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079 no image |박윤선의 5분 새벽기도 설교 <38>|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편집부
2668 2014-11-04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출애굽기14장 10-14절 “사람의 번영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그 길에서 찾아야” 사람들은 역경을 당하면 원망을 합니다.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도 원망하고 물건도 원망합니다. 이러한 원망은 결국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1.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11-12절) 때문에 나왔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원망은 인간의 근성입니다. 그것은 자기 성품을 제재하지 않는 자에게서 언제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과 사람이 일하는 방법이 서로 맞지 않으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방법을 원망하게 됩니다. 사람의 방법은 졸렬하고 하나님의 방법은 깊고 오묘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9). 하나님께서 어느 때는 환난을 주시어서 우리를 회개시키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환난을 원하지도 않고 싫어합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집에 강도가 들어와서 위협하므로 그 집 아이가 놀라 병이 났습니다. 장성해서는 그 병이 더 악화되어 병원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웃에 있는 신자들이 그를 데려다가 부흥집회에 참석시켰습니다. 그곳에서 병 고침을 받았고,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나중에는 전도자까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역경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2.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은 어떤 것입니까 모세의 기도에 만족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15절)라고 하신 것을 보면 모세가 기도를 흡족하게 한 것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 편의 기도가 있는 곳에서 성취됩니다. 스펄전은 “기도는 하늘을 정복하는 것인데 땅을 정복하지 못하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실패는 기도 부족의 결과입니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 대중의 순종을 보시고 이루신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대중을 기뻐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창1:2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참된 사람의 번영을 담고 있습니다. 대중이 부패할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홍수로 멸망시키셨습니다(창7:17-23).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대중으로 나타날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크게 기뻐하십니다.
1078 no image |심/층/진/단| 오늘날 교회에서 ‘예수의 제자' 세움은 가능한가?_고경태 목사
편집부
3133 2014-11-04
오늘날 교회에서 ‘예수의 제자' 세움은 가능한가?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시작하는 말 한국 교회에서 제자훈련프로그램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 28장 19-20절을 근거로 “제자를 삼음”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성경 본문을 그대로 살펴본다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제자를 삼을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이 본문으로 “제자훈련”을 함에 있어서 과연 누구의 제자를 삼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의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 ‘제자훈련프로그램’은 마치 ‘예수 제자 삼기’ 운동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만일 “제자 삼기”가 “예수의 제자를 세움”이라할 때에는 좋은 사명이나 사역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와 관련해 과연 예수의 제자를 세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보다 분명하게 정의하지 않을 수 없다. 1. 예수의 제자를 세우려면 자신이 확실한 예수의 제자여야 한다. 사도 이후로 자신을 예수의 확실한 제자로 주장할 수 있는 사역자는 없었다. 그런데 작금 신사도 운동에서는 스스로 자기들이 예수의 제자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에서는 현재도 사도가 가능하며, 사도와 동급이 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신사도 운동 추종자들은 가룟 유다 대신에 선택된 맛디아나 바울 사도처럼 가시적이고 모두가 인정할 만한 표징을 자기들도 가지고 있는지 답을 해야 한다. 과연 모두가 인정할 만한 표징을 신사도 운동 추종자들이 내보일 수 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 사도의 사도성은 당시에도 의심을 받았지만 사도들이 인정함으로써 사도의 반열에 서 있음이 확실하다. 반면에 마가, 누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인 야고보 등은 사도의 반열에 서 있지 않았었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성경 기록자들조차도 사도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누가 감히 사도와 같은 예수의 제자라고 나설 수 있겠는가? 2. 예수의 제자는 오직 예수님만이 세울 수 있다. 예수의 제자인 사도들은 예수의 제자를 세울 수 있었는가? 사도들의 행적에서 “제자 삼음”이 사도행전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것이 곧 “예수의 제사 세움”이라 할 수는 없다. 문맥으로 본다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사도를 따르는 그들은 “사도의 제자”가 된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로 간주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로 간주되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선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는 예수 외에 그 어떤 누구도 세울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서울대학교 나온 학생이 서울대학교 졸업 자격을 줄 수 있다고 하는 허무맹랑한 주장과 다를 바 없다. 3. ‘예수의 제자’에 담겨 있는 의미 예수께서 제자라고 선언하신 말씀이 있다(요 8:31-32). 곧 예수의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면”된다(요 8:31). 그리고 “진리를 깨달아 진리로 자유로워야” 한다(요 8:32).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제자’라 하지 않고 오히려 “친구”라고 하셨다(요 8:14). 그렇다면 제자들은 제자인가, 친구인가? 높은 목표는 친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자’나 ‘친구’ 모두 원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 결정권이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십자가에 대한 사랑에 대한 것이며, ‘예수의 친구들’도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보다 분명하게 증거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예수의 제자’가 삼은 ‘제자’는 ‘예수의 제자의 제자’이다. 결국 ‘사도의 제자가 된 사람’은 ‘예수의 제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4. 목사가 ‘예수의 제자’를 세울 수 있는가? 교회는 사도의 제자를 ‘속사도’라고 했다. 그리고 속사도의 제자를 “교부”라고 했다. 교회는 이 ‘교부’까지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며 존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사도’나 ‘교부’들에게 ‘예수의 제자’라는 호칭을 부여하지 않았다. ‘속사도’나 ‘교부’는 ‘예수의 제자’보다 더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에서 탁월한 존경을 받는다. 그리고 교부의 뒤로는 ‘목사’를 세웠다. 이 목사들은 모두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 잘 알다시피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이들은 ‘사제와 주교’로 불렸지만, 종교개혁 때 ‘미사’를 집례하지 않는 ‘복음 선포자’라는 의미에서 목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비록 목사 안에서도 차등을 갖고 있는 감독정치가 있지만, 장로교회에서는 목사는 모두가 동일한 목사다. 그러한 교회의 질서에서 ‘목사’가 ‘예수의 제자’를 세울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제자를 세울 수 있는가? 사도들도, 속사도들도, 교부들도 하지 않은 ‘예수의 제자 세움’이라는 행위를 목사나 그리스도인이 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 사도, 속사도, 교부들이 집중을 했던 일은 ‘예수의 제사 세움’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과 기도에 착념하는 일’(행 6:4)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지금 목사들을 통해 계속해야 한다. 마치는 말 교회는 “예수의 제자 만들기”라는 헛된 프로그램에서 벗어나야 한다. 할 수 없는 능력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를 믿으며, 위탁된 복음의 선포를 듣고 믿음을 이루는 곳이다. 교회는 만민이 구원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의를 위한 기도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 교회에서 선포된 복음을 존경하고, 선포된 말씀으로 하나가 되며, 그 믿음을 따라 정진하는 것이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다. 이 땅에 완전한 교회는 없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세워진 유일한 기관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16)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곳이다(딤전 6:3).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자들은 다른 수단이 아닌 오직 바른 말씀을 선포하는 것에 착념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된 교회를 이룸에 힘써야 한다.
1077 no image |개/혁/주/의/신/앙/강/좌| 세례, 곧 그리스도의 피와 영으로 씻음의 의미_황원하 목사
편집부
3563 2014-10-21
세례, 곧 그리스도의 피와 영으로 씻음의 의미 출애굽기 14장 10-31절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 제26주, 제69-71문 참고) < 황원하 목사, 대구산성교회 > 《초대 교회는 아무에게나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 그들은 세례를 베풀기 전에 반드시 교리공부를 시켰다. 기본적인 교리를 알고 문답을 통과한 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 이처럼 세례는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세례는 단 한 번만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하여 수세자는 자신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 기억하여야 하며, 세례를 집례하는 교회와 목사는 수세자의 상황을 신중히 살펴야 한다.”》 교회에 나오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세례를 받게 된다. 그런데 세례의 의미를 잘 모르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세례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가르치지 않고서 세례를 베푸는 교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다시 제대로 세례를 받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이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세례는 중요한 성례(거룩한 예식)이므로 교회가 신중하게 베풀어야 하고 받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야 한다. 결혼식을 함부로 거행하지 않고 장례식도 중요하게 여기면서 세례 예식을 가볍게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1. 세례의 가치 초대 교회는 아무에게나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 그들은 세례를 베풀기 전에 반드시 교리공부를 시켰다. 기본적인 교리를 알고 문답을 통과한 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 이처럼 세례는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그러다가 주후 4세기에 로마가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공인한 후에 모든 국민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면서 세례의 의미가 퇴색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불명확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앙고백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아무렇게나 세례를 베푸는 일은 반드시 자제해야 한다. 세례는 결코 경솔하게 시행되지 않아야 한다. 베드로는 세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 3:21). 베드로는 세례가 우리를 ‘구원하는 표’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한다. 이것은 세례가 단지 기념 예식으로 간주될 것이 아니며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례는 기독교 전통에서 대단히 중요한 과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비로소 신앙의 여정을 시작한다. 2. 세례의 유래 신약에서 세례는 세례자 요한에 의하여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요한이 세례를 어떻게 도입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그가 유대의 정결의식과 쿰란 공동체의 목욕의식을 참고하여 독특한 예식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는데, 선지자는 새로운 의식을 만들 자격과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요한의 세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특별히 보내심을 받은 사람인데, 새로운 메시아 시대를 맞이하기 전에 더럽고 불결한 것을 씻는 의식으로서 세례를 만들어 시행하였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셨으며 직접 받으셨다. 그리고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례를 시행하였다.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세례를 베푸는 형식은 같다. 하지만 요한의 세례가 메시아로 말미암는 새 언약의 시대를 준비하는 의식이었다면 예수님의 세례는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진 새 언약의 공동체에 가입하는 의식이었다. 즉 세례는 수세자를 유형교회에 엄숙하게 가입시킨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세례는 예수님에 의해 제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세례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 세례는 이미 구약에서 상징적으로 계시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홍해를 건넌 사건이다. 구약에서 물은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의미한다. 노아의 홍수는 불의한 자들에 대한 심판이면서 동시에 의로운 자들에 대한 구원이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일 역시 불의한 이집트 사람들과 의로운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분하는 방편이 되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말함으로써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를 받은 것으로 해석한다(고전 10:1-2). 3. 세례의 효력 세례의 효력과 관련된 성경구절들이 많이 있다(예. 히 12:24; 벧전 1:2; 계 1:5; 슥 13:1; 겔 36:25; 요 1:33; 요 3:5; 고전 6:11; 고전 12:13; 롬 6:4; 골 2:12). 이 구절들을 통하여 우리는 세례가 은혜의 실질적인 방편인 것을 알게 된다. 1)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선언함 물은 더러운 것을 씻는다. 이에 따라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더러운 죄를 씻어서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세례는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공적으로 드러낸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롬 6:3-4). 그렇지만 세례와 구원이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구원을 받았을 수 있으며, 세례를 받았어도 구원을 받지 않았을 수 있다. 이것은 세례 자체가 어떤 효력을 가지고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실로 세례는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보증하고 확인시켜 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교회에 등록한 사람들은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2) 죄를 깨끗하게 씻어줌 세례는 ‘외적인 씻음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내가 몸의 더러움을 제거하기 위하여 물로 씻는 것처럼 세례는 ‘그리스도의 피와 영’으로 내 영혼의 불결함, 즉 나의 모든 죄악을 씻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친히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셨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하는데 대속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하며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성령)’으로 말미암아 정결하게 된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도록 성화시키시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씻어지고 선함을 사모하는 성향이 늘어난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막 1: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그러므로 세례는 ‘중생의 씻음’(딛 3:5) 혹은 ‘죄 씻음’(행 22:16)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모든 종류의 불결함으로부터 깨끗하게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이를 통하여 우리의 본성이 거룩함과 의로움을 추구하게 된다. 3)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게 하심으로 이집트 군사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셨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 갈라졌던 바닷물은 이집트 군사들이 뒤 따라 건너려 할 때 다시 합쳐져서 이집트 군사들을 멸절시켜 버렸다. 결국 홍해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는 커다란 장벽이 생기게 되었고 그들은 다시 왕래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장벽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것이며, 따라서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다. 홍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적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서 안전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백성으로 인치시며 우리를 그분의 특별한 섭리와 계획 가운데 보호해 주신다. 이는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영으로 씻겨서 하나님의 정결한 자녀가 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는 은혜언약의 표와 인이라 할 수 있다. 즉 세례는 중생과 사죄와 헌신의 표인 것이다. 세례는 우리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보증과 보호의 표식인데, 이것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 영원히 지켜진다. 4) 지속적인 은혜를 받게 함 세례는 은혜의 방편이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받은 자에게 그분의 은혜를 주신다. 하지만 세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세례를 집례하는 순간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세례를 받는 순간에 제공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 제공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그러나 세례를 통한 은혜가 기계적이거나 자동적인 것은 아니다. 믿음이 없는 자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은혜를 자동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분명히 믿음이 우선이며 전제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히 11:6). 5) 유형교회의 회원으로 가입시킴 바울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한다(고전 12:13). 여기서 ‘한 몸’이란 교회를 뜻한다. 즉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교회를 이룬다는 뜻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8장은 세례가 수세자를 유형 교회의 회원으로 엄숙하게 가입시킨다고 명시한다. 이것은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며 하나님의 교회로 모여서 교회 안에서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구별된 신적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4. 세례의 시행 1)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자 세례를 모독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큰 죄이다. 세례를 아무나 집례해서는 안 된다. 세례는 반드시 합법적으로 소명을 받은 복음의 사역자, 즉 목사가 엄중하게 시행해야 한다. 그런데 목사만이 세례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은 목사가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목사가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다. 목사는 세례를 베풀 자를 잘 분별하여야 한다. 우선 세례를 받을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교리들을 가르쳐서 주님의 제자로 성장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2)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는 유형 교회에 등록한 회원들로 교회가 정한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 한다. 그리고 유아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는 유형 교회의 회원들의 자녀인 생후 24개월 이내의 유아들이어야 한다. 세례를 받으려면 신앙을 분명히 고백해야 하는데,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야 한다. 그리고 목사에게서 일정 기간 교육을 받아야 하며 당회가 실시한 문답에서 통과되어야 한다. 하지만 예외가 있는데, 임종하기 직전이거나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에 당회의 결의로 세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유형 교회 밖의 사람들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을 수 없다. 3) 물로써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목사는 물로써 수세자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여기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이유는 물이 구원의 사역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세례가 삼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삼위 하나님과의 깊은 연관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과 예배와 신뢰와 존귀를 체험하고 향유하게 된다. 따라서 세례를 이와 같이 받는 것은 큰 복이다. 4) 침례인가 뿌림인가? 세례의 시행 방법에 관해서는 오래되고 지루한 논쟁이 있다. 그것은 수세자를 물에 담그는 침례가 옳으냐 아니면 수세자에게 물을 뿌리는 뿌림이 옳으냐의 논쟁이다. ‘세례를 주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밥티조’는 ‘물에 담그다’, ‘빠뜨리다’, ‘적시다’, ‘씻다’, ‘뿌리다’의 의미를 가지는 ‘밥토’에서 유래한 것이어서 단어 자체를 가지고는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역사적으로 보면 동방교회에서는 물에 담그는 방식으로 세례가 행해졌고 추운 북쪽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서는 물을 뿌리는 방식으로 세례가 행해져서 두 방식 모두가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 수록된 세례 이야기를 관찰해 보면 물에 담그는 방법을 사용했을 수는 있으나 물에 담글 만한 상황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 때에는 강에서 베풀었으므로 물에 담그게 했을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바울이 감옥에서 세례를 베풀거나 집 안에서 세례를 베풀었을 경우에는 분명히 물에 담그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물을 뿌렸다고 보아야 한다.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침례를 고집하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세례를 베풀 때 수세자를 반드시 물에 담글 필요는 없다. 5) 그 밖에 알아야 할 것들 세례는 단 한 번만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하여 수세자는 자신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 기억하여야 하며, 세례를 집례하는 교회와 목사는 수세자의 상황을 신중히 살펴야 한다. 유아 세례를 받은 경우에는 나중에 장성하여 입교문답을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하여 유아의 부모와 집례 교회는 유아 세례 기록을 잘 기록해야 하고 보존해야 한다. 세례를 베풀 때 미신적인 도구들, 즉 기름, 소금, 양초, 기타 물건 등과 덕스럽지 않은 세속적인 의식은 결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로지 주님이 정하신 방식대로 세례를 시행해야 한다. 사람 외에 짐승이나 여타 피조물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세례를 가증스럽게 만든다. 마치는 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마지막 시기에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그리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막 16:16). 그러므로 세례는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주님의 제자로 훈련시키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풂으로 온전한 복음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
1076 no image <박영선 석좌교수 특별강좌> 한국교회 목회자의 길_박영선 목사
편집부
3646 2014-10-07
한국교회 목회자의 길 < 박영선 목사, 남포교회, 합신 석좌교수 > 발췌 : 노승수 목사 이 원고는 10월 6일 합신 목회자연장교육원 주최로 합신대강당에서 ‘한국교회 목회자의 길’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석좌교수 특별강좌의 내용을 요약, 발췌한 것입니다.<편집자 주> “삶에 허덕이며 짜증내는 성도들 앞에서 그리스도처럼 짐을 지고 가는 것” 목회란 하나님이 일하시는 성육신의 방법을 잇는 하나님의 지혜요 방법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 묶이고 엮여서 드라마를 써가는 것이 목회이다. 삶의 현장을 떠날 수는 없어 하나님은 스스로 지심으로 자신의 명예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항복을 받으시는 것처럼 목회란 그런 것이다.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는 수없이 목회를 해오셨지만 복음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무도 그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것이 목회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종종 설명한다. 부부간의 맺어짐은 세상에서는 진심과 열정의 문제이지만 기독교에서 부부가 되는 것은 사랑에 조건 지어져 있지 않고 믿음에 조건 지어져 있다. 사랑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충분조건이다. 목회 역시 사랑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충분조건이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목회이다. 목회자들의 공통적인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분노와 억울함이다. 우리가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이렇게 수고하건만 이 무슨 어이없는 현실인가 하는 자괴감과 분노가 우리를 지배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닥에 내려놓으신다. 그것이 주님이 가신 길이다. 우리는 그 조건에 묶여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헤게모니(주도권)를 잡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처분되도록 맡겨지는 것, 그것이 주님이 가신 길이요 목회의 길이다. 백성들의 분노의 대상이 되는 그리스도처럼 목회자의 길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삶에 허덕이는 것에 짜증을 내는 성도들 앞에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짐을 지고 가는 것이 목회이다. 목회는 딱 떨어지는 답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다. 묵묵히 처분을 따라야 할 뿐 목회자의 명예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조건과 세상의 도전이 요구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데 있다. 예를 들자면, 벤허라는 영화에서 찰톤 헤스톤의 존재감 없는 존재로서 영화를 빛낸다. 주인공이 너무 멋있으면 스토리를 좇아갈 수가 없다. 우리는 본문이 아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본문의 스토리를 드러내는 것이 목회이다. 그래서 존재감 없는 주인공 벤허 때문에 그 스토리가 빛이 난다. 목회자의 명예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목회는 주인공이지만 스타가 아닌 삶이다. 스토리를 엮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역사라는 무대 위에 서서 자기 자리를 살아내는 것이 목회이다. 우리가 묶여 있고 맡겨진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진지한 스토리를 만드는지를 모르니 자기 자신을 살지 못한다.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그렇게 던져진 존재이다. 그것을 견뎌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묶고 있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조건이다. 역사의 스토리를 써 가야 시편 150편 17-22절을 보면,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 그를 그의 집의 주관자로 삼아 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하고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며 그의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시 105:22)라고 노래한다. 이 본문은 요셉의 생애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데 한 번도 주어가 안 되고 수동태 목적어로 사용되고 있다. 요셉의 생애에 재미있는 점은 한 번도 긍정적인 선택을 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때까지 그는 묶여 있다. 그는 늘 몰려서 무엇인가를 했다. 성경은 전부 수동태로 말하고 있다. 팔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그 형들은 그를 팔아먹고 죽이려고 한 것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것이 주님이 가신 길이고 그것이 목회의 길이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나날들로 분노와 억울함 속에서 총리가 된다. 총리 수업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서 총리가 되었다. 목회의 길도 그런 것이다.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결정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묶여 있다. 이 시대에 묶여 있고 정반대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목회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 방법 그것이 목회의 길이다. 마치 요셉이 자신의 꾼 꿈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이루는 것처럼 견딜만하거나 이해할만하지 않다. 목회의 길에서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그 길을 가신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길은 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이신다. 그것이 목회의 길이다. 반면에 우리는 할 수 있다면 멋있게 폼 나게 살려고 한다. 그때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나중에 후회할 일도 포함이 된다. 그래서 후회 없는 삶을 살려고 강박적으로 시도한다. 이런 이유에서 자신의 삶에서 잘못했던 과거를 회개로 씻어버리려고 한다. 없애려는 이유는 잘못한 것은 필요 없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에 필요 없는 것이 없다. 자기가 자기를 저주할 수밖에 없는 자책을 지고 사는 것이 목회다. 그 앞에서 분노와 자책을 견딜 방법이 없다. 그것을 따뜻한 눈으로 보라. 분노와 자책도 감수하길 하나님은 우리를 못난 대로 갚지 않으신다. 묵묵히 견뎌내는 것이 목회요 목회자의 길이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목회다.
1075 no image |긴/급/진/단| 로마 천주교와의 ‘교류’ 및 ‘영세’에 대한 우리의 이해_박동근 목사
편집부
3663 2014-10-07
로마 천주교와의 ‘교류’ 및 ‘영세’에 대한 우리의 이해 < 박동근 목사, 강변교회 교육목사 >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언약의 표를 ‘거짓교회의 불결한 손’도 소멸치 못하였다!” <들어가는 말> 최근 한국 사회와 한국 교계는 로마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8월 14일부터 18일까지의 4박 5일의 그들 수장의 한국 방문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 사회와 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모든 언론이 그의 일정을 대서특필했고, 로마 천주교 신자들은 열렬히 그의 방환을 환대했다. 반면 개신교 내부에서는 로마 천주교의 신학과 신앙에 대한 입장 차이로 갈등을 보이기도 하였다. 제99회 예장합동 총회에서는 로마 천주교가 이단이라는 입장을 공교히 하고, 로마 천주교의 영세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반면 예장통합 총회는 로마 천주교를 단지 전통이 다른 교회로 규정하기로 결의하여 예장합동 총회의 결의와 상반된 태도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개신교 내에 일반 성도들 안에서도 로마 천주교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에 대한 혼돈이 있는 것 같다. 이에 필자는 ‘로마 천주교에 의해 시행된 영세’를 인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통해, 로마 천주교에 대해 개신교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신앙고백 앞에서 합당할지를 숙고해 보고자 한다. 로마 천주교에 대한 입장 정립은 개신교 자체에 몹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이 로마 천주교에 대한 신앙적, 신학적 판단으로부터 기원했으며, 로마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개신교의 신학과 신앙 정체성 이해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즉, 종교개혁의 정체성은 로마 천주교와의 논쟁의 정황에서 정립되었다. 따라서 로마 천주교에 대한 판단이 정서적 접근이나 단지 교세 경쟁의 측면에서 다루어져서는 안 되리라 생각한다. 필자는 로마 천주교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를 종교개혁의 선구자이며 개혁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교사로서 존 칼빈(John Calvin)의 가르침을 통해 숙고해 보려 한다. 필자는 이 주제를 ‘로마 천주교에 의해 시행된 영세를 인정할 것이냐 부정할 것이냐’의 질문 속에서 다루려 한다. 로마 천주교와 영세의 문제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다룰 때, 세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첫째, 칼빈은 로마 천주교를 참 교회로 보았나 거짓 교회로 보았는가? 둘째, 칼빈은 왜 로마 천주교의 영세를 세례로 인정하였는가? 셋째, 칼빈의 로마 천주교로부터의 분리는 교회 일치의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것일까? 이 논증의 목표는 ‘로마 천주교의 영세를 세례로 받을 것인가’라는 문제 안에서 로마 천주교를 어떻게 규정할 지를 존 칼빈의 가르침 안에서 통찰하는 것이다. 1. 칼빈은 교회의 표지를 근거로 로마 천주교를 거짓 교회로 규정했다. 칼빈은 로마 천주교의 영세를 세례로 인정한다. 왜 그가 영세를 세례로 인정했는지는 차후에 다룰 것이다. 이번 예장합동 총회 결의는 로마 천주교가 이단이기에 영세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우리는 몇 가지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자칫 이러한 생각은 칼빈이 영세를 세례로 인정한 것이 로마 천주교를 참 교회로 인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은 로마 천주교를 결코 참 교회로 인정한 적이 없고, 그런 이유로 그들의 영세를 세례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칼빈에게 있어 영세를 세례로 인정하는 일은 로마 천주교를 교회로 인정하는 일과 무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영세 인정이 로마 천주교 인정과 인과 관계에 있지 않다. 이 문제는 후에 다루기로 하고, 우선 우리는 칼빈이 로마 천주교를 참 교회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가 어떠한 근거로 이러한 판단을 내렸는지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칼빈에게 로마 천주교는 왜 거짓 교회로 규정되었을까? 이에 대한 근거는 교회의 표지(the Marks of the Church)에 있다. 칼빈은 교회가 그 표지에 의해 ‘얼굴’을 가지며, 그 얼굴에 의해 눈에 보이게 된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가견적 교회(visible church) 안에 표지를 두셔서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분별할 수 있도록 하셨다. 표지는 두 가지로 ‘말씀 선포’와 ‘성례’이다. 이 표지를 잃어버린 곳에 교회의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도덕적인 문제와 흠이 있어도 이 표지가 존재하는 한, 그곳에 교회의 형태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도덕적 완전성을 내세워 표지를 가진 교회를 부정한 카타리파, 도나투스파, 재세례파를 정죄한다. 교회에도 용서가 필요하며, 용서 안에서 완전한 목표를 추구한다. 칼빈에게 교회가 참 교회되는 것은 교회의 표지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천주교를 교회로 볼 것이냐 아니냐의 판단 근거는 이 표지가 로마 천주교 안에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귀결될 것이다. 칼빈에 따르면, 로마 천주교는 말씀 선포의 표지를 잃었다. 말씀의 표지란 성경과 성경이 가르치는 중요한 교리(praecipua religionis doctrina), 모든 신자들이 인정해야 하는 신조들(religionis capita)을 포함한다. 칼빈에게 로마 천주교는 필수적인 교리의 핵심(summa necessariae doctrinae)과 성례(sacramenta, 영세만이 세례의 형태를 유지)가 파괴되었다. 교황 제도는 성경 위에 군림하고, 교회의 오직 하나인 머리, 그리스도의 지위를 가로챘다. 교황은 신자들의 양심을 주재하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의 표, 성례의 순수성을 빼앗고, 두 가지 표지를 부패시켰다. 칼빈은 성경을 따라 교회의 기초(Ecclesiam fundatam)가 사도와 예언자들의 교훈 위에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칼빈에게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은 그리스도시다(엡 2:20). 삼위일체를 인정한다고 하여 그들이 온전한 교회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뿐, 그 하나님께서 예배와 경배와 찬양과 섬김을 받으시며, 그 백성들을 통치하시는 진리의 표준인 선지자와 사도들의 교훈을 버리므로, 자신들이 부르는 하나님을 모독한다. 교황과 천주교의 전통은 성경 위에 군림했고, 성도들의 양심을 속박했다. 이와 같이 부패한 성경관은 교회의 교리를 부패시켰고, 구원과 예배를 인간의 유전과 미신으로 부패시켰다. 칼빈은 로마 천주교의 교리와 예배와 직제의 부패를 여로보암 시대의 극심한 우상숭배에 비유한다. 교회의 표지가 파괴된 로마 천주교의 상태를 칼빈은 이렇게 비유한다. 교회의 표지 파괴는 “목을 찔리거나 심장에 치명상을 입은 사람이 죽은 것과 같다.” 로마 천주교는 근본 교리를 떠났고, 공중집회는 우상 숭배로 부패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의 이름을 성경을 떠나 자의적으로 숭배하므로, 부패된 교리를 통해, 미신을 통해 오염시켰다. 칼빈은 로마 천주교를 적그리스도, 거짓 교회로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말씀의 표지가 파괴된 거짓 교회는 “그리스도의 으뜸 되는 대적”이면서 “교회의 이름으로” 참된 교회를 괴롭히고 위협한다. 칼빈이 로마 천주교를 어떻게 규정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분명히 로마 천주교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호를 부르면서도 사도와 선지자의 교훈, 성경과 근본적인 교리들을 떠났고, 성례는 부패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대적함을 의미한다. 말씀을 떠나, 바른 교훈을 떠나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것은 그를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 로마 천주교를 거짓 교회로 규정한 칼빈은 왜 영세를 세례로 인정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칼빈은 로마 천주교를 교회로 인정하여 영세를 세례로 인정한 것이 아니다. 칼빈에 따르면, 로마 천주교에는 교회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진술에서 중요한 것은 남은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남은 것은 지금까지 칼빈이 신랄하게 비판한 것들에 대한 일종의 타협적인 발언이나 비일관적인 번복이 아니다. 그가 남았다고 말하는 것은 로마 천주교에 하나님의 기적 안에 남겨진 ‘남은 자들’과 아직 하나님께서 애초에 주신 형태를 남기고 있는 ‘세례’를 의미한다. 로마 천교회의 영세는 세례의 원래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로마 천주교의 영세는 로마 천주교 체제와 무관하게 하나님께 기원을 두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것의 부패를 막으셨다. 따라서 로마 천주교의 합법성 때문에 영세가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기원과 그분의 보호하심에 의한 그 형태 보존 자체 때문에 세례로 인정된다. 칼빈의 말을 들어 보자.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언약을 한 번 맺으셨으나, 그것을 보존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언약이 그 자체의 힘으로 그들의 불경건과 싸우면서 생명을 유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언약이 그들 중에 존속한 것은 확실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한 것이다. 그들의 배반은 주의 진실을 말소할 수 없었고, 비록 그들의 불결한 손이 할례를 더럽혔을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여호와의 언약의 진정한 표징이며 거룩한 성례였다.” 로마 천주교의 교회 인정과 부정의 문제는 영세 인정의 문제와 인과 관계를 갖지 않으며 무관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 천주교가 이단이기에 영세를 세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는 신학적 문제를 가져올 수 있고, 역사적 개혁신학의 판단과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가 옛 재세례파나 도덕적 완전주의자들의 오류를 반복할 수 있기에 위험하기도 하다. 성례는 언약의 표지이다. 그러므로 성례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와 그리스도께 묶여 있다. 성례는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주신 약속에 대한 표지요 약속으로부터 받은 은총에 대한 확신의 표지이다. 성례의 효력은 집례자의 능력이나 성례 자체의 마술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은총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영세에 남겨진 세례의 형태는 로마 천주교로부터 기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언약의 표의 형태를 유지하신 것도 하나님이시니 그 형태를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칼빈의 말을 빌리면, 비록 불결한 손으로 집행된 영세라 할지라도, 그 영세의 형태는 하나님께서 주신 세례의 형태이므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을 구분해야 한다. 그러므로 로마 천주교에서 누군가 개종한다면 세례 자체는 인정해주고, 그의 신앙고백을 점검하여 참된 교훈을 가르친 후 교리적 전향을 전제로 영세를 세례로 인정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마치는 말> 결론적으로, 참된 신앙고백 안에만 참된 일치와 연합이 있다. “주의 말씀을 떠나서는 신자 간에 일치가 없다”는 칼빈의 가르침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칼빈도 그랬듯 우리도 로마 천주교가 회복되길 소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와 연합은 로마 천주교가 그들의 잃어버린 교회의 얼굴인 표지를 회복할 때만 가능하다는 전제를 유지해야 한다. 칼빈은 로마 천주교를 거짓 교회로 규정했고, 오늘날 로마 천주교는 전혀 ‘말씀 선포’와 ‘성례’의 회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예장통합이 진리의 일치를 배제한 사랑의 연합을 주장하는 일은 위험해 보인다. 한편 예장합동처럼 로마 천주교가 거짓 교회라는 사실을 영세 부정과 인과 관계 속에 놓는 일도 위험하다. 왜냐하면 옛 종교개혁자들을 괴롭혔던 도덕적 완전주의자들과 재세례파의 망령을 불러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혁교회의 교훈을 따라 로마 천주교와 세례의 문제는, 불결한 손으로 집행되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한 언약의 표의 형태를 영세가 가지고 있으므로 교리적 전향을 전제로 영세를 세례로 인정하자는 방향으로 인식됨이 합당하리라 본다. 이상에서 살펴본 결과 로마 천주교는 거짓 교회라는 점을 유지하면서, 영세를 세례로 인정하는 것이 개혁교회의 신학적 입장에 가장 일관된 것으로 판단된다.
1074 no image |제99회 총회 참석기| 나는 합신의 목사다_최광희 목사
편집부
2989 2014-10-07
나는 합신의 목사다 < 최광희 목사, 행복한 교회 > “한 번의 고성도 없었고 얼굴 붉히는 사람도 없었던 총회였습니다” 9월 셋째 주간에 제99회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총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수원노회의 총대로 참석했습니다. 총회를 참석한 첫날부터 저는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에 너무나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수십 년간 노회에 참석해 왔지만 전국의 노회에서 선출된 총대들이 모인 총회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습니다. 찬송을 하나 불러도 어쩜 그렇게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해마다 9월이면 각 교단의 총회 상황이 뉴스에 나오는데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소식 때문에 부끄럽고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합신 교단의 총회는 전혀 다르며 이름처럼 성(聖) 총회입니다. 이번 총회를 참석하면서 저는 물론이고 다른 총대들도 하나같이 합신에 속한 성도이고 합신의 목사인 것에 대해 한없는 자부심과 감사를 느낀다고 고백했습니다. 오늘날은 당연한 것이 오히려 희귀한 이상한 시대인데, 우리 합신 총회에서는 단 한 번의 고성도 없었고 한 사람도 얼굴을 붉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수십 번 손을 들고 발언을 해도 누구 하나 야유하는 사람 없이 다 들어주는 성숙한 분위기였습니다. 자기와 전혀 다른 의견의 발언도 끝까지 들어주고 또 상대방의 의견이 더 옳다 싶을 때 앞서 동의(動議)한 분이 자기의 동의를 철회하기도 했습니다. 혹 두 의견이 맞설 경우 표결을 하면 언제든지 승복하기도 했습니다. 임원선거나 의사 결정을 할 때에도 같은 노회에서 온 총대라 해서 몰표를 주는 일도 없었습니다. 나란히 앉은 총대가 서로 다른 의견에 거수를 해도 너는 왜 그쪽에 손을 드느냐고 핀잔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각자 자기의 신앙 양심에 따라 옳다고 생각되는 의견에 찬성을 표했습니다. 일전에 총회 총무로부터 기독교계 신문사 기자들이 합신 총회는 세미나를 하는 것 같다고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참석하면서 봐도 우리는 3일 내내 각종 안건을 다루면서 학술 세미나를 하는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우리 총회를 그대로 촬영하면 회의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는 교과서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금번 총회에서 대외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한 것 중에는 ‘베리칩이 666 짐승의 표라고 주장하는 무리들은 급진적 세대주의자들이며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666은 사람의 수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수는 네로 황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바코드나 베리칩이 짐승의 표라고 떠드는 사람들에게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결정은 ‘한국독립교단연합회’는 교단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작년에 제가 한국독립교단연합회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그쪽 총무도 그들 스스로 교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번 결정으로 말미암아 ‘한국독립교단연합회’와 같이 교단이 아닌 곳에서 목사로 안수 받은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3년 전에 고신 교단의 제의로 고신과 합동추진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해 왔는데 금번에 이를 폐지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합동은 추진하지 않더라도 교류협력위원회를 만들어 연합활동을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이 외에도 3일간 여러 가지 보고와 결정을 했는데 그 모든 과정에서 총회 총대들이 보여준 성숙한 자세로 말미암아 감사가 넘칩니다. 총회를 마친 소감을 딱 한 마디로 말하라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나는 합신의 목사다.”
1073 no image |박윤선의 5분 새벽기도 설교 <37>| 신자의 처세
편집부
2926 2014-10-07
신자의 처세 잠언 29장 25-26절 “신자가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을 때 진리는 신자의 생명에 역사해” 신자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이 세상에서 취해야 할 바른 태도입니다. 1.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신자로서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능력인 사실을 체험한 자는 복음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면서 소경 된 자가 예수님에게 고침 받았을 때에 바리새인들은 교권을 가지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때에 본인은 끝까지 담대히 예수님을 증거하였으나 그의 부모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요 9:2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마음속에 죄를 분변하고 멀리함)하는 마음”(딤후 1:7)입니다. 신자가 복음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면, 그는 진리를 주장하지도 못하며 사랑하지도 않게 됩니다. 복음을 사랑하는 뜨거움은 그것을 위하여 굳게 선 신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지 않으면 그 진리가 그의 마음속에서 생명의 역사를 하지 않으므로 그는 진리를 떠난 자와 같이 됩니다. 마귀는 이런 자를 자신의 이용물로 삼습니다. “올무에 걸리게 된다”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2. 여호와를 의지하라 여호와를 의지함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살후 3:2)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물을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이 선물이 금보다 귀한 줄 알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는 생활을 소유하기 위하여 모든 방면으로 힘써야 합니다. 루터는 로빈이란 새를 한 마리 기르면서도 믿음을 배웠다고 합니다. “나는 땅 위에서 어느 설교자보다 로빈 새를 더 사랑합니다. 내가 밤마다 작은 떡 조각을 놓아주면 그 새는 그것을 먹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아무 염려도 하지 않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런던 시내가 크게 폭격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6시간 반 동안이나 무너진 집 속에서 구출된 여자가 있었습니다. 어린 딸은 바로 죽었고 그 여인은 입원한 지 5주 후에 눈이 완전히 실명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간호사가 불쌍히 여겨 울자 도리어 위로하면서 “내게는 소경 된 것이 문제도 안 된다. 나에게는 예수를 보는 영안이 있소. 이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오!”라고 하였습니다.
1072 no image |개|혁|주|의|신|앙|강|좌| '칭의와 성화'에 대한 바른 이해_박영돈 목사
편집부
3415 2014-09-23
'칭의와 성화'에 대한 바른 이해 < 박영돈 목사,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다.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 따라서 칭의와 성화가 비록 우리의 사고에서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경험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종교개혁이 재정립한 칭의론의 부요한 함의와 풍성한 복을 제대로 전하는 설교를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것이 작금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이 전통적인 입장을 도외시함보다는 이를 바르게 깨닫고 전파해야 한다.” 작금에 이르러 '칭의와 성화'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마치 한국교회의 문제가 전통적인 '칭의와 성화'의 구원론으로부터 발생한 것처럼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이와 관련해 ‘칭의와 성화’는 중대한 구원의 복음에 관한 것이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몇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1. “전통적인 구원론에서는 칭의 다음에 성화가 단계적으로 이어진다고 함으로써 윤리 없는 구원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치우친다”는 주장에 대해 이러한 주장은 통상적인 오해일 뿐이며, 개혁교회의 구원론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칭의와 성화에 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의 가르침은 놀라울 정도로 부요하고 치밀하며 성경적이다. 칼빈은 칭의론이 믿기만 하면 어떻게 살든지 구원은 따 논 당상이라는 식으로 왜곡될 위험성을 치밀하면서도 정교하게 발전된 논증을 통하여 철저하게 봉쇄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다.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 따라서 칭의와 성화가 비록 우리의 사고에서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경험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만을 체험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만을 체험할 수 없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성화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동시적으로 그를 거룩하게 하신다. 이와 관련해 칼빈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는 결코 의롭게 하시지 않는다고 역설적으로 말하기까지 하였다. 구원의 전 과정에서 칭의와 성화는 긴밀하게 연합하여 병행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서로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찢어버리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칭의와 성화가 긴밀히 연결되어있음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2. “우리 구원의 현재 단계를 의인됨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고, 성화에 있어서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칭의가 최후 심판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주장에 대해 이런 논리에 따르면, 칭의는 실제 의롭게 되는 성화가 진전됨에 따라 점진적으로 진행되다가 종말에 가서야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까지 유보된 칭의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비록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않고 연합해버린 중세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유사한 논리적인 맥락으로 회귀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이렇게 칭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때 목회 현장에서 부딪히는 실제적인 문제는 종교개혁 전에 신자들이 겪었던 혼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우리의 불완전한 성화에 따라 우리의 의인됨이 점진적으로 완성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과연 거룩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만큼 거룩해졌는지 자신할 수 없어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칭의가 우리가 이룬 거룩함에 어느 정도라도 근거한다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거룩함의 커트라인은 어느 정도인가? 우리가 성결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기준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만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 시 루터가 겪었던 영적 고뇌였다. 만약 이런 가르침을 따라서 신앙 생활한다면 교인들은 하루도 구원의 확신을 누리며 살 자신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칭의와 성화가 연합되어 있지만 날카롭게 구별되지 않으면 중세 로마 가톨릭에서처럼 복음의 핵심이 심각하게 변질된다고 보았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영원한 끈으로 하나로 엮어져 있지만, 이 둘은 논리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칭의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불완전한 의로움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외래적인 의로움, 즉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리자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의로움에 전적으로 근거하여 영 단번에 내려진 은혜로운 법적 선언이다. 우리는 이 칭의의 영원한 바탕 위에서만 죄사함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반면에 이 칭의의 바탕을 떠나서 우리가 이룬 보잘 것 없는 거룩함을 의존해서는 한 순간도 주님 앞에 설 수 없다. 우리가 서 있는 영원한 칭의의 반석은 우리의 연약함과 성화의 부진으로 인해 결코 흔들릴 수 없고 변개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의로움으로 보완되고 강화될 수도 없다. 라일(J. C. Ryle)이 말했듯이, 천국에 있는 성도들도 우리보다 더 칭의되지 않았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 칭의에서 바로 성화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칭의의 바탕 위에서 신앙을 생활하는 것이다. 이 반석 위에서만 감사와 확신과 자유함과 계속되는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진정한 성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것이 칭의의 종말론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칭의를 기독론적-종말론적 관점에서 “이미와 아직도(already and not-yet)"의 구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곧 칭의는 종말론적으로 유보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확정되었고, 종말론적으로 최종 확증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내려진 선언과 앞으로 내려질 선언의 근본 내용은 동일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에는 변동이 없다. 3. “칭의받은 신자들은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 사실 성화는 실패를 통한 성화이다.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험난한 여정에서 신자는 연약하여 수없이 쓰러진다. 그 때마다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영적인 회복의 바탕과 다이내믹이 바로 칭의의 은혜이다. 비록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 가운데 살지라도 하루도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는 날은 없다. 그래서 성인은 다른 이들보다 더 자주 회개하는 죄인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더 거룩해질수록 자신의 의로움보다는 칭의의 은혜만을 더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이 칭의의 복음이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아 애초부터 거짓된 믿음을 가진 자들, 그래서 결국 멸망할 자들에게는 악용될지 모른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 죄에 대해 예민해진 신앙 양심을 가짐으로 작은 죄에도 고통 받고 자괴감에 시달리는 신자들에게는 유일한 위로이며 피난처이다. 칭의론의 남용을 지나치게 우려하는 것은 그다지 지혜롭지 못하다. 진리를 악용하는 자들은 항상 존재한다. 사실 칭의의 복음이 망하는 자들에게나 방종의 라이선스로 남용되지만,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오히려 위로와 안식의 유일한 근원이며 경건의 바탕으로 순기능 하는 면이 훨씬 더 많다. 칭의론의 남용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참된 신자의 위로와 성화의 원동력까지 앗아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4. 전통적인 구원론 위에 서 있어야 하는 교회 결국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면 구원의 확신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뿐 아니라 진정한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위로와 유익을 유실하게 된다. 개혁주의 칭의론은 구원뿐 아니라 성화의 전 과정까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영원불변한 사랑 가운데 진행된다는 구원의 선물적인 특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교리이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오류에 대응하여 칭의와 성화를 날카롭게 구별하는 동시에,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무율법주의 위험에 대비하여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과 연결성을 균형 있게 적용함으로써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 양극단을 효과적으로 물리치는 전략적인 논증이 성경에 근거한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을 이루고 있다. 이 귀한 선진들의 통찰을 영적유산으로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의 강단에서조차 이러한 가르침과 동떨어진 값싼 은혜의 복음에 가까운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전통의 틀에 갇혀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좋은 전통을 모르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신앙의 선진들로부터 전수된 역사적 신앙의 진귀한 유산을 섭렵한 바탕위에서만 참된 진보가 가능하다. 마치는 말 한국교회에 만연한 왜곡된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정도가 매우 우려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잘 알고 있듯이 칭의의 복음을 재발견함으로써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500년 개혁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 복음이 바르게 전파될 때마다 교회가 부흥하고 건강하게 세워져갔다. 반면에 한국교회의 윤리적인 문제는 개혁주의 칭의론 때문이 아니라 이 교리가 바르게 전수되어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재정립한 칭의론의 부요한 함의와 풍성한 복을 제대로 전하는 설교를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것이 작금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이 전통적인 입장을 도외시함보다는 이를 바르게 깨닫고 전파해야 한다. 복음 사역자들은 여러 가지 신학적 도전 앞에서 개혁교회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의 복음을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전해야 할 것이다.
1071 no image <故 박윤성 목사 소천 고별사> 조용한 큰소리, 고요한 큰 걸음_조병수 총장
편집부
2859 2014-09-23
조용한 큰소리, 고요한 큰 걸음 < 조병수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 “일생 동안 주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강한 용사로 사신 분” 먼저 유가족과 교회에 천국의 위로가 임하기를 빕니다. 일평생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교단과 교계에 헌신하시던 존경하는 故 박윤성 목사님을 주님의 품으로 떠나보내면서 고별사를 말씀드리려 하니, 여러 가지 회상이 떠오릅니다. 37년 전 은곡교회의 인근 어느 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기던 시절, 은곡교회에 몇 친구가 사역을 하고 있어서 찻잔 나눌 겸 때때로 방문을 하였는데, 우연찮게 박윤성 목사님을 뵙게 되어 인사를 드리면, 당시 지천명의 연세를 넘기신 목사님은 젊은 신학도에게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격려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박윤성 목사님은 우리나라가 한국전쟁 이후 겪은 격랑의 시기를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40여 년간의 성역과 30년 동안의 은곡교회 담임목회를 사랑과 진실, 말씀과 기도, 헌신과 희생으로 올곧게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는 목사님이 새로 설립된 교단에서 개혁신보의 주필로 다년간 활동하시면서 분명한 필치로 한국교회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을 보았고, 특히 합신 교단의 방향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확실한 의견을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이 총회장으로 섬기던 당시는 모두가 잘 알다시피 우리 교단이 설립 10년을 뒤로 하고 격동기에 들어서던 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팎으로 다양한 일을 일궈내셨습니다. 지금의 총회사무실을 구입하여 총회센터 건립과 관련된 오랜 논의를 일단락 짓고, 이단사이비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필연적 조처로 대책연구 위원을 세웠으며, 남북통일과 북한교회에 대한 큰 관심을 보이면서 남북통일대책위원회를 설치하였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 대하여 남다른 사랑과 관심을 표명하였습니다. 박윤성 목사님은 조용한 큰소리였고, 고요한 큰 걸음이셨습니다. 목사님에게는 요란하지 않지만 분명한 교훈이 있었고, 화려하지 않지만 선명한 방향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목사님이 일생 동안 주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강한 용사로 사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억이 맞는다면, 지난 해 여름 은곡교회의 임직식에서 마지막으로 목사님을 뵈었는데, 그 때도 비록 육체는 쇠약해졌지만 영혼은 맹렬하게 깨어있는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목사님은 이 땅에서 모든 용맹스런 사역을 마치고 주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을 보내면서 영적으로 점점 어두워져가는 이 시대를 선도할 용사가 곁에 없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용사 박윤성 목사님이 남기신 성역이 헛되지 않을 것을 확신하기에, 다윗의 활 노래로 고별사를 갈음합니다.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삼하 1:22).
1070 no image |박윤선의 5분 새벽기도 설교 <36>| 원수 앞에서 가질 신앙적 태도
편집부
2569 2014-09-23
원수 앞에서 가질 신앙적 태도 시편 70편 1-5절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원수를 대적하는 유일한 길” 인간은 너무 쉽게 남들을 원수로 만들고 미워합니다. 반면에 일평생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가장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원수 갚는 일을 주님께 부탁해야 합니다(1-3절) 시인은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9)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부탁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것이 있습니다. ‘내’게 원수라고 생각되는 그가 과연 ‘내’ 원수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내’게는 원수이지만 하나님께는 원수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를 ‘내’ 원수로 삼아서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친구를 내가 원수시하면 ‘내’가 하나님께 범죄함이 아닐까요. 2. 진짜 원수를 알아야 합니다 미국에서 비참한 비행기 사고가 난 적이 있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해서 승객 전원이 죽었습니다. 승객들 중에 비행기 사고 보험에 든 한 부인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보험을 노리고 어머니 가방 속에 폭발물 하나를 넣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가까운 친척이나 가족일지라도 자기를 이용하는 무서운 원수일 수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원수를 자신의 반대편으로 알아야 합니다. 시편 139편 21절에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한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어떤 것입니까. 첫째, 마귀입니다. 우리는 마귀를 미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마귀를 미워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만 믿고 순종함이 마귀를 미워하는 방법입니다(참조, 약 4:7). 둘째, 죄악입니다. 우리는 죄악을 하나님의 원수로 알고 미워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우리는 다른 것보다도 죄악이 멸절되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적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강퍅한 적그리스도의 운동을 미워하며 그 운동이 무너지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이단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간교하게 거짓 교훈을 가지고 가만히 역사하는 확실한 이단의 운동을 잘 경계하며 막아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원수가 내부적으로 더욱 악하게 역사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1069 <고 이화주 사모 추모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목사의 아내로 사는 길 파일
편집부
6456 2014-09-02
세상에서 가장 귀한 목사의 아내로 사는 길 어머님, 당신은 상처한 목사님 가정에 “훗어머니”로 드셔서 쉽지 않은 결혼 생활을 감당하셨습니다. 오로지 “주의 종의 사역을 돕기 위해” 결혼하셨던 당신은, 부군인 박윤선 목사로 하여금 오로지 말씀 연구와 복음 전파에만 몰두하시도록, 단순하지 못했던 가정을 도맡아 짊어지고 가셨지요. 과거에 한국의 가난했던 많은 어머님들이 그랬듯, 사과 한 알을 자신의 입에 직접 넣어보지 못하셨고, 값나가는 옷 한 벌 스스로를 위해 입어보지 못하시며, 묵묵히 34년 어려운 목사 사모의 삶을 사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목사직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라고 하시며, 우리 형제들 모두가 세상 그 어떤 유복하고 존경받는 직업보다 복음 전하는 그 길을 가기를 진심으로 원하셨던 분이셨습니다. 또한 남편인 박윤선 목사님이 원하시는 것이면, 한 겨울의 온상에서 키운 딸기나, 철지난 귀한 생선(특히 청어), 혹 목사님이 미국 유학 시절에 먹었던 과일 파이(pie)가 참 맛있었다, 한번 언급하시면, 그것을 구하시려고 시장 가방 한 손에 끼고 가난했던 5-60년대의 한국 시장들을 샅샅이 뒤지곤 하셨던 당신 … 지금도 저희들은 생생히 기억합니다! 엄연히 결혼하여 남편으로 모신 목사님을, 남편이라기보다는 항상 “목사님”이라고 부르시며, 34년을 언제나 아버님이 설교 후 목축이실 음료수 보온병과 필기도구를 가방에 넣고 그림자처럼 그의 설교지를 따라 다니시던 어머니, 아버님의 설교에 항상 감동받아 하시던 것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당신은 소천하기 몇 해 전까지도 알츠하아머병으로 기억이 다 없어져서 자주 자주 “아버지(박 목사님)가 지금 집회 인도차 와 계신데, 저렇게 잡숫지도 못하고 왔다 갔다 하신다”면서 오래 습관화된 말씀을 되뇌곤 하셨죠. 아무리 저희들이 “아버지가 이미 20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해도 듣지 않고 계속 걱정하곤 하셨죠. 어머님, 당신은 우리더러 항상 “진실하라”시며, “쌀 한 톨도 거짓으로 얻으면 안 된다” 하시고, “동전 하나도 과장해서 구하지 말라”고 하시곤 했지요. 저희들이 소싯적에 이웃집 살구나무의 다 시들어 버린 열매 몇 개를 주인 허락 없이 따먹었음을 아셨던 어머니는 저희 손을 꼭- 쥐고 함께 주인을 찾아 용서를 구하도록 하신 일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혀가 잘려도 절대 거짓말은 안 돼”라고 저희들을 깨우치곤 하셨죠. 항상 “내실 없이 말만 앞세워선 안 된다”고 저희들을 경계하셨고, 피나는 준비 없이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무섭게 책망하시던 당신, 그 말씀이 아직 귀에 생생할 따름입니다. 또한 어머님은 저희 모두에게 “하나님 제일주의만이 살 길임”을 강조하시고, 항상 성경 말씀 암송을 독려하시면서 잘 주시지 않던 용돈도 상급으로 기꺼이 내거시고, 성경 암송을 시켜주셨습니다. 주일 성수를 생명같이 여기시며, “숨넘어가지 않는 한, 주일예배 결코 빠져먹지 말라”고 하셨고, 언제나 빳빳한 새 돈으로 준비했다가 주일 헌금하라고 주셨지요. 공부로 피곤한 저희들을 저녁마다 가정 예배를 드리자고 강권하며 독려하시곤 하셨지요. 우리가 바빠서 기도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함을 못내 안타까워하시며, 귀가 따가울 정도로 기도를 강조하셨지요. 부족하나마 저희들이 이만큼이라도 된 것, 당신의 수없는 눈물어린 기도와, 그렇게도 가슴 저리게 일러주신 가르침 덕입니다. 항상 저희들의 신앙을 염려하셨던 당신은, 우리가 세상에서 황당한 오해와 억울한 일로 괴로워할 때, “기도만이 살길이다” 하시며, 눈물로 저희들과 함께 통곡하시며 떡 먹듯이 며칠씩 금식 기도를 반복하시면서 저희가 당한 난관을 기어코라도 극복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살겠습니다. 진실하기 위해 혀를 깨물겠습니다. 새벽을 깨우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겠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원하시던 대로, 복음 전파에 진력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정성으로 섬기겠습니다. “교회와 사회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기억력이 약해지시며 즐겨하시던 성경 암송도 못하시게 되자, 전에 암송하셨던 로마서 8장 앞부분만, 어린아이처럼 자꾸 자꾸 되뇌시며, 또한 자주 침상에서 일어나셔서 잘 이해도 안 되시는데 성경을 펴놓고 조용히 앉아계시곤 했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방문하던 저희의 손을 그 일그러지고 힘없는 손으로 부여잡고, 기도만은 정말 또렷또렷하게 하시던 당신… “어서 주님이 불러주셔야지…” 하시며, 쇠퇴해진 기억력과 관절통으로 자주 괴로워하시던 어머니! 병원에 계실 때 가서 찾아뵐 때마다 우리더러 자꾸만 “바쁠 테니 빨리 가봐라” 하시면서 일에 허덕이는 저희들을 염려하시던 당신! 그동안 저희들이 당신께 불공했던 것, 당신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던 것, 잘 이해하지 못하신다 하여 언성을 높이기도 하며 마음에 상처드렸던 것 등 많은 잘못을, 염치없지만 이제 당신께 엎드려 용서를 빕니다. 일그러져버린 손과 발,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괴로워했던 육신의 장막, 이제 훌훌 던져버리시고,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영광의 나라에서, 그다지도 뵙고 싶었던 주님 손잡고, 이젠 좀 쉬시고 넘치도록 즐거이 지내세요, 영원토록 말이에요. 어머니, 저희도 주님이 부르시는 날, 얼른 어머님이 계신 천국에 가서, 영광의 주님을 뵈올 때 지극한 반가움과 지극한 기쁨으로 어머니를 부둥켜안으렵니다. 이 땅에서 어머니를 저희들에게 주셨던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대단하신 우리 어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정말 사랑합니다. - 유가족 일동 드림 -고 이화주(李和主) 님 연혁- ■1920년 7월 20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아버지 이양섭과 어머니 양상실 사이에서 셋째 딸로 출생하시다. ■17세 어간에 절친했던 친구 (고) 차봉덕(차후, 여醫師)의 권유로 기독교에 귀의하시며, 이름을 花珠에서 和主(주님과 화목함)으로 바꾸시다. ■21세에 당시 평양 기홀 기독병원과 연계된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하시고, 상기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시다. (당시 장기려 박사, 김명산 박사에게 배움) ■소련의 신탁통치 당시 북한 평양 산정현교회에 출석하시며, 당시 이미 홀로 되신 (고) 주기철 목사의 사모, 오정모 여사를 수 년여 동안 가까이 모시면서 신앙적 감화와 지도를 받으시다. ■6.25 전쟁 직전 월남, 부산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여 1949-51년에 현 고신대학교 신학과 예과과정(2년, 성문과)을 졸업하시고, 1951-54년에 고려신학교 연구과(3년, 현 M.div 과정)를 졸업하시다. ■1952년 이후 전도사로서 지방 교회들을 위한 목회 사역을 시작하던 중, 1954년에 당시 고려신학교 교장 (고) 박윤선 목사님과 결혼하시다. (박윤선 목사님께서 네덜란드 자유대학 대학원 유학 중, 한국에 남아계셨던 김애련 사모님을 불의의 사고로 먼저 천국에 보내심) ■자녀를 얻으시다. 1955년. 득 1남(男), 박성은(聖恩) [자부: 병미, 손: Jamie(녀), Jerome(자) 1957년. 득 1녀(女), (전) 박성혜(聖惠) [사위: 전지현 (목사), 손: Andrew(자), Michelle(녀) 1961년. 득 2남(男), 박성진(聖眞) [자부: 미숙, 손: Tiphany(녀), Timothy(자) ■1973년. 박윤선 목사님의 정년퇴임(사당동 총회신학교 교수, 70세)과 함께 자녀들과 미국으로 이민하여, 첫 2년 동안 전자제품 공장 노동자, 간호보조원 등을 하기도 하시고, 직접 운영하던 드라이크리닝점에서 옷 수선(alteration) 등을 하시면서 가정 경제를 감당해 나가시다. 또한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 집필을 도우시려고 50대 중반에 운전을 배우셔서 탈봇, 퓰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도서관에 박윤선 목사님을 태워주시며 주석 완필을 적극 도우시다. (주석 완필은 1978년) ■1977-88년. 부군이신 박윤선 목사가 과거 이미 정년퇴임했던 서울 사당동 총회신학대학으로 재초청되어 대학원장에 취임하시면서, 함께 귀국하셔서 10여 년 동안 한국에 계시며 합동신학원 설립에 협력하시며 교수하시는 부군 박윤선 목사님을 내조하시다. ■1988년 6월. 34년 동안 내조하신 박윤선 목사님이 소천하신 후 미국으로 돌아오셔서 자녀들과 함께 오렌지카운티에 거주하시다. ■2014년 8월 25일. 향년 94세로 소천하시다. ■가장 좋아하시던 성경 말씀 : 로마서 8장가장 좋아하시던 찬송 : “하늘 가는 밝은 길이”(통 493/ 새 545),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통 338/ 새364)
1068 no image |<박윤선의 5분 새벽기도 설교 <35>| 마음을 확정하자
편집부
2756 2014-09-02
마음을 확정하자 시편 57편 7절 “주님의 손에서 고락간에 무엇이든지 받을 마음 준비 필요해” 본문에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라고 한 말은 중언체로서 마음의 안정을 고조시킵니다. 그 안정된 마음의 내용이란 무엇입니까. 1. 죽음을 각오한 마음입니다 시편 57편은 다윗이 자신의 원수 옆에서 쓴 것입니다. 원수 옆에서 이런 시가 나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위험한 자리에서도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다윗은 죽을 것을 각오하고 마음에 준비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유쾌하게 당할 준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뿐입니다. 바울은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마음의 확정을 얻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우리가 다음과 같은 말을 참으로 할 수 있다면,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곧 “나는 안다. 확실히 안다. 내가 믿는 그 분을, 내가 영접한 그 분을 나는 확실히 안다. 그의 피가 내게 유효하게 일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의 구속자가 지금도 살아서 선물 주시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가 나를 끝까지 지키실 것을 나는 안다”라는 말입니다. 2. 확정된 마음이란 모든 선을 행하려고 준비된 마음입니다 미련한 자의 특징은 마음의 준비가 없는 것입니다. 잠언 17장 24절에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미련한 자는 이렇게 일정한 목표 없이 늘 동요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준비된 마음으로 움직입니다. 준비된 마음에 대하여 성경은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로 예비된 마음, 디도서 3장 1절에서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로 예비된 마음, 디모데전서 6장 18절은 “나눠 주기를” 예비한 마음, 누가복음 22장 33절은 주님의 인도대로 가려고 예비된 마음에 대하여 말합니다. 사도행전 21장 13절은 주님을 위하여 죽기로 예비된 마음, 마태복음 24장 44절과 25장 10절은 주님의 재림을 영접하기로 예비된 마음에 대하여 말합니다. 우리는 위의 성경 교훈에 의지하여 몇 가지 착실히 준비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손에서 고락간에 무엇이든지 받을 준비가 있는 마음,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기로 준비된 마음, 남을 봉사하기로 준비된 마음, 교만 외에는 두려워하지 않고 영광을 받지 못하여도 주님을 위하여 굳게 서려는 준비 있는 마음입니다.
1067 |총회농목회 수련회 참가기| 쉼 그리고 영적 재충전의 현장_이은국 목사 파일
편집부
2874 2014-09-02
쉼 그리고 영적 재충전의 현장 < 이은국 목사, 용연교회 > “목사로의 부름뿐 아니라 농어촌 목회자로 불러주신 은혜 고마워” 쏟아 붓는 물 폭탄을 가로지르며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 간 곳은 2014년 합신 농어촌목회자 가족수련회가 열리는 변산반도의 썬리치랜드(SUNRICHLAND)였다. 허름한 듯 아담한 집회실을 가득채운 찬양 소리는 을씨년스런 바깥 날씨와 달리 평화롭고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전국각지에서 달려 온 이들은 "쉼! 그리고 영적 재충전!!"이라고 펼쳐진 현수막을 마주하며 일찌거니 자리하였다. 여기 주님이 인도하신 보금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는 오랜 친구 같은 동역자들이다. 멀리 흩어져 있으나 매년 서너 차례 마주하기를 이어가는 구면이기에 몇몇 사람만이 낯설 뿐이다. 개회예배에서 우종휴 목사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제하의 찬찬한 메시지는 진작부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하나 됨을 재확인하며 사모하고 갈망하는 심령에 내릴 은혜의 마중물이 되었다. 숙소를 배정받아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서니 곧바로 집회시간이다. 합신농목회의 영원한 멤버가운데 한 사람인 조정연 목사, 그는 언제 봐도 침착함과 겸손함이 몸에 배어 있는지라 그가 인도하는 찬양은 퍽 은혜스럽다. 기타연주는 물론 젊은이들이나 부를만한 곡 까지도 문제없이 소화해 내는 실력이 예사롭지 않아 얼마나 기도하면서 준비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야말로 특별한 은사에 놀랍고 얼굴만 봐도 은혜가 넘치는 목사님이라 했던가. 첫째 날 은혜의 시간을 통해 선포된 김병훈 교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배경으로 한 "은혜의 구원과 선행"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 오늘날 윤리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틀에 갇혀 자신의 영적무능과 부끄러움을 자각하지 못함을 직시할 것과 오직믿음 오직은혜의 복음을 되새기고 영광스러운 복음의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다시 한 번 가다듬는 진지한 도전과 강력한 영적 재충전의 시간이 되었다. 다음 날 강사로 나선 안만수 목사는 디모데전서 4장 13-16절을 본문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좋은 목사"라는 제하의 말씀에서 설교에 전념하는 목사, 성직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목사가 되라는 두 가지 중심 주제를 통해 첨부터 끝까지 말씀에 근거한 주석(註釋) 한마디 한마디가 주옥(珠玉)같은 교훈이 되어 깊은 성찰의 장으로 몰아갔다. 시간이 한정돼 준비한 말씀을 다 들을 수 없었던 아쉬움은 물론 두 차례에 걸친 저녁집회 시간은 심금을 울렸고 많은 위로가 되어 긴 여운을 남겼다. 마음속으로 아멘 아멘을 몇 번이고 외쳤던 감동적인 시간이 되었고, 근간 참석한 집회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퍽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두 강사들의 경우 농어촌 목회 경험이 없을듯하여 듣는 이들에게 자칫 공감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을까 염려했던 것마저도 단숨에 날려 버렸다. 사역현장에서 절실한 순수 복음의 능력과 목회자로서의 기본을 든든히 하는데 있어서는 도시나 농어촌이 따로 없었다. 식사시간을 전후로 틈틈이 삼삼오오 이야기 마당이 펼쳐지고 지역과 연령을 초월한 모임인지라 관심거리도 많다. 수련회 둘째 날부터 하늘이 개이면서 눈앞으로 펼쳐진 크고 작은 섬들 사이로 바다안개 자욱한 아름다운 변산반도의 자태를 관망할 수 있었다. 목장의 푸른 초장 그리고 산과 바다 하늘과 숲이 맞닿는 곳 온통 푸르름으로 장식한 대자연의 안식처는 저절로 쉼과 힐링을 제공해 주었다. 오전시간의 특강 또한 유익하고 감동적인 시간이 되었다. 박발영 목사의 성경 파노라마에서는 "성경은 한 주제로 된 한 권의 책이며 성경의 대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 완성"이라는 중요한 개념정리와 성경해석의 실제를 보여주었다. 농어촌교회 부흥이야기 강사로 나선 박희준 목사는 농촌목회 현장의 생생한 체험담을 통해 열정과 헌신적 봉사로 일구어낸 아름다운 결과물들을 나눔으로써 함께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깊숙이 공감할 수 있었다. 이른 아침 윤찬열 목사와 장 안 목사가 각각 인도한 산상기도회는 주기도문 강해를 통해 일상에서 소홀해 지기 쉬운 하나님의 거룩성을 일깨워 주었고, 베드로의 출옥을 위해 기도했던 성도들의 확신 없음을 반면 거울로 삼을 수 있었다. 그 밖에 우리는 사역나눔을 통해 해답 없는 해답을 찾고자 머리를 맞대기도 했고, 유여한 물품들을 선물하기도 했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채 서로를 섬기는 아름다움도 보았다. 갑남산 중턱에서 함께 기도의 제목을 나누었고, 트레킹을 즐기며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직소폭포를 내려다보며 농어촌 목회현장의 숱한 격랑과 시름도 말끔하게 씻어내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한편 겹쳐진 일정관계로 참석치 못한 이주형 총회장의 격려 문자메시지가 깜짝 감동을 불러왔고, 먼 길 무릅쓰고 방문한 박 혁 목사, 순서를 맡아 사회와 기도로 섬겨준 모든 분들에게 마음의 감사를 보낸다. 폐회예배 설교를 통해 김용진 목사는 구원받은 은혜와 목회자로 불러주신 은혜 그리고 농어촌 목회자로 불러주신 은혜 이 세 가지를 삶의 지속적인 감사의 제목으로 꼽았다. "쉼만 있고 영적 재충전이 없는 수련회는 실망이지만 이번 수련회야말로 쉼 그리고 영적 재충전이 된 귀한 자리였다"는 처음 참석한 어느 목사 부인의 한 마디 소감이 의미 있게 들렸다. 곰소쉼터에서의 풍성한 점심식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각자의 사역지로 먼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쉼과 영적 재충전으로 채워진 즐거움과 행복비전을 가슴에 담아 흩어지는 마당을 못내 아쉬워하며 연거푸 악수를 아끼지 않았다.
1066 no image |심|층|진|단| 21세기 한국교회의 정황에서 바라본 종교개혁_이승구 교수
편집부
2862 2014-08-19
21세기 한국교회의 정황에서 바라본 종교개혁 < 이승구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종교개혁의 역사적 원인과 그 과정에 대해서는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회자 되어 왔었다. 물론 이를 더 탐구하는 일은 지속되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중요시 되어야 할 일은 오늘 우리의 정황에서 종교개혁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21세기 한국교회의 정황 가운데서 종교개혁을 돌아 볼 때 우리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글에서는 이런 관심을 가지고 21세기 초 한국교회의 한 가운데서 16세기 종교개혁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일이 특히 의미 있는 것은 수년 전부터 그 때 그 곳의 정황과 지금 이곳의 정황이 묘하게 겹치는 듯한 느낌을 많은 사람들이 받고 그런 지적을 여러 번 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1. 대표적 인물과 기관들에서 나타나는 교회의 부패 현상 이런 작업을 하려고 할 때 가장 많은 사람의 의식에 떠오르는 것은 교회의 부패 현상일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전야에 대해서나 21세기 한국교회와 관련해서도 너무 많이 언급되어 왔기에 이제는 진부해진 교회의 부패 현상에 대한 지적은 그 때나 지금이나 주로 교회 공동체의 중심적 인물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때도 교회의 대표적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리고 대표 기관들이 심각한 부패 현상을 드러내었고 또 지금도 그런 부패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종교개혁 전야의 ‘교회의 부패성’은 오늘날 천주교회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인정하는 것인데, 그에 못지않은 부패성이 상당수 교단의 교단장 선거 과정에서나 지도자들의 사생활에서나 교회와 관련한 행위에서 드러나고 있다. 각 교단만이 아니라 소위 교단들의 연합 기관들이 얼마나 이상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 심각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것을 이용해서 많은 이단들도 기존의 교단이나 연합 단체를 이용해서 자신들이 이단이 아니라는 면죄부를 얻으려고 하고, 또 부패의 고리를 통해서 이런 일에 도움을 주는 인사들이 많다는 것은 교회 부패의 문제가 종교개혁 전야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더 깊이 생각하게 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경우가 많고, 또 관심이 있다고 해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 있다는 데에 있다. 큰 교단의 금권 선거 문제나 비상식적인 전횡과 문제 드러냄 앞에서 과연 그것이 고쳐질 수 있다고 여기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지 생각해 보라. 큰 연합 기관의 참으로 몰상식한 행동들 앞에서 그것이 고쳐질 수 있다고 확신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라. 문제는 교회 안에 이런 저런 문제가 많다는 것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고치려고 하는 소위 자정 능력을 교회 공동체가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당신님의 놀라운 주권으로 종교개혁을 일으켜 주셨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도 그런 주님과 주님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2. 개개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무관심, 무력증, 무신(無信) 현상 그런데 종교개혁 전야에도 그러하고 오늘날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고, 그 해결에 대해서는 무력증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그 근본적 이유는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배 행위에 참여하나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無信)의 태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도 믿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에도 무관심한 것이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소위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것을 지나치게 축소하고, 그것에 집중하고, 그런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것과 일상생활을 상당히 절연시키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새벽 기도회를 가장 열심히 한다고 하는 교회들의 성도들이 과연 한국교회의 문제들이나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판단력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보라! 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고, 새벽에 모여 기도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일에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우리 한국 교회 전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가장 분별력 있는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이런 문제를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해결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조금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그런 기도회가 많아질수록 사람들의 건전하고 성경적인 판단이 점점 없어지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런 일이 계속되면, 우리들이 지금도 느끼고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예배와 기도회 등 종교적 집회에 사람들이 잘 참여하지 않는 일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성도들의 교회적 문제들에 대한 무관심, 해결책에 대한 무력감, 그리고 그 배후의 무신(無信)의 문제에서 나오는 것이다. 깊이 있게 살펴보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 공동체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3. 우리는 진정 하나님을 믿는가? 성경을 믿는가? 우리들은 이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모든 문제에 대한 최종적 판단을 해나간다. 여기에 종교 개혁이 있었다. 물론 이것은 성경 이외의 것은 전혀 살펴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다른 모든 것과 함께 당대 교회의 모든 문제들도 다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최종적 대답은 항상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종교 개혁 전야의 교회는 상당수의 성도들이 열심이 있었지만, 그들의 열심이 성경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의 교회는 아주 이상한 가르침을 베풀어, 성경을 잘 보호하기 위해서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생각할 수 없도록 했으니 그것이 참으로 반어적(ironical)인 상황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은 성서공회와 여러 출판사가 성경을 열심히 찍어 내고 있으나, 성도들이 실질적으로 성경을 존귀하게 여기고 있는지는 의문인 상황이다. 첫째로, 공식적으로 성경을 다는 믿지는 않는 사조가 있는 것이 문제이다. 오늘날 신학계에서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마치 신학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 이미 오래 전이라는 것을 우리는 심각하게 문제 삼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 내용을 판단하고 비평하기 위해 주어진 책이 아니라, 그 성경이 우리의 생각과 사상과 감정과 삶을 평가하고 옳은 데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일은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하나님을 믿는 일, 예수님을 믿는 일은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선배들이 처음부터 강조해 왔던 이 말이 우리 시대처럼 절실한 시대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과연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지를 참으로 진지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보라. 그렇지 않다면, 우리 교회는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는 교회인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가장 반어적인 것은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교회나 사람들이 오늘날의 종교개혁을 말하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 교회는 참으로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하는 소위 한국의 보수적 교단들에 속한 교회들은 우리가 과연 성경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대로 참으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성경을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긴다면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판단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들 주변에서 나타나는 모든 부패와 관련된 문제들은 있지 않을 것이고, 적어도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도(media gratiae)로서 작용하고 있다면 우리들은 점점 주님이 요구하시는 그런 삶을 향해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한국의 소위 보수적인 교단들이 더 많은 부패의 문제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고백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들은 더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이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일치하는 모습을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일은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정 믿어 가는 일이다. 이를 진정으로 믿는 성경적 교회를 종교개혁적 교회요, 참 교회라고 하여 왔다. 4. 우리는 진정 성경적인 교회인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저 구호가 아니고, 먼저 우리의 교회를 그 말씀을 따라 변혁하고, 그 결과로 우리의 삶을 그 말씀을 따라 변혁시켜 이 세상에 말씀에 의해 변혁된 공동체를 드러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과거에도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그렇게 해 왔다. 오늘 우리의 과제도 역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성경에 근거한 교회의 개혁과 우리의 삶의 개혁에서 나오는 우리 사회의 개혁이 바로 그렇다. 이런 성경적인 교회, 참된 교회는 먼저 신앙고백의 내용, 즉 믿는 믿음의 내용이 오직 성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믿는 것 가운데서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내용들을 모두 배제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른 신앙 운동이다. 그저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성경적인 열심을 제거하고 믿는 믿음의 내용을 철저히 성경적이게 해 나가야 한다. 종교 개혁 전야에 성도들이 연옥을 믿고, 교황 제도를 믿고, 마리아를 믿고, 묵주 기도의 공력을 믿고, 성호 긋는 것과, 성수의 효과를 믿고, 십자가와 수많은 상들의 효험을 믿고 했던 것을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일소해 버린 것과 같은 일이 우리의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도 일어나야 한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 가운데서 성경적이지 않은 것들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사도, 즉 신사도가 있다고 하거나, 오늘날도 성경 이외의 특별계시가 계속된다고 하는 등의 생각 등이 사라져야 한다. 신사도 운동과 관련된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런 주장이 나타날 수 있을 수 있는 분위기가 사라져야만 한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오직 성경에서 가르친 것을 믿는다는 분위가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 이외의 임사 체험이나 다른 종교적 체험을 믿으려고 하는 것도 극복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우리의 고귀한 종교적 체험도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시켜야 하는 것이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들의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던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적인 비성경적인 생각이 오늘날 교회 안에 다시 들어오거나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십자가의 구속을 중요시하면서도 인간이 은혜 받은 후에 그 은혜에 근거해서 힘쓰는 것의 공로가 고려되어 온전한 구원이 일어난다고 하는 천주교회의 주장이 16세기에 비성경적인 것으로 선언된 것은 그 때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오늘 날도 이와 비슷한 신인협력주의의 주장은 모두 비성경적인 것으로 선언되어 바른 교회 안에서 제거 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성경에 근거한 이신칭의 바른 가르침이 교회를 주도해야 한다. 성도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그저 은혜만 된다면 어떤 것이나 다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들 중의 하나이므로 이 시대 역시 참으로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대임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주변의 생각들이나 신학들 가운데서 비성경적인 모든 것을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하는 일이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예배가 과연 성경적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종교개혁은 무엇보다 먼저 예배의 개혁으로 나타났다. 종교개혁적 예배는 진공 상태에서 시작했던 것이 아니라 천주교 예배의 개념과 순서 중에서 비성경적 것들을 배제하고, 성경적으로 새롭게 하여 성경적 예배를 하려는 것이었다. 예배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피 없는 형태도 다시 드린다(represent)고 생각하는 천주교회적 예배 개념을 성경이 비추어 개혁한 것이 바로 종교개혁적 예배였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도 신약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제거되어야 한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이나 예배당 앞부분을 ‘제단’이라고 하거나 예배 인도자를 어떤 의미에서라도 ‘제사장’ 또는 ‘사제’라고 하는 등 이와 관련된 모든 잘못된 의식과 용어조차도 제거되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예배 순서 가운데 비성경적인 것이 들어 온 것이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려고 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신약 성경이 가르친 예배의 요소들만을 가지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성자의 십자가 공로에 근거하여 성령님 안에서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 안에서, 그리고 영 안에서 행하는 성경적 예배이다. 각 교회 공동체는 우리들이 하는 예배가 진정 성경적 예배인지를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런 고려없이 그저 은혜스러운 순서가 있어서 은혜만 있으면 된다는, 더구나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로 우리가 종교적 만족을 얻을 수 있으면 된다는 태도가 계속되어 간다면 우리의 열심히 하는 예배가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종교개혁 전야에 눈물을 흘리면서 미사에 참여하던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이것이 과연 무슨 말인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5. 우리의 의식(意識)이 종교개혁적인가? 즉 성경적인가? 이와 관련하여 더 많은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영위되는가? 그리하여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와 문화가 그런 성경적인 변혁을 경험해 가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종교개혁의 삶을 변혁시키고 문화를 변혁시킨 예는 우리들의 전범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종교는 그저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개혁자들의 후예들이 항상 강조한대로, 삶 전체가 종교요(life is religion), 종교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을 이렇게 만드는 우리의 의식이다. 그러므로 핵심은 “우리가 과연 종교개혁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과연 성경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그 성경에서 배운 대로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coram deo)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항상 하나님 주권을 온전히 의식하면서 사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성경적 의식이 우리에게 충만히 있을 때만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모든 개혁, 그런 문제의 해결이 있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항상 나 자신이고, 나의 문제이고, 나의 개혁이다. 성령님께 의존해서 그리고 성경에 근거해서, 나 자신이 이런 성경적 의식에 충일함을 향해 나갈 때만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니, 그렇게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주님의 뜻대로 해 나가려는 수많은 성도들과의 교제(cummunio sanctorum)를 우리는 그 과정에서 누려가기 때문이다.
1065 no image |박윤선의 5분 새벽기도 설교 <34>| 신뢰는 공포를 모른다
편집부
2339 2014-08-19
신뢰는 공포를 모른다 시편 27:1-14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들을 보호하는 행동은 은밀한 것” 사람에게는 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특히 자신을 해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두려움은 더 클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두려움도 극복하게 합니다. 1. 다윗의 신뢰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여 두려워한 사실은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을 아끼어 죽이지 않은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사울은 여러 번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다윗은 그 때마다 피하였고 저항한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다윗은 여러 번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묘한 기회를 만났음에도 사울을 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신뢰한 다윗은 악한 사울이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았다는 사실로 인하여 해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여 섬기고 신뢰한 그에게 다른 두려움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고 노래한 것은 당연합니다. 두려움이 많은 것은 선천적으로 가진 성격일 수도 있지만, 흔히는 불신앙으로 인해서 생기는 법입니다. 신앙자는 사망의 두려움이 와도 겁내지 않지만, 불신앙자는 죽음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2. 다윗의 한 가지 소원 4절에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소원이 하나이고 둘이 아니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4절)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활의 즐거움을 오직 하나님에게서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신앙이지만 하나님을 즐거워함에 몰두함은 확실히 장성한 신앙의 열매입니다. 다윗은 왜 하나님을 즐거워하였습니까. 그 이유를 다음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5절).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10절)라는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여기서 “비밀히 지키시고”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성도들을 보호하시는 행동은 은밀한 것입니다. 누가 그 보호하시는 행동의 내막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떤 때에는 주님께서 그 성도들을 내버리시고 돌아보시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눈동자 같이 보호하셨구나’ 하며 찬송할 날이 옵니다.
1064 |심층진단| 일본기독교단이 ‘대동아공영권의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에 대한 평가_김산덕 목사 파일
편집부
3831 2014-08-05
일본기독교단이 ‘대동아공영권의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에 대한 평가 < 김산덕 목사, 일본 후쿠로이아이노메구미교회 > <사진설명 / 황기2천6백봉축전국기독교신도대회의 장면> 1944년 3월 26일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기독교단」(이하 교단)은 그들이 말하는 대동아공영권에 속한 이웃 나라의 교회들에게 소위 ‘일본기독교단이 대동아공영권의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을 보냈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용어는 1940년 일본 내각에서 결정된 것으로, 서양 특히 영국과 미국의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해방시켜서, 일본을 맹주로 공존공생하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건설하려는 음모에 기인한 것이다. 광복 69주년을 맞이하여 이 글에서는 당시 일본기독교단이 저지른 악행을 돌아보며 우리 교회가 마땅히 추구할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1. 간략한 일본교회 역사 이 서한은 서론과 함께 모두 4장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은 황군에 의해서 적성국가(특히, 영국과 미국)로부터 대동아의 해방을 말하며, 제2장은 신의 나라 일본만이 대동아를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제3장은 교회는 종교보국으로(宗敎報國: 종교로 나라에 충성하여 나라의 은혜를 갚는 것) 천황의 넓은 마음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것이 교회의 길이라고 호소하며, 제4장에서는 대동아공영권 수립에 저항하는 자를 분열주의자로 규정한다. 그리스도교의 교회로서 「일본기독교단」이 어떻게 이런 편지를 발송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면, 교단이 설립되게 된 배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에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최초로 건설된 것은 1872년 3월 10일 ‘요코하마공회’(橫浜公會, 현재 橫浜海岸敎會)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일본기독공회」였다. 이 공회시대는 일본의 개혁파 교회와 장로파 교회에 속한 아홉 교회가 연합한 「일본기독일치교회」(1877.10.3)로 이어졌고, 나아가 선교사들을 배제하고 가능한 한 일본인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기독교회」(1890-1941) 시대가 열렸다. 그러던 것이 1941년 6월 24일 「일본기독교단」이 설립되어 지금에 이른다. 전후에 각 교파는 자신들의 교파(교회)를 새롭게 세우기 위해 교단으로부터 이탈한다. 그러나 적지 않은 교회들이 이 교단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 현재 일본에서 규모적으로 가장 큰 개신교 교단(교파) 중의 하나는 「일본기독교단」(또는 일본그리스도교단)이다. 교단이 설립된 시기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이때의 역사적 상황은 일본제국이 대동아공영권의 야욕으로 가장 불타오른 때였다. 2. 이 서한을 발송하게 된 배경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로 일본은 1894-1895년의 청일전쟁, 1904-1905년의 러일전쟁, 1910년의 한일병탄,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 등으로 이어지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천업익찬”(天業翼贊: 천황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받들어 도우는 것)을 이루어가는 한창 때였다. 1938년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총력전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정부가 통제 운용한다는 내용의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 제정과 함께, 1939년 4월 8일에 「종교단체법」을 제정했다. 이 종교단체법은 대아를 위해서 소아를 죽이는 것을 원리아래 국가에 보조를 맞추는 종교는 보호, 공안과 공익을 방해하는 종교는 단속한다는 취지였다. 이에 근거하여 일본제국정부는 당시 일본의 33개의 프로테스탄트 교파를 ‘하나의 교회’(교단)로 통폐합하여 「일본기독교단」(United Church of Christ in Japan)을 설립했다. 참고로 1945년에는 한국교회에도 동일한 것을 요구하여, 그 당시 교역자들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이 교단의 신앙적 신학적 특징은 교단 헌법 제6조 그리스도인의 생활강령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황국의 도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철저하게 각자의 임무를 다하여 황운을 부익하고 섬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가 황국을 위한 길에 있다고 가르쳤던 교단은 황국의 도를 대동아공영권에 알리기 위하여 전국 교인들을 대상으로 「현대판 사도적 서한」을 1943년 5월에 공모 공시하여, 그해 10월 28일 입선작을 선정하였다. 입선된 서한을 그 당시 교단의 통리였던 토미타 미쯔루(富田滿)가 자신의 이름으로 대동아공영권 산하의 각 교회에 발송한 것이다. 3. 이 서한에 나타난 일본기독교단의 교회관 먼저 당시 일본기독교단의 교회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 일본교회는 전 세계를 지도하고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일본의 국체(國體)라고 생각하였다. 이 국체란 일본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적 질서, 즉 천황에 의한 통치를 말한다. 천황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자손으로 현인신(現人神)이기 때문에, 천황에게는 신으로부터 수여받은 영구한 일본 통치권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현인신인 천황의 지배를 받는 일본이야 말로 정의와 공영이라는 아름다운 나라를 동아(東亞)의 온 세상에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확립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천황의 나라인 일본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아시아의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최고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대동아(大東亞)는 대동아의 전통과 역사와 민족성에 적합한 ‘대동아적 그리스도교’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이 서한의 내용 ‘대동아적 그리스도교’를 확립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일본의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은 천황 즉위 2천 6백년을 기념하는 「황기2천6백봉축전국기독교신도대회」 (皇紀二千六百奉祝全國基督敎信徒大會)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에 앞서 1940년 10월 17일, 신무천황즉위기원 2600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 약 2만 명의 교인들이 모여, 궁성요배의 국민의례로 시작하여 천황을 찬양하는 찬송가를 만들어 불렀고, 식이 끝나자 교인들은 메이지신구(明治神社)에 참배하였다. 이 대회는 “오등(吾等)은 전기독교회의 합동을 이루어갈 것을 기약한다”고 선언하였다. 「일본기독교단」은 이 서약을 기초로 하여 성립된 것이다. 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일본의 모든 개신교 교파들은 하나님과 국가 앞에서 각 교파의 전통, 신학, 관습, 특징, 기관, 교리 등의 모든 차별과 상이를 불식시키고, 외국선교사들의 정신적 물질적인 원조로부터 벗어나 독립하며, 모든 교파적인 편파를 없애고 하나로 단결하여 “한 나라 한 교회”(一國一敎會)를 만들어, 세계교회 역사상 선례와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하나의 교회’를 성립시킬 것을 다짐하였다. 이것이야 말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며, 일본국체의 존엄무비(尊嚴無比)한 기초에 입각하여 천황이 행하는 정치의 길과 그 윤리를 몸에 익힌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매일 동방요배(東方遙拜)라는 국민의례를 통해서 천황에게 절을 하며, “대일본은 신의 나라, 천황폐하는 현인신이시며, 우리는 천업익찬을 위해서 태어났고, 우리는 천업익찬을 위해서 죽고”라고 노래하며 맹세했다. 동방요배, 또는 궁성요배(宮城遙拜), 황거요배(皇居遙拜)는 천황이 있는 동쪽이나, 황궁을 향하여 먼 곳에서도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는 행위로, 기미가요(일본국가), 히노마루 게양(일본국기), 높은 사람의 초상이나 사진에 경의를 표하는 고진에이(御眞影)와 함께 거행되었다. 따라서 본 서한은 신의 나라 일본과, 그 나라를 다스리는 현인신인 천황의 천업을 이루어 가는 것이야 말로 성경이 주장하는 복음이므로, “천업”인 대동아공영권 수립을 위해서 대동아공영권에 속한 모든 교회가 이에 순종하고 따를 것을 종용하는 일명 “현대판 사도적 서한”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5. 이 서한에 대한 평가 이 서한은 일본기독교단이라고 하는 한 교회(교단)의 공식적인 문서이다. 그리고 신앙적 신학적 수치도 모르고 교회를 국가와 ‘자기동일화’(自己同一化)시킨 것은 삯군 교역자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비난의 몫이다. 이것은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가 아니라, 세상의 이념과 권력에 지배를 받는 교회(교단)이다. 이 서한에는 신앙도 교회도 신학도 부재한다. 서한의 원안을 작성한 사람은 바르트 신학자 야마모토 카노우(山本和, 1909-1995)로서, 칼 바르트 신학을 차용하여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일본에서는 1900년 초기에 칼 바르트 신학이 소개되어 큰 영향을 미쳤다. 서한공모 심사 위원 중 한 사람은 쿠마노 요시타카(熊野義孝)는 일본의 대표적 조직 신학자였다. 그들이 빚어낸 신학은 국가의 목적 또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자기수단화였다. 때문에 그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교회는 인위적인 목적을 지향할 뿐이다. 오늘날 교회는 물질과 ‘자기동일화’를 시켜버림으로써, 교회의 믿음과 신학이 물질 중심적으로 종교화되어 버렸다. 교회는 한 사람의 종교적 야망이나, 한 집단의 이데올로기 또는 한 나라의 국가적 이념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세워져서는 안 된다. 마치는 말 하나님의 교회는 두 세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또는 국가, 사회) 앞에서 고백하는 자신들의 신앙고백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유화된 욕심의 현장이 아니라 고백적 전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자기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현대판 사도적 서한”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발신하고 있지 않는지 물어야 한다. 광복 69주년을 맞이하면서,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그들이 교회에 요구하는 것을 부둥켜안고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사회와 국가와 세상에 대하여 예언자적 직분을 감당하는 고백하는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도한다. 참조 / 1. 오노 시즈오 지음, 김산덕 옮김, 『일본교회사』(서울: 칼빈아카데미, 2012년) 2. 일본기독교단이 '대동아공영권의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은 http://rpress.or.kr/xe/359315 에서 읽을 수 있다.
1063 no image |현장 리포트| 황무지 같은 선교지에 핀 꽃_원영대 목사
편집부
2353 2014-08-05
황무지 같은 선교지에 핀 꽃 < 원영대 목사, 부천평안교회, PMS 실행이사, C국 서남부 후원 부이사장 > “타성에 붙어 권태감에 시달리던 사역에 신선한 충격 느껴져” 6월 **일 월요일 오전 11시, K목사와 인천공항에서 만났다. 목적지는 C국 서북부 모 지역이다. 종종 매스컴을 통해 테러 사건이 보도되는 지역이라 주변의 만류도 있었으나 현지 사역자들의 말을 믿고 결행하였다. 항공료 절약을 위해 카자흐스탄을 경유하여 들어가기로 했다. 방문 목적은 그 지역의 PMS(총회선교부) 선교사들의 사역을 둘러보고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K목사와 나는 그 지역의 후원 이사이기도 하다. K목사는 수년 전부터 자신이 담당한 지역을 1년에 한 차례 방문해서 선교사 부부와 함께 세미나를 갖고 교제도 해오고 있었다. 나 역시 PMS 후원 이사로서 그 사역에 동참하고 싶었는데 마침 후원회 지역 조정에 의해 함께 C국 서남부를 섬기게 되어 방문 사역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항공료를 절약하기 위해 경유 편을 이용했는데 무려 7시간을 기다리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비행기는 자정이 다 되어 출발했고 다음날 01시 30분, 목적지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3명의 선생들이 우리를 환영했다. 둘째 날은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오후에는 시내의 한 박물관과 공원을 둘러보고 김 선생 댁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 우리 PMS 3가정과 합신 동문 선교사 6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인사와 사역 소개의 시간을 가진 후 K목사의 코칭 세미나를 2시간 동안 가졌다.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 속에 세미나를 마친 시간은 오후 10시. 다음 날을 약속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셋째 날의 일정은 PMS 소속 선교사들의 사역 현장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지역 특성상 구체적인 사역을 소개할 수는 없지만 각자 자신의 특기와 기질을 살려 사역에 임하고 있었다. 우리 합신 동문 선교사들도 선교 단체에 소속되어 사역하면서 교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역이 원주민과 정부 당국과의 충돌이 잦은 곳이라 대체적으로 사역이 많이 위축된 상태였다. 저녁에는 소속 선교사들과 동문 선교사 가족들을 초청하여 함께 식사한 후 장 선생 가정에서 두 번째 세미나 시간을 가졌다. 넷째 날은 오전에 그곳 한인교회당으로 장소를 옮겨 세미나를 하였고 오후에는 산지 원주민 지역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을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유목민 전통 가옥으로 들어가 차와 빵을 대접 받았는데 배탈 날 각오를 하고 주는 대로 받아먹고 마셨다. 다섯째와 여섯째 날은 PMS 소속 선교사들과 현지의 유명한 유적지를 방문하며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찾은 곳은 사막 지역의 오아시스라고 불리는 곳인데 포도 농사와 지하수로로 유명한 곳이었다. 함께 투어 하는 중 장시간 대화하며 교제하는 시간은 그들의 애로 사항과 사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 날은 주일, 지부장 강 선생 가정에서 주일예배를 위해 모였다. 각자의 사역 때문에 함께 모이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좁은 거실에서 10여 명이 모여 앉아 조용히 드리는 예배는 초기 교회시대의 박해 받던 신앙공동체 분위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배 후 소속 선교사 가족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한 후 마지막 세미나를 가졌다. 이윽고 석별의 정을 나눠야 할 시간이 왔다. 짧은 한 주간이었으나 많이 친숙해져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늦은 밤, 첫 날 나중 나왔던 것처럼 세 선생이 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다. 함께 밥 먹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차타고 다니며 대화하면서 그렇게 한 주간을 보낸 것이다. 본국에서는 본부와 선교사의 입장이 갑과 을의 관계처럼 느껴졌는데 막상 선교지에서 함께 밥 먹고 함께 어울리다보니 똑같은 입장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주로 그들의 말을 많이 들었다.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위로가 되었고 힘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이사회 모임 때는 재판관과 같은 입장이었으나 현지에서 지내다보니 변호사가 되었다. 남모르는 아픔과 답답함이 가정 마다 있었다. 후원 이사들이 방문했다고 그들의 애로 사항이나 요구 사항이 당장 해결될 것은 아니었지만 한 두 끼 함께 밥 먹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부분이 해소되었을 것이다. 이번 선교지 방문에 아내와 동행하였다. 선교사 부인들과의 대화가 꽃 피었고, 나름대로의 대화의 창구 역할을 감당해 내어서 선교사 부인들에게 많은 힘이 되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후원 이사들의 방문이 오지 사역자들에게는 큰 힘이 되진 못했어도 버려진 존재와 같다는 서운함과 외로움은 어느 정도 떨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여러 가지 제약된 상황 가운데서도 중심을 지키며 고군분투하는 우리 선교사들과 동문들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게 유익이 되었던 것은 타성에 붙어 권태감에 시달리던 나의 사역과 영혼에 신선한 충격과 회복이 있었다는 것이다. 늦은 밤 응신조차 힘든 E-클레스의 좁은 좌석, 그러나 감사한 마음이 더 크다. 주께서 은혜주시는 날까지 그냥 가서 함께 밥 먹고 차타고 대화하고 그럴 작정이다.
1062 |리포트| 필리핀 재난 지역을 다녀와서_안두익 목사 파일
편집부
2446 2014-08-05
필리핀 재난 지역을 다녀와서 안두익 목사, 동성교회, 총회사회복지부장 “고난당한 현장에 복음의 향기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무한한 감격” 지난 2013년 11월 6일에 12m가 넘는 해일을 동반한 하이옌 태풍이 한 순간에 필리핀의 여러 개 섬들을 덮어 버렸다. 그 가운데 가장 피해가 심한 지역은 인구 20만이 살고 있는 타클로반이다. 그동안 총회사회복지부는 3차례에 걸쳐 재난 지역을 다녀왔다. 그 이유는 단지 구호성금을 전달만 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피해 지역의 주민이 바로 일어설 수 있는 일을 돕기 위함이었다. 처음 타클로반 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 청사는 포탄에 맞은 듯 쑥대밭 그 자체 였다. 공항을 빠져 나오는데 퀘퀘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재난의 현장에 왔다는 긴장감이 밀려 들어왔다. 한 순간에 1만 여명이 태풍에 쓸려 주검으로 변한 현장은 3개월이 다 되어 갈 때까지도 참혹한 그대로였다. 우리 일행이 태풍 지역인 사마르 섬을 5-6시간을 도는 동안에도 끝없이 펼쳐진 재난의 모습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는 재앙의 현장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다음 세대를 위한 아이들이 6,000명이나 죽은 현실과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할 가족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울고 웃던 마을 주민들이 한 순간에 싸늘한 주검이 된 그 절망의 현실 앞에서 다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인생의 허무감, 의욕상실감 같은 극단적인 것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그 절망이 서려있는 현장 곳곳에는 세계 각처에서 온 자원 봉사자들이 무너진 도로를 깔아주고, 천막을 세워 주고, 식량을 공급하는 모습을 보았다.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감동의 현장이었다. 처음에 우리가 살펴본 지역은 이미 다른 단체가 도와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다시 3월에 들어가 현장을 살펴보고 학교를 재건하는 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총회장을 비롯해 3명이 다시 현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동안 총회사회복지부는 삐나미띠난 초등학교(학생 268명, 교사 7명)를 재건하고 교회당 두 곳을 복구 및 신축을 했다. 곧 태풍으로 무너진 Christ is King Mission Church(성도 80-100여 명) 교회당을 복구했으며, 새로운 지역에 풀 가스펠 교회(성도 30여 명)의 교회당을 신축했다. 학교 완공식과 예배당 복구 및 신축을 맞아 예배를 드릴 때 감격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지역 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학교 완공식을 보며 얼마나 기뻐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돌아보면 고난과 아픔뿐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통해 또 다른 역사를 이루어 내는 모습 앞에 감사만 드려질 뿐이었다. 특히 삐나미띠난 초등학교 교장은 “우리나라(필리핀) 지도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 깊은 산 속에, 절망과 탄식만 할 수 밖에 없는 바로 이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학교가 다시 세워질 줄은 몰랐다”고 하면서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가르침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들을 때, 섬김과 나눔의 사역이 이처럼 크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귀국하는 길에는 또 다른 태풍이 불어 타클로반에서 마닐라로 나오지 못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하지만 바쁜 가운데서도 이 사역에 기도와 사랑으로 함께 동참한 총회장 이주형 목사님의 수고를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전국 교회가 하나가 되어 이 일에 동참함으로써 슬픔에 젖은 저들에게 복음의 향기를 전할 수 있게 되어서 무한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1061 no image |긴/급/진/단| 땅밟기 기도, 무엇이 문제인가?_박형택 목사
편집부
9374 2014-07-22
땅밟기 기도, 무엇이 문제인가? < 박형택 목사, 총회이단대책위원회 연구위원 > “하나님이 주관하는 지역과 귀신이 주관하는 지역 있을 수 없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마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지난 2014년 7월 7일 한국 기독교 청년들 3인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인도 부다가야 마하보디사원 내에서 선교기도를 하며 일명 ‘땅밟기 기도’ 행위를 한 것으로 인하여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사실은 마침 그곳에서 묵언수행을 하던 비구니 법수 스님이란 분이 법보신문에 글을 올리고 동영상을 올림으로써 알려졌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글들이 인터넷에 회자되고 있으며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다. 지난 2010년에도 찬양인도자학교 소속의 기독청년 5명이 봉은사에서 기독교식 예배를 올리는 동영상이 ‘봉은사 땅밟기’라는 제목으로 올라와 상당한 이슈가 되기도 했었다. 2010년 10월에는 대구기독교총연합회가 대구 불교테마공원 설립반대 운동을 하면서 대구 동화사 성보 박물관 주차장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문제가 되었고, 2011년 2월에는 한국 개신교 교인들이 버마의 한 법당에 둘러앉아 손을 잡고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드리는 이른 바 ‘미얀바 땅밟기’ 동영상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하여 17일에는 한국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 4대종단 지도자들이 기자회견을 갖고 “종교화합 및 공존을 위한 종교 평화법 및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했다고 한다. 사실 기독교내에서도 찬반 논란이 있는 바 ‘땅밟기 기도’에 대하여 상고해 보고자 한다. ‘땅밟기 기도’란 신사도운동의 “영적도해”(Spiritual Mapping)라는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비성경적인 사상이며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영적도해사상은 1989년 마닐라 제2차 로쟌회의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피터 와그너, 죤 도우슨, 신디 제이콥스, 죠지 오티스, 루이스 부쉬 등 여러 사람들이 강사로 나와 각 지역에는 그 지역을 주관하는 지역의 영들(territorial spirits) 곧 지역을 주관하는 귀신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 지역에서 역사하는 귀신을 대적하여 몰아내는 것이 곧 복음화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단체가 신사도운동 단체와 예수전도단, 그리고 인터콥이라 할 수 있다. 신사도운동의 대부인 피터 와그너는 “지역사회에서 마귀의 진을 헐라”라는 책을, 예수전도단 죤 도우슨은 “하나님을 위하여 도시를 점령하라”, 밥 베켓은 “지역을 바꾸는 기도 영적도해”, 인터콥의 최바울은 “세계영적도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리고 예수전도단에서 스티브 홀든은 “그리스도인의 땅밟기 기도”라는 책을 발간하였고 댄 크로포드는 “땅밟기 기도”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먼저 영적도해사상 무엇이 문제인가? 살펴보자. 영적도해는 이 지구의 모든 지역을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과 마귀 즉 귀신이 주관하는 영역으로 나누어 그 지역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그 지역을 복음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루이스 부쉬의 10/40창(위도와 경도)이라는 것을 보면 주로 이슬람과 불교지역이 많은데 바로 이 지역에 귀신의 역사가 강하다는 것이다. 나타난 현상을 가지고 잘못된 이론을 가져다 붙인 것이라고 판단된다. 과연 하나님이 다스리는 지역과 귀신이 다스리는 지역이 따로 구분이 되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는 첫째, 하나님의 온 세상의 통치와 주권을 믿지 않는데서 오는 것이고 둘째, 하나님의 통치를 땅의 영역에 한정시키고 셋째, 하나님과 마귀의 대결구도로 이원론적 몰고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마귀를 멸하는 데 있다는 잘못된 성경해석에서 기인한 것이다. 지역 귀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곡해하고 있다. 요한일서 3장 8절의 말씀은 마귀를 멸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신 것이다. 마귀의 일이란 사람들을 정죄하는 일이다. 이러한 잘못된 성경해석이 잘못된 사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면 땅밟기 기도 혹은 대적기도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 지역을 발로 밟으면서 마귀를 대적하며 기도하면 귀신이 물러가고 그 지역이 복음화 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상은 어디서 온 것인가? 이것은 여호수아 6장의 말씀을 왜곡해서 적용한 것 때문이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한 번씩 여리고 성을 돌았다. 그리고 일곱 번을 돌고 나팔을 불었을 때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땅밟기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무릇 너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여호수아 1:3)라고 하신 말씀을 오해하고 있다. 그들은 여리고성을 발로 일곱바퀴를 밟고 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다고 믿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오늘도 “여리고 성 정복작전” “땅밟기 기도”를 시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땅을 밟았기 때문에 여리고 성을 주신 것일까? 아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약속한 것 즉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다”는 것을 시행하신 것이다. 창과 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것이지 그 지역에서 역사하는 귀신을 이스라엘이 땅을 밟으므로 쫓아낸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땅을 밟은 결과로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능력과 힘이 아니라 애굽에서 능력으로 구원해 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여리고를 붙이셨다는 것을 증명하신 것이다. 위의 성경내용을 왜곡해석하면 이상한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행위가 나오고 잘못된 신학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관하는 지역과 귀신이 주관하는 지역이 있다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마귀를 하나님의 대적자로 대등한 관계로 만드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마귀는 하나의 피조물일 뿐이며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마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다. 이러한 사상은 우리나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미신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터가 문제가 있다는 사상이다. 터의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사는 사람이 문제이다. 따라서 ‘땅밟기 기도’는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위험한 이단적 사상이요 행위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하고 이로 인한 타종교의 비방을 받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1060 no image |지|상|강|좌| ‘성경중심 - 전체를 전부로’에 대한 이해_김봉찬 목사
편집부
2725 2014-07-22
‘성경중심 - 전체를 전부로’에 대한 이해 < 김봉찬 목사, 울산중부교회 부목사 > “신앙고백은 성경 자체를 다루면서, 전체 성경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고 꼭 붙잡아야 할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신학적 오류를 바로잡은 척도이며, 기준이며, 틀” 우리가 흔히 ‘5대 솔라’라고 부르는 종교개혁의 다섯 가지 구호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로”(solus Christus),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구호는 오랫동안 앞의 ‘솔라’에 비해 그리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바로 “전체 성경으로”, 즉 “tota Scriptura”입니다. “전체 성경으로”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 성경 전부를 신앙과 삶의 유일한 권위로 삼으며,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면을 동시에 다루는 태도입니다. 쉽게 말해 “성경 66권이 내는 한 목소리”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전반적으로 성경이 66권이라는 사실에 관심이 적습니다. 주제별 성경공부는 열심히 해도 성경 “책”을 읽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파편으로 기억하며, 그저 몇 구절만을 인생의 지침으로 여기는 것에 익숙합니다. 성경을 보는 안목이나 성경적 시야가 아주 좁아서 자기 조각이 최고인 줄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편협한 신자가 양산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외쳐야 할 구호는 “오직, 그리고 전체 성경으로”(sola et tota Scriptura)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설교와 성경공부가 넘치는 홍수 시대, 오직 성경을 외치면서도 정작 그 내용은 빠져버린 이 세대에 필요한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1. 성경읽기부터 첫 단계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 그 안에서 구원의 원리와 지혜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능지수나 나이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성경 읽기는 글자를 알고 성실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매일, 규칙적으로, 일단 읽는 겁니다.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게 안 되면 그저 게으른 겁니다. 태도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내 앞에 계신 듯이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이 직접 말씀해주시고, 내가 그 앞에 엎드리며, 주를 경외함으로 홀로 주 앞에 선다는 고백으로 진지하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설교나 성경공부 이전에 성경 자체가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은 다 알 수 없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분명한 진리이다’는 고백으로 책을 먼저 접해야 합니다. 읽기가 기본이요 우선순위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어떤 내용은 비밀로 숨겨져 있고,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과 오해할만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둘째 단계가 필요합니다. 바로 “설교 잘 듣기”입니다. 2. 설교와 설교자 설교는 성경에 대한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바른 해석과 가르침을 위해 교회 안에 말씀의 직분자를 세우셨습니다. 목사의 설교는 그 사명의 본질이요, 가장 아름다운 꽃입니다. 그 꽃이 활짝 피어날 때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해 갑니다.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설교를 잘 들어야 합니다. 잘 듣는 데에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내용으로 듣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마음이 뜨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예배 분위기나, 성가대의 화음이나, 사람들의 미소 때문이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 때문이라면 은혜를 받은 게 아닙니다. 단지 감동한 것뿐이죠. 내 감각 기관이 외부 현상에 반응하는 것과 은혜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단지 그뿐인 감동이라면 설교는 의미가 없습니다. 전인적인 변화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설교는 내용입니다. 가슴부터 데우려고 달려들면 안 됩니다. 기억도 내용이고, 적용도 내용이고, 비전도 내용입니다. 삶도 내용으로 채워야 합니다. 귀로 곱씹으며 듣고 머릿속에 먼저 넣어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텅 빈 머리로 가슴을 불태울 수 있을진 몰라도, 바른 삶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가슴이 뜨겁길 원하십니까? 기억하십시오. 성령님은 말씀의 장작을 태우십니다. 3. 설교자와 회중 바른 듣기를 위해 바른 설교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성경 전체를 오직 성경으로 풀어낸 설교가 올바로 선포될 때 다른 은혜의 방편이 따라오며, 교회의 표지와 속성이 바로 일어나고, 주의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말씀 사역자의 책임이 참으로 큽니다. 바른 내용과 성령님의 역사가 동시에 이뤄지길 간구하며 누구보다 절실하게 예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부족한 자신을 붙잡고 날마다 씨름합니다. 말씀의 통로이자 청중으로, 마음으로는 가장 앞에서 엎드리며 예배합니다. 입술로도, 가슴으로도 선포하길 기도합니다. 설교자가 그렇게 책임을 다할 때, 이제 교회는 바르게 반응해야 합니다. 회중은 말씀의 통로인 목사를 신뢰하며 설교를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까? 직분자는 말씀의 모든 부요함에 이르려고 일주일간 얼마나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이런 면에서 올바른 신뢰 관계가 정립된 교회는 참으로 복되다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 최고의 QT는 주일 공예배에 선포된 설교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께서 세우신 목사의 설교가 귀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신자가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설교만 제대로 들으면 진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목사 개인의 역량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때로는 욕심이나 실수로 성경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셋째 단계가 필요합니다. 바로, 교리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4. 교리의 중요성 교리는 넓게는 성경 자체 혹은 성경을 체계화한 내용이며, 좁게는 역사적 신앙고백(교리에 대한 반응으로서 신조, 신경, 교리문답)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알아간다는 것은 먼저 성경 자체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이며, 다음으로 역사적 신앙고백에 관한 공부입니다. 성경은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모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유월절과 성찬을 배울 수 없지요.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경을 아예 안 읽으면 모든 단계가 무용지물입니다. 설교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아무리 쉬운 설교도 은혜는커녕 지루하기만 합니다. 재밌는 부분만 듣습니다. 자연히 성경에 흥미가 떨어집니다. 여전히 안 읽고 안 듣습니다. 듣지 않으니 신앙이 자라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다시 안 읽고, 안 듣고, 결국 안 가게 됩니다. 악순환입니다. 거기에 대고 웨스트민스터니, 소요리니 하면 정말 도망가고 싶습니다. 예전부터 교회 안에 있던 터라 그래도 뭔가 안타깝고 은혜에 목마르긴 한데 그게 자연스럽게 되길 원하지 스스로 노력하지는 않습니다. 교회 일을 하고 있으면 그래도 괜찮은 거라고 자신도, 주변에서도 안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교묘하게 비껴난 종교생활을 지속하고 있는데 뭐가 성경 중심이고, 뭐가 바른 신앙생활이겠습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창세기부터 펴고 배워야 합니다. 띄엄띄엄 성경을 읽어 나가야 합니다. 몇 년, 십몇 년 굳은 것이 한두 달에 풀리지 않겠지만,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풀어가야 합니다. 우습게 여겼던 성경 순서나 열두 지파 이름도 외우고, 레위기도 한 번 독파해봐야 합니다. 부지런히 읽고 탐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특히 청년의 때에 이것을 놓치면 평생 성경 변두리에서 살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 신앙고백은 보편 교회가 오랫동안 다듬어 온 보석입니다. 성경 전체의 정제된 해석이자 열매이고, 누구의 입맛에도 잘 맞게 차려진 요리이고, 성경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설집이기도 합니다. 이런 신앙고백을 잘 살피면 성경해석과 삶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과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 읽기와 설교만으로 부족한 내용을 여기서 채우고,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목사 역시 신종 교리나 개인적 해석을 고집하지 않고, 안수받을 때 맹세한 대로 이 신앙고백 안에서 자신을 세우며, 이것을 잘 가르치면서 진리를 보존합니다. 신앙고백은 성경 자체를 다루면서, 전체 성경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고, 꼭 붙잡아야 할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신학적 오류를 바로잡은 척도이며, 기준이며, 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통해 성경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좋은 참고서로 교과서를 공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역시 성경입니다. 최소한의 성경적 기초라도 있어야만 이 귀한 신앙고백에 바르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신앙고백을 공유한다는 것은, 모든 신자의 객관적인 반응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뜻이며, 시공간을 아우르는 보편교회라는 표지이며, “교회 중심”의 생활원리에도 충실하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하나 됨으로, 한 성령 안에서, 한 아버지께 나아감으로써, 자연스럽게 하나님 중심의 삶도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역사적 신앙고백으로 교회를 더 든든히 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고백의 근본과 목적이 성경 자체이며, 성경이 교리의 근거임을 잊지 말고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체계적인 성경공부도 필요하고, 신앙고백서 공부도 필요합니다. 성경으로 교리를 확인하고, 다시 고백을 통해 반응해야 합니다. 반복과 반응, 이것이 신앙고백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5. 종합적 사고력 이상이 “오직 그리고 전체 성경”을 이루는 네 가지 단계이지만, 편의상 나누었을 뿐 이 네 가지는 항상 같이 가야 합니다. 읽고 듣고 연구하는 일이 한 사람 안에서 꾸준해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지성을 두드리는 작업” 위에 겸손한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성경 전체의 빛 아래에서 성령님의 빛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태도는 무엇보다 영적인 일입니다. 지성을 두드리고, 감정이 움직이며, 의지 전체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앞에 순종할 수 있도록 수시로 간구해야 합니다. 이 모두가 올바로 진행될 때, 비로소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종합 사고력”이 내 안에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종합 사고력(성경적 세계관, 성경적 가치관 등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무엇에든 스스로 적용할 수 있는 선명한 기준이 생겨나면 비로소 성경대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이제는 무슨 일이 터져서야 부랴부랴 기도하지도 않고, 말씀 한 구절에만 인생을 걸 정도로 무모하지도 않으며, 누가 적용거리를 던져주지 않으면 무엇을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지도 않을 것이고, 삶에서 부딪치는 온갖 문제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으며, 변하지 않으며, 치우치지 않는 전체 성경의 원리가 성경 읽기를 통해, 바른 설교를 통해, 교리를 통해 확립되면, 비로소 내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전체 성경의 원리가 내 안에 채워질 때 그렇게 됩니다. 때로는 엎어져 울더라도 전인격은 여전히 성경을 따르고 있을 것입니다. 마치는 말 “성경 중심”이란 삶의 운동입니다. 그러나 운동 이전에 내 안에 정적인 역사 즉, 머리가 성경을 따라 맹렬히 회전하여 기억하고, 비교하며, 적용하는 일이 있어야 하기에 위와 같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지는 것, 무슨 일을 하더라도 성경의 원칙대로, 말씀하시는 성령님께 지성으로 반응하고, 감정과 의지가 계명에 순종하는 것, 우리 몸의 세포 하나까지 말씀으로 꽉 차게 듣고, 반응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요, “성경 중심”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중심을 외치려면 일단, 거기 있는 성경을 집으십시오. 그리고 펴서, 읽으십시오. 성경 전체를 계시의 전부로 받을 때까지 말입니다. 1548년, 교회의 위대한 교사인 칼뱅 선생이 영국의 호민관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며 글을 맺겠습니다. 기회가 되어 편지 전문을 읽어보시면, 이 단언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모어 경, 제 말을 믿으십시오. 주님의 교회는 요리문답 없이 결코 보존될 수 없습니다.”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