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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 no image 역사의 교훈_박형용 목사 (83)
편집부
4767 2011-08-24
역사의 교훈 < 박형용 목사,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 “우리의 신앙 행태가 잘못된 모델은 아닌지 반성해야” 지난 2011년 7월 22일(금) 관용과 개방과 평화의 나라라고 자칭하는 노르웨이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할 큰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기독교 극우주의자’라고 자칭한 32세밖에 되지 않은 브레이비크(Anders Behring Breivik)가 1997년부터 준비한 테러를 결행한 것이다. 오슬로 정부청사를 폭탄으로 테러하여 8명을 살해하고, 오슬로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우퇴우아(Utoeya) 섬에서 노동당 청년집회를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경찰로 위장하여 덤덤탄(총탄이 몸 안에서 터지는 탄)을 난사함으로 69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 테러 사건으로 77명의 귀한 생명을 잃게 된 것이다. 브레이비크는 이 테러가 이슬람(Islam)으로부터 유럽을 구하기 위한 성전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약 1,500페이지에 달하는 ‘2083년 유럽의 독립선언’이라는 제하의 문건을 통해 테러 준비를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테러가 왜 정당한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십자군에 비유하여 유럽을 잠식하고 있는 이슬람(Islam)으로부터 유럽의 기독교를 구하기 위해 이런 잔악한 행동을 결행했다고 말한다. 그가 자신의 문건의 제목을 ‘2083년 유럽의 독립선언’이라고 부친 것은 1683년에 비엔나 전투에서 기독교군이 오스만투르크 이슬람 군대를 무찔렀는데 이로부터 400주년이 되는 2083년까지 유럽에서 무슬림을 몰아내겠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브레이비크가 ‘기독교 극우주의자’라는 사실 때문에 불신자들은 물론 신자들까지도 ‘기독교 극우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를 혼동하여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브레이비크의 테러 사건이 터지자 신문매체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기독교 근본주의가 테러 사건의 배면에 깔려있는 사상이나 된 것처럼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한마디로 이런 종류의 테러 사건과 기독교 근본주의는 전혀 관련이 없다. 브레이비크는 자신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주장했을지 모르나 그는 진정한 기독교 복음을 알지 못한 사람이요,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20세기 초에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대항해서 주창한 신학사상이다.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초자연적 사건들을 모두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성경에서 초자연성을 배제하는 이론을 펴자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무오성,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처녀 탄생, 대속적 구원, 예수님의 육체부활, 예수님의 재림 등 다섯 가지 핵심 교리를 제창하게 된 이후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명칭이 사용되게 되었다. 기독교 근본주의가 사회의 변혁에 대한 관심이 약하고 일반 정치와 사회에 참여하는 것을 부정적인 태도로 보는 것은 사실이나 테러나 범행을 조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 근본주의는 테러 행위를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그러므로 브레이비크의 테러 행위는 천인공노할 악행으로 기독교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놀랍게 여겨야 할 사실은 브레이비크가 테러 준비를 시작했던 1997년은 그의 나이 겨우 18세 정도라는 사실이다. 18세 어린 청년의 머리에서 어떻게 이런 과격한 생각이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을까? 성경은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가르치는 객관적 계시로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규범이다. 그리고 무슬림을 포함해서 아직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 나라이고 개인주의가 팽배한 나라이다. 오늘날 온 세계 기독교가 합리주의, 이성우위주의, 포스트모던 사고에 매여 허우적거리고 있다. 노르웨이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한국 교회도 많은 잠식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브레이비크와 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는데 무관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의 객관적 계시를 바르게 믿는 사람이면 절대로 테러분자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브레이비크의 테러사건을 통해 한국 교회가 성경의 바른 교훈을 우리 젊은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지 우리의 신앙 행태가 후세의 젊은이들에게 잘못된 모델이 될 가능성은 없는지 반성하면서 성경말씀을 바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362 no image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_박성호 목사
편집부
4364 2011-08-02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 박성호 목사, 푸른초장교회 > “내가 경험하기 전까지는 남을 이해하기 쉽지 않아” 우리는 남이 나를 이해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남을 이해하는 데는 좀 인색한 편이다. 물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오래 전 일이다 친한 친구 부부가 선교사로 사역하다가 오랜만에 안식년을 맞아 우리 집을 찾아왔다. 정말 반갑고 기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다가 식사 때가 되어 좋은 것을 대접하고 싶어서 물어보니 자장면이 먹고 싶다면서 자장면을 사달라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외국에서 그토록 고생하고 온 친구를 제일 싼 음식을 사줄 수가 없어서 몸보신이나 시켜 주려고 무조건 끌고 소의 꼬리 등 특수 부위를 요리하는 식당으로 갔다. 당시 나로서는 최대한의 대접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음식을 다 먹은 후에 그 친구의 말이 해외에서 지내면서 각종 요리나 고기는 많이 먹어 봤는데 자장면은 진짜 중국음식점에 가도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자장면이 먹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선교현지에서는 꼬리나 이런 부위는 그냥 버리다가 한국사람들이 자주 가져가니까 요즘은 천원 정도 받고 준다고 했다. 나는 내 입장에서 잘 대접하려고 큰마음 먹고 대접한 것인데 정말 우습게 되고 말았다. 그 때 나는 내 입장에서 대접하지 말고 정말로 원하는 상대방이 것을 대접해야한다는 큰 교훈을 받고 그 후로는 선교사들이 오면 그가 원하는 메뉴로 대접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음식 대접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하면서 다른 부분은 여전히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경험하기 전까지는 남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수년 전 아들이 군 입대를 했을 때 정말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이상했다. 그 때도 많이 깨달았다. 성도들이 군에 자식을 보내면서 슬퍼할 때, “뭐 남자면 다 가는 것이고 죽으러 간 것도 아니니 너무 슬퍼 말라. 건강하게 더 성숙해져서 돌아 올테니 염려말고 기도하라”며 너무 쉽게 말했던 것과 그 분의 심정에서 위로하지 못했던 것을 크게 후회한 바 있다. 개척교회를 하면서도 많이 깨닫고 있다. 전에 개척교회를 많이 지원했던 경험이 있는데 실제로 내가 개척을 해보니 그 당시는 개척교회의 입장에서 도운 것이 아니고 그냥 내 입장에서 물질만 지원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바른 원칙이라 생각하고 했지만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한 지원이었다. 나의 지원 원칙은 쉬고 있는 목회자는 도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개척을 시작하면 돕는 것으로 하고 개척을 시작해야 도와 드렸다. 그런데 실제로 경험해보니 개척을 시작하기 전 쉴 때가 더 어려웠다. 시작하면 돕는 교회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개척 시작 전에는 아무도 돕지 않기 때문에 정말 힘든 시기이다. 사실 오죽하면 목회를 쉬게 되었겠는가? 그래서 앞으로는 개척시작 전부터 도와야겠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개척교회를 도울 때도 넷째 주 아니면 어떤 때는 다섯째 주 교회 형편상 보내드리는 날이 일정치 못했는데 개척교회 입장에서는 어느 날까지 오지 않으면 차용하든지 다른 계획을 세워야하며 혹시 지원이 끝난 것인지 몰라 불안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는 정한 날짜에 맞추어 보내기로 했다. 총회와 노회를 섬기면서 법대로 하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법을 어긴 것이 고의가 아닌 어쩔 수 없는 형편과 처지의 경우도 있었다. 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법의 잣대로만 볼 수는 없다. 우리 인간은 다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총회에서도 법을 뛰어 넘는 결정으로 오랜 시간 해결되지 못하던 일이 극적인 화해를 이루었다. 법도 중요하지만 화평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남의 교회 일이나 다른 노회 일도 내 생각대로만 판단하지 말자. 결과만 생각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그렇다고 불의와 거짓을 용납하자는 말이 아니다. 한 번만 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요즘 세대는 참지 못하는 세대가 되어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은 좋다. 그러나 모든 것을 확실히 안 후에도 그 사람의 입장에서, 아니 내가 실수한 일이며 내가 당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표현한다면 정말 아름다운 공동체로 발전할 것이다.
361 no image 속이 깨지지 않으면 겉이 부서진다_김수흥 목사 (111)
편집부
4997 2011-07-20
속이 깨지지 않으면 겉이 부서진다 < 김수흥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 “하나님은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것부터 부수시는 분” 우리의 속이 깨지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겉을 부수신다. 애굽의 바로가 속이 깨지지 않았을 때 그의 나라는 많이 부서졌다. 바로가 모세를 통해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하지 않았을 때 그의 나라는 엄청난 재앙을 만났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바로는 불순종하여 10가지 재앙이 애굽에 닥쳤다(출 7:14-11:10). 바로의 마음이 깨어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이런 재앙들은 애굽에 임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 최대 최강의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 영국 사우샘프턴 항(港)에서 뉴욕 항으로 향하는 처녀항해 중,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부류빙산(浮流氷山)과 충돌하여 2시간 40분만에 침몰했다. 이 사고로 승선자 2,208명 중 1,513명의 희생자를 내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타이타닉호가 어느 지점에 이르렀을 때 본사로부터 빙산이 흘러내리니 주의하라는 전보가 왔다. 기관사는 전보의 내용을 비웃으며 “이 배를 당할 그 무슨 빙산이 있겠는가?” 하며, 그 전보를 휴지통에 버리고 말았다. 2차로 전보가 왔는데, 전문(前文)과 똑같은 빙산 주의보였다. 선장에게 전문을 보여주었는데 선장은 오히려 보라는 듯이 승객들에게 “여러분이여 갑판에 나와서 스릴 있는 구경을 하십시오” 하면서, 빠른 속도로 항해를 계속해나갔다. 그러나 소(小) 빙산은 통과했으나 마침내 대(大) 빙산과 충돌하여 파선되고 말았다. 겨우 승객 655명이 구조되었을 뿐 그 외는 타이타닉 호와 함께 대서양 깊은 바다에 수장되었다. 속이 깨지지 않은 자는 망하리라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잠 11:2; 13:10, 16:18-19). 겉보기에는 깨진 것같이 보이나 깨지지 않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다시 말해 겉은 양같이 보이나 속이 이리 같은 심령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겉을 부수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을 부수실 때 제일 아플만한 것부터 부수신다. 사람마다 아프게 생각하는 곳이 다르다. 혹자는 재물이고 또 혹자는 자녀들이며 또 혹자는 명예이고 또 혹자는 부동산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귀중하게 여기는 순번을 따라 치신다. 제일 귀중하게 여기는 것부터 먼저 부수고 그런 일을 당해도 깨지지 않으면 다음 차례의 것을 부수신다. 사람은 겉이 부서질 때 얼른 알아차리고 속이 깨져야 하는데 보통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여전히 속을 강퍅하게 그냥 놔둔다. 그래서 자주 얻어맞는다. 훗날 은퇴 연령쯤 되면 만신창이가 된다. 참으로 쓸쓸하고 적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된다. 패잔병의 심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버림받은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의 징계를 당했을 뿐이다(벧전 4:17).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에 때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이기에 구원하시려고 징계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루 속히 마음속이 깨진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신다(마 5:5). 사람이 마음속이 깨져 온유하게 되면 무엇을 많이 받는다는 말씀이다. 온유한 사람은 승리하게 되고 많은 사람을 친구로 얻게 되며 많은 일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 속이 깨어지면 겉이 잘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겉이 잘되기 위해서 혈안이 될 것이 아니라 속이 잘되기를 추구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겉이 잘되기 마련이다. 요한사도는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기원한다. 속이 깨진 사람은 모든 사업도 잘되고 또 건강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신다(사 25:11; 단 4:37).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리라”고 가르치셨고(마 23:12), 베드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고 말씀한다. 우리는 하루 속히 우리 속이 깨어지기 위해 성경을 상고하며 기도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360 no image “다음 세대 일으키는 목회로 변화되어야”_정화영 목사 (60)
편집부
4901 2011-07-06
“다음 세대 일으키는 목회로 변화되어야” < 정화영 목사, 삼일교회, 특수전도부장 > 중세 유럽에서는 국민모병제가 없었으므로 왕이 돈을 주고 군대를 고용하는 용병제가 일반적이었다. 당시 스위스는 농사지을 땅이 없는 산간 오지였다.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의 헐벗은 백성이었으니 가족들을 먹여 살기 위해서는 용병으로 지원을 해서 다른 나라에 가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했다. 그런데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군들은 모두 왕을 버리고 도망쳐버렸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온 용병들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를 지키다가 전멸을 하였다. 도망치면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기는 하겠지만 자신들과 그 후손들은 용병시장에서 푸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후손들이 장차 살아갈 길이 없어진다는 것을 생각한 786명의 용병들은 스위스의 후손들을 생각하면서 죽음으로 자신의 위치를 지킨 것이다. 스위스에는 알프스 산이 있었고 산에 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그 나무를 베어서 팔면 당장은 먹고 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스위스의 선조들은 후손들을 위해서 나무를 베지 않았다. 그리고 고생을 밥먹듯이 하면서 돈을 아껴서 자식들을 교육을 시켰다. 후손들을 위해서 자연보호와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도 스위스 용병들은 가장 많은 월급을 받고 일하고 있으며, 스위스는 자연으로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으며, 스위스의 지식은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오늘날의 부강하고 아름다운 스위스는 선배들의 수고와 희생의 결과이다. 얼마 전에 KBS 9시 뉴스에서는 학원에 하루에 4시간씩 다니는 어린이들의 30%가 우울증상을 호소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근 충북도 교육청에서는 도내 초등학생 80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부모 등 보호자에게 평소 가장 바라는 것에 대해 ▲ 학원을 쉬게 해달라고 36.3%(294명)가 답했다. 이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달라고 29.3%(237명)가 답했다. 이것이 현재 우리 교회학교 어린이들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면 지식과 재능의 개발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황금의 시기를 쓴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장차 어떤 열매를 거둘 것인가? 이렇게 자란 어린이들이 예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것인가? 필자는 확신을 갖고 말할 수가 있다. “아니다!” 그들은 마음 속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심은 적이 없다. 그들은 성경적 세계관과 성경적 가치관과 예수님의 성품을 갖도록 구체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답이 나온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이고 우리의 큰 고통이다. 다음 세대의 영광은 지금 그들을 예수님의 형상을 닮도록 총체적으로 개발시킨 결과로 오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 교회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평일날 모아서 성경적 세계관을 갖는 훈련, 성경적 가치관으로 무장되는 훈련, 예수님의 성품 훈련을 시켜야 할 것이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다. 그런데 국영수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교회에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는 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렇다면 필자의 교회처럼 교회학교 교사들이 국영수를 가르치면 될 것이다. 평일날 2회씩 교사들의 집으로 오게 해서 먼저 게임을 하고 뜨겁게 찬양과 기도를 하고 성품 훈련을 시켰다. 그 후에 국영수를 가르쳤다. 1년 만에 240명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학원을 끊고 제자훈련에 참여하게 되었다. 필자는 이렇게 자라난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이 반드시 한국 사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이 세계 선교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게 될 것으로 믿어진다. 이제 교회의 지도자들은 큰 고민을 해야 한다. 지금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심고 있는가? 지금 지식적인 것만 심는가?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세상에 빼앗기게 될 것이고 세속화된 사회가 그들을 자신들의 제자로 삼을 것이다. 예수님의 전인적인 모습으로 다음 세대를 훈련시키고 있는가? 그들은 민족과 열방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359 no image 참된 회개와 거짓 회개_이광호 목사
편집부
4772 2011-06-22
참된 회개와 거짓 회개 < 이광호 목사, 실로암교회 > “회개에 죄책감 없다면 가증스런 거짓에 불과” 한국교회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회개를 외쳐왔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좋지 않은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형식상의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아가 일반 교인들에게 회개에 동참하도록 촉구했다. 기독교 계통의 신문을 비롯한 다양한 언론매체들은 그것들을 대서특필하여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그 회개를 하기 전과 후에는 과연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떠들썩한 집회를 열며 입술로 회개하고 나서도 그 전과 달리 변한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사람들로부터 동정심을 얻고 적절한 동조를 유도해 낸 것 자체로서 나름대로의 목표에 도달한 것인가? 한국교회의 부패와 위선은 거기서 여실히 드러난다. 진정한 회개가 아닌 형식만 취하는 회개는 신앙이 어린 교인들을 기만하는 종교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그런 행위를 보고 그대로 속게 된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 대해 냉철하게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주변에는 새벽마다 눈물로 회개하고 금요일 밤마다 통성으로 기도하며 회개하는 교인들이 많다. 나아가 깊은 산 속에 있는 기도원에 들어가 목이 터져라 회개하는 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눈물이 뒤범벅이 되고 목이 쉴 만큼 울부짖으며 기도한 목사들과 교인들이 또한 얼마나 많은가? 그 동안 한국교회의 종교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큰소리로 외쳐 부르짖으며 회개의 기도를 하면서 흘린 눈물을 전부 모을 수 있다면 그 양이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어쩌면 그 눈물이 결코 작지 않은 연못 하나를 이룰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한국교회만큼 회개를 많이 하는 교회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과거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어느 시대에 그런 식으로 간절함을 표현한 교회들이 있었으며, 지금 현재 지구 위에 한국교회만큼 회개를 많이 하는 교회가 또 있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 회개 뒤에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하는 점이다.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부르짖은 형식적인 회개를 통해 자기의 속은 후련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변한 것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참된 회개였던 것으로 말하기 어렵다. 그런 회개기도는 자기 스스로 속고 속이게 되는 거짓회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과 타인을 기만할 뿐 아니라 감히 하나님을 기만하는 위험한 행위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계시된 말씀을 통해 더러운 자신의 내면을 면밀히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슴을 쥐어짜는 아픔으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죄악으로 가득 찬 가슴속을 예리한 칼로 후벼파는 듯한 쓰라린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회개한다는 소문을 겉으로 떠벌릴 필요도 없으며 소문을 내지 않아도 된다. 회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의인’으로 인식되고자 하는 쓴 뿌리부터 도려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악행에 대해 진정으로 회개한 성도라면 결코 동일한 자리에 서지 않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회개한 후에는 과거와 동일한 악행이 일상적으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어제는 회개를 외치고 오늘은 전과 동일한 범죄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면 그것은 가증스런 거짓 회개일 따름이다. 한국교회가 왜 세상에 속한 자들부터 이토록 욕을 먹고 있는가? 교회가 불신자들로부터 비아냥거림을 당하고 욕을 먹는다는 것은, 교인들 스스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욕을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에 대한 분명한 자세로 참회의 자리에 앉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로 말미암아 욕을 들어야 할 내용에 대해서는 타협을 통해 칭찬과 인정을 받으려 하고, 결코 비난받지 말아야 할 윤리적인 면에서는 엄청난 욕을 먹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기독교 지도자 뿐 아니라 교회의 직분을 가진 정치, 사회 지도자들의 거짓된 모습에 대해서는 엄하게 대응해야 한다. 심판주 하나님에 대한 현실적인 경외감이 없다면 참된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신앙이 성숙한 성도들은 참된 회개와 거짓 회개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세상의 유혹을 받을 수 있고 일시적인 죄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러나 진정성이 없는 형식적인 회개를 통해 현실적인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된다.
358 no image 이름표를 달고_최광희 목사 (83)
편집부
5559 2011-06-08
이름표를 달고 < 최광희 목사, 행복한교회 > “성도들은 이름표 달고 생활하는 사람들” 전도사로 어린이 주일학교를 섬길 때의 일이었다. 여름성경학교를 하는 중에 한 여집사님이 점심식사를 하러 집에 가는데 골목길에서 어떤 남자 분이 자기 가슴을 자세히 쳐다보더라는 것이다. 참 엉큼한 남자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얼른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집에 가서 보니 가슴에 이름표가 달려있었다고 한다. 여름성경학교를 하는 동안 어린이도 교사도 모두 이름표를 달아 주었는데 그 이름표를 단 채 골목길을 지나갔으니 뭐라고 쓰여 있는지 궁금해서 쳐다보았던 것이었다. 어제 용기총에서 주최하는 ‘용인시 복음화 대성회’에 참석했더니 입구에서 목사들에게 이름표를 달아주었다. 이번 성회뿐 아니라 여러 모임에 참석하면 접수처에서 이름표를 달아준다. 그러면 그 행사장에서는 이름표를 달고 다니는데 행사장 밖에서는 이름표를 다는 것이 영 어색하고 이상해서 얼른 이름표부터 떼어버린다. 이름표를 처음으로 단 것은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할 때이다. 그때는 전교생이 다 이름표를 달고 다녔다. 중고등학생 때는 아예 교복에 이름표가 박음질되어 있었다. 학교, 학년, 이름이 새겨져 있어 어디를 가나 신분이 노출되었다. 군에 입대하자 군번과 계급장까지 옷에 달게 되어 있었다. 군인은 어디를 가나 자기 신분을 외부로 알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인이 된 이후에는 행사장 외에서는 이름표를 달지 않는다. 누군가 이름표를 달고 다니면 다른 사람이 궁금해서 자세히 쳐다보게 될 것이다. 사회인 중에는 이름표는 아니지만 자기 신분이나 소속을 나타내는 뱃지를 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국회의원은 금뱃지를 달고 대기업에 다니는 분 중에는 회사 뱃지를 단다. 잠언은 하나님의 말씀의 법도를 마음 판에 새기라고 한다. 이것은 명심하라는 뜻도 있지만 가슴 판에 달고 외부로 선포하면서 살라는 뜻도 있다. 만일 우리 성도들 모두에게 이름표를 만들어 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예쁜 이름표를 만들어서 거기에 “OO 교회 OOO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도”라고 새겨서 준다면 성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아마 대부분은 달고 다니겠지만 예배당을 나서면서 가장 먼저 이름표부터 떼어버릴지 모르겠다. 무심코 이름표를 달고 집에까지 가는 분도 간혹 있을 것이다. 일주일 내내 어디서나 달고 생활하라고 명령한다면 얼마나 많은 성도가 순종을 할까? 그리고 그 이름표를 달고 생활할 때 어떤 반응과 변화가 일어날까? 아마도 여러 가지 행동의 제약이 따를 것이다. 많은 것을 절제하거나 포기하게 될 것이다. 어떤 말은 못하고 어떤 곳은 못 가고 어떤 음식은 못 먹고 어떤 것은 못 사게 될 것이다. 우리 교회가 전 성도에게 이름표를 만들어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가 성도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목사도 성도들도 함께 시험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이름표를 달고 다닌다. 성도, 교인, 하나님 자녀,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주일학교 교사, 제자훈련생, 찬양대원 등등 이름표를 달고 이 세상 여러 곳을 누비며 생활하고 있다. 이름표가 없어도 내가 성도인 것을 내가 알고 상대방도 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이름표를 달고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름표를 달면 불편한 것 같지만 내가 성도라고 아예 공개하고 다니면 차라리 홀가분하다. “나 이런 사람이야. 알아서 기어!” 한때 유행가의 가사처럼 나를 공개하면 사람들이 알아서 성도로 대우해 줄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든다. “이번 주간에는 어제 받은 이름표를 달고 한번 생활해 볼까?”
357 no image “정암은 자신의 신학적 방법론 극복 위해 평생 노력해”_강경민 목사 (13)
편집부
3623 2011-05-25
“정암은 자신의 신학적 방법론 극복 위해 평생 노력해” < 강경민 목사, 일산은혜교회, 경기북노회장 > 우리는 고 박윤선 목사님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 우리는 모두 그 분에게 빚진 자들임에 틀림없다. 그 분이 우리에게 물려주신 사상과 신학은 ‘계시 의존 사색’일 것이다. 계시 의존 사색!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을 뛰어넘는 사상이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의 근본 정신이 ‘계시 의존 사색’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개혁주의 신학이 최종적인 답변일 수 없다는 뜻이다. 교회사를 전공하신 김명혁 교수는 교단 30주년 기념대회 설교에서 어떤 신학도 그 신학적 틀 자체가 완벽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 역사에 등장한 어떤 신학적 방법론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성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당연한 논리이다. 개혁신학은 그 정신이 계승되어야지 그 신학적 방법론이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 개혁주의가 살려면 칼빈도, 박윤선도 뛰어 넘어야 한다. 합신의 신학이 과거의 개혁신학적 틀에 갇혀 있으면 그것은 계시 의존 사색의 정신과 맞지 않는 일이다. 박윤선 목사님도 계시 의존 사색의 정신을 기초로 자신의 신학적 방법론을 극복하려고 평생을 애쓰신 학자이셨다. 당신의 성경신학적 이해가 최고의 신학이라는 생각을 한 순간도 품지 아니 하셨으리라. 그런데 그의 제자들 가운데 박윤선의 신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그 신학의 내용을 더욱 성경적으로 끌어올린 제자가 누구인가? 필자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시대적 상황에서 볼 때 합신을 대표하는 4인 교수들 중에서 박윤선을 뛰어넘을 사람들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존경하는 신복윤, 김명혁, 윤영탁, 박형용 교수는 박윤선과 함께 계시 의존 사색에 기초한 개혁신학의 정신과 틀거리를 우리 시대에 소개하는 것으로 그들의 사명을 다했다. 그 다음 신학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들에게 박윤선의 신학적 한계를 뛰어넘기를 기대한다. “합신에서 감히 박윤선을 비판하다니... 박윤선이 가보지 못한 신학의 영역을 넘어서다니... 무슨 일을 당하려고?” 하는 자세는 신학자들의 정당한 양심이 아니다. 그것은 결단코 박윤선의 원함도 아니다. 박윤선은 개척자일 뿐 최종적인 해답이 아니다. 합신의 신학적 치열성이 박윤선을 넘어서지 못하면 그것은 답보가 아니라 퇴보이며 거기에는 근본주의로의 회귀라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교단의 정체성이 그저 총회장 선거할 때 돈 안 쓰는 일 정도여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 교단의 정신이 급진적 청렴성(purity)에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우리 교단이 가입되어 있는 ‘한기총’이 지금 난리다. 우리 교단에서 파송한 대의원들께서 ‘우리는 돈 봉투 받은 일이 없다’고 양심선언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 교단이 존재해야 할 명분을 찾을 수는 없다. 합신은 개혁주의 신학의 끊임없는 계승 발전을 통해 이 땅에 실현되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 조직신학, 성경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의 치열한 조우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통전성을 밝히 드러내야만 한다. 필자는 합신 교수들에게 이와 같은 학문적 치열성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학자는 항상 새로운 논문을 통해 말해야 한다. 교회는 작더라도 ‘이것이 교회다’고 회자되는 역할 모델(Role Model) 교회가 우리 교단 여기저기서 일어나야 한다. 그 때 한국교회는 우리 교단을 통해 희망을 볼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신학과 목회의 만남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 교단은 한국교회에 비전을 제시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 있다. 비전은 메가처치에 있지 않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할 절박한 이유이다. 30년을 답보하고 있는 합신 신학에서 절망을 느끼지만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 박윤선의 정신이 있기에 희망을 놓지 않는다. 절대 계시 의존 사색은 성경이 완전하게 해석되어지는 것을 절대 사명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의 기초이다. 하지만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은 완성된 합창곡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과정이다. 신학자들의 분발과 겸손을 촉구한다.
356 no image "지금 우리가 도전할 새로운 인식전환"_남웅기 목사
편집부
5252 2011-05-11
"지금 우리가 도전할 새로운 인식전환" < 남웅기 목사, 바로선교회, 경북노회장 >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교단 30주년 기념대회도 은혜 중에 마쳤습니다. 혼신의 힘을 쏟아 대회를 주관해 온 준비위원 여러분들께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또한 경향각지에서 모여들어 교단 30주년의 의미를 뜨겁게 가슴에 새기며 기쁜 마음으로 돌아간 우리 교단 모든 구성원들의 자발적이고도 헌신적인 참여 또한 감동적이었음을 밝힙니다. 그런데 아무리 화려하고 엄청난 규모의 대집회였을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만 행사였을 뿐입니다. 여기서 행여 우리가 큰 행사를 잘 치러낸 것으로 교단 30주년을 온전히 기념한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정녕 우리가 기념할 것은 행사자체가 아니라 그 행사를 통한 새로운 면모일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합신의 그 근본 정체성을 재확인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의 행태가 잘못됨을 시인한다면 통렬하게 회개하고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금번 30주년 기념대회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일반적으로 사실 썩 공감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5년 전에 했는데 또 해?”라는 반응이 주류를 이룬 것은 지난 25주년대회가 성대하게 치러진 것은 맞지만 ‘이건 아닌데...?’ 하는 아쉬움이 묻어있었다는 반증 아니겠습니까? 행사 자체만으로 기념하고 끝나버린 뒤끝의 허무감이라 하겠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 중의 하나라면 돈이 아닌 그 무엇인가의 가치, 돈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의 능력과 감동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입증하는 게 곧 교회의 사명이요 영광 아니겠습니까? 목회사역도 돈이 필요하긴 하지만 돈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돈 없어서 죽겠다는 어둠의 세상에서 진정한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합신의 태동이 한국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저들이 다른 이들보다 깨끗하고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내 던진 채 오직 ‘바르게 하겠다’는 사람들 중심의 모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선 사람만큼 중요한 게 없습니다. 이는 교회가 외형적으로 커져야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 자체만을 중요하게 여기지 다른 재산과 지식과 능력여부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실 때 그의 가문과 재산을 보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만을 바라보는 약한 자를 불러주셨고 당신만을 노래하는 고독한 자를 세워주셨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은 왕궁의 모세를 사용하지 않고 광야에 버려진 모세를 사용하셨겠습니까? 합신은 그 부름 받음에서부터 이미 기득권을 버린 십자가의 길이었기에 교계의 주목을 받았던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이 벗어난 것 같습니다. 작년 총회에서는 부총회장 선거에서 미조직 교회의 어느 목회자가 부각되면서 파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용기가 대단하다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장로도 없는 교회에서 총회장은 너무 심했다. 그래도 교회가 어느 정도는 뒷받침 할 수 있어야지’ 하는 이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지금은 사태가 더 심각해졌습니다. ‘그 분이 다음에 혹시 총회장이 되면 어쩌나?’ 하며 밤잠을 못 자며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대거 생겨났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교단 창피’라니 이 무슨 해괴한 망발입니까? 그 후보자가 그간 노회나 총회에서 보인 열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다만 그 후보자가 섬기는 교회의 금전적 규모 때문이라면, 또한 교단 체통을 염려하는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면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방금 치른 30주년기념대회가 허망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든든한 배경이 아니라 충성된 사자를 세워 영광을 받습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처럼 총회의 영광과 재정적 능력을 동일시하게 되었습니까? 가난과 약함을 부끄러워하면서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를 노래할 수 있습니까? 미조직 교회의 목회자일지라도 총회장으로 선출되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정말 합신만이 할 수 있는 한국교회의 개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그렇게 우리 교단 설립 30주년을 꽃피워보지 않겠습니까?
355 no image 개혁이념과 다음 세대의 계승_김용봉 목사 (22)
편집부
4270 2011-04-20
개혁이념과 다음 세대의 계승 < 김용봉 목사, 신석교회 >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시점에서 개혁정신의 연속성 점검해야”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의 3대 개혁이념을 걸고 출발한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30년의 세월이 주는 의미는 다른 무엇보다도 처음 세대의 목회자들이 은퇴를 시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첫 세대에 대한 평가는 물론이거니와 이어지는 세대에 대한 관심이 또한 중요합니다. 이어지는 세대에서 처음의 개혁정신과 의지가 과연 연속성을 가지고 이어져 나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큰 관심입니다. 신학교 교수들의 개혁정신의 연속성, 교단 목회자들의 개혁정신의 연속성이 밝히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여러 모양으로 드러나는 다양성으로 인하여 교회의 앞날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혁정신이 퇴색되지 않았다고 해서 여전히 우리에게 소망이 남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단설립 30주년을 맞아 갈망하며 다짐하고 싶은 부분은 ① 바른 신학 곧 개혁주의 신학을 확립하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노력하여 왔는가 하는 평가와 더불어 이어지는 다음 세대를 통하여 기대를 갖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②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한 바른 교회 곧 개혁주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이어지는 세대의 목회자를 세우는 일에 대한 점검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중요한 것은 오늘의 한국교회가 겪는 부끄러운 현실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가 여기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단의 출발은 한국 교회에 대해 희망의 빛을 비추는 일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 정치의 깨끗함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선교지향적 노력의 결과라고도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신학과 설교와 목회의 변혁을 통한 평가까지는 아직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신학과 설교와 목회의 변혁을 통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바른 신학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가, 또한 바른 목회와 바른 설교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이 정말 하나님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로 자라가고 있는가 하는 점도 평가해봐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서 이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시점에서 개혁정신의 연속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죽은 후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되어버렸던 이스라엘의 역사가 우리에게 심각하게 우려되는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성도들의 입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목사님들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다’는 호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쇠퇴해지고 각종 이벤트성 행사로 나아가는데 염려스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설교하는 일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를 개혁교회 목회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이러한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도록 여전히 노력해야 하며 또 이러한 정신으로 이어지는 세대가 되도록 대비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단설립 30주년은 세대교체를 통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시점입니다. 개혁정신이 변함 없이 이어진다면 큰 기대가 되는 미래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다음 세대에서 개혁정신이 퇴색된다면 이는 매우 우려할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은퇴와 더욱 아름다운 세대교체를 잘 이루어서 우리 교단의 미래가 밝아지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354 no image ‘수쿠크법’무엇이 문제인가?_이재헌 목사 (18)
편집부
4336 2011-04-06
‘수쿠크법’무엇이 문제인가? < 이재헌 목사, 새과천교회, 총회다종교문제연구위원회 위원장 > 특정종교 아래 국가경제 종속시키는 것은 잘못 최근에 이슬람 채권인 ‘수쿠크(Sukuk)’에 조세특례를 주자는 내용의 이른바 ‘수쿠크법’이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상정되어 통과되려던 것이 무산되면서 정치권 안팎은 물론 사회 여론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수쿠크 법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간단히 정리해 보면 그것은 이슬람 율법에 의해 조성되고 운영되고 있는 재정을 그들이 요구하는 입맛에 맞도록 동의, 동조해 주고서 그 돈을 우리의 편의에 따라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슬람 율법 샤리아(Shariah)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부당이득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래서 돈을 모아 특정 사업에 투자한 뒤 수익금을 투자자들에게 이자 대신 배당금 형태로 지급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수쿠크로 불리는 이슬람채권이 바로 이 방식을 쓴다. 이슬람채권 유통구조는 자산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해 자산에서 얻는 수익금을 채권 보유자에게 돌려주는 자산담보부증권(ABS)과 비슷하다. 돈을 빌리는 차입자가 보유자산을 채권 발행자인 특수목적회사에 매각하고 그 대금을 활용하는 대신 리스료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운용된다. 투자자들은 이자 대신 특수목적회사의 수익금을 배당받고 만기가 되면 회사가 차입자에게 자산을 다시 팔아 원금을 회수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양도소득세와 취득세, 등록세, 부가가치세 등을 물어야 하는데 배당금을 늘려 주기 위해 모두 면세해주자는 것이 이슬람채권 관련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의 골자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는 이슬람채권은 샤리아위원회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는데, 이 위원회의 구성은 이슬람 종교지도자이면서 금융과 법률 전문자격을 갖춘 인물로 위원 자격을 제한하고 있으며, 이슬람율법을 해당국가의 국내법에 우선 적용하도록 요구한다는 것이다. 결국 샤리아위원회는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와 연결돼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슬람 율법은 채권 금융수입의 2.5%를 ‘자카트’란 이름으로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는데, 문제는 기부 즉시 모든 송금 내역을 파기하기 때문에 자금이 제대로 사용되는지 아니면 불순한 단체로 유입되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 돈이 불법 테러 집단으로 흘러갈지라도 아무런 제재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쿠크는 경제논리가 아닌 종교 논리에 기반을 둔 ‘금융 지하드’(그들이 말하는 거룩한 전쟁)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다. 즉 전 세계를 이슬람 제국화하기 위해 고안된 전략적 도구인 것이다. 만약 우리 국회에서 이 법안이 통과된다면 이슬람 종교법인 샤리아법에 따라 위원회를 조직해야만 하고, 그들의 돈을 사용하고 있는 단체 혹은 기업은 그 샤리아 위원회가 요구하는 것이 어떤 것이라 해도 수긍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제적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나라 경제에 이슬람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이고 우리가 이 법을 반대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더구나 과세의 형평성 차원에서 본다면 자산거래에 따르는 양도세와 등록세, 취득세 면세는 지나친 특혜인 것이 분명한데 이런 특례를 베풀면서까지 이슬람이라는 특정 종교의 영향력 아래에 국가의 경제를 종속시키겠다는 의도는 너무나 잘못된 정책인 것이 분명하다. 이런 연유로 국회의 대표적인 경제통인 이혜훈 의원은 “절대 종교적 문제가 반대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라며, 이 제도는 경제적인 혼란이 크게 우려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혜훈 의원은 “수쿠크를 채권으로 보고 임대료와 배당 등 모든 수익에 대해 세금을 면제하는 것은 과도한 특혜다”면서,“이자 수취를 금지하는 종교적 제약을 인정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우리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수쿠크 법안은 자본주의 경제논리에 역행한다는 지적이다. 지난 역사 속에서 경제통합 정책에 고개를 숙인 연후에 한일합방의 치욕의 역사가 시작된 경험을 가진 우리가 또 다시 이슬람이라는 한 종교의 강력한 권한 안에 있는 경제력에 굴복하는 역사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교회를 지키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이 문제를 위하여 기도하며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 할 것이다.
353 no image 일본 재앙이 주는 교훈_장석진 목사
편집부
4450 2011-03-23
일본 재앙이 주는 교훈 < 장석진 목사, 광주월산교회 > 재앙을 넘어 하나님의 섭리 볼 수 있어야 ‘지신 가미나리 가지 오야지’(地震·雷·火事·親父)는 일본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장 무서워하는 네 가지다. 각각 지진, 벼락, 화재, 아버지를 뜻한다. 앞의 셋은 재해인데 비해 네 번째로 등장하는 오야지는 좀 뜬금 없다. 가부장시대 주인공이 슬쩍 끼어 붙은 것일까. 오야지가 야마지(山風), 즉 태풍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렇게 되면 넷 모두가 재해를 가리킨다. 그만큼 일본인들에게 재해, 특히 자연재해는 두려운 존재였다. 자연재해가 그들의 삶 중심을 좌우했으며 이를 거스를 경우 치러야 할 몫이 적지 않았던 탓이다. 지금까지 일본인들에게 지진은 으뜸으로 두려운 것이었다. 이번 지진의 재앙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사라지게 했다. 땀이 밴 인간의 성취도, 문명의 빛나는 진전도 자연의 거대한 힘에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검은 파도에 쓸린 배와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내동댕이쳐졌고 건물들은 종잇장처럼 부서졌다. 지난 3월 11일 금요일 오후 일본 동북부를 강타한 대지진의 후폭풍은 참혹했다. ‘지신 가미나리 가지 오야지’란 표현은 이제 ‘다이지신 쓰나미 겐파쓰’(大地震·津波·原發)로 바꿔야 할 것 같다(겐파쓰는 원자력 발전소의 일본식 줄임말). 사실 대지진에 이어 제트기보다 더 빠른 속도로 들이닥친 쓰나미는 인명피해의 가장 큰 직접 원인이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가공할 파괴력으로 악마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9000여 명이 숨지고 수십만 명이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방사능 낙진은 2000㎞ 떨어진 북유럽, 중부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대지진과 쓰나미가 몰고 온 또 하나의 재앙, 후쿠시마(福島) 원전 폭발은 충격적이다. 후쿠시마 제1원전 1호기에 이어 3호기도 폭발했다. 두 차례 폭발 과정에서 200명에 가까운 이들이 방사능에 피폭됐고, 패닉 상태에 빠진 주민 21만 명이 앞 다퉈 탈출의 길에 올랐다. 지진-원전 연쇄 재난에 대한 일본인들의 방사능 오염 공포는 기존의 두려운 존재들을 웃도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대비해야 할 문제는 어떤 선진 문명으로도 대응하기 힘든 환경의 쓰나미, 금융의 쓰나미, 정보의 쓰나미, 테러의 쓰나미이다. 그리고 현대 문명의 임계점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생명의 구제이다. 생명을 구제하는 것은 돈도 권력도 아니고 바이오필리아(biophilia, 생명애), 토포필리아(topophilia, 장소애), 그리고 네오필리아(neophilia, 창조애)와 같은 이웃을 향한 선한 사마리아가 되는 사랑뿐이다. 이때 우리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고 했던 일본과 한국이 하나의 생명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생명을 자본으로 한 진정한 글로벌리즘이 검은 파도를 이기는 우리의 블루 오션이다. 일본에 있는 어떤 선교사로부터 온 편지의 일부이다. “후꾸시마의 원자력 발전소는 숨겨진 위협으로 인간들이 손을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칼이 있음을 보여 주시는 주님의 강력한 의지와도 같습니다. 이민족은 선하고 순종적인 것 같지만 바로의 불신이 무지와 완고로 점철되듯이 이 백성들도 항상 그러합니다. 주님의 긍휼과 선하심을 의지해야만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이웃과의 연대뿐만 아니라, 재앙을 넘어 보다 본질적인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섭리를 보아야 한다. 창조주 앞에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 일본의 아픔이 가슴 깊이 저며 온다.
352 no image 역사의 교훈과 우리 시대의 역할_정재선 은퇴장로
편집부
4745 2011-03-09
역사의 교훈과 우리 시대의 역할 < 정재선 은퇴장로, 남포교회 > “뼈를 깎는 각오로 진정한 개혁의 길 나서야”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성공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교회도 그런 면으로는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교회 본분을 벗어나 세상 방법이 동원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가 건전하지 못하면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기 마련이다. 빛이 어둠을 밝히지 못하고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에 쓸 것인가? 그런데 교회는 건전하다고 생각을 하지만 세상이 건전하게 봐주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연합기구나 각 교단 총회에서나 큰 교회에서 아름답지 못한 소식이 전해지므로 교회는 자연스럽게 불신을 받고, 힘을 잃게 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한국 교회 전체를 보면 절대 다수의 목회자나 성도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복음으로 사회를 섬기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럴 때일수록 교회는 더욱 뼈를 깎는 각오로 진정한 개혁의 길로 나가야 한다. 교권주의자들이 교회를 지배하고 개혁을 가로막는 세력은 일부일 것이다. 그리고 일부 교회지도자들이 영적 자만과 무사안일과 교권다툼과 세상권력과 함께 한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나아가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게 될 것이다. 우리 교단은 작은 규모에 비해 훌륭한 신학교와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요, 사명임을 알고 감사를 드린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을 볼 때 우리 교단도 분명히 개선해야 할 점이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환골탈태하는 진통을 각오하고서라도 개선해야 한다. 우리 교단에는 미자립 교회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미자립 교회 목회자들의 수고와 고난은 밖에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이제 교단차원에서 고민해야 될 줄 안다. 바울 사도가 아시아 전도 길에서 겪은 고난이 고난 속에 숨겨진 영광이라고 그렇게 넘겨서는 안 된다. 기도로 물질로 협력하든지 목회의 지혜나 전도의 교육 등 무엇으로든 협력해야 될 줄 안다. 작은 교단의 협력과 나눔과 따스함이 얼마나 큰 장점인데 지금까지 너무 소홀히 한 것 같다. 신자들도 많이 변하였다. 지식과 안목과 생활환경이 변했으므로 신앙생활이 바뀌고 있다. 그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해 주어야 될 것으로 안다. 영적으로는 끌려가서는 안되겠지만 밀어주기라도 해야 될 줄 안다. 이혼도 쉽게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교회 이적도 쉽게 한다. 사람을 키우는 일만큼 신나는 일이 없다. 교회에서는 영혼을 살리니까 더욱 그러하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양육하셨다. 부활하신 후에 디베라 호수에 오셔서 고기잡이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3년 동안이나 동행하면서 직접 가르치신 제자들을 보시고 ‘얘들아’라고 하심은 많은 뜻이 담겨 있을 줄 안다. 부활 후에 만남이니까 좀 더 멋이 있고 품위 있는 호칭, 제자들에게 용기와 명예를 더한 호칭으로 불러주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얘들아’ 하심은 어부로 되돌아갔음을 보시고 제자로 돌아오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세상 곳곳에서는 인류에게는 있어서는 안될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지구도 못 견디겠다고 몸살을 앓고 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 있는 교회일지라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건과 교훈을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다. 탕자도 아버지께로 돌아왔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신분으로 받아 주셨다. 만약 우리 교단이 제자들처럼 어부로 돌아가 있지 않나 확인하고 언제나 개혁하고 개혁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 개혁만이 우리 교단이 발전하는 길임을 명심하자.
351 no image “세상이 우리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고 있는가?”_허태성 목사 (27)
편집부
4851 2011-02-23
“세상이 우리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고 있는가?” < 허태성 목사, 강변교회 > 입춘이 지난 지 여러 날이 되었음에도 아직 봄기운은 느껴지지 않고 있다. 지난 겨울의 기록적인 한파에 이어 최근에 영동지방에 내린 1미터가 넘는 폭설의 풍경은 마치 한국이 북극지방인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정말 춘래(春來) 불이춘(不以春)이다. 봄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비단 날씨 탓만이 아닌 것 같다. 꽁꽁 얼어붙은 불신앙의 마음을 녹여 화창한 봄날 같은 주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할 한국교회의 끝 모르는 추락을 냉소하며 지켜보는 세상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이 봄이 오는 것을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했는데, 오늘 이 세상은 우리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지 않고 새해 첫 주일 아침에 ‘소망교회에서 일어난 목사 간의 폭력에 관한 이유’를 걱정하며 묻고 있다. 이는 어느 여성 개그우먼의 표현대로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다. 이를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분간을 하기조차도 힘들다. 차라리 어떤 기발한 사람이 꾸며낸 종교 풍자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는 우리나라의 국회의원들이 신사적인 토론과 각자의 양심에 따른 표결을 통하여 민주적인 방식으로 점잖게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고 입에 담기 힘든 욕설과 고성 그리고 물리적인 폭력으로 시정잡배 같은 모습을 연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자질을 얼마나 비난했던가?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 코가 석자인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더 이상 나무랄 수 없게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행히 세상 사람들이 이 사건을 망각해 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이번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 선거를 둘러싼 양심선언과 고발이 등장해서 한국교회의 타락이 어느 한 교회만의 문제가 아닌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지도자의 선정 기준이 진실한 신앙인격보다 시무하는 교회의 싸이즈와 정치적 술수가 우선시 되더니 이제는 곪을 대로 곪아터져버린 한국교회의 치부를 온 천하에 들어낸 것이다.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타락의 이야기가 얼마나 더 있는 것일까? 어쩌다가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현재의 한국교회는 알량한 세속적 힘은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거룩함을 잃어버린 것 같다. 거룩함을 잃어버린 이유는 죄인의 거룩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에 힘 좀 쓴다는 사람이, 머리 좀 굴릴 줄 안다는 인간이 주인 행세를 하고 앉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되지도 못한 자가 된 줄로 여기고 스스로를 지도자의 자리에 불법을 동원해서라도 앉아보려고 하기 때문은 아닐까? 내가 그 중에 한 사람은 아닐까? 그래서 구제역도 잡히지 않고 계속 번져가는 것은 아닐까? 무슨 방법으로 이 위기에서 벗어날 것인가?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마음을 찢으며 회개하자. 금식을 하며 통곡을 하자.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부끄러운 수치를 제하시고 은총의 봄날을 선물로 주실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이 다시 우리에게 당신 안에 있는 그 소망의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게 하자. 한국교회를 내려다보시며 마음이 너무 아프다 못해 갈갈이 찢어지셨을 예수님의 얼굴에 작은 미소를 만들어 드리자. 구제역이 물러가고 믿음과 거룩함의 새싹이 돋아나는 이 나라가 되게 하자.
350 no image 자발적 순수한 열정_홍문균 목사 (8)
편집부
4570 2011-02-09
자발적 순수한 열정 < 홍문균 목사, 주은혜교회> “사람 마음 사로잡아 목회하려는 것은 무서운 타락의 현상” 목회 현장에서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여기저기 표어를 내어 거는 것이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전도합시다! 올해는 기도하는 한 해가 됩시다! 서로 사랑하며 서로 섬깁시다. 1년에 성경을 1독 합시다! 예배에 실패하면 모든 것을 실패합니다! 우리교회 좋은 교회입니다!” 등등. 물론 교회당 안과 바깥 벽면 잘 보이는 곳에 큼지막한 플래카드에 구호들을 내어 걸고 성도들의 열심을 독려하는 노력들을 크게 잘못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도 성도들의 분발을 유도하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온 교회가 주님의 거룩하신 뜻을 합심하여 받들어 가자는 데 시비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성도들의 관심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고 늘 깨어 있는 마음을 갖도록 돕는 것은 참 좋은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유의 방법론이 성도들을 너무 유치하게 취급하는 것 같아 보인다. 어떤 세미나에서 성도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가능하면 함축된 단어로 표어를 만들어 계속 반복하여 숙지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교회가 북한 사회도 아니고, 이념 집단도 아니고, 시장터도 아닌데 계속 사람들의 마음에 충격을 주어 몰아가는 식의 목회 스타일을 받아들이기에 결코 쉽지 않다. 때로는 신앙생활에 뒷짐을 지고 한 발을 뒤로 슬그머니 빼고 관망만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그런 동기 유발의 수단들이 효과도 있겠지만 성령께서 그런 식의 유치한 방법으로 성도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울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단순히 ‘표어’를 내거는 행위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더 깊은 안쪽 내용으로 작금 우리 목회자들의 모습 가운데서 그럴듯한 ‘표어들’을 내어 걸고 성도들의 마음을 한 쪽으로 몰아 목회자의 의도대로 교회를 끌고 가고자 하는 잘못된 방법론들이 하나님의 신성한 교회 안에 판을 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정책들과 당근으로 포장된 ‘포퓰리즘식’ 방법론으로 겉모양만 보기 좋게 꾸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신들의 입지를 세워가는 정치인들처럼 교묘하게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성도들의 인기에 영합하여 자신의 목회 이상을 이루어가고자 하는 의도가 만약에 교회 안에서도 알게 모르게 자행되고 있다면 이것은 한국교회의 무서운 타락이 아닐 수 없다. “기도 중에 응답을 받은 내용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우리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교회를 향하여 이런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너무나 은혜스러운 도전이지만 과연 그것이 진정 성령께서 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도인지, 성령님과 아무 관계없는 목회자 자신의 개인 소신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일반 상식에도 걸맞지 않는 일들이 성령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주님의 사역’이라는 미명 아래 하나님의 시선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교회 안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면 이 일을 어찌해야 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음 속 사람은 ‘너나 잘 하세요’라고 외친다. 아마 필자 자신에게도 그 같은 요소들이 중심 저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목회 현장의 진정한 가치는 인간 지성이나 인간 능력의 어떤 요소들이 주가 되어 조작되고 시도되는 인위적인 방법론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가감 없이 바르게 전하는 결과로 성령께서 주도하고 역사하고 깨워주시는 신령한 방법론을 추구해야 된다. 이미 각 성도들 심령마다 임재해 계시는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친히 순수한 열정을 일으켜 주시고, 그 순수한 열정이 기초가 되어 하나님을 위한 자발적인 거룩한 헌신이 발생되어진다면 가장 힘있고, 가장 진실되고, 가장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지 않겠는가.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누군가가 보고 있기 때문도 아니고 오직 신실하신 아버지 하나님, 그 존엄하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의 부흥으로 사역자들의 마음에서 그리고 성도들의 가슴에서 용암처럼 솟아오르는 뜨겁고도 순수한 열정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복된 한 해, 그런 교회상을 주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 우리 심령에 성령의 타는 불을 붙여 자발적 순수한 열정을 일으켜 주옵소서!”
349 no image 총회농어촌부를 고민하면서_한철형 목사
편집부
4381 2011-01-19
총회농어촌부를 고민하면서 < 한철형 목사, 산성교회, 총회농어촌부장 > “교단사역 활성화 위한 상비부역량 결집하길” 유난히 추운 날씨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들 건강에 유의하셔야 하겠습니다. 농어촌부장을 연속으로 맡으면서 사모세미나를 앞두고 감회와 의견을 몇자 적어봅니다. 우리 교단은 금년에 설립 30주년을 맞이하는 때입니다. 전국목회자사모세미나가 횟수를 거듭하여 이번으로 18회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사모세미나에 열심히 참석하시고 기품 있게 시간, 시간 진행에 참여하시며 또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감도 가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총회농어촌부의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회한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정책적인 면을 몇 마디 하려 합니다. 총회의 정책위원회의 활성화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일례로 농어촌부의 사모세미나나 지도부의 중고등부 연합수련회는 우리 교단이 아직 미숙할 때에 그래도 연합성을 이루기 위하여 시작된 사업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당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업은 규모가 커지고 잘 정착되었는데 그 그릇이 준비되지 못하고 계속하여서 같은 일만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비부는 이제 상비부의 본연의 일로 한걸음 나아가야 합니다. 행사는 산하 기구를 통하여서 일구어 나가도록 틀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리매김은 상비부 자체가 하지 못하고 정책위원회에서 중장기적으로 정리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각 상비부 업무의 분할을 재고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조직을 다양화해야 합니다. 인재풀을 위하여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국가적으로도 문제입니다만 고령화는 교계에서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교단에서는 이 문제가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단 사역의 활성화를 위한 큰 변화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농어촌부를 국한하여서 보면 작금에 도시와 농촌의 이원화가 된 것을 봅니다. 과거에는 농어촌교회를 통하여 도시 목회자가 충원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농어촌교회에서 목회하는 담임목사의 당해 교회에서의 경력이 평균 10년 이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고착화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특별한 외적 변화(교회성장)를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결국은 개 교회의 고립으로 이어집니다. 농어촌에서의 10년, 20년 목회에 외형적인 성장 없이 지내고 나면 그 내적 상처가 어떨까 쉽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미 중견목회자가 된 다음에는 같은 동역자라도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때에 ‘증경총회장단’이 아니라 ‘은퇴목사회’가 구성되어서 교단 산하 지방의 교회들을 순회하며 기도회 또는 지역전도단으로 섬길 수 있다면 신바람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대접받는 원로가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알아주고 목회 노하우를 가진 전도자로서 지역 전도에 함께 한다면 대단한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더 욕심을 낸다면 인재풀에 성도들과의 연계성입니다. 몇몇 교회들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예배당에 비가 새고 수리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가장 마음이 아픈 소식이기도 합니다. 농어촌부로서는 재정적인 여력이 없으므로 아예 손을 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농어촌교회에 청년 몇 명이 있어서 마음먹으면 바로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할텐데 시작을 못합니다. 재정적인 면보다는 그 작은 동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도 헤비타트운동(사랑의 집짓기 운동) 같은 경우 많은 결실을 하고 있는데 농어촌부와 도시교회의 농활사역이 연계되면 농어촌교회에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큰 재정적인 후원 없이도 성도들 인재풀을 통하여 사역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물론 이미 개교회적으로는 섬기고 있는 일들이기도 합니다만 보다 더 조직적이고도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다. 작은 교단이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도 많지만 작기 때문에 시도할 수 있는 일들도 많을 것입니다. 목회자 중심이 아니라 교회 살리는 운동들이 일어나고, 재능 기부도 일어나고, 보도기관인 개혁신보가 이런 사역을 많이 다루어 줄 때 우리 교단이 살아있는 교단으로 서게 되고 공감대가 형성되는 활성화가 되지 않겠는가 기대해 봅니다. 농어촌목회자들의 호구지책을 위하는 것 같은 생각들은 농어촌목회자들에게는 심히 민망한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농어촌교회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누리고 이웃 동네에 보여주는 것을 더 원합니다. 그동안 힘이 없어 못했으면서도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겨져서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348 no image 매개물을 거두라_나종천 목사
편집부
4163 2011-01-05
매개물을 거두라 < 나종천 목사, 한사랑교회 > “매개물이 있는 한 하나님은 작게 보이기 마련” 교수신문은 지난 2010년 사자성어를 ‘장두노미’(藏頭露尾)로 결정했다. 기던 타조가 급한 나머지 덤불 속에 머리만 숨긴 채 꼬리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이 말은, 이미 그 실상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진실을 감추려 하는 세태를 풍자하는 말이라 한다. 이 사자성어가 오늘 우리 조국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든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속에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강화시켜주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들을 통치하고 힘겹게 하는 장소로 그 의미가 굳어져갔다. 제사장들은 종교세, 인구세 등 막대한 세금을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이는데 관심의 큰 부분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중요 정책 중 하나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매개물들을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너희 백성들의 제사를 직접 받아 주시지 않으신다.” “우리 제사장들을 통해야만 한다.” “너희들이 제사용으로 밖에서 사온 비둘기는 인정할 수 없다.” “우리가 파는 비둘기라야 한다.” “너희들의 편의를 생각해서 흠 없는 비둘기만 성전에서 팔 테니, 편하게 성전에서 사서 그걸 바치면 된다.” 물론 그 값은 밖에서 사는 것보다 네 배 이상 비싼 것이었다. 돈도 미리 바꾸어 내야 했다. 이런 것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백성들의 어깨를 누른 몇몇 예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이렇듯 수많은 방식으로 백성들의 가는 허리를 조른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의 제사장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기구, 종교의식을 신비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어 놓고 백성들의 의식속에서 그 조작된 신비가 깊이 침투에 들어가 백성들이 이를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도록 여러 가지 방법들을 고안했다. 이런 성전에 예수님이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결케 하셨다. 성전 정결 사건은 성전에서 상업 행위를 금지시킨 것만이 결코 아니다. 마가는 당시 모습을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막 11: 16)라며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물건이란 제사용 물건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즉 성전의 제사적 기능을 중단시켰다는 것이다. 성전의 상업적, 경제적 기능을 중단시켰을 뿐 아니라 그 종교적 기능까지도 중단시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은 그런 제사용 물건들의 사용 없이도 만민이 누구나 자유롭게 기도드릴 수 있는 집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그들에게 괴롬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삶의 본래적인 의미와 참 신앙의 기회가 회복되고, 제공되는 사건이었다. 이 천년 전에 일어났던 이 이야기는 여전히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의미가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틈엔가 우리는 또 다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많은 매개물들을 만들어 놓았다. 함께 모이는 행위 자체가 교회인데 ‘건물’이 교회인줄 알고 자꾸 건물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매개물들이 교회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 모른다. 예수의 죽음과 함께 찢어졌던 그 커튼이 어느 틈엔가 슬슬 다시 꿰매어지기 시작한 종교 현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심정이 든다. 매개물이 있는 한 매개물만 크게 보일 뿐 하나님은 작게 보이거나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바라기는 오늘의 상업화되어 가고 있는 종교현실에서 매개물들이 중요하게 부각되려 할 때마다 더구나 그것이 교리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를 막으려할 때 그것들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우리는 그것들을 단호하게 거부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 구상 선생과 몇몇 사람들이 앉아서 식사를 할 때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 정말 세상이 온통 어둡습니다. 온통 흙탕물입니다. 이럴 때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구상 선생님이 대답하시기를 “크리스천으로 맑은 물을 계속 흘러 보내어야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또 물었다. “선생님, 온 세상이 흙탕물인데 크리스천이 물 몇 방울을 보낸다고 이 세상이 맑아지겠습니까?” 이 반론에 대한 구상 선생의 대답은 “그래도 크리스천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세상이 악하다고 비관하거나 비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로 진정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크리스천답게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우리 앞에 남겨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347 no image 성탄절기에 대한 단상_이승구 목사 (159)
편집부
7090 2010-12-22
성탄절기에 대한 단상 < 이승구 목사, 합신 교수 > ‘크리스마스’란 그리스도에게 예배한다는 뜻 성탄절을 보낸다는 것은 성자(聖子) 하나님께서 인성(人性)을 취하시어 이 세상에 구속사적(救贖史的)으로 임하신 일을 기념하는 일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은 주님께서 정확히 어느 날 이 세상에 태어나셨는지 알지 못한다. 성경이 그 정보를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주는 것에 대해서만 100%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다른 것들은 성경의 계시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추론해 가는 작업을 할 수 있고, 성경 계시의 빛에서 자연의 책을 바라보고, 또한 그로부터 바르게 추론하는 내용들이 바른 학문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보내면서 우리 주님께서 이 날 태어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날에 주님의 성탄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로마 시대에 태양신을 기념하던 이교적 절기에 교회는 태양이 신(神)이 아니며 우리 주님만이 하나님이시고 영적인 의미로 진정한 태양이심을 증언하면서 지키기 시작한 것이 크리스마스(Christ-mas)의 기원이 되었다. 이 말은 그리스도에게 예배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크리스마스는 이교(異敎) 나라였던 로마에서 기독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생긴 절기이다. 이전에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는 더 이상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성탄절인 크리스마스가 된 것이다. 종교개혁시기부터, 특히 청교도들은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천주교적 미신을 일소(一宵)하는 의미에서 성탄절을 절기로 지키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날에 어떤 적극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청교도들의 이런 태도를 존중해야 한다. 반면에 이 날에 우리 주님의 탄생 사실 자체를 기념하는 일을 비판하거나 제거해야만 한다고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주께서 언제 탄생하셨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12월 25이나 24일 저녁에 태어나셨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히 하면서, 우리 주님의 성육신을 깊이 있게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바르게 생각되는 성탄절이란 이 날에 우리 주께서 탄생하셨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사실을 생각하며 기념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주님의 성육신(成肉身)의 참된 의미를 바르게 생각하는 데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하였기에 주님께서 성육신하여 대리속죄(代理贖罪)의 죽음으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정도이며, 이와 같이 심각한 죄 문제 때문에 주께서 성육신하셨다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사실을 주의 깊게 생각하게 된다. 이런 성육신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성탄절이라면 참으로 무의미한 날이다. 또한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알릴 수 있다면 그것은 이 날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 진정한 의미 없이 이 절기를 보내는 데에 익숙해졌지만 이 기회를 이용해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성탄절 즈음에 믿지 않는 이웃과 친구들을 교회당으로 초대하여 좋은 음악을 들려주면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또한 어떻게 이 기회를 사용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왕 모든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이 절기를 이용해서 ① 그리스도인들로서는 그리스도의 오심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②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성탄의 참된 의미를 전하는 기회로 삼으며, ③ 그리스도의 정신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 참 사랑을 표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 성탄의 절기에 사랑의 실천을 연습하는 좋은 기회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 자세를 다잡기를 바란다.
346 no image 흐르는 강물처럼_변세권 목사
편집부
4168 2010-12-15
흐르는 강물처럼 < 변세권목사, 온유한교회, 강원노회장 > “좌절, 절망, 실패도 자연스런 삶의 훈련 과정” 지난 여름에는 기록적인 비와 폭우가 자주 내려서인지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신의 충실한 사도로 인간은 죄인이지만 은총을 통해 신의 리듬을 회복한다고 믿는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가 두 아들들과 함께 긴 낚시대를 가지고 강으로 향한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낚시를 통해 삶의 인내와 여유 그리고 예술을 터득하게 된다. 낚시는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창조적 활동이었으며 인생의 이정표이자 자신의 내적 성숙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때로 자기가 잡은 고기보다 크기가 작지만 아이들이 잡은 고기를 보면서 “둘 다 놀랍구나!”하며 두 아들들에게 가능성을 보여주며 이들을 배려해주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성장한 그 형제들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남에게 기회와 가능성을 부여해주는 여유와 배려를 잃지 않는다. 작가 파울로 코엘류도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깊은 밤을 흐르는 한 줄기 강물처럼 두려움도 슬픔도 없이 지나가라. 마침내 바다에 다다를 때까지”라고 인생의 흐름을 노래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무슨 큰 일을 하고 싶어 하시지도 않고 역사에 남을 인물을 만들고 싶은 생각도 없으시다.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최소한 신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먼저 혈육 앞에서 그리고 이웃 앞에서 섬기는 자가 되며, 병든 자 앞에서 유일한 답을 가진 자로 서 있기를 요구하신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일종의 변명거리만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나에게 건강이 조금 더 있었다면, 돈이 조금 더 있었다면, 누가 조금만 더 보살펴준다면 괜찮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억울함 속에 스스로 가둬두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말씀을 듣는 대로 하나님 앞에 보냄을 받은 그 환경, 그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맡겨진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다. 흐르는 강물에는 자연과 인간의 호흡, 젊은 날의 격정과 추억, 삶의 회한, 인생의 관조 등이 농축되어 있다. 작가 신경숙씨는 “우리는 내가 어느 지점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건 간에 그 지나간 것들은 오늘 여기까지로 오는 길이었으며 여기 내 앞에 놓여있는 이 시간 또한 10년이나 20년 뒤 짐작도 못하는 그 시간들로 가는 길이라는 당연한 이 사실을 이제야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시인 장 루슬로는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어서는 안 된다. 풀과 돌, 새와 바람 그리고 대지 위에 모든 것들처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너무 늦을 때까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 자신에게 있어서도 유유하게 때로는 굽이쳐 흐르는 강물처럼 지켜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성공과 승리와 형통이든 아니면 좌절과 절망과 실패이든 그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과 훈련인 것으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며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는 자기 자신이 수퍼맨처럼 모든 면에서 초능력자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진정 하나님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345 no image 위기는 또 다른 도약 위한 준비_장창수 목사
편집부
4337 2010-12-08
위기는 또 다른 도약 위한 준비 < 장창수 목사, PMS 선교사 > 물은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다른 형태로 바뀌려면 외부의 물리적인 압력에 의해 물의 분자 구조가 깨져야 한다. 이 임계점(臨界點)에서 고체는 기체로, 기체는 액체로 그리고 액체는 고체로 변화한다. 이 임계점에 이르기까지 물리적인 압력, 즉 온도의 상승 또는 하강은 계속된다. 이것을 가리켜 문리적 용어로 ‘혼란의 가장자리’라고 말한다. 오늘의 대한민국도 이처럼 혼란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은 연평도를 포격함으로 대한민국을 공격했다. 신문도 대한민국이 공격을 당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전쟁 상태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대책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보복 공격을 하자니 확전(擴戰)으로 이어질까 걱정이다. 잘 나가는 대한민국 경제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북한은 이를 이용하여 간간이 대한민국의 신경을 건드렸다. 모든 면에서 훨씬 앞서가고 경제 규모가 훨씬 큰 대한민국이 조그만 북한의 손안에서 농락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고 유화 정책을 쓰자니 너무나 나약한 정권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이래도 저래도 대안이 마땅치 않다. 사실 그동안 북한이라는 물리적인 압력은 점점 더 커져 갔지만 대한민국은 평화 무드에 젖어 변화에 대비하지 않았다. 그동안 새로운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었지만 대한민국은 이에 소홀했고 지금은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지금의 문제를 정치적 차원에서만 볼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한민국이 처한 혼란의 가장자리는 한국 교회로 하여금 정치 현상 넘어 하나님을 보도록 유도한다. 교회의 머리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가야 할 이유이다. 인간의 힘과 능력과 지혜로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통치자인 이명박 대통령은 장로교 신자이며 국회의원들의 35% 이상이 기독교 신자들이며 그리고 대한민국에는 700만을 상회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있다. 또한 대한민국은 작은 나라이지만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전세계로 파송했다. 무신론 국가인 북한과 비교한다면 대한민국은 기독교 국가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참 마음으로 회개하고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우리의 힘으로 이 위기를 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신론 나라인 북한이 아시아에서 가장 기독교 활동이 왕성한 대한민국을 이기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다. 한국 교회가 그동안의 잘못을 진실로 회개하지 않고 기독교 교세나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믿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외형을 보지 않고 회개하는 마음의 동기를 보고 은총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하여 한국 교회는 인본주의적인 흐름을 완전히 차단시키고 교회 개혁에 돌입하여야 한다. 한국민과 교회는 그 동안 북한을 6.25라는 민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원수처럼 보았다. 그러나 이제부터 북한이라는 존재를 한국 교회는 달리 보아야 한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야 하며 향후 교회 개혁에 힘써야 한다.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던 평양이 하루아침에 공산주의 통치 아래 떨어진 것처럼 하나님의 징계로 민족이 하루아침에 멸망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이라는 두 사건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대한민국이 훨씬 그리고 너무나 허술한 나라였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동안의 경제 번영과 그로 인한 만족과 자만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기강이 전반적으로 해이해졌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하지만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민족적인 위기를 만났지만 이를 잘 극복한다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위기는 전화위복이라는 위대한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수 있느냐 여부는 한국 교회의 회개와 개혁 의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제라도 한국 교회는 민족을 위해서도 회개하여야 하며 교회 개혁을 도모해야 한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민족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며 도움을 간절히 구해야 할 것이다.
344 no image 정보사회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_박성호 목사
편집부
4985 2010-11-24
정보사회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 < 박성호 목사, 푸른초장교회, 총회부서기 > “진리의 말씀에 진력하는 자세 더욱 절실해” 인터넷과 매스컴의 발달로 우리는 지금 정보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만 치면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고, 필요한 것도 다 찾을 수 있는 편리함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정보는 재화이자 권력이자 존재의 가치를 갖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확실성’이나 ‘필연성’에 의거하지 못하고 ‘개연성’과 ‘그럴 듯함’과 그리고 ‘편협적’인 정보에 근거하여 판단을 내릴 때가 많다. 또는 정보를 전달할 때 큰 실수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수도 있다. 실제적으로 한번 실험해보자. 당신은 아래의 A, B, C와 같은 3 후보자 중에 위대한 지도자로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후보 A : 부패한 정치인들과 결탁한 적이 있고, 점성술을 가지고 결정을 하며, 두 명의 부인이 있고, 줄담배를 피우고, 하루에 8내지 10잔의 술(마티니)을 마신다. 후보 B : 두 번이나 회사에서 해고된 적이 있으며, 정오까지 잠을 자고, 대학시절 마약을 복용한 적도 있고, 매일 위스키 4분의 1병을 마신다. 후보 C : 전쟁 영웅이다. 채식가였으며 담배도 안 피우고 경우에 따라 맥주를 가끔 마신다. 불륜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 이상의 정보만 가지고 뽑는다면 당연히 C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3 후보자의 이름을 밝힌다면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다. 후보 A는 프랭클린 D.루즈벨트이고, 후보 B는 윈스턴 처칠이며, 후보 C는 아돌프 히틀러이다. 우리의 일상 생활과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연관된 정보의 대부분은 사실 미디어를 통해 얻는다. 드라마와 같이 계획된 연출을 통해 가상의 내용을 보여주는 픽션 장르와는 달리 뉴스, 신문 기사 등과 같은 사실적인 장르는 실제의 사실을 다루고 있다는 인식을 우리는 잠재적으로 하고 있다. 또한 그 모든 정보가 왜곡 없는 실재의 반영일 것이라고 쉽게 믿게 되는 경향이 있다. 즉 제공되는 현실의 내용이나 형식 문장 구조 등이 구성된 것임에도 실재의 반영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미디어를 통해 매개된 간접 정보로 구성된 제2차 현실의 세상이라고 한다. 즉 왜곡되고 조작되는 이미지가 그 이미지의 근원인 실체보다 더 위력을 가지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의 홍수와 상징 조작의 일상화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인식과 판단에 대해 참과 거짓을 확신하기가 그만큼 어렵게 된 것이다. 얼마 전 명문 스탠포드대학을 나온 연예인이 편협적이고 조작된 정보로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엄청난 고통을 겪었고 연예 활동을 중단할 정도로 생매장 될 위기를 겪었다. 다행히 모 방송국의 스탠포드 대학의 현지 방문 취재로 누명은 벗겨졌지만 그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으며 아직도 계속 그대로 믿고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다. 필자도 왜곡된 정보 때문에 동일한 고통과 피해를 받은 적이 있기에 그 고통과 후유증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다. 잘못된 정보나 편협적인 정보를 가지고 쉽게 말하거나 글을 쓸 때 회복되기 어려운 엄청난 피해를 입는 자가 있음을 기억하자.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내가 아는 정보로 남을 쉽게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말자. 진실 같이 보여도 진실이 아닌 것도 있으며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가 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나타난 외형으로만 판단하지 말자. 참된 진리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믿을 것이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진리의 말씀을 붙잡기를 힘쓰는 삶이 되기를 힘써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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