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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no image ‘멤버 체인지’를 아시나요?-최명선 목사
rpress
4661 2005-05-26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77si.hwp‘멤버 체인지’를 아시나요? 최명선 목사| 새빛장로교회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면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을 모르는 사 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영이 살아났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습 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들에 대해서 지성(知性)으로만 알고 있다는 데 문제 가 있습니다. 우리가 궁궐 같은 아주 큰 집에서 산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나의 부모님께서는 별궁에 거하시고 내 아내는 또 다른 별궁에 거합니다. 수 석 내시로부터 그 사실에 대해서 전해 듣고서 왕인 내가 압니다. “아바마 마 어마마마는 별궁에 거하시는구나! 또 중전은 제2 별궁에 거처하는구 나!” 이것만 알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침, 저녁으로 별궁에 문 후을 드려야 그것이 같이 거하는 것이지요! 또 저녁마다 중전의 별궁을 찾아 가서 함께 기거를 해야 되는 것이지요. 그냥 “내 아내는 제2별궁에서 잘 먹 고 잘 살고 있다더라!” 이것을 아는 것이 나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 까? 보혜사는 어떤 분입니까? 요한복음 14장 16절에 의하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또 17절에는 무엇이라고 기록합니까? “…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 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나는 모릅니다. 귀로 듣고 머리로는 아는데, 아 무리 살아봐도 뭔가 감이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는 실패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중요한 일이면 자신이 1대 1로 멤버 체인지를 하셨겠습니까? 요한복 음 16장 7절에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이라…” 이렇게 단언하 셨습니다. 왜 더 유익이라고 하셨습니까? 성령님하고 멤버 체인지를 하기 때 문에 더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를 알아야 하고, 이것 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초등학교 축구시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규정이 좀 이상합니다. “멤버 체인 지를 할 때 꼭 한 사람만은 그 자격에 제한이 없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 다. 한참 축구 시합을 하다가 그중에서 제일 잘하는 6학년 주장이 다리에 쥐 가 났습니다. 그래서 멤버 체인지를 하는데 그 주장 대신에 들어온 선수가 누구냐 하면 아인트호벤의 ‘박지성’ 선수입니다. 그러면 손해입니까? 이익입니까?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게임은 이긴 것이 나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 모든 것이 다 해결 됩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뭐라고 하시면서 멤버 체인지를 하셨습니까? 내가 떠나는 것이 더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하 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애써 더 큰일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멤버 체인지로 들어온 박지성 선수에게 딴지를 겁니다. 너무 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 리 팀에서 제일 잘하는 선수는 6학년 주장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그 엄청난 능력을 학문이라는 괴물을 사용해서 여기저기 잘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곁에는 38년된 앉은뱅이들이 수없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레오날드 레이번힐 목사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사람을 낚아야 할 어부들 이 사람으로부터 칭찬과 박수소리를 낚고 있습니다. 전날의 설교자들은 씨앗 을 심었으나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학식의 진주를 온 들판에 흩어 뿌리고 있 습니다. 진주를 심어 놓은 밭을 상상해 봅시다.” 소름 끼치지 않습니까? 나 는 아니라고요? 다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이끌어 갈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어떻게 그렇게도 바울 사도를 닮지 않았는지… 애통합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바 울 사도가 버린 것들을 다시 주워모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 버린 것들을 주워모으는데 거의 모든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거듭나 서 영생을 얻었다고 안심하고 다니는 우리들이 영을 느끼지 못하면서 살다 니… 이것이 해 아래서 21세기 최대의 비극입니다. 세익스피어가 그의 희곡 을 몽땅 들고 온다고 할지라도 이 비극의 서문이나 장식할 수 있을는지…! 그러면서 그 사람들은 입만 열면 “영성…” 운운합니다. 신학을 지키기 위해서 성령님을 포기한 성도들이여,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에 게 있어서 만은 실패한 천국 축구단의 감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리에 쥐 가 나셔서 안타깝게 운동장을 바라보고만 계십니다. 성령님께서는 멤버 체인 지로 들어오셨는데 패스해 주는 사람이 없어 외로이 뛰시다가 아군의 스파이 크에 번번이 발등이 찍혀 넘어지시며 괴로워하십니다. 이 우주컵 축구 경기를 어떻게 보십니까? 불쌍한 감독이신 우리 하나님 너무 너무 죄송합니다.
142 no image 일본이 우리를 괴롭히는 이유-김수홍 목사
rpress
5389 2005-05-12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76siron.hwp일본이 우리를 괴롭히는 이유 김수홍 목사| 합신 초빙교수 일본이 과거에 36년간 우리를 식민 통치한 이래 우리 국민은 항상 반일감정 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던 차에 최근에는 몇가지 문제들이 불거져 나와 더 욱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 첫째가 일본 고위층의 망언이다. 일본은 대한민국을 계속해서 괴롭히기 로 작정한 것처럼 우리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만큼 고위급 인사들의 망 언이 계속되어 왔다. 외무상과 문부상이 교대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과거 침 략을 미화해왔다. 둘째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도 우리와 중국을 괴롭히고 있다. 총 리는 야스구니 신사 참배를 포기하지 않고 매년 연례행사처럼 참배를 계속 해 왔고 앞으로도 참배하려는 기세이다. 피해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큰 상처 가 아닐 수 없다. 셋째로 일본의 역사왜곡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일본은 어린 학생들이 배 우는 교과서에까지 과거의 역사를 왜곡하여 자국의 학생들 속이기를 꾀하고 있다. 비록 그 교과서의 채택률이 10% 미만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거짓은 거 짓이다. 넷째로 설상가상으로 일본은 독도문제를 들고 나왔다. 독도는 한국 영토라 는 것이 분명한데도 1905년 한일합방 때 일본이 독도를 강점해 놓고 그것을 근거하여 독도를 자국(自國)의 영토라고 우기기에 이르렀다. 일본이 이렇게 한국을 괴롭히는 이유는 물론 일본 자국(自國) 내의 사정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또 한국의 IT산업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데 반하여 일본은 경제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있으니 주변국들에 대해서 자존심이라도 세워야 한다는 계산이라는 것 이다. 아무튼 오늘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마치 일본은 과거 의 군국주의 망령을 되살리려는 듯 자존심을 세우려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나라는 거의 매일 반일데모를 하고 있고, 중국 또한 격렬하게 반일데모를 하 고 있다. 이런 반일데모는 멀리 미국에까지 번져서 우리 동포들과 중국 사람 들이 합세하기에 이르렀다. 오늘 우리는 일본의 괴롭힘을 우연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세상에 우연은 단 한 가지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마10:29). 일본의 괴롭힘은 우 리 대한민국 성도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행위인 셈이다. 하나님은 지금 일본 을 사용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과거에는 북한을 우리 성도들의 각성제로 사용하셨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주변에는 위협적인 이족들이 있었다. 초대 왕 사울 때에 는 블레셋 족속의 위협이 심하였다. 사울왕가는 하나님을 떠났으므로 결국 블레셋 족속의 침공을 받아 망하고 말았다. 제2대 왕 다윗은 하나님을 철저 히 의지하는 중에 주변국들의 침략을 물리치고 평화롭게 살았다. 3대 왕 솔 로몬 때에는 주변국을 제압하고 평화롭게 살았으나(왕상4:1-28) 훗날 우상숭 배에 빠지게 되었을 때 주위에서 대적들이 일어났다. 에돔 사람 하닷(왕상11:14-22)과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이 솔로몬을 괴롭혔다 (왕상11:23-25). 그리고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다가(왕 상11:26-40)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함 때에 이르러 결국은 나라를 두 조각으 로 나누고 말았다(왕상12:1-24). 이후 남북은 하나님을 의지했느냐 아니냐 에 따라 평화롭게 살기도 했고 혹은 외국의 침략을 당하기도 하였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사향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부정과 비리도 위험수위에 이르렀고 또 음란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가고 있다. 그리고 지 도자들은 공산주의가 위험한 사상인 줄 모르고 가까이 하고 있다. 우리 1,200만 성도들은 이제 일본의 괴롭힘을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드리고 그리스도의 발 앞에 나아가(마15:29-31) 우리의 죄를 통회하며(욘3:5-6) 예 수 그리스도의 무궁한 긍휼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멈출 것 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많이 기도하여 강국(强國)이 되어 다른 나라들을 도와 주는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141 no image 자신의 부끄럼 자랑할 것인가?-우종휴 목사
rpress
4060 2005-04-28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75siron.hwp자신의 부끄럼 자랑할 것인가? 우종휴 목사| 황상교회, 총회 서기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의논이 있기 마련입니다. 공통의 목표를 이루기 위 해서는 뜻을 모아야 하고, 뜻을 모으기 위해서 의논은 좋은 방편이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지각이 있고 분별하는 힘이 있습 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다르게 지었으므로 서로의 생각이 같기도 하고 때로는 다르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 생각이 언제나 같지 만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지으셨기 때문이 기도 하려니와 우리로 하여금 함께 함으로 더욱 넉넉한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닫힌 사회에서는 다양성이 제대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깨어있 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열려있습니다. 상대를 인정하므로 마음이 열려 있습니 다. 더욱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열려있습니 다. 닫힌 사회에서는 자유로운 논의를 통해서보다는 어떤 힘에 의해서 결정 되기 쉽습니다. 숫자의 힘이나 지식의 힘이나 어떤 권력자들의 뜻이 쉽게 이 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을 가 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하나님께 그 마음을 열어 놓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와 설교를 들을 때, 그리고 형제들과 이야기를 할 때, 더욱 주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님의 뜻을 함께 찾아가는 모든 회의에서 어떤 사람 을 통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 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학식이나 경험이나 그의 지위보다도 성령님 의 음성에 귀 기울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가 자기의 부족과 무능을 깨닫는 신자라면 자기와 다른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 도 안에서 형제가 되고 한 몸인 것을 신앙고백과 성찬을 통해서 고백했으므 로 생각이 다른 형제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업신여기는 죄에 빠지지 못 할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사람 사람을 귀하게 다양하게 독특하게 지 으심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형제를 용납하려고 할 것입니 다. 여러 가지 모양의 힘있는 자라도 그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능력이 없다고 무 시하는 언동을 부끄러워서 감히 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형제의 실수가 드 러날 때 받아들이며 자신을 돌아보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들은 교회에서 당회나 제직회나 각 기관의 모임에서 회의할 때 이 러한 성숙함을 볼 수 있고 보여 줄 수 있습니까? 노회나 총회는 더욱 목사 와 장로들이 모여 의논하는 회의입니다. 성도들이 와서 하나님 백성들의 회 의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모범을 보고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든지 주의 말씀을 하는 것으로 들려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도 우리 는 여러 가지를 의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뜻을 찾고 그것을 이루고자 의논해야 합니다. 또한 그 논의의 과정이 은혜로워야 할 것입니다. 의논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용납하고 오래 참음을 보여 주고 실천함으로 서로의 얼굴을 빛내는 의논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으 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이지만 아직 죄의 찌꺼기가 남아있 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을 함께 찾아가는 거룩한 모임에서 우리의 부 끄러운 본색이 너무 쉽게 드러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회의 중이라도 자주 말씀을 읽고 기도 드리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 때 문에 시시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우리들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리하여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의논이 될 수만 있다면, 성령님께서 지휘하시는 훌륭한 연주회가 될 수 있다면, 그래서 이 모임이 바 로 영생이라고, 천국이라고 불려질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여러 회의에 갈 때마다 늘 이런 꿈을 안고 갑니다.
140 no image 제사는 성경적이 아니다-이선웅 목사
rpress
4760 2005-04-14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74siron.hwp제사는 성경적이 아니다 이선웅 목사/ 남문교회 예수 믿는 사람들 중 어떤 분들은, 아니 교역자들 중에서도 아직도 제사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여러 해 전에 서울의 한 큰 교회 목사 가 예배 시간에 ‘제사드리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고 함으로써 교계에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는 “제사드리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부 모님 생각나니까 부모님 잘 잡수시던 음식도 생각나고 우리끼리 먹으려니 마 음이 안 됐어요. 그럼 부모님이 앞에 계신 듯이 제사상 차려 놓고 아무게 신 전이라고 하면 우상이 되니까 지방 같은 것은 쓰지 말고 정 겁나면 십자가 하나 세워놓고 꿇어앉아서 ‘아버지 어머니 명절이 되니 부모님 생각납니 다. 그 은공을 생각하니 고맙습니다’ 하며 절하는 것이 왜 죄가 됩니까?” 하고 설교했다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제사에 대해서 처음에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가 지금은 ‘무방하다, 제사드려도 된다’는 쪽으로 바뀌어져 있다. 로마 카톨릭이 처 음부터 제사를 드린 것은 아니었다. 1742년에 중국에서 선교하던 후렌시스 칸 선교사들이 제사 문제에 대해서 로마 교황청에 질의하자 로마 교황청에 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면 안 된다’고 결정했다. 교황 베네틱 투스 14세가 두 번이나 교서를 발표해서 ‘유교적 조상 숭배는 성경의 가르 침과 어긋나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후로 중국과 한국에서 제사와 관련하여 많은 순교자를 내게 되었다. 특히 1784년 북경에 갔던 이승훈이 조선에 천주교를 전래한 후 조선의 로마 천주 교는 철저하게 이 교황의 교서를 지켰다. 많은 순교자를 내면서도 제사를 드 리지 않았으며 제삿상 앞에서 절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세계 2차 대전 초엽인 1939년 12월 18일에 교황 피우스 12세가 새 로운 교서를 발표함으로써 그때부터 천주교는 제사 드리는 천주교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이 태도를 돌변하여 제사를 허용한 것은 순전히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2차 대전은 독일, 일본, 이태리 이렇게 세 나라가 동맹 을 맺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연합국 측과 싸운 전쟁이었다. 이때 일본 이 동맹 국인 이태리에 싸인을 보냈다. 그 내용은 ‘너희 나라 수도에 자리잡 고 있는 로마 교황청에 압력을 넣어서 신사참배도 괜찮다, 제사도 괜찮다고 하는 교서를 좀 발표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이탈리아 정부에서 일본의 제의를 받아들여 교황청에 압력을 넣게 되었고, 압력을 받은 로마 교황 피우스 12세가 ‘신사참배도 괜찮다. 제사는 조상에 대한 효의 표시로 간주해야 한다’는 새로운 교서를 발표하게 되었던 것이 다. 그후부터 천주교 신자들이‘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치적 인 이유로 교황이 말을 바꿈으로 해서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는 이유로 순교를 당한 사람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였던 것이다. 로마 교황 이 백 번, 천 번 교서를 발표해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제사는 드 리면 안 된다’ 했으면 안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 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 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 니 하노라”(고전 10:20)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 주님은 사람이 죽으 면 ‘그 날로’ 천국을 가든, 원치 않는 곳으로 가든, 가게 된다(눅 23:43) 고 말씀하셨다. 즉 사람이 한 번 죽으면 그 사람의 영혼이 다시 이 세상으 로 돌아오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사는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죽은 부모나 형제는 이미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도 인격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는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부모나 조상에 대한 효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죽은 자는 인격체가 아니기 때 문이요, 제사 행위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39 no image “제가 잘못했습니다”-허태성 목사
rpress
3945 2005-03-31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73si.hwp“제가 잘못했습니다” 허태성 목사/ 은곡교회 옛날 한 시골 마을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젊은 부부가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 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집을 온 지 얼마 안 된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옷을 삶다가 그만 부주의하여 태워먹고 말았다.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끼며 안 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 남편이 산에서 나무를 한 짐 해서 짊어지 고 돌아왔다. 새색시의 자초지종을 들은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여보, 미안하오! 내가 나무를 조금만 해다 놓았더라면 그렇게 불을 많이 때서 어머니의 옷을 태워먹지 않았을 텐데. 내가 나무를 너무 많이 해다 놓 아서 이렇게 됐구료. 다 내 잘못이요.” 뜻밖에도 남편으로부터 사과와 용서를 들은 며느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으로 서있을 때 태워버린 옷의 주인인 시어머니가 이웃집에 갔다가 돌아왔 다. 며느리는 ‘이제는 정말 죽었구나’라는 마음으로 시어머니 앞에 무릎 을 꿇고 빌었다. “어머니, 제가 그만 어머니의 옷을 태워먹고 말았습니다.” 며느리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어머니가 이렇게 말하였다. “아가, 미안하구나! 내가 이웃집에 놀러가지 않고 집에서 너와 함께 있었더 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내가 너무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이렇게 됐구나. 다 내 잘못이다.” 이 옛날이야기는 물어볼 것도 없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아주 잘 살았단다’ 라는 말로 끝이 난다. 필자가 오래 전에 들었던 이야기이며 때로 설교 중에 예화로 사용하는 이 이 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었는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서 상상된 픽션(fiction)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어딘가에 지금도 이런 사람이 살고 있 다면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 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먼저 고백하고 잘못을 시인하며 용서를 구하는 죄인은 찾아보기가 힘들고 하나같이 의인(?)이 되어 남을 비난하고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강변하는 날카로운 금속성(金屬聲)이 새봄의 입성을 가로막 고 있는 듯하여 우 리들의 마음이 답답한 것은 아닐까? 21세기를 맞이하여 더욱 성숙한 사회로의 발전이 요구되는데도 불구하고, 작 금의 우리 사회는 정치권에서 촉발시킨 보수와 진보의 유치한 편가르기와 이 의 영향으로 노소간의 세대적 갈등, 빈부간의 경제적 반목, 노사간의 이익추 구를 위한 투쟁 그리고 학교 사회의 입시부정, 일진회 문제 등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그러나 이 사회가 이 지경이 된 것은 결코 저들만의 책임이 아 닌 것을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어서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다 안다. 세상의 부 패를 방지할 소금이 맛을 잃어가고 있으며 산 위에 있는 동네의 불빛이 희미 해져 가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신자라면 무엇이 가장 시급 한 것인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 말은 아주 짧은 말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이 고백을 할 때 하나님께서 들 으시고 이 땅을 고치실 것이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많은 문제들 이 이 고백을 통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마침 한국복음주의협 의회가 별세목회연구원과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와 함께 “제가 잘못했습니 다”라는 주제로 4월 8 일에 조찬기도회를 갖는다고 한다. 한국교회의 대표 적 지도자들이 같은 주제로 기도와 고백을 한다고 한다. ‘누가 무슨 고백을 하는가?’를 들어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도 내 죄를 깊이 깨닫고 고백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꼭 조찬기도회에 참석을 해보련다. 그곳에서 그 옛날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소 원을 주님께서 들어 주실 줄 것이라는 기대 또한 작지 않다.
138 no image ‘성도들 깨우기 운동’의 참 의미-강경민 목사
rpress
3703 2005-03-17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72si.hwp‘성도들 깨우기 운동’의 참 의미 강경민 목사/ 일산은혜교회 지금 한국교회에서는 ‘성도들 깨우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참 으로 반가운 일이다. 성도란 목사를 비롯해 장로나 집사 또는 권사 같은 직 분자들도 모두 포함된 교회의 회원들을 일컫는 말이다. 중세교회는 사제중심의 교회였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부터 모든 성도들이 만인제사장이라는 사실에 눈을 떴다. 그러니까 성도들 깨우기 운동은 종교개 혁 이후 시작된 새로운 운동이었다. 가히 혁명과도 같았다. 그런데 새삼스럽 게 이제야 성도들 깨우기 운동 운운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를 중심으로 일어난 만인제사장 운동이 점점 희석 되어서 사제의 자리를 목사가 대신해버린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 미에서 ‘모든 성도는 왕같은 제사장이다’는 신학적 각성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 종교개혁 당시 만인제사장 운동이 신학적 각성으로 끝났을 뿐 만인제 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한 훈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도들의 능 력을 활성화시키지 못한 근본 원인이었고 그 결과 교회는 여전히 목사 중심 으로 운영이 되었던 것이다. 새로 일어난 성도들 깨우기 운동은 성도들이 훈 련되어서 각자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므로 건강한 교회를 함께 세워 가는 운동 이다. 반면에 요즈음의 성도들 깨우기 운동이 교역자와의 주도권 경쟁처럼 비추어 지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성도가 교회의 주인이다’는 슬로건이 이 런 오해를 야기 시킬 수 있다. 성도가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교회의 주인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를 세우셨다. 사실, 교회 안에 교역자 그룹과 일반 성도 그룹이 따로 있는 것도 당연하 다. 다만 두 그룹은 신분적 차별이 전혀 없다.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 도 안에서 다같이 왕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목사나 일반 성도가 하나이다. 장로나 새 신자 역시 하나이다. 그러나 일의 직분이 다르다. 일할 내용이 다르다. 목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 해 가르치는 사명을 받았다. 특별히 담임 목사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책임자 로 부름을 받았다. 모든 성도들의 은사를 찾아 적재적소에 세워야 한다(엡 4:11-12). 회사 같으면 C.E.O 의 자리이다. 맡겨진 기간 동안은 목사에게 교 회 경영의 모든 책임이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기 위한 목사 의 권위는 보장되어야 하고 존경되어야 마땅하다(딤전 5:16-17). 성도들은 자신의 몫이 어디까지인지를 늘 생각해야 한다. 목사가 성경에 근 거해서 소신을 가지고 목회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협력해야 마땅하다. 목사 역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해 주님께 목회의 정신을 배워야 한 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목회 정신은 단연 섬김이다. 부모가 자식에 게 행하는 사랑과 희생의 정신이다. 자기 희생이 없는 목사는 삯군의 반열 에 있는 사람이다. 모든 성도는 주님을 위해 목숨 바쳐 충성하는 것만이 가야 할 길이다. 우리 모두 즐거움으로 주님만 따라 가야 한다. 한국교회의 성장이 멈춘 것이 이 미 오래 되었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원인을 밖에서 찾아서는 안될 것 이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성도들 깨우기 운동이 활성화되어 복음전도의 기폭제가 되기를 기 대한다.
137 no image 생물학적 교회 성장-안만길 목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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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4 2005-03-03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71siron.hwp생물학적 교회 성장 안만길 목사/ 염광교회 작년 11월말, 금요일 저녁으로 기억된다. 땀을 흘리기 위하여 헬스장의 러닝 머신 위를 달리고 있을 때, TV에서 재미있는 한 가정을 소개하고 있었다. 충북 진천에 있는 가정으로 자녀들이 무려 8남매였다. 아직 엄마 젖을 물고 있는 막내로부터 중학생에 이르기까지 고만고만한 나이 대를 이루고 있는 가 정이었다. 시골에서 자연을 친구 삼아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아이들의 천진 함과 행복함을 담은 다큐멘터리였다. 그의 부모들은 이 많은 자녀를 갖게 된 것이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 님이 주신 복으로 여기며 살고 있었다. ‘그 많은 자녀들을 어떻게 키운다 말인가?’하고 의아심을 갖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들은 화목하게 서로의 영 향과 상호 작용가운데서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큰언니가 책을 읽으면 동생들이 따라서 책을 읽었다. 또한 많은 돈은 없었으 나 지극히 행복한 가정으로 보였다. 시골의 그림 같은 전원주택이 아니라 조 립식 주택같이 보이는 집이었지만 항상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자라고 있는 곳이 시골이었지만,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 놀며, 자연을 벗 삼아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다산(多産)이 결코 짐이 아니 라 복이라는 것이다. 지금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가정은 며칠 전 합 신 목회대학원을 졸업한 권학도 목사의 가정이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저 출산문제로 비상이 걸려 있다. 여성들이 아이 낳기를 싫 어하니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한 여성이 평생 낳을 수 있는 평균 출생아의 수가 해마다 줄고 있는데, 1970년에는 100만7천 명으로 4.53% 이었던 것이, 점점 줄어들어 2003년에는 1.19%인 49만3천 명, 2020년에는 38 만 명, 2050년에는 22만9천 명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통계청은 추산하고 있 다. 이러하니 저 출산을 그대로 방치하면 국가의 미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닐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많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사교육비 의 엄청난 부담감,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 또 여성들의 사회진출 이 확대되면서 가정에서의 역할이 줄어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 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 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놀라운 축 복을 거부한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저 출산이라는 추세로 간다 하더라도, 교회만은 이 복을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상황, 100세라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하 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의 씨앗을 기다리지 않았던가! 결국 저 출산의 문제 는 믿음의 문제로도 귀착되는 것이다. 자녀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면서 믿음으로 출산하여 키운다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터인데 지나친 인간의 염려로 이 복을 거절하는 것이 문제이 다. 출산에 따른 육아의 문제가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성도들 만은 이 복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회성장학자들도 우리나라의 교회들이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염려하고 있 다. 이러한 때에 교회들이 앞장서 출산 장려운동을 벌이는 것이 좋겠다. 물론 국가에서는 아동수당을 도입하고 유아휴직을 대폭 늘리며, 신혼부부에 게 는 주택자금을 지원하여 결혼을 장려하는 정책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도 먼저 청년들의 결혼을 위하여 기도하며 도와주어야 하겠다. 특 히 교회 안에는 결혼 적령기를 넘어선 청년들이 많은데 교회가 그들에게 깊 은 관심을 가지고 서로 짝지어 주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또한 수시로 결 혼 준비학교를 열어서 청년들이 믿음 안에서 결혼을 꿈꾸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가도록 교회들이 앞장서야 하겠다. 교회성장학에 생물학적 교회성장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 용어는 기독교 가정 에서 출생하는 사람들을 통한 자연적인 성장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저 출산 현상에 반하여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적 명령에 순종하여 가급적 하나님이 주 시는 축복의 선물들을 많이 가져서 믿음으로 키워야 할 것이다. 어떤 목사가 하던 말씀이 기억난다. ‘전도 못하거든 자녀라도 많이 낳아라!
136 no image ‘시기상조’ 유감(有感) -윤석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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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3 2005-02-17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70si.hwp ‘시기상조’ 유감(有感) 윤석희 목사(증경총회장, 총회정책위원) 시기상조(時機尙早)란 문자 그대로 어떤 목적을 이루려 할 때 ‘때가 아직 아니거나 때가 이르다’는 말이다. 지난 89회 총회에서 몇 분의 총대들이 발 언할 때 사용한 용어이다. 세상에 뜻 없는 소리가 있겠는가? 나름대로 생각 이 있고 뜻이 있어서 한 말일 게다. 총회가 끝난 지 꽤 오래 되었고 해를 넘겼지만 그 용어가 마음에 걸려 있 고 뇌리에 맴돌고 있다. 과연 시기상조인가? 무엇이 시기상조란 말인가? 설 사 시기상조라 하더라도 계속 이대로 가면 하나님의 교회(노회, 총회)는 어 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해결 방안은 없는 것일까? 예수께서도 마가복음 11장 13절에서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여기에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 “때가 이 르다. 아직 아니다.” 그렇게 해석한 사람이 니체라고 한다. 니체는 무화과 의 때가 아닌데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했기 때문에 예수를 정 신 이상 자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시기상조로 이해한 결과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미 지났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때가 이미 지났다’란 무화과 열매가 있는 것이 당연한 때라는 것이다. 열매가 없 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이것은 만 왕의 왕이고 우주만물을 창조하 며 심판주이심을 보인 것이다. 심판하신 이유는 시기상조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의미가 반대일 뿐이다. 먼저 노회에서 선출된 총대가 총회에 참석했다면 의당히 교단의 발전을 생 각하여 발언하는 것이 상례다. 총회 총대가 되어서 교단에 대한 걱정은 뒷전 이고 어떻게 보면 다른 집안 일을 걱정하는 것은 상당히 폭넓은 이해 같지 만 실제적으로는 자기 번지, 앞가림도 못하는 일일 수 있다. 신학은 교회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교회를 위한 신학이어야 하고 교단을 위하는 신학교이어야 한다. 교단과 교회의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운영되는 신학교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게 되어 있다. 지난해 여성비하 발언으로 합동측 모 증경총회장이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 비난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 교단의 헌법에 따라 여성목사를 인정하고 않고 있는 상황에서 총회 때 합신의 김영재 교수 보고에 의하면 매 년 12%나 여성이 선발되었다고 한다. 과연 그것이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 에서 교단 교회를 위한 것인지 시기상조 발언자들에게 묻고 싶다. 나름대로 이유를 말할 수 있다. 문교부의 정책, 학교의 남녀평등, 성적순 선발 기준 등이 그렇다. 다 이유는 되지만 결과는 교단과 교회를 위한 정책 에는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교단 정책과 100% 동일하게 움직일 수는 없더라 도 최소한 기본 정신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아가 재정적으로 시기상조라면 교단에 속한 교회가 더욱 분발해야 한다. 이미 학교는 우리 교단의 후원과 학생들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입학률이 시기상조라면 어느 세월에 100% 이상이 되고 10대 1, 100대 1 을 기대하겠는가? 지교회는 사역자가 부족한데 무슨 시기상조라는 말인가? 시기상조 주장자들에 대한 해답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적은 수를 뽑아 우리 사람을 만드는 것이 지금의 초교파적으로 모집하여 폭넓게 운영하는 것보다 사상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우리 교단에는 더 유익하다는 것이 다. 동시에 합동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려면 먼저 우리 교단에 속한 노회 혹은 교회에 출석하 게 하거나 추천서를 받게 하면 쉽게 해결될 것이다. 필자가 담임하고 있는 천성교회의 예를 보면 합신 출신 40%, 타신학 출신 60%로 구성된 상태에서 지난 24년을 견뎌왔다. 그리고 총회장으로서 전국 노 회와 제주 지역을 방문하고 지교회 사정 이야기를 들으면서 결심하기에 이르 렀다. 부교역자가 상당히 부족하다는 사실이 천성교회 문제만이 아님을 알 게 되었고 인천노회에 건의하여 100여명이 넘는 노회원들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합신 인준 재론의 건’을 총회에 헌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무엇 이 시기상조란 말인가? 더군다나 이 학교가 교수들이 세운 교수들 학교인가? 과연 총신대학교에서 부터 합동신학대학원에 이르기까지 교수들이 데모를 주장하고 조정했던가? 교수들이 학교 운영 재정을 뒷받침해 왔던가? 역사를 왜곡하는 발언을 들을 때면 아연실색할 정도이다. 역사 왜곡이 일본과 중국만의 일이 아니다. 교회 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데서 가슴이 아프다. 시기상조는 시기상조다. 의미는 정 반대이지만, 교회에 손해가 되는 것은 어떤 사상도 제도도 그리고 인물도 발언도 다 시기상조일 뿐이리라.
135 no image 인생은 편지-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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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1 2005-01-26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69siron.hwp인생은 편지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나는 “인생은 만남과 나눔과 기쁨”이란 말과 함께 “인생은 편지”란 말 을 자주한다. 성경은 물론 선교와 목회도 만남과 나눔과 편지라고 할 수 있 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처럼 가슴속에서 우러나오 는 감사와 사랑과 간증과 고백과 권면이 충만하게 담긴 편지도 없을 것이 다. 나는 지난 성탄절 날 설교를 하는 대신 내가 받은 성탄 카드들을 성도들에 게 소개했다. 편지 소개가 무슨 ‘설교’나 ‘시론’이 될 수는 없겠으나 삭 막한 오늘의 한국교회와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담 긴 편지를 주고받으므로 오늘의 우리의 현실을 보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 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제일 먼저 소개한 카드는 6살 난 어린이가 써서 보낸 것이었다. 이레는 아 기 때부터 내가 안아주며 예뻐하던 아이였다. 내가 안아주면 내 품에 안겨 서 한 시간도 편하게 잠을 자던 아이였다. 그런데 2년 전에 멀리 이사 갔 다. “목사님 께 메리 크리스마스. 목사님 저 어렸을 때 많이 많이 돌봐주시고 기 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항상 챙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목사님 그 리고 또 할 말이 있어요. 저 나중에 크면 놀러 갈께요. ♡♡해요. 이레 올 림.” 얼마나 예쁜 편진지 모른다. 그 다음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 성혜진이 보낸 글을 소개했다. “목사님 제 꿈이 커졌어요. 사랑의 음악회 때 목사님께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셨을 때 그것을 보면서 나도 커서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아픈 사람 들을 치료해주고 도와줘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목사님 요번 성탄절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건 좋은 소식이지만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 실 분이었기 때문에 슬펐어요. 그래서 요번 성탄절은 선물만 고집할게 아니 라 회개하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고 싶어요. 목사님 추운 날씨에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 너무너무 착하고 예쁘고 생각이 깊은 글이 었다. 그 다음 감비아에서 선교하던 유병국 선교사 부부가 미국에서 보낸 편지와 러시아 아르쫌의 정득수 선교사 부부와 쌍트뻬쩨르부르그의 김도수 선교사 부부가 보낸 편지들을 소개했다. 외로움과 고난과 상처 가운데서 살아가는 선교사들이야말로 사랑의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아이들에게 가장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신 목사님에게 사랑과 그리움 을 사진에 담아 보내드립니다.” “목사님이 옆에 계시다는 것이 저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르겠습니 다.” “열등감 많고 상처 많은 저희를 기억해주시고 사랑하고 기도해주셔서 큰 위 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김삼환 목사는 “목사님의 사랑을 일생동안 잊을 수 없습니다. 늘 강건하시 길 빕니다” 란 글을 적어보냈고 이중표 목사는 다음과 같은 과찬의 글을 써 서 보냈다. “님이 그리워 성탄이 온다. 성탄이 오면 고마운 님이 생각난다. 주님이 님 을 찾아 세상에 오시듯 나도 님을 찾아 세상을 나선다. 나에게 님으로 만나 주신 목사님께 눈물겹도록 고마운 생각이 든다. 하늘 아래 나의 님으로 계 신 목사님이 살아계신 사실로 나는 이 세상을 살 맛이 난다. 님을 생각하면 그 소중함이 하늘에 이르고 아끼는 마음은 땅끝에 이르니 아 이 신비한 만남 이요 우정이로다. 성탄에 주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r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주고 받으며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 한 일인지 모른다. 선교와 목회는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주고 받고 나누면 서 서로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34 no image 예언자적인 자세-박병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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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8 2005-01-12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68siron.hwp예언자적인 자세 박병식 목사/ 송파제일교회 18세기와 19세기에 이은 산업 혁명과 이성의 발달은 세계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밝게 하였다. 문명의 이기들이 수없이 개발되는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의 세계를 희망적으로 예측하였다. 신학계 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예로 후천년설이 당시에 강세를 이루었음을 지적 할 수 있다. 후 천년설이란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고 온 세계가 복음화 된 후에 이 세상은 평화롭고 번영하게 되어 낙원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기간이 천년 왕 국으로 일컫는 지상 낙원 시대이다. 그리고 그 후에 주님이 재림하시게 된다 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긍정적으로 앞 날에 희망이 있음을 예견하였다. 마침내 이런 흐름이 세계 미래학(WFS)이라 는 용어를 낳게 하였다. 한 때 세계 미래학에 속한 사람들의 수가 6만 명을 상회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그 수가 3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 난 100년 동안 미래학자들이 세계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 매우 희망적이고 긍 정적인 많은 예고를 하였다. 그러나 그 예고는 거의 다 빗나갔기 때문이다. 미래학자들 중 그 누구도 20세기의 대 재앙으로 기억되는 일차 대전과 이차 대전을 예견하지 못하였다. 두 차례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인간이 저지른 잔혹과 그 죄악상을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재난을 목격하였 다. 심지어 신학자들까지도 이에 충격을 받고 후천년론에서 무천년론으로 돌 아서기도 하였다. 금세기 최고 미래학자로 일컫는 앨빈 토플러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이다. 그가 쓴 「제3의 물결」, 「미래 쇼크」를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이런 책들이 출간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인기도 사라지고 있다. 무한의 가 능성을 가진 인간의! 이성은 앞으로 보다 밝은 세계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 고 한 그의 낙관론적인 미래관은 9,11사태나 이라크 사태 그리고 12, 26 동 남아시아의 재난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예측과는 세계가 달리 가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다. 미래를 낙관하는 것은 인간의 소망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그 소망에 역행하고 있다. 사서라고 불리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이 있고 유교를 보다 무속화시킨 삼경이라고 부르는 시전, 서전, 주역, 예기 그리고 춘추 등이 있 다. 이런 책들은 인간 속에 내재하는 미래에 대한 소망을 운명론적으로 풀이 한 책들이다. 인간의 운명을 다룬 역학서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시대에 또한 우리는 살 고 있다. 역학에 근거해서 인간의 운명을 예측해 주는 역학자들이 전국적으 로 5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들 모두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름 있는 일간지들마다 다투어 ‘오늘의 운세’ 운운하면서 역학 풀이를 한다. 유명 한 역학인들이 신문 하단 광고란에 수천만 원씩을 들여 사진과 함께 선전을 한다. 컴퓨터를 켜면 제일 먼저 역술 광고가 등장한다. 역술이 온 나라를 뒤 덮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장래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내면에는 깊은 불안이 잠 재하고 있다. 장래는 오히려 불투명하고 불확실하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역술에 더 몰두하고 있다. 교회가 가질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는 예언이다.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철저히 이해하고 이를 선포하는 메시지 이 다. 구약의 예언서는 하나님이 주신 기본 계시인 모세 오경을 바로 이해하고 선 포함에 그 특징이 있다. 신약의 서신이나 계시록은 이미 주신 사 복음서를 정확히 이해하고 선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교 회가 말씀 위에 바로 서서 그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지킨다면 교회는 훌륭 하게 예언자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교회가 물량주의에 빠지 면 세상과 동일하게 성공을 제일로 삼는 세속주의에 빠진다. 그리하여 교회 가 해야 할 예언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9.11사태 이후 이슬람권에서는 조용하면서도 확실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고 한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알라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잔혹 행위를 온 건한 무슬림들이 보면서 이슬람 자체에 큰 실망과 회의를 느끼고 있다고 한 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가 장 강력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였다고 자부하는 이란조차 예외가 아니다. 역사 상 어느 때보다 많은 무슬림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있다고 한다. 이라 크 내에서도 전쟁 전 150여명이 모이던 어느 교회가 지금은 500명씩 모이 는 예배를 매주일 세 번씩이나 드린다고 한다. 12.26 동남아 재난 이후에 이 지 역에서도 많은 영적 변화들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한다. 선교사들이 일선에서 하는 사역과 달리 하나님은 보다 더 원대하고 보다 더 확고하게 그의 예언들을 성취해 가신다. 우리는 보다 더 깨어! 마지막 시 대를 예고하고 이를 준비하도록 예고하는 예언자적이며 종말론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분명히 시대는 마지막을 향하여 가고 있다.
133 no image 2005년을 도전의 해로 삼자-허태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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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1 2004-12-29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67si.hwp2005년을 도전의 해로 삼자 허태성 목사(은곡교회) 정말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2004년이 물러가고 새해 2005년의 아침이 밝 았다. 온 나라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침체 그리고 사회적 갈등과 부패로 인 하여 결코 편하지 않았던 한 해였다. 세상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교회마저 도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는 우리들에게 희망이 가득한 새해를 허락하셨다. 새해에는 우리 교단의 교회 를 포함한 한국교회의 모든 교역자들과 성도들이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도전 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하여 본다. 1. 우리 안에 있는 염려를 몰아내자. 도전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안에 있는 염려를 몰아내는 일이다. 왜냐하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도전을 못하 게 막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환경과 형편이 실로 염려가 되는 때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문제는 실패를 두려워하여 염려만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들의 정신 자세이다. 어떤 사람의 말에 의하면 염려하는 일의 99%는 실제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난 다고 해도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그 강도가 적다고 한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 보면 그것은 경험적으로도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가 염려를 한 다고 안 생길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생길 일이 안 생기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염려하기보다는 염려를 우리 안에서 믿음으로 몰아내는 일에 앞장서 야 한다. 우리의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자. 주께서 우리를 권고하여 주실 것이다. 염려만 하다가 아무 일도 못하고 도전의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면 악 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주님으로부터 듣게 될 것이다. 2. 도전의 즐거움을 경험하자. 필자는 혹이라도 자랑으로 비췰까봐 두렵지만 몇 가지 간증을 독자들과 나누 고자 한다. 필자는 본래 겁이 많은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처음 자동차 운전을 배울 때에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기도하고 도전했을 때, 단번에 합격이 되어 지금은 운전을 즐기고 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신학교의 문을 두드릴 때도 많은 두려움이 있었지 만 믿음으로 도전 했을 때 주님께서는 필자에게 새로운 인생의 문을 열어 주셨 다. 신학생 신분으로 교회를 처음 개척하였을 때도 그러했고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마다 믿음으로 도전해야 했으며 그 결과는 항상 좋았다. 최근에 필자는 오랫동안 포기하고 있었던 영어에 도전하였다. 지금도 외국인 을 만나면 아직도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며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교회를 방문하는 외국인 목사의 설교를 서툴지만 통역하게 되 었고 선교지에 나가서 영어로 설교하는 기쁨도 맛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 을 계기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필자에게 보다 적극적인 해외 선교의 문도 열 어 주셨다. 지난 달 12월 9일에는 필자가 섬기는 은곡교회가 필리핀에 현지인을 위한 교 회당을 짓고 헌당을 하는 특권을 누리게 하셨다. 선교에 도전하면서 큰 교회 만 선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올해도 필자는 계속하여 도전적인 삶을 살아 보려고 한다. 목회 사역도 주님 의 뜻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보다 도전적으로 해보고 싶다. 우리 가운데 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 록 하실 이에게 영광을 돌린다. 필자는 여호수아 14장 12절에 나오는 갈렙의 도전 기사를 읽을 때마다 마음 에 큰 감동을 받는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 서 당신도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 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 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도전하는 것은 믿는 자의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도전하는 자를 도 와주신다. 도전은 믿음의 한 표현이다. 따라서 도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다. 그리고 그 모습과 결과는 아름답다. 새해를 맞아서 모든 염려를 떨쳐버리 고 믿음으로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도전하는 개혁신보의 독자들이 되기를 소 원한다.
132 no image 담(wall)과 다리(bridge)-장귀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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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8 2004-12-16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66siron.hwp담(wall)과 다리(bridge) 장귀복 목사/새일산교회 올해가 불경기라고 하지만, 그래도 길거리와 교회들의 성탄 장식은 빛을 발 하면서 잔잔하게 성탄절이 다가옴을 알리는 듯합니다. 얼마 전 어느 기독교 신문에서 '성탄절 회복 운동'을 전개하는 어느 목사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 다. 성탄절 트리 장식과 카드 보내기 등 전통적인 성탄 분위기들이 절약 혹 은 카드 보내지 않기 운동 등에 의해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는데, 그러다보니 성탄절을 일반인에게 빼앗기는 분위기이고 왠지 기독교인이 소외되는 느낌이 니 예전처럼 교회와 성도들이 성탄절 분위기를 띄우자는 내용의 글이었습니 다. 그리고 기독교 시민 단체와 일부 교단에서는 '성탄절 하면 떠오르는 산타 클로스 캐릭터 대신 성경적인 동방박사 캐릭터를 사용하자'는 운동을 전개하 고 있다고 합니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일이 있다고 봅니다. 교회가 성탄 장식을 잘 해 놓았다고 그것 때문에 예수를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멋있는 성탄 트 리가 거리와 교회들에 세워지고, 캐럴이 엄청나게 방송을 타고, 산타 대신 동 방박사 캐릭터가 교회마다 거리마다 넘쳐난다고 해서 그것이 복음 증거에 얼 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더욱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부활절 연합예배 때 엄청난 수자의 기독교인들이 모였다고 해서, 그 소식을 듣고 예수를 믿기 로 작정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교회 차량에 교회 이름을 써서 거리를 누빈 다고 그것을 보고 안 믿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경우는 또 얼마나 될까요? 물 론 그런 것들의 긍정적인 면들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교회에서 행해지는 많은 일들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한다 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아기 예수로 오신 이유는 담을 헐기 위해서입니다. "그 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 주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담을 헐고, 우리와 우리 사이의 담 을 헐기 위해 오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보다 담을 허무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절은 '담 허는 날'이 되었 으면 합니다. 서로 간에 높은 담이 쌓여 있는데, 그 담을 헐기 위한 일과 상 관없는 많은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작금의 한국 사회를 볼 때, 같은 민족임에도 너무 대립과 갈등의 담이 높 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회만이 아닙니다. 교계와 교회 내에도, 심지어 교인들 간에도 많은 담들이 쌓여져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서 우리는 담을 허무는 운동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가 담을 헐기 보다 담을 세우는 일에 일조를 하는 듯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질적 인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높이 담을 쌓아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세상의 일이나 비본질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담을 허무는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래 서 성탄절이 되면 교회마다 담을 허무는 운동을 했으면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담을 허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놓는 삶 을 살았으면 합니다. 담을 허는 것이 수동적이라면 다리를 놓는 것은 적극적 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막힌 담을 허시되, 그 일을 적극적으로 다 리를 놓는 삶을 통해 이루어가셨습니다. 그 당시 세리, 열심당, 죄인, 창기 와 같은 사람들은 담으로 둘러싸여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의 담을 허시고 그들에게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그 다리는 곧 주님을 믿고 영 접하는 길로 이어졌습니다. 담을 허무는 삶은 다리를 놓는 삶으로 이어지고 실행되어야 합니다. 담만 헐고 다리는 놓지 않는다면 무의미합니다. 특히 성탄절을 맞아 교회와 성도 가 힘쓸 일은 담을 헐고 다리를 놓는 삶인 줄 압니다. 그러나 기독교 내에도 얼마나 많은 담이 존재하는지요. 교단끼리, 교회끼리, 교인끼리 비본질적인 문제임에도 높은 담을 쌓아놓고 있는 경우가 너무도 많은 것 같습니다. 먼저 우리 안의 담을 허뭅시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담을 허물고 다리를 놓 는 삶을 삽시다. 이것이 성탄절을 지키는 본질적인 자세라고 봅니다. 분명 신 앙인과 교회들이 담을 헐고 다리를 놓는 삶을 산다면, 세상은 교회에 감동하 고 교회에 발을 들여놓을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금번 성탄절, 그 어느 해 보다도 주변을 살피며 '담을 허물고 다리를 놓는 운동'이 일어났으면 합니 다.
131 no image 여러분은 훌륭하십니다!-박삼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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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1 2004-12-02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65siron.hwp여러분은 훌륭하십니다! 박삼열 목사(인천송월교회) 제가 만나 본 세 분과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1. 박윤선 목사님과 나눈 이야기입니다. 약 20년 전 저는 당시 그 분이 시무하시는 교회의 부목사로 섬기고 있었습니 다. 어느 날 그분이 저를 불렀습니다. “박 목사, 새해에 교우들이 사용할 수 있는 전도교재로 뭐가 좋을까?”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집필 하시지요. 그런데 왜 그러시나요?” 라고 여쭈었습니다. 그 때 그분의 말씀 은 지금까지 제가 마음속에 두는 기도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는 일평생 신학자로 사역해 오면서 한국교회의 신학의 파수를 위하여 싸워 왔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수많은 신학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런데 노 년이 되어 돌아볼 때 진정 좋은 교회는 주님의 복음과 영혼을 사랑하는 성도 들이 전도하려고 힘을 쓰면서 움직이는 교회라고 생각하신다는 것이었습니 다. 그런 교회를 남은 생애 동안에 이루어보자는 독려였습니다. 일평생을 한 국교회의 신학교육에 바친 노 신 학자가 남기는 소감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의 마음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의 복음을 깊이 사랑하면서 영혼구 원을 위하여 즐겁게 움직이는 교회를 섬겨볼까 하는 것이 기도의 제목이 되었 습니다. 2. 한철하 박사님으로부터 받은 편지의 내용이야기입니다. 몇 달 전 그분으로부터 편지 하나를 받았습니다. 전국교회 여러 목회자들에 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당신은 본능적으로 목회자들을 존경한 다고 서두를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 구령의 최전선 현장에서 일생을 고 투하는 목회자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당신은 신학 자로서 오랫동안 구원에 관한 신학을 토론해 왔는데 그것도 귀한 일이지만, 이미도 그 진리를 붙들고 목회현장에서 구령의 전투를 생명 바쳐 감당해 오 는 목회자들의 생애를 어찌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 다. 그러면서 그분이 하신 말씀이, 사람들의 삶에 그리스도가 전해지지 못하는 것 은 복음의 전제인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내용이 불충분하기 때문이어서 그렇지 그 내용을 잘 알고 나면 그리스도의 복음만큼 절실한 것이 이 세상에 또 있 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노 신학자의 겸손한 말씀은 새벽부터 밤늦은 시 간까지 교회의 부흥과 우리의 부족함을 안고 고뇌하며 씨름하는 우리네 평범 한 목회자들에게 아주 격려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3. 마지막은 정진경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얼마 전 새문안교회에서 전국의 은퇴 목사님 300~400여분을 모시고 오찬을 대 접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한국교회와 후배들에게 전하는 말씀 을 하신다고 하면서 이런 소감을 말하셨습니다. 당신 세대의 목사들은 민족 의 어려운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목회자의 길을 가면서 언제나 사명감만 은 잃지 않으려고 다짐하곤 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심정이 느껴지는 말씀 이었습니다. 그 분은 이어서 후배들에게 격려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오 늘날이야 말로 정말 온갖 문화의 물결이 요동치고 있는데 그 속에서 목사로 서 그 부르심을 감당하는 후배들을 보면 그 노고가 그렇게 훌륭하게 보일 수 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당신더러 이 시대에 복음을 전 하라고 했다면 잘 못 감당할 것 같다는 말씀도 곁들였습니다. 노 목회자의 겸 손하면서도 진정 격려를 담은 말씀이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고군분투하시는 동역자 여러분, 훌륭하셨습니다. 올 한해도 새해 벽두부터 지금까지 우리 모두는 가르침을 받은 대로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서 감당하느라고 힘써왔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수를 파수하 며 아울러 이 시대에 지혜롭고 능력 있게 전해야 하는 소임을 받았습니다. 쉽 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훌륭하다고 생각됩니다. 동역자 여러분, 우리 모두 힘을 냅시다!
130 no image 질서보다 더 아름다운 것 - 섬김-우종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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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8 2004-11-18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64si.hwp 질서보다 더 아름다운 것 - 섬김 우종휴 목사/ 총회 서기 제가 사는 도시에는 언제부터인가 신호등 옆에 "정체시 진입금지"라는 알림판 이 덧붙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웬만한 신호등에는 그 팻말이 붙어있습 니다. 원래 차량은 신호등이 있는 곳에서는 그가 진행하고자 하는 방향의 신 호가 들어오면 그 신호를 따라서 갈 수 있습니다만 혼잡하여 진행할 수 없는 때에는 비록 자기 차가 진행할 방향의 신호등이 켜지더라도 진행해서는 안됩 니다. 그래야만 더욱 혼잡해 지는 것을 면할 수 있고, 차량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운전자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상식과 예절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운전자들이 운전면허를 받을 때 배운 대로 지키지 않기 때문에 상식 만 지킨다면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교통 지시판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 래서 경관을 좋지 않게 하면서 재정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당국에서는 운전자 들이 운전 예절을 잘 지키지 않으니 차선책으로 지시판으로 덧붙여서라도 교 통 혼잡을 줄이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차량이 많이 늘어난 데서 생겨나는 부산물이라 고 하면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운전자들이 기본적인 상식과 예절 을 제대로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법과 제도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그 죄성으로 기인된 보다 큰 악을 막고 선을 장려하기 위해서 법은 필요 불가결 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보하는 사회라면 법으로 규제하는 것이 줄어들 어야 할 것이요, 시민 의식을 일깨우고 고양시켜서 도덕적인 진보를 이루어 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은 비단 교통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함부로 버리면 벌금을 내게 함으로써 환경을 깨끗 하게 가꿀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주변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사람에게 벌을 주어 막기도 해야겠습니다. 하지 만 또 한편으로는, 아니 더욱 더 스스로 쓰레기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시 민 의식을 함양시킴으로써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줄어들어 마 침 내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교통 예절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운전자들 때문에 없어도 될 지시판을 붙이 는 것이나 ‘쓰레기 투기 금지’라는 경고문을 붙이는 것이 질서 상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하여도 궁극적으로 모두가 예절을 지키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 는 일에 더 많은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예절과 상식이 잘 지켜짐으로 규 칙이 최소화되는 사회가 보다 나은 사회, 보다 살기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있 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야말로 더욱 더 새로운 사회요, 가장 이상적인 공동 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회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고 힘써 행할 것을 서약했습니다. 공적인 예배에서 는 말할 것도 없고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의 말씀 배우기를 힘쓰며 행하기를 즐 겨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 습니다.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있어 예의와 상식 에 대해서 훈계를 듣는 것은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상식과 예절이 부족하다거나 없다는 말을 듣는 것은 하나 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성도답게 산다면 이런 삶을 제재할 법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이러한 성 도들을 가르치고 감독하는 목사와 장로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일에 뛰어남으로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존경의 대상이 될 만 해야 합니 다. 교단과 신학교간의 제도 문제가 논의되는 이 시점에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 리가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사는 일을 제대로 해왔다면 제도 문제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 은 언제나 제도보다는 사람 곧 우리 자신이요, 우리에게 있는 문제라면 죄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서 자유로워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할 수 만 있다면 무엇이 그리 큰 문제이겠습니까.
129 no image 꿈과 비전을 가진 교회-송춘섭 부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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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1 2004-11-08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63si.hwp꿈과 비전을 가진 교회 송춘섭 장로(부총회장, 송파제일교회) 우리 주님의 역사와 인도하심에 감사 드린다. 다행히도 우리 한국엔 하나님의 복주심으로 5만여 교회에 1200만의 성도가 있 다. 많은 교단 가운데 대한예수교 장로회 간판을 건 교회가 대다수이다. 장로 회가 많다는 것은 개혁주의 정신을 잘 계승하고 있는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 는 교회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합신의 김영재 교수는 장로회 정치는 독립(회중) 정치와 감독(교황) 정치 사 이에 위치해 있다. 즉 교회들의 연합을 무시하고 개교회의 독자적인 치리를 절대시하는 독립교회와 개교회의 독자적 치리를 무시하고 교회 위에 있는 더 높은 권세에 의해 치리 되는 감독(교황)체제를 거부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처럼 장로교회 정치 체제가 성경적인 체제임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것은 신본주의에 근거한 민주적 정치 형태를 장로교 정치 체제가 가장 적합하게 드 러내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때문에 민주적인 정치체제인 당회가 교회의 치 리에 있어서 합리적인 것이다. 그만큼 장로교회는 장로의 직분을 귀하게 여기 며 교회 치리에 있어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합신 교단의 800여 지교회 가운데 교직교회(장로가 있는 교회) 가 겨우 170여 교회 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교단이 새롭게 출범한지 20년이 조금 넘는다는 점에서 이해가 된다. 상당수의 교회들이 새롭게 설립되 다보니 장로를 선출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교단 헌법에 세례교인 25명에 장로 한사람을 세울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세례교인 30명이 넘고 50명, 100명이 넘는데도 불구하고 장로가 없이 미조직 교회로 있는 것을 볼 때 정말 아쉬움이 많다. 물론 그 교 회의 특수한 형편과 사정이 있겠지만 사람은 그 어떤 사람도 온전한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온전하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셨다(마 5:48). 지교회 담임목사가 세례교인 50명, 100명임에도 장로를 세우지 않는 것은 이 해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장로를 세워서 교회가 비전을 갖고 소망 가운데 든든히 세워져 가는 교회가 되길 바라면서 몇 말씀드리고 싶다. 담임목사 가 장로 세우는 일을 너무 소극적으로 주저하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장로는 목사와 함께 교회를 받들며 섬기는 자이기 때문이며 담임목사 와 모든 교역자의 목회에 협력자로서 교회를 지혜롭고 충성스럽게 받드는 사 명자이기 때문이다. 당회의 직무는 교회의 영적 사무를 처리하는 것으로 입교한 부모를 권하여 그 들의 어린 자녀로 유아세례를 받게 하며 교인의 입회와 퇴회, 학습과 입교할 자를 문답하여 명부에 올리는 일 등을 하며 예배와 성례 거행에 봉사하고 교 회의 장로와 집사를 임직하는 일을 하며 권징을 실시하고 영적 유익을 도모하 고 교회의 각 기관을 사랑으로 감독하며 교인을 심방하고 영적 부흥을 장려하 는 일들을 하게 된다(헌법 교회정치 제4조 참고). 이 모든 일들은 담임 목사 혼자서 시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로 서감에 있어 장로를 세우는 것은 목회에 있어 매우 중 요한 일 중 하나이다. 그리고 목사와 장로는 서로 아끼고 격려해서 꿈과 비전 을 갖고 주님의 교회의 내적 외적 부흥과 성장을 위하여 주의 말씀에 순종하 며 힘써 기도하며 봉사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교회가 5년, 10년이 가도 교인이 늘지 않고 성장하지 않으면 그 교회 는 꿈도 비전도 없이 무사안일에 빠져 있지 않는가 싶다. 한 알의 밀알이 땅 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24)고 했다. 교회당이 외딴섬에 위치한다면 백번 이해되지마는 그렇지 않다면 주님의 교회 는 계속 성장 발전해야 한다. 주님의 교회가 5년, 10년이 지나도 부흥되지 않 고 그 형편 그 현상이라면 목숨을 걸어 주님 의지하고 최선을 다하면 주님께 서는 필경 역사 하실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합신 교단 목사 장로가 지교회, 노회, 교단을 위하여 참된 꿈과 비전을 갖고 최선을 다할 때 교회는 부흥될 것이며 우리 합신 교단도 크게 성장 할 줄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128 no image 시대를 보라 미래를 보라-박범룡 부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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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5 2004-10-20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62si.hwp시대를 보라 미래를 보라 박범룡 부총회장(송탄제일교회) "소경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듣지 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였던 3중고의 헬렌 켈러는 "그것은 눈을 갖고 있으 되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발전하는 공동체는 비 전을 제시하고 그 성취를 위하여 동기 부여를 하는 지도력을 갖고 있다. 우 리 교단은 어디로 가야 하는 지를 알고 있는가? 그리고 동기 부여를 하는 지 도력이 있는가? 우리 교단은 4반세기를 보낸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우리의 좌표는 어디에 있는가? 교회들은 개혁 피곤증에 걸려 개혁과 성장은 포기하고 현상 유지와 생존에 몸부림치고 있지는 않는가? 시대를 분별하고 문화를 분석하여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야 할 복음의 전사를 양육하여야 할 신학교는 30-40년 전의 커 리큘럼에 답습하고 과거 회상에 머무르며 안주하고 있지는 않는가? 교단 설립 초창기의 지도자들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기득권에 집착 하여 전진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는가? 목회자들은 이미 탈진하여 전의를 상실 하고 있지는 않는가? 4반세기를 보내는 교단 지도자들은 교단의 정체성과 자 신들을 객관적으로 점검해 보아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재를 양성하였는가? 목회자들을 양성하였는가? 교회들은 개혁되고 성장하고 있는가? 우리 교단만의 자랑스런 사역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 교단 의 정치는 과연 타 교단과 차별화를 보여 줄 만큼 신선미와 존경을 받고 있는 가? 뇌물 쓰지 않고 임원들을 선거하는 것을 자랑하며 자위하고 말 것인가? 교단 규모에 비하여 상당수가 되는 선교 지망생들은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 가? 국가적이며 사회적인 이슈가 터졌을 때 그 흔한 성명서라도 발표하여 교 회를 지도하고 경각 시키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우리의 좌표를 인식하여야 한다. 우리 교단만의 특성을 살려야 한다. 그리고 나갈 길을 찾아야 한다. 제시하여야 한다. 교단 목회자들과 성 도들 신학생들에게 긍지를 심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가 먼저 할 일은 교단 지도자들이 모여서 솔직하게 우리 를 고백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현 주소를 알 수 있는 정확한 통계를 내 야 한다. 자연적 교회 성장 학자 크리스천 슈바르츠는 수많은 사례를 통한 연 구 결과 건강한 교회는 성장한다고 단언하였다. 우리는 지금 어디가 건강하 고 어디가 최소치인지 모르고 있다. 건강 진단을 받아 본 일이 없기 때문이 다. 예수님은 전능하셔도 자신이 의인(義人)이라고 생각하는 자를 고칠 수는 없었 다. 우리는 지금 자칭 의인 병에 걸려 있다. 우리는 주님의 진단을 받아야 한 다. 과학적 통계를 통하여서도 진단 받아야 한다. 우리는 실제 가련하고 가난 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부끄러운 모습인데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착각하 여 발전과 성장의 기회를 잃고 있다. 의례적 칭찬을 사실로 착각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천기의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를 분 별하지 못하느냐"(눅 12:54-56) 탄식하신다. 지금이라도 우리 교단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 을 주창한 3대 개혁 이념을 구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 다. 이런 점에서 구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부단 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 일을 위 해 교단의 어른들과 지도자들 그리고 합신의 교수들과 지역 노회의 지도자들 이 발벗고 나서야 한다. 서로의 이권이나 기득권을 포기하여야 한다. 오로지 우리 교단의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구현 과 확장을 위한 일념으로 서로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하나된 군사이다. 각자가 속해 있는 기관이나 지역 또는 연령층이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의 군대에 소속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 다. 그리고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서로 협력하 고 힘을 모을 때 우리 교단의 밝은 미래가 약속될 것이다.
127 no image 국경일이 되어야 할 한글날-오동춘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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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95 2004-10-07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61si.hwp국경일이 되어야 할 한글날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시인 말과 글은 그 겨레의 얼이다. 말과 글이 힘이 있으면 그 겨레도 힘이 있고 말 과 글이 약하면 그 겨레는 쇠퇴하거나 망하게 된다. 한 때 세계를 지배하던 만주족이 역사와 문화가 깊은 중국 한족에 밀려 오늘날의 만주말과 글은 희미 하게 없어져 가고 그 겨레도 나라도 힘이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바로 우리 나라가 일제시대 조선어말살정책에 휘말려 우리 말과 글을 악랄 한 일제에 빼앗기고 심지어 성도 이름도 다 뺏기지 않았던가?이처럼 제 나라 말과 글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삼천리 금수강산의 고운 우리 말을 업신여기고 어려운 한문을 숭상하고 중국 사대주의에 빠져 살다가 1910 년 일제의 경술침략으로 나라까지 잃고 35년간 일제의 온갖 설움과 압박까지 받았던 뼈저린 짚신겨레의 고통과 상처를 우리는 두고두고 어찌 잊고 산단 말 인가?하나님의 심판으로 세계를 제패하려던 일본은 연합국의 원자탄 두알로 무조건 항복을 했 다. 그런 일본이 경제와 군사 대국으로 다시 일어섰다. 독도 를 자기네 영토라고 억지 쓰며 우리 나라를 다시 먹을 듯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중국은 고구려사를 왜곡하며 북한 땅을 다 차지하려는 침략의 야욕을 보이고 있다. 이런 안보 위기에도 불구하고 남북은 분단조국으로 대치해 있고 대한민국은 동서 지역 갈등, 세대 갈등, 빈부 갈등, 좌우익 색깔 갈등 등 갖가지 갈등으 로 국론이 분열되고 서로 반목의 혼란을 보이고 있다. 다시 강대국에 나라를 잃는 엄청난 위기와 불안을 보이고 있다. 이런 나라의 위기에 우리는 한글사랑, 나라사랑으로 굳게 뭉치고 크게 힘을 길러야 한다. 19세기 후반에 영국 선교사 로쓰목사와 그의 매부 매킨타이어 에 의해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어 배우고 익히기 쉬운 한글성경을 읽으며 하늘 가는 천당길을 깨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성경 말씀에 감화 감동을 크게 받았 다. 너무 기뻐서 할렐루야 찬송을 힘차게 불렀다. 어려운 한자에 시달린 한국 에 세종대왕이 15세기에 만들어 반포한 한글로 우리의 민주 자주정신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오늘의 한국은 제2의 예루살렘이 된 것이다. 간 악한 일제에 나라 잃은 우리는 민족정신의 구심점을 찾고 광복특집의 하나 로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 주최로 1926년 11월 4일(음력 9월 29일)에 한 글날을 ‘가갸날’ 이름으로 한글반포 480주년을 기념하며 서울 시내 식도원 에서 지식인 400여명이 모여 한글날 기념식을 처음 열었던 것이다. 1940년 경 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되어 한글날을 양력으로 환산하니 10월 9 일, 이 날을 공휴일로 정하면서 서울 덕수궁에 시민 2만여 명이 모여 한글반 포 500돌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한 것이다. 한글날이 처음으로 제정되던 해 1926년 12월 7일자 동아일보에 민족대표 33인 의 하나인 한용운 시인은 한글날 제정 축시에서 해처럼 쑥 한글날이 솟은 것 은 참되고 아름답고 기쁜일이라고 높이 한글날 제정을 찬양했다. 이런 뜻깊 은 한글날을 노태우 정부는 10월달은 공휴일이 많다는 이유로 당시 경제계나 국한혼용론자들의 말을 듣고 어리석게도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버린 것이 다. 1991년부터 단순 기념일로 전락된 한글날을 한글학회 중심으로 다시 국경 일로 만들어 달라고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과 국회 등에 건의해 왔으 나 계속 묵살되어 온 것이다. 도대체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언어, 문자관도 바 로 갖지 못하고 어떻게 나라를 뼈대 있게 잘 다스릴지 참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다시는 이런 무지의 언어정책이 없어야 하겠다. 바야흐로 한글시대다. 속도 정보시대다. 가장 과학적이며 배우고 익히기 쉬 운 한글로 우리 주체성 있는 한글문화를 이뤄 가야 한다. 한글은 1997년 유네 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기록 되었다. 사실상 국보 제1호는 남대문이 아니고 우리의 세계적 보배인 한글이다. 아직도 설치는 한자나, 홍수처럼 판 치는 서양 외래어의 노예가 되지 말고 우리말 우리글 우리얼을 사랑하면서 우 리 한글 나라를 세계 으뜸나라로 잘 사는 나라로 만들어야 하겠다. 바라건대 부디 올해 558돌 한글날은 꼭 국경일로 만들어 주길 온 국민과 행정당국에 빌 며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자.
126 no image 그리스도의 종의 정체성과 주체성-최성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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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9 2004-09-23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60si.hwp그리스도의 종의 정체성과 주체성 최성대 목사/ 동산교회 해마다 9월이면 교단마다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총회가 열린다. 금년에 시행 되는 총회 위에 하나님이 은혜 주시기를 기원한다. 각 교회의 사건이 노회에 올려지고, 각 노회의 사건이 최종적으로 총회에 올려진다. 금번 제 89회 총회 는 여러 노회가 헌의한 내용 중 하나로 합동신학교의 총회직영인가, 인준인가 를 다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무엇이 총회와 합동신학교를 위한 최선 의 길인가는 지나간 약 25년의 합동신학교의 뿌리와 발전과정의 인식을 종합 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인식은 합신의 정체성이 되는 뿌리에 대한 인식이다. 합신 뿌리의 태동은 교권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진리의 전당을 추구하는 것 이었다고 믿어진다. 합신은 시대적인 격동과 갈등의 상황 속에서 교권주의를 배격한다는 것과 바른 신학, 교회, 생활 삼정(三正)의 건설을 위해 먼저 우 리 자신부터 고쳐야한다는 자기 개혁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본다. 교권주의의 횡포에 대한 부정적 의지와 신학교의 자유와 보호라는 긍정의 의지가 연합하 여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인준 관계의 뿌리가 내려졌다고 믿어진다. 합신 태 동의 역사적 뿌리의 관점에서 볼 때, 합신의 인준은 당시 한국 교계에 새로 운 것이었다. 두 번째 인식은 합신의 주체성이 되는 발전 과정의 결실에 대한 인식이다. 과거 1000년의 변화가 100년 만에 변화되는 옛날 고대와 중세 시대가 있었 다. 100년의 변화가 10년에 변화되는 현대 시대를 지나서 이제는 10년의 변화 를 1년 안에 단축시키는 감당하기 어려운 초현대(?) 21세기를 맞이하게 되었 다. 이런 때에 총회 산하 교회는 합동신학교의 발전지수를 살펴보는 것 같 다. 그런데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신학교는 교회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25년의 짧은 합신은 교회 부흥말기 에 해당하는 80년대에 시작해서 90년대의 현상유지 내지, 침체분위기를 직면 했다. 교회발전 둔화를 염려하면서 교회를 위한 신학교를 위해 합동신학교는 총회직영으로 해야된다는 여론이다. 세 번째 인식은 신학교와 총회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하나로 연결하 는 종합적 인 인식이다. 교권주의로부터 자유를 지향한 합신의 정체성의 태동은 진정한 교회를 위한 인준이었다. 합신의 인준은 무엇을 위한 인준인가. 신학교의 실제는 총회산하 의 교회가 성경에 기초한 교회를 위한 신학교가 아닌가? 그러나 신학교는 총 회의 종은 아니다. 반면에 교회의 생명력을 위한 신학교로서 역동적인 발전 을 기대하는 총회는 교회를 살리는 신학교의 주체성을 위임해 주고, 신학교 의 자유와 발전을 위한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총회직영은 무엇을 위한 직영인가. 진정한 교회를 위한 신학교라면 진리의 전 당으로서의 신학교의 주체성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총회는 신학교의 종은 아니다. 주체자가 하나님이지만 신학교와 총회에 권한을 위임하여 주체 성을 발휘케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인격 앞에 감사할 뿐이다. 신학교와 총회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영역주권(領域主權: Sphere Sovereignty) 즉 스스로의 책임과 결정할 수 있는 주체성(Subjecthood)을 서 로 신뢰하면서 상호보완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서로의 관점의 차이는 이 질과 본질의 다름은 아니다. 교육은 100년 대계라고 했는데 합신은 불과 4분 의 1의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멀 다. 초현대의 더 크게, 더 지름길로, 더 빠르게, 더 외형적으로,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소유라는 "더"의 홍수 속에서 역설의 진리로 나아가야 할 때가 적지 않다. 더 알차게, 더 멀리, 더 느리게, 더 단순하게, 더 지혜롭게, 더 심령 이 가난한 방향으로 가야 할 때가 적지 않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 의 근본(잠 1:7; 9:10)이라는 진리 앞에 더 빠른 지름길과 더 쉬운 공식은 없 다. 자기 긍정과 자기 확립의 지름길이 있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더 심령 이 가난해지는 길 밖에 없다. 21세기는 진리 안에서 느림이 가장 빠른 지름길 이 될 수 있다. 신학교든, 총회산하 교회든 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누구의 종으로 일 하는가에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의 종(Gil Christ)이라 고 했다(롬 1:1).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총회인고로 총회의 본질은 그리스도 의 종으로서 섬기는 사역이다. 총회는 교회의 주재권(왕권)과 머리되신 그리 스도께 복종하는 청지기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주님이 하나님의 종으 로 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처럼, 교회를 대표하는 총대는 주장하 는 자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된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벧전 5:4).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정치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데 있다. 교회정 치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차고 넘칠 때, 총회를 중심한 모든 교회정치는 아름답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 기에 주님은 바울에게 주체성을 위임해주셨다. 그리스도의 종된 바울은 그리 스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의 주체성을 강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 이 여기에 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정체성)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주체성) 모 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다. 주체성의 영역 주권을 서로 신뢰하면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서로를 섬기는 청지기의 길이 신학교와 총회의 사명이라 고 믿어진다. 종된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주체성으로 계속 역동적으로 발 전되는 신학교와 총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125 no image 긴장 중에 경청한 눈물의 권면-박진우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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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1 2004-09-10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59si.hwp" 긴장 중에 경청한 눈물의 권면" 도약의 장이된 성공적 장로수련회 전국장로연합회 직전회장 박 진 우 전국장로연합회는 지난 8월 26일부터 2박 3일간 경주 교육문화회관에서 여 름수련회를 가졌습니다. 무덥던 여름도 어언 간에 지나가고 서늘한 바람이 불 어오는 가을의 문턱에서 열린 경주수련회는 250여명의 장로 내외분이 참석한 가운데 은혜와 영적 감동이 넘쳤고 장로회의 도약과 전환의 장이 된 성공적 모임이 됐었습니다. 전국장로연합회는 12년 전인 1993년에 복음사업과 교회 발전 그리고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목적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전통이 얕고 역사가 짧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총회 또는 수련회에 많은 장로들이 모이기가 참 어려웠습니 다. 어느 해 총회 때는 21명이 모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로연합회는 꾸준히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왔습니다. 이번 수련회같이 지휘부가 뜨겁게 기도로 준비하고 심혈을 기울인 일은 지 금까지 없었습니다. 전국장로연합회 는 지난 5월 20일 인천 송월교회에서 열 린 상임위원회에서 이번 경주 수련회 개회를 결정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수원 합신에서 1박2일로 수련회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경주에서 2 박 3일의 수련회는 예산과 교통에 문제점이 많았지만 "새롭게 한번 각오하고 도약의 기회를 만들어 보자"는 회장단의 뜻에 따라 결정이 됐습니다. 전국장로회 임원들은 이 계획의 결정 후 매주 1회씩 임원회를 여는 등 백방 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7월 8일 전국 노회장 초청 친목회를 열고 이번 수련 회 계획의 설명과 함께 장로의 수련회 참석 권면과 협력을 간곡히 부탁드렸습 니다. 한 주일 후인 7월 14일에 연 본 교단 은퇴 장로 초청 친목회에서는 백 발의 은퇴 장로들로부터 청년의 열정으로 수련회 참석과 협력의 다짐을 받아 임원들은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회장과 임원들은 전국에 있는 회원들과 전화로 통화하고 참석을 요청했는 데 송춘섭 회장은 아마 천 통화 이상의 전화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 다. "전화 연결이 안될 때는 어떻게 합니까"라는 질문에 송 장로는 "연결 될 때까지 전화합니다"라고 대답 했습니다. 수련회는 첫날부터 뜨거웠습니다. 개회예배에서 윤석희 총회장은 장로들부 터 비전과 꿈을 가지고 몸 된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자고 역설했 습니다. 이어 특강시간에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는 이날 과로로 연약한 중에 도 강단에 서주셨고 육신의 진액을 짜내는 말씀의 증거에 전 회원은 긴장 중 에 경청했습니다. 또한 "장로는 교회에서의 임무와 역할에 대한 분명한 확신 을 가지라"는 눈물의 권면은 우리 회원들의 속마음을 뜨겁게 했습니다. 둘째 날 한동대 김영길 총장이 초기 한동대의 고난과 시련의 기간을 넘어 온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간증할 때 가슴속에서 울었고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 니다. 또한 행복한 가정을 위해 작은 일을 소중히 하자는 위트와 유머 넘치 는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의 특강에 웃음꽃이 넘치는 시간을 가졌습 니다. 우리는 새벽기도회를 인도해준 새일산교회 장귀복 목사와 폐회예배의 경북 노회장 안세경 목사에게서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번 수련회는 폐회 예배 때 에도 개회예배 때와 같이 세미나 장을 떠난 회원은 거의 없었습니다. 회원들 은 바쁜 삶을 벗어나 잠시 마음과 몸을 쉬는 한적한 시간에 영혼의 깊은 내 적 교제의 귀한 시간을 얻었고, 경건의 연습과 아울러 사랑의 교제와 하나 되 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각 노회별로 버스를 나누어 타고 돌아오는 길에 금강 유원지에서 다시 만났 습니다. 그리고 오찬을 나누며 담소했습니다. "우리는 안이한 자리에서 일어 서야 해" 그리고 "장로들이 새로워져야 해" 하고 서로 인사를 주고 받았습니 다. 전국장로연합회는 이제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습니다.
124 no image 내 발등의 불을 꺼야 하는데-김기영 부총회장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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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9 2004-08-25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58si.hwp내 발등의 불을 꺼야 하는데 김 기영 목사/ 부총회장, 화성교회 내 집이 지금 불이나 타들어 가는데 먼데 있는 집이 불났다고 소리치고 있다 면, 먼 곳에 있는 남의 집 불도 꺼야할 것이나 내 집의 불을 끄는 것이 우선 이 아닌가 싶다. 지금 우리나라는 심각한 위기에 처할지 모르는 위기 가운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일에 더 신경을 쓰고 말을 많이 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에 대하여 너무 떠들지는 않는가? 우리가 가진 문제는 그에 못지 않게 어렵기 때문이다. 또 세계의 여러 나라의 상황에 나서 서 이래라 저래라 할 만큼 우리의 국력이 강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라 크 전쟁의 정당성에 대하여 얼마든지 말하고 싶기는 하다. 그리고 할 수 있다 면 중재하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그들의 나라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덜 위태로운가? 김선일씨 참수사건에 대하여서도 기억에 담아 넣고 싶지도 않다. 그를 순교자와 같다 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다 그는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 고 비굴한 죽음을 마쳤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은 2001년 9월 11일, 벌써 3년이 되어 가는데, 경악을 금치 못할 테러를 당하고 테러단체를 향해 전쟁을 선포하면서 테러를 지원하는 국가는 적으로 간주한다고 했다(아마 테러 분자의 손에 핵무기가 들어가는 날 세계전쟁이 일 어나리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연관되어 이라크를 지목하면서 군대를 진격시켜 전쟁을 했으나 대량살상 무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부시 의 본심은 석유가 아닌가 의심을 받고 있다. 세계사에서 발발한 수많은 전쟁의 원인을 보면 과연 의를 위한 정당한 전쟁 이 얼마나 있었는가? 러시아가 체첸의 독립을 왜 막는가? 석유 때문이 아닌 가? 무차별 탱크를 보내어 짓밟는 러시아를 향해 '너희들 썩 물러가라'고 한 들 우리말을 듣겠는가? 중국은 주변의 소수민족이 조금이라도 독립의 기미가 보이면 가차없이 군대를 진격시킨다. 한족은 30여개의 소수민족이지만 중국 은 힘으로 제압하고 있다. 남의 나라 이야기는 그만하고 우리는 현실을 직감 하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 내나라 북한 주민들이 억압과 배고품으로부터 탈출해 동남아를 방황하면서 고 통 받는 것에 대하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오늘 약속을 하고도 내일 모른다 고 하는 김정일 정부를 우리는 맞대하고 있다. 핵무기 확산에 대하여 서로 동 족임에도 우리끼리 문제를 해결 못해서 6자회담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 황에서, 안에서만 큰소리치지 밖에 나가면 큰소리는 치지 못하고 있다. 통일 국가도 이루지 못한 형편이 아닌가? 작년에 북한에 다녀온 미국 시민권 가진 한국 물리학자에게서 로동신문을 얻 어 볼 기회가 있었다. 온통 김정일 찬양과 아울러 여러 각국에서 특사가 와 서 김정일 위원장님에게 ---을 바치고, ---을 헌납하였다는 기사뿐이다. 거지 같은 꼴을 하고 구걸하여 얻어먹고 나서 로동신문에는 위대한 김정일 위원장 을 존경하여 방문하여 바쳤다는 기사로 도배되어 있다. 그는 종이가 없어서 누런 시험지 교과서를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으며 호텔에 도 화장지가 제한되어 급히 설사가 나서 곤욕을 치렀다고 고발하고 있다. 북 한은 우리가 담당해야 할 우리 민족이다. 그들이 자유와 복음과 빵을 얻는 날 이 오도 록 누가 해줄 것인가? 우리가 아닌가? 사람들은 지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경제 문제가 단순히 경제 문제 만 아닌 듯싶다. 국내 정치, 안보, 국민 의식 그리고 국제 정세와 국제 간의 무역 협정 등 복합적이며 해결의 방법 또한 난해하다. 천정부지로 솟아오르 는 원자재 값과 기름 값 또한 우리의 주름을 더 만들어 주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자위대는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일본 군대로 탈바꿈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해군력이 세계 수준인데 공격을 정당화하면 어찌될지 모 른다.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견주겠다고 큰기침하고 있다. 대만을 한 입에 삼 키고 싶은데 뜻대로 안 되는 것이다. 중국민주 정부가 이제는 공산 정부에게 먹히는 것인가? 고구려사 왜곡도 우리나라를 그만큼 우습게 보는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우리 나라는 늘 중국의 그늘을 의지해왔다. 신라의 통일도 당나라의 군대를 빌어 이루었다. 고려, 조선에 이르도록 자주 중국에 시달려왔다. 해방 이후 지난 59년 간의 평화 시대는 참으로 돌이켜 보면 하나님 은혜요 어 찌보면 우방 국가들의 도움이라고 생각된다. 해방 5년 만에 터진 북한 공산주 의의 침략으로 인한 전쟁 이후 54년은 긴장 속에서도 평화가 흘러왔다. 이제 앞으로의 50년, 아니 30년은 주변 정세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아닌가? 유럽연합이라는 거대한 기구가 탄생하면서 베토벤의 환희(찬송가 13장)를 국 가(國歌)로 결정했다고 한다. 유로화는 가치가 날로 올라가고 있으며 경제 연 합은 그 힘을 얻어가고 있다. 그래서 아시아 국가들도 연합기구를 만들자고 몇 번 모이기도 했지만 중국, 일본의 연합이 가능할까? 이렇게 국제 사회는 바쁘게 돌아가는데 우리나라 안에서는 여전히 냉전과 열 전이 그치지 않는다. 서로 각 계층이, 각 파벌이, 각 지역이, 각 정파가 원수 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닌지. 우리는 작은 나라임을 알고 서로 힘을 합하기를 꿈속에서도 바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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