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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 no image 명예로운 제101회 총회를 기대한다
편집부
1163 2016-09-06
명예로운 제101회 총회를 기대한다 헌법 권징조례 제1장 1조 ‘양심의 자유’에서는 아래와 같이 선언하고 있다. “양심의 주재자는 하나님뿐이시다. 그가 신자들에게 신앙 양심의 자유를 주사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성경을 위반하거나 이탈한 인간적 교훈이나 명령을 받지 않게 하셨으니, 그리스도인의 이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각기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을 즉 아무도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양심의 자유란 기본적으로 죄로부터의 자유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복음 아래 있는 신자들을 위해 값 주고 사신 자유”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그 자유는 “노예의 두려움이 아니라 자녀로서의 사랑과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가 복종할 수 있게” 하는 그런 것이다(웨신 제20장 제1항 참고). 이처럼 교회의 성경적인 원리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기구가 바로 장로교의 총회이다. 장로교회 총회가 존재하는 근거와 방법은 철저히 신자들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총회라는 조직은 모든 장로교단에서 공히 ‘임시기구’여야 마땅하다. 이처럼 장로교회들에서는 ‘총회’가 소집되더라도 항상 임시로 소집했던 것이며, 그처럼 임시로 소집된 회의기구는 그 회의가 끝남과 동시에 항상 해체했었는데, 이를 ‘파회(破會)’라고 하며 기본적으로 그 회의기구를 완전하게 해체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범 교회적인 기구가 상설화 될 때 형성될 수 있는 교권주의를 타파하기 위함이다. 사실 그러한 교권주의는 로마가톨릭에서 시작되었는데 성경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소위 교황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절대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제도화되었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제 제101회 총회를 앞두고 있다. 총대들은 이러한 장로교회 총회의 기본 정신이 양심을 주제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총회에 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누구도 총대들의 권위를 폄훼하거나 훼손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어떤 형태의 권위주의나 교권주의를 용납하지 않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670 no image 선거에서 유권자가 유념해야 할 것
편집부
1317 2016-08-23
선거에서 유권자가 유념해야 할 것 기원전 510년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독재정치를 타도하는데 앞장선 클레이스테네스는 여러 가지 민주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그 중에 하나가 도편추방제였다. 누구든지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면 매년 민회에서 투표하여 과반수의 표를 얻은 사람은 10년 동안 외국에 나가서 살다가 돌아와야 했다. 도편추방제가 만들어진 지 20년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에 해마다 열리는 도편추방 투표장에서 당시 정계의 거물이었던 아리스티데스에게 한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자기의 도편을 내밀면서 거기에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을 좀 써 달라고 했다. 그 사람을 추방하고 싶지만 자기는 글씨를 쓸 줄 모른다는 것이다. 아리스티데스는 그 사내에게 아리스티데스가 무슨 나쁜 짓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사내는 아리스티데스를 잘 모르는데 하도 여기저기서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이 들려와서 지겨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리스티데스는 그 도편에 자기 이름을 써서 사내에게 넘겨주었고 그 해에 아리스티데스는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 사방에서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이 들린다면 과연 그 사람이 정말 나쁜 사람인지 혹은 국가를 세울 좋은 사람인데 모함을 받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책임은 유권자 자신에게 있다. 그렇지 않고 상대방의 얼굴도 모르고 그 사람의 공과도 알지 못하면서 군중심리에 이끌려 가표나 부표를 던지는 것은 기권보다 더 무책임한 행위이다. 투표권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이것을 포기하라고 종용받는다면 당연히 모욕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권리를 주장만 하는 것이 상책이 아니라 그 권리를 행사할 자격을 갖추는 것 또한 유권자가 해야 할 의무이다. 그래야 얼굴도 모르는 아리스티데스를 추방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진정 책임 있는 민주 시민이 될 수 있다. 민주주의란 모든 구성원 하나하나가 주인이 되는 제도이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인데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 선장이 책임지지 않는 배는 어디로 표류하다 파선할지 모르듯이 주인인 백성이 책임을 질 때 우리 공동체가 망망대해로 힘차게 항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총회에서도 총회장을 비롯해서 많은 임원과 상비부장들을 선출하게 된다. 그 투표에서 혹시라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부당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유권자들은 먼저 자신의 의무를 온전하게 수행해야 할 것이다.
669 no image 제101회 총회에 임하는 총대들의 자세
편집부
1215 2016-08-23
제101회 총회에 임하는 총대들의 자세 장로회 제101회 총회를 맞이함에 있어 먼저 우리 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몇 가지를 점검하고자 한다. 우리 교단 헌법은 총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총회는 상설 기관이 아니고 일시적 회합으로서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총회의 포든 교회들의 전체 회의이다”(헌법 제17장 제1조). 주지하다시피 총회는 우리 교단의 총의를 모으는 회의이다. 이런 점에서 헌법은 “그 판단과 치리가 성경 말씀대로 되어진 한에 있어서 가장 유력하다고 할 수 있으나 어느 치리회보다 높은 것은 아니다”(제17장 제3조)고 규정하고 있다. 곧 총회는 성경 말씀대로 수종하는 사역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헌법은 총대에 관하여 언급하기를 “(총회는) 지교회들이 택해 세운 목사 장로의 모임”으로 그 모임의 권위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지교회의 파송에 근거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아울러 “(총회는) 통치적이 아니고 봉사적이다. 총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사역한다”(제17장 제3조 4항)고 명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총회회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두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 총대들이 사적인 관심사나 이권을 위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정당하게 구현해 나가기 위해 참석해야 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할 것이다. 이번 총회에서도 지난 한 회기동안 있었던 각 상비부 및 위원회의 사업 경과들이 보고되고, 다음 회기에 있을 사업 내용들에 관한 결의가 시행될 것이다. 아울러 각 노회와 상비부 및 위원회의 헌의안들이 상정되어 이에 관한 결의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때 총대들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따라 양심껏 결의에 임하여야 할 것이다. 그 어떤 사항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관점이 아닌 바른 신학적 관점에 따라 발의하고 발언하며 결의에 임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총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사역한다’는 우리의 헌법을 수호하는 올바른 자세임을 총대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668 no image 역사적 장로교회를 회복하자
편집부
1359 2016-08-02
역사적 장로교회를 회복하자 한국의 장로교회는 미국의 수정주의 장로교회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의 수정주의 장로교회는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올 때 가지고 왔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자기들의 실정에 맞춰 몇몇 조항을 수정하게 됨으로써 정통적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아닌 수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따라 장로교회 목사를 임직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정통적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정신이 아닌 미국의 수정주의에 따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정신을 가진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장로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잘 아는 것처럼 미국의 청교도 후예들은 후에 양키즘으로 상징되는 소위 실용주의에 따라 미국 장로교회를 구축해 나갔으며 그 결과 미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로 분리된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진보적인 신학에 물이 들어왔었다. 미국 장로회 선교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예장통합측이 에큐메니칼 가입 문제로 미국선교부와 손을 끊었던 예장합동측보다 오늘날 더 진보적인 색깔을 갖고 있는 것 역시 미국 장로회의 진보적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 할지라도 예장합동측이나 예장고신측 역시 초창기 수정주의 미국 장로교 선교부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으며, 따지고 보면 미국 장로교의 진보적 성향을 가진 장로교회 선교부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반면에 호주장로교 선교부 영향을 받은 예장고신이 그나마 좀더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칼빈의 개혁주의 정신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및 예배모범과 권징조례를 근거로 하는 정통적인 장로교 사상을 바탕으로 이 땅의 한국교회가 장로교회 회복의 길로 가기를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작금 일부에서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벨직신앙고백서와 도르트신경 등 3대 일치신조를 고백하는 개혁파 교회를 도입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고 있다. 물론 화란의 개혁파 교회와의 교류를 통해 이 땅에 개혁파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두 손 들어 환영하는 바이다. 하지만 칼빈의 개혁주의 사상이 유럽에서는 3대 일치 신조를 중심으로 개혁파 교회를 세워나가게 하였다는 점과 영국에서는 영국의 의회주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장로교회가 3대 일치 신조 이후 고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및 예배모범과 권징조례를 바탕으로 장로교회로 세워나가게 되었다는 점을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역사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가장 칼빈의 개혁주의 사상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대륙적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개신교에서는 루터교회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루터란은 무늬만 개신교일 뿐이지 천주교 체제를 거의 그대로 가지고 있다. 반면에 대륙의 개혁파 교회들은 개혁주의 사상을 충분히 담고 있지만 그 정치적 실체는 상당히 딱딱한 면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유럽의 교회들이 아마도 루터교회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으며 3대 일치 신조가 민주주의에 근거한 민의적 요청이 아닌 당시 군주들의 요청에 따라 작성되었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에 영국의 장로교회는 의회민주주의를 따르는 장로교인들이 주축으로 영국국교회(오늘날 영국성공회)와의 끊임없는 싸움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는 점에서 대륙의 개혁파 신조들보다 좀더 민주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어찌했든 역사적 과정에서 산출된 3대 일치 신조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공히 칼빈의 개혁주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만 교회정치 체제에 있어 장로교회 체제가 좀 더 민주적인 체제임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정신을 계속 계승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한국장로교회는 무엇보다도 미국의 수정주의 장로교회의 노선에서 벗어나 정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따른 교회관과 교회 체제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정신에 근거한 신학원에서 정상적인 컬리큘럼과 사상을 가진 교육이 실시되어야 하며 장로교 정신을 함양한 목회자들이 배출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이라도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에 근거한 역사적 장로교회를 회복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역사적인 요청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정신을 충분히 함양하고 드러내는 목회자들 양성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럴 때 비로소 한국장로교회는 역사적인 개혁주의 장로교회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667 no image 소위 ‘성화’(聖畫)나 ‘성상’(聖像)을 배격한다
편집부
1338 2016-07-19
소위 ‘성화’(聖畫)나 ‘성상’(聖像)을 배격한다 하나님의 권능은 그 무엇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우주와 역사를 친히 통치하신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지금까지 그 어떤 우상들도 역사 속에 친히 개입한 적이 없지만 하나님은 유일하게도 친히 말씀하신 대로 역사를 경영해 오셨다. 때문에 참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참된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들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은 돌과 나무로 제조한 우상을 섬기는 것에서 확인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죽어 있는 돌과 나무로 형상을 만들 수 없다는 것에서 확인된다. 우상들은 사람들이 온갖 금박과 은박과 화려한 옷감으로 꾸밀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것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외양만 반듯하게 꾸며놓고 자기들의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땅을 지으시고, 자신의 지혜로 세상을 세우시고, 자신의 명철로 하늘을 펼치시며 구름과 비와 번개와 바람을 자유자제로 운행하시는 것으로 증명된다. 지구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질서정연하게 지으신 분은 한 분밖에 없다. 또한 하늘을 펼치시고 그곳에 태양과 달과 별들을 운행하게 하시는 분도 한 분뿐이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돋보이는데 하나님만이 이 세상과 천체들에게 자연의 질서를 부여하실 수 있으며 그것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라면 의당히 하나님께서 자연과 천제 안에 담아 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그처럼 놀라운 지혜와 영광을 보고서도 그것이 죽은 돌이나 나무 혹은 사람들이 조작한 어떤 형체가 그처럼 놀라운 일을 행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며 그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 되는 것이다. 아울러 소위 성화(聖畫)나 성상(聖像)이라고 해서 예수님이나 성령님을 그림이나 동상으로 만드는 행위들도 마찬가지이다. 이상의 이유들 때문에 사람들의 지식으로 부어 만든 것으로는 결코 삼위일체 하나님을 담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온갖 재능을 모두 동원하여 최상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자부심을 가질 것이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미련하고 악독한 행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666 no image 교회의 질서 안에 있는 신자의 삶
편집부
1321 2016-07-19
교회의 질서 안에 있는 신자의 삶 오늘날 교회에서 질서가 약화되고 신자들이 자의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그것은 교회가 정통 교리보다는 인위적인 성장 또는 인간적인 성공을 추구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잘 알다시피 교회의 질서는 사도들에 의해 세워져다. 곧 사도 시대 교회에서 이미 교회의 질서가 형성 되었던 것이다. 그 첫 번째 질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신구약 성경이 교회의 첫 질서이다. 그 다음 질서는 정통 교리이다. 정통 교리는 성경 다음의 질서를 갖는다. 아울러 정통 교리는 성경으로 제재를 받는다. 그래서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가르침은 정통 교리라 할 수 없다. 이 정통 교리는 사도들의 디다케를 정리한 정통 교회 신조들이다. 이것은 사도 신조와 니케아-칼게돈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들이다. 후대에 정통 교리는 이 교회의 첫 번째 정통 교리에 제재를 받는다. 그러므로 성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이성 일인격 교리는 정통 교리의 근간이다. 이 교리로부터 벗어나면 정통 교리가 아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후대의 정통 교리들,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비롯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벨직 신앙고백과 도르트 신경은 신구약 성경과 정통 교회 신조에 따라서 작성되었던 것이다. 교회에서 그 다음 질서는 치리회이다. 당회와 노회와 총회로 구분되는 이 치리회는 신구약 성경과 정통 교리에 의해 제재를 받는다. 정통 교리에 어긋나는 교회법을 제정하거나 결정을 하는 모든 치리회의 결정은 불법이다. 그래서 치리회는 신구약 성경과 정통 교리 아래에 있다. 치리회 다음의 질서를 차지하는 자들은 치리회원들이다. 치리회원들은 치리회에 의해 제재를 받는다. 아울러 치리회원은 정통 교회법 아래에 있다. 이 치리회원들은 치리회의 합당한 치리에 순종해야 한다. 목사는 노회 아래에 있다. 치리 장로는 당회 아래에 있다. 집사는 지교회 아래에 있다. 일반 신자들도 지교회 아래에 있다. 이 질서를 무분별하게 어기는 것은 주의 몸된 교회를 만홀히 여기는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몸인 그리스도에게 속한 교회의 일원으로서 이러한 교회의 질서에 관하여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교회의 질서를 따라 신자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함을 명심해야 하겠다.
665 no image ‘유보된 칭의, 예약된 칭의’라는 용어의 부당성
편집부
1331 2016-07-05
‘유보된 칭의, 예약된 칭의’라는 용어의 부당성 유보된 칭의, 예약된 칭의와 같은 말로 한국교회를 농락하는 신학자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아울러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마치 선진화된 서구 신학인 것처럼 호도하고 따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심히 통탄할 일이다. 그러한 주장을 호도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설명하기 위한 ‘이미-아직’이라는 용어를 들먹이면서 이미 칭의를 받았지만 아직 확정된 칭의를 받은 것이 아니며,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최종적으로 확정된 칭의를 받는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이런 주장을 개혁신학자들이 말하는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한국교회가 구원파적인 구원관으로 잘 못 이해한 것에 대한 뼈아픈 충고라고 평하면서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 다는 생각은 잘 못된 신학이며,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선한 행실을 드러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게 말이 되는가? 언제 한국교회가 구원파 교리를 받아들였다는 것인가? 그리고 구원파 교리와 한국교회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마치 한국교회를 저급한 수준의 신학에 붙잡혀 있는 것처럼 단정하고 한국교회 신학이 구원파 교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주장에 무슨 선한 것이 있다는 것인가? 신학은 단호하다. 어쩌면 죽고 사는 문제처럼 서슬이 퍼렇기도 한 것이다. 그런 신학을 가지고 패더럴 비전이나 다를 바 없는 주장을 하면서 한국교회를 지도하겠다고 하는가? 우리가 받는 칭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행하신 십자가의 의와 그 공로를 전가받음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어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다. 이것을 성화라고 하며 그 성화의 근거는 성도들의 견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칭의와 성화에 있어서 칭의는 한 번도 유보되거나 예약된 바 없다. 그것은 신적 작정에 속한 일이기에 우리는 그 사실을 믿는 것뿐이다. 이 신적 작정에 속한 일에 인간들의 얄팍한 이론을 끼어 넣으려고 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칭의와 성화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기독교의 위대한 유산 중 하나이다.
664 no image 교회의 통치 원리는 오직 성경이다
편집부
1341 2016-07-05
교회의 통치 원리는 오직 성경이다 로마가톨릭과 분리한 개신교의 중요한 구분 점이자 정통성의 원리는 바로 ‘성경’이었다. 곧 종교개혁 당시부터 개신교 신앙의 중심은 항상 성경이었던 것이다. 이 원리에 따라 개신교에서 가시적(可視的) 교회론은 항상 성경에 충실한 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곧 성경에 충실하지 않는 어떤 가시적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회(會)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혁자들이 교회의 표지로 말씀과 성례와 권징을 제시한 것은 참되다 할 것이다. 로마가톨릭에서도 소위 반동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성경이 아니라 ‘교회’ 즉 지상의 유일한 교회인 로마가톨릭만이 유일한 통치 원리이며 기구로 남아 있다. 로마가톨릭에서는 지상에 유일한 교회는 오직 로마가톨릭교회뿐이며, 그 근거는 베드로의 계승자인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조직된 로마가톨릭교회만이 사도좌를 계승한 유일한 지상의 교회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신앙 중심에 있어서의 차이, 즉 성경을 신앙의 중심에 두느냐 로마가톨릭교회로서의 조직교회를 신앙의 중심에 두느냐의 차이는 고스란히 교회의 통치원리에 있어서도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를 구별하는 구별점이 된다. 로마가톨릭교회의 통치원리는 사도좌(Sedes Apostolica)의 계승자인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사제(성직자)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통치(jurisdictionis)이다. 때문에 로마카톨릭에서는 통치권(potestas jurisdictionis)을 가진 성직자들과 그들의 통치를 받는 평신도(laicus)로 양분되어 있다. 반면에 개신교, 특히 장로교회는 로마가톨릭과 같은 성직자가 아니라 다만 직분으로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와 다스리는 장로들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개신교회인 장로교회들에 있어서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직분은 수종(隨從)적이며, 이때에 각 직분자들이 수종드는 대상은 회중(會衆)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직분자들인 목사와 장로와 집사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을 위해 회중들에 의해 선출된다. 그리고 이 직분자들이 오직 성경 말씀을 수종드는 일을 통해서 유일한 교회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663 no image 교회 시대에는 소위 ‘방언’은 없다
편집부
1637 2016-06-21
교회 시대에는 소위 ‘방언’은 없다 신약시대에 신약성경이 문자로 기록되어 완성된 이후에는 더 이상 방언이나 직통이나 환상이나 이상이나 꿈과 같은 방식의 계시는 더 이상 교회에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오로지 기록된 성경 계시를 통해서만 그의 백성인 교회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 그러니 교회의 성도들이라면 더 이상 방언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방언’이라는 말은 원어상의 의미가 '외국어'라는 말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예루살렘이나 가나안 땅에 국한되지 않고 소아시아와 유럽남부 지역에까지 교회가 확장되면서 다양한 방언, 곧 외국어를 접하게 되었다. 이럴 때 방언, 곧 외국어를 통역하는 일들이 필요했었다. 오순절날 성령께서 예루살렘 성전 뜰에 있는 제자들에게 임재하신 그 날에도 소아시아를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온 유대인들로 인해 각 나라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들 방언을 통역하는 일들이 필요했었다. 아무튼 국제적인 사회 환경이 방언, 곧 외국어를 자주 접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기 위해 방언 통역은 교회 안에서도 매우 익숙한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오늘날 소위 ‘방언’이라고 하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마치 자기는 영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형제들을 속이는 사악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조차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이상한 소리를 가리켜 ‘방언’을 한다고 하는 것은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이러한 방언에 대해 칼빈은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에서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247문: 그렇다면 방언으로(알지 못하는 말)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이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입니다. 성경 계시를 교회에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 어느 누구에게나, 어느 시대에나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다. 어느 누구든 하나님으로부터 교회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방법, 즉 방언이나 직통이나 환상이나 꿈과 같은 방식으로 이 은혜를 누릴 수 없음을 명심하자.
662 no image 동성애 옹호보다 창조의 성(性) 윤리 회복해야
편집부
1312 2016-06-21
동성애 옹호보다 창조의 성(性) 윤리 회복해야 오늘날, 이미 무너져 내린 한국사회의 도덕적 현실 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마저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를 가슴 아프게 만들고 있다. 연일 들려오는 일부 종교인들의 성적 타락 소식, 성과 순결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린 청소년들의 가치관, 온갖 불륜과 낙태가 기승을 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간의 정절이 가지는 아름다움조차 묻혀가고 있는 현실 등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이것은 시대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우리들의 서글픈 자화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창조의 성(性)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거룩하고 신비로운 연합이라는 결혼제도 아래에서 가정과 사회의 기초를 세우셨다. 이 과정을 통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참되고 진실된 사랑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창 1:28)고 인류에게 명하신 문화명령의 초석은 바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아름다운 성(性)의 결합을 근거하고 있다. 때문에 동성결혼 합법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간통죄 위헌판결로 결혼제도의 방어막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창조의 성이 지니는 고귀한 가치를 회복하고 정결하고 고귀한 성을 지키는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진정한 인권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됨에 있으며 창조의 성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고불변의 법칙을 거스르고 동성애를 옹호하거나 비호하는 것을 마치 인권을 존중하는 것처럼 위장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면에 호모포비아(homophobia, 동성애 혐오)에 기초해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극단적인 차별과 증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비록 동성애가 성경이 지적하는 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죄인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마치 우리가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미친 것과 같다. 성경이 말하는 인권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형상됨에 있으며 나아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긍휼하심으로 죄인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다.
661 no image 공로주의 성직개념을 반대한다
편집부
1594 2016-06-07
공로주의 성직개념을 반대한다 인간 사회에서는 인간의 치성이나 공양과 같은 공로를 바탕으로 자연종교가 유지되며 기생하고 있다. 중세시대까지 로마가톨릭의 체제 또한 자연종교와 다를 바 없으며 그들의 성직 이해에 있어서도 이러한 ‘공로사상’ 혹은 ‘공덕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는 타락 이후로 바벨탑의 사건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에 바탕을 둔 수고와 노력의 결실인 공로주의가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곧 로마가톨릭의 성직 계급의 저변에는 이러한 공로주의가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가톨릭에서 평신도(a layman)와 성직자(a churchman)의 구별은 공로 혹은 공덕의 차이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평신도에 비해 성직자들은 그 공로가 월등하여서 심지어 평신도들의 죄를 사하거나 감(減)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성직계급의 개념이다. 그와는 달리 종교개혁 사상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전혀 없으며, 다만 ‘항존직’이라 불리는 성경에 근거하는 직능적인 직제에 대한 호칭의 구별만이 있을 뿐이다. 나아가 항존직에 있어서 중요한 원리 중 하나인 임기(任期)의 의미는 단순히 직무를 수행하는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직무의 수행이 항상 있어야 하되 그 수행이 특정한 사람에게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직무로서만 항존하도록 있다는 원리다. 따라서 장로교회에서 목사(가르치는 장로)와 장로(치리하는 장로), 그리고 집사(섬기며 봉사하는 직분)의 직분은 교회 안에 항상 있어야 하되 특정인에게 평생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맡겨진 임기동안 주어지는 것이다. 이때 말씀으로 가르치며 섬기는 직무인 목사는 장로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직무이기에 아주 긴 정년을 두고 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말씀으로 가르치는 능력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생리적인 연령을 고려한 것이다. 왜냐하면 장로교회의 목사에게 요구하는 어학능력 곧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등을 비롯해 학문적 수준은 모두가 말씀으로 가르치는 능력을 전제하기 때문이며, 그 능력은 가히 학자적 수준에 결코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가톨릭의 직제와 장로교회의 직제에 있어서 가장 큰 구별은 바로 ‘직분의 동등성’에 있다. 장로교회에서는 학문적 소양과 경건을 갖춘 목사라 하더라도 치리장로나 집사보다 높은 것이 아니며, 다만 말씀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신앙의 원리상 그 직무를 수행하는 목사를 존중하고 예우하는 것뿐이다. 반면에 로마가톨릭에서도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학문적 소양에 대한 평가와 경건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지만, 그렇게 해서 세워진 사제들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다른 직분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계급으로 추앙된다. 이러한 로마가톨릭의 성직계급은 곧바로 로마가톨릭의 공로주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한 공로주의의 가장 큰 심벌이 바로 ‘마리아’이다. 로마가톨릭에서 마리아는 그 경건과 은총의 경지가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 심지어 마리아는 원죄 없이 예수를 잉태하였고, 그러한 잉태였기에 예수도 원죄가 없이 태어날 수 있었다고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현대의 로마가톨릭에서는 사제들마다 약간씩 이견들이 허용되어 있어서 로마가톨릭의 교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어느 정도 산재해 있지만, 로마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문건들에서 말하는 교리의 내용에 있어서는 결코 바뀌지 않았다. 한마디로 로마가톨릭의 모든 신앙의 체계와 그것이 가시적으로 들어나는 직제는 항상 공로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반해 개신교(Protestant), 그 가운데서도 장로교회에서는 일체 ‘공로’라는 개념이 없이 모든 교회의 직분들이나 회원들이 기본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있다. 나아가 직분자들이나 교회의 회원들 모두가 행하는 선행 역시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처럼 동등한 직분의 개념을 가진 장로교회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교회원의 공덕을 기리거나 공로를 인정하는 상장이나 공로패와 같은 것을 줄 수 있는 권위와 자격을 가지지 않는다. 때문에 장로교회에서는 어느 사람이 특별한 공헌을 한다 해서 상장을 수여하거나 공로패를 수여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거룩한 직분을 행함에 있에서 그 임기가 끝난 후에 그에게 공로라는 타이틀을 더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장로교회가 개신교임을 포기하고 로마가톨릭으로 전락해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로마가톨릭처럼 마리아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배교와 다를 바 없으며, 신앙의 원리로서만이 아니라 실천으로서도 배교의 길을 걷는 크나큰 실책이요 죄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어떤 이에게 어떤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의 공을 치하하거나 상급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며, 우리들 중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에게 상을 주거나 공로패를 줄 수 있는 권위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660 no image 강남역 살인 사건을 보는 관점
편집부
1531 2016-05-24
강남역 살인 사건을 보는 관점 최근 강남역에서 조현병 환자에 의해서 전혀 알지 못하던 여성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을 계기로 여성혐오에 대해서 우리 사회에서 이런 저런 말들이 많다. 흔히 김치녀, 된장녀 같은 표현으로 대표되는 여성혐오는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된 거 같다. 왜 우리 사회에서 여성 혐오라는 사회 현상이 폭넓은 지지층을 얻으면서 확산되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혐오에 대한 근본적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미움이나 분노는 자기보다 힘세고 가진 자를 향해서 표출되지 않는다. 우리 속담에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을 흘긴다고 했다. 화는 그 특성상 아래로 흐른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갈등과 미움을 약자를 향해서 표출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사회 현상이 되고 있고 이 사회 현상은 우리 사회가 사회신경증적 상태로 진입하고 있는 증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문제가 관리가 되려면, 여성 혐오를 하는 세대들이 어떤 갈등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어느 통계에 보니까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이런 현상이 더 두드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겪고 있는 여러 문제로부터 갈등과 분노가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유럽 사회에서 다시 나치가 등장하고 특히 젊은이들이 여기에 동조하고 유색인종을 혐오하는 현상도 사실은 비슷한 맥락이다. 어떤 사회적 현상이 특정 계층의 희생을 요구하고 그렇게 희생된 계층의 분노가 사회병리로 표출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취업 문제, 결혼 문제, 소득 문제 등등의 갈등이 사회 전체적 병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남녀 공용 화장실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경제-심리학적 문제라 할 것이다. 이러할 때 교회는 한 개인의 구원 문제만이 아니라 한 개인과 공동체가 건강해지는 일에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한 가정의 양육환경이 건강해지도록 도와야 하며, 한 개인이 여러 심리적 압박과 갈등 그리고 분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적 갈등을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도록 도와야 한다. 나아가 이런 내적 갈등이 증폭되지 않도록 회원들에게 여러 가지 소통적 공동체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앞으로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보다 불건강한 사람이 다수인 사회가 도래하기 때문에 교회는 이런 문제에 미리 대비해야 할 것이다.
659 no image 교회에서 바른 권징을 행하는 방식
편집부
1276 2016-05-24
교회에서 바른 권징을 행하는 방식 상담에서는 치료적 동맹(Working Alliance)이라는 표현이 있다. 곧 내담자의 무너진 삶과 인격을 회복하기 위해서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신뢰적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동맹(alliance)이하는 말은 갑을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서로가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관계를 가리킨다. 이 말은 ‘대등한 관계에서의 사랑’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실제로 상담자가 일방적으로 베풀기만 하는 관계에서는 내담자의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상담자는 내담자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내담자는 무너진 자신의 삶에서 상담자의 도움으로 회복의 길을 걷는다. 교회에서 권징이 시행이 되려면 적어도 이런 호혜적인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목사는 성도들로부터 생활을 위한 지지를 받으며, 성도들은 목사로부터 영적 돌봄을 입는다. 목회란 그저 설교나 하고 옳은 것이나 읊어대는 것이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과 이런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배우며 소망하며 확인하며 그렇게 자라가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에서 권징이 없어졌다고 통탄하기에 앞서 우리들은 서로 그렇게 사랑했는지 살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미숙함을 책망하기에 앞서 그들의 형편을 돌아보고 경제적이거나 영적인 형편들에서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권징을 시행하기에 앞서 때로는 진실한 사랑으로 그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먼저 일 수 있다. 곧 미숙한 아이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그저 돌보아야 하는 것처럼 죄나 잘못을 책망만 한다고 성도들의 삶이 회복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더러는 알아도 기다려야 할 때가 있으며, 더러는 그들이 부끄럼과 수치를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신앙과 삶에서 그들이 자라가도록 돕는 사랑이 권징의 첫걸음인 것이다. 권징이란 말이 담고 있는 뜻처럼 그것은 '권면과 징계'이다. 권면은 없고 징계만 있다면 그것을 권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랑과 돌봄의 의무는 없고 상대의 책임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을 가리켜 과연 치리회를 통한 다스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주님은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가리켜 새계명이라고 하셨다. 이 계명은 어떤 심미적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사랑이 가장 큰 권면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658 no image ‘은혜’는 ‘상식’을 무시하지 않는다
편집부
1352 2016-05-10
‘은혜’는 ‘상식’을 무시하지 않는다 ‘상식’(common sense)이란 보편타당성(普遍妥當性)에 근거한다. 그래서 개인주의와 그에 따른 주관주의를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사회에서는 상식이라는 말이 점차 퇴화하고 있는데 이것은 논리상으로 당연한 이치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공동체적인 특성보다는 개인주의적인 특성이 더욱 강해진 현대의 기독교에서도 정작 ‘은혜’라는 말이 점차 퇴화되고 있다. 왜냐하면 은혜라는 말은 기독교에서는 보편타당한 상식의 용어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실 은혜라는 말과 상식이라는 말은 굳이 구분하여 사용할 용어가 아니다. 흔히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용례와 같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상식과 특별한 개념으로서의 은혜 혹은 은총은 분명히 선을 그어 각각 구분되어 병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통섭(Consilience) 가운데서 구별하기만 할 뿐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적 현실 가운데서는 은혜라는 말이 상당히 모순적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상당히 보편적이면서도, 그 말을 쓸 때에는 항상 특별하고 비상식적인 어떤 일이나 사건을 가르키는 것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용어 구별에서 알 수 있듯이, 은혜는 특별한 일들이나 사건의 개념이 아니라 일반적인 일들이나 사건의 개념이 훨씬 많은 분량과 빈도를 차지하는 점에서 아주 보편적인 말인데도 불과하고 이를 이해하는 가운데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를 확대하여 적용해 보면, 상식이라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계약으로 인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인해 성립해 있는 것이다. 항상 가까운 원인밖에는 보지 못하는 인간의 눈에는 모든 상식들이나 질서, 곧 사회적 질서들이 인간 사이의 계약으로 성립한 것으로 보이지만, 먼 원인이자 근본적인 원인에서는 항상 은혜로서 끊임없이 부여되고 공급되어 넘쳐흐르고 있는 것이 바로 상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지 않은 피조물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은혜와 상식 혹은 보편성은 결코 각각 떨어져 성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같은 한 개념에 대한 다른 관점에서의 구별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더욱 보편적으로 적용해 보면, 결국 세상 가운데 있는 상식과 기독교 신앙의 은혜는 서로 별개로 추구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가 있다. 따라서 은혜라는 말이 조금 특별한 의미로 사용될지라도, 그것은 상식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라 상식을 넘어서는(Beyond) 말이다. 그런데 은혜의 백성들이 모인 교회의 운영을 보면, 도처에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상식을 무시하는 그야말로 몰상식이 팽배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적으로 교역자들의 사역(Work)은 엄연히 일(Work)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사역’이라는 말을 따로 선정해서 쓰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그들이 하는 일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특별함이란 헌신(self-sacrifice)이거나 은혜를 함축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 그 자체에 이미 은혜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일 자체로도 우리들은 얼마든지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원리 가운데서 비로소 직업에 대한 소명(召命)이 성립한다. 따라서 교회의 운영이라고 해서 상식을 벗어나서는 안 되며, 오히려 상식을 넘어서야 마땅하다. 간단히 말해서 세상의 복지 이론보다 교회의 복지가 훨씬 탁월해야 한다. 이는 의미상의 탁월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탁월해야 함을 가리킨다. 이러한 정신은 칭의(justification)의 근거 구절 가운데 하나인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이라는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롬 4:6절). 여기에서 세상보다 탁월한(Beyond) 기독교의 복지 개념을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식’을 무시하는 ‘은혜’로는 결코 상식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며, 그러한 기독교의 모습은 단언컨대 ‘몰상식’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몰상식해져만 가는 교회에 사람들이 갈수록 무관심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이라 할 것이다. ‘상식’을 무시하는 ‘은혜’가 결코 상식을 뛰어넘지 못한다. 따라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을 구별하되 통합하여 이해하되, 초대교회가 우리에게 모범을 보였던 것처럼 사회적인 상식과 특별한 은혜를 구별하되 상식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넘는 탁월함을 지닌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으로서 보편적인 상식이 되도록 이기심을 버린 순수한 의미의 공동체성을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이다.
657 no image ‘유보적 칭의론’에 대한 유감
편집부
1864 2016-04-26
‘유보적 칭의론’에 대한 유감 여전히 한국교회 안에서 칭의론 논쟁이 식지 않고 있다. 특히 풀러신학교 김세윤 교수가 주장한 ‘유보적 칭의론’으로 말미암은 논쟁이 이를 더 촉발시키고 있다. 김 교수가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의 무분별한 한국교회의 복음 세일즈, 혹은 성공과 번영의 신학이 가져다 준 껍데기만 남은 복음, 또는 거룩한 삶과 실천이 결여된 한국교회의 현실은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이다. 사실 이런 논란은 이미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 논쟁으로 논의된 바 있다. 구원 따로, 삶 따로인 윤리 실종의 현실에서 '믿는다고 다 구원받는가? 그것이 아니다'라는 문제제기가 곧 주되심을 강조했던 개혁주의 그룹에서 주장되었다. 이는 소위 '믿으면 구원받는다'면서 구원, 곧 칭의와 성화를 분리해서 생각했던 복음주의 그룹에 대한 반박이었다. 이 문제 인식에 있어서 김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과 유사한 면이 없지 않다. 곧 값싼 복음,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교회의 현실에 대한 지적이 그렇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유보적 칭의론과 같지 않았다. 주재권 구원 논쟁에서는 '주 되심'을 강조하면서도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통전적인 구원 안에서 '거듭난 자의 거룩한 삶'은 필연적으로 동반된다고 보았다. 한 마디로 거듭난 참된 신자라면 필연적으로 거룩에의 추구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주재권 논쟁을 통해 값싼 칭의론을 남발하는 복음주의 교회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칭의 유보론이 아닌 통전적 구원론인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해법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작금의 교회 현실이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행했던 것이 아니라 칭의만을 파편적으로 구원의 서정에서 분리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복음주의자들은 개혁자들이 말한 구원의 서정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의 구원임을 외면했던 것이다. 참된 성도라면 자신이 받은 구원이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자신을 타락한 이 세상 가운데 방임하거나 마땅히 살아야할 거룩한 성도로서의 삶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단코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교만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자신에게 임한 구원이 자기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참된 신자들은 겸손한 마음과 뜨거운 충성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마련이다. 늘 진리를 사모하는 가운데 참된 경건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힘쓰는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은혜주실 것을 바라는 가운데 간절히 기도함으로 엎드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변함없는 구원을 아는 성도의 진정한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사실은 오히려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욱 힘 있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준다. 그것은 자신의 구원이 자신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알기에 겸비하여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매 순간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나아가게 된다. 주님이 베푸신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분이 허락하신 하루의 삶 속에서, 그분이 베푸시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힘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종교개혁의 선물인 도르트신조 제12항 ‘구원의 확신이 경건의 동기가 된다’는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견인의 확실함은 결코 참 신자를 교만하거나 육신의 안일함에 빠지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겸손, 자녀로서의 경외감, 참된 경건, 모든 싸움 가운데 인내, 불붙는 기도, 굳건히 십자가를 지고 진리를 고백함, 견고히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함의 참된 원천이다. 더욱이 이 은택을 묵상하는 것은 참 신자들을 항상 간절히 감사하고 선을 행하게 자극한다. 이것은 성경의 증거들과 성도들의 예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나아가 제13항 ‘이 확신이 나태함으로 이끌지 않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견인의 확신은 구원함을 입은 사람들로 하여금 방탕하거나 경건을 무시하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반대로 더욱 더 세심히 주의를 기울여 여호와의 도를 지키게 한다. 참 신자는 자신의 견인을 계속 확신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것으로 이 도를 행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애로운 인자하심을 오용함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운 얼굴을 가리지 않도록, 더 큰 영혼의 아픔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이는 경건한 참된 신자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생명보다 더 달며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시는 것은 사망보다 더 쓰기 때문이다.” 차제에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우리들에게 남겨준 유산을 더욱 확고하게 계승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656 no image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
편집부
1723 2016-04-12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 보편교회에 대한 의식은 개신교회가 가진 기본적인 인식이며, 진정한 의미의 보편교회, 혹은 공교회는 개신교회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런 점에서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 혹은 “거룩한 공교회”라는 문구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은 바로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서 보편교회를 믿는다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보편교회에 속하는 것을 믿으며 추구한다는 고백이다. 하지만 이러한 보편교회에 관한 신앙에 있어 한 가지 오해가 있다. 그것이 바로 보편교회를 추구하는 교회로서의 개신교회는 기본적으로 ‘초교파적인 교회’를 표방한다고 생각하는 오해다. 즉 보편교회로서의 우주적인 교회이기도 한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 개신교회는 항상 모든 교파들을 아우르는 초교파의 교회였고,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공교회, 즉 보편교회에 대한 개념 자체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가운데서 발생한 오해이다. 왜냐하면 공교회를 ‘우주적인 교회’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보편교회는 수많은 교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좀 더 엄밀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오직 하나인 교회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한”이라는 단어를 더하여 “거룩한 공교회”라고 사도신경을 통해 하나인 유일한 교회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개신교 신앙의 교회관이다. 이런 교회관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 안에서 오직 하나인 우주적 보편교회, 즉 공교회가 가시적으로 이 지상에 구현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곧 하나님 안에 있는 교회라는 점에서,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오직 하나인 그 교회가 어떻게 수많은 지상의 교회들로 구현되어 가시적으로도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기본적으로 보편교회를 가시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로마가톨릭교회가 보편교회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세계교회협의회(W·C·C)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로마가톨릭과 다른 것이 있다면, W·C·C의 경우에는 로마가톨릭교회뿐 아니라 모든 종교들을 통합하는 범종교적 의미의 보편교회를 가시적으로 이루려고 한다는 점에서 다를 뿐, 기본적인 노선은 로마가톨릭의 보편교회 추구의 방식과 철저히 일치하고 있다. 하지만 개신교회, 그 가운데서도 장로교회들이 생각하는 보편교회의 구현과 교회일치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만 일치를 이루어 가시적으로까지 구현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이며, 다만 정통교리와 신앙의 일치 곧 신조 혹은 교리의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서 비로소 가시적으로 구현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교회는 어느 교파에 한정될 수 없으며, 보편교회를 이루는 단초가 바로 신앙의 일치라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나인 교회만이 성립하게 된다는 의미가 ‘공교회’라는 말에 함의되어 있는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백성, 즉 택자(擇者)들은 장로교회나 개혁교회만이 아니라 침례교파, 감리교파, 심지어 로마가톨릭과 순복음교파에도 있을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바로 그러한 택자들이 하나의 보편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인 보편교회가 가시적으로 구현되는 원리는 제도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앙의 일치 곧 교리의 일치에 따르므로, 일치된 보편신앙이자 정통신앙의 확립과 공유가 없는 교회는 로마가톨릭이건, 순복음교파이건, 침례교파이건, 감리교파이건, 심지어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보편교회에는 속하지 않은 거짓교회일 수도 있다. 따라서 보편교회는 항상 종말 가운데서야 비로소 그 전체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지평을 가졌으며, 그런 점에서 지상에 있는 교회들이 보편교회를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바로 ‘비가시적 교회’에 대한 이해와 믿음에 있는 것이다. 이 원리가 사도신경 안에 담겨 있으며, 그 원리를 바르게 숙지하는 신자라고 한다면, 어떻게 W·C·C의 일치운동 혹은 교단통합이라는 거짓 일치와 거짓 연합에 동조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런 관점에서, 현대의 기독교는 결코 연합과 일치를 이룰 만한 시기와 역량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런 역량과 시기는 오직 하나님 안에만 있으며, 다만 그런 보편교회요 우주적인 교회를 우리가 고백하고 추구하는 것은 믿음과 신앙의 조망을 통해서 비로소 확인할 수가 있다는 점에서 신학과 교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이 들여온 바알에게 모든 선지자들이 무릎을 꿇던 시대에 엘리야가 보지 못했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의 용사들이 분명하게 보이셨고(왕상 19:18), 마찬가지로 모든 기독교가 로마가톨릭교회로만 보였던 중세시대의 제국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인 보편교회를 이루도록 하셨다. 바로 그러한 조망 가운데서, 우리들은 지금도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며 사도신경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655 no image ‘허락이요’와 ‘법이요’에 대한 이해
편집부
1363 2016-03-29
 ‘허락이요’와 ‘법이요’에 대한 이해 일반적으로 어떤 안건이 상정되어 동의를 구하는 방식이 ‘허락이요’라는 말이고, 어떤 의사 진행이나 안건에 대해 강력한 동의나 혹은 강력한 반론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법이요’라는 말이 사용된다. 이와 관련한 용어의 의미를 고린도전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허락이요’라는 말은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라”(고전 7:6)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허락이요”라고 한 것은 결혼 생활에 대한 권면 가운데서 말한 것이다. ‘법이요’라는 말은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전 14:37)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한 것은 교회의 질서, 그 가운데서도 교회에서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말씀 가운데서 사용한 것이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허락이요”라고 말하는 내용은 결혼과 관련된 언급들을 완곡하게 동의해주기를 원하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말이었으며, “명령인 줄 알라”고 한 것은 교회의 질서, 특히 여자가 교회에서 혹은 가정에서 가르치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 질서와 관련된 것으로 이는 강하고 단호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냥 ‘명령’이 아니라 ‘주의 명령’이라고 한 것이다. 곧 회의 중에서 완곡히 의사진행자와 총대들에 사이에 동의를 구하는 것이 ‘허락이요’라는 말이며 반면에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이 ‘법이요’라는 용어라 할 것인데, 그러한 용어들의 용례와 그 근거 또한 철저히 성경에 근거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용되는 ‘허락이요’는 총대로서 권위의 행사, 혹은 원로로서 권위 행사인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법이요’라는 말 또한 “주의 명령인 줄 알라” 곧 ‘하나님의 법인 줄 알라’와 달리 ‘그것이 장로교 법이요’라는 의미로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총대들은 모든 회의의 의사 진행 혹은 발언에 동참할 때 ‘허락이요’ 혹은 ‘법이요’를 명확하게 표명함으로써 자신의 의사 혹은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오직 성경의 진리만이 올바르게 반영되고 실현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654 no image 장로교 회의의 최종 권위
편집부
1454 2016-03-29
장로교 회의의 최종 권위 장로교에서 최고의 권위는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리스도는 천지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왕으로서 그의 교회를 치리하시되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직접 하시고 또 사람들의 사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하신다”(헌법 총론 I. 교회의 왕). 이 원칙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는 “그에 필요한 교회의 직분들과 규례들을 신약에 계시하여 주셨다. 교회는 이 계시된 제도를 따라야 하며 그 규례들을 지켜야 한다”(헌법 총론 I. 교회의 왕). 이 원칙을 지상에서 가장 잘 수행하기 위한 제도가 바로 장로회 정치이다. “이 정치는 지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하여금 치리의 사역을 하게 하는 정치이다. 그러므로 장로회 정치는 그 기본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신본주의적 공화정치이다”(헌법 총론 III. 체제선언 5항). 이상의 원리에 근거하여 장로교회 회의의 권위는 특정한 사람이나 직분에 있지 않고 회(會) 자체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신본주의 공화정치에 대한 오해 중 하나가 바로 다수 회중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곧 다수 회중들의 동의를 구하면 그 회의에서 결정한 결의에 권위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원칙은 다수 회중들의 동위를 구하기 전에 누구나 먼저 왕이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의 말씀인 ‘성경’에 따라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교에서는 ‘공동의회’ 위에 당회가 있거나, 당회 위에 노회 혹은 총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든 교회와 회의 위에 ‘성경’이 유일한 권위와 표준으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회와 총회에서 총대들은 예외 없이 동일하게 1표의 의사 반영권이 주어질 뿐이며, 혹 다수의 총대들이 동의하고 원하는 바라 할지라도 단 1표라도 성경에 충실한 의사가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장로교회의 독특한 회의 진행방식이며 운영 원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수 회중들의 동의가 있다 할지라도 누구든 성경에 근거한 반론을 제시한다면, 곧 회중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반론을 제시한다면 모든 논의를 중단하고 이를 충분히 검토하여 받아들임이 마땅하다. 바로 이것이 장로회 정치 원리에 따른 것으로 장로회의 최종 권위를 성경에 두는 정신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653 no image 성공과 번영을 섬기는 사람들
편집부
1294 2016-03-15
성공과 번영을 섬기는 사람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는 성공과 번영의 신학에 너무나도 깊이 잠식되어 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도깨비 방망이로 전락된 지 오래고 그들에게 목사는 마치 이 세상에서의 행복과 평안을 빌어주는 무당같이 여겨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이 시대의 교권주의자들은 국가 권력에 기생하여 자신의 영예를 높이고 자랑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세상에 속한 세상 나라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 주님을 믿노라고 말은 하면서도 우리 주님께서 마신 ‘그 잔’과 ‘그 세례’를 받기는 원하지 않는다. 많은 교인들이 매 주일 ‘아멘’으로 화답은 하나 정작 엿새 동안 삶의 현장에서 ‘실천’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치 고개를 떨구고 돌아섰던 부자 청년처럼 종교적 행위와 열심으로 자기 공로의 높은 탑만 쌓을 뿐이다. 그들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적당히’ 살아가기를 원한다. 세상도 취하고 하나님도 동시에 취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을 섬길 뿐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세상과 하나님을 어떻게 동시에 섬길 수 있느냐?”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스인으로 살아가며 이 땅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오늘도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어정쩡하게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삶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을 부정하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신 우리 주님을 따르는 삶이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바로 우리 주님처럼 ‘잔’을 마시며 ‘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으로 인하여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 바울 사도처럼 이 세상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구하는 삶이 바로 진정한 제자의 삶이다. 세상의 어떠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으며 오직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삶’, 바로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진정한 제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652 no image 지옥은 부정하면서 부활은 믿는가?
편집부
1553 2016-03-15
지옥은 부정하면서 부활은 믿는가? 참으로 기이한 교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실제로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몸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2장 ‘사후(死後) 상태와 죽은 자의 부활’ 제1항에서는 부활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인간의 육체는 사후(死後)에 흙으로 돌아가 썩게 되나 영혼은 불멸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즉시 돌아간다. 의인의 영혼은 죽는 순간에 즉시 거룩함으로 완전케 되어 지극히 높은 천국에 들어가 거기서 빛과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을 뵈오며, 몸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린다. 그러나 사악한 자의 영혼은 즉시 지옥에 던지어져 거기서 고통과 칠흑 같은 어두움 가운데 지내며, 마지막 날에 심판을 기다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은 육신이 죽은 후에 영혼이 갈 곳으로 이 두 장소(지옥과 천국) 외에는 아무 곳도 인정하지 않는다.” 신앙고백서가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것처럼 종국에 사람은 누구나 부활을 하게 되고 최후 심판을 거쳐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된다. 따라서 신자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도 부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은 신자들만의 특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천국이나 지옥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작금 부활을 믿지 않는 ‘영혼 멸절설’과 같은 괴이한 신학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에 죽은 사람들을 형벌하기 위한 지옥을 만들어 놓지 않으셨다는 기이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문제는 천국을 소망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조차도 실제로는 지옥이 없는 것처럼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으로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도무지 행할 수 없는 일들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행하고 있다는 것은 말세의 특징일 것이다. 아마도 본인들은 분명히 천국에 갈 것이니 지옥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겠지만,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기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전말을 밝히고, 그들이 선악간에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웨신 제33장 1항)라고 밝히고 있다. 우리는 천국을 확신하는 것처럼 지옥도 있다는 점을 늘 명심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부활의 소망이 우리들에게 진정한 기쁨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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