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059 no image <총회유지재단 출연을 격려하며> 우리 교단 교회들과 목사님들께_박영선 목사
편집부
2328 2014-07-22
우리 교단 교회들과 목사님들께 < 박영선 목사, 남포교회, 총회유지재단 이사 > “지교회가 모여 더 넓은 하나님 교회 섬기는 모범 보여야 할 때” 지난 시간 우리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귀하게 여겨주셔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우리 눈으로 보게 하여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참여하여 그분의 크심을 체험한 것입니다. 각 교회의 풍성한 간증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복된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을 향한 우리의 열심이 각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교회가 모여 더 커다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교단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그 무게에 걸맞게 증거하며 책임지기 위해 세워진 주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교회들이 함께 이루어 가는 관계가 교단에 담겨 있습니다. 교회들 사이의 이 관계를 더 긴밀하며 깊이 있게 하려고 총회유지재단이 세워졌습니다. 유지재단은 교회마다의 헌신과 책임을 모아 하나님을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섬기는 일을 도울 것입니다. 총회유지재단은 교단 산하 교회들의 자산을 더욱 소중히 돌보는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혹여 우려하듯 지교회의 재산권을 교단의 권리 아래로 가져오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교회의 재산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정하는 것이 유지재단의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 교단의 신앙과 우리 교단에 맡겨진 책임과 역할에 교단 소속 모든 교회가 같은 각오로 동참하게 하는 창구가 되려는 것입니다. 총회유지재단은 교단 산하 교회들의 자산에 어떠한 불이익이나 불편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교회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시험거리을 예방합니다. 개교회의 재산권 행사가 필요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도움과 편리를 제공 받으실 수 있습니다. 짧은 역사에 작은 규모이지만, 우리 합신 교단은 한국교회 안에서 소중한 사명을 맡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여 순수하고 온전한 교회됨을 지켜나가는 것은 이제껏 우리 교단이 감사히 맡아온 몫입니다. 이 사명을 더욱 분명히 감당하기 위한 출발점에 힘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총회유지재단의 뜻에 동참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우는 일에 진심과 책임으로 함께하는 동역자라는 것을 보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문의처: 총회사무실 02-708-4458>
1058 no image |박윤선 5분 새벽기도 설교 <33>| 역경을 돌파하는 믿음
편집부
2191 2014-07-22
역경을 돌파하는 믿음 - 시편 3편 1-8절 - “하나님을 바로 아는 신앙적 지식 따를 때 문제 해결돼” 원수가 많은 것으로 보아 그의 역경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1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역경을 이긴 비결은 무엇입니까. 1. 이 시인이 당한 역경은 무엇입니까(1-2절) 성도는 좋은 사람인데 왜 원수가 많습니까. 땅위에는 마귀에게 속한 무리가 많고(창 3:15), 그들이 성도를 대적하여 싸우기 때문입니다. 다만 구체적으로 누가 이런 의미의 원수인지는 인간으로서 최후의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신자가 진정으로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원수로 가지고 있다면, 그만큼 그는 확실한 성도입니다. 그는 이러할 때 더욱 담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자로서 교회 안에서도 원수를 만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조심하여 원수를 함부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역경은 종교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불행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원수들이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2절)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의 도움도 못 받는 것으로 보일 만큼 사정이 어려웠으니 과연 견디기 힘겨웠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절을 당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다. 그런 시절도 실상은 성도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있습니다(시119:67, 71). 2. 역경에서도 요동하지 않는 비결이 있습니다(3-8절) 시인은 역경에서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 비결이 본문에 나옵니다. 첫째, 시인은 여호와께서 누구신지를 바로 알았습니다(3절). 오늘날 우리나라의 문제가 국제적인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세계의 현실 흐름에 따라 비로소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이 말은 세계 문제만 해결된다면 작은 한국의 문제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 사람의 문제 역시 하나님을 바로 아는 신앙적 지식에 따라 해결됩니다. 하나님을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로 아는 신앙적 지식 앞에서는 천지가 무너져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둘째, 시인은 기도의 능력을 믿었습니다(4절). 하나님께 기도하면 일이 해결될 줄 믿는 사람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셋째, 그는 과거에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았기 때문에 현재의 역경에서도 그렇게 벗어나게 될 줄 알고 안심합니다(7절). 마지막으로 그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 있는 줄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8절).
1057 no image |심층진단| 구원파의 거짓 구원론을 반박함_박영돈 목사
편집부
2914 2014-07-08
구원파의 거짓 구원론을 반박함 < 박영돈 목사,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 > “거룩함 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종교개혁 가르침 왜곡한 것” “신자는 칭의와 성화가 성령 안에서 긴밀히 결합되어 거룩한 열매 산출해야” 이번 세월호 사태로 인해 구원파의 교리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그들의 구원 교리에 의하면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얻으면 더 이상 죄를 회개할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어떻게 살아도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순진한 교인들을 홀리기 쉽습니다. 어떤 교인은 기존 교회에서 몇 십 년 신앙생활을 해도 누리지 못했던 구원의 확신을 이런 구원파 교리를 통해 단번에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방종에 빠지게 하며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 사이비 구원론은 구원파 교주와 그 일가와 측근에게서 볼 수 있듯이 양심이 화인 맞은 괴물 같은 인간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개신교 구원의 교리가 얼마나 괴이하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보는 많은 교회에서 전하는 구원의 교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김세윤 박사가 얼마 전 그의 강의와 책에서 대다수의 한국교회도 사실상 구원파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세윤 박사의 진단을 100% 받아드릴 수는 없지만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1. 잘못된 구원론에 빠진 한국교회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거룩함의 열매가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복음의 변질입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원에는 잘못된 구원론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교인들이 변화되지 않는 문제는 우선적으로 구원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거룩함이 없어도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생각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요. 성경은 물론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도 이런 사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히12:14).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고전 6:9-10; 갈 5:21; 엡 5:5). 주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주를 본다고 했습니다. 죄에서 떠나 순결하고 거룩하지 못한 이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거룩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성경말씀에서 완전히 벗어날 뿐 아니라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완전히 왜곡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가장 염려한 것이 바로 ‘오직 믿음으로’라는 교리가 이런 식으로 오해되는 것이었습니다. 2. ‘오직 믿음으로’에 대한 이해 칼빈은 우리의 행위나 거룩함에 근거해서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배격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반드시 거룩함의 열매를 산출한다는 점을 동시에 역설합니다. 믿음으로 신분이 의롭게 되는 것과 실제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결코 분리 될 수 없는 영원한 띠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의롭게 하면 동시에 그를 반드시 거룩하게 하십니다. 또한 믿음은 끊임없이 회개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기독교강요 3.1.1). 끊임없이 회개함으로 거룩함을 이루어가지 않는 이들은 곧 부패해져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 안에게는 구원의 확신과 함께 두려움과 떨림이 공존해야합니다. 이 두려움은 구원의 확신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종과 게으름과 헛된 자만을 막아줌으로 구원의 확신을 더 온전하고 견고하게 합니다(기독교 강요 3. 2. 22). 이런 칼빈의 가르침은 히브리서의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히브리서에는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는 교인들에게 믿음의 확신과 위로를 주는 말씀과 함께 시험을 당해 믿음을 저버릴 수 있는 배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말씀이 공존합니다. 교인들을 위로하는 말씀과 두려운 경종의 말씀이 적절하게 배합되어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말씀이 신앙생활에 요긴합니다. 3. 위로와 두려움의 양면성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위로와 확신을 주는 말씀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진리를 알고 은혜를 입고 배도하면 다시는 회개할 수 없다는 히브리서의 말씀과,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는 경고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위험을 두려워하며 경계하게 됩니다. 이런 두려움이 있어야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이 없는 구원의 확신은 우리를 방종에 빠지게 하며 결국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거룩한 두려움 없이 확신으로만 충만한 사람, 거룩하게 살지 않는데도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이는 망할 사람입니다. 마귀는 거짓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확신을 전혀 흔들거나 공격하지 않고 더욱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자기기만에 빠져 확실하게 망하게 합니다.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서 믿었기에 구원받았다고 굳게 확신하는 것은 마귀가 준 거짓 확신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마귀적으로 왜곡된 구원의 복음을 통해 마귀가 심어준 거짓 구원의 확신에 사로잡혀 있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며 자신의 구원의 여부를 염려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확고히 하려는 경각심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거룩함의 열매가 없는데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한다고 성경이 분명히 말씀했는데 거룩함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자기 착각, 기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치는 말 내가 참된 믿음을 가졌는지, 내가 참으로 구원받았는지는 오직 거룩함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거짓 확신에 푹 빠져 신앙 생활하다가 멸망하는 것보다 괴로울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점검하고 구원을 의심해보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것이 온전한 확신에 이르는 길입니다. 물론 참으로 구원받은 신자들도 자신이 이룬 거룩함이 너무 미흡하고 보잘 것 없기에 그것만 의지해서는 자신의 구원을 자신할 수 없습니다. 거룩해질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합니다. 자신의 죄인 됨과 부패성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거룩해질수록 자신의 의로움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의 의로움과 긍휼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신자들은 이처럼 점점 더 낮아지면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에는 칭의와 성화가 성령 안에서 긴밀하게 결합되어 거룩함의 열매를 산출하는 것입니다.
1056 no image |개|혁|주|의|신|앙|강|좌| 마지막 때의 경건을 위한 바울의 교훈_이복우 목사
편집부
3035 2014-07-08
마지막 때의 경건을 위한 바울의 교훈 (디모데후서 3장 12-17절을 중심으로) < 이복우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제(奠祭)와 같이 부어지고 떠날 시각이 가까웠으며,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 4:6-7)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cf. 딤후 4:9-10, 13, 21), 곧 닥칠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면서 쓴 유언장과 같은 편지이다. 디모데후서 3장 12-17절은 그 내용들 중의 하나이다. 이에 앞서 바울은 “마지막 날들에 고통하는 때가 올 것이라”(딤후 3:1)고 말한다. 이때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딤후 3:2) 타인을 “비방하며”(딤후 3: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쾌락을 더 사랑한다”(딤후 3:4)고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딤후 3:5). 하지만 성도는 이러한 때에도 변함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딤후 3:12). 이를 위하여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2-17절에서 다음과 같이 교훈한다. 1.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 먼저, 사도 바울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14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13절과 14절이 “그러나 너는”(cf. 딤후 3:10)이라는 표현으로 강하게 대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조되는 내용은 “더욱” 악하여 진다”(13절)와 “거하라”(14절)이다. 전자는 악한 것에서 더 악한 것으로 ‘나아가다, 전진하다’(progress, advance)는 뜻이다. 이 단어는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딤후 2:16)는 말에서 이미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것과 대조되는 14절의 “거하라”는 말은 ‘머물다, 거주하다, 체류하다’는 뜻이다.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악의 진보를 통하여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딤후 3:13).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도가 이와 같은 상황에 동화되지 않고 경건하게 사는 비결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진’이 아니라 ‘머묾’이다. ‘나아감’이 아니라 ‘거함’이, ‘진전’이 아니라 ‘체류’가 경건의 비밀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머물고 거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배우고 확신하는 것 안”에 머물러야 한다. 경건한 성도에게는 머물러야 할 울타리가 있다. 넘어가면 안 되는 한계가 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이 제한 ‘안’에 확고부동하게 머물러야 한다. 사도 요한도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요이 9; cf. 요일 2:24)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는 배우고 확신하는 것을 넘어서 나아가지 말고, 그것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배우는 것과 확신하는 것은 별개의 다른 둘이 아니다. 배움과 확신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확신 없는 배움은 단순한 죽은 지식이며, 배움 없는 확신은 광신이요 미신이다. 배우지 않으면 확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며, 확실한 믿음은 배움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배움에서 확신이 나오고, 확신은 배움을 수단으로 한다. 2. 두 가지 앎(딤후 3:14b-15) 그러면 성도가 악에서 더 큰 악으로 나아가지 않고 배우고 확신한 것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 둘을 ‘안다’는 말로 설명한다. 하나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아는 것이며(딤후 3:14b), 다른 하나는 성경을 아는 것이다(딤후 3:15). 전자는 배움의 수단인 교사에 관한 것이며, 후자는 배움의 내용인 성경에 대한 것이다. 1) 참된 교사 성도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실한 교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14b)라고 말한 것이다. 디모데는 여러 사람에게서 성경을 배웠다(14b). 먼저 디모데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이 말씀은 사람이 성경을 배우고 확신한 것에 거하기 위해서는, 또한 성도가 경건한 자로 살기 위해서는 어머니가 훌륭한 성경 교사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면 자녀의 신앙에 대한 책임이 어머니에게만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을 디모데의 아버지로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것도 그냥 아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1:2), “내 아들”(2:1)이라고 부른다(cf. 딤전 1:2,18). 이것은 바울이 자신을 디모데의 영적 아버지로 선언하는 것이다. 디모데의 친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행 16:1). 그래서 디모데는 친아버지로부터 신앙을 배울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영적 아버지인 바울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영적 아버지인 바울에게서 성경을 배웠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딤후 1:13). “내 아들아 …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딤후 2:2, cf. 딤후 3:10-11). 그러므로 디모데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목회자요 신앙인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을 가르쳐 준 육신의 어머니와 영적 아버지인 바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 경건한 성도로 살기 위해서는 육적이든 영적이든 부모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다시 말해 부모가 최고의 성경 교사이어야 한다. 경건한 신앙을 위해서는 경건한 교사가 있어야 한다. 악한 시대를 이기고 경건을 가능케 하는 배움과 확신은 좋은 교사를 통하여 가르쳐지고 계승된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부모가 이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교사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것은 바울이 성경보다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를 먼저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딤후 3:14-15). 여기에는 어떤 특별한 의도가 있다. 좀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그것은 성경 교사가 성경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이단들이 우리와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도 우리와 전혀 다르게 가르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단에 빠지고 멸망에 이르는 것은 성경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의 문제이다. 바로 이 점에서 성경보다 교사가 중요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디모데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도 거짓 교사들이 있었고 그들로 인해 교회가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후메내오와 빌레도이다(딤후 2:17). 그들은 망령되고 헛된 말로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갔다(딤후 2:16). 그들은 진리에 관하여 잘못되었다. 이것은 악성종양과 같은 것이었다(딤후 2:17). 특히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함으로써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렸다(딤후 2:18). 이처럼 거짓 교사는 진리를 대적하고 믿음을 파괴한다. 또한 디모데의 교회에는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으며 도리어 간지러운 귀를 긁어 자신들의 욕심을 만족시켜 줄 거짓 스승을 많이 두었다(딤후 4:3). 이들은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이야기를 따랐다(딤후 4:4). 그러므로 배우고 확신한 일에 머무는 경건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한테서나 배우면 절대로 안 된다. 이 세상에는 거짓 선생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딤후 4:3-4). 그러므로 참된 선생을 만나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복이다. 2) 성경 이와 함께 성도가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딤후 3:15a). 이 말씀은 성도가 성경을 배우는 것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교훈한다. ① 시기 먼저 성도는 “어려서부터”(baby, infant, childhood) 성경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어리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나이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언제부터 성경을 배우고 가르쳐야 할까? 신약성경에서 ‘어리다’라는 “어리다”라는 말은 뛰어 다닐 수 있는 어린 아이(cf. 눅 8:16-17)만이 아니라 젖먹이와 심지어는 엄마의 뱃속에 있는 태아까지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다는 것은 그가 모태에서부터, 갓난아이 때도, 그리고 어린아이 때에도 성경을 배웠다는 뜻이다. 이처럼 성경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즉 모태에서부터 배워야 한다. 또한 바울은 청년 디모데에게 성경을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말한다(딤전 4:13). 나아가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딤후 2:15), 가르치라고 말한다(딤후 2:24; 4:2). 이에 더하여 바울은 장로를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라고 말함으로써 장년이 되어서도 말씀을 배우고 연구하며 가르칠 것을 말하고 있다(딤전 5:17). 따라서 인간은 그의 태동부터 삶의 전 과정 동안 내내 성경을 배워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어려서부터”라고 말함으로써 성경을 배우는 시작에 대하여는 밝히지만 그 끝에 대하여는(∼까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성경을 배우는 데는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다. ② 범위 또한 성도는 성경 전체를 골고루 배워야 한다. 본문의 ‘성경’이라는 단어를 직역하면 ‘거룩한 문자들’ 또는 ‘거룩한 기록물들’이라는 뜻이며, 복수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성경이 여러 권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16절은 “모든 성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배우되 모든 성경을 골고루 배워야 한다. 그 이유는 ‘모든’(16절)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고, 성경은 전체가 연속성과 통일성 속에 있으며, 신구약 간에 상호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 중 어느 하나라도 배척하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모든 성경을 골고루 배우고 전체 속에서 부분을 이해해야 한다. ③ 기록성 이와 함께 성도는 성경을 어려서부터, 그리고 전체를 배우되 반드시 ‘기록된’ 성경을 배워야 한다. 본문의 “성경”이라는 말은 문자로 기록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마치 성경처럼 믿고 추앙하는 이상한 신자들이 많이 있다. ‘기록된’ 성경이 아닌 허황된 공상이나 꿈과 같은 것들을 성경이나 그 이상으로 신뢰하는 것을 자주 본다. 하지만 문자로 기록된 성경 이 외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고 말씀하심으로써 기록된 성경(구약)만을 인정하셨다. 바울 사도도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전 4:6)고 말했고, 빌립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할 때 “모세가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요 1:45)라고 말함으로써 기록된 성경을 최종 근거로 제시하였다. 또한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요 20:31).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는 것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고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본이 되고 깨우침이 되기 위한 것도 기록된 것으로 제한하고 있다. 또한 그는 친필로 문안함으로써(고전 16:21) 그것을 자신의 편지라는 표시로 삼았고(살전 3:17), 사도 베드로도 사도 바울이 쓴 편지를 성경으로 인정하였다(벧후 3:15-16). 나아가서 요한계시록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계 1:3)고 말씀하며, 특히 두루마리의 말씀을 더하거나 제하지 말 것을 경고함으로써 기록된 말씀에 최종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계 22:18-19). 그러므로 기록된 성경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가르치거나 배우면 절대로 안 된다. 문자로 기록된 성경 이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성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성경의 기원 이제 사도 바울은 성경의 기원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한다(딤후 3:16a). 여기서 감동이라는 말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받은 감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호흡으로 불어내셨다”는 뜻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성경 저자들 속에 기운을 불어 넣었다든지, 혹은 작품 속에 불어 넣어 독특한 성격을 가지게 했다는 것이 아니고, 기록은 사람이 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불어내진 것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 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다(벧후 1:21). 그렇다고 해서 인간 저자들은 그냥 받아쓰기를 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인격과 기질과 배경과 경험 등을 충분히 사용하셔서 각자로 하여금 적당하고 독특한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의 유기적 영감이라고 한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했으며, 신적인 권위를 가진다. 따라서 모든 성경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성경의 완전성 성경은 완전하다. 성경은 완전하신 하나님에 의해 감동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완전성이 성경의 완전성을 보장한다. 그런데 성경이 완전하다는 것은 그것의 질(質)과 양(量)에 있어서 모두 완전하다는 뜻이다. 먼저 질적으로 보면 성경은 진리이기 때문에 완전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分別)하라”(딤후 2:15)고 말함으로써 말씀이 진리라고 설명한다. 성경은 거짓 교사들의 망령되고 헛된 말이 아니며(딤후 1:16) 허탄한 이야기도 아니다(딤후 4:4). 성경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바른 말”(딤후 1:13)이며, “하나님의 견고한 터”(딤후 2:19)이다. 또한 성경이 진리인 이유는 말씀하신 분이 미쁘신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기에 자기를 부인할 수 없다(딤후 2:13).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분이시며(딛 1:2) 식언치 않으시는 분이다(민 23:19). 또한 성경은 양적으로도 완전하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씀에서 “모든”은 양을 나타내는 말이며, 그것이 전부라는 뜻으로서 양적 완전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고전 4:6)는 것에는 기록된 말씀으로 충분하고 완전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기록된 것에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말씀도(계 22:18-19) 성경의 양적 충분성을 확증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질과 양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다. 2) 성경의 영원성과 불변성 성경은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며(딤후 1:9; cf. 딛 1:2) 사망을 폐하신 분이다(딤후 1:10). 하나님 앞에서 사망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분이다(딤후 1:10). 그래서 그분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는 것이다(딤후 4:18). 이처럼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감동으로 된 성경도 영원하며 불변한다. 성경의 영원성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기초하고 있다. 3) 성경의 비속박성 성경은 속박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속박당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 분의 말씀도 속박되지 않는다.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환경이나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제한을 당하지 않는다. 바울은 매였어도 그가 전한 복음은 매이지 않고 더욱 담대히 전해졌다(빌 1:13-14). 바울에 의해 선포된 말씀은 “모든 족속”(cf. 마 28:19)이 듣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딤후 4:17). 그는 분명히 모든 족속에게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전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은 매이지 않으므로 모든 족속이 듣게 될 것이다. 4) 성경의 계시성 성경은 계시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가지고 계신 자신의 계획과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셨다(딤후 1:9-10). 하나님은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계시자인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도 계시의 책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의 영광과 위대하심과 전능하심과 역사하심 등을 계시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나타내신다. 성경을 보면 인간이 바로 보인다. 성경은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히 4:12). 성경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패역함을 극명하게 대조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만물의 시작과 그들의 상태와 운명에 대하여 명확하고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우며, 인간과 만물에 대하여 알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을 바로 알기 원하는 사람은 성경을 열어야 한다. 성경을 열면 하늘이 열린다. 성경을 열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인간과 만물이 열린다. 4. 성경의 목적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성경의 목적에 대하여 말한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일으켜 구원을 받게 한다.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며,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을 주신 것을 믿게 된다(딤후 1:9-10, cf. 벧전 1:23). 그러므로 인간은 구원을 위해서도 성경을 열어야 한다. 그리하면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할 것이다. 또한 성경은 성도의 온전함을 목적으로 한다. 성경은 온전하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에 능히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만든다. 즉 성경의 신적 기원이 인간의 온전함을 보증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온전함은 성경이 주는 유익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에 유익하다. 성경은 가르치고, 잘못된 것을 꾸짖고 바로잡아 교정하며, 의로움으로 훈련시키기에 유익하다. 성경은 이런 유익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만든다. 이처럼 성경은 성도의 온전함을 위하여 있다. 5. 맺는 말 우리 모두는 말세의 고통하는 때를 살고 있다. 사람들은 악한 것에서 더 악한 것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성도는 이들과 달리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머묾으로써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경을 정확하게 가르칠 수 있는 신실한 교사가 필요하다. 또한 성도는 모태에서부터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성경을 알아가며, 성경 전체를 알고, 반드시 기록된 성경의 진리를 배우기 위해 힘써야 한다. 나아가서 성도는 성경의 특성을 알고 성경의 신적 권위와 가르침에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될 수 있는 것은 부지런히 성경을 배우고 그것 안에 머묾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055 no image |PMS 디브리핑 캠프 리포트| 디브리핑(debriefing) 캠프에서 누린 유익_서평화 선교사
편집부
2544 2014-06-24
디브리핑(debriefing) 캠프에서 누린 유익 < 서평화 목사(가명), PMS선교사 > “가장 절실한 육체적, 심리적 건강에 대한 점검과 회복의 시간 누려” 2014 본국 사역 선교사 디브리핑(debriefing) 캠프(2차)가 합신세계선교회(이하 PMS) 주관으로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에 소재한 서후리 숲에서 6월 2일(월)부터 4일(수)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우리 가족과 중앙아시아에서 사역한 선교사 가족 등 두 가정이 ‘서후리 숲’ 디브리핑 캠프에 참여하였다. 경기도 양평 서종면에 소재한 서후리 숲은 이 숲을 가꾸어 온 ‘서후리숲지기’의 마음을 닮아서 깨끗한 자연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연 친화적인 ‘서후리 숲’을 새롭게 만들어 놓았다. 첫째 날, 숲 안의 숙소를 배정 받았다. ‘캡슐’로 명명한 두 개의 ‘케빈’ 가운데 한 곳을 정하여 짐을 풀고 통나무로 지어진 작은 집에서 우리 가족들은 깨끗하고 새로운 집으로 사랑의 영접을 받고 신바람이 났다. ‘케빈’을 나와서 위쪽의 산책로를 따라서 가벼운 산행으로 ‘디브리핑’ 캠프가 시작이 되었다. 오솔길에서 만나는 다람쥐를 쫓아가는 동안 가족들은 동심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우리 가정은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까딸루냐 지역에서 경험한 삶과 사역을 나누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첫 번째 사역을 마치고 본국 사역 가운데 있는 김 선교사를 통해 지난 몇 년 동안 그 가정과 삶과 사역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모든 것을 공감하면서 함께 즐거워하고 눈물을 나누게 될 때 누가 먼저라고 말할 것 없이 서로 마음의 문을 열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복된 시간이 되었다. 2014년 본국 사역 선교사 디브리핑 캠프(1차)에 먼저 참여하였던 김 선교사, 문 사모와 권 간사 등 스텝으로서 섬겨주는 따뜻한 사랑으로 행복한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잣나무와 황토 등으로 지어놓은 ‘숲 속의 까페’에서 첫날부터 ‘회복’과 ‘쉼’과 ‘소망의 노래’가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 ‘카페’ 입구에는 투명유리로 된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작은 참새가 낳은 다섯 개의 알이 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나뭇가지에서는 새끼 알을 지키고 돌보는 ‘어미 새’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매일 매일 용감하게 ‘카페’를 방문하였다. 우리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모두 ‘샬롬’을 발견하고 느끼고 있었다. 둘째 날, 통나무 집 지붕으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눈을 뜨고 상쾌한 아침을 시작하였다. 아내와 나는 빗소리를 마치 음악처럼 경청하며 차를 마시는 것을 즐길 수 있었다. 디브리핑 캠프에 도착한 손 박사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비를 좋아하세요?’라는 그의 물음에 우리는 웃으면서 ‘예’! 그런데 ‘많이 좋아해요’라고 답했다. MCN(Member Care Network) 대표로 섬기는 손 박사와는 약 십여 년 전 만난 적이 있고 다시 만남을 이어서 교제를 하게 된 것이다. 셋째 날, 서울여대 상담대학원 미술심리상담 교수와 함께 ‘자신’과 ‘가족’과 ‘가족 구성원’ 각자의 역할 가운데 ‘서로를 배려한’ ‘상호 존중’과 MBTI로 살펴본 ‘서로 다름’은 ‘서로 틀림’이 아닌 것이라는 인식은 디브리핑 캠프의 마지막 가족 상담 시간에 다시 발견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예람이는 체험학습기간으로써 ‘디브리핑 캠프’에 참가하였고, 아침마다 산 속의 통나무 집 앞에서 만나는 ‘고라니’를 새로운 식구인양 환영하였고, MK체험학습으로써 ‘키자니아’ 직업체험에서 신나는 시간을 보내었다. 그리고 어느 듯 3일째 되는 날 아침에 편안한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예람이는 ‘오늘부터 다시 3일 더 가족캠프로 이곳에서 머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예람이 그리고 아내와 나 역시 더 머물고 싶은 것은 똑 같은 마음이었다. 이번에 본국 사역 선교사 디브리핑 캠프(2차)에 참석한 가운데 지난 선교지 현장에서 ‘기쁨’과 ‘슬픔’ 여러 가지 경험한 일들을 뒤돌아보고, ‘쉼’과 ‘회복’과 ‘도전’을 얻는 은혜의 기회가 되었다. 우선 가족과 사역과 현장에 대한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는 ‘돌아봄’의 여유로운 시간이 무척이나 행복하였고, 동시에 PMS 멤버로서 ‘돌봄’을 받는 ‘케어’의 시간이라는 그 자체로 말미암아 행복감이 충만해지는 시간이었다. PMS 선교회 본부에서 제공한 차량을 이용하며 우리 가족은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차장 밖으로 바라다보며 한강 변을 따라서 서울과 양평으로 오가는 길 위에서 이 길이 마치 현장에서 많이 지치고 힘들었던 선교사 가족을 환영하는 ‘대로’라고 생각되었다. 금번 디브리핑 캠프를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고 새롭게 개선해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향후 PMS 선교사 멤버 케어에 있어서 효과적인 접근이 될 것이고, 선교사들의 가장 절실한 정신적, 육체적, 심리적 건강에 대한 점검과 회복의 시간이 될 것이다. ‘디브리핑’은 현지 사역 후, 본국 사역 가운데 자신과 가족과 사역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첫 번째 ‘프로세스’가 될 때에 우리 PMS 멤버들은 새롭게 사역을 준비하고 방향을 설정하는데 유익한 결과를 만나게 될 것이다. 2014년 6월 첫 주에 본국사역 선교사 ‘디브리핑’ 캠프(2차)에 참가하여 선교사 가족의 회복과정 일체를 위한 멤버케어로써 기회를 주신 합신세계선교회 및 이사회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PMS본부와 부요한 사랑의 마음으로 섬겨준 모든 선교사들, MCN 교수들과 PMS본부 스텝과 간사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돌아보니 ‘회복’을 위한 과정이었다. 우리 가족은 최근 몇 년간 우리들의 현지 선교사역을 객관적으로 뒤돌아 볼 수 있었고, 2015년 선교사역 방향을 설정하는 준비를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1054 no image |박윤선의 5분 새벽기도 설교 <32>| 오직 하나님만 나의 반석이심
편집부
2138 2014-06-24
오직 하나님만 나의 반석이심 시편 62편 1-12절 하나님만이 자기의 반석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집니까. 1. 원수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습니다(1-7절) 성도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볼 뿐입니다. 잠잠히 바라본다 함은 변동 없이 힘 있게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사람이 언제나 선한 일을 침묵으로 실행한다는 것은 신념이 강한 태도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침묵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밖에 다른 일들은 무엇이든지 불필요한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를 침묵 정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떠들며 방해하여도 나는 내 할 일만 힘 있게 해 나아가는 태도입니다. 성도는 원수들의 모든 방해 운동 가운데서도 아무런 동요의 태도 없이 일편단심 주님을 신뢰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침묵의 태도를 원수들 앞에서 끝까지 가지셨습니다. 그는 침묵하심으로 장차 무너질 잔인한 교권주의에 대처하셨습니다(마 26:63). 그는 헤롯 앞에서와 빌라도 앞에서도 침묵하신 일이 있습니다(눅 23:9; 요 19:9). 2. 근심된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하고 그에게 의뢰합니다(8-12절) 내가 만주에 있을 때에 계노순 집사와 사귄 일이 있습니다. 그는 믿기 전에 요술쟁이요 아편 중독자였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뒤부터는 기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는 한번 자기 자부의 난치병 때문에 100일 동안 산상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가 기도를 마치고 산에서 돌아오니, 그의 친척들은 그를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100일 기도를 끝낸 뒤에 그가 가정기도회를 인도하는 때에, 그 자부의 병이 완치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걱정을 하나님께 토하는 일은 남들이 미쳤다고 할 만큼 열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근심된 마음을 토할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못되는 까닭입니다(9절). 예레미야 17장 5절에는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포학한 행동이나 재물을 의지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10절). 시편 39편 6절에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그 권능과 인자하심으로 갚아 주시는 까닭입니다(11-12절).
1053 no image |동서울노회 순례길 동행기| 밧모섬에서 드린 예배_이선웅 목사
편집부
2623 2014-06-10
밧모섬에서 드린 예배 < 이선웅 목사, 남문교회 원로 > “아시아 7교회 유적지는 로마 교황과 유럽 영주들의 잇속에 따른 산물” 밧모섬은 사도 요한이 90세가 넘은 고령의 나이에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유배당했던 에게해에 위치하는 작은 섬이다. 소아시아 에베소 인근의 쿠사다시 항에서 배로 4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그리스 영토로 되어있으며 남북의 길이는 16km, 동서의 길이는 90km정도 된다. 사도 요한은 이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계1:9). 이 밧모섬 중앙 높은 언덕에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은 곳으로 전해진 동굴교회가 있다. 초대교회와 바울 사도를 중심한 제1, 2, 3차 세계전도여행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길에 나선 우리 일행은 서울을 출발한 지 이레째 되는 날 밧모섬에서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동서울노회의 배려로 동서울노회가 주관한 5월 25일(주일)-6월 5일(금)에 걸쳐 11박 12일 동안 진행된 이번 순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참여한 인원은 25명이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고 성장하시고 공생애를 보내신 이스라엘을 답사하면서 받게 되는 은혜가 크다. 그런가하면 초대교회와 바울과 바나바와 실라 등이 제1차, 제2차, 제3차 세계전도여행을 했던 그 발자취를 따라 소아시아와 마게도냐를 순례하면서 받는 감회 역시 남다르다. 놀라움과 탄식과 깨달음과 회개와 새로운 열정을 불러일으킴으로 만감이 교차 될 때가 많다. 특히 목회자들에게는 그동안 글로만 대해왔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고 체험함으로써 얻는 유익이 크다. 도전되고 충전도 되고 영이 새로워지고 영적은사가 더 풍성해 지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여기서 얻는 유익이 고스란히 그들이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대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때문에 이러한 순례의 여정은 목회자들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단 이러한 순례일정을 잡기 위해서는 적어도 9일 이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일을 본 교회에서 지킬 수 없다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래도 떠나야 한다. 대신 순례길에서 만나게 되는 주일에는 반드시 현장에서 주일을 지켜야 한다. 이번 순례길에서 우리 일행은 밧모섬에서 주일 예배를 드렸다. 설교는 박병식 목사, 사회는 나종천 목사, 기도는 홍승열 목사, 특송은 사모일동, 축도는 이선웅 목사가 하였다. 평소 교회당에서 드리던 예배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 우리에게 있었다. 예배 외에 이날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이날 밤 우리 일행이 밧모섬을 떠나 마게도냐로 갈 때는 3만 톤급의 큰 배를 탔다. 처음 타보는 큰 배였다. 세월호가 8천 톤 급이었다고 하니까 3만 톤급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갈 것이다. 이 배로 우리는 8시간을 달려 그리스 아테네에서 가까운 피레우스 항구에 도착하였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다시 육로로 아덴, 고린도, 데살로니가, 빌립보 등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 제2차 전도여행 때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바울과 실라가 마게도냐 사람으로부터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9)고 하는 환상을 보고 소아시아의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마게도냐의 네압볼리에 도착하여 곧바로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함으로 유럽 땅에 교회를 세웠다. 우리는 그 역사의 현장들을 역으로 순회하였는데 순례길 내내 하나님의 하신 일과 바울 사도를 비롯한 주의 일꾼들의 활약과 노고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리스 땅에는 그나마 그리스 정교회라는 이름으로 98%의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소아시아라고 불리기도 하는 오늘날의 터키는 달랐다. 터키는 98%가 모슬렘이었다. 매우 가슴이 아팠다. 소아시아에는 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 서머나 교회, 에베소 교회, 두아디라 교회, 버가모 교회, 사데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등 일곱 교회의 유적지가 있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3년 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했던 에베소(행 20:31)를 비롯해 예루살렘 교회 다음으로 두 번째로 교회가 세워졌던 수리아의 안디옥(행 11:20-22)과 바울 사도의 생가가 있는 길리기아 다소(행 22:3)도 돌아볼 수 있었다. 갑바도기아에서는 수많은 동굴 교회 유적지와 초대교회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지하 도시들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그 땅에서 교회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소아시아가 이렇게 된 데에는 십자군 전쟁의 여파 때문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1095년-1456년 사이에 8차례에 걸쳐 이어졌었다. 이 십자군 전쟁의 명분은 예루살렘 탈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명분이었을 뿐이며 로마 교황과 유럽 영주들의 잇속과 이해타산이 엉켜 원래 목적은 뒷전이었고 점령과 약탈과 횡포로 일관하였다. 십자군이 너무 잔인하게 횡포를 부렸기 때문에 결국 그 땅에 살던 사람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기독교를 외면하게 만들었다는 동행 목사님의 지적 앞에 우리는 할 말을 잊었다. 부끄러움과 비통함과 회개로 인해 아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우리는 오늘날의 터키 땅인 소아시아를 돌아보면서 내내 “주여! 이 땅을 고쳐주소서! 무너진 교회들을 다시 세울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하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지방을 순회 한 거리는 육로(버스 편)로 약 2,800Km를 달리고, 그 외 배편과 현지 국내선 항공편과 도보로 약 2,200Km를 달리게 되어서 전체 여정은 대략 5,000Km를 달린 셈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건강한 몸으로 이 순례길을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1052 no image |긴/급/진/단| 동성애 문제를 대처하는 한국 교회의 인식과 태도_민현필 목사
편집부
2648 2014-06-10
동성애 문제를 대처하는 한국 교회의 인식과 태도 < 민현필 목사, 부천중동교회 청년부 담당 > “혹, 동성애자들의 입장이 정치 세력화하여 어떤 입법적 절차를 밟게 된다 하더라도 동성애라는 행위 자체를 태생적으로 혐오하는 사람들이 역차별 받지 아니할 권리와 인권 또한 보장되어야” 지난 6월 7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에서는 동성애자들의 행사인 제15회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가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역대 최대 규모로 열렸다. 퀴어(queer)라는 용어는 원래 ‘이상한’, ‘기묘한’이라는 뜻으로, 동성애자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된 용어였으나, 동성애자들 스스로가 ‘그래 나 이상하다 어쩔래?’ 하는 뉘앙스로 사회적인 통념에 대한 저항적 의미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 차용된 용어이다. 이들 동성애자들이(그들은 ‘성소수자’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퀴어 퍼레이드’를 하는 벌이는 이유는 이렇게 사회적으로 ‘이상한 사람들’ 취급 받는 그들의 스스로의 자긍심을 축하하고, 지지하며, 사회적으로는 자신들이 자유와 평등을 염원하는 건전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임을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다. 그런데 이날 퍼레이드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 단체와 어버이 연합, 일부 시민들이 퍼레이드 진행을 가로막으면서 3시간 넘게 행사가 지연되었다. 퍼레이드를 벌이던 참가자들은 행사를 방해하는 기독교인들을 향해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가스펠을 부르며 동성애 혐오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한 시민은 “나는 어느 쪽도 아니지만, 기독교가 저렇게까지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반대야 할 수 있지만 저렇게 퍼레이드를 막고 난동을 부리는 것은 심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SNS 상에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한 트위터리안은 “퀴어 축제 가서 퀴어가 된다면, 교회 맨날 가는 너네는 왜 예수가 되질 못하니?”라는 조소를 날리기도 했다. 특히 일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강자에겐 관대하고 약자에겐 야멸찬 한국 기독교”, “기독교계가 엉뚱한 곳에 집단행동을 벌이고 있다” 등의 신랄한 비판도 쏟아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주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론과 누리꾼들의 반응들을 종합해 볼 때 동성애를 반대하는 그들의 표현 방식은 국민 대다수의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지혜롭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사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전체적으로는 동성애가 성경적 관점에서 명백한 죄라는 인식 그 이상의 단계, 즉 단순한 정죄의 시선이 아닌 공감적 대화와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대응논리까지는 그 고민이 발전되어 오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들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 와중에 지난 해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차별금지법은 한국 교회의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동성애자들이 각계각층에 진출하며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사회적 인지도를 높여온 것에 비하면 한국 교회의 인식과 대처는 지극히 미미했다. 특히 이번 대회를 통해 보듯이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고품격 문화축제로 포장했지만, 한국 교회는 언론의 눈에 그저 ‘행패’ 혹은 ‘난동’ 수준으로 비춰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옳은 것을 지혜로운 방법으로 표현하지 못하면 자칫 문제를 제기한 교회가 문화적으로 미개한 집단이 되거나 틀린 것이 되고 마는 분위기가 이미 우리 사회에 형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동성애 문제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목회자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기 위한 첫 번째 단초로서 몇 가지 사항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1. 큰 틀에서 볼 때 동성애자들이 인정받기를 요구하는 인권은 옹호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그러한 요구는 당연히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인권의 범주에 동성애라는 행위가 포함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는 동의할 수 없다. 2. 진정한 인권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 문제에 있어서 그 사회에서 관습적으로 용인되어 온 통념과 상식을 명문화한 성문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한, 동성애자들은 민주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힐 수 있지만 그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반대하는 교회의 입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3.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힘들어하는 일부 동성애자들(크리스천들이 다수 포함된)의 고충이 동성애 행위 자체에 대한 기독교의 정죄에 의해 무시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들의 고충이 그 사회 공동체 전체가 함께 나누고 공감되어져야 할 부분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고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4. 그러나 반대로 동성애 행위 자체를 억지 성경 해석으로 합리화하거나, 성경적 의미의 결혼관 자체를 사회학적으로 재정의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특히 이번 퀴어퍼레이드를 준비해 온 조직위원회의 행사 취지가 사랑을 ‘남녀’ 간의 감정으로 정의한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개정에 반대 의사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면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5. 설혹 동성애자들의 인권이 정치적으로 정당화되고, 그 사회적 인지도나 입지가 강화되어 동성애라는 행위 자체를 표현의 자유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보수 기독교 진영을 향해 동성애적 성향 자체까지도 정죄하는 옹졸한 집단쯤으로 매도하거나, 그 비난의 논리로 동성애 행위 자체를 성경적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는 일부 진보적인 크리스천들의 편파적인 이중 잣대는 동의할 수 없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표현 방법이나 대응논리는 구분되어져야 한다. 방법론에 시비를 걸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는 교회의 입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6. 남녀의 결합으로 존속되어 온 가정이나 결혼 문제가 단순한 인권이나 정치적 판단의 대상 너머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성애 문제 또한 단순히 정치적 쟁점화로 해결할 수 없는 좀 더 근원적이고 복잡한 논의가 필요한 사안임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혹, 동성애자들의 입장이 정치 세력화하여 어떤 입법적 절차를 밟게 된다 하더라도 동성애라는 행위 자체를 태생적으로 혐오하는 사람들이 역차별 받지 아니할 권리와 인권 또한 보장되어야 한다. 부족하나마 이상이 필자가 동성애 문제를 고민하면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다. 이러한 사안들을 기초로 동성애 문제를 대처하는 한국 교회의 대응 논리와 표현 방법론이 좀 더 심화되고 성숙되어져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1051 no image |박윤선 5분 새벽기도 설교 <31>| 주께 맡겨버리는 신앙
편집부
2325 2014-06-10
주께 맡겨버리는 신앙 - 시편 37:5-9 - 무슨 일이든지 남에게 맡기지 못하고 맡기더라도 이것저것 간섭하는 사람은 마음이 좁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1. 맡기는 마음은 큰마음입니다(5절) 신앙이란 구원 문제에 있어서 자기의 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힘만 믿는 것이니, 맡기는 성질을 그 본질로 가집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일단 하나님께 맡겼으면 나로서는 간섭하지 말고 일체 순종해야 합니다. 혹시 일이 잘 안 되는 것 같을지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일이 잘못되거나 우리 자신에게 괴로움이나 불행이 올까 두려워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심리는 죄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사상이요, 하나님이 나만 못 하시다는 사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는 도적의 행위입니다. 순종이란 모든 괴로운 조건 앞에서도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난관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난관을 타고 난 자들입니다. 특별히 남들의 짐을 져 주기 위하여 난관을 당할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2. 의를 지켜야 합니다(6절) 주님께 맡겨 버리는 신앙은 방종이 아닙니다. 베드로도 말하기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벧전5:7)고 한 다음에 바로 “근신하라 깨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중 그의 난제를 하나님께 맡겨 버리신다는 의미에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힘써 기도하시면서 피땀을 흘리셨습니다(44절). 그러므로 우리가 알 것은 난제를 주님께 맡겨 버렸다고 하여 의에 힘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보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본문 6절에서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라고 한 것입니다. 3. 참아 기다려야 합니다(7절)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은 단시일 내에 큰 수확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시간 관념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는 방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급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적당한 시간을 경유하여 되어 가는 법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내일 일은 내일 가서 보기로 하고 그날 그날에 충성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고 하셨습니다.
1050 no image |총회군선교회 보고서| 복음 전도의 요지 군선교의 중요성_조영규 목사
편집부
2626 2014-05-27
복음 전도의 요지 군선교의 중요성 < 조영규 목사, 동성교회(춘곡군인교회) > “총회군선교회가 설립된 것은 군선교에 대한 자부심 가지게 해” 2006년 군인교회를 전담하고 있는 전남 강진에 있는 어느 목사와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교제 가운데 군인교회의 어려움을 듣고 후원과 함께 한 달에 한 번 군인교회의 예배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그 목사가 갑자기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어 엉겁결에 대신해서 춘곡군인교회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동성교회와 춘곡군인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군인 형제가 전역하면 마지막 예배시간에 성경과 더불어 전역비로 2만원을 줍니다. 2만원은 먼 거리 가면서 점심 맛있게 먹고 가라고 주는 것이며, 성경은 지역교회로 나갈 때 성경이 없어서 주저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전역 형제가 예배를 마친 후에 간식을 먹으면서 살짝 제게 다가와서 감사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정말 자기가 힘든 부분이 많았는데 예배를 드리면서 힘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전역 후에도 열심히 교회에 다니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 형제는 군대에 오기 전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군대에 와 가지고 예수님을 믿고 열심히 신앙 생활하다가 전역하는 군인 형제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군인 형제는 군대에 오기 전에 예수님을 믿는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어서 교회에 따라 나가다가 군대에 오게 되었습니다. 수송부 보직을 받아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면서 군종으로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는 2013년 2월에 전역하게 되었는데 그후 아르바이트를 한 십일조를 군인교회에 드리고 싶다고 하여 16만원을 보내 왔습니다. 그리고 이 형제는 고등학교만 마치고 2년 늦게 군대에 왔는데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사범대에 가고 싶다고 하여 몇 개월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군선교를 시작할 때에는 군선교에 대한 특별한 지식과 사명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군인교회를 섬기다 보니 힘든 부분보다는 군인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저도 모르게 쏟아 났습니다. 군복만 보아도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군인교회에 관심이 많이 가게 되었고 무얼 해야 하는지, 뭐가 필요한지 조금씩 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군인교회를 섬겨야 하는 중요한 이유와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난 2013년, 군에 온지 5-6개월 되는 형제가 군 교회에 한 번 출석하고 3개월 동안 근무하는 해안소초로 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자살했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동료들과도 잘 지냈다고 하고 간부들에게도 칭찬도 받고 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제 마음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만약에 전담 군선교사가 함께 있었다면 저들의 고민도 아픔도 들어 줄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과 큰 아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반면에 군 생활 가운데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형제의 말을 듣고 부대에 건의 하여 무사히 군 생활을 마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군에는 아직도 젊은 청년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얻게 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전담 군선교사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만약 군부대만을 전담하는 군선교사가 배치되어 있다면, 그래서 군인들의 말과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놀랍고 위대한 일들이 많이 일어 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군선교는 해외 선교보다 더 어렵고 힘이 듭니다. 첫째는 군부대의 특성상 헌금이 없는 자비량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풍부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주신 양들을 먹이는 일에 헌금이 없어서 지장을 받는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둘째는 21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청년이 가장 갈급한 시기가 바로 군인일 때입니다. 이 기간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지만, 가장 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래서 그 열매를 볼 수 없지만 아직 세상에 덜 오염되었을 군 청년시절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고 주님의 허락하신 때에 주님이 허락하신 곳에서 싹이 트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사역에 우리 교단에 총회군선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우리 교단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요 군선교에 대한 부르심이라고 믿습니다. 또 감사한 것은 합신대학원에 군선교 동아리도 결성이 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장차 이 동아리를 통하여 젊고 힘이 있는 젊은 군선교사가 배출되어 젊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날이 올 것임을 확신합니다. 모든 것이 힘든 시기이지만 기도에, 후원에, 그리고 군선교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총회군선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교회와 젊은이들이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1049 no image <2014 총회 교직자 수양회 특강 > 요한계시록과 그리스도의 강림_오광만 목사
편집부
2499 2014-05-27
요한계시록과 그리스도의 강림 (계 12-14장 환상을 중심으로) < 오광만 목사,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 이 원고는 5월 14일 총회 교직자 수양회에서 박혜근 교수가 ‘요한계시록과 그리스도의 강림’라는 제목으로 특강한 원고를 요약 발췌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지문 1> 요한계시록의 “속히”와 “가깝다”는 말은 우선적으로 선지자적 성취의 시작과 그것의 지속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요한계시록의 상당히 많은 부분은 미래 종말(그리스도의 재림)을 목표로 하면서, 현재 종말(그리스도의 초림)과 그 사이에 사는 교회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지문 2>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구약의 약속이 종말론적으로 성취가 되는 때가 이미 임했다. 그러나 종말(의 완성)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강림(coming)은 초림과 재림이라는 두 단계에 걸쳐 발생한다. 그리스도의 강림은 신약시대에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이해하는 열쇠다. 1.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열쇠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 22:6.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위 두 본문은 요한계시록의 서론과 결론에 위치하면서, 요한계시록이 “반드시 속히 일어날(되어질) 일”을 다룬다는 점을 강조하며 요한계시록의 수미상관(inclusio)을 이룬다. 여기서 문제는 “반드시 속히 일어날”의 성격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재림을 겨냥한 것인가? 아니면 초림을? 아니면 초림과 재림을 염두에 둔 것인가? 이 문제 해결의 열쇠는 본문이 다니엘 2:28, 29, 45와 연결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은 “속히”라는 단어를 첨가하여 다니엘서의 “후일(장래)에 될 일”(단 2:28, 29, 45)을 1세기 상황에 맞게 의도적으로 대체한 어구이다. 여기에서 반드시 “속히” 일어난다는 것은 다니엘의 예언이 성취되는 빠르기나, 그것이 미래 언젠가 성취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미 시작한 성취의 결정적이고 임박한 때를 의미한다. 요한은 다니엘서에 예언된 먼 “마지막 때”에 발생할 것을 기대했던 종말론적 환난과 악의 멸망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는 마지막 때와 관련한 계획이 요한 자신의 세대에 성취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사실 이미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했음을 기대한다(이미의 종말론).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속히”와 “가깝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선지자적 성취의 시작과 그것의 지속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지, 절정(아직의 종말론)의 성취가 가깝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의 상당히 많은 부분은 미래 종말(그리스도의 재림)을 목표로 하면서, 현재 종말(그리스도의 초림)과 그 사이에 사는 교회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1:19(“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를 중심으로 과거(1장), 현재(2-3장), 미래(4-22장)로 나눈 전통적인 입장은 설득력이 없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루어진(종말의 첫 번째 단계) 구속 사실과 그 혜택을 받고 사는 교회 이야기와 그리스도의 재림(종말의 두 번째 단계) 때 이루어질 구원과 심판의 완성이 혼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두 강림이 구약 예언의 종말론적 성취와 신약교회의 상황을 이해하는 열쇠이듯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2. 요한계시록 1:9에 나타난 요한계시록의 주제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안에서)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 1:9)라는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를 제시한다. 이와 관련해 요한은 당대 일곱 교회와 함께 동일한 것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내용이 소개된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는 일. 둘째, 예수 안에서 환난에 동참하는 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는 일로 박해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예수 안에서 나라에 동참하는 일. 신약교회는 그리스도 덕택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왔고, 나라와 제사장이 되고, 왕 노릇한다. 넷째, 예수 안에서 참음에 동참하는 일. 갖가지 유혹과 강압과 위협 속에서도 인내의 말씀을 지킨다. 이처럼 교회는 참음(1:9)과 인내(2:2, 19; 3:10; 13:10; 14:12)와 견딤(2:3)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이기는 자(2:7, 11, 17, 26; 3:5, 12, 21)에게 주시는 약속을 일깨움으로써 우상숭배와 영적인 간음에 연루되지 말라는 권함을 받는다. 그리고 마침내 교회는 미래에 승리하고 영광을 얻는다(21:9-11, 26). 3. 교회는 왜 이런 복합적인 상황에 직면하는가? 1) 메시아의 강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에 관한) 계시”이며,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신다(1:1; 22:6). 이것은 다니엘 2:28(“후일에 될 일”), 29(“장래 일”), 45(“장래 일”)의 성취를 직접적으로 염두에 두었다. 장래 일은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다(44절).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구약의 약속이 종말론적으로 성취가 되는 때가 이미 임했다. 그러나 종말(의 완성)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강림(coming)은 초림과 재림이라는 두 단계에 걸쳐 발생한다. 그리스도의 강림은 신약시대에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2) 서론과 결론에 그리스도의 일대기가 요약적으로 그려졌다(1:5-7; 22:6, 7). 요한계시록에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시간 간격이 무척 짧게 묘사되었으며, 그분의 강림으로 발생하는 일이 다각적인 면에서 그려지고 있다. 그리스도가 초림하여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은 자가 생겨났다. 그리고 일곱 교회에 주는 권면은 그리스도의 재림 사실에 맞춰져 있다(2:5, 16; 3:3, 11). 3) 일곱 인 재앙에 나타난 그리스도 강림의 결과(6:1-8:1) 일곱 인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약속을 마지막 때까지 봉함한 것을 의미한다(단 12:4, 9). 이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종말론적인 인물이 오셔야 비로소 역사에서 실현된다. 처음 하늘 환상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인을 뗄 자격이 있는 분이 오셨음을 알리는 것이다(5:5).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분이 일찍 죽임을 당하신 것은 그분이 일곱 인을 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근거가 된다(5:6. 참조. 1:18). 6장은 그리스도께서 일곱 인을 떼기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역사 가운데 마지막 때 재앙이 나타난다. 일곱 인을 떼는 것은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성취된 것이다(5:7, 8). 악인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들의 믿음을 정련하는 데 인 재앙의 주된 목적이 있다. 여기에서 첫째 인부터 다섯째 인은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에 벌어지는 역사적인 상황에 집중한다. 그리스도의 초림은 신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재앙에 연루된 이유를 보여준다(단 12:1).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은 원수를 갚아달라고 기도한다(6:9-11). 반면에 여섯째 인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자들이 주님에 의해 보호를 받고 신원을 받은 상황을 보여준다. 4)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에 나타난 그리스도 강림의 결과(8:2-11:18; 15:1-16:21) 나팔/대접 재앙은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설명한다. 두 시리즈는 전쟁과 불신자들이 받게 되는 심판들을 애굽에 내렸던 재앙을 이용하여 설명한다. 여기에서 나팔 재앙은 인 재앙에서 강조하는 성도들의 기도(6:9-11)의 응답이다(비교. 16:6). 대접 재앙 역시 같은 분위기를 전해준다. 특히, 일곱 째 나팔 후에 세상 나라가 하나님과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는 것(11:15)은 나팔 재앙의 초점 역시 그리스도에게 맞춰졌음을 알려준다. 5) 천년 통치와 마지막 심판에 나타난 그리스도 강림의 결과(19:11-21; 20:1-22:5) 성도들이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에 하나님께 원수를 (최후)심판하지 않으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6:10)라고 부르짖고, 하나님은 “아직 잠시 동안 쉬라”(6:11)고 권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악인들과 원수를 심판하실 때가 여전히 미래에 있음을 알려준다. “어느 때까지?”와 그것이 실현되기까지 “남은 기간”은 다니엘 12:6-7(“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에 의거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이 기간은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곧 마흔두 달 짓밟힘(11:2), 천이백육십 일의 예언(11:3), 천이백육십 일의 광야 예비된 곳에 있음(12:6),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박해와 광야에서 양육 받음(12:14), 마흔두 달 짐승이 신성모독하며 권세를 행사함(13:5) 등이다. 4. 요한계시록의 메시지 1) 그리스도의 초림 그리스도의 초림은 사탄의 시도를 무력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리스도의 초림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그분이 승리하신 사건이다(12:7-12). 그런데 이것은 두 가지 효과를 가져왔다. 첫째,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다(12:10). 신자들도 이 승리에 동참한다(12:11).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라”(1:9)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용이 교회를 박해하고 땅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데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12:13-17; 13:1-18). 용은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알자 그를 대신하여 교회를 공격할 하수인 둘을 불러들인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정치적인 세력(로마 정부)을,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종교적, 경제적인 세력(로마 황제와 주변 나라들의 통치자들)을 가리킨다. 2) 그리스도의 재림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을 구원한다(이마에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 쓴 것이 있음). 그리고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나 손에 표를 받는 자들을 심판한다(짐승의 표). 땅에 있는 사람들, 곧 현재 경제 원리 때문에(13:15-17) 짐승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마지막 경고이다. 이로써 바벨론 편에 있는 사람(“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은 사람”)은 바벨론과 운명을 같이 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이다(13:9-11). 5. 결론 이처럼 최후의 심판이 분명히 있을 것이므로 성도들은 다음과 같은 신앙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 어린양을 따르고 신앙(순결)을 지켜야 한다(14:1-3). 둘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광 돌리고, 경배해야 한다(14:6-7). 셋째, 인내하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켜야 한다(14:12).
1048 no image <2014 총회 교직자 수양회 특강> “영원한 안전”은 무엇을 뜻하는가?_박혜근 목사
편집부
3498 2014-05-27
“영원한 안전”은 무엇을 뜻하는가? < 박혜근 목사, 칼빈대학교 > 이 원고는 5월 13일 총회 교직자 수양회에서 박혜근 교수가 ‘영원한 안전은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제목으로 특강한 원고를 요약 발췌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지문 1> “역사적으로 성도의 견인에 대해서 가르친 최초의 신학자는 히포(Hippo)의 어거스틴(Augustine)이다. 그는 신자의 예정에 대한 확신 안에서 견인의 교리를 구축했는데 그러나 후대에 이르면서 그는 자기의 초기의 사상과 같이 신자가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인정하였다.” <지문 2> “믿음은 결코 하나님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은 전적으로 그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력을 부여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신자의 믿음은 자존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구원을 비롯하여 심지어 믿음 그 자체도 오직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돌린다.” 1. 서론 “성도의 견인”은 잘 알려진 대로 돌트총회(Synod of Dort, 1618년 11월 8일-1619년 5월 9일)에서 채택된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교리보다 교회 일반에 더 많은 오래를 초래한 교리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견인의 교리가 마치 신자의 삶의 내용이나 신앙의 유무를 결코 문제 삼지 않는 구원의 불변성을 가르치는 것으로 오해하는 잘못은 비단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본 이슈와 관련한 신학적 입장은 크게 두 진영으로 나누어진다. 단순화의 위험이 있지만 간략하게 대별하자면, 첫째 구원을 보존하시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은혜로 주어진 구원은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 둘째 구원을 관리할 책임은 신자에게 있으며 참으로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불순종이나 배교로 인해서 상실할 수 있다. 전자는 전통적인 칼빈주의의 입장이며 후자의 대표적인 유형은 알미니우스주의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로서 견인을 받아들이는 칼빈주의의 신학적 전통으로부터 서로 정반대되는 두 가지의 견해가 갈라져 나왔다. 하나는 “주권구원”(Lordship Salvation)이며 다른 하나는 무상은혜의 교리가 그것이다. 이 둘은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대척점에 서 있고 둘 사이의 논쟁을 통해서 견인의 교리는 최근까지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2. 교리의 개요 개혁파의 전통에서 “성도의 견인”(perseverantia sanctorum, 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한 참된 신자는 모든 시험과 유혹 그리고 시련을 거치면서도 반드시 그 믿음을 지키고 마침내 하늘의 영광에 도달하게 될 것을 가르친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한 하늘의 기업을 간직하시는 것만큼이나 성도들을 이 땅에서 순례의 길을 성공적으로 마치도록 지키시고(벧전 1:4), 그리스도는 마지막 날에 참된 신자들을 다시 살리실 것을 보증하신다(요 10:28-30, cf. 6:39, 40). 반면에 성경은 여러 곳에서 신자가 믿음에서 떨어져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지 못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다(히 3:21; 6:1-9; 10:1, 2; 벧후 2:20). 하지만 이런 구절들에 대한 칼빈주의적 해석은 그것이 이름만 신자들인 자들에게 주어진 경고이거나 혹은 논적을 상대할(ad hominem) 목적으로 이루어진 순수한 가정적 논조이거나 또는 기독교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확신을 고취하기 위해 거룩하게 살 것을 권하는 말씀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자들이 받게 될 영광스러운 상을 잃을 가능성을 경고하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이들 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하든 배교의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참된 신자들, 창세전에 선택되고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되고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중생하고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 그 핵심이다. 역사적으로 성도의 견인에 대해서 가르친 최초의 신학자는 히포(Hippo)의 어거스틴(Augustine)이다. 그는 신자의 예정에 대한 확신 안에서 견인의 교리를 구축했는데 그러나 후대에 이르면서 그는 자기의 초기의 사상과 같이 신자가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인정하였다. 만일에 신자가 은혜에서 떨어지게 되는 경우 그런 자들을 다시 은혜로 회복케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성찬 예식에 부여하였고 이로 인해 종교개혁 전까지 성찬에 막강한 권능을 부여하는 전통이 형성되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루터(M. Luther)는 은혜와 율법 사이의 긴장관계에 대한 그의 확고한 입장 때문에 견인에 대해서 매우 어정쩡한 입장을 취했던 반면에 칼빈(J. Calvin)은 어거스틴의 견인의 교리를 수용하여 구원의 최종적인 영광에 이르게 될 때까지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단계를 훑어가며 그것을 더욱 명료하고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성경이 견인의 은혜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불완전성으로부터 눈을 돌려 모든 은혜의 하나님의 완전한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으로 눈을 돌리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과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죄와의 싸움에서 능히 이기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구원은 전적으로 어떤 시험과 고난에도 참고 견디는 믿음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칼빈은 우리의 믿음이 때로는 껌벅거리는 촛불과 같고 아예 꺼져버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다시 살아나고 결코 꺼트릴 수 없는 불꽃으로 끝 날까지 견디게 될 것을 가르쳤다. 3. 전통적 칼빈주의 견해 “성도의 견인”(perseverantia sanctorum, perseverance of the saints)은 요한 칼빈(J. Calvin)이 1536년에 발행한
1047 no image |총회군선교회 보고서| 군선교를 통해 누리는 하나님 은혜_오성민 목사
편집부
2453 2014-05-13
군선교를 통해 누리는 하나님 은혜 < 오성민 목사 · 삼척교동교회 > “군대에서 겪는 일들, 때론 전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 교회 근처에 사단 본부가 있어 군목에게 군 사역에 동참하겠다고 자원한 후 주변의 조그마한 소초를 인도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저희가 있는 곳은 수개월마다 경계병이 교체되는 곳이어서 주로 로마서를 중심으로 성경공부형식으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때로는 서너 명이 예배드릴 때도 있었으나 3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많은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명색이 군종이라고 세워놓은 한 형제와만 몇 주 째 예배를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도 믿음이 적어 예배를 그만 두고 싶다고 하던 어느 날, 평상시와 달리 정복차림의 단정한 자세로 예배에 참석하여 자기가 겪은 일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주간에 야간 경계근무를 나가다 넘어졌는데 몸에 지니고 다니던 수류탄이 옆에 굴러 떨어졌다고 합니다. 만일 안전핀이 나무에 걸려 빠졌더라면 큰 대형사고가 날 수도 있었습니다. 순간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주신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며 그 뒤로는 예배를 잘 참석하다가 후에 전역하였습니다. 아무리 권해도 잘 듣지 않던 사람이 한 순간에 달라지는 것을 보며, 또 한편으로 군 사역에 사방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을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던 어느 사병이 휴가를 다녀온 뒤로 안 나온 일도 있었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던 중 어느 날 강릉의 군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말을 듣고 심방을 가보니 자기 입으로 퇴원하면 예배에 잘 참석하겠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몸이 아파 부대에서 링거를 맞으며 치료받던 중 밤중에 뒤척이며 바늘이 빠진 것도 모르고 자다가 문득 깨어 간호사를 찾았더니 온통 피 범벅이 된 자기 모습을 보며 깜짝 놀라더라는 것입니다. 만약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생명이 위험할 뻔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깨워 살려주신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때로는 불신앙의 장교들로 인해 예배드리기에 어려움이 있어 믿음의 사람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하였더니, 이번에는 기독인 소초장이 와서 신병들을 의무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도록 권면하여 20여 명씩 예배를 드린 일도 있었습니다. 믿음이 적은사람이나 심지어 교회를 안 다닌 청년들도 예배를 통해 믿음이 자라는 것을 보며, 비록 적은 수라도 하나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과거에는 자살 소동도 있었으나 예배를 드리게 된 이후, 다른 부대에 비해 사고나 시험이 없도록 지켜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군 사역은 그 대상이 계속 교체가 되기에 한편으로는 아쉽지만, 그러나 그들이 제대 후 계속 교회들을 섬기는 것으로 감사하며, 한편으로는 젊은이들 전도가 쉽지 않으나, 군대는 인원이 교체되어 말씀을 증거할 대상이 계속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또한 천주교나 혹은 잘 못된 믿음을 가진 청년들에게도 바른 복음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명목 하에 이단과, 심지어 절에서 조차 군종의 이름으로 부대에 들어오고 있는 때에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과 단체생활에서 겪는 갈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인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지만 아직 인도자가 없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곳들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이 일에 더 많은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1046 no image |박윤선 5분 새벽기도 설교 <30>| 하나님만 의지하라
편집부
2282 2014-05-13
하나님만 의지하라 시편 20편 7절 사람들은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 곧 티끌과 같은 인생들을 의지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것은 어두운 인간들의 헛된 일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반석과 같으니 하나님만 믿읍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견고하여 언제나 요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부딪치는 이 세상의 사상마다 스스로 부서질 뿐입니다. 발뒤꿈치로 송곳을 차면 어떻게 되며, 계란으로 바위를 때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진화론자들이 성경 진리에 부딪쳐 보았으나, 결국은 창세기 1장에 있는 “종류대로”란 말씀을 더욱 옳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종류대로”란 말씀이 창세기 1장에 열 번이나 나옵니다. 진화론자 찰스 다윈도 자연계를 보고, 그것이 맹목적 세력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그레이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 말하기를 “나는 이 훌륭한 우주, 특히 인간의 성품을 볼 때에 그것이 맹목적 세력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는 “나는 이 세계가 우연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진화론의 자살인 것입니다. 2. 죄를 벌하시고 의를 높여 주시는 하나님만 믿읍시다 시편 127편 1절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한 나라는 모두 멸망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하나님께서 그 장래에 대하여 정하신대로 되고야 맙니다. 애굽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겔29:14, 15) 약한 나라로 남았으니, 곧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사라센, 터키의 속국이 되었다가 지금은 약소국으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은 아주 망하리라고 하셨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 그 곳에 거주할 자가 없겠고 거처할 사람이 대대에 없을 것이며 아라비아 사람도 거기에 장막을 치지 아니하며 목자들도 그 곳에 그들의 양 떼를 쉬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사 13:19, 20)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대로 되었습니다. 영웅 나폴레옹도 세인트헬레나 섬에 귀양살이 하면서 벨트란드 장군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나는 사람들을 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은 나를 놀라게 한다. 그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에게 가까이 갈수록 그의 모든 것이 나의 위에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사 2:22).
1045 <박영선 목사 북 콘서트 참관기> 참관기 시간의 장벽을 꿰뚫는 설교자_노승수 목사 파일
편집부
3269 2014-04-29
참관기 시간의 장벽을 꿰뚫는 설교자 < 노승수 목사, 인천노회 >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거스른 시대의 설교자” 지난 22일 저녁 7시부터 잠실에 있는 남포교회에서 박영선 목사님의 북 콘서트가 있었다. 한 달 전부터 공지가 있어서 기대를 가지고 참석을 했다. 조금 일찍 몇몇 지인들과 남포교회당에 들어섰다. 남포교회 교우들이 준비해준 따뜻한 차와 간식을 들고 들어선 예배당은 들어설 때만해도 한산했지만 금새 사람들로 가득 찼다. 박영선과 그의 설교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몇몇 아는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눈인사로 가볍게 스치기도 하면서 그렇게 북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먼저 1부는 조주석 목사의 박영선 목사의 설교와 그 설교 세계에 대한 논평이 있었고, 2부는 덕은침례교회 김관성 목사가 질의하고 박영선 목사가 대답하는 대담으로 꾸며졌다. 3부는 박영선 목사의 간단한 강의와 청중들에게서 나온 질문들에 박영선 목사가 대답하시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북 콘서트는 지루할 틈이 없이 진행이 되었다. 김관성 목사의 재치 넘치는 질문과 박영선 목사의 간간히 섞여 나오는 유머는 현장의 긴장을 풀어주었고 적절한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면서 그렇게 뜨거워져 갔다. 그렇게 청중과 만나고 있는 박영선 목사는 어떤 사람일까? 그의 30년 설교 사역은 무엇으로 요약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쏟아졌다. 꽤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통상 한 설교자의 설교를 들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북 콘서트는 그의 지난 모든 설교와 설교에서 그가 가졌던 중심 메시지와 설교자의 일생을 통해 변해온 여러 강조점들을 설교자 자신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것, 또 그를 따르고 싶어 하는 여러 후배 설교자의 시선을 통해서 보는 것, 늘 그의 설교를 들어온 청중의 입장에서 설교자 박영선을 보는 것이 함께 어울려 마치 정말 콘서트 장에 온 것처럼 각기 다른 악기들의 하모니를 이루듯이 입체적으로 그의 설교 세계와 사상을 엿보게 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북 콘서트는 처음이었다. 그냥 출판 기념회 정도로 할 것이지 어울리지 않게 콘서트는 가져다 붙일까 하는 의구심을 평소에 늘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와서 보니 북 콘서트란 정말 훌륭한 작명이었다. 한 사람의 저술 세계와 그의 사상 그리고 논평을 통해서 얻게 되는 유익, 각기 다른 청중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어울려 정말 그야말로 콘서트였다. 마치 공연을 감사하고 나와서 느끼는 정서적 포만감 같은 것이 박영선의 북 콘서트에 있었다.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설교자 박영선에 대한 느낌은 그는 영혼이 자유로운 설교자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평소에 말이나 글이 그가 가진 지식의 반영이라기보다 그의 영혼이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대한 반영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한 믿음에 대한 보답이라고 할까? 박영선은 개념에 갇히지 않고 우리가 믿는 진리를 이야기로 풀어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설교에는 깊은 하나님에 대한 성찰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빚어지는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배려도 있다. 그를 설교 시간에 간혹 나오는 욕 때문에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의 설교에는 따뜻함이 있다. 김관성 목사가 짓궂은 질문을 하나 했다.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설교자인 나는 설교자 박영선을 넘을 수 있는가?’ 좀 당돌해보이기도 하고 건방져 보이기도 하는 질문에 박 목사는 ‘여러분의 특권은 나보다 늦게 태어난 것이다. 당연히 넘어야 하고 넘을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정말 시간의 장벽을 꿰뚫는 답변이었다. 그의 자유로움은 그의 설교 곳곳에 넘쳐난다. 그리고 그의 자유로움은 그의 치열한 싸움에서부터 비롯된 거 같다. 세상을 거스르는 그의 치열한 싸움이 그 영혼을 자유롭게 한 거 같다. 율법주의와 명분이 좌우하던 시대를 향해 그 체제 속에 순응하거나 녹아드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거스른 시대의 설교자다. 어떤 분들은 그의 설교의 한계들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누구나 시대 속에서 자신 속한 공간 속에서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설교자 박영선은 자신이 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체화되고 체득되어 오늘 이 시대에 청중에게 전해졌다. 그가 이 시대 설교 아이콘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아가 그의 설교는 청중을 하나님 앞에 무리로서 서게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 서게 한다. 각자의 길을 가게 한다. 나는 사실 이점이 가장 박영선 목사에게서 매력적인 부분이었다. 그의 자유로움, 싸움은 이 지점에 다 녹아 있다. 그래서 배려할 수 있다. 왜? 각자에게는 자기 길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북 콘서트는 나 자신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시대를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설교가가 많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면서 돌아오는 길은 왠지 모를 여운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나는 과연 그만큼 치열했는가? 그 치열함이 빗어낸 자유와 배려가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 아쉬움에 담겨 쉽게 잠들지 못하고 힘든 밤을 보내야 했다.
1044 no image |<도르트 회의와 한국교회> 학술발표 참관기| 공교회의 신앙고백과 한국교회 신학의 현주소_신재원 집사
편집부
2693 2014-04-15
공교회의 신앙고백과 한국교회 신학의 현주소 < 신재원 집사, 대덕한빛교회, 대덕연구단지 연구원 >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 계승해 공교회의 신앙고백부터 회복해야” 지난 3월 29일, 온누리교회 양재예배당에서 한국장로교신학회 학술발표가 열렸다. 궂은 날씨에도 지방에서 먼 길을 나서 가벼운 마음으로 기꺼이 학술대회를 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학술발표가 그만큼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도르트 회의와 한국 교회’라는 아주 시의적절한 주제에 더하여, 이 분야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한다 할 수 있는 다섯 명의 교수들이 발제를 맡았다. 학술발표의 주제도 주제였지만 발제자의 면면을 보면 아무 때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발표회가 아니었다. 1. ‘도르트 신조’ 다룬 독보적인 학술대회 첫 발제를 맡은 김요섭 교수(총신대)는 ‘공동의 신앙고백 위에서의 교회의 일치:도르트 회의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그는 도르트회의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17세기 초 네델란드의 독특한 정치적·종교적 상황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공유할 수 있는 도르트 회의의 보편적인 가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콘텍스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발제에서 이남규 교수(성경신대원)는 도르트 총회에 참석했던 ‘국외 총대들’의 평가문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분석한 ‘예정인가, 후정인가? 항론파 제1항에 대한 도르트 회의 총대들의 논의와 결정’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논문에서, ‘총대들은 인간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궁극적인 원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강조하여 선택은 후정이 아니라 예정임을 분명히 했으며, 나아가 그들은 예정론의 유익을 알았기에 예정을 가르치는 방식까지도 생각했다’고 평가했다. 세 번째 발제에서 김은수 교수(평택대)는 ‘도르트 신조의 속죄론 이해: 형벌대속적 제한속죄’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속죄론을 다루면서 도르트 신조에 한정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논의까지 폭넓게 다루되, 일목요연하게 속죄론을 구분하여 정리함으로써, 개혁파가 고백해야 할 속죄론은 그 성격에 있어서 ‘형벌대속적’이요, 그 범위에 있어서는 ‘제한적’임을 분명히 했다. 네 번째 발제자로 나선 김병훈 교수(합신대원)는 “도르트 신조가 고백하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다루었다. 그는 먼저 성도의 견인 교리에 따른 성도의 범위를 분명히 한 후에, 도르트 신조에서는, 항론파의 주장과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성도를 ‘완전하게(totaliter)’ 그리고 ‘최종적으로(finaliter)’ 견인케 하심을 분명히 한다고 설명했다. 더 나아가 성도의 견인교리에 대한 다른 개혁파 신앙고백서가 말하는 바를 살펴봄과 동시에 루터파와의 차이를 통해 도르트 신조가 말하는 성도의 견인교리에 대한 이해를 깊게 했다. 마지막 발제는 ‘도르트 신조의 유기론’이란 제목으로 한병수 교수(합신대원)가 맡았다. 그는 어거스틴이 유기를 설명했던 방식인 결함적 원인(내버려두심 혹은 은혜를 제공하지 않는 것)의 개념이 내용적으로 도르트 신조에도 녹아 있음을 주장하며, 결론적으로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이 무자비해 보이고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 외엔 어떠한 것에서도 발견하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판단중지’ 반응을 요구한다며 논문을 마무리 지었다. 2. 여전히 갈 길이 먼 개혁주의 학술대회 발제를 맡은 교수들 대부분은 일차자료에 근거하여 도르트 신조의 가르침을 실감 나게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관련 교리에 대한 개혁파적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보다 폭넓고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또한 논문을 발표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일반 목회자나 목회자 후보생 및 신학 비전공자인 일반 성도에 대한 배려가 엿보였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가 듣고 이해하기에도 그리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그들의 설명은 친절했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발제를 맡으신 모든 교수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준비하신 모든 내용을 다루기에는 발제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물론 짧은 시간에 보다 많은 교수님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들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발제자들은 대체로 시간에 쫓겨서 중요한 신학적 내용을 너무나도 축약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을 남겼다. 공교회의 위대한 유산인 도르트 신조가 요약하는 이른바 ‘TULIP 교리’는, 한마디로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성경적·정통적 가르침이다. 물론 개혁주의는 TULIP으로 한정될 수 없으며 보다 풍성함을 가지겠지만, TULIP이야말로 개혁주의 구원론의 기초요, 시작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자. 개회식에서 이승구 교수도 언급했다시피, 이번처럼 도르트 신조에 초점을 맞춘 학술회가 열린 것은 한국교회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도르트 신조에 대한 대중적인 책도 이제 겨우 두 권이 출간되었을 뿐이다(『도르트 신조 강해』<크르넬리스 닐 프롱크, 그 책의 사람들, 2012>, 『도르트 신조』<최찬영, 예영커뮤니케이션, 2013>).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국교회에서 개혁주의나 개혁신앙이라는 말은 사실 내실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작금의 한국 교회는 TULIP의 가르침을 견지하고 전파하기는커녕, 여전히 항론파가 주장했던 잘못된 교리가 만연하다. 이 같은 현실을 인지한다면, 이번 학술발표와 같이 TULIP의 신학이 바르게 선포되는 기회가 더 많아야 할 것이다. TULIP이라는 용어에서 나올 수 있는 오해들을 논의하는 신학적 논의라든지, 타 신학과의 대화를 위한 논의 등을 할 때가 아니다. ‘개혁주의’가 성경적 참된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TULIP을, 그리고 더욱 TULIP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타 교파에 대한 배타심의 표현이 아니다. 우리가, 바로 우리가 문제의 발단이며 우리 안의 죄가 빌미를 제공하기에, 더욱 철저하게 자기 자신은 뒤로 미루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향해 시야를 좁혀가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와 같은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학술 발표회가 더욱 많아지길 소망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TULIP과 개혁신앙의 강조는 아직도 너무 부족하며, 여전히 너무 멀리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마치는 말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성경에 가장 충실하여 하나님의 영광만을 높이려했던 종교개혁 선진들의 가르침 위에 교회 공동체가 바로 서서 공동의 신앙고백을 함께하고, 다시금 신앙고백으로 하나됨을 확인하는 놀라운 일이 이 땅에 속히 회복되기를 바란다. 거룩하고 구별된 주님의 교회를 하나로 세우려는 옛 시대 선진들의 먼저 된 노력이, 오늘날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할 때에, 오늘날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 교회가 나아갈 진정한 방향이 설정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귀한 자리를 열심히 준비하여 신학자와 목회자들만의 장이 아닌 필자와 같은 일반 성도들도 함께 하는 장으로 이번 학술발표회를 개최한 한국장로교신학회에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1043 no image |개|혁|주|의|신|앙|강|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한 이해_한병수 박사
편집부
2810 2014-04-15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한 이해 < 한병수 박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강사, 개혁주의신학연구소 소장 > “진실로 예배의 본질과 내용과 방식은 예배의 대상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배는 기독교의 꽃이며 성경의 주제이며 삶의 정수이며 인생의 절정이며 영혼의 잔치이며 최고의 사건이며 복 중의 복입니다. 예배에 관하여 이것보다 명료하고 강력한 선언은 없을 것입니다. 1.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관건은 무엇보다 누구에게 예배를 드릴 것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예배의 본질과 내용과 방식은 예배의 대상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습니다. 온 세상에 인간의 종교성이 발휘된 온갖 종류의 예배를 일별해 보십시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 근거하여 우상숭배 가능성 측면에서 본다면 숭배의 대상이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물속에 있는 것들일 수 있겠고 거기에 그것들을 숭배하는 주체의 다양성을 더한다면 예배의 종류는 천문학적 수치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며 예배의 대상을 하나님 한 분으로만 제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할 때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속성은 하나님이 육체가 아니라 영이라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는 요구되는 예배의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빈곤하면 비록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한다 할지라도 “알려지지 않은 신”(Ἀγνώστῳ θεῷ)에게 경배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경배의 진정한 개념도 애매해질 것이고 예배의 합당한 방법에도 무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 경배하는 아테네 지성들의 빈곤한 신개념과 재단을 쌓고 사당을 세우는 그들의 인위적인 방식에 엄중한 일침을 가합니다. 그리고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의 손으로 지어지거나, 영원 전에 계시지 않으셨거나,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 이유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2.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아테네 이방인의 무지와는 달리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에 대한 오해가 있었는데 예배의 유일한 처소가 예루살렘 지역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백 투 더 예루살렘” 운동도 어떤 특정한 지역에 과도한 종교성을 부여한 지역주의 맹신의 희생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유대인의 '지역주의' 오해를 듣고 예루살렘 지역을 예배의 처소로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답변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는 “여기서도 말고 저기서도 말고” 즉 물리적인 장소에 매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루살렘 같은 특정한 장소에 특별하고 신비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도 계시며 누구와도 만나시며 언제든지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순서가 구비되지 않으면 예배가 불가능한 것처럼 어떤 인위적인 조건에 의존하는 분이 아니시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분입니다. 이러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지구상의 어떤 지점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진리 안에서만 구현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영적인 예배와 올바른 예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혼 차원에서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영혼은 어떤 식으로도 꾸며지지 않는 곳입니다. 예배의 무늬만 갖추는 가식이나 연출이 불가능한 곳입니다. 우리의 타락과 비참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자로 발견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영혼의 추한 실상을 생각하면 우리에겐 도무지 예배자의 자격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절망의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삼으시고 영원토록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가 계십니다. 거룩한 영이신 성령의 내주 때문에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습니다.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가슴에서 터지는 감격과 눈물을 쏟아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히는 크고 무한한 은혜가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만 강조하는 분들은 대체로 어떤 신비로운 황홀경을 예배의 지고한 경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정지된 고요한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엘리야가 보여준 주님과의 신비로운 조우와 연합의 사례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이시라 할지라도 영혼의 신령한 상태만이 예배의 전부가 아님을 예수님은 “진리 안에서”란 문구를 추가하며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영혼과만 결부되지 않고 삶을 의미하는 우리의 몸과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이며 그 말씀이 육체로 오신 예수시며 성경 전체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란 방식은 결코 예사롭지 않으며 성경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배가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이면서 동시에 성경 전체와 관계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아가 성경은 그 전체가 우리의 신앙과 인격과 삶의 규범이기 때문에 우리의 전인격과 전생애가 예배와 결부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3. 신자의 삶 또한 예배에 속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다”는 바울의 권고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비해서 볼 때 자칫 바울이 예수님의 예배관에 무례한 대립각을 세우는 것 아니냐는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몸과 영을 서로 대립적인 쌍극으로 이해한 이원론적 사유에의 무의식적 적응이 빚은 선입견일 뿐입니다. 영혼과 몸을 과도하게 분할하지 마십시오. 영과 몸은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서로 조화하고 상응하여 한 인격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예배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배제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몸이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지는 것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와 무관한 다른 예배가 아니라 "영적 예배"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몸의 배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몸은 삶을 의미하고 바른 삶은 진리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이 12장에서 밝힌 몸의 산제사를 가능하게 하는 성경 전체의 영적인 구속사적 가르침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말씀은 영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몸과 영에 모두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은 삶입니다. 몸이 없으면 삶도 없습니다. 몸이 거하는 모든 곳에서는 어디서든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루살렘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배에 대해 원천봉쇄 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온 세상에 흩어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과 진리 안에서만 경배를 받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거하시지 않고 진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거룩한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믿고 알고 몸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만이 진정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이처럼 최고로 복된 삶입니다. 삶이 예배이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살았어도 죽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 전체가 거룩하고 영적인 예배라는 바울의 권고를 빌미로 삼아 모이기를 힘쓰고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하는 기독교의 장구한 전통을 무시하고 소멸하는 것은 주님의 다른 말씀을 핑계로 자신의 기호를 슬그머니 표출하는 야비한 극단인 것 같습니다. 마치는 말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은 성경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이나 다른 날들에 드려지는 구별된 예배를 통해 우리는 영과 진리 안에서 몸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의 본질과 범례를 배우고 익히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삶의 모든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영적 예배로 드려지고 있는지도 점검할 수 있습니다. 하나를 취하면 다른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아무데나 아무 때나 적용하는 고질적인 악습은 이제 기독교에 발을 디디지도 못하도록 조속히 근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순처럼 보인다고 버리면 기독교의 진리는 남아나는 게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않으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의미도 모르고 어떠한 삶이 바른 것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예배하고 진리를 깨닫고 딱 그만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영이신 분이심을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예배를 드리고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1042 no image |박윤선 5분 새벽기도 설교 <29>| 하나님을 사모하자
편집부
2535 2014-03-25
하나님을 사모하자 시편42편 1-5절 “하나님만이 구원, 영생, 소망 되셔” 이사야 55장 1절에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목마른 자처럼 그를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1. 영혼이 주님을 찾음 신자들 중에는 생명 없는 종교 의식을 갖춘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한 줄 아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원하십니다. 본문 말씀에서도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영혼이 육신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보다 영혼을 상대로 일하십니다. 그가 우리를 살리실 때도 우리의 영혼을 먼저 살리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롬 8:10)고 하였습니다. 2. 영혼이 주님을 찾는 모습 본문 1절에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영혼이 주님을 찾는 열성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슴은 새끼 낳을 때가 되면 사람이 알 수 없는 깊은 곳에 들어가 숨습니다. 갓 태어난 새끼도 태어난 지 한 시간만 지나면 숨을 줄 안다고 합니다. 이런 사슴이 목이 말라 시냇가에 머물러 있으면 사람을 보고도 얼른 피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사슴은 시냇물을 사모합니다. 인생은 사실상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생의 구원이시며, 영생이시며, 소망이시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모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벧전 2:1-3). 하나님 말씀의 맛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맛이라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칼빈은 임종시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는 말씀을 거듭거듭 읽으면서 별세하였습니다. 존 낙스는 임종시에 칼빈의 설교를 읽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 맛을 사모하는 심리입니다. 욥은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욥23:12)라고 고백합니다.
1041 no image 16세기 후반 ‘속죄의 범위’논쟁 소고_이남규 목사
편집부
5907 2014-03-25
16세기 후반 ‘속죄의 범위’논쟁 소고 < 이남규 목사, 서울성경신학대학원 교수 > 서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대하여 성경은 그 표현에 있어서 보편적일 때가 있고 제한적일 때가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며(요 3:16)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딤전 2:4).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며(고후 5:15)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시다(요일 2:1-2). 그러나 한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으며(롬 8:31-32),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며(마 1:21), 한 무리의 양의 목자이며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며(요 10:15-16),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주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요 17:9). 이 성경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가 있었다. 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보편성 또는 일반성을 말해야 했으며, 동시에 특별성 또는 제한성을 말해야 했다.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계시인 성경 전체에 맞게 말해야 했다. 여기에서 속죄의 범위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다. 이와 관련해 개혁신학의 관점에 대해 야콥 안드레애(Jacob Andreae, 1528-1590)가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후 사무엘 후버(Samuel Huber, 1547-1624)가 개혁신학자들을 비판하는 격렬한 논제들을 출판하면서 수년간 논의되면서 많은 자료들을 남기게 되었다. 특히 사무엘 후버가 이 주제와 다툰 주요 신학자들은 하이델베르크의 신학자들인 다니엘 토사누스(Daniel Tossanus, 1541-1602)와 야콥 키메돈키우스(Jacob, Kimedoncius, 1550-1596)였다. 1. 종교개혁 전 속죄의 범위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 교회는 처음에 속죄의 보편성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가 속죄의 제한적 의미를 정죄했다는 말은 아니었다. 교회는 아직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구분의 필요성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삼위일체와 기독론이 그러하듯 이단과 오류의 등장과 함께 교회는 말씀을 묵상하고 정당한 내용을 정리했다. 따라서 오리겐이 타락한 천사들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피조물이 구속되었다고 말했을 때, 교회는 그런 보편적 구속사상을 거부했다. 아직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을 때 보편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특수성을 말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진다는 것을 암브로시스가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진술했다. “그리스도가 모두를 위해서 고난당하셨을지라도 특별히 우리를 위해서 고난당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를 위해 고난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펠라기우스주의와 반펠라기우스주의가 교회에 나타나자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더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 싸우며 하나님의 예정과 은혜가 보편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한 사람도 제외하지 않는 모든 각 사람을 위한 구원을 부정했다. 어거스틴은 디모데전서 2장 4절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모든 계층으로 대표되는 인류 전체라고 생각했다. 즉 왕과 백성, 귀족과 평민, 고귀한 자와 비천한 자,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 강한 자와 약한 자, 남자와 여자, 어린이와 노인, 모든 어족, 모든 직업 등과 같은 다양성으로 생각했다. 이런 보편성의 해석에 따라 요한일서 2장 2절의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에서 ‘온 세상’을 모든 나라에 있는 교회로 보았다. 즉 우리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퍼진 교회를 가리킨다. 그런데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 즉 하나님의 의도가 보편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도도 보편이 아니어야 하는 일관성이 어거스틴에게 있었다. 그는 성경의 보편적 표현에 대한 해석을 각 구절의 문맥에 따라 인류 전체를 의미하는 다양성의 보편성과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보편으로 보았다. 이렇게 해서 어거스틴은 속죄의 특수성을 분명하게 가르쳤던 첫 번째 학자로 언급된다. 어거스틴 사후에 반펠라기우스주의가 목소리를 높이자 어거스틴을 옹호하고 나선 이가 프로스퍼였다. 프로스퍼는 보편성에 대하여서는 인류를 대표하는 대표성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치 그 자체로 해석한다. 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유익이 누구에게 실제적인 유익이 있는가와 관련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목적을 신자들 곧 택함받은 자들에게 연결시킨다. 이로써 프로스퍼는 초기에 그리스도의 의도라는 관점을 보여준 가장 명백한 주창자로 불린다. 그 후 롬바르두스에 이르면 ‘충분’과 ‘효과’라는 중요한 구분이 생긴다. 그는 그전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피의 가치가 온 세상을 위할지라도 교회를 위하여 고난받으셨다는 내용을 가치의 충분과 가치의 효과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진술했다. 이후 신학에서는 ‘충분’과 ‘효과’는 중요한 개념이 되어서 아퀴나스도 그리스도의 고난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할지라도 믿음과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연결된 자들 밖에는 그 효과를 갖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보편성과 특정성에 대한 ‘충분과 효과’라는 분명한 구분이 롬바르두스에게서 시작되면서 이후 이 구분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이해하는 고전적 개념으로 자리 잡았고 개혁신학자들에게 하나의 중요한 표준으로 자주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2. 하이델베르크신학자들의 속죄 논쟁의 역사적 배경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칼빈은 그의 예정교리에서 보듯이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 의도된 구원이 성경적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속죄에 대한 범위도 제한적으로 본다. 특히 요한일서 2장 2절의 화목제물이 우리 뿐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다는 구절에 대한 해석에서 칼빈의 이런 생각이 잘 나타난다. 이 주석에 따르면 칼빈은 유기자들에게까지 속죄를 확대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거절하면서 속죄의 특정성을 강조한다. 이런 방식의 해석은 디모데전서 2장 4절의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얻기를 원하신다’는 구절에도 적용된다. 칼빈에 의하면 이 구절의 문맥에서 사도가 가르치려는 것은 세상에서 구원에서 제외되는 어떤 민족이나 계층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복음이 예외 없이 모두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칼빈은 ‘충분과 효과’의 구분을 말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구절의 해석에 들어가서 (적어도 요일 2:2에서) 이런 구분이 적용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칼빈에게 ‘세상’이나 ‘모든’이라는 단어는 온 세상에 보편적으로 흩어져서 믿을 자들을 말한다. 이와 관련해 칼빈의 뒤를 이은 신학자는 베자였다. 베자는 1586년에 안드레애를 대표로하는 루터주의자들과 몽벨리아르(Montbéliard, Mömpelgard)에서 만나 토론을 했다. 개혁파를 대표해서 제네바와 베른의 신학자들로 구성된 총대(이들 중에 베자와 아브라함 무스쿨루스<Abraham Musculus> 등)가 파송되었고, 루터파를 대표해서는 야콥 안드레애(Jacob Andreä)와 루카스 오시안더(Lucac Osiander) 등이 파송되었다. 이 토론은 1586년 3월 21일에서 29일까지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다룬 주제는 성만찬에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위격과 양성 문제, 세례, 성상의 문제, 예정의 문제까지 다양했다. 예정을 다루면서 그리스도의 속죄 범위 문제도 다루어졌다. 3월 29일 예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때 안드레애와 뷔르템베르크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이 사람들의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선택하고 유기했다는 절대적 예정을 거절했다. 특히 안드레애가 하나님의 결정 때문에 영원한 저주에 처해진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베자는 하나님의 자비가 결정되었듯이 하나님의 진노도 결정되는 것이라고 로마서 9장을 근거로 대답했다. 다만 그들이 정죄되는 근거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돌려져야 한다고 답했다. 이 예정에 대한 논의는 그리스도의 속죄 범위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유기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안드레애의 질문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속죄 범위 문제로 주제가 넘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성경에 있는 구원에 대한 보편적인 표현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다루어졌다. 그리고 베자가 ‘세상’을 택함받은 자들로 제한하자 안드레애는 이에 반대하며 ‘세상’이 전체 인류를 뜻한다고 주장했다. ‘모두’(omnes)나 ‘세상’(mundus)이 단지 ‘어떤 자들’(aliquos)만을 뜻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베자는 요한복음 17장에서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는 구절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동시에 베자는 ‘모두’가 의미하는 보편성을 유대인 중에서만이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하나님은 자비의 그릇으로 준비했다는 다양성의 의미로 해석했다. 따라서 베자는 요일 2장의 ‘온 세상’을 위한다는 말은 바로 유대인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모든 족속들로부터 있는 택함받은 자들이라고 해석했다. 반면에 안드레애는 그리스도가 우리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화목제물(요일 2:4)이라고 할 때의 세상은 모든 인간들이어야 하고, 따라서 요한복음 3장의 세상은 모든 인간들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베자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충분성이 실제적이라면 그 효과까지 실제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저주받을 자까지 속죄의 대상이어야 하는 모순에 빠지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죽음으로 위하신 자들은 보편적 교회(Catholica Ecclesia)라고 답했다. 이상을 정리하면 칼빈과 베자에게서 어거스틴과 프로스퍼와 같은 이해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세상’과 ‘모두’라는 보편적 표현들은 지역과 신분에 제한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지역과 모든 계층에 흩어진 택자의 보편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곧 충분과 효과의 구분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나 전폭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3. 사무엘 후버와 하이델베르크 신학자들 베자와 안드레애의 몽벨리아르의 토론의 내용이 출판되자 베른에서 사무엘 후버(Samuel Huber)라는 인물로 인해 예상치 못한 소란이 일어났다. 후버는 개혁파 진영을 대표해서 베자와 함께 몽벨리아르 토론에 참석한 베른의 신학자들이 베른의 전통과 어긋난 행위를 했다고 고소했다. 베른의 신학자들인 아브라함 무스쿨루스(Abraham Musculus)와 페트루스 휘브너(Petrus Hübner)가 베자의 논제에 동의하는 의미로 서명을 했는데, 이 행위를 비판한 것이다. 1588년 4월 후버가 제기한 문제를 판단하기 위해 베른에서 공적 토론이 열렸고, 이것을 판단하기 위해서 다른 도시들로부터 신학자들이 도착했다. 결과는 무스쿨루스가 옳고 후버가 틀렸다는 것이었다. 후버는 면직 당했고 뷔르템베르크로 갔다. 그런데 거기에서 같은 주제로 후버는 하이델베르크 신학자들과 논쟁을 이어갔다. 이 논쟁의 중심 인물로 토사누스와 키메돈키우스가 등장하게 된다. 가. 토사누스 1586년 3월 몽벨리아르에서 베자와 안드레애와의 토론이 있었던 그 해 11월 19일과 23일에 토사누스는 예정론 논제를 발표했다. 이 논제는 흥미롭게도 유기를 중심 주제로 다루었다. 그리고 1588년 사무엘 후버가 등장하는 베른 논쟁이 발생했다. 개혁신학을 가르치던 하이델베르크에서도 이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신학자들은 당시 루터파와 새로운 논쟁 주제로 떠오른 속죄의 범위에 대한 답변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1589년 7월 5일 토사누스는 이 주제를 다루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는 구절의 의미와 “그리스도가 모두를 위해서 죽었는가?”에 대한 답변이었다. 여기에서 토사누스는 고린도전서 15장 22절을 통해 첫 아담과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어떻게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지 설명한다. 먼저 첫 아담과 둘째 아담은 서로 유비적 관계에 있어서 머리와 그들에게서 나오는 족속을 뜻한다. 첫째 아담은 죄와 죽음을 출발시켰고 둘째 아담은 의와 생명을 만드는 자요 저자이다. 바로 이런 원리 아래서 모든 자들이 아담 안에서 죽었듯이, 중생해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이 토사누스의 핵심 주장이다. 죄인된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죄인이며, 영생을 얻는 모든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 표현인 ‘모두’는 바로 이런 이해에 근거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모두’이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방식으로 생명을 얻은 ‘모두’라는 사실은 토사누스에게 중요하게 보인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토사누스에게서 구속의 대상과 성화의 대상은 같다. “딛 2:14에서 구속의 은택이 성화의 은택과 함께 있다. 즉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해 주셔서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속량하시고 자기 백성이 선한일의 특별히 열심을 내는 백성으로 깨끗하게 하려는 것이다.” 속죄의 대상과 구원의 대상이 같기 때문에 이것은 다시 교회론과 연결된다. 사도신경에서 ‘내가 교회를 믿는다’(credo Ecclesiam)라고 할 때에 그 의미는 영원 전에 정하신 무리를 말하며, 그리스도는 그 무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이다. “그 무리를 복음의 설교와 성령을 통해 값없이 부르시고 믿음을 주셨다.” 그래서 속죄 받은 무리,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되는 무리는 같은 무리로 교회가 되며 이들이 창세전에 택함받은 무리인 것이다. 사실 토사누스의 논제는 후버를 직접적으로 상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안드레애로 인하여 떠오른 루터주의자들의 보편속죄론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후 후버가 토사누스를 공격하면서 하이델베르크 신학자들은 직접적으로 후버를 상대한 글들을 출판했다. 나. 키메돈키우스 토사누스의 논제가 출판된 이후 후버는 속죄의 논쟁을 폭발시킨 책 ‘Theses, Jesum Christum esse mortuum pro peccatis omnium hominum (1590)’(논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을 출판한다. 이 책에서 보편속죄론자들의 주장이 상세하게 해설되었다. 반면에 키메돈키우스는 후버의 의견을 비판하면서 칼빈주의의 입장을 대변한다. 후버의 주장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가 어떤 차이도 없이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 모든 인간의 죄는 충분할 뿐만 아니라 효과적으로 용서되었다.” 후버에게 이것은 하늘 아버지가 전 인류를 은혜로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각 사람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로부터 의로, 옛 것에서 새 것으로 옮겨갔다. 모두가 구원과 은혜의 왕국의 공동체에 속했다. 모두가 (즉 유기자와 택자가) 그들이 믿던 믿지 않던 동일하게 구원받았다. 그러면 후버는 멸망의 원인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토사누스가 말한 대로 후버에게 유기자의 멸망의 원인은 죄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가 그리스도를 통해 사해졌기 때문이다. 대신에 불신을 제시한다. 오직 불신 때문에 그들은 성취되고 주어진 화목을 파괴시키고 효과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키메돈키우스가 볼 때 후버는 펠라기우스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인간의 믿음에 구원이 달려있게 되어서 구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렸다는 점에서 후버의 아버지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다. 키메돈키우스는 영생이 모두에게 준비되어 있고 구원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게 되어서 후버가 화목의 결정적 원인을 사람의 의지에 놓았다고 평가한다. 키메돈키우스가 속죄의 범위를 다루면서 구원의 근거로서 예정교리를 방대하게 다루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보편속죄론자들이 강하게 증거로 내세우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세상’을 키메돈키우스는 어떻게 해석할까? 여기서 세상이 한 세상인지 두 세상인지에 대한 논쟁이 생겼다. 후버에게 세상은 구원의 보편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다(요 3:16).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양을 보라(요 1:29). 하나님은 그래서 인류에게 차이 없이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키메돈키우스의 대답은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이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가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실제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모두가 갖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기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있는 곳에 양자됨이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성화, 회개, 영생, 믿음, 성레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 속죄의 범위에 대한 교리는 초대교회의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를 정죄하면서 밝힌 이후 그 효과에 있어서 특정적 또는 제한적이라는 것이 교회의 견해이다. 다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가치 또는 크기 자체가 작다는 것도 동시에 거절해왔다. 몽벨리아르에서 베자와 안드레애의 논쟁에서 보듯이 보편속죄론자들은 충분을 모든 인류를 위한 실제적인 죄의 속죄 또는 만족으로 보았고, 효과는 인간들 자신의 믿음에 의존하는 것으로 돌렸다. 그 이후 벌어진 사무엘 후버와 하이델베르크 신학자들(특히 토사누스와 키메돈키우스)과 벌어진 논쟁에서 그 분량이 많아졌지만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과가 택함받은 자들에게만 해당된다는 기본적인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부정하는가?”라는 비판이 개혁신학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가치를 값없게 만드는가라는 비판도 주어졌다. 이런 비판에 대한 답은 두 가지로 주어진다. 첫째,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가치 자체에 대하여 인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베자의 경우 온 세상의 죄를 위해선 피 한 방울로도 충분하다(만일 온 세상의 죄의 효과적 속죄를 원하셨다면이란 가정 하에)고 진술한다. 둘째, '모두' 또는 '세상'에 대해 성경 전체와 해당 문맥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키메돈키우스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특정 무리를 가리키는 보편적 표현, 즉 택함받은 자들 모두이며 신자들 모두이다. 2) 구속의 방식과 관련한 보편적 표현, 즉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받는다. 3) 다양한 형태와 계층을 가리키는 보편적 표현, 즉 유대인만이 아닌 세상 모든 족속, 남자나 여자, 주인이나 종 모두이다. 4) 외적 소명의 대상인 보편적 표현, 즉 구원은 모두에게 제시되며 모두가 초청받는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개혁신학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이란 구원의 모든 은택들을 효과적으로 얻으신 죽으심이다. 즉 성령에 의한 중생, 소명, 신앙, 성화, 영화까지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으로 얻으셨다. 따라서 그의 속죄의 죽으심과 구원의 적용을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속죄의 대상과 중보 또는 구원의 대상이 같다. 보편속죄론자들은 개혁신학자들의 교리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닫아 놓고 자신들의 교리가 열어놓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편속죄론자들의 교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스도의 피의 가치를 높이고 모두에게 구원을 여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닫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를 적용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으로 불신을 극복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신앙을 유지해야 하는데, 어떤 사람도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신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유효한 죽으심이 우리를 위한 믿음을 사셨고, 그리스도의 영이 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다. 그리스도의 피는 족속에 제한받지 않으며, 재산의 유무에 제한받지 않으며, 지식의 유무에 제한받지 않으며, 인간의 불신에 제한받지 않는다. 속죄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우리의 믿음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할 뿐이다.
1040 |제25차 합신농목회 용연교회를 다녀와서| 반가운 동역자들의 기쁨이 넘치는 곳_김용진 목사 파일
편집부
3381 2014-03-25
반가운 동역자들의 기쁨이 넘치는 곳! < 김용진 목사, 도산제일교회, 합신농목회 회장 > “지역 교회 방문 통해 목회 현장의 생동감 함께 공유할 수 있어” 합신농목회는 2007년 3월 26일부터 2박 3일간 은평교회(장상래 목사)에서 열린 농어촌목회자대회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저녁 좌담회 시간을 통해서 농어촌교회의 문제를 농어촌교회의 목회자들이 스스로 모여 토론하고 함께 풀어갈 수 있는 지속적인 모임의 필요성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해 5월 21일부터 22일까지 충남 홍성의 홍동밀알교회(김무정 목사)에서 첫 번째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이른 바 합신농어촌목회자모임(합신농목회)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 3월 10일(월)-11일(화) 경남 양산의 용연교회에서 제25차 합신농목회 모임을 가졌는데 멀리는 강원도 인제 가아교회, 경기도 연천 아미성도교회와 파주의 다락골교회, 충남 보령의 고대도교회, 전남 완도의 장항갈보리교회 등 전국 각지에서 목회자와 사모 그리고 자녀 등 50명이 참석하였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목회자들이 참석할 수 있을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듯이 비슷한 처지의 농어촌교회를 방문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도전을 받고 은혜를 나누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도하고 교제하며 새 힘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가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언제나 반가운 동역자들이 있고 섬김이 있고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용연교회는 1963년에 불교의 텃밭인 양산에서 설립되었다. 부산, 경남 지역은 전국에서 불교권이 가장 강한 지역으로 부산 범어사,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 등 유명한 사찰이 많으며, 특히 용연교회가 있는 면내에는 통도사, 내원사 등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유치원과 양로원 등이 60여 곳에 이르는 반면 교회는 세 곳 밖에 없다고 하니 그 형편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거기에다 양산신도시 개발로 인하여 젊은 층이 도시로 빠져나가는 등 농어촌 인구의 감소현상으로 교인수도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지역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복음을 전해 온 결과 해마다 주민초청잔치나 의료봉사활동을 할 때마다 전 주민이 참석하며 찬조금까지 가져온다. 용연교회 이은국 목사님은 항상 웃는 얼굴로 목회를 즐겁게 하신다. 교인들도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개회예배 시간에 말씀을 전해 주신 미래로교회 이진화 원로목사님은 농어촌교회 목회자들에게 비록 농어촌교회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이 많지만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도 열두 바구니나 남기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것과 작은 힘을 드리면서 열심히 충성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실 것이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리고 아침식사도 제공해 주셨다. 특강을 맡아 주신 정신과 전문의 김지원 집사님과 내과 전문의 이사라 집사님은 다정한 부부 집사님이면서 이진화 원로목사님의 가족인 사위와 따님이다. 귀한 강의를 통해 농어촌지역 노인성 질환을 이해하게 되었고, 목회자와 사모의 건강관리를 위해 식이요법과 운동을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오전 해운대로 나와서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와 모래사장에서 오랜만에 보는 농어촌 목회자들을 환영하러 나온 갈매기와 비둘기들과 어울려 바닷바람을 쐬면서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부산 아쿠아리움 초대형 수족관에서 유유히 헤엄치며 다니는 상어, 가오리, 거북이, 펭귄 그리고 크고 작은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을 보면서 동심에 사로잡혀 바다의 세계로 빠져들기도 했다. 지역탐방은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귀한 교제의 시간이다. 우리 모두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은 동백공원과 누리마루 APEC 하우스, 멀리 바다 위에 떠있는 광안대교를 뒤로 하고 우리의 목회지인 농어촌교회로 돌아왔다.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