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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9 |2017년 전국목회자 사모세미나 참석기<1> | 사모는 감추어질 수 없는 빛이다_민 향 사모 파일
편집부
1468 2017-02-22
2017년 전국목회자 사모세미나 참석기<1> 사모는 감추어질 수 없는 빛이다 < 민 향 사모_ 박봉규 목사 > 사모로서의 소명의 확신은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사모들이여, 긍지를 갖자 2017년 2월 6일부터 8일까지 제주도에서 진행된 제24회 사모 세미나의 주제는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였다. 주제 말씀 그대로 사모들의 눈물의 기도 후에는 여러 가지의 감사가 넘침을 확인할 수 있었던 귀한 회복의 현장이었다. 나를 지명하여 사모로 선택하여 주심에 감사, 신령한 복으로 내려 주심에 감사, 수고와 소망 중에 인내하게 하심에 감사, 환난과 고난 중에서도 감사...... 세미나 기간 내내 사모들의 가슴 속은 감사와 감격으로 가득 찼다. 이제 70대가 된 필자도 40여 년간의 사모 생활을 마무리하며 섬겼던 성도들과 두 명의 자녀, 사위, 며느리, 네 명의 손주들을 바라볼 때 넘치는 감사뿐이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와 눈물을 보시고 감사하는 삶으로 변화 시켜 주신 증거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축복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세미나의 배경이 된 ‘제주도’는 생태의 보고이며 청정한 곳이기에 3일 동안 틈틈이 경관을 둘러보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참 아름다운 창조세계에 감격하였다. 이처럼 창조세계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도록 지으셨고 우리로 하여금 청지기로 잘 다스리며 보호하라고 명령하셨기에 인간의 발자국으로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될 것이라 느꼈다. 특히 자연사 박물관을 방문한 후에 바다를 품에 안은 올레 길을 걸으면서 ‘나의 여호와가 창조 세계 안에서 나를 위로하고 치유하시는구나’ 하는 감동을 느끼며 몸과 마음이 새로워지기를 간구하고 기도하였다. 귓가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속삭이시는 음성이 뿌듯하게 가슴으로 번져왔다. ‘애월읍’의 아름다운 해변, 화산에서 흘러나온 형형한 자태의 돌들이 우리에게 뭍의 안부를 물어왔다. 봄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먼 수평선에서 파도치는 물결의 손짓도 감사했다. “사모들아 엉거주춤 하지 말고 누구를 따라가야 할 것인가”를 외치셨던 총회장님의 간절한 설교를 잊을 수 없다.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사 51:1)’라는 말씀은 환경이 아무리 나쁘고 부족하여도 바른 진리를 아는 자는 주변인들에게 개의치 않아야 한다는 권면이었다. 목사님도 “의를 따르고 여호와를 찾아 구하며 이곳까지 왔노라”고 진심으로 호소하시면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니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고 하나님을 찾는 일에 힘쓰라”고 말씀하셨다. 사모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엎드려 울며 그 길을 걸어야 진정으로 살아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사모로서의 소명의 확신은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동역자로서 영혼을 살리신다. 사모들이여, 긍지를 갖자.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께서는 능력과 여건을 다 예비해 놓으셨다. 직분에 맞는 은혜와 은사를 사모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들에게 넘치는 복을 주셨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특히 사모는 남편인 목사님과 자녀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고 계심을 깨닫고 감사하자. 덧붙여 이번 사모 세미나는 주님이 부어주시는 성령의 기쁨이 충만한 부흥회였다. 농어촌 부장 목사님을 비롯하여 40여 분의 목사님들이 총력을 기울여 사모들의 심신에 최상의 도움을 주시고 눈빛만 보고도 필요를 채워 주시려 애쓰시는 모습들이 너무나도 숭고하고 존경스러웠다. 특히 제주에서 합신 교단의 명예를 걸고 목회하시는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의 온정어린 헌신 봉사에 감사를 전한다. 제주도에 모인 200여 분의 사모님들은 2박3일 동안 식구들 밥걱정 안하고 매 식사 때마다 제주도 특산물과 진수성찬으로 사모들의 입을 한없이 즐겁게 해주신 여러 교회의 손길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특히 은혜와 경건의 시간에 합신의 3대 이념인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신 여섯 분의 강사 목사님들께 깊은 감사를 표한다. 이번 세미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깨달은 바는 목사의 아내인 사모는 감추어질 수 없는 빛이라는 것이다. 사모는 가릴 수도 숨길 수도 없는 빛이다. 사모가 스스로 어둠이고자 하지 않는 한, 사모는 목사님과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비출 빛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밝히는 존귀한 빛인 것이다. 이 모든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올린다.
1178 <2017년도 전국목회자 사모세미나를 마치고> 은혜가 많고 감동이 있는 세미나_김석만 목사 파일
편집부
1611 2017-02-22
1177 no image |청소년 연합수련회를 마치고| “깨달음과 책임감, 미래를 위한 기도로 이끈 수련회”_김기연
편집부
1395 2017-01-25
“괜찮아, 우리의 미래” - 청소년 연합수련회를 마치고 - “깨달음과 책임감, 미래를 위한 기도로 이끈 수련회” <김기연, 하안장로교회 >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17살이 되었고 교회를 다닌 지 3년차이며, 연합수련회는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전에 연합수련회와 교회 자체수련회를 갔을 땐 나이도 어렸고 별 생각 없이 갔었지만 이번 연합수련회는 가장 의미 있고 은혜로웠습니다. 저는 매 기도 시간과 두 번의 기도회 시간에 소중한 주변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먼저 저와 친언니가 기독교 1세대라서 아직 다른 식구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믿음의 가정을 이루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직 믿음이 부족해서 예배에 늦거나 교회에 안 다니는 친구들과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학급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첫째 날 예배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며 기도를 안 드리던 친구들이 둘째날 저녁 예배 시간에는 다 같이 손을 잡아 주며 펑펑 울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 역시 하나님은 위대하시구나! 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드리길 정말 잘했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친구들과 가족들이 하루빨리 하나님을 영접하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더 많이 간절히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택강의로 <크리스찬, 방송인 해도 되나?>를 들었는데. 요한복음 15장 4~5절 말씀이 가장 은혜로워 기억이 납니다. 이 말씀은 포도나무가 예수님, 그 포도나무를 키우시는 분이 하나님, 그리고 그 포도나무에 자라는 가지가 우리라는 내용입니다. 이 구절이 왜 은혜롭게 와 닿았냐면 저에겐 어려운 내용을 강사님께서 쉽게 이해시켜 주셔서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고, 어떻게 하면 책임감을 갖고 제가 믿는 하나님을 후손들에게 전파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기도하게 하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번 수련회는 저에게 믿는 자로서의 깨달음과 책임감을 갖도록 해 주었고, 미래를 생각하고 기도하게 해 준 수련회였습니다. 수련회를 준비해주신 목사님들과 스탭 전도사님들, 강사님들, 그리고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176 no image |청소년 연합수련회를 마치고| “신앙적 가치관이 더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었습니다”_한재훈
편집부
1286 2017-01-25
“괜찮아, 우리의 미래” - 청소년 연합수련회를 마치고 - “신앙적 가치관이 더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었습니다” < 한재훈, 좋은교회 > 안녕하세요. 저는 예비 고2 학생입니다. 저는 사실 우리 교회 전도사님이 이번 방학에 연합수련회를 한다며 개인 일정을 비워달라고 하셨을 때부터 이미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고3 수능일까지 성적 향상 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이 때이고, 지금까지 말로만 열심히 한다고 다짐하던 저였기에 이번 방학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닫은 것입니다. 수련회 오기 전 목요일 밤에도 학원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 와중에 전도사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전도사님께서는 “학업이 물론 중요하지만,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너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것을 알기에 설득하려고 전화했다”며 저를 계속 독려하셨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제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전도사님은 저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으로 바라봤습니다. 그깟 수련회보다 학업의 가치가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일 전날 밤, 어머니께서는 “너도 같이 참여해서 신앙적인 마음이 좀 더 성장하고 더 나은 아들이 되면 좋지 않겠느냐”며 저를 설득하셨는데 이유를 모르겠지만 울먹거리며 말씀하시는 겁니다. 수련회를 안 간다고 저에게 해가 되지는 않겠지만 ‘제가 무얼 생각하고 있든지, 무슨 가치 판단을 하고 있든지, 만일 이 수련회를 가지 않으면 어머니께 불효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의 효도는 수련회를 참석하는 방법 밖에 없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이 열리면서 수련회에 참석해야겠다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그렇게 결심하고 수련회에 왔습니다. 결국 이 수련회에 와서 수많은 활동을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고백함으로써 ‘참여 안했다고 후회까지는 안했겠지만 오길 참 잘했구나!’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수련회를 통해 저의 신앙적 가치관이 좀 더 구체적으로 형상화 되었다는 점, 이것이 가장 만족스러운 일인 듯합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 예배, 찬양 등이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우선순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순간순간을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살아야함을 배웠습니다. 수련회를 통해 느끼고 생각한 대로 변치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다는 결심도 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수련회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저의 본분을 다하고, 힘든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위해 부르는 찬양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것을 알게 해주신 어머니와 전도사님, 모든 분들께 감사하며 글을 마칩니다.
1175 |기행문| 일본 북해도 졸업여행_오동춘 장로 파일
편집부
1651 2017-01-10
<기행문> 일본 북해도 졸업여행 - 장로교육원 1기 - < 오동춘, 화성교회 원로장로 > 2016년 11월 14일 장로교육원 1기생 부부 일행 20명은 대한항공편으로 일본 북해도 치토세 공항에 낮 12시반경 내렸다. 함께 온 정경선 가이드의 안내로 큰 버스에 올라 초겨울에 접어든 조금은 삭막한 도로변 숲 경치를 바라보며 노보리베츠부터 가 보았다. 산길을 좀 올라가니 유황연기 깔리는 지옥계곡이 나왔다. 신기하게 생각하며 사람들이 몰린 곳에 가 보니 온수가 끓어오르는 샘이었다. 유황불이 치솟으니 죄인이 형벌 받을 지옥이 떠올랐다. 전망대로 향하자 자동차 다닐 정도의 큰길이 나오고 그 아래 푸른 호수가 누워있었다. 여기가 지홀동야국립공원이었다. 호수 언덕에는 유황연기가 수증기처럼 하늘로 치솟았다. 우리는 곧 노보리베츠 타키모토판 호텔로 왔다. 온천 중심의 호텔 촌이었다. 웅장한 시설에 놀라며 시원하게 목욕을 마치고 숙소에 쉬면서 정 가이드가 한 말을 떠 올렸다. 알다시피 일본은 시카고, 규슈, 본토, 북해도 네 개의 큰 섬을 비롯 7천 개의 섬을 가진 나라이다. 남북 3,600킬로미터에 면적은 한반도 4배인데 그중 북해도가 전체의 22%이다. 북해도 인구 540만 중 160만이 삿포로에 산다. 면적은 남한땅 8배,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가 겨울이다. 일본 본토와 북해도는 1988년 개통한 해저터널로 왕래한다. 1953년에 착공 38년 만에 개통됐고 지금은 하꼬다떼와 삿포로 간 해저터널 공사가 진행 중인데 2035년에 개통될 예정이다. 북해도 개척은 130년 정도 되었고 원래 아이누 족이 살았는데 메이지유신 때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됐다. 아이누 족은 털이 많은 민족으로 현재 2만 명 정도라 한다. 호텔에서 1박한 우리는 아침 9시경 버스에 올라 다데 지다이무라 민속촌에 갔다. 옛날 식 집이 있는 거리를 지나 조그만 극장에 가서 에도 시대 애정극인 오이란 쇼와 시라이성의 우에스가 가문과 코쥬로 가문과의 주도권 싸움 연극을 보고 나왔다. 그 후 이달 시의 쇼화신 산에 갔다. 1943년 12월의 화산폭발로 생긴 화산이다. 300미터 높이의 민둥산인데 당시 삼송정부 일본인 우체국장이 사진을 찍어 그 기록을 상세히 남겼다. 그 공로로 정부 표창도 받았다 한다. 쇼화신 산에서 점심을 마치고 도야호 선착장에 갔다. 호수가 아닌 바다처럼 둘레가 43킬로미터란다. 유람선을 탔는데 정중렬 장로가 선상에서 모두에게 커피 대접을 해 주셨다. 호수 가운데 오시마, 벤젠지, 간논지, 만주지마 등 네 섬이 형제처럼 나란히 있다. 나는 즉흥시 <도야 호수 커피 잔을 들고>를 지어 낭독했다. 순간적인 미적 감동에 모두 손뼉을 쳤다. 하선한 우리는 근처 사이로전망대에 갔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도야 호수가 시원하게 코앞에 보였다. 갑자기 악천후가 되어 곧 전망대를 떠나 호숫가 도야썬팔레스호텔로 갔다. 아침에 아내와 함께 성경을 읽으며 예배를 드렸다. 식사 후 밖을 나서니 눈보라가 치며 바람은 거칠고 춥다. 눈꽃을 보며 오타루 항구를 향해 달렸다. 정 가이드는 일본의 기독교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일본은 신이 8만개나 있고 임진왜란 때 잡혀 온 도공 심수관, 이삼행을 모신 신사도 있다고 한다. 귀신의 나라 일본엔 기독교가 1%밖에 안 된다고 했다. 이 미신의 나라 일본이야말로 철저히 선교를 해야 할 나라로 생각됐다. 합신 출신 선교사들이 성령의 불을 활활 지펴 속히 일본을 예수 믿는 나라로 바꿔야 할 사명이 큰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타루 항구는 인구 13만 6천명으로 한때 청어 산지였다 한다. 오타루에 이르자 바닷가 옛날 창고였던 건물이 식당가였다. 옛 창고 안에 있는 한 식당에서 일본식 점심을 먹고 옛 운하의 거리와 시가지를 걸어 보고 상가에 들어 가 보기도 했다. 마지막 코스로 한 시간을 달려 동계올림픽으로 유명한 삿포로 시계탑 앞에 갔다. 삿포로농업학교가 이전하며 남은 20미터 정도의 탑이다. 가이드는 오오리공원을 거닐어 보라 했으나 이미 어둠이 깔린 터라 사양하고 근처 백화점에 가서 주로 약류 선물을 샀다. 마지막 밤은 삿포로 프린스 호텔에서 지냈다. 산이 창밖 가까이에 와 있었다. 17일 귀국하는 날. 조식 후 우리는 북해도 옛 도청에 갔다. 5층 건물 2층에 전시된 옛 자료들. 북해도 역대 도지사 사진, 생활용품, 인근 환경 등을 둘러보고 1888년에 지어 1968년까지 사용한 북해도 도청 청사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나왔다. 옛 도청 뒤에 1968년부터 쓰는 10여 층의 새 도청 건물이 육중하게 서 있었다. 우리는 뜻깊은 졸업여행을 무사히 마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귀국비행기에 올랐다.
1174 no image |긴/급/진/단| 누가 감히 ‘중보’라는 말을 쓰는가?_장대선 목사
편집부
1314 2016-12-27
|긴/급/진/단| 누가 감히 ‘중보’라는 말을 쓰는가? < 장대선 목사, 가마산교회 > “중보기도라는 말은 우리와 타인의 처지에서 사용할 수 없어” 중보자(仲保者)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 화해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중보(仲保, mediation)라는 말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든지 하늘(Heaven)과 땅 사이에서든지 항상 그리스도(Kristos)만이 유일하게 그러한 중보의 역할을 수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원칙상 ‘중보’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말고는 어디에도 붙일 수 없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왜 그처럼 ‘중보’라는 말을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말고는 사용할 수 없는 가? 거두절미(去頭截尾)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가장 간명하게 파악해 볼 수 있는 것은 제네바 교리문답 제38문답이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어떤 것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희생제사를 드리심으로써 은혜를 얻고 진노를 거두시게 하는 직무와 특권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중보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직분에 부여된 고유한 특권(직무)에 속한다는 것이다. 현재 모든 인류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순종하여 지어진 목적대로 살아가지 않을 뿐 아니라, 그와 반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무한한 진노가 더욱 크게 가로 놓여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된 것은 잘 아는 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먹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 곧 사람의 모든 죄의 근본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희생제사(Sacrifice)를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께 용납되고 은혜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중보’의 사역을 하도록 그리스도의 직무를 준비해 두셨다. 이처럼 중보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직무에 부여된 유일하고도 고유한 특권이며, 그것은 이미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으로 준비된 것이라는 점에서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직무에 속한 특권이다. 그러니 그런 그리스도의 직분 외에 추가적인 어떤 기능과 역할도 불필요한 것이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베드로 사도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 사실을 분명하게 신앙으로 고백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서 직무에는 그의 ‘선지자직’도 포함된다. 제네바 교리문답 제1문의 대답, 즉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아는 것과 제2문의 대답,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시어 세상에 두셨다는 것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뜻을 충분하고도 확실하게 최종적으로 알 수 있는 원천(origin or source)또한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중보의 직무이다. 때문에 히브리서 1장 2절에서도 “아들을 통하여(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최종적으로)” 이뤄졌음을 명확하게 선언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중보로서의 직무에는 그의 ‘왕직’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러한 왕직에 있어 중심적인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Kingdom)인데 그것은 영토(땅)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주권과 통치(능력)와 관련된다. 결국 ‘중보’의 개념에는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모든 직무를 포함하는 ‘그리스도’라는 호칭의 독특하고도 유일한 의미만이 있는 것인데, 바로 그 독특하고도 유일한 의미 때문에 우리들은 구원자 예수라고만 부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곧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다른 어떤 언어로도 대체할 수 없는 세 직무인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을 포괄하는 독특한 직무의 성격을 유일하게 함의한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베드로 사도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라고 한 것은, 문자 그대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기 때문이다. 흔히 중보기도의 모범이라 일컫는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만 하더라도, 그것은 기도의 모범이 아니라 유일한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달되는 유익 외에 그 어떤 유익이나 전달의 통로(중보)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어찌 ‘중보기도’라는 말을 우리 자신과 타인의 처지 사이에서 사용할 수가 있겠는가! 오히려 ‘그를 도우시도록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에 더해서 ‘그를 도우시도록 중보기도하자’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것이다. 단언컨대 태초부터 세말까지 새 언약의 중보자(히 9:15) 외에 다른 중보는 없다. 구약의 모든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들조차도 중보직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뿐이다.
1173 no image |긴/급/진/단| 현재적 칭의와 종말의 칭의 이해_박영돈 목사
편집부
1606 2016-12-13
|긴/급/진/단| 현재적 칭의와 종말의 칭의 이해 < 박영돈 목사, 고신대 교의학 교수 > 성령 안에서 성화가 진행되는 증거와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것은 교인들을 무서운 자기기만과 방종에 빠지게 하는 것 칭의는 하나님이 신자의 전인, 즉 그의 존재 뿐 아니라 그의 행함도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며 이때 행함은 칭의의 조건은 아니지만 믿음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필수적인 열매 칼빈은 신자에게는 확신과 두려움이 공존한다고 했다. 즉 우리의 확신에 경건한 두려움이 깃들여 있어야 우리를 죄와 방종에 빠지지 않도록 보존하여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칭의의 탈락이라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사랑과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에서부터 오는 두려움이다. 곧 자신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지극히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참으로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그 은혜와 사랑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까 우려하는 두려움이 있다. 이는 율법 아래 있는 종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히 사랑받는 자녀들 안에 있는 복음적인 두려움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위로와 확신을 주는 말씀과 두려움과 경종을 불러일으키는 말씀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믿음 안에서 살아있게 해야 한다. 이런 두려운 말씀이 부패성을 안고 있는 신자가 방종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아주는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하게 한다. 1. 연합되어 있는 칭의와 성화 오래 교회생활을 했음에도 성화의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의 진정성은 반드시 점검되어야 한다. 자신이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심각하게 돌아보고 성찰해야 할 사람들에게 억지로 구원의 확신을 주입시키려는 인위적인 시도는 사람들을 거짓구원의 확신으로 세뇌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사탄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확신을 공격하며 흔든다. 반면에 위선자 안에 거짓 구원의 확신을 더욱 강화한다. 위선자들은 거룩함의 열매가 없이 죄 속에 살면서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으로 충만하여 자신의 구원을 전혀 의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확실히 망하게 한다. 한국교회에 구원파적인 복음, 성화와 단절된 칭의로만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은 교인들을 진리의 영이 아니라 미혹의 영이 주는 거짓 확신에 빠지게 한다. 성령 안에서 성화가 진행되는 증거와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것은 교인들을 무서운 자기기만과 방종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런 위험에 대응하여 복음 전도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하나로 연합되어 있으며 칭의가 참되다면 반드시 성화를 수반한다는 점을 강조해야한다. 어떻게 사느냐와 상관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은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안일하고 태평하게 사는 이들에게 성화의 열매로 칭의의 진정성을 증명해야한다고 강력하게 도전해야한다. 참된 칭의의 증거와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교인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보게 해야 한다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조언은 매우 적절하다고 본다. 이런 의심이 참된 확신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다. 2. 성령의 사역과 칭의 칭의론을 성령론의 맥락에서 재조명하여 칭의와 성령사역의 긴밀한 연합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칭의 교리의 남용과 왜곡을 막는 길이다. 칭의론은 기독론뿐 아니라 성령론적인 관점, 즉 교회론, 종말론,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다루어야한다. 칭의론이 면죄부로 왜곡된 근본책임은 교회 강단에 있다. 칭의의 교리가 신자의 거룩한 삶을 증진시키기보다 오히려 방해하는 역기능을 하게 된 것은 칭의의 복음이 성령의 조명 가운데 제대로 전파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의 조명이 함께하기 힘들 정도로 성경이 증거하는 칭의 복음의 진수가 빠진 구원론이 한국교회에 범람한다.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삼위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 그 은혜의 영광과 풍성함을 구속사적 맥락에서 온전히 드러냄이 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메시지의 단조로운 반복이 거짓 확신과 윤리적인 혼란을 가중시킨다. 구원의 확신은 인위적으로 창출해내는 종교적인 감정이 아니다. 진정한 구원의 확신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비추어 주심으로 생성되는 진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마음의 확증이다. 성령은 죄인들을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삼으셨다는 칭의 복음을 통해 십자가의 정점에서 찬란하게 계시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그리스도의 얼굴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신다. 따라서 이런 성령의 조명이 없이 참된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칼빈은 성령의 역사 없이 믿음은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3. 경건의 삶을 동반하는 칭의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롬5:1-2). 성령은 우리 안에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확신뿐 아니라 미래에 궁극적인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확신까지 갖게 하신다. 이런 확신의 강력한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는 성령의 사역이다(롬 5:5). 의롭게 된 이가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다. 의롭게 된 이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하나님과 영적으로 먹고 마시는 천국잔치에 참여한다. 성령은 궁극적인 구원과 영생의 보증이며 첫 열매이다. 신자는 성령 안에서 이미 종말론적인 은혜, 하늘에 속한 복을 그 첫 열매로 맛본다. 신자는 이미 심판대를 지나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이다. 그는 이미 하늘의 영역에 속한 사람이다. 하늘의 처소에 들어가 아버지 집에 거하며 천상의 신령한 복을 누린다(엡1:3, 2:6). 성령 안에서 누리는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와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는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는 이는 결코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역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사는 이는 반드시 완성될 천국에 들어간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로움이 우리가 죄로 인해 상실한 하나님 나라에 지금 들어가게 할 뿐 아니라 미래의 천국입성까지 확실히 보장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이미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였다. 영적으로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었고(롬6:1-5, 엡2:1-5, 골3:1),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다(엡1:19-20).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현재적인 면과 마지막 육체가 소생하는 미래적인 부활은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된 한 짝이다. 신자 안에 내주하는 부활의 영인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린 것처럼 우리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릴 것이다(롬8:11).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이미 부활의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이 마지막 육체의 부활과 영생을 확실히 보장해준다. 따라서 영적인 부활 뿐 아니라 육적인 부활까지 칭의의 열매인 동시에 칭의의 확증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그가 의로우심을 입증하셨듯이 마지막에 우리를 다시 살리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확증하신다.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요일3:3). 이 소망이 참된 경건의 비밀이다.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은 소망하는 믿음이다.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는 이미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선 자로 산다. 심판대 앞에 선 것처럼 산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한다. 4. 칭의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참된 신앙의 증거인 종말론적인 지향성을 상실한 것이다. 하늘의 영광이 아니라 이 땅의 영광과 권력과 번영을 추구하는 현세지향적인 신앙으로 전락하였다. 이것이 한국교회 세속화의 근본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종말의 영인 성령을 거스르고 대적하며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칭의의 복음은 성령을 거스르고 사는 위선자들을 위한 면죄부가 아니다. 칭의론을 방종의 라이선스로 남용하는 자들은 아무리 믿노라고 할지라도 그 행한 대로 심판받을 것이다(롬14:10-12, 고후 5:10).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믿노라고 고백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했다고 그들의 대단한 믿음과 업적을 과시할 것이다. 그들이 고백하는 믿음의 진위를 가리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심판밖에 없다. 따라서 심판은 우선적으로 주님이 자주 말씀하신 알곡과 쭉정이, 위선자와 참 신자를 가려내 영구히 분리시키는 방편이다. 믿노라고 하면서 성령을 계속 거스르고 거짓되게 행한 위선자는 불신자와 똑같이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이다. 그들의 행함 없는 믿음이 그들을 의롭다 하기보다 오히려 더 혹독한 심판을 자초할 것이다. 그 때에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고 하실 것이다. 주님이 위선자는 정죄하시나 참 신자는 사탄의 고소 앞에서 강력하게 변호하실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줄기차게 강조하는 바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 따라서 참 신자에게 정죄와 영벌에 이르는 심판은 더 이상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죽을 몸을 다시 살리시는 자체가 만천하에 우리가 의롭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행위인 셈이다. 마치는 말 최후의 심판에서 신자에게는 이미 부활로 인해 가시화된 칭의에 대한 공적인 확증과 선포가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가 범한 죄악에 대한 사죄와 함께 그가 행한 선에 대한 인정과 상이 결정될 것이다. 악행에 대한 사죄의 근거도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데 있으며 선행에 대한 인정과 상급의 근거도 칭의이다. 우리의 선행과 의로움이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미미하기 짝이 없고 흠투성이 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의롭게 여기시고 그에 대한 상급까지 약속하셨다. 칭의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신자의 전인, 즉 그의 존재 뿐 아니라 그의 행함도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행함은 칭의의 조건은 아니지만 믿음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필수적인 열매이다. 이 열매 없이 하나님의 심판대를 통과한다는 보장은 없다. <편집자 주> 이 원고는 12월 5일 개최된 ‘2016 미래포럼’에서 발표한 원고의 일부를 편집한 것이며, 원고의 전문은 https://www.facebook.com/ danielydpark/posts/1319516361424163?pnref=story에서 볼 수 있습니다.
1172 no image |성/탄/절/특/집|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사 9:1-7)_황원하 목사
편집부
1425 2016-12-13
|성/탄/절/특/집|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사 9:1-7) < 황원하 목사, 대구산성교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므로 잉태되고 출생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우리의 죄를 그분의 순결함과 온전한 거룩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려주신다.”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과 고난을 받으신 것과 부활하신 것과 승천하신 것과 통치하시는 것과 다시 오시는 것이 들어 있다. 이들 중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살펴보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분명하고 정확한 인식이 없으면 이어지는 그분의 일들에 대한 이해가 그릇될 수밖에 없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한 탄생이 그분의 정체와 사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참으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없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이제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시려면 그분은 반드시 성령으로 잉태되셔야 하며 반드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구원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 그렇지만 사람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나는 법이며,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것’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1.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자들 주후 1세기 이후에 나타났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가현설자들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종교개혁시대에 나타났던 재세례파 가운데 일부는 예수님이 마리아로부터 인간의 살과 피를 취하셨다는 사실을 부정하였다. 역사적으로 많은 이단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거부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출생을 부인하였고 그리스도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어떤 극악한 자들은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교묘하게 왜곡하여 사람들을 미혹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신 사실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전자를 믿으면서 후자를 믿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도신경에서는 한 조항을 믿지 않으면 다른 조항을 모두 믿지 않는 것이 된다. 특히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으면서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들, 즉 그분의 부활과 승천과 통치와 재림을 믿을 수는 없다. 게다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역사성은 제외하고 그 의미만을 받아들이자는 주장도 옳지 않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역사적인 사실이며 그 바탕 위에서 실존적인 의미를 가진다. 분명히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어야만 참된 신자가 될 수 있다. 2.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태복음 1:18-25와 누가복음 2:1-7에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에는 요셉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라는 점이 부각되어 있다(유대인 고려). 하지만 누가복음에는 마리아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메시아이시라는 점이 부각되어 있다(이방인 고려). 특히 마태는 이사야 7:14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동정녀(결혼하지 않은 처녀, 젊은 여자 아님)에게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통하여 임마누엘의 약속이 실현되었다고 본다. 원래 이사야 7:14은 주전 735년 이사야 시대에 아람 왕과 북이스라엘 왕이 연합하여 남유다왕 아하스를 대적하였던 일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에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아하스에게 징조를 주셨다. 그것은 아하스 집안의 한 처녀가 아이를 낳을 것이며 그 아이가 장성하기 전에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패할 것이라는 징조였다. 이 아이는 아하스의 후계자인 히스기야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의 탄생에 적용된다. 이것을 이중적 성취 혹은 다중적 성취라고 한다. 이것은 구약에서 일차적으로 성취되었는데, 신약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뜻한다. 이후에 이사야는 메시아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보다 자세히 언급한다. 그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라고 말한다(사 9:2). 그리고 한 아기가 태어날 것에 대하여 말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그는 이어서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라고 말한다(사 9:7). 따라서 구약시대에 임마누엘의 예언이 유다에게 구원의 복음이 되었듯이, 신약시대에 예수님의 탄생이 온 세상에 구원의 복음이 된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될 수 있는 가능성과 동정녀 탄생이 가능한지 여부에 대하여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그것을 선포하였을 뿐이다. 기독교 신앙은 선포된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사건의 이유와 가능성을 따져서 받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에 따라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음을 믿음으로 인정할 뿐이다. 3. 성령으로 잉태되심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심의 의미 사도신경에서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말로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아가서 예수님은 왜 성령으로 잉태되셔야 했으며 왜 하필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셔야 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 1) 성령으로 잉태되심의 의미 사도신경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라는 문구가 지시하는 것은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장본인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즉 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셨다는 것은 성령님이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태어나심에 관여하셔서 예수님을 남자의 씨와 실체가 없이 태어나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육체가 신성의 실체로부터나 성령의 본질로부터 산출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이것은 예수님이 성령의 덕분으로 혹은 성령의 역사로 태어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육신적인 측면은 그분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 전혀 없고 오직 그분의 어머니로부터 받아서 형성되었다. 2)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심의 의미 예수님이 다윗 집안의 여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예수님은 예언들과 약속들에 따라서 다윗의 씨로 태어나셔야 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사 7:14). 특히 예수님은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심으로 예언을 완전히 성취하셨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3) 동정녀 탄생의 결과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심으로 다음과 같은 결과가 발생하였다. 이 결과는 모두 예수님이 구원자의 자격을 갖추셨다는 점과 연관된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서 죄가 없으시기에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충족시켜 드릴 수 있다. 4. 동정녀 탄생의 의미 1)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여전히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된 인성을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취하셨다. 예수님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되고 완전한 사람이시다. 예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권한과 지위를 가지고 계신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고 계신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롬 9:5). 2) 예수님은 거룩하시며 죄가 없으시다. 만일 예수님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태어나셨더라면 그분에게는 모든 인류가 가지는 원죄가 있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며 이후에 자범죄를 짓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자의 도움 없이 오로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아담의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동정녀의 뱃속에서 거룩하게 되셨고 따라서 순결하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부모에게 연결하는 죄악의 끈을 예수님께 대하여서 끊어버리셨다. 이후에도 예수님은 죄를 전혀 짓지 않으셨다. 예수님께는 죄가 전혀 없으시기에 그분은 죄인을 구원하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시다. 3) 예수님은 사람이시므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 예수님은 다윗의 참된 자손이 되시고 모든 일에서 그분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 시편 132:11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하지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위에 둘지라.”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3). 특히 히브리서 4:15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약속된 다윗의 자손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동시에 우리의 진정한 형제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불쌍히 여겨 주신다. 마치는 말 그리스도의 거룩한 잉태와 탄생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이시므로 잉태되고 출생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우리의 죄를 그분의 순결함과 온전한 거룩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려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가려주시되 우리가 잉태되고 출생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죄를 가려주신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51:5). 그러나 우리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기 때문에 원죄를 가지고 있지 않으시다. 그러한 분께서 그분의 순결함과 온전한 거룩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가려주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우리를 가리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리스도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받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신뢰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의지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받으시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1171 no image |종교개혁특집| <2> 국가에 대한 교회의 태도_노승수 목사
편집부
1633 2016-11-16
국가에 대한 교회의 태도 < 노승수 목사, 강남성도교회 > “민주국가는 헌법을 통해 대통령과 정부에 주권의 일부를 맡기고 대통령으로 하여금 법률에 따라 다스릴 것을 요청한 것” ”대통령은 헌법과 그 질서를 수호할 책임이 있고 그 권위 아래 있어야 하며, 법질서를 허물었을 때에는 그 책임을 물어야” 장로교 목사인 사무엘 러더포드는 1644년에는 대영제국에 돌풍을 일으킨 책 한 권을 저술했다. 그것은 “법이 왕”(Lex Rex)이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왕도 법질서 아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서구의 근대적 국가 개념, 곧 사회계약론은 바로 이 러더포드의 저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국민은 자신의 주권을 나라에 위탁하고 나라로부터 보호를 받는 관계로서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정의한 것이다. 이는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언약 관계로 정의한 것이다. 스코틀랜드가 장로교 체제에서 언약국가를 표방하는데 이도 같은 맥락이다. 1천 자 내외로 된 국가 언약서(National Covenant)가 1580년에 작성되고 엄숙 동맹 언약서(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가 1643년 스코틀랜드 총회와 잉글랜드 하원과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공동 회의에서 통과되었다. 러더포드의 “법이 왕”이라는 책은 바로 이즈음에 저술되었다. 근대적 국가 개념은 사회계약론에 기초하고 있어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국가 권위의 출발점은 바로 언약이다. 그리고 이 언약의 문서가 곧 법률이며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법률은 곧 성경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최종 권위가 성경이듯이 국가에서 최종권위 역시 국가의 헌법인 셈이다. 이 관점을 더 극명하게 드러낸 인물도 있는데 네덜란드의 루이 알투시우스는 “정치학”(Politica)에서 독재자는 폐위되어야 하며 심지어 사형시킬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 민주국가인 대한민국 역시 헌법을 통해서 대통령과 정부에 우리 주권의 일부를 맡기고 대통령으로 하여금 법률에 따라 나라를 다스려 줄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왕정에 살지 않는다. 17세기 청교도들의 관점에서 왕도 법질서 아래 있어야 한다면,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은 당연히 헌법과 그 질서를 수호할 책임이 있고 그 권위 아래 있어야 한다. 법 위에 대통령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해가 우리에게 자명하게 가져야 할 관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떤 대통령도 법률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질 수 없고 어떤 교회의 지도자라도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일 대통령이나 교회의 지도자가 법질서를 허물었다면 당연히 그 법질서를 허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언약이란 정의를 기반으로 한다. 기독교 신자들이 국가의 관료들에게 순종을 해야 하는 것은 이들이 정의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하는 권면을 살펴보면,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롬 13:3-4)라고 말한다. 즉, 국가 관료의 사명이 악을 응징하고 선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전제 조건하에서 국가 관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정초해야 한다. 국가 관료들의 사명은 악을 응징하고 선을 보호하는 것 우리가 국가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우리가 맡긴 주권을 수호할 때이지 그 주권으로 사익을 추구하고 최씨 일가와 대통령의 배를 부르게 할 목적으로 맡긴 적이 없다. 그리고 그런 반-법률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국가 관료에 통치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교회의 보수적 태도들이 국가 권력의 부패를 부추겼다. 과거 군사독재정부 시절의 조찬기도회는 최태민에 의한 구국기도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는 바알숭배나 진배가 없다. 그럼에도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경의 교훈을 빌미로 대통령을 위로하며 대통령이 듣기 좋은 말을 하기에 급급하고 실제로 대통령은 그런 교계 지도자들만 만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한기총은 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내놓고 있다. 한기총의 이런 행보는 결코 참된 교회의 입장일 수 없다. 우리가 국가와 위정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지점은 그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선물로서 공의를 대변하도록 하기 위함이지 불의와 불공평을 대변하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정의할 때, “관원의 도움은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sanctum esse Dei donum auxilium magistratus)로 이해해야 한다. 이유는 신자의 신앙생활의 안정과 하나님의 공의를 집행하는 기구로써 국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교회를 보호하고 보존할 책임 가지고 있어 교회가 국가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가 교회를 위한다고 보아야 한다. 교회가 국가를 위하는 지점이 있다면 관원들이 정의구현을 위한 선지자적 역할을 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당연히 구약에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언급되는 공평과 정의를 실행하는 정부여야 하고 신자는 이 기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위정자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의 기능을 상실하고 악과 불의를 조장한다면 교회는 민주국가의 시민으로서 응당 이런 질서를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있다.
1170 no image |종교개혁특집| <1> ‘전투하는 교회’가 싸우는 방식에 관해_장대선 목사
편집부
1801 2016-11-16
‘전투하는 교회’가 싸우는 방식에 관해 < 장대선 목사, 가마산교회 > “로마가톨릭에는 아직도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권위를 가진다 주장하지만 교황은 결코 사도직의 계승자 될 수 없어” “전투하는 교회의 전투는 치리기구 자체가 아니라 사역자들에 의해 수종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그 본질”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전투하는 교회’의 일원이다.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는 그의 교리 강론에서 “그들은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부터 한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함께 모인 사람들인데, 영적인 싸움 가운데서 그리스도 왕국의 대적자들에게 대항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 이처럼 영적인 싸움 가운데서 그리스도 왕국의 대적자들에게 대항하고 있는 자들로 이뤄진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켜 전투하는 교회라고 한다. 이 교회에는 “가르침과 다스림을 위하여 항존직인 목사 및 교사와 장로와 집사들을 주신다”고 카트라이트는 덧붙여 말한다. 그 중 목사와 교사 및 교사를 가리켜 사역자들이라고 한다. 이 땅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로 존재하고 있어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회와 관련하여서 우리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종교개혁 이후 개혁된 교회들에는 항존직원과 사역자가 세워지지 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재세례파의 경우에는 ‘사제’(Sacerdos, Priest)에 대한 반발로 심지어 일체 교회의 직원을 두지 않기까지 했었지만, 개혁된 개신교회들은 사제주의를 반대했을지라도 결코 교회의 직원들과 사역자들을 두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로마가톨릭에서 사제들의 권위는 ‘교황’의 권위에 기반을 둔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제들은 교황에 의해 세워졌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권위의 계승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가톨릭에 있어서 교황권에 대한 수호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황의 권위가 부정되는 순간 로마가톨릭의 모든 직제의 권위가 붕괴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주의를 반대하는 개혁자들은 교황이 결코 사도직의 계승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했다. 카트라이트의 교리 강론에서도 “사도들은 후계자들을 두었는가?”라고 물은 뒤, 곧장 답변하기를 “정확히 말해, 사도들은 사도권의 위엄과 존엄을 지닌 후계자를 단 한 명도 두지 않았다”고 했다. 그 근거로 사도행전 12장 3절에서 야고보 사도가 칼로 죽임을 당한 후에 또 다른 사도를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사도행전 2장 26절에서 맛디아가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가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도는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 하나”(행 2:21-22)에 국한하며, 특별한 예외로서 사도 바울 외에는 더 이상의 계승자가 없는 것이다. 사역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가 아니며 그 직무를 대신할 뿐 카트라이트는 사도와 관련한 설명을 그것으로 끝마치지 않고 이르기를 “다른 면에서는 말씀과 성례, 그리고 열쇠(치리)권을 수행하기 위해 합법적으로 소명된 모든 목사들과 복음의 사역자들은 참으로 의심할 바 없이 사도들의 후계자들이다”라고 덧붙여 말한다. 이처럼 합법적으로 세워진 목사들과 복음의 사역자들이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것은, 그들에게 권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복음의 사역에 있어서 사도들과 동일한 임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로마가톨릭의 교황주의에 근거한 사제들과 확연히 다르며, 재세례파에서 일체 교회의 직원들을 두지 않는 것과 명백히 다른 종교개혁의 직분관이 바로 합법적으로 세워지는 목사들과 복음 사역자들이다. 이런 점에서 항존직의 경우에 역시 본질상 그 직분자들과 동일한 임무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개혁된 교회에는 말씀과 성례, 그리고 열쇠(치리)를 수행하는 합법적인 사역자들로 된 치리기구를 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들에 의해서 지상의 교회들은 전투하는 교회로서 고유한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치리기구 자체가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영적 전투를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멜랑크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이 1521년에 쓴 신학 총론(Loci Communes)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주교들은 종이지 주권자나 관원이 아니며, 뿐만 아니라 주교들은 법률 제정권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만 위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개혁교회의 치리기구를 주교와 같은 고위성직자 체제에 의해 다스려지는 기구로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 원리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즉 전투하는 교회의 전투는 치리기구 자체가 아니라 그들에 의해 수종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그 본질이다. 전투는 사역자들이 수종드는 말씀으로 수행되어야 이처럼 전투하는 교회로서 지상의 교회에 중요한 요소가 바로 목사를 비롯한 복음의 사역자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들이 수행하는 사역 곧 말씀 사역에 전투하는 본질이 있는 것이다. 그런 사역자들을 세우지 않는 재세례주의에 바탕을 둔 무교회주의적인 모임들은 결코 전투하는 교회가 되지 못하며, 그런 말씀 사역을 수행하지 않는 로마가톨릭의 사제들 또한 결코 영적인 전투를 수행한다고 말할 수 없다.
1169 no image |정/암/신/학/강/좌| <2>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칼빈의 견해
편집부
1705 2016-11-16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칼빈의 견해 헤르만 셀더하위스(Herman Selderhuis) / 이승구 옮김 칼빈은 “죽음에는 탈출구가 없으나, 죽음이 끝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음을 향해 갈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실상 참된 삶을 향해 가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1. 서론 “나의 몸은 후패하고 날마다 나빠져 간다. 죽음을 생각하기 위해 먼 곳을 갈 필요가 전혀 없다”고 칼빈은 말하였다. 칼빈은 1554년에 했던 욥기 설교에서 자신은 죽음으로부터 10 시간 거리에 있다고 말하였다. 이 말은 죽음이 항상 그와 동행하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준다. 이 글에서 먼저 칼빈의 개인적인 사람에서 죽음이 어떻게 하나의 실재가 되었는지를 간단히 묘사해 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석들과 설교들에 근거해서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죽음을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견해를 요약해 보도록 하겠다. 실제로 죽음이 실제 삶에 다가 올 때 이런 죽음관이 어떻게 기능하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칼빈의 삶에서 죽음에 대한 경험(Death in Calvin’s life) 칼빈도 죽음을 일상적이고 어디에서나 경험하는 실재로 경험하였고, 그가 이런 경험을 표현하는 것을 잘 보면 그것이 얼마나 실존적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게 된다. 칼빈은 인생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트랙에 놓으시고 작은 장애물 코스를 뛰어 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잘 조직해 놓으신 짧은 경주”(a short race organized by God)라고 말한다. 우리는 매순간 어디서나 수 없이 많은 죽음을 직면한다. 칼빈은 삶이란 아주 깨어지기 쉽고 죽음은 매순간 도처에서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잘 의식하고 있다. 3. 칼빈 사상에서의 죽음 이해 『기독교강요』에서 죽음이 따로 다루어지고 있는 유일한 곳은 미래의 삶에 대한 묵상(the meditatio future vitae)에 대한 부분인데, 이는 영생의 맥락과 직접 연결되어 제시되고 있다. 성경과 특히 사도 바울이 이 세상에서의 비참함과 죽음 이후의 삶의 영광에 대해서 말하는 바를 언급한 후에 “죽음의 날과 종국적 부활의 날을 기쁨을 가지고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진보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는 것 이외의 다른 결론에 이르지 않는다. 죽음의 신학적 차원을 다루는 구절에서 칼빈은 경험적 차원도 표현해 내고 있다. 그는 『영혼 수면설에 대한 논박』(Psychopannychia)에서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며, 따라서 죽음은 온전한 절망을 가져 온다고 진술한다. 즉, 죽음은 진노하시고 형벌하시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부가하신 것이다. 4. 칼빈의 편지들에 나타난 죽음 죽음 앞에서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장사하며,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것은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칼빈주의자의 이미지와 연관해서 우리들은 그런 태도들 시발시키고 보급시킨 사람은 분명히 칼빈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칼빈의 편지는 죽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눈물로 가득 차 있다는 것도 보아야 한다. 칼빈의 편지들에서는 하나님의 전능한 힘에 뿌리를 내리고 전혀 요동하지도 감정적으로 흔들리지도 않으면서 그 어떤 것도 그저 스쳐 지나가게끔 하는 강한 칼빈과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들은 슬픔에 사로잡혀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칼빈을 보게 된다. 5. 칼빈의 죽음 칼빈은 지금부터 450여년전인 1564년 5월 27일 저녁에 죽게 된다. 그 다음 날인 1564년 5월 28일 주일 오후 2시에, 그가 요청한대로 늘 사용되던 나무 관에 실려서 일반 묘지(Plein Palais)에 안장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장례식은 그 관과 같이 깨끗하고 침착하게 치뤄졌다. 모든 것을 지나치게 하지 않는다는 그의 원칙은 이 장례식에서도 잘 지켜졌다. 그러나 장례식은 결국 몸을 무덤에 묻는 것이지, 그 인격 전부에 대한 것은 아니다. 칼빈은 사람들이 “하늘”(heaven)에서 서로 알아 볼 것이라고 하면서 루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칼빈은 그들이 “하늘”에서 함께 있으면서 조용히 논의를 계속할 수 있으리라고 쓴 바 있다. 같은 말을 멜랑흐톤에게 한 적도 있다. 그와 함께 하늘에서 잔치를 벌이기 원한다고 하였다. 칼빈은 “죽음에는 탈출구가 없으나, 죽음이 끝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음을 향해 갈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실상 참된 삶을 향해 가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6. 요약과 결론 이로부터 결론은 다음 같은 것들이다: 1. 칼빈의 작품에는 예정과 선택의 주제가 죽음의 침상에서의 고뇌와 의심의 원인으로 나타난 적이 없다. 2. 칼빈은 죽음에 직면하여 슬픔의 감정을 가지는 것을 자연스럽고 성경적인 것으로 여겨 적법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었다. 3.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어떠해야 한다고 칼빈이 말한 것과 칼빈의 실제적 목회적 조언과 죽음과 죽어 감에 대한 그 자신의 실제 모습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이 있다. 4. “칼빈의 생애와 신학에서 죽음”이라는 주제는 그 동안 칼빈 연구에서 많이 간과해온 분야이다. 이런 네 가지 결론은 칼빈 자신의 말로 가장 잘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께서 근자에 나의 아내를 고향으로 그에게 데리고 가셨기에 나는 반쪽 사람일뿐입니다”(CO 20.394).
1168 no image |정/암/신/학/강/좌| <1> 마틴 부써와 목회 사역
편집부
1542 2016-11-16
마틴 부써와 목회 사역 헤르만 셀더하위스(Herman Selderhuis) / 김병훈 옮김 “교회는 하늘의 왕국이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왕권을 실행하시는 영역이며, 목회 사역이란 말씀을 개인적이며 공적으로 선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덕으로 세워가는 것” 1. 서론 목회의 위기는 교회 위기의 원인이다. 이 한 마디로 부써의 목회적 관심과 목회를 계속적으로 개혁할 필요에 대한 견해를 표현할 수 있다. 부패의 상태로 빠져버린 교회의 부패 원인은 바로 목회의 부패에서 시작되었다. 성경적인 올바른 목양의 결핍은 교회의 비참함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의 원인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부써는 목회의 개혁에 관심을 쏟았다. 부써에게 있어 종교개혁이란 무엇보다도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또한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다. 2. 목회 신학 부써에게 있어서 목양이란 하나님 왕국 안에 있는 모든 일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무엇보다 섬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사역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뚜렷해진다. 이것이 또한 부써의 신학 기반이며, 그의 초기 저서들 안에서 전제로서 개진된, 그리고 이후에 해설이 된 요소이며, 그 후로 바뀐 적이 없었던 요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에 참으로 임재하시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여 대체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직원[곧 목회자, 장로 그리고 집사]들을 사용하시지만,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자리에 있지 않다.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일을 행하신다. 목회 사역의 개혁과 관련해, 부써의 관심은 교회의 개혁에 있다. 그의 개혁의 의도는 오로지 교회의 안녕을 향해 있다. 3.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의 왕권은 교회에 계시되어 있으며, 모든 것들보다 우위에 있다. 교회는 왕국이다. 부써는 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이것을 선포한다. 교회는 하늘의 왕국이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왕권을 실행하시는 영역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 선택을 받은 신자들의 심령 안에서 그의 왕권을 실행하신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을 통하여 왕권을 실행하신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곧 한 몸의 두 손과 같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열매이며, 동시에 성령의 도구이다. 열매인 교회는 심령 안에서 믿음을 일으키시는 성령께서 일하신 결과이며, 신자들의 총회인 교회를 빚어간다. 성령의 도구인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에 이르도록 말씀을 설교한다. 4. 교회 직원과 회중 부써에게 있어 교회란 구원의 기관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질서있게 교회와 관련된 방식으로 그의 선택을 실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그의 은사를 내어주시어 교회의 유익을 베푸신다. 용서를 바라는 자는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 구원은 교회 직원들의 손에서 받는 것이다. 그들은 말씀과 성례로 구원의 일을 하며, 권징을 통해 이 구원을 보존한다. 이로써 목회 사역에 영원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구원을 목회자의 손 또는 입에서 받는 사람은 또한 그것을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것이다. 여기에 성령께서 말씀과 성례의 밖에서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없이도 성령께서 구원을 이루실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5. 교회 직원의 목회 사역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선택을 받은 자들을 친히 모으시고 그들을 자신의 몸으로 취하신다. 하지만 이 일을 위하여 목회자들을 사용하신다. 목회자와 관련해 말할 때, 부써는 단지 말씀의 사역자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러 직무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 모든 것들은 회중의 크기와 필요에 따라 결정이 된다. 직무의 구분 가운데 주된 것은 장로와 집사의 구분이다. 이 둘의 구분 안에는 여러 가지 차이점들이 있다. 임무에 따라 특정하게 분업화가 이루어진다. 장로들 가운데 어떤 이는 교회를 덕으로 세우는 일에 특별히 부름을 받으며, 또한 교회를 돌보는 일을 위해 구체적으로 부름을 받는다. 장로들을 포함하여, 교회 안에 있는 사역자들 [종들]은 말씀과 성례와 권징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한다. 요리문답을 가르치는 일 또한 목회 사역에 속한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요리문답을 통해 세례를 받는 것의 의미를 배우며, 나중에 그들의 신앙을 고백할 줄 알게 된다. 6. 회중의 목양적 역할 회중도 또한 목양의 역할을 한다. 신자들은 단지 양일뿐만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각 신자에게 임하여 계시기 때문에, 각 신자는 서로를 향해 목자이기도 하다. 내 형제에게서 나는 최고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내 형제를 위한 목자인 것이다. 각 신자는 서로를 보호할 책임이 있으며, 또한 양 무리에게로 이끌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각 신자 안에 살고 계시므로, 신자는 다른 것을 행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양 무리에게로 이끄는] 후자의 책임은 교회와 선택에 관한 부써의 견해에서 펼쳐지는 것으로 복음전도와 관계된다. 복음전도의 교훈은 온 회중의 임무이면서 또한 회원이 개별적으로 행할 책임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목양에 속한다. 7. 결론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부써에 따르면 목회 사역이란 말씀을 개인적이며 공적으로 선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덕으로 세워가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는 점이 확실하게 나타난다. 목회 사역의 목적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왕국을 섬기는 것이며,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 가운데 실현된다.
1167 no image |개/혁/주/의/신/앙/강/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담긴 장로교회의 정신_서요한 목사
편집부
1809 2016-11-0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담긴 장로교회의 정신 < 서요한 목사, 총신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는 사도적 가르침과 전통에 따라 오직 살아계신 주님과 교회 간의 유기적 상호 결속을 강조하며 신앙고백서를 포함한 웨스트민스터 문서는 또한 성경의 가르침을 더욱 권위 있게 들어내 장로교회는 성경의 영감과 계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의 요체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통해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며 구원의 은총과 가치를 높이는 계기 만들어야 I. 서론 장로교회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채택한 신앙고백서를 신앙의 원리와 표준으로 삼고 지금까지 고백해 왔다. 한국 교회, 특별히 장로교회도 예외 없이 세계 교회의 전통을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1956년 이후 총회의 승인 하에 지금까지 고백해 왔다. 그러면 왜 우리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그 총회가 제정한 문서들을 중요시하는가? 이유 중에 하나는 무엇보다도 계시된 성경의 진리를 분명하고 가장 명료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는 사도적 가르침과 전통에 따라 오직 살아계신 주님과 교회 간의 유기적 상호 결속을 강조한다. 신앙고백서를 포함한 웨스트민스터 문서는 또한 성경의 가르침을 더욱 권위 있게 들어내었다. 이러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담긴 장로교회의 정신을 이해함으로써 종교개혁 499주년을 맞은 우리 시대의 교회들이 추구해야 할 길의 좌표로 삼고자 한다. II. 본론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절대 다수인 이들은 독선적인 국왕의 횡포와 감독주의에 맞서 의회 중심의 대의제를 주장하였다. 장로 정치는 어원상 헬라어 “프레스비테로스”에서 유래한 바, 지교회가 회중에 의해 선출된 장로회(당회)에 의해 운영되는 교회 정치체제를 말한다. 장로교회는 성경적 원리에 기초하여 장로, 즉 목사와 장로, 집사로 구성되었다(빌 1:1; 딤전 3:1-2, 5:17; 딛 1:5-7, 얍 5:1). 따라서 감독교회와 달리 장로들 간의 어떤 위계나 차별이 없음을 보여준다. 말씀과 성례를 주관하는 목사, 이른바 ‘치리 장로’는 봉사 장로와 단지 직무상 기능이 다를 뿐, 실제로 당회를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할 때는 양자가 동등하다. 따라서 대부분의 결정은 다수결로 결정된다. 한편 성경에 기초한 장로교회의 정치는 기본 권력이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의해 행사된다. 때로 집단의 결정도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개인의 결정보다는 덜 범한다는 것이 신념이다. 장로교회의 특징은 명칭대로 장로로 구성된, 개 교회 당회와 노회, 총회로 구성된 정치 체제이다. 이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장로교회는 목사의 동등성(the Parity of the clergy), 대의주의(Representative), 입헌주의(Constitutional), 관계주의(Relational)를 표방한다. 1. 목사의 동등성 목사의 동등성은 주님의 소명에 따라 일정한 과정을 마치고 안수 받은 목사는 어느 교회를 담당하든지, 크든지 작든지, 도시든지 시골이든지, 모두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는 원리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라도 목사 간에 종속적인, 상하관계의 직무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목사, 즉 치리하는 자는 모두 말씀의 사역자들과 구별되지 않으며, 그들은 필연적으로 별개의 계급, 상급 계급을 형성하지 않는다. 단지 교회를 대표하여 통치하고 다스리며 관리하는 직무를 행할 뿐이다(히 13:7, 17 참조). 무엇보다 목사는 주님의 소명에 따라 대변자로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에 우월성을 가질 수 없다. 데이빗 딕슨(David Dickson, 1583-1662)은 마 20:20-28 주석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에 권력을 장악한다든지 강력한 관할권을 행사하는 것은 주님에 의해서 주님에게 쓰임받는 자에게는 금지되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장로교회는 모든 교직자, 목회자의 지위와 평등성을 주장한다. 이는 로마 가톨릭이나 성공회 혹은 감리교가 주장하는 교직자의 서열의식과는 다른 것이다. 2. 대의주의 대의주의 혹은 대의제는 교인이 선출한 교회직원(officers)이 운영하는 제도로, 엡 4장과 고전 12장, 롬 12장에 기초한 당회 중심의 각각 독립된 지 교회를 가리킨다. 이는 종교개혁 이후 스코틀랜드 중심의 세계 장로교회에서 실행해오는 전통이다. 이 전통에 따라 개 교회의 일반 회중 혹은 성도는 각각 항존직 직원, 장로와 집사를 선출하는 바, 이것은 장로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정치 원리이다. 위임목사 선출 시 공동의회의 동의를 얻는 것이나 장로나 안수집사, 그리고 권사가 선거로 선출되는 것은 이 원리에 근거한다. 목사나 장로 혹은 어느 개인의 결정 보다는 당회의 지도를 통해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다. 회중은 상기한 직원을 선출하여 교회를 지도, 운영하도록 권한을 주며, 당회는 교회의 전반적인 운영과 관련된 모든 결정을 합리적으로 집행한다. 미국의 일부 장로교와 현재 몇몇 한국 장로교회는 당회 대신 상설 의사 결정 기구, 예를 들면 각 부서 책임자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모든 일을 집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장로의 시무 연한을 임기제로, 장로의 경우 보통 6년 임기로 시무하고, 다시 선거를 거쳐 시무 장로가 되며, 그 다음에는 사역 장로로 전환된다. 이러한 임기제는 교회가 역할 분담을 위해 가능한한 많은 사람이 교회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조처이다. 또한 치리회는 대표위원회(committee on representation)를 조직하여, 치리회 구성원이 다양한 집단을 대표할 수 있도록 조언하도록 하며, 특히 임직자 공천에서 이러한 원칙이 지켜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 당회와 교회 직원이 가능하면 성, 나이, 지역, 신념 등에서 회중 전체의 구성과 일치하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다. 3. 입헌주의 장로교회는 헌법에 의해 다스리는 입헌주의 원리이다. 장로교회는 개인이나 집단의 임의적인 결정보다는 미리 규정된 규범, 헌법에 따라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강조한다. 스코틀랜드와 미국장로교, 그리고 한국의 장로교 헌법은 신앙고백서(the Book of Confessions)와 규례서(Book of Order), 즉 정치편람으로 이루어졌다. 신앙고백서는 교인과 세상에게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믿으며, 어떤 일을 하려는 지를 선언한다. 신앙고백서가 교회의 믿음과 신앙을 보여준다면, 규례서는 교회정치의 원리와 실제적인 내용을 제시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규례서에는 교회정치, 예배모범, 권징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 왕 되심(Head and King of his Church)이다. 이렇게 헌법에 규정된 대로 정치와 예배, 권징이 이루어진 것이 장로교회의 전통이다. 이러한 입헌주의는 대의주의와 직접 연결된 바, 회중에 의해 선출되어 권한을 위임받은 교회의 직원, 장로와 집사는 헌법에 규정된 범위 안에서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와 미국과 한국의 장로교 규례서에는 목사, 장로, 집사, 권사의 권한과 직무, 당회, 노회, 총회와 같은 치리회의 권한과 직무를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4. 관계주의 장로교회는 관계주의, 즉 유기적 통합 원리로 이는 교회가 하나라는 성경적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장로교회는 교회의 하나 됨을 성경에 기초하여 구체적으로 실현하였다. 우선 장로교회는 상기한 원리를 중심으로 여러 지교회가 모여 집합적으로 ‘한 교회’를 이룬다고 믿는다. 따라서 장로교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지 교회와의 유대 속에 한 울타리 안에 들어가며, 지교회의 상회 기관인 노회의 권위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독립된 장로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이 같은 장로교회의 관계적 혹은 통합적 성격은 당회, 노회, 대회, 총회로 이루어진 치리회의 조직에 표현되었다. 장로교회는 상급회의가 하급회의를 다스리며, 전체를 대표하는 기구가 각 부분 또는 그 부분의 총화에 대해 민주적으로 다스리고 결정한다는 원리이다. 즉 당회나 노회는 총회의 결정에 반하여 행동할 수 없으며, 당회는 노회의 결정에 불복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지 교회나 노회의 규칙이나 내규도 헌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장로교회는 당회의 결정에 따라 상회, 즉 총회와 노회에 소속하되, 지역적 상황에 따라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여 고백한다. III. 결론 고찰한대로 역사적 기독교, 특별히 한국 장로교회를 포함한 장로교회는 성경을 기초로 오랜 전통을 갖는다. 이 장로교는 교리와 구조, 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초대교회, 종교개혁시대, 정통시대에서 보듯이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투쟁 속에서 유지되었다. 하지만 피나는 투쟁 속에서 교회는 국가로부터 자율권을 인정받고, 복음 전파와 더불어 오늘까지 신앙에 정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장로교회는 크게 두 가지 중요성을 갖는다. 1. 역사적 중요성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은 역사적으로 325년의 니케아 신조, 451년의 칼케돈 신조, 1518년 하이델베르크 신조, 제 2스위스 신조, 벨직 신조, 1560년 낙스의 신앙고백서, 1618년 돌트 신조 등을 집대성하였다. 특별히 이 모든 신조는 칼빈의 신학, 「기독교강요」에 기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가장 독립적이며 독창적인 신학의 꽃이요 열매이다. 기존에 존재한 고백서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종합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영감과 계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 구속,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기적과 인간의 책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교회의 본질과 성령의 역할, 재림과 종말 사상 등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역사적 장로교회는 17세기 영국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논의된 신앙고백서를 가장 성경적인, 성경의 내용을 함축한 문서로 오늘 세계 장로교회가 신앙의 표준문서로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는 개혁자 존 칼빈의 사상이 잘 함축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칼빈주의적 성격의 신앙고백서로 불린다. 역사와 환경은 변해도 영원히 변치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고백서를 오늘날 장로교회가 수용하고 실천하는 이유이다. 2. 현대적 중요성 작금의 기독교, 특별히 한국 장로교회는 세속주의와 혼합주의, 종교 다원주의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는 2013년 10월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10일 간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제10차 WCC 총회가 대표적이다. 상기 총회는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라는 주제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문제를 포함하여 환경문제와 인권문제, 핵문제, 질병문제, 가난과 경제 정의실현 문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총회는 한국교회의 큰 관심사였던 종교다원주의와 동성애, 개종전도금지와 용공시비문제는 명확한 답변 없이 정리하였다. 특별히 의제 중에 용공주의는 구시대적 발상으로 지금은 공산주의가 사라진 상황에서 의미가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문제는 성경에 대한 입장으로 WCC는 진보적 신학자들의 방식을 고수하였다. 예를 들면, 총회는 선교 선언에서 요 10:10을 인용한바, 본문의 ‘생명’을 자연적인 목숨, 모든 생명체들이 가진 생명(비오스)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한 목자의 대속사역의 결과로 얻어지는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조에)을 가리킨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기쁜 소식을 온 세계에 전하므로 영생을 얻게 하는데 대한 언급이 없다. 이것은 WCC가 성경의 권위보다는 교회의 가시적 일치와 사회변혁을 우선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맹렬한 도전 속에서 한국의 장로교회는 성경의 영감과 계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의 요체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통해 정체된 한국 교회를 새롭게, 무엇보다 구원의 은총과 가치를 높여야 할 것이다.
1166 no image |심/층/진/단| 자연종교 현상으로서 ‘방언’에 대한 비평적 소고_장대선 목사
편집부
1755 2016-10-18
자연종교 현상으로서 ‘방언’에 대한 비평적 소고 <장대선 목사, 가마산교회> 한국의 100년 남짓의 개신교 역사에서 가장 큰 흐름은 이미 부흥운동과 이를 이은 성령운동이 주도했었기에 한국의 개신교는 어느 교파를 막론하고 공히 성령운동의 풍토를 공유하고 있었다. ‘자연종교-신비주의-방언 기도’의 연계성 가운데서 방언 기도는 결코 역사적인 기독교 정통에서의 풍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한국에 전파된 개신교의 모습은 그 초기에서부터 이미 부흥운동(revivalism)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상당히 늦은 시기에 조선에 개신교가 전파된 역사적인 배경 가운데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1. 한국교회 초기부터 불어 닥친 성령운동 조선에 개신교가 들어올 때 이미 서구사회는 부흥운동 및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이 큰 물결을 이루어 휩쓸고 간 뒤끝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이미 조선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올 당시부터 특정 교파가 아니라 다양한 교파들이 거의 동시적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보내던 시기였기 때문에 어떤 한 교파의 신앙이 정립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사실 조선에 들어온 개신교의 풍토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한국의 장로교회들에서 한동안 강조했었던 평양대부흥운동, 즉 1905년 원산을 시작으로 1907년 평양에서 정점에 오른 부흥운동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것은 전형적인 부흥운동의 양상이었다. 이런 배경 아래 1907년에 조선 장로교에 독노회(One presbytery)가 설립되었지만, 이 노회가 갖는 헌법과 신앙고백의 의미는 순식간에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은 소란에 잠식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때는 일제에 의한 제국주의 정책 가운데서 유일한 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가 김재준(金在俊, 1901-1987)을 비롯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 무대가 되었던 시기로 당시 조선은 그야말로 신사참배(神社參拜)와 같은 반 신앙적인 행위조차도 얼마든지 용인하고 동조할 수 있는 사상적 혼란기였다. 이후로 광복과 곧바로 이어진 민족분단, 그리고 6·25 전쟁이후 친미정책과 더불어 한국의 기독교는 이미 부흥운동을 넘어서 ‘성령운동’이라는 열풍이 휩쓸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의 풍토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5.16 이후 들어 선 군사정권 아래에서 한국 기독교는 ‘민족복음화’니 ‘백만인 구령운동’이니 하는 슬로건이 개신교의 분위기를 송두리째 독점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순복음교회의 등장과 더불어 ‘성령운동’이 사실상 한국 기독교의 분위기를 이끌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100년 남짓의 개신교 역사에서 가장 큰 흐름은 이미 부흥운동과 이를 이은 성령운동이 주도했었기에 한국의 개신교는 어느 교파를 막론하고 공히 성령운동의 풍토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한 풍토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방언(γλωδδα)의 추구였다. 2. 방언의 등장과 그 역사적 배경 성령운동 가운데서 크게 강조되고 유행한 방언은 시대적으로 두 양상을 보였다. 즉 사도행전 2장에서와 같은 외국어로서의 방언과 로마서 8장 혹은 고린도전서 13-14장에서 주로 다룬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고전 14:2)인 방언의 두 양상이 각각 간격을 두고 방언 현상의 근거를 이룬 것이다. 그와 같은 방언과 관련한 배경과 그 이론적 근거와 관련하여 간단하면서도 분명하게 다룬 종교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 1929-)에 따르면, 초기의 성령운동 가운데서의 방언은 주로 늦은 비 운동(Latter Rain revival)과 관련하여 추구되었으며, 그러한 운동 가운데서 방언을 추구했었던 자들은 “방언 기도를 통해서 결코 배운 적이 없는 중국어나 러시아어, 아랍어 등을 말할 수 있는 기적의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이는 그들이 “마지막 때가 다가왔다는 급박한 소식을 만방에 알리라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중대한 소명이 방언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방언에 대한 설명 방식은 불과 10년을 못 버티고 롬 8장 26절의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는 말씀을 바탕으로 “자비로운 성령께서 제공하는 소리를 통해, 주저하며 더듬는 영혼이 힘을 얻어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으로서 이해하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즉 종말론적 바탕에서 세계선교를 위한 도구로써 외국어 방언의 필요가 아닌 “마음은 간절하나 자신의 힘으로 기도가 잘 안 되는 사람들에게 언어의 문법적 고리를 벗어나 초자아적 경지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해되고 설명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에서 순복음교회를 필두로 크게 번진 성령운동은 방언기도의 두 번째 양상이 이미 보편적으로 유행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순복음교회의 조용기는 그 두 가지 양상을 모두 활용하여서 “방언 기도가 유일하고 명약관화한 성령 세례의 증거(초기의 방언 이해)”라고 믿도록 함과 동시에 “방언의 은사를 성령의 여러 은사 중 하나라고 생각(후기의 방언 이해)”하도록 하는 창의성(혹은 순발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사실 1세기 이후 2-3세기에 걸쳐서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서 방언이나 은사 혹은 이적 등은 전혀 기록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특별히 2세기 말 몬타누스(Montanism)나 17세기의 야콥 뵈메(Jacob Boehme, 1575-1624)와 같은 신비주의자들 가운데서 종종 등장하는데, 특히 뵈메는 태초의 “아담이 히브리어 같은 지각 언어(known language)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감각 언어(sensual speech)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뵈메는 “이 감각 언어를 의미에 대한 즉흥적 감각을 표현하는 대화의 직접적 형태이자……타락하거나 왜곡되지 않은 동물의 언어에 가깝다”고 하여 자연 언어(natural language)라고 불렀다. 바로 그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재세례주의자들과 20세기 초의 성령운동에 참여하는 자들이 공히 자연 언어로서의 방언 기도에 대한 두 번째 입장(성령께서 제공하는 소리를 통해, 주저하며 더듬는 영혼이 힘을 얻어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신약성경의 관점으로 회복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론을 수립할 수 있었다. 3. 자연종교의 공통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방언’ 1세기 이후로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사라졌다가 종종 등장하곤 하는 방언 기도는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거나 불건전한 신앙풍토를 지닌 인물이나 그룹들 가운데서 주로 추구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상당하게 추구되고 있는 방언 기도는 주로 언어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은사)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다. 결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방언 기도의 추구는 항상 신비주의 혹은 그와 유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전수되었던 것임을 알 수가 있는데, 그러한 방언에 대해 원초적 언어(primal speech)라고 말하는 성령운동 그룹의 주장은 구조주의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1928)가 주장한 ‘보편 문법 구조’와의 관계성 가운데서 이론적으로도 치밀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운동 그룹의 방언 기도가 갖는 종교적 특성을 가장 잘 함축하여 설명한 것은 소설가이자 문학비평가이기도 했었던 수잔 손탁(Susan Sontag, 1933-2004)이다. 그녀에 따르면 “언어가 어떤 실재의 참된 의미와 중요성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한계를 보일 때, 인간은 신비주의 종교의 극단적인 형태 속에서 새로운 표현의 탈출구를 찾는다”고 하면서 “이 같은 언어에 대한 신비주의적 회의(懷疑)와 새로운 표현 방법의 제시가 모든 다양한 종교 속에 존재”하는데, “회교의 수피즘, 힌두교, 도교, 불교,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 내의 신비주의” 등을 그 예로 언급하고 있다. 사실 종교학에서는 정통(正統, orthodox)적인 기독교가 아니라 비정통적인 기독교에 주로 관심을 두어 연구하곤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종교들의 공통분모인 자연종교의 성격이 비정통적인 기독교, 그 가운데서도 신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성령운동과 같은 그룹들에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통적인 기독교에서는 종교학이 선호하는 자연종교의 특성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신앙(신학)을 정립했으며, 신약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에 대한 오늘날까지의 연속성(복음 뿐 아니라 구약성경과의 연속성까지를 포함한 정통교리)뿐 아니라 불연속성(사도시대에 팽배했던 여러 이적적인 현상들과 그것이 지향했던 복음의 확증 이후로 사라진 사실) 가운데서 일관된 믿음을 정립했다. 이런 점에서 방언 기도를 추구하는 성령주의적인 양상 가운데서 기독교는 흔히 자연종교로 퇴행한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마치는 말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방언과 관련한 역사와 배경 가운데서 우리들은 충분히 그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연종교-신비주의-방언 기도’의 연계성이다. 그와 같은 맥락을 이해하는 가운데서 방언 기도는 결코 역사적인 기독교 정통에서의 풍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따라서 가장 분명하고도 객관적인 교리와 신앙고백 위에 서 있는 장로교회들의 신앙 가운데서는 이러한 자연종교-신비주의-방언 기도와 같은 주관적인 종교 현상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1165 no image |총/회/참/관/기| “품격있는 총회로 성숙한 교단 자랑스러워”_장임구 장로
편집부
1641 2016-10-05
“품격있는 총회로 성숙한 교단 자랑스러워” <장임구 장로, 남문교회> 새로운 한 세기를 시작하는 101회 총회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긴장된 생활에서 모처럼 벗어나 9월 20(화)-22일(목)까지 ‘덕을 우러러 본다’는 온천의 고향 ‘덕산리솜리조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유난히 길었던 폭염과 미세먼지로 푸르고 높은 하늘 보는 날이 드물었지만 주님께서는 신선한 바람과 드높고 해맑은 하늘, 적당한 기온 등 최적의 환경조건을 총회 사흘 동안 저희들에게 선물로 주셔서 최고의 컨디션으로 총회에 임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총회장님의 유연한 사회진행으로 긴장과 경직된 분위기를 해소하셨고 회의절차를 무시하거나 예의에 어긋나는 발언이나 과격한 발언이 지적되면 발언한 총대는 즉시 사과하고 시정하는 모습은 세상과도 구별되며 주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으로 묵묵히 지켜보는 모든 총대에게도 귀감이 되었습니다. 자주 발언하는 총대께서도 논쟁이 아닌 언행, 헌법과 규칙을 준수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발언으로 예년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모든 회무가 은혜로웠습니다. 지난 몇 회기 총회 때마다 뜨거운 논쟁이었던 ‘세계비전 두날개 프로세스’가 한층 성숙하고 은혜롭게 마무리 되었고, 한국사회의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동성애와 동성결혼법 저지를 위한 위원회 구성’등으로 교회가 먼저 기도하고 대처하며 대안을 도출하도록 주요 이슈 등도 심도 있게 논의하여 결정된 사안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아름다운 결정체라 생각됩니다. 우리 교단이 한 단계 격상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제안을 해보려 합니다. 첫째, 이번 총회에서도 예년과 같이 목사총대 146명 중 136명(95%) 참석했으며 장로총대 143명 중 90명(62%)참석하여 이튿날에는 장로총대 90명 중 50-60명만이 계속해 참석하는 상황입니다. 물론 장로님들께서는 각자 생업이 있기 때문에 총회기간 사흘 동안 참석하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지만 노회 대표로 위임받은 자들로 그 책무를 다해야 부끄럽지 않을 것이며, 사정이 있어 불참할 경우 부총대를 대신 참석시켜 책임을 다해야 하며 더불어 각 노회에서도 정·부총대에 권면과 설득으로 총대의 책무를 다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각 노회대표로 참석하였으나 상비부 또는 특별위원회에 배정을 받지 못하여 교단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면 교단으로서도 큰 손실임으로 교단차원에서 지혜를 모아 해결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임원들은 회의진행을 돕기 위한 극히 제한적인 발언 외에는 특정사안에 자주 발언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넷째, 오전·오후 시간을 앞당겨 회무시간 외 별도 시간을 배정하여 전국에 모인 총대끼리 목회정보 등을 교류하며 교제의 시간을 갖는 것도 교회확장에 유익할 것으로 사료되어 검토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다섯째,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총회기간 내내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신 증경총회장님과 부총회장님들께 감사를 드리며 저희 후배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셨습니다. 교단의 어르신들이시며 힘들고 어려울 때, 후배들이 방황할 때 지혜와 방향타가 되시는 참 소중하신 분들입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공식석상에서 증경부총회장님들의 의견을 청취할 수 없는 현황이여서 증경부총회장님들의 발언권을 드리는 방안을 모색하여 증경총회장님과 부총회장님들의 지도편달을 받는 것은 교단의 큰 재산이며 보배로 생각되어집니다. 이번 총회를 통해 저희 합신교단이 더욱 자랑스럽고 총대님들이 존경스러우며 벌써 102회 총회가 기대됩니다. 함께하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1164 no image |총/회/참/관/기| “총회의 여러 사안들을 학습하는 배움의 시간”_김무곤 목사
편집부
1449 2016-10-05
“총회의 여러 사안들을 학습하는 배움의 시간” <김무곤 목사, 대구동흥교회> 우리 합신의 총회를 두 번째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작년에는 사실 첫 번째는 총대이면서 제100회 경주총회를 스텝으로 섬겨야 하는 상황에다가 신옥주 측의 반대시위 등으로 인하여 총회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다른 책임 없이 두 번째로 참여하여 보니 더 많이 보이고, 더 넓게 보이고 더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우리 합신 총회가 왜 자랑스러운 총회인지에 대해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진행상의 아쉬움들도 더러 있었지만 총평을 하자면 소망을 품을 만한 총회였습니다. 먼저 총회의 외적인 부분을 살펴보면 장소는 덕산의 스파캐슬 리조트였고, 염광교회와 중서울노회가 주도적으로 섬겨주었습니다. 이제 제3의 장소에서 총회를 개최하는 것은 대세가 되었습니다. 숙소와 회의장이 가까워서 편리했고, 총회 중간 중간에 자연스러운 여러 총대들의 대화가 가능하니 교제와 소통에도 좋았습니다. 간식과 선물에까지 넘치게 잘 섬겨주셨습니다. 낭비적인 요소는 없애면서도 편리하고 쾌적한 환경제공이 가능한 제3의 장소에서 미래의 총회들이 개최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이 배우는 총회였습니다. 전국노회의 대표자들이 함께 모여서 총회적 관심사들을 논의하기에 걸맞은 모임이었습니다. 행정적인 절차들과 신학적인 주제들, 특히 이단과 관련된 사항들, 미래지향적인 주제들, 여러 총회관련기관들의 당면과제들을 폭넓게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여러 사안들이 다른 관점에서 논의되는 것을 잘 듣고자 애를 썼습니다. 물론 같은 논지를 중복하는 분들과 불필요하게 자주 발언대에 나서는 분들로 인하여 논의의 흐름이 다소 엉클어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찬반의 입장들이 사안들마다 잘 드러났습니다. 총대는 누가 강권하지 않아도 벙어리 3년의 시간을 요구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강요된 침묵이 아니라, 총회의 여러 사안들을 깊이 배우고 학습하는 좋은 배움의 시간임이 분명합니다. 많이 들었고, 많이 찬반 행사를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거수기 노릇만 한다고들 불평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전국노회를 대표하여 모인 분들이 찬반의 여부를 결정하고, 더 깊은 관심을 가진 부분에 대해서는 소신 발언을 하는 모든 과정이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과정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이번 총회에서도 교단적 쟁점들이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두날개 관련된 작년결정과 관련된 사항도 그렇고 이대위의 보고안들과 정책위원회의 제안들은 총회에 긴장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몇몇 인물들이 토론을 독점하는 면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참여한 다른 총대들의 책임도 있습니다. 우리 총회는 결과적으로 “은혜와 진리가 함께 입맞추는 총회”였습니다. 우리 총회에서는 토론이 살아있습니다. 쟁점사안들마다 불꽃 튀는 토론들이 일어납니다. 함께 한 총대목사님은 “마치 TV토크쇼를 보는 마음이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준비된 발언에는 깊이가 있습니다. 처음에 발언을 들으면 ‘그 말이 맞지’하다가또 다른 총대가 반대발언을 하면 ‘그런 면이 있었구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발언들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결국 ‘법대로 하자’ ‘은혜가 필요하다’의 싸움입니다. ‘더 바르게 해보자’라는 측과 ‘진짜 바르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측의 대립이기도 합니다. 저는 어느 편이 더 옳다기보다는 이런 논쟁과 토론, 때로는 갈등의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결정들이 결국 그 총회의 격과 그 교단의 수준을 드러낸다고 봅니다. 총회의 결과는 양편에서 모두 불만일 수 있습니다. 좀 더 바르게 하자는 측에서는 더 확실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을 가지지만, 다른 편에서는 좁은 개혁주의로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서는 여전히 변화와 포용력을 주문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목소리가 다 필요합니다. 이런 진동과 폭이 우리의 수준이고 우리의 한계이기에 그렇습니다. 국민일보 기사는 우리 총회를 두 가지 단어로 극찬했습니다. ‘의관정제’와 ‘품격’. 저도 백번공감이 가는 기사였습니다. 총회를 참여하면서 총회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가지게 됩니다. 전체 그림을 좀 더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총회를 위해 관심을 가지고 섬기는 분들이 참 많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 총회의 미래가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그 자리에 앉아서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신 모든 총대분들과 교회들과 총회임원들과 스텝들의 수고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1163 no image |총/회/참/관/기| “총회는 헌법을 해석하고 노회에서 헌의한 교리문제를 해명해야”_최덕수 목사
편집부
1551 2016-10-05
“총회는 헌법을 해석하고 노회에서 헌의한 교리문제를 해명해야” <최덕수 목사, 현산교회> 사람은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협의를 통해서 어떤 일을 결정한다. 교회 역시 두 세 사람 이상이 모여 구성된 일종의 회의체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결정할 때는 회의로 모이게 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신적 논의를 통하여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한 기관이 교회이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가장 성경적인 방식이 회의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회의를 바르게 해야 한다. 회의를 잘 하면 나뉘어졌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고 어려운 난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반대로 회의를 잘 하지 못하면 반목과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회의를 아니한 만 못하게 된다. “회의(會議)를 하면 회의(懷疑)가 생긴다”는 자조 섞인 말이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회의를 잘 할 수 있을까? 회의를 잘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려는 자세보다 주님의 뜻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안타까운 일은 회의를 앞두고 “이번에는 누구를 임원으로 밀자, 이 안건은 이렇게 처리하자”는 등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여론을 조장하거나 작전을 짜서 회의에 참여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장(場)인 회의를 자기 뜻을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만드는 매우 경망된 행위이다. 애당초 주의 뜻을 묻고자 하는 마음은 없이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는 사람들이 회집한 모임에는 주님의 뜻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회의 참여자는 자기 뜻을 고집하기보다 주님의 뜻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먼저 해야 한다. 그렇다고 회의 내내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회의석상에서 만큼은 침묵은 금이 아니다. 회의란 단지 동의하는 사람을 찾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주의 뜻을 찾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의에 참여한 자들은 주께서 자신을 통하여 말씀하실 수 있음을 기억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한다. 그리고 의견을 개진할 때는 처음부터 자신이 발언하고자 하는 바가 동의안인지, 찬성 혹은 반대 발언인지를 분명히 할 뿐 아니라 의사 결정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목적에 맞게 발언해야 한다. 간혹 동의와 재청에 이어 가부를 물어 최종 결론을 내는 기본적인 회의 형식에 맞지 않게 자기주장만을 되풀이함으로 참여자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들이 발생한다. 이런 때에는 회의를 진행하는 의장이 지혜롭게 통제해야 한다. 의사 진행에는 부드러움과 재치도 필요하지만 단호함과 적극적인 제지도 필요하다. 특히 의장은 표결에 참여하는 이들이 왜곡되거나 편향된 정보를 가지고 표결에 참여하지 않도록 어느 한 편의 주장만 계속되도록 방관해서는 안 되고, 소수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도 용기를 내어 발언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올바른 회의를 위해서는 회의의 성격을 파악하고 회의의 목적에 충실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단 총회 회의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헌법 제17장 6조 2항과 6항에 의하면 총회는 헌법을 해석하고 노회에서 헌의한 교리문제를 해명하는 일에 수종들어야 한다. 총회 때마다 제기되는 이단 문제도 이런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교회사 안에 나타난 이단과 정통’이란 책의 저자인 헤롤드 브라운(Harold O.J. Brown) 박사는 “신학은 이단에 대한 반응이고 이단은 진리에 대한 반응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총회는 이단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을 진부하거나 고리타분한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절대 진리를 강조하는 기독교의 독특성 때문에 기독교 안에는 이단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단논쟁이 길어지면 교회 화합이란 명분을 내세워 문제를 얼버무려 넘어가려 하고, 심지어 “회의는 가능한 한 빨리 끝내고 친목을 도모하자”며 타박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이것은 신학에 봉사하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총대의 직무 유기다. 그레샴 메이천(J. Gresham Machen)은 “교리에 대한 무관심주의는 신앙의 영웅을 만들지 못한다”고 하였다. 오늘날 칼뱅과 루터와 같은 뛰어난 신학자나 교부 폴리캅과 같은 믿음의 영웅이 나오지 않는 것은 교리에 대한 무관심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과 개혁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수많은 회의를 통해서 놀랄만한 신학적 업적을 만들어 내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첫 번째 총회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공회는 신학적 논의를 위해 회집되었으며, 회의에 참여한 총대들은 지교회에서 겪고 있는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한 혼란을 해결하는 일에 기여하였다. 예루살렘 공회에서 내려진 결정은 각 지교회로 전달되었고 예루살렘 공회가 내린 결정으로 인하여 교회의 수가 늘어나는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다(행 16:5). 이것은 교회 회의가 교회 성장의 걸림돌이나 방해물이 아니라 도약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따라서 회의 참여자는 각종 회의를 통하여 교회 선교와 성장에 유익을 주는 활발한 신학적 논의가 이루어지고 주의 뜻에 맞는 선한 결정들이 내려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회의를 통해서 회의(懷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과 위로를 얻고 진리가 판명하게 드러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주여! 저희들이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소서!(렘 23:18)
1162 no image |지상강좌| 예수하나님의 사랑(요 3:14-16)에 관한 바른 이해_이복우 목사
편집부
1856 2016-10-04
하나님의 사랑(요 3:14-16)에 관한 바른 이해 <이복우 목사, 합신 신약신학 교수> 하나님은 대속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값싸게 사랑하지 않으셨으며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시는 가장 비싼 값을 치르셨다. 신자가 받은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보다 못한 것이 아니며 신자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과 동일한 것으로 영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삶이며 신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이다. 요한복음 3:14-15과 함께 16절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준다. 16절을 14-15절과 함께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 둘이 “왜냐하면”이라는 이유의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둘 모두 “이처럼”이라는 말과(아쉽게도 대부분의 우리말 성경에는 이 말이 빠져 있다)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내용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신 방법과 이 사랑의 결과와 목적이 무엇이며, 또한 이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1. 사랑의 방법 : “이처럼” 본문은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에 대하여 알려 준다.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처럼’이 하나님의 사랑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이 아들을 주실 정도로 무한한 사랑을 하신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처럼’을 사랑의 분량으로 생각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많이, 이만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은 본문에서 방법을 나타내는 의미가 더 강하다. ‘이처럼’은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또는 ‘이러한 방법으로’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14절에 의해서 쉽게 확인된다. 아쉽게도 우리말 성경에는 14절의 상반절과 하반절 사이에 ‘이처럼’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지만, 원문에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이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로 되어 있다. 여기서도 ‘이처럼’은 정도나 양이 아닌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 이 사실은 ‘이처럼’을 빼고 그 자리에 정도나 양을 나타내는 말을 넣어 읽어보면 금방 드러난다. 먼저 정도를 의미하는 말을 넣어 읽으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그 정도로’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가 된다. 또한 양을 뜻하는 말을 넣어 읽으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그렇게 많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가 된다. 이 둘 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방법의 의미를 넣어 읽으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가 된다. 이것은 의미가 아주 잘 통한다. 따라서 한 절 다음인 16절의 “이처럼”도 정도나 분량이 아니라 방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접 구절에서(14, 16), 그것도 같은 내용을 말하는 인접구절에서 같은 단어로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해석에 따라 14절과 16절을 다시 읽으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인자가 들려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방법으로’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던 바로 그 방식으로 사랑하셨다(민 21:4-9).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길을 돌아가는 것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대항했다. 이에 하나님은 맹독성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물게 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했고, 하나님은 놋으로 불뱀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로 즉시 살게 하셨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죄에 대한 죽음의 형벌을 그들에게서 거두어 장대 끝에 달린 놋뱀에게 몽땅 다 쏟아 부으신 것이다. 이것은 대리 속죄의 원리를 잘 보여 주는 것으로서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이다. 그리고 인자가 바로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십자가에 들리셨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에 대하여 매우 강조한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부른다(요 1:29, 36).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셨다(요 12:32-33). 예수님 한 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예수께로 이끄는 죽음이다(참조. “…을 위하여”, 요 6:51; 10:11, 15; 11:49-52; 15:13; 18:14).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이다. 2. 사랑의 결과 : “그래서”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 방법으로 사랑하셨다고 말씀한 다음에 “그래서”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결과로 예수님을 주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주심으로써 자기의 사랑을 실행에 옮기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환상이나 공상적인 것이 아니요 말로만의 사랑도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을 나타낼 방법을 생각하셨고 또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하셨다. 그것은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 주시어 세상의 모든 죄를 그 한 몸에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들리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대속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값싸게 사랑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시는 가장 비싼 값을 치르셨다. 3. 사랑의 목적 :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하신 목적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믿는 자 멸망에 이르지 않게 하며,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러면 영생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어떻게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일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신 속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요 5:26). 하나님은 생명을 본유적으로 소유하고 계시는 영생의 진원지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생명을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주어 그분 속에 있게 하셨다.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 6:25).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소유하시며 그 자신이 참된 생명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다”(요 6:35, 4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11:25; 14:6). 나아가서 예수님은 이 생명을 믿는 자에게 주신다(요 4:10, 14; 6:27, 51).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요 10:28; 17:2). 결국 아버지의 생명이 예수님을 통해 역사 속에서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 아들이 아버지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처럼 신자도 아들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요 6:57). 그런데 예수님은 신자에게 생명을 주시되, 자신의 생명을 쪼개어 분배하는 방식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신자를 하나님께 연합시킴으로써 생명을 주신다. 신자가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은 생명의 물리적인 분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자가 생명의 원천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신자의 완전한 연합과 이를 통한 하나 됨이 이것을 잘 증거한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참조. 요 17:21, 23). 신자가 생명을 얻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하나 됨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에 소속되고 연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 그 자체를 공유하는 것이다(참조, 요 15:5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 신자의 생명 공유성 때문에 신자는 영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의 본질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영생이신 하나님과 아들에게 연합된 ‘관계’를 의미한다. 영생은 시간적인 것을 넘어 관계적인 것이다. 이처럼 믿는 자는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연합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공유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신 생명은 하나님과 예수께서 소유하시는 바로 그 생명이다. 신자가 받은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보다 못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생명과 질 다른 것도 아니다. 신자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과 동일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영생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의 삶이며, 신자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삶이다(요 15:5; 갈 2:20; 엡 1:13-14). 이러한 하나님과 신자의 생명의 동일성은 신자가 소유한 생명의 영원 불변성을 보증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영원히 존재하시듯이 하나님과 연합된 신자도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소유하였기에 하나님처럼 영원히 산다. 하나님의 생명이 영원한 생명이기에 신자의 생명도 영원한 생명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은 것은 절대로 무효가 되거나 번복될 수 없으며 무름도 없다. 4. 사랑의 대상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에 대하여 말씀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본문이 말씀하는 세상은 넓게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 핵심은 인간이다. 왜냐하면 15절과 16절에서 “믿는 자”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세상 사랑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동반된다. 1) 비참하고 무가치한 자를 사랑하심 하나님은 무가치한 인간을 사랑하셨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말하는 인간의 상태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금방 확인이 된다. 사람들은 어두움에 빠져 있어서(요 1:5; 참조. 요 9:39) 그리스도를 깨닫지도 못하며(요 1:5) 알지도 못하고(요 1:10) 영접하지도 않았다(요 1:11). 니고데모는 세상적인 지식과 지위에 있어서 최고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지만 거듭남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땅의 것에 집착하는 반면 하늘의 것을 알지 못했다. 이는 인간의 연약함과 타락을 잘 보여 준다(요 4:1-42).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비참한 인생들을 사랑하신 것이다. 2) 자발적인 사랑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동기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은 단지 죄인이며 연약하고 비참할 뿐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렇게 비참한 인간을 위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에게 사랑받을 만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유발시킬만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히 자발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유일한 동기와 근거는 오직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 우리 안에 구원의 근거가 전혀 없듯이, 우리 안에는 사랑받을 어떤 근거도 없다. 그래서 구원이 우리 밖에서 오듯이 사랑도 오로지 우리 밖에서 오는 것이다. 3) 가치창조의 사랑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아무런 자격도 없고 가치도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참된 가치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무가치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게 된다. 무가치한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되고 하나님과 한 생명을 공유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자는 참으로 존귀한 자일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의 사랑은 가치 창조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가치를 인식하는 사랑이 아니라 인간 가치를 창조하는 사랑이다. 무가치한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참된 가치를 가진 존귀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1161 no image |성경지리답사 참가 소감문| 아직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갈릴리 호수
편집부
1470 2016-09-06
 아직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갈릴리 호수 <이윤범 전도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3학년 > “성경 구절들, 역사와 지리와 시간 속에서 구체적인 옷을 입고 다가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또한 성경을 읽는 성도라면 누구나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고 체험하고 싶기 마련이다. 물론 이스라엘 역사가 펼쳐진 땅이 그 이외의 지역보다 더 성스럽다거나 고귀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존재로 만드셨기에, 가장 귀중한 책이 다루고 있는 장소를 눈과 귀와 손으로 경험했을 때의 유익은 크다. 또한 성경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현장을 둘러봄으로써,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에 대해 좀 더 생생하고 입체적인 이해가 증진(增進)된다는 면도 간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음에도 또한 여호수아에게 기념비를 세우게 하시고, 그것을 대대로 신앙이 전수되는 수단이자 접촉점이 되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땅 역시 성경 이해와 경건을 위한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성경시대 배경 지역 탐방 의미 있어 지난 6월 중순, 필자는 합신 성경지리역사연구소(소장 김진수 교수)가 주관하는 성경지리답사에 참여했다. 사실 경제적인 부담은 무시할 수 없었지만, 여러 목사님들과 교수님들, 선배들을 통해 이스라엘 답사가 주는 유익을 들어온 터라 참가를 결심하였다. 인천국제공항을 떠나 이스라엘의 관문인 벤구리온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이스라엘을 시계방향으로 이동하면서, 북부지방에서부터 중부, 남부를 거쳐 예루살렘과 그 주변을 답사하였다. 아침 일찍부터 오후 5-6시까지, 작열하는 태양 아래 답사팀 40명은 건기(乾期)를 보내고 있는 이스라엘 곳곳을 부지런히 누볐다. 처음으로 본 지중해는 아름다웠다. 가이사랴와 욥바에서 마주한 바다는 맑고 깨끗했다. 이스라엘 곳곳에서 헤롯 대왕이 벌인 토목공사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인공적으로 양항(良港)을 만들고자 했던 그의 야심은 가이사랴에 오롯이 투영되어 있었다. 사도 바울이 로마와 유럽 선교를 꿈꾸며 승선한 자리에 서서 바라보는 지중해는, 고난 속에서도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증언하는 듯했다. 바울의 꿈 담고 있는 푸른 지중해 북부 도시 하솔과 북쪽 경계인 단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교통의 요지이자 풍요롭고 광대한 배후지(背後地)를 지닌 하솔의 성벽과 신전들은 왜 이곳이 ‘가나안의 머리’라 불렸는지 실감케 했다. 또한 풍성한 물과 우거진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높은 성곽과 금송아지 우상의 신전의 흔적을 지닌 단에서는 이 도시가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지니는 경제적, 종교적 위상을 알 수 있었으며, 하나님 없는 번영이 어떤 결말을 맞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정착한계인 강수량 200-250mm선에 위치한 브엘세바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지역을 족장들과 이스라엘 민족의 연단장소로 사용하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극히 미묘한 기후변동에도 극한의 기근과 100배의 풍작이 갈릴 수 있는 곳, 그러기에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것의 인간의 재지(才智)에 달린 것이 아니며, 바알과 맘몬의 영험(靈驗)함에 있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브엘세바였다. 이외에도 답사팀이 방문한 곳은 많다. 예수님께서 많이 활동하신 갈릴리 일대,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세겜과 실로, 명칭과는 달리 매우 아름다웠던 사해(死海)와 천혜의 요새 마사다, 해안평야와 중앙산지 사이에 위치하여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충돌지역이자 완충지대였던 구릉지 ‘쉐펠라’ 등을 방문하며 8박 9일의 일정동안 답사팀은 쉴 새 없이 이동하였다. 때로 지치기도 했지만 뮤지컬 배우가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서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되는 것처럼, 수천 년 전 성경의 무대에 있다는 사실이 답사팀 모두의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답사를 떠나기 전까지 모르고 있었거나 오해하고 있던 성경의 각 구절에 대한 상세한 강의와 설명을 통해 말씀을 알아가는 일과 이를 전하는 일에 한층 도전과 격려를 받게 되었다. 마지막 방문지였던 예루살렘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기독교의 각 종파에서 경쟁적으로 세우고 관리하는 각종 ‘성지순례’용 건물들은 그들의 종교적 열성을 보여주긴 했지만 ‘옛 모습 그대로 보전되어 있었더라면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었을 텐데’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지금 있는 그 모습 그대로를 통해서도 다윗과 솔로몬, 히스기야와 예수님 시대의 역사를 반추(反芻)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지금도 물이 흐르고 있는 히스기야 수로를 답사팀이 암흑 속에서 한 시간에 걸쳐 완주한 것은 잊을 수 없다. 답사에서 돌아온 다음 주 월요일, 마태복음 통독파일을 들으면서 도서관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예수님의 족보로부터 산상수훈에 이르는 말씀이 이전과는 다르게 들렸다. 눈을 감자 팔복 산에서 갈릴리 호수를 내려다보던 정경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아, 이곳이로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 바람에 목소리를 실어 저 밑에서 듣고자 하는 수많은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셨구나.’ 어느새 눈가가 촉촉했다. 머릿속에서 맴돌던 구절이, 역사와 지리와 시간 속에서 구체적인 옷을 입고 다가옴을 느꼈다. 성경지리역사연구소를 설립하시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조병수 총장님, 소장으로서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김진수 교수님, 부소장이시며 인솔자로 수고하신 이복우 교수님, 단순한 가이드가 아니라 생생하고 상세한 설명으로 성경과 인문지리적 지식의 융합을 보여주신 고양주 목사님, 함께 참여하셔서 경건의 귀감이 되시고 실질적인 도움을 베풀어 주신 강신욱 목사님, 그리고 답사팀을 위해 특별히 동행해 주신 『다비드투어』 이윤 대표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도 오고가는 모든 일정 속에 은혜와 평강을 허락해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리며, 짧은 답사 소감을 마치고자 한다.
1160 no image |심/층/진/단| ‘피’로 얻은 교회 치리권을 헐값에 넘겨버리는 세태_장대선 목사
편집부
1589 2016-08-23
‘피’로 얻은 교회 치리권을 헐값에 넘겨버리는 세태 <장대선 목사, 가마산교회> 언제부터인가 교회들에서 한 번 분란이 일어나면 좀처럼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서 결국에는 세속법정에 가서야 비로소 판결을 통해 분란을 수습하거나 봉합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목회자가 앞장서서 교회의 분란이나 분쟁의 해결을 세속법정에 의뢰하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시대 개신교의 암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교회의 치리권이 어떻게 교회 자체의 권한으로 확립된 것인지 그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치리권이 교회 자체적인 권한으로 확립하게 된 배경에는 종교개혁의 시대의 무수한 피(죽음의 희생)의 역사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1. 교회의 치리권 확립 배경 기독교 초기의 역사에서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337) 황제가 주후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멈추고 관용을 선포하여 정식 종교로 공인된 일은 역사상 놀라운 일들 중 하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동안 압류했었던 기독교회의 재산을 환수조치를 했을 뿐 아니라, 그동안 박해와 압류에 대해 국가적인 보상을 집행하기도 했다. 또한 325년에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한 인물이 바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의 초기에 황제가 보장했었던 기독교에 대한 여러 보상과 보장들은 후대로 갈수록 점차 변질되고 로마제국 또한 쇠퇴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교황제의 기초를 닦은 레오 감독(Leo Magnus, 재위: 440-461)이 죽은 뒤, 그레고리 1세(Saint Gregory the Great 1, 540-604)에 의해 교황제도가 확립되면서 교회의 권세가 성장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세속의 권세보다도 우월한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세속의 권세에 의해 교회가 용인되고 보호되다가, 나중에는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권세가 어느덧 세속의 권세를 아우르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몰락 이후로 민족국가가 점차 형성되는 과정에서, 특히 프랑스를 비롯하여 독일 등 서유럽을 중심으로 왕권이 점차 강화되면서 로마 교황청의 영향력과 세속군주의 권력 사이에 잦은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교회의 치리권마저 점차 세속군주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에는 가장 적극적으로 로마가톨릭을 표방하면서도, 동시에 왕권이 강화되어서 교황청을 로마가 아닌 프랑스로 옮겨 아비뇽 교황청(Avignon papacy)을 세울 정도로 막강해 졌다. 이후로 서유럽에서 교회의 주교를 서임하는 권한을 행사하는 국가나 지역들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가운데 종교개혁자들은 세속 군주의 교회에 대한 권한 행사를 개혁하고 교회의 치리권을 교회 자체의 것으로 돌리는 과정에서 무수한 희생(피)을 치러야만 했다. 이처럼 개신교회의 치리권은 원래부터 부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수한 희생의 피 가운데서 교회에 부여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 교회의 고유한 권세인 ‘치리권’ 교회 치리권의 독립은 성경, 그 가운데서도 복음서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서 확고하게 보장되었던 내용이다. 마태복음 22장 21절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세금징수에 대한 문제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권세의 지배력과 교회의 치리권이 각각 고유의 영역 가운데 양립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인 것이다. 이는 로마서 13장 7절에서 사도 바울도 인용하는 내용으로, 사도 바울은 권세들에게 복종하도록 가르치며 이르기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하여 ‘하나님의 사역자’(롬 13:4)인 세상 권세들을 인정하고 있다. 즉 교회의 치리권만이 아니라 세속권세의 정당한 집행 또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6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 간의 다툼 문제를 세속법정으로 끌고 가는 일을 개탄하여 이르기를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고 책망한 바 있다. 곧 세상의 불의에 대하여서 오히려 성도들이 판단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상보다 못하게 된 교회의 치리하는 자에 대하여 심각하게 책망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가 다시 확보한 치리권은 세속정부가 행사하는 것과 다른 교회만의 특별한 성격이며, 그러한 교회의 치리권은 교회가 세속정부의 통치를 인정하는 것과 더불어 세속정부도 교회에 대해 보장해야 마땅한 독특한 권한인 것이다. 3. 힘써야 할 교회의 치리권 회복 성경적으로나 기독교 역사로나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교회의 치리가 형편없이 부패하여, 마치 고린도전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이 책망했었던 그 교회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게 된 것이 우리 시대의 개신교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교회의 치리와 관련한 일들, 이를테면 교회에서의 분란이나 질서의 문제를 포함한 영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여전히 교회 안에서 감당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 세상의 법정으로 끌고 나갈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6장 1-8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교회의 치리권에 대한 권면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들의 시대에는 이를 가리키고 지도하며 치리해야 할 자들인 교회의 직분자들이 앞장서서 세상법정의 판단을 요구하고 있다. 간음이나 횡령과 같은 세속법에 저촉되는 문제들뿐 아니라, 교회의 부동산에 대한 재산권분쟁이나 교회법의 해석 혹은 적용과 관련한 치리의 내용들마저도 지교회의 당회나 노회 등의 재판절차를 불신하는 일들이 횡횡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신뢰성을 잃어버린 교회들의 치리권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교회의 치리권이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입장차가 아니라 성경의 유일한 규범으로 시행되도록 해야 하는 직분자들의 개혁이 절실히 요구된다할 것이다. 마치는 말 우리는 불의한 형편 가운데서도 교회의 치리권이 어떤 피의 역사 가운데서 교회로 돌려진 것인지, 그리고 고린도전서 6장 7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은 것이 낫지 아니하냐”는 말씀이 나타내는 바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불의하고 강퍅한 이 시대에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있는 것이 마땅한 신자의 자리임을 명백히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신중함과 성경 중심의 판단기준을 잃어버리고 세속법정에 기대는 것은 결국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2절)인 성경을 벗어난 또 다른 오류와 배도의 길을 가고 있음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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