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합신 이단대책위원회와 두 날개 선교회에 바랍니다에 대한 반론


< 안상진 목사, 합신이단대책위원장 >

 

|이 글은 2015627일자 기독교개혁신보 제6974면에 게재된 유영기 목사의 합신 이단대책위원회와 두 날개 선교회에 바랍니다에 대한 반론으로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유영기 목사님의 합신 이단대책위원회와 두 날개 선교회에 바랍니다라는 글을 잘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유 목사님의 글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 이에 대한 해명 및 총회이대위의 입장을 아래와 같이 밝히는 바입니다.


언급하신 것처럼 합신 두 날개 공청회에 두 날개 관련 우리교단 내 인사는 참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물었습니다. 공청회가 불법 모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합신 공청회가 불법인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반론을 하고자 합니다.

 

1. 공청회는 불법이었는가?

 

두 날개 측에서 공청회를 불법이라고 하면서 전개하는 억지주장의 근거로 치리협력위원회(이하 총회치리위원회)의 권고를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총회치리위원회의 권고를, 총회의 중지 요청(김성곤 목사에 주장)으로 표현하면서, 총회에 불복한 모임이니 불법이라고 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혹 김성곤 목사는, 불법이라고 한 것은 합신 내 두 날개 관련 목회자들의 주장이지,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고 변명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그의 글들 속에는 같은 생각을 한다는 충분한 근거들이 있습니다). 혹이라도 함께 한 분들에게 책임 전가를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과연 공청회는 불법이었는가? 총회치리위원회의 권면과 이단및사이비대책위원회(이하 이대위)의 결정에 대한 바른 이해는 그 시작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총회장 앞으로, 합동 측 총회장으로부터 두 날개에 대한 이대위의 조사중단 요청을 하는 서신이 도달하였습니다. 총회임원회는 합동 측의 서신을 정중하게 대하기 위해 총회가 파한 이후에 급히 처리할 일에 대해 위임을 받은 총회치리위원회에 처리를 위탁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총회치리위원회가 모였습니다.


총회치리위원회는 신중한 자세로 고민을 하면서, 합동 측의 요청에도 최선을 다하고, 또한 총회로부터 수임을 받아 일을 처리하고 있는 이대위의 사역에도 걸림이 되지 않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합동 측의 요청을 제100회 총회가 개최하면 물어서 결정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연구 조사 보고서도 총회에 문의하여 결정하고, 공청회도 총회의 의견을 물어 하게 하자는 내용이었고, 이것을 이대위에 권고하기로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에 총회치리위원회와 이대위가 모였고, 결정한 사항대로 총회치리위원회는 이대위에 권고를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이대위는 총회치리위원회의 권고를 충분히 이해하고, 총회치리위원회의 권고가 명령인지, 권고인지를 물었다. 명령이면 따를 것이며, 권고이면 이대위 모임을 다시 열어서 의논하여 결정하겠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총회치리위원회는 명령은 아니고 권고라 하였으며, 이에 이대위가 다시 모여 의논한 결과 교단과 교단 내 두 날개를 하고 있는 교회를 포함하여, 뿐만 아니라, 두 날개 측에도 공청회 개최가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고, 계획대로 개최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인가요?


김성곤 목사는 개혁신보에 실린 그의 글에 의하면, “합동과 합신 두 총회의 중지 요청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을 지어, 그와 함께 하는 김성곤 목사와 이대위가 만날 때 함께 동석하였던 책임 있는 분들의 입을 빌어 공청회를 불법으로 몰고 있습니다.


합동은 모르겠으나, 합신 총회가 언제 공청회 중지를 요청하였습니까? 총회가 요청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나요? 총회에서는 개최 여부를 물어 요청이 아니라 가부를 결정하게 되며, 총회기관을 총회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김성공 목사의 자의적 해석 모습이 그가 어떤 사고의 소유자인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2. 합신 이대위는 두 날개에 변론의 기회를 주지 않았는가?

 

합신 이대위는 이제까지 출간된 두 날개 측 서적과, 두 날개 교육내용과, 증인들만으로도 객관적인 평가와 결론을 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미 내외적으로 이단성(이단적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에 대해 지적을 받고 있고, 합신교단 교회 중에 두 날개 프로그램으로 사역을 하다 교회가 무너지는 사례가 있고 다른 교단에 속한 교회 중에도 유사 사례가 있음은 물론입니다.


김성곤 목사 혹은 그를 대신하여 만난 두 날개 측 인사는 이 모든 것을 모함으로 몰거나, 혹은 개교회의 다른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결과이거나, 혹은 두 날개 선교회가 가르치는 내용과 다르게 사역을 하다가 발생한 현상 등으로 치부하는 것을 들은 바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대부분 사람들과 동일한 주장이며 목소입니다.


이대위는 최종보고를 공청회 없이 총회에 올려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충분한 변론의 기회를 마련해 주고자 공청회를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두 날개 측과 김성곤 목사에게도 이미 내외적으로 이단성과 관련하여 지적을 받고 있는 입장이기에, 자신들을 변론할 수 있고, 문제가 없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알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습니다.


더불어서, 이런 저런 이유와 상황으로 두 날개 프로그램을 행하고 있는 합신의 교회와 목회자들에게도 총회의 결정 전에 두 날개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가짐으로써 총회의 결정 전에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는 역시 최고의 기회였습니다.

 

3. 공청회에 이르기까지의 경과

 

이대위의 두 날개에 대한 연구조사 보고서는 201499회 총회 때 보고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공청회 또한 201499회 총회 전 개최가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년으로 변경이 된 데에는 그럴만한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첫 째는 두 날개 측으로부터 교재를 수정하여 발간하니 새 교재를 갖고 평가해 달라는 요청 때문이었습니다.


연구 조사의 기본은 객관성이니 만큼 이대위는 흔쾌히 받아들여, 최종보고는 100회 때 하고, 99회 총회 때는 총회의 허락을 받아 경과보고서만을 올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99회 총회 때 경과보고서도 보고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변경의 두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두 날개를 시행하고 있는 목회자로부터 경과 보고서를 올리는 것만으로도 교회와 사역에 어려움을 가질 수 있으니 올리지 말고, 2015년에 공청회를 하면 공청회의 결과를 보고, 두 날개 시행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겠으니, 보고 자체를 2015년에 해 달라는 요청 때문이었습니다.


이대위의 사역은 교회를 살리고 목회를 돕기 위한 사역입니다. 진정성 있는 요청에 이대위는 한 발짝 물러나서 100회 총회 때 보고하는 것으로 하고, 공청회를 더욱 잘 준비하여, 교단 내 교회와 목회자들이 현명하게 결정할 수 있도록 하자고, 결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계획을 일시까지 정하여 상임위 때 보고서로 제출을 하였습니다.

 

4. 김성곤 목사와의 만남과 공청회 개최

 

총회와 상임위를 마친 뒤에,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습니다. 공청회 경과를 보고 결정하겠다고 하였던 목회자가 공청회를 하면 교단을 탈퇴하겠다는 발언을 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이대위가 먼저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관련기관 혹은 회의자리 이외에서는 발언을 삼가 해 왔는데, 지난 개혁신보에 두 날개 측 입장에서 글을 쓰신 유 교수님께서 언급을 하셨기에 상황 상 언급하는 바입니다.


더불어서 총회 임원으로부터 해당 목사를 찾아 이대위의 연구결과를 설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동감하여 만나려 했으나, ‘자신을 만날 필요가 무엇이 있겠냐고 하면서, 만나려면 김성곤 목사를 만나야 한다고 하여, 그 의견까지 받아들여 김성곤 목사를 찾게 된 것이다.


김 목사를 만난 이유는 합신의 공청회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공청회에 참여하고 안 하고는 그의 몫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청회에 참여하여 두 날개 측의 입장을 표현해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는 거절을 하였습니다. 이미 있었던 공청회를 살핀 결과 공청회의 결과가 당사자들로 하여금 더욱 어렵게 만들었음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이대위는 당사자들의 진정성 때문임을 설명했습니다.


김 목사는 자신의 목회신념을 설명하였고, 그 중에 자신의 목회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과, 아들이 신학을 하고 있고, 손자도 목사가 되겠다고 하였다며 아들과 손자에게 자랑스러운 목회자로 마치고 싶다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들과 손자의 이름을 걸고 말하는 데서, 김성곤 목사의 목회에 대한 진정성을 믿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를 따로 만나 그런 마음이라면 공청회에 꼭 나오시라! 두 날개 측의 문제가 오직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나타난 문제점이지, 의도적인 결산물이 아닌 것으로 보이니, 그러한 마음으로 공청회에 참석을 하여 있는 사실 그대로 드러내시라! 두 날개가 모두가 인정을 하는 가운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김목사의 진정성만 확실하다면 합신 이대위가 도움이 되어 드릴 것이다라고 의견을 개진하였습니다. 이에 김 목사가 승낙을 하여, 다시 회의석상에 앉아 공청회를 하는 것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물론 동석하였던 두 날개 측 인사는 그 순간에도 반대를 하였습니다. 두 번째 자리에서 그는 반대 이유가 밥그릇 문제라는 발언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이대위가 먼저 제안을 하여 공청회 제목 또한 이단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도록 해보겠다고 까지 제시하였습니다.


김 목사를 만나고 기차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대신하였지만, 결과에 대해서 감사해 하면서, 공청회가 유익한 공청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대위원들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 날개 측으로부터 속히 다시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총회사무실에 두 번째 만남을 가졌습니다.


두 번째 만난 자리에서 앉자마자 공청회를 못하겠다는 말과 함께, 어떤 자료를 내놓았습니다. 그 자료는 네이버의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카페지기인 이인규 권사가 두 날개에 대해 질의한 내용에 대한 답변이 담긴 자료였습니다. 그들은 이인규 권사가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합신 이대위가 그런 사람의 자료를 갖고 연구할 수 있느냐?”라는 말과, 이 권사가 두 날개에 대해 오해하여 공격한 내용들에 대해 사과하기로 하였다는 것과 함께 그 자료를 내놓았습니다.


후에 이 부분에 대해 이인규 권사에게 사실이 아닌 것을 거짓으로 언급한 것에 대해 직접 찾아가 사과한 것으로 확인하였습니다. 이 권사는 한양대 졸업을 하였고, 두 날개가 잘못된 것을 인정하기로 하였지, 이인규 권사가 사과하기로 하였다는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두 날개 측이 제시한 자료에 대한 답변 또한 자신들은 잘못이 없으며, 오해이었다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이대위는 몇 번에 걸쳐서 경고를 하였습니다. 이대위의 연구 보고서는 이인규 권사의 자료와 상관이 없으니, 한 번 더 연결시키면 조치를 취하겠다는 경고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충분히 연구 조사하여 문제가 무엇인지 다 파악하고 있는데 한결같은 거짓으로 일관하고, 무엇이든지 지적하면 수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쌍방 간에 공청회는 반드시 필요함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마치는 말

 

두 날개 측은 이미 지적받았지만 수정하지 않았고, 수정을 하였다 할지라도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한 것이며, 뿐만 아니라 수정한 부분 또한 여전히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저들은 합신 이대위가 전체를 보지 않은 연구와, 앞뒤를 잘라 버리고 일부분의 내용만을 가지고 주장함으로, 자신들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런가? 만일 그런 것이라면 공청회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했습니다.


합신이대위는 두 날개 측을 존중하여 공청회를 개최하였고, 공청회를 통하여 합신이대위가 내 놓는 문제에 대해서 떳떳하게 반박함으로써 두 날개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 모든 교회들로 하여금 당당하게 두 날개를 시행하도록 했어야 합니다. 공청회는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게 하는 최고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 목사는 개혁신보에 올린 광고 글에서 회유라는 표현으로 이대위의 배려와 최소한의 예의를 위장된 모습으로 단정 짓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태도는 이대위원 모두의 마음에, 혹 이후 어떤 동일한 상황이 발생할 때 그의 위장된 진정성에 눈이 멀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지게 하였습니다.


유영기 목사님은 이러한 내용들을 충분히 숙지하시고 앞선 목사님의 근거없는 주장들을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119 no image |조사| 주의 종을 보내며_박병식 목사
편집부
1626 2015-08-25
주의 종을 보내며 < 박병식 목사, 송파제일교회 원로 > “평생 목회자의 길을 인내로 걸어오신 우리 시대 스승 같은 분” 믿음의 선배요 스승이 주님의 나라로 가셨습니다. 아쉬움이 마음에 남습니다. 그러나 이런 귀한 선배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동시에 귀한 믿음의 선배를 모셨음을 우리는 자랑으로 여깁니다. 박 목사님은 인내의 종이었습니다. 인내란 오래 참고 견딤을 뜻합니다. 그러나 여기 인내란 단순하게 오래 참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래 참음을 의미합니다. 박목사님은 그렇게 살아오셨습니다. 민족의 아픔을 인내로 참아오셨습니다. 이제의 고난기를 인내로 겪어오셨습니다. 또한 박 목사님은 해방 이후의 극도의 혼란과 아픔을 겪어 오셨습니다. 6.25의 참상을 인내로 겪어오셨습니다. 북한의 고향을 등지고 남한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참단한 아픔과 극도의 고난을 역시 인내로 견디어 오셨습니다. 박 목사님은 평생 목회자의 길을 인내로 걸어오셨습니다. 박 목사님께서 목회하셨던 기간은 한 마디로 고난 그 자체였습니다. 극한 고난과 아픔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목회였습니다. 박 목사님은 이를 인내로 견디고 견디며 살아오셨습니다. 박 목사님은 2001년 5월 도로 공사장을 지나오시다가 크게 넘어지셨습니다. 그 이후로 오늘까지 장애를 얻으시어 휠체어를 의지해 살아오셨습니다. 참으로 길고도 오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슬퍼하고 낙심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웃음이 있고 소망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위로하셨기 때문입니다. 송탄제일교회 성도들의 지극한 돌보심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 목사님의 믿음으로 인내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모님의 지극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박 목사님의 자녀분들의 효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 목사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신 분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깊은 신앙의 인격이 있었고 우리가 본받을 바른 품성이 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개혁주의에 대한 깊은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난의 길인 줄 알면서도 개혁주의에 서 오셨습니다. 그는 언제나 사랑이 있었지만 사랑을 가장하기 위해 속이거나 거짓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늘 사랑하셨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매우 엄격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하심으로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의 은혜와 자유를 깊이 누리며 사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자유는 진리대로 해야 하는 제한성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사셨지만 물질에 흔들리거나 구속받지 않고 사셨습니다. 가난하셨지만 언제나 남을 넉넉하게 하고 부요하게 하면서 사셨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깊은 성숙한 인격이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남을 향하여 비난하고 미워하는 욕망이나 이기심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박 목사님에게는 지배하려는 교권의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영적이며 인격적이며 도덕적 권위가 늘 있었습니다. 박 목사님은 능력 있는 종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 카리스마를 보이려고 힘을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박 목사님은 늘 자신을 반성하고 고치려고 노력하셨기 때문에 독선적인 모습이 없었습니다. 분명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신 개혁주의자이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은 복음 신앙을 의미합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은 영생의 소망을 갖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합니다. 박 목사님은 평생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신 분이요, 예수님의 형상을 닮으려 하신 분입니다. 자신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평생 예수님의 일만을 구하신 분입니다. 그는 복음의 진수를 명확히 깨닫고 전하시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만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여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임하심을 강조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늘 그 말씀으로 살고자 하셨습니다. 박 목사님은 자신의 몸이 불편하게 된 이후에는 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암기하셨고 찬송을 많이 암기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말씀을 묵상하셨고, 찬송을 부르시었습니다. 그는 평생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오셨습니다. 분명 그는 예수 믿음을 지켜 오셨습니다. 그는 지금 그가 그토록 사모하셨던 주님의 품에 계십니다. 주님께서 그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계십니다. 다시는 죽거나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아니한 천국의 영광 중에 계십니다. 그는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가 입는 흰옷을 입고,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가 받는 금 면류관을 쓰고 주님 품안에 계십니다.
1118 no image |지/상/강/좌| 글 읽기, 어떻게 할까?_한준명 집사
편집부
1835 2015-07-21
 글 읽기, 어떻게 할까? < 한준명 집사, 성심교회 > 1. 글 읽기의 출발은 듣기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수한 말들을 듣는다. 한 단어와 두 단어를 사용하는 시기를 거쳐, 세 단어를 말하기 시작하면 인간은 이미 문장을 구성할 수 있는 상태에 접어든다. 그 뒤 엄마와 대화하면서, 혹은 책을 통하여 듣게 되는 무수한 이야기를 듣는다. 어린아이들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이야기로 구성된 말’에 주의를 집중한다. 이 때 어린아이들은 ‘동화’를 즐겨 듣는다.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유행처럼 번진 ‘과학동화’니 ‘수학동화’니 하는 것 또한 근본적으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어린아이의 속성에 기반을 두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취학 전 아동들의 독서는 이야기를 ‘듣는’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듣는 많은 이야기는 언어를 풍성하게 하고, 문장 구성 능력을 발달시키고, 상상력을 풍성하게 한다. 이 시기에 일찌감치 글자를 배우는 것은 오히려 해롭다. 글자에는 감정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상황을 실감나게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의 톤을 통하여 아이들은 상황과 감정을 이해하고 상상력을 기르게 된다. 반면에 일찌감치 글자를 익힌 아이들은 부모를 성가시게 하지 않고 책에 몰두하는 듯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메마른 독서에 장시간 노출이 되는 결과만을 가져온다. 미취학 아동들의 독서가 ‘듣기’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자를 본격적으로 배우는 시기에는 이제 학교에서의 학습이 병행되면서 아이의 지적 능력이 급격히 향상된다. 그러나 이 시기 아동들의 독서는 ‘동화’ 차원에서, ‘전기문’을 읽는 것으로 확장된다. 전기문도 어떤 인물의 생애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확장’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를 보내고 고학년이 될 무렵, 이야기 방식의 독서에서 벗어나 개념적인 독서로의 확대가 이루어진다. 이제 그림이 없어도, 인물들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아도, 사회, 관계, 철학, 과학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에 대한 사고가 이루어져야 하는 시기를 만난다. 이 결정적 시기와 더불어 우리 아이들이 독서는 ‘중단’된다. 많은 아이들이 손에 스마트폰이 들려지는 시기가 또 이 시기이다. SNS를 통한 의사소통은 즉각적이고 파편적이다. 이러한 읽기와 쓰기의 방식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를 통하여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에 매우 서툴다. 장면을 인식하여 사고하는 단계에서 개념을 인식하여 사고하는 단계로의 이행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독서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되면서 가중되는 학습에 대한 부담은 더더욱 독서에게 아이들을 멀어지게 한다. 책을 읽고 있으면 “넌 공부는 안 하니?” 하고, 공부를 하고 있으면 “책도 좀 읽어야 되는 거 아니니?” 한다. 학습을 위한 독서, 독서기록장을 작성하기 위한 독서를 하니 책읽기가 재미있을 리가 없다. 책읽기가 즐거움이 아니라, 의무이고 숙제가 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의미 있는 책을 가져다 줘봤다. 그저 “됐거든?”이라는 한 마디만 돌아오기 십상이다. 2. 우선 읽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왕도는 없다. 읽지도 않는데, 어떻게 하면 잘 읽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이 5분이 되었던 10분이 되었든 상관없다. 정해진 시간에 어떻게든 책을 펼쳐서 읽다가 그 시간이 끝나면 과감히 덮는 것이다. 최근에 유행처럼 번졌던 “아침 10분 책읽기 운동”은 정해진 시간에 책을 펼쳐 읽는 습관을 중요성을 보여준다. 이 시간에 전교 학생들에게 동시에 책을 읽히고, 10분 후에 책을 덮고 다른 공부를 하게 했더니,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심지어 집에서도 책을 읽더라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음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지닌 동물이다. 이 실험의 핵심은 일단 읽는 기회를 주었더니,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 하면서 읽기가 지속되었고, 읽기의 습관이 형성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는 무언가 부족할 것 같다. 무엇이고 확실하고 체계적인 방법이 있을 듯하다. 그래서 여기 독서의 방법으로 가장 유명하다고 알려진 《SQ3R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3. 독서를 위한 SQ3R 방식 효과적인 글 읽기 기법(SQ3R)은 미국 오하이오 주립 대학의 심리학자 로빈슨(Francis P. Robinson이 미 국방부의 요청으로 개발했다. S는 Survey(훑어보기), Q는 Question(질문하기), 그리고 3R은 Reading(자세히 읽기), Recite(암송하기), Review(다시 보기)와 같은 순서로 독서를 하는 것을 뜻한다. 1) SQ3R로 알아보는 독서방법 Survey는 제목, 소제목, 목차 등 눈에 띄는 부분을 간단하게 읽으며 책에 대한 관심을 갖고 짐작하는 단계고, Question은 앞서 훑어본 제목과 내용들에 대해 질문거리를 만들어 내는 단계이며, Reading은 말 그대로 책을 읽는 단계이다. Recite는 지금까지 읽은 내용의 주제나 글을 쓴 동기, 추측, 핵심 내용 등을 마음 속으로 정리해 보는 단계이며, 마지막으로 Review 단계에서 책을 다시 읽으며 Question에서 만든 질문 거리를 해결해 나가면서 이를 나와 우리의 문제로 내면화시켜 나가는 단계입니다. 2) 학습 방법으로도 유용한 SQ3R(예습-공부-복습) 가. Survey(훑어보기) 훑어보기 단계에서는 읽기 제목, 소재, 글의 첫 부분, 굵은 서체의 소제목, 글에 나오는 그림이나 도표 등을 훑어보게 한다. 훑어보기 단계에서는 너무 한 부분의 내용에 집중하지 말고 눈으로 대충 내용을 훑는 것이 보통이다. 나. Question(질문하기) 글을 읽기 전에 마음 속으로 다양한 질문을 만들어 내는 단계이다. 글의 내용을 예언해 볼 수 있는 질문, 배경 지식을 연결시키는 질문, 글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질문 등 여러 가지 목적의 질문을 만들 수 있다. 다. Read(자세히 읽기) Read(자세히 읽기)는 Question(질문하기)을 통하여 정한 의문에 답할 수 있도록 글을 적극적으로 읽는 단계다. 정신을 집중하며 읽되, 글에서 강조하는 부분에 특히 신경을 쓰며 읽어야 한다. 중요한 용어, 개념은 물론 본문만 읽지 말고 도표나, 그래프, 그림도 빼놓지 말고 읽어야 한다. 이 때 중요한 개념들을 밑줄 그으며 읽으면 도움이 된다. 중요한 내용들을 요점 정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읽은 내용을 다시 되새길 때에도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라. Recite(되새기기) 각 표제에 해당하는 부분을 읽고 나면 읽은 내용들을 정리하며 자신의 생각으로 ‘재구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읽던 것을 멈추고 읽기 시작할 때 품었던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되새기기 단계는 머릿속으로 암송해 보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보다 효과적으로 읽은 내용을 기억하고, 주어진 질문에 효과적인 답을 하기 위해서는 직접 읽은 내용을 떠올리면서 적어 보면 도움이 된다. 마. Review(다시보기) 마지막 단계로, 읽은 내용에 대해 총정리 하면서 읽기의 내용을 자신의 기존 지식, 경험 및 의견 등과 관련지어 본다. 이 때는 글의 내용을 정리하는 차원을 넘어서, 책에서 읽은 내용이 나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아이디어를 떠올려야 한다. 책을 통해 알게 된 내용을 통해 ‘나와 우리’를 발견해 나가는 단계이며, 이러한 ‘내면화의 과정’을 통해서 지적인 성숙과 통찰력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독서의 목적은 이 마지막 단계를 통해 달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 나가는 말 평소 우리들에게 있어 글 읽기는 어려움을 넘어서 두려움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여겨진다. 주입식 교육에 의해 구조화된 지식을 암기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글을 읽는 기회가 거의 없다보니 당연히 서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글 읽기 또한 처음 단계부터 차근차근 훈련을 필요로 한다. 위에 제시한 SQ3R 방법을 도입한다면 보다 체계적인 글 읽기를 몸에 익힐 수 있을 것이다.
Selected no image |반론문| “합신 이단대책위원회와 두 날개 선교회에 바랍니다”에 대한 반론_안상진 목사
편집부
2276 2015-07-07
“합신 이단대책위원회와 두 날개 선교회에 바랍니다”에 대한 반론 < 안상진 목사, 합신이단대책위원장 > |이 글은 2015년 6월 27일자 기독교개혁신보 제697호 4면에 게재된 유영기 목사의 “합신 이단대책위원회와 두 날개 선교회에 바랍니다”에 대한 반론으로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유영기 목사님의 “합신 이단대책위원회와 두 날개 선교회에 바랍니다”라는 글을 잘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유 목사님의 글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 이에 대한 해명 및 총회이대위의 입장을 아래와 같이 밝히는 바입니다. 언급하신 것처럼 합신 두 날개 공청회에 두 날개 관련 우리교단 내 인사는 참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물었습니다. 공청회가 불법 모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합신 공청회가 불법인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반론을 하고자 합니다. 1. 공청회는 불법이었는가? 두 날개 측에서 공청회를 불법이라고 하면서 전개하는 억지주장의 근거로 치리협력위원회(이하 총회치리위원회)의 권고를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총회치리위원회의 권고를, 총회의 중지 요청(김성곤 목사에 주장)으로 표현하면서, 총회에 불복한 ‘모임’이니 불법이라고 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혹 김성곤 목사는, 불법이라고 한 것은 합신 내 두 날개 관련 목회자들의 주장이지,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고 변명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그의 글들 속에는 같은 생각을 한다는 충분한 근거들이 있습니다). 혹이라도 함께 한 분들에게 책임 전가를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과연 공청회는 불법이었는가? 총회치리위원회의 권면과 이단및사이비대책위원회(이하 이대위)의 결정에 대한 바른 이해는 그 시작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총회장 앞으로, 합동 측 총회장으로부터 두 날개에 대한 이대위의 조사중단 요청을 하는 서신이 도달하였습니다. 총회임원회는 합동 측의 서신을 정중하게 대하기 위해 총회가 파한 이후에 급히 처리할 일에 대해 위임을 받은 총회치리위원회에 처리를 위탁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총회치리위원회가 모였습니다. 총회치리위원회는 신중한 자세로 고민을 하면서, 합동 측의 요청에도 최선을 다하고, 또한 총회로부터 수임을 받아 일을 처리하고 있는 이대위의 사역에도 걸림이 되지 않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합동 측의 요청을 제100회 총회가 개최하면 물어서 결정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연구 조사 보고서도 총회에 문의하여 결정하고, 공청회도 총회의 의견을 물어 하게 하자는 내용이었고, 이것을 이대위에 권고하기로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에 총회치리위원회와 이대위가 모였고, 결정한 사항대로 총회치리위원회는 이대위에 권고를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이대위는 총회치리위원회의 권고를 충분히 이해하고, 총회치리위원회의 권고가 명령인지, 권고인지를 물었다. 명령이면 따를 것이며, 권고이면 이대위 모임을 다시 열어서 의논하여 결정하겠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총회치리위원회는 명령은 아니고 권고라 하였으며, 이에 이대위가 다시 모여 의논한 결과 교단과 교단 내 두 날개를 하고 있는 교회를 포함하여, 뿐만 아니라, 두 날개 측에도 공청회 개최가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고, 계획대로 개최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인가요? 김성곤 목사는 개혁신보에 실린 그의 글에 의하면, “합동과 합신 두 총회의 중지 요청”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을 지어, 그와 함께 하는 김성곤 목사와 이대위가 만날 때 함께 동석하였던 책임 있는 분들의 입을 빌어 공청회를 불법으로 몰고 있습니다. 합동은 모르겠으나, 합신 총회가 언제 공청회 중지를 요청하였습니까? 총회가 요청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나요? 총회에서는 개최 여부를 물어 요청이 아니라 가부를 결정하게 되며, 총회기관을 총회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김성공 목사의 자의적 해석 모습이 그가 어떤 사고의 소유자인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2. 합신 이대위는 두 날개에 변론의 기회를 주지 않았는가? 합신 이대위는 이제까지 출간된 두 날개 측 서적과, 두 날개 교육내용과, 증인들만으로도 객관적인 평가와 결론을 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미 내외적으로 이단성(이단적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에 대해 지적을 받고 있고, 합신교단 교회 중에 두 날개 프로그램으로 사역을 하다 교회가 무너지는 사례가 있고 다른 교단에 속한 교회 중에도 유사 사례가 있음은 물론입니다. 김성곤 목사 혹은 그를 대신하여 만난 두 날개 측 인사는 이 모든 것을 모함으로 몰거나, 혹은 개교회의 다른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결과이거나, 혹은 두 날개 선교회가 가르치는 내용과 다르게 사역을 하다가 발생한 현상 등으로 치부하는 것을 들은 바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대부분 사람들과 동일한 주장이며 목소입니다. 이대위는 최종보고를 공청회 없이 총회에 올려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충분한 변론의 기회를 마련해 주고자 공청회를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두 날개 측과 김성곤 목사에게도 이미 내외적으로 이단성과 관련하여 지적을 받고 있는 입장이기에, 자신들을 변론할 수 있고, 문제가 없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알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습니다. 더불어서, 이런 저런 이유와 상황으로 두 날개 프로그램을 행하고 있는 합신의 교회와 목회자들에게도 총회의 결정 전에 두 날개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가짐으로써 총회의 결정 전에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는 역시 최고의 기회였습니다. 3. 공청회에 이르기까지의 경과 이대위의 두 날개에 대한 연구조사 보고서는 2014년 99회 총회 때 보고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공청회 또한 2014년 99회 총회 전 개최가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년으로 변경이 된 데에는 그럴만한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첫 째는 두 날개 측으로부터 교재를 수정하여 발간하니 새 교재를 갖고 평가해 달라는 요청 때문이었습니다. 연구 조사의 기본은 객관성이니 만큼 이대위는 흔쾌히 받아들여, 최종보고는 100회 때 하고, 99회 총회 때는 총회의 허락을 받아 경과보고서만을 올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99회 총회 때 경과보고서도 보고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변경의 두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두 날개를 시행하고 있는 목회자로부터 경과 보고서를 올리는 것만으로도 교회와 사역에 어려움을 가질 수 있으니 올리지 말고, 2015년에 공청회를 하면 공청회의 결과를 보고, 두 날개 시행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겠으니, 보고 자체를 2015년에 해 달라는 요청 때문이었습니다. 이대위의 사역은 교회를 살리고 목회를 돕기 위한 사역입니다. 진정성 있는 요청에 이대위는 한 발짝 물러나서 100회 총회 때 보고하는 것으로 하고, 공청회를 더욱 잘 준비하여, 교단 내 교회와 목회자들이 현명하게 결정할 수 있도록 하자고, 결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계획을 일시까지 정하여 상임위 때 보고서로 제출을 하였습니다. 4. 김성곤 목사와의 만남과 공청회 개최 총회와 상임위를 마친 뒤에,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습니다. 공청회 경과를 보고 결정하겠다고 하였던 목회자가 공청회를 하면 교단을 탈퇴하겠다는 발언을 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이대위가 먼저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관련기관 혹은 회의자리 이외에서는 발언을 삼가 해 왔는데, 지난 개혁신보에 두 날개 측 입장에서 글을 쓰신 유 교수님께서 언급을 하셨기에 상황 상 언급하는 바입니다. 더불어서 총회 임원으로부터 해당 목사를 찾아 이대위의 연구결과를 설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동감하여 만나려 했으나, ‘자신을 만날 필요가 무엇이 있겠냐’고 하면서, 만나려면 김성곤 목사를 만나야 한다고 하여, 그 의견까지 받아들여 김성곤 목사를 찾게 된 것이다. 김 목사를 만난 이유는 합신의 공청회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공청회에 참여하고 안 하고는 그의 몫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청회에 참여하여 두 날개 측의 입장을 표현해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는 거절을 하였습니다. 이미 있었던 공청회를 살핀 결과 공청회의 결과가 당사자들로 하여금 더욱 어렵게 만들었음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이대위는 당사자들의 진정성 때문임을 설명했습니다. 김 목사는 자신의 목회신념을 설명하였고, 그 중에 자신의 목회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과, 아들이 신학을 하고 있고, 손자도 목사가 되겠다고 하였다며 아들과 손자에게 자랑스러운 목회자로 마치고 싶다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들과 손자의 이름을 걸고 말하는 데서, 김성곤 목사의 목회에 대한 진정성을 믿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를 따로 만나 “그런 마음이라면 공청회에 꼭 나오시라! 두 날개 측의 문제가 오직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나타난 문제점이지, 의도적인 결산물이 아닌 것으로 보이니, 그러한 마음으로 공청회에 참석을 하여 있는 사실 그대로 드러내시라! 두 날개가 모두가 인정을 하는 가운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김목사의 진정성만 확실하다면 합신 이대위가 도움이 되어 드릴 것이다”라고 의견을 개진하였습니다. 이에 김 목사가 승낙을 하여, 다시 회의석상에 앉아 공청회를 하는 것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물론 동석하였던 두 날개 측 인사는 그 순간에도 반대를 하였습니다. 두 번째 자리에서 그는 반대 이유가 밥그릇 문제라는 발언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이대위가 먼저 제안을 하여 공청회 제목 또한 “이단”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도록 해보겠다고 까지 제시하였습니다. 김 목사를 만나고 기차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대신하였지만, 결과에 대해서 감사해 하면서, 공청회가 유익한 공청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대위원들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 날개 측으로부터 속히 다시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총회사무실에 두 번째 만남을 가졌습니다. 두 번째 만난 자리에서 앉자마자 공청회를 못하겠다는 말과 함께, 어떤 자료를 내놓았습니다. 그 자료는 네이버의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카페지기인 이인규 권사가 두 날개에 대해 질의한 내용에 대한 답변이 담긴 자료였습니다. 그들은 “이인규 권사가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합신 이대위가 그런 사람의 자료를 갖고 연구할 수 있느냐?”라는 말과, 이 권사가 두 날개에 대해 오해하여 공격한 내용들에 대해 사과하기로 하였다는 것과 함께 그 자료를 내놓았습니다. 후에 이 부분에 대해 이인규 권사에게 사실이 아닌 것을 거짓으로 언급한 것에 대해 직접 찾아가 사과한 것으로 확인하였습니다. 이 권사는 한양대 졸업을 하였고, 두 날개가 잘못된 것을 인정하기로 하였지, 이인규 권사가 사과하기로 하였다는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두 날개 측이 제시한 자료에 대한 답변 또한 자신들은 잘못이 없으며, 오해이었다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이대위는 몇 번에 걸쳐서 경고를 하였습니다. 이대위의 연구 보고서는 이인규 권사의 자료와 상관이 없으니, 한 번 더 연결시키면 조치를 취하겠다는 경고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충분히 연구 조사하여 문제가 무엇인지 다 파악하고 있는데 한결같은 거짓으로 일관하고, 무엇이든지 지적하면 수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쌍방 간에 공청회는 반드시 필요함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마치는 말 두 날개 측은 이미 지적받았지만 수정하지 않았고, 수정을 하였다 할지라도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한 것이며, 뿐만 아니라 수정한 부분 또한 여전히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저들은 합신 이대위가 전체를 보지 않은 연구와, 앞뒤를 잘라 버리고 일부분의 내용만을 가지고 주장함으로, 자신들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런가? 만일 그런 것이라면 공청회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했습니다. 합신이대위는 두 날개 측을 존중하여 공청회를 개최하였고, 공청회를 통하여 합신이대위가 내 놓는 문제에 대해서 떳떳하게 반박함으로써 두 날개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 모든 교회들로 하여금 당당하게 두 날개를 시행하도록 했어야 합니다. 공청회는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게 하는 최고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 목사는 개혁신보에 올린 광고 글에서 “회유”라는 표현으로 이대위의 배려와 최소한의 예의를 위장된 모습으로 단정 짓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태도는 이대위원 모두의 마음에, 혹 이후 어떤 동일한 상황이 발생할 때 그의 위장된 진정성에 눈이 멀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지게 하였습니다. 유영기 목사님은 이러한 내용들을 충분히 숙지하시고 앞선 목사님의 근거없는 주장들을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1116 no image 합신 이단대책위원회와 두 날개 선교회에 바랍니다_유영기 목사
편집부
2384 2015-06-23
합신 이단대책위원회와 두 날개 선교회에 바랍니다 < 유영기 목사, 합신 신약학 교수 역임 > <이 원고는 2015년 6월 13일자 기독교개혁신보 제697호 4면에 게재된 두날개 공청회 특집과 관련해 그에 대한 반론 형태로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먼저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을 개혁하려고하는 자는 독사의 독을 뿜을 수 있다 두 날개 선교회에 대한 합신 이단대책위원회 (이하 이대위)의 비판과 지적을 보면서 혹시라도 합신의 ‘바른 신학’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마음에 이 칼럼을 씁니다. 합신이 추구하는 ‘바른 신학’은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입니다.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은 관습이나 제도 심지어 신학의 패러다임 등으로 인해 굳어져가는(Formation) 신학이 아니라 ‘특별 계시의 역사적 과정(the historical progression og the special revelation)’의 관점으로 사고하며 행동하기 위해 끊임없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개혁적(Reformation) 신학입니다. 곧 바른 신학은 닫혀진 패러다임 (Closed paradigm)이 아니라 개혁의 첫 번째 대상인 자신부터 그 이후 교회와 사회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뤄내는 삶을 살아가도록 개혁하는 열린 패러다임(Opened paradigm) 구조의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신학은 가장 성경적이면서도 가장 실천적인 신학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스승이신 정암 박윤선 목사님은 생전에 신학은 철저히 교회를 위해서만 존재해야한다고 역설하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를 위하지 않는 신학 곧 학문 자체의 신학은 죽은 신학이며 오히려 교회에 해독을 끼치는 사악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어떻게 신학 박사의 논문이 성경보다 더 어려울 수 있습니까?”라고 하시며 다른 학문과 달리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일반 교인들이 더 깊고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자로서 교회의 덕을 쌓도록 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유산과도 같은 박윤선 목사님은 성경 전권의 주석을 다른 학자들의 주석들과 달리 현학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적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합신이 표어로 삼고 있는 ‘바른 신학’은 성경과 성령을 절대 의존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려는 구속사적 관점으로 교회에 덕이 되는것을 목적으로 하며 궁극적으로는 성도들의 ‘바른 생활’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른 신학’은 우선 자신을 개혁하는 과정 곧 ‘바른 생활’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성찰과 개혁이 없으면 자신과 다르다고 판단되는 대상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신학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른’이라는 표현은 ‘다른’ 대상을 ‘바르지 못하게 보는’ 관점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만이 바르며 자신과 다른 대상은 ‘그른 대상’ 결국 ‘나쁜 대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은 끊임없이 개혁하는 열린 패러다임 구조인데 그 개혁 시켜야할 우선적 대상은 자신과 달라 보여 그르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정암이 합신 태동시기 설교 중에 여러 차례 간곡하게 권고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설교하실 때 그 분의 특유의 표정과 더불어 칼칼한 음성이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정암은 “남을 개혁하려고 할 때 자칫 잘못하면 독사의 독을 뿜어내는 독사의 무리로 전략할 수밖에 없다.” 경고하셨습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하여 독사의 독을 내뿜는 자가 될 것이 아니라 먼저 겸허하게 자신을 개혁하기 위해 회개하자”고 눈물어린 호소를 하신 정암을 기억하고 그의 제자로서의 우리의 삶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주장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열린 패러다임 구조(Opened paradigm system)’는 21세기에 들어 개혁주의 신학 내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패러다임이 ‘열린 패러다임 구조’로 변화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그 용어의 표현에서만 같지 내용은 다릅니다. 곧 개혁주의 신학의 내용을 바꾸자는 데이빗 에드워즈(David L. Edwards)나 가렛트 죤스(Gareth Jones) 또는 변화해가는 상황에 따라 개혁주의 신학의 내용을 적절하게 수정해나가자는 수정적 개혁주의 신학자인 마르쿠스 보르그(Marcus J. Borg) 혹은 웨더번(A.J.M. Wedderburn)들이 주장하는 ‘열린 패러다임 구조’가 아닙니다. 곧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바른 신학’의 패러다임이 곧바른가를 돌아보아 스스로를 개혁하는 ‘열린 패러다임 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받는 겸허함이 없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마치 휘어진 자를 가지고 대상이 잘못되었다고 어거지를 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아닌 상대방을 개혁하려고할 때는 그것을 전달하는 형태가 더욱 겸허한 태도가 되어야만합니다. 만일 그러하지 않고 인격 변수(Person variable)의 형태가 비판적이면 그 비난을 받는 사람은 마음이 상하게 되고 “당신이나 잘하세요!”라는 비웃음만 사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개혁의 대상이 개인이 아닌 교회일 경우에는 자칫 자신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굳어진 패러다임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허무는 도끼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합신 이대위에게 바랍니다. 저는 그동안 합신 이대위가 이 혼탁하고 어두워져가는 한국 기독교 사회에 훌륭한 신학적 방파제요 등대의 역할을 감당해 왔다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금번 두 날개 선교회의 공청회 및 개혁신보 등의 비판 내용은 두 날개를 제자훈련 프로그램으로 하고 있는 합신 내 교회들은 물론 다른 여타 교단에 소속된 교회들의 목사님들과 교인들을 이단이라는 도끼로 내리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은 아닌가하여 마음이 심히 안타깝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일을 계기로 이대위는 앞으로 어떠한 교회나 선교단체 등을 이단으로 규정하기 이전에 자체적으로만 연구하고 결정하기 보다는 이대위내 합신 교수 자문위원들에게 자문을 요청해주셨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합신 이대위 위원들의 신학이 항상 절대 무흠하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국민들을 공포스럽게 위협하는 메르스의 주제로 얼마 전 방영된 개그 콘서트의 ‘민상 토론’같은 이대위가 되지 아니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저의 진정어린 권면입니다. ‘민상 토론’ 풍자의 포인트는 정치 풍자보다는 토론자의 말꼬리를 붙잡고 토론자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왜곡하는 사회자의 태도와 민감한 질문을 피하려고 애쓰지만 매번 걸려들고 마는 개그맨 유민상의 억울한 모습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단이라는 규정은 신론과 기독론 및 교회론 등 교의적인 내용을 의도적으로 왜곡한후 고집스럽게 체계화시켜가는 대상에게만 적용해야하는 것입니다. 이대위가 존재하는 목적은 교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함인데 합신내 두 날개를 적용하고 교회들도 그 대상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지하셨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대상은 반드시 그 대상을 불러 소명의 기회를 주고 지도를 해주는 것이(마태복음 18장 15절~17절) 성경의 말씀에도 적합 합니다. 만일 그리하지 않고 비판하는 대상자의 말꼬리를 붙잡고 이단성 시비를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그리한다면 지난번 두 날개 공청회 발표시 주장된 합신 이대위 박형택 목사의 ‘메시야 과정설’로 인해 현재 인터넷 언론 및 신문 등에서 오히려 박형택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비판에서 합신 이대위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 날개 선교회에 바랍니다. 금번 합신 이대위의 공청회로 인하여 두 날개를 제자훈련 프로그램으로 적용하고 있는 교회들로 하여금 이단성 시비를 받게 된 것을 너무 억울하고 분하게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돌아보고 두 날개 안에 개혁해야만할 굳어져가는 패러다임 체계는 없는가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두 날개 교회들과 합신 이대위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달려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이요 한 지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두 날개가 성경과 성령의 균형을 잡아가는데 있어서 금번 합신 이대위의 지적은 좋은 약이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금번의 사태로 인하여 합신 내 두 날개 프로그램 적용 교회들뿐만 아니라 지난번 어려운 산고의 고통을 거쳐 하나 된 합신 교회들 중에서 교단 탈퇴까지 협의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그야말로 주님의 몸을 나누는 일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십여 년 이상을 합신에서 교수로서 부족하나마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앞부분에서 주장하였던 ‘바른 신학’을 위해 성경과 성령이 균형 잡힌 개혁주의 사람이 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물론 두 날개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배우고 적용하는 국내외 교회들이 다양한 교단과 교파에서 모였기에 각자의 신학과 신앙 양식의 컬러가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자훈련을 배워가서 적용하는 교회와 선교단체들도 가능한 개혁주의 신학의 내용을 갖도록 노력해주시길 바랍니다.
1115 no image |두날개 공청회 특집 <1>| 두날개 프로그램의 성경적 문제점_박형택 목사
편집부
2253 2015-06-09
두날개 프로그램의 성경적 문제점 < 박형택 목사, 총회 이단상담소장 > “두날개 교리는 자신의 논리에 성경을 가져다 붙인 것에 불과해” 합신 이대위가 공청회를 진행하기까지 여러 외압을 받아왔으나 외압에 의해 이대위의 정상적인 활동을 제지당하거나 중단할 수 없었기에 무거운 짐을 안고 있었지만 예정대로 공청회를 진행하였다. 공청회를 열기까지의 경과 교단내의 여러 목회자들의 요청으로 두날개 대표 김성곤 목사를 만났고, 총회 이대위의 정상정인 활동으로서 공청회는 예정대로 진행될 것을 전달하고 공청회에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두 번째 만남에서는 공청회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김 목사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공청회를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기자회견을 통해서 합신 이대위가 마치 불법을 행한 것처럼 호도한 것은 그 저의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지적하면 고치겠다고 하고, 이미 고쳤다고 교재를 보내오기도 했지만 신뢰성이 떨어졌다. 왜냐하면 교재의 내용은 이미 그가 발행한 단행본 책에 수록된 내용들로 그가 가진 사상이 교재의 내용도 나온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그 교재를 고친다면 이 전에 간행된 단행본들 다 폐기해야 옳을 일이다. 또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지적하면 고치겠다고 공언했다면 당연히 공청회를 통해서 지적된 것을 받아들이고 고쳐나가야 하며 그 동안 잘못된 내용을 공적으로 가르쳤으니 공개적으로 잘못된 내용을 인정하고 당당하게 고쳐나가야 되지 않나 생각이 된다. 미리 이단성 규정을 해 놓고 공청회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책도 받았지만 오히려 공청회를 통해서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오해가 있으면 풀어나가는 것이 공청회의 목적이다. 두날개의 성경적 문제점 지금까지 김성곤 목사의 책 10여 권이 넘는 단행본과 다양한 교재들을 바탕으로 나타난 문제점들을 간단하게 요약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김성곤 목사가 말하고 있는 두날개 교리는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자신의 논리에 성경을 가져다 붙인 것에 불과하는 ‘성경 짜깁기’라는 판단이다. 첫째, 삼위일체 존재 방식이 공동체로 존재하며 바로 셀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을 닮았으며 셀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예수를 믿어도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인하여 해결되지 않은 재앙들이 있으니 가계의 저주를 차단해야 한다는 가계저주론을 주장한다. 셋째, 아담의 죄가 자손들의 피를 타고 흘러내려간다는 혈통유전설을 주장하며 죄를 차단하지 않으면 상속된다고 한다. 넷째, 예수를 믿어도 치유되지 않은 내면의 쓴 뿌리와 견고한 진 때문에 신앙생활에 실패하며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축복의 문을 막는다고 주장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쓴뿌리나 견고한 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섯째, 인간을 영 혼 육 삼분설을 주장하며 성령은 오직 영에 계시고 영에 계신 성령이 혼을 뚫고 육을 뚫고 나타나는 것이 은사라는 주장을 하는데 지방교회나 구원파에서 주장하는 사상이다. 여섯째, 두날개 양육 시스템이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건강한 교회라고 하며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세우기를 원하셨던 교회라고 하면서 기존교회는 잘못된 교회로서 개혁해야 할 교회라고 주장한다. 일곱째, 사단이 직접 예수님 사역조차 방해했으며 에덴동산에서부터 사단이 공동체를 파괴하기 시작했고, 가룟 유다도 공동체 파괴를 했다고 한다. 특히 콘스탄틴 대제가 AD 313년 두날개 교회를 파괴하여 한쪽 날개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여덟째, 신사도운동 사상이나 베뢰아 사상 그리고 다락방과 유사한 사상들이 그의 책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1114 no image |두날개 공청회 특집 <2>| 두날개 프로그램의 신학적 문제점_김성한 목사
편집부
2449 2015-06-09
두날개 프로그램의 신학적 문제점 < 김성한 목사, 총회 이대위 위원 > “두날개 신학은 현세적 신비주의 신앙으로 변질시키는 프로그램” 두날개 양육 프로그램은 기존교회의 제도와 신학을 매우 잘못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성경적인 교회는 오직 두 날개(셀교회와 축제예배) 교회이기 때문에, 기존교회를 두 날개 교회로 개혁하라고 주장한다. 즉 두날개는 교회 체제를 셀교회 체제로, 예배는 축제예배로, 그리고 신학은 현세적 신비주의 신앙으로 변질시키려는 매우 비성경적인 제자훈련 프로그램이다. 셀교회의 문제점 셀교회는 당회와 제직회 같은 교회의 정상적인 기구를 무력화시키며 목사를 절대화하고, 신학적 소양이 부족한 평신도 셀리더에게 목회의 많은 부분을 맡김으로써 교회 안에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 두날개의 셀교회 시스템에서는 장로나 당회 같은 기존 교회의 체제가 점차 소멸되고 셀리더, 슈퍼셀리더, 디렉터로 올라가는 다단계 구조로 개편된다. 축제예배의 문제점 축제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사람의 만족을 위한 예배이며, 기존 교회에서 선포되는 건전한 성경적인 설교 메시지를 율법적, 지식적인 설교로 폄하하고, 사람의 마음에 평안과 위로를 주는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예언자적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미래에 일어날 좋은 일에 대한 축복화 확신을 주어서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고 성도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거짓 예언자들이 했던 것이다. 현세적 복음의 문제점 두날개의 복음은 죄에 대한 참된 회개와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겪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현세적인 복음이며,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르치고 전파하며 병을 고치는 3대 사역을 해하도록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신유의 은사가 훈련을 통하여 나타날 수 있다는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사상이며 치유사역이 전도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잘못된 전도 개념을 가르치며, 신앙이 자랄수록 은사가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고 가르친다. 병고침 사역을 위하여 병의 원인을 파악하는데, 원죄 자범죄 조상죄 마귀가 주는 죄로 파악하라는 것 등은 그 내용이 다락방에서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며, 두날개에서 가르치는 ‘10가지 축복’은 다락방의 ‘7가지 권세’와 순서까지 거의 일치한다. 또한 병을 의인화하여 예수 이름으로 호통치며 마귀를 내쫓으라는 것은 베뢰아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일치하며, 많은 부분이 신사도운동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기존교회의 신학을 비판한다 두날개는 기존교회가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성령에 대하여 무지하여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며, 성령을 환영하고 성령이 임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성령 체험을 하게 하는 매우 잘못되고 위험한 성령론을 가르친다. 이 외에도 또한 교단 헌법 15장 6조에 위배되는 공개자백을 교리화하여 가르치고 있다. 또한 셀교회와 축체예배는 이미 2003년 제88회 총회에서 신학위원회에서 매우 위험한 것으로 보고하여 총회에서 결의하였기 때문에, 2003년 이후 합신 교단에서는 셀교회와 축제예배를 해서는 안 된다. 두날개의 자체 수정 노력에 대하여 두날개는 여러 차례 공문화 성명서를 통하여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면 고치는 수정 노력을 해왔다고 주장하나, “가계저주”가 문제가 되면 “집안 저주”로, ‘성령세례’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용어만 살짝 바꾸어 문제를 숨겨 왔다. 이런 수정은 의미가 없으며 합신 이대위는 두날개에게 다음 같이 3가지를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1. 셀교회를 중지하고, 정상적인 장로교회 체제를 회복하라. 2. 축제예배를 중지하고, 말씀 중심의 예배를 회복하라. 3. 현세적 기복적 신비주의 신학을 버리고,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쳐라.
1113 no image |2015 총회교직자 수련회 특집| 주의 일에 힘쓰라_박혜근 교수
편집부
2453 2015-06-09
주의 일에 힘쓰라 (고전 15:51-58) < 박혜근 목사, 칼빈대 교수 > <편집자 주 : 5월 11-14일간 ‘은혜의 복음을 회복하라’는 주제로 열린 총회교직자 수련회 주 강사인 박혜근 목사의 설교문을 요약, 게재합니다> “이생에서 내가 행한 일은 없어지지 않고 부활과 함께 모두 드러납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세상에서 살되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쓰고 싶은 대로 다 쓰고 그렇게 살면 부끄러운 부활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1. 고린도교회는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받은 은사가 많았지만 문제도 많은 교회였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성적방종, 분쟁, 편 나누기, 은사의 남용 등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문제는 더 근본적인 것에 있었습니다. 본 서신을 분석해 보면 고린도 교회에는 대략 열 가지의 문제가 있었는데, 그 원인은 많은 부분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지 않는 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당면한 문제들과 관련해서 바울에게 물었기 때문에 본 서신은 그것에 대하여 대답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일종의 신앙생활의 FAQ's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는 새로운 부분을 시작할 때는 언제나 “대하여는(now concerning, 헬. Peri de)”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7:1, 25; 8:1; 12:1; 16:1). 그런데 15장만큼은 “이제”(de)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15장의 내용은 고린도교회가 질문하지 않은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말하자면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다루면서 세세하게 답변했지만 사도가 생각할 때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고린도교회에 가장 근본적으로 필요한 가르침은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다수는 모두 부활에 대한 바른 신앙을 요구하는 문제라고 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컨대 여자들이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는 문제의 배후에는 디오니소스(Dionysos) 숭배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 숭배는 여자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기에 고린도교회의 여신자들 중의 일부는 여전히 이 종교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촉발된 문제 중의 하나가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면서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디오니소스의 제의에 참석하는 여자들은 종종 남장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거나 혹은 머리를 짧게 깎고 어떤 경우에는 아예 머리카락을 밀어버리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남자들은 여자처럼 머리를 길게 길러 내리고 예배에 참석할 때는 머리에 수건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발굴된 고고학적인 유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고린도에서 발굴된 한 꽃 병에는 디오니소스 앞에서 머리를 민 여자가 춤을 추는 그림이 새겨져 있습니다(Lewis R. Farnell, Cults and the Greek States, vol. 5 [Oxford, 1896-1909], 275-280). 이렇게 여자들이 디오니소스를 숭배할 때 그들의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거나 짧게 깎거나 혹은 머리를 동여매는 것은 술의 신에 대한 헌신의 표였습니다. 디오니소스가 양성동체였으므로 그것의 숭배자들은 남성과 여성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관념을 가졌고 이런 관념은 여자들이 남장을 하는 일에 그리고 물론 그 반대의 경우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배후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의 여성도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예배에 참석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행동이 이교의 제의에서는 횡행한다고 해도 로마사회의 문화적 규범에 저촉되고 기존질서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같이 행동한 것은 부활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영적인 부활을 믿은 그들로서는 이미 부활을 했으므로 이제는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없고 따라서 복식에 관한 기존의 질서에 더 이상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게 되면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천사와 같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마 22:30; 눅 20:35).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부활을 거치고 천사와 같이 되었으므로 남녀의 구분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남녀를 구분하는 복식규정을 비롯한 사회적 규범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사도 바울에게 여러 가지 실천적인 질문을 했지만 그들이 당면한 문제와 관련해서 정작 물었어야 했던 것은 육체의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묻지도 않았지만 15장에서 부활에 관하여 장황하게 언급하게 된 것입니다. 2.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하나는 육체의 부활입니다. 육체의 부활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핵심입니다. 세계관이란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원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부활신앙이 비뚤어지면서 많은 문제들을 야기했던 것입니다. 고대의 초대교회의 당시에 부활에 대 한 잘못된 주장은 크게 두 가지의 입장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첫째는 부활을 전면 부정하는 그룹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사두개인이었습니다(마 22:23). 둘째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부활을 인정하되 몸의 부활은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도 역시 몸의 부활은 부정하고 영혼의 부활을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7절에 보면 후메내오와 빌레도라는 사람이 “육체의 부활”을 부정했습니다. 그들은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에게 소위 예수님의 “영적인 부활”을 가르쳤습니다. 육체는 속되고 영은 거룩하니 부활은 영의 부활이지 육체의 부활은 무익하다는 논리였습니다. 요지는 육체의 부활은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들은 사두개인들과 같이 부활의 개념을 근본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cf. 마 22:23)만 그러나 “육체의 부활”은 부정했습니다(고전 15:12).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면서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병리적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생을 전부로 받아들이고 삽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허무주의입니다. 육체의 부활이 없는데 사람의 생애, 그것보다 더 허무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국불교의 고승(高僧)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의 정이 그리워서 찾아온 딸을 끝내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부녀간의 인연을 두텁게 하는 것은 더 큰 고통이 될 뿐이라는 이유로 끝내 딸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게 될 부녀간의 인연이라는 것을 더 이어봤자 번민과 아픔만 더 할 뿐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지요. 만일에 육체의 부활이 없다면 그가 말한 대로 인간사도 헛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돈 버는 목적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상의 추구할 달리 더 높은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고대의 에피쿠로스학파는 생의 특별한 목적이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한 쾌락을 누리는 것이 그나마 최고의 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쾌락주의의 밑바탕에는 어김없이 허무주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생을 전부로 보았고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소멸되어 없어진다고 보았기에 쾌락 외에는 달리 추구할 가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의 부활이 없으면 반드시 쾌락으로 떨어집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 15:32).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음란과 방종, 이기심과 게으름은 금할 길이 없습니다. 공산주의사회인 중국으로 눈을 돌려보세요. 대개의 남자들은 오후 4부터 술집에 가서 밤늦도록 여자들과 어울려 먹고 마십니다. 관료들은 일과시간 이후에는 설령 나라가 망한다 해도 상관 안 할 태세입니다. 비록 경제가 좋아져서 돈은 많다고 해도 타락을 금할 길은 없는 겁니다. 돈만으로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입니다. 무신론과 유물론이 팽배한 사회에서 영적인 암흑 가운데 처한 사람들이 추구할 것 이라고는 술 취함과 육체의 쾌락과 사치가 전부일 뿐이며 이는 타락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는 불가피한 일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면 복음의 가장 중요한 교리 전부를 다 부정하게 됩니다. 육체의 부활이 없다면 믿는 자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 몸으로 다시 사는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이 헛것이고”(v.14),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며”(v.14), “사도 역시 거짓 증인이 되고”(v.15), “우리의 죄 씻음도 다 쓸데없는 짓이고”(v.17), “이미 죽은 자들은 땅 속에서 썩어져 소멸될 뿐”(v.18)이라는 사도의 말은 논리적으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부활에 우리의 생의 가장 중요한 모든 것이 달렸습니다. 심판과 상급, 천국과 지옥 등은 모두 육체의 부활이 있어야 의미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데, 헌신이니 충성이니 이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고린도교회가 받은 은사가 많았고 남다른 열심을 갖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많은 문제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까?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무엇보다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은 것에 있습니다. 3. 부활은 영의 부활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입니다. ①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었습니다. 그의 부활의 가장 큰 특징은 육체의 부활이었고, 제자들은 이미 보고 만져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500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친히 보았기 때문에 본장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논증을 자세히 할 필요가 없었고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논의는 이런 이유로 간단한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 시에 더 나은 몸으로 나타나셨는데,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셨고 다 시는 죽지 않는 몸으로 거듭나신 것입니다. 그는 지금도 몸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늘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사람의 특징은 육체성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사람으로 계신다는 것은 그의 육체의 부활을 뒷받침하는 말씀입니다. ②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예표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인정하면서도 죽은 성도들이 육체로 다시 산다는 것은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사람이었으므로 사람이 다시 몸으로 사는 법이 없다면 그도 다시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한다면 우리들의 몸의 부활도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레위기 23:11에 보면 유월절 후 안식을 지난 첫 날 아침에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후 첫날 곧 주일에 부활했습니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이제 곧 그를 뒤이어 성도들의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살전 4:16).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의 부활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그의 부 활의 양식과 특징을 보면 우리의 부활이 어떠할지를 정확히 알게 하는 모델입니다. ③ 부활은 심고 거두는 법칙을 따릅니다. 바울은 부활을 씨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콩을 심은데 콩이 나고 팥을 심은데 팥이 나옵니다. 첫째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이 몸은 이 땅의 삶에 국한된 몸이었고 반드시 한번 죽어야 합니다.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물려받은 우리의 몸은 죽을 때 씨처럼 땅에 묻히고 썩어집니다. 몸이 땅에 심겼으므로 다시 부활할 때는 반드시 몸의 부활로 거두는 것입니다. 몸을 심었으니 몸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할 때는 다시는 썩지 아니할 몸, 죽지 아니할 몸, 신령한 몸,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부활합니다. 부활을 통해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물려받을 몸은 영적인 세계에 살기에 적합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몸은 죽을 때 약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 시에는 강한 것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아직은 죽음에 이르는 몸이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부활의 몸, 다시는 죽지 않을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몸의 부활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요구되는 사건입니다. 즉 몸의 부활이 필요한 이유는 장차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한 몸을 입기 위함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v. 50). 하나님의 나라는 몸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영혼은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인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혈과 육”(v. 50)은 현재의 죽을 몸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인간성” 혹은 “인간의 몸”을 지칭할 때 즐겨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혈과 육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몸은 양립하지 못한다는 뜻을 피력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몸으로 가는 곳이되 현재의 죽고 썩을 몸으로는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 입니다. 말하자면 몸은 몸이되 현재의 이 몸은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예컨대 물고기는 물에 살기에 적합한 몸을 지녔고 새는 창공을 날기에 적합한 몸을 가졌습니다. 현재 우리의 죽을 몸 그리고 썩을 이 몸은 이 땅에 살기에 적합한 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의 몸과는 다른 더 나은 몸 곧 신령하고 다시는 죽지 않고 썩지 않고 하늘의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그런 몸이 요구됩니다.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재의 몸이 그 속성의 변화를 거쳐야 한다는 점과 그 변화의 중심은 부활이라고 말씀한 것에 있습니다. 실로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더 낫고 영광스러운 몸을 입는 사건입니다. 물론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더 나은 몸을 받기 전에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재림하는 날 그 때까지 살아있는 자들의 몸은 죽지 않고 더 나은 몸으로 일순간에 변화를 받을 것입니다(cf. 요 14:1-3; 고전 15:51-53; 살전 4:13-18). 그러나 그 외의 모든 성도들은 더 나은 몸을 받기 전에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저주도 심판도 아니라 몸의 부활로 이어지는 구원의 경험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 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4. 부활은 우리의 몸의 열매를 드러낼 것입니다. 부활할 때는 우리가 행한 일도 함께 모두 드러납니다. 제가 목회했던 이민교회에 나오던 교인 중의 한 분이 자기의 집 인근에 있는 미국인교회의 수요일성경공부에 참석했습니다. 성경공부 유인물을 받아들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더랍니다. “불신자들이야 말로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영원히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이 세상만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영어를 듣는 일에는 서툴렀지만, 그러나 읽는 일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영어로 된 이 말을 그는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성경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만일에 내가 영원히 살도록 지음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정말 그 목사님의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다.” 이 의문을 풀어보자는 마음에서 나온 곳이 바로 제가 목회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람은 더 나은 몸으로 영원히 살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뿐이라는 것은 뻔뻔스러운 거짓말입니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생애는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고 반드시 더 나은 몸으로 부활하고 그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몸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몸으로 행한 모든 일도 부활의 아침에 하나님 앞에 모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나의 몸과 함께 나의 역사와 생각과 행위가 함께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몸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되는 대로 살고 부패한 욕망이 이끄는 대로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잘한 일은 영원히 잘한 일이 되고 여기에서 잘못한 일은 영원히 잘못한 일로 남습니다. 이생에서 내가 행한 일은 없어지지 않고 부활과 함께 모두 드러납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세상에서 살되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쓰고 싶은 대로 다 쓰고 그렇게 살면 부끄러운 부활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의 관한 강론을 마치면서 그 결론을 “주의 일 에 힘쓰라”는 헌신의 권면으로 끝맺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 5:60). 몸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주를 위한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신앙을 지키다가 처자식이 유랑하며 걸식하는 신세가 되기도 하고 자신은 영어 (囹圄)의 몸이 되어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고 굶주리기도 하고 심지어 순교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주를 위한 충성을 다하였던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부활할 때 그 몸으로 행한 것이 함께 드러나게 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한 모든 것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몸의 부활이 있다면 나의 일도 영원히 결코 잊히지 않고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 32-37절에 보면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가진 것을 팔아서 구제하고 유무상통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3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행 4:33).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헌신은 전적으로 부활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치는 말 우리가 일을 할 때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봐주면 힘이 나고 사람들이 박수치면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인정받고 자랑하려는 동기로 인해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과 교회를 위한 우리의 섬김이 사람의 기쁨을 위한 일이 되어서도 안 되고 명예를 위한 일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주를 위한 우리의 모든 수고와 헌신의 동기는 오직 부활신앙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며 어디로 향해 가는지 알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몸의 부활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1). 이 땅에 사는 동안 나에게 주어진 길을 불평도 원망도 없이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1112 no image |박윤선을 말한다| ‘목사의 딸’을 읽고서_김영재 목사
편집부
2236 2015-05-26
‘목사의 딸’을 읽고서 < 김영재 목사, 전 합신 교수 > 김영재 /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브리스톨에 있는 클리프톤신학교(Clifton Theological College)와 독일 부퍼탈신학교(Wuppertal Kirchliche Hochschule)에서 공부했고, 마르부르크 필립 대학교(Philipps Universität zu Marburg)에서 신학박사(Dr. thel.) 학위를 받았다. 독일, 미국 등지에서 목회를 했으며 서울대, 총신대 신학대학원, 합동신학대학원에서 교수를 역임하였고 <기독교교회사> <한국교회사> <기독교교리사> <기독교 신앙고백> 등 다수의 신학도서를 저술했다. 저는 살림출판사에서 발행한 현대 신학자 평전 시리즈의 <박윤선>을 쓴 저자 김영재입니다. 저도 <목사의 딸>을 읽었습니다. 저자인 딸이 사춘기 시절에 어머니를 여의신 불행한 일과 이어서 형제자매들이 겪은 쓰라린 일들을 열거하는 대목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박윤선의 인품을 여지없이 비판할 뿐 아니라 아버지의 업적을 폄하하고 아버지의 신앙과 함께 그분을 낳은 한국 교회, 그분이 몸 바쳐 일한 한국 교회의 신앙과 신학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하는 말을 읽고는 경악하지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 유례가 없는 일 저자는 자신이 말하듯이 독서도 많이 했으며 고등 교육을 받고 건축사의 경력도 가진 지성인이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교양인이십니다. 슬하에 네 자녀를 둔 가정의 주부이실 뿐 아니라 미국에서 신학까지 하여 목회학 박사 학위도 얻고 목사 안수까지 받고서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목회하시는 등, 사랑을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의 인격과 신앙과 신학을 잘못되었다 하면서 매섭게 비판할 수 있는지 의아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 어떤 인물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써야 할 경우, 그 사람을 매장하기로 작정을 했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익명으로 쓰거나 마지못해 조심스럽게 쓰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아버지를 비판하고 폄하하는 글을 새로운 제목 아래 스스럼없이 파상적으로 서너 차례나 되풀이해 쓰고 있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유물론이 지배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나 전체주의 사회에서 자녀가 권력의 강압을 의식한 나머지 아버지를 비판하고 고발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고 들어 왔습니다만, 자유를 누리는 정상적인 사회에서 그러는 일은 유례가 없는 일인 줄 압니다. 일제 강점기에 처음에는 독립 운동을 하고 독립 사상을 고취하던 많은 지도적인 인물들이 일제의 탄압에 마침내 굴종하여 변절하고 만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해방이 되자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민족 반역자로 지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녀들이나 자손들은 그 일을 가슴 아파할 뿐 그들 중에 자신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다른 사람들처럼 돌을 던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들이 아버지와 일체임을 의식해서이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이고, 의리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잘못을 자기들의 잘못으로 동일시하는 것이 도리이고,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박윤선은 1905년에 출생하셔서 40세가 되기까지 일제 강점기에 온 민족이 당하는 아픔과 고초를 함께 겪으며 사셨습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 교회를 탄압하며 신학교를 폐쇄할 때, 박윤선은 다른 교수들처럼 망명의 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봉천에서 박형룡 교수와 함께 신학교를 섬길 때 신사참배에 한 번 굴하고는 사임하고 은둔하면서 주석 쓰는 일에만 매진하셨습니다. 그때 한시적으로 굴종한 사실은 박윤선에게는 늘 마음 아파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연약하여 실족했던 사실을 자녀는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함께 마음 아파해야 할 터인데 비웃는 조로 말하고 있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박해 아래 감옥에서 순교하거나 굴하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을 우리는 치하하고 존경합니다만, 그렇게 하지 못한 이들을 비웃거나 정죄하는 일은 아무도 감히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연약한 죄인이어서 어느 누구도 박해를 견딜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견디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을 나무라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해방 후 한국 교회가 신사 참배한 사실을 공적으로 회개했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회개 운동은 부분적으로 한국 장로교회가 분열되기 전 소위 고려 측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자신이 먼저 회개함으로써 회개하는 집회를 주도하는 한 분으로 역할하셨습니다. 1946년 저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회개하는 집회에 앉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유년주일학교 큰 학생들이 어른 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우리 교회 담임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피하여 다녔으나, 신사 참배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여기시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찬송을 부르며 회개할 때, 온 교회가 울음바다가 되었던 일을 저는 종종 떠올립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나는 죄인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신 것은 신사 참배를 이기지 못해서 뿐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속죄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면,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사도 바울을 위시하여 누구나 다 깊이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란 말은 루터가 한 말입니다만, 하나님을 더 알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면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더 의식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값지고 귀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모든 것에 당당해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저자가 덴버 신학교와 교수님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이해하거나 전달하고 적용하는 일을 두고는 오랜 기독교 역사와 문화를 가진 나라의 교회 사역자들과 한국과 같이 기독교 역사가 짧은 데다 다종교 사회에서 성장해 온 교회 사역자들의 성경 이해와 적용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압제와 고난 속에서 자라 왔으며 현재도 북한의 전쟁 도발과 위협 아래 살고 있는 분단국의 교회 목회자와 풍요와 자유를 누려온 미국 교회의 목회자가 말씀을 택하여 강조하고 적용하는 일에 동일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에서도 흑인 목사들이 선호하는 말씀은 자유와 평등인 줄 압니다. 개혁주의 전통을 이어받고 그것을 표방하는 한국 장로교회가 네덜란드 교회를 개혁주의가 잘 발전한 나라 교회라고 하여 그대로 모방하거나 배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1960대 중반의 이야깁니다만, 네덜란드 주민의 50%가 주일 예배에 출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곳 교회의 목회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 즉 성화를 주로 설교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다원 종교 사회에서 아직 기독교인이 소수인 한국 교회의 목회자는 회개하고 주께로 오라는 복음주의적인 설교를 여전히 많이 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개인을 대하여서도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을 따라 달리 말씀을 선택하고 적용해야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는 가정을 심방할 때 그 가정의 사정을 알고 적절한 말씀을 택하여 권면하거나 위로합니다. 덴버의 교수님들은 소녀 시절부터 안고 있는 저자의 문제를 두고 상담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많이 이야기한 줄 압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로움을 맛보고 누리게 되었다고 하는 저자의 간증은 귀하고 그러한 경험은 하나님의 은혜요, 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로움이고, 세상의 염려와 근심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움을 누리는 자유입니다. 저자가 얻어 누리는 자유가 그런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유로움을 얻은 그리스도인은 마귀와 우상을 섬기며 돈을 사랑하고 육의 정욕 따라 사는 데서 멀리 벗어나 성령을 좇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사주보고, 점치고, 날 잡고 하는 옛 풍속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면,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부자유하며 억압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자유로움을 누리는 자유입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고 확신하는 가운데 누리는 자유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온갖 핍박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전도자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루터 역시 교황으로부터 출교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교회를 개혁하고 복음을 드러내는 일에 충실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지체 높은 사람이나 그 무슨 권세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돈의 유혹과 세력에도 초연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모든 것에 당당해질 수 있는 자유입니다. 3. 만인을 섬기는 자유여야 그러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전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하면 신학을 한 사람들에게는 낯익은 제목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먼저 설교하고 발표한 글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거기서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물 위에 있는 자유로운 주인이며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매사에 섬길 자세를 갖춘, 각 사람에게 예속된 종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물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을 받지 않는 자유인이면서 동시에 누구에게나 봉사해야 하는 모든 사람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첫 문장은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을 해석한 말씀이고, 두 번째 문장은 5장 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을 다시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은 종의 자세로 형제를, 즉 만인을 섬기는 자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 7장을 보면 성경은 우리가 죄의 종에서 해방되었으니 이젠 자유인이다.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자고 말씀하지 않고,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8) 하는 말씀처럼 시종일관 의의 종이라면서 섬기는 삶을 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고 말씀합니다. 그는 고린도후서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이 말씀은 우리가 다 익히 아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어서 직분을 맡은 자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교회를 위해 산다는 것을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는 것은 우리 목회자들이 흔히 간과하는 말씀입니다.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는 말씀을 하고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12)고 말씀을 합니다. 말씀의 사역자인 바울은 종으로서 교회를 위하여,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향유하도록 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종으로 섬긴다고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쉬라고 하시지 않고 계속 새롭게 저야 할 멍에를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옳게 이해하고 한 말씀인 줄 압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향유하는 당연한 자유와 권리를 형제와 이웃을 위하여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의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고기를 먹는 문제를 두고 바울은 먹을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가졌으나 자기가 고기를 먹음으로 약한 형제가 시험에 들게 된다면 자기는 고기를 영원히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고전 8:13; 롬 14:13-23). 4.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것은 섬기는 자유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를 누린다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것은 섬기는 자유, 남을 배려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취약했던 부분을 폭로할 뿐 아니라, 그분을 낳고 그분이 섬기던 교회와 그분에게서 배운 많은 목회자들을 존중하지 않고 근심하게 하는 것은 섬기는 종으로서 누리는 자유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 무용론을 말하는 안티노미안들이 말하는 자유보다 훨씬 위험한 사상이요, 자세입니다. 그것은 남을 배려하고 남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라는 성경이 가르치는 자유가 아니고 방종입니다. 언론의 자유를 빙자하여 특종 기사에 혈안이 되어 사회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을 개의치 않고 말하거나 진실을 말한다면서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고 한 사람의 생명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사를 쓰는 이기적이고 몰지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우리의 자유는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는 자유입니다. 딸의 아버지 박윤선은 태생적으로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나머지 그밖에 것은 잊어버리기가 일쑤인 분임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열정과 믿음을 가진 분이셔서 맡은 사역을 위하여 전력으로 질주하신 분입니다. 역사는 그런 사람들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 점에서 박윤선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불러 세우신 분입니다. 종으로서의 자유를 향유하기 위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안녕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자녀들과 즐길 수 있는 욕구와 당연한 권리와 자유를 희생하고 죽기내기로 기도하시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종으로 섬기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러신 분을 두고, 그렇게 사신 분을 두고 율법주의에 얽매어 있었다거나 아직 자유로움을 몰랐다고 평가하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오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지 온전히 알지 못해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오랜 유교적인 전통 문화에서 살아왔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유교적인 전통과 가르침을 부정하거나 배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기독교와 상통하는 윤리적인 가르침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존해야 합니다. 교회에 권위주의 혹은 교권주의가 팽배한 것을 반드시 유교적인 영향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중세의 긴 세월을 지나면서 교권주의로 굳어졌습니다. 샤머니즘과 같은 민속신앙이나 우상을 섬기려는 경향은 우리 사람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본능적인 종교심입니다. 구약의 선지자의 외침은 그런 신앙에서 창조주요, 구원의 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교회 역사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개혁교회와 전통을 존중하고 그것을 가르치신 박윤선 목사님을 두고 유교적인 권위주의니 샤머니즘을 못 벗어났느니 하고 말하는 것은 어이가 없는 오해요, 단죄입니다. 스스로 복음주의 신학자라는 분들이 딸의 아버지의 가정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동정한 나머지 구체적인 논증도 없는 오해에서 비롯된 신학적인 편견까지 그대로 받아들여, 보수주의와 율법주의 혹은 샤머니즘적인 것을 동일시하며, 박윤선이 한국 보수주의 교회로 하여금 그런 신앙을 갖게 했다는 점에 동의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위대한 신학자임을 인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입니다. 신학자라는 사람이 교회를 섬기지 않고 교회를 방관하거나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그냥 학자일 수는 있어도 신학자일 수는 없습니다. 마치는 말 박윤선은 성경 말씀에 충실하기 위하여 평생을 바쳐 성경을 주석하고 많은 목회자들에게 계시의 말씀인 성경 말씀에 충실한 설교를 하도록 가르치고 열정을 불어넣으며 자료를 제공해 줄 뿐 아니라 한국 교회에 개혁신학과 전통의 기초를 놓으셨으며 교회 쇄신을 주창하고 실천하신 개혁주의 신학자입니다. 박윤선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유익을 얻은 한국 교회에 속한 지체의 한 사람으로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그 때문에 아버지와 정겨운 시간을 보내고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희생이 되신 자녀분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아울러 감사의 마음을 가집니다. 저자인 딸은 아버지를 지극히 사랑하므로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셨으며, 아버지를 보다 완벽한 분이기를 소원하는 마음에서 아버지의 신학마저 왜곡되게 이해하시는 줄 압니다. 공인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신 많은 분들과 순교자의 자녀들 중에는 불만과 소외감을 가지는 이들이 많았으나 나중에 그들이 장성하여서는 사생활을 희생하신 아버지를 이해하고 돌아오시는 분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딸의 아버지 박윤선의 뜻과는 다르게 살아온 자녀분들도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 눈물로 화해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이미 성경 말씀을 통하여 자유로움을 얻은 따님께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의 의미를 더 터득하셔서 아버지 박윤선을 옳게 이해하는 자유로움의 경지에 이르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낳으시고, 아버지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종의 사역을 감당하고자 하는 후배들을 낳은 한국 교회,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신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시고 종으로 섬기신 한국 교회와 부족한 우리 모두를 귀하게 보아 주시고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간절히 소원합니다.
1111 no image |심/층/진/단| 원죄를 부정하는 현대신학의 오류_노승수 목사
편집부
2956 2015-05-12
원죄를 부정하는 현대신학의 오류 < 노승수 목사, 강남성도교회 > “전가 교리 부정하는 신학은 신비체험과 유사 성령체험으로 가고 있어” 어느 신학대학원 석사(Th.M) 과정에서 독일에서 공부한 모 교수가 ‘어거스틴의 원죄 교리를 현대 신학에서는 하나의 신화로 여기고 원죄는 없다’는 식의 강의를 했다고 한다. 국내에 점점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아무래도 서구 신학의 영향일 것이다. 이런 현상은 서구현대 신학의 보편적 현상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원죄 교리의 부정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를 담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매우 불편하게 여겨서 한 때 존 스토트도 동조한 바 있는 영혼 소멸설이 등장하기도 했고 지금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최근 미국의 목회자 랍 벨이 '사랑이 이긴다'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지옥은 없다’는 주장으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모두가 죄와 그에 대한 진노, 그리고 그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대속 개념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한국교회에도 이에서 자유롭지 않고 머지않아 밀어닥칠 신학적 위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대신학의 맥락은 기독교회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있다. 특히 종교개혁 당시 재침례파들이 지난 1500년간의 교회 역사를 뒤엎고 사도시대로 돌아가자고 주장을 펼쳤던 것과 다를 바 없다. 교회는 역사 위에 서 있다. 칼뱅이 제도로서의 교회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칼뱅의 신학은 어거스틴 위에 서 있다. 칼뱅의 이런 시도는 그가 교회를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것으로 보지 않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교회를 보존하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삼위일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공교회가 진리로 세운 삼위일체 교리를 허물 것인가? 그럴 수 없다. 그처럼 원죄 교리나 진노 개념, 그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대속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 가치이고 부인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렇다면 왜 서구 신학은 원죄 교리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일까? 사실 원죄 교리의 기초를 놓은 사람은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은 후기에 펠라기우스와 논쟁 중에 원죄 교리를 확립하는데 그 근거가 되는 본문이 로마서 5장 12절이다.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모든 인간은 ‘씨앗 형태’(ratione seminali)로 아담 안에 있었고 부모의 육체적 관계로 출생할 때 죄를 물려받고 출생하는 것으로 원죄 교리를 설명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주해에 오류가 있다는 이유로 원죄 교리를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원죄 교리를 옹호하는 후대의 신학자들도 각 사람이 ‘간접적’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직접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그대로 받지는 않는다. 벌콥의 조직신학을 보면, 행위언약에 근거해서 죄책(죄의 형벌)은 ‘직접적’으로 모든 인류에게 사망이 ‘전가’된 것으로 보고 그 전가된 사망을 근거로 오염(부패한 형질)이 부모라는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것으로 원죄 교리를 설명했다. 성경에는 원죄 교리를 옹호하는 많은 본문이 있다. 구약의 역사가 보여준 이스라엘의 타락과 실패는 이 교리를 확증한다. 원죄 교리는 단순히 이 한 구절에서 도출된 신학이 아니다. 성경 전체가 인간의 부패에 관해 강하게 증거한다. 원죄가 없다면 인간은 스스로 구원 얻을 가능성이 있고 그런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굳이 그리스도께서 율법 외의 다른 의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셔야 할 필연성이 없다. 이처럼 원죄 교리의 부정은 자연히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가장 기본적 전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다. 그런데 이런 진노 개념은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당연히 대속 개념도 상당히 수정을 가하게 되는데 전통적인 대속(propitiation)라는 전통적 속죄 개념을 싫어한다. 대신에 속죄(expiation)라는 개념을 선호한다. 전통적으로 칼뱅주의는 형벌적 대속론을 취해왔는데 이에 대해서도 수정하려는 움직임이 매우 강하게 있다. 형벌적 대속론은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보고 그 진노를 멈추셨다는 개념을 담는다. 대속(propitiation)을 표현한 이 단어는 출애굽기 25장 17절의 “속죄소”를 의미하며, 정확히 번역한다면 “진노가 가라앉는 곳, 또는 화해의 장소”(propitiatory, or place of propitiation)를 의미한다(propitiation는 신약에서 2회 나온다. 로마서 3:25, 히브리서 9:5). 이 대속 개념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와 그 진노가 비롯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만족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창세기에서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의 죽음을 아담과 달리 완전히 순종한 인류의 대표이신 그리스도가 대신 행하심으로써 그 공의가 만족되었다는 개념을 담는다. 단순히 죽었기 때문에 만족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아담과는 달리 완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셨기 때문에 그 진노가 누그러뜨려진 것이다. 그런데 이 개념을 지우려는 시도가 있다(Holmes, Steve. 2005. "Can punishment being peace?: Penal substitution revisited."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58(1). 104-123.: 106, 113). 현대 서구 신학의 이런 경향은 마치 몬타누스가 구약의 진노하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바울서신만을 정경이라고 주장했던 맥락과도 통해 있다. 게다가 몬타누스주의는 황홀경에 취해 예언하는 신비주의 경향의 원조이기도 하다. 새관점(NPP) 등, 현대 서구 신학은 이런 몬타누스적인 요소를 다분히 가지고 있다. 원죄를 부정하고 진노를 싫어해서 J.I. 패커의 표현대로 하나님을 편안한 이웃집 할아버지로 만들어 버렸다. 원죄 교리도, 하나님의 진노도, 그에 대한 대속도, 지옥이라는 심판도 다 부정해버리면 기독교에 무엇이 남는가? 그러다보니 결국 남는 것이라곤 몬타누스적 신비체험과 유사 성령 체험 외에는 갈 곳이 없다. 새관점이나 여러 현대 신학들도 이런 경향을 보인다. 새관점이 전가 교리를 부정하는 데도 이런 맥락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트렌트에 가까운데 오순절 운동의 확산과 이런 유의 신학 태동에는 거의 원죄 교리를 암묵적으로 부정하고 대속과 진노의 개념을 수정하며 도래할 심판을 수정하려는 신학의 터전 위에 서 있다.
1110 no image |본문이 있는 신앙강좌| 순종에 따르는 고난_이복우 교수
편집부
2087 2015-05-12
순종에 따르는 고난 < 이복우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신학 교수> “하나님은 그들이 고난을 통하여 그들의 죄악 된 본성을 직시하고 그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완악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똑똑히 보기를 원하셨다” 출애굽기 17장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다. 1-7절은 르비딤에서 물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다툰 사건이고, 8-16절은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와서 싸운 사건이다. 전자는 이스라엘 내부에서 일어난 다툼인 반면에 후자는 이스라엘 외부에서 온 적과의 싸움이다. 하지만 모세는 서로 다른 이 두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동일하게 하나님의 지팡이를 사용했다(5, 9). 필자는 1-7절을 중심으로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순종에 따르는 고난 이스라엘 백성은 분명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애굽에서 나왔다. 그런데 나와 봤더니 평탄한 길이 아니라 사람이 도저히 건널 수 없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다. 절망이다. 또한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수르 광야로 들어갔지만 물을 얻지 못했다(출 15:22). 게다가 이스라엘이 신 광야에 도착했는데 이번에는 양식이 없다(출 16:1-3). 그래서 백성들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라며 원망했다.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났고,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그곳에 마실 물이 없었다(출 17:1).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다(출 17:8이하, 신 25:17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마음대로, 임의로 이동한 것이 분명 아니다. 그들은 오직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움직였다. 그래서 민수기 33:2에서는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진행한 것을 기록했다”고 말씀한다. 하지만 이렇게 순종한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엄청난 고난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다가 죽음과 같은 고난을 당한 것이다. 말씀에 순종했더니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 닥친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고난을 당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데 있다. 만일 그들이 애굽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그들이 여전히 ‘애굽의 종’이라는 신분으로 살고 있었다면 광야에서 양식과 물이 없어 고생하는 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실은 그들이 고난을 당할 때마다 습관처럼 반복하는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었느냐”(출 14:11-12; 16:2-3; 17:3)는 원망에서 잘 드러난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애굽의 종이었던 그들이 하나님의 경이로운 부르심을 받고 애굽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에 참여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고난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증하는 표지였다. 2. 고난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 그것은 한 마디로 ‘원망’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자신들의 기대와 어긋났을 때 계속해서 원망했다(출 15:24; 16:2, 7×2회, 8×2회, 9, 12; 17:3). 게다가 이들의 원망은 그 대상과 정도에서 부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마라에서 물이 없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원망했지만(출 15:24) 신 광야에서 양식이 없을 때에는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출 16:2). 또한 이들은 모세와 다투고(출 17:2, 7), 모세를 원망하고(출 17:3), 결국에는 모세를 돌로 칠 지경에 이르렀다(출 17:4). 그들은 폭도로 변하기 일보직전에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의 대상은 확대되고 그 정도는 점점 더 강해졌으며 그 방법도 과격해졌다. 그런데 모세를 향한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은 곧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출애굽기 16:2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이것을 출애굽기 16:7, 8은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고 말씀한다. 나아가서 출애굽기 17:2, 7에서는 이 원망이 곧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신 6:16 참조).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을 다른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민수기 21:5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라며 원망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보내 백성을 물게 하셨고 죽은 자가 많았다. 이 사건을 두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9에서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라고 말씀한다. 이처럼 모세를 원망한 것은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었다(시 78:18, 41, 56; 시 95:9; 106:14 참조). 그러므로 신자는 신자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된 표지로 알아 원망하지 말고 도리어 감사하며 믿음으로 인내해야 옳다. 3.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의 근원 출애굽기 15:24은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라고 기록하고 있고, 출애굽기 16:2, 3에서는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라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그리고 출애굽기7:3을 보면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고 말씀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원망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원망의 근원이 그들이 당한 고난에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에게 먹고 마실 것이 없기 때문에 원망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우겨대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원망의 근원이 그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밖에 있다는 강력한 항변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그들의 착각일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필요가 다 채워졌을 때에도 원망을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명기 8:4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 “이 40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한다. 느헤미야 9:21에서도 “40년 동안 들에서 기르시되 부족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사오며”라고 말씀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시 78:19)고 말했지만,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그들의 모든 필요를 다 채워주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계속해서 범죄했고 원망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다(시 78:17). 이에 대하여 시편 78:22은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라고 말씀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의 근원은 그들의 환경이나 그들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죄를 뿜어내는 부패한 본성을 가진 멈추지 않는 악의 공장이었다. 마치는 말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게 하신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그들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그들의 죄성을 들춰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고난을 통하여 그들의 죄악 된 본성을 직시하고 그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완악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똑똑히 보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며 얼마나 불순종하며 얼마나 빨리 하나님의 법에서 떠나며 죄악이 그들 속에 얼마나 깊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고난을 통해 바로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원망이 일어날 때 자신의 죄인 됨을 두려움으로 돌아보고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부르심과 거룩한 신분과 기업의 영광을 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1109 no image |아버지 박윤선을 말한다 <마지막 회>| 위대한 개혁주의자이신 아버지_박성은 박사
편집부
1926 2015-05-12
위대한 개혁주의자이신 아버지 < 박성은 박사 > 아버지, 당신이 하나님 나라로 가시기 며칠 전 “저 주석 이제 다 불태워도 한이 없다”고 하셨지요. 그러시곤, “사람들이 나더러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내 마음에 그런 말을 속으로 즐기곤 했음을 회개한다!”고 말씀하시곤 계속 두 주간 회개의 기도를 하시다가 영광의 주님께로 가셨죠. 아버지 당신이 주님 앞에 서시기 이틀 전 “애야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러는데 주님이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한 구절이 마가복음 어디에 있는지 찾아서 읽어주렴” 하신 것 기억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곤 합니다. 그러시곤, 계속 긴 한숨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계속 되뇌이시다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시고 26년 전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신 아버지! 오늘 이다지도 당신이 뵙고 싶음은 웬일입니까? 가슴 메이는 것 두 가지 아버지에 대해서 두 가지가 가슴 깊이 메입니다. 하나는 아버지 당신은 항상 우리에게 위로 받기를 원하셨지만 별로 위로가 되지 못해 못내 아쉬울 뿐입니다. 아버지 당신은 자식들 때문에 너무나 많은 마음고생을 하고 사셨지요. 정말 큰 형님들을 비롯해서 이 글을 쓰는 저까지도 당신에게 별로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기도의 기회로 삼아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고들 말하지만, 지금 제가 자식을 키워보니 아버지의 멍든 가슴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한 가지는 아버님이 유학 차 화란에 가 계시는 동안, 전 어머님이 불의의 차 사고로 급사하셨다는 것이며, 동시에 힘을 다해 한국교회를 위해 사역하시다 50에 가까운 나이에 겨우 시도한 박사 학위 공부를 어쩔 수 없이 그 기회조차 놓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전 어머님을 잃은 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손실이며 피멍이 드는 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거기에 학위 공부까지 날아가 버린 일은 정말 당신에게 크나 큰 손실이었음을 가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저의 친 어머니(이화주 님) 말씀에, 당신이 그 당시 화란 자유대학에서 보내온 학위 과정 거절 편지를 받으시곤 “땅에 콱 주저앉고 싶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시더군요. 학자에게 학위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물론 당신은 학위 없이도 많은 일을 하셨지만, 그것 때문에 또한 많은 불이익도 당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래도 묵묵히 참고 남은 삶의 사역을 훌륭히 마치셨습니다. 전 너무너무 잘 압니다. 우리 아버지 정암은 그 누구와 비교해도 탁월한 학자라는 것 말입니다. 당신의 타고난 어학의 재능과 당신의 초인적인 집중력과 노력은 한국교회의 어려운 과도기를 위해 이룬 놀라운 금자탑이었고, 최고 학위 몇 개를 받아도 부족하다고 자부합니다. 아버지 당신은 정말 당대 몇 안 되는 놀라운 학자이셨습니다. 그 어려운 시대를 극복하여 학업을 이루시고 한국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봉사를 하신 위대한 학자이십니다. 누가 뭐래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가슴 메이는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아버지의 자식에 의해 당신의 소천 후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에, 과거 무덤에서 다시 파내서 화형에 처해졌던 위클리프처럼, 온 천하가 보도록 입으로 형언할 수 없는 말로써 당신을 또 다시 가슴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수도 없이 혼자 통곡했습니다. 아버지 정말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아버지를 지켜 드리지 못한 제 불찰을 용서하십시오. 아버님의 말씀에 가장 큰 효도는 형제들끼리 화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 하셨죠? 그래서 저희들도 조금은 노력했지만 그게 미치지도 못할 만큼 아주 미미했나 봅니다. 아버지를 사랑했기에 누님들이나 형님들을 마음속으로라도 사랑하려 노력했고 특히 돌아가신 세 형님들과는 아주 좋은 관계로 서로를 품었습니다. 당신께서 바로 세우려고 노력하셨던 형님들은 결국 다 회심하고 주님 앞에서 해후하셨겠지요. 그래서 땅에서 함께 지냈던 이야기를 들으셨을 줄 압니다. 그런데도 저희들이 누님들은 더 품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제 잘못이고 제 불찰입니다. 아버지의 교훈대로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려 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교훈대로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려 합니다. 특별히 이복형님과 누님들의 자녀(제 조카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많은 염려와 기도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혜란 누님은 아직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는 네 자녀들에 대해서 ‘난 염려 안 해! 하나님이 언젠가 알아서 해 주실 거야’라고 믿고 기도하시겠고 저 또한 그리 생각하고서 기도하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형님들과 큰 누님의 자녀들도 제 기도와 노력의 대상입니다. 미미한 노력을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지만, 모두 제 부족한 기도에서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항상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천진난만한 아버지의 신앙을 저는 본받을 겁니다. 좀 욕을 먹어도 아버지의 개혁주의 신앙 체계가 저에게는 가장 귀한 모델이며, 누가 뭐라 해도, 아버지가 해석하신 복음은 다른 모든 신학의 주의 주장들보다도 제 중심에 와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의 온 기독교계가 들썩이고 있는 전대미문의 출판물과 그 안에 기록된 결단코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에 대해서는 너무 괴롭고, 저것이 한국교회를 또 한 번 심하게 잘못되게 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서 하루하루 견디기 어렵습니다만, 그것으로 인해서 발생한 아버지 당신에 관한 오해는 더 이상 바로 잡거나 제거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으렵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그저 침묵정진과 기도일관을 목표로 삼겠습니다. “난 기도할 뿐이라!”라는 시편 109편 4절 말씀을 자주 인용하시며 다른 사람에게 악한 말을 결코 하지 말라고 하셨던 아버지가 더 생각나는 시절입니다. 보고 싶은 나의 아버지, 이제 모든 사명 다 끝내시고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교제하는 그 놀라운 환희와 행복으로, 아니 하나님에게 집중되어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이젠 아랑곳없으시겠지요. 또한 하나님이 다 처리하실 것을 믿고 평안 가운데 계시겠지요. 지금 이 시간에도 “난 괜찮아!” 하시며, “성은아 너무 걱정 말아라. 주님이 계시니 알아서 처리하지 않겠니? 혜란을 위해 기도하길 바란다”라고 하시는 것 같고 당신의 쓰다듬으시는 따뜻하고 굵은 손가락이 느껴집니다. 당신이 주문하신 대로 잠깐 사는 세상을 염려와 분노와 고뇌로 신앙생활을 망치지 않으렵니다. 기도하고 침묵하고 그리고 또한 정진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신앙은 제가 걸어가야 할 구체화된 이정표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단순하고 순진했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나의 신앙의 챔피언이고 아버지의 신앙은 제가 걸어가야 할 구체화된 이정표이며, 아버지의 성경 무오설은 제가 피로써 지켜야 할 신앙의 지표입니다. 항상 말씀하시길, 먼저 성경은 오류가 결코 없다고 전제를 세우고 성경 편에 서서 연구하라고 하셨죠. 귀에 생생합니다. 사랑하는 착하신 아버지! 아버지는 위대한 개혁주의자이십니다. 아버지를 참으로 존경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저의 자랑이십니다. 조금 후에 영광의 나라에서 아버지를 부둥켜 얼싸안고 기뻐할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아버지, 당신의 유산(legacy)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해서 참 죄송합니다. 그래도 저에게는 아버지 당신은 진정한 영웅이시며 자랑입니다. 신구약 성경주석을 완수하셔서 열악한 과도기 한국교회의 강단을 부요하게 하셨으며, 성경 무오설을 생명같이 여기시며 한국에 정통신학을 파수하셨으며, 기도의 모범과 영성으로 보수 신학을 기름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평양신학교 강사로 시작해서 만주 봉천신학원과 그 후 해방을 맞아 고신과 총신과 합신에서 수많은 학생들에게 진정한 개혁주의의 중심에 서는 길을 보이신 것과, 당신이 주신 인격적 감화와 개혁주의적 영성은 주님 오실 날까지 이 땅에 뿌리를 내릴 것을 바라보며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퇴락을 미리 염려하셔서 은퇴하신 후 십여 년 동안 팔십 노구가 다 허물어져 갈 때까지 고민하시고 흘리신 피와 땀은 우리 모두에게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영적 리더의 귀감으로 남을 것을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내 아버지 정암 박윤선 목사님! 전 당신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주님 다음으론 그 누구보다 다시 보고 싶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아버지로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1108 no image |아버지 박윤선을 말한다 <3>| 당신의 사정을 누가 살 깊이 알겠습니까?_박성은 박사
편집부
2394 2015-04-28
당신의 사정을 누가 살 깊이 알겠습니까? < 박성은 박사 > "당신은 주석 집필과 설교 그리고 신학교 강의 때문에 교육은 다 어머니 몫으로 내어 놓으셨지만 그래도 거의 매일 드리는 가정예배 등을 통하여 저희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평생 가정의 재정 상황이나 가정사에 많은 관심을 못 가지셨던 당신은 자녀 교육을 비롯한 모든 가사를 아내에게 일임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 선비의 한 사람이셨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온유한 사람이셨고 그 어떤 연약하고 배경 없는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라는 교훈을 저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시절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당시 “식모”)를 무시하는 행동을 한 것을 아신 당신은 집필 도중에 저를 불러 옆에 앉히곤,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의 형상이니 네가 그들을 무시하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라” 하시며 조용하지만 맵고 따끔하게 저를 야단치셨던 일을 기억합니다. 형님들의 고치지 못하는 심한 잘못 때문에 안타까움과 의분으로 격노하시기도 하셨고, 잘못 되어가는 형님을 인간인지라 젊은 시절 혈기로 고쳐보려고 하셨던 때가 있으셨겠지만, 당시의 상황을 자상하게 아는 그 어떤 지인들이나 함께 지내기도 했던 친척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당신이 과격하거나 혈기가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분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물리적 폭력이나 가슴 찌르는 폭언을 가할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는 모두 한 가지입니다. 당신의 속을 너무도 몰라줍니다 당신의 슬하에서 저의 33년 동안 자랐던 저는, 매질은 언제나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너무도 온유하셨고 심지어 당신의 개인 기도 시간에도, 자주는 아니었지만, 어떤 때 함부로 시끄럽게 하거나 약간 급하다 생각하여 문을 열고 어떤 무엇을 여쭤보아도 묵묵히 하던 기도를 중단하고 대답해 주시던 분이셨습니다. 손자들이 기도하시는 할아버지 주변을 서성일 때는 붙들고 무릎에 앉혀 한참 기도하시고 내어 보내시던 일을 보곤 했습니다. 평생 당신보다 십여 년 연하인 어머니에게 늘 존대를 하셨고 당신의 최후를 직면하시기 며칠 전, 옆에 앉아 흐느끼는 어머니에게 “당신은 날 위해 모든 것 다 희생하고 거름더미와 다름없이 살았수다레!”라고 하신 말씀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당신은 주석 집필과 설교 그리고 신학교 강의 때문에 교육은 다 어머니 몫으로 내어 놓으셨지만 그래도 거의 매일 드리는 가정예배 등을 통하여 저희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주자주 매우 자세한 내용도 일러주시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세수를 하고 난 자리나 잠을 자고 난 자리를 깨끗이 해 놓아야 크리스천의 모습과 부합한다”든지 “습관은 제이 천성”이라든지, 또한 도산 안창호 선생, 정재윤 선생, 조만식 선생 등의 애국지사들의 이야기들도 가끔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사실 그런 것들이 저와 저의 동생들에게는 보석과 같은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젠 이 세상에는 없지만 저와 함께 성장한 이복형님 다니엘도 아마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모든 것을 회개하며 새 사람이 될 때, 모르긴 해도 아버지의 주셨던 교훈을 다 기억했을 겁니다. 아버지, 당신이 자녀인 우리에게 무관심했다 한다면 그것은 정말 당신의 속을 너무도 몰라주는 것입니다. 다만, 너무 단순하시고 자상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마도 일부는 성격 탓일 것이고, 더더군다나 너무 한 쪽으로 쏠려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런 중에서도, 당신이 중요하다고 여기시던 것들은 입이 닳도록 일러 주시곤 했습니다. 어릴 적에 찻길을 건널 때 “먼저 왼쪽을 보고 차가 없으면 중간 쯤 가서 다시 오른 쪽을 보고 차가 ‘까맣게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나머지 반을 건너라”고 수도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당신의 첫 부인을 불의의 교통사고로 잃었던 아픈 기억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길을 건너며 살고 있습니다. 사실 길을 건널 때마다 ‘차가 까맣게 보일 때 건너라’는 말을 생각만 하고 지키긴 어렵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상모르시는 모습 가운데서도 가끔 아버지의 원래 모습답지 않게 자상한 배려를 하셨던 것들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6-7세 때, 당시 삼각산 어느 교단 집회에서 (고) 차남진 목사님과 함께 강사로 말씀을 전하실 때, 제 동생의 출산으로 집에 계셔야 했던 어머니 대신 함께 따라간 저를 숙소에 두고 집회 장소로 가셔야 하신 당신은, 그곳 숙소 앞에 있는 과일 가게에 가셔서 과일 몇 가지를 엉거주춤 사다가 저에게 주시면서 ‘이거 좀 먹고 조용히 있으라이!’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으신 후 집회 장소로 올라가셨던 아버지가 기억에 새록새록 합니다. 수많은 눈물을 누가 한 방울이라도 이해하겠습니까 아버지의 단순하셨던 자식 사랑이 저는 너무 그립고 당신이 거리낌이나 간격 없이 저희들과 스킨십을 하시던 그때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고 34년 동안 아버님을 봉양하시며, 때로는 과격했지만 저희들의 교육을 오로지 자신만의 일인 양, 교육시켜 주신 어머니(이화주 님)께도 깊은 감사드립니다. 물론 제가 태어나기 전 또 다른 34년 동안 힘든 아버지의 세 차례의 유학길을 비롯한 온갖 어려움을 혼자 도맡아 형님들과 누님들을 키워 가시며 가사를 짊어지고 가신 전 어머님(김애련 님)에게도 큰 박수와 존경의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분명 하늘의 상급이 크실 것이며 그 아픔과 눈물은 주님만이 아시며 주님만이 씻겨 주셨을 것으로 믿습니다. 다 정말 너무 고마운 분들입니다. 제가 아버지께서 소천하시기 몇 년 전 언젠가 “아버지 주석은 혼자 쓴 게 아녜요. 아버지, 하늘의 상급은 아버지를 봉양한 두 어머님하고 또 옆에서 도운 분들도 함께 받을 걸요!”라고 조금은 건방진 코멘트를 하자 아버지는 “네가 날 납작하게 만드는구나” 하시며 머쓱히 웃으셨습니다. 당신이 후에 인정하시고 아픔의 눈물을 흘리신 대로, 자녀들을 위해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지 못했음에 대해 용서를 빌기도 하시고, 눈시울도 붉히시곤 하셨지만, 그것이 마치 당신 혼자 욕을 먹어야 되는 것처럼 현재의 잣대로 비평을 받으시니 저는 참 가슴 아픕니다. 오랫동안 누님의 불평으로 힘든 심정을 참고 지내신 당신이 소천하시기 얼마 전 마지막으로 1987년 겨울, “저 아이가 저래선 하나님의 복을 결코 받지 못한다” 하시며 말리는 저희의 손을 뿌리치며, 1,000마일이 넘는 콜로라도로 길을 다녀오셨지요. 그 후 당신이 비행기에서 많이 우셨다고 어머니에게 고백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저도 울었습니다. 사실 제가 누님과 더 화친하고 더 화기애애하게 관계를 유지하지 못해서 이런 엄청난 일도 벌어진 것입니다. 저의 죄가 큽니다. 제가 아버지를 제대로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엎드려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당시 책이 없고 척박한 시기, 특별히 일제 강점기와 그것을 벗어나는 혼란의 시대, 또한 6.25전쟁을 전후해서 경제적으로 극히 열악한 시대를 위한 당신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해 준비하신 것입니다. 지금처럼 많은 책들이 번역되고 온갖 심리 이론들과 교육 이론들이 물밀 듯 들어와 이런 날선 주장들을 펴며, “박윤선 당신은 이런저런 것을 아이들을 위해 하지 못 했어. 그래서 빗나간 아이들이 생겨난 거야. 당신은 자녀들과 더 깊은 대화를 통해 가정을 살려야 했어” 하며 냉혹한 비판을 하지만, 주님 말고 누가 당신의 사정을 살 깊이 알겠습니까? 하나님 말곤, 누가 당신이 자녀들을 위해서 흘린 수많은 눈물을 한 방울이라도 이해하겠습니까? 성령님 아니곤 누가 당신의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알려 주기나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잣대를 가지고 당신을 마구 난도질합니다. 당시의 척박한 한국 교회의 강단을 책임진 많은 설교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정통 진리로 향하도록 도움을 주려는 한 가지 일념으로 생명을 걸고 성경 해석을 위해 저희 가족들이 이런저런 희생까지 걸머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저희들의 영광입니다. 당신은 또한 해외 유학으로 많은 것들을 보고 들으셨지만, 한국적 상황은 아버지를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내몰았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한 가지를 전문으로 해도 되는 연구실의 학자(armchair scholar)로서 지내며 또 그런 위치에서 창조적 신학을 하실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해방 직후 당신의 사역은 하루 8시간을 강의하며 성경 원어를 비롯해서 교회 행정까지 가르쳐야 했던 그런 시기였으니까요. 평생 가정의 재정 상황이나 이사를 가고 집을 고치고 자녀들을 전학시키고 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못 가지셨던 당신은 자녀 교육을 비롯한 모든 가사를 아내에게 일임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 선비의 한 사람이셨습니다. 당신도 그 당시의 그 사회의 아들이시기 때문이겠지요. 집 한 칸 재산 하나 없이 은퇴하신 아버지 약 40여년 전, 집 한 칸 재산 하나 없이 신학 교수직을 정년 은퇴하시자, 아버지는 늦게 재혼해서 얻은 저희 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염려하셨고 또한 아직 마치지 못한 성경 주석을 속히 마치기 위해 오래 전에 미국에 가 있었던 둘째 형님(요한)을 통한 초청으로 가족 이민을 결정하셨지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 당신이 저희 가정의 먹고 입을 것에 대해 염려하신 것을 제가 목격하고 제 마음도 매우 힘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일하시던 미국 공장에서 퇴출되자 당신의 나이 칠십에 저희들은 아직 10대(맏이었던 필자는 19세)였고 영어 한 자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죠. 그때 영어 못하는 저희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허드렛일 직장도 얻어주시고 어머니를 따라 다니시면서 통역하시며 공장 일을 얻는 데 도움을 주셨던 아버지, 그리고는 틈틈이 아직 남은 몇 권의 주석을 계속 집필하시려고 주말이면 어머니가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주변 신학교 도서관으로 전전하시던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또한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갓 들어갔던 모 신학교에서 배우며 성경 무오설에 조금 흔들리게 되자, 방학을 이용하여 미국을 방문하셨던 당신은, 불같은 심정으로 저를 새벽에 깨우시며 함께 80마일이나 떨어진 샌디에이고의 에스콘디도(Escondido, San Diego)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서부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달려가 어거스틴과 칼빈이 직접 한 말들을 찾아 보여주시며 그때 제가 잘못 읽었던, 잭 로저스(Jack Rodgers)와 도널드 매킴(Donald McKim)의 <성경의 권위와 해석>(The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of the Bible)이란 책을 자상히 비평해 주시던 당신! 아침마다 울면서 우리 자식들 한사람 한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시며 당신이 못 다한 사랑을 회개하시면서 기도하시던 당신! 특히 이민 시절엔, 앞으로 다른 사람은 가르칠 기회가 많지 않아서 그러셨는지, 저녁 식사 후엔, 헌 양복이라도 차려 입고 나오셔서 가정예배를 독촉하시던 당신! 오늘도 기억에 새벽별처럼 떠오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항상 가정예배를 잊지 않고 자주자주 “형제들끼리 사랑하고 사는 것이 나에게 효도하는 것이야”라고 요한복음 13장 34절을 본문으로 말씀하시던 가정예배가 기억에 초롱초롱 남습니다. 이민 당시 저희를 조금 도우셨던 고 김CI 목사님과 주말 성경공부를 만들어 아버님으로 가르치게 하시며 돌봐 주셨던 LA의 조CI 목사님 그리고 주석 몇 권이라도 교포 교인들에게 팔아 주시면서 적은 양이지만 생활비로 만들어 주시곤 하셨던 시키고의 고EB 목사님 같은 분들은 정말 고마운 분들이십니다. 그 후 당신은 다시 한국에 나와서 일하시게 되자 어린아이처럼 저희 등을 붙잡고 팔짝팔짝 뛰시던 아버지, 한국으로 좀 초라하게 돌아가셔서 많은 생각 끝에 합동신학교의 젊은 교수님들과 함께 가담하시면서 많은 오해와 비난도 있었지만, “언제나 옳은 편에 서라!”고 하시던 당신의 평소 지론에 따라 그 후 십년 가까운 시간 동안 노구를 이끌고 힘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셨음을 압니다. 돌아가시는 침상 위에서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또한 방문하시는 한 분 한 분 다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특히 신학교를 교수님들에게 자상하게 부탁하셨습니다. 눈과 온몸은 황달로 샛노랗게 되시고, 놀란 사람처럼 눈을 똥그랗게 뜨시고 쉰 목소리로 코와 입에 호수를 끼신 채 힘에 겹지만 않으셔서 “교회를 중심하는 신학교가 꼭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부탁하셨습니다.
1107 no image |아버지 박윤선을 말한다 <2>| 당신이 바치신 삶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_박성은 박사
편집부
2413 2015-04-15
당신이 바치신 삶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 박성은 박사, 캘리포니아대학교수 > 박성은 / 박윤선 목사의 4남으로서 미국 아이오아(Iowa) 주립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M.D.)를 받았으며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종교문학석사(M.A.R.)를 받고 동교 대학원에서 변증학을 전공하다. 현재 미국에서 신경내과 의사로 일하며 캘리포니아의 선한청지기교회에서 협동 전도사로 섬기고 있다. "딸의 대학 등록금을 대느라고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신학교 월급으론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아 항상 돈을 빌리러 다니던 계모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누님에 대해서는 갸우뚱 할 따름입니다." "참 진리가 다수결에 의해 몰락되고, 비진리가 군중에 의해 진리로 둔갑하는 이 시대에, 진리 편에 서기 위해선 기꺼이 고난도 감수하던 당신의 외침은 가슴 벅찬 메아리로 아직 남아있습니다." 아버지, 외국 생활을 많이 하셨던 당신은 영성이 메말라가는 서양 신학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동양 철학과 성경을 비교하여 성경의 탁월성을 드러내고 또한 서양 신학이 잊어가는 성경의 가르침을 당신의 잠언 주석을 통해 영미에 소개하려는 뜻을 가지셨음을 기억합니다. 항상 권위주의를 배격하셨던 아버지 당신이 가졌던 더욱더 방대하게 동양윤리의 옳고 그름과 또한 성경적 윤리관에 비해서 탁월치 못함을 드러내시길 원하셔서 한동안 잠시 그런 계획을 가지셨으나 일의 어려움을 아시고 접으셨지요. 수많은 성경주석을 접한 당신은 당신의 주석이 누구보다 우수하다 고집하지 않으셨음도 저는 압니다. 누가 무슨 악한 말로 오해를 하고 악한 말로 뒤집어 씌워도 그저 침묵하고 정진하고 하나님만 바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권위주의는 항상 배격하셨음을 저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제자들이 설교할 때도 항상 앞에 앉으시고 자주 필기도 하시곤 했습니다. 제자 목사님들이 와서 세배를 할 때도 대부분 함께 맞절을 하시는 때가 많았고, 거의 대부분 손자 벌 되는 신학생들에게도 존댓말을 쓰시는 때가 많았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교회에서 외식주의와 종교적 권위주의를 배격하려고 목사 가운도 입지 말라고 하셨고 그저 겸손히 은사에 따라 봉사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했음을 저희들 모두 잘 기억합니다. 또한 일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목사는 항상 보따리를 싸고 목회를 해야 하며 목사도 다른 장로와 함께 임기제로 해나가라고 힘든 주문을 하셨음을 압니다. 우는 소리로 기도하셨던 아버지가 이해됩니다 제가 아주 너댓 살 때에도 자주자주 술 취해서 밤에 집으로 와서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 큰 소리로 주정하던 큰 형님 때문에 무던히도 울며 하나님께 간구했던 당신은 어린 제 눈에도 이상한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술주정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돕는 가까이 거주하는 신학교 학생들은 술 취한 형님을 일단 안정시켜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려고 붙들어 묶곤 하였고, 언젠가 비가 오는 한밤중에 술에 취한 형님을 묶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인데, 아버지는 형님의 머리가 땅에 닫지 않도록 하게 하려고 손수 방석을 가져다가 형님의 머리 밑에 놓아두시던 것을 어린 제 눈으로 본 기억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왜 저러실까 했지만, 다윗의 용서와 사랑을 배신하고 심지어 아비의 부인들을 겁탈했던 압살롬의 죽음을 애곡으로 반응했던 다윗에 대하여 읽고 이해했습니다. 당신의 기도대로 그리고 당신이 항상 하신 말씀대로, ‘기도는 죽은 다음에도 이루어져’라고 하시던 말씀대로 큰 형님은 그의 말년에 저희 ‘어머니 자식’들과 가깝게 보냈고 그가 소천하기 전 후모가 계신 양로병원에 와서 엎드려 절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곁에서 수십 년 주석을 받아 적었던 딸 같은 비서에게(실제로 ‘아버님’이라 불렀음) 물건을 건넬 때도 책에다가 얹어서 주셨고, 그의 팔십 생애에 있어서 단 한 번도 남녀유별에 어긋난 일을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전 어머님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싶어서 몰래 등에 업고 학교로 데리고 가셨던 당신, 또한 당신보다 십 수 년 연하였던 어머니에게도 늘 존대를 하셨던 아버님에게 폭력을, 더군다나 습관적으로 행사했다고 말하는 자녀를 가지셨던 당신은 정말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놀라울 따름입니다. 자기 아버지를 온 천하에 대고 폭언과 거짓으로 매장하는 딸을 둔 것 하나만으로 당신은 놀라운 삶을 사신 분이 확실합니다. 딸의 대학 등록금을 대느라고 제 달 제 달 나오지도 않는 신학교 월급으론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아 항상 돈을 빌리러 다니던 계모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누님에 대해서는 갸우뚱 할 따름입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시대적 그리고 가정적 상황에서 그것들을 극복하고 주석을 쓰시려고 할 때에는 한 가지 일에 초인적 집중력을 아버지처럼 구사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아버지 당신은 어린아이와 같이 울면서 아침마다 긴 시간을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자주자주 매우 “안타까워서 견디기 어렵다”고 하나님께 토로하셨습니다. 그리곤 가까이 다가가서 당신의 기도 소리를 들어보면 온갖 자세한 도고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어린 저도 듣곤 했습니다. 이제야 저는 왜 아버지가 그토록 “안타까워 견디기 어렵다”는 말을 하나님께 자주 하셨는지 이해가 조금은 갑니다. 그 목소리는 늘 반쯤 우는 소리였습니다. 그러심에도 저희들더러 기도를 꼭 길게 해야 한다느니 왜 기도생활을 그 정도로 하느니 하시는 말씀은 별로 하지 않으시고 단순히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만 아주 가끔 하셨습니다. (겨울엔) 항상 두터운 옛 만주 봉천신학교 교수 시절부터 입던 두껍고 누런 털 달린 오버코트를 입으시고 두터운 스펀지 방석과 성경을 옆에 끼고 하루도 빼지 않고 뒷산으로 기도하러 오르내리셨던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늘 하얀 손수건을 꾸깃꾸깃 주머니에서 꺼내서 코를 풀곤 하셨지요. 늘 기도할 수 있는 뒷산이 있는 곳에 집을 구하려고 어머니가 노력하셨지요. 당신이 바치신 그 삶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개혁주의자셨던 당신은, 구약의 모든 것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덕만으로 우리 신자에게 구원은 완성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정을 받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구원의 정점적 완성(consummation)은 되지 않았기에, 아직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성과 악한 경향을 향해 싸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항상 당신은 설교에서, “신자의 평안함”과 “염려하지 말라”는 설교를 수도 없이 하셨으나, 또한 “너희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 12:4), 또한 “내 몸을 처 복종케 함은”(고전 9:27)이란 말씀도 많이 하셨지요. 당신의 그러한 가르침을 아들은 신학교에서 뒤늦게 “Already, But Not Yet”(이미 그러나 아직)의 원리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받고 어린아이와 같은 기쁨과 평안함을 누리면서도, 또 한편 영적 전쟁(warfare)을 위한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도 간단없이 강조하셨습니다. 정말이지 당신이 추구하던 개혁주의는 위클리프와, 루터, 칼빈, 그리고 바빙크와 워필드와 함께 서 있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 흘려 전한 복음으로 한국 땅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수적 부흥도 했지만, 아직도 복음의 씨앗이 깊게 뿌리 내리지 못한 조국을 많이 염려하셨음을 곁에서 보았습니다. “딱 거져 카톨릭같이 되어 가누나!” 하시며 복음이 삶으로 연결되지 못함을 염려하셨고 “많은 교인들이 구경꾼 같은 위치에 있지 않는가”라고 근심하시곤 하셨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민족상잔의 전쟁, 그리고 그 후에도 경제적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한 조국의 강단을 많이 생각하셨음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강단의 말씀 사역의 부흥을 생각하여 온몸을 던져 불태워 성경주석을 쓰신 것을 이 아들은 지켜봤습니다. 소풍 한 번 제대로 가보지 못하고, 미국을 수도 없이 왕래하셨지만 그 흔한 국립공원(national park) 한 곳도 가 보지 못한 당신은 그저 사명에 몰두하여 사시다 가셨습니다. 당신의 뇌리에는 그저 강단, 성경주석, 그리고 신학교밖에 들어 있지 않았음을 잘 압니다. 비행기를 타도 주석 원고를 손에 드시고, 어디서 누구를 기다려도 돌아앉아 “주여 주여” 하시며 기도하셨던 당신을 언짢게 생각하며 균형이 없는 지도자, “치우친 삶,” “하나밖에 모르는 분”이라며, 지금 좀 풍요로워진 위치에서 괴이한 눈초리로 보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저는 그런 당신이 그립고 그렇게 바쳐진 삶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하나에 ‘올인’하지 않는 삶으로는 적은 성취도 가능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늘 ‘진리 편에 서라’하셨던 당신은 순수한 복음 진리 때문에 많은 오해도 받으시고,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셨음을 압니다. 90년 전 보장된 교수직과 큰 교단의 이점을 포기하고 조그만 신학교를 세워 진리 운동을 주도하던 G. 메이쳔 박사, 그리고 보장된 노후를 마다하고 새로 시작하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참여하셨다가 1년 후 폐렴으로 소천한 프린스턴신학교의 구약학 전설, 로버트 딕 윌슨(Robert Dick Wilson) 박사, 그리고 존 머리 교수, 코넬리우스 반틸 박사, 모두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음을 저는 압니다. 또한 당신은 그들이 결코 분열주의자들이 아니라고 변호하시며, 강단이 두 쪽 나도록 내리치며 절절히 외치던 당신의 사자후의 설교가 유독 그리워지는 시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분열주의자란 말도 때론 감수해야 한다고 외치시던 당신의 갈라진 목소리가 유독 듣고 싶은 때입니다. 진리 편에 서기 위해선 고난도 감수해야 된다고 단호한 자세로 일러 주시던 쉰 목소리가 많이많이 생각나는 때입니다. 참 진리가 다수결에 의해 몰락되고, 비진리가 군중에 의해 진리로 둔갑하는 이 시대에, 당신의 외침은 가슴 벅찬 메아리로 남아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사역에 사활을 건 ‘기도’ 저는 지금도 아버지 당신의 기도 소리를 아침마다 곁에서 듣는 듯합니다. 당신의 생의 말기에, 80을 바라보는 시기에, 젊은 네 교수님들과 손잡고 신학 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셨습니다. 맨땅에서 선지학교를 시작하신 것이지요. 이제 갓 시작한 신학교는 모든 것 하나 가진 것이 없었음에도, 진리를 사모하여 모여든 많은 젊은이들과 꿈을 나누는 기쁨을 누리시는가 했습니다. 허나 당시 고등교육의 질적 퇴락을 염려한 정부의 강경책으로 신학교 인가라는 문제로 당신은 날마다 눈물로 주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학생들의 학문적 미래와 또한 그들의 졸업 후 사역을 위한 학교의 위상을 위해 고등교육기관 인가는 모든 분들과 뜨거운 기도의 제목이었음을 잘 기억합니다. 당시로선 불가능하다했던 새 신학교 인가 문제는, 당신을 여윈 얼굴로 빈방에 홀로 앉아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도록 했었지요. 당신의 마지막 사역의 사활을 건 기도였습니다. 당시 이미 당당하게 인가받아 있던 몇몇 신학교에 버금가는 위상을 남겨줘야 하겠기에 당신은 교수님들과 또한 교회의 어른들과 기도로 해결하기로 작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적적으로 열매를 보게 되었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특별히 금식 후 죽을 드시는 당신의 까맣게 타고 초췌해진 얼굴의 미소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이십니다. 기도는 물론 ‘영혼의 호흡’이며 우리가 ‘하나님과 가지는 아름답고 귀한 대화’이니 모든 언어는 기도를 위해 있다고 말씀하신 당신은, 또한 기도가 영적 전쟁이기에 ‘죽기내기로 시간을 확보하고, 죽기내기로 집중하고, 죽기내기로 우선순위를 바로 잡지 못하면 진정한 기도생활이 되지 않는다”고 귀가 닳도록 역설하셨지요. 우리의 남아있는 죄성 때문에 싫어도 진액을 짜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아직 성화의 완성을 이루지 못한 우리는 기도에 게으르고, 기도가 정욕으로 흐르고 성의가 없다고 누누이 강조하시며 기도가 싫을수록 기도하려고 애써야 한다고 하셨지요. 아버지 당신은 기도를 똑똑한 정신으로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다 동원해서 하라하셨고,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짓지 않”(삼상 12:23)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바쳐 넣어야 된다고 하셨지요. 결코 고행주의자도, 자학주의자도, 염세주의자도 아니셨지만 기도와 성결을 향한 고난은 당신의 설교의 주된 테마였으며 당신의 삶의 징검다리였습니다.
1106 no image |개/혁/주/의/신/앙/강/좌| 개혁교회의 성만찬에 대한 이해_이남규 교수
편집부
2665 2015-04-15
개혁교회의 성만찬에 대한 이해 <이남규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말씀과 성례 둘 다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하는 면에서는 같다. 그런데 말씀은 믿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믿음을 굳게 하기도 하지만, 성례는 믿음을 불러일으키지는 않고 믿음을 굳게 한다." "성례전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이 표가 말하는 내용 곧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을 말한다." 말씀과 성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이 말씀이다. 우리는 전하는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복음의 약속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이 이 들리는 증거 외에도 보이는 증거가 있다. 보이는 증거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복음의 약속을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더 굳게 하기 위해서 보이는 증거를 예식으로서 제정하셨기 때문에 중요하다. 교회는 이 보이는 증거를 성례라고 불러왔다. 그래서 다른 말로 성례를 보이는 표와 인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듣는 증거(말씀)가 보이는 증거(성례)보다 앞선다. 말씀과 성례 둘 다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하는 면에서는 같다. 그런데 말씀은 믿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믿음을 굳게 하기도 하지만, 성례는 믿음을 불러일으키지는 않고 믿음을 굳게 한다. 성례는 이미 믿는 자만, 즉 말씀을 들어 믿는 자만 참여한다. 게다가 말씀을 들어 믿음에 이르렀으나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성례에 참여하지 못한 신자도 있을 수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회심한 옆에 있던 강도는 말씀에는 참여했으나 성례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성례는 말씀 없이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드러날 수 없으므로 말씀의 증거와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한다. 말씀과 함께 말씀(들음으로)처럼 성례(봄으로)도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한다. 한편 말씀을 듣는 것과 함께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야 믿음이 일어나듯이, 성례에서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야만 믿음에 유익이 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야만 전달되는 말씀이 유익하다고 해서 말씀이 전달되는 것을 무시할 수 없듯이, 아니 오히려 성령님께서 그 전달되는 말씀에 역사하시므로 그 일을 중히 여겨 수고를 다하듯이, 성례에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므로 마땅히 중히 여겨야 한다. 나아가 말씀이 성례보다 앞선다고, 성례를 무시할 수 없다. 성례를 무시하는 자는, 성례를 제정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자다. 성례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성례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업신여기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주시는 복음의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는 증거인 성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귀하게 여긴다. 성만찬을 업신여겨 잘못 사용한 고린도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진노를 보이셔서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가 적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례를 중요하고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성례전적 연합 그리스도께서 새언약을 통해 제정하신 성례는 두 가지, 곧 세례와 성만찬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정하신 예식이 세례이다. 그리고 성만찬 예식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주 예수께서 잡하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가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이 두 예식의 외적인 모습만 본다면 세례는 물로 씻는 모습이고, 성만찬은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모습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외적인 모습을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과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례 가운데 보여지는 외적인 모습은 분명히 어떤 내용을 말씀하고 있다. 이 외적인 모습은 말하는 내용을 갖기 때문에, 표라고 부른다. 이 표는 표가 말하는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세례에서 물로 씻는 것은 죄 씻음이란 내용과 연결되어 있고, 성만찬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마시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표와 이 표가 말하는 내용과의 연결을 교회는 성례전적연합이라고 불러왔다. 이 성례전적연합에 대한 이해 때문에 교회사에는 여러 가지 논쟁이 있게 된다. 즉 질문은 이것이다: 표와 표가 말하는 내용이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특히 종교개혁 시대에 이 질문에 대한 논쟁으로 시끄러웠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표가 사제가 말을 할 때(예를 들어 “혹 에스트 에님 코르푸스 메움”(Hoc est enim corpus meum)), 떡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한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라틴어로 말해져도 상관이 없다. 그래서 마치 주문과 같다. 한편 루터주의자들은 ‘표가 말하는 내용’이 표와 함께 공간적으로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떡과 잔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공간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혁주의자들은 로마 가톨릭과 루터주의자들을 향해 반대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인 살과 피를 우리의 육신의 입으로 먹고 마시는 것(로마가톨릭과 루터주의의 의견은 이 면에서 결국 똑같다)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와 루터주의는 성례전적 연합이 물질적인 연합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 없는 연합이라고 이해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례적 연합을 물질적인 연합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징적으로 이해하였다. 이 때 상징적이라는 것은 내용과 실체가 없는 상징이 아니라, 그것을 분명히 포함하는 상징이다. 마치 목사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될 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말씀이 말하는 내용이 본질적으로 실제적으로 전달되듯이, 목사가 예식을 집례할 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예식이 말하는 내용이 본질적으로 실제적으로 전달된다. 그러므로 성례를 말씀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은, 말씀을 통해 성례의 외적인 모습(표)은 표가 말하는 내용(실체)과 상징적으로 연합하여서(성례전적 연합) 구원의 은혜(복음의 약속)를 본질적이고 실제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시대에 이르러서 새롭게 개발된 내용이 아니다. 같은 내용이 이미 처음부터 교회 안에 있었으나 논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것을 더 세밀하고 정돈되게 표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말씀이 없이 물은 그저 물이고, 요소에 말씀을 더할 때 요소가 성례가 된다고 말했다. 츠빙글리와 루터 종교개혁 후 개신교 진영은 로마가톨릭교회의 화체설을 거절하는데 있어서는 동의했다. 그러나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에 성만찬에 대한 이해에 이견이 있었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루터와 츠빙글리가 마르부르크에서 만나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문서(Die Marburger Artikel 1529)를 작성했다. 여기에 보면 그들이 동의한 점은 다섯 가지라고 할 수 있다. ■빵과 포도주 두 가지 요소를 사용해야 한다. ■미사는 거절한다.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의 성례이다. ■몸과 피에 영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약한 양심이 성령에 의해 믿음을 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가 육체적으로 빵과 포도주에 있는지에 대해선 합의하지 못했다.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성만찬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함께 한다는 것은 미신과 우상숭배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공간적으로 실재적으로 있다는 것은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츠빙글리의 입장에서 로마 가톨릭의 성만찬은 미신화 되어 있었다. 그는 “이것은 내몸이다”(hoc est corpus meum)에서 “이다”(est)를 “상징한다”(significat)라고 해야 바른 성경해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츠빙글리는 예수님께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몸이다고 하셨을 때, 이것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몸을 “상징한다”라고 읽었다. 그러나 루터가 생각할 때, 성만찬에서 인성을 빼버린 채 단순한 상징이나 기념에만 머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현존을 부정하게 되면, 성육신 하셔서 구속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성의 현존을 끝까지 고집했다. ‘이다’(est)는 루터에게 있어서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본질에 대한 것이다. 루터의 고민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위격적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는 데서 출발했다. 사실 여기까지는 츠빙글리도 동의하고 칼빈도 동의하고 다른 개혁신학자들도 동의한 내용이다. 오래전부터 교회는 그리스도의 위격적 통일성을 가르쳤다. 그러나 인성이 없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위격이 분리된다는 것까지 주장한 것은 루터의 오해다. 루터주의자들은 공재설을 위해서 신성의 속성을 인성이 받아서 편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편재한 인성이 떡과 잔에 있어, 그리스도의 몸을 육체적으로 먹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런 의견을 츠빙글리는 받을 수 없었다. 유한이 무한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인성이 신적속성인 편재성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한 일은 신성에 돌려지고, 신성이 한 일이 인성에 돌려진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성경이 그렇게 하고 있다), 신성의 속성이 인성에 돌려지고 인성의 속성이 신성에게 돌려진다는 것은 신성과 인성이 혼합, 변화, 분할, 분리가 없이 위격적 통일을 이룬다는 칼케돈신경(451년)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칼빈 칼빈은 츠빙글리의 이해에 머무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츠빙글리는 성만찬을 기념으로 이해해서 단순한 신앙고백의 행위에 머무르거나,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을 단순히 믿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츠빙글리와 칼빈은 성만찬론에서 분명한 차이를 갖게 되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육체적 현존을 거절하는데 있어서 루터에 반대하고 츠빙글리와 동의했다. 그러나 츠빙글리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한 것은 아니다. 바빙크는 칼빈이 츠빙글리의 의견에 동의하지 못한 점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츠빙글리는 성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선물을 신자들이 성찬 가운데서 행하는 것 뒤로 너무 많이 물러나게 하여 결국 성찬을 일방적 고백의 행위로 이해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을 다만 그의 이름을 믿고 그의 죽음을 신뢰하는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판단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칼빈은 이제 루터 편에서 서서 그리스도가 비록 육체적으로 그리고 지역적으로 성찬 가운데 현존하지 않을지라도,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과 피를 포함한 자신의 전 위격으로(met zijn ganschen persoon) 참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waarachtig en wezentlijk) 성찬 가운데 현존하여 성도들이 즐긴다고 말했다. 칼빈과 루터 사이의 차이는 이 현존의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현존의 방식에 대한 것뿐이다.”(GD IV, 542.) 여기서 츠빙글리의 성만찬론이 성령의 역사없는 단순한 기념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위의 인용한 마부르크 논제(Marburger Artikel 1529)에서도 나타나듯이 성령의 역사에 의한 믿음의 강화가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츠빙글리와 칼빈의 성찬론의 차이가 성령의 역사 없는 단순한 기념인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게다가 츠빙글리도 그리스도의 영적인 현존을 말한다. 츠빙글리에게 그리스도의 육체의 현존이 영적일 때, 이 의미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CR 92, 587). 브렌츠가 루터편에서 말씀의 능력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을 설명했을 때, 츠빙글리의 반응은 믿음이 현존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본성으로 현존하게 되지 않듯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본성으로 현존하게 되지 않는다”(CR 92, 587). 즉 츠빙글리에게 성만찬은 신자들의 고백의 행위요 믿는 행위에 머물렀다. 칼빈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성만찬에 그리스도의 전위격의 실제적인 현존과 신자들의 그리스도의 은택을 누림과 신자들과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이 있다고 이해했다. 그래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것을 그리스도 자신을 믿는 것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자들(Inst. 4. 17. 5), 성만찬이 다만 외적고백의 표라고 하는 자들(Inst. 4. 17. 6),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의미가 성령에 참여한다는 것이라고 하면서 피와 살을 무시하는 자들(Inst. 4. 17. 7)과 거리를 둔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성례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우리가 갖고 있으므로, 현존하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시야 안에 나타나 있고 손으로 만져질 수 있는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 참되게 제시된다고 확실하게 생각되어야 한다. 받으라, 먹으라, 마시라 이것은 내 몸이라는 이 말씀은 우리를 속이거나 놀릴 수 없기 때문이다.”(Inst. 4. 17. 3) “경건한 사람들이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원칙은, 곧 주께서 세운신 상징을 볼 때마다 표된 것의 사실이 거기에 있다고 분명히 생각하고 확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보이지 않는 것을 주신다는 것을 인치기 위해 보이는 표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몸의 상징을 받았을 때 역시 바로 몸 그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분명히 확신해야 한다.”(Inst. 4, 17, 10) 개혁교회의 입장 개혁신학자들은 이런 관점에 만족했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성경을 잘 드러내는 것이고, 교회가 예전부터 갖고 있었던 성례전적연합의 이해와 잘 맞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개혁교회는 성만찬에서 물질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있는 그리스도의 살을 육신의 입으로 먹는 다는 것을 분명히 거절한다. 그러나 성만찬을 단순한 기념과 고백이라고 하지 않는다. 성례전적인 의미에서, 즉 성례전적 연합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표현을 한다. 성례전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이 표가 말하는 내용 곧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성례전적 연합(즉 ‘표’와 ‘표가 말하는 내용’의 연합)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말할지라도 이것은 물질적이거나 장소적이지 않은 성례전적 연합에 의한 진술이다. 이런 성례전적 연합에 의한 유익은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믿음을 통해서 믿는 자들에게 성만찬의 유익을 주신다. 고난당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성례전적 연합에 의한 방식으로 실제적으로 함께 하여서 우리에게 주어질 뿐 만 아니라, 성만찬예식 가운데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전 위격적으로 함께 하신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전 위격이란 죽기까지 낮아지셨다가 하늘에 오르셔서 그 인성은 하늘에 있으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방식이다. 신성이 한 일은 그의 전 위격에 돌려지므로 이제 그리스도 전 위격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정리하여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성은 하늘에 있으나 신성으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영광의 그리스도께서 성만찬 예식에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예식 가운데서 믿는 우리에게 성례전적 연합에 의해 떡과 포도주가 말하는 그의 고난과 죽음으로 얻으신 구속과 그 모든 은택의 실체를 우리에게 주신다. 이런 관점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에 표현되어 있다. 칼빈의 초안을 가지고 작성된 프랑스 신앙고백서는 말한다: “세상을 심판하려고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 거기에서 머무실 것이지만, 그가 신비하고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성령의 능력을 통해, 믿음으로 받게 되는 그의 몸과 피의 본질로 우리를 먹이시고 살리신다는 것을 믿는다.”(Confessio Gallicana, 36) 벨직신앙고백서는 말한다: “우리가 믿음(이것은 우리 영혼의 손과 입이다)으로 우리 영혼에서 참된 몸과 참된 피를 받는다”(Confessio Belgica, 3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도 묻는다: “그리스도께서 뗀 빵을 먹고 잔에서 마시우듯이 그렇게 확실히 그의 살과 피를 신자들에게 먹이고 마시운다는 것을 어디에서 약속하셨는가?”(HC, 77) 성만찬 실행에 대하여 두 요소를 합당하게 받는 것이 옳다는 점에서 개혁신학자들만이 아니라 루터주의자들도 동의한다. 그리스도께서 잔을 마시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먹는 빵과 음료 두 요소가 성만찬에서 주어져야 한다.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의미들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육체적 생명이 빵으로 유지되듯이 생명의 빵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영혼이 영양을 공급받아 영생에 이른다; 빵이 몸의 배고픔을 없애주듯이 그리스도의 몸의 공로가 영혼의 배고픔을 없애준다; 빵이 배부른 자가 아니라 배고픈 자에게 유익하듯이 그리스도의 몸의 능력과 공로도 의에 주린자에게 유익하고 자기 자신의 의로 헛배 부른자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다; 많은 자에게 배분되는 하나의 빵이 일치의 표이듯이, 많은 자에게 제공되는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선한 뜻의 표이며 우리들 상호 간의 사랑의 표다; 하나의 빵이 많은 곡물로 이루어지듯이, 많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한 하나의 몸이다(Bucanus). 그런데 빵과 포도주가 없는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빵과 포도주 대신 그곳에서 사용되는 땅의 음식물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도 용납되었다. 그러나 개혁신학자들이 빵과 포도주 외에 다른 음식에 대하여 용납하고 있을 때, 그것은 부득이한 상황 아래서의 허용될 수 있다는 의미이지 일부러 바꾸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혀 가질 수 없을 곳에서 허용되는 것은 옳다는 정도이다. 그래서 빵과 포도주를 흔히 구할 수 있는 우리가 다른 것을 일부러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목사가 이 두 요소 빵과 포도주를 취하여 성별하게 된다. 목사가 빵과 포도주가 이제 거룩한 사용을 위해 정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보통 기도와 함께 주의 만찬 제정의 말씀을 설명한다. 그러면 여기서 일상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이 된다. 이것을 성례전적 연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말하는 것처럼 땅의 것의 본질이 변한 것이 아니라, 목적이 변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일상적인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면서 성례를 위한 목적과 사용을 위해 구별된다. 성별 후에 목사가 빵을 떼어 배분하게 된다. 빵을 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첫째, 주의 빵이 자신에게 떼어지듯이, 그리스도의 몸이 확실히 무거운 고난의 고통가운데서 또 영혼이 몸에서 분리됨으로써 그 자신들을 위해 떼어지듯이 찢겨졋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한 빵에 참여하는 모든 많은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한 몸과의 교제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빵을 떼는 것은 주의 만찬의 본질(essential)이며 형식(forma)에 속해 있으며 생략될 수 없다. 그래서 동전모양의 얇은 과자를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성례전적 연합에 의해서 성만찬 예식 전체가 중요한 상징을 갖는다. 빵이 말씀의 종에 의해 전달되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몸이 전달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 주의 떡을 당신에게 주는 것을 볼 때에 목사의 손이 너에게 내밀어졌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리스도의 손이 네게 내밀어진 것이다. 빵이 전달되는 것은 복음의 약속 안에서 그리스도가 전달되는 것이고, 빵이 외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빵이 몸의 입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영혼의 입 곧 믿음에 들어가는 것이고, 빵이 신자들과 위선자들에게 전달될 때에도 그리스도의 몸은 오직 신자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Polanus).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의하면 성만찬 예식의 표가 떡과 잔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목사에 의해 떼어지고 나누어지고 신자가 받고 맛보는 전체 예식에 있다. “… 첫째, 주님의 떡이 나를 위해 떼어지고 잔이 나에게 분배되는 것을 내 눈으로 보는 것처럼 확실히, 그의 몸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드려지고 찢기셨으며 그의 피도 나를 위해 쏟으셨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확실한 표로서 주님의 떡과 잔을 내가 목사의 손에서 받아 입으로 맛보는 것처럼 확실히,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몸과 흘리신 피로써 나의 영혼을 친히 영생에 이르도록 먹이시고 마시우실 것입니다”(HC 75). 여기에서는 수동적 시각(떼어지고 나누어지는 것을 본다)과 적극적 촉각과 미각(떡과 잔을 받아 맛본다)이 사용된다. 마치는 말 성찬은 신자만이 참여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성찬에 참여할 자들을 신자들로서 제한하면서, 신자들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한다. 신자들은 성찬에 참여할 때 슬퍼하고, 신뢰하고, 사모한다. 이 자세는 성찬에 나아가는 자들이 기억해야할 사항들이다. 자기 죄 때문에 슬퍼할 것,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가 슬퍼하는 그 죄가 사함을 받은 것과 남아있는 약한 것도 그리스도의 공로로 덮인다는 것을 신뢰할 것, 그리고 믿음이 강해지고 삶이 더 교정되기를 소망할 것이 성찬에 나아가는 자세다. 죄를 슬퍼만하여서 나아가지 못하는 자는 혹 자신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전성을 의심하는지 점검해야 한다. 그러나 칭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화까지, 즉 더 강한 믿음과 더 나은 삶의 교정에 대한 소망을 포함해야 한다. 이것이 신자의 마땅한 자세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전혀 유익하지 않고 해가 된다. 이 예식을 잘 수행하는 것 자체가 교회의 표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이 예식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성찬을 권징과 연결시켰다. 불신과 불경건이 고백과 생활에서 드러나는 자들에게 성찬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표에 대한 모욕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더럽혀질 때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회중에게 임한다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지적한다(HC 82). 그래서 교회는 교회권징이라는 천국열쇠를 사용해야 한다. 이 교회권징을 위해서 치리장로가 필요했고 당회가 구성되었다. 결국 성찬, 삶, 권징, 교회정치가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교회가 성찬을 회복한다는 것은 권징을 회복할 때, 또 권징을 회복하기 위해 교회정치가 회복될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성찬이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105 no image |심/층/진/단| 박윤선 성경주석에 대한 오해와 진실_안만수 목사
편집부
5534 2015-03-31
 박윤선 성경주석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안만수 목사, 화평교회 원로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사장 > “박윤선 목사는 지식의 자랑이나 학적 우월성을 자랑하기 위해 연구 실적을 책 속에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지식이나 정보 전달을 위한 백과사전 같은 주석을 쓰는 것이 그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주석이 설명하는 명확한 진리, 곧 주석의 주된 내용들은 모두 진리와 관련된 내용들입니다. 진리인 성경 말씀을 올바로 설명한 주석이라면 그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시대적, 문화적 한계가 없습니다.” 박윤선 주석과 관련해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이에 그 진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1. 원어 성경을 기준으로 저술된 박윤선 성경주석 우리가 그동안 사용했던 우리말 성경은 외국어 성경을 번역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직접 원어 성경으로부터 번역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암 박윤선 목사에게서 직접 들은 바이고 이에 대해 아시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소위 시중에서 떠도는 것처럼 우리말 성경이 중국어 성경이나 영어 성경을 번역했다는 말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원어 외에 다른 외국어 성경들은 단순히 참고 자료였습니다. 때문에 박윤선 주석이 중국어를 번역한 한국어 성경을 기준으로 저술되었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정암은 원어 성경을 직접 해설하며 주석을 저술했습니다. 이것은 정암과 고 이창숙 권사님께 직접 들은 말입니다. 물론 정암의 학문적 깊이와 이해도가 성숙함에 있어서 초기 주석에 부족한 점이 있었을 수 있으나 수차례에 거쳐 개정되면서 모두 보충되어 현재 그 어느 주석보다도 정확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석이 완간되기까지 개역성경을 사용하였지만, 정암은 원어 성경과 외국의 다양한 참고자료들을 연구하여 개역성경의 부족한 점을 보충했습니다. 결코 원어를 모른 채 한글 성경의 텍스트만을 기준으로 주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잘못된 해석을 지적했으며, 성도의 이해를 위해 더 나은 번역을 제시하였습니다. 다른 번역본보다 오히려 한글 해석이 자연스러운 점이 있을 경우에는 그 내용도 표시하였습니다. 박윤선 목사는 결코 지식의 자랑이나 학적 우월성을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연구 실적을 책 속에 표하며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토록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을 모두 뒤로하고 성도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가장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주석을 펼쳐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술어가 많이 보이지 않아서 마치 연구가 부족한 책이라고 생각을 하거나 박윤선 주석에 대해서 섣부르게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역자를 비롯한 성도들을 사랑했던 박윤선 목사는, 신앙이야말로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야만 한다는 것을 항상 강조했습니다. 때문에 지식이나 정보 전달을 위한 백과사전 같은 주석을 쓰는 것이 그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주석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고 깨닫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게 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그 자신에게도 주석 연구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한 철저한 도구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생전에 만약 자신의 주석이나 연구 자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있다면 죽기 전에 모두 태우고 싶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2. 몸소 자신의 삶으로 저술한 박윤선 성경주석 박윤선 목사는 주석을 삶으로 써나갑니다. 용서에 대해 말하면 용서를 하려고 애쓰고, 사랑에 대해 말하면 사랑하면서 쓰려고 애썼습니다. 기도하라고 말하면 기도를 그 누구보다 많이 하며 하나님과 직접 교제의 큰 기쁨을 누리며 말하려고 몸부림에 몸부림을 쳤습니다. 공부하라고 말하면 공부하다가 죽는 것도 순교이니 걱정하지 말고 식음을 전폐하거나 잠을 자지 않고서라도 공부하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말에 힘이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그렇게 살면서 외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주석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제시하는 하나님의 말씀들은 하나같이 그의 실천적인 삶의 땀과 피가 어려 있습니다. 삶이 녹아져 있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열정과, 믿음과, 소망과, 확신과, 생각과, 의지와,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에 지식 전달이나 정보 전달을 위한 다른 책을 읽을 때와는 다른 감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박윤선 목사의 저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다보면 그의 연구가 얼마나 방대했으며, 그의 학문적 깊이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게 됩니다. 그는 진리에 있어서는 단순 명쾌한 해석을 제시해줍니다. 이는 결코 얕은 지식과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복잡하고 거미줄처럼 얽히고 해결하기 힘든 인생 문제를 삶으로 겪어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자료를 연구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직접 살아내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은혜를 체험한 결과의 산물로 나온 것들입니다. 깊이 우려낸 곰국의 진액과 같은 경험의 산물들입니다. 그래서 박윤선 목사의 주석을 보면 오직 기도, 여주동행(與主同行), 말씀 순종을 위한 치열한 삶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조명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내용들을 통해 감동을 받게 됩니다. 소위 학문적 깊이, 넓이 및 의미 그리고 영향력 등에 대해 살펴본다고 하면서 대개의 주석들은 세상의 학문적 평가 기준을 적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만일 신자인 우리들도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은 영적 본질의 세계를 설명하는 책을 앞에 놓고서 이해가 부족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혹시 사역자라면 성도들에게 세상의 논리를 초월하는 믿음의 원리를 설명하고 우리의 정체성과 영적 실체를 가르친다고 하면서 왜 신학을 논함에 있어 세상적 학문의 기준을 가져다가 잣대로 사용해야 하나요?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다면 깨달을 수 없으며, 그 말씀대로 직접 순종해보지 않고는 그 말씀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세상의 책을 읽듯이 읽는다면 그 말씀이 꿀송이 같이 달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냥 성경은 미련해 보이기만 하는 것입니다. 주석은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해주는 책이기 때문에 역시 세상의 기준으로 주석을 읽고 평가한다면 그 주석의 진수를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거듭난 자라면 주석을 한 줄이라도 읽을 때 그 자세부터 달라야 합니다. 주석의 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주석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마음으로 읽어야 그 주석이 성도들에게 참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역사적, 문화적 한계를 초월한 박윤선 성경주석 또 한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박윤선 성경주석이 역사적 한계나 문화적 한계가 있다고 하면서 마치 그 내용을 유행가와 같이 지나간 내용이라는 듯 폄하하려는 자유주의적 시각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만들어낸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업데이트가 됩니다. 휴대폰, 컴퓨터, 각종 소모품들뿐 아니라 각종 지식,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성경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여 결코 업데이트를 하지 않습니다. 아담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라면 지금도 변함없이 진리일 뿐입니다. 거기에 더할 것이 결코 없습니다. 신학의 역사는 하나님의 진리를 업데이트해온 역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의 지식과 다릅니다. 진리는 처음부터 주어졌습니다. 현재까지 신학의 발전을 통해 깨달은 어떤 지식이 없기 때문에 과거 조상이 구원을 못 받은 일이 없습니다. 신학은 그 시대의 사람들, 즉 죄성으로 여전히 이기적인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도록 만들어주기 위해 계속 연구되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책들을 보면서 모든 책은 역사적, 문화적 한계를 가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진리를 설명하는 주석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물론 문화적 한계라는 표현이 적합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유교적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성경 말씀으로 깨우치기 위해 마치 유교 문화적 단어들을 구사하고 예화를 들어는 것입니다. 이단을 비판할 때는 그 당시 유행한 이단의 예를 들어야 합니다. 역사적 한계라는 면도 이와 궤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주석이 설명하는 명확한 진리, 곧 주석의 주된 내용들은 모두 진리와 관련된 내용들입니다. 따라서 진리인 성경 말씀을 올바로 설명한 해석이라면 그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올바른 해석이어야 합니다. 일례로 성경 말씀에서 인간의 전적 부패를 말씀하시는데 그에 대한 구절들을 모두 모아 설명하고, 미처 깨닫지 못한 연관 구절들도 모두 모아 설명하고, 당시까지 나온 모든 책들을 섭렵하여 전적 부패에 관한 해설을 덧붙였는데 그 내용에 오류가 없다면 그 내용은 어떤 시대를 초월하여 정확한 해설입니다. 여기에는 시대적, 문화적 한계가 없습니다. 다른 예를 든다면, 박윤선 목사는 ‘계시의존사색’이라는 말을 잘 씁니다. 이는 성경 말씀을 해석할 때 어떤 구절의 뜻이 무언가 궁금하다면 바로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이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찾는 것입니다. 이 ‘계시의존사색’이라는 것과 관련해 욥기 주석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절대 시대적, 역사적, 문화적 한계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박윤선 성경주석에 대해 우리부터 성경 말씀에 따른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박윤선 목사의 삶을 올바로 조명하며 오해에 대한 해명을 하는 이유는 박윤선이라는 한 인간의 우상화를 위함이 아닙니다. 박윤선 목사에 대한 오해, 혹 있을 수도 있는 질투심을 포함하여 비롯된 섣부른 판단으로 말미암아 박윤선 목사의 인생을 평가하려 한다면 자칫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박윤선 목사의 인생을 통해 선하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섭리의 흔적을 지우려고 시도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박윤선 목사와 삶을 같이하며, 같이 신학을 연구하고, 같이 성경 말씀을 배우고 동역한 우리들이라면 여전히 살아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에게, 우리나라에 주신 유익한 유무형의 자료를 포함한 신앙의 유산들을 최대한 활용함에 있어 거침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104 no image |아버지 박윤선을 말한다 <1>|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_박성은 박사
편집부
3006 2015-03-31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박성은 박사, 캘리포니아대학 교수 > <필자 박성은 / 박윤선 목사의 4남으로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M.D.), 웨스트민스터신학교(캘리포니아)에서 M.A.R.를 받고 박사학위 과정에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UCI) 의대 임상 부교수,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에서 통증의학 및 신경내과 병원 운영. 캘리포니아 Beuena Park 나침반교회 자원봉사 전도사로 봉사하고 있다.> “당신은 진정한 개혁주의로, 인간의 부패성에 대해 깊이 느끼셨던 분이셨습니다. 혜란 누님의 글을 보셨다 하더라도 훼손에 대해선 그다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비록 세상적 기준으로 자상하고 상세하게 또한 방법론적으로 자식들을 사랑하지는 못하셨다 해도 늘 단순하고 진실하게 우리를 대해주셨던 모습, 오늘 따라 너무 그리울 뿐입니다.” 아버지, 지금 얼마나 기쁘고 좋으십니까? 저는 아버님 살아 계실 때 당신 밑에서 신학 수업은 못해서 한이 맺히긴 하였고 또 안수 받은 목사가 되지 못해 훌륭하게 설교자로서 직접 강단에서 영혼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선 목회자가 되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는 일터, 즉 환자를 보면서 때에 따라 눈물로 기도도 해주고, 의심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변증적으로 가르치고, 확신을 주기 위해 이런 저런 말을 하며 권면하며 살고 있습니다. 가끔 목회자나 신학 교수의 일을 하는 것도 그려 보지만, 그래도 전 제가 하는 이 일에 적지 않은 기쁨을 가집니다. 단순한 아버지를 좋아했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당신의 온 삶의 열정을 당신이 “당신님”이라고 특별히 불러드리는 삼위일체 창조주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 성경에 쏟으신 것을 저는 어릴 적부터 알았습니다. 당신은 항상 두툼한 손가락으로 낡은 가죽 덮개로 된 온갖 가장자리에 간단히 코멘트를 써놓은 너덜너덜한 성경을 손에 쥐시고, 당신이 좋아하시던 파카 만년필로 된 굵은 글씨로 이곳저곳으로 선을 그어가면서 읽고 계셨죠. 때로는 조용한 소리를 내시면서 읽다가, 원고지에 굵은 글씨로 몇 자 적으시다가, 성경 원어를 찾고, 또 다른 서양 주석가들의 주석들을 펼쳐보시고 조용히 웃으시곤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전 어머님의 잦은 주의대로, “아버지는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바친 분인데, 내가 아버지 대접하려고 놔둔 것 건드려선 안 돼. 너희들도 커서 아버지처럼 살면 얼마나 좋겠냐!” 하시면서 당시로선 조금은 싫증나도록 저희들을 다독이시던 것 기억합니다. 저희들은 아버지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은 잘 알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기대하지 않았고 그런 단순한 아버지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어머니보다 더 좋아했으니까요. 당신은 평생 저희들의 옳지 못한 행동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교단적으로도 자녀들의 일로 많은 노고를 치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이 생명을 걸고 외치던 “교회끼리 소송은 안 됩니다”라는 주장에 찬성하지 않던 분들이 “자기 아들이나 잘 다스리라고 해!”라며 당신의 형님들의 비행까지 들고 나와서 강단에서 비평할 때 당신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합니다. 땅속으로 들어가고 싶으셨겠지요. 그래도 당신은 그런 형님을 끝까지 도우셨고 위해서 끝까지 기도하시다 가셨죠. “기도는 내가 죽은 후에라도 이뤄져!”라고 하시면서요. 정말 그랬습니다. 당신의 말씀이 맞았어요. 형님 세 분 다 참신한 신자로 이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를 많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니까요. 저희가 어릴 때부터 당신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당신을 재정적으로 도와 공부하게 했던 몇몇 미국인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가정예배 때도 기도하셨고 또 성탄절 때마다 카드를 보내셨습니다. 특히 Bouley(“뻘레이 할머니”) 여사는 그녀가 70년대 초반쯤 세상 떴다는 말을 들으실 때까지 계속 기억하시고 기도하셔서 우리는 그분이 누군가 하고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율법주의에 매이지 않은 용기 자랑스럽습니다 또한 당신은 선교사들을 그리도 사랑하셔서 당시 전후 복구를 위해 여러 해 봉사하고 가는 출항 스케줄 상 주일 아침에 본국을 향해 홀로 영구 귀국하는 스푸너 선교사를 그냥 돌려보내기가 너무도 안 되어 “나라도 가서 꼭 위로의 말이라도 해야 하겠다”고 말씀하시곤 당시 경직했던 고려파의 신학 교육 수장으로 있음도 마다 않고 본국으로 떠나는 스푸너를 위로하러 급히 주일 아침 시발택시를 잡아타시는 것을 어머니 손을 잡고 봤습니다. 바로 신학교 사택 앞이었죠. 그 후 저는 잘 몰랐는데 많은 어려움을 당하셨더군요. 전 당신의 용기와 율법주의에 매이지 않으신 아버님 당신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후에도 아버님은 주일 성수에 대해서도 어머니와는 다르게 이런저런 권면은 많이 하지 않으셨고 주일은 예배에 집중하라고만 하셨습니다. 또한 아버지는 주일 설교 마치시고 오후 서너 시간 편히 쉬시면서 저희더러 손발 좀 주물러달라고 하시곤 하셨던 것 저희들은 기억합니다. 선교사들의 노고를 늘 생각하셔서 당신의 생일에는 늘 한국 주재 선교사 가족들을 집으로 대거 초청하시곤 해서 어머니께서 교회 요리 잘 하시는 집사님들을 불러 모으시던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 당신은 말씀은 별로 많이 하시지 않았지만 정말 이해심 많은 분이셨다고 저는 자랑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70-80년대에 장발로 다닐 때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 하고 “머리 깎으라’고 하셨지만 당신은 대체로 침묵하시다가도 가끔 “그거 아이들 요즈음 추세인데 그냥 두라우. 당신 말대로라면 나도 지금 상투를 틀란 말이요?”라고 하시며 우리를 변호해 주시곤 하셨죠. 당신은 우리가 가족끼리라도 모였을 때는 혹시라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그들의 성취에 대해 조금이라도 폄하하는 말을 할 때면 늘 우리를 경계하신 것으로 우리 모두 기억합니다. 정말 아버지가 옳으셨어요. 제가 곁에서 봐도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폄하하는 말을 하신 기억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내 생각을 들여다보면 냄새 나서 다 도망가 버릴 거다” 아버지 당신은 진정한 개혁주의로, 인간의 부패성에 대해 깊이 느끼셨던 분이셨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지금 살아서 혜란 누님의 글을 보셨다 하더라도 당신 자신의 명예 훼손에 대해선 그다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내가 그랬지 않았는가? 당신들 누구라도 나하고 삼일만 가까이 있어보고 특별히 내 속에 들어와서 내 생각을 들여다본다면, 냄새 나서 다 도망가 버릴 거라고 말일세. 사실 난 내 딸 혜란이가 말한 것보다 더 나쁜 놈이라오”라고 말입니다. 당신은 늘 인간의 죄악상에 대해 뼈저리게 일러 주셨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여 “구원을 받았지만 항상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정예배 시간에 어린 저희들에게도 귀가 닳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신뢰할 바가 아니고 사랑할 바라”고도 말입니다. 인간은 의롭다고 칭해진 것이지 의로운 것이 아니므로 계속 성화해 나가야 한다는 개혁주의 진수에 충실하셨고, 인간이 아무리 악을 행해도 안타까워는 해야 하겠지만, 놀랄 것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바울 신학에서 악한 생각을 도모하는 인간을 헬라어로 ‘삵스’로 표현하였으며 단지 신체적인 몸을 뜻하는 헬라어 ‘소마’와는 구분해서 말한 부분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물론 이 부분은, 흑백 논리처럼 단순하지는 않다. 정암이 인정하는 대로, 바울이 두 단어를 기계적으로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고 혼용된 부분도 있는 것은 사실이나, 확실한 것은 정암은 인간에 대해 말할 때 ‘죄로 향하는 몸’(‘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나니’, 롬 8:6)을 말할 때와 ‘중성적 의미로서 몸’(‘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롬 12:1)에서 말하는 ‘몸’과는 날카롭게 구분하시곤 했다.] 제가 “아버지, 난, 교회에서 녹을 받지 않고 주님의 일을 할 거예요!”라고 말한 적을 기억하십니까? 그러자 아버님은 저의 교만한 마음을 걱정하시면서, “너 사람이 원래 다 진흙인줄 모르네? 사람은 자기가 뭘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돈을 받아도 별 것 아니고 안 받아도 대단한 것 아니다. 사람은 일정한 보수를 받으며 책임을 지는 것이 더 효과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사람이 두 가지 다 잘하기 어렵다! 너무 장담하지 말아라. 겸손해라”라고 저에게 경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의 의미를 되새기며 살아갑니다.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지 말라” 아버지, 당신은 소시 때부터 동양철학에 심취하시고 대학 중용 시경 서경 등을 거의 다 외울 정도로 섭렵하셨고, 또한 유교의 이단설이라 말씀하시며 장자나 노자에 대해서도 가끔 가정예배 때 인용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놀랍게 당신은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먼 분이셨습니다. 항상 짙은 스킨십으로 우리를 대하시고 함께 만들어낸 애칭을 자식들과 쓰기도 하시며(예를 들어 막내아들을 ‘거북님’이라고 부름) 우리로 하여금 거의 버릇없는 자식같이 만드신 당신. 식사하실 때 옆에서 함부로 눕곤 하면, 어머니께서는 “어른 식사 하시는데 누워있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지, 당신은 별로 관계도 안하셨고 허례허식을 너무 지나칠 정도로 차리지 않으셨던 당신. 며느리나 딸과 차의 뒷자리에 동석하시면 항상 그들의 손을 깍지 끼어 잡고 계시던 당신. 비록 세상적 기준으로 자상하고 상세하게 또한 방법론적으로 자식들을 사랑하지는 못하셨다 해도 늘 단순하고 진실하게 우리를 대해주셨던 모습, 오늘 따라 너무 그리울 뿐입니다. 아버지 당신은 권위에 대하여 성경적 진리를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동양철학을 하신 당신은, 지나친 것들은 성경적 원리에 의해 제거해야 되지만, 일반은총의 깨달음에 의한 동양적 윤리에서도 배울 것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가정예배 시에 말씀하시던 것들 중, “부모는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지만 이 세상에서는 다른 어떤 권위보다 더 깊은 권위를 소유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동양 윤리에서 말하는 “부모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온유와 울음으로 손을 붙들고 호소할지언정 부모에게 고함지르고 험한 말이나 혈기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유교적 진리는 그 자체로선 구원은 못 주지만,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만 건질 수밖에 없는 어떤 절박한 상황에서, 자기의 부모를 생각해서, 부모의 자식인 동생을 자신의 아들보다 항상 먼저 위험에서 건져야 한다”는 유교적 윤리는 지나치다고 하시며 잘못된 것이라고 일침을 가하셨습니다(필자는 여기서 정암이 한 말은 분명히 기억하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서 어디서 정암이 그런 글을 인용하셨는지 아직 찾아 봐야 합니다.) 참 균형 있는 좋은 가르침이라 여겨집니다. 항상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신 이유에서 권위를 가지듯, 우리를 이 세상에 있게 한 육신적 이유가 되고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그 점에서 특별히 가지는 부모의 권위도 무시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이 너무 와 닿는 이 시대입니다.
1103 no image <긴급진단 / 간통죄 위헌 결정을 반대한다> ‘남의 아내 도둑질하기’가 ‘담배꽁초 버리기’보다 경미하다니?_이광호 목사
편집부
2532 2015-03-03
‘남의 아내 도둑질하기’가 ‘담배꽁초 버리기’보다 경미하다니? <이광호 목사, 실로암교회> “간통죄 위헌 결정은 동성애와 동성 결혼 문제 물꼬 터주는 격” “다음 세대 염려했다면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을 것” 지난 2015년 2월 26일, 헌법재판소에서는 ‘위헌’이라는 딱지를 붙여 간통죄를 폐지했다. ‘성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 비밀 보장’ 때문이란다. 헌법 재판관이라는 자들의 무책임과 무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보편 윤리를 파괴하면서 시대적 변화를 핑계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길을 가다가 ‘담배꽁초를 버리면’ 경찰이 와서 범칙금을 물거나 잡아간다. 그러나 ‘남의 아내나 남의 남편을 도둑질’ 해도 법적으로 죄가 되지 않게 되었다. 그 배우자가 간통현장을 신고해도 경찰이 와서 도와주지 않는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는가? 다른 나라에는 이미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식의 구차스런 이야기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런 자들은 결국 자신의 부패한 감정에만 충실했을 뿐 장차 이 땅에 살아가야 할 우리 자손들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다음 세대를 염려했다면 그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이는 간통 문제에 대한 경제적인 손실과 보상에 연관 지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자기 자녀들이 앞으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 생각했다면 결코 그럴 수 없다. 헌법 재판소는 도리어 악법을 제시하면서 개인의 인권을 앞세웠지만 공공의 가치를 파괴하는 자신의 못된 모습을 보지 않았다. 가족 관계 가치관조차 무너져 헌법재판소라는 곳은 국민들의 근본 도덕과 윤리를 포함한 내용을 제멋대로 판단하고 유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지 않았다. 간통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될 더러운 죄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더욱 악하게 되면, 간통은 죄가 아니라고 판단한 자들이 마치 시대를 앞서간 인물처럼 평가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저들이 윤리와 도덕을 파괴함으로써 큰 해악을 끼친 인물로 기억해야 한다. 그들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녀들이 얼마나 큰 혼란을 겪을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에 허락된 성은 하나님의 선물에 해당된다. 그것은 욕정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생명의 존엄성에 연관되어 있다. 성경은 간음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죄인가 하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십계명 가운데는 ‘간음하지 말라’는 준엄한 명령이 들어있다. 그것을 어기면 하나님께 저항하는 범죄 행위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한 자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그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셨다. 간통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법적으로 제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성 포기를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그와 같은 판단에 동조한다면 사회를 어지럽히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전반적으로 볼 때 제정신이 아니다. 간음과 살인 가운데 과연 어느 쪽이 더 악한 죄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사람의 생명을 박탈하는 살인은 무서운 죄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한 가정을 파괴하여 죽이는 행위는 살인 못지않게 악하다. 욕정을 채우기 위해 남의 배우자를 도둑질하고 한 가정을 파멸에 빠뜨리는 간통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 헌법재판소는 간통죄를 폐지하면서 현 시대를 반영하고 개인의 인권과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이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저들이 생각하는 인권과 우리가 알고 있는 참된 인권 개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개인의 추한 인권만 앞세웠을 뿐 가정과 그에 속한 가족 구성원들과 사회적 인권에 대해서는 기본 인식조차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이제 악한 죄를 보고도 죄라고 말하지 못하는 혼탁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간통죄 폐지는 성도덕 의식 자체를 파괴할 것이 분명하다. 헌법 재판관이라는 자들의 도덕적 무지로 인해 앞으로 나라 전체가 성적으로 문란해 질 것이 분명하다. 교회의 자녀들은 그 악한 분위기 가운데서 힘겹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 나라의 장래와 자라나는 다음 세대가 심히 염려된다. 그렇잖아도 국가와 기독교 지도자를 자처하는 자들 가운데 더러운 간통을 저지르면서도 뻔뻔스런 태도를 보인자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악법과 권력에 달리 저항 할 방도가 없다는 사실이 아쉽다. 이와 더불어 대두될 심각한 문제는 간통죄 폐지가 동성애와 동성 결혼 문제에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성적 결정권을 앞세운 터에 성적 취향을 제한하는 것도 동일 선상에서 파악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장하는 아이들이 간통이나 동성애를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 배우게 된다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는 세상의 더러운 논리에 정신적으로 저항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를 상속해가는 성도들의 자세이며 어린 자녀들을 보호할 수 있는 길이 된다. 지상 교회는 결코 이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며, 간음 문제를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하는 악법에 대해서는 양심으로 거부할 수 있다. 교회는 절대로 이와 같은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1102 no image |개/혁/주/의/신/앙/강/좌|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신자들을 위하여_최덕수 목사
편집부
2823 2015-03-03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 최덕수 목사, 현산교회 > "신학적 지식보다 경건의 실천을 중요시하는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는 열심을 내는 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지적 추구에만 열을 올리는 형식주의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게을리 한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있는 신자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깨끗케 하는 일에 마음을 쓰게 될 것이며, 그가 나타나실 때에는 그와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하나님께 가까이(To be near unto God)’라는 책을 썼으며, ‘경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필립 야곱 슈페너는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이라는 책을 남겼다.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성화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함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 자신이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런 사실들은 신앙의 선배들이 경건을 얼마나 사모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하지만 경건은 몇몇 사람들만이 추구하는 덕목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신자라면 예외 없이 추구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신자의 덕목이다. 그러면 어떻게 모든 신자들이 소원하는 경건을 이룰 수 있는가? 1. 신자의 경건은 근본적으로 신앙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책을 쓴 헨리 스쿠걸은 “참된 신앙이란 하나님과 영혼의 연합이며, 바로 그런 상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경건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신앙을 ‘하나님과 영혼의 연합을 이루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경건한 삶에 참여하는 것’, 이 두 가지 요소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헨리 스쿠걸의 ‘참된 신앙’에 대한 정의는 신자로 하여금 경건을 추구할 때 범하기 쉬운 양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게 만들어 준다. 많은 신자들이 경건을 추구하다가 치우치는 한 극단은 신비주의다.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주관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려고 한다. 수녀가 되고자 깊은 묵상과 종교적인 삶에 몰두하기를 원했지만 억지로 결혼했던 프랑스의 신비주의자 마담 기용은 예수의 이름을 자기 알몸에 새겼다고 한다. 테레사 수녀는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을 보고 정신을 잃었다고 하며, 주상 수도사였던 시몬 스틸리츠는 높은 기둥 꼭대기에서 살았다고 한다. 성 안토니는 믿음의 신비를 묵상하기 위해 이집트 사막 지역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일보다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정열을 불태우는 일을 더 선호하면서 그것을 경건으로 착각한다. 경건을 추구하다가 치우치게 되는 또 다른 극단은 진정한 믿음을 갖지 못한 채 사람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형식주의다. 형식주의자들은 시선은 늘 사람을 향해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지 않은 채 경건을 추구하게 되면 ‘모양만의 경건’이란 사생아를 낳게 된다. 이는 내용은 빠져나가 버린 껍데기와 같다. 어떤 이들은 ‘참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이 경건을 이루고자 하는 소원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예에서 보는 바대로 사람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경건을 이룰만한 능력은 갖고 있지 못하면서도 경건을 추구하는 종교적인 사람은 모양만의 경건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고 결국 위선과 외식으로 치우치게 된다. 2. 성경은 신비주의와 형식주의라는 극단으로 치우친 신앙생활을 경계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분리된 채 하나님과의 교통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자의 경건은 실제적인 삶의 내용이 없는 관념에 불과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낼 능력은 없으면서 형식과 규례에 얽매이는 형식주의자의 경건은 아무리 그럴듯한 모습을 드러내어도 어디까지나 단순한 도덕적인 삶에 불과하다. 대중 앞에 가르치는 자로 있는 지교회 교사인 목사들과 신학을 가르치는 보편 교회의 교사인 신학교 교수들은 신비주의와 형식주의, 이 둘 중에 어느 쪽으로 치우치기 쉬운가? 목회자들과 신학교 교수들 중에도 신비주의적인 신앙 칼라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간혹 있긴 하지만, 대개 오랫동안 신학하는 환경에 있다 보면 가르치는 내용을 내면화하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형식주의적인 신앙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은 자신이 습득한 신학적 지식으로 자기 경건을 위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생각으로는 믿고 지식적으로 논하기는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복음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물론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적인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경건이 없는 지성은 무의미하며 도리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특히 복음에 대한 지성적인 이해에만 머무르고 복음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영혼은 물론 교회에도 상처를 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였던 토마스 할리 버톤이 젊었을 때 어느 노년의 목사님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고 한다. “성결케 되지 않은 학식은 교회에 아주 많은 해를 끼친다네”.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안다는 이들이 경건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 때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갖게 만들 듯이, 개혁주의 신학을 논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견지하는 신학을 실제적인 삶과 교회를 통해 구현해내지 못하면 의도하지 않게 사람들에게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경건이란 지성보다 오히려 마음에 속한 것임에도 많은 이들이 지적인 작업을 하는 것으로 그쳐 버리기 때문이다. 신학의 부요함과 풍성함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이런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3.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삶과 분리될 수 없다. 신학적 지식보다 경건의 실천을 중요시하는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는 열심을 내는 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지적 추구에만 열을 올리는 형식주의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게을리 한다. 성경보다 신학서적을 더 탐독하고, 성경자체가 말하는 내용보다 신학자들의 주장과 가르침에 더 관심을 가지며, 자기주장의 논거(論據)로 성경보다는 유명한 신학자의 주장이나 신학적 입장을 더 선호한다. 이처럼 단순한 학자의 신앙적인 지성에는 언제나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결함이 존재한다. 물론 이성적인 신학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청교도들이 믿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은혜를 주실 때 먼저 인간 이성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적인 추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필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은 거의 하지 않으면서 신학적 지식을 갖추어 가는 일에만 열심을 내는 편향적인 태도이다. 물론 이런 태도와 대척점에 있는 지성을 도외시하는 신비주의 역시 비판 받아 마땅하다. 교회의 선생으로 신학을 가르친다고 하는 우리들은 어떤가? 가르치고 전하는 일과 관계없이 자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설교하고 글을 쓰는 일에 힘을 쓰는 만큼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는 일을 즐거워하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어느 누구보다 교리와 신학적 주제를 잘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지식이 거룩한 정서로 승화되는 일이 내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실제에 있어서 그 사람은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알지 못하는 자이며 자신이 가르친 교훈의 절반만 아는 자이다. 한 사람이 교리를 잘 이해했는가의 여부는 교리를 얼마나 잘 진술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느냐의 여부로 파악될 수 있다. 교리에 대한 참된 이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며 겸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칼뱅의 제네바교리문답이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제1문 “인간의 삶의 중요한 목적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 다음, 제2문에서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여 세상에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의 삶의 근원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내용은 칼빈에게 있어서 신앙과 신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삶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4. 참된 기독교의 표시는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앞서 헨리 스쿠걸의 진술에서 살펴보았듯이 삶은 신앙으로부터 나온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믿음이 사람 안에서 내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원리로 작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믿음의 사람은 외적인 동기나 압박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며 세상의 유혹이나 협박에 끌려가지 않는다. 달콤한 약속에 현혹되거나 매수되지 않으며 율법의 요구에 억지로 반응하지 않는다. 악하고 죄된 것은 미워하고 옳고 선한 것은 좋아하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신앙과 신앙의 실천은 상호 유기적인 관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헨리 스쿠걸은 이런 원리를 믿음이라는 뿌리에서 나오는 네 개의 가지로 설명하였다. 네 개의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자비, 청결, 겸손’이다. 스쿠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완전함에 대한 기쁘고 즐거운 깨달음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온 마음으로 하는 순종과 최고의 복을 이끌어낸다고 하였다. 둘째, ‘사람에 대한 자비’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긴 악을 마치 자신에게 일어난 일처럼 분개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셋째, ‘청결’은 하나님의 완전함에 대한 흥미를 줄이는 어떠한 욕망도 거절하는 내적인 원리라고 하였고, 넷째, ‘겸손’은 충만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깊이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참된 기독교의 표시는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도덕적 수준이 높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자에게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자의 도덕성이 믿음에 뿌리를 두지 않으면 자기 의를 의지하는 바리새주의가 된다. 이적을 행하는 것이나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병을 고치는 것도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가룟 유다의 경우를 통해 보는 바대로 은사는 은혜 없이 발휘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늘 조심해야 한다. 지성인의 대명사인 일반대학 교수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잘 가르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교회의 교사인 목사와 신학교 교수는 말씀을 논리적으로 잘 전하는 것으로 자기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개 현대 교회 교사들은 머리에 있는 내용을 가르치지만, 과거 신앙의 선배들은 내면화된 지식을 가르쳤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보다 자신에게 더 많이 설교하였으며 스스로 수업하고 스스로 꾸짖고 스스로 훈계하였다. 신자는 이러한 경건을 추구해야 한다. 경건은 신학자의 연구의 열매가 아니며 신비주의자의 자기 수고의 결과도 아니다. 엄밀한 지식을 이해하는 마음도 아니다. 경건은 기도로서 하나님의 귀에 소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묵상하는 것이며, 즐거운 찬송을 부르는 것이다. 또한 경건은 위대한 교리들 속으로 들어가는 마음이요 생명의 양식을 먹는 일을 기뻐하는 마음이다. 5.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의 임재 앞에 나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경건은 거듭난 사람의 심령 안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다. 경건은 신자의 영혼 속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타오르는 신기한 열정이다. 혹자는 ‘신자란 하나님에 취해서 사는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진리의 깃발 편집장을 지낸 모리스 로버츠는 “한 성도에 대한 평가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통함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입맛을 다시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경건과 경건의 실천적인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지런히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의 임재 앞에 나아가야 한다. 이것에 관한 한 최고의 모본은 성자 예수님이다. 성자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본질에 속한 하나님으로 영광과 능력과 권세와 힘에 있어서 등등하다. 그럼에도 성자는 성부께 나아가 기도하는 일을 등한히 하지 않으셨다. 그분에게는 우리와 달리 고백해야 할 죄가 없으셨고, 구해야 할 세상의 이익들도 전혀 없으셨다. 그럼에도 주님은 성부 하나님과 대화하기를 기뻐하셨다. 주님은 기도하시기 위해 자주 세상에서 물러가셨으며, 온전한 헌신과 기쁨으로 온 밤을 지새우시며 하늘에 속한 일에 힘쓰셨다.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대중들의 요청과 세상의 흐름에 따른 인기를 거부하셨으며, 제자들의 성공지향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시고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의도와 목적에만 전념하셨다. 주님은 경건의 모범을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기도 하셨다. 신자는 이런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자신이 가진 신분과 위치가 어떠하든지 기본적으로 우리는 신자다. 신자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묵상하는 일에,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은혜의 수단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한다. 은혜의 수단이 없는 경건은 메마르기 때문이다. 신자는 항상 자기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하며 그런 심령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무엇보다 신자는 신학적인 지식은 물론 하나님을 향한 따뜻한 사랑의 감정을 가져야 한다. 단순한 감정이 아닌 의지를 포함한 사랑의 감정을 가져야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감정은 영혼의 방향이라고 하였고, 헨리 스쿠걸은 “사랑은 영혼의 모든 기능과 성향들이 결정되는 강력하고도 주도적인 열정이다”라고 하면서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은 영혼이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 평가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람에게 있어 무엇을 열망하느냐 하는 문제는 너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에 따라 영혼의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마치는 말 당신은 누구를 사랑하며 무엇을 갈망하는가?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자연스럽게 닮게 된다. 친구들과 연인들은 행동뿐만 아니라 목소리와 제스처, 분위기까지 서로 닮는다.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당신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를 얼마나 닮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이 일을 얼마나 소원하는가?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있는 신자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깨끗케 하는 일에 마음을 쓰게 될 것이며, 그가 나타나실 때에는 그와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는 평생 추구하며 훈련했던 경건의 절정을 보게 될 것이다. 신자인 우리는 이 날을 바라보고 쉬지 않고 경건의 실천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1101 no image |박윤선의 5분 새벽기도 설교 <41>| 신앙을 보호하자
편집부
2083 2015-02-10
신앙을 보호하자 시편 42편 1-5절 “하나님은 신자가 성경 말씀의 은혜로 신앙 유지하도록 인도하셔”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보호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신앙을 보호할 수 있을까요. 1. 주님 사모하는 마음을 배양하자 시인 1절에서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은 귀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모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갈급한 자를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55:1)고 하였습니다.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갈망함에 있어서 열도가 높은 사람들입니다. 2. 낙심하지 말라 시인 5절에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라고 합니다. 사람이 은혜를 사모한다고 하다가도 자기의 기대대로 은혜를 받지 못하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어떤 신자는 사업 형통의 은혜를 기다리다가 그렇게 되지 아니하여 낙심하기도 합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사업을 지혜롭게 운영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도우시되 특별히 영적으로 도우십니다. 이 세상일에서는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신자도 실패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불신자처럼 낙심하지는 않습니다. 신자는 그때에 오히려 영적으로 굳게 섭니다. 어떤 신자는 은혜를 잘못 사모함으로 그것을 받지 못할 때에 낙심하기도 합니다. 남이 받은 신비한 은혜를 자신도 받으려고 애를 쓰다가 그것을 받지 못하면 낙심합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물론 신비한 은혜도 옳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부합하다면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가 신비한 은혜의 체험이 없어도 성경 말씀의 은혜로 신앙을 유지하도록 경륜하셨습니다. 또 어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기를 힘쓰다가 뜻대로 잘 되지 아니하면 낙심합니다. 이것도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사람이 단기간 내에 완전하여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점차적으로 자라가기 마련입니다. 만일 일시에 완전해진다면 세상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 머물러 있는 때라도 교만해지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천재를 부러워하여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그에게 “천재가 겸손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 천재가 겸손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이란 천재가 되는 것보다 귀합니다.
1100 no image |긴/급/진/단| 인문학 시대와 복음에 관한 이해_노승수 목사
편집부
2666 2015-01-27
인문학 시대와 복음에 관한 이해 < 노승수 목사, 강남성도교회 >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통속적 메시지가 강단을 점령하고 있어” “설교는 가슴 치고 주님 앞에 회개하도록 하는 복음의 부름이어야” 근래에 들어 사람들로부터 주목받은 것이 인문학입니다. 인문학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은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이 행복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을 겪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각종 매체와 문화센터마다 인문학 강의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찍부터 삶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전세계적이며 20세기 후반 들어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한 예로 1997년 세계보건기구가 건강의 정의를 바꾸었는데 거기에 영적 안녕(spiritual well-being)이라는 개념을 첨가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자 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의 핵심적 주제가 있다면 바로 “내가 누구인가?”(Who am I?)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을 찾고 싶어 합니다. 소득 수준이 높아질수록 삶의 여유가 생길수록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것을 비단 사람들의 소득 문제로만 국한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서울시가 개최했던 노숙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에 먹을 것이라도 얻을까 해서 참가했던 어떤 노숙자는 서너 번의 강의를 참석한 후에 말끔한 옷차림으로 강의에 나타나기도 했는데 자기 삶의 고귀한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니 이렇게 살 수만은 없었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문학적 주제로서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은 인류의 심대한 질문 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이 인문학적 질문에 가장 잘 대답해 줄 수 있는 책이 있다면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두 가지 사실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 이르러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에 이르러야 합니다. 둘째, 그 지식이 불러오는 또 다른 지식에 이르러야 하는데 바로 자기를 아는 지식에 이르러야 합니다. 애둘러 말했지만 진정하게 하나님을 아는 일은 자기를 아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현은 자신에 대한 애통에서 발견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깊은 연구는 반드시 깊은 자기에 대한 성찰로 이어집니다. 이런 점에서 자기 성찰은 면벽의 수행이나 어떤 신비적 체험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경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과의 조우를 통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은 우리의 깊은 죄성의 각성과 더불어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우리가 언제 그의 자비를 알겠습니까? 멸망을 당해도 싼 우리가 여전히 용납되고 있고 수용되고 있으며 생명이 보존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과 하나님의 자비를 인식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 신학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인식을 상실했습니다. 자기 성찰의 상실은 곧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한 인식의 상실로 이어졌습니다. 애통이나 회개 없는 믿음은 하나님을 공허한 개념으로 만들었고, 너도 나도 지식 자랑과 남들이 전하지 않은 색다른 주장과,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을 내놓기에 급급하고, 사람들은 아덴 사람들처럼 새로운 것을 듣는 일 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습니다(행 17:21).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이 설교, 저 설교를 기웃거리거나 혹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듣기에는 힘을 쓰지만 정작 자기 삶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목회자도, 직분자도, 성도들도 이 시대의 가장 큰 위기는 자기 영혼에 대한 애통함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멸망의 길인 줄도 모르고 그저 새것이면 부나비처럼 달려들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간 새로운 것이 없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팔이 짧아졌거나 교회가 생명의 구원선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는 새로운 것을 듣지 못함에 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진정한 공의와 자비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 탓에 자기에 대한 깊은 애통과 탄식을 결여한 가난함이 없는 세대를 맞이하여 오늘의 위기에 직면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 불분명하거나 오해가 가득한 주의주장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은 무율법주의자이거나 율법주의자로 귀착됩니다. 무율법주의자라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십계명에 대한 이해의 결여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십계명을 강조해서 설명하거나 가르치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반면에 십계명을 가르치지만 그 내용이 형식적 율법주의로 가득해서 오히려 율법주의자들을 양산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 원리로서 의를 드러내는 율법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기 마련입니다. 혹시라도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는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매우 운이 좋은 신자입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께로 나아와야 한다는 진리를 선포하는 경우를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대다수의 건강한 목회자들이 바르게 사역하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단에서 복음보다 윤리나 율법적 요구가 난무하거나 혹은 율법 없이 방종하는 자유의 메시지만 가득한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힘을 잃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의 부패를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이것도 고치고 저것도 바꾸지만 정작 강단에서 선포되고 있는 복음의 위기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강단은 번영신학에 물든 거짓 복음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으며 기복 신앙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서 고품질의 강의들을 쏟아 내고 사람들은 그곳으로 몰리고 있는데 정작 교회는 인문학적 질문에 대한 가장 적실하고 최적의 대답인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통속적 메시지로 강단을 점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세술, 성공비결, 긍정적 신념과 같은 이단 사설에 가까운 것이 강단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단은 무대로 점점 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강설하는 강단의 위기입니다. 설교는 우리 가슴을 치고 주님 앞에 서도록 하는 복음의 부름이요 도구여야 합니다. 복음의 강단이 회복되지 않고 어떤 변화를 위한 노력이나 어떤 구조의 개혁이나 인적 쇄신조차도 결코 우리를 바꾸지 못합니다. 복음만이 참 생명의 길입니다.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