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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1569
2017.05.10 (11:32:21)

새 정권의 과제


 

   유례없는 국정농단 사건과 대통령 탄핵으로 지난 반년 동안 국민이 된몸살을 앓았고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그래도 이만한 질서와 성숙한 민주의식을 갖고 변혁의 소용돌이를 잘 헤쳐 나온 국민들의 모습은 칭찬 받을 만하다. 그렇다면 새 정권의 과제는 무엇일까?


   월간중앙과 타임리서치가 실시한 제19대 대통령 선거와 관련한 412일자 여론 조사를 보면 우리 국민의 55.8%적폐 청산과 사회 개혁, 37.4%갈등 치유와 국민 통합이 중요하다고 봤다. 또한 새 정권의 우선 과제에 대해 국민일보와 지앤컴리서치가 실시한 314일자 교회와 사회 개혁을 위한 성도 및 목회자 여론 조사결과 성도들은 투명, 공정성 회복, 물가 안정과 경제 성장,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목회자들은 국민 통합과 정치 경제의 안정과 투명, 공정 사회를 바랐다.


   이를 종합하면 교인들 및 전 국민은 우리 사회가 여러 면에서 새롭게 변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원론적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개혁과 생명과 화목이라는 관점에서 요약하여 새 정권의 과제로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진정한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개혁의 동력은 투명성과 공정성에 있다. 대통령과 모든 공직자들이 청렴 정직하며 겸허하게 국민을 섬기는 태도를 재정돈해야 한다. 국민들이 위임한 권력을 남용할 때 최순실 사건과 같은 역사의 오점을 남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은밀한 패권이나 농단 세력이 없이 정책 시행과 인사 등용에서 차별을 없애고 법적 질서의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 법원과 검찰을 비롯한 권력 기관들을 개혁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며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던 일부의 작태를 원천 차단해야 한다. 또한 단기간의 성과를 욕심내기보다 시행착오를 겪고 조금 더디더라도 미래지향적이며 내실이 있는 통치와 행정을 펼치기를 바란다.


   둘째,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로 만들어 가야 한다. 생명의 존엄성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다. 먹을거리와 교통, 방역 등의 국가 안전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 정책과 시행령이 되도록 전반적, 세부적으로 손질해야 한다. 그래서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와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원전과 생태 환경 문제 등도 국민의 생명 보호를 중심으로 해결에 최선을 다하고 개발 위주의 정책들을 신중히 재고하고 정돈해야 한다

 

   노동 환경도 마찬가지이다. 2016815일 발표된 OECD‘2016 고용 동향에 따르면 취업자 1인당 연 평균 노동 시간이 멕시코 2246시간 한국 2113시간 미국이 1790시간 일본이 1719시간이라 한다. 한국은 OECD 회원국 34개국 평균(1766시간)보다 347시간이나 많았다. 이제는 경제 발전의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민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라도 노동 시간 단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노동 시간과 환경의 조속한 개선이 더더욱 필요한 이유는 이것이 인권과 삶의 질의 문제이며 만혼과 저출산 그리고 교육 등 최근의 사회적 문제들과도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화목한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대선 기간의 갈등을 포함한 계층 간, 세대 간, 지역 간의 갈등을 치유하고 사회 통합의 가시적 정책과 조치들이 조속히 시행되어야 한다. 탕평책과 같은 산술적 통합은 물론, 가장 문제시되는 양극화로 인한 불화와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위한 특단의 정책이 필요하다. 저소득 소외 계층의 복지, 청년 실업, 부익부 빈익빈은 지속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이다. 또한 이번 선거에선 많이 희석되었지만 여전한 지역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권이 습관적으로 공약해 온 지방의 균형적 발전이 속히 실천되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에 남북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가시적 활동들이 필요하다. 북한의 핵 위협과 미국이 주도한 한국 내 사드 배치 등의 일련의 조치들로 강대국들이 얽혀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굳건한 안보는 두말할 나위 없이 당연하다. 하지만 남북 대화의 여지를 없애 버리고 대치 상태만 지속하는 것도 옳지 않다

 

   지난 423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발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새 정권의 대북 정책 방향과 관련해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68.6%였고 북한에 강경한 대응으로 나가야 한다는 응답은 26.5%였다. 여론에 나타나듯이 다수 국민들은 가급적 평화로운 남북 관계를 원하고 있다


   힘의 우위를 통한 안보 태세를 갖추어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주체가 되어 다각적 외교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필요하다. 북한이 스스로 핵을 포기하고 평화적인 자세로 나오도록 채널을 열어 두고 관련국들의 협조 속에 부단히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이런 자주적 노력이 없이는 우리가 소외된 채 당사국들의 이해타산에 끌려 다니는 형국이 되고 남북 갈등은 더 깊어지고 말 것이다.


   새 정권의 과제를 제시했지만 사실 이는 어느 정권이든 지속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들이다. 정직하고 겸허한 자세로 차근차근 성실하게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나가면서 바르게 개혁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화목한 사회를 지향하는 새 정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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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 no image 성탄의 시선으로 한 해를 돌아보자
편집부
1113 2017-12-20
성탄의 시선으로 한 해를 돌아보자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벌써 종착점에 다가섰다. 올해는 특별히 정치 분야에서 급격한 변화가 두드러지고 그 저변에서 사회의식의 심층적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으로서 또 교회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와 관련하여 성탄절은 한 해를 조망하기에 적합한 신앙적 관점을 제공한다. 성탄은 역사의 주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가르쳐 준다. 그것을 알 때 역사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적용할 수 있다. 구세주의 탄생은 하나님의 구원이 선물로 주어지고, 더불어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도래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탄의 관점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안을 선택적으로 짚어 봄으로 한 해를 돌이켜 보는 거점을 삼을 것이다. 먼저 한국교회는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사실을 뜻깊게 받아들였다. 성도들은 이전 한국기독교 100주년 때에 그랬던 것처럼 500주년을 전기 삼아 기독교의 근본으로 돌아가서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를 염원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의미 있는 내적, 외적 변화와 진전을 보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일부 대형교회는 대형교회대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개척교회는 개척교회대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교회 분열과 이단 문제는 복음의 증언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개혁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이요 교회가 힘써야할 항구적인 과제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역사의 주인이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때문에 날마다 새로워지는 믿음으로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는 구원 이후 성화의 삶, 곧 성숙과 경건의 과제를 안고 있다. 이 과제를 지나치게 개별적인 과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세워 주신 교회의 공통된 특권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사회, 종교적 함의를 수반하는 정치적 격변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지난 해 후반기에 불거진 국정농단으로 촛불집회가 이어진 끝에 국회의 가결과 헌재의 인용 판결을 거쳐 현직 대통령이 탄핵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연이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긴 안목으로 볼 때 문제의 발생 과정에서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했는지 묻게 된다. 사실 목사 안수 등 한국교회의 구조적 취약점이 이러한 사태를 막지 못한 측면도 있다. 기독교 신앙의 공공성 문제도 제기된다. 신뢰받는 시민으로, 개혁의 주체로 살아가는 일에 사회를 변혁시키는 기독교 신앙의 힘이 드러났어야 했다. 복음은 영혼 구원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전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창조의 온전한 회복을 포함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문화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변혁적 삶을 살아가야 한다. 특히 동성애 규정 등이 포함된 차별금지법은 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중대한 문제이다. 헌법 개정 논의에도 주요 쟁점으로 부상한 이 주제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기존의 사회문화적 통념에만 의지하는 것은 부족하다. 교회는, 한편으로는 창조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사회의 복지에 유익한 것임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법의 논리와 통상적인 언어로 대중을 설득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문제가 “국민 정서와 국가 발전을 위해서도 맞지 않고 사회적 폐해가 꾸준히 증가”하는 측면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차별금지 자체는 평등한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지만, 마땅히 나뉘어야 할 자연 질서에 속한 구별을 부당한 차별로 규정하여 이를 철폐하는 쪽으로 나아갈 때 결국 마주하게 될 인간과 사회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한국교회는 편향적인 언론 보도, 법제화와 관련하여 불리한 정치적 지형 등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창조 질서를 유지함으로 건강한 사회 발전을 도모하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단과 신학교의 사명에 관한 일이다. 수년 전부터 본격화된 신학교 지원자의 감소는 거의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합신의 이번 입시 경쟁률이 M.Div 일반전형 기준 1.7 대 1을 기록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여 교회가 요청하는 말씀의 사역자들을 꾸준하게 배출하는 신학교로 우뚝 서기를 바란다. 이러한 고무적인 현상은 신학교가 교단 안팎에서 신학교육에 대해 신임을 받고 있다는 하나의 시그널로 해석해도 무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합신 교단도 규모는 작지만 여러 면에서 한국교회의 기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신호들은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위하여 우리 교단과 신학교에게 사명을 주신 줄로 알고 더욱 겸손히 한국교회에 소망의 빛을 비추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성탄은 육신을 입으시고 역사의 한복판으로 오신 주님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때이다. 성탄의 정신에 따라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성탄으로 인해 우리는 물리적인 시간(chronos)의 흐름 가운데 구속의 시간(kairos)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은총은 교회의 상태와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원으로부터, 삼위 하나님의 변치 않는 언약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구속의 역사가 일반역사 가운데 중단 없이 진행되어가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나라를 견인하는 구속사의 진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710 no image 개혁교회의 12월은 따뜻한가?
편집부
1116 2017-12-06
개혁교회의 12월은 따뜻한가? 12월이면 구세군과 여타의 자선활동들이 사랑의 온도계를 작동시킨다. 우리 개혁교회는 온도를 얼마나 높이고 있는가? 개혁교회일수록 이웃을 섬기는 따뜻한 구제와 사회봉사에 풍성하기를 바란다. 근자에 영화화된 서서평 선교사의 감동 깊은 일화도 있지만 사람들이 기독교를 가장 친근히 여길 때는 소외된 자들이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고 병들 때 고쳐 주는 그 순간일 것이다. 기독교회의 구제와 사회봉사는 구약적 배경은 물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의 일치에 대한 역설(약2:14-17)로 보강되어 초대교회의 구제 활동의 모범을 통해 정립이 되었다. 초대교회 때는 매우 구체적인 구제가 시행되었다. 특히 집사직이 나타난 발단은 과부들에 대한 보호 및 빈민 구제의 일을 맡기기 위함이었다. 야고보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고 했다. 세속이란 무엇인가? 하나님나라의 본래적 가치에 반하는 세상의 가치관이다. 세상의 가치에 물들지 말라는 것은 전 영역에 걸친 권고이다. 그것은 물질에 대한 집착과 탐욕에 관해서도 동일하다. 초대교회는 ‘가난한 자들’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든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당연히 구제하는 교회였다. 그런데 교회가 세력을 얻고 국가가 확립되자 이런 구제 활동을 국가에 위임해 버렸다. 그 결과 교회 내의 구제 사업은 감소하고 국가 재산의 7-8할이 교회에 귀속되어 그 재정이 증가했음에도 교회는 오히려 타락의 길을 걸었다. 구제는 마침내 자기 의를 드러내려는 바리새인적 허세가 돼 버렸다. 그래서 아씨시의 프란시스의 경우처럼 청빈을 실천하는 간헐적 노력 외에는 중세는 캄캄했던 것이다. 그러다 종교개혁이 일어나 빈자를 돌보기 위한 집사직이 회복되면서 교회의 재정 집행은 다시 빈자 구제를 원칙으로 하게 되었다. 이는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교회 밖으로 확대 진행되었다. 루터교는 빈자 구제만을 목표로 따로 모금함을 만들었고 산모, 병자 보호와 교육 문제에까지도 관심을 기울였다. 칼빈도 빈민 구제를 사도적 의무로 책정했다. 칼빈의 종교개혁 직후 제네바에 일반 병원과 함께 구빈원이 설립되었다. 1541년의 법령에는 시가 고용한 의사들은 병원을 돌볼 뿐 아니라 다른 가난한 자들을 돕도록 규정해 놓았다. 제네바대학 경제학자 앙드레 비엘러에 의하면 칼빈과 그의 동역자들은 매우 검소하게 살았고 심지어 그들의 생활은 궁핍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는 중세적 금욕주의와는 다른 물질에 대한 개혁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각성에 기인한다. 그런 중에도 그들은 구빈에 관심을 기울여 물품이나 기부금을 거두려고 애썼는데 1545년 프로방스의 신도들이 대량학살 당한 후 칼빈은 스스로 연맹을 조직하여 피난민들이 가득한 복도를 비집고 다니며 기부금을 얻어냈다고 한다. 칼빈은 디모데전서 설교(6:17-19)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 이웃을 위해 헌신하기를 바라신다.”고 했다. 또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은 우리가 각자의 재력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궁핍한 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 자연의 균형을 권고하시므로 풍요로운 자도 있을 수 없으며 부족한 자도 있을 수 없다”(고후 8:13주석).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따르는 개혁교회는 그 사회의 경제정책에도 관심을 두고 정당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한다. 생존권을 보장하는 분배가 창조질서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교회의 구제 활동은 성도들을 돕는 데서부터 지역사회로 확대되어야 한다. 구조적으로 늘 가난할 수밖에 없고 장애인이라서 영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해 교회 곧 신자들은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주님께서 물질을 주시는 목적이다. 누구든 나보다 가난한 자를 돌볼 책임을 느껴야 한다. 한국교회도 간헐적으로 선심 쓰듯하는 구제가 아니라 계획과 예산의 대책을 세워 지속적으로 행하는 구제를 지향해야 한다. 한 해가 저무는 12월, 성탄절이 다가온다. 우리만의 구원론을 또 다시 다지고 기뻐하기만 하는 절기일 것인가? 개혁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항상 있을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위한 가시적 구제와 봉사에도 힘써야 한다. 액수나 규모가 얼마가 됐든, 부득불 표나게 하든 조용히 하든 우리들의 교회는 이웃을 위해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지금까지 잘해 왔다면 좋은 일이다. 더 많이 그렇게 하도록 하자. 그래서 다시 묻는다. 개혁교회의 12월은 따뜻한가? 아니, 고쳐서 묻는다. 개혁교회의 열두 달은 따뜻한가?
709 no image 객원기자들의 활약을 기대한다
편집부
1076 2017-11-22
객원기자들의 활약을 기대한다 객원기자(客員記者)의 본의는 ‘특정 언론사에 소속되지 않고 외부에서 기사를 취재하여 쓰거나 편집하여 기고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기독교개혁신보의 정식 직원은 아니지만 각 노회를 대표하여 노회와 관련된 소식을 전하고 네트워크를 통해 소통하는 일에 협력하는 기자를 말한다. 본보에도 오래 전 객원기자가 활동하던 시절이 있긴 했다. 이번에 시대적 요구로 다시 이를 활성화하기 위해 각 노회의 추천을 받아 대대적으로 임명하였다. 몇 노회들이 사정상 아직 객원기자를 추천하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하지만 이미 임명된 기자들이 즉시 활동에 들어갔음은 모두가 축하하고 격려할 일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객원기자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신문사마다 객원기자를 두는 것은 약점의 보완을 위함이다. 정기자들이 빠지기 쉬운 매너리즘을 극복하며 그들이 힘에 부쳐 다룰 수 없고 볼 수 없는 사각지대, 그리고 놓칠 수 있는 광범위한 스토리들을 다양한 각도와 색깔로 소개하고 함께 그 감동을 나누려는 것이다. 그동안 본보는 편집국장 1인, 취재부장 1인, 편집기자 1인이 그 많은 정보들을 다루며 기사를 쓰고 원고를 수집하고 편집해야 하는 운영체제로 어려움이 있어 왔다. 그 내막이야 알다시피 일꾼을 많이 쓰지 못하는 재정적 형편에 크게 기인하지만, 특별히 교단, 교계, 종합 소식에 있어서 취재부장 1인이 정보를 모아 전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어떤 것은 다루고 어떤 것은 다루지 못하는 기사 작성상의 편중성의 논란도 배제할 수 없었다. 취재부장 혼자 성심껏 수고로이 폭넓은 취재와 기사 작성을 위해 노력해도 그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먼 지방의 소식을 전하려면 아무래도 운신이 어렵고 정보의 정확성을 담보할 수 없는 가능성도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좀 더 생생한 기사를 위해서 해당 노회의 생활권에 있는 객원기자들의 활동이 그런 약점들을 보완하며 많은 도움이 되리라 본다. 객원기자 본인이 다양한 원고를 쓰고 뉴스가 될 만한 일들을 기사로 작성하여 소개할 뿐 아니라 노회의 목회자나 성도들 중 새로운 필자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며 좋은 글들이 지속적으로 게재될 수 있도록 협력하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은 일꾼인 셈이다. 이로써 무엇보다 크고 작은 오류가 줄어들고 편중성의 오해도 불식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렇게 되면 신문 내용의 상투성 또한 상당히 많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며 정보는 더욱 생명력과 정확성을 갖게 될 것이다. 교단적인 큰 덩어리의 행사나 사건, 그리고 한국교회와 사회가 직면한 공동의 사안들을 교단의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은 덤이라 하겠다. 신문의 신선감은 숨은 필자들과 잠재적 필자들의 발굴과 양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양한 필자가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간다. 그러므로 객원기자들을 통한 정보의 다양성, 숨은 스토리와 필자의 발굴은 신문의 감동과 공익성을 담보해 줄 것이고 교단의 외연과 시야의 확장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소통이 주제인 시대적 요구에도 잘 부응하는 일이고 함께 참여하는 신문을 지향함으로 독자층의 확대와 구독률 제고에 적잖은 힘이 되리라 믿는다. 사실 ‘객원’이라는 말은 일정 부분 ‘주인의식’과는 거리감이 있는 말이라 사용하기에 조심스런 면이 있다. 또한 지금의 형편상 급여를 받는 정기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대우상 미안함도 병존한다. 그러나 이런 실상을 잘 이해하고 교단 정론지의 객원기자라는 자부심과 기자 보편의 윤리성을 바탕으로 책임감을 갖고 적극 활동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렇게 귀한 객원기자들을 추천한 노회와 교회, 교인들은 더더욱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 활동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그렇게 교단 정론지가 건전하게 변화, 발전되어 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우리 모두에게도 유익한 일이다. 신문을 읽는 즐거움이 있고 보람이 있으려면 콘텐츠의 다양성이 확보되며 그 유익성과 내용의 질이 향상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단과 독자들의 후원의 마음이 더 열리고 향후 더욱 튼실한 운영과 결과들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교단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기독교개혁신보의 발전을 위해 새로이 임명된 객원기자들의 활약을 기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708 no image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학술 행사에 대하여
편집부
1172 2017-11-07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학술 행사에 대하여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들이 봇물을 이루어 왔다. 그중에 학술대회는 우리를 설레게 한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또 좋은 생각을 공유하는 연합의 장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우리 교단에서도 신학의 현장화, 신학교의 대중화의 일환으로 합신의 교수들이 방문 혹은 초청 형식으로 노회를 찾아가 신학적 주제들을 나누며 목회에 성찰을 제공하는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어 더욱 고무적이다. 여러 노회들 혹은 시찰회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에서 교수들을 초청하였다는 소식은 반갑기 그지없다. 다양한 과목의 더 많은 교수들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속적이고 의미 깊은 활동이 될 것이다. 이는 노회 차원만이 아니라 각 교회에서도 성도들을 위해 주최가 가능한 일이고 이웃 교회들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면 더욱 풍성하고 실효적인 행사가 되리라 믿는다. 혹자는 교수들의 강의가 목회나 신앙에 무슨 큰 도움이 되느냐고 하지만 바쁜 중에도 평생 동안 공부해야 하는 목회자들에게 신학생 시절의 순수함과 진리에 대한 열정의 회복, 그리고 최근 신학의 흐름을 감지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통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귀하고 고마운 일이다. 바라기는 이런 학술 행사들과 더불어 목회자 자신들이 공부하며 기도하는 모임들도 활성화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서로 좋은 논제들을 준비하고 발표하는 자리에 교수들을 초청하여 자문하며 우리들의 정체성을 정돈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금상첨화라 본다. 최근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학술 행사의 정점은 제29회 정암신학강좌와 이어진 합신신학강좌였다. 정암신학강좌의 ‘종교개혁의 신학과 오늘’이라는 주제는 아주 적실하였다. 모든 신학함은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로 귀결될 때 의미가 배가된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방식에는 그 역사 자체를 정확히 공부하며 기억하는 것과 그 교훈과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구체적 현실에 적용하며 실천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부단히 천착하고 그에 따라 실천적 적용점들이 나오도록 힘쓰는 것은 지당하며 숭고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의 신학을 오늘 우리의 역사로 연결하여 함께 연구하고 고민하며 실천을 지향하는 것은 좋은 기념 방식이라 하겠다. 이번 정암 신학강좌와 합신신학강좌의 내용들이 더욱 와 닿는 것은 갈수록 성경과 구원의 도리 그리고 건전한 교회론에 대한 의식이 공격을 받고 희석되어 가는 시대적 아픔을 반영한 때문이다. 학술 논문들이 학자들만의 영역에서 운용되지 않고 시대의 첨예한 문제들을 반영하며 대중적으로 연구되고 발표되는 것은 이후로도 바람직한 일이다. 참석한 어느 교수의 평가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번 정암신학강좌가 예년에 비해 일층 발전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은 일방적이지 않고 함께 소통하려는 의지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성만찬 논쟁과 종교개혁자들의 분열의 장으로 알려진 마르부르크 회담을 신학생들이 극으로 표현한 것은 비교적 참신한 기획이었다. 이런 시도는 신학생들에게도 청중에게도 유익하다고 본다. 마르부르크 회담은 격렬한 논쟁의 장이었지만 당시 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성경적으로 고민하며 바른 길을 가려고 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분열을 막으려 서로가 애썼는지를 극을 통해 공감하게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시간 때문에 해당 발제에 대한 논평이 생략되어 아쉬움은 남는다. 전통적으로 논문대회는 발제에 따른 논평이 있어야 청중들에게 다양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다음에는 개회 시간을 조금 앞당기더라도 가급적 교류 교단 교수들이나 외부 학자들로 구성된 논자들을 선정하여 촌평이라도 듣도록 했으면 한다. 논문 발표 이후에 진행된 좌담회는 시간이 부족하다 느낄 정도로 알찬 내용이었다. 실제적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나눈다는 점에서 소통의 극치라 할 수 있다. 패널에 은퇴 교수들도 함께 했다면 연륜에서 나오는 더 지혜로운 답변들도 있었으리라 본다. 이후엔 좌담회의 질의응답 시간이 잘 확보되고 청중도 많이 참여하도록 탄탄하게 구성되기를 바란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가시적이고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가 규모 있는 행사임에는 분명하다. 그중에 학술대회는 그 효과가 적지 않다. 이는 언표를 통해 현장에서 각성을 줄 뿐 아니라 2차적 문서 작업을 통해서도 부대효과를 보기 때문이다. 교단적으로, 또 노회나 개교회에서도 학술 행사를 개최하고 성찰의 기회를 만드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행사 뒤에는 허탈함도 다가온다는 점이다. 행사를 통해 얻은 각성과 교훈 그리고 적용점들을 삶의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실천할 때만이 그 허탈함을 넘어선 참된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될 터이다.
707 no image 합신이 한국교회의 연합에 참여하는 자세
편집부
1088 2017-10-25
합신이 한국교회의 연합에 참여하는 자세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한국신학자 선언’이 발표되었다(8면 참조). 이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오늘에 구현하기 위한 최근의 활동 중에 큰 가치가 있는 산물이라 본다. 성경적 신앙의 기틀을 수호하고 한국 교회의 상황적 당면 문제들, 반성적 갱신과 사회적 책임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개혁 정신이 담겨 있어 의미가 깊다. 주목을 끄는 것은 기왕의 복음 중심의 신앙을 강조함과 아울러 교파를 초월한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 힘쓰는 것을 시대적 과제로 천명한 점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선언문에서 언급한 여러 사항들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필히 연합적 노력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일치와 연합을 위해 노력했다고 하지만 느슨한 의미의 연합 행사 외에는 공동의 목표와 주제가 뚜렷하지 않았기에 그 활동이 지지부진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 안팎으로 사회적 비판과 이단 사설의 실제적 공격이 증가하여 위기의식이 팽배해지고 성경 중심의 복음을 수호하자는 종교개혁 정신이 절실해진 것이 연합의 필요성을 고조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의 보루라 자평하는 우리 교단은 한국교회의 연합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가. 102회기 박삼열 총회장의 취임사와 좌담회(본보 754, 755호)에 그 단초가 있다. 그는 우리 합신이 한국교회의 예인선의 하나로서 겸허히 바른 역할을 감당하자고 했다. 그가 말한 바는 견인선 같은 큰 배가 아니라 작지만 동력이 강한 배를 뜻하고 그 중의 하나가 합신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예인선은 배의 방향을 제시하며 정박할 항구로 에스코트해 간다는 함의가 있다. 위험 요소들을 방지, 제거하면서 큰 배가 안착할 여건을 만들며 자기 몫을 감당하는 것이다. 합신이 여러 예인선 중의 하나라는 표현은 그래서 적절하다. 따라서 가장 좋은 연합은 각자의 예인하는 위치에 충실하고 예인의 대상이 되는 큰 배의 올바른 방향을 함께 인지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각자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예인하는 힘의 균형과 안정성에 관련된다. 한국교회의 완전한 연합을 꿈꾸는 것은 현재로선 무망한 일이다. 오히려 각 교파와 교단이 건전한 정체성에 튼실하게 서서 방향을 공유할 때 예인의 가치가 빛난다 하겠다. 그러므로 연합의 전제는 각자의 정체성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모호한 혼합은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다. 단순히 정치적 세력화나 교회의 물리적 이익을 수호하는 데만 급급한 연합체로 나아간다면 역효과를 부른다. 또한 산술적 통합이나 행사 위주의 즉흥적 연대의 무의미함은 지난 역사에서 한국교회가 보여 준 행태로 충분히 인지한 바이다. 새삼 연합이라는 언급이 무색할 정도로 불건전하게 닮아 있는 교파와 교단들이 각자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하는 것이 순서이다. 그래야 연합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자명해지기 때문이다. 이번에 발표된 선언문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어떤 정치적 실리적 속셈이 없이 성경의 진리 위에서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상호 존중의 성경적 연합을 추구함이요 한국교회의 당면 문제에 대한 현실참여적인 능동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교단은 개혁주의의 내적 정체성에 충실하면서 성경적 갱신 운동과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일에 마음을 열고 연합에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정박할 배의 방향이 옳도록 그 역할을 감당하며 각 예인선 간의 긴밀하고 정확한 정보의 공유와 연락의 필요성도 인정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 개혁주의자들은 굳이 연합이라는 가치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내온 면이 있다. 이것은 상대적 우월감과 배타성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혁주의적 정체성을 다지는 것을 넘어선 독선은 옳지 않다. 우리만이 온전하게 진리 안에 있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우리도 진리를 향해 부단히 개혁하며 나아가는 것뿐이기에 종교개혁의 정신의 그 원점에서 성경적 기초에 비추어 우리가 연합할 수 있는 지점을 타 교파, 교단들과 공유하려는 자세마저 버려서는 안 된다. 개혁주의의 가장 큰 적도 내부에 있다. 진리의 배타성이란 불가결한 것이지만 진리에 대한 자부심이 이분법적 자만심이 될 때 한국교회가 함께 살아야 할 공존의 근거는 사라진다. 연합이 곧 변질의 지름길이라는 등식은 늘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개혁주의적 기초를 양보하거나 굳이 무조건적 연합에 방점을 두고 과장된 일치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같은 성경과 찬송가를 쓰는 한국교회의 일원으로서의 협력과 연합의 필요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에서의 성경적 에큐메니칼의 진의는 거기에서 찾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해 많은 기구들이 있어 왔고 지금도 태동 중인 연합체가 있다. 연합을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쏟는 느낌이다. 이는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한 위기의식의 발로이다. 뭉쳐야 산다는 절박감도 보인다. 이럴 때일수록 보다 침착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각자의 정체성을 정돈해야 하며 종교개혁 정신과 성경적 가치관에 근거한 공통분모가 확실한 사안에 대하여는 연합과 일치를 지향해 나아가야 한다. 오래 전에 로잔 언약이 발표되었을 때 범복음주의 교파들이 대사회적 책임을 매개로 절실한 반성과 연합적 움직임을 다짐했지만 세월 속에 묻힌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특별히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한국신학자 선언’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수호와 교회의 반성적 갱신, 그리고 사회적 책임에 관한한 우리 교단의 능동적 역할과 구체적 연합의 결실을 기대하는 바이다.
706 no image ‘두 날개’ 사안에 관한 총회의 결의와 의미
편집부
1158 2017-10-10
‘두 날개’ 사안에 관한 총회의 결의와 의미 이번 102회 총회는 “오랜만에 총회다운 총회를 보았다.”는 어느 총대의 평가처럼 비교적 진일보하고 성숙한 토론 수준을 보였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그 중에 논의의 긴장감을 더한 것은 단연 ‘세계비전 두 날개 프로세스(이하 두 날개)’ 건이었다. 두 회기를 거치고 이번에도 상정된 이 안건은 이틀 동안의 논의에서 일차 정치부로 갔고 정치부에서는 신학연구위원회로 보내자고 동의안을 냈으나 표결 끝에 100회의 결의를 따르기로 한 101회의 결의대로 기각되었다. 신학연구위원회로 보내자는 정치부의 안에는 이 문제의 근본적, 실효적인 해결에 대한 염원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기각된 것은 거듭되는 논의의 누적된 피로감과 어수선하고 냉랭해지는 교단적 분위기에 대한 염려가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알다시피 100회의 결의는 “총회에 속한 모든 교회에서의 신앙교육이 신학적 깊이와 균형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총회가 확인하고, 더욱 총회 소속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고 승리할 것을 간절히 구하는 계기로 삼기로 한다.”였다. 이 문안이 모호성의 논쟁을 야기한 이유는 적확한 설명보다는 얼마간 두루뭉술하게 진술된 탓이다. ‘신학적 깊이와 균형’의 실체에 대한 석명한 언표가 없고 구체적으로 총회가 두 날개에 관련하여 교회들에게 어떤 지침으로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왕에 결의된 이 문안의 본의를 천착하여 그것을 바르게 적용하기를 바란다. 우리 교단이 지향하는 신학의 정체성은 바른 신학이요 그것은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사상임을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기초 위에서 갖가지 운동들을 살피고 각자가 일탈하지 않도록 힘쓰자는 것이 결의의 본의이다. ‘균형’이라는 말이 ‘치우치지 말자’는 유연성을 요구하고 있긴 하지만 모두가 목회 현장에서 신학적 오류가 없도록 조심하며 자기를 돌아보자는 것과 두 날개에 관련한 결의를 그 계기로 삼자는 것이 요점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차라리 “목회자들이 개별적 필요성에 의해 관심을 두는 ‘두 날개 운동’과 같은 류의 목회적 운동들이 본 교단의 개혁주의적 정체성에 기초하여 신학적으로 바른지 항상 주의해 성찰하고 내용상 취사선택의 기준이 모호할 경우 총회적 점검과 지도를 받기로 한다.”는 실체적 문안으로 결의가 정돈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분명한 것은 헌의안이 수용되지 않았다고 해서 두 날개의 모든 내용들이 총회의 인준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여유는 없다는 점이다. 전체든 부분이든 논쟁의 여지가 있는 요소들을 살펴 수정하는 것은 언제든 바람직하며 나아가 심각한 오류가 입증되었을 때엔 중단하는 용기도 필요할 것이다. 모든 목회 활동에서 더 조심스럽게 개혁주의적 원리에 부적합한 부분들을 걸러내야 할 책임감을 돋우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이번 결의를 수용하는 자세요 교단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두 날개나 여타의 운동에 몸담고 있던 교회들이라 할지라도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에 합류한 이상 수반되는 적응과 변화의 고통은 감내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교단이 개혁주의적 스펙트럼을 버릴 수는 없다. 따라서 결의문의 ‘신학적 깊이와 균형’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을 경우 교단의 정체성의 모호함을 자처할 수도 있다. 한국교회의 특성상 앞으로도 많은 신앙적, 목회적 운동들은 명멸할 것이다. 그 중에는 일편 도움이 될 만한 것도 있겠지만 그간 유입된 운동들의 생태를 고려할 때 신학적으로 규명, 정돈되지 못한 실용주의적 경험론을 기초로 한 혼합주의 운동들이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런 운동들을 무작정 정죄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지혜롭게 분별하며 그 본질과 기저에 배태된 위험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신학적으로 바른 이정표를 세우려는 일이 폄하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신칭의 교리마저 공격을 받는 현황에서 우리는 매사에 신학적 고민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이번 결의는 사실 차선책, 더 나아가 고육지책이지 최선책은 아니다. 이는 상황에서 나온 지혜의 산물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이 결의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총회는 이루어질 수 없다. 비록 개개인이 그것을 다 수긍하지 못해도 총회적 결의를 순복하고 따르는 것이 옳다. 아울러 두 날개를 실행하는 교회들과 그렇지 않은 교회들의 상호 맹목적 반감이나 배타심에 대한 우려가 기우가 되도록 서로 배려하기를 바란다. 난관이 있더라도 우리는 함께 교단의 정체성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해야 한다. 총회의 결의를 겸허히 받되 지속적인 연구도 있어야 할 것이다. 진정 교단을 사랑한다면 총회의 결의를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에 비추어 우리가 어디만큼 왔는지 혹은 얼마나 멀어졌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두 날개 사안을 떠나 어떤 의미로든 개혁주의 정신이 퇴색하고 혼합적 요소들이 우리 자신과 교단 내에도 많이 스며들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것을 자체 정화하며 각자가 역사적 개혁주의의 본령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총회의 결의를 존중하는 첩경이다.
705 no image 총회의 대표적 직무
편집부
1108 2017-09-19
총회의 대표적 직무 총회 헌법은 총회의 직무 중 하나가 ‘노회에서 합법적으로 문의한 교리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라 한다(교회정치 17.6.6). 역사상 첫 총회도 교리적 갈등을 푸는 것이 주제였다(행 15장). 이방인도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다며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는(갈 2:14) 자들 때문에 교회에 혼란이 생겼다. 이에 바울 일행은 무엇이 옳고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한 것인지 사도들 앞에서 규명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고 관계자들이 회집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총회인 예루살렘 총회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열린 이번 102회 총회의 의미를 애써 부여한다면 우리 교단의 신학적 교리적 기초와 개혁 정신에 부합하는 프로세스를 재확인하고 공고히 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안팎으로 신앙적 사상적 공격이 난무하는 시대에 교단 내 모든 교회들이 건전한 개혁주의의 기초에 든든히 서 있는지를 자가 점검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예컨대 설교, 예배의 형식, 교회교육 등 제반 영역에서 시류의 여파로 개혁주의적 본질이 훼손되는 부분은 없는지, 있다면 개선, 회복하는 데 어떻게 도움을 줄 것인지를 모색하고 답을 제시해야 한다. 목회 현장의 긴박성과 실용성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개혁주의적 금과옥조들을 포기해도 좋다는 구실은 될 수 없다. 선진들이 지켜 온 종교개혁의 근본과 신앙적 토대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보루이다. 개혁은 건전한 변화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이 변질의 경계를 쉽게 넘는 것을 정당화하진 않는다. 오늘날처럼 다원화, 다양성의 시대에 우리 교단 내에서도 목회자들 개개인의 다양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엽적인 문제에 대한 해석과 적용의 상이함은 인정하더라도, 우리가 개혁주의 교단인 이상 개혁주의의 교리적 신앙적 기초에 속한 것들을 양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몸은 우리 교단에 있으면서 마음은 개혁주의와 무관한 조류에 편승한다면 교단의 정체성에서 멀어져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교단 내 교회들의 화합과 일체성이 참된 의미를 가지려면 함께 서 있는 기초가 동일해야 한다. 다소의 흔들림이 있어도 기초는 같아야 한다. 예루살렘총회는 사실 오늘날과 같은 민주적 표결 과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도와 장로들이 많은 토론을 한 후 믿는 자는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차별이 없이 이신칭의의 은혜 안에 있음을 베드로가 동의 재청하고 이를 받아 야고보가 최종 결론을 내려 주었다. 야고보는 지혜롭게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공히 이해하고 보편타당하게 실천할 만한 덕목의 단서를 달았다. 야고보가 내린 결론을 독단적인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미 사도와 장로들이 충분한 논의를 했고 특별히 베드로의 변론을 들은 후에 그것을 근거로 종합 판단하여 야고보가 발표한 것이다. 당연히 성령께서는 야고보를 통해 복음의 본질이 훼손되지 않고도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수긍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결론을 내리게 하셨다. 오늘 우리의 총회도 어떤 헌의안이든 어렵고 두렵게 느끼지 말아야 한다. 특히 신학적 교리적 기초에 결부된 문제일수록 우리가 주님의 진리의 권위 앞에서 겸허히 순종하려는 열망으로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면 거룩하신 성령께서 자유로운 토론 속에 함께 하시고 가장 좋은 답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한편, 회의는 문제를 야기하는 자리가 아니고 해결하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분란의 빌미가 되는 인신공격과 무례함이 나타나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지혜로운 해결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오늘날의 총회가 절대선일 수는 없다. 보다 더 성경적인 결론을 위해 매번 노력해야 한다. 어느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아직 결론이 나지 못하고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잔존한다는 증거다. 이를 해결함에는 두말할 것 없이 성경적인 근거와 개혁주의 전통에의 부합성의 유무가 잣대가 되어야 한다. 교리적 혼란이 있을 때 이를 교회의 최종 권위인 말씀에 비추어 규명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총회의 가장 주요 회집 이유 중 하나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52)의 주요 결과물도 신앙고백과 문답서와 예배 지침이었다. 그것은 개혁주의의 역사적 집대성이었다. 따라서 다수의 헌의안들이 있지만 교리 문제에 관한 분명한 판단과 결론을 내리는 것, 교회가 바른 신학과 신앙을 따르며 준수하고 있는지 살피고 돕고 분별해 주는 일은 우리 시대 총회의 대표적 직무이다.
704 no image 102회 총회와 총대들을 위하여
편집부
1173 2017-09-06
102회 총회와 총대들을 위하여 비록 총회가 임시적 모임이라 해도 그 중요성과 상징성은 크다. 그래서 그 중요성에 대한 강박이 교권주의와 결탁하면 문제의 온상으로 변질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 교단의 총회는 나름대로 자정 능력과 자기 절제의 면모를 갖추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에게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소소한 부분들이 눈덩이가 되어 우리를 허물 수 있는 큰 파괴력을 갖기 전에 매회 시의적절하게 진솔한 논의와 적법한 결정 과정을 통해 더디더라도 반드시 난관을 극복해 나아가야 한다. 먼저, 반복되는 갈등의 해결을 도모해야 한다. 잠복해 있다가 총회 때마다 나타나는 사안들이 있다. 특히 신학적인 토대와 교단의 정체성에 얽힌 문제의 경우엔 임시적 봉합으로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정당한 헌의안으로 상정된 사안들에 대해 총회가 적실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자꾸만 다음 회기로 넘기는 습관에 길들여지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어찌하든지 결론 도출을 위한 총대들의 엄정하고 양심적인 논의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총회는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고 덕을 세우기 위해 그냥 넘어가자 하거나 툭하면 몇 년의 유예로 잠정하는 태도는 불가피할지는 몰라도 자랑할 만한 모습은 아니다. 어떤 사안이든 논쟁과 잡음이 예상된다고 해서 적당히 물러서거나 양심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타협안으로 우리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맞닥뜨리게 될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파악하고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다수가 옳을 수도 있고 때론 소수가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결의 과정은 자유롭고 양심적이어야 하며 어떠한 형태의 압력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개혁주의 총회는 세력 다툼이나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장이 아니다. 성경적 논의의 자유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면 전국의 총대들이 왜 소중한 시간을 내어 모이는가. 따라서 총대들은 각 노회에서 회원들의 열망과 기대와 전폭적인 신뢰 속에서 적법하게 선출하여 파송한 대표자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 상투적인 말을 왜 꺼내겠는가. 총대들이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에 해태하며 총회의 자리만 메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총대로 선출되고도 총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부끄러운 일이며 중도에 빠져나가는 것도 비천한 일이다. ‘부득이’라는 단서를 달아 대(代)를 세운다 해도 오랫동안 고개 숙여야 할 일이다. 주일성수를 중시하듯 총대들의 총회 참석은 중차대한 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렇게 귀하게 참석한 총대들의 기본권은 자유롭게 보장되어야 한다. 교단의 원로이든 선후배의 질서든, 큰 교회를 섬기든 그렇지 않든 적어도 총회의 결의 과정에는 어떤 종류의 부적절한 압력도 개입해서는 안 될 것이다. 총대들 각각 성경적인 원리와 기초 위에서 판단한 대로 의견을 개진하며 법적 결의 과정에 양심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총회의 의결에서의 의견 개진은 설득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총대들은 자신의 의견을 활발하게 발표해야 하고 또한 윤리적, 인격적 성숙함을 견지하는 것이 자신과 모두에게 유익하다. 언성을 높이거나 경박한 태도를 취한다면 그만큼 설득력과 신뢰성의 낙폭이 클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안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사전에 많은 공부를 하고 오는 것이 좋다. 평소에 아무 견해도 가다듬지 못한 채 현장에서 즉흥적, 감정적으로 의견을 말하다보니 인격적인 실수와 더불어 설득력이 약해지고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총회에서 무엇인가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거든 전회의 자료들을 섭렵하고 관련 자료들을 철저히 연구해서 설득력을 갖춰 참여하기를 권한다. 그것이 논의 시간의 절약과 총회의 질적 고양에 일조하는 자세이다. 우리 총회도 늘 깨어 있지 않으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개혁주의적 기초 위에서 작은 허점이라도 보완하고 더욱 건전하고 성경적인 총회로 나아가야 함을 모두가 깊이 인식하도록 하자. 임원, 상비부를 포함한 모든 총대들이 반드시 참석하여 성실하게 의무를 다하고 자유롭고 양심적으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며 잘 준비된 논의를 통해 결실을 맺는 102회 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703 no image 동성애·동성혼을 반대한다
편집부
1246 2017-08-23
동성애·동성혼을 반대한다 1987년에 개정된 현행 헌법을 다시 개정하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는 8월말까지 개헌 초안을 작성하고, 내년 2월까지 여야 합의의 개헌안을 도출하며, 내년 6월 지방 선거에서 국민 투표에 붙이는 것을 골자로 한 개헌 일정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기본권 부분에서는 헌법 36조에 ‘양성평등’ 대신 ‘성평등’ 조항을 신설하고, 11조의 차별 금지 사유에 ‘등(等)’을 추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당혹감과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동성애·동성혼의 합법화를 반대하는 다양한 움직임이 각계 각층에서 일어났다. 감사하게도 지난 17일 해당 소위원회에서 ‘양성평등’을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11조의 ‘등’ 추가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어 차후 ‘성적지향’이 합법화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여전하다. 용어가 혼란을 가중시키는 측면이 있다. ‘양성(兩性)평등’과 ‘성(性)평등’은 얼핏 동의어처럼 보이나 완전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양성’은 남녀의 생물학적 성(sex)를 가리키는 반면, ‘성’은 사회적 개념인 ‘젠더(gender)’를 번역한 말로 50개 정도의 성적지향과 연루되어 있다. 만일 양성평등이 성평등으로 바뀐다면 동성애를 비롯한 많은 ‘성’들이 합법화되고 이후에는 동성혼까지 합법화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순진해 보이는 ‘성평등’이란 말은 이러한 위험성을 감추고 있다. 동성애·동성혼은 성경적 가치관에 위배되고 창조질서에 반한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소돔 이야기(창 19장)와 신구약의 5 구절(레 18:22, 20:13, 롬 1:27, 고전 6:9-10)은 동성애를 예시적, 명시적으로 금한다. 예수님도 구약의 계시인 성과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분명하게 가르치신다. 따라서 동성애는 죄이며 양성의 구분과 결혼의 신성성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회가 창조적 보편 가치의 복을 함께 누리도록 힘써야 한다. 이와 병행하여 동성애의 실상을 바로 알고 바로 알리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은 아닐지라도 주된 감염통로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동성애가 선천적, 유전적 문제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데도 동성애를 정상적인 것으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현행 교과서에 동성애와 에이즈의 관련성이 누락되어 있는 상황에서 상당수의 가출 청소년들이 동성애 관련 알바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를 더 이상 방치해서도 안 된다. 동성애 논쟁은 ‘프레임(frame) 전쟁’을 연상시킨다. ‘소수자’ 구조는 동성애자는 억압받는 약자이므로 보호받아야 된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차별을 받는 것은 당연히 금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소수라고 무조건 용인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차별금지법 반대’도 마치 부당한 차별을 찬성하는 것처럼 들린다. 일부 언론은 작금의 동성애 반대가 ‘보수기독교’만의 아집인 양 보도한다. TV 드라마 등에 나타나는 ‘브로맨스(bromance)’ 등 동성애 코드는 동성애가 낭만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십상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지혜로운 분별과 건강한 비판이 요청된다. 물론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죄인들이다. 따라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겸손한 이웃 사랑으로 건강한 가정과 사회, 그리고 미래 세대를 세우는 일에 본을 보여야 한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시대의 도덕적 보루가 되어 잘못된 일에 대하여는 기독교적 양식과 신앙의 양심을 따라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동성에 문제는 어떠한 정치적인 계산이 없이 진리 운동의 차원에서 접근하여야 한다. 헌법 개정의 남은 논의와 결정 과정에서 36조의 양성평등 보장 조항이 끝까지 지켜지고 11조에 ‘등’은 추가되지 말아야 한다.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우리는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적절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헌법 개정 여부와 상관없이 동성애 문제는 앞으로 지속적인 이슈가 될 것이다. 날로 복잡해지는 현대 사회의 문제에 대한 전문적 연구, 제자다운 실천, 그리고 지혜로운 대응이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교단 교회의 지원과 신학교의 교육으로 전문 지식과 신학적 이해와 하나님나라에 대한 열심을 고루 갖춘 크리스천 전문가의 양성이 시급하게 요청된다.
702 no image 교회 개척에 합력하자
편집부
1261 2017-08-02
교회 개척에 합력하자 주지하다시피 한국교회의 교인 수가 감소하고 국민들의 대 기독교 인식 또한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 와중에 목회자들의 공급이 한정된 사역지의 수요를 초과한 지 오래다. 따라서 다수의 합신 졸업생들에게도 남은 건 교회 개척뿐이다. 개척은 참으로 어렵다고들 한다. 그러나 어려워도 이제 다시 사도행전의 역사를 기대하며 우리가 교단적으로 힘써야 할 사역은 개척인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들려오는 안타까운 사연들과 도움을 요청하는 부르짖음은 거의 단말마에 가깝다. 개척의 거대한 전장에서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수년 간 지쳐 있는 병사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보급품은 끊어지고 고립무원의 두려움에 처한 전우들이 많다. 처처에 뒹구는 중상자들과 겁에 질린 탈영병들을 목도하며 졸아붙은 마음으로 다시 고지를 향해 기어서라도 가야 하는 슬픔이 있다. 오늘 우리 동역자들의 교회 개척 전쟁은 이처럼 냉엄한 실제 상황이다. 차제에 우리는 그에 어떻게 합력할 것인가를 지난 개척교회 목회자 좌담회(본보 749호)에서 정돈된 내용들을 참고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교단적 관심과 도움 역량을 환기해야 한다. 총회 전도부에 속하든 아니면 독립적이든 개척교회 전담 팀이나 부서가 필히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교단 내 개척교회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관리 체제를 정비하고 총사령부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해 두자면 여기서 관리란 간섭이 아니라 도움이다. 각 노회의 협조로 대대적인 개척교회 전수조사를 실시하여 이를 토대로 개척교회 상황판을 만들자는 것이다. 총회적 차원에서 합력할 일이 없는지 수시로 살피고 합력자들을 주선하는 섬김의 실천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해당 부서는 개척교회를 최대한 도울 수 있는 크고 작은 여러 방법들을 강구하여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합신 교단만의 개척교회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한 개척의 준비와 시작과 진행과 최소한 설립예배 때까지의 일련의 과정 속에 참고할 만한 통합적 도우미 자료집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내용은 자상할수록 좋다. 그래야 당사자가 막연함 없이 안정감 있게 신학적, 행정적인 착오를 줄이고 개척을 실현해 갈 수 있게 된다. 둘째, 노회의 섬김이다. 개척 지역의 노회는 개척 단계에서부터 관심과 사랑을 갖고 개척 목회자를 격려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준비 단계와 개척예배, 설립예배 그리고 노회 가입 등의 과정들에 지도와 도움을 주고 끈끈한 관계를 형성한다면 이후의 노회 생활에도 피차 유익할 것이다. 무엇보다 노회원들의 적극적이고 자상한 배려가 필요하다. 수시로 소통하며 지원 포격을 해 주며 울타리가 된다면 고지를 점령하는 데 더없이 힘이 될 것이다. 이런 노회야말로 진정한 야전 사령부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각 노회는, 기왕에 노회에 가입을 한 교회들만 결속할 것이 아니라 가입 전의 교회들에도 할 수 있는 한 법적, 심적, 인적, 물적 도움을 주려고 애써야 한다. 그리고 총회와의 관련된 사안들에 가교 역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셋째, 개척 당사자의 적극적인 자세가 중요하다. 일단 고립되지 말고 합력의 장으로 스스럼없이 나와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성품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노회의 건전한 지도와 섬김을 받으며 함께 기도하며 동역하는 관계를 설정하지 않으면 고독 속에서 방황하기가 쉽다. 자기연민과 자아상실감이 더 심화되기도 한다. 따라서 노회나 총회를 간섭의 주체로 생각하는 태도를 버리고, 무익한 자존심도 눌러 두고 적극적으로 노회에 반응하고 합류해야 한다. 본인이 소극적이면 주위에 돕고 싶어도 머뭇거리는 사람만 늘어나게 된다. 넷째, 합동신학대학원의 역할이다. 입학 직후부터 개척 비전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하고 도전을 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귀중한 개척목회 강의가 개설되어 있지만 이미 안정적인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현재 막 개척, 설립하여 후배들과 근접감을 지닌 선배들도 초청하여 그들의 생생한 증언과 체험들을 나누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개척 목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며 기도하고 준비하는 모임을 만들어 주고 선배 개척 목회자들을 간사로 섬기게 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이런 모임은 자생적인 것이 바람직하지만 학교 당국에서 권유하고 물심으로 지원해 주는 것도 좋다고 본다. 선교훈련원이 있듯이 개척훈련원, 혹은 개척학교를 교단과의 협의 하에 만들어 운영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는 개척교회를 준비하거나 개척 목회 중인 동역자들의 모임이 절실하다. 함께 대화하며 기도와 말씀 속에서 답을 찾아가며 쉼을 얻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합신농목회를 본으로 개척목회자들이 먼저 마음을 열어 모이고 교단적으로는 이를 뒷받침하는 장치와 후원이 필요하다 하겠다. 지난한 개척으로 수고하는 동역자들과 이들의 뒤를 따를 준비자들에게 교단적으로 두루 합력해야 할 시기이다. 적자생존과 각자도생의 냉혹한 전장의 고립감과 불안함에 동역자들을 방치해 두지 않기를 바란다. 아울러 개척 당사자들도 모종의 섭섭함과 고독 속에 함몰되지 말고 힘을 내어 합력의 광장으로 나오기를 부탁한다.
701 no image 복잡한 상황 속에서의 그리스도인
편집부
1304 2017-07-19
복잡한 상황 속에서의 그리스도인 오늘 우리들은 매우 복잡한 상황 가운데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한국 현대사의 어느 시점에 복잡하지 않은 때가 있었을까? 사실 성경에 의하면, 타락 이후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 만들어 낸 복잡함 중에 살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가 어우러진 태도를 가져야만 모든 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바르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 된다. 첫째는 이 복잡한 상황이 비정상적(abnormal)임을 인정해야 한다. 즉, 현재의 세상이 비정상적이고 우리들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 조금 인정하더라도 그리 심각하지는 않다고 보려 한다. 둘째는, 이 복잡함과 비정상성이 우리가 집단적, 개인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며 그 궁극적 해결책이 우리에게 있지 않을 만큼 그 상황이 심각함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문제의 근원임을 생각한 사람들 중의 일부는 스스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으려고 한다. 혹자는 솔직히 우리에겐 희망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상황에서나마 무언가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실상이라고 한다. 20세기 초반의 소위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그러니 의미를 찾고 추구하고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본질은 결정되어 있지 않고 이 실존이 선행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르트르의 그 유명한 “실존이 본질을 우선한다”는 말의 배경이다. 여기엔 부단한 인간의 추구만이 나타날 뿐이다. 타락한 인간은 그 이상을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다. 셋째로, 그러니 우리 문제의 근원적 해결책은 우리의 손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직 자유롭게 우리에게 해결책을 주시는 하나님의 손에만 달려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과 그것이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고 진정한 승리임을 드러낸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우리의 문제의 해결의 열쇠라고 선언하신다. 이것을 믿는 곳에 기독교 신앙이 있다. 우리는 모든 복잡한 상황에 이 세 가지를 다 적용하여 생각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적 사유”이다. 구원의 문제에는 이 셋을 연관하여 생각하면서도 다른 문제들에는 그렇지 않으려는 건 온전히 기독교적이지 않다. 우리 사회의 모든 복잡한 문제에 직면해서도 근본적으로 이 세 가지가 연합된 태도로 참된 기독교적 사유를 해야 하고 그로부터 참된 기독교적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성령님께 의존하려고 애를 쓰고 노력해서라도 우리가 이런 기독교적 사유를 한다면 세상의 복잡한 문제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그 모든 문제들을 정복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의 빛에서 그 문제를 직시하게 된다. 따라서 참으로 기독교적 사유를 하는 우리에게는 모든 문제의 복잡성과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전혀 문제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여유와 유연함과 관대함이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모든 문제를 그저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 종국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귀정(歸正)하시기 전에 과연 상대적으로 나은 것이 뭔지를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해야 한다. 가장 선에 근접하며, 악에 덜 가까운 길을 찾고, 또한 그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방도를 찾으며, 그것을 위해 힘을 쓴다. 여기에 순례자로서의 우리의 노력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그것에도 전혀 집착하지 않는 자세여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위하는 동기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려는 열심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우리의 그 행하는 바와 그 산물을 우리는 절대화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 것의 실천을 위해 힘쓰면서도, 우리가 행하는 것이 전혀 공로가 아니라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이다. 사실 초기 루터는 자신이 애쓰는 것이 자신을 전혀 의인으로 만들지 못하며 여전히 자신을 죄인이라고 선언하게 한다고 느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애써 행하는 바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의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우리는 상대적 의를 행해 가려고 하는 것이며, 따라서 늘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의 애씀을 의미 있게 보시며 성도들의 그런 노력을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진전시켜 나가신다. 그러나 그것 역시 주님의 일이고 우리는 무익한 종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는 것뿐이다. 우리 모두가 진정 그런 하나님의 종들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런 논의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너무 비기독교적으로 사유하는 경우가 많고, 전혀 주님의 뜻을 향해 나가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또 열심이 있다는 사람들은 너무 자기 확신, 자기 신뢰, 자기 사랑에 넘쳐 있다. 이 모두가 회개할 일이다. 종교 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 해에 우리 자신을 깊이 생각해 보자.
700 no image 강도사 고시의 의의와 선용
편집부
1251 2017-07-05
강도사 고시의 의의와 선용 지난 6월 13일 2017년도 강도사 고시가 치러졌다. 그 결과 응시자 84명 가운데 49명이 합격하였다. 합격자가 통과한 세 종류의 시험은, 과목 시험(조직신학, 교회정치, 교회사), ‘능력 시험’(논문, 주해, 설교), 그리고 구두시험이다. 구두시험에서는 합신 교단의 정체성과 방향, 개인 경건, 가정 및 교회 생활, 신학, 소명, 교단 소속감, 향후 목회 진로 등을 묻는 만큼, 강도사 고시는 그야말로 목회자의 자격을 전반적으로 알아보는 포괄적 성격을 지닌다. 강도사 고시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교회와 교단 및 신학교에게도 중대한 의미가 있다. 출신 교회는 양육을, 소속 노회는 ‘양성’을, 신학교는 신학 교육을, 그리고 총회는 고시를 책임지는 등 여러 기관들이 합력하여 목회자를 세워 가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고시의 목적이 ‘신앙과 덕행’ 및 실력을 고루 갖춘 교역자의 자격을 합당한 표준에 의거하여 시험하는 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고시 합격자는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고 복음의 일꾼으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일에 적합한 자로 판단된 자이다. 이번 강도사 고시에서 눈에 띠는 것은 합격률이다. 본보의 보도에 따르면 합격률은 58.3%로 예년에 비해 낮은 편이다. 그러나 낮은 합격률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합격생 수는 지원자의 수준뿐만 아니라 고시부의 평가 기준에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후보자에게 고시는 통과 의례가 아니고, 고시부에게 고시는 후보생의 합당한 자질을 꼼꼼히 살피는 기회라는 사실이다. 강도사 고시의 시행과 관련하여 강조하고 싶은 점은 강도사 고시 제도를 선용하여 교회와 교단 발전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먼저 후보생은 그동안 배운 개혁주의 신학을 심화하고 체화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작년 말 고지 받은 논문, 주해, 설교를 올 4월 21일까지 제출하고 곧 이어 과목 시험을 준비하는 일을 교회 사역과 병행해서 하는 일은 사람에 따라서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급하게 고비를 넘기려고만 하지 말고 일정한 시간을 계획적으로 투자해서 철저하게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게 할 때 합당한 성과를 얻을 것이다. 강도사 고시는 목사 후보생에게 특히 글쓰기의 중요성을 확인해 준다. 목사는 언어를 통하여 사역하는 사람이다. 교인과 원만하게 소통하고 복음을 능력 있게 전하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말하기와 글쓰기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앞에 언급한 시험 과목도 기본적으로 신앙적, 신학적, 목회적 글쓰기에 해당한다. 물론 글쓰기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번 강도사 고시를 지속적인 독서와 글쓰기 습관을 들이기로 결단하고 실천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아마 합격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학교가 글쓰기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 신학교에서는 선택과 집중의 방식으로 교과 과정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지원자에 한해 졸업 후 1년간 목회를 실제적으로 준비하는 과정을 신설한다면 졸업생들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강도사 고시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강도사 고시 준비뿐만 아니라 사역의 길을 열어 가는 준비 과정으로도 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총회 고시부는 매해 응시자들에게 시험과 관련하여 공통 유의 사항과 과목별 유의 사항을 친절하게 알려 주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동안의 기출문제를 공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기출 문제 공개는 장점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교단 설립 후 여러 해 동안 축적된 문제들은 교단의 강조점과 지향점 그리고 과목의 중요 내용을 보여줄 것이다. 기출 문제 공개는 후보생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문제의 성격을 파악하여 중요 사항을 숙지하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교역자의 자질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작금의 한국 교회와 신학교는 목회 환경과 신학 교육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전환기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목회 상황이 악화되고 목회 현장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구비된 목회자를 세움으로써 교단과 신학교가 발전하는 기회를 삼아야 한다. 아울러 목회 헌신자와 신학교 지원자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치러지는 강도사 고시는, 노회의 목사후보생 지도와 신학교의 교육 방향 등과 보조를 맞추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신축성 있게 대응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삼는 일에 강도사 고시 제도의 선용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699 no image 교회 계절 교육 활동의 지향점
편집부
1368 2017-06-21
교회 계절 교육 활동의 지향점 한국 교회의 성장에 주일학교의 역할은 컸다. 모양을 갖춘 그 역사가 100년이 넘었다. 특히 여름 성경학교(수련회 포함)는 교회교육의 한 축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나름 의미 있는 교육으로 성장한 한국 교회의 교인들이 시대와 사회를 감당해 내는 면에서는 왜 약한가 하는 의문이 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한국의 성경학교가 성경(text)을 가르치면서 삶(Context)을 함께 다루는 데 인색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삶을 다룬다는 것은 단지 인생의 근본적인 의미를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지식적으로만 습득시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삶의 여러 영역과 실제적 양상들에 대한 성경적인 문답과 좋은 실습, 체험과 가치관 교육을 병행한다는 뜻이다. 다수 교회에서의 계절 교육 활동의 목표는 아무래도 주일에 못 다한 학습의 심화에 있을 것이다. 믿음의 본질과 기도와 찬송과 경건에 속한 진리들을 더 익히고 교회 공동체의 의미를 체득하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일은 차치하고라도 모처럼의 계절 활동에서조차 성경 본문 자체를 가르치는 교육만을 반복 진행 하는 것이 개혁주의적 교육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현재적 삶의 영역들에서의 생활 방식을 위한 가치관의 형성에 도움이 되는 확장성이 있어야 피교육자들이 균형 잡힌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이를 감안하며 차제에 계절 교육 활동의 바람직한 지향점들을 생각해 보자. 첫째, 창조 세계에 대한 교육이다. 먼저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가르치고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마다 사정과 난점이 있더라도 가능하면 성경학교나 수련회를 위해 교회당을 떠나 야외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호연지기라는 말도 있듯이 익숙한 공간을 떠나 자신과 서로를 돌아보고 창조 세계를 호흡하는 것은 폭넓은 마음과 겸허한 자세를 갖추는 데 도움을 준다. 이를 위해 교회는 경제적 타산에 매이지 말고 다음세대를 위한 섬김이요 투자로 여겨야 한다. 작가 생떽쥐베리는 ‘인간의 대지’에서 “대지는 우리에게 만권의 책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대지 속에서 응전하며 성장하는 인간성을 말한 것인데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창조 세계를 누리며 하나님을 높이고 능동적으로 살아야 한다. 둘째, 역사 교육이다. 한국교회사를 비롯하여 세계교회사, 종교개혁사 등을 두루 가르침으로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또 역사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역사를 통시적으로 인식하며 당대를 살아가는 자세를 습득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태생과 성장 과정, 선교사들의 헌신, 구한말의 그리스도인들의 애국 계몽 운동과 일제강점기의 신앙과 민족 독립 운동의 일체성과 역동성, 해방 후의 분열적 교회사와 부흥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순교자들과 기독교사상사 등의 맥락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역사 인식이 정립되어 갈 때 지금 여기, 한국이라고 하는 시공간 속에서의 책임성을 지닌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근자에 이와 관련한 영상과 학습 자료들이 계발, 활용되고 순교지 방문 등, 한국교회사의 자취를 따라 의미를 되새기는 성경학교와 수련회를 실행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음은 좋은 일이다. 셋째, 가치관의 교육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학습 자료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한국적인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맞닥뜨리는 제 문제들에 대한 가치 판단의 훈련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혼인과 가정, 일과 노동, 사회 정의, 이웃을 섬김, 직업적 소명 그리고 문화와 예술 및 정치와 국제적 감각에 이르기까지 성경적인 가치관을 세워 주는 일은 어린 시절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그런 가치 교육 속에서 비전과 소명의식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계절 교육 활동은 이러한 주제를 다루기에 좋은 기회이다. 수잔 쉐퍼는 “교육은 생활”이라 했고 폴 마샬은 “세상은 하나님이 세우신 학교”라면서 일생 동안 삶 속에서 진리를 배워 나간다고 했다. 근래에 그 의미를 더욱 드러내는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 (sola scriptura)과 전체 성경(tota scriptura)의 슬로건이 교육 활동에서도 구현되어야 한다. 성경을 강조하는 것은 백번 지당하지만 성경의 본의를 전체적이고 균형 있게 삶의 전 영역에 적용하고 이를 개인과 사회 활동에서 구현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런 역동성이 없이는 고답적 교육의 테두리에 갇혀 피교육자들에게 사회적 응전력을 길러 주기가 힘들다. 그것은 개혁주의의 본령이 아니다. 현창학 교수의 다음의 말을 교육 활동에서도 새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나 내 가족의 안위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가치와 정신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개혁신앙이다.” (본보 747호 “구약성경과 기독교적 사회정의”)
698 no image 국제적 공동선을 추구하는 애국심
편집부
1466 2017-06-02
국제적 공동선을 추구하는 애국심 이즈음 우리나라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몸짓이 예사롭지 않다. 이러한 때 재고해 보는 것이 애국심이다. 태극기만 봐도 눈물 나는 것. 애국심이란 이렇게 파토스적인 것이다. 어떤 나라에 의해 자존심이 상하거나 불이익을 당했을 때 국민이 총동원되어 궐기 대회를 열고 그 나라를 성토하며 단합을 과시하던 때가 있었다. 머리띠를 두르고 그 국기를 태우며 함성을 지르는 건 흔한 광경이었다. 적개심에 근거한 애국심은 국민을 하나로 모으기에 충분한 매개체였다. 이런 파토스적 애국심이 합리성과 멀어질 때 독재정권이 즐겨 붙드는 쇼비니즘이 된다. 폭압적이고 부당한 언론 통제와 정보 차단으로 국민을 획일적 가치관에 묶어 놓는 쇼비니즘. 그것에 가장 잘 결합하는 것이 배타적 민족주의이고 그 뚜렷한 예가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 정권이었다. 그에 따라 당시 독일인들은 터무니없이 과장된 자부심에 빠져 이웃나라 침략을 정당화하며 세계의 중심은 독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는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쇼비니즘으로는 성숙한 나라가 될 수 없다. 다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정세 속에서는 타국과의 합리적 상호 소통과 배려의 질서를 잘 인식하고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외교라는 것이 어찌하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행위라고들 하지만 본래 외교의 ‘교’자는 사귈 교자가 아닌가. 이는 진정한 소통으로 서로의 이익을 함께 추구해 나가는 상호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니 서로 사이좋게 지내려는 노력이 먼저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국민들은 오로지 배타적 욕심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 국제적 공리성과 보편타당한 합리성을 담보한다면 다른 나라의 형편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로고스적 애국심을 겸비해야 한다. 한편, 정부도 국민들을 올바른 애국심으로 계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포퓰리즘에 근거하여 근시안적으로 국제 관계를 끌어간다면 오히려 자승자박에 봉착할 가능성이 크다. ‘독재의 유혹’을 쓴 중국의 지성 쉬즈위안은 최근의 ‘미성숙한 국가’라는 책에서 “중국인들은 사드가 뭔지도 모르면서 한국 전체를 매도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사드의 함의와 그것에 연관된 전후 인과관계나 세부적 정보의 공유도 없이 국민 선동을 꾀하고 한한령 등의 경제적, 문화적 보복조치를 강화하는 행태가 “맹목적 민족주의를 고무하는 냉전적 사유고 미성숙한 모습“이라고 일갈한다. 중국 군중들이 롯데마트 불매 운동을 하고 태극기를 불사르거나 한류문화 콘텐츠를 차단하며 핏대를 세우는 모습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결은 다르지만 우리도 그 비슷한 때가 많았고 또한 여건이 조성되면 언제든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의 쇼비니즘적 반응을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긴장된 국제관계 속에서의 진정한 애국심이 무엇인지 재정립해야 한다. 애국심이란 거주의 경계를 정해 주신 하나님께서 각자가 속한 나라에 애착을 갖고 성실히 살아가도록 인류에게 주신 정서요 마음이다. 그러므로 애국심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건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다른 나라와의 공존의 질서를 지키며 공동선의 테두리를 이탈하지 않는 신중한 자기 검증과 절제를 포함한다. 여기서 공동선이란 경제적 이득에 앞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인류 보편의 양심과 윤리적 가치, 그리고 합리적인 관계와 공평한 질서를 의미한다. 따라서 어느 나라도 자신들의 애국심을 기치로 다른 나라의 정당한 이익을 침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특히 근래에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며 뒤틀린 신자유주의와 자국보호주의적 힘의 논리로 약소국에 압력을 가하는 것은 백번 따져 봐도 부당하다. 식민주의 시대의 야만의 역사에서 보듯 남의 고통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모순은 지나간 우여곡절의 세계사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기독교적 가치와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우리만 잘 살면 되는’ 세상은 모두가 죽는 세상인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주창하며 한, 중, 일의 선린적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라도 일제는 강도짓을 그치고 물러가라고 했다. 그의 애국심은 얼마나 국제 지향적이며 정의롭고 보편타당한가. 그러나 일제는 아시아가 함께 번영하자면서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2차 대전과 아시아 침략을 미화하고 정당화했다. 그들만의 이기적인 애국심이 국제관계를 파괴하고 고통을 끼친 역사는 그들을 도리어 단죄했다. 앞서 소개한 쉬즈위안의 결론을 빌리자면 “성숙한 나라란 자기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나 세계 질서 속에서의 유연성을 가진 나라”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애국심은 쇼비니즘에 이끌리거나 과도한 파토스와 자기중심적인 데 매몰되지 말고 좀 더 합리적 소통으로 국제적 공동선을 추구하는 기조 위에 서야 한다.
697 no image 가짜 뉴스와 교회의 대처
편집부
1611 2017-05-24
가짜 뉴스와 교회의 대처 최근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가짜 뉴스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었다. 지난해 미국 대선 기간에도 SNS에서는 가짜 뉴스가 진짜 뉴스보다 많았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전에 ‘찌라시’나 ‘카더라 통신’이 있었으나 근래 가짜 뉴스는 언론의 뉴스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더 속기 쉽다고 한다. 가짜 뉴스의 피해는 실로 크다.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고, 거짓을 참이라고 믿게 만든다. SNS를 통해서 순식간에 여러 사람에게 퍼지는데 일단 퍼지고 나면 되돌리기 어렵기 때문에 잘못을 바로잡기가 쉽지 않다. 나아가서 가짜 뉴스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하고 불신풍조를 만들어 사회를 병들게 한다. 이러한 현상은 언론 환경의 영향도 있다. 속보 경쟁과 단독 보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사실 여부를 제대로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는 부당한 목적을 위하여 가짜 뉴스를 만들어내고 유통시키는 일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짜 뉴스는 자기가 좋아하는 이야기만을 사실이라고 믿는 ‘확증편향’을 통해 자아를 강화하려는 수용자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는 쉽게 접하는 뉴스를 그대로 믿지 말고 공신력 있는 언론과 비교해 보라는 권면이다. 개인이 일일이 진위를 가리는 일이 쉽지 않은 현실에서 방송사의 ‘팩트체크’류의 코너를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진짜 뉴스를 많이 제공하고 또 이에 자주 접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전문가 집단의 도움이나 집단 지성의 힘을 빌리는 방법이 제시되기도 한다. 가짜 뉴스가 사법적 범죄로 판단되는 경우에는 공권력의 행사가 불가피할 것이다. 사실 가짜 뉴스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 최초로 가짜 뉴스를 만들어내고 유포시킨 자는 바로 사탄이었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진리의 말씀을 왜곡하여 그럴 듯한 가짜 뉴스를 꾸며내었다. 가짜 뉴스가 불러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아담 부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를 인류는 날마다 확인하고 있다. 초대교회 시대에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가짜 뉴스도 여전히 교회 주변을 배회하고, 이단과 사이비 집단 등이 만들어내는 종교적, 신학적 가짜 뉴스도 같이 서성인다. 사실 타락한 세상에서 가짜 뉴스가 진짜 뉴스인 복음 진리의 주변에 출몰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교회를 둘러싼 가짜 뉴스의 폐해는 참으로 크다. 무엇보다 복음 진리를 왜곡하여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다. 예컨대 출애굽과 부활에 대해서 아무리 깊은 의미를 말한다 해도 출애굽의 역사와 부활의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가짜 뉴스다. 사실에 기초한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는 또한 진리를 상대적으로 보는 시대 풍조에 편승한다. 과연 거짓을 참이라고 믿으면 거짓이 참이 되고, 참을 거짓이라고 믿으면 참이 거짓이 되는 것인가? 이 오류는 절대적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불행한 귀결이다. 가짜 뉴스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불편하더라도 검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실을 찾아 비교하고 확인할 뿐만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것을 퍼 나르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 건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사실 여부, 진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근본적인 참조점을 가지고 있다. 성경과 개혁신학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또한 중생한 이성의 건전한 양식과 판단력도 하나님이 함께 주신 지혜의 선물이다. 나아가서 진짜를 많이 접하고 그 감각을 익혀야 한다. 이는 위조 지폐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진짜 지폐를 잘 알아야 하는 것과 같다. 특히 이단 등이 퍼뜨리는 가짜 뉴스에 대해서는 진리의 말씀을 바로 알아서 효과적으로 대응할 때 복음의 진리가 왜곡되지 않고 교회가 바로 세워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한다. 인류의 타락 이래로 하나님은 선지자들과 자기 아들과 사도들을 통해 구원의 진리를 보이시고 자기 백성과 소통하셨다, 성령은 영감을 통하여 성경을 기록케 하셨고 조명을 통해서 지금도 깨닫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와 분별의 영이자 ‘교통’의 영이신 성령의 지혜를 의지해야 한다. 나아가서 교회는 사실과 진리로 소통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갈등 상황에서도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가짜 뉴스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사실과 진리만을 말함으로써 상호 신뢰하는 공동체를 세우도록 힘써야 한다.
Selected no image 새 정권의 과제
편집부
1569 2017-05-10
새 정권의 과제 유례없는 국정농단 사건과 대통령 탄핵으로 지난 반년 동안 국민이 된몸살을 앓았고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그래도 이만한 질서와 성숙한 민주의식을 갖고 변혁의 소용돌이를 잘 헤쳐 나온 국민들의 모습은 칭찬 받을 만하다. 그렇다면 새 정권의 과제는 무엇일까? 월간중앙과 타임리서치가 실시한 제19대 대통령 선거와 관련한 4월 12일자 여론 조사를 보면 우리 국민의 55.8%는 ‘적폐 청산과 사회 개혁’이, 37.4%는 ‘갈등 치유와 국민 통합’이 중요하다고 봤다. 또한 새 정권의 우선 과제에 대해 국민일보와 지앤컴리서치가 실시한 3월 14일자 ‘교회와 사회 개혁을 위한 성도 및 목회자 여론 조사“ 결과 성도들은 투명, 공정성 회복, 물가 안정과 경제 성장,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목회자들은 국민 통합과 정치 경제의 안정과 투명, 공정 사회를 바랐다. 이를 종합하면 교인들 및 전 국민은 우리 사회가 여러 면에서 새롭게 변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원론적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개혁과 생명과 화목이라는 관점에서 요약하여 새 정권의 과제로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진정한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개혁의 동력은 투명성과 공정성에 있다. 대통령과 모든 공직자들이 청렴 정직하며 겸허하게 국민을 섬기는 태도를 재정돈해야 한다. 국민들이 위임한 권력을 남용할 때 최순실 사건과 같은 역사의 오점을 남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은밀한 패권이나 농단 세력이 없이 정책 시행과 인사 등용에서 차별을 없애고 법적 질서의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 법원과 검찰을 비롯한 권력 기관들을 개혁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며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던 일부의 작태를 원천 차단해야 한다. 또한 단기간의 성과를 욕심내기보다 시행착오를 겪고 조금 더디더라도 미래지향적이며 내실이 있는 통치와 행정을 펼치기를 바란다. 둘째,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로 만들어 가야 한다. 생명의 존엄성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다. 먹을거리와 교통, 방역 등의 국가 안전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 정책과 시행령이 되도록 전반적, 세부적으로 손질해야 한다. 그래서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와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원전과 생태 환경 문제 등도 국민의 생명 보호를 중심으로 해결에 최선을 다하고 개발 위주의 정책들을 신중히 재고하고 정돈해야 한다. 노동 환경도 마찬가지이다. 2016년 8월 15일 발표된 OECD의 ‘2016 고용 동향’에 따르면 취업자 1인당 연 평균 노동 시간이 멕시코 2246시간 한국 2113시간 미국이 1790시간 일본이 1719시간이라 한다. 한국은 OECD 회원국 34개국 평균(1천766시간)보다 347시간이나 많았다. 이제는 경제 발전의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민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라도 노동 시간 단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노동 시간과 환경의 조속한 개선이 더더욱 필요한 이유는 이것이 인권과 삶의 질의 문제이며 만혼과 저출산 그리고 교육 등 최근의 사회적 문제들과도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화목한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대선 기간의 갈등을 포함한 계층 간, 세대 간, 지역 간의 갈등을 치유하고 사회 통합의 가시적 정책과 조치들이 조속히 시행되어야 한다. 탕평책과 같은 산술적 통합은 물론, 가장 문제시되는 양극화로 인한 불화와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위한 특단의 정책이 필요하다. 저소득 소외 계층의 복지, 청년 실업, 부익부 빈익빈은 지속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이다. 또한 이번 선거에선 많이 희석되었지만 여전한 지역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권이 습관적으로 공약해 온 지방의 균형적 발전이 속히 실천되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에 남북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가시적 활동들이 필요하다. 북한의 핵 위협과 미국이 주도한 한국 내 사드 배치 등의 일련의 조치들로 강대국들이 얽혀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굳건한 안보는 두말할 나위 없이 당연하다. 하지만 남북 대화의 여지를 없애 버리고 대치 상태만 지속하는 것도 옳지 않다. 지난 4월 23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발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새 정권의 대북 정책 방향과 관련해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68.6%였고 ‘북한에 강경한 대응으로 나가야 한다’는 응답은 26.5%였다. 여론에 나타나듯이 다수 국민들은 가급적 평화로운 남북 관계를 원하고 있다. 힘의 우위를 통한 안보 태세를 갖추어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주체가 되어 다각적 외교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필요하다. 북한이 스스로 핵을 포기하고 평화적인 자세로 나오도록 채널을 열어 두고 관련국들의 협조 속에 부단히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이런 자주적 노력이 없이는 우리가 소외된 채 당사국들의 이해타산에 끌려 다니는 형국이 되고 남북 갈등은 더 깊어지고 말 것이다. 새 정권의 과제를 제시했지만 사실 이는 어느 정권이든 지속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들이다. 정직하고 겸허한 자세로 차근차근 성실하게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나가면서 바르게 개혁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화목한 사회를 지향하는 새 정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695 no image 배려, 공동체의 꿈
편집부
1719 2017-04-19
배려, 공동체의 꿈 우리 시대엔 인성 교육이나 지도력을 말할 때 흔히 배려라는 덕을 거론하곤 한다. 사회가 소통의 부재로 공동체적인 미덕을 잃어가고 부익부 빈익빈 같은 편중 현상이 극에 달한 때문일 것이다. 그에 따른 사회적 손실도 늘면서 배려라는 덕목이 국가나 사회, 가정 등에서의 관계 향상과 지도력에서 중요한 자질로 떠올랐다. 배려는 사전적으로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쓴다는 뜻이다. 이는 서로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상대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이해하고 존중해 주는 소통의 마음이다. 쉽게 말해 상대의 필요에 민감해져서 그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려는 마음과 행동을 뜻한다. 누구나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것이 세상의 상식인데도 그동안 우리 사회의 각박함은 서로에 대한 배려심을 졸아붙게 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조류를 생성해 왔 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사회주의권의 퇴조는 그 이념과는 달리 인간을 물질적인 존재로만 상정하고 상관된 문제를 풀어 가려는 삭막함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약자를 위한다며 출발했으나 약자를 오히려 억압하는 소수 강자들만의 편향된 통치와 이기심이 자기 몰락을 초래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도 심각하다. 자본주의 자체가 인간의 건전한 개인주의를 경제적으로 적용한 체제이다 보니 불건전한 이기주의로 치달으면 결국 문제를 일으킨다. 사회가 상호 투쟁적인 약육강식의 생존 질서로 변질되어 특히 약자에 대한 배려의 윤리가 바르게 시행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조금만 더 약한 자들을 섬세하게 이해하고 배려하며 산다면 진정한 소통으로 서로가 그 필요를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회가 서로의 슬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사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일의 모본을 보여야 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말씀도 배려의 정신에 다름 아니다. 혹자는 얘기한다. “약자가 무슨 선이라도 되는가?” 아니다. 약자를 배려한다는 것은 약자가 선해서가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가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판단하여 도움을 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생래적 존엄함을 지닌 인간이 강도를 만나 곤궁에 처했기 때문에 그 존엄성을 지켜 하나님의 형상됨을 회복시켜 주려 함이다. 그렇게 함이 선한 일이요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복음 전도는 물론이요 구체적 위로와 도움을 주는 일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배려의 변용인 똘레랑스(tolerance)로 서로 관용하고 인정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로 힘 있는 자가 사회의 약자를 위해 더 섬기는 모습을 보인다면 서로가 돕고 사는 공동체의 형성이 꿈만은 아닐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배려하여 죄에서 건지시려고 낮아지셔서 고난의 길을 가신 것 아닌가. 은혜를 많이 누리고 사는 우리도 주님의 마음으로 이 사연 많은 나라와 사회와 교회를 품고 그 길로 가자.
694 no image 발전적 변화를 위하여
편집부
1622 2017-04-19
발전적 변화를 위하여 오랜 전통이나 현실의 안정된 상황을 더 중요시하며 굳건히 지켜 나가려는 자세를 보수라 한다. 반면 상황을 반영하며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보려는 자세를 진보라 한다. 보수든 진보든 다 나름의 가치가 있고 상호보완적일 때 사회에 유익한 면이 있다. 그러나 보수가 지나치면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폐쇄성을 갖게 되고 진보가 지나치면 좋은 전통과 본질적 가치들을 훼손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인 가치 기준을 분명히 하고 그에 따라 좋은 것은 끝까지 지키고 나쁜 것은 고쳐서 발전을 지향해야 한다. 이렇게 지킬 것은 지키되 발전을 위해 고칠 것은 고쳐 나가는 것을 개혁이라 한다. 개인이든 사회든 발전의 결과는 좋아하면서도 그 과정에서의 변화는 두려워한다. 익숙한 현실의 틀을 바꾼다는 것이 낯설어 불확실한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진정한 개혁도 없다. 우리 사회나 교회나 오류와 모순에 고민하는 현 단계에서는 다소의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개혁적인 자세로 나아가는 것이 미덕이라 본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각성이 있다면 새로운 미래를 위해 준엄한 자기 점검과 개혁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용기 있고 양심적인 개인과 사회만이 발전의 복을 누리는 것이다. 참된 변화는 가치의 변질이 아니라 발전이다.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는 보수와 진보를 넘어 성경적인 길을 간다. 그러므로 변질돼선 안 되는 분명한 진리에 속한 가치들은 끝까지 보수해야 하지만, 잘못된 점이나 변화가 필요한 것들은 속히 고쳐 나가는 개혁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발전을 누릴 수 있다.
693 no image 참여보다 귀한 사역은 없다
편집부
1593 2017-04-05
참여보다 귀한 사역은 없다 모든 것에는 그 고유의 역할이 있다. 교회에서의 역할을 우리는 흔히들 사역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 일을 주도하는 책임자를 사역자라 부르고, 그 일을 떠맡은 평신도를 우리는 평신도 사역자라 부른다. 교회가 하는 사역 중에는 본질적 사역도 있고, 비본질적 사역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지교회만을 말하지 않는다. 보다 넓은 의미의 공교회로 노회와 총회도 포함하는 말이다. 교회 사역을 맡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주관심사가 있다. 참여 인원으로 인한 노심초사이다. 이는 사역자가 사역의 성공 여부를 가리는 첫 번째 주제이기도 하다. 성경 공부 모임을 시작해도 그렇고, 교육 부서를 맡아도 그렇고, 말씀집회를 열어도 그렇고, 무슨 행사를 주관해도 그렇다. 책임 맡은 사역자라면 누구나 그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참여자 숫자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교회의 규모를 따질 때도 예배 참여 숫자를 그 기준으로 삼는 것을 보면 사역과 참여숫자는 여간 밀접한 관계가 아닌 게 분명하다. 사역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유형은 다양하다. 예컨대 교회마다 교회 사역이라면 할 수만 있으면 모두 참여하려는 열정적인 성도들이 있다. 이들은 예배나 활동이나 대회나 구분 없이 개근을 추구하며 열정을 쏟는 충성된 일꾼들이라 하겠다. 또한 자신에게 이익이 되거나 즐겨하는 분야에만 참여하는 성도가 있나 하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경우에만 참여하는 성도도 있다. 물론 그때그때 형편 따라 참여하는 이가 있나 하면, 예배 외의 사역엔 아예 외면하는 성도들도 적지 않다. 교회마다 이러한 다양한 유형의 성도들을 잘 아우르면서 목회하는 중에 있을 줄로 안다. 공적인 예배처럼 본질적 사역이라면 끊임없이 참여의 당위성을 일깨워 줘야 하고, 비본질적 사역이라면 함께 하기 위한 홍보는 극대화하되, 구체적인 제안과 권면은 최소한에 그치는 게 좋겠다. 성도에게 비본질적인 사역으로 부담을 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역에 대한 참여는 성도들만의 주제는 아니다. 노회와 총회에 참석하는 총대들도 예외 아니다. 이제 곧 봄 노회가 개회될 텐데 노회에 참석하는 노회원들도 심기일전할 필요가 있다. 누구든 자기가 속한 조직에 대한 첫 번째 의무는 그 조직의 정기 모임에 참석하는 일이다. 그 의무 성실에 위반할 때는 그 경중에 따라 대가를 치르는 게 기본적 상식이다. 목사는 더욱 그렇다. 목사가 노회에서 세움 받고 노회에 소속된 게 사실이라면, 지교회 목사로서 노회 안에서의 사역 중 노회 참석, 그 자체보다 중한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여 아무런 사전 사유서 하나 없이 무단으로 노회에 불참한다면, 그것도 연속으로 되풀이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재나 개선의 노력도 없는 노회라면, 그건 정말이지 어둠의 세력 외에는 우리 중에 누구도 바라지 않을 가장 난감한 모습의 노회라 하겠다. 조직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 조직을 아우를 수 있을 때 그 자체의 권위가 생기기 마련이다. 누군가 무단으로 연속하여 노회에 불참해도 전혀 손쓸 수 없는 무기력한 노회라면 어떻게 거기서 영적인 권위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느 노회나 어느 교단인들 예외 없는 일이지만, 노회나 총회에서 사실상 발언하며 회의를 이끌어가는 총대들은 몇몇 손에 꼽을 정도에 그친다. 나머지 80-90%의 총대들은 발언 한 번 하지 않고 2박 3일을 꼬박 앉아 회의에만 참석하다가 돌아간다. 그럼 총회는 누가 이끌어 가는가? 비록 발언은 소수가 하지만 회의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발언자들이 아니라 말없는 다수의 참석자들에게서 나온다. 그들은 다른 회원의 발언을 진지하게 경청하며 스스로 사리 판단을 내리며 회의의 흐름을 이끌어간다. 그들은 그냥 앉아 있는 방청객이 아니다. 방청객은 방청 여부가 자신의 뜻에 달려있지만 총대는 참석 여부가 내 뜻이 아니라 지 교회와 노회의 뜻을 받들고 있기 때문이다. 노회와 총회가 보다 큰 범위의 교회라면 노회와 총회의 의결은 그 엄중함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발언자를 발언자대로 사용하신다면, 말없는 다수의 참여자 역시 그 몫대로 사용하시는 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에 있어 참여만큼 귀한 사역은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무슨 사역을 하느냐?’ ‘얼마나 성과를 내느냐?’ ‘얼마나 큰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일에 진정성을 갖고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 물론 여기서의 진정성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앞장서서 일하거나 유력한 발언자들이 이끌어 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끌어 가시는 거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중심으로 360도 원을 그리며 참여하는 뭇 참여자를 동일한 영광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의 참여 활동을 대수롭잖게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걸린 사역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의 성도의 영광된 순간이 어디 예배뿐이던가! 하물며 보냄 받은 총대가 파송자의 뜻을 거스르면서, 어찌 하나님의 영광을 입에 담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692 no image 탄핵 갈등, 성장통으로 삼아야
편집부
1604 2017-03-22
탄핵 갈등, 성장통으로 삼아야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으로 현직 대통령이 파면되는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하였다. 헌재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사회적 갈등 요인이 되고 있다. 성도들도 교회 안과 밖에서 부딪치는 정치적인 불편함에 대하여 신앙적으로 대응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작금에 겪고 있는 갈등과 아픔이 국민 통합의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성숙하고 정의로운 민주사회로 발전하는 길목에서 겪는 성장통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이번 헌재의 결정은 헌법의 역할과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한 나라의 헌법은 그 나라 국민이 합의하고 따르는바 공동체적 가치, 원리, 절차를 포함한다. 구약시대에 모세 율법이 이스라엘을 신정국가로 세우는 기초였던 것처럼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가운데 국가적으로 합의된 최고의 질서로 국가 존립의 법적 기초이다. 이번 헌재의 결정은 국가 지도자의 신임 문제가 헌법의 정신과 절차에 따라 일단락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인의 생각이 헌재 판결과 다를지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민주 시민에게 요구되는 덕목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야기되는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먼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자기 생각을 강요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억지로 봉합하려고 무리하기보다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물론 그 견해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생각의 차이 때문에 서로 미워하거나 대립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다름이 공동체 안에서 상호 보완하는 길을 찾도록 힘써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치유 과정을 밟아야 한다.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는 것이 치유 프로세스의 시작일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견해와 다르지만 어렵게 결정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자신을 추스를 시간을 주어야 한다. 될 수 있는 대로 갈등의 골을 좁히고 치유와 통합의 길로 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공동체 정신을 고양하고 정의와 평화의 길을 감으로써 화해와 통합에 앞장서야 한다. 나아가서 성도는 민주 시민으로서 나라의 새로운 질서와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 적극 참여하여야 한다. 특히 5월 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들의 사람됨과 공약을 꼼꼼히 살피고 기독교적 가치에 따라 면밀하고 냉철하게 판단하여 중요한 선택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교회로서 특별히 주의할 점은 아무리 자기가 옳다고 확신할지라도 정치적인 사안에 교회의 이름과 표지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혹시라도 개인이 아닌 교회가 전체로서 특정 정파나 정치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기독교 진리를 축소, 왜곡할 위험이 크다. 기독교회는 정치적 이념에 휘둘리거나 정치적 신념을 강요하거나 편 가르기에 가담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의 진리가 특정 정파와 운동의 주장과 동일시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전통을 이어 가야 한다. 한국 교회는 기독교 전래 이래로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공헌한 바가 적지 않다. 개화와 독립, 문맹 퇴치, 의료, 교육, 민주화 과정 등에서 공헌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작금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시민으로서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물론 사도 바울의 권면대로 나라와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언제나 믿음으로 행하여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되, 마땅히 가야할 바 본연의 길을 가야 한다. 일마다 특별한 대책을 강구하기 전에, 성도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에서 자기가 맡은 일과 직분에 충실한 성도다운 성도가 되고,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일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이는 어떤 국가나 제도, 혹은 단체가 할 수 없는, 오직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특권이자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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