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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 no image "오직 믿음으로"라고 말해야 할 이유
편집부
2480 2014-10-07
"오직 믿음으로"라고 말해야 할 이유 오늘날 믿음에 행함을 더하려고 하는 시도는 참된 믿음의 성격을 제대로 보지 못한데서 기인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적인 믿음, 역사적인 믿음, 이적적인 믿음도 같은 믿음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믿음은 애초에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잘못된 믿음들은 언약의 신실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각기 제 갈 길로 떠나고 말게 된다. 그것은 위로부터 기원한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기원한 자기 신념에 불과한 이념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한국교회에 유행하는 값싼 복음, 값싼 은혜, 잘못된 이신칭의 교리 이해에서 비롯된 소위 ‘말로만 믿는 믿음’에 민감한 나머지, 이 문제의 해법을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믿음에서 찾지 않고 이들이 지닌 일종의 신념과 같은 자기 믿음에다가 율법적인 행위를 덧붙임으로써 해결하려고 한다. '오직 믿음으로'가 아니라 '믿음 더하기 행함(행위)으로'라는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게다가 심지어는 믿었지만 신실하게 행하지 않으면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은 그 자체로 무의미해지고 행위만이 남는 순간이다. 하지만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은 오직 영원하신 성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다. 이 참된 믿음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약속하신 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구속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으시며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신다. 이것이 바로 참된 믿음이 지식(belief)이며 동시에 신뢰(trust)인 이유이다. 그래서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죄와 비참을 깨달으며 유일한 위로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감사하게 된다. 나아가 그 은혜에 감사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만일 그러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애초에 믿음 자체를 소유한 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은 언제나 행함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단지 그 행함의 정도가 사람마다 다를 뿐, 참된 믿음을 소유한 신자들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행함이 존재하고 있다. 참된 믿음은 인격적인 신뢰이며 실천적 지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코 믿음에서 행함이 분리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590 no image ‘교리’와 ‘전통’은 구별되어야 한다
편집부
2539 2014-10-07
‘교리’와 ‘전통’은 구별되어야 한다 바빙크가 그의 교의학에서 잘 지적했듯이, 교회의 전통을 성경보다 '위에' 혹은 동등한 '옆에' 두는 것은 중세 교회가 범했던 실수였고 악습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것을 개혁하여, 전통을 성경 '아래에' 두면서, 오직 성경을 기치로 내걸었다.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나온 교리조차도 저런 '전통'과 같은 것이라고 혼동을 해버린다면 그것은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즉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성경 '아래에' 두고자 했던 그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교회의 전통은 소중하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과 구분되며, 반드시 성경 아래에 있어야 한다. 교리도 소중하다. 전통과는 다른 이유에서 소중하다. 교리는 성경에서 나왔기 때문에 소중하다. 따라서 이것은 성경 위에 혹은 옆에 혹은 아래에 두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교리는 항상 성경에서 비롯되며, 성경의 지지를 받는다. 따라서 교리를 배운다는 것은 곧 성경을 배운다는 것이다. 교리가 역사라고 하는 시간 속에서 다음 세대의 교회에 상속되면서 교회의 전통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출발점도 다르고 개념도 다른 것을 혼동하여 '교리와 전통은 배제해야 한다'거나, '교리와 전통을 배우기 전에 성경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펴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교리와 전통에 대한 개념의 혼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교리는 성경에서 나오고 성경으로 돌아가기에 성경 연구를 통해 성경과 다른 점이 밝혀진 교리가 있다. 그 교리는 즉시 자기 자리를 상실하고 개혁된다. 그 위치에서 개혁되지 않고 버티는 교리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단이다. 이처럼 교리를 만들기도 하고 개혁하기도 하는 주체는 오직 성경이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전통을 만들고 그 전통을 따라 잘못된 교리를 고수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단과 사이비를 양산하는 결과만을 가져올 따름이다. 이러한 개념조차 구분이 없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교리는 성경을 가로막는 전통일 뿐이다. 차제에 우리는 역사적인 보편 교회가 고백해 온 신앙고백서와 그에 따른 교리문답서에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문서들을 ‘전통’이라는 명찰을 붙여서 배제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들이 고백하는 역사적인 신앙의 내용들조차 무시하는 잘못된 관행을 낳을 뿐임을 명심할 일이다.
589 no image 총회에서 총회장의 직무
편집부
2328 2014-09-23
총회에서 총회장의 직무 장로교회는 ‘교회는 1인(人)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會)에 의해서 치리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가장 기본적인 정치 원리로 제시한다. 이런 이유에서 장로교회는 주교정치나 감독정치 또는 회중정치를 거부한다. 이에 장로교회는 지교회에 의해 선임된 직분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회의 곧 당회와 노회와 총회를 유일한 치리회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노회는 지교회의 당회에서 파송한 대의원으로, 총회는 노회에서 파송한 대의원으로 구성된다. 총회의 직무와 관련해 총회규칙에서는 “본회의 목적은 성경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에 따라 전국의 교회와 노회가 개혁주의 신앙으로 그 사명을 바르게 수행하도록 도우므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있다”(총회규칙 제2조)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총회는 “통치적이 아니고 봉사적이다. 총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사역한다”(교회정치 제17장 3조 4항)에서 정하고 있는 것처럼 “총회는 모든 교회들 또는 노회들의 단합을 위하여 필요한 일에 봉사하며, 논쟁을 가져올 치리 문제들은 노회 차원에서 해결하도록 한다”(교회정치 제17장 6조 1항)는 규정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총회장은 ‘총회의장’이라고 할 수 있다. 총회장을 ‘president’가 아니라 ‘moderator’라고 하는데 이 뜻을 직역하면 ‘조정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총회의 성격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규명된다. 곧 “총회는 상설 기관은 아니고 일시적 회합으로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모든 교회들의 전체 회의이다”(교회정치 제17장 1조)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참조, 교회정치 제17장 3조 5항) 총회장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총회의 기간 동안에 회원들의 뜻을 잘 반영하여 조정하는 것에 있다. 총회절차 제7조에서 “총회장은 본 회 회무 일체를 총괄하며 본 회를 대표한다”(총회질서 제7조 1항)에서 보는 것처럼 ‘총괄’은 살핀다는 의미이지 다스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장로교회 안에서 총회장의 권한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이 말은 총회장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거나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장로교 정치 원리에 비추어 보았을 때 총회장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회원들의 원만한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원만한 총회의 합의는 총회장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수준 높고 교양 있는 회원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588 no image 교회가 신앙고백서를 익혀야 할 이유
편집부
2398 2014-09-23
교회가 신앙고백서를 익혀야 할 이유 신약 시대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영원한 사망의 법에 아직도 얽매여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고백한다. 곧 창세기 3장 15절의 예언처럼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사건을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이해한다. 곧 신약의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구약의 완성이며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려준 증표가 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성도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은 이들 가운데 거하시고 활동하시고 이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들을 나의 백성이라고 선언하신다(롬 9:25-26; 고후 6:16). 이러한 개념들은 옛 언약과 달리하는 새 언약의 개념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따라서 부활 사건 이후에 존재하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자신이 영원한 삶으로 인도되었으며 바로 지금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또한 이제부터는 의문에 쌓인 법(율법)이 아닌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법 곧 ‘복음’ 안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나아가 재림 사건이 있을 때 비로소 영원한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소망해야 한다. 이 날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만이 온 인류의 심판주로서 모든 존귀를 받으시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신약의 성도들이 어느 위치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가를 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자기의 위치가 아직도 구약의 위치에 있다면 그는 여전히 예수의 십자가 구속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는 아직도 부활의 권능을 알지도 못하고 참예하지도 못하고 있다. 유대주의가 그러하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있다면 ‘새 질서’에 속한 새 사람인 것을 인식하게 된다. 곧 복음이 무엇이며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나아가 그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된다. 그 새로운 질서로 주어진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취하는 유일한 기관이 바로 교회이다. 그리고 이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속한 새로운 실재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뜻을 따라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 신자들에게 제시한 것이 바로 신앙고백서이다. 우리가 교회의 역사적인 신앙고백서를 항상 배우고 익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587 no image 교회의 임시직원으로서 ‘서리집사’의 위상
편집부
7194 2014-09-02
교회의 임시직원으로서 ‘서리집사’의 위상 우리교단 헌법에는 교회의 임시직원으로서 서리집사 제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교회 혹은 당회가 세례 받은 후 2년 이상 된 실실한 남녀를 선정하여 집사로 임명한 자니 그 임기는 1년이다”(정치 제4장 제3조 4항). 서리(署理)라는 말은 “어떤 조직에 결원이 생겼을 때, 그 직위의 직무를 대리함. 또는 그런 사람”이란 사전적 의미를 갖는다. 곧 대리(代理)와 대행(代行)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서리집사는 정식으로 선임된 집사는 아니며 집사직을 대리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곧 아직은 정식으로 안수를 받아 집사가 된 자가 아닌 자들 중에서 교회는 신실한 자로 집사 업무를 대리로 하게 하는 것이 서리집사이다. 그래서 서리집사는 안수 없이 1년마다 다시 임명을 받아야 하고, 그래서 교회들은 매년 연말이나 연초에 서리 집사를 임명하게 된다. 반면에 안수집사는 성경이 말하는 ‘집사’로, 사실은 서리집사와 구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말이다. 안수라는 명칭이 들어간 것은 집사 직분을 받을 때 안수를 받기 때문이다. 우리교단 헌법에서는 “집사직은 수직적으로 목사, 장로 두 직 밑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직분들과 수평적으로 병립란 구별된 직분이요, 항존직이다(행 6:3-3; 빌 1:1)”(정치 제 10장 제1조)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서리집사가 마치 안수집사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됨으로써 교회의 다른 직분 간에서 대해서도 오해의 소지를 낳고 있다. 곧 서리집사 위에 안수집사, 그 위에 장로, 그 위에 목사, 그리고 권사는 안수집사와 장로 사이를 줄타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서열이 보이지 않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죄악된 사람이 높은 신분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다. 헌법이 말하는 대로 교회 안에서는 어떤 이유로든 직분 간에 있어서 수평적일 뿐이며 결코 수직적이지 않다. 비록 교회의 임시직원으로서 서리집사라 할지라도 고유한 집사의 직무(정치 제 10장 제3조)를 수행함에 있어 타 직분에 대해 독립적이며 수평적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서리집사는 비록 임시직이지만 그저 집사라는 호칭이나 명예만을 누리기 위한 직분이 아니며, 엄연히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집사직을 대리하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차제에 성경이 말하는 내용과 원리에 따라 교회의 상황을 무시하지 않으며 교회의 직분관을 잘 유지해야 할 것이다.
586 no image 개혁주의 신학의 공공성
편집부
2196 2014-09-02
개혁주의 신학의 공공성 개혁주의 신학은 여타 다른 신학의 전통보다 기독교 신앙의 공공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구속 주일 뿐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판에 근거해 개혁주의 신학은 '창조'를 강조하며, 구속을 '창조의 회복'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은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고백하는 신앙의 장을 펼치기 마련이다.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인간의 영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나아가 제도 및 정책 등 국가와 사회의 모든 구조적인 조건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에서 개혁주의 신학은 삶의 현장과 유리된 신학의 이론으로 머물거나, 혹은 다분히 예전과 직제 등의 눈에 보이는 교회 건설에만 집중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특히 개인 경건과 관련된 구원론적 이해에 제한되는 경향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한 교회를 건설하는 것은 이 땅의 신자들에게는 매우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땅의 신자들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소명 역시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은 각각의 신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편으로서의 직업을 하나님의 부르심 곧 ‘소명’(召命)으로 이해한다. 곧 신자의 삶을 지지하는 방편으로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각각의 신자들에게 고유한 직업으로 부르셨음을 고백한다. 따라서 모든 신자들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부귀영화’ 혹은 ‘입신양명’의 길을 기꺼이 포기하고 오로지 교회의 한 회원으로서 교회를 지지하고 계승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헌신해 왔다. 곧 개인의 삶에서 누리는 풍족함과 풍요로움보다는 교회를 지지하고 보존하고 유지하는 일에 인생에 있어서 더 큰 비중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최소한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개혁주의 신앙을 추구하는 신자들이라면 개혁주의 신조와 교리 그리고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소중함뿐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영역에서 부여된 직업으로서의 소명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질서 있게 살아간다는 공적인 신앙 역시 소중하게 고백해야 한다. 이러한 신자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유효한 삶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585 no image 교회 안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편집부
2186 2014-08-19
교회 안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들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다양한 직업을 가지게 된다. 특히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신자들은 세속국가에 속해 있으며, 누구나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건전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귀천 없이 모든 면에서 성실하고 근면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바탕에 근거하여 교회 안에서는 세상에서 가지는 직업과 지위가 결코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 또한 세상에서의 성공여부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나 은혜인 양 직접 결부 짓지도 않는다. 만일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나 은혜인 것으로 여긴다면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그렇지 않은 삶을 누리는 신자들은 마치 하나님의 복과 은혜로부터 거리가 먼 사람인 것처럼 오해하게 되는 우려가 따른다. 나아가 교회의 직분자들인 목사나 장로나 집사들과 같은 지도자들이 세상에서 누렸던 과거 화려한 경력을 자랑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과거에 그가 어떤 높은 자리에 있었던가 하는 것은 교회에서 하등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또한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교육을 받으며 어떤 학위를 받았든지 결코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 교회에서는 그와 같은 세상의 것들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 조건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신자라면 누구나 아무 차별 없이 교회의 회원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러한 점에 있어서 분명한 자세를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나간 과거뿐 아니라 현재의 경력 역시 교회 안에서는 어떠한 긍지를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로 작용할 수 없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함께 교회를 형성해 나가는 일이 어렵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는 어떤가? 세상에서 높이 인정받는 사회적 신분이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거나 일종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순박한 교인들은 그들의 외형적인 배경이나 경력이나 지위를 부러워하게 되는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외모를 보고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들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584 no image 교회에서 남용되고 있는 직분자의 호칭
편집부
2597 2014-08-19
교회에서 남용되고 있는 직분자의 호칭 한국교회에서는 종종 교회의 직분과 연관되어 있지 않고서도 스스로 직분자임을 자처하는 경우들이 간혹 있는데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교회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세워지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교회를 충만케 하기 위해 교회의 머리이신 주께서 주신 선물이다. 이 선물은 오직 교회를 위한 것이며, 역사 가운데 존재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상속하여 유지, 보존하기 위해서 하신 주님의 선물이다. 이 사실에 근거해 모든 직분은 반드시 교회로부터 비롯되어야 하고, 교회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교회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직분은 없으며, 교회와 연관되지 않는 직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총회헌법 제1장 제6조). 이처럼 교회의 직분인 목사, 장로, 집사와 같은 직분(office)은 모두 교회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직분자들은 교회를 굳건하게 세우기 위해 임직을 받는다. 따라서 교회의 직분자들은 전적으로 교회의 회중에 의해 선임되어야 한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신약교회에 직분자를 주실 때에 그 행위 주체를 회중에게 맡기셨다. 그러므로 직분이 교회로부터 나온다고 할 때에 그 실제적인 적용은 바로 “회중의 선택에 의한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 사실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 중 하나인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31조 “교회의 직분자들”이라는 조항에 언급되어 있다. 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과 장로들과 집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규정된(stipulated) 대로 기도와 선한 질서를 따라 교회의 합법적인 선거(election)를 통하여 선출되어야(chosen) 함을 믿습니다”라는 내용으로 표현되어 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파) 헌법(1982년 판) 제3조 “합당한 부름의 필요성”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직분에 합당한 부름을 받지 않고 스스로 그 직분을 취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교회로부터 현재 부름이나 세움을 받지 않은 직분자들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예전에 어떤 직분을 받았다 할지라도 현재 그 직분에서 은퇴하였거나 그 직분을 수행하지 않고 있다면 더 이상 직분자로 자처하거나 부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583 no image 기독교가 로마 천주교와 화해할 수 있는가?
편집부
2436 2014-08-05
기독교가 로마 천주교와 화해할 수 있는가? 최근 기독교와 로마 천주교 사이에서 화해의 무드를 펼치고자 하는 몇몇 인사들이 기독교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과연 이 사람들은 무엇이 진정한 화해인가를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서로 이권이 다른 사안에 따른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또는 권력을 가진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에서, 또는 권력과 상관없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화해와 용서라는 주제는 그리 단순치 않음이 분명하다. 그 가운데서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 종교 간의 갈등이며, 같은 종파 가운데서도 신학적인 갈등에는 화해와 용서라는 단어조차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이러한 갈등이 이념화가 되면 참으로 그 자리에는 화해와 용서가 비집고 들어설 틈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가 된다. 그러나 화해와 용서에도 최소한의 원칙이 있다. 곧 죄의 문제야말로 화해와 용서의 핵심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죄를 간과한 화해와 용서는 결코 진정한 화해와 용서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도 반드시 죄의 문제를 직시하고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할지라도 결코 죄를 간과하지 않는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라. 십자가는 사랑뿐 아니라 공의도 함께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킨 유일한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키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 사랑 앞에서 처절하고 부끄러운 죄를 보며 애통해하고 진심으로 사죄의 고백할 때 비로소 참된 용서와 진정한 화해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와 화해를 해야 한다면, 그리고 참으로 용서를 기대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진심으로 사죄의 고백을 해야 한다. 특히 로마 천주교는 지난 1500년 동안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들에 대해서 그리해야 한다. 그리고 로마 천주교의 거짓 교리에 사로잡혀 있는 전 세계의 지교회들이 교회의 신앙고백에 따를 수 있도록 해방시켜야 한다. 물론 용서는 그보다 앞설 수 있다. 상대가 어떠하든지 간에 일방적으로 용서를 선포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화해는 쌍방적이다. 진정한 화해는 일방적인 용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때 비롯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82 no image 로마 천주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편집부
2953 2014-08-05
로마 천주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로마 천주교가 주장하는 교리를 보면 그들이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들의 주장은 사도들이 교회에 전해준 성경 66권의 가르침을 왜곡시키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거짓 교리를 만들어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종교일 따름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허황되고 미신적인 몇몇 교리들은 다음과 같다. AD 300년,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십자가를 그리는 소위 ‘성호’라는 것을 만들었다. 375년, 천사들과 죽은 성도들에 대한 숭배가 시작되었다.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마리아에 대한 예배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교리를 제정했다. 590년, 그레고리 1세가 교회 황제로 취임했다. 593년, 그레고리 1세가 연옥 교리를 주장했다. 600년, 그레고리 1세가 기도와 예배에 라틴어만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800년, 마리아와 죽은 성도들에게 기도하게 가르쳤다. 788년, 십자가와 유골 숭배를 시작했다. 998년, 금요일과 사순절 금식이 시작되었다. 1079년, 그레고리 7세가 성직자의 독신을 규정했다. 1184년, 종교 재판이 시작되었다. 1215년, 인노센트 3세에 의하여 화체설이 제정되었다. 1215년, 인노센트 3세에 의하여 고해성사가 제정되었다. 1220년, 떡을 숭배하는 의식이 시작되었다. 1414년, 콘스탄틴 회의에서 신도들에게는 성례식에서 떡만 주고 포도주를 금하게 했다. 1439년, 피렌체 회의에서 연옥에 대한 교리가 선포되었다. 1445년, 트렌트 회의에서 유전이 성경과 같은 권위가 있다고 선언했다. 1546년, 트렌트 회의에서 외경을 정경에 포함시켰다. 1854년, 피우스 9세가 마리아 무원죄 잉태설을 주장했다. 20) 1870년, 피우스 9세가 소위 교황의 무오설을 주장했다. 이러한 저들의 주장들은 그 어디에서도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저들은 성경이 아닌 것들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그 거짓 위에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주장들을 조작해 낸 것이다. 차제에 우리는 천주교에 속한 교인들이 지금이라도 차갑고 어두운 거짓 교리의 올무에서 벗어나 따스하고 광명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581 no image 부활과 성찬
편집부
2105 2014-07-22
부활과 성찬 사두개인이나 자유주의자들이 아무리 부활을 부인한다 해도 부활은 분명한 진리이다. 부활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며, 장차 일어날 일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과학과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이성으로 보기에 합리적이지 않은 것들이 분명히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불합리나 비합리가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의 이해력으로는 도무지 담아낼 수 없는 초합리적인 것이다. 부활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신비로운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처럼 부활은 초자연적인 것이기에 사람의 논리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부활은 그 어떤 인간의 논리로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기에 설령 부활이 인간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더라도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 진리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논리로 다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러한 부활과 관련해 교회는 성찬을 행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성찬이 우리를 위해 찢기신 예수님의 몸과 우리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성찬을 예수님의 죽음과만 연결시키고 있다. 하지만, 사실 성찬이야말로 주님의 부활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으신 분으로 끝났다면 성찬은 썩은 빵과 썩은 포도주에 불과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싱싱한 빵과 잘 숙성된 포도주로 성찬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께서 죽음 가운데 계셨던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를 얻게 된다. 또한 그렇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사망 권세에서 구원하여 생명으로 인도케 하셔서 지금 현재 살아계신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에 참여케 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죽은 자로서가 아니라 산 자로서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이 살려주신 자들만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성찬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 이로써 우리는 살아나셔서 지금도 지속적으로 우리를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살려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산 자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고 우리 또한 살리실 것이다. 이렇게 성찬을 통해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과 연결되어 있음을 명심하자.
580 no image 소위 ‘교황’(敎皇)이라는 칭호에 대해
편집부
1930 2014-07-22
소위 ‘교황’(敎皇)이라는 칭호에 대해 천주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것에 있어서 기독교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지금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시다는 것에 대해서도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하심을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데 비해, 천주교회에서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시므로 이 땅 위에 그를 대리하는 사람(vicar)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의견의 차이가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에 근거해 생각해 볼 때에 과연 ‘교황’이 있을 수 있는가를 근본적으로 의문시하게 된다. 또한 교황제도가 성경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여기기에 우리는 교황을 인정하지 않고, 보다 성경적인 교회의 정치체제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교황제도 때문에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믿음과 실천을 오직 성경에 근거하려고 노력할 때 교황제도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반되는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했기에 이를 과감히 거부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교회의 직분자들은 다 동등하며, 어느 지역 교회나 그 교회의 직분자들이 다른 지역의 교회나 그 직분자들보다 더 우월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천명한 바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교황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천주교회가 말하는 교황’, ‘천주교회의 이른 바 교황’, ‘소위 교황’ 등으로 언급하고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런 뜻으로 말한다고 하면서도 마치 그가 실제로 ‘교황’(敎皇)인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인상을 주는 일이 세속 매스컴으로부터 우리의 언어에서 사라져야 한다. 이땅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교황이라는 자가 과거 천주교 신자들 중 일부에 대해서 복자(福者, the blessed)로 선언하는 시복식을 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을 믿는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는 대로 모두 성인들(saints, 聖徒)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주교회의 비성경적이며 배타적인 성격을 가진 교황제도를 거부하며 천주교회가 드러내고 있는 잘못된 제도, 잘못된 용어, 잘못된 믿음은 모두 다 제거되어야 한다고 천명하는 바이다.
579 no image 투명해야 할 외부 강사 섭외
편집부
2456 2014-07-08
투명해야 할 외부 강사 섭외 얼마 전 서울의 모 교회에서 시무하던 한 장로의 죽음과 관련해 목회자의 비자금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이와 관련해 그 교회 담임목사는 지난 6월 29일 주일 설교에서 자신이 얼마나 청렴한가를 주장한 뒤, 설교 말미에 “한 때 제 집회 사례비가 교회 1년 재정과 맞먹은 적도 있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지금 이 교회는 6만 여 명의 출석 교인에 년 600여억 원의 예산을 집행하는 규모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실 일부이기는 하지만 몇몇 유명하다는 목사들의 설교나 강사 사례비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한 번 설교에 기백 만 원을 호가하거나, 한 번 집회의 사례금으로 강사의 한 달 사례금을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이처럼 오랜 한국교회의 관행으로 치부되어 왔던 외부 설교자나 강사의 사례금 문제로 인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의혹의 눈길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차제에 이러한 목회자 개인의 치부와 관련해 한 치의 의혹이나 부끄러운 일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에 목회자의 설교나 강사의 초빙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시행할 것을 제안한다. 1) 외부 설교자나 강사의 초빙과 관련해 초청하는 교회와 파송하는 교회 사이에 충분한 합의가 사전에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제반 경비와 사례 및 예우와 관련해서도 두 교회 사이에 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2) 무엇보다도 먼저 지금과 같이 한 교회가 타 교회의 목사를 개인적인 접촉을 통하여 설교나 혹은 강사로 초빙하고, 해 당사자는 소속 교회에 이를 통보하는 식으로 진행된 비공개적인 초청 형식의 절차를 탈피해야 한다. 3) 한 교회가 외부 목사를 설교자 혹은 강사로 초청할 경우에는 소속 교회에 의중을 타진하고, 해당 교회의 허락을 받아서 절차를 투명하게 진행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할 때 더 이상 사례금 혹은 예우에 대한 문제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4) 정상적인 방법으로 설교자와 강사를 교환하는 일을 통해 당사자인 교회들은 서로의 신앙을 고백하고 확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의 신학과 신앙에 유익을 나누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할 때 한국교회는 이웃 교회들과 더불어 보다 풍성한 성도의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보편교회로서 교회의 보편성과 통일성을 더욱 견고하게 세워나가게 될 것이다.
578 no image 모든 성도들은 성경 박사가 되자
편집부
1901 2014-07-08
모든 성도들은 성경 박사가 되자 일부 목회자들이지만 박사학위 논문 표절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목사가 정당하지 않은 방법을 통해 박사가 되었다면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교회가 이런 문제로 인해 기독교 내부뿐 아니라 사회적 이슈가 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생각해 보면 이런 일조차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에서는 그 전부터 이보다 더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논문 표절을 넘어 다른 사람이 논문을 대필해준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에 한국 기독교 내부에 정당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박사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고민하게 된다. 단순히 큰 교회, 유명한 목사이기에 문제가 크게 부각되는 것과는 별도의 문제이기에 그렇다. 한국 교회에는 신학 박사, 목회학 박사, 선교학 박사, 기독교교육학 박사 등의 학위를 가진 이들이 수없이 많다. 우리는 다른 나라 교회와 달리 한국의 목사들 가운데 왜 이렇게 박사들이 많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 가운데 정당한 과정을 거쳐 학위를 받은 사람들을 이 문제에 포함시키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목사로서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외국에서 공부하지 않아도 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해당분야에 대한 연구 과정 없이 학위를 받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그런 유혹에 빠진 사람들은 세속화된 한국 교회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로부터 부여받은 목사 직분보다 세속국가가 수여한 박사학위를 더 높게 여긴다는 것은 스스로 교회의 위상을 낮추는 것과 같다. 교회 안에서 박사가 목사보다 더 나아보이고 명예롭게 보이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면 그것은 세속화된 증거이다. 우리는 국가가 수여하는 박사가 교회의 직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식견이 높은 일반 성도들이 많아져야 한다. 나아가 일반 성도들의 신학적 이해가 목사나 박사들의 지식 정도에 근접할 수 있을 만큼 자라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교회는 보다 건강한 풍토를 다지게 될 것이다.
577 no image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말의 의미
편집부
2233 2014-06-24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말의 의미 최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지 의견들이 분분하다. 이와 관련해 우리 신자들은 무엇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명백한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특히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고 할 때에는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와 관련해 좁혀서 생각해야 한다. 우선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하나님의 뜻’은 계시된 성경을 통해 명백하게 밝혀진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에 국한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감추어진 일”과 “나타난 일”로 대별된다(신 29:29). 흔히, 감추어진 일은 ‘작정적 뜻’이라고 하고, 나타난 일을 ‘교훈적 뜻’이라고 구별한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미래의 일은 가려져 있지만 과거의 일은 나타난 일이기 때문에 통상 그 과거지사들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이 경우 인간의 참혹한 현실이나 부조리, 죄 등도 하나님의 뜻이 되어 버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허용적 작정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작정이 과거사로 드러났다 하더라도 왜 그와 같은 경륜을 보이셨는지는 사실 여전히 감추어져 있기 마련이다. 사실 우리가 인생에서 여러 고난을 만나 그것이 과거사가 되었더라도 그 과거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모두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나간 역사적 요인들을 단순화 시켜서 특정한 해석으로 하나님이 그와 같은 것을 결과하셨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자기 위치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두는 교만과 다름이 아니다. 과거사라 해서 하나님의 모든 뜻과 의도가 나타나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오히려 이 과거의 사건들을 여전히 하나님의 감추어진 경륜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반면에 우리에게 명시적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교훈적이다. 이는 성경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주어졌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 여기에 국한해서 사용해야 할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교훈적인 뜻들에 국한해서 하나님의 뜻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고 따를 수 있는 부분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교훈하신 뜻들을 우리가 섭리적으로 순종해서 이룬 열매들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576 no image 역사를 해석하는 두 가지 관점
편집부
2003 2014-06-24
역사를 해석하는 두 가지 관점 역사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곧 '은혜의 왕국'과 '권능의 왕국'의 관점이 그것이다. 은혜의 왕국은 교회사에서 가장 큰 신학적 주제이다. 따라서 은혜의 왕국 관점은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세상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끌고 가시는가를 명확하게 이해하게 하는 렌즈이다. 동시에 교회사는 이 은혜의 왕국이 보편적인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확장되고 세워져 가는가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 '권능의 왕국'에 대한 해석을 필요로 한다. 곧 세계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의 역사를 이끌어 오셨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이것이 권능의 왕국 관점이다. 따라서 신학자들뿐 아니라 모든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이 두 가지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곧 우리들이 역사를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지금 한국교회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교회사학자들이 해야 할 신학적 작업이다. 그리고 이 신학적 작업에 있어서 교회사학자들은 교의학자들과 성경신학자들로부터 신학적인 도움을 받는 것이다. 곧 우주적인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식견을 보다 폭 넓게 갖추기 위한 신학적 작업을 위해 도움을 받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에서 '은혜의 왕국'으로 표방되는 세계교회사뿐 아니라 한국교회사의 흐름을 해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교회사학자들의 몫이라 할 것이다. 때문에 신학자들이나 교회사학자들은 세속사에서 발생하고 있는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이슈를 가지고 그것을 당장에 신학적으로 해석하려 들거나,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주장하기 위한 자료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즉 교회의 직분자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제시하는 것이 보다 올바른 자세이다. 작금 한국교회는 신학적인 판단으로 보거나 혹은 교회사적 판단으로 보거나 온갖 잡다한 탈교리적인 형태를 거침없이 보이고 있다. 교회의 직분을 갖고 있는 목사나 신학교수들은 이런 난맥상들에 대해 보다 신학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권능의 왕국이라고 하는 큰 틀을 통해서 은혜의 왕국 안에 있는 한국교회에 대한 보다 건설적인 해석과 방향 제시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575 no image 교회가 동성애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편집부
2137 2014-06-10
교회가 동성애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최근 들어 극히 일부이지만 동성애자들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밝히는 교회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경악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예수님도 동성애자들을 사랑하신다”는 표어를 앞세우고 있다. 물론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녀를 지으신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질서를 벗어난 죄악이라고 회개한 이후의 일이어야 한다. 잘 알고 있듯이 동성친애적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거부되거나 비난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 동성친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을 이 땅에 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개도해야 한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이와 관련해 화란 기독개혁교회 소속의 필스 교수의 동성애에 대한 견해는 참으로 우려스럽기만 하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가 성경적으로 산다고 하면서 그들(동성애자들)을 박대하고 차별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까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관심을 베풀었어야 했다는 것을 느꼈다. 만약 교회가 동성애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들을 교회의 울타리 안으로 이끌었다면 지금 이 문제가 이토록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회가 이들을 차별하지 말고 품을 때 사회를 향한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필스 교수의 말처럼 우리 기독 신자들이 동성애자들을 박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동성애자들은 마땅히 징계되어야 한다. 만일 동성애자들을 교회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드리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들이 죄악을 즐기는 소돔과 고모라성의 사람들을 품으려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동성애는 결코 주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거룩한 교회가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다. 교회는 그런 자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아울러 만일 교회 안에 그런 자들이 있다면 엄하게 권징해야 하며 그것에 대한 죄를 깨닫지 못할 때는 마땅히 출교해야만 한다. 그러나 동성애의 경험이 있더라도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들에 대해서는 교회가 마땅히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질서를 외면하고 막연히 교회의 울타리 안으로 감싸려 한다는 것은 교회의 세속화만 재촉하는 비성경적 자세이다. 그런 자들을 엄하게 귄징하는 것이 성경이 교훈하는 바 진정한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574 no image 다시 동성애인가?
편집부
1642 2014-06-10
다시 동성애인가? 지난 6월 7일 서울 신촌에서 동성애자들의 축제가 있었다. 이제 한국에서까지 동성애 축제가 벌어질 정도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더욱 확고히 해야 할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동성애에 대한 태도는 여전히 양극단으로 양분된 듯하다. 인권을 말하면서 동성애를 용인하는 태도와, 죄를 지적하면서 동성애자를 혐오하고 정죄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죄에 대해 지적하며 동시에 그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태도는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곧 ‘죄’를 ‘죄’라고 지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죄에 대하여 단호하게 지적하고 회개를 선포해야 한다. 모든 죄는 회개의 대상이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죄는 ‘호리’라도 버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에 대한 혐오는 당연하다. 죄를 지적하는 것이 결코 폭력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다름 아니라 죄를 지은 그 ‘사람’을 정죄하거나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내치는 태도이다. 다시 말해 바로 그 사람을 영원한 정죄 가운데 두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 그들 역시 십자가의 긍휼을 입을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역시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의 긍휼을 입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모든 죄인에게 동일하다. 모든 ‘죄’는 십자가에서 정죄 받으며, 동시에 모든 ‘죄인’은 십자가에서 용납된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모든 죄인은 십자가 안에서 용납되어야 한다. 동성애도 동성애자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 죄를 미워하다가 죄를 범한 사람까지 영원한 정죄 가운데 내어두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죄인을 사랑하다가 죄까지 용납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 죄에 대해선 단호하되 사람에 대하여는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동성애자들 역시 용서받을 죄인이라 여기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긍휼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 십자가의 긍휼 앞에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권해야 할 것이다.
573 no image 소위 공동체 ‘죄’ 고백을 배격한다.
편집부
2309 2014-05-27
소위 공동체 ‘죄’ 고백을 배격한다. 작금 한국교회에서는 소위 공동체 ‘죄’ 고백이라는 프로그램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교회를 병들게 하는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다. 어쩌자고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난무하고 있는지 참으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교회는 이 방법으로 급성장하였다고 입소문이 나기도 한다. 그리고 Y 전도단 같은 단체에서는 아예 ‘죄’ 고백 나눔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소위 가정교회를 한다고 하는 교회들의 공부 시리즈 중에는 리차드 포스터의 교재를 통해 지체 간의 죄의 고백을 독려하기도 한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이러한 공동체 안에서의 공개적인 ‘죄’ 고백은 잠시동안 심리적 위안과 자기 만족은 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죄성을 안다면 그로 인해 올무에 걸릴 수도 있고, 피차 간에 시험을 줄 수 있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이웃에게 잘못하여 피해를 준 것이 있다면 그 대상자를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변상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죄를 깨닫지 못하여 방황하는 지체들이 있다면 그것을 깨닫도록 충고하고 권면함도 필요하다. 하지만 주님께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의 내용을 공동체 앞에서 고백하게 함으로써 그것으로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된다면 이는 심리적이거나 다른 종류의 자기 의에 불과할 따름이다. 혹시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죄 고백을 듣고 자기 위안을 삼는 효과가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이 성경적이 아님을 분명하다. 심지어 자신의 부적절한 과거를 공동체 앞에서 고백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한 가정을 고통 속에 빠트리는 일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누군가 죄를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그 고백을 받는 상담자들도 진심으로 내담자를 사랑할 상태가 아니라면 함부로 고백을 받지 말아야 한다. 물론 죄책에 시달리는 연약한 지체가 있어서 그가 죄를 고백하고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며 자유함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죄의 고백은 어디까지나 당사자가 하나님께 고백하고 위로를 받는 것이지 상담자가 위로해주고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사안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죄의 고백, 특히 공동체 앞에서 행하는 공개적인 죄의 고백을 배격해야 한다. 은밀하게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며 말씀으로 위로받고 깨닫게 되는 것만이 온전한 회개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572 no image 위기의 한국, 이렇게 극복하자
편집부
1681 2014-05-27
위기의 한국, 이렇게 극복하자 지금 우리나라는 거의 모든 영역이 위기에 처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와 일반사회 뿐 아니라 기독교 역시 전혀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 내부가 차라리 더 심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투쟁하는 모습이나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개인적인 욕망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안일한 태도로 일관하는 위태로운 분위기를 조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최근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건’은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건이 단지 하나의 사건에 머물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내일 혹은 모레 또다시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바는 이런 일이 결코 급작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온갖 위험한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다. 차라리 정상적인 상태를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사회의 기득권층 인사들이 자기 욕망에 빠져 신뢰를 상실하게 되면 그 미래가 어둡다. 이는 국가와 일반사회 뿐 아니라 기독교계 역시 그와 동일하다. 성숙한 사회라면 자기를 희생하며 시민을 섬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자들이 많아져야 한다. 진정한 봉사자로서 자기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이기적인 국가 공직자는 필요 없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하기에 급급한 종교인이라면 도리어 교회에 해악이 된다. 그래서인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총체적으로 부실하기 짝이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이렇게 된 근저에는 극도의 전문성을 갖추어야할 기관의 책임자로서 비전문가가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에 상당부분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심각한 위기요소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전문성이 결여된 자를 파당을 조성하여 정부 기관의 요직에 앉히는 부당한 관행은 근절되어야 한다. 아울러 위기에 처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성숙한 신앙의식을 가짐으로써 전문성이 결여된 재주꾼이나 술수를 부리는 자들을 분별할 수 있는 냉철한 안목을 가져야 한다. 진정한 프로정신이 없는 아마추어들이 전문가 행세를 하게 되면 모든 것을 부실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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