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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3164
2002.03.13 (00:00:00)
http://www.rpress.or.kr/files/poetry/298si.hwp청교도의 성경교수관


김재윤/ 광야교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사역자들이나 교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성경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 가르치는 내용이나 기술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르치는 사람 자신이다. 디모데후서 3장 17절에서는 이것을 하나
님의 사람이 된 후에야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된다고 말씀하고 있
다. 교회사 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청교도들의 성경관과 그들
의 성경 교수법을 살펴보고 우리의 지표로 삼고자 한다.


청교도들의 성경관
청교도들은 먼저 성경을 볼 수 있는 평신도들의 권리를 중요시했다. 청교도들
은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었기에 오직 성경만을 최종적인 권위
로 삼았다. 토마스 왓슨은 "당신이 읽고 있는 성경 한 줄 한 줄에서 하나님
이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라"고 말했다. 존 오웬은 "성경의 권위는...... 그 신
적 기원에 있다...... 성경은 성경을 쓰신 분 때문에 권위를 갖는다"고 말했
다. 존 오웬은 성경이 "하
나님의 뜻과 심정을 한치 오차도 없이, 또 아무런
오류도 없이 보여 주는 계시"라고 말했다.

청교도들은 성경의 권위를 말할 때 그것을 구원에 관련된 문제로 제한하지 않
고 여러 방면으로 개방해 두었다. 리챠드 십스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어떤 규준도 얻을 수 없다. 단지 성경이 제공하는 일반적인 규준만이 있을 뿐
이다. 그리고 이 규준은 모범에 의해서 보강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천적인
지식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말해서 청교도들이 성경 권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지
표는 그들이 성경을 어떻게 적용했는가를 보면 된다. 그들은 경제, 정부, 가
정, 교회, 인생, 성, 자연, 교육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든 문제에 성경 본문
과 성경의 모범을 끌어댔다. 청교도들은 제한된 무오설을 수용했는가 아니면
전적인 무오설을 수용했는가? 그들의 이론뿐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인 삶을
볼 때 그들이 성경을 삶 전체를 위한 규준으로 삼았음이 분명하다.



청교도들의 성경교수관
청교도들은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의 사람이 되어
야 함을 역설했다. 토
마스 구드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씀을 기록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였다. ... 그러므로... 이 하늘의 공적 비
서의 도우심이 없다면 인간의 또는 인간들 자신의 이해력으로는 성경을 이해
할 수 없다. ... 그 분이 홀로 그 밭에 지식의 보화들을 숨기셨으므로 그분만
이 그 보화들이 어디 있는지를 아신다. 그러므로 기도로 하나님의 가슴을 열
고 하나님의 연구실을 열어 하나님의 모든 원고들과 문서들로 나아갈 수 있
는 지식의 열쇠를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유익인가!

보다 덜 아기자기하지만 보다 더 명확하게 존 오웬은 같은 주장을 한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일반 원리로 확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성령의 신령한 도우심을 얻기 위한 계속적이며 열렬한 기도는 성경에 나타
난 하나님의 생각에 대한 지식을 얻음에 있어 절대 필요 불가결한 수단이다.
이 지식이 없이는 다른 모든 것들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고 하는 사람은 경건하고 겸손하고 기도하고 가르침
을 잘 받고 순종하는 심령의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그의 정
신이 관념들로 빈틈없이 채
워졌을지라도 그는 영적 실재들의 깨달음에 절대
로 이르지 못할 것이다.

청교도들은 해석하고자 하는 구절이나 본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질문을 하였다.

1. 이 말씀은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2. 다른 성경은 이 본문의 설명
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3. 이 본문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해
서 인간에 대해 어떤 진리들을 가르치는가? 4. 이 진리들은 그리스도의 구원
하는 역사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진리들의 설명
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5. 이 진리들은 어떤 경험들을 묘사하거나 서술하거
나, 또는 창조하거나 고치고자 하는가? 이 진리들은 어떤 실제적 목적을 위
해 성경에 존재하는가? 6. 이 진리들은 우리의 실제적 상황에서 어떻게 나 자
신과 타인들에게 적용되는가? 이 진리들은 현재의 어떤 인간의 상태에 대해
말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믿고 행하라고 말하고 있는가?

맺음말
우리는 청교들의 성경관에서 성경은 모든 삶의 규범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 외의 다른 사상이나 규례는 기독인의 삶을 결코 완성케 할 수 없
는 것이다. 또한 성경교수
관을 통해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 통치가 구
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가
야 할 교회가 늘 심중에 담아두어야 할 지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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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no image '좋은 신앙'이란 어떤 것일까? -유익순 목사
rpress
3214 2002-12-26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17si.hwp'좋은 신앙'이란 어떤 것일까? 유익순 목사(제주 탐라교회) 제주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겪는 어려움이 여러 가지이겠으나 그 중 한 가지 를 든다면 좋은 신앙을 만나지 못 한 것이다. 그동안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잠시 머무르다 지나가는 교인들을 수 없이 겪으면서 "제주에서는 원래 그렇겠거니..." 했으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 좋은 교인의 모습을 바라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좋은 교인'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꽤나 많은 부분에서 실력 있는 신앙을 요구받고 있다. 흔히들 신앙생활이라고 하면 기도라든지 찬송이라든지 예배라든지 전도라든 지 그런 종교적인 행위들에 국한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회서는 신앙생 활을 잘 하라고 하면서 기도하라, 전도하라, 예배에 참석을 잘하라는 등의 강 조를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신앙생활이란 신앙으로 사는 생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활 속에서가 아 닌 교회에서 하는 기도나 예배나, 전도를 생활이라고 하지 않는다. 생활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걸 잘 해야 하는 것이다. 즉, "병든자를 돌 아보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주린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와 같은 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일들이다. 이런 일들에 관하여 하나님은 성경에 일일이 적어 놓으시지 않으셨다. 우리 앞에 밀려오는 수많은 경우를 맞을 때에 그때, 그때 신앙으로 대처할 수 있 는 교인이 실력 있는 교인들일 것이다. 실력 있는 운전자라면 '초보 운전'의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지 않는다. 그렇다 고 스티커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다 실력 있는 운전자는 아닌 것이다. 보통 의 경우에 있어서 약 4년의 기간 동안 운전을 하면 언제 있을지 모르는 돌발 적인 사고에 대처할 수 있는 자기반응이 스스로 일어난다고들 한다. 우리 신 앙인들도 4년이 지나면 그렇게 될까? 어쨌든 우리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을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짧지 않은 기간을 신앙으로 살아가려면 '의리'가 필요한 것이다. 목회자가 믿 고 맡겨준 일을 끝까지 감당하는 모습이 그리운 것이 다. 혹 무슨 일이 생길지 라도 내가 맡은 일 때문이라도, 그 일을 믿고 맡겨 준 목사님과의 의리를 생 각해서라도 인내할 수 있다면 그건 방법일 수 있다. 우리는 유아세례를 받고 나서 무려 18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야 입교식을 하 게 되는 경우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느 사람이 섬기는 교회에서 장 로로 안수 받으면 그 섬기는 지교회의 장로인 것이다. 만약 사정이 생겨 다 른 교회로 적을 옮겼다면 이미 장로가 아닌 것이다. 이런 점들에서 우리는 교 회를 섬김에 있어서 의리적 성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에 관한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의리가 생기기 전에야 이 익의 차원에서 붙들렸겠지만 신앙생활이 깊어지면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하 나님과의 의리가 생겨난 스데반 집사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돌에 맞아 순 교하였으며, 바울 사도는 의리가 생겨 난 후에 자기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것만으로도 충성하다가 죽을 수 있는 것이 다. '축복'과 '보상'을 전재로 한 신앙이 반드시 잘못 되었다 는 것만은 아니 다. 다만 아직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라면 '의리'까지는 가 보지도 못 한 것이다. '좋은 신앙'이 아닌 것이다.
82 no image 평화의 예수 그리스도 -최성대 목사
rpress
4407 2002-12-11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16si.hwp평화의 예수 그리스도 최성대(동산교회 담임목사) 어느 가정에 심방한 적이 있다. 집사님이 "저에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그 리스도의 칭호는 평강의 왕"(사 7:6)이라고 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 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는 말씀처럼 땅에 거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가 되신다. 평강이란 말은 전쟁이 없는 그 이상의 조화로운 상태를 뜻한다. 역사의 뒤 안길을 보면 평화는 깨어졌고, 우리는 다툼이 계속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 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다(엡 2:14). 다윗 왕은 예루살렘의 성 전을 지어 봉헌하려고 했지만 성전을 지을 수 없었던 이유는 피를 너무나 많 이 흘렸기 때문이다(대상 22:8). 그리스도는 트러블 메이커로 오신 분이 아니 라 피스메이커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의 평화는 어떤 평화인가? 평화의 예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 n다. 엡2:14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 을 허시고." 여기 "막힌 담"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을 가리킨다. 유대 인들은 자신의 특권을 주장한 나머지 이방인들을 무시했다. 그러나 예수를 경 배하러 온 박사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다. 평화의 예수는 가정에 막힌 담을 허물어 버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어떤 가정이 행복한 가정인가. 평화의 그리스도를 가정의 주인으로 모셔드린 가정이야말로 행복한 가정이다. 평화의 예수를 가정에 주인으로 모셔드린 가 정은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하는 가정이 될 것이다. 가 정에 필요한 것이 너무나 많다. 경제력, 체력, 지력, 담력, 그러나 무엇보다 평화의 주님이 필요하다. 평화의 주님이 빠져버리면 가정은 모든 것을 잃어버 리고 만다. 평화의 예수는 교회 안에 막힌 담을 허물어 버리기 위해 오셨다. 에베소 교회는 겉모양으로 볼 때 통일되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 의 내면은 겉모양과는 판이하게 달 랐다. 에베소 교회는 내면적으로 볼 때에 적지 않은 갈등과 불협화음 있었던 교회였다. 교회 안의 갈등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의 주님이 시기 때문이다. 교회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평강과 평안과 평화이 다. 교회의 분열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왜 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평안의 줄이기 때문 이다. 평화의 예수는 남자와 여자의 막힌 담을 허물어버리기 위해서 오셨다. 구 약시대의 예루살렘의 성전의 구조를 보면 성전 미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 게 되어있다. 미문 안으로 들어가면 남자의 뜰과 여자의 뜰이 구별되어 있 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남녀차별의 역사가 오랫동안 지배해왔다. 남녀의 차 별의 역사를 뒤바꾸어 놓으신 분은 바로 평화의 주님이시다(갈 3:28). 예수 그리스도는 남녀간에 가로막힌 큰 장벽을 허물고 평화의 다리를 놓으셨다. 평화의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서 오셨다(엡 2:16). 인간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전쟁과 원수의 상태에 있 다. 하나님 과의 분리된 상태는 불안과 죽음과 어두움이 지배하는 상태이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불화의 상태를 초래한다. 하나님과의 전쟁의 상태를 화목의 상태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오신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도성인신)의 사 건이다. 어두운 삶의 현장에 그리스도는 평강의 태양이시다. 그러나 아직도 지구 촌 구석구석에 복음의 빛이 가려진 응달진 곳이 너무나 많다. 아직도 응달지 고 얼어붙은 동토의 땅이 너무나 많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 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 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이 세상에 의인만 산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 없을 것이다. 죄에 대하여는 전쟁을 선포하지만, 죄인에 대 하여는 사랑을 선포해야 한다. 이 두 가지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십 자가와 부활의 권능밖에 없다. 평화의 예수는 민족과 민족 간의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서 오셨다. 1944 년 겨울 세계 제 2차대전이 끝날 무렵 연합군이 파리 근교에 있는 독일군의 패잔병을 수색하고 있었다. 때는 성탄절 이브 저녁이였 다. 연합군이 총뿌리 를 겨누고 수색을 하는 중에 독일군의 패잔병이 함께 모여있는 곳을 발견하 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독일군이 촛 불을 켜놓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두움에 묻힌밤"의 캐롤 송을 부르고 있 었다. 연합군도 이 광경을 보고 무기를 다 내려놓고 함께 캐롤 송을 부르고 함 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예배를 마친 후에 연합군은 독일 패잔병들에게 연 합군이 주둔해있는 곳을 피해 가는 길을 가르쳐주었다. 연합군과 독일 패잔병 간에 평화가 일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평화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 재 때문이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회에 범죄가 늘어가고, 가정이 깨져 가는 원인은 무 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나님과 이웃 과 담이 막히고, 가정과 개인과의 담이 막혀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과 안정은 점점 상실하게 된다. 이런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약속을 지키는 자"의 각성 운동을 일으키시고 있다. 막힌 담을 허물어 버려야 한다. 평화의 그리스도 안에서 막힌 담을 허물어버 리고 서로 교통하 는 복을 건설해야 한다. "솰롬 우베르카"- '평강의 복'이 있기를 바란다.
81 no image C국과 한국교회-김종렬 목사
rpress
3712 2002-11-27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15si.hwpC국과 한국교회 참빛교회 김 종렬 목사 얼마 전 C국을 다녀왔다. 그곳에 일주일 있는 동안 무질서와 낙후된 환경에 혼돈을 겪었지만 함께 공부하며 생활한 사람들로부터 순수함과 따뜻함을 맛보 았다. 50년 전 상황이라면 서로 먼저 죽여야 하는 적이었겠지만 주님의 피를 나눈 형제애와 선교의 동역자의식을 가졌다. 현재 그곳은 초대교회 상황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리스도 제자가 되 어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고난과 감옥을 감수해야 한다. 그들은 가난하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와 찬송은 너무나 진지하고 열정적이 다. 그들은 단지 생존 외에는 걱정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생존도 하나님께서 주신 넓은 땅에서 곡식을 거두니 해결이 되었다. 돌아와서 내가 깊이 실감한 것은 내가 서구 자본주의 문화에 중독되어 있었다 는 것과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문화는 순수한 기독교 정신의 변질을 가 지고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비교하고 질투하고 높아지려는 것이 없는 진정한 형제였 고 자매 였다. 그들의 최대 관심은 오직 성경을 잘 배우는 일이며 배운 대로 살며 가 르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더 크냐, 높냐의 비교와 경쟁이 제일의 관심사이고 성경 을 성령님의 감동 받고 바르게 알고 실천하며 가르치냐는 이미 유행이 지난 고전이 되어 버렸다. 어제 교회 남자 성도에게서 "목사님 설교 중에 물질에 관한 말씀을 하시려면 설교 초두에는 피하고 말미에 하라"는 권고(?)를 들었다. 설교 초두에 물질 에 관한 말을 들으면 처음부터 눈을 감고 잠을 자게 된다고 했다. 그 성도는 물질에 과민반응을 하고 있으며 그 결과 설교 내용까지도 곡해하고 있었다. 이 시대 한국교회 성도의 큰 관심은 물질에 대한 부담감을 갖지 않으려는 대 에 있다고 생각된다. 자기에게 물질의 부담이 오게되면 비판적이고 공격적이 된다. 한국교회는 이미 물질로 인해 병이 들었다. 교회도 예수님 보다 돈 냄새가 물씬 풍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회 부흥 에 대한 바램이 주님 사랑인가? 육신의 탐욕인가? 심령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한다. 이런 말이 있다. "돈이 많음은 이교세계에서 는 그의 영광과 지위를 표시하지 만, 기독교 세계에서는 그의 연약과 거짓말을 나타낸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물질적인 많은 축복을 받은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주 신 것 중에 최상의 가치를 분별해야 한다. 내가 항상 기뻐하며, 기도하며, 감사하는 정확한 목표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이 일에 실패한 사람 중에 이미 자기 본분을 떠나 넘어 진 사 람이 많다. 그리고 교회도 무너질 위험이 있다. 한국교회는 물질보다 항상 삼위 하나님을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특정 사람보 다 오직 예수님이 높아지고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영적으로 깨 어 하나님 나라의 충만을 경험하며 감사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예수님에 사로잡히며, 성령님의 강력한 지배 를 받는 것이 돈보다,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가치가 될 때 큰 소망이 있다. 연말이 가깝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다. 성도의 저금통장을 털어서 헌금 하고 교회의 통장을 털어서 복음전파와 물질이 필요한 곳에 보낼 때 교회는 보다 강해질 것이다. 성도에게 영과 물질은 하나이다. 물질의 지배를 받 지 말고 영이 물질을 지배 하게 하자 하나님으로 받은 많은 축복을 내 안에 축적하지 말고 바르게 사용 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자.
80 no image 전도는 문화와 시대를 따라 개발되어져야 한다- 한광수 목사
rpress
4450 2002-11-13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14si.hwp전도는 문화와 시대를 따라 개발되어져야 한다. 한광수 목사/ 사명의교회 과거에 최봉석 목사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며 새벽에 평양 시내를 다녔어도 전도가 되었기에 그분은 평생에 80여개의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에 우리 교회에 여러 가지 전도의 방법들이 소개되 었습니다. 그 동안 알려졌던 전도 방법들을 살펴보면 일대일로 전도하는 방법으로서 4영리 전도, 브릿지(다리) 전도, 김기동 집사의 고구마 전도, 아이들 대상으 로 글 없는 책 등이 있고 행사적인 전도법으로는 총동원 전도주일, 왕성교회 에서 잘하고 있는 태신자 전도, 전도 부흥집회, 전도 간증집회 등이 있어왔 고 이슬비 편지 전도법도 한 몫을 해왔습니다. 장소에 따라서는 노방전도, 축 호전도, 행사 집회 전도, 무대 공연 전도 등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전도 방법은 교회마다 계속해서 다양하게 섞어서 사용되어지 고 있습니다. 잃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 히 전도하는 교회들이 있기 에 우리 교회들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열심은 오히려 전도에 해 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의 글은 2002년 10월 30일자 개혁신보 실린 동락교회 이은상 목사의 글 입니다. “교회 전도지를 들고 나섰습니다. 벌써부터 아파트 정문 앞과 목이 좋은 곳 에는 여러 교회가 플래카드와 커피 및 생수를 비롯한 선물과 함께 전도캠프 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서로 뒤질세라 이삿짐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재빨리 전 도지를 들고 들어가는 여러 교회 무리들과 저도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데 그곳에서 보아서는 안 될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교회 전도지를 붙이느라 다른 교회 전도지를 떼어버리는 전도자를 목격한 것입니 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전도자들이 자기교회로 먼저 입주자를 데 려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다른 교회를 비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역시 같은 씁쓸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는 전도가 잘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교인들이나 교회를 통해서 받은 나쁜 선입관들이 복음 을 받아드리는데 방해가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 그러기에 이제는 전도의 패러 다임이 바꾸어져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상만 목사는 그의 저서 ‘오이코 스 전도폭발’에서 21세기 전도의 패러다임을 “오이코스 전도(관계전도)로 전환”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하는 개인 전도를 낚시 전도라 고 한다면 소그룹을 통해 하는 전도는 그물 전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맞는 전도법이 개발되어 전도가 보다 잘 되어지기를 바라는 것 이 우리 모두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스티브 쇼그린’ 은 그의 저서 “자연적 전도”와 “101전도법”에서 말하는 전도방법은 우리에게 관심 을 끌고 있습니다. 소그룹을 통해서 마음이 닫혀있는 자들에게 적절한 시기 에, 사랑의 말과 함께 겸손하게 하나님의 사랑의 행실을 보여주는 전도를 말 합니다. 예를 들자면 무료 세차라든지 화장실 청소를 해주면서 그 이유를 묻 는 자에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한 방법으로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 을 뿐입니다.”라고 사랑의 말을 전하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마음이 열려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미국 교회들을 통계 를 통해 연구한 ‘드와잇 마블’은 목사님의 목회의 초점이 설교목회를 지향한 교회는 출석 교인의 수가 약간 감소하였고 평균나이는 높아졌으며 교인들은 수평이동이 교회 성장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방목회나 행정목회도 역시 교인들이 많이 감소하게 되었 지만 반면에 전도목회에 초점을 둔 교회는 회심자들에 의한 교회 성장이 이루 어졌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담임하고 계신 목회자들은 마음에 새기고 전도에 대해 최고의 관심 을 기울여서 문화와 시대에 맞는 전도방법을 개발하여 전도가 잘되게 하는 것 이 우리의 중요 임무라고 여겨집니다.
79 no image 통역요원 95%가 기독교인-박성호 목사 (2)
rpress
4336 2002-10-30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13si.hwp통역요원 95%가 기독교인 박성호 목사/ 개금교회, 총회서기 지금 부산은 2002 아·태 장애인 경기대회가 한참 진행 중에 있다. 지난 14일 에는 아시안의 축제인 제 14회 아시아경기대회가 성황리에 폐막되었다. 16일 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과 부산, 그리고 기독교의 이름을 드러낸 아주 좋은 기회였다. 대회규모도 역대 경기대회 중 최대였다. 북한을 위시한 44개 국 OCA 전 회원국의 선수 임원 11,000여명이 참가했다. 어디든지 찾아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가진 우리에게 선수, 임원, 응원단, 관광객들을 포함한 수만의 아시안들이 우리에게 자신들 의 비용으로 스스로 다가왔던 것이다. 얼마나 복되고 좋은 기회였는지 모른 다. 그래서 아시안 게임이 하나님이 주신 선교의 기회로 알고 각 교회들은 44 개국의 그룹으로 나누어 서포터즈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부산의 전 교회 가 다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뜻을 같이 한 목회자들과 교회들의 활약은 눈부셨 다. 부산시의 종합 보고서(2002.1 0.22)에 의하면, 총 38,875명의 서포터즈 회원들 이 참가하여 봉사했는데 분류해보니 부산시가 모집한 인원이 17,091명이고, 기독교인이 18,100명, 불교인 2,564명, 기타 종교인이 1,120명이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참가하여 부산시민들과 공무원들을 깜짝 놀라게 했으 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다. 우리 교회는 몽골 선수팀을 맡아서 열심히 섬겼다. 선수단이 입국하는 날에 는 교인들이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저녁까지 굶으면서 공항에 나가 몽골 국 기를 흔들며 몽골어로 그들을 영접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달해 주었다. 그들 은 자신들이 왜 이런 환대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어리둥절해 했다. 우 리 몽골 서포터즈팀에서는 계속 선수들을 위해 필요한 물품 및 애로사항을 듣 고 도와주게 되었다. 갑자기 급성맹장염으로 입원케 된 선수를 위문하고 기도해 주었으며, 레슬링 복이 없어 출전이 어렵게 된 사정을 알고 레슬링복을 제작해 전달해 주기도 했다. 이런 우리의 마음과 사랑이 전달되었는지, 그 다음 주일 예배시에 몽 골 선수단장이 우리 개금교회에 참석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는 성도들 에게 응원 을 부탁했고, 레슬링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 청했다. 우리는 몽골 선수단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 다. 마침 그 이튿날 우리가 응원하는 가운데 금메달을 따자 그들은 감격했 고, 당신들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금메달을 땄다고 고백했다. 몽골 I.O.C 위원은 부산광역시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함께 간 필자를 가리키 며 저 교회와 저 목사님이 기도해 주셔서 하나님이 금메달을 따게 하셨다며 이방인의 입술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고백이 나오기도 했다. 우리 교회뿐이 아 니다. 평화교회(임영문 목사시무)는 이슬람권인 파키스탄을 섬겼는데 그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 Jesus를 외치며 감사의 눈물을 훔치며 떠났다. 또 호 산나교회도 북한팀을 물심양면으로 섬겼는데 최홍준 목사는 북한 선박인 만경 봉호에 초대되기도 했다. 그 외의 많은 교회들이 정말 열심히 참여하여 하나 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올림픽 등 스포츠 경기대회와 신앙과는 상반된 것처럼 여기 는 경향이 컸으나 이번 아시안 게임을 통해서 결산해 보니 많은 큰 유익이 있 었다. 첫째, 아시안게임이 복 음전파의 좋은 기회가 되었다. 앞으로 이런 복음 전파 의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금번 아시안 게임은 다시 보기 어려운 너 무도 좋은 선교의 기회였다. 그런데 더 많은 교회가 참여하여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면 더 큰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둘째, 교회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다는 것이다. 금 번 아시안게임을 통해 불교권인 부산 시민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 다. 또 공무원들의 입에서 교회가 너무도 잘 협력해 주어 감사하다는 말들이 계속 터져 나왔다. 셋째, 성도들이 봉사를 통해 하나 되는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성도들이 함께 응원하며 함께 기도하며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하나되는 뿌듯함을 맛본 기회였다. 넷째, 진정한 베풂과 사랑은 언어와 문화, 모든 장벽을 허문다는 것을 체험 한 기회였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종족이지만, 함께 응원하며 사랑을 나눌 때 그들에게 그것이 그대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사랑 은 민족을 초월한다. 이런 말들을 직접 체험한 기회였다. 다섯째, 앞으로 선교에 큰 도움이 될 것을 확신한다. 각국 선수단 임원들과 선수들이 우리의 사랑과 베풂으로 한국인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고 떠났 다. 또 이번 선수단장, 통역요원의 95% 이상이 기독교인이었고 선교사님들이 었다. 그들이 선교지에서 이제 자연스럽게 그 나라 유지들인 임원들과 교제하 게 되었고, 또 선수들과 친해져서 한 가족처럼 되었다. 이제 앞으로 선교의 큰 도움이 될 것을 확신한다. 끝으로 지금 진행 중인 아·태 장애인 경기대회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크게 나타날 것으로 기대한다.
78 no image '선배와 후배'-윤석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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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7 2002-10-17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12si.hwp'선배와 후배' 부총회장 윤석희 목사/ 천성교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 중의 하나가 '선배와 후배의 관계'이다. 부모 와 자녀, 형과 아우, 스승과 제자 그리고 선배와 후배가 있기에 세상은 아름 답다.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 있으며, 형 없는 아우가 어디 있고, 스승 없는 제자나 선배 없는 후배가 어디 있겠는가? 이 아름다움은 '관계'에서 나타난다. 부모와 자녀, 형과 아우, 스승과 제자 그리고 선배와 후배의 관계가 손상을 입으면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으로 기억되 지 않고 추하고 더러운 관계로 남게 된다. 그래서 요즘 세상이 그렇게 복잡하 고 시끄러운지 모르겠다. 조금만 더 이해하고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면 아름 다운 관계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어린 시절 졸업식장마다 이런 노래가 울려 퍼졌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물려받 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아마도 요즈음 은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책을 물려주지 않기 때문에 선배와 후배의 구분이 없 는 모양이다. 초고속 시대를 맞이하여 지난 해 책이 한해만 넘기면 헌 책이 되고, 일 년 전의 컴퓨터는 구시대 컴퓨터가 되어 후배들에게 물려줄 것이 없 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필자는 총회 임원으로 몇 년 동안 교단을 섬긴 경험이 있다. 임원회를 위하 여 총회사무실에 출입할 때 어떤 선배가 '사관학교 출신들도 기수가 있고, 법 무관들도 선후배가 있는데, 유독 목사 세계만은 그런 것이 존재하다가 최근 에 없어졌다'는 푸념이었다. 당시에는 그 말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 았고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다만 '선배 대접을 많이 받고 싶어하는 구나'라 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특 별히 관계성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더욱 그렇게 여겨진다. 선배는 풍부한 인 생 경험으로 바탕으로 좋은 지혜를 가지고 있고, 후배는 남달리 용기를 가지 고 있다.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를 때 선배들이 닦아 놓은 토대 위에 무엇인가 하나를 더 할 수 있기에 선후 배 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세 상에는 유아독존이란 없기 때문이다. 선배와 후배도 여러 가지 구분법이 있다. 학교 입학을 기준으로 보아 졸업 은 늦게 했어도 학번이 몇 년도 학번이냐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또는 졸업 년도를 기준으로 선후배를 구분하는 방법도 있다. 아니면 목사 장립을 기준으 로 하거나 교단가입이나 노회 가입 시기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다. 회의할 때 는 헌법을 잘 알고, 회의법을 잘 아는 사람이 선배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 것 저것 다 그만 두고 언제 태어났는가를 기준으로 보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노회나 총회는 이런 것 저런 것이 다 뒤섞여져 있는 공동체라는 점에 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그러다 보니 그 안에서 선후배 관계가 미묘하게 되고 때로는 이런 일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불편한 관계에 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 총회나 노회를 볼 때 희망을 느끼 게 된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나이도 많고 인생 경험도 풍부한 선배들이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은 후배를 만날 때에도 '선배님 잘 지내셨습니까?'라 고 인사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분들은 학교 입학이나 졸업을 기준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인사를 하거나 목사 장립을 생각 해서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면 나이나 장립 년도나 어 떤 기준법을 생각하더라도 선배와 후배의 관계를 새롭게 발견한다면 아름다 운 관계를 맺을 것이 분명하다. 선배를 존경하고 후배를 아끼는 노회나 총회 라면 참으로 희망이 있지 않겠는가? 이런 전통이 우리 교단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할 것이다.
77 no image 큰 교회들에게 거는 기대-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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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2 2002-10-02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11siron.hwp 큰 교회들에게 거는 기대 정창균 목사/ 새하늘교회 "신도시 개발 지역의 인접 교회들 사이의 경쟁이 장바닥의 이웃 가게 사이의 경쟁보다 더 치열하고 야비합니다." 우리 교회가 신개발 지역의 아파트 밀집 지역으로 옮기고 서너 달이 지난 뒤 뼈저리게 확인한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등록한 한 부부는 자기 집에서 우리 교회까지 오는데 세 번을 붙잡혔 다 하면서, 다음 주일부터는 그 아파트에서 우리 교회 쪽으로 오는 샛길로 교 회를 와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분들이 사는 아파트와 우리 교회는 걸어서 5 분정도 걸리는데 그 사이에 교회가 하나 있었고, 그 교회 교인들에게 자기 교 회로 들어가라고 세 번을 붙잡혔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주 모이는 화요 전도모임에 교인들과 함께 나가서 한창 입주가 진행 중이 던 아파트 전도를 해보았습니다. 같은 라인에서 세 교회의 전도 대원을 만났 습니다. 한 교회에서 나온 분을 붙들고, "이런 방식은 주민들에게 괴로움만 주고, 교회에 대한 나쁜 인상만 심어주어서 결국 교회들도 손해이니 일정을 서로 조정하여 전도를 하자"고 제안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무 때나 수시로 전도를 하는 것이 교회의 방침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대답과 함께 거 절을 당하였습니다. 한 교회는 다른 교회의 입구에 자기 교회의 차량을 주차 해놓고 전도를 하는 바람에 그 교회 교인들과 심한 말다툼을 하였다는 이야 기를 듣기도 하였습니다. 한번은 이 지역에서 여러 해 목회를 했다는 목사님 한분을 만났습니다. 교회들의 이러한 모습으로 괴로워하는 저를 세상 물정 모 르는 순진한 아이를 보듯 저를 보시더니, 제게 한 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지역에 있는 아주 큰 교회는, 부교역자들에게 자동차를 주고 교인들을 데 려오는 대로 돈을 준다면서, 저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하지 않으면 이 지역에 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충고였습니다. 다음 주일 설교에서 저는 저의 괴로운 심사를 교인들에게 털어놓으며 들은 이 야기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교회 부흥이 안 되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교회를 부흥시킨답시고 교회를 교회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는 없지 않느냐고. 그리고 또 말했습니다. 혹시 목사 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 언 제라도 말씀하시라고. 일자리 하나 붙잡고 있자고 목사가 목사 아닌 것으로 될 수는 없지 않느냐고. 교회부흥을 지상목표로 그렇게 까지 치열하게 경쟁을 하거나 혹은 어느 모 로든지 용납될 수 없는 무리수 목회를 거침없이 행해야 되는 교회 현실이 된 데에는 몇 가지 원인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 원인은 상당 수의 개척교회들에게 교회부흥은 생존이 걸린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교인이 늘지 않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교회가 문을 닫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교 회의 설립에 간여한 여러 사람들과, 특히 그 모든 빚을 자신의 개인 책임 아 래 끌어드린 목사님의 개인 파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 개인이 혼자서 전적인 책임을 걸머지고 교회를 개척하였기 때문에 오는 당연한 결과 입니다. 목회는 보람이고, 소명이고, 즐거움이어야지, 그것이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되어버리면 안됩니다. 사람은 생존이 걸린 문제에 부딪히면 물불을 가리지 않 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책임 감당 능력의 한계 를 넘어서 무리하게 교회를 개척한 목사의 책임이 큽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 대한 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책임은 그 교회 그 목사 보다는 이 나라 기성교회들에게 있습니다. 목사 개인의 전적인 책임아래 교회 를 시작하고 흥하든지 망하든지 그들의 일인 것으로 놓아야 될 일이 아닌 것 입니다. 교회가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큰 교회는 혼자서 여러 교회를 개척할 수 있고, 작은 교회들은 여러 교회가 연합하여 한 교회를 개척할 수 있고, 노회가, 그리고 총회가 교회를 개척해 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 나라의 큰 교회들은 이 나라 교회들의 부정적인 현실에 대하여 많은 책임이 있습니다. "큰 교회는 더 커지고, 작은 교회는 더 작아진다"는 말이 마치 수학의 공리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하고 있습니 다. 교회에 무슨 본점과 지점이 있는 것인지... 마치 세 불리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대형 백화점이나 쇼핑몰들도 셔틀버스를 돌 리면서 먼 동네의 손님들을 쓸어가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여러 대 형 교회들은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동네의 작은 가게들과 슈퍼들이 백화점 앞에 가서 데모했듯이, 동네의 작은 교회들 이 큰 교회 앞에 가서 데모라도 하게 될지 모릅니다. "교인들이 큰 교회로 몰 려오는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이냐"는 항변으로 그러한 현상의 원인을 몽땅 일 반 교인들에게 돌려대는 것은, 이 현상을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 심각하게 보지 않은 무책임 일 뿐만 아니라, 양심적으로도 그렇게 온당한 입장은 아니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나라 교계에 큰 교회들이 큰 역할을 하는 날을 기다 려봅니다.
76 no image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교단-김 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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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7 2002-09-11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10si.hwp능동적이고 역동적인 교단 김 훈/ 한누리전원교회 하나님은 능동적이시다. 그분의 속성을 생각할 때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고, 그분의 역사를 볼 때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교회의 머리와 왕이신 주 예수께서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삶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주님의 가르침 속에서 그분이 그 제자와 따르는 자들이 능동적이고 역동적이 되기를 바라고 계셨는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고 썩은 세상 의 소금이 되라", "세상 끝까지 나아가라", "모든 민족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여 제자 삼으라"」 위의 말씀들이 한결같이 가르치는 교훈 중의 하나는 주님의 사람들은 수동적 이고 폐쇄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능동적이고 역동적이고 그 결과 폭이 넓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신자들을 능동적이고 역동적이고 폭이 넓게 하신다. 오순절 후에 도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가 과거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 나지 못하고 수 동적이고 폐쇄적인 사역을 하고 있을 때 환상과 음성을 통해 "일어나 잡아 먹 으라"고 일깨워 고넬료의 집에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충만하게 임하 신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말씀과 뜻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 누구보다도 능동적이고 폭이 넓은 역동적인 삶을 살았던 것이다. 더 많은 사 람을 얻기 의하여 할 수 있는 그야말로 각계 각층의 사람과 만나고 교제했으 며 더 멀리, 더 넓은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가 동 역자와 교인들의 의심과 비판을 무릅쓰고 능동적이고 폭 넓게 활동한 것도 그 것이 주님의 뜻이며 주의 일군들의 사명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 각된다. 흔히 보수정통주의는 수동적이고 폐쇄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성경은 우리에게 피할 것과 사귀지 말아 야 할 것이 있음을 거듭 경계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런 것들이 교회의 존재 이유나 사명이 될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교회의 본연의 모습과 성격은 능 동적이고 그 결과 폭 넓은 것이어야 한다. r 어두움은 밝히는 사명보다는 어두움에 삼키울까하는 두려움에 사로 잡히거 나, 썩은 세상을 되살리는 책임보다는 썩음에 오염될 것을 염려하여 폐쇄적 이 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소위 보수 주의자들과 교회는 그렇게 인식되게끔 수비지향적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배경에는 다른 이유도 있지만 자신감의 결여가 큰 몫을 차지했다고 생 각된다. 우리 교단에 소속된 신학자와 목회자와 성도들 가운데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 로 폭 넓은 역동적인 활동을 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우리 교단이 그 역사와 규모와 교단적 활동이 상대적으로 적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이상으로 인정을 받고 또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데에는 그런 분들에게 힘입은 바가 적지 않 다. 그 분들이 그야말로 각계 각층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지 않았다 면 우리 교단의 설립과 존재 의미에 대해 오늘과 같은 정도의 인정을 외부로 부터 받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필자가 시론을 통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교단의 신자, 특히 지도자 들은 능동적이고 폭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우 리 교단도 더욱 능동적이고 폭이 넓어져야 하겠다는 것이다. 우물 안이 안전 하다고 한다거나 높은 산 바위 위에서 독야청청을 자랑하는 수동적이고 고립 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국가는 통일을 준비해야 할 시점에 있고, 세계는 바야흐로 글로벌시대에 접어 들고 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공산권, 회교권, 불교권, 기타 갖가지 이교 도 지역과 종족에게 선교사를 파송하여 혹은 협력하고 혹은 주도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있다. 누구 한 사람도 선교사들이 그곳에 가서 이교도 가 되거나 그것에 오염될까봐 파송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감과 믿음 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우리 교단과 회원들도 자신감과 믿음을 가지고 국내외의 각계 각층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진출하여 폭 넓은 교제와 주어진 사명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래서 못 먹고 저것은 저래서 안 먹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소신있 게 말하던 베드로와 같은 율법적이고 구시대적인 사고와 활동의 틀에서 벗어 나 "일어나 잡아먹는 교단"이 되어야 한다. 능동적이고 폭 넓게 활동하는 동 역자를 경계도 말고 비판도 말 고 오히려 고마워하고 격려해야 한다고 생각한 다. 총회에 참여하는 모든 총대들과 교단을 대표해서 활동하는 임원들과 모든 부 서의 책임자와 부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국의 모든 동역자와 교회의 지도 자들이 능동적이고 역동적이 되기를 바란다.
75 no image 이제 개혁은 끝났는가? -진상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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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2 2002-08-28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09siron.hwp이제 개혁은 끝났는가? 진상철 /성광교회 목사 9월이 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교단마다 개최된다. 본 교단의 총회역사도 20년이 흘러왔다. 그동안 우리 총회와 합신을 부흥발전 시켜 주신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린다. 필자가 다니던 총신대 시절은 유신반대로 반정부 시위와 합동측의 주류·비주 류 갈등, 방배동 신학교의 분리 등으로 한국교회 대혼란의 시대였다. 총신에 서는 ‘하나되게 하소서’의 기도와 ‘한국교회를 개혁하소서’의 기도가 계 속되자 일부 교권주의 목사들이 학장에게 압력을 가하여 휴교령을 내렸고, 우 리들은 학장실을 점거하고 시위를 하였다. 그후 정든 캠퍼스를 떠나고 남서울교회당에서 공부를 마친후 마침내 1981년 9 월 22일, 16개 노회 목사와 장로들이 참석한 가운데 드디어 개혁총회가 창립 되었다. 합신은 합법적으로 인가를 받고 기적적으로 수원교정에 자리를 잡았 다. 그후에도 한차례 교단합동운동의 결렬의 아픔을 겪으면서 내부갈등은 차차 진 정되고 평양신학교 의 맥과 예장총회의 전통(주기철, 손양원, 길선주, 박형 룡, 박윤선, 노진현 목사등)을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우리 총회는 스스로 개혁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자유주의 신학과 이단 운동을 거부하고, 교권주의자의 횡포가 사라졌으며 인맥주의와 지방색등이 없 어졌는가 하면 지방신학교도 사라졌다. 또한 총회와 신학교는 직영이상의 협 력으로 타교단이 부러워하고 있다. 그리고 양심과 정직한 선거제도로 대표성 이 있는 총회장과 임원이 선출 지역안배나 뒷거래속에 단일후보자가 없고, 구 슬뽑기도 할 필요가 없는 진정한 의회민주주의 선거가 실시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 교단은 다 개혁에 성공했는가?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다. 첫째, 성공한 개혁과 실패한 개혁이 있다. 개혁자 엘리야의 종교개혁과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개혁운동은 성공한 운동이 었다. 그 이유는 그들로부터 시작한 개혁이 전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요시야의 개혁은 자신이 죽자 중단되었으며 후대까지 그 영향이 미치지 못했 다. 타 교단 목사들이 했던 ‘박윤선 목사나 노진현 목사가 소천한 후에 보자’라 는 말들을 듣는 때가 있었다. 우리는 그분 들이 안 계셔도 그들의 신학과 삶 을 이어받아 개혁주의 신앙의 계승자로 계속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둘째, 개혁을 어떻게 할 것인가? 1981년 창립총회를 돌아보며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회개하고 주님앞에서 겸 손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개혁의 정체성을 연구하고 바른 방향을 제시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늘 그때처럼, 미움과 반목, 갈등을 통회자복하고 서 로 용서하며, 진리안에서 하나될 때 가능하다. 이를 위해 바른 개혁정치, 개혁신앙, 개혁교회, 개혁적인 삶이 전국 교인들에 게 지지받는 개혁백서와 목회자 자신부터 지켜야 할 목회자 윤리강령과 성도 들의 강령이 만들어져 한국교회 안에 개혁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겠다. 그뿐 만 아니라 교단의 장·단기 발전계획서를 세워 21세기 한국교회의 비전을 제 시하며 특히 총회시 임원선거를 위한 총회가 아니라 정책총회, 각 상비부 사 업총회로의 도약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지교회나 노회에서 많은 안건과 쟁점 사업들을 총회에 헌의해야 우리 총회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누가 개혁을 이끌어 갈 것인가? 개혁의 성공과 실패는 개혁의 원리원칙과 지 도자의 인격, 총회경영 확신과 능 력 그리고 든든한 지지기반 등에 달려 있다. 모세, 엘리야, 느헤미야는 정치 공학 차원에서 그 시대를 이끈 성공의 개혁자였다. 또 다윗은 사울왕이란 적 수가 있는 가운데도 개혁원리와 원칙과 확신을 지키면서 참도들과 백성들의 신뢰를 받았다. 느헤미야는 얽히고 설킨 복잡한 갈등의 현장에서도 그 대안을 찾아 백성들에 게 비전을 제시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아론의 지도력 아래서는 개혁의 원리 가 퇴색하고 원칙과 신앙이 변질되어 간 것을 알 수 있다. 오직 개혁의 원리와 원칙은 성경 안에서 찾아야 한다. 개혁원리를 잘 이해하 며 인격과 능력을 갖추고, 확신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만이 참된 개 혁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다.
74 no image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나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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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4 2002-08-14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08si.hwp하나님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나종천 목사/ 한사랑교회 대동 수양관에서 가족수련회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수양관을 관리하던 집사 님께서 이미 소천하신 목사님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다. '목사는 집을 3일간 비워도 도둑 맞을 걱정이 없어야 된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시대가 많이 달라 졌지만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많이 가지고 있고, 많은 것을 부요하게 누리 고 있지 않는가? 또 외적인 여러 가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집과 내 마 음을 여러 개의 자물쇠 통으로 꼭 잠가놓았다. 그런 나에게 주님은 찾아오셔 서 수없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지만 그 기득권을 놓치기 싫어서 열지 않고 있는 나의 추한 모습을 보았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혼자 하는 일인데 못할 것도 없지 않느냐, 단 한 번 만 무릎을 꿇고, 계속해서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다. 딱 한 번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그 대가로 상상을 초월하는 이득이 주어진다면 이처럼 매혹적인 유 혹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 얼마나 있겠는가? 비밀이 보장되고 성공만 한다면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만연된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혹 비밀이 새 어 나간다고 해도 대수로운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미 모든 난관은 사라 졌고, 부귀와 권세를 누리고 있지 아니하냐, 그까짓 절 한번 했다고 고개가 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신 후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다만 그 분만을 섬기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만'이 첨가된다. 경배를 받고 섬 김을 받을 대상은 오직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존재도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사단과 하나님,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가 과제로 주어진다. 사단에 게 절하는 것은 사단이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라 사단이 줄 수 있는 천하만국 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의 천하만국은 '세상의 모든 나라들'(pasas tas basileias tou kosmou)로 되어있다. 여기에서 나라는 '통치' 또는 '지배'를 뜻한다. 이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 을 다스릴 수 있는 수단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져야할 바 른 관계를 저버리게 하고 왜곡된 관계를 갖게 하며 인간의 상호평등 관계를 포기케 하려는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무릎을 꿇어서도 안되고, 반대 로 다른 사람의 무릎을 자기에게 꿇리게 해서도 안 된다. 배운 사람이 배우 지 못한 사람을,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그 어 떤 매개물도 높낮이를 나누거나 구분해서 상호평등관계를 깨서는 안 된다. 사람이 한가할 때 주로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가 밝혀진다. 틈만 있으면 땅을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땅이 그 사람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당 건축이, 어떤 경우에는 명예가, 또는 대 저택이나 초대형 교회 건물이 한 사람의 잠정적인 하나님이 될 것이 다. 품목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으나, 그러나 그 어떤 품목도, 그것이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경배받아야 할 하나님을 대치할 수 없다. "권력은 그것 앞에 무릎을 꿇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 와 벌」에 나오는 구절이다.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권력뿐 아니라 재산도 그 렇고, 부귀 영화도 그렇다. 그것들 앞에 무릎을 꿇어야 주어지게 되어있다. 사람들이 그것들을 집착 하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것들이 다른 사람들 의 무릎을 꿇게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쳔 은 그럴 수 없다. 우리가 무릎을 꿇어 경배해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만 있을 뿐이다. 아직도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벨기에의 다미안 신부에게서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평생 나병 환자와 함 께 보내기로 작정한 다미안 신부는 나병 환자들이 집단으로 수용되어 있는 몰 로카이 섬에 가서 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환자인 그들이 환자가 아닌 자신을 그들과는 운명이 다른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이 신 부는 그들과 심정적으로 교류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파악했다. 그래서 그 신부는 자신도 그들의 고통을, 머리로가 아니라 실제로 체험하기 위해 직접 자신이 나병 환자가 되기를 날마다 주께 기도했다. "제발 나병에 걸리게 해주십시오." 그러던 중 몇 년만에 결국 그 자신이 나병에 걸리게 되 었다. 그 신부는 자신이 나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자마자 이렇게 외쳤 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 니다. 이제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립니다." 그는 진심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오늘 우리들의 감사는 무엇 때문에 올리는 감사인가? 신분의 상승, 땅의 구 입, 교회당 건축, 주택 구입 때문인가? 아니면 한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다미안 신부의 마음이 있기에 감사하고 있는가? 아니라면 우리는 하 나님 외에 어떤 매개물을 경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라기는, 천하만국, 부 귀영화가 주는 권력에 매료되어, 다른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싶은 유혹, 혹 은 다른 사람들의 무릎을 꿇리게 하고 싶은 유혹의 순간이 올 때마다, "사탄 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으로 올 여름에는 우리의 심정을 다스리고, 맑은 신앙을 유지해 나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사실 천하만국이 주는 힘의 매력은 물거품처럼 사라지나, 하나님 의 말씀은 영원하다. "다만 하나님만 섬기라." 섬김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이 시다.
73 no image 정직한 목회자가 됩시다-장귀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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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1 2002-07-31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07siron.hwp정직한 목회자가 됩시다 장귀복 목사/ 새일산교회 "성도님, 새해에 집사로 봉사 좀 해주시지요." "목사님, 아직은 부족하고 아는 것도 없으니 내년에 임명받고 봉사할께요." 그래서 집사로 임명하지 않 았더니, 다른 사람은 임명하고 자신은 임명하지 않았다고 시험에 든 성도가 있었습니다. 또 초대 여전도회장이 임원들간의 갈등으로 사표를 내기에 만류 했더니, 절대 갈등 때문이 아니라 집안 사정 때문이라고 하기에 그 말 그대로 를 믿고 사표 수리를 했다가, 목사님이 자신을 그만두게 했다고 하면서 교회 를 떠난 경우도 있었습니다. 교인들의 말의 행간을 읽지 못한 목회의 미숙이 었습니다. 솔직히 일산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하면서 성도들의 선한 거짓말, 하얀 거짓 말, 겸손으로 위장한 내숭적 태도 때문에 애를 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 다. 물론 악의에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인지는 솔직히 몰랐습니다. 단순히 밥을 먹고 안 먹고에도 정직하지 못하고, 공부에 늦게 온 이 유를 말하는데도 거짓말을 합니다. 순간 순간 둘러대고 핑계를 대는데 능숙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하얀 거짓말이라 괜찮고 그럴 수 있다고들 생각 합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자칫하면 신앙인들을 위선자요 거짓말하는 자로 인식시키기 쉽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선한 거짓말이나 내숭적 겸손을 미덕으로 생각하면서 전 혀 죄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가진 분 들도 있겠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선한 거짓말도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 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럴 때라도 거짓말을 한 죄는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고 봅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면, 대 령 가족을 숨겨준 뒤 독일군에게 거짓말 한 것에 대해 수녀원장이 십자가를 그으며 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지라도, 거짓말은 거짓말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하얀 거짓말은 괜찮습니까? 남에게 유익을 주는 거짓말, 더욱이 하나님께 영 광 돌려지는 거짓말은 괜찮습니까? 바울 선생은 정죄받는 것이 옳다고 말하 고 있습니다(롬 3:7,8). 그런데 이런 거짓말의 경향이 일반 성도뿐 아니라 목사들에게도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둘러대고, 한 말을 안 했다고 하고, 약속 에 무책임한 목사들이 있습니다. 여행비자를 받아 입국한 후 그냥 눌러 앉는 목사들 때문에 목사가 비자 발급을 받기가 어렵고, 목사의 신뢰도가 다른 종 교의 지도자보다 떨어진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전에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1천만원의 세금이 나왔는데 교회 에 헌금한 것으로 하면 세금이 감면된다고 헌금증서를 발급해 주면 1백만원 을 헌금하겠다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또 기독교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세례증 서가 필요한데 발급해 주면 교회를 다니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 회에 헌금도 하지 않았는데 연말 정산 서류를 발급해 주면 환급금 50%를 교회 에 내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물론 모두 다 거절을 했습니다. 공문서 위조 고 탈세에 가담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 니 다른 교회에서 모두 서류를 발급받아 일들을 해결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 다. 어느 날 "교회들이 공문서 위조"라는 제목의 뉴스가 나올까봐 두렵습니 다. 지난 7월 19일에 SBS "뉴스 추적"에서 "세상에 이런 목사가..."라는 프로 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보지는 못했는데, 목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자매를 보도하면서 무자격 목사와 무인가 신학교의 문제를 다루는 내용 이었습니다. 그 방송을 보면서 깜짝 놀란 것이 있었습니다. 8백명의 신학생 이 있는 어느 무인가 신학교가 온통 가짜 투성이라는 사실입니다. 교수들의 박사 학위도 가짜고, 교단 인가도 가짜고, 미국 신학교와의 연계도 모두 가짜 였습니다. 그러면서 버젓이 신학교를 운영하며 목사 안수를 주고 있었습니 다. 솔직히 그 사람들이 무엇 하러 신학교를 운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사회나 교계의 개혁과 변화의 일차적 목표는 "정직성 회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직과 목사는 대치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직 과 목사는 생명처럼 서로 연결된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렇지 못한 현실이 우 리를 슬프게 만듭니다. 큰 목회, 성공하는 목회자가 되기 전에 정직한 목회자 인지를 살펴야겠습니다. 목회자 가 정직해야 성도가 정직하고, 그때 한국 사회 의 정직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글을 쓰다보니 마치 내 자신은 마치 정직한 듯 비춰지는 것이 큰 부담 입니다. 저 역시 연약하고 부족한 자임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나아 가야 할 한 방향이 "정직성 회복"이라 생각합니다. 글을 쓰면서도 내게는 부 정직성이 없는지, 환경에 따라 적당하게 둘러대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봅니 다. 정직성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거짓의 아비는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72 no image 예수 축제를 벌입시다 -신명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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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8 2002-07-10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06si.hwp예수 축제를 벌입시다 신명섭 목사/ 북인천교회, 인천노회 노회장 7월은 교회적으로 큰 행사가 있는 달입니다. 어린이여름성경학교와 중 고등 부, 청년대학부의 수련회가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는 해마다 여름방학기간을 이용하여 평상시 하지 못했던 프로그램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아이들에게 신앙 교육을 합니다. 이를 위하여 각 교회마다 많은 계획을 세우고 기도하며 준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는 다른 때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해야 합 니다. 왜냐하면 지난달에 있었던 월드컵 때문입니다. 온 국민들이 감격과 환호 속 에 승리의 기쁨을 누렸고 특히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월드컵으로 인하여 들떠 있었습니다. 그들의 머리와 마음에는 히딩크와 태극전사 그리고 붉은 악 마 응원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났었습니다. 모든 이야기의 화두(話頭)는 월드컵이었습니다. 이제 월드컵은 많은 흥분과 진한 감동을 남긴 채 막을 내렸습니다. 한국의 월드컵 경기가 모두 끝난 지난 달 29일 이후 주변에서 흔하게 듣는 말 이 있습니다. "이제는 무슨 재미로 사냐" 라는 얘기입니다. 아무 뜻 없이 하 는 말로 들릴 수도 있으나 여기에는 생각해 봐야 할 것이 많이 담겨 있습니 다. 많은 청소년들이 심지어 어른들까지라도 대회가 끝난 후에 공부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실 월드컵기간에도 경기가 없는 날이면 무엇 인가 허전한 마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월드컵이 끝난 후에 무엇인가 이 축제 를 대신할 수 있는 행사가 있어야 한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염려할 것은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달에는 저들을 위하 여 예수 축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달에는 월드컵 축제가 있었다면 이번 달에는 예수 축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름성경학교를 천국잔치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월드컵 축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저들의 마음 을 사로잡은 것처럼, 이제 각 교회가 신나는 천국잔치를 벌려서 저들의 마음 을 사로잡아 하나님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래서 월드컵이 끝난 후에 저들 의 공허한 마음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참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 다. 기우(杞憂) 같습니다 마는 많은 신앙인 들이 붉은 악마라는 명칭 때문에 혹시 라도 아이들의 신앙에 악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하고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달의 예수 축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가득해지면 저들의 머리 와 마음 속에 남아있던 신앙적으로 부정적인 것들이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 다. 그러므로 이번 여름 행사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저들이 월드컵으로 인해 신 이 난 그 이상으로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신이 나도록 해야 합니다. 축구이 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더 재미있고 신나고 즐거운 곳이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번 월드컵의 좋은 성적이 악마가 아니라 하나님 의 은혜로 되었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번에 뛰었던 선수들 중에 다수가 하 나님을 알고 섬기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 니다. 경기하기 전에 기도했던 모습과 승리했을 때 하나님께 감사 기도했던 모습들을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이런 과제들은 우리 한국 교회가 시급히 해야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를 맡아 지도할 교사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 합니 다. 교사 자신이 먼저 월드컵으로 들뜬 마음을 차분히 정돈하고 고요히 하나 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 번 여름성경학교의 주제가 어렵다는 말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 다. 하지만 교사가 가르칠 본문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며 기도할 때, 성령님 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쉽게 가르칠 수 있도록 은혜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여름의 모든 교회 행사를 통하여 아이들의 마음과 믿는 성도들 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하게 되어 월드컵보다도 더 신이 나는 예수 축제를 벌리는 한 판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한국교회의 건투를 빕니다.
71 no image 월드컵 한국 축구에서 배우는 목회훈 열 두 가지-최충산 목사
rpress
2864 2002-06-26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05si.hwp 월드컵 한국 축구에서 배우는 목회훈 열 두 가지 최 충산(목사, 한주 교회) 월드컵 때 한국 축구가 보여준 승리는 축구 이상의 의미를 우리에게 던졌 다. 교회를 섬기는 우리들도 목회적 측면에서 한국 축구가 던진 메시지를 해 석하고 연결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 건전한 분별력을 전제하면서, 월드컵 한국 축구에서 배우는 열두 가 지 목회훈을 생각해 보자. 첫째, 목회 사명에 충실하자. 이번 우리 선수들과 코칭 스텝들이 임무를 성 실하게 수행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도 목회사명에 충실하자. 사 명을 수행해가는 목사의 진실과 열정을 우리의 목회 현장에서 인정받자. 둘째, 우리 자신의 문제와 상황을 분석적으로 인식하자. 히딩크은 한국 축구 를 과학적으로 분석했다. 우리도 문제와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대책을 마 련해야한다. 정확한 진단이 해결의 열쇠다. 셋째, 기본을 잘 갖추자. 축구의 기본은 체력 과 기술과 팀워크라고 본다. 때 로 기본이 안 된 목사를 보고 안타까와 할 때가 있다. 목사의 기본이란 신학 적 분별력과 신앙 인격이다. 좀더 기본에 충실하자. 넷째, 어떤 형편에서든지 잘 적응하여 창조적으로 사역하자. 이번에 우리 선수들은 멀티 플레이어로 조련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디에다 배치해도 자 기 역할을 잘 해 주었다. 목사가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하나님 나라와 교회 를 위해 창조적으로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목사의 능력은 뚜렷한 사명감과 복음적 확신에 근거한 상황 적응력이다. 다섯째, 철저히 영육을 훈련하자. 체력이 없이는 기술을 소화할 수 없다. 우 리 축구의 승리는 월등한 체력이 이루어낸 결과이다. 목사가 건강하지 않으 면 사역에 큰 부담이 된다. 또한, 경건의 훈련도 부단히 해야 한다. 감독이 선수를 경기에 투입하려면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는 선수를 선발할 것 이다. 일상적인 영적 전투에서 지고 있는 목사는 실전에서 이길 수없다. 여섯째, 목회적 '전략과 전술'을 준비하자. 승리는 노리는 자의 것이다. 목 회적 '전략과 전술'이 있어야 한다. 확신과 열정만 가지고는 안 된다. 전략 이 있어야 전술이 나오고, 전술은 전략에 봉사한다. 우리는 때로 전략은 있으 되 전술이 없고, 전술은 있으되 전략이 없는 경우가 있다. 원대한 목적과 구 체적 목표를 세우고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일곱째, 목회를 즐기자. 축구는 직접 하는 재미는 더 하다. 선수가 축구를 즐기지 않으면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할 수 있겠는가. 우리도 목회를 즐기면 서, 즐거워하면서 하자. 땀을 흘려야 기쁨이 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보는 즐기는 목회를 하자. 여덟째, 성령의 현장적 지휘에 민감하자. 그라운드에서 선수가 뛰는 동안 감독은 사이드 라인 밖에서 현장을 지휘한다. 선수는 그 손짓, 발짓 사인을 받아서 전술에 변화를 준다. 우리도 목회의 현장에서 어찌 하지 못할 때 성령 님의 '현장적 지휘'를 받아야 할 때가 있다. 현장감 있는 성령의 인도는 이제 까지 갈고 닦은 신학적 분별력의 창조적인 적용이다. 아홉째, 특정인을 의지하지말자. 프랑스는 지단을, 포르투갈은 피구를, 아르 젠티나는 베론을 의지했다. 그러나 그들이 제 구실을 못하자 팀도 패배했 다. 우리의 목회가 어떤 특정인을 의지하는 목회를 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 다. 교회에는 사회적으로 능력있고, 성공한 사람이 많다. 그들을 지나치게 신뢰하다가 실패한 경우가 얼마나 많는가. 열 번째,협력하자. 축구는 팀플레이다. 이번 한국 축구의 팀워크는 눈물겹도 록 아름다왔다. 팀의 승리를 위해 몸을 던졌다. 목회도 마찬가지다. 목회 의 성공은 팀워크의 성공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각자가 순종하면서 협력 하도록 하여 생명적 질서를 건강하게 유지,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목회이 다. 협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열한 번째, 결코 좌절하지 말자. 이번 한국 축구가 우리 한국인에게 심어 준 것 중에 하나는 좌절하지 말자는 것이다. 패널틱 킥을 실패하고도 꺾이지 않고 끝까지 사력을 다하다가 급기야 크게 공헌 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다. 우리는 실패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좌절해서는 안 된다. 열두 번째, 복음과 교회의 승리를 확신하자. 축구는 축구다. 또 질 수도 있 다. 그러나, 복음과 교회는 그 자체가 현재적 승리이며, 궁극적 승리가 보장 된 최고의 가치이다. 복음과 교회의 영원한 승리를 믿는 자는 현재의 승 리와 실패에 울고 웃지 않는다. 끝을 보는 자는 현재의 슬픔을 이기는 자다. 목회 는 지금과 나중을 가슴에 동시에 품고 나아가는 창조적 행위이다. 복음과 교 회의 승리를 확신하자.
70 no image 히딩크에게서 배운다 - 정화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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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 2002-06-12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04si.hwp히딩크에게서 배운다 정화영 목사/ 북서울노회 노회장, 삼일교회 요즘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인물은 히딩크이다. 그의 지도력을 각 계 각층에서 배울려고 한다. 목회적 측면에서 그에게서 배울 점은 무엇인가? 그의 강력한 지도력에서 가장 크게 배울 점은 목적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그 는 16강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18개월 동안 힘차게 전진해 나갔다. 그는 선수 들의 이전 명성도, 학연도, 지연도, 파벌도, 선배도, 후배도 다 무시했다. 히 딩크는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오직 실력과 성실성만 인정했다. 그는 자 신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따르는 선수들의 장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했다. 먼 저 체력과 스피드를 키운 후 튼튼한 기초 위에서 전략과 전술 훈련을 했다. 그의 지도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그러나 히딩크는 많은 비난과 비판 속에서도 그의 목적을 힘있게 밀고 나갔 다. 그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은 이루어지고 있 다. 한국팀은 최상의 체력과 정신력을 갖 게 되었고 확실히 달라졌다. 그 결정 적인 요인이 무엇인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는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 다. 이제 우리 자신을 한번 점검해보자. 우리들의 목회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 는가? 히딩크가 우리 교회에 와서 당신 교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다면 담임 목사와 부교역자와 성도들은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라고 똑같은 말 을 할 수 있는가? 어떤 마라톤 대회에서 대회장은 선수들을 격려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뛰기 바랍니다." 그때 한 선수가 질문을 했다. "어느 코스로 뛰어야 됩니 까?" 대회장은 "오늘 대회는 코스가 없습니다. 각자 어느 방향이든 최선을 다 해서 뛰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에서 생각할 점이 하나가 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 이다. 목회자도 성도들도 참으로 열심히 교회를 섬긴다. 최선을 다 했지만 때 로는 성과가 없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결과는 주님께 맡깁시 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주님께로부터 달란트를 받은 자의 결산 은 확실했다. "이익을 남겼느냐? 못남겼느냐?" 하는 것이었다. 목회자와 성도 들이 열심히 뛰었지만 아무 성과가 없었다면 그것은 실패한 것이다. 실패한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가장 첫 번째 이유는 목적이 없었 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목적은 평가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마치 월드컵 16강에 들었느냐? 못들었느냐? 가 분명한 것처럼. 목회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올해 그리고 "3년이나 5년 후에 우리 교회는 이런 목적을 이룰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글로 쓸 수 있어야 한다. 그 목적 을 누가 언제 물어보아도 "우리 교회의 목적은 이것이다!"라고 확실하고도 분 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목적이 분명하다면 성도들은 지도자를 신뢰할 수 있다.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분명한 푯대가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 자신도 어떤 역 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달려갈 확실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회는 목적이 분명한 목회인가? 이것이 히딩크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 한 교훈이다.
69 no image 아직도 우리는 아마추어 수준인가?-한양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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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8 2002-05-29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03si.hwp아직도 우리는 아마추어 수준인가? 한양훈 목사/ 강성교회 이 나라에서 가장 취약한 분야가 정치라고 한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정치는 윤활유와 같아서 모든 일을 원활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선한정치 는 감격과 행복을 주며 무능하거나 부패한 정치는 사람을 고통과 시름 속에 밀어 넣는 것이다. 교회도 조직된 단체이기에 지도자가 필요하며 그의 사상과 활동 여하에 따 라 희비가 엇 갈린다. 당연히 유능한 지도자를 모시고 그의 훈계와 사랑과 지도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도자는 유형무형의 재산 인 셈 이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 교회와 교단의 형편은 유능한 지도자 보다 아마추 어 수준의 지도자들이 도처에서 지도자연 하고 있지 않은가 염려된다.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그가 얼마나 능력 있게 정치적 행정적 문제를 처리하 며 방향제시를 해 주느냐 하는 점인데 지금 교단 안에서는 깔끔하게 일처리 를 해나가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몇 가지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근년에 이르러 서울의 몇 개 노회와 지방의 몇 개 노회에서 재판 건에 휘말 려 홍역을 치렀다. 물론 문제는 어느 교회 어느 노회나 상존해 있는 것이다. 모두의 관심은 얼마나 신앙적으로 지혜롭게 처리 하느냐 하는 것인데, 민망하 게도 교회나 노회 안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세상 법정으로 까지 비화되었다. 실로 부끄러울 뿐이다. 당사자들의 인격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지만 마땅히 지 도자들이 정치력을 발휘하여 공평정대하고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합의점을 도출했어야 했다. 얼마나 무능한 지도자를 원망했을까? 지도자는 성도의 억울 한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또한 지난해 서울의 어느 노회가 회원 간에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상 당수 회원과 교회가 허락 없이 노회를 이탈하여 새 노회를 구성하는 일이 벌 어졌다. 이 일이 바로 우리 교단에서 발생한 것이다. 우리 합신 교단이 타 교 단이나 한국교회를 향하여 바르게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더 놀라운 것은 총회 가 지도자를 파송한 후 화해를 위한 역할을 기대하였으나 속수무책으로 돌아 올 수밖에 없었던 점이다. 총회도 지도력을 상실한 것이다. 꼭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을까. 좀더 정치적절충과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까. 우리는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 교단은 헌법수정을 너무 빈번하게 하 는 것이다. 교단 지도자들은 이점에 유의해야 한다. 지난 10여 년간 회의록 을 보면 거의 매해 헌법수정 및 세칙을 수정한 것이다. 물론 시대가 변하고 수정할 여건이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바뀐 내용이나 빈번함에 헌법이 그 특성과 정신을 잃고 누더기가 되는 것은 아닌 가 염려된다. 대대적인 수정 안이 작년86회 총회 시에 부결로 밝혀진 것을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와중에 또 다시 권징조례 수정안이 노회의 수의 되었다. 절차의 옳고 그름을 떠나 꼭 이렇게 헌법에 매달려야만 할까, 제안하는 것은 최소한 헌법수정은 5 년이나 10년이 되어야 할 수 있도록 정서가 조성되었으면 한다. 우리교단 회원 중에는 법과 정치를 무시하다가 바로 그 함정에 빠져 허우적 거리기 일수다. 정치 행정에 밝은 원로를 존경하지 않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 라보다가 정작 자신의 무능력으로 일을 망치는 우를 범한다. 완숙한 정치력 을 발휘할 때 교회, 노회 총회가 원만해 질 텐데 아직도 그 사실을 애써 무시 해 보려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아무쪼록 교회 정치와 행정에 유능한 지도자로 실력을 쌓아가기를 소원한 다.
68 no image 현대 목회 집으로 …-박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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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1 2002-05-16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02si.hwp현대 목회 집으로 … 박양호 목사/ 경기서노회 노회장 ·은강교회 며칠 전 교회 어른들을 모시기 위해서 ‘집으로’라는 영화를 사전 관람하였 다. 77세의 무명의 할머니 김을분씨를 출현시켜 흥행에 대박을 터트렸고 5월 가정의 달에 가정 사랑의 애잔한 정서를 자극하는데 대 히트를 쳤다고 할 수 있는 ‘집으로’라는 영화 한 편은 나의 목회에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였다. 도심의 문화권 속에 살던 한 아이가 외딴 시골집 외할머니 댁에 맡겨지면서 내용이 전개된다. 도시의 문화에 흠뻑 젖어 천방지축으로 살던 아이가 자극 없는 밋밋한 산골의 환경과 유일한 관계를 맺는 말 못하는 할머니와의 생활 에 짜증을 부리며 아우성을 치며 할머니를 자극하고 괴롭히지만 아이의 말과 행동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건없는 사랑의 가슴으로 외손주를 끌어안고 자신 의 책임을 다하는 할머니의 잔잔한 사랑에 닫혔던 어린 가슴이 녹아내리고 사 랑의 마음문이 조금씩 열리면서 결국은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를 분출해 낼 때, 보는 이들로 하 여금 소리 없는 눈물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어쩌면 하 나님의 가슴을 열어서 보여주는 것같은 할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은 한 편의 아카페적 서정시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현대를 가리켜 무한 경쟁시대라고 한다. 이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얼마든 지 경쟁할 수 있고 얼마든지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뜻이라 하겠다. 이로 인해 기존 패러다임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어제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기술과 노하우 는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어 버렸다. 문제는 이런 급변하는 시대의 한 중심에 교회가 서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대를 감당할 만한 그릇으로 준비되어 가고 있 는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들의 목회의 패러다임 은 현대인들을 포용할 만한 가슴으로 준비되어 있는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교회가 한 시대의 교육과 문화를 이끌고 가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세상이 제공하는 문화의 한 모퉁이를 서성거리며 변화를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는 현 대교회의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세속적 가치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기도 전에 교회성 장이 라는 타겟을 향해 무한경쟁속으로 뛰어들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현대교회 의 모습을 주님은 뭐라고 평하실까? 이제는 멈추어 서서 다시한번 점검해 보 자. 무엇이 목표이며 무엇을 위해서 주님은 세상에 교회를 두셨는가? ‘집으 로’라는 영화에 주인공으로등장하는 아이, 그는 분명 현대인의 축소판이라 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교회는 과연 그 아이를 수용하고 있는 가? 다르게 표현하자면 오늘날 교회는 과연 이 할머니의 가슴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교회는 현대인들이 그렇게 갈급해 찾고 있는 어머니의 가슴 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춥고 병들고 찌든 영혼들이 교회에 와서 원초적이 고 본능적인 사랑을 느끼고 있을까? 교회는 세상에 무엇을 주어야 할까? 우리 의 목회는 어디를 향하여 줄다름치고 있는 것일까? 새로운 방법, 새로운 프로 그램, 새로운 성경공부 무엇을 위해서 필요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평가 는 간단하다. 철부지 아이같은 현대인들이 우리 교회를 통해서 과연 몇 명이 나 변화되어 하나님의 집으로 향하고 있는가를 보면 금새 알 수가 있을 것이 다. 무한 경쟁속에서 밤낮으로 피 곤해 지친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것은 새로운 지 식도 아니고 최고가 되는 성공적인 이론도 아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 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문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대인들이 갈급해 하고 추 구하는 것은 김을분 할머니가 쏟아놓은 본능적 사랑이다. 아무 소리도 없고 경쟁도 없고 요구가 없어도 줄 수 잇는 만큼 쏟아내는 조건없는 사랑을 갈급 해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죽은 생명을 살리는 창조적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바라는 목회의 방법이 아닐까? 이 일을 위해서 주께서 피흘 려 이땅에 교회를 세우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할머니로부터 주님 의 목회를 배워야 한다. 한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모든 것을 불태우신 주님 의 목회를 우리는 터득해야 한다. 입으로만 아닌 가슴으로 하는 목회, 스승 의 목회가 아닌 아비의 목회, 죽이는 목회가 아닌 살리는 목회, 쥐어짜듯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목회가 아닌 자연스럽게 몸에서 흘러나온 사랑의 목회 가 될 때, 아버지의 품을 떠나 방황하는 현대인들을 아버지께서 만드신 영원 한 집으로 향하게 할 수 있지 않을 까?
67 no image 노회 참여의식 심각하다-정성호 목사
rpress
3449 2002-05-03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01si.hwp노회 참여의식 심각하다 수원 선목교회 정성호 목사 우리 교단은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를, 정치적으로는 장로교 정치를 따르는 교단이다. 따라서 총회 산하의 각 노회는 개혁주의 전통에 따라 1년에 두 번 정기노회를 개최한다. 올해에도 4월 둘째 주가 되자 모든 노회가 정기노회로 모였다. 그런데 노회 회원으로서 노회에 참석할 때마다 일부 회원들의 모습 때문에 마 음 한 구석이 편치가 않게 된다. 어떤 회원은 아무런 연락도 없이 결석을 한 다. 어떤 회원은 일부러 개회예배 이후에 온다. 어떤 회원은 회의 중에 독서 를 한다. 어떤 회원은 회의 중에 잠시 회의 장소를 떠나 회원들끼리 사적인 만남을 가진다. 어떤 회원은 회의에 출석했다가 도중에 돌아간다. 그 중에는 흠석·사찰위원(출석자 관리 위원)의 허락을 받고 간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슬쩍 빠져나간 사람도 있다. 대부분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조퇴하지만,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 레 슨을 하기 위해서, 심방을 하기 위해서, 원고 마감을 하기 위해서 등과 같이 너무나 사사로운 이유 때문에 조퇴한다. 심지어 어떤 회원은 회의에 참석하 는 것 자체가 귀찮고 시간 낭비인 것 같아서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서 조퇴한 다. 어떤 회원은 노회의장의 허락을 받지도 않은 채 그냥 일어서서 발언을 한다. 의장이 제재를 가해도 막무가내이다. 이와 같은 일부 회원들의 모습은 노회 에 대한 인식부족 때문이다. 일부 회원들은 노회를 불필요하고 지교회에 아무 런 유익이 되지 않는 모임으로 여긴다. 노회는 여러 가지 점에서 꼭 필요하 고 또한 유익하다. 다음과 같은 필연성과 유익성 때문에 노회는 하나님의 말 씀에 의해서 명백히 명령된 것은 아니지만 허용된 것이다. 첫째, 노회는 교회가 더 잘 존속하기 위하여 필연적인 것이다. 교회가 교회답 게 계속해서 존속하는 데 가장 큰 방해물은 인간의 부패성이다. 인간의 죄성 과 연약성이 교회의 존속을 방해하고 위태롭게 하기 때문에 노회는 필연적으 로 필요하다. 노회는 지교회들의 독립성을 주장하고, 교회의 혼란과 분열, 목 사의 성직계급, 몇몇 지체들에 의한 통치로부터 지교회들을 보존한다. 노회 는 다른 교회들과 의 연합 속에서 지교회들을 지지하고, 더 많은 회중들에게 소임을 수여함으로서 각 지체들의 자유를 확증하여 준다. 둘째, 노회는 교회의 통일성을 위하여 필요하다. 교회가 부름 받은 교리의 통 일성, 권징과 의식(예배)의 통일성, 교회가 보존해야 할 규례와 평화와 사 랑, 교회에 일임된 공동적인 관심사들(교육, 소임, 봉사선교, 이방선교, 교 회 구제 등)은 노회라는 수단을 통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 사실 노회는, 이 땅에서 항상 교회 내에 교리와 권징 그리고 섬김에 대해서 반복하여 토론 을 일으키고 이와 같은 평화로운 방식으로 행해진 자세한 조사와 충분한 논의 를 통하여 그것들을 결정하는 수단이다. 이런 점에서 노회는 행정적인 사무 를 처리하는 노회로 머무를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토론과 합의가 있는 노회 로 발전해야 한다. 또한 일부 회원들은 노회와 지교회와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 지교회는 노회 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교회는 노회와 독립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지교회는 노회와 동등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교회 는 교회의 본질을 가지고 있으나 노회를 떠나서는 완전한 교회가 아니다. 작 은 부분은 더 큰 부분에 속해 있고, 더 큰 부분은 전체에 속해 있듯이, 각 지 교회는 "많은 각 지교회가 그 지체로 존재하는" "하나의 전체교회"(노회 혹 은 총회)의 일부이며 따라서 노회와 총회 아래에 있을 때 완전한 교회이다. 따라서 모든 지교회는 자체의 일을 처리하며 자체의 치리를 행사할 권리가 있 지만, 그 권리 행사를 독립적으로나 무책임하게 할 수 없다. 만약에 개교회 가 그 정치에 있어서 전적으로 독립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됨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또한 지교회의 회원은 전체교회(노회)의 회원이 며 지교회의 행동이 교회 전체의 행동이 된다. 따라서 전체교회는 지교회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서 행해지도록 감독할 권리가 있다. 비록 어떤 지교회가 다른 지교회 위에 권세를 갖는 것은 아닐지라도, 같은 분할지역에 있는 각 지교회는 회의든지 의논이든지 간에 그들이 교제하고 있는 "더 많은 교회들"(노회)의 견해에 순종해야 한다. 한마디로 노회는 하나님께서 교회(교회의 하나됨과 거룩성, 그리고 사도성) 를 잘 보존하기 위해서 만드신 기관이다. 그러므로 첫째, 노회를 가볍게 여기 서는 안 된다. 노회 자체를 업신여기거나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무시해 서는 안 된다. 노회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둘째, 노회의 명령과 결의된 사항 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순종해야 한다. 물론 노회가 처리한 일이 성경적으 로 올바른지를 평가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노회 모임에 열심히 참여해야 한다. 정기 노회이든 임시 노회이든 빠짐없이 출석해야 하고, 그 모 임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해야 한다. 개인의 사사로운 일로 혹은 지교회의 사정으로 너무나 쉽게 그리고 당연하게 결석해서는 안 된다. 넷째, 노회원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노회원들이 서로 자주 만나 교제함으로 신학적인 동질성을 확인하고 굳게 해야 한다. 노회원들을 장로교 신학과 장로교 정치 를 함께 구현해 나가는 귀한 동지로 여겨야 한다.
66 no image 노회를 앞두고-임성찬 목사
rpress
3332 2002-04-10
http://www.rpress.or.kr/files/poetry/300si.hwp노회를 앞두고 임성찬 목사 / 경기중노회 우리 교단은 개혁주의 장로교회로서 회중교회도 아니요, 복음주의를 표방하지 도 않는다. 개혁주의 중에서도 어느 선을 따르는가? 먼저 우리 교단의 신학 의 입장을 헌법에서는 어떻게 표명하고 있는가. "우리 총회의 입장과 진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는 바이다. 1. 우리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인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히 13:8- 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 소요리문답, 교회정치, 권징 조례 및 예배 모범을 우리의 교의와 규례의 표준으로 삼는다." 우리가 따르고 고수하는 바는 성경을 잘 해석하였던 그 신학적 전통을 다시 회복하고 보존한 종교개혁적 신학의 노선이다. 그리고 그 노선에 있을지라도 과거 퇴락한 신학적 내용을 다시 가졌던 루터주의의 신학이나 재세례파적인 이단요소들과 싸워 온 특별한 신학적 내용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 런 신학적 노선에 있으면서도 또한 역사적으로 오래된 펠라기우스 이단의 길 을 따른 아르 미니우스주의나 웨슬레주의 및 회중교회의 비성경적 교회관으로 부터 벗어난 순수한 개혁주의 신학,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신학, 칼빈 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우리 교단의 신학적 입장이고 자리인 것이 다. 그렇다면, 그 정체성을 분명히 확립하고 그 신학적, 신앙적 자리에서의 입장 과 방향을 분명히 하고, 교회정치와 목회가 이루어져야 할 것은 너무나도 자 명한 일인 것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 교단의 신학이 얼마나 우리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 앙고백에 충실한지, 아니면 여러 다양한 신학의 영향 아래 많은 간격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현 주소를 제대로 분별해 보아야 하리라 여겨진다. 혹, 개혁주의신학이 점점 변질되거나 약해져가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교회사 에서 독특하게 개혁주의의 순수성을 그 헌법에 가지고 있는 우리 교단이 그 역사적인 책임성을 가지고 더욱 개혁주의 신앙고백 위에 서 있는 교단이 되어 야 하며, 그리고 그러한 신학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본 교단의 역사 적 자리이고 가치이고 의무이고 차별성이다. 순수하고 엄밀한 칼빈 주의가 땅에서 날마다 잃어져가고 있다고 하여,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인가? 우리에게 남겨진 대부분 성경의 기록은 기록의 당시대 의 사람들에게 거의 수용되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핍박과 순교 를 요구하였던 말씀이었다. 개혁주의 신학을 따라 했더니 시대의 즉각적인 호 응이 없다고 하며 도리어 스스로 개혁주의를 배격하고 등지고 심지어 이 내용 을 버릴 수 없다. 그러나 도리어 이 시대 개혁교회의 소명은 이러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 고, 실로 이 개혁주의를 제대로 알고 내용에 충실하게 목회하면, 고리타분하 다거나 시대감각에 뒤떨어진다거나 행함이나 열심히 없다거나 하는 편견을 넘 어서서 도리어 그 어느 내용보다 더 첨단적이며, 미래에 대하여 통찰하며, 세 상에 가장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시대가 감당치 못하는 개혁교회로서 세상 에 그 독특한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확증해야 할 역사적인 책임과 소 명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우리게 주어진 이 내용이 진리이기에 그러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신실함 그리고 이 길 을 고집 하는 우직함이 더욱 요구되어야 한다.
65 no image 부활이 없다니?!-윤석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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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5 2002-03-28
http://www.rpress.or.kr/files/poetry/299si.hwp부활이 없다니?! 윤석희 목사/천성교회 세상을 깊이 있게 생각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세상이 다. 과학자들은 지구 온난화 현상을 말하거나 남, 북극 지방의 빙하가 온도 가 높아져 녹아 내리고 있다고 말한다. 종교인들은 말세지말이라고 힘주어 말 하고, 정치인들은 진흙탕 싸움을 하면서 정치에 소망이 있다고 외치고 또 외 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진정한 생명이 어디에 있으며, 영원 한 생명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이다. 지난 겨울에는 눈도 적게 내렸다. 시내와 강은 바닥을 드러냈다. 멀리 중국 에서부터 날아 온 흙먼지가 한국 전체를 뒤덮었다. 황사현상으로 숨쉬기가 곤 란하고 눈뜨기가 어려웠다. 심지어 아낙네들은 집안 청소며 장독대를 연실 닦 아야 했고, 자동차를 운행하려고 하면 더러워서 이용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흙먼지가 뒤덮여 있었다. 공항에는 비행기의 이착륙이 중지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반가운 봄비가 내렸다. 밤새도록 내렸다. 지역에 따라 강수량 은 다르 지만 온 대지를 촉촉하게 적셨다. 흡족하지는 않지만 만물이 약동하 고 생동감 있게 자라날 것을 생각하니 마음조차 설레인다. 생명은 신비하고 오묘한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을 사랑하고 좋아하기 때문 이다. 바울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부활은 없 다"(고전 15:12). 또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전 15:35). 부활을 부정하거나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두개인들은 천사도 영도 부활도 없다고 믿었다. 데살로니가교회에도 죽은 자에 대한 오해가 있었 다(살전 4:13). 이런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단호했다. 한마디로 "어리 석은 자여"라고 말한다. 알지 못하는 자라고 설명하면서 부활을 논증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생명의 종교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 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살아나셨다. 재창조사역이다. 하나님은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창조된 세상에 죄악이 들어오게 되었다. 하나 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사역을 실현하셨다. 창조사역이 선했듯이 재창조 사역도 선하고, 하나님 보시 기에 아름다운 사역이다. 더 가치 있는 사역이었 다. 영원히 생명을 주신 사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대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연의 자세 이다. 재창조사역에 대하여는 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재창조사역인 부활에 대 하여 사도들과 초대교회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지금까지 내려오던 전통적 인 안식일을 부활하신 날로 바꾸어 지켰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모였다. 재창조사역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헌금도 드렸다. 지금 우리들은 어떤 상황인가? 우리들에게 재창조된 생명이 있다. 재창조된 생명이 있기에 재창조자인 주님을 만나는 의미가 있다. 생명의 주님을 만나 는 의미에서 신약의 주일은 뜻이 깊은 것이다. 나는 부활주일을 이런 의미에 서 기다리고 있다. 계란을 먹기 위함도 아니요 헌금을 조금 거둬서 선한 일 을 하기 위함도 아닐 것이다. 새생명을 얻은 자로서 새생명을 주신 주님을 만 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이 소식을 나 누고 싶은 것뿐이다. 나는 종종 이런 질문으로 자문자답한다. "너, 부활에 대한 감격이 있니? 있 다면 얼마나 큰 감격이 있니?" 이미 죽었거나 죽어 가고 있는 사람과 같은 상 황은 아닌지를 확신하고 싶은 것이다. 부활신앙을 회복하여 소유하는 일이야 말로 목회자에 있어서 가장 급한 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죽어 가고 있다고 같이 죽을 수는 없는 일이다. 부활주일만이 아니라 주일은 주님 의 부활과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다. 세상 만물이 사람들이 저질러 놓은 여러 가지 죄악에 물들어 죽어가는 입장 이다. 새생명을 얻은 기독교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생명을 기대하면서 부활주일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도 살고, 교회도 살아야 하고, 세상 도 살아야 하겠는데...... 올 부활주일에 생명의 주님, 부활의 주님이 재창조의 사역을 힘있게 수행하 실 것을 믿는다. 죽어 가는 세상을 살리실 분은 재창조자, 주님밖에 없기 때 문이다.
Selected no image 청교도의 성경교수관-김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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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4 2002-03-13
http://www.rpress.or.kr/files/poetry/298si.hwp청교도의 성경교수관 김재윤/ 광야교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사역자들이나 교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성경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 가르치는 내용이나 기술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르치는 사람 자신이다. 디모데후서 3장 17절에서는 이것을 하나 님의 사람이 된 후에야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된다고 말씀하고 있 다. 교회사 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청교도들의 성경관과 그들 의 성경 교수법을 살펴보고 우리의 지표로 삼고자 한다. 청교도들의 성경관 청교도들은 먼저 성경을 볼 수 있는 평신도들의 권리를 중요시했다. 청교도들 은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었기에 오직 성경만을 최종적인 권위 로 삼았다. 토마스 왓슨은 "당신이 읽고 있는 성경 한 줄 한 줄에서 하나님 이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라"고 말했다. 존 오웬은 "성경의 권위는...... 그 신 적 기원에 있다...... 성경은 성경을 쓰신 분 때문에 권위를 갖는다"고 말했 다. 존 오웬은 성경이 "하 나님의 뜻과 심정을 한치 오차도 없이, 또 아무런 오류도 없이 보여 주는 계시"라고 말했다. 청교도들은 성경의 권위를 말할 때 그것을 구원에 관련된 문제로 제한하지 않 고 여러 방면으로 개방해 두었다. 리챠드 십스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어떤 규준도 얻을 수 없다. 단지 성경이 제공하는 일반적인 규준만이 있을 뿐 이다. 그리고 이 규준은 모범에 의해서 보강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천적인 지식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말해서 청교도들이 성경 권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지 표는 그들이 성경을 어떻게 적용했는가를 보면 된다. 그들은 경제, 정부, 가 정, 교회, 인생, 성, 자연, 교육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든 문제에 성경 본문 과 성경의 모범을 끌어댔다. 청교도들은 제한된 무오설을 수용했는가 아니면 전적인 무오설을 수용했는가? 그들의 이론뿐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인 삶을 볼 때 그들이 성경을 삶 전체를 위한 규준으로 삼았음이 분명하다. 청교도들의 성경교수관 청교도들은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의 사람이 되어 야 함을 역설했다. 토 마스 구드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씀을 기록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였다. ... 그러므로... 이 하늘의 공적 비 서의 도우심이 없다면 인간의 또는 인간들 자신의 이해력으로는 성경을 이해 할 수 없다. ... 그 분이 홀로 그 밭에 지식의 보화들을 숨기셨으므로 그분만 이 그 보화들이 어디 있는지를 아신다. 그러므로 기도로 하나님의 가슴을 열 고 하나님의 연구실을 열어 하나님의 모든 원고들과 문서들로 나아갈 수 있 는 지식의 열쇠를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유익인가! 보다 덜 아기자기하지만 보다 더 명확하게 존 오웬은 같은 주장을 한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일반 원리로 확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성령의 신령한 도우심을 얻기 위한 계속적이며 열렬한 기도는 성경에 나타 난 하나님의 생각에 대한 지식을 얻음에 있어 절대 필요 불가결한 수단이다. 이 지식이 없이는 다른 모든 것들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고 하는 사람은 경건하고 겸손하고 기도하고 가르침 을 잘 받고 순종하는 심령의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그의 정 신이 관념들로 빈틈없이 채 워졌을지라도 그는 영적 실재들의 깨달음에 절대 로 이르지 못할 것이다. 청교도들은 해석하고자 하는 구절이나 본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질문을 하였다. 1. 이 말씀은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2. 다른 성경은 이 본문의 설명 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3. 이 본문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해 서 인간에 대해 어떤 진리들을 가르치는가? 4. 이 진리들은 그리스도의 구원 하는 역사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진리들의 설명 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5. 이 진리들은 어떤 경험들을 묘사하거나 서술하거 나, 또는 창조하거나 고치고자 하는가? 이 진리들은 어떤 실제적 목적을 위 해 성경에 존재하는가? 6. 이 진리들은 우리의 실제적 상황에서 어떻게 나 자 신과 타인들에게 적용되는가? 이 진리들은 현재의 어떤 인간의 상태에 대해 말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믿고 행하라고 말하고 있는가? 맺음말 우리는 청교들의 성경관에서 성경은 모든 삶의 규범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 외의 다른 사상이나 규례는 기독인의 삶을 결코 완성케 할 수 없 는 것이다. 또한 성경교수 관을 통해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 통치가 구 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가 야 할 교회가 늘 심중에 담아두어야 할 지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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