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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no image 21세기 개혁총회의 진로에 있어서 교회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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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2 2000-04-07
21세기 개혁 총회의 진로에 있어서 교회교육 이철호목사/ 부평강성교회 21세기를 맞이하면서 개혁 총회의 진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를 이어갈 청소년들의 부흥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존 재하는가에 따라 21세기 하나님 나라의 건실한 건설과 확장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교회를 떠나는 청소년들 주일학교, 학생회를 거쳐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하면서 교회의 청 소년들이 자꾸만 교회를 떠나고 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벌써 20년 가까이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날로 침체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개진해왔고, 또 여러 가지 의 대책이 강구되었으나, 그 현상은 여전히 우리의 숙제로 남아 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을 두 가지로 진단하고자 한다. 첫째는 재미있던 교회가 재미없는 교회로 바뀐 것이요, 둘째는 ‘또래문화’에 젖 r 은 세대들이 교회내에 설 땅이 없다는 것이다. 재미없는 교회 먼저 그 첫째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한국기독교사를 돌이켜 보면 일 찍이 개화기 초 기독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즈음에는 기독교가 우리 나 라의 왕실과 애국단체를 중심으로 큰 일을 감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교 사들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비롯하여 국내 주요인사들과 교제를 나누면 서 이 나라의 개화를 직접 도왔으며 또한 왕실은 그들의 선교를 도왔다. 그리고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통해 이 겨레에 큰 유익을 가져다 준 것도 바로 기독교였다. 그리고 동족상잔의 6.25동란 이전에는 평양을 중심으로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독교의 교세는 굉장한 성장을 거듭하였다. 그러던 것이 6.25동란 이후 그 선교세력의 중심권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부터 양상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 의 기독교는 날로 성장하는 추세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당시 이 사회는 지금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음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그때 교회는 일반사회나 공공교육기관에서 쉽게 제공하지 못 하는 문화적 요소들을 많이 제공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특히 젊 은 학생들과 청년층으로부터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켰음은 사실이다. 주일학교에서 실시한 분반 공부는 헌신된 많은 교사들에 의하여 소수의 소 그룹 교육으로 콩나물 교실의 학교 교육과는 대비가 되었고, TV가 본격적 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70년대 초반 까지는 율동과 융판교재 중심의 시청각 교육과 동화와 찬양, 놀이 등이 있는 교회 교육은 사회 교육기관인 학교나 가정에서 주지 못하던 획기적인 내용이었고 교육시스템이었다. 또한 학생회에서 실시한 문학의 밤과 회지 발간, 그리고 청년들이 주도한 교회의 각종 문화행사 등은 이 사회에서 자신들의 문화적 욕구를 표출할 공간과 기회를 갖지 못하던 당시의 청소년들에게는 아주 좋은 문화적 공간 과 기회와 볼거리들이었음이 틀림없다.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그것은 하나 의 문화적 충격과 문화적 동력으로 이 사회의 문화 발전을 선도하고 있었 다. 그리고 당시 이 사회에서는 ‘남녀칠세 부동석’이라 해서 젊은 남녀간에 자리를 같이 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교회에서 만큼은 그렇지 않았으니, 젊은 남녀가 함께 자리를 같이 하여 예배를 드리고 또 예배 후 에 친교의 시간도 가질 수가 있었다. 비록 ‘연애당’이란 말은 들었으나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건전한 남녀교제의 기회를 제공한 교회야말로 그 당 시 사회를 계도하고 문화의 질을 높이며 젊은이들에게 이상과 희망을 가져 다준 유일무이한 처소이었다.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 교회는 이 사회 어느 곳보다도 더 매력적인 처소요 이 사회 어느 모임보다도 가봄직한 곳이 되 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이 사 회는 날로 날로 변화를 거듭하였고 청소년들의 주변 환경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고 말았다. 5,60년대의 행사나 70년대 의 행사가 똑 같았으며, 7,80년대의 행사나 오늘 90년대의 행사가 그 모양 그대로이다. 이제는 더 이상 분반공부와 율동, 시청각 교육인 융판교재와 슬라이드 상영은 매력적일 수 없고, 이제 더 이상 ‘문학의 밤’이 청소년 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 수 없다. 성탄전야의 각종 행사도 이 사회의 세 련되고 흥미진진한 행사들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그야말로 한마디로 2,30년 전과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이제는 교회의 청소년들이 교회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시대가 온 것이 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그들을 붙잡아 둘 힘이 없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그들이 교회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단순히 그 자체가 문제가 되 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서 멀어진다는 데 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교회 밖으로 뛰쳐나간 청소년들이 세상과 짝하 며 사는 것은 결국 하나님 나라와는 멀어진다는 것을 뜻할 수 밖에 없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은 교회 안으로 불러 모을 수 있어야만 한다. 다시 재미있는 교회로 우리는 무엇으로 그들을 불러들일 것인가? 아무래도 다시 재미있는 교회로 그들에게 닥아가야만 할 것 같다. 혹자는 교회가 재미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진리의 문제가 아닌 한 교회는 너무 경직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오히려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 리는 그 밖의 문제에 있어서는 여유있는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사 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처한 처지마다 태도를 부드럽게 고쳐가면서 진리의 도 를 전한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전9:19-23)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 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 코자 함이니”(22) 이제 청소년들이 최대로 관심을 갖고 있는 문화적 삶에 대하여 교회는 관 심을 가져야 한다. 청소년기에는 감성이 가장 발달할 때다. 즉 문화적 욕구가 가장 왕성할 때 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70년대 한국교회는 청소년들의 이러한 문화적 욕구 를 문학의 밤, 회지 발간, 성탄절 행사 등을 통해 충족시켜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욱 문화적 욕구가 강한 세대를 향하여 교회는 70년대보다 도 더 퇴보된 상황이다. ‘문학의 밤’도 학교 축전보다는 좀 더 재미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래야 만 청소년들이 교회로 오게 되지,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그들을 교회로 오 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청소년들을 위하여 문화교실을 제안한다. 문화 교실은 개 교회 형 편에 맞게 개설할 수 있다. 컴퓨터교실, 미술교실 , 회화교실과 같은 학습교 실과 농구교실, 축구교실과 같은 스포츠교실, 드럼, 기타 등 악기를 배울 수 있는 음악교실 등과 같이 개 교회 형편에 맞는 교실을 한두 가지라도 개설해서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평소 해보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제공해 줘야 한다. 이 사회보다 더 앞서서 최첨단의 생각으로 최첨단의 수단을 통해 최고의 프로그램을 개발해 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예전의 기독교문화의 영광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 우리가 이 사회를 선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를 통해 진리의 도를 전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제는 교회에서도 영상문화의 개념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새대의 청소년들은 어려서부터 영상 시스템에 의해 자라났다. 동화도 책을 읽는 것이 아니고 비디오와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며 자라났다. 또한 이 사 회는 영상화 되어가며 멀티비전화 되어가고 있다. 기성세대는 문서세대요 듣는 세대였다면 현대의 청소년들은 보고, 듣고, 느끼는 세대다. 즉 문화적 욕구가 강한 세대다. 우리는 학창시절에 교통비를 절약하여 빵과 먹을 것을 사먹었다면 이들은 돈을 모아 CD나 테이 프를 사는 세대다. 이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예배 당 건축시 교육관을 설계하면서 우리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영상시스템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음향시스템도 가능하다면 최첨단의 것으로 마 련할 필요가 있다. 본래 구약시대부터 우리 하나님께는 언제나 그 시대 최상의 것이 제물로 드려졌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이러한 준비와 노력에 일점의 부정적인 생 각을 가질 필요도 없다. 오늘 우리 시대의 최상의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교회교육에 있어서도 교사 중심의 주입식 교육에서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열린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근자에 교회마다 교사 확보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사를 아무나 하는 경우가 있어 더욱 교육의 부실을 낳고 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코너학습’을 시행하는 것이 긍정적일 것이다. 다양 한 교실을 만들어 놓고 학생들이 참여(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고 급하다고 생각한다. 그 주일의 주제를 설교하고 난 후 각 반으로 나뉘어서 분반공부를 하던 시 스템에서 1-2, 3-4, 5-6학년으로 나누어 그 주일의 주제를 한 선생님이 공 과공부를 시킨 후 각 코너별로 학생들 스스로가 참여하는 학습방법이다. 코너는 교회 형편에 따라 다양하게 마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림 그리 기방, 만들기방, 연극방, 찬양방, 컴퓨터방, 놀이방 등을 만들어 놓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각 방마다 그 방의 전문 선생님이 그 날의 주제를 가지고 그 림을 그리게 하고, 만들기(공작, 진흙만들기 등)를 하고, 짧은 연극을 하고, 노래를 하고, 컴퓨터게임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로 하여금 하루에 한 코너에만 들어가게 할 게 아니라, 두세 개의 코너를 거치도록 하여 그 날의 주제를 다양한 모습으로 반복하게 한 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은 자기의 관심분야 안에서 즐겁게 참여하게 되고 그 날의 주제를 반복 교육함으로써 학습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 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레포츠 시설이다. 시대는 바야흐로 레포츠 의 시대이다. 정신적·육체적 피로를 풀기 원하는 청소년들에게 교회는 과 연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신앙심이 깊은 청소년들 뿐 아니라 일반 청소 년들 에게도 레포츠에 대한 욕구는 대단하다. 오늘 그들은 교회내에서 이 필요를 채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 밖으로 나가게 마련이다. 그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진리의 도를 전하는 데에 있어 그 첫 단계가 아니겠는가?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영적 안식처만 이 아니라, 정신적·육체적 안식처도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내 에 그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 레포츠 시설과 휴식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각 교회 나름대로 형편에 따라 얼마간의 공간 확보와 시설 투자가 꼭 있어야 한다. 재미있는 교회란 사회보다 앞서가는 교육환경, 그리고 교육의(전도) 대상인 청소년들의 문화적 욕구를 반영하는 의식전환과 과감한 투자, 공간확보를 통해 저들 스스로가 다시 찾을 수 있는 교회를 의미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적은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님을 잘 안다. 대단한 재정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을 마음껏 투자할만한 교회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각 교회마다 어려운 형편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 는가? 이 시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보다는 우 선 청소년들을 이해해 주는 것이다. 교회가 그들을 이해하고 이 일을 위하 여 노력하고 있다는 점만 느끼게 해줘도 그들은 교회로 올 것이라 확신한 다. 청년들은 비전을 주면 목숨을 걸고 청소년은 알아주면 목숨을 거는 세대임을 인식해야 한다. 또래문화 이제 둘째 문제, 즉 ‘또래문화’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유치부, 유 초등부, 중고등부, 청년대학부를 지나면서 교회의 청소년들은 12년에서 15 년간을 독립적인 예배와 모임으로 교회 안에서 또래문화에 젖어왔다. 언제 나 주위에 또래들이 있었다. 그 또래들과 함께 생각하며 그들과 함께 기쁨 과 슬픔을 나누었던 것이다. 또한 그 시절은 부모님이나 선생님보다는 또 래가 훨씬 더 편하고 재미있는 대화의 상대요 행동의 동반자이다. 우리 모 두의 경험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그들이 청년대학부를 지나 장년부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갑자가 ‘또래문화’가 아니라 ‘기성문화’의 막내로 전락해버리 고 만다. 장년부를 아무리 세분해 놓았다 해도 그들이 느끼기에는 마찬가 지이다. 그들에게는 이제 대화의 상대가 사라져 버렸고, 행동의 동반자가 없어져 버렸다. 홀로 남은 것이다. 이때부터 교회가 싫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결과 이들이 대학을 진학하면 대학 속에 있는 같은 또래들이 모이는 선교단체에 가입하 여 교회를 떠하는 경향이 강하다. 대학내에서 활동하는 여러 파라처치 (Para-Church)들이 바로 이러한 또래문화의 한 모습이다. 그들은 어린 시 절 교회에서 몸에 익힌 또래문화를 대학내에서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한 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의 교회를 벗어나 나름대로의 또래문화를 형성하여 신앙생활을 즐기려 한다. 이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파라처치들이 우리 교회사 에 끼친 영향은 물론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겠으나 크게 보아서는 부정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부정적인 면들을 경 험적으로 너무나도 많이 겪어오고 있다. 또한 12-15년 동안 자신들만의 예배를 드림으로 장년부에 올라와 저녁예배 를 드리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 동안 저녁 예배가 드려지지 않는 유초등부와 중고등부 시절을 보냄으로 저녁예배에 대한 훈련이 이루어지지를 않았다. 그 결과 저녁예배 에 대한 개념이 바로 정립되어 있지 못하다. 오늘날 유초등부와 학생회 시절을 보낸 30대 성도들 가운데 상당수가 저녁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저녁예배에 젊은 세대가 참 여하기 어려운 요소도 많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가족중심의 사회현상, 여가 시간을 누리기를 원하는 세대의식, 현대사회의 누적된 스트레스에 대 한 휴식시간의 필요성 등이다. 그러나 현금 미국등에서 성장하는 교회들을 보면 저녁예배가 활성화 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성도들이 넘쳐나고 있을 정도이다. 수요일 저녁과 목 요일 저녁예배, 토요일 저녁예배까지 엄청난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고 있 다. 이는 과연 어떤 현상인가? 우리는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도 낮 예배보다는 오히려 저녁예배 때에 젊 은 세대들이 훨씬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이른바 찬양예배를 드리고 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오랜 시간 저녁예배 를 드리지 않는 신앙습관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루 속히 이러한 잘못된 신앙습관을 타파하고 바른 신앙의 모습을 가르쳐서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그 안에서 그 들이 생의 풍요로움과 위로와 또한 삶의 활력 등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해 주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 과연 어떤 처방을 내려야 할 것인가? 어떻게 그들 을 감싸 안을 수 있을까? 시험적으로 두 가지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겠 다. 하나는 계속적으로 연령적 또래를 만들어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전문분 야별 또래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연령적 또래라 함은 장년부를 아주 잘게 나누는 것을 의미하고, 전문분야별 또래라 함은 각자의 취향이나 전문성에 따라 분야를 나누어 소그룹을 만들어 그 분야 안에서 활동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안들은 자칫 교회내에 분파를 조장할 수 있으 므로 위험이 따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또래문화를 교회 장년부에서도 계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 이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 가? 아예 또래문화 자체를 없 애버릴 것인가? 그러나 그것도 안 될 것이, 어린 시절에는 또 또래문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어린 시절에는 필요한 또래문화가 장년부에 와서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니 말이다. 부모님과 함께 예배를 그래서 우리는 연령적 또래를 만들어주는 처방보다는 전문분야별 또래를 만들어주는 처방을 택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문분야별로는 적어 도 연령적 또래문화를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좋은 처방으로 우리는 ‘전교인 합동예배’를 추천 하는 바이다. 부모님과 자녀들이 함께 손잡고 교회로 나와서 함께 나란히 앉아 한 하나 님께 예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별도의 모임을 완전히 없애자는 것은 아니다. 예배 후 에 각부는 따로 별도의 모임을 가질 수 있다. 즉 유치부, 유초등부, 학생부, 청년대학부 나름대로의 모임을 완전을 가질 수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또래문화의 필요성을 충족시켜주긴 하되, 그 또래문화에 너무 심취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또 일찍부터 모든 연령층이 함께 모이 는 자리에 익숙하게 만들어 주 자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훈련을 받 은 청소년들은 앞으로 장년부에 들어가서도 결코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것 이다. 동시에 그렇게 각 연령층이 함께 생각하고 함께 대화하고 함께 행동 하게 될 것이다. 그런 가운데 다양성과 조화를 배우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다양한 모습도 찾아내게 될 것이다. 의식전환이 필요 우리는 이제 교회교육에 있어서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매를 맞아가면서 교회로 향하던 20-30년 전의 청소년들의 모습이 다시 교회 내에서 나타나 야 한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청소년들에게 재미있는 곳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 재미있는 교회에 모여들고 자라면서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하나님의 일 꾼들이 많이 배출되어 다시 한번 교회부흥의 시대를 도래케 해야 할 것이 다. 또한 또래문화를 극복하기 위하여 전교인이 함께 예배하는 예배가 연구되 고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어려서부터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장년에 이르 러서도 자연스럽게 교회역사를 이어가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 다. (끝)
22 no image 주일학교 공과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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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3 2000-03-21
주일학교 공과에 대한 이해 양승헌교수/ 파이디온선교회 대표쪾 합동신학대학원 잠언은 말한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잠29:18). 하나 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알고, 믿고, 순종하지 않는 한 그 어떤 대안도 우리 의 다음 세대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총공세를 이겨낼 보호 막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도, 그분이 하신 일도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의 제 3세대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삿2:10) 슬픈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이미 대부분 한국교회는 다음 세대 출석수(유치-고등부)는 어른 출석수의 50%를 넘지 못하는 부정적인 징후를 보이고 있다.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30년 뒤 한국교회는 현재의 절반 규모로 줄어드는 모습을 볼 때 속이 탄다. 그렇다고 적지만 질적으로 우수한 다음 세대가 자란다고 말할 수도 없다. 여러가지 교육적 문제들이 다 점검이 되어야 하겠지만 우선 우 리의 성경 교육의 현장이 달라져야만 한다. 성경 교육의 현장이 달라지려 면 우선 성 숙하고 열정을 가진 교사를 훈련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그 다음 문제는 공과가 달라져야 한다. 모든 교사가 성경을 연구하고 교육 원 리에 맞는 교육 내용으로 조직하고 아이들의 눈높이와 필요에 맞도록 개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정보(information)를 위한 책이 아니라 변화(transformation)를 위한 책이다(딤후 3:16-18). 진정한 의식과 삶의 변화를 위해 성경을 가르치려면 우리의 공과가 달라져야 한다. 우리 교단에서 공과를 집필하던, 기존의 공 과를 채택하던 다음 여섯 가지의 공과의 기준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적용성: 공과는 실제적인 삶의 구체적인 변화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문제를 삶의 현장에서 끌어내고, 성경의 답을 삶에 적용케 함으로써 크리 스천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둘째, 활동성: 진정한 배움은 활동과 경험을 통해 배운다. 학생들을 학습의 주체가 되도록 활동 중심으로 교과가 진행되어야 한다. 셋째, 핵심성: 성경의 모든 내용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의 중 심 사상을 정확히 이끌어내고 그것을 분명하고 간결한 포인트로 바꾸어 아 이들의 가슴에 박힌 나침반처럼 되게 해주어야 한다. 넷째, 흥미성: 빈칸에 답 채우기나, 낱말 퍼즐 맞추기 등의 개념 이해나, 교 사의 강의에 의존하지 않고 학생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학습의 주체로 서 참여와 활동을 통한 배움의 즐거움을 회복케 해주어야 한다. 다섯째, 협동성: 학생들에게 익숙한 개인적이고 경쟁적인 배움의 문화를 함 께 더불어 배우는 공동체 문화로 바꾸어 줄 수 있도록 협동적인 활동을 제 시해 주어야 한다. 여섯째, 창의성: 판에 박힌 교수 방법을 지양하고 가르치는 교사나 배우는 학생들이 늘 신선하게 느낄 창조적인 가르침의 방법들을 제공해 주어야 한 다. 아무리 훌륭한 공과라 하더라도 5-6년이 지나면 시대적 감각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시 집필해야 한다. 그만큼 공과 집필 주기가 빨라지고 있는 것이 다. 그렇다면 늘 새롭게 공과를 제작한다는 것은 공과에 대한 중요성과 필 요성을 중시하고 상당한 시간과 금전을 투자해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교 단에서 공과를 자체 제작해야 한다는 당위성만을 가지고 접근하기보다는 전문 기관과 유기적인 협조 아래 늘 새롭고 발전적인 공과를 제작할 수 있 는 씨스템 도입이 필 요할 것이다.
21 no image 고령화 사회를 위한 교회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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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8 2000-03-03
고령화 사회를 위한 교회의 준비 권태진 목사 새천년을 맞는 모든 사람들은 큰 기대를 가지고 축제와 불꽃놀이로 요란하 게 맞았다. 세속뿐 아니라 교회들도 새천년이란 말을 하며 새로운 각오와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하나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대로 진정 새 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나라도 이제 노령화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과거에는 여러 명의 자녀 를 두었으므로 아들, 딸을 의지했고 사회적으로는 노동생산성인구가 많았 으므로 노인들은 어른으로서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약 30년후 에는 3명이 일하여 한 노인을 부양하게 된다. 그때는 노인의 문제가 가정 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가 될 것이다. 현재도 65세의 노인은 복지관 에서 아이취급을 받는다. 한 주일에 5일동안 매일 300-400명 이상이 무료 식사를 공급받고 있는데 그 중에는 80세 이상된 분들도 상당수 계신다. 지금 정부에서도 노인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노인복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 으나 복지는 정책이나 돈만 가지 고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평안하게 하 고 즐겁게 하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성경적 가치관과 마음이 따뜻한 사 람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는 ‘복지’하면 음식 대접하는 것을 생각했으나 현재는 그들의 문제를 알아주고 외로움을 덜어주고 놀이문화를 개발해 주 고,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지도록 신앙을 가지게 하여 생의 마감을 기쁨으 로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된다. 그러므로 차원 높은 복지는 영혼 과 육체를 돌보아 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미래에 이러한 효과적인 복지 를 책임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제는 노령화사회에서의 주역을 교회가 감당해 야 할 것이다. 잉태한 여인이 산달이 가까이 오면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 옷, 젖병, 환경을 생각하며 출산준비를 하게 된다. 교회는 금방 도래할 노 령화사회와 죽음에 대한 준비를 잘 해야 될 것이다. 앞으로의 교회는 큰 건물이나 인원을 자랑할 것이 아니다. 또한 지식이나 학벌을 앞세워서 우월의식을 가질 때도 아니다. 우리는 지난 과거의 시행 착오만으로 족해야 한다. 바르게 한다는 명분아래 분립이 계속되어 교단도 많으나 세속으로부터 외면당 하고 기독교 인구의 감소라는 말이 나오고 있 지 않는가? 생명의 종교라고 말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크리스천이 잠자고 있을 때 우상종교로 업신여김 받는 이들은 정치를 등에 업고 문화 재 관리라는 명목으로 사찰을 복원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그 힘으로 연 꽃 마을을 만들어 복지에 힘쓰고 있다. 그뿐인가 비성경적이며 교리에 구원이 없다고 하는 한 종교는 꽃동네를 만 들어 복지를 하고 이제는 학교까지 세워 인재를 양성하는데, 가장 잘하고 있다는 교회는 어두운 곳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물질운동이 아니므로 나타나는 것은 없으나 이 시대에서 꼭 필요한 등불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온 성도와 교회가 노령화사 회를 위해 준비해 보자. 교회의 규모나 인원에 맞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 사회봉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실천이 되고 인재들의 훈련장이 됨으로 봉 사는 희생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기쁨이다. 며칠 전 한 목회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교회는 성도가 약 일백 명 정 도인데 노인정 관리를 위탁받아 경제적인 것은 정부가 부담하고 여전도회 에서 중식을 준비하여 공급하며 그 지역에서 영혼구원과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빛과 소금의 사역을 감당하며 보람을 느낀다는 소식이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 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 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6-27). 그리스도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왜 육신의 동생들에게 맡기지 않고 제자 요 한에게 맡겼을까? 왜 마리아는 육신의 아들을 떠나 사도 요한의 모심에 응 했을까? 참된 신앙인은 주님과 마리아의 노년에 대한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키 위해 헌신된 일꾼을 준비하고 시대적 흐름을 보며 교회 전체와 사회가 힘을 모아야 한다. 신앙이 없는 혈육이나 자녀나 정부를 의지하는 것보다, 복음 안에서 차분 히 준비하는 것이 미래를 보는 앞선 자들의 지혜라 할 수 있다. 그것만이 한국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는 길이며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이루는 교회가 될 것이다.
20 no image 청소년 신앙 교육과 연합 프로그램이 주는 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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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2 2000-02-12
청소년 신앙 교육과 연합 프로그램이 주는 유익 강성일 지도부 부장 지난 83회 총회는 총회센타 건립 후원금을 모금하기로 하였다. 이 모금은 처음 모금하여 구입한 총회센타에 이어 두번째로 가지는 모금으로 각 지교 회의 많은 참여와 협력이 요망되고 있다. 모금내역에 의하면 각 지교회의 새해 예산의 0.4%를 모금하는 것으로 4월 말까지 마감을 잡고 있다. 지금같이 어려운 때이기도 하지만 온 교회가 하 나같이 제몫을 감당해 간다면 못이룰 게 없고 반드시 성취될 것으로 믿어 진다. 우리는 지난 날에 처음 총회사무실을 마련할 때 빈 손 들고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 교단적으로도 어려웠고 지금과 같이 기반도 튼튼하 지 못한 때였다. 그렇지만 한 마음을 이루어 이에 동참 총회사무실을 구입 하고 개혁총회의 사역처 역할을 감담해 왔다. 이제 다시 총회센타 건립 후원금을 모금하게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 리 총회산하 기관중에 여러 주요 부서가 있지만 총회의 언론을 맡은 기독 교개혁신보사는 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개혁신보사가 사옥 하나 없이 오늘까지 여러 곳을 전전하여 왔지만 용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 오늘날까지의 현실이다. 이제 그 사역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기독교 개혁신보사 사옥을 마련하는 총회센타 건립 후원금 모금을 추진하기로 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한 일이다. 때 늦은감이 없지는 않지만 차제에 반드시 사옥을 마련하여 언론 발전에 기여해야 된다고 믿어진다. 또 한 가지는 교회언론지가 총회사무실과 거리를 두고 있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그 사역과 기능면은 다르다 할지라도 그 소속관념과 존재목적은 ‘총회사무실과 일치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렇게 될 때 개혁총회의 사 역에 보다 큰 힘이 주어질 것이며 개혁총회의 위상을 높이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개혁신보의 발전과 질적인 향상을 위해 반드시 사옥이 마 련되어야 한다. 양질의 신문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변의 여 건과 환경과 시설에 상당한 이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질의 신 문제작을 위해서라도 사옥 마련이 필수여건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개혁신보사 사옥을 위한 총회센타건립 후 원금 모금에 총회산하 온 교회가 기쁘게 참여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 신문이 개혁운동의 선봉에 서는 신문이 되기를 바라며 현재의 재작진을 보완하여 격주간에서 월 3회 4회로 발행을 증대해 가는 신문이 되기를 바란다. 이 일을 위하여 다 같이 기도하며 동참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19 no image 밀레니엄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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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8 2000-01-27
밀레니엄 소동 박양호(은강교회 목사) 인류가 과학적으로 일년 단위로 시간의 흐름을 자리매김 하기 시작한 지 2000여년. 아니 예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이땅에 강림하신 역사적인 사건이 있은 지 2000년.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면서 겪은 위험 부담과 소용 돌이는 무슨 큰 전쟁을 치른 기분이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할 때마다 인류는 밀레니엄이 주는 위험과 부담으로 인하여 큰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첫번째 밀레니엄 때는 인류 역사의 종말과 심판에 대한 부담과 기대 때문에, 그리고 두번째 밀레니엄은 컴퓨터 오작동 문제로 온 지구촌이 긴장과 두려움과 초조함 속 에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해야만 했다. 첫번째 밀레니엄의 문제가 종교적 인 문제요 수직적인 신과 인간과 관계 문제였다면 두번째 문제는 현대인들 이 신으로 숭상하고 과학이 낳은 기형아 컴퓨터 문제였다. 문제는 두번째 밀레니엄 때 소동의 원인이 된 과학의 기형아 문제는 끝이 아니라 이제부 터 시작이라는 데 있다. 현대 과학문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가 자기를 창조한 인간을 볼모로 잡고 잠간 농간을 부리자 온 지구촌이 얼마 나 쩔쩔 매었는가? 얼마나 야단 법석을 하며 난리를 피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부할 수 없는 과학이라는 공룡은 인류의 새로운 신으로 등장을 하고 있다. 새로운 신인 과학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완전히 뒤집어 엎 고 있다. 생물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모든 동식물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인간의 복제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과학이 만들어낸 새로운 창 조물을 보며 인간들은 승리자가 된 것처럼 의기양양해 하며 어깨를 으쓱거 리고 있다. 과학을 신봉한 자들의 주장대로 인류 역사가 진행된다면 21세 기 초반에 지구촌은 온통 복제물로 들끓게 될 것임에 틀임이 없다. 이런 인간의 무한한 도전에 정작 창조주 하나님은 침묵을 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난 해 년말을 돌이켜 보라. 과학이 낳은 기형아인 컴퓨터 때문에 어떤 소동이 있었는가? 과학이란 신이 만든 세상은 인류 역사를 창세기 1 장 2절로 되돌려 놓아 온 지구촌을 혼돈과 공허함과 깊은 흑암속으로 몰아 넣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이 가만히 계셔도 인류는 스스로 파멸 의 웅덩이 를 파고 돌이킬 수 없는 깊은 구덩이로 빠져 들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 은 과학이라는 신이 인류에게 주는 선물은 가치관의 혼돈과 삶의 공허함과 진리를 분별치 못하게 하는 흑암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역사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 야 한다. 인류가 무엇을 어떻게 진행하든 역사의 주관자는 창조주 하나님 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에게 주신 진리를 파수하며 인간의 오만함 과 교만함을 지적하며 겸허하게 하나님을 향할 수 있도록 광야의 외침을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18 no image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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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5 2000-01-15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김상도 목사 /부산평화교회 원로목사 이제 우리는 새천년에 들어와 있으며 새천년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새천 년은 어떠한 세상이 될까. 학자들은 말하기를 과학이 아주 발달한 세상이 될 것이라 한다. 복제인간도 나올 것이며 암질환도 정복될 것이라 한다. 달 의 관광여행도 될 것이라 한다. 사람의 사는 것이 아주 편리하게 될 것이 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물질주의, 쾌락주의 위주의 생활을 하게 되 고 죄악이 관영하게 될 것이다. 가치관이 전도되고 윤리도덕이 상실된 사회가 될 것이다. 부부의 관계가 변질되고 부모자식의 관계도 변화될 것이며 사회는 이기주의가 팽배할 것 이다. 죄악의 질이 더욱더 교묘하게 되며 흉앙해 질 것이다. 종교도 속화 타락하여 모든 종교들이 우상종교화 할 것이다. 사람들이 종 교를 믿는다고 해도 순전히 형식적으로만 믿는 것이고 사람들의 의식을 변 화시키는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기독교도 종교다원화주의를 믿 는 자들이 많이 생기며 우상종교화 될 것이다. 지난 12월 한 달동안 온 세계를 통해서 우리 나라에도 신문, 텔레비전 등 에서 새천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새천년에는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되어 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매일같이 토론 강의 연구발표들이 있었다. 무엇보 다도 정치가 바뀌어져야 한다, 기업 금융의 구조조정이 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이 바뀌어져야 한다 등등 다 옳은 말이다. 그렇게 되야 할 것이다. 그런데 누가 이 일을 하는가? 누가 바꾸어주는가? 한국 사람들이 믿는 부처가 해주는가? 부처는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것을 해줄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통하여 볼 때 하나님께서는 이 복을 주시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지구의 주역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여 에덴동산에 살게 하시며 지구를 관리하도록 하신 것이다. 지구가 좋은 지구가 될 것인 가 아닌가는 지구상의 사람들의 책임이다. 한국의 주역은 한국 사람이다. 한국이 좋은 나라가 될 것인가 좋은 사회가 될 것인가는 한국 사람의 책 임 이다. 새천년의 한국이 어떠한 나라가 될 것인가는 한국 사람의 책임이며 한국 사람이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열렬이 새천년의 한국이 좋은 나라 잘 사는 나라 되기를 빌고 소망하니까 그렇게 되지 않겠나 기대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올림픽이 행하여졌을 때다. 온 나라 사람들이 친절하게 하고 쓰 레기도 버리지 않고 깨끗하게 하여 그전에는 오염으로 물고기가 살지 못하 던 강에 물고기가 살게 되었다. 그런데 올림픽이 지나고 나니 강물은 다시 오염이 되고 물고기도 없어졌다. 한국 사람이 이러한 사람인데 새천년의 한국이 좋은 나라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새천년의 한국은 한국 사람이 만들어야 하는데 먼저 한국 사람이 새 사람 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옛 사람은 결국 헌 나라만 만들 수밖에 없다. 사기꾼들이 모여서 정직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 법과 제도를 고쳐 놓는 다 해도 그것을 운용하는 옛 사람은 결국 헌 나라를 만들 수밖에 없다. 한 국 사람이 새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누가 한국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들 것인가. 새 사람 만드는 일은 법으로도 제도로도 교육으로도 할 수 없 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중생해야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에 이 근본적인 귀한 사명을 주셨는데 한 국 교회는 이것을 깨닫고 이 사명 감당하기 위하여 자신이 새로와지며 전 심전력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 합신교단도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개혁의 기치를 들 고 합동신학교를 세우며 교단을 조직한 것이 아닌가. 우리 자신들의 부족 과 나태를 통해 자복하며 기도하기를 힘쓰고 사생결단 말씀대로 살아 빛과 소금이 되어 이 민족을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내어놓고 이 사명을 위하여 헌신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이 민 족을 구원해 주시며 복된 나라로 축복해 주실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주님의 말씀이다. 새 나라 되기 위하여 먼저 새 사람 되어야 한다.
17 no image 새천년의 교회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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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2 2000-01-03
새천년의 교회의 정체성 박봉규 총회총무 새천년을 맞으면서 다른 나라들은 바쁘게 큰 일을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나 라는 혼란스러운 정치계와 힘겨운 경제계 그리고 맘몬이즘 앞에 가치관의 상실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교회들은 현재 무엇을 하고 있 는지 자문하고 싶다. 수 백년 전 만해도 세계 5대 강국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스페 인, 포르투칼이었다. 그 중에서도 스페인은 해적의 약탈자로 약 300여년간 지배 강국 노릇을 하였으나 지금은 유럽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원인은 과거 그들은 약탈한 돈으로 사치와 낭비와 부패로 만연 되어 있었고 일년에 280여일을 일하지 않았으며 그 중 1월은 한 달 동안 카니발의 달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인생을 즐길 수 있을까? 또 어디가서 약탈을 하여 돈을 벌까? 하는 망할 생각만 했던 것이다. 이런 스페인의 역사를 보며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는 G.D.P.10,000불에서 허덕이는 비정상 적인 나라다. 공직자 부인들은 검은 돈으로 수 백 만원씩 하는 옷을 수도 없이 사서 입고 남편의 얼굴에 먹칠만 하고 다니는 등 나라 안팎이 사치와 낭비와 부패가 만연하고 있으니 이 나라가 과거에 망한 스페인과 다를 것 이 무엇인가? 이제 교회는 강건너 불만 구경하는 식의 잘못된 진리의 해석인 정교분리의 원칙만 내세우고 국가의 위기에서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사회 구석구석을 살피고 어두운 곳에 빛을 밝혀 야 한다. 정직한 사람들은 잘 못하는 정치는 그만두고라도 가장 시급한 문 제는 경제문제를 알아야 한다. 몰락한 경제계의 공룡은 대우만이 아니라 S 그룹, H그룹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고 한다. 정부 52개 투자공사의 부채도 200조 이상이다. 그리고 시, 군, 구 지자체 부채가 18조이다. 성업공사 부실 자산이 200조 이상이다. 각 도시 지하철 공사의 부채는 말하기도 싫다. 음 식물 쓰레기로 나가는 비용이 18조이다. 가히 부채 왕국이라고 해도 과언 이 아니다.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니다. 이제 우리교회가 더욱 국가를 위해 간구하여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성도가 세상 의 빛된 생활을 철저하게 해 야 한다. 먼저 절약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그리고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사회의 잘못된 것을 갱신하고 어두운 곳을 찾아 밝게 해야 한다. 21세기는 빅벤(대란)의 시대라고 한다. 세계는 다국적시대에서 무국적시대 로, 총칼 없는 무한 경쟁만이 있는 시대가 된다. 교회가 신본주의를 외면하 고 물신주의에 빠져 불의한 돈까지 기쁨으로 받는 일은 이제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의 명예를 위한 일은 그만하자. 교회가 Global standard(세계의 표준)를 정의와 정도로 선도해야 한다. 그리고 과거에 실 추한 교회의 정체성을 빨리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 해서는 역대하에 보면 이스라엘이 실추된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레위 인들이 거룩해졌던 것과 같이 교회 직분자들이 먼저 거룩해져야 하며 인본 주의가 아닌 바른 신본주의의 예배의식이 회복되어야 하고 성도들이 정직 하고 매사에 합리성이 있어야 하며 말씀을 실천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교회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설 수 있고 백성도 바르게 살 수 있는 것이 다. 이제 세상에서 신뢰받지 못 하는 교회들은 자진 퇴출해야 한다. 우리 민족에는 폴 케네디 교수가 말한대로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가 있다. 우리 한민족은 독특한 문화의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한다면 하는’ 정 신문화이다. 특별히 목회자들은 세상을 바르게 보고 이제부터라도 교회에 서부터 새로운 선진국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다음 세기에서 살 수 가 있다. 그리고 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한국적 가족주의에서 충효사상 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목숨을 건 교육열에 의한 젊은 엘리트 정신과 기업가 정신이 있다. 이 좋은 특성들을 기독교주의로 더욱 승화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면 21세기에는 한국 도 선진국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16 no image 성탄과 새천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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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5 1999-12-20
우리는 주님이 오신 후 1999번 째 성탄을 맞는다. 성탄은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 속으로 즉 인류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 오신 사건이다. 성탄의 사건은 인류에게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인류는 시 간을 계산할 때 성탄의 사건을 기점으로 즉 주후 (또는 서기) 몇 년 몇 년 으로 계산하게 되었고 공간을 생각할 때도 하나님이 오신 공간으로 즉 하 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곳으로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주님과 상관이 없던 시간과 공간이었으나 이제는 시간과 공간이 모두 주님과 관련 된 것이 되었다. 우리는 1999번 째 성탄과 2000번 째 새로운 해를 맞으면서 시간의 의미와 공간의 의미 즉 역사의 의미를 새겨 본다. 우리 민족은 본래 시간의 의미 와 역사의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에 대한 직선적이고 발 전적이며 창조적인 사고 보다는 순환적이고 정체적이며 형식적인 사고에 젖어 있었다. 우리는 우리 개인과 인류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올바로 계산할 줄 알 아야 한다. 즉 주님이 인류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 오신 것처럼 주님 이 나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그리고 우리 민족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 와서 주장하시고 다스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 오셔서 우리와 우리의 시공을 다 스리도록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문화를 우리 안에 실현하는 것이다. 우 리가 날마다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시공을 주님과 상관이 없는 것 으로 간주하는 것은 성육과 성탄의 의미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사실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의 문화를 우리의 사회와 역사 안에 실현하는 일을 실패하 고 말았다. 정치는 정치고 신앙은 신앙이었으며 사업은 사업이고 신앙은 신앙이었다. 신앙의 영역과 삶의 영역이 유리되어 있었다. 새 천년의 문턱에 들어 선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하루 하루와 우리 의 한 해 한 해를 주님의 하루와 주님의 한 해로 계산하며 살도록 하자. 우리가 활동하는 공간 하나 하나를 주님이 들어 오신 주님의 공간으로 간 주하며 살아가도록 하자. 주님은 2000년 전에 우리 속으로 들어 오셨고 지 금도 우리 속으로 들어 오신다. 그리고 우리는 가자. 주님이 각 마을과 각 동네로 가신 것처럼. 이 지구 촌 인류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 속으로, 지구 촌 각 마을과 각 동네 속으로 가 자.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루며! 그리고 조만간 이루어질 온 우주의 통 일의 날인 오메가 포인트를 바라보면서!
15 no image 정암신학강좌, 한국 신학계 지표되어야/정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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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 1999-12-02
정암신학강좌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호응도가 낮아지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할 것같다. 우리 교단의 정신적 지주이며 교단적 성격을 규명 함에 있어 늘 잣대로 제시되고 있는 고 박윤선 박사의 사상을 기리고 개혁 의 자세를 공고히 하기 위해 실시되었던 정암신학강좌에 대한 관심이 예전 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8일 남포교회당에서는 제11회 정암신학강좌가 개최되었다. 합신 동문 및 교수들 그리고 교계 인사 등 35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실시된 이 번 강좌는 미래 사회에 대한 한국 교회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 역할과 책임 을 점검하는 좋은 기회였다. 또한 수준 높은 강좌는 참여한 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개혁교단의 위상을 확인하며 한국 교회의 개혁에 있어 선두 주자로 나선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게 했다. 그러나 우리 교단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이끌고 가야 할 교단 지도자들과 원로들은 아쉽게도 이 자리에서 몇몇 분을 제외하고는 찾을 수 없었다. 또 한 앞으로 교단을 짊어지고 나가야 할 중진들 역시 그러했다. 나아가 부지 런히 정암의 뜻을 받들고 훈련을 받아야 할 후진들 역시 그러기는 마찬가 지였다. 심지어 이 행사와 깊은 연관이 있는 합동신학교 재학생들조차 보 이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자리는 합신 동문들의 잔치 자리만은 아니다. 우리 교단에 속한 모든 목회자와 교직자와 성도들의 잔치이다. 그러나 주축이 되어야 할 합신 동문들의 무관심 속에서 정암 강좌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또한 정암과 뜻을 같이하며 한국 교회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중진 들 역시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다. 쉽게 말한다면 교단 중진들이나 합신 동문들이나 그다지 깊은 호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다. 해가 거듭될수록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할 우리 교단의 성격으 로 본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주최측의 홍보 부족이 나 각 사람의 사정이 겹쳐 참여치 못한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암강좌는 매년 연례적으로 시행되어 왔었고 늘 관심의 대상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이유로 이 문제를 덮어버릴 수는 없을 것 이다. 문제는 과연 우리 교단이 개혁의 의지를 처음처럼 분명하고 확고하게 가지 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정암은 생전에 한국교회가 복음을 떠나고 있다는 배도의 현상에 대해 그처럼 가슴아파했었다. 그리고 그의 말년에 개혁 정 신에 투철한 후학들을 양성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합신을 개교하였던 것이 다. 이러한 정신을 받들어 우리 교단은 적극적인 후원 아래 적지 않은 목 회자를 길러내었음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의 정 신은 지금도 우리 교단이 이어받아야 할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하는 척도 중의 하나가 정암강좌에 대한 관심과 호 응도인 것이다. 주최측은 이 점을 명심하고 차기 정암신학강좌가 교단적 관심과 적극적 참 여 아래 진행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특히 정암강좌가 한국 신학계에 어떤 지표를 제공하기 위한 수준 높은 강좌로 발돋음해야 한다는 역사적 요청을 중시하기를 바란다. 단순히 정암을 기리 는 정도로 끝나거나 교단 내의 행사로 치부되어선 안될 것이다. 정암이 한 국 교회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것처럼 정암 강좌 역시 한국 교회에 일익 을 담당하는 강좌로 성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교단의 정체성과 깊은 연관이 있는 사안임을 잊어선 안 된다. 합신 동문뿐 아니라 전 교단의 관심과 호응 아래 정암강좌가 그 맥을 이어 가기를 바라는 것은 필자만의 바램이 아닐 것이다.
14 no image 신구교 500년만에 화해라니?/황희상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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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4 1999-11-16
아우크스부르크(AP AFP) 연합 기사에 따르면 로마 천주교와 루터파 개신 교가 지난달 31일 구원론에 대한 논쟁을 끝내기로 하는 선언에 서명함으로 써 500여년만에 화해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 경(교황청 일치위원회 위원장)과 크리스티언 크라우저 루터교 세계연맹 감 독은 이날 독일 남부 아우크스부르크 교회에서 열린 예배에서 “기독교인 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신의 사랑’에 의해서만 정당화 될 수 있 다고 믿는다”는 내용의 면죄와 구원에 대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는 것 이다. 이들의 논쟁은 정확히 478년 전 마틴 루터가 카톨릭의 ‘면죄부’ 판매 관 행에 반발해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 논제’의 반박문을 내걸어 종 교개혁과 30년 종교전쟁의 불을 지피면서 시작됐다. 종교전쟁과 신·구교 를 분리시킨 이런 교리 논쟁은 ‘어떻게 천국에 이를 수 있는가’를 둘러 싼 이견이었다. 개신교에서는 “인간은 신앙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카톨릭에서는 “신앙과 함께 선행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 해왔었다. 로마 교황청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번 신·구교의 화해 선언은 고난의 역정 위에 기독교 통합의 ‘초석’을 놓은 것이라면서 “몇 세기만에 처음으로 우리가 함께 같은 길 위에서 걷고 있다”고 환영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기어이 천주교가 프로테스탄트에 항복한 것인가? 드 디어 교황이 자신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개혁자들의 외침에 수긍한 것일까?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가 그토록 쉽게 화해할 수 있었던가? 그들의 차이가 정녕 구원론의 차이에 불과하단 말인가. 고개가 갸우뚱해지지 않을 수 없 다. 인간의 구원이 신의 사랑(은혜)으로 인해 되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천주교 는 나머지 수많은 교리들을 왜 모조리 수정하지 않는가. 진리는 따로 떨어 진 몇 개 조항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 으며, 어느 한가지 교리가 깨어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것은 이번 사건이 원래부터 진정한 연합, 진정한 화해가 결코 아니었다 는 것을 말해준다. 한마디로 이번 사건은 정치적 쑈이며, 인간들이 얼마나 진리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져 있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예제 라 하겠다. 진리의 문제는 어떤 선언이나 합의로 타협점을 이룸으로써 해결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 “구원은 신의 사랑으로…” 이렇게 말해놓고 자기들끼리 만 족하고 좋아하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연합과 화해, 평화… 이런 것들이 절대적 가치가 되어버리면, 정작 진리가 설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 없이 넘어 가자는 것 아닌가?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소위 평화의 시대라 불리는 오늘날, 날마다 선한 것처럼 포장된 비진리의 혼탁함 속에 파묻혀 살다 보니, 우리는 자꾸자꾸 비판력만 무뎌지고 있다. “서로 사랑해라… 싸우지 말고… 윤리… 도덕…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 지… 사이좋게 놀아라… 뭐든지 열심히 하는 거지… 왜 자꾸 따지고 드 니…” 이런 따위의 부드럽지만 마약과도 같은 음흉한 최면술에 우리는 속 지 말아야 한다. 절대 진리는 하나이다. 그리고 그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 회색지대는 없다. 카톨릭은 우리와 연합하고 우리를 슬금슬금 변질시키고, 타락하게 만든 뒤 본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 그것이 그들의 오래된 수법 이었음을 잊지 말자. 오직 진리 안에서, 오직 진리 안에서만 연합은 가능한 것이다.
13 no image 목회 성공에 새로운 인식이 필요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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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4 1999-10-26
목회에 성공했다고 자부하면서 한국 복음주의 총연합회에서 크게 활동하는 목사 님 한 분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가 교회개척을 할 때부터 현 재의 교회가 되기까지 그 과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월곡동에서 개척을 시작하여 열심히 교회를 키웠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개포동에 아파트 단지가 생길 때 그곳으로 이전하여 새로 교회를 세웠다. 월곡동의 교인들은 얼마 안되서 다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교 회를 키워나갔다. 그러면서 자금을 더 모았다. 상계동에 아파트 단지가 들 어서자 그는 재빨리 그동안 모은 자금으로 종교부지를 사서 교회를 지었 다. 이미 아파트 입주가 시작할 즈음 잘 지어진 교회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수백명 천명이 넘어갔다. 사람들은 계속 몰려왔고 그는 어느덧 능력있는 목회자, 목회에 성공한 목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요즈음 단기간에 많은 수의 성도가 모이는 슈퍼교회의 슈퍼목사들이 저마 다 자신의 목회성공을 자랑하듯 세미나를 하고 성 공비결을 공개하고 있다. 마치 그것이 목회성공의 모델이 되는 것처럼 “내가 이렇게 했더니 성공했 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래서 얼마나 짧은 기간에 얼마나 많은 성도가 모이느냐가 목회성공의 기 준처럼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래서 저마다 목사들이 개발지역으로 가서 다른 사람보다 빨리 선점을 차지하려고 애를 쓴다. 그 리고 목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한다. 어찌 보면 장사꾼들이 사람들 이 많이 모이는 목좋은 곳에 자리를 잡아 장사하여 큰 돈을 벌려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서 성공하면 능력있는 목회자요 그렇지 못하 면 무능한 목회자가 되고 만다. 특히 기존지역이나 농촌에서 성실하게 목회하지만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교회(여건이 부흥하기에 어려운 상황)의 목회자는 상대적 영적 무력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자신의 목회에 대한 회의를 품기도 한다. 처음 우리 교단이 출발할 당시 개혁을 추구하던 당시 교회를 개척해야 했 던 목회자들은 어디가서 개척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목좋은 데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진정 교회가 필 요한 지역에 가서 교회를 개척할 것인가? 또한 내게 필요한 곳을 선택하여 내가 갈 것인가? 아니면 고생이 되더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갈 것인가? 하는 것도 고민거리였다. 자신의 성공에 초점을 맞출 때 당연히 목이 좋은 곳이어야 하고, 주님께 초점을 맞추어 보냄을 받은 자로 자신을 생각할 때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 이었다. 따라서 필자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성실하게 목회하는 많은 수의 동료 목회자들이 소신을 잃지 말고 하나님께 쓰임받고 있다는 사실에 기쁨 을 가지고 당당하게 목회사역에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아파트 지역에서 수백명을 목회하는 젊은 후배 목사님의 격려가 생각난다. “처음에 지하실을 분양 받아 열심히 목회를 했지만 150명을 넘지 못했는 데 목이 좋은 곳에 빚을 내서 예배당을 짓고나니 많은 성도들이 와서 등록 을 했습니다. 지하실 예배당에서 목회할 때가 설교도 더 뜨겁고 열심도 더 있었는데 그때는 부흥이 안되더니 예배당을 지어 놓으니까 저절로 부흥이 되니 자신의 능력이나 설교 때문에 부흥을 하거나 저의 열심에 교회가 성 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 을 수 없습니다. 기존지역이나 어려운 지역에서 묵묵히 목회하면서 교회를 세워나가는 분들이 참으로 위 대해 보입니다.” 뉴 밀레니엄을 맞이하여서는 목회자와 목회성공의 새로 운 인식과 새로운 잣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12 no image 회심을 우리의 목표로/박발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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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4 1999-10-11
젊고 꿈이 많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같은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야무지게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어느덧 장년이 된 그는 자신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좁혀서 자기가 사는 사회만이라도 변화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또 세 월이 흘러 인생의 황혼기에 선 그는 그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 기와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나마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달라 지지 않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는 그때서야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 더라면’하고 후회했지만 시간이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바로 나의 모습, 또 우리 교단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 닐까 생각이 든다. 한국교회를 개혁하겠다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듯 이 나온 지가 어언 20년이 흘렀다. 당시 우리의 스승이셨던 박윤선 목사님 은 모세 같아 보였고 교수님들은 12지파 두령 같아 보였었다. 그래서 정말 한국교회가 변화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볼 때 아 n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고 우리가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친 것도 없는 것 같다. 그저 저급한 삶에 붙들려 살았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우 리들의 모습이 아닐런지… 이제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다.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를 개혁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보다는 ‘우 리는 무엇 때문에 실패했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 다. 이야기 속의 청년처럼 우리가 무엇을 개혁시킬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 라는 것을, 바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 아야 하지 않을까? 자, 이제부터 회심을 우리의 목표로 삼자. 그리고 이제 우리의 무능, 부 족함, 한계를 철저히 깨닫고 가장 먼저 변화받아야 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필자는 감히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첫째, 기도하지 않은 죄를 회개하자. 허드슨 테일러는 성공적인 선교비결을 묻는 질문에 ‘나는 기도로 사람 을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진정한 기도는 자신을 변화시킨다. 또 성도를 변화시킨다. 야곱의 기도가 에서의 마음을 변화시키듯이 자기 자신이 변화 r 되지 않은 목사 또 맡기운 양무리들을 아직 변화시키지 못한 목회자는 기 도하지 않는 목회자라 할 수 있다. 둘째, 하나님 말씀에 붙들려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자. 성경을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말씀을 대할 때 하나님을 뵈옵는 것같이 하나님을 대하듯 경외심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여야 할 것이 다. 과연 우리는 그러한 믿음이 있는가. 옛날 신하들은 어명을 받을 때 왕 을 뵈옵는 것처럼 왕을 대하듯 그렇게 받지 않았던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태도와 자세가 잘못된 것을 회개하자. 셋째, 구원의 열정이 없는 것을 회개하자. 목사는 영혼구원을 위해 부름을 받은 자이다. 또 영혼구원을 위한 사명 을 받은 자이다. 그런데 목회자가 구령의 열정이 없다면 그는 병든 자가 아니겠는가? 넷째, 성령충만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자. 뭐니뭐니 해도 목회자의 가장 우선적인 조건은 성령충만이다. 성령충만 하지 못한 자는 목회자로서 부적격한 자이다. 왜냐하면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성령충만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자.
11 no image 오늘날의 교회 단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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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5 1999-09-17
집사와 권사의 외아들이 어렵게 지방신학교 행정요원으로 시험을 치루어 합격했는데, 면접 과정에서 부모가 출석하는 교회의 교단과 그 신학교의 교단이 다르다는 이유로 취업확정을 보류하고 전가족이 출석교회를 옮기면 취업을 허락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 부모들은 아들이 직장을 보장받 기 위해서 교회를 바꾸기로 하고 그 신학교가 속한 교단 교회로 옮겼다. 이것은 몇 주전 필자의 교회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말 이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개혁)’ 교단은 이단이 아닌가? 라고 했다는 데… 목사에게는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으므로 교인들은 목사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며 불만이 있으면 교회를 떠나라 하고, 불응하면 제명출교를 시키겠다고 강단에서 설교를 하였다. 교인들은 한두 번 듣는 설교가 아니라 반복해서 듣다 보니 장로도 집사도 권사도 떠나고 그 교회는 목사에게 절대 복종하 는 사람만 남아있게 되었다. 이런 목회를 하는 이유는 목회 세습을 위하여 목숨걸고 하는 목회라고 그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이구동 성으로 말을 한 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목숨걸고 복음을 전했는데… 사반세기(25년)동안 장로 직분을 수행해 오면서 필자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상은 ‘목사 안수를 받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사실이다. 안수받 은 목사가 이십대거나 삼십대거나 사십대거나 안수받은 그날부터 하나님처 럼 권위를 행사한다. 그날로 ‘모른다’거나, ‘잘못했다’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인간 생활의 전 분야 에서 최고 권위자로 최고 결재자로 군림하려 한다. 겸손은 형식뿐이다. (물 론 모든 목사님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소위 이룩한 업적이 교 단을 나누고, 이권을 차지하고, 하나님께 드린 헌금으로 모아진 자금을 물 쓰듯 쓴다.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적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한 단면이라고 한다면 반론할 사람이 있겠는가? 시간이 흘러 어느덧 세기가 바뀌는 시점에 서 있다. 우리 모두 정신을 차 리고 스스로에게 냉철해져서 하나님께 다시 검증을 받음이 어떠할까? 불원 간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옷 매무새를 고 치고 몸가짐도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신앙생활의 기본부터 다시 가르치고 배워서 지키는 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단통 합 운동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안으로 꼭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 하나 무속화되어 가고 있는 한국 교회의 현상을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귀의 세력에 대응할 수 있는 믿음의 반석(신앙의 기본)을 재점검 하여 밑바닥부터 다시 세우는 작업이 꼭 있어야 한다. 예측할 수 없는 정 보와 지식의 물결이 엄습해 오면 갈팡징팡 흩어지고 방황하게 될 그리스도 인들을 우리 한번 진지하게 생각하고 걱정해 보자.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 계시면 우리를 향하여 무엇을 요구하시겠는가?
10 no image 방관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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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0 1999-09-03
신학교를 다닐 때 어느 목사님께서 경건회 시간에 주신 말씀은 바른 것에 마음 설랬던 청중과 나에게 큰 은혜와 깨달음이 되었다. 내용은 당시 헤롯왕이 헤로디아를 취한 일이 죄라고 지적한 세례요한이 감 옥에 갇히게 되고 결국은 사형을 당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더 큰 아 픔은 헤로디아가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했던 살상의 현장에서 무수한 귀인 과 방백들이 침묵한 것이다. 분명 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또한 존 경했으면서도 누구나 그 부당성을 지적하거나 생명을 구하는 일에 나서지 않았다. 이는 직접 살인한 것은 아니나 간접적인 죄요 말하자면 방관죄인 것이다. 이런 미온적이며 확신 없는 태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믿음의 사람 들이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개혁교단에 몸담고 있는 것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이 된다. 나 자신과 교회와 사회를 바르게 해 나가겠다는 교단인데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가기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늘 진리를 탐구하고 세상 돌아가 는 일에 민감하며 바른 일에 몸을 던져야 한다. 어쨌든 기치를 내걸고 동 참하였으면 갈 길을 가야 하고 이름 값을 해야 한다. 교단을 위해 일하거나 모임이 있을 때 가끔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찾게 된다. 누구보다 더 개혁신앙과 사명감을 가지고 희생과 수고를 아끼 지 않으리라고 기대했던 분들의 모습이 뵙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 에 중대한 일이 있어서인지 혹 병중에 계신지 아니면 이런 저런 이유로 실 망을 하고 모른 척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이런 현상은 오히려 유능한 젊은 층에 많을 것이다. 지금의 개혁의 방향을 더 분명히 하고 이론적으로 무장하여 구체적으로 실 천해야 하고 개교회 뿐 아니라 신학교와 총회 상비부의 활동을 통하여 더 욱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그런데 어느 때는 주인은 어디 가고 객들이 설 치는 것 같고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꼭 어설프게 해치우는 듯하다. 하나님 의 일은 결코 무관심과 졸속으로 되어져서는 안 된다. 이 일에 우리 모두 공동책임이 있다. 또 하나의 방관 죄를 범하지 말고 귀한 사역에 자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총회에서도 일군을 선출할 때도 직분을 맡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듯한 풍토나 중요한 사안에 지나치게 발언을 자제하거나 방조하는 것은 이 미지 관리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우리의 자랑거리는 아니다. 개혁의 칼이든 곡괭이든 들어야 할 때 부채를 든다면 모든 이에게 실망이 된다. 잘할 때는 박수를 쳐주고 혹 부정한 일이나 세속적인 일로 뒷걸음치 면 따끔한 질책을 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교단행사에 동참한다면 서로에게 큰 힘이 된다. 쟁반 위에 담겨진 세례요한의 목이 침묵하는 귀인들의 죄를 물을 것이며 우리의 삶의 자세는 주님과 교회의 판단을 받는다. 우리 교단은 결코 왜소하거나 무기력하지 않다. 많은 인재가 적재 적소에 서 제자리를 찾아 나간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이 시대에 우리 를 부르신 부름에 합당한 길을 가자.
9 no image 생명존중과 조직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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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2 1999-08-23
필자는 어느 가정의 가족 사진에서 세 세대가 즉, 할아버지 부부, 아들 부부 와 그 형제들 등, 모든 가족의 시선들이 어린 손자에게 집중하여 바라보는 사 진을 보고 감명 깊었습니다. 이는 세대의 연속성과 다음 세대의 주체인 어린 자녀에게 온 가족의 관심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가족사진이었습니다.코소보사 태 때 비행기 추락으로 체포된 미공군 비행기 조종사 세 사람 때문에 온 미 국 국민의 관심이 미국 언론을 통해 비등하는 모습, 그리고 그 세 사람을 위 해 특별한 외교적 활동을 벌이는 정부 모습은 감동을 주는 내용이 아닐 수 없 습니다. 충청노회 제천전원교회 김미희 사모(최태남 목사)의 중상 소식에, 안 타까움이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필자가 속한 노회 지도 위치의 한 목사님 이 곤경에 처한 목회자 가족의 치료비 후원을 위해 필자에게 참여를 적극 독 려하며, 솔선함에 감동을 받으면서, 이러한 생명존중과 사랑의 물결은 신속하 고 뜨겁게 파동쳐야 될 것임을 우리 모두가 절감합니다.그러나 이런 중하고 많은 힘이 필요한 일을 총회차원에서 후 원독려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후 문에 의하면, 우리 노회차원에서 먼저 돕고 다음 단계로 총회적인 후원 요청 의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어느 노회든 한 노회에서 모자람 없이 후원할 수 있는 역량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러나 설사 그렇더라도 우 리의 관심은 커야 한다고 봅니다.지난 7월 28일자 본 총회 기관지인 기독교 개혁신보의 보도를 보면서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사고 보고와 함께 이미 17일자로 일어난 사고였으니 총회 해당 상임위원회가(보고를 못 받 았는지는 모르지만) 신속히 모여서 그 대책을 강구한다는 보도가 같이 나왔다 면 얼마나 좋았을까(물론 보도에 빠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8월 6일 현재까 지 총회차원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음). 또 개혁신보는 이 사고 보도를 2면 기사에서도 작은 지면에, 사실 보도와 후원요청을 친절히 하는 정도였습니 다. 그러나 이런 총회소속 목회자 가족의 중상에 대해서는 1면 톱이나 아니 면 1면에서 크게 보도하고 취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필자는 이런 저런 현 상을 살피면서 생명존중의 열기를 가늠해 봅니다. 교회는 생명구원과 생명존 중을 위 한 조직체요, 노회나 총회는 이 일의 효과적 수행을 위한 지원 조직체 라면, 더욱이나 목회자는 총회의 밀접한 구성원이라면 이런 어려운 현상에 대 해 신속하고 열기 있는 관심과 온정을 나타내어야 한다고 봅니다. 혹시 목회 자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나, 그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관심의 차이 를 두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명의 위기적 상황에서는 목회자와 같이 소중히 대해야 한다고 봅니다.필자 자신이 교회를 섬기면서 교회라는 조직 때문에 그 구성원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관심과 섬김의 소중성이 희석되지 않을 까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하면서, 필자는 감히 우리의 조직들이 한 생명을 천 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뜻을 충실히 반영하는 열기가 더욱 꽉 차서 가장 구석지고 가장 어린 자라도 큰 전체의, 큰 사랑의 관심 때문에, 그가 기 뻐 어찌할 줄 모르는 감격의 물결을 쉼 없이 흘려내는, 세계 최고의 개혁총회 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열망을 논해봅니다.
8 no image '총회'와 교단 명칭 구분해서 사용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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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 1999-07-28
시론 / '총회'와 교단의 명칭 구분해서 사용해야 우리 교단의 명칭을 호칭할 때면 망설여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 안 에서는 단지 '교단'이라고만 호칭하면 되겠지만 그 '교단'의 명칭이 무엇이냐 고 물어올 때 적합한 명칭 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례로 문공부에서 우리 교단을 구분할 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B)이 라고 호칭한다. 이는 광주 개혁측인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A)과 구별하기 위함이다. 최초 1981년 우리 교단이 출범할 때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이 었다. 그런데 1986년 청담측과 결별하면서 우리를 개혁주류, 청담측을 개혁비 주류로 호칭하다가 합동 비주류인 광주개혁과 청담측이 합동하면서 개혁(A) 로 변신하게 되고 우리 교단은 개혁(B)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반면 교회연합신문사 발행 99년판 교회연합주소록에는 우리 교단을 대한 예수교장로회(개혁합신)로 구분한다. 무엇보다도 총신 이사진을 반발하고 합 동신학교를 세우면서 교단이 출범했기 때문에 개혁합신이라는 말이 자연스 럽게 호칭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교단 출범 초창기부터 외부에서 우리 교단 을 호칭하는 명칭이었던 것이다. 대부분 교계 언론사들 역시 개혁합신을 선 호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교단을 호칭할 때 우리들도 부자연스럽지만 개혁합 신측이라고 말하고 있는 지 모르겠다. 1981년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란 공식 명칭으로 교단 출범해 또 하나 문제는 교단 차원에서 교단 명칭을 대내외적으로 명확하게 제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대외적으로 우리 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로 표명하고 출범했었다. 그러던 것이 광주개혁측이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로 자리 매김 하게 되었고 우리 교단은 개혁합신으로 자리잡아가고 있 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고 그저 사태를 관 망하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어떤 경로에서인가 분명치 않지만 1996년 헌법 을 재정하는 과정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81 회 총회이후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로 표기하기에 이르렀다. 교 단에서 발행되는 모든 문서나 책자에 "대 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로 표기 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외부에서는 개혁(B), 개혁합신 또는 합신측으로 우리 교단을 호칭하고 있 는 상태에서 정작 우리 교단 내부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가 갑자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로 변경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한 때는 지역 노회에서 명칭을 표기할 때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OO노회"로 해야 할 것이지 아니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 OO노회"로 표기할 것인지 혼동이 되기도 했었다. 이렇게 되자 1998년 83회 총회에서 경북노회는 노회의 수의도 없이 사용 하고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란 교단 명칭을 96년 이전의 명칭 인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헌의한 바 있었다. 반면 충청노회에서는 외부에서 주로 사용하는 명칭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 신)"로 개정할 것을 헌의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당시 총회에서는 이 문제를 정치부에 넘겨 처리하도록 하였고, 정치부에서는 현행과 같이 그대로 사용하 도록 함으로써 교단 명칭에 대한 구체적인 협 의 없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 회(개혁)"로 결정짓고 말았다. 1991년 헌법 재정 과정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로 노회 수의 없 이 변경됨 그러다 보니 지 노회나 교회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 OO노 회" 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 OO교회"로 표기하는 것이 불편하다 고 하여 '총회'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OO노회" 또는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OO교회"라고 사용하고 있다. 분명히 교단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이지만 교단 차원의 행사나 공문서에서 교단 명칭을 표기할 때에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로 표기하고 있을 뿐 지 노회나 교회는 이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결과를 낳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말 그대로 '총회'는 당회 와 노회와 더불어 교회 치리회의 호칭이다. 헌법 정치 14장 1조에서 언급하 는 바 3심 치리회 중 당회와 노회는 상설 치리회로 존재하되 '총회'는 회기 중에만 존재하는 일시적 치리회인 것이다(정치 17장 1,2조) . 그런데 우리 교 단이 공식 명칭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로 표기하고 있어, 때로는 이 단체가 여전히 총회의 성격을 표명하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교단의 명칭 을 표명하고 있는지 혼돈을 가져오고 있다는 점이다. 교단의 주요 행사나 공 문서에는 의당 교단 명칭이 사용되어야 하는데 그 때마다 "대한예수교장로 회 총회(개혁)"로 표기하고 있어 총회를 지금까지 연장하여 운영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말을 하면 누가 그렇게까지 생각하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 러나 총회라는 치리회의 성격상 자연히 회기와 함께 소멸되었어야 할 조직 이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유령 총회라 고 표현한다면 지나친 말인지 알면서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라는 명칭의 책자나 공문서를 받아볼 때마다 도대체 종료된 총회가 어떻게 이런 책자를 발행하고 행사를 진행하고 이런 저런 일들을 처리하고 있는지 모르 겠다는 자괴감이 자연 앞서게 되는 것은 비록 한 두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교단의 명칭이 총회인지 총회라는 기관이 교단인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모호 한 상태로 교단 명칭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 다. 그래서인지 교단 차원의 모든 행사는 마치 총회가 주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고 교단 총무, 선교부, 교육부가 있는 사무실조차도 '총회사무 실'이 라고 주저 없이 말하고 있다. 심지어 교단 기관지인 개혁신보조차 총회가 발 행 주체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 혁)"라는 기관이 발행하는 기관지임에도 불구하고 현행 교단 차원의 문건에 서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라는 표기를 하고 있고 지 노회나 교회 는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OO노회" 또는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OO교 회"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본다면 총회가 주체인지 교단이 주체인 지 얼른 눈에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총회가 곧 교단인지 교단의 호칭이 총회인지 혼동되는 기현상 나타나고 있어 이렇게 혼동되다 보니 교단을 지칭할 때에도 총회라고 하고 총회를 지칭 할 때에도 총회라고 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이미 총회는 회 기 종료와 함께 소멸되었음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단을 가리켜 여전히 총회 라고 일컫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교단이 곧 총회요 총회가 곧 교단이 되는 이상한 어휘 속에 갖혀있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이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장소는 교단 차원의 행사장이기 마련이다. 행사장을 장식하는 프랑카드에는 자랑스럽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라고 표기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교단 차원의 행사를 주관하는 부서조차 "총회를 위해, 총회의 행사를 위해, 총회 소속 노회나 교회를 위해, 총회 차원의 지원과 협력과 단합을 위 해......." 라는 어휘를 스스럼없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몇몇 뜻 있는 인사들은 총회의 성격을 굳이 설명하면서 소 멸된 총회를 위해 애쓰지 말고 교단을 위해 힘쓰라고까지 직언하는 일이 발 생하게 되었다. 사실 교단의 명칭이 총회이고 보면 논리적으로는 하등 문제 가 없는데 치리회인 '총회'를 자꾸 지칭하는 것같아 누가 보아도 무언가 자 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교단을 가리켜 총회라고 호칭해야 하는 대부분의 교단 소속 임원이나 목 회자나 성도들의 혼동을 어 떻게 바로잡아야 할 지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다행히 금번 83회기에 헌법수정위원회가 소집되어 좀더 완벽한 헌법으로 개정한다고 한다. 차제에 우리 교단의 명칭을 명확하게 하는 일도 헌법수정 위원회의 중요한 임무일 것 같다. 헌법수정위원회는 차후론 대내외적으로 우 리 교단의 호칭에 혼돈이 가지 않도록 이 점을 명확하게 마무리해주길 바란 다.
7 no image 왜 착한 어린이들이 불타 죽는가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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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9 1999-07-20
착하고 순진한 어린이야말로 어른의 거울이 아닐 수 없다. 거짓 많고 허물 많 은 어른들은 어린이의 마음에서 진실을 배워야 한다. 어른의 마음에서 나오 는 것은 무엇일까? 마태복음 15장 19절에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 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라고 말하고 있다. 어른들의 마음속에는 이 세상의 악랄한 죄가 가득차 있고 그런 죄들이 하늘의 심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지난 6월 30일 오전 1시 20분 경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백미리 씨랜드 청소년수련원에서 원인을 알 수 없 는 불이 나서 301호실에서 고이 자고 있던 서울 송파구 문정동 소망어린이집 원생 고가연, 고나연, 천수영 양등 유치원생 19명과 마도초등학교 김영재 선 생 등 모두 23명이 숨진 화재사건이 발생했다. 김이현 양등 4명이 화상을 입 었으며 불은 3층 건물을 모두 태우고 3시간여만인 오전 4시 25분경에야 꺼진 것이다. 참으로 끔찍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1957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공포 된 ‘어린이헌장’에는 ‘어린이는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 사람이 므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귀히 여겨 옳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힘써 야 한다’는 전문 아래 어린이를 잘 키우고 가르치고 보호해야 할 어른들의 행동지침이 9가지로 나와 있다. 그 가운데 다섯번째에 ‘어린이는 위험한 때 에 맨 먼저 구출하여야 한다’로 철저한 어린이 보호 조항이 들어 있다. 옳 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어른들이 힘쓰고 위기에서 맨 먼저 구해주어 야 하는 데도 우선 씨랜드 시설 자체가 콘크리트 1층 건물에 52개의 컨테이너 를 얹은 가건물에 지나지 않는 엉성한 시설 공간이 거짓스런 허가를 거쳐 어 른들의 보호가 허술한 가운데 어린이들만 잠자다가 불 속에 숯이 된 비극을 맞은 것이다. 사람의 목숨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새 파란 꿈나무로 나라와 겨레를 이어가야 할 여닐곱 살 짜리 어린이를 잃은 부 모의 가슴은 그 얼마나 찢어지겠는가? 하나님은 왜 소망어린이집 유치원 어린 이들을 불타 죽게 하시는걸까?이 나라 이 겨레가 먼저 하늘나라와 그 의를 구 하는 하나님의 일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나만 잘살아 보겠다는 극도의 이기 주의 와 사리사욕의 온갖 욕심에서 빚어지는 어른들의 죄값으로 순진한 어린이들 이 희생된 것이다.현재 전국에 487개의 청소년수련 시설이 안전하게 제대로 갖추어진 건물인지 정부는 다시한번 재점검을 해 봐야 할 것이다. 늘 소 잃 고 외양간 고치기식으로 사고가 나면 행정 관리 책임자나 사고 책임자들을 징 계한다. 먼저 사고가 나기 전에 안전대책을 바로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청소 년을 수련한다는 핑계로 유치원과 수련원간에 장삿속으로 검은 돈이 오고간다 면 하늘의 심판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어린이들은 어린이헌장에 있는 그대 로 어른들의 장사 대상으로 결코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어린이들은 천사처 럼 자고 있는데 인솔 교사는 옆방에서 술이나 마시는 그런 무책임한 행동이 화를 부른 것이다. 예수님도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라야 천당에 갈 수 있 다고 하셨다. 오늘의 우리 어른들은 주홍같이 붉은 죄를 눈같이 씻는 회개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숨진 어린이들의 희생을 마음 아파하며 유가족들에 게 깊이 애도해 마지 않는다.오동춘장로/화성교회
6 no image 시대가 요청하는 신학교육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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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4 1999-07-01
현대를 일컬어 전문화 시대라고 한다. 이런 현상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더 욱 세분화 되고 전문화 되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려면 전문인이 되 어야 한다. 이런 사회적의 요구에 호응하여 대학마다 커리큘럼을 다양화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전문인을 배출해내는 데 힘쓰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 회는 엄청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농경사회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있다면 교회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그렇다면 변화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 까? 아니면 변화하면 안되기 때문일까? 지난 일월달 월간 목회지의 특집 기사 를 유심히 살핀적이 있다. 모 교단 중견 목회자 두 분을 모시고 대담 형식으 로 이루어진 제목은 “목회자 수급, 무엇이 문제인가?”였다. 과거 이민 사회 에서나 볼 수 있었던 무임목사 혹은 실직목사 문제가 이제는 한국 교회의 문 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교단도 예외는 아니라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이런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될 지 미련한 필자로서는 선뜻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특집 대담에 동참한 두 분 이 제시한 해결 방법을 정리해 보면 현재 목회자들의 정년을 낮추는 문제와 신학생 정원수를 줄이는 문제 등으로 요약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일리 가 있다. 그러나 근본적이 해결책에는 무엇인가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래서 좁은 소견이나마 평소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신학교육의 커리 큘럼을 다양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 교회는 다양한 전문 사역자를 요 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교는 획일적인 교육으로 담임목사만(?) 을 배출해 내고 있다. 특히 우리 교단이 더욱 그런 것 같다. 물론 신학교의 독특한 성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교 인들은 나름대로 사회의 전문인들로 구성되어 가고 있다. 당연히 교회의 사역 도 전문화 되기를 요청 받고 있다. 예를 들면 심방전문 사역자,(상담 전문)교 육전문, 사회분야, 음악전문, 행정전문 사역자 등, 이제는 과거 농경사회에서 처럼 사람들이 단순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 한 사람이 모든 분야를 다 책임진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무리한 일이라 생각된다. 아니 감 당 할 수 가 없다. 상식과 경험만으로 교회를 섬기기에는 너무 벅찬 시대가 되었다. 그 런의미에서 바른 신학에 근거한 전문사역자들을 중심으로 각 은사와 적성에 맞는 진로를 선택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두 가지 문제가 해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먼저는 적채현상으로 교회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무 임목사들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 될 수가 있으시리라고 생각 한다. 왜냐하 면 각 지교회에서 요구하는 전문사역자들이 되어 담임목사와 더불어 협력내지 는 팀 목회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담임목사와 부목사간의 불필 요한 긴장 관계가 해소될 수가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더욱 전문화 되어가 는 현대 사회를 이끌지는 못해도 보조는 맞추어 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물 론 전문성을 가진 평신도를 잘 활용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사실 신학 바탕이 없는 평신도들이 교회를 섬기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우리 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교 커리큘럼의 다양화 내지는 세분화 가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교육의 중요한 목적중 한 가지는 교 회가 요청한 일꾼을 양성하는데 있다 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적인 요청 에 우리 신학교가 한발 앞서주기를 기대해 본다. 은강교회 박양호 목사
5 no image 지금,우리 교단이 하나가 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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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3 1999-06-14
개혁교단이 ‘바름’을 내세워 출발한 지가 20년의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났 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조국 교회의 어두움을 보고 무엇인가 새로 운 개혁의 의지를 붙들고 힘있게 일어섰다. 몇 교회가 되지 않았지만 교회나 교세 수를 보지도 않았다. 또한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서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겠노라고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힘차게 일 어섰다. 교회의 문제는 목회자의 문제이기에 신학교가 바르게 서야함을 통감 한 개혁교단 산하 교회들은 피땀을 흘리면서 지금의 아름다운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교회는 겸손하게 고백했다. “주님이 이 시대와 조 국교회를 사랑하셔서 이루신 하나님의 자비였다고….”뿐만 아니라 어떤 교단 도 하지 못했던 선교하는 교단으로 우뚝섰다. 재정의 대부분을 선교비로 내 는 교회가 있을 정도로 헌신했다. 신학교와 선교는 개혁교단을 통해 주님이 이루어낸 시대의 가장 값진 보화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교회와 신학교, 선교 는 하나였다. 그러나 이제 물 어 보자. 신학교와 선교가 지금 어떻게 보이는가 를…. 교회들이 출혈을 하면서 지금까지 헌신해 왔던 그 신학교와 선교가 지 금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는가 물어 보고 싶다.1. 신학교에 대 해서신학교는 교회를 위한 신학교가 되어야 한다. 단순히 신학을 위한 신학으 로 멈추어서는 안될 것이다. 목회 현장에서 수없이 제기되고 있는 신학교육 의 부정적인 견해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해야 한다. 그동안 1천 여명의 학생 들이 합신을 졸업했다. 그 졸업생들의 목회 현장을 한번쯤 겸손하게 돌아보 고 교회를 위한 신학으로, 영혼을 위한 신학으로, 현장을 알고 현장에 힘있 게 적용되어가는 신학으로 그리고 텅빈 가슴을 안고 고통하는 동역자의 가슴 을 시원케 하는 신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수들은 신학교 교수이기 전에 목 사이다. 신학교 3년 동안 신학생들이 교회에서 훈련받고 자라온 시간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들을 함께 했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그들은 신학에 대해 서는 들었을지 모르지만 목자에 대한 모델을 보여준 것이 있어야 한다. 강의 한 내용을 채점하고 학점을 주느냐 안 주느냐 하는 차원을 넘어서 목사가 되 어야 한다. 그리고 바른 목자가 어떤 목자인지 모르고 내가 받은 지식만을 전 달하는 자로 있다면 강의를 하지 않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수들은 개혁교단 을 섬겨야 한다. 그리하여 바른 모델들을 연합하여 만들어내어야 할 것이 다.2. 교단에 대해서몇 교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개혁교단은 참으로 큰 일 을 했다. 참 아름다운 신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선교하는 일에 교단이 힘을 하나로 묶었다. 그러나 교단에서 강도사 합격과 인허, 목사 안수를 받은 동역 자들을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인가? 교단적으로 교회를 하나 세워 본적도 없었 다. 우리 개혁교단은 신학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바른 교회를, 개혁교 회를 세우는 것이 교단의 일이다. 그러나 총회 직영도 아닌 신학교를 위해서 모든 힘을 모았다. 그렇지만 교단이 안수했던 목사들을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 주었는가? 목회에 필요한 재정을 지원해 주었는가? 개척교회 목회자의 생 활을 위해서 최소의 생활비를 책정하여 주었는가? 교단 차원에서 교회 건축 을 위해 땅을 구입해 보았는가? 솔직히 정직하게 고백하자. 교단 교회에 대해 서 관심이 부족했다고 본다. 목회 현장에서 지친 형 제를 위로한 적이 있었는 가? 빚에 힘이 겨워 고통하는 지체들을 보고 무리하게 돈을 끌어다가 썼기에 저런 일이 일어났다고 정죄하면서도 그 교회를 위해 기도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는가? 교단 교회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도움을 요청한 적도 없음을 시인 하자. 총회 사무실 하나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힘들었다면 우리 개혁교단 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는 물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제 개 혁교단은 힘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 개혁교회를 위한 교단으로, 그리고 정책 과 비젼을 가지고 준비된 교단으로 거듭나야 한다. 개 교회의 필요를 신학교 가 모두 채워줄 수는 없다. 교단의 각 상비부에서 균형잡힌 교단의 정책을 제 시하고 그 정책을 위해서 교회들이 힘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개혁교단상을 정 립해야 할 것이다. 동서울노회 한사랑교회 나종천 목사
4 no image 어버이 주일의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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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9 1999-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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