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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no image 존 뉴턴의 권면_변세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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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1 2006-12-20
존 뉴턴의 권면 변세권 목사_온유한교회 1787년 영국, 한 젊은 국회의원이 노예제도 폐지 법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노예매매가 골치 아픈 문제이긴 하지만 만일에 중단되면 경제 적 파산을 우려하는 상황이었으며 노예매매를 죄악시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노예매매 극성했던 영국 윌버포스는 “나는 노예매매를 폐지하기 위해 싸울 것을 굳게 다짐한다. 전 능하신 하나님은 내게 두 가지 과업을 주셨다. 그것은 노예제도의 폐지와 관 습의 개혁이다”라고 결심하고 50년 동안 거대한 의회의 반대와 폭력적 위협 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성취했다. 역사가 트레벨 얀이 그 일은 “세계 역사 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라고 평가할 정도로 한 사람의 결심을 통 해 영국과 유럽의 역사 전환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윌버포스도 한 순간 자신의 정치 소명을 잃을 뻔했던 때가 있었다. 그의 나이 25세, 그는 정치를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고민하고 있었 다. 그때 당시 노예 상인으로 살다가 회심하여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 신...”을 작사했던 존 뉴턴이 윌버포스를 설득했다. 하나님께서 그가 목회 자보다 정치인으로 남기를 원하신다고 말했다. “나는 주님이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당신을 세우셨다고 믿고 있으며 또 그 렇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윌버포스는 많은 시간을 기도하고 뉴턴의 권면이 하나님의 소명임을 깨달았 다. 만일에 존 뉴턴의 권면이 없었다면 영국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소명(Call)은 구원과 동의어다. 소명(부르심)은 이중적이다. 그리스도를 따 르는 자로 부르신 일차적 소명과 가정 주부로, 법조인으로, 교사로, 직장인 으로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게 하시는 이차적 소명이 있다. 하나님 께서는 다양한 직업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다. 그러나 윌버포스의 경우처럼 우리는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잘못 판단하고 엉 뚱한 길을 걸으려 할 때가 많다. 찰스 스펄젼은 목회 사역의 소명에 대해 이 렇게 말했다.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느끼십니까?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해 보십시오. 그 것이 가능한 한 소명이 아닙니다.” 그렇다. 거룩한 소명을 느끼지 못한 사람이 외로운 광야에서 한 사람을 준비 하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훈련을 감당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진리로 섬기고자 하는 타오르는 열망과 잃어버린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영 혼의 연민과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것밖에는 더 이상의 소망이 세상 에는 없다고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거룩한 결단이 그의 의식 세 계 속에서 확인되는 사람만이 그 길을 가야한다. 소명 받지 않는 세속적인 사역자가 하늘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인 것처럼 자 신을 위장하는 것처럼 어려운 게 없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필자도 목회 를 하다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거나 열매없는 사역의 결과를 볼 때 “나는 아닌가 봐! 내가 정말 하나님이 허락한 종일까?”하며 소명이 흔들 릴 때가 있다. 혹 주님께서 부르신 1차 소명자가 아닌 것 같고 내가 자원하여 2차 소명으 로 이 길을 가는 것 같은 불충한 사역자 같아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2차 자원 소명자라 목회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 때도 있 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첫 번째 부름은 철이 없어서 주님을 실망시켰다 할 지라도 두 번째 소명만큼은 그렇게 살고 싶 지가 않다.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 게 쓰실지 모른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 모든 사람에게 맡기신 일이 다르며 또한 일을 맡기는 시 기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베푸시는 구원에 동참한 사람이다. 최후 한 사람을 위한 목회 우리 안에 들어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비롯한 최후의 한 명까지도 구원 해 내기 위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찾아 들어가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 고 목회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목회! 그래도 해야 되지 않겠는가?
202 no image 교회가 극복해야 할 양극화 체제_나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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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1 2006-12-13
교회가 극복해야 할 양극화 체제 나종천목사_한사랑교회 요즘 우리나라의 화두는 양극화이다. 얼마 전 어느 목회자 모임을 갔을 때 우리나라 최고의 지도자까지 북의 지령을 받아 세워진 빨갱이 세상이라는 말 에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아가는 내겐 너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많은 것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극단적 양극화 현상 보여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양극화 현상은 경제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지역간, 세대간, 노사간 등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모든 부분들의 양극화 현상 원인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경제적인 것에서 비롯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제도 자체의 속성이 양극화 현상의 근본원인이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공감을 할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어디나 다 양극이 있 다.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가 있고, 부한 자가 있으면 가난한 자 가 있고, 좌가 있으면 우가 있는 법이다. 물론 그것이 양쪽으로 극단화되면 그 때문에 사람과 사회가 다치게 되지만 그렇지만 않다면 어느 정도 양극을 서로 인정하고 화해하며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훨씬 더 사회적인 건강을 위 하여 좋을 것이다. 지금 우리 교회와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다시 사람을 보는 눈이 복음으로, 성경으로 돌아와야 한다. 예수님이 사람을 어떻게 보셨는가? 사람 들이 모두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보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녀를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로 보고 계셨다. 우리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창녀로 본다. 왼편 성향의 사람은 빨갱이 로, 오른편 경향의 사람은 꼴통으로 본다. 부자는 도둑놈으로, 가난한 사람 은 불만으로 가득한 난동자로만 본다. 우리에게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 다. 복음의 핵심은 사랑이다. 복음중의 복음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다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세상을 사랑하신다. 우리와 세상이 마치 타락한 탕자와도 같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 질 받는 창녀 막달라 마리아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다. 사람들은 이데올로기를 중히 여긴다. 사상을 중히 여긴다. 그러나 사 상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상보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때 그 문제를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우리 사회가 좌향이냐 우향이 냐 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사회가 자기와 다른 사람을 전혀 용납하려고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보다 사상이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어, 자기 와 다른 사상과 이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적군처럼 취급하며, 심지어는 마 귀처럼 취급한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신다. 모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신다. 이제 교회나 교계가 너무 이념과 사상 논쟁이나 양극화 현상에 깊이 개입하 여 서로 나누지 말고 이 땅에 수많은 영혼을 주님은 어떻게 보고 계신가를 묻고 다시 주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상보다 사랑이 앞서야 무엇보다도 “목자는 내 양을 알고,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우리 밖에 있 는 양을 우리 안으로 들이는” 참 목자의 길을 걸어갈 때 한국 교회의 미래 가 달라지게 될 것이며, 그런 달라진 우리의 모습을 주님은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201 no image 높이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_정문영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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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9 2006-12-06
높이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정문영 장로_큰빛교회, 총회 부회계 며칠이 지나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세계적 절기 인 성탄절이다. 이즈음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의 목적을 살피는 것은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성육신 의미 되새길 때 누가복음 19장 41-44절 말씀은 인류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이제 그 목적을 이루고 죽으시기 위해 예 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이다. 예루살렘 성 가까운 곳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축제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군 중들과 대조적으로 성을 보시고 비탄에 빠지셨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는 평화롭고 웅장한 자태의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선지자들을 능욕하고 돌 로 쳐죽일 뿐 아니라 또 예수님 자신을 죽이고 결국 심판으로 멸망할 예루살 렘의 미래를 보셨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세끼를 날게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고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 13:34). 이처럼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죄악을 애통해하는 마음으로 우셨다. ‘우시 며’라는 말은 ‘소리내어 통곡하는 행동’을 표현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는 주변의 많은 시선을 의식할 틈이 없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며 통곡 하셨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지금은 어떤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오직 예루살렘에 가까이 더 가까이 가 기만을 원하셨으리라. 이처럼 가까이 가기 위하여 성육신하셨고 친히 눈물 을 흘리심으로 그 백성들에게 죄를 인하여 나와 같이 울어야 함을 알려주신 다. 죄의 값을 해결하기 위해서 오직 죄없는 의인이 사망을 받음으로써 하나님 의 공의를 만족케 해야 한다. 이것이 절대 정확한 공평의 법이다. 그 공의 를 만족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모양과 형상으로 전인격적으 로 성육신하셔서 이처럼 가까이 오셨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과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기보 다는 하나님을 인간의 소욕과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끌고 내려오는 병이 들었다. 구원을 위해서 가까이 찾아오신 예수님을 끌어내려 자기들의 정치 경제 종교적인 목적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니 죽이고 말았다. 이것이 하나님 과 단절되고 죄성에 빠져 생긴 질병이요 멸망의 이유인 것이다. 이처럼 선민 이스라엘은 이 세상의 가치 평가 판단의 기준과 원리의 임시적 인 벽으로 둘러싸여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그 보내신 자를 죽이고 말았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처럼 오늘날 교회는 신의 성품 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기를 소원해야 한다. 그런데 크고 아름다운 교회, 재정적으로 안정된 교회, 복지 정책이 자리잡 은 교회만을 부러워하며 기회만 있으면 바꾸어 타려고 하는 모습을 너무 쉽 게 찾아 볼 수 있다. 모세가 쓰레기통에 버리고 바울이 배설물로 치워버린 스스로 속고 속이는 세 상의 원리와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보다 오히려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고 경쟁 하고 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욕심으로 가득 찬 세대 더구나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 을 수 없음에 숙연해질 뿐 이다.
200 no image 믿음이 있다는 증거_김성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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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0 2006-11-29
믿음이 있다는 증거 김성열 목사_총회 부회록서기, 오산양문교회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 한 믿음으로 산 증인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 라함 등 믿음으로 살다 간 선진들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 사람들이 살아간 믿음의 증거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 고자 한다. 모범 보인 믿음의 선진들 믿음의 사람들은 분명히 믿음이 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아벨은 제사를 통해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고,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는 증거를 받았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다는 증거가 있는가? 첫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 를 얻었으니 그는 예배를 통해서 구속의 은혜에 감격한 자이다. 믿음이 있다 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 닫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둘째,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에녹은 무드셀라를 낳은 이후 그는 종말의 때를 바라보고 하나님과 동행하 는 삶을 살았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은 믿음 의 삶이다. 믿음이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주여, 주여’ 하는 것 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아마 우리들이 가장 많이 실패하는 경우가 아닌가 생각된다. 믿음이 있는 삶 이란 세상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셋째,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 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하심에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했고, 아브라함은 하나 님의 부름에 순종함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 에 따라 행했던 모든 일들은 믿음으로 한 것이다. 그러면 믿음이 있다는 증 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나의 상황과 지식과 경험과 논 리를 앞세우지 않고, 어리석다고 여김을 받을 정도로 그 말씀에 ‘아멘’하 며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어떠한가? 이리 제고 저리 따지고, 나에게 불리한 말씀은 채로 걸러버리고,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씀이라고 판단되 면 마음 문을 닫아 버리고 만다. 믿음이 있는 삶이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100% 신뢰를 보이는 것이다. 넷째, 믿음이 있는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 알 수 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고난을 당할 때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먼저는 고난을 이겨 승리하는 믿음이고, 그리고 고난을 견디며 감 내하는 믿음이다. 이들의 믿음은 고난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 로, 가장 뛰어난 능력으로, 가장 멋진 삶으로 나타났다. 믿음이 있다는 증거 는 무엇인가? 고난 앞에서 비겁하지 않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죽음을 뛰 어 넘는 소망과 확신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한다. 그 고난이 우리의 모든 행복한 것들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의 주이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자. 십자가 뒤에 영광이 있음을 바라보자. 이 제 믿음 없는 자가 아니라 믿음 있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자. 죽음 뛰어 넘는 확신 가져야 이제는 한국 교회가 살아 있는 믿음의 증거를 보일 때이다. paulsykim@yahoo.co.kr
199 no image 극기하는 겸손과 인고로 정상에 서기를_나택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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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8 2006-11-15
극기하는 겸손과 인고로 정상에 서기를 나택권 장로_호산나교회, 총회 회계 신문은 독자를 대상으로 제작되며 일부 계층이나 특정 집단이 아닌 일반인 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 매체로서 제작된다. 마찬가지로 교단 신문도 일부 계 층에 한정하여 특정한 내용만을 기사화 해서는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가 어려 울 뿐 아니라 외면당할 수가 있다. 신문과 독자와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와 같다고 비유하고 싶다. 물을 잃은 물 고기가 맞는 신세와 마찬가지로 독자 대중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신문은 그 존 재의 명분을 상실하게 될 수밖에 없다. 1. 신문은 공기(公器)이며 상품 신문의 사회적 기능은 사실의 전달과 진상의 발굴, 건전한 비평에서 찾아진 다. 이와 같은 기능은 언론의 통시적인 존재의 이유이며 신문과 공고를 구별 하는 관건이 된다. 교단신문은 기능상 기관지로서 계도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은 이 와 같은 방법과 역할로서도 교회와 독자에게 참다운 이익에 기여했다고 본 다. 이를테면 소화제의 역할이나 소금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문이 갖고 있는 활발한 계도 기능에 의해서 환부가 조명되고 맺 힌 것이 풀리며 답답하고 냉가슴 앓는 마음들이 속 풀이 할 수 있도록 그 기 능을 다해야 한다. 또한 신문은 시장적 경제 원리를 생각해야 한다. 신문이 독자로 운영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타 교단 신문보다 신 의와 품격이 있어 많은 독자를 확보한다면 광고 의뢰는 많아질 것이며 또 내 용적으로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 할 것이다. 2. 독자와 함께 만드는 신문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신문이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독자와 함께 만드는 신 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신문 제작은 독자인 성도들과 대화 형식으로 만들어 나가 야 하고 가르치는 스승이 아니라 함께 배우는 벗이어야 한다. 또한 독자들 이 신문 제작에 참여한다고 하는 것은 많은 독자들이 신문 구독료를 납부하 되 이 구독료는 제작비로서 교단 신문을 함께 제작하는 제작자로서의 자긍심 을 갖도록 사고(思考)를 전환시켜야 한다. 신문이 발전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불가결 한 것은 독자의 신 문제작 참 여라고 할 것이다. 무슨 일이나 성취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경영이 필요하고 그 경영의 성사 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 중의 하나가 재정(자금)이다. 재정 확보를 위한 방안 으로 신문사 사장이 전국교회 앞에 요청한 사항을 정리 요약 하면 정기 구독 하는 유료 구독자의 확대는 물론 기관 후원금과 교회 후원금, 제작광고후원 금 등으로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지원하여 줄 것을 바라는 것이다. 3. 반성과 앞으로의 기약 기독교 개혁신보는 교단의 얼굴이다. 부채가 없는 신문사로 거듭 날 수 있도 록 우리 모두 협력하는 마음과 실천의 다짐이 있어야 한다. 마치 진열장에 전시하듯 하는 진열 품목이 되지 않도록 모두가 ‘나의 일’로 가다듬도록 책임과 사명을 다 하자. 성원은 직접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며 채 찍질은 안일을 반성케 하고 실의를 어루만져주는 더 없는 활력소로서 작용한 다. 정상을 정복하는 것은 헬리콥터로 산정에 강림하는 것이 아니라 한발 한발 위로 발을 딛고 서는 등정의 과정이 있는 것처럼 교단 신문도 정상을 정복하 기 위해서는 극기하는 겸손과 인고가 있어야 하며 한 발 한발 착실하게 위로 발을 딛는 등정의 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독자와 함께 하는 등정은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신문사가 어려운 상황을 맞을 때마다 독자가 격려와 성원과 편달로 위로와 용기를 주도록 하 고 반면 신문사는 균형된 집필과 조화를 이룬 기사로 독자에게 긍지와 자부 심을 가질 수 있도록 신문사의 역량을 발휘하면 된다.
198 no image 조금씩만 낮춥시다_석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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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0 2006-11-08
조금씩만 낮춥시다 석일원 목사_부림교회, 총회 회록서기 언젠가 총회에 참석을 위해 모 교회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첫날부터 교회의 명을 받은 섬김이 성도들이 줄을 서서 인사를 합니다. 식사시간, 휴식시간 때마다 기다리고 서서 인사를 합니다. 성도들의 섬김 마음에 남아 “안녕 하세요, 뭐든 말씀하세요, 뭐든 시켜주십시오, 도와드리겠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교회의 명을 받아 주인이 명령하신 대로 마지막까지 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미안할 정도로 섬기는 것을 보고 죄송할 정도였습니다. 이 성도들이 바로 주님의 말씀대로 섬기는 종들이 아닌가 하 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감동을 받고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 타가 주님의 종들이라고 다 알고 있는 우리 목사들은 어떠한 지 생각해 보았 습니다. 총회나 노회에서 총대들은 성도들의 섬김을 받아 가면서 회의를 합니다. 회 의 중에 총회와 노회를 위해 건설적인 의견을 가지고 의논하고 토론도 합니 다. 더 좋은 방법을 위하 여 격한 논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너무 지나치게 자기 주장을 강조하면서 격한 어조로 전체를 어렵게 할 때가 있습 니다. 주님이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인 듯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주위에서 섬 기는 성도들에게 부끄러울 정도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본인은 주님 을 위한다고 하시겠지만, 많은 분들이 볼 때는 주님의 뜻이나 전체의 유익보 다 자기 개인의 뜻과 주장이 너무 강조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제 자신의 경험이요 후회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자신은 잘한다 해도 그 자리에는 부족하지만 주님의 일꾼들이 모였습 니다. 그 많은 분들의 눈에 좋지 않게 보일 때는 뭔가 잘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봐도 기본도 안 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 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종들입니다. 내 생각대로 안 되어도 주님이 기뻐하시 는 대로 하기 위해 조금만 자신을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종이 자기 주장 이 너무 강해지면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종이라고 하 는 기본만이라도 생각한다면 너무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제 자신을 향한 소원이기도 합니다. r 내 주장이 조금 강해질 때면 “나는 주님의 종이다” 하고 자신을 돌이켜 보 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 내가 섬기는 교회가 조금 잘 될 때도 “나는 주 님의 종이다” 고백하면서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맡겨만 주십시오.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무익 한 종이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눅 17:10) 하고 자신을 낮출 수 있다면 정 말 아름다운 주님의 종들의 모습이 총회나 노회에서 나타나지 않을까요? 자신을 종으로 낮출 수 있어야 우리 모두 조금씩만 낮춥시다. 조금씩만 더 섬기는 종이 됩시다. 종의 기본 만이라도 되면 놀랍게 달라지지 않을까요? 섬김으로 시작하여 섬김으로 마치 는 종들이 되면 섬기는 성도들이 부러워하고 자랑하는 총회 노회가 되지 않 을까요? 조금씩만 더....
197 no image 사랑의 일치_전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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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6 2006-11-01
사랑의 일치 전현 목사_화평교회, 총회서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화목 하는 친교를 나누는 대가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가정의 가장이요 주인이십니다. 그러므 로 우리 모두는 가장이요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그리스도의 말씀 만 순종하면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중심의 대가족 서로 고집부리지 말고, 사랑하고 서로가 화합하고 일치해야합니다. 어떤 가 정이든지 온 식구가 다 제 생각대로 하려고 하고 자기 고집대로만 구한다면 부부끼리도 싸우게 되고, 부자끼리도 싸우게 되고, 형제끼리도 싸웁니다. 도 저히 그 집에 화합 일치는 없습니다. 오늘날 왜 국가가 위태롭게 되고 국민 생활이 파탄이 일어나는가요? 전부 이 기주의로 돌아서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마음속에서 이기 심을 빼어 버리기 전에는 가정도 국가도 교회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도 뜯어다가 자기에게 붙이고, 저 사람도 뜯어다가 자기에게 붙이고 해서 조각을 내면 얼른 절단 이 납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를 살리는 법 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로움과 이기적인 것을 억제하고 공과 의를 앞세워 야 합니다. 왜 그것이 실천이 안되는가요? 사와 이를 추구하는 마음은 강한데 공과 의 를 취하는 마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으로 주인으로 모시고 살 줄 아는 사람들이 많 아지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정의 가장이 되면 가정이 화목해 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가장이 되면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문 이 열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인이시며 머리이십니다. 머리의 지배를 잘 받아 몸이 움직이면 서로가 화합하고, 화목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체 가 각각 제 마음 데로 놀면 몸이 결단이 납니다. 그렇다면 교회 일치의 화합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요셉 은 형들이 자기를 판 것을 원망하고 원수를 갚고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겼 을 것입니다. 그가 총리 대신이 되고 난 후 전국에 흉년들게 되어 형들이 양 식을 구하러 애굽에 왔을 때 요셉은 형들을 원망하거나, 앙갚음하지 않고 오 히려 선한 말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형제 화합을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화목하는 곳에 번영이 있습니다. 불화하는 곳에 위축과 실패가 있습니다. 화 합하는 신자, 화목 하는 교회는 생명의 은혜에 참여하게 됩니다. 형제 화목 이 쉬운 듯 하면서도 사실은 어렵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 에서와 야곱의 사건, 이삭과 이스마엘의 싸움, 여당과 야당의 싸움이 형제의 싸움입니다. 형제가 싸움 안 해야 할 것은 당연한 일 입니다. 이 세상의 싸움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야보고 사도의 말을 들어봅시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 온 것이 아니요 세상 적이요 정욕 적이요 마 귀 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 라.” 이 세상 싸움은 세상 적이요 정욕 적이요 마귀 적인 것이니 싸움하지 않아야 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귀적인 싸움 하지 말아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된 우리는 교회가 다툼이 없는 교회가 되고, 다툼이 없 는 가정이 됩시다. 그래서 사랑의 일치를 이룹시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복이 올 것입니다.
196 no image “우리 모두 최선 다해야 할 때”_최종설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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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9 2006-10-25
“우리 모두 최선 다해야 할 때” 최종설 장로_부총회장, 새하늘교회 91회기 총회를 은혜 가운데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전국에 계 신 우리 교단 성도님들의 기도인 줄 안다. 이번 회기에 장로 부총회장으로 선출되고 보니 나의 여러 가지 부족함 때문에 부담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맡긴 일 최선 다해야 어느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하나님이 세워 주셨으면 최선을 다하 고 열심히 하라고 하시는데 마음과 생각으로는 그렇게 하자고 내 자신에게 다짐도 해보지만 너무 연약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나보다도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간구하기로 했다. 부족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사용하여 주실 것을 믿고 최선을 다 하려고 한다. 금년에 우리는 ‘Jumping Up Together’(함께 도약)하는 합신 총회가 되자 고 다짐하는 교단설립25주년 대회를 가졌다. 교단 이래로 성황리에 치러졌 고 꿈과 비전도 가지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 교단은 바르게 힘차 게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대로 안주하지 말고 새롭게 변화되자 는 공감대를 가짐으로 이번 회기에 여러 가지 정책들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 게 된다. 좋은 정책도 필요하다 하지만 실천이 중요하다고 본다. 첫째, 상비부의 전문성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상비부는 달란트대로 일할 수 있는 전문인이 필요한데 우리는 1.2.3.년조에 국한되다 보니 이런 면에 미약하여 전문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앞으 로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각 상비부도 사업 계획을 총회에서 승인을 받았으면 상비부에서는 교단 산 하 교회들이 납득이 가고 이해가 되어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충분한 홍보 도 하고 무엇보다도 연례 행사가 아니라 새로운 기대가 되는 행사들이 되었 으면 한다. 둘째, 행사도 총회적으로 조율을 하여서 치러졌으면 한다. 각부서 나름대로 잘하려다 보니 행사가 중복되거나 몰리게 되는 경향을 보 게 되는데 잘 조정하여 치러지면 더 효과가 있고 참여도가 많을 것으로 본 다. 재정 청원도 그렇다. 이번 회기에는 어느 회기보다 각부서의 재정 청원이 많 은 것 같다. 꼭 필요해서 총회에서 허락 이 되었지만 청원을 하되 각부서가 서로 시기를 조정하여 왜 재정이 필요한지를 충분히 설명하여 청원을 하면 지교회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게 될 것 같다. 사업 계획 원활하게 진행되길 향후 교단 30년을 내다보며 “비전 2010위원회”가 가동되는 것으로 안다. 이러한 모든 정책들이 개선되고 새로워져서 주님이 명령하신 복음 사역에 앞 장서 일하는 교단이 되어 이 시대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교단, 하나님이 보시 기를 원하시는 교단, 하나님 마음에 합한 우리 합신 교단이 되었으면 한다. 이런 교단이 되려면 전국의 지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끈임 없는 기도와 아낌없는 헌신이 필요할 것이다. 나 또한 최선을 다하고 싶다.
195 no image “사랑하기에도 짧은 시간”_박삼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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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0 2006-10-18
“사랑하기에도 짧은 시간” 박삼열 목사_총회 부서기, 송월교회 연세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김동길 박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우리나라에서 나 만큼 교육 혜택을 받은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데 유치원 때부터 최근까지의 선생님들을 뒤돌아 볼 때 기억나는 선생님들 은 의외로 많지 않고, 생각나는 분들의 공통점은 나를 사랑하고 격려해 준 선생님들입니다. 생각해 보니 그들의 격려로 내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지 요.” 인생에 있어서 사랑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사랑 베푸신 스승들 기억남아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사랑도 한계가 있어. 사 랑의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나 가능 해!’ 사실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은 속 상할 때가 많습니다. 때아닌 모함을 비롯해 선을 악으로 대하는 이들도 없 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장하게 된 것 같습니다. ‘옳게 하기 위해서 는 정의의 칼을 들어야 해!’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많이 변한 사람은 아마 요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처음에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을 통하여 야심을 이루려는 불같은 충 동을 생각해 보면 그의 나중은 너무나 다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 로 ‘사랑’ 때문에 변했다고 봅니다. 아무것도 되돌려 줄 수 없는 이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는 사랑 을 보았겠지요. 인류 대속의 희생 길을 가시는 예수님에게서 사랑의 승리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 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는 자신이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수혜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사랑만이 이 땅의 문제들을 싸매며 열매를 맺게 한다고 믿었음이 분 명합니다. 그의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 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같은 동포이지만 북한은 참 어려운 대상인 것 같습니다. 우리를 속상하게 하니까요. 그런가하면 교회 안에서도 섭섭한 이들을 간혹 만납니다. 그 때마 다 우리 속에서 미움을 부추기는 동 요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도 장례식을 집례한 후 사무실에 와서 이 글을 씁니다. 우 리 교회는 고령자가 많아 장례식도 많습니다. 그러나 장례식에서는 언제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오늘도 성도들과 찬송을 부르는 중에 ‘아! 세상은 이 렇게 서로 사랑하면서 승리해야 하는 곳이구나!’라고 느껴보았습니다. 사실 교회엔 아름다운 성도들도 많습니다. 그 중에 금요일이면 지역의 외로 운 이들을 초대하여 특별한 메뉴로 점심을 대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 메뉴는 교회에서 직접 만든 돈까스에 사과와 키위를 갈아 소스를 얹어 뜨 겁게 데웠습니다. 그리고는 그것과 같이 먹을 수 있도록 김국을 끓였습니 다. 선선해지는 요즘 교회 식당에는 소문을 듣고 찾아 온 손님들로 가득 찼 습니다. 따끈한 돈까스와 김국을 모두가 맛있게 먹었습니다. 다들 행복한 시 간을 보냈습니다. 사랑하면 행복해 졌습니다. 사랑하면 거룩함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고요. 찬송을 해보니 사랑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 앞 에 서니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더군요. 사랑은 행복의 첫 번째 조건 사랑하 기에도 짧은 세월, 금년의 남은 시간들은 사랑으로만 살아 보려고 합 니다. 내 마음도, 세상도 하나님의 따뜻한 세상이 되겠지요.
194 no image 이 가을과 소망_문상득 부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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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7 2006-10-11
이 가을과 소망 문상득 목사_부총회장 엊그제 매스컴에서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겠다고 누군가를 향해 협박했다 는 보도가 있었다. 미국발 호재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22.22%로 크게 하락하 였다는 보도도 읽었다. 위험한 북 핵실험 강행 한편 우리 정부는 북한의 이러한 협박 다음날에 그래도 수재 피해 복구를 위 해 북한에 약속한 시멘트 10만 톤은 예정대로 지원한다고 발표했다는 보도 도 함께 했다. 이 보도를 접한 많은 국민들이 왜 하필 이때냐며 불안감과 함 께 북한에 대한 배신감, 이 정권의 정책과 그 실패에 대해 또 한번 실망과 분노를 토해낸다는 보도다. 생각해 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이래로 우리 현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들로 인하여 국민들은 실망하고 분노하고 온 나라는 몸살을 앓 았다. 그는 우리 헌정사에서 탄핵을 받은 유일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기도 했 다. ‘막가자는 거지요?’ 라는 그의 언행은 시정에 엽기적 유행어가 되기도 했 고, 많은 언론들은 막말, 조폭 같은 말, 경박스러운 말이라고 그의 언사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이러한 것 때문에 외교 관계에서도 허다한 갈 등을 야기하고 국민들도 그 때마다 불안해했다. 이 정권을 비아냥거리는 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제 우리 귀에 익숙 하게 된 ‘코드’라는 말도 그렇다. 코드정치, 코드인사... 처음에는 그 말 의 생소함 때문에 그 개념을 설명해 줘야 했던 것이다. 이 코드가 독선과 아 집과 이기주의와 합세하면서 편가르기 등 여러 악성의 결과물들을 양산해 냈 다. 많은 사람의 마음에 갈등과 미움을 모래알처럼 뿌려놓았다. 정치계는 말 할 것도 없고 교육계, 노동자 한 사람에게까지... 노무현 정권에 대해서는 탈법과 초법을 일삼는 독선 정권, 무슨 무슨 수많 은 위원회들을 만들어 내는 위원회 공화국, 큰 프로젝트를 터뜨려 세상을 놀 라게 하는 선전정치, 막대한 자금력으로 밀어붙이며 세금공화국, 화급한 민 생 문제에 대하여 생각도 해결할 능력도 없는 미숙하고 무능한 아마추어 정 권, 실험정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바다 이야기로’ 온 나라를 떠들썩했 을 때는 부패공화국, 도박공화국을 만드는 패륜아적 정권이라고 불리 기도 했 다. 정책의 실패와 잘 못들을 역사의 탓, 남의 탓으로 책임을 전가하며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른다 하여 무양심의 소아적 정권, 더 이상 정부의 말을 믿지 못 하겠다는 국민지지율 10%대로 추락의 몸짓에 대고는 지도자를 이해할 수준 이 못되는 국민이라고 국민을 능멸하며 질책한다하여 오만방자한 정권 등으 로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정권이라면 누구나 같은 심정이 아니겠는가. 걱정하고 불평하고 그 리고 성토하는 일이..... 그러나 그런다고 직성이 풀리고, 해결될 일도 아닌 데도 말이다. 그러나 문득 다윗을 질책한 나단 선지자의 말이 생각난다. ‘당신이 그 사 람이라!’ 시대는 교회가 보아야 할 거울이고 징조다. 주님께서는 실로암 망 대의 사건을 어떻게 말씀하셨던가! 목사는 나라의 얼굴인 대통령 못지 않은 공인이 아닌가. 내 교회, 나아가 주님의 이름을 걸머진 공인이다. 오늘 목사 와 성도는 마땅히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대통령의 애초의 소망대로 동북아 중심 역할을 담당하는 한국은 고사하고 국제 외톨이가 되어 불행한 역사의 전철을 밟게 될까 걱정하는 원로들의 소 리를 많 이 듣게 된다. 그런데 교회는 누구에게서 그런 소리를 듣는가. 우리 민족은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품고 있다. 이산가족을 찾는 모습을 밤 새 지켜보며 함께 울어주는 이들이고, I.M.F 때는 내 아이의 손가락에서 반 지를 빼어 헌납할 수 있는 백성이다. 누가 다시 그들을 진정 감동시켜 진리 를 위하여 움직이게 할 것인가! 지금 이 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고 그 일을 감당할 우리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이 백성 우리가 감동시켜야 곳곳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며 새벽시간에 어디선가 나직이 울어대는 귀뚜 라미 소리는 아! 우리가 이미 가을을 산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 가 을이 천고마비의 계절이 아닌 천고영비(天高靈肥)의 계절이, 등화가친(燈火 可親)이 아니라 주님과 그 말씀을 더 가까이 하게 되기를 꿈꿔본다.
193 no image '비전2010위원회' 활동을 기대하면서_안만수 목사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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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5 2006-09-27
'비전2010위원회' 활동을 기대하면서 안만수 목사_화평교회 본 교단의 ‘비전 2010’ 위원회가 새롭게 발족하게 되었다. 이 위원회는 지 난 5월에 개최되었던 본 교단 창립 25주년 기념대회 때 그 필요성이 제기되 었고 지난주에 열린 본 교단 총회에서 결의되었다. 이 위원회가 할 일은 본 교단의 2010년까지의 비전과 방향, 더 나아가 더욱 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전 2010위원회 발족해 앞으로 우리 사회는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변화해 갈 것이다. 이 변화의 물결은 한국교회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크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비 전 2010’ 위원회는 이 새로운 상황에서 본 교단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또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밝힐 것이다. 이것은 본 교단이 다가오는 2010년을 준비함에 있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위원회가 주어 진 사명을 잘 감당하여 교단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도록 전국의 교회 지 도자들과 교 인들의 정성어린 기도와 아낌없는 성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비전 2010’ 위원회가 할 방향을 다음 몇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교단의 바른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실제 모습 은 어떠한가? 신앙이 단지 오락거리가 되고 있고, 공동체성이 약화되며, 진 리의 상대성과 다원성의 위협을 받고 있다. 무분별한 신흥 종교와 이단 사이 비 운동 때문에 영성의 대혼란을 겪고 있다. 점차 물량주의와 대교회주의에 더욱 사로잡히게 되며 신앙이 삶에서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점차 사회로부터 도외시됨에 따라 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도 쇠퇴하 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 상황에서 본 교단은 우리 교단의 창립 이념인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에 따라 사회 와 문화를 변혁시키고 개혁신학 전통에 따른 교회 제도를 만들어 가야 한 다. 아울러 우리 교단이 그 정체성을 다시 확립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것의 해결을 위한 제도적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바른 교회의 실제적 모델을 보여주는 일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 회 상황은 한 마디로 매우 혼란하다. 목회가 양적 성장위주로 치닫다 보니 바른 기준이 무시되고 있다. 양적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면 그 목회 원리 나 방식이나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바른가 하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오늘의 목회 현실에서 무엇보다 필요로 하는 것은 바른 교회의 실제 적 모델링 작업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미국의 교회를 본받으려고 하고 있 다. 물론 미국의 교회를 본으로 삼을 수 있다. 교회는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 는 보편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실제적 모습은 언제 나 그 교회가 속하는 문화와 떨어질 수 없다. 이것은 바른 교회의 실제적 모 델링은 한국교회 자체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까지 바른 목회 원리에 대하여 많은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것들이 대부분 막연하고 추상적이어서 목회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였 다. 이것은 목회자들에게 실제적 교회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면 그것의 구체적 방안은 무엇인가? 그것의 하나로 제안하고 싶은 것은 어떤 특정 지역 교회가 성경적이고 개혁 주의적 교회 상을 만들어 갈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이것은 먼저 어느 한 지 역 교회가 예배, 영성, 양육 프로그램, 친교, 선교, 구제 및 지역사회봉사 등의 분야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 다. 성경적 원리와 개혁주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이 교회는 어떠한 모습이 바람직하며 또한 어떤 모습이 건강하지 못한가를 판단해야 한다. 그 다음 이 교회가 바람직하고 건강한 교회의 모습으로 성장해 갈 수 있도 록 구체적 방향을 제시하고 실제적 도움을 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의 모델이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객관적으로 자료화 하는 것이 요구된다. 한 걸음 나아가 이러한 모델링 작업의 대상인 지역교회 는 하나의 형태로 제한되지 말고 대교회, 도시교회 및 농어촌교회 등의 유형 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모델이 되는 교회는 신학생, 목회자 및 다른 교단 목회 자들에게 바른 교회로 성장해 가기 위한 목회의 실제적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이 일을 전문적으로 맡아서 연구할 이른바 ‘바른 교회성장연구소’를 교단 차원에서 설립하는 것 도 하나의 좋은 방안일 것이 다. 목회에 실제적 도움되어야 본 교단이 오늘의 발전을 이루도록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이 앞으 로도 우리 교단이 품고 있는 비전 2010을 귀하고 아름답게 이루어 하나님께 큰 영광 돌릴 수 있도록 친히 인도해 주실 것을 굳게 믿는다.
192 no image 네 번째 사람_변세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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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5 2006-09-21
네 번째 사람 변세권 목사_온유한교회 우리 노회원들을 무척이나 사랑해주시는 서울의 어느 목사님과 지난주간 강 원도 어느 마을에서 순박한 시골소년처럼 뛰어 놀았다. 세상이 부럽지가 않 았다. 저녁을 먹고 나오자 산허리를 휘어 감고 나온 보름달이 잿빛 수채화 에 걸쳐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지인과 소박한 여유 보내 얼마 전 SDS 김홍기 경영고문이 3박자 인간형을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3박 자 인간형으로는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서 스페셜이스트, 다방면에 걸쳐서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 제너럴니스트, 따뜻한 심성을 가지고 있는 휴 머니스트를 강조했다. 어떤 목회 전문 잡지에서 ‘인격이 목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간략한 글 을 읽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을 따라 목회의 길 을 걷고 있는데 목회자는 ‘인격적인 요소’ 곧 심리적인 요소와 가정적인 요소들이 작용을 한다고 지적했다. 여기에서는 3종류의 인격적인 요소가 목회방법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지적했 는데 흥미롭다. 1) 성장하면서 가정에서 많은 칭찬을 받고 자란 사람 : 이 사람은 부모를 기 쁘게 하며 가정을 화목하게 하려고 애쓰며 성장했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목회에도 계속되어 그 목회자는 칭찬받기 위해 교회 내의 산적한 많은 일을 감당하려고 애쓰다가 지쳐 쓰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2) 교회를 무의식적으로 자기 가정의 대체물로 생각하는 사람 : 이러한 목회 자는 가정보다는 교회가 모든 것을 더 잘 이해해주고 수용하는 영적 가정이 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커다란 하나님의 가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회자들 은 가정에서 자신들이 경험했던 어린 시절의 아픔과 상처들을 교회 성도들에 게 다시 나누어 줄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3) 다른 사람 앞에 서기를 좋아하는 사람 : 대중적인 기질은 목회자가 되기 에 매우 적당한 체질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에 속한 목회자 는 성령의 은사나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도록 조심해 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나는 몇 번째의 사람에 해당이 될까? 고민을 했더니 역시 사람이 시원찮아서인지 여기저기 다 해당되는 것 같았 다. 물론 목회자에 대한 목회 평가는 성도 개인마다 다 다르고 목회에 대한 인식 측면도 다르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의 요소들을 극복하면 서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뛰어난 지식을 가지 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그런데 이 지식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고 얼마 나 프로그램이 다양한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에 의해 서 연단된 사람인가가 결국에 하나님을 아는 지성의 양을 결정하고 질을 결 정하게 된다. 목회를 하다보면 가끔 생각이 없고 지혜가 부족한 듯한 목회자를 보게 된 다. 문제가 무엇인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는, 통찰력 있게 볼 줄 아는 뛰어 난 지각과 지성을 가진 목회자를 보기가 힘들다. 사람이 살면 살수록, 사람 을 알면 알수록 사람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래 서 그만큼 잘 다듬어진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오랜 다루심에 의해서 잘 다듬어진 사람을 만나는 게 왜 이렇게 힘 들까? 하나님께서 어떤 어려움을 주시든, 어떤 크고 작은 언덕과 어떤 개울 을 건너게 하시든 철저하게 하나님께 연단되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잘 다 듬어진 인격과 삶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야 한다. 좋은 신학에서 좋 은 설교가 나오듯, 좋은 설교는 좋은 인격에서 나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좋은 설교는 좋은 인격에서 우리는 거룩한 신의 영을 가지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아는 방향성과 우리 안 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통찰력을 가지는 인격의 네 번째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191 no image 지금 우리는 기도가 필요합니다_전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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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1 2006-09-15
지금 우리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전현 목사_명성교회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복종시키는 것이 기도입 니다.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만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겠다는 신앙 고백의 한 형태가 기도로 나타나 는 것입니다. 신앙고백과 같은 기도여야 흔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고 합니다. 머리나 몸은 유기적 관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몸 안에서 기능은 다르나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유기적 관계입니다. 손과 발이 다르나 이 둘은 서로 유기적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발과 입이 다르나 이 둘은 서로 유기적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발가락이 아프면 입 이 소리를 지릅니다. 손은 발가락의 가시를 뽑아줍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기적 관계를 가진 몸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유기적 관계를 가진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중보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 좌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 그리 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유기적 관계 를 가진 우리가 기도하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사무엘상 12장 23 절에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말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죄, 얼마나 교만한 사람입니까? 이는 하나님과 관계를 끊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복종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우리는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나 교회를 위해서나 교단을 위해서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존귀와 영 광을 받으시게 하려면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 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 광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방법이 우리가 힘써 기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도하는 일, 말씀 전하는 일을 전무 하였습니다. 이 일 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적으로 하는 일은 기도하는 일입 니다. 우리는 신자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은 말씀합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 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것 은 신자만이 받는 특권입니다. 아무나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기도 한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만이 기도한 것들을 받을 수 있습니 다. 기도는 또한 다른 믿음의 형제들에 대한 의무입니다. 우리가 다른 형제를 위 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8절에는 “여러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남의 짐을 서로 지라”고 말씀 합니다. 이 남의 짐을 서로 지는 일 중의 하나는 바로 다른 형제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 는 악을 쓰고 위협을 하면서 문장도 안 맞고 유치한 기도를 드릴 때가 물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고 그 권능을 믿고 엎드려 간 구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그 기도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 님 앞에 우리가 무릎 꿇고 엎드려 기도하는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 해서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 인간 영혼을 구원하 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은혜와 경건 속에 성장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 나님 앞에서 우리 경건이 날마다 더 굳어지고 성화되려면 하나님 앞에 기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어도 역사상 위대 한 인물들은 전부가 다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역사 속에 기도의 인물들 많아 우리가 늘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의 은혜와 경건의 역사는 기도와 간구 속에서 이루어져 나갑니다. 그래서 지 금 우리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190 no image 오묘하고 신기한 역사의 흐름_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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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5 2006-09-06
오묘하고 신기한 역사의 흐름 김명혁 목사_강변교회 나는 최근 주일마다 “조선에 복음이 전해진 이야기”란 제목으로 세 번 계 속해서 설교를 하면서 “오묘하고 신기한 구원 역사의 흐름”을 발견하고 감 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1866년 9월 5일 대동강 변에서 27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의 피를 흘린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이 단순한 순교의 죽 음으로 그치지 않고, 조선의 구원 역사의 흐름에 지금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순교자의 피 헛되지 않아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은 16년 후인 1882년에는 조미 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되 게 했고, 그 2년 후인 1884년에는 알렌 의사가 조선에 들어오게 했고, 그 다 음 해인 1885년에는 아펜셀라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오게 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며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하나님의 구 원 역사의 흐름’에 얼마나 길고도 깊은 고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 을 생각하 면서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1866년 9월 5일 대동강 변에서 불타버린 미국 상선 제네랄 션먼 호의 피습 사건 때문에 미국 정부는 1867년과 1868년에 미국 전함을 보내 사건을 조사 하게 했다. 미국 정부는 진상을 조사하고 손해 배상을 청구하고 조선과의 통 상 관계를 수립하려고 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1882년에 조선은 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조선에 선교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조약에 근거하여 중국 상하이에서 의료 선교 사역을 하고 있던 호레이스 알렌 의사가 1884년 개신교 의료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조선에 발을 딛게 되 었다. 알렌 의사가 직접적인 선교를 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에 선교의 환경을 조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알렌을 가리켜 조선 선교의 세례 요한이라고 부른다. 이 모든 것이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결과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날 아침 아펜셀라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 천 제물포 항에 착륙한 사건은 조선의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 다. 그런데 이 중요한 사건도 1882년 조미 수호 통상조 약의 결과로 일어나 게 되었다고 하겠다. 선교사들이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조미 통상조약을 알리 면서 조선 선교를 독려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토마스 목사의 순교의 사건 이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미국에서 조선에 대한 선교적 관심의 주인공으로 떠 오른 사람들 중에 헨리 아펜셀라라는 청년과 호레이스 언더우드라는 청년이 있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흐름과 개인적 소명이 만나는 일은 참으로 오묘하고 놀라운 일이다. 구원 역사의 흐름을 간파하고 시대적 요청의 소리를 들으며 거기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이다. 헨리 아펜셀라와 호레이스 언더우드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나는 언더우드 가의 3대가 조선 구원의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여 조선 사람들 에게 끝이 없는 사랑을 쏟아 부으면서 살다가 죽어 지금 양화진에 모두 함 께 묻혀 있다는 사실 앞에서 지극한 경외감과 존경과 사랑을 느끼면서 한없 이 울 수밖에 없었다. 조선을 사랑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미국에 가서 치료 를 받다가 죽어가면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비록 내가 조선은 못 가지만 하늘 나라에서 다 볼 수 있지, 맞아." 역사의 흐름은 오묘하고도 신기하다. 어떤 사람은 그의 한 생애를 구원의 역 사의 흐름에 길고도 깊은 고귀한 영향을 미치는 진한 삶을 살고 어떤 사람 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허무한 삶을 살 수도 있다. 역사에 남는 고귀한 삶 살기를 지금도 구원의 역사는 땅끝을 향하여 흐르고 있다. 이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 여 길고도 깊은 고귀한 영향을 미치면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189 no image 성숙한 교단으로 거듭나야 할 때_이의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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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3 2006-08-30
성숙한 교단으로 거듭나야 할 때 이의행 목사_목민교회 일반 시민들이 갖는 언론관은 무엇일까? 육하원칙에 입각한 사실 보도와 다 양한 정보 제공과 비판과 대안 제시 그리고 사회 전반에 대해 건전한 여론 형성을 이끄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언론의 기능은 보도, 비판, 대안 물론 어느 특정한 기관을 대변하는 기관 언론은 항상 자기 홍보와 자기 방 어 그리고 상대에 대한 비방과 공격을 통해 집단 이익을 창출하려고 하기 때 문에 건전 언론을 표방하기 쉽지 않다. 특히 우리 기독교 개혁신보와 같은 종교 언론의 특징 중 하나는 건전한 비판 의 부재라는 것이다. 우리 교단처럼 규모가 작은 경우는 선후배 혹은 스승, 제자같은 연줄을 뛰어넘는 호기를 부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하고 싶 은 말들이 많아도 그냥 침 삼키며 넘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교단 언론은 광야의 소리였던 세례 요한처럼 강심장 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합신교단의 태동과 함께 한 목회 였기에 필자는 교단에 대한 애정을 누구 못지 않게 가지고 있다. 벌써 4반세기의 세월이 흘 러 청년의 기상을 품게 된 것이 대견스럽다. 그런데 교단 설립 25주년 기념대회를 마치고 뒷이야기들이 제법 무성하다. 당연히 이야기의 내용들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뉜다. 물론 이 런 평가들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사장에 진주가 묻혀버리듯 이 이런 평가들이 언론에서 공개적으로 토론되고 독자들에게 바로 알려지고 그래서 설명이 되고 대안이 제시되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세워져서 발전해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마음이다. 학생들은 평소에 공부한 것을 시험이라는 기회를 통해 자기 실력을 평가한 다. 이때 자신의 취약점이 무엇인지를 간파해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완 하는 학생은 반드시 실력이 향상된다. 우리 교단은 금번 대회를 통해 일종 의 테스트를 해본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 목회 철학, 교단의 정체 성, 목회자 상호간의 긴밀한 동역자 의식 더 나아가 교단의 비전을 시험대 에 올려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단 전체의 행사를 가지고 앞서 일하는 몇몇 사람들의 리 더십을 평가해서 는 안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 전체를 보는 것이다. 그 속에서 나를 보고 우 리의 목회 현장을 보아야 한다. 영화 ‘괴물’이 개봉한지 29일만에 국민 다섯 명중 한 명에 해당하는 1,000 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동원해서 역대 한국 영화 최고 흥행 기록에 도전하 고 있다. 대단한 일이다. 여기에도 물론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원초적 본능엔 집단 무의식을 자극하는 내용과 마케팅 전략으로 무장한 ‘괴물’을 보기 위해서 620개의 스크린 앞에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적 인 거장 김기덕 감독이 자신이 만든 영화 ‘시간’을 상영하겠다는 개봉관 이 별로 없어서 앞으로 한국에서는 더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것은 우리 사회가 균형을 잃어버리고 ‘쏠림 현상’으로 치닫고 있지 않은 가 하는 우려가 된다. 사회학적으로 문화의 쏠림 현상은 그 사회가 미성숙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이다. 월드컵때 ‘대~한민국’을 외치던 전국민이 월드컵이 끝난 후 축구장 은 왜 외면하는가. 이것도 역시 미성숙의 단면이다. 남의 이야기 그만하고 우리 이야기하고 불꺼야겠다. 필자는 우리나라와 우리교단을 비슷하게 생각한다. 교회숫자가 1000교회도 되지 않는 작은 교단에 ‘쏠림 현상’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집중과 쏠림 은 분명 다르다. 쏠림은 미성숙이지만 집중은 성숙함의 행동이다. 집중은 균 형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쏠림은 균형 감각을 상실한다. 집중은 이성적이지 만, 쏠림은 비이성적이다. 우리 안에 정책의 쏠림 현상, 인물과 재정과 목 회 이념과 신학의 쏠림 현상은 없는가. 마지막으로 총회를 앞두고 이런 제안 을 해본다. ① 총회의 총대는 모든 목사 회원이 되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총회는 축제 의 장이 될 것이다. ② 총회의 안건은 사전 토론이 가능한 인터넷 토론을 허용하면 좋지 않을까? ③ 총회 선거 역시 사전 인터넷 투표는 어떨까. 우리는 무감독 시험의 경험 이 있지 않은가. 쏠림 현상에서 벗어나길 이렇게 제안하는 이유는 총회가 정치를 독점하지 않고 집중과 균형을 잡아 교단 목회자와 교회 전체가 함께 성장하는 총회가 되기를 바람에서다.
188 no image 다주택(多住宅) 소유 어떻게 봐야 하나_장재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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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3 2006-08-23
다주택(多住宅) 소유 어떻게 봐야 하나 장재훈 목사_군산 내흥교회 8월 18일자 한겨레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집 늘어났는데 내 집은 없 다”, “주택보급률 106% 불구, 자가 점유률 55%”, “무주택 631만 가구 - 다주택 104만 가구”라고. 무주택 가구만 631만 도달해 이에 대하여 국토연구원 윤주한 선임연구위원은 “돈 있는 사람이 집을 많 이 사고 없는 사람은 집을 못 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두 채 이상 다주 택 보유 가구가 104만 7천 가구나 된다는 것이다. 집이 무엇인가? 사람이 살기 위해서 지은 건물이다. 가족이 생활하는 터전이 다. 기본적으로 집이란 사람에게 있어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거주 개념이 지 부의 축적이나 확장을 위한 소유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자본주의라는 신무기시대가 도래하면서 집에 대한 바르 지 못한 의식에 사로잡힌 일부 가진 자들이 재산형성을 위한 투기성 무기로 사용하므로 주택 보급률이 100%가 넘었음에도 불구 하고 서민 다수는 여전히 무주택자로 살면서 불안한 임시 거주 생활을 전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 은 분명 자본주의 단점이자 병폐인 가진 자들의 부의 남용이자 이기적인 모 습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이와 관련하여 뭐라 하는가?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 도록 할지니라”(롬 15:1, 2).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것 은 가난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잠 28:8). 사회와 불우한 이웃을 위한 다주택 소유를 제외하고는 재테크적인 다주택 소 유는 성경적이지 않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은 사 회적인 약자에 대한 사랑과 긍휼과 배려와 나눔 그리고 양보 등등을 언급하 고 있다. 그런데 신자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본주의 법칙과 원리를 더 우월하게 여기고 따르는 성도들이 적지 않다. 물론 죄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도, 예수님의 마음도, 성경의 기본적인 정신과 원리도 아닌 것 이다. 현재와 같은 추세라 면 정부나 기타 기관에서 아무리 집을 많이 건축한들 주 택문제의 해소는 쉽게 풀리지 않을 듯싶다. 왜냐하면 부를 많이 소유한 자 와 투기에 강한 자들이 자기 자본과 금융권의 도움을 받아 온갖 꼼수를 다 동원하여 많은 주택들을 사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돈이 넉넉지 않은 서민 이나 무주택자들의 내 집 마련의 기회는 희망 사항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 다. 그림의 떡이 되곤 한다. 사회적으로 힘없는 약자들만 피해를 입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신자들만큼이라도 이와 같은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옳지 않은 투기를 하 지 않고 빠진다면 비교적 지금보다는 더 가까이 약자들에게 내 집 마련을 위 한 꿈이 현실화 될 것으로 사료된다. 이렇게 하는 것 또한 우리 이웃을 사랑 하는 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볼 때 아무리 합법적이라 해도 권력과 같은 돈의 힘으로 약하고 가난한 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들의 소중한 꿈들을 빼앗아 간다면 공 인된 폭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다주택을 소유하고 당첨 이 되고 하는 것은 복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고 박수를 받을 만 한 행위도 아 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다주택 소유는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에 알게 모르 게 재산 형성과 확장(투기) 차원에서 다주택을 소유하신 신자들이 있다면 하 루속히 처분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그리고 신자된 주택 소유주 들은 세입자들에게 저렴한 세만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다주택 소유 욕심부터 버려야 역지사지로 접근하고 우리가 죄인 되어 헐벗고 비참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긍휼과 사랑으로 거두어 주신 것을 생각하면 가진 자들이 이 땅에서 어려운 이웃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 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알고 받고 사는 자들이 결코 이기적으로 살 수 없지 않은가?
187 no image 막강(莫强)한 국가가 되려면?_김수흥 목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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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8 2006-08-16
막강(莫强)한 국가가 되려면? 김수흥 목사_목사 합신교환교수 우리나라는 얼마 전부터 세계 11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고 회자(膾炙)되 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국력이 점점 약해간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다. 정재 계뿐 아니라 교육계를 비롯해 일상 생활까지도 죄악들로 멍들어가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는 여기서 쇠퇴를 경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든다.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참으로 과거의 영국 과 같이 그리고 지금의 미국 수준을 넘을 수는 없는 것일까. 얼마든지 넘을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막 9:23; 빌 4:13).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되 는 것은 전적으로 기독교에 달려 있다. 유교나 불교는 나라의 성장이나 국력 과는 무관한 종교들이다. 유교사상은 중국 고대의 춘추전국시대에 공자(BC 551-479년)와 맹자(BC 371- 289년) 그리고 순자를 중심으로 정립된 사상이다. 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은 372년에 태학 (太學)을 세웠고 백제는 285년에 왕인(王仁)을 일본에 보내어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였다. 우리나라의 유교 부흥은 고려 말부터 시작되었고 그뒤 조선 왕조의 정치 이 념으로서 조선인의 정신 바탕이 되었다. 유교는 윤리도덕에 의한 교화를 정 치지배의 수단으로 삼았으며 국민들로 하여금 도덕적 자각을 통하여 자발적 으로 지배체제에 순응하도록 하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고 있다. 유교정치사상에서는 인간과 만물을 생성시키고, 질서를 갖추도록 하는 이법 으로서 천(天)을 상정한다. 여기에서 천은 자연과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주재 자로 인정되므로 천이 지시하는 명령(天命)이나 천이 제시하는 질서(天道) 는 무조건적 따라야 할 인간의 도리로 설명한다. 인간 사회는 천이 제시하 는 질서나 명령을 순응해야 하고 만약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큰 재앙을 받 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유교의 하늘은 막연한 하늘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을 가르 쳐주지 못했다. 따라서 유교는 하나님이 없는 종교로서 국가의 부흥발전에 기여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들어 온 지 수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나 라를 강국으로 만들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유교의 나라 중국도 강한 나라 가 되지 못하고 사회주의에 휩싸이고 말았다. 다음으로 불교의 영향을 잠시 살펴보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졌 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372년)라고 전해지고 있고 384년 백제, 527년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하였다. 불교는 종교로서의 교리나 의식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음악레抉核공예렝피 �등을 전달하였고 중국문화뿐 아니라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문화까지 소개하 여 한국의 고대문화를 성립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불교는 질병을 고 친다든지, 자식을 구한다든지 하는 개인의 현세적 이익을 기원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불교는 개개인의 영혼 구제보다는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신앙으로서 성격을 매우 강하게 드러냈다고 전해지고 있 다. 불행하게도 불교는 신(神)을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는 자력 구원을 주장한 다. 사람의 힘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 어 온 지 1,70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유교나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를 강한 나라로 세운 적이 없었다. 지금 동양을 중심하여 불교의 나라들은 세계의 바닥을 치고 있다. 세상을 살리는 것은 기독교뿐이다.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영국을 막강한 나라로 만들었고 미국을 부강한 나라로 발돋움하게 했다. 그리고 노 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 독일 등 개신교의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힘 을 얻었고 또한 사회적으로 선진화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이제 큰 위기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나라가 사양(斜陽)길에 들어 선 것이다. 국가의 이데올로기는 점점 이상한 데로 흘러가고 있고 사회도 점 점 병들어가고 있으며 국가 경제도 점점 약화되어 가고 있다. 못살겠다는 소 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고 그 심도가 점점 더해가고 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는데 그 첫째는 무서 운 배교(背敎-apostasy)이다. 다시 말해 교회들이 하나님을 점점 떠나는 데 있다. 교인들은 영적인 힘을 잃어가고 있으며 심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교회 배교가 그 원인 배교는 개인의 불행과 국력의 쇠퇴로 곧장 연결되고 있다. 과거 이스라엘 왕 들의 배교 후에는 반 드시 국력의 쇠퇴가 있었다(대하 16:7-10; 26:16-23).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향한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하고(계 2:1-5) 최대한 하나님께 충성을 다짐해야 한다(계 2:10). 이것만이 우리 민족이 살 길이다.
186 no image 정보의 홍수가 가져다주는 독소_이선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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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0 2006-08-02
정보의 홍수가 가져다주는 독소 이선웅 목사_남문교회 스데반 집사의 복음 전파 활동에 위기감을 느낀 유대인들은 일단의 무리들 을 매수하여 스데반 집사를 공회에 고소하기에 이른다. 매수된 거짓 증인들 은 공회에서 “이 사람이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행 6:13-14)고 증 언하였다. 거짓 증언 판치는 시대 은혜와 능력이 충만했던 스데반 집사가 성전을 모독하거나 율법을 무시했을 리 없다. 다만 예수님께서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르치시면서 성전의 허물어 짐을 말씀하셨던 것처럼(요 2:19-22) 스데반도 성전에 대한 깊은 성경적 가 르침을 전하였을 수 있다. 또 율법을 공로의 수단으로만 여겼던 유대인들에게 그런 의미에서의 율법 사 용은 폐해져야 하고(엡 2:15)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율법이라는 새로운 시각 을 가져야 한다고 후에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역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은혜가 없어 이 깊은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은 스데반 의 말의 의미를 오해하였고, 오해하 여 왜곡된 의미를 나름대로 확장하였고 그 확장되고 왜곡된 의미가 마침내는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음모 (陰謀)’처럼 되어 버렸다. 오늘날 음모는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정치, 경제, 사 회, 종교, 문화 모든 분야에서 ‘음모 이론(The Conspiracy Theory)’들이 홍수로 불어난 강에 쓰레기처럼 부유하고 있다. 북핵 문제와 한미 FTA에도 음모가 개입되어 있고 기름 값이 인상되는 이면에도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들 말한다. 모든 종교에도 소설 ‘다빈치 코드’식의 음모가 판치고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음모 이론들은 사실 신문 지상에서나 볼 만한 거대한 일들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생활에도 그리고 교회 안에도 침투되 어 있다. 교회의 어떤 사람의 일상사를 보면서 우리는 쉽게 음모를 말한다. 가히 우리는 ‘음모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다.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음모 이론’은 “정보의 소외”로부터 발생한다고 여겨져 왔다. 어떤 정보가 다수에게 알려지지 않고 권력층에 의해 통제될 때 통제로 감추어진 사실들이 대중의 상 상에 의해 왜곡되고 증폭되어 음모 가 된다. 그러기에 그 감추어진 부분이 크면 클수록 음모의 규모도 비례하 여 커지게 되고 역사적으로 정보의 통제가 가능했던 권력 기관은 국가와 교 회였으므로 음모는 늘 정치적이었고 종교적이었다. 그러나 정보의 홍수로 가득 찬 21세기의 음모는 그 양상이 좀 다르다. 현대 는 오히려 정보의 과다로 인해 음모가 발생한다. 복잡한 기계일수록 오류의 확률이 높아지는 것처럼 정보의 과다한 교류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이 부 분이 과거와 다르다)하는 쓰레기와 같은 왜곡된 정보들이 음모를 만들어 낸 다. 음모란 구체적 처방을 외면하면서 끝없이 순환하는 폐쇄적인 커뮤니케이 션이기 때문에 늘 사실 확인을 회피한다. 그렇게 자연스레 왜곡되어 확장되지만 검증되지 않는 현대의 음모들은 진실 에 대한 아무런 결정적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증거라고 추정되는 것들을 끊임없이 소비하며 인간의 이기적인 호기심만을 충족시켜준다. 그래서 현대 의 음모들은 우리 주변에 널리 퍼져 있으며, 사소하기까지 하고, 우리의 죄 악된 정서들인 욕심, 질투, 이기심, 자존심 등을 자극한다. 사실 삶과 그속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은 늘 극복할 수 없는 불안 정성과 불투명성을 지녔기 때문에 이를 설명할 배후의 논리를 찾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욕구에 대해 긍 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욕구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결여로 인한 ‘바벨성의 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음모란 언제나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나 그러지 못하는 인간의 죄성 을 근간으로 한 호기심의 다양한 스펙트럼이다. 그러기에 정보가 통제되었 던 과거에나 그리고 그것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고 있는 지금에나 변함 없이 인간은 지속적으로 음모를 만들어 내고 있는지 모른다. 수많은 세대와 지배자들과 철학자들이 이 땅위에서 꽃을 피우고 사라져 가기 를 반복했지만 땅이 변함 없는 것처럼 아직도 변함 없이 그 누구도 밝혀내 지 못한 사실이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철학 그것은 인생의 참 가치요, 사람이 나아가야 할 유일한 생명의 길이다. 그것 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사람에 게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알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음 모도 개입될 수 없 다. 그렇게 한 점 의혹(음모)없이 진실을 아는 은혜 입은 자들을 전도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부른다(전 12:13-14).
185 no image 평양으로 간 요나_한화룡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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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0 2006-07-26
평양으로 간 요나 한화룡 목사_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국제정세가 심상하지 않다. 미국은 차제에 김정일 정 권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 북한 문제를 해결할 기세이다. 중국도 북한 문제 로 골머리를 앓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북한 당국이 언제까지 벼랑끝 전술 을 갖고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래 못 갈 벼랑끝 전술 이런 국제적 흐름과는 별개로 한국 정부는 아직도 북한에 대한 미련을 버리 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발사 전부터 미사일을 발사해도 금강산 관광과 개 성공단 사업 을 중단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지난 7월 12-13일 개최된 19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도 미사일 발사와 6자 회담 복귀 를 비롯한 남북 간 현안에 대해 이렇다할 입장 표명을 하지 못했다. 물론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대북 정책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인도적 지원과 교류 협력, 경제 제재와 군사적 공격 등 여러 국가 및 집단의 이해 관계에 따라 다양한 접근과 대응이 가 능하다. 하지만 필자 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현재 한반도가 처한 국내외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북한의 지도 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김정일은 수령절대주의 체제를 만들어 놓고 2000만 북한 주민들에게 폭정을 일삼고 있다. 그동안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 가는데도 김정일은 권력을 유지 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북한은 여전히 심각한 식량난에 처해 있고 한반도에는 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사면초 가에 몰린 김정일은 핵과 미사일을 갖고 위기를 돌파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몰락을 재촉하는 자충수가 될 것이다. 요즈음 북한이 허장성세 를 부리는 만큼 김정일의 영혼은 두려움에 떨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북한노동당 통일전선부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한 탈북자에 따르면 2003년 북 한 정찰국장이 저격을 당해 죽은 후로 김정일은 민간인들이 사는 지역에 새 벽 아니면 밤늦게 나타난다고 한다. 오죽하면 그를 따르는 사람이 없다고 별 명이 무졸(無卒)장군이겠는가! 아마도 현재 북한에서 가장 잠 못 이루는 사 람이 있다면 김정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 효과적인 방법 은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직접 전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혹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 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의 실수를 부지중에 반복하고 있 는 것은 아닐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 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욘 1:2). 놀랍게도 니느웨는 회개하고 임박한 파멸로부터 구원받았다. 그 이유는 무엇 이었는가? 한 편으로 신적 차원에서 볼 때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 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 니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욘 4:2). 다른 한 편으로 인간적 차원에 서 볼 때, 앗수르가 기원전 8세기 초반 여러 재앙들을 경험하면서 니느웨 사 람들의 마음이 가난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슈르단 3세(BC 772-755년)가 다스리던 기간 중, BC 765년부터 BC 759년까 지 기근이 되풀이되거나 지속되었으며, BC 763년에는 불길한 일 식(日蝕)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모든 자연 재난 때문에 BC 758년까지 여러 도시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흥미로운 것은 앗수르가 겪은 재앙들이 1990년대 이후 북 한이 겪은 여러 재앙들과 본질상 유사하다는 점이다. 북한은 1990년대 이후 식량 배급 중단과 기아, 홍수와 가뭄, 전염병과 대규모 아사, 대량 탈북과 민심 이반 등 각종 재난을 연이어 겪었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십 수 년 간 이루어진 많은 방북 행렬에도 불구하고 아 직까지 북한 당국에 심판과 회개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요나 같은 사자를 찾아보기 힘든 점은 매우 안타깝다. 1992년 북한을 방문 해 김일성 주석과 신앙적 대화를 나눈 바 있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대를 잇는다는 릭 워런 목사가 마침 내년 3월 국제대성회 주강사로 평양을 방문 할 가능성이 높다니 한 번 기대해 볼 일이다. 복음과 회개부터 전해야 릭 워런 목사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가서 오직 하나의 메 시지, 즉 예수님과의 관계 회복을 소망하는 것만이 영원하다는 메시지를 전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여러모로 한국 교회의 관심과 기도가 절실히 필 요 한 역사적 시점이다.
184 no image 이제는 우리 자신을 시험할 때다_우종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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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7 2006-07-20
이제는 우리 자신을 시험할 때다 우종휴 목사_황상교회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귀한 목숨과 재산을 앗아가 버렸습니 다. 정부도 국가적 위기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생각나는 것 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이렇게 많은 비가 내릴 것을 관계 당국자들은 예상치 못했을까, 이만큼의 수해를 입지 않을 방도를 취하지 못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되풀이되는 위기대처 능력 다른 하나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집이 무너지듯 바른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지 아니한 목회자들이나 신자들에게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과 연 주님의 말씀처럼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 는, 우리 노회는, 그리고 우리 총회는? 개혁을 외치면서 교단이 출범한 지 2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연륜으로 치 자면 청년의 나이입니다. 나름대로의 가치관이 세워졌을 나이입니다. 주변 을 살펴보기야 하겠지만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옳다고 믿는 바 를 따 라서 살아갈 만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총회나 노회나 지교회나 모두가 주님의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이 시라고 다함께 고백하며 우리는 그의 지체라고 즐겁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 님의 몸일진대 우리의 하는 일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 다. 우리가 주님의 몸으로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교회의 영광입 니다. 개인이든 지교회든 노회든 총회든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개인이나 지교 회는 말할 것 없거니와 노회와 총회는 더욱 이런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합니 다. 그리함으로써 총회가 노회와 지교회를 도울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일은 예상되는 것도 있고 어 떤 일은 예상 밖에 일어납니다. 긴급하게 해결해야 할 것도 있고 시간을 두 고 처리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그 어느 경우의 것이든 우리가 문제를 해결 하는 방식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의 원리에 따 라서 그 말씀을 순종한 열매로 나타나는 해결책입니다. 우리 개인이나 지교회나 노회나 총회가 어떤 사건을 다루어 감에 있어서 그 문제를 푸는 것도 좋지만 그 해결책이 성경적이 어야 합니다. ‘꿩 잡는 게 매’라고 성취하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임의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오 직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기쁨이 될 뿐입니다. 예외가 없을 수 없지 만 우리의 개인적인 결정이나 지교회나 노회나 총회의 결정이나 하는 일들 은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면도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능률과 성취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어떤 동기와 과정을 거치면서 그것을 이루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 면 거짓된 믿음도 엄청난 일을 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러 하다 보니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아니하면 교회 역시 성과제일주의로 흐르기 쉽습니다. 물결이 거셉니다. 산도 허물고 길도 없애버립니다. 집도 삼켜버리고 귀한 목 숨도 아끼지 아니합니다. 책임 있는 사람들이 미리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세상 물결은 더욱 거셉니다. 큰 자나 작은 자, 부자나 가난한 자, 많이 배 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성공한 자나 실패한 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거센 물결 앞에 서 있어 9월이 되면 우리 교단이 설립된 지 만 25주년이 됩니다. 꼭 년 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 지만 기왕에 25주년을 기념하는 해로 삼았으니 우리 자신을 돌아보 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처음 마음, 개혁의 의지가 살아있는지 그 동안 얼마나 진보를 이루었는지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아야 할 때입니 다. 훗날 주님 앞에서 인정받는 복 된 사람이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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