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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no image 아는 것이 병인가? 모르는 것이 약인가?_박성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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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1 2006-07-13
아는 것이 병인가? 모르는 것이 약인가? 박성호 목사_푸른초장교회 제70회 총회(1985년) 때부터 총대로 선정되어 20년 이상을 총회에 참석하다 보니 총회 결의안과 법에 대해 많이 듣고 또 실제로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 게 법을 많이 알게 되어 소위 법통(?)이라는 달갑지 않은 칭호를 여러 번 들 었다. 들을 때마다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 나는 법통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 보다는 법을 잘 지키는 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법 잘 지키는 사람’ 듣고 싶어 법은 화평과 질서를 위해 꼭 필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오히려 법을 지키 려다 화평과 질서가 파괴될 때도 있다. 법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이다. 불완 전한 인간이 만든 법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 그러나 불완전한 법이더라도 제정되었다면 지켜야 하며, 모순이 있더라도 개정되기까지는 지켜야 하며, 또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법은 지켜져야 한다. ‘아는 것이 병이고, 모르는 것이 약’이란 말처럼 차라리 법을 모르면 편 할 텐데 하고 느낄 때가 많다. 또 법을 몰랐다면 대하기 편하고, 온유하며, 둥글둥글한 사람으로 인식될 텐데 법을 알고 지키려다보니 까다롭고 융통성 도 없는 경직된 사람으로, 심지어 사랑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게 된다. 가끔 후배 목사님들이 주일에 임직식을 하려는데 와서 순서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 평일에 성도들이 모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임직자들조차도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해가 간다. 내 개인 적인 견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모로 교회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 런데 그런 부탁 받을 때마다 86회 총회(2001년. 강변교회)에서 주일행사 금 지의 건에 관한 결의사항이 생각난다. 제86회 총회시에 경북노회장이 헌의한 ‘제69회 총회(1984년. 송월교회) 결 의 재확인 건’(강단 십자가 설치금지. 가운 착용금지 및 주일행사 금지)이 다시 의결되었었다. 그 당시 필자는 이제 세상도 많이 변했고 성도들의 신앙 도 크게 성숙해졌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당회에서 잘 살펴 처리하도록 했으 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인천의 모목사님께서 개인적인 행사가 아닌 공 적인 임직식 등은 허용해 주었 으면 한다고 요청도 했으나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통과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총회 법에 어긋나는 일이기에 주일에는 하지 말라고 권면했 다. 그래도 형편상 해야 한다는 분들에게 필자는 그 임직식에 참예할 수 없 다고 거절하고 말았다. 거절하는 사람의 마음도 무척 아팠었고 부탁하는 목 사님들도 무척 섭섭해했었다. 내가 너무 ‘법, 법’ 하는 것 아닌가? 사랑 이 부족한 사람이 아닌가? 하고 반성도 하고 자책도 했었다 그러나 어떤 목사님은 그런 법을 잘 몰랐다고 하면서 권면을 받아들여 날짜 를 평일로 바꾸기도 했다. 그럴 때는 법도 지킬 수 있고 도움을 드릴 수 있 어서 무척 기뻤다. 그러다 보니 우리 노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주일에는 하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신문에 주일에 하는 행사 광고가 대문짝만하게 나더니 급기야는 총회의 권위도 있고 책임도 있는 분이 시무하는 교회의 광고까지 실리고 또 기사까지 보도되고 있다. 참 당황스럽다. 이제 주일에 행사를 요 청할 때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실제로 어떤 분은 신문을 보고는 이런 교회도 하는데 괜히 박목사 말만 듣 고 그 당시 날짜를 바꿨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때 순서 부탁을 거절당한 목 사님들이 아직 무슨 소리는 안 했지만 더 섭섭할 것이며 까다로운 목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고 또 이런 질문에 어 떻게 답변해야 하는가? 지금 우리 교단 안에 십자가를 설치한 교회도 있다. 보기에는 참 좋아 보였 다. 우리 도 십자가를 달자고 요청하는 교인도 있다. 또 가운을 입고 설교하 는 목사님들도 있다. 주일에 행사하는 교회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법을 지켜야 하기에 교인들의 편의나 요청을 무조건 무시하고 법을 준수하 는 교회, 법 때문에 하고는 싶지만 하지 못하며 망설이는 교회, ‘법이란 교 회를 위해 있는 것이다”라며 법을 뛰어 넘어 완전히 자유하는 교회, 법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해 눈치 보며 하는 교 회, 모르는 게 약이기에 그런 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용감하게 시행하는 교 회들이 있다. 법은 하나인데 시행은 제각각 악법도 법이며, 법 앞에는 다 평등하다. 법을 지키는 데는 다양성이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교단 교회는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법 r 이 모순되고 시대에 뒤떨어진다면 과감히 개정하든지 아니면 이 정도의 문제 는 각 교회가 알아서 할 수 있도록 당회에 맡기든지 어떤 조치가 필요한 시 점이다. 모두가 잘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들어 아무런 갈등 없이 기쁨으로 법 을 지키며 또 모든 교회에 유익과 기쁨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182 no image 유비쿼터스 시대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_박홍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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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6 2006-07-05
유비쿼터스 시대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박홍서 목사_대언교회 30년 아니 20년 전만 해도 생각지 못할 그러한 시대가 오늘날 우리 앞에 펼 쳐져 있다. 그것은 와이브로 유비쿼터스 시대요 멤스 시대이다. 요즘은 자 고 일어나면 신종용어인 와이브로, 유비쿼터스, 솔루숀, 지상파 DMB, 모바 일 뱅킹, 홈 네트워크, 브로드케스팅, 컨버전스, 텔레메틱스, 쌍방향 커뮤니 케이션, 양방향시대, 프로슈머 등의 용어가 생기고 듣도 보도 못한 수많은 통신 콘텐츠가 생겨난다. 급변하는 신종용어 시대 현재 우리나라는 IT강국으로 그것은 곧 콘텐츠 강국으로 통한다. 시대에 뒤 떨어지거나 그 시대 문화감각에 둔하면 콘텐츠가 무엇인지 무슨 콘텐츠인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필자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터넷을 하지도 못했었 다. 컴퓨터만 보면 알 수 없는 영역의 차디찬 기계통으로 외면하고 쳐다보지 도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배워서 컴맹을 가까스로 탈출하여 사용하고 있 다. 그런데 이제는 시대와 세계를 바꾸어 놓았던 컴퓨터의 시대를 넘어서서 휴대폰 만능시대로 활짝 열려졌다. 이것은 모든 사물에 컴퓨터를 내장하여 휴대폰으로 원격 조정하여 사용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천국은 그런 것하고 상관이 없다고 혹자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현시대에서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특별한 이유의 사람을 빼고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게 휴대폰은 사람들에게 애용이 되고 있다. 학생들이나 젊 은이들은 이 휴대폰이 없으면 우울증까지 걸린다. 휴대폰에 너무 의존하여 오히려 치매현상이 심각하다. 그만큼 이 휴대폰은 우리들의 일상 속에 떨어질 내야 떨어질 수 없는 아주 깊고 밀접한 관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이제는 이 휴대폰을 외면하거나 멀리 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그 시대의 문화나 정보를 외면하고 살 수는 없다. 오히 려 그 시대 문화를 이끌어 가야할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정보시대나 지식기 반 사회는 크리스천을 위해 열어놓은 시대로 보기 때문이다. 신앙은 절대로 과거나 현재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언제나 미래 지향적이 다. 성경도 하나님 나라의 정보요 지식이다. 정보를 알려줄 사명이 있고 지 식을 통해 인생의 가치와 삶의 질을 최상으로 만들어 주어야 할 막중한 사명 이 크리스천에게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경을 선물해 주신 것이다. 그 영 원한 생명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의 지식이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정보의 시대인 지식 기반사회에서 적용하기가 더 쉽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영적으로 예민해져 있기에 세상 문화와는 담을 쌓고 세상 지식은 멀 리 하는 경향으로 기독교는 세상 문화 수준에 상당히 뒤떨어져 있다. 세상 을 성경으로 조명해 볼 때 육이 강성하며 역사이래 가장 악한 세상일 것이 다. 그것은 교회가 문화를 정복하지 못하고 세상 문화에 정복당해 왔기 때문 이다. 그것은 사단에게 정복당하는 것이다. 21세기는 통신의 능력이 그대로 나타나는 세상이다. 그러나 누구의 손에 들 리느냐에 달려 있다. 사단의 손에 들리면 육의 소리나 정신의 소리에 민감 한 사람들은 사단에게 빼앗긴다. 세상은 벌써 제2의 바벨탑 같이 커졌고 아 마 제2의 바벨탑이 무너질 때는 세상 끝이 될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육체의 주림 때문에 교회는 부흥되어 왔었다. 이제는 정 신 문화의 주림으로 교회를 떠난다. 그것은 교회가 사람들의 정신 문화를 채 워주지 못하는 데 있다. 현재 나타난 징조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다 는 통계에 있다. 그러나 앞으로 통신시대를 교회와 성도들이 주도한다면 떠 났던 많은 사람들을 찾아올 수 있다. 성도들은 신앙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건물 중심의 교인으로 머무르면 배교하고 마는 시대가 온다.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의 중심이 확고하고 주님 의 제자가 되어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는 신앙이어야 한다. 그것은 개혁주 의 신앙이요 성경 중심적인 신앙을 말한다. 동적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한국교회의 외형적인 신앙주의와 같은 정적인 신앙에서 동적인 신앙으로 변 화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통신 시대는 지식 기반 시대이기에 감정적인 신앙 은 버티기 어렵고 성경적 신앙관으로 정립되는 자만 살아남을 것이다. 그때 개혁주의가 꽃을 피우고 부흥된다. 그래서 정적인 시대에는 개혁주의가 힘들 고 어려웠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졌다. 그 중심에 우리 개 혁주의가 있어야 한다.
181 no image 북한의 미사일 발사시도가 가져온 영향_김수흥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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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4 2006-06-28
북한의 미사일 발사시도가 가져온 영향 김수흥 목사_합신 초빙교수 북한은 최근 대포동 2호를 발사한다고 야단이었다. 언론은 뒤에 대포동 2호 가 아니라 백두산 2호라고 정정해서 보도했다. 발사 준비를 알리는 언론은 하루하루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었다. 미사일 발사에 이목 집중돼 6월 18일이 고비가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고위관리가 갑자기 그들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북미(北美)간 회담을 하자는 것이었다. 회담을 중단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미사일 발사를 시도했다는 것 이다. 북한은 육자(한,일,미,북,중,러) 회담을 열어놓고도 그것으로는 별 큰 유익이 돌아오지 않을 것같이 보여 북미 양자회담을 원한 것이었다. 국제 사회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북한, 벼랑 끝 전술을 쓰지 않으면 안 되 는 북한, 그래서 미사일 발사라는 초강수 전술을 쓸 수밖에 없었던 북한, 어 쩌면 처량한 신세가 되어 버린 동족이 불쌍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북한은 이 제라도 국제 사회의 규약을 준수하고 육자회담에 성실히 복귀하며 신용을 쌓 아가야 한다. 마치 리비아의 카다피처럼 국제 사회에 한발 다가와야 할 것이 다. 이번의 미사일 발사 시도만 해도 엄청나게 불행한 파장을 몰고 왔다는 사실을 깊이 알아야 한다. 첫째,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미친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뜻 있는 기독교인 들 그리고 양식(良識)있는 국민들의 마음속에 북한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큰 문제아, 불량아, 지구촌 미아(迷兒)라는 불행스러운 인상으로 더욱 각인되었 다. 이 얼마나 큰 손해인가. 둘째, 일본과 미국 그리고 우리의 우방인들에게 심히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이들 나라들에게는 두 가지로 불행한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하나 는 북한이라는 나라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라로 각인시켰다. 미국의 대 통령은 북한대표부의 고위관리의 양자 회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리 고 육자회담에 나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 연합으로 하여금 더욱 하나로 뭉치게 만들어주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우려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이 지난 19일 태평양 괌 부근에서 10년 만에 최대 규 모의 군사 훈련인 ‘용감한 방패(Valiant Shield) 2006’에 돌입했다. 19?23일 실시되는 이번 훈련은 에이브러햄 링 컨, 로널드 레이건, 키티 호크 등 3개 항모와 함정 30척, 군용기 280대, 병 력 2만2천여 명이 동원되는 대규모 훈련으로 3척의 항공모함이 태평양에서 동시에 연습하는 것은 베트남전쟁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이번 훈련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 이뤄 져 북한이 실제로 미사일 발사를 강행할 경우 군사훈련 전반에 적잖은 변화 가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또한 북 한의 미사일 발사 움직임과 관련 주일미군은 미사일 관측함인 ‘옵저베이션 아일랜드호’를 나가사키현 사세보 해군기지에 배치하고 전자정찰기 RC-135S 를 미 본토에서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로 이동, 투입하는 등 감시체제를 강화했다. 또 동해에 이지스함을 배치했다는 정보도 있다. 일본 자위대도 이지스함 ‘초카이’를 사세보 기지에서 동해로 파견했다. 전 자전 정보수집기 ‘FP3’와 전자 정찰기를 배치, 정보수집과 추적 태세를 강 화하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이제는 앞 으로 북한은 벼랑 끝 전술 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정상인의 걸음을 걸어야 한다. 셋째, 가장 큰 불행은 북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졌다는 것이다. 미국 을 붙잡고 더 큰 것을 얻어내려다가 얻어내지도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더 욱 멀어지게만 되었다. 사실 미국이 무엇인가. 미국은 아직은 국제 사회에 서 강력한 국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미국의 국력도 점점 기울어지고 있 고 국제 사회에서 배척을 받고 있지 않은가. 미국을 붙잡고 무엇을 얻어내려 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아닌가. 과거 이스라엘은 주위의 강대국을 의지하려가다 하나님으로부터 수많은 책망을 들고 말았다(사 30:6- 7; 36:6). 북한은 강대국 의지하려 해 이제 북한은 참으로 살 길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회주의 사상 을 버리고 복의 근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와야 한다(골 1:19).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요 20:28; 골 1:15), 온 우주를 창조하셨고(요 1:3; 골1:16),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분이시다(골 1:14). 북한은 이제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와 복을 빌어 잘 사는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180 no image 역사는 문화유산으로 말한다_최영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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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4 2006-06-22
역사는 문화유산으로 말한다 최영묵 목사_화곡언약교회 우리는 지금 월드컵 비상체제 속에 살고 있다. 온통 거리는 붉은 티셔츠차림 의 사람들과 우왕좌왕 꼭지점 댄스를 추는 사람들과 남녀노소와 국적을 초월 하고 외쳐대는 “대~한민국”과 여기에 따라오는 박수소리들이 난무하고 있 다. 21세기 초두 우리가 지구상에 펼쳐 놓은 월드컵 거리응원 문화는 월드컵의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각양각색의 다양한 모습으로 지구촌의 멋진 응원문화 로 남게 될 것이다. 월드컵 응원 체제 돌입해 시대마다 우리 삶의 방식에 따라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가 자리 잡게 된다. 식민지시대의 문화, 군사문화의 망령들, 전통문화라는 또 다른 가면들과 월 드컵 거리문화 등등. 이처럼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곳의 흔적들은 좋은 것이 든 나쁜 것이든 시대를 넘어 문화의 유산이라는 모습으로 후손들에게 전해지 게 되며 후손들은 이 유산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하고 못내 아쉬워하기 도 할 것이다. 여기에 먼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고민이 있는 것 아닐까? 21세기 의 화두는 문화라고 한다. 특히 이 큰 관심거리의 중심에 살고 있는 우리 교 회는 이 사회에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문화를, 어떤 문화 유산을 남겨 줄 수 있을까? 한국 문화의 70%는 불교문화라고 말한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한국 전통문화 정책을 수립해 가야 한다고 정책위반자들과 문화계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 로 말하고 있다. 긴 세월의 흔적들에 따른 유리함(advantage)으로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가 짧아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위안의 말로 이 사실들을 인정해야만 하는 내 자신이 왜 이리 초라하고 내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생각 이 드는지 모르겠다. 며칠 전 사적 258호인 명동성당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왜, 저들은 새 건물을 짓지 않고 번거롭게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돈이 없어서는 아닐 것이다. 같은 시기에 세워졌던 개신교 새문안교회당의 변화되 고 신축되어진 모습을 그려보면서 100년 후 우리들의 후손들은 이 두 교회 의 예배당 문화유산에 어떤 평가를 내려 줄 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혹시 우리는 경제개발논리와 성장주의에 빠져 우리 시대의 문화유산을 아쉬 움이라는 것으로 남겨주려는 것은 아닌지, 혹시 여름성경학교 기간에만 입 고 버려야 하는 티셔츠 마냥 일회용 삶의 문화만 교회문화로 물려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더 늦기 전에 교회와 문화, 기독교 문화관을 성찰해 보고 새로운 사회적 문화비평을 해보았으면 좋겠다. 한편에서는 “붉은악마”라는 명칭에 대해 악마인지, 뭔지에 대해 반대운동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월드컵 전사들을 위해 기도 부 탁” 이야기가 나온다. 차라리 사소한 명칭에 대한 왈가왈부 할 것이 아니 라 지나치게 과열되고 상업화되며, 미디어의 현혹 속에 무아지경으로 빠져있 는 현상들을 비판하고 반대하면 좋을 것이다. 최소한 문화연대의 비판처럼 말이다. 오늘도 개신교는 “전도와 교인 숫자의 놀음을” 증빙자료로 해서 한국 기독 교의 부흥시대가 끝나고 쇠퇴기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어쭙잖은 위기적 사회 비평을 해댄다. 오히려 우리가 걱정해야 할 진정한 쇠퇴는 전혀 뿌리내리지 못하고 후대에 남겨 줄 것조차 없는 한국적 기독교회 문화유산이 아닐까? 교회문화, 유산으로 남겨야 좋은 교회와 목회를 꿈꾸는 우리들부터 기독교적 삶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문화유산에 대한 깊은 생각들과 진정한 기독교의 부흥들을 논했으면 좋겠 다. 붉은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을 외쳐대면 자발적으로 박수 소리가 나오는 것처럼, 교회에서 외치는 소리에 만왕의 왕께 영광을 드리는 총체적인 삶의 모습들이 기독교 문화로 비쳐질 수 있도록 말이다.
179 no image 총회 25주년 대회를 돌아보며!_이주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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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8 2006-06-15
총회 25주년 대회를 돌아보며! 이주형 목사_오정성화교회 먼저 이 대회를 은혜롭게 마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준 비하고 진행하신 모든 분들께 또한 감사드린다. 총회에서 25주년 대회를 결 의하고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이일을 추진하는 과정에 하나님의 세심한 섭 리와 간섭하심으로 정말 은혜롭게 진행되고 은혜롭게 마친 것이라 생각하며 다음 몇 가지 감사할 이유를 정리해 보았다. 은혜롭게 마친 것 감사해 첫째 총회 설립 25년 만에 처음 큰 행사에 목표 이상 많이 모이므로 앞으로 도 무한한 가능성을 심어 놓았다는 점이다. 목사, 장로 1004명 목표에 첫날 1005명 그리고 1100여명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역사가 아닐 수 없 다. 왜냐하면 장신과 연합한 이후 합신에 들어와서 볼 때 장점도 많이 있었 지만 모이는 일에는 약하다고 느껴졌고 실재로 그랬다. 이런 중에 이번 모임 은 그런 생각을 불식시키고 앞으로도 동기 부여와 목적만 확실하다면 얼마든 지 모여서 큰일을 해낼 수 있다는 확신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짧은 일정이었지만 짜임새 있는 기획과 내실 있는 내용에 감사하지 않 을 수 없다. 처음에 3박4일 일정이었지만 5.31 지방선거일이 나중에 발표되 어서 고심 끝에 하루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도 모든 내용을 소화 시키려고 애를 쓴 흔적이 여러 가지로 많은 유익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과 거 25주년을 돌아보며 우리의 현주소를 돌아보고 앞으로 25주년을 설계 해보 고, 나아갈 방향을 새롭게 다짐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셋째 보수주의라는 위장된 틀 안에 갇혀있던 영성이 새롭게 발산되고, 무한 히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찬송 인도하는 리더가 젊은 목회자였고 그가 손들고 찬양하자는 말에, 일어서서 찬양하자 는 말에 어린아이 같이 따라하는 순수한 모습과 마지막 밤 합심하는 기도 시 간에 무릎 꿇고 같이 손에 손을 잡고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모습이 얼마나 힘 이 있고 순수한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으리라 믿는다. “보수는 진보를 따라 가는 것이다.” 이런 우스운 말을 듣기도 하고 본인 도 말을 하기도 했었다. 진보 는 앞서 행하면서 욕을 많이 먹었다. 그리고 몇 년 지나서 보면 욕하던 보수는 그 일을 그대로 따라 가는 것을 지금까지 보았다. 찬송할 때 박수한다고 이단시 할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게 말하 는 사람은 없는 것 같고, 조찬기도회를 교회에서 안하고 호텔에서 한다고 비 난하더니 지금은 말하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교회에서 하면 잘 안 모인다고 한다. 노회 및 교역자 모임을 해외에서 갖는다고 비난하더니 몇 년 후에는 그대 로 따라 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정체성은 흔들리지 말아야 하겠으나 복 음 전하는 방법은 다양해져야 하듯이 침체된 우리 교단의 영성과 한국교회 부흥운동 100주년이 되는 2007년도를 맞이하는 이 때에 좀 더 폭넓은 시야 와 새로운 방법에 대하여 수용의 자세를 가져보는 것이 어떨지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싶다. 넷째, 지도자들의 리더십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총회장님에게 귀 한 사명감을 주셔서 “변화냐? 죽음이냐?”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할 것을 강 조하셨다. “죽어야 산다. 죽여주시옵소서. 그리고 나를 살려주시옵소서.” 절규에 가까운 중심의 외침은 하늘에 상달되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 대회였다고 생각하며 준비위원장과 준비위원들의 계속된 기도와 목적 에 부합된 내용으로 맞추어 가도록 준비해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또 한 증경총회장들과 전임 총장들이 많이 참석하셔서 기도와 격려해 주심이 너 무 아름다웠고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변화 아니면 죽음’ 동감해 이제 글말 마치며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이런 대회를 매년 정기적인 행사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충분 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둘째, 큰 행사가 아닐지라도 목사와 장로들이 3박 4일 일정으로 자주 모여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모든 목회자와 장로 들 같이 합심하여 계속 동참하여 교단의 발전과 교회의 부흥과 자신의 영성 을 회복하는 계기를 삼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178 no image 전국의 백만 어머니가 기도하는 모습을 꿈꾸며_김원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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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3 2006-06-09
전국의 백만 어머니가 기도하는 모습을 꿈꾸며 김원광 목사_중계충성교회 중계충성교회에서 어머니 기도회가 시작된 지 벌써 2년이 되었습니다. 그동 안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우선 처음에 40명의 어머니로 시작 된 어머니 기도회는 매주 300여명의 어머니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는 모임으 로 변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우리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더 크게 확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300명씩 모이는 어머니 기도회 중계충성교회 어머니 기도회의 놀라운 발전은 이미 극동방송에도 몇 차례 소개되었습니다. 어머니 기도회의 시작은 단지 본 교회 어머니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소모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전혀 기대치 못 한 다른 일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임을 통하여 불신 어머니들 이 교회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해 말, 어머니 기도회가 방학에 들어 갈 때였습니다. 타교인 한 분이 저 희 교회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 분은 어머니 기도회가 너무 방학을 길게 한 다고 항의를 했습니다. 항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중계충성교회 어머니 기도회에 불신 어머니들을 여러분 모시고 나가고 있 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기도회를 쉬면 어떻게 합니까? 모임을 가급적 계속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어머니들은 어머니 기도회에 참석해서 처음으로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중계충성교회 어머니 기도회에 이런 분 들이 많이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도자들이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 다.” 저희는 어쩔 수 없는 교회 상황 때문에 쉴 수밖에 없음을 말씀드리면서 그 분들을 그 성도님의 교회로 가급적 모시고 나갈 수 있도록 해 보시라고 권면 한 바 있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어린 시절 교회에 다닌 경험이 있으나 현재는 신앙생 활에서 떠나 있는 분들의 경우, 어머니 기도회는 가장 효과적인 전도방법이 되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머니 기도회에 참석하는 성도들에게 우리는 이웃들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 도록 의식화합니다. “엄마가 자식을 위해 기도도 안 하고 뭐하세요?” 이 간단한 문구가 의외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 소리를 들은 엄마들이 교회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평생 불교를 믿던 한 어머니가 계십니다. 그 분은 장성한 딸이 “엄마, 나 를 위해서 기도 좀 해주세요”라는 부탁을 받고 마음에 부담을 느끼던 중, 본 교회에 어머니 기도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서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고 지금은 주일에도 그 딸과 함께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계십니다. 참으 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제 모두 한 마음으로 이런 꿈을 갖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전국의 모든 교회가 어머니 기도회를 열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 서. 매주 수요일이면 전국에서 백만의 어머니가 자기 교회에 엎드려 자녀들 을 축복하며 기도하게 하옵소서. 이로 인하여 이 시대의 미래인 자녀들이 복 을 받게 하옵소서. 또한 그로 인하여 이 민족이 복을 받게 하옵소서.” 우리는 이런 우리의 기도가 허공을 치는 기도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 머니 기도회에서는 자녀와 갈등이 있는 어머니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자녀들의 삶 에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자신 의 삶의 문제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가정의 모습을 다시 한번 살펴 주 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바르게 하는 귀한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정과 자녀의 갈등 회복돼 우리는 어머니 기도회가 하나의 큰 무브먼트(Movement)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온 나라의 모든 교회 가운데 이 어머니 기도회가 하나의 운동으 로 자리잡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 모 두의 교회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77 no image 주님을 배우며_전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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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2 2006-06-01
주님을 배우며 전현 목사_명성교회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거닐며 우리도 주님을 닮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꿀 수 있으면 좋겠다. 외적인 아름다움이야 누구나 쉽게 가꿀 수 있지만 내적인 아 름다움을 가꾼다 함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꾸준 히 가꾸어야 하는 것이기에 더욱 더 힘들다. 내적 아름다움 절실해 우리의 마음이 장미만큼 화사한 아름다움이 아니더라도 백합만큼 청초한 아 름다움이 아니더라도 달밤에 겸손하게 피어나는 박꽃만큼의 소박한 아름다움 만이라도 가졌으면 좋겠다. 외식이나 가식이 없는 있는 그대로를 나타내 보려고 하는 마음의 박꽃과 같 은 마음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억지로 지어내는 어색한 표정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진실된 아름다운 표정으로서의 마음 만이라도 가졌으면 좋겠다, 누리를 밝게 비추어주는 태양만큼의 강렬한 빛이 아니더라도, 밤하늘을 밝 게 밝혀주는 달빛만큼의 황홀한 빛이 아니더라도 우리를 아는 이들의 마음 을 조 금이라도 즐겁게 기쁘게 할 수 있는 그런 밝은 빛으로 우리네 마음이 따뜻한 빛을 밝힐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성경 마태복음 5장 14절에 귀를 기울여 보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주 님을 배우며 우리는 참된 주님의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우리네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은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 무한한 보답을 해주신다. 우리네가 주님을 배반하지 않으면 결코 주님도 우리를 배반하지 않으신다. 우리네가 우리 자신의 빈 마음을 그대로 주님 앞에 내어 보이면 주님은 우리네의 빈 마음에 온유, 사랑, 겸손, 진실을 가득 채워 줌으로써 참된 주님을 깨닫게 해 주심을 배울 수 있으리라. 우리는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기쁨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들은 독자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하는 것을 선호할지 모른다. 그리 고 남을 위해 내가 홀로 관제로 부어지는 것을 커다란 희생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생각을 갖지 않았다. 그는 혼자 믿음의 영웅 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남을 위한 자기 희생도 이기적 일 수 있다. 좋은 일 도 같이하기보다는 혼자 마음이 편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 믿 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 도” 라고 말했다. 관제는 이미 제단에 올려진 제물 위에 부어지는 것이다. 그는 혼자서 관제와 같은 제물이 된 것이 아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이미 행 하는 믿음의 제사와 봉사 위에 자신도 동참하여 더 온전한 희생 제물이 되도 록 하겠다는 것이 바울의 뜻이었다. “바울의 기쁨” 은 함께 누리는 기쁨이 었다 개인주의적인 봉사나 헌신에서가 아닌 다른 성도들이 헌신에 참여하는 지체 의 역할을 통해 누려지는 기쁨이었기에 바울은 교회 전체를 향해 함께 기뻐 하자고 외쳤다. 우리는 주님의 인내를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인내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기 다리고 겸손해지고 진실을 가졌으면 좋겠다. 오늘은 이기심과 합리주의로 가 득 찬 현실이라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주님을 배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 생과 봉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있음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 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인내 배워야 “주님, 제가 지금까지 사랑했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저의 우상들이었습 니다. 그것은 저를 살찌운 것이 아니라 저의 마음을 오염시키고 정신을 오도 했으며 영혼을 메말렸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사랑이 내 영혼의 회복을 위한 자비의 표현인 것을 깨닫고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는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 을 바라보며 연연해하지 않겠습니다. 이 연민의 마음으로부터 저를 온전히 해방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발아래 앉아 주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 며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주옵소서.”
176 no image 아버지(父)의 회복_최성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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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5 2006-05-24
아버지(父)의 회복 최성대 목사-동산교회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가정마다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바란다. 변할 수 없는 진리는 아버지의 위치이다. 신명기 5장 16절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 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 고 복을 누리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부모는 누구인가? ‘부모’ 공경이 첫 번째 일 첫째, 영혼의 아버지 천부(天父)를 경외해야 한다. 올림픽을 능가할 만한 월드컵에 관한 독일 책이 얼마 전에 ‘하늘에 계신 우리 축구시 여’(Fussball Unser)의 제목으로 발간되었다고 한다. 지구촌의 아버지는 골프와 축구 가 되어버렸다. 골프와 축구가 나의 목자가 되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Vater Unser)의 유일성이 인간의 열광에 의해 하늘에 계신 우리 골프와 축구로 비하 된 것은 부성의 세속화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거룩성을 회복해야 한다. 아 버지가 아버지 되게 할 거룩한 능력이 우리에게 전 혀 없다. 다만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 이 우리에게 임하게 해달라고 세리처럼 긍휼을 기도할 뿐이다(요 17:6; 눅 18:13). 둘째, 육신의 아버지 지부(地父)를 공경해야 한다. 주기도문의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로 개정해야 한다는 여성주의자의 주장 은 정도를 벗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가정의 부성과 모성, 남성과 여성의 인격 의 균형을 조화롭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1:27).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경 외하듯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주기도문의 가르침대로 부성 아버지의 위치만 높 이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부성은 아버지의 정의(징계, 신 8:5)와 동시에 모성의 사랑(신 1:31)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버지는 연세가 들어가면서 여성화되고 어머니는 남성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이다. 인간은 아버지 안에 어머니, 어머니 안에 아버지로 지음 받았다. 셋째, 나라의 아버지 국부(國父)를 공경해야 한다. 나라마다 초대 대통령과 수상의 자리를 존경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초가 되는 인물 로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기초 없는 건국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건국을 형성하 는 지도자들의 아버 지됨(fatherhood)을 존중하는 국격(國格)을 세워가야 한다. 넷째, 학교의 아버지 사부(師父)는 장인(匠人)처럼 공경 받아야 한다. 지식을 전수해주는 부드러운 장인(artisee)같은 스승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산다 는 것은 평생 교육이다. 동물은 본능에 의존하므로 교육과 스승이 필요 없다. 그러나 인간은 형상 즉 가능성(은사)의 발견과 발전, 꽃피고 결실케 해주는 길잡이와 같은 스 승을 공경해야 한다. 인간은 동물같은 헛된 생존 경쟁이 아니라 목적 있는 실존 경쟁 과 독립적 자율이 아니라 은혜에 전적 의존하는 자율을 추구하는 의미를 만들어 가는 존재(homo poeta)이다. 다섯째, 신앙의 아버지 신부(神父)를 더욱 존중해야 한다. 성경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 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고 말씀한다. 여기 “수고하는 이들”은 신앙 양육을 위 해 해산의 수고(갈 4:19)를 감당하는 신앙의 부모(선교사, 전도자, 교역자, 주일학교 선생)를 뜻한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신앙의 아버지로(왕하 2:12), 사도 바울은 디모데 를 신앙의 아들(딤전 1:18)로 불렀다. 6.25 전쟁으로 해 체된 육신의 가족에게 가장 좋 은 소식은 신앙에 의해 새롭게 건설되어 가는 은혜의 가족이다(엡 2:19; 마 12:47- 50). 신앙 안에서 이룬 가족들 가정 해체의 관계 회복과 점진적 치유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럴 때 육신의 가족을 상실한 사람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기능이 순기능으로 회복 될 수 있다. 오직 주님의 은혜 안에서만이 가능할 뿐이다(빌 4:13).
175 no image “성숙한 교회는 가정 예배로부터 시작된다”_안만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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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9 2006-05-19
“성숙한 교회는 가정 예배로부터 시작된다” 안만수 목사_화평교회 신앙의 가정을 세워가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이러한 제도가 있는 것은 가정의 건강에 대한 우리 사 회의 깊은 관심을 반영한다. 가정의 행복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값비싼 희생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정을 지키려 한다. 이것은 사람 의 행복에 가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가족이 고치기 어려 운 병에 걸리거나 큰 사고를 당하는 만큼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 없 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사람은 가족에게 의지하는 경향이 더욱 크다. 힘들수록 가족 의지해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가정 파괴 현상은 사회를 무질서와 혼란에 빠뜨리게 한다. 따라서 가정을 바로 세우는 것은 사회와 나 라가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급히 풀어가야 할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근 많은 사회단체나 정부 기관이 가정 문제 해결을 위해서 여 러 각도로 관심을 기 울이고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가정의 문제는 사회 제도 및 정책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면 들이 있다. 가정은 근본적으로 영적 공동체이다. 가족 구성원들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 는 데에서 서로 뗄 수 없는 연관성과 의존성을 갖고 있는 유기체이다. 신앙 의 문제가 가족에게는 단지 가족 구성원의 한 개인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 의 문제이다. 가족이 함께 그 문제를 풀어갈 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이 자라가고, 그렇게 함으로써 가족의 전체 믿음이 또한 자라간다. 이러 한 유기적 공동체로서 가정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가족이 함께 이루어 간 다. 이러한 뜻에서 가정은 작은 교회라 할 수 있다. 영적 공동체로서 가정이 건강하려면 무엇보다 신앙 부흥이 일어나야 한다. 신앙은 회개가 있을 때 자라게 된다. 이것은 신앙적 가정이 되려면 무엇보 다 가정에서부터 회개 운동이 일어나야 함을 뜻한다. 그러면 참된 회개는 어 떻게 경험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함께 예수 그리스도 의 구원 사역에 기초하여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때 경험할 수 있다. 바 로 이러한 이유에서 유명한 청교도 목사인 리처드 백스터는 가정예 배를 강조한다. 가정에서 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 게 된다. 먼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값비싼 사랑의 선물인 줄을 알고 감사하게 된다. 또한 가족이 개인적 으로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지난 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한 부끄 러운 모습을 깨닫고 회개하게 된다. 한 걸음 나아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개인적으로 또한 공동체적으로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자라게 된다. 영적으로 건강한 가정은 교회의 부흥에 결정적이다. 교회가 바른 질서를 이 루고 부흥하려면 굳건한 신앙에 바탕을 둔 가정이 필요하다. 교회를 구성하 는 한 가정 한 가정이 바른 신앙에 서 있지 않으면, 그러한 사람들의 모임 인 교회 역시 든든히 서 갈 수 없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가정에서부터 신앙 부흥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신 앙 안에서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경우가 있 다. 때로는 가정이 교회의 전문 사역자로부터 가르침과 권면을 받아야 하 고, 믿음이 성숙한 교인들로부터 사랑의 위로와 격려를 받아야 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기독교 신앙은 교회중심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가정의 건강은 개인의 행복과 교회의 부흥 및 사회와 나라의 질서와 안녕에 결정적일 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가정을 새롭게 하는 운동은 5월 한 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언제나 끊임없이 일어나야 한다. 매일 매 일이 가정의 날이어야 한다. 가정과 교회 뗄 수 없어 이와 관련하여 올해로 창립 25주년을 맞는 우리 교단이 여러 기념사업과 더 불어 성경적 가정 세우기 운동을 벌여가기를 제안한다. 가정이 모든 공동체 삶의 기본인 만큼, 믿음의 훈련과 성장은 바르고 건강한 가정에 초점을 두어 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가정을 세워 가는 것이 신앙의 실천으 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설교와 교육 및 그 밖의 모든 교회 활동을 통해 주 지시켜야 한다. 광야의 소리 야고보 사도를 처형하고 베드로까지 처형하려 했던 헤롯왕의 계획은 베드로 가 기적같이 옥에서 탈출함으로써 수포가 되고 말았다(행 12:6-10). 베드로 를 처형하여 자기의 인기를 높이려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 아가자 헤롯은 파 수꾼들을 무고하게 처형시키고 가이사랴로 내려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 수리아에 속한 두로와 시돈 지방은 무역으로 인해 부를 많이 축 적했지만 양식이 풍족하지 못해 유대로부터 양식을 공급을 받아야 할 형편이 었다. 반면에 헤롯은 두로와 시돈이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 에 양식을 공급하지 않았다. 이때는 천하가 큰 흉년이 들어 양식이 귀한 때 였기 때문에 헤롯이 양식을 미끼로 삼아 두로와 시돈을 서서히 억압하는 방 법은 제대로 맞아 떨어졌다. 그러자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의 신하인 블라스도를 매수하여 어떻게든 지 화친을 하기 위해 갖은 술수를 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헤롯에게 충분히 뇌물을 전달시켜 일단 마음을 돌이키게 함으로써 양식을 얻어내는데 성공하 였다. 때문에 그들은 헤롯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기 위한 아첨을 하지 않 을 수 없었다. 명예욕에 눈이 어두워진 헤롯은 드로와 시돈 사람들 앞에 찬란한 왕복을 입 고 나타나 갖은 위용을 다 부리며 허세를 피웠다. 요세푸스의 사기를 보면 이 날 헤롯은 황금으로 덧입힌 옷을 입었기 때문에 햇빛에 반사되는 광채가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황홀하게 할 정도의 위용을 부렸다고 한다. 헤롯 이 백성을 향하여 연설을 할 때 사람들은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 는 아니라”(행 12:22)고 할 정도로 대단하였다. 이러한 영광을 받은 헤롯은 스스로 만족하여 자신이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최상의 권위를 부리려 했다. 그러자 이러한 그의 교만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즉시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던 악의 세력은 이처럼 비참하게 꺾여지고 말았 다. 사람의 힘과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처럼 의기양양하게 보 였던 반신국 세력의 대표인 헤롯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와 같이 교회는 하나 님에 의해 세워진다.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 하더라”(행 12:24)고 하는 누가의 결론적인 기록은 어떠한 대적 앞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교회의 승리를 선언하고 있는 승전가의 팡파르와 같다. 문제는 바로 우리다. 어떤 상황에서도 교회의 대적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을 믿는가? 그렇다면 교회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온 땅에 가득하게 하 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 밖에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174 no image 자유야말로 진정한 선이고 의이다_윤석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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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4 2006-05-11
자유야말로 진정한 선이고 의이다 윤석희 목사_본보사장, 천성교회 2006년 4월 20일 일본은 동해에 탐사선을 보내 독도 근해에서 여러 가지를 탐사하려 했다. 이에 대한 대한민국의 반응은 영토 침범으로 판단하고 무력 충돌까지 불사하겠다는 작전 계획을 세웠다. 25일은 대통령의 특별담화문까 지 발표했다. 이것도 피흘려 싸워 겨우 얻어 낸 자유에 대한 보존과 국토를 지키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민감해진 독도 문제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 싸우다 숨져갔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모든 인간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자유를 추구해 왔 고 미래적으로도 자유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흔히 사람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양심과 신앙의 자유, 결사의 자유, 언론과 출판 의 자유를 말한다. 그런데 막상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는 데 있어서 문제점이 있다. 다른 사람 들이 볼 때는 행복해 보이고 넉넉해 보이는데 본인은 불행하고 넉넉하지 않 다고 한다. 아마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유의 기준이나 가치를 다른 사람들 에 비교해서 얻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문제점은 법에 대한 존엄성의 결여이다. 법은 최소한 사회 혹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져야 할 도리로 이해된다. 그런데 대다수 의 사람들이 법은 최후의 수단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법은 성문법도 있지만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법이 더 우선이다.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법의 범위 안에서 먹을 수 있고 누릴 수 있으며, 믿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그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자유자이다. 왜 그런가? 기독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자들로 그리스도께서 죄로부터 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에서 죽어 주시고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하여 새 생명을 우리들에게 부어 주 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자들이다. 아담이래 모든 사람 들은 죽어야 한다. 영적인 죽음이든 육체적인 죽음이든 그리고 영원한 죽음 이든 죽어야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생명의 부활로 나오셨다. 죽음의 권세, 사망의 권세, 사망의 쏘는 것을 이기 시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다. 행함이나 행위로 구원 얻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 종교가 기독교다. 그렇 다고 하나님의 법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구원 얻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되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자유를 누린다고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 람에게 얼마나 큰 손해와 소음과 방해가 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과연 자유 가 그런 것인가? 자유는 생명이고 기쁨이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 다. 자유야말로 진정한 선이고 의이다. 다른 사람 유익 위해야 우리 총회를 섬기는 모든 분들에게 현재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 유를 누리기를 소원한다. 그리고 우리 함께 주께서 허락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디며 자유를 누리는 사람답게 말하고 행동 하며 살아보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자유함을 보고 자유를 배우고 본받도록 말이다.
173 no image 십자가 앞에서 왜 눈물이 사라졌는가?_박발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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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8 2006-04-26
십자가 앞에서 왜 눈물이 사라졌는가? 박발영 목사 한우리교회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행하셨습 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잊 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1: 23-26).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 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또 잔을 가지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 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위한 십자가 기념해야 이 말씀은 성찬식을 행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라는 말씀이었습니 다. 즉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입니 다. 그런데 여기서 “기념하라”는 말씀은 “기억하여 지키라”는 뜻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기억하라”는 말씀은 “잊지 말라”는 보통 의미보다 더 강 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잊으면 죽는다”는 뜻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 로 이 해석이 옳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는 것을 잊으면 죽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저주를 받습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 면 지옥의 형벌을 영원히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고, 믿는 것 은 구원의 문제이고 영생의 문제입니다. 생사의 운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알 면 살고 모르면 죽습니다. 믿으면 구원받고 안 믿으면 저주와 형벌을 받습니 다. 십자가 사건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충격적으로 경험해야 할 중대한 사 건입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단순한 신학적인 지식만으로 평 범하게 알면 안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들을 십자가의 사건을 역사적 신학적 지식만으로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행 2:36- 37).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 니라”고 말하자 그들이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에게 물어 가로되 우 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 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말씀을 듣고 가슴을 치며 “내가 어찌할꼬” 하면 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스콜틀랜드 캠버스 랭에서 영적 각성이 일어날 때 일입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30년 동안 신학을 가르친 노 교수였습니 다. 하루는 이 분이 무명의 목사가 하는 십자가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런데 그는 한없이 뜨거운 눈물을 쏟으면서 통곡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왜 그 랬을까요?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십자가의 속죄의 진리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 고 3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지금 깨닫고 보니 이제까지는 교리적인 지식만으로 알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로소 그 십자가의 주님 을 내가 만났습니다. 내가 그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머리에서 가슴 으로 내려오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하면서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루터가 그러했고 아브람 카이퍼가 그러했고 제롬이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한 결같이 십자가에 사건을 충격으로 경험했던 자들 이 였습니다. 스펄전 목사님 은 어느 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내용의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 데 아무 반응이 없는 자신을 보면서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또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 모습은 어떻 습니까? 과연 우리 강단에서 피 묻은 원색적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까? 그리 고 십자가를 충격으로 받아들인 성도들이 얼마나 됩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진리를 평범하게 아는 지식만으로 죄와 세상과 악 한 영을 이길 수 있던가요?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너무나 평범한 지식으로 알고 있는 부끄러운 수준에서 주님을 믿고 있는 것을 회개해야겠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 을 정도로 화석화 된 내 심령을 보면서 통곡해야 합니다. 돌처럼 굳어버린 내 가슴을 보면서 탄식해야겠습니다. 강철같이 차가워진 내 얼굴을 보면서 회 개해야겠습니다. 돌처럼 굳어버린 마음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신 처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룩함이 넘쳐야 합니 다.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거룩함이 사 라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 가 세속화 된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 나님의 임재가 희미해져가고 있습니다. 진정 우리 목회자가 탄식하고 통곡하 며 슬퍼해야 할 일이 이것이 아닐까요?
172 no image 부활, 그것은 실현되는 현장이어야_오덕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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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8 2006-04-20
부활, 그것은 실현되는 현장이어야 오덕교 목사_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궁지에 빠져있던 인 간에게 미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크고도 많습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를 꼽는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인간의 근본적 문제인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켰 습니다. 죄로 시작된 죽음은 인간에게 허무와 절망과 영원한 파멸의 길을 이 끌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영원히 사망케 하였습니다. 이제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죽음을 향해 우리가 큰 소리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고 야단을 칠 수 있게 되 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이제는 죽음이 우리를 두려워할 입장 이 된 것입니다. 둘째, 주님의 부활은 진리의 밝은 빛과 의와 승리의 자리로 나아가게 만들었 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던 가롯 유다는 마귀에게 붙잡혀 죄 없는 예 수님을 은 30량에 파는 일이 엄청난 범죄인줄 알지 못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 과 민중들은 시기심과 악감과 무지에 사로잡혀 이성과 양심이 마비되어 악을 선하다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 즉 흉악범 강도는 놓아주고 의로우신 예수를 못 박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나름대로 의분은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 나약함에 사로잡혀 지리멸 렬 배은망덕의 길로 줄달음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의로움이고 불의함인지를 분별하는 빛을 주었고 침묵 정진의 순종과 오래 참음 그리고 온유와 용서가 진정한 승리의 비결임을 깨우 쳐 주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만도 아니고, 미래에 나타날 신자 부활 의 근거만도 아닌 지금도 약동하고 실재하는 현장의 사건을 만들어주었습니 다. ‘예수가 정말 부활했느냐, 안 했느냐?’ ‘신자의 부활이 있느냐, 없느 냐?’ 하는 것은 교회사적렘탭隙�이슈이기도 했고 지금도 그럴지 모르겠습니 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와 사망과 불행에 갇혀 신음하고 탄식하는 영혼들을 살리는 지극히 큰 능력을 교회에게 안겨주었습니다(엡 1:19-21).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이 담긴 복음은 단순한 역사적인 이야기로 그치 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위력을 담고 있습니다. 그 래서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 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고 외쳤던 것입 니다. 교회가 복음에 대한 확신과 영혼에 대한 관심, 그리고 성령의 권능에 붙잡힌 다면 얼마든지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는 부활은 현존하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 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가 희열과 감격의 현장 속에서 부활의 이적을 눈으로 목격하며 구원과 승리와 영광의 주님을 손을 높이 들어 찬양케 하시는 것입니 다. 따라서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겸손과 온 유함과 의로운 마음을 주시고 영혼들에 대한 열정을 주소서. 복음과 성령에 사로잡히게 하사 우리의 삶과 사역이 부활의 사건 현장이 되게 하소서. 아 멘!’
171 no image 한국교회는 통일의 저수지 되어야_강경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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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6 2006-04-14
한국교회는 통일의 저수지 되어야 강경민 목사_일산은혜교회 한국은 지금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해외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 다. 선교 120년 역사가 이루어낸 경이적인 사건이다. 생각해보면 월드컵 4강의 신화보다 더 놀랍고 충격적인 기적이다. 신앙의 눈 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문화사적 안목으로 보더라도 한국교회가 이루어낸 업적은 민족사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놀랍게 발전한 한국교회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머지 않았다는 조짐은 여기저기서 분명해 지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가장 분명한 징조는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다(마 24:14).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면 끝이 올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민족(지역)을 보면 대부분이 아시아지 역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복음화를 위한 주역은 누가 될 것인가? 섭 리의 비밀 앞에 인생이 겸손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감안한다 할지라도 이미 나 타난 섭리적 결과로 보면 한국교회의 사명은 자 명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5000년의 한민족 역사에서 우리 민족공동체에 이처럼 뚜렷하게 세계사적 사명 이 부각되었던 때가 있었던가? 구속역사적 안목으로 볼 때 오늘날 한민족 공 동체의 번영은 선교 한국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요 복임에 틀 림없다. 한민족 공동체의 번영이 지속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뭐니 뭐니 해 도 민족의 평화적인 통일이다. 평화 통일이 민족 공동체의 번영을 담보하는 최고의 관건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선교 한국을 위한 민족 공동체의 번영, 민족 공동체의 지속적 번영을 위한 평 화 통일, 평화 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사명은 실로 지대한 것이다. 2. 70-80년대 한국교회의 통일 운동은 주로 선언적이고 이념적으로 진행되어 왔었다. 이 시대 통일 운동은 정부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어 왔었기 때문에 사회 각 분야에서 운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주로 반체제 운동을 했 던 진보주의 그룹에서 통일 운동이 시작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당시 반체제 운동의 핵심에는 진보 세력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통 일 운동 역시 진보주의 교회를 중심으로 이념적이고 선언적인 통일 운동이 전 부였다. 90년대 들어서면서 정치 상황의 변화와 함께 통일 운동의 양상도 급격한 변화 를 겪게 된다. 이념적, 선언적 통일 운동은 이제 실제적인 나눔 운동으로 변 화된다. 이 과정에서 나눔의 힘을 가진 보수주의 교회가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이다. 지금 통일을 위한 나눔 운동은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다. 북한의 곤란을 살리 고 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북한의 열악한 인권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연계 시킬 것인가? 이 문제가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북한 인권 상황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북한 인권 상황은 북한 사회의 지속적인 개방과 경제 성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지난 십 수 년 동안 우리가 경험한 귀중한 교훈이다. 그런가 하면 통일 운동은 정치적, 군사적 통일 이전에 문화적 심리적 통일이 더 근본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땅의 통일이 아니라 사람의 통일 이 먼저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진 자의 겸손과 가진 자의 희생이 필수 적이다. 누가 겸손과 희생의 정 신으로 나눔 운동을 계속할 수 있겠는가? 이 땅에서 누 구에게 그것을 기대하겠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본을 보 이신 복음 정신만이 평화 통일을 이루어내는 실천적 에너지임을 깊이 인식하 자. 복음만이 통일의 원동력 한국교회는 정치적 격랑을 넘어 일관되고 꾸준하게 북한과 나눔 운동을 지속 시켜 감으로 평화 통일을 위한 저수지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해외 선교헌금 을 따로 하듯이 통일의 그 날까지 교회마다 생명줄 헌금을 따로 드려 통일 비 용의 오병이어가 되도록 하자.
170 no image 제자훈련에서 남자와 여자는 다르게 가르쳐야_한광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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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5 2006-04-06
제자훈련에서 남자와 여자는 다르게 가르쳐야 한광수 목사_사명의 교회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시키다 보니 남자들보다 더 많은 여자 성도들을 훈련시 키게 된다. 여성들은 훈련이 잘 되어 변화된 일꾼이 되어 가는 것과 비교되 게 남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목장(구역) 모임도 아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홀 로 서지 못하는 남성들이 많다. 누군가 말하기를 “교회 안에서 남자들이 더 수줍어하고 얼굴을 탄다”는 말이 실감난다. 수줍어하는 남자 성도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남자들만 제자로 훈련받는 특권을 누렸다. 그 러나 3년이 아니라 공생애 기간이 더 길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오늘날 예수님 이 제자훈련을 시키신다면 남자들만 제자훈련을 시키실까? 나는 분명히 예수 님도 여자들에게 제자훈련을 시키셨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 의 제자훈련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교회에 초창기 때부터 신앙생활하시던 여 집사님이 어떤 군소 교단의 신 학교를 다니 고 그 교단에서 전도사를 몇 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교 통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었고 그 전도사는 결국 그 교단에서 목사로 안수 받 고 개척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교회 여러 성도들이 축하하기 위해 다녀 왔다. 그러나 나는 가지 않았다. 나는 핑계대기를 “우리 교단에서는 여자 목 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라고 간단하게 말했다. 그러나 마음 깊숙이에서는 여자 목사는 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하는 생각 이 들었다. 친척 가운데 동생 부인이 여자 목사가 되어서 기도원 겸 교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왠지 가기가 꺼려지게 되었다. 신학교를 다닌다고 할 때는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막상 여자 목사가 되었다는 말에는 거리감이 생기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기준을 모른다. 계속해서 기준이 바꾸어지고 있다. 그 러나 교회에는 영원한 표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우리 는 말씀에 입각해서 모든 일을 판단하고 이끌어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신학 이 잘못된 곳에서는 세상풍습을 좇아서 교회가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 다. 나는 그 동안 실시했던 제자훈련을 살펴볼 때 남녀의 차별을 두지 않고 제자 훈련을 실시해 왔었다. 그리고 주로 제자훈련이라면 여자 성도를 대상으로 시 켜왔었다. 아마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같은 전철을 밟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제자훈련 에 있어서 성별에 따라서도 훈련이 달라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된 것이다. 요즘 초교파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아버지학교와 어머니학교가 있다. 아주 좋 은 교육이고 미처 교회 안에서 훈련시키지 못한 부분을 잘 깨닫게 해주는 것 이라 생각한다. 또 결혼한 남자와 여자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깨닫게 해 주어 서 좋은 가정을 유지시키도록 하는 면에서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 보이기도 하 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이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봉사하는 분들에게 박수를 치고싶다. 그런데 왜 그런 학교가 생기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볼 때 아쉬움을 느낀다. 한 국교회가 좀 더 분별 있는 제자훈련을 잘 시켰다면 이런 학교는 생기지 않아 도 될 뻔하였다. 그러면 남자 제자훈련과 여자 제자훈련은 무엇이 달라야 할까? 먼저 하나님 은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지으셨다. 맡겨진 임무가 다르고 교회 안에서 봉사 해야 될 부서가 다르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의 남녀의 차이에 대하여 분명한 진리를 디모데전서 2:8-15에서 잘 가르쳐주고 있다. 시대가 변했다고 하나님 의 창조의 원리나 질서가 변한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여자들의 제자훈련은 담임목사의 사모가 시키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목사가 여자 성도를 제자훈련 시키는 것 보다 훨씬 났다. 또 남자가 여자를 제자훈련 시키다보면 불미스러운 사건도 생길 수 있다. 옛날처 럼 사모는 교회에서 입도 열지 말고 죽은 듯이 가만히 있으라고만 하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교회에서 그렇게 하면 사모에게 있는 능력과 은사가 파묻히 게 될 뿐만 아니라 사모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목사의 발목을 붙잡 는 대 마귀가 된다는 말이 맞아들어 가게 될 것이다. 여성 제자반 사모가 맡기를 나는 이제부터라도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제자훈련 시킬 것이다. 또 목사 사 모를 통해서 여자들을 제자훈련시키는 사역을 시도하고 있다. 나는 그 열매 가 기존의 방법보다 훨씬 많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169 no image "우리의 역량을 보여줄 떄이다"_이선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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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4 2006-03-29
"우리의 역량을 보여줄 떄이다" 이선웅 목사_남문교회 『교단설립 25주년 대회』를 준비하는 가운데 우리 준비위원들이 몇 가지 어 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5월 31일(지방 선거일)에는 교단 행 사를 해서는 안 된다 - 다른 날로 변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뜻 있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빗발치는 요청에 부딪치게 되었다. 갑자기 발생한 일정 변경 처음에는 매우 난감했다. 사실 우리 준비 위원회가 대회 일정을 잡은 것은 작 년 11월이었고, 정부에서 지방 선거일을 발표한 것은 그 2개월 후의 일이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 선거는 정부 행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날짜를 바 꿔야 하지 않겠느냐는 데에 점점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한 가지 감사한 것은 금년부터는 누구나 부재자 신고 를 하면 사전에 부재자 투표를 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 재자 투표를 적극 권장을 하고 대회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하 는 것이 좋겠다 는 쪽으로 준비 위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3월 20일에『25주년대회 실행위원(각 노회장), 각 노회 서기 연 석회의』로 모였는데 거기서도 참석자 50명 중 절반이 대회 날짜를 변경해야 된다는 의견을 내 놓았다. 그렇지만 준비위원 측에서 날짜를 변경하고 싶어 도 거기에는 큰 어려움이 따랐다. 어렵게 확보한 강사와, 앞으로 당기거나 뒤로 미뤄서는 확보할 수 없는 장소 (무주 리조트)와 그리고 이미 통보된 선교사 100명의 입국 일정 및 대회 일정 에 맞춰 목회 일정을 진행 중인 여러 목회자님들과 교회들과 장로님들 때문 에 날짜를 바꾸는 일이 쉽지 않았다. 준비위원회에서는 이 문제로 계속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준비위 원 모두의 마음에 “대회 일정을 하루 줄여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 위원들이 모두 같은 시간에 같은 마음을 가지고 모이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결정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준비위원들 에게 주신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우리 모두 마음과 뜻을 함께 모으는 일이다. 부득이 일 정을 축소할 수밖에 없 지만 그래도 알차게 이번 행사를 꾸려시론 『교단설립 25주년 대회』를 준비하는 가운데 우리 준비위원들이 몇 가지 어 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5월 31일(지방 선거일)에는 교단 행 사를 해서는 안 된다 - 다른 날로 변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뜻 있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빗발치는 요청에 부딪치게 되었다. 갑자기 발생한 일정 변경 처음에는 매우 난감했다. 사실 우리 준비 위원회가 대회 일정을 잡은 것은 작 년 11월이었고, 정부에서 지방 선거일을 발표한 것은 그 2개월 후의 일이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 선거는 정부 행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날짜를 바 꿔야 하지 않겠느냐는 데에 점점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한 가지 감사한 것은 금년부터는 누구나 부재자 신고 를 하면 사전에 부재자 투표를 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 재자 투표를 적극 권장을 하고 대회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 는 쪽으로 준비 위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3월 20일에『25주년대회 실행위원(각 노회장), 각 노회 서기 연 석회의』로 모였는데 거 기서도 참석자 50명 중 절반이 대회 날짜를 변경해야 된다는 의견을 내 놓았다. 그렇지만 준비위원 측에서 날짜를 변경하고 싶어 도 거기에는 큰 어려움이 따랐다. 어렵게 확보한 강사와, 앞으로 당기거나 뒤로 미뤄서는 확보할 수 없는 장소 (무주 리조트)와 그리고 이미 통보된 선교사 100명의 입국 일정 및 대회 일정 에 맞춰 목회 일정을 진행 중인 여러 목회자님들과 교회들과 장로님들 때문 에 날짜를 바꾸는 일이 쉽지 않았다. 준비위원회에서는 이 문제로 계속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준비위 원 모두의 마음에 “대회 일정을 하루 줄여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 위원들이 모두 같은 시간에 같은 마음을 가지고 모이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결정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준비위원들 에게 주신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우리 모두 마음과 뜻을 함께 모으는 일이다. 부득이 일 정을 축소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알차게 이번 행사를 꾸려갈 수 있다. 여기 에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한 몸이며 지체라는 의식이 필요하다. 아울러 이번 행사를 통해 우리 교단이 새롭게 도약 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 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지난 25년 동안 줄곧 합신 교단의 위상을 높이며 우리는 한 길을 달려 왔다. 이즈음에서 우리가 달려 온 길을 뒤돌아 보며 앞으로 나갈 길을 점검한다는 것은 매우 적절한 때가 아닌가 한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평가와 향후 전개 될 우리의 앞길을 함께 점검한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뜻깊은 행사 위해 마음 모아야 “함께 도약”이라는 슬로건 아래 합신 교단의 목회자들과 장로들 그리고 해 외 목회자들이 함께 모이는 일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반절의 성공을 예감할 수 있다. 차제에 우리 교단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프로그램 도 함께 의논하면 좋을 것이다. 이제 두 달 앞으로 다가온 『교단설립 25주년 대회』를 위해 전국 교회가 힘 을 모으고 원할한 진행을 위해 함께 기도하길 바란다. 이 행사를 위해 물심양 면으로 후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는 분들에게 이 자리를 통해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168 no image 어느 때나 공정해야 할 목회자_장재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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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0 2006-03-24
어느 때나 공정해야 할 목회자 장재훈 목사_내흥교회 뉴욕타임스(NYT)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미국과 일본 전에서 나온 미국 심판의 결정적인 오심을 강력히 비난했다. 뉴욕타임스는 3월 13일(현지시간) 스포츠면을 통해 전날 열린 WBC 그라운드 1조 예선 미-일전 내용을 전하면서 승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의심스런 판정으로 인해 편파 판정 논란에 휩싸이 게 됐다고 보도했다. 심판 판정 편파 회자돼 일본은 전날 에너하임에서 벌어진 미국과 WBC 그라운드 첫 경기에서 3-3으로 팽팽한 8회말 1사 만루에서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 번복으로 득점이 취소돼 결 국 패배의 멍에를 썼다. 미국 프로야구 최고의 강타자요 홈런 왕인 배리 본즈 도 월드베이스클래식(WBC)에서 일본이 승리를 도둑맞았다는 데 동의했다. USA 투데이, 야후MLB등 미국 언론들도 “빗나간 애국심이며, 최고의 대회가 되어 야 할 WBC를 먹칠했다”고 비난했다. 경기는 선수가 하지만 판정은 주심이 하므로 주심의 역할이 승패를 결정할 수 도 있는 위치에 있기에 주심의 올바른 판단과 결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 지 않다고 생각한다. 주심의 위치는 칼과 같아서 잘못 행하면 폭력이 될 수 도 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뭐라고 하는가?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은 다 여호 와께서 미워하신다”(잠 20:10,23)고,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 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 신다”(잠 21:3)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랑 이 무한하신 분이시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공정과 공평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사랑과 공의를 혼동하거나 오해를 하여 적용에 있어서 부당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본다. 공의롭게 하는 것을 ‘사랑이 부족하다거 나, 화합을 해친다거나’하는 쪽으로 몰아가서 한 점 의혹이 없도록 공정하 게 하는 것을 흐리게 하고 막는다. 환자를 치료할 때는 제대로 치료를 해야 후유증이 없고 재발하지 않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환자가 더 고생하고 위 험에 처해진다. 순간의 아픔과 고통을 피하고자 대충 꿰매는 의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 는 근시안적 인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일전 경기의 심판을 본 미국 인의 어처구니없는 편파 판정이 의식이 있는 미국인들에게도 비난을 받은 것 이다. 이번 사건은 WBC를 할 때마다 두고두고 미국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되고 회자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심은 자기 아들이, 가족이, 친한 친구가 출전을 해도 경기 진행 과 판정을 공정하고 바르게 해야 한다. 재판관은 어떠한 압력을 받더라도 쌍 방의 주장과 의견을 충분히 청취하고 참 증인과 검증된 증거물을 근거로 시시 비비를 판결해야 한다. 신자들은 직장이나, 학교나, 어디에서나 누구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 앞과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고 어떠한 불이익을 당해도 바르게 주장을 해야 한다. 목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와 근거 그리고 헌법과 일반 정서와 상식에 맞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거시적으로 볼 때 공동체의 안정과 화합을 도모하는 것이 요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억울 한 자가 나오게 되어 있고 그로 인해서 공동체의 하나 됨은 쉽지 않을 것이 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여러 물건들을 보면 처음 구입 시에는 빛나고 깨끗하 고 흠잡을 데가 없는 것을 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여러 사람들이 이용하 다 보면 낡아지고 망가지고 변해버린다. 목사나 신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 생각한다. 물론 다는 아니지만 처음의 순수하고 깨끗한 모습은 간데 없고 처세술과 언변 만 화려하고 일을 바르게 처리하기보다는 사람의 낯을 보면서 적당히 봉합하 고 담합하여 매듭지으려는 모습들을 본다. 그러면서 이렇게 합리화시키고 상 대방의 주장을 교묘하게 막는다. 교묘한 술수 늘어나선 안돼 “나도 젊었을 때는 다 그랬어! 그런데 연륜이 쌓이고 세상을 더 살아보니 그 게 아니더라”고 한다. 하나님과 성경 말씀은 세상이 변하고 세월이 변해도 동일하시다. 우리 자신 이 세속화되고 보신주의화 되어 있지 않은가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167 no image “불확실 세계에서 확실의 세계로 나서야”_김종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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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2 2006-03-15
“불확실 세계에서 확실의 세계로 나서야” 김종렬 목사_참빛교회 6월이면 월드컵이 시작되고 온 세계가 축구열기로 뜨거워진다. 축구는 반드 시 서로 협력해야 하며 뛰고 몸을 날리는 역동과 투지가 넘치는 매력적인 경 기다. 축구 국가대표 선수 중에 기도 세리머니로 유명한 박주영 선수가 있 다. 아드보카드 감독은 그에게 ‘더 보여 줄 것’을 주문했다. 전임 히딩크 감독은 16강에 진출하고도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내가 축 구 감독이라면 ‘확실하게 하라’고 말하고 싶다. 패스도 슈팅도 대충해서는 안 된다. 확실하게 해야 개선점을 발견하고 실력이 향상된다. 대충 해서는 절대 안 돼 더 보여 달라는 것은 현란한 드리블이 아니라 골인이다. 배가 고프다는 말은 더 많은 승리를 원한다는 말이다. 앙골라 전에서 머리 좋은 박 선수는 왼쪽으 로 수평으로 드리블하여 수비수 모두와 골키퍼의 중심을 오른 쪽으로 이동시 킨 후 몸을 회전하여 왼쪽 구석으로 볼을 차 넣 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뛰어난 지능적인 플레이였다. 일류 선수는 창조적인 플레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박 선수는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교회도 반드시 서로 협력해야 하며 투지를 불사르며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기 관이다. 교회의 감독이신 주님이 하늘에서 ‘더 보여 달라, 아직도 배가 고프 다. 확실하게 하라’ 고 명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영적으로 어두워진 죄악 된 세상을 밝히는 복음의 광채 즉 하나님 영광을 아는 빛이 아닐까? 축구에서 패스가 필요하듯이 물질도 필요하고 뛰어난 드리블이 중요하듯이 봉 사와 간증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지능적이고 창 조적으로 골을 넣어야 하듯이 교회도 우리 신앙의 최고 유산인 성경을 지능적 이고 창조적으로 연구하여 복음의 광채를 비추어야 한다. 축구 경기에서 공격수는 수비수 없이 또 수비수와 엉켜 가지고는 결코 골을 넣을 수 없다. 공을 수비수에게 빼앗기지 않으며 공이 수비수에서 멀어지게 하고 수비수보다 먼저 볼을 차야 골을 넣을 수 있다. 수비수를 죄로 비유할 때 죄는 복음의 광채를 가리우기 위해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 붙는 다. 교회가 죄를 따돌리고 복음의 깊이와 넓이를 역동적으로 보여주어야 한 다. 공격수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 수비수를 좌로나 우로 따돌리고 오른 발이나, 왼발이나 머리를 써서 골을 넣는다. 교회도 성령님의 도움 받아 죄를 극복하 고 사랑과 진리로 승리할 수 있다. 요즘 죄에 대한 의식이 희박한 것 같다. 성도가 명백한 죄를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감정과 혈기에 치우쳐 목 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많다. 성도는 무엇보다 죄를 극복하며 죄에서 멀어지 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죄와 싸우며 이길 때 주님의 사랑을 받으며 진리를 알 고 진리를 행할 수 있다. 골을 넣지 못하는 공격수는 탈락된다. 복음의 광채 가 죄로 가려진 교회도 퇴출 될 수 있다. 봄이 오면 산과 들에 꽃이 피고 포근한 햇살은 천국이 연상되니 너무 좋다. 이 봄에 운동장에 나가 축구하며 골을 넣을 것이다. 동료들에게 불확실하게 패스하지 말고 마무리를 확실하게 할 것을 주문할 것이다. 아니면 상대편 공 격수가 골을 넣지 못하게 지능적으로 수비를 할 것이다. 수비수가 머리를 쓰 듯이 죄도 머리를 쓴다. 성도는 죄에 압도당하여 죄의 놀림이 되지 않아야 한 다. 골 찬스를 잡고 골을 넣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이처럼 원통한 일이 어 디 있는가? 한국 축구 선수들은 결정적인 찬스에서 실수가 너무 많다. 한국 교회도 부흥이라는 결정적인 찬스를 잡았다가 놓치곤 한다. 이제 지능적이고 창조적인 지혜로 복음의 광채가 비추게 하여 주님을 기쁘게 하자. 지능적 창조적 발상 필요해 교회는 주님의 교훈대로만 하면 승리가 결정되어 있다. 주님이 성경에서 말씀 하신 근본으로 돌아가 복음의 불확실을 버리고 복음의 확실함에 거하며 성령 님의 감화와 충만을 받자.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의 선전을 기대한다. 박 주 영 선수의 기도 세리머니를 더 많이 보고 싶다. 한국 교회가 기도의 무릎을 끓으며 온 세상에 복음의 광채를 비추며 하나님 영광되기를 기원한다.
166 no image “종의 자유 누릴 준비되어 있는가?”_최성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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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6 2006-03-09
“종의 자유 누릴 준비되어 있는가?” 최성대 목사_동산교회 진리 세계의 중립은 없다. 인간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헬레니즘 (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헬레니즘 의 생활 방식은 인간 중심이고 헤브라이즘은 하나님 중심이다. 새가 어떻게 창공을 자유롭게 나는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중심한 헬레니즘은 두 날개 로 난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중심한 헤브라이즘은 두 날개로 날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일반 은총 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원동력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나의 나됨 의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이다(고전15:10). -으로부터(죄책, 자기 중심과 두려 움)의 소극적 자유와 -을 위한(하나님께 속하고, 위한) 적극적 자유로 구분 할 수 있다. 첫째, 일반 은총을 제한시키는 독단으로부터 자유를 회복해야 한다. 중세는 바로니우스의 부정의 시각에서 보면 남유럽의 교권주의, 공로주의, 성 속의 불평등, 신비체험주의, 사변적 스콜라주의 번쇄, 흑사병과 매독, 폐쇄 적 근시안으로 특징된 절망의 어두운 시대이다. 그러나 19세기 낭만주의 역사 가의 긍정의 시각으로 보면 15세기 전후의 북유럽 르네상스의 기독교 인문주 의(성경고전으로 돌아가자)는 십자가의 은혜와 윤리로 16세기의 루터와 칼빈 의 종교(교회) 개혁의 기초가 되었다. 중세기는 밝음과 어두움, 신앙과 불신 앙이 함께 공존했다. 르네상스(문예부흥)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창조적인 시각의 전환을 가지고 기독교 문화를 최상으로 개발한 소망의 빛나는 시대이 다. 르네상스의 개인의 존엄성, 가능성과 내면적 경건은 긍정의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는(becoming) 불신앙의 형상화 는 우상숭배이지만 주님 안에서 형상 회복은 하나님을 나타내는(imaging) 기 독교 문학, 역사, 철학과 예술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일반 은총의 영역 은 거듭난 의지를 가지고 계발하여 심령의 샘이 터지는 기쁨으로 승화돼야 한 다(요 7:38). 둘째, 특별 은총의 궤도를 벗어난 종교다원주의로부터 자유를 회복해야 한 다. 기독교는 수평적 인 일반 은총의 선, 아름다움과 생명의 복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민족이 누리도록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보편적인 복들이 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태어난 이스마엘에게 일반 은총의 사랑으로 자 녀가 되는 복을 허용하셨지만 그는 결코 약속의 자녀는 아니다(창 17:20- 21).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수직적 인격 관계는 오직 한 분 주님 밖에 없다는 유대주의의 수적인 하나가 아니라 구원의 독특성, 유일성(uniqueness) 과 다른 신들과 비교 불가능성(사 40:18)을 강조하는 최상의 주권을 강조하 는 것이다. 기독교는 일반 은총의 사랑으로 타종교를 존중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타종교 의 길과 하나라고 주장하는 범종교와 범문화의 가르침은 결코 허락하지 않는 다(요 14:6; 행 4:12). 종교다원주의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서야 할 자리가 없 다. 우리는 범종교의 부자유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셋째, 자유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적극적으로 주님을 좇는 것이 다. 자유는 내 안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은총을 거부하는 탕자의 생활 방식 을 부인하는 것이다. 자유는 내 안에 하나님 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맏형 (눅 15:28-30)의 생활 방식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자유는 주되신 예수 그 리스도를 종으로 좇는 것이다(마 16:24). 오직 주님의 종으로 갇혔을 때 최상 의 자유를 맛보고 누린다. 주님으로부터 자유로우면 죄의 종이 된다. 그러나 죄로부터 자유로우면 창조 주, 구속주와 섭리주의 구원 계획(영생)을 수종드는 종의 자유를 누리는 것 은 역설이다(롬 6:18-23). 주님의 주권(영광) 아래 사랑의 의지를 가지고 종 노릇하는 자유인은 과거로 후퇴가 아니라 오늘의 르네상스인으로 미래를 향 해 전진하는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165 no image 뱀의 발을 그리는 심정으로_남웅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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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9 2006-03-02
뱀의 발을 그리는 심정으로 남웅기 목사_대구 바로선교회 우리 기독교개혁신보가 지령 400호를 맞는다니 반갑다. 이 반가움에는 ‘벌 써?’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2주마다 만나던 그 자체’ 만으로도 기쁨 이었는데 벌써 400호를 기록하다니 장할 수밖에. 그 숱한 세월동안 얼마나 많 은 이들의 눈물과 기도가 쏟아 부어졌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하다. 400호 맞은 감격 남달라 물론 이 반가움 속에는 ‘역시!’라는 의미도 들어있다. 최근 신문의 주간 발 행과 의욕적 지면 증대 그리고 다양한 필진들의 옥고를 보면 과연 그 동안의 성장에 걸 맞는 지령(紙齡)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헌신한 숨은 일군 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뿐만 아니라 이 반가움 속에는 또한 ‘이제부터는....’ 이란 새로운 의지와 당부마저 담겨 있음을 숨길 수 없다. 이미 ‘내일을 위한’ 신문사 자체의 비 전과 의지가 더 분명하게 서 있을 줄 알지만 기독교개혁신보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여기 뱀의 발(蛇足)을 그려본다. 신문에는 물론 정보의 기능이 있다.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대부분 목회자들 도 기독교개혁신보를 통해 비로소 교계의 사정에 눈뜨게 되며 교계의 움직임 에 발맞추게 된다. 참으로 유익한 기능이었다. 그러나 신문이 그것으로 만족 한다면 한낱 정보지에 불과 할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개혁신보가 정보의 기능 그 이상을 감당해 주기를 기대한다. 계 도(啓導)의 기능, 즉 가치 판단의 기능이 지금보다 더 강화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신문이 진실해야만 한다. 독자들이 무엇이 옳은 것인 지,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무엇이 화급한 일인지, 무엇이 보다 중요한 일인 지 헷갈려 할 때 누구나 먼저 찾아보게 되는 신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 게 된다면 주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신문에는 또한 홍보의 기능도 있다. 교단의 기관지로서 한계를 벗어나기는 힘 들겠지만 교단의 홍보에 치중한다면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한다. 그런 기관지 에 주목하고 기관지를 좋아하고 기관지를 이용하는 사람은 그 기관의 실력자 들 밖에 없다. 독자에게 사랑 받고 독자의 뜨거운 후원을 받으려면 어느 정 도 신문 본 연의 기능을 강화해야만 한다. 그것은 비판의 기능이다. 그것은 분 열을 조장하는 게 아니라 바른 교단을 세워 가는 직접적 기능이다. 물론 기독언론의 제작여건상 이런 모든 욕망을 다 채울 순 없겠지만 포기해 선 안 된다. 먼저 기자들이 기능인이 아닌 기자 정신으로 근무하도록 환경 을 조성해주자. 재정적 후원은 넉넉히 하되 그 힘으로 영향력은 행사하지 말 자. 힘이든 돈이든 영광이든 가진 자는 가진 것으로 그 넉넉함을 자랑할게 아 니라 비워낸 그릇으로 그 넉넉함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압력은 부끄러운 일 인 동시에 신문을 망치는 일이다. 가치 판단 기준 제시하길 편집자들은 독자들이 다양한 견해를 접할 수 있도록 언로를 열어주어야 한 다. 우리 교단엔 정말 유능한 필진들이 많이 묻혀있다. 이들을 찾아 모시고 주요 사안을 공론화 하도록 하자. 또한 교단의 이름으로 상징화 할 수 있는 전국적인 성도들의 대회 프로그램을 신문사에서 주관해보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 기독교개혁신보가 교계의 자랑스러운 신문, 모든 성도들이 즐겨 찾는 신 문이 되지 않겠는가!
164 no image “교회 안의 양극화 해소할 수 있는가?”_장재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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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8 2006-02-22
“교회 안의 양극화 해소할 수 있는가?” 장재훈 목사_군산내흥교회 이병완 청와대비서실장은 2월 15일 주요국 주재 대사와 대표부 대사 등 130여 명이 참가한 재외 공관장회의에서 "한국의 빈부격차는 OECD 회원국중 최악"이 라며 "이런 상태로 방치되면 한반도는 3개의 코리아 다시 말해 빈부격차로 인 한 2개의 대한민국과 북한으로 나눠질지 모른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중국, 남미 그리고 동북아에서 가장 소득 수준이 높은 일본에서도 양극화가 사회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이 양극화는 지역 안정과 지역 통합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빈부격차 갈수록 심해져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나 노회, 교단 안에서 빈부 양극화 또한 심각한 상태에 있다고 본다. 도 시 교회와 농어촌교회간의 빈부 양극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양극화는 성도간의 하나됨과 교회간의 하나됨 그리고 도시교회와 시골교회의 한 몸됨에 부분적으로 하나의 장해 요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다 잘 아시다시피 교회는 우열이 없고 그리고 계급이 없어서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 소중하고 귀한 한 몸이요 한 형제인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 안의 빈부격차의 양극화는 교회 본질의 속성을 파괴할 수 있는 요소임에 분명하다. 잠언 22장 2절을 보면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라고 말 씀하고 있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빈부는 있을 것으로 본다. 물론 지상 교회는 불완전하므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하겠지만 그래도 교회 본질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교회 안의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해답이 사도 행전 4장 31-35절에 기록되어 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 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 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 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 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 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그렇다. 예루살렘 초대교회 안에도 빈부의 격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 나 성령이 충만하고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자 교회 안의 빈부 격차는 이내 바람처럼 사라졌다. 부유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자기 재물과 소유 를 아낌없이 나누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은 본래 속성 상 물질(돈/재산)을 자기 생명 혹은 우상과 같이 믿고 의지하고 산다. 이것 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들이다. 혹 이웃을 위해서 기부를 한다해도 지극 히 조금 외에는 더 이상 손을 대지 않는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고 성령충만(하나님 말 씀에 절대 순종)을 받으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여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교회 안팎의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서 기쁨으로 나눈다 는 것이다. 성경은 가지고 있는 것이 복이 아니라 주고 나누는 것이 은혜요 복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늘 가난한자, 약자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마태복 음 19장 21절을 보면 부자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 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셨다. 가끔 사회를 시원하게 하는 밝은 뉴스들이 나온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모은 돈을 몰래 몰래 동사무소에 혹은 어려운 이웃에게 놓고 사라지는 소식들이 다. 그것도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는 분들이 있음을 본다. 부끄럽기 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재산 나누는 미담 많아 사회는 그렇다하더라도 교회 안의 빈부 양극화는 해소할 수 있음을 성경을 통 해서 확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고 받고 그리고 감정 충만, 욕 심 충만이 아니라 성령 충만을 받으면 교회 안에는 사랑이 넘치고 구원자가 늘어나고 양극화는 찾아보기 힘들 것으로 확신한다. 이런 교회가 비교적 건강 한 교회요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운 교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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