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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2 (00:00:00)
‘관상(觀想)기도’의 실상을 밝힌다


림헌원 목사_한돌교회


“관상추종자들은 성경적 해석과 기도의 방법론 왜곡하지 말아야”


시작하는 말

미국과 한국의 개신교계에 불고 있는 관상(觀想)기도는 다양한 이름으로 위
장하여 표현되어 각 개신교계 교단의 교회 속에 침투 되고 있다. 관상기도
는 경청기도, 침묵기도, 숨(호흡)기도, 마음기도, 향심(向心)기도 등의 다양
한 이름으로 위장하여 교회 안에 들어와 개신교의 신앙과 성경적 가르침의
뿌리를 은근히 뒤흔들며 미혹하고 있는 실정이다.
관상기도 추종자들은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라고
주장하며 관상기도가 매우 성경적인 것인 양 위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터
넷에 올라온 관상추종자들의 글들을 보면 관상기도의 실체는 숨겨 버린 채
온갖 미사여구로 교묘히 치장하여 덮어씌우고 뜬구름 잡는 듯한 관상의 이야
기만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다행히 관상 지지자 중에 한신대학교의 K 교수가 ‘관상기도
의 성경적 근
거’라고 하여 매우 용감(?)하게 인터넷에 공개 제시하므로 인터넷과 각종
지면상에서 토론을 시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되어 세상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분별력의 시야를 넓혀 줄 기회가 찾아 오게 되었다.
이에 대부분의 관상추종자들이 내세운 대표적 성경구절들의 인용이 관상기도
를 억지로 정당화하려는 황당무계한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이 글에
서는 뉴스엔조이 사이트에 K 교수가 제시한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
절의 해석에 대해서 비교적 짧게 반론하는 비판을 전개하고자 한다.

1. 이사야 30:15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관상기도를 해야 한다는 성경적 근거는 무수히 많다. 지면 관계상
구약과 신약의 대표적 본문을 몇 개 언급하도록 한다. 영성의 분야에서 미국
과 한국에서 많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유진 피터슨이 <관상적 목회자>란 책
에서 목회자는 밖으로 분주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 잠잠하여야 한다고 이사
야서 30장 15절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
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란 말씀의 예를 들어 책망했다”
고 주장하고 있다.
▶ <반론> : 상기와 같이 관상가들은 이사야 30장 15절에서 조용히 관상하
지 못했기 때문에 책망 받았다는 내용을 본문의 전후 문맥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본뜻은 사람이 노력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
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에 대한 전초적인 뜻을 밝히 전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
나님의 전적인 능력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뜻을 전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인위적인 해석이다. 관상가들의 이러한 해석은 성경
의 영감성과 계시를 모르고 구속적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황당무계
한 해석을 하게 되었다고 본다.
관상가들의 그릇된 인용은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조용히 있어” “잠잠하
고” 등의 단어만을 몇 개 찍어내어 인용한 것으로 성경 앞뒤의 문맥을 살
핀 뒤 그 문맥 속에서 그 단어의 참된 의미를 해석한 후 인용한 것이 아니
다. 그러므로 성경해석원리 중의 하나가 문맥상의 해석임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정중히 주문하는 바이다.

2. 시편 46
:10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주장하기를 “시편은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여기서 ‘가
만히 있어’의 영어 표현은 ‘be silent’로서 침묵 가운데 있어서 내가 하
나님 됨을 알라는 중요한 말씀이다”라고 한다.
▶ <반론> :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안식하라는 것이지 ‘기도로 조
용히 관상하라’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다. 설령 기도하라는 말이 나오면
서 소리를 내지 말고 조용히 관상하라고 한다 할지라도 역시 성경의 전후문
맥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본문은 구원과 관계된 것이지 관상기도와 연결된 흔적이 없다. ‘너희는 가
만히 있어라’ 하는 말은 ‘너희가 하나님의 행적의 증거를 찾아 조용히 보
고 믿으라’ 하는 뜻이다. 곧 조용히 하라는 것은 과거 하나님이 행하신 행
적들을 가만히 보고 되새김질(음미, 또는 묵상)하여 보고 하나님 됨을 믿으
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행적이라 한다면 구약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
스라엘이 약하지만 이기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다양한 하나님의
행적들을
지시하고 있다.

3. 열왕기상 19:1-18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또한 엘리아 선지가가 하나님의 호렙산의 동굴에서 ‘세미한’ 하
나님의 음성을 들었다(열왕기상 19:1-18)고 성경은 기록했다”는 내용을 근
거로 제시하고 있다.
▶ <반론> : 본문을 문맥 속에서 살펴본 뜻은 하나님은 물리적으로 나타나
지 않으시고 영적으로 나타나신다는 의미이다. 요란하게 외부적으로 물리현
상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고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세미하다’는 것은 내적으로 은밀하게 나타나시는 하나님, 내적으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인데 ‘세미한’이란 말은 ‘물리적인 외부의
것들이 조용하다’는 것이지 ‘엘리야가 조용하여 관상기도를 했다’는 근거
가 될 수가 없다.
그리고 구약시대 하나님의 임재 방식은 선지자가 원하여서 음성을 듣는 것
이 아니고 갑자기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임하셨다. 즉
하나님 편향적인 말씀이 임하신 것이지 우리의 기구적인 말씀이 아니었다.
우리가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기다려서 듣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네
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만들고 기다려라’
고 말씀하신 바 없다.

4. 마태복음 5:3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라고 산상수훈의 첫 구절을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
난하다는 것은 마음을 비운 자가 가난한 자이고, 빈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신
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관상사상을 의미하는 구절이 많다”고 주장한
다.
▶ <반론> : 본문의 빈 마음이라는 것은 탐욕, 정욕, 물욕, 등의 생각을 갖
지 않고 정결한 심령으로 사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의 모습(상태)이 어떠
한가를 보여 주는 말씀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인임을 겸손히 선언하고 하
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만을 구하는 구원 받은 자로서의 겸비한 모습으로 성령
을 받은 상태를 말한다(행2:28).
주님이 연합하시기 위해 들어오시는데 마치 우리가 침묵하여 도와주는 알미
니안적 인본주의를 엿 볼 수 있게 하는데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전능성을 훼
손하는 것이고 신인 합동사역인 것처럼 꾸며서 하나님의 독자적인 능력을 평
가절하 시키는 것이 된다. 결국 인간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
건이나 이
유, 방법 등을 관상이라는 채널을 통하여서만 행하는 것처럼 미혹하려는 행
위는 성령의 독자적인 능력을 훼손할 뿐이다.
마태복음 5장 3절 말씀에서는 무슨 기도를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조용하여 관상하는 것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5. 요한복음 14:10, 20; 17:21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요한복음 14장 10절, 14장 20절, 17장 21절 등에 반복적으로 나오
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은 관상기도를 통해 기
도자가 마음을 비워 그곳에 주님을 모시고 그분이 내주하여 나의 주인이 되
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고 주장한다.
▶ <반론> :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을 동거동행으
로 해석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관상기도를 통해서 한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
도 없다. 오히려 요한복음 14장 10절과 14장 20절은 14장 전체 문맥 가운데
서 살펴볼 때, 결국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당신을
나타내시고 함께 하시겠다는 뜻이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
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
리라”(요 14:21).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
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 14:23).
이처럼 동거동행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하나 되는 연합사상을 말한다.
제 삼자가 아닌 일자가 되는 하나님의 역사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무궁한 사
랑을 뜻하는 것이다.
귀하고 복되신 말씀 사이에 관상의 의미를 끼워 넣으려는 시도 자체가 함정
이다. 관상가들이 말씀의 좋은 말 사이에 관상기도의 의미를 끼워 넣고 있
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관상의 상품을 멋있게 포장하여 선전
하니 많은 목사와 연약한 성도들이 미혹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6. 로마서 8:26-28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로마서 8장 26-28절은 관상기도 하는 신자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
어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
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
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 8:26)는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데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주신다는 구절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성령의 활동을 도와주는 일로써 조용히 침묵 가운데 마음을 비
워드리는 일인 것이다. 이것이 곧 관상기도다”라고 주장한다.
▶ <반론> : 하나님께서 탄식함은 죄 때문에 죄로 얼룩이 지어진 인간들을
안타까워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
의 지혜의 본질을 잃어버린 지구촌의 상태를 탄식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
기에 관상기도의 의미를 끼워 삽입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해석으로 황당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초적 상태를 향하여 나가시는 것이며, 최종적인 목표를
향하여 가시는 것이다. 즉 이것은 성령의 독자적 영역이다. 하나님의 불가항
력적 은총이다. 여기에 우리 인간의 인위적인 관상행위가 들어가겠다는 것
은 인본주의요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행위가 된다.

7. 요한계시록 3:20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마지막으로 관상기도 수련회 때마다 인용하는 구절인 요한계시록 3
장 20절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로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개역).
여기서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
실 때 ‘문을 연다’는 것은 우리가 침묵 가운데 머무르며 다른 생각을 멀리
하고 주님께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주님을 초대하면 내 영혼 안에
들어오시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반론> : 이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침묵’이라는 언어는 필요 없
는 말이다. 주님이 연합되어 들어오시기 때문에 그 방법이 ‘침묵’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방법이 아니다. 주님과의 연합의 방법이 침묵이라는 것은 관
상가들의 자의적 해석이다.
결국 지금까지 관상의 성경인용과 다른 곳에서의 실체적 행위를 지켜 보건
데 나중에는 ‘주님이 들어오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침묵이 주가 되
는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해석이요 황당한 발
상이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본질을 떠난 것이다.
주님께서 연합하기 위하여 임재 하실 때 우리는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믿고
심령의 문을 엶으로써 하나님과의 연합은 성취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불가항
력적인 은총과 능력에 의해서 성취될 뿐 침묵이라는 인간의 방법이 게재된다
는 것을 본문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과의 연합 사이에
침묵을 삽입하는 것은 그들의 임의적인 입장일 뿐 성경의 입장이 아님은 더
욱 분명해 진다.
침묵하여 마음의 입술로 깊고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한다면 좋겠지만 관상기
도의 실체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관상기도는 침묵기도에서 파생된 새로
운 양태의 이방 종교의 인본주의적 기도 형태이다.
침묵만 하려들고 거기에 인도의 명상과 만트라(주문)식으로 짧은 내용을 반
복하여 중언부언하는 것은 분명 이교도의 명상에 말씀 몇 구절을 얹혀 놓은
것으로 초월적 명상행위와 그 차이가 없는 인본주의, 신비주의, 신영지주
의, 뉴에이지로서 미래로는 종교다원주의(모든 종교에는 각기 특별한 구원
의 법이 있으니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여 세계 모든 종교를 평화적으로 통일
하자는 입장)와 맥을 같이 하게 되는 비성경적 흐름을 막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마치는 말

지금까지의 내용을 살펴 볼 때 K 교수와 관상 추종자들의 성경 인용은 성경
말씀에 대하여 일종의 기만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관상가들이 미사여구로 잘 포장하여 성경 말씀 속에 살며시 끼워 들여 놓은
가시(관상, 경청, 침묵 등)를 사
람들이 모를 수 있다. 허를 찌르는 가시는
그냥 놔두면 피부를 자극하여 아프게 하고 곪아 퍼지면 급기야 치명적일 수
있으므로 발견하는 즉시 더 늦지 않도록 속히 뽑아 버려야 할 것이다.
더 이상 경건한 기독교의 성경적 해석과 기도의 방법론을 왜곡하지 말고 모
든 종교를 통합할 수 있고 종교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서로 넘나들게 할
수 있는 용어인 ‘영성’과 ‘관상’이라는 용어 사용과 그 구체적인 방법
과 실제 행위들을 일거에 내어다 버리길 바란다.
그리고 매스컴에 자주 오르는 일부 대형교회 유명 목사들과 추종하는 젊은
목회자들이 관상기도 관련 영성기도 행위를 이 시대의 최고의 영성신학이라
고 주장하며 교회성장의 한 방법으로 목회 현장에 도입하고 있는 실정은
‘기도’에 대한 성경적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일로 매우 우려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하여 신학적으로 증명하여 공교회의 정체성에 배치되거
나 혼란이 야기될 경우 등에 대한 대처 방안을 교단 차원에서 제시해야 마땅
하다고 사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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