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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5 (16:54:18)

신자들이 믿는 믿음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은 거의 같은 말이다. 곧 우리의 구원은 우리 편에서 하는 말이며 이를 하나님 편에서 하는 말이 곧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사실 성경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 두 가지로 집약되기도 한다. 등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구원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이 된다. 결국 영광이라는 것이 동양의 고전에서 흔히 말하는 입신양명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누군가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남다른 경력을 쌓고 유명한 교회에 나가고 일류 기업에 다니거나 고위직에 진출하거나 멋진 남자,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는 게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광은 우리가 좀 더 구원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하며 우리의 일생 동안에 죄는 죽게 하고 의는 살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고 우리의 죄인됨을 날마다 확인하고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놀라운 은혜를 날마다 찬양하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영광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하심에 담겨 있는 본질이다.

 

그리스도가 왜 죽으셨는가? 그는 왜 부활하셨으며 그는 왜 낮고 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는가? 그는 왜 수욕을 당하며 왜 십자가의 참혹한 저주를 감내하셨는가? 그것이 모두 우리의 구원 때문이다. 그 구원의 본질이 우리 삶에서 제대로 드러나는 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사람들로부터 찬탄을 받는 것,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동경하는 것, 큰 집에 살거나 유명한 교회를 짓는 것, 우리가 잘 나가거나 인정을 받을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죽어지고 우리가 낮아지고 원래 지으셨던 본연의 모습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고 날마다 새로워질 때 그 때 영광을 받으신다.

 

따라서 신자들은 결국 사람은 누구나 죄의 삯인 사망 아래에 있음을 인정하고 구원은 그처럼 사망 앞에서 무력한 인간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임을 믿어야 한다. 그러니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해주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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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1 no image 교회의 타락이 ‘구원론’ 때문인가?
편집부
2185 2014-05-13
교회의 타락이 ‘구원론’ 때문인가? 요즈음 한국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다. 목사들의 잘못된 처사 때문에 세상은 교회를 싸잡아 비판한다. 특히 근래에 대형교회의 이런 저런 잘못으로 인해 한국교회 전체가 매도되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목사와 성도들과의 불협화음이라든지, 교회내의 갈등으로 인해 법적소송문제가 제기될 경우 사회는 비판의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게 된다. 또한 이단들의 잘못된 행패까지도 기독교회의 잘못으로 치부되는 시대이다. 이와 같이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물론 교회가 사회의 비판이 있을 때 옷깃을 여미는 심정으로 자성하는 것은 바른 일이다. 그런데 근래에 이런 한국교회의 형편을 논하면서 일부 학자들이나 일부 매체들은 한국교회의 타락이 마치 잘못된 구원론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어떤 이는 한국교회가 “이신칭의”를 잘못 이해해서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말은 성도들이 바른 생활을 하지 않으면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문제이다. 우리의 행위가 구원의 요건이 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은혜로만, 그리고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만약 우리의 행위가 구원의 요건이 된다면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있을 수 없다. 세상에서 누가 자신 있게 “나는 전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속을 나를 위한 것으로 내가 믿을 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 한국교회가 지탄을 받고 있는 이 참담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들이 믿는 “구원론”이나 “이신칭의” 교리에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구원 받은 성도들의 삶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교훈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받는 것을 강조하지만 성도들의 삶도 바른 삶이어야 함을 가르친다. 교회가 사회의 비판을 받을 때 우리는 우리의 손가락을 밖을 향해 가리킬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가리켜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리더들은 뼈를 깎는 자성을 통해 복음의 본질과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570 no image 통일에 대한 우리의 마음자세
편집부
1733 2014-05-13
통일에 대한 우리의 마음자세 우리 민족이 남북한으로 분단된 지도 벌써 반세기가 훨씬 넘었다. 동일한 문화적 관습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한 민족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같은 민족이면서 총칼을 맞대고 서로 간 왕래할 수 없다는 것은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산가족이 되어 지근의 거리에서 생이별 상태에 있는 분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인간의 바람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사회나 국가적인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보기에 그럴듯하다고 판단되면 하나님도 그와 동일할 것이라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 땅에 살아가는 상식을 갖춘 사람들 치고 남북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순조로운 통일이 이루어질 날을 기다리고 어서 빨리 남북이 통일되어 아픈 상처를 씻어내고 자유로운 왕래 가운데 소통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렇지만 남북이 통일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막연한 주장을 펼치는 것은 곤란하다. 성경에는 그와 같은 교훈을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시대의 정치적인 안타까운 상황을 통해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더욱 겸손한 자세를 배우도록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단된 조국의 현실 가운데 존재하는 지상 교회와 모든 성도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신실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넘어 영원한 천상의 나라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가운데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경륜을 신앙의 눈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우리는 북녘 땅에 영원한 진리가 선포되고 증거되기를 바란다. 교회는 통일이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저들 가운데 천상의 복음이 올바르게 전파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북통일과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되는 문제를 별개의 것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설령 남북이 통일된다고 할지라도 교회가 그 본질을 상실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569 no image 통일에 대한 우리의 마음자세
편집부
2600 2014-05-13
통일에 대한 우리의 마음자세 우리 민족이 남북한으로 분단된 지도 벌써 반세기가 훨씬 넘었다. 동일한 문화적 관습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한 민족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같은 민족이면서 총칼을 맞대고 서로 간 왕래할 수 없다는 것은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산가족이 되어 지근의 거리에서 생이별 상태에 있는 분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인간의 바람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사회나 국가적인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보기에 그럴듯하다고 판단되면 하나님도 그와 동일할 것이라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 땅에 살아가는 상식을 갖춘 사람들 치고 남북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순조로운 통일이 이루어질 날을 기다리고 어서 빨리 남북이 통일되어 아픈 상처를 씻어내고 자유로운 왕래 가운데 소통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렇지만 남북이 통일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막연한 주장을 펼치는 것은 곤란하다. 성경에는 그와 같은 교훈을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시대의 정치적인 안타까운 상황을 통해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더욱 겸손한 자세를 배우도록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단된 조국의 현실 가운데 존재하는 지상 교회와 모든 성도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신실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넘어 영원한 천상의 나라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가운데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경륜을 신앙의 눈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우리는 북녘 땅에 영원한 진리가 선포되고 증거되기를 바란다. 교회는 통일이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저들 가운데 천상의 복음이 올바르게 전파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북통일과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되는 문제를 별개의 것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설령 남북이 통일된다고 할지라도 교회가 그 본질을 상실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568 no image 교회는 세상과 구별 되어야 한다
편집부
1920 2014-04-29
교회는 세상과 구별 되어야 한다 교회와 신자들의 가치관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 혹 그들의 비난이 두려워서 교회나 신자들이 자기 존재 의미를 상실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전적으로 자기들이 추구하고 있는 힘의 논리와 맘몬이즘에 물든 세속적 가치관을 근거로 교회와 신자들을 비난할 뿐이다. 그것이 마치 이 땅의 윤리이고 삶의 목적인 것처럼 교회와 신자들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와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의 요구에 일일이 답하거나 응대할 필요는 없다. 설령 애국심을 앞세운 국가관이나 세계 평화를 앞세우는 세계관을 내세우며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가는 길을 방해하거나, 자기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나 목적을 강요한다 할지라도 그러하다. 그들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죄에 오염된 힘의 철학을 그럴 듯한 이론이나 학설을 앞세워 포장할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드높은 삶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제시하는 애국심이나 세계 평화보다 훨씬 드높은 통치 이념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오히려 그들은 우리를 두려워하고 시기함으로써 우리들의 삶을 비방하고 폄하하는 것이다. 정작 세상 사람들은 국가에 대한 애국이나 세계의 평화에 그다지 크게 공헌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회의 부조리와 구조악을 양식으로 삼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러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이며, 그것이 마치 부와 명예를 가져다 주는 것처럼 호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그 길은 모든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멸망의 길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에 우리는 명백하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드러냄으로써 이 땅에서 교회로 혹은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야 한다. 아무리 그들이 이해를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을 설득하려하기보다는 묵묵히 우리가 가야 할 그 길을 가야 한다. 그 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다. 곧 아벨처럼 피를 흘리고 그 피가 땅에서 소리 지르는 삶을 살았던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죽음조차도 기꺼이 감수하며 교회의 예배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해야 한다. 참된 교회 하나가 서 있을 때 거기로부터 정의가 구현되며 공평이 실현되는 법이입니다. 이로써 평균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이 땅에서 힘없고 약하고 버림받는 자들에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가 실현될 때에 비로소 이번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며 유족들에게도 참된 위로가 될 것이다. 차제에 여론을 앞세워 유족돕기라고 하는 값싼 동정심을 유발하고 그것이 마치 공의나 공평인 것처럼 호도할 것이 아니라, 이땅에 참된 교회들이 반듯하게 세워져야 하고, 나아가 신자들의 삶으로 공의와 공평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들의 몫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67 no image 세월호 침몰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것
편집부
1870 2014-04-29
세월호 침몰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것 지난 4월 16일 오전 8시경 난파한 세월호 사고로 말미암아 수많은 생명이 꺼져가는 장면을 우리는 두 눈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희생자들과 유족들에게 깊은 위로를 표하는 바이다. 이번 사고는 총체적인 안전불감증이 가져다 준 ‘한국호’라는 국가의 위기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서 심히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사고의 원인이야 밝혀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아직도 구출할 수 있는 생명들이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구명조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온갖 허무맹랑한 소리로 가족들과 국민들을 기만하는 관계 당국자들의 태도는 우리 모두를 분노의 용광로 속으로 몰아가고도 남았다. 이념이나 사상이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살아있는 생명부터 구출하는 것이 순서이다. 그 상황 앞에서 잘잘못을 따지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면책하려는 야비한 행동보다는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는 일에 모두가 발 벗고 나섰어야 했다. 고위 공무원들로부터 관계 당국자들뿐 아니라 일선에 서 있는 공무원들까지 모두 그리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앞장서서 책임을 면피하려고 부당하게 행동한 것은 참으로 납득하기가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일주일을 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기적같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심지어 여론들조차 취재거리에 눈이 팔려서 정작 사실조차 파악되지 않은 기사들을 무차별 살포함으로써 유족들과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한 것은 두고두고 우리의 가슴에 피멍이 새겨지게 하고야 말았다.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죽음조차 불문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출하고자 했던 숭고한 정신의 희생자들의 죽음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한다. 이제 세월호는 말 그대로 세월이라고 하는 바다 속으로 침몰함으로써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들의 뇌리속에서 잊혀져갈 것이다. 그러나 유족들의 가슴에는 언제까지나 뿌리깊은 나무처럼 결코 잊혀지지 않는 상처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566 no image 언약은 그 자체가 은혜다
편집부
1932 2014-04-15
언약은 그 자체가 은혜다 우리는 종종 언약을 말할 때 하나님과 인간의 쌍방적 요소를 들어 수평대등한 구조로 착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언약이 언약 당사자간의 쌍방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약은 근원적으로 은혜의 성격을 띤다. 타락 전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셨던 행위언약도 역시 마찬가지다. 행위언약이든 그 이후 인간의 범죄로 맺으셨던 은혜언약이든 간에 언약 자체가 가진 속성상 언약은 성격의 차이가 다소 있을 지라도 모두 다 은혜의 차원에 속한다. 사실 무로부터 창조된 보잘 것 없는 존재인 인간과 만물의 영원한 조성자이신 하나님과의 언약 자체가 은혜이다. 언약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모든 만물이 그러하듯이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할 책임을 가지기 때문이다. 너무 간극이 커서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께서 미미한, 지극히 작은 존재인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언약을 맺어주신 것만으로도 피조물인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분만을 자신의 영원한 복과 유일한 상급으로 삼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그런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생각할 때, 언약적 존재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보잘 것 없는 존재인 피조물로서, 하물며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벌레만도 못한 우리를 언약백성 삼으신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가! 언약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받은 사실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 오늘도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무한 감사를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 미천한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친히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께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하여 영광을 올려드려야 한다. 이것이 인생의 첫 번째 존재 이유가 아닌가?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문에서 “사람의 첫째 되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사람의 첫째 되며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히 마음을 다하여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을 축하하기에 앞서 우리의 존재 위치와 의의가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565 no image 죽음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
편집부
2087 2014-04-15
죽음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 바울은 그리스도를 역사적인 사실로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의 삶 속에 항상 살아 있는 부활한 주로서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바울이 알고자 하는 ‘능력’은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가 부여받은 능력이었다. 곧 바울은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발휘되는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고자 했던 것이다. 바울은 먼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바울을 의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성령을 보내셔서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기에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항상 바울의 새로운 생명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임하는 성화의 권능이기도 하다. 바울은 이 성화를 ‘새로운 삶’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삶은 교회 안에 임재하신 성령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삶이다. 바울은 죽음으로부터 부활시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자신 안에서 창조적으로 활동하고 계심을 의심치 않는다. 이것은 자신을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기 위해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로써 고백된다. 이 말은 바울 자신과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죽음과 부활을 비롯한 그리스도의 생애의 모든 사건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결합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당하는 육체적 고통에 의해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다. 즉 믿음 안에서 당하는 성도들의 고난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신자들이라면 의당히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고난과 죽음이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활의 영광을 구하는 신자들이라면 기꺼이 죽음의 고난에도 참여해야 할 이유이다.
564 no image 십자가 없는 하나님나라 운동을 배격한다
편집부
2027 2014-03-25
십자가 없는 하나님나라 운동을 배격한다 우리는 종종 불신자들에게 남겨진 ‘일반은총’ 혹은 타락한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남겨두신 ‘잔여물’ 때문에 마치 저들 안에 선한 것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참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기곤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불신자 안에 있는 선한 그것들이 마치 하나님 나라의 가치라고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일반은총적인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장한다. 사실 언뜻 보면 하나님 없이 사는 불신자들이 더 나아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 이름하는 이들의 위선과 거짓, 그리고 교회의 부패는 하늘에 닿을 것만 같다. 그래서 차라리 예수를 믿느니 예수 안 믿고 착하게 사는 것이 낫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떡일 때도 있다. 하지만 세속적 선 개념과 교회의 선 개념을 결코 동일할 수 없다. 부패하여 텅 빈 조개껍질과 같이 된 교회라면 그것은 개혁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며 울부짖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들에 의한 휴머니즘적 가치를 하나님 나라의 가치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일반은총이라고 이름하는 것의 한계이다. 일반은총 그 자체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임에는 틀림없다. 사실 그것은 타락한 사람들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세상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자비로운 구원의 역사를 펼쳐나가시며 여전히 선한 일반은총의 선물을 남겨 두셨던 것이다. 이것을 잘못 이해할 때 주님의 교회를 비판하면서 “차라리 십자가가 없어도 저들이 낫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종교다원주의가 나오고 종교혼합주의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인본주의적 도덕종교가 나오고 심지어 십자가 없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파생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본주의적이고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우리는 심각하게 바라보며 배격해야 한다. 일반은총이 비록 죄 아래 있는 불쌍한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일지라도 오히려 타락한 사람들은 그것으로 ‘자기 의’만 더 쌓을 뿐이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를 어두운 세상에서 거룩한 하나님 나라로 옮기셨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게 하신다. 십자가 안에서 비로소 공의와 형평과 인애의 삶이 열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굳게 믿으며 고백하는 바이다.
563 no image 기독교 교리와 청교도 서적의 중요성
편집부
2181 2014-03-25
기독교 교리와 청교도 서적의 중요성 최근 교리와 청교도 서적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 여파인지 몰라도 ‘교리는 무용한 것인가?’ 또는 ‘신앙 서적, 특히 청교도 서적은 그 당시에만 통용 가능하고 오늘날에는 도움이 안 되는 고루한 것이기만 한가?’ 하는 질문도 높아지고 있다. 잘 아다시피 성경 말씀, 즉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진리는 모든 세대 모든 민족에게 동일하게 말하고 동일하게 적용된다. 교리는 그 진리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한 것이다. 바른 교리는 진리가 그러한 것처럼 모든 세대에게 진리를 이해시키고 가르치는 도구로 적합하며 유용하다. 청교도 서적 또한 진리를 신자의 삶에 적용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어떻게 진리대로 살아야 하는지 보여준다. 청교도는 여러 부류로 나뉘기는 하지만, 진리를 바르게 다루고 있는 청교도 서적은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사실 교리와 청교도 서적이 무용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것들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거나 읽어 보았어도 배우려는 자세로 읽은 게 아니라 날을 잔뜩 세운 시선으로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열린 마음으로 그것들을 읽은 사람은 무용하다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이 진리를 얼마나 풍성히 증거하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교리적 지식과 우리가 읽은 청교도 서적은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내용들을 접하게 되면 우리가 아는 교리와 우리가 읽은 청교도 서적에 담긴 지식들을 우리의 신앙 가운데서 조금씩 하나하나 경험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통해 그 지식들은 화석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교리와 청교도의 가르침을 신앙함 가운데서 경험할 때마다 그것들은 단지 성경을 머리로 분석해서 나온 내용들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그들이 신앙함 가운데서 실제로 경험한 말씀을 알기 쉽게 정리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래서 교리가 더욱 소중하다. 교리와 청교도의 가르침을 더 많이 알아야 한다. 그것들을 숭앙하자는 게 아니다. 그것들이 성경을 바르게 알도록 도와주기에 그 도구들을 충분히 활용하자는 것이다. 그것들이 진리의 보화를 우리에게 실제로 맛보게 해주기에 더욱 그리해야 할 것이다.
562 no image 거짓된 체험신앙, 이제는 버려야 할 때
편집부
2556 2014-03-11
거짓된 체험신앙, 이제는 버려야 할 때 우리 신자들 중에는 소위 체험신앙 또는 신비적 체험신앙을 갈망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 모양이다. 사실 종교는 세인들에게 신비적 체험을 제공하는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과연 기독교 신앙을 그와 같은 저속한 세속적 체험으로 대신할 수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기독교 신자들 중에는 소위 ‘예언기도’에 목이 말라 하거나, 심지어 ‘관상기도’와 같은 이교적 풍습을 수련하는 곳을 찾아다니기도 한다니 안타깝기만 하다. 이것은 마치 점집을 찾아가 알 수도 없는 자신의 운명을 타인의 손에 내맡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심지어 ‘성령치유집회’나 ‘천국간증집회’와 같은 허무맹랑한 낭설에 수천 명씩 모여 희희낙락거리면서 자신이 마치 성령의 치유나 받은 것처럼, 혹은 천국에나 갔다 온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우리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놀랍고 신비로운 신적 체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회심'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죄로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이 회심이야 말로 가장 신비스러운 체험이 아니겠는가. 이런 신자가 이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놀랍고 신비로운 영적 체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찬'이다. 성찬을 통하여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이 놀라운 영적 체험이야말로 우리 신자들에게는 더 없는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이 두 가지 체험보다 더 놀랍고 신비로운 종교적 체험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결단코 찾을 수 없다. 이 두 가지 영적인 체험은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비정상적인 체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회심과 성찬은 신비주의자들이 구하는 신비한 체험을 능가하는 신비로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신자는 이 두 가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맛볼 수 있다. 그러므로 회심했다 하면서 다른 체험을 더 구하는 자는 아마도 진짜 회심한 자가 아닐 것이다. 성찬을 맛보았으면서도 다른 체험을 더 구하는 자는 성찬을 제대로 맛본 자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회심’과 ‘성찬’과 같은 영적 체험 이외 더 이상의 신비로운 체험은 없다. 회심과 성찬이야말로 다른 것을 더 구할 필요가 없을 만큼,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신적이며 영적인 체험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561 no image 우리 안에 있는 근본주의를 경계한다
편집부
2154 2014-03-11
우리 안에 있는 근본주의를 경계한다 교회사에 있어서 근본주의는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의 범람으로 인하여 전통적인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복음주의 진영의 다양한 신학적 그룹의 교리적 연대를 가리킨다. 이들 근본주의 연대는 당면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방어 태세를 갖추기 위해서 신학적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일치하는 근본적인 교리를 중심으로 연대를 구축했다. 그 과정 속에서 띠게 된 근본주의자들의 부정적인 특징은 그들의 긍정적인 기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회자된다. ① 풍요로운 복음을 몇 가지 근본교리로 축소하여 과도한 비판을 일삼는다는 점, ②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역시 몇 가지 율법주의 계율로 축소하여 타인의 신앙을 비방하는 잣대로 삼는 점, ③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포용보다는 부정적인 자세로 과도한 비판과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자세를 견지한다는 점, ④ 이러한 것들을 기초로하여 상대를 배격하고 심각한 분리주의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축소, 공격, 배격, 분리 등등 이런 식의 태도를 종종 ‘근본주의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런 근본주의적 태도는 신학적 경향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 안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가끔 개혁주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근본주의적 태도를 취한다고 지적받곤 하지만, 현대신학의 영향을 받은 진보적 진영이나 진보적 복음주의자, 기독교 평화주의자, 심지어는 톨레랑스를 외치는 다원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좌우, 보수와 진보로 이념적, 정치적으로 대립되어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물론 합리적인 학문적 토론과 대화, 비판은 용인될 수 있고 오히려 널리 장려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자칫 과도한 토론과 비판은 감정적인 논쟁과 비난으로 이어져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일종의 정서적 폭력이 되어 독선과 분리, 그리고 배제로 나아가게 한다. 이런 근본주의적 자세, 곧 축소와 공격, 배제, 그리고 분리의 태도는 우리 모두 지양해야할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진정 개혁주의를 지향한다면 누구보다 냉철하게 우리 자신을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도록 경주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타인들을 공격하거나 배제하거나 분리시키는 잣대로 삼아선 안 될 것이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구원을 약속하고 있음을 명심하자.
560 no image 회심하지 않는 교인들을 경계한다
편집부
2257 2014-02-25
회심하지 않는 교인들을 경계한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회심하지 않고 단지 그들의 영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찾아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또 대부분의 경우, 본인이 스스로 회심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분명 그들은 교회를 다니며, 영접기도를 했다고 해도 그들이 다 거듭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실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앉아 있고, 또 자신들이 천국으로 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한다. 혹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회개하고 예수를 주와 구주로 믿겠다는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일깨워주시고 예수를 주와 구주로 계시해주시기를 의지하는 방법을 생략한 것은 아닌가?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는 회심을 이끌어내는 것까지도 우리의 책임으로 간주해 온갖 계획과 기법을 동원하는 것은 “성령의 역할을 빼앗고 우리 스스로를 중생의 대리인으로 삼는 것”이라는 지적한 바 있다. 즉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그의 인격과 삶의 전체적인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변화가 일어나 하나님께로 향한 삶으로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 바로 회심이다. 이런 회심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자하는 적극적이고도 전적인 삶의 방향 전환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회심은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써 돌이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결의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이 없이는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지 않으며 반대로 참된 회개 없이 온전한 믿음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돌아간 참된 회심자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슬퍼하고 자신의 죄를 미워한다. 참된 회심자들은 계속 자기중심적일 수 없으며 대신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 마음의 성향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을 갈망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한다. 참된 회심자들은 순전함과 의로움 속에서 살아가기를 갈망하고 경건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습관적으로 죄 속에 거하며 회개하지 않은 채 죄 속에서 살아가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아직까지 회심하지 않은 자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Selected no image 신자들이 믿는 믿음
편집부
1899 2014-02-25
신자들이 믿는 믿음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은 거의 같은 말이다. 곧 우리의 구원은 우리 편에서 하는 말이며 이를 하나님 편에서 하는 말이 곧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사실 성경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 두 가지로 집약되기도 한다. 등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구원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이 된다. 결국 영광이라는 것이 동양의 고전에서 흔히 말하는 ‘입신양명’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누군가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남다른 경력을 쌓고 유명한 교회에 나가고 일류 기업에 다니거나 고위직에 진출하거나 멋진 남자,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는 게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광은 우리가 좀 더 구원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하며 우리의 일생 동안에 죄는 죽게 하고 의는 살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고 우리의 죄인됨을 날마다 확인하고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놀라운 은혜를 날마다 찬양하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영광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하심에 담겨 있는 본질이다. 그리스도가 왜 죽으셨는가? 그는 왜 부활하셨으며 그는 왜 낮고 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는가? 그는 왜 수욕을 당하며 왜 십자가의 참혹한 저주를 감내하셨는가? 그것이 모두 우리의 구원 때문이다. 그 구원의 본질이 우리 삶에서 제대로 드러나는 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사람들로부터 찬탄을 받는 것,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동경하는 것, 큰 집에 살거나 유명한 교회를 짓는 것, 우리가 잘 나가거나 인정을 받을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죽어지고 우리가 낮아지고 원래 지으셨던 본연의 모습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고 날마다 새로워질 때 그 때 영광을 받으신다. 따라서 신자들은 결국 사람은 누구나 죄의 삯인 사망 아래에 있음을 인정하고 구원은 그처럼 사망 앞에서 무력한 인간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임을 믿어야 한다. 그러니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해주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558 no image 개혁주의 혹은 개혁신앙에 대한 오해
편집부
2191 2014-02-11
개혁주의 혹은 개혁신앙에 대한 오해 작금 한국교회는 두 가지 양상으로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 곧 지성적으로 되어 가거나 반대로 감성적으로 되어가는 현상이 그것이다. 그런데 전자는 소위 개혁주의 혹은 개혁신앙을 대변하는 것처럼, 후자는 소위 기복주의 혹은 기복신앙을 대변하는 것처럼 회자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누구나 후자의 흐름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나타낸다. 대다수 교인들은 자신을 개혁주의 혹은 개혁신앙을 추구한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종종 사람들은 개혁주의와 기복주의의 변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 결과 나타난 현상이 바로 개혁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오해에서 비롯된 비난 중 하나가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을 애써 외면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나머지 방종적인 생활로 자신을 내모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사실 개혁주의자들이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을 우리의 기치로 들고 있는 우리들은 이러한 비난 앞에서 좀 더 의연하게 우리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정한 개혁신앙인이라면 결코 자신을 방임한 상태에 내버려두거나 성도의 거룩한 삶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의 견인교리는 선택과 은혜를 말하며 성도의 책임을 결코 간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은 결코 성도의 견인 교리를 남용하지 않는다. 만약 자신이 선택을 받았노라 하면서 성도의 거룩한 삶을 의도적으로 방임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오히려 결코 선택받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선택받은 하나님 백성의 마음에는 필연적으로 거룩한 삶을 향한 경건한 열망이 솟구치기 마련이다. 단지 그 정도에서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경건을 향한 거룩한 열망이 결여된 사람이라면, 그가 제아무리 개혁신학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교리적 치밀함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거짓과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바리새적인 독선과 정죄의 쓴 열매만 맺게 될 것이다. 참된 성도는 구원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을 향한 거룩의 열망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늘 빚진 자의 심정으로 연약한 자를 향한 섬김과 배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557 no image 시대적 산물의 ‘신학’을 거부한다
편집부
1933 2014-02-11
시대적 산물의 ‘신학’을 거부한다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일과 관계있다. 이 말은 신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담지하고 있는 진리에 대한 가감 없는 바른 진술과 오늘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현실과 삶에 대한 진술을 동시에 포함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영원이 시간과 맞닿는 자리에 신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도 없고 시대의 제약을 일부러 걷어찰 필요도 없다. 오히려 시대의 문제를 부둥켜안고 시대와 더불어 몸부림쳐야 한다. 이것은 신학으로 하여금 시대성의 제약에 따르는 겸손과 함께 시대적 과제를 목표로 하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도록 도전한다. 하지만 신학이 가지는 시대성의 한계와 시대성이라는 목표는 자칫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선포하는 불변하는 진리를 왜곡하며 변개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신학이 시대의 아들이 되는 순간이다. 이것은 영원에 잇대어 오늘을 살아가야 할 신학이 시대의 이름으로 영원을 도발하는 것이다. 그 순간, 시대에 대한 적실성이라는 명분으로 성경이 포함하는 진리는 재해석되고 변질된다. “신학이 당신의 신앙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조심하라”는 어느 광고 카피의 문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명심해야 할 권고로 남아 있다.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진리를 난도질하며 시대정신으로 불변하는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반드시 필요하다. 게다가 신학의 시대적 과제는 너무나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신학이 진리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신학이 우리 시대의 언명(言明)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또한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과 현실을 부둥켜안아야 하지만 그것이 영원한 진리를 파괴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시대성의 이름으로 콘텍스트가 텍스트를 뒤엎을 수는 없다. 현대 신학의 해석학적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칫 절대 불변의 진리는 사라지고 해석자의 해석만 남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상대의 자리를 넘어 절대를 넘본다. 내용은 사라지고 해석만 난무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시대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일이다. 영원을 담아내지 못하는 신학은 의미가 없고 진리를 변개하는 신학은 백해무익하다. 이런 신학은 단지 시대의 맹아(盲啞)일 뿐이다. 올바른 신학만이 개인과 공동체를 살리지만 잘못된 신학은 교회와 영혼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556 no image ‘가나안’ 성도만은 되지 말자
편집부
2073 2014-01-28
‘가나안’ 성도만은 되지 말자 작금 소위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가나안’ 성도들이라는 말은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는 신자들을 가리키는 신조어이다. 곧 교회나 목회자 혹은 신도들에게 상처를 입고 교회에 나가는 것을 포기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자기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과 관련해 교회를, 혹은 목회자 때로는 한 때 함께 교회에 다녔던 신도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상처받고 이로 인해 원망과 불평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자기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변명할 수 있는 주장의 근거라고 말하기에는 그리 단순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자기들이 받은 상처나 혹은 불만과 불평을 교회에 나가지 않는 빌미로 삼는다는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가나안’ 성도들이 과거에 어떤 어려움을 겪었거나 상처를 받았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탓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정당하지 않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했었다. 광야는 본래 그런 환경이다. 물론 ‘가나안’ 성도들이 광야의 성도들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빠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끼친 대상이 교회이거나 목회자이거나 신도들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남 탓만 하고 있다가는 그들이 정작 싫어하는 그들과 함께 망하는 길로 접어들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탓하고 있는 동안 자기 마음은 정당한 이유를 찾아서 편안할지 몰라도 그 영혼은 그 상처를 준 자들와 똑같이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가 고달프다 할지라도 담담히 짊어져야 한다. 적어도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시지 않는 분이다. 그것이 신앙이다. 반대로 남을 탓하고 핑계를 대는 것은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자와 다를 바 없다. 핑계하고 탓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어렵더라도 교회의 지체들과 그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여정을 출발해야 한다. 불을 토하듯 그 심정을 토하더라도 불만과 불평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체들과 함께 광야의 길을 걸으며 그 짐을 지는 신자들에게는 하늘로부터 참된 위로와 안식이 내려 올 것이다.
555 no image 성화의 핵심은 ‘자기 부정’
편집부
2370 2014-01-28
성화의 핵심은 ‘자기 부정’ 익히 알고 있듯이 죄의 본질은 자기를 주인의 자리에 올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 선언하려는 욕망 위에 놓여 있다. 아담이 최초에 지은 죄의 다른 이름은 교만이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독립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처럼 되려 했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 안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서 자기의 판단과 욕구대로 살려는 욕망이 내재되어 있었다. 반면에 성화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을 의지해 살아가며, 예수님 안에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이다. 때문에 피조 의식과 은혜 의식으로 충만한 가난한 영혼만이 성화를 추구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우리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에 지향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에 이러한 가르침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우리의 이성과 의지가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지배하려 들 때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악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큰 선이다. 이럴 때 순종은 우리를 괴롭게 하는 하나님의 고문이 아니다. 사실 순종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때 가능하다. 그 선하심을 의지하는 것과 그의 선하심에 순종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절대선(絶對善)이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한한 복이다. 곧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우리의 가장 큰 복락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본연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상태이며, 그러한 상태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만 존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기를 부정하는 것 없이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성화는 율법의 두 돌판의 정신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해 부단히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성화의 삶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정이 없이는 매일 매일의 회개, 매일 매일의 전향, 매일 매일의 전투를 지속할 수 없다. 자기 부정이 있는 곳에 인내의 부단한 전진과 성장이 존재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554 no image 칭의와 성화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오는 오류
편집부
3089 2014-01-14
칭의와 성화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오는 오류 작금 회자되고 있는 칭의와 성화와 관련된 이해에서 상당수의 신자들이 오해할 여지를 담고 있어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필요로 한다. 잘 알고 있다시피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이라는 하나의 실체로서의 구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한 구원론적 오류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날 윤리적 부패에 직면한 한국교회적 상황에서 한국교회에 다가오는 근자의 구원론적인 혼동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현상은 동전의 양면인 '칭의와 성화'를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잘못 이해할 때 나타나는 오류이다. 첫 번째 오류는 칭의 만을 강조하는 경우이다. 곧 값싼 구원, 공짜 은혜를 남발하면서 거룩한 삶과 윤리가 결여된 구원파적인 오류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 경우다. 이 경우, 오직 믿음을 말하나 단순한 지적동의와 자기 확신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에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차원의 실천적 지식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비롯되는 성화와 같은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은덕을 부정하는 결과를 빚는다. 두 번째 오류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는 경우이다. 곧 구원파적인 윤리적 방종에 대한 또 다른 극단적인 반동으로 발생한 것으로 거룩한 삶과 윤리를 강조하나 칭의에 대한 근거로 자신의 윤리적 행위를 앞세운다. 이것은 자신의 행위를 최종적 칭의의 유효적 조건으로 앞세움으로써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공로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경우 선행은 열매의 차원이 아니라 구원의 조건이 된다. 결국 구원은 그리스도만으로는 충분치 못한 셈이 되고 만다. 이러한 두 가지의 현상을 통해 우리는 안타깝게도 또 다시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의 긴장을 보게 된다. 잘 알고 있듯이 칭의(구원의 확신과 감격)와 성화(구원을 이루는 삶)는 그 뿌리와 열매로써 하나이다. 이것을 나누어 생각할 때 극단적 주장이 서로를 상쇄하고 대치시키는 오류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사역의 완전성, 즉 칭의뿐 아니라 성화의 결정적 근거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553 no image 개혁신앙과 하나님의 은혜
편집부
2667 2014-01-14
개혁신앙과 하나님의 은혜 개혁신앙이란, 먼저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이며, 다음으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이다. 전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큰 일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후자는 바로 그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에 부응하는 삶의 고백이다. 따라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베푸심에 대한 신앙고백이 없이는 결단코 우리 인생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다스림에 순종할 수 없다. 하나님을 향한 삶의 고백보다 앞서는 것은 날 향한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실함보다 앞서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말하는 감사의 삶은 죄와 비참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기초해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되심을 알기에 그 은혜에 감사해 우리는 자발적인 헌신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의 고백처럼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이란, 다름 아닌 벌레와 같은 우리를 향해 놀라운 큰 일을 행하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만으로 즐거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관점에서 도르트신경에서 나타난 인내를 이루는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예정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구속의 사랑을 보이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자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은 은혜이다. 구원을 성취하시는 분도, 우리에게 구원을 적용하시는 분도 오로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원에 있어서의 절대 주권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 그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건지시고 우리로 하여금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이와 관련해 요한 사도는 “은혜 위에 은혜로다”(요 1:16)라고 선언한다. 2014년도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 열심히 개혁신앙을 추구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552 no image 우리의 유일한 왕은 그리스도이시다
편집부
2228 2013-12-30
우리의 유일한 왕은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충성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국가 권력이나 물질주의자나 문화주의자들의 요구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 교회는 더 높은 권세를 바라보고 있기에 이것은 앞에 열거한 세속주의자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불쾌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삶과 가르침은 세상에서 높이 존중받고 숭배 받는 대상을 정죄하기도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할 당시 국가는 절대왕조의 시대였다. 그 시대의 국가 권세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권세와 동일시하던 시대였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종속관계였고, 이 시대는 국가에 대한 교회의 은혜수단은 찾아 볼 수 없는 시대이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깨어 있는 기독교인들은 절대왕조에 대해 복종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을 신앙문답으로 드러냈다. 그것이 바로 대소요리문답 제1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의 제일 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제일 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떤가? 교회에 경제논리의 가치관이 자리 잡은지 오래이다. 교회는 경제논리 가치관에 종속되다시피 되어 버렸다. 경제논리에 의해 교회가 성장하고 못하고를 판단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가 폐쇄 되는 원인과 결과 역시 물질 때문이라고 한다. 물질이 없으면 복음도 전할 수 없고 교회도 세울 수 없고 선교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질이 없으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마다 주님의 이름을 내세워 물질 축복을 남발하고 있다. 이렇게 교회가 교회의 본의를 잃어가다 보니 역으로 이런 교회를 향하여 세상으로부터 비판과 질시를 받고 있다. 작금 교회의 눈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절대 하나님께 순종인가? 여기서 “창조자로부터 미혹하고 피조물을 향하게 하는 모든 사람들은 거짓 목자”라고 지적하는 종교개혁자 쯔빙글리의 외침은 지금도 한국교회에 대해서는 유효한 지적이다. 교회의 본의를 드러내야 하는데 길이 안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칼빈이 말했듯이 “뱃사공이 뱃길을 보지 못하나 별을 보면서 확실한 항구에 도달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그의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목표를 주시함으로써 길을 발견하기를 바랄 수 있다.” 그것이 대소요리문답이다. 그렇기에 2014년에 교회는 부지런히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렇게 좋은 신앙유산을 선진들로부터 받고도 땅에 묻어두고 다른 것들을 좇는다면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하려는지 두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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