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159 no image |추도사| 故 최일환 목사의 별세를 애도하며_김승식 목사
편집부
1665 2016-08-23
故 최일환 목사의 별세를 애도하며 < 김승식 목사, 인천 영광교회 원로 > “그의 곁에는 언제나 여러 나라에서 온 선교사들이 많았습니다” 금요일 아침 일찍 카톡 방에 올라온 최일환 목사의 갑작스런 비보는 믿기 어려워 처음엔 그다지 마음에 담지 않았습니다. “에이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무슨 착오가 있었겠지...“ 확인도 안 해보고 하루를 보내던 나는 그 비보가 사실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황망함과 충격 속에 빠져 들었습니다. “청천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을 쓴 어느 동역자의 놀라움은 그를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파장으로 몰아쳤습니다. 평소에 지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누구도 쉽게 수긍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차라리 저를 데려가시지... 저야 살만큼 살지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귀한 종을 그렇게 빨리, 급작스럽게 데려 가십니까?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종이건만......” 자연스럽게 비탄이 흘러나왔습니다. 지난 5월 귀국했을 때 장안중앙교회에서 만나던 모습, 대화하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습니다. “형님, 문제가 생겨 강의하러 가시려던 C국 계획을 당분간 미루셔야 되겠어요. 며칠 전 공안원들이 신학교에 들이 닥쳤어요. 기도해 주세요.” “형님 교인 수가 자꾸 줄어들어 힘이 드네요.” 선교의 열정은 시들 줄 모르는데 그 열정을 뒷받침해야할 교회가 약해진다는 말에 마음이 짠해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오지랖은 은퇴 목사님들의 노후 걱정까지 이어졌습니다. 앞으로 많은 교역자들이 은퇴하게 될 터인데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말에 어찌 공감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날 광고 시간에는 어느 은퇴 목사님을 위한 헌금을 한다고 했는데 생활대책이 안 돼 폐지를 줍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은퇴 후 이렇게 뉴질랜드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는 나 자신이 무척이나 송구스럽게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최 목사를 알고 지낸 세월은 30년이 넘습니다. 그 중에서도 잊지 못할 일을 몇 가지 추억해 보며 고인을 기리고자 합니다. 28년 전인가, 어느 초라한 이층을 세 얻어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부흥회 초빙을 받아 갔는데 부흥회를 마치면서 소위 강사란 자가 하마터면 평생 나 자신에게는 후회가 되고 최 목사에게는 큰 상처를 안겨줄 말을 내뱉을 뻔 했습니다. 그 말을 이것이었습니다. “최 강도사 꼭 목회를 해야겠어? 내 개인적 생각은 목회 길을 그만 두는 게 어때?” 초라한 교회의 모습, 그리고 장애의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그의 처지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기에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사실 그 당시는 지금보다 장애가 훨씬 더 심했습니다. 후에 두어 차례 수술로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동시에 그에 대한 존경심이 더 해 갔습니다. 그도 나에 대해 존경과 사랑을 표해왔지만 그보다 내가 그를 더 사랑하고 존경해 왔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신학교도 한참 후배였지만 정말 존경스러운 동역자였습니다. 두 번째 잊혀 지지 않는 일은 대학원 졸업여행 때였습니다. 신학교는 후배였지만 대학원은 동기가 되어 함께 설악산과 동해안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살악산에서는 금강굴을 올라갔다 오게 되었는데 양손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코스가 많아 우리 일행은 당연히 최 목사가 포기하고 산 아래서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우리 일행이 2/3나 하산했는데 최 목사가 혼자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금방 날이 저물어 갈 테고 철 사다리도 차가운 데 한 손만 사용해야 하는 그에게는 도저히 무리한 산행이었습니다. 모두들 반대를 했고 특히 인솔자인 나는 심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혼자 금강굴 코스를 주파하고 내려왔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나 스스로가 부끄러워집니다. 그의 고집스러움에 화를 낼 줄은 알았지만 함께 동행 할 생각조차 못한 속 좁음에 대해 말입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 최 목사는 이렇게 생각하고 가히 필사적으로 도전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 등반에 실패하면 목회에 실패한다! 반드시 주파해야 목회할 수 있다!” 장애는 분명 그에게 마이너스였지만 남에게 없는 집념과 도전력은 플러스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장애는 오히려 그에게 더 큰 동기부여와 도전이 되어 그를 큰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있었습니다. 최 목사님에 대한 일화를 말할 때 반드시 하고 싶은 말은 입양에 대한 일입니다. 내 자녀가 없는 것도 아니고 생활이 넉넉한 것도 아니건만 그는 입양을 추진하여 결국 아들 하나를 막내로 입양하여 훌륭히 키워냈습니다. 처음 그 일을 추진할 때 내가 알기에 주변의 반대는 아주 극심했습니다.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여 입양을 성공시킵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난 일이 있습니다. 그 아이가 더 댓 살 정도 되었을 때 “사모님 어때요?” 늦게 얻은 자식을 키우는 사모님이 좀 안쓰러워 질문을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김 목사님, 저 최 목사 없으면 살아도 우리 기성이 없으면 못 살아요.” 사실 나도 입양을 꿈꾸던 사람 중에 하나였지만, 그게 어디 남편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던가요! 나는 실천 못한 그 일을 해 낸 두 분께, 특히 사모님께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선교에 대한 최 목사님의 열정은 조금만 그를 가까이 한 사람들이라면 잘 알 고 있기에 제가 일일이 예를 들지 않겠습니다. 장안중안교회를 방문할 때면 언제나 이런 저런 선교사들을 만나게 됩니다. 고국 방문을 한 동기 선교사들, 안식년을 맞은 후배 선교사들, 난 잘 알지도 못하는 선교사들이 늘 한 두 명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 만큼 그의 그늘이 넓다는 말이죠. 저는 대놓고 말했습니다. “최 목사 존경스럽다. 훌륭해! 난 최 목사처럼 그렇게 못해!” 지난 5월 방문 때는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 벽보에 교회 청년들 이름이 빼곡이 적혀있고 그들이 맡아 기도할 국가들이 나란히 적혀져 있었습니다. 결코 크지 않은 목사, 결코 큰 교회는 아니었지만 그는 큰 목사였고 선교의 열정이 가득한 그 교회는 큰 교회였습니다. 최 목사님에 대한 비보를 접한 저는 솔직히 하나님께 대한 섭섭함이나 저항 같은 게 느껴져 한 동안 마음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데려갈 사람은 데려가지 않으시고 아직도 우리 곁에 있어야 할 사람들을 홀연히 데려 가실 때 느끼는 회의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의 종이기에, 결국 그 분의 섭리와 주권 앞에 굴복해야할 종이기에 순종할 수밖에 없겠지요. 사랑하는 최 목사님! 다시 만날 때 까지 주님 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이곳에서 평소에 기도해 오던 내용들을 이제는 주님께 직접 아뢰실 수 있으니 좋으시겠네요! 우리 모두 최 목사님을 오래 오래 잊지 못할 것입니다.
1158 |온양서부교회 방문기| “함께 공감하며 새롭게 다짐과 위로를 받는 시간들”_박종훈 목사 파일
편집부
1970 2016-08-02
“함께 공감하며 새롭게 다짐과 위로를 받는 시간들” <박종훈 목사, 궁산교회> 총회 농어촌부 소속인 합신농목회는 제33차 모임으로 충남 온양서부교회에서 모였다. 분기마다 일 년에 4번 모이지만 늘 기다려지고 설레는 맘으로 참석한다. 이번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그 곳의 담임목사님은 어떠한 목회와 삶을 살고 계실까? 전국을 상대로 지역을 돌아가며 그동안 여러 교회를 방문하여 각기 다양한 은사와 지역적 특색에 따라 묵묵히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들을 보고 느끼며 감동을 받고 돌아온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총회산하 여러 부서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단체가 농목회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같은 농어촌 목회자라는 동질감도 있지만 사역환경이 거의 비슷하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해주며 마음이 통하는 공동체이다. 온양서부교회를 방문하면서 목적지가 거의 다 와 가지만 시내를 벗어나지 못하길래 교회당이 도시 안에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불과 몇 백 미터를 남기고 들판의 농로를 지나고 마을을 가로질려 밭이 있는 곳에 벽돌로 지은 이층 교회당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동네와 약간 떨어진 곳이며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성전은 전형적인 시골교회당의 모습이었다. 방연식 담임 목사 부부와 성도들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개회 예배 시간이 다가오며 전국 곳곳에서 회원들이 도착하여 반가운 대화를 나누며 웃는 소리로 떠들썩했다. 충남 노회장의 설교를 통하여 잘 알아듣지 못하는 시골 노인들에게 반복하여 전하는 말씀의 노련함을 한 수 배웠다. 저녁식사를 한 후에 기다리던 방연식 담임목사의 농촌목회와 교회당 건축 이야기를 들었다. 개척하여 34년 동안 인내하며 우직하게 달려온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동받기에 충분했다.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사역환경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충남인 들은 고무줄 특성이 있다는 어느 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지역사람들의 문화와 생활의 배경을 아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셨다. 또한 직접 전도와 가정의 고장 난 전자제품을 고쳐주며 조금씩 주민들에게 다가가고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도 주민들을 만나면 반드시 내려서 인사를 함으로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인근에 저수지가 있는데 농번기철에 마을 아이들끼리 놀다가 그만 익사하는 사고가 났었다고 한다. 농사일에 바쁜 주민들은 아이들을 방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알고 그 때부터 사모님과 함께 병설유치원이 시작되기 전까지 아이들을 교회에서 돌봐주는 사역을 시작하셨다. 이러한 지역상황에 필요한 맞춤식 섬김이 계기가 되어 자녀들의 부모님이 전도되고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교회당 건축에 대해 많은 은혜를 체험하신 과정을 간략하게 말씀하였다. 창고 같은 구 예배당이 겨울에는 밖의 온도보다 낮았고 여름에는 더 높은 기온으로 시급히 건축을 해야 할 열악한 상황이었다. 준비된 자금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와 절대농지인 토지의 허가 문제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4개월 만에 이층 벽돌 건물로 완공하고 입당예배를 1992년 12월에 드리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공사 도중에 마을에서도 회관을 건축하려고 관에서 지원금이 나왔지만 건축비가 부족하여 포기하려는 소식을 듣고 방목사님은 책임자들을 찾아가 상당한 기금을 주면서 회관건축을 하도록 힘을 실어 주었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 사실을 알고 감동을 받았고 서로 협력하여 건물을 완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교회당 입당예배 때 주민들은 저마다 봉투를 들고 축하해주었는데 교회에서 회관건축 후원한 금액보다 더 많이 나왔다고 한다. 이 후 관(官)에서 마을 골목길 포장 자금이 나오자 먼저 교회당 진입로를 우선적으로 하도록 마을에서 배려해 주었었다. 좁은 골목길을 차량이 다닐 정도로 넓히기 위해서는 대신 토지매입을 교회에서 해야 했다. 방 목사는 한 사람씩 찾아가서 설득하고 매입을 부탁하며 거절하는 어떤 분에게는 6~7번까지 찾아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선한 영향을 주었고 해가 갈수록 든든히 세워가는 중에 있다고 한다. 목회사역을 뒤돌아보면서 한두 가지 후회되는 점도 말씀을 하셨다. 지금은 합법적이지만 처음 건축할 때 법을 어기면서 진행했던 점과 자금이 부족하여 은행 빚을 안고 갔던 점, 성도들이 어렵게 헌금한 돈을 몇 년간 은행이자와 빚을 갚는데 사용했던 일이다. 목회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그 말씀에 농어촌 목회 후배들인 우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곳에서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한다는 세월 속에도 사심(私心)없이 목양일념(牧羊一念)으로 그 자리를 지키며 이제 은퇴를 바라보는 방연식 목사님의 사역에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는 이야기였었다. 농어촌 목회는 많은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적은 능력과 사소한 은사라 할지라도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환경이다. 모든 사물(事物)이 그렇듯이 시간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본래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방목사님의 오랜 세월이 그분의 어떠함을 밝히 말씀하고 있다. 짧은 시간에 어찌 그 많은 사역을 다 소개할 수 있으랴마는 같은 시골에서 목회하는 동역자로서 공감하며 더 새롭게 다짐과 위로를 받는 합신 농목회 모임임을 확실하게 느꼈다. 우리의 주인 되시는 주님은 가장 적절한 환경과 장소에 그에 맞는 종을 그 시대에 보내시고 선하게 사용하심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일정이었다.
1157 no image |개/혁/주/의/신/앙/강/좌| 회심(Conversion)에 대한 이해_이광호 목사
편집부
1471 2016-07-19
회심(Conversion)에 대한 이해 <이광호 목사, 실로암교회> 시작하는 말 기독교 구원론에 있어서 회심은 절대 중요한 요소이다. 회심이 없이는 그 어떠한 구원도 있을 수 없고 회심에 대한 올바른 해석 없이는 기독교 복음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모든 기독교 신앙은 '회심'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이후의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중생과 회심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회심과 회개에 대해서도 분리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이러한 다소 상이한 개념들을 동시에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과 회심은 구분된다는 견해가 있으며 회심과 회개 역시 서로 구분하여 이해될 수 있다는 견해를 살펴볼 수 있다. 즉, 그 개념들이 어느 정도 동일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지만 특성에 따라 그 의미들을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회심에 대한 개념을 파악해 봄과 동시에 회심의 주체가 성령 하나님임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선물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보다 근접한 이해를 위해 어의적 정의와 함께 회심의 주체 및 그 효과를 함께 간략히 살펴 볼 것이다.   1. 회심과 유사 용어들 일반적으로 회심(Conversion)이라 함은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미 가지고 있는 특정의 심적 사고를 스스로 다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회심이라 한다. 이러한 회심은 보편적인 인간생활에 있어서 흔히 일어나며 그것은 각 개인의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물론 그 결단은 순수하게 자의일 수도 있고 타의에 의한 결단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신앙에 있어서의 회심이란 악한 마음을 청산하고 새로운 마음을 소유함에 지칭한다. 이는 죄에 대한 본질적 청산을 의미한다. 즉 과거의 잘못된 죄에 물든 생활을 뉘우치고 새로운 선한 생활을 다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 구원론에서의 회심의 의미는 그보다 더욱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독교에서의 회심은 단순히 윤리적 악한 마음을 새것으로 바꾸는(change) 내적인 자기결단이 아니라 자신의 근본적인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turn)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1) 회심과 회개 회심(conversion)과 회개(repentance)는 기독교 구원론에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이는 회심과 회개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을지라도 구분하여 단어적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회심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떠나 살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잠정적 마음행위로써 구원의 일부에 속하는 단회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맞이하여 그에게로 돌이킨 사람은 성도로서의 지속적인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회심을 계속해서 되풀이 한다면 그 앞서의 회심이 올바른 회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양상인 것이다. 회심은 거듭되는 성도의 신앙행위가 될 수 없으며 맨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영접하는 그 순간에 한번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에 반해 회개는 성도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표현이다. 회개는 날마다 해야 할 성질의 것이며 시시때때로 해야만 한다. 이 세상에서 회심한 성도라고 해서 이제는 죄와는 완전히 단절된 완성된 구원의 영역가운데 사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회심(conversion)으로 시작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 죄와의 투쟁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구원을 소유한 회심한 성도라 할지라도 세상의 유혹과 공격 가운데 살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요구에 부족한 자신의 죄된 삶을 확인하여 고백하는 것이 곧 회개이다. 이 회개는 살아있는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며, 그러한 올바른 회개를 통해 좀 더 장성한 성도로 날마다 자라가게 되는 것이다.   2) 회개와 후회 회개와 후회를 구분하는 데는 상당히 애매모호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어의적인 면에서, 그 의미상으로 보아서는 매우 분명히 구별된다. 회개는 현대의 용례상 오직 기독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용어이며, 후회는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에게 공히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언어이다. 회개는 참된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삶이나 행위를 하나님께 비추어 보아 잘못된 부분을 고백하는 것인 반면, 후회는 어떤 사실에 대해 스스로 자탄(自歎)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회개가 있을 수 없다. 즉, 후회하는 자는 자신의 사고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원통해 하며 애석해 하는 것으로 후회할만한 객관적 실체는 있으나 그 후회를 받을 인격적 대상은 없다. 이러한 후회는 스스로 원통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회심은 회개나 후회와 구별되는 단어이다. 그 의미상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는 측면에서 보아 회심과 회개는 성격이 비슷하며, 자신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면에서 회심은 회개나 후회와 관련되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그 성격상 비슷하다는 것이 동일하다는 뜻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회심이 단회적 사건임을 생각할 때 회개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며, 회심의 대상이 인격적 하나님임을 감안할 때 후회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이처럼 그 쓰이는 용어들을 올바르게 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회심이 전적인 하나님의 관여에 의한 결과라고 한다면,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자신의 반응의 형태라 할 수 있으며, 후회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 스스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회심, 하나님, 율법   1) 회심의 주체 회심을 하여 변화를 받는 주체는 각 개별 인간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은혜를 누려 구원을 얻은 자가 회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회심을 주관하는 주체는 회심을 하여 변화를 받는 개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점이 기독교 복음의 중요한 핵심이다. 하나님의 관여와 선택의 섭리 없이 기독교적 의미의 참된 회심은 있을 수 없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참된 이성을 상실한 인간으로서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그에게로 회심할 능력이 없다. 혹 죄된 인간에게 그러한 의사가 있다고 할지라도 죄로 오염된 인간의 이성은 참된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도에 따라 잘못된 신적(神的) 대상에게로 회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생겨난 현상들이 오늘날의 숱한 종교들이다. 그러나 참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기 작정에 의해 개별 인간의 인격을 통해 회심의 역사를 할 때 비로소 올바른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기독교에서 발하는 회심은 바로 그런 의미의 회심이다. 인간의 회심을 주관하는 존재는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특히 성령 하나님이다. 즉, 택함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회심을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의 내적인 역사가 따라야 하는 것이다. 양자의 영(롬8:15)으로 일컬어지는 성령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갈4:6)라 부를 수 있는 능력을 얻어 그 삶을 풍성히 누리게 된다. 성령 하나님은 이에 대해 믿는 자들의 보증과 인(고후1:22, 엡1:14)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계시는 것이다.   2) 회심과 하나님의 율법 회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이는 회심을 위한 방편으로서 구약성경에 계시된 율법이 절대적 근간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까닭은 하나님의 율법이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고(갈3:22) 다시 그 율법이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자들에게 복음의 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지 않는 회심은 올바른 회심일 수 없으며, 그것은 후회의 일종이거나 인간의 이성에 의해 조작된 어떤 신적 대상에 대한 회심일 따름이다. 하나님의 계시된 율법에 의해서만 회심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결단에 따른 그런 회심에 의해서는 복음의 문이 열려질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진실로 자기의 죄를 깨닫는(롬3:20)자들만이 진정한 회심을 통한 복음의 실체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으며 따라서 의로워질 수 없다. 결코 죄로 물든 인간 스스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올바르게 자각한 자라야 자기의 삶을 진정으로 포기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서므로 그의 은혜에 진실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개별 인간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들어 그 기능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피게 하는 것도 성령사역의 한 방편이다. 회심에 있어서 율법의 기능을 잘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3. 회심의 효과   회심의 결과는 개별 인간에게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회심을 통해 이전의 자연인은 완전히 포기된다. 그리고 그 회심한 자에게는 상징적이면서 동시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 오며, 아울러 새롭게 재창조된 사람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 회심한 사람은 적어도 세 인격적 존재와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된다. 그 내용을 구분해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금 회복된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연인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 놓여있다. 그런 형편에 있던 개별 자연인이 하나님께 회심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이전에는 인격적 관계로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왕으로, 주(主)로, 아버지로 알고 그와 교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심한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명령과 섭리를 지속적으로 의식하는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포함된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된 것을 인식하게 된다. 둘째,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인식을 하게 된다. 회심을 통해 하나님을 왕이요, 주요, 아버지로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함에 따라 회심한 성도는 이제 그의 백성이요, 종이요,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회심한 이후로는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순종하는 성도로서의 삶을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는 방편이 곧 그에 대한 순종이며,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의 관계로서의 위치를 올바르게 자각할 때 비로소 참된 순종의 자세가 표현된다. 그것은 곧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세째, 이웃에 대해 참된 견해를 가지게 된다. 회심을 하기 전의 자연인은 그 본질상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이기적이라 여겨지는 부분 이외에 남을 위하는 봉사마저도 사실은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 발로에 기인한 것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회심하여 이웃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이웃이 자신의 어떤 대상, 곧 구제나 봉사의 대상일지라도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죄인의 모습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웃에 대한 진실한 관심과 사랑이 회심한 성도에게 생겨나는 마음인 것이다. 그것이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으로 표현되어 구제와 복음전파에 최선의 힘을 기울이게 하는 근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적 관계들이 올바르게 정립될 때 비로소 회심의 효과가 충만히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 예배하는 자세와 자신의 겸손한 자세이다. 하나님께로 회심한 성도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예배하고자 하며, 온전한 예배에 대한 연속적인 부족함이 저를 더욱 겸손하게 한다. 결국은 그런 가운데서 이웃에 대해 복음을 선포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게 되며, 그 사랑의 표현으로써 선행의 열매들이 더욱 풍성히 맺히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이 생겨나는 회심의 모든 효과는, 성령 하나님의 강권적 일하심의 결과이므로 결코 우리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맺음말 회심은 기독교 구원의 기초로이며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주의 선물이다. 진정한 회심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참 기독교인이 될 수도 없다. 그리고 그 진정한 회심은 인간의 자구적인 노력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순전히 은혜로 자기의 선택된 사람들에게 거저 주시는 것이다. 그 회심은 회개와 다르다. 그리고 후회가 아니다. 즉 인간 스스로에게서 자기 노력이나 결단에 따라 발생되는 것이 아니며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확정하신 그 섭리에 따라(엡1:4) 회심이 각 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 회심에 참여할 자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에 한정된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진심으로 회심하게 된 모든 성도들은 그 효과에 따른 삶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한 삶은 회심에 따른 마땅한 귀결이다. 자신의 의(義)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써 회심을 하게 되었기에 단지 그 은혜에 감사할 수 있을 따름인 것이다.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곧바로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경배로 이어지게 된다. 회심(conversion)이 인간의 노력이나 결단의 결과라면 또다시 가변적일 수 있겠지만 성령 하나님에 의해 주도된 것이므로 그것은 구원의 보장이 된다. 그것이 늘 생각이 변하는 인간의 결단이라면 결단코 믿을 수 없으나, 불변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기에 성도들은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 하나님의 선물인 회심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 구원론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며 매순간 순간마다 그를 높여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1156 no image |심/층/진/단| 소위 ‘방언’이 추구하는 비성경적 요소들_장대선 목사
편집부
1475 2016-07-05
소위 ‘방언’이 추구하는 비성경적 요소들 < 장대선 목사, 가마산교회 > “교회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땅 가운데 오시어 완성하신 모든 계시인 성경을 벗어나거나 넘어설 수 없어” 한국의 개신교 신앙에서 ‘방언 추구’는 광범위한 문화를 이루고 있으며, 심지어 장로교회들에서도 추구되거나 권장될 정도로 일반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특별히 선교단체나 초교파적인 사역을 추구하는 단체들에서는 거의 공통적으로 방언기도를 부추기고 있을 정도이다. 이들은 방언과 관련하여서 흔히 고린도전서 14장을 가장 강력한 증거본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고전 13장 1절은 “내가 사람의 방언(γλώσσαις)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전제하였는 바 이미 은사의 바탕이 은혜이며 섬김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방언을 추구하며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조차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이르기를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방언과 각종 은사들을 이미 전제(前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방언이 분명히 사랑을 이루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방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려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타의 다른 성경구절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다가도 이러한 특정한 본문에 대해서는 의미상의 해석을 꾀함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에 부합하는 해석을 도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방언을 추구하는 자들의 신앙을 보면 반드시 연계되는 것이 바로 은사(χάρισμσ)의 사모함이며, 그들은 완곡하게 기도 응답이라고 말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비밀한 계시를 사모하게 된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흔히 말하는 ‘직통 계시’의 경지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방언기도란 결코 한 방향, 즉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만으로 추구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서 피드백(feedback)하는 과정에서 ‘예언’ 혹은 ‘직통계시’의 단계에까지 도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전 13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언(προϕητεία)을 언급하면서도, 9절과 10절에서 이르기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함으로써 13장 1절에서 언급한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2절에서 언급한 예언 등이 모두 부분적이며 불완전함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도가 권면하는 것은 신자들의 신앙을 말씀(λογος)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 향하게 하는 것에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눅 24장 44절에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고 하시며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눅 24:45) 하셨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신자들로 하여금 말씀(성경)을 향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모든 부분적인 예언과 계시가 폐해지고 오직 성경만이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로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은 계시를 추구하는 은사자들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일들의 증인(눅 24:48)들이었던 것이다. 사실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에서 일탈한 대부분의 이단들이 추구한 것이 바로 방언 추구의 배후에 있는 소위 ‘계시의 연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방언은 단순한 음절의 반복을 통한 무아지경에서의 신비적인 현상들의 경험들과 그 가운데서 얻은 신비적 지식들의 신빙성이 계시의 연속선상에서 보증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단들이 그 도덕성에 상관없이 결국에는 방언기도와 같은 것을 통해 신비주의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결국, 방언기도를 추구하는 신앙은 반드시 신비주의적인 자연신학, 곧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기반을 두는 신학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그 예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슬람이다. 글을 모르는 마호멧이 유일신관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유대교와 구약 외경, 그리고 신약시대 이단분파들의 불완전하고 허구적인 기록들을 통해 왜곡된 기독교 교리를 바탕으로 천사장 가브리엘로부터 받았다는 직통계시 가운데 완성한 것이 바로 쿠란(quran)이다. 또한 그러한 쿠란을 바탕으로 형성된 이슬람 신앙 가운데서는 탁발수사들이 ‘알라, 알라’라는 단순한 단어를 끝없이 반복함으로써 황홀경에 빠진 채로 벌이는 갖가지 이적적인 기행들은, 현대 개신교의 은사주의자들이 추구하며 보여주는 기이한 일들과 전적으로 닮아 있다. 이처럼 방언기도는 단순히 기도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된다거나 하나님께만 집중하도록 한다는 측면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그 깊이 가운데서 예언과 계시에 이르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측면에서 그 폐해가 크다 할 것이다. 무엇보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땅 가운데 오시어 완성하신 모든 계시인 성경을 벗어나거나 넘어서게 하는 것들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의 후손들인 개신교 신자들이 취할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에서 끊어낸 것은 성경의 진리 이외의 모든 미신과 우상숭배와 자연종교적인 잔재들과 폐해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방언이니 은사니 하는 대부분의 현상들이라는 것은 사실 버려진 쓰레기 조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1155 no image |심/층/진/단|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해_김영길 목사
편집부
1536 2016-07-05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해 < 김영길 목사, 더불어사는교회 > “절대 실수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붙들고 있어” 요즘 믿음에 대한 구원관, 곧 개혁교회 교리인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대하여 그 의미를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하는 부분은 우리의 구원이 신인의 협력, 즉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손을 내밀지라도 그 은혜를 받고자하는 우리의 노력이 없이는 절대 그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은혜를 거저 주시지만 우리가 그 은혜를 받고자 하는 손을 내밀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곧 알미니언주의자들이 말하는 논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알미니언적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든지 못 받든지 결국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렸다는 사고방식인데,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은혜를 베풀고자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받으려고 하는 의지가 없다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입장은 다릅니다. 죄인 된 우리로서는 절대로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갈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도 없다는 입장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의 택한 백성들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오시고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가 거부한다고 해서 거부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받고자 한다고 해서 받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이 은혜를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문밖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시지만 문을 열고, 안 열고는 우리의 책임이어서 만약 우리가 문을 열지 않으면 주님도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하는 처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무능력한 존재로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거부하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는 이 논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무시한 처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처음부터 우리의 구원은 그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항상 자신의 욕심을 따라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지을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들 속에 주님께서 직접 찾아오시고 닫혀 있는 우리의 문을 깨뜨려 부수시고 들어오셔서 주님의 은혜를 알게 하여 믿게 하시고, 주님을 따라가도록 만들어 가시는 것과 관련해 이를 인간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불가항력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절대 실수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거짓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붙들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구원의 주도권이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날마다 하나님을 붙드는 연습을 부단히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한계가 있는 것이어서 부지중에 실수하고 넘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이 죄를 지을 때마다 자신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계를 가진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붙들고 있어서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있느냐, 아니면 내가 하나님을 붙들고자 애를 쓰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입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따라가는 사람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고자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자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결단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말미암습니다(엡 2:8-9). 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들만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라면 자기 자랑이 되겠지만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랑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절대 구원에서 떨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절대 끊을 없는 관계라서 설사 자녀가 잘못이나 실수를 범한다고 해서 그것이 빌미가 되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한없는 은혜가 자녀의 잘못을 훨씬 능가하는 사랑으로 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3-39).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누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임을 다시 한 번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1154 카카오톡으로 기독교개혁신보를 받아보세요!_안정위 장로 파일
편집부
1843 2016-06-21
카카오톡으로 기독교개혁신보를 받아보세요! < 안정위 장로, 세대로교회, 기독교개혁신보사 IT 팀장 > “기독교개혁신보와 독자 간의 소통 긴밀하게 오고가는 카카오톡 개설돼” 안녕하세요? 세대로교회 안정위 장로입니다. 저는 40여 년 동안 아이티(IT)분야에서 종사하고 있으며 현재 ㈜파라미디어에서 온라인 관련 전문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2015년 1월, 기독교개혁신보 홈페이지를 스마트폰에서 보기 편한 반응형 홈페이지로 개편하였고, 이 인연으로 기독교개혁신보사의 아이티(IT)와 관련된 분야에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개혁신보는 좋은 기사들이 지속적으로 작성되고 있지만, 목회자와 성도님들에게 널리 전달, 전파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에 좋은 소식을 더 쉽고, 더 빠르게, 더 널리 알리기 위하여 스마트폰에서 카카오톡을 이용한 새로운 뉴스 전달 채널 서비스를 새롭게 도입하고자 합니다. 기독교개혁신보와 카카오톡 친구 등록하고 온라인 소통 강화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개혁신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카카오톡을 이용한 온라인 소통 강화를 하고자 합니다. 첫째, 독자들과 지속적인 소통 채널이 필요합니다. 합신에 소속되어 있는 목회자만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3,000여 명 이상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단 행사나 모임에는 참석하지 못하지만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소통하며 함께 기도해야 할 교단 내부의 소통을 확대하여야 할 첫 번째 이유입니다. 온라인상이라도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기도하는 소통하는 장이 열린다면 현재까지 누리지 못했던 합신 교단의 시너지가 창출되어 보다 큰 복음전파와 선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둘째, 문자(SMS)발송은 비용부담 때문에 최대한 짧게 정리하여 발송을 하다 보니 상세한 내용은 보낼 수 없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반면에 카카오톡을 이용해 정기적으로 발송되는 내용은 많은 정보들을 손쉽게 서로 공유하고 수신할 수 있습니다. 문자(SMS) 수신은 비용 발생뿐 아니라 기계가 보낸 느낌이 강하여 감성적인 부분이 부족하고 일방적인 통보에 가깝고 일회성이며 지속적인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는 소통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지속적인 친구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카카오톡을 통한 온라인 양방향 소통 채널 파이프라인이 구축된 것입니다. 셋째, 카카오톡으로 받은 소식을 제3자에게 쉽게 전달하고 전파할 수 있습니다. 교회 내 뿐만 아니라 여타 사람들에도 쉽게 소식을 전파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스마트폰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카카오톡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보편적인 소통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카카오톡을 기반으로 소통하는 방식이기에 전혀 불편함 없이 제3자에게 전달, 배포할 수 있어서 기독교개혁신보 구독의 저변을 넓힘에 있어 가장 최적화된 도구라 할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을 올리면 “합신 소속 목회자와 성도님들은 선택이 아닌 의무적으로 ”기독교개혁신보“와 카카오톡 친구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카카오톡에서 “기독교개혁신보”와 친구 되는 방법을 간단히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개혁신보와 카톡친구 되는 방법> ■ 카카오톡 앱을 설치하고 실행 합니다(이미 대부분 설치하고 사용하고 계십니다). ■ 카카오톡에서 친구 창으로 이동합니다 ■ 상단의 친구추가 버튼을 클릭합니다 ■ 상단 친구찾기 검색창에 "@기독교개혁신보"를 입력 후 우측 상단의 찾기를 클릭합니다 ■ 잠시 후에 "기독교개혁신보"가 검색되어 나타납니다 ■ 우측에 있는 친구추가버튼을 클릭합니다 ■ 다시 카카오톡 친구창으로 돌아오면 기독교개혁신보가 친구로 등록되어 나타납니다 ■ 채팅창에 "기독교개혁신보와 친구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는 내용이 수신 됩니다 ■ 친구로 등록된 후 기독교개혁신보와 친구가 된 기념으로 자신의 소속 교회명과 성명을 채팅창에 작성한 후 전송하면 됩니다 ■ 그 이후에는 기독교개혁신보에서 보낸 공지사항을 카카오톡에서 내용을 확인하면 됩니다. 상기 과정을 통하여 기독교개혁신보와 카카오톡 친구가 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서비스를 통해 기독교개혁신보와 원할한 소통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합신 목회자, 중직자님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따라야 합니다. 수시로 스마트폰에서 카카오톡을 확인하여 기독교개혁신보에서 보내온 메시지를 읽어 주시고 기독교개혁신보의 발전을 위하여 좋은 의견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울러 이미 운영 되고 있는 기독교개혁신보의 모바일허브( http://m.repress.kr )의 적극적인 활용을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종류의 정보들을 한곳으로 통합하여 스마트폰에서 쉽게 접속하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모바일 홈페이지에 접속하셔서 관련 소식들을 보실 수 있으며 여타 주변 교우들에게도 기독교개혁신보의 뉴스들을 손쉽게 전달하실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기독교개혁신보사의 전달용 모바일 홈페이지입니다. 전 세계 누구와도 합신 교단의 소식을 스마트폰을 통하여 손쉽고 편리하게 온라인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여러 목회자님들과 중직자님들의 많은 활용을 부탁드립니다. 이상과 같은 다양한 디지털 방식을 통하여 기독교개혁신보와 독자 간의 소통이 긴밀하게 되면 우리 교단의 발전은 물론 전 세계 선교에 큰 영향을 키치는 기독교개혁신보가 될 것입니다. 합신의 모든 구성원들의 건강하심과 가정의 평안하심을 기도하면서 기독교개혁신보의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강화를 위한 제언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153 no image |심/층/진/단| 능동적 칭의와 수동적 칭의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_노승수 목사
편집부
1675 2016-06-21
능동적 칭의와 수동적 칭의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노승수 목사, 강남성도교회 > “개혁파 신학자들이 칭의와 성화를 나눈 것은 세미펠라기안 때문” 개혁파 신학자들은 칭의를 이해할 때, 하나의 칭의를 능동적 칭의와 수동적 칭의라는 두 국면으로 이해했다. 원래 칭의는 법정적이며 객관적이며 즉각적 성격을, 성화는 실제적이며 주관적이며 점진적 성격을 갖는다. 우리가 오해하기 쉽지만 칭의는 사실 우리 의식의 국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서 모든 신자들이 누리는 내면적 체험과 확신의 성격을 배제할 수 없다. 능동적 칭의와 수동적 칭의는 이런 국면을 설명한 것이다. 사실상 이 사건은 우리의 경험 내의 사건이 전혀 아니지만 회심을 할 때, 신자들의 내면에서 경험되는 구원의 확신 등에서 자신이 의롭게 된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국면을 우리 양심의 법정에서 일어나는 칭의, 곧 수동적 칭의라고 말한다. 그러나 수동적 칭의라는 개념은 칭의의 개념이지만 사실상 이는 성화의 영역이다. 그래서 존 머레이는 이 국면을 ‘결정적 성화’라고 표현했다. 성화가 가지는 점진적 성격과는 달리 이를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성화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일어나는 우리 인식과는 무관한 사건임에도 거듭난 신자는 이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게 되는데, 이 국면을 수동적 칭의로 이해한 것이다. 즉, 우리 양심의 법정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 믿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 의식에 인식되었기 때문에 수동적이라 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는 여전히 법정적이며 객관적 사건이다. 이와 관련해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능동적 칭의의 실천적 유익 중 하나가 구원 문제로 불안해하는 성도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드는 것은 이 사건이 우리의 변덕스런 경향에 달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약속과 그 능력에 달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신자들의 실제 신앙생활에도 그런가하는 의문이 든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장로교회들이 사실상 이 확신을 과도하게 남용하고 있다는 점과 그 극단이 구원파적 사고라는 점을 돌아보면 능동적 칭의에 대한 단순한 강조가 실제적으로 이런 실천적 유익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이것이 정말 제대로 실천적 유익이 되려면 이런 구조를 가져야 한다. 곧 능동적 칭의에서는 우리의 행위가 구원의 공로로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처럼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의 행위를 그리스도의 의에 속한 행위로 간주하는 것이다. 단지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이것이 실천적 유익이 될 수 없다. 칭의가 우리 심령에서 인식되는 것은 믿음이라는 인식의 수단이자 그리스도와 연합의 도구로 알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 칭의를 인식함과 확신은 결국 성화의 열매들에 의해서 방증될 뿐이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 전통적으로 개혁파 신학자들이 칭의와 성화를 나눈 것은 세미펠라기안 때문이었다. '의의 주입'이라는 교리를 극도로 싫어했고, 그 의로 우리가 선행을 하고 그 행위로 종국에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는 우리 행위 개입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제거하려는 신학적 장치인 것이다. 그래서 칭의는 법정적인 성격으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구원파적 사고와 구원에 대한 확신의 남발 및 거기서 비롯된 도덕적 타락과 해이는 이 능동적 칭의가 어떻게 우리 심령에서 확인되는가 하는 점을 간과해왔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칭의와 성화를 잘 구분하되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곧 칭의(능동적 칭의)-믿음-결정적 성화(수동적 칭의)-점진적 성화라는 구도가 가장 성도들이 오해 없이 이해하기 좋은 구조다. 이런 점에서 패더럴 비전(FV)이나 바울에 관한 새관점(NPP)의 등장은 능동적 칭의에 대한 강조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능동적 칭의를 느슨하게 강조해온 것이 불러온 참사라 할 것이다. 교회에 등록하면 제자훈련이라는 명목으로 복음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곧바로 구원의 확신으로 넘어간다. 그 확신은 대게 칭의의 법정적 성격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단독적 사역이라는 강조점으로 이뤄져 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유사 그리스도인이 양산되었다. 그 결과 교회 안에 도덕적 해이는 이제 거의 붕괴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점이 칭의에 대한 유보적 시각을 역사 속에서 다시 불러내었다. 그리고 이렇게 유보된 칭의는 믿음과 성령에 의한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행위를 칭의의 영역에 불러들인 잘못된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패더럴 비전(FV)이나 바울에 관한 새관점(NPP)은 그냥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장로교회가 칭의와 성화를 잘못 가르친 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칭의의 법정적 성격은 계속 고수되어야 한다. 이 칭의가 우리 안에서 확인되는 지점은 성화의 영역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되 분리하지 말아야 하는 지점이 여기라 할 수 있다.
1152 |총회교직자 수양회 특집 <마지막회>| 우리의 위로_김병훈 교수 파일
편집부
1565 2016-06-07
우리의 위로 딤후 4:6-8 < 김병훈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돌아보며 디모데에게 설교 사역을 간절히 부탁하고 권면하고 명령을 합니다. 앞서 1절에서 바울은 설교 사역을 지상 최대의 지엄한 기준으로 디모데에게 명하였습니다: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이 명령은 어떤 조건을 들어 순종여부를 결정하거나 불순종을 핑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쓸 일이요”(2절), 또한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 사욕을 따르며 허탄한 이야기를 따를 것이지만”(3-4절) 해야 할 일이며, 또한 “고난을 받아도”(5절) 해야 할 일입니다.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하되 신중함으로”(2절) 할 것이로되, “경책하여” 죄를 들어내고, “경계하여” 죄를 꾸짖으라(2절)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으로 부드럽게 돌보며 이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1. 임박한 죽음과 당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설교 사역을 명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설교 사역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설교 사역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 곧 그리스도의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전하는 바울 자신의 실존 상황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고 말합니다.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예견하고 전제애 빗대어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는 이제 곧 죽을 날이 가까이 왔구나! 그런즉 네가 나의 말씀 사역을 이어야겠구나. 디모데야 두려워 하지 말고 말씀을 전하라!” 이것은 일찍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다윗이 솔로몬에게 당부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찍이 모세는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네 앞에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신 31:7-8).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까닭은 다름 아니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여호수아에게 이르시기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윗은 솔로몬에게 명하기를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2-3)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동일한 명령과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며, 지키게 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행하라.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2. 회고와 소망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는 말은 이제 닻을 올리고 출항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떠난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고 바다를 향해 목적지를 향해 나가는 출발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생애를 마치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간다는 희망이 앞에 있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곧 임박한 순교의 때를 당하게 되는 지금에 이르러,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말하면서, 자신이 걸어온 나그네 신앙 여정의 요약을 제시합니다. 먼저는 과거를 돌아보며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7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선한 일을 위하여 싸워왔고, 또한 싸움을 굴하지 않고 잘 싸워냈다고 말합니다. 또한 자신이 달려가야 할 모든 길을 다 마쳤다고 말합니다. 이것으로 말하는 바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믿음을 지켰다”는 것은 주 예수께 받은 진리의 복음을 잘 보호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의 약속을 믿고 사역을 감당했다는 뜻합니다. 바울 자신이 이 모든 싸움을 감당하고, 경주를 끝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온 전적인 신뢰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바울 사도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지 않았다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력하지 않았을 것이며, 주님 앞에 서는 날에 받을 상을 기대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미래의 소망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이제 후로는 자신을 위하여 예비된 의의 면류관”(8절)을 바라본다고 말합니다. 그의 과거와 미래가 서로 분리되거나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과거는 바로 미래의 소망으로 인하여 빚어진 것입니다. 바울이 미래의 소망을 바라보는 것은 과거에 수고한 자신의 노력을 대가로 공로를 바라며 주장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인하여 수고를 다 한 후에,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서 주신 신실하신 약속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상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확신은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성을 믿기 때문이며 또한 재판장의 의로움을 믿기 때문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가 주실 의의 면류관이란 영원한 생명이며(딤전 6:11-12), 생명의 면류관이고(약 1:9-12; 계 2:10),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후 9:25)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서 우리는 바울 사도와 동일한 내용의 교훈을 듣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 장막을 벗을”(벧후 1:14) 임박하였을 때, 그의 교회에 유언처럼 남기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베드로 사도는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기를 원하는 교훈”(12절)이며,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바로 그 교훈”(13절)이며,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 생각나게 하기를 힘써 원하는 교훈”(15절)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토록 절박하게 간절히 당부를 합니까? 그 답은 11절에서 확인이 됩니다.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날에 들어감”입니다.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의 인생과 사역은 한 구절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빌 3:14) 인생입니다. 이들이 바라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그 날에 받을 칭찬이었습니다(고후 5:8-10). 3. 믿음의 사람들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믿는 모든 사람들도 함께 갖는 소망입니다(딤후 4:8b).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특이하게 볼 것 없습니다. 누구나 죽으니,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만날 것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바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즉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은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몇 사람들을 열거합니다. 노아는 왜 방주를 만들었습니까?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일에 경고를 받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7절).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계획하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 때문입니다(10절). 아브라함은 왜 이삭을 제물로 드렸습니까?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고 알았기 때문입니다(19절).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과 그 약속을 지키실 능력이 있으시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을 받기를 애굽에서 죄악의 낙을 누리기보다 더 좋아한 까닭은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26절).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까닭은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수 2:11). 히브리서는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을 손꼽자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히 11:32).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끌어 오신 믿음의 사람들, 그들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정리하여 답을 줍니다. 히브리서 11장 13-16절이 그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러하므로 어찌하겠습니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히 12:1-2)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4. 결론: 우리의 위로는 하늘 본향 결국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을 따라 죽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일의 원인을 성질에 따라 분류할 때, 소위 목적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일의 원인을 분별할 때 그 일을 행한 목적이 벌어진 일의 원인으로 보는 관점을 반영하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여행에 빗댈 때, 목적지에 의하여 모든 여행 경로와 방편 등이 결정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수련회 장소에 오면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으로 가시는 분은 안 게실 것입니다. 목적지는 비록 시간적으로는 제일 나중에 나타나는 일이지만, 그 끝에 이르는 전체 과정을 다 지배하고 결정을 짓는 우선성을 갖습니다. 논리적으로 가장 우선하며, 모든 과정의 가치를 결정짓습니다. 소련에 끌려간 고려인들은 한국 방송을 들으며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랜다고 방송에서 들었습니다. 해외 동포들은 누구나 공감하는 말일 것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돌아갈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며 삽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주파수는 하나님 말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익히고 그것에 따라 살아갑니다. 목사는 성도들이 외인이요 나그네로 사는 이 세상에 하늘 본향의 소식을 들려주는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풀어 설교하는 일이며, 신앙고백서과 요리문답으로 가르쳐서, 잡음이 없이 깨끗하며 순수한 말씀을 듣도록 하는 일입니다. 성경을 열면 하나님 나라가 보이고, 성경을 덮으면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무엇을 설교 하여야 하겠습니까? 마치는 말 여러분이 임종을 할 때 자신의 사역이 무엇으로 요약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주신 의의 면류관을 바라며, 믿음을 따라 사역을 하다가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정리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까? 임종을 맞이하는 날에는 드러납니다. 그가 복음을 따라 살고 죽은 자인가 그렇지 않은 자인가는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로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 가운데 바울 사도의 고백과 유언을 들은 것이며, 또한 베드로 사도의 고백과 유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부족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정암 박윤선 박사님이 계시고, 또 가장 최근에는 신복윤 교수님도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도 곧 그 행렬에 합류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족할 것입니다. 마지막에 세상을 떠날 때, 여러분의 묘비에 “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을 따라 하늘의 본향으로 돌아간 성도 나그네 아무개”라고 기록되는 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목회란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는 나그네로 살면서 예수를 증언하고 성도들이 이 행렬에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경주할 수 있도록 전도하고 이를 가르치며 일깨워 세워가는 헌신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그리스도를 배우며 사랑하는 교회, 이 땅의 교회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수고하시고 약속된 의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영광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1151 |총회교직자 수양회 특집 <3>| 바른 신학과 경건_김병훈 교수 파일
편집부
1548 2016-06-07
바른 신학과 경건 엡 4:17-24 < 김병훈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 총회교직자 수양회 주 강사인 김병훈 목사의 셋째 날과 넷째 날 강의를 특집으로 마련했다. 독자들에게 많은 유익이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주> 경건은 신앙생활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건생활을 예배출석, 기도, 성경읽기와 같이 관찰 가능한 종교 행위들만으로 측정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외적인 측면에서의 생활들이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들만으로 충분하게 여긴다면 종교 형식주의에 머무는 잘못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별로 없겠으나, 목회실제에 있어서는 종종 이러한 외적 생활을 강조하고 이것으로 다소 안도를 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1. 경건생활의 토대: 그리스도를 배워가며 본받음 본문 엡 4:17-24이 주는 경건생활의 교훈은 분명히 영적이며 또한 도덕적입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본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의 토대와 출발은 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로 요약이 됩니다. 목사의 으뜸가는 책임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설교는 성경을 풀어내는 것이어야 하며, 꾸준하게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도를 불러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고(롬 8:29)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갈 4:19)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2. 이방인이 사는 것 같이 살지 말라 그리스도를 배운 자들에게는 변화가 요구되며 또한 기대가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가졌던 이방인들과 같은 생활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삶이란 17절에 말하듯이 “허망한 것을 생각하고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요약이 됩니다. 썩어질 것, 결국 사라질 것, 그 자체가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을 바라며 사는 생활 입니다. 이러한 생활에 대하여 18절에서 보듯이 성경은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져 있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기” 때문이며, 그 결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임을 밝히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19절에서 이들이 분별력이 없이 감각을 잃은 자들처럼 방탕함에 빠져 온갖 더러운 것들은 끊임없이 갈망하며 살아간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자들이 비참한 모습은 한마디로 이성이 없는 짐승과도 같은 상태와도 같을 뿐입니다. 이러한 생활에서 떠나기를 요구하면서, 사도는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믿음의 지식을 상기시킵니다. 즉 그리스도를 배웠을 때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겸비하여 돌이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자가 되었을진대, 이방인이 사는 것 같이 예전 생활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3.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 사도는 21절에서 그리스도를 배운 사실을 다시 풀어 명령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듣고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옛 사람이란 죄를 짓도록 속이는 욕망으로 인해 부패한 심령을 좇아서, 회심 이전의 생활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자아를 뜻합니다. 반면에 새 사람이란 심령이 새롭게 되어 이러한 모든 일에 있어서 태도가 달라진 자들을 말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진리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하나님을 닮아가는 모습으로 새롭게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앙생활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하여 살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오류 가운데 하나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을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의 지위를 갖게 되는 것으로 본문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는 영적 도덕적 상태의 변화가 먼저 이루어질 때에라야, 또한 새 사람을 입는 변화를 통하여 비로소 신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것은 은혜의 복음이 가르치는 바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잘못된 것입니다. 또 다른 오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인 만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일은 구원에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잘못된 이해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상태의 변화가 단지 구원의 사실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부가적인 것으로 여기며 변화를 요구하는 명령을 구원받은 자가 받을 상급을 위한 것으로 그릇되게 가르칩니다. 본문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또 “새 사람을 입으라”는 표현이 명령이면서도 또한 결과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바르게 주목하는 데에 있습니다. 첫째는 순종여부에 따라 구원을 받는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지 않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애초부터 배워 알지 못하므로 이방인과 같이 살 뿐이므로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는 명령이 무엇인지,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명령은 구원을 받기 위하여 행할 일을 지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 명령은 부가적인 선택도 아닙니다. 본문의 명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상태의 변화를 일깨우고 촉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이미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은 즉 옛 사람이 아니며, 새 사람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그러한 신분의 변화에 따라 합당한 결과, 곧 상태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일진대, 변화된 새 사람에게 합당한 열매를 맺고, 옛 사람의 상태를 벗어 버리라”고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4. 칭의와 성화의 올바른 이해 그리스도인의 경건생활 문제는 대체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칭의와 거룩한 생활로 이끌어 가는 성화의 은혜에 대하여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이와 관련하여 명확하게 설명을 합니다. 먼저 70문답에서 의롭게 하심에 대하여 이르기를 “죄인들에게 값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죄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자로 받아주시고 간주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완전한 죗값의 속상” 때문이며,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다고 교훈합니다. 또 75문답에서는 성화에 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이며, 그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들의 전 인격의 새롭게 됨을 받으며,” “더욱 더 죄에 대하여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자라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요컨대 의롭게 하심이란 진노의 대상인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바꾸어 주시는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며, 거룩하게 하심이란 이러한 신분의 변화를 주신 자들을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죄에 대하여 죽고 새 사람이 되도록 영적, 도덕적 상태를 바꾸는 은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칭의와 성화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단일한 구원의 은혜의 두 측면이기 때문에 서로 분리되거나 어느 하나가 없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과 그에 합당한 상태의 변화는 분리될 수가 없으며 반드시 함께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77문항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밝혀 줍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일은 의롭게 여기시는 일과 분리될 수 없도록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여기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는 것이고, 거룩하게 하실 때는 성령의 은혜를 주입하시며 그것들을 실행할 수 있게끔 합니다. 전자에서는 죄를 용서받으며, 후자에서는 죄를 억누릅니다. 전자에서는 모든 신자들이 벌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똑같이 면제를 받으며, 이 세상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며, 결코 다시 정죄에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후자에서는 모든 신자들이 똑같지는 않으며,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되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단지 온전함에 이르도록 자라갈 따름입니다.” 성화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활동입니다. 따라서 회개의 생활로 죄를 죽이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살아가는 신앙의 노력과 이를 위한 은혜의 간구가 없는 불경건한 사람은 신자라 스스로 칭할지라도 구원의 증거를 갖지 못하고 있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성화는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또한 유념하여야 합니다. 자신에게 발견되는 죄의 모습, 곧 옛 사람의 모습으로 인하여 성급하게 자신이 구원을 받지 못한 자라 단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78문항은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성화는 불완전하다는 사실과 그 까닭에 대하여 설명을 합니다. “죄가 그들의 각 부분마다에 남아 있으며, 육체의 지속적인 정욕이 성령을 거슬리기 때문에” 신자라 할지라도 성화는 불완전하며, 그렇기 때문에 “시험에 종종 넘어지고, 많은 죄에 빠지며, 영적인 봉사를 행함에 있어 방해를 받게 되고, 그들이 행하는 최선의 일조차도 하나님 보시기에 불완전하고 정결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만다”고 교훈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명령은 구원을 받기 위함도 아니며, 또한 구원을 받은 자에게 부가적으로 상을 주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존재론적 변화를 반영하는 명령입니다. 비록 신분적으로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죄가 각 부분에 남아 있기 때문에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명령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격의 새로움을 증진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새 사람을 입으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목사는 설교를 통하여 신자의 경건생활이 필연적으로 나타나도록 권면을 하고 경책하며 경계하여야 합니다. 5. 성령 하나님의 사역과 경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신자들에게 성화의 경건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까닭에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바르게 알기 위하여 소위 개혁신학의 성령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객관적 사역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끄셨으며, 또한 주관적 사역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용하십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사역을 생각해 봅니다. 성육신 하신 일로부터 승천하여 그리스도의 영으로 교회를 다스리시는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이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의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원죄가 없이 거룩하게 잉태되셨으며,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충만한 가운데 성장 하셨으며,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받은 왕, 선지자, 제사장의 직임에 취임하셨습니다. 특별히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도록 내모셨습니다. 그리고 시험에 승리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뭇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선한 일을 행하실 때, 그것은 모두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신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의 사역도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그의 부활도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성결의 영으로 인한 것입니다. 승천 이후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보혜사로서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이행하십니다. 이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 가운데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객관적 사역을 이루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도록 죄인들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의롭다함을 받도록 하시고, 또한 그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성화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져 무지하게 되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던 자들을(엡 4:18), 중생케 하시고(요 3:5), 우리 안에 거하시며(요 14:16-17),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시고(고전 3:16),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십니다.(롬 8:29) 그리하여 오늘 살핀 본문의 말씀대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격적 순종을 명하시고 자라가라고 성장을 촉구하십니다(벧후 3:17,18). 이러한 성령 하나님의 사역은 단일하기 때문에 분리할 수 없으며, 또한 변개치 않으십니다. 그러하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선택을 받은 죄인들에게 중생의 은혜를 주시어 믿음을 고백하고 의롭다함을 받게 하시고, 그러한 자들에게 거룩한 변화의 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가시는 성령 하나님의 일에는 어떠한 취소나 중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비록 성화에 있어서 불완전하더라도, 그가 참 신자라면 그들에게 있게 되는 시험들과 죄로 인하여 은혜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다고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79문항을 가르칩니다. 바로 이러한 보호하심이 교회에 주신 권징이라는 표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목사는 성경을 풀어주는 말씀을 통하여 경책과 경계를 행하며 또한 권함으로써, 연약한 상태에 있더라도 참 신자들로 하여금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은혜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보호를 받도록 하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보호를 위한 예방책이 바로 경건의 생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필연적인 사역입니다. 6. 바른 경건생활과 기도 죄인은 본래 자기 소견대로 행하기를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도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의 부패한 사례들은 소돔과 고모라가 이스라엘 밖 어딘 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 안에, 그들 마음에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생활의 여부를 외적인 신앙활동만으로 판단하는 것을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외적인 활동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신앙활동들을 행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경건생활에서 멀리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면서 경건생활의 가장 뚜렷한 표지인 기도를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높이며, 그의 나라의 통치를 바라며, 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도와 같은 경건생활이 무엇을 지향하여야 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기도는 자신이 바라는 것과 필요한 것과 불만스럽게 여기는 것만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자신의 고통과 아픔이 죄 아래 있는 이 세상에서 피할 수가 없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어진 것임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을 들어주시기도 하시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응답하셨음을 믿고 인내의 믿음으로 감사하는 내적인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그 기도는 경건생활을 이루는 기도가 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아무리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경건하지 않은 자일 수도 있게 됩니다. 마치는 말 우리의 스승, 정암 박윤선 박사의 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들려드립니다. 근년에 이르러 물량주의가 팽창해 가면서 교회는 그 성결성(혹은 순결성) 교리를 지키지 않는 경향이 보인다. 성결성 교리는 교회의 5대 본질 (단일성, 보편성, 성결성, 사도성, 불멸성) 가운데 하나로서 그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생활의 순결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가 바른 교리를 문서로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족한 것은 아니다. 교회가 그것을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하며, 또 교리를 거슬리는 생활이나 행정을 용납하지 말하야 한다. 그런데 현하 개신교계는 은근히 가톨릭을 닮아가는 것 같은 현실이 아닌가? 교리의 순결보다 외부적인 교세 확장을 우선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회는 세력 단체가 아니요 증거 단체이니만큼 양보다 질을 앞세워 신자들의 성화를 중요시해야 된다. 이를 위한 구체적 작업은 건전하고 깊이 있는 신학 운동과 집중적인 평신도 훈련 및 성경적인 권징 시행이다.
1150 no image |총회교직자 수양회 특집 <2>| 바른 신학과 목회_김병훈 교수
편집부
1399 2016-05-24
바른 신학과 목회 엡 4:1-16 < 김병훈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부르심이란 첫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목사로 세움을 받은 우리들은 목사로서의 부르심과 관련해 적용의 교훈을 받습니다. 1. ‘성도의 부르심’에 담긴 의미 먼저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신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며(엡 1:5), 또한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며(엡 1:7),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기업을 얻는 상속자가 되었음을 뜻합니다(엡 1:11). 아울러 성도의 부르심은 성도의 상태적 변화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끔”하기 위한 목적을 갖습니다(엡 1:4). 이것이 목적인 까닭은 부르심을 받았다 할지라도 곧 바로 이루어지는 사실이 아니라 이루어져야 할 당위적인 목표이며 또한 반드시 이루실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부르심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한 것이라는 목적을 갖습니다(엡 1:6,12,14). 요컨대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이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빚어 가시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잘 알려진 에베소서 2장 1-10의 말씀은 이러한 부르심의 의미를 구원론의 관점에서 선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2. 조직체로서의 교회와 유기체로서의 교회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란 성도들을 향한 이러한 부르심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입니다. 그리고 목회란 교회를 통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을 수종드는 목사의 직무활동입니다. 따라서 바른 목회를 감당하기 위하여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에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가에 대해 올바른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11-16절의 말씀은 교회에 관하여 두 가지 측면을 교훈합니다. 하나는 조직체로서의 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우리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되 목사라는 직원을 두시는 조직체로 세우셨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는 필요에 따라서 사람들이 임의로 세운 기관이 아니며, 또한 더 나은 조직 구성체를 생각하고 목사직을 임의로 폐기하여서도 안 됩니다. 교회가 있는 곳에는 목사가 있어야 하며, 목사가 없이는 교회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559년에 작성된 프랑스 신앙고백서는 25항에서 “이제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권위로 세워진 교회의 제도는 신성해야 하며, 가르치는 직분인 목사들이 없이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교인들은 목사들이 정당하게 부르심을 받고 그들의 임무를 충실히 다하면, 그들의 가르침을 존경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제도를 두심은 그들의 도움과 종사자들이 반드시 필요해서가 아니고, 그러한 제도로 우리를 다스리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설교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직분을 없애려는 모든 신령주의자들을 배격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다른 교회의 측면은 유기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본문 15-16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는 말씀은 교회가 이루어야 할 내적인 성질을 교훈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조직체로서의 교회가 직분과 방편을 통해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드러낸다면,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성령의 은사들과 재능들을 다해서 서로 연합하여 영육 모두 선을 이루어 가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나타내셨던 역사적인 신약 교회의 모습에서 교회의 두 가지 측면이 모두 반영이 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47절 말씀 가운데,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는 것은 조직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표현하며, 또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의 말씀은 유기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도시대에 이루어진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바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지상명령, 곧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이 의도한 이상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조직체로서의 교회의 측면이 필요하며, 또한 가르침을 받아 그것을 지키는 모습 가운데 유기체로서의 교회의 측면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3. 목사가 가져야 할 교회론적 인식 그렇다면 목회는 무엇을 하여야 하며, 또 무엇으로 목회가 진실하며 신실하게 이루어졌음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교회론의 맥락에서 답이 주어집니다. 곧 교회가 조직체로서 견실하며, 유기체로서 열매를 드러내도록 노력하는 목회일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 일은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므로, 사람이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직체로서의 교회와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분리된 두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의 두 가지 모습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목사는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에 필요한 자신의 직무를 선히 감당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목사는 기관으로서의 교회를 보여주는 교회의 표지를 충실하고 바르게 드러내도록 해야 합니다. 칼빈이 교훈하는 바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순결하게 선포되고 그 말씀을 들으며,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규례를 따라서 성례가 시행되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의심할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합니다”(기독교 강요 4.1.9), 여기서 목사는 어느 교회가 교회의 표지를 충실히 다 행하고 있다고 하여도 그 교회의 교인들이 모두 영적으로 부요한 것은 아니며, 목회란 연약한 성도들이 자라나도록 하는 일이라는 점을 유념해 두어야 합니다. 1566년에 작성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교훈을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참된 교회의 지표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좁게 보고 다음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즉, 고의적으로 성례를 멸시하지 않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본의 아니게 성례에 참석하지 않거나 못하게 된 사람들, 비록 때로는 믿음에서 떨어질지라도 완전히 없어지거나 아주 믿기를 그치지 않는 사람들이나 혹은 연약하기 때문에 불완전함과 잘못을 노출하는 사람들은 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로 간주하지 않는다 .... 자기의 주인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방황하거나 연약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신실한 백성에게 날마다 어떤 일이 있어 왔는지 우리는 안다. 그리고 사도 시대의 갈라디아와 고린도에 있던 교회들이 어떤 교회였는지 우리는 안다. 사도 바울은 그들 교회에서 심각한 범죄를 동반한 결점들을 발견하였으나, 그럼에도 그는 그 교회들을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라고 부른다(고전 1:2, 갈 1:2)”(17장 14항). 비록 하나님의 말씀은 올바른 선포와 성례의 적법한 시행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은혜를 받아 자라나며 열매를 맺는 일에는 차이가 있으며, 개 교회마다 또한 서로 차이가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의 연약함과 성장의 더딤을 참아내지 못하고 정죄하는 태도로 대하거나, 그것을 들어 교회가 아닌 것으로 단정하는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사도들과도 다르며 개혁신학자들과도 다른 것입니다. 조직체로서의 교회의 측면이 시행이 되고 있으면, 비록 유기체로서의 교회의 측면이 연약하더라도 여전히 참 교회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여야 합니다. 동시에 교회에는 가리지가 섞여 있음을 목사는 유념해야 합니다. 다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교훈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체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이 다 성도, 즉 살아 있는 진정한 교회 지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만 듣고 사람들 보는 데서 성례를 받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같고, 그리스도를 그들의 유일한 의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예배해하고 사랑을 베푸는 의무를 수행하며, 불행 중에서 한 때는 참음으로 견디는 것처럼 보이는 위선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적으로 성령의 참 조명을 받지 못하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믿음과 진실함과 끝까지 이르는 견인을 갖지 못하고 있다”(17장 16항). 연약한 교회에 또한 가라지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목사는 한편으로는 교인들이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도록 신앙을 격려하며 가르쳐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라지가 일어나 목사의 진리사역과 교인들의 거룩한 생활에 해를 깨치는 자들을 가려내어 이러한 자들이 교회 내에서 번성하지 않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혜의 방편, 곧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를 바르게 시행하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가라지가 혹시라도 드러나거나, 또는 연약한 교인의 신앙적 나태와 방종을 다스리는 권징이 시행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목회적 책임이란 단순히 교회의 외형을 크게 하는 것일 수가 없습니다. 목회적 책임이란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를 바르고 적법하게 시행하여, 교회에 주신 은혜의 방편을 통해 은혜를 받아, 성도들을 성장토록 하며, 가라지들에게서 보호를 받도록 하기 위하여 성실을 다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4. 목사가 가져야 할 목양의 자세 목사가 이러한 엄중한 목회의 책임을 감당하기 위하여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은 “성령 안에서 겸손과 온유한 심령으로 오래 참고 서로를 용납하는” 자세로 행할 것을 교훈합니다. 한국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 가운데 연약한 교인을 질타하고, 또 다른 연약한 교회를 비방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목사는 목양을 함에 있어서 교인들에게서 용서를 받으며 목회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아야 합니다. 목사도 연약한 성도로 목사의 직무를 감당하면서 교인들을 대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많은 허물들을 교인들에게서 용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양무리의 본이 되기 위하여 노력을 하되 그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여서는 안 됩니다(벧전 5:2-4), 오히려 교인들이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힘써야 하듯이, 목사는 친절과 불쌍히 여김과 용서의 태도를 반영하는 목양의 사역을 행하여야 합니다. 5. 목회의 목표: 진리와 사랑 목사가 힘써야 하는 목양의 활동, 곧 목회는 결국 두 가지 초점으로 모아집니다. 에베소서 4장 13-16에서 이르듯이, 온 교인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은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게 하며, 서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사랑 가운데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곧 하나는 기관으로서의 교회의 책무인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유기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인 사랑이 풍성하게 드러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점에서 어느 하나라도 현저하게 부실하게 되면, 교회가 교회답지 않다는 평가를 듣게 됩니다. 이 가운데 우선적인 것은 물론 진리의 말씀 사역입니다. 사랑의 열매는 진리의 말씀 위에서 자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보는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는 바로 목양의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을 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소망과 기업의 풍성함과 능력의 크심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할 때(엡 1:17-19) 그것은 바로 진리 사역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 너희가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가기”를 기도할 때(엡 3:16-19) 그것은 바로 사랑의 충만함을 위한 것입니다. 6. 목양의 책임을 감당할 방편: 성경 강해와 요리문답 이러한 목양의 책임을 감당하기 위하여 목사에게 주어진 것은 소위 은혜의 방편이라고 일컫는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시행, 그리고 기도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지탱하며 성장시키는 매우 강력한 방편들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성례는 보이는 말씀으로서, 보이지 않는 말씀의 올바른 선포와 더불어, 성도들에게 은혜를 공고히 해줍니다. 이러한 은혜의 실행과 강화는 신비로운 일이므로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로 그 응답을 받습니다. 목회자들은 성경을 풀어주는 설교를 행하며, 또한 요리문답을 적절하고 꾸준하게 가르치기를 바랍니다. 요리문답은 신앙의 실천을 위한 아주 구체적인 지침을 교훈합니다. 목회의 실천적 방안이란 신앙의 실행을 위한 것이며, 그것에 관한 것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요리문답입니다.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며 무엇을 믿어야 하며 행하여야 하며 또한 바라야 하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은 요리문답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무엇인지를 또한 가르쳐 줍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지, 다른 사람이 세례를 받는 동안 이미 세레를 받은 나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 것인지, 성찬을 받을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등은 모두 실천적인 내용이며,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요리문답은 답을 줍니다. 요리문답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단순한 지식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참된 신앙은 사랑을 열매로 맺는 법이듯이, 요리문답은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교훈하며, 그리하여 성화와 사랑의 결국을 향하여 나가도록 교인들의 믿음을 이끌어 갑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일곱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들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결국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목회란 무엇입니까? 진리의 말씀에 충실하며, 그리스도와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데에 있음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른 신학 위에서 바른 목회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회피할 길이 없습니다. 마치는 말 정암 박윤선 박사님의 글 “개혁교회의 목사상”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시대의 ‘개혁’이란 것은 이미 성경대로 이루어 놓은 개혁교회를 그대로 잘 지키자는 교회 운동이다. 이같이 종교개혁의 유산을 잘 지켜 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책임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말하면, 오늘날은 비참하게도 교회 교리가 불신임을 당하고 있는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개혁운동이 교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어느 교회든지 교리를 문서로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교리를 가졌다고 할 수 없다. 교리를 문서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교리를 수호하지 않는 교회는 문제가 있다. 오늘날 교회들은 동서양을 물론하고 좋지 못한 유사점이 있으니, 그것은 참 교회의 세 가지 표지 가운데 하나,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바로 전해야 하는 이 문제에 있어서 너무나 미급한 형편이라고 생각된다. 목회자들은 그 자신이 성경을 바로 깨닫고 바로 전하는 성경 중심의 목회를 하려고 계속 힘써야 된다. 그뿐 아니라, 권징 시행을 바로 하는 것이 참 교회의 표지인데, 오늘날 교계에는 권징 시행이 거의 없는 실정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권징을 바로 시행하는 때에 교회의 권위가 서게 되고, 주님의 영광이 교회에 나타나게 되고, 온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다 함께 정신을 차리게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거룩한 삶이 나타나게 된다. 목사는 신자들에게 성경을 명확하게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분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또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과 강권을 받아서 진실과 인내로써 주님의 교회를 희생적으로 봉사하도록 지도할 책임이 있다 <개혁교회의 목사상, 『성경과 나의 생애』>
1149 no image |총회교직자 수양회 특집 <1>| 바른 신학과 설교_김병훈 교수
편집부
1634 2016-05-24
바른 신학과 설교 딤후 3:10-4:5 < 김병훈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 본문의 말씀을 통해 상기하고자 하는 교훈은 설교자란 어떠한 자이며 설교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1. 명령의 무게: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설 것을 기억하라 먼저 설교자란 명령을 받은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2) 하셨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명령의 권위와 엄중함의 무게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1절에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 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장수가 부하 병사에게 명령을 주는 듯한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들에게 아주 확실하게 설교자로서의 직무를 다할 것을 밝히 명령하십니다. 사도의 말씀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알고 사역의 부름을 받은 것 아니냐?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또한 이 세상을 그의 뜻대로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이 되면 심판하실 것이니, 그 날에 산 자들이나 또 그 날에 이미 죽은 자들이나 모두 심판을 받을 것이다. 설교자들이여 기억하라, 그의 나라가 임할 때 여러분들이 어떠한 심판을 받을 것이지 기억하라.” 이렇듯이 무거운 명령을 받은 설교자는 설교 사역을 가볍게 대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마지막 날에 주님을 뵐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 날에 명령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또한 확실히 믿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설교자를 향한 명령의 권위가 이러한 만큼, 설교에 목숨을 걸라고 명하십니다. 그 목숨은 이 세상에서 사는 잠깐 동안의 목숨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영원한 생명을 걸라는 압박의 무게로 명령을 하십니다. 이보다 엄숙하며 장엄한 명령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어떤 일이 이보다 더 크고 무거운 책임을 요구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절대 명령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명령이며, 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명령을 받는 자의 존재 목적을 결정하는 명령입니다. 2. 설교자의 상황: 바른 교훈을 전하라.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따를 것으로 생각하지는 말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반역의 시대에 설교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4-5)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세상에서 환영을 받기는커녕 배척과 위협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가 겪을 환경이 이러할 것임을 미리 아시며, 또한 충분히 알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며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눅 10:1-3)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 상황 가운데로(딤후 4:3-4) 설교자들은 보냄을 받습니다. 설교자의 상황은 어려울 것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바른 교훈을 전하기 때문에 겪게 되는 어려움입니다. 만일 바른 교훈을 전하지 않고, 또한 사람들의 사욕에 비위를 맞춘다면, 결코 겪지 않아도 되는 어려움입니다. 따라서 본문이 3-4절에서 교훈하는 바는 환영을 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바른 교훈을 전하기에 힘을 쓰라는 것입니다. 바른 교훈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딤후 1:13)에서 보듯이 사도에게서 들은 말씀, 곧 복음의 교리입니다. 디모데에게 명하면서 상기시키고 있는 바울 사도가 행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를 들어 사도행전 17장 2-3절에서 보듯이 다만 성경을 풀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오직 성경을 강론하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강론하는 것, 이것이 진리를 전파하는 바른 교훈이며, 또한 거짓교사를 분별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준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강론하는 설교자에게 “어찌하여 당신은 우리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여 우리의 마음을 곤란하게 하며, 우리를 잘못되었다고 하는가? 우리가 듣고자 하는 말들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여 가르치는 선생이 얼마나 많은 줄을 아는가? 보라 당신만이 옳은가?”라고 힐문하며 바른 교훈의 말씀에 저항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청중의 반응과 규모가 바른 교훈을 전하는 설교인지를 판단하게 하는 기준이지 못할 때가 더 많을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너무 경직된 말일까요? 요컨대 사람들이 기뻐한다고 하여 목사는 성급하게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 얼버무리고 세상 이야기나 도덕교훈을 담아 감상적 이야기를 전했는데 반응이 끌려온다면 그것은 은혜를 받을 것이 아닙니다. 듣고 싶은 것을 들어서 나온 반응일 뿐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를 바르게 했는가를 결정짓는 객관적인 기준은 오직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3. 바른 교훈을 전하는 설교의 효과와 설교자의 자세 모름지기 바른 교훈을 전하는 설교가 환영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설교가 일으키는 효과들 때문입니다. 설교를 바르게 하면 경책과 경계의 효과(딤후 4:2)가 나타납니다. 경책하라는 것은 죄를 드러내라는 말씀이며, 경계하라는 것은 죄를 용납하지 말고 그 죄를 꾸짖으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설교가 죄를 꾸짖는 효과를 낳지 못한다면, 그러한 효과를 회피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설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한 죄인은 누구라도 죄를 상기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바른 설교도 또한 경책과 경계를 줍니다. 그런데 설교가 이러한 효과를 갖는 만큼, 설교자가 자칫하면 정죄하는 자세를 갖기 쉽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위험성을 고려하여, 설교자의 태도에 대해 부드럽게 돌보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권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하라고 명령합니다. 설교자가 전하는 복음은 설교자에게 이미 권하며 오래 참음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딤전 1:15-16), 설교자 스스로 마땅히 그러한 은혜를 입은 자로 성도를 대하여야 합니다.(예, 고전 3:1-8) 4. 설교자의 직무: 결과론적인 성공이 아니라 바른 말씀의 선포 설교자가 그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는가에 대한 판별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았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것은 중요하며 더 없이 기쁜 일이지만, 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본문은 설교자가 마땅히 직무를 다할 것을 명령합니다(5절). 설교자의 직무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59에 따르면, 말씀 사역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1)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지런히 바른 교리를 설교해야 하며, (2) 쉬운 말로 하며, (3) 사람의 지혜로 사람을 끌려고 하기 보다는 성령과 능력이 나타나도록 해야 하며, (4)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낱낱이 충성스럽게 알게 하며, (5) 청중이 무엇을 필요로 하며 받아들일 것인지를 알아서 거기에 자신들을 적응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6) 하나님과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불붙는 사랑을 가지고 열심을 다하며, (7)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음과 동시에 (8) 사람들이 거듭나고 교화를 받아 구원에 이르도록 열심을 다해야 한다. 설교란 성경을 가르치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보다도 성경은 진실로 특별한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면 어떠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일을 온전하게 이룰 수가 없으며, 그 결과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도록 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 설교는 교인들을 죄 가운데서 죽도록 방임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에 다른 이야기를 섞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세우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을 섞으면 그것은 설교자의 직무를 바르게 감당하지 못할뿐더러, 더 나아가 성경의 가르침을 훼손하거나 심지어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죄를 범할 우려가 높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설교가 성경을 풀이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설교가 과연 신앙고백서과 요리문답과 같은 신앙의 표준문서의 교훈에 일치하며, 그것을 반영하고 있는가에 의하여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면 충분하다는 주장을 내세워 만일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과 같은 표준문서들을 무시하는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해석이 성경의 권위를 차지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항상 해석을 통해 읽혀지는데, 신앙표준문서에 의하여 자신의 해석을 통제받지 않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해석이 곧 성경이 되는 매우 잘못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러한 오류의 전형을 바로 이단에서 봅니다. 설교자가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늘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을 익히고, 또한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목사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그리고 설교가 그 가르침에 일치할 때, 비로소 그 교회는 보편교회에 속한 교회로서, 적어도 장로교회에 속한 교회로서 참 교회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바르게 행할 때에라야 교인들에게 바른 태도로 설교를 듣도록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문항 160에서 설교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요구할 사항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요구할 것은 말씀을 듣기 위하여 열심을 다하여 준비하고 기도함으로써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이 듣는 것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검토하고, 진리를 믿음과 사랑과 온유함과 열린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참고하며, 마음에 간직하며, 생활 속에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한다.” 요컨대 교인으로 하여금 성경의 교훈을 알고 그것을 적용하여 열매를 맺도록 하는 일이 설교자가 교인들에게 행하여야 하는 직무인 것입니다. 마치는 말 정암 박윤선 목사의 음성을 다시 들으시기 바랍니다. 교계에는 신학 무관주의의 경향도 적지 않다. 즉 신학은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지 학문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고, 실제로 신앙생활만 바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운동에 시비를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의 신학은 그의 신앙과 그의 성경관에 영향을 미친다. 그의 신학이 바르지 못하면 그의 성경 해석이 바르지 못하므로 듣는 자들의 신앙을 무너뜨린다. 신학교에서 배출되는 신학도들이 얼마나 성경을 바로 알고 확신을 가지고 졸업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경성하여 천추에 한이 없도록 해결해야 될 과제이다. 중세 교회가 흑암으로 뒤덮였던 원인을 살펴보면,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관용하고 후원하는 그 기회를 타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왔는데, 그들을 성경으로 바로 가르치지 못했으므로 교회의 지도자 가운데는 성경에 무식한 자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거듭나지 않은 자들도 넘쳤던 것이다. 영적 무식은 영적 부패를 동반하는 법이다. 중세의 암흑 상태는 세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중세는 암흑시대였다.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사 21:11, 신학정론 2권 1호, 2-3> 정암은 이것이 어찌 중세교회만을 향한 탄식이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오늘 한국교회를 향한 탄식이 아닐 수 없으며, 합신은 이러한 상황에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되묻습니다. 오늘 우리 합신은 어떠합니가?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어 주시옵소서.
1148 no image |긴/급/진/단| 기독교 구원과 이슬람교 구원의 차이_손재익 목사
편집부
1774 2016-04-12
기독교 구원과 이슬람교 구원의 차이 <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하나님은 다르지 않다고 하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과연 그런가? 이 점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일이다. 이슬람도 하나님을 믿는다? 이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알라’(Alla)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엘로힘이나 God을 가리켜서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다. 엘로힘은 히브리어이고, 알라는 아랍어이며, 하나님은 우리말이다. 명칭이 중요하지만, 명칭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번역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렇다면 이슬람이 믿는 하나님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같은가? 명칭만 다를 뿐 실제는 같은가? 기표만 다를 뿐 의미도 같은가? 이슬람은 그렇게 가르친다. 그들도 하나님을 믿고 기독교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의 경전(經典)인 꾸란(Al-Quran) 29장 46절에 보면 “우리는 우리에게 계시된 것(꾸란)과 너희에게 계시된 것(성경)을 믿노라. 우리의 하나님(알라)과 너희의 하나님은 같다. 우리는 모두 다 그 분께 순종한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너희’는 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지칭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꾸란의 가르침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꼭 기독교를 고집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슬람을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 그래서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슬람의 유일신 사상 이슬람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는다.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꾸란 2장 163절에 나와 있다. 언뜻 보면 제대로 된 신앙처럼 보인다. 제1계명에 매우 충실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도 성령님도 믿지 않는다. 예수님과 성령님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라고 여긴다. 왜 이렇게 믿는가? 삼위일체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한 분이실 뿐, 다른 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은 아브라함, 모세, 무함마드의 연장선상에 있는 하나님의 예언자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던 아브라함을 비롯한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인물 정도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서는 꾸란 4장 171절에 잘 나와 있다. “성경의 백성들아, 너희들의 믿음에 열광하지 말라. 하나님에 대해 진리 외에는 말하지 말라. 마리아의 아들 예수, 메시아는 하나님(알라)의 예언자(사도)이니 그분께서 마리아에게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영혼을 보내셨다. 그러니 하나님(알라)과 그분의 예언자들(사도들)을 믿고, 삼위일체(Trinity)는 말하지 말라. 너희가 그친다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 하나님(알라)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 이슬람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같은데, 우리가 잘못 믿는다고 본다.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 과연 그런가? 우리는 어떻게 믿는가?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실 뿐만은 아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그 한 분 하나님이 서로 다른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이 위격은 모두 하나님이다.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은 장로교회에 속한 유초등학생들이 배워야 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5-6문답에 잘 나와 있다. 제5문: 하나님 한 분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이 있습니까? 답: 오직 한 분뿐이시니,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십니다(신 6:4; 렘 10:10). 제6문: 하나님의 신격에는 몇 위(位)persons가 계십니까? 답: 하나님의 신격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가 계시는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며, 본질이 같으시고, 능력과 영광은 동등하십니다(요일 5:7; 마 28:19).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성자는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이 아니다. 성령은 하나님외의 다른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1계명이 가르치는 ‘하나님 외의 다른 신’에는 성자, 성령이 포함되지 않는다. 성자, 성령은 성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시다. 제1계명을 제대로 지키려면 오히려 성자와 성령을 믿어야 한다. 따라서 이슬람이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번역어와 같은 또 다른 번역어인 ‘알라’이지만, 그 ‘알라’는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이 아니다. 같은 이름이지만 사실은 다른 이름이다. ‘알라’를 ‘하나님’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자유지만, ‘알라’를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구원에 대해 다루면서 왜 하나님인가 예수님이 아니고? 기독교의 구원과 이슬람교의 구원의 차이에 대해서 다루면서 왜 예수님을 다루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다루고 있는가? 흔히 사용하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라는 말은 예수님만 믿고 다른 위격이신 성부와 성령은 믿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인데, 이 일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슬람에게는 불가능하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예수님을 한낱 선지자와 예언자 정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도 결국은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된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가르침 3대 공교회 신경 중 하나인 아타나시우스 신경(The Athanasian Creed)은 제일 첫 문장에서 “구원 받기를 바라는 자는 그 누구든지 다른 무엇보다도 공적(=보편적)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세 번째와 네 번째 문장에서 ‘공적 신앙’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적 신앙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삼위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 일체이신 삼위를 예배하되, 그 위격들을 합성하지 않으며, 실체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28번째 문장에서 “그러므로 구원 받기를 원하는 자는 이와 같이 삼위일체를 깨달아야 합니다”라고 고백한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그러한 믿음이 있어야 구원 받는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잘못되다보니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 이슬람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저 예언자일 뿐이다. 꾸란 5장 19절은 “하나님 그분은 마리아의 아들 메시아입니다 라고 말하는 자들은 불신자들이니...”라고 가르친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그다지 의미가 있지 않다. 이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역사적 사실은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사건이 아니다. 예언자에 불과한 예수님이 죽은 것이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여기지 않는다. 예수님의 신성과 중보자직, 십자가 사건의 중요도에 있어서 다른 믿음을 보이는 이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방식의 구원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따로 필요하지 않다. 이슬람의 구원관 이슬람은 죄 지은 자 스스로가 회개와 참회를 통해 유일신인 하나님께 용서를 구함으로써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즉 이슬람은 사람이 자신의 노력과 의를 통해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꾸란 23장 102-103절에는 “저울눈이 더 무거운 자는 행복을 찾을 것이요, 가벼운 자는 죽어서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저울눈’이란 사람의 선한 행위를 행한 정도를 무게로 측정했을 경우를 의미한다. 그들에게 있어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가늠할 저울의 기울기를 결정하는 것은 선한 행위이다. 이슬람에서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이다. 이처럼 이슬람교의 구원은 기독교의 구원과는 다르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이슬람교에는 구원이 없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알라’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니다. 이슬람교는 자신들이 기독교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제 아무리 성경을 받아들이고, 천지창조를 믿고, 아브라함을 믿는다고 해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 삼위일체에 근거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구원받는다.” 곧 ‘믿음’이 중요하고,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을 바르게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헛되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오 또한 동시에 사람이시며,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되, 삼위일체를 믿어야 사실상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고 그래야만 구원이 있다. 마치는 말 이슬람 신자와 교리와 문화가 우리 눈앞에 있다. 그들을 무조건 배타적으로 여길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구원과 우리의 구원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들과 우리의 구원의 차이의 출발은 다름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본적으로 삼위일체를 분명히 믿고 가르쳐야 한다. 삼위일체에 근거해 하나님을 가르치고 예수님을 가르치고 성령을 가르치며 구원을 가르치고 믿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장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9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6문답에 있으며 사도신경에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성경에 있다.
1147 no image |총동문회 수련회 참석자 수기 대상작| 사랑은 떡볶이를 타고.._신순화 사모
편집부
1748 2016-03-15
사랑은 떡볶이를 타고.. < 신순화 사모, 목인교회 > 개척교회를 시작할 땐 사명자의 삶인 양 어떤 고난도 고통이 아닌 감사뿐이어서 방긋방긋 미소로 우아한 사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3년, 5년 정열을 쏟았건만 7년이 지나도 처음 시작했던 원룸 20평 예배당을 벗어나지 못하고, 무슨 일만 생기면 언제나 내 탓으로 돌리는 습관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자발적 아픔이니 말할 수 없는 자책의 여왕이지만, 겉으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해맑은 미소 복면 미소 사모의 인생이었습니다. 갱년기가 되니 병원의 도움을 1년간 받으면서도 빨리 나아서 교회 일을 해야지 하는 강박과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유혹이 싸우는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자책과 자포자기로 강박증 갖게 돼 어느 날, 중년 여인이 우리가 사는 아파트 바로 앞 동 고층에서 떨어지며 세상과 이별을 하였습니다. 그 장면이 큰 충격으로 다가와 스스로 이상한 속삭임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순화야! 너도 따라가! 마음 한 번만 먹으면 이 고통의 늪에서 해방될 수 있어......” 나름 홀로 갈등해보지만 내안에 주님의 음성이 더욱 크게 들려옵니다. “사랑하는 딸아, 그런 마음으로 힘내서 살아봐. 내가 있잖아.” 용기를 얻어 한 달간 쉬던 교회로 돌아가 겨우 예배만 참석하고 나 홀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 밖으로 나갑니다. 낮엔 해님과 데이트로 이 산 저 산으로 헤맬 뿐 아니라 교회만 생각하면 두통이 시작되니 자꾸만 밖으로 나갈 수밖에요. 사단은 날마다 흔들어댑니다. 절망이랑 낙심은 동무하자며 속삭임이 시작됩니다. “안되잖아! 절대 안되잖아! 서울의 개척교회는 선교지보다 더 힘들다는데 그 사모가 어디 쉽니? 그 만 포기해! 그 정도 했으면 된 거야! 8년 잘 견딘거야! 이미 없어진 교회들은 3년, 5년 때 자발적 인사이동으로 포기 했잖아! 장목사는 내가 다른 방범으로 시도해 볼게!” 주님의 음성보다 사단의 음성이 더 달콤했기에 누군가 밀면 밀릴 준비가 확실하게 되었을 때 불현듯 사랑이 밀려옵니다. 교역자 부부모임에 세미나를 하는데 박영선 목사님은 강연을 마치고 사모들에게도 질문의 시간을 주셨는데 저는 저돌적으로 질문했습니다. “돈 잘 벌고 직장 생활 잘 하는 집사가 로마서 설교 말씀 듣고 은혜 받아 합신에 들어가게 하시고 교회 개척까지 하게 하시어 개고생 하고 있는 사모들에게 어떤 말씀으로 위로 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엉엉 울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날 교역자 모임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그해 중서울 노회는 박 목사님의 배려로 울릉도까지 다녀오는 놀라운 은혜를 누렸습니다. 또한 그 당시, 교역자 회장님이신 안두익 목사님께서 “여행이 최고의 특효, 사모님 모시고 제주도 다녀오세요”라는 말씀과 함께 거금의 여행비도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의 릴레이 사랑으로 맘껏 채워지니 세상을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고 세상을 장악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전도의 열정이 되살아납니다. 전도의 맛을 아는지라 다시 기도의 자리에 머뭅니다. 위로의 시간이 된 교역자 세미나 사모 없이는 목회해도 아내 없이는 목회할 수 없다던 남편이 눈에 들어와 제 열정을 다시 깨운 것은 남편이 쓴 목회자 칼럼이었습니다. <교회 설립 8주년을 맞으며> 벌써 교회 설립 8주년을 맞이합니다. 사실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작은 공간에서 작은 몸부림을 친 것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이룬 것도 없고, 목사들 사이에서 으레 화제가 되는 예배당 건축을 한 것도 아니고, 교인 수가 늘어나는 부흥을 이룬 것도 없습니다. 담임 목사가 그런 재주가 없으니 당연합니다. 미련 곰탱이처럼 말씀만 전했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교회에 나오는 성도님들도 참 무던합니다. 그 재미없는 말씀을 수년간 들어왔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지난 8년을 다시 되돌아봅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바람같이, 정말 그렇게 흘러버린 시간들이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남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속에 씨앗처럼 심겨진 진리의 말씀입니다. 저는, 씨앗으로 심겨진 그 말씀이 우리 성도님들의 심령마다 살아 역사하리라 확신합니다. 남편의 글을 읽은 후 불만스럽게 읽던 잠언 31장 말씀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결혼 제도를 통해 남녀가 있게 하신 것, 둘이면서 하나같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게 하실 인격체로 정하시고 거룩한 질서를 통해 상호 선물로 결혼의 신성성과 거룩성을 바탕으로 '하나님 사랑과 상호사랑, 곧 이웃사랑'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잠언에서 그려주는 여성상은 아주 강하고 진취적이며 활동적이며 신실하고 근면, 강인하고 지혜롭고 덕과 인애, 깨끗하고 단정하며 경건하고 아름답고 고운 면보다 더 크게 가치화하고 있는 것은 돕는 배필이라는 능력자로 부르셨기 때문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자극제가 된 남편의 글 나는 능력자다! 나는 할 수 있다! 세상이란 시간 속에 잠시 머물다 가는지라 채우고 채운들 무엇이 위로가 되겠으며 만족이 될까요. 더욱 잃을게 없는 개척교회 사모라서 전도만이 살길인지라 쫄지 않고 전도에 마음을 쏟기로 결단합니다. 어제의 안녕이 오늘의 안녕이 될 수 없듯이 전도만이 살길이니까요. “아버지! 어떻게 전도 할까요?” 이런 기도 응답은 총알택시보다 더 빠르게 보리건빵 400봉지를 우리 노회 김원명 목사님께서 보내주십니다. 이렇게 전도의 열정에 기름을 부어주시며 부채질을 해주시니 낮의 해도 집으로 돌아가고 어둑해진 길목에서 손이 꽁꽁 발이 꽁꽁 얼어도 바람이 불어 더 좋은 날이라 외치며 나갑니다. 전도하는 날은 그 자체만으로 뿌듯하며 고개를 높이 쳐들며 집으로 돌아오지만 매번 그럴 수 없는 노릇입니다. 오르락내리락 또 포기하고 싶은 마음에 핑계 거리 찾을 땐 죽이 척척 맞습니다. 이럴 때 남편은 내게 종용을 합니다. “여보! 요즘 세상에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기특한데 헌금으로 부담 주지 말고 우리의 생활비는 우리가, 우리 김밥집 할까?” 남편으로부터 사업 제안을 받는데 기쁨보다는 타협하지 않고 올 곶은 합신의 개혁주의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로 어디가든 합신의 사모라는 것을 만천하에 자랑질이 삶의 기쁨이었는데 그 기쁨조차 앗아가는 남편이 미웠습니다. 목회 하나에만 집중해도 이 모양인데 뭐가 다를까? 사모들만 흔들리는 줄 알았는데 목사님들도 별 수 없음을 알았으니 사모의 기도는 사명감으로 열렬한 기도가 시작됩니다. "주여! 저 장중현 목사는 설교 잘 하잖아요! 설교자의 복은 말씀을 전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뭐든 할게요! 제발 말려 주세요!“ 말씀만이 교회의 힘이라며 개척이후 창세기부터 하루에 한 장씩 강해 설교로 말씀을 꼭꼭 씹어 먹여주니 부부싸움하고 은혜 안 받으려 입을 꼭 다물어도 입이 터져 예배당 가득 아멘하며 속없는 사모로 만들더니 이제는 목사도 시험이 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묵묵히 목회에만 전념하는 남편 그런데 새벽기도회 마친 남편의 콧구멍 평수가 커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교역자회의 하자! 하나님이 인사이트를 주셨는데 말이지 전도가 안 되는 장년들 보며 힘 빼지 말고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을 전도하자! 우리 상가에 학원들이 많으니...” 상가 교회가 약점에서 강점으로 바뀌니 불평하던 환경은 사역지가 되었습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상가에 있는지라 학원을 순례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일까 궁리를 한 것입니다. 언제나 시작은 미약한 법, 돈 만원이 없어 카드로 긁으며 시작했지만 그 날 아이들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 그 아이들의 반응으로 시작이 되었으니까요. 지금은 떡볶이 전도 3년차로 접어듭니다. 백 명의 마을 아이들이 수요일을 기다리고 그들은 떡볶이를 먹으며 한 명씩 목인둥이들이 되었으며,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사랑을 깨달아가며 토요일엔 그들 스스로 모여 찬양 율동을 연습하며 예배자들이 되어 예배인도와 대표기도를 합니다. 지난 성탄절엔 그들이 겪은 현장감으로 연기를 하니 모두가 명배우가 되었습니다. '사랑은 뗙볶이를 타고'라는 제목의 뮤지컬을 부모님들까지 초대해서 공연을 마쳤습니다. 20평 작은 예배당은 작은 소극장 느낌으로 옛 추억에 젖어 지금도 이런 예배당이 있냐며 작은 만큼 은혜는 더 풍성 했더랬습니다. 아이들을 통해 들은 후문은 다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해서 감동 받고 왔어~ 그 곳에 주님의 임재를 느꼈어~ 엄마도 교회에 다녔었단다~“ 등등. 수요일마다 떡볶이를 들고 거리에 나가니 불특정 다수인을 만나 예비 교인들도 만나고 초등부를 심방하고 그들의 상담자가 됩니다. 하나, 둘 목인둥이가 되어 그들의 부모님까지 관계를 갖습니다. 초등부가 부흥되니 중고등부로 진급이 되어 동계수련회도 은혜롭게 청소년 캠프를 다녀왔습니다. 초등부는 오대산 깊은 산속 오지에서 수련회를 2박 3일로, 주문진 겨울바다에도 풍덩 빠지기도 했습니다. 도시 속에 아파트 감옥 탈출인지라 맘껏 뛰고 놀고 맘껏 먹이고 동영상까지 동원해 학부모 카톡방으로 맘껏 자랑질을 합니다. 한국 교회의 미래둥이들을 섬기려면 그 부모들의 절대인 도움이 필요한지라 3월부터 소그룹 어머니 기도모임을 계획하며 기도중입니다. 새로운 전기 만들게 된 떡볶이 전도 SNS 중독자라 가족들의 원성을 듣고 있습니다만 그 중독은 또 다른 찬스가 됩니다. 카카오 스토리에 교회 일지를 올립니다. 날마다 사건마다 올리는데 큰 사건이 터지면 더욱 즐겁습니다. 특보감일수록 은혜도 큽니다. 카카오스토리 덕분에 목인교회는 전국구인지라 기도와 응원도 전국구입니다. 미국에서도 아들의 친구들까지도, 지난번 초등부 수련회 때 목인둥이들에게 춘천닭갈비를 대접하신 카친님도, 카카오 스토리 주제는 떡볶이 전도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미쳐야 사는 순화 사모는 예수 사랑에 미치고 그 사랑은 전도에 미치니 아이들이 보입니다. 그들의 눈을 읽으니 그들의 마음이 보이고 누군가 해야 할 사랑이라면 제가 하고 싶습니다. 예배드리러 오는 아이들뿐 아니라 수요일 거리에서 만나는 아이들도 제게는 성도입니다. 그들의 아픔이 보이니까요. 영하의 날씨에도 거리로 나가는 이유는 단 하나! 수줍은 아이들은 제가 찾아가야 만날 수 있으니까요. 떡볶이를 먹던 아이가 안보여 수소문 해보면 이사를 가거나 엄마가 돌아가셔 할머님 댁으로, 아빠한테로, 또 어떤 자매는 두문불출을 합니다. 그 두문불출인 자매를 만나러 거리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 자매들은 3, 6학년 여자이니까요. 지금도 떡볶이 전도하며 낙심이 찾아올 땐 전도 현장에서 겪는지라 태풍급 강풍으로 다가옵니다. 저를 흔들어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주님은 제게 속삭이십니다. "순화야! 너 살기위해 시작했잖아. 너 그 때 기억하니? 죽는 것은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환경에서 해볼 때까지 해보는 거야! 그리고 그 때가서 포기해도 늦진 않아! 너! 지금이 최선이니? 지금까지 지내온 거 너 혼자였니? 내가 있잖아~ 임마!“ 이런 저런 추억을 돌아보며 총동문회 수련회에서 새벽기도회 말씀을 들으며 목회자에게 부어주시는 특별한 은혜를 경험합니다.
1146 no image |지/상/강/좌| ‘안식 후 첫날’로서 ‘주일’에 담긴 의미_노승수 목사
편집부
2234 2016-02-29
‘안식 후 첫날’로서 ‘주일’에 담긴 의미 < 노승수 목사, 강남성도교회 > “주일은 구약적 안식의 성취이며 영원한 안식을 보증하는 증표” 매주 첫째 날에 우리 신자들은 교회로 모여 공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날을 보통 ‘주님의 날’을 의미하는 ‘주일’이라고 부른다. 그 대표적인 용어가 ‘주일 성수’와 같은 말이다. 그러다보니 주일이 아닌 날 곧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주일의 예배와는 상관없이 자기 일상의 삶을 꾸려가는 날로 오해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때문에 좀 더 신앙적인 삶을 강조하는 이들은 매일 매일을 ‘주의 날’이라고 하면서 매일을 ‘주일’처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우리가 공적으로 예배하는 날인 ‘주일’과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평일과의 관계와 구분이 모호해진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주일’을 평일과 구별하면서도 날마다 거룩한 산제사로 살아가는 예배하는 삶과의 연속성을 확인하고, 이것이 마침내 영원한 안식에 참여하는 부활신앙의 참된 표징이 된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1. ‘안식일’과 ‘주일’의 연속성 신약 성경에 주일을 표현한 관용적 표현은 ‘안식 후 첫날’로 불려진다. 우리말 성경으로 읽을 때에는 안식일 다음 날이라는 뉘앙스를 갖지만 사실상 이 표현은 의역에 가깝다. 바우어 사전에 의하면, 여기에서 사용된 안식일이라는 단어의 용례는 '1주일'을 의미한다. 단수형이나 복수형을 통틀어서 이 용례는 모두 주님의 부활을 가리키는 날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그 용례들은 다음의 구절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 28:1; 막 16:2; 눅 18:12; 24:1; 요 20:1, 19; 행 20:7; 고전 16:2. 그런데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안식일을 의미하는 ‘안식’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가리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주간(week)을 의미하는 용례로 사용된 예가 없다. 구약의 헬라어 역인 70인역에서는 아예 찾을 수가 없다. 실제로 복음서와 서신서들에서 ‘안식 후 첫날’은 안식일 이후의 첫째 날, 곧 오늘날의 주일로서 신약 교회가 예배하던 날을 가리키는 용례로만 사용되었다. 문맥상으로 보면 이 날은 안식일 다음날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 용어를 ‘안식 후 첫날’이라고 번역을 한 것이다. 바우어 사전 역시 그와 같은 용례로 설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용어를 직역하자면 "the first of the sabbaths“(막 16:2), 즉 "안식일들의 첫 번째"로 직역할 수 있다. 2. 주일과 ‘안식 후 첫날’ 신약의 저자들인 사도들과 복음서 기록자들은 모두 오늘날의 주일을 이와 같은 관용적 형태인 ‘안식 후 첫날’로 표현했다. 실제로 신약에는 주일을 의미하는 표현이 있다. 계시록을 보면, ‘주의 날’(the Lord's-day)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 용어를 두고 왜 굳이 안식을 의미하는 ‘싸바톤’(σαββάτων)이라는 단어를 이용해서 주일을 설명했을까? 게다가 앞서 설명한 대로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은 "안식일들의 첫 번째"라는 의미다. 굳이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은 통상적 의미의 '주일' 곧 주간의 첫 번째 날을 설명하려는 용도로 보기에는 매우 불편하고 불필요한 표현이다. 오히려 계시록에 나타난 ‘주의 날’을 사용하면 여러 오해도 쉽게 해소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오해를 무릅쓰고 ‘안식 후 첫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이 용어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가리키는 의미로만 사용함으로써 일종의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곧 이 용어는 '신학적 조어'로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첫째, "안식일들의 첫 번째"라는 표현의 함의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가 이미 영원한 안식 곧 구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둘째, 이 표현은 주님의 부활하신 날을 가리킬 때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매주 첫날에"(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고전 16:2)라고 함으로써 매주 모이는 예배의 날을 표현할 때도 사용되었다. 이는 부활이후 모든 날이 안식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매주의 첫 번째 날이 구약의 언약적 개념의 안식일을 대체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구약에서 안식일은 언약적인 표징을 지닌 날이다(출 31:13, 17; 겔 20:12).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안식 후 첫날’은 우리가 이미 안식에 들었으나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는 것처럼 아직 들어가야 할 안식이 남아 있고(히 4:9-11), 주님의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새언약을 주셨으므로 이 말은 언약의 표징으로서 안식에 들어갈 것을 보증하는 새로운 안식일이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구약적 개념의 안식일이 아니라 새로운 언약과 그 갱신의 표징을 담은 부활의 날인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이유이다.
1145 no image |개/혁/주/의/신/앙/강/좌| 교리 교육의 목적과 그 유용성_손재익 목사
편집부
1981 2016-02-29
교리 교육의 목적과 그 유용성 <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 시작하는 말 오늘날 우리가 속한 교회의 현실 중 하나는 ‘역사적으로 이어져 오던 교회’와 단절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사실 교회라는 것, 그리고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져 온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과 역사의 전통을 통해 그 정통성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No History No Faith. 그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교회와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한국교회를 가리켜 말하기를 ‘별종의 기독교’요 ‘아류의 기독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현시대의 교회가 세계교회의 큰 흐름, 즉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교회의 흐름, 끊임없이 이어져 온 교회의 정통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적이고 역사적이며 보편적인 정통교회의 흐름에 떠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통과 보편에서 벗어난 수많은 요소 가운데 하나는 바로 교리가 사라진 교회의 현실입니다. 교리라고 하는 것은 2000년 전의 교회와 1000년 전의 교회, 지금의 교회와 그리고 앞으로 오게 될 교회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사라진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1. 교리에 대한 무관심이 나타난 이유 교리에 대한 무관심은 다음의 2가지에 기인합니다. 첫째, 17세기 중엽부터 나타나는 계몽주의와 경건주의의 영향입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이후 인간의 이성을 사물에 대한 인식과 판단의 근거요 척도로 생각하는 사상인 계몽주의가 교회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전통과 역사를 중요시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을 편견 없이 배우고 따른다는 사상인 경건주의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여파로 교리의 중요성이 약화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19세기말과 20세기부터 들어온 이상한 생각, 즉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기만 한다면 무엇을 믿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이 들어온 것입니다. 특별히 이것은 교리가 사라진 가장 중요한 원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미국에서 행동주의나 실용주의와 맞물려서 우리가 만약 주님의 일에 분주하기만 하다면 우리가 무엇을 믿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영향이 얼마나 잘 나타나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상당수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주제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인가? 교회를 위해서 어떻게 수고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입니다. 또한 사람의 경험에 관한 설교와 윤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설교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2. 교리를 강조하는 개혁교회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교리교육을 강조하고 그 전통을 이어오는 교회들이 있으니, 그런 교회들 중의 한 부류를 ‘개혁교회’라고 부릅니다. 역사상 존재해 왔던 그리고 현재 존재하는 개혁교회는 교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흐름은 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루터와 같은 사람에게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소요리문답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이 원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루터의 소요리문답(1529)도 있습니다. 칼뱅 같은 사람에게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칼뱅은 “교리가 없이는 교회 자체가 존재한 일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루터와 칼뱅의 전통 위에 서 있는 개혁주의 교회들.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고, 귀한 유산으로 생각하는 개혁교회들은 지금도 교리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3. 교리를 배우는 목적 어떤 사람은 “성경만 배우면 되지 교리를 무엇하려고 배우나? 하나님이 성경을 주셨지 교리를 주신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고 질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은 어떻게 보면 그럴듯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그 질문의 내면에는 성경에 대한 경외심이 가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 질문은 썩 좋은 질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의 3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성경 계시 기록 방식과 인간의 사고 체계 간의 차이 첫째, 성경 계시 기록 방식의 독특성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를 주실 때에 교리적 체계로 주지 않으시고 성경 계시의 독특한 방식, 특히 ‘역사’라고 하는 틀 속에서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왜 성경이 이렇게 어렵게 기록되어 있는가? 그냥 간단하게 하나님은 누구시다. 예수님은 누구시다. 교회는 무엇이다. 목사 장로는 무엇이다. 라는 식으로 일종의 선언적 진술로 기록되어 있다면 참 좋을 텐데”라는 식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역사’ 속에 담아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매우 독특한 형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의도적으로 인간에게 너무나 친숙한 삶의 틀인 ‘역사’,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들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과 찬송과 소망으로 응답하여 동참하게 하신 역사를 기록하심으로서 관념화(觀念化)나 개념체계(槪念體系)로서는 담을 수 없는 중요한 것들을 함축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이 일종의 역사 서술이라는 형식을 사용하셨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성경 속에서 진리의 다양한 면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단순하게 선언적 진술로 주셨다면, 즉 개념체계(槪念體系)나 관념화(觀念化)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면, 한편으로는 성경의 기록이 엄청나게 많아야 할 것이고 또 한편으로 성경은 아주 제한적일 것입니다. 부연설명하면, 풍요로운 하나님에 대해서 일일이 기록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해 버린다면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제한된 표현 속에 가두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경과 관련해 쓰여진 수많은 책들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풍요로우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기 위한 방법으로 ‘역사’라는 틀이 아주 좋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기에는 ‘역사’라는 틀이야 말로 풍성하게 당신의 뜻을 나타내실 아주 적합한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우리의 사고 틀에서 이해함에 있어서 ‘일종의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관념화나 개념체계의 틀입니다. 예를 들어, ‘성육신’이라고 하는 주제, 사실 이것이 우리가 명확하게 알고 싶어하는 개념체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요한복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습니다. 히브리서에도 있고, 구약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골고루 퍼져 있는 것을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본문의 흐름을 따라 하나님의 계시를 배울 뿐 아니라, 교리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 잘 알았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성경’만 가르치기보다, 그 성경에서 말하는 관념체계, 개념체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고 노력하였으니 그 결과물이 바로 벨기에 신앙고백서와 같은 교리서들이며, 그것을 가르치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들은 오전에는 성경전체의 본문에 대한 연속적 강해를, 오후에는 교리를 배워왔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오후예배’라고 하는 전통 자체가 그러한 맥락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역사적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를 계승하는 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2) 하나의 교회라는 관점에서 교리의 필요성 둘째, ‘하나의 교회’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입니다. 즉 믿는 바에 있어서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앙고백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 교회에서 서로 믿는 바가 다르다면 사실상 한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교회’라고 하는 것의 정의를 자꾸만 눈에 보이는 형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고백이 서로 다르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한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10은 이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여기에서 말하는 ‘같은’이라는 말, ‘합하라’라는 말이 모두 다 교회의 ‘고백적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동일한 신앙고백, 하나의 교리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리를 통해 진리 안에서의 하나됨이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또한 이러한 하나됨은 공시적(公示的)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통시적(通時的) 관점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지금 현재 우리의 교회가 하나일 뿐만 아니라, 2000년 전의 교회와 지금 우리의 교회가 하나여야 하는 것입니다. 공교회적 보편성이 없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보편적이라 불려지는데, 땅의 이쪽에서 저쪽까지 세상에 두루 퍼져 있고, 우리가 알아야 하는 가시적이고 불가시적이며, 천상적이고 지상적인 모든 것에 관한 하나의 교리를 보편적이고 완전하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시작부터 신앙고백을 갖고 있었고, 교회의 시작 자체가 신앙고백에 근거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고, 그에 대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대답에 기초해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사도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3)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측면에서 세 번째로, 교리의 당위성은 성령 하나님이 교리를 우리에게 전수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나는 교리가 필요없다. 난 성경대로만 살테다”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경건한 것 같지만 오히려 성령님의 역사를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이 세대의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 혹은 한 명의 설교자가 설교 중 성경을 풀이 할 때만 일하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선물을 교회에 수천 년간 주셨습니다. 그 동안에 여러 교회와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이 성경을 더 잘 이해토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수천 년 간 교회에 보존해 주신 이 교리를 무시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4. 교리교육의 유용함 첫째, 성경 전체를 보는 안목을 길러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서는 쉽게 설명해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만큼 수많은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성도들만큼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경우도 흔치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대해서 말해 보라고 하면, 자기가 믿는 바에 대해서 말해 보라고 하면 전혀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이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위한 최소한도의 지식에 만족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교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책 자체를 열심히 공부해서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 성경을 모두 다 배우는 것은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 대신 성경의 전체를 보도록 하고, 성경 전체를 요약해 주고 있는 교리를 배우면 성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둘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에서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을 보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야고보서에서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분명히 로마서에는 우리가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을 행함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교리입니다. 교리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잘 조화해서 정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교회의 하나됨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하나의 고백으로 뭉쳐져야 할 신앙고백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교회가 하나의 교리를 배우는 것은 이것을 실현케 해 줍니다. 넷째, 이단을 방지해 줍니다(엡 4:14). 사람들이 이단으로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 모르니까 잘못된 교리에도 쉽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또는 자기가 속한 교회에서 성경을 잘 안 가르쳐 주니까 상대적으로 뭔가를 가르쳐 주는 이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세 번째에서 파생되는 유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은 다른 교리에 빠지는 것을 막아줍니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면 교회 안에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 많아지게 됩니다. 다섯째, 신앙의 상속(相續)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중 하나, 복음이란 대대로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즉 상속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상속이라는 것이 바로 교리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섯째, 복음전파에 유익을 줍니다(벧전 3:15).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를 모르니까 남한테도 가르쳐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리를 배우면 우리가 믿는 바를 분명히 알고 고백하게 되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담대히 증거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일곱째, 신앙의 성장과 확신에 도움을 줍니다(딤후 3:14).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제대로 알면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우리의 믿음에 확신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마치는 말 교리를 배우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어떠한 상태로부터 구원을 받았으며, 또 자신이 무엇을 행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는지를 철저히 깨달음으로써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마음껏 찬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는 모든 성도가 신학자이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교리를 배우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1144 no image |목회자 자녀 캠프를 마치고| 아이들에게서 배운 것이 더 많았습니다_김덕선 목사
편집부
1559 2016-02-29
아이들에게서 배운 것이 더 많았습니다 < 김덕선 목사, 총회교육부장 > 지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충남 서천에서 제14회 목회자 자녀(PK)캠프를 은혜 가운데 마쳤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캠프에서 만날 또 다른 나의 아이들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를 안고 기도로 준비하였습니다. 첫 날, 청년스텝(OK) 두 명을 태우고 가다가 휴게소에서 식사와 커피를 함께 할 때, 그들의 감사하는 모습, 즐거운 모습에서 섬기는 감동이 있었는데, 이것은 90여 명의 학생, 스텝, 목사님들과 함께 본격적인 일정이 진행되는 동안 쉼 없이 밀려오는 감동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기도로 준비된 인도에 따라 뜨겁게 드리는 찬양, 집중하여 설교를 듣는 자세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바라보는 것 자체가 행복했습니다. 기도시간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1:1로 상담해 주며 후배 중고등학생들을 섬기는 청년 스텝들은, 마치 그들의 부모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감동적이었습니다. 페스티벌 시간에도 자기 팀의 순서에는 최선을 다하면서도 다른 팀들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격려를 보내는 모습에서, 요즘 어른들이 염려하는 이기적이고 성적지향적인 아이들의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에게서 배운 것이 더 많았던 3박 4일의 감동은 아직도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벌써부터 내년 캠프가 기다려지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것일까요?
1143 no image |긴/급/진/단| 한국교회는 이단의 온상인가?_박형택 목사
편집부
1922 2016-02-16
한국교회는 이단의 온상인가? < 박형택 목사, 합신이단상담연구소장 > 시작하는 말 2015년 한국교회에 대한 결산을 하면서 뉴스엔조이(Newsnjoy) 신문이 리서치를 한 모양이다. 예장 합동, 통합, 고신, 합신, 기감, 기장 등 6개 교단의 교세를 조사한 결과 교인 수는 2015년 한해 17만 명 정도로 줄고 목회자 수와 교회 수는 조금 늘었다고 한다.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을 한다는 소문이 사실로 들어난 셈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이단에 빠져 이단집단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2만 명 가까이 된다는 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줄어드는 반면 이단들의 수효는 늘어난다는 이 안타까운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왜 이단들의 포교대상이 한국교회 성도들이며 왜 그들이 이단에 빠져가는 것일까? 왜 한국교회는 이단에게 속수무책으로 성도들을 빼앗기는 것일까? 심사숙고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어떤 이단연구가는 이단집단에게 성도들을 더 많이 빼앗겨 보아야 목회자들이 정신을 차린다는 얘기를 하기도 하였다. 그 만큼 목회자들이 이단에 대하여 무지하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 줄을 모른다는 얘기이다. 이단들의 포교대상이 한국교회 성도들이라는 사실 앞에 지금까지도 문제였지만 앞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 성도들이 이단에 빠지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의 공통점 한국교회가 이단집단에게 교인들을 빼앗기는 이유를 이단상담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것은 기성교회에 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포교를 당해서 이단에 빠졌던 사람들이 상담을 받고 돌아와 자신들이 이단에 빠졌던 계기를 설명하는 가운데 들은 것을 정리한 내용이다. 첫째,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타락과 교회의 부패라는 것이다. 이단들이 실행하는 포교전략 가운데 하나는 기성교회를 타도하고 비난하며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목회자들의 비리와 타락한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단들은 “진리가 있다면 그럴 수 있느냐? 진리가 없기 때문에 타락하고 부패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겠느냐”하는 논리를 전개하면 자신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 교회에서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고 자신들의 영적인 갈급함을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너무 많은 것을 성도들에게 요구하고 강요할 뿐 아니라 자신들이 고민하고 겪었던 문제에 대하여 교회에서는 해결을 볼 수 없었고 영적으로 갈급하였지만 채워주지 못했는데 이단집단에 갔을 때 은혜를 받았고 속시원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셋째, 자신들이 너무나 목회자의 설교에 의존하는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만 배웠지 성경을 알고 분별하는 것은 전혀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이단에 갔을 때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성경을 너무 몰랐다는 죄책감이 들었고 왜 목사님들은 우리에게 성경말씀을 설교하거나 가르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많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은 이단이 무엇인지 모르고 성경을 잘 몰라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단에 대한 분별력만 가지고 있었어도 빠지지 않았을 텐데 양의 가죽을 쓰고 나타나는 이단의 포교수법에 넘어간 것이다. 이단에 빠지면 그곳에 진리가 있고 자신은 진리를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물론 거짓확신이지만 이단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이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거기에 걸고 올인한다는 것이다. 2. 이단에 빠졌던 사람들을 위한 대안 단순히 이단들이 주장하는 이론에만 빠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거짓된 영이 역사하기 때문에 거짓된 영에 사로잡혀 완전히 사탄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금방 알 수 있는 것도 그들은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고 절대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성도들을 이단에게 빼앗겨 점점 수가 줄어들고 있는 반면 이단들의 수효는 점점 늘어나는 상황, 그리고 이단들의 포교대상이 한국교회 성도들이라는 상황, 이단들이 돈이 많아 부도난 교회당을 계속 사들이는 상황(2015년까지 2-3년 동안 수백억 부도난 교회당 35개가 이단에게 넘어간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 한국교회가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교회를 위하여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성도들이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잘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다. 이단에 빠지는 것은 이단에 무엇인지 모르고 성경도 잘 모르기 때문인 것을 안다면 이단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단이 무엇이며 어떻게 접근하여 포섭하는가? 무엇을 보고 이단인지 알 수 있는가? 를 교육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바로 가르쳐야 한다. 특히 교리교육을 철저하게 해서 잘못된 사상이나 교리를 성도들이 분별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이단에 빠지지 않는다. 둘째,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내는 전도 패러다임으로 바꿔야 한다. 지금은 새로운 신자를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불신자 전도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든 교회는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예수님이나 교회를 몰라서 안 오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신자 전도에서 이단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전도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때가 된 것 같다. 셋째, 교회 안에 이단에 빠졌다가 돌아온 사람들을 위한 케어 시스템을 구축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단에 빠졌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돌아와도 기성교회에 적응하기 힘들다. 이단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특징은 헌신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고 말씀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고자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려와 포용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단에 빠진 사람이 상담을 받고 돌아왔을 때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소개할만한 교회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마치는 말 결론적으로 우리 목회자들과 교회는 한국교회 현실과 상황을 직시하고 이단에 대한 분별과 대처, 이단에 빠진 영혼들을 위한 방안 구축, 그리고 교회성장에만 몰두하지 말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헌신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주변에 이단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이단에 빠지면 돌아올 수 있을까?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단과 이단에 빠진 사람은 구분해야 한다. 이단에 빠진 사람은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
1142 no image |서간문| 제비꽃처럼_전덕영 목사
편집부
1579 2016-02-16
제비꽃처럼 < 전덕영 목사, 하늘소망교회 > “목회 현장은 한 겨울처럼 추워도 미소를 잃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목사님! 작년 초 봄에 내 고향은 남쪽인지라, 고향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산소 주변에는 예쁘지만 화려하지 않고, 아름다운 색깔을 지녔으면서도 향기로 주위를 끌려고 하지 않는 소박한 제비꽃이 있었습니다. 그 긴 겨울 추위를 용케도 견디고 아직 사방이 찬바람 소리로 가득할 때, 햇빛이 잠시라도 머무는 양지쪽이면 어느 풀잎보다 먼저 잎을 내고 꽃 피우는 그 모습은 산소를 찾아온 나와 가족을 눈물겹게 했습니다. 그리고 게을러지는 나의 생활에 채찍을 가차 없이 했습니다. 존경하는 목사님! 도시에 사는 저에게 아버지 산소 곁에 핀 제비꽃은 이제 하나의 추억이 되어 버렸습니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지천에 피어나던 제비꽃, 언덕 따라 능선 따라 무더기무더기 피어나 얼어있던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던 제비꽃, 그 어떤 꾸밈도 화려함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안겨주던 제비꽃이 지금은 봄이 와도 주변에선 찾아보기조차 힘든 귀한 꽃이 되어 아쉽습니다. 아버지 산소 주변에 핀 제비꽃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작년에도 피고 금년에도 그 자리에 변함없이 피어 성묘 차 온 가족들을 기뻐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꽃을 피우려고 겨우네 추위를 이겨내고 방긋이 미소를 지으며 반기는 제비꽃을 보면서 내 자리를 지키며 주변의 사람들을 웃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짐해 보았습니다. 존경하는 동역자님! 우리 목회자가 제비꽃처럼 피어나면 어떨까요?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변함없이 내 사명감을 가지고 자리를 지키며 목회의 현장에서 미소를 지으며 피어나 예수님의 향기를 피우므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짓게 하면 어떨까요?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살짝 미소를 지은 제비꽃처럼 목회의 현장이 한 겨울처럼 추워도 미소를 잃지 않는 교회가 된다면 이 추운 겨울 세상에서 사람에게 빛이 되고 소망이 되지 않을까요?
1141 no image |개/혁/주/의/신/앙/강/좌| 신자에게 있어서 ‘계시록(啓示錄)’의 가치_장대선 목사
편집부
1615 2016-02-16
신자에게 있어서 ‘계시록(啓示錄)’의 가치 < 장대선 목사, 가마산교회 > 한국의 기독교에 있어서 오순절운동(Pentecostalism)의 영향은 거의 모든 교단이나 교파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렇게 된 것은 이미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올 당시부터 교파적 특색이 점차 신앙의 경험에 치우치는 방향으로의 대대적인 왜곡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적인 성경 해석과 전천년기설(Premillennialism)을 바탕으로 하는 예수재림론은 신사도운동의 기원이기도 한 1940년대 소위 늦은 비 부흥운동(New Order of the Latter Rain)의 경우와 같이 종말론에 대한 큰 왜곡을 불러왔고, 그러한 왜곡 가운데서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문학은 많은 신자들에게 과격하고 급진적인 두려움의 책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했다. 요한계시록과 관련하여 메이천(J. Gresham Machen, 1881-1937)은 이르기를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소망의 생활이다… 소망을 생생하게 하기 위하여 요한계시록은 미래의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은 때와 기한을 계산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주신 책이 아니고 보좌에 계신 어린 양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책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라고 했다. 신자들에게 요한계시록은 공포의 묵시가 가득한 두려움의 책이 아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계 1:3)에게 복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계 1:2)이다. 한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 카이퍼(Abraham Kuyper·1837∼1920),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 1894-1977) 등 화란의 굵직한 신학자들 및 철학자들에 의해 ‘일반은총’의 강조와 ‘영역주권’등을 바탕으로 이 땅에서의 신자들의 생활에 대한 강조가 한 시대를 선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에게 모든 궁극적인 완성과 안식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대망 가운데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즉 신자들에게 있어 성화의 완성, 즉 ‘영화(靈化)’는 언제나 개인적 종말 혹은 궁극적 종말 가운데서 비로소 보게 되는 믿음과 은혜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영역, 혹은 은혜의 영역에 대한 안목과 이해는 빈약하기 이를 데 없으며, 상대적으로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만족은 전혀 가시적인 영역 외에는 의미 있게 생각하지 않는 형편에까지 이르렀다. 심지어 말씀의 사역자들도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고난과 시련의 현실 가운데서 인내하는 ‘선비’ 같은 자들이 아니라 한낱 탐관오리(貪官汚吏)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 일반계시든지 일반은총이든지 간에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서 주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특별계시요 특별은총으로서의 성경 외에는 그 어떤 일반적인 것들도 구원과 같은 하나님의 깊은 지식을 전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이나 일반학문이 성경에 접근하는 길을 닦아주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성경을 근거로 하는 신학이 과학과 일반학문이 찾지 못하는 질문들에 답변을 하고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계시인 성경은 하나님의 택자(擇者)들 외에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과학을 비롯한 일반학문들의 성경에 대한 관심은 결코 구원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미궁(迷宮)에 빠져버리고 마는데, 그것은 성경의 세부적 명칭 곧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이라는 단어에 어느 정도 암시되고 있는 바라 할 것이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명칭은 공히 ‘Testament’로 표기되는데, 이는 유언(遺言)이라는 의미다. 즉 첫 언약의 피와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 언약(言約)이 유언의 효력을 발휘하는 의미가 구약이든 신약이든 공히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비가시적인 믿음의 영역 가운데서 그 택하심을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히 9:15)하시는 새 언약의 중보자의 유언을 효과적으로 적용하시는 “영원하신 성령”(히 9:14)의 역사와 지도는 언약백성에게만 매순간 공급되는 은총의 진정한 국면이다. 그러므로 택자들 이외에는 성경이 교양을 넓히는 근거가 될 뿐, 구원에 관한 참된 지식을 전달해 주는 바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언약(구약과 신약)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많은 경우에 ‘Covenant’로만 생각하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흔히 본다. 마치 히브리서를 기록할 당시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유대인(히브리인)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을 불쌍하고 어리석게 보면서 율법의 행위와 제사의 행위를 종용했었던 것처럼, 언약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쌍방의 계약이요 우리 편에서의 행위를 조건으로 해서 비로소 성립하는 계약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언급하는 언약(διαθήκη)이라는 단어에는 ‘Covenant’만이 아니라 ‘Testament’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으며, 특별히 히브리서에서는 Testament의 의미로서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을 언급하며 공히 언약을 Testament, 즉 ‘유언’의 성격으로 소급(遡及)하고 있다. 이처럼 히브리서에서 말하고 있는 언약의 개념 가운데서 구약과 신약의 시대를 각각 생각해 보면, 공히 그 실체가 구체적으로 눈앞에 실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서 조망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즉 구약백성들은 예표(豫表)가운데서 믿음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라보았고, 신약의 백성들은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영원한 기업에 대한 ‘약속’을 바라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의 묵시적인 영광의 미래는 부르심을 입은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단적인 소망의 예시(豫示)가 된다. 메이천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설명 가운데서 “우리는 시련 가운데서 혹은 단조로운 일상들 가운데서 우리에게 있는 소망을 상실할 위험에 항상 직면해 있다”고 하여, 미래의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여주는 요한계시록의 유용함을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회피할 두려운 책이나 당장의 실현을 조급하게 서두르도록 하는 조바심을 부르는 책이 아니라,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이미 족한 비전(Vision)의 책이라는 것이다. 물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는 말씀을 당장의 현실에 적용하는 폐해(弊害)가 흔할지라도, “주 예수의 은혜”(계 22:21)는 유언을 효력 있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편에서 베푸시는 것으로서 명백하고도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놀랍게도 이 말씀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성경 합 2:2-3의 말씀이다. 나아가 4절에서는 이르기를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어찌 우리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계 1:8)의 때를 대망(大望)하지 않겠는가? 하박국서와 요한계시록 사이의 ‘성취’(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를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현대의 신자들에게 요한계시록이 멀리 있는 두려움이 책으로 되어버린 것은 그만큼 진정한 은혜와는 멀고 현실의 복락에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으로서, 이는 요한계시록에 있는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마지막 구절이 교훈하는 바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의 마지막은 바로 ‘은혜’, 즉 유언을 효력 있게 하신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다. 우리들의 그 어떤 수고와 노력과 헌신과 열정도, 그 너머에 있는 은혜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요한계시록은 그 너머에 있는 은혜를 공급하고 있는 책이다.
1140 no image |개/혁/주/의/신/앙/강/좌| 뜨레스 디아스(Tres Dias) 운동에 대한 평가_김성욱 목사
편집부
2421 2016-01-26
뜨레스 디아스(Tres Dias) 운동에 대한 평가 < 김성욱 목사,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 다양한 종교적 운동들이 교회사에 나타나고 사라진다. 언제나 새로운 것처럼 주장하는 것들도 사실은 과거에 존재한 것이나 혹은 그 변형일 경우가 많다. 그리고 어느 시대나 교회는 세상 속에 있기 때문에 세상에 어울려 살려는 흐름과 세상과 구별되어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려는 흐름이 있었다. 경건과 헌신적인 삶을 추구하며 열성이 있는 성도들은 대부분 초대교회의 모습을 재현하며 추구하고자 노력한다. 세상과 연합하여 사는 것에 대한 평가는 쉬울 수 있으나, 세상과 구분하려는 운동에 대한 평가는 많은 경우에 조심스럽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예가 종교개혁운동과 달리 독립된 경건주의 운동일 것이다. 이 주제는 결론 부분에서 다시금 언급하며 정리하고자 한다. 뜨레스 디아스(Tres Dias <TD>)는 세상 속에 살아가는 기독인들의 영적인 각성을 위하여 특별한 기회나 여건을 통해 영적인 부분을 강화하자는 운동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이 운동은 기존의 다른 운동들과는 달리 체계화된 모습과 세계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1. 뜨레스 디아스의 역사 TD에 관한 여러 설명들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말엽에 스페인에서 발생한 것으로 본다. 스페인의 몇몇 수도사와 신부들이 전쟁 말기에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부어주는 운동인 Roman Catholic Cursillo(수련회)가 개신교에 들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스페인어 tres dias는 사흘이란 의미인데, 내용적으로는 3박 4일간 크리스천 단기 수련회를 일컫는 용어이다. 1949년 1월 7일-10일까지 스페인의 말요카에서 공식적인 첫 모임이 시작되었으며 미조리아의 주교 신부인 잔 헤르 바스와 보닌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순례자들의 안내를 맡아 로마 천주교 지도자들을 훈련하는 훈련 프로그램이다. 현재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구체적인 평신도 영성 훈련으로 가장 각광받는 프로그램이다. 스페인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 프로그램을 남미로 전파했으며, 미국 텍사스에서 훈련 중이던 스페인 군인들 가운데 평신도 공동체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특히 단기 수련회(cursillo) 식으로 강조되면서 점차 미국 전역에 퍼지게 된다. 1972년 11월 2-5일에는 미국 뉴욕에서 cursillo 운동이 개최되는데 여기에 기독교도 동참하게 된다. 초대 렉토(3일간의 운동을 총괄하는 평신도)로 데이브 맥마니갈을 언급할 수 있는데 그를 중심으로 뉴잉글랜드, 뉴저지, 펜실바니아로 펴져나갔으며 1980년 7월 11일에는 미국 전역의 TD운동은 연합체를 조직하여 오늘날 전 세계로 펴져 나간다. 2. 한국의 뜨레스 디아스 운동 천주교회에서 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활용하고 있는 이 운동이 1967년에 한국으로 도입된다. 1985년에 미8군 교회와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를 통하여 한국교회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특히 1984년 7월(1기)에 이 운동을 훈련받은 남자 56명 가운데 하나인 L씨를 통하여 한국에 널리 소개되었다. 이것을 한국 기독교 TD운동의 공식적인 시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한국 기독교 TD운동의 흐름은 L씨를 중심으로 한 티디운동과 서로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미8군 영내에서는 미군들을 중심으로 기존에 진행해 오던 티디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두 운동은 자연스럽게 동반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서울 뜨레스 디아스'와 '아가페 뜨레스 디아스' 그리고 '골든 뜨레스 디아스'가 생겼다. 여기에 예수교 장로교측의 목사들이 가담하면서 약간 변형하여 부흥과 성도들을 각성하는 프로그램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점차 확대되어 감리교회와 침례교회로 확대되는데 '사랑의 불꽃'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고 한국교회에서 그 범위를 넓히며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구체적으로 보면 한국 TD운동의 핵심으로 L씨를 언급할 수 있다. 그는 성락침례교회에서 약 4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독립하여 '레마선교회'를 만들었다. 베뢰아 아카데미 제7기 졸업식에 39명의 졸업생 가운데 한 명으로 그의 신학적 기초는 베뢰아에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귀신론과 가톨릭적 영성운동을 연결하여 '사랑의 불꽃' 혹은 '레마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한국교회에 영향을 끼쳤다. 이와 연관하여 베뢰아 출신으로 L씨와 비슷하게 활동한 LA 0000교회 K목사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는 티디운동과 귀신론으로 LA기독교 사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고, 그 결과 C&MA(기독교연합선교회)교단으로부터 1989년 1월 제명당하고 1989년 10월에는 남가주 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럼에도 이 운동은 약간씩 변형되면서 미국의 한인교회로 확대되어 나갔으며 한국에도 기도원을 중심으로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다. 현재 한국에는 가톨릭 TD를 제외하고도 15개 이상의 TD가 활동하고 있고, 특별히 조선족이 많이 분포된 중국의 동북 3성에 큰 흐름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한 진단과 평가 그리고 대안의 제시가 필요할 것이다. 3. 수련회(Cursillo)의 진행 한국교회에서 이미 큰 흐름처럼 지나간 운동으로 보이지만 그 운동에 영향 받은 성도들이나 교역자들에게 있어서 추억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따라서 그 영향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명한 신학적 대안과 정리가 필요할 것이다. TD운동의 실제적인 진행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상태에서 3박 4일간 실시되는 훈련이기에 프로그램의 진행 방법과 내용 그리고 훈련 효과의 지속성 유지를 위해서 철저히 비밀로 한다.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기에 분명하게 정리하기보다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리고 공개적으로 소개된 것과 그 과정을 지나온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공개적으로 소개된 운동의 방향이다. 서울 TD에서 발행한 소책자인 "뜨레스 디아스의 본질적인 요소들"에서 이 운동은 그리스도인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보다 가까이 보다 친밀하게 만들고자 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생활환경 속에서 지도자적 자질과 사도적인 능력을 함양케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소개한다. 즉 초기의 가톨릭적인 색채와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배제하고 성경적이고 건전하며 성도들의 삶에 유익이 되는 프로그램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진행은 단어의 본래적인 의미처럼 3일간 진행되는데 3일간의 행사를 ‘위크앤드’(weekend)라고 하고, 신청자가 훈련 참가 신청을 할 때에는 '프리 위크앤드'(Pre-weekend)로, 또한 3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계속적으로 수료생들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The Fourth Day'라고 부른다. 3일간 훈련 후에도 지속적인 모임을 위해 Reunion Group(친목회)을 만드는데 이것은 교회 밖에서도 계속적으로 운동하는 것이다. 또한 3일간 훈련을 마친 수료생들이 배우는 기관으로 Tres Dias School이 있다. 집회를 위한 초대도 은밀하게 편지를 통하여 이뤄지며, 집회에서 추구하는 것은 은혜를 통해서 각자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체험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한다. 3일간 여러 가지 강의나 자유로운 토론 그리고 찬양과 애찬식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체험하는데, 구체적으로 눈물과 감동과 체험의 고백 그리고 간증 등으로 표현하게 된다. TD의 프로그램 가운데 많이 비판받는 것은 '아브라조'(abrazo)라고 하는 포옹 인사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먼저 받아야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새 계명을 실천할 수 있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고 말씀하신 것에서 좀 더 나아가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TD운동을 지도하는 사람들은 이 인사를 통하여 다음의 효과가 있다고 소개한다. 첫째,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덜어 준다. 둘째, 우리에게 공포와 긴장을 극복하게 만든다. 셋째, 신앙생활과 주님의 뜨거운 사랑이 지속되도록 도와준다. 넷째, 마음을 밝고 행복하게 해주며 불가능에서 가능성을 창조하도록 마음을 고무시킨다. TD에 참여하여 훈련을 받으려 할 때, 먼저 수료한 수료생의 인도를 받아 개별적으로 훈련장에 도착하거나 혹은 단체로 참가하게 된다. 이들은 훈련장에 도착할 때부터 전기 수료생들로부터 왕자대접을 받는 뜨거운 포옹인사를 받고 양쪽에 쭉 늘어서서 새로 입교하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포옹하는데, 이들은 마치 천사 대접을 받는 것처럼 큰 감동을 받는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에 있어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될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첫 시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명상하는 것이다. 주로 평신도와 성직자에 의하여 느낌이나 소감에 대한 발표가 있다. 하지만 이 훈련에는 성경을 읽는 시간이나 개인적 기도시간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기도의 경우 교재에 주어진 기도문만 암송하도록 한다. 아침 기도문 암송, 묵상 기도문 암송, 저녁 기도문 암송으로 로마 가톨릭의 의식과 비슷한 종교의식으로 진행된다. TD에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Pilgrims Guide에는 '십자가의 길'이란 글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시키고 동시에 큰 녹슨 못을 주어서 시각화하기도 한다. 형상 중에는 마치 철십자가를 연상케 하는 나무 십자가가 주어지는 데, 네 잎 클로바 형상으로써 완전 로마 가톨릭 십자가 형상과 일치한다. 또한 시각적 그리고 형상적으로 특별한 것을 느끼도록 하기 위하여 무지개 색깔 컵, 볼펜, 오색찬란한 명찰, 가죽명찰, 황금색 마대, 금색 찬란한 나비형상 핀 등을 사용한다. 시각적으로 특별한 감각을 느끼게 하여 황홀하게 만들며, 훈련도중 사역자가 강단에 나갈 때는 반드시 촛불을 켜고, 내려올 때는 성수를 뿌린다고 한다. '로여'(rollo)라는 시간에는 지정된 자가 나타나 간증과 설교로 하루를 보내는 첫 날을 의미한다. 다음 단계로 올라가 이들이 찬양을 할 때 머리에는 이상한 색깔들로 수놓은 장식들을 달고 얼굴은 여러 개의 스카프로 붙이는데, 늙으나 젊으나 다 똑같은 모습을 한다. 한 가지의 찬송을 반복하여 부르고 모두가 함께 율동을 함으로써 흥분과 신비로운 감정이 유발되고, 더 나아가 신비로운 체험 곧 황홀경의 세계로 인도되며, 그런 가운데 서로 돌아가며 아브라조(포옹)를 하게 된다. 4. 행사와 의미 원래 가톨릭에서 처음 전수될 때에는 강의, 그룹토의, 찬양, 섬김 훈련과 각종의 독특하게 구성된 프로그램이었으나, 개신교로 전래되면서 용어는 물론이고 강의 내용과 프로그램들도 자의적으로 변형되어 실시되고 있다. 프로그램의 내용은 메시지의 선포, 회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호소력 있는 선포,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체험하는 기쁨,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실생활에서 증거하는 삶을 주로 다루고 있다. 주제별 강의 외에도 현재 한국에서 실시되는 프로그램 중에는 묵상기도, 성찬식, 편지 보내기, 선물보내기, 특별기도회, 세족식, 회개한 죄목 태우기, 촛불 길 걷기, 사랑의 포옹, 아침 만남의 시간, 침묵훈련, 개인고백의 시간, 간증시간 등 실로 다양하다. 이 운동의 특징을 좀 더 실제적으로 표현한다면 수련회기간 동안 두 사람이 한 사람을 마치 왕이나 공주를 모시고 받들 듯이 섬기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찌든 현대인에게 특별히 외국생활로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이런 대접은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며 놀라운 경험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또한 모태신앙으로서 형식적인 교회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도 사랑의 체험을 통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약 100여 군데 이상의 단체나 교회 등이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다양한 명칭으로 행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가톨릭적인 요소를 없애고 내용과 형식을 자의적으로 변형시켜 운영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근본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고 작은 부분에 있어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5. 그동안 알려진 평가 TD는 분명히 가톨릭의 영성운동을 기독교에 적용하여 신비체험과 성도간의 교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프로그램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러한 운동들은 20세기 후반에 비로소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자주 등장하던 모습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교회에서 행해지는 많은 수련회에서 이와 비슷한 것들이나 프로그램을 발견할 수 있으며 나름대로 그 효과(?)를 확인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TD에 참여한 많은 성도나 목회자들의 경우 좋은 경험으로 생각하며, 나름대로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운동에 대해 기존에 있었던 다양한 평가들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1) 영성훈련, 사도적 훈련, 사랑의 훈련이라고 하는데 성경책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 (2) 감각적이며 아브라조라는 훈련방식의 비성경적인 모습(밀교적 행태). (3) 신비주의적인 형상들의 사용 : 나무십자가, 가죽명찰, 무지개색 가방, 그림 색종이, 나비형상 핀, 가슴 핀, 머리 핀, 그림, 마패, 컵 등. (4) 인위적인 영성개발, 영성훈련이며 성령의 역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5) 섹스교 의식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교회나 노회에 객관적인 평가를 요구하고 있는데, 평가에 대한 답변을 얻기 이전에 이미 일반 교회에서는 변형된 TD나 혹은 그와 유사한 프로그램들이 여과 없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그것을 통하여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성도의 영적인 생활이 나아지며, 때로는 불신자가 회심의 체험을 하기도 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평가는 위와 같은 정도이다. 특히 기존의 교회들이 영적인 갈함에 그 필요를 다 채워주지 못하는 것에 반해서 참가한 사람들의 체험과 기쁨이 간증으로 많이 나타나기도 한다. 전쟁과 여러 어려움 가운데 지친 사람들을 꿈과 정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일깨워주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는 것도 교회사적으로 본다면 귀한 은혜일 것이다. 6.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본 비평 첫째, 모든 신학의 궁극성은 삼위 하나님에게 두어야하며 그분의 말씀인 성경이 최고의 판단 기준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직접 영감되었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와 섭리로 말미암아 모든 시대에 보존되어 왔다. 그러므로 이 책들은 권위 있고 신뢰할 만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적 논쟁에 있어서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그 최후적 결론을 내린다.” 둘째, 체험과 확신에 관해서도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은사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경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일 것이다. 하지만 경험은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해석되고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틀림없는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진정한 신자는 그것을 얻기 전에 오래 기다리면서 많은 어려움들로 갈등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에 의해 하나님이 그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 수 있게 되므로 그는 특별한 계시 없이도 일반적인 수단들의 사용을 통해 그것(확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마찬 가지로 교회사가인 필립 샤프 역시 종교개혁의 특징을 소개하는데, 객관적인 원리로서 전통에 대한 성경의 우위성을 지적하고, 이어서 주관적인 원리로서 행위에 대한 믿음의 우위성을 강조한다. 대중화된 것(다수에 의한 합의와 동의)이라고 항상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흐름이 그렇게 흘러간다고 할지라도 시대의 사조에 편승하기보다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주어진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셋째, 이 운동의 가톨릭적 경향에 관한 것이다. 가톨릭적이기 때문에 틀렸다는 논의보다는 성경적이어야 할 것이라는 근본적인 자세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 TD운동은 부분적으로 기독교적으로 채색되었다고 하지만, 전체적으로 여전히 가톨릭적이며 본인은 의도하지 않더라도 성물숭배나 신비체험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넷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분명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지정의를 모두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신앙과 신학의 복합적인 요소를 모두 염두에 두면서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인도해야 할 것이다. 대안이 없이 그 운동의 틀린 것만 지적한다고 성도들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어느 시대에나 유혹의 물결과 흐름들이 있어 왔으며, 그 모습 역시 다양하게 변형되어 왔다. 바른 신학적 안내와 함께 예방, 그리고 더 나아가 총체적인 훈련과 교육이 필요다. 이미 종교개혁시대에 있었던 성찬론의 논쟁처럼 신비하게 채색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따라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하며 성경을 기준으로 개혁하려는 노력을 교회의 지도자만이 아니라 전교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마치는 말 이상의 논증을 종합해 보면, TD운동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이다. 실제로 교회의 분열과 자기들끼리의 특별한 유대로 인한 구별된 집단화 그리고 체험이 강조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근본적으로는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이며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신비체험을 가져오며 유지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위험성이 있는 것을 알고 고민하면서 교회가 새로운 대책과 성경적 대안을 마련하는 일에 더 많은 힘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