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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 no image 교회 울타리, 한 없이 낮춰야 하는가?
편집부
1626 2015-08-04
교회 울타리, 한 없이 낮춰야 하는가? 문화사역이라는 개념의 사상적 바탕을 이룬 중요한 인물들 가운데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으로 유명한 프란시스 쉐퍼를 대표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 특히 프란시스 쉐퍼의 경우에는 한국의 개신교 내에서 문화사역이라는 붐을 조성하는데 가장 큰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 운동이나, 프란시스 쉐퍼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모두 몰락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기독교가 문화를 변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속의 문화가 기독교를 변질시켜버린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상들은 모두 칼빈주의 신학에 대한 오해를 바탕에 두고 있는데, 특히 존 칼빈의 ‘제1차 교리교육서’(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하는 신앙교육 요강 및 신앙고백, 1537)에서 다루는 초반부의 주제들인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내용과 이러한 이해의 바탕에서 시작하는 “참 종교와 거짓 종교 사이의 차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 등에 대한 오해와 오류였다고 볼 수 있다. 존 칼빈의 ‘제1차 교리교육서’ 제1장에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함이 마땅하다고 언급함으로써 그 지식을 막연한 신적 대상에 대한 추구(종교심)로 그치지 말도록 언급하고 있다. 결국 존 칼빈은 그 적용 대상을 기독교 신자들만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 문화사역을 통해서 기독교회의 울타리를 낮추는 명분이 되도록 제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신앙과 지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존 칼빈은 보편성을 언급함에 있어서 항상 인간의 관점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에 이르도록 하고 있다. 바로 그 점에서 보편구원이 아니라 선택과 유기의 이중예정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고스란히 인정된다. 한마디로 예정에 대한 이해는 보편적이지만 그 구체적인 적용은 분명히 제한적으로 택자들에 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믿고 확신하는 신앙의 도리로 선 기독교회는 ‘보편적’인 것으로 존재하되 결코 낮은 울타리로만 둘러있는 것이 아니라, 굳건하고 견고하고 불변하는 진리의 울타리로 둘러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들이 취해야 할 ‘칼빈주의’이다.
630 no image 유아들도 설교를 듣도록 해야 한다
편집부
1620 2015-08-04
유아들도 설교를 듣도록 해야 한다 누가복음을 보면 ‘유아’들과 관련해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말씀이 하나 소개되어 있는데,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서 안수하여 기도해주시도록 하는 과정에서의 사건(눅 18:15-17)이다. 동일한 내용의 본문들을 참고하면, 당시에 사람들이 데리고 온 아이들은 ‘유아들’ 곧 간난아이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에서는 그 때가 무리들 가운데서 여러 내용들을 말씀하시던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마 19:13). 여기서 우리들은 제자들이 그처럼 유아들을 데리고 와서 안수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요구하던 것을 제지하려 했던 이유를 파악하게 되는데, 한참 진지하게 비유들과 여러 변론들을 듣는 와중에 아무런 지적인 능력을 지니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듣는 일에 방해가 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제자들의 태도에 대해 예수께서는 화를 내시면서 그들을 제지하지 말도록 하셨다(막 10:14).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린아이들이 복음을 강설하는 자리에 오는 것을 막지 않으셨는데, 그들이 그 자리에 오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제자들에게 화를 내실만큼 어린아이들이 복음을 강설하는 자리에 함께 하는 것을 원하셨던 것이다. 사실 현대신학은 대부분 가시적인 개념들과 인간의 이성에서 파악할 수 있는 이론들의 체계로서, 일종의 철학과 비슷한 것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그래서 칼 바르트를 비롯해 대다수 자유주의 학자들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없는 어린아이라도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의 택하심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혁교회들은 항상 유아들을 포함한 모든 가족들이 복음을 설교하는 예배의 자리에 나오도록 했으며, 유아들에게 반드시 유아세례를 주도록 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능력이나 믿음 혹은 신앙고백 이전에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전적인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말미암아 가는 크고 놀라운 은총의 자리임을 명심하자.
629 no image 매우 조심해야 할 사적인 신앙상담
편집부
1708 2015-07-21
매우 조심해야 할 사적인 신앙상담 한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신자들이 자신이 속한 교회의 치리회를 떠나 타 교회의 목회자 혹은 일종의 상담자에게 신앙의 지도를 받거나 상담을 하는 일은 매우 조심해야 할 일이다. 하나의 지역 교회는 그 자체가 유기적 생명체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언약공동체입니다. 곧 동일한 신앙고백을 통해 유기적으로 엮여 있는 것이 하나의 지역 교회이다. 그리고 이 하나의 지역 교회의 회원들은 당연히 하나의 치리회인 당회, 즉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에 의해 신앙의 지침에 있어서 지도와 견인을 받게 된다. 이러한 치리회의 성격이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가정심방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교회의 통일성과 보편성과 거룩성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치리회인 당회의 지도와 보호 아래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신자들은 가정 심방을 통해 자신의 모든 신행의 옳고 그름을 상담해야 한다. 또한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 모두 그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교회의 정회원인 신자가 당회의 지도나 보호를 먼저 구하지 않고 타 교회의 목회자나 혹은 상담자에게 자신의 신앙과 관련하여 혹은 가족이나 기타 사회적 문제 등을 상담한다는 것은 하나의 지역 교회가 유지해야 하는 언약공동체로서의 속성을 저해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자들은 당연히 자신이 속한 치리회인 당회원들의 지도와 보호를 받아야 하며, 당회의 허락 아래 좀 더 넓은 치리회인 노회나 총회에 소속한 목회자나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는 당회의 지도 아래 공개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신앙상담 방식을 통해서도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질서를 무시하고 임의로 어떤 대상을 향해 신앙상담을 요구하거나 받는 일은 매우 조심해야 할 일이다. 특히 이러한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고 비록 자신이 목사라 할지라도 공개적으로 '성경적 상담연구소' 운운하며 일면식도 없는 타 교회의 신자들에게 신앙상담을 유도하는 행위는 결코 올바른 일이라 할 수 없다. 서로 잘 알고 친분이 있는 사이라 할지라도 신앙과 관련된 상담은 먼저 그 사람이 소속된 치리회의 지도를 받도록 이끄는 것이 옳다. 어떤 이유라도 비공식적 일대일 신앙상담은 주의해야 할 일이다.
628 no image 성경에 기록된 이적과 기사에 대한 이해
편집부
1657 2015-07-21
성경에 기록된 이적과 기사에 대한 이해 성경의 큰 특성 중 하나는 '계시'이다. 곧 예수께서 행하신 행위들을 비롯해 그 행위들이 기록된 사건들 역시 계시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특성들을 무시하고 성경의 어느 특정한 상황이나 사건, 특히 이적을 일으킨 사건들을 지금 우리들의 삶의 정황으로 곧바로 끌어들인다면 엄청난 괴리와 오류를 낳게 된다. 만일 성경에 기록된 어떤 사건을 지금 우리의 삶의 정황에 곧바로 연결시킨다면 그것은 마치 '계시'가 지향하고 있는 메시아이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계시'를 담고 있는 글자만 바라보는 것과 같다. 이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그 손이 가리키는 대상을 보아야 하는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상이 어떨 것이라고 자기 혼자 상상하고 판단하는 것과 같이 우매한 일이다. 성경에 기록된 어떤 사건들, 그것이 이적이든 기사든 그것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에서는 메시아의 오심과 관련되거나, 혹은 예수님이 오신 후 지상에 계실 때에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거나, 또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는 지금도 예수님이 교회를 친히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 기록된 기이한 일들과 관련해 방언 말함이거나, 신유 곧 병고치는 행위이거나, 축귀(퇴마) 곧 귀신을 쫓아냄이거나, 심지어 죽은 사람이 살아남과 같은 이적과 기사들을 빙자하여 지금도 우리가 그와 같은 일들을 행할 수 있다거나 그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성경 계시의 특성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청맹과니와 같은 생각들이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엄청난 이적과 기사들을 그 발생한 시점에 따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 곧바로 끌어다가 마치 우리도 그와 같은 이적이나 기사를 행하거나 경험할 것처럼 나대거나 선전하는 것은 거짓 교사들이나 하는 매우 음흉하고 사악한 짓거리들일 따름이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었던 이적이나 기사를 예수님과 관련된 계시의 성격으로 이해하고 믿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 사건들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계시로 주어졌으며, 그것은 곧 그 사건들이 우리의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큰 이적과 기적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바로 그 사실임을 명심하자.
627 no image 인본주의적인 도덕 종교를 경계한다
편집부
1602 2015-07-07
인본주의적인 도덕 종교를 경계한다 날개 없이 마냥 추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교회를 향해 걱정하고 아파하는 마음으로 소위 공평과 정의를 강조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곧 윤리가 상실된 것처럼 보이는 한국교회를 비판하며 교회 개혁과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물론 참된 기독교는 중생자의 윤리, 성화의 윤리, 거룩의 길을 걸어야 할 신자들의 윤리를 마땅히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럽히는 요소들을 과감하게 척결하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평과 정의를 강조한 나머지 성경을 부정하거나, 윤리적 삶을 강조한 나머지 십자가 은혜의 복음을 희석시키고 유일한 구원의 도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혹은 공평과 정의를 빙자하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제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런데도 작금 한국교회 현실을 이용하여 교회를 비판함으로써 자신들의 도덕적 의를 드러내거나 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허무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 거짓 복음을 주입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일반은총으로서 도덕과 윤리는 그것 또한 '하나님께서 남겨주신 잔여물‘이며 그들에게 주어진 선물이기에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 하지만 일반은총만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 도덕과 윤리는 타락한 세상을 보존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에서 주어진 제한적 의미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세속의 도덕과 윤리의 가치를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거나 인본주의적 윤리만을 강조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놓치게 만든다. 더군다나 세속적 도덕과 윤리를 교회에 강요하는 것은 언뜻 보면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를 허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이 부패한 시대에 또 다른 극단으로 등장하는 인본주의적인 도덕 종교를 우리를 경계해야 할 이유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윤리를 강조할지라도 십자가 복음을 허물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공평과 정의를 따라 산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생명도 구원도 없다“(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16장)고 하는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주목해야 한다. 도덕과 윤리는 십자가를 통과한 도덕과 윤리여야 함을 명심하자.
626 no image 미국의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한 우리의 자세
편집부
1697 2015-07-07
미국의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한 우리의 자세 6월 26일, 미국에서는 5:4로 연방대법원에 의한 동성결혼 합법화가 결정되었다. 연방대법원은 “결혼은 사랑과 충실, 헌신, 희생과 가족에 있어 가장 높은 이상을 내포하고 있기에 결혼만큼 중대한 결합은 없다”고 하면서 ‘동성애 결혼은 죽음까지 계속되며 역사 이래로 계속되어온 결혼제도에도 전적으로 부합한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이로써 미국 내 동성애자들은 미국 내 어디서든지 동성결혼식을 올리고 결혼관계를 정부에 등록할 수 있으며 그에 따른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바랬던 바 숙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번 결과는 전혀 엉뚱한 형태로 발전되고 있다. 그 나타난 현상 중에 우려스러운 일이 곧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하늘을 치솟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동성애자를 향하던 그 혐오들이 이제는 오히려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로 향하고 있다. 전에는 소수의 동성애자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또 다른 희생양으로 삼아 그들에게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혐오는 그 대상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인권을 말하고 주장하면서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 과부하 된 인권의 시대에 오히려 인권이 탄압받고 있는 것이다. 과거 소수자 인권 운동을 펼쳤던 그들이 이제는 권력이 되어 힘을 가지고 극한의 혐오를 발산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이다. 이제 머지않아 우리가 처할 현실을 내다보게 된다. 세속의 강력한 풍조가 교회를 향하고 교회마저 세상을 뒤따를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말하고 그들을 향한 사랑과 회복을 말하고 있지만 그때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비난받고 탄압받고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성애가 죄이며 동성결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셨으며, 그들의 배타적이고 성실하고 친밀한 결합을 통하여 세상을 이루어가길 기뻐하셨음을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의 기준을 잃어버린 세상 속에서 묵묵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우직하게 고집하며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것이 신자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625 no image 자의적인 개인 묵상의 위험성
편집부
1636 2015-06-23
자의적인 개인 묵상의 위험성 시편에서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은 ‘말씀’의 주인이신 메시아의 오심을 대망한다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때 말씀이라는 ‘로고스’는 제2위 성자 하나님을 지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묵상은 메시아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신약 시대의 성도들의 묵상은 이미 구약 예언의 성취로 오신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이 땅에 세우신 교회의 회원으로서,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과 깊은 관련을 가져야 한다. 때문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런 점들을 충분히 감안하여 교회의 회의를 통해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를 채택하여 교회가 공적으로 이를 가르치고 성도들이 배우며 살도록 하였던 것이다. 곧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은 성도들이 매일 묵상해야 할 귀한 문서들이다. 그것도 교회가 공적으로 결의하여 채택한 문서들이다. 따라서 장성한 신자들은 대요리문답을 통해서, 그리고 자녀들은 소요리문답을 매일 매일 묵상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도 매우 중요한 매일 묵상집 중 하나이다. 그보다 앞서 칼빈이 만든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서' 역시 중요한 매일 묵상집이다. 신자들은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 소요리문답을 매일 한두 문답씩을 전해주는 것이 좋다. 혹은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서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를 매일 한두 문답씩 전해주는 것도 성도로서 책임을 다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혹 자녀들이 요리문답서나 교리문답서들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요리문답서는 이 점을 충분히 배려하여 한번 보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해마다 거듭거듭 읽고 외우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녀들은 이러한 요리문답서를 통해 차서를 따라 조금씩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고 익숙해지도록 하였다. 이러한 선진들의 지혜를 의심치 말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훌륭한 묵상집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학적 사상에 있어서 그 근본을 알 수 없는 개인 묵상집을 사용할 때 자칫 자의적인 성경 해석의 오류에 빠져들게 되어 자신 뿐 아니라 교회를 해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인증이나 지도를 받지 않는 개인 묵상과 같은 행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혹은 교회를 위해서나 매우 무책임한 행위임을 명심할 것이다.
624 no image 무소유의 신앙과 십일조 정신
편집부
1546 2015-06-23
무소유의 신앙과 십일조 정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무소유 개념은 완전한 무소유가 아니라 최소한의 소유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소한의 소유 개념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최소한의 소유 개념을 정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반면에 성경에서 말하는 무소유 개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완전한 무소유의 삶을 말한다. 그것은 신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의 출처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음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물질이나 지식이나 명예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신까지도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면서 내 것은 전혀 없다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확실히 하는 단초가 된다. 따라서 신자들은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시 맡겨둔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때문에 아무리 적게 가졌을지라도 그것이 자기의 것으로 믿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무소유의 신앙이라 할 수 없다. 반대로 아주 많은 것을 소유했을지라도 그것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사는 삶이라면 그것이 바로 무소유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무소유 신앙을 가진 사람은 제일 먼저 우리의 왕 되신 하나님께 자신의 몸까지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되는데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구원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이러한 신앙인은 자신이 소유한 것들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지향함으로써 자기의 소유를 믿음의 형제들과 나누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소유한 물질 때문에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더욱 애통해하며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더욱 깊이 깨닫고 오직 주님만을 의존하고자 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오늘도 자신을 성령께 의탁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이처럼 기독 신자의 무소유 개념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 신앙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중심을 이루고 있는 언약적 십일조 정신이다. 바로 이 십일조 정신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음을 인정하는 우리의 신앙 고백적 헌신임을 명심하자.
623 no image 노회가 꼭 실천해야 할 세 가지 책무
편집부
1499 2015-06-09
노회가 꼭 실천해야 할 세 가지 책무 “노회는 지금도 교회를 통치하시는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일 없어야” 오늘날 노회는 간단한 행정사무를 처리하는 일과 주로 정치적인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때가 많다. 그러나 정작 노회가 꼭 실천해야 할 책무를 빠뜨리는 경우가 있는데 노회는 이것을 잘 감당해야 한다. 첫째, 노회는 지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교단은 역사적 개혁주의라고 하는데, 교단에 소속된 각 지교회들은 어떠한 신학노선을 지향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각자 옳은 소견대로 자신들만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지만 대개가 잡다한 짬뽕신학이다. 목회자는 분명 역사적 개혁주의 교단 신학교를 나왔는데, 목회 일선에서는 엉뚱한 신학체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는 거의가 기복주의 노선을 부추기는 순복음 오순절주의화 되어 치유목회, 은사목회, 영성목회, 직통계시 운운하면서 떠들어 대고 있다. 따라서 노회는 각 지교회가 바른 신학을 추구할 수 있도록 노회 때마다, 그 해에 이슈가 되고 있는 신학적인 논제들을 올바르게 해석하여 지교회가 바른 신학에 설 수 있도록 도와 줘야 한다. 그래야 건전한 교회로 성숙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노회는 목사후보생들을 신학교에 보내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 각 지교회에서 올라오는 신학생 추천서가 올바른 과정을 거쳐서 서류가 접수되었는지 검증을 해야 한다. 목사후보생을 담임목사 개인 자격으로 도장을 찍어 신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은 안 된다. 각지교회는 장차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고자하는 자들을 엄격히 심사하기 위해서 지교회 공동의회에서 목사후보생들의 신앙과 인격과 자질과 소명 등을 철저히 검증하고 담임목사의 재가를 얻어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노회에 요청을 하고 노회는 목사후보생을 교단 신학교에 위탁교육을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목사후보생을 추천한 지교회는 목사후보생이 목사가 되기까지의 어느 정도의 생활비를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목사후보생이 교단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자기 멋대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본 교회로 돌아와서 얼마동안 실제적인 사역 훈련을 받은 이후에 교회의 필요에 의하여, 지교회가 적절한 곳에 교회를 개척하고자 할 때 훈련받은 목회자를 파송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러한 과정이 무시되어 자질이 빈약한 목회자들이 양산되는 실정이며, 개인이 교회를 개척하다보니 살아 남고자하는 경쟁심리만 팽배하여 다른 교회는 다 망해도 자신이 개척한 교회만큼을 살아남고자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교회는 함께 가는 관계이지 경쟁관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셋째, 노회는 지교회들이 한 형제임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재정이 넉넉한 교회는 재정이 빈약한 교회들을 돌볼 수 있도록 노회는 이를 행정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 이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노회는 바른 노회라고 볼 수 없다. 같은 노회 안에 있는 어려운 교회들을 방치한 채 재정이 넉넉한 교회들이 자신들만의 잔치를 벌이고, 자기네 교회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좋은 일 한답시고 별별 구제사업을 펼친다고 할지라도 가장 가까운 형제 교회들을 무시하고 외면한다면 이는 결코 온당하다고 볼 수 없다. 집안의 가장이 자기 식구들은 전혀 돌보지 않고 내 팽개친 채 다른 사람들을 열심히 돌보면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고 해도 이는 바람직한 가장이라고 볼 수 없다. 집안의 가장은 먼저 자신의 가정을 잘 보살핀 연후에 가정의 모든 식구들의 동의를 얻어 좋은 일에 함께 힘을 기울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재정이 넉넉한 교회는 먼저 이웃 재정이 넉넉지 못한 교회들의 형편을 돌아보고 목회자들의 생활을 지지해 주어야 한다. 마치는 말 이상에서 지적한 책무들을 노회가 등한시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금도 교회를 통치하시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때문에 노회는 행정적인 업무보다 노회에게 주어진 본래의 책무에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상에 서 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지교회들이 보다 건전하고 건강하게 세워져 나가기를 바란다.
622 no image 직통계시가 비성경적인 이유
편집부
1872 2015-05-26
 직통계시가 비성경적인 이유 소위 직통계시를 추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은밀한 욕망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직통계시에 열광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와 구원에 대한 성경의 증거에 대한 불신이며, 여전히 자신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불안을 주술적인 방식으로 바꾸려는 시도들 때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환경과 신적 존재를 제재하는 방식의 주술형 종교는 통제되지 않는 불안의 투사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주술은 불안이 발생할 때마다 불안을 잠재우는 방식으로 기능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이런 부류들은 성경처럼 기록된 완성형의 계시 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대신에 그들은 늘 살아서 매순간 자기 삶에 개입하는 방식으로써 신적 존재를 요구하게 된다. 이것이 직통계시의 직접적인 이유이다. 신사도 운동 계열에서는 이런 경향의 변종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경우 그들에게 있어서 마치 자판기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통제하는 기계화된 신이어야 하고,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정하는 부채도사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내재화된 불안 요소 때문에 그들은 성경이라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계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 직통계시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은 모두 구원을 계시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행동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와 그 계획은 완벽하여서 특별한 개입 방식이 없을 지라도 완전하게 운행된다. 따라서 특별한 하나님의 개입이 반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경영이 부실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율배반일 따름이다. 성경 계시가 오늘날에 반복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최후, 최종적 계시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 특별히 그의 낮아지심(성육신, 수난, 죽으심)과 높아지심(부활, 승귀, 등등) 그리고 구원의 보증으로서 오순절 성령의 강림까지 이 모든 것이 종말론적 성취이다. 그런데 이처럼 완벽한 종말론적 성취인 계시를 마다하고 직통계시처럼 또다른 계시를 요구한다는 것은 마치 성경 계시에 무슨 하자가 있어서 새로운 계시를 필요로 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로 계시가 충분치 못하든지 하는 일종의 자가 당착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마치 억지로 암에 걸린 다음 그걸 고쳐주심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도록 하나님께 요구는 것과 다름없는 패역일 뿐이다.
621 no image 결혼 ‘서약’에 담긴 의미
편집부
2073 2015-05-26
결혼 ‘서약’에 담긴 의미 최근 들어 몇몇 연예인들을 비롯해 혼전동거를 찬동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결혼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혹은 개인적 가치 기준에 따른 일종의 계약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결혼은 하나님께서 창조 가운데 부여하신 질서와 원리에 따른 것이다. 곧 하나님의 창조질서 가운데서 피조물로서 필연적으로 지니게 되는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는 ‘의무’의 성격으로 시작된 것이 결혼이다. 따라서 결혼 예식에서는 반드시 ‘서약’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갖는 ‘맹세’에서 시작되었다. 곧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서약이 시행되어야 한다. 이처럼 결혼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부여한 ‘의무’의 성격으로, 우리들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결혼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돕고, 합법적인 자손을 통해 인류를 번성하게 하며, 거룩한 씨를 통해 교회를 성장시키고, 성적 부도덕을 방지하기 위해 제정되었다”고 제24장 2항에서 규정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결혼은 기본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우리들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위하도록 하는 수단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에 따른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인들조차도 이러한 결혼관을 지닌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믿는 신자라도 하나님 앞에서 맹세로 결혼하고서도 이를 파해버리고 마는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와 같은 행위는 죄를 범하는 것이며, 진리를 알고서도 이를 거스르는 패역한 죄임을 명심해야 한다. 사람의 제일 되며 근본적인 목적은 인간 자신의 행복과 번영, 그리고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제일 되며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며 추구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결혼’도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 있어야 하며, 결혼 서약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과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을 맹세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든 불신자이든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며 그 의무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620 no image 살아있는 믿음인가, 죽은 믿음인가?
편집부
1707 2015-05-12
살아있는 믿음인가, 죽은 믿음인가? 신자에게 있어 믿음과 회개는 늘 함께 한다. 이것들은 중생, 곧 거듭남에 따르는 새 생명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난 새 생명은 필연적으로 참된 믿음과 진정한 회개를 수반한다. 이것은 거룩한 새 생명이 지니는 당연한 특징이다. 마치 생명을 지니고 태어난 아이가 울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지닌 신자라면 성 삼위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죄에 대한 자각 그리고 돌이킴과 의에 대한 순종으로 자연스레 나아가게 된다. 이것이 생명 없이 지식으로만 믿는다 하는 역사적 믿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참된 믿음을 가진 신자의 모습이다. 이처럼 참된 믿음과 진정한 회개는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에 역사적인 죽은 믿음과 일반적인 뉘우침과 그 양상부터 다르다. 이런 점에서 개혁자들은 이 믿음과 회개를 가리켜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라고 했다. 잘 아는 것처럼 거듭남, 곧 중생이라는 이 '생명의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 선행(先行)되었기에 그에 따른 생명의 자각과 반응은 필연적으로 뒤따라오게 된다. 따라서 믿는다고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삶의 고백이 없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역사적 지식에 머무르지 않는, 전 인격을 동반한 실천적 믿음만이 참된 믿음이며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지속적인 회개가 진정한 회개이다. 그런데 전적인 신뢰와 회개의 역사는 결코 일시적이거나 단회적일 수 없다. 따라서 신자에게 믿음과 행함은 늘 함께 가야한다. 죄로 죽은 무력한 사람에게서 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은 영혼을 그 자체를 살리신 새 생명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그러하다. 이것을 가리켜 진정한 회개는 참된 믿음을 전제하며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바빙크는 "옛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켰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뉘우침이요, 그로 인하여 점점 더 그런 죄를 미워하고 거기서 피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새 사람이 된 신자라면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선한 행실로 사는 일에 관한 욕망과 사랑을 갖는 것이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을 양산하고 있는 텅 빈 조개껍질 같은 한국교회가 깊이 돌아보아야 할 대목이다.
619 no image 어린이들은 우리 모두의 자녀이다
편집부
1446 2015-05-12
어린이들은 우리 모두의 자녀이다 작금 물량주의화 되기 이전의 시대에는 '나의 아이'라는 개념보다는 '우리의 아이'라는 개념이 강했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와서는 '우리의 아이'라는 생각은 거의 사라지고 '나의 아이'에만 집착해 있다는 것은 심히 유감스럽다. 과거, 우리의 미래가 되는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자는 취지가 살아있을 때는 '나의 아이' '남의 아이'를 떠나 모든 어린이들이 구김살 없이 잘 자라도록 배려하고자 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있어서 어린이날이란 자기 자녀에게 선물을 사주는 날로 바뀌어 버렸다. 자기 아이를 놀이공원 등에 데려가 즐겁게 해주는 날이 되고만 것이다. 그러나 양식 있는 어른들이라면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기의 자녀에게 그렇게 하는 동안 그와 같은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엄청난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사실 우리의 주변에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도 많이 있다. 또한 어릴 때 부모를 잃었거나 부모 얼굴도 모른 채 태어나 고아원과 같은 시설에서 어렵게 자라나는 아이들도 많이 있다. 우리가 좀 더 성숙하다면 그와 같은 어린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아야 한다. 나아가 그와 같은 어린이들에게도 똑 같이 의미 있는 어린이날이 아니라면 이제는 어린이날을 폐기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시대에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선물을 전달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매년 돌아오는 어린이날 부모가 자녀에게 선물보따리를 주고는, 진정한 삶의 본이 되지 않는다면 그 선물마저도 자녀에게 해악을 끼치게 될지 모른다. 어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어린이들에게 참된 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부모가 주님의 말씀 가운데 살며 아이들을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다. 모든 어린이가 올바르게 자랄 수 있는 여건을 확보하는 것은 어린이들이 가지는 권리이며, 어른들은 그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제 어른인 우리는 어린이에 대한 공동개념을 다시금 확립해야 할 때이다.
618 no image 전가 교리 대체하는 ‘새관점’을 반대한다.
편집부
1882 2015-04-28
전가 교리 대체하는 ‘새관점’을 반대한다. 새관점(NPP)은 통상 목적격으로 해석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갈 2:16)를 "예수의 신실함으로"라고 소유격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헬라어의 소유격이 목적격적 소유격으로도, 속격적 소유격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처음 루터가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한 이래로 종교개혁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해석을 해왔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법정적으로 전가되어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하는 것으로 믿음을 해석했다. 여기서 ‘전가’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분한 구원의 공로로써 그리스도의 순종과 형벌적 대속을 우리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물론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가 자리하고 있고 이는 칼빈 신학의 핵심 원리 중 하나다. 그런데 새관점은 이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이라고 해석한다. 아담이 실패한 것을 온전히 순종하고 형벌적 대속을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신실함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였으니 우리도 그 길을 따라 신실히 행함으로써 구원 얻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령의 연합케 하는 역사’가 전제되어 있다. 톰 라이트의 경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를 주해하면서 전자의 믿음을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후자의 믿음을 신자의 신실함으로 해석한다. 즉 그의 ‘믿음’에는 ‘언약에 신실함’이라는 행위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는 이전 세대에 모든 사람들이 실패했던 길을 신실하게 행하셨으므로 우리는 그 본을 따라 신실하게 삶으로 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성령의 연합케 하는 역사가 전제되지만, 믿음은 언약적 신실함이므로 칭의 역시 이 언약에 신실한 행위가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열매와 더불어 그 결실을 거두는 미래적 칭의 개념을 더하게 된다. 물론 성령으로 연합한 시점에 칭의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톰 라이트의 믿음 이해에는 ‘신실함’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 이렇게 되면 전통적으로 종교개혁의 신학인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이신칭의’에 행위를 결부시키지 않는 것과는 달리, 그의 신학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던 시절, 즉 의화라고 불리던 종교개혁 이전 시기의 신학으로 회귀하게 된다. 새관점은 칭의 속에 성화의 요소로써 우리가 언약적 삶을 신실하게 사는 것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성령의 연합을 설정해 두고 있다. 대신에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개념 중 하나인 전가의 개념을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종교개혁 신학이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할 때, 여기에는 또 다른 신학적 장치들이 있다. 곧 믿음은 우리 구원의 효력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공효, 곧 은혜를 받는 내적 방편이다. 그리고 이 내적 방편으로 외적 방편인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함으로써 이 공효들을 공급받고 선행이라는 열매를 맺는 구조로 설명했다. 선행은 우리의 행위나 결단이나 노력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께 더 잘 붙어 있을 때, 곧 그리스도와 더 잘 연합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열매를 맺는 것으로 설명한다. 새관점의 언약적 신실함이라는 개념은 믿음이 결여하고 있는 행위를 믿음에 부여함으로써 믿음을 더 믿음 되게 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성령의 연합이라는 전제에도 불구하고 기본적 구조가 예수의 신실함을 본받는 우리의 신실함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 편의 행위를 더 강조하게 되므로써 오히려 연합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또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이 오랫동안 인간의 부패에 대해 지적하고 이스라엘의 실패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구원론적 문제가 아니라 교회론적 문제로 만듦으로써 인간의 부패를 간과하고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따라 우리가 그것을 본받을 수 있다고 전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대로 전가 교리가 철저하게 구원의 공효를 그리스도 안에만 둠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만 그 공효가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도록 한 구조와 그 장치들, 예컨대 은혜의 방편과 믿음 그리고 거기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라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선행이라는 결실을 맺는다는 신학적 해석을 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전통적인 성경 해석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이 새관점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신학이 현실과의 대화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원인에서 찾을 수 있다. 곧 ‘이신칭의’를 오해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행함 없는 믿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새관점이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교회의 ‘이신칭의’ 신학을 떠나 새관점이 제시하는 길로 갈아타기보다는 우리가 어떤 신학적 전통에 서 있는가를 명백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617 no image 상황에 물든 복음을 경계한다
편집부
1840 2015-04-15
상황에 물든 복음을 경계한다 사회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자칫 복음이라는 본질을 소홀히 할 때 순간 기독교는 인본주의적 휴머니즘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이미 우리는 교회의 역사를 통해 이와 같은 모순을 수도 없이 목도해 왔다. 복음을 상실한 도덕화된 교회, 그리고 휴머니즘으로 전락한 문화화된 종교 등은 상황이라는 컨텍스트보다 복음이라는 본질을 소홀히 한 결과였다. 반면에 복음‘만’을 강조하고 상황을 도외시하는 것 역시 가슴이 아픈 일이다. 이 경우 기독교는 세상과는 무관한 맛을 잃은 소금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기독교는 교조적이고 독선적이며 정죄와 비판이 난무하는 우월감에 휩싸인 무례한 종교가 되기 십상이다. 무례한 기독교는 성도의 삶과는 무관하며 형식적으로 교리를 적용하는 바리새적 종교일 뿐이다. 이 또한 복음의 본질을 상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작금 한국교회에서는 성속 이원론과 도덕적 세속주의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양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더욱이 현장이 결여된 한국교회의 성속 이원론적 신앙과, 한국교회를 잠식하고 있는 번영과 성공에 물든 또 다른 세속주의와의 싸움은 한국교회를 휴머니즘화된 도덕적 복음으로 내몰고 있다. 이것은 복음이 윤리나 도덕에 삼킨 것과 다를 바 없다. 곧 상황을 강조한 나머지 복음의 본질이 왜곡된 것과 다름없다. 비록 복음을 말하지만 그 복음은 분명 다른 복음이다. 여기에서는 사도적 공교회의 신앙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사람을 향한 신앙’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함께 있어야 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제 ‘사람에 대한 사랑’만 남고 만 것이다. 기독교는 당연히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하고 공의와 형평, 인애에 기반한 사회적 제자도를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이 세상을 바꾸고 변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혁된 실존으로서, 나아가 죄 많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존재하기 위함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세속적 가치에 뒤섞이지 않은 순수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되찾아야 한다. 곧 세속적 상황으로부터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복음을 회복할 때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복음’을 가지고 다시 상황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616 no image 동성애자 혼인 및 직분 임직을 반대한다
편집부
1618 2015-04-15
동성애자 혼인 및 직분 임직을 반대한다 이제 교회 안에서조차 동성애자들의 혼인을 승인하고, 동성애자들에게도 교회의 직분을 개방하려고 하는 무리들이 힘을 과시하는 시대가 된 것 같아 이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명확하게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3월 17일, 미국에서 규모가 큰 미국장로교(PCUSA) 교단은 제221회 총회에서 “교회 내에서 게이와 레즈비언 등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인정하는 교단헌법 개정안 14F(동성결혼 인정) 법안”을 승인했다. 이러한 결정은 비록 미국장로교단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향후 성경적인 지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세속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교회가 수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동시에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가치관 해체라는 극단적인 현상을 유발할 것이며, 마침내 세속 문화를 교회 안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반신국적인 행위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세속사의 흐름은 계몽주의(Enlightenment)를 거치며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으로 집약되었다. 이 ‘포스트모더니즘’은 한 마디로 “폭 넓은 회의주의 주관주의 상대주의적 특징을 보이며, 인간 이성에 대한 총체적 의심이자 정치 경제적 권력을 유지 주장하는 데 필요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시대를 가리켜 우리는 문화의 해체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은 세속사에서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문화의 해체가 아니다. 정작 그것이 추구하고 있는 궁극적 목적은 다름 아닌 ‘교회’의 해체이다. 곧 포스트모더니즘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류와 맺은 언약을 파기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작금 소위 문화의 형태로 탈을 쓰고 전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동성애를 비롯한 세속 문화의 트렌드는 ‘문화의 해체’라는 케치 프레이즈(catch phrase)를 내걸고 ‘교회’를 공격하는 또 다른 형태일 따름이다. 이 현상은 처음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질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지속되어 왔었고 시대마다, 지역마다 그 탈만 갈아입었을 뿐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반신국 성향의 세속 문화를 극복하고 교회의 거룩성, 보편성,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근거한 교리 교육에 힘써야 할 것이다.
615 no image 미국장로교단의 동성결혼 수용을 우려한다
편집부
2024 2015-03-31
미국장로교단의 동성결혼 수용을 우려한다 미국의 장로교단이자 한국의 예장통합 측과 자매교단인 미국장로교(PCUSA)가 지난 3월 22일 장로교단으로서는 레즈비언 동성애자 부부를 목사로 안수했다. 동 교단이 동성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한 지 5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다. 이번 미국장로교(PCUSA)의 동성결혼 합법화 결정은 작년 3월 27일 미국 워싱턴의 연방 대법원에 의해 동성결혼 금지법인 연방 결혼보호법(DOMA)과 캘리포니아의 동성결혼금지 법률조항(프로포지션 8)의 위헌 판결 이후 가속화된 미국 내 동성결혼 합법화의 분위기를 교회가 앞장서서 추인한 것에 다름이 없다. 교회가 세상의 풍조를 거스르지는 못할망정 세상과 더불어 짝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장로교(PCUSA)가 교회헌법에서 수정한 내용은 “목사 및 장로, 집사 등 모든 제직자는 ‘남성과 여성 결합’의 신실한 결혼 정립 또는 혼전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정절과 순결 조항’에서 ‘남성과 여성 결합’의 내용을 삭제한 부분이다. 그리고 올 3월에 와서는 결혼에 대한 정의마저 “한 남자와 한 여자 간의 계약”에서 단지 “두 사람 사이의 고유한 계약”으로 바꾸었다. 이제 결혼은 더 이상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성스러운 결합이 아니다. 미국에서의 결혼은 남성과 여성을 불문하고 단지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의 결혼이면 된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결혼이 가능해 진 것이다. 교회 내에서조차 말이다. 이러한 동성결혼 합법화의 이면에는 ‘인권’이라는 시대정신이 존재함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동성결혼 합법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차별받을 수 없는 고유한 인권이 있고 성적 지향에 있어서도 성적인 자기 결정권과 평등권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물론 인권은 중요하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타락한 이후에도 인간을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인권이 그 자체로 무제한적인 절대적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이 따르는 상대적 권리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동성애자들의 동성애 정당화와 동성결혼 합법화 주장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위반한 부당한 권리 요구에 다름 아니다. 간통죄와 마찬가지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일부일처의 거룩한 결혼제도 아래서 허락된 성적인 교제를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성경적인 올바른 인권의 의미를 각인하길 바란다.
614 no image 세상의 폭력과 예수님의 부활
편집부
1649 2015-03-31
세상의 폭력과 예수님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수립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왕권은 무력에 근거한 다윗 혈통의 왕들이 행사했던 왕권과는 구별되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방 나라의 왕들이 다윗 혈통의 왕들에 의해 진압될 것이며, 이방 나라들은 다윗 왕국에 의해 통일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하지만 정작 역사 속에서 다윗 왕국은 세속 왕국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힘에 근거하였던 구약 시대의 왕권은 이방 나라들에 의해 거부된 것이었다. 이 사실은 다윗 왕권의 무력으로 세상 왕국들이 통일될 수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세상의 폭력에 맞서지 않으셨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그 폭력을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무력이나 폭력과 같은 힘이 아닌 신령한 권능으로 그의 나라를 세우셨다. 예수께서는 그동안 세상을 지배해 왔던 폭력과 무력의 질서를 자신의 죽음으로써 무기력하게 만드시고 그 대신에 새로운 질서, 곧 죽음을 이긴 부활의 사실 위에 그의 나라를 세워졌다. 이처럼 그리스의 왕권은 부활을 통한 죽음의 승리를 통해 증거 되었으며,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재림하실 때에 그 절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무력에 근거하고 있는 지상 왕권과 예수님의 왕권을 구별했으며, 죽음을 극복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했으며, 유한한 인간이나 천사들보다 높은 존재임을 증거하였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세상에서 진정한 왕이심을 선포한 최종적인 선포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등극하신 최후의 왕권은 지금까지 세속의 왕들과는 달리 범세계적이며 우주적인 완벽한 왕권인 것이다. 그 왕권이 행사되는 곳에 세워진 나라가 바로 교회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더 이상 폭력이나 무력과는 상관이 없는 나라이다. 이 나라는 오로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신령한 권능으로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다. 이에 지상에 있는 교회들은 어떤 이유로든 폭력이나 무력으로 교회를 증거 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속한 교회의 회원으로서 폭력과 무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오로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만을 유일한 교회의 통치 원리로 삼아야 할 것이다.
613 no image ‘에클레시아’에서 ‘디아코니아’로
편집부
1628 2015-03-17
 ‘에클레시아’에서 ‘디아코니아’로 교회로 모여 드리는 주일의 예배는 엿새 동안 회중들의 삶을 한데 모아서 하나의 신앙고백을 고백하는 공동체로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이다. 따라서 엿새 동안 흩어져 각각 개개인으로 드렸던 삶의 예배는 하나의 공동체로 모이는 주일 예배를 향하게 하고, 또한 회중들의 입술과 마음을 통해 드렸던 주일 예배는 이후 엿새 동안 각각 개개인의 삶을 통한 드려질 예배를 향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엿새 동안의 일상에서 드려진 삶의 예배가 없는 주일의 공적인 예배는 자칫 허위와 가식일 수 있으며, 반면에 주일 예배를 통한 신앙고백과 말씀의 은혜, 공동체의 돌아봄이 없는 엿새 동안의 삶은 자칫 자기 의에 가득 차거나 무기력해질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사실 엿새 동안의 일상이 없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삶이 없는 주일 예배는 자칫 소리만 요란하고, 거품은 가득하지만 사실은 텅 빈 조개껍질과 같은 제도권 교회의 단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매 주일 함께 모여 언약을 갱신하고 예배하는 공동체의 아름다움이 상실된 채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나 홀로 힘겹게 버텨내야만 하는 가나안 교인들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지만 주님께서 핏값을 주고 사신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을 향하여 모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증시하기 위해 세상으로 흩어지는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한다. 곧 참된 교회의 성도들이라면 주일을 통해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동시에 엿새를 통해 세상으로 힘 있게 나아가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여 서로를 격려하며, 동시에 온 세상으로 흩어져 일상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교회이다. 곧 흩어져 있던 성도들인 ‘디아코니아’는 함께 모이는 ‘에클레시아’를 향하고 ‘에클레시아’는 또다시 ‘디아코니아’를 향하는 것이 성도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모이는 것도 주를 위한 것이고 세상으로 향하는 것도 주를 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와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은 주일에 함께 모여 진리와 성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동시에 엿새 동안 세상으로 흩어져 일상에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주일과 엿새는 둘 모두 예배의 장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새 생명이 회복되는 ‘에클라시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회복되는 ‘디아코니아’로 살아가길 바란다.
612 no image ‘칭의’와 ‘성화’ 그리고 ‘영화’
편집부
1987 2015-03-17
‘칭의’와 ‘성화’ 그리고 ‘영화’ 율법 안에서나 밖에서나 오직 심판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처럼 불의한 인류에게 한 ‘의’를 보여주셨다. 곧 하나님께서 준비한 ‘하나님의 의’이다. 이 ‘하나님의 의’는 이미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보여졌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롬 3:22) 것으로서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 공로에 근거해서 값없이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짐으로 얻어지는 ‘의’이다. 곧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주어지는 특별한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을 가리켜 칭의(justification)라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을 완전히 이룬 것은 아니다. 이미 칭의를 받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성도로서 온전한 삶을 살기에는 너무나 미흡하고 부족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이제부턴 장성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숙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은 순전히 복음에 붙잡힌 성도가 성령님의 충만한 다스림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다운 품성을 이루어 가는 것을 말한다. 칭의를 받음으로써 구원은 받았으되 성숙한 성도로서 온전한 성화를 이루기까지는 여전히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는 상태 아래 있다. 그리고 성도는 죽는 날까지 성화를 완성해 나가기 위한 성도로서의 삶을 유지해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구원의 완성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를 영화(glorification)라고 한다. 이 영화의 자리에 설 때 하나님과 주 예수와 더불어 성령님의 교통하심을 통해 영원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자리에 나아가기까지 붙잡고 인도하는 권능이 곧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이다. 결코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확고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의에 근거하여 영화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곧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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