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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 no image |‘정암신학강좌’에 관한 단상| “정암이 제시한 칼빈주의 원리를 목회 현장에 적용해야”_김병혁 목사
편집부
2784 2013-11-19
“정암이 제시한 칼빈주의 원리를 목회 현장에 적용해야” < 김병혁 목사, 솔리데오글로리아교회 > 어느덧 정암 신학강좌가 사반세기를 넘겼다. 올해로 제25주년을 맞는 정암신학강좌가 지난 11월 5일 화평교회당에서 개최된 것이다. 정암은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괄목할만한 족적을 남긴 개혁주의 신학자이다. 특히 한국 정통 칼빈주의 신학과 교회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논찬자로 참여한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역사신학)의 표현을 빌리면, 정암은 만주 봉천신학교와 고신대학교와 총신대학교와 합동신학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무려 50여년에 걸친 교수사역을 통해 한국에 진정한 의미의 개혁주의 신학을 소개하고 발전시켜 온 교회의 교사(doctor ecclesiae)이다. 교회의 교사였던 정암 박윤선 정암의 인생 노정의 종착점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합신교단과 합동신학대학원은 그가 남긴 유산의 최대 수혜자임에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정암강좌는 정암의 신학과 삶을 기리기 위한 목적에서 매년 개최하는 학술 모임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정암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호사와 후광에 대한 일종의 고마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 행사에 대한 합신 동문들의 관심과 애정은 남다르다. 신학강좌에 참석한 다른 교단에 속한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그 모습에 무척 감탄하며, 때로는 질투어린 시선으로 부러워하기도 한다. 분명 합신인으로서 뿌듯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우쭐할 일이 아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살아생전 정암과의 관계나 외적인 개연성을 근거로 그의 실질적인 계승자가 누구인가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정암의 가르침은 어느 한 교단, 어느 한 신학교에 고정될 수도, 제한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암 신학강좌는 단지 정암과의 옛 추억을 회고하며 그것에 만족하는 추모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암이 우리 손 안에 남겨 놓은 좋은 유산들을 우리만의 것인양 잘난 척하거나 으스대서는 더욱 안 될 것이다. 평생토록 정암이 그토록 간절히 추구했던 그 신학과 또한 그토록 간절히 살아내고자 했던 그 삶을 겸허하고 진지하게 돌아보는 기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선견자적인 그의 신학과 삶이 오늘의 한국교회에 어떤 의미를 던지며, 미래의 조국 교회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채워가야 할지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가 이룬 업적을 계승하는 동시에 그가 남긴 숙제를 함께 풀어가야 한다. 이것이 정암이 바라던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한 정암 신학강좌가 존재하고 계속되어야 할 명분과 목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부분에서 합신교단은 정암에게서 받은 사랑의 빚을 어느 정도 갚고자 무진장 애를 써왔다. 그러한 노력이 정암 신학강좌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그 점에 대해서 합신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며, 매년 이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기회를 빌어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정암 강좌는 한국교회에 대한 봉사 그럼에도 조금 불편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좀 불편하게 들려도 뼈를 깎는 마음으로 하는 뼈있는 이야기로 삼아주기를 바란다. 다소 송구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으나 최근 몇 해 동안 정암 세미나에 참여할 때마다 약간의 피로감과 실망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압축해서 말하자면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정암의 가르침이 계속적으로 강조됨에도 불구하고 왜 현실 교단과 교회는 여전히 미개혁의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가 하는 점이다. 확신컨대, 정암의 가르침은 역사적 개혁신학 위에 확고히 머물러 있으며, 그 가르침의 정점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있다. 정암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직전에 저술한 책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라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을 출판한 영음사의 설명에 따르면, 정암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1개월 전까지 약 7개월에 걸쳐 이 신앙고백을 읽기 쉽도록 번역하였다. 그리고 그가 번역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합신의 헌법 안에 고스란히 수록되어 있다. 그뿐이 아니다. 정암은 생전에 헌법주석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정암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이 책의 집필을 위해 웨스트민스터 헌법 원서와 기타 개혁교회의 헌법주석가들의 문헌들을 많이 참고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비록 정치와 예배모범에 집중된 주석이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정신에 충실한 정치와 예배를 구현하고자 한 정암의 의중을 드러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정암이 이 주석을 통해 총회와 치리회와 관련하여 반드시 개혁되어야 할 구체적인 지침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치리회는 등급은 없고 대소(大小)의 차이라든가, 총회는 폐회가 아니라 파회(罷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책에는 특별참고문의 형태로 교회 운영과 관련한 실제적인 개혁안들도 제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여교역자와 강단의 문제라든지, 십일조 헌금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적실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정암을 정신적 지주(支柱)로 받드는 현실 교회의 형편은 어떠한가? 합신에 속한 모든 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정신 위에 바르게 서 있는가. 정암이 칼빈주의 원리와 표준이라고 누누이 밝힌 이 고백서를 교회 현장에서 정직하게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가. 하지만 대단히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교회에서 강조하는 것을 들어 본적도 없다는 교회 직분자들이 넘쳐난다. 그렇다면 정암이 헌법 주석에서 제시한 개혁안들을 제대로 실천에 옮기고 있는가. 정암의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끄러운 현실이다. 혹시 정암이 가리키는 달은 생각지 못하고 그의 손가락을 보고서 안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다. 정암의 가르침과 너무나 상이한 신앙 현실을 살면서도 정암과의 관련성을 이유로 자신을 개혁주의자라고 확신하는 것은 정암에게 대단한 결례가 아닐 수 없다. 정암이 제시한 교회 개혁 정신 따라야 둘째, 정암 신학강좌에서는 왜 항상 ‘그에게 속한’ 것만 찾으려 할 뿐, ‘그를 넘어서는’ 시도가 보이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질문 자체를 교만하고 불손하게 여길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암을 따라가기도 힘겨운데 어찌 정암을 뛰어 넘을 생각을 하는가라고 말이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 그럴 수 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설령 정암에게 극복할만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이상이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암의 신학은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정암을 잇는 신학적 발전과 번영에 대해 궁구해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암 박윤선과 나의 목회’라는 제하를 둔 이번 강좌에서도 여전히 이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정암 신학강좌의 주제는 매년 다르다. 하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대동소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발제자들의 신념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용 대부분이 정암의 과거와 그에 관한 개인적인 탁월성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이번에 처음 시도된 수상문에 당선된 어느 분은 ‘(정암)목사님께서는 선지자이셨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다. 좀 격하게 말하자면, 용비어천가를 방불케 하는 내용이었다. 발표된 논문 중에는 새로운 시각과 접근이 돋보이는 것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정암에 속한 것들을 찾아내어 그를 드높이고자(?) 하는 목적에 충실한 논문도 있었다. 정암신학강좌는 계속해서 진보되어야 정암을 생각할 때마다 그가 평생 그토록 닮기 원했던 칼빈을 떠올린다. 칼빈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묘비를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는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위대한 신학자요, 목회자요, 개혁자인 칼빈조차 죽음마저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실 우리에게 있어 칼빈의 심장을 가장 닮은 개혁주의자로 정암을 택하는데 있어 주저함은 없다. 정암은 이유 불문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높이는데 열중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을 것이다. 물론 믿음의 선배를 정중하게 높이고 존경하는 것은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정암 신학강좌 때마다 어김없이 정암을 위해 쏟아지는 예찬들은 솔직히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여기에 한 가지 바람을 전한다면, 정암의 신학에 대한 좀 더 객관적인 접근과 이해, 그리고 그의 신학을 넘을 수 있는 시도와 제안이 쏟아지는 강좌가 되기를 바란다. 정암이 존중하는 화란 개혁교회에는 폴레믹스(ploemics, 논쟁)라는 전통이 있다. 그들은 좀 더 바람직하고 견고한 개혁 신학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누구를 향해서도 폴레믹스는 열려져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도르트 총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정통 장로교회, 개혁교회의 유구한 전통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암 신학강좌에서 이러한 전통이 주는 유익들을 제대로 찾아 누리기 어렵다고 한다면 너무 과도한 표현일까. 정암 신학에 대한 폭넓은 논증도 필요해 누구나 그렇듯이 정암이 이룬 일도 있고, 못 이룬 일도 있다. 겸허하고 존중하는 자세로 그가 이룬 업적과 한계에 대해 폴레믹스할 수 있어야 한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함성은 전체의식을 강화할 수 있을지언정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갖게 할 수는 없다. 무슨 일이든지 한쪽으로 치우치면 '우리만의 잔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인 개혁신앙의 테두리에서 정암의 사상에 대하여 성숙하고 심화된 폴레믹스를 이룰 수 있는 배려와 여유를 좀 더 느낄 수 있는 신학강좌가 되면 좋겠다. 정암을 추억하고 그 안에 머무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그가 말하고자 했고 지향하고자 했던, 그러나 그가 이루지 못한 가장 좋은 개혁주의를 향해 힘써 나아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정녕 정암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진정한 유산이 아니겠는가. 그 때문에라도 정암신학강좌는 지속되어야 하며, 끊임없는 관심과 참여는 계속되어야 한다.
998 no image |심|층|진|단| 이신칭의는 개신교의 교리적 면죄부인가?_황대우 목사
편집부
2897 2013-11-05
이신칭의는 개신교의 교리적 면죄부인가? < 황대우 목사, 고신대교수 > 로마서 1장 17절에 근거한 이신칭의(以信稱義)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이다. 이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결정적인 교리이기도 하다. 이후 모든 개신교도들은 이 교리를 성경 해석의 열쇠로 삼았다. 1. ‘이신칭의’는 성경해석의 원리 오늘날 개신교도들은 이 교리에 도전하거나 이 교리를 위협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 개신교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이 건전한 이신칭의 교리가 개신교의 새로운 교리적 면죄부(new doctrinal indulgence of the Protestant Churches)로 전락해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혹자는 이러한 교리 위에 세워진 개신교를 개인주의의 천국으로 이해한다. 이유는 이 교리가 개인의 신앙고백인 믿음을 절대화함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성을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상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지적 가운데 하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교리가 본래 그와 같은 개인주의를 조장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욱이 개혁주의 교리에서 보자면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그와 같은 개인주의로 왜곡될 가능성은 희박해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의 거의 모든 장로교단 교회들에 그러한 개인주의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안타까운 사실이다. “예수천당”이라는 구호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진리는 이신칭의 교리와 더불어 한국교회를 개인주의화하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왜곡되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이 한 때 대학선교단체인 CCC를 통해 80년대 한국교회를 강타했다. 그런데 이 질문 역시 이신칭의 교리와 예수천당이라는 구호와 무관하지 않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이 모든 교리를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춘 전도 전략의 모티브로 사용해왔다. 지금까지 이신칭의 교리는 전도전략에서 부동의 모티브로 활용되고 있으며 폭발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교회 부흥이라는 황금알을 낳았다. 그리고 여전히 교회 부흥이라는 황금알은 형태상 성경공부, 다양한 전도 프로그램, 전도 집회, 다양한 수련회 등을 통해 부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교회 부흥은 곧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통한다.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고 소원하시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이웃교회는 안중에도 없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이요 현주소이다. 2. 교회연합은 수단이 아닌 본질 때때로 교회들 사이의 연합에 대한 아름다운 소식이 보도되기도 하지만 지역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교회와의 연합 사역에 대한 소식을 듣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다. 대형교회가 가장 가까운 이웃 개척교회를 대대적으로 지원했다는 이야기나, 상가의 조그마한 교회가 이웃의 덩치 큰 교회와 연합 사업을 했다는 소식들은 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문제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교회가 천상적이든 지상적이든 하나님 앞에 있는 교회(ecclesia coram Deo), 즉 하나님의 교회는 분명 하나라는 성경의 가르침 때문이다. 바울 사도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몸, 즉 교회는 하나라는 사실을 거듭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분리된 한국교회의 여러 교단들은 한 교회가 아닐 뿐만 아니라, 결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고 하나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기형적인 양상이 단지 교단과 교단 사이에만 상존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교단 안의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상존한다는 점이다. 마치 죽어서 서로가 갈 천국이 다른 것처럼 이웃교회들 사이의 관계는 너무나도 적대적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참 모습이 이런 것인가? 전도라는 미명아래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것이 당연하기라도 하듯 외치는 각 교회 강단의 소리에 청중들은 너무나도 쉽게 감염되어 왔다. 어쩌면 교인을 빼앗기지 않고 뺏어오는 일이 전도라는 미명에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각 교회들은 이웃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행사에 대해 민감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역적으로 인접한 교회일수록 서로에 대한 미움과 적대감은 더욱 심각하게 증폭되어 왔다. 물론 이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연합과 교회연합 사업을 장려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교회연합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구호는 분명 옳지만 때로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개 교회들이 추구하는 개인주의와 물량주의의 목표와 너무나도 닮아 있다. 이럴 경우 교회연합은 연합 사업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되고 만다. 교회연합이란 그 자체가 교회의 본질이요 목표이지 결코 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개인주의를 거부하는 교회론 그렇다면 각 교회의 개인주의화와 이로 인한 지역 교회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가? 야고보 사도가 지적한 것처럼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 4:1)는 질문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교회 간의 갈등의 주원인은 어쩌면 전도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적인 “욕심”이 아닐까? 한국교회가 전도라는 미명아래 감추고 있는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사도교회와 초대교회의 초심, 즉 “교회는 하나이며 그 머리도 하나”라는 성경의 근원적 교회론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철부지 아이들의 명분 없는 아집으로 인해 벌어지는 싸움과도 같은 지역교회들 사이의 아귀다툼은 분명 해소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신칭의 교리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교리를 우리 자신의 욕심을 포장하는 포장지로 사용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나만 옳다는 독선을 옹호하는 도구로,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상대를 무조건 부정하고 배척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은 분명 이신칭의를 가르치지만 성경의 교회론은 결코 개인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 우리는 왈가왈부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만 알 뿐이다. 하지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은 결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한 몸을 이룬 “더불어 공동체”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자마자 그분의 몸에 속한 한 지체가 된다. 많은 지체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 몸에서 한 지체는 다른 지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다른 교회의 성도 없이 우리 교회의 성도도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론이다. 마치는 말 천국이 하나이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하나다. 이 지상의 교회가 아무리 불완전하다 해도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의 몸, 한 몸이다. 정상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체가 있다면 모든 지체가 함께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 지체가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도움의 필요는 더욱 긴박하고 절실하게 느껴져야 할 것이다. 모든 한국의 지역교회들이 “우리 교회” 내지는 “내 교회”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을 벗어던지고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보다 성경적이고 보편적인 사상에 사로잡히기를 간절히 바란다.
997 no image |심|층|진|단| ‘새 관점 학파의 <율법주의 이해>’에 대한 비판_박동근 목사
편집부
3565 2013-11-05
‘새 관점 학파의 <율법주의 이해>’에 대한 비판 < 박동근 목사, 강변교회 협동목사 > ‘바울에 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f Paul, NPP) 학파 신학자들은 바울과 유대주의를 언약적 율법주의의 연속성 아래 놓고 종교개혁신학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1세기 유대주의 정황에 조종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신학의 제1원리 혹은 외적 원리로써 성경을 철저히 따르지 않고, 유대주의와 구약(정경과 그 권위)을 구분하지 못한 채 바울 신학이 언약적 율법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새 관점의 방법론은 1세기 유대주의를 신학의 제1원리처럼 여기고 바울을 유대주의 신학자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1. 참된 신학적 방법론에 근거하고 있는가? 참된 신학은 성경만이 진리의 척도라는 사실을 고수한다. 오직 바울 연구는 13권의 바울 서신 자체의 음성에 귀 기울일 뿐만 아니라 66권 성경의 유기적인 문맥과 정황 속에서, 즉 성경의 통일성 안에서 바울의 초상을 그려야 한다. 물론 바울 저작과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지만, 언제나 신학적 체계 구축과 결론은 성경에 의해 조종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방법론이 종교개혁의 대안이라 주장하는 새 관점 주의자들은 종종 조직신학과 교회의 역사적 고백들을 무시하지만, 문제는 성경신학이냐 조직신학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건전하고 타당한 신학 방법론과 해석학 그리고 주석을 통해 온전한 신학 체계를 구축하느냐의 문제이다. 새 관점 학파에 속한 톰 라이트 역시 자신의 신학 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이는 자신의 방법론으로부터 귀결된 것이다. 개혁신학의 교의 체계 역시 신학적 방법론과 해석의 원리, 즉 문법적이며 역사적이고 신학적 해석를 따라 성경을 해석한 결과물들인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과 개혁신학은 교의 체계의 선입견 속에서 성경을 왜곡했다고 하면서 자신은 ‘오직 성경으로’의 원리를 따른다는 톰 라이트의 자화자찬은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양자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성경을 신학의 제1원리로 삼으며 성경 자신의 음성을 따라 신학 체계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새 관점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1세기 유대주의를 신학 원리와 전제로 삼아 성경을 해석하였고 성경의 일부만을 인용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오직 성경으로’의 모토를 따라가고 있는가 분명하다. 2. 톰 라이트의 신학적 방법론 오류 톰 라이트가 스스로 ‘오직 성경으로’의 실천자라고 고백한 것은 과연 정직한 진술일까? 진정 자신은 성경의 진정한 헌신자이지만, 종교개혁과 개혁주의는 교의신학의 선입견 아래 성경을 왜곡한 성경에 문외한들이었을까? 진정 개혁주의는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체계를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선별 인용한 사람들일까? 이와 관련해 김병훈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이들은 ‘새 관점’이 성경에 대한 정직한 주석에 기초하여 제시한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그들의 생각에 종교개혁신학의 ‘옛 관점’을 고집하는 것은 학문에 대한 정직한 태도가 아니며 교리의 전통 안에 갇혀 있는 잘못을 범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까? ‘새 관점’의 신학적 소재에 대한 논고의 평가는 단지 성경 주석에 근거한 ‘새 관점’을 전통 신학에 근거한 ‘옛 관점’으로 제한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가 아니다. ‘옛 관점’도 성경의[에] 근거한 신학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개혁신학은 철저한 성경의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의 기초 위에서 주석한 결과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새 관점의 성경해석의 결과들과 그로부터의 신학 체계들이 성경만이 아닌 1세기 유대주의에 조종된 성경해석의 결과들로서 신학의 제1원리로서 성경 해석의 원칙을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성경 자체의 진리를 왜곡하게 되었다고 판단한다. 3. 율법주의 범주 안에 있는 새 관점 학파 새 관점주의자들은 유대주의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하고도 그러한 결론을 엉뚱하게 적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주의를 언약적 율법주의, 곧 은혜로 시작하여 인간의 행위로 끝마치는 구원론적 구조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유대주의는 언약적 율법주의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미-펠라기안주의적 율법주의라고 불려야 한다. 바울은 이러한 율법주의적 성향을 향해 유대인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결론에 도달한 그들은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행위로 머물기는 해도 은혜가 존재하기에 은혜의 종교라는 것이다. 유대주의가 율법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은혜가 존재하기에 율법주의가 아니라는 주장은 로마 카톨릭 유사한 은혜관을 갖는다는 것을 입증한다. 사실 율법주의에는 펠라기우스주의처럼 은혜를 전면 부정하는 강경한 율법주의와, 은혜와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세미-펠라기우스주의적 율법주의를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이러한 율법주의 이해는 교회사 속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그러나 새 관점주의자들은 세미-펠라기안주의적 율법주의를 은혜의 종교로 여긴다. 무엇보다 그들은 종교개혁 무용론의 전제가 비상식적이다.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이 개신교 vs. 펠라기우스주의적 로마-카톨릭과의 논쟁을 세미-펠라기우스주의적 은혜의 종교인 유대교에 대입해 바울을 오독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세미-펠라기우스주의적 율법주의이지 결코 펠라기우스주의적 율법주의가 아니다. 이들은 종교개혁 무용론이라는 주장을 펴가면서 전혀 상식 밖에 판단을 전제로 그렇게 주장한다. 이들은 율법주의에 대한 개념을 펠라기우스주의에 너무 좁게 설정하고 한편 세미-펠라기우스주의에 너무 관대함을 표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의를 통해 칭의를 받을 수 없으며, 중생한 자조차 남은 죄가 있어 성령의 열매로서 행위가 칭의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가르친다. 따라서 오직 죄인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가 하나님의 공의적 측면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선물로써 하나님의 의에는 공의적 측면으로서 도덕적이고 분배적 의 개념이 확고히 전제된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의 ‘오직 은혜로’가 철저히 ‘오직 그리스도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마치는 말 우리가 전가받는 선물로써의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께서 철저히 죄인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분배적 의를 순종과 형벌을 통해 성취하셨기에 주어진 것이다. 즉 우리가 전가받는 의는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받으시고 순종하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결과로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의의 전가는 오직 은혜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위해 대가를 치르셨던 것이다. 이러한 의의 전가를 부정하는 세미-펠라기우스주의는 역사 속에서 은혜의 종교로 여겨진 적이 없다. 세미-펠라기우스주의는 펠라기우스주의와 마찬가지로 모두 율법주의에 포함될 따름이다. 성경이 인정하는 은혜의 종교는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만’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직’(sola)의 제거는 하나님께 영광에서의 ‘오직’(sola)도 제거하게 만든다. 그것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공로의 영광이 인간의 행위에 돌려지게 만들뿐이다.
996 no image |박윤선 5분 새벽기도 설교 <25>| 모세의 금식 기도
편집부
6352 2013-11-05
모세의 금식 기도 시편 99편 6-9절 “중대한 책임감으로 그 일을 완성하기 위해 금식 기도를 필요로 했던 것” 모세와 아론과 사무엘은 특수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의 인물이었습니다(6절). 이 세 사람의 기도 생활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1. 모세는 근심과 책임감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금식한 것은 그가 인도한 백성을 위한 책임감과 근심이 컸던 까닭입니다. 금식은 근심에 끌리고 책임감이 무거운 가운데서 되는 일입니다(참조, 시 35:13; 69:10; 마 4:1-2; 행 13:3). 금식은 성경에 있는 대로, 시험 받거나 시험 받을 위험이 있을 때에 하고(마 4:1-2), 중대한 선택 앞에서 하는 것이며(눅 6:12), 중대한 일을 경영하려고 할 때에 합니다(행 13:3; 14:23).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금식을 하는 것은 금식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요 기도에 정력을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중대한 책임감을 느끼어 큰 근심을 가졌으며, 그 일을 완성하기에 큰 기도를 필요로 하였던 것입니다. 칼빈은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안다. 음식을 많이 먹고 나면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으며 열정적으로 기도가 되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금식은 주로 기도를 하기 위해서 합니다(느 1:4; 눅 2:37; 행 13:2-3; 14:23). 2. 모세는 이기주의에서 멀리 떠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향기 있는 기도의 특질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장에 가르치신 기도의 정신이 역시 그러합니다. 한 사람이 밤중에 떡 세 덩이를 빌리러 간 것은 그를 찾아온 동무를 먹이려고 그리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애고 너를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신 9:14)라고 하실 때에, 모세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금식기도 하면서(신 9:18)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역사상에 기도로 승리한 자들은 모두 이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조지 뮬러는 불쌍한 고아들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또 불신자들의 회개를 위하여 여러 해 동안 기도하였습니다. 3. 금식과 관련하여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금식은 결사(決死)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몸을 해하는 것은 성경적 교훈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금식을 무슨 공로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욜 2:12-13). 금식은 주로 정성껏 기도하려는 목적으로만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지성껏 해야 합니다. 부룩스(Brooks)는 “그림에 있는 불은 불이 아니요 죽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며 간절하지 않은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왕을 찾아보려고 일생 동안 힘쓴다 할지라도 언제 면회 시간을 얻을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왕에게 아무 날 아무 때에 면회 갈 터이니 그때에 꼭 만나 달라고 할 수 없고, 항상 찾아다니다가 왕이 허락하는 기회에만 면회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서 우리가 정성을 바쳐 계속 기도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분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995 no image |독후감| 『박윤선과의 만남을 읽고』을 읽고_이원평 목사
편집부
3028 2013-10-22
『박윤선과의 만남을 읽고』을 읽고 내 마음을 사로잡은 목사님 < 이원평 목사, 합신 1학년 > “개혁주의 신학 열심히 배우고 익혀 주님의 교회에 유용한 사역자 되고 싶어” 이번에 대담 형식으로 엮은 박윤선 목사님에 관한 대담집이 두 권으로 나왔다. 이런 식의 대담집은 그렇게 흔치 않아서 그 내용이 어떻게 채워져 있을지 서점에서 손에 드는 순간 꽤나 궁금했다. 이야기체를 그대로 살려서 출간한 책이라 그런지 읽기도 대단히 쉽다. 그리고 꾸밈없이 진솔한 고백을 담은지라 읽는 내내 큰 감동이 있었다. 1권은 방학 중에 열리는 히브리어 공부 기간에 짬을 내서 먼저 읽었는데 다음날 퀴즈 준비하는 것도 뒷전으로 미룬 채 저녁 내내 읽어나갔다. 그 감동이 너무 커서 히브리어 기간이 끝나자 2권도 망설임 없이 주문해서 읽었다. 저녁에 책을 받았는데 은혜를 받으며 회개하는 심정으로 다 읽고 나니 다음날 새벽 4시경이었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내용이 너무 짧아서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리고 내친 김에 남은 방학 기간 중 목사님의 다른 저서들도 읽으려고 책장에서 그분의 저서들을 모두 빼서 책상에 올려놓았다. 이 책에 크게 세 부류의 증언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먼저는 박윤선 목사님의 기도 생활에서 영향을 받은 분들이다. 어디를 가든지 기도하던 사람, 좋은 장소를 보면 기도하기를 원했던 사람,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의 사람, 이것이 그들의 증언이었다. 신학자로서 기도의 사람이라는 평을 받는 분들은 그리 많지가 않은데 그런 영향력을 후대에 남겼다는 것이 참 귀한 일이라 생각된다. 두 번째로는 고인의 어린아이 같은 인격에 감화를 받은 분들의 증언이다. 꾸밈이 없고, 솔직하며 강직한 성품의 사람, 거짓을 모르며 진실했던 사람. 그리고 세 번째로는 신학자요 주석가로서의 박윤선 목사님을 떠올리는 분들이 참 많았다. 밥을 굶으면서도 주석 집필에 전념했던 사람, 여행지나 피난처에서도 주석을 집필 했던 집념의 사람, 주석 집필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은 희생했던 사람. 목사님의 주석을 읽으며 평생 목회에 동반자로 삼았던 수많은 분들의 증언이 이 책에 담겨져 있었다.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보니 주석에 대한 찬사가 대단하다는 것을 곳곳에서 보게 되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인데 수많은 분들이 이토록 칭찬을 한단 말인가? 형편이 허락하면 빨리 구해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 책을 통해서 박윤선 목사님의 삶의 궤적을 여러 증인들을 통해서 들어보니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그가 주위에 남긴 영향력도 드러나지 않게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부분을 잘 드러내준 것이 이 책의 귀한 점이라고 생각된다. 한 사람의 헌신이 한국 교회 안에 남긴 열매가 이렇게 클 줄은 미처 몰랐다. 그리고 이 시대에 합동신학대학원에서 정암 박윤선 목사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신학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정말 귀한 열매라 생각된다. 합동신학대학원이 성경적인 신학을 지키며 올바른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데 있어서 한국교회 안에서 맡고 있는 역할은 참으로 막중하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한 학기를 배워보니 모두가 개혁신학에 충실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가 그런 것 같다! 그래서 항상 시간이 지나면 개혁이 되어야 하나 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합신을 통해서 복음의 역사를 계속해서 이루어 가실 줄 믿는다. 사실 나는 감리교회에서 자라나 신학 수업을 받고 목사 안수까지 받은지라 장로교회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니 한국 장로교회에 박윤선 목사님과 같은 거목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2005년 3월경에 서영일 교수님이 쓴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라는 책을 읽은 것이 그분과의 본격적인 첫 만남으로 기억된다. 개척 목회를 시작하면서 한국교회사를 개인적으로 공부하다가 박윤선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분의 인격과 학식, 고난을 온 몸으로 이겨내신 것, 수많은 저작들과 교회에 남긴 유산이 놀랍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그 전기를 읽으며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한국 교회 안에 이런 분이 계셨다니! 이 사실을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니! 그렇게 전기를 다 읽고서 다음날 아침에 주체할 수 없는 마음으로 차를 몰아 대전에서 단걸음에 합동신학대학원으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홀로 조심스럽게 합신의 교정을 거닐면서 ‘나도 이런 신학교에서 제대로 된 신학 수업을 받아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하나님 앞에서 기도와 한숨 사이를 오갔던 일이 새삼 떠오른다. 지금 합신의 입구는 변했지만 강의동과 기숙사는 변하지 않아 가끔 그 앞을 홀로 거닐 때면 그날의 감회가 새롭다. 지금 생각해보니 점심시간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때 학생들이 강의동에서 나와 기숙사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받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1학년 때부터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통해서 청교도들과 개혁자들을 알게 되어 학교에서 가르치는 자유주의 신학을 어느 정도 분별하고 물리칠 수 있었다. 교단의 제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도저히 더는 견디기 힘들어 자퇴를 하고 개척 목회를 하면서 독학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학문적인 기초가 약했던 나에게 독학은 쉬운 길이 아니었다. 자유주의 신학에 진절머리가 났던 나는 늘 학교 공부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기왕이면 성경적인 신학을 한번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 그런데 한국 교회 안에 이렇게 아름다운 신학교와 신학 전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너무도 반가웠다. 비록 지금 나의 현실은 여러모로 어렵지만 합신으로 교단을 옮기고 합신에 입학해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만 하다. 박 목사님께서 그렇게도 강조하신 기도의 열정이 내게 아주 약하다는 것이 무엇보다 괴로웠다. 한 학기 신학 수업을 받아보니 나의 실력도 너무나 부족한 것이 드러나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사실조차 부끄러웠다. 영력과 실력을 다 갖춰야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 박윤선 목사님이 강조하신 바인데 나는 둘 다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제 합신에서의 첫 학기 수업을 마쳤다. 참으로 내게 버거운 일정이었다. 앞으로 남은 학기 동안에도 개혁주의 신학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주님의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사역자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래야 박윤선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한 사람으로서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994 no image |독후감| 『톰 라이트에 대한 개혁신학적 반응』을 읽고_최성운 목사
편집부
3289 2013-10-22
『톰 라이트에 대한 개혁신학적 반응』을 읽고 신학적 방법론과 개혁신학의 자세 < 최성운 목사, 수원 예수사랑교회 교육목사 > “신학적 학문의 탁월성에 관심가지기보다는 내용이 주는 유익 살펴야” 톰 라이트는 분명 인기 있는 신학자이다. 이 학자는 박식하다. 게다가 이 학자의 연구에 사용되는 방법은 진짜 학문을 한다는 사람의 입장에서 신학적 극우주의자라 판단되는 “순진한” 근본주의자들의 것과는 다르다. 그가 쓰는 방법은 좀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그의 결론도 왠지 모르게 근본주의자들의 결론과 닮은 부분이 많으면서도 좀 더 설득력 있게 보인다. 톰 라이트는 한마디로 “쿨하다.” 아마 이것이 톰 라이트에게 호의적인 복음주의자들의 반응일 것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개혁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톰 라이트는 적이라 또는 아군이라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적이라 하기에는 개혁신학이 환영할 만한 수많은 신학적 기여를 하고 있고 반면 아군이라 하기에는 그의 성경해석이 지나치거나 우리가 배척하는 그 결론 -가령 반(半)펠라기우스적인 결론- 과 너무 닮아있다. 그런데 그런 결론을 내린다고 해서 쉽게 내치고 배척할 수도 없다. 라이트의 글 중 성경적인 부분이 많고 게다가 쉽고 대중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를 철저하게 인정하는 개혁신학을 배운 사람마저도 라이트의 논의에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구 교수의 책은 분명 반가운 책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는 톰 라이트를 굳이 다 읽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그의 주장이 주제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 톰 라이트를 아직 읽지 않은 사람에게 “이승구 교수님의 이 책을 읽어보라, 그러면 톰 라이트의 논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톰 라이트를 읽어라. 그것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더 유익할 것이다.” 이렇게 권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책은 맹목적인 비판만 하지 않는다. 오히려 톰 라이트를 적정선에서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저자가 책 마지막 부분에서 쓴 것처럼 이 책은 톰 라이트에 대한 개혁 신학적 성찰이라는 원형 테이블로 초청하여 대화를 요청하는 책이다. 저자의 의도대로 이 책을 톰 라이트도 읽고 -이 책의 영문판이 필요하겠지만- 어떤 답변을 주어 건설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길 바라고 또한 이 책을 통해 톰 라이트의 지지자들과 개혁신학자들 모두 서로 더 진리에 다가가는 장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이 책에서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유익은 톰 라이트가 왜 1세기 유대교라는 맥락에 그렇게 큰 권위를 두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성경 전체 맥락이 더욱 중요하고 신약의 거울에 비추어 구약을 해석하고, 구약을 통해 신약을 더 깊이 보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인데 얼핏 보면 톰 라이트도 그렇게 해석하는 듯하다. 구약과 신약을 완전히 따로 떼어 단절로 보는 현대 신학계의 흐름에 반하여 톰 라이트에게는 구약과 신약이 하나의 성경으로 묶이는 것 같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그 다름은 그가 1세기 유대교라는 정황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고 그것의 권위를 굉장히 높이는 데 있다. 사실, 학계에서 어느 정도 인정되는 이러한 역사적 접근이 더 합리적으로 보이고 그래서 그 결론이 더 설득력 있게 보이기 쉽다. 그러나 무엇인가 꺼림칙하다. 이 책은 그 꺼림칙한 것이 무엇인지 잘 밝혀준다. 그것은 그의 성경 접근의 기초가 되는 방법론 때문이다. 저자는 책의 제3장에서 라이트의 방법론을 상세하게 비교적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다룬다. 저자는 이 장에서 라이트의 방법론이 얼마나 성경적인지 자세하게 비판적으로 논의하는데, 이것을 통해 독자들은 라이트의 논의 과정이 왜 그렇게 합리적으로 보이는지, 또한 결론이 왜 그렇게 설득력이 있는지,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 시대의 사조와 그의 성경해석이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쉽게 이야기해서, 톰 라이트가 왜 이 시대에 각광을 받는지 등을 알 수 있다. 1세기의 유대교라는 역사적 정황과 당시 문헌을 정경과 같은 권위로 사용하면서 논의를 진행하는 라이트지만 그는 분명 개혁신학에서 환영할만한 수많은 좋은 결론들을 내린다. 이 좋은 결론들은 성경의 권위를 그대로 인정하는 우리 쪽에서 정말 잘 사용할 수 있는 귀한 결론들이다. 그런데 이 결론들을 사용하려면 그 결론이 도출된 과정과 라이트의 의도와 그의 방법론과 그 부작용 등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그의 결론들은 더욱 자유자재로 개혁신학을 통해 선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면에서 저자의 논의는 빛을 발한다. 저자는 톰 라이트라는 정력적으로 집필 활동을 하는 대중적이며 인기 있는 성경 교사를 우리의 적으로 몰아내어 진영 논리를 공고히 하지 않는다. 오히려 라이트가 더 성경적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이 책에는 담겨 있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가 개혁신학의 입장을 저변에 깔고 논의하기 때문에 개혁신학이 얼마나 더 풍성하며 진리에 가까우며 깊은지에 대한 충분한 전달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물론 개혁신학을 그렇게 다루려면 라이트가 크게 어필하는 대상인 대중이 읽기에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많은 지면이 할애되어야 했을 것이므로 책의 의도와는 맞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지만 각각의 주제를 다룬 개혁신학의 성경적이면서도 풍성한 논의들이 이해하기 쉽게 성경해석과 더불어 조금이라도 덧붙여졌으면, 또는 개인 연구를 위한 간략한 안내라도 되어 있었다면 오히려 더 대중에게 어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그런 개정판이이나 시리즈물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이 책은 분명 톰 라이트를 읽고 크게 감명 받은 사람뿐만 아니라 톰 라이트의 위험성에 대해서 들어 보았으나 톰 라이트의 저작을 아직 읽어보지 않은 사람, 톰 라이트를 읽고 비판적인 의식을 가졌으나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정확히 집어낼 수 없는 사람, 그리고 개혁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거나 개혁신학에 관심 있는 사람라면 누구나, 마지막으로 톰 라이트를 포함하여 꼭 한 번쯤은 읽어 보아야할 책이다. “그리하여 라이트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자신들도 부디 성경을 보다 바르게 이해하고 그 가르침의 빛에서 우리 자신을 검토하여 진정한 새 언약의 백성으로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살기 원한다”(책의 본문 328쪽, 저자의 말 인용).
993 no image |심|층|진|단| ‘바울에 대한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_이승구 교수
편집부
2570 2013-10-22
‘바울에 대한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 < 이승구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않게 하는 주장들 항상 경계해야” 이미 40-50여 년 전부터 ‘바울에 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f Paul, NPP)으로 바울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신약학계에서 나타났다. 이러한 주장은 이제 새로운 관점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었으며, 이에 대한 좋은 비판서들도 많이 나와 있다. 또한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라는 것도 단일한 것이 아니어서 ‘바울에 대한 새로운 여러 관점들’이라고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제2성전 시기 유대교(Second Temple Judaism)와 바울에 대해서 성경에 묘사된 예수님의 견해나 종교개혁자들의 바울 이해와는 다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첫째로,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은 근본적으로 성경에 대한 비판적 이해에 근거한 주장과 논의라는 문제를 지닌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유대교에 대한 기존의 이해나 종교개혁자들의 바울에 대한 이해가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역사적으로 그 시대의 문헌을 정확히 살펴보면 제2성전시대의 유대교의 모습이 신약 성경의 예수님이 말하는 모습과는 다르다고 하며, 따라서 우리들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주장을 따라서 생각하지 말고 역사적 검토를 거친 역사적으로 바른 판단을 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바울이 말하는 것을 종교개혁자들의 렌즈로 읽지 말고 바울이 처한 역사적 상황에 정확히 근거한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독특한 정향성을 지닌 독특한 해석을 내어 놓는다. 그런데 그런 해석이 객관적으로 옳지도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작업도 자신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그 시대의 사료에 근거한 철저히 역사적인 것도 아니며, 더 나아가서 이는 기본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해석이라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둘째로, 그 내용과 관련해서 이런 해석을 하는 학자들은 예수님 당시 유대교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예수님 당시 유대교도 구원에는 은혜로 들어가며, 단지 구원에 머무르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한다. 이 말은 (1) 마치 바리새인들과 유대교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 같은 시사를 주는 해석들이며, 그러한 해석은 성경에서 묘사된 예수님의 해석이든지 개혁자들이 해석한 바울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2) 자신들이 해석한 유대교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지 않았고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며, 은혜로 구원 얻은 자들이 그 은혜의 상태에 머물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으므로 바울이 예수님을 믿었을 때 구원론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전과 같이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예수님 안에서 임하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지 은혜에 근거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이제 유대교가 말하는 율법을 지켜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잘 행하여 은혜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셋째로, 위의 논의에 충실하면서, 새 관점주의자들은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순종하는 삶을 잘 살아 그들의 순종의 삶 전체에 근거하여 최후에 칭의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믿음과 믿는 사람으로서의 삶에 근거하여 최종적 칭의를 받는다고 바울이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최후의 심판 때에 칭의 선언이 우리의 삶 전체를 염두에 두고 내려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미리 믿음에 근거해서 앞당겨 선언하는 것이 현재적 칭의라고 한다. 이처럼 무게의 중심이 최후 심판에서 칭의 선언이 주어질 것에 주어지고, 그 때에는 우리의 해위 전체를 고려하여 칭의하신다고 함으로 결국 이전에 천주교에서 주자하던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에 이런 바울 해석이 옳다면 개혁자들의 이신칭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종교개혁기의 논의에서 개혁자들이 틀렸고, 천주교적 반펠라기우스적 입장이 옳다는 것이 된다. 이는 결국 종교개혁이 잘못한 것이라는 주장이 되므로 개신교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주장이다. 넷째로, 그렇게 해석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이런 해석은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imputation)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라고 새 관점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하나님의 믿음으로 해석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구원 얻는 것이라고 한다. 동시에 우리들은 우리가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삶으로 궁극적 칭의를 받는다고 하여 결국 신인협력적 구원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새 관점주의적 해석이 결국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임이 천명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들은 바울에 대한 새관점주의적 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 이는 그저 학자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논의의 다양성의 한 부분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근본을 뒤흔드는 주장인 것이다. 성경을 중요시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않게 하는 이런 주장들에 대해서 우리들은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992 no image |박윤선의 5분 새벽기도 설교 <24>| 아브라함의 기도
편집부
2816 2013-10-22
아브라함의 기도 창세기 18장 22-33절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일 수 있어”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하여 기도하며 여쭙기를 의인을 악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어떠한 기도였습니까. 1. 하나님의 뜻을 믿는 기도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의사를 물어보는 것이요 자기 요구대로 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자아를 포기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자는 자기의 평안과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를 중심으로 살 때에는 끊임없는 고난을 당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일이 안 되어도 그 환경에서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2. 의를 따라 갚아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천국의 구원을 입혀 주실 만한 의가 우리에게 있나요.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뿐입니다. 그것을 받는 방편은 믿음뿐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 증거는 그리스도의 의를 사모하되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사모하는 것입니다(마5:6). 3. 남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의인들의 구원을 위한 것도 사실이지만, 소돔 고모라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라고 한 말씀(24절)이 그것을 알려줍니다. 남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은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기도를 하지 않으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삼상12:23). 그런 기도가 쉽게 되지 않지만 힘쓰면 가능합니다. 모든 좋은 일들은 힘쓰지 않고 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좋은 일이든지 힘쓰면 처음에는 잘 안 되던 것도 후에는 순조롭게 되는 법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힘을 써서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신 법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를 “쳐 복종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고전9:27). 4. 대면하여 말하는 기도였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기도를 읽어보면, 두 사람이 서로 대면하여 담화하는 기도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청원하면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고, 하나님이 대답하시면 아브라함이 또 다시 청원하였습니다. 기도가 이렇게 된 것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사이에 교통이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막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죄악입니다. 이런 사상과 행동은 우상 숭배나 음행과 같은 종류의 것입니다. 우리는 생사의 문제를 걸고 주님을 믿는 만큼, 이런 우상 숭배와 음행을 결사적으로 배척해야 합니다. 5. 자기를 티끌과 같이 보는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티끌”과 같이 보았습니다. 티끌은 땅에 붙어 있는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자기를 땅에 붙은 티끌과 같이 낮추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도록 만드는 것도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991 KL열린교회 교사강습회와 성경학교_하광영 목사 파일
편집부
3436 2013-10-08
KL열린교회 교사강습회와 성경학교 < 하광영 목사, 대봉교회, 교육부 총무 > 순식간에 교회학교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손 놓고 바라볼 수 없는 중대한 일이긴 한데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르는 난감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단지 한 지교회의 문제라면 어떻게 손을 써볼 텐데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출산율은 떨어져 아이들 숫자가 적어집니다.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점점 팽배해가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등 문명의 기기들이 학생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 시대, 이 나라의 세속적인 풍조와 반기독교적인 분위기는 아이들의 마음을 급속도로 영적인 일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장년 교인보다 더 빠르게 쇠약해져가는 것이 교회학교입니다. 교회학교는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아예 교회학교가 없는 교회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 모두 고민입니다. 쓰러지는 건물을 다시 일으켜 세울 힘이 없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렇다고 넘어져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상황을 되돌릴 힘은 우리에게 없지만 더 이상 쓰러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면서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회복의 은혜를 다시 한 번 허락해주시기를 바라며 주를 바라야 할 때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총회교육부가 할 일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여전히 좋은 교재를 만드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아니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교재를 만드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교육지도자와 교사를 세워가는 일입니다. 교재를 만드는 일뿐 아니라 교육지도자들을 키워내는 일이 교육부가 앞으로 힘써 해야 할 일입니다. 사람이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올해 초 전국 4개 지역에서 교육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다. 열띤 호응이 있었습니다. 내년에도 꼭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내년 초에 제2회 교육세미나를 개최합니다. 내년에는 노회별로 혹은 두 노회 연합으로 세미나를 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희망하는 노회와 함께 의논하여 준비하려고 합니다. 노회와 교회가 필요로 할 때 기꺼이 가서 교육을 하려고 합니다. 지난 9월에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KL열린교회 교사강습회와 성경학교를 진행하고 왔습니다. 해외에서 처음 교육부에 요청하여 이루어진 집회였습니다. 교육부에서 파송되어 간 강사들의 강의를 통해 말레이시아 교민인 교사들은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경청하며 자신의 믿음이 구원 얻는 믿음인지 돌아보았습니다. 우리 교단의 교재가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졌지만 참된 복음의 말씀을 듣게 되고 가르치게 되어 큰 유익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교단에서 직접 나와서 하는 강의에 위로와 은혜의 시간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2박 3일로 진행된 성경학교에는 150여 명의 학생들과 교사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교육부 강사들은 저녁부흥회와 주일집회를 인도하며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하였고 학생들은 주님을 믿고 살아가기로 다짐하였습니다. 김기홍 담임목사님은 열린교회 뿐만 아니라 해외에 있는 한인교회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교육에 힘써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총회교육부는 앞으로 노회와 교회가 원하면 찾아갈 것입니다. 해외에 있는 교회와 노회라도 초청하면 기쁨으로 가서 섬길 것입니다. 교사들을 말씀으로 깨워야 하고 사명으로 무장시켜야 무너져가는 교회학교를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단은 교회교육을 살리기 위하여 실력 있는 교육지도자를 키워내야 합니다. 그래서 교육부는 합신에 교육부 동아리를 구성하는 중에 있습니다. 교회교육에 관심 있는 학생들을 발굴하고 키워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개혁신학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학생들을 긍휼히 여기는 지도자들을 많이 키워내는 일이 교회교육을 회복시키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더디지만 이 일을 계속해나가려고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교단 내 교회학교들이 다시 살아나기를 소원합니다.
990 |KL열린교회 교사강습회와 성경학교를 마치고| 교사들 사명 인식의 계기된 강습회_김기홍 목사 파일
편집부
3326 2013-10-08
교사들 사명 인식의 계기된 강습회 < 김기홍 목사, KL열린교회 > 한국교회에 '다음 세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에 어린이, 청소년들이 줄어들고 고령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자연적 인구 감소의 현상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교회의 교육이 나날이 다양해지는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KL열린교회 교회에는 아직 아이들이 있다. 영어권인 말레이시아에 공부하러 온 아이들이 있다 보니 교회학교의 활동이 활발한 편이다. 이 아이들은 한국과 한국교회의 미래요 꿈나무들이다. 어려서부터 세계의 문화를 경험하고 외국어를 배우면서 글로벌 인재들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미래로 볼 때는 양질의 선교자원이기도 하다. 이렇게 귀한 아이들을 주셔서 신앙적으로 더 잘 가르치고 양육해야 하지만 해외교회다 보니 교역자와 좋은 교사들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이번에 가진 어린이 성경학교는 의미가 깊고 풍성했던 시간이었다. 우리 합신 총회 교육부에서 세 분의 목사님과 한 분의 전도사님께서 오셔서 교사강습회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주셨다. 교사들이 새롭게 사명을 인식하고 공과지도에 관한 실재적 방법을 습득하고 영혼을 향한 열정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아이들이 은혜 받고 새롭게 결단하며 변화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온 교회가 힘을 얻는 시간들이었다. 이국에 있는 교회까지 신경을 써 주시고 어린 영혼들을 품어 주시는 총회와 교육부의 사랑에 대해서 감사드린다. 바라기는 단발적인 행사가 아니라 꾸준하게 관심과 기도, 그리고 좋은 자료와 교육이 제공될 수 있기를 부탁드린다. 다시 한 번 총회와 교육부, 그리고 수고해 주신 목사님들과 전도사님께 감사드린다.
989 no image |박윤선의 5분 새벽기도 설교 <23>| 기도의 중요성
편집부
3195 2013-10-08
기도의 중요성 < 골로새서 4장 2-3절 > “복잡한 일로 방해를 받기에 힘쓰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어” 기도는 중요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5:6에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1. 기도에 힘쓰라 우리는 기도에 힘써야 기도다운 기도를 하게 됩니다. 기도는 당장 큰 효과를 거두는 것이 아니므로 계속 힘써야 하고, 기도는 복잡한 일로 인하여 방해를 받기 때문에 고요한 자리를 찾아 힘써 해야 합니다. 기도를 규칙적으로 하지 않으면 이럭저럭 기도를 하지 못하게 되므로 힘써야 합니다. 사람은 기도에도 외식하게 되므로 힘쓰지 않으면 참된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하여 한 번 머리 숙여 기도하는 모양을 내고 돌아가서는 전혀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찌무라(內村鑑三)는 기도하지 않는 신학자에 대하여 혹평하여 말하기를 “이런 신학자들은 교권자들의 머슴이라”고 하였습니다. 2. 기도에 깨어 있으라 2절에 말하기를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이 문구를 직역하면 “기도에, 감사에 깨어 있으라”가 됩니다. 곧 “기도에 깨어 있으라”고 함은 기도할 때에 다만 예식이나 습관에 의하여 중언부언하지 않고 그야말로 각성과 감격과 간절함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감사에 깨어 있으라”고 함은 이미 받은 은혜에 감격하고 또 앞으로 받을 은혜를 생각하여 감사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진실한 신자라면 영원한 미래에 반드시 잘 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신자로서 자기 장래를 생각하면서 감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두운 생각이고 잠자는 상태입니다. 3. 전도할 문 열어 주시기를 기도하라 전도에는 난관이 많습니다. 첫째는 불신자들의 마음이 굳어서 반응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전도할 용기가 부족한 것입니다. 이 난제 해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우리가 어느 때에 받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간절히 사모해야 받습니다. 간절하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을 정도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워져 있음을 말합니다.
988 no image |심|층|진|단| ‘바울의 새 관점’ 학파가 주장하는 ‘미래의 칭의’에 대한 비판적 소고_노승수 목사
편집부
4345 2013-09-24
‘바울의 새 관점’ 학파가 주장하는 ‘미래의 칭의’에 대한 비판적 소고 < 노승수 목사, 인천노회 >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순종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며 하나님은 그 의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것이 칭의 교리의 핵심” “우리의 행함은 그리스도의 의로운 순종의 전가에 비해서 심판대 앞에서 우리 구원을 결정하는 데 있어 아무런 효력이 발생하지 않아” 최근 회자되고 있는 톰 라이트(Tom Wright)를 중심으로 하는 ‘바울의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 학파의 여러 견해 중에 가장 미심쩍은 부분은 ‘미래의 칭의’에 대한 것이다. 새 관점을 지지하는 어떤 이들은 기독교강요의 칭의에 관한 진술과 관련해서 “칭의를 얻은 신자의 선행은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로운 행위로 여겨짐을 받게 된다”(3.17.8-10)는 칼빈의 진술을 근거로 “미래의 칭의는 칼빈도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어느 강연에서 톰 라이트가 "다른 그룹은 몰라도 칼빈의 후예들이 자기를 박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라는 표현을 한 것에서도 이런 문맥을 읽을 수 있다. 미래의 칭의를 요약하자면 “공로 없이 의롭다 함을 입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뤄질 심판이 행위에 대해서 이뤄지는 까닭에, 이 때 받게 될 행위에 대한 의롭다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기독교강요를 칼빈의 저술 의도에 따라 제대로 읽은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강요에 의하면 행위에 의한 의는 그 성격이 어떻든지 간에 이신칭의에 의존한다는 것이 칼빈의 설명이자 전제이다(3.17.9). 그리고 이 전제는 칼빈 당시의 반대자들, 곧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우리의 의는 행위들에 의해 완성된다(our justification is completed by works)"(3.17.8)고 하는 주장에 대해 논박하는 문맥에서 구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1. 전통적 ‘칭의’관에서 멀어진 새 관점 학파 종교개혁의 배경이 되었던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은 새 관점에서 말하는 ‘미래의 칭의’와 비슷한 국면을 가지고 있다. 사실 펠라기우스는 이미 고대교회로부터 정죄되었기 때문에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적어도 종교개혁 당시에는 없었다. 다만 이 펠라기우스주의의 변종이 나타났는데 먼저 선행적 은혜로써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가 '주입'이 되고, 이 주입된 의에 기반해서 신자가 순종의 삶을 살면 구원을 받게 되며 불순종의 삶을 살면 저주를 받는다는 행태의 절충적 펠라기우스주의가 당시에 있었던 일반적 교리였다. 결국 한 신자의 구원 여부는 신자의 순종과 불순종에 달린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새 관점의 미래적 칭의는 사실 이 반펠라기우스주의와 구조적으로 닮아있다. 반펠라기우스주의가 ‘의의 주입’을 말하는 자리에 ‘의의 전가’를 놓았던 것처럼, 새 관점 학파는 ‘순종의 공로’를 말하는 자리에 ‘미래적 칭의’를 놓고 있다는 구조에서 서로 닮았다는 점이다. 반면에 대부분의 종교개혁 시기의 신앙고백서들은 이 절반의 펠라기우스주의를 명백하게 반대한다. 특별히 '의의 주입'이라는 표현을 분명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신앙고백서들은 의를 얻는 유일한 수단으로써 믿음만을 제시했던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1장 1절에서 “하나님은 실제로 부르신 이들을 또한 거리낌 없이 의롭게 하셨다. 그들 안에 의를 주입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의롭다고 간주하시고 용납하심으로써 의롭게 하셨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2절에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얻고 그에게 의지하는 믿음은 의롭게 되는 유일의 도구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각자 어떤 전통에 서 있든지 간에 그가 종교개혁의 후예라면 우리가 구원받는 의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 외에는 없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새 관점 학파는 의의 전가라는 전통의 교리에다가 칭의가 진짜가 되려면 뭔가 더 있어야 할 것으로 ‘미래의 칭의’를 덧붙인다다는 점에서 반펠라기우스주의가 의의 주입 후에 ‘순종’을 구원의 공로로 첨가한 방식과 흡사하다. 이것은 칼 바르트가 종교개혁자들이 거절한 ‘의의 주입’과 ‘의의 전가’의 교리를 함께 인정하는 방식과도 흡사하며, 갈라디아 교회가 복음에 할례를 더하는 것과도 흡사하다. 2.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에 기초한 구원 전통적으로 칭의 교리에서 ‘의’는 ‘전가’의 방식으로 이해되었으며,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우리의 것으로 여겨졌다. 이것이 ‘칭의’의 신학적 본령이다. 칼빈은 칭의를 정의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사 그의 사랑 속으로 받아들이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칭의’는 죄를 씻는 일(the remission of sins)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일(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에 있다”(3.11.2)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대속의 공로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온전한 순종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며 하나님은 그 의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것이 칭의 교리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전가가 가능하도록 하는 ‘믿음’을 ‘주입’한다고 정리했다. 이때 믿음은 구원의 공로가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의 의와 십자가와 부활을 보고 그것과 연합하는 일종의 ‘어플’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효가 적용되도록 만들 뿐, 실제적으로 구원의 공효를 만들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은 구원의 공로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에 두고 그 의가 믿음으로 우리 것으로 칭해지는 것으로 정리를 한 것이다. 그런데 ‘미래적 칭의’의 성경적 근거를 보면 종국에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심판의 때에 우리의 행위가 심판의 준거가 된다는 점과, 이 ‘행위 심판’에 의거해서 성경에서 제시한 심판의 용례들을 보면 마치 믿음이 그 근거가 아니라 행위가 그 근거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착안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한 행위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음’을 미래적 칭의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실제로 이런 주장과 성경 해석은 반펠라기우스주의와 크게 다를 바 없다. 3. 구원의 공적이 될 수 없는 ‘선행’ 문제는 행위 심판의 미래적 칭의를 말하면서 동시에 구원은 누구도 행위로 받을 수 없다고 새 관점 학파가 강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톰 라이트는 현재의 칭의가 미래의 칭의의 근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심판을 선언할 근거가 행위이지만 성령의 역사의 결과물로써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매우 혼란을 가져다줄 뿐이다. 만약 성령의 역사의 결과라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행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결국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참 믿음을 가진 자가 중생하고 그 중생은 선행이라는 열매로 나타난다는 전통적 교리로의 회귀여야 하며, 그것을 구태여 ‘미래의 칭의’라는 말을 통해서 혼란을 야기할 필요가 없다. 칭의의 근거를 그리스도에게만 돌렸던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흔들 만큼 이 사안이 중대한가 하는 점도 역시 의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참된 믿음으로 성령을 따라 중생하고, 중생의 보증으로 성령을 받은 자가 내면적 변화를 통해 선행이라는 열매를 맺는다는 기존의 종교개혁자들의 설명이 훨씬 더 체계적이며 반펠라기우스주의를 경계하면서 성경의 본령을 더 잘 드러낸다고 하겠다. 백번 양보해서 톰 라이트의 주장이 전통적 칭의론과 다름이 없는 주장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이 ‘미래의 칭의’라는 용어는 행위구원론이 들어올 수 없도록 견고하게 만들어 둔 교회의 성문에 오히려 균열을 만드는 신학적 후퇴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톰 라이트는 종교개혁자들이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 때문에 엄격하게 사용한 ‘칭의’라는 용어를 순진하게 사용한 것이 된다. 종국에 행위가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 대해서 반대하는 신학자는 없다. 문제는 그것이 공적이 아니라면 행위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봐주시는 것이지, 우리 행위가 곧 심판의 준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국에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각자 자신이 행한 행위의 의를 따라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심판을 맞이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의 의가 그 근거이자 합당하며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마치는 말 칭의의 근본적 원리, 즉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를 전가 받아 법적으로 완전하게 의롭게 됨과, 심판의 문맥에서 행위에 의한 심판은 구별되어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미래적 칭의’라고 해서 ‘그리스도에 의한 칭의’와 이 ‘미래적 칭의’를 병렬로 놓게 된다면 신학적 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이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게 될지 심히 염려가 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톰 라이트의 주장대로 성령에 의한 행위라면 그것을 행위의 미래적 칭의라고 말해야 할지도 의문이다. 성경은 성령을 가리켜 그리스도를 증거하러 온 영이라고 명시하고 있다(요 15:26). 이런 점에서 우리의 구원과 관련한 모든 공로는 그리스도께로 돌려져야 마땅하다. 따라서 우리의 행함은 그리스도의 의로운 순종의 전가에 비해서 우리 구원을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아무런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의 행함이 어떤 효력을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톰 라이트나 새 관점 학파는 행위 구원론자가 되고 말 것이다. 반면에 효력이 없다고 말한다면 왜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순종의 충분성을 두고 우리 행위의 의를 심판 때의 의로 첨가해야 하는지 그 이유조차 분명치 않다. 그러므로 ‘현재의 칭의’ 곧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와, ‘미래의 칭의’ 곧 우리가 성령을 따라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의를 병렬로 놓는다는 것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따른 칭의의 중요성을 반감시키는 결과만 초래한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용어 사용은 필연적으로 행위구원론의 함정에 빠지는 사람들을 양산하게 되거나, 교회 안에 행위구원론이 들어오도록 만드는 관문이 될 따름이라는 점에서 결코 ‘미래의 칭의’를 우리는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987 no image |총회참석후기| 우리가 줄곧 부를 노래_남웅기 목사
편집부
2368 2013-09-24
우리가 줄곧 부를 노래 < 남웅기 목사, 바로선교회 > “모든 것 친히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금번 인천에서 모인 합신 제98회 총회 역시, 우리에겐 기쁨이었고 감동이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주장하시고 그 뜻대로 이뤄진 총회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설령 그러하지 못했다고 자책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설령 황당한 의결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형편없는 총회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완벽함이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연약하고 사악한 우리가 오늘을 당당하게 노래할 수 있는 것은 그 노래의 대상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 우리에게 부끄러운 모습이 있었다면 그건 우리의 참모습을 깨닫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고, 자랑스러움이 있었다면 그건 하나님의 위로이자 기뻐하심의 징표 아니겠습니까? 사실 총회 참석은 정말 고역중의 고역입니다. 한 시간 회의도 지루하겠거늘, 밤낮없이 2박 3일간 먹고 자는 것 외에는 줄곧 회의뿐이라면 그건 상상만으로도 숨 막히는 일입니다. 자주 발언하다 보면 자체 에너지라도 생길 수 있겠지만 말 한 마디 없이 그 참석만으로 충성과 헌신(?)을 다하는 대부분 95%의 총대들은 거의 파김치가 되어버리기 마련입니다. 오후에 잠시라도 쉬지 않으면 몸을 가눌 수 없는 저 같은 경우는 거의 초죽음의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양호실이라든지 잠시 누울 수 있는 휴게실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설령 그런 공간이 있었더라도 저는 회의장을 떠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는 귀한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몇몇 사람이 회의를 주도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이해를 돕게 하고 회의진행을 돕는 측면도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논리적이거나 좀 더 격정적인 사람이 발언권을 자주 얻는 건 순리입니다. 회의를 고의로 방해하거나 무례하거나 억지 피우거나 회의를 불법으로 진행하거나, 거짓보고자가 비난받을 일이지, 단순히 잦은 발언이라고 비난할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우리 합신 총회는 한국교회 안에서 상대적으로 제일 아름다운 교단으로 소문 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회의진행이 순리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욕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발언권에 제한이 없으니 그럴만합니다. 그러나 회의진행의 품위에 그친 칭찬만이라면 대놓고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교단(교회, 성도)이라면 적어도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하고,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만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때, 금년 우리 총회에서는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결의했습니다. 우리가 결의해놓고 우리가 놀랄 정도의 그 결의는 바로 부총회장 선거에서 일어났습니다. 3년 전, 처음 그 이름이 등장했을 땐 ‘결코 있어선 안 될 일’ 정도로 여겨지던 일이 이젠 한국교회 초유의 사건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뽑아놓고도 총대들의 걱정은 여전한 모양입니다. 현실이니깐요. 금년에 피선된 부총회장은 지극히 작은 상가교회 출신 맞습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선에서의 총회장 일을 어찌 감당할지 걱정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당일 점심시간의 대화 주제도 바로 이 걱정이었습니다. ‘사람 좋아 뽑아주긴 했지만 정말 해낼 수 있을까?’ ‘내후년 총회 장소는 어떡하지?’ 등등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능하게 하시고 그 뜻하신 바를 친히 이루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돈 없이도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미련함의 극치입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가 그 주인공입니다. 마찬가지로 ‘돈 없어 아무 일도 못하겠다.’는 좌절감 역시 성도의 가장 부끄러운 추태라 하겠습니다. 이제 곧 우리는 돈이 왕 노릇하는 세상에서 그 돈을 하나님이 주장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교회엔 너무너무 신실하여 복 받을 수밖에 없는 장로님도 있고, 그에겐 신학동기도 있고, 그가 섬겨온 노회도 있고, 그 외에도 준비된 인물이 많을 테니깐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줄곧 부를 노래가 있다면 그건 바로 “하나님이 계시잖아!”의 고백입니다.
986 <제3회 국토순례대장정을 다녀와서> _문은주 의료팀장 파일
편집부
3602 2013-09-24
제3회 국토순례대장정을 다녀와서 < 문은주 의료팀장, 역곡동교회 > 2013년 8월 4일부터 8월 8일까지 4박 5일간 슬로건인 ‘이 땅을 내게 주소서’와 함께 한 국토순례대장정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1. 사모하며 기다린 국토순례대장정 작년 이랜드에 근무할 때에는 베트남 의료선교기간과 교회국토순례 일정이 겹쳐 참여하고 싶었지만 마음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꼭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며, 6월부터 주보를 받으면 제일 먼저 혹시나 국토순례 일정이 공지되진 않았나 확인도 하면서 기다리던 중 주보에 국토순례 광고가 나오자마자 먼저 찾아가 참가 신청을 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국토순례 일정이 정해진 후에 강의의뢰가 4건이나 겹치도록 들어왔었고 내 의지를 보시려 하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쿨하게 포기했는데 국토순례를 다녀온 후에 다시 연락을 받았을 때는 4건 중 2건의 일정이 뒤로 미뤄져 9월로 일정을 잡았고, 2건은 3회 강의지원을 2회만 하고 대신 그 시간을 늘려 진행하고 3회 강사료를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경기도 포천, 강원도 철원지역을 행군하는 국토순례팀은 각 조마다 교사 2~3명, 학생 10명씩 구성원이 되고, 주방봉사자와 목사님들과 전도사님까지 60여 명이 함께 하였습니다. 8월 4일 주일. 오후예배시 파송식을 치른 첫 날은 역곡동교회에서 저녁강의와 야간행군을 하였습니다. 첫 강의를 맡아주신 세계선교공동체 이종훈 목사님께서는 한국에 복음의 빛을 전하려고 쇄국정책에도 굴하지 않고, 이 땅을 밟으신 외국인 선교사들과 그들의 복음전파 과정을 생생히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한국이 지금 선교사를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이 파송하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님들의 복음의 씨앗 덕분이라는 말씀을 들으며 부족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게 해 달라고, 나도 목숨 앞에서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갖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2. 양화진부터 시작된 딸과 함께 걸은 길 8월 5일 월요일 오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방문했을 때부터 쏟아진 장대비에도 그 전날의 감동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안장되어 계신 선교사님들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 채워져 모두가 묵묵히 비를 맞으며 인도하시는 이종훈 목사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던 모습들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 중에 선교사님들의 삶을 따라가는 하나님의 일꾼이 많이 나올 것 같아 첫 방문지를 양화진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행선지인 임진각으로 가기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자유로를 따라 당동IC에 도착하여 임진각까지 국도를 따라가는 행군은 무더위와 싸우며 쉬지 않고 행군하였고, 딸 유림이의 입에서는 불만과 짜증의 소리가 쉬지 않고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지쳐 쓰러지기 직전에 도착한 임진각은 문득 분단으로 인해, 늘 이산가족을 찾는 방송과 라디오채널에 귀를 기울이시며 통일을 염원하시고 떨어진 혈육들과 만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돌아가신 친할머니의 아픔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김병진 목사님의 말씀으로 발대식을 갖으며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철조망 건너에 있는 북한 땅을 향해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안보를 위한 통일과 북에 있는 숨죽여 기도하고 있을 성도들의 안위를 위해 뜨겁게 기도드렸습니다. 이후 조별 구호를 힘차게 외치고 다시 임진각을 출발, 문산 여우고개, 문산체육공원, 율곡리까지 하루 동안 총 17km를 행군하였습니다. 첫 날 행군 일정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포천 주님애숲교회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의 발에는 물집이 잡히거나 터져 걸은 때마다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하기도 하고 근육통과 알레르기 증상을 호소하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아이들이 잘 버틸 수 있을까. 육체의 피곤함으로 인해 슬로건이였던 ‘이 땅을 내게 주소서’에 대한 묵상과 저마다의 응답을 받고 갈 수 있을까. 염려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3. 보이지 않는 길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둘째 날 저녁집회에 박형범 목사님의 ‘길’에 대한 말씀은 염려를 하는 나를 반성하게 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낮에도 별은 빛나고 있지만 안 보이듯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보이는 길은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그 길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확신을 갖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불안의 연속일 것입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그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게 하는 것이 ‘기도’라고 길을 걷는 방법에 대해 전해 주셨습니다. 첫 날부터 계속 된 행군 뒤에 저녁 늦은 시간까지 집회와 기도시간을 가지면서 아이들의 불평불만이 더 많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하루하루 행군하면서 육체는 지쳐가지만 영적으로 성숙되어가는 어린 아이들의 태도변화를 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이 국토순례의 모든 시간에 다 미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8월 6일 화요일. 셋째 날의 행군은 아름답고 웅장한 산부연폭포 앞에서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라고 입을 모아 힘차게 단체구호를 외치고 출발했습니다. 20km를 걷는 중에 햇빛에 지치지 않도록 구름기둥을 만들어 주시고, 갈증 없이 행군할 수 있도록 빗줄기를 허락하여 주셔서 고석정까지 힘차게 조별 구호와 찬양을 하며 행군할 수 있었습니다. 고석정부터 한여울길을 따라 걸을 때에는 강한 햇빛에 젖은 옷과 신발이 마를 수 있었고, 각자 가지고 있던 물이 떨어져서 없는 물도 나눠 마시며 하나되는 과정을 갖게 하시고 물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만물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새롭게 가질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 때를 따라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 돌립니다. 8월 7일 수요일. 넷째 날은 산정호수 근처에 있는 명성산을 등반하는 일정이었습니다. 비선폭포에서 팔각정까지 절경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무더운 더위로 인해 계곡을 만날 때마다 뛰어 들어가 시원한 물놀이를 하고 싶은 욕구가 굴뚝같았지만 우리가 가야하는 길이 정해져 있기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계속 걷고 또 걸어 정상을 향해야만 했습니다. 힘겹게 오른 팔각정에서 꿀맛 같은 점심을 먹고 힘을 얻어 행군을 다시 시작하면서, 점점 험난해지는 코스는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면서 상처에 서러워 우는 아이도 생겨났고 발을 헛딛고 삐끗하여 절룩거리는 아이, 숨이 가빠지면서 스스로 호흡조절이 안된다며 불안해하는 아이, 풀독 오른 아이, 근육감각이 이상해 못 걷겠다는 아이들이 속출하게 했고 교사들까지도 바닥난 체력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낙오자 없이 끝까지 모두가 완주할 수 있도록 안전과 체력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한 편으로는 우리는 이 정도의 산을 도시락과 물병만을 지고 오르면서도 죽겠다고 엄살을 부리는데, 골고다 언덕을 살을 파고드는 가시 면류관과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오르면서도 우리를 위해 일을 다 이루신 예수님의 고난과 사랑을 잠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4. 고통 가운데서도 예수님만 생각해 고난을 통해 성장하게 하시고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 우리 아이들도 산을 오르고 내리면서 힘들수록 더 크게 구호를 외치고, 고학년이 저학년들을 챙기며 밀어주고 당겨주는 모습을 보며 신앙생활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갖길 바라시고 기뻐하실 하나님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껏 해 본 산행 중에 가장 힘들었지만 명성산 등반을 마치고 나서 저의 마음은 앞으로 어려운 일이 닥칠 때에 이렇게 외칠 것 같습니다 “ 이까이꺼~명성산도 오른 난데... I can do it"이라고요. 마지막 저녁집회에는 우리교회 청년부를 다니다가 철원에서 군생활을 하는 이상엽 중위가 늠름한 모습으로 6.25전쟁의 배경과 분단과정에 대해 자세히 전해 주었고, 이어서 강연해 주신 고영재 전도사님은 창조, 성공, 고난 3가지 주제를 가지고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특징을 잘 찾아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 우리의 성공은 세상의 성공과 달라서 하나님의 목적대로 쓰였을 때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씀, 그리고 우리의 가치를 변화시키고 쓰시기 위해 고난을 사용하신다는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내 일과 세상적인 성공보다는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자녀가 되고 주님의 목적대로 내가 쓰임 받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고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두 분의 강연을 마치고 밤 12시가 지나서도 지속된 소감발표시간과 기도회는 그 전날보다 더 큰 목소리로 기도하며 찬양하며 눈물로 매달리게 하셨습니다. 8월 8일 마지막 날. 제2땅굴, 통일전망대, 노동당사로 돌아오는 안보관광을 견학한 후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곤하게 잠든 아이들. 부천 작동에서 내려 교회까지 마지막 행군을 힘차게 하면서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무사히 행군을 마치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4박 5일 동안 동고동락했던 조원들과 유난히 나의 손길을 많이 탔던 정든 아이들과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가까워지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아마도 함께 했던 교사들의 마음도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도착한 교회 앞에는 ‘건강한 성도, 행복한 교회’라고 적혀 있는 현수막이 시야에 또렷이 들어왔습니다. 뭉클해지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여러 훈련들을 통해 영적 건강을 돌봐주고 있는 교회와 교역자분들께 감사한 마음과 이런 행복한 교회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음에 감사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한 명 한 명 교회로 입장할 때마다 마중 나오신 부모님들과 지인들이 함께 이름을 크게 외쳐주고 면류관과 십자가 목걸이를 걸어주며 사랑 가득한 포옹으로 맞이해 주심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맛있는 만찬을 장만해 놓고 춤과 노래로 환영해 주어 4박 5일간의 힘든 여정은 싹 잊고 감동과 행복감으로 꽉 채워지는 환영식을 준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나라에 이를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런 축제를 준비하고 계시겠지요? 생각만 해도 기쁘고 신바람 납니다. 5. 이 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국토순례 대장정을 마치고 나서 그 동안 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막연함과 어떻게 가야할지, 내가 어떻게 쓰임 받고 싶은지를 고민해왔는데 그것에 대한 응답을 받은 시간이었습니다. 안전하고 안정된 직장을 나와 교육사업을 시작한 지 만7개월이 지났습니다. 사업운영과 다시 도전한 학업 앞에서 나약한 나를 직면하면서 보이지 않게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요즘 저는 내 삶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국토순례를 마친 후 주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을 잘 이루고 싶은 욕심과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힘든 여러 현실 앞에서 웃을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편한 길 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그 길을 걷고 싶습니다. ‘이 땅을 내게 주소서’를 되새기며 ‘땅’이 내겐 무엇인지 4박 5일 동안 하나님께 기도하며 계속 물었습니다. 제가 죽을 때 신앙생활에 대한 후회를 남기지 않길 소망합니다. 저에게 땅은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저의 행실과 일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적합하도록 앞으로 영성도, 실력도, 인격도 잘 준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의 삶, 나의 노래,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고 경외할 수 있게 해 준 국토순례 대장정과 기도하며 이끌어 주신 김병진 목사님, 정명섭 목사님 이하 애써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어린 감사의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 에벤에셀 하나님,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985 |제2회 Old PK 모임에 다녀와서| “나의 힘이 되는 이름 예수 그리스도!”_박서진 파일
편집부
3397 2013-09-10
“나의 힘이 되는 이름 예수 그리스도!” 박 서 진 PK캠프를 처음 알게 된 건 6회 때이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에 힘들어하고 싫어했는데 캠프라니, 정말 가기 싫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권유에 의해 PK캠프를 가게 되었고, 그 땐 아무것도 모르던 중2였다. 그 후 캠프에 계속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6회 때 뜨거운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캠프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위로와, 감사와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제는 20살 OK가 되었다. 부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섬겨야 할 거라고 생각하였다. OK캠프를 처음 참석하게 되었다. 우리만의 일정과 프로그램이 있어 색다르고 재미있었다. 장소는 옥계교회였다. 시골교회의 자연경관이 아름다웠다. 또한 너무나 풍족하게 베풀어 주셨다. 매 세끼 밥과 간식들, 그리고 과일들, 풍족하게 먹을 수 있어 감사했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힘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 OK들과의 깊은 대화도 하였다. 힘들거나 감사했던 점, 그리고 PK캠프에 대한 평가와 건의도 하였다. 대화를 하며 알게 된 것이 있다. 솔직히 나조차도 PK의 끈끈한 정 때문에 계속 가게 되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지만, 새 친구들에게는 서툴게 대한 점, 하나님의 교제보다 사람이 우선이 아니었나 생각하며 반성할 수 있었다. 이젠 내가 OK로써 PK들의 건전한 신앙을 위해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를 통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다. PK를 거쳐 OK까지 성장하는데 하나님을 통해 스텝들과 형 누나들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내가 경험하였기 때문에 PK캠프는 꼭 필요하다. 그리고 믿음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혼자 나설 수 있는 OK가 있어 이제 OK가 되어 너무나 감사하다. 나의 힘이 되는 이름 예수 그리스도!!
984 |제2회 Old PK 모임에 다녀와서| “함께 치유하고 교제하는 즐거움”_김하은 파일
편집부
2528 2013-09-10
“함께 치유하고 교제하는 즐거움” 김 하 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하은이는 아빠가 목사님이라서 좋아, 안 좋아?”라고 물어보시곤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음…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고….”라고 말을 얼버무리곤 했습니다. 사실, 제 기억으로는 그 때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예배시간에 다 같이 떠들었을 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오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혼나는 것은 저였고,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는 억압은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이러한 모습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어느 순간 제 마음 속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상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평범한 집사님의 딸로 태어났으면 하는 생각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 마음을 아버지께도 말할 수 없었고, 말할 사람도 없어 마음 깊은 곳에 꾹꾹 눌러놨었습니다. 그렇게 눌러놓기만 했던 제 마음을 PK캠프를 통해, PK라는 이름아래 모인 사람들과 교제하고 상처를 나눔으로 제 마음을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목사님의 딸이기에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하고 예배도 잘 드려야한다고 주의를 주지 않았으며, 목사님의 딸이었기에 받았던 상처들과 답답함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정말 큰 위로와 기쁨을 받았습니다. PK라는 모임은 가족처럼 매일 보는 사이도 아니고, 교회 식구들처럼 매주 만나며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도 아니며, 오히려 일 년에 한두 번 만날까하는 모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만나면 오래된 친구사이, 언니, 오빠사이인 것처럼 진짜 친자매, 친남매인 것처럼, 만나면 누구보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교회에서 받았던 상처들을 치유하고 교제의 즐거움에서 PK라는 이름 아래로 모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점점 횟수를 거듭하고 나눌수록 내 안에서 무엇인가 변화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이번 OK(old pk) 모임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이러한 PK라는 이름아래 함께 모여 교제를 나누면서 아버지가 목사님이라는 사실에 감사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제 모습이었습니다. PK라는 이름이 얼마나 복받고 사랑받는 자리의 이름이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는 자들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많은 PK들이 이 복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저라는 통로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바입니다.
983 |제2회 Old PK 모임에 다녀와서| “평생의 동역자로 자리매김 하길”_김창규 파일
편집부
2686 2013-09-10
“평생의 동역자로 자리매김 하길” 김 창 규 프롤로그 우선 OK 모임이 이루어지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는 피케이 모임과 구분을 위해 목회자 자녀들 중 대학생 이상들이 모이는 모임을 OK(Old pastor Kid)모임이라 부르고 있다. 제11회 PK캠프가 끝나고 3월 1일에 천안 은혜교회에서, 5월 17일에 대전에서 두 번의 모임이 있었고, 그 모임을 통해 제11회 캠프를 되돌아보고, OK모임을 준비할 몇몇 사람들이 선출되었다. 우선 이 모임이 계속 유지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줘서 감사했고, 장소를 선정할 때도 목사님께서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 결과 인천에서 광주로, 그리고 이번에 보령 옥계교회에서 세 번째 모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여름모임을 준비하면서 힘든 점도 있었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계기였다. 만남 그리고 시간... 21명의 청년들이 연신내와 영종도에서부터, 광주와 부산까지 전국 각지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대천에서 모이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감사함과 더불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 자발적으로 모이는 모임, 심지어 이중 3명은 군대에서 휴가까지 맞춰 나올 정도의 열정도 보여주었다. 이 와중에 몇 명은 미리 와서 장을 보고, 도착하는 대로 식사를 하고 옥계교회로 향하였다. 시골교회이기에 시설이 열악하여 잠자리 등 여러 면에서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이들의 얼굴에는 감사한 마음에 웃음이 가득하였다. 기쁨으로 자신이 맡은 프로그램들을 준비해 와서 진행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것이 우리의 저력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모임을 귀하게 여기신 옥계교회 담임목사님께서 OK들을 위해 특강도 해주셨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되셔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으며 또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예수 이름의 권세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도 갖게 해 주셨다.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이번 캠프기간 동안 세 명의 환자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을 보며 조금 더 신경 쓸 껄 하는 아쉬움과 미안함이 가득하였다. 그럼에도 함께 모여 모임을 갖고,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 손길을 보며 하나님께서 이 모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느낄 수 있었다. 대화의 시간 - 우리들만의 이야기들 캠프를 진행하며 밤에 함께 고민을 나누고 기도를 할 때 PK 청년 중 한명이 PK캠프를 온 것은 자신의 삶에서의 “일탈”이라는 표현을 함으로써 그동안 그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 왔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고 개인적으로 마음이 짠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목회자 자녀들에게 함께 모일 수 있는 시간은 참으로 귀하고 값진 것이라 생각해본다. 나의 선택이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목회자의 자녀라는 굴레를 쓰고 살아야하는 특별한 신분의 삶을 살아야 하는 PK들이기에 어쩌면 교회 생활은 지극히 익숙한 삶이면서도 또한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삶이 될 수 있는 우리의 입장이기에 이런 우리들만의 모임의 시간은 정말로 귀하고 귀한 시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아직 믿어지지 않아요. 형은 믿어지세요?”라며 살며시 마음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비밀스러운 마음을 슬며시 끄집어 내어놓으며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이런 PK캠프가 아니라면 나눌 수 없는 고민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부모님을 실망시킬 용기보다는, 성도님들 앞에서 가면을 쓰며 살아가는 방법이 훨씬 더 편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행복을 누리는 한 사람으로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목회자 자녀들을 보면 항상 안타까움이 컸었다. 그들에게 “괜찮아”라고 말해줄 수 있는 시간, 그들이 억지로 믿음 있는 척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의 온전한 성도로, 자녀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바로 PK캠프가 아닌가 생각한다. 2박 3일간 우리는 일정이 있었지만 찬양 시간이 아니어도 쉬는 시간이면 자연스레 찬양하고, 성령님이 분초마다 살아 역사하시며 서로를 사랑하게 하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 온 몸과 마음으로 느껴지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에필로그 사실 OK모임(대학생모임)의 목적은 겨울 PK캠프를 준비하고 기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먼저 PK의 길을 걸어온 선배로서 “어떻게 그들의 상처를 만져주고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 우리와 같은 행복한 복음의 길을 걷게 할 수 있을까?”라는 수많은 의견들이 사방에서 쏟아지면서 우리의 이번 모임은 하나님이 PK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실까 기대하며 설레는 시간들을 보내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우리끼리도 평생의 동역자로 자리매김하는 사랑이 가득한 시간이기도 했다. 캠프 이후로 산만한 덩치의 형제들이 단체 대화방에서 허심탄회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오글거리면서도 내 마음이 훈훈해짐을 느낀다. 참으로 감사하다. 그리고 고맙고 좋다. 하나님의 기대! 하나님의 희망! 하나님의 자랑! 그 이름 PK... 나는 오늘도 우리 PK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불꽃이 되길 기도한다. 그리고 우리 모든 피케이 형제자매들을 축복한다. 샬롬.
982 |제2회 Old PK 모임에 다녀와서| “스무 살이 되어 OK모임에 참여하다”_김예진 파일
편집부
2798 2013-09-10
“스무 살이 되어 OK모임에 참여하다” 김 예 진 만 14세, 즉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 줄 곳 PK캠프에 학생 신분으로 참석해왔었다. 캠프에 참여하면서 OK스텝 언니와 오빠들에게서 많은 도움과 사랑을 받아왔기에 자연스럽게 나 또한 20살이 되면 OK스텝으로 PK동생들을 사랑해주고 싶었다. 어느덧 내 나이 20살이 되어 OK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정말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2박 3일의 일정으로 짜인 우리들의 모임 첫째 날은 개회예배로 시작하였다. 옥계교회 김종화 목사님의 설교는 단 15분이었지만 파격적이었다. OK들의 주최로 우리들만의 모임이라 길래 쉬면서 즐기는 간단한 모임인 줄 알았던 나의 어린 생각들을 개회예배의 시작과 함께 목사님께서 산산조각 내놓으셨다. 갖가지 엄청나고 심오한 질문들을 던져주신 목사님의 설교가 끝나고 레크리에이션을 시작하였는데, 이 또한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그냥 모임이다. 우리들이 주최한 모임! 그러나 정말 체계적이었으며 게임 또한 진짜 수련회 못지않은 레크리에이션 그 자체였다. 진지하게 임한 게임들을 끝마친 우리들은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저 항상 먹는 된장찌개인데 어찌 그리 맛나던지 역시 함께 하기에 좋은 사람들과 먹는 음식은 맛 또한 달랐다. 그렇게 행복한 저녁식사를 끝내고는 찬양 및 기도회가 시작되었는데 그저 감동이었다. 이번 모임은 나에게 감동으로 시작하여 감동으로 끝이 난 것 같다. 기도회를 가짐으로써 다시금 우리들의 모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어느 집회 못지 않은 뜨거움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그 후에는 목사님의 특강이 이어졌고 여러 질문들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둘째 날은 각종 콘프러스트와 우유 및 빵으로 시작하여 김종화 목사님의 엄청난 특강이 이어졌다. 근처 식당에서 푸짐한 점심을 먹고 우리 모임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대천해수욕장으로 황급히 떠났다. 우리의 신입 94들은 언니오빠들의 엄청난 축복 속에 물세례를 받으며 바다 속으로 입수되어졌고 그의 결말은 처참하였다. 그런데 재밌게 놀고 즐겨야할 모임에 나는 그만 급성위장염이라는 진찰을 받았고, 이에 옥계교회 사모님께서 엄청나게 수고해주셨다. 너무나도 감사하며 아직도 죄송할 따름이다. 이후 옥계교회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고기 파티를 즐기고 다시금 찬양 및 기도회 시간을 가졌다. 아파서 힘은 들었지만 OK들과 함께였기에 재밌었고, 뜻깊었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한시간 한시간이 매우 소중하였다. 셋째 날, 마지막 날의 아침이 밝았다. 사모님께서 아픈 사람들을 위하여 직접 죽을 끓여주셨다. 둘째 날 고기 파티에 참여할 수 없었던 우리를 위해 고기도 구워주시고, 너무나도 감사했다. 풍성한 아침식사가 이루어진 뒤 어질러서 난장판이 된 교회를 청소하며 짐 정리를 하는데, 언제나 그렇듯 PK들과 헤어진다는 생각에 다소 울적해졌다. 아쉬운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하고 사진도 찍으며 시간이 멈추기를 고대하였으나, 예정대로 폐회예배는 진행되었다. 우리의 2박 3일간의 짧디 짧은 모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쉽다. 그러나 한편으론 매우 기쁘다. 이들과 또 만날 수 있고, 이렇게 귀중한 사람들을 알게 되어서. PK로 태어난 사람들 나는 목회자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러나 PK캠프에 참여하기 이전에 나는 나의 신분을 한탄도 해보았으며 내 삶에 불만이 적지 않았다. PK캠프를 통하여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로부터 위로를 얻고 사랑을 받으며 목회자 자녀로 태어난 것이 특권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나의 삶은 감사의 연속이 되었고 캠프에 참여하는 횟수가 증가함에 따라 조금씩 성장하였다. 이제는 PK선배, 즉 OK들에게 받은 사랑을 내어주는 입장에 서있다. 지금도 PK로 상처받고 있는 친구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OK로서 그들에게 다가가 알려주고 싶다. “PK는 특권이다!” 확실히 PK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복임에 틀림없다.
981 |제2회 Old PK 모임에 다녀와서| “아름다운 섬김은 계속되어야 한다”_김다훈 파일
편집부
2779 2013-09-10
“아름다운 섬김은 계속되어야 한다” 김 다 훈 나와 PK와의 인연은 중학교 2학년, 제6회 PK캠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만 있는 캠프에 혼자 간다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가지 않겠다고 부모님께 얼마나 떼를 쓰고 억지를 부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 캠프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이런 귀한 동역자들을 결코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학생으로 캠프에 참가할 때부터 OK(Old PK의 약자)를 많이 존경해왔다. 빈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3박 4일 동안 시간을 들이고 자신의 돈을 들여서 동생들을 돕고자 참가하는 형, 누나들을 볼 때면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캠프에 참여하는 동안 OK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과 헌신과 축복을 받았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올해 겨울을 지나면서 나도 이제 더 이상 학생으로서 참가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뒤돌아보면 내가 받았던 너무나 값진 위로들, 사랑들, 헌신들.. 이 축복이 나에게서 멈추는 것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또, 자신이 목회자의 자녀인 사실에 힘들어하는 동생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한참 어릴 적에 목회자의 자녀라는 이유로 받았던 괴로움들에서 건져내준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 그 아이들이 자신이 목회자의 자녀라는 사실이 지금 당장은 저주같이 느껴져도 몇 발자국 걸어가서 뒤돌아보면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깨닫게 해주고 싶다.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는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에 있다. 제6기에서 11기 캠프에 걸쳐서 내가 받았던 그 큰 복을 나에게서 머무르게 하지 않고 뒤따라오는 동생들에게 알려준다면 그 아이들이 그 밑의 동생들에게 그 사랑을 알려주지 않을까. 이제 나도 내가 보아왔던 수많은 형과 누나들처럼 그 아이들을 위해 섬길 것이다.
980 no image |박윤선 5분 새벽기도 설교<22>| 항상 기도하자
편집부
2887 2013-09-10
항상 기도하자 < 누가복음 18장 1-8절 >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계속되는 기도’ ‘끈질긴 기도’에 대하여 우리는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이 기도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원한을 풀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얼른 보면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할 성도가 어떻게 원한을 품고 기도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자세히 생각해 본다면, 그 원한은 어떤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야 풀릴 정도로 이 세상의 모든 불의와 죄악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죄악과 불의를 미워합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죄악과 불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 사실에 대하여 언제나 원통한 생각을 품습니다. 자나 깨나 이 모든 원통한 사실들이 하나님의 간섭으로 귀정되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따라서 그의 기도의 초점은 자기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2. 계속 기도하는 자는 물결과 같이 쉽게 동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응답을 내다봅니다 7절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란 말은 “자주 찾아오는 과부”(3절)란 말과 대조됩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는 불쌍한 과부보다 더 구원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란 말은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합니다. 1절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했는데, 여기서 “항상”이란 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이 부분의 비유는 주로 그것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따금 발작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정도로는 기도에 생명이 없습니다. 기도의 생명은 “항상” 실행되는 데에 있습니다. 인도에서 선교한 하이드는 항상 기도하였으므로 그의 별명이 ‘기도하는 하이드’(Praying Hyde)였다고 합니다. 그는 특별히 감사하는 기도를 함으로써 새로운 은혜를 많이 받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감사한 조건을 찾도록 힘쓰고 감사의 기도로 시간을 많이 잡아야 합니다. 하이드는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에 감사하자. 그리하면 그 환난이 우리에게 왜 임했는지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3. 기도를 계속하는 자에게는 기다리는 생활이 강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지만 시간을 길게 잡으시고 일하시는 경륜도 있습니다. 그는 사람과 달라서 생각하시는 방식이 원대하십니다. 이사야55:8-9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참고 기다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우리의 믿음을 연단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기도를 얼른 들어주시지 않고 시간을 잡으시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참고 기다리는 인내가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계속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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