 레위기 18장 22절에 말씀하셨다. 동성애뿐만이 아니다. 보통 사람은 생각지도 못할 각각의 죄들이 줄줄이 나와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순결하게 지키시고자 하나하나 다 짚어주시는 것 같다. 마치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기를 위해 조그만 물건에도 툭 하고 넘어질까봐 그 앞에 있는 이것저것을 다 치워주는 부모와 같은 모습이다. 구약에서 이렇게 지목하는 죄는 대부분 사형에 해당하는 죄다. 동성애도 마찬가지다. 여기까지라면 동성애자들이 교회를 비판할 만도 하겠지만 우리는 유대교도 아니고 이슬람교도 아니고 기독교다. 모든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구원을 얻는 기독교를 동성애자들이 배척하고 매도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죽어 마땅한 죄로 정해졌으나 그 죄를 지은 죄인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날 때부터 동성애자이거나, 자라면서 형성이 된 동성애자이거나,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람이거나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죄인이었고 하나님과 원수였으나 그 죄인과 원수였던 우리를 위해서 사랑의 왕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살려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동성애자들을 교회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죄하였는가? 의도적으로 불이익을 주었는가? 철저하게 따돌렸는가? 힘을 합하여 돌팔매질을 하였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동성애가 우리나라 문화의 전통과 사람들의 보통 정서에 참으로 가문의 영광이 되는 일인데도 유독 기독교만 찬물을 끼얹고 있는가? 동성애자의 부모가 느끼는 보람과 감사에 교회가 손가락질을 하였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동성애자들은 교회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믿는가에 대해서는 헌법이 그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동성애뿐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이 죄로 정하시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그것은 죄라고 가르칠 것이다. 헌법이 이것을 보장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지하로 스며들거나 국경을 넘거나 죽음을 택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우리는 끝까지 용납하고 사랑하며 중보하며 헌신할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르자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과, 가장 큰 죄인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상대하지 말 것이 우리의 행함의 극한이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동성애를 죄로 보는 우리는 동성애자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고 중보할 것이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사랑하는 기독교를 향해 어떻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가.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근원적으로 원수 마귀의 궤계가 있겠지만 그들은 왜 모르고 있으며, 왜 못 보았단 말인가. 혹시 우리가 사랑하지 않아서는 아닐까? 우리와 조금만 달라도 정죄하기 바빴고, 미워하기 좋아하고, 따돌려서 내치기에 능했던 것은 아닐까? 원수는 내가 갚아줄 것이니 너희는 다만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교회 안에 살아서 역사하고 있는가? 교회가 참 교회되지 않았는데, 기독교가 참 기독교답지 않은데 어떻게 세상을 향해 기독교는 이런 종교인데 너희가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외칠 수 있단 말인가. 12월이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의인으로 칭함을 받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도, 나아가 성경이 죄인이라고 하고 있는 저들에게도 예수님의 사랑은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 모든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오셨다. 유대 땅 베들레헴 어딘가 마굿간 구유 위에 강보에 싸여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오셨다. 이 예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는 성탄절이 되기 바란다.
549 no image |살구나무그늘아래서| 강제로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_추둘란 집사 (1)
편집부
3819 2010-12-15
강제로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추둘란 집사, 수필가, 홍동밀알교회 > “하나님과 함께한 지난 10년이야 말로 천국이라 말할 수 있어” 하나님이 어떤 기준으로 하늘나라 백성을 택하고 구원하는지 알 수 없지만, 나 같은 사람도 구원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은혜 중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처음 교회를 나간 것은 여섯 살 때였습니다. 경찰관이던 아버지의 발령지를 따라 통영 앞바다의 작은 섬에서 두 해를 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교회가 있었고 섬마을 아이들을 따라 다니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기적과 같은 은혜입니다. 지금도 남해안 섬에는 교회가 없는 곳이 많은데 삼십여 년 전,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을지언정 복음이 들어와 있는 섬으로 보내주셨으니 말입니다. 믿지 않는 부모님에게는 섬 생활이 고난의 시기였지만, 그 섬에서 하나님의 첫 번째 부르심을 받은 나는 감히 말하건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두 해를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다시 통영 시내로 이사를 오면서 교회와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때 할머니의 부고를 전해들은 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이 엄청난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하여 친구가 다니던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중고등부 시절에 하나님의 말씀 옆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귀에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려웠고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 소망을 얻었다가도,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내 부모 형제가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라는 설교를 들을 땐 깜깜한 절망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 두 가지 말씀을 구별하여 이해할 만한 지혜나 믿음이 그때만 해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의 확신이 없으니 세례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1 때 학습세례를 받았으나 6개월 뒤 세례식에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세상 즐거움을 다 놓칠 것만 같았습니다. 통영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니 얼마나 자유롭던지요. 나는 다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88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세상도 호황이요 나의 모든 일도 잘 풀려나갔습니다. 대학도 한 번에 붙었고, 학기마다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고, 전공을 바꾸어 응시한 대학원 시험에도 쉽게 합격했습니다. 취직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모든 일이 마음먹은 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꿈에 가까이 다가간 듯 했고, 뭔가 성공한 듯한데,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헛헛하고 무엇을 해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즈음 IMF가 터졌고 서울생활을 정리한 나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 서산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습니다. 결혼하면 행복만 있을 줄 알았는데, 첫아이 민서가 다운증후군 장애아라는 판정을 받으면서 모든 꿈은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뒤쳐진다든가, 패배를 맛보지 않은 나로서는 회복이 불가능한 실패자가 된 듯 했습니다. 민서가 백일을 맞을 즈음, 남편이 직장을 찾아 홍동으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들어본 적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더욱이 남편은 직장인 환경농업교육관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굳이 가겠다는 남편을 말릴 수가 없어서 무작정 살림살이를 챙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세 번째 부르심이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몰고 가던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이 민서를 통하여 강제로 돌려놓아 버리셨고, 아는 사람이라곤 전혀 없는 낯선 시골 마을에서 하나님은 내 인생을 다시 출발시키셨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그동안 왜 행복하지 못했는지 깨달았습니다. 이미 택함을 받은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행복할 수가 없고, 반드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듬해에, 섬마을 작은 교회와 너무도 닮은 작은 시골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학습세례를 받은 지 꼭 16년만이었습니다. 세례는 나에게 “이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인정합니다”라는 절절한 고백이었습니다. 그 고백이 있은 지 10년 세월 동안, 하나님은 날마다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너무 높은 데 계셔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찾아와 주시지 않을 것 같던 그 하나님이 내 생활 곳곳에 세세하게 찾아오셔서는 살갑게 보살펴 주셨습니다. 스무 살부터 서른 살까지 하나님을 떠나 산 10년과, 서른 살부터 마흔 살까지 하나님과 함께 한 10년을 비교하면 딱 지옥과 천국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구원해 주시지 않았으면 나는 인생이 저주 덩어리요, 슬픔과 고단함뿐인 줄로만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민서를 보내주시지 않았으면 이 세상에 장애인도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외면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작은 시골교회로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오늘도 어느 도시의 스산한 골목에서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이 가르쳐 주지 않았던 삶의 통찰력이나 지혜를 시골 어르신들에게서 배울 수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크고 작은 은혜를 입고도 그것이 은혜인 줄 모르고, 더욱이 그 은혜를 글로 써서 세상에 조곤조곤 들려주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구원하신 그 일에 나의 의지나 나의 노력은 단 1%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나를 지으셨고 나를 아시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구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얼마나 큰 사랑인지 내 평생 글로 쓴다 해도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548 no image |수 필| 눈물젖은 송이버섯_김영숙 사모
편집부
4705 2010-12-08
눈물젖은 송이버섯 < 김영숙 사모, 일산새하늘교회 > “한참 자고 나서 깨어보니 아직도 깊은 산속이어서 이제는 죽는구나 싶었지요. 얼마가 지나자 불빛이 보이더니 미국 경찰들이 큰 개를 데리고 나타나더군요.” “하마터면 내가 목사님, 사모님을 다시는 못 볼 뻔했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꿈만 같아요.” 미국 덴버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함께 교회를 섬겼던 신 권사님이 며칠 전 한국을 방문하셔서 만나 뵈었는데 만나자마자 그 말씀을 하시더니 우리를 끌어안고 한참을 가만히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78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씩씩한 권사님이었는데 그 날은 기운이 없어 보였습니다. “권사님, 그동안 많이 편찮으셨나요?” “아니요. 문제는 송이 때문이었어요.” 해마다 9월이면 록키산 자락으로 죽은 소나무 밑에서 자라는 자연산 송이버섯을 캐러 다니던 성도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면 아무런 표지판도 없고 인적도 없어 염려가 되어 만류할 때마다 그들이 하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자연산 송이가 우리를 부르니 안 갈 수 없어요. 9월 중순이 되면 자다가도 송이가 눈에 어린다니까요.” 권사님은 한숨을 한 번 더 쉬시더니 다음과 같이 자초지총 설명하셨습니다. 두 주전에 와이오밍 산으로 버섯을 캐러 갔는데 가다보니 여기저기에 송이가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계속 송이를 따라가며 많이 캤지요. 한참 가다가 주위를 살펴보니 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갑자기 겁이 덜컥 나서 딸과 일행들의 이름을 부르며 산속을 헤매다 보니 밤이 되고 말았지요. 배도 고프고 걸을 힘도 없어 캐 놓은 버섯을 먹고 나니 피곤이 몰려와서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한참 자고 나서 깨어보니 아직도 깊은 산속이어서 이제는 죽는구나 싶었지요. 사나운 짐승들이 밤에 어슬렁거린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짐승들이 오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데려가시라고 기도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져서 계속 찬송을 부르고 있었어요. 얼마가 지나자 불빛이 보이더니 미국 경찰들이 큰 개를 데리고 나타나더군요. 나에게 한국말로 “엄마? 엄마!”라고 하기에 나도 “엄마! 엄마!”라고 했더니 나를 헬리콥터 있는 곳으로 데려갔어요. 헬리콥터를 타고 내렸더니 그곳에 내 딸이 초죽음이 되어 일행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지요. 내 딸이 미국 경찰들에게 내가 영어를 못하니 그냥 “엄마, 엄마”라고 하면 알아들을 것이라고 했다는 거예요. 나를 찾기 위해 수십 명의 미국 경찰들과 경찰 개들이 동원되었대요. 나를 찾은 시간이 밤 11시쯤이었다고 하더라고요. 목사님, 사모님! 내가 그래서 이렇게 살아 한국에 다니러 왔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자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권사님, 내년부터는 절대로 송이버섯 캐러 가지 마세요.” “............” 권사님이 대답을 안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권사님이 잡수시려고 그 송이를 캐는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에 흩어져 사는 자녀들에게 보내려고 그러는 것을 알기에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권사님과 함께 섬기던 교회를 떠난 지 7년이 넘었는데도 해마다 고사리 철이 되면 고사리를, 송이버섯 철이면 송이버섯을 말려 보내시던 권사님이 올해에도 어김없이 내 것까지 챙겨 오셨습니다. “권사님, 그동안 저에게 주신 사랑만으로도 충분해요. 목사님과 제가 미국을 떠나 한국까지 왔는데 이제 잊을 만도 하시잖아요. 그 교회를 떠난 지 벌써 7년이나 지났는데........” “사모님은 멀리 떠났다고 자식이 잊어지나요? 사모님을 내 큰딸처럼 생각하고 살았어요. 60살이 되도록 한글을 못 깨우쳐서 사람답게 살지 못했는데 사모님이 내 눈을 뜨게 해 주었잖아요. 그 은혜를 어떻게 내가 잊을 수 있습니까?” “권사님! 그 일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세요. 그동안 제가 받은 사랑이 얼마인데요.” 처음 부임해서 교회에 갔더니 성경을 거꾸로 들고 있던 어른이 계셨습니다. 내가 한글을 가르쳐드리겠다고 했더니 그분은 이제 늦었다고 만류하시던 것을 설득해서 4개월만에 한글을 깨우치시고 열심히 신앙생활하시다가 권사님까지 되셨습니다. 미국 덴버에서 목회하던 11년 동안 그분은 우리 부부에게 늘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보여주신 분이었습니다. “권사님, 한국에 오니 자연산 송이버섯보다 더 좋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러니 제발 내년에는 그렇게 험한 산에 가지 마세요. 다른 자녀들도 같은 생각일거예요. 제발!” 그 말을 하다 말고 나는 결국은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사모님! 이 늙은이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요. 그러니 나 하고 싶은 것 하게 놔두세요. 내년에는 딸의 팔에 끈을 묶어 갈 테니 걱정 마세요.” “권사님! 이제 더 이상 목이 메어서 그 송이버섯은 못 먹을 것 같아요. 제발 이제는 보내지 마세요.” 그러나 그 말은 권사님의 우렁찬 음성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이 자연산 송이버섯이 좋긴 좋은가 봐요. 그것 먹고 몸이 좋아진 사람이 많대요. 목사님, 사모님! 이것 먹고 아프지 말고 튼튼해져서 목회 잘해야 됩니다. 그것이 이 늙은이 소원이니까요.” 권사님의 그 활기찬 목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내 여린 가슴속을 떠돌고 있습니다.
547 no image |하늘이슬로 쓴 편지| home, homeless_이영란 사모 (7)
편집부
4087 2010-10-13
home, homeless < 이영란 사모, 좋은소식교회 > “나그네 같은 우리들에게 교회를 주신 주님이 고마워” “집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버지 집이에요, 바로 내 집에 온 거예요, 제가 옆에 있으니 마음 편히 가지세요!” 주눅이 들어있는 그녀를 옆에 앉히고 안심시켰다. 공원에서 새에게 먹이를 주던 그녀와 만난 지 거의 백일쯤 된 것 같다.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오직 한 가지, 서로 친구가 될 수 있게 해 주세요!’라는 마음으로 거의 매일 만나왔다. 한두 번 도움이나 주고 말았을 텐데 이렇게 신중하게 만나온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읽은 책(나의 고민, 나의 사랑/ 필립 얀시) 때문이었다. 책 내용을 나누던 중에 이미 그 아줌마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기에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맞아주었다. 소박하지만 진실된 환대 속에서 편안히 예배드리고 식사까지 하고 갔다. 석 달이 넘도록 그녀의 회색 츄리닝은 바뀌지 않았다. 조그만 배낭에 무엇인가 가득 했다. 비오는 날은 팔각정에서, 그렇지 않은 날은 나무 아래 벤치에서 밤을 지냈다. 누군가 도움을 주면 한 두끼 식사를 할 수 있었고 때로 운이 좋은 날은 찜질방에서 자면서 옷도 빨 수 있었다. 친구로 만나기 위한 마음이 있었기에 작은 것만을 조심스럽게 나누었다. 처음에는 주로 쌓여온 원망과 증오심을 토해냈다.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형제들, 이렇게 만든 남편에 대한 배신감, 마찬가지로 친구와 이웃들 나아가서는 가진 자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병에 걸린 그녀에게 도움을 주었던 교회마저 자신을 더 비참하게 하는 것 같아 발걸음을 끊게 되었다는 고백들을 들으며 공감하게 되었다. 얀시의 책에서도 한 알코올 중독자 역시 “교회에는 당당하고 안정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발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었다. 교회가 가시적이고 숫자적인 비전과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직과 행사, 프로그램 속에서 오히려 주님의 제자의 길을 제대로 걷고 있는지, 조용히 발을 씻기시는 주님을 본받아 더 낮아져 세상을 섬기기가 어렵다고 언급하고 있었다. 세상의 그늘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교회를 집과 가족으로 만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절박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나 또한 한 사람이 어떻게 노숙자가 되는지 가장 낮은 세계에 발걸음을 들여놓으면서 하나하나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 동네 주민이었고 직업도 가지고 있었으며 급조결혼해서 남편과도 살았다. 그러다가 암 수술을 받고 많은 돈을 쓰게 되면서 결국 남편의 칼부림으로 힘든 다리 수술을 하고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후에 신용불량자가 되면서 형제들의 도움도 끊기고 결국 길에 나앉게 되었다. 그리고 집없음(homelessness)의 그 막막한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프레드릭 뷰크너는 ‘우리는 모든 친숙한 것들 속에서 안도감에 둘러싸여 궂은 날씨에 피할 수도 있고 힘들 때 틀어박혀 상처를 핥을 수도 있지만 아직 비바람을 피해 누울 건물 구석구석을 찾아 어두운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나는 밥을 푸면서 혹은 비가 오는 소리를 들으며 그분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작은 도움을 주긴 하지만 가서 배부르게 하고 따뜻하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일뿐이었다. 뷰크너가 ‘다른 사람의 절실한 필요를 외면하고, 다가가야 한다는 내면의 깊은 책임감에 대해 눈을 감는다면 우리는 어디에서도 평안할 수 없다’고 한대로라면 안정된 집안에 있다 해도 그들을 돌보지 않는 우리 역시 홈리스라는 뜻이 아닐까! 놀라웠던 것은 늘 담소를 나누던 아줌마들도 내가 그녀를 만나는 것을 보면서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청소 미화원들도 격려하듯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벌써 옷가지 등 도와준 분도 있었다. 특히 놀란 것은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 매우 공격적이어서 대화를 피해오던 분이 며칠 전에는 “그 노숙자 아줌마를 어떤 식으로 만나고 계시는지... 어떻게 돕고 계세요? 교회에는 그런 시스템이 있을 것 같은데, 나도 같이 하고 싶으니 좀 알려 주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우리들에게 부담이 되던 이 노숙자 한사람으로 인해 오히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갑자기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또한 그녀를 통해 그 외에도 10명이 넘는 노숙자가 공원에 있다는 것과 간헐적으로 빵과 우유 등 도움을 주는 단체나 개인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남편과 함께 우리가 아니 우리 교회가 작은 것부터라도 지속적으로 섬기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듯 책을 읽게 하시고 동시에 그녀를 내 옆에 이끌어 오셔서 가족으로서 교회, 세상을 섬기는 교회를 고민하게 하신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벌써 그녀는 점점 우리 교회를 가족으로 느끼기 시작했고 추석명절에도 성도들의 사랑을 느꼈다. 이분을 생각하면 주의 피로 세우신, 영원한 집에 가기까지 홈으로서의 교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뿐이겠는가, 우리 역시 아버지 집을 향해 가는 이 땅에서의 고독한 홈리스이다. 또한 말구유로 오시고 이 땅에서 머리 둘 곳 없이 우리보다 먼저 홈리스(Homeless)로 사셨던 주님! 그래서 우리들의 영원한 홈(Home)이 되신 주님께 얼마나 고마운지, 누구보다도 내가 더 고맙고 감사하다.
546 no image |노트북을 열며| 조금만 강박증에서 벗어납시다_변세권 목사 (96)
편집부
4893 2010-10-13
조금만 강박증에서 벗어납시다 < 변세권 목사·온유한교회 > “하나님의 신비에 교회를 맡기는 자세 가져야” 올 여름 유난스런 폭염과 소나기, 열대야로 가을이 언제 오겠냐 싶었는데 살갗에 닿는 선선한 바람이 가을 속으로 이미도 많이 들어와 있음을 실감케 한다. 하늘이 참 맑고 푸르다. 감사한 일들이 주변에 이렇게 가득한데도 늘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움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성장에 대한 부담감과 강박증이다. 이런 나의 강박관념에 대해서 필립 얀시는 “나는 사람 자체를 염려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고통에 더 노심초사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질문을 하면서 그런 걱정을 타인의 고통을 참지 못하는 ‘소모성 자기번민증세’라고 했다. 즉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사람은 교회, 공동체, 나라 아니 우주 전체의 운명이 헌신적인 사역자 한 사람의 어깨에 달렸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절박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사역이란 때때로 그의 말대로 어떤 초연함을 요구한다. 작가 부흐너는 이 초연함에 대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네 몸을 네 이웃과 같이 사랑하라는 뜻과 통한다”고 했다. 타인을 돌볼 수 있도록 너 자신을 돌보라, 남을 돕겠다고 피를 흘리되 죽을 정도로 흘리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립 얀시는 타인을 위하겠다는 불건전한 자기희생증후군, 사람자체보다는 그 사람의 고통을 더 짊어지겠다는 태도를 ‘구세주 강박증’이라고 했다. 그는 또 “예수님도 정녕 인간 자유에 대한 놀라운 존중심을 보여주었는데 그 분은 결코 당신 생애에 온 세상을 회개시키겠다고 나서지 않으셨고 준비 안 된 사람들까지 모두 책임지겠다고 마음먹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교회가 어느 한 편에 치우치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모든 문제에 답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세주강박증이라고 부르는 태도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도 초탈해계시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그 위기를 극복하셨는데 당신 혼자 그 무거운 짐을 가지고 가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으셨다. 당신을 이 땅에 보내주신 분은 아버지였으므로 그 짐 또한 아버지께 돌렸다. 그리하여 그분의 기도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였다. 이 기도는 단순히 내 뜻을 접고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닌 것에 복종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는 측량할 수 없는 깊은 진리를 외치셨다. 지상교회는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 인간들로 구성되었기에, 때때로 사명에 좌절하고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모험이다. 완벽을 기대하고 교회에 들어가는 자는 이 모험의 본질도, 인간조건의 본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완벽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뜻에 합하도록 수종드는 것만이 필요하다. 교회는 예수님이 혼자 자신을 지시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역자 한 사람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아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신비에 교회를 맡겨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 교회는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혼자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지고 번민하는 사역자나 독자가 있다면 이번 기회로 구세주강박증을 내려놓자. 우리 주님도 내려놓으셨기 때문이다. 늘 강박관념으로 다가오는 외형적인 교회성장의 부담을 잠시 내려놓고 진리 안에서의 자율과 책임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자유와 거룩, 기쁨으로 감당하는 사역자들이 되었으면 한다.
545 no image |채석포에서 온 편지| 암흑의 3일 _김영자 사모 (18)
편집부
4973 2010-09-15
암흑의 3일 < 김영자 사모, 채석포교회 > “악몽 지나자 다치지 않고 남겨진 성도들 감사하는 계기돼” 방학과 휴가철을 맞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쉼과 삶의 재충전을 하기 위해 바닷가와 소나무 숲이 있는 채석포와 주변 바닷가를 많이 찾아옵니다. 그동안 이곳은 주변에 많은 소나무가 있고 해풍이 불어오기 때문인지 그다지 더운 줄 모르고 여름을 보냈었습니다. 올해 여름은 예년과는 달리 잦은 비와 높은 기온으로 인하여 무척이나 힘든 여름이었습니다. 반면에 가을 어장이 시작되면서 잡히는 많은 꽃게를 보면서 성도와 주민들은 가을 어장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활형태가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정보 사회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도회지로 떠나고 나이든 어른들만이 고향의 지킴이가 되어 있는 것이 농어촌의 현실이 된지도 오래입니다. 조상들이 물려준 고향의 땅에 터를 잡은 이들은 수확한 여러 가지 농작물을 자식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생각하며 구부러진 허리에 힘들고 피곤한 것을 참으며 날마다 일터로 나갑니다. 그날도 어느 날과 마찬가지로 동네 분들은 일기예보를 듣고서 어장으로 나갔고, 밭에 나가 막바지 붉은 고추를 따느라고 분주했습니다. 일기예보에서는 비와 태풍이 온다고 했지만 오보라고 느낄 수 있을 만큼 너무나 맑은 하늘과 소나무가 간간이 흔들리면서 바람까지 불기도 했습니다. 성도들은 어둑해 질 무렵 하던 일을 내일로 미루고 수요일 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일을 마무리 했을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성도들과 서로 안부를 물어가며 즐겁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는데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벼락을 치는지 순간적으로 유리창에 번쩍이는 불빛과 천둥소리에 놀라 무의식적으로 귀를 막고 머리를 베개 속으로 묻었지만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그 동안 안방과 남편의 서재에 큰 유리창이 있는 것이 자랑이었습니다. 창문만 열면 큰 소나무 사이로 멀리 보이는 바다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과 위로를 받으며 행복한 시간들을 가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아름다운 경치를 선물한 유리창 너머로 소나무를 뿌리 채 흔들리게 하는 광풍은 심장을 멎게 할 만큼의 무서움과 두려움이었으며 바다 위로 뿌옇게 흩날리는 물보라와 굉음소리를 내는 성난 파도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계절마다 변화되는 집 주위의 풍경을 정원처럼 느끼고 싶어서 유리창이 유난히 많은 집이었으나 아름답게 보였던 그 모든 것들이 무서운 무기가 되어 우리를 무섭고 떨게 만들었습니다. 광풍으로 인한 광음들과 뇌성으로 인해 고막은 찢어질 것 같았고 나무가 부러지고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서움으로 몸 하나 까닥할 수 없었습니다. 벼락으로 인해 전기는 나가고 온 세상이 캄캄한 속에서 무서운 자연의 소리만이 온 밤을 무서움으로 보냈습니다. 무서운 밤도 지나고 바람이 조금 잔잔한 이른 새벽에 남편은 성도들의 집이 걱정되어 안위를 살피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는 마당으로 나와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밖으로 나와 보니 교회 마당에는 부러진 아름드리 소나무 둥치와 건물 파편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으며 소나무 가지가 수북하게 널려져 있었습니다. 작은 텃밭의 작물들과 주위의 식물들은 거센 바람으로 인해 넘어졌으며 밤새 내내 불안에 떨게 했던 소나무들은 밑 둥이 잘리고 주위의 많은 나무들도 부러지고 넘어져 있었습니다. 한참 만에 돌아온 남편은 성도들의 가정에는 인명 피해는 없지만 건물과 논과 밭과 어장에 큰 피해가 있으며, 모든 길이 막혀서 차량통행이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꼭 있어야 하는 비닐하우스가 다 날아가 버린 것은 기본이고 창고가 무너지고 지붕이 날아가고, 담도 무너졌습니다. 임시 주택으로 사용한 콘테이너는 광풍으로 넘어진 체 도로에 누워 길을 막아 자동차를 다닐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밭에 남겨진 고추와 농작물은 손을 댈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흩어져 있는 건물의 파편들을 보고 망연자실했습니다. 도로의 전신주와 가로수, 주위에 있는 큰 나무들이 부러지고 넘어져서 도로를 막고 있어 돌아보지 못한 성도들이 걱정되어 수화기를 들었지만 전화와 핸드폰까지도 불통이었습니다. 수돗물도 단수가 되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나이 들고 힘이 없는 놀란 가슴으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텔레비전에서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던 재난의 소식들이 우리에게 닥쳤습니다. 멀리서 포크레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도로에 엉켜 있는 나무들을 치우기 위해서입니다.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나였지만 이런 모습들이 전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습니다. 각 가정마다 피해가 속출되어 일손이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방송을 본 도시에 있는 자녀들의 긴급출동으로 무너진 하우스와 어지럽혀진 주변을 정리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십자가가 있는 용마루가 흩어져 날아가고 주변의 나무들은 다 부러지고 넘어졌으며 몇 십 년 된 소나무도 몇 그루 뽑혔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주변을 밝히기 위해 촛불을 밝히면서 어릴 때 호롱불을 켰을 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포로 불을 밝히고 환해진 불빛으로 책을 읽으면서 기뻐했던 기억을 생각해 보면서 빛의 소중함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특별한 날에나 사용했던 촛불 두 개를 모아서 불을 밝혔습니다. 삼일 동안 모든 것들이 암흑과 정지 상태였습니다. 소식도 끊기고 냉장고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은 쌓여가고 시간이 지나 갈수록 불편하고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암흑의 삼일을 보내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솜씨에 감탄과 찬양은 했지만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 삶 속에서도 태풍과 같은 수많은 시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복케 하셨으며, 그 모든 것들은 내가 감당할 만큼의 시련이었음을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일날 성도들의 모습은 너무나 지치고 힘들게 보였지만 태풍으로 인한 상흔들은 점차 회복되고 그 악몽의 밤에도 다치지 않고 남겨진 우리들의 모습으로 감사하며 찬양하는 성도들을 볼 때 시편 말씀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라.” 너무나 두려운 태풍의 잔해들이 남겨졌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태풍으로 인해 뒤집혀진 바다는 더 많은 고기가 생산되고 노후 된 나무들의 간벌(?)로 말미암아 새로운 어린 나무들이 자라서 아름다운 강산이 될 것입니다. 지금도 놀란 가슴을 다독이며 암흑천지의 삼일을 돌아봅니다.
544 no image |수필| 추석이면 생각나는 이야기_김영숙 사모 (1)
편집부
4281 2010-09-15
추석이면 생각나는 이야기 < 김영숙 사모, 일산 새하늘 교회 > “나를 부르는 주님의 음성이 있기에 늘 새 힘 얻어” 해마다 추석이 되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습니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그날은 오랫동안 떠나 있던 오빠가 집으로 오는 날이었습니다. 당시 8-9살이던 나는 며칠 전부터 오빠가 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나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잘 놀아 주지는 않았지만 당시 대학생이었던 오빠는 나의 우상이었습니다. 오빠가 들려주던 대학교 이야기는 언제나 신나고 재미있어서 상상의 나래를 펴며 듣곤 했습니다. 오빠를 더욱 좋아했던 것은 그 당시 흔하지 않았던 동화책을 늘 빌려다 주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빠가 빌려다 준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읽고 나서 다락방에 올라가 하이디의 흉내를 내면서 하이디의 할아버지를 불러보기도 했습니다. 동네골목에 나가 기다리고 있는 데 멀리서 오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리던 오빠가 왔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반갑게 뛰어가지 못하고 내가 숨을 곳부터 찾는 것이 아닙니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서 쑥스럽기도 하고 부끄러워 숨고만 싶었습니다. 숨을 곳을 찾던 중 급한 나머지 마당에 있는 변소로 들어갔지요. 오빠가 집에 오자 온 가족들이 이야기꽃을 피우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그동안 더 씩씩해졌구나. 서울 생활은 재미있었니?” “네, 이번 학기에는 장학금을 받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변소 안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오빠 목소리를 듣고 웃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냄새나고 후덥지근한 변소를 어떻게 빠져 나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나중에는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것이 너무 슬퍼서 소리 없이 울고 있었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몰랐습니다.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오빠가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빠는 정말 너무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나를 찾지도 않다니.’ 집안에서 떠들썩하던 소리들이 차츰 잦아들더니 그때야 누군가가 나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 까지 있었던 영숙이가 안 보이네요. 얘가 어디 갔지? 오빠를 그렇게 기다리더니.” 비로소 온 가족이 내 이름을 부르며 찾기 시작했습니다. “영숙아! 영숙아!” 그때까지 변소에서 땀을 흘리며 훌쩍 거리고 있던 나는 이제야 살았다 싶어 마음은 뛰어 나가고 싶었지만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밖으로 나를 찾아 나선 가족들이 집으로 들어오며 한 마디씩 했습니다. “아직 못 찾았어요? 아니 얘가 어디를 갔기에 안 보이지.” 그러던 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변소에 한번 가 봐요. 혹시…….” 누군가 변소 문을 열려고 하자 나는 그제야 밖으로 튀어 나가 “나 여기 있었단 말이야” 하며 엉엉 울었습니다. 오빠가 미소를 지은 채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나를 번쩍 안아 올리며 말했습니다. “영숙아! 왜 여기 있었어. 내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나는 엉망이 된 내 얼굴을 오빠의 어깨에 묻은 채 환하게 웃었습니다. 동생이 옆에서 놀리건 말건 상관없이 한번 터진 웃음은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흐흐흐, 히히히, 호호호.”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절로 웃음이 납니다. 목회현장에서도 지치고 힘들 때마다 여전히 잊지 않고 나를 부르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었기에 새 힘을 얻곤 했습니다. “얘야 어디 있느냐! 어둡고 쓸쓸한 곳에서 바보처럼 혼자 울지 말고 이리로 나오렴. 그리고 내 어깨에 기대어라. 내가 그 웃음을 되찾게 해주마.”
543 no image |들꽃 향기처럼| “아 픔”_윤순열 사모
편집부
4843 2010-09-08
“아 픔” < 윤순열 사모, 서문교회 > “정성 쏟은 성도의 변심에 더 없이 고통을 느껴” 지난 토요일 오후 휴가를 앞두고 카메라 건전지를 사러 홈플러스에 갔던 남편이 와서 한참 후 말문을 열었습니다. “여보 나 홈플러스에서 박 집사 내외를 만났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마음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어두움과 무거움이 밀려왔습니다. 아니 분노라 해야 맞을 것입니다. 남편도 그래서 오자마자 말하지 않고 한참 후 말문을 연 것 같습니다. 그들은 18년 전에 제가 아들을 등에 업고 다니며 전도하면서 만난 전도의 첫 열매로 만난 인연들입니다. 당시 부인은 교회 다니다 쉬는 중이었고 남편은 전혀 교회에 와 본적이 없는 문외한이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방문하면서 부인은 어렵사리 교회에 나와 일대일 양육 제자 훈련 과정까지 마치며 신앙을 키워갔습니다. 그러면서 불신자였던 그 남편까지 전도해 새신자 양육 제자훈련까지 마친 전도의 첫 열매들인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분들은 안수집사와 권사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늘 어두웠던 그 부인은 마음에 변화가 심해 제 마음을 늘 불안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집에서 기분이 좋지 않아도 교회에 와서 그 기분을 거침없이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1년 동안 기분이 좋은날이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저에게 상한 감정을 많이 표현하며 뾰루퉁한 표정을 하여 저희 마음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저는 그를 보면서 왜 나는 저를 기분 좋게 하지 못하고 기분을 상하게 하는 존재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유난히 음식솜씨가 좋아 주방에서 인기가 좋았습니다. 당연히 주방의 권한이 그에게 쏠렸습니다. 냄비 하나 프라이팬 하나도 그의 허락없이는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주방구석에 있는 헌 프라이팬을 고물인 줄 알고 시장에 가지고 가서 새 프라이팬으로 교체해 놓았다가 호되게 질책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왜 물어보지도 않고 쓸 만한 프라이팬을 갖다 주었냐면서 난리였습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그는 자기 허락 없이 물건을 처분한 것에 대해 대단히 불쾌해 하며 소동을 벌였습니다. 이 어이없는 일들이 개척교회 안에서는 비일비재 하게 일어나고 있고 이 보다 더 한 일들도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개척교회 사모들의 서글픔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의 모든 일에 사사건건 불만이 많았던 그 부부는 그 후 몇 년을 더 섬기다가 이웃의 큰 교회로 교회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옮긴 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 또 다른 일이 발생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옮긴 후 그분들은 우리교회 성도들에게 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 오니 너무 좋다, 말씀이 은혜롭다 아이들 교육이 너무 좋다, 특히 일이 잘 풀린다, 결혼적령기에 이르는 외동딸이 당회장 목사님 아들과 사귀게 되어 결혼 날을 받아놓았다, 너무 큰 복을 이곳에 와서 받았다 등등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혼 상대 사윗감이 목사후보생이라는 말이 저에게는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다가 왔습니다. 혼란에 빠진 성도들은 결국 그분들의 전화 설득에 몇 가정이 그분들을 따라 교회를 옮기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 교회는 몇 개월 동안 큰 혼란에 빠졌고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마음 밑에 깔려있던 커다란 응어리가 올라오는 느낌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그 사랑하는 딸과 사위도 힘든 목회여정을 겪으며 살겠지요. 우리를 힘들게 했던 만큼이나 어려운 고비를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는 알게 되겠지요.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이없는 일들 앞에서도 항거할 수 없는 것인지를 어느 집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분들에게 그 아픔을 느끼게 하려고 사랑하는 딸을 그 길로 보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저는 그 말을 들으며 마음이 참으로 씁쓸하였습니다.
542 no image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303가족캠프_최에스더 사모 (16)
편집부
5840 2010-08-18
303가족캠프 < 최에스더 사모, 남서울평촌교회 > “아이들을 훈련해야 복음과 진리가 온전히 전수될 것” 모태에서부터 여름은 주로 교회에서 보냈을 것같은 나같은 사람에게 여름은 단연 수련회의 계절이다. 여름이 다가오면 방학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피서나 바캉스, 여름휴가, 가족여행이라는 단어보다는 여름성경학교, 하계수련회, 기도원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의 첫 테이프는 여름성경학교가 끊어주면서 본격적인 방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청소년이 되면서는 교회를 벗어나 가까운 기도원이나 바닷가 근처의 지방교회에서 열리는 여름수련회를 기대에 부풀어 기다렸다가 반드시 참석했다. 고3 수험생 때에도 절대 빠질 수 없었던 나의 가장 중요한 여름 행사였다. 이렇게 여름성경학교나 수련회를 기다리고 즐겁게 참석하는 것은 그 옛날 별다른 여름휴가계획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나나, 비교적 여행을 자주하는 지금 우리 집 아이들이나 별다르지 않는 것 같다. 4살짜리 우리 집 막내딸을 시작으로 14살 장남까지 각자 자기가 속한 교육부서에서 즐겁고 신나는 성경학교를 모두 끝냈다. 그렇게 아이들의 수련회를 모두 끝내고나서 우리 가족은 특별한 수련회에 참석을 했다. 그 수련회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공식적인 명칭은 ‘303비전가족캠프’이다. 기저귀차고 기어 다니는 아기부터 할머니들까지 오시는, 말 그대로 온 가족이 다함께 참석하는 캠프인데,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캠프다. 캠프일정이 발표가 나면 3,4일 안에 등록인원의 1.5배가 다 차버려서 해마다 인원수를 조금씩 늘여오고 있는데도 ‘아차!’ 하는 사이에 기회를 놓쳐버린 수많은 엄마들의 아쉬움이 넘치는 캠프다. 올 여름이 제7회 캠프였는데 초창기 엄마와 아이들만 주로 온 것과 달리 참석한 가정의 4분의 1정도는 아빠들도 함께 참석하여 가족캠프라는 이름을 빛내주었다. 이 아빠들에게는 일 년에 한 번 밖에 없는, 정말 황금과 같은 여름휴가기간을 온 가족의 은혜를 위하여 희생하고 참석하는 것이라 늘 칭찬과 부러움 넘치는 뜨거운 박수를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캠프는 그냥 와서 앉아있기만 해도 저절로 은혜가 쏟아지는 다른 캠프와는 달리 캠프기간 내내 아주 열심히 성경을 암송하는 캠프이다. 머릿속을 산뜻하게 비워내고 재충전을 하고 싶은 여름휴가에 성경말씀을 장으로 외운다니 어느 아빠들이 좋아하겠냐마는 매년 늘어나고 있는 아빠들의 참석 소감을 듣노라면 역시 말씀은 그 자체로 힘이며 능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동안 가정에서 아이들과 성경암송을 꾸준히 해 온 엄마들이 모여서 그간의 은혜와 기쁨을 나누고 또 어려웠던 점, 힘들었던 점과 고민을 함께 나누기도 하고, 아이와 암송을 하고 싶었으나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다 캠프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싶어서 온 사람들도 있다. 물론 어린 아이들은 짧은 기간 안에 언니, 오빠들처럼 모두 암송하지는 못한다. 그저 앉아서 암송하고 있는 어른들과 형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논다. 한 집에 하나인 아이도 있지만 셋, 넷은 물론이고 다섯인 집에서 형제자매들이 나란히 앉아서 암송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고 든든하기 짝이 없다. 303비전장학회 출신 목사들의 말씀을 듣고 함께 은혜 받으며, 말씀으로 무장된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다음 세대 일군이 되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위하여 모두가 함께 기도하는 시간, 이번 캠프의 암송장인 로마서 12장을 모두가 한 목소리로 암송하며 각 개인에게 부어주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새기는 시간들은 이 더운 여름, 다른 어떤 피서의 자리에서는 얻을 수 없는 꿈과 같은 시간이다. 제각각 집에서 암송을 하다가 여름과 겨울, 캠프에서 만나 다 같이 암송하면서 아이들은 이제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말씀 안에서 한 형제자매요 한 식구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나 혼자만의 지루하고 고독한 싸움이 아니라 서로 격려하고 도전하는 거룩한 매임이요 황홀한 초대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린 아이들이 많이 참여하는 캠프라서 장소섭외가 힘들다고 한다. 어른들을 위한 장소는 얼마나 많은가. 대형교회들은 경쟁이라도 하는 듯 경치 좋은 곳에 훌륭한 시설을 자랑하는 수련원을 많이 짓는다. 그러나 그런 곳에도 다음세대를 위한 배려는 너무나 아쉽다. 겨우 부모님을 따라온 아이들을 위한 놀이방 수준이다. 다음 세대 없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일일이 계시하지 않으시고 가정을 통해, 교회를 통해 전수되게 하셨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그들을 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복음과 진리는 온전히 전수되지 못할 것이다. 각기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기독교의 다음 세대를 보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지금 시작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해 전국에서, 심지어 타국에서 휴가를 반납하고 아이들을 줄줄이 데리고 치악산의 깊은 산골짜기까지 와서 말씀을 암송하고 밤늦게까지 고민하며 기도했던 그 부모들의 열정을 하나님께서 잊지않고 갚아주시리라고 나는 믿는다.
541 no image |살구나무그늘아래서| 6년간의 영적 훈련, 그리고 <파브르 식물이야기>_추둘란 집사 (21)
편집부
4361 2010-08-03
6년간의 영적 훈련, 그리고 <파브르 식물이야기> < 추둘란 집사, 수필가, 홍동밀알교회 > “거절 못해 시작한 번역, 영적 훈련 톡톡히 치르게 돼” 막바지 수정 작업이 진행될 즈음, 출판사의 편집부 담당자에게 말했습니다. “책이 술술 잘 읽혀요, 참 좋습니다.” 그 말은 들은 담당자가 의아해 하며 되물었습니다. “아니, 선생님. 이 책을 선생님이 써놓고는 지금 선생님이 감동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을 안 믿는 담당자여서 그이에게는 다른 이유를 대었으나 나는 속으로 답했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쓰셨으니까 감동할 수밖에요’라고. 7년 전입니다. 후배 한 명과 출판사 직원이 찾아 와서는 번역을 의뢰하였습니다. <파브르식물기>는 불어로 된 책이지만, 영문으로 번역된 것이 있으니 그것을 번역하되 직역이 아니라 내용을 재구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에다, 그이들이 그날 낮에 우리 고추밭에 올라가 고추 곁순을 따준 것이 고마워서 나는 얼떨결에 승낙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문으로 된 책을 받아보니 내용은 대학 생물학 수준이요, 분량 또한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초고는 완성되었으나 그것을 어떻게 다듬어야 할지 출판사도 나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즈음 둘째아이를 출산하게 되었고, 늘 병원을 들락거리는 첫 아이 뒤치다꺼리까지 겹치면서 나는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직장을 잃은 터라 매달 빚내기 바빴고, 아르바이트 삼아 산림조합 간벌작업을 다니게 되었는데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하다 보니 짜증이 늘어갔습니다. 이렇게 생활이 복잡하니 번역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일단 초고는 드렸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십시오. 나는 이제 아무 것도 못하겠습니다”라며 출판사에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6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완전히 포기하였기 때문에 언제든 계약금을 돌려달라고 하면 돌려줄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5월이었습니다. ‘경건의 삶’이라는 성경공부를 하면서 10년 계획을 세워가던 도중 이 책을 다시 쓰고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출판사에 전화를 했더니 담당자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내일 전화를 할 참이었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기획했던 것과는 다르게 방향을 좀 바꾸었고 그림 자료도 거의 완성 되었으며, 원고 내용을 추려놓았으니 이제 읽기 좋게 연결시키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일이 일사천리로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도 시간 약속을 어기지 않고 꼬박꼬박 원고를 넘겨주었고, 6년 전과는 글솜씨가 크게 달라져 편집부에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6년이라는 시간은 영적으로 갓난아이였던 저를 하나님께서 성숙시킨 영적 훈련의 기간이었습니다. 3년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환란 가운데 두더니 3년 동안 무조건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목장예배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하라 하니까 앞뒤 가리지 않고 했습니다. 원고 쓰느라 컴퓨터 만지던 그 손가락으로 목원들을 위해 생전 처음 하는 요리를 하기 시작했고 새벽에 기도시키니 기도했고 성경공부 단계별로 모조리 시키니 무조건 따라갔습니다. 그랬더니 나의 약한 부분이 어느새 다 바뀌어 있었습니다. 다운증후군 장애아인 첫아이와의 관계, 친정아버지와 풀리지 않았던 마음의 응어리, 도저히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던 부부싸움, 다달이 빚만 쌓였던 살림살이까지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책을 다시 보게 해 주셨습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곧 그것을 증거할 만한 큰 문제에 맞닥뜨리게 하셨습니다. 원작자인 파브르가 본문에서 자주 사용한 ‘창조’라는 말과 ‘창조주’라는 말을 편집부에서는 빼자고 요구하더니, 식물의 발생 연대를 나타내는 표를 만들면서 그 표의 해설 부분에 ‘진화’라는 말을 열 번이 넘도록 써놓았습니다. 설득도 하고 간곡히 부탁도 하였지만 물러서지 않는 그이들과의 논쟁 속에서 비로소 나는 하나님이 이 책을 번역하게 하신 이유를 알았습니다. 이같은 영적인 싸움이 있을 줄 아셨고 믿음으로 무장된 군사와 한마음이 되어 기도할 교회를 찾으셨던 것입니다. 그 군사가 6년 전 영적으로 아무 것도 준비되지 않았던 나였으며 그 교회가 홍동밀알교회였던 것입니다.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출판사를 향해 목사님을 비롯하여 여러 성도님들, 목원들이 기도했고 “정 그렇다면 내 이름을 빼고 출판사의 이름으로 출간하세요. 인세도 받지 않겠으며 봉사한 셈 치겠습니다”라는 단호한 결정 앞에 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파브르 식물이야기> 표지를 들여다봅니다. 하나님이 다 이루시고도, 나를 어여삐 여기셔서 많고 많은 이름 중에 내 이름 석 자를 표지에 넣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포기하겠다던 그 인세를 세 배로 늘려주셨습니다. 애초에 한 권으로 기획했던 책이 청소년용 두 권과 성인용 한 권으로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원고를 쓰려고 컴퓨터를 켤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노라고 여러 사람 앞에서 인정해 드린 것, 바로 그 당연한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셨고 이와 같이 큰 복을 주셨습니다. 이제 <파브르 식물 이야기>는 세상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높이 드러날 일만 남았습니다.
540 no image |채석포에서 온 편지| 남편이 차려준 밥상_김영자 사모 (1)
편집부
4557 2010-07-21
남편이 차려준 밥상 |김영자 사모, 채석포교회 | “살아 있는 물은 멈추지 않고 늘 흐르기 마련” 오늘은 가까이 지내는 동료 목사님 부부와 만나는 약속의 날입니다. 서해안의 끝자락에 있는 내가 사는 동네 채석포에서 그 어느 곳을 가더라도 1시간 이상을 달려가야 그 누구라도 만날 수가 있기 때문에 가슴 부풀게 하는 나들이가 됩니다. 지도책을 보면 채석포라는 이름 대신에 그 옛날 이름은 생금포라는 이름으로 표기되기도 했었습니다. 달리는 차의 창밖으로 보이는 일상 풍경이 그림같이 다가옵니다. 마당가에 널려 있는 잡초라고 뽑아버렸던 개망초가 들판에 무리지어 하얗게 핀 모습들까지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바로 어제 만난 것처럼 친숙한 형님 목사님 부부와 아우 목사님 부부가 함께 칠갑산 자락 저수지의 파란 물이 햇빛에 반사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통나무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면서 맛있는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요즈음 들어서 이번 모임과 같은 몇 번의 식사 자리가 있었지만 모든 경비는 남편이 맡았습니다. 40년 가까이 살았지만 저의 생일을 한번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였는데, 금년 생일은 내가 회갑이 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생일이기 때문에 모든 회갑 기념을 위한 식사자리는 남편이 계산을 한다고 했습니다. 나의 만 60세가 되는 날은 총동문회로 모이는 날이었기 때문에 회갑이 되는 생일을 챙기기가 쉽지 않은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회갑을 앞두고 며칠 전부터 큰 아들에게 아내의 회갑을 위해서 무엇인가 준비 시키는 것 같았는데, 회갑을 일주일 앞둔 주말 저녁을 택하여 두 아들 가족과 함께 좋은 곳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들에게 이번 식사는 엄마를 위해서 아버지가 내겠다고 멋진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날에도 예배 후에 성도들 모두에게 점심을 대접했습니다. 그동안 성도들에게 사랑만 받았으니 오늘은 목사인 본인이 대접하겠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들이 참 멋지게 보였습니다. 과거에 서울에서 친구들과 식사를 하면서 옷걸이에 양복 윗옷을 걸어 놓고 집에 거의 도착해서야 없는 옷을 찾는 남편은 택배로 두고 온 옷을 배달 받기도 했을 만큼 심한 건망증 때문에 생일을 한번도 제대로 챙겨보지 못했고 무관심 같아 보여서 젊은 날에 숱하게 속상해 하며 원망을 하기도 하면서 드디어 포기하는 단계에까지 오면서 이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요즈음 넌센스 유머인 노숙자 씨리즈에서 마누라에게 밥 주라고 했다가 노숙자가 된 사연의 노숙자를 보면 내 남편은 진정 간이 큰 남편인가 봅니다. 하루 세끼 중 분식이나 빵으로 한 끼를 준비하면 그것은 간식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오직 ‘밥’ 만이 주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내 남편입니다.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면서 맛있는 것을 챙기는 내가 ‘남편의 입맛과 버릇을 그렇게 만들었다’라고 생각들 때가 있습니다. 젊은 날에는 특별히 생각하고 싶은 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이 무척이나 섭섭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끔 한번씩 엉뚱한(?) 이벤트로 모든 서운함을 상쇄시키기도 했습니다. 오랜 직장생활을 그만 두고 미래를 걱정하는 나에게 분위기 좋은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피자를 사주면서 “그 동안 가족을 위해 고생 많이 했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남편에게 있는 건망증이 남자들에게는 거의 일반적일 수는 없지만 흔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나이가 들면서였습니다. 그리고 경제관념이 거의 없어 손에 그 무엇을 사가지고 들고 오는 일도 없는 남편이 어쩌다 물건을 사는 일이 있는 날은 사고를 치는 날입니다. 건망증에 간 큰 그러한 남편이 나의 회갑을 위해서 2년 동안 모아놓은 비상금으로 아내인 나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러한 남편이 마음속으로는 반갑고 기뻤지만 나는 잔소리 아닌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당신은 아들들이나 성도들에게 멋지게 보였겠지만 주인공인 당사자인 나나 그들이나 똑 같이 밥 한 그릇 밖에 먹은 것이 없다고 종알거렸습니다. 나에게 다른 뭐 하나 없냐고 하면서...... 그러한 나에게 남편은 생각해 보니 그렇다고 하면서 얇은 봉투를 하나 주면서 옷이나 한 벌 사 입으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근근히 모은 비상금이 바닥나고 이제 빈껍데기만 남았다고 했습니다. 지난 달 남편의 동문 목사님들이 일년 전에 계획했던 북경 21세기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21쌍의 부부들이 세계 각국에서 모여 4박 5일의 여정을 보냈습니다. 북경 21세기 박태윤 목사님과 성도들이 동문들을 맞이하여 진정한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행복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역사 속에 있는 천안문과 만리장성을 사랑하는 동문 가족들과 거닐었던 것이 꿈만 같기도 했습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과 그 베풀어 주는 사랑을 받는 자 모두가 행복해 하며 감사했습니다. 주님 때문에, 그 주님의 사랑으로 모두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선물로 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생일 날 미역국을 끓여 주는 대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밥 한 그릇으로 사랑을 나누어 준 남편이 고마웠습니다. 물은 고정된 모습이 없다고 했습니다.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근 모습, 뜨거운 곳에서는 증기로, 그리고 차가운 곳에서는 얼음으로, 이렇듯 물에는 자기 고집이 없고 자기를 내 세우지 않고 남의 뜻을 따른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물은 멈추지 않고 늘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이 차려주는 회갑의 밥상을 사랑으로 받으면서 더욱 더 부부라는 관계 속에서 신뢰를 꽃피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1세기 교회에서 다음 날을 기약하며 송별회 때 작은 음악회를 열어 여러 가지 재능으로 우리들을 즐겁게 했으며 답사로 앨토 섹소폰을 연주하신 키 큰 목사님의 멋진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나의 특별한 생일 회갑을 기억하고 준비해준 남편과 마치 이날을 기념하듯이 주위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기억에 남을 일들을 생각하면서 지금도 내 귓가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열창했던 그 소녀의 목소리가 나의 노래가 되어 갚을 길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만히 불러봅니다.
539 no image |하늘이슬로 쓴 편지| 나의 고민, 나의 사랑_ 이영란 사모 (1)
편집부
4423 2010-07-07
나의 고민, 나의 사랑 | 이영란 사모, 좋은소식교회 | “교회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의 보금자리 되어야” 비가 올 줄 모르고 호숫가에 나갔다가 갑자기 비를 만났다. 다행히도 홈리스 여자 분이 준 우산 덕에 젖지 않고 무사히 올 수 있었다. 너무 고마운 마음에 이 사람과의 만남이 나의 고민에 한줄기 빛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공원에서 여러 번 보았지만 무심히 지나치곤했는데 그날따라 새들에게 과자부스러기를 주고 있어서 말을 걸게 되었다. 요즈음 나는 고민이 있다. 4년이 넘어가는 우리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지에 관한 것이다. 전에는 아무리 자유하려해도 수적 증가에 대한 고민에 늘 목덜미를 잡힐 수 밖에 없었는데 서서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신학교 동기모임에서 남편이 읽었던 ‘하나님이 기도에 침묵하실 때’(제럴드 싯처)라는 한권의 책 때문이기도 하다. “교회 성장이 나의 우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 자신을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공적으로 여러 번 진지하게 고백하는 목사의 권고에 따라 성도들도 함께 읽게 되었다. 우리들 역시 ‘세상을 변화시키지 전에 우리가, 교회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며 변화된 고민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런데 요즈음 읽기 시작한 또 하나의 책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을 통해 이러한 고민이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저자 필립 얀시는 어릴 때부터 근본주의 교회(율법적이고 매우 엄격함)에 다녔는데 그에게 교회는 무서운 곳이었다. 청년기가 되어 성도들의 ‘위선’이라는 장애에 걸려 교회를 떠나게 되었지만 그 영혼은 타다 남은 재처럼 되어가고 교회에 대한 그의 연민의 고민은 더 많아졌다. 그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 교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종내는 다시 보수전통의 교회에 돌아와 섬기게 되었다. 교회를 떠나 방황하던 중 주일을 사모하게 되고 복음의 위대성을 깨닫게 한 어느 교회를 만난다. 그 교회는 갑부들과 가난한 자들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이 공존하며 온갖 부랑자들과 빈약한 사람들, 중독자들이 가족의 일원으로 한 교회를 이루어 가는 현장을 13년간 경험했다. 주님의 몸을 깨뜨려 인간의 모든 담을 허무시고 한 몸, 한 가족으로 세우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주님이 세우신 교회가 이 세상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경험적 통찰을 얻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 역시 숫자에 대해 민감하기도 했지만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개척 성도가 가장으로 살아오던 여 성도님 중심이었고 그 이후로 어려움을 가진 분들을 새 가족으로 주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따뜻한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을 경험하며 필립 얀시의 경험적 고백처럼 ‘교회가 무엇인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에 대해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교회는 나의 가족입니다”라는 말없는 고백을 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며 나 또한 “이보다 더 좋은 가족은 없다”는 천국 가족에 대한 애정을 느꼈다. 전도하다 보면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신앙의 길에서 돌아선 사람이 많다. 예수님이 허무신 담을 오히려 교회가 더 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회 성장이 우상이 되어 천국을 만나야 할 목마른 영혼들에게 또 하나의 고통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교회가 어떤 곳인지, 특히 지역 교회로서 어떠해야하는지 요즈음 이런 고민을 더 심화시키고 주님께 엎드리게 하시니 더욱 감사하다. 소낙비가 내리는데 그녀가 준 우산을 쓰고 오면서 혹시 주님이 보내신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노숙자이고 교회를 다녔던 사람이며 대화중에 빗방울보다 더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던 가난한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받았다는 문선명의 책을 가지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교인이세요? 나는 개척교회에 다녔어요. 한 50명 되는데 좋은 교회예요, 바로 이 근처인데 오래 다녔어요, 그런데 이제는 갈 수가 없어요!” 하며 갑자기 눈물을 떨어뜨렸다.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얼마 전에는 수술비와 여러 가지로 큰 도움과 목사님의 사랑을 받았는데 도저히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돌아오면서 고민은 이어졌다. ‘아침 한 끼는 도움을 주었지만 하루 종일 이 비가 오는데 어디서 어떻게 지낼까. 만일 우리 교회에 온다면 우리 교회는 그녀에게 어떤 곳일까. 과연 교회에서 자도록 문을 열어줄 수 있을까. 전에 다니던 그 교회와 같이 재정적인 도움과 최선의 관심은 주겠지만 결국 한 가족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게 되겠지. 아니야! 주님의 교회라면 그녀가 우리와 가족이 될 수 있어야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집에 돌아와 남편과 이 이야기를 나누고 또 교회에서 독서 토론을 할 때 다시 나누었다. 우리 모두 같이 고민한다. 교회!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기에.
538 no image |들꽃 향기처럼| 카페에서 남편과 함께_ 윤순열 사모
편집부
5023 2010-06-23
카페에서 남편과 함께 < 윤순열 사모, 서문교회 > “잔잔하게 들려오는 음악에 취해 끝없는 이야기 나눠” 중요한 일을 앞두고 남편이 기도원에 갔습니다.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기도원이기에 느즈막이 챙겨 주는 짐을 가지고 남편은 떠났습니다. 남편이 없는 며칠 동안은 집안이 썰렁할 것 같습니다. 아들은 기숙사에 가 있고 딸은 아침 일찍부터 나가 있으니 하루 종일 혼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떠난 지 하루 만에 저도 남편이 있는 기도원으로 향했습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버스와 전철을 타고 2시간을 달려왔는데도 집회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습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 마다 가끔씩 오는 기도원은 항상 올 때마다 새로운 힘을 얻는 곳이기도 합니다. 집회가 끝난 후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벤치에서 남편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루를 떨어져 있었는데도 하루 동안에 쌓였던 이야기들이 많아 시간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2시가 넘어 저는 남편을 남겨두고 집으로 가려고 서둘러 전철역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날씨는 잔뜩 구름이 끼어 빗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집니다. 마침 준비해간 양산을 받쳐 들고 20분정도 내려와 전철역 가까이 왔을 때 핸드폰 벨이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발신자 표시에 ‘달링’이라는 남편의 애칭이 떠있었습니다. 전화를 받으니 남편이 ‘여보, 어디야 전철 탔어?’라고 황급히 물어왔습니다. ‘아니요’라고 말하자 ‘그럼 나하고 산책하면서 놀다가 저녁때 가지. 거기 어디야? 데리러 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혼자 비를 맞으며 가는 길이 쓸쓸했는데 남편의 전화를 받으니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오늘따라 남편도 저도 헤어지기가 무척 아쉬웠나봅니다. 잠시 후 남편은 검은 우산을 받쳐 들고 단숨에 저 있는 곳에 달려왔습니다. 흑기사처럼 말입니다. 저는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둘이는 우산을 받쳐 들고 예술 공원길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중매로 만난 지 2개월 만에 결혼을 해서 이런 로맨틱한 데이트를 즐길 겨를도 없이 결혼식을 올린 커플입니다. “여보 어디가지?” 남편이 물었습니다. 기도원에서 점심은 먹었으니 식당은 안가도 되고 저는 그 멋있는 카페가 생각났습니다. 가끔씩 이곳에 올 때마다 지나치는 그 카페를 떠올렸습니다. 평소에 눈여겨보고 한번쯤 들어가 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저 위로 한참 걸어 올라가면 멋있는 카페가 있는데 그 곳에 가서 커피 마실까요?” 비도 오고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카페라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카페인지라 남편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그랬더니 의외로 남편이 “그럼 갈까” 하면서 흔쾌히 대답했습니다. 원래 남편은 저하고 단둘이 그런 곳에 가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한번은 첫눈이 오는 날 예전에 모임에서 갔던 장작불이 타오르는 카페 생각이 나서 가자고 했다가 ‘눈 오는데 그런데는 청승맞게 왜 가노’ 하면서 핀잔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남편과 함께 가까운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가면 남편은 항상 어디 맛 집이 없나, 영양탕은 어디가 잘한다는데 하면서 그런 곳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흔쾌히 대답하는걸 보니 반갑기도 하고 마음이 변할까봐 발걸음을 빨리 재촉하였습니다. 드디어 카페에 들어서니 은은한 커피 향과 함께 잔잔한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실내는 깔끔하면서도 멋스럽게 배치된 각양각색의 가구와 인테리어가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사방의 벽면에는 멋있는 그림으로 장식을 해놓아 이곳이 갤러리인지 카페인지 혼돈이 생깁니다. 담배냄새 하나 없는 이곳 분위기는 신선한 곳을 찾는 사람들의 모임 장소로 너무나 훌륭한 곳 같았습니다. 영국 왕실에서 사용하는 것같은 화려한 모양의 의자에 우리는 자리를 잡았습니다. 카푸치노 커피 두 잔을 시키고 잔잔하게 들려오는 음악에 취하여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이 좋은 곳에서 남편과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저의 마음에 너무나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전날 밤 딸과 함께 12시가 넘도록 한 이야기들을 남편에게 들려주고 멀리 기숙사에 가 있는 아들 이야기 이런저런 이야기에 시간은 훌쩍 두 시간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남편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요 복이 아닐 듯 싶습니다. 언제나 옆에 있어주어 들어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동행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느낍니다. 부부는 오래 살면 닮아간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지금은 눈빛만 보아도 마음을 알 수 있고 통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때는 가끔씩 내가 노래를 흥얼거리면 남편이 내가 그 노래를 부르려고 하는 참인데 당신이 부르니 이상하네 하면서 서로의 텔레파시가 통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 깜짝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언제나 곁에 있어 마음을 나눌 수 있고 힘들고 어려운 인생길 고비마다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평생의 동행자 남편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537 no image |살구나무그늘아래서| 트레이너이신 예수님_추둘란 집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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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5 2010-04-28
트레이너이신 예수님 “쉽게 분노하는 나의 옛 속성 적나라하게 드러나” 매번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주님은 이론 공부로 끝내지 않 으시고 그때마다 실습을 시켜 주십니다. 그 주에 배운 내용을 체험하고 깨달 을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주시며 아주 특별히 지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론과 실습을 병행시키셔 우리가 모여서 성경공부를 할 때는 팀으로 가르치시지만, 생활로 돌아가면 자상하게 일대일로 훈련시켜 주시는 예수님은 아주 특별한 트레이너이십니 다. 지난주에는 그 훈련이 너무도 혹독하여서, 그러면서도 놀랍도록 정확하 여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몇 달 전부터 대학원 동기들과 수학여행을 가고 싶어 했습니다. 여행 지는 일본. 나는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더군다나 올 해 내가 실직 상태이니 우리 형편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남편 은 여행을 강행했습니다. 예약이 끝났으므로 80퍼센트의 위약금을 물면서 해 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딱부러지게 반대하지 않아서 일이 이렇게 되었다며 되레 나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나는 무척 화가 났습니다. 화에 화가 더 쌓여서 내 마음은 분노로 가득차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을 가야한다면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 다 만나는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생활비를 벌기 위해 3년 동안 투잡 (two-job)을 하느라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바로 나여야 했습니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습니다. 더욱이 집안에 필요한 물건 하나를 놓고 2년 동안 기도해온 것을 알면서 공 교롭게 그 물건값이 여행 경비와 똑같은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여행 가방을 꾸린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나도 보란 듯이 내 마음대로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남편이 적지 않은 돈을 자신을 위 해 쓴 것처럼, 나는 남아있는 생활비에서 그동안 사고 싶었지만 차마 사지 못했던 것들을 의기양양하게 샀습니다. 남편이 일본에서 돌아오자 나는 밤새도록 넋두리를 쏟아놓았습니다. 하지만 아 무리 말하고 울어도 좀처럼 서운함과 억울함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튿 날 아침에는 밥상머리에 함께 앉지도 않았고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습 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는 오랜만에 근교의 카페를 찾아갔습니다. 한가하게 카페 에서 식사해본 지가 5-6년은 된 것 같았습니다. 다음날은 가까운 곳에 있는 식물원에 갔습니다. 승용차로 30-4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인데 그런 곳에도 못가고 살았던 억울함을 풀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마음대로 돈을 쓰고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을 가도 마음은 지옥이었습니다. 점점 더 분노가 쌓이고 분노가 쌓이는 만큼 될 대로 되라 싶었습니다. 그 와중에 매일매일 해야 하는 성경공부 숙제만 뒷전이 되었습 니다. 아니, 마음속으로는 이미 성경공부를 단념하고 있었습니다. 벌써 4단계 성경공부를 하면서 나름대로 내면이 성숙된 줄 알았지만,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듯 했습니다. 원점으로 돌아가 있으니 아예 하지 않느니 만 못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위선으로 느껴지고 내가 나를 속 이며 살고 있다는 아득한 절망감에 괴로웠습니다. 시험이 올 때마다 주님의 도움으 로 잘 이겨냈지만 갈수록 시험의 강도가 커지니 더 이상 높은 단계로 나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금요일 목장예배가 다가올수록 남편 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차차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주 목장예배는 나 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건만 어느새 내 발걸음은 오 성도님 댁에 닿아 있었 고 애찬 준비를 거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새벽, 뜬금없이 잠이 깨어버린 나는 바로 그 순간에 성령님 이 남편을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기 원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느끼게 되었습니 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신기한지… 한순간에 모든 것이 다시 반대편으로 돌아왔습니다. 더 할 나위 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던 마음이 어느새 평안함으로 되돌아와 있었 습니다. 마치 ‘극과 극’을 체험이라도 한 것 같았습니다. 서둘러 밀린 성경공부 숙제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무릎을 쳤습니다. 이번에 공부해야 하는 내용은 다름 아닌 ‘두 가지 속성’이었습니다. 죄 가 운데 살던 옛 속성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새 속성이 여전히 우리 가운 데 있는데, 주님을 인정해야 주 님이 나를 통치하게 되고 주님의 능력으로 옛 속성이 다스려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어쩌면 그 사실 하나를 가르쳐 주시려고 이렇게도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 셨을까요? 주님이 옳았습니다. 간단하지만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기에, 행여 내가 지적으로 동의만 하고 슬쩍 넘어갈까 싶어서 주님은 철저하게 실습을 시키신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오래 참지 못하고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나의 옛 속성을 어쩌면 그리도 적나라하게 돌아보게 하셨는지요. 도저히 내 힘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어느 한 순간 성령님께서 거짓말처럼 해결하셔서, 능력 은 내게 있지 않음을 어쩌면 그리도 정확하게 보여주셨는지요. 사실은 남편이 여행을 떠나기 전, 다음번에 내게도 그런 기회를 주실 것이 니 기꺼이 허락하라는 음성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나는 단번에 외면하였습니 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님의 통치에 나를 완전히 맡기지 못하는 것을 주님 은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내가 주님의 음성을 거부하리라는 것도 알고 계셨 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음성을 거부했을 때 다시 솟아오르게 되는 나의 옛 속성이 얼마나 죄악되고 추 한 모습인지 뼈에 사무치도록 철저히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번에 경험한 주님과의 일대일 훈련으로 나는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 다. 주님께서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랑으로 나를 이끌고 계 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보다 더 큰 사랑으로 인도해 내 깜냥으로는 진리를 깨달아가는 그 단계, 단계의 수준을 알지도 상상하지 도 못합니다. 다만 가끔씩 뒤돌아보며 주님이 변화시켜 놓으신 것들에 그저 놀라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536 no image |들꽃 향기처럼| 바지의 수난_윤순열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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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9 2010-04-14
바지의 수난 “신체적 동질감 느끼는 유전인자 배치 신기해” 우리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에게는 여자처럼 약간 큰 엉덩이 때문에 고등학교 3년 동안 수능 스 트레스에 플러스한 바지 스트레스까지 겪으며 3년을 보내야 했던 에피소드 가 있습니다. 엉덩이 부분 찢어지는 일 자주 겪어 얼마 전에는 학원에서 공부하고 밤 12시가 다되어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면 서 “엄마, 나 바지가 또 찢어졌어요”라고 하면서 울상입니다. 바지를 보 니 얼마 전 세탁소에서 기워준 엉덩이 부분이 또 찢어져서 속에 입은 줄무 늬 팬티가 다 보이고 있었습니다. 알록달록 줄무늬 팬티가 다 보이는 찢어 진 바지를 입고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시간을 버스를 타고 집에 왔으니 아 들이 얼마나 난감했겠습니까. 아들은 울상이다 못해 짜증을 내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저는 제 엉 덩이 때문에 엄청 불만이에요. 멋있고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으려고 하면 안 들어가고 교복은 툭하면 엉덩이가 찢어지고 얼마나 스트레스인지 아세요? 그 리고 제가 학교에서 별명이 뭔지 아세요? 오방이에요. 여자처럼 엉덩이가 크 다고 오리방뎅이의 줄임말 ‘오방’으로 통해요. 저도 남들처럼 엉덩이가 작 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옆에 있는 누나에게 말했습니다. “누나 나 엉덩이 다이어트 좀 해야 할 까봐. 엉덩이하고 허벅지살만 빼는 다이어트는 없을까? 수술을 해서라도 엉덩이하고 허벅지 좀 줄여야겠어.” 아들은 유난히 큰 엉덩이 때문에 당하는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다 쏟아놓으 며 야단법석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들아, 네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아니? 바로 그 볼록 튀어나온 엉덩이 에서 나오는 것이야. 그 엉덩이가 작아져 버리면 너는 곧 힘이 없어져서 네 가 잘하는 운동 실력도 사라져 버리는 것이야. 삼손이 긴 머리털에서 힘이 나왔던 것처럼 네 운동 실력도 큰 엉덩이와 튼튼한 허벅지에서 나오는 것이 야. 그러니 감사한 줄 알아라.” 아들은 외모와는 다르게 힘이 굉장히 좋습니다. 달리기, 농구, 태권도 공인4 단, 팔씨름 등 못하는 운동이 없습니다. 처음에 학교에 입학했을 때 자기 반 아이들이 곱상하고 순하게 생긴 얼굴을 보고 아무 힘도 없는 줄 알고 시 비를 걸어와서 그걸 참느라고 무척 힘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아들의 운동 실력과 태권도 실력을 알고 나서 감히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실세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 찬 표정입니다. 아들은 얼굴이 다른 사람 들보다 작은 편에 속하는 동남아스타일의 곱상한 외모를 가졌습니다. 짙은 눈썹, 쌍꺼풀진 서글서글한 눈, 오똑한 코, 도톰한 입술 등이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 질서정연하게 붙어있어서 보는 이들에게 호감을 주는 호감형 얼굴 입니다. 우리 부부외모와는 전혀 닮지 않은 모습에 사람들은 아들을 보고 신기해하 고 농담처럼 입양해 오지 않았느냐, 수입해오지 않았느냐 하면서 처음 보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합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얼굴을 보면 한눈 에 허씨 가문임에 틀림없구나고 말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얼굴 부분은 시아버 님을 빼어 닮았습니다. 그리고 허스키한 목소리는 저희 남편을 닮았고 손은 저를 닮 아서 왼손잡이입니다. 어쩌면 유전인자가 그렇게 배치되었는지 신기 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유난스러운 엉덩이가 엄마인 저의 엉덩이를 쏙 빼 어 닮아서 그렇게 크게 생겼던 것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상체는 95사이즈인데 엉덩이 부분에 이르러는 100사이즈가 넘어서니 옷을 입 을 때마다 윗옷 부분은 날씬하게 쑥 빠지는데 아랫동네에 오면 큰 엉덩이 때 문에 쉽게 바지를 입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조금 넉넉한 사이즈로 입으면 괜찮으련만 조금이라도 날씬하게 보이려고 몸에 꽉 끼는 바지를 입으니 조금 만 세차게 움직여도 실밥이 터지고, 지퍼가 고장 나고, 엉덩이 부분이 찢어 지는 난리를 저도 수없이 겪으며 자라왔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아들도 똑 같이 겪고 있으니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조금 넉넉한 사이즈를 입으면 되지 않겠 니?” 그랬더니 아들은 “그러면 아저씨 바지 같잖아요” 그러면서 여전히 몸에 꽉 끼는 바지를 입고 조심조심 다니다가 얼마 못가서 엉덩이 부분이 찢 어지는 수난을 당하면서 제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며 저를 웃게 만듭니다 . 신체 닮은 아들 통해 옛 추억 되살려 제가 청소년기에 친정어머니에게 들었던 “얘 조금 넉넉한 사이즈로 입으면 안되겠니?” 했던 말씀을 듣지 않고 큰 엉덩이에다 작은 바지를 입고 수난 을 당했던 것처럼 우리 아들도 똑같은 엉덩이로 인한 바지수난을 당하며 학 교에 가곤 하였답니다.
535 no image |채석포에서 온 편지| 작은 화단의 아기 손 _김영자 사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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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7 2010-04-14
작은 화단의 아기 손 "새 싹으로 다가 온 성도들 제 자리 잡기를 기도해" 변화무쌍한 기온으로 두꺼운 옷을 선뜻 벗지못하고 있지만 계절을 따라 새순 들이 뾰족이 나오고 작은 꽃들이 하나 둘 피기 시작하는 봄이 왔습니다. 이 때쯤이면 퇴색한 풀잎 속에서 파란 작은 잎이 살짝 보이는 것이 너무나 경이 롭기만 합니다. 새순 돋는 봄기운 널리 퍼져 봄에는 입맛이 없는 때라서 가족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주부들은 밥상 걱정으 로 고심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곳 농촌마을에서는 호미와 작은 칼만 있 으면 들에 나가 지천에 널려있는 냉이와 달래와 쑥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봄 나물들로 밥상을 가득 채우며 잃었던 입맛을 되찾습니다. 시장에 나가면 그 모든 나물들을 쉽게 구입할 수 있지만 자기가 채취한 여 러 종류의 나물들로 식단을 바꿔 가면서 상을 차리릴 때의 뿌듯함과 행복은 남다르기 마련입니다. 요즘 남편은 교회 주변에 많은 꽃나무들을 심어놓고 주위를 돌아보며 산에 가서 부엽토를 가져와 화분 갈이와 가지치기를 하면서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와 화분가꾸는 것을 보면서도 30년을 훨씬 넘 게 생활한 부부이지만 성격만큼이나 취향도 너무나 다른 것을 세삼 느낄 때 가 있습니다. 집 안에서 관리하는 화분 하나를 보더라도 우리는 너무나 다릅니다. 남편은 분재나 큰 화분을 좋아하는 반면에 나는 다육식물과 선인장, 그리고 뿌리를 내리고 새끼를 쳐서 심어놓은 작은 화분들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기른 꽃나 무들은 성도들에게 특별한 날에 사랑의 편지를 담아서 선물로 주기도 합니 다. 며칠 전 밖에서 전정가위를 들고 주변 나무들의 가지치기를 하던 남편이 집 안에 있는 나를 성급하게 불렀습니다. 밖에 나가보니 집 앞 작은 화단에 고 개를 숙이고 무엇인가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작년 가을에 이웃 목사님 집 화단에 흩어져 있던 씨앗 몇 개를 주워와서 우 리 화단 한 곳에 모래와 흙을 섞어 심어놓았던 것이었습니다. 작년 겨울에 혹한과 많은 눈으로 행여나 싹이 트지는 않을까 염려를 했었 는데 어느새 새 싹이 그 모습을 들어내놓고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마로니에였습니다. 우리에게 젊음이 있던 학창시절에 "그 사람 이름은 있었지만"이라는 가요가 있었는데 그 노랫말에 마로니에가 나옵니다. 어쩐지 이국적인 느낌이 있고 마로니에 나무는 나에게 사랑과 꿈을 줄 것같은 그러한 막연한 기다림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기 손 같이 생긴 다섯 잎의 마로니에가 모양을 갖추고 화단 한 곳에서 솟아나 우리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새싹이 시간이 지나면서 잎이 무성해지고, 꽃을 피워 향기를 내고, 꽃이 진 후에는 한 여름 뙤약볕에 풍성한 그늘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풍요롭기만 합니다. 그때 다섯 개의 씨앗을 심었 지만 그 중에는 싹을 내지 못하고 흙 속에서 썩은 씨앗도 있었습니다. 많은 세월 제멋대로 굳어진 소나무가 정원수로 거듭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불 필요한 가지를 잘라주고 다듬어 주면서 정원수로서의 모양으로 만들어져 가 야 합니다. 어쩌면 목회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번 부활절에도 새벽에 바다에 나가는 성도들과 농사를 짓는 성도들을 생각 하면서 새벽과 저녁에 기도회를 가지면서 부활의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그러 나 정작 보여야 할 부부 집사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후에 이 지 역에서 연합으로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려야 하는데 성가대의 일원 인 집사님이 출석을 못했으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남편보다 늦게 교회 다니기 시작한 여 집사님은 성가대와 구역장으로 봉사 를 열심히 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끔씩 남편의 욕설과 구 타로 인하여 많은 상처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집사님이 마음 아파할 사 모님을 생각하니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울면서 전화를 해왔습니다. 항상 혼자 서 속 끓이며 내색하지 못했지만 이번 봄에 사위를 맞이한 일도 있고, 나이 들어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 만 나는 그 집사님에게 무어라고 위로의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라 고 하는 말도 이제 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부가 같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아 생활도 넉넉한 편이지만 교회 봉사하는 일에는 늘 인색했습니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에게 드려지는 삶보다 욕심 때 문에 벌어지는 불의의 사건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그 가정이 항상 위태위태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가정을 포기할 수 없어서 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님 안에서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여 집사님이 눈물 흘릴 때 예수님이 나 때문에 눈물흘리신 것처럼 나도 눈물 을 흘리며 그 가정의 성숙되지 못한 믿음을 보며 아파합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되지 않고 외향적으로만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그러한 믿음이 변화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성도들의 살림살이와 형편을 낱낱이 알 수 있고 숨겨지지 않은 일들이 때로 는 우리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때도 있습니다. 같은 날짜에 똑 같은 씨앗 을 심지만 싹이 트는 것도 있고 또 싹이 트였다고 해서 다 성장하는 것은 아 닐지라도 우리들은 모두 다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그 여 집사님의 부부가 새 싹의 티를 벗고 성장하여 믿음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 다. 오늘은 밖에 있는 남편을 내가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너무나 신기한 것이 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책상 서랍에 사 놓았던 오래 된 연꽃 씨앗이 있었습 니다. 그 씨앗은 너무 딱딱하여 하루 정도 물에 불린 다음 한 쪽 끝을 잘라 내고 작은 병 속의 물에 담가 놓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 딱딱한 껍 질에서 파란 싹이 보였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연 잎이 생길 것이고 그 러면 작은 병에서 조금 넓적한 그릇으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성숙해서 자라기까지 돌봐줘야 아기 손 같은 마로니에 나무에 꽃이 피고 더위를 식혀줄 그늘이 생길 때까지 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듯이 새 싹으로 내게 다가 온 성도들도 성장해서 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많은 시간이 흐른 뒤 함께 환하게 웃을 날을 기다립 니다.
534 no image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이 봄을 맞이하면서_최에스더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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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3 2010-03-17
이 봄을 맞이하면서 | 최에스더 사모, 남서울평촌교회 | “은혜의 역사, 자녀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노력해야” 바람이 달라졌다. 아직 따뜻한 기운은 없지만 확실히 부드러워졌다. 겨우내 두꺼운 옷을 입고 차가운 바람이 몸 안으로 조금이라도 들어오지 못하게 잔 뜩 움츠리고는 동동거리고 다녔는데 이제는 안 그런다. 봄을 맞아 바람도 부드러워져 천천히 걷는다. 게다가 거북이처럼 목을 쭉 빼고 불어오는 바람을 마음 놓 고 맞아본다. 확실히 봄은 가까이 와 있다. 열어놓은 창밖으로 새소리도 들 린다. 기온이 많이 올라갔다는 소리다. 긴 겨울동안 못 들었던 소리인지라 귀에 쏙 들어온다. 이렇게 계절이 바뀔 때 내 몸에서 제일 먼저 신호를 보내오는 곳은 바로 입 맛이다. 몇 개월동안 먹었던 저장음식을 배신처럼 밀어내고 이제 막 땅에서 나온 푸성귀로 만든 싱싱한 반찬들을 마구 당긴다. 사실 제철야채, 제철과일 이라는 개념이 없어진 요즘이지 만 입맛만은 아직 그 경계를 확실하게 구별하 고 있나보다. 겨울에도 늘 살 수 있는 야채였지만 주부의 찬거리 고민 속에 떠오르지도 않 고, 장바구니 속으로 들어오지도 못하다가 그 맛을 찾는 입맛이 이제 그 야 채를 먹어줘야 하는 계절이 왔다는 것을 내 몸에 신호를 보내자마자 거짓말 처럼 머리 속에 떠올랐고 나는 마트로 뛰어가 냉큼 사들었다. 그게 바로 냉 이다. 이 식물로 말할 것 같으면 다듬어본 사람만 알 것이다. 들여다보고 다듬느라 고 숙인 고개가 뻣뻣해질 정도가 돼야 겨우 4인 가족을 위한 밥상에 올라올 만큼의 양이 된다. 들인 수고에 비해서 양은 얼마 되지 않지만, 잘 다듬은 냉이를 끓는 소금물에 데쳐서 마늘과 파를 다져넣고 참기름과 조선간장에 무 쳐서 먹으면 그 향과 맛이 정말 기가 막히다. 바로 봄맛이라는 게 이런 것일 까. 그 맛을 본 사람만이 인내심을 가지고 이 나물을 다듬을 수 있으리라. 그 맛을 어서 보고 싶어서 냉이를 쟁반에 쏟아놓고 열심히 다듬고 있는데 둘 째아들이 옆에 와서 앉는다. “엄마, 이게 뭐에요?” “응, 냉이.” “냉 이?” 하길래 어떻게 가르쳐줄까 하다가 냉이라는 말이 들어가 는 동요를 하 나 불러줬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가자 너도나도 바구니 옆에 끼고서 달래냉이씀바귀 나물 캐오자 종달이도 높이 떠 노래부르네 이 노래를 부르고나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나 혼자 한참 웃었다. ‘21세기에 태어나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네가 어찌 알 겠느냐. 바구니를 옆에 끼고 동무들과 나물을 캐러가면서 부를 이 노래 를.’ 그래도 나는 지금 내 아들만한 나이, 열 살 때 이 동요를 부르면 이게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있었다. 비록 달래, 냉이, 씀바귀가 어떻게 생긴 식물들인 지 정확하게 구별할 줄 몰랐지만 친구들과 나물 캐러간 경험이 내게는 있었 기 때문이다. 나는 쑥을 캐러 다녔었다. 연필을 깎는 도루코 칼로 친구들과 동네에서 쑥 을 캤었다. 여럿이서 함께 제법 많은 양의 쑥을 캐서 한 집에 몰아주고나면 그 쑥으로 국을 끓이는지, 떡을 해먹는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나물 캔 경험 이 내게는 있지만 내 아들에게는 전무하다. 이 동요를 부르면 내게도 가사와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봄날의 정경과 추억 이 머릿속에 떠오르지만 내 아들에게 이 노래 는 민요다. 전혀 다른 세상이 며 책 속에서나 볼 수 있다. 지금도 이 땅에는 달래와 냉이와 씀바귀가 변함 없이 자라고 있건만 내 아들의 삶과는 정말로 동떨어져있는 것이다. 내 노래 를 듣는 무심한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어떤 것이 세대를 거쳐 전수된다 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구나 새삼 절감했다. 내 기억 속에 나물 캐러 간 장면에는 칼과 쑥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 혼자 조용히 흥얼거렸던 노래도 있고, 재잘재잘 친구들과 끝도 없이 나눴던 이야 기도 있고, 쪼그리고 앉아서 쑥을 캐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꼼짝도 못하는 친구를 보고 깔깔거렸던 웃음소리도 있고, 땅에서 솟아나온 여러 가지 식물 들 가운데 쑥만 가려내 찾았던 기쁨도 있고, 그 쑥을 칼로 베면 그 진한 향 이 내 코에 와 닿았던 감동도 있고, 잘못하다 내 손끝을 베었던 쓰라림도 있 다. 쑥을 뜯다가 어느덧 해가 져서 집으로 가는 어둑어둑해진 골목길을 내달리 며 느꼈던 공포도 있고, 내가 오기를 기다렸던 엄마의 따뜻한 목소리까지 있 다. 이렇게 많은 것을 내 아이들에게도 전해주려면 나는 올 봄에 부지런히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함께 뭐라도 뜯어 야할 것 같다. 신앙은 어떨까. 멀쩡히 옆에 있고 빤하게 눈에 보이는 것도 나와 함께 공감 하게하기 위해서는 이런 수고가 있어야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이 미 지나가버린 은혜의 역사를 나의 아이들에게 전해주려면 나는 어떤 노력 을 얼마나 해야 할까. 가만히 있으면서 저절로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실수를 하지 싶다. 그리 고 그들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라고 떠넘기기에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이야 기들이 너무나 많다. 그 이야기들이 증언할 것이다. 너는 왜 나를 너의 아이 들에게 전해주지 않았냐고. 믿음의 선조들의 이야기, 7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신 우리 집안의 어르신 들이 지켜온 믿음의 이야기, 그리고 40이 넘은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에게 자주자주 들려줘야겠다. 우리가 각자 다른 시대를 살지만 하나 님 안에서 한 그림을 그리며 한 영으로 호흡하는 자들임을 알게 해주고 싶 다. 신앙이라는 바톤을 넘겨주고 가면서 우리 아이들이 그 바톤을 볼 때마다 할 아버지의 눈물을, 할머니의 기도를, 아버지의 순종을, 어머니의 찬송을 기억 하며 그것과 함께 했던 절규도, 후회도, 탄식도, 회개도, 돌이킴도, 벗어남 도, 자유함도 모두 떠올리며 조상들의 삶이 자신의 것과 다르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새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자신도 반드 시 그럴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주고 싶다. 수요예배시간, 어른들 사이에 앉아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을 보며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우리가 함께 부를 찬양이 쌓여가고, 훗날 우리 가 그 찬양을 부를 때 머릿속에 떠올릴 추억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기에. 신앙의 유산 더 많이 쌓여가기를 가정을 통한 신앙전수, 이 봄에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볼 가치이다.
533 no image |살구나무그늘아래서| 아가야! 열심 특심이 아니어도, 너니까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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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7 2010-03-03
아가야! 열심 특심이 아니어도, 너니까 사랑한다 ““하나님보다 내가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한 것 알게 돼” 연초에 사모님이 조용히 나를 불렀습니다. 그동안 몇 년째 혼자 도맡아온 성 전꽃꽂이와 주일학교 간식을 다른 사람과 나눠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것 이 목사님의 뜻이라고 전해 주었습니다. 그동안 혼자 도맡아 해 온 교회 봉사 목사님의 뜻이라니 바로 그 자리에서 그러겠노라고 확답을 드렸습니다. 그런 데 돌아서 나오는 내 마음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지 금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을 ‘죽도록 일을 하라’로 알아들은 나였기에 잘 하고 있던 교회 봉사를 다른 사람과 나 눠서 하라는 얘기는 충성을 줄이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에게 서운함을 느끼기 시작하니 기도도 막혀 버리고 예배에 집중도 되 지 않았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 시험이 지나가기를 무기력하게 기다렸 을 텐데, 이번에는 참 이상하게도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잠들기 전 한두 시간 가졌던 휴식을 물리치고 성경을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날은 “내 마음이 이러하니 주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여쭙기 도 하고 “주님, 오늘은 아무 말씀이라도 좋으니 제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주님이 먼저 얘기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 니다.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빌립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 십시오.” 다툼과 허영이라는 단어가 좀 와 닿지 않아서 다르게 번역된 성경과 비교하 여 읽어보니 ‘경쟁심과 자기자랑’으로 이해가 되어졌습니다. 그제야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성경의 그 많은 말씀 가운데 하나님은 어떻게 이 말씀을 주실 생각을 하셨는지, 사람의 마음과 그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보시는 하나 님의 능력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꽃꽂이를 8년 남 짓 하고 주일 학교 간식 요리를 3년 남짓 하면서 나는 내가 경쟁심과 자기자랑으로 봉사했 다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달리 자원하는 분이 없다는 핑계도 내가 나를 속인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주 일 설교 중에 ‘완벽주의는 죄’라는 말씀을 주셨지만 그것 또한 다른 집사 님에게 해당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옳았습니다. 열심과 특 심으로 봉사하여 하나님을 위해 남보다 내가 더 뛰어나게 인정받고 칭찬받아 야 한다는 잘못된 충성심이 분명히 내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쟁자가 없 었지만 오히려 누군가 경쟁하며 쫓아올까봐 완벽에 가까운 수준으로 봉사하 지 못해 안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봉사를 나누어 하면 그 칭찬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것인데 그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랜 시간 드린 봉사와 헌신에 하나님 사랑과 나 를 향한 사랑이 교묘히 섞여 있었다는 것을 알고 저는 깊은 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막혀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원스레 열리는 것이 느껴졌습 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가 드린 봉사 때문에 나를 인정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녀이니까 있는 그대 로 사랑해주신다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 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회복되어질 때마다 하나님은 저를 “아가야”하 고 불러주시는 것을 느끼는데, 나는 그동안 그 호칭이 어떤 의미였는지 몰랐 다가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언니는 예쁘고 붙임성 있는 성격이어서 집안어른 들이 좋아하였습니다. 남동생은 집안에 하나뿐인 장손이니 특별한 사랑을 받 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예쁘지도 않고 붙임성도 없는 나는 그 사이 에 끼여서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아예 그런 것을 바라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그나마 공부를 잘하고 상을 많이 받아오니 그것으로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족관계를 통해 배운 사랑이 그러 하였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도 그렇게 나를 사랑해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래서 열심에 특심을 내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인정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병중에 계셨던 외할머니께서 우리집에 잠깐 와 계시다가, 설 거지하는 저를 보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아가야, 뭘 그리 애쓰느냐. 이 리 와서 쉬어라.” 그 한마디가 내게 얼마나 큰 위 로가 되었는지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영혼 전체가 위로받는 듯한 따뜻한 말이었습니다. “뭔가 기특한 일 을 하지 않아도 너는 내 손녀딸이니까 너를 사랑한다.”는 말로 들렸던 것입 니다. 나는 그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때에 내가 그 말을 얼 마나 좋아했는지 아시고서 그날의 외할머니와 똑같이 저를 불러주신 것입니 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감히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나이기에 그나마 내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그때 그 순간을 떠올려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목사님께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내 마음에 하나님보다 내가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해 주신 것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집사님이 해 놓은 꽃꽂이와 간식 요리에 진심에 서 우러난 칭찬을 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신 것도 감사했습니다. 2월입니다. 해마다 새해계획을 세우는 1월에 마음이 설레고 기대감이 부풀었 는데 올해는 1월보다 2월에 더 마음이 설렙니다. 지난달보다 이번 달에 말씀 이 더 달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섬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 봉사 서로 나눠 지는 계기 만들어 이번 달보다 남은 열 달 동안 부어주실 그 사랑이 얼마나 뜨거울지 벌써부 터 기대가 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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