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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9 no image |박윤선의 5분 새벽기도 설교 <40>| 여호와만 바라보라
편집부
4176 2015-01-13
 여호와만 바라보라 시편 127편 1-5절 “인생들은 창조주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어” 왜 신자들은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까. 그분만이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잠도 주시는데 어떻게 해야 평안히 잘 수 있습니까. 1. 여호와만 바라보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없이는 어떤 좋은 일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잠언 16장 1-3절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희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좋으나, 그것을 내 뜻대로 조급히 이루어 보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여 보려고 얼마나 간절하였던가요. 시편 132편 1-5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별 수 없이 성사시키지 못하였습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는 자에겐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주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인생으로서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만복의 근원되시는 이는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2. 잠자는 자가 되자 본문 2절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 신자들은 잠자는 사람이 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적당한 시간에 자는 잠은 귀합니다. 사람이 잠자는 동안 좋은 변동이 생기기도 합니다. 아담은 잠든 동안에 갈빗대 하나가 없어졌지만 그 대신 아내가 생겼습니다(창 2:21, 22). 우리가 마음에 헛된 근심을 하다가도 자고 난 뒤에는 괜찮아지는 일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평안히 잘 수 있을까요. 평안한 양심을 가질 때, 평안히 잘 수 있습니다. 평안한 양심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사죄 받은 양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며 신앙 양심을 지키면 평안히 자게 됩니다. 마르퀴스라는 순교자는 사형 집행을 당하는 아침에 깊은 잠을 잤으며, 리들리라는 순교자는 순교하기 전날 밤에 위로하려고 찾아 온 동생을 돌려보내고 평안히 잤습니다. 의지하는 안전감이 있으면 평안히 자게 됩니다. 임금들은 자기 주위에 파수병을 세우고 잡니다. 그러나 신자는 언제나 자기 홀로 있어도 주님만 의지하니 안전감을 느낍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피로 구속하신 성도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1098 no image |지/상/강/좌| 개혁주의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_김기영 목사
편집부
3157 2015-01-13
개혁주의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 김기영 목사, 화성교회 > “개혁주의는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가는 신앙 사상” “개혁주의”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 의미를 깊이는 아니더라도 골격만 생각해 보고자 한다. 개혁주의 신앙은 어떤 것이며 그 뿌리는 어디며 대표적인 인물은 누구이며 개혁주의는 삶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그리고 개혁주의 교회의 정치형태에 대하여서는 다음에 생각해 보고자한다. “주의”라는 것은 사상을 말하기 때문에 정의하기가 꾀 어렵다. 개혁주의는 쉽게 말해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사상이다. 신앙은 그 뿌리가 신학이며 신학은 교회와 성도의 삶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우리 교단의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이란 그야말로 너무나 개혁주의 신앙을 잘 드러내는 모토라고 생각된다. 개혁주의라 함은 신앙사상을 말함이지 프로그램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자훈련, 중보기도훈련, 가정교회, 무슨 무슨 프로그램은 그저 목회에 사용되는 실천적인 방법론일 뿐이다. 그 방법론도 신학과 충돌되어서는 안 될 것이면서 방법론을 신학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1. 개혁주의 신학은 신앙의 뼈대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라 종교개혁의 신학을 그대로 순수하게 이어나가는 바른신학을 말한다. 말 그대로 개혁하는 신앙이다. 개혁주의는 그러면 어떤 방향으로 개혁해 나가는가? 무조건 바꾸는 것이 개혁인가? 아니다. 때로는 바꾸는 것이 타락일 수도 있다. 정상적인 이성관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결혼이란 새로운 것인가? 타락인가? 고대사회 성적 문란한 시대부터 있었던 심각한 타락이다. 지금부터 약 4000년 전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거주하였던 소돔성(불과 유황비로 하룻밤에 멸망한 고대도시)에 만연했던 타락상이다. 당시 소돔성 사람들은 롯의 집에 하룻밤 머무른 천사(사람의 모양)를 끌어내 성적관계하려고 했었다. 무조건 바꾸는 것이 개혁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도적 신앙을 계승하고 성경을 바로 해석하여 그 바탕에서 개혁해 나가는 신앙이다. 그러면 개혁주의의 뿌리와 계승은 어떻게 되는가? 개혁주의 뿌리는 12사도와 바울신학이다. 특히 바울은 위대한 신학자이다. 신학의 계승은 바울에서 어거스틴으로 넘어간다(초대 교부시대), 그리고 중세 암흑기를 거쳐 종교개혁시대의 요한 칼빈으로 이어진다. 칼빈은 개혁주의 신학의 대가이다.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있었는데 가장 탁월하게 성경을 해석한 신학자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있으나 개혁주의 신학을 계승하는 인물로 바울 어거스틴 칼빈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물론 바울이나 어거스틴 당시에는 개혁주의란 말은 없었으며 종교개혁 이후 생겨난 이름이다. 12사도와 바울-어거스틴-요한 칼빈으로 이어지는 사상을 칼빈주의라고 할 때 그 뿌리는 바울신학에 있다. 2. 박형룡과 박윤선으로 이어지는 개혁사상 한국에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신학에서 박윤선 박사, 그리고 조직신학에서는 박형룡 박사가 대표적 인물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이 아닌 줄 안다. 이 두 분 다 돌아가신 분이시다. 두 분이 다 개혁주의 신앙을 토대로 하여 한국의 신학교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물론 그 이전에 선교사들이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미국 북 장로교에서 파송된 영향이 크다고 한다. 필자는 대한신학 3학년에 편입하여(야간) 개혁주의신학을 배웠다. 그러나 신학의 부족을 느끼고 다시 총신 대학부 3학년에 편입하여 인문학 신학을 배우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박형룡 박사 조직신학 7권을 구입하여 여름방학 기간에 도서관에서 정독하고 또 읽었다. 당시 필자는 전도사 사례를 처음 받아서 그 돈으로 박윤선 주석전질을 사고 나니 남는 돈이 없었다. 당시 아직 출간되지 않은 계시록, 전도서 등은 후일에 구입하였다. 박윤선 박사의 주석이나 박형룡 박사의 조직신학 책에는 세계의 유명한 신학자들의 견해가 많이 소개되어 따로 다른 책을 읽지 못해도 폭넓게 공부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나서 신학원(M.Div) 과정에 올라가니 벌코프 조직신학을 배우는데 이미 아는 것보다 더 배운 것은 없었다. 참으로 한국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좋은 영향으로 신앙이 바로 서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이 복이라 하겠다. 교회에서는 장경재 목사님의 개혁주의 신앙을 설교로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매끄러운 설교는 아니지만 살아있는 신앙이며 개혁주의 신학의 뼈가 있는 설교였다. 자유주의에 반대하여 보수주의, 개신교를 총망라하여 복음주의,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하는 신정통주의 등 여러 입장이 나오지만 개혁주의는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가는 신앙사상이다. 3. 개혁주의와 삶은 하나이다 개혁주의는 이신칭의만 주장하는 신앙사상인가? 개혁주의자들의 삷은 개혁주의 신학과일치하였다. 개혁자들이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삶이 따랐기 때문이었다.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그 삶이 성경말씀에 철저하였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철저한 개혁주의 신앙의 삶을 실천하려고 온 힘을 쏟아 부었다. 이러한 삶은 영국에서도 일어나서 청교도 운동이 그것이었다. 청교도 삶은 그 개혁주의 신학에 바탕을 두었고 신학으로 끝나지 않고 삶으로 이어졌다. 영국은 국가가 개혁을 주도하다보니 개혁이 철저하지 못하여 일어난 것이 청교도들이다. 청교도의 신학은 매우 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나타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와 미 전역으로 확산되어 선교사들을 통하여 한국에 까지 좋은 영향을 준 것은 참으로 큰 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청교도 운동은 단순히 윤리실천운동이 아니라 그 개혁주의 신학에 바탕을 둔 신앙의 꽃이었다. 오늘날 현대는 부흥의 방법론이 쏟아져 나오다가 없어지곤 한다.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방법론은 세상에 빛을 주지 못한다. 내가 변화하지 않는 부흥은 썩은 고기에서 신선한 요리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내 심령의 부흥을 간구하자. 개혁주의 신앙을 그대로 믿고 실천해 가자. 마치는 말 바른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이다. 바른교회는 역시 개혁주의 교회이다. 그리고 바른생활은 개혁주의 신앙에 토대를 둔 삶이다. 요즘 교회에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도입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프로그램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제자양육에서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을 양육하는 것이다. 책이 하는 것도 아니다. 신학이 사람을 양육하는 것이 아니고 신학의 바탕을 가진 사람이 사람을 양육하는 것이다. 바울은 바울 같은 제자를 양육했는데 그가 디모데였다. 디모데는 또 충성된 사람을 찾아내어 양육해서 신앙은 계승되는 것이다. 사람을 통하여 신학과 삶이 계승되지 않으면 좋은 것은 그치고 책만 남아 있다. 책은 책이지 사람이 아니다. 우리에게 있는 좋은 유산인 개혁주의 신학 바탕에서 혼탁한 시대를 분별하며 한 영혼을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사람을 가까이 하는 목회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1097 |PMS 남아시아 선교대회 설교문| 피스 메이커 (Peace Maker)_이재헌 목사 파일
편집부
3240 2014-12-30
"피스 메이커 (Peace Maker)" (삼하 2:4~7) < 이재헌 목사, 새과천교회 > 선교사는 평화의 사도요, 전달자요,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어야 한다. 특별히 남아시아 3개국이 영국의 식민지로 인해 복음을 받았기 때문에 좀 더 세밀히 생각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가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을 누리길 원한다. 더 나아가 평화를 전하는 사람,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윗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 그는 항상 마음속에 평화가 있었다.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마음에 평화를 잃지 않았다. 그 평화는 자신이 의지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 평화가 있었고 나아가 평화를 만드는 피스 메이커(Peace-Maker)의 삶을 살았다. 1. 피스메이커로서 다윗의 모습 본문은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행한 일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가 어떤 신앙과 인격의 소유자인가, 왕으로서 어떤 정치를 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가늠자가 된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에겐 엄청난 원수였던 사울의 시체를 장사한 사람들을 괘씸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윗은 오히려 복을 빌어준다(삼하2:6~7). 다윗은 원수 사울을 용서하고, 심지어 그의 공적(功績)을 포용하고 인정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인간 본연의 모습에서 나온 게 아니다. 그의 성숙한 신앙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이 사울과 그의 편에 선 사람들도 모두 용서하고 포용함으로 화해하고, 더 나아가 통합된 이스라엘을 이루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평화며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다(마5:43~45). 사랑과 평화를 위해 더 많은 시간, 물질이 소요되면서(비경제적)도 평화롭게 문제를 풀어가는 다윗의 모습을 보고서 백성들은 그를 기쁨으로 의지하게 된다(삼하3:36). 이것이 바로 존경받는 선교사의 모습이 아닐까? 2. 피스메이커로서 우리의 모습 우리는 다윗의 모범을 따라 피스 메이커로 살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 중요한 특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를 위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다. ① 하나님 중심주의 ;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 보편적인 사람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다윗의 삶의 모습은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회복시키기 위해 친히 화목 제물이 되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됨으로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된다. ② 용서 ;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 다윗의 심령에 평화가 있고 그가 화평의 사람으로 행동하게 된 것에는 용서의 은혜가 그 심령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용서함으로 모든 이스라엘 민족을 평화로 이끌었던 것이다. 보복은 악순환을 가져온다. 용서만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어떻게 용서의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용서받은 경험을 잊지 않으면 된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를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엄청난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망각하고서 용서를 멀리서 찾으려 할 때가 많이 있다. 사역 중에 일어난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인하여 동료 선교사들과 혹은 현지 사역자들과의 관계에서 원수처럼 지내는 분들이 가끔 있다. 서로를 불신 비방, 폄하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임을 잊지 말라. 현지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졌다고 판단되면 즉각 현장에서 철수하고 스스로를 재 충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유익하다. ③ 화합 ; 하나님과 뜻이 같은 사람 다윗이 축복을 받고, 통치 기간 중에 이스라엘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바로 화합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과 화합한 자였다(행13:22).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그가 대단한 인격을 가졌거나 성품이 뛰어나거나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하나님과 뜻이 같은 자로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선교사들 가운데는 교단의 차이, 신학의 차이, 성격과 추구하는 목표의 차이가 누구보다 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다른 동역자들과 화합하는 것은 선교사의 기본적인 자질이라 할 수 있다. 합신의 이름으로 분열주의자, 지나친 자긍심으로 교만한 자가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화합하는 선교사로 목사로 살아가는 진정한 Peace Maker 사역자들로 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1096 |PMS 남아시아 선교대회를 다녀와서| “메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 주었습니다”_양사무엘 선교사 파일
편집부
2745 2014-12-30
“메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 주었습니다” < 양사무엘 선교사 > 남아시아 선교대회가 태국에서 3박 4일로 예정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단숨에 날아갔습니다.모든 일을 제쳐놓고 아내와 함께 남아시아 대회에 참석했는데 대회 동안 내내 떠오르는 성경구절이 있었습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 7:18).” 이 말씀이 대회기간 내내 나의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렇듯 환대하시는지요? 부족하기 그지없는 다윗, 양치는 목자를 왕으로 삼으신 것 같이 하찮은 저희들을 불러 종으로 삼으시고 또 선교사로 불러 주셔서 이 같은 대접을 하시고 영적 무장을 시켜 주시고, 저희 마음을 기쁘게 하여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저 고맙습니다. 영적으로는 새벽의 이슬 같은 말씀, 진주같이 영롱한 말씀이 저희의 눌리고 메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 주어서 생수가 배에서 올라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국 강사 목사님의 말씀은 정말 우리에게 새 힘을 주었습니다. 시간이 제한되어 다 듣지 못함을 아쉬워하였고, 저녁 심령 대 부흥회는 눌린 가슴이 뭉클거리며 터져 나갈듯한 성령의 역사가 시간 시간 충만 하였습니다. 늘 설교만 했지 한국어로 설교를 듣지 않아 메말라 가는 마음에 적합한 은혜의 단비가 내렸습니다. 강사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남아시아 후원 이사님들과의 만남은 더욱 값진 만남이었습니다. 호텔에서, 차량에서, 바닷가에서의 친근감 있는 대화는 선배 후배가 아닌 형제로서의 대화임을 확인 하였습니다. 정말 저희 선교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는지요? 저희가 무엇 이관데 이렇게 값진 헌금으로 저희를 위로해 주시는지요? 후원금을 보내주신 교회 성도들, 참석을 안 하셨지만 헌금을 보내 주신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쓸 것 아니 쓰시고, 귀한 것을 귀하다 아니하시고 얼굴도 모르는 선교사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어 주심은 주안에서 맺어져 있는 사랑의 끈임을 확신합니다. 이 큰 잔치를 위해 PMS도 큰일을 하셨습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있는 선교사들과의 긴밀한 연락을 취해 함께 참석할 것을 격려 하며, 위로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선교지에서 경직되어서 눌린 마음이 선교대회에서 어린이처럼 자유롭고, 새처럼 가벼운 마음을 느꼈습니다. 새 힘을 얻었습니다. 생수를 마셨습니다. 이 대회를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해 주신 간사님, 사모님, 목사님 그리고 그 외 숨은 봉사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에는 언제일지 모르지만 남아시아 제2회 대회를 다시 한번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 봅니다.
1095 no image |심/층/진/단|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과 교회의 과세 문제_장대선 목사
편집부
3064 2014-12-30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과 교회의 과세 문제 < 장대선 목사, 가마산교회 > 시작하는 말 최근 정부에서 시도하고 있는 교회와 목사에 대한 과세 문제와 관련하여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목사와 관련해서보다는 교회와 관련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목사 개인에 대한 세금징수는 사례에 대한 것 외에는 모두 직간접적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른 보면 목사의 사례를 소득으로 보고 과세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이 상식적으로 타당하게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세속정부와 교회와의 관계 선정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되는 근원적인 부분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점을 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목사에 대한 사례를 소득으로만 본다면 당연히 세금을 부과해야 마땅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근로소득과 관련한 급여처리의 절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교회의 제정과 관련된 과세와 그에 따른 전반적인 법적인 근거의 확보를 위한 행정절차가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세속정부의 행정력이 교회의 행정과 관련된 사항의 일부에라도 관여하는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목사 개인과 정부 사이의 상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교회의 관계와 관련되는 근본적이고 심각한 내용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문제로 확장됩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헌법상 교회와 국가의 관계와 관련해서는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제2항 “국교(國敎)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宗敎)와 정치(政治)는 분리된다”라는 명시에 따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와 교회는 기본적으로 양립(兩立)하는 성격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행 헌법상 국가의 직원들인 공무원들과 교회의 직원들인 목사, 장로, 집사들은 전혀 별개의 업무를 수행한다고 보아야 하므로 국가가 교회의 직원에 대한 급여 혹은 사례에 대해서는 과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정교분리의 원칙이 성격적인지에 대한 점은 차치하고 다른 시각으로 교회에 대한 국가의 과세 문제를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1. 국가에 대한 교회의 인식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는 장로교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는데, 신앙고백서 제23장에서 국가와 위정자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제23장 1절은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최고의 주시오,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영광과 선을 위하여 국가의 위정자들을 그 분 아래에 있게 하셨고, 이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을 위해 이들을 칼과 힘(권력)의로 무장시키셨으니, 선한 것을 옹호하고 권장하며 악을 행하는 자들을 징벌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교회와는 분리된 별개의 권세가 아니라 교회와 함께 양립하는 하나님의 권세에 속한다고 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국가와 교회를 결코 정교분리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1789년에 수정된 신앙고백서가 아닌 원래의 신앙고백서의 정신입니다. 곧 “모든 권세가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 13:1)는 말씀과 같이, 교회와 국가는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벧전 2:13-14)는 말씀과 같이 교회와 신자들은 주를 위하여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인 국가와 정부 등을 순복하되, 왕이나 그의 보낸 방백인 관리에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교회에 대한 국가의 인식 그렇다면 교회는 국가에 종속되는 관계, 즉 교회 위에 국가가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기본적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최고의 주시오,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영광과 선을 위하여 국가의 위정자들을 그 분 아래에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국가의 기능과 역할은 “선한 것을 옹호하고 권장하며 악을 행하는 자들을 징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3장은 제3절에서 국가의 책무를 교회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통치자는 말씀과 성례의 집행이나 하나님 나라의 열쇠권이 자신에게 속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가 가지는 권위는 질서를 유지하고 교회 안에 (신앙의)일치와 평화를 보존시키는 것으로서의 의무이니, 하나님의 진리가 순수하고 완전하게 지켜지고 모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들과 이단들은 억압되고 예배와 권징에 있어서 모든 부패들과 오용들은 저지되고 개혁되며 하나님의 모든 경건한 예식들은 바르게 제정되고 집행되며 시행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권위를 효과적으로 발휘하기 위해서 총회를 소집하고 그들(총회원들) 가운데서 처리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이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3장 제3절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전혀 별개로 양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유기적인 관계 가운데서 기능적으로 양립하는 성격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국가라 할지라도 국가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3. 교회와 국가 관계에서 과세 문제 사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세금의 문제에 대해 이미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즉 제23장 제4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국민의 의무는 국가 통치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며 그들에게 세금과 기타 의무를 이행하고 그들의 법률을 존중하며 양심을 위해서 그들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다 ...… 이는 교회의 성직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국가가 과연 교회에 대해 가져야 할 책임과 의무,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밝히고 있는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행 헌법상으로 보자면, 교회 혹은 교회의 직원인 목회자의 사례에 대해 과세하는 것은 법리상 모순됩니다. 하지만 장로교의 헌법에 원래 명시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정신에 따르면, 그렇게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분명히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롬 13:7)라고 했으니 성직자인 목사들이 먼저 앞장서서 세금을 지불해야 마땅할 것이고, 이를 위해 필요한 행정에도 적극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책임과 의무가 교회에게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국가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3장 제1절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의 진리가 순수하고 완전하게 지켜지고 모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들과 이단들은 억압되고 예배와 권징에 있어서 모든 부패들과 오용들은 저지되고 개혁되며 하나님의 모든 경건한 예식들은 바르게 제정되고 집행되며 시행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권위를 효과적으로 발휘하기 위해서 총회를 소집하고 그들(총회원들) 가운데서 처리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으로 규정”짓는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다원화되고 복잡하게 관계가 엉켜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현 정부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처럼 자신들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형편에서 세속법인 대한민국 헌법에 명백히 선포하고 있는 ‘정교분리’의 근거와 충돌하는 교회 및 교회의 직원들에 대한 과세는 근본적으로 법리에 맞지 않다는 위헌적 소지가 있다 할 것입니다.
1094 no image |박윤선의 5분 새벽기도 설교 <39>| 신앙에 굳게 서는 비결
편집부
3079 2014-12-16
신앙에 굳게 서는 비결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7절 “아무리 악한 운동일지라도 신자들은 불안할 이유가 없어”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면 현실 속에서 자꾸 요동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믿음에 굳게 설 수 있습니까. 우리는 두 가지를 주시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섭리를 계속 주시하십시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모든 일, 심지어 사탄의 일조차도 제재하시며 섭리하십니다. 어떤 일은 먼저 일어나게 하시고(3절상) 어떤 일은 나중에 일어나게 하십니다(3절하). 하나님은 무엇이든 정하신 때에 따라 일어나게 하시고 또 막을 것은 막으십니다(6절). 어떤 것은 비밀히 역사하도록 그대로 놔두시기도 하고, 어떤 것은 겉에 드러나게 역사하도록 간섭하십니다(8절상). 하나님은 멸망할 자들(택함 받지 못한 자들)만 사단의 역사에 말려들어가게 하십니다(10절).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드러내실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8절). 신자들이 이 모든 사실을 기억하고 진리의 사랑을 받기만 좋아한다면(10절하), 언제나 심령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운동일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의 장중에 있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2. 자기 자신을 계속 주시하십시오 우리 자신은 택함 받은 자입니다(13절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내게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임이 틀림없습니다(13절). 진리를 사랑하여 사도적 전통 x, 곧 성경 말씀을 기쁘게 지키기를(14-15절) 원합니까. 그것도 내가 택함 받았다는 증거입니다(살전1:4-8).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와 소망을 받았고 또 앞으로도 받기를 원합니까. 그것도 내가 택함 받았다는 증거입니다(16-17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다른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이 세상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섭리에 대하여 믿음으로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받은 영적 은혜가 무엇인지 믿음으로 찾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자라면 거기서 심령에 평안과 안정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1093 no image |긴/급/진/단| 목사 생활비에 대한 세금 납부는 정당한가?_손재익 목사
편집부
3764 2014-12-16
목사 생활비에 대한 세금 납부는 정당한가? <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 1. 문제제기 2000년 이후 언론과 각종 NGO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교회의 세금납부에 대해서 지적한다. 교계에서도 세금납부운동을 펼치는 경우가 있다. 몇 년 전부터는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자발적으로 ‘목사 근로소득세 납부 신고 운동’을 펼치고 있다. ‘교회의 세금 납부’라는 넓은 범위의 내용은 일단 두고, ‘목사의 세금 납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참고로 간단하게만 언급하면, 현재 종교계에서는 소위 ‘성직자’라고 불리는 교직자들이 근로소득세를 납부하지 않고 있으며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의 재산에 대해서 재산세를 납부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천주교의 경우 1994년에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는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종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취지에서 성직자의 세금 납부를 결정했다. 과연 목사는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가? 목사가 세금을 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헌법 제11조 제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및 제2항 “사회적 특수 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에 근거하여 종교계가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비판받아야 하는가? 2. 이 문제에 대한 최근의 일반적인 입장 먼저 목사의 세금 납부를 지적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전적으로 기독교의 특수성, 정교분리의 원칙, 목사 생활비가 임금이 아니라는 점 등을 전혀 무시하고 접근한다. 그래서 종교인의 소득도 근로소득이므로 과세 대상이 된다는 견해를 주장하기도 하고, 시민 단체 등 비영리단체 노동자들도 근로소득세를 낸다는 주장한다. 나아가 근로인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조세 평등주의에 근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심지어 “목사의 활동이 근로가 아니지만, 우리가 소속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법으로 정한 틀 안에서는 맞춰가는게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국내의 진보적인 교회가 세금을 납부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국내에서는 주님의 교회에 시무하던 이재철 목사(현 100주년 기념교회 시무)가 “목사가 세금을 내지 않으면 교인들에게 탈세하지 말라고 설교할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세금을 납부하기 시작하였고, 손봉호 교수의 영향을 받은 서울영동교회(정현구 목사), 한영교회(김낙춘 목사), 분당샘물교회(박은조 목사), 다니엘새시대교회(박희명 목사) 등이 세금을 납부한다. 그 외에 남서울은혜교회(홍정길 목사), 예인교회(정성규 목사), 부천평안교회(원영대 목사), 빛과 소금교회(신동식 목사), 열린문교회(윤여성 목사), 전주 안디옥교회(박진구 목사), 지구촌교회(침례, 성남시 분당, 진재혁 목사), 이 외에도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천주교 등이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외국의 사례를 들면서 목사도 세금을 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독일 교회를 예를 드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것은 독일교회에 대한 이해를 하고 접근해야 한다. 독일에서 목사의 직분은 교회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주어진다. 여기에서부터 출발이 잘못되었다. ‘정교 분리의 원칙’이 고려되지 않는 것이다. 이점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독일 목사는 세금을 낸다고 하면 안 된다. 독일의 목사는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임금을 받는다. 독일교회에서 ‘목사의 직분’은 성경적이지 않다. 그런 곳에서의 예를 근거로 하는 경우에는 접근에서부터 달라지게 된다. 이에 반해 목사의 세금 납부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정교분리의 원칙은 제대로 강조하지만, 정작 교회론과 목사 생활비가 가지는 특성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않은 채 종교인의 활동은 근로가 아닌 봉사활동이므로 과세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거나 목사가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이중과세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법률상 이중과세란 동일한 소득에 대해 동일한 귀속자에게 이중과세함을 의미하는데, 교회의 헌금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3. 우리의 주장 이와 관련해 우리는 3가지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정교 분리의 원칙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제1항에서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말하고, 제2항에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정교 분리의 원칙은 대한민국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나라들에서 많이 주장하는데,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청교도 혁명, 프랑스의 공화주의, 미국의 권리장전 등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원리는 세속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0장 “교회의 권징”의 제1절에는 “자기 교회의 왕이요 머리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국가 위정자와는 구별하여 교회 직원들(Church officers)의 손에 치리(治理)를 맡기셨다(hath therein appointed a government)”고 되어 있다. 그리고 제31장 “공의회와 협의회”의 제5절에는 “공의회와 협의회는 교회에 관련된 사항 이외의 다른 사안을 취급하거나 결정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국가의 세속정치 문제에 간섭하려해서는 안 된다. 다만 특별한 경우 위정자에게 겸허한 태도로 청원할 수 있으며, 혹 위정자의 요구가 있을 때 양심껏 충고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다”라고 함으로써 정교 분리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원칙에 의하면 목사의 세금 납부는 목사 개인의 측면보다는 교회의 측면과 관련해서 교회가 세속정부에 예속된다는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목사직의 직분적 특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기독교의 개혁적인 인사인 손봉호 교수의 경우 “성직자가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세속과 성직을 구분하는 잘못된 이분법의 문제로 세상일과 목회일이 다르지 않으므로 세금을 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또 다른 오해를 가진다. 목사의 일이 성직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이나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 부분이다. 목사가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성직’이기 때문이 아니다. 목사직에 근거하여 받는 생활비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셋째, 목사가 전혀 세금을 내지 않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흔히 사람들은 “목사는 세금을 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매우 고개를 끄덕이고 목사를 비판하고 교회를 비판한다. 그래서 정말로 목사는 전혀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 사람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는 매우 두루뭉실한 표현이다. 그렇게 말하기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목사는 갑종 근로 소득세를 내지 않는다”라고 말이다. 근로소득은 그 징수방법에 따라 원천 징수되는 갑종 근로소득과 납세조합에 의하여 특별 징수되거나 원천 징수 없이 확정 신고에 의하는 을종 근로소득으로 구분한다. 갑종 근로소득은 근로의 제공으로 인하여 받는 급여의 소득, 법인의 주주총회 및 사원총회 또는 이에 준하는 의결기관의 결의에 의하여 상여로 받는 소득 법인세법에 의하여 상여로 처분된 금액, 퇴직으로 인하여 지급받는 소득으로 퇴직소득이 아닌 소득 등이다. 을종 근로소득은 외국기관이나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을 제외한 국제연합군으로부터 받는 급여, 국외에 있는 외국인 또는 외국법인(국내지점 또는 국내영업소는 제외함)으로부터 받는 급여이다. 목사는 ‘근로 소득세’를 제외한 모든 세금을 납부한다. 목사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세금을 납부한다. 목사에게 개인적인 재산이 있다면 재산세를 내고 그 외에 지방세, 교육세, 주민세 등을 납부한다. 자동차가 목사의 소유일 경우 자동차세도 납부한다. 그 밖에 목사가 개인적인 소비를 통해서 간접세도 부담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쌀을 살 때에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에 각각 부가가치세를 납부한다. 자동차에 기름을 넣을 때에 지방세를 낸다. 목사가 내지 않는 것은 단 하나 ‘근로 소득세’이다. 그 이유는 목사의 생활비는 ‘임금’(賃金)과 다르기 때문이다. ‘목사 생활비’는 교회론이요 직분론이요, 복음의 의미를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 사람들이 직장에서 근로한 대가로 받는 임금 역시 ‘생활비’로 사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성격이 다르다는 점에서 목사는 근로 소득세를 납부하지 않을 뿐이다. 4. 마치는 말 만일 누군가 목사도 세금을 내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면 그 순간 ‘목사 생활비’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교회론적 의미는 퇴색되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교회는 목사를 위해서 세금을 포함한 더 많은 생활비를 제공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목사가 ‘목사 생활비의 참된 성격’에서 위배되는 만큼의 돈을 교회로부터 받는다면 목사는 아무 할 말이 없다. 오늘날 목사들이 1년 연봉이 1억이 훨씬 넘는 많은 돈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목사 생활비를 받는 목사가 아니다. 임금을 받는 목사다. 그러므로 그 목사는 세금을 내어야 한다. 목사의 세금 납부에 관한 문제는 사실 교회의 책임도 크다. 왜냐하면 교회가 ‘목사 생활비’의 참된 정신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기 때문이다. 교회와 목사가 ‘목사 생활비’의 정신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다면 세상이 교회에게 목사 세금 납부를 요구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목사가 생활비와는 전혀 상관없을 정도의 많은 돈을 받으니 세상은 당연히 그러한 자에게 세금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1092 <합신농목회 참석기> 섬기는 교회, 주는 교회_이은국 목사 파일
편집부
3472 2014-12-16
섬기는 교회, 주는 교회 < 이은국 목사, 용연교회 > “섬김의 목회와 주는 목회를 실천하는 논어촌 교회 모범 보여줘” 김천시 남면 섶밭길을 접어드니 잔잔한 물결 위에 떠 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이 시야에 들어왔다. 늦가을 가랑비를 흠뻑 머금은 단풍나무 한그루가 곱고 화려한 자태를 드러내고 작은 마을 들머리에 우뚝 솟은 예배당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여느 농어촌 마을의 소박한 예배당의 모습과 달리 하나뿐인 반듯한 2층의 적벽돌 건물에다 높이 솟은 종탑이 더해져 가히 늠름한 모습이다. 알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교회가 설립된 지 무려 111년째, 합신 교단의 소속 교회로는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가 아닐까 싶다. 1903년 월명교회를 설립한 부해리(傅海利) 선교사(Henry Moro Bruen, 1874-1959)는 경북의 서부지방, 즉 김천 선산 군위 고령 성주 상주 칠곡 등지의 선교를 담당하여 이곳 월명교회를 비롯하여 곳곳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하여 이른바 경북선교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 영혼을 구원하라"(Save One Soul)는 주보에 실린 표어가 세기를 넘어 지금껏 한결같이 달려 온 교회의 사명을 큰소리로 외치는듯 했다. 월명교회를 담임하는 안상진 목사는 일찍이 강도사로서 이곳에 파송을 받아 어언 30년을 하루같이 달려오며 성도들과 더불어 교회와 주민들을 섬기고 있다. 이곳 섶밭마을은 불과 55가구에 120여명이 거주하는 작은 농촌마을, 소규모의 과수원과 밭작물을 재배하며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다. 근처 초등학교가 폐교된 지 오래고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한 때 왕성했던 마을이 쇠퇴일로함은오늘날 대다수 농어촌교회가 직면하는 그야말로 이농현상의 단면이다. 제9차 정기총회 및 제28차 합신농목회가 열리는 날, 조용했던 마을이 모처럼 활기로 가득했다. 오후 3시를 접어들면서 일치감치 남원과 평택에서 단숨에 달려온 승합차량을 시작으로 각처에서 속속 모여든 회원들로 널따란 교회마당은 순식간에 만차를 이루었다. 우리를 맞이하는 월명교회 성도들은 훨씬 먼저 총집합했고 몇몇 직장을 가진 이들까지도 조퇴를 하고 두 팔을 걷어부친채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계단을 올라 예배실에 들어서자면 누구라도 신발을 벗어야 했다. 농어촌교회 특유의 마룻바닥에 가지런히 놓인 장의자는 긁힌 세월의 자국이 적어도 수십 년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 흔한 꽃꽂이를 대신하여 강대상 좌우에는 소철나무 한그루와 대여섯을 합친 정도의 커다란 누렁덩이 호박하나가 놓여 있어 추수감사의 계절을 알렸다. 주보를 들여다보니 모이는 성도의 수에 비해 섬김의 그릇은 과연 교회의 역사만큼이나 만만치 않아 참석한 이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농어촌교회가 살아야 한국교회가 산다'라는 농목회의 영구주제를 넣어 깜찍하게 제작한 펼침막은 월명교회가 얼마나 우리 모임을 위해 세세히 준비를 했는가를 짐작케 했다. 농어촌을 목회현장으로 삼은 동역자들의 모임은 만남자체로 서로에게 큰 힘이 되고 격려가 된다. 여기저기 낯익은 얼굴들과 반가운 인사를 주거니받거니 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고락을 함께하는 든든한 친구들이 다시 모였다. 준비된 다과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짧기만 하다. 어느새 개회예배 시간이 되었다. 각처에서 모인 사람들로 함께한 예배이니만큼 적어도 전국교회 연합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먼 곳 고창에서 온 박종훈 목사의 사회와 가까운 곳 성주에서 참석한 윤찬열 목사의 기도인도 후, 강사로 나선 경북노회장 노주복 목사는 에베소서 3장 2절을 중심으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이라는 제하의 말씀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목적하시는바 내가 선 자리가 그 어디든 가장 귀하고 복된 자리임을 일깨워 주었다. 농어촌 지역의 이름 없는 작은 교회라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고 우리가 서 있는 그 곳이야말로 주께서 세우신 소중한 자리임을 깨닫게 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다. 저녁 식사시간 월명교회가 준비한 웰빙 한식은 초대받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감탄을 자아냈고 우리 모두는 백년손님이 된 기분이었다. 남녀노소 성도들이 직접 다듬은 쪽파와 마늘 양념에 시골의 전통 두부와 도토리묵, 삶은 고기와 떡, 온갖 나물이 차려져 수라상을 연상케 하는 진수성찬이었다. 담임목사, 원로장로, 시무장로 따로 없이 온 교회가 총동원되어 손님을 시중드는 섬김의 모습을 바라보며 찡한 감동까지도 함께 먹었다. 여기에 농목회가 준비한 통영의 싱싱한 굴이 곁들여져 더할 나위 없는 파티였다. 특강시간을 앞두고 예배실로 들어서니 때 아닌 장마당이 펼쳐졌다. 사연을 알고보니 고대도에서 온 총무 박원열 목사는 지인 장로님을 통해 유행을 살짝 넘긴 와이셔츠 120개를 지원 받았다고 했다. 곁에서는 일일이 치수를 알려주는 도우미까지 등장했고, 미처 생각지 못한 귀한 선물을 가질 수 있었다. 같은 시간 충청노회 농어촌부 간사로 처음 참석한 진천의 유영덕 목사 가족 소개와 환영의 시간도 가졌다. 백믿음터 목사의 "에덴동산의 회복"을 주제로 한 저녁특강은 농어촌목회자들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구수함이 돋보였다. 56세의 늦깎이 신학생으로 함양의 농촌 교역자 없는 상내백교회에 부임한 후 지금의 명실상부한 자립교회를 이룬 과정을 통해 많은 도전을 주었다. 제9차 정기총회를 통해 통영의 김용진 목사가 회장을 유임하고, 지금까지 수고했던 임원들이 분과위원회 활성화를 위한 적재적소에 배치되면서 농목회 임원진은 새로운 인물로 대폭 물갈이 되었다. 특강 및 정기총회를 마치고 나니 예정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늦은 시간 등단한 개최교회 안상진 목사의 "나의 목회사역" 주제 강의는 30년의 세월을 말하기에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어린 시절 하나님의 준비된 부르심을 시작으로 목회자로의 훈련과정을 비롯하여 불신주민 가정의 병문안과 장례봉사를 통해 임종전 주님께로 인도한 일들 그리고 예배당건축 과정의 숱한 애로를 해결 받은 일들을 중심으로 섬김의 목회와 주는 목회를 실천하는 교회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음이 시종 묻어났고 그의 열정적 강의는 퍽 인상적이었다. 밤 열한시를 가까이한 늦은 시간, 주변에 숙박시설이 없어 어둡고 안개까지 자욱한 좁은 도로 위를 한참을 달린 후 마침내 성주의 하늘목장에 이르러 하룻밤을 편히 쉴 수 있었다. 숙소에서도 회의가 이어졌다. 내년 2월로 예정된 전국교회 사모세미나 준비를 위해 간사들은 새로 한 시를 넘기는 강행군을 마다하지 않았다. 농목회장 김용진 목사의 인도로 드려진 아침경건회와 더불어 둘째 날 일정이 시작되었고 밤사이 날씨도 개이기 시작했다. 산 속의 숙소 주변 역시 식당이 없어 다시 한참을 달려 성주참외 비닐하우스 드넓은 들판에 자리한 토브라는 이름을 가진 식당을 찾았고, 노주복 목사가 제공한 따끈한 굴 국밥과 콩나물 국밥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창녕에서 온 정석중 목사가 양파 박스씩을 나눠주겠노라고 광고를 했다. 다시 월명교회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이영경 목사가 나섰다. 청양에서 자신이 직접 농사해서 포장한 흑미 한 봉지씩을 선물로 내 놓았다. 농목회원들이 서로를 생각하며 건네지는 소중한 선물들이 사라져가는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했다. 이날 우리 일행은 성주와 김천 그리고 칠곡과 구미를 전전하는 동안에 서울에서 출발한 총회 농어촌부 서기 장덕만 목사와 회계 김원철 장로가 먼 길을 주저 없이 달려와 주셨다. 반갑게 악수를 나눈 후에 이들과 함께 금오산 호수위의 둘레길 코스를 돌며 트레킹을 즐겼고 모임기류는 한 층 더 화기애애한 상승모드를 이어갔다. 둘레길이 끝나는 곳에서는 금오산과 호수를 배경으로 단체사진도 찍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점심시간뿐, 칠곡대로변에 자리한 한식전문의 한라명가에서 만찬을 제공한 농어촌부 서기 장덕만 목사는 농목회원들과 함께하는 동안 도농교회 직거래 활성화와 농어촌교회 자립방안 등을 토론하며 끝까지 격려를 아끼지 아니했다. 지난 여름 변산에서 열린 농목수련회 강사로 큰 은혜를 끼쳐주신 안만수 목사가 농목회 후원금을 두둑히 보내주었다는 좋은 소식도 닿았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감사를 드린다. 월명교회의 아름다운 섬김과 동참한 모든 이들의 귀한 섬김을 통해 한껏 은혜를 나눠가진 농목회원들 모두에게 더없이 행복한 이틀이 되었다.
1091 no image <특강 ‘설교자의 길’ 참관기> 이 시대에 설교자로 살아가는 길_노승수 목사
편집부
3297 2014-12-02
이 시대에 설교자로 살아가는 길 <노승수 목사, 강남성도교회> “묵묵히 시간 속에서 자기 삶을 살아내는 것이 설교자가 견지할 자리” 12월 1일 남포교회에서 일병목회연구소 주최로 박영선 목사의 특강 ‘설교자의 길’이 열렸다. 오전은 설교자가 가지는 대표성에 대해서, 오후는 설교자의 삶이 가지는 구체성에 대해 특강이 진행되었다. 참석인원으로 150-200명 가량을 예상한 강의는 400명 이상이 참석해 현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그만큼 박영선 목사의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이 시대 설교자들이 갖는 목마름이 크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보통 설교자를 생각할 때, 설교 스킬이나 청중을 끄는 법 등의 방법론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강의와는 달리 박영선 목사는 설교자 자체에 초점을 두었다. 곧 설교자의 설교 행위가 아니라 설교자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그의 정체성에 더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는 설교자의 스피릿과 설교자가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아냄으로써 그것을 설교에 녹여내는 사람인지를 의미한다. 1.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설교자의 대표성 오전에 이뤄진 특강의 주제는 설교자의 대표성이었다. 설교자의 대표성은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육신이 되는 이 일이 ‘구체성’이라면 그렇게 육신이 되심으로 육신적 존재들과 동등한 지위와 정체를 가지는 일을 하시는 것이 ‘대표성’이라 할 수 있다. 곧 그리스도가 우리 형제 중 하나가 됨으로써 그가 가진 지위가 우리 모두의 지위가 되는 연대성이 바로 대표성이다. 하나님은 모두를 위해서 하나를 뽑으시는데 그가 우월하기 때문에 뽑는 것이 아니라 그들 전부를 하나님께서 목적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 대표로 삼으신다. 곧 하나님은 용서와 은혜의 영광으로 변변치 않은 설교자를 대표로 삼아 죄가 만든 비열함을 극복하게 하신다. 우리는 현재에 묶여있다. 따라서 설교자는 그 현실과 차별화되는 사람이 아니라 그 현실의 일부가 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그런 대표성을 가진 존재로 삼으셨다. 그래서 설교는 우리가 디딘 현실에 기초해야 한다. 설교자가 세상으로부터 나를 차별화하고 그 차별화로 자기 정체성을 삼는 것은 빈곤이며 비열함이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대표를 자처하는 바울이 설교자가 취해야 할 자세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이 세상과 다름으로 혹은 어떤 교단에 속했음으로 혹은 누가 어떻게 틀렸다는 것을 비난함으로 그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는다. 이같이 빈곤한 것이 있는가? 우리는 현재와 현실에 묶여 있다.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그들 가운데 들어가 그들의 대표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표가 되어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설교란 그런 것이어야 하고 설교자는 그것을 드러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저것은 틀렸다. 그런데 나는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으로 마음이 시원할지 몰라도 설교자의 스피릿은 아니다. 설교자는 대표성을 갖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청중과 함께 현재로 묶여 있다. 바울은 실패한 이스라엘의 대표가 되어 그들 전체를 견인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실패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결코 폐하여지지지 않았음을 몸소 자신의 삶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그런 바울과 같은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다. 이는 마치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과 같다. 모두가 탕자를 힐난하지만 아들이 돌아옴으로써 그 아들을 위해 소를 잡는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두 다 실패한 것 같아도 그중에서도 그렇지 않음을 드러내는, 그래서 청중 전체를 그 설교자의 대표성과 묶이게 만들고 연대를 이루고 모두의 지위가 되도록 하는 그것이 설교자가 지닌 대표성이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그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자리가 설교자의 자리이다. 2. 설교자의 삶으로 구현되는 구체성 오후에는 남포교회의 넉넉한 준비로 좋은 점심 식사와 교제를 나눈 후 1시 20분에 모여서 두 번째 특강, 곧 설교자의 구체성에 관한 특강이 이어졌다. 스토리가 없다면 누구를 설득하고 납득시키고 감동시킬 수 없다. 스토리 속에 우리는 몰입을 하고 그것을 따라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자기 시대를 살면서 자신과 함께 사는 이들의 이웃이 되는 것에서 구체성을 찾을 수 있다. 나와 같은 정황, 조건 속에 있는 것 그것이 예수의 삶이었다. 유대인의 정황, 로마와 적대 행위를 하지 않은 정황, 바리새인에게 격노하시지만 그들을 죽이시지 않는 정황에 예수가 서 있듯이 설교자도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역할에 서 있고 내 현재와 시간에 묶여서 내 역할을 맡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내 자리를 감당하는 것 그것이 ‘구체성’이다. 그 때 내 자리 내 정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구체성이다. 때론 후회로, 때론 분노로, 때론 낙심으로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우리 현실의 구체적인 자리에 서는 것이 구체성이다. 명분이나 당위, 설명과 비판으로 후퇴해서 자기 자리를 삼지 말아야 한다. 나침반은 방향을 가르쳐주지만 길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어떤 길이 나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을 가는 것이 구체성이다. 삶은 비전과 다르다. 우리는 막연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삶은 늘 사고를 당한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대형 사고다. 살아 있는 한 안전이란 없다. 삶이란 그 자체로 구체성이다. 이런 우연과 사고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성실하심을 직면하는 시간적 직면이 구체성이다. 오늘은 어제와 같은 하루가 아니다. 그것이 구체성이다. 아직도 하나님은 일하시고 그의 의지를 놓지 않으신다. 힘을 다하여 찾아오시는 예수, 그것이 설교이다. 설교란 그 구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로 사는 것이다. 매일을 사는 것이다.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치는 말 특강은 성공리에 잘 마쳐졌다. 박영선 목사는 해마다 한번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이 있을 때까지 이렇게 하고 더 해야 할 말이 없을 때 그만하겠다고 했다. 그것 역시 박영선 목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갖는 구체성이지 않을까 싶었다.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자리였다. 결국 그것은 내 자리로 돌아와 묵묵히 내 시간 속에서 내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설교자로서 내가 견지해야 할 자리이며 이 땅의 신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일 것이다.
1090 no image |개|혁|주|의|신|앙|강|좌| ‘스텔스 처치’를 통해 본 ‘참된 교회’에 대한 이해_장대선 목사
편집부
3144 2014-12-02
‘스텔스 처치’를 통해 본 ‘참된 교회’에 대한 이해 < 장대선 목사, 가마산교회 > 전도를 하다보면 가끔씩 듣게 되는 말이 바로 “나도 교회에 나갔었는데, 교회의 이런저런 문제가 싫어서 지금은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교회에 발을 디뎌보았을 만큼 흔한 것이 교회이지만 그와 반비례한 것이 바로 교회에 대한 신뢰도 같습니다. 한 마디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회의 문제는 믿지 않는 자들도 다 아는 개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한 가지 중요한 것이 간과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곧 교회를 비판하거나 개혁을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 목소리들이 처음에는 분명하지만, 마치 늘어난 철길처럼 그것이 계속 진행될수록 또 다른 이탈이 발견되기 일쑤입니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교회론은 대부분이 눈에 보이는 교회, 곧 조직교회에 대한 개념들입니다만, 교회론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은 바로 ‘보이지 않는 교회’ 곧 ‘보편의 교회’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제목에서의 ‘스텔스 처치’라는 선정적인 문구는 바로 보이지 않는 보편교회에 대한 흥미를 끌기위한 문구입니다. 흔히 보이지 않는 교회 곧 ‘무형교회’ 혹은 ‘비가시적교회’에 대하여 이르기를 예배당 건물이 보이는 교회이고, 그 안에 모인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교회인데, 진정한 교회란 바로 모인 ‘우리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란 그처럼 건물이 아닌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회, 하나님의 택하심 안에 감추어져 있어서 인간의 눈이나 안목으로는 전적으로 구별해 낼 수가 없는 하나님 안에서의 오직 하나인 교회(the universal Church)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신앙으로서 고백할 때에 “거룩한 공회(혹은 교회)”라고 고백하는 문구가 바로 사람의 눈으로 구별할 수 없는,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오직 하나로 있는 그러한 교회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곧 사도신경을 자신들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교회들에서는 매 번 예배 때마다 보이지 않는 교회(보편교회)에 대한 신앙을 그처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진정한 신앙고백으로 고백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짧은 문구 안에 담긴 좀 더 긴 의미와 내용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 번 예배 때마다 신앙으로 고백하는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라는 문구는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그처럼 고백하는 교회, 하나님 안에서 오직 하나인 감추어진 교회야말로 진정한 교회임을 우리는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지구상에 수 없이 많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로 모아졌고, 모아지고 있으며, 모아져야 하는 택함받은 자들의 모든 수임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공회”라는 문구가 안에 담겨 있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교회’라는 단어 대신에 “공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보편적 교회에 대한 의미를 담는 것이며, 교회들이 흩어져 있을 지라도 항상 추구하는 것은 교회의 보편성이라는 점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즘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로는 교회의 일치를 추구한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일치는 사도신경으로 예배 때마다 고백할 만큼 중요한 것이지만 W·C·C와 같은 단체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제도적인 연합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교회로서의 표지(sign)를 명백하고 분명하게 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사실 W·C·C의 운동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교회로서의 표지를 조금씩 약화시키고 눈에 보이는 조직들의 일치와 화합을 추구하겠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들의 표지가 다른데 어떻게 일치와 화합이 가능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교회’라고 할 때, 무엇을 근거로 교회라고 부르느냐의 기준인데, 그것을 교회의 ‘표지(sign)’라고 합니다. 이 표지에 의해서 남아프리카에 있는 교회이거나 알라스카에 있는 교회이거나 상관이 없이 온 교회들이 다 하나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중요한 교회의 표지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보편적인 교회(가시적인 보편교회)는 때로는 덜 가시적이다. 그리고 그것의 지체들인 지교회는 그들 안에서 얼마나 순수하게 복음의 교리가 가르쳐 지고 수용되며 예식(성례)이 집행되고 공적예배가 수행되고 있느냐에 따라서 더 혹은 덜 순수하다.”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조직교회가 진정한 교회인가 아닌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복음이 얼마나 순수한 교리로서 가르쳐 지고 있고 설교되고 있는가와, 성례(세례와 성찬)가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대로 순수하게 시행되며 예배 또한 얼마나 성경에 합당하게 수행되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조직된 교회가 아무리 크고 그럴듯한 것이라도, 이러한 기준에서 순수하지 못할 때에는 그것을 참된 의미의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천주교교회 밖에는 구원에 없다”라고 외치는 교황의 외침을 뒤로하고 순수한 복음의 교리와 성례, 곧 로마 천주교의 일곱 성례가 아닌 두 가지 성례인 세례와 성찬을 집행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설립했던 것입니다. 사실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도 로마 천주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로마 천주교회(성당)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보이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인 보편적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의미이며, 조직된 교회라도 비가시적이라 할 수 있는 교리의 순수성과 그에 근거한 합당한 성례의 집행여부에 따라서 더 가시적일 수도, 덜 가시적일 수도 있음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가 없는 교회개혁은 그 취지와 다르게 껍데기만 개혁하는 것이 되기 쉬우며, 결국에는 진정으로 개혁한 것이 아니라 모양만 살짝 바꾼 개혁을 이루기 쉬운 것입니다. 결국 교회의 순수성은 기본적으로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이라 할 수 있는 교리의 순수성에서 오게 됩니다. 이에 따라서 순수하고 바른 성례가 집행될 수 있는 것이고, 공적예배도 수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교리에 대한 이해와 그에 근거하는 개혁이 없이는 결코 진정한 개혁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개혁이 개신교회들에서 되지 않으므로 오늘날에는 개신교회보다 로마 천주교회가 더 경건하고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끝으로 눈에 보이는 교회는 온전히 순수할 수 없음도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교회를 순수하게 모으실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르기를 “하늘아래 가장 순수한 교회도 혼합과 오류에 빠지기 쉽고, 어떤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회(會)가 될 만큼 변질되는 경우들이 있다”고 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가 지상에는 언제나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중세시대에 비록 부패한 로마 천주교회만이 유일한 교회였어도, 중세시대에는 순수한 교회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가 언제나처럼 존재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교회는 어디에 속해 있는지 이제는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교회의 표지를 떠나서는 결코 교회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089 no image |총회 지도부 비전트립을 다녀와서| “선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습니다”_김윤태
편집부
2900 2014-12-02
“선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습니다” <김윤태, 일신교회 > 주의 은혜 속에서 지난 7월 14일부터 20일까지 7일간 합신 총회 소속 전국 각지의 교회청년들과 함께 태국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이번 단기선교의 타이틀인 ‘미션트립’은 대한민국의 젊은 청년들이 해외 각지의 선교 현장을 직접 방문하면서 크신 주의 은혜를 체험하고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취지의 프로그램입니다. 이번 선교 방문지는 태국에서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코사무이’라는 곳입니다. 실제로 방문해보니 현지인보다 외국 관광객들이 많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매력적인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외국인들이 휴양을 목적으로 찾는 곳이었기에 세상적인 유혹이 많아 복음이 전파되기 쉽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이번 일정에 동행하여 주셨던 하철환 선교사님은 방콕에 2개 교회, 방콕 인근 논타부리에 3개 교회,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한 칸차나부리에 3개 교회를 설립하셨고, 현재 코사무이의 버마족 마을에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고자 준비 중이었습니다. 아울러 선교사님과 함께 동행해주신 세분의 단기선교사님은 일정 내내 저희와 함께하며 낯설고 어려웠던 현지인과의 의사소통을 도와주시는 등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주셨습니다. 선교 사역은 전체 일정 중 3일간 진행되었는데, 학교 4곳과 2개 마을 전도로 이루어졌습니다. 학교 전도 활동은 그룹을 나누어 학생들과 한국전통 놀이와 복음을 전파하면서 주님과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낯선 외국인임에도 예의바르게 인사하며 큰 소리로 복음을 따라 읽었던 어린 아이들의 모습에 놀랍고 고마웠습니다. 학교 전도활동은 정해진 틀에 따라 진행되었기 때문에 힘든 점은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린 학생들과 함께 뛰어놀며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사역이었던 마을 전도는 학교와는 다르게 실제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습니다. 국내에서도 노방전도의 경험이 전무 했던 저는 시도하는 것 자체가 겁이 나고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주의 자녀들과 함께하는 것에 큰 자신감을 얻었고, 간단한 인사말을 배우며 어느새 앞자리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단기선교에 함께했던 16명의 주의 청년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들은 주께서 주신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중한 형제자매님들과 믿음으로 교제하면서 태국에서의 일정을 즐겁게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선교활동은 이 땅에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제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이 크리스찬이라고 말하던 어린 학생의 말에 감동도 받았습니다. 인구의 대부분이 불교를 믿고 종교에 대한 억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있게 주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었던 어린 학생의 용기에 감동을 받았고, 한편으론 그동안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고 숨겨왔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7일간의 미션트립을 통해 태국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고 느끼며 주 안에서 휴식을 얻을 수 있었으며, 선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아울러 믿음으로 나아가는 주의 자녀들을 만나게 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면서 택하심 받은 주의 자녀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이번 단기선교에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동행해 주셔서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번 일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셨던 일신교회 김명선 목사님과 계승애 전도사님께 감사드리고, 아울러 한 주간 기도로 힘써주신 일신교회 성도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1088 no image |총회 지도부 비전트립을 다녀와서| “나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_장세희
편집부
2726 2014-12-02
“나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 장세희, 안중 새소망교회 > C국 OOO을 다녀온 후 많은 생각들이 바뀌었습니다. 작은 일에도 불평 할 때가 있고 힘든 일은 금방 포기하고 싶어 했던 마음들이 이제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모든 것에 열심히 하게 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는 옮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어도 사실 겁도 나고 무서워서 조심스러워지고 그곳 사람들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날수록 그런 맘을 가졌다는 것이 너무 죄송해졌습니다.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보는데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왔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파 끝까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보이는 모습이 조금 다를 뿐 그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래도 뭔가 눈빛이나 손짓으로 통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반갑다고 손 잡아주시고 안아 주시는 것이 너무 감동적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곳은 왠지 한국에 있는 요양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지내다 보니 마지막 날엔 조금 더 있다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그곳에 있으면서 느낀 것이 그 곳 사람들을 가족이 버리고 나라가 버렸어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셨음을 보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 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천국갈 수 있다는 것에 너무 다행이고 감사합니다. 이제 남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믿어 천국에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좋은 분들만 만나고 온 것 같아서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또한 아픈 곳 없이 건강하게 돌아오게 되어 너무 감사합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삽질을 해보고 살면서 안 해봤던 일들을 해보니 뿌듯했습니다. 비록 완성시키지는 못해 많이 아쉽지만 축대가 조금씩 쌓아지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년에는 다른 곳도 가고 싶지만 이곳에 한 번 더 가고 싶어졌습니다. 벌레가 너무 많은 것은 흠이었지만 좋은 날씨를 주셔서 편하게 활동 할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너무 유익한 시간이었고 너무 행복했고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온 것 같습니다.
1087 no image |총회 지도부 비전트립을 다녀와서| “묵묵히 이 세상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로 다짐했습니다”_김선경
편집부
2655 2014-12-02
“묵묵히 이 세상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로 다짐했습니다” < 김선경, 서울평안교회 > 미션트립은 처음이었습니다. 기대되고 설레고 어떤 사람들과 함께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궁금했었습니다. 출발 전에 단체 카톡방에서 들었던 일정은 줄곧 ‘일을 합니다’였고 그렇게 어떤 일인지 전혀 감도 못 잡은 채로 짐을 싸서 중국으로 출국했습니다. 평소 돌을 나른다든지, 삽질을 한다든지 등의 일은 당연히 남자의 몫이라 여겨왔기에 직접 그 일을 해야 한다고 들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대신에 청년들 중 맏언니라는 이유로 애써 담담한 척 표정을 고수해야 했습니다. 담당 목사님께서 ‘버릴 옷을 입고 나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비로소 실감이 났고 그때부터 숨 막히는 노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물이 부족하다니까 빨래는 힘들겠지 싶어 요일별로 챙겨갔던 옷들 중 ‘버릴 옷’은 없었고, 그 안에서 고르고 골라서 겨우 가장 편한 옷들 두 세트만 주구장창 세탁기로 빨래하며 돌려 입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청년들도 다 그랬겠지만 평소 전혀 해보던 일이 아니라 모두 숨이 턱까지 차고 힘들어했는데 잠깐 숨을 고르려 고개를 돌리면 우리보다 훨씬 어른이시고 나이 많으신 목사님들이 우리보다 열심히 일을 하고 계시는 모습에 요령은 피울 수도 없었습니다. 지휘감독만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데도 그분들이 먼저 솔선수범하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땀으로 온 얼굴이 범벅이 되시는데 절로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OOO은 많은 환우들이 사는 곳이었고 그분들의 상태는 아침저녁으로 드레싱을 해주어야할 만큼 심각한 분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몇 명씩 팀을 나누어서 그분들 치료하는 것을 보러 갔었는데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상태로 57년을 살아오셨을까 싶어서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그러나 원장이신 김 박사님과 간호사님은 덤덤하게 환부를 소독하시고 다시 붕대를 갈아주셨는데 새삼 그분들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직업이 그렇다고 단순히 넘길 문제가 아니라 정말 그분들은 값없이 빛없이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묵묵히 환우들을 돌보시는 모습이 내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김 박사님의 저녁 강의는 이 땅에서의 삶이 아닌 천국에의 소망을 두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는데 정말 나에게 필요한 말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어떤 생각으로 또 어떤 시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 원하실까? 사실 해답은 말씀에 나와 있는 것처럼 분명합니다. 곧 내가 반응을 할 수 있는가, 무시하면서 살아가는가의 문제일 뿐입니다. ‘과연 할 수 있을까’의 삶이 아니라 ‘물론 할 수 있다’의 삶을 실제로 묵묵히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현재의 나의 삶을 점검하고, 미래의 나의 삶을 다시 한 번 그려볼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 되었음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086 |전국장로회연합회| 선교의 현장을 찾아서_황인곤 회장 파일
편집부
2397 2014-11-18
선교의 현장을 찾아서 < 황인곤 장로, 전국장로회연합회 회장 > "새롭게 하소서"(롬12:1-2)라는 주제로 제22회기 사업을 몇 가지 준비했습니다. 장로님들이 여름 수련회를 통해 체력 달련과 쉼을 얻어 내일을 준비하는 것과, 장로교육원을 통해 신앙이 성숙되고 거룩한 영성을 갖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우리 교단 선교사님들 선교현장을 찾던 중 필리핀 박용대 선교사님이 섬기는 뵈뵈 선교회를 주께서 인도하심가운데 10월 15일부터 18일까지 선교위원장 손길식 장로 외 10분의 장로님들과 함께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단 선교사님 11가정이 필리핀 이곳저곳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각자에게 맡겨진 사역 등을 통해 세계 선교지의 허브역할을 잘 감당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둘째 날, 6가정의 선교사님과 맛있는 식사와 위로금을 전달하면서 많은 대화와 애로 사항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셋째 날, 부칼교회와 까룰로사교회를 방문하여 기도제목을 놓고 통성기도를 했습니다. 함께 기도 하며 부칼교회의 크리마스행사 준비가 되었고, 카룰로사교회 리모델링 헌금이 준비되게 하심을 감사했습니다. 특히 임마누엘 신학교를 방문해서 신학생 3명에게 안경을 맞춰 증정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 감격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특별히 이곳은 신학교 별관을 건축 중에 있었습니다. 좋은 신학이 이곳 필리핀에서 꽃을 피울 때가 멀지 아니함을 느껴보면서 눈물의 기도를 마치고 공항을 항해 왔습니다. 선교지에 세워진 모든 교회는 주님을 위하여 그 어떤 것들을 버린 이들의 손길을 통한 희생과 헌신의 열매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천하보다 귀한 수많은 영혼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 현장들을 탐방하는 가운데, 이 역사는 쉬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혼을 인도하는 지도자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주님이 하실 일이라 믿고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해주시고, 동역해주신 장로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1085 |전국장로회연합회| 필리핀 선교 보고서 파일
편집부
4648 2014-11-18
필리핀 선교 보고서 전국장로회연합회(회장 황인곤 장로)는 2014년 업무추진계획 중 선교위원회소속 해외선교에 필리핀선교 팀을 구성하여 11명의 희망자(증경 회장과 임원)를 구성하여 2014.10.16(수)-18(토) 3박4일 일정으로 다녀오다. <1일째> 10월 15일 인천공항 06시에 모여서 08시 10분 이륙한 필리핀 행(필리핀항공)은 11시 45분(현지시간) 마닐라 공항에 도착 봇짐을 찾아 12시 20분 박용대 선교사 안내로 2대의 승합차에 탑승하면서 필리핀 일정이 시작되다. 한식당(마카파잘)에서 두부김치찌게로 오찬을 하고 필리핀의 영웅 호세-리잘 기념관을 통해 필리핀의 인구 1억 2천 명, 국가면적 우리나라 3배, 국교는 천주교이며 스페인지배 400년, 일본지배 43년, 미국지배 3년을 겪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선교관인 뵈뵈 하우스(다스마리야스씨티)숙소에서 여장을 풀다. 저녁은 숙소에서 세우소금구이로 단촐 한 식사 후 박용대 목사의 예배 인도로 영을 다스리며 첫날밤을 보내다. <2일째> 10월 16일 숙소에서 식사 후 3시간 거리에 위치한 식당(필리핀 나구나 로스바유스 : 손가락으로 식사 집) 식사 후 팍상한 폭포(필리핀 2km거리 개곡) 답사 후에 필리핀에 계신 선교사님의 위로 장소(마닐라, 파사이시티 샤브샤브)에서 필리핀 선교사 11분 중 6분 부부, 이아이들 까지 23명의 만남의 시간에 정치도 증경회장의 기도, 황인곤 회장이 인사말 하다. 별석에서 다과를 나누는 자리에서 전국장로회연합회는 각 선교사들에게 위로금 전달식이 있었고 불참한 선교사들에게는 박용대 선교사에게 전달하도록 위임하다. 이어 선교사들이 하는 일과 기도제목을 받으며 궁금 사항은 직접 질문으로 이어지다. 1) 차주만 선교사(방갓 아브리지역) / 24시간 거리, 1994년 파송, 목회연구원을 개원하여 학생교육에 전념, 기도제목: 한인선교사 파견. 2) 이병훈 선교사(따이따이) / 1992년 파송, 성경번역(150종족 언어 중 130종족 언어 번역 마침), 기도제목: 건강회복과 후원요청. 3) 양종태 선교사(니잘 안티폴로), 1994년 파송, 선교사 자녀교육, 기도제목 : ① 국.영.수 전문 강사 파송 요청. ②선교사 파송요천(기독교 세계관을 연결할 수 있도록). 4) 김현중 선교사(니잘 안티폴로), 2007년 1월 파송, 어린이 사역(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이지만 돈이 없어 학교 준비물과 도시락 준비를 못해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 반과 후 가르치고 있음), 기도제목: 아이들 교육이 하나님을 아는 교육이 되길. 5) 이승일 선교사(니잘 안티폴로), 2006년 파송, ①선교사 훈련사역(특히 영어권선교사를 지도하고 있으며 이미 15개 나라에 파송함, ②목회자 교육기관 강의, 기도제목 : 선교사 파송요청, PMS 후원 원함. 6)박용대 선교사(다스마리 야스시티), 1994년 파송, 임마누엘교회 운영, 신학교 운영(학생 19명으로 베트남 1명, 캄보디아 1명 교육 중), 다사랑교회, 임마누엘신학대학, 메디컬센터 운영으로 지역민을 돕고 있음, 기도제목 : ①하나님에 사역이 잘 이루지 길. ②영육 간에 강건. <3일째> 10월 17일 전날과 같이 숙소에서 식사 후 3시간 거리에 박용대 선교사와 함께 방문하다. 1) 임마누엘 부칼교회 / 에브아임 코킹 전도사(필리핀 부부)의 바탕가스 탈라타 간지역 방문하여 교회 현황과 기도 제목을 듣다. 기도제목: ①주일예배시간 06시에 드림(이유는 새벽에 일터에 나가기 때문). ②학생들이 부모님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③ 학생들이 잘 성장할 수 있기를. ④교인들의 성령 충만. ⑤크리스마스트리 행사비용 10만원 정도 필요. 16명이 손잡고 통성기도로 교회 성장과 발전을 위한 기도와, 전도사 부부를 위한 간절한 기도를 드리다. 2) 까를로사교회 / 에브아임 코킹 전도사(필리핀부부) 기도제목: ①교회 보수공사(100만 원 예산이 필요). ②교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잘 믿도록. 이곳에서도 우리 일행과 선교사와 손잡고 교회성장과 발전을 위한 통성기도를 드렸다. 저녁은 한인식당에서 박선교사님 61회 생일 케익커팅으로 사랑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4일째> 10월 18일 아침식사는 숙소에서 박 선교사와 함께 식사 후 우리일행은 박 선교사에게 어제 부칼교회 기도 제목 중 크리스마스 행사 비용과, 까를로사교회 보수공사 보조금, 설교강단 구입비에 충당하도록 금일봉과 돋보기안경 90개를 드리고 햇빛에 대비한 선그라스 100개(경기북노회 일산은혜교회 장유도 장로 제공)를 드리고 기도로 마지막 일정에 들어가다. 1시간 거리에 임마누엘신학교 별관(다스마리 야스 랑까안) 방문하니 열악하지만 기숙사와 도서관(외국서적 12만권 확보) 있으며 외국인 학생이 2명이 기숙하는 등 발전을 확인하다. 신학교 인가를 얻으려면 부지부족으로 옆에 땅을 어렵게 매입하여 혼자서 설계, 시공, 감리를 하면서 밤과 낮을 모르고 열심히 하신모습에 하나님께서 여기서도 일하심을 알게 되다. 우리 일행도 손잡고 통성기도로 하나님께 더욱 도와주시도록 기도드리고 이어 20분 거리에 위치한 다스마리 야스시티 죤1-A에 있는 “다사랑교회” “세계메디칼센터” “임마누엘 신학교본관” “도서관”(외국도서 7천권화보)을 방문한 바 발전과 성장을 확인하다. <갈무리> 필리핀에 가기 전 그곳 학생들의 시력검안을 받아 준비해간 안경을 3명의 학생(이안, 조안, 꼬아)에게 자기에 맞는 안경을 끼워주니 얼굴이 환해지는 모습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박용대 선교사가 1994년 파송되어 한결같은 신념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와 헌신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 이번 3박4일 동안 만나는 선교사들과 가는 곳 마다 어렵고 힘든 현상을 보며 우울한 우리 일행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주었다. 앞으로 해외선교의 절박함을 해결하기 위한 기도에 열정으로 임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1084 no image <고 노윤석 목사 추모사> “어린아이처럼 순박하고 단순하게 평생을 목회 위해 헌신한 분”_김재완 목사
편집부
2996 2014-11-18
“어린아이처럼 순박하고 단순하게 평생을 목회 위해 헌신한 분” < 김재완 목사, 석광교회 원로 > 먼저 유족들에게 주님의 크신 위로가 임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고 노윤석 목사님의 신앙사상과 바른생활과 그분의 겸손하심을 오랜 세월동인 가까이에서 바라보면서 크게 놀라며 많이 배우고 존경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시고 이 땅에서 다시는 목사님을 뵐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 무겁습니다. 진리의 종들이 한 분 한 분 이 세상을 떠나고 영적으로 점점 어두워져 감을 느끼며 추모의 인사를 드리려 하니 목사님과 함께 했던 많은 일들이 떠오릅니다. 목사님께서 소천하시기 이틀 전 병원에서 뵈었을 때는 저희 말을 알아들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의 손을 붙잡고 잠시 기도하는 동안 목사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아버지께서 부르시니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겠다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한평생 오직 믿음으로 사신 그 아름다운 생활을 가지고 아버지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겠지요. 1. 목사님은 사모님과 자녀들에게 늘 존경과 사랑을 받아오신 분이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일찍이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 영등포 한남교회와 숭신교회를 섬겨오면서 평생 충성된 목회사역을 하셨습니다.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던 때는 목사님들의 생활이 대개가 어려웠었습니다. 생활은 쪼들리고 목사님은 교회밖에 모르시니 처자식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노 목사님의 사모님은 '세상에서 우리 목사님처럼 올 곶은 분이 없다'고 늘 칭찬하셨습니다. 자녀들은 '우리 아버지는 최고의 아버지 이셨습니다. 최고의 남편이셨습니다. 최고의 목사님이셨습니다'라고 자부하면서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모습들은 너무 아름답고 부럽기도 하였습니다. 2. 목사님은 어려운 교회를 진실로 사랑하고 도와주며 위로해 주신 분이셨습니다. 제가 섬기던 석광교회가 어려운 가운데서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동암교회 고 장흥재 목사님과 여러 번 저를 위로해주면서 숭신교회와 동암교회가 힘을 써서 석광교회가 세워지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충청도 청라지역의 어려운 교회들도 자주 찾아가 위로하며 도와주셨습니다. 목사님의 신혼시절 전도사로서 단칸방에서 어렵게 살아가실 때에 고 김관형 목사님이 전도사 시절에 오갈대가 없게 되자 그를 모셔다가 단칸방에서 수개월동안 함께 먹고 잠을 재워주신 일은 오래도록 귀감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언제나 가난한자들과 외로운 자들과 힘이 없는 자들 편에서 도와주시고 위로해주신 자상한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3. 목사님은 항상 어린아이 같으시고 마음이 넓으신 분이셨습니다. 같은 노회에서 1년이면 두 세 차례 함께 모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함께 숙식을 하는데 목사님들로부터 똑같은 이야기를 50-60번 들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목사님께서는 늘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들어주고 웃어주며 재미있어 하셨습니다. 웬만하면 또 그이야기냐 이제 그만하라고도 할 만한데 한 번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주시던 자상한 아버지이셨습니다. 4. 목사님께서는 평생을 기도하시면서 바라던 것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중국여행을 함께 간적이 있었는데 단동에서 강 건너편 북한쪽을 바라보시면서 저 넘어가 나의 고향인데 내가 죽기 전에 꼭 고향을 가봐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린시절 이야기들을 들려주시면서 눈시울을 적시셨습니다. 이제는 천국에서 더 아름다운 세계를 누리시면서 안식 하실 것입니다. 저는 북한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고 노윤석 목사님과 고 장흥재 목사님으로 부터 수십 년을 공산당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에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었습니다. 5. 목사님은 기교를 부릴 줄도 모르고 그저 순박하고 단순한 목사님이셨습니다. 6.25의 전란을 겪으시면서 남쪽으로 내려오셔서 그의 평생을 오직 한길을 걸어 오셨습니다. 순박하고 단순하신 시골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살아오시면서 기도하는일과 전도하는 일과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하시다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사모하시던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당신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아름다운 교훈들을 잊지 않고 따라가겠습니다. 주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옵소서.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1083 no image |총회 지도부 비전트립을 다녀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체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_홍쾌성
편집부
2499 2014-11-18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체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홍쾌성, 대구영안교회 > 5박 6일 동안 하루하루 저에게는 “하나님의 짝사랑”이라는 무거운 마음으로 다가왔습니다. 출국을 하루 앞둔 그 시간부터 저에게는 많은 시험이 있었습니다. 마음에 무거운 쇠 덩이를 올린 것처럼 숨을 쉬어도 답답한 그 감정이 있었습니다. 선교를 가기 전부터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러한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인애원에 도착하였습니다. 인애원에서 첫날의 어색함을 뒤로 하고 장시간의 이동에 피곤했는지 모두가 휴식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피곤한 육체의 휴식을 취할 때도 제 마음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시편을 읽고 묵상하며 마음의 힘듦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둘째 날이 되고 아침부터 서둘러 일정을 소화하며 우리 단기선교 팀은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다행히 출국 전부터 걱정하였던 무릎은 이상하리만큼 일을 하여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모두 수고하며 땀을 흘리는 모습에서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려고 했던 저의 모습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오후엔 조금의 휴식과 쉬운 일이 있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바깥의 일을 마무리하고 저녁 집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안락했던 삶을 버리고 자진의 유익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린 박사님의 삶을 보면서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또한, 출국부터 지금까지 힘들었던 마음의 정체를 하나님은 저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24년 동안 저를 너무나 사랑했다는 그 사실을 주님은 알려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짝사랑이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시간을 투자하고 쾌락과 유희를 위해 살아왔던 나의 삶을 하나님은 자신의 방법으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 뒤로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박사님을 이 오지에서 환경도 음식도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였을까 같은 입장이 되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때까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다음날이 되고 다 다음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하며 몸의 건강은 최악을 향했습니다. 장에 큰 탈이 났던 것입니다. 오래된 염증처럼 저의 장은 너무나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스트레스와 기름진 음식이 마치 화약심지에 불을 붙이듯 몸의 건강이 안 좋았습니다. 하루에도 수 없이 화장실을 가면서 주님은 저에게 금식을 요구하셨습니다. 한 끼라도 굶은 적이 없던 저에게 육체의 노동을 하며 금식을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금식을 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귀한 말씀을 보며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한다 하여도 우리의 선에는 한정이 있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나의 사랑엔 유통기한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것도 나의 힘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애원의 환자들을 보며 느낀 것은 나병이 마치 나의 죄와 같다는 것입니다. 나병은 고통도 없이 몸이 썩어가는 병입니다. 고통이 없으니 썩어가는 그대로 두고, 뜨거운 것과 통증을 모르니 그 상처는 날로 더 곪게 됩니다. 나병의 치료 장면도 보게 되었는데 그 큰 상처를 소독하지만 얼굴하나 찌푸리지 않는 환자의 모습도 저에게 충격으로 다가 왔습니다. 이 나병이 마치 우리의 죄악과 같다는 것입니다. 죄는 어떠한 고통도 없이 슬그머니 다가와 심령을 다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나병처럼 끔찍하게 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저에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그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날 저는 하나님께 저의 죄를 통회하며 무릎으로 나아갔습니다.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이번 미션트립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게 해주는 귀한 시간이었고, 아직 친해지지 못했던 형제, 자매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허락해주었습니다. 감사와 찬양의 시간이 지나고 집에 돌아와 이 간증문을 쓰기 까지 한 시도 하나님은 저의 곁을 떠난 적이 없이 사랑해주시고 계십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혼자 짝사랑하지 않게 나도 그 사랑에 조금이라도 반응하기를 원합니다. <다음호 계속>
1082 no image |총회 지도부 비전트립을 다녀와서| “주님께서 제 마음을 바꾸어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주셨습니다”_신정원
편집부
2415 2014-11-18
“주님께서 제 마음을 바꾸어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 신정원, 예수우리교회> 공항에서 함께 만나 중국으로 비행기를 타고가고, 중국에 도착하고 나서는 또 다시 준비되었던 차량으로 2시간 동안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동안 마음은 떨리고 있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반겨주신 분은 그곳에서 사역을 하고 계셨던 김 박사님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직까지 낯설고 사역하는 곳도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도착하고 함께하는 저녁식사를 맛보면서 환자들의 먹는 음식들을 체험하게 되었고 또한 그들과도 인사하는 시간을 잠깐 보내었습니다. 인사를 하면서 받아주실 때마다 웃으면서 좋아하셨지만 겉모습은 아직도 상처들이 있거나 몸이 불편한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을 보면서 건강한 내 몸에 대한 감사했고, 이곳에 보내어 도움이 되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긴장함을 계속 가지고 가는 것보다 친해지려고 노력했습니다. 형제들하고도 먼저 말을 걸고 나중에 같이 사역하면서 자매들도 조금씩 알아갔습니다. 사역은 환자들의 화장실 청소, 침대 시트 바꾸기, 환자들의 치료를 위한 솜 및 거즈 접기, 건물뒤쪽에 축대 쌓기 등 여러 일들을 했습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축대 쌓는 일은 모두가 힘들어 하는 과정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환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였고 함께 일 함에 또 즐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과 그밖에 작은 일들을 도와주는 것이 제 마음에 가장 감동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치료할 때 보게 되었던 상처들을 보고 그들도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모습과 거동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인사할 때마다 웃어주시는 모습에 주님의 위대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족하지만 그 속에서도 행복과 사랑을 주시는 주님을 통해 저는 더욱 잘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열심히 살아가는 환자들을 볼 수 있어서 감사한 시간들이 되었고, 그들을 위해 침대와 이불 시트를 바꾸거나 화장실 청소를 하여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음에 행복했습니다. 저의 작은 행동이 그 환자들에게 사랑으로 전해졌을지는 모르지만 주님께서 전달해 주셨으리라 믿고 나아갔습니다. 이런 사역들을 하고 마무리하는 금요일 토요일이 되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김 박사님께서 전해주신 말씀들을 생각해보고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축대는 비록 다 쌓지는 못했지만 함께한 형제, 자매들 그리고 목사님들의 사랑이 모여서 이 환자들에게 잘 전달되어 주님께 가는 그날까지 남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주님께서 제 마음을 바꾸어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주셨음에 감사합니다.
1081 no image |총회 지도부 비전트립을 다녀와서| “열손가락이 멀쩡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_이현덕
편집부
2298 2014-11-18
“열손가락이 멀쩡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 이현덕, 새소망교회 > 지난 8월 18일부터 23일까지 총회지도부 주관으로 중국 oo지방 미션트립을 다녀왔습니다. 솔직히 저는 미션트립을 가기 전에는 보통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친구들과 만나서 세상적으로 놀고 흥청망청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면 정말 한심하게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태국과 중국으로 미션트립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을 하다가 제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서 중국으로 미션트립을 가보자고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번 미션트립을 통해서 억지로나마 제 자신이 변하고 싶었습니다. 핸드폰 연락을 통해 계획도 조금씩 알게 되었고, 많이는 하지 않았지만 기도하면서 하루하루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심 출발하기 며칠 전에 모임을 가졌으면 했지만 모임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쉬웠습니다. 인천공항 시간에 맞춰 도착한 후 지도 목사님들을 비롯해 장로님과 형제자매들을 보고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비행기 좌석을 배정받고 짐을 싣는 동안 서로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갔습니다. 도착해서 짐을 풀고 저녁 식사로 국수가 나왔는데 한국에서 먹던 국수와는 맛이 너무 다르고 향신료 향이 너무 강해서 먹기 힘들었지만 그곳에서 견디기 위해서 먹었습니다. 첫째 날이 지나가고 둘째 날이 되어 새벽예배를 드리는데, 평소에 하지 않던 새벽예배를 드리다보니 너무 졸려서 저도 모르게 졸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축대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 2차 미션트립 때 오신 분들이 작업하신 것을 보니 대단하였습니다. 우리도 작업하는 시간에 열심을 다해 일을 하였습니다. 점심까지 일은 마치고 약간의 휴식 후 거즈 작업을 하면서 형제자매들과의 대화를 통해 더욱 친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과 종료 후에 드린 예배를 통해 목사님의 말씀도 듣고 기도를 하며 하루를 마쳤는데 정말 보람찬 하루였습니다. 둘째 날과 셋째 날에는 인애원에서 환자분들 치료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20-30년 동안 병을 앓고 계시다가 늦게 치료를 받아서 양쪽 발가락이 안쪽으로 말아져 있는 것을 보고, 열 손가락이 멀쩡하신 분이 없다는 말씀을 듣고 제가 비록 아토피가 조금 있지만 양손발이 멀쩡하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OOO에서 마지막 날 이영래 목사님의 말씀 중에 ‘어떻게 천국을 갈수 있을까?’라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막연히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가면 천국에 갈 수 있을거야’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씀 중에 그런 것은 다 기본이라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 이 생겼고 제가 그동안 했던 생활들이 반성이 되었습니다. OOO에서 미션트립은 제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이곳에서의 4일은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미션트립에 참여했던 목사님 장로님 형제자매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고 좋은 인연인 것을 감사히 생각하겠습니다. ps. 두리안을 꼭 다음 미션트립 형제자매들에게도 권해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1080 no image |지/상/특/강| 하나님의 백성인가, 바로의 종인가?_이복우 목사
편집부
3067 2014-11-04
하나님의 백성인가, 바로의 종인가? < 이복우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애굽기 5장은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바로의 반응과 조치가 설명되고, 나아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바로에게 호소한 일과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대한 모세의 탄원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받게 된다. 1. 이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신 하나님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통해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고 명하심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 백성”이라고 칭하셨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자존심이 굉장히 상하시는 일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바로의 ‘노예’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고 부르신 것은 “나는 네가 맘대로 부리고 있는 이 노예들의 왕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당시에 노예는 한낱 짐짝 같고 짐승과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처럼 천하기 비길 데 없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노예들의 왕이라 하니 바로가 하나님을 얼마나 우습고 하찮은 존재로 생각했겠는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바로 앞에서 우주만물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멸시를 당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스럼없이 ‘이 노예들이 내 백성이며, 나는 이 노예들의 왕’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일컬으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핵심 내용이다(참조, 창 17:7; 출 6:10; 렘 26:12; 히 8:10 등). 여기서 우리는 상황을 초월하여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속하게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근본 동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출 2:23-25).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사 41:14)라고 부르셨지만 동시에 자신을 그 버러지 같은 “야곱의 왕”(사 41:21)이라고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11:16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간에 단 한 번도 그들을 부끄러워하거나 모른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영원토록 사랑하신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도 이와 동일한 은혜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죄의 종노릇하던 버러지 같은 우리에게 언약에 근거한 구원을 베푸시고 “내 백성”이라, “내가 택한 자라”(사 43:20)고 말씀하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아니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존귀한 자로 여기신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는가! 신자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로의 반응 바로는 “내 백성을 보내서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키게 하라”(출 5:1)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자,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나는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로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무지를 보여준다. 그는 “여호와가 누구냐?”라고 묻고 이어서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였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무지’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는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막강한 권세와 힘을 가지고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던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주 하찮은 존재로 여긴 것이다.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을 무시했다. 무지가 무시로 이어진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을 무시하게 된다. 세상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근본 원인도 하나님을 모르는 데 있다. 신자들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방자하게 행하게 된다(참조, 잠 29:18). 이어서 바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반면에 자신을 매우 과시했다. 2절에서 그는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나는(개역개정역에는 빠져 있다)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 그는 무려 세 번이나 “나는”을 말함으로써 자신을 매우 높이고 있다.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바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을 매우 과시하고 높였다. 이런 점에서 바로는 세상을 대표하는 자가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로의 부정적인 반응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더욱 괴롭히는 것으로 확장된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광야로 나가겠다고 하는 것이 쉬고 싶어서(출 5:4, 5) 하는 짓이며, 게을러서(출 5:8, 17bis.) 하는 소리요, 거짓말을 하는 것(출 5:9)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벽돌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인 짚을 주지 말라고 감독들에게 명령한다. 하지만 벽돌을 만들어 내는 양은 이전과 동일하게 하라고 명령한다. 이리하여 바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더욱 무시하고 멸시하며 핍박했다. 이것이 악한 세상의 특징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괴롭히고 핍박한다. 3. 바로의 처분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 상황이 더욱 악해지자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은 바로를 찾아가서 호소한다. 이때에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기는커녕 “당신의 종”, 즉 바로의 종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무려 세 번이나(출 5:15, 16bis.) 연거푸 반복함으로써 매우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 전에 하나님께 머리 숙여 경배한 모습(출 4:13)과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께서는 노예로 살면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변함없이 “내 백성”이라고 인정하시나,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바로의 종’이라고 강변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난이 가중되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 존귀한 신분을 팽개치고 바로의 종으로 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그 모습이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할 것 같으면 세상에 굽실거리며 마치 세상의 노예인 것처럼 살아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마치는 말 하나님께서 어떤 망설임도 없이 우리를 내 백성, 내 자녀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주저함 없이 하나님만이 나의 왕이시며, 나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말하고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뛰어 넘어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신다. 우리 역시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어야 하며, 하나님께만 소속되고 매인 자임을 고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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