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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 no image 섬김에로의 초대_이종석 목사
편집부
1041 2017-12-20
섬김에로의 초대 < 이종석 목사_좋은교회, 사랑의호스피스 대표 > 진리를 실천적 영역에서 구현하는 교회들이 많아질수록 소망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극복하고 해결해야 될 많은 과제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양극화의 문제이다. 부요한 사람들은 점점 부요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 국가적으로 복지사회 구현이라는 목표를 제시하지만 여전히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장애인을 위한 시설 부족과 특히 지적장애아들을 위한 특수교육 시설 미비, 전혀 거동할 수 없는 재가 장애인들에 대한 정부차원의 지원 부족, 그리고 노인 문제도 점점 심화되고 있는데 만성질환 가운데 있는 노인 보건 문제, 노후 준비가 전혀 되지 못한 노인들의 경제 문제, 독거노인들의 정신적 고독 문제와 가족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갈등 문제, 등 갈수록 고령화 사회가 되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 노인 문제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고 본다. 결식노인들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외국인 근로자들의 인권유린, 임금 채불, 소년소녀 가장 문제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회적 문제들을 안고 있다. 기독교의 황금률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섬김의 삶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섬김을 통해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고 상처 입은 마음들을 따뜻하게 치유할 수 있다. 극단적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다른 사람들을 짓밟고서라도 자신의 야욕을 채우려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섬김의 삶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살 맛 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삶이 섬김의 삶이었고 오늘도 주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주님은 섬김의 삶을 요구하고 계신다. 교회별로 사회봉사부가 조직되어 있고 작은 교회의 경우도 구제부가 있어서 기본적으로 교회는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섬기려는 조직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근래에 결식노인들을 위한 사랑의 식당을 운영하는 교회들과 경로대학을 운영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지만 한편으론 이 사역이 너무 힘들어 운영하던 사랑의 식당을 포기하는 교회들도 늘고 있다. 문제는 섬김을 위한 교회의 조직과 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소명의식과 전문성의 결핍인데 교회가 시급히 보완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할 수만 있으면 교회가 목회 간호사도 채용하여 교구 내 병자들을 돌아보는 일도 하고 사회복지를 공부한 전문 인력도 채용하여 지역사회 안에서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종합적인 접근을 해야 할 것이다.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된 이후 교회마다 사회복지에 지대한 관심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심의 동기가 돈이 아니라 섬김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재정은 예배와 선교와 사역자들의 생활비와 구제에 사용해야 하는데 구약시대 율법에 의하면 삼 년에 한번은 십일조를 따로 구별하여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을 위해 쓰도록 했다. 이런 정신을 살린다면 고통 중의 이웃들을 위해 어렵지만 최소한 교회 재정의 삼분의 일은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 재정이 지나치게 건축비와 건물 유지비 그리고 교회 자체 운영비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는지 늘 검토하면서 균형을 잡아 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복지정책이 잘 돼 있는 선진국들에 비해 복지 영역에 있어서 미흡함이 아직 많은 게 사실이다. 복지 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복지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지 못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교회가 많기에 교회가 마을 공동체를 섬기는 일에 적극적으로 문을 열어야 한다. 독거하거나 건강이 어려운 노인들을 위한 주간 보호시설로 교회 시설이 활용될 수도 있고 독거하는 만성질환 재가 노인, 재가 장애인들에 대해 교회가 구역별로 영친관계를 맺고 자원 봉사 사역을 감당한다면 교회의 아름다운 소문이 지역 사회에 번져가게 될 것이다. 더 예컨대 임종 말기 환자들을 전인적으로 돌보는 호스피스 팀들을 교회마다 조직하여 섬김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도 고통 중의 이웃들을 섬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여겨진다.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는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웃을 돌보고 섬기는 순수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에 대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진리를 실천적 영역에서 구현하는 교회들이 많아질수록 이 땅은 소망이 있다고 여겨진다. 특히 억압받고 소외받는 이 시대 지극히 작은 자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야말로 죄인의 친구로 오셔서 죽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우리 주님의 자취를 따르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522 no image 한국 교회가 가야 할 방향_안두익 목사
편집부
952 2017-12-06
한국 교회가 가야 할 방향 < 안두익 목사_동성교회 > 교회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젊은이들이 머물고 싶게 해야 연말이 되면 늘 느끼지만 세월이 참 빠르다. 무엇보다 2017년을 보내며 마음이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지난 3월 10일에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인용이 선고되었다. 그 기간 우리나라는 참으로 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후 그에 얽힌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새 정부가 나름 애를 쓰고 있지만, 여전히 어려움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런 와중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청년들의 문제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유행어 중에 ‘헬조선’이란 말이 있다. 쉽게 말해 ‘지옥 같은 한국’이라는 뜻이다. 왜 그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를 알아야 한다. 귀에 익은 말인데 한 때 우리 시대 젊은이들을 3포, 5포, 7포 세대니 하는 말로 정의를 내렸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고,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하고, 더 나아가 꿈과 희망까지 포기해야 하는 것이 오늘의 젊은이 세대이다. 물론 젊기에 방황도 할 수 있고,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다. 그런 방황은 언젠가 끝날 것이고, 시행착오를 통해 새로운 길을 개척할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의 젊은이들은 현재의 절망과 고통의 자리에서 더 나은 미래로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희망과 꿈까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한두 번 실패했더라도 패자부활전과 같은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마지막으로 이런 절망의 자리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 한국을 떠나는 것이다. 삶을 위한 희망의 끈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다. 조국에 미련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조국을 떠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고, 떠나고 싶다고 해서 모두 떠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마음에 뿌리박힌 이 상처 속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조국을 ‘지옥 같은 한국, 헬 조선’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함께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필자는 목회자로서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과연 우리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교회는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한국교회가 젊은이들에게 잃어버린 희망을 되찾게 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교회를 떠나가는 젊은이들에게 다시금 교회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그런 교회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아직도 교회에 남아 있는 젊은이들에게 교회에 남아 있을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라는 질문 말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다시 물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우리 교회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가? 젊은이들이 머물고 싶은 교회인가?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채 살아가야 하는 N포세대의 젊은이들에게 ‘헬조선’처럼 떠나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그래도 교회에는 머물고 싶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와 관련하여 올 한해 많은 행사들, 논문들, 그리고 진단들이 쏟아졌다. 대부분 공감할 내용이고 또 날카로운 지적엔 마음이 쓰리도록 아픔도 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에서 가장 시급히 개혁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몇 가지 중에 한국교회를 가장 부패시키는 것은 신자본주의 사상일 것이다. 그것이 오늘 교회 안에 들어온 가장 무서운 세속주의이다. 신자본주의 사고에 세뇌된 현대인들은 개척교회로 가려하지 않는다. 개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가도 조금 신앙이 성장하면 제도와 여건이 훨씬 나은 큰 교회로 이동을 해버린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로 교회를 성장시킨 목회자는 성공한 목회자라고 여긴다.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이 잘못일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의 숫자적 성장이 교회의 목표가 될 수 없고, 그것이 교회와 목회자를 평가하는 잣대가 돼선 안 된다. 하나님은 크기로 사람이나 교회를 판단치 않으신다. 얼마나 신실한가를 보신다. 허황된 성장과 외적 부흥의 신기루를 쫓기보다는 기초를 다시 세워야 한다. 주일학교 교육과정, 그리고 청소년, 젊은이에 대한 교회의 과감한 투자가 한국 교회를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제 이 해도 저물어 간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한국 교회가 이대로 좋은가를 생각해야 한다. 합신을 합신이 되게 하는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의 토양 속에서 힘들고 어려워도 이것을 붙잡고 나아가야 한다. 종교 개혁 주의자들이 피를 토하듯 외쳤던 개혁 교회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는 이 진리의 외침을 외침으로만 끝낼 것이 아니다. 교회마다 비 진리를 버리고 진리를 붙잡고 나아갈 때, 떠나가는 다음 세대들이 다시 돌아오는 계기가 될 것이다.
521 no image 세상이 걱정하는 교회_정요석 목사
편집부
1077 2017-11-22
세상이 걱정하는 교회 < 정요석 목사_세움교회 > 바른 신학이 바른 교회와 생활로 구체화되게 거룩성과 현실성을 모두 붙잡아야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2017년에 여러 교단들은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우리 교단의 정암신학강좌도 “종교개혁의 신학과 오늘”이란 주제를 다루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에 크게 역행되는 일이 최근에 합동과 통합 교단에서 발생하였다. 11월 6일 주간에 총신대학교는 해외석학들을 초청하여 500주년기념 국제학술대회를 며칠간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목격한 것은 수업 거부를 하며 총장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대였다. 이들은 시위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갔고, 시위대의 주장이 담긴 유인물을 착실히 챙겨 갔다. 그들이 확실하게 배워간 한국어는 “사퇴하라”였다. 총신대와 합동 교단은 돈을 들여 해외석학들을 초청하여 자신들의 치부를 해외에 널리 알린 것이다. 명성교회는 11월 12일 저녁 7시 예배 때 김삼환 목사를 원로목사로, 그 아들 김하나 목사를 위임목사로 세우는 예식을 가졌다. 통합 교단은 헌법 정치 제28조 6항에서 교회에서 사임·은퇴하는 위임목사의 배우자 및 직계비속과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에게 위임목사직의 세습을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명성교회는 과감하게 헌법까지도 무시하며 세습을 강행했다. JTBC 뉴스룸은 11월 13일부터 며칠에 걸쳐 이 세습을 비판하였다. 손석희 앵커는 11월 14일의 앵커브리핑에서 핼버슨(Richard Halverson) 목사가 1984년의 미국 장로교 총회에서 언급한 말을 다음처럼 인용했다.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 다음에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 그는 이 인용 후에 “그리고 한국으로 와서 교회는 대기업이 되었다.”라고 덧붙였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교회가 자체 정화력을 상실했다고 여기는지 세상은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세습과 성추행과 재정 횡령보다 더 큰 문제는 해당 교인들이 정작 문제의식을 못 느낀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무 문제없이 평안 속에서 신앙 생활하는데 왜 외부에서 떠드느냐고 못마땅해 한다. 그런데 나치 정권도 국민의 합법적 지지로 정권을 잡고 모든 정책을 집행하였다. 독일 국민이 해외의 비판과 염려를 멀린 한 채 나치 정권의 해악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표를 몰아주었을 때 몇 년 후 나치 정권은 유대인 학살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목사 개인의 일탈로 인한 재정횡령과 간음과 도박과 세습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성도들이 이것의 심각한 위해성을 알지 못하고, 교회가 외적 성장을 하고, 자신들은 복을 받으면 된다고 여긴다면 한국 교회는 너무나 위험한 것이다. 자정 능력을 잃은 것이고, 다른 종교들과 차이가 없게 된 것이고, 하나님을 현세를 위한 실용의 신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11월 15일에 포항에서 발생한 지진이 어떤 건물이 튼튼한지를 알려 주었듯, 한국 교회는 앞으로 다가올 다양한 시련과 유혹 앞에서 그 정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것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 교단이 단순히 종교개혁의 신학적 유산을 관념적으로 되뇌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바른 교회와 바른 생활로 실천의 구체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합신 교단에도 이러저런 사건사고와 잡음이 있지만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잠재우는 형태로 의사결정하고 집행하는 분위기는 너무나 소중하다. 총회장, 이사장, 총장, 총무가 되려는 노골적 운동이 없고, 자신의 기한이 차면 기꺼이 자리를 내놓고, 목사 간의 평등을 인하여 권위주의가 자리 잡지 않는 교단의 정신과 분위기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다. “다섯 가지 오직”(5 solas)으로 대표되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이 새기고 실천화하려는 자세 또한 적절하다. 그런데 앞으로 교단의 규모가 더 커져도 자리에 대한 욕심과 경쟁은 절제되고, 교단의 역사가 길어져도 파벌이 생기지 않을까? 바른 신학의 유지를 위해 성경과 신학을 치열하게 연구하고, 그것이 바른 교회와 생활로 구체화되도록 거룩함과 현실성을 모두 붙잡을 수 있을까?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었지만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보다 더 개혁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걱정을 받고 있다. 합신 교단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줄 수 있는 큰 선물은 단지 외적 성장에 있지 않고, 더욱 깊이 신학을 바르게 연구하고, 그것의 적용을 구체적으로 교회와 생활에서 나타냄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
520 no image 목사의 기본_임형택 목사
편집부
1030 2017-11-07
목사의 기본 < 임형택 목사_숭신교회 > 목사가 기본을 갖추는 것이 주님을 잘 섬기는 일이다 주일예배에 참여하는 교우들을 보면 10분 전에 오는 분은 거의 매주 10분 전에 오고, 3분 전에 오는 분은 거의 매번 3분 전에 옵니다. 지각하는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1분 지각하는 분은 거의 매주 1분 지각하고, 5분 지각하는 분은 거의 매번 5분 지각합니다. 15분 늦는 분은 거의 매주 15분 늦습니다. 필자는 매주 토요일 새벽에는 그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지각하지 않게 하시고, 일찍 와서 기도하게 하시고, 감사와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게 해 주시라고.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다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16년 동안 필자가 여전히 기도하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그러나 나는 그분들에게 실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분들도 제가 목양해야 할 성도이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에 비교하면 그지없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안타깝지 않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분들이 변화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절실합니다. 정기노회에 가면 결석하는 목사, 지각하는 목사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개회예배가 시작됐는데 빈자리가 많다는 것을 노회 때마다 느낍니다. 어떤 분은 기도할 때 들어오고, 어떤 분은 설교 시간에 들어옵니다. 어떤 분은 예배가 끝나면 들어옵니다. 미안한 마음은 있는지, 부끄러운 마음은 있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이보다 필자를 더 긴장하고 초조하게 만든 경우들이 있습니다. 헌신예배 설교나 임직예배 순서를 부탁했는데 지각하는 분들입니다. 물론 사정이 있습니다. 서울의 교통이 번잡하고, 초행길인지라 잘 못 찾기도 하고, 지하철을 반대 방향으로 타서 늦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날에는 예배에 들어갈 때 얼굴이 뜨끈뜨끈 합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 목사에게는 안타까운 정도가 아니라 실망도 하고, 비난도 하고 싶습니다. 다시는 강사로 초청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생깁니다. 사람은 기본(基本)이란 것이 있어야 합니다. 기본은 우리 말 사전에서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가장 먼저, 또는 꼭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소양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기본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춰야 할 교양이고, 예의입니다. 목사의 기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춰야 할 교양과 예의가 있습니다. 자신만 아니라 다른 목사의 명예를 위해서도 갖춰야 할 교양과 예의. 그 중 한 가지는 예배와 관련한 기본입니다. 예배에 늦지 않는 것, 천재지변이나 인명 사고를 당한 경우가 아니라면 반드시 예배 전에 도착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서울만 아니라 웬만한 도시에서 교통 체증은 일상입니다. 초행길이라 해도 전날 지도 검색을 해서 길을 익힐 수 있습니다. 자주 이용하지 않는 지하철이라도 모바일 검색을 통해 사전에 방향을 익힐 수 있습니다. 도시라고 해서 이런 이유로 예배에 늦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초청받은 교회의 예배에 늦는 것은 목사의 기본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는 예배에 늦어도 되는 것처럼, 성도들은 찬송을 부르며 예배하려고 하는데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기본이 없는 것이 아닐까요? 초청받은 예배에서의 설교에도 기본이 있어야 합니다. 초청받은 예배의 성격과 맞는 설교를 준비해야 하고, 본문과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성경내용을 신중하게 다루지 않고, 예화가 많은 것은 문제입니다. 설교의 기본을 갖추는 것은 초청한 교회와 그들의 예배에 대해 마땅히 갖춰야 할 예의입니다. 그럼에도 목사의 기본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명예만 아니라 다른 목사의 명예까지 실추시킵니다. 말씀의 권위를 상실할 수 있고, 예배자의 마음을 닫게 하고, 그날의 예배를 망쳐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날에는 담임목사가 성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청소년기를 보낼 때는 거의 모든 가정에서 보리밥, 잡곡밥을 먹었습니다. 지금은 건강식이라 많은 가정에서 선호하지만, 그 시절에는 쌀밥을 먹는 것은 소박한 소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점을 착안해서 외부 강사가 오면 담임목사가 소개할 때 보리밥만 먹다가 쌀밥을 먹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외부 강사에 대한 기대감을 피력한 것입니다. 지금도 담임목사의 설교만 듣던 교우들은 어쩌다 외부 강사가 오면 평소와 다른 기대감을 갖습니다. 설교자를 위해 기도하고, 은혜받기를 사모합니다. 그 기대감이 어그러지지 않도록 목사의 기본을 갖추는 것은 우리 주와 예배를 잘 섬기는 것이 아닐까요? 목사가 예배 전에 도착하고, 함께 찬송하고, 함께 예배를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시기에도 아름답고, 성도들이 보기에도 은혜롭지 않을까요?
519 no image 종교개혁을 생활화하자 _성주진 교수
편집부
838 2017-10-25
종교개혁을 생활화하자 < 성주진 교수_합신 구약학, 본보 주필 > 나날이 새로워지는 개혁의 삶을 살아야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특히 종교개혁 기념일(31일)이 있는 10월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한 행사가 집중되는 달이기도 하다. 지금이야말로 총체적인 개혁이 절실한 때라는 인식에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종교개혁의 소중한 유산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삶에서 실천하는 개혁이 요청된다. 개혁은 부흥(revival)과 나눌 수 없다. 성경의 언약갱신 기록에서 개혁은 통상적으로 영적 부흥의 결과로 제시된다. 따라서 항상 부흥을 구하되 주신 바 부흥을 근거로 개혁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흥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개혁을 미루는 것이 바람직한가? 성경에도 부흥의 기록은 없지만 제도적 개혁을 정당하게 실행한 사례가 없지 않다. 말씀에 비추어 잘못된 것이라면 언제라도 개혁에 옮기는 것이 원칙이다. 삶의 개혁은 종교개혁의 통전적 성격과 연관이 깊다.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신학적 이슈는 무엇보다 중요하나 개혁의 통전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개혁에는 구원의 복음과 복음에 합당한 삶, 믿음과 행위, 열매와 증거, 경건과 의로운 삶의 실천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개혁의 통전성과 생활화는 특히 성경, 교회, 가정, 직장, 사회의 영역에서 공히 요청되는 주제이다. 성경의 영감과 권위는 개혁의 근본적인 기초이다. 가톨릭은 전통을 성경의 반열에 올려놓을 때 진리에서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도 교황청이 전통에 의거하여 ‘성모승천설’을 교리로 결정한 것은 좋은 예이다. 물론 개혁은 모든 교회 전통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 전통을 최종적인 권위인 성경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개혁이다.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믿는 성도는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 개혁자들은 교황권을 부인하고 교회 직제를 성경 진리 위에 세우고자 힘썼다. 만인제사장설을 통해서 성도에게 제자리를 찾아 주고 사제의 중보적 위치를 부인하였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서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를 정립하는 일에 중요하다. 만인제사장설이 목회자의 자리와 기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종교개혁의 소산인 장로교회의 헌법을 존중하여 성도 개인과 회중, 장로와 담임목사의 권한과 책임을 잘 지키는 일이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성과 결혼 그리고 가정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특히 성적 타락이 심해지고 가정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며 성(젠더) 문제가 사회적 논란이 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창조규례에 따라 건강한 성과 결혼을 통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지켜야 할 하나님의 뜻이다. 자녀 교육과 부부의 책임도 개혁자들이 일궈놓은 길을 따라 실천에 힘써야 할 부분이다. 삶의 개혁에서 일에 대한 개혁자들의 이해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당시 직업의 귀천은 성속의 분리에 기초하고 있었다. 성직은 세속적인 직업에 비해 뛰어난 것으로 존중을 받았다. 세속적인 일과 직업은 불가피한 생존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부름(소명)이 성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진리를 드러냈다. 직업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진리는 오늘날에도 성도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동력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삶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 영혼 구원을 기반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일에 앞장서는 일이 소중하다. 이 땅에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의 등불이자 방부제가 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라간 믿음의 선배들이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고 역사의 방향을 바꾼 사실을 교회사의 도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개혁 대상은 나를 제외한 누군가라고, 즉 다른 사람, 교회, 사회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개혁할 수 있는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의 신앙과 삶이다. 칭의 논쟁의 여파로 종교개혁의 의의가 희석되어서는 안 된다. 구원의 확신이 약해져서도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죄와 심판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에 기초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나날이 새로워지는 개혁의 삶을 힘 있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518 no image 증상, 병, 죄, 치료_김성진 목사
편집부
830 2017-10-10
증상, 병, 죄, 치료 < 김성진 목사, 늘소망교회 > 그리스도를 신뢰하자. 문제의 처방과 치료를 그가 하신다 얼마 전 목이 자꾸 잠겨서 거담제라도 먹으려고 이비인후과에 갔었다. 의사가 내시경 사진을 보여 주면서 후두에 뭔가 있다고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한다. 사진을 보니 성대에 볼록하게 돌기가 솟아 있었다. 간단히 생각했다가 예기치 않은 말을 듣고 놀라서 대학병원 두경부암센터로 달려갔다. 진료를 기다리면서 벽에 걸린 사진들을 보니 내 목 상태가 영락없는 후두암이었다. 순간 인생을 정리(?)하고 있는데 의사가 왔다. 암은 아니란다. 그렇지만 몇 개월 약을 강하게 써보고 폴립이 줄어들지 않으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한다. 목이 쉬는 증상 하나 가지고 가볍게도 생각 했다가 기겁도 했다가, 혼자 여러 가지를 했다. 겉으로 나타난 증상만 가지고 판단하거나 조치해서는 안 된다. 원인이 되는 정확한 병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병을 다스려야 한다. 요즈음 사회에 정의와 선행에 대해 강조하는 목소리가 유난히 높아지는 인상을 받는다. 불의와 비행에 대한 성토의 소리가 뜨겁다. 토론도 많고 구호도 차고 넘친다. 교회도 그런 차원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좋은 소리도 좋지만 너무 피상적이지 않나 싶다. 잘하자, 착하게 살자, 나쁜 짓 하지 말자고 외치면 인간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가? 증상만 잡으려고 하면 되는 게 아니다. 원인되는 병을 고쳐야 한다. 성경은 세상 문제의 원인을 죄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 성령으로 푸신다. 심오하고 복잡하게 푼다. 율법을 주고 바른 말만 하지 않으신다. 우리 속에 퍼진 죄를 다루신다. 사람을 새롭게 하고 뿌리를 고치신다. 당장 증상만 덮으려고 세상에 마취제나 진통제를 뿌리지 않으시는 이유다. 맘에 들지 않는 모습이 주변에 널려 있다. 하나님은 뭐하시나 싶은 일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래도 좀 더 깊이 생각하자. 죄를 생각하자. 지금은 성(聖)과 속(俗)이 분리되어 있다. 세속주의에 물든 때문이다. 가정과 사회의 문제를 다루지만 신앙과 경건에 연결하지 못한다. 부부싸움, 학교폭력, 소외 계층, 이념 대립, 갑질 문제 등이 교회와 예배, 기도, 찬양과 관계가 없다. 또한 교회로 모이고 예배를 드리며 기도는 하는데 가정과 사회생활에 연결하지 못하는 것도 우리의 과제다. 어느덧 따로 따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하나로 통해야 한다. 약한 사람을 돕고 옳은 길을 가자고 하며 악한 사람을 지탄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주의 나라를 바라는가, 나를 버리고 주를 사랑하는가 물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의사라고 하셨다. 그리고 병든 자들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원인이 병인 줄 모르고 자기가 마음먹고 행동만 고치면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를 찾지 않는다. 혹 병이 문제인 줄 알아도 그 병을 자기가 고치는 것이 아니다. 의사를 찾아 그에게 자신을 맡겨야 한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자. 우리가 다 알 수 없다. 처방과 치료를 그가 하신다. 약을 먹으라 하시면 약을 먹고, 수술하자 하시면 수술대 위에 눕자. 그가 우리 죄를 깨끗케 하시리니. 병을 고치면 당연히 증상도 나아져야 한다. 그런데 당장 증상이 없어지지 않을 수 도 있다. 치료하는 동안 통증이 더하기도 한다. 수술을 하게 되면 당분간 원래 아팠던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병을 치료했다면 결과적으로 증상이 호전되어야 한다. 교회가 죄 문제를 알게 되었고 전능하신 의사를 모셨다면 어느 시점에서는 개선된 모습을 보여야 맞다. 그 증거가 없어서 세상이 외면하고 자가 처방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우리가 고민하고 기도해야할 문제다. 배가 아픈데 ‘빨간 약’을 바를까? 아니면 파스를 붙여야겠나? 결국 문제의 원인은 죄이고, 그 죄를 해결해야만 제대로 증상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거기서 후퇴하는 것은 갈 길을 멀게 할 뿐이다.
517 no image 총대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_최덕수 목사
편집부
848 2017-09-18
총대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 최덕수 목사_현산교회 >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고 주님의 말씀과 뜻에 편들며 수종들어야 사람들은 회의가 보다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에게서 나온 아이디어보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고 정제한 끝에 나온 의견이 모든 면에서 나은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정과 학교와 정부와 기업은 물론, 심지어 폭력배 집단까지도 회의를 통해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敎會)’와 ‘장로회(長老會)’란 명칭 자체가 교회가 회의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문에 교회에서 다양한 회의들이 이루어지는데 교회 회의 중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는 총회 회의이다. 총회는 노회와 어떻게 다른가? 본래 개혁교회는 상회(上會) 개념이 없다. 프랑스 개혁파교회 규칙 제1조에 “어떠한 교회도 타교회에 대하여 상위 또는 지배를 요구하지 못한다”라고 적시되어 있다. 이런 원칙은 한 지교회 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엠덴회의(1571년) 조항 1조는 “당회가 집사회의 구제 사역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모든 직분은 상호병립하지 수직상승하지 않는다는 장로교 정치 원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나 나나 다 똑같다’는 식의 수평적 질서만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간에 수평적 질서와 수직적 질서가 공존하는 것처럼, 노회와 총회 간에도 수평적 질서와 함께 수직적 질서가 세워져야 한다. 만약 수직적 질서가 세워지지 않는다면 총회는 노회보다 더 넓은 회의체에 불과할 뿐 총회가 내린 결정은 아무런 구속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수직적 질서도 세워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권위 없는 질서는 존재할 수도, 세워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권위는 질서의 원리다. 교회의 권위는 누구에게 있는가? 칼빈은 “모든 공의회를 주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요, 이러한 그의 위엄을 인간과 공유하시지 않는다”(기강 4.9.1)라고 하였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권위자로 인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말씀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공적인 설교와 사적인 복음 전파는 물론 가정 심방에 이르기까지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거룩한 복음의 말씀의 실천이 되도록 해야 한다. 교회 회의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오늘날 말씀의 통치를 가장 적게 받는 영역 중 하나가 교회 회의다.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와 태도, 절제된 언사, 주장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을 기다리는 주의 깊은 자세가 요구되는 곳이 교회 회의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말씀과 성령보다 타락한 본성의 지배를 받는 일들이 적지 않고 위로와 격려를 받기보다 마음이 나뉘고 상하는 일들이 더 많다. 총회는 이런 유아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작부터 마지막에 이르는 전 과정이 전통과 관행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회의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게 하는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총회에 참여하는 총대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과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지교회 직분자는 회중의 투표를 통해 세워지지만 그 직분은 회중들로부터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다. 총회 총대라는 직분 역시 외형상 노회원으로부터 위탁받았지만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총대는 하나님의 대리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대리자인 총대는 어떤 자세와 태도로 총회에 임해야 하는가? 여호와의 총회의 영원한 의장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참여해야 하며 발언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듯 해야 한다(벧전 4:11). 다른 사람의 발언을 들을 때는 그 주장이 거룩한 복음에 합당한지 여부를 살펴야 하고 거수할 때는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고 주님의 뜻에 편을 들어야 한다. 모름지기 총대는 하나님의 뜻에 수종들어야 한다.
516 no image 노회와 총회의 의미와 중요성_나종천 목사
편집부
1012 2017-09-06
노회와 총회의 의미와 중요성 < 나종천 목사_한사랑교회 > 교회, 노회, 총회를 섬기는 것은 모두 합신 교단의 한 공동체를 섬기는 일이다 얼마 전, 지교회 담임목사 청빙 건으로 청빙 받은 목사와 청빙한 교회 그리고 그의 소속 노회가 상처를 입은 일이 있었다. 여기에 우리 교단도 다시 교권이 시작되는 것 아닌가 우려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뿐만 아니라 목사 위임 투표에 있어서도 잡음들이 종종 들려오곤 한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헌법 제3부 교회정치에 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오는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노회(老會, presbytery)란 장로회(長老會)를 뜻한다. 곧 목사와 장로들이 교회의 문제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모임을 말한다. 이 ‘노회’가 중심이 되어 교회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 노회에 중요한 권한이 주어진 것이 장로회 정치 제도이다. 교단의 모든 목사는 임직 시에 서약을 한다. 정치 제6장 9조 1항 2,3번에서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과 정치와 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 신종할 것을 선서한다. 헌법은 장로교 신학과 교리, 신앙을 총괄한 것이고 성경과 개혁주의 신학이 그 바탕이다. 그런데 최근 장로정치제도를 바로 알지 못해 총회의 위상을 높이고 총회장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것을 본다. 합신이 출발하면서는 총회의장, 노회의장이라 했다. 이것은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모든 회의의 의장이시며 총회장, 노회장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 하나님의 뜻을 묻는 회의를 진행할 뿐임을 말한다. 그런데 의장의 권한을 강화하고 그 직을 상시직처럼 이해하려 한다면 개혁주의 장로정치에 반한 것이다. 노회의 예배 중 사도신경으로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라고 함께 신앙 고백을 한다. 즉 장로회인 노회를 우리는 일차적인 공교회로 본다. 그러기에 노회 때마다 예배와 성찬이 있다. 또한 노회는 지교회의 형편을 살피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중요한 모임인데 행정적 처리 기관으로만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나와 내 교회의 사안이 아니면 상관이 없다는 듯이 점심 후면 많은 회원들이 귀가하곤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목사 안수를 하는 노회의 중요한 사역에도 순서를 맡은 몇 명의 목사들만 참석한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개혁주의를 부르짖지만 이것이 개혁주의인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다. 또한 목사가 노회를 섬기면 어떤 교인들은 교회는 안 돌보고 노회 일만 한다고 치부하기도 한다. 이런 것은 개교회적 이기주의다. 노회나 총회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관이고 그것을 더 넓은 기관에서 확인하는 공교회의 한 모습이다. 그러기에 교회나 노회나 총회를 섬기는 것은 모두 합신 교단의 한 공동체를 섬기는 일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컨대, 대부분의 교회가 청빙위원을 두지만 장로정치제도에서 목사 청빙은 당회가 진행한다. 청빙위원들이 준비를 했더라도 당회가 결정한 후 공동의회를 소집하여 그 사안 의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의회장은 목사 청빙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그 사안을 노회에 요청한다. 공동의회장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임을 물었고 확인했습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본 교회가 소속된 더 넓은 치리회인 노회의 찬성이 있어야 합니다. 지교회에 목사를 보내는 일이 너무 중요해서 이런 절차를 두어 행합니다. 따라서 노회에서 결의되기까지 계속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청빙 받은 자가 타 노회 회원이라면 노회장은 노회 결의 후에 이렇게 말해야 한다. “교회에 목사를 파송하고 세우는 일이 중요하기에 본 노회는 여기까지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그 회원이 소속되어 있는 노회의 결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최종 결정 때까지 회원들은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까다로운 절차를 두는 이유는 교회가 매우 중요하고 영광스럽고 존귀하기에 사람을 함부로 세우거나 보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교회나 기관에서는 항상 교회의 왕이신 주님을 앞세워야 한다. 혹 진행 과정상 내 맘에 안 들고 원치 않는 점이 있어도 자기 유익을 따라 사사로이 흐름을 왜곡시키거나 결정해선 안 된다. 노회가 교회를 세우고 목사를 지 교회에 파송하는 일, 교회를 시찰하는 일 등을 처리하기에 행정 절차 기관으로만 아는데, 노회의 모든 행정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기에 노회나 총회에 그 회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해야 한다. 공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묻는 중요한 자리에 주께서 나를 세워 두셨는데 나와는 무관하다며 자리를 뜬다면 바람직한 개혁교회 회원의 모습은 아니다. 금번 총회와 노회에서는 이런 부정적인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끝까지 함께함으로 바르고 건강한 개혁주의 장로회 교회정치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515 no image 도덕성 없는 과학의 발달_정요석 목사
편집부
1081 2017-08-23
도덕성 없는 과학의 발달 <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 과학의 발달로 능력과 편리함이 개선될수록 그 부작용을 이기는 도덕이 있어야 여름에 돼지고기가 안 좋다는 말은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먹고 남은 고기의 부패와 연관이 있다. 남은 고기가 아까워 먹다가 식중독에 걸리는 경우들이 많았다. 소고기도 물론 여름에 상하여 탈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돼지고기는 심한 식중독으로 연결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요사이 냉장고의 보급으로 이런 말을 들어 보기 힘들다. 냉장고는 참 편리하다. 남은 음식을 냉장과 냉동으로 보관할 수 있어, 제철이 아닌 음식도 언제든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냉장고의 발달과 함께 이웃과 음식을 나눠먹던 풍습은 감소되었다. 음식의 나눔은 이웃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은 따스한 마음이 큰 이유겠지만, 나누지 않으면 음식이 썩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하다. 썩어서 버리느니 인심이라도 쓰는 것이다. 그때는 이웃이 잔치하기를 마을 사람들이 바랐다. 음식물이 당연히 나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냉장고의 보급으로 장기 보존이 가능해지며, 잔치를 해도 떨어지는 떡고물이 이웃에 별로 없게 되었다. 음식의 빈부 격차가 심해졌고, 그만큼 이웃과의 소통과 나눔은 적어졌다. 동전이 유통되기 전에는 농부가 농작물을 아무리 많이 수확하여 창고에 들여도, 몇 달이 지나면 썩기 때문에 싼값에 방출하거나, 친지와 이웃과 나눠가졌다. 그런데 동전이 유통되면서 부자들은 수확물을 창고에 보관하는 대신에, 모두 팔아서 동전으로 깔끔하게 보관했다. 거대한 창고도, 썩을 걱정도 대폭 감소되었고, 대신 이웃 간의 나눔과 소통은 감소되고, 빈부 격차는 심해졌다. 부패와 추위와 더위라는 물리적 한계를 이겨내는 인간의 과학은 이런 부작용을 뜻하지 않게 불러온 것이다. 그래도 동전은 부피와 무게를 인하여 넓은 보관 공간을 필요로 했고, 쉽게 이동하기 힘들었다. 곳곳에 산적과 해적들이 동전을 많이 가진 자들을 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폐와 어음이 발달하면서부터는 작은 창고의 동전들이 달랑 종이 몇 장으로 둔갑하였다. 게다가 곳곳에 존재하게 된 은행은 거대한 현금을 강도의 위험을 무릎 쓰고 이동하는 필요도 없애 버렸다. 과학의 발달은 갈수록 빈부 격차의 자연적 제어 장치를 없애 버리는 것이다. 별 4개의 대장 공관에 있는 냉장고 9개가 화젯거리다. 냉장고 9개는 얼마나 많은 음식물이 보관되었나를 말해 준다. 공관병들을 비롯해 한창 나이에 먹을 병사들과 공관을 찾는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9개의 냉장고가 필요했는지, 아니면 수시로 들어오는 음식 선물을 비축하려는 욕심으로 필요했는지 더 살펴봐야 할 일이다. 만약에 전자였다면 그 대장은 그 나눠준 만큼 칭찬을 들을 것이고, 국방장관을 비롯한 더 높은 요직으로 등용될 것이다. 만약에 후자라면 그간 인격과 능력이 있기에 별 4개까지 되었겠지만, 그간의 공과 명예마저 냉장고 9개로 대변되는 인색함을 인해 모두 무너질 것이다. 필자는 1-2년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10년이 지나도 사용하지 않음을 많이 보아 왔다. 그래서 1-2년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과감히 필요한 자에게 주려고 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명심하려는데, 힘들기는 하지만 실천하면 정말 그 말이 맞음을 느끼곤 한다. 나눌수록 자유로워지고, 우회하여 더 큰 대가로 돌아오곤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패와 추위와 더위 자체의 제거, 태풍과 폭우가 없는 날씨, 맛있는 것을 무한정 먹을 수 있는 소화 구조 등을 주실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우리가 탐욕과 축적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물리적, 인체적 한계를 설정하셨다. 이런 모든 한계의 제거는 완전 성화가 가능한 하나님 나라에서만 가능하고, 거기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이 땅의 사람들은 이 한계를 과학의 발달로 일부분 해결하곤 한다. 그런데 마음의 탐욕과 자기주장까지 해결하지 못하여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일으키곤 한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성이다. 도덕성 없는 과학의 발달은 더 심한 부패와 비참함을 이 땅에 가져온다. 과학의 발달로 능력과 편리함이 개선될수록 그에 따른 부작용을 이겨내는 도덕이 있어야 한다. 신자들이 먼저 이 땅에서 비우고, 나누려고 해야 한다. 그래야 미련 없이 기꺼이 이 땅을 떠날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서도 깃털처럼 높여 주신다.
514 no image 복음 없는 교회협의기구_김성한 목사
편집부
1146 2017-08-02
복음 없는 교회협의기구 < 김성한 목사, 은혜교회 > 교회일치 운동은 교리일치 운동으로서 진리를 찾는 노력이어야 한다 2013년 11월 부산 벡스코에서 WCC 총회가 열렸다. 주제는 생명, 정의, 평화였다. 주제에서 ‘복음’이 빠져있는 것을 이상히 여겨 살펴봤더니 놀랍게도 복음과 구원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 언급도 없이 일정을 마쳤다. 이것이 과연 교회연합기구가 맞는가? 부산 WCC 총회에서 마틴 히젤 목사는 유럽을 대표하여 이렇게 기도했다. “우리(유럽)는 전쟁과 식민지 착취 인종차별, 대량 학살 등 죽음의 유산을 대표하는 무리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생명의 하나님 유럽으로 하여금 모두에게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신실되게 하소서.” 그리고 카레킨 2세 아르메니안 정교회 주교는 이렇게 기도했다. “상처 받은 세계 속에서 살면서 우리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정적인 도구들을 더 많이 확장시켜 가야 합니다.” 그럴듯한 주장으로 온갖 미사여구를 구사했으나 WCC 총회 내내 복음과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만 보아도 WCC의 정체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복음 없이, 영혼 구원 없이 전 세계 교회가 하나 되자는 것이 WCC이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정의와 개선을 위하여 당연하고 분명히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먼저 복음에 충실할 때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도 있었고, 교회와 성도들이 먼저 예수의 복음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노력할 때 오히려 사회도 변화되었었다. 2017년 6월 29일부터 7월 7일까지 세계개혁교회커뮤니온 WCRC 제 26차 총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전 세계 교회 대표 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열렸다.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등 인류가 살아가는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도록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힘쓰자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복음과 영혼 구원은 관심의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손달익 목사는 “정의의 문제가 단순히 정치 사회학적 문제만이 아니고 환경에 대한 문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 환경 파괴와 그로 인한 인류 미래의 불안감 이런 것들이 결국 정의 회복으로 가능하다”고 하였고, 이성희 통합 총회장은 “핵 반대, 사드 반대,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한반도에서 무기가 떠나가고 평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이런 노력들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면 의미 있겠지만 복음을 잃어버린 교회가 정치, 경제, 사회, 환경에 진실되고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이런 운동이 사회의 갈등 해결과 평화 정착에 과연 근본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까? 지금 세계적으로 복음이 위축되고 있는 현실을 교회는 우선 직시해야 한다. 왜 세계적으로 기독교 인구가 감소하고 있을까? 교회 스스로가 복음을 버리는데, 어떻게 교회가 부흥할 수 있겠으며, 하나님께서 이런 교회에 은혜를 주시겠는가? 그리고 그런 교회가 사회를 위해 진정한 의미의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작년에는 우리나라 어느 대형 교단 둘이 통합을 이룬 일이 있었다. 통합 논의 과정을 지켜보았는데, 양 교단의 체제와 교단 명칭 등에 관한 협의만 하고, 양 교단 간의 신학적 입장과 차이에 대하여는 단 한 마디의 협의도 없이 통합을 이뤘다. 예를 들면, 두 교단 중에 한 교단은 여자 목사 안수를 인정하고, 다른 한 교단은 여자 목사 안수를 인정하지 않는 교단인데, 이 문제에 대하여도 진지한 협의 없이 교단 통합을 이루는 것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성경적 진리가 교회의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아님을 보는 것 같았다. 스펄전은 “진리를 희생시키고 연합을 찾는 것은 주 예수에게 대한 반역이다”라고 말하였고, 박윤선 박사는 WCC에 대하여 “신신학적으로 타협주의적이며 기독교의 근본적 진리의 해석을 각자의 자유에 맡기에 그것을 옳은 대로 주장하지 않고라도 교회라고 하면 그 무슨 교회라도 모두 다 서로 뭉치어 하나가 되기를 도모한다. 이것은 항의자(protestant)의 걸어온 역사를 후회하며 일소(一掃)하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진리보다 연합을 즐기는 운동이며 따라서 개혁파의 올바른 신앙노선을 오착으로 여기는 그릇된 주의이다(파수군, 1949년)”라고 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교회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을 후회하며 개혁주의를 지우려는 노력도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는 두려운 현실을 본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과 교회에 닥친 도전들을 심각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을 더욱 견고하게 붙들어야 한다. 교회 일치 운동은 우선 교리 일치 운동이어야 한다. 교리적 차이에 대해 논의해야 하며, 진리에 대해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분열된 교회는 연합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연합을 위한 노력은 반드시 진리를 찾는 과정이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작금의 복음과 구원이 빠진 교회협의기구에 대해서는 선지자적인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것이다.’
513 no image 그들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라도 있는데..._남웅기 목사
편집부
992 2017-07-19
그들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라도 있는데... < 남웅기 목사, 바로선교회 > 교회가 살아야 세상에 희망이 생긴다 금년 봄은 행복했습니다. 그렇다고 필자에게 무슨 호사가 생기거나 성도가 새로 등록하거나, 주위로부터 유별난 박수와 격려가 쏟아진 것도 아닙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되레 악재가 많았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차량이 느닷없이 급발진하여 남의 미용실을 치고 들어가기도 했고, 전립선 질환으로 1주일간 입원하며 무진 고통을 겪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악재를 덮고도 남을 기쁨이 넘쳤습니다. 비록 더 갖지 않고 더 누리지 못해도 가능한 기쁨과 행복이었습니다. 다만 감동적인 장면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하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한 건 새 대통령의 취임이었습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바람직한 조치들로 시민들의 눈물을 닦아 주었고, 그동안 응어리진 시민들의 가슴을 뻥 뚫어 주었습니다. 시민들과 어깨를 같이하면서 권력자의 겸손한 모습까지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유약한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닙니다. 어디서 그런 강단 있는 조치가 나오는지 지지자들조차도 놀란다고들 합니다. 41% 당선자가 90% 지지를 받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그가 내건 주요한 국정 지표가 바로 적폐 청산입니다. 지금 시민들이 기대하며 환호하며 설레는 주요인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적폐 청산이 모든 이의 기쁨은 될 수 없습니다. 그 청산의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얼마나 잠 못 이루며 고통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겠습니까? 모든 검찰이 다 그런 건 아닌 줄로 알지만 조직문화는 무섭습니다. 검찰 조직에 몸을 담은 이상 검찰의 모든 부정적인 요인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어디 검찰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정치, 교육, 언론, 재벌, 국방, 예술 어느 분야인들 예외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시민들은 법과 제도의 개혁을 촉구하면서, 또 한편 저들이 적폐를 청산하고 새 시대에 합류하기를 기대합니다. 스스로 청산하든지, 아니면 강요에 의해 청산되든지 말입니다. 문제는 이들의 비난과 원성의 대상 속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가 누구입니까? 곧 교회와 성도 아니겠습니까? 지금 세상은 우리를 향해 ‘교회도 적폐를 청산하라’고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인 교회와 성도들은 남의 일 보듯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혹 우리 중엔 ‘우리까지 적폐의 대상으로 삼다니’하며 분개할 이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허나 보십시오. 우리가 과연 저들과 다른 점이 있는가를... 2016년도 만인지탄의 대상인 최순실은 이 시대 적폐의 상징입니다. 그런 그가 교회 집사라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검사든, 방송인이든, 정치인이든 장성이든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세상과 그나마 다른 무엇을 보여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원래 어두운(타락한) 사회에 빛이 되고, 숨 막히는 현실에 신선한 새바람을 불어넣어 죽어 가는 대상들을 살려 내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역할은커녕 세상과 동화되어 있다면, 그 책임을 감당 못한 기능의 마비, 그게 곧 기독교와 성도가 청산할 적폐의 알짬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복음 전하고 경건에 매진하기도 바쁜데, 교회가 사회 개혁에 눈 돌릴 여력이 어디 있냐?” 이렇게 어깃장 놓으면 안 됩니다. 필자는 지금 우리가 사회 개혁에 눈 돌리자는 게 아닙니다. 교회 내부의 적폐 청산의 심각성을 거론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살아야 세상에 희망이 생길 테니깐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래의 그 모습을 잃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교회와 성도는 약한 것을 자랑하며 낮은 곳으로 내려앉아야 마땅한데 우리의 지금 모습이 어디 그렇습니까? 우리는 사실 십자가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힘을 더 비축하는데 진액을 쏟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노래해야 할 우리가 온통 내 힘을 추구하며 내 힘을 구축하고 있다면, 이게 곧 기독교의 적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를 통해 살림의 역사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영광을 교회가 오히려 가로막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 십자가를 가로막던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타락한 세상이 힘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거룩한 교회가 언제부터 이처럼 힘을 추구하며 그 거룩성을 스스로 던져 버렸는지 안타깝습니다. 그 해결책은 제각각 자기 힘을 빼는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힘은 세상에서 활용하기엔 더 없이 좋으나 하나님을 좇는 데는 결정적 장애물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기쁘심을 좇는 진실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잃어버린 교회라면 가짜 교회란 말인데 그건 너무나 끔찍한 가상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힘을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도 특허 낸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눅 16장의 부자처럼 말입니다. 가난과 실패와 무능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이 있음을 놓치면 안 됩니다. 세상은 지금 스스로를 적폐의 대상인 줄 알고 그 심판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오늘날 교회는 두려움은커녕 부끄러움마저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되레 자신의 교회를 영광의 본체인양 착각하고 있다면 이 일을 어떡합니까? 종교 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마당에.
512 no image 다윗의 ‘고엘’을 기억하자_김양호 목사
편집부
1016 2017-07-05
다윗의 ‘고엘’을 기억하자 < 김양호 목사_하누리교회,목포기독교역사연구소장 >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는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도 동일하다 “다윗 시대에 삼 년이나 내리 흉년이 든 적이 있었다. 다윗이 야훼께 곡절을 물으니 야훼께서는 사울과 그의 가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여 살인죄를 지은 탓이라고 하셨다... 다윗 왕은 사울의 가문에서 7명을 기브온 사람들 손에 넘겼다. 기브온 사람들은 산 위에 올라 야훼 앞에서 그들 일곱을 한꺼번에 나무에 매달아 죽였다”(삼하 21:1~9). 히브리 민족이 살아가는 이스라엘 나라의 기근은 예사롭지 않았다. 건조한 땅인 팔레스타인에, 그것도 3년씩이나 기근으로 흉년의 세월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필경 죄에 따른 심판의 성격이 짙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여 무고한 피를 흘린 까닭이다. 아모리 사람인 기브온 족속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전쟁 때 멸족을 면하기 위해 거짓으로 위장하여 여호수아와 화친조약을 맺고 이스라엘의 종노릇하며 살아가던 자들이다(수 9장). 그러데 사울이 이 평화조약을 어기고 민족 차별을 일으키며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 억울함에 대해 그와 방불한 원한을 풀어주길 기대하며 합법적 처형을 요구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한 ‘고엘’ 제도에 따른 것이다. ‘고엘’은 응당한 책임, 사회적 보호로서 일종의 사법적 정의이며, 가난한 자를 돌보는 사회복지 제도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의 청을 받아들여 사울 집안의 아들과 손자 7명을 넘겨주고 그들의 사형 집행을 야훼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는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동일하다. 소수민족으로 종노릇하던 기브온이기에 감히 국가 사회적으로 억울함을 토로하고 쟁론화하지 못하며 속병 앓고 지내야 했던 그들의 신원을 하나님이 들어 주신 것이다. 갑작스레 3년씩이나 흉년이 들게 한 까닭은, 다윗과 온 나라로 하여 각성하게 하고 국정조사를 벌이게 하여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도록 한 것이다. “야훼여, 악한 자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횡포한 자의 손에서 나를 보호하소서... 야훼여, 당신께서 억울한 자에게 권리 찾아 주시고 가난한 자에게 정의 돌려 주심을 나는 압니다”(시 140편). 억울한 자의 피맺힌 한을 들어 주시고 신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은 차별이 없으며 선이다. 원수를 멸하고 사악을 징벌하는 엄밀하고 철저한 심판은 당신의 자녀를 용서하고 구속하는 구원의 은총과 맞닿아 있다. ‘고엘’ 제도를 어김없이 시행하는 다윗의 처사와 정의 회복을 보며, 우리 현대사에 너무 가슴 아픈 ‘반민특위 와해’ 사건을 떠올린다. ‘반민특위’가 제대로 역할을 다 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 벌어진 억울함과 훼손된 민족정기를 그래도 상당한 수준에서 회복하고 바로 할 수 있었을 터이다. 민족과 나라보다 개인의 야심이 더 앞섰던 권력자들과 친일파 출신들로 채워진 경찰들에 의해 반민특위는 와해되고 해체되었다. 그 결과는 왜곡되고 뒤틀린 역사와 어그러진 민족사를 이어가게 하였고, 계속해서 친일파에 의한 장기 집권 독재와 정의롭지 못한 반사회적 반공동체적 국가를 만들어 왔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고 국정을 농단하며 최순실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은 지난 시대의 오도된 역사가 미어터진 일이다. 박근혜, 최순실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지만 해방 이후 치유되지 못하고 오히려 굴절된 역사와 아픈 상채기로 고통하며 신음하는 현실 문제는 참으로 많기만 하다. 촛불 민의를 담은 이 나라의 민주 평화 열망은 새로운 정부를 세웠고 국민들의 마음에 새로운 소망을 일구게 한다. 나아가 이 땅의 사회 정의의 회복이 일어서야 한다. 개인의 죄악에 대해선 용서와 사법적 처리 시한이 있더라도 민족과 사회에 대한 역사적 공동체적 죄악에 대해선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많이 바뀌었어도 마땅하고 정당한 규명과 심판이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 이 땅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며 다시는 엉터리 거짓된 자들의 참극을 피하기 위해서다. 고엘의 정의는 오늘 우리 역사에 반드시 제대로 세워져야 한다. 금수강산 대지의 갈증이 더하는 시절, 시원한 장마라도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511 no image 교회의 대사회적 설득력을 회복하자_이종석 목사
편집부
1094 2017-06-21
교회의 대사회적 설득력을 회복하자 < 이종석 목사, 좋은교회_CCC사랑의호스피스 대표 > 진정한 영성 회복과 봉사와 섬김의 사회적 실천이 중요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는 폭발적인 성장을 계속해 왔던 한국교회가 80년대 중반부터 정체 내지는 감소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국민일보 부설 교회성장연구소의 한 통계에 의하면 교세 성장의 연평균 증가율이 60년대에는 41.2%, 70년대에는 12.5%, 80년대에는 4.4%, 그리고 90년대 이후에는 불과 3%미만 내지는 -1%로 나타나고 있다. 그 주요 원인으로 한국 교회가 다원화, 정보화, 민주화, 세계화로 치닫는 시대적 사회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데서 온 결과로 분석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가 교회로서의 신앙과 삶을 회복하지 못한, 즉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하고 있다. 지나치게 전통에 얽매인 형식적인 예배, 감동 없이 인간의 말로 받아들여지는 하나님의 말씀, 응답의 확신이 없는 습관적인 기도, 처음 사랑의 감격이 사라진 냉랭한 찬송, 십자가의 사랑이 메말라 버린 인간 중심의 교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높임 받기를 원하는 봉사, 교세 확장이나 교회의 이름을 내세우기 위한 선교, 성장지상주의에 사로잡힌 경쟁적인 목회, 더 나아가 불신자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는 언행불일치의 삶 등, 교회가 교회로서의 참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부끄러운 면들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공감하는 점들이다. 최근에 겪었던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일부 교계 지도자들의 지나친 극우적 발언 또한 젊은이들로부터 교회를 외면하게 하고 있다. 지금은 한국 교회가 그 존재로서의 사명을 감당키 위하여 대사회적 설득력을 시급히 회복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설득력 회복을 위한 많은 방안으로는 교회와 사역자들의 참된 영성 회복과, 봉사와 섬김을 통한 대 사회적 사랑의 실천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영성 즉 살아 있는 생명력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이루어 내는 일치와 화해, 기쁨과 진리, 사랑 같은 진정한 영성의 결과를 그 열매로 맺는데 이러한 열매들은 교회 안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이 올바로 선포될 때 맺어지는 열매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대인들의 내적 갈구에서 나오는 진정한 영성에의 요구, 하나님에의 요구, 그들 삶 속에서 체험하고자 하는 신앙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며 그 진리 안에서 기뻐하며 감사하고 행복을 누리는 것이 인간의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구현해 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진정한 영성 회복을 위하여 무엇보다 사역자들의 영성 회복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사역자들이 성령 충만한 영성보다 신학적 지식이나 학위를 지나치게 내세우고 겉으로 드러나는 교회 성장과 교세의 과시에 치중하는 현대 한국 교회의 문제들을 볼 수 있다. 현대 교회의 문제가 사역자들의 영성에 있다고 볼 때 사역자들의 영성 회복은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때보다 교회 지도자들의 삶이 바빠지고 시끄럽고 얽매이는 일이 많아져 점점 깊은 기도의 삶이 결여되고 있는데, 지금은 사역자들의 깊은 기도 생활의 열정을 회복해야 할 때이다. 교회의 대사회적 설득력 회복을 위해 또 하나 시급한 것은 봉사와 섬김을 통한 대 사회적 사랑의 실천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봉사와 섬김의 삶을 위하여 부름 받았으며 섬김의 삶은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특권이다. 참된 봉사와 섬김을 통하여 그 곳에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 줄 수 있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그 삶 속에서 구현하지 못하는 교회는 그 설득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의 한복판에서 순결을 회복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탁월한 능력으로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하여 그 존재로서의 사명을 묵묵히 잘 감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곳곳에 있어 희망을 가져 본다.
510 no image 분단국가 교회 정체성과 통일선교_전득안 목사
편집부
1339 2017-06-02
분단국가 교회 정체성과 통일선교 < 전득안 목사, 새벽이슬교회_국제학 박사 > 한국교회는 분단국가 위에 서 있음을 인식하고 통일선교 사명을 잘 감당해야 개인의 정체성은 선천적이면서 동시에 교육과 경험으로 만들어진다.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도 있다. 이는 국가적, 민족적 공동체의 장시간의 동일한 경험과 교육으로 형성된다. 한국교회는 확연히 구별되는 한 가지 정체성이 있다. 이는 곧 ‘분단국가 교회 정체성’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한국교회는 분단국가 위에 세워져 있다는 현실을 생각보다 많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분단국가의 현실이란 무엇보다 남북의 군사적 대치와 전쟁의 위협을 말한다. 이런 상황 인식하에 우리는 처음에 왜 싸우게 되었고 왜 아직까지도 싸우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이 불안을 평화로 바꿀 수 있는지를 고민하며 화해와 평화를 위해 가능한 노력을 다 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러한 상황인식과 변화를 위한 노력이 비교적 부족하다는 것이다. 선거철에나 득표를 위한 정치인들의 극단적 편가르기의 도구로 남북한의 분단 상태를 이용할 뿐이고 교회조차 이러한 정치적 활동에 휘둘리거나 혼란을 겪곤 한다. 교회는 개인의 영역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 국가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화해자로서의 역할을 순전하게 감당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분단국가 교회 정체성이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로 인해 비참하게 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회복을 위해 순종하신 것처럼, 한국교회가 분단국가 위에서 받은 사명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 분단국가 교회 정체성을 인식하고 그 사명을 실천한 모델이 독일 교회이다. 의외로 잘 안 알려진 사실은 1989년 10월 9일 독일 통일의 물꼬를 튼 것이 바로 독일의 교회였다는 것이다. 당시 동베를린 라이프치히의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8년 째 매주 월요일이면 쉬지 않고 평화를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그들은 평화를 상징하는 촛불을 들고 전쟁 반대, 인권, 평화를 위해서 기도했다. 동독 비밀경찰과 정부의 탄압과 방해에도 ‘월요 평화기도회’를 결코 쉬지 않았다. 이처럼 독일의 교회는 단지 개교회의 부흥이나 개인의 복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나라가 처한 위기와 하나됨을 위해 교회가 할 일을 깨닫고 이를 실천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일 교회처럼 한국교회가 분단국가 교회 정체성으로 통일을 준비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제안을 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목회자들이 좌우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을 갖춘 성경적 통일관을 견지할 때 통일 시대를 준비하고 리드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젊은 신학생들 중에는 이미 통일시대 목회를 준비하고 있는 예비사역자들이 상당히 많다. 6월은 현충일과 6.25 기념일이 있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성도들 중에는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도 있고, 그 가족들이 있으며 탈북민도 이미 3만 명이 넘는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이미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균형 잡힌 통일관을 가진 목회자들이 이들을 위로하고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과 북한 선교를 준비해야 한다. 둘째, 통일목회를 목회자 혼자 다 할 수 없으므로 통일 전문가와 손잡고 전문적인 자료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통일 관련 사역과 통일을 주제로 한 설교를 준비하기 위한 책이나 자료들이 다양하게 있다. 이미 각 도시마다 통일선교를 위해 정기적인 기도 그룹도 활발히 사역하고 있으며, 통일선교아카데미나 기독교 통일준비학교도 있다. 이런 건전한 단체와 그 사역들은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고민하는 목회자와 교회들을 돕고 있으니 이들과 협력하는 방법이 있다. 셋째, 시대와 상황에 맞는 다양한 통일선교 사역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통일은 교회 홀로 준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세계정세와 정치적 변화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특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통일 준비’라는 시대적 필요에 한국교회는 진실하게 응답해야 한다. 지난 5월, 새로운 정부가 출발했다. 이전과는 또 다른 대북정책이 운영될 것으로 예상된다. 권세를 세우시고 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한국교회는 새 정부의 정책을 위해 기도하고 그에 맞는 전략을 잘 세워 통일 준비와 통일선교에 쓰임을 받아야 한다. 통일은 이미 우리 옆에 가까이 왔음을 인식하자.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국제정세 속에서 남북한의 통일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가 이를 위해서 분단국가 교회 정체성을 재인식하고 준비하며 기도할 때 통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주시는 큰 선물이 될 것이다.
509 no image 예언이 실패할 때 (When prophecy fails)_정요석 목사
편집부
1285 2017-05-24
예언이 실패할 때 (When prophecy fails) <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 인지부조화와 확증편향 및 자기 합리화를 벗어나 자신과 이웃을 올바로 인식해야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라고 말한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는 그의 책 『예언이 실패할 때』에서, 예언이 실패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씨는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예언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954년에 미국에서도 말세론을 믿는 자들이 가정과 직장을 떠나 한 곳에 모여 자신들을 데려갈 비행접시를 기다렸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예언이 실패하였을 때 추종자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일부는 자신들이 틀렸음을 알고 종말론을 버렸다. 하지만 일부는 여전히 교주를 떠나지 않았고, 자신들의 믿음이 약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더욱 광신적 행태로 변해갔거나, 날짜 산정에 오류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한 번 가진 믿음과 생각을 수정하거나 버리는 대신에, 현실과 사실을 그에 맞추어 해석한 것이다.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내가 아는 어느 목사는 몇 년 전에 위임투표를 했다. 그는 통과를 확신하였다. 자신을 미워하는 몇 장로들과 권사들의 눈치를 보느라 성도들이 적극적인 지지를 외적으로 보내지 않지만 대다수는 자신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낮은 득표율로 실패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서 부족함을 찾지 않고, 성도들에게서 문제점을 찾고 있다. 그 인식과 그 자세로 개척교회를 하여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고, 여전히 자신의 설교와 목회의 깊이를 못 알아주는 현실과 사람들을 비판할 뿐이다. 아직 젊은 그가 자신을 계속 합리화하려는 성향을 고치지 않는 한 그의 목회와 대인관계는 계속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바로 왕은 열 번의 이적을 경험하면서도 마음이 강퍅했다. 여전히 자신의 권위와 생각에 머물러 하나님과 모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장자들이 모두 죽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홍해에서 몰살당하는 처절한 패배를 맛보았다. 이세벨은 어떠했는가? 바알의 선지자 450인이 죽을 때에, 남편 아합이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죽고, 그 피를 개들이 핥을 때에 깨달아야 했다.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예언이 그대로 집행되고 있음을 빨리 받아들여 행실을 고쳐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인지부조화에 빠져 여전히 강퍅했고,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려 했고, 그 결과 자신의 아들들과 손자들이 모두 죽는 아픔을 당했고, 그녀 자신은 창에서 내시들에게 떠밀려 피가 담과 말에게 튀는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그녀는 죽기 직전에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예후를 바라보았다(왕하9:30). 인지부조화에 빠진 이들은 죽음 직전에도 허상의 미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미 펼쳐진 현실과 사실이 어떻게 변하겠는가? 그것을 바라는 자신의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 현실과 사실 앞에 냉철해야 한다.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늘 인정하며 사실에 자신을 맞추어야지, 자신의 틀림을 계속 합리화하려고 하면 안 된다. 사실을 자신의 견해에 맞출수록 현실을 힘들게 살 뿐이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후 다른 방법이 없을 때에서야 비로소 현실을 인정하며 자신을 바꾼다면 이 얼마나 서글픈 인생인가? 사람이 어떻게 사물을 인지하고 신념의 정당성을 갖는지 살펴보는 인식론은 철학의 3대 분야에 속한다. 조직신학은 신론을 배우기에 앞서 내적인식원리와 외적인식원리를 다루는 서론을 먼저 배운다. 자신이 어떤 견해를 갖는지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왜 이런 견해를 갖는지 자신의 깊은 전제(前提)를 살피는 자는 더 훌륭하다. 상대방의 견해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이 왜 그런 견해를 갖는지 그의 전제와 목적을 살피려 하고 그에 맞추어 절충점을 찾으려 하는 자는 더 훌륭하다. 인지부조화에 빠진 이들,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만 편향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견해를 더욱 공고히 하는 확증편향에 빠진 이들은 주변 사람들을 매우 힘들게 함을 알아야 한다. 어느 유서 깊은 호주의 신학교는 인식에 관하여 신학과 철학과 심리학의 입장에서 무려 3학기 동안 신학생에게 가르친다고 한다. 목회하는 이들에게 “인식”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성도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목사는 얼마나 많은 이들을 아프게 하는지 모른다. 무엇을 읽고, 어떤 지식을 습득하기 전에 내가 올바로 인식하고 있는지 살피고 살펴야 하고, 자신도 모르는 전제가 무엇인지 또 살필 일이다.
508 no image 사회 참여와 교회의 소명_최덕수 목사
편집부
1263 2017-05-10
사회 참여와 교회의 소명 < 최덕수 목사, 현산교회 > 새로운 정부가 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새 정부에게 거는 기대와 소망은 조만간 상실감과 낭패감으로 바뀌게 될 지도 모른다. 바사 왕 고레스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사45:1)로 불렸으나 그가 진정한 메시야는 아니었듯이,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구원할 구원자가 새로 임기를 시작하는 대통령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세상 권세자에 대한 어떤 기대나 소망도 갖지 않고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 지는 식의 타계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 주권을 행사 한 다음 교회는 자기 본연의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헤르만 바빙크는 교회의 소명은 “모든 세대에 걸쳐 사람들의 생각을 굴복시켜 성경 속의 하나님의 뜻에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교회가 소명 받은 모든 활동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헌신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사회 변화는 죄로 인해 오염된 인간의 지정의가 새롭게 되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 일은 복음 전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 일부는 복음 전도보다 사회 개혁에 중점을 준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일은 이 정도로 해두고 이제는 사회 개혁의 주체로 나서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권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신자가 정치와 사회 참여 운동에 지나치게 가담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이 견지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신념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그 안에 자기 의의 기반을 두게 된다. 그리고 자기와 같지 않은 이들을 ‘행동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 비난하게 되고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복음을 가볍게 생각하게 된다. 사회 개혁에 너무 깊숙이 발을 들여 놓았다가 복음을 이념화시킨 사회복음주의자들의 실수를 또 다시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사회 참여를 하는 이유는 사회 참여에로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문을 열기 위한 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들어온 초대 선교사들이 교육과 의료 사업에 종사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복음 전도와 사회 개혁 운동은 양극단에 있지 않다. 이런 사실을 알았던 19세기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요 설교자였던 토마스 챨머스 목사(1780-1847)는 “진정한 개혁은 인간의 내적 개혁을 통해서 오는 것이지 정치 구조 개혁이라는 외적인 변화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필자는 교회가 세상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키는 방식은 무력이 아닌 복음 전도를 통한 회심임을 믿는다. 죄인이 거듭나고 회심하면 사회 문제는 최소화되며 혹 사회 문제가 발생해도 기독교적 가치관을 따라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사회가 복음화되면 현재 핫이슈가 되어 있는 성소수자 차별 금지법을 제정하는 일들은 말조차 꺼낼 수 없는 분위기가 될 것이다. 물론 교회가 복음전도에만 열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 복음 전도의 주체인 신자의 신앙 인격이 변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 참여에 실패하는 원인은 의지의 박약함과 소신의 부족이 아닌 성화되지 못한 신앙 인격에 있다.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고 나선 시민 단체와 사회적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이 종국에는 비난을 받는 이유도 신앙 인격의 부족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신자는 자기를 부인하는 일에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이루어가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사회 변화는 교회의 소명에 충실함으로 맺어지는 자연스러운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오늘날 스위스 제네바에 UN에 속한 기구와 구호 단체들이 유독 많은 이유는 칼뱅이 제네바시를 복음화하고 구제에 힘썼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 사회가 기독교화된 것은 노예 제도를 폐지하는 일에 앞장섰던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나 고아들을 위하여 평생을 헌신했던 죠지 뮬러(1805-1898), 그리고 노예 해방 운동에 앞장섰던 인도 선교사 윌리엄 캐리(1761-1834)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구현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처음부터 세상을 바꿔 보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속한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였고 그 결과 사회가 변화되는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새로운 정권이 출발했다. 교회는 새 정부가 국정 운영을 올바로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어야 하고 권세 잡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사회 참여는 교회가 전면에 나서는 방식을 지양하고 개인적으로 사회 공익에 이바지하는 길을 모색하며 가정과 사회를 비롯한 삶의 전반에 기독교적인 가치를 구현하도록 지도하고 독려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사회 참여를 하는 가장 바람직한 길이다.
507 no image 대통령과 목사의 최우선 소임_장재훈 목사
편집부
1205 2017-04-19
대통령과 목사의 최우선 소임 < 장재훈 목사, 내흥교회 > 교회와 목사들의 최우선 소임은 진리 준수와 파수 대통령 취임 선서문의 첫 부분은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입니다. 새롭게 대통령이 된 국가 지도자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선서는 “헌법을 준수하고”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대통령이 해야 할 가장 최우선 소임이 헌법 준수라는 것입니다. 왜 헌법 준수입니까? 헌법이란 국가의 통치 체계의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자기 주관대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헌법을 통해서 통치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대통령에 있어서 가장 최우선 소임은 헌법 준수입니다. 혹 헌법을 제대로 준수하지 못하는 대통령은 탄핵과 파면을 당합니다. 우리는 지난 3월 10일 이런 사실을 목도했습니다. 이처럼 최우선 소임을 감당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목사들은 어떻습니까? 목사들의 최우선 소임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에 대한 질문 하나는 이것입니다. “어떠한 핍박이나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참고 견디며, 교회의 화평과 성결을 위하여 헌신하며 복음의 진리를 보호할 것을 서약하겠습니까?” 그래서 목사들을 가리켜서 진리를 준수하고 파수하는 하나님의 군병이라고 말합니다. 그 중에서도 진리를 파수하는 장교 군병들이라고 합니다. 사병들보다 더 진리 파수와 준수에 충성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군인의 최우선 소임은 목숨을 걸고 적군의 공격과 침투를 막고 사랑하는 국가와 국민과 가족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명이 부족한 사람은 직업 군인, 하나님의 장교 군병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진리의 적군인 이단들의 공격이 대단합니다. 눈만 뜨면 매 순간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 진리 전쟁이 치열합니다. 과거 이단들은 숨어서 조용히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이단들은 당당하게 드러내 놓고 활동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거나 반대하는 총회, 노회, 교회들 앞에 가서 온갖 시위를 합니다. 이로 인하여 심장이 약한 하나님의 장교 군병인 목사들은 당황하고 불편해 하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어떤 목사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총회가 이단을 규정하니 이단들이 자기 교회 앞에 와서 시위하고 위협하고 시끄럽게 해서 불편하고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러니 이단을 규정하지 말고 손대지 말자”고 말합니다. “괜히 이단이라고 규정하여 부스럼을 만들지 말자”고 말합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주장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기본적인 목사의 자세가 아닙니다. 아무리 불편하고 괴롭고 위협을 당하고 순교를 당하더라도 진리 준수와 파수는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상과 결과가 어떠하든지 목사의 최우선 소임은 진리 준수와 파수입니다. 도리어 적군이 공격하고 침투할수록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하여 방어를 하고 강하게 맞서야 합니다. 그것이 군병과 목사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런데 진리 파수에 대하여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은 탄핵과 파면감입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이단들의 공격과 위협과 시위 때문에 총회가 이단 조사와 규정을 소극적으로 하라는 뜻의 말씀은 없고 그 반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진리 준수와 파수를 위하다 순교 당했습니다. 대통령이 변질되고 최우선 소임을 망각하면 헌법을 적극적으로 준수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다룹니다. 군인이 군인의 사명을 망각하고 군기가 약해지면 제대로 방비하지 않고 적군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고 숨거나 도망가거나 전쟁을 피해 버립니다. 목사가 가장 중요한 진리 준수와 파수 소임이 약화되면 이단에도 관심이 없고 그저 편안한 목회에만 관심을 갖게 됩니다. 총회에서의 이단 규정에 대해 불편해 하거나 소극적으로 나옵니다. 교회와 목사들의 첫 번째 소임은 진리 준수와 파수입니다. 이 소임을 소홀히 하고 다른 것을 열심히 하는 것은 사상누각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우리 속에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각성하고 다시 처음의 신앙과 마음으로 돌아가 목사의 최우선 소임인 진리 준수와 파수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506 no image 이젠 아픔을 딛고_안두익 목사
편집부
1318 2017-04-05
이젠 아픔을 딛고 < 안두익 목사, 동성교회 > 대한민국에 몰아친 시련의 태풍을 믿음으로 이겨 내고 도약의 기회로 봄이 성큼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추위에 움츠렸던 모든 것들이 기지개를 켜고 여기저기 꽃샘의 시샘을 받아가면서도 봄을 알리는 꽃망울들이 터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3월 10일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국회의원 234명의 찬성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고, 91일 만인 3월 10일에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8명 전원 일치의 판결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인용이 선고되었습니다. 이로써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파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탄핵이 결정된 지 불과 3주 만에 구속 수감이 되었습니다. 그 112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우리나라는 참으로 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고,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해야 했습니다. 탄핵 인용을 주장하는 촛불 시위하는 사람들과 탄핵을 반대하는 태극기를 든 사람들 사이에 반목과 갈등으로 인해 심각한 국론 분열이라는 고통을 겪어내야 했습니다. 재판의 결정이 나기까지 서로 자기들의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웠던 사람들도 이제는 사법부의 결정을 기꺼이 수용해서 그동안 탄핵 정국으로 인해 감수해야 했던 온갖 아픔과 국제 정세 속에서 감내해야 했던 불이익을 극복해 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마치 100여 년 전 세계 열강이 조선을 잡아 삼키려 하던 때와 흡사한 형국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사방에 욱여쌈을 당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외환위기 때보다도 더 어렵다고 느껴지는 내수 침체와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강화되고 있는 미국의 자국보호주의, 그리고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 등을 고려하면 말 그대로 '내우외환'이라는 말이 딱 맞는 우리 시대의 상태입니다. 사방에서 우리의 목을 조여오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사정은 어떠합니까. 실물 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가장들은 실직하고 조기 퇴직자들이 비정규직으로 몰리면서 청년 실업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이런 통계를 보면 이 나라가 다시 일어 설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주저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합니다(롬8:28). 이 시련의 태풍을 잘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여름철이 지나면서 예외 없이 태풍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피해를 많이 준다고 생각하고, 태풍이 오는 것을 별로 반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풍은 우리에게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마다 겪는 현상 중에 하나가 바로 적조 현상입니다. 적조 현상이 일어나면 바다의 물고기 떼들이 몰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적조 현상이 일어나니까 생명체들이 숨을 쉴 수 없고 흙을 붓지만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죽음의 힘이 임하니까 아무리 몸부림쳐도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거대한 태풍이 몰아치면 한 순간에 해결이 됩니다. 태풍이 불면 바닷물이 뒤집어져 바닷물의 순환을 가져오게 되고, 이로 인해서 바다의 가장 작은 생명체인 플랑크톤의 움직임을 활발하게 하여 물고기들이 그 플랑크톤을 먹을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태풍이 주는 피해를 더 많이 생각하지만 실제로 태풍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그로 인해 생기는 피해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 인생에도 태풍이 불게 허락하십니다. 그로 인해서 나에게 여러 가지 유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거꾸로 태풍이 없다면 우리가 사는 지구나 우리의 사회가 더 큰 피해를 입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 태풍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평안할 것 같지만 그로 인해서 찾아오는 피해가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호는 태풍 속에 다시 한 번 도약의 기회를 맞이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때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왜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교회로 부르셔서 이처럼 살게 하십니까? 지금 한국 교회가 가장 필요한 것은 800만이다, 1,000만이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남은 자,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아직도 아물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에 십자가의 보혈의 생수를 흘려주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강수가 흐를 때 이 민족의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처방이요, 대안이 될 것입니다. 이 기회에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명의 깃발 아래 믿음의 사람들이 모일 때, 그러한 숫자가 100만만 되어도, 아니 10만만 되어도 하나님은 이 나라를 강하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이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민족의 비상을 기대해 봅니다.
505 no image 사유하고 공유하며_변세권 목사
편집부
1298 2017-03-22
사유하고 공유하며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강원노회장 > 사유하고 공유하며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진행하시는 말씀에 순종하자 우리는 커다란 시대적, 사회적 아픔을 겪고 다시 아무도 가 보지 않은 미래의 길을 의심과 불안, 염려와 걱정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거기엔 분명 희망도 있다. 그동안 우리는 속 깊은 성찰의 시간들을 보내 왔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쓴 인문학자 최진석 교수는 ‘성숙한 개인은 자신의 개인적 성숙을 통해서 이미 사회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독립된 주체가 발휘하는 인문적 용기는 문명이나 국가, 인간이나 인류의 방향과 관련되는 일이므로 이미 사회적이다.’ 라고 말한다. 박영선 목사는 ‘기독교 신앙은 사적 영역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도 작동해야 한다. 지금까지 개인적 차원에서만 해명되었을 뿐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하지 못했다’라고도 했다. 우리는 이런 사회적 혼란기에 개인적 사유의 높이와 깊이를 사회적 공유의 가치와 삶으로 나누고 함께하며 실천하는 자리에까지 왔다. 이런 것들은 거대한 명제나 명분, 구호나 주장이 아니라 기본적이고 원칙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언어의 훈련, 지성의 훈련, 혼란의 훈련을 잘 연습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에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기회를 맞고 있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일수록 이 모든 조건과 환경을 이겨내고 나아가는 실력 있는 시민이고 신자여야 한다.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과 신앙의 선배들 다수가 한심하고 낯선 이방 적국에서 그들의 신앙이 성장했다. 칼빈도 정치적으로 가장 취약했었던 제네바의 불안한 사회배경에서 제네바 교회의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 교회법을 제정했다. 심지어 사무엘도 엘리 제사장의 무력한 시대에 태어나 성장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이 잘 되는 것인지, 무엇이 좋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배울 틈이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일찍이 교회는 영향력은 있을지언정 권력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을 중세 교회에서 배웠다. 이제는 종교적인 기능과 역할에만 머무는 신자가 아니라 그 시대의 상식과 문화, 사회적 흐름을 알고 표현하는 앞뒤 문맥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사회적 책임은 한국 교회의 수준과 함께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교인 수준에만 머물지 말고 인간의 보편적 호소와 삶으로 나아가는 인문학적 소양도 필요하다. 사람은 잘해서 얻는 결과보다 못해서 얻는 결과가 더 크다. 잘못한 것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한 것으로 하나님이 담으시는 것은 잘해서 담는 것 그 이상의 것이 된다는 뜻이다. 물론 잘해야 한다. 잘하는 것은 우리의 명예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가 잘못하면 불명예이지만 그것이 역설적으로 훨씬 많은 것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그것마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을 딛고 다시 잘하면 된다. 우리 어떻게 다시 살아가 볼까? 그것은 더 이상 욕심을 내지 말고 우리의 실력만큼 오늘 하루와 이 시대를 살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이런 과정을 거쳐야 행복하다. 여기를 통과할 줄 아는 인문학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 안목, 용서, 분별... 이런 것들이다. 이것이 인간성을 구성하는 가장 본질적인 내용이다. 교회와 사회의 난국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게으르다는 것, 이기적이라는 것, 허영심이 많다는 것,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것. 이런 것들을 배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우리는 차제에 인간이라는 존재와 가치체계에 대해 다시 사유하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만들고 해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무엇이 되느냐에 목적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섭리하시는 계시의 뜻에 긍정적으로 참여하는 자발성을 가지고 우리 신자의 인생을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우리를 붙드시는 데에만 있다. 이제 우리는 경직되고 낡은 사고의 틀을 벗고 다시 한 번 우리의 정신과 가치, 물질을 나누며 공유하는 사회적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책임을 개인적으로 감면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격려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하고 권력도 변한다. 이 세상에 대단한 것은 없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이나 교회에 대해 전체적인 배경을 이해하고 그 수준을 높이는 지성을 가져야 한다. 이제 우리 모두 말씀의 권세를 높이고 주님의 형제간에 서로 존경하는 성령의 공동체를 지향하도록 하자. 열린 마음으로 사유하고 공유하며 겸허히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진행하시는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와 세상으로 만들어 가자.
504 no image 문명, 그리고 우리의 믿음_윤여성 목사
편집부
1484 2017-03-08
문명, 그리고 우리의 믿음 < 윤여성 목사, 수지열린문교회 > 첨단의 현대 문명에 대해 깊은 신앙의 성찰을 통한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요즈음 세간에 회자되는 말 중에는 카페인 중독이란 말이 있다. 이는 단순한 카페인 음료에서 온 현상만을 의미함은 아니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중독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첫 글자를 딴 신조어로서 그것에 나타나는 금단 현상을 이겨 내지 못해 우울증을 앓거나 불안에 시달리는 증상이다. 그야말로 과학 문명이 우리 삶과 내면에 깊은 곳까지 다가와 있다. 2016년도에 있었던 세계 지도자 회의인 다보스 포럼에서는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주제로 모임을 갖고 의논했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빅데이터, 사물 인터넷, 인공지능 같은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로 인한 가상 세계의 구현을 통한 온라인의 일상화에 대해 논의한 것이다. 정말 그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우리 교회에서도 금년 들어 연초 행사로 그런 가상 현실 등 새로운 시대를 대비하는 교인세미나를 개최했다. 그 유익도 컸지만 적잖이 놀란 성도들 가운데는 그런 주제가 교회의 세미나 주제로 합당한지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인 사람도 있어서 이해를 구해야만 했었다. 문명의 창조란 본래 에덴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과 같은 것이지만 가인 이후 죄로 인한 오염과 타락은 크게 왜곡된 결과를 낳았다. 오늘의 성도들은 첨단의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자들로서 현대 문명에 대해 깊은 반성과 신앙의 성찰을 통한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그것을 배타적으로만 보지 말고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판단과 능력도 배양하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합당하리라고 여겨진다. 4차 산업 사회의 문명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더불어 이 시대의 주인공다운 삶의 모습들을 철저히 인식하도록 해야겠다. 하나님 없는 불신의 세상과 인류에게만 미래를 맡기는 소극적인 태도로 어찌 창조주의 축복된 삶을 인류가 함께 충만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인터넷 스마트폰 등을 넘어 10년 내에 다가올 다양한 분야에서의 인공지능 로봇들의 각 영역에서의 사용과 자율주행차들의 거리 활보는 물론, 최고 수준의 인공지능 예술 작품들까지도 감상하러 갤러리에 다니게 되고 우주 여행도 계획해야 할 날이 올 수도 있다. 우리 세대의 변화의 물결 속에서 문명이 갈 길을 잃게 하지 않도록 그것을 사용하는 교회와 성도가 먼저 바른 안목을 가짐으로서 축복이 저주가 되지 않도록 적극적 대응과 태도를 가져야만 하겠다. 이 글을 쓰는 동안 필자의 스마트 폰의 카카오톡 신호음이 계속 울리고 있다. 저 멀리 유럽, 중동, 그리고 북미 등에서 목회와 선교 활동을 하는 친구들이 다른 동기 친구의 부모님의 장례에 대해 조의를 표하며 서로 위로를 함께 나누는 중임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카카오톡에 있는 동기 친구들만의 나눔 방을 자주 들어가진 못하지만 그 교제의 풍요로운 공간이 주는 삶의 기쁨은 참으로 큰 것 같다. 매일 멀리서 다가오는 손녀딸의 귀여운 동영상과의 만남으로 피곤한 하루를 마감하는 일도 내게는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기쁨이다. 하나님의 큰 사랑 속에서 문명의 혜택과 편리함들을 누리되 다만 성령 안에서의 절제가 필요하다. 상대방을 배려함을 기억하며 익명성, 중독성에서 비롯되는 해악을 경계할 수 있다면 그 선물은 진정 이 시대 사람들만의 축복이 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현대 문명을 이루어 가도록 우리 모두가 거룩한 책임감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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