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39 no image 2000년 교단이 해야할 과제/ 강성일 목사
rpress
2020 2000-01-27
-인재와 후진 양성에 많은 비중을 강성일(세영교회 목사) 개혁교단의 기치를 흔든 지가 성년의 나이테를 넘기는 때에 때론 진통도 없지 않았으나 개혁정신의 이념에 대한 집념 때문에 고고히 오늘에 이르게 됨은 실로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로 표현되는 개혁교단의 잘 결집된 이념지표가 더 발전적으로 그 폭과 영향력이 확대되기 위해서는 교단정책이 추구하는 방향이 뚜렷해야 할 것 이다. 그것은 인재양성을 많은 비중으로 주력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모든 일이 그렇지만 더욱 복음전도와 선교사역에는 신실하고 유능하며 능력 있 는 일꾼들을 통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실로 우리 교단의 오 늘의 기반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통한 성실한 목회자 양성이 있었기 때문이라면, 앞으로 이 신학교에 더 많은 유능한 인재들이 양성될 수 있도 록 학교에 대한 후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그 다음은 차세대의 후진 양성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소속교 단 교회의 청년대학생 및 중고등학생들이 개혁교단 교회에서의 생활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하고, 다음 세대에 이 교단을 이끌어갈 결집 된 힘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교회 는 개교회 중심의 청소년 교육에만 안주해서는 안되며, 또 교단은 교단 차 원에서 이들에게 바른 신학의 신앙과 생활의 문화가 형성될 수 있도록 연 합과 일치의 기회를 만드는 데 제도적 받침이 있어야 한다. 지도부에서 금년 2월에 제3회 중고등부 연합수련회를 개최하지만 지역 교 회는 개 교회의 벽을 넘어 청소년들이 유대와 일치를 통해 신앙의 시야를 넓히고 연합훈련을 통해 바른 신앙의 문화를 이루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 기 위해서는 모든 교회가 이 연합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할 뿐 아니라 충회 현실을 감안, 재정후원으로도 협력하여야 교단의 장래는 밝아질 것이라고 본다. 중고등학생 중심의 년1차 정기적 연합수련회 개최의 발족은 늦었지만 다행 한 사업이고, 대학생에까지 연합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도부의 활동이 더 필요하고, 아울러 중요한 것은 의욕적이고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교 단의 적극적인 정책배려와 재정의 받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개혁교단이 바른 교회의 기치와 이념 아래 부흥하고 계속적인 발전을 위해 서는, 교단정책은 마땅히 인재와 후진 양성에 제일의 비중을 두는 것이 거 시적 이상정책이라고 본다.
38 no image 2000년 교단이 나아갈길/ 김정태 목사
rpress
2302 2000-01-16
-장로정치인 민주적 정치특성 살려 국제화시대 열어가길 김정태 목사 / 정책위원회위원장 지금 우리는 21세기에 진입하여 첫 해인 2000년도를 맞이하였다. 지난 20 세기는 도전과 시련의 1백년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개혁교단도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을 이념으로 하여 출범한 지도 어언 20년이 되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먼저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자만 과 불충을 회개하며 개혁의 시행착오를 자인하며 겸허한 자세로 진리의 근 본이시며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전도를 의탁하는 자 세를 가져야 하겠다. 왜냐하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잠 19:9). 유대 격언에 “바른 것을 배우는 일보다 바른 일을 행하는 것이 더욱 중요 하다.” H.후버는 “행동이 없는 말은 이상주의의 죽음이다.” F.W.로버트 슨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알고 들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런 명언을 기억하면서 2000년도 교단이 나아갈 길에 대하여 몇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 교단은 국가와 민족에게 희망을 안겨주며 어둡고 후패한 사회 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며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에 바른신학, 바른교 회, 바른생활을 구현하는데 더욱 헌신해야 하겠다. 이런 막중한 책무를 감 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조력과 우리 자신의 부단한 개혁과 힘의 결집이 절대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 우리 교단은 대형화와 국제화시대에 생존하기 위하여 개인주의를 버 리고 모든 지혜와 역량을 모아야 하며 불필요한 전력을 소모하지 말고 겸 손한 자세로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즉, 우리 총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언제나 어디서나 앞장서 야 할 것이며 이래서 기도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목회자는 물론 전국 교회와 성도들이 하루에 한번이라도 총회,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기독교개 혁신보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원을 끌어들이는 것 이며 기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 교단은 각 치리회에서부터 바른 행정을 펴며 말씀과 규례를 잘 준수하며 실효있는 정책을 세워 하나님 나라 건설에 이바지하며 항상 내실 에 충실해야 하겠다. 우리 교단은 장로교이다. 장로회 정치를 해야 한다. 이 정치는 지교회 교인 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이다. 이래서 미조직 교회는 헌법에 준하여 세례교인 25인 이상이 되면 속히 장로를 세워 목사와 장로가 협의 하여 지교회를 운영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지교회를 바로 세워 나 가는 작업이 구체화 될 때 교회들은 성장하고 후배들의 목회 진로는 밝으 며 교단의 터전은 날로 견고하여 한국 교회를 선도하며 국내 전도와 세계 복음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37 no image 2000년 교단이 나아갈 길/ 김종화 목사
rpress
2743 2000-01-15
계시의 창문 통해 역사와 시대 바라보는 안목을 갖춰야 김종화 목사 /농어촌부장 “2000년도에 교단이 나아갈 길”에 대해 글을 쓰라 한다. 길(道)은 이미 나 있지 않았던가! 우린 그 길 위에서 걷기도 하고 또는 뛰기도 하고 여기 까지 와 있지 않았던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우리 교단만의 길이어선 안되고, 나만의 독불장 군식 길이어서도 안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길이어야 하고, 우리 주 예 수 그리스도의 길이어야 하고, 이미 내 안에 거주하고 계신 성령 하나님의 길이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 길을 잘 알아서 잘 걸을 수 있겠는가가 과 제일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잘 듣고 잘 깨달을 때, 그리고 그분을 잘 알아 갈 때 자연스럽게 되어질 일이 아니겠는가.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섭리로 예정된 길이었던 그의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시기 바로 전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 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 기도하셨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교단이, 우리 지교회들이, 교역자님들이,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교사님,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우리 주님을 더욱 많이 알아 가려는 애씀과 열심이 지난 해보다 더 많아지기를 원한다. 그리되면 자연 스럽게 계시의 창문을 통해서 역사를, 시대를 내다보는 안목을 갖게될 것 이다. 바로 하나님의 안목을 갖게 될 것이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므로 우리 인간계에 시간의 시작이 있게 하셨고 공간이 있게 하신 하나님께선 만물의 종국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계 21:1-8)!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 라”(계 21:6). 하나님의 길이 이미 고속도로처럼 나 있는데 2000년도의 교 단의 나아갈 길을 말하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굳이 말하라 한다면 2000년 첫달엔 제8회 사모세미나의 길이 있고, 2월엔 제3회 전국중고등부 심령수 련회로 가는 길이 있고, 또한 2월엔 계단공과 커리큘럼을 위한 2차 공청회 가 예정되어 있고(실로 작은 교단이 간덩이도 커서 계획하고 있는, 그러나 한국 교회에 크게 공헌하게 될 것이다), 5월엔 교직자 수련회의 길이 있고, 전도부, 사회부, 선교부, 각 상비부가 가야할 길이 있 고, 각 지교회가, 각 노회가 각기 나름의 길들을 주님 안에서 신실하고 건실하고 충성스럽게 가 는 길들이 있다. 우리 각 개개인들의 길들이 있어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 갈 길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 길을 잘 따라 갈 때 각기 서 있는 위치와 자 리에서 소금, 빛, 향기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01년에 열려야 할 2001년 도농선교대회의 갈 길도 있어서 우리 교단이 한 몸 한 생명임을 다시 확인하는 길도 있겠고, 우리 지교회 들이, 우리 각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사랑의 교제를 복되게 나 누게 될 길도 있겠다. 오, 주님! 우리 교단을 이제까지도 축복하셨사오니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도 축복하소서! 영광 받으소서!
36 no image 2000년 교단이 나아갈 길/한양훈 목사 (4)
rpress
2350 2000-01-15
-조금씩 인내하고 서로를 감싸며 한 길 가는 동료의식 필요 한양훈 목사/ 사회부장 모두가 어려운 때에 개인적으로 지난 한해를 기쁨으로 산 것이 감사하다. 물으나마나 새해에도, 21C에도 역시 살아온 대로 살 것이다. 사람은 별로 변하지 않으니까. 이 시점에서 교단을 생각하며 이런저런 바람이 없을 리 없다. 아무래도 사랑하고 화목하는 일이 급선무일 것이다. 교단의 지도자들과 합 신의 선후배들이 진정 서로 하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는 지금까 지 오직 바른 것을 추구하고, 몸부림치며 달려왔다. 이젠 20년의 세월이 지 났고 어느 정도 개혁을 성취하고 안정적으로 나가고 있으므로 우리의 성향 과 병행하여 사랑과 이해와 포용력을 발휘하였으면 한다. 교단 안팎에서 문제를 풀어갈 때 이런 차원에서 생각하고 해결하면 좋을 것이다. 어느 때 는 개혁의 진행이 미진하고, 의식 없이 행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조금만 인 내하고 서로를 감싸며 한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나됨의 방향을 정해놓고, 혹시 나 한국 교회의 공통된 병폐가 없 는지를 늘 살펴야 한다. 우리는 큰 교단, 큰 학교, 큰 교회를 포기하고 나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목 사인 부모 형제와 갈라섰다. 가장 주된 목표가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의 목회는 죽었다 깨어나도 개혁 지향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과거의 패 거리 정치를 탈피해야 하며 물량주의와 세속적 냄새는 일찌감치 제거해야 한다. 우리의 사역이 평가를 받게 될 때 지나치게 교회성장과 연결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큰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교단에서 중용되고 여기 저기서 대접을 받는다는 소식이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는 몰라도 너도나도 무리수를 두어 교회를 확장하나, 수많은 상처만 낳을 뿐이다. 인위적이며 조작된 성공과 품위는 쓸데없는 동료간의 경쟁과 시기심을 유발하며 하나 됨을 깨뜨린다. 우리의 자존심과 품위는 그런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 역의 결과는 오랜 후에 지역과 은사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진실로 하나됨은 개혁정신과 실천, 그리고 투철한 동지의식, 여기에 한번더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 자세에서 자라고 열매맺는다. 이것이 금년, 아니 영원한 우리 교단의 목표이기를 소원한다.
35 no image 2000년 교단이 나아갈 길/ 박윤성 목사 (1)
rpress
2383 2000-01-15
목회자로서의 이미지 부합되는‘강도사’ 명칭 생각해 보아야 박윤성 목사/ 고시부장 한국장로교회가 어느 때부터 강도사고시를 시행하였는지 그 명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 강도사라는 직책이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장로회총회 가 조직된 직후부터라는 것을 감안할 때 1911년 이후부터 있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장로교회에 있어 강도사 직제가 있어온 것은 근 1 백년 가까운 연륜의 일로 믿어진다. 이동안 강도사 직제에 대한 언론도 없지 않았으나 역시 강도사에 준하는 준목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목사직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설 교하며 전하는 일이 얼마나 중차대한 일임을 상기케 한다. 이제 우리 앞에 2천년의 새역사의 장이 열리고 있다. 교회는 강도사직의 존립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으며 새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정책적 결단이 있어야 할 때가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먼저 강도사고시 제도가 계속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답 변은 강도사 고시는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로서의 교양과 소명은 분명히 공적 인정을 거쳐야 할 중차대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강도사’라는 명칭을 고쳐야 한다. 한문과 그 의미가 중요시 되 던 지난 세대에는 적합했겠지만 오늘에 있어서는 부적합한 명칭이다. 그러 므로 강도사는 그 명칭부터 개정해야 할 것이다. 명칭의 개정은 강도사직 에 새로운 이미지가 주어질 것이며 또한 강도사 자신들에게도 새로운 자부 심이 주어질 것이다. 다음으로 강도사고시가 현재와 같은 학과목 편중에서 인격과 소명의식에 대하여 보다 중점적으로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목회자들의 도덕성과 윤리성의 타락은 교회와 목회자 자신들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있 다. 고시부는 이제부터 이 점에 대하여 관심을 쏟고 강도사고시를 시행해 야 할 것이다. 당회장과 노회의 추천에는 목회자로서의 품위와 소명의식에 대한 확실한 소견서가 첨부되었으면 하는 주문이 간절하다. 마지막으로 강도사고시 응시자들은 합격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 에서 자신을 한번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이와같은 자기판단이 없이 목회자가 된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목회자 가 될 것이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34 no image 2000년 교단이 나아갈 길/이선웅 목사
rpress
2030 2000-01-13
-우리 교단의 참신한 이미지 계승시키는 전환점 되야 이선웅 목사 1981년 9월에 출범한 우리 교단이 올해로 20년째를 맞이하게 되었다. 나이 로 하면 이제는 성년이 다된 셈이다. 특별히 금년은 뉴밀레니엄이 시작되는 해라서 그런지 감회와 설레임과 기 대가 여느 해와 다르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금년은 우리 교단에 있어서도 ‘전환점’을 이루는 해이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한 해가 되고 있다. 지난 20년을 뒤돌아 볼 때 우리가 특별히 꼭 집어서 자랑거리로 내세울 만 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러나 필자가 우리 교단에 대해 깊은 애정과 함께 긍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우리 교단이 가지고 있는 ‘참신한 이미지’이다. 부연하면 ‘비교적 참신한 이미지’ 이다. 이것은 필자 스스로의 자찬이 아니다. 그리고 필자만의 주장이 아니다. 우 리의 시각이 아니라 타교단 인사들, 또는 타교단 소속 교우들의 평가이다. 물론 우리가 무엇을 특별히 잘해서가 아니 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그동안 보여온 여러 가지 ‘얼룩’ 때문일 것이다. 금년은 뉴밀레니엄이 교차되는 시점으로서의 ‘전환점’이라는 의미도 있 지만 우리 교단으로서는 앞으로 소위 합신세대가 선배들의 뒤를 이어 총회 를 섬겨야 할 ‘전환점’이라는 의미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렇다. 필자의 이 말을 어떤 정치적 의도로 해석하는 일 이 없기를 바란다. 우리가 지금 ‘전환점’을 맞았다고 하는 필자의 이런 생각은 그동안 선배 목사님들과 본 교단 여러 어른들이 애써 세워놓은 아 름다운 전통을 우리 후배들이 잘 계승해 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나온 표현일 뿐이다. 필자는 필자와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본 교단에 속해 있는 것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만족해 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일을 바 르게 하려고 하는 정신 때문이다. 총회때 은혜스럽게 총회장을 선출하는 모습과 그리고 합신에서 시험볼 때 감독관 없이 시험보는 것 등을 그 대표 적인 예로 들고자 한다. 바로 이런 귀한 전통을 계승해 나가는 일은 우리가 많은 일을 계획하고 어 떤 큰 일을 해 나가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33 no image 새해의 신부/정승진 목사(행복마을에서 온 편지 저자)
rpress
2741 2000-01-04
32 no image 교회와 뉴 밀레니엄/장경재 합신이사장
rpress
2109 2000-01-04
개혁에 화합과 희생정신 필요 장경재 목사 새 천년을 맞는 우리 개혁교단의 비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역시 삼대 이념 이라고 생각된다. 첫째는 바른 신학 운동이요, 둘째는 바른 교회 운동이요, 셋째는 바른 생활 운동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 안에 바른 신학 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1980년 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설립케 하시고 지금까지 일 천 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한국 교회와 지구촌 곳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지 사충성 하고 있다.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 알므로 최후로 발악하여 신 신학 자유 주의 사상과 각색 이단과 무신론 유물공산주의와 적그리스도를 일으켜 온 천하를 꾀어 마귀를 따르도록 활동하고 있다. 이런 위기에 우리 한국 교회 가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붙잡고 나가는 바른 신학 운동이 요청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우리로 하여금 구원 얻는 지식에 이르게 한다. 위대한 구원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데서 일어났 다. 칼빈이나 루터가 그랬 다. 1918년에 화란은 공산국이 될 뻔하였으나 위대한 지도자 아브라함 카 이퍼가 4년간 총리대신으로 사역한 결과 그 나라는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때에 레이덴 대학의 자유신학 사상을 가진 당이 있었으나 그 당은 시국 을 수습하지 못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위대한 삼대 칼빈주의 학자 가 운데 하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 특히 우리 개혁교단의 교직자들과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합신과 개혁교단의 사명을 명심하고 교회의 화평과 성결로써 단합하고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아야 된다. 특별 히 정신차려 성경을 읽음과 깨어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된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 하시고,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다(마 5:13-16). 참된 경 건 생활은 세상과 격리되어 사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사람들과 잘 화합하 여 나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유익하게 하려는 이웃 사랑의 생활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우리의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 운동은 하나님을 높이는 운동이 다. 이 일은 인력으로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할 수 있다. 그럼으 로 이 개혁 운동은 동시에 기도 운동이어야 한다. 기도 없는 운동은 마침 내 인본주의로 떨어지게 된다. 우리 교단의 모든 교회가 하나님 앞에 기도 의 불을 붙여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한국교계와 북한 동포들과 나아가 지 구촌의 모든 민족들에게 밝히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31 no image 교회와 뉴 밀레니엄/박봉규 총회 총무
rpress
2809 2000-01-04
미래 지도자 양육에 투자해야 박봉규 총회총무 저물어 가는 20세기를 정의하기를 예일대학의 사학자 헥스터(J. H. Hexter)는 ‘혼돈의 시대,’ 하버드대학의 사회학자 소로킨(Pitrim Sorokin)은 ‘위기의 시대,’ 영국의 시인 오덴(W. H. Auden)은 ‘불안 의 시대,’ 미국의 경영학자 드러커(Peter Drucker)는 ‘불연속성 시대,’ 하버드대학의 경제학자 갈브레이트(John K. Galbraith)는 ‘불확실성 시 대’라고 말했다. 우리 소시민이 보아도 20세기는 변화의 시대인 것만은 사실이다. 특별히 교통, 통신, 원자력, 컴퓨터, 우주개발, 생명공학 등은 가히 혁명적인 변화 를 가져왔다. 이러한 20세기를 보내면서 다시 새로운 천년(New Millennium)인 2000년대는 어떤 세상이 올 것인가? 먼저, 뉴밀레니엄이란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밀레니엄이란 말은 성경 계시록에서 나오는 천년왕국설에서 나온 말로서 그 의미는 ‘평화와 번 영’ 그리고 ‘행복이 깃드는 황금시대’란 뜻이다. 물론 이 말은 서기 999 년을 보내고 1000년을 맞이하면서도 기대와 감격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이 제 또한번의 천년을 맞으면서 새로 오는 2000년대는 어떤 세상이 올 것인 가?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그의 책 『메가트랜드 2,000』에서 “21세 기는 종교적 영성이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으며, 물리학자 프리쵸프 카플라는 그의 책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에서 “미래는 총체적이고 종합적이고 모성애적인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두 학자의 말은 그 속에 기독교적인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미래 세계는 다변화되고 복잡해지고 빠른 세상이라 많은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욱 인간의 한계를 절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는 분명히 기독교적 영 성이 없으면 소망스런 비전도 없고 성공도 없고 지도자가 될 수도 없을 것 이다. 특별히 다양성 중에 통일성을 기반으로 하는 기독교의 사상에서는 영성이 없이는 주어진 과업을 완수할 수 없을 것이다. 경제학자 아담 스미 스가 시장경제론을 말하면서 시장경제를 온전히 이끌어 가는데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고 했는데, 그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영성 의 원동력인 하나님의 도움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뉴밀레니엄 시대의 비전은 교 회가 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을 양육해야 하는데, 그 인물은 깨끗한 양심에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기독교적 사상을 가진 성숙한 기독 교인들이어야 한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 평화와 번영이 있고 행복이 깃드 는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해 나갈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몰락했지만, 유 물론주의는 계속해서 자본주의 국가에서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무엇이가? 그것은 인본주의 사상 때문이다. 인본주의는 바벨탑이며 그것은 한계가 있 고 결국은 멸망하게 된다. 21세기는 기독교 영성이 충만한 자만이 새로운 비전을 가질 수 있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30 no image 교회와 뉴 밀레니엄/강경민 목사
rpress
2257 2000-01-04
파루시아 준비하는 원년이길 강경민 목사 변하는 것들 가운데서도 변치 않는 것이 있고, 변치 않고 있는 것들 가운 데 반드시 변해야만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참된 지혜이다. 새 천 년이 돌아온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2000년 1월 1일의 태양이나 1999년 12월 12일의 태양이나 매양 한 가지임에 틀림 없을 터인데 말이다. 새 천년 새 천년하는 것을 거의가 다 장사꾼들의 술 책이다는 것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천년이 의미가 있는 것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역 사에는 종말이 있고 새 천년은 그 종말의식을 심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역 사에 종말이 없다면 역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허무와 쾌락의 순환이 있을 뿐이다는 것이 정직한 인식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끝이 있기에 역사 는 어제와 오늘이 비교되어야 하고 끝이 있기에 그날을 준비해야하지 않는 가? 그런 의미에서 새 년은 우리의 종말의식을 한층 고조시켜 주는 것이 사실이다. 주님 만날 준비를 점 검하는 것이 새 천년의 의미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 종말이 있음을 힘있게 알리는 것이 새 천년의 비전임을 아를 알아 야 한다. 그런가하면 새 천년은 변해야만 할 것이 변해야 하기 때문에 우 리에게 보다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세상의 변화속도는 급류와도 같 은데 교회만 변화되지 않는 문화적 수구세력으로 남아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요 위험한 일이다. 새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이념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진리가 입었던 시대 적인 옷(문화)을 벗어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새로운 것은 본질에 대한 충 실함이다. 문화적 수구성을 본질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과감한 문화적 진보성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장년층이기 때문에 새로운 문화에의 적응속도가 뒤떨어 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서 새벽의 노래, 신앙의 노래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변화시켰던 나이가 30세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요셉 역시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지 않았던가! 유교질서에 멍든 장 유유서의 정신으로는 문화적 창조성을 발휘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한 다. 새 천년에는 교회와 지도자들이 젊어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 교회의 비전을 영속화시키는 관건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29 no image 교회와 뉴 밀레니엄/윤석희 목사
rpress
2213 2000-01-04
본질적인 의식변화 추구해야 윤석희 목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받았다. 피조물의 면류관인 인간에 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죄로 인해 이즈러지고 깨어졌다. 역사의 변천과 더불어 발전한 문화는 더 발전적이지 못하고, 악해지고 타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여러번 받았다. 노아시대의 홍수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그것이다. 새로운 천년시대가 열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벅찬 감격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어떤 마음과 자세로 맞이하고,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 인가? 이것이 문제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 교회가 큰 숙제를 맡은 격이다. 여기에 대한 답이 있는가? 교회는 본질적인 문제로부터 답을 찾아야 한다. 위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다. 새 천년시대에 모든 인류가 우상을 버리고, 세상 사랑을 포기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위기로 바꾸어야 할 책임이 교회에 있다. 성도들이 예배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 삼위일체교리나 기독론, 성령론이나 교회론까지 어느 정도 발전시켰다. 이제는 창조론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 각한다. 창조와 재창조의 맥을 잇는 깊은 연구의 책임이 교회에 있다. 이런 사명을 교회가 감당하여 온 세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해야 하겠다. 일반(자연)은총과 특별(초자연)은총을 잇는 연구의 책임이 교회에 있다고 생각한다. 또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하여 양육하고 교육하며 훈련할 책임이 있다. 교 회 안에 어린아이가 없도록 해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튼튼하고 견실한 성 도들이 되도록 해야 할 책임이 교회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기 위한 교육이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인성 교육이다. 성도라고 하면서 거짓말을 일삼고 자기가 한 말을 식언하는 일이 새 천년시대에는 없어야 한다. 모든 교회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 다. ‘교육이 죽으면 미래가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의지하는 지도자들이 많이 나타나서 신비주의와 자유주의를 대적하고 이단과 대항하며 모든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든든하게 성장 시켜 하나님 나라가 왕성하게 발전하도록 노력해야 할 책임이 교회에 있 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성도들의 삶이다. 일상생활의 신학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상생활이 빛이요 소금이어야 한다. 세상 속에 살고 있기에 여러가지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좋은 문화를 발전 시키기도 하고, 수용도 해야 하지만 때로는 고수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 다. 진정한 영적인 안식을 위하여 고수해야 할 것이 더 많이 있다. 이런 사명을 위하여 목회의 기본적인 변화와 예배의 축제화, 평신도를 위 한 평생교육과 훈련, 그리고 흩어진 성도들의 일상생활의 삶이 빛과 소금 일 때 하나님의 교회는 새로운 시대에도 능력있게 발전할 줄로 확신한다. 그것이 새 천년시대에 하나님 교회의 사명이요 비전일게다.
28 no image 교회와 뉴 밀레니엄/안만수 목사
rpress
1921 2000-01-04
21세기와 교회 안만수(화평교회 담임목사) 미국의 미래학자 다니엘 벨(Daniel Bell)은 21세기가 첨단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류에게 새로운 발전과 가능성을 줄 후기 산업사회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 시대는 어떠한 특징을 가질까? 이 시대는 무엇보다도 컴퓨터의 대량 보급으로 정보의 혁명이 가속화될 것이다. 유전 공학의 발달로 식량 및 불임등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산업사회가 초래한 생태계의 파괴 및 위기 의 반작용으로 환경을 중시하게 될 것이다. 고도의 기동성을 기반으로 하는 여가의 시대가 될 것이다. 기존의 가치와 권위가 무시되는 개인주의가 주된 삶의 방식이 될 것이다. 다양한 정보의 교환으로 다양한 가치와 삶의 방식 이 받아들여지는 다원화된 사회가 될 것이다. 또한 21세기는 불확실성의 시대이다. 인류에게 혜택을 끼친 과학 문명은 이제는 도리어 인간을 지배하 게 되었고 인류의 내일이 보장받지 못하도록 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뿐 만 아니라, 새로운 세기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 소외가 더욱 깊어지게 될 것이다. 과학의 지배, 합리적 사고, 발전의 신념 및 낙관주의로 특징되는 현대를 지나는 이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고독 및 삶의 무료감을 극복 하기 위해 말초적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향락 추구에로 치닫게 될 것이 다. 이러한 삶은 자연히 성의 개방을 불러 올 것이고 이것과 더불어 전통적 인 윤리와 도덕은 무너지게 될 것이며 마침내 결혼 질서와 가정이 무너질 것 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로 되는 것이 물질이기 때문에 물질 만 능주의로 흐르게 될 것이다. 특히 새로운 세기는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는 여러 요소들이 만연할 것이 다. 예를 들면, 인간이 구원받는 길이 기독교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 도 있다고 하는 종교다원주의, 성적쾌락과 물질에서 채우지 못한 정신적인 공허를 뉴에이지운동 등과 같은 초자연적 신비주의 종교 행위들에서 찾으려 고 하는 움직임, 그리고 전통적 교리와 교회 의전을 부정하는 해체주의 등이 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는 먼저 종교개혁자들이 물려준 신앙의 전통인 하나님 영광 중심의 기독교적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 영성은 하나님의 뜻과 어 긋나는 가치관을 높이고 따르는 세속주의를 극복할 때에 회복할 수 있다. 21세기 교회는 이 세속주의의 주 형태인 쾌락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물리쳐 야 한다. 또한 이 영성을 되찾는 일은 그리스도가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라는 성경 적 진리가 받아들여 질 때에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21세기의 교회가 종교 다원주의와 해체주의 및 혼합종교적 신비주의 등을 물리치기 위한 신학 적 목회적 문화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한 걸음 나아가, 이 영성은 하나님 말씀의 실천을 요구한다. 새로운 세 기에 한국교회는 말씀을 듣는 것에 그치지 말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선 포된 말씀을 따라 살 때에 사회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이러 한 실천의 항목들 중에 중요한 것을 들면, 첫째 노인에 대한 섬김의 일이 다. 경제논리는 노인이 사회의 짐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을 행동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교회는 이 경제 논리를 넘어가야 한 다. 노인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일에 막강한 자원이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실천하는 대상이다. 둘째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 천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그것의 담을 헐고 이웃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모 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그 존엄성을 인정받고 인 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사회 봉사를 통해 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회에 나타내지 않으면 이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따 라서 선교의 문도 닫히고 만다. 셋째는 청소년 신앙 교육이다. 청소년들 이 죄악된 가치관이 범람하는 사회에서 믿음의 전통을 지키고 바른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교회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 회의 미래는 기대할 수 없다. 마지막은 환경 보호이다. 교회가 자연과 조화 롭게 사는 일에 실패하면 전인 목회의 기반을 잃어버리게 된다.
27 no image 교회와 뉴 밀레니엄/남웅기 목사
rpress
2203 2000-01-04
좁은 길 걸어가는 교회 되어야 남웅기 목사 이제 며칠 있으면 새 천년 시대가 도래한다. 10년도 100년도 아닌 천년의 전환기에서 사람들은 제마다 기대에 부풀어 있다. 날은 똑같은 날이지만 사람들은 천년을 단위로 카운트 하기를 즐긴다. 내일에 대한 간절한 소망 이 빚어내는 기대적 심리인 것 같다. 새 천년은 놀랄만한 변화를 동반할 것이다. 과학은 첨단으로 치닫고, 생활환경은 눈부시게 발전할 것이다. ‘천국이 있다손 치더라도 예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발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가 오해하거나 착각해서는 안된다. 세상의 발전이 교회의 발전 의 원동력이 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세상의 발전이 교회의 입지를 보장된 것도 아니다. 또한 세상의 발전이라는 것도 평화와 안전이 보장된 것도 아 니다. 인간의 지혜가 하늘에 맞닿아 신의 경지에 오를수록, 눅12:20말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을 생각하게 된 다. 그것이 어찌 부자에게만 주 어진 말씀이며, 그것이 어찌 쌓아 둔 곡식에만 해당되는 말씀이겠는가? 세상이 인생을 자랑하고 즐길지라도 교회는 그럴 수 없다. 교회는 늘 심판을 예고해야 할 책무를 진다. 교회가 세상과 함께 누리려면 심판 예고의 책무를 포기하고, 그 책무를 감당하려먼 세상으로부 터 외면당할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세상이 무지개빛 꿈을 꾼다 고 해서 교회가 지금 꿈만 꾸고 있어선 안된다. 교회는 새 천년을 앞두고 각오를 새로이 해야만 한다. 그 각오는 십자가를 제대로 질 각오, 즉 죽을 각오를 말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성공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영광받을 존재가 아니다. 세상에서의 영광은 교회를 차라 리 욕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음을 실 존으로 보여줘야 할 책무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좁은 길은 교회가 새 천년에 걸어가야만 할 길이다. 좁은 길은 가면서도 그 길에 잇대어 있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보면서 가슴벅찬 심장의 박동을 느끼는 것, 이게 바로 새 천년을 앞둔 교회의 각오이며 꿈 이여야 하지 않겠는가?
26 no image 교회와 뉴 밀레니엄/서요한 교수
rpress
2544 2000-01-04
교회는 세속적 욕망 제어해야 서요한 교수 세계는 지금 뉴 밀레니엄, 새 천년에 대한 기대감으로 온통 야단이다. 우리 나라도 12월 31일 성대한 새 천년을 맞는 행사를 광화문에서 열 계획이다. 천년을 보내고 새 천년을 맞는 것이 이 시대 우리들의 특권일진데, 그 중 에서도 의미가 남다를 우리 교회는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가? 직시할 것은 새 천년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세기임에 틀림없으나 그렇 다고 별스런 시대는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저기서 낙관적이인 전망들이 있 기는 하지만, 지난 시대 이상으로 새 천년은 더 깊은 고통과 공포의 늪에 우리를 빠뜨릴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이땅에는 행복의 추구에 대한 전 인류의 공통된 노력에도 불구하 고 미움과 증오, 갈등과 대립, 불안과 공포, 기아와 지진, 분파와 분리, 전 쟁은 계속되어 왔다. 세대간의 갈등, 빈부간의 갈등, 종교간의 갈등, 민족간 의 갈등은 아직 그 끝이 묘연하다. 따라서 교회는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지혜자 솔로몬이 말한 바, ‘해 아래 새 것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장대한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하려는 세속적 욕망을 제어해야 할 것이다. 사실 죄로 타락하고 범죄한 우리가 무 슨 획기적인 일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구원받은 공동체로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착념하여 이땅에 당신 의 교회를 세우신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을 성취하는 데 더욱 힘써야겠다. 끝없이 도전해 오는 세속화의 물결에 의연이 맞서며, 맛과 빛을 상실한 이 시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의 군사로써 능력과 위용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이때에 오직 주님의 능력과 신령 한 은혜만이 우리로 하여금 자유케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백성으 로서의 거룩한 본질과 성품을 잃지 않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역사를 창 출해야겠다. 새 천년을 앞에 두고 지난 날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변 함없이 그를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와 함께 하는 새 천년은 그의 교회에 무한한 소망과 축복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히 13:8). 아멘!
25 no image 교회와 뉴 밀레니엄/엄원규 목사
rpress
2938 2000-01-04
정체성 명확하게 드러내어야 엄원규 목사 1999년이 지나면 대망의 21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이 온다. 새로운 세기 2000년은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가 예상되고 있다. 20세기 말엽에 우리는 기독교 선교 100주년의 한국 교회, 세계교회사에 초 고속 성장기록을 세운 한국 교회, 전 인구의 25%에 해당하는 1천200만의 교인 수를 자랑하는 한국 교회, 21세기 세계선교의 중심국이 될 한국 교회, 새천년을 준비하는 한국 교회 등. 이 모든 말은 한국 교회에 대한 찬사이다. 이렇게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한 국 교회는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쨌든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의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 사실이다. 그 비결이 무엇이든 간에 지난 날의 이 런 경이적인 부흥은 우리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불신자들은 교회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교인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다. 한마디로 교회와 교인 들이 교회답지 못하고 교인답지 못하다는 것이 다. 이는 한국 교회의 정체 성, 교인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못한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다가오는 새천년은 부패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리 사회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을 분명하게 들어내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정 체성은 바로 빛과 소금됨이며 복음 전파의 귀중한 도구가 된다는 사실이 다. 성경은 교회를 이렇게 서술한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요 그리스도 안 에서 세워진 새롭고 참된 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이 자기에게로 부르신 무리 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전히 교회의 사명은 21세기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어두운 가운데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으로 인도하 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원을 선포해야만 한다. 아울러서 최근에는 정부도 기업도 ‘변해야 산다’는 슬로건을 높이 내걸 었다. 변해야 산다는 명제는 우리 시대 모든 세계인의 것이다. 온세계가 정 보화라는 새로운 세계구도 앞에서 변하기 위한 몸부림을 시작하였다. 이런 변화에 쉽게 적응하는 나라와 교회, 개인은 성공할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경 우에 대열에서 낙오되며 성장도 안될 것이다. 즉, 시대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교회는 언제나 사회를 향해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그들이 필요한 때는 언제나 그들의 곁으로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지난날 사회 변화 에 둔감했던 교회의 태도가 결국 질적으로 쇠퇴의 결과를 초래한 원인임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눈으로 보아 왔다. 구원받은 것은 세상을 섬기기 위함이다.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는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존재 이유와 같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교회만이 다가오는 2000년대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24 no image 교회와 뉴 밀레니엄/정중렬 장로
rpress
2353 2000-01-04
교회는 구원의 선포 기관이어야 정중렬 장로 예수라는 단어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또는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당시의 문헌들을 보면 이 ‘예수’라 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이름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적 성격 즉 ‘여호와여 구원하소서’라는 기대감이나 ‘여호와는 구원이시 다’라는 시대적인 요청이 그 시대 저변에 얼마나 널리 깔려 있는가를 보 여주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다윗 왕국이 멸망한지 680여년이 흐르는 동 안 유대인들은 속히 그 나라가 회복될 것을 소망하는 메시아적 대망을 가 지고 있었는데 그 결과가 이런 현상을 유발했을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오심을 대망하던 때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 태하기에 이른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 1:18). 그런데 예수님의 탄 생을 예고한 주의 사자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소망과 당시 시대적인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의미를 ‘예수’라는 이름 속에 부 여하고 있다. 주의 사자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마 1:21)라고 예수의 이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로마로부터 정치적인 압제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이스라엘 사람 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오히려 주의 사자는 죄로부터의 해방 을 선포함으로써 영적인 구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선포에 따른 다면 예수님은 정치적인 해방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해방인 영적 구원을 위 해 오신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교회 역시 이 세상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니다. 사 람들로 하여금 경제적인 혜택을 누리게 하는 것에 그 존재 목적이 있는 것 도 아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그 죄로부터의 구원을 선포하는 기 관인 것이다. 그리고 구속받은 자의 삶의 방향과 질을 제시하여야 한다. 그 것이 곧 복음이다. 지난 세기 동안 한국 교회는 이 점에서 그 본연의 자태 를 상실하지 않았나 되돌아보아야 한다. 교회가 급성장한 배후에는 죄를 지적하기보다는 적당히 서로 타협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반대급부가 있었음 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다가오는 시대의 교회는 그 어떤 조건이나 유혹과도 타협하면 안될 것이다. 특히 교회는 본연의 임무인 복음 선포의 권위를 잃어버리거나 함부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세속의 도전으로부터 교 회를 지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정체성을 늘 확인해야 한다. 여기에 인류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23 no image 교회와 뉴 밀레니엄/손종국 목사
rpress
2402 2000-01-04
기독교개혁신보시론(1999년 12월 13일) 교회와 뉴밀레니엄 비전 손종국(청소년교육선교회 총무, 염광 교회 협동목사) 2000년을 맞는 사람들의 태도가 다양하다. 1000이라는 숫자의 의미 때문 인지, 아니면 금세기에 대한 실망 때문인지 사람들은 21세기에 대한 기대 가 다양하게 드러낸다. 21세기를 맞으며 우리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21세기는 정보화시대로서 ①세계화와 지방화의 시대 ②신세대와 미래형인간 대두 ③가속적 변화의 시대 ④기술산업의 혁명 ⑤정보사회 ⑥임시성과 일회성의 문화관 ⑦과학의 발달 ⑧인류공동체의 보편화 등의 특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로 인해 하 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은 더욱 멀어져만 갈 것 같다. 이러한 미래상 가운데 학자들은 우리 교회의 미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예견하고 있다. ①개교회주의의 퇴조와 에큐메니즘의 발달 ②평신도사역의 극대화 ③조 직교회에 대한 반대와 영성의 부활 ④선교의 통전적 이해와 디아 코니아의 발달 ⑤여성의 교회정치 참여의 증대 ⑥교회 마케팅의 발달. 우리는 이러한 특징들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며 우리의 할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개교회를 넘어서는 교회연합, 교회의 모든 성도가 각자의 은사 에 따라 섬기는 모습, 활기차고 역동적인 예배, 다양한 선교사역과 대사회 적인 평화창출의 역할, 교회구성윈의 1/2이 넘는 여성들의 적극적인 교회 봉사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무언가 새롭게 우리가 해야할 일을 생각해 보면 가슴에 벅찬 감동이 솟아오른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의 사명은 변하지 않을 것이 다.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성도가 함께 교제하고 대외적으로 구 제와 봉사를 하는 일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듯 앞으로도 불 변의 것이다. 따라서 21세기의 교회의 비전은 외형적인 변화에서 찾기 보다는 그것을 이끄는 내적인 신앙의 본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가정과 사회와 교회에 서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하나님의 향한 우리의 헌신의 태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우리의 비전이다.
22 no image 교회와 뉴 밀레니엄/정재선 장로
rpress
2427 2000-01-04
-성숙한 신앙 인격으로 존경받길 정재선 장로 새천년과 교회, 한 세기를 마감하고 새천년을 여는 엄숙한 이 순간에도 세 월은 흘러가고 변화무쌍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이땅 위에 복음 주셔서 전국에 전파되게 하시고, 천만이 넘는 영혼들을 구원하여 주 신 하나님 은혜를 감사하며, 우리의 믿음과 교회를 생각해 보자. 교회가 하 나님나라 넓히는 일에는 공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 하고 새천년을 준비하는 데는 부족함을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 가 힘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개화기에는 민중계명 운동등, 사회를 리 드했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면서 빛을 잃어가고 있다. 세상은 인간들을 편하게 살도록 이끌어 가고 있다. 죄의 유혹도 어느 때보 다도 극심하다. 모든 변화와 개발이 반드시 유익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안방에 앉아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꿈같은 현실이 오고 있다. 인간은 너 무 편해지면 게을러지고 하나님도 멀리할 것이다. 그리고 타 락할 것이다. 교회는 인간들의 속성을 바로 알고 사람을 살리자. 그리고 진실한 기독인 을 힘써 양육하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어떤 역경에서도 믿음으로 살 며 불의와는 싸우고 정의를 실천하며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십자가의 군병들을 양육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먼저 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목회자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신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좋은 꼴을 먹이며 신앙 인격자 로 존경을 받을 때 진실한 신자로 양육되어질 것이고, 가르침을 받는 자 (임직자)는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명심하고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봉사에 솔선하며 듣고 보고 배운대로 충실히 행하는 믿음의 선구자로 변하였을 때, 교회에 힘이 되고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리라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반 드시 우리 손을 통하여 역사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심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민족을 통하여 역사하심도 우리는 체험하였다. 천만이 넘는 영혼들을 구원하여 주시고 자원도 기술도 자본도 없는 이 땅위에 세계에서 유래없는 기적을 이루어 주셨다. 의인 열 명 찾으시는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자. 교회가 새로운 각오로 도전할 때 하 나님께서는 반드시 도와주실 것으로 믿 는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자. 죄악된 세상의 것은 하나도 가지고 갈 것은 없다. 모든 능력과 정열을 다 바치자. 그래서, 민족의 무거운 짐도 후 손들에 남기지 말고, 믿음의 유산만을 남겨주자. 이것이 교회가 맡은 사명 일 것이다.
21 no image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운전이야기
rpress
1992 2000-01-04
-운전이야기 장창수 목사 운전 자세가 그 나라 국민의 민도(民度)를 반영하며 정치 수준을 대변(代 辯)한다고 말한다. 일리 있다. 러시아인들의 운전 자세를 보면 한국의 60-70년대 버스나 택시 운전기사들이 생각난다. 예전 한국에서 대형 버스 운전자들이 대로에서 다른 버스보다 먼저 가려고 경쟁하듯 위험하게 운전 하였다. 러시아인 운전자에게도 이런 모습이 보여진다. 그리고 러시아 사람 들도 한국인 못지 않게 끼여들기를 잘 한다. 우리와의 차이는 러시아인들 이 사과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의 철면피 성향은 우리의 오리발 수준 을 넘는다. 흙탕물이 고여 있는 도로를 무작정 세게 달려 반대편에서 오는 차에 흙탕물 세례를 준다. 그러나 이들은 여유 있게 유유히 사라진다. 이런 러시아인의 운전 자세를 보면 땅의 크기에 비해 러시아인의 마음이 좁고 여유가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구소련 당시 러시아인들은 한국 민간 여객 기가 항로를 이탈한 것을 알면서도 두 차례나 공격해서 격추시켰다. 그 이 후 배 상이라는 단어도 언급할 수 없었던 것은 러시아인들의 이런 성향(性 向)이 그대로 노출된 것이리라. 러시아인들은 운전하면서 후퇴를 모른다. 가다가 길이 막히면 그 옆으로 길을 만들며 계속 나간다. 주말 농장에 갈 때 가끔 길이 막히는 경우를 만 난다. 그러나 반듯이 그 옆 어딘가에 다른 길이 있었다. 한국인들도 가는 길이 막히면 어떻게 해서든지 앞으로 나가려고 한다. 후퇴를 모른다는 점 에서 훌륭하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반칙도 할 수 있다는 사고가 여기 보인다. 러시아 도로에는 중앙선이 보이지 않는다.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 때문에 도색한 중앙선이 봄이면 이미 지워져 있다. 그리고 여름이 거의 끝나 가는 가을쯤에서야 중앙선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재정이 빈약해서인지 아니 면 행정력이 미약해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운전자들은 거 침없이 중앙선을 너머 재빨리 앞서 갈 수 있다. 그러므로 맨 뒤차가 맨 앞 으로 달려나가 일등이 될 수 있다. 신호를 대기할 때 맨 뒤차가 중앙선을 너머 앞차의 앞에 서거나 아니면 신호가 바뀔 때쯤 중앙선을 너머 가장 먼 저 앞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통법은 분명히 있지만 무용하다. 그렇다고 이를 무시하면 교통 순경에게 걸려 벌금을 낼 수 있다. 법이 있 지만 없기도 하고 없으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러시아의 오늘날 모습 이다. 러시아도 한국과 비슷하게 운전 기술을 보고 면허증을 발급한다. 이런 이 유 때문에 러시아의 교통 사고율도 한국 못지 않게 높다고 생각된다. 거의 매일 도로에서 교통 사고 차량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나 유럽 에서는 인명을 존중하는 자세가 면허증 발급 기준이다. 한국에서 교통 사고가 나면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먼저 큰소리쳐야 한다 고 말한다. 우리 나라 정치도 그렇다. 잘못했음에도 청문회에서 잘못을 시 인하고 사과하는 정치인이나 기업인은 하나도 없다. 소위 한국인의 오리발 이다. 그러나 러시아인에게도 오리발은 있다. 1990연초부터 러시아에는 수 많은 은행과 채권 회사들이 생겼다. 그리고 이들은 고리(高利)를 약속하며 국민들이 소유한 채권을 긁어 보았다. 개방 후 러시아 정부는 채권 형식으 로 국민들에게 정부의 재산을 분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날 은행들 은 갑자기 파산했고 사주(社主)는 예금 과 채권을 해외로 은닉시킨 뒤 도망 치곤 했다. 지금까지 어느 하나 시원스럽게 해결된 것은 없다. 어디서나 힘 없는 국민만 항상 손해보기 마련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들은 오리발도 내밀 지 않았다. 요즘 한국에서 이런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파이낸스 회사가 높은 이자를 약속하고 예금을 유입한 후 사장이 마음대로 자금을 인출하여 사용 했다. 러시아와 한국 기업인들의 사기 수법이 너무나 비슷하다. 한국은 아 직도 이런 사기(詐欺)가 먹혀 들어가는 허름한 나라는 점에서 러시아와 비 슷하다. 일인 체제의 경영과 정치가 낳은 산물(産物)이다. 이런 체제로 한 국과 러시아가 어떻게 21세기를 대비할 수 있겠는가? 한국이나 러시아에서 왜 정치 분야가 안정적이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자세는 무단정치나 독재정치로 반 영된다. 상황에 따라 자신을 위해 편리하게 운전하는 국민들 가운데 정치 지도자가 배출되기 때문이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다고 주장하는 한국 정 치가들도 이런 범위를 넘지 못한다. 이 점에서 한국이나 러시아는 서로 난 형난제(難兄難弟)이다.
20 no image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장창수 선교사
rpress
2194 1999-12-02
-러시아에서 선교사로 5년 넘게 사역하는 동안 한국과 러시아의 유사점을 많이 발견했다. 이는 주로 부정적인 관찰이 될 것이다. 이제 한국인들도 미 래를 위해 자신의 아픈 곳을 정확히 진단하고 처방 내릴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21세기에 우리는 후진국을 면치 못할 것이다. 1. 민족정서 러시아 민족도 한국 민족처럼 개개인들로 볼 때 참 우수하다. 그러나 한국 인은 원칙보다 반칙을 좋아한다. 반칙은 눈치와 관계된다. 눈치는 원칙보다 도 윗사람의 생각을 살피는 힘없는 백성의 처세술이다. 그 결과 원칙보다 윗사람의 기분에 맞춰 살다보니 우리 민족은 어느덧 힘있는 자들의 반칙에 공범으로 참여했다. 유교 문화의 부작용이다. 러시아 국민도 비슷한 면이 있다. 제정 러시아 시대 이들도 아주 오랫동안 귀족과 지주들의 눈치를 살 피고 그리고 공산 혁명 이후 공산 당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야 했다. 두 국민의 정서도 비슷하여 전통 음악도 대부분 슬픈 단조로 시작하여 단 조로 끝난다. 민요를 부 르는 창법도 비슷하다. 전통 의상도 원색을 많이 사 용한다. 이들의 전통 춤중 강강수월레처럼 손을 잡고 돌기도 한다. 러시아인들도 손님 대접을 잘 하려고 지나치게 노력한다. 상이 휘어지게 차리는 습성이 이들에게도 있다. 이들도 손님들이 배불리 먹어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그래서 한국의 시골 아주머니들처럼 자꾸 먹으라고 권한다. 이들에게 수프는 한국인 밥상의 국과 같다. 이들도 고기와 뼈 국물 로 수프를 만든다. 우리의 곰탕 같은 것이다. 잦은 굶주림이 가져다준 식생 활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도 밭에서 난 농작물은 무게보다는 손 되로 판다. 한 양동이 또는 한 병 단위로 가격을 메긴다. 이 모두 러시아인이 외모로는 서양인이지만 문 화면에서는 동양에 속한다는 증거이다. 서구에서 연사(演士)는 대중을 언급할 때 “Ladies and gentlemen!”이라 고 말한다. 약한 여성을 보호하여야 한다는 사고가 엿보인다. 그 결과 지금 은 여성들이 남자들보다 너무나 앞장 서 있는 상황이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이나 러시아에서는 호칭 방법이 정반대이다. 한국과 러시 아의 교회 목회자들도 한결같이 “형 제자매 여러분!”이라고 호칭한다. 남 존여비 사상이 무의식적으로 배여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대통령 클린턴의 외도가 문제화되었을 때 러시아 여성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한 다. 강하고 잘난 남자는 그래도 된다는 동양식 남존여비 사상이 그들에게 도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남성들이 성공한 후 젊고 이쁜 처녀를 얻으려고 조강지처와 자식을 버리는 예는 허다하다. . 러시아인이나 한국인이나 잘 참는다. 그러나 인내가 그 한계에 이르렀을 때 과히 혁명적인 사건들이 발생한다. 한국인의 경우 동학란과 삼일 운동 같은 사건으로 터졌다. 비교적 건전한 방향으로 전개되었지만 대부분 실패 로 끝났다. 그러나 러시아인의 경우 인내의 한계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 왔다. 1천년 동안 정교회를 자랑한 유신론 국가였던 러시아가 하루아침에 공산주의라는 무신론 국가로 전락했다. 다시 말해 러시아인의 경우 극과 극을 오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들이 국제 사회에 보여준 돌발적인 행동도 이를 증명한다. 이들도 공통의 목표보다 사람을 중심으로 일한다. 당연히 파벌이 있을 수 밖에 없고 결국 한 사람의 정치 논리에 의해 사 회가 지배된다. 옐친의 존 재가 이를 잘 증명한다. 동양의 가부장적인 기질이 아직도 러시아인에게도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한국에서 사주(社主)의 독재(獨裁)를 막으려고 재벌 을 개혁하려 하지만 한국의 정당 구조는 아직도 일인 독재 체재이다. 정치 개혁 없이 재벌만 개혁하려는 발상 자체가 이미 잘못이다. 한국과 러시아 유사점은 여기에 끝나지 않는다. 러시아 민족들도 한국 민 족들처럼 엄청난 이산가족의 슬픔을 안다. 그래서인가 눈물을 이들도 잘 보인다. 2차 세계대전 당시 2천만이상이 희생되었다. 자연히 이들도 전쟁에 나가는 사랑하는 이와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는 연인에 대한 유행가를 한때 많이 불렀다. 우리의 6.25동란으로 인한 민족 분단의 슬픔과 같다. 또 스탈 린 당시에도 2천만 이상이 억울하게 숙청당했다. 그것은 우리 나라의 광주 사태보다 더한 민족적 비극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스탈린의 서거를 슬퍼했다. 한국인도 비슷한 심성이 있어 독재자로 낙인찍힌 이승만 박사의 장례식 때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양국민 모두 과거 잘못에 대한 반성에서 너무나 빈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 러므로 과거에 대한 분명 한 정리가 안된 상태로 정치가 항상 진행된다. 그 결과 모든 것이 뒤엉킨다. 그리고 좀처럼 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지 못한다. 이 모두 두 국민이 이성보다도 감정에 먼저 쉽게 호소하기 때문이다.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