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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9 |2017 총회 교직자 수양회 강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강하여라(1)_서문강 목사 파일
편집부
1395 2017-06-02
< 2017 총회 교직자 수양회 강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강하여라 < 서문강 목사, 중심교회 > 1. 은혜의 원천 (요4:13,14; 롬3:20-26) 먼저 이번 성회를 위하여 은혜 주실 하나님을 찬미한다. 이런 특별성회에 참여한 강사나 회중이 빠질 수 있는 유혹은, ‘이제까지 듣고 배우고 알아왔던 것과는 별다른 무엇을 주고 받아야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성경에서 사도들이 보여준 것과는 다른 인간적인 함정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 ‘부활이 없다’는 교훈을 가지고 악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대처하였는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I want to remind you of the gospel I preached to you?-NIV),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전 15:1,2). 사도는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고 이미 들었던 복음을 다시 상기하게 하고 그 안에서 더욱 견고하게 서게 하는 방식을 채용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현대에 맞는 현대적인 복음’ 같은 것은 없다. 항상 사도가 전했던 바로 ‘그 복음’이다. 그리고 세대의 차이도 복음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곤경도 같고, 그 곤경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도 변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이번 수련회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에 집중할 때’ 우리 심령을 소성케 하시어 견고하게 서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바라자.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딤후2:1).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두 줄기’가 서로 꼬여 이어 달려가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두 줄기’ 중 한 줄기는 ‘인간의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줄기요, 다른 한 줄기는 ‘그 곤경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줄기’이다.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바로 그 ‘두 줄기’ 정점(頂点)의 조우(遭遇)와 같다 할 수 있다.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그 여인의 상태는 ‘죄가 가져온 인간의 비참’을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형국이다. 그래서 그녀는 ‘곧 다시 목마르게 하는 물을 들이켜나 결국 허무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렇게 살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의 파멸에 던져질 인생의 곤경을 보여주는 모델과 같다. 그러나 그녀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약속하시고,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신다. 그 여인은 이제 ‘자기 속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지닌 새 사람이 되어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기가 사는 사마리아 동네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선다. 그녀를 통하여 그 동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 그러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은혜의 원천’은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의 도와 그 구속(救贖)의 완성’이 그 ‘은혜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그 ‘은혜의 원천’을 사모하고 거기서 나는 것으로만 마시길 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신 복음의 절대적인 진수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하늘 법정에서 믿는 이를 향하여 ‘네가 죄를 한 번도 지은 적이 없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하게 이룬 것으로 여기노라’는 판결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들의 죄를 전가 받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것을 믿음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인 우리에게 전가하심으로 죄용서 하시고 의롭다 하신다. 그것이 복음의 진수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출할 ‘의’를 그리스도로 이루게 하시어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여기시어 죄책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사는 ‘단회적으로 완성되고 그 효력은 영원하다.’ 그 효력을 무효화시킬 것은 없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성화(聖化)는 칭의의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성화는 칭의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고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져”(골1:12)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는(롬 8:29)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거룩한 헌신으로 죄를 이겨 가는 반복적인 과정이다. 성화의 과정 중에 ‘우리의 연약으로 인하여 넘어져도’ 칭의의 효력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붙잡아 일으키시며 연단하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다루심이 그에게 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4). 오늘날 ‘성화의 열매로서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인 같이 말하는 신학자들은 복음의 은혜의 진수를 파괴하는 자들이다. 성화의 열매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칭의’로 말미암아 그 속에 영생의 새 생명을 가진 자들이 보이는 은혜의 열매다. 야고보서를 들어 로마서의 복음의 논리를 전복시키는 일을 사탄 말고 누가 좋아할 일인가? 로마서의 복음으로 야고보서의 ‘행함 있는 믿음’을 해석해야 한다. ‘로마서의 복음의 은혜에다 야고보서의 행함을 더해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간다’는 식으로 말하면, 야고보서를 잘못 읽은 것이다. 야고보서는 의롭다 하심을 받기 이전의 사람들에게 주신 서신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하여 방종하고 육체의 기회로 삼으려는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경계하며 은혜에 합당한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 야고보서의 핵심 메시지이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5).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은 종교개혁의 중심을 관통하는 ‘이신칭의’ 교리의 논리와 그 능력과 영광 안에서 더욱 견고하게 서자.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강하게 되는 첩경”이다. ▲ 여전도회 특송
1198 |2017 총회 교직자 수양회 강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강하여라(2)_서문강 목사 파일
편집부
1218 2017-06-02
< 2017 총회 교직자 수양회 강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강하여라 < 서문강 목사, 중심교회 > 2. 은혜의 효력 (롬5:1-8; 8:1-6) 오늘은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하여 상고하기를 원한다. 로마서 5:5에서 사도는 말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예정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행사를 주장하신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2-14).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고백을 한 사도들도 정작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다시 사심과 승천 등, 예수님께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자신의 이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사를 원만한 이해를 가진 것은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신 후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그래서 그들은 비로소 성경을 풀어 예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기탄없이 밝히 증거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어떻게 믿는 자들의 구원의 완전하고 충분한 근거가 되는지를 막힘없이 증거할 수 있었다. 우리 개인의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과 그 영광을 원만하게 이해하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기름부으심 때문이다(요일2:20).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루신 구속의 효력을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각 사람에게 적용하시어 구원받을 만한 믿음에 이르게 하시어 구원받게 하시는 것이다. 성부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성자께서 구속하시고(요6:39), 성령께서는 성부의 뜻대로 성자께서 구속하신 자들에게 믿음을 주시어 그 은혜를 적용하시는 것이다. 사도는 이런 의미에서 로마서 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효력을 세 가지의 측면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1)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2)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3)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1,2). ‘칭의’를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이 영예의 항목을 무효로 돌릴 것은 없다. 우리 자신의 연약과 허물과 사탄의 각종 시험에도 불구하고 ‘칭의의 효력을 무효로 돌릴 수 없으니 그러하다. 성령께서는 사도로 하여금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말한다. 그 환난이 그 사람을 못쓰게 만들지 않는다. 도리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하고 오직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에 부합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그에게 있기에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품으로 자라게 하신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 훈련을 받게 되어 있는 ‘환난의 학교’가 바로 ‘은혜의 영역’ 안에 있다. 그래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우리 속에서 보혜사로 계시면서 이 모든 과정을 이끄시는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효력을 우리에게 적용하시어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한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이나 환난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을 망가지게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속에 보혜사로 계신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의 효력을 우리에게 적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택한 백성들을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회개하여 믿음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부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의 심령 속에서 ‘양자의 영’으로 작용하시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신다. 그리고 그런 자녀의식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성령께서는 모든 만난을 극복하고 믿음을 견지하게 하시어 하나님의 목적하시는 영화(榮化)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주님을 믿는 모든 이들 속에서 ‘생명의 법’을 주관하시어 ‘육신의 생각’을 제어하고 ‘영의 생각’으로 이어가게 하시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이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롬8:1-6). ▲ 저녁집회 ▲ 특강
1197 |2017 총회 교직자 수양회 강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강하여라(3)_서문강 목사 파일
편집부
1252 2017-06-02
< 2017 총회 교직자 수양회 강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강하여라 < 서문강 목사, 중심교회 > 3. 은혜의 방편 (시73:16-17; 엡1:23) 하나님께서 지상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되 지정하신 ‘은혜의 방편’을 통하여 주신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소’로서의 교회의 위치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히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소로서의 교회와 그 교회의 모든 제도’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하신 주님이 세우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함은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 집중되어 있는 교회의 여러 제도, 예배와 설교와 기도와 성례 등’을 존중하고 거기서 주시는 은혜를 받는다 함이다. 어거스틴이나 칼빈이 교회를 ‘영의 어머니’라 한 것은 의미 있다. 지상에 있는 성도의 행로 속에 ‘하나님의 성소로서의 교회와 그 모든 제도’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된 우리 모두에게 생수를 제공하는 샘의 통로이다. 시편 73편 기자가 ‘신실한 경건의 사람’으로서 자기에게 찾아오는 시험(지상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다 당하는)을 어떻게 극복하고 믿음의 존귀함을 더욱 아는 자리로 회복되었는가? 그는 믿음이 없는 이들이 자기들의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살아도 ‘잘 되고 건강하고 형통하고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는 모습’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죄의 정욕을 이기어 정결하게 살아도 ‘아침마다 징책을 당하며 징벌을 당하고 있는’ 처지라. 이로 인하여 깊은 상심에 빠져 침체되고 아무리 궁구하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안 되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하여 그 시험을 이겼는가?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73:16,17). 그리고 영적 회복이 이루어졌다. 이제 그는 하나님 없는 악인들의 파멸의 종말과,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하늘의 소망을 자신의 영화로운 종말을 비교하고 나서 말한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2-25). ‘은혜의 방편이 모여 있는 성소,’ - 하나님의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로 회복한 것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낳으시고 기르시고 자라게 하시는 은혜를 교회를 통하여 주신다. 우리 목회자들은 이런 시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서 가장 쉽게 그런 시험에 들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을 통하여 부단한 은혜를 공급 받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복음 사역자들이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다니,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런 영광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세워 주시다니’ 하면서 늘 깨어 있을 때에 자신을 위하여도 복되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도 좋은 본이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5).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광을 무엇에 비교하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3). 우리가 목회자 설교자가 되어 교회를 섬기는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사람이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사람이 지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소명을 받는 것이라’고 한 것과 같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설교자, 목회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를 충성되게 여기시어 우리에게 직분을 맡기신 주님을 찬미합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하여 이기는 자”로 나타나기를 바란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소명에 걸맞은 은사와 능력을 아울러 주실 것이다. ▲ 고신총회 친선사절단 방문 ▲ 새벽기도회
1196 |2017 총회 교직자 수양회 강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강하여라(4)_서문강 목사 파일
편집부
1244 2017-06-02
< 2017 총회 교직자 수양회 강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강하여라 < 서문강 목사, 중심교회 >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게 된다 4. 은혜의 궁극적 승리 (롬 8:28-39) 우리가 이번 수양회를 통하여 다시 들었듯이,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어 영화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장엄한 목적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면면히 반복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는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열심과 신실함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은혜의 방식’으로 그 목적을 이루심에 근거한 것이다. ‘은혜’란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바와 같이 ‘주권적인 긍휼의 처사’이다. ‘우리의 죄와 부패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엄정한 공의의 분노를 우리에게 쏟지 않으시고 아들이 대신 받게 하시고, 또 우리가 마땅하게 제출해야 하는 완전한 의를 아들이 대신 이루게 하시어 그 아들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여기시고, 그것의 효력을 성령님으로 적용하시고 그 안에서 우리를 영원히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사’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믿음도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어 단번에 주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고 헌신하는 것은 그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처사’에 대한 ‘마땅한 반응이다.’ 모세와 선지자들과 사도들 - 성경 전체를 통하여 - 은 ‘하나님의 그 은혜의 방식’을 무수히 반복적으로 선포하고 확인한다. 사도 바울은 여기 오늘 읽은 본문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얼마나 확실하게 이루어지며, 그 목적에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이 우리의 우리 됨에 불구하고 얼마나 확정적인지를 말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선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견지의 ‘선’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정하신 뜻을 이루시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의 경륜 속에서 ‘그 목적을 이루시는 데 방해가 아니라 합력한다’는 것이다. ‘섭리’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는 바로 뒤이어 29-30절에서 그 점을 확인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의 믿음이란 ‘우리의 됨됨이와 우리의 처지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하신 그 완전하신 하나님과, 그 확정된 목적이 반드시 이루어져 우리가 그 뜻하신 영광에 이르게 됨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소망’은 그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 목적이 우리의 영원한 현실로 될 날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조망이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히 11:1). 사도는 그런 하나님의 거룩하신 행사의 조명을 가지고 ‘믿는 우리가 지상 생애에서 만나는 현실로 돌아온다’. 우리는 하늘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나 몸을 입고 지상의 현실 속에 있다. 지상의 현실에 속하고 매몰된 사람은 아니나 여전히 ‘세상’이라는 환경 속에서 산다. 우리가 여기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오늘 바로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현실’로 회귀한다. 그럼 그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의 믿음의 싸움을 위한 지원병을 보내지 않고, 우리 믿음을 까부수려는 적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사도가 31절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그 현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사탄의 훼방이 있다. 우리의 연약과 허물을 그도 잘 알기에 늘 참소하고 우리를 조롱하고 우리를 우울하게 하려 벼른다. 신자들 중에 이런 일이 영적 침체의 큰 원인이 된다. 연약과 허물로 실족과 사탄의 참소가 있다. 그러나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우리의 현실이 그리 만만치가 않다. 어떤 때는 우리 앞에 절벽이 놓여 있고 도저히 그것을 넘어설 지혜도 힘도 없다. 스펄전과 같은 대 설교자는 마냥 행복한 것 같았어도 그의 현실은 늘 그를 찔러댔다. 통풍으로 인한 고통, 자신의 연약에 대한 자의식으로 인하여 우울증으로 인하여 목회를 접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를 모함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이겨냈는가? 사도의 말을 들어 보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3:37). ‘은혜의 궁극적 승리이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 강하라”는 성령님의 권고를 듣고 거룩한 담대함으로 서게 하시는 은혜로 충만해지자. 우리 자신의 힘만 의지하면 넘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와 은혜의 효력을 따라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따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려고 은혜의 방편을 통해 은혜를 공급받을 때에 내 것이 아닌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게 된다’. 아멘. <끝>
1195 no image |이단을 경계하라3| 이삭이 그리스도인가?_김성한 목사
편집부
1121 2017-06-02
이단을 경계하라3 이삭이 그리스도인가? < 김성한 목사, 은혜교회_총회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서기> * 총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에서는 이단이 준동하는 시대에 이에 대한 경계심과 분별력을 높이고자 주요한 이단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게재한다. _ 편집자 주 이단 ‘하나님의교회’에서 재림 예수라고 믿고 있는 안상홍 씨에게 생전에 엄수인이라는 부인이 있었다. 엄수인 씨가 “자기가 새 예루살렘이며 신부”라고 주장하자 안상홍 씨가 이를 반박하기 위해 “새 예루살렘과 신부”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 보면 “이삭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엉뚱한 해석이 나온다.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 중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한 것이 바로 이삭을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문맥을 잘 살피면 이 구절이 이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을 금방 알 수 있는데, 이단들은 절대로 성경의 문맥을 살피지 않는다. 또한 창18:10을 근거로 하나님이 사라에게서 이삭으로 태어나셨다는 황당한 주장을 한다. (창18: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슈브’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에 직접 개입하셔서 사역하시는 것을 말한다. ‘슈브’를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들어가서 잉태되신 것이라고 해석한 것은 이단들의 무지함을 잘 드러내 보여 준다. ‘하나님의교회’의 주장을 보면, 하나님이 시도 때도 없이 성육신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삭으로 성육신하셨고,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안상홍으로 오신다”고 한다. 이단들은 그리스도께서 왜 이 땅에 오셔야 하는지 알지 못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의미를 혼란시킨다.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 성육신하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완전히 이루신 구속 사역을 분명히 알면 자칭 재림 예수라고 하는 이단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 다음 주소와 qr 코드를 활용하면 안상홍 씨의 저서 관련 부분을 볼 수 있다. http://theblessed.org/data/qr/isac.jpg
1194 no image |가정의달_특강| 청년실업 시대의 기독교 교육_방선기 교수
편집부
1267 2017-05-24
<가정의달 특강> 청년실업 시대의 기독교 교육 < 방선기 교수, 합신, 기독교교육학 > ‘나’에게 맞는 ‘일’을 택하고 그 일로 버는 ‘돈’에 만족하는 ‘나, 일, 돈’의 원리로 진로를 준비함이 대안을 찾는 길이다 하나님이 내 생애를 통해서 다양한 일로 부르신다는 평생소명의 믿음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청년실업 문제는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 중에 가장 풀기 어려운 사회적인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글로벌한 문제다. 기본적으로 경제가 침체하면서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며 또 산업이 발달하지만 교육이 그보다 더 많이 발달해서 그 사이의 갭 때문에 상황이 심각해진 것이다. 이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갈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기존의 일자리들이 사라지게 되는데 비해 새로운 일자리는 아직 확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사회는 지난 세대에서 급격한 경제성장을 경험한 터라 일자리가 부족한데 대한 상실감이 훨씬 더 크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에서 다양한 방법을 제안한다. 그러나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이 된다. 실제적인 해결책은 기업들이 성장해서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기업의 성장과 일자리의 증가가 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기업의 역할에도 한계가 있다. 청년실업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일자리 부족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만 조금 자세히 들어가 보면 일자리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기보다는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청년들에게 눈높이를 낮추라는 조언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눈높이를 낮춘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고, 실제로 눈높이를 낮춰서 취업을 하게 되면 일을 하는데 성실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청년실업의 문제는 심각한데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은 요원하다는 느낌이다. 청년실업의 상황을 개선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통령이 아무리 권력이 있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다. 그것은 정부나 기업이 함께 노력을 해야 할 일이다. 사실 개개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상황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흔히 말하는 취업이나 창업 교육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직업을 바라보는 교육을 말한다. 교회가 이런 교육을 기독교적인 관점에 할 수 있다면 상황은 바꾸지 못해도 그 상황 속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취업의 관점에서 진로의 관점 으로 바뀌어야 한다.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면 된다, 그래서 일자리를 많이 만들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종의 단기 처방이다. 많은 경우가 취업을 하더라도 일의 질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인내가 부족한 젊은이들이 쉽게 일을 그만 둔다. 그러면 실업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이 문제를 풀려면 취업의 관점이 아니라 진로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일찍부터 진로에 대한 교육을 해서 진로를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교육의 문제는 교육의 목표가 대학입시라는 데에 있다. 교육은 진로를 준비하는데 맞추어져야 한다. 진로를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공부를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 공부를 위해서 어떤 학교를 갈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로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가지 않는 학교를 택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공부보다 먼저 일을 배워야 한다면 대학교 가는 것을 미룰 수도 있다. 이런 진로 교육을 위해서는 ‘나, 일, 돈’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 세상에서는 돈이나 인기, 안정 등에 직업의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다. 크리스쳔들도 이런 경향에 동화되어가는 것 같다. 그런데 바람직한 직업은 자신에게 맞는 일,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나’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적성검사도 필요하고 심리검사도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떤 사람을 창조했는지 돌아보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부모나 윗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자녀들이나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독려하기보다 그들이 어떤 재능이 있고, 어떤 강점이 있는지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없이 공부만 한다면 혹 좋은 학교를 간다고 해도 바람직한 진로를 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일’은 돈을 많이 벌거나 안정되거나 인기가 있는 직업이 아니라 ‘나’에게 잘 맞는 일인 것을 인식해야 한다. 동시에 일을 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돈을 버는 것이기 때문에 ‘돈’에 대한 바른 이해도 중요하다. ‘나’에게 맞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경우에 그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면 그런 경우는 행운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때 ‘돈’만을 위해서 ‘일’을 선택하면 ‘나’를 잃어버리게 될 수가 있다. 이 세상에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정말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나’에게 맞는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통해서 버는 ‘돈’에 만족해야 한다. ‘나, 일, 돈’의 원리에 따라 진로를 준비한다면 비교적 적절한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진로의 관점에서 소명의 관점 으로 바뀌어야 한다. 진로의 관점은 아주 중요하지만 진로를 정하는 주체가 사람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진로를 정하는데 ‘나, 일, 돈’의 원리를 따르면 크리스천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진로를 정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세속적인 가치관의 영향을 피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물로 신앙인들까지도 결국에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따라 진로를 정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 일, 돈’이 ‘돈, 일, 나’로 바뀌는 것이다. ‘돈’ 많이 벌고 안정성이 있고 사람들이 알아주는 ‘일’을 선호한다. 그러니까 경쟁이 치열하게 되고 그 경쟁에서 이긴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고 경쟁에서 진 ‘나’는 패배자가 된다. 즉 ‘돈’이 ‘일’을 결정하고 ‘일’이 ‘나’의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 이것이 진로의 관점이 갖는 한계다. 이런 진로의 관점을 초월하는 것이 소명의 관점이다. 이 관점은 하나님 중심이다. 사람이 하는 일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세속의 산업심리학에서도 등장했다. 직업을 돈벌이(Job)이나 경력(Career)이 아닌 소명(Calling)으로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속학자들이 소명과 소명의식을 강조하는데 정작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직업을 소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으면 직업에 따른 성과 속의 차별을 하지 않게 된다. 흔히 종교적인 직업은 일반 직업에 비해서 더 거룩하게 느껴지지만 소명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직업이 다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고 하는 바울의 직업관과 부합된다. 또한 직업을 소명으로 받으면 직업의 귀천의 차별을 초월할 수 있다. 사도바울은 그 당시 노예로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을 향해 노예 신분으로 있는 것에 대해서 마음을 쓰지 말라고 하면서 자유스러운 몸이 될 수 있다면 그래도 좋다고 했다.(고전7:21) 이 말씀은 현대 사회의 직업 중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격려가 된다.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직업의 선악은 철저히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이 불러서 시키는 일이라면 결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악한 일이 될 수 없다. 사회에서도 지탄받지 않는 일이라야 소명이 될 수 있다. “도둑질 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하지 말고 수고하여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엡3:28) 이렇게 직업을 소명으로 받으면 직업관이 분명해지며 동시에 직업을 찾는 자세가 달라진다. 프레데릭 뷰크너는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는 소명의 장소는 당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세상의 깊은 갈망이 만나는 곳입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열정과 세상의 필요가 소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인인 것을 보여준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 생애에 한 번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 지속된다는 점이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은 그를 애굽의 총리로 부르셨다. 그 소명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는 애굽의 종살이도 했고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성실하게 임했고 결과적으로 주변에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창39:3,23) 요셉의 예를 통해 보듯이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일을 맡기시려고 부르신다. 때로는 그 일이 힘든 일일 수도 있고, 자신이 원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일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새로운 소명을 준비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젊은이들이 많이 하는 아르바이트도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임한다면 새로운 소명의 준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소명의 관점이 필요한 이유는 현대 사회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지금 평생직장은 사라졌다. 한 회사에 취직을 해서 평생 일하다가 그 곳에서 퇴직하는 것은 완전히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평생직업을 가지라고 했지만 이것도 벌써 지나간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기존의 직업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평생직업의 개념도 의미가 없어졌다. 이런 변화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내 생애를 통해서 다양한 일로 부르신다는 믿음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바로 평생소명이라는 믿음이다. 우리 시대 청년실업의 상황을 단번에 변화시키는 일은 정말 어렵다. 개개인이 이 상황에 바로 대처할 뿐이다. 크리스천들에게는 이런 상황에서 바로 대처할 대안이 있다. 바로 하나님이 평생 우리를 부르신다는 소명의식이다. 물론 이것이 당장 일자리를 마련해 주지는 않지만 평생 살아가는 동안 일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1193 no image |이단을 경계하라2| 아담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_김성한 목사
편집부
1391 2017-05-24
이단을 경계하라2 아담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 베뢰아 김기동 씨의 ‘네피림’ 오해 - < 김성한 목사, 은혜교회_총회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서기> * 총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에서는 이단이 준동하는 시대에 이에 대한 경계심과 분별력을 높이고자 주요한 이단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게재한다. _ 편집자 주 “아담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을 뽑으셨다. 그 사람이 아담이다. 그 선택에서 탈락된 나머지 사람들이 네피림이다. 네피림의 뜻은 ‘떨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가인이 두려워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 네피림이었다. 아담은 부모에게서 났으므로 아담에게는 배꼽이 있다." 베뢰아 김기동씨의 주장이다. 아담 이전에 영혼이 없는 육신만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주장을 ‘이중아담론’이라고 한다. 이중아담론을 주장하는 이단들이 의외로 많은데 베뢰아 김기동씨와 신천지, 녹산교회 유복종씨 등이 있다. 베뢰아 10기생으로 알려져 있는 윤석전 목사도 1987년 7월 9일 설교에서 ‘아담과 네피림’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김기동과 똑같은 주장을 하였다. 성경적인 바른 교리는 아담이 첫 사람이며, 아담 이전에는 사람이 없었다. 이중아담론의 오류는 출생한 모든 사람을 기록하지 않는 창세기의 족보를 오해했기 때문이다. 네피림은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타락한 사람들”이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아담이 첫 사람이며, 아담 이전에는 사람들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정확하게 잘 가르쳐도 이단의 15% 정도는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다음 주소를 클릭하면 이중아담론을 주장하는 김기동씨의 저서 ‘하나님의 의도’를 볼 수 있다. http://theblessed.org/data/qr/nephilim.jpg
1192 no image |부/활/절/특/집|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_이강호 목사
편집부
1455 2017-04-05
|부/활/절/특/집| 로버트 맥체인 성찬 강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THIS DO IN REMEMBRANCE OF ME) 원문 _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 1813-1843) | 번역 _ 이강호 목사 < 이강호 목사, 런던 갈보리장로교회 > | 해제 |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성찬의 거행에 있어서 개혁 교회들에게 귀중한 유산을 남겨 주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찬은 영적인 잔치였다. 성찬주일 단 하루의 행사가 아니고 성찬 전 금요일은 금식일, 토요일은 준비 집회, 성찬주일은 성찬 설교와 경계를 겸한 성찬 거행, 월요일은 감사 예배로 이어졌다. 보통 성찬 전 주일은 성찬에 대한 설교와 권면이 있었다. 그때의 설교들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받았던 은혜들을 짐작할 수 있다. 목사들이 성찬에서 성도들에게 사용한 것은 소박한 약간의 떡과 포도주였지만 그것이 말씀과 기도로 준비되고 전해졌을 때, 성찬은 풍요롭고 즐겁고 유익한 잔치가 되었다. 또한 성찬을 앞두고 목사와 장로들은 분담하여 모든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개인적으로 교리 문답이나 성찬 문답을 중심으로 주님의 몸을 분별하는 지식과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할만한 삶을 사는지 확인한 다음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토큰을 나눠주었다. 이는 성경과 신앙고백서의 원리에 따른 것으로 주님께서 성도들의 유익과 위로를 위해 제정해 주신 성찬을 욕되게 하지 아니하며 바르게 참여하여 큰 은혜를 입고 합당치 못한 참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기 직전에도 경고의 말씀을 생략하지 않았다. 로버트 맥체인 목사의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자신의 교우들, 특히 처음 성찬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에게 성찬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합당하게 참여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생전인 1840년에 발행한 소책자로서 이 소중한 유산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강호 목사) “저는 주님의 만찬이 여러분 중에서 두려운 방식으로 모독되고 있을까 봐 두렵습니다” “주님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여러분은 엄숙하게 모든 다른 것들을 버리며 진심으로 주 예수를 유일한 주님과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엄숙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한 지체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손에서 손으로 옮겨집니다” 주님의 만찬은 모든 예식들 중 가장 사랑스럽습니다. 1. 그것이 제정되었던 시간 때문입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그 때는 이 세상에서 어느 때보다 가장 어두운 밤이었지만 가장 밝은 밤이기도 했으니 죄인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가장 가혹한 시험에 처했던 밤이었습니다. 그러한 시간에 그가 우리의 위안을 생각하셨다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2. 그것은 신자의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까마귀 새끼들이 울부짖을 때에도 들으시고 또 자주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시107편, 행8:22). 복음의 전파를 듣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그러나 주님의 만찬은 자녀들만을 위한 떡이니 오직 주님 예수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위해서 마련된 것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 그것의 시작, 중간, 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끝이 아닌 많은 설교들이 있고 그리스도의 이름의 냄새를 맡을 수 없는 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끝이 아닌 성찬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만찬의 알파요 오메가이니 그것은 전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입니다. 이것들이 그 떡과 포도주에 특별한 사랑스러움을 줍니다. 저는 주님의 만찬이 여러분 중에서 두려운 방식으로 모독되고 있을까 봐 두렵습니다. 분명한 죄들 가운데, 혹은 분명한 의무들을 무시하며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옵니다. 자기들이 회심한 적이 결코 없는 것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회심에 대한 생각 자체를 멸시하는 많은 사람들이 옵니다. 합당하지 않은 성찬 참여는 무서운 죄입니다.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크게 노여워하셔서 자신의 영을 여러분에게서 거두시고 섭리의 찡그림으로 여러분을 찾으시며 여러분을 멸망의 날을 위하여 인치십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적이 되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에 대하여 정직하게 대하시고 제가 지금 쓰고 있는 것을 읽고 기도하시며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던 분께서 제가 설명하는 동안 여러분의 마음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성찬 참여자의 행위들 1. 그가 떡과 포도주를 취합니다. 목사가 상에 앉은 사람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줄 때 이것은 죄인들, 괴수에게까지 값없이 제시된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떡과 포도주를 받는 것은 “내가 상하시고 피 흘리시는 구주를 나의 보증인으로 감사히 받습니다”를 의미합니다. 떡과 포도주를 받는 행위는 적용하는 행위이니 그것은 하나님과, 천사들과, 사람들과, 악마들 앞에서 “나는 나의 피난처이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피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것은 적용하는 행위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붕 위로, 자기들의 요새들과 탑들로, 험준한 바위들로, 지극히 높은 산의 꼭대기로 피하라고 하십시오. 나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의 유일한 피난처인 방주로 피합니다(히11:7).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피했을 때 그것은 적용하는 행위였습니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헤브론의 문에 들어갈 때 그의 친구들이 외쳤을 수 있습니다. 광야로 도망하라! 아니면 요단강을 건너 도망하라! 그러나 그는 아니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나는 오직 이 성벽들 안에서만 안전할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도피성이고 나는 오직 여기에 숨을 것입니다(수20). 한 이스라엘 사람이 생축이나 양 중에서 예물을 가져오고, 제사장이 그것을 줄로 제단의 뿔에 맸을 때, 드리는 자는 자기의 손을 어린양의 머리에 안수했습니다. 이것은 적용하는 행위로서 “나는 이 어린양이 나를 위하여 죽는 것으로 여깁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이 말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너를 구원하겠느냐? 너의 생활을 고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라. 그는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나는 내 자신의 죄를 감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어린양에게 올려놓습니다(레1:4). 한 여인이 떨면서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을 만졌을 때 이것은 또한 적용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녀의 친구들이 그녀에게 말했을 수 있습니다. “가서 다른 의사들을 더 찾아보자. 아니면 네가 좀 나아질 때까지 기다려보자.” 그녀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막5:28). 시편 42편에서 다윗의 적들은 그에게 끊임없이 말했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것이 밤낮 눈물로 그의 양식이 되게 했습니다. 그것은 뼈를 상하게 하는 칼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편 43편에서 그는 용기를 내어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어린양이 죽임을 당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너희는 내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보라, 나는 이 어린양을 나를 위해 죽임 당한 것으로 취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다. 아가서에서 신부는 자기 마음에 사랑하는 이를 만났을 때 “그를 붙잡고 놓지 아니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적용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세상은 그녀에게 말했을 수 있습니다. “이리 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너의 사랑하는 자보다 더 아름다운 다른 사랑스러운 자들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그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그를 붙잡고 놓지 아니하였노라. 이는 내 사랑하는 자며 내 친구로다”(아3:4). 사랑하는 분들이여, 바로 이것이 주님의 상에서 부서진 떡과 부어진 포도주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일생에서 가장 엄숙한 적용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내가 방주로 들어갑니다. 내가 도피성으로 피합니다. 내가 어린양의 머리에 내 손을 놓습니다. 내가 그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내가 예수를 나의 주와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그를 붙잡으며 은혜를 의지하여 그를 가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증표들에 의하여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증인들 앞에서 증표들을 수단으로 그리스도와의 신중한 언약 맺음입니다. 신부가 혼례에서 많은 증인들 앞에서 오른 손을 받을 때, 그것은 그녀가 신랑을 자신의 유일한 남편으로 받아들인다는 엄숙한 선언입니다. 그같이 주님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여러분은 엄숙하게 모든 다른 것들을 버리며 진심으로 주 예수를 여러분의 유일한 주님과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엄숙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일들이 사실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이 거룩한 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은혜의 일이 시작되지 않았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떨게 된 적도 없었고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된 적도 없었으며 “하나님을 믿어 기뻐함”에 이른 적이 없었던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진심을 다하여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니 이 상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중의 많은 사람은 여러분이 죽어도 좋은 상태에 있지 않은 것을 압니다. 여러분은 말합니다. “죽기 전에는 돌아서겠지요.” 이것이 여러분의 죄가 가려지지 않았으며, 여러분이 거듭나지 않았으며, 여러분이 여러분 앞에 제시된 소망으로 피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 상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 어떤 사람들은 죄의 확신을 가졌었지만 그것이 사라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의 벽들은 여러분이 영원의 벼랑에서 떠는 것을 보았지만 여러분은 “믿는 가운데 평안함”이나 “하나님과의 평안”에 결코 이르렀던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근심을 사업이나 쾌락의 소용돌이에 잠가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물러났습니다. 여러분의 인애(仁愛)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습니다. 이 상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명예나 일상적인 정직에 대한 여러분의 인식을 두고 말합니다. 세속적인 일들에 있어서 여러분이 입의 말로든지 몸짓으로든지 거짓말을 하려고 합니까? 그렇다면 영원한 일들에 있어서 거짓을 말하는 것이 가벼운 일입니까? 여러분이 부서진 빵과 부어진 포도주를 취함으로써 여러분이 거짓말로 아는 것을 고의적으로 선언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통하여 기도하시고 떠십시오(행5:1-11). 하늘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말해지지 않겠습니까? 떨며, 믿는 영혼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 잔치는 여러분을 위하여 베푼 것입니다.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만일 여러분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오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믿음에 약”하면 목사들은 여러분을 영접하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만일 성찬 안식일 아침에, 심지어 여러분의 일생에서 첫 번째일지라도,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풍성하시고 아낌없이 나타나셔서 여러분이 그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면 주저 마시고 오십시오. 그 상에 오셔서 사랑하는 자에게 기대십시오. 그리하면 거기서 여러분은 요한의 자리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안하게 그의 가슴에 기댈 것입니다. 2.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십니다. “받아먹으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떡은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며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떡은 생명의 지팡이이고 포도주는 디모데처럼 자주 약함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운을 북돋아줍니다. 그것들은 사람이 소유한 가장 영양가 있는 복들입니다. 주님의 만찬에서 그것들을 먹는 것은 내가 나의 유일한 힘으로서 예수를 먹으며 “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떡을 손으로 취하는 것은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내게 의로움이 되셨다”는 것을 증표에 의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는 것은 “예수는 내게 거룩함이 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고 반석으로부터 물을 마셨을 때 그들은 황량한 광야를 통과하는 그들의 여행을 위하여 힘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을 통과하는 신자들의 여행의 모습이었습니다. 신자들은 매일 자신들의 힘인 그리스도를 먹고, 그는 그들의 매일의 만나이고, 그는 그들을 따르는 반석입니다. 신부가 사과나무 그늘 아래 앉았을 때 그녀는 말합니다.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그리고 또 말합니다.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신자들이여, 이것이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구주로 인하여 피난하게 되자마자 그에 의하여 영양을 공급받고 새로워집니다. 그는 여러분의 마음들을 위로하시며 모든 선한 말씀과 일로 여러분을 세우십니다. 시편 36편에서 다윗은 주님 예수의 날개 아래 의지하는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는 부언합니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어린 자녀들이여, 여러분은 경험에 의하여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도록 인도함을 받을 때 여러분은 그의 가족으로 입양되었고 자녀의 떡을 먹게 되고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기쁨으로 채워집니다. 그와 같은 일이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온 세상 앞에서 여러분이 그 벌어진 바위틈으로 들어갔으며 거기에 간직된 꿀을 먹고 있다는 엄숙한 선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그늘 아래 앉았고 생명나무의 열매에 의하여 위로와 영양을 공급 받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와서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합니다. 그리고 이제 주의 복락의 강에서 마시고 있습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어찌할 수 없음과 연약함, 그리스도께서 온통 여러분의 힘, 온통 여러분의 생명이라는 감미로운 선언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상에서 떨어져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실제로 그 참 포도나무에 접붙여지지 않았으며 그리스도로부터 어떤 영양분을 받지 않았으며 성령을 받은 적이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죽은 가지들이며, 단지 포도나무에 연합된 것처럼 보일 뿐이며, 열매를 맺지 않아서 그가 잘라 버리시는 가지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여러분이 그 떡과 포도주를 먹으려고 합니까?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들은 여러분이 죄 안에서 죽었으며 회심하지 않았고 중생하지 않았으며, 여러분이 에스겔서 36장 26절에 말한 것과 같은 마음의 어떤 변화를 체험한 적이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떡과 포도주는 여러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들은 여러분이 이름을 댈 수 있는 죄들의 권세 아래 살고 있음을 압니다.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들은 아마 거룩한 안식일을 은밀하게 욕되게 하여 “자기 길로 행하며 자기 오락을 구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 은밀한 욕설, 거짓말, 부정직, 술취함, 불결함을 범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 무슨 이유로 여러분이 이 떡과 포도주를 먹으려고 합니까? 그것은 여러분에게 결코 유익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합당하지 못하게 먹고 마시게 될 것을 여러분은 일순간이라도 의심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감히 이런 일을 합니까? 이 두려운 말씀을 읽고 기도하십시오. “합당치 못하게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저주]를 먹고 마심이니라.” 진실로 “예수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은 주님의 상으로 오라고 초청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병에서 회복되는 병든 사람과 같이 느끼니 힘이 없고 손이나 머리를 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자신들의 힘이신 예수를 바라보니 그가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그들을 위하여 사십니다. 여러분은 나날이 그를 바라봅니다. 여러분은 말합니다. “그가 나의 떡이며 나의 포도주입니다. 그로부터 오는 것 말고 내게는 힘이 없습니다.” 오셔서 그리스도의 상에서 먹으십시오. 환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관에 도착한 여행자같이 느끼니 기진하고 피곤하여 더 나갈 힘이 없고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습니다만 자기들의 힘인 예수께 기대어 “내가 살고 너희도 살겠음이라”는 말씀을 믿습니다. 오셔서 손에 지팡이를 잡고 발에 신을 신고 이 떡과 포도주를 드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기뻐하면서 여러분의 길을 계속 가게 될 것입니다. 연약한 가지들은 많은 영양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이 자신들의 연약함, 마음의 심한 부패, 사탄의 권세, 세상의 미움을 느끼면 느낄수록, 여러분은 예수에게 기대어 이 떡과 포도주를 먹어야 할 필요가 더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더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3. 그는 떡과 포도주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눕니다. 주님의 상은 이기적인, 혼자 먹는 식사가 아닙니다.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만이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3장 15절에서 말하는 그러한 가족의 가족식사입니다. 여러분은 단지 혼자 먹고 마시지 않습니다. 같은 상에 둘러앉아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습니다. 예수께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들”과 하나됨의 감미로운 인식, 모두가 같은 평안, 같은 기쁨, 같은 마음, 같은 거룩함, 같은 천국을 자기와 함께 가져야 한다는 마음 가득한 소원을 나타냅니다. 여러분은 성전에 있었던 일곱 등잔을 가진 순금 등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꼭대기에 항상 기름으로 채워져 있는 금 주발로부터 기름을 공급받았습니다. 기름은 등대의 지주를 통하여 흘러내렸고 각 등잔에 일곱 개의 금으로 된 관 혹은 가지에 의하여 분배되었습니다. 모든 등잔들이 같은 기름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것이 가지를 통해 가지로 전해집니다. 등잔들 중 어느 것도 자기만을 위하여 기름을 가질 수 없었으니 그것은 그들 모두에게 나누어졌습니다. 그것이 포도나무에도 그러합니다. 수액이 뿌리에서 올라가 모든 가지들을 채웁니다. 한 가지가 채워지면 그것은 수액을 다음 가지로 전합니다. 아니 그것은 풍족한 수액을 작은 가지들과 덩굴손들로 보내 모두가 자기들의 분량을 가지게 하고, 모두가 자기의 보배로운 과실을 맺게 합니다. 그것이 몸에게 그러합니다. 피는 심장으로부터 가득히 영양을 공급하는 흐름으로 나와서 모든 지체들에게 흐르고 한 지체는 다른 지체에게 그것을 전해주어 모두가 살아있게 하고 모두가 자라게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만찬에서 그렇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한 지체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손에서 손으로 옮겨집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10:17). 그것은 여러분이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과 하나이며, 평안에서 하나, 애정에서 하나, 거룩함에서 하나이며 또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여러분이 그와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여러분이 그와 함께 즐거워하겠다는 엄숙한 선언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에 의해서 여러분이 참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며 숙명적으로 모든 가지들에게 연합되어 있고 같은 성령이 모든 가슴에 퍼지기를 바란다고 선언합니다. 여러분이 같은 금 등대의 등잔들이며 그리고 같은 금 기름이 여러분과 그들로 계속 타고 어두운 세상에서 빛들처럼 비추이기를 바란다고 선언합니다. 다시 한 번 많은 사람들이 이 상에서 떨어져 있어야 함을 아십시오.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랑의 불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들은 그들을 박해하거나 혹은 멸시합니다. 여러분의 혀는 그들에 대하여 날카로운 면도날과 같으니 여러분은 그들의 은혜, 회심, 성령의 일에 대한 말을 조롱합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회심을 미워하니 그것이 빈말이며 위선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신이 나서 하나님의 일을 말할 때 여러분이 끼어들어 여러분이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무슨 이유로 이 거룩한 상에 와야 합니까? 이것이 위선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엄중한 모습과 자세를 취하고 열심히 그 상으로 급히 나아가 자리에 앉아서 깊이 진지한 태도를 보이며 자기가 회심했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는 체하며 손에 떡을 듭니다. 그런 다음 자신이 예수에 의지하여 살며 성령에 충만한 사람 중에 하나인 체하면서 감격해 하는 명백한 모양을 내며 부서진 떡을 먹으며 부어진 포도주를 마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기독교인들을 사랑하며 모두가 자기와 함께 주 예수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는 체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넘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동안 내내 여러분은 그들을, 그들의 생각을, 그들의 행위를, 그들의 친구를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위해서는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영혼들이여, 이것이 위선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저는 여러분이 양의 옷을 입은 이리가 되어 오는 것보다 차라리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오는 것을 보는 게 낫다고 엄숙하게 주장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이 상에 앉아 있는 동안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라고 말씀하는 주 예수의 목소리를 듣게 되지 않을까 두렵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신자여, 당신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줄”을 아십니다. 이 순전하고 거룩한 생명이 회심한 가슴에서 첫 인상들의 하나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의 친구입니다. 악한 사람들과 영원을 지낸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지옥이 될 것입니다. 오셔서 사랑의 잔치에서 이 사랑을 나타내십시오.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있었던 상은 단지 영광의 다락방에 있는 상의 모형이며 보증일 뿐이었습니다. 곧 우리가 아래 있는 상을 위에 있는 상으로 바꾸게 될 것이며 거기서 우리는 영원, 영원토록 우리의 사랑을 충분히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거기는 어떤 배신자들도 올 수 없으니 “부정한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상석에 계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밀히 답하도록 젊은 성찬 참여자들에게 던지는 질문들: 1. 그대가 주님의 상에 오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대의 아버지나 어머니 혹 땅 위의 다른 누구를 기쁘게 하려는 것입니까? 2. 그것이 습관이어서 그리고 그대의 친구들과 동료들이 오기 때문입니까? 3. 그대가 인생의 일정한 시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까? 4. 그대가 주님의 상에 오려고 하는 진정한 동기들은 무엇입니까? 그대의 영혼을 구원하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려는 것(시116:12,13)이나, 예수님을 기념하기 위한 것(눅22:19)이나,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려는 것(요13:23)입니까? 아니면 그것이 세속적인 자랑을 위한 것입니까? 명성을 얻으려는 것입니까? 돈을 벌기 위한 것입니까? 5. 그대는 주님의 상에 와야 할 사람은 누구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6. 오직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들만 와야 한다고 그대는 생각합니까? 회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7. 만일 그대가 스스로 회심하지 않았음을 알았으면 왔겠습니까? 8. 자기들의 영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었지만 그리스도께 오지 않는 사람들은 와야 합니까? 9. 그대는 성령에 의하여 깨우침을 받았고, 그리스도께 이끌림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무엇이 그대로 하여금 그렇다고 생각하게 합니까? 10. 부서진 떡과 부어진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11. 떡과 포도주를 그대의 손으로 받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대는 진심으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까? 12. 그것들을 먹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대는 진실로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살아갑니까? 13. 그대와 함께 같은 상에 앉은 사람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대는 진실하게 형제들을 사랑합니까? <성찬 절기에 묵상해야 할 말씀> ·출12장·시22, 51, 116편·아가서·사53장·마22:1-14; 26, 27장·막14, 15장·눅22, 23장·요13, 14, 15, 16, 17장·고전11:23-34 - 1841년 10월. 세인트 피터 교회, 던디.
1191 |이단을 경계하라| 신천지의 삼위일체_김성한 목사 파일
편집부
1512 2017-04-05
이단을 경계하라 신천지의 삼위일체 < 김성한 목사, 은혜교회_총회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서기>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가 되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가 되었다. 삼위(三位)라는 말은 자리가 셋이라는 뜻이며, 일체(一體)라는 말은 몸이 하나라는 뜻이다. 하나님, 예수님, 이만희 이렇게 자리가 셋이 있는데 이 중에 몸(體)을 가진 분은 이만희뿐이다. 그래서 삼위 중에 몸은 하나라는 뜻으로 삼위일체가 된다. 하나님, 성령님, 예수님 삼위 중에 육체를 가지신 분은 예수님뿐이었다. 이것이 과거의 삼위일체였고, 지금은 예수님이 영으로 존재하시므로 하나님, 예수님, 이만희 중에 육체를 가진 자는 이만희뿐이다. 이것이 지금의 삼위일체다.” 위와 같이 주장하는 것이 신천지의 삼위일체론이다. 예수님은 원래 인간이었으며 목수였다. 그런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인간 예수님에게 성령이 들어가셨고 그 후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천지 이만희는 요 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을 “나와 아버지는 하나가 되었다”라고 성경을 변개했다. 성령님이 예수님에게 들어가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처럼, 예수님의 영이 이만희에게 들어가 이만희가 보혜사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 교회가 삼위일체 교리만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가르쳐도 신천지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다음의 QR 코드로 첨부한 동영상을 참고하기 바란다. * 총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에서는 이단이 준동하는 시대에 이에 대한 경계심과 분별력을 높이고자 주요한 이단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게재한다. _ 편집자 주
1190 | 제36차 합신농목회 참석기 | 사랑의 복지 목회를 배우다_이상목 목사 파일
편집부
1380 2017-04-05
제36차 합신농목회 참석기 사랑의 복지 목회를 배우다 < 이상목 목사, 동산안교회 > 마음에만 머무는 사랑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과 삶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사랑 지난 3월 13일(월)-14일(화)에 열린 제 36차 합신농목회 모임은 농촌 목회자로서의 특권을 누린 영예로운 시간이었다. 농촌 목회자들을 모든 정성으로 환대해 준 군포제일교회의 배려와 섬김에 먼저 깊은 감사를 드린다. 세상은 갈수록 더 험악하게 우리를 위협한다. 삶과 목회의 현장에서 모두가 생존의 어려움을 느낄 만큼 각박해 가는 것이 현실이다. 살아남느냐, 도태되느냐 하는 위기감을 피부로 느끼는 세태이다. 이런 중에 모든 목회자들이 묵묵히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때마다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더해 주시기 때문이라 믿는다. 이번 농목회도 하나님이 연약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의 시간이었다. 알려진 바대로 군포제일교회는 복지하는 교회이다. 복지의 규모나 질에서 탁월한 것을 익히 알기에 이 교회의 사례를 과연 농촌 목회에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품고 군포로 향했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이미 숙소를 정리하던 교회 일꾼들이 우리 일행을 편안히 쉴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총회장님의 개회 예배 설교로 마음이 푸근하던 차에 정성어리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회원들은 어느덧 오랜 친구처럼 어우러졌다. 밤에는 모두가 둘러앉아 군포제일교회의 영상을 통해 권태진 목사님의 복지 목회 내용들을 소개 받은 후 복지 시설장들과 함께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분위기는 소탈했지만 내용은 진지했다. 회원들의 뜨거운 열기로 예정된 시간을 훨씬 넘은 늦은 밤에야 모임을 마쳤다. 마음을 터놓고 나누는 목회자들의 대화에 참석하여 늦은 밤까지 관련 분야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 주는 시설장들의 수고와 밝은 표정이 인상 깊었다. 이들은 모두 군포제일교회의 복지 기관인 성민원에 속한 여러 기관의 시설장이면서 동시에 군포제일교회의 장로, 권사, 집사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복지 목회를 지향하는 권태진 목사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하고 있었다. 권태진 목사님은 한 번도 의도를 갖고 복지 목회를 한 적은 없다고 고백하였다. 다만 사랑으로 목회하는 중에 성도들의 필요에 의해서 복지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교회의 모든 복지 활동은 성도의 필요를 섬기는 목회였고 그렇게 시작한 복지 목회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교회의 복지 사역에 종사하는 교우들이 많은 이유가 있었다. 시설장들은 하나같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내민 목사님의 사랑의 손을 잡고 따라 온 결과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됐다는 것이다. 저들은 모두 받은 사랑을 기억했고, 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제 복지 사역에 정성을 다한다고 고백했다. 둘째 날 아침에는 전날 만난 기관장들의 안내로 군포제일교회의 모든 복지 시설들을 둘러보았다. 3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진 제일선교원에서는 어린 시절 담임목사님의 권면으로 선교원 교사를 꿈꾸었다는 원장과 역시 어린 시절 이 선교원에서 공부했다는 교사를 만났다. 교회가 원하는 대로 충분히 교육하기 위해서 나라의 지원이 없이 자체 재정으로 운영하며, 모든 원생들이 교회 성도의 자녀들로서 부모들이 재정 문제를 떠나 교육의 질을 보고 선교원에 아이들을 보낸다고 하였다. 재정의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바른 신앙 교육을 하기 원하는 목사님과 성도들의 열심이 이런 결실을 맺고 있었다. 성민원의 산하 기관인 푸드뱅크, 성민요양원, 주간보호센터, 시니어클럽 등을 방문하고, 각 시설의 시설장들의 정성스런 안내를 받으며, 지난밤에 남은 질문에 대한 전문인들의 대답을 들었다. 바쁜 일정의 일과 시간인데도 모든 기관의 대표들이 끝까지 함께 하며 사랑의 마음을 전하려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성도들은 단지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헌신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마치 건강한 사람의 혈액이 온 몸 구석구석에 미치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담임목사님을 중심으로 모든 교역자들과 성도와 각 복지 기관 종사원과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미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농촌 목회 10년째를 보내고 있는 나로서 사랑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고 뜨거운 것임을 생각하게 했고 마음에 큰 도전을 주었다. 이번 농목회를 마치며 사랑이 일구어 가는 목회에 대해서 생각한다. 사랑이 전해지고 퍼져 가는 목회의 현장이 되는 길을 고민한다. 성도의 필요를 더 깊이 생각하고, 살필 것을 생각한다. “마음에만 머무는 사랑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과 삶으로 사랑이 표현되어야 사랑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면에서 내 사랑은 아직 흉내만 내는 모조품일지도 모른다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런 마음은 교통비가 담긴 돈 봉투와 사모의 몫으로 선물한 두 벌의 외투를 받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군포제일교회에서 열린 농목회를 통해 뜨거운 사랑을 체험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반응이리라 믿는다.
1189 |기행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_김용진 목사 파일
편집부
1448 2017-04-05
<기행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 김용진 목사, 도산제일교회 >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삶을 이해하며 영적인 눈이 밝아지다 지난 3월 13일부터 18일까지 5박 6일간 기독교개혁신보사와 (주)다비드투어와의 협찬으로 합신 농어촌 목회자를 위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고 왔다. 예루살렘과 유대 광야, 갈릴리 바다와 가이사랴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우고, 깨닫고, 느끼며 예수님과 성경과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돌이 많은 작은 산들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은 화려하지 않지만 깨끗하고 소박했다. 모든 건물의 외벽이 ‘예루살렘 스톤’(Jerusalem Stone)이라 불리는 똑같은 형태의 돌로 아름답게 지어진 것이 인상적이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의 역사적 사실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주기도문 교회, 예수님 눈물교회, 겟세마네 교회, 예수님 무덤 교회, 베드로 통곡 교회, 베데스다의 못, 십자가의 길을 통해 주님의 사역과 고난당하신 현장을 느껴볼 수 있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뜨려지리라고 하시던 주님의 예언대로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과 유일하게 남아 있는 통곡의 벽에서 지금도 기도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치며,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하던 그들의 말대로 이루어진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야드바쉼이라는 유대인 학살 추모관을 관람하면서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나게 하였다. 말로만 듣던 유대 광야 와디켈트.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산들과 광야가 끝없이 펼쳐진 모습을 보면서 이곳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만나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곳임을 실감케 된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광야를 지나면서 다듬어지고, 겸손해지고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광야와 같은 세상살이를 통해서 시험과 연단과 훈련을 받지만 광야는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복의 통로가 된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에 이끌리시어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고 말씀으로 물리치셔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셨다. 광야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가장 오래된 사해 구약 사본이 발견된 쿰란 동굴과 사해 바다를 만난다. 쿰란 공동체는 주전 150년에서 주후 68년 사이에 도시의 유혹을 떠나 사막의 고독을 찾아들었다. 그들은 사해가 내려다보이는 이곳 광야에서 구약 성경 사본을 기록하고 함께 기도와 명상과 공부를 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그들이 기록한 사해 사본은 그때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레닌그라드 사본보다 무려 1,000년이나 앞선 것이어서 그 귀중함을 더하고 있다. 오늘날 지나치게 바쁜 사역 의 현장에서 시간에 쫓겨 조용한 기도나 말씀 묵상의 여유가 적은 우리로서는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사해에서 가만히 누워 있어도 몸이 둥둥 뜨는가를 체험하고 몸에 진흙을 발라본 뒤 요단강을 따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갈릴리 바다를 만나게 된다. 요단강은 한강과 같이 넓고 물이 넘쳐흐르는 강이 아니라 비가 오지 않아서인지 마치 실개천과 같은 모습으로 보였다. 베드로와 많은 제자들이 고기를 잡던 갈릴리 바다에 도착하면 지금까지와 다른 자연의 풍요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헐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갈릴리 바다에 모여들어 주위의 모든 산들은 울창한 나무숲을 이루고 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팔복을 가르치셨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셨다. 그리고 실의에 빠져서 갈릴리 바다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잡던 베드로를 만나주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그를 격려해 주시며 다시금 사명감을 일깨워 주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고 선상예배를 드렸고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찬양했다. 마지막 여정은 지중해가 넓게 끝없이 펼쳐진 해안 도시 가이사랴. 2,000년 전 헤롯왕이 건축하여 당시 로마황제인 가이사랴에게 헌납한 도시이다. 폭군이며 건축광인 헤롯이 12년에 걸쳐 만든 선박 접안 시설과 전차 경주를 했던 원형 경기장, 지금도 공연장으로 사용되는 야외극장과 헤롯의 궁전 터와 신전 등 지난날의 화려했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주일이 되기 전에 돌아오는 5박 6일의 일정이었으나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자라시고 사역하셨던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들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스라엘을 돌아봄으로써 영적인 눈이 더 밝아진 느낌이 든다. 여행사의 배려로 좋은 숙소와 식사, 항공편, 여행 가이드 등 모든 일정이 불편함 없이 이루어진 것을 감사드린다. 이번 이스라엘 성지 순례는 기독교개혁신보사 사장 황인곤 장로와 (주)다비드투어의 이윤 사장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주)다비드투어는 회장 정중렬 장로가 운영하는 성지 전문 여행사로서 여건이 힘든 목회자와 사모들에게 성지 순례 기회를 주고 있고, 올해부터 어려운 농어촌 목회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하여 이후 매년 진행하도록 애쓴다 하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여행은 우리에게 일상을 떠나 마치 타임머신을 타듯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 당시의 숨결을 느끼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특히 이스라엘 성지 순례는 2,000년 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행하신 일들을 살펴볼 수 있는 큰 선물이다. 머잖아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사 천국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실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린다.
1188 |좌담회 | 총회은급제연구위원회-‘목회자 퇴직금의 안정적 적립을 위한 제도에 관한 좌담회’ 파일
편집부
1744 2017-03-22
좌담회 | 총회은급제연구위원회 ‘목회자 퇴직금의 안정적 적립을 위한 제도에 관한 좌담회’ 본보는 은급제연구위원회 위원들을 초청하여 최근에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목회자 퇴직금의 안정적 적립을 위한 제도에 관한 좌담회를 가졌다. - 일시 : 2017. 3. 13(월) - 장소 : 총회회의실 - 사회 : 박부민 편집국장 - 참석자 : 은급제연구위원회 위원들 △조덕래 목사 (위원장) △김태흥 목사 (서기) △박현효 장로 (회계) △김석만 목사 (소위원장) ◈… 총회에서 만든 퇴직금 적립 기준에 의거 각 지교회는 목회자의 월사례비의 10분의 1 이상을 매월 외부 금융기관에 적립, 지교회와 총회가 함께 관리함 ◈… 퇴직 충당금을 외부 금융기관에 적립하는 이유는 목회자의 퇴직금 적립 충당금에 대해 방화벽을 설치하자는 뜻 ◈… ‘은퇴 목회자 퇴직금 적립 규정’을 교회 내 규정에 넣고, 목회자의 월사례비의 10분의 1 이상을 매월 KEB하나은행 또는 MetLife생명에 납입함 ▣ 사회자 : 반갑습니다. 참석해 주신 ‘은급제연구위원회’ 위원장님과 위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수 년 전부터 총회 ‘은급제연구위원회’에서 은퇴 목회자의 퇴직금을 안정적으로 적립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럼 우선 은퇴 목회자 퇴직금의 안정적 적립을 위한 제도를 왜 만들게 되었는지 조덕래 위원장님께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조덕래 목사 : 네, 반갑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기독교개혁신보에 감사를 드립니다. 먼저, 우리 총회 산하 ‘은급제연구위원회’(이하 ‘은급위’)에서 하는 일을 소개한다면 전임 임석영 위원장님 시절부터 해 왔던 일로 지금은 제가 이어받아 위원님들과 함께 섬기고 있습니다. 은급위는 다음의 세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일 년에 두 번 은퇴목회자 부부들을 모시고 위로회를 갖습니다. 둘째, 마땅한 거처가 없으신 은퇴 목회자님들을 위해 현재 은목관(집) 건축 사업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부지는 있는데 초기 단계입니다. 셋째, 은퇴 목회자의 퇴직금을 안정적으로 적립하는 제도를 총회 차원에서 수립하고 시행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위 세 가지 일마다 소위원회가 있는데 우리는 바로 은퇴 목회자의 퇴직금의 안정적 적립을 위한 제도에 대해 좌담회를 갖게 된 것이지요. ▣ 사회자 : 그렇다면 ‘은퇴목회자퇴직금소위원회’위원장이신 김석만 목사님께서 소상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김석만 목사 : 이 제도를 도입하게 된 배경부터 말씀드리자면, 일평생 헌신한 후 은퇴할 때 적절한 노후 대책이 마련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계신 목회자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퇴직금 지급 기준이 있는 교회도 있고 또 없는 교회도 있습니다만, 설사 지급 기준이 있다 해도 현실은 정말 어려운 형편입니다. 예를 들어 목회 중 교회 건물을 신축 또는 증, 개축하는 경우 목회자들이 그때까지 적립된 퇴직금의 일부 또는 전부를 건축 헌금으로 드리는 사례도 많이 있었고 또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거나 기타 사정에 의해 전용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20년, 30년 목회를 하고 난 후에도 퇴직금을 전혀 받지 못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노후에 폐지를 줍는 노쇠한 목회자님들이나 정말 어렵게 노후를 보내고 계신 목회자님들도 있습니다. 또 한편 젊은 목회자의 경우에도 목회지를 옮기면 그 때마다 교회가 안정적인 퇴직금을 지급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옮길 때마다 퇴직금을 제대로 받는다 해도 그 때 그 때 전부 써 버리고 나중에는 최종 목회지에서 목회한 기간에 해당된 퇴직금만 받으니 정작 은퇴 후에는 상당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물론 본인들이 때마다 퇴직금을 받아 사용했으니 할 말이야 없겠지만요.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욱 심화되어 상당한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어 이에 은급위원회에서는 체계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하였고 현재 시행 중에 있습니다. ▣ 사회자 : 그렇지요. 평생 목양하신 목회자들이 은퇴 후 경제적으로 어려우신 모습을 저도 많이 봅니다. 그럼 그 체계적인 대응 방안에 대해 은급위 서기 김태흥 목사님께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좀 해 주시지요. ▶ 김태흥 목사 : 우리 교단에 속한 지교회의 경우 각 지교회 별로 목회자에 대한 퇴직금 지급 기준이 상이하며 심지어는 지급 기준이 없는 교회도 있습니다. 따라서 차제에 우리 총회 차원에서 목회자에 대한 퇴직금 지급 기준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준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어디에 어떻게 동 퇴직 적립금을 적립해야 하는지를 이번 기회에 명확하게 한 것입니다. 이 기준은 100회 총회(2015.9.23경주)에서 의결되어 작년(2016.1.1)부터 이미 시행되고 있고 금년(2017.1.1)부터 본격적으로 금융기관에 적립되기 시작했습니다. ▣ 사회자 :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 해 주실까요? ▶ 김태흥 목사 : 네, 이번 제도를 간단히 말씀드리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은퇴 목회자에 대한 퇴직금 적립 기준을 총회 차원에서 만들었다는 것. 둘째, 이 퇴직금 적립 기준에 의거 각 지교회는 목회자의 월사례비 중 10분의 1 이상을 매월 외부 금융 기관에 적립해 달라는 것. 셋째, 외부 금융 기관에 적립되는 이 퇴직 충당금은 지교회와 총회가 함께 관리(Cross Check)함으로써 퇴직금 관리에 철저를 기하겠다는 것입니다. ▣ 사회자 : 이 제도로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요? ▶ 김석만 목사 : 네, 우선 지교회 별로 상이한 퇴직금 규정 또는 현재 퇴직금 규정이 없는 지교회를 위해 총회 차원에서 표준화된 교단 전체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총회에서 제시하는 퇴직금 규정의 퇴직금 지급 기준보다 현재 지교회의 퇴직금 지급 기준이 높을 경우 지교회의 퇴직금 규정을 따로 고칠 필요는 없습니다. 다음은 지금까지 교회는 물론이고 목회자 한 분 한 분이 평소에도 자신의 퇴직금이 현재 얼마나 적립되고 있는지 또 어떤 형태로 어떤 곳에 적립되고 있는 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퇴직금이 현재 얼마가 어떤 형태로 어떤 기관에 어떻게 적립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의 하나 일어날 수 있는 목회자의 퇴직금의 계산상의 오류 또는 기타 오류도 사전에 충분히 방지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지교회 자체에서도 계산과 파악에 소요되는 시간이 절감되고 정확도를 제고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퇴직 충당금을 외부 금융 기관에 적립하는 이유는 목회자의 퇴직금 적립 충당금에 대해 방화벽을 설치하자는 뜻입니다. 즉 퇴직 충당금만은 교회의 다른 예산과 확실히 구분하여 관리를 하자는 것이지요. 목회자의 퇴직을 대비한 퇴직 충당금을 이렇게 외부에 적립함으로써 어떤 경우에도 목회자가 퇴직을 할 때 퇴직금이 확실히 그리고 정확히 지급될 수 있도록 하자는 차원에서 이렇게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한 것입니다. ▣ 사회자 : 현재 지교회에서도 목회자 퇴직금을 자체적으로 확실히 적립하고 있는 교회도 있습니다. 물론 외부 금융 기관에 적립하는 것이 안정성 면에서 장점이 있겠지만 안정성을 제외한다면 현행 제도와 동일한 것 아닌가요? 은급위 회계이신 박현효 장로님 답변해 주시지요. ▶ 박현효 장로 : 얼핏 보면 개교회에서 적립하고 있는 목회자 퇴직 충당금 제도와 본 제도가 크게 다를 바 없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세밀히 보면 많이 다릅니다. 나름대로 아무 문제없이 목회자의 퇴직 충당금을 아주 잘 적립하고 있는 지교회라 할지라도 퇴직금을 지급하기 위해서는 지교회에서 별도의 조치를 취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그 지교회는 현재 운용 자산 중 일부가 목회자의 퇴직 충당금이라는 사실만 알 뿐 정확한 금액이 얼마이며 그것이 자산 중 과연 어디에 어떻게 정확히 적립되고 있는지, 또 어느 계정 과목에서 그 금원을 인출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사항들은 별도로 계산을 해 본 후에나 파악 할 수 있습니다. 자산의 부분 부분들을 일일이 점검 해 본 후에나 최종적으로 정확히 알 수 있지요. 다시 말해 이 퇴직 충당 금액이 자산의 일부로 포함돼 있다는 사실만 알뿐 정확히 어디에 얼마가 어떻게 포함되어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더구나 우리 교단의 거의 대부분 교회들이 소위 복식부기가 아닌 단식부기를 채택하고 있기에 더더욱 알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 사회자 : 이번의 새로운 제도는 그에 대한 대책을 갖고 있다는 겁니까? ▶ 박현효 장로 : 그렇지요. 퇴직 충당금에 관한 한 외부 금융 기관에 적립하고 이에 대하여 별도의 방화벽을 설치해 놓음으로써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자산과 구분하여 퇴직 충당금 부분을 분명하게 확보해 놓는다는 것은 안정성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정확성, 신속성, 경제성, 신뢰성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항이기도 합니다. 즉 “충당금으로 적립되어 있는 이 금원이 바로 목회자의 퇴직 시 지급될 퇴직금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맞는 겁니다. 이 적립금은 목회자의 퇴직 시 일시금으로 받을 수도 있고, 아니면 10년 연금, 20년 연금, 또는 평생 연금으로 나누어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중 일부는 일시금으로 또 일부는 연금으로도 받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 사회자 : 은급위에서 상당히 오래전부터 추진을 해 온 것으로 압니다만 준비는 얼마나 하셨는지요? 그간의 과정을 좀 듣고 싶군요. ▶ 조덕래 목사 :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은급위에서는 먼저 총회 차원에서 목회자의 퇴직금 적립 기준을 마련하였고 100회 총회(2015.9.23 경주)에서 의결을 거쳐 2016.1.1부터 동 기준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 기준은 현재 모든 지교회에 공문으로 발송되어 보관 되어 있습니다. 이어 지난 1년간은 동 퇴직금을 적립하기 위한 외부 기관으로 금융기관 두 곳(KEB하나은행, MetLife생명보험)를 선정하여 101회 총회(2016.9.21 덕산리솜파크텔)의 결의를 받아 2017.1.1부터 지교회들이 본격적으로 목회자의 퇴직 충당금을 적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시행 초기라 아직은 많은 교회들이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합신 교단 총 교회 수의 약 10분의1에 해당하는 교회들이 이미 가입을 했거나 현재 금융 기관과 본격적인 상의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아직 가입하지 않은 교회 관계자들께서는 이미 가입한 이웃 교회의 담당자와 상의를 해 보시면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자세한 것은 오늘 대담의 후미에 남겨 드릴 연락처에 문의하시면 좋은 안내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 사회자 : 금융기관 두 곳(KEB하나은행, MetLife)은 어떻게 선정되었나요? ▶ 김석만 목사 : 은급위에서는 먼저 선정 후보 대상 기관으로 KB국민은행을 포함한 4개 은행, 그리고 삼성생명을 포함한 4개의 보험사 등 총 8개사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즉 우리가 계획 중인 목회자 퇴직 충당금 적립의 목적, 취지, 배경, 향후 관리 방향과 추진 내용 등을 상세히 설명하였고 이어 8개 금융기관에 대해 이에 가장 적합한 최적의 상품, 최고의 조건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해 줄 것을 요구 했습니다. 금융기관들의 지대한 관심 속에 각 금융 기관마다 최고의 조건으로 최선을 다해 프레젠테이션에 임하였습니다. 우리는 선정 기준(상품성, 실용성, 안정성, 경제성, 적극성, 신뢰성, 창의성)을 마련하고 이를 평가 기준으로 심사숙고하여 심사를 하였고, 최종 2개 기관을 선정, 101회 총회(2016.9.21덕산리솜파크텔)의 의결을 받았습니다. ▣ 사회자 : 그런데 지금 은급위에서 제시한 금융기관 두 곳 KEB하나은행과 MetLife 중 대체 어느 곳에 가입해야 좋은지요? ▶ 김태흥 목사 : 네, 우선 저희가 금융 기관을 복수로 선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즉 은행 한 곳, 보험 회사 한 곳을 선정한 것은 은행과 보험이 갖는 각자의 강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곳에 대한 장단점은 금융 기관에서도 따로 상세히 설명을 하겠지만 우선 알기 쉽게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은행의 장점은 향후 목회 기간이 얼마가 될 지를 예측하기 힘들 경우, 예를 들어 10년 이내에 목회를 그만 둘 수도 있다고 가정을 한다면 보험보다는 은행의 적립금이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보험은 초기에 사업비를 많이 소진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보험의 장점은 목회 기간이 길수록 유리한 면이 있습니다. 목회 중의 유사시(예: 목회자의 갑작스러운 소천 등)에는 사망보험금을 별도로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보장성보험의 자동 가입). 여기서 유의할 점은 목회자가 목회를 하는 동안 퇴직 충당금을 적립할 수 없는 불가피한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목회를 하던 중 잠시 쉬다가 다시 목회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또 A교회에서 B교회로 목회지를 옮기는 경우에 일시적으로 사례금을 받지 못하는 공백 기간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은행은 목회를 쉬는 동안 또는 목회지를 옮길 때의 공백 기간 중에는 충당금을 적립하지 않고 있다가 다시 목회지가 결정되고 안정적인 사례비를 받을 수 있는 그때부터 다시 퇴직 충당금 적립을 이어서 하면 됩니다. 하지만 보험의 경우는 어떠한 경우에도 퇴직 충당금 적립(보험료)이 두 달 이상 늦어질 경우 계약이 효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는 겁니다. 물론 이러한 경우 목회자의 개인 돈으로 퇴직충당금(보험료)을 적립하는 방법도 고려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어려움이 있더라도 개인이 일부를 적립하였다면 퇴직할 때는 당연히 더 많은 퇴직금을 받을 수 있기에 반드시 좋다 나쁘다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고 개인적으로 판단을 해 봐야 할 겁니다. 즉, 은행의 장점이 보험의 단점, 보험의 장점이 은행의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충분히 고려하여 가입하실 때 목회자님들의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 어느 한 곳을 선택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판단하시는 데 도움이 되는 충분한 설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사회자 : 잘 알겠습니다. 그럼 좀 간단히 이해하기 위해 앞으로 지교회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딱 꼬집어서 말씀을 좀 해 주십시오. ▶ 박현효 장로 :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총회에서 정한 ‘은퇴 목회자 퇴직금 적립 규정’(지교회 기송부)을 교회 내 규정에 넣어 주시면 됩니다. 물론 현재 교회 내에 시행 중인 목회자의 퇴직금에 관한 규정이 있고 그 규정 안에 있는 퇴직금 적립 기준이 총회에서 마련한 기준보다 더 많은 퇴직금을 지급할 수 있게 돼 있다면 현행 기준을 그대로 유지하시면 됩니다. 둘째, 목회자의 월 사례비의 10분의1 이상을 매월 금융기관(KEB하나은행 또는 Met Life생명)에 납입하여 주시면 됩니다. ▣ 사회자 : 그렇군요. 매월 사례비의 10분의 1만 적립하면 모든 교역자들의 퇴직금은 충분히 적립이 되는 것입니까? ▶ 김석만 목사 : 지난 100회 총회에서 퇴직금 지급 규정이 통과가 되어 2016.1.1부터 시행이 되고 있습니다. 그 규정에 따라 퇴직금을 계산해서 지급하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퇴직하실 시점이 많이 남은 목사님의 경우는 매월 사례비의 10분의 1 만 적립해도 퇴직금을 충당할 수 있지만 만일 퇴직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동안 퇴직금으로 적립해 놓은 금액이 퇴직금으로 지급하기에는 부족한 경우에는 그에 상당한 금액을 적립해야 할 것입니다. ▣ 사회자 : 퇴직 충당금에 대한 적립은 담임 목회자만 그 대상인가요? ▶ 조덕래 목사 : 아닙니다. 전임 사역자 모두가 그 대상입니다. ▣ 사회자 : 참고로 향후 처리 절차에 대해서 좀 더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박현효 장로 : 지교회에서 적립되는 퇴직 충당금은 목회자의 개인별 구좌가 마련되어 이 구좌로 입금되어 적립됩니다. 다만 목회자는 이 적립금을 임의로 인출할 수 없으며 목회자의 퇴직시 지교회의 요청에 의해서 금융 기관에서 지급됩니다. 총회(은급위)는 목회자 별로 적립되고 있는 충당금을 일괄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지교회와 총회가 이중으로 체크를 할 수 있게 되어 안전성, 신속성, 안정성, 신뢰성, 경제성이 더욱 제고될 수 있습니다. 충당금 입금은 지교회에서 해당 금융 기관으로 입금한 후 총회(은급위)로 통보해 주시면 됩니다. 퇴직금 지급 시에는 지교회가 금융 기관에 퇴직금 지급을 요청하면서 그 내용을 그대로 총회(은급위)에도 통보를 해 주시면 됩니다. ▣ 사회자 : 현재의 생활이 여러모로 힘들어 은퇴 준비는 엄두를 못 내고 있는 도시 개척목회자나 농어촌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을 위한 실제적 방안은 없는지요? ▶ 조덕래 목사 : 아쉽게도 아직은 구체적 방안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점에 대해서도 도움이 될 대책을 연구 중에 있습니다. ▣ 사회자 : 그동안 많은 수고들 하셨습니다. 모쪼록 이 제도가 잘 정착되어 목회자들이 은퇴 시 목회자님들의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는 삶을 살아가시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시간 내어 자세한 설명을 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 은급위원 일동 : 네, 기독교개혁신보에서 꼭 필요하고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덧붙여 자주 받는 질문과 답을 축약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각 질문들에 대한 상세한 답변 자료들은 별도로 이미 지교회에 송부돼 있으니 그것을 꼭 참조해 주십시오. <자주 받는 질문과 답> 문 : 지교회에서 어련히 알아서 잘 적립하고 있는데 왜 귀찮게 이렇게 또 다른 방법을 들고 나오나요? 답 : 이 방법이 가장 안전하고 정확하고 신속하며 신뢰성이 확보되고 또한 경제성 등 모든 면에서 좋기 때문입니다. 문 : 퇴직금 대신에 차라리 국민연금을 들어 주면 안 되나요? 답 : 국민연금과 퇴직금은 성격상 완전히 다릅니다. 문 : 충당금 적립에 따른 이율은 어떻게 되나요? 정기 예금(적금)에 가입한 것 보다는 유리한가요? 답 : 물론입니다. 이율도 높고 더군다나 이자가 복리로 계산됩니다. 문 : 저는 기존 삼성화재에 가입되어 있는데 그럼 그 부분을 해약하고 새로 또 여기에 가입해야 하나요? 답 : 아닙니다. 삼성화재와 계약하신 목회자님들께서는 가급적 그 계약을 유지하시는 게 좋습니다. 이를 위한 해결 방안 5가지(기송부된 공문 내용)를 제시해 놓았으니 참고하시고 형편에 맞게 그 중 한 가지 방법을 택하시면 됩니다. * 더 상세한 것은 다음의 관계자에게 연락을 하셔서 친절한 안내를 받으십시오. * 지교회에 송부해 드린 자료를 꼭 참조하십시오. ▣ 금융기관 담당자 연락처 - KEB하나은행: 안천수 차장(010-9775-3064) - MetLife: 강석현 팀장(010-2355-2870) ▣ 은급위원회 담당자 연락처 - 김석만 목사 : 010-3795-2971 (은급위 퇴직금 소위원회 위원장) - 박현효 장로 : 010-5236-6155 (은급위 회계)
1187 no image <故 안만수 목사 소천> 따뜻한 사랑과 탁월한 리더십_박성은 박사
편집부
1418 2017-03-22
따뜻한 사랑과 탁월한 리더십 < 박성은 박사, 고 박윤선 목사 4남, 미국 거주 > 참 섭섭하고 허전하기 이를 데 없다. 지난 11월에, 안 목사님께서, 항암 치료가 너무 힘들어 다 마치지 못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급히 잠깐 미국서 다녀갔었다. 당시 안 목사님은 매우 야윈 모습이셨고 상태가 너무 안 좋으셨다. 힘없는 목소리로 반갑게 대해 주시는 안 목사님을 뵙고 필자는 사실 많이 놀랐다. 그럼에도 목사님은 그 목소리로 영음사의 문서 선교에 대해서는 침이 마르도록 환희에 차서 말씀하셨다. 당시 진행 중인 출판물들에 대해 희망적인 말씀을 하시면서 그 힘든 몸을 이끌고 곧 자신이 현지 방문을 하여 일의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 말씀 후 영음사 직원들과 점심시간을 가졌는데, 당신은 힘이 부쳐 식사도 못하시고 댁으로 속히 들어가셔야만 했다. 그런 어려운 상황을 보았기에 의사인 필자는 매우 걱정이 되었었다. 필자가 그렇게 뵙고 온 지 4개월 만에 결국 안 목사님은 지난 6-7개월간의 힘든 투병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필자는 과거 합신의 초창기 때 한국에 수년 머물게 되었었는데, 당시 안 목사님이 필자에게 중고생 대상의 영어 성경공부 반을 맡기셨다. 그 때는 40대 중후반이신 안 목사님이 합신 1회 졸업생으로 대치동에서 개척을 하셨을 때였다. 그 후, 지난 32년간 안만수 목사님과 개인적으로 매우 가깝게 지냈다. 특히, 필자의 부친이신 박윤선 목사님이 소천하신 후에는, 정말 큰 형님 이상으로 필자와 필자의 동생의 가족들을 사랑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안 목사님에게 허락하셨던 사명과 그에 따른 달란트와 성품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이제 안만수 목사님의 지난 걸음을 후배요 동생 같은 부족한 사람이 지난 30여 년간 느낀 바대로 몇 가지 언급하고 싶다. 첫째, 안 목사님은, 개혁주의적 복음주의를 심도 있게 파악하신 분이셨다. 목사님은 매사가 매우 실천적이고 목회적이었고 개혁주의 신앙과 복음적인 것이 무엇인지 날카롭게 파악하여 그 원리를 거침없이 실천하신 분이셨다. 무엇이 옳다고 여겨지면 푸쉬(push)하고 드라이브(drive)하시는 분이셨다. 특별한 빠른 이해심으로 주어진 규범 안에서 활동하시면서도 자주 날카로운 직관으로 조금은 예외적인 결정도 거침없이 하시곤 했다. 둘째, 안 목사님은 많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는 성품이셨다. 안 목사님의 ‘발 넓은’ 인간관계는, 그가 신학 공부를 하기 전 사업에도 크게 기여했었다. 과거 시사영어사 편집자로서 안 목사님은, 40여 년을 미국에서 산 필자보다도 영어가 탁월하셨다. 그런 사업적 안목과 실력, 스마트한 마인드(mind)가 목회 은퇴 후에 헌신적으로 맡으신 영음사를 상당한 수준의 문서 선교 기관으로 발돋움 시켰다. 셋째, 안 목사님은 사람을 참 좋아하셨다. 그런 성품은 목회적 역량을 십분 발휘하게 하였다. 그의 집무실 큰 테이블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찍은 사진들(주로 자신이 직접 찍은)이 큰 유리 아래 펼쳐져 있음을 방문해 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그런 장점을 파악하신 고 박윤선 목사님은 제자인 그분에게 두 교회를 합쳐 목회하도록 주선하셨다. 그렇게, 안 목사님은 출발점이나 개척 세팅(setting)이 꽤 달랐던 두 교회를 맡아 ‘화평교회’로 명명하여 25년을 맡아 은혜롭게 성장시켜 한국 교회에 흔치 않은 예를 남기셨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안만수 목사님을 그의 생애 중반기에 불러 당신의 영광을 위해 합신 교단과, 화평교회, 영음사를 온전히 섬기게 하신 후 데려 가셨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사실 귀한 분들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날 때마다 슬프기도 하지만, 우리도 대합실에서처럼 기다리다 잠깐 후엔 그분들을 만날 것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으려 한다. 우리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안 목사님을 뵐 것이다. 또한 박윤선, 노진현, 신복윤 목사님들을 뵐 것이다. 엘리야와 다윗과 모세, 바울과 베드로를 만날 것이고 그 누구보다 우리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다. 안 만수 목사님을 떠나보냄으로 합신 교단과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매우 귀한 리더 한 분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실패가 없으신 하나님은, 아직 주어진 사명을 더 감당해야 할 우리와 또한 주의 재림 때까지 계속 될 교회 안에, 안 목사님에게 허락하셨던 좋은 선물들을 또 주실 것을 기대한다. 특별한 은사, 개혁주의적 복음에 대한 깊은 통찰력, 흔치 않은 명민함과 판단력, 폭넓은 인간관계, 따뜻한 사랑과 목회적 심장을 지닌 그 탁월한 리더십을, 우리와 우리 후배들에게 분명히 또 허락해 주실 것을 믿으며 아픈 가슴을 어루만진다.
1186 no image <故 안만수 목사 소천> 뒤늦은 사랑의 편지_장덕순 장로
편집부
1304 2017-03-22
뒤늦은 사랑의 편지 < 장덕순 장로, 화평교회 > 목사님! 한국 교계는 또 한 사람의 참 지도자를 잃었습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빚진 자들이 이렇게 다 모였는데 왜 당신께선 아무 말씀이 없으신가요? 목사님, 용서해 주세요. 우리 성도들이 목사님을 그동안 편히 모시지 못한 것 용서해 주십시오. 목사님의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항상 우리의 소중한 추억을 위해 사진을 열심히도 찍어 현상까지 하여 그 특별하신 세상에 하나뿐인 멋들어진 글씨체로 우리를 즐겁게 해 주셨습니다. 사모님과 손자와 며느님이 번갈아가며 목숨을 넘나드는 종합병원 같은 환경에서도 언제나 남을 먼저 생각하며 교회를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탈북자 안형덕을 친아들 삼아 사랑으로 돌봐 주셔서 장례 순서지에 3남이라 분명히 인쇄된 안형덕, 그 이름을 보며 안 목사님을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목사님은 또한 어른을 섬기고 따르며 끝까지 지키며 실천하신 목사님이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과 장경재 목사님을 본인의 스승으로 모시고 정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상도동 장안교회와 대치동 화평교회가 하나로 합쳐져서 화평교회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화평과 사랑의 교회로 하나 되어 온 경우는 역사에 남을 만한 큰 자랑입니다. 올해 4월 17일로 함께한 지 꼭 30주년이 됩니다. 교회들이 갈라서고 다투고 흩어지는 모습을 보이는 이 시대에 목사님은 사랑과 헌신으로 가장 중요한 화합과 단결을 이끌어 주셨고 간절한 기도로 이 아름다운 결실을 보게 하셨습니다. 저는 50년을 목사님 가까이에서 뵈었기에 할 말은 너무 많은데 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가 없으니 어찌합니까? 나머지는 천국에 가서 말씀드리지요. 만날 때마다 전화할 때마다 누구나 붙들고 간절히 기도해 주시던 안만수 우리 목사님. 그동안 저희 못난 성도들 때문에 너무 힘드셨습니다. 이제야 철이 들어 잘 모실 것 같았는데 가셨군요. 저희들도 그동안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교회를 열심히 섬기며 기도와 말씀과 전도에 힘을 다하겠습니다. 담임 목사님 말씀에 잘 순종하며 합신과 영음사를 위해 기도와 물질로서 열심을 다하겠습니다. 한 여성의 사랑스런 남편이시며 두 아들의 어지신 아버지시며 너무 정겨운 손자들의 할아버지이신 목사님, 지금 이들도 모두 이 자리에 있습니다. 황옥선 사모님과 유가족들에게 하나님께서 크신 위로와 소망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목사님, 그동안 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아무런 근심 걱정 고통 없는 하나님 나라, 그 좋은 낙원에서 편히 쉬십시오. 저희들도 뒤늦게 목 놓아 사랑한다고 외칩니다. 목사님!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1185 no image <故 안만수 목사 소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신 삶_이광태 목사
편집부
1409 2017-03-22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신 삶 < 이광태 목사, 화평교회 > 늘 우리 곁에 계시던 원로 목사님께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예배당을 울리는 큰 소리로 가르치시던 그 천국으로, 그토록 간절하게 외치시던 주님의 나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참 기쁘고 감사합니다. 당신의 믿음대로 늘 힘주어 말씀하시던 “오늘 밤이라도 눈을 감으면 천국에서 눈 뜰 것을 확신하는” 그 믿음대로 지금 천국의 영광을 보고 계실 것이오니 감사합니다. 분명 기뻐서 뛰며 춤추며 노래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실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시기에 그래서 저도 기쁩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너무 슬픕니다. 이 땅에서는 그 가르침을 다시 들을 수가 없고 그 모습을 다시 볼 수가 없고 두텁고 힘 있는 목사님의 손을 다시 잡을 수가 없어서 너무나도 슬픕니다. 병원에서 뵐 때에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왕에 하는 것이니만큼 제대로 해야 해, 제대로 해야 해.” 복음에 붙잡힌 삶을 사셨던 목사님은 무슨 일을 하든 제대로 하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냥 대충 하지 않으셨습니다. 장로로 화성교회를 섬기실 때에도 분명 대충 하는 장로님이 아니셨을 것입니다. 화평교회를 개척하시고 스승이신 고 박윤선 목사님을 모시고 섬길 때에도 무엇 하나 대충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합신 이사장으로 섬기시는 동안에도, 영음사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도 대충대충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일이든지 이것이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이며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언제나 제대로 하시려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시던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모든 삶의 목표점은 오직 하나, ‘주님의 영광’이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사랑하는 우리 목사님은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충성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목사님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화평교회’가 있었습니다. 3년 전 사우디에 있던 저를 부르실 때에도 목사님의 걱정은 오직 ‘화평교회’였습니다. 언제나 화평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늘 그렇게 살아오셨습니다. 이제 그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의 평안에 들어가셨습니다.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은퇴하신 후에 사우디에 오셔서 “이 목사,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아.”라고 하시더니 이제는 정말 하늘을 날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한없이 기쁘고 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한없이 슬프고 또 슬픕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한가지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다시 만나 뵙게 되었을 때, “제대로 했어?”라고 물으실 때 대답할 말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화평교회를 온 힘을 다해 섬김으로 대답할 말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모쪼록, 우리 모두가 남은 생애를 그렇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주님의 위로하심이 황옥선 사모님과 유족들 그리고 목사님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모든 분들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184 no image <故 안만수 목사 소천> 고 안만수 목사님을 추모하며_김명혁 목사
편집부
1426 2017-03-22
고 안만수 목사님을 추모하며 <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선교목사,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 한평생 주님과 신앙의 선배님들과 교회와 신학교를 충성스럽게 섬기다가, 그래서 얼마 동안 지쳐 쓰러져 있다가 평안한 모습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자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세상을 떠나 주님 품으로 돌아간 안만수 목사님을 추모하며 몇 자 적어 봅니다. 안만수 목사님은 의리가 있는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안만수 목사님이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따르던 박윤선 목사님과 장경재 목사님에 대한 의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장경재 목사님이 박윤선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존경하고 따랐듯이, 안만수 목사님은 박윤선 목사님과 장경재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존경하며 따랐다고 생각합니다. 안만수 목사님이 편집한 『박윤선과의 만남』 1, 2, 3권의 출판은 대단한 공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140여 명과의 만남과 대담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간과 정력을 쏟아 부은 힘든 만남과 대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안 목사님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귀중하게 보시면서 월례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기 때문에 장경재 목사님도 안만수 목사님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장경재 목사님은 한복협 모임에 빠지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안만수 목사님이 한복협의 총무 일을 9년 동안 충실히 수행한 것도 특히 한복협이 벌여온 주일성수 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어온 것도 박윤선 목사님과 장경재 목사님에 대한 의리에서 비롯한 것이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한국 교회 신앙 전통에 대한 충실한 의리에서 비롯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좀 더 폭넓은 한국 교회의 연합 운동을 전개하면서 진보적인 지도자들과의 교제와 협력을 시도했을 때 안만수 목사님이 좋아하지 않은 것도 사실은 하나님 말씀과 정통 신앙에 대한 충실한 의리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합니다. 안만수 목사님은 맡은 일에 대한 충성과 의리가 두드러졌습니다. 특히 양 무리들을 돌아보는 목회에 대한 충성과 의리는 대단했습니다. 전화를 걸면 언제나 심방 중이었습니다. 안만수 목사님은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소련선교회, 할렐루야축구단후원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등 맡은 일이 많았지만 그런 모임들에는 자주 빠지면서도 자기가 맡은 화평교회의 담임목사의 일과 합동신학교의 이사장의 일에는 빠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27년 동안 충성스럽게 섬긴 화평교회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로 발전했습니다. 천국환송예배 때 화평교회 권사님들이 눈물로 부른 찬송과 이광태 목사님이 마음을 쏟으면서 전한 설교는 너무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안만수 목사님은 동료 교역자들에 대한 신뢰와 의리가 두드러졌습니다. 화평교회 안에서는 동료 교역자들이 조그만 잘못을 범할 때는 야단을 치는 일도 있었지만 언제나 동료 교역자들 편에 서서 동료 교역자들을 감싸 안곤 했습니다. 후배들에 대한 신뢰와 의리와 칭찬도 두드러졌는데 특히 후임으로 오게 된 후배 교역자들에 대한 신뢰와 칭찬은 대단했습니다. 안만수 목사님은 계획 세우는 일과 시간 관리에 두드러지게 철저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철저한 준비를 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저는 안만수 목사님과 여러 번 여행을 함께 했는데 제가 철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형편에 따라서 ‘대강대강’ ‘자유롭게’ 움직일 때는 항상 불안해했습니다. 정해 놓은 시간표대로 움직이자고 강하게 주장을 하곤 했습니다. 세계 어디에 가든지 한국 시간과는 상관없이 현지 새벽 4시 경에는 언제나 일어나서 부스럭거렸습니다. 새벽 기도 시간이라던가? 그래서 룸메이트를 하던 저는 항상 새벽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안만수 목사님은 결국 철저한 의리의 사나이였습니다. 안만수 목사님은 합신 3회 졸업생인 나의 제자였지만 합신 1회 졸업생들인 김종군 목사님과 박범룡 목사님들과 함께 동료 친구들처럼 친하게 지내곤 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우 만수, 좌 범룡” 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제가 귀중하게 여기던 김종군 목사님과 박범룡 목사님은 지금 중국에서 나병 환자들과 현지인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선교 사역에 종사하고 있고 안만수 목사님은 주님과 신앙의 선배님들과 교회와 신학교를 충성스럽게 섬기다가 먼저 주님 품으로 갔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박범룡 목사님은 “오월에 북한강변을 함께 드라이브 하자고 했는데 먼저 가서 너무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2008년 3월 10일에 쓴 ‘인생은 즐거워’ 라는 제목의 글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그 다음 날인 3월 7일 금요일 11시 경엔 나의 제자 목사들 다섯 사람이 내 사무실에 찾아왔다. 1년에 한 두 번씩 나를 찾아와서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서 스승이라고 나를 대접하는 제자 목사님들이다. 안만수, 박범룡, 윤석희, 임석영, 박요나 목사님들이다. 퇴촌에도 양평에도 설악산에도 동해에도 가곤 했는데 이번에는 내 사무실에 와서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흑염소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내가 좋아하는 흑염소 고기를 대접하는 것이었다. 이것저것 못 다한 이야기들을 흠 없이 나누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란 말도 했다. 스승과 제자들이(사실 이제는 제자들도 아니다. 꼭 같이 늙어가는 동료들이다.) 함께 모여 흠 없이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고 즐거운 일이다.” 저는 지난 며칠 동안 안만수 목사님을 생각하면서 행20:24 말씀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안만수 목사님은 사도 바울의 뒤를 이어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주님과 신앙의 선배님들과 교회와 신학교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다가 기운이 다해서 세상을 떠나 주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신앙의 선배님들과 함께 하늘 집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세세토록 돌리시고 조만간 반갑게 만나기를 바라고 기다립니다. 유족들과 성도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과 축복을 부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1183 no image |특별기고| 한국 교회의 미래, 소통이 답이 아닐까?<2>_강치원 교수
편집부
1251 2017-03-22
특/별/기/고 한국 교회의 미래, 소통이 답이 아닐까?<2> < 강치원 교수, 강원대 역사학_남포교회 장로 > 하나님과의 소통, 교인 상호간의 소통, 시대 및 사회와의 소통 교회의 소통을 논하기 위해서 역사신학의 개념을 좀 빌어보자. 역사신학은 신학의 사회적, 역사적 메커니즘을 연구한다. 역사적 환경과의 관계를 통해 신학의 발달과정을 추적한다. 역사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역사적, 시대적 문제의식에 대한 대답으로서 형성되어 왔다. 물론 신앙의 전제 조건인 계시는 초자연적 성격을 가진다. 하지만 계시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계시는 역사적 맥락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역사와 시간 속에서 일하신다. 성경만 아는 사람은 성경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텍스트(Text)만 아는 사람은, 다시 말해 콘텍스트(Context)를 모르는 사람은 텍스트도 모른다. 모름지기 신학은 역사와 시대에 대답해야 한다. 신학과 역사의 관계는 사상과 역사의 관계와 유사하다. 사상은 역사와 시대의 산물이자, 그 반영이다. 사상은 역사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사상은 역사에 영향을 주기도 하며 역사를 선도적으로 이끌어 가기도 한다. 때로 사상은 역사와 무관하게 자기 발전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상이 살아남으려면 역사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결국 신학과 역사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내가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 가장 훌륭한 신학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시대의 토론, 즉 소통이었다. 교회사에서 보면 신실함과 고결함은 단지 의식이나 제의, 혹은 관습 등 행위를 규율한다고 해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통과 토론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소통과 토론은 일시적으로 어느 정도 의견의 불일치나 불편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길게 보면 결국 발전하고 진보한다. 토론은 ‘다름을 인정하고 같음을 지향’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론과 소통의 근거는 텍스트로서 성경이었고, 또 성경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신약 성경의 정경화 과정, 즉 어떤 책을 성경으로 할 것인가 라는 논의 역시 일종의 토론이 아니던가. 소통을 통해 교회의 지지가 있었기에 정경은 성립했다.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는 소통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았다. 나는 16세기 루터와 칼빈의 생애 속에서 소통과 토론을 본다. 종교 개혁이나 개혁주의 신학은 당시 가톨릭, 성공회, 루터파, 개혁파, 그리고 재세례파 사이의 소통과 토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종교개혁의 다섯 솔라(Sola)인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나 개혁주의의 5대 강령 TULIP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역시 소통과 토론의 결과이지 않은가. 결국 신학의 발전, 교회의 위기 극복은 성경을 텍스트로, 토론을 콘텍스트로 해서 이루어져 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신앙생활도 소통이다. 소통해야 할 대상은 세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소통, 다른 하나는 교회 안에서의 교인 상호 간의 소통, 또 다른 하나는 비신자나 시대 및 사회와의 소통이다. 소통의 방법은 대화와 토론이다. 나는 대화를 ‘차분하게 주거니 받거니’로 정의한다. 토론은 ‘터놓고 주거니 받거니’이다. 대화나 토론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예컨대 가정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화하자고 해 놓고 혼자만 말한다면 대화라고 지칭할 수 없다. 또 윽박지르며 말한다면 역시 대화가 아니다. 윽박지르지 않으려면 경청을 위한 인내와 훈련이 필요하다. 토론은 어느 시점에 어느 정도 터놓을 것인가가 관건이다. 대화이건 토론이건 ‘주거니 받거니’하기 위해서는 질문이 절대 중요하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에 대한 답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교육과 소통을 통해 뜻을 이루시지 않을까. 나는 기도하고 있다. 주일 학교 학생들이 성경을 중심으로 소통의 역량을 기르도록 교육 운동을 펼쳐 보면 어떨까. 소통 프로그램은 유대인의 하브루타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 교회 교육에서 소통이 중요시 되는 날을 꿈꾸어 본다. 소통은 대화와 토론이다. 대화와 토론의 본질은 질문이다. 결국 교회 위기 극복의 답은 질문에 있지 않을까. 한국 교회의 미래, 소통에서 그 답을 찾고 싶다. <끝>
1182 no image |특별기고| 한국 교회의 미래, 소통이 답이 아닐까?<1>_강치원 교수
편집부
1515 2017-03-08
특/별/기/고 한국 교회의 미래, 소통이 답이 아닐까?<1> < 강치원 교수, 강원대 역사학_남포교회 장로 > 오늘날 교회의 소통은 대체로 형식적이어서 실질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모두들 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교인 수와 헌금액이 줄어들고 있으며, 특별히 교회학교가 없어지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현실 진단이 아니다. 대처방안이 절실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안다운 대안을 들어 보지 못했다. 해결 방안은 정말 없는 것인가? 요즘 교회 밖에서는 시대 변화와 함께 ‘소통’의 중요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시대와 사회에 비해 교회는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나는 한국 교회의 위기에 대한 해답을 소통에서 찾고 싶다. 오래 전 한국 교회는 시대와 사회를 선도했던 적이 있다. 그때 교회는 한국 사회에서 소통과 교육에 관한 한 선진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국민 일반이 민주적 절차의 의사 진행 방식을 익히는 데에 교회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예컨대 회의의 구두 표결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보면 그렇다. “.... 하기로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 “동의가 성립되어 의제가 되었습니다.” “이의 없으시면 예라고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 같은 표현들을 우리는 교회에서 익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늘날 어떠한가. 지금도 교회의 회의 절차와 소통 방식이 사회보다 선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상황은 역전되었다. 오늘날 교회의 소통은 대체로 지극히 형식적이어서 실질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한때 한국 교회 교육은 학교 교육보다 앞선 적이 있다. 소위 콩나물 교실에서 교사 1명이 과밀학급 수업을 펼치고 있을 때 교회는 소규모 분반공부를 했다. 전체로 모이고 분반으로 흩어지고, 분반으로 흩어지고 전체로 모였다. 교사당 학생 수라는 차원에서도 당시 교회 교육은 학교 교육보다 훨씬 나은 편이었다. 한때는 교회가 선진이었다는 말이다. 최근에 우리나라 학교 교육에서 수업 방식이 참여 형으로 현저하게 개선되고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 교회 교육의 방식은 어떠한가. 교회의 분반은 학교보다 소규모이지만 교육방식은 여전히 대체로 일방적 전달이다. 교회 주일 학교 교사를 예로 들어 말해 보자. 교사는 주일 예배 시간에 담임목사로부터 설교를 듣는다. 또 주일 학교에서 담당 교역자로부터 설교를 듣는다. 그리고 분반공부 시간에 자신이 맡고 있는 학생들에게 공과 내용을 일방적으로 가르친다. 주일 학교 교사에게 있어 설교부터 분반공부까지 대체로 일방적인 셈이다. 언젠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어찌하여 교인들은 그토록 오래도록 설교를 듣는데 신앙 수준과 성경 지식에 있어 그 성숙이 더딘 것일까? 그에 대해 이런 대답을 들은 기억이 난다. 교인들은 목회자의 설교를 ‘듣기만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 학교 교육은 ‘듣고 외우고 시험 보고 잊어 버리는’ 방식을 개선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런데 교회 교육은 여전히 ‘듣고 잊어 버리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인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면 신앙 수준과 성경 지식이 깊어질까? ‘말은 생각 없이 할 수 없다. 말할 수 있는 만큼 알아듣는다’고 한다. 교육은 경험과 언어활동(experience and language)으로 이루어진다. 말하게 하는 것, 그것이 교육이다. 말을 해야 사고할 수 있다. 언어와 사고와 세계는 표상과 대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어느 신학 강좌에 참여한 적이 있다. 외국에서 모셔 온 신학 교수의 강의를 통역으로 진행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강의가 끝난 후 청중들에게서 질문을 받지 않고 곧 바로 그 다음 강의가 이어졌다. 질문은 모든 강의들이 끝난 후에 한꺼번에 받으려나 보다 했다. 하지만 그날 행사는 질문이나 토론 없이 끝나 버리고 말았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교수, 신학생, 교역자, 성도 등 모두 그냥 듣기만 하였다. 질문과 토론이 없으니 그날 강의의 핵심은 묻혀 버리고 만 셈이다. 나는 좀 허탈했다. 진정한 소통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그 질문을 적절히 끌어내는 것은 훈련된 사회자의 몫이다. 소통을 공부하다가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예수님은 마이크가 없는 시절인데도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실 수 있었을까. 목소리도 좋으셨을까. 얼마나 소통을 잘 하셨을까. 첫째, 예수님은 관심을 갖고(막 5:21-43), 그들의 말로(요 4:1-42), 질문하셨다(막 8:27-38). 듣는 사람들의 관심이 무엇일까. 그들이 있는 곳에 찾아가 그들의 말로 소통하셨다. 그리고 질문하셨다. 둘째, 예수님은 영원한 진리를 위해(요 3:16),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마 13장), 솔직하게 들려 주셨다(막 14-27-31). 영원한 진리를 전하셨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셨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과 대화하셨다(눅 6:12-13, 막 14:32-42).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질문을 던져 질문을 끌어내시고 (요 18:28-38),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셨다(요 7:53-8:11, 눅 10:25-37).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소통의 모범을 본다. <다음 호에 계속>
1181 |2017년 전국목회자 사모세미나 참석기<3> | 후회 없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_정 인 사모 파일
편집부
1563 2017-02-22
2017년 전국목회자 사모세미나 참석기<3> 후회 없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 < 정 인 사모_ 평강교회 > 나의 모습은 참 못났음에도 여전히 난 주님께 붙들린 행복한 사모이다 여행과 음식을 좋아하는 내게 사모 세미나만큼 더한 선물이 있을까? 시간의 여유와 물질의 여유가 서로 비껴가는 것을 늘 경험하고 사는 개척 교회 사모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터득한 것이 공식적인 기회를 선용하는 것이다. 숙박을 하는 전 가족 여행은 늘 쉽지 않은 일이다 보니 해마다 아이들은 목회자 자녀 캠프에 보내고 나는 사모 세미나에서 몸과 영혼에 위로와 기쁨을 누리곤 한다. 이번에도 강사님들의 귀한 메시지에 힘입어 지혜와 위로를 공급받았고, 섬겨주시는 농어촌부 목사님들의 헌신에 감동했다. 그 뿐 아니라 모든 끼니를 따뜻함으로 섬겨 주시는 손길 덕분에 배고픈 무리를 오병이어로 먹여 주셨던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도 했다. 모두에게 부족함이 없는 주님의 손길! 귀한 여행 중 성서 식물원을 돌아보면서 유대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던 주님을 생각했다. 초라한 인생 속으로 직접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 올레 길을 산책할 때는 창조주의 미소를 발견했다. 돌 박물관에서는 창조세계의 신비가 만든 화산과 용암의 흔적들을 보며 감탄사와 함께 사모님들과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제주 앞 바다에서는 잠시 나를 돌아보며 주님과의 시간을 가졌다. 사역자의 아내가 된지 21년, 그리고 지금의 교회를 개척한지는 9년이 되었다. 주님 앞에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 동안에 신장이 약해져서 지금껏 싸우고 있지만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이겨내며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사실 자나 깨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늘 주님께 받기만 했지 주를 위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는 사랑을 주셨지만 내가 주님을 위해 한 일은 없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땅의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살아 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밀리지 않고 월세를 내는 것이고, 신기한 것이 있다면 그 속에서도 주님과 교회를 사랑으로 섬기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인내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능력 없음을 인정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긍휼 앞에 엎드린다. 사랑이 넘치는 선배 사모님들과 열정이 넘치는 후배 사모님들을 보며 위로를 얻는다. 그 중간 쯤 걸어온 사모로서의 나의 모습을 돌아보면 참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 주님께 붙들린 행복한 사모이다. 지면을 통해 여러 사모님들과 목사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꼭 올리고 싶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우리를 위해 기도와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곳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은혜와 여러 목사님 가정의 따뜻한 손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투병생활 7년 만에 첫 아이는 대학 신입생이 됐고, 둘째는 고3, 막내는 중2가 되었다. 세월 속에서 주님의 긍휼과 동역자 님들의 섬김 그리고 성도들의 사랑이 지금의 선물을 만들어 주셨다. 늘 아쉬운 것은 사모 세미나의 여러 좋은 프로그램이 있지만 일부만 참석할 수밖에 없는 내 몸의 연약함이다. 혹시라도 도중에 아프면 민폐가 될 수 있어 약을 먹으며 조절하곤 한다. 돌아오는 저가항공기가 착륙할 때 진동이 심해 주님께 기도했다. 옆 좌석에 앉은 사모님들은 나의 건강과 안전을 책임져 주시라고 기도드렸단다. 감사의 연속이다. 이렇게 감사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견뎌보자고 다짐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로마서 11:29 ) 나는 이제껏 이 말씀에 의지하여 사역자의 아내로 섬겨 왔다. 오늘도 내일도 후회하심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교회를 위해 살아갈 것이다.
1180 no image |2017년 전국목회자 사모세미나 참석기<2> |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_임애랑 사모
편집부
1372 2017-02-22
2017년 전국목회자 사모세미나 참석기<2>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임 애 랑 사모_ 동산위의교회 >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금껏 버틸 수 있었습니다. 사모세미나를 개최하기까지 수많은 헌신자들이 계셨습니다. 물질의 헌신, 기도의 헌신, 섬김의 헌신 등. 늘 조용히 섬김의 자리에 계신 믿음의 선배님들이 계셨기에 제주에서의 행복한 사모세미나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때를 따라 느낄 수 있었 고 주옥같은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에 빈곳을 채워주었습니다. 목사의 아내로 살아간다는 것 ... 현재의 나의 모습을 점검할 수 있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해가 가면 갈수록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만 보여드렸던 시간들, 거울을 보듯 목사의 아내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지 못할 부분들 하나하나씩 스크린에 비춰보는 것처럼 만들어 주셨습니다. 목회현장에서 목사의 아내로 조력자로 어머니로서 부족한 부분들을 알게 하시고 보게 하시니 감사했습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내조해야 하는 나의 사명, 늘 깨어 있어 주님과 24시간 동행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무지하여 사람의 방법과 생각으로 했던 부분들. 영적으로 분별이 안 되어 방관자로 지냈던 시간들도 있었음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목회자 부부가 영과 육으로 하나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하는 것을 더욱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먼저 하나 되고 행복해야 그 영적 영향력이 우리의 속한 지체들에게 흘러갈 수 있음을 다시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 기쁨, 평안, 감사와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향한 일편단심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껏 버틸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너부터 해.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네 자신이 죽으면 돼, 네가 살아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하시면서 울리는 꽹과리처럼 요란한 소리만 내었던 나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며 고백했습니다. “주님 제가 문제입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해마다 나에게 주시는 과제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회피하고 싶은 과제들 앞에서 “아버지, 그래서 이 과제를 저에게 주셨군요. 감사합니다.“라며 겸손히 주님 앞에 설 수밖에 없었고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격이 없는 자를 목사의 아내로 세워 주셔서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음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일 년에 한 두 번씩 우리 목사님이 하시는 말이 있습니다. “여보, 나에게 시집 잘 왔지? 그리고 목사의 아내가 되길 잘했지? 당신은 목사의 아내가 안 됐으면 세상 것을 다 누리며 매일 돌아다니며 잘 살고 있겠지만 이제 그런 거 누리지 못해도 괜찮지? 사모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니까.” 그러면 나는 대답합니다. “암요. 괜찮고말고요.” 목사의 아내로 살아가면서 내려 놔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음을 알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기에 세상 것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이 은혜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많은 문제 앞에서 그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바라보며 감사의 조건들을 헤아릴 수 있는 은혜. 이 땅의 시간은 들의 꽃처럼 잠시 동안의 것임을 알기에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네게 준 사명 잘 감당하였구나.” 하시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목사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합니다. 저와 같은 모든 동역자 님들도 행복하십시오. 우리에게는 만왕의 왕 되신 주님이 계시잖아요. 사모 세미나는 이런 소망을 더욱 굳건히 해 주었습니다. 교단과 섬기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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