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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9 no image |개/혁/주/의/신/앙/강/좌| 칼빈의 경제관에 관한 소고_최재호 집사
편집부
1890 2016-01-12
칼빈의 경제관에 관한 소고 < 최재호 집사, 실로암교회 > 모든 것이 선하신 아버지이신 주께로부터 왔음을 인식하고 고백하는 신자라면, 마땅히 자신의 손에 받아 쥔 물질을 사용할 때 그것을 창조하시고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신 이의 목적을 생각하며,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사용해야 한다. 모든 것이 선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를 위해 사용된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삶은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맡겨진 물질을 교회와 지체들 그리고 필요한 이웃을 위해 사용하려 애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듭난 신자에게 있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는 삶의 원리는, 이 땅을 살아가며 접하게 되는 모든 상황들, 특히 직업을 통한 노동과 더 넓게 경제행위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나를 사랑하고 나의 욕심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진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사랑과 욕망을 포기할 것을 명하신다. 그러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님을 가르치신다. 성경말씀은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곧 내가 임의대로 처분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고전 4:7). 그러므로 신자는 그것을 가지고 결코 교만하거나 자랑할 수 없다. 이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칼빈은 명확히 인식했다(강요, 3.7.4). 1.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 칼빈은 부를 하나님의 은사에 의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만일 누군가가 부자가 된다면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열매이다. 하나님께서 복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실상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칼빈, 신명기 8:17). 모든 것이 선하신 아버지이신 주께로부터 왔음을 인식하고 고백하는 신자라면, 마땅히 자신의 손에 받아 쥔 물질을 사용할 때 그것을 창조하시고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신 이의 목적을 생각하며,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음식이라면,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신 주께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함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을 주셨음을 감사하며 음식을 대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시기 위한 목적도 있음을 기억하며 음식을 섭취하여야 한다. 만약 그것이 의복이라면, 몸을 보호하거나 인간다운 품위를 갖추도록 하는 필수적인 목적은 물론 아름다움과 정숙함을 충족시키도록 선하신 아버지께서 공급해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재화(財貨)는 그것이 가지는 필수적인 용도를 충족시키는 물론, 그것을 즐기도록 주셨으니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감사하고 찬양해야함을 가르친다(강요, 3.10.2). 그러므로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로 필수적 용도만을 인정하고 나머지 용도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는 빵과 물만으로 가능하지만 더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포도주까지 주셔서 기쁨과 즐거움, 활력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 과거 중세 수도원이나 사막수도자들 중에는 평생을 빵과 물로만 연명하며 세상을 떠나 동굴과 사막, 심지어 높은 장대 위에서 자신을 괴롭게 하며 살아간 이들도 있었다. 반대로 구원받은 신자는 세상의 여러 가지 육적, 물질적 상황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방탕한 입장도 있었다. 칼빈은 그러한 양 극단적 태도를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신자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불신자의 물질적 풍요나 부는 그를 더 세상의 즐거움으로 빠져들게 하는 화(禍)가 되고 말 것이다. 또 물질적 풍부나 결핍 자체가 신자의 신앙의 좋고 나쁨과 결부할 수 없는데,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주시기도, 거두시기도 하시기 때문이다(욥 1:21). 2. 부(富)-교회와 이웃을 위해 위탁(委託)됨 나아가 성경은 신자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와 이웃을 위해 신자들에게 ‘위탁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자주 청지기를 등장시킨다. 포도원지기의 청지기(마20:8), 지혜있고 신실한 청지기(눅12:42) 달란트비유(마25:15이하), 불의한 청지기(눅16장) 등 이는 우리에게 맡기신 주인, 위탁하신 이를 기억하게 한다. 그러므로 주인이신 하나님의 청지기가 된 신자들은 내게 맡겨두신 주인의 뜻이 무엇인가를 늘 기억하여야 한다. 교회 안에 각양 은사를 나누어 주신 것은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온전케 하며(엡 4:11-12), 또 교회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균등케 하는 원리’가 적용된다(고후 8:14-15). 물론 교회 밖의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장수민, 존 칼빈, 498).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각인에게 주신(위탁하신) 모든 것, 이를테면 직분을 비롯하여 물질, 재능, 지식, 건강, 기회, 권력 등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교회와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하시는 만유(萬有)의 주인께서 위임하신 것이다. 따라서 주인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점유(占有) 혹은 보관하고 있다고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다. 덧붙여 칼빈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사(재능, 물질, 명예, 지식 등)를 볼 때, 시기하거나 멸시해서는 안되며, 극히 존중하고 귀히 여기라고 가르친다. 그 모든 것은 선하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을 분명히 하였던 그에게 있어서 물질은 ‘소유(所有)’나 ‘획득(獲得)’의 개념이 아니라 ‘분배(分配)’의 개념이었다. 칼빈은 우리가 재물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면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주변에 두셨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상속에 의한 것이든, 근면과 노력에 의해 획득한 것이든, 여하간 부를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풍요로움을 지나친 무절제로 낭비해서는 안 되며, 형제들의 가난을 줄이는데 사용하라고(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칼빈, 고린도후서 8:15). 사실 물질의 부요함이나 궁핍함이 본질상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막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부유한 자들이 자기들의 부에 짓눌려 세상의 안락을 즐기며 사느라 자신들의 본분을 버리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거기에서 부자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그릇된 육신의 정욕을 억제하고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위탁받은 물질을 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칼빈은 신자에게 하늘의 영생(영원한 구원의 복락과 악인의 심판)을 묵상하는 일을 권한다. 그러면서 그는 물질을 쓰는 자는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며, 빈곤을 조용히 참고 견디며 부유함을 억제하라는 권면을 주고 있다(강요, 3.10.4). 정리하자면, 부(富)는 우리의 형제들을 돕는데 사용하라는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장수민, 존 칼빈, 2. 18.). 그래서 칼빈은 부자들의 자선행위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의 사회적 경제적 생활을 위한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부자들의 마땅한 의무이므로 정성을 다하라고 했다. 좀 더 나아가 그는 부자가 빈자를 돌아보고 돕는 것은 바로 ‘자신의 신자됨을 확인하는 은혜’라고도 생각했다. 부자의 선한 행위 그 자체나 공로가 아니라, 물질을 대하는 그의 자세를 통해 선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 섬기며 순종하는 신자인 증거가 그렇게 나타나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성경에서 배워야 할 분명한 원칙이다. 나의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이 선하신 우리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주어진 것이기에 반드시 주신 분의 목적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성경은 위탁물이 제대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결산의 때가 있다는 것도 명백히 가르친다. 이를테면 ‘주인의 무서운 경고가 뒤따르는 위탁’인 셈이다. 3. 부(富), 어떻게 얻고 관리(사용)할까 성경은 먼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기회를 따라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며 부를 얻고, 그것을 잘 관리하고 사용하라는 권면을 준다. 두 곳의 성경본문을 살펴보자. 데살로니가전서 4:11-12에는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에베소서 4:28에는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정당한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과 그것이 불신자들에게도 교훈이 될 수 있도록 하라는 이해를 준다. 또 직업 활동을 건전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행하여 빈궁한 자, 혹은 필요한 자를 도울 수 있도록 경제활동에 힘쓰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칼빈 역시 이 본문의 가르침을 ‘한가롭고 침착하게 자신의 일을 하라’와 ‘자신의 소명의 여러 임무에 몰두하고 헌신하라’는 말로 이해한다. 그리고 두 가지 조언하기를 먼저는 각자가 생계를 유지할 능력을 갖추라는 것이고 둘째는 불신자들 앞에서도 존경받는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칼빈, 데살로니가전서 4:11-12). 또 그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는 부정한 방법을 버리고 합법적으로 남을 해치지 않는 수고를 하여 자기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고 남에게 그것을 적절하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하라’고 해석한다. 즉 정직한 노력을 통한 경제생활을 할 것과 다른 사람의 필요를 공급해줄 수 있도록 힘써 부를 모을 것을 권하는 것이다(칼빈, 에베소서 4:28). 이어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제8계명을 해설하면서 남의 돈이나 재산을 폭력과 속임수로 도적질해서는 안되는 것은 물론, 우리가 서로를 위해 지불해야 할 봉사의 의무를 거절하는 것도 이웃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며 그 범위를 확장해 정의하고 있다(강요, 2.8.45). 또 칼빈은 신자가 부를 획득하는 방식은 정당한 방법으로, 성실한 노동행위를 통해야만 하며 지나치게 높은 이자놀이나 투기와 같이 불로소득(不勞所得)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견해를 밝힌다(임종구, 칼빈의 제네바목사회, 480). 정리하자면, 칼빈은 열심히 수고하되 정당한 방법으로 사회의 유익을 위한 직업을 가질 것과 그러한 경제활동을 통해 부를 쌓을 것, 자신도 부를 누리되 이웃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애쓸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와 지체, 그리고 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위한 신자들의 의무를 생각해보면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칼빈 선생이 신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가정을 돌보아야 한다는 의무가 우선적으로 부여된다고 생각하여,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수고하고 노동하는 것이 경건생활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노동으로 아내와 자녀들을 부양하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당연한 의무이므로 농부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데도 밭(자신의 생산기반으로서)을 팔아버린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통해 우리가 먼저 가족을 부양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무엇인가를 나눠줄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다(부스마, 칼빈, 458). 4. 신자의 직업으로서 소명 이해 신자는 어떤 직업, 어떤 노동을 하며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무를 다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직업을 가지게 되고 그 일을 통해 교회와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게 된다. 이때 붙잡아야 할 한 가지 원리는, 우리가 가진 직업과 그에 따른 노동의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사탄의 일이 아닌 한 마음에 복음의 지배를 받으면 그의 모든 활동은 경건한 것이란 점이다. 여기에서 이른바 ‘직업소명설’이 나타난다. 모든 사람은 그 일을 통해, 혹은 그 일의 자리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칼빈은 자신이 신앙을 포괄하는 교리(敎理)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거기서 구원이 시작되고 마음속에 들어가 일상생활에 전해지며, 그로 인해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반드시 열매를 맺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강요, 3.6.4). 즉 그에게 있어 교리는 삶의 열매로 연결되는 개념이다. 직업과 노동은 바로 신자가 자신의 교리를 삶의 열매로 자리잡게 하는 현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직업은 하나님과 교회, 이웃을 유익하게 하는 큰 틀에서 자신의 신앙의 도리를 삶의 열매로 체화하는데 적합하다면 어떤 것이라도 경건의 자리인 셈이다. 칼빈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이러한 생각들을 사회적 관점으로까지 확대했다. 그의 고린도후서 8장 15절 주석에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그것의 근원이 무엇이든 ‘만나’(manna)와 같다. 우리의 장래를 위해 지나치게 쌓아두며, 우리의 가련한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것으로 부를 축적해서는 안 된다.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완전히 똑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굶주리는 사람이 없고 남을 희생시키면서 부를 축적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평등은 지켜져야 한다”며 사회 구조문제를 논한다. 이 말은 우리 시대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 더하여 그는 하늘로부터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은 부자는 절제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실족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인 셈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상대적 가난 혹은 빈곤이다. 부가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빈곤도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 혹은 심판과 동일하지 않다. 칼빈도 가난(빈곤)을 반드시 불행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가난이 우리를 경건하게 한다면 더없이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가난에 처한 자는 과도한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고통 받지 말고, 인내하며 견딜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극심한 가난 중에도 검소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일에 몰두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전했다. 부요한 가운데 하늘의 소망을 깊이 묵상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잘 사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동시에 가난 가운데 인내하며 일용할 양식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며 자신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가난과 질병, 가족들과의 영원한 이별 등은 결코 반길 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신뢰한다면, 이 모든 것들이 바로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의 유익을 위해 특별한 의도 중에 주신 것이란 것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생각은 <기독교강요>를 통해서도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신자는 부귀(富貴)에 있어서 자신의 생각과 바람이 현실과 다르다 해도 결코 조급하거나 비관해서는 안 된다. 빈부와 귀천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분배하시는 것이며 신자의 구원에 가장 유익한 방식으로 이뤄가시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강요, 3.7.9). 그러나 이같은 원리를 우리가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그러한 삶을 당연히 살아간다거나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는 가운데 옛 본성과 끊임없이 싸워가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켜나가는 처절한 싸움에 의해 조금씩 쟁취(爭取)될 뿐이다. 이 싸움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고, 막연히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마무리 되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해 끝없이 욕심내는 우리의 안타까운 상황도 한순간에 종료될 수 없다. 오직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정(情)과 욕심을 지속적으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천상에 연결된 영원한 복락에 대한 갈급한 소망이, 이 땅의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존재들에 대한 욕망과 비교할 수 없음을 더 깊이 인식해감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힘겹게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또 살아가야 할 인간들에게 칼빈 선생의 권면을 한번 더 새겨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칼빈은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관계없는 번영(繁榮)을 동경하거나 바라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참된 안정과 안식이 있음을 기억하라고 가르친다. 둘째로, 이 땅에서 악인들도 명예와 부귀를 누리지만 결국 그것들은 불행을 초래하기에 그들을 보며 부러워하거나 실족하지 말 것을 명한다. 그들에게는 참 행복이 없으며,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고 인도하심을 따르며 주께서 베푸시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야지, 부귀영화를 동경하거나 자신의 재주나 부지런함을 의지하거나 헛된 행운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한다. 끝으로 바라는 만큼 일이 되지 않아도 조급하거나 비관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께 불평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강요, 3.7.8). 맺는말 물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칼빈의 이해를 중심으로 신자의 경제관념에 대해 살펴보았다. 거듭난 신자도 사실상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기에, 세상의 반(反) 그리스도적 문화와 가치에 영향을 받으면서 이 땅의 악한 존재들로부터 끊임없는 유혹과 그에 따른 고통을 당한다. 그런 중에 삼위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회복된 위치와 존재를 자각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결단이나 노력이 아닌,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함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해석하며 살아갈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도 세상의 경제논리와 구조를 벗어나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당연히 경제행위를 통해 세상의 재화나 용역을 생산, 소비, 분배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다만 신자는 세상의 가치나 시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반하여 말씀이 제시하는 가르침에 따라 해석하며 거기에 겸손히 순종할 뿐이다. 신자들은 이 땅을 살아가며 선하신 아버지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된다. 하늘 아버지는 신자된 우리에게 영의 양식과 함께, 이 땅을 살아갈 모든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신다. 모든 사람이 하늘로부터 오는 은택(恩澤)을 입고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이는 오직 선택된 자들로 제한된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이 선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를 위해 사용된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면서 그러한 고백과 조화되는 삶을 산다. 이는 창조주이시자 섭리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맡겨진 물질을 교회와 지체들, 그리고 필요한 이웃을 위해 사용하려 애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영원한 천상을 소망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가 잠시 머물다 갈 이 땅이 아닌, 영원한 천상을 소망하고 묵상하며 우리의 욕심과 자아를 죽이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러한 신자들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이나 노동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명확하다. 하나님의 법과 상충되지 않으면서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사람들을 해치는 일이 아닌 한, 아니 사회를 유익하게 하는 일이라면 그 자리가 자신의 신앙교리를 열매로 체화(體化)시키는 부르심의 자리인 것이다. 이러한 직업을 통한 노동행위를 통해 교회를 세워가고 지체들을 돌보며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다. 물론, 신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가정과 가족들을 돌보는 것은 가장 우선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 신자의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며 모든 일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결산이 뒤따른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1138 |현장리포트| 일본 3.11 피해 지역 자원봉사를 마치고_최혜경 선교사 파일
편집부
1834 2015-12-29
일본 3.11 피해 지역 자원봉사를 마치고 < 최혜경 선교사, 북서울노회 > 일본은 2011년 3월 11일 동북지역 대지진이 있은 이후 4번째의 겨울을 맞이하였습니다. 지진 직후에는 세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일본 각지에서도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었지만 4년이 지난 지금엔 어떤 모습일지, 과연 우리가 할 일이 있을지, 또한 관심이 쏠리고 그 관심이 유행처럼 지나가고 난 자리에 남아 살고 있는 분들의 현실은 어떠한지 늘 마음 한 구석에 부담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지진이 있은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피해지역 복구를 위한 자원봉사에 참여하여 왔습니다. 현지에 가서 청소도 하고 집수리를 위한 내부정리도 돕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곳 분들의 삶의 터전이 안정되어짐과 더불어 사역의 방향도 바뀌었습니다. 가설주택단지를 돌면서 모임을 만들어 차를 나누고 부침개를 부치고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드리고 동경에서는 매주 목요일 한국어 교실의 일본 분들과 수업시작 전 동북지역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아주 작은 것이었고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누군가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억하고 함께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분들에게 힘이 된다는 생각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지난 4월, 박병식 목사님, 장덕만 목사님, 선교부 총무님 등을 모시고 개최된 PMS 일본지부 선교사 수련회를 계기로 가족 단위로 교제를 하게 된 민수식 선교사님 부부와 저희 부부는 몇 번의 교제를 가지는 가운데 아직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동북지역 자원봉사를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물가가 비싼 일본에서 지방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재정적 부담과 사역을 잠시 멈추고 다녀와야 하고 부부가 움직이기에 아이들만 집에 남아있다는 심적인 부담감이 있었지만, 성실하신 하나님이 순조롭게 재정을 채워 주시고, 아이들도 동역하는 마음으로 흔쾌히 승낙을 해 주어 저희 부부와 민수식 선교사님 부부, 4명이 팀을 꾸려 이와테현 카마이시로 2박 3일 자원봉사를 다녀왔습니다. 첫날 동경을 떠나 10시간이 넘는 운전 끝에 도착한 곳은 미즈사와교회였습니다. 이곳에서 3.11 이와테 네트워크라는 단체의 목사님들과 만났습니다. 3.11 이와테 네트워크는 대지진이 있은 직후 이와테현의 목사님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지원 단체로 자신들도 피해를 입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4년이 지난 지금도 현지 목사님들과 교회에 의한 지원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는 단체입니다. 둘째 날에는 다시 산길을 2시간정도 달려 원래 목적지였던 카마이시의 잇뽀잇뽀하우스에 짐을 풀고 가설주택 단지 모임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저희가 방문한 곳에는 3명의 할머님들이 모이셨는데 함께 노래도 하고 공작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중간 중간 하시는 말씀이 원래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었는데 지금은 모두 복구주택(나라에서 마련한 주택지)으로 이사를 해서 가설 주택에 남은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본인들도 이사 날짜는 결정이 되어있지만 2년 뒤라는 것과 아직 공사도 시작하지 않아서 언제 이사가 가능할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오게 된 곳이 가설주택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둘 떠나가는 이별을 맛보게 되었고, 당신은 언제 이사를 가야할지 모르는 불안과 새로운 곳에 다시 적응해야한다는 긴장을 늘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힘겨워 보였습니다. 저희들은 마음을 다해 부침개를 부쳐 드렸습니다. 처음 먹어보신다며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한국의 부침개냐며 웃어주시던 할머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엄마라고 부르게 되었고, 자신의 막내딸보다 어리다시며 이제 자신의 막내딸이라 해주셨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한국어와 일본어로 불러 드렸습니다.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른다던 고운 엄마들, 가시는 길에 엄마가 기다릴테니 꼭 다시 오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오전 방문을 마치고 잠시 휴식 후에 다른 가설 주택단지를 방문했습니다. 이곳은 8명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오전과 마찬가지로 차도 마시고 노래도 하고 공작도 하고 부침개도 부쳐 드렸습니다. 이 단지 역시 전체가 이사를 가야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곳에 도로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4개의 단지로 이루어진 곳인데 한 지역은 이미 많은 분들이 이전을 하여 4명만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 단지에 들어오기 까지도 3, 4번씩 이사를 하셨던 분들이라고 들었는데 다시 이사를 해야 한다니 마음 쉴 틈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역시 돌아가시는 길에 다시 오라고 하십니다. 가능하면 다시 오겠다고 하니 한 할머님이 모두 그렇게 말했지만 정말로 다시 오는 사람들은 없었다고 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동안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관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녁에는 잇뽀잇뽀하우스에서 사역하시는 스텝들을 위한 비빔밥과 부침개 파티를 열었습니다. 여자 목사님과 홍콩에서 봉사 온 형제, 가설주택 모임을 주도하는 홍콩선교사님 부부, 미즈사와에서부터 동행해 주신 일본 목사님, 우리 네 사람, 단촐한 식구였지만 그곳에서 사역하시는 스텝들에겐 따스하고 편안한 저녁이 되길 소망했습니다. 식사 후 나눈 교제에서 이제는 봉사자들도 거의 찾아오질 않아 현지에 있는 장기 사역자들이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도 현재 홍콩에서 온 선교사님과 형제가 있어 현지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을 위한 사역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현재는 심리적인 케어도 필요한 상태라고 합니다. 신나게 뛰어 놀던 아이가 갑자기 다가와서 “쓰나미가 왔을 때......”라고 말을 시작하여 스텝이 놀라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어 주는 상대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같은 일을 겪었기에 서로에게 아픔이 되고 어려운 기억을 되살리게 되는 것이기에 자신들끼리는 이야기를 못한다고 합니다. 저에게도 한 할머님이 104살 된 시어머니가 쓰나미가 오기 한 달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것이 큰 복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살아계셨으면 자신도 시어머님도 살아나지 못했을 꺼라 하시며 우십니다. 살아남아서 이곳까지 왔는데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모르시겠다며 “차라리 그때...”라며 말끝을 흐리십니다. 엄마가 그때 살아나셨기에 오늘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냐고 위로를 해 드렸지만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4년이 지난 지금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고, 현실은 점점 더 외로워져 가고 아직도 안정이 안 되고 있으니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동경에서 봉사를 준비 할 때, 과연 4년이 지난 지금까지 할 일이 남아 있을까? 우리가 한번 왔다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현지에 와 보니 아직도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기억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음이 현지 분들에게 힘이 된다는 것과 동경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한국어 교실 수업 전 기도를 통해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 낼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아와야 하는 걸음이 무거웠지만 가슴속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게 된 엄마들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허락하시면, 꼭 다시 오라하시던 엄마들의 소원을 들어 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엄마들을 만나러 갈 수 있도록 건강이 허락 되고 재정이 채워지도록 기도 해 주시기 바랍니다. 10시간씩 차를 타고 이동을 하는 길에도 즐거운 교제의 시간, 동역하는 기쁨과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계셔서 천국의 잔치를 맛보았습니다. 다음에는 더 열심히 찬양도 준비하고 더 맛있는 부침개를 준비하자며 짧은 자원봉사를 마무리 했습니다. 먼 길을 오가는 동안 건강을 지켜 주시고 아이들과 사역지를 안전하게 돌보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 동역하는 귀한 지체들을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현장에서 열심히 뛰라고 기도와 관심과 사랑과 물질로 동역해 주시는 후원자님들이 계셔 저희들은 참 행복한 선교사들 입니다. 염성준, 최혜경 선교사 부부 (북서울 노회) 민수식, 김난영 선교사 부부(동서울 노회)
1137 no image |개/혁/주/의/신/앙/강/좌| 헌상(獻上)에 대하여_최덕수 목사
편집부
1646 2015-12-29
헌상(獻上)에 대하여 < 최덕수 목사, 현산교회 > “자신이 드리는 헌금에 어느 정도 무게 느낄 만큼 하나님께 드려야” 교회가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한 탓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믿는 신자들까지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헌상(獻上)에 대하여 잘 가르치지 않게 되었다. 신자들 또한 이렇게 하는 것이 교회가 자신들을 신사적으로 대우하는 일이라 생각하여 헌금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는 교회를 선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일이 일시적으로는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 주긴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권리는 앞세우지만 헌신은 잘 하지 않으려는 기형적인 신자를 만들어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고린도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에게 구제 헌금을 보내는 것을 가리켜 "은혜"(고전 16:3)라고 표현하였다. 성경은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도 "은혜"라고 말하지만,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나눠주는 신자의 구제 헌금도 "은혜"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헌상은 성도들로 하여금 더 많은 은혜를 누리게 하고 나누게 하는 통로라 할 수 있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교회가 헌상에 대해 가르치는 일이나 성도들이 헌상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일을 결코 부담스러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지만 헌금한 이들의 이름을 주보에 올리고 헌상기도를 할 때 거명까지 하는 유치함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교회들도 있지만, '우리 교회는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성도들로 하여금 유약한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교회들도 있다. 헌금만 강조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 것도 문제라는 말이다. 구약시대 때 제사를 드림에 있어 제물은 필수적이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처음 난 동물이나 처음 난 농산물을 바쳐야만 하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도 빈손으로 오면 안 되고 비둘기라도 바쳐야만 하였다. 물론 제사제도가 가리켰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오늘날에는 구약 시대와 똑같은 방법으로 드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동일하게 견지해야 할 원칙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예배할 때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창 4:2-5; 히 13:15-16). 그러므로 새 언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한다. 물론 그 방법은 새 언약의 시대에 합당한 방법이라야 한다. 구약 시대에는 짐승이나 곡식을 하나님께 드렸으나 신약 시대에는 헌금(돈)을 드린다. 헌금을 드리되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다 드리지 않고 대개 10분의 1을 드린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드리고 난 나머지 10분의 9는 우리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10분의 9도 하나님의 소유다. 우리의 재능과 노동력을 사용하여 번 돈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것이다. 최첨단 산업에 근무하여 연봉을 억대로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로지택(雨露之澤)의 은혜를 내려주시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으므로 신자는 주인의 소유를 신실하게 관리하는 청지기적 자세로 우리의 필요를 위해 주신 10분의 9까지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용처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10분의 1을 드렸다고 하여 신자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신약교회 성도가 드리는 10분의 1은 구약의 십일조 규례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 헌금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 만약 "10분의 1을 내었으니 내 의무를 다했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런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았던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다(눅 18:9-14). 따라서 신자는 정확한 비율로 헌금했다는 것으로 자위해서는 안 된다. 성경이 명한 바대로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되고 감사하는 마음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후 9:7). 그러면 하나님께 어느 정도를 드려야 하는가? 너무 부담스러울 정도로 헌금해서는 안 되며, ‘이런 정도는 나에게 큰 부담이 안 된다’는 수준으로 내어서도 안 된다. 헌상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로 자기 전부를 대표하여 드리는 일인 만큼, 액수나 요율에 억매이기보다 자신이 드리는 금액에 어느 정도의 무게를 느낄 만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대부분의 교회가 주일예배 때에만 헌상한다. 그런데 원칙적으로는 예배드릴 때마다 헌상해야 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구역예배 때에도 헌금순서를 두었던 것이다. 서구 개혁교회는 예배 시간에 두 번 헌상한다. 한 번은 교회 살림살이(경상비)를 위해서, 또 한 번은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위해서 헌상한다. 헌금을 거둘 때에도 헌금함에 넣는 방법이 아니라 헌금 바구니를 돌리는 방법을 사용한다. 저녁 예배 때에도 낮예배와 똑같이 두 번 헌상한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행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중고등부 때나 청년 때에는 예배 시간마다 헌상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취직하여 첫 월급을 받기라도 하면 일부는 부모님 내의를 사드리고 나머지는 모두 헌금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지금도 그래야만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필자가 젊었을 당시 한국교회 신자들의 일반적인 정서가 그랬다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예전에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에 비해 지금에 와서 성도들은 헌금을 잘 하지 않는 것 같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 여건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힘들게 생활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다고 하여 헌금을 드리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대로 많든 적든 자기 수입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께 헌상해야 한다(고전 16:2). 교회가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한 일이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나머지 교회는 교인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고, 신자들은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 교회의 처사를 매우 신앙적이며 신사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분명 잘못된 일이다. 성경은 헌상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치도록 명하고 있다. 또한 구속받은 신자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 곧 하나님을 예배할 때마다 그분의 왕되심과 주되심을 인정하는 표시로 헌상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바라고 말씀한다(시 76:11). 교회는 신자가 마땅히 행할 바를 강조하는 일을 부담스러워 해서는 안 되며 신자는 마땅히 행할 바를 기쁨으로 감당해야 한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2)
1136 no image |심/층/진/단| 장로교 정치 원리에 따른 치리회의 정치_장대선 목사
편집부
1979 2015-12-29
장로교 정치 원리에 따른 치리회의 정치 < 장대선 목사, 가마산교회 > “장로교 정치 원리는 성경의 교회 원리에 충실하게 이뤄진 것” 현재 한국의 기독교를 비롯해 대부분의 종교는 거의 총체적인 혼란 가운데 처해 있다. 그 중 기독교를 거론하다면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혼란 이전에 이미 성경적인 기독교 원리에서 이탈함으로 말미암은 혼란이라 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혼란이야말로 모든 탈법(脫法)의 바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혼란 가운데서 거의 유일하게 수습할 수 있는 근거와 원리를 가지고 있는 교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장로교파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장로교 정치원리야말로 가장 성경에 충실한 원리일 뿐 아니라 가장 체계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원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장로교단들이 장로교 정치원리 자체에 미숙할 뿐 아니라, 이미 그러한 정치원리의 근거인 장로교 헌법을 사문화(死文化)시킨 지 오래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부터 모든 혼란과 탈법이 시작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장로교 정치에서 ‘장로’란 일반적으로 칭하는 장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와 장로를 말한다. 그 원리에서 노회 혹은 총회의 총대는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로교 정치 원리에서 지교회의 당회가 장로들로만 구성되지 않고 목사를 포함해서 구성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장로’란 목사와 장로를 모두 지칭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흔히 지교회에서 장로로 호칭하는 장로들은 철저히 당회를 통해 치리가 이루어지지만, 목사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당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노회를 통해서 치리되는 것이 장로교의 치리 체계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지교회의 목사라도 그 치리는 노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런 기본적인 원리가 한국의 장로교회들에서는 제대로 서 있지 못하며, 그나마 세워진 체계들조차도 무너진 지가 이미 오래다. 작금 장로교 정치에서 말하는 ‘정치’란 마치 세속의 정치 원리와 같이 세력화 한지 오래며, 교회가 개척하여 세워진 경우에는 거의 모든 당회의 치리를 목사가 전횡(專橫)하거나, 그 목사가 은퇴한 이후부터는 그야말로 장로들에게 그 권력이 넘겨져서 후임 목사들을 장로들이 좌지우지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역사를 보면 장로교단들 가운데서 예장합동 측의 경우에는 목사가 당회장이 되어 전횡하던 역사의 뿌리가 깊은데 반해, 예장통합 측의 경우에는 장로들이 당회를 장악하여 전횡하던 역사가 아주 오래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목사의 전횡에 의한 폐단은 큰 이슈(issue)가 되어도 장로들의 전횡에 의한 폐단은 잘 이슈화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즉 목사들의 전횡에 대해서는 각종 매체들을 통해 심각하게 다루어지지만, 장로들의 전횡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장로들의 전횡에 관한 대표적인 사례를 들라면 지교회 목사의 청빙 혹은 사직과 관련한 것을 들 수 있다. 특별히 지교회 목사 사직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노회의 치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음에도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대표적으로 과거 장로교 합동 교단의 충현교회에서 청빙된 이종윤 목사의 사직과 관련한 치리를 지교회 당회인 충현교회 당회가 직권으로 시행했던 것은 장로교 정치역사에 있어서 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 이후로 그처럼 당회에 의해 목사를 쫓아내는 일이 보편화되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장로교 헌법과 정치원리를 거스르는 명백한 불법이요 탈법이 아닐 수 없다. 지교회에 청빙된 목사가 헌법의 절차에 따라 1년이나 2년이 지나서 위임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지교회의 당회 혹은 공동의회라도 일방적으로 목사를 치리하여 쫓아낼 수 없고, 노회에 타당한 사유를 근거로 문제를 제기하여 노회의 치리에 의해 목사를 사직시키든지 하는 것이 올바른 장로교 정치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원리나 헌법에 대해서 대부분의 장로(장로만이 아니라 목사를 포함한 장로)들이 잘 모르거나 따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로교 정치원리와 헌법의 원리는 철저히 성경에 바탕을 둔 것인데, 그것은 신약성경의 교회원리 만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교회원리까지 충실한 가운데 이뤄진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장로교 정치는 그러한 성경의 원리에 무지하고서는 제대로 시행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한국의 장로교회들의 위와 같은 뼈아픈 역사들은 한국의 장로교회들이 얼마만큼 성경의 원리에 무지한 지를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참된 개혁이란 심정(心情)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의 원리를 따라서 철저한 원칙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 참된 개혁이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에 따라 개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교파가 바로 장로교단들이다. 왜냐하면 감독교회의 정치원리는 기본적으로 감독, 즉 목사에게 있고, 침례교회의 정치원리는 기본적으로 ‘회중’에게 있기 때문인데, 오직 장로교단의 헌법만이 목사와 회중의 대표인 장로 그리고 크게는 회중까지 포함한 공동의회와 노회에 의해 교회정치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장로교단의 헌법은 세속의 삼권분립 원칙보다도 더욱 철저히 지교회의 장로와 회중과 노회의 권한과 그 역역 등이 잘 구별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원리들과 원칙으로의 회복과 개혁이 없는 교회 개혁이란 더욱 큰 혼란과 탈법을 초래할 뿐이니 반드시 이러한 문제 의식이 공론화되어 바르게 정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135 no image |총회농목회 참관기| 농목회 수련회를 통해 얻은 용기_김보혜 사모
편집부
1704 2015-12-02
 농목회 수련회를 통해 얻은 용기 < 김보혜 사모, 해금강영광교회 >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확장에 최선 다하는 모습들 반가워” 지난 11월 16-17일에 합신농어촌 목회자 모임에 다녀왔다. 도시에서만 살던 내가 이곳 거제도 해금강에 내려온 것은 이제 11개월 정도 되었기 때문에 농어촌목회자 모임이 있다는 소식이 무척 반갑고 기다려졌다. 우리 가정은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생으로 어리기에 합신농어촌목회자 모임을 같이 참여할 수밖에 없었기에 분주하게 준비하면서 출발했다. 통영에 계시는 도산제일교회 김용진 목사님 부부와 만나 같이 농목회모임이 있는 전라남도 영광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붉게 물든 단풍과 끝없이 펼쳐진 논과 밭, 높이 솓은 산세 등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으로 영광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도 몸과 마음이 평안해지는 거 같았다. 더욱이 가을 내내 가물어서 비를 기다렸는데 아침부터 반갑게 비가 내려 마음이 더욱 차분하고 고요해지면서 농목회 모임을 가는 길에 여러 생각을 하면서 가게 되어 좋았다. 이번 합신 농목회가 열리는 곳은 전라남도 영광에 있는 덕흥교회였다. 작고 소박한 교회당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도착해계셨고 처음 참석하는 우리 부부를 따뜻하고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이렇게 편안하게 인사하고 우리를 소개하면서 개회예배를 드렸다. 설교는 전남 노회장이신 박재균 목사님께서 전하셨다. 영광에 내려오셔서 사역을 하시는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 농촌 사역의 많은 어려움 가운데 깨달으신 은혜, 내려놓는 삶 을 들으면서 지금 내가 겪고 느끼는 것들이 단지 나의 어려움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 모임을 참 잘 왔고 목사님들과 사모님들과 많이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녁식사 후 덕흥교회를 시무하시는 남종우 목사님 부부의 “나의 목회사역과 특강”이 있었다. 개회예배 설교와 같이 나에게 위로와 도전이 되는 시간이었다. 성도의 대부분이 나이 많으신 글을 잘 읽을 수 없는 어른들이시고, 젊은 부부라면 다문화가정의 이주 여성과 가족, 그 가족들로 부터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로 이루어진 작고 약한 공동체를 섬기고 계신다는 목사님의 사역은 너무나도 실제적이었다. 어르신들과 이주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시고, 지역 교회와 여러 기관과 연계하여 아이들을 지도하시는 것, 아이들을 집에 데려와 키우시고, 아이들을 통해 지역 어르신들을 섬기시는 등의 사역이었다. 목사님의 사역은 점점 영향력이 있고 열매를 맺어가고 있었다. 나 또한 거제도에 와서 이런 사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먼저 가고계신 선배님이 있다고 생각하니 맘이 든든하고 어떻게 해야 하고 무슨 어려움이 있는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 이후에는 목사님의 소개 시간이 있었다. 목사님의 아이들이 학교의 전분인 섬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 건강을 잃어 회복중인 목사님, 지역주민에게 도둑질을 끊임없이 당하면서도 그분을 섬기시고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 모두 외로움과 재정적인 어려움, 건강의 한계 등과 싸우시며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시는데 열심이셨다. 나도 이분들과 같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모임에 오신 목사님 부부는 화려하거나 얼굴이 희거나 밝지 않다. 그것이 사역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흔적 같았다. 수고하고 지친 모습들... 따뜻한 숙소에서 단잠을 자고 난후 아침에 이은국 목사님(신임 농목회 회장)의 인도로 아침 예배를 드렸다. 전날의 여러 목사님들의 말씀을 듣고 받은 도전으로 앞으로의 사역을 다짐하는 귀한 시간이었고, 중보하게 되었다. 점심을 먹을 때 우리 큰아이가 생선을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렸다. 많이 아파했기 때문에 식사도 더 이상 할 수 없었고 근처의 보건소로 향했다. 하지만 보건소에서는 목의 가시를 뺄 수 없다고 해 시내에 있는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셨다. 어쩔 수 없이 큰 병원에 갔는데 이비인후과가 없어서 가시를 뺄 수 없었다. 그런데 같이 간 사모님께서 큰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셨는데 아이가 그때부터 나아져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먼저 기도해야한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신다. 나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사역을 감당해야한다. 농목회에서 들은 목사님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결론이 났다. 모든 싸움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처음 참석한 농목회이지만 그래서인지 더 깊은 감동과 깨달음이 있었다. 이 마음을 잘 간직하여 사역에 임해야겠다.
1134 no image |개/혁/주/의/신/앙강/좌| 간단하게 정리한 개신교의 ‘성령론’과 ‘선교’ 역사_장대선 목사
편집부
1729 2015-11-17
간단하게 정리한 개신교의 ‘성령론’과 ‘선교’ 역사 < 장대선 목사, 가마산교회 > 개신교 신자들은 흔히 종교개혁이 온전하게 하나의 흐름을 이루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곤 하지만, 실재 역사에 있어서 종교개혁이란 상당히 다양하며 모호한 역사와 배경 가운데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세부적인 조망 없이는 결코 종교개혁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없다. 1. 종교개혁과 함께 시작된 개신교의 두 진영 기독교 안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의 기류가 항상 존재해 왔는데, 그것은 바로 ‘확장’과 ‘분열’로서 종교개혁의 시대인 16세기의 유럽의 기독교 안에서도 그 기류는 그대로 재현되었다. 즉, 마틴 루터를 심벌(symbol)로 하여 불타오른 16세기 종교개혁은 그 불꽃이 작열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마틴 루터’와 ‘필립 멜랑히톤’을 중심으로 하는 진영과 반대로 ‘울리히 쯔빙글리’와 ‘오클람파디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두 개신교 진영으로 곧장 나뉘어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진영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으로는 루터와 쯔빙글리 사상을 정립한 칼빈의 신학을 기초로 하는 ‘정통주의’와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는 ‘실천주의’로 분열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곧 개혁교회가 정통주의 진영인데 반해 상대적으로 일부 침례파를 포함하는 재세례파, 퀘이커, 경건주의, 메소디스트 등은 신앙의 순수성과 실천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는 실천적인 진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순수주의, 경건주의, 성령 신비주의적 특성을 강조한다. 이처럼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한 개신교(Protestant) 진영은 거의 처음부터 교리적 차이를 바탕으로 하는 정통주의 개신교 진영과, 성령 안에서의 자유로운 신앙과 경건의 실천을 강조하는 실천주의 진영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다. 또한 확장, 즉 전도와 선교의 기류에 있어서는 로마 가톨릭 진영에 비해 개신교 진영에서는 처음에는 로마 가톨릭의 박해와 정치적 상황에 따른 핍박의 상황에 의해 상대적으로 제한적으로만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특히 실천주의 진영에 비해 정통주의 진영의 경우에는 더욱 제한적이었는데, 올바른 신앙의 교리들을 도출해 감과 아울러서 그러한 교리를 가르치고 전수하는 정통주의와 달리 처음부터 교리적 엄밀함보다는 경건과 실천을 강조하던 재세례파, 퀘이커파, 경건주의파 등 실천주의 진영에서는 성령의 사역으로서 ‘전도’와 ‘선교’의 강조가 농후했었다. 2. 성령론 중심으로 전향된 17세기 이후 개신교 동향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은 개신교 안에서는 처음부터 ‘분리’ 혹은 ‘분열’의 양상이 함께 했었으며 그런 분리 혹은 분열이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부패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교리적으로 크게 부패하고 본래의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된 로마 가톨릭에 대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원래의 기독교 신앙을 향한 ‘개혁’ 혹은 ‘회복’의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개혁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에 재세례파, 퀘이커, 경건주의 등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는 분파들의 성향보다는 정통주의의 성향이 종교개혁의 본질과 의미에 훨씬 부합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고전 12장 27절에서 사도가 말한바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에서 한 몸을 이루게 하는 ‘평안의 매는 줄’이란 다름이 아니라 온전한 복음의 진리 가운데서의 하나 됨, 곧 참된 복음의 교리 가운데서의 신앙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에 근거하여 정통주의 진영인 개혁교회, 그리고 개혁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완전하지만 루터교회에서는 항상 교리적인 일치 가운데서 하나 됨과 ‘복음 진리의 전파’로서의 선교가 있었다. 반면에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는 진영에서 하나 됨과 복음 전파의 강조가 있었지만 그 양상은 교리적 일치보다는 십자가 복음의 기독론에 근거한 ‘신앙적 경험’과 ‘경건한 생활의 실천’으로서의 선교를 중시했다. 안타깝게도 서구의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흔히 정통주의 시대라고도 칭하는 16-17세기 이후의 주도권은 정통주의 진영이 아니라 오히려 실천주의 진영에 있었는데, 바로 그러한 주도권의 변화 가운데서 세속문화와 사상의 변화 또한 초래되었던 것이다. 이후로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거의 모든 개신교 진영에서의 확장은 실천주의 진영에서 이루어 졌고 오히려 정통주의 진영, 특히 장로교회들에서는 여러 차례의 분열이 초래되었는데 대표적인 분열의 역사는 주로 북미대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런가하면 19세기 이후, 특히 20세기에 이르러 주로 실천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개신교 진영을 중심으로 ‘교회일치 운동’(Ecumenical movement)이 급격하게 퍼져나가게 되는데, 그 중심적인 영역을 신학적으로는 ‘성령론’과 실천적으로는 ‘선교’에 두고 있었다. 3. 종교개혁 정신에서 벗어난 19세기 이후 교회연합운동 특별히 18-19세기의 개신교 진영에 있어서 ‘부흥운동’의 중심적인 신학적 배경을 이루는 ‘성령론’은 이미 전술한 실천주의의 영향이 거의 지배적인데,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바탕으로 메소디스트 운동(Methodist movement)을 비롯하여 기독교 제3세력인 펜타코스트 운동(Pentecostalism/오순절운동)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개신교 역사의 중심에 ‘성령론’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그처럼 성령론을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의 양상 가운데서 ‘선교’의 강조가 있어왔는데, 그러한 성령론과 선교의 강조가 복합적으로 자리매김한 교회일치 운동은 20세기에 이르러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들과, 심지어 장로교회들까지 포섭해 버렸다. 즉, 고전 12장 27절의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실천주의 개신교 진영과 원래는 정통주의 진영이었던 상당수의 장로교회들이 ‘교회일치를 지향하는 선교론’과 이를 가능케 하는 ‘성령의 역사’라는 주제 가운데서 한 카테고리를 형성해 버린 것인데, 그런 교회일치 운동의 꽃이 바로 ‘세계교회협의회’(W·C·C)이다. 물론 현대 개신교의 대부분의 신학은 교회일치의 근거가 되는 성령론과 선교의 강조를 바탕으로 하는 실천주의에 대해 긍정적이며 발전적이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세계교회협의회는 동·서방교회의 일치추구를 근거로 로마 가톨릭과의 일치 또한 추구하고 있는데, 종교개혁의 배경 가운데서 이를 제대로 바라볼 때에 그것은 개혁을 돌이켜 파기해 버리는 맥락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W·C·C의 교파 통합과 관련한 역사를 보면 1925년에 캐나다의 개신교에서 이미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및 조합교회가 연합하여 캐나다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Canada)가 조직된 바 있다. 1947년에는 인도 남부의 성공회, 감리교회, 장로교회, 회중교회가 연합하여 남인도교회(Church of South India)가, 1076년에는 호주의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가 연합하여 합동하는 호주교회(The Uniting Church in Australia)라는 기구적 합동을 이루어지는 등 17세기 이후 실천주의 개신교 안에서 거의 모든 개신교가 통합을 이루었던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러한 개신교 역사에 대해 대부분의 기독교 역사학자들이 긍정적으로 분석하고 있지만, 그런 역사는 분명 종교개혁의 취지와 방향에 전혀 부합하지 않은 반종교개혁(Anti Reformation)적 양상이라 할 수 있다. 마치는 말 현대의 개신교가 보여주는 신학과 윤리의 실종(失踪)양상에 대한 종교개혁을 말하면서 여전히 실천주의 맥락, 곧 성경과 별도인 성령론에 바탕을 둔 선교와 교회연합을 부르짖는 개혁의 목소리들은 오히려 근본적인 종교개혁적 신학과 윤리의 실종으로 이어지는 전혀 무의미한 외침에 불과하다. 그러한 양상은 작금 세계 곳곳에서 주로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실천적 개신교를 추구하는 교회들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정통적인 의미의 개신교를 추구하는 교회들은 여전히 양적 성장보다는 교리의 가르침에 따른 신앙과 신학의 내적인 심화의 길을 더욱 추구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도 두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성령론을 강조하는 실천적 개신교를 추구하는 교회들은 알파나 신사도 등 각종 프로그램을 도입하며 외형적 성장을 추구하지만 상대적으로 정통 개신교를 따르는 교회들은 종교개혁 정신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 신조나 요리문답 등을 공부하는 일에 더 힘을 기울이고 있다. 성경의 진리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추구하는 것을 시작으로 ‘신앙’과 ‘교리’의 일치를 추구하는 개혁주의야말로 시류(時流)를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진정한 종교개혁이다. 그 안에 분명히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선교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외형적이고 실천적인 ‘연합’과 ‘일치’를 추구할 때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한 것처럼 더욱 큰 개신교의 ‘분열’을 야기할 뿐이다.
1133 no image |제언| 총회의 임시목사제도 폐지 부결에 대한 차후 대책_박형용 목사
편집부
1808 2015-11-17
총회의 임시목사제도 폐지 부결에 대한 차후 대책 < 박형용 목사, 동서울노회 > “교회와 목사에게 부작용 가져온 임시목사 제도 이제는 개선해야” 기독교개혁신보 제705호(2015, 10, 10)에 게재된 소식에 의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제100회 총회가 은혜가운데 폐회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뉴스의 한 부분에 “헌법수정위원회에서 연구 보고한 제5장 4조 목사의 칭호 중 ‘임시목사로 청빙 받아 2년 시무한 뒤 담임목사로 청빙 받을 수 있는 것’을 ‘바로 담임목사로 청빙하거나 또는 임시목사로 시무하다 2년 이내에 청빙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개정안에 대해 논의한 결과 출석 121명 중 찬성 61명으로 과반수(61명 초과)가 되지 않아 부결 처리됐다”는 기사가 있다. 문제는 본 안건을 부결시킨 이유가 참석회원의 과반수 찬성이 되지 않아 부결시켰다는 논리이다. 들리는 이야기는 121명의 절반이 60.5이니 사람을 0.5로 계산할 수 없어 사사오입하여 61명으로 계산하여야 하고 따라서 과반수가 되려면 62명이 되어야 하는데 61명이 찬성했기 때문에 과반수가 되지 않아 부결시켰다는 이론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사람을 0.5로 취급할 수 없다면 0.5명를 빼고 60으로 계산하는 것이 바르지, 없는 0.5명을 보태서 사사오입을 한다는 것이 해괴한 발상이다. 만약 그런 방법으로 계산하면 한 당회에서 당회원이 3명인데 어떤 안건을 1명이 반대하고 2명이 찬성했다면 3명의 절반이 1.5명이니 사사오입해서 2명이 절반이고 따라서 2명은 과반수가 되지 못하므로 3명이 과반수가 된다는 논리이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에서 어떤 안건을 심의하여 결정하는데 15명 중 8명이 찬성투표를 해도 8명은 과반수가 아니기 때문에 그 안건은 부결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금번 100회 총회의 임시목사제도에 대한 안건 부결 처리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또 어떤 이는 총회 헌법을 고치려면 어차피 3분의 2 득표가 있어야 하니 문제될 것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목사에 관한 규정은 교리 개정에 속하지 않고, 교회정치에 속한다. 교회정치 규정을 고치는 것은 헌법 “제22장, 헌법 및 교리 개정”의 제1조에 “교회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을 개정코자 하면 다음과 같이 한다. 1. 총회는 출석회원 과반수의 결의로 개정 위원들을 택하고 1년 후에 개정안을 보고케 하여 검토한 후 그 개정안을 각 노회에 보내서 찬성 표결을 얻어야 한다. 2. 각 노회에 접수된 개정안은 노회 과반수의 가결과 각 노회에서 투표한 투표 총수의 3분의 2 이상의 가표를 얻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 헌법의 문장이 약간 불분명하게 진술되었지만 그 뜻은 임시목사제도를 폐지하는 안건은 총회 출석회원 과반수로 가결하고 노회에 보내서 노회 과반수와 총 투표수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수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번 안건에 관한 총회 결의는 회의법 진행에 있어 미숙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 동안 임시목사 제도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공동의회의 3분의 2의 투표를 받아 부임한 목사가 2년 동안 사람의 눈치를 보며 목회를 해야 한다는 안타까운 사실과, 또한 당회원들과 교회의 리더들이 2년을 목사 길들이기 하는 기간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마음이 괴롭다. 본인이 아는 한 예는 전임 목사가 은퇴하고 후임 임시목사가 부임했는데 전임 목사가 후임 목사에게 교회의 재정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자신이 교회의 통장을 관리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후임목사가 임시목사이니 2년 후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도의 잘못과 인간의 약함이 이런 경우까지 만들어 낸다. 또 어떤 목사는 위임목사 투표에서 3분의 2에 약간 못 미치는 표를 얻어 교회를 사임할 수밖에 없었고 한 평생 제대로 목회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한 목사가 교회의 3분의 2이상의 찬성 투표로 부임하게 되면 그 목사에게 교회를 맡아 섬기도록 위임하는 것이 옳다. 목사가 교회를 맡아서 섬길 때 테스트(test) 받는 기간으로 일정 기간을 섬겨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목사는 3분의 2라는 다수의 찬성으로 그 교회의 부름을 받았다면 목회 첫 날부터 그 교회를 떠나는 날까지 그 교회를 위임받아 섬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임시목사 제도는 담임목사가 아니며 일정기간 테스트 받는 목사요, 위임목사는 한번 위임목사가 되면 평생 그 교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과 같다는 개념이다. 이는 성경의 교훈에 결코 합당치 않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어느 목사든지 교회의 3분의 2이상 찬성으로 교회의 부름을 받았다면 목회 시작하는 첫 날부터 그 교회의 담임목사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담임목사가 교회 내에서 목회를 계속할 수 없다거나 혹은 심각한 잘못을 범하면 그 교회에서 목회 사역 기간에 상관없이 그 목사를 사직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금번 총회에서 부결한 임시목사 안건을 보다 심각하게 접근해야 한다. 그 첫째 이유는 현재의 임시목사 제도가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은 제도이기 때문이며, 둘째 이유는 임시목사 제도가 교회와 목사 자신에게 많은 부작용을 가져왔기 때문이며, 셋째 이유는 앞으로 노회나 당회 혹은 어떤 기관에서 과반수 적용을 총회가 사용한 방법대로 한다면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아무도 다치지 않은 선에서 교단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1132 no image |긴/급/진/단| 칼뱅은 잔악한 학살자였는가?_권현익 목사
편집부
2069 2015-11-17
칼뱅은 잔악한 학살자였는가? < 권현익 목사, 프랑스 선교사 > “카스텔리옹의 주장은 칼뱅을 살상자로 몰고 가려는 반 칼뱅주의자들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유일한 참고 문헌” “칼뱅을 공격하기 위해서 상상력을 동원하여 지어낸 역사적인 서술은 전혀 학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 최근 인터넷 ‘당당 뉴스’는 검증되지 않는 소문을 근거하여 ‘칼뱅은 학살자’라는 내용을 게재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칼뱅을 마치 잔악한 학살자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 이는 감리교 소속의 운영자들이 인터넷 당당 뉴스를 통해 칼뱅에 관한 감리교의 경향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일고의 가치가 없는 허무맹랑한 내용들이지만 거짓이란 사람들의 귀를 유혹시키며 재빨리 전달되고 증폭되는 것으로, 이제는 칼뱅 학살이 마치 사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식되는 지경이 될 수 있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역사적 진실을 확인하고자 한다. 1. 소위 '칼뱅 학살'의 주장 및 그 주장의 근거 칼뱅의 학살 주장의 진원지는 칼뱅 당시 콜레쥬 드 리브(Collège de Rive)의 교장이었던 카스텔리옹(Sébastien Castellion, 1515-1563 )이다. 그는 목사가 되기를 원하였지만 평소 그의 행실과 신학적 소양으로 인하여 칼뱅과 쥬네브 목사회는 그의 청원을 거부했다. 이에 그는 칼뱅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칼뱅이 인도하는 목사들의 성경 공부 모임에 나타나 칼뱅과 목사들을 비방한 죄로 쥬네브 시의회로부터 면직을 당하게 되었고, 생계유지를 위해 자유와 학문의 도시인 바젤로 옮겨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카스텔리옹은 세르베 화형 사건(1553.10.27)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칼뱅을 향한 비난의 소리가 커지자 그 비난에 동승하여 익명으로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역사 속에 거의 묻혀 있던 이 책은 300년 뒤 유태인 극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가 이를 다시 출판했고 당시 칼뱅을 반대하는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여 일약 베스트셀러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책 내용 중 “칼뱅이 통치한 불과 5년 동안에 당시 전 인구가 1만 3천 명에 불과한 쥬네브 시에서 13명이 교수대에서 살상되었고, 10명이 목이 잘리고, 35명을 화형시키는 끔찍한 범죄들을 벌였다”는 카스텔리옹의 주장은 칼뱅을 살상자로 몰고 가려는 반 칼뱅주의자들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유일한 참고 문헌이다. 이처럼 근거 없는 카스텔리옹의 이 글을 한국에서 심상용, 조찬선 등이 수용하여 반 칼뱅주의의 선봉장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목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카스텔리옹보다 더 많이 인용되어 인터넷에 칼뱅 살상이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이처럼 카스텔리옹, 슈테판 츠바이크, 조찬선, 심상용은 칼뱅을 중상모략(中傷謀略)하려는 이들의 교과서인냥 인용되는 주요 인물이다. 2. 카스텔리옹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주장은 사실인가? 1) 근거없는 카스텔리옹의 기술 카스텔리옹의 역사 서술 방식은 증언의 3대 요소인 ‘언제, 누가, 어디서’에 관한 언급이 없다. 예를 들면 이런 형식의 서술이다. “칼뱅과 그의 종교국은 80세 노인과 그녀의 딸을 무참하게 처형했다. 그 유일한 사유는 자녀들에게 유아세례 주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한 출판업자는 칼뱅을 비난했다고 해서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혀를 잘렸다. 어떤 사람은 예정설을 반대하는 말을 했다고 해서 가혹한 고문을 받고 광장에서 화형을 당했다. 게다가 자크 그뤼에란 사람은 단지 칼뱅의 정책을 반대하고 그를 '위선자'라고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극한 고문을 받은 후 처형되었다.” 일괄되게 어떤 이가, 아니면 80세 노인이 전부이며, 그들이 처형된 날짜도 없으며, 장소는 쥬네브에서 광장이 단 하나 밖에 없었던 것처럼 ‘광장에서’가 사건 설명의 전부이다. 당시 모든 역사 서술에는 반드시 처형되는 사람의 이름과 나이, 처형된 날짜와 장소가 반드시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10년 후에 그것도 칼뱅이 머물고 있는 도시가 아닌 다른 곳에서 폭로하였다면 누가 그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그의 역사 언급은 그 어떤 역사책에서도 인용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가 유일하게 이름을 밝힌 자크 그뤼에(J. Gruet)라는 인물은 여러 역사 서술에서는 등장하는 인물로, 그의 주장과 달리 필립 샤프는 ‘반역과 무신론의 혐의로 참수를 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2) 극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악의적 편집 츠바이크가 ‘칼뱅의 정통 신앙 변론’이라는 책에서 인용했다는 내용에 의하면 “심지어 칼뱅은 이단을 처형한다는 일은 결코 그리스교도적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 신자가 이단의 거짓 가르침에 물드는 것을 막아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목적을 위해서는 한 도시의 주민 전부를 없앨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지만 그의 인용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령 인용문이다. 단지 칼뱅이 신명기를 인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전 도시를 그들의 주민들과 더불어 동일한 처벌 속에 가두신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주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너희 가운데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주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가운데에 거주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을 칼날로 진멸하고’라고 하신다”(신 13:12)는 언급에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칼뱅을 대치하였고, 그 다음의 내용은 칼뱅을 벼랑으로 몰아세우기 위하여 악의적인 창작 활동까지 더 하였던 것이다. 카스텔리옹의 주장을 여과 없이 그대로 수용할 뿐 아니라 칼뱅을 공격하기 위해서 극작가다운 츠바이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지어낸 그의 역사 서술은 전혀 학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3) 조찬선의 악의적 인용 조찬선은 “장로교 창시자 존 칼뱅”이라고 지목하면서 칼뱅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세르베는) 칼뱅의 저서 『기독교 강요』를 비판했다가 칼뱅에 의해 쥬네브 근교에서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칼뱅은 세르베가 산 채로 서서 참혹하게 불타 죽기까지 다섯 시간 정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총칼에 의해 일순간에 죽는 것도 아니고, 이글이글 서서히 타는 불에 죽는 처참한 광경을 상상해 볼 때, 신앙의 잔악성은 그 어느 전쟁의 잔악성보다 수 백 배 더하다고 보아야 하고 보복적 수단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출처는 1908년 뉴욕에서 출간된 로마 가톨릭 백과사전에서 나온 것이며, 두 글을 비교해 본 즉 대부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자신의 글인냥 서술하였다. 카톨릭 백과사전에는 조찬선의 주장과 일치하는 칼뱅에 관한 글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칼뱅은 세르베의 죽음을 주도할 뿐 아니라 세르베가 죽는 그 현장에 친히 참석하여 죽어가는 모습을 즐겼다”고 서술하면서, 영국의 역사학자 기븐 (Edward Gibbon, 1737-1794)의 칼뱅에 대한 저주스러운 평가를 다음과 같이 인용해 놓았다. “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천주교 종교재판’(auto-da-fé)에서 타오른 수많은 희생보다 세르베 한 명의 처형에 대해 더 깊이 분개한다.” 로마 천주교회는 이 글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행하였던 다른 수천, 수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 학살의 희생들은 칼뱅에 비하면 그 죄악이 경미하며 매우 신사적이었다는 동정을 받아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찬선이 몰래 훔쳐다 쓴 이 글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판단조차 서지 않는다. 그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왜곡된 천주교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한 천주교 대변인 노릇을 자처하였을 뿐이다. 3. 칼뱅이 쥬네브의 실제적 지도자로 학살을 주도하였는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제네바에는 분명히 가톨릭의 이단 심문소와 유사한 ‘종교재판국’(종교법원 또는 장로치리회)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들의 행위는 온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같은 기간 제네바 외에 스위스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방법으로 죽었다. 그런데 근 25년간 그곳의 실제적 지도자였던 칼뱅이 그런 마녀사냥 재판과 만행을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존 칼빈(장수민 저, 칼빈아카데미 발행)에 의하면 “1549년 2월, 드 에끌레시아는 동료 목사들 앞에 소환되어 잘못된 교리를 전했다는 이유로 견책을 받았다. …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같은 가르침을 되풀이하면서 심지어 동료 목사들을 비난하고 다녔다. 결국 목사회는 그를 면직시켰다. 하지만 그는 의회에 항소하였고 수석 행정관인 페렝을 움직여 구명 운동을 펼쳤다. 목사들은 페렝의 압력에 못 이겨 그를 다시 복직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세르베가 죽은 1553년 당시 상황을 소개한 일지들을 보면 당시 쥬네브 목사들에게 정치 투표권과 시의회 참석하는 권리권 마저 박탈된 상황 속에서 칼뱅이 무슨 수로 시의회를 장악하여 마녀 상황을 주도하였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악의적인 왜곡자들은 '세르베투스'가 화형을 당한 다음 해에 ‘정통신앙 옹호론’에서 "많은 사람들은 내가 파괴한 사람을 내가 '다시' 죽이고 싶어 하는 잔학성에 대해 나를 비난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말에 관심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나는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 사실에 기뻐한다”(T.H. Dyer, "The Life of John Calvin", Harper 1855, citing 'Defensio' Calvini Opera Vol.8, at 516.A)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위 인용 출처인 오페라 제8권 516쪽에 이런 내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인용물을 제시한 T.H. Dyer가 1855년에 그의 책을 출판한 이후, 칼뱅 반대파들은 단 한 번도 칼뱅의 오페라를 확인하지도 않고, 초지일관 이 거짓 인용문을 오늘날까지도 인용하면서 이를 근거로 칼뱅의 잔학성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4. 역사적 사실은 무엇인가? 1) 1640년에 프랑스 왕국 서열 2인자였던 리셀리유 추기경(1585-1642)은 칼뱅을 중상모략함으로써 칼뱅의 권위를 깎아내리기 위해 칼뱅의 고향인 느와용의 역사 자료와 프랑스의 모든 기록들을 통하여 흠집을 낼만한 것을 찾도록 지시하였다. 하지만 그 어떤 혐의도 결코 찾아내지 못하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2) 철학자 볼테르(1694-1778)는 “범죄와 형벌에 대한 해설”(Commentaire sur le livre Des Délits et des Peines, 1766)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학살의 자료를 찾아 그의 책에 게재하였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수십 명을 학살했으며, 유아 세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집행했다는 그런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3) 데오토르 베즈가 세르베 사건으로 유럽의 다른 지역(루터교를 포함)에서 ‘쥬네브에는 관용이 없는 잔악한 도시’라고 공격을 해 오자, 그는 “종교적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한 당신들이 세르베 사건 외에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은 쥬네브를 과연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라고 반박하고 있다. 4) 쥬네브의 마녀 사냥 역사를 기록해 놓은 역사 기록물이 칼뱅의 무흠함을 증명하고 있다. 쥬네브에서 마녀 사냥은 1531년으로 끝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그 어떤 역사책에서도 칼뱅의 학살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칼뱅을 싫어하는 학자들이 근거 없이 칼뱅이 학살을 주도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정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근거하는 사료가 칼뱅을 공격하려 했던 리셀리유 추기경의 칼뱅 폄하 노력으로 인하여 이 책이 출판된 1640년 전의 사료가 아니면 그 사료의 그 정당성을 인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 논쟁에서는 사료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증거로 제출할 사료가 없을 경우에는 그 입을 다무는 것이 역사 논쟁에 임하는 진정한 자세이다.
1131 no image |신학 발전 공로자 수상 소감| 자신의 시대적 사명 감당한 할아버지_박은혜 사모
편집부
1553 2015-11-03
자신의 시대적 사명 감당한 할아버지 < 박은혜 사모, 네팔사랑교회 >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던 한 알의 밀알로 살으신 분” 저는 돌아가신 박윤선 목사의 친손녀입니다. 제 남편은 수년 전 합동신학원대학원대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올해 수원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저희는 천안에서 국내 네팔 선교를 위해 사역 중에 있습니다. 우리 부부는 지난 9월 중순에 대구에서 열리는 제10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에 초대를 받아 다녀왔습니다. 이 초대는 저희 부부에게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저의 친할아버지이신 박윤선 목사께서 제100회 장로회 총회 기념 인물 수상자 중 1인으로 선정되셨고, 수상 부문은 “개혁주의 장로교 신학 발전 공로자”였습니다. 제가 그 후손의 일원으로 이 영광된 수상의 자리에 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분야의 수상자는 할아버지 외에 박형룡 목사님과 명신홍 목사님 두 분이 더 계셨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여러 귀한 수상자들의 자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가졌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따님도 만날 수 있었고, 특별히 할아버지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유학 시절과 고려신학교를 섬기시던 시절에 아주 가깝게 동역하셨던 한부선(Bruce Hunt) 선교사님의 따님과 손녀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제게 아주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저는 그 수상자들의 공통점을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한국교회의 태동과 발전을 위해 자신은 물론 가족조차도 온전하게 돌볼 틈이 없었습니다. 지금의 목회자들과는 너무나 다른 당시의 독특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던 한 알의 밀알들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특히 할아버지는 신학적 기초가 정립되지 못했던 혼란기에 한국교회가 역사적 칼빈주의 장로교신학을 지켜나갈 수 있는 신학의 정초를 닦기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으셨습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할아버지를 왜곡된 시각으로 보는 최근의 일들로 인해 아팠던 저의 마음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불신자보다 못한 무책임한 태도로 자기 자식과 손자들을 돌보지 않으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도 재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저는 부족하나마, 하나님께서 남편과 저에게 맡겨주신 국내에 있는 네팔인 선교를 위해, 이번에 수상하신 한없이 귀하고 소중한 주의 종들처럼, 그리고 자랑스러운 할아버지처럼 하나님께 지사충성하며 달려갈 것을 다짐해 보았습니다. 사람은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그 수상자들을 한국교회에 보내 주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저의 친할아버지를 한국교회와 저희 가족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1130 no image |개/혁/주/의/지/상/강/좌|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의 신비_황대우 목사
편집부
1945 2015-10-20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의 신비 < 황대우 목사, 고신대 교수 > “하나님의 뜻이라는 큰 틀 속에서 인간 의지는 자유 누릴 수 있어”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백성을 자신의 자녀로 미리 선택하셨다는 예정론은 이성적으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신학 주제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적인 구원의 방식이므로 결코 부인될 수 없다. 성경은 흔히 구원을 신비라고 가르친다. 구원의 가장 큰 신비가 이 예정론에서도 적용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 때문에 모든 인간이 아무런 자기결정권도 없는 로봇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다면 모든 것은 마치 짜놓은 프로그램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기계처럼 돌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며 사는 세상도, 한 인간이 살아가는 인생도 결코 세상과 인생이 자동화 시스템의 기계처럼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자동화 기계처럼 철저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살이는 질서 있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엉성하고, 혼란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뭔가 큰 질서의 틀 속에 있는 듯하다. 이것이 바로 예정론이 운명론과 다르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는 세상을 자동화 기계로 만들지 않는다.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와 구속주 하나님의 예정은 조물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에서 확인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가운데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은 신적 능력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라 해도 결코 우리의 이성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마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왜 십자가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신비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신의 손에 달린 구원의 문제를 최대한 우리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명하신다. 그 설명서가 성경이다. 하지만 설명서란 그야말로 사용설명서이지 기계의 부품과 부품의 기능까지 세부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용설명서만으로는 기계 전체를 모조리 파악할 수 없다. 혹 그런 설명서가 있다고 해도 기계를 제작하는 전문가가 아니라면 결코 그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정해놓았다고 불평한다. 정해놓지 않으면 구원 받을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우연히 구원받은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예상하여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받을 자로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은 그가 믿을 줄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이 예지예정론이다. 그렇다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의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인가? 구원이 하나님의 의지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만일 구원이 하나님의 의지와 결정에 달린 것이라면 그 구원은 이중예정론으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이중예정론은 결코 구원운명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예정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은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어느 한 부모가 모든 아이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럴지라도 그 아이들이 그 부모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그 부모가 낳은 자녀 혹은 키운 자녀에 대한 사랑과 동등할 수는 없다. 즉 그 두 사랑은 구분되고 서로 다르다.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유사하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사랑하는 세상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을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더 사랑하신다. 이 사랑은 차별적이고 선택적이다. 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동등하게 사랑하시지 않는가? 동등하게 사랑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는가? 우리 가운데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자연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사랑의 차별과 선택을 당연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 사랑의 결과인 구원에 대해서만큼은 차별과 선택을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누가 더 이상한가? 차별적이고 선택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인가? 아니면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부당하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차별적이고 선택적이다. 차별적이고 선택적인 사랑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명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다. 왜냐하면 선택이란 차별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이해 가능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선택한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무엇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디 사람의 구원뿐이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공중의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세상만사 가운데 어떤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세상은 하나님께서 의지하시는 대로 진행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것이 부자연스럽지 않다. 하나님의 질서라는 큰 틀 속에서 세상의 온갖 무질서가 발생하듯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큰 틀 속에서 인간의 의지는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은 참으로 경이롭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신비라고 표현한다. 이 신비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신비로운 자연의 이치도 온전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이 가장 신비로운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것은 가장 심각한 만용,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때문에 삶의 현장 속에서 우리의 의지와 선택에 반하는 신적인 강요와 강제에 시달리며 억지스럽게 살아가고 있는가? 아마 아무도 그런 경험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억지와 강요와 강제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사랑은 감동의 동반자이지, 강요의 동반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마음속에 가장 심오한 감동과 감격을 불러일으킨다. 그 사랑을 받은 모든 사람은 흔쾌히, 자발적으로, 기꺼이 그 사랑을 수용한다. 이것이 바로 신비로운 구원 사건이다.
1129 no image |특별기고| 호스피스 사역에 관한 목회적 이해_김승주 목사
편집부
1676 2015-10-20
호스피스 사역에 관한 목회적 이해 < 김승주 목사, 참빛교회, (사)안양호스피스선교회 회장 > “자칫 죽음을 준비할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것 간과해선 안돼” 금년 7월부터 호스피스 완화의료법이 시행되고 있다. 이제는 말기 암 환우들이 제도권 안에서 수혜(受惠)를 보게 되었다. 그동안은 생명 연장에 대한 본능적 집착과 대책 없이 소요되던 의료비 부담 그리고 관계의 단절 등으로 고통받던 많은 말기 암 환우들이 제도권 안에서 노출되면서 삶의 질 또한 이전과는 비교할 수가 없게 향상되게 되었다. 이에 호스피스 사역에 관한 목회적 이해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돌봄의 필수 인력 시행법의 적용 대상은 의료기관이며 여기에 인적 자원으로는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성직자, 자원봉사자 등의 인력을 갖추어야 한다.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있다. 필수 요원 가운데 성직자가 있다는 것이다. 돌봄의 궁극적인 목표는 평안 전인적 건강의 의미는 편안(便安)과 평안(平安)의 균형에 있다. 그런데 호스피스 환우들은 편안하지 않다. 결국은 편치 못함의 극한점에 이르러서 생을 마치게 된다. 이에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어야 할 것은 또 다른 축(軸)인 평안이다. 치유불가 선고 후로부터 실제 사망에 이를 때까지의 멈춘 듯한 시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삶을 완성해야 하는 시간이다. 아름다운 정리가 곧 완성이다. 그간의 삶의 의미(보람)를 찾고,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왜곡(아쉬움)될 수도 있었던 관계들과의 원상회복(충족)이야말로 완성이다. 그리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확인했을 때, 현실적 죽음을 삶의 일부분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고, 이런 이해를 전제로 마음의 평안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세례를 받는 분들 가운데는 눈물짓는 분들을 보게 된다.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은 적은 없지만 필자는 그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다. 안도(安堵)의 눈물이다. 아무도 가 본적이 없는 길, 아무도 같이 할 수 없는 길, 가다가 되돌릴 수 도 없는 길을 걷는 이에게 무슨 평안이 있었겠는가. 참 평안은 복음으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요14:1-2)라고 약속하셨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노라”(요14:6)시며 구체적 방편까지 확인시켜 주셨다. 따라서 호스피스 현장은 불신자에게는 당연히 복음으로의 초청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고, 신앙인들에게는 재점검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평소 잘 믿는다고 여겨지던 사람들도 죽음 앞에서는 흔들릴 수밖에는 없다. 본능이다. 하지만 그 흔들림이 임종 순간까지 지속된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삶의 질은 바닥을 헤매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는 근거 없는 희망을 주기 보다는, 복음 제시(점검)와 찬양과 기도로 죽음의 긍정적 수용을 도와야 한다. 죽음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기적은 얼마든지 있다. 생명을 포기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물론 남은 이들은 치료를 위하여 최선을 다 해야 한다. 또한 양을 생각하는 목자로써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의학적 최종 판단이 불치였다면 현실을 인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죽음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질적이고도 궁극적인 관심은 천국에 있다. 그런데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전15:50)고 하셨다. 평소에 눈물로 대변되는 세상을 살면서 늘 천국을 사모해 온 것이 진심이었다면, 죽음은 천국 의 관문이다. 이제 그 문턱에 도착하여 실제 입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절체절명에서 흔들리는 이들에게는 이 점을 강조하고, 거듭해서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마치는 말 우리 모두가 희망하는 아름다운 마무리(=죽음 앞에서의 평안)는 결코 이론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죽음의 긍정적 수용에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이들 앞에서는 좀 더 신중함이 요구된다. 끝까지 생명 연장에만 집착하거나, 이를 도모(圖謀)하는 사이에 자칫하면 죽음을 준비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이른바 ‘호스피스 시대’이다. ‘천사가 흠모할 만한 호스피스 사역’에 대한 목회자들의 진지한 접근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1128 |총회를 마치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아름다운 총회_김양한 장로 파일
편집부
1792 2015-10-06
하나님께서 이루신 아름다운 총회 < 김양한 장로, 황상교회 > “이번 총회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아름다운 일들 중 하나였습니다.” “정말 기적이었습니다”라며 주변에 많은 분들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일은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이루신 아름다운 일들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제99회 총회에서 우종휴 담임 목사님이 총회장으로 선임되셨을 때 오정성화교회에 모인 많은 총대들과 저와 우리교회를 아는 많은 분들이 어떻게 총회를 치를 것인지 걱정과 염려로 물어왔고 또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런 염려와 걱정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98회 총회에서 우종휴 목사님이 부총회장에 당선되면서부터 이런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있어 왔습니다. 우리 황상교회 성도들 역시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1년 예산이 1억이 겨우 되는 작은 교회에서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모두들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계획하셨으며 이루어 가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우 목사님이 교단과 교회를 위해 하고자 하는 개혁 의지가 하나님의 섭리로 부총회장과 총회장으로 선임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27년 동안 함께 섬겨오면서 자신의 이익보다도 주님의 의를 위하여 뜻을 굽히지 않음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할 때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아왔기에 모든 일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총회를 위해 황상교회 성도들의 힘에 겨운 헌신과, 노회장님과 노회준비위원들을 비롯하여 경북노회 여전도회의 섬김과, 경주선교교회와 경북노회의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한마음으로 섬김으로써 무사히 총회를 마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감사드리며 신옥주 측의 방해에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웃에 있는 다른 교단 목사님께서 헌금해주셨으며 서울에 있는 교회에서도 헌금을 해주셔서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합신 총회가 추구하는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을 든든히 지켜가는 제100회, 또 제101회 총회가 되며, 진리의 거룩한 입맞춤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증거하는 합신 산하 모든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1127 no image |제100회 총회 참관기| 합신의 위치와 장로교 정체성 회복의 필요성_가정호 목사
편집부
1802 2015-10-06
합신의 위치와 장로교 정체성 회복의 필요성 < 가정호 목사, 세대로교회 > “우리 헌법에 명기된 대로 장로교회다운 신앙의 실천을 먼저 점검해야” “신앙고백과 총회 소집문에 입각하여 믿음의 승리 구하는 기회 삼기를” "우리가 저들보다 나은게 무엇이냐? 바로하겠다고 나와서 뭘 얼마나 바로했나?" 이 말은 이번 총회중에 의장에게 언권을 얻어 발언자로 나선 한 총대께서 의견을 개진하기 전에 던진 질문이었다. 사실 그의 이 과격한 발언은 단지 그분만의 발언이 아니라 고뇌에 빠진 합신 사역자들이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이기도 하다. 단순히 타교단과 비교우위를 통해 그들보다 조금 나은 부분이 있어 어떤 자부심을 갖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이라면 이는 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원로가 된 박영선 목사님께서 수시로 도전하는 “우리가 뭘 얼마나 바로 했는가?”라는 이 질문은 깨끗하고 바른신학, 바른목회, 바른 생활을 실천한다고 외쳐온 우리가 이 땅의 교회들을 얼마나 바른길로 인도했는가에 대한 자책성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들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그래서 우리가 저들보다 뭔가 좀 낫다면 그게 어떤 의미인가? 그래서 합신 총회는 교회의 순결성과 신학의 정통성을 회복시키고 또 그것을 지키는데 어떤 영향력을 끼쳤는가? 1. 시급한 장로교 정체성 확립 총회 안에서 우리 내부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일들, 이를테면 우리 헌법에 명기된 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신앙고백서와 대소 교리문답, 예배모범)를 근거로 한 목회가 얼마나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다루는 문제들을 제쳐둔 채 합신 총회와 이대위가 누군가를 이단으로 결정하는 자리에 서슴없다는 점을 걱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며 성도들의 일상을 송두리째 파멸에 이르게 하는 명징성이 드러난 집단에 대한 이단 판정은 시급하게 실행해야 할 일이다. 합신 총회 산하에 이미 두날개 선교회의 교회 체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접목하고 있는 교회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이 단체를 99회와 100회기 두 번의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하자는 말은 한국교회의 정황과 형편에서 지나친 단순함이 아닐까? 그렇게 하기로 한다면 이 땅에 19세기 경건주의나 웨슬레주의 영향으로 파생된 오순절 신학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교회들이 얼마나 있단 말인가? 한 개혁교회 연구가는 “한국교회는 모두 이단성이 있다”는 냉소적인 중얼거림이 늘 필자의 뇌리에 맴도는 것은 그의 비명 같은 외침이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두날개 선교회가 이단성이 명백하다면 거기에 참여한 교회들을 단번에 치리하는 것이 제대로 된 결정이 아니냐고 서슬 퍼렇게 힐문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두날개 선교회가 정확하게 이단이라면 원론적으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우리와 다른 신학이나 심한 혼합주의에 빠진 일련의 단체들에 대하여 급거히 이단판정을 내릴 만큼 당당한가? 그러기 전에 우리 총회는 합신소속 지역교회들이 헌법에 명기된 대로 장로교회다운 신앙의 실천에 대하여 점검해 봐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교회들의 신학실천현장의 심각한 문제들을 명백하게 증명해 내는 일이 전제되지 않고 우리 이웃들의 신학이 가진 이단성에 대하여 시시비비하는 일은 우리자신이 공격을 당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2. 두날개 보고서에 대한 총회 결의 이번 100회 합신 총회 산하기관인 이단대책위원회가 이단성이 의심되는 단체나 교회들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여 노력해 온 기관임을 확인하였다. 총회회원들은 이대위의 수고와 노력에 대하여 신뢰를 보냈다. 그리하여 이대위가 보고한 안건들을 총대들은 높은 긴장수위를 유지하며 신학적으로 목회적으로 의논을 하여 최선의 결론을 내렸다. 꼭 총대가 앞에 나와 발언되어진 부분만이 의논의 전부는 아니다. 한 총대는 이대위의 조사 결과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어떤 단체나 교회의 이단성을 검토하는데 있어서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우리의 헌법에 명시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어떤 조항에 얼마나 어긋나는 점이 있는지를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 옳다. 이는 이대위의 연구물에 대한 적절한 지적이며 올바른 의견이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회원은 1981년 제66회 총회 소집시 결의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총회 소집문 제 1,2,3,4항에 근거하여 매회 총회가 올바르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냉정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참으로 옳은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에게 편리하게 해석하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이번 합신 총회의 결의가 세계비전 두날개 프로세스에 대한 이단성에 대하여 면제부가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언론이나 다양한 뉴스매체에서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결의된 내용을 스스로 폄훼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합신 총회는 두날개 선교회에 대한 조사연구에 대한 보고서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그 선교회가 주장하는 내용들의 심각성에 대하여 분명히 언급하였다. 그것은 이미 문서화된 결의안에 담겨져 있다. "총회에 소속한 모든 교회에 대해서 신앙교육의 신학적 깊이와 균형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총회가 확인하고, 더욱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고 승리할 것을 간절히 구하는 기회로 삼기로 하다." 이 결의안은 결코 두날개 그룹에 면제부를 부여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있거나 이웃 교단과의 갈등을 피하려고 분칠한 것이 아니다. 이 안에는 중대한 내용을 함의하고 있다. 3. 총회 결의안에 담긴 의미 "신앙교육의 신학적 깊이와 균형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내용은 신학적 깊이가 너무 빈약하여 깊이 있는 균형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신앙교육의 심한 불균형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큰 문제가 야기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몸통을 지지해 주는 두 날개에 균형을 심하게 잃으면 추락한다. 두 날개가 급거히 균형회복을 시도하지 않으면 추락하고 말 것이라는 경고인 셈이다. 애써 부연하면 "신학적 깊이가 절실히 요구된다"라는 말은 신학적인 고민이 너무 얕아서 도무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대로 두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된다는 말이다. “그 운동에 신학적인 균형이 절실하다"는 말은 균형 회복이 안 되면 필경은 추락할 것이니 결과적으로 양떼들이 생명을 잃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전체 문구 중에서 “절실하다”는 말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절실하다는 말은 그저 조금만 회복되면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이 회복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고 믿음이 승리할 것을 간절히 구하는 기회로 삼자"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들을 의존하는 잘못된 의존성을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과 개혁을 추구하는 총회 소집의 근거 조항에 입각하여 믿음의 승리를 구하는 기회로 삼자는 말과 다름이 아니다. 총회에서 자기의 의견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인내함으로 사랑을 더하여 진리를 말하며,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번 총회에서 고뇌하는 총대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총회에 참석한 일원으로 적지 않은 보람이 있었다. 4. 마치는 말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100% 정합성을 가진 결론이 나왔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더 분명하고 명징성이 높은 수준의 판정과 결과물이 나오기를 기대했던 분들에게는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겠다. 그러나 합신이 이단 판정을 하는데 있어서 발 빠르게 움직이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바른 신학을 수호하고 무엇이 장로교회의 정체성에 근거를 둔 교회인가에 대한 정통성을 세워가는 일에 더 안타까워하고 호소하는 일이 절실할 것이다. 이단을 명징성 있게 가려낼 정통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논쟁은 의미 없는 말다툼의 반복일 뿐이다. 우리 합신교단이 역사적 전통에 입각한 장로교와 개혁신학을 더 깊이 있게 드려다 보고 그 올바른 신학을 목회에 치열하게 적용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른 신앙을 드러내는 일에 쓰임받기를 격렬하게 소망한다.
1126 no image |제100회 총회 참관기|걱정하던 합신 총회, 너끈히 감당한 100회 총회_남웅기 목사
편집부
1599 2015-10-06
걱정하던 합신 총회, 너끈히 감당한 100회 총회 < 남웅기 목사, 바로선교회 > “합신이 건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힘에도 굽히지 않는 의지 때문” 합신 제100회 총회는 우리에게 그 이름값을 요구했습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대가를 필요로 하는 값비싼 총회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결정적인 대목이었습니다. 개회를 앞둔 며칠 전 작년 총회에서 이단으로 결의된 신옥주 측에서 기습시위를 벌일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됐습니다. 그들은 이미 금년 교단신년교례회 현장에 난입하여 소란을 피운 바 있어 과연 총회가 제대로 진행될지 누구나 걱정하던 상황입니다. 그러나 총회에 대한 우려는 이미 지난 봄, 이단대책위원회가 두날개 측에 대한 공청회를 열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두날개 측의 날선 반응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미 두날개에 관여한 교단 내 50여개 교회의 반발이 예상을 뛰어 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내외로부터 비난에 직면한 이단대책위원들이 결국은 책임을 지게 될지 모른다는 설이 나돌면서 분위기는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제100회 총회에 대한 걱정은 사실 만 2년 전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제98차 총회에서 우종휴 목사가 부총회장에 피선되자, 그에게 표를 던진 총대들조차 곧바로 삼삼오오 모여서 걱정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해당 총회장 교회가 제100회 총회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건 당시 누구나 알고 있던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2년 전 그때, 필자가 ‘우리가 줄곧 부를 노래’라는 총회 참석후기를 쓴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 노래의 제목은 ‘하나님이 계시잖아!’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합신 제100회 총회는 개회 일부터 과연 시끌벅적했습니다. 신옥주 측의 시위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이크 소리와 펄럭이는 현수막과 험악한 기세는 이날 속속 입장하던 총대들의 마음을 위축되게 만들었습니다. 총회가 열리는 호텔 경내에선 경찰 기동대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고, 경북노회는 출입자들의 신원확인으로 총회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염려는 염려로 끝났을 뿐, 그들은 이튿날까지 시위를 반복했지만 총회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국가공권력의 소중함을 체험하게 된 기회였습니다. 합신 제100회 총회가 이처럼 물리적 충돌 없이 평화 총회가 된 데에는 경찰기동대의 수고와 자원봉사에 나선 몸을 아끼지 않은 많은 목사님들의 헌신 때문인 줄 압니다. 그러나 정말 걱정스러운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이단대책위원회와 두날개’의 날 선 진리공방이 교단내의 갈등으로 번졌기 때문입니다. 총대들의 마음도 갈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갈등을 봉합하는 새로운 제안이 채택되었습니다. 모두를 만족케 할 순 없었지만 발의자 스스로 신의 한수라고 했을 만큼 절묘했습니다. 그런즉 지혜 자가 아니면 해석의 늪(?)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양측을 다 살려내는 게 신의묘수입니다. 제 논에 물대기 식의 자기해석은 스스로의 미련함을 드러내는 부끄러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금번 총회의 시작과 끝은 단연 이단대책위원회였습니다. 처음엔 무슨 불법이라도 저지른 단체인양 거론되던 저들이었지만 나중엔 대다수 총대들의 마음을 사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대위가 무슨 잘못을 했나? 합신 총회가 하는 일엔 귀 기울이는 이 없지만, 합신 이대위가 발표하면 교계가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는가!” 발언하던 인천노회 아무 총대의 회의말미 모습은 상징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주께서 장로회 제100회 총회를 기해 합신을 주목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어떤 큰 힘에도 굽히지 않는 의의 추종자들 덕분 아니겠습니까? 한 가지 유감은 합동 총회가 두날개 문제로 합신 총회에 엄중경고한 점입니다. 다툼에서 의와 폭력의 구분은 그 대상의 강약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저들의 무례함은 많은 총대들의 공분을 사게 됐습니다. 총회장을 섬긴 교회의 헌신, 노회의 협조, 총회의 배려는 한 폭의 그림이었습니다. 약한 자로 하여금 제100회 총회를 너끈히 감당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125 no image |제100회 총회 참관기| 성숙한 총회의 운영을 위하여_윤석희 목사
편집부
1615 2015-10-06
성숙한 총회의 운영을 위하여 < 윤석희 목사, 천성교회 > “우리 교단이 한국교회를 짊어지고 나가는 실력 쌓은 계기 되기를” 제100회 총회가 2015년 9월 22일부터 24일까지 경주에 있는 코모드 호텔에서 열렸다. 모든 총회가 다 하나님 앞에 모인 총대들의 모임이지만 이번 총회는 ‘100회’라는 의미에서 뜻깊은 총회였다. 열린 장소 또한 경관이 수려하고 건물도 현대식이었다. 제100회 총회에서는 좋은 결정도 많이 했다. 수고하신 임원들과 총대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어 지적해 본다. 첫째, 성숙한 총회 운영을 위하여 회장을 비롯하여 모든 임원들이 좀 더 헌법 수호와 회의법을 숙지하여야 한다. 상비부의 보고나 회원의 발언 도중에 ‘잠깐만요, 잠깐만요’하면서 간식 광고를 하거나, 바쁜 사람이 있으니 보고를 하자는 것, 회의 도중에 임원이 나서서 발언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회의 운영 방법이 아닐 것이다. 서기부나 임원이 발언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회중이 헌법이나 회의법에서 벗어나거나, 올바른 헌법 정신이나 회의법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발언할 수 있다고 본다. 과거의 역대 임원들은 금식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하고 의로운 결정을 위하여 기도와 말씀에 수종들려고 노력했었다. 의장이나 임원들은 원만한 회의 진행을 돕기 위해 있는 것이지 그 자리에서 어느 특정한 사안에 자기 의견을 피력하거나 관철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모든 총대는 회의 이전에 웬만한 헌의안을 숙지하고 연구하여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회의에 임해야 할 것이다. 막상 안건이 상정되고 동의와 재청이 있고 난 후에 장황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냥 내 의견입니다’라는 식의 발언은 회의 진행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의장이 동의안과 관련해 묻지도 않았는데 그 동의안에 관련하여 총대들을 가르치려드는 자세의 발언 등은 다른 총대들에게 결코 기쁨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회의 진행을 방해할 따름이다. 회의에서는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 개의 있습니다, 재개의 있습니다’ 등의 발언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회의 참석자들은 원활한 회의의 진행을 위한 발언을 하는 것이 옳다. 셋째, 좋은 목적은 좋은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회의를 한다면 좋은 일을 위하여 좋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정상적일 것이다. 회의 절차를 무시하거나 예의에 어긋나는 발언이나 과격한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총회의 분위기를 어둡게 하고, 나중에는 후유증도 따르게 만든다. 훗날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면 ‘전례가 있다’는 미명 아래 똑같은 방법을 쓰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좋은 일을 위하여, 더 좋은 목적을 위하여 성령을 의지하고 법과 원칙을 지켜서 결정하는 것이 성숙한 총회 발전은 물론이고 모든 총대와 교회의 기쁨이 된다. 넷째, 3일 동안 심혈을 기울여 상대방의 의견을 청취하려고 하는 총대들, 발언 한마디 하지 않고 끝까지 참석하는 모든 총대들을 생각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총회는 몇 사람의 의견을 모으는 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발언을 많이 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소수 사람들의 발언대처럼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다수가 말은 하지 않지만 다 생각이 있고 경험이 있으며, 연륜과 경륜이 있는 총대들이다. 다섯째, 우리 총회에서는 철저하게 무기명 비밀 투표를 통해 일꾼들을 선출하는 선거 방식으로 진행된다. 무기명 비밀 투표란 현장에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총회를 앞두고 혹은 선거를 앞두고 미리 누구를 지목하거나, 누가 되어야 한다거나 하는 등 사전 선거 운동을 하지 않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무기명 비밀 투표라 해놓고 사전에 누구는 어디에 적합하다는 식의 사전 선거 운동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선거 방식이 아니다. 우리 총회 총대들은 누구나 선거권을 가짐과 동시에 피선거권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식의 사전 선거 운동과 같은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특별히 특정한 집단에서 논의나 혹은 협의 등을 통해 사전에 어느 특정한 인물을 선정한다는 식으로 무기명 비밀 투표의 본의를 헤치는 일들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보다 어느 특정 직무나 기관에 특정한 사람을 지목해서 밀어붙이는 것은 무기명 비밀 투표를 무색하게 하는 일로 이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누구든 현장에서 무기명 비밀 투표나 혹은 추대 방식으로 일꾼에 선출되거나 선임되는 것이 우리 총회의 오랜 전통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가능하다면 교단을 향한 공헌이나 충성도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례교인분담금을 비롯해 여러 행사 때마다 적극 참여하고, 각 상비부원이나 임원 등으로 헌신하고 봉사해 온 분들의 수고를 결코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상의 내용들을 숙지함으로써 우리 교단이 더욱 성숙해지고 한국교회를 짊어지고 나갈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124 no image |반론문| 이대위의 활동을 ‘이단 조작 운운’하는 것은 총회에 대한 모독_안상진 목사
편집부
2697 2015-09-22
이대위의 활동을 ‘이단 조작 운운’하는 것은 총회에 대한 모독 < 안상진 목사, 총회 이단대책위원장 > <이 글은 2015년 9월 12일자 기독교개혁신보 제704호 4면에 게재된 두날개측 박기성 목사의 “Fact(사실)에 근거한 합신 이대위의 ‘총체적 참사’에 대한 분석”에 대한 합신 이대위측의 반론으로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98회 총회 때 수임 받은 '두날개'에 대한 보고서를 마침내 100회 총회를 맞이하여 보고를 하게 되었다. 총회이대위원들 관심은 오직 교단 내 교회에 침투해 있는 이단 혹은 이단 의혹 대상으로부터 교단과 교회를 보호하고 지키는 일로서, 맡은 사역에 충실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작은 논쟁과 충돌이 또한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특별히 '두날개'를 시행하고 있는 교단 내 교회들과 목회자들께서는 '두날개'의 문제를 인지한 가운데 시행하고 있을 리가 없고, 목회 현장에서의 고민을 풀어가는 중에 필요한 부분들을 도입하여 활용하였을 것임이 틀림이 없다. 그렇기에 이대위의 연구 및 조사의 목적 중 하나는 교단 내 '두날개' 관련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두날개'에 대한 정체를 알림으로써,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데 있었다. 이번 보고서가 그러한 바람에 충족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특히 보고하는 과정 속에 몇몇 원로 목사님들께서 아름다운 총회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중간 입장에서 어려운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양쪽의 의견을 동일하게 듣고 객관적 판단을 내려, 화합을 위해 주신 진언은 이대위 사역을 하는 동안 귀한 지침과 교훈이 될 만한 말씀으로 마음에 담아 간직하고자 한다. 다시 한 번 이대위의 특성상 수임 받은 질의에 대한 내용에 충실한 보고서를 올리고자 하였음을 알리며, 그동안 '두날개'측과 있어 왔던 개혁신보를 통한 서로의 의견을 개진함에 있어서 내용보다는 절차상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공방을 하던 차에, 박기성 목사의 글이 총회이대위의 보고서 내용에 대한 반박적 틀을 갖추었고, ‘두날개'의 공식적 입장이라 하였으므로, 박기성 목사 글에 대한 이대위의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박기성 목사의 “Fact에 근거한 합신 이대위의 총체척 참사에 대한 분석”이라는 글에 대한 반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프로그램에 대하여 신학적 검증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합신 이대위의 공청회와 총회 보고 과정에 대하여 두날개 측에서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문제는 두날개에 이단성이 있는지를 가리는 신학적인 문제인데, 두날개 측은 이 문제를 합동과 합신 교단 간의 갈등, 그리고 합신 교단 내의 위원회 간의 갈등 문제로 이끌어 가려고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합신 이대위에서는 총회에서 위임받은 “두날개 시스템의 이단성 조사”에 대한 사항을 성실하게 준행하는 과정으로 ‘두날개’의 실체를 파악해서 그 문제점을 총회에 보고하는 것이고, 총회에서는 회의를 통해 어떤 규정을 하고 방침을 정하여 총회산하 교회로 하여금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두날개 시스템을 적용하고 있는 교회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총회의 모든 기관은 교단 교회를 보호하고 바른 신앙을 수호하기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 목적이다. 합동 측 정서를 가지고 우리 합신 교단의 정서를 이해하려니 아마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 개인이 그것도 외인으로서 합신 총회의 이대위와 총회치리협력위원회의 관계를 거론하고 있는 것은 우리 합신 총회를 크게 오해한 것이다. 박기성 목사는 Fact(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며 합신 이대위 공청회에서 발제자였던 김성한 목사와 박형택 목사가 제시했던 내용들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고, 심지어 이단옹호언론의 조작 기사까지 인용하면서 합신 이대위가 악행을 행한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사법적인 처벌까지 운운하며 협박성 글로 합신 이대위원들의 위상을 깍아내리고, 인격적 비하도 서슴치 않았다. 박기성 목사의 글을 보면 그가 과연 김성곤 목사의 책과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았는지 의심된다. 합신 이대위가 아무 문제가 없는 두날개 시스템을 근거 없이 조작한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목조목 반론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Fact 1,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라는 말에 대하여 김성한 목사가 주장하는 내용 자체를 박기성 목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김성한 목사는 풍성한교회가 교회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며 당회나 제직회를 무력화시키고 목사를 중심으로 슈퍼 디렉터, 디렉터, 슈퍼 셀리더, 셀리더 순으로 피라미드식 제도를 내놓은 것에 대하여 그 위험성을 지적한 내용으로서 언제 당회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박기성 목사는 김성곤 목사가 2009년에 위임식을 했기 때문에 2002년에는 당회가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김성한 목사가 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거짓말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2002년에 당회가 없었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 교단 헌법 정치편에서 보는 대로 교회는 어떤 형식으로든 당회가 조직되어 있어야 한다. 박기성 목사의 주장대로라면, 김성곤 목사가 2009년에 교인 수 3,000명에 장로 1인을 세우고 당회를 구성한 것은 오직 위임목사가 되기 위한 요식행위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Fact 2, 허위사실 적시에 따른 사법적인 처벌이 가능한 주장이라는 점에 대하여 박기성 목사가 법률적인 용어까지 사용하면서 김성한 목사가 지적한 내용이 법률을 위반한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김성한 목사가 지적하는 내용은 두날개가 지금까지의 한국교회 설교를 철학적이요 율법적이어서 질책과 정죄하는 설교가 주를 이루었다는 전제하에 두날개가 원하는 축제예배로 즐거움과 기쁨과 참 평안을 주는 설교로 전환해야 한다는 내용에 대한 것이다. 즉 축제예배를 드리게 되면 회개와 성화를 위한 설교 내용이 사라지기 때문에 개혁주의 교회의 설교로서는 합당치 않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비판을 가지고 “대국민 사기극, 악행, 신학적 살인, 목사의 자격정지를 당하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이라는 표현까지 쓴 것은 이단 연구가로서의 합당한 태도가 아니다. Fact 3, 자신이 제시한 자료의 내용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한다는 거짓말에 대하여 두날개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성곤 목사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문제가 잘못된 신학 곧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은 신학 그리고 사도행전의 역사는 끝났다고 주장하는 신학 사상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그의 책에서 밝히고 있다. 결국 이러한 논리는 기존 교회가 잘못된 신학을 가졌다는 전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김성한 목사는 기존교회를 “잘못된 신학 위에 세워진 교회로 공격한다”고 한 것이다. 실제로 개혁주의 신학이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신학인가? 사도행전의 역사는 끝났다고 주장하는가? 그럼에도 기존교회가 다 그런 것처럼 김성곤 목사가 글을 쓴 것은 자신의 신사도적 은사주의 입지를 세우기 위하여 기성교회를 공격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Fact 4, 총회신학위 보고서의 G12나 셀교회가 두날개와 동일하다는 엉터리 주장이라는데 대하여 박기성 목사는 총회신학위 보고서에 G12와 두날개의 사상이 같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데 박형택 목사와 김성한 목사가 두날개와 G12나 셀교회의 사상이 같다고 하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두날개의 셀과 G12의 셀이 다른 것이며 풍성한 교회는 지금까지 소개된 셀과는 전혀 다른 한국형 토종 셀교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국민일보 기사까지 인용하고 있다. 이단적인 셀교회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김성곤 목사가 줄곧 주장해 온 내용이다. 박기성 목사는 합신 이대위가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를 못하는 것같다. 합신 이대위는 “신학위 보고서에 셀교회와 두날개가 같다는 내용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신학위원회에서는 2003년에 “G12에 대해서 위험한 사상이 있다”고 발표하였는데, 합신 이대위가 살핀 바에 의하면 신학위원회가 지적한 위험한 사상들이 두날개 시스템에도 똑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신학위원회의 보고에 의하면 G12의 핵심 인물은 “빌 백햄과 랄프 네이버”이다. 그런데 김성곤 목사의 “두날개로 날아오르는 건강한 교회”라는 책(p.147-149)에 보면 김 목사 자신이 “빌 백햄과 랄프 네이버의 셀 이론”을 만났다고 하면서 빌 백햄과 랄프 네이버의 셀교회 이론이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랄프 네이버와 빌 백햄의 셀교회 이론과 두날개 시스템의 셀 이론을 박기성 목사는 전혀 모르는 것같다. 그 사상이 같은 지 다른지 알았다면 이러한 악성의 글로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2009년 통합측 보고서에는 “G12와 두날개는 그 목적과 방법이 유사하다”고 밝히고 있으며, 2008년 합동측 신학부 보고서에는 G12가 이단성이 있다고 발표했다. 합신 이대위는 G12와 두날개가 교리적으로 유사하다는 많은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 김성곤 목사 자신이 스스로 G12와 '두날개'의 유사성을 인정하며, 2015년 3월 3일 ‘교회와 신앙’에 다음과 같이 사과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래를 펼쳐가는 과정에서 몇 가지 신학적인 오해와 오류들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바입니다. 예를 들면 다락방, 신사도운동, G-12의 문제점에 대하여 이단 전문가들의 지적을 받아들여 그 동안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두날개'의 교육 교재를 수정하여 재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두날개'의 사과 성명문> Fact 5, 삼위일체 존재방식이 공동체적 존재라는 교리가 있다는 거짓된 주장이라는 말에 대하여 박기성 목사는 “합신 이대위가 김성곤 목사를 삼위일체를 부정하며 삼위일체 이단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말로 김성곤 목사의 주장을 변론한다. 박기성 목사는 김성곤 목사의 책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김성곤 목사는 “셀 그룹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 셀그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을 닮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김성곤 목사는 “삼위 하나님은 공동체로 존재 하신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예수님이 이 공동체에서 분리된 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 “두날개의 셀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 공동체라고 주장한다. '두날개'의 교재에 나오는 다음 내용을 참고하기 바란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공동체로 존재하신다.... 주님의 십자가의 가장 큰 고통은 죄로 인한 공동체의 관계에서 분리되는 것이었음. 그래서 십자가로 인해 그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임”(두날개 양육교재 강사자료). <위 내용은 김성곤 목사가 G12 랄프 네이버의 책 “셀교회지침서” 153쪽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셀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의 임재와 능력과 목적을 체험한다.” “당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게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문안 인사 합니다.” <제자의 삶 66쪽> Fact 6, 박형택 목사는 언론에서 시비하듯 메시야 과정설을 주장하는 이단인가?라는 말에 대하여 “박형택 목사는 <메시야 과정설>을 주장하는 이단”이라고 이단옹호자로 규정된 황규학씨(통합측)가 이단옹호언론 <법과 교회>에 글을 올렸고, 신옥주를 옹호하는 어떤 인사가 합신의 신옥주에 관한 보고서를 보고 그 내용이 삼신론이라고 공격하였다. 박기성 목사는 이단옹호자들이 만들어낸 말을 가지고 합신 이대위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박형택 목사는 김성곤 목사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예수님은 창조주요 하나님이신데 피조물인 마귀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할 수 있느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 마귀와 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 시험을 받은 것으로서 이것은 메시야로서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설명하였다. 이것이 메시야 과정설인가? 이것이 시험받기 전에는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었다고 말한 것인가? 이단옹호인사는 여기서 메시야 과정설을 조작한 것이다. 이단옹호인사는 이미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에게 “메시야과정설 조작”에 대하여 고소를 당한 상태이다. 신옥주 이단에 대한 합신 이대위 보고서에는 신옥주의 양태론적 삼위일체를 비판하고, 정통교회의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인 동일성과 인격적 구분”을 말하였다. 그런데 신옥주 옹호자는 “구별”이 맞는데 “구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삼신론이라고 하였다.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이나 여러 조직신학자들이나 심지어 칼빈 기독교강요에도 구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합신 보고서는 이를 인용한 것이다. ‘구분’이라는 용어를 ‘구별’과 다른 뜻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Fact 7, 왜곡된 거짓으로 두날개가 마치 이단성이 있는 것처럼 모함하는 참소라는 말에 대하여 박기성 목사는 두날개가 신사도운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다락방과 베뢰아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합신 이대위가 모함하고 왜곡한다고 주장한다. 합신 이대위는 오랜 기간 두날개에 대하여 면밀하게 조사하고 연구했다. 이단문제는 말로하는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를 가지고 결정한다. 합신 이대위는 충분한 자료와 근거를 가지고 정확하게 분석하고 비판했다. 합신 이대위는 총회의 결의를 따라 성실하게 연구하고 보고서를 총회에 올릴 뿐이다. 마치는 말 정상적인 총회 이대위의 활동을 이단 조작 운운하며 이단 조작자로 매도하는 것은 총회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 합신 총회 이대위는 보고된 내용 외에도 제보자들을 통하여 두날개에 관하여 많은 잘못된 내용들을 알고 있음에도 한국 교회를 생각하며 인내하고 있을 뿐이다. 김성곤 목사의 총회 이대위 공격 행위는 오히려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라 여겨질 수 있다. 합신 이대위는 2년 동안 '두 날개'의 모든 책과 10여 년 동안 사용된 교재를 수집하여 연구하였으며, 많은 증인들과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증언을 들었다. 합신 이대위의 보고서는 객관적이며 정확한 보고임을 재차 밝히는 바이다.
1123 no image |긴/급/진/단| 목사의 이중직 금지 제도에 대한 실천적 이해_손재익 목사
편집부
1924 2015-09-22
목사의 이중직 금지 제도에 대한 실천적 이해 <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 상식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목사가 굳이 직업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복잡한 교회 현실과 원리가 사라진 시대 속에서 ‘목사의 이중직 허용’이라는 주장이 마치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원리’인 듯 생각되고 있다. 1. 현실에 대한 바른 이해의 필요성 현실 때문에 원리가 잠식(蠶食)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왜 목사의 이중직 논의가 발생하게 되었는가?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상당수의 목사들이 부족한 생활비로 고통받고 있는 현실에만 초점을 둔다. 하지만, 우리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왜 목사들이 합당한 생활비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 되었는가?”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교회의 양극화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평균케 함의 원리’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어떤 교회는 1년 재정이 몇 백억이지만, 어떤 교회는 1년 재정이 2천만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목사를 위해 넉넉한 생활비를 제공하기 어렵다. 게다가 상당수의 교회들이 재정적인 측면에서의 미자립교회라는 사실은 원리를 제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현실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에 있다 하더라도 공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다면 현실은 충분히 극복될 수 있고, 원리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다. 공교회의 정신에 따라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교회는 마땅히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회를 도와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원리를 실천할 수 있다. 또 하나 무분별한 교회개척 때문이다. 장로교 원리상 교회의 개척은 노회의 소관이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노회는 교회개척을 위한 목사를 ‘전도목사’로 파송하면서 생활비 지원을 약속하게 되어 있다. ‘전도’ 활동이 끝나 교회 ‘개척’이 종료할 때까지 노회는 목사의 생활비를 책임지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러한 현실이 왜곡되어 목사 개인이 일단 교회를 개척한 뒤에 노회의 허락을 받는다. 물론 사후 허락을 원천 봉쇄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후 허락이 보편화되다보니 충분한 여건이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들이 많아지고, 결국 합당한 생활비를 교회(노회)로부터 받지 못하여 다른 직업을 함께 가져야 할 형편에 놓인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현실들’은 오늘날 목사의 이중직을 허용해야 한다는 새로운 ‘원리’를 만들게 되었다. 그래서 ‘목사의 이중직 허용’을 주장하는 것은 ‘현실’을 반영해 달라는 것이지, ‘원리’가 그러해야 한다는 주장이 될 수는 없다. ‘목사의 이중직’을 허용해 달라는 분이나 이 주장에 대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분들은 목사의 이중직 허용이 ‘원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2. 원리와 현실 사이에서 원리와 현실, 그리고 제도가 있다. 제도는 기본적으로 원리에 근거한다. 그러면서 때로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이 때 원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한다. 원리를 무시하고 현실만 반영한 제도는 시행되면 될수록 문제점이 드러나고 결국 원리를 잃게 만들고 현실을 악화시킨다. 원리에 근거한 제도가 남아있을 때에는 그나마 원리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할 텐데, 현실에 근거하여 제도를 바꾸어 버리면 원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목사의 이중직 금지와 목사 생계에 대한 교회의 책임은 원리이다. 목사에게 합당한 생활비를 제공하기 어려운 교회와 생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목사들이 있다는 사실은 현실이다. 이러한 원리와 현실 사이에서 현재의 제도는 원리에 근거한 제도이다. 원리를 지키기 위해서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 따라 제도를 바꾸어 버리면 원리가 사라질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목사의 이중직 허용을 주장하는 분들의 의견대로 원리보다는 현실에 따라 제도를 바꾸면 어떻게 될까? 가까운 시점에는 생계의 위협을 받는 목사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생계를 충분히 책임지지 못하는 교회의 부담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원리가 훼손되고 현실만 남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현실마저도 더 악화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 악화될까? ① 재정적으로 넉넉한 교회가 그 책임을 기피하게 될 것이다. 공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을 개인에게 미뤄버릴 것이다. ②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요구할 것이다. “다른 교회 목사는 자신이 직접 생계를 책임지는데 왜 우리교회 목사는 교회가 생계를 책임지는가?”라고. 그래서 “형편이 어려운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져도 되느냐?”의 문제가 아닌 “목사도 자기의 생계를 자기가 책임져라”는 방향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충분한 재정적 능력이 있는 교회마저도 목사의 생활비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소홀히 하게 될 것이다. ③ 그 결과 원래는 이 제도와 상관없는 목사들마저 일터로 내몰릴 것이다. ④ 어떤 교회는 ‘부자 목사’를 원할 것이다. 일하지 않아도 자기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으면서도 일하지 않기 때문에 목사직에 전념할 수 있는 목사를 청빙하려고만 할 것이다. ⑤ 목사이면서 다른 직업을 가지려는 분들이 아니라 다른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목사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목사라는 직분이 전적으로 감당해야만 가능하다는 의식이 점점 사라지면서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⑥ 위에서 언급한 모든 일들이 확산되어 교회 전체가 말씀에서 멀어지고 목사직의 세속화로 이어질 수 있다. 3. 목사의 이중직 금지는 교회를 위함이다 공무원이나 사기업의 사원들에 대해서 이중직을 금한다. 공무원의 경우 국가공무원법 제64조(영리 업무 및 겸직 금지) 제1항과 국가공무원 복무규정 제25조 (영리 업무의 금지)에 의하면 다른 직을 겸할 수 없다. 그 이유 중에는 공무원의 직무 능률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있다. 대부분의 사기업은 직원들이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것을 금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기업에 해가 되기 때문이다.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그렇게 될 때에 목사로서의 직분을 감당함에 있어서 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결국 교회로 돌아오게 될 것이고, 교회를 말씀의 터 위에 든든히 세우는 일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리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있다. 이 때 원리는 잘 보존해야 한다. “목사의 이중직 금지”라는 원리를 제도화한 현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면서 현실에 따라 이 제도를 탄력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교회는 최대한 목사의 생활을 책임지도록 하는 일에 힘쓰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직업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예외적 허용’을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제도를 바꿔서가 아니라 제도는 그대로 두되 그에 대한 적용을 통해서 해야 한다. 그리고 목사들도 부득이한 이유 때문에 다른 일을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일은 부차적인 것이지 절대로 주(主)가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임시로 다른 직업을 겸하는 것이요 부업으로서 갖는 것이지, 그 직업이 주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될 때에 교회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원리를 쉽게 잃어버릴 것이다. 결론 안타깝게도 직분과 교회에 대해 바르게 가르쳐야 할 교회의 교사인 목사들이 나서서 이중직을 공식적으로 허용해 달라고 한다. 그리고 목사의 이중직 허용이 결국 목사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임을 모르고 있다. 목사의 이중직 금지는 목사의 생계를 위협하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의 귀한 전통과 유산이요 목사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이다. 목사로 하여금 생업 전선에 내몰리지 않게 함으로써 목사의 직분과 직무를 보호하고, 목사 개인을 보호하는 제도이다. 또한 교회로 하여금 교회가 감당해야 할 마땅한 책임을 다하게 함으로써 목사직의 성실한 수행을 통해 교회가 보존되게 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지만, 목사의 이중직 금지는 목사와 교회를 위한 제도이다.
1122 no image |긴/급/진/단| 목사의 이중직 금지 제도에 대한 교회론적 이해_손재익 목사
편집부
1945 2015-09-08
목사의 이중직 금지 제도에 대한 교회론적 이해 <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교계에 이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이 문제는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든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로서의 근로의 의무(대한민국 헌법 32조)가 있고, 직업선택의 자유(헌법 15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총회)가 목사에게 “직업을 가지지 마시오”라고 강제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역시 이 문제는 이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이유와 전혀 달라야 한다. 바로 “목사가 굳이 직업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도 목사들이 다른 직업을 겸직할 수 있게 공적으로 결의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1. 목사라는 직분자들이 다른 직업을 갖지 않았던 이유 정상적인 성인은 모두 다 직업을 갖는다. 부득불 일할 능력이 없거나 일자리가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든 직업을 갖고 자신의 일을 해 나간다. 그런데 왜 목사들은 직업을 갖지 않을까? 그 이유는 목사라는 ‘직분’이 감당해야 할 ‘직무의 독특성’ 때문이다. 목사의 직무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들’이다(딤전 5:17). 또한 그리스도의 양떼를 살피는 자들이다(행 20:28). 이와 더불어 장로교 헌법(합신, 고신, 합동)에 의하면,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 찬송을 지도하는 일, 성례를 거행하는 일, 교인을 심방하는 일, 교회를 치리하는 일 등을 해야 하는 직분자이다. 그런데 이 일들은 영적으로도 무거운 일이지만 물리적으로도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 일이다. 남는 시간에 틈틈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요구되고 연속성이 요구된다. 그러다보니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남는 시간들을 잘 활용하여 직분을 수행하기가 쉽지 않다. 이 일에 수고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남의 일처럼 쉽게 “그 일이 뭐 그리 힘들다고”라고 말할 수 있으나, 목사의 일을 감당해 본 모든 사람들은 잘 알듯이 물리적인 시간이 많이 요구되는 일임에 틀림없다. 특히 목사의 직무 중 가장 핵심적인 ‘설교를 준비하는 일’만 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요구된다. 목사는 ‘직업’이 아니다. ‘직분’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목사는 ‘무직’이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 봉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직분은 봉사직이요, 목사도 마찬가지며, 목사 외의 다른 항존직원인 장로와 집사도 자신의 직업을 갖고서 직분에 수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사직은 다른 직분과 달리 무직 상태에서도 쉽게 감당하기 힘든 직분이다.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만 힘쓰겠다는 사도들(행 6:4)에 비해서 더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 직무이다. 이렇게 목사라는 ‘직분’이 갖고 있는 ‘직무의 독특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목사는 ‘직업’을 갖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2. 목사에 대한 생계를 교회가 책임져 왔던 이유 직업이 없다는 것은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직무의 독특성 때문에 직업을 가지지 않는 목사와 그 가족의 생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목사가 직업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다. 그렇게 되면 목사가 감당하는 ‘직무’에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결국 교회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교회 역사는 교회가 목사와 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방식으로 해결해 왔다. 이것은 성경과 교회론(직분론 포함)에 근거한 것이다. 간략히 설명하면, 성경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적으로 수고하는 이들에 대해 교회(회중)가 책임질 것을 명하는 말씀이 여러 곳에 나타난다. 갈라디아서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디모데전서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고린도후서 11:8-9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라고 말하는데 이 본문들은 복음 전파의 사역을 감당하는 직분자의 생계를 교회가 책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교회론(직분론 포함)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교회가 목사에게 생활비를 배려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목사 개인을 위해서이기 이전에 교회 전체를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목사직이 감당하는 ‘직무’는 모두 ‘교회’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일,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 찬송을 지도하는 일, 성례를 거행하는 일, 교인을 심방하는 일, 교회를 치리하는 일 등 이 모든 일들은 교회를 위한 직무이다. 교회를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전체를 통해 일해야 하는 직무이다. 이렇게 목사의 직분이 곧 교회를 위한 직분이기에 목사의 생활을 교회가 책임지는 것이다. 다른 모든 자연인이 자신의 생계를 자기가 책임지지만 목사의 생계는 교회가 책임지는 것이다. 3. 목사의 생계를 위한 이중직을 허용할 수 있는가? 목사와 그 가정의 생계를 교회가 책임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런 이유 때문에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짐으로써 직접 생업(生業) 전선에 뛰어 든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그 타격은 목사와 그 가정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회중에 돌아온다. 왜 그럴까? 목사는 생업이 있으니 생계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목사와 그 가정이 받는 타격은 크지 않다. 단, 목사가 생계에 전념하느라 목사의 직무를 제대로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목사가 목사의 직무를 하기 싫어서 혹은 게을러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감당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소홀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목사도 사람이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체력은 한정되어 있는데, 생계와 목사의 직무를 동시에 제대로 수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 결과 목사는 말씀 연구에 전념하지 못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며, 성도들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부담은 결국 회중이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목사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의 의미는 “목사님! 당신이 맡은 직분은 그 특성상 삶 전체를 교회에 드려야 하는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생활은 교회가 책임져 줄 터이니,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목사에게 맡기신 그 직분을 담당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생활에 대한 염려는 하지 마십시오. 목사의 생활에 대한 염려는 교회의 회중인 우리의 몫입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마치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목사의 이중직 금지’는 원리적으로 볼 때에 목사의 ‘직무’를 보존하기 위함이요, 나아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가 목사의 생활비를 지급함으로써 목사로 하여금 자신의 직무에만 전념하게 하는 방식”이 오늘날까지 장로교회와 대부분의 교파 안에 정립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제대로 이해할 때에 ‘목사의 이중직 금지’가 목사를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목사직과 교회를 위함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곧 목사의 이중직 금지는 목사의 생계를 위협하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의 귀한 전통과 유산이요 목사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이다.
1121 |반론문| Fact(사실)에 근거한 합신 이대위의 ‘총체적 참사’에 대한 분석_박기성 목사 파일
편집부
2263 2015-09-08
Fact(사실)에 근거한 합신 이대위의 ‘총체적 참사’에 대한 분석  ▲ 박기성 목사 * 예드림교회 담임 * 예장합동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전문위원 * 한국교회 언론회 언론모니터 전문위원 * 서울동부지방법원 시민사법참여단 * 한국기독교이단 사이비 대책 목회자 협의회 대표회장 * 경찰종합뉴스 발행(편집)인 * 칼빈대학교, 서울신학교 교수 역임 <이 글은 2015년 7월 11일자 기독교개혁신보 제699호 4면에 게재된 안상진 목사의 반론에 대한 두날개측의 반론으로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필자는 1986년 학보사 편집국장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교계 언론에서 섬기는 기자로서, 예장합동 이대위의 전문위원으로 이번 공청회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두 날개 시스템’을 배우지 않았기에 공청회 이후부터 자료수집과 녹취록을 통하여 강의 PPT를 재구성하고 철저히 분석하게 되었다. 그 결과 문제가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 이것은 “대국민 사기극”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가지고 필자가 소속한 교단에 보고하기에 앞서서 합신 총회와 이대위 위원들, 그리고 일부 증경 총회장들께 전달하였다. 그 이유는 사과하고 화해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개혁신보의 기고도 지난 7월에 할 것을 지금까지 미룬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이대위의 무모함으로 교단과 교단의 싸움으로 비화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이대위의 행보 특히 지난 호에 광고로 게재한 내용을 보면 참으로 ‘진상’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이성적인 접근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싸우려고만 한다. 만일 지난 호에 이대위의 악행이 없었다면 오늘 이 글은 개혁신보에 게재되지 않았을 것이다. Fact 1.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허무맹랑한 거짓말 김성한 목사는 「두 날개의 교회제도 개혁」이라는 첫 번째 주제에서 “풍성한 교회의 조직을 기능적으로 개편 했는데 당회가 없다(2002년 책)”고 힘주어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다. 책에 있는 도표 한 장만 보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였다. ‘왜 당회가 없는지’에 대한 확인도 없이 “두날개는 교회의 제도를 개혁한다”는 황당한 거짓말을 목사의 직임을 가지고 뻔뻔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총회가 이런 거짓말을 하는 목사를 이대위의 서기로 세운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김성곤 목사는 2009년 10월에 목사 위임을 했기에 2002년에는 당회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거짓 발언을 하는 것은 상식적인 지성인의 자세는 아니다. Fact 2. 허위사실 적시에 따른 사법적인 처벌이 가능한 주장 김성한 목사는 「두 날개는 예배를 바꾸자는 것」이라는 두 번째 주제에서는 황당한 실수를 또 하였다. “자, 김성곤씨 책에 나온 이야기인데 기존교회는 율법적으로 지식적으로 변질된 교회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주장은 ‘출판물 등에 의한 허위 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 및 모욕죄’에 해당하여 사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김성한 목사가 발표 화면에 제시한 교재 ‘두날개로 날아오르는 건강한 교회’ 223쪽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공정한 판단을 위하여 원문을 소개한다. 「한국의 성장하는 몇몇 교회 또한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교회들은 특별한 비밀이나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특징들이란 너무나 단순하고 상식적인 것들입니다. 첫째, 복음중심의 교회입니다. 모든 교회가 복음을 알기 쉽게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복음을 너무 어렵게 만들어 전하며 또한 복음이 철학으로, 율법적으로, 혹은 지식적으로 변질된 교회가 많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읽고 “기존교회는 율법적으로 지식적으로 변질된 교회”라는 말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 글을 읽은 이단 비판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은 ‘당장 고발하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행위를 ‘대국민 사기극’에 해당하는 악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어떻게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상대방을 폄하하며 신학적인 살인행위를 목사가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불순한 저의를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상대방을 음해하는 행위를 하는가? 총회가 아니라 사법당국에 의해서 목사의 자격정지를 당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막나니 같은 충동적 언행을 하는지 궁금하다. Fact 3. 자신이 제시한 자료의 내용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거짓말 김성한 목사는 「두 날개가 복음의 내용을 바꾸자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계속 거짓말을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발표 당시의 화면을 소개한다. ▲ 김성한 목사의 발표 화면 김성한 목사는 “두 날개는 20년 동안 기존 교회의 신학을 공격해왔습니다. 잘못된 신학사상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신학, 사도행전의 역사는 끝났다라고 가르치는 잘못된 신학사상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두 날개는 기존교회를 공격해 왔습니다.”라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한글의 읽기능력과 독해능력의 부족으로 말미암는 자가당착에 빠진 주장이다. 본인이 제시한 자료화면에는 성령에 관한 문제를 지적하면서 “성령님에 대한 오해는 무엇 때문일까?”를 묻는 것이 나온다. 그런데 김성한 목사는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두날개는 20년 동안 기존 교회의 신학을 공격했다”로 읽고 해석하고 주장하였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읽을 수 있는지 정말 신기하다. 목사가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 것인가?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계속한다면 목사라는 직임은 스스로 포기함이 타당할 것이다. 목사라는 직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한없이 부끄럽다. Fact 4. 신학위 보고서의 G12나 셀교회가 두날개와 동일하다는 엉터리 주장 김성한 목사나 박형택 목사는 합신의 신학위 보고서를 근거로 G12의 문제와 셀교회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큰 실수는 G12와 셀교회를 두날개와 동일하게 이해하는 인식의 부족과 거짓말을 하였다. 박형택 목사는 “결국 「두 날개」하고 G12하고 셀운동하고 내용이 거의다 똑같다. 사상이 똑같다. 그런 사실을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지만 이것은 분명한 거짓말이다. 그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2004년 2월 국민일보는 “풍성한 교회는 한국교회에 소개된 G12, J12 등과는 완전히 다른 한국형 토종 셀교회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고 2005년 1월에 “교회 본질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 성장을 위해 셀교회로 전환하려는 것은 큰 위험만 따를 뿐”이라고 하였다. 김성곤목사는 합신 이대위의 연구보다 훨씬 앞서서 셀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김성곤 목사의 두날개 운동이 셀교회 운동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면서 발제의 시작을 하겠다는 것 자체가 엉터리이다. 이대위가 지적하는 두날개의 셀은 소위 이단적 성격을 가진 셀교회의 셀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비판을 받는 셀은 ‘교회 내의 또 하나의 교회로서 셀교회’가 되어서 성찬식을 행하는 등의 신학적으로 위험한 행위를 하고 있다. 두날개에서 말하는 셀은 결코 이런 셀이 아니다. 축제예배도 구약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쁨으로 제사한 것처럼 하나님께 기쁨으로 예배하자는 의미이며, 주일 예배의 예전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자행하는 이단적 요소의 축제 예배가 아니다. Fact 5. 삼위일체 존재방식이 공동체적 존재라는 교리가 있다는 거짓된 주장 박형택 목사는 김성곤 목사가 마치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며 잘못된 삼위일체 교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모함하였다. 그러나 김성곤 목사가 주장한 삼위일체론은 ‘교인들이 교회 내 셀에서 서로 사랑하고 친밀해야할 것’을 설명한 것이다. 이는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 주장하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공동체’를 근거하고 있는 바른 해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형택 목사는 ‘교리’라는 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인지 “김성곤 목사의 삼위일체론은 비성경적 교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교리’는 ‘종교적인 원리나 이치. 각 종교의 종파가 진리라고 규정한 신앙의 체계’인데 김성곤 목사의 저서, 설교, 수강생의 강의노트를 눈이 시리게 살펴보아도 그런 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박형택 목사의 이런 주장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김성곤 목사를 삼위일체 이단으로 인식하게 만들려는 악의가 있는 비열한 발언이며 멀쩡한 사람을 이단으로 만드는 저급한 수준의 이단사냥꾼들이 하는 전형적인 악행에 불과하다. Fact 6. 박형택 목사는 언론에서 시비하듯 메시야 과정설을 주장하는 이단인가? 박형택 목사는 세간에 문제가 되는 ‘메시야 과정설’과 ‘삼신론’의 오해가 될 수 있는 주장을 하였다. ‘메시야 과정설’의 문제이다. 어떤 이는 “이단감별사 박형택 목사의 ‘메시야 과정설’은 이단사상”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이 주장에 대하여 ‘상습적으로 이단을 옹호하는 인물과 언론’, ‘윤리와 도덕적인 흠이 많은 인물’ 등의 반박을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변명에 불과하다. 이 일에 대하여 박형택 목사는 여러 차례 반박을 하지만 ‘메시야 과정설’의 정체와 본인의 주장의 차이점에 대해서 명쾌하게 설명한 사실이 없다. “메시야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는 주장은 메시야 과정설이지만, “메시야로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표현하면 메시야 과정설이라고 할 수 없다. 기자의 오해와 실수이다. 그렇다고 해도 박형택 목사의 주장은 충분히 오해를 가져올 수 있는 발언을 했다. 왜냐하면 ‘메시야로서 거쳐야 할 과정’은 구약에 예언된 것들을 이루어 나아가는 것인데 이 부분은 해당사항이 없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면 안 된다. ‘삼신론’의 문제이다. 박형택 목사의 강의에 대하여 “이단 사냥꾼, 두 얼굴 가면을 벗어라”는 보도가 있었다. 박형택 목사는 “하나님은 세 이름으로 구분되시는 분”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삼신(三神)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지적받은 것이다. ‘하나님을 세 이름으로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을 삼등분하여 성부, 성자, 성령을 각기 1/3로 분리시킬 수 있으며 ‘삼위가 하나가 될 때만이 완전한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발전하여 ‘온전하신 삼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 일에 대하여 박형택 목사는 지금까지 아무런 해명이 없다. 필자는 이것을 「구분과 구별」이라는 단어를 혼용하는 습관에서 출발한 작은 실수라고 생각하고 싶다. 단어 하나로 그 사람을 이단으로 매도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박형택 목사는 삼신(三神)론 이단자가 아니라 단지 말의 실수가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운하지 않는 것은 박형택 목사는 어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이 의미를 잘 모르고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이단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이 필요한 것이다. Fact 7. 왜곡된 거짓으로 두날개가 마치 이단성이 있는 것처럼 모함하는 참소 합신 이대위는 두 날개가 마치 이단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모호한 편집을 통해 온갖 이단들의 사상을 소개하면서 그것을 두날개에 억지로 엮는 모함하는 참소를 쉬지 않았다. 이것은 비 신앙적인 행위다. 그들이 문제로 삼고 있는 부분은 김성곤 목사의 주장과 전혀 다른 정 반대의 이야기를 마치 김성곤 목사의 주장처럼 소개하는 거짓된 부분이 많이 있다. 김성곤 목사의 설교나 저서 그리고 수강생들의 노트나 증언들을 참고하면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신사도 운동의 주장들’(직통계시, 예언, 환상, 넘어짐, 금가루나 금이빨 등의 기이한 현상)에 관하여 경계하며 그러한 현상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주장되는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김성곤 목사는 “성령을 단순한 능력이나 도구로 오해하는 것은 성령에 대한 오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신 이대위는 김성곤 목사와 두 날개에 대하여 신사도운동의 아류, G12를 모방한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모함에 불과하다. 그리고 김성곤 목사가 전혀 관계도 하지 않은 다락방 혹은 베뢰아의 이단 사상을 두 날개의 핵심사상으로 만든 것처럼 주장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와 비슷한 용어들을 사용한다며 이리 걸고 저리 걸어 온갖 거짓으로 모함하고 왜곡하여 참소하였다. 성경도 중간의 한 부분만을 편집하여 왜곡하고 모함하기로 작정하면 얼마든지 이단이 된다. 실제로 이단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사상이 성경에 근거했다고 한다. 성경도 편집하면 이런 일이 있는데 하물며 목사들의 설교나 강의의 한 부분을 편집한다면 이단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단성’이라는 말 한마디가 던져주는 무서움을 인지하지 못하는 합신 이대위는 자신들이 정해 둔 결론으로 몰아가는 마녀사냥 식의 이단 참소와 모함을 중단하고 스스로 반성하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이제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초교파 운동이지만 건전한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는 두날개에 관하여 ‘이단성’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 말미암아 예장합동이나 합신 및 건전교단에 소속한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당하는 고통이다. 정상적인 교회와 목회자가 하루아침에 이단으로 모함을 받아 고통을 받고 있다. 합신 이대위는 이들 교회의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당한 정신적, 실제적 고통 및 피해에 대한 보상책이 있는지 묻고 싶다. 건전한 공교단의 목회자에 대하여 신학적인 살해와 현행법 위반 행위, 교단 소속 교회의 보호가 아니라 아픔을 주는 행위는 멈춰야 한다. 또한 이단 연구의 기본인 귀납적인 논리를 무시하고 연역적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거짓으로 왜곡하고 모함하는 참소하는 악행도 멈추고 한국교회 앞에 석고대죄 해야만 할 것이다.
1120 no image <2015.8.2.-8.6 국토순례 감상문> 서울 한양 도성길 및 강화지역 탐방기_공건용 청년
편집부
1908 2015-08-25
서울 한양 도성길 및 강화지역 탐방기 < 공건용, 역곡동교회 청년부 > “주님께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 느낄 수 있어” 역곡동교회 국토순례팀이 ‘하나님을 시원케 하는 영건이 되자’라는 생소하고도 참신한 슬로건을 걸고 계획했던 ‘제5회 국토순례대장정’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완주를 하게 되었다. 역곡동교회 성도들의 기대와 기도 속에서 단 하나의 안전사고 없이 무사히 여름사역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2015년 신앙적인 목표를 '순종'이라 결정 한 뒤로 교회에서 나에게 분담되어진 역할에 하나하나 순종하며 나아가기 시작했을 4월쯤 국토순례대장정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작년에 참가를 권유 받았었지만 사서하는 고생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조금 더 컸었기에 망설이다 결국 참가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순종을 마음에 품고 나니 이 또한 주님께서 주신 역할이라 믿고 과감하게 국토순례 참가서를 제출하였다. 국토순례를 참가의지를 굳게 다지고 나니 준비하는데 있어서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청년부는 아이들을 이끄는 조장역할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아이들의 안전한 완주를 위해 기도와 혹시라도 체력으로 뒤처지지 않기 위하여 꾸준한 운동으로 준비하였다. 그렇게 8월 2일 역곡동교회 성도들의 응원과 기도 속에서 우리들은 힘차게 국토순례대장정의 첫발을 내딛었다. 성도들의 응원 가운데 시작돼 국토순례는 행군, 저녁집회, 환영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행군의 첫날은 낙산공원을 시작으로 흥인지문을 거쳐 남산둘레길, 덕수궁돌담길까지 행진하는 코스였다. 이튿날부터 마지막 날까지는 강화지역탐방을 위한 코스로 이루어져있었다. 한양도성길 코스는 육체적으로 힘든 코스는 아니었지만 서울 시내를 가로질러 행군해야 했기 때문에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코스 중간중간 인파가 많은 지역들이 있어 행군대열이 흐트러지지는 않을까 걱정했었지만 아이들이 잘 따라 와줬고 우려했던 바와 달리 안전하게 낙산공원에서 덕수궁돌담길까지의 첫날행군을 마칠 수 있었다. 첫날을 돌이켜보니 많은 인파 속에서도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일하신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고, 이어지는 다음날의 일정부터는 그 속에서 일하시는 주님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튿날부터는 강화도지역탐방 및 역사탐방을 위한 행군코스가 시작되었다. 우리 국토순례팀은 숙소였던 김포대곶교회에서 강화도 갑곶돈대까지 차량으로 이동한 뒤 연미정을 거쳐 고려궁지 북문까지 행군하였다. 북문에서 점심식사를 한 뒤 강화도저수지 둘레길까지의 행군코스를 모두 소화하였다. 셋째날 코스는 비교적 쉬운 루트였다. 오전엔 선선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걸을 수 있었던 뚝방 길을 걸었고 갯벌전망대에서 점심식사 후 오후엔 강화도 관광명소인 함허동천 계곡에 가서 물놀이를 하며 그간 쌓였던 행군의 피로를 털어버렸다. 사실 미리 답사를 다녀왔던 목사님들께서 그늘이 거의 없는 코스라며 걱정을 많이 하셨다. 하지만 이튿날부터 마지막날까지의 행군 역시 주님의 보살핌 속에서 진행되었다. 행군 내내 구름으로 햇빛을 가려 주셨고 선선한 바람을 불어 주셨다. 쾌적한 날씨를 허락하시어 아이들의 체력을 지켜주셨고 비교적 편안한 환경 속에서 행군하게 해주셨다. 마치 모세와 이스라엘사람들이 출애굽 당시 구름기둥으로써 그들을 보호하셨던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행군을 통하여 육체적 고통을 경험했지만, 아이들과 선생님들 간의 격려와 위로를 통하여 화합을 이루었다. 또한 세대간의 연합을 이끌어내며 저녁집회의 은혜를 위한 전초과정을 다지게 되었다. 세대간 연합 이끌어 내기도 국토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저녁집회 시간에는 찬양과 강사목사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아이들에게 영적인 성장을 이끌어내어 아이들의 마음을 조금 더 주님에게 향할 수 있도록 하였던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첫째 날 집회는 담임목사님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많은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는 주제의 말씀이었는데 주님보다는 세상적인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아이들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볼 수 있었다. 구름기둥으로 행군을 인도하심을 느낀 둘째 날 집회는 강사목사님이신 김창수 목사님이 ‘모세이야기를 통한 열정’을 주제로 삼고 집회를 진행하셨다. 주님께 작은 것이라도 바라는 것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고 그것이 주님과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드신다고 하셨다. 또한 바라는 것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여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임할 때, 주님과 더욱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하셨다. 셋째 날 마지막 집회는 한마디로 요악하자면 ‘life is rooted in impossibility’이다. 풀이하자면 우리들의 삶은 불가능 속에 뿌리내려 있다는 뜻이다.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는 일일지라도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는 기도로 간구하면 얻지 못할 것이 없기에 한나가 술에 취한 사람과 같이 기도한 것처럼 우리들도 기도할 때에 온전히 주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집회시간을 통하여 아이들의 태도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짐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매일 밤 진행되는 집회 속에서 아이들의 마음과 시선이 주님께로 향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눈을 감고 두 손을 높이 들며 찬양하였고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며 기도를 하였다. 마지막 집회시간, 국토순례 출발하기 전의 아이들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아이들이 국토순례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성장이 있었음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하여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 역시 너무나도 풍성하였다.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만져 주셔서 그들의 시선을 주님께 돌려놓으심을 느꼈을 때의 감사함은 절대 잊지 못 할 것이다. 참가자들에게서 변화 느낄 수 있어 모든 국토순례의 일정을 마치고 교회로 돌아왔을 때에는 환영식을 통하여 역곡동교회 성도들이 국토순례팀의 안전한 귀환을 환영하여 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박수와 찬송으로 축복하여 주었고 그 축복 속에서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천국에 들어갈 때의 기분이 이런 기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환영회 중 문득 국토순례에 참여한 참가자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에도 은혜를 내려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안전귀환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가족들의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의 은혜를 주셨고 그로 인하여 참가한 인원 모두가 안전사고 없이 귀환할 수 있었다는 깨달음을 주셨다. 5회째 진행되는 국토순례에 왜 이제야 처음으로 참여를 하게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적으로 너무나도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국토순례 마지막 날 아침 큐티시간에 그렇게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고 말썽을 피우던 아이의 입에서 ‘기도는 주님과의 소통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주님께서는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순례를 떠나기 전에는 국토순례대장정의 슬로건인 ‘하나님을 시원케 하는 영건이 되자’라는 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일정을 끝낸 지금에서야 조금이나마 그 뜻을 알 것 같다. 섬길 줄 알고 협력하며 다른 이의 형편을 살피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시원케 하는 영건이 아닐까 한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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