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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no image <부활절특집> 故 박윤선 목사님 설교-예수님이 죽으신 결과 (1)
rpress
2057 2003-04-15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324pys.hwp 예수님이 죽으신 결과 본 문: 히 2:14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심으로 이루신 구원 역사 가운데 한 가지는 인류의 대 적 마귀를 멸하신 사실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자기가 승리할 줄로 알았다. 그는 가룟 유다 의 마음에 역사하여 에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어 주었고(요13:2), 그 다음에 는 유다로 하여금 예수님을 은 30에 팔도록 하였다(마 26:14-16). 주님께서 는 마지막 만찬석에서 유다에게 경고와 함께 회개할 기회를 주셨건마는 유다 는 전혀 뉘우침이 없이 주님께서 주시는 떡조각을 받았다. 이때를 기다리던 마귀는 즉시 그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요 13:27) 유다로 하여금 예수님을 잡 으려는 무리에게 그를 넘겨주도록 역사하였다(마 26:48-49; 막 14:45-46). 이러한 일들은 결국 하나님이 예정하신 경륜대로 이루어진 것이다(행 4:28). 하나님의 깊은 지혜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류 구원의 대 역사를 이루 심이었다. 마귀는 하나님의 이 깊은 지혜를 도무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지혜는 깊은 중에도 더 깊은 것이어서 멸망하 는 자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인다(고전 1:18 상). 하나님의 이 구원 계획은 만 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니(고전 2:7), 엡 3:9에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 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라고 하였다. 이 지혜야말로 하나님 자신의 깊은 내용으로서 그 지혜를 실시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피를 흘 리신 것이다. 구속의 진리(지혜) 앞에서는 마귀가 자멸하게 된다. 루터는 이 지혜를 가리켜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성경에는 이런 역리적(逆理的)인 원리가 표현되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 리니"(요 3:14)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모세의 인도를 따라 광야를 통과하 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다 그 죄값으로 불뱀에게 물려 많은 사람 이 죽었고, 위기에 처한 그들이 회개하며 부르짖을때 하나님께서는 그 불뱀 모양의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고 그 놋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해독 의 치료를 받도록 하신 사건(민 21:5-9)을 들어 뱀의 독을 뱀으로 소멸시킨다 는 진리를 가르치신 것이다. 즉,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 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임을 당하심으로 인류의 죄값을 치르시고 그들을 멸망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 쳐 주신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이 진리에 대하여 왜 캄캄한가? 그놈이 이사야의 예언(사 53 장)을 몰랐던가? 그 밖에도 양의 피로써 속죄제를 드리라고 하신 하나님 의 계시(啓示)를 몰랐던가? 그놈이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 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하)고 하신 말씀을 몰랐던가?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고후 4:3)고 한다. 마귀의 정체는 본질적으로 어두움이고 거짓이기 때문에 그놈이 빛(하나님의 진리)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깨닫지도 못한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선한 일에 지혜로운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본질이고, 악한 일에 지혜로운 것은 마귀의 속성이라고 한다(참조, 롬 16:19). 그러므로 내가 성경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것이 멸망의 요소임을 알고 각성해야 된다. 마귀가 성경의 글자는 알지언정 성경을 하나님의 지혜와 구원의 말씀으로 바로 알지는 못한다. 가령 마귀가 성경에서 구속의 도리를 알게 된다 하더라 도 그놈은 하나님을 대적할 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인만큼 하나님의 말 씀을 순종하지 않는다. 그놈은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대항하기 때문에 하나님 을 대적하기 위함이라면 지옥으로 뛰어 내려가는 것도 감행한다.
178 no image <부활절메세지> 부활한 생명으로 충만하자-최충산 목사
rpress
1698 2003-04-15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324cmes.hwp부활한 생명으로 충만하자 고전15:20 최 충산 목사(충청노회장) 4월은 주의 부활을 기리는 점에서 더 좋습니다. 전쟁의 공포로 시작한 이 새 봄에 부활의 생명으로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세상에는 늘 전쟁이 있었습니 다. 전쟁을 통하여 파괴적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 온 것이 인간 역사였습니 다. 힘의 우위를 통하여 패권적 질서를 부여하고, 그 안에서 삶을 이어가도 록 강제해 온 것이 인간의 평화입니다. 그 평화에 순응하면 살고 불응하면 죽 습니다. 그런 구도에서 생명이란 그저 육체적 생명 이상의 의미는 사실 없습 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적으로 힘을 가진 자가 보장하는 생명이 아닙니다. 진정한 생명을 창조하신 자가 주시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그리스도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은 하늘로부터 온 새로운 생명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은 세상의 에너지가 보장하는 생명 이 아니며, 첨단 무기로 살상할 수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 생명은 종말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주시는 부활의 생명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묘사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리가 유기적으로 연합된 생명적 질서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관 계없이 자기 혼자 역사의 한 시점에서 사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종말에 행하실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부활 역사의 시작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신자들의 부활의 시작입니다. "첫 열매"라 할 때에, 그것은 제사적 의미로 전체를 대표하는 것 입니다. 이미 추수가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모든 소출이 첫 열매 로 대표되어 드려진다는 점에서, 첫 열매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동시에, 모 든 것과 떨어질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부활은 그와 연합된 신자들의 부활을 대표합니다. 또한, 신자 부활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결국,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의 부활을 '잠자는 성도'의 육체 부활을 내포하는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은 단순한 표징이 아니고, 신자 부활의 실 제적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종말적인 역사의 추수는 시작된 것이 라는 것을 예수의 부활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롬6:3이하), 예수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골2:12,13,3:1) 우리들은 이제 종말적인 영원한 부활의 생명질서를 사 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누리며 산다는 것은 이 생명으로 산다 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 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종말적 경륜 속에서 '산 자'로서 살 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새로운 부활의 생명은 하나님이 종말에 당신의 백성에게 주시려고 하셨던 바로 그 생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는 부활의 생명 질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말 은, 신자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말입니다(골2:12,13). 이제 주 의 재림 때에 있을 신자의 육체적 부활은 그것의 완성이요, 궁극적 성취가 될 것입니다. 성도는 오늘을 부활한 생명으로 살다가 주님이 깨우시는 날 온 전한 육체를 입고 주님과 영원히 살게될 것입니다(고후4:14). 이 생명의 역동적 표출이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입니다. 오늘 날 우리가 믿 음으로 사는 삶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생명을 죄 가 왕노롯하는 '죽음의 질서'가운데서 역동적으로 드러내는 체험적인 삶입니 다. 그 삶은 때로는 '죽음의 질서'와 싸우는 전투적 삶이며, 때로는 고난 속 에서 인내하는 삶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만끽하는 기쁨와 찬양의 삶입니다. 이 생명의 삶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주의 백성에게 주셔 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로 살게 하기 위하여 재창조하 신 생명을 표출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령의 충만으로 믿고 나 아갑니다. 곧 부활 생명의 충만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부활한 새생명의 충만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을 기리 는 날, 하나님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생명 질서를 다시금 인식합시다.
177 no image <부활절특집> 그리운 삼보 할머니-변이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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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0 2003-04-15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sambo.hwp 그리운 삼보 할머니 변이주 목사/ 알곡교회 이변이라면 이변이었다. 어쨌든 죽은 것으로 판명된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은 이변 중에도 이변이 아닌가! 삼보 할머니는 분명히 임종을 하셨고, 나는 교인들과 더불어 임종 예배를 드 리고 왔다. 가족들은 이미 관과 수의를 준비했고 가까운 친척들에게 전화로 할머니의 임종 소식을 전했다. 그 할머니가 살아나신 것이다. '삼보 할머니'로 통하는 최만덕 할머니는 당시 86세의 고령이셨고 허리가 반 쯤 굽어 지팡이에 의지하여 걸어다니셨지만 몸 어디 불편한 곳 없이 건강한 편이셨다. 할머니는 교회만 오시면 금방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시는 바람에 한 바탕 웃음판이 벌어지곤 해서 '잠보 할머니'라는 별명을 얻으셨다. 그러면서 도 예배 시간에는 빠지지 않고 지성으로 참석하셨다. 할머니는 날짜 가는 것 도 모르시기 때문에 주일과 수요일은 꼭 알려드려야만 교회에 나오실 수 있었 다. 할머니는 '잠보'라는 별명 외에도 코를 잘 흘리신다 하여 '코보 할머니', 게 다가 욕을 잘하신다 하여 '욕보 할머니'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도 가지셨 다. 아무튼 잠보, 코보, 욕보 하여 통칭 '삼보 할머니'었다. 그러나 교회에 나오신 후 4년여 동안 나는 할머니가 욕을 하시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 다. 삼보 할머니가 어떻게 해서 의식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지 만 아무려나 할머니는 의식을 회복하고 나서 느닷없이 천당 갔다온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이야기는 좀 황당무계한 데가 있어서 신빙성 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자무식인 할머니는 그런 이야기를 꾸 며서 할 수 있는 실력도 없는 형편이고 보니 더욱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천당 갔다온 이야기는 그렇다 치고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 는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의식을 회복한 후 기미 투성이었던 할머니의 얼굴 에 광채가 나는가 하면 그렇게 흘려대던 코가 뚝 그쳐버린 것이었다. 몇 달이 지난 후부터는 할머니 얼굴에 다시 기미가 끼고 코도 여전히 흘리셨 지만,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할머니의 믿음이 몰라보게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아마 부활의 소망을 확실히 붙잡은 것 같았다. 그 후 할머니는 2년 이상 더 사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어따어따, 내일 이 벌써 주일이요?" 하며 반가워하시던 목소리와, 광채가 나던 그 얼굴이 눈 에 삼삼 어릴 때면 지금도 삼보 할머니가 몹시도 그리워진다.
176 no image 부활절특집<2> 복음과 부활-김영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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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 2003-04-15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324kyc.hwp복음과 부활 고린도전서 15:12-19 김영철 목사/ 수원노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병이 낫고 복을 받는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교회는 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많아졌으나 정작 주님을 의지 하는 참 신자는 늘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복음을 제대로 가 르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가 복음을 제대로 배우려 하지 않 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초대 교회에게 복음의 핵심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반듯하게 복음을 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이상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바울은 12절 에서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 냐"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공공연하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 을 믿지 못하겠다고 떠드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말하기 시작합니 다. 13절에서 바울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가 살아나지 않으 셨다면,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는 모두 빈 것이요 또한 이를 믿는 사람들의 믿 음도 비어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하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 셨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 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는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유독 그리스도라 는 말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 다. 이어서 바울은 15절에서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시지 않으셨다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거짓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지 않으셨는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거짓으 로 전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17-19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 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17절의 '헛되다'와 14절의 '헛되다'는 서로 다 른 의미를 지닙니다. 14절의 '헛되다'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아서 헛되게 되었다'는 말, 즉 예 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신 결과 모든 것이 헛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 나 17절의 '헛되다'는 '실제로 주어졌으나 쓸모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 으신 죽음도 아무 소용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전혀 탕감 받지 못한 채, 각기 자신의 죄 가운데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 이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고 따른다 해도,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 셨다면 그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를 믿고 그 리스도께 소망을 둔 모든 사 람들이 다 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초대교 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과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런 무 서운 고난 속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장차 있을 자신들의 부활을 바라보 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모 든 소망은 일순간에 모두 끊겨지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19절에서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살아있는 자들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 지 않으셨다면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도 전부 끊어지는 것이 되고 맙 니다. 이렇게 말한 바울은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바울 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잠자는 자들의 소망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 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단순히 위로가 되는 정도의 말씀 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믿음이 참 믿음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되 며 , 또한 앞으로 우리가 영원히 죽음에서 벗어나 참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 는 것에 대한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우리의 생명이 요 영원한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바로 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사실을 바로 아는 것이, 곧 복 음을 바로 깨닫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175 no image 부활절특집<1> 복음과 믿음-김영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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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 2003-03-27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buhwal1.hwp부활절 특집 (1) 복음과 믿음 김영철 목사/ 수원노회 2000년 전에 바울이라 불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있었습니 다. 이 분이 이 곳 저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 게 되었습니다. 그 덕택에 고린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나 중에 고린도교회에게 편지를 쓰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쓰여진 편지가 고린도 전서와 고린도후서입니다. 당시 고린도 도시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 과 헬라인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반면 에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표적을 구하였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표적을 발견하지 못하자 복음을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반 면에 지혜를 원하던 헬라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지혜가 복음 안에서 나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다 시금 새롭게 복음 안에서 든든히 서 야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이에 바울은 1절부터 이러한 자신의 뜻을 전합니 다. 1절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을 다시 전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이 미 복음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 게 복음을 알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가 비록 복음 위에 있었지만, 고린도교회가 보다 확실하게 복음 위에 서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2절은 현재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고린도교회는 비록 과거에 복음 위에 있었 지만, 앞으로도 계속 복음 위에 든든하게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어떤 잘못된 조짐이 있었습니다. 이 조짐은 12절에 기록 된 대로,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가리킵 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육체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 였습니다. 이들의 이런 가르침은 복음과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행위입니 다. 이에 바울은 이들에게 복음을 다시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말합니다 . 그리고 바 울은 3절부터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 다고 말합니다(3절).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죽으신 것은 모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가 부 활을 믿기 위해 먼저 필연적으로 믿어야 할 요소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4절에서 예수님의 육체가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 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가르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 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의 모든 고난과 죽으심은 자기 백성들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육체로 부활하심으로 말미 암아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하 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게바와 열두 제자들과 그리고 오백여 형제들에게 보이 셨습니다. 이런 증거들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육체로 부활하셨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500여 형제들 중에서 반 수 이상이 지금도 살아 있다고 말합 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후에 야고보와 모든 사도와 그리고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신에게도 보이 셨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그런 자신이 더 많이 수고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였습 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복음을 통하여, 즉 예수께서 육체로 부활하신 것을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 것 입니다.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교양을 쌓고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온 다는 것은 복음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이를 믿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를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하여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리 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그분을 의지하고, 그리고 장차 자 신도 그리스도와 같이 육체로 부활할 소망을 갖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 람들 속에 바로 이런 믿음에 약하거나, 혹 없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비 록 교회는 나오고 있으나 진정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 다.
174 no image 개혁주의 교회관/보편적인 교회-이홍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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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2 2003-03-27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323spe.hwp특별기고-개혁주의 교회관 보편적인 교회 이홍년 목사/전남노회 요즘 신자들은 교회의 보편성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교회는 보편성 이 있어야 한다 해서 기성교회(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교회)와 똑같이 하 든, 아니면 그와 비슷하게 해서 차이가 부각되지 않게 하는 것을 보편성이라 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교회의 보편성은 주변의 교회들과 비슷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참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뜻한다. 다 시 말하면 교회는 하나의 통일된 특징을 갖는다는 점에서 하나이다는 의미이 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참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통제만을 받고,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그에게만 순종을 드린다는 점에서 그 렇다. 교회는 통일성과 거룩성 안에서 본질적으로 구별이 없는 하나의 교회이다. 교 회의 통일성이란 모든 본질의 교회가 그리스도와 생명으로 연결된 지체로서 통일성을 갖는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 다스림과 성령의 인도아래 있으면 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구별된 존재로서의 거룩성을 가지고 있다(출 19:5-6). 교회가 보편교회로서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주변 교회들과 차이가 없 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때도 성경은 어디까지 나 해석하기 나름이 아니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이 역사적인 보편의 교회와 그들이 고백해서 내 놓은 역사적인 신앙이다. 어느 시대에 존재했던 교회인가 혹은 어느 지역에 존재하는 교회인가를 불문 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진리 앞에서 어 떻게 복종하고 나갔으며, 그리하여 이 교회는 어떤 형태를 띄게 되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래서 복잡한 모든 것을 생략하고 교회의 세 가지 표지로 말씀 의 참된 전파와 성례를 거룩히 시행하는 일과 정당한 권징의 실시를 들었다 (벨직신앙고백 제29조). 이것이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는 표지이자 교 회의 속성을 바로 유지하는 길이다. 만약 지금 이 시대의 교회들이 이 세 가지 요건을 잘 충족시키고, 여기에 하 자가 없이 서 간다면 여 기에서 자기를 구별시키거나 분리시키는 것은 큰 잘못 이다. 하지만 이 시대의 교회들이 이 세 가지 요건을 바르게 충족시키지 못한 다면 그것이 대세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문제 는 이 시대의 교회가 배교의 도도한 물결 위에 서 있다는 것이요, 그러한 현 실은 설교의 타락과 성례를 개방시키는 운동과(close table을 open table로 전환시키는 일, 예를 들면 성찬을 세례 받지 않은 자에게 개방하는 일이나 혹 은 성찬이나 세례를 교회가 아닌 기관이나 학교에서 베풀도록 허용하는 일 등 을 말한다. 이런 일이 주로 한국의 가장 큰 교단이나 혹은 한국에서 대표적 인 교회로 이름을 올리는 덩치 큰 교회들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파장이 크 다), 권징이 사라지는 현실(타교회에서 책벌받고 해벌된 일이 없는 자를 아무 런 하자 없이 교인으로 등록시키는 일 등이다. 이런 것이 오히려 교회의 통일 성을 깨뜨리는 일이다)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 것의 구별을 철폐해야 교회가 더욱 사람들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고 사람들은 또 교회를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 이유이다. 그것 이 복음을 효과 적으로 전하는 길이고 결과적으로 교회도 부흥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일이 대세를 이루게 되고 이것이 교회의 보편성으로 받아들여지 는 현실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복음의 전파가 교회의 큰 사명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복음 전파를 목적으 로 교회의 본질과 속성을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 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 교회의 속성을 스스로 철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 부흥을 목적으로 신앙고백의 터 위에 확고히 서 있 는 개혁교회의 정체성을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효과적인 복음전파 를 위해서 복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말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문제는 잘못된 생각들이 이 시대의 대세가 되어 여기에 합류하지 않는 교회들 은 기성교회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비춰지게 되고 그래서 심하면 분파주의라 는 소리도 듣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신도들의 혼돈만 깊어가고 있다. 과연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교회처럼 하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의 보편성 을 깨뜨리는 것이고 자기만 옳다고 하는 독단적인 분파주의에 속하는 것인 가? 교회 부흥(물론 이것을 복음전파라는 말로 포장하기는 하지만)이라는 당 면한 과제 아래 교회의 속성을 장애물처럼 여기는 것이 교회의 보편성을 심각 하게 훼손하는 일이다. 우리는 더 당당하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 좋은 광고의 기법으로 사람의 눈 치를 보아 가면서 하는 것 말고 당당하게 씨를 뿌리되 그 결과는 우리의 신앙 고백대로 주께서 친히 거두시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고전 3:7).
173 no image 미국 장로 교회 헌법과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정치론-배현주 목사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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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82 2003-03-11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baihju.hwp미국 장로 교회 헌법과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정치론 배현주 목사/ 중서울 노회 들어가는 말 역사적으로 한국 장로 교회 헌법은 미국 장로 교회 헌법을 모체로 하여서 발 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국 장로 교회 헌법을 연구하고 그것을 다 시 정통 장로 교회 정치 원리와 비교 검토하는 것은 한국 장로 교회 헌법의 기초가 어디인가 하는 것을 살피기에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본말 1. 미 북장로 교회 헌법 미 북장로 교회 헌법은 한국 장로교회 헌법과 그 구조에 있어서 거의 유사하 다. 미 북장로 교회 헌법의 특징과 관련하여서 몇 가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들이 있다. 1) 원리에 대해서(Preliminary Principle) 7 번째 원리의 부분에서 "모든 교회 권세는 일반적으로 치리회에 의하여서 수 행되거나 혹은 위임된 권위에 의하여서 대리적 방식으로 수행될지라도 그 권 세는 오직 선언적이고 사역적이다. 즉 다시 말해서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행 위의 유일 한 규범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원리는 한국 장로 교회 헌법 에서도 그대로 심어진 중요한 원리가 된다. 2) 교회의 직원에 대한 부분에서 미 북장로 교회 헌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있다. "교회의 평범한 항존직원은 감독 혹은 목사 그리고 회중들의 대표자들인 장로 들 그리고 집사이다." 미북 장로 교회 헌법에서도 '평범한'을 의도적으로 삽 입하고 있다. 이런 교회 직원에 대한 '평범한'이라고 하는 의미는 결코 폐기 되어서는 안 되는 개혁 교회 역사에 있어서 오래된 전통이다. 3) 치리회의 성격에 대하여서 미 북장로 교회 헌법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교회 치리회의 권세는 전적으로 도덕적이고 영적이며 오직 사역적이고 선언 적이다. 그 치리회는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할 것을 요청할 권한을 가지고 있 다." 4) 당회에 대하여서 한국 장로 교회 헌법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는 동사 목사 제도에 대하여서 다루고 있다. 당회의 구성에 대하여서 미 북장로 교회 헌법 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당회는 목사 혹은 목사들 그리고 지교회 회중으로부터 피 택된 치리 장로들 에 의하여서 구성된다." 이것은 한 지 교회에서 목사가 2인 이상 일 수 있으며 그러할 때 당회의장의 직무는 담임 목사들이 교대로 수행하도록 되어있다. 이런 미 북장로 교회 정 치 원리를 비추어서 보면 당회 안에 목사들의 칭호가 구별이 되지 않고 있으 며 모든 당회의 목사들에게 수평적인 권세가 주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이미 계층화를 추구하고 있는 한국 장로 교회의 목사 제도의 여러 가지 호칭들은 미 북장로 교회 입장에서 볼 때 상당하게 불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정통 장로 교회 입장에서 볼 때에도 목사들 사이에서의 호칭을 통한 계층적 구조화는 정통 장로 교회 정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5) 노회에 대하여서 미 북장로 교회 헌법이 진술하고 있는 몇 가지 측면이 있 다. "노회는 당회로부터 정규적으로 가져오는 호소건, 항고건, 중재 의뢰건을 수 납해서 논의할 권세가 있다." "노회는 거룩한 사역을 위한 목사 후보생에 대한 고시와 인허 그리고 목사들 에 대한 임직과 청빙 그리고 면직과 치리를 수행한다." "노회는 당회록에 대한 검사와 시찰 을 수행한다." 6) 미 북장로 교회 헌법은 합신 헌법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은 대회에 대하여 서 다루고 있다. 7) 미 북장로교회 헌법은 총회를 가장 높은 치리회(The highest judicatory) 로 명시하고 있다. "총회는 각 노회로부터 파송된 목사 총대와 치리 장로 총대 동 수로 구성된 다." "총회는 모든 교리적인 논쟁점을 해결할 권세가 있다." "지 교회와 노회와 대회에 대한 교리의 오류에 대하여서 혹은 실재적인 도덕 성에 대하여서 지교회와 노회와 대회로부터 교정, 경고 증거에 대한 확인 등 을 한다." 8)미 북장로교회 헌법은 19장에서 의장(Moderator)에 대하여서 한 부분을 할 애하여서 다루고 있다. "교회의 회의에 필요한 의장은 필수적이다." "의장은 전체 회원으로부터 위임을 받는 것이다. 모든 권위는 질서를 유지하 는데 사용된다." 각 치리회의 사회자를 의장이라고 하여서 각 치리회에서 그 치리회를 조정하 는 조정자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J.A. 핫지의 What is Presbyterian Law?와 달리 회장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J.A. 핫지는 의장 (Moderator)과 회장(President)의 개념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9) 미 북장로 교회 헌법은 20장에서 서기(Clerk)에 대하여서 진술하고 있다. "서기는 회의를 기록하고 주의 깊게 그 기록을 보관하고 회원들의 요구가 있 으면 회의록을 열람하게 해야 한다. 서기의 입회 하에 열람하게된 모든 회의 록의 인용구는 교회의 어떤 치리회 안에서 교회의 어떤 부분에 대하여서 보증 서가 된다." 2. 정통 장로 교회 정치 원리 1) 교회의 유기적 통일성 정통 장로 교회 정치 원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교회의 유기적 통일 성에 대한 것이다. 장로 교회는 지교회로서 온전한 형태의 교회라고 보지 않 고 당회와 노회와 총회를 아울러서 완전한 형태의 교회로 보고 있다. 이런 교회관은 요한 칼빈에 의하여서 시작되었던 교회관이다. 요한 칼빈은 교 회에 대한 그의 입장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교회와 우리는 하나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우주적 혹은 보편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누어 질 수 없다면 교회도 둘이나 셋으로 나누어서 생 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가시적 교회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논할 생각이기에, 우리는 교회를 한 어머니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논할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교회에 대한 얼마나 많은 유용성과 필요성을 배울 수 있는지 모른다." 이와 같이 요한 칼빈은 가시적 교회를 유기적으로 통일된 교회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가 기독교 강요 4권에서 진술하고 있는 교회에 대한 진술은 거의 대 부분이 가시적 교회에 대한 것이다. 장로 교회 정치 원리 안에서 볼 때 가시적 교회의 유기적 통일성은 동일한 신 앙 고백과 동일한 정치 제도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교회로서 완전하 지 않고 노회와 총회와 아울러서 온전한 형태의 가시적 교회라고 하는 것이 다. 그러한 요한 칼빈의 장로 교회 정치 원리는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 백을 작성하였던 청교도(Puritan)들에 의하여서 좀더 분명하게 고백이 되었 다. 장로 교회 정치 원리를 체계화하였던 토마스 카트라이트 목사는 그의 저서에 서 "보편적 교회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그 답변으로서 "그리스도안에서 함 께 한 신앙에 의하여서 세상에 각처에서 흩어져 있는 사람들의 통일체이다"라 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보편적 교회의 머리는 누구신가?"라고 묻고 그 답변으로 서 "오직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답변을 하고 있다. 이런 신학적 답변은 장로 교회 정치 원리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 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왕이 되신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통 장로 교회 정치 원리에서 있어서 원리적으로 치리회를 벗어나서 교회의 정치를 시 행하는 모든 활동은 그 자체가 치리회의 머리되신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만홀히 여기는 것이 된다. 장로 교회 정치 원리로 볼 때 치리회의 모든 상비부서나 위원회는 치리회 아 래 부속된 것이며 그것도 치리회로부터 받은 권한 이외의 권세를 가지고 있 지 않다. 원리적으로 볼 때 치리회와 별개로 어떤 행사도 추진할 수 없다. 오 직 교회의 권세는 치리회가 개회하였을 그 때에 발휘되며 치리회의 파회와 함 께 사라진다. 다만 각 치리회의 상비부나 위원회는 치리회에서 결정된 사안만 을 다룬다. 그리고 그 사안은 다음 치리회의 개회 때에 보고하고 해산하는 것 이 바른 것이다. 엄밀한 장로 교회 정치 원리를 볼 때 상비부서의 권한 확대는 비정상적이다. 그러므로 치리회가 개회되었을 때 중대한 문제를 거의 토의하고 결정하여 위 원회에 위임하고 위원회나 상비부는 치리회로부터 받은 안건만을 다루어 보고 하고 해산하는 것이 장로 교회 정치 원리에 합당하다. 특히 장로 교회 총회는 임시회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노회로부터 헌의 되지 아니한 어떤 것도 다룰 수 없고 노회의 수의를 거치지 않은 어떤 것도 결정 할 수 없다. 또한 모든 결정과 선언은 치리회 기간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총회의 상비부와 위원회는 총회 개회 기간 이외에는 어떤 경우에도 헌의 되거나 수의된 것을 결정하여 공포할 수 없다. 오직 모든 결정은 치리회가 하는 것이고 상비부나 위원회는 단지 치리회로부 터 위임받은 것만을 실행하고 보고할 권한 이외에 없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 회의의 결정과 선언은 오직 치리회 기간 안에서만 할 수 있다. 그것은 치리회 의 고유 권한이므로 상비부나 위원회에게 위임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2) 교회 정치의 원리로서 하나님의 말씀 장로 교회 정치 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교 회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 과 그 말씀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그 치리회가 고백하는 신앙 고백에 기초한 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최종의 유일한 교회의 법에 대한 기초가 된다. 그 리고 그 치리회의 신앙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는 방식으로서 교회의 법을 세우는 그 다음 차순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의 법은 오직 성 경과 그 치리회의 신앙 고백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성경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교회의 법을 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구약 성경이 유일한 교회의 정치 제 도와 권징 조례 그리고 예배 모범에 대한 기초를 제시한다. 그런 측면에서 모 든 교회의 법에 대한 개정은 성경과 그 성경을 보존하는 방식으로서 신앙 고 백에 기초하여서 교회 정치와 권징 조례와 예배 모범을 세워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의 법은 전면 개정이 불가하다. 왜냐하면 교회의 법에 대한 전면 개 정은 곧 교회의 오랜 전통과 그 교회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정통성에 대한 시 비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법은 가장 신중하게 가장 최 소한의 법개정을 기나긴 기간을 통 하여서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역사적 으로 장로 교회의 헌법은 하루 이틀 만에 생각 없이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서 전통으로 자리잡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나긴 기간을 통하여서 점진적으로 개정되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개정도 가장 신중하고 가장 엄밀하게 모든 치리회 회의를 거쳐서 노회로부 터 헌의된 것만을 개정하는 것이 가한 줄로 안다. 그러므로 하회 치리회로부 터 헌의된 개정안을 총회가 검토하고 가부여서 결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러므로 교회 법에 대한 전면 개정은 스스로 장로 교회 정통성을 버리는 사생 아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3) 치리회의 성격 장로 교회 치리회는 각 치리회의 회원들의 수평성을 기초로 개회된다. 그 회 의 기간에 호명된 노회원이나 총회의 총대들은 동등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하회 기관이라고 하여서 상회 기관에 무조건 복종은 아니다. 특히 노회 와 총회와의 관계는 넓은 회와 그보다 작은 회의 성격이 있다. 그러므로 넓은 회의 결정은 곧 무비판적으로 하회의 결정이 될 수 없고 하회 는 상회의 결정을 심사숙고하여서 수의하고 다시 그 수의된 결과를 돌 려보내 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회는 상회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하는 장로 교회 정치 원리는 원리 적인 통일성에 대한 것이며 그 원리가 하회에 대한 상회의 무조건적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총회가 최고의 법정이기는 하지만 그 치리회의 결정이 오직 성경과 그 치리회의 신앙 고백에 일치하지 않는 한 철회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회의는 그리스도의 공회이며 그 최종적인 심판자는 성 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시다(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1장 9절). 총회가 최고회의 성격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노회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한 도 내에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노회 이외에는 어느 기관도 헌의할 수 없다. 오히려 장로 교회 정치 원리로 볼 때 노회의 헌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총회는 개회 자체를 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장로 교회 총회는 임시회 성격 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장로 교회 총회 총대의 권세는 노회로부터 받은 권세 이외에 없는 것이 다. 그러므로 총회의 총대는 노회의 상비부서로부터 선출되어서는 안 된다. 노회의 상비부서는 노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총회와 관련된 총 대 파송 과 그 외의 관련 업무는 노회로부터 결정된 것을 통하지 않고는 무효이다. 결코 노회의 상비부 조차도 총대 파송의 기관이 될 수 없다. 오직 정기 노회 의 선출을 통하여서 총대가 파송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총대 선출은 가장 공 정하여야 하고 모든 노회원의 의견이 반영된 상태에서의 결정을 통하여서 선 출되어야한다. 맺는 말 이제 한국 장로 교회는 교회의 유기적 통일성과 함께 각 지교회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가장 민주적이면서 동시에 신정 정치적인 교회 정치 제도로 나아가 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서 모든 교회 정치는 치리회를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몇 몇 사람들에 의하여서 교회의 권세가 진리와 상관없이 휘둘리지 못하도록 치 리회 자체의 권세가 강화되어야 하고 여러 가지 상비부나 위원회의 권한은 축 소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당회와 노회의 안건은 자주 모여서 처리하고 총회는 중요한 안건 이 외에는 다루지 아니함이 가하다. 개혁 교회 총회는 임시회의 성격이 있기 때 문이다. 치리회 안에 상설 기구를 두고 초법적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장로 교 회 총회의 성격과 일치하지 않는다. 장로 교회 총회는 다스리는 기관이 아니 라 수종들고 조정하는 기관이다. 모든 치리회는 교회의 문제를 조정하는 기관 이며 통치하거나 강압적으로 군림하는 기관이 아니다. 그러기에 민주적이면서 도 동시에 신정 정치적이다. 오직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만이 모든 치리회의 주재자가 되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통치 개념과 다스리는 개념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되고 치리회의 어떤 상비부나 위원회도 그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런 상비부나 위원회는 치리회에 수종들고 치리회의 일들을 처리하고 조정하 는 기관으로써 그 사안만을 다루기 위하여서 결성되고 바로 해산해야 하는 것 이다. 장로 교회 제도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왕이 되심을 그 정 치 제도를 통하여서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 교회 정치 원리는 치리 회 간에 목사들을 계층적으로 상하 구분하는 형태를 용납하지 않는다. 장로 교회 치리회는 고위 성직자 개념이 없다. 모든 교회의 직원들은 그리스도의 직원이고 사람에게 속한 직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위 성직자 개념은 로마 천주교의 정치 제도의 구조이다. 장로 교회 정치 원리를 따라서 볼 때 모든 직원들은 수평적이고 수직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치리회원들의 권세도 동등하다. 치리회원들의 모든 활동을 의도적으 로 이유 없이 저지하는 어떤 행위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장로 교회 정치 제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워지거나 개정 될 수 있다. 정통 장로 교회 정치 원리는 오직 성경에 기초하여서 제정된 것이다. 우리가 더 나은 개혁으로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정통 장로 교회 정치 원리를 기초로 하여서 나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오직 성경과 그 성경의 해석을 보존하고자 하였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그 치리회의 헌법의 기초로서 폐기하는 순간 교회 정치가 가게되는 방향은 감 독 교회를 넘어서 로마 천주교의 교황 정치 제도에 이르는 인간 부패성의 산 출물 밖에 더 얻을 것이 없을 것이다. 장로 교회 치리회의 성격에 대한 올바 르고 충분한 이해가 치리회원 상호간에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172 no image 미국 장로교 헌법과 한국 장로교 헌법과의 관계 -민성기 목사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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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0 2003-02-26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321min.hwp미국 장로교 헌법과 한국 장로교 헌법과의 관계 민성기목사, 충청노회 1. 머리말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은 장로교 헌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할 때 세워지며 장 로교의 독특성이 구별되리라 생각된다. 오직 성경을 원리로 하여 역사적으로 가장 좋은 정치형태가 심어진 것이 장로정치라 할 수 있다. 현 한국교회 실정 이 개교회주의로 흐르고 있기에 더욱 장로교의 정체성을 찾아야 할 때라 생각 된다. 장로교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정치형태는 회중정치를 따르고 있 고 심지어 감독정치, 교황정치형태를 취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유는 한국교 회 현실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교회정치도 이제는 장로정치형태가 아니라 회 중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세워 나가는 형태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헌법을 수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지금의 헌법은 시대적으로 뒤떨어진다는 사고가 자리 잡고 있어 늘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다.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는 타교단과 구별되어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왕이 시다' 라는 원리에 따라 세워졌던 그 헌법 정신을 최소한 회복하는 차원으로 잘못 개정된 부분들을 되돌릴 뿐만 아니라, 더 엄밀한 선에서 가장 좋은 장로 교 헌법이 되도록 개정을 추진하는 것이다. 개정된 우리 교단의 헌법은 교회 정치 개정안은 부결되고 권징조례 개정안은 가결됨으로 권징조례에서 교회정 치부분으로 넘어간 많은 내용들이 사라진 상태에 있다. 또한 예배모범에 있 는 내용들이 권징조례에 이중으로 들어 있는 상황이다. 한국 장로교 헌법의 기초는 미국장로교 헌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장 로교 헌법과 한국 장로교 헌법과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우리 교단 헌법의 자 리를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좋은 장로정치원리에 따라 세워진 헌 법이 있다면 그 선은 최소한 머물러야 할 것이다. 지면 관계상 헌법 발전 역사를 다 다룰 수 없어 웨스트민스터 규범에 따라 세 워진 미국 장로교 헌법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던 사건들과 미북장로교 선 교사들에 의해 초창기 한국 장로교 헌법이 형성되는 과정에 따라 부정적인 영 향을 준 관계 를 살펴보고, 미국 장로교 헌법과 한국 장로교 헌법(신앙고백부 분과 교회정치)을 비교해 그 차이를 알아본 후 우리 교단 헌법이 갖는 독특성 과 앞으로의 헌법 수정의 방향을 모색해 보기로 하겠다. 2. 미국장로교 헌법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던 사건들 미국장로교 헌법 발전에 있어 부정적 영향을 끼쳤던 사건들을 열거하면 다음 과 같다. 첫째, 미국장로회가 조직되기 전 뉴잉글랜드 정착초기 교회(매사추 세츠지역)는 엄밀한 칼빈주의 신학 위에 세워진 장로교가 아니라 영국으로부 터 들어간 퓨리탄 칼빈주의에 의해 교회정치에 있어 회중교회적인 교회정치 가 배경이 되어 세워진 회중교회로 장로정치를 선호하는 교인들과의 마찰이 있었다. 뉴잉글랜드 정착 초기 지도자들인 죤 코튼(Jhon Cotton), 토마스 후 커(Thomas Hooker), 죤 데이븐포트(Jhon Davenport)의 신학은 영국에서 웨스 트민스터 총회시기에 교회정치에 있어 회중교회정치를 주장함으로 문제가 되 어 비판받았다. 둘째, 윌리엄 테넌트와 그의 아들인 길버트 테넌트(Gilbert Tennent)에 의해 세워진 통나무대학은 회심과 새로운 삶을 강조하는 감리교식 부흥운동 을 전개 함으로써 장로교가 분열되는 계기를 주게 되었다. 셋째, 서부개척시대에 따른 목사수급 문제로 인한 컴버랜드노회의 탈퇴(1810 년)는 1801년 회중교회와 연합계획 채택에 따른 정신의 산물로 예정론과 제한 속죄를 포기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르는 미국장로교로부터 분리되었 고, 그 후 교회 헌법과 교리의 문제로 미국 장로교회는 남, 북이 분열(1837 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넷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수정(1903)은 예정론의 유기론과 그리스도의 제한속죄를 부정하는 것으로 미국 장로교내의 개혁주의 신학의 몰락을 의미한 다. 그리고 수정된 신앙고백을 기초로 아르미니스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컴버 랜드 장로교회와의 연합이 이루어졌다. 다섯째, 미국 장로교가 자유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조건적으로 성경을 수 용하고 성경에 복종해야 한다는 근본주의가 일어남에 따라 자유주의 사상들과 의 싸움에서 성경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속죄, 성경적 기적들을 강 조하였지만 장로교의 교리적 헌법을 약하게 만들고 개인적인 경건에 치중하 는 결과를 낳았다. 3. 한국장로교 헌법 발 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던 사건들 첫째, 수정된 미국헌법(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1903년) 정신에 따른 미국 선 교사들에 의한 한국장로교 헌법이 기초되고 있다는 점이다. 초창기 한국 장로 교회는 미국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한국장로교 헌법이 형성된 것도 미국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 미국 장로교는 1903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하였다. 미국장로교 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하면서 역사적 장로교회가 세워놓았던 17세 기 칼빈주의의 핵심인 예정론을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새롭게 이해하려고 시 도하고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신앙고백을 따르는 컴버랜드 장로교회와 연합 할 수 있는 여건을 이미 수정된 신앙고백이 열어 준 셈이다. 컴버랜드 신앙고백 제 3 장 "하나님의 작정" 부분에서 기존 신앙고백에 있었 던 3항부터 8항까지 모두 삭제하였다. 이는 역사적 장로교회가 진리로 순수하 게 지켰던 예정론의 유기론에 대한 언급과 그리스도의 제한속죄 부분을 완전 히 삭제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정된 신앙고백 3장에 대한 선언문은 도르트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본래 뜻인 그리스도의 제한속죄를 부정하는 선언이었 다. 또한 제 10장 3항 "유아로 죽은 아이들에 대해서는 택함 받은 유아로 제한" 하고 있었는데 수정판은 "유아 때 죽은 모든 아이들은 은혜의 선택 안에 포함 되며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되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여 유 기론과 그리스도의 제한 속죄를 거부하고 있다. 이는 아르미니우스보다 더 진 보적이고 웨슬레주의에 가까운 선언으로 감리교와 장로교의 구별되지 않는 입 장이며 선교지향주의에 따른 고백의 수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제 16장, 22장, 25장에 대한 수정을 가함으로 시대적으로 연합분위기 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고 수용하려는 움직임이었음을 고려할 수 있 다. 맹세거절에 대한 죄를 부정하고 카톨릭 입장을 적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 고 비성경적이라고 고백하고 이방인들에게 선(善)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음에 서 카톨릭교회와 이방세계의 종교와 대화하고 수용하고자 하는 준비로 생각 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34장과 35장을 첨가하였다는 사실이다. 제 34장 "성령에 대 하여" 부분과 제 35장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대 하여" 부분은 삼위일체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제 2장 "하나님과 삼위일체"부분과 상충되어 모순을 일으 킨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외적 사역에 있어 분리되지 아니하시고 한 하나님 의 사역으로 선언하여 모든 계획 모든 행사 모든 명령에 있어 성부, 성자, 성 령의 사역을 구분하고 있지 않다. 한 하나님의 사역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러 나 수정된 부분에서는 오순절 운동과 같은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성령의 사역 을 강조하여 선교에 기초적 토대를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제 35장 부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으로 선교지향성을 더욱 극대화하고 있다. 하나님의 특별은총에 의한 사랑과 보편은총을 구별하지 못하고 앞서 수 정부분에서 확인된 대로 예정에 대한 특별은총은 사라지고 모든 대상으로 하 나님의 사랑이 보편은총화 되어 인간 자신의 기도와 은사와 개인적인 노력과 책임으로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해야 할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복음 주의 노선에서 쉽게 확인 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들이다. 이처럼 한국 초창기 미국 장로교선교사들은 한국에 단일한 교회를 복음주의 노선에 따라 세우려는 움직 임이 있었다. 이는 이미 미국장로교 신학이 해외 선교를 지향하는 분위기에서 개혁주의의 신학의 핵심을 잃고 신앙고백을 수정 하여 그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을 볼 때 쉽게 확인이 된다. 이런 분위기에 있 던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그들의 신학을 그대로 반영하여 뿌리를 내리게 될 것 은 자명한 일이다. 실제로 한국 초기 장로교 역사에서 확인되고 있다. 아무리 모든 일을 성경 중 심으로 해야 한다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일지라도 거기에는 한국에 감리교와 장 로교를 구별하지 않고 분할하여 교회를 세우고자 하려는 복음주의 선에서의 연합 정신이 깃 들여 있다. 선교지의 분위기에 따라 장로교 신학의 독특성이 심어지기보다는 복음주의 선에 머물려는 선교사들의 정신에는 이미 자국의 신 학이 반영되어 실천되고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수정은 장로교의 핵심인 예정론과 그리스도의 제한 속죄가 고백되지 않아 선교에 매우 커다란 장점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러 한 미국장로교 신학은 한국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서 그대로 한국에 소개되었 다. 한국에 심어진 장로교 신학은 철저하게 미국 장로교 신학에 종 속되어 엄 밀한 개혁주의의 핵심이 빠진 성경무오와 동정녀 탄생,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 부활, 그리스도의 기적을 행하는 능력 등이 겨우 소개되는 정도 의 복음주의 노선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초기 장로교선교사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신학으로는 갑작스런 회심 과 새로운 삶을 강조하여 교회부흥을 꾀하는 감리교와 특별한 구별을 가질 수 없었고, 당연히 연합하여 교회를 세우고자하는 정책들이 공의회에서 확인 되고 있다. 둘째,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한국 독노회(1907년)가 12신조를 채택 하였다는 것이다. 1901년 이후 미국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오순절운동은 선교 사들을 통해 한국에도 심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에 "한국 그 리스도교회(the Church of the Christ in Korea)"를 세우고자 하는 선교사들 의 분위기는 장로교 공의회 역사를 통해서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 (1901,1905,1916)하여 단일한 교회를 세우려는 움직임에서 잘 알 수 있다. 장로교와 감리교 합동으로 감사일(1905)을 정한다든지, 연합하여 찬송가를 편 찬(1902)한다든지, 연합 회보를 발행 한다든지(191 5) 지방 선교나 일본 선 교, 하와이 교회 시찰(1906)에 있어 교단 구분을 하지 않고 교회를 운영한다 든지 등 여러 분야에서 연합하여 단일한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선교 사들에 의해 있었던 분위기였다. 12신조 채택은 한국 선교지의 형편에 적합하다는 이유를 들어 인도자유장로교 회(1904)가 채택한 것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채택이었다. 또한 이 신경은 인도 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모든 장로회가 채택하여 모든 교회가 연합되기를 바란다는 선교사들의 보고가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성경을 기초로 하여 가장 진리에 이르는 가장 좋은 체계임을 인정하고 미국 헌법으로 채용했던 미국 초기 장로교(1788)와는 달 리 선교지향주의를 지향하고자 수정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1903)은 선교에 예정론의 유기론에 대한 고백과 그리스도의 제한속죄에 대한 고백이 선교지 에 악영향을 줄 것을 고려하여 12신조와 같은 신조를 택하게 된 것이다. 셋째, 곽안련(미북장로회 선교사)목사의 "예수교 장로회 정치문답조례(1917 년)"에 따른 교회정치 형성을 들 수 있다.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1878- 1961) 목 사는 한국 초창기 장로회 헌법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특히 그는 1917년 J. Aspinwall, Hodge의 "What is presbyterian Law?"(정치 문답 조례)를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신경론"에서 신경이 없다면 교회를 회집하여 교회설립 을 할 수 없다고 정의하고 있다. 만약 성경이 오직 나의 신경이라고 하는 자 는 무식한 자라고 하면서 교회의 신경이 무엇인지 어느 곳에서 산출되는 것인 지 알지 못한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과 신경은 서로 대적할 수 없고 신 경은 신구약 성경에서 산출된다고 하였다. 신구약성경중에서 요긴한 도리의 요지를 몇 가지로 분류하여 편성한 것이 신경이라고 덧 붙였다. 사경회나 성 서학원에서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각 교인에게 신경을 교수하지 아니하 면 안 된다고 하고 있다. 신경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고 난 후 그는 12신조의 우수성을 설명하고 있 다. 장로회 신경 중 우수한 신경들(니케아, 아타나시우스, 제네바신경, 도르 트신조,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39개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경)을 말하면서 한국 실정에 맞는 신경은 인도자유장로교회가 사 용하는 12개 신조가 교회 형 편상 가장 적합하다고 하였다. 이 신경론에서 그는 12신조에 대해서 만국장로회신경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 고 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기타 유명한 일곱신경보다 간단하고 명백하 여 알기 쉽다고 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다른 신조들이 유아 의 택하심과 예정에 대한 교리 조항이 명백하지 못하여 늘 논쟁의 대상이 되 었으나 12신조는 명백한 견해를 주고 있어 쟁론의 발생이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곽안련의 입장은 미국 장로교회가 1903년 수정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 백 정신의 연장선이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감리교와 장로교간의 연합문제 회집시 감리교가 웨스트민스터신경은 채용하기가 어려움에 있으나 인도에서 채택한 12신조는 연합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는 견해가 있었다 고 하였다. 이처럼 예정론과 그리스도의 제한속죄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선교사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앞서도 살펴본 바대로 그 당시 미 국 장로교 자체 신학교육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시대적 분위기는 선교 지에 그대로 심겨질 수밖에 없는 상황 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미국장로교헌법과 한국장로교헌법 비교 전체적인 구조에 있어 한국 장로교 헌법은 미국 장로교 헌법의 형태를 따르 고 있다기보다는 J. A. Hodge의 정치문답조례의 구조를 따라 기술되고 있음 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 정치에 있어 한국 장로교 정치는 미국 헌법의 정 치 부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J. A. Hodge의 정치문답조례의 영향이 크다 할 수 있다. 초기 곽안련 선교사에 의해 번역된 정치문답조례의 영향에 따라 구조화되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치리회 의장(Moderator)과 회장(President) 개념의 혼동이 Hodge 안에 있기 때문에 그대로 지금까지 고정되어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명칭 사용에 대한 구별과 선택은 어디까지 엄밀하게 교회가 개혁해야 하 는지에 대한 분명한 교회정치 원리가 있는 것이다. 또한 목사 칭호에 대한 구 별이 미국 헌법 정치 부분에 구별되고 있지 않다. 이것 또한 J. A. Hodge에 의해 구별되어 한국 장로교회가 그것을 사용한 것이다. 초기 한국장로교회에 있었던 동사목사(co-pastor)의 칭호는 현재 정치에서 사 라지고 없다. 목사의 직임상 구별로 인한 칭호가 갖는 애매성이 있을 수 있 다. 특히 부목사나 임시목사의 경우 목사간 교황정치나 감독정치처럼 계급구 조가 형성될 수 있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목사의 직임상 칭호에 대한 연구 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앞으로 세분화되고 조직화되는 추세에 따라 목사직임에 따른 칭호가 발생해야 하며 그것에 따라 구별이 있어야 하는지 의 문이 생긴다. 음악을 담당하는 음악목사, 행정을 담당하는 행정목사, 교회 시스템을 담당하 는 시스템 목사 등 다양한 직임에 따라 이처럼 목사의 칭호가 있어야 하는 가? 본래 웨스트민스터 정치부분에 따라 미국 장로교 헌법이 목사의 직임상 칭호를 구별하지 않는 것처럼 그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다음으로 지교회 부동산 재산 소유권에 대한 언급은 미국 헌법에 따라 한국 장로교회가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미국 장로교 헌법에서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추가하여 명기하고 있는 것은 교황정치나 감독정치가 지향하는 제도이 다. 우리교단은 이 점에 있어 개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미국 장로교회의 헌법 역사 가운데 회중교회와 의 연합(1801)이 있었 다. 인간론에 의해 교회 성장을 추구한 나머지 교회정치에 있어 엄밀한 선에 서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는 회중교회와 연합을 추진하였다. 우리교단이 "우 호적 교단과의 합동" 조항을 헌법에 삽입하였다. 만약 미국 장로교회가 단순 히 인간론적인 교회성장을 위한 목사 수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차원의 연 합과 같은 합동이라면 향후 그 문제는 크리라 본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시다"는 우리 교단의 총론에서의 선언은 이 시대 독 특한 개혁주의를 지향하고자 하는 강한 고백의 선언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왕이시다는 진리만을 고집하며 그 선에서 벗어났을 때 타협할 수 없 는 그 헌법 정신에 따라 합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맺는 말 헌법 수정은 매우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미국 장로교회 헌법 역사 를 통해 살펴보았다.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여 오직 성경의 원리에 따라 가장 좋은 고백을 역사적으로 세웠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함으로써 미국 내 개혁주의 신학의 몰락을 가져오게 하였고 심지어 선교지에 그 수정된 정신 이 뿌리를 내려 장로교의 정체성을 잃고 약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장로교가 다른 교단과 구별이 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영향으로 계속 발전되어 왔기 때 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향후 헌법 수정을 추진한다면 합신 헌법의 독특성(수정된 1903년 웨스트민스 터 신앙고백이 아닌 17세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회복한 정신)에서 한 걸 음 더 나아가 한국 초기 유아기적인 교회의 실정에 따라 선교사들의 공의회 에 의해 형성되었던 12신조는 헌법에서 삭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12신조 자리 에 역사적 장로교의 유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홀로 자리해야 한다. 모 교단처럼 12신조를 원 고백으로 삼고 신앙고백을 부록으로 삽입한다든지 12신조와 함께 신앙고백을 선언하게 되었을 때 모순적인 조항이 생기기 때문 에 헌법으로서 합당한 신앙고백이 될 수 없게 된다. 다만 미국장로교가 1729 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하면서 "국가 위정자가 교회에 간섭할 수 있 는 선언(23장)" 부분을 삭제했던 것처럼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수정될 필요가 있다. 향후 헌법 수정의 방향을 모색해 본다면 성경을 어떻게 바르게 해석하는 틀로 서 교리의 기 본적 선언을 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예배모범, 교회정 치 포함)을 최소한 선으로 하고 교회역사에 있어 중요하게 발굴된 내용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반영되지 못했던 것들과 역사적으로 다루지 못했던 것들(원문 성경의 신적 영감 및 무오성, 삼위일체와 그 구조에 있어 신구약 의 실체의 통일성, 신구약에 관한 '육체 밖의 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두 의지론',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예정 의 실천적 의미, 그리스도의 제한속죄와 그의 중보사역, 먼 원인과 가까운 원 인으로서 구원의 서정과 예정론의 관계, 장로회에 있어 성직자 '개인 '과 '회자체', 개혁주의 예배, 현대과학적 사실과 그 신학적 의미 등)을 첨가하여 지금까지 교회사적으로 내지 못했던 가장 좋은 장로교 헌법으로의 수정이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 헌법은 세상 법의 테두리에서 해석되고 수정되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헌법 수정은 오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원리로 하여 적정과 절도의 규범 을 원칙으로 철저한 검토와 검증이 요구된다. 잘못된 헌법은 언제라도 장로 교 정치원리에 의해 바른 절차를 밟아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171 no image 한국장로교 권징조례의 발전역사와 그 신학적 문제점-김인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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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0 2003-02-12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320law.hwp한국장로교 권징조례의 발전역사와 그 신학적 문제점 김인석 목사(경기중노회) 1. 한국장로교 권징조례의 발전역사 한국에 처음으로 독노회가 조직된 것은 1907년 9월17일 9시 평양 장대현교회 (혹은 중앙교회)에서였다.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면서 매년 예수교장로회헌 법에 대한 작성이 활기를 띄었다. 1917년까지 헌법과 관련되어 계속 작성되 는 일이 많았다. 특별히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작성이 되었다. 첫째는 도 리적헌법(道理的憲法)부분으로 신경과 대소요리문답이었고, 둘째는 관리적헌 법(管理的憲法)부분으로 정치, 권징, 예배모범으로 구성되어 있다. 1913년 제 2회 총회에서 김이제씨가 헌의한 건 가운데 정치와 권징조례 출간 에 대한 안이 있었다. 정치는 임의로 출간하였고 권징조례는 조속히 출간할 것으로 결의가 되었다. 1915년 제 4회 총회는 장로회 정치와 권징조례와 규칙 을 출판하는 일에 대하여 권징조례와 규칙은 번역 중이고 교회정치는 마포삼 열, 양전백, 원두우, 김필수, 김선두 5인을 택하여 조속히 준비키로 하였다. 1917년 총회는 교회정치와 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은 웨스트민스터 책을 번역하 고 편집케 할 것과 교회정치는 곽안련, 함태영 씨에게 맡겨 준비 교정 중에 있어서 완전히 교정하여 출판할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권징조례와 예 배모범은 곽안련, 함태영, 배유지, 남궁혁에게 맡겨 번역토록 하였고 출판토 록 하였다. 1918년 제 7회 총회는 예배모범과 권징조례는 출간하여 분전하였다고 보고하 고 있다. 1921년 제 10회 총회는 교회정치와 권징조례 예배모범의 출간 후 각 노회 수의 후 교정하여 보고하고 채용하였다. 1928년 총회는 헌법수정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권징조례는 기존의 것을 약간 수정 개정 혹은 삭제된 부 분이 있었다. 1934년, 1954년, 1962년, 1988년(합신헌법), 1995년(합신헌법) 에 걸쳐 헌법을 출간했는데 권징조례는 1928년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다만 1967년 제53회 총회에서 초기에 삭제되었던 '대회' 조항을 첨가하는 수 정과 옛 한문체와 고어를 현대에 맞게 바꾸는 수정 외에 큰 변화 없이 제14 장 제146조에 이르는 권징조례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교단(합신)의 경우 1996년에 수정 출판된 헌법 제13장에서 대회 재판국 규례 10개 조항과 제8장 제65조항이 삭제되어 제9장 제77조가 첨가되었고, 제 9장 제99조는 제98조에서 분리하여 한 조를 추가함으로 전체 14장 137조항의 권징조례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한국장로교 권징조례는 미국 장로교 권 징조례에 상당한 부분의 것을 채택하였다. 그렇지만 미국장로교 권징조례를 채택하면서 그 번역에 있어 명확한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정확한 번역은 사 실상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통합 측의 권징조례는 개혁주의 장로교 정치원리로부터 오해의 성격을 가지 고 수정되었다. 수차례에 걸쳐 1983년 권징조례의 경우 총 6장 91조로 대폭 간소화하여 사용 중인데, 권징조례의 특징은 세속법정의 재판 절차를 대폭 적 용하여 개정하였다는데 있다. 권징의 본래의 신학적 의미가 전혀 드러나지 않 을 뿐만 아니라, 세상 재판회의 성격으로 보아 분쟁 조정과 절차에만 치우친 경향이 많다. 그래서 본래 치리회의 성경적 의미가 애매해졌고, 권징의 목적 과 지향해야 할 바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방향으로 수정된 것이다. n그것은 권징의 참된 의미를 상실하게 하였고, 세상 법정에서처럼 인간존중에 기초한 법정적 절차로 판결하려는 시도는 말씀에 더 가까이 더 정확히 모든 규범을 세우고자 하는 장로교 정치원리에 대한 의도적인 외면이 되었다. 지난 해 우리교단은 총 13장 134조로 축소하여 권징조례를 개정하였다. 통합측과 유사하게 개정된 우리교단의 권징조례 또한 현행 세속법에 따른 절차 등을 고 려하여 개정되었다. 2. 개정된 권징조례의 신학적 문제점 첫째, 교회권징의 원리와는 달리 현행 세속법의 정신에 따른 개정이라 할 수 있다. 개정된 권징조례의 구조를 보면 현행 형사소송규칙에 가까울 정도로 개정되었 다는 점이다. 권징조례의 목차를 보면 재판절차를 위한 규례들처럼 매우 이해 하기 쉽게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절차들은 형벌의 유무를 가리기 위한 논리적 수준에는 합리적이라 할 수 있지만 교회 권징의 원리에는 맞지 않는 다. 권징조례에 있던 조항이 교회정치부분으로 넘어 간 것과 예배모범에 있던 조 항들이 권징조례로 넘어온 것은 단순히 현행 재판행위에 관한 규례로 권징조 례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따 라서 권징조례에 사용되는 용어에 있어서도 세속 형법에 사용되는 용어들로 바뀌었다는데서 그 정신이 세속법을 따라가고 있다 고 볼 수 있다. 즉결재판, 삼심제, 재판비용, 변호인의 선임권, 변호인의 보 수, 행정심판, 위탁 심판 등이 세속법으로부터 빌려온 용어라 할 수 있다. 둘째, 현행형법소송의 삼심제와 장로회(당회, 노회, 총회)를 혼동하여 적용 한 점이다. 통합측 제 4조 3항과 합신측 제 1장 10조에 삼심제(당회, 노회, 총회)에 대 한 표현은 치리회의 성격에 대한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치리회는 언제든 지 대회, 세계 공의회와 같은 중간 혹은 더 넓은 회로 확대 혹은 축소 될 수 있기 때문에 삼심제의 성격과는 관련이 없다. 미국장로교 헌법 제 9장은 '한 사건이 낮은 치리회에서 넓은 치리회로 갈 수 있는 길들에 대해서'란 조항이 다. 이것을 상소규례에 대한 항목으로 잘못 하였기 때문에 장로회를 세속법 의 삼심제로 착각하여 적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장로교 권징 원리에는 어떤 회원이나 회원들이 자신의 양심과 자신의 면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가장 높은 재판 절차 또는 어떤 결의에 대항하여 저항할 의무를 가진다. 왜냐하면 회복을 위한 또 다른 호소가 없기 때문이 다. 그리고 회록에 그것을 기록함으로 언제든지 항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셋째, 변호인 제도에 대한 원리적인 오해에 기인한 개정이었다. 개정되기 전(1996년) 제27조이었던 것이 개정된 권징조례에는 제3장 제28조부 터 제33조에까지 극대화함으로 개정의 원리가 세속 형법의 모범으로부터 온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변호인 제도는 성경으로부터 확증된 것이 아 니다. 그 자격에 있어서는 더 혼란스러워졌는데, 합동측(제 27조 1항 본 장로 회 목사 혹 장로 아닌 자를 변호인으로 선정하지 못할 것이요..), 통합측(제 26조 1항 ... 변호인은 본 교단의 무흠 세례교인 중에서 ....) 합신측(제 29 조 3항 사건이 전문적인 분야의 지식이 필요한 경우 목사나 장로가 아닌 일 반 신자도 ...선임될 수 있다)이 서로 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성경을 원리로 하여 변호하는데 있어서도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변호인제도이 다. 변호인을 두는 목적은 마치 세상에서 변호사를 두어 재판에서 승소하기 위해 두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미국 장로교 헌법은 이를 확 고하게 해 두고 있다. 전문적인 변호사를 거절하고 목사, 혹은 장로에 의한 변호제도만을 허 락할 뿐이다. 넷째, 상설재판국, 각 치리회의 의장의 권세를 강화한 것과 교회 직원들에 대 한 치리의 내용이 불필요하게 강화되었다. 더불어 총회의 치리협력위원회에게 '지도를 구한 치리회는 그 지도에 그대로 따라야'(제105조 2항)한다든지, 위탁한 판결에 대해서 '그대로 받아들여야'하 는 조항들은 역할을 크게 강화하였다(제 9장). 재판국원의 결원 시에 그 임명 을 대폭 각 치리회장에게 일임해 버렸다. 교회 직원들을 치리 할 수 있는 내 용이 강화되었는데, 당회가 없거나 시무장로가 1인인 교회에서 치리 위탁 문 제, 즉결재판에 해당된 죄목들의 애매성, 목사를 고소할만한 죄목의 강화, 재 판절차 없이 목사직무 정지처분 가능성, 타 교단으로 가는 교회직원의 이명문 제 등 그런 것들이 그렇게 강화되어야 할 필연적 이유와 관련해서 좀 더 살펴 야 할 내용들이다. 3. 권징에 대한 성경적 이해 처음부터 장로교 권징은 신적기원(출25:40; 레24:11-16; 민9; 대하8:14; 겔 40:41,42; 43:11)을 갖는데 모세나 선지 자로부터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부 터 출발한 것이다. 치리회의 성격이 재판권의 행사라 할지라도 그것은 전적으 로 말씀의 판단을 받는 영적인 권징에 관한 것이다. 양심이 세속법정에서 최후로 인간 자신을 보호하고 다스리는 것이라면, 하나 님의 백성을 지키고 다스리는 권(權)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어 려운 일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며, 그분에게서 나오는 말씀으로 치리 회가 세워지고 그 안에서 택함 받은 권속(眷屬)들이 선한 판단으로 다스림 받 는 것이 권징조례의 근본정신이다. 첫째, 교회의 권징은 즉, 재판권은 언제든지 도덕적이고 영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제 1치리서나 제 2 치리서등에는 교회정치와 권징 및 예배모범 등의 개념이 구별 없이 혼합되어 있어도 권징(Discipline)의 개념 을 사용한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 교회정치와 권징조례가 구별되었지만, 교회 권징 자체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교회 안에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그에 대해서 견책하고 조사하는 열쇠의 직책이 다스리 는 장로들에게 임명되었다(딤전 5;27; 고전 12:28) . 이런 권한은 어떤 개인(uni)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회(unitati)' 자체에 그리스도께서 주신 열쇠권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다. 직접적으로 베드로에 게 하신 말씀(마16:19)은 복음 선포와 관련해서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주어 진 것이지만 그럴지라도 '메고 푸는' 권세가 선포하는 성직자 개인들에게 주 신 것이거나 그들 안에서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게 주신 것이 다. 마태복음18장(마18:15-18)에서도 그 권세가 같은 명령과 같은 약속에 기 초하지만 특별히 교회에 맡겨진 권징(출교)에 관한 것으로 해석된다. 둘째, 예배와 권징은 분리할 수 없는 성격이 있다. 개정된 권징조례들의 경우에는 이를 단순히 재판행위에 관한 규례정도로 이해 하였다. 교회정치, 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의 각각 고유의 독특한 자리가 있음에 도 그런 이해로 인하여 많은 부분이 교회정치로 옮겨갔고, 고 박윤선 박사의 노력으로 시벌과 해벌조항을 예배모범의 마지막 항에 둠으로 예배와 분리할 수 없는 성경과 개혁신학의 권징의 정신(권징조례 제 4 장 제 31조)을 우리 의 권징조례에 심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 정신을 현 개정된 권징조례가 파 괴하고 있다. 셋째, 권징에 대한 전통적 개혁주의 견해는 세속법의 정신과는 달리 오직 성 경을 원리로 하여 세워졌다. 1559년 불란서 개혁교회 고백서와 1566년 벨직고백서, 그리고 개혁교회 혹은 장로교회의 선행자들인 왈두스파의 1573년 보헤미야 고백, 후에 웨스트민스 터 신앙고백서에서 그대로 확인하는 바,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우리 의 구원을 위해 요구되는 무엇이든지 그것에 대해서 모든 진리의 총화"이 다. "이 성경책에 가장 완전하게 하나님의 모든 뜻이 내포하고 있음"을 믿 고 "그 안에 교리와 거룩한 교회를 권징하고 다스리는데 필연적인 구원의 정 규적 목회에서 각 자와 모든 이들을 위한 그런 모든 것들이 충만히 절대적으 로 그리고 성령의 가장 뛰어나고 가장 예리한 역사 안에서 필요 불가결한 것 처럼 포괄되고 내포되어 있음"을 고백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작성하였던 유명한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Ursinus도 모든 것이 성경에 따라 시험되어야 한다고 할 때, 교의들(dogmata)이든, 권징 (disciplina)이나 의식들(ceremoniae)이든, 기독교 안에서 일어 나는 모든 물 음들에 대해서 적용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성경을 어기는 것은 물론 성경 안 에 내포하지 않는 어떤(quae non in ea contineatur) 교리도 교회에게 제의해 서는 아니 된다고 믿고 고백한다"고 하였다. 반면 "성경의 분명한 증거로 전 해내려 오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혹은 정당한 성찰로 말씀으로부터 결론되 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거나 믿지 않을 양심의 가책 없이, 바꾸며 폐기 하고 생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원칙이 영국의 퓨리탄의 신학사상과 웨 스트민스터 총회의 신학의 기본 뿌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개혁신학의 지배적 신학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4. 권징조례의 향후 방향 모색 첫째, 오직 성경을 원리로 하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권징의 목적에 따른 권징 조례 원리로 회복되어야 한다. 좁은 치리회와 함께 더 넓은 치리회의 결정은 존중받아야하지만 항상 옳은 결 정만 내리는 것은 아니다. 칼빈도 인간적인 결함을 근거로 고대의 비교적 순 수한 회의에도 결함이 있었음을 말하며, 한 회의의 투표에 의해서 채택되는 성경 해석이 확고한 진리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 지는 않는다. 종종 우리는 사안의 중요성보다도 수효만을 보기 때문에 더 좋은 제안이 더 많은 부분에 의해 무시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교단의 권징조례 개정안 투표 결과가 한 표도 안 되는 차이로 가결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 재고의 필요성을 요구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 회의의 결정이 지혜의 유일한 표준으로서 말씀의 요구를 담지 못할 때도 생긴다. 그럴 때 그 결정을 반대하는 일에 망 설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회의도 진리를 거스려서 결정될 수 없고, 그렇게 결정된 회의라면 거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든지 성경의 판단과 관련해서 수정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 다. 거기에는 인간의 판단이나 경험이나, 사려들이 개입될 수 없다. 오직 말 씀과 함께 사색하고 말씀을 통하여 시험하는 장로교 정치의 원리 아래에서 해 석되고 재개정될 수 있다. 다만 권징이 행사될 때에는 재판회 성격의 치리회 가 일임한 안건에 한해서 합당한 절차와 조사를 통해서 판결하는 것이 필요한 데 그 모든 판단 기준은 말씀이다. 이는 단순히 사건의 진상을 밝혀서 책임을 묻는 재판 행위로서가 아니라 온 교회로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케 하고 진리를 보호하며, 그리스도의 권위와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악행을 제거하고 교회를 정결하게 하며, 덕을 세우 고 범죄한 자의 영적 유익을 도모"하게 하는 그 목적을 잘 드러나게 해야 한 다. 그리고 부당한 책망을 염려하여 엄격하고 과도하게 많은 조항을 두어 양심에 짐을 지우는 것이나, 세속 재판회의 성격으로 지나치게 간략히 하거나 변경해 서도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절차를 밟음으로서 대상을 치리하고자 함으로 권징의 도덕적 영적 성격이 무시되게 하는 것이다. 엄격하거나 과도한 조항 들 역시 같은 이유에서 말씀의 요청대로(고후2:,8;갈6:1) 하나님의 판단에 맡 기는 태도가 아니라 우리 판단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를 제한 하고 있다. 권징의 수행에 있어서 출교는 마지막 수단이면서, 교정과 책망의 의미를 갖 고 있다. 튜레틴은 출교가 외면적으로는 교회와의 교통과 성례로부터의 분리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의 영속적인 분리는 아니라고 하였다. 다만 그가 회개하여 돌이키는 것을 기다릴 뿐이고, 그가 돌이킬 기회조차도 갖지 못하도록 요구되는 책망은 권징의 참된 목적이 아니다. 둘째, 미국장로교 권징조례의 정확한 번역을 통하여 개혁신학의 권징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기존 권징조례들은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서 매 조항들에 대한 정확하지 않은 제목을 부친 것이 전체적 구조를 이해하는데 더 방해를 하였고, 이로 인해 권 징조례의 개정과정에서 전체적 구조 분석에 있어서 아주 큰 오해와 혼돈이 있 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조항들이 교회정치부분으로 옮겨졌고, 예배모범으로 부터 권징조례로 넘어온 조항들은 역시 고 박윤선 박사가 심고자 했던 개혁신 학의 권징 정신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미국 장로교의 권징조례는 그 구조가 명료하였다. 제 1장은 '권징의 본성과 목적 및 대상에 관해서'인데, 단순한 총론이나 형사소송규칙의 총칙 의 개념이나 내용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제 7장은 '재판없는 사건들 에 대해서'인데 여기에서 가장 큰 오해가 있다. 이 조항들은 즉결처단의 규례 나 우리 권징조례의 제목처럼 치리회와 직접 관계된 사항들이 아니었다. 제 9 장은 '한 사건이 낮은 치리회에서 넓은 치리회로 갈 수 있는 기들에 대해 서'로 서 단순히 상소규례는 아닌 것이다. 제 13장은 제목이 없으며, 재판국 심판규칙이나 재판국에 관한 규례라고 번역하기에는 상당히 제한적이다. 셋째, 월터 트레버스가 그의 권징론에서 교회의 권징을 '선한 경영과 정치를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규정되고 정해진 그리스도 교회의 정치'이며, '그것 의 규칙이 성경으로부터 외에는 다른 기초로부터 가져오지 않아야 한다'는 대 원칙을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권징의 첫째원리는 권징의 근거가 오직 성경이라는 것이 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더 가까이 정확히 되는 것이 새로운 종교 개 혁의 첫 조항이어야 한다'는 기초 위에 권징도 하나님 자신의 목소리와 권위 에 의해 확증되는 것만큼 인정되도록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특별한 이해를 가진다. 그의 나라의 법정과 공 의의 질서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들이 사도와 선지자들에게 뿐 만 아니라 그가 임명한 직임자들에게 어떻게 제공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세 번째로 원리적으로 교회의 권징은 다른 어느 것으로부터 기원하거나 참조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기 때문에 모든 교회에 공통되고 일반 적이며 모든 시대에 있어서 영원하며 필연적이라는 정신이다. 그래서 이런 질 서는 사람의 힘이나 권위로 깨뜨려지거나 기호에 의해서 변경될 수 없다는 것 도 같은 맥락에서 함부로 개정할 수 없는 정신이 거기에 있다. 5. 마치는 말 말씀이 모든 세계에 대하여 빛이라면 교회와 관련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 다. 한 국가와 사회를 다스리는 데에 재판권의 행사는 그 사회의 질서를 유지 해주는 최첨단에 서 있는 것이다. 비록 도덕과 윤리가 보이지 않는 큰 힘으 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재판권은 직접적인 보이는 행사로서 질서를 유 지시키는 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물리적 힘도 사실상 인간 삶의 가장 기초적인 양심의 기능에 빚을 지 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교회 치리회의 성격도 모든 교회에 속한 자들에게 가장 실제적인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세상 재판권과는 그 기원과 동기, 목적에 있어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존재하고 심지어 방식에 있어서 조차도 커다란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 교회의 권징이다. 한국 장로교 권징조례의 발전 역사를 살펴 볼 때 그 개정의 원리와 내용들이 과연 얼마나 성경으로부터 산출된 것인지를 판단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결 코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기초를 떠나서 인간의 규정이나 경험, 그 사회상 의 시대적 규범아래에서 해석되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오랫동안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개혁된 그런 교회 안에서 남겨졌 던 규범들 속에서 이미 판단되었고, 더욱이 오직 하나님 자신의 목소리와 권 위에 의해서 확증할 수 있는 선인 성경에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이 처음에 의도되었다면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가장 좋은 개혁의 길을 가는 것 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 자가 더 멀리 가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종종 그런 자 는 더 멀리 후퇴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머무는 것이 더 좋은 길을 가고 있 는 것일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런 길을 가야 할 필요가 있다.
170 no image Hodge의 저서,개혁주의 교회정치의 지침서가 될 수 있는가/이차식목사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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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73 2003-02-12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hodge.hwp 이차식 목사/ 덕일교회 시작하는 글 지난 2003년 2월 1일(토요일)자 기독교개혁신보 7면에 "한국 장로교 헌법의 발전역사와 그 실태"라는 주제로 글이 실린 바 있다. 참으로 귀하고 중요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필자와 한가지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어서 조심스럽 게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그 내용은 "J. A. Hodge의 교회정치문답조례가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를 축조 해석한 문답식의 치리상의 지침서로 한국 장로 교회가 교회정치를 개혁주의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지침서를 얻게 되었다"라 고 한 부분이다. 과연 J. A. Hodge의 저서 What is Presbyterian Law?가 개혁주의 교회정치 의 지침서가 될 수 있는가? 1. 개혁교회에서는 상회(Higer Court)나 최고회(the Highest Court) 또는 하 회(Lower Court)라는 말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최고회, 상회, 하회라는 말은 권위의 높고 낮음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장로교에서는 노회나 총회 를 '상회'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개 혁교회에서는 그 상회를 가리켜 '대회' 혹은 '광회'(Major Assembly, Broader Assembly)라고 부른다. 노회를 당회보다 높은 치리회로 보지 않으 며, 총회를 노회보다 높은 치리회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헌법은 총회 의 사역의 성격을 높은 것이 아니고 넓은 것이요, 통치적이 아니요 봉사적이 요, 영속적인 것이 아니요 일시적인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헌법, 교회정치 제17장 총회 제3조). 따라서 치리회의 모임의 권위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지 교회의 파송에 근거한 것으로써, 교회의 일들을 모두 다 주장하지 못한다고 밝히고 있다(헌법, 교회정치 제17장 제3조). 그러나 J. A. Hodge는 상회, 하회, 하급 재판관, 상급 재판관, 최고회, 최 고치리회, 최종심의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J. A. Hodge, Presbyterian Law, 1882, pp. 260-62, 267, 270). 이것은 감독정치에서나 취급하는 용어라 할 수 있기에, 개혁교회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 개혁교회의 근간이 되는 웨스 트민스터 헌법에서는 총회를 가리켜 최고회 또는 최고치리회라는 말을 사용하 지 않는다. 총회의 권위는 최고일 수가 없으며, 절대가 될 수 없다. 왜냐하 면 모든 치리회는 그 구성원들이 교회 상호간의 협력과 봉사를 위하여 대표 의 이름으로 파송되어 구성되는 것일 뿐이며, 주님께서 그들에게 여러 교회 를 감독할 수 있는 직분이나 상회를 주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교 회는 지금의 장로교에서 부르는 '상회' '하회'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리고 모임을 이끄는 자를 '의장'이라 하고, 회의가 마치면 그 동시에 '파 회'한다. 그러나 Hodge는 '의장(Moderator)'과 '회장(President)'을 구별 없 이 사용하였고, 또한 '파회(dissolve)'와 '폐회(adjourning)'라는 말을 혼용 하고 있다(Ibid., pp. 304, 267).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에 위배되는 것이다. 2. 개혁교회의 정치와 권징의 원리는 노회나 총회 자체가 갖는 고유한 권위 를 인정하지 않는다. 개혁교회는 노회나 총회가 결정했기 때문에 무조건 그 권위에 순종해야 한 다는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회나 총회가 종종 오류를 범한 일 이 있었음을 교회 역사를 통해 숙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왕 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치리회 자체에 권위를 돌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 헌법의 총회의 직무 조항을 살펴보면,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지배적 인 태도를 취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교리나 권징에 관한 문제들을 취급할 때나, 헌의된 교회 헌법을 해석할 때조차도 '봉 사한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봉사하는 자세로 탐구하고 협력할 것을 요 구하고 있을 뿐이지, 주장하는 어떤 전권을 부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Hodge의 글에 의하면 '전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 와 비슷한 총회의 고유한 권한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총회는 전 교회 의 관심사를 지도 감독한다"라고 하였다(Ibid., p. 271). 그런데 우리 헌법 은 "총회의 치리회는 성경 말씀대로 수종하는 사역을 하는 것이다"(헌법, p. 315)라고 하며, "감독한다"는 표현을 쓸 때는 언제나 "사랑으로 감독하고"(헌 법, pp. 307, 311)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Hodge는 "총회만이 헌법을 해석할 수 있다"(Hodge, p. 267)라고 하였다. 그 런데 이것을 곽안련이 번역할 때 '전권'이라 는 말을 덧붙여서 "총회만이 교회 법을 전권으로 해석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권'이라는 말은 웨스트민스 터 원본이나 미국 장로교 헌법에는 없다. Hodge는 총회의 권위에 대하여는 "총회의 결의와 답변은 권위가 있다. 그 이유는 총회의 결정은 최종적이니 반드시 순복해야 한다."(Ibid., p. 271) 총회와 노회와의 관계에서는 "총회가 노회의 형성 및 한계를 결정한 다"(Ibid., p. 272) 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헌법은 "총회는 노회를 설립, 분립, 합병하며, 노회의 구역을 정하는 일에 봉사하되, 해당 노회와 협의해야 한다."(헌법 p. 317) 박윤선은 "총회는 노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독단을 피하 고, 노회 의견을 존중하고 돕는 태도여야 한다."(박윤선, 「헌법주석」 p. 163)라고 하였다. 총회와 목사와의 관계에 있어서 Hodge는 "교회의 평화와 번영을 위하는 이 유가 충분할 때 총회가 목사 해임을 노회에 명할 수 있다."(Hodge. p. 274)라 고 하였다. 그러나 박윤선은 총회는 자체의 힘으로 신자들의 양심을 구속할 명령 선포의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박윤선, p. 163)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개혁교회의 정치원리는 소수보다 다수에 의한 결정으로 권위를 갖 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할 때만 권위를 갖는 것이 기 때문이다. 개혁교회는 치리회가 갖는 고유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교회는 어디까 지나 증거 단체일 뿐 세력 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총회는 말씀 수종의 권 위 외에는 그 자체적으로 어떤 특정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하나님 말씀에 위 배됨이 없을 때 우리의 신앙양심은 거기에 구속을 받는 것이다. Hodge는 치리회의 고유한 권한을 인정하였지만, 개혁주의 신학을 충실히 구 현하려고 한 우리 헌법은 교회 안에 인간의 권위가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 고, 그리스도만을 왕으로 모시고 교회를 바로 이루기 위해서 이를 배격하고 있다. 3. 개혁교회는 어떤 목회자 개인의 독특하고 고유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개혁주의 정치원리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교회직분과 사역상의 균 등 혹은 평등이다. Hodge도 이것을 주장한다(Hodge, p. 11). 그러나 Hodge는 실제적으로는 목사를 임시목사(stated supply), 동사목사(co-pastors), 원로 목사(pastor emeritus), 부목사(pa stor's Assistant), 무임목사(Minister without charge)로 구별하고 있다(Ibid., p. 48). 하지만 이것은 한국 장로교 회의 모체라 할 수 있는 미 장로교회의 정치 본문에도 없는 것이다. 형식상의 칭호로 동역자간의 차별을 가져오고, 당회권이나 치리권과 같은 목사 고유의 직무에 있어서 계급적인 차별을 가져온 것은 개혁주의 성격에 배 치된다. 목사의 직분은 직책과 사명에 있어서나, 권위와 영광에 있어서 전혀 서로 다르지 않다. 개혁교회의 목사 위임은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부 름을 받을 때 위임을 받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목사 위임식이 잘못되었다 거나 필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이러한 칭호상의 구별은 Hodge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에만 있는 것으로써, 특별히 목사 상호간의 동등권이 무너지 면 계급적이고 교권적인 직임상 차별이 발생하므로, 교회의 건전한 발전은 물 론 목사의 직무 수행뿐 아니라, 교단의 발전과 성도의 교육목적에 과연 도움 이 되고 있는지 고려해 보아야할 과제라고 본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찬탈한 교황권과 감독정치를 성경적 인 교회정치로 회복하는 운동이었 다. 개혁주의 생활원리는 하나님의 영광만 을 선양하고, 사람을 높이거나 사람에게 공로를 돌리지 않는다. 마치는 글 본인은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J. A. Hodge의 What is Presbyterian Law? 라는 저서를 개혁주의 교회정치의 지침서로 받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 이다. 물론 박윤선 목사가 헌법주석에 13회에 걸쳐서 인용할 정도로 개혁주의 의 중요한 내용들도 담고 있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개혁주의교회 정치형 태보다는 감리교회나, 회중교회의 정치이념에 가까운 부분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의와 규례는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 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서, 1986년판 헌법의 교회정 치, 권징조례 및 예배모범을 표준으로 하고 지침서로 삼으면 충분하다고 본 다.
169 no image 한국 장로교 헌법의 발전 역사와 그 실태-임성찬 목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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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4 2003-01-28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ischan.hwp한국 장로교 헌법의 발전 역사와 그 실태 임성찬 목사(경기 중노회) 1. 한국장로교 헌법의 기원 1800년대 후반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발을 내디딤으로 한국 장로교는 출발하였다. 그것은 한국장로교회에 있어 장로회 정치와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요 동시에 웨스트민스터 헌법에 대한 앎의 시작을 가리킨다. 이는 대한예 수교장로회 제1회 노회회록(1908) 서문 초두에 장로교 정치와 노회의 시작이 성경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선포함으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는 일찍이 공의회 시대부터 웨스트민스터 헌법 정신에 준하 여 교회를 다스리다가, 1917年 제6회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적당하 게 수정하여 채용케 된다. 그런데 이때 장로회 헌법을 작성함에 있어서 웨스 트민스터 헌법을 받고 있는 미국의 연합장로교 전신(前身)인 북장로교 헌법 의 대부분을 채택하였다. 그 후 헌법은 1934년과 1954년에 다시금 수정되었으며, 그 후에도 필요에 의 해 수정 혹은 개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계속되는 여러 차례의 수정 혹은 개정의 과정들은 종교개혁정신을 더욱 드러낸다기보다는 도리어 그 내용 이 진정한 개혁주의 교회정치로부터의 퇴보로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 다. 그러한 역사 속에서도 한때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現 합신)가 정통개혁주의 를 회복하고 보존하려는 어떤 시대의 교회헌법보다 더 순수한 내용의 헌법 (1986년판)을 가지게 되었음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역사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100여년을 거친 지난 한국장로교회의 헌법의 역사를 통해서 본래 웨스 트민스터 헌법의 종교개혁 정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거나 서로 상관이 없어 져 가는 한국장로교회를 되돌아보게 되며 동시에 "진리 앞에 강하라"는 그분 의 메시지 앞에 오늘 우리를 다시금 서게 한다. 2. 한국장로교 헌법의 발전 역사 선교 초기에 한국에 입래한 선교사들의 각 교단의 장로회 선교부끼리의 협의 체로 나타난 것이 공의회(公議會)이다. 이 공의회는 1904년 회의에서 공의회 의 목적을 갱정교(更定敎) 신경을 신인(信認)하고 장로교 정치를 사용하는 연 합 독립교회를 조선에 설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헌법과 규칙을 채용하 였다. 그리고 1905년 회의에서 다시 한국의 형편에 알맞는 신경을 만들되 인 도 자유장로회에서 채용한 신경과 동일한 것으로 하도록 하였다. 또한 1906 년 회의에서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에 따른 '정치'를 유안하고 간단한 '정 치'를 제정 제출하였다. 1907년에 4개의 선교부가 합력하여서 '독노회(獨老會)'를 조직하였는데 이 때, 대한 장로교회 신경(12신조)과 정치를 대략으로 제정하여 임시 채용하였 다. 이때 특기할 사항은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대소요리문답 대신 12조목으로 신경을 삼았다는 것이고 소요리문답을 교회문답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 고 이때 제1로회 회록의 끝부분에는 약 8쪽에 걸쳐 '대한교예수 쟝로회 규 측'을 싣고 있는데 이것이 이후 '교회정치'의 초기 모습이다. 1912년에 총회가 조직되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1917 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6회 총회에서 '졍치와 권징됴례와 례 모법은 우리교 회가 인용? 바 웨쓰민쓰트  을 번역?고   우리총회에셔 작뎡?바로 편즙 케 ?일'을 채용하였다. 그 리고 1919년 제8회 때는 J.A. 하지의 「교회정치문 답조례」를 참고서로 정식 채용한다. 이 책은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를 축조 해석한 문답식의 치리상 지침서로 한국 장로교회가 교회정치를 개혁주의적으 로 실천할 수 있는 지침서를 얻게 되었다고 하겠다. 1922년에 와서는 한국장로교 헌법책이 출판이 되는데 그 서문에서 밝히기 를 '웨스트민스터 헌법의 목차를 모방하여' 爰是信經, 小要理, 政治, 勸懲, 禮拜, 等五法全書를 두고 있다. 1964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9회 총회에서는 대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게요를 수의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 장로 교 회(합동 측)는 이즈음에 와서야 비로서 를 신앙의 표준 문서로 채택하여 헌법의 한 부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이전에는 위 문서들을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인정"하고 "우리 교회 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이라고만 밝혔을 뿐 공식적으로 채용하지 않 았었다. 3. 한국장로교 헌법의 실태 헌법의 여러 차례의 수정 혹은 개정들에서 드러나는 진정한 개혁주의 교회정 치로부터의 퇴보를 아래와 같이 역대의 총회록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1) 총회록에서 나타난 감리회와의 연합 1913년(예수교장로회조선총회 제2회)에 감리회와 쟝로회가 연합공의회를 설립 하자는 일에 대하여 논하였으며 1917년(제6회)총회록에는 '朝鮮耶 敎長監聯 合協議會憲法'이 게재되어 있다. 그리고 1936년(제25회)총회록에서는 장감련 합으로 신편찬송가 편찬하야 발간했음을 확인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공동성경 번역 사업, 합동찬송가를 만드는 작업에서 증명되듯이, 1907년 장로교 독노회 가 형성되기 전후의 선교정책의 분위기는 복음주의 교회(one evangelical Church)라고 할 수 있는 '한국 그리스도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를 만들려는 분위기였다. 이는 실제적으로 한국 교회의 신학적 근저에 는 감리교와 장로교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총회록에 나타난 '평범한'의 의미 1922년 憲法에는 '今日에  이런 이적 행하는 권능이 停止되엿 니라'는 문구 가 第三章 '敎會職任' 중에 명기되어 있다. 그러나 1923년 제12회 총회 와 1924년 제13회 총회에서 이 문구의 삭제의 논의 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삭제되 지 않았으나 그 이후의 헌법에서는 이 문구가 삭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측을 제외한 타 총회에서는 삭제된 그 문구가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 現 합신) 1986년판 헌법에서는 '사도적 기적(고후12:12)도 멎어졌 다.' '교회의 평범한 ('평범'은 비범한 사도직과 구분되는 표현) 항존직원'이 라는 내용으로 분명히 명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장로교회 정치원리에 심대한 노고로 쏟았던 故 박윤선 박사는 그의 「헌법주 석」에서 "이 조문의 영어 원문에는 "평범한"(ordinary)이란 말이 있는데 그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신약의 교회시대(사도시대가 아님)에는 하나님께서 평범 한 사람들을 세워서 복음 사역을 하게 하신다. 그들은 사도적 이적은 행하지 못하는 평범한 자들이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범한'이란 말은 사 도시대가 아닌 이 때에 사도적 이적을 행하지 못하는 '평범한' 자들이라는 의 미에서의 '평범함'이다. 그렇게 교회의 삼직(목사, 장로, 안수집사)이 성격 상 평범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 문구가 이곳에 있는 것으로써, 그 삼직 이 '수직적이 아니고 수평적인 것이라(제2조 4항)'는 의미에서의 '평범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3) 총회록에서 나타난 동사목사, 부목사, 무임목사, 교육목사 1914년 예수교장로회조선총회 제3회 총회록에는 젼임목 와 아울러 동 목  가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초기 헌법인 1922년판 헌법에 는 '목사칭호'라는 조목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판 헌법부터 '목사 칭호' 조목이 생기게 되는데 그 내용은 '위임목사, 임시목사, 동사목사, 원로 목사'등이었다. '부목사'라는 제도가 처음 생기게 되는 것은 1955년판 헌법에서부터이다. 바 로 이전 헌법의 '동사목사(同事牧師)'자리에 '부목사(副牧師)'라는 항목이 생 기고 '동사목사'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 부목사라는 목사의 칭호는 J.A 핫지 의 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곽안련 목사가 1917년 에 이를 번역할 때, '부목사' 항목의 내용 중에 '이는 조사와 방불하니라'라 는 번역 문구를 넣고 있다. 그러나 목사가 과연 당시의 조사와 같을 수 있는 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영향으로 1955년판 헌법부터 '부목사'제도가 삽입되고 그 후에 1966년 판에 '교육목사'등의 칭호들이 생겨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담임목사 가 사임하면 따라서 부목사도 사임해야 하는 헌법도 생겨났으며(1975년판 기 장측 헌법등) 또는 현재 일부에서는 '수석 부목사'라는 칭호들도 사용되고 있 는데 이러한 현상들은 한국 장로교회가 감리교와 같은 목사간의 계급조직 (hierarchy)이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분명 장 로교의 정치의 근본정신을 벗어난 모습들인 것이다. 본 개혁교단(합신)은 헌법 총론의 서두에 "그리스도는 교회의 왕이시다"는 고 백을 두었다. 이는 한국장로교회사 안에서의 새로운 개혁으로써 17세기 엄밀 한 종교개혁정신의 실제적인 내용을 고백한 유일한 증거이다. 장로교 정치의 근본 정신으로써 '그리스도만이 오직 교회의 왕이시라'고 했을 때는, 그의 말 씀의 권위 이외에 지체 위에 다른 지체가 혹은 교회 위에 다른 교회가 권위 를 갖지 않는다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숨어있는 것이다. 이런 원리에 손상을 n주는 모든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금하는 것이 장로교의 중요한 원리라고 할 수 있다. 4) 총회록에 나타난 파회(罷會)와 폐회(閉會) 1934年版 헌법 에서는 "총회가 ... 폐회하기로 결정 한 후에는 회장이 선언하기를「교회가 나에게 위탁한 權으로 지금 총회는 파 (罷)함이 가한줄로 알며..」..축도로 산회(散會)한다."고 되어 있다. 이를 현 합동측에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나, 이후 기장측이라든지 통합측, 고려 측에서는 이 '파(罷)함'이라는 문구가 삭제되고 있다.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現 합신)가 이 부분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개혁 을 하게 된다. "총회가... 파회하되, 파회하기로 결정한 후에는 의장이 선언 하기를, "교회가 나에게 위탁한 권한으로 지금 총회는 파(罷)함이 가한 줄로 알며, ... 파회를 선언한다."(1986년판 헌법). 이는 총회는 임시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폐회라고 할 수 없고 파회라 고 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그 본 의미는 '총회'라는 이름으로 교권 을 만드는 병폐를 막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내용과 정 신은 다음과 같이 수정됨으로 그 본질에서 후퇴하였다. "총회가... 폐회하 되, ... 총회장이 선언하기를, "교회가 나에게 위탁한 권한으로 지금 총회는 폐회함이 가한 줄로 알며,... 폐회를 선언한다."(합신 현 헌법,1996년판) 치리회를 마치 다스리는 치리회로 스스로 착각하고, 보는 사람들도 착각하는 것 같다. 총회가 '폐회'가 아니라 '파회'인 것은 그 총회가 파회 한 후에 일 년 동안은 지교회의 어떤 종류의 일이든지 총회의 권위로서 관여하지 못하며 총회는 해마다 새로 조직하여 모이는 회합이기에 총회가 파회하여도 교단의 사업은 계속된다고 하는데 있다. 장로교에서 총회나 대회, 노회는 행정기관 이 아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최고의 법정(the highest judicatory)이다. 우 리에게 집행위원회(executive commission)인 총회 임원이 있으나, 그것은 단 지 총회가 결정한 것을 집행하는 위원회로서 발기하는 행동의 힘을 가지고 있 지 않다(have no power of initiiating action). (5) 당회의장, 노회의장, 의장과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 1922년판 헌법과 그 이후 헌법에 당회와 노회와 총회의 사회자를 그대로 당회 장, 노회장, 총회장으로 명시하고 있다. 고 박윤선 목사는 1986년 당시 신학 정론에서 오늘까지 교계에서 사용되는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이라는 호칭들 을 살펴보면,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성경과 달리 형성할 정도로 해로운 표현들 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당회장'이라는 직명은 우리나라 장로교 헌법이 의종하고 있는 미국 북장로교 헌법에도 없는 것으로 미북장로교헌법은 당회장 이란 호칭이 없고 그저 사회자(司會者)를 의미하는 "마더레이터"(moderator) 라고 했을 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노회장' '총회장'이라는 호칭도 우리 헌법의 원본인 북장로교 헌법에 는 없는 것이고 거기서도 '사회자'(moderator)라고 했을 뿐이며 교회안에서 의 사회자(moderator)에게는 세속 사회 기관들의 관리처럼 어떤 권세가 부여 되어 있지 않다고 그 의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의를 가지고 개 혁총회(합신)는 1986년판 헌법에서 '당회의장', '노회의장', '의장'(총회)이 라는 용어를 받음으로 개혁하였으나 이후 1995년 80회 총회에서 안타깝게도 기존 헌법에 있는 '의 장'의 명칭을 "총회장, 노회장, 당회장"으로 변경하고 말았다. 4. 마치는 말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비록 용어의 변경에 불과하지만 치리회의 폐회개념 을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용어인 '의장'을 '회장'으로 바꾼다든지 기존 한국장 로교 헌법에서 삭제하였던 임원제도나 상임위원회의 성격에 대해서 아주 제한 적이었던 우리의 헌법의 정신과 상관없이, 총회규칙이나 노회 규칙을 따로 두 어 수시로 개정됨으로 헌법의 정신이 실제적으로 효력을 잃어버린 상태로 지 속되고 있고 그로 인하여 교권정치의 문을 열고 놓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뒤 로 후퇴한 것이다. 지금은 총회가 순수 치리회가 아니라 정책기관이 되고 있 고 상임위원회들은 총회가 일임하지 않은 문제들까지도 독자적으로 처리하려 는 유혹이 있고 그런 분위기로 유도되고 있다. 발전과 연합의 이름으로 역사적으로 유일한 우리의 헌법의 정신과 고백을 포 기할 수 없는 것이다. 참된 진리를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의 헌법에 기초하여야 하고, 언제든지 진리는 동조자가 없고 공인이 되지 않아 도 그 자체가 빛으로 남아 있도록 운 영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헌법수정이 있어야만 한다고 했을 때 그때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 가를 물을 때, 그것은 인간적인 편리함 같은 것이 그 목적이 되거나 이유가 될 수 없으며, '세상의 법'이 그 기준이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장 로 교회의 법은 그 자체가 성경 해석의 결과이다. 역사적 장로 교회의 헌법의 모든 정신과 그 채택된 제도들은 오직 성경에 기 초하여서 작성되었던 것이다. 전통은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원리가 오 직 성경이다. 성경으로 증거를 받지 못하는 한은 어떤 전통도 바꿀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 교회가 받은 미국 북장로 교회의 헌법은 비록 완전하지 는 못할지라도 그러나 요즘의 여러 교단들이 가지고 있는 헌법보다는 훨씬 성 경적인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장로 교회 정치 제도이다. 그러므로 헌법이 개 정될 것이 있다면 미국 북장로교회와 역사적 개혁 장로 교회의 헌법의 정신으 로 개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더욱 엄밀한 개혁신학으로 돌아가고 초창기의 오류들을 되짚어 수정하여 진정 한 장로교의 헌법과 그 내용들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곧 신 구약으로 구성된 거룩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거룩한 책으로부터 얻는 그런 증거들이 더 확실하고 강하며 전적으로 가장 의심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168 no image <신년특집> 새해 소망 세 가지-박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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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6 2003-01-16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318psj.hwp 새해 소망 세 가지 박상준/ 개금교회 부목사 1. 지난해 3월 늦장가를 든 친구가 있다. 나의 온가족이 다같이 혼인식에 참석하 기 위해 부산에서 충주까지 갈 정도로 친분이 있다. 나는 축시를 지어 액자 를 만들고 기꺼이 낭송하면서 친구의 혼인을 축하해 주었다. 친구는 고신에 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오랜 시간 특수 목회분야에서 일해왔다. 장애인 선교 단체 간사로, 호스피스선교회에서, 그리고 최근까지 교회문제연구소에서 고생 (?)을 하였다. 그런데 친구는 혼인과 함께 실직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목사로서, 새신랑으 로서 혼인과 함께 일할 자리가 없다.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 는 일이었다. 계속 그를 위해 기도하며 연락을 취했다. 그때마다 친구는 한 1 년 쉴 것이라며 태연해 했다. 자기 스스로 안식년을 가지게 된 셈이다. 새해 에는 그가 아주 멋지게 출발하기를 소원해 본다. 그의 아내가 출퇴근하는 남 편의 뒷바라지를 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2. r 또 한 친구는 영국에 가 있다. 신학교로는 후배지만, 지금 내가 섬기는 교회 에서는 나의 선임자였다. 가족과 함께 WEC 선교부에서 주관하는 언어훈련과 선교훈련 과정을 밟고 있는 친구이다. 이 친구는 내가 부임해 오기 전에 교회 에서 사역을 참 열심히 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담임목사로부터 좋은 인정 을 받으면서, 훈련을 마친 후에는 본교에서 파송하는 선교사가 되도록 내정되 어 있다. 출국 한지 어느새 1년 8개월이 지났다. 우리 가족은 이 친구의 가족 과 서로 교통하며 자주 연락을 주고 받는다. 기도의 동역자가 된 셈이다. 아직 선교지에 투입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타 문화권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에 게 얼마 전에 여러 가지 녹음테이프를 보내준 일이 있었다. 그가 요청한 테잎 은 의외로 한국말로 된 동화나 성경이야기였다. 영국에 가면 한국말 테잎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싶어 한 두 개만을 가지고 갔 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나가서 생활하다보니 한국말이 그렇게 그립더라며 그런 요청을 한 것이었다. 아마 이런 그리움은 새해가 되면 더 커지게 될 것 이다. 친구의 동역자로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해 주 고 싶다. 3. 마지막으로 또 한사람의 친구는 최근에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고대도리에 있는 고대도교회의 목회자로 들어간 친구이다. 이 친구는 신학 1년 선배이 다. 그러나 친구처럼 지내곤 했다. 한 교회에서 1년 정도 같이 사역했고, 내 가 사역하고 떠난 또 다른 교회에서 한참 후에 사역을 하다가 고대도교회에 가게 되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얼마나 기쁘던지, 오래도록 연락을 못하고 지낸 상태였지만 바로 곁에 있는 친구에게 하듯이 전화를 걸어 축하 와 격려를 나누게 되었다. 고대도는 조용하지만, 많이 외로울 것이고 사역이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 지만 작은 키의 그 친구는 그 외로운 시간을 유익하게 보낼 계획까지 이미 가 지고 있었다. 언제든지 쉬고 싶을 때에는 오라 한다. 쉬고 싶을 때 갈 곳이 되어 줄 친구가 있음이 행복하다. 새해에는 정말 그가 공해 없는(?) 쉴만한 그늘이 되어 있기를 소망해본다.
167 no image 개혁신앙 건강성 유지 역할에 충실 기원-기독신문사 김성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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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 2003-01-16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ksku.hwp신년사 개혁신앙 건강성 유지 역할에 충실 기원 기독신문사 사장 김 성규 장로 하나님의 은총 속에 2003년 새해가 열렸습니다. 특히 새 해는 새 대통령이 취임하고 국내외 정세의 변화가 예견되는 해이며, 우리 기독교계에도 어느 때보다 많은 변화와 개혁의 물결이 요구되고 또 기대 되는 한 해이기도 합니다. 지난 2002년은 월드컵 대회와 대통령 선거, 그리 고 SOFA개정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촛불행진이 우리나라를 뒤덮어 세계의 이목 을 집중시키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시민사회의 도래를 증명하는 현장이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시작된 2003년은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과 각오를 다지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 상황은 이웃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점점 각박해지고 있고, 가정과 교회 그리고 민족과 온 인류가 지금 고통 중에 있 는 현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은 급속도로 붕괴되고 있고, 교 회는 성경이 가르 쳐주는 본연의 모습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으며, 인류 사회 는 집단이기주의와 패권주의에 빠져 온 지구촌이 갈등과 분쟁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개혁신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공존의 사회로 가는 디 딤돌을 놓기 위해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구촌의 모든 공동체가 본연의 모습 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며 그 길을 모색해 가는 통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교단이 지향하는 신학노선에 따라 개혁신학과 신앙의 건강성이 유지되도 록 하는 역할에 게으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독자들의 필요와 다양 한 요구에 기독교 언론으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고 상식이 통하는 질서를 세우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는 언론매체의 급속한 발달로 신문 잡지나 방송이라는 제한된 틀을 넘은 지 오래입니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언론 매체로 다양한 독 자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개혁신보가 2003년에 가시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독자들이 적극 지원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 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2003년을 새롭게 다짐하며 시작하는 모든 교회와 애 독자 여러분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166 no image 새 시대는 화합과 변화하는 교계 기원-한국교회신보 임인재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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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 2003-01-16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iij.hwp 새 시대는 화합과 변화하는 교계 기원 한국교회신보 사장 임인재장로 다사다난했던 2002년를 뒤로하고 계미(癸未)년 희망찬 새해를 맞아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나라 모든 교회 위에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새 시대는 화합 과 변화하는 교계를 기원합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나타난 결과는 기성세대와 교계에 주는 메시지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대다수 국민들이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고 그 변화의 욕구는 표 를 통하여 여야를 구분하지 않고 변화를 선택하게 했습니다. 이제 그 여파가 교회에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한편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대통령선거를 통해 나타난 변화의 욕구가 정치권만이 아니라 사회 저변과 교 회, 교계에도 밀어닥칠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수용여부에 따라서 명암이 엇갈릴 것입니다. 개혁과 변화에 대해 말은 하면서도 변화하지 않는 곳은 교회일 것입니다. 그 동안 신학과 미디어 쪽에서 사회와 문화변화에 대하 여 수없이 예고했지만, 교 회는 미동도하지 않았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수없이 이야기했고 주 5일 근무제에 대해서도 경고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대선을 통하여 세상의 욕구가 어떻다는 것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구미 기독교 선진국들의 교회 양극화 현상은 최근 20년 전후를 기점으로 갈리 고 있습니다. 전통을 고수하며 변화의 욕구에 대해 외면하던 교회들은 지금 관광명소(?)로 남게 되었고 문화변화를 적절하게 대처한 교회들은 대형교회 로 급성장하였습니다. 이것이 외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2003년부터 우리나라 교회에 불어닥칠 새바람이 된다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새해는 교회가 권위주의를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입니다. 신령한 권위가 살아 나는 방법은 교회 권위주의가 깨져야하고 모두 내려앉아야 합니다. 교회의 직 분은 결코 위세를 부리거나 사람을 내려다보는 자리가 아니라 봉사자리인 것 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만 회복해도 교회개혁은 이미 절반이상 성공한 것입니다. 교회의 고질병은 전도와 인도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신자가 교회를 이동하는 것도 전도, 불신자가 새로 믿고 돌아오는 것도 전도라고 하 고 있습니다. 결국 손쉬운 쪽, 기존신자 쪽에 더 많은 관심과 비중을 두었기 에 교인 쟁탈전으로 비하되어 사회의 외면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수족관의 물고기를 옮겨놓는 것이 결코 기독교의 발전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교회에서부터 바르게 시작되면 각 총회의 개혁은 자연히 될 것이 고 우리나라 기독교도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해는 교회부터 변화가 도 래하기를 두손 모아 기원합니다.
165 no image <선교지에서 온 편지>아들 머리에 물들이던 날 -김춘례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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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8 2002-12-27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namago.jpg 아들 머리에 물들이던 날 김 춘례 사모/ 남아공 선교사 그 날은 아들이 고등학교 교복을 마지막 입었던 날이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이미 약속했던 대로 내 손에 순순히 머리를 맡기고 염 색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30분만 두려고 했는데 완전 금발로 바꿔보겠다고 스스로 거울 앞에서 머리 조사를 해 가더니 한시간 30분을 버티고 있었던 것 이다. 예닐곱 살 때였던가, “엄마, 아빠는 언제 아기 낳을 건가요?”하고 물었다. 같은 마을에 살던 배부른 아주머니가 아기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늘 배 가 불러 있는 아빠는 언제나 자기에게 동생을 안겨 줄 수 있을 것인가를 궁금 해 하다가 물어 온 질문이었다. 남자는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웃음 섞인 나 의 답변을 듣고 얼마나 실망을 했던 얼굴 이었던지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그 후로 우리 부부는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입 양에 대해 구체적으 로 이야기도 하며 아들을 교육시키기로 했다. 어느 날은 화장실에서 울음소리가 났다. 평소에도 약간은 소심한 아이라서 걱 정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아파도 그렇지 말을 하지 않고 저렇게 울고 있을 까?' 하여 들어가서 무슨 일이냐,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더니 “엄마, 죽지 마 세요. 나는 엄마 없이는 못 살아요.” 하는 것이었다. 입양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아프거나 사고로나 어떤 이 유로든지 부모를 잃어버릴 수가 있는데 만약 너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 게 되겠느냐고,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을 때 그런 아이들을 데려다가 도움 을 주면 좋지 않겠느냐고 아들이 알아듣도록 나름대로 훈련을 해 가던 참이었 다. 그런데 그 후론 이 녀석은 부모의 죽음에 대해 생각 해 보았고 두려움이 생겼던 모양이다.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네가 어른이 되어 장가도 가고 또 훌륭한 사람이 되어 좋은 일 많이 하는걸 다 지켜보다가 네가 싫어하면 죽을 거라고 마치 내 운명 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꾸며대어 해 댔었다. 그리고는 입양도 하여 평화롭게 지낼 수 있 었는가 싶었는데 산에 오르던 어 느 날, 아들은 또 해괴한 질문을 해 왔다. “엄마는 누구를 더 사랑하세 요?” 혼자서 즐기던 장난감이며 모든 물건을 동생과 나눠 써야 하고 심지어 는 자기가 아끼는 물건인데도 오빠라고 뺏겨야 하니 마음 속에서 의심이 생겼 었나 보다. “너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 사랑하고 동생은 우리가 사랑해 주고 키 워 주려고 데려 왔으니 동생도 사랑한단다.” 등산을 하는 동안 이런 저런 말 로 마음에 뭉친 것을 풀어 주었다. 뇌성마비 형을 두었던 이 아들은 동생이 형 노릇을 해가며 부모를 도왔고, 부 드럽지 못한 성품의 부모 아래서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란 아들이었으며 이 런 저런 환경에 시달리면서 때로는 힘들다 하기도 하고 때로는 죽고 싶다고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벌써 성장하여 교복을 벗고 사회에 나가게 되었던 것 이다. 머리에 물을 들이고 싶다고 상의를 해 왔을 때 그 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학생 이라고 못 했으니 하고 싶으면 하라고 말했다. 사실 그 나이 또래에만 어울리 는 일이고 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어서 전혀 부정적인 마음이 나에겐 없었 다. 그 대신 에 꼭 미장원에서 하고 싶다고 했다. 평소에도 항상 엄마에게 머리를 맡겨서 실패를 하거나 성공을 하거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 온 녀석인데 왜 미용실에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유인 즉 “사람들이 엄마가 머리 물 들였 다고 한다면 엄마를 욕 할거 아니 예요? 저는 엄마 욕 먹히는 것 싫어요. 제가 하고 싶어서 스스로 미장원에서 했다 고 하면 저만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게 되잖아요.” “엄마는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는데…. 엄마 허락 없이 스스로 했다면 자식 을 멋대로 키워 놓았다고 더 욕할걸. 차라리 엄마가 했다면 뭐라고 못 할거 야. 만약 물들인 머리 때문에 너의 모든 부분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면 그건 그 사람들의 잘못이야. 엄마는 내 아들을 믿고 있으니까 누가 뭐라 해도 엄마 는 괜찮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라고 생각 할거니 까.” 물들인 다음날, 이 아들은 부모 품을 떠나서 멀리 갔다. 이제부터 그 아이 앞 에는 스스로 결정하며 헤쳐나가야 할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사회 에 적응하며 필요한 곳에서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인도 해 주었어 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함에 후회가 된다. 18년을 함께 살아 온 시간들이 그렇게 중요하고 귀한 날 들이었는데 다 놓쳐 버린 것 같아서 아들이 떠난 후 방 안에 앉아 눈물 줄기를 보이며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주님, 주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을 이 아이는 발견했다고 하니 복을 주셔서 잘 감당하게 하소서. 소외된 곳에 사랑을 전하고 병든 자에게 희망을 주도록 걸어야 할 의사의 길을 잘 준비하게 하소서. 인내하게 하시고 더 넓은 마음 을 주셔서 따뜻한 사회를 주위에 만들어 가게 하소서. 알고 있는 것보다는 모 르는 게 더 많고 선한 일 보다는 악한 일을 더 잘하는 허물투성이 아들이지 만 그래도 주인은 주님이시기에 맡기오니 앞날에 경험하며 배워 갈 때에 옳 은 길로 인도 해 주소서. 이 못난 부모는 더 이상 본도 보이지 못하고 잔소리 도 못하고 그저 두 손을 모을 뿐입니다.” 아들과 헤어지며 남편은 "내 아들이라 그런지 염색이 잘 어울려 훨씬 부드럽 게 보이고 좋은데 나도 한번 해 볼까?" 하는 것이었다.
164 no image <신년메시지>새해의 소망-최충하 총무(예장대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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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6 2002-12-26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cchms.hwp 새해의 소망 최충하 목사/ 예장대신 총무 '미래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잘 알고 있 다. 그러나 때때로 평범한 진리는 비범한 깨달음과 강한 실천력을 요구한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보면서, 여러 번 두드리다가 열리지 않으면 지쳐서 마침내 더 이상 두드리지 않고 저절로 열리기를 바라는 나태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지 않았나 반성해 본다. 진정한 두드림은 열릴 때까지일진대 그 날을 기다리는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본인은 한국장로교총연합회에서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현재 교단 총무로 일 하면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사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직접 경험하 고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평가해 볼 때 일차적으로 50점의 점수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연합사업의 참여도가 50% 정도이 기 때문이다. 그나마 임원회나 임원선출이 있는 총회의 참여도는 90% 정도가 되어 한국교회의 연 합기관은 '일하는 사람만 일하게 하는 체제'를 가진 것을 볼 수 있다. 전체 조직을 100% 완벽하게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철저하게 미리미리 계획을 세워서 연합사업을 추진한다해도 각자의 사정이 있을 수 있 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반드시 '개인 혹은 개교회의 자기희생'이 요구된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연합기관의 회원이 되려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자기의 살을 베어내 고 뼈를 깎는 아픔을 감수하며, 대교단과 중소교단이 일치(harmony)를 이룬 가운데 우선 먼저 참여도를 90% 이상으로 높이는 일을 위해 진력을 다해야 한 다. 그 다음에 사업의 질을 높이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1세기 사도 바울의 시대적 고민은 교회일치적 행함을 소홀히 하고 교회분 열을 합리화하는 교회들에 대한 "염려"(고후 11:28)였다. 믿음에 의한 구원론 에 만족하는 교회들에 대해 교회일치적 행함을 더 강조했던 바울과 같이 교회 개혁의 문을 또다시 힘차게 두드리기를 다짐하며 ,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 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좀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아 름답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163 no image <신년메시지>새해를 맞는 성도의 각오와 소원-박만수 총무(예장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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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3 2002-12-26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pmsms.hwp새해를 맞는 나의(성도의) 각오와 소원 박만수 목사/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개혁) 총무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2002년을 보내고 또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서 몇 가지 각 오를 새롭게 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가 되어 소원을 성취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첫째, 나의 각오 언제나 많은 계획과 각오를 갖지만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이 사실이다. 하지만 비록 삼일만에 무너질지라도 또 한번 각오를 세워본다. 1. 작은일에 충성된 자가 되기를 원한다(눅16:10). 큰 것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작은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 의 마음에 맞게 살기를 원한다. 큰일에만 관심을 두고, 큰 자에게만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자, 소외 당한자에게 관심을 쏟고 작은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한해가 되기를 원한다. 예컨대, 주일날은 작은 노동이나 오락까지라도 삼가고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 어 드리고 싶다는 말이다. 옛 성도 들은 주일날엔 손톱 발톱도 깍지 않았다고 한다. 2. 주체의식이 분명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옛말이다. 요즘은 1년 혹 한달이면 엄청난 변 화가 생긴다. 환경의 변화만이 아니다. 사회·환경·문화·의식...다방면에 있어 주체 할 수 없이 변화무쌍하다. 특별히 젊은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주체의식이 없이 몇몇 스타들 흉 내내기에 바쁜 것 같다. 성도들까지 여기에 편승되고 메스컴에 끌려가 버리 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한 고 김용기 장로가 막사이상을 받으러 가면서 잠바 차림에 고무신 신고 비행기를 타려고 할 때 정부에서 양복에 구두를 신고 가 라고 했으나 농군이 농군차림이면 됐지 의복이 뭐 중요하냐고 반문하며 평소 차림으로 갔다고 한다. 그의 뚜렸한 주체 의식을 볼 수 있다. 성도는 분명한 주체의식이 있어야 한다. ① 민족적 주체의식이 있어야 하다. ② 지방의 주체의식이 있어야 한다. ③ 성씨의 주체의식이 있어야 한다. ④ 무엇보다 신앙의 주체의식 영적 의식이 살아 있어야 한다. 성도로서, 주체의식이 분명한자가 되기를 원한다. 하나 님의 공의가 앞서는 주체의식이 있기를 원한다. 3. 주어진 사명에 생명을 걸고 싶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귀한 직책과 사명을 주셨으니 여기에 생명을 걸고 최선 을 다하려고 한다. 둘째, 나의 소원 많은 소원이 있지만 지면 관계로 세 가지만 말하려고 한다. 1. 풍부한 자원 확보를 소원한다. 국가적으로나 교회 그리고 개인의 삶에 있어 누구나 풍부한 자원을 소원 할 것이다. 2003년에는 참으로 풍부한 자원이 확보되기를 간절히 소원해 본다. 1) 풍부한 인적자원을 주소서 2) 풍부한 물적자원을 확보하게 하소서 3) 영적으로 충만한 한해가 되게 하소서 2. 아주 작은 일 까지도 자유의지가 성화 되기를 소원한다. 우리는 많은 일에 나의 자유의지가 발동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뜻이 아 닌지 알면서도...자유 의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 한 것은 -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가 무엇인가 깊이 깨달아지는 때가 있다. 이 럴 때, 나의 의지로 해석하면 안 된다. 경험으로 하면 안 된다. 나의 자유 의지가 성화 되게 하소서. 3. 하나님이 찾는 사람의 규격에 맞는 자가 되기를 소원한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 님이 찾는 사람은 의인이다. 하나님과 연합된자가 의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연합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연합은 멀리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연합으로 생각한 다. 이것은 실상이 연합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과 실상이 연합 되어 그의 뜻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작은일에서 큰일까지 하나님의 방법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말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는 의인의 삶을 살게 하소서.
162 no image <성탄특집>'임마누엘'의 의미-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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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8 2002-12-12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316lkh.hwp'임마누엘'의 의미 이광호 목사/ 고신대학교 교수 임마누엘'은 우리의 신앙의 근거가 된다. 마태복음 1:23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 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을 이사야의 글(사7:14)을 인용하여 기록하고 있 다. 복음서는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적용시키고 있다. 위 같 은 구절에서, 임마누엘의 의미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임을 밝 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임마누엘이 되어 우리 인간세상 가운데 오실 크 고 놀라운 사건은, 이미 인간이 범죄한 직후부터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 을 통해 말씀하신 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임마누엘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 들은 그 의미를 소위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의 의 미를 '하나님이 항상 우리를 떠나지 않고 영적으로 지금도 함께 계신다'는 말 로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일을 하던지 길을 가던지 음식을 먹 던 지 혹은 잠을 자던지 항상 우리를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것이다. 임마누엘이란 말이, 설령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사망의 음 침한 골짜기를 지나 다닌다고 해도 그는 우리와 함께 하며 눈동자와 같이 지 키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신다. 그러나 그 말은, 하나님 께서 자기의 택하신 자녀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끝까지 지키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절대 실수하지 않도록 하고 아무런 사고가 나지 않게 자기자녀 를 보호신다는 말이 아니라 결코 사탄의 세력에 내어주지 않는다는 말인 것이 다. 임마누엘이란 말은 위에서 말한 그러한 영적인 의미가 아니다. 임마누엘의 참 된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처럼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하 나님은 영적인 존재인 것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다. 그 하나님은 매우 영화로 운 분이시기에 죄인인 인간이 대면하여 볼수가 없다. 만일 그를 대면하여 보 게 되면 그 영화로운 광채로 인해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그 영화로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 세상에 오셨다. 성육 (incarnation)하신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코와 눈, 귀, 입을 가지시고 팔, 다리를 가지고 죄악된 이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 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으니 보통 인간의 눈에는 그가 여느 인간과 똑같이 보 인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옷을 입고 오셨으니 그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자기와 같은 존재로서의 인간으로만 생각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 지만, 여전히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그가 인간의 몸을 입었으되 거룩한 하나님이심을 안다.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 자들은, 그가 천박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임을 알고 그 은혜에 감격해 한다.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거룩한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처럼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로부터 능멸을 당하시고 인간들로부터 죽임 을 당하셨다. 그는 사악한 인간들로부터, 인간들 보다 더욱 심한 고초를 당하 셨다. 그러나 지금 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와 함께 계셨던 하나 님'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그를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 모든 것을 친히 몸 으로 체휼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과 함께 계시면서' 인간들로부터 생명을 빼앗기는 고초를 스스로 당하신 것은 자기 백성을 죄가 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마1:21).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임마누엘로 오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가! 그의 성호를 찬양할지어다.
161 no image <성탄특집>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소외/이정석 교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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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2 2002-12-12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316ljs.hwp 예수님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시하 심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실체를 보여 삼위 일체를 증거한 사건이며, 우리의 죄를 구속하심으로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사건이며,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리게 한 사건 이었다. 이에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현대 교회 의 신앙을 회복하고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소외"를 본지에 게재한다. 본 원고는 이정석 교수의 신학연구 홈페이지 http://jsrhee.hihome.com에서 필자의 허락을 받아 가져왔다/편집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소외 이정석 (풀러신학교 조직신학교수)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핵심적 실체이다. 실로, 예수님을 제외한다면 기독 교는 약화되고 결국은 멸망할 것이다. 그가 기독교의 유일한 존재이유 (raison d'etre)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그리스도가 소외되고 있 다면 이는 중대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가 처음 세상에 왔을 때 그는 자기 백성으로부터 소외를 받았다(요 1.9-12). 그러나, 그의 희생적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룩한 인류의 구원 으로 인해 예수님은 많은 성도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왔으며, 그들은 자타 에 의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현대사회로 접어 들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교회와 자기 백성으로부터 소외를 당하는 현상 이 다시 발생하고 있다. 소외(疏外, alienation)란 철학적 용어로서 비인간화와 관련되어 있다. 사람 들이 자기나 타인을 인격체로 대하기 보다 이념이나 물질의 관점에서 보게 되 면 자기를 상실하게 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비인간화는 비인격화(depersonalization)와 연관된다. 현대에 발생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소외는 과거의 소외와 달리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자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자 처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를 거부하는 실천적 소외라는데 자 기 기만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종교다원론적 소외 서구교회가 계몽주의라는 반기독교 운동에 의해 처절하 게 무너져 내리면서 그 리스도는 서구사회의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소외당하는 아픔을 겪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세속화에 동조하여 시대정신에 타협적인 자유주의가 발생하였 고, 그들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단지 그의 윤리적 이상과 종교적 의식만을 취한 채 인격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멀리 소외시켰다. 이러한 19세기의 구자유주의가 신정통주의와 근본주의 운동에 의해 퇴치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20세기 후반 그보다 더 과격한 신자유주의가 발생하여 심지어 사신 신학까지 부르짖었다. 20세기말에 부상한 포스트모더니즘을 배경으로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라는 신학이 기독교 안에서 발생하여 충격을 주고 있다. 포스트모 더니즘은 이성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이성의 해체를 주장하며 절대진리와 절대 윤리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라는 데카당스적 시대정신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해야 될 기독교 안에서 오히려 세속정신에 도취 하여 다원주의 사상으로 기독교를 역복음화 하려는 시도가 바로 종교다원주 의 운동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기독교의 본질적 실체이기 때문에, 그리 스도를 기독교에 서 추방 혹은 소외시키지 않고서는 기독교에서 종교다원주의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소외시킨다. 첫째는 종교다원주의의 선구자인 존 힉의 방법으로, 그는 기독교가 그리스도 중심적 종교에서 신중심적 종교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코페 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자찬하였다. 다른 종교들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근본적인 거침이 되지만, 신개념은 대부분 의 종교에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종교다원주의의 신학적 후원을 위해 개발된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의 대표자 존 콥의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일반화시키고 익명화 함으 로서 유일한 인격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소외시키는 희석전략이다. 그는 그리스 도라는 명칭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로서, 유대인 예수는 수많은 그리 스도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불교에도 힌두교에도 그리고 다른 종교들에도 각기 그들의 그리스도가 있다 고 주장하고 그런 그리스도들을 '익명의 그리스도(anonymous Christ)'라고 불 렀으며, 칼 라너는 그런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인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라고 규정하였다. 실로 그리스도의 익명화는 비인격화이며, 그리스도의 우주 화는 추상화이다. 왜냐하면 과정신학에서는 심지어 예수가 하나의 그리스도 가 된 것도 단지 범재신론적 진화 과정에서 비인격적인 로고스에 많은 영향 을 받은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부 한국의 진보적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신앙을 상실 한 채 이러한 서구의 세속화신학에 영향을 받아 종교다원주의운동을 전개하 고 있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종교간 평화주의와 상대적 다원주의라는 시대의 흐름에 힘을 얻어 사 명감을 가지고 추구하고 있으나, 이는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이념에 도취하여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를 단절하고 그를 자기 중심에서 소외시키는 행위 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일부 지성인들은 이것이 마치 현대기독교의 지배 적 신학인 것처럼 오해하여 오히려 전통적 기독교를 아류로 비방하고 있는 실 정이다. 그리스도의 삼위일체론적 소외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시작되었으나, 그리스도로 인해 서로 결별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독생자로 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왔을 때, 유대인들 은 그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아브라 함 이후 2천년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왔으며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 해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을 전혀 들어보 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주장은 하나님이 한 분뿐이라는 유 일신론(monotheism)에 대한 근본적 도전으로 인식되어 단호하게 배척하였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한 분 외에 그의 외아들 예 수님도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나아가 또 한 분, 즉 성령님이 더 계신 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관에 존재하는 근본적 차이인 것이다. 이제 성육신과 오순절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완전 히 계시된 상태에서 하나님은 모두 세 분이며, 그 중 한 분이라도 믿지 않으 면 안 되었다. 구약시대에 잘 모를 때는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믿었지만, 성자와 성령이 계 시된 상황에서 구약시대의 제한된 신관만을 고집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따라서, 세례나 축도와 같은 공식적 구문에는 반드시 세 분 이 함께 언급되었 다. 그러나, 일부는 끝까지 이를 수용하지 못하여 하나님은 한 분인데 세 모 습으로 변형하여 나타난 것뿐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고, 이들은 양태론 (modalism)으로 규정되어 이단으로 출교되었다. 한편, 세 분의 관계에 대하여 완전한 신성을 근거로 한 평등성을 부정하고 아 리우스와 같이 서로 다른 종류와 등급의 신들로 이해한 삼신론(tritheism)도 이단으로 출교되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가 고백하는 대로, 하나님은 세 분 (three Persons)이지만 세 하나님(three Gods)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 은 세 분의 이질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 두 오류를 범하지 않는 올바른 신관이 후에 '같은 본질을 가진 세 분의 하나님(three persons in one nature)'을 고백하는 삼위일체론으로 정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삼위일체론에 대한 혼동이 계속되고 있는 것 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 분이 세 위격으로 존재한다'거나 '세 분이 한 분이 다'라는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비논리적인 말을 하면서, 신비라서 잘 모른 다고 무책임하게 얼버무리는 어설픈 신학자들로 인해 신학도들과 목회자들 은 몽롱하고 모호한 신관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한 분인지 세 분인지를 질문하면 목회자들이 반반으로 나뉘는 어처구니없는 실정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같은 분인지 다른 분인지를 질문하면 다른 분이라고 선뜻 대답해 놓고 나서, 그러면 세 분 이 아니냐고 하면 대답을 주저한다. 그리스도의 세례 기사를 보든지,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성부를 향해 기도한 사실을 보면 성부와 성자가 다른 인격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런데도 하나 님이 한 분(one person)밖에 없다고 주장함으로서 사실상 유대교나 이슬람교 와 같은 입장을 취하거나 양태론적 이해를 하여 고대 같으면 이단으로 규정되 었을 사상이 오히려 동등한 세 분을 모두 믿는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삼신론이 라고 공격하는 현실은 현대의 혼란된 신학적 실상을 반영한다. 그에 비하면, 오히려 대다수의 평신도들은 신학적 혼란 없이 단순하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을 모두 믿고 세 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눈다. 세 분을 분명히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적 소외를 결과한다. 먼 저 분명한 인격적 주체가 설정되지 않으면 인격적 관계가 불가 능하기 때문이 다. 예를 들어 어떤 아버지와 아들을 한 분, 즉 같은 분으로 혼동한다면 그 아버지나 아들과의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를 성부와 성령 과 더불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사랑하고 주님으로 섬기며 교제할 수 있는 독자적 인격으로 믿지 않고, 모호하게 한 분 하나님의 색다른 모습이나 기능 정도로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에게 가려지고 혼돈되어 자기가 구원한 사람들로부터 심각한 소외를 당하게 된다. 기독교 역사에 보면, 정통적인 교회가 한결같이 세 분을 믿는 삼위일체론 (trinitarianism)을 고백하였는데, 근대에 와서 성부 하나님 한 분만을 믿는 일위일체론(uniterianism)이 등장하였고, 최근에는 승천한 예수님이 성령으 로 모습을 바꾸어 내려왔다고 하여 두 분만을 믿는 이위일체론 (binitarianism)도 대두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예배론적 소외 삼위일체론의 확립은 자연히 예배론에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에게만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하나님이 세 분임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니케아 신조는 성부와 함께 성자와 성령도 예배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론 적으로는 거의 모든 신조가 이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성부를 왕으로 세 분을 서열화하는 군왕적 삼위일체론(monarchianism) 과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계급주의(hierarchicalism) 사고 는 예배의 대상을 성부로 집중하고 사실상 성자와 성령은 거의 소외되도록 만 들었으며, 이러한 그리스도의 예배적 소외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축도에서 발견되는 삼위의 균형이 예배 전체에서는 부정되고 있다. 모든 인류 가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예배의 중요한 의미가 프로스쿤네오, 즉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것인데, 그리스도가 예배의 중심에서 소외된다면 이는 실로 기독교 예배의 근본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예배의 중요한 요소인 기도에 있어서 오로지 성부만이 기도를 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제한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 마지막에 한 마디 언급 될 뿐 성도들이 자기의 주님인 그리스도에게 직접 기도하는 것이 어린이들을 제외하고는 금지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에게 직접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 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따라서, 스데반은 순교 당하 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기도하였고, 사도 바울도 자 신의 병고침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하였다. 물론, 주기도가 기도의 패턴이 되 었기 때문에 성부가 기도의 주된 대상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예수님 이 지상에 있는 동안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상황에서 주어진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몸소 경험한 분으로서 언제나 우리를 돕기 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 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우 리가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말할 수 없고 항상 성부를 통하여 간접적으로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억지스러운 주장인지 모른다. 오리 겐으로부터 시작된 이 금지장치는 그리스도를 기도와 예배의 중심에서 소외시 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찬송에서는 그리스도나 성령에게 직접 간구하 는 가사들이 허용되고 있는 것은 실로 모순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의 교회론적 소외 r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자기 교회로부터 주권을 상실하고 주변으 로 소외되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실상 자 기들의 머리와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식적 명목일 뿐, 교회를 섬기라고 믿고 맡겨준 목사가 주인으로 군림하는가 하면 교인들은 민 주주의에 영향을 받아 '주인의식'을 강조하고 교인들의 대표라고 자처하는 장 로들이 마치 기업의 소유권같이 교회의 대표성을 주장하는 것이 오늘의 실상 이다. 많은 교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로부터 지시를 받는 수동적이고 순종적 인 몸이 되기를 원치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확보한 인력과 재정을 자기 들의 뜻대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이와 같은 소외현상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분열시킨 분파주의와 자기영광 추구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교회가 분리되기 전에는 그 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와 주인이었으나, 분리 배후에서 특정인물이나 사상이 분파를 하나로 결속하고 지휘하는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그리스 도는 중심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제2의 주인을 추종하는 교파주의에 이어 교단 주의 는 제3의 주인, 즉 수많은 정치적 보스와 이념을 중심으로 결속하면서 그 리스도의 소외는 심화되었다. 더욱이, 현대의 개인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발생한 개교회주의는 분파운동 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유기체이며 개교회는 이를 구성하는 지체들이기 때문에, 지체는 유기체와의 관계 속에서 만 그 올바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유기체로부터 분리된 독립적 지체는 마 치 몸에서 분리된 팔과 같이 필연적으로 부패와 죽음을 결과한다(요 15.4- 6).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교회주의는 주변의 다른 교회들을 적대시하고 교제와 협력을 부정한 채 자기의 영광을 추구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설 곳이 없으 며, 자기허영과 영웅숭배가 이를 대치한다. 물론, 그리스도가 설교되고 그리 스도가 표방되지만, 그것은 자기 교회의 영광을 이룩하기 위한 상징적 도구 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의 상징적 소외 이러한 그리스도의 도구적 이용은 현대의 많은 세속적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 타난다. 기복적 신앙의 추구는 인격적 그리스도와의 관계보다는 자기의 형통 과 축복을 위하여 그를 이용하는데 더 관심을 가지는 자연종교(natural religion)인데, 자연종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중요하지 않고 그 효능과 편의 성에 치중한다. 그리스도는 전인적으로 사랑하고 무조건 따라야 할 인격적 대상이라기보다 축 복의 방편이나 마술적 상징으로 이해된다. 무엇이든지 구하고 끝에 '예수님 이름으로'라는 주문을 붙이면 모두 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무엇을 원 하는가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어야 되고 들어 준다고 생각하는 이기주의적 신앙에서 신은 자동적 응답기(deus ex machina) 가 된다. 부모를 존경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돈만 받아가려는 아이들과 같이, 이와 같은 신앙구조에서 그리스도는 존중되지 않고 그의 인격은 철저 히 소외당한다. 구원을 면죄부와 천국 입장권 정도로 이해하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는 단지 그러한 특권을 값없이 제공한 분으로 인식된다. 은혜를 잊지 않고 감 사하지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완전한 연합이나 그를 위해 자기를 버리 는 자기 부인은 너무 지나친 요구로 생각되어 사실상 거절된다. 하나님과의 화해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가 구원의 핵심이며 다른 것은 모두 부수적인데도, 인격적 관계와 헌신적 사랑보다는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 한 도구로만 수용된다. 그는 우리와 영원한 인격적 교제를 원하는데, 우리는 그것보다 목적 달성의 방편으로 이용한다면, 그리스도는 심각한 인격적 소외 를 당하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를 상징이나 이념으로 인식하는 것도 그리스도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현대의 지성인들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은 거부한 채, 그로부터 올바른 사고나 도덕만을 배우려는 것이 바로 그런 오류 이며, 자기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그리스도를 상징화하여 이용하 는 것도 그러하다. 예를 들어, 불교나 유교는 해탈이나 군자와 같은 이념의 성취에 그 목적이 있 으며, 공자나 석가와의 인격적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격적 화해의 복음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이미 죽어버린 공자나 석가와 달 리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서 우리와 교제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세속적 사고에서 얼마든지 상징으로 전락할 수 있다. 단군숭배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서 이용되는 가상적 인물의 상징인 것 처럼, 그리스도는 제국주의자들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의 상 징으로도 이용되었고, 노예제도나 인종차별의 상징적 배경으로도 이용되었 다. 많은 제왕들은 자기의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 왕관을 쓴 그리스도를 상징 적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현대와 같은 자본주의시대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무조건적 사랑하고 헌신하는 인격적 대상이 아니라 부귀와 건강의 상징으로 전락하고 있다. 상징이 인격과 분리되면 그리스도는 소외된다. 현대교회의 또 다른 문제는 프로그램의 범람이다. 오늘날 대중문화와 조직사 회는 프로그램을 통해 운영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교회들도 현대인들의 자유 분방하고 통제되지 않는 성향을 제어하고자 교인들을 수많은 제도와 의식과 프로그램의 틀 속에 고정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이런 시도들이 대개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지만, 그 과정에서 그리스 도가 실종되고 소외될 수 있다. 심지어 그리스도가 완성하여 폐지된 구약의 제사제도나 율법적 장치들을 부활하려는 시도들이 한국교회에서 발생하고 있 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천마리의 제물을 한번에 불태워 바치는 번제( 燔祭)로 드린 구약의 일천 번제 의 개념을 그릇되이 이용하여 헌금을 천번(番)드려 소원을 이루게 한다는 일 천 번제 헌금이 유행처럼 퍼져가고 있는 현실이나 백일기도를 통하여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백일 특별기도회는 불교의 공력에 의한 소원성취 사상을 그대 로 도입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무관한 혹은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제도와 프로그램들 이 범람할수록 그리스도는 소외된다. 칼빈이 {교회개혁의 필요성}에서 통탄 한 중세교회의 그리스도 소외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모 든 교회가 공개적으로 우상숭배에 오염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그리스도 대신 우리가 만든 허상들을 섬기고 있다. 수천의 미신들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 수 많은 미신들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사 람들의 마음에서 거의 사라지고, 구원의 희망은 그로부터 공허하고 사소하고 무가치한 의식들로 넘겨졌다." 마치는 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라 그를 인격적으로 정답게 사 랑하고 조건 없이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를 회복하 지 않고는 진정한 사랑을 실현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은 구체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즉 삼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 하는 것으로서,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 로 섬기며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는 추상적인 사랑이나 정의를 실현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삼 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며 이웃들과의 인격적 관계를 수립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상징이나 이념으로서의 그리스도와 같이 인격 적 실체가 없는 그리스도는 참된 그리스도가 아니며, 그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현대교회는 헤아릴 수 없는 신학과 정치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어 어린이 와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모든 면에서 그와의 전인 적이고 심층적이며 헌신적인 교제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160 no image 예수님의 탄생 기사와 헤롯 왕(마 2:1)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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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2 2002-12-12
http://www.rpress.or.kr/files/planning_special/hrk.hwp성탄 특집 예수님의 탄생 기사와 헤롯 왕(마 2:1) 마태는 예수의 탄생 시기가 헤롯왕이 통치하고 있던 기간이라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의 탄생 일자를 기산(起算) 하기 위함이기도 했으며 이스라엘의 왕통이 단절되고 이방인의 통치가 본격적 으로 실현됨으로써 '홀(笏)이 유다를 떠나고 치리자(治理者)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남으로, 지금은 실로가 오실 때이며 백성이 그에게 복종할 때'(창 49:10)라는 야곱 예언의 성취를 묵시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예수님의 탄생과 헤롯의 때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헤롯 왕'은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 사람(Idumean) 안티 파터(Antipater)의 아들로서 주전 73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영웅의 아들'이 라는 이름의 뜻에 걸맞게 팔레스틴 인접 지역을 B.C. 55년경부터 A.D. 93년까 지 통치한 왕조의 실질적인 중흥자였다. 실로 그는 25세에 이미 갈릴리의 총 독을 역임했고 탁월한 정치력으로 로마군의 도움을 받아 그의 반대 세력을 팔 레스틴에서 완전히 축출하였다. 그러나 헤롯은 지나치게 권력에 집착하였다. 계속되는 로마 정권의 교체 속에 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백성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각 종 건축사역(극장. 원형 경기장, 기념비, 우상 제단, 성채 등)에 백성 들을 동원하여 고된 부역을 강요했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 했다. 물론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제 3성전) 사역을 B.C. 20년에 시작하여 그가 죽은 뒤인 A.D. 68년에 완성시킴으로써 주위로부 터 부분적으로나마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한편 헤롯은 10명의 아내를 두었고, 그중 에돔 출신의 첫 아내 '도리 스'(Doris)에게서 안티파터(Antipater)라는 아들을 얻어 자신의 후계자로 생 각하기도 했으나 그가 죽기(B.C. 4년) 수일 전에 그의 과대 망상증으로 그 아 들을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 마카비가(家) 출신의 둘째 아내 마리암네 (Mariamne)에게서 두 아들을 얻었으나 그들 역시 그 어미와 더불어 살해당하 고 말았다. 헤롯은 대제사장 시므온의 딸이었던 미리암네 2세를 세번째 아내로 맞아 이두 메의 분봉왕이 된 빌립 1세를 낳았다. 한편 사마리아 출신의 넷째 아들 마르 다게(Malthace)에게서 아켈라오(2:22)와 안티파스(Herod Antipas;14:1)를 낳 았다. 그리고 예루살렘 출신의 다섯번째 아내 크레오파트라(Cleopatra)에게 서 칼시스(Chalsis)와 빌립 2세를 낳았다. 헤롯은 B.C. 4년에 매우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70세를 일기로 최후를 맞아야 만 했다(19절). 그런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연대를 제시하는 것이 바로 본문 이외에는 성경 어느 부분에서도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 의 탄생 일자를 산출하는데 많은 애로점이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학자들 은 해롯이 B.C. 4년에 죽었기 때문에(Schurer) 적어도 예수는 그전에 태어났 음이 틀림없다고 믿어왔다. 헤롯의 사망 일자에 대해서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그가 죽기 전에 월식(月食)이 있었다고 언급함으로써 B.C. 4년 3월 12-13일로 측정케 했다. 그에 반해 유대인들의 전승은 헤롯이 죽은 후 유월절이 시작되었다고 증언함 으로써 이 때를 B.C. 4년 4월 11일 경으로 추정케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 황적(政況的) 증 거로 보아 예수의 탄생 연대는 B.C. 5년 후반기나 B.C. 4년 초반기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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