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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1 no image 강도사고시 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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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1 1999-07-01
99년 강도사교시가 원만하게 끝을 맺었다. 총 108명의 응시자 중 한 명의 결 시자를 제하고 다 응시했다. 이중에는 초시자와 재시자와 삼수자도 있었다. 각자의 성적에 따라 합격과 불합격으로 단락이 지어졌지만 아쉬움도 없지 않 았다. 합격자 68명은 예년에 비해 약간 상승된 수이다.고시부에서는 출제문제 에 대하여 많은 배려를 하였다. 문제를 많이 내고 택일하는 방법과 많이 출제 하여 점수를 얻게 하는 배려를 하였다. 그러나 착실하게 준비한 자와 소홀히 한 자의 차이점이 답안지에 여실하게 나타났다. 금번 논문제목은 ‘21세기 한 국교회를 위한 신학교육’이었다. 신학자도 아니며 미래학에 대한 학문적 조 예도 깊지않은 이들에게 다소 무리한 출제였다고 생각되었다. 응시자들 중에 서도 논제가 자신들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는 말은 무리한 말이 아닌듯 싶 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하고 논술을 전개한 훌륭한 작품도 있었지만 또 한편 에는 도저히 읽기조차 힘겨운 논문도 있었다. 또하나는 논문 내용이 유사한 작품이 있었고 심지어는 복사하듯 옮겨 쓴 것도 있었다. 고시부는 이에 대해 조사한 후 적절히 처리했다. 이러한 경우는 주해와 설교에도 있었다. 물론 논 문에 있어서 참고도서와 자료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열심히 공부한 자 와 적당히 한 자와의 차이는 뚜렷하게 나타났다. 논문만 아니라 모든 응시과 목에서도 역시 그러했다.강도사고시는 목사후보생이 총회의 고시와 노회의 인 준을 받아 비로소 강도(설교)하는 공적인준을 받게되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 러므로 이를 소홀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게 되면 하고 못하게 되면 안 한다’는 식의 냉소적인 자세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안하는 것이 좋다. 그동 안 노고를 아끼지 않은 고시부원들에게 감사드리며 합격자들에게 축하를 보내 며 뜻을 이루지 못한 응시자들에게 다시금 격려를 보낸다. 다시 한번 주어지 는 새로운 세기의 첫해에 합격의 영광을 안고 이 나라의 교회가 요청하는 신 실한 복음의 일군들이 되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10 no image 서해충돌과 교회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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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4 1999-07-01
이 세상에 가장 폭악스럽고 교활한 집단이 있다면 북의 김정일 집단일 것이 다. 국민의 정부는 이 집단에 햇볕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비료도 갖다 주고 양식과 의료품과 관광객의 딸러도 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좀처럼 문을 열 려고 하지 않는다. 햇볕정책이 주는 당근은 챙기면서 햇볕정책이 원하는 개혁 과 개방은 생각조차 안하고 폐쇄와 적화전략의 망상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 다.지난 15일에 야기된 무력도발은 어쩌면 햇볕정책의 틀속에 들어오지 않겠 다는 작태인지도 모를 일이다. 서해에서는 격돌해 오고 동해에서는 관광객을 받고 남포에서는 비료를 하역시키고 있었다. 도대체 김정일 집단은 무엇인 가? 야뉴스의 두 얼굴 같은 그들의 행각은 국민의 정부에 끝없는 인내를 요청 하고 있는 것 같다. 저들의 도발에 여러가지 분석이 내려지고 있지만 주된 원 인은 햇볕정책에 대한 시험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지난 서해충돌에서 우리 군의 강한 저해(沮害)에 저윽히 당황했을 것이며 햇볕정책에 대한 시각 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계속 햇볕정책의 당근을 받을 것인가? 정략가들 은 받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전기한 바와 같이 햇볕정책은 많은 인내 를 필요로 할 것이다.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김정일 집단은 쉽사리 햇볕정책 의 범주속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적화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 도발은 언제 다시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란 점이다. 그러므로 이 와같은 상대를 알고 만전의 대응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도발에 대 해서는 서해충돌에서 보인 바와 같은 단호한 응징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간 햇볕정책에 대한 여러 비판중의 하나는 그들의 도발에 응징이 약했다는 것이 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무모한 도발에 강한 대응이 주어질 때 햇볕정책은 국 민적 지지와 호응을 받게 될 것이다.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할 것인 가.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다. 하룻밤 사이에 바벨 론의 역사를 메데와 파사의 역사로 바꾸어 놓으신 하나님을 믿고 소망할 일이 다. 그리고 전쟁의 참화 없이 이 나라와 민족이 하나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일이다. 우리는 6.25전쟁의 참화를 경험했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6.25 의 깊은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평화적 통일은 민족의 염 원이다. 우리, 낙심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여야 한다.마지막으로 북한에 대한 선교사역이다. 북녘에는 2천여 교회가 있었다. 지금도 지하교회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북녘땅에 대한 복음사역은 우리 교회의 일 대 사역이며 이 민족을 하나되게 하는 사역이기도 하다. 빛이 스며드는 곳에 생명이 약동하듯 어두운 동토(凍土)에 복음의 빛을 비추어 가는 선교사역이 뜨겁게 진행되기를 바란다.
9 no image 법의 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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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9 1999-06-14
세상엔 완전한 법이 없다. 법을 고치려 들면 끝이 없다. 총·노회가 모일 때 마다 법수정 규칙수정안이 빈번하게 상정되고 논의된다. 총회법(헌법)을 고치 려면 노회수의까지 몇해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 거추장스런 법개정과 수정을 무엇 때문에 해야만 하는가?우리 교회법은 1917년 미북장로교회의 헌법을 우 리 실정에 맞게 번역채용한 것이 우리 교회의 법 설정의 시작이었다. 이후 여 러 해를 거쳐 오면서 필요를 따라 수없이 개정과 수정을 가해 왔다. 마치 우 리 법은 더덕더덕 기워입은 누더기옷과도 같다. 이렇게 누더기법을 들고 수정 하고 개정하느니 보다 새로운 세기가 오고 새로 시대가 열리고 있는 이때 아 예 법 전체를 개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더 나아가서 한국장로교회 전체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법을 만들면 어떨까! 이건 너무 비약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우리 교단만이라도 21세기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법을 새로 제정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남도(南都)의 어느 큰 교회가 장로, 안수집사, 권사 선 출에 대한 법절차를 새롭게 만들었다. 꼼꼼히 살펴보니 총회법을 범하지 않 는 범위 안에서 묘하게 선을 그은 것이다. 법이란 요령껏 사용한다면 얼마든 지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가정이 성립되는 것이다. 온 교회들이 총회의 큰 법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요령껏 운신한다면 매우 자유로울 것이며 교권의 개 입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신문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거창한 찬사를 보냈 다. 젊은이들은 멋있다고 손뼉칠 것 같고 총회의 어른들은 이것 좀 이상한데 하면서도 잡힐 것 없고, 근엄하신 신학교 교수님들은 이것 개혁주의에 어긋남 이 없을까? … 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어떻든 답답한 가슴에 시원함이 파도처 럼 밀려온다. 만일 이것이 보편화 되어 총회의 큰 법이 있고 개교회는 그 범 주 안에서 요령껏 운신한다면 이것은 회중교회의 법질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든 교회가 있고 법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8 no image 머물러 선 교회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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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5 1999-06-14
왜 이럴까? 멈추어 선 시계바늘 처럼 교회성장이 머물러 선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교단의 교세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 없다. 무엇 때문에 이 렇게 되어 가는지? 기우와 함께 깊은 탄식을 털어버릴 수 없다.개중에는 개혁 주의 신앙으로 교회가 굳게 서면 되는 것이지 숫적 부흥은 큰 문제일 수 없다 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교회성장이란 질적성장을 빼놓을 수 없다. 그 러나 성경말씀은 분명히 양적부흥도 말씀하고 있어 진정한 의미에서 질과 양 을 겸한 부흥이 바른 부흥이며 성장일 것이다. 어느 하나를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그런데 왜 우리는 멈추어 선 시계바늘 처럼 정체상태에 머물러 있는 가?사람들 중에는 ‘개혁운동을 하느라고 목회다운 목회를 못했다’고 말한 다.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다. 어떻게 들으면 야유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한편 으로는 자조적(自嘲的)인 말로 들리기도 한다.우리는 십여년 전 부패타락한 집단에서 탈출하여 개혁의 깃발을 들었다. 새로 세워진 합동신학교는 개혁주 의의 도장이었고 요람이었다. 열심히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쳤고 학생들은 몰 려 왔다.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고 자부심도 대단했다. 그러나 근래에 이 르러 자부심과 기세(氣勢)는 시들어지고 비판의 소리만 거세게 들려오고 있 다. 총회정책의 궤도수정이 들려오고 있으며 특히 신학교육의 궤도수정이 강 도높게 들려오고 있다. 즉, 실천신학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 사역 자들 중에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목회하면 실패한다’고 말하고 있다. 듣기 가 거북스러운 말이지만 듣고 넘길 수도 없는 말이다. 왜 신학교에서 배운 대 로 하면 목회가 안 될까? 신학교에서 잘못 가르쳤다는 말인가? 결코 그럴 리 없다. 합동신학교의 높은 학적수준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총회나 신학교에서 유능한 목회자 양성에 힘을 쏟지 못했다는 것이 다. 신학교는 목회자 양성에 그 존립의 의미를 두어야 한다. 신학생들이 교 수 되기를 원했고 선교사 되기를 원했지만 목회자 되기를 그리 원하지 않았다 는 점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신학교는 오로지 유력한 개혁주의 목회자 양성 을 지상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우리는 이 점에 등한히 했고 빈약했었다. 그 결 과가 오늘의 현실을 초래케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 합동신 학교를 통해 개혁주의 신앙에 굳게 선 유능하고 유력한 그리고 은혜롭고 뜨거 운 목회자가 많이 배출되기를 기도하며 소망하는 바이다.
7 no image 노회, 좀더 생산적이 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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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5 1999-05-25
노회, 좀더 생산적이 될 수 없는가? 이제 봄 노회를 마치므로 또 한 해의 임 원진이 구성되고, 각 부서의 책임자들이 선정 되었다. 한 해에 두 번 모이는 이 귀중한 노회는 장로교회의 핵심적인 모임이자, 총회의 근간이 되고 있는 사항들이 처리되고 다루어지는 실질적인 회의이기도 하다. 노회가 활성화 되고 민주화 되며 생산적으로 회무를 처리해 나갈 때에 장로교회다운 공동체 의 특성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최근의 각 노회 모임을 보면 너무나 구태 의연하다. 개혁하는 교단다운 총회나 노회모임이라고 자부심을 느낄만한 것 이 별로 없다. 우선 참석률이 현저히 저조하다. 매번 무단 결석자들이 늘어 나고 있고, 출석한 회원 중에도 진지하게 경청하며 논의하기 보다는 의무적으 로 자리만 채우고 있다가 이석하는 경우도 많다. 노회에 모이기 이전에 사전 에 철저히 준비하는 자세가 아쉽다. 상당히 많은 부서는 일년 동안 거의 하 는 일이 없는 경우도 많다. 실질적인 행사나 연합 기관으로서 주도권을 거 의 행사하지 않고, 그저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부서들이 너무나 많다. 각자 지교회의 목회사역에 바쁘다가 노회에 모이게 되므로 더욱 그러하다. 선진 국의 사례를 보면, 우선 노회 서기를 은퇴목사들이 맡는다. 그분들은 경험 도 많고, 동시에 담임교역자가 아니기에 시간도 넉넉하다. 또한 상비부도 거 대한 총회조직의 하부 기관처럼 의무적으로 조직되어있지 않으며, 천편일률적 이 아니다. 지역특성과 형편에 따라서 위원회나 부서가 다양하게 구성되고 있다. 노회장은 순번대로 돌아가면서 맡는다. 총회 총대나 각종 대표들 역시 이름 순서대로 맡는다. 노회는 각종 고시에 철저하고 진지하다. 소속된 회원 들간에 대한 상호 배려가 극진하다. 그러나 한국의 노회가 스콧틀랜드나, 화 란 개혁교회를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와 정서에 맡는 창조 적이고 생산적인 모임으로 만들어 가면 된다. 노회는 친목이나 회원 상호간 의 운동경기 보다는 진지하게 연구하고, 탐구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 다. 영등포 광야교회, 총회가 돕는 봉사기관으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강 조되는 이 시대에, 우리 총회가 한국 사회의 소외계층과 저변 확대를 위해 서 연합하여 돕는 일에 앞장서야 할 때이다. 특히 대량실업과 명예 퇴직으로 인해서 어수선한 시대에 병든자들고 노약자들을 선교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 근래에 여러 매스컴을 통해서 도시 빈민계층을 선교하는 일들이 관심 을 끌고 있다. 우리 교단내에서도 광야교회가 영등포 역 주변에서 꾸준히 도시선교에 놀라운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일을 하는 다른 사역자들은 이미 대대적으로 보도되어서 유명세를 치르고 있기도 하다. 청량리의 다일공 동체, 음성의 꽃동네, 나자로 마을 등이다. 영등포 광야교회는 본 교단의 특 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선교사역이다. 합동신학원을 졸업한 새내기 개척전도 사가 사명감만으로 선교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차차 결실을 맺게 되 어 이제는 지역사회가 인정하는 기관으로 서게 되었다. 이 작은 교회가 심 한 불모지역에 세워져서 지난 10여년 간 쌓아온 그간의 봉사는 실로 눈물겨 운 드라마이다. 이젠 른 기관의 지속적인 보조와 도움 없이 감당하기에는 그 수용인원이 너무나 많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약 90여명에게 의 식주를 책임지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일 이 아니다. 이젠 총회연합기관으로 선정하여 명실상부한 본 교단의 사회봉사 활동의 대명사로 지원하고 협력했 으면 한다. 총회 본부는 광야교회와 같은 사역을 계획적으로, 조직적으로 지원할 대책을 세웠으면 한다. 지금 몇 교회가 참여하고 있는데, 개 교회의 일로 그저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일이자,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6 no image 일부 교계 언론, 이단 꼭두각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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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2 1999-05-09
사설 교계 일부 방송 언론사 활개치는 이단 사이비의 꼭두각시인가? 이단 사이비성 문제로 교계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이재록 씨가 일부 방송 언론사를 등에 없고 요즘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나는 원죄와 자범죄가 없어졌다"고 공언하고 스스로 신격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는 그 가 여전히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교계를 농락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본인 의 정체성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라면 당연히 자중해야 할 그가 언론을 앞세 워 자신의 정체를 감추려 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1월 본 보 229호에서도 이재록 씨의 사상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 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일부 교계 방송사가 후원하는 것인냥 공개적으로 명판을 내걸고 특별 집회를 열고 있을 정도이다. 그의 후원을 받고 있는 방송사나 언론사들은 그의 이단 사이비성을 전혀 문제 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밀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재록 씨 는 이를 악용해 "내가 이단이 나 사이비라면 방송사들과 언론사들이 내 설교 를 방송하고 내 글을 게재하겠느냐?"고 오히려 호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교계는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나 방향을 마련하지 않고 방관 하고 있음은 심히 염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월 16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산하 이단 사이비 대책위원회는 이재록 씨 를 극단적 신비주의의 무서운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성명서를 통해 교 계의 몇몇 방송, 언론 매체, 일부 목회자와 부흥사들이 그를 방조하고 그의 이단성 확산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 성명서에 따르면 이재록은 대언이나 직통 계시를 주장하고 5단계 천국, 5단계 믿음을 주장하며 자신은 죄가 없어 주님과 하나다고 하는 등 신비주의 형태의 이단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본 교단 북서울 노회에서도 이재록 씨의 이단성에 대해 조사할 것을 총회에 헌의하기로 지난 정기노회에서 결의한 바 있다(본보 234호). 한국 교회는 일제와 공산주의자들의 회유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켜왔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주기철이나 손양원 등과 같은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음을 자랑한다. 외국 선교사들이 한 국 교회를 지켜 준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복음을 지켰고 교회를 세워 나 왔던 것이다. 이렇게 교회를 지켜 온 민족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 을 정도로 한국 교회는 특별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선배들의 순교적 신 앙과 복음을 사모하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 연히 선배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복음을 지키고 신앙의 자유를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작금에 와서 이단 사이비 문제로 얼 마나 많은 성도들이 미혹 당하고 재산을 탕진하고 인생을 포기하는 일이 벌 어지고 있는가?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한국 교계에 커다란 문제 점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70년대 이후 경제적 급성장과 함께 대형 교회 지향의 성장 일변도의 목회자들이 속출하고 정략적으로 교단을 분열시켜서라도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분파주의자들로 인해 한국 교회의 힘이 분산되었다는 사실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틈을 비집고 이단 사이비 들이 똬리를 틀고 교회라는 간판을 앞세워 기세 등등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이단 사이비 계보조차 파악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특히 OO교회, OO선교회 등 의 간판을 걸어 놓고 활개치는 사이비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기 때문에 그 폐해의 심각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단 사이비를 가려 참 된 복음을 전파해야 할 목회자들조차 사이비 단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프로 그램에 참여하고 선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주님께서도 경고 하셨듯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 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 리라"(마 24:24)는 말씀처럼 그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교회와 성 도들을 미혹할 것이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정상적인 교회처럼 위장하거 나 아니면 정상한 교회와 연대 관계를 맺어서라도 그들의 악랄한 사상을 교 계에 침투시키려 할 것이다. 실지로 문선명의 통일교나 박대선의 전도관 보 다는 교묘하게 교회 속에 숨어 있는 이단이나 사이비가 바로 우리 교회를 부 패하게 하고 저질화 하는데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 해야 할 것이다. 이단 사이비의 후원을 받고 있는 방송사나 언론사들이 있다면 한국 교회 의 유구한 전통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단호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이 단 사이비의 본색을 밝혀 발본색원해야 할 방송 언론사들이 그들을 오히려 비호하고 나선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5 no image 헌법수정에 대한 기대 / 갈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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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1 1999-04-23
헌법수정에 대한 기대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1917년 미국 북장로교의 헌법 을 한국교회의 실정에 맞게 발췌 번역하여 사용한 것이 그 시작이다. 해방 후 해방된 교회의 현실과 격에 맞게 헌법을 수정하여 사용하였고 1981년 본 개혁교단이 출범함과 함께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헌법으로 수정하여 사 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정하였다 할지라도 그 골격(骨格)은 헌법과 대동소 이하고 아직도 개정(改正)과 수정을 가해야 할 점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각 노회에서 헌법수정을 헌의안으로 총회에 상정(上程)해 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면 헌법을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 그 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전체를 수정할 것인가 부분적으로 수정할 것인가? 아니면 노회 에서 상정해 오는 헌의안과 권징조례의 수정과 헌법적규칙을 삽입할 정도로 수정할 것인가를 결정 내려야 한다. 지금 우리 헌법 중에서 권징조례의 수정 은 시급한 과제이다. 그 용어와 단어를 현대화 하는 일은 필수적 작업이며 문 장의 흐름도 알아보기 쉽도록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헌법적규칙이 무엇 때 문에 누락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필요성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유사점이 있어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헌법을 대할 때마 다 느끼는 혼돈은 유사점(類似点)이 많다는 것이며 옛글을 대하는 듯한 감정 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표준된 해석이 따라야 한다는 점 이다. 사람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다는 점은 헌법이 명석하지 못하며 조화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속된 말로 표현한다면 코에 걸면 코거 리 귀에 걸면 귀고리식이다. ‘J.A.하지’의 ‘교회정치 문답조례’가 있어 다소의 도움은 얻지만 사람들 중에는 이를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 면 우리도 헌법에 대한 해설이 출간되어야 하지 않을까? 정암 박윤선 목사가 헌법주석을 내 놓았지만 원리에 멈추어진 내용이다.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 범 한결같이 수정과 보충이 필요하며 헌법적규칙이 보충되어야 하며 헌법 중 정치와 권징조례 등에는 해설서가 출간되어야 한다. 헌법수정 작업은 방대한 작업이다. 지난 3월 15일 헌법수정위원회가 모여 기초위원 몇명을 선 출하고 일을 맡기었다. 졸속을 피하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완벽한 헌법이 이루 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법의 응용과 적응에 가급적 일치를 이루도록 힘씀 이 옳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돼지목의 진주목걸이 가 될 것이다. 그리고 법을 운위(云謂)하면 정치목사로 낙인찍는 일은 없어 야 하며, 법을 가지고 농간(弄奸)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법이 하나님의 질서 라면 우리는 힘써 지켜야할 의무를 가진다. 헌법수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명 석하고 조화롭고 권위가 있는 헌법으로 수정되기를 기대해 본다. 갈곳이 없다 근간에 노회의 안수로 목사임직을 받은 신임목사들이 갈 곳(임지)이 없다고 한다. 목사뿐만 아니라 신학생들까지 그렇다고 한다. 물론 목사로 장립을 받 게 될 때 청빙하는 곳이 있어 노회가 목사로 장립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한 것이 대다수이다. 혹 교회 시무자라 할지라도 장립 후 그 교회를 사임해야 할 형편에 있고 또는 교회기관에서 일하는 자와 심지어는 노회전도부가 임지 가 없어도 전도목사로 안수를 주는 기현상이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하여 목 사는 많아졌고 갈 곳이 없는 목사들이 방 황하고 있는 것이다.98년 83총회시 신학교 보고에 의하면 1981-98년까지 18회를 걸쳐 총 1,085명이 졸업했고 이 중 단독목회가 420명 선교사로 60명 유학생이 43명 기타 부목사 전도사로 535 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임지가 없는 목사가 50-100명 안 팎이 될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는 본교단소속 목사이다. 목사가 갈 곳이 없 다면 이보다 더한 서글픔이 어디 있으랴!갈 곳이 없는 목사문제를 어떻게 해 결할 것인가? 근원적으로 말한다면 신학교에 대한 개념과 인식이 바뀌어져야 한다고 본다. 신학교를 하면 반드시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없이 하고 단순히 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신학교를 찾아 올 수 있는 분위기가 조 성되어야 한다. 목회자로서의 소명은 하나님과 본인과의 문제이다.대교회주의 는 교회의 형평(衡平)이 크게 흔들려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교회안에 크게 부각 되었다. 대교회들의 결단이 촉구되는 바이다. 그것은 교회를 분할(分割) 하는 일이다. 일정지역에 교회를 신설하고 그 지역에 거주하는 신자들로 하여 금 그 교회로 출석하여 섬기도록 하고 교역자를 파송하는 일이다. 교인욕심 버리 고 뜨거운 선교적 사명에 굳게 선다면 가능할 것이며 분할하여 간 교인들 의 자리는 다시 채워질 것이다.근래에 이르러 사회 각분야에서 영적이며 정신 적인 지도자를 찾고 있다. 사회갈등이 조성되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정신 적이며 심리적 불안정을 심화해 가고 있다. 이런 부분에 목사의 역할이 크게 기대되는 것이다. 전문적인 교 양을 받고 목사들이 이런 일에 봉사한다면 목사의 필요는 보다 증가되리라고 본다. “갈 곳이 없다”는 말속엔 “오라는 곳이 없어 못간다”는 의미도 포 함되어 있다. 오라는 곳만 찾아갈 생각을 한다면 평생 갈 곳 없는 사람도 있 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더러 땅끝까지 가라고 하였다. 땅끝까지 찾아간 사도 적 선교신앙이 우리에게 있다면 갈 곳이 없다기보다 오히려 갈 곳이 많을 것 이다. 갈 곳이 없다기보다 갈 곳을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곳을 나의 사역 지로 만들어야 한다. 목숨을 걸고 극한의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해 간다면 그 곳이 나의 가장 아름다운 목장이 될 것이다.
4 no image <사설> 부활절, 총회의 무기력증을 떨쳐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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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4 1999-04-04
부활절, 총회의 무기력증을 떨쳐버리자최근 정부 조직개편안의 혼선과 국정 의 혼란은 개혁의 주체들은 없고, 오직 이권의 주체들만이 이전투구하고 있 기 때문이다. 희생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여 정치를 본 궤도에 진입하게 하려는 조타수가 없다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그런가 하면, 기독교 연합기관으로 출범했던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이 거듭된 부채를 감당하 지 못해서 경영권을 포기해야 할 위기에 봉착했다는 소식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대교단들과 중소 교단들 사이의 갈등이 있고, 주체의식이 없이 서로 떠넘기는 식으로 운영되어 오다 보니까, 결국 경제위기의 시대에 무너지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 총회는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 1980년에 시작된 한국 교회 개혁의 정신은 비교적 깨끗한 총회풍토를 이룩하면서 빛을 발휘하고 있 다고 본다. 현재의 순수한 총회 모습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고 박윤선 목 사님, 노진현 목사님을 위시하여 원로 목회자들의 인격과 신앙을 견인차로 하 였기 때문이 다. 거기에, 합동신학 대학원의 교수진과 동문들이 열렬하게 지지 와 성원을 보내면서 가능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원로세대가 서서히 퇴조하 는 시점에서 우리 총회는 어떤 모습으로 세워져 가고 있는가? 요즈음, 총회 는 연합사업의 무기력증에 휩싸여 있다. 일치된 목소리를 발휘하여 한국 교회 를 이끌어나가는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통일문제나, 환경문제나, 실업 자나 노숙자 대책이나, 해외선교나 국내전도 사업에 이르기까지 어떤 활동에 응집력을 모으고 있는가? 작년에 추진되었던 교단간의 연합사업을 예로 들 면, 줄곧 소극적으로 대처하다가 결국 고립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교단 이 한국 교회의 연합이나, 일체감 조성이나, 혹은 복음전도에 있어서나 주도 적으로 공헌하고 있는 것은 과연 있는가? 자칫하면 본 난에서 주장하는 바 가, 그동안 열심히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서 수고해 온 역대 총회 임원들의 능 력이나 자질에 대해 비판을 하려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동안 나름대로 수고해온 임원진들의 노고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제는 새로운 밀레 니엄을 향한 노력이 확산되어야 하겠다는 말이다. 첫째의 대안은, 모든 건설 적인 의견이 총회에 격의없이 모아지고, 수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합운동 이나, 대외사업에 있어서 총회에 참여해온 일부 인사들만이 계속해서 맡고 있 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은 무시되는 일이 많다. 이제는 중요한 정 책에 있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전국 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여론을 수집 해 보고, 그 추진에 있어서는 다양한 계층의 인재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일 대 쇄신이 필요하다. 둘째, 우리 총회가 좀 더 활기찬 역할을 감당하고 한국 교회의 명실상부한 소망으로 잘 발전하기 위해서는 전국 총회 시에 모든 목사 회원들의 참여를 허용하도록 하는 일이다. 목사회원이 모두 참여할 때 전국성 도들의 관심과 사랑을 불러 모아서 응집력을 산출해 낼 수 있다. 지금처럼 일 부 총대가 선출되어서 대행하는 방식에만 의존한다면 여전히 많은 목사 회원 들은 총회와 거리감을 느낄 것이다. 최근에 가입한 교회와 회원들은 총회와 는 인연이 거의 없어서 무관심하기 쉽다. 미국 정통장로교회의 총회 시에는 모든 목사회원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셋째 대안은, 합신의 태동기에 주축이던 동문들 이 초심으로 돌아가서 모든 총회 사역에 힘 을 합치고 진지하게 내일을 향한 비젼 있는 일에 힘을 모아야한다는 것이다. 이제 합신의 초기 동문들이 50세 전후의 장년에 이르렀다. 목회연륜이나 인 생의 경륜에서 볼 때 적지 않은 경험을 쌓았고, 중추적인 세대로 자리매김하 고 있다고 본다. 지금 교단은 새로워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합신의 재학생들 이나, 일반 청년회원들의 눈에 비친 우리 총회의 장년층들, 특히 합신의 초 기 개척자들의 모습은 구세대를 답습하고 있고, 매우 무기력증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기에 뚜렷했던 비젼이나 투철한 사명의 식을 회복해야만 할 것이다.최초의 부활절, 그 당시 제자들은 무능력과 무기 력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 선도에 섰던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디베 랴 호수에서 다시 만남으로서 새로운 능력과 사명을 부여받아 마침내 일어서 게 되었다. 부활절은 일대 변화의 분수령이었다. 금년 부활절은 무기력해진 우리 한국 교회와 총회가 주님이 부탁하신 ‘내 양을 먹이라’는 소명감을 재 인식하고, 주님의 남은 고난을 위해서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회복하는 절기 가 되기를 소망한다. 교회의 문제점만을 꼬집고, 비판만을 일삼으며, 책임져 야할 일에는 수수 방관하는 교단으로 더 이상 방치되어서는 안된다. 이제는 교회 개혁보다 몇 배나 어려운 교회 연합사역의 열매를 보여주어야 할 시대이 다. 매우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장벽을 허물어 버리고, 신선한 감동을 줄 수 있도록 총회를 위해 헌신해 보자.
3 no image 세속과 구별된 교회 정체성 회복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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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8 1999-03-15
사설 세속과 구별된 교회 정체성 회복되어야 최근 보도를 돌이켜 보면 한국 교회가 처한 위기 상황이 어떤 것인 가에 직면할 수 있다. 영생교의 우종진씨 일행의 집단 자살 사건은 이 런 점에서 하나의 신호탄에 불과하다. 우씨는 정규 신학교를 졸업했다. 한 때 그는 100여명의 신도를 가진 교회에서 목회에 종사하던 사람이 었었다. 그러던 그가 교회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람들을 미혹해 영생교 를 설립했던 것이다. 더욱이 우씨가 남긴 메모지 등에서 발견되는 여러 내용들을 볼 때 그들이 성적으로 문란한 사이비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참으로 경악할 일이다. 이 사건의 전모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만 오늘날의 교회가 타락하고 있다는 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 가? 대다수 목회자나 교회가 아무리 건전한 신학과 신앙을 표방하고 있 다 할지라도 영생교와 같은 사건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교 회가 당면한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겉 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우씨와 같은 목회자들이 또 있을 수 있다는 점 이다. 그런 인물들이 건전하지 못한 신학 사상을 가지고 교회의 권위를 앞세워 얼마나 많은 성도들을 미혹하며 병들게 할는지 알 수 없다. 나아가 목사의 가르침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분별하고 바른 사상을 추구할 수 있는 평신도들이 많지 않다는 것은 한국 교회의 질적 수준 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번 사건은 이미 익히 알 려진 다미 선교회나 오대양 사건 등과 그 맥낙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 이다. 극단적인 종말론적 사상을 강조한 결과 지나치게 현실 도피적인 생각에 치우친 한국 교회의 단면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미혹된 신도들이 그처럼 저급한 수준에 머물고 있었던 것 은 복음의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는 실력이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신도들의 수준이 하향화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한 국 교계의 지나친 분파주의가 그 원인이 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초기 한국 교회는 사회를 개도하거나 지도할 만큼의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교단이 확장되고 교권 다툼이 발생하면서부터 한국 교회는 사 분오열되기 시작했고 급조된 신학교에서 무자격 목회자 들이 다량 배출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외형상 양적으로 팽창의 길을 달려왔을지라도 그 내면에는 신학 부재, 목회관 부재, 윤리 부재 의 목회자들이 이 사회 여러곳에서 적지않은 부작용을 일으켜 왔던 것 이 사실이다. 한국 교회는 이번 영생교 신도 집단 자살 사건을 단지 일개 사이비 집단의 광적인 자살 사건으로 치부해선 안된다. 개신교 사이비 집단이 나 이단이 이 땅에서 활개칠 수 있는 것도 개신교회가 그들에게 발판 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을 먼저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신학 교육에 대한 무관심이나 철저한 검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목회자를 세우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제 2의 영생교, 다미 선교회, 오대양 사건이 발생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차제에 개신교 안에서 자정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첫째, 무자격 신학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일부 교단 들이 자기 교단의 교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조건 신학교를 운영하여야 한다는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 타 교단 과 연합이나 화합에 관심을 가진 다면 이 문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둘째, 무자격 목회자에 대한 문제를 더 이상 감추어 두어선 안될 것 이다. 교단은 그 교단이 규정하고 있는 바 최소한의 목회자 자격 기준 을 가지고 있다. 교세를 축소한다 할지라도 자기 교단 소속의 목회자들 에 대한 신학적 검증을 실시한다면 한국 교회의 미래는 어둡지 않을 것이다. 또한 교단 차원에서 목회자 재교육을 실시하는 것도 좋을 것이 다. 평생 교육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요즈음이다. 일정 기간 동안 공인된 신학교에서 목회자들이 학문에 정진한다면 개인적으로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셋째, 평신도 실력 향상을 위해 교회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 치우치거나 건물 확장에 투자하기 보다는 성도들의 질 적 향상을 위해 일정한 비율의 투자를 지속해야 한다. 평신도의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교회는 더 힘을 얻고 발전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 한 교회 성장이 아니겠는가. 넷째, 목회자 신임 투표제를 실시해야 한다. 교단 헌법에는 목회자 신임 투표제를 실시하도록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교 회들은 이를 시행하고 있지 않다. 바른 교회를 세워감에 있어 어느 정도의 희생이 따른다 할지라도 우리 교단 만이라도 먼저 목회자 신임 투표제를 실시 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 신임 투표는 목회자를 성장하게 하는 좋은 제 도이다. 이 제도가 활성화 될 수 있도록 교단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2 no image 세번째 밀레니엄 앞에선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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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7 1999-03-15
사설 3번째 밀레니엄 앞에 선 자세 지난 연말 모 TV 방송사에서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두고 인류가 당할지도 모를 종말에 대하여 특집 방송을 한 바 있다. 그 방송의 내용 중에는 익히 알려져 있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 예언과 최근 신통하 다고 일컫는 유명한 예언가들의 말을 빌어 1999년 8-9월경 태양계가 십자가(GREAT CROSS) 모형을 이루면서 지구의 종말이 올지도 모른 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실제로 8-9월경 태양계는 지구를 중심으로 9개의 위성들이 십자가 형태로 배열된다는 것이 천문학계의 예측이다. 참고로 천문학계에서는 태양계가 십자가 형태로 배열된다 할지라도 각 위성간의 거리가 멀어 지구에 미치는 인력은 달이 미치는 인력의 수백분의 1에 불과하기 때문에 지구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밝 히고 있다. 그러나 예언가들은 물리적 역학 관계를 떠나 그 때가 되면 지구에 상상치 못할 변화와 함께 종말을 가져온다고 예견하고 있다. 이런 종말 예언은 세기말이면 어김없이 등장했다 가 슬그머니 사라 져 왔었다. 더욱이 올해는 세기말과 더불어 천년기의 말미에 서 있기 때문에 지구 종말론을 과감히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뿐이다. 실제 로 예루살렘에는 지구의 종말을 예견하고 모여드는 광신도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특히 세대주의에 입각한 사이비 교단에서는 2000년과 함 께 세계의 역사가 종말을 구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주장하 고 있어 종말론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한 격론을 가져오리라 예상된다. 이러한 시대적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 교회는 어떤 자세를 견지해 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된다. 몇몇 보도를 보면 지구의 지축이 바뀐다거나(지축 이동설), 유라시아 대륙과 환태평양 대 륙이 충돌한다거나(대륙 유동설), 태양의 흑점이 최근 들어 급작히 확 장된다거나(흑점 확장설), 정체 모를 행성이 지구와 충돌할지 모른다는 (행성 충돌설) 등 종말적 징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도 이미 밝히신 것처럼 미래의 종말에 대해선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날이 내일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음 세대일 수도 있는 것이다(마 24:36). 문제는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에 대한 것보다는 오히려 지금 우리의 삶이 어떠한 것인가에 초점이 모아 져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경고처럼 그 때와 시한을 알 수 없을지라도 (마 25:13)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으로 주님은 우리를 인정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마 25:23). 그렇다면 종말에 대한 관심보다 는 현세의 삶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이처럼 종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은 순전히 이기적인 발상에 기인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지금의 자신 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면 가질수록 미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다. 내일은 오늘의 연장선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은 오늘과 달리 자기 에게 새로운 기회가 올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것이 그들의 인생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입각한 성도라면 오늘 나에게 주 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내일은 내일 주어진 일이 있음을 잘 알고 있 다. 그리고 내일은 새롭게 주어진 사명을 위해(그것이 오늘과 연속선 상에 있을지라도) 최선을 다하려 할 것이다.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 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또다른 일을 맞이하는 것이 우리들의 미래관 인 것이다. 그러한 삶의 결과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담 담히 내일을 맞이하는 것이 기독인의 삶의 자세여야 한다. 그렇다고 교회가 미래에 대해서, 또는 내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미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계시로 주어진 직선적 역사관에 근거한 것으로 창 조의 완성으로서 종말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날의 영광은 오늘 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도 알고 있다. 그리고 세상 사람 그 누 구보다도 그 날이 속히 올 것을 기대하며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무엇보다도 복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유사 이래로 하나님께서 각 시대마다 그의 나라를 경영해 오신 목적을 상기하고 지금 우리 교회가 그 연장선상에 서 있음을 늘 확인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기말적인 종말 현상과 천년기를 가름하 는 지금에 서 있는 교회는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하나님 나라의 구체 적인 현현을 위해 앞장서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어느 사람은 들떠 있기도 하고 어느 사 람은 종말의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복음의 가르침에 확고 하게 서 있기 위해 노력해 온 성도라면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에 대하 여 묵묵히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이것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보여준 지혜로운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어떻게 되겠지 하는 요행심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그리고 그 날에 주님께서 기필코 우리 각 사람을 판단하실 것이라는 달란트 비유를 상고하며 우리의 삶 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은 어리석은 생 각은 우리 모두를 어려움에 빠뜨리고 말 것이다.
1 no image 총회 은급제도 점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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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9 1999-03-01
사설 총회 은급제도 점검해야 누구나 동등하게 혜택받도록 70세정년제 및 은급연구위원회가 83회 총회에서 보고한 교역자 은 급 연구에 대한 보고서의 주된 내용은 ①목회자 은급 보험료는 교회 재정에서 불입하고 ②미자립 교회는 최하 월 8만원을 불입하되 교단 차원에서 지원하기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면을 상세히 살펴본 다면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은급제도 실시 정신에 합당하지 않다는 점이다. 은급제도를 총회가 실시하고자 하는 것은 정년 목회자들의 노후 생 활 대책 및 목회자가 처할 위급한 상황을 미리 대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보고서에 따르면 교회의 재정 능력에 따라 월 보험료를 차등 불입하고 그 혜택 또한 차등 적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도이다. 능력별로 보 험료를 많이 불입한 사람이 차후 타인보다 양질의 보장을 받는 것은 형평성에 따른 당연한 논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총회가 실시하고자 하 는 은급제도의 정신은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선 안되는 것이다. 보험의 기본 정신은 내가 희생함으로 타인이 어려울 때 도움을 받 도록 하는 데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물론 유사시 본인에 게도 혜택이 돌아 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행 실시되고 있 는 자동차 보험이나 의료 보험은 그러한 정신을 잘 담고 있는 제도이 다. 비록 재정 능력에 따라 보험료을 지불하더라도 혜택은 똑같이 받도 록 해야 할 것이다. 둘째, 총회 은급제도는 단순한 저축 수단이 되어선 안된다는 점이 다. 보고서에 따르면 총회 은급제도는 보험사가 운영하고 있는 개인연 금 제도를 그 골격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현행 보험사가 운용하고 있 는 개인연금 제도는 보험의 본래 기능보다는 노후 생활을 대비하기 위 한 저축성 기능을 더 중시하고 있다. 즉 개인 능력별로 불입하는 보험 료에 따라 노후 생활을 그만큼 원활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러한 시장 경제의 원칙에 따라 개인 능력만큼 혜택을 받는 개인연금 제도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결과를 당연히 초래하게 된다. 물론 은급제도의 성격상 저축성 성격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 러나 문제는 현재 많은 액수의 보험료를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은 타인 보다 낳은 조건의 노후 대책도 마련할 수 있다. 반면에 지금 적은 액수 의 보험료를 지불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노후 대책 역시 막연할 수밖 에 없다. 그 결과는 불을 보듯 훤하다. 목회 일선에서 한 평생을 헌신한 은퇴 목회자들에게 평상시 남보다 적은 금액을 지불했으므로 은퇴 후에도 남보다 적은 혜택을 누리라고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대우가 아니겠는가? 은급제도의 초점은 바로 일선에서 생활이 어려웠던 목회자들에게 두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목회자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는 점이다. 목회자는 평생을 거쳐 가족을 희생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교회를 위 해 헌신한 분들이다. 어떤 목회자는 명성과 부를 얻기도 하지만 그 수 는 소수를 헤아린다. 대부분 목회자들은 생존의 위협을 무릅쓰고라도 복음 전파와 교회 설립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다. 그것이 전부이 다. 그들을 위해 은급제도를 도입하자고 한 것은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 자는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소위 상급을 주자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의 도였다면 처음부터 그들은 은급제도를 환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단 지 만약에 있을 불의의 사고나 혹시 발생할 유가족 문제, 나아가 그들 이 은퇴한 후의 생활 대책을 총회 차원에서 대비해 두기 위해 은급제 도를 시행하도록 한 것이다. 더욱이 은급제도의 재원은 주로 교회와 총회가 불입하는 것으로 되 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원이 넉넉한 교회 목회자보다 재원이 적 은 목회자가 상대적으로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면 결코 정당한 은급제 도라고 할 수 없다. 보험 정신에 따라 큰 교회는 많이 부담하고 적은 교회는 적게 부담할지라도 그 혜택을 받을 대상은 누구나 동등한 혜택 을 누리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차원에서 총회 은급부는 은급제도 시행에 앞서 좀더 면밀한 관찰과 연구를 통하여 모든 교회가 흔쾌하게 동참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 줄 것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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