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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 no image 간통죄 위헌 판결에 즈음하여
편집부
1892 2015-03-03
간통죄 위헌 판결에 즈음하여 6년 전 혼인빙자 간음죄의 위헌 판결과 폐지에 이어 지난 2월 26일에는 간통죄의 형사상 처벌조항마저 헌법재판소의 7:2 위헌 판결로 62년 만에 역사 속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간통죄 처벌조항은 일부일처제 혼인제도를 보호하고 부부 사이에 정조의무를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지만,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의 비밀,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위헌 판결의 이유를 밝혔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이 간통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는 입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간통죄는 여전히 도덕적으로 잘못이며 민사상으로도 부도덕한 죄로 여전히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 잘못에 대해 과도한 형사적 개입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물론 미국의 문화신학자인 데이빗 웰스 역시 개인의 자유와 국가가 강제하는 법이 곧바로 충돌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다. 건강한 사회란 시민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수준이 성숙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웰스는 자유와 법 사이에 도덕적 완충지대가 존재해야 하며 공공의 질서를 위한 시민들의 높은 윤리적 수준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국가가 개인의 사적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도덕적 행위에 대해 형법으로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번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적절치 않았음을 지적해야 한다. 그것은 국민의 60% 이상이 우리 사회의 부도덕한 상황을 빌어 간통죄가 존속해야 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간통죄는 단순히 개인의 사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차원의 죄가 아니다. 간통죄는 일부일처제 사회의 결혼제도와 가정이라는 사회의 기초를 허무는 공익과 관련된 죄이다. 더구나 우리 사회의 도덕적 수준이 약화되고 성에 대한 윤리적 인식이 문란해진 상황이라면 개인의 도덕적 판단에만 맡기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해야 했다. 한국교회는 이번 판결을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며 성경적인 윤리기준을 강화하고 결혼의 신성함과 성의 아름다움을 바르게 가르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올바른 권징을 통해 개인과 교회의 거룩을 확립하는데 힘을 써야한다. 이것이야말로 부패한 사회 속에서 한국교회에 주어진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610 no image 복음은 더 이상 숨겨진 ‘비밀’이 아니다
편집부
1635 2015-03-03
복음은 더 이상 숨겨진 ‘비밀’이 아니다 최근 폭력을 일삼으며 좌충우돌하고 있는 ‘은혜로교회’를 비롯해 우리 주변에서 자주 회자되고 있는 신천지, 구원파, 다락방, 신사도, 빈야드, 인터콥을 비롯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요한계시록 강좌, 신유 은사 힐링 집회 등과 같은 특정 집단들의 공통점은 자기들에게만 비밀스러운 능력이나 지식이 있어서 그동안 감추어진 계시들을 해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들이 추종하는 윤리관 및 도덕성과 금욕적 실천 또는 방언 현상을 비롯한 마술적 신비나 치유 등과 같은 아류들은 모두 헛된 속임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사악한 사람들의 특징인 육신의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류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이고 환상적인 경험으로 신적인 지식을 얻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은밀한 지식은 선택된 특정한 몇몇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자랑함으로써 진리에 대한 오만과 배타성을 가지게 만든다. 때문에 이런 부류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겸손한 인간이 되게 하는 어떤 방법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에 인간의 자기 성취적 교만을 확장시키며 자신이 다른 사람들 또는 다른 교회 신자들보다 더 좋은 행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들 따름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일부 사람들에 의해 전용되는 비밀스러운 것이거나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 복음은 보편성을 가지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에 가식적인 종교적 열망이나 꾸며진 겸손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처럼 교회는 자기들만으로 만족하는 폐쇄적 구성원들 안에 있는 비밀스러운 집단이 아니다. 오히려 천하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모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기들만이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속이는 거짓 종파에 더 이상 속아 넘어갈 이유가 없다. 그들이 말하는 자기들만의 ‘계시’라든지 ‘능력’ 혹은 ‘비밀’이라는 것은 그들이 추종하고 있는 교주가 만들어낸 망상에 불과할 따름이다.
609 no image 교회의 지도자들이 새길 교훈
편집부
1753 2015-02-10
교회의 지도자들이 새길 교훈 교회의 지도자란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교회의 회원들에 의해 선택된 직분자들, 즉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가리킨다. 이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자들이 누구인가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곧 신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백성들이며, 하나님만이 그들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고 신자들이 그 말씀을 떠나 방자(放恣)하지 않도록 가르치며 진리를 분별하여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지도자들이 마치 신자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거나, 신자들을 지배하려 들거나, 자기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신자들을 우민화하거나, 계속해서 자기들의 지위 유지를 위해 진리를 거스르면서까지 교회를 유린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왕이신 하나님께 대한 불충과 무지에서 나오는 불신앙일 따름이다. 비록 그들이 자기들의 열정과 불신앙과 사악한 행동들로 말미암아 교회를 유린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방해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됨으로써 그들이 가진 권위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일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막중한 책임과 함께 그에 따른 심판이 기다릴 따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 누구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인생 연륜과 혹은 권위로써 하나님을 말씀을 대신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내는 일에 심각한 저해 요소가 된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일이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대적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기 위하여 진리의 영으로 오신 성령의 감화와 인도를 받기 위해 겸손해야 한다. 또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경영에 대하여 무지할 수 있음을 고백하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지금도 교회를 통치하시는 실천적인 모습이며, 이러한 모습 가운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분명한 증표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608 no image 성화는 세속적 정의를 구축한다.
편집부
1926 2015-02-10
성화는 세속적 정의를 구축한다. 한국교회의 윤리부재와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고 있는 오늘날, '휴머니즘적인 사회정의'를 마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속한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혹은 사회 정의를 주창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 칭의'를 약화시키려는 경향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공동선의 추구와 신자로서 중생자의 윤리가 뒤섞여 있는 기이한 현상으로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보겠다는 과욕이거나 혹은 구원받은 신자라면 의당히 사회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사회복음주의에 지나지 않음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명쾌하게 답변을 하고 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의를 사회의 정의 구현으로 찾지 않으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는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십자가 고난을 마다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사회 정의 구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칭의에 기반을 둔 성화로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것으로, 중생한 신자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살아가는 삶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곧 성화의 열매 중 하나인 ‘정의’인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이 추구하는 사회 정의라는 수준이 단순히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공리적인 개념의 ‘정의’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령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법'에 순종하며, 이 법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신자들이 추구하는 정의는 세속적 차원이 추구하는 정의보다 월등히 고상한 공평과 공의를 수행하게 되며, 여기에서 비로소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의를 모호하게 사회 정의와 혼합하여 그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것은 자칫 '기독교'를 단순한 '휴머니즘'으로 전락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이신칭의를 간과하는 그릇된 휴머니즘적인 하나님 나라 운동이 종교다원주의에 문을 열어주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성화의 길을 가고 있는 신자들의 윤리 의식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위에 서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607 no image 영원한 안식과 그리스도인의 삶
편집부
2001 2015-01-27
영원한 안식과 그리스도인의 삶 작금 베리칩 운운하며 ‘휴거를 대비하자, 깨어있어 신앙을 준비하고 천국 갈 준비를 하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특별히 새로운 것도 아닌 예전 것의 재판과 같은 이런 주장들에 순수한 신앙의 열정을 가진 교인들조차 현혹되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런 현상들은 극단적인 세대주의 신앙이 판을 치던 1980년대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의 공통된 주장은 ‘예수님께서 오실 날이 머지않았으니 어서 속히 신앙을 준비해서 대환난을 피하고 천국 갈 준비를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불타 없어질 이 땅을 버리고 저 하늘을 소망하는 삶, 곧 대환란을 피하고 휴거를 대비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삶은 더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을 다해 사랑하며,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사람의 최종적 목표는 영원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안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그분 자신이 친히 이루실 것이다. 반면에 우리에게는 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에 앞서 바로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해야 한다. 곧 우리는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살아가야할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것은 관념적 세계도 아니며 타계적 세상도 아닌 바로 ‘이 땅, 바로 여기’인 것이다. 영원한 안식을 대망하는가? 그렇다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회복된 소명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매일의 삶이 영원과 관계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신자라면 바로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처절한 역사를 바라보며 치열한 사투를 벌이는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예배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나아가 주님께서 핏값을 주고 사신 교회를 바르게 이루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영원을 대망하는 신자의 삶이다.
606 no image 교회 개혁의 출발점
편집부
2126 2015-01-27
교회 개혁의 출발점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문제가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 다시 말해 야고보 사도가 말한 행함이 있는 참된 믿음이 결여된 믿음의 문제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교회 개혁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거듭나게 하는 복음으로서의 근원적 개혁이 없다면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며, 오히려 교회 안에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사실상의 위선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부패는 교리의 부패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부패이다. 곧 구원에 이르는 참된 신앙의 도리가 강단에서 증거되지 않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중생자의 삶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죄와 비참을 깨달은 사람이 인생의 유일한 위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한다면 필연적으로 감사의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죄와 그 비참을 깨닫지도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요 삶의 주권자로 고백하지도 못한 채 형식적인 종교인으로 살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고자 하는 윤리적인 삶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것이 비록 부패에 점철되며 가증스런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보다는 나을지 모르나 본질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의 도덕과 윤리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만을 쌓는 도구가 될 뿐이다. 나아가 바로 그 도덕과 윤리는 유일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걸림돌이 되고 말 뿐이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교회 개혁은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일 뿐 결국에는 정죄와 판단, 그리고 또 다른 자기 의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그런 식의 교회 개혁은 사랑의 회복보다는 분노와 증오가 앞설 뿐이다. 교회의 회복을 소망한다면 근원적인 말씀의 개혁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강단에서 성공과 번영의 거짓 복음이 사라지고, 간증이나 윤리 또는 목회자의 개인 취향에 물든 철학과 같은 인간적인 교훈이 사라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개혁에의 여명이 비춰올 것이다. 교회의 개혁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개혁에 앞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개혁, 강단에서의 개혁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회복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 개혁을 이끌기 때문이다. 복음만이 생명을 제공하며, 참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들을 거듭나게 한다. 그러한 생명을 가진 신자만이 참 생명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로써 사랑으로 역사하는 참된 믿음을 가진 신자만이 참된 신앙고백과 더불어 신자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교회 개혁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605 no image 공적 신앙을 부인하는 자들을 향한 경고
편집부
2198 2015-01-13
공적 신앙을 부인하는 자들을 향한 경고 교회는 모름지기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있는 한 몸이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역사적으로 교회가 고백해 온 공적인 신앙고백의 터 위에 서 있음으로써 교회의 통일성과 거룩성과 보편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를 떠난 단체 혹은 개인이 있다면 공교회는 이들을 이단 혹은 사이비로 규정하여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을 보존하고, 이단 혹은 사이비들의 거짓 교훈과 미혹으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작금 불건전한 사상을 앞세워 사람들을 미혹하여 공적 신앙을 유린하고, 가정을 파괴하거나 개인을 죽음으로 몰아세우는 이단 및 사이비들의 악행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심지어 지난해 말에는 한국에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며 사람들을 미혹하던 거짓 예언가가 신자들을 농락하기도 했었다. 이것은 절대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포스트모던이즘의 현상이라고 치부하기 이전에 지교회들이 공적 신앙고백에 대한 권위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으로부터 그 원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2000년대 이후에 급작이 외형적으로 몸집을 부풀린 소위 인기 있다는 목사들의 일탈을 비롯해, 여실히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이단 사이비로 규정하지 못하고 방관해 온 공교회의 눈치 보기도 이와 다를 바 없다. 그러다보니 정작 이단 사이비들까지도 공교회의 결의와 신앙고백의 권위마저도 부정하고, 오히려 이단 사이비들이 사회 법정에 공교회를 고소하는 기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심지어 이단 사이비들이 공교회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만행도 서슴지 않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문제는 이단 사이비들에게 미혹된 사람들의 만행보다는 교회의 울타리 안에 교묘하게 위장하여 잠적해 있는 거짓 목사들이다. 이들은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을 보란 듯이 유린하면서도 기름기 넘치는 웃음으로 여전히 신자들을 미혹하고 있다. 이들을 가리켜 우리 주님은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고 경고하신 바 있다. 이처럼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을 부정하며 거짓 교훈을 일삼는 자들은 우리 주님의 경고를 따라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지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604 no image 신옥주(은혜로교회) 측의 만행을 규탄한다
편집부
2846 2015-01-13
신옥주(은혜로교회) 측의 만행을 규탄한다 지난 1월 6일 본 교단 신년하례회에 무단 침입하여 행사장에 있던 인사들을 향해 무차별 밀가루를 뿌리고 계란을 던지며 폭력 행위를 저지른 신옥주(은혜로교회) 측의 만행을 규탄한다. 이날 만행은 우리 교단이 지난 99회 총회에서 신옥주(은혜로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 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조직적으로 행한 것으로 이것은 엄연히 법을 유린한 만행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우리 교단의 입장을 지지하는 교회들과 이를 보도한 방송국 등에 대해서도 무분별한 폭력 행위를 행사하고 있다. 이것은 공교회에 대한 도발이며,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을 향한 테러와 다를 바 없다. 공적인 교단이 어느 한 단체나 개인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공교단의 권한이며, 이것은 본 교단 소속 교회와 교인들을 거짓 교리로부터 보호하고, 이단에 빠진 교회의 교인들을 보호하고 선도하기 위한 합당하고 적절한 조치이다. 만일 해당 단체나 개인이 자신의 이단 규정에 대하여 이의가 있다면 정당하고 적법한 절차를 따라 이에 대한 신학적인 해명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아니면 해당 단체나 개인에 대한 공교회의 규정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주의주장을 철회하며 개선의 정을 실천하여 증명해 보여야 한다. 이것이 이단으로 규정된 단체나 개인이 마땅히 공교회의 지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이며 이로써 교회의 안녕과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이미 은혜로교회 측 대표들은 본 교단의 총회장과의 면담을 요구한 바 있으며,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본 교단은 이들과 회동할 약속 시간까지 서로 정해 놓은 상태였다. 이렇게까지 배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밀가루와 계란 등을 준비하여 조직적으로 본 교단의 신년 하례회를 방해한 것은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폭력적인 범죄이며 불법 행위로 이를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은혜로교회와 관계자들은 본 교단 및 한국교회 앞에 엄중히 사죄해야 한다. 또한 향후 어떤 방법으로든 공교회를 상대로 폭력 및 비방 행위에 대한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한다. 또한 정당한 언론 보도를 방해하는 그 어떤 행위도 자제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사법당국은 이들의 만행을 엄중하게 수사하여 관련자들을 처벌함으로써 차후 이와 유사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촉구하는 바이다.
603 no image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게 하라
편집부
2290 2014-12-30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게 하라 자본주의(capitalism)는 최소한의 노력, 최소한의 지출, 최소한의 희생을 통해서 최대의 효과를 얻어내고 싶어 하는 것을 삶의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 따른 성과를 바라보고 투자를 한다. 성과가 없을 것으로 판단되면 가차 없이 투자를 멈춰버리게 된다. 교회는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존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교회는 자본주의가 말하는 경제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곧 교회는 운영을 위해 재물을 필요로 하지만 자본주의 원칙이 통용되어서는 안 되는 곳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 원칙이 애당초부터 교회로 인한 어떤 성과를 기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구원의 방주로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기 위한 기구이며, 동시에 신자들의 성화에 필요한 은혜를 공급하는 기관으로 세우셨다. 따라서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복음 전파와 가르치는 사역의 제도는 신자들의 신앙을 일깨우고,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집단적인 성화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원하신다. 이런 점에서 교회를 설립하여 수완이 좋은 목회자를 세워서 자본이 탄탄한 교회로 키워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성과를 바라고 교회를 세우시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교회는 성과를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과는 인간의 욕심이고 만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교회에서 신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과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무너지게 하는 것뿐이다. 신자들은 교회를 위해 헌신해야 하며 자신의 욕심과 생각들을 포기해야 한다. 나아가 자신을 부인하는 것까지도 성령의 일하심이라 한다면 정작 신자들이 교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만일 성과를 기대하는 선교, 홍보를 기대하는 구제, 교회 채우기를 원하는 전도, 칭찬과 인정을 기대하는 봉사, 우리 교회의 교인으로 만들기 위해 주는 세례와 직분, 복을 기대하는 헌금 등등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자본주의 원칙에 따라 세움을 입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의 원칙에 의해서 세워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602 no image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을 따르자
편집부
2398 2014-12-30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을 따르자 교회의 교사인 목사를 비롯한 신학자들과 교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은 장로와 집사를 비롯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회원으로 부름을 받은 신자들은 교회가 공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신앙고백서들을 바탕으로 그 자리에 부름을 받았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모든 회원들은 역사적인 교회가 고백해 온 공적인 신앙고백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곧 공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아나타시우스신조를 비롯하여, 장로교회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대소요리문답 그리고 개혁파교회가 고백하는 세일치 신조인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도르트 신경 및 벨직 신앙고백을 자신의 공적인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에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은 모든 목회자와 신학자들에게 있어 성경을 강설하고 해설하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목사와 신학자들은 자신의 견해나 경험에 근거하여 혹은 자신이 습득한 지식에 근거하여 성경을 강설하거나 해설하지 않아야 한다. 성경은 목사나 신학자라 할지라도 사사로이 풀 수 있는 학문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다. 성경은 오로지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강설하고 해설해야 하는데 이것이 곧 목사와 신학자들의 의무이다. 목사와 신학자들의 강설이나 해설 또는 집필, 저작이나 강의들은 모두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에 의해 지지를 받아야 한다.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개인적인 사견이나 의견들은 어떤 이유라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 혹은 교회의 이름으로 또는 신학교 강단에서 선포하거나 발설하거나 출판해서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그 어떤 내용을 서로 변론하거나 판별하거나 이의를 제시하거나 변증할 경우에라도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서를 근거로 하여야 한다. 목사나 신학자들은 자신의 사적인 견해나 혹은 어떤 유명한 학자의 견해를 바탕으로 자기 주장을 변론하거나 판별하거나 변증할 수 없다. 이 경우에도 역시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이로써 교회는 거짓 교사나 이단 사이비들의 주장을 판별하고 대처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올곧은 신앙의 자태를 세대를 따라 지속적으로 전수하고 계승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목사와 신학자들은 자신이 목사로 임직받을 때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에 동의한다고 선서했음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601 no image 교회를 세우고 이 땅을 고쳐주소서
편집부
2255 2014-12-16
교회를 세우고 이 땅을 고쳐주소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자들과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으며 성령으로 성화되어 인치심 받음을 믿는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왜 그런지 정녕 교회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는 거룩한 교회 안에 위선자들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알곡뿐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존재한다.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지 못하고, 거룩한 성례가 올바로 시행되지 않으며, 정당한 권징이 실시되지 않을 때에 위선자는 더욱 더 증가한다. 형식적인 껍데기만 가진 종교적 그리스도인들이 범람한다. 차고 넘친다.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쉽게 스스로 가공해 낸 예수를 만들고 자기 복음을 추구한다. 성찬과 세례가 올바로 시행되지 못할 때 거짓된 무리가 교회 내에 쉬 들어오고 그들이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한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라.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들을 방어할 거룩한 권징은 존재하는가? 권징은 교권의 전횡을 위한 한낱 도구로 전락했거나 정당한 권징은 이미 무장 해제된 지 오래된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교회가 그 표지를 상실하고 있다. 물론 하늘 아래 순결한 교회라 하더라도 혼란과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한 교회이며 끊임없이 죄와 전투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느 시기,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회(會)가 될 만큼 타락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 그럼에도 우리가 소망을 놓지 않는 것은 이처럼 부패하고 황무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가 지상에 언제나 존재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교회의 머리시며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남은 자를 붙드시고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친히 남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교회의 거룩함을 위해 힘써 일하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가슴을 찢고 재를 뒤집어 쓸 주님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알고 눈물로 무릎 꿇는 주의 백성들이 필요하다. 성탄절을 맞아 우리는 쓰러지는 교회를 다시 세우고 이 땅을 고쳐주시기를 목 놓아 기도하자.
600 no image 성탄절에 생각하는 순례자적 종말론
편집부
2298 2014-12-16
성탄절에 생각하는 순례자적 종말론 세상이 불의로 가득차고 좀처럼 희망이 없어 보일 때 우리는 종종 쉽게 낙담하기 쉽다. 그리고는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야. 소망이 없어!"라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게 된다. 죄 많은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고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라며 변명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우리 가운데 와 있고 주의 거룩한 백성들을 통하여 세상 가운데서 자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로 오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과 신약의 성도들은 모두 죽음을 종말로 보지 않았다. 종말에 대한 그들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 많은 세상에서 불의와 부조리를 경험할 때마다 부활의 산 소망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았다. 그분이 다시 오셔서 모든 약속을 이루고 완전한 구원과 영생을 베푸실 것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피조물들의 탄식을 갚아주시며 썩어짐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하게 될 그날, 곧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본 것이다. 죄 많은 세상 속에서 절망하는가? 도무지 이 세상은 가망 없다고 고개를 휘저으며 낙담하는가? 그러나 신자들은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서 성장하고 있으며 이 땅 가운데서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재림을 대망하는 신자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들은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죄 많은 세상에서 오히려 희망을 바라보게 된다. 이 세상이 악해져 갈수록 소망을 가지는 것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절망을 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셨고 또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나라가 있지 않는가?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지 않은가?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는가? 그렇다면 바로 여기, 오늘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자.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아들이자. 여기에 성탄의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죄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신자의 삶이다.
599 no image 교리 없는 기독교는 불가능하다
편집부
2484 2014-12-02
교리 없는 기독교는 불가능하다 이 세상에서 모든 주장이나 이념들과 견해들은 모두 교리(敎理)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교리 없는 기독교”를 외치는 자들의 주장 역시 하나의 교리이다. 그래서 말의 모순이 있는 주장들은 거짓 교리이다. 그러므로 교리 없는 기독교를 외치는 자들의 주장은 그 자체가 거짓 교리이다. 참된 교리란 어떤 교리가 성경의 가르침에 가까운가, 나아가 기록된 계시로서 성경을 얼마나 정확하게 교리적으로 진술하였는가에 달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교리 논쟁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가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은 교리 논쟁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추적해서 확인해야할 할 부분들이 많이 있고 그것을 추적하기 위하여서 어느 정도 뛰어 넘어 갈 수 있는 사색의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로 살고 싶은 교인들에게 교리 논쟁은 실로 불필요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가시적인 복에 목매달아 살아가기 때문이다. 비록 교회의 여러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하지만 정작 근본적인 주제에 대하여서 붙잡고 씨름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대충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심사를 가지고 매우 중요한 사색의 논점들을 무시해 버린다. 거짓 신자들이다. 실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이 참된 신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떻게 자신들에게 제대로 투영되고 있는지에 대하여서 목말라 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자신이 제대로 진리를 알고 있는가라는 의문도 갖고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교리가 참된 것인가에 의문도 갖는다. 그것이 살아 있는 신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 확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의심할 수 없는 실체에 이른다면 더욱 확신 있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의심을 위한 의심이 아닌 진리를 알아가고자 하는 도상에서 의심이란 매우 소중하다. 실로 맹목적인 신앙이 거짓 신앙이다. 맹목적인 교인들이 거짓 신자들이다. 참된 신자는 진리에 대한 사실 확인에 목말라하게 되어있다. 이것이 진리를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신자들에게 중요한 삶의 자세임을 명심하자.
598 no image 신학이 신앙을 파괴하지 않도록 하라
편집부
2185 2014-12-02
신학이 신앙을 파괴하지 않도록 하라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일과 관계있다. 이 말은 신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담지하고 있는 진리에 대한 가감 없는 바른 진술과 오늘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현실과 삶에 대한 진술을 동시에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영원이 시간과 맞닿는 자리에 신학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도 없고 시대의 제약을 일부러 걷어찰 필요도 없다. 오히려 시대의 문제를 부둥켜안고 시대와 더불어 몸부림쳐야 한다. 이것은 신학으로 하여금 시대성의 제약에 따르는 겸손과 함께 시대적 과제를 목표로 하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도록 도전한다. 이것은 미국 칼빈신학교의 멀러 교수가 말한 "영원한 진리에 대한 시대적 재진술"이라는 신학의 목적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신학이 가지는 시대성의 한계와 시대성이라는 목표는 자칫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선포하는 불변하는 진리를 왜곡하며 변개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신학이 '시대의 아들'이 되는 순간인 것이다. 곧 '영원에 잇대어 오늘을 살아가야할 신학'이 '시대의 이름으로 영원을 도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순간, 시대에 대한 적실성이라는 명분으로 성경이 포함하는 변하지 않는 진리는 재해석되고 변질되고 만다. 그래서 "신학이 당신의 신앙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조심하라"라는 문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명심해야할 권고로 남아 있다.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진리를 난도질하며 시대정신으로 불변하는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신학이 영원을 도발하며 진리를 변개하는 문제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현대의 신학적 경향은 이미 영원을 시대성에 가두어놓고 변하지 않는 진리를 변하는 시대적 가치로 이리저리 마음껏 요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학은 반드시 필요하다. 게다가 신학의 시대적 과제는 너무나도 중요하다. 신학은 바로 그 시대의 문제와 도전에 대한 응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신학이 '진리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신학이 우리 시대의 언명(言明)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또한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과 현실을 부둥켜안아야 하지만 그것이 영원한 진리를 파괴하는 방식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시대성의 이름으로 콘텍스트가 텍스트를 뒤엎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이다.
597 no image 지켜져야 할 목사의 선서
편집부
2380 2014-11-18
지켜져야 할 목사의 선서 현대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기원전 460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히포크라테스의 원래의 선서문을 상당부분 변형하거나 축약하여 194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계의사협회(WMA)가 작성한 것이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나치의 범죄에 의사들도 적극 참여했던 비극을 반성하는 의미로 선서하도록 제정한 것이라고 한다. 1948년도부터 사용되고 있는 현대의 선서는 “나는 인류에 봉사하는데 내 일생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라는 문구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위협을 받더라도 인간의 생명을 그 시작에서부터 최대한 존중하며, 인류를 위한 법칙에 반하여 나의 의학지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이 모든 약속을 나의 명예를 걸고 ‘자유의지’로서 엄숙히 서약한다”고 마무리하고 있다. 이러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인간의 육신적 생명과 관련하여 가장 숭고한 선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장로교회의 목회자로 헌신하기 위해 강도권을 얻으려 하는 자들은 강도사 고시를 치르게 되는데, 고시에 합격한 자는 강도사 인허 시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 1)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함이 없는 진리이고 신앙생활에 기준이 됨을 믿습니까? 2) 본 장로회의 신조와 교리문답은 성경의 교훈을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순종하시겠습니까? 3) 본 장로회 헌법과 정치를 정당한 것으로 알고 그대로 승낙하고 따르시겠습니까? 4) 목회의 성직을 구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자하는 진정한 마음에서 울어난 것을 인정하십니까? 5) 어떠한 핍박이나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참고 견디며 교회의 화평과 성결을 위하여 헌신하며 복음의 진리를 보호할 것을 서약하겠습니까? 6) 주안에서 본 노회 치리에 복종하고 다른 노회에 이명할 때에는 그 노회의 치리에 복종할 것을 서약하시겠습니까? 이에 대해 강도사 인허를 받는 자는 각각 ‘예’로 대답하며 서약을 한다. 이러한 강도사 인허 시의 서약은 인간의 영적 생명과 관련한 일에 사역하는 자로서 행하는 가장 숭고한 서약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의사들과 목사들의 행태를 보면, 과연 그들이 행했거나 행하려고 했던 선서나 서약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차제에 목사들이라면 자신이 행한 맹세(선서)나 서약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그 내용을 다짐해야 할 것이다.
596 no image 정암 신학 강좌가 남긴 숙제
편집부
2238 2014-11-18
정암 신학 강좌가 남긴 숙제 한국교회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본격적인 유입은 수십 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알음알음 꾸준히 전파되었지만, 수면에 부상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개혁주의를 전혀 모르던 뭇사람들의 뇌리에 분명히 각인되고 크게 알려진 것은 최근 수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서 개혁주의는 백일도 안 된 갓난아기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곧 개혁주의 관련 도서들이 촉매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사실이다. 작금 많은 사람들이 개혁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개혁주의에 어울리는 집을 짓기 위해 공들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스스로 둘러친 한계에 갇혀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안타깝지만 우리나라 개혁주의자들 중에는 개혁주의를 개혁교회에서 몸으로 체득한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 신학자와 목회자, 성도들 모두 다를 바 없다. 유학 시절 개혁교회에 몇 년 간 출석한 사람들은 있지만,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그 토양에서 자라 개혁주의를 신앙과 삶으로 경험한 신자들, 그런 사람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구성원을 이루고, 여러 세대에 걸쳐 형성된 개혁교회는 아예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개혁주의에 대해 누군가 말하길 진정한 개혁주의가 아니라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토착화된 기독교가 그 본질적인 색깔을 잃은 것처럼 개혁주의는 그저 구호화 된, 자기 자신만의 개혁주의라고도 말한다. 개혁주의에 대한 이해와 추구하는 바가 잘못 되었다는 말이다. 개혁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마치 유행을 따르듯, 그 본류와는 전혀 다름에도 단어만 차용해서 자신은 개혁주의자라고 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혹은 개혁주의의 지향점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목말라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사는데 있지만, 그것을 외면한 채 신학 노름만 하고 있다. 철학자들과 같이 한 가지 주제만 깊게 파내려 가며 지적인 만족에 흡족해 하고 있다. 수맥 위에서가 아니라 바위 위에서 무의미한 곡괭이질만 하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무엇이 개혁주의고, 개혁주의가 추구하는 바가 무언인지 상기해야 한다. 더불어 개혁주의를 삶으로 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지적 노름을 그치고 삶을 살기 위한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신학과 신앙, 삶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정암 강좌는 이 점에서 우리에게 큰 숙제를 남겨 주었다. 곧 신학과 신앙, 삶의 균형과 조화를 우리 교회들이 이뤄내야 하는 것이다.
595 no image 패미니즘을 경계한다
편집부
2846 2014-11-04
패미니즘을 경계한다 현대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페미니즘은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남성 중심의 억압적인 구조, 곧 인류의 타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남성의 성차별에 반대하며 여성의 평등을 주장하려는 이들의 저항 심리에는 여전히 갈등과 대립이라는 전제가 숨어있다. 알다시피 페미니즘은 힘의 논리로 좌우되어 왔던 타락한 생태계가 그 출발점이다. 그러다보니 페미니즘은 언제나 억압과 차별에 대한 저항이 그 기조를 이룰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를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하나 됨에서 보여주듯이 본래 남녀의 관계는 대립과 갈등의 관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남녀 관계는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향한 아담의 절절한 사랑고백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남녀 관계의 원형 또한 남녀가 서로 상보적인 사랑의 관계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남녀 관계는 사랑 안에서 질서를 이루는 한 몸이다. 따라서 남녀의 관계에서 사랑이 결여된다면 남성의 억압적인 성차별만큼이나 여성의 평등을 위한 투쟁도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인류의 타락이 가져다 준 왜곡된 작용에 대한 또 다른 극단적인 반작용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랑에 기초한 동반자 의식이 결여된 평등을 위한 노력은 여전히 갈등과 대립의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성차별과 이에 따른 억압적 구조를 보고 있자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최초 창조의 원리에 따르면 남과 여는 하나님 나라를 공동으로 상속받을 동반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종말에 있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남녀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랑에 기초한 남자와 여자의 진정한 하나 됨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형상됨의 기초이다. 이것이 남녀의 질서와 조화, 평등의 문제 역시 저항과 투쟁이 아니라 사랑에 기초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제 교회 안에서는, 그리고 기독 신자들의 가정에서는 더 이상 억압적인 성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혹시라도 이에 맞선 폭력적인 저항과 투쟁 또한 버려야 한다. 남과 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부르심에 진정한 하나 됨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남녀는 하나님 나라를 공동으로 상속받을 동반자로 부름을 받았다. 곧 남과 여는 함께 걸어가야 할 공동의 상속자임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594 no image 추수감사절의 진정한 의미
편집부
2329 2014-11-04
추수감사절의 진정한 의미 해마다 오는 추수감사절은 풍년이냐 흉년이냐 하는 문제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바는 농부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추수감사의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풍년이 들었을 때도 추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며, 심각한 흉년이 들었을 때도 여전히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따라서 성도들은 직장이 안정되고 사업이 잘 될 때도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사정이 전혀 그렇지 못할 때도 여전히 추수감사절을 지킨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라면 결실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에 본질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설령 전쟁이나 재난 중에도 여전히 추수감사에 대한 마음은 있어야 한다. 성도들은 형편이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똑같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근본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에 연관되어 있다. 즉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해마다 수확하게 되는 양식을 통해 생명을 공급하시고 보존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추수기가 되어 일 년을 되돌아보아 수확의 양을 보고 감사의 정도를 정하는 것은 교회에 속한 성도의 자세가 아니다. 농사가 잘 된 사람들은 풍족히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가운데 감사절을 지키고 그렇지 못해 극심한 흉년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고통스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억지 추수감사를 드려야만 하는가? 물론 그런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우리가 날마다 양식을 먹고 살아가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햇빛을 허락하시지 않고 하늘의 비를 내리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양식이 공급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다. 올해도 많은 교회들이 결실기를 맞아 추수감사절을 지킬 것이다. 성도들이 때에 따라 감사하는 것은 거둔 수확물의 양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 이는 추수하게 되어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모르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소유한 우리는 추수의 계절을 맞아 참된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길 원한다.
593 no image 우리는 마리아 숭배를 반대한다
편집부
2912 2014-10-21
우리는 마리아 숭배를 반대한다 교회에서 예배의 대상은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은 불변의 진리이다. 그런데 천주교에서 최고의 예배 대상은 성 삼위 하나님이 아닌 ‘성모 마리아’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를 엄격하게 경계하며 반대하는 바이다. 처음부터 천주교에서 마리아 숭배 사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은 AD 3세기경에 동로마 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神母)라고 부르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이 이단 교리는 교회의 반대를 받았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이어 마리아의 영원 동정성(童貞性)이 대두 되었다. 이것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후 일생을 동정녀로 살았고 다른 죄 있는 자녀들을 생산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 역시 당시 교회에 의해 금지되었다. 하지만 오래 지 않아 마리아의 영원 동정성이 교리로 체계화 되었다. 그것은 AD 387년에 제롬이 ‘영원한 동정녀’라는 책을 통해 주장했다. 그리고 AD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 거짓 교리를 바탕으로 AD 7세기경에는 마리아 승천설이 주장되었다. 이 거짓 주장은 '마리아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취하셨기에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육체가 썩음을 원치 아니하여 그녀를 승천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1850년에 마리아 승천설이 선포되었다. 이 마리아 승천설에 근거하여 “성모는 천당에서 모든 천신과 성인의 모후가 되시며 우리의 중보가 되신다'는 마리아 중보설이 가공되었다. 1858년 12월 8일에는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마리아의 무원죄설’(Immaculate Conception)이 주장되었다. 이윽고 1954년 10월 11일, 교황 비오 12세는 이러한 주장들을 더욱 확장하였다. 그는 마리아를 '하늘 여왕‘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1954년 12월 8일, 교황의 칙령에 의해 마리아 숭배 교리가 천주교의 정식 신조로 인정되었다. 그 이후 천주교는 매년 5월 31일을 ’마리아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임을 분명하게 밝혔다(딤전 2:5). 따라서 예수 외에 마리아가 인류의 중보자라는 주장은 거짓 교리일 따름이다. 이에 우리는 마리아를 숭배하는 그 어떤 주의 주장이든 반대하며, 이를 엄히 경계하는 바이다.
592 no image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유익
편집부
2250 2014-10-21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유익 올해도 10월 31일이면 종교개혁기념일을 맞이한다. 그런데 해마다 맞이하는 기념일치고는 정작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유익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높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에 종교개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종교개혁은 소위 ‘성직자’들의 교회를 성도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때까지 교회는 전적으로 소위 ‘성직자’들의 교회였다. 성도들은 그저 성직자들의 명예와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한 부속품에 불과했다. 이에 종교개혁자들은 가장 먼저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예배찬송을 도입해 운율을 붙였다. 그리고 자국어로 강설하고 기도하였다. 이로써 성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몸으로 체득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예배를 봉사하기 위하여 교회의 직분을 회복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직분자들을 세워 봉사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교회에서 직분자들은 선출이 아닌 임명에 의해 선임되었다. 그리고 공공연히 직분을 사고파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회중에 의해 직분자들이 선임되어야 한다는 성경의 원리를 통해 소위 ‘성직자’ 중심의 교회와 예배 방식을 타파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어찌 보면 매우 보편타당한 이 놀라운 일들, 곧 자국어로 성격을 읽고 찬송을 드리고 기도하는 것 그리고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성도들의 선임에 의해 세우는 일들은 사실 수많은 성도들이 로마 천주교와 싸우기 위해 피를 흘려 죽음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그런데 작금에 이르러 매머드 교회의 등장과 더불어 소위 유명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가 운용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장로와 집사를 선출할 때 성도들의 자의적인 뜻이 아닌 목사의 의중에 따라 세워진다면 이 또한 로마 천주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차제에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다시 확인하고 종교개혁자들이 피를 흘려 회복한 교회와 예배의 중심에 있는 직분자들이 전적으로 성도들의 자의적인 뜻에 따라 세워질 수 있도록 돌아서야만 한다. 그리고 더 이상 직분자들이 예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모인 모든 성도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의 직분 회복이야말로 교회를 다시 찾은 종교개혁자들의 숭고한 희생을 길이 보전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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