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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9.03 (00:00:00)
-제 84회 총회가 몇일을 앞두고 있다. 근래에 이르러 총회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총회가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가 1981년 9월에 총회를 창립할 때 우리 총회의 목표와 방향은 분명했
고 확고했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개혁이었으며 그 실현방침으로 3대 이
념 곧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 이와같은 총회의 기본설정과 목표는 명분만 남아 있
을 뿐 한국교회의 거대한 세속적 탁류속에 우리마저 함께 표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미한 교권싸움과, 지방관념과 계층간의 갈등, 위계질서의 붕괴, 윤리적
타락, 교회의 침체 등 지난 날에 경험했던 부패상이 서서히 파생하고 있다
는 것이다.
우리 총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제84회 총회는 위에 지적한 죄악들에 대하여 깊이 회개하는 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진실한 신앙과 양심과 이성을 되찾는 총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풀어지고 느즈러진 우리들의 자세를 바로잡는 총회가 되기를 바란
다. 우리가 처음 가졌던 개
혁의 신앙과 의지를 되찾고 벅찬 감격과 소망을
가지고 출발했던 영적 기세(氣勢)를 회복하는 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지금 한 세기를 보내고 새로운 세기를 맞는 중대한 기
점에 와 있다. 미래를 생각하며 미래를 설정하는 생산적인 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회무적이며 사무적인 총회가 되지 말고 성숙하고 앞을 향해 가는 총회, 개
혁주의 교회다운 총회, 곧 제84회 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9 no image 총회에 참석하고 나서/홍성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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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1 1999-10-11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총회가 지난 9월 14일(화)부터 서울 성심교회당 에서 개최되었다. 당일 오후 2시에 총회장 임운택 목사님의 인도로 개회예 배를 마치고 이어 성찬예식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마치게 되어 하나 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오후 4시 30분부터 사무처리에 들어가면서 회 원을 호명하니 목사총대 64명중 62분이 참석하였으며 장로총대 64명중 55 분이 참석하여 필자는 마음속으로 많은 총대회원이 참석하였으니 이번 총 회가 하나님 은혜 가운데 잘 진행되리라 믿고 본총회에 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본총회를 진행하는 가운데 필자의 생각이 짧아서 그런지 시정해 야 할 문제점을 여기에 기재하고자 한다. 사무처리 첫시간 회원호명, 개회선언, 총회성서낭독 후 절차보고에서 유 럽노회 가입청원(보고서 p.44) 및 부산노회에서 청원한 규칙수정헌의건(보 고서 p.47) 이 두 건을 여기에 내어놓고 여러 총대들의 의견을 들으며 많 은 시간을 보내었는데 이런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둘째날 오후 사무처 리 시간에는 부산노회에서 헌의한 규칙수정안을 가지 고 많은 총대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요즘 TV방송에서 방영되는 국회청문회 고급옷로비사건, 조폐공사파업유도사건 등을 머리에 그리게 되었다. 많은 의견을 내어놓고 토론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그런데 한 안건을 가지고 손을 들어 가결하는 가운데 의장이 가결되었다고 선포를 하자 한쪽에서 이 의를 제기하였을 때 다시 번복하여 부결되었다고 선포하고 또 다른쪽에서 인원 숫자가 잘못되었다고 이의를 제기하였을 때 회원을 호명한 후 투표용 지를 배부하여 비밀투표 후 0.46%로 미달되어 부결되었다고 선포하니 회 원중 한분이 저는 발의권은 있지만 의결권이 없으므로 투표에 참석하지 않 아서 그러니 참고하여 달라고 하여 재차 비밀투표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생산적이 안되고 여기 참석한 총대들의 마음 만 서글프게 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경북노회에 속한 증경총회장 김○○ 목사님께서는 본총회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회의절차, 내용 등이 잘못되었을 때 발언을 자주하시 니 총회에 참석하신 총대들은 싫어하는 마음을 가진 듯하 는 생각이 필자에 게 다가왔다. 총회가 잘못가고 있는 것을 바로잡아 주시고 교회법, 총회법, 규칙을 하나 하나 가르쳐 주시는 그분의 말씀을 잔소리로 받아들이지 말고 우리는 배우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회원들은 자주 자리를 비우며 본회의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나 자신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증경총회장이신 김 ○○ 목사님은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본 총회에 끝까지 열중하시는 것이다. 그 예로 총회회의록을 작성하는 마지막시간 회의장 안에는 좌석이 2/3 정도는 비어 있었지만 유독 그분만은 남으셔서 회의록에 기재된 글자 한 자 한 자 받침 하나 하나, 순서, 시간 등을 확인하시며 수정하시는 모습 을 보았을 때 본총회에 참석하신 모든 총대가 이 모습을 가지고 열심히 하 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기도하면서 좀더 남을 존경하고 나 자신을 낮추게 되면 본 교단이 더욱 성장하지 않을까 하면서 이 글을 쓴다.
18 no image 신뢰 받는 교단되도록 힘쓸터/박봉규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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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9 1999-10-11
총회의 일이 복잡하고 힘들지만 총회에서 부족한 사람에게 다시 중책을 맡겨 주셨으니 기도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감당하려고 합니다. 우리 교단은 지금까지도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교회와 총회를 섬겨온 줄 아오나 좀더 창의적으로 정체성을 가지고 성숙된 교단이 되었으면 좋겠습 니다. 총회의 모든 회의에서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비판을 위한 비 판은 잘못된 주인의식입니다. 주인의식에는 긍정적인 주인의식과 노예근성 의 부정적인 주인의식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주인의식은 비판을 위한 비판 을 하여 공동체를 파괴하게 됩니다. 21세기는 분명히 선진화된 교회와 교단만이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그의 책 ‘Trust’(신뢰)에서 말 하기를 ‘선진 사회란 신뢰의 수준이 높은 사회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신뢰에는 3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로 정직해 야 신뢰할 수 있고, 둘째는 합리성이 있어야 신뢰할 수 있고, 셋째는 실천 능력이 있어야 신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미국 화폐에는 어느 종류이든 ‘In God We trust’라고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신실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 니다. 신자와 교역자가 신뢰성이 없으면 전도가 되지 않고 교회도 부흥되 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새천년을 맞으면서 우리 교단이 비록 작은 교단이지만 개혁주의의 자부 심을 가지고 신뢰받는 교역자, 신뢰받는 교회, 신뢰받는 교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7 no image 침묵하여야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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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4 1999-10-11
선택의 여지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가 있다. 황혼을 바라보는 백발이 성성한 생애 마지막 순례자들! 자녀를 낳 아서 기르고 교육하며 사회의 일원이 되게 하기 위하여 온갖 어려움을 감 내해서 뜻을 이루어 놓았거늘 지금 그들이 서야할 자리는 어디인가. 의사 표시가 자녀들과 맞지 않으면 세대차라는 차가운 냉대와 간섭한다는 질책 을 받아야 하니 이런 답답하고 안타까울 때가 또 있단 말인가? 경제가 취약한 국가도 그들이 젊었을 때는 온갖 요구를 강요하며 국가건설 에 이바지하게 해놓고는 지금 그들의 설 자리를 배려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럼 우리의 작은 모임은 어떠한가? 발언권을 제도 적으로 보장하고 좌석을 맨 앞자리에 정하여 후배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세라 자리를 뜨지 못하고 매무새를 가다듬어야 하는 피곤과 무료함이 역력하게 나타나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이번에는 오히려 참여할 수 있도 록 편의를 제공하면서(마이크) 자제해 줄 것을 요구한다면 그들은 어떤 처 신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장본인들은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하는 섭섭함과 상처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무거운 침묵으로만 일관하며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는 것 이 원로의 해야 할 덕망이라고 하기에는 후배들의 미숙한 일 처리에 걱정 이 앞서기도 할 것이다. 원로들의 걸어온 바른 신앙의 여정과 교단 태동시 에 어렵고 힘드는 산파역을 감당하였기에 작으나마 위로가 되게 하는 것이 후배가 선배나 원로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된다. 풍부한 체험과 법이론에 밝은 분들에게 자문을 먼저 구하므로 스스로 자제 하게 하고 후배들이 성장하는 모습에 안도와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할 때 자연스럽게 침묵을 선택하리라 생각해 본다.
16 no image 총회에 즈음하여/이철호 목사(부평강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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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8 1999-09-17
-우리 총회는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한국 교회에 많은 도전과 영향을 주 었다고 생각된다. 조그만 교단이지만 나름대로 건실한 신학과 바른 교회를 세워보겠다는 의지를 천명함으로 조그만 파장과 더불어 신선함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우리 또한 목회현장에서 개혁주의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정확한 인식은 부 족하였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목회를 해왔다고 생각한다. 순수하게 신앙양 심을 지키며 한 명의 교인이지만 생명처럼 사랑하며 진리를 그들에게 심어 주려 애타하는 모습들, 젊은 목회자들이 큰 목회를 부러워하지 않고 작은 교회를 사랑하고 명예보다는 한 영혼을 더 사랑하는 모습들은 참으로 현세 대에서 보기 힘든 모습들이다. 특히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기 위해 수도 사적인 삶을 사는 후배들을 대할 때마다 나는 감동한다. 또한 선배 목회자들을 대할 때도 타 교단에 비교하는 것이 무엇하지만 순 수함과 겸손함과 바르게 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 총회의 임원과 총회의 모습도 우리가 긍지를 가져도 좋을 만큼 교권이나 지역이나 인맥을 중심으 로 하는 계파가 없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쁨이며 행복이다. 이러한 교단에 있음을 나는 감사한다. 그러나 이번 총회를 즈음하여 두 가 지 기대하는 것이 있다. 첫째: 새로운 비전이 제시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교권과 지역주의 등 교회의 아픈 모습을 보며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합동신학교와 교단을 출범시킨 바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해온 것이다. 아픔을 겪으면서 무지역노회를 지역 노회로 통합했고 교권을 타파하였다. 그 결과 교권과 지역주의가 모두 타 파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비전이 제시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교권주의나 지역주의의 모습들이 사라진 시점에서 우리가 새롭게 추구해야 할 비전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새롭게 직면하는 제반 문제 앞에서 개혁주의 목회자와 교회로서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지 등. 이번 총회가 이런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어 구체적인 목회지침과 교단의 정체성 을 확립해 주었으면 좋겠다. (열린예배 등의 예배갱신 문제, 평일예배 문 제 등의 주일성수 문제, 다원주의의 결과인 종교 혹은 교단 혼합주의 등) 둘째: 교회 개척과 성장에 대한 교단적인 대안이 제시되기를 바란다. 우리 교단은 처음부터 교회 개척이 주류를 이루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교 단인지라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대부분 개척을 했다. 그 어떤 교단보다 개 척교회 비중이 큰 교단일 것이다. 이것이 우리 교단이 가지고 있는 특징임 과 동시에 강점이기도 하다. (신학교 때 가지고 있던 개혁주의적인 생각들 이 각 교회의 목회현장에서 실현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교단이 개혁주의적 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개척교회가 많은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개척교회 설립과 성장을 위한 교단적인 배려와 대책과 지원은 너무 미약했다고 생각한다. 교단 차원에서 설립한 교회가 없다. (제주도 한라산 교회?) 우리가 생각하는 개혁주의적인 교회를 처처에 세워야 한다.(종교부 지 확보) 정책적으로 인구 밀집지역과 새로 개발되는 지역에 교회를 세워 야 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개척으로는 불가능하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개인이 개척을 함으로 주변의 지도와 관심과 배려가 적다. 그 결과 더욱 어려움이 가중되며, 동시에 어렵사리 개척하여 성장한 교회들은 자연히 교 단에 대한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라도 교회 개척과 성장에 대해 교단과 노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대 책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총회를 즈음하여 여러 가지 생각이 있지만 이 작은 것부터 하나씩 접 근해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15 no image 반헌법적 행위는 즉시 철회되어야 한다/박기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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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 1999-09-03
-1. 공공시설에 단군신상을 건립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단군신상을 건립하면서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누가 먼저 꾸며낸 말인지는 모르나 참으로 교묘하고 기교가 차 있는 말이다. 단 군신상이라는 주상(鑄像)을 세우는 일을 하면서도 그들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단군을 종교화 하려는 시도를 누 구보다도 반대해 왔다’라고 공언을 하고 있다. 참으로 세상에 별 희한한 거짓말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군신상이라는 축조물을 공공시설 장소에 세우는 목적은 단군을 국조(國 祖)로 숭배하자는 데 있지 않은가? ‘문화인’으로 자부하고 있는 그들이 목적도 없는 무의미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일은 아닐 테고, 그렇다고 그 많 은 예산을 투입하면서 단순한 기념비 세우는 정도로 생각하면서 이 일을 추진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단군상은 이미 신격화(神格化)된 인격 상(人格像)이기 때문에 그냥 단순한 하나의 상(像)이 아니다. 단군신상을 건립하면서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그들은 무 언가 사고(思考)상 착오 내지 오류를 범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고 의식적 혹은 의도적으로 그런 말을 한다면, 이것은 위장술로 국민을 현혹하고 기 만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2. 정부 당국에 묻고 싶다. 우리 나라에는 여러 종교가 혼재해 있다. 신교자유(信敎自由)가 보장되어 있고, 또 종교 다원화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러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정부가 어떤 특정 종교에다 그 어떤 호의나 특권을 준다면, 이것은 공평치 못하며 이 불공평한 특혜로 인하여 기타의 종교는 발전상 절대적으로 불리 한 타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각 종교들에 대한 불공평한 대우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의 엄청난 파국을 몰고 올 수 있다. 그러므로 단군신상 건립문 제는 우리 나라 종교계에 관한 문제일 뿐만이 아니고 나라 전체의 운명에 관계되는 아주 중대한 문제이다. 3. 그리고 단군신상을 가지고 종교는 아니라고 하는 이론은 대단히 국민을 우롱하고 무시하는 행위이다. 비록 그들이 ‘단군신상’이 아닌 ‘단군상 ’이라고 변명을 해도 그것은 저희들의 강변일 뿐, 객관적인 견지에서 볼 때 그것은 ‘단군신상’이라고 함이 당연하고, 실제로 그들도 내심으로는 ‘단군신상’으로 의식화, 신앙 화 되어 있다. 그들은 단군을 국조신(國祖神)으로 숭배하고 있고, 심지어 유일한 절대신으로 믿고 섬기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말 즉 ‘우리는 단군을 종교화 하려는 시도를 누구보다도 반대해 왔다’라는 말은 정말 그들의 속심이 드려다보이는 언사이다. 그들의 위장 술책으로밖 에 보이지 않는다. 종교인은 누구보다 정직하고 솔직해야 할 것이다. 현재 단군 숭배자들은 ‘단군은 종교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단군(國祖)을 찾아 국민으로서 예의를 표하자는 것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물론 그득이 어떤 변명을 하든 솔직히 말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기독신자의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세상에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싶다. 그들이 과거 일제시대 때 일본 사람들이 하던 일을 배워서 하지는 아니할 터인데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은 수법을 가지고 나타날까 하는 의아심이 든 다. 한국 기독신자는 현재 경계심과 공포, 그리고 분노와 위 기감을 느끼며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 일제 때의 신사참배 반대의 정신으로 볼 때 지금의 기독신자들은 그 착잡함을 내면에 감춘 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기독신자의 신앙양심과 감정을 억누르고 짓밟아도 되는가? 실 로 국민으로 하여금 마음놓고 신앙생활과 생활활동을 하게 함이 국가의 본 분이요 책임일 터인데 오늘날의 현실은 어찌되어 이렇게 되어 가는지 묻고 싶다. 반헌법적 처사는 즉시 철회되어야 한다. 필자는 80노구이다. 기독신자로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우국지심에서 드리는 말이다. 정부의 깊은 헤아림을 요청하는 바이다.
14 no image 21세기를 바라보며 우리 교단의 나아갈 길/김상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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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9 1999-09-03
-한국 교회의 관심을 한 곳으로 모으며 개혁총회가 출범한 지도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총회와 개교회가 놀라운 부흥과 발전 이 있었음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정암 신학 사상의 귀결을 3대 이념으로 보았을 때 고인이 생존해 계실 때 에는 3대 이념이 “이 것이다”라고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분의 언행심사 (言行心事)가 그분을 따르고 존경하는 모든 분들께 충분히 이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개혁교회의 이념이 왜 3대 이 념이어야 하고 총회와 개교회의 목표인지 성경으로 돌아가 충분히 설명되 고 가르쳐서 이념이 정착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갈수록 3대 이념이 쇠 퇴하고 빛을 바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 이때에 함께 점검하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매년 총회가 열리면 많은 분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며 회기 중에 다른 총회의 소식을 접하면서 총회가 은혜스럽게 잘 폐회되었다는 소식과 미담 을 들을 땐 “개혁총회는 다르다 ”라는 말을 들으면서 주님께 감사드립니 다. 참으로 총회가 할 일은 너무나 다양하고 어려운 일이 많을 것이지만 그 중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면 개혁교회가 나아갈 방향과 비전을 제시 하는 일이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매년 총회가 끝나면 교사로서 서운한 마음을 숨길 수 없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육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크고 중요한 사업이겠으나 개혁 이념이 계승, 발전되기 위해서는 교육이 아니고 는 이룩하기 어려울 것이며 개혁총회가 출범한 지도 20여 년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학생들을 가르칠 교재가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교육이 없는 개혁이념은 구호에만 그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다양한 신학 사상 속에 교파간 골이 더 깊어만 가는 현실 속에서 3대 이념이 바르게 정착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이야기한 교재가 꼭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개혁교회의 특색(?)은 교육을 통해서만 이루 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침례교회 같이 교육의 백년대계(百年大計)는 못 세워도 반드시 교재로 뒷받침을 해주어야 된다는 것은 저 혼자만의 생 각이겠습니까? 고인이 그토록 애타게 외치고 교육하신 3대 이념이 총회와 개혁교회의 목 표이고, 그분을 따르는 분들의 눈물과 희생으로 기초석을 놓았는데 건축은 못하게 되지는 않는지 조금은 염려가 됩니다. 그동안 잘 버텨(?)왔다고 생 각되며 교재를 만들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계획과 연구가 필요할 것인데 이 번 총회에서는 긴급안건으로 상정을 해서라도 이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합 니다.
13 no image 총회에 바란다/박동욱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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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1 1999-09-03
-지난 총회 총대로 참석하고서 나는 개혁교단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야 했 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개혁교단을 인정해 주실까?’ 하는 것이다. 첫째 : 개혁교단 일세대라 할 수 있는 증경총회장들의 영향력이 너무 컸다. 고정관념으로 굳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발상의 전환이 불가능하구나 생각하 니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 총회부터 증경총회장님들은 한 발 뒤로 물 러서 주시고 헌법도 수정되었으면 한다. 둘째 : 교리나 신앙의 본질이 같으면서도 울타리를 쳐서 구별하는 교단들 이 너무 난립한 현 상황을 타개해 주었으면 한다. 새천년을 준비하고 새로 운 몸가짐으로 임하려면 교단이 하나되는 통합운동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 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의 뜻이라고 확신한다. 셋째 : 복음의 본질, 교회의 본질, 신앙생활(예배)의 본질에 대한 재점검이 있어야 한다. 우리 나라에 전래된 모든 종교가 무속화 되었거나 무속화 되 어가고 있다는 연구 보고를 접할 때마다 “나는 어떤가?” “우리는 어떤 가?” 하고 살펴보게 된다. 그 한 가지 예로서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성 도인가 예배를 구경하는 관객인가?” 관객은 하나님 한 분이어야 하는데… 참으로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고 노회와 총회의 활동이 예배가 되는 그런 변화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12 no image 총회에 바란다/박병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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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5 1999-09-03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이 놀라운 속도로 전 유럽 대륙을 휩쓸고 지나갈 때, 구교는 곧 사라지고 진정한 개신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 에 실현되리라고 사람들은 예측하였다. 그러나 개혁은 기대와 같이 이루어 지지는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는 얼마 가지 않아 심각한 침체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들이 있었다. 먼저 농민전쟁 당시 루터는 처음에는 농민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살상을 서슴지 않는 과격함을 드러내자 그는 동조를 철회하고 더이 상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럽의 농민들 상당수가 개신교회를 배척하고 외면하였다. 다음 지나친 교리적 강조는 성도들의 도덕적 해이를 가져왔다. 이신칭의의 지나친 강조로 성도들은 책임 있는 삶보다는 은혜로 얻은 구원의 감격에만 몰입해 있었다. 그 결과 당시 구교도들보다 신교도들이 오히려 더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개혁의 지나친 강조였다. 개혁교회들은 단순한 교회 개혁만을 주장하 지 않았다. 정치, 문화, 교육 그리고 사회 전반의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는 기득권을 누리고 변화보다는 안일을 추구하던 당시의 중상류층으로 개신교 회를 외면하게 하였다. 그리고 개신교회들의 분열이었다. 루터파, 칼빈파 그리고 즈빙글리파 등으 로 교회들은 일치점이나 타협을 찾지 못하고 분열되었다. 이런 혼란을 틈 타 재침례파와 같은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하였다. 이는 대다수의 사람들로 개신교회를 부정적으로 보게 하였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 오늘 제84회 개혁총회를 맞게 되었다. 처음의 기대와 달리 본 교단은 상당한 정도의 침체국면을 맞고 있다. 종교개혁 당시의 교 회들처럼 본 교단이 겪는 쓰라린 침체는 그만한 이유들이 충분히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들을 보다 심도 깊게 검토하고 개혁의 햇불 이 더욱 타오르게 하는 총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총회는 교단이 갖는 정례회의이지 교단의 모든 것이 아니다. 총대들은 지 노회들과 지교회들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주장 을 개진하기 위해서 온 이들이 아니다. 개혁의 의지를 갖고 있는 지노회 회원들을 대표하여 온 이들이다. 그러 므로 그들의 모든 의지들이 집약되는 총회가 되어야 한다. 본 교단은 개혁의 열망으로 인하여 상당히 투쟁적이고 비타협적인 면을 지 니고 있다. 이로 인하여 본 교단 안에는 일치와 협력이 상실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개혁이란 섬김의 극대화지 투쟁이 아니다. 사랑과 용서의 실현이지 비판과 고발의 개념이 아니다. 투쟁과 비판으로 상처투성 인 모습들을 보고 조용히 새롭게 시작된 본 교단이 다시 옛날의 장으로 돌 아간다면 다시 본 교단은 인간적인 교회 정치의 무대가 되고 말 것이다. 금번 총회는 섬기고 사랑하고 협력하려는 새로운 개혁의 모습으로 돌아가 야 한다. 우리는 개혁교단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총회는 지노회들을 대표하는 총대 들의 모임일 뿐이다. 총회가 교단이 아니고 물론 총회가 교단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총회는 항상 일회적으로 모이고 폐회 후에는 그 권 위가 지속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현실은 점점 모든 것이 총회에 집약 되고, 결과 몇 사람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주장되려는 위험에 처해 있다. 본 교단 내에 있는 전 교회와 전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가능성이 집 약되어 큰 힘으로 드러나도록 그 역할을 총회는 다하여야 한다. 이런 생산 적인 총회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11 no image 총회에 바란다/이점수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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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1 1999-09-03
-한국 교회의 관심을 한 곳으로 모으며 개혁총회가 출범한 지도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총회와 개교회가 놀라운 부흥과 발전 이 있었음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정암 신학 사상의 귀결을 3대 이념으로 보았을 때 고인이 생존해 계실 때 에는 3대 이념이 “이 것이다”라고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분의 언행심사 (言行心事)가 그분을 따르고 존경하는 모든 분들께 충분히 이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개혁교회의 이념이 왜 3대 이 념이어야 하고 총회와 개교회의 목표인지 성경으로 돌아가 충분히 설명되 고 가르쳐서 이념이 정착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갈수록 3대 이념이 쇠 퇴하고 빛을 바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 이때에 함께 점검하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매년 총회가 열리면 많은 분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며 회기 중에 다른 총회의 소식을 접하면서 총회가 은혜스럽게 잘 폐회되었다는 소식과 미담 을 들을 땐 “개혁총회는 다르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주님 께 감사드립니 다. 참으로 총회가 할 일은 너무나 다양하고 어려운 일이 많을 것이지만 그 중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면 개혁교회가 나아갈 방향과 비전을 제시 하는 일이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매년 총회가 끝나면 교사로서 서운한 마음을 숨길 수 없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육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크고 중요한 사업이겠으나 개혁 이념이 계승, 발전되기 위해서는 교육이 아니고 는 이룩하기 어려울 것이며 개혁총회가 출범한 지도 20여 년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학생들을 가르칠 교재가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교육이 없는 개혁이념은 구호에만 그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다양한 신학 사상 속에 교파간 골이 더 깊어만 가는 현실 속에서 3대 이념이 바르게 정착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이야기한 교재가 꼭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개혁교회의 특색(?)은 교육을 통해서만 이루 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침례교회 같이 교육의 백년대계(百年大計)는 못 세워도 반드시 교재로 뒷받침을 해주어야 된다는 것은 저 혼자만의 생 각 이겠습니까? 고인이 그토록 애타게 외치고 교육하신 3대 이념이 총회와 개혁교회의 목 표이고, 그분을 따르는 분들의 눈물과 희생으로 기초석을 놓았는데 건축은 못하게 되지는 않는지 조금은 염려가 됩니다. 그동안 잘 버텨(?)왔다고 생 각되며 교재를 만들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계획과 연구가 필요할 것인데 이 번 총회에서는 긴급안건으로 상정을 해서라도 이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합 니다.
10 no image 총회에 바란다/송용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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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6 1999-09-03
-우리 교단을 생각하면 먼저 삼대 이념(三大理念)인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이 떠오른다. 이 말을 하면 너희들만 바르냐고 욕하는 사람도 있 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 우리가 바르다는 것이 아니라, 이 바름을 추구한다 는 의미다. 이 바름은 누구와 비교해서 바름도 아니요, 우리의 자랑 위한 바름도 아니다. 이 삼대 이념을 외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 에선 우리의 책임이요 특권이다. 이를 우리 각자의 삶에 실현되기 위해서 는 끊임없는 기도와 분투와 자기 개혁이 필요하다. 우리 총회가 출범한 이후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면서 느낀 점은 이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총회에서 여러 목사 님과 장로님들과 얘기하면 대다수 공감하면서도 도입하지 못하는 것이 있 다. 바른 신학에 대한 것은 장로인 입장에서 논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 른 교회를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 해서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장로는 임직 후 3년에 한 번, 위 임 목사는 위임 후 5년에 한 번, 개척교회 목사는 개척 후 5년에 한 번씩 신임 투표를 실시하여 더욱 책임 있는 당회 가 되도록 했으면 한다. 또 장로를 세울 수 있는 데도 세우지 않는 교회가 없도록 노회장과 총회 총대는 조직 교회의 목사만 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한 다. 이를 여러분들이 공감하지만 덕이 되게 해야 한다는 정에 이끌려 도입 이 어렵다. 이는 결코 이념을 이루는 자세가 아니다. 인간 상호간의 정리(情理)가 아니라, 제도에 따라 공정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는 누구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연약성 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번 총회를 통해 우리의 삼대 이 념이 한 걸음 더 실현되기를 기도 드린다.
9 no image 총회에 바란다/정재선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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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3 1999-09-03
-때가 때이니 만큼, 총최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도 뜨거움을 느낀다. 영 적 소망과 세상적 소망이 합해져서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시대적으로는 변 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역사의 흐름은 새 천년을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시 기이다. 모든 질서는 허물어지고, 죄와 이단이 힘을 쓰는 이때에, 교회의 사명이 너무도 막중함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우리 교단은 합동 신학대학원대학과 함께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이란 3대 개혁이념을 추구하면서, 세워진 교단임을 자부할 수 있음은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우리 교단과 학교를 사랑하시고 기도해 주실 박윤선 목사님과 노진현 목사님의 신앙이념과 인격이 학교와 교단의 영적양식으로 남아있기 때문인 줄 안다. 비록 수는 적으나 3대 이념과 함께 세우신 이들의 신앙이념을 전수받음으 로, 공동체의 이해와 화합과, 삶의 실천이 잘 나타나게 될 줄 믿는다. 그러 므로 우리 교단의 신앙 이념이 흐려지지 않도록 열심을 품고, 참된 목자가 되고, 참다운 청지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 절하다. 교단마다 총회 때가 되면, 신앙 양심은 흐려지고 사회적 해악에 오염되어서 선거과열이다, 부정 선거다 하는 후문들이 들릴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우리 교 단도 지상에서 거론된 적이 있었다. 가슴 아픈 일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모든 총대(특히 장로총대)님들에게 부탁함은, 총대로서의 준비를 충분히 하여서 끝날까지 회의에 참석하여야지 임원선출이 끝나면 자리를 비우니, 총대가 무슨 회무를 의결했는지 알 수 없을 것 같아서 안 타깝다. 모든 문제를 같이 의논하고 교제함으로 해서 교단도 발전될 줄 안 다. 총회의 모든 결과는 총대님들의 실력이요, 신앙 인격인줄 안다. 주님께 서 주신 사명을 깊이 인식하고, 치유와 화합과 사랑과 일치로 84회 총회는 성 총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Selected no image 총회에 바란다/박윤성 목사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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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0 1999-09-03
-제 84회 총회가 몇일을 앞두고 있다. 근래에 이르러 총회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총회가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가 1981년 9월에 총회를 창립할 때 우리 총회의 목표와 방향은 분명했 고 확고했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개혁이었으며 그 실현방침으로 3대 이 념 곧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 이와같은 총회의 기본설정과 목표는 명분만 남아 있 을 뿐 한국교회의 거대한 세속적 탁류속에 우리마저 함께 표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미한 교권싸움과, 지방관념과 계층간의 갈등, 위계질서의 붕괴, 윤리적 타락, 교회의 침체 등 지난 날에 경험했던 부패상이 서서히 파생하고 있다 는 것이다. 우리 총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제84회 총회는 위에 지적한 죄악들에 대하여 깊이 회개하는 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진실한 신앙과 양심과 이성을 되찾는 총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풀어지고 느즈러진 우리들의 자세를 바로잡는 총회가 되기를 바란 다. 우리가 처음 가졌던 개 혁의 신앙과 의지를 되찾고 벅찬 감격과 소망을 가지고 출발했던 영적 기세(氣勢)를 회복하는 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지금 한 세기를 보내고 새로운 세기를 맞는 중대한 기 점에 와 있다. 미래를 생각하며 미래를 설정하는 생산적인 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회무적이며 사무적인 총회가 되지 말고 성숙하고 앞을 향해 가는 총회, 개 혁주의 교회다운 총회, 곧 제84회 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7 no image 총회에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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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9 1999-09-03
-최근 우리 주변에서, “총회에 바랄 것도 없고 교단에 바랄 것도 없다”는 자조적인 말을 가끔 듣는다. 지난 여름 우리 교단의 지도자 한 분은 우리 총회와 교단에는 전문적인 지도력도 부족하고 내일에 대한 방향 제시도 부족하다는 정확한 진단을 했다. 그저 남들이 우리 총회와 교단을 ‘바 른’총회와 교단으로 보고 있다는 부정확한 착각에 빠져서 안일하고 만족 하고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필자도 총회에 많은 것을 바라지 못하 고 있다. 그저 임원선거하고 헌의 보고 받고 정치부에 맡겨서 처리하도록 하고 끝나는 총회가 아닌가? 최근에는 일부 회원들이 사적인 정치적 관심 까지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것들을 총 회에 바라고 싶다. 첫째, 총회가 故박윤선 목사님이 바라시던 대로 은혜와 감동이 넘치는 축 제 분위기의 총회로 진행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녁마다 한 해 동안 힘써 해 온 1)선교 사역 보고, 2)자선 사역 보고, 3)미래 사역 제 시 등이 있었으면 좋겠다. 둘째, 총회가 사무처리 하는 총회에서 정책을 발의하고 결의하고 수행하는 일하는 총회로 탈바꿈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자가 10여년 전부 터 헌의안 “총회발전 및 정책위원회”를 두고 실질적으로 가동하도록 해 야 할 것이다. 지금 “총회정책위원회”는 유명무실한 위원회로 남아 있다. 셋째, 총회는 교단 안에 머무는 총회가 아닌 한국교회와 사회 및 세계교회 안에 자리하는 총회로 발전하도록 다른 교단 및 다른 나라 교회와 유대 및 협력관계를 증진하는 총회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협력의 식과 지도력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6 no image 북한 더 살기 어려워졌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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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5 1999-08-23
-오늘날 많은 북한 주민들이 식량난 때문에 북한을 탈출하여 인접국인 중국 에 머물고 있다. 탈북자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약 2~30만명 정 도 될 것으로 관계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 인접국 중국에서 참담 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북한으로의 송환의 공포속에 떨고 있다. 그래서 우리 총회 남북교회 협력위원회에서는 한기총 산하 북한난민 UN청원운동본부와 협 력하여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취급해 달라는 청원을 UN에 하기 위해 지금 서명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한편 총회 남북교회 협력위원회에서는 그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4명의 위원이 지난 7 월에 중국 현지를 답사하고 돌아온 바 있다.필자가 현지 답사 위원중의 한 사 람으로 탈북자들과 소위 ‘꽃제비’라고 불리우는 중국에서 구걸하는 탈북소 년소녀들을 만났을 때 무엇보다 안스럽게 느낀 것은 탈북 아이들이 그들의 나 이에 비해 키가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조선족 자치주인 길림성 연변지역에 가면 탈북 청소년들을 쉽 게 만날 수 있다. 이 아이들은 한국에서 온 사람들 이 나타날 만한 곳을 잘 알고 있다. 예를 들면 호텔주변, 식당주변, 삼자교 회, 백두산 코스 등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중국 공안당국의 감시의 눈길을 피해 서너명씩 한국인에게 찾아와 도 움을 호소한다. 그러나 그들의 숫자가 1-2년전보다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 만큼 감시가 심하고 공안당국에 붙잡혀 가거나 북한으로 송환된 아이들이 많 기 때문이다.필자가 중국에 간 것이 이번이 세번째이므로 이같은 사실을 피부 로 느낄 수 있었다. 탈북 청소년들을 만날 때마다 실감하는 것은 북한이 얼마 나 살기 어려우면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의 키가 저렇게 작을까 하는 것이다. 꼭 초등학교 2-3학년 정도밖에 안되어 보이는데 나이를 물어보면 16살이라는 아이도 있고 17살이라는 아이도 있다. 배가 볼록 나온 아이, 피골이 상접한 아이, 버짐이며 피부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이 많다.밤에 몰래 반도체 라디오 (트렌지스타)를 들어 남한소식을 알고 있었다는 탈북자 김두영 씨(55세. 가 명)와 그의 아내에 의하면 지금 북한은 식량 사정이 말이 아니라고 한다. 식 량 사정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한 다. 그러면서 자신들도 견디다 못해 가만히 앉아 굶어 죽기보다는 붙잡혀 죽 는 한이 있더라도 탈북을 시도해 보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고 삼엄한 감시망 을 뚫고 비오는 밤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고 말했다.거 주 이전의 자유가 없고 허가 없이 타 지역으로 이동할 수 없는 북한이지만 요 즈음은 먹을 것 구하러 간다고 하면 여간해선 붙잡지 않는다고 한다. 김씨의 부인에 의하면 지금 북한의 학교에는 등교 못하는 학생이 절반도 더되고 아 예 문을 닫는 학교들도 있다고 한다. 사정은 공장도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중 국쪽 접경지역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함경북도 ‘무산시’에는 철강 공장이 즐비한데 단 한 군데도 가동이 되지 않고 있었다. 북한 식량난의 심각한 실상 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사이에 둔 북한 중국 국경지대의 옥수수밭에서도 실감 할 수 있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둔 중국과 북한의 옥수수밭은 너무 판이하다. 중국 땅의 옥수수는 사람키보다 크고 무성하다. 그러나 북한 땅의 옥수수는 불과 1m도 안되고 그나마 듬성듬 성한 데가 많다. 왜 그런가? 북한에 서는 비료가 없어 비료를 사용하지 못하는 데다 윤작도 하지 않은 채 오랫동 안 경작만 하는 바람에 땅이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지금 북한은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자생능력을 상실했다고 말하고 있다.
5 no image 부흥운동을 하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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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6 1999-08-10
-해방과 6.25동란 전후로 한국 교회는 어려운 현실적인 상황에서 신흥종교와 신비적인 이단 등의 출현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 부흥과 복음전파를 위하여 부흥운동이 계속되게 하셨다. 이성봉 목사, 박재봉 목사, 박용묵 목 사 등 훌륭한 부흥사들의 활약이 침체속의 한국 교회를 일으켰다. 1960년대 각 교단의 분파와 분열의 아픔이 있었지만 1965년 초교파적으로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대중 전도집회가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고 이후 계속 된 부흥전도집회가 지방별로 이루어지면서 당시 4만 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당시 부흥회는 월요일 밤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하였다. 특히 성령운동으로 세 워진 오순절계통의 순복음교회는 당시 부흥운동으로 성장한 교회가 되었다. 60년대 말의 부흥운동은 초교파적 운동이었다. 이웃 교회가 부흥회를 한다면 내 교회 부흥회 하는 듯 기뻐하며 참석하고 교단 교파를 초월하여 성도간에 교제가 활발하였다. 당시 선교운동이 공단과 노동자들에게 파급되어 산업선교 회가 활발히 활동되기도 하였 다.교회가 새벽기도의 열심 때문에 당시 새마을 운동 노래 가사까지 인용되게 되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도 국가는 정치적 사건들이 많았고, 유신체제 아래와 그리고 10.26사건 등 어려운 시련속에서 도 교회는 계속 부흥운동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여 700만의 기독교인 숫 자로 증가되었다. 그리고 초교파 부흥협회가 조직되면서 활발히 부흥회가 전 국적으로 개최되었고 1973년 빌리그래이엄(Billy Graham)의 3차 집회가 여의 도에서 5일동안 회집되면서 수만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1974년 Explo74 대회 로 큰 전도운동이 일어났다. 한국교회의 부흥발전은 70년대 말에 이룩되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군부정치로 5.18 광주민주화운 동등 유혈사태와 6.29선언등 정치적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도 교회는 계속 적인 부흥회와 전도열기가 지속되어 1990년 통계에 의하면 3만5897개의 교회 에 6만4688명의 교역자, 1212만 1837명의 교인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는 부흥회보다 질적성장을 위한 성경공부라는 바이블 스터디(Bible study)가 교회마다 바람을 타듯 일어났다. 풍요한 생활문화 속 에서 목회자들도 교회의 내실을 다진다는 생각에 교회 교육수준을 높이기 위 해 지식주의 학문주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 교회는 기도 와 부흥운동이 식어지면서 힘을 잃어가게 되었다.지금까지 뒤돌아보면서 우리 는 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부흥운동으로 발전하고 성장되었음을 긍 정 평가해야 한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교회 성장은 목회자 자신 의 긍정적인 성령 역사를 의지하는 활력있는 비젼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 가 야 한다. 건전한 은혜운동이 1년에 2-3차례 또는 3-4차례 있어야 한다. 우리 교단은 개혁적 사명감이 높다(?)고 우리들이 자평한다(밖에서는 그렇게 보고 있지 않지만). 우리들만이 높은 신학수준을 갖고, 바르게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다른 교단은 부패하고 잘못된 것처럼 인식하는 교만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이러므로 부흥회나 건전한 은혜운동을 수준이하의 운동으로 보고, 높은 학문(?)과 높은 신학(?)적인 측면에서 부흥운동을 제한시키거나 무시하 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이렇게 된 여러 원인이 있다면 부흥사 들의 매너와 사역 그리고 여러 가지 발생된 도덕적 타락등 부흥사들의 어두 운 면들이 교회에 상처를 준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자 자신도 부 흥사들의 많은 시행착오를 인정하고 싶다(지금은 부흥사들의 교육이 자주 있 음). 그러나, 부흥회가 교회의 활력과 성장에 역사적으로 증거하고 큰 영향 을 끼치고 있다. 부흥운동은 목회자에게 도전을 주고 성도들에게 힘을 주며, 교회 부흥과 성도들에게 영적 성장을 해준다는 측면에서 동의해 주기 바란다. 진정한 한국 교회의 개혁도 성령의 능력과 부흥운동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각 교회마다 기도운동과 은혜운동을 다양하게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이 교회 를 이끌도록 부흥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건전한 은혜운동이 교회의 영적 질 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됨을 깊이 생각하기를 바란다.
4 no image 부흥운동을 하라.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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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6 1999-07-20
-개혁신보 제237호 사설에 ‘머물러선 교회 성장’에서 교단의 교세가 1년전 이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하며 무엇이 이렇게 되어가는지 탄식한 다고 하였다. 이 문제는 우리 교단 목회자들이 더러 모이면 여러 가지 교회 의 일들을 이야기하며 나누는 대화 가운데 한약방의 감초처럼 나오는 한숨을 짓는 관심사이다.양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그나마 기존성도들이라도 성숙한 신 앙생활을 위하여 교육을 시켜 질적 성장을 돕고자 힘쓰고 있어도 교회 분위기 는 기쁨과 넘치는 은혜없이 침체가 되어 있다고 자평하고 있다. 대다수 목회 자들이 교회의 영적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그 해결 방안이 없이 목회 자 자신도 나약해지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안타까울 뿐이다. 필자는 우리 개혁 교단의 교회성장이 정체된 상태는 부흥운동을 일으키지 아니한 목회자의 영적 지도력 상실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본 기고문은 교단의 부흥단을 섬기고 있 는 총무로서 부흥운동이 교회성장의 동기가 된다는 측면에서 살피고 외치는 견해이니 이해하고 공감해 주었 으면 한다.부흥이란 말은 영어로 Revivere에 서 온 말로 ‘다시 살아나다’ ‘소생하다’ ‘회복시키다’ ‘살게하다’의 뜻이 있다. 구약성경에는 ‘하야’란 동사로 ‘재생시키다’ ‘생명을 주 다’ ‘소성시키다’ ‘구원시키다’ 등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브리태니커 사전에 의하면 기독교의 부흥운동(Revivalism)은 ‘기독교 내의 다시 새로워 진 종교적 열성의 한 예로 교인들과 새로운 구도자(새신자)들의 영적인 열성 을 일으키는 고조된 노력’이라고 하였다. 구약의 근거를 보면 가나안 정복 중에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에서 말씀집회를 하고(수 8:30-35) 사무엘 선지 자가 미스바에서 회개 성회를 하고(삼상 7:3-17) 엘리야의 갈멜산 집회(왕상 18장) 요나의 니느웨 외침(욘 3:4-9) 요시야 왕의 신앙개혁운동(왕하 22-23 장) 에스라의 수문앞 광장 대부흥집회(느 8장)들을 통하여 죄와 부패로 말미 암아 신앙의 힘을 잃고 쇠퇴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르게 하고, 깨닫게 하 여 힘을 얻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였다. 신약의 근거를 보면 오순절 성령 역 사를 통하여 초대교회의 왕성한 부흥과 복음전파는 순교도 기뻐하며 힘을 내 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오직 성령에 의한 성령의 능력인 것이다. 교회부흥 의 힘과 동기는 성령의 역사이다. 교회가 날마다 더하게 하시고 가르침을 받 고 성숙한 신자가 되어 헌신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지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이다(행 2:42-47).기독교 2천년 역사속에 교회가 많은 시련 과 아픔 핍박 부패를 헤치고 오늘날까지 크게 발전되어 온 것은 각 시대마다 신앙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때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로 교 회가 부흥되었고, 중세시대에는 종교적 정치적 교권적인 암흑속에 십자군운동 (여러가지 결과적인 모순도 있었다)으로 성지순례를 통하여 열심있는 신앙을 추구하고 또한, 수도원운동으로 경건의 절제운동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코 자 했으며, 로마교회의 타락과 어두움에서 올바른 신앙의 종교개혁 운동이 일 어났다. 종교개혁 운동은 2천년 기독교 교회사상 최고의 교회개혁 부흥운동이 라고 할 수 있다. 근대에 와서 부흥운동은 독일의 경건주의운동, 영국의 웨슬 레 부흥운동, 미국의 대각성운동으로 교회부흥이 일어났다. 그 결과 전도가 잘되었고, 교회가 영적 힘을 얻어 사회적으로 봉사운 동, 교육운동, 선교운동 이 일어나, 우리나라에도 선교사들이 들어오고 사회봉사, 선교, 교육이 기독 교의 사상으로 나라와 사회에 이바지했다. 한국 교회의 발전을 살펴보면 성장 의 원인과 동기는 부흥운동이다. 1903년 8월 원산에서 선교사들이 성경연구 기도회를 갖고 사경회가 일어났고, 그 영향을 받아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 의 대부흥집회는 일제 식민지 통치의 어두웠던 암흑속에서 빛이었고 희망이었 다. 1907년 1월 6일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폭발적인 부흥운동에 힘입어 당 시 학생 2천여 명이 전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당시 8만 명의 신자 가 18만 명으로 부흥되었다.해방과 6.25동란 전후로 한국 교회는 어려운 현실 적인 상황에서 신흥종교와 신비적인 이단 등의 출현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는 교회 부흥과 복음전파를 위하여 부흥운동이 계속되었다. 이성봉 목사, 박 재봉 목사, 박용묵 목사 등 훌륭한 부흥사들의 활약이 침체속의 한국 교회를 일으켰다. 1960년대 각 교단의 분파와 분열의 아픔이 있었지만 1965년 초교파 적으로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대중 전도집회가 서울운동장에서 개 최되었고 이후 계속 된 부흥전도집회가 지방별로 이루어지면서 당시 4만 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당시 부흥회는 월요일 밤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하였다. 특 히 성령운동으로 세워진 오순절계통의 순복음교회는 당시 부흥운동으로 성장 한 교회가 되었다. 60년대 말의 부흥운동은 초교파적 운동이었다. 이웃 교회 가 부흥회를 한다면 내 교회 부흥회 하는 듯 기뻐하며 참석하고교단 교파를 초월하여 성도간에 교제가 활발하였 다. 당시 선교운동이 공단과 노동자들에게 파급되어 산업선교회가 활발히 활 동되었다.교회가 새벽기도의 열심 때문에 당시 새마을운동 노래 가사까지 인 용되게 되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도 국가는 정치적 사건들이 많았고, 유신 체제 아래와 그리고 10.26사건 등 어려운 시련속에서도 교회는 계속 부흥운동 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여 700만의 기독교인 숫자로 증가되었다. 그리 고 초교파 부흥협회가 조직되면서 활발히 부흥회가 전국적으로 개최되었고 1973년 빌리그래이엄(Billy Graham)의 3차 집회가 여의도에서 5일동안 회집되 면서 수만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1974년 Explo74 대회로 큰 전도운동이 일어 났다. 한국교회의 부흥발전은 7 0년대 말에 이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군부정치로 5.18 광주민주화운동등 유혈사태와 6.29 선언등 정치적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도 교회는 계속적인 부흥회와 전도열 기가 계속되어 1990년 통계에 의하면 3만5897개의 교회에 6만4688명의 교역 자, 1212만 1837명의 교인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 까지는 부흥회보다 질적성장을 위한 성경공부라는 바이블 스터디(Bable study)가 교회마다 바람을 타듯 일어났다. 풍요한 생활문화 속에서 목회자들 도 교회의 내실을 다진다는 생각에 교회 교육수준을 높이기 위해 지식주의 학 문주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 교회는 기도와 부흥운동이 식어지면서 힘을 잃어가게 되었다.지금까지 뒤돌아보면서 우리는 교회가 성령 의 능력을 의지하는 부흥운동으로 발전하고 성장되었음을 긍정 평가해야 한 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교회 성장은 목회자 자신의 긍정적인 성 령 역사를 의지하는 활력있는 비젼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 가야 한다. 건전 한 은혜운동이 1년에 2-3차례 또는 3-4차례 있어야 한다. 우리 교단은 개혁 적 사명 감이 높다(?)고 우리들이 자평한다(밖에서는 그렇게 보고 있지 않지 만). 우리들만이 높은 신학수준을 갖고, 바르게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다른 교단은 부패하고 잘못된 것처럼 인식하는 교만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이러므로 부흥회나 건전한 은혜운동을 수준이하의 운동으로 보고, 높은 학문 (?)과 높은 신학(?)적인 측면에서 부흥운동을 제한시키거나 무시하지는 않는 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이렇게 된 여러 원인이 있다면 부흥사들의 매너 와 사역 그리고 여러 가지 발생된 도덕적 타락등 부흥사들의 어두운 면들이 교회에 상처를 준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자 자신도 부흥사들의 많은 시행착오를 인정하고 싶다(지금은 부흥사들의 교육이 자주 있음). 그러 나, 부흥회가 교회의 활력과 성장에 역사적으로 증거하고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부흥운동은 목회자에게 도전을 주고 성도들에게 힘을 주며, 교회 부흥 과 성도들에게 영적 성장을 해준다는 측면에서 동의해 주기 바란다.진정한 한 국 교회의 개혁도 성령의 능력과 부흥운동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각 교회마 다 기도운동과 은혜로운 운동을 다양하게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이 교회를 이 끌도록 부흥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건전한 은혜운동이 교회의 영적 질적 성장 에 큰 도움이 됨을 깊이 생각하기를 바란다./심훈진 목사
3 no image 수련회에 왜 참여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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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8 1999-05-28
-옛말에 ‘잔치가 있으면 종은 밖으로 나가나 자녀는 먼 곳에 있다가도 집을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가정이나 교회, 단체에 속해 보면 때로는 모이고 싶 지 않는 일들이 가끔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소속감 때문에라도 행사에 우선 순위를 두어 참석하고 물질과 마음, 시간 등으로 협력한다.이번 총회수련회 는 개혁교단의 시대적 요청이요 너무나 중요한 모임이다. 매년 기도회와 수양 회를 통해 함께 기도하며 동역자의 우정을 돈독히 했으나, 올해는 4월 기도회 와 8월 수양회를 동시에 실시하게 되었다. 이젠 모이고 단합해야 목회도 잘된 다. 우리 교단의 모든 교회가 잘될 때 도시 농촌 모든 교회도 부흥한다. 일례 로 성도들이 필요에 의해 이사하게 되면 같은 교단을 먼저 찾아가기 때문이 다.당장에는 얻어지는 것이 없어도 본 총회에 소속된 교역자는 총회의 발전 과 화합을 위한 배전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본 교단의 잠재력을 보고 현재는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하게 될 것을 믿게 되었다. 그 이유는 목회하시는 선배 목사님들이 동역자와 후배를 위해 헌신하기를 아끼 지 않고 있고, 합신교수님들과 장로회, 전국 여전도회원들 모두가 교단을 사 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강사도 세계적인 목회자이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일본에서 열린 목회자세미나 강사였고 7월에 있을 한국의 큰집회 강사로 내정 되어 있다. 또한 본 교단을 사랑하는 이들의 좋은 강의가 있다. 이번에는 장 소도 아주 좋다. 추억과 낭만이 있고 창조주의 작품이 아름답게 보여지며 영 육의 큰 교훈을 주는 곳이다. 산과 바위와 물의 조화, 목회와 IMF의 긴 터널 을 통과하면서 고생한 교직자들에게 위로와 꿈을 아울러 줄 것이다. 그러므 로 참석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목회자의 지혜일 것이다.혹 어떤 분은 같은 기간에 여러 곳에 세미나가 있어 총회수련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가 있을 수 있으나 내 집의 행사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추구를 위해 다른 곳으로 찾아간다면 본 교단의 소속한 교역자로서의 자긍심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 다. 생각해 보자. 본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교우 중에 옆 교회의 강사가 더 좋다고 직분자가 다른 곳에 참석했다면 그 직분자에게 무엇을 맡길 수 있 겠는가? 개인주의가 팽배해 신앙과 행동의 자유를 부르짖는 이들에게는 선택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람은 지교회에서 중직자로서는 불가능 하다. 만약 그와 같은 자를 앞선 자로 한다면 때로는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 우가 될지도 모른다.성경에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다. 그 렇다면 교직자의 개인주의는 결국 성도들을 개인주의자로 양육해서 하나님 중 심, 교회 중심이 아닌 자기 중심으로 무기력하게 살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깨달은 것은 교단 교회를 사랑하는 충성된 협력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전국여전도회에서 농어촌교역자를 위해 협력하고, 또 교육부의 요청에 선뜻 응하여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분들께 감사한다. 그뿐 아니라 교수님들 의 수양회도 같은 기간에 그곳으로 정했다. 또한 장로기도회도 같은 곳에서 하기로 하였다. 이젠 화합과 성령충만으로 신앙의 동질을 이룰 과제만 남았 다.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로 한국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이들은 먼 저 자신이 개혁되어야 한다.올바른 생활로 교 단의 체질을 강하게 해야 한다. 단합과 헌신 없이 발판만 삼고자 하는 것은 자신은 물론 교단에도 유익을 주 지 못한다. 가족 구성원이 가정에 필요하듯이 교회는 교단이 필요하다. 이유 는 외풍을 막아주는 큰 울타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교회의 힘만으 로 어둠의 권세와 싸움에서 승리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무기력했던 과거를 뒤로 하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신앙의 동질을 가지기 위해 일어서자. 아름다운 만남의 장소로 달려와 좋은 교직자로 성장해 보자. 경제력이 허락 지 않으면 이번 수련회에 옥합을 깬 재력 있는 교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 족한 대로 참석하자. 우리의 기쁨과 행복은 여호와로 인하여 옴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교직자가 모이는 곳으로 마음의 선물과 물질을 가지고 달려와 고생 하는 동역자들을 위로하고 말씀으로 은혜 받는 복된 시간이 되길 바란다. 권태진 목사
2 no image 서양화가 '장완'을 찾아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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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31 1999-05-07
풋풋한 화폭 위에 주님의 세계 담아내 교회당 건축 위해 7억원 상당 작품 헌 납한서양화가 장완(張完)을 찾아서교회당 건축을 위해 싯가 7억원대의 그림 을 헌납했다고 한다면 분명 세인들의 관심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서양화 가 장완(60세, 청아한 교회 집사)에게 있어선 그런 관심은 절대 사절이다. 혼 신을 담은 작품을 선뜻 교회당 건축을 위해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그림 이 가지고 있는 화폐적 가치를 내 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조금이라도 주님을 위해 내놓고 싶은 충정으로 이해한다면 그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이순(耳順)의 나이답게 그 에게 있어 인생은 아름다운 그림 그 자체이다. 그의 화려한 이력은 오히려 거 추장스런 장식에 불과할 뿐, 그의 삶은 그 무엇으로부터라도 자유스럽다. 거 침없이 화폭 위를 달리는 붓끝은 그래서 힘이 있다. 우주의 원리를 가히 극복 한 자연스러운 율동이 그의 절제된 손놀림 속에 담겨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 한다.“성화(聖畵) 는 매우 치밀하고 완벽한 영감 없이는 그릴 수 없는 작업이 죠. 그렇기 때문에 구성의 첫 단계에서부터 구체적인 색감까지 눈으로 보기 전에는 절대로 작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구도만 가지고도 절 로 작품을 해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그가 이 말을 할 때에는 기자의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비장해 보였다. 어느 시인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고 노래했지만 장완의 작품들은 영원전 부터 비춰왔던 빛의 색감을 이미 담아내고 있었다.“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림을 보여주실 때에는 그저 잠잠히 기도만 할 뿐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기도 만 할 뿐입니다. 한 작품을 하기 위해 주님께서 전체를 다 보여주실 때까지 몇 년을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기다림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 다. 기다림 그 자체가 이미 작품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그 앞 에선 세월을 논할 수 없다. 이미 세월을 먹고 사는 것이 그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1 no image ‘관상(觀想)기도’의 실상을 밝힌다_림헌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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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9 2009-07-22
‘관상(觀想)기도’의 실상을 밝힌다 림헌원 목사_한돌교회 “관상추종자들은 성경적 해석과 기도의 방법론 왜곡하지 말아야” 시작하는 말 미국과 한국의 개신교계에 불고 있는 관상(觀想)기도는 다양한 이름으로 위 장하여 표현되어 각 개신교계 교단의 교회 속에 침투 되고 있다. 관상기도 는 경청기도, 침묵기도, 숨(호흡)기도, 마음기도, 향심(向心)기도 등의 다양 한 이름으로 위장하여 교회 안에 들어와 개신교의 신앙과 성경적 가르침의 뿌리를 은근히 뒤흔들며 미혹하고 있는 실정이다. 관상기도 추종자들은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라고 주장하며 관상기도가 매우 성경적인 것인 양 위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터 넷에 올라온 관상추종자들의 글들을 보면 관상기도의 실체는 숨겨 버린 채 온갖 미사여구로 교묘히 치장하여 덮어씌우고 뜬구름 잡는 듯한 관상의 이야 기만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다행히 관상 지지자 중에 한신대학교의 K 교수가 ‘관상기도 의 성경적 근 거’라고 하여 매우 용감(?)하게 인터넷에 공개 제시하므로 인터넷과 각종 지면상에서 토론을 시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되어 세상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분별력의 시야를 넓혀 줄 기회가 찾아 오게 되었다. 이에 대부분의 관상추종자들이 내세운 대표적 성경구절들의 인용이 관상기도 를 억지로 정당화하려는 황당무계한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이 글에 서는 뉴스엔조이 사이트에 K 교수가 제시한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 절의 해석에 대해서 비교적 짧게 반론하는 비판을 전개하고자 한다. 1. 이사야 30:15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관상기도를 해야 한다는 성경적 근거는 무수히 많다. 지면 관계상 구약과 신약의 대표적 본문을 몇 개 언급하도록 한다. 영성의 분야에서 미국 과 한국에서 많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유진 피터슨이 란 책 에서 목회자는 밖으로 분주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 잠잠하여야 한다고 이사 야서 30장 15절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 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란 말씀의 예를 들어 책망했다” 고 주장하고 있다. ▶ : 상기와 같이 관상가들은 이사야 30장 15절에서 조용히 관상하 지 못했기 때문에 책망 받았다는 내용을 본문의 전후 문맥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본뜻은 사람이 노력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 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에 대한 전초적인 뜻을 밝히 전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 나님의 전적인 능력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뜻을 전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인위적인 해석이다. 관상가들의 이러한 해석은 성경 의 영감성과 계시를 모르고 구속적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황당무계 한 해석을 하게 되었다고 본다. 관상가들의 그릇된 인용은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조용히 있어” “잠잠하 고” 등의 단어만을 몇 개 찍어내어 인용한 것으로 성경 앞뒤의 문맥을 살 핀 뒤 그 문맥 속에서 그 단어의 참된 의미를 해석한 후 인용한 것이 아니 다. 그러므로 성경해석원리 중의 하나가 문맥상의 해석임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정중히 주문하는 바이다. 2. 시편 46 :10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주장하기를 “시편은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여기서 ‘가 만히 있어’의 영어 표현은 ‘be silent’로서 침묵 가운데 있어서 내가 하 나님 됨을 알라는 중요한 말씀이다”라고 한다. ▶ :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안식하라는 것이지 ‘기도로 조 용히 관상하라’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다. 설령 기도하라는 말이 나오면 서 소리를 내지 말고 조용히 관상하라고 한다 할지라도 역시 성경의 전후문 맥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본문은 구원과 관계된 것이지 관상기도와 연결된 흔적이 없다. ‘너희는 가 만히 있어라’ 하는 말은 ‘너희가 하나님의 행적의 증거를 찾아 조용히 보 고 믿으라’ 하는 뜻이다. 곧 조용히 하라는 것은 과거 하나님이 행하신 행 적들을 가만히 보고 되새김질(음미, 또는 묵상)하여 보고 하나님 됨을 믿으 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행적이라 한다면 구약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 스라엘이 약하지만 이기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다양한 하나님의 행적들을 지시하고 있다. 3. 열왕기상 19:1-18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또한 엘리아 선지가가 하나님의 호렙산의 동굴에서 ‘세미한’ 하 나님의 음성을 들었다(열왕기상 19:1-18)고 성경은 기록했다”는 내용을 근 거로 제시하고 있다. ▶ : 본문을 문맥 속에서 살펴본 뜻은 하나님은 물리적으로 나타나 지 않으시고 영적으로 나타나신다는 의미이다. 요란하게 외부적으로 물리현 상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고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세미하다’는 것은 내적으로 은밀하게 나타나시는 하나님, 내적으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인데 ‘세미한’이란 말은 ‘물리적인 외부의 것들이 조용하다’는 것이지 ‘엘리야가 조용하여 관상기도를 했다’는 근거 가 될 수가 없다. 그리고 구약시대 하나님의 임재 방식은 선지자가 원하여서 음성을 듣는 것 이 아니고 갑자기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임하셨다. 즉 하나님 편향적인 말씀이 임하신 것이지 우리의 기구적인 말씀이 아니었다. 우리가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기다려서 듣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네 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만들고 기다려라’ 고 말씀하신 바 없다. 4. 마태복음 5:3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라고 산상수훈의 첫 구절을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 난하다는 것은 마음을 비운 자가 가난한 자이고, 빈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신 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관상사상을 의미하는 구절이 많다”고 주장한 다. ▶ : 본문의 빈 마음이라는 것은 탐욕, 정욕, 물욕, 등의 생각을 갖 지 않고 정결한 심령으로 사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의 모습(상태)이 어떠 한가를 보여 주는 말씀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인임을 겸손히 선언하고 하 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만을 구하는 구원 받은 자로서의 겸비한 모습으로 성령 을 받은 상태를 말한다(행2:28). 주님이 연합하시기 위해 들어오시는데 마치 우리가 침묵하여 도와주는 알미 니안적 인본주의를 엿 볼 수 있게 하는데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전능성을 훼 손하는 것이고 신인 합동사역인 것처럼 꾸며서 하나님의 독자적인 능력을 평 가절하 시키는 것이 된다. 결국 인간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 건이나 이 유, 방법 등을 관상이라는 채널을 통하여서만 행하는 것처럼 미혹하려는 행 위는 성령의 독자적인 능력을 훼손할 뿐이다. 마태복음 5장 3절 말씀에서는 무슨 기도를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조용하여 관상하는 것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5. 요한복음 14:10, 20; 17:21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요한복음 14장 10절, 14장 20절, 17장 21절 등에 반복적으로 나오 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은 관상기도를 통해 기 도자가 마음을 비워 그곳에 주님을 모시고 그분이 내주하여 나의 주인이 되 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고 주장한다. ▶ :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을 동거동행으 로 해석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관상기도를 통해서 한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 도 없다. 오히려 요한복음 14장 10절과 14장 20절은 14장 전체 문맥 가운데 서 살펴볼 때, 결국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당신을 나타내시고 함께 하시겠다는 뜻이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 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 리라”(요 14:21).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 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 14:23). 이처럼 동거동행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하나 되는 연합사상을 말한다. 제 삼자가 아닌 일자가 되는 하나님의 역사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무궁한 사 랑을 뜻하는 것이다. 귀하고 복되신 말씀 사이에 관상의 의미를 끼워 넣으려는 시도 자체가 함정 이다. 관상가들이 말씀의 좋은 말 사이에 관상기도의 의미를 끼워 넣고 있 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관상의 상품을 멋있게 포장하여 선전 하니 많은 목사와 연약한 성도들이 미혹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6. 로마서 8:26-28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로마서 8장 26-28절은 관상기도 하는 신자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 어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 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 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 8:26)는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데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주신다는 구절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성령의 활동을 도와주는 일로써 조용히 침묵 가운데 마음을 비 워드리는 일인 것이다. 이것이 곧 관상기도다”라고 주장한다. ▶ : 하나님께서 탄식함은 죄 때문에 죄로 얼룩이 지어진 인간들을 안타까워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 의 지혜의 본질을 잃어버린 지구촌의 상태를 탄식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 기에 관상기도의 의미를 끼워 삽입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해석으로 황당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초적 상태를 향하여 나가시는 것이며, 최종적인 목표를 향하여 가시는 것이다. 즉 이것은 성령의 독자적 영역이다. 하나님의 불가항 력적 은총이다. 여기에 우리 인간의 인위적인 관상행위가 들어가겠다는 것 은 인본주의요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행위가 된다. 7. 요한계시록 3:20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마지막으로 관상기도 수련회 때마다 인용하는 구절인 요한계시록 3 장 20절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로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개역). 여기서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 실 때 ‘문을 연다’는 것은 우리가 침묵 가운데 머무르며 다른 생각을 멀리 하고 주님께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주님을 초대하면 내 영혼 안에 들어오시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 이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침묵’이라는 언어는 필요 없 는 말이다. 주님이 연합되어 들어오시기 때문에 그 방법이 ‘침묵’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방법이 아니다. 주님과의 연합의 방법이 침묵이라는 것은 관 상가들의 자의적 해석이다. 결국 지금까지 관상의 성경인용과 다른 곳에서의 실체적 행위를 지켜 보건 데 나중에는 ‘주님이 들어오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침묵이 주가 되 는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해석이요 황당한 발 상이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본질을 떠난 것이다. 주님께서 연합하기 위하여 임재 하실 때 우리는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믿고 심령의 문을 엶으로써 하나님과의 연합은 성취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불가항 력적인 은총과 능력에 의해서 성취될 뿐 침묵이라는 인간의 방법이 게재된다 는 것을 본문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과의 연합 사이에 침묵을 삽입하는 것은 그들의 임의적인 입장일 뿐 성경의 입장이 아님은 더 욱 분명해 진다. 침묵하여 마음의 입술로 깊고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한다면 좋겠지만 관상기 도의 실체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관상기도는 침묵기도에서 파생된 새로 운 양태의 이방 종교의 인본주의적 기도 형태이다. 침묵만 하려들고 거기에 인도의 명상과 만트라(주문)식으로 짧은 내용을 반 복하여 중언부언하는 것은 분명 이교도의 명상에 말씀 몇 구절을 얹혀 놓은 것으로 초월적 명상행위와 그 차이가 없는 인본주의, 신비주의, 신영지주 의, 뉴에이지로서 미래로는 종교다원주의(모든 종교에는 각기 특별한 구원 의 법이 있으니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여 세계 모든 종교를 평화적으로 통일 하자는 입장)와 맥을 같이 하게 되는 비성경적 흐름을 막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마치는 말 지금까지의 내용을 살펴 볼 때 K 교수와 관상 추종자들의 성경 인용은 성경 말씀에 대하여 일종의 기만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관상가들이 미사여구로 잘 포장하여 성경 말씀 속에 살며시 끼워 들여 놓은 가시(관상, 경청, 침묵 등)를 사 람들이 모를 수 있다. 허를 찌르는 가시는 그냥 놔두면 피부를 자극하여 아프게 하고 곪아 퍼지면 급기야 치명적일 수 있으므로 발견하는 즉시 더 늦지 않도록 속히 뽑아 버려야 할 것이다. 더 이상 경건한 기독교의 성경적 해석과 기도의 방법론을 왜곡하지 말고 모 든 종교를 통합할 수 있고 종교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서로 넘나들게 할 수 있는 용어인 ‘영성’과 ‘관상’이라는 용어 사용과 그 구체적인 방법 과 실제 행위들을 일거에 내어다 버리길 바란다. 그리고 매스컴에 자주 오르는 일부 대형교회 유명 목사들과 추종하는 젊은 목회자들이 관상기도 관련 영성기도 행위를 이 시대의 최고의 영성신학이라 고 주장하며 교회성장의 한 방법으로 목회 현장에 도입하고 있는 실정은 ‘기도’에 대한 성경적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일로 매우 우려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하여 신학적으로 증명하여 공교회의 정체성에 배치되거 나 혼란이 야기될 경우 등에 대한 대처 방안을 교단 차원에서 제시해야 마땅 하다고 사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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