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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651 no image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는가?
편집부
1537 2016-02-29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는가? 역사 이래로 낙원을 잃어버린 인생,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은 늘 불안과 공포 가운데서 살아왔다. 죄로 말미암은 인생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 (롬 1:18-3:20). 그래서 인생들은 가시와 엉겅퀴로 상징되는 온갖 부조리와 결핍으로 가득한 세상 가운데서 신음하며 살고 있다. 개인도 문제고 사회 구조도 그렇다. 이렇듯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불안한 인생을 달래기 위해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다. 과거에는 5대 스펙(학벌, 학점, 토익, 어학연수, 자격증)으로도 충분했지만 지금은 8대 스펙(봉사활동, 인턴, 수상경력)으로도 충분치 않다는 이야기가 씁쓸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도달할 스펙 쌓기, 행복 추구의 무한 경쟁의 끝은 무엇일까? 결국에 인생들이 경험하는 마지막 종착역은 허무함, 즉 인생무상(人生無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기독인들이다. 우리는 종종 고상하게도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란 것은 불신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고작해야 청부론(淸富論, 돈을 많이 벌어 부자로 살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이고 고지론(高地論, 성공하여 높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정도를 자랑으로 삼는다는 것은 결코 신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라.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일까? 오히려 나의 영광, 나의 행복을 위한 삶을 그렇게 치부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을 빙자하여 교묘하게 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쉽게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쟁취하고자 하는 무한행복(無限幸福)을 위한 도우미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참으로 우리가 기독신자라면 지금 내가 처한 위치에서부터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명심하자.
650 no image 개혁주의 국가관과 저항 정신
편집부
1603 2016-02-29
개혁주의 국가관과 저항 정신 17세기 개혁주의의 국가관에 대한 이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3장 ‘정부에 관하여’라는 항목에 잘 나타나 있다. 제1항에서는 하나님께서 정부라는 제도를 두셨다고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최고주가 되시고 전 세계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과 공동의 선을 위하여 정부라는 제도를 두셔서 자기의 관할 하에 두셨다. 이것은 대중을 다스린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칼의 힘을 주어 선한 무리를 보호하고 격려하는 반면, 악을 행하는 자를 처벌하게 하셨다.” 신앙고백서가 말하는 것처럼 정부는 ‘하나님의 영광과 공동의 선’을 위하여 자신의 권세를 행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부가 존립하는 목적이다. 이와 관련해 칼빈은 정부의 통치권자의 권위에 복종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단서 조항을 피력한다. 그것은 “통치자의 행위가 하나님에 대한 복종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지 않도록 한다”는 원칙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통치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이 통치자의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는 단서 조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통치자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부응할 때다. 이 말은 통치자의 권세란 자율적인 절대적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세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통치자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다면 그러한 불의한 통치에 대해서 우리는 복종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더 위에 계시는 권세'인 하나님의 권세에 반(反)하는 행위가 된다. 곧 통치자에게 다스리는 권세를 맡겨주신 가장 높은 권세인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양심에 따른 불복종과 저항이다. 칼뱅주의 신학자 최윤배 교수는 자신의 논문 ‘개혁파 전통에서 본 국가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개혁파 전통에서 국가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시고 통치하시는 기관으로 이해된다. 이를 위해 교회는 국가가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지도록 국가와 통치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알려주어야 하고 선한 모든 일에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하나님의 말씀에 이탈할 경우, 성경적인 모든 방법을 통해서 비판하고 저항해야 한다.” 로마서 13장 1-4절에서 말하는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은 한국교회를 정치적 중립이 아니라 기득권과 결탁하는 기독교로 몰아갈 수밖에 없음을 주의해야 한다.
649 no image ‘현대신학’ 앞에 서있는 우리의 자세
편집부
1475 2016-02-16
‘현대신학’ 앞에 서있는 우리의 자세 현대신학의 양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느 때 부턴가 ‘객관적 검증’이라는 절차는 사라져버리고 주관적인 사고과정에서 무언가 ‘독창적인 이론’으로서의 신학이 주를 이루는 시대가 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신학은 제기되는 이론으로서의 신학 혹은 당면한 현안으로서의 신학에 대한 비판도 철저히 주관적이며, 따라서 그런 주관성을 바탕으로 하는 상대성 가운데서 적당히 타협하는 선으로 결론이 주어지는 것을 흔히 목격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양상은 현대신학의 방법들 가운데서는 매우 일반적이지만, 과거 조직신학의 우세 가운데서 그러한 양상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곧 조직신학적 이론 수립과 검증은 현대의 신학 양상들과는 달리 매우 보수적이며, 그 검증에 있어서도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검증이 아닌 과학적 객관성 가운데서의 검증 체계르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조직신학은 단순히 역사성(historicity)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정통(orthodoxy)으로서의 교리적 표준에 의존하는데 그 특징이 있었다. 즉 조직신학의 방법에서는 항상 대조할만한 표준적 신학체계 혹은 교리가 확보된 가운데서 그에 대한 명확도에 따르는 독창성만이 어느 정도까지 인정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직신학의 방법 혹은 특징에서는 항상 비판에 앞서 ‘정확한 신학체계’ 혹은 ‘교리’에 대한 이해와 증명이 기본이었다. 한마디로 정확한 답을 분명하게 규정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잘못된 신학이론에 대한 비판과 검증의 절차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주관주의적인 신학체계에서는 그것이 전도되어 비판과 검증이 앞서 중심을 이루기 쉬우며, 심지어는 비판 자체로만 이론체계가 수립하는 선에서도 충분히 그 가치가 인정되곤 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그 결과 현대적인 분위기 가운데서는 항상 다양한 비판들이 있을 뿐, 명확한 이해와 결말은 잠정적이거나 불분명하게 되는 것을 흔히 목격하곤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현대신학의 분위기 가운데서는 어떤 명확한 결론도 없이 수많은 비판과 반론으로만 점철된 매우 혼란스런 분위기가 되기 쉬운 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것이 이론신학에서건 실천신학에서건 기본적인 분위기는 동일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도 이미 포스트 모던(post-modern) 시대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할 것이다. 이런 시대에 우리들의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남들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 나보다 못한 듯이 보이는 남들의 신앙이나 신학에 관하함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신앙과 신학이 어떠한가에 늘 착념하여야 마땅하다. 곧 남들의 신학과 신앙이 어떠한가? 나의 것과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다른가가 아니라 나의 신학과 신앙이 얼마만큼이나 정통에 부합하는가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비판과 판단은 부정할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비판과 판단은 항상 자기가 지닌 신학의 정당성 혹은 정통성 여부에 따른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비판과 판단이 부정할 수 없이 정당한 것이라도 비판하고 판단하는 자기 자신이 정당하지 못하다면 비판은 정작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와 같은 비판과 판단만으로는 다른 오해와 왜곡만 야기할 뿐이다. 그런즉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 행실에 믿음이 보이지 않는 자들이 도처에 있는 것이 이 시대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관심을 둘 것은 그런 자들의 행실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이미 있는 믿음의 내용이 정당한가에 있어야 마땅하다. 신학함에 있어서 우리가 늘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 것은 우리 신학의 정통의 여부가 늘 먼저이며 우선이지 우리와 다른 신학에 대한 비판과 판단은 나중이며 부수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분명한 정통의 표준이 확신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많은 현대의 신학들은 이미 그 확신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며, 그런 오류가운데서도 각자의 윤리와 도덕으로 선악을 분별할 뿐이다. 그 결과 수많은 윤리적 오해와 도덕적 왜곡 가운데서 헤매고 있는 것이 바로 현대신학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현대신학의 모습 가운데 있는 사역자들이 착념할 것은 현대 신학의 오류에 대한 비판이나 판단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런 현대 신학이 잃어버린 순수한 복음(Full gospel), 즉 ‘정통의 교리의 회복’에 있어야 한다. 그처럼 정통의 교리를 회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현대신학의 오류와 왜곡들에 대해 비판하고 판단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된 때에라도 항상 먼저 착념할 것은 우리 자신의 순수한 정통의 교리이며, 현대신학의 오류와 왜곡들에 대한 비판과 판단은 여전히 부수적인 것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특히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사역자들은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모범을 따라 순수한 복음의 교리에 착념해야 마땅할 것이다.
648 no image 또 ‘유신 진화론’인가?
편집부
1826 2016-01-26
또 ‘유신 진화론’인가? 작금 유신 진화론을 긍정적으로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들 유신 진화론자들 역시 진리인 성경을 가지고 자신들의 이론을 주장하고 있어 이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잘 알다시피 신학의 특성 중 하나인 유기적 성격은 그 상호 긴밀한 성격으로 인해 유별나게 돌출적인 소결론이 성립할 수 없는 동시에 어떠한 오류들도 그 안에서 다소간 설명이 가능하다는 양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진리는 대부분 고립되어 있지 않고 방대한 조직을 이루며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유기적 특성에 따른 진리로서의 성경은 ‘창조’ 뿐만 아니라 소위 ‘진화론’에서부터 ‘창조적 진화론’(creative evolutionism) 혹은 ‘유신 진화론’(theistic evolution)까지도 얼마든지 일부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낼 수 있다. 즉 성경의 전체적 조망 가운데서는 ‘창조’만이 올바른 설명의 경로이지만 소위 ‘창조적 진화론’이나 ‘유신 진화론’이라는 오류로 이탈하는 경로의 근거도 역시 진리인 성경 안에서 얼마든지 엮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에 대비되는 모든 진화 이론, 그것이 철저한 진화론이든지 유신론적 진화론이든지 간에 창조 외에 부가되는 모든 진화 개념의 수식적 단어들에는 한 가지 공통분모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피조세계(the world) 혹은 물질세계(the material world)의 자율(自律)이라 할 것이다. 곧 유신론적 진화론이라 할지라도 진화론과 근본적으로 같은 바탕을 이루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보존과 통치 그리고 섭리 없이도 그 스스로를 유지시키거나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점에서 동일한 배양기(medium)에 놓인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진화론에 있어서 보편산(Universal Acid)은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에 있으며, 이에 따라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 안에 있는 자연계에서 완벽하게 제거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유신론적 진화론 역시 인간 이성이 생각하는 자연계인 피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물러나게 하는 이론인데, 진화론처럼 철저히 내몰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이신론(deism)이라는 뒷방으로 하나님을 물러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신 진화론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원창조 이후의 보존과 통치를 전부 피조세계에 부여한 능력에 맡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 이후의 모든 세상은 진화론으로도 얼마든지 설명이 될 수 있을 만큼 자체적으로 발전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론이 됐든지 유신 진화론이 됐든 간에 세상이 자체적인 능력에 의해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는 생각(idea)은 무엇이 문제인가? 그러한 생각은 하나의 강산(强酸)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생각에 의하면 세상 안에는 애초부터 진리인 것은 없으며, 인간 스스로의 합리성과 지혜 가운데서 얼마든지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고 만들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생각 가운데서는 과거의 것은 이미 무용한 것들이며, 당장에 그리고 앞으로 필요한 것들이 항상 유용한 것이다. 과거에는 과거에 맡는 생각들이 필요했고, 지금은 지금에 맡는 생각이, 그리고 미래에는 또 다른 유용한 생각들이 필요할 뿐 영원한 진리와 같은 것은 결코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모든 논의들은 당장에 살아가는데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 보일 수 있다. 세상이 진화했거나 유신 진화한 것이건 간에 당장에 살아가고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데에는 아무 의미도 문제도 없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진화론이라는 것은 명백히 보편산(Universal Acid)이다. 물질이건 생각이건 간에 모든 것들을 다 무위(無位)로 녹여버리는 사고들이 바로 진화론이다. 당장에는 인류가 진보해 나가는 것처럼 설명이 되지만 언젠가는 모든 인류가 멸망한다고 해도 전혀 정상적인 자연의 진화과정일 뿐이며, 더구나 그런 인간 사회에 진리니 도덕이니 하는 것은 얼마든지 용도를 다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작금 한국의 신앙인들은 생각하고 사고하기보다 느끼기에 익숙하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저 막연하고 피상적인 이데아(idea)로서의 천국을 추구할 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특별히 창조와 다른 모든 진화의 패턴과 맥락을 분별하는 일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에 우리는 창조 외에 그 어떤 형태의 진화론적 가설에 근거한 창조적 진화론 또는 유신론적 진화론을 거부하며,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을 강단에서 퇴출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바이다.
647 no image 부패한 사회 속에서 신자로 사는 길
편집부
1478 2016-01-12
부패한 사회 속에서 신자로 사는 길 신자들이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신자가 그처럼 빛으로 또는 소금으로 구별되는 삶을 사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작금의 우리 현실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정치의 부패지수는 거의 밑바닥에까지 추락한 지 오래며, 한동안 개혁의 기치아래 숨죽이던 온갖 부정부패가 그야말로 만연해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임을 부인하는 양심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그런 사회 가운데에 있는 교회들의 실상이 현실의 세속 사회와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 가히 교회들이 부패하는 만큼 이 사회가 부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울 만큼 이 사회는 총체적으로 타락과 부패가 창궐해 있다. 그렇다면 신자들이라면 누구에게나 거의 상식적인 내용인 빛과 소금의 사명이 왜 이 사회의 현실 가운데서는 바르게 실현되지 않을까? 이 문제에 대해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의식과 대답을 되뇌고 있을 뿐인데, 그것이 얼마나 신빙성이 없는 대답들인지는 그렇게 되뇌어 대답하는 신자들 자신의 무미건조하고 확신 없는 외침들이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사실 부패한 사회 속에서 신자들이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청결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로 모인 신자들 대부분은 정결함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그 부패와 무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놓은 채로 모인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회개는 신자들의 가장 단적인 구별됨이요, 희생을 당하는 짐승들의 울부짖는 소리들만큼 속죄하는 백성들의 낙망과 회개가 드러나는 것이 구약 제사의 외형적인 특징이었다. 따라서 이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개혁하는 빛과 소금의 사역을 신자들이 감당하고자 한다면, 그 주된 관심을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로 향할 것이 아니라 ‘교회로 모이는 본질’과 자신들에게 두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와 함께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만큼 갈수록 사회 구성원인 국민들의 양분(兩分)을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급격히 타락해 가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자본가가 노동자들의 시간과 생산성을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방안을 추구하는 것을 우리 사회는 급격히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갈수록 이 사회의 노동구조는 산업혁명시기의 영국과 미국에서 있었던 노동력 착취, 즉 미취학 아동들까지 최대한의 시간을 짜내 공장의 노동력으로 삼던 시대의 경험을 되살리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회 가운데서 신자들만이라도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을 잘 추구하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함으로서 예배자의 삶을 구현해 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폐단 가운데 하나인 지나치게 노동집약적인 생산성 고취, 즉 일하는 시간에 쫓겨 저녁조차 없는 ‘회색도시의 삶’으로 내몰리는 현대 자본주의사회에 적절한 대안과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신자들이 자신의 사업체 혹은 업소에서 경건한 가정예배를 실천하여서, 직원들이 아침저녁에 경건한 가정예배를 보장하고 그러한 것이 비록 불신자일지라도 모든 직원들에게 보장된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빛과 소금으로서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사회 가운데 있는 장로회 교회들 가운데 장로정치의 모범을 구현하는 교회조차 찾아보기 쉽지 않으며, 더 나아가 노동생산성을 기반으로 하는 기업경쟁력강화라는 경영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신앙의 실천으로써 이 사회에 빛과 소금으로 드러나는 신자들을 찾아보기가 너무나 어렵게 되어버린 것이 현실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사회 가운데 있는 수많은 교회들과 신자들이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빛과 소금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현실은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예일 것이다. 신자들이 추구하는 방향은 ‘교회다움’이요 ‘신자다움’에 있는 것으로, 이 사회 가운데서 어떻게 빛과 소금이 될 것인가의 문제는 그 다음의 문제일 뿐 아니라 교회다움과 신자다움을 실천하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수반(隨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요지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바 마땅히 행할 바에 대한 신앙을 우리의 삶에 온전히 적용하고 실천하는 신앙이야말로 이 사회에서 신자들이 얼마나 빛처럼 밝게, 그리고 얼마나 소금처럼 짜게 그 맛을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가장 확실한 목표요 방향이라는 사실을 깊이 상고하고 착념함이 마땅할 것이다.
646 no image 소위 ‘평신도신학’을 우려한다
편집부
2217 2015-12-29
소위 ‘평신도신학’을 우려한다 최근까지 소위 ‘평신도신학’을 강조하는 일부 교파들과 이를 무분별하게 혼용하는 일부 장로교인들에 의해 ‘만인제사장’(Universal priesthood)론을 근거로 개신교 현실의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주장들에서는 거의 대부분 ‘평신도’라는 용어를 전혀 문제의식 없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평신도’(the laity)라는 용어는 로마가톨릭이나 루터교 혹은 성공회와 같은 수직적인 직제론을 따르는 교파들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며, 그 근거로 만인제사장론을 언급하는 것은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용어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만인제사장론을 근거로 개신교 직제(職制)를 부정하면서 그 대안으로 평신도신학을 주장한다는 것은 이미 그 용어의 사용에서부터 만인제사장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와 인식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로마가톨릭의 수직적 직제에 대한 거부 가운데서 시작한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직제는 수평적이며 기능적, 혹은 수종적이다. 영국에서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근대 민주주의 정치원리 역시 종교개혁의 직분론을 정립한 장로교의 교회정치원리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바탕으로 갱신된 개신교의 직제론에 있어서 만인제사장론은 ‘제사’(祭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이는 개념을 정립할 수 없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과 십자가에 달리신 구속(救贖)의 성취 이후로 유대교의 제사와 제사장 제도가 모두 폐기되었다는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만 만인제사장론의 정확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가장 적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성경은 히브리서인데, 히브리서는 기본적으로 유대교로 돌아오라는 회유에 직면하여 흔들리는 히브리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교의 제사장과 제사제도가 모두 폐지되었음을 확신하도록 하는 사도의 권면으로 되어 있다. 만일 그들이 유대교의 회유에 흔들리고 만다면, 그들이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패역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과거 성전에서 제사장과 같이 ‘중보’(中保)의 사역을 하는 직분은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해서만 신앙과 믿음이 가능한 것을 굳게 붙들도록 히브리서에서 사도는 강력히 권면한 것이다. 이러한 성경적 이해는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가 왜 ‘미사’(missa)가 아닌 ‘예배’를 드리는 지에 대한 근거가 되며, 이에 따라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 신앙에 있어서 예배는 제물과 제사장을 통해 이뤄지는 제사가 아니라 말씀(성경)과 설교자(성경의 교사)가 중심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종교개혁의 신앙유산은 ‘성찬’에 있어서도 로마가톨릭과 독특한 구별을 보이는데, 로마가톨릭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과 달리 우리들은 영적임재(spiritual presence)를 바탕으로 한다. 이 영적임재에 있어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영적’(spiritual)이라는 말로써 성령께서는 말씀의 영이시기 때문에 항상 성찬예식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그 성찬에 관련한 성경말씀과 강설을 통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성찬은 제사장으로서의 사제가 아니라 말씀의 교사이자 목자인 목사에 의해 집례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직분으로서의 차이는 곧 제사장적이며 수직적인 직제인 로마가톨릭의 사제와, 말씀교사 혹은 목회자로서 직능(職能)적이며 수종(隨從)적 직제인 개신교의 목사로 극명하게 구별된다. 소위 ‘평신도신학’을 강조하는 이들의 주장에서 오해하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직제에 대한 오해로써, 개신교에서는 ‘평신도’라는 용어는 사용할 수 없음과 더불어 직분자로서 목사와 성도인 신자들이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고전 12:28)라는 말씀을 바탕으로 목사와 직분자(장로, 집사)들이 수종(隨從)적으로 그 직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동일할(수평적일) 뿐이다. 아울러 ‘수종’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직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자신이 시중들고 있는 직능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성경을 통해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현대 개신교의 문제점들이 바로 이러한 직분(職分)과 직능(職能)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만인제사장을 주장하며 평신도신학을 강조하는 이들의 문제의식은 거의가 다 이러한 직분과 직능에 대한 오해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직분과 직능에 관한 정확한 이해와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주장하는 교회에 대한 문제의식이란 당장에는 통쾌하고 명쾌한 대안인 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하며 사안을 복잡하게 만드는 혼란만 초래하고 만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645 no image 통전적 신앙으로 참된 믿음을 회복하자
편집부
1620 2015-12-15
 통전적 신앙으로 참된 믿음을 회복하자 주일학교가 사라지고 있다. 교회 내 청년들의 숫자도 급감하고 있다. 주일학교가 사라지는 현상이 출생률 감소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그런데 이것만이 아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교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른바 ‘가나안 교인’ 현상이다. ‘가나안 교인’이라는 말은 최근에 와서 등장한 신조어다. 한국교회의 씁쓸한 현실을 풍자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가나안 교인’이란 매 주일 교회로 함께 모여 예배하며 교제하는 교인들과는 달리 교회를 떠나 스스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제도권 교회 밖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일컫는다. 한마디로 교회에 ‘안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사실 그들은 늘 있어왔던 뜨내기 교인이거나 믿음이 연약한 교인들이 아니다. 신앙이 깊지 못해 이리저리 방황하는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아예 신앙을 포기한 채 형식적인 ‘종교’로서 ‘기독교’를 추구하는 ‘무늬만 그리스도인’도 아니다. 이들은 결코 낮은 수준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아니다. 신앙에 대해 누구보다 더 많이 고민하며, 지금 교회의 모습에 누구보다 아파하는 자들이다. 오히려 기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여타의 부정적인 요소들로 말미암아 교회로부터 ‘밀려난’ 자들이다. 그들은 신앙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를 떠난 것이다. 왜 이들은 교회를 떠나야 했는가? 날로 쇠퇴해가는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이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다. 일부 목회자들의 전횡, 교권주의와 도덕성의 상실, 기복신앙과 극단적인 신비주의 신앙, 대형교회 현상과 공동체성의 상실, 현대판 맘몬인 자본 숭배, 신앙의 프로그램화와 보험회사와 같은 교회의 모습 등은 수많은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사실 강단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사라진 지 오래고 세속화된 복음, 번영과 성공을 강조하는 기형적 복음이 난무한다. 세례는 참된 신앙고백의 여부와 상관없이 소정의 절차만을 거치면 마치 회원 자격증을 부여하는 것처럼 남발된다. 그러다보니 교회 내에 존재하는 사실상의 ‘위선자’들이 교회의 주류가 되면서 한국교회에서는 ‘가나안 교인’ 현상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일견 믿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이 있다고 지적한다. 구원받지 못한 형식적인 종교적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적으로 동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다고는 하나, 사실 그리스도께서 구주시라는 사실을 많이 들어서 그렇게 여길 뿐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고백해본 적은 없다. 그래서 그런 그들의 신앙은 미지근하기 그지없다. 덥지도 차지도 않다. 거의 습관적이다. 구원의 능력이 없으며, 구원의 감격과 기쁨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자신들을 죄에 대해서 죽었고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기지 않는다. 자신들이 져야 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애초에 모른다.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거짓된 믿음을 가리켜 다른 말로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다.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삶의 모습에서는 그리스도인다운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다. 기도도 잘하고, 성경도 많이 알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나 그것은 그저 자신의 죄악으로 물든 삶을 보상하는 차원이다. 또는 심지어 교회에서마저 세상의 영광을 탐닉하는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것일 뿐 진정한 신앙의 모습은 결코 아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삶의 모습은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마치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다. 그들은 입술로만 ‘주’라 부르고 실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실천적 무신론’이요 ‘사실상의 불신자’들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참된 믿음을 가르쳐야 한다. 참된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주인’이요, ‘왕’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바로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것이다. 존귀한 신앙을 주일만의 신앙으로 제한하지 않아야 한다. 주일을 넘어 엿새 모두가 거룩한 예배의 자리가 되게 해야 한다.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부가 예배여야 한다. 예배드릴 때만, 성경 보고 기도할 때만이 아니라 매일 매일 평범한 일상에서 삶을 통해 거룩한 찬송이 흘러나오게 해야 한다. 참된 믿음은 우리 자신의 모든 삶을 통해 고백되는 통전적인 신앙이다. 일상 속의 제자도, 바로 그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참된 믿음의 길임을 명심하자.
644 no image ‘독재’(獨裁)에 익숙한 것이 우리의 신앙인가?
편집부
1559 2015-12-02
‘독재’(獨裁)에 익숙한 것이 우리의 신앙인가? 작금 한국교회에서 일어난 현상들을 보고 있자면 많지는 않지만 소위 규모가 큰 교회일수록 교회가 본질적으로 추구하고 나아갈 길에 있어서 목사에 의해 혹은 일부 당회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편협한 길로 나가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이들 몇몇 목사의 부정이나 비리 사건들로 인하여 마치 한국교회 전체가 공의와 공평을 무시하거나, 혹은 목사나 장로들이 안하무인격으로 교인들의 의견을 묵살하는 독재에 익숙해 있는 것처럼 메스컴에 노출된다는 것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더욱이 교주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일탈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는 기독교 이단들조차도 교회의 한 부류인 것처럼 메스컴에 노출됨으로써 이제 한국교회는 안팎으로 지탄의 대상처럼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그냥 간과할 일이 아님이 분명하다. 차제에 우리는 교회의 정치 원리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확인함으로써 이러한 작태들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처해 나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잘 아는 것처럼 장로교회의 정치 원리는 기본적으로 ‘장로회’라는 것을 통해 이뤄지는 점에서 세속정치로서는 일종의 ‘공화정’(Republic)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말은 좀 더 세부적으로는 ‘귀족적 공화제’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귀족적’이라는 말은 세속적인 의미의 귀족의 개념이 아니다. 곧 성경에 얼마나 충실한지를 바탕으로 하는 귀족 개념이다. 한마디로 귀족적 공화제에서 귀족에 속하는 장로(a presbyter)란 얼마만큼 성경에 충실하는가를 절대적으로 중요시 여기는 직분이다. 이러한 원리에서 장로교회에서의 교회정치는 세속사회의 민주주의 정체와는 완전히 구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사실상 민주주의에 있어서도 서툴 뿐만 아니라 그 사회에 속한 교회들, 특별히 장로교회들조차도 귀족적 공화제로서의 장로회 정치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서툴다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장로회 정치에 서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의사결정이나 행정권이 특정인, 이를테면 담임목사나 특정 집단 곧 당회 혹은 제직회에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리를 거의 모르거나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툴다는 의미이다. 알다시피 장로교회에서 중요한 의사결정, 예를 들면 목사의 청빙이나 교회 예산안 등을 논의할 때에는 항상 ‘공동의회’를 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교회회원 모두가 참여하여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바로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에게 의사결정이나 행정권이 집중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공동의회를 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의사결정이나 행정에 있어서 자발성이 결여된다는 것은 전혀 장로교회의 합당한 의사결정방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때의 자발성이란 회중(會衆) 자체의 의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성경에 충실하느냐에 따른 의사결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의 모든 의사결정이나 행정은 말씀(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에 따라 정립된 교리와 교회법에 근거해 있다. 곧 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교회법, 즉 헌법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자발적인 의사 표현이 불가능하다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장로교회의 신앙원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0장과 제22장에서 직접적인 표현들에서 볼 수 있다. 제22장 ‘합당한 맹세와 서약’에 관한 신앙고백 3항에서는 “누구든지 선하고 정당한 것, 그리고 스스로도 그렇다고 믿는 것, 그리고 자기가 행할 수 있고 하기로 결심한 것 이외의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맹세를 통해 예속하지 말아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집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 바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맹세를 통해 예속하지 말아야 한다”는 고백이다. 즉 억지로 맹세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합당한 맹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로교회의 모든 신앙행실들은 억지로 스스로를 묶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정당한 것, 그리고 스스로도 그렇다고 믿는 것, 그리고 자기가 행할 수 있고 하기로 결심한 것”을 따라 행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상당수 한국의 개신교는 여전히 교황과 사제단의 독재를 추종하는 형태로 존립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신앙은 ‘독재자가 있어야 일이 잘 된다’고 말하는 무지몽매(無知蒙昧)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장로교회 정치의 본질인 귀족적 공화제다운 면모를 다시 각인하고 교회의 의사 결정에 있어서 소위 ‘독재’라는 말이 어떤 형태로든 결코 회자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교회원들은 교단의 헌법을 숙지하고 그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자율적 의사 결정에 하자가 없도록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643 no image 자칭해서 ‘재림 예수’라 할 수 있는가?
편집부
1649 2015-11-17
 자칭해서 ‘재림 예수’라 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잘 아는 바와 같이 그의 삼중직인 선지자, 왕, 제사장의 이미지를 통해 구약에서부터 예표된 바 있다. 특히 멜기세덱은 ‘왕’이자 ‘제사장’이되 족보가 없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탁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되심으로 인하여 율법 또한 변혁되었다고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변혁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모든 유대교의 종교·문화·사회적 체계까지도 송두리째 변혁되어 무위(無位)로 돌려지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은 가장 급진적인 종교개혁의 한 양상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대교는 히브리 사회에서 여전히 중심적이고도 유력한 종교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부터 모든 유대교의 기반들은 근본적으로 폐지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외에 참된 제사장이 없기 때문이다. 유대 사회에서 제사장이란 중보(仲保)적인 존재로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보적 기능을 수행하는 제사장을 통해야만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만 유일한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뿐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조차도 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내용은 사제들이 중보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처럼 변질되어서 중세 암흑시대에 퇴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종교개혁시기를 통해 ‘만인제사장설’로 다시 회복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종교개혁 시기를 거치면서 로마 천주교에 속한 사제의 중보적 직분론과 기능이 폐지되었고, 이제 모든 신자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중보 곧 제사장으로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화목할 수 있다는 믿음이 비로소 온전하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 내의 모든 직분자들은 그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중보적인 역할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중보 기도’라는 말도 합당한 용어가 될 수 없다. 하물며 어느 누구든 ‘교주’나 ‘재림 예수’로 주장하는 일은 결단코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게 될 날은 마지막 심판의 날이며, 그런 심판은 완만하게 오랜 시간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도적과 같이 또는 홍수 때와 같이 돌연히 온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642 no image 성경으로 성경이 되게 하라
편집부
1458 2015-11-17
성경으로 성경이 되게 하라 잘 아는 바와 같이 종교개혁은 성경을 사제들과 로마 가톨릭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것으로 회복시켰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변혁을 이루었다. 그러나 성경이 신자들의 손에 들려지게 되었을 때에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성경 본문을 주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모든 ‘교리’를 배제하고 한 본문 안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는 의미로서 ‘성경(a text)으로 돌아가자’는 양상이 그것이다. 이것을 지지하던 자들은 주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향하던 재세례주의자(Anabaptist)들이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교리를 반대하고 대신에 성경만을 강조하는 입장을 지금까지도 표명하고 있다. 그와 같은 재세례주의자들의 성경해석 입장은 주로 ‘문자주의’ 입장에서 성경 본문을 자구(字句)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은 현대의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주로 종말론에 치중하는 문자적 해석의 폐단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한 본문 안에서 여러 다양한 의미와 해석을 가능케 한 것이 아니라 한 본문 안에 한 가지의 의미와 해석만이 존재하도록 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 바로 ‘교리’와 ‘신조’들이다. 반면에 한 본문 안에 담긴 의미가 한 가지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교리와 신조의 맥락에서 유념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 본문을 문자주의의 입장에서 자구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방식으로는 표준이 될 만한 진리로서의 정당한 교리와 신조가 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이 모든 신자들의 몫이 되는 것은 성경 본문을 주관적이고 다의적(多義的)으로 이해하는 문자주의적인 방식이 아니라, 유일하며 불변하는 것으로 규명하여 공적으로 표명하는 방식인 교리와 신조의 채택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표명하며 교리와 신조를 배척하는 가운데서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재세례주의와 이를 답습하는 현대신학의 방식은 성경본문을 신자들의 몫으로 돌려준다 할지라도 그 안에 담긴 진리(Meaning)는 철저히 미궁에 빠뜨리고 마는 것으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어도 불변하는 진리의 표준으로서 ‘교리’와 ‘신조’가 표명되지 않고서는 결코 성경을 모든 신자들의 몫으로 되돌려 줄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641 no image 교회 성장 명분 앞세운 ‘민간자격증’ 유감
편집부
1510 2015-11-03
교회 성장 명분 앞세운 ‘민간자격증’ 유감 최근 다문화가정상담사나 가정폭력관련상담원 등 각종 민간자격증들을 취득하려는 목회자들이 급속히 늘고 있다. 특히 미자립 교회 목회자들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어 이에 대한 주의가 요청되고 있다. 관련 자격증 발급 민간단체들은 마치 자격증만 따면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것처럼 현혹하고 있다. 이에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이 수십만 원의 수강료를 지불하고서라도 너도 나도 자격증을 취득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정작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도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양상은 지난 2008년부터 정부가 민간자격등록제를 도입하고 특별한 심사과정 없이 민간자격증 등록을 허용하면서 확산되고 있으며 그에 따른 경제적 피해 사례 역시 급증하고 있다. 심지어 ‘원 플러스 원’ 자격증 시대를 부추기거나, 수강료만 납부하면 민간자격증을 남발하는 단체까지 있어서 각종 부작용까지 나타나고 있다. 사실 자격증이라면 각자 개인의 특성과 능력을 검증하고 그에 따른 자기개발 혹은 능력 향상에 그 목적이 있어야 한다. 아울러 자격증을 취득한 이들 역시 그에 따른 자존감도 높아져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자격증 취득이 향후 목회 현장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필요성을 충족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경제적 자립을 목적으로 자격증을 취득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적지 않은 수강료를 지불하고서도 아무런 사후 대책도 없는 이중고를 겪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는 민간단체뿐 아니라 지방 단체에서도 무료평생교육과정이 마련되어 있어서 누구든 성실하게 학습에 임하면 독서지도사, 아동심리상담사, 방과후지도사 등을 취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값비싼 수강료를 지불하면서라도 강습자들이 줄지 않고 있는 그 이면에는 출석하지 않고서도 자격증을 발급하는 단체들의 이권과 서로 맞물려 있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곧 부당한 방법으로 자격증을 취득하고자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고스란히 성실하게 자격을 취득한 자들에게 또 다른 폐해로 작용하고 있다. 차제에 각 노회에서는 이러한 목회자들의 현실을 감안하여 다양한 필요를 요구하는 현장 목회자들을 위한 지원 방안 등을 연구하여 교단 차원의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640 no image 배격해야 할 주관적 성령 운동들
편집부
1662 2015-11-03
배격해야 할 주관적 성령 운동들 현대 개신교 신자들에게 있어 신앙의 뿌리는 공통적으로 일반종교적인 주관주의(Subjectivism)가 자리하고 있다. 즉 장로교든지 침례교, 루터교,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교단 등등에 상관없이 기독교 신앙을 스스로의 주관적 경험에 근거해서 정립하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개신교의 가장 심각하고 근본적인 숙주(宿主)라고 할 수 있는 이 주관주의는 슐라이에르 마허(1768-1834년)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곧 17세기 이후 근현대의 신학론의 중심이 급격하게 ‘성령론’의 강조로 치우치게 되는데, 이때의 성령론이란 기존의 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오해와 지나친 비판에 따른 반동적인 신학의 오류이자 세계관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성령 운동가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는 입장을 표방하면서 중교개혁자들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고착시켰다”고 비판하면서 주관주의적 경험에 더욱 강조점을 두었다. 그 결과 주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성령께서는 항상 성경과 함께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함께 하시거나 성경을 벗어나서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것으로 오해되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세속과 맞닥뜨려서 합리주의를 태동시켰고, 급기야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인간 이성의 강조와 역사주의에 대한 강조를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종교적 대안을 주장하며 주관주의적 기독교 종교관을 근본적으로 확장한 이가 바로 슐라이에르 마허다. 이후 대부분 개신교의 흐름은 슐라이에르 마허의 ‘종교론’(1799년)의 범주 안에서 주관주의로 포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신자로서 개혁해야 하는 것은, 각자 성령의 내재 가운데서 어떤 새롭고 비상한 경험을 통해 성령의 뜻을 확신하며 나아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 ■ 가장 확실하고도 견고하게 성경 가운데서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 ■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 가운데서 그리고 성례(세례와 성찬) 가운데 영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시는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진리’(요 4:24)에로의 개혁이어야 한다. 그런 개혁이란 실천이나 방법들의 강조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이해를 지향하는 “신령과 진리”의 개혁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정통적 교리(신조)를 배우고 익히는데 중점을 두지 않을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639 no image 신옥주(은혜로교회) 측의 무례
편집부
1836 2015-10-20
신옥주(은혜로교회) 측의 무례 우리 교단이 이단으로 규정한 신옥주(은혜로교회) 측이 최근 잇단 무례를 저지르고 있다. 연초에는 교단 신년하례회에 무단 난입하여 밀가루를 뿌리며 계란을 던지고 폭력적인 욕설을 퍼붓는 난동을 부렸다. 지난 9월에는 경주에서 모인 총회 자리까지 내려가서 극렬하게 집단 시위를 벌이더니, 이제는 전국에 있는 우리 교단 여러 교회들을 찾아가서 시위할 뿐 아니라, 가을노회가 열린 어느 교회에도 나타나 극성스런 시위를 하였다. 심지어 그들은 교단의 건실한 목회자후보생을 양육하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앞에 모여서 특정 교수를 지명하여 교수 자격이 없는 하나님의 대적자라고 인신공격으로 비난할 뿐 아니라, 합신을 거짓 목사 찍어내는 공적이며 지옥으로 가는 관문이라고 헐뜯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교단 내에 어떤 분들은 불만을 토로한다. 왜 우리 교단이 구태여 이렇게 힘든 일을 사서 고생하느냐는 것이다. 다른 교단들이 침묵하는데 우리가 혼자서 앞장설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또한 시위 때문에 예배를 비롯하여 그 외의 모임들이 방해를 받아 집중할 수가 없고, 성도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끄러운 시위로 말미암아 지역주민들의 눈초리가 따가워져서 교회 이미지가 실추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생각이 신옥주 측이 노리는 전략임을 잊으면 안 된다. 그들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약칭: 집시법)을 최대한 이용하여 우리를 귀찮게 하고, 불편하게 하고, 정신적인 압박을 가하여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포기하거나 타협하도록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옥주 측의 이런 악랄한 시위를 보면서 약해지거나 불만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 시위로부터 도리어 몇 가지 중대한 교훈을 얻기 때문이다. 첫째로 얻는 교훈은 우리 교단에 대한 자부심이다. 우리는 다른 교단들이 침묵할 때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살아있는 교단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침묵하더라도 우리 교단은 분명하게 말한다는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귀찮고 불편한 일이라도 피하거나 숨거나 모른 채 하지 않는 강직한 교단의 위상을 만방에 보이는 것이다. 차제에 교단은 이런 일련의 사태를 통해 전국교회에 이단들의 정체와 현황과 문제점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교회와 성도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안을 알려주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교단은 산하 교회들에게 공문, 이메일, 문자를 보내는 등 다양한 통신 매체와 인터넷 매체를 총동원 사용하여 정보를 공유하게 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이단을 물리치는 교육을 시도해야 한다. 둘째 교훈은 신옥주 측의 폭언과 만행은 성도들에게 이단에 대한 실물교육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이단에 대하여 교육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성도들은 극렬한 시위 현장을 보면서 이단을 개념적으로나 피상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피부로 경험하고, 이단이란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리임을 절감한다. 이렇게 하여 성도들은 이단이 멀리 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발등에 떨어진 우리의 이야기임을 배운다. 이로써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이단의 위험성과 파괴성을 사실대로 가르치고, 이단을 식별하는 법과 이단을 대처하는 법 등을 현장감 있게 교육할 기회를 얻은 셈이다.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은 온갖 악질적인 비방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부릅뜨고 깨어서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더욱 믿음에 정진해야 할 것을 다짐하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셋째로 신옥주 측의 이런 무례한 시위야말로 지역주민들에게도 사회와 가정에 끼치는 이단의 위험과 피해를 정확하게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한편으로 이번 기회에 우리는 여러 가지 적법한 홍보를 통해서 이단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거나 가지를 뻗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저들의 시위 만행이 지역주민들에게 살아있고 건전한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런 시위들을 역으로 우리 교회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기회로 바꾸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신옥주 측의 시위를 보면서 결국 성경의 예언은 진실임을 배운다. 성경 곳곳에 말세가 되면 거짓 교사들과 선지자들이 많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다. 이단이 들끓을수록 우리는 말세를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낀다. 그리고 성경이 예언한 대로 말세가 깊어질수록 거짓 교사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더욱 득세할 터인데, 지금 우리가 어떤 이단들과 싸우는 것은 장차 더 큰 흑암의 세력과 싸울 것을 위한 연습이 되고, 지금 우리가 어떤 이단들을 이기는 것은 앞으로 더 강한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것을 위한 연습이 되는 것이다.
638 no image 우리가 교회로 부름받은 이유
편집부
1711 2015-10-06
우리가 교회로 부름받은 이유 아는 대로 살면 얼마나 좋을까 만은 사람은 아는 대로 살지 않고 익숙한 대로 사는 존재인 것 같다. 애굽의 400년은 광야 40년으로도 잘 벗겨지지 않는 법이다. 신학적 회심이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정서적 회심이다. 신학적 실천이 이뤄지는 곳이 우리 삶의 자리인 정서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회심 안에는 이 둘이 다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진정한 회심이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달라질 것이고 그렇게 달라졌다면 그것이 몸에 익을 수밖에 없다. 몸에 익지 않은 지식은 결국 그가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운동이나 운전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이론을 따라 하지만 나중에는 몸에 익은 대로 반응하게 된다. 예컨대 수영 교본을 100권을 독파해서 수영에 대해 이론적인 마스터를 하는 것과 실제 물에 들어가서 수영하는 것은 별개라는 것이다. 곧 신학적 회심이 이론적 변화라면 정서적 회심은 이 이론적 변화가 몸에 베이게 되는 변화를 일컫는다. 실존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키에르케골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자신의 신학에 거하지 않는 젊은 신학자를 논하는 장면이 어쩌면 현대인의 실존의 위기이자 기독인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수많은 책들에 갇혀 현장을 잃어버렸다. 성도, 곧 거룩한 무리라 부르는 이유, 우리가 교회로 부름받은 이유가 우리의 신학적 회심이 정서적 회심으로 전환되는 지점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의 현장은 교회이고 교회는 공동체의 산실(産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공동체 성을 상실했다. 그저 일주일에 한번 모여서 설교를 듣고 점심 먹고 성경공부 하나 정도 참석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되고 말았다. 성도의 교제라 할 수 있는 철이 철을 더욱 날카롭게 하고, 친구의 얼굴을 더욱 빛나게 하는 그런 진정한 형태의 만남이 사라진 것이다. 걸음마를 이론으로 배운다고 되지 않는다. 엄마와 가정의 품에서 무한 실패를 경험하면서 습득한다. 성도의 성화도 교회라는 어머니의 품에서 무한 실패를 용인받으면서 일곱 번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여덟 번째의 의로움인 것이다. 교회가 이것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음을 명심하자.
637 no image 총회 결의문, 명분인가 명예인가?
편집부
1457 2015-10-06
총회 결의문, 명분인가 명예인가? 지난 9월 24일, 제100회 예장합신 총회에서는 두날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총회에 소속한 모든 교회에 대해서 신앙교육의 신학적 깊이와 균형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총회가 확인하고, 더욱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고 승리할 것을 간절히 구하는 기회로 삼기로 한다." 이렇게 총회가 결의한 배경과 관련해서는 "총회의 결정은 법 이전에 모든 교회의 고백이어야 한다"는 정신에 따라 "법이 강제로 질서를 잡게 하는 것보다 총회의 결의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보이고, 선과 악의 선택 이전에 우리의 인격의 성숙을 보이는 길을 먼저 갈 필요가 있다"는 총대들의 성숙한 합의의 결과였다. 이러한 결정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지난 2015년 9월 18일 예장합동 총회가 두날개와 관련해 “예장합신 교단과 산하 이대위에 엄중 항의를 결정하고, 강력 조치 내용에 대해서는 총회 임원회에 맡기기로 했다”고 결의한 것에 대해 점잖게 훈수한 것이다. 한 마디로 총회의 결의는 공교회의 고백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대 원칙을 보인 것이다. 둘째, "유일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통치에 절대 순종하여야 하며, 지상에 유일하게 세워놓으신 교회의 한 회원으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개혁신보 704호 사설)는 원칙 앞에서 합신은 성숙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며, 이번 총회의 결의는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으로 사용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물론 이번 총회가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두날개와 관련해 명쾌하게 선을 긋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래도 이러한 결정만으로 그동안 한국 장로교회가 이루지 못했던 대의적인 결단을 이끌어 낸 것이다. 우리 총회는 잘 해보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있다는 모습을 이번에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잘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직도 자라야 할 우리 총회가 잘 하려고 무던히도 애쓰는 그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바라기는 보다 더 잘하는 합신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그 일은 우리 각자의 결의에 달려 있다. 이제 주사위는 우리들 손으로 넘겨졌다. 이 결의안을 지금의 자리를 지켜내기 위한 명분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명예를 높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높이는 계기로 삼을 것인가? 이제 각자 자기 자리에서 심사숙고 할 일이다.
636 no image 성공과 번영에 잠식된 세속화된 교회들
편집부
1520 2015-09-22
성공과 번영에 잠식된 세속화된 교회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세상과 삶에 대한 태도를 염려하며 지적하는 목소리들이 많다. 한편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진보적인 현세 중심적 태도와 다른 극단에 자리한 복음주의자들의 내세 중심의 성속 이원론적인 신앙에 대한 지적들이 그것이다. 게다가 요즈음에 와서는 자유주의나 복음주의 진영 모두 세속화의 일로에 있으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의 행태는 이 땅에서나 내세에서나 오직 이기적인 행복과 안녕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 결과 오직 성공과 번영의 현세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적인 태도가 대세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긴지 오래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며 개인경건과 사회적 책임의 총합으로서의 총체적 복음의 필요성이 절실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이 땅을 주관하시는 섭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교회로 부르시고 구원하신 바로 그분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속하진 않지만 바로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역사와 만물을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의 하나님을 신앙하고 유일한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유일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통치에 절대 순종하여야 하며, 지상에 유일하게 세워놓으신 교회의 한 회원으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사실 누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원론적인 삶의 질서에 대해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 삶의 보이지 않은 작은 영역에까지도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고 있다는 그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복음으로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그 복음의 통치를 구현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복음이 아닌 세속적 삶의 가치관에 붙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이럴 때일수록 신자들이라면 세속적 가치관을 과감하게 털어버리고 오로지 복음에 근거한 일상과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소서!
635 no image 제100회 예장합동 총회 유감
편집부
1826 2015-09-22
제100회 예장합동 총회 유감 2015년 9월 18일 예장합동 총회는 “예장합신 교단과 산하 이대위에 엄중 항의를 결정하고, 강력 조치 내용에 대해서는 총회 임원회에 맡기기로 했다”고 결의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예장합동 기관지인 기독신문은 “한성노회 등은 예장합신 이단대책위원회에 대해 엄중 항의 경고, 재발 방지 요청과 예장합신 총회에 대한 강력 조치를 해달라고 헌의”했으며 “이에 대해 총회는 예장합신 총회와 산하 이대위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예장합신 이대위는 5월 18일 공청회를 열고 ‘두날개선교회(대표:김성곤 목사)가 이단성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예장합동 총회는 교단차원에서 우리 교단에게 이대위를 향해 강력 조치해 달라는 내용을 총회 임원회가 이행하도록 결의한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누구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예장합동 총회 결의는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의 선을 넘는 결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액면 그대로 타교단의 기구를 향해 ‘엄중 항의’를 결의하고 그 교단에게 소속 기구를 ‘강력 조치’하도록 요청한다는 것은 결코 교단과 교단간의 정서에 어울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는 선전포고와 다를 바 없는 후안무치한 경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총회이대위는 제99회기 총회의 결의를 따라 두날개측 이단성을 연구한 것이며, 그 일환으로 공청회를 개최한 것이다. 따라서 총회이대위 활동은 본 교단을 대표한 것이다. 따라서 총회이대위를 향해 ‘엄중 항의’한다는 것은 곧 우리 교단을 향한 엄포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대위는 그동안 연구한 내용을 제100회 총회에 보고하는 것으로 그 임무는 종료된다. 그 보고 내용을 받고 안 받고는 제100회 총회의 고유 권한이며, 우리 총회는 신학적으로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할 것이다. 적어도 예장합동 총회가 이 정도의 절차를 인지하고 있다면 ‘엄중 항의’ 또른 ‘강력 조치’ 등을 운운하기 전에 우리 총회가 총회이대위의 보고 내용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예의주시한 후에나 언급할 내용인 것이다. 물론 예장합동 임원회가 총회 결의를 어떤 방식으로 이행할지 지금으로서는 미지수이지만 적어도 교단 간에 있어서 예장합동 임원회는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기를 바란다. 아울러 우리는 이번 합동총회에서 우리 교단을 상대로 ‘엄중 항의’ 내지는 ‘강력 조치’ 등을 결의함으로써 우리 교단을 향해 무례를 범한 행위에 대해 심심한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634 no image 바람직한 총회를 기대하며
편집부
1569 2015-09-08
바람직한 총회를 기대하며 작금 한국의 교단들은 ‘총회’(General Assembly)가 존재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한 무지와 혼란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무지와 혼란은 대다수 교단들의 문제이며 도무지 개혁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사실 개신교(Protestant)가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될 때에 그 분리란 이제 새로 시작하게 되는 교회로서의 분리가 아니라 본래의 교회, 즉 로마가톨릭이 부패하기 전 원래의 교회로 회복하는 의미의 분리였다. 또한 그런 개신교에 있어서 그 근거는 오직 ‘성경’에 바탕을 둔 것으로, 로마가톨릭은 바로 그 성경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성경보다 위에 있는 권위로서의 로마가톨릭교회를 앞세우는 종교로 있었다는 점이야말로 명백한 분리의 근거였다. 그러므로 개신교가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분파’(分派)가 아닌 근거는 개신교의 신앙정신이 얼마나 성경 혹은 성경의 권위에 충실한 것이냐에 있었다. 아울러 그런 개신교 분리의 가장 큰 힘 또한 성경에서 오는데, 그처럼 성경적인 개신교 분리의 힘의 원동력이 바로 ‘양심의 자유’이다. 개신교 신자에게 있어서 양심의 자유란 기본적으로 죄로부터의 자유이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복음 아래 있는 신자들을 위해 값 주고 사신 자유”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0장 제1항). 또한 그 자유는 “노예의 두려움이 아니라 자녀로서의 사랑과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가 복종할 수 있게” 하는 그런 것이다. 그런 양심의 자유와 반대되는 것이 바로 로마가톨릭의 강제력이었으며, 그런 강제력은 곧 신약 시대의 신자들이 누리게 된 율법과 의식법에 대한 자유를 버리고 다시 구약의 의식법에 매이게 하는 것으로, 이를 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값 주고 사신 교회의 자유를 거절하고 욕보이는 패역이었다. 그러므로 개신교, 그 가운데서도 개신교의 성경적인 원리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했던 장로교회들의 총회가 존재하는 근거와 방법은 철저히 개신교 신자들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기반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 따라 총회라는 조직은 모든 장로교단에서 공히 ‘임시기구’여야 마땅하지 지금과 같이 ‘상설기구’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반면에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뿐 아니라 신약교회의 역사 가운데에는 개교회의 당회나 의결기구인 공동의회 이외의 의결기구가 항상 존재했는데,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당시 흩어져 있는 교회들의 소식을 듣고서 현안들을 논의하던 것이 대표적이다. 신약 시대의 교회 이후에도 기독교에는 항상 이단의 문제와 같이 공교회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총회적인 의결 및 재판기구를 항상 설치했는데, 그러한 기구들은 로마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번갈아 있도록 함으로꺼 항상 임시적인 성격으로 있었다. 바로 그러한 임시기구를 통해 이단문제와 같은 당면한 현안들을 논의하고 의결함으로써 진리에 기반을 두는 ‘공교회성’을 구축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의결 혹은 재판기구들이 점차 상설화함에 따라 교권주의가 생성되었고, 그러한 교권주의의 산실이 바로 로마에 있게 됨으로 중세시대 로마가톨릭의 교권주의의 철옹성이 구축됐던 것이다. 이처럼 현재와 같이 장로교총회가 상설기구로 있는 것은 결코 성경에 없는 현상일 뿐 아니라 로마가톨릭으로 변질되기 이전까지의 모든 신약교회들에서도 있지 않았던 현상이다. 오히려 임시기구로서의 범 교회적인 기구가 상설화함으로 형성된 교권주의와 그러한 교권주의의 산실인 로마가톨릭을 개혁하여 분리된 개신교에서 그런 상설기구를 만드는 것은 로마가톨릭의 교권주의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며, 그럴 경우에 개신교는 성경에 충실한 회복된 교회가 아니라 로마가톨릭의 분파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어느 교단에서는 총회장에 나서면서 공약사항으로 총회회관 부채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천명했다가 이를 실행하지 않아 선관위로부터 총회장 및 부총회장의 직무를 정지하겠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모양이다. 이처럼 총회에 관한 기본적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들은 원래 장로교회들의 교단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들이다. 한마디로 성경을 벗어나거나 위배한 정치기구들과 정치는 기독교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따라 아무런 의미도 힘도 없다. 이런 기본적인 전제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실정인 한국의 일부 장로교회들과 교단들은 과연 자신들이 로마가톨릭의 분파인지 아니면 이로부터 개혁한 개신교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차제에 우리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총회가 왜 존재하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규명하고, 어떤 이유로든 교회 안에서 성경에 근거한 양심의 자유를 속박하는 일체의 행위들이 없어야 할 것이다.
633 no image 장로교회에서 목사가 중요한 이유
편집부
1667 2015-08-25
장로교회에서 목사가 중요한 이유 장로교회뿐 아니라 성경의 진리에 충실한 모든 복음적인 교회들에 있어서,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고 설교하는 목사의 가치는 가히 절대적이라 할 만큼 중요다. 따라서 그러한 목사의 양성에 있어서는 가장 신중하며 엄밀한 추천과 선별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무엇보다 여러 장로교단의 지교회들에서 이러한 의미를 생각하고 천국일꾼을 양성하며 다음세대를 책임질 만한 일꾼으로서의 목사를 양성하는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기껏해야 장학금을 지불하거나 생활비를 보탤 뿐, 목회자후보생이 바른 진리를 배우는지 그리고 배운바 진리를 바르게 실천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은 거의 전무하다. 뿐만 아니라 지교회 담임목사를 세움에 있어서 노회와 지교회 당회의 긴밀한 협력 또한 요원(遙遠)하며, 심지어 담임목사직을 안정적인 직업을 전수하듯 혈연(血緣)이나 학연(學緣) 등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물려주는, 가히 ‘성직매매’에 필적할 만한 일들이 만연한 것이 오늘날 대부분 교회들의 실상이다. 무엇보다도 지교회들에서 천국일꾼을 양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할 대부분의 장로들이 장로교 신앙고백과 교리를 모르기 때문에 목회자 후보생이나 지교회 목사의 가르치는 바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목회자 후보생을 지도하는 역할도 수행해야 마땅한 지교회 장로들이 오히려 후보생들로부터 지도를 받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지교회의 후임목회자를 청빙하는 과정에 있어서 장로교단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선별절차라 할 수 있는 위임식 절차가 의미하는 바도 거의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후임목회자 청빙 후 일정한 기간이 지나서 위임식을 하는 것은, 그 동안 후임목회자의 설교와 가르치는 내용, 그리고 소양 등을 충분히 검증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절차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형식적으로 그 기간을 보내고 만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목사를 세우느냐에 따라서 천국 문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한다는 사실, 그런 만큼 지교회들이 가장 중점을 두고 투자해야할 최고의 비전이 진리(성경의 진리)의 교사인 목사를 양성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바로 그것에 따라서 지교회에 천국 문이 열릴 수도, 닫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이다.
632 no image 공적 신앙고백의 전수와 ‘설교’
편집부
1608 2015-08-25
공적 신앙고백의 전수와 ‘설교’ 일반적으로 조직교회의 형태를 분류함에 있어서 ‘로마가톨릭’은 그야말로 가시적인 로마가톨릭교회조직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사제들의 양성 또한 중앙집권적으로 일사분란하게 이뤄진다. 반면에 그러한 조직의 형태를 가장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회중교회’ 혹은 ‘재세례파(Believer’s Church라고도 한다)’의 경우에는 그와는 정반대로 회중의 원하는 바에 부합하는 목회자를 자체적으로 결정하여 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장로교회들의 경우에 지교회의 목사를 세우는 것은 노회와 지교회의 의사가 절충되는 형태인데, 마치 로마가톨릭의 체제와 회중교회의 체제가 절충된 듯한 모양새를 보인다. 물론 그러한 장로교회의 모양새는 두 체제를 절충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원리, 곧 일반적으로는 신약교회들의 원리를 따라 취한 것으로,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다른 두 체제와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로교회들의 모양새에 있어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목사이며, 특별히 그 목사의 신앙노선, 즉 장로교회의 신조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것과 그 신학의 엄밀함이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회중교회에서는 신자 개개인의 신앙고백(believe)이 중요하며, 신자 개인의 구원은 철저히 그 사람의 신앙고백과 순수함에 바탕을 두지만, 로마가톨릭에서는 로마가톨릭교회조직에 포함되느냐가 중요하며, 신자 개인의 구원은 철저히 사제권에 귀속(歸屬)된다. 그런데 장로교회에 있어서는 신자 개개인의 신앙고백과 아울러 지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 즉 ‘진리’가 중요하다. 그러나 장로교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고백이란 회중교회에서 말하는 신앙고백(believe)과는 다른 신앙고백(confession)으로서, 일종의 신조(creed)의 고백이다. 때문에 회중교회 신자들의 신앙고백은 각자의 경험이나 체험과 확신이 바탕이며 기본적으로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지만, 장로교회 신자들의 신앙고백은 신조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바탕이며 기본적으로 신앙과 교리의 일치를 그 특징으로 한다. 또한 회중교회의 신앙고백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은 신자 개개인이 나름으로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교회의 공적 교사인 ‘목사’의 지도를 바탕으로 전수되며 습득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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