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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1 no image 진정한 이미지는 실재에서 나온다
편집부
1455 2017-03-08
진정한 이미지는 실재에서 나온다 오늘날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image)를 중요시하는 시대이다. 그래서 이미지 관리라는 말도 나왔다. 이미지가 외적인 면모라면 실재(reality)는 그가 가진 본질적, 내적인 면모를 말한다. 좋은 실재에서 비롯된 좋은 이미지야 더할 나위 없지만 이미지와 실재가 항상 일치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 온전치 못하여 진정한 내면을 갖추는 힘이 부족하고 서로의 내면을 제대로 보는 눈도 약하기 때문이다. 좋은 이미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다만 좋은 실재를 갖추려 하지 않고 전략적으로 이미지만을 조작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미지와 실재의 가장 쉬운 예가 대중 매체를 통한 제품 광고이다. 어떤 광고라도 제품의 본질적인 기능만을 그대로 선전하진 않는다. 다수의 광고는 실재와는 다른 과장된 설명과 왜곡을 불사하며 판매에 목적을 두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이미지 전략인 줄 알면서도 그런 광고에 지배를 받고 그 제품의 본질을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제품에 하자가 보여도 그 정도는 감수할 만큼의 면역력과 적응력을 갖게 된다. 이런 부분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시뮬라시옹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는 인공적 작업을 뜻한다. 일종의 가상 현실, 혹은 이미지 조작인 셈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이미지의 네 가지 면으로 이를 설명한다. 실재를 반영하는 것, 실재를 변질시켜 거짓을 만들어 내는 것, 실재를 은폐하여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 그리고 사실성이 완전히 사라진 왜곡된 이미지가 실재가 돼 버리는 것이다. 이미지 작업이 진행되면 결국 본래의 실재가 무엇이든 나타나는 이미지를 실재라고 믿고 사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한국 교회도 위의 어느 단계에 있는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지만 이모저모 시뮬라시옹의 폐해를 입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이미지에 적잖이 힘을 써 온 게 사실이다. 그것이 단기간의 외적 성장의 효과를 가져 온 한 요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외면에 치우친 이미지 전략은 시간이 흐르자 결국 부메랑이 되어 교회에 손상을 입히고 있다. 내면이 준비되지 못한 채 외면에 치중한 결과 이미지마저 흐려지게 된 것이다. 제 아무리 광고를 멋지게 잘해도 결국 그 제품의 질이 함량 미달일 경우엔 때가 되면 집단적인 외면을 받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일찍이 마이클 호튼이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는 책에서 설파한 대로 미국 교회는 사회적 흐름을 타고 실용주의와 소비자중심주의의 길을 걸어왔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 중심의 물량적인 행태를 낳았고 교회가 세속화의 길을 걸으며 쇠퇴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국 교회도 그 길을 답습해 온 혐의가 짙다. 우리는 은연중 내면의 본질을 추구하지 않고 외적인 면모에만 가치를 두고 투자하는 사회적 조류에 편승해 온 것이다. 그러다가 실재가 약해지자 조작된 이미지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정체성의 혼란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애초에 우리의 실재를 정직하게 돌아봤어야 했다. 사람들이 끝없이 속아 주진 않는 것이 현실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 우리가 관심을 두고 진력해야 할 것은 실재를 갖추는 일이다. 본질적 내면을 점검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재건한 다음 이미지에 연연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실재를 갖추면 실재와 일치된 이미지는 자연스레 우러나오기 마련이다. 조작이나 왜곡이 아닌 정당하고 진정한 이미지는 실재에서 나온다. 잘 알듯이 엑수시아(ejxousiva 권세, 권위)라는 말은 엑크(ejk ~로부터)와 우시아(ousiva 본질, 실재)의 합성어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실재로부터 발현되는 것이 진정한 권위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권위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미거나 과대 선전을 할 필요도 없다. 신앙의 권위자인 척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삶을 꾸짖으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미지와 실재, 겉과 속이 일치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 생활은 우리를 지치게 한다. 조작되고 과장된 이미지를 실재처럼 계속 유지하려니 힘들 수밖에 없다. 한국 교회도 그런 이미지 관리의 조바심 때문에 피곤에 내몰린 상태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만시지탄은 있지만 우리를 향한 세상의 부정적인 평판에 너무 좌절하지 말고 이를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부끄러운 민낯으로 당분간 비난을 받더라도 향후 실재를 갖추어 나가면 된다.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내면적 본질을 회복하는 삶, 실재를 중요시하는 삶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 개혁이다. 실재를 변질시켜 거짓을 만들어 내지 말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포장하지도 말자. 완전히 왜곡된 이미지를 실재라고 믿고 사는 가상 현실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실재, 교회의 본질적이고 성경적인 실재를 갖추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
690 no image 신학은 과연 전문적으로 신학 공부를 하는 이들의 전유물인가?
편집부
1657 2017-02-22
신학은 과연 전문적으로 신학 공부를 하는 이들의 전유물인가? “신학은 과연 전문적으로 신학 공부를 하는 이들의 전유물인가?”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신학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우선 대답부터 하면, “그렇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학을 해야 하고, 사실 신학을 하는 사람이다.” 물론 이 말 속의 신학은 전문적 신학은 아니다. 전문적 의미로 신학을 하는 이들은 극히 적다.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신학한다”(theologieren, doing theology)고 표현한다. 그렇게 전문적으로 신학하는 일은 평생 그 일에 종사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사명으로 맡겨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문적으로 신학을 하는 것만이 신학하는 것은 아니다. 비전문적으로 신학하는 일도 있고, 오히려 더 많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신학하는 일의 본래적 의미이다. 전문적으로 신학하는 이들의 사명은 이런 비전문적 신학 작업을 돕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목회자와 성도들의 신학함의 의미를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생각해보려 한다. 첫째, 모든 목회자는 “신학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전문적 의미의 신학자는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만일 목회자가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그 가르침을 회중들에게 그들의 수준에 맡도록 전달하며, 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여 가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의 목회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참된 목회자는 날마다 기도하면서 성경을 공부하여 바르게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발견한 성경의 뜻을 오늘의 상황과 구체적인 성도들의 삶에 적용하여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전해 주며 성도들과 함께 성경에서 발견한 참된 교회의 모습이 이 땅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도록 기도하며 애쓰는 사람이다. 바로 이것이 신학하는 일이다. 이 일에 힘쓰지 않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는 아무리 많은 사람을 모으고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처럼 보여도 참된 목회자가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삯꾼 목자”일 뿐이다. 둘째, 성도는 “신학하는 사람들”이다. 앞서의 참된 목회자와 함께 교회의 회원들도 자연스럽게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면서 그 말씀의 뜻을 잘 파악해 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게 된다. 그러니 이들 모두가 다 넓은 의미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바른 목회자와 함께 하는 모든 이들, 그들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 “성도(聖徒)들”, 즉 “거룩한 무리들”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진정한 의미이며 성경을 바로 공부한 사람들은 모두 이처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신학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로마가톨릭에서는 전문적인 성직자들 이외의 사람들을 전문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뜻에서 “평신도”(平信徒, layman, 오늘날은 layperson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라고 지칭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통해 모든 것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변혁시키려 했던 개혁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제요, 성직자들이라면서 상호 목회의 원칙을 강조하였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각기 은사를 받은 대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 즉 신학하는 사람이 되었고 교회 공동체의 모임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 하면서 기도하는 중에 성경을 계속 공부하며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공동체, 곧 신학하는 공동체가 된 것이다. 셋째, 그러면 성도들은 과연 어떻게 신학할 것인가? 전문적인 신학자가 아닌 우리들은 먼저 우리들의 한도 내에서 목회자들의 인도를 따라 성경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열심히 기도하면서, 시간을 내어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해야 한다. 부족하지만 이 일을 위해 노력하다 보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을 전체적으로 깨닫게 된다(the whole counsel of God). 그로부터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는 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느끼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결단하고 사는 일을 향해 나아가게 돼야 한다. 그것이 참으로 복되게 사는 일인 신학을 하는 일이다. 이 작업은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고, 죽어서 “하늘”(heaven)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 뒤에는 우리 모두가 더 온전한 신학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일, 즉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생각하는 일”을 이미 이 땅에서 시작했다. 이를 박윤선 목사는 “계시의존사색”(啓示依存思索)이라고 표현했다. 한국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이런 의미의 “계시의존사색”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한국 교회가 이렇게 바르게 신학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할 때 지금 한국 교회가 직면한 많은 문제들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일을 얼마나 빨리 시작하느냐, 얼마나 진지하게 하느냐, 그리고 특히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신실한 종들”이기를 바란다.
689 no image 세상의 창을 열어 통합적 사고력을 기르자
편집부
1503 2017-02-08
세상의 창을 열어 통합적 사고력을 기르자 - 합신 신학생들을 위하여 - 2017학년도 75명의 신입생들이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 선발되어 입학식을 기다리고 있다. 무척이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사명의 길로 들어선 귀한 후배들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축하를 보낸다. 모든 신학교들이 좋은 학생들을 확보하려 노력하지만 적어도 합신의 입학생들은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목사 후보생들로 졸업할 것임을 믿는다. 이를 위해 3년간의 길지 않은 시간에 상당히 바쁜 생활을 한다. 방대한 신학들을 빠른 속도로 익히고 일정한 학점을 이수해야 한다. 게다가 지교회에서 사역도 해야 한다. 그러므로 관심 있는 개별 과목에만 진력하기에는 녹록치 않다. 이 점을 기억하길 바라며 신입생과 기왕의 재학생들에게 진심 어린 당부의 말을 건네려 한다. 먼저, 자신이 익숙한 신학과 신앙에 고집스레 안주하지 않고 학교에서 배우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체계로 전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싫다면 애초에 신앙 노선이 맞는 학교를 선택했어야 옳다. 3년간 개혁신학을 배우고도 목회 현장에선 잠복기가 끝난 다른 신학을 표출하여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종종 있다. 3년은 단지 라이선스의 기간이 아니다. 자신이 변화, 발전되고 성숙돼야 하는 황금 같은 시간이다. 그러므로 열의를 갖고 개혁신학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개혁주의 자체를 열심히 배웠다고 목회나 선교 현장에서의 노하우가 저절로 터득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목회나 선교는 세상을 대하는 것인데 세상을 이해하는 지혜와 통찰력이 결여되면 결국 세상의 실체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어려움을 당한다. 그러므로 둘째로 당부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창을 열어 통합적 사고력을 기르고 이해력을 키우라는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학부 과정에서 장착되었어야 할 부분이지만 의외로 상당수의 신학생들이 이런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졸업하고 부랴부랴 사명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본다. 그것이 작금의 한국교회의 목회자의 자질 문제를 일으킨 불씨의 하나임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통합적 사고란 무엇인가? 개혁신학의 각 과목들을 지식 축적 방식의 공부로 끝내지 않고 세상에 대한 비평적 사고로 연결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예컨대 일반 역사도 그렇지만 역사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신자로서의 통찰력과 응전력을 기르기 위함이기에 오늘의 시대 상황과 시민사회 속에서의 의미와 항상 연결 지어 생각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생들은 이수 과목 상호간의 통합적 이해는 물론, 일반 서적이나 신문도 부지런히 읽고 동시대의 개혁주의 신자로서의 고민을 함께 나누며, 모든 과목들이 삶과 동떨어진 진리가 아님을 부단히 인식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렇게 진리와 삶의 통합적 인식에 단련된 사명자는 목회 현장에서 의연하게 성경적인 답을 찾아 제시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융합이니 통섭이니 하면서 모든 분야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복합적인 연구와 소통으로 답을 찾으려는 흐름이 크다. 신학도 소위 통전신학이라 하여 혼합주의 논쟁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통합적 사고란 그저 다원성을 수용하며 이런 저런 생각을 병렬적으로 혼합함이 아니라 개혁주의적 세계관 위에서 신학과 목회와 경건과 일상생활이 통합돼 있음을 전제로 성경적인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본래적 울타리에 갇히지 말고 세상을 향한 창을 활짝 열어야 한다. 창을 열었어도 창틀 안에 나타난 풍광만 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자주 내다보고 바깥의 공기와 습도와 온도를 느끼고 이해력을 증진시켜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시력을 높이고 시야를 확대해 가야 한다. 이것을 세상과의 소통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세상에 동화되어 버리는 세속화와는 분명히 다르다. 가장 개혁주의적인 사람이 창을 가장 활짝 여는 게 맞다. 우리는 언제고 삶의 정황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이후의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고민은 세상에 대한 신자들의 삶의 자세를 성경적으로 정립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올바른 목회자들을 배출하려는 우리의 열망이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머잖은 미래의 주역들인 신학생들이 그 기대에 얼마나 부응할지는 다음의 세 가지에 달려 있다. 첫째, 말할 것도 없이 신학생 본인들의 분투이다. 둘째, 신학교 당국의 배려다. 세상에 대한 성경적인 인식의 끈을 놓지 않도록 일반상식과 문화적 창을 넓혀주는 격려와 가르침과 소통의 기회를 자주 주어야 한다. 셋째는 이들을 지원하는 교단 목회자들과 교회이다. 그들이 통합적 사고와 안목을 갖춰 좋은 인격적 목회자로 성장하도록 기도와 후원으로 협력하고 복된 신학생 시절을 보낼 수 있게 힘껏 도와야 한다.
688 no image 개혁주의적 삶으로 더 나아가자
편집부
1413 2017-01-25
개혁주의적 삶으로 더 나아가자 합신 교단의 정체성을 말하려면 낯익은 ~from ~to의 어법이 적절하다. 우리는 합동(총신)으로부터(from) 나왔다. 같은 개혁신학이요 합동이라는 이름을 동반했으니 교단적 궤도 비슷한데 우리는 어디로 가려고, 무엇을 위해(to) 나왔는가? 배운 신학과는 달리 개혁주의답지 않은 당시의 교권과 그에 갇힌 신학교의 어둠을 벗어나 진정한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삶과 목회와 바른 신학교로 보여주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따라서 합신의 정체성은 개혁주의적 삶이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에 있다.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의 요점이 그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개혁주의적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힘써 왔다. 그런데 갈수록 많은 도전들을 이겨 내는 과정에서 개혁주의의 보루라는 의식과 책임감을 너무 무겁게 가진 나머지, 혹시라도 역사적 개혁주의 자체를 강조하는 데만 익숙해진 건 아닌지 한번쯤 돌아보자. 개혁주의에 대한 지적 포만감을 누리며 논리의 장비를 잘 갖추는 것과 실제로 개혁주의적 삶을 사는 건 다르다. 책을 수집하는 것과 읽는 것이 다르듯이 달리기 선수가 유니폼을 잘 차려 입고 달리기에 대한 풍성한 사전 지식을 갖춰 출발선에 늠름히 섰어도 달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 가장 성경적인 개혁주의의 세례를 받고 행복한 신앙 체계 안에서 자기 위안을 누리더라도 실제적 실천적 개혁주의가 아니고서는 그것이 옳다는 증거가 빈약해진다. 언제든 어떻게 사는 것이 개혁주의인지 삶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성장세가 약화된 기독교는 믿음과 삶에 대한 고민과 논쟁에 직면해 있다. 이는 의도와는 달리 숱한 오류와 오해를 낳고 있다. 특히 한국의 상황은 더 심각해서 삶의 영성, 관상기도, 감각적 영성 등, 지식의 동굴을 벗어난 삶의 신학과 신앙을 말하는 풍조가 반응을 얻고 있다. 신학적 정체가 모호한 여러 운동들이 성행하고 개혁주의 동료들마저도 간혹 그런 류에 마음을 뺏기곤 한다. 왜 그럴까? 지행합일이라는 일반적 진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개혁주의에 대한 지식은 많은데 정작 그대로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개혁주의적 삶의 전범을 많이 못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개혁주의는 소위 영성을 따로 말하지 않는다. 믿음과 삶을 이미 통합하고 있다.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고전적인 칼빈주의 세계관이 이를 잘 표현해 준다. 그럼에도 왜 우리가 배운 개혁주의와 실제 삶의 괴리가 오는가? 애초에 개혁주의를 제대로 못 배웠거나 배운 대로 사는 것을 여전히 주저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지적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 기초하여 역사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일상의 모든 인격과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부하다고 하겠지만 개혁주의는 교회와 목회와 인간관계, 주방과 밥상, 일터, 학교, 독서, 학문, 예술, 놀이, 여행, 노사문제, 선거와 시민운동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하는 실제적 역사적 삶을 말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교회사 속에서 신앙과 윤리라는 주제가 끊인 적은 없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바울이 ‘복음과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명확히 제시한 바이다. 그런데 근래의 바울 신학 칭의론 논쟁에서 보듯 믿음과 삶의 일체성에 대한 반성과 강한 열망이 생긴 것은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돌파구를 다른 데서 찾으려 하면 결코 답이 없다. 오래됐는데 아직도 적실한 말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How should we then live?’ 프란시스 쉐퍼가 40년 전에 만든 영화와 책의 제목이지만 지금도 유효한 질문이 아닌가? 그 내용의 방대함과는 달리 쉐퍼의 결론은 간단하다. 성경만이 우리가 당대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려주는 분명한 관점과 그 해결책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위기나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성경에 기초한 바른 신학으로서의 역사적 개혁주의의 등불을 버릴 수 없으며 그것이 혼돈의 교회를 비추는 것임을 확신한다. 그리고는 바른 생활이다. 결국 우리가 견지하는 개혁주의가 진짜임을 보여주려면 개혁주의적 삶이 수반되어야 한다. 사상과 변증의 도전이 극심한 세상에서 진짜를 진짜라고 가르쳐 전하는 일은 언제고 멈출 수 없다. 그러나 복음 전도가 그렇듯이 너무 말로만 강조하다 보면 괜한 의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진짜 좋은 제품은 적절한 선전과 더불어 실제 소비자의 경험에 의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따라서 마땅한 논리적 설득과 함께 진짜임을 의연하게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개혁주의가 가장 올바른 대안이라면 한국적 상황 속에서 개혁주의적 삶이란 무엇인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든 영역에서 연구하여 규명하고 증언하는 실천적 삶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너무 조급한 편이다. 당장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의심부터 한다. 가야 할 길이 바르다는 확신이 있다면 인내하며 길게 내다보고 가야 한다. 지금까지도 애써 언덕을 잘 넘어 왔지만 비상한 시기에 우리는 개혁주의적 삶이라는 신호등을 다시 마주하고 있다. 푸른 등은 켜졌다. 주저 말고 함께 건너가자.
687 no image 세상 속에서의 교회의 바른 역할
편집부
1667 2017-01-10
세상 속에서의 교회의 바른 역할 작금의 복잡하고 혼란한 사회 속에서 교회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성경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갖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용어들은 다를 수 있다. 교회는 ‘제사장’이며 동시에 ‘예언자’적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제목의 시사점에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동의하지만 그게 정확한 표현인가에는 다양한 의견이 가능하다. 문제는 제사장과 예언자가 구약의 하나님 나라 백성이던 이스라엘에 주어진 종교적 직임이었다는 점이다. 그때와 우리의 상황은 두 가지 점에서 명백히 다르다. 먼저, 이제는 구약과 달리 제사장과 선지자가 그 사명을 다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완성하신 신약 시대라는 점. 두 번째는 구약의 신정 사회와 달리 우리 사회는 불신자들이 대다수이며 그 안에 주님을 믿는 교회 공동체가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므로 아주 엄밀히 따지는 자들은 이런 직임과 역할이 이 시대에 실존 가능하다는 것에 부정적이다. 이제 다른 직임들이 교회에 주어졌고, 다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예언자적 역할’이라는 용어로 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을 표현해 보려는 그 의도를 가장 잘 표현할 길은 무엇일까?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교회는 무엇인가? 첫째, 교회는 이땅 가운데서 꿈꾸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꿈들(their own visions)이거나 자신들의 목적에 대한 꿈도 아닌, 이 세상 사람들의 온갖 꿈을 종합한 것이어서는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세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꿈, 곧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세상 역사 가운데 그 나라가 임하리라는 소식을 예언자들을 통해 전하시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땅에 이미 도래시키시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극치에 이르게 하실,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시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둘째, 교회는 옳은 것을 지시하고, 그것에 비춰 우리의 문제를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나라는 의로운 나라여서 아무도 그 스스로 그 나라에 들어 올 수가 없다. 사람들의 의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하나님의 의로만 가득 찬 나라이므로 그 나라와 의에 비추면 인간의 진선미는 그야말로 누더기와 같은 것이다(사64:6).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의 심각한 죄악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언하여 사람들로 그 십자가의 공로에 의존하여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오게 하고, 같이 하나님 앞에 서는 공동체이다. 셋째, 교회는 진정한 실천가들이다. 이렇게 구속받고 매우 감사하여 다른 이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이땅에서 자신들이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 받고 그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골1:13) 것이 감사해서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공동체, 즉 감사하여 실천하는 공동체이다. 이땅에서 이 세 가지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교회는 세상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증언하게 되고, 간접적으로는 세상의 현실적인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가는 것이 덜 악한(less evil) 것인지에 대한 증언도 하게 된다. 세상 다른 데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교회가 발현하고 있는 의에 대한 증언에 비춰 간접적으로 이 세상도 일반은총 중에 덜한 악(less evil)을 향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의를 증언하며 세상이 상대적으로 의로운 방향으로 가게 하는 역할을 간접적으로 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가 궁극적인 구제 단체는 아니지만 성경이 지시한 대로의 역할을 잘 해낼 때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 교회 밖으로 흘러넘쳐 주변에도 사랑의 구제가 이뤄진다. 물론 교회는 단순한 구제운동이 아니라 신자들로 하여금 창조와 구속에 감사하여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르치고 배워 그런 기초 위에서 일하게 하고 구제와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들의 일반 시민 사회 속에서의 책임이 더욱 중차대하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시대의 필요인 교회는 끝까지 남아 옳은 것을 세상에 증언하는 시대의 양심 역할을 해야 한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스스로 해체해 버린 이 세대에 그래도 끝까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의로운 것임을 세상의 용어로 바꾸어 잘 드러낼 책임이 교회에 있는 것이다. 다시 강조컨대, 교회는 궁극적으로 이 세상 자체를 위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다운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이 세상도 간접적인 빛을 얻을 수 있고, 세상이 직면한 여러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시사(示唆)를 받는다. 또한 교회는 이땅의 정치나 사회, 문화 발전을 위한 단체는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진정 교회다울 때 교회는 이 세상의 정치, 사회, 문화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교회의 참 교회다움에서 나오는 결과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힘써서 우리들이 속한 교회를 참으로 교회다운 교회가 되도록 하자. 그리하여 이땅에 그 열매로서 정치, 사회, 문화의 발전도 경험할 수 있게 하자. 우리는 그것을 위한 ‘사람’들이지 그것을 위한 ‘기관’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교회다울 때 그 열매로 이 세상도 복을 얻는 것이다.
686 no image 교회의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편집부
1504 2016-12-28
교회의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의 개혁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올바른 말씀의 가르침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곧 개혁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점을 마음에 새기고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먼저 교회의 개혁은 아래와 같이 세 가지 관점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의 올바름을 가늠하는 유일한 잣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의 경험이나 판단으로써 교회개혁의 여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교회개혁의 중심은 어떠한 경우에도 나 혹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일반적 관점에서 보아 정의로우냐, 정의롭지 못하냐 하는 것도 역시 교회의 올바름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교회의 올바름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교회개혁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지식의 소유라 할 수 있다.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교회가 교회다운지 그렇지 않은지 분별할 수 있으며 그것을 기준으로 개혁의 출발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사역 곧 성령의 일하심이다. 어떤 개혁운동도 인간이 주도할 수 없으며 인간의 공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겸손하게 참여할 따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참된 성도는 주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개혁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어떤 사람의 결단에 달려 있지 않다. 한 개인이나 집단의 결단이 교회개혁을 주도하게 되면 또다시 개혁해야 할 다른 양상을 양산해 낼 따름이며, 외적으로 보아 상당히 성공적이라 판단될지라도 진정한 생명력은 없을 수밖에 없다. 신앙이 있는 성도들은 자기 시대를 살아가면서 주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와 그 말씀의 의미를 기독교회 가운데 끊임없이 말하며 살아가야 한다. 셋째, 개혁은 인간의 정의감과는 무관하다. 교회 개혁은 인간의 정의감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인간의 정의감이란 시대와 지역에 따라 항상 가변적이며 상대적이다. 그리고 경험적이다. 즉 정의를 외치는 인간, 특히 기독교 가운데서 정의를 외치는 자들은 모두가 자신을 정의의 편에 둘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서로 자기가 정의롭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끝없는 불필요한 투쟁만 지속될 우려가 있다. 교회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교회 내에 일반적 의미에서의 정의를 실현할 목적으로 그 일을 시도하지 않는다. 참된 교회개혁에 참여는 '말씀회복 운동'에 따른 성령으로 인한 자연 발생적 사역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 개혁의 대상은 비성경적인 지도자들이 아니다. 즉 잘못된 교권주의자들을 몰아내는 것이 개혁의 목적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논리에 입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 참다운 교회개혁운동은 제도나 조직의 개혁을 그 일차적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만일 교회개혁의 대상이 조직이나 제도라면 우리는 더 이상 개혁(reformation)이라 말하지 말고 혁명(revolution)이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개혁'과 '혁명'을 혼동하고 있으며 교회개혁을 외치면서 혁명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개혁은 결코 혁명적 방법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개혁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조직의 개선 뿐 아니라 어떤 획일적 운동(movement)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교회개혁은 기존의 제도를 개선한다든지 정책을 발전적으로 도모하자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것은 어떤 회개운동과도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개혁은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회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외적인 자기 행동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에 벗어나 있는 자신을 뉘우치는 것이다. 참된 회개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는, 집단을 이루어 '우리가 미리 회개하며 자복하자'고 이야기하며 모두가 자신들을 따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개혁은 그렇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개혁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주의 백성들에 대한 관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조직화된 잘못된 시대교회 가운데서 주의 백성을 이끌어 내려는 노력이 곧 교회개혁운동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개혁이 이루어짐으로써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회복되기를 바라며,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참된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기로 다짐해야 하겠다.
685 no image 더 이상의 ‘칭의’ 논쟁을 우려한다
편집부
1443 2016-12-14
더 이상의 ‘칭의’ 논쟁을 우려한다 아쉽지만 그동안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구원론과 칭의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왜곡된 구원론과 칭의론을 가르쳐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결과 복음이 실종되었고 참된 복음에 기초한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실종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적인 은혜의 교리는 값싼 은혜로 변질되었고 ‘오직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잘못된 칭의 이해가 종교개혁의 구원론과 칭의론 자체를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교회가 잘못 받아들이고 이해한 구원론과 칭의론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개혁의 구원론과 칭의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칼뱅은 칭의를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위한 참된 기초로 여겼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 곧 성화는 바로 율법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의 한 의, 곧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기초한다고 밝혔다. 오직 예수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전가된 의,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윤리의 기초인 것이다. 참된 경건은 참된 믿음에 기초하며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구속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감사에 근거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마치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을 무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칭의 논쟁은 윤리실종의 한국교회에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강조하다가 복음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 분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기초인데 여기에 인간의 선행을 섞으려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한국교회가 붙들어야 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한국교회는 바른 복음에 대한 이해 없이 마치 면죄부식의 값싼 복음을 가르쳐왔었다. 바로 여기에 소위 '구원파식의 구원 이해'가 자리하고 있다. 참된 복음이 없으니 참된 생명의 역사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 자리에는 이기적인 현세적 자기만족을 위한 기복신앙, 번영신학이 자리할 뿐이다. 칭의론 논쟁 이전에 복음에 대한 바른 선포가 우선되어야 한다. 개혁자들이 전수하여 준 바른 복음, 그 바른 복음의 선포만이 새 생명의 역사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거듭남의 역사가 없이, 곧 회심케 하는 역사가 없이 어떻게 성도의 거룩한 삶이 가능하겠는가?
684 no image 성탄의 의미와 신자에게 주는 유익
편집부
1550 2016-12-14
성탄의 의미와 신자에게 주는 유익 성탄절이다. 성탄의 날짜와 관련해서 논란이 많지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약속대로 오셨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자는 이 성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우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믿었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가 하늘에 별과 같을 것이라고 하실 때, 이 씨를 그리스도라 해석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그리스도를 주실 줄을 믿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 씨 가운데 그리스도를 주실 것을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긴 바 되었듯이 우리도 그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그 씨가 2000년 전 베들레헴 땅에 오셨고 우리 역시 아브라함과 같이 그 씨에 대해 믿음을 가짐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약속을 바울은 두 가지로 이해한다. 첫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이방에 미치게 하는 것과 둘째,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성령을 받는 것이었다. 곧 신자에게 성례가 그리스도 구속의 표로써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듯이 성탄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데 유익하도록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탄이 성례처럼 우리 믿음을 강화하는 교회의 공적 기능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절기들이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고 그 그림자로서 그 믿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 것처럼 교회는 성탄에 대해서 같은 자세로 임해야 한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성례가 아무런 유익이 없듯이 성탄도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는다. 성탄에서 가장 중심에 있어야 할 이해는 죄에서 구원할 씨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이다. 성찬식 때 떡이나 포도주에 대한 믿음 없이 참여한다면 그저 가게에서 파는 떡이고 사람이 만든 포도주에 불과하다. 성탄절도 마찬가지이다. 즐거운 찬송과 선물을 주고받는 일에만 열중할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을 점검해야 할 것이다.
683 no image 우리가 낙심하지 않아야 할 이유
편집부
1580 2016-11-29
우리가 낙심하지 않아야 할 이유 이땅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부딪치는 삶의 나락, 그것은 사실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삶의 투쟁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무언가 살아 있다는 그 사실을 온 몸으로 부대끼면서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누구나 죄악에 빠진 인간이 느껴야 하는 비참함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 낙심은 우리 인생의 종착점은 아니다. 삶의 비참이 극대에 이르든 이르지 않든 신자들에게는 언제나 위로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심한 종교적인 박해가 있던 시절에 신자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누리는 것에 대해 1559년에서 1576년 사이에 작성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다. 제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죄 값을 완전히 치러 주셨고, 마귀의 모든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나의 머리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게 하시는 방법으로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일이 나의 구원을 위하여 합력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성령으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며, 나를 전심으로 기꺼이, 그리고 이제부터 곧바로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결국 사람이 이땅에 태어나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려고 할 때에는 극심한 자기 비하에 따른 비참한 인생을 살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있는 나라와 사회가 오로지 힘의 철학에 따라 부익부, 빈익부의 길로 치닫게 될 때 상대적인 박탈감에 빠진 사람들은 더욱 비참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를 이땅에 보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내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면, 그리고 “나를 전심으로 기꺼이, 그리고 이제부터 곧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가 당하는 비참한 현실은 삶의 낙망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비참한 상황에 빠질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682 no image 참된 믿음은 경건을 동반한다
편집부
1687 2016-11-29
참된 믿음은 경건을 동반한다 바울 사도가 제1차 전도여행을 시작했던 그레데에서는 진리를 주장하지만 경건함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믿음은 가히 진정한 믿음이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이단에 속해 있었다. 이 이단의 창시자들이 주로 유대인들이었음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두 단계가 존재하는데 회심의 순간과 경건한 삶 속에서 자라 가는 것이 바로 그 두 단계이다. 바울은 이 두 가지 모두에 관심을 갖고서 믿음과 지식을 발전시키는 것과 신자들이 경건해지는 것을 돕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은 상대적으로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택함을 받지 못한 이들의 믿음은 부패했고 믿음에서 떠났으며 믿음이 아닌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리켜 ‘진리’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경건함에 속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로부터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지식은 거짓임이 밝혀진다. 믿음은 결코 경건과 분리되지 않는다. 믿음을 가리켜 ‘진리의 지식’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울은 결코 믿음과 경건 생활을 분리하지 않는다. 믿음이 진리의 지식이 되는 것은 신자들의 믿음을 증진시키고 성장함에 있어 기독교의 진리를 알게 하고, 그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며, 깊은 확신으로 그 진리를 붙들어 주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진리는 은혜 더불어 지식으로 자랄 수 있는 무한의 기회를 제공한다. 어느 시대든 어느 곳이든 성도들이 살기 쉬운 때와 장소는 없다. 때문에 성도들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짐으로써 진리의 지식을 한층 더 쌓아가야 한다. 진리가 경건을 동반하는 것은 영생에 대한 소망이기 때문이다.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경건을 추구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복음은 생명에 대한 약속이며 그 생명은 새로운 힘을 가지고 시작하여 영원토록 계속된다. 이런 점에서 참된 진리인 복음은 신자들에게 늘 경건한 삶을 살도록 역사한다. 그렇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감정적인 이입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는 데에서 진정한 능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681 no image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
편집부
5421 2016-11-16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 ‘개혁주의’는 항상 ‘역사적 개혁주의’를 동반한다. 여기에서 ‘역사적’이라는 말은 ‘전통적’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개혁주의’는 ‘잘못된 교회를 개혁해 가는 현실적 어떤 성향’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개혁의 다양한 내용이나 방법 등 현실적 현상에 대한 해석을 동원 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 개혁주의’는 칼빈주의와 같은 의미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칼빈주의에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배경으로 하는 ‘인간의 전적 부패’, ‘인간의 전적 무능’, ‘하나님의 제한적 구원’ 등을 포함한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인간은 무능하고 부패한 존재여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가 되는 구원에 대해서도, 죄악에 빠진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편 ‘역사적 복음주의’는 일반적으로 17세기 경건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형성이 되었다. 이 복음주의는 16세기 종교개혁시대의 신앙정신이 점차 세월을 따라 경직되고 제도화되어 갈 때 독일에서는 발생한 경건주의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경직되고 제도화된 기독교에서 좀 더 삶에 밀착된 실질적인 신앙을 필요로 하다고 판단한 것이 경건주의를 낳게 했다면 이러한 편의적인 복음 이해를 추종하려는 일단의 움직임이 오늘날 복음주의를 낳게하였다. 사실 경직된 기독교를 활성화된 삶의 종교로 회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신도 또다시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인본주의적 성향을 띠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결과 복음주의에서는 개혁주의에서 주장하던 인간의 전적 부패, 전적 무능, 제한적 구원에 대한 일종의 변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만한 일부는 남아있다’든지, ‘인간이 전적으로 무능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전도하여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든지, ‘하나님의 제한적 구원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시킬 수 있다’는 해석이 바로 오늘날 복음주의가 낳은 사생아들이다. 우리는 칼빈이 이단으로 정죄했던 알미니안주의 사상을 포함하고 있는 복음주의 사상들을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
680 no image 정교분리(政敎分離)에 대한 이해
편집부
1829 2016-11-16
정교분리(政敎分離)에 대한 이해 한국교회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은 종종 교회의 불의한 국가권력에 대한 암묵적 동의 내지 타협을 두둔하는데 사용된다. 더군다나 현재의 한국교회는 이에 더하여 불의한 권력에 대한 편승과 결탁, 나아가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권력의 떡고물을 누리기 위하여 권력의 시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정교분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제도로서의 국가(정부)와 교회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교분리, 다시 말해 국가와 교회의 분리원칙은 국가와 교회, 양자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방식의 차이를 존중하고 국가와 교회의 고유한 주권에 대한 침해를 막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다. 이것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말은 아니다. 도리어 참된 기독교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과 관련되어 있다. 카이퍼가 말한 대로 "한 치라도 주님의 소유"가 아닌 영역이 없다. 승리하신 부활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이시며 만유에 대한 주재권(主宰權)을 가지신다. 그는 우주의 왕이시다.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 곧 주 되심(lordship)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참된 기독교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영역에 관여하고 방향을 제시한다. 정치 또한 예외가 아니다. 더구나 정치가 우리 삶의 제반 영역과 관련있는 현대사회라면 그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참된 기독교는 정치와 관련해 있으며 세속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타를 제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권세가 가장 높은 권세인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해야 함을 뜻한다. 나아가 국가의 권세가 불법을 행하거나 정부의 권세가 부패할 때 우리는 이에 대하여 불복종하거나 저항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삶의 영역을 이원론적으로 성(聖)과 속(俗)으로 나누거나, 정치와 종교를 무 자르듯이 싹둑 잘라놓는 것은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이 아니다. 그것은 만유의 대주재(大主宰)이신 창조주요 섭리주이신 주권자 하나님을 개인의 내면적 경건의 영역과 예배당 안에 가두어 두는 망령스런 행위요 나아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왕적 통치를 부정하는 불경스런 행위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교회가 국가의, 국가가 교회의 고유한 주권을 간섭하거나 혹은 야합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만 한다. 여기에 정치도 예외일 수 없다.
679 no image 신자들은 정실주의 타파해야
편집부
1934 2016-11-01
신자들은 정실주의 타파해야 정실주의(patronage)란 사람을 공직에 임용함에 있어 실적 이외의 요인, 즉 정치적 요인뿐만 아니라 혈연, 지연, 학연 등 개인적인 친분 및 기타의 온정관계 등을 기준으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정실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가르친다(갈 5:24). 그것은 일을 시행함에 있어서 정실에 치우치지 않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품성을 갖는 것이다. 유독 기독교를 경험한 지 오래 되지 않은 동아시아권 사람들이 정실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다. 조선 시대는 붕당 정치라고 불렸다. 지금 시대에는 패거리 정치라고 부른다. 정실주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진리보다 지방색과 학연과 사회적 연대를 더 중요시하는 정신이다. 그래서 어떠한 판단을 할 때에 공명정대하지 못하고 그러한 사회적 연대를 따라서 검은 것을 희다고 하고 흰 것을 검다고 하는 정신 상태이다. 정실주의에 치우치면 매우 혼미한 정신 상태를 갖게 된다. 정실주의란 사람과 사람 간에 서로 연결된 세상적 여러 관계들에 따라서 사회적 결정을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항상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여 이익을 보려고 하는 세력들이 있다. 이러한 정실주의적 문화가 오랫동안 자리잡은 사회는 지방색이라든가 학연이라든가 심지어 스포츠 동아리까지도 하나의 연대를 형성해서 그 외에 속한 사람들을 왕따시킨다. 이러한 풍토에서는 역량있고 마땅한 사람이 제 위치를 잡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정실 문화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매우 무능한 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너도 나도 많은 사회적 연대 안에 들어가고자 다양한 사회적 모임과 행사에 참여한다. 서로 정실 관계에 따라서 끌어주고 잡아주고 밀어주고 사익을 챙기고 한다. 그러한 사회는 정실 관계로 인하여서 벌어지는 비리와 추문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정실에 치우칠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생존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흰 것은 희다고 하고 검은 것은 검다고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실에 치우치는 기질과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리면서까지 개인적 욕망을 채우려는 탐욕의 기질을 버리고 정실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678 no image 장로교의 치리회는 섬기는 치리회이다
편집부
1537 2016-11-01
장로교의 치리회는 섬기는 치리회이다 장로교회에서는 총회가 노회를, 노회가 당회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곧 상회 치리회라 할지라도 하회 치리회 위에 군림하거나 압박하거나 지시하는 치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상회 치리회는 하회 치리회 사이의 분쟁이나 논란이 발생했을 경우에 화해시키며 자비와 사랑으로 섬기는 치리회이다. 이런 점에서 상회 치리회를 가리켜 하회 치리회보다 넓은 치리회라고 정의하고 있다. 곧 당회와 노회와 총회는 수평적 질서 안에 있으며 다만 그 치리회가 다른 치리회에 비해서 더 넓다거나 혹은 좁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교리적 진술에 대한 무지와 함께 해방이후 학습된 교권주의적 행태의 세습으로 지금 장로교 총회에는 올바른 권징이 사라졌다. 장로교 정치에서 형벌은 없다. 다만 교정이다. 사랑으로 교정을 시도할 뿐이다. 어른들에 대한 괴씸죄도 없다. 그것은 장로교 정치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복음서의 자세가 상회 치리회가 하회 치리회를 섬기는 원리이다. 하나님 나라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긴다. 장로교회는 장로교회법을 따라서 공명정대하게 시행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자비와 긍휼의 원리를 따라서 권징을 시행한다. 8.15 해방 이후 장로교 교회 정치사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지금의 장로교가 있게 한 역사이며 신사참배를 인하여서 감옥에서 순교한 자들과 해방 직후 공산주의자들의 총칼에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무수히 죽어간 순교의 역사를 계승하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해방 이후 교권주의자들은 신앙의 지조를 지킨 출옥성도들에게 무한한 빚을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후안무치가 되어서 출옥성도들을 사회적으로 감금하고 폭압하고 세력을 형성하여서 출옥성도들의 신앙을 유폐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 발생한 한국 장로교 여러 총회들의 잘못된 결정들은 모두 친일파 교권주의자들이 선악을 분간하지 못하게 구조를 형성해 놓은 원죄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구약 성경이다. 그리고 성도들이 순종해야 할 대상은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다(웨신 제1장 10절). 모든 교회 회의 종교적 논쟁과 교리의 결정에 최고의 판단자는 성령이심을 명심하자.
677 no image 누구를 위한 종교개혁 기념일인가?
편집부
1609 2016-10-18
누구를 위한 종교개혁 기념일인가? 1517년 10월 31일은 마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 조항을 공표함으로써 유럽을 뒤흔든 종교개혁을 통해 가톨릭과 대비되는 개신교의 등장을 기념하는 날이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교회는 10월 마지막 주를 종교개혁주간으로,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키고 있다. 루터가 교권주의 속에서 극도의 타락상을 보인 중세 가톨릭 세계에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주창하며 기독교 본질 회복운동을 벌인 지 벌써 499년이 지났다. 그렇다면 2016년 우리가 종교개혁 기념일을 지키는 의미는 뭘까? 먼저 성경의 최초의 개혁사건은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이었다. 이 사건은 성전수리 중 발견된 모세의 율법에서 시작됐다. 이 개혁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며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Back to the Bible)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이기적인 개교회주의는 맘몬주의와 교권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져 교회 본연의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의 원리로써 말하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믿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는 ‘섬김과 나눔의 상실, 무한정한 대형화의 추구, 교파우선주의, 지역이기주의, 물질우선주의, 교권주의’가 아닌 오직 성경으로 ‘바른 말씀의 회복’과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구원함을 얻는 ‘본질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다. 제발 종교개혁이라는 명분만 우려먹는 의미 없는 기념행사를 되풀이 하지 말았으면 한다. 교회의 부패와 성직자의 타락을 지적하며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개혁자들의 그 신앙과 용기를 뜨거운 가슴에 새겨 오늘 우리도 개혁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종교개혁기념일은 해마다 돌아온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종교개혁 기념행사가 아니라 허물어져 가는 보편교회를 말씀의 터 위에 바르게 세우는 데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직 성경으로, 오직 복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Coram Deo)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고 바른 복음으로 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중세의 무지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676 no image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몰락이 주는 교훈
편집부
1414 2016-10-18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몰락이 주는 교훈 미국 장로교 몰락에 있어서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세속주의적 기반의 자유주의 신학이 주는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장로교가 최종적으로 몰락한 시기는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했던 시대였다. 당시 남북 전쟁의 여파로 미국 정신은 한번 더 세속주의로 치닫게 되었다. 이에 편승한 미합중국 장로교는 남북전쟁 이전에 매우 큰 신학적 견해 차이로 갈라진 구학파와 신학파가 전쟁 기간을 거쳐 새롭게 연합을 모색하였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함께 할 수 없듯이 장로교 총회는 다른 신학적 정체성을 가진 집단과 연합할 수 없다. 그러나 미합중국 장로교는 남북전쟁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면서 미합중국 남장로교와 북장로교 총회가 연합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이미 있었던 신학적 쟁점을 뒤로하고 연합한 형태인 혼합주의적 장로교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한 세대가 넘어가기도 전에 미합중국 장로교는 신구약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고 독일에서 발흥하여서 그 시대 신학으로 자리잡은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시대의 보편성 앞에 진리의 보편성이 무너진 것이다. 구 프린스턴의 몰락과 함께 미합중국 장로교 총회는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장로교가 아닌 형태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비참한 상황의 도래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당시 유럽으로부터 다양한 신학적 이론들이 들어올 때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문과학과 세속주의에 물든 신학의 결과물들이 무분별하게 수입되었다. 아직 유럽 신학의 역사를 제대로 분별하여서 헤아리기 어려운 미합중국 장로교는 그 시대에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면서 몰락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장로교회는 계속 분열의 길을 걸어왔다. 195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7차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를 파면하고 제명한 일로 말미암아 예장과 기장이 분열되었다. 이후로 고려파의 환원, 예장합동과 통합의 분열 등 크고 작은 분열이 계속되었다. 그 막바지에 우리 교단인 예장합신이 존재하고 있다. 지난 역사를 통해 미국장로교회가 어떻게 변질되었는가를 교훈삼아 우리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보다 확고하게 정립해야 할 것이다.
675 no image 우리는 장로교인가, 회중주의인가?
편집부
1554 2016-10-06
우리는 장로교인가, 회중주의인가? 최근에 자주 존 오웬을 비롯한 회중주의 신학자들로부터 장로교 신학의 전통을 찾으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불편하게도 회중주의와 장로교는 엄연히 다르다. 실제로 17세기 영국 신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거부하고, 회중주의 신학을 택함으로 스콜라주의의 길을 걷다가 몰락했다. 이것은 정통신학으로 확증된 장로교 신학을 거부한 결과이다. 당시 올리버 크롬웰을 등에 업고 회중주의자들이 장로교 목사들을 내 쫓았던 것이다. 회중주의자들은 사보이 선언(1658년)을 통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교회정치 및 예배모범을 폐기했다. 그 결과 영국 내 신학적 광맥은 끊어지고, 존 오웬으로 대표되는 회중주의 신학이 자리하게 된다. 반대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엄숙한 동맹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에 포함된 문서들이 비준되고 통과 된다. 이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이다. 결국 영국의 신학은 몰락되었고 자연스럽게 웨슬레의 알미니안주의 신학과 회중주의적인 형이상학적 신학이 서로의 대립을 통해 대부흥이라는 실용주의적이며 감성적인 미국의 신학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도르트 총회를 통해서 알미니안주의를 정죄했지만 타락후 선택이라는 낮은 수준의 타협이 새롭게 보편성을 갖게 되는 아이러니를 갖게 된 것과 같다. 사실상 미국의 장로교회는 조나단 에드워드 이후 부흥이라는 이해하기 쉬운 공동의 목적을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하거나 폐기하는 길을 걷게 된다. 역사의 교훈이 이러한데, 한국 교회는 존 오웬을 위시한 회중주의 신학으로부터 정통신학의 뿌리를 찾으려 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 나무의 좋고 나쁨을 그 열매로 안다고 했다. 교회의 열매는 오직 교회의 외적인 숫자에 있지 않고,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분리됨이 없는 그 진리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에서 좋은 본보기를 보인 참되고 복된 사역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모인 신학자들 가운데 많이 있고, 여전히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름들이 많음을 기억하자. 진실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주님의 종들이 누구인지 정직하게 찾고 구해야 할 것이다.
674 no image 노회의 직무를 다시 확인한다
편집부
1395 2016-10-04
노회의 직무를 다시 확인한다 우리 교단 헌법에서는 노회를 가리켜 “서로 협의하며 도와서 교리의 순전을 보전하며, 권징을 동일하게 하며, 영직 지식과 바른 지리를 전파하며, 배도와 부도덕을 금지”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헌법 제16장 1조). 이에 따라 노회는 소속된 “당회와 지교회의 목사와 강도사와 전도사와 목사후보생과 미조직 지교회를 사랑으로 보살피며 감독”하는 일에 수종드는 기구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직무는 앞서 밝힌 것처럼 “교리의 순전을 보전”함으로써 가능하다. 지난 제101회 총회에서는 4개 노회가 ‘두 날개 프로세스’와 관련된 내용을 헌의한 바 있다. 이것은 지난 제100회 총회에서 “총회에 소속한 모든 교회에서의 신앙교육이 신학적 깊이와 균형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총회가 확인하고, 더욱 총회 소속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고 승리할 것을 간절히 구하는 기회로 삼기로 한다”고 결의한 것에 대한 부가적인 신학적 해석을 요청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노회는 심사숙고하여 헌의안을 제출하기 이전에 노회의 기본 직무인 “서로 협의하며 도와서 교리의 순전을 보전”하기 위해 먼저 노력하는 것이 순서상 옳아 보인다. 각 노회가 지난 총회에서 결의한 내용에 대해 충분히 신학적 판단을 하고 그에 따라 노회마다 ‘교리의 순전’을 보전하기 위해 헌의하기 이전에 얼마든지 신학적 판단과 결의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언제부터인가 노회는 이러한 기본적인 신학적 작업을 헌의안이라는 통로를 통해 총회로 이관하려는 풍토를 조성해 오고 있다. 이것은 노회의 기본 기능을 저하시키는 행위로 소속 지교회들과 직분자들을 감독하는 일에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라 할 것이다. 장로교회에서 노회는 가장 완전한 교회 치리회이다. 그래서 총회가 임시회인 것에 반해 노회는 상설회로 두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상설회인 노회가 얼마든지 모여서 신학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사안을 임시회인 총회에 일임한다는 것은 오히려 총회의 직무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차제에 노회는 자체적으로 신학적 판단의 의결권이 있다는 점을 중시하고 이를 통해 노회의 기본권인 ‘교리의 순전’을 도모하기 위해 보다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결의에 임해야 할 것이다.
673 no image 다시 교회의 개혁을 생각한다
편집부
1480 2016-09-21
다시 교회의 개혁을 생각한다 정통 교리를 떠난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개혁을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제왕적 목회자를 떠올린다. 일부는 권위주의적인 당회를 개혁의 대상으로 이야기하기도 할 것이다. 혹은 교회재정의 불투명한 운영이나 직분자 선출과정의 비합리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러한 잘못된 모습들이 우리시대 교회 속에 혼재함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문제라고 해서 그들을 쫓아내고, 그들의 상을 뒤엎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참된 교회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잘못이다. 참 교회, 성경 말씀대로 개혁된 교회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교회의 교회됨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해지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바른 권징과 올바른 성례가 뒤따르게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개혁의 요체는 신실한 말씀의 선포와 함께 말씀을 따라 교회를 섬기고 다스리는 직분, 곧 목사직의 회복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개혁에 있어서 결코 다른 길은 없다. 바로 지금부터 우리는 바른 말씀을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리스도 예수를, 성령님을 알고 신앙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기관인 교회에 대해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리할 때 교회는 말씀 위에서 개혁되고 든든히 세워져 갈 것이다. 물론 이것은 쉽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우리의 당대에 개혁된 교회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한발한발 걸어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교회개혁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에 우리의 마음을 앞세우거나 욕심을 따라 행동해서는 안 된다. 이 길은 또 외롭고 거친 길이기에 쉽게 지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과 함께 주의 참 교회에 대한 바른 소망이 있는 자들과의 함께함도 필요하다. 바른 교회에 대한 이해는 개교회주의를 배격한다. 이것은 주의 몸을 나누는 일이며 스스로를 머리에서 잘라내는 일이다. 함께 지어져 갈 수 있도록 우리는 말씀과 건전한 고백위에 하나됨을 이뤄야 한다. 교회개혁은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서의 회복이기에 하나님이 스스로 하실 것임에 틀림없으나 하나님의 뜻과 나라의 실현을 기도하는 이들로서는 마땅히 걸어야 할 길임도 분명하다. 긴 세월 동안 개신교 안에서는 분파주의를 형성해 오고 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이미 거짓된 교리를 주장하는 분파로 판명났던 재세례파, 알미니우스주의자들, 유니테리언주의자들, 소키누스주의자들이 계속 개신교 안에 자리를 잡으면서 개신교는 분파주의자들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개신교 분파주의자들은 초교파주의를 주창하면서 교리 없는 기독교를 추구하였다. 그처럼 교리 없는 기독교를 추구하는 개신교 분파주의자들은 부흥주의, 신비주의, 은사주의 그리고 영성주의와 체험주의 종교를 더욱 추구하여 왔었다. 하지만 개신교 분파주의 기독교는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기독교가 아니다. 이들은 새롭게 형성된 세속화된 기독교이다. 그러면서도 광신과 열광주의가 더욱 독실한 기독교로 각인이 되고 있다. 너도 나도 광신적 신앙과 열광주의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열광주의는 도식화되고 이제는 그마저도 퇴색이 되고 있다. 그만큼 종교적 열광주의가 지나간 자리에 기독교의 흔적이란 무지, 혼돈, 광기 그 자체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개신교 분파주의 교파는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은 세속화된 이방 종교에 이미 첫 걸음을 뗀 것이다. 교리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지금의 개신교 분파주의 교파 역시 전혀 새로운 형태의 다른 기독교이다. 즉 종교 다원주의, 교리 없는 신비한 체험 중심의 기독교를 추구하는 개신교 분파주의의 실체는 거짓 교회임이 분명하다. 안타깝게도 정통 교리를 말하지 못하게 하는 개신교 분파주의의 무언의 압박은 개혁 교회의 소멸로 이어졌다. 시편송을 부르는 회중들이 사라져갔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와 대소요리 문답을 가르치는 회중들이 사라져 갔다. 개신교 분파주의자들의 교파들은 개혁 교회와 다른 교리를 가르친다. 그것은 거짓 교리들이다. 장로교회 만이 유일하게 칼빈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 외 모든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들은 알미니우스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개신교 분파주의자들의 거짓 교리로 인하여서 더 이상 개신교는 교리를 말하지 못하는 심각한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거룩한 보편 교회는 교리로서 그 정체성을 드러내며 교리로서 그 교회의 자태를 구분하여야 한다. 정통 교리는 우리가 표방해야 할 개신교의 가치임을 기억하자.
672 no image ‘이신칭의’가 한국교회 타락과 윤리실종의 주범인가?
편집부
1379 2016-09-06
‘이신칭의’가 한국교회 타락과 윤리실종의 주범인가? 작금 종교개혁의 이신칭의를 비판하면서 믿음에 인간의 순종을 가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오직 믿음’만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행함은 없고 믿음만 강조해서 한국교회가 타락하고 윤리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에다가 율법에 대한 인간의 신실한 언약적 순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인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든다. 율법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의 한 의, 곧 오직 믿음만으로 말미암는 의는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원인이며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드는 의인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드는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죄악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을 향한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은혜로 중생케 하신 하나님 그분에 의해 이루어지는 생명의 역사이다. 곧 "너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이"가 우리로 구원을 이루게 하신다. 그래서 오직 믿음은 결코 방종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우리와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놀라우신 은혜에 감사하여 사랑으로 더욱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이것이 곧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그러니 ‘오직 믿음’에 대한 오해를 중단하라. 오직 믿음을 행함 없는 믿음으로 몰아지 말라. 만약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애초에 죽은 믿음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가짜 믿음이었을 뿐이다. 참된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초한다. 그리고 구원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은덕을 누린다. 당연히 거룩을 향한 우리의 소원함을 포함한다. 이 또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만약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첨가하려는 이들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나타났던 오류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분만을 믿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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