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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 no image 교회의 ‘존재’ 가치부터 확인하자
편집부
2049 2013-12-30
교회의 ‘존재’ 가치부터 확인하자 작금 한국교회의 현실은 사회적 이슈들에게 대해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과연 한국교회는 자신감을 회생하고 1970-90년대에 누렸던 성장의 시대를 다시 누릴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대답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그렇다보니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낙관적이라기보다는 비관적인 예측이 난무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에서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묘안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방안을 마련한다고 해서 한국교회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기독교의 사회에 대한 책임은 중요하지만, 자칫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소홀히' 할 때 그 순간 기독교는 고유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인본주의적 휴머니즘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상황이라는 컨텍스트보다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강조해야 할 이유이다. 하지만 성경이라는 텍스트 '만'을 강조하면서 '세상 속에서의 역할'에 대해 무관심한다면 기독교는 세상과는 무관한 맛을 잃은 소금일 뿐이다. 어쩌면 이것은 마치 군인들이 전투에는 나가지 않고 한 평생 훈련소에서 군가나 부르며 고함만 지르는 격이고, 밝은 방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얼굴에 촛불을 비추는 격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 많은 이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은 바로 세상을 사랑하셨다. 주님의 제자들도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 죄 많은 이 세상 속에서 세상을 향한 기독교가 아니라면 우리의 존재가치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자도는 세상 속의 제자도인 것이다. 우리의 선교적 문화적 삶은 다름 아닌 이 세상 속에서이다. 기독교는 세상 속에서의 삶을 강조하고 이 세상 속에서 사회적 제자도를 추구한다. 하지만 기억하자. 그것은 이 세상을 변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우리가 존재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존재됨’(Being)이라 할 것이다. 2014년도에는 ‘교회의 존재됨’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존재됨’을 확인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550 no image 성탄절에 생각하는 한국교회 실정
편집부
1831 2013-12-17
성탄절에 생각하는 한국교회 실정 작금 한국교회의 실정에 대한 각계각층의 염려가 적지 않다. 심지어 교회의 성도들조차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서 노심초사하는 형편이기도 하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역사 속에서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자들과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으며 성령으로 성화되어 인치심을 받음을 믿는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룩한 교회 안에 위선자들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알곡뿐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지 못하고, 거룩한 성례가 올바로 시행되지 않으며, 정당한 권징이 실시되지 않을 때에 위선자는 더욱 더 증가한다. 형식적인 껍데기만 가진 종교적 그리스도인들이 범람한다.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쉽게 스스로 가공해 낸 예수를 만들고 자기 복음을 추구한다. 성찬과 세례가 올바로 시행되지 못할 때 거짓된 무리가 교회 내에 쉬 들어오고 그들이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한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 마치 교회가 표지를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과연 우리 한국교회는 정말 어두운 시대에 빠져 있는가? 물론 하늘 아래 가장 순결한 교회라고 하더라도 혼란과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한 교회이며 끊임없이 죄와 전투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느 시기,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회(會)가 될 만큼 타락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소망을 놓지 않는 것은 이처럼 부패하고 황무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가 지상에 언제나 존재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시며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남은 자를 붙드시고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친히 남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교회의 거룩을 위해 힘써 일하게 하신다.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리새적인 정죄와 비판이 아닌 가슴치며 울부짖는 선지자적인 외침이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꿇는 무릎이다. 쓰러진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을 고쳐 주시기를 목 놓아 기도하자. 우리 주님께서 바로 이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49 no image 하나밖에 없는 생명
편집부
1802 2013-12-17
하나밖에 없는 생명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는 말씀은,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는 타협될 요소가 없음을 분명히 하신 말씀이다. 재물을 얻어 어렵지 않게 살아가는 일을 도모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도 얻어 아무런 불편 없이 잘 살아 보겠다는 이기적인 자기 행복주의는 철저히 배격되어야 한다. 재물을 선택하든지 하나님을 선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과연 재물이 그처럼 소중한가, 아니면 생명이 더 소중한가에 대하여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하고 계신다. 재물을 얻기 위해서 생명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재물을 포기해야 한다.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재물을 포기하되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근거가 되어야 한다. 이미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면 이제는 망설이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라는 말씀은,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제부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부차적인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쏟음으로써 헛되이 삶을 낭비하지 말고 자기 생명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삶의 목표를 향해 살아야 할 것을 제시하신 것이다. 사실 염려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는 말씀은 이러한 염려에 대하여 쐐기를 박는 선언이다. 여기에서 ‘키’라는 단어를 우리말 성경에는 ‘그 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의 길이’라고 번역된다. 따라서 이 말씀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의 길이를 한 치라도 늘일 수 있느냐?’는 의미이다. 곧, 이미 결정된 생명의 수한에 대하여 염려하기보다는 인생의 본분을 바로 지키고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미 그런 부차적인 것들은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실 일이고, 우리는 역사 안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을 성취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답게 마땅히 살아가야 할 목표를 성취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밖에 없는 우리의 생명을 정상적으로 나타내는 유일한 길이다.
548 no image 신학자는 교회의 신학자여야 한다
편집부
1949 2013-12-03
신학자는 교회의 신학자여야 한다 오랜 교회의 전통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기독교 교리’를 바탕으로 교회가 세워져 왔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때문에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들은 자신들이 고백하는 신앙의 기준인 ‘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서’들을 후세대의 교회를 위해 유산으로 남겨 놓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장로교 신앙과 신학을 대변하는 웨스트민스턴 신앙고백서(1646년)와 대, 소요리문답 및 예배모범과 정치모범 등을 들 수 있다. 나아가 개혁파 신앙과 신학을 대변하는 벨직신앙고백서(1561년)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년) 및 돌트신경(1618년)이 있다. 이처럼 전통적인 교회가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교회가 세운 직분인 ‘목사’들이며, 이들의 신학적 활동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유사 이래로 명백하게 신앙과 신학을 변증하고 정립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돌아볼 때 목사들은 교회가 세운 ‘교사’이자 ‘신학자’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점마다 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정립하고, 그것을 후세대의 교회에게 유산으로 남기는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교사이자 신학자인 목사는 전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며 계승하는 일에 봉사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한 사람의 목사를 세우는 일에 교회는 주체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곧 목사 후보생을 선임하여 목회자로 양성한 후 이들을 청빙하여 목사로 임직하기까지 전적으로 교회가 주관해서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한 사람의 좋은 교사이자 신학자인 목사는 곧 교회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교회가 한 사람의 좋은 목사를 양성함에 있어 주체 의식을 가지고 적극 지지하고 후원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럴 때 목사는 전적으로 자신을 양육한 교회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파수하고 전파하는 일에 충성으로 화답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교회의 회원인 신자들이 이 점을 각성을 하고, 교회마다 좋은 목회자 및 신학자들을 양성하고 배출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교회가 이에 등한시한다면 그것은 결국 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변증하며 정립하고 후 세대에게 계승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국교회에서 이러한 풍토에서 열악하다는 점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향후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교회에 의해 전적으로 세워지고 지지되기를 바란다.
547 no image 교회법에서 ‘권징조례’의 의미
편집부
2341 2013-12-03
교회법에서 ‘권징조례’의 의미 교회법은 사회법과 다르다. 교회법을 사회법 다루듯이 다루면 그것은 교회법에 대한 무지의 소치 만 드러내는 꼴이 된다. 장로교회의 법은 세상의 변호사나 판사나 검사가 이해할 수 있는 법이 아니다. 장로교회의 법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표준문서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권징조례는 신자들을 권징하기 위한 조례를 제시한 것으로 교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함이다. 그래서 장로교회의 법은 신자들의 시벌과 해벌을 권징조례에 넣지 않고 예배모범에 넣었다. 왜냐하면 시벌과 해벌은 선언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사회법처럼 공권력으로 처벌하거나 인신을 구속하여서 가두는 법이 아니다. 시벌과 해벌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와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권징조례에 시벌이나 해벌이 포함되면 안 된다. 권징의 목적도 교정이 그 목적이며, 책벌이 그 목적이 될 수 없다. 권징조례는 그야말로 권징을 하는 절차를 규정하는 규례일 뿐이다. 따라서 권징조례를 통해서 재판을 하고 재판의 결과가 나와도 그 결과는 아직 효력이 없다. 그 재판 결과를 가지고 노회에서 허락을 받아야 그 효력이 발생한다. 장로교회 제도는 노회 외에는 어떠한 법적인 구속력이나 권능을 가지지 않는다. 오직 치리회 본회의 석상에서만 교회 열쇠권이 있다. 그래서 재판국장과 국원들이 모여서 재판을 해도 그것은 정치부에서 논의하고 노회 치리회에서 최종적으로 허락을 해야 법적 효력을 갖는다. 항상 장로교회의 법을 이해할 때에 벗어나지 말아야 할 선은 노회 본회의 외에서는 어떠한 기관도 최종적 권력이 없다는 점이다. 위원회는 단지 노회로부터 위임 받은 사안을 처리하는 기관일 뿐이다. 재판국도 위원회의 일종이다. 위원회에서 다룬 사안을 보고하고 해산하면 그만이다. 이런 점에서 두 번의 정기 노회 사이에 발생한 모든 사안들은 임시노회라도 개회하여서 처리함이 가하다. 권징조례를 따라서 결성된 치리회의 재판국이 그 치리회의 허락 없이 무소불위의 권능을 행하게 되면 17세기 잉글랜드 감독교회에서 행하였던 폭력적 압제와 다를 바 없게 된다. 그것은 개혁의 후퇴이다. 장로교회는 개인이든 어떤 기관이든 본 회의를 벗어나서 독자력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 감독교회가 된다. 장로교회는 치리회 위에 어떤 개인이나 기관도 그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546 no image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자
편집부
2450 2013-11-19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자 많은 사람들이 한국 보수 교회의 열매 없음을 지적하면서 진리를 교회의 근원으로 삼으려는 노력에 동조하지 못하고 비난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그들은 신비한 현상이나 기이한 이적이 일어나고,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고, 가난한 자들이 도움을 얻고 있는데 ‘비성경적이라느니, 진리가 어떠니 하면서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려 하지 말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말이야 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아닌가 한다. 살펴보면 논쟁이 있는 곳마다 자주 등장하는 말씀이 바로 예수께서 하신 ‘열매를 보아 안다’(마태 7:15-27)는 말씀이기도 하다. 근래 이름이 널리 알려진 ‘큰 믿음’을 명패를 내걸고 있는 모 교회에서는 성형의 은사가 한창 내리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면 브이라인이 생기고, 낮은 코가 오뚝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은혜 받은 자들이 변화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열매가 나타나니까 열매로 분별하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본문은 아이러니하게도 참된 교회를 분별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라고 주어진 말씀이다. 이 거짓 선지자들은 속여 노략질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열매를 보고 분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거짓 선지자들은 입술로 “주여, 주여”하는 자들로 속칭 신령한 자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의 특징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들”이기도 하다(마 7:22). 신기하게도 ‘열매로 보아 알라’고 하는 신비주의와 신사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모습과 너무 닮아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다고 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주의 진리에서 벗어난 자들이며, 하나님의 뜻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능력과 신비를 추구하는 자들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진리 위에 자신을 굳건히 세운 자들과 그 진리대로 살아가려는 자들이 바로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신자들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545 no image WCC 부산 총회를 보면서
편집부
2109 2013-11-19
WCC 부산 총회를 보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고백하는 것처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이 무너지면 기독교도 무너지게 된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왜 그처럼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를 외쳤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계몽주의 이후에 지속적으로 성경의 고등 비평 학문은 성경의 계시성을 파괴시키고자 집요하게 학문적 활동을 확산시켜 왔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신학에서조차 성경의 계시성이 파괴되고 말았다.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인 헤르만 바빙크(1854-1921)는 성경의 계시성이 파괴되고 있는 시대를 살았다. 그런 상황에서 바빙크는 일반 계시론과 특별 계시론이라는 이론을 당겨서 성경의 계시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그만큼 그 시대에는 성경의 계시성에 대한 도전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성경의 계시성에 도전했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칼 바르트(1886-1968)였다. 그는 결코 성경의 축자 영감을 믿지 않았다. 바르트의 영향으로 또 다시 기독교는 성경의 계시성에 대한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영향이 미친 하나의 결과가 바로 다름 아닌 지금의 WCC 부산 총회에서 역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미 성경의 계시성을 부정하고 있는 WCC 부산 총회는 더 이상 기독교의 대표도 아니며, 기독교라고 할 수조차 없다. 그것은 단지 기독교를 빙자한 종교인들의 축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자들을 볼모로 붙잡고 기독교라는 명패를 달고 이교적 신앙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더 이상 믿지도 않는 그들이 감히 교회의 이름으로, 기독교라는 명패를 부착하고 이교적 축제에 열을 올리는 것은 결코 가당치 않은 일이다. 이것은 온 세상을 사탄에게 넘기고자 하는 사탄 숭배자들과 다름이 없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우리는 성경 66권만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는 프랑스 신앙고백서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벨직 신앙고백서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고백 위에 굳게 서서 성경의 계시성에 도전하는 WCC와 같은 종교집단들을 상대해야 한다. 역사적인 교회들이 고백한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와 같은 신앙고백서들을 견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고백서들로 돌아가는 것이 작금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더욱 건전한 교회를 세워가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544 no image 성경을 대하는 정당한 자세
편집부
2123 2013-11-05
성경을 대하는 정당한 자세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종종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지식이나 이성과 경험 등을 총동원해 말씀의 의미에 접근해 가려고 할 때가 많이 있다. 또는 내가 가진 고민이나 현상에 대한 논리적 사고에서 출발하여 말씀의 의미를 파악하려 애쓰기도 한다. 비록 그러한 노력들이 모두 허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려는 자세에서 상당 부분 멀어질 수 있음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금까지 형성해 놓은 체계적 논리 위에 그것을 세워보려는 시도를 먼저 거쳐서 그를 통해 정리된 개념을 가지고 ‘아, 하나님의 뜻이 이러하다’라고 주장할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제한된 시각과 연약한 눈으로 굳이 합리적인 이해를 얻어 보려고 애쓰다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범위를 넘어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 분량 이상의 어쭙잖은 이해를 추구할 위험을 조심해야 할 이유이다. 따라서 우리는 제한된 시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다고 자신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과 그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구속사에 우리를 참여하게 하심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안에서만 우리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말씀의 비밀을 밝혀내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권위가 교회를 통해 우리 삶을 통치하고 다스리심을 깨달아 그에 순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또 성령께서 눈을 열어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주실 때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것을 누리며 우리의 삶을 통해 그에 순종하는 실질을 드러내보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바르게 깨달을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하며 또 그 은혜를 통해 계시해 주신 만큼만 바르게 알아가야 할 것이다. 교회가 그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사모하며 서로가 가진 이해의 차이를 겸손함 가운데 잘 정리해 갈 수 있어야 한다. 선명해야 할 부분과 우리의 한계에 머무는 부분이 있을 터인데 그것을 잘 분별하여 그에 합당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543 no image 신자들이 이 시대를 사는 법
편집부
1910 2013-11-05
신자들이 이 시대를 사는 법 우리 주변을 보면 진리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로 다양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사회 일반의 상식을 강조하며 사회적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이들은 상식과 사회정의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진리에 대해선 의외로 자유롭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사회에 걸맞은 관용적이며 현대적인 세련된 삶이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종교적이고 형식적인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교조적인 교리 나부랭이나 붙들지 말고 제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며, 아니 제발 상식 수준의 삶이라도 살라고 조소를 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철저하게 강조하는 듯한데, 상식과 사회정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리만큼 거리가 먼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이들은 대단히 종교적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형식적이다. 자신들이 설정한 종교적 계율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진리에 대해서도 몇 가지 교리에만 집착하면서, 너무도 심하리만큼 교조적인 신앙의 색채를 띤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교리의 의미를 잘 알고 고백하느냐, 그리고 그에 걸맞는 고백적인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이들은 오히려 종종 부패의 소굴이 되며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받기도 한다.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몇 가지 교리를 역사적 지식으로만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깨닫고 고백하며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바른 진리는 반드시 삶으로 표출되게 되어 있다. 진리를 생명처럼 여기는 자가 어찌 그 진리를 따라 살지 않겠는가? 자칫 기독교가 진리를 도외시하며 상식과 사회 정의에만 집중하게 될 때 일반적인 휴머니즘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또한 몇 가지 교조화된 진리의 파편만을 붙들며 상식과 사회적 정의감을 무시할 땐 부패와 타락에 찌든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도 명심하자. 우리는 관용과 다양성을 위하여 진리를 버려서는 안 된다. 또한 최소한의 상식과 사회적 정의감 역시 회복해야 한다. 아니, 여기에 머물 것이 아니라 참된 진리 안에서 단순한 상식과 사회정의의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542 no image WCC와 종교혼합주의
편집부
3511 2013-10-22
WCC와 종교혼합주의 WCC(세계교회협의회) 제10차 총회가 이번 가을(2013.10.28-11.13) 부산에서 개최된다. 관련자들은 WCC 총회를 한국에 유치한 것이 세계적인 사건이라 여기며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다른 한편 일부에서는 그것을 저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신학사상은 뒤로하고 일단 거기에 들어가서 좋은 영향을 끼치면 되지 않는가 주장하는 자들도 없지 않다. 이런 복잡한 상황 가운데서 건전한 교회들은 냉철하고 성숙한 판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분명한 사실은 WCC 한국유치가 결코 하나님께 감사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종교 단체는 이름의 전면에 ‘교회’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는 그 단체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여 다양한 종교사상을 받아들이는 혼합주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WCC에 소속된 지도자들은 성경의 교훈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저들의 사상 가운데는 참된 진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주장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가 하면 성경의 본질을 완전히 왜곡시킨 내용들이 많이 있다. 즉 그들은 일반 종교적인 현상을 중시할 뿐 근본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현재 그들이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사상은 종교다원주의이다. 그들에게는 각양 종교의 다양한 그리스도가 인정되고 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기도 하지만 다른 종교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부처와 무함마드뿐 아니라 무속 종교에 등장하는 다양한 잡신들도 받아들인다. 그들은 부처를 향해 기도하기도 하며 죽은 자들의 영혼을 불러내는 초혼놀음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것이 기독교의 독선을 벗어나는 종교적 관용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와 같은 인본주의 사상은 우선 보기에 매우 관대해 보이지만 실상은 교회를 허물뿐 아니라 인륜을 파괴하고 있다. WCC는 근자에 동생애를 인정했을 뿐 아니라 동성결혼을 받아들였다. 결국은 동성결혼을 한 목사들을 배출하는 어처구니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우리는 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혼합종교 사상을 가진 저들을 향해 지속적인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저들의 주장을 교회와 순진한 성도들이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어린 성도들이 이교 사상에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541 no image 강사 선정에 질서를 지키자
편집부
1955 2013-10-22
강사 선정에 질서를 지키자 강단의 강도권은 교회에서 진리를 보존하고 증거하기 위한 거룩한 직분이다. 따라서 바른 강도권은 바른 교회의 권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당회와 노회, 총회는 바른 강도권을 드러내고 보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런데 작금 총회(총회 주관 집회)와 교회의 강단이 바른 강도권에 의해 집회를 하고 있는가 할 때, 우려할만한 강단의 모습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심히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교단은 제76회 총회에서 강단 교류의 범위를 정한 바 있고, 제82회와 제92회 총회에서 확대 수정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일부 교회의 집회나 총회 주최 행사에서 총회의 결정사항을 무시한 채 성경적, 역사적 개혁주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 타교단 목회자들을, 신학적 입장 차이가 현저함에도 불구하고 분별없이 초청하여 강단에 세우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총회가 주관한 일부 집회에서도 그런 강사를 세우는 경우도 있다. 그것도 신문광고 등을 통해 초청강사를 공개적으로 소개할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공개 강의를 통해 선전하므로 합신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강단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일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일부 타락한 복음주의의 흐름에 휩쓸려 합신의 정체성을 왜곡 또는 부정함으로써 합신 교단과 교회들의 혼란을, 더 나아가 분열을 야기할 수 있다. 또한 교회의 일체성이라는 이름 아래 신학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다. 서로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다양성을 내세워 비평 없이 수용하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비성경적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라 할 것이다. 교회의 일체성은 바른 진리와 교리 안에서의, 그리고 그 위에서의 일체성인 것이다.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을 추구하는 합신은 강단의 질서에 대해서 합신의 정체성과 권위를 따라 합신의 모든 집회에서는 총회(노회)가 인정한 강도권이 있는 자로서 합신의 정체성과 뜻을 같이한 강사에 한해 초청하도록 함으로써 총회가 결의한 강단교류의 질서를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
540 no image 참된 신자가 가야할 거룩의 길
편집부
2217 2013-10-08
참된 신자가 가야할 거룩의 길 참된 신자에게 있어서 믿음과 회개는 늘 함께 간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중생, 곧 거듭남에 따르는 새 생명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난 새 생명은 필연적으로 참된 믿음과 진정한 회개를 수반한다. 이것은 거룩한 새 생명이 지니는 당연한 특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지닌 신자는 성 삼위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죄에 대한 자각과 돌이킴 그리고 의에 대한 순종으로 자연스레 나아간다. 이것은 생명 없이 지식으로만 믿는다 하는 역사적 신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참된 믿음과 진정한 회개가 역사적인 죽은 신앙과 일반적인 뉘우침과 다른 것은 그것이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다. 따라서 거듭남, 곧 중생이라는 '생명의 역사'가 하나님에 의하여 선행되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생명의 자각과 반응은 필연적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반면에 믿는다고 입술로는 고백하나 삶의 고백이 없는 것은 처음부터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새 생명이 있을 수 없다. 하늘로부터 온 중생의 역사가 없기에 새 생명의 반응인 믿음과 회개조차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적 지식에 머무르지 않는, 전 인격을 동반한 실천적 믿음이 참된 믿음이며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지속적인 회개가 진정한 회개이다. 전적인 신뢰와 회개의 역사는 결코 일시적이거나 단회적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이 영원한 것이라면 참된 믿음과 진정한 회개 역시 영원하다. 따라서 참된 신자에게 믿음과 행함은 늘 함께 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죄로 죽은 무력한 사람에게서 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죽은 영혼을 존재 자체를 살리신 하나님의 새 생명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그렇다. 진정한 회개는 참된 믿음을 전제하고 평생을 달린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이다. 옛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켰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뉘우침이며, 그로 인하여 점점 더 그런 죄를 미워하고 거기서 피하는 것이다. 그러면 새 사람으로 다시 산다는 것의 의미는 또한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선한 행실로 사는 일에 대한 욕망과 사랑을 갖는 것이다. 죄를 미워하고 거룩을 사모하는 길은 참된 신자가 마땅히 행할 권세이다.
539 no image 정의라는 이름의 함정을 배격하자
편집부
1852 2013-10-08
정의라는 이름의 함정을 배격하자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에 대하여 사회의 정의를 외칠 때, 우리가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있다. 그것은 사회의 정의 그 자체에 머물고 만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사회 정의 그 자체가 곧 하나님 나라의 의로 오용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불신자들의 정의 개념과 신자들의 정의 개념을 마땅히 구분해야 한다. 성령으로부터 난 선행이 아니라면 사회 정의 역시 일반은총적인 의미에서의 제한적인 가치만 있을 뿐이며, 구원과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가 사회 정의를 외치며 나아갈 때 일반은총적 요소인 사회 정의에 만족하고 이를 수긍하는 데만 머문다면 이것은 복음에 나타난 또 다른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정작 모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잘 아는 것처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믿음의 ‘의’다. 이 ‘믿음의 의’는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반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는 필연적으로 자기 의(義)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자기 의는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막는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사회 정의 개념은 십자가를 통한 개개인의 실존적 변화와, 변화된 실존의 총체적 삶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 먼저는 십자가를 통한 실존의 변화이며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사회 정의인 것이다. 곧 중생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이 먼저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삶이 그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의 사회 정의는 일반은총적 수준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임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따르는 삶이며, 나아가 개인의 경건을 넘어 일상 속에서 표출되는 제자도와 사회적 책임으로 고백되기 마련이다. 개인의 실존적 변화를 전제로 하는 총체적 복음은 이런 의미에서 사회복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진정한 의미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은 또 다른 하나님의 의 곧 믿음의 의에 기초를 두지만, 일반적인 사회복음은 믿음의 의가 아닌 율법의 의에 그 기초를 두기 때문이다. 사회복음에서 말하는 복음은 사회적 정의와 평화일 뿐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억압과 차별을 철폐하고 정의와 평화가 흐르는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시도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는 신자와 불신자의 사회 정의조차 구분이 되지 않는다. 또한 일반은총의 한계에 대한 지적도 없다. 단지 신자와 불신자는 함께 하나의 복음을 추구하고 결국에는 십자가가 없는 유토피아를 지향할 뿐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538 no image 소위 ‘세습방지법안’에 대한 이해
편집부
2137 2013-09-24
소위 ‘세습방지법안’에 대한 이해 작금 한국의 몇몇 대형 교회들을 비롯한 중소형 교회들의 목회자 후임 선정과 관련해 아들이 아버지의 대를 잇는 소위 세습 형태와 관련해 사회적 관심이 증폭되어 왔다. 과연 이런 형태의 목회자 후임 선정과 관련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1. 세속적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교회 직분 소위 ‘세습’(世襲)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일반적으로 “재산, 신분, 직업 등을 한 집안에서 자손 대대로 물려받음”으로 이해된다. 이런 관점에서 대형교회의 목사직을 아들이나 손자 혹은 친인척이 계승하는 것에 대해 세습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엄밀하게 살펴볼 때 교회의 목사직은 ‘재산, 신분, 직업’과 같은 세속적 가치에 근거하는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의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직분은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한 사람의 재산이나 신분이나 직업 등과 같은 것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잘 아는 것처럼 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같은 교회의 직분은 교회의 교훈과 치리 및 자비 사역을 위한 것(행 14:23; 20:28; 딤전 3:1-13; 5:17)으로 언제나 교회 안에 있어야 할 직분으로 이를 항존직이라고 한다. 이 항존직은 반드시 어느 특정인들이 그 직분에 계속 유임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헌법 정치 제4장 2조 2항). 때문에 이 삼직을 받은 자들 중 어떤 인물에 대해 당회원 과반수의 청원이나 또는 재직회원 과반수의 청원이 있을 때 공동의회에서 신임투표를 통하여 시무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헌법 정치 제4장 2조 3항). 이러한 사실은 교회의 직분이 세습이나 혹은 후임자 지명과 같은 방법으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교회의 회의에 의해 선임되거나 해임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2. 목사의 청빙 절차에 담긴 법 정신 특별히 목사의 청빙은 당회의 결의로 공동의회의 청빙에 의한 투표에서 2/3의 찬성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입교인 과반수 이상의 날인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교회원들의 찬동을 필요로 한다(헌법 정치 제6장 제1조 및 제2조). 이러한 청빙의 절차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신자들은 각기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을즉 아무도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헌법 정치 제1장 1조, 양심의 자유)와 “어느 교단이나 어느 교회든지 교인의 입회 규칙, 목사와 또는 회원의 자격과 교회 정치의 전 체계를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선포할 자유권이 있다”(헌법 정치 제1장 2조 ‘교회의 자유’ 1항)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원칙 아래 헌법은 ‘교회의 직원 선택권’을 제시하면서 “교회 직원의 성격, 자격, 권한 또는 선거와 위임의 규례가 성경에 기록되었으니 그대로 실행되어야 하며, 또 그 선정 권한은 그 교회 자체에 있다”(헌법 정치 제1장 6조)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따라서 세습금지법과 같은 강제조항은 “어느 치리회든지 신자의 양심을 속박할 규칙을 자의로 결정할 권리가 없고(막 7:9) 그 모든 결정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루어져야 한다”(헌법 정치 제1장 7조)는 ‘치리권’을 제한하는 것과 다름없다. 3. 힘써 지켜야 할 교회법의 질서 보존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의 직분에 대한 바른 이해 및 헌법의 정신을 보다 원숙하게 이해하고 실행한다면 소위 세습금지법과 같은 강제조항을 헌법에 부기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교회의 목사 청빙에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법과 질서를 실행함에 있어 일부 무지와 탐욕에 젖어 있는 자들이 이러한 교회법과 질서를 침해하면서까지 물의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법 정신의 운용과 관련된 것이며, 그에 상응하는 정당한 권징조례의 질서를 지켜 행함으로써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의 항존직에 따른 성경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그 직분에 알맞은 인물들을 힘써 직분자로 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교회의 결정은 고유한 치리회 권한이며 최대한 그 권한을 서로 존중해야 한다. 헌법은 분명히 양심의 자유를 가장 우선하고 있으며, 목사의 청빙에 있어서 지교회 성도들의 자율적 판단을 중시하고 있다. 이때 노회는 청빙대상자의 신학적인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할 것이고 그 적합성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이처럼 이중적인 안전장치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세습방지법’이라고 하는 강제조항을 헌법에 추가하려고 하는 것은 교회법의 정신이 아닌 세속적 판단의 가치관이 작용한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아울러 교회와 성도들은 이러한 세속적 가치관이 더 이상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537 no image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의 의미
편집부
3968 2013-09-10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의 의미 우리 교단은 1981년에 출범하던 때부터 전통적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제1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개혁)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출범한 우리 교단은 바른 신학(딤전 6:3; 딤후 1:13), 바른 교회(딤전 3:15), 바른 생활(약 1:27)을 설립 이념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참신한 개혁주의적 신앙 운동을 펴 나아가기로 하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 자신의 개혁을 다짐하고(갈 6:3-5), 또한 독선과 아집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우리 총회의 입장과 진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는 바이다”라며 선언했다. 이 선언문 제2항에서 “우리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인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히 13:8-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교회정치, 권징조례 및 예배모범을 우리의 교의와 규례의 표준으로 삼는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장로교회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뿐 아니라 대소요리문답, 정치모범, 예배모범까지를 모두 수용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첫 번째 교단이 되었다. 이어 제3항에서는 교단의 신학적 지향점이 명백하게 개혁주의적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의 특징인 하나님의 절대 주권(롬 11:36), 성경의 객관적 권위(딤후 3:16-17), 구원의 전적 은혜성(엡 2:8),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으로서의 교회(엡 1:22-23) 등을 신봉하고, 이상과 같은 바른 신학의 내용을 흐리게 해 온 이질적인 다양한 신학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개혁주의의 참 모습을 찾아내는 데 힘쓴다.” 이러한 선언은 우리 교단이 타 장로회 교단들과 달리 근본적으로 개혁주의적 신학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정신은 헌법 총론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의 무오(無誤)를 기본 교리로 가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 대소요리문답서 및 교회정치와 예배모범을 성경적인 줄 알고 받아들이며, 또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를 성경적 고백서로 받고 다음과 같은 모든 것을 배척합니다. 1) 성경의 무오를 믿지 않는 자유주의의 모든 학설. 2)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자연주의. 3) 사람의 책임을 망각하는 무관심주의. 4) 경건의 능력을 무시하는 형식주의 또는 의식주의. 5) 허영과 허세와 부실을 개의치 않는 물량주의. 6) 화평을 좇는다는 명목으로 분명한 비진리를 포용하는 타협주의(예컨대 WCC 운동). 7) 복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게 하는 무자격한 교역자들의 복음사역 진출 등을 배척합니다. 우리는 무분별한 패쇄주의를 지양하고, 정치 형태가 개혁교회와 다를 지라도 건전한 복음주의 교단들과는 교류를 힘쓰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I believe 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고백함과 같이 우리는 땅 위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다른 교회들과 하나 되기를 기도하며 힘쓰겠습니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 교단은 전통적인 장로교 신앙고백서뿐 아니라 개혁파교회의 3개 일치 신조인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까지 채택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개혁주의 교회 및 정치 체제까지 추구하는 것으로 타 장로회 교단들과 차별화 하였다. 특별히 타 장로교단과 달리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채택한 것은 예장 합신이 개혁파교회가 추구하는 개혁주의 정신이 담긴 돌트신경 및 벨직신앙고백을 비롯해 ‘돌트 교회질서’까지도 교단이 추구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정신으로 삼고자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의 정신은 칼빈이 정립한 신학을 그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개혁주의 교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헌법 총론에서 밝힌 바 우리 교단이 추구하는 개혁주의는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교회를 추구하고 있으며, 동시에 칼빈이 제시한 개혁주의 교회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교단이 명실상부한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이념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교단 설립의 이념과 교단이 추구하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의 정신을 고양하고 함양해 나가야 한다는 역사적인 사명 의식을 고취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우리 교단이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길임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536 no image 복음전도자의 후원에 대한 이해
편집부
2491 2013-08-27
복음전도자의 후원에 대한 이해 바울 사도는 자비량을 원칙으로 삼아 복음 사역을 하였다. 바울의 자비량 원칙은 당시 삶의 지혜나 성공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쳐 준다고 강의를 하면서 모금 행각을 벌이고 있었던 순회 전도자들이나 순회 철학자(지혜자)들과 차별을 두기 위함으로 보인다. 바울이 구원의 복음을 선포한다고 하면서 모금을 했다면 바울 역시 순회 전도자나 철학자들과 다를 바 없는 인물로 여김을 받을 것이며 바울이 전하는 복음 또한 철학의 일종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복음의 진보를 위해 모금을 하지 않음으로써 복음의 은혜성을 돋보이려 했다. 하지만 빌립보 교회만은 후원에서 예외로 했다.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복음 사역을 하게 된 것을 가리켜 ‘복음의 시초’라고 한 것은 아시아에서 마게도냐로 건너와 복음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은 자신의 선교 역사상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복음 사역을 함에 있어서 괴로움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힘써 바울을 도왔다. 반면에 빌립보 교회의 후원에 대해 바울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자신의 동업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후원을 받지 않아도 자신의 복음 사역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럼에도 빌립보 교회의 후원을 받아들인 것은 그들의 관대하고 자비로운 태도가 그들의 삶에 더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빌립보 교회의 후원은 바울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사랑의 실천이란 단순히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적이고도 거룩한 예배임을 확인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후원을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주실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렇지만 빌립보 교회의 후원은 여유와 부요가 아닌 고난과 가난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자신들의 희생적 사랑 그 자체였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우리의 영적 예배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535 no image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자
편집부
2458 2013-08-27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자 예수님을 보내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그 아들이 삶을 드리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빛나고 놀라우신 거룩한 사랑의 증거이며, 우리가 그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보내셨다는 사실에서 재확인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희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지식은 하나님 자신의 일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따라서 사랑에 대한 정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으며 추상적으로 인식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의 구체적이며 역사적 사건을 통해 행하신 일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동반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실 목적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실천적 지식을 동반하지 않은 개념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설명하지 못한다. 여기에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 사상과 본질이 담겨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분은 죽음을 통해서 우리 죄를 다루셨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동떨어진 대가로 당해야 할 형벌을 당하셨다. 그 형벌은 마땅히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이었다. 이처럼 십자가 때문에 우리 죄가 용서받고 제거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는 확실한 죽음 대신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오로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와 같은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이다. 그 원천은 하나님 안에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그 사랑의 목적은 무수한 생명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복을 누리게 함에 있음을 우리는 날마다 고백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534 no image 힘써 가정심방에 충실하자
편집부
2796 2013-08-06
힘써 가정심방에 충실하자 교회의 가정심방이 종교개혁과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는 것 같다. 로마 천주교는 마치 사제들이 사죄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성도들을 미혹하고 소위 ‘고해성사라’는 미신적 행위를 통해 성도들을 관리해 왔다. 그들은 고해성사가 신자 개개인을 돌보며 사제들의 인도를 받는 방편인 것처럼 속여 왔었다. 심지어 그들은 사제들에게 하는 이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들이 용서를 구하고 사죄를 받을 뿐 아니라 교회로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받는 것처럼 신자들을 속였던 것이다. 이처럼 신자들이 사제들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는 동안에 교회의 거룩한 직분인 장로직이 철저하게 외면을 당하고 말았다. 실제로 로마 천주교에서 장로의 직분은 유명무실한 바로 그것이었다. 때문에 로마 천주교에서는 오로지 사제들에 의해 교회가 통치되는 비민주적인 정치체제가 자리 잡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사제들의 미개하고 불손한 통치 행위를 거부하고 이를 비성경적이라고 반박했다. 칼빈은 실제로 이러한 비성경적이고 미신적인 로마 천주교의 잘못된 관행을 완전히 폐지시켰다. 대신 그 자리에 목사와 장로들을 신자들에게 보내어 목회적인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이로써 신자들은 목사와 장로들에 의해 실제로 신앙의 돌봄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장로 직분의 기능이 회복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교회는 가정심방을 통하여 장로들은 신자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권면하고 인내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그리고 장로들은 신자들에게 위로나 권면이 필요할 경우 그에 합당한 절차를 따라 위로와 권면을 행함으로써 온전한 교회의 권징을 실시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가정심방은 성령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공급하시는 은혜의 방편으로써 말씀 선포와 성례의 시행과 권징의 시행을 건전하게 수행하는 하나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특별히 교회에서 가정심방은 주의 만찬의 시행과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주의 만찬을 통하여 모든 신자들이 결속될 뿐 아니라 주의 만찬을 통하여 교회생활의 최절정에 이르게 되는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교회의 가정심방은 신자의 신앙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요소이다. 때문에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가정심방에 많은 심혈을 기울여 오고 있다. 그만큼 가정심방은 교회의 정체성을 세우는 단단한 뼈대와 같다. 그러므로 가정심방을 연례행사정도로 치부한다는 것은 거짓 설교가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533 no image 언약궤를 통해서 본 예배의 정신
편집부
2731 2013-08-06
언약궤를 통해서 본 예배의 정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혹은 법궤)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보좌로 삼으셨다는 점에서 신현(神顯)의 극치를 보여준다. 지성소에 자리하고 있는 언약궤 위에는 그룹 천사의 날개가 보위하고 있다. 이것은 하늘 궁정을 가장 간소하게 축소시켜 놓은 형상이다. 바로 그 공간에 하나님께서 거처하실 자리를 정하셨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주를 초월하시며, 하늘 궁정에서 친히 역사를 주관하시고 결정하신다. 지성소는 바로 이 하나님의 궁정을 모방한 것이며 언약궤는 하나님의 보좌를 모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작게 축소시킨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하나님의 나라의 축소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성전을 만들게 하셨다. 성전은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보이신 자기 계시의 극치로 독특한 존재 의의를 가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 성전을 자신의 몸과 동일시 한 것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요한 사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켜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고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계 21:23)는 묘사처럼 전혀 새로운 질서의 세계가 펼쳐질 것을 예고하고 있다. 비록 우리는 요한 사도처럼 완성된 영광스러운 성전의 극치를 지금 볼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의 눈앞에 서 있는 현재의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전권을 가지시고 우주와 역사를 통치하신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눈에 비치는 교회당은 단순히 종교적 예식을 치르기 위한 구별된 건물만이 아니다. 비록 가시적인 건축물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야말로 하나님께서 자기 계시를 극대화하실 뿐 아니라, 우주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도록 하는 유일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함에 있어 한 치의 소홀함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기쁨으로 찬양하는 일에 전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532 no image 신앙의 길잡이인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
편집부
2516 2013-07-23
신앙의 길잡이인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는 말이 있다. 아무래도 인간이 습득한 인식 혹은 인지라 할지라도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오류와 한계를 인정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아는 것이 진실 혹은 진리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등등은 어떤 사물의 실체를 아는 것에 있어 전부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인식의 대상 또한 너무나 많고 다양하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일 수 있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상대일 수도 있고, 나아가 하나님일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스스로 겸손하지 않을 수 없고 겸허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든 아는 것과 실제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괴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진실과 얼마나 부합되는지 세세하게 점검해야 한다. 보통 돌아봄이라고도 하는데, 실험실에서 얻게 된 어떤 결과를 놓고서 당연히 실험자는 그 결과가 정확한지 여러 번 검사를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학문을 하거나 신학을 하거나 심지어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신자들의 기본자세이다. 이러한 점검이 없다면 자기 자신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다. 마치 안개 속에서 헤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그때 돌아보는 작업에서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이다. 내가 과연 얼마나 정확하게 진리를 인식하고 있는가를 가름하는 최적의 길잡이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서 목사나 신학교에서 교수는 신자들에게 있어 혹은 신학도들에게 있어 하나의 지팡이가 되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길잡이까지는 되어줄 수는 없다. 그것은 어떤 목사나 교사든지 오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들의 인식에서도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 인식의 바름을 정확하게 가름하는 잣대가 바로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 것이다. 목사와 교수와 성도들은 다름 아닌 이 신앙고백서를 길잡이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르게 점검하고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성경 다음으로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길잡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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