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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no image 신종 플루와 칼빈의 방책
rpress
2748 2009-11-18
신종 플루와 칼빈의 방책 신종 플루가 지난 4월 멕시코에서 시작한 이후 그 기세를 맹렬하게 떨치면 서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소문에 의하면 미국에서만 현 재 4천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고 하니 정말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전 세계 신종플루 사망자는 이미 6천 명을 넘어선 상태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10월부터 사망률이 급격하게 상 승하면서 11월 12일 날짜로 사망자 수가 64명으로 증가했다. 사망자의 다수가 주로 고위험군에 속한 사람들이지만 비고위험군 사람도 3명 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신종 플루가 대재앙이 될 거라던 전망이 현실로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생활이 규칙적인 집회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기독교는 매우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셈이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집회에 참석하는 동 안 신종 플루에 집단적으로 감염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이 예상되기 때문이 다. 그러다보니 믿음이 크건 작건 많은 신자들이 집회에 참석하기를 기피하는 현 상을 보이고 있다. 주간 중에 진행되는 다양한 일반 모임들은 그렇다 손치더 라도 심지어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까지도 이와 같은 기피현상이 높아지 고 있다는 것을 볼 때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신종 플루의 위세가 더 악화되기 전에 그리고 신자들의 망설임이 더 심화되 기 전에 분명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신종 플루에 대한 두려움으로 신자들 이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무조건 불신앙으로 치부하거나 비난하지 말 고 합리적인 방책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교회는 성도들에게 신종 플루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할 필요 가 있다. 신종 플루의 정체, 예방접종, 잠복상태, 초기증상, 심각성 등을 알 려주고 전염과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상생활의 위생을 철저하게 홍보해 야 한다. 이와 함께 물리적인 대책으로 교회의 출입구를 비롯하여 눈에 잘 띄는 여러 장소에 손세정제를 설치하는 가장 간단한 일부터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 이 미 웬만한 교회에서는 이런 노력이 시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행이 단순히 신종 플루에 대 하여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 하는 정도의 형식적인 행사로 끝나서는 안 된다. 손세정제 곁에 안내원을 세 워 집회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손을 소독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것 이 옳다. 또한 집회 중에는 보기에 흉할지 모르지만 성도들이 방역에 효과가 있는 마 스크를 착용하는 것도 생각해봄직한 일이다. 모임 전후에 신자들은 만나는 반가움에 서로 악수를 하는데 신종 플루가 성행하는 동안에는 잠시 악수를 자제하고 목례를 하거나 손을 흔드는 방식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주일에는 함께 식사를 하면서 식탁교제를 나눈다. 그런 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다른 때보다 지금은 식기 소독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할 필요가 있다. 감염 의심자와 확진자가 집회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되 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예배와 신앙생활에 축이 나지 않도록 교회가 특 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사람들이 비록 교회 에는 나오지 못하지만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장소에서 개인적으로라도 예배 하도록 진심으로 권면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개인예배를 위한 지침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을 이용 하거나 우편으로 주보와 설교, 성경공부자료 등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목 회자들은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전화로 이런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을 지도하 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종 플루가 사회 전반에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교회는 대내적인 시각만을 가질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떻게 사회를 도와야 할 것인가도 생각해야 한다. 신종 플루 검사비용과 치료비용이 저소득층 사람들에게는 작지 않은 부담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특별예산을 세우거나 특별지출안을 만들어 신자든 불 신자든 감염자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좋겠다. 더 할 수 만 있다면 교회는 신종 플루 백신을 생산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도 록 하자. 하지만 올해 봄부터 세계적인 재앙으로 인류를 강타하고 있는 신종 플루의 공포 앞에서 교회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대책에 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게 지금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칼빈의 지적 처럼 영적 각성이다. 칼빈은 말한다. “전염병 이나 기근이나 전쟁이 휘몰아치기 시작하거나 어떤 재앙이 한 지방과 주민에게 닥쳐올 듯한 때에 주의 진로를 피할 수 있도록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목사는 교회에 금식을 권고할 의무가 있다” (기독교강요, 4권 12장 17절). 지금 교회는 신종 플루라는 지구적인 전염병의 재앙에 직면해서 우리의 죄악 이 무엇인가 철저하게 점검하면서 주님의 엄격한 징벌을 면할 수 있도록 금 식을 선포하고 회개해야 하지 않을까.
350 no image 병든 교회에는 올바른 처방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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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2 2009-11-04
병든 교회에는 올바른 처방이 필요하다 요즘들어 ‘신종풀루’가 극성을 부리며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 다. 그런가 하면 교회에서는 그 근원이 분명치 않은 각종 세미나 혹은 집회 들이 성도들의 영혼을 유린하고 있다. 이런 때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기 위 해 부름받은 목사들의 올바른 처방이 절실히 요구된다 하겠다. 교회의 직분자인 ‘목사’는 어떤 면에서 ‘의사’와 매우 유사하다. 목사 는 매 주일마다 성도들의 영혼 건강을 좌우하는 영적 양식을 공예배를 통해 진설하며, 죄에 오염되고 병든 성도들의 마음을 진단하여 그에 합당한 말씀 의 처방전을 제시하여야 한다. 혹시라도 개인 성도나 전체 교회가 병들어 있으면서도 그 병을 인지하지 못 하고 있다면 목사는 그 병명이 무엇인지, 그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섬기며 애쓰는 것이 정상 적인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 교회가 극도로 병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목사들 은 이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같아서 안타깝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고 철저하게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 심리치유라 는 엉뚱한 치료법을 처방하는가 하면 자신의 종교철학을 강연하고 삯을 받 아 챙기는 이른바 삯꾼 목사들도 적지 않은 것같다. 병들어 고통 받는 환자에게 올바른 지침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립서비스 를 통해 거짓된 평안과 희망만 계속 안겨준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 가. 그 병은 점점 심각해지고 낫지 않아서 누룩처럼 퍼지며 온 성도들을 감 염시켜 결국 교회를 비참한 상태에 다다르게 할 것이다. 성경을 유일한 진단서이자 처방전으로 여기지 않고 엉뚱한 것을 가져다가 불 법 진단, 불법 치료를 자행하며 영업하는 불법 목사들이 우리 시대에 활개 를 치고 있다고 생각하니 하나님 앞에서 두렵기 짝이 없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들의 활동이 합법적일지 모르나 그들의 불법은 결국 하나님의 책 망을 받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 7:22-23). 변종된 바이러스인 ‘신종플루’가 여러 사람을 사망에 빠뜨리며 유행하는 요즘, 변종된 바이러스처럼 급속도로 퍼지며 교회 를 병들게 하는 불건전한 신학사상들에 대해 올바른 진단과 처방이 필요한 오늘날 이를 담당하고 있 는 신학교수들과 목사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올바른 의술이 아닌 긍정의 힘을 믿는 의사가 위험하듯이 성경이 아닌 스스 로 만들어 낸 종교적 신념과 철학에 의지하여 교회를 다루는 목사들은 교회 를 더욱 깊이 병들게 할 위험을 늘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메스가 건전한 의사에게는 치료 도구이지만 불법 의사에게는 흉기가 될 수 있듯이 불법 목사의 활동을 별것 아닌 것으로 가볍게 보며 계속하여 그에게 말씀의 상속을 맡긴다면 결국 교회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 다. 우리 시대 교회가 당면한 문제 중 가장 시급한 것은 이러한 불법 활동을 강 하게 견제하고, 말씀이 계시하는 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참된 뜻을 올바 른 처방으로 제시하여 이를 통해 병들어 있던 자신과 교회의 모습을 바로 깨 닫고 하나님의 은혜로 조금씩 건강을 회복해 가도록 개혁해 가는 일이라 아 니할 수 없다. 이 가운데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자신과 교회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올바로 살피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자신과 교회를 살피지 않으면 속을 수밖 에 없기 때문이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아무리 건강하다, 문제 없다고 진단 할지라도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과연 그러한가를 살피지 않으면 자기를 속이 게 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는 성도들을 실제로 감독하고 돌보는 직분으로 장로직이 있다. 장로들은 당회를 통해 가장 먼저 교회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성도들 을 심방하며 그들의 영적 상태를 목사에게 알림으로써 성도들의 영혼이 병들 지 않도록 예방하는 최일선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각종 혼잡한 행사들과, 성도들을 미혹하고 참된 말씀의 도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각종 유사 종교 행위들에 대해 일선 에서 진단하고 막아내는 최전선의 척후병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 야 할 것이다. 최일선 방역진으로서 장로들이 무너진다면 누가 교회의 건전 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우리 시대 보편교회가 이러한 일들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란다. 자기 만족 과 재미를 추구하며 자신과 교회의 건강을 올바로 돌보지 않을 때 그리고 ‘나는 건강 하다’며 거짓 평안과 거짓 믿음으로 일관할 때 돌아올 결과가 어떤 것일지를 깊이 생각해보며 반드시 말씀으로 건강 진단을 받는 일을 미 루지 말아야 할 것이다.
349 no image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우리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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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9 2009-10-21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우리의 입장 2013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를 부산에 유치했다는 소식에 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WCC를 중심한 에큐메니칼 운동을 계속해 온 이들은 한국의 경제적 성장과 한 국 교회의 위상에 비추어볼 때 이와 같은 총회 유치는 자연스러운 일로 여긴 다. 다양한 국제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되고 G20 정상회담이 내년에 한국에서 열리기로 한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WCC 총회를 개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예장 통합측 사무총장은 “제10차 WCC 총회 장소가 한국 부산으로 결정된 것 은 21세기 세계교회의 비전과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한국의 역할에 대 한 기대와 소망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주 신 은혜이자 도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WCC 가입에 반대하면서 교회가 분열된 경험을 가진 쪽에서는 과연 WCC가 바른 에큐메니칼 운동인가에 대한 깊은 반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른 문 제들과 맞물려 있기는 하기만 WCC 문제로 교단이 승동측과 연동측으 로 따로 총회를 하고, 결국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나누어진 중심에는 WCC 신 학의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그 당시 WCC가 나타내던 신학적 입장이 바뀌어 져서 이제는 보수적인 교회들도 환영할만한 국제적 교회연합기구가 되었는 가 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물론 WCC는 여러 교회들의 연합운동이기 때문에 어떤 입장이 WCC의 공식적 입장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WCC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는 분들의 언명을 인용하면서 그들의 입장을 말하면 대개 그것은 WCC에 참 여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입장일 뿐이지 WCC의 공식적 입장은 아니라고 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전 WCC가 천명하던 신학적 입장보다 21세기 초 에 WCC에 관여하는 이들이 나타내는 입장이 보다 과격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지금 WCC는 공식적으로 “성경을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공동의 소명을 함께 수행하 기 원하는 교회들의 연합”이라고 주장 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아주 다양한 신학이 WCC 관련자들에 의해서 주장되고 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종교 다원주의 주 장부터, 의식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실질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내포주의(포괄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생각이 WCC 안에서 주장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WCC 안에서 보다 보수적 입장을 대변하는 이들로는 동방 정교회의 대표자들 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KNCC가 표방하는 신학적 입장은 더 과격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통합측 강남 노회 장로들의 모임인 강 남노회 장로회에서는 KNCC의 극단적 주장을 공식적으로 강하게 비판한 바 있 다. 심지어 장로회원들 간에서는 교단이 WCC로부터 탈퇴해야 하지 않느냐는 문 제 제기와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WCC가 과거의 WCC보다 더 보수 쪽으로 다가가기보다는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갔다는 것이 공정한 판단일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WCC 자체의 다양한 신학 적 입장 때문에 WCC에 속해 있는 모 든 이들을 그대로 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 제요 자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말하기에는 WCC에 참여 하는 분들의 신학적 다양성이 너무 크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어떤 종류의 일치 추구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또 그래 야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참된 교회는 항상 진리 안에서의 일치를 추구 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WCC와 같이 극단적인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통일성 과 일치를 추구해 가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영적인 하나됨에 근 거한 성경적 진리에 충실한 진정한 교회의 하나됨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진리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는 것이므로 진리 안에서 교회는 하나일 뿐이 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적 진리에 참으로 동의하는 교회들의 깊이 있 는 대화와 연합적 활동,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내적이고 영적인 연 합을 외적으로 구현할 것을 추구하는 일에는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모든 성경적 신학자들이 말하는 진정한 에큐메니즘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 WCC 운동이 이런 진정한 에큐메니즘의 실현으로 보이지는 않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 다양성이 너무 크고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십자 가에 근거한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강한 의구심이 있기 때문이 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내적으로 우리 입장을 확인하는 한편, WCC에 대해서 는 이번 대회를 계기로 최소한 공식적으로 표명하는 입장으로라도 돌아가기 를 촉구하는 바이다.
348 no image 힘겨운 손 먼저 잡아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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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6 2009-10-07
힘겨운 손 먼저 잡아 주자 (최저 생활비를 돕는 「나눔의 헌금」 봉투) 관심의 경제학에서는 말하기를 관심에도 총량이 있다고 한다. 즉 어떤 형태 의 모금에도 관심을 많이 쏟으면 또 다른 것에는 적게 관심을 갖는다는 뜻이 다. 제94회 총회목회자최저생활비 대책실행위원회의 보고에 의하면 「나눔의 헌 금」 참여 현황(2008.9-2009.8) 보고는 17개 노회 4,929명(5.45%)이 참여하 는 극히 저조한 실적이었다. 이 「나눔의 헌금」은 헌금 봉투를 만들어 전국 교회에 보내어 1년에 1회 일 만 원 이상 자의로 헌금케 하여 이를 취합 후 목회자 최저생활비를 지원 하는 대책의 일환이다. 모 교단의 미자립교회 현황조사에서 미자립교회가 자립하기 힘든 이유로서 교회의 입지조건(66.2%)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으며, 목회자의 능력부족 (13.8%), 교단의 지원부족(9.3%)순으로 응답되었다고 발표했다. 이와 같은 통계를 보면 목회자의 능력부족보다는 교회의 입지조건이 열악하고 재정적 어려움이 가장 큰 애로임을 알 수 있다. 본 교단 상 황도 아마 동일할 것으 로 본다. 총회의 보고에 따르면 목회자 최저생활비 대책실행위원회가 추진하고 있는 「나눔의 헌금」은 계획과 방법은 좋았으나 이를 호응하는 교회가 적었고 심 지어는 참여하지 않은 노회도 두 곳이나 되는데 이 저조한 것을 분석한 내용 을 보면 아직까지 개 교회들의 참여의식이 결여된 것으로 결론지었다.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참여도가 높아야 그 실적도 많아지고 사업도 만족스 럽게 수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실행 위원회는 노회별로 홍보를 보 다 적극적으로 하기로 했다. 이에 덧붙여 말하자면 세미나나 중장기 대책도 중요하겠지만 화급한 것은 중 장기 대책보다도 지교회의 담임목사와 당회의 깊은 관심이 필수적이고 더 나 아가 총회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에는 우선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이 라 하겠다. 일반 사회에서는 자선 기관들에 보통 사람들의 작은 기부가 몰려들고 있다는 데 이것은 자선 단체에 개인이 낸 돈의 비율이 93%였다고 한다. 특히 우리 교단에서는 모금이 저조하여 폐기하기로 한 ARS모금방법에 걸려온 전화가 약 10일간에 47,000여건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활 발한 모금의 배경 에는 다들 나도 힘들지만 기부행위는 나보다 더 춥고 더 힘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해서 보낸 돈이라고 한다. 기부자의 혜택도 고려한 점이 기부자를 끌어 올렸다고 한다. 어느 단체에서 는 기부하면 100%의 소득공제를 받고 또 어떤 단체에서는 15% 밖에 안 되는 소득 공제를 받는다고 한다. 어찌했든 기부자에 대한 소득공제는 필요한 조 치이다. 왜냐하면 기부하는 사람들의 기부 의욕도 생기게 할 수 있고 투명 한 공개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현재 총회 산하 장년층을 90,400명으로 보아 1인 1만원씩 전원 「나눔의 헌 금」에 참여한다면 904,000,000원의 큰 돈이 된다. 어떤 형태의 모금방법이 든 성도들이 익숙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홍보와 함께 방법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 기부는 나도 힘들지만 나보다 더 춥고 더 힘든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홍보하 는 것은 물론 총회나 노회가 함께 관심을 갖는 것도 중요하고 기부를 할 수 있는 층인 중대형교회의 담임목사의 관심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겠다. 연중 1 회 이상 모금도 중요하지만 당분간 성도들이 익숙하게 습관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때까지 매주 「나눔의 헌금 」에 대해 광고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또한 모든 기부자에게 소득공제의 혜택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일반 인까지도 기부에 동참할 수 있도록 대내외적으로 홍보를 확대하는 것도 좋 은 방법이다. 우리들의 이웃에는 최저생활비를 유지 못하는 목회자가 있는 가 하면 공식적 빈곤층이 153만 가구, 독거노인 93만 가구, 장애인 194만 가 구, 한 부모가정 144만 가구, 소년 소녀 가정 1,630가구, 노숙자 4,500여 명, 쪽방에서 사는 사람 5,800여명이 된다. 이와 같은 통계 숫자의 하나하나에 숨겨져 있는 사연들은 얼마나 아프고 쓰 라릴까? 한겨울에 추운 날씨도 날씨이겠지만 춥고 배고파하는 이웃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다. 이를 돌보는 손과 발에 탄력을 주는 기부행위는 하면 할수록 좋다. 이제 곧 겨울이 찾아온다. 저들의 힘겨운 손을 먼저 잡아 주도 록 하자.
347 no image 총회는 복된 모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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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4 2009-09-23
총회는 복된 모임이다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와 장로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교회정치를 의논하는 것 은 장로교만의 자랑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로마 천주교의 교황정치의 횡포 를 반대하고 성경적인 신앙으로 돌아가 초대교회의 장로정치를 회복하기까지 에는 많은 시간과 희생이 있었다. 12세기의 왈도파는 로마 천주교의 교황정치를 따르지 않고 장로정치 제도를 통해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왈도파는 장로를 회중이 추천한 후 당회에 서 선거하였고 장립식을 거쳐서 그 직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계급구조는 인 정하지 않았고, 모든 목사와 장로는 동등한 권세를 가진다고 보았으며 노회 제도를 두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이 사상은 로마 천주교의 주 된 공격의 대상이 되어 1487년 교황 인노센트 8세는 군대를 보내어 왈도파 를 진멸하고자 백만 명 이상을 처형하였다. 루터의 ‘만인 제사장’ 사상에 기초하여 시작된 종교개혁은 칼빈을 통해서 교회 정치원리를 ‘장로정치’로 정착하여 로마 천주교의 ‘교황정치’를 대 치하게 되었다. 이 원리는 3가지 속성이 강조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주권 아 래서 모든 지체들이 누리는 평등성, 직분을 맡은 자들을 통하여 자유롭게 운 영되는 자율성, 대표를 통하여 실시되는 연합성이었다. 이러한 칼빈의 개혁적인 ‘장로정치’ 사상을 스위스가 받아들였고 그의 고 국인 프랑스의 위그노들을 통해서 확장되었다. 칼빈은 위그노들에게 무력시 위를 자제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여 결국은 종교전쟁으로 이어졌다. 로마 천주교는 1572년 정부 군대를 동원하여 위그노들을 색출해서 팔만 명 에 가까운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다. 당시 위그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25 만 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인접한 국가들로 이민을 하게 되 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장로정치를 원하여 ‘벨직신앙고백서’에 동참하는 자들이 3 개월 만에 1,800명이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이렇게 종교개혁의 바람으로 거세게 일어났던 장로회 정치는 영국의 청교도 들을 통해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열매를 맺었으며, 그 총회에서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등 장로교 신앙의 표준 문서들을 작성해 냈다. 천주교 에서 채택하고 있는 교황정치와 감리교회, 성공회, 루터교회에서 채택 된 감독정치에서는 교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강조한다. 그래서 평신도들을 교회 운영에서 제외시킨다. 그들에게는 평신도를 대표하여 교회 정치에 참여 하는 장로가 있을 수 없다. 반면에 교황정치나 감독정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회중정치는 목회자간의 평등을 강조하며 교회 안에 계급구조가 있을 수 없는 것이 장로정치와 같지 만, 교회 회의의 위계제도를 반대하고 치리와 권징을 위한 교회의 연합도 거 부하며 개 교회주의를 추구한다. 이런 회중정치 제도는 침례교회, 형제단, 그리고 회중교회에서 채택되었다. 오직 장로교만이 만인 제사장을 강조하며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 평등하 며 교직자 간 또는 교회와 교회 사이에 평등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다. 즉 장로교회 정치형태는 교회의 일치를 구현하는데 실패한 회중정치의 오류와, 교회의 권위 행사를 교직자들로만 소집하여 회의를 하는 감독정치 의 오류를 제거했다. 그럼으로 지역교회의 자율, 교직자 사이의 평등, 교회 의 연합을 추구한다. 우리는 이런 정치제도를 이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 지고 총회에 임하여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많은 시련을 이기고 주님의 왕권을 세우기 위해 성경적인 교단 총회가 열린 것은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총대들은 당회와 노회에서 교 회를 대표하는 주의 종들이다. 교회를 주님의 마음을 품고 섬기는 자들이 다. 우리는 이런 위치에서 수고하는 것을 알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주어야 한 다. 그동안 교회를 섬기면서 많은 영적인 싸움에서 지쳐있을 수 있기 때문이 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 있는 영적인 세력과 싸우는 것 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제94회 총회도 주님에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원들을 뽑아 세웠으니 주 님이 원하시는 일꾼들이 세워졌다고 믿고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하 며 힘써 협력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총회장에게는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 태도는 말 보다 더 많은 말을 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뽑혀진 임원들이 약간의 실수 를 해도 수용하고 받아들여서 끝까지 임기를 잘 마치도록 격려하고 협력해 야 한다. 끝으로 회의를 인도하다보면 찬반 양론은 언제라도 있 을 수 있다. 그러나 결 정이 된 후에는 하나님의 뜻인줄 알고 겸손하게 받아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고 그들의 마음을 안아줄 수 있으면 더욱 아 름답겠다. 오늘의 총회를 주님이 보실 때 주님이 잘하고 있다고 박수치실 수 있는 성숙 한 회의가 되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자.
346 no image 어떤 찬송을 불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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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0 2009-09-17
어떤 찬송을 불러야 하는가? 예배에서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찬송이라는 것은 지각 을 가진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어떤 찬송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합당한가 하는 것이다. 대략 한 세대 전쯤부터 청년들의 집회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찬송가 책 밖 의 노래들이 대중음악의 보급이라는 시류의 힘을 받으면서 강하게 전파되더 니 급기야는 예배에까지 도입되어 지금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입을 맞추고 있다. 한편, 최근 21세기 찬송가가 출판권 때문에 삐걱거리는 소리를 여간 많이 낸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아직도 여러 방면에서 적지 않은 비판의 소리를 듣 고는 있는 가운데 교계에서 점점 널리 사용되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예배에 합당한 찬송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더욱 절실한 것 처럼 보인다. 모름지기 개혁교회(장로교회)는 전통적으로 시편찬송을 고집해왔다. 개혁교 회가 시편찬송에 집착하는 데는 이유 가 없지 않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아 무도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받은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 하나님께 진정 한 영광을 돌리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가 이것을 힘주어 밝힌다.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바이 다. 그것은 그의 계시하신 의지, 곧 성경 말씀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 로 인간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단의 지시를 따라서 어떤 보이는 형상을 예 배의 대상으로 삼아도 안 되고, 기타 비성경적인 방법을 사용해도 안 된다” (21장 1항, 박윤선 역). 하나님을 예배하는 찬송을 위해 이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바로 시편이 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히스기야 왕도 여호와의 시(대하 29:27), 곧 다윗과 아삽의 시편(대하 29:30)으로 하나님을 찬송했고, 신약시대에 사도 바울도 시편을 노래했던 것이다(엡 5:19; 골 3:16). 이런 점에서 역사적인 개혁교회 는 예배에서 시편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야 마땅하다. 때때로 찬송가와 신앙격려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는 예배에서조차 찬 송가가 아니라 신앙격려가를 버젓이 부르는 잘못을 저지른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하여 부르는 노래는 찬송이고, 성도의 신앙을 세우기 위하여 부르는 노래는 신앙격려가이다. 일반적인 신앙 집회에서는 신앙격려가를 부를 수 있으나 예배에서는 반드시 찬송가를 불러 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강요에서 찬송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 칼빈의 말 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곡조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가 사의 영적 의미에는 마음을 덜 기울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 로 이렇게 적당한 정도를 지킨다면 노래를 부르는 것은 확실히 대단히 거룩 하고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 곡한 노래는 교회의 존엄성에 합당치 못한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기독교강요 3권 20장 32절). 어떤 이들은 예배에서 시편찬송을 사용하고 싶으나 구할 수가 없다고 말한 다. 그러나 이것은 가당치 않은 말이다. 우리나라에 이미 여러 종류의 시편 찬송이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번역되어 시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은 스코틀랜드나 미국에서 출판된 시편찬송들이다. 최 근에는 고맙게도 제네바 시편찬송이 출판되어 교계에 보급되고 있다. 개혁교회의 목회자들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이와 같은 시편찬송은 얼 마든지 입수하여 예배에서 사용할 수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학적으 로 볼 때 국적이 불분명한 노래들을 예배에서 마구잡이로 부르는 것은 칼빈 의 말처럼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 것임에 틀림없다. 개혁교회는 예배에서 시편찬송을 불러야 한다. 그러나 찬송에도 발전이 있다 는 것을 감안할 때 제네바 시편찬송을 비롯해서 역사적으로 출판된 여러 시 편찬송들을 함께 사용하면서 우리 시대에 맞는 곡조의 시편찬송을 창안하여 예배에서 더 많은 시편찬송으로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할 것이다.
345 no image 즐거움과 활력을 주는 총회로 모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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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6 2009-09-03
즐거움과 활력을 주는 총회로 모이자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함께 살아가려면 함께 결정하는 방법부터 알아가야 하 는데 상대방이 많으면 많을수록 일일이 상의하고 협상하여 합의를 도출하기 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관계를 효율적으로 해소하기 위 해 나온 것이 회의(會議)문화이다. 이 회의문화는 약 70%가 말의 교환에서부터 시작되며 말의 효율적 사용은 그 조직과 삶에 즐거움과 활력을 주게 된다. 사실 말이란 서로 주고받는 상 대가 있는 것이기에 회의에서 일방적인 의사 전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서로의 인격이 나타나고 서로 만나는 교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말의 사용은 신뢰와 공감이 전제된 논리적 설득 행위가 있어야 효율적 회의가 진 행되고 대화가 되는 것이다. 곧 제94회 총회가 열린다. 총회가 열리면 1년간 할 일들과 중요한 안건을 정 하여진 시간 안에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회의에서 결정하는 과정이 번거러워 서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주된 요인이 말로 인 한 것들이다. 말의 교환이 효율적이 되지 못하면 의안 결정에 비능률적인 것은 물론 의안 을 결정함에 있어서 소수인들이 다수를 지배하려는 집단사고 현상이 일어나 게 된다. 그런가 하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 성안해야 하는 원칙을 깨고 소수가 발언권을 독점하는 분위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침묵형의 거수기가 되어 버리는 경우도 발생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제한된 총회일정에 비해 의안들이 과중하고 신중히 다루어야 할 의안들이 있음에도 시간의 부족과 지루하고 진부한 무거운 분위기 때문 에 신중하지 못하게 결정하는 다수가 거수기 회원들로 나타나는 집단변화 현 상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회의 분위기 때문에 많은 회원들이 회의 에 대하여 무척 회의적(懷疑的)이어서 무관심하거나 긴장하는 두 가지 형태 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문제점은 매회 회의 때마다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를 해소하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의 표현에서 찾아야 한다. 말 은 혀로서 발성하지만 사실 말은 두뇌운동이다. 언제 어떤 말을 적절히 행사 할 것인가 하는 판단은 명석한 두뇌의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 러므로 명석한 두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창조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해 야 한다. 보통 생각이 없고 지각이 모자라는 사람일수록 말을 떠벌리는 경향이 있다 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의 열등의식의 보상 심리적 작용이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그룹에 속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회의에 있어서 말의 교환은 평등해야 하며 일방적 지시형이나 명령적이거나 가르침의 대화는 없어져야 한다. 동일한 자격의 총대로 출석한 총대가 다른 총대를 가르치려 한다든지 고참 회원이 신참 회원을 훈계하는 등의 행태는 없어야 한다. 특히 언권회원이나 원로급 회원은 스스로 이를 자제해야 한 다. 회의때 사용되는 말은 부드럽고 세련되게 해야 하며 간결하면서도 명료하게 해야 한다. 자꾸 말꼬리를 잡거나 순간적인 기분과 재치로 임기응변의 대화 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말의 표현에 있어서 과격한 어휘나 어구를 쓰거나 존재과시형의 말을 구사함 으로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언어는 삼가야 한다 . 또한 핵심 과 거리가 먼 자기 소견을 일방적으로 장황하게 피력해서도 안 된다.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교회의 결정은 만장일치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사 도들과 장로들이 만장일치로 결정을 지을 수 있었던 비결은 성령께서 그 모 임을 관장하셨기 때문이다. 즉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 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행 15:28)라는 보도처럼 성령을 통한 만장일치의 결과를 이룰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주의 마음을 알기 원하는 공통적인 염원에 근거하여 서로간의 차이점을 자유 롭고 솔직하게 논할 때 우리는 만장일치로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래서 우리는 회의에 임할 때마다 마음의 확신을 가지고 주의 마음을 알기를 갈망하면서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만약 의제를 놓고 토론할 때 심각한 의견 차이가 나타나거나 장애 요소가 나 타날 때에는 우리의 기도가 부족했거나 정보교환의 부족으로 인함을 알고 다 수의 사람이 동일한 의견에 동의할 때까지 조급하게 결정하거나 집행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연기하거나 유보하는 것이 덕일 수 있다. 성경에 유순 한 대답은 분노를 쉽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시킨다(잠 15:1)고 하였다. 이번 제94회 총회가 시끄러운 말잔치 공해로부터 벗어나고 조직적인 회의 분위기 속에 즐거움과 활력을 주는 은혜로운 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344 no image 노회추천 특별전형의 성공적인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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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3 2009-08-18
노회추천 특별전형의 성공적인 정착 지난 6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는 2010년도 입학생 선발을 위하여 올 하반기 에 시행할 전형방법을 결정, 발표하였다. 이번 입시에서 특기할만한 변화는 정원의 10% 한도 내에서 사회저명인사 특별전형 선발 인원을 뺀 나머지 인원 을 노회추천 특별전형으로 선발하는 일이다. 예년의 전형결과에 비추어볼 때 10% 대부분이 노회추천 특별전형 지원자에 배정되리라고 한다. 노회추천 특별전형 방식은 합신 노회의 추천을 받은 목사후보생고시합격자들 을 일반전형 지원자와는 별도로 전형하는 방식이다. 구체적으로는 일반전형 항목인 성경시험, 영어시험, 면접 대신 서류전형, 성경시험, 면접을 통하여 신입생을 선발한다. 합신이 개혁신보(6월 23일자 머리기사)에서와 전국 노회장들에게 보낸 편지 (7월 17일자)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노회추천 특별전형을 시행하는 목적의 첫 번째는 우수한 인재의 선발이다. 전형방식의 다양화를 통하여 기존방식으 로는 놓치기 쉬운 지원자를 선발 하여 주님의 교회와 선교현장에 필요한 하나 님의 일군으로 양성하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노회추천 특별전형은 인준관계를 입시에 제도적으로 반영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노회 소속 교회가 일정 기간 교육하고 주님의 교회에 필요 한 자로 검증하여 추천한 지원자는 신앙과 인격, 목회적 은사와 신학적 지향 성에서 일반전형방식보다 더 확실하게 검증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별전형방식의 도입에 대하여 총회는 이미 환영의 뜻을 밝힌 바 있 다. 사실 그동안 일반전형방식에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없지 않았다. 성 경과 영어 시험 위주의 전형방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고 객관성 확보 의 차원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으나, 이러한 방식만으로는 교단 산하 교회 에서 개혁주의 신앙으로 착실하게 훈련받고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준비된 자 로 인정된 지원자가 선발되지 못할 가능성이 제기되어왔던 것이다. 따라서 전형의 목적과 방법을 놓고 볼 때 이번부터 실시하는 노회추천 특별 전형은 전향적 보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회추천 특별전형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 야 한다. 즉 당사자 들인 합신과 추천노회 그리고 지원자 자신의 특별전형에 대한 정확한 이해 와 시행, 그리고 적극적인 협조가 요청되는 것이다. 먼저 시행자인 합신은 주도면밀한 관리를 통하여 시행에 차질이 없도록 만반 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처음으로 시행되는 제도인 만큼, 현실적으로 예상 되는 시나리오에 철저히 대비하여 착오가 생기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미리 미리 준비하고 적시에 홍보함으로써 학생과 추천노회가 제도의 취지와 방식 을 숙지하고 원활하게 지원하고 추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추천노회의 역할이다. 노회는 무엇보다도 자격 있는 지원자를 추천해야 한다. 물론 담임목사의 추천도 마찬가지이다. 노회추천 특별전형 방식의 성공여부는 사실상 노회의 공정한 추천에 달려 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한 두 사람의 면식에 의존하는 후보자가 아니라 여러 관련자들이 수긍할 수 있는 인재, 즉 교단 교회에서 일정기간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소명과 준비 가 섬김과 봉사를 통하여 여러 사람 앞에 인정된 자격자가 추천을 받을 때 장차 이들의 사역을 통하여 교회 의 앞날이 밝아질 것이다. 객관적인 추천을 위하여 노회 안에 가칭 ‘특별전형자 추천위원회’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 이 될 것이다. 추천 후에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노회 추천자가 다 합격된다는 보장이 없 다. 혹 가까운 사람이 합격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제한된 인원 내에서 성경시 험과 서류전형 그리고 면접의 결과로 추천자가 합격되지 아니하였을 경우 전 형결과를 존중하고, 후보자가 소명을 재확인하고 착실하게 다시 준비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야 한다. 마지막으로 입시의 주인공은 역시 지원자 자신이다. 그저 목사가 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좋은 목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내적, 외적 소명을 정직하게 확인한 후 부르심에 합당하게 준비하고 응시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설령 입학이 된다고 하더라도 본인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유익 되지 못 할 것이다. 신학은 그저 또 하나의 학문이 아니며, 목사는 그저 또 하나의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복음을 전 하며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 여기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 다. 결론적으로 정직한 준비와 주도면밀한 시행, 그리고 적극적인 협조가 노회추 천 특별전형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전형의 취지에 부합하 게 지원하고 추천하며 시행함으로써 좋은 학생 선발과 교단과 신학교의 보 다 긴밀한 관계라는 소기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 노회추천 특별전형은 성공적 으로 정착될 것이다. 첫 단추인 이번 시행부터 바로 시행되고 정착되기 위하여 입시당사자와 관련 자들의 철저한 준비와 적극적인 협조가 중요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 다.
343 no image ‘예배 찬송’에도 개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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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5 2009-08-05
‘예배 찬송’에도 개혁이 필요하다 작금 한국교회에서 예배 찬송으로 사용되고 있는 찬송가들에서 전통적인 교 회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감사 와 선포의 내용이 빈약하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전통적인 개혁교회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여 왔던 시편 찬송가를 배 제하고 신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찬송가들을 무분별하게 도입해 예배 찬송 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최상의 예배를 드려야 할 교회들의 자세가 아니 라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 초기 시절에 어쩔 수 없이 외국 찬송가를 번역해 사용할 수밖에 없 는 상황에서는 우주적인 교회, 보편적인 교회의 한 지체로서 그들이 고백하 는 신앙 내용을 답습해야 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미 신학이 변질되고 신앙 고백의 내용이 변질된 외국의 찬송가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하나님을 경 배하는 거룩한 예배 찬송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일이 아니다. 또한 한국 교회의 역사가 120년이 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예배에 대한 바른 의식을 가지고 그에 합당한 예배 찬송을 드려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는 찬송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우리가 새롭게 언약 공동체인 새 이스라엘로 부르심을 받고 그 안에서 존재 한다는 의식이 높아진 만큼 예배 찬송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로 선택받은 우리는 날마다 전개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 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 차원에서 마땅히 하나님 께 새 노래로 찬송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개혁교회 공동체가 역사적인 신앙 고백이 담긴 찬송으로 시편 찬송을 선택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칼빈은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중이던 1539년부터 1562년에 걸쳐 예배 개혁의 일환으로 예배 찬송에 적합한 ‘시편가’를 편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제네바 시편 찬송가는 칼빈에 의해 철저하게 감독, 편집되었으며 성경 본 문을 기초하여 이루어진 시와 노래가 운율화된 예배 찬송이었다. 이후 2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r 1645년 채택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서는 ‘공적 금식’과 관련해 “회중 이 모이기 전에 각 가정과 개인은 그 엄숙한 일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저희 의 마음을 예비하고 모이는 시간에 일찍 가도록 할 것이다. 그 날은 할 수 있는 대로 종일을 회중이 그 의무에 맞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말씀을 읽고 설 교하고 시편 찬송을 하는 데 보낼 것이다”고 제시하고 있다. 또한 ‘공적 감사일’과 관련해 “시편 찬송이 무엇보다도 기쁨과 감사를 표 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규칙이므로 해당하는 시편이나 시편 여러 장을 그 목 적을 위하여 부르되, 당면한 문제에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전후에 할 것이다”라고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예배모범의 ‘시편 찬송에 대하여’ 항목에서는 “하나님을 공적으 로 찬송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회중에서 함께, 또 개인적으로 가 정에서 시편을 찬송할 것이다. 시편을 찬송하는 데 있어서 목소리는 곡조에 맞게 엄숙하게 낼 것이다. 그러나 제일 조심할 것은 이해를 가지고 마음에 은혜를 가지고 주님께 노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온 회중이 다 함께 불러야 하므로 읽을 수 있는 자는 다 시편 책을 가질 것이요 다른 사람들도 나이나 다른 조건으로 불능이 되지 않는 한 읽는 법을 배우라고 권면할 것이다”라 고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을 찬송함에 있어 예배 찬송으로 시편 찬송을 드 린다는 것은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앙고백과 같은 연속선상에 서 있음을 확인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처럼 명확한 교회의 찬송으로 시편 찬송가를 가지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 근거를 알 수 없는 외국곡을 번역해 예배 찬 송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 공동체로서 결코 바람 직한 일이라 할 수 없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른 시편 찬송으로 하나님을 경배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시편 찬송을 제네바 교회에 도입했던 칼빈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조명과 더불어 한국교회의 예배 찬송에 합당한 시편 찬송가 도입에 따른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예배 찬송의 개혁이 없는 개혁은 미완의 개혁일 뿐이다.
342 no image 새로운 교회 정치 문화를 창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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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9 2009-07-22
새로운 교회 정치 문화를 창조하자 조직된 사회가 있으면 그곳에는 법이 있어야 하고 또한 그 법은 편중됨 없 이 사용되어야 한다. 특히 교회법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라는 사명을 효과 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도 더욱 잘 정비된 법으로 제정되고 운영되어야 한 다. 교회 정치의 본질은 교회의 중직자들을 무엇보다도 중직자답게 교회 일을 하 게 하는 것이고 각자의 책임과 의무를 철저히 수행하게 하는 것이기에 이에 합당한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 지상교회는 불완전한 교회이기에 허다한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됨으로 이 문제들과 싸우고 전투해야 하는 환경적 제약이 있고 제한들이 있다. 그러므 로 교회법은 먼저 교회의 권위를 세우고 일관성과 정당성은 물론 질서와 공 평을 부여하는 법이 되어야 하며, 이 법의 제정과 개정은 항상 균형과 형평 성을 유지해야 하고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총회가 앞으로 창조적인 미래를 담기 위해서 구성원들이 어떻게 준비하고 얼 마만큼 노력하였느냐에 따라서 교단 미래는 그 원인에 의해 주어진 결과가 크고 아름다우며 발전적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침체와 낙후를 벗어나 기가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 총회가 새로운 교회정치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성원들의 사고가 창의적이고 긍정적이어야 하며 저들의 행태는 적극적이어야 한다. 그 런데 지금 우리 교단에는 일부이기는 하지만 매사에 비판적이고 무소신과 방 관적이며 냉소적이고 물량주의에 흐르고 있어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을 속히 극복하고 치유하지 않고서는 창조적인 미 래를 담을 그릇을 준비할 수 없으며 이에 더하여 미래지향적인 인식과 희생 하는 전적인 헌신과 섬김의 자세가 없을 때는 창조적인 미래성에 입성할 수 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심은 대로 거둔다. 많이 심은 자가 많이 거두게 되고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게 되며 심지 않은 자들은 아무것도 거둘 수가 없다. 거짓과 나태와 부정적인 씨앗을 심고서 미래에 성공의 열매, 행복의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매사에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자들의 그 중심 에는 긍정적인 것이 보이지 않 고 모두 부정적인 것만 보이기 때문이다. 총회가 1년간 총회를 대행토록 상비부에게 의제를 위임할 때는 구성원 각자 가 맡은 책임을 명확하게 하고 업무를 효과적으로 성취하게 하기 위하여 필 요한 권한과 능력을 부여하고 구성원들이 맡은 업무를 완성하도록 책임을 지 게 하였다. 이러함에도 상비부가 의안들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신중하지 못하 다든지 총회 회집에 임박하여야 의안을 다룬다는 것은 총의를 무시한 올바 른 상비부의 처사라 할 수 없다. 상비부에 위임된 의안들은 상비부에서 연구, 검토하여 성안을 만들어 총회 에 보고 채택함으로써 총회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비부에 소속된 회원은 총회가 위임한 의안에 대하여는 끝장토론 이 되도록 적극적 활동이 요구되며 최대한의 전문성을 발휘하여 정책개발과 성안 만들기에 전력을 다하여 맡은 업무가 완성되도록 책임을 져야 한다. 총회는 헌의와 청원 등을 좇아 결정 시행하지만 헌의가 없을지라도 총회가 판단하여 총회적으로 스스로가 전국교회의 품행을 단정케하고 성결과 덕과 진보를 위하여 해당 상비부로 하여금 해당 부분 에 따르는 의안을 만들게 하 여 총회가 채택 시행할 수 있도록 총회에 상송의안의 처결권을 주어야 한다. 교권이라는 벽 때문에 소멸시킨 총회의 총찰권 직무를 부활하여 질서를 유지 하고 부도덕한 일을 징책하여 신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총회가 총찰권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교회정치문제에 대하여 흔히들 진리와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데 그렇지 않다. 정치문제는 진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교회 정치 원리가 성경으로 말미암았으므로 그것 자체가 곧 진리문제이며 또한 진리를 수호하 는 신령한 방편이 곧 교회정치인데 이것을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된 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정치란 바르게 하고 바로잡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바르고 옳게 알고 그리 고 믿고 행하게 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인 것이다. 교회의 크고 작은 모든 사 건들은 자상한 행정력이 미치지 못한 데서 일어난다.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잠 27:23) 하신 분부에 합당하게 사역하는 것은 먹이는 일뿐 아니라 따뜻한 행정력을 키우 는 길이다.
341 no image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를 지켜야 교회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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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7 2009-07-08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를 지켜야 교회가 산다 여성연구특별위원회가 번역한 주기도문의 내용 중에는 성경을 원문과 다르 게 번역하였다.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 나라와 능력과 영광이 영원 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아멘.” 이 기도문 두 곳에서는 원래 있었던 “아버 지”라는 단어 위치에 “하나님”이란 말로 대치하였다. 여성 운동가들은 남 녀평등권을 여성의 남성화로 잘못 오해하고 ‘남자들이 하는 일을 우리는 왜 못하느냐?’고 반론하기도 한다. 이런 세속 시류에 영합하여 성경 주경학자인 이상근 박사는 여성목사 안수 에 대해 “한국 교회가 여성목사 안수를 금지해 온 것은 봉건적 사고방식의 시대적 산물”이라고 지적하면서 “한국교회 헌법은 1907년 봉건성과 남존여 비 사상이 문화의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독소조항 을 제하여 버리고 여성을 안수하는 것이 시대적 추세”라고 주장했다. 장로교 통합측 교단은 1995년 제79회 총회에서 여성목사 안수를 가결 통과시 켰다. 이를 계기로 상당수 교단들이 여성목사 안수 문제를 공개적으로 들고 나와 헌법 개정을 시도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현재 170여 개의 교단 중에서 여성목사 안수에 대한 교단별 입장은 교회성장 과 발전이란 차원에서 다뤄지고 있다. 그래서 감리교와 기장, 예장통합, 구 세군, 순복음 하나님의성회 그리고 초교파 단체에서 여성목사 안수를 주고 있는 형편이다. 반면에 우리 교단을 비롯해서 신학의 보수를 유지하고 있는 예장합동, 고신, 개혁 등은 여성 안수불가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다. 몇달 전에는 우리 교단에서도 여성목사 안수와 관련된 어느 목회자로 인하 여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 선교지에서는 더욱 입지가 난처할 때가 많을 것 이다. 이러한 때에 교단은 자유주의 신학과 이단으로부터 신학을 지켜주며 교회는 성도 개인들의 신앙을 보호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는 결코 변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 신 직접 계시이며 진리이다. 그 말씀을 믿을 때에 참 자유를 누리며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교단 총회에 계속 상정해서 60년 만에 여성안수 허락을 얻어낸 것이 여성들의 승리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탄의 종노릇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겨서 구원의 진리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사명이 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배경에는 프린스톤 신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의 북 장로교 교단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점점 자유주의와 세속적인 신앙의 노선 을 밟아가게 되었다. 그 결과 북장로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운동을 주 도하면서 성경의 본질적인 구속의 은총의 원리를 외면하고 사회복음주의적 관심으로 기울게 되었다. 특히 세계교회협의회가 종교다원주의 색깔을 띠는 것에 대하여 관용노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여성안수가 허용되었고 동성연애 목회자가 생기 는 등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복음과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교단의 정책이 드러났다. 그 영향이 현재 우리나라의 장로교 통합측 교단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회의 보수신학의 기초를 놓은 고 박형룡 박사는 사도 바울이 여 자에게 교권을 허락하지 아니한 이유로 다음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디 모데전서 2장 13절에서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아 창조의 순서 에서 여자가 남 자보다 뒤졌으며 남자의 협조자로 지음받아 종속적 지위에 있다. 둘째 디모 데전서 2장 14절에서는 바울이 하와가 아담보다 먼저 유혹과 죄에 빠져 선천 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가르치는 재능이 결핍함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 는 15절에서 여자의 천직은 가정생활이라고 하였다. 총신대학 조직신학 교수인 김길성 박사는 여성임직을 허용할 수 없는 직접적 인 성경의 근거를 디모데전서 2장 8-15절로 들며 “성경은 여성들이 일반적 으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으나 여성들이 남성들을 가르치 는 것은 금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12절에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함께 ‘허락지 아니하노니’라는 동사에 모두 연결되어 있다.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지한 것은 여자가 교회 내에서 남 자 위에 권위를 행사하는 일과 관련하여 금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 연스럽다. 곧 여자가 목사나 장로가 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여성 안수는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린다. 성경의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의 권위를 무너뜨리게 되며 결국은 가정과 사회를 망치는 일에 일조하 는 것 이다. 미국 최대 개신교단인 남침례교가 그동안 허용해오던 여성안수를 2000 년부터는 더 이상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얼마나 뼈아픈 결정이었겠는가? 그 동안 안수한 목사들도 많았을 턴데도 이러한 결정을 내렸던 저들의 경험 을 우리도 깊이 참고해야 될 것이다. 교단은 목사들의 신학의 울타리 역할을 해야 하며 교회는 성도들의 신앙에 울타리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은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 공동 체 전체를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지 키는 보수를 해야 한다.
340 no image 칼빈 출생 500주년과 한국 장로교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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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0 2009-06-24
칼빈 출생 500주년과 한국 장로교회 작금 칼빈 출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곳곳에서 칼빈과 관련된 행사와 모임이 열리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행사와 모임을 통해 칼빈 정신을 올바로 살피고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 다. 현재의 한국교회는 개혁이 절실하면서도, 또 그에 대한 공감의 목소리가 높 아져 가면서도 정작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말 씀에 근거하지 않은 편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로 말미 암아 한국교회는 더욱 어지러운 형편 가운데 처하게 된 것이 지금의 현실이 라고 판단된다. 대다수 장로교회들과 신학 교수들이 참여하는 ‘칼빈탄생500주년기념사업 회’는 그 사업의 일환으로 칼빈의 흉상을 만들어 세우고, 서울에 있는 한 도로의 이름을 ‘칼빈로’로 지명하고, 칼빈 기념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의 일들을 통해 칼빈을 기념하겠다고 추진 중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행사들을 진행하는 것과 칼빈의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는 것과 는 별개의 문제이다. 칼빈이 한평생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말씀을 통 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개혁하고 섬긴 본을 한국 교회에 적용함에 있어 과 연 그러한 행사들이 유익을 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1907년 평양 부흥 운동’ 100주년을 기념한다고 하면서 한국교회 들이 모여 떠들썩하게 회개하고 나면 무언가 크게 바뀌고 한국교회에 다시 부흥이 찾아 올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지금은 잠잠해지고 시들어버린 일을 아 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칼빈 출생 500주년을 맞이했다며 크 게 한번 행사라도 치러보자는 식이라면 이 역시 교회를 말씀으로 개혁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아직도 교회로서의 본질, 하나님을 경배하는 공예배, 그 공예배의 중심인 강단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과 참된 신앙의 상속에는 그다 지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도 각종 절기를 지 키고, 그 절기를 행사화 하고, 각종 기념일을 만들어 지키는 데에 모든 시간 과 힘과 노력을 쏟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와중에서 신자들은 한국교회의 다양한 현상들을 체험하며 이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인가, 이 말씀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인가 고민하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정작 말씀을 맡은 직분자인 목사들과 신학 교수들은 올바른 말씀 선 포를 통한 교회의 개혁과 상속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니 안타깝기 그 지 없다. 현재 대부분의 한국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그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역사가운데 신앙의 선배들이 말씀을 잘 살펴서 올 바른 신앙의 도리들을 가르치고 전수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아 훌륭한 유산들 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의 장로교회들이 그것을 하찮게 취급하 고 있다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면에 장로교회와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는 개혁파 교회는 신앙고백서를 살피고 가르치는 데 상당히 철저히 하고 있는 편이다. 그들은 역사적, 전통 적 신앙고백서를 가르치고 배우는 데 더 많은 열심을 내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계시된 말씀과 잘 조화되는지를 살피는 일에 있어서도 또한 매우 중 요하게 여기고 있다 . 이것은 한국의 장로교회가 그들로부터 배워야 할 부분 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칼빈을 칭송하고 칼빈을 높이며 칼빈을 쉴 새 없이 이야 기하지만 정작 칼빈이 말한 바 올바른 신앙의 도리와 교회의 참된 모습에 대 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칼빈을 ‘기념’하기는 하지만 칼빈을 ‘계승’하 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이제는 칼빈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 한국 장로교회를 이야기할 때이다. 칼 빈의 후예로 자처하면서도 말씀으로 개혁되기를 싫어하는 한국 장로교회의 모습, 은혜의 방편을 하찮게 취급하고 엉뚱한 종교 행사와 각종 프로그램으 로 신앙의 도리를 대체하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를 올바로 진단하고 평가해 야 할 때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자신의 모습도 바르게 평가하지 못하면서 칼빈을 평가하고 자 하는 오만한 자세를 버리고 이제 말씀의 거울 앞에 스스로를 겸손히 비추 어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장로교회의 목사와 신학자들이 장로교회가 고백 하는 역사적 신앙고백이 무엇인지를 잘 살피고 이를 통해 건전한 신앙의 상 속이 바르게 이루어지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 와 우리의 자녀, 다음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 씀을 경외하는 본이 될 것이며 우리와 한국 장로교회를 살리는 방편이 될 것 이다.
339 no image 건강한 DNA는 신앙교육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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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5 2009-06-11
건강한 DNA는 신앙교육뿐이다 모 광역시 교육청에서는 학생들의 인성을 함양한다면서 명상과 상담, 뇌체 조 등 두뇌 활동을 통해 학생들의 감성을 강화하고 올바른 인성을 기른다는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올해부터 연구학교와 거점학교 등을 선정, 시행 할 계획이었으나 기독교 단체와 성시화 본부의 반대로 중지하고 재검토 작업 에 들어갔다고 한다. 저들의 말에 의하면 미신이나 종교가 아닌 정신교육을 통한 인성강화 프로그 램이라고 하나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뇌교육 프로그램은 기(氣) 프로젝트 로 풍수지리와 무속신앙 등 미신적 요소가 가미된 것으로 깊이 우려하지 않 을 수 없는 일이다. 어린이를 포함한 청소년은 한 가정의 미래요, 한 국가의 미래며 인류 사회 의 미래다. 특히 어린이는 미래를 잉태하는 씨앗이다. 이런 의미에서 독버 섯 같은 뇌교육 프로그램이 한 국가와 가정의 미래를 책임질 민족적 희망인 아이들의 순수한 심령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차단 소멸시켜야 한 다. 유대인들이 국가가 없이 수천년을 유리, 방황하면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 올 수 있었던 것은 자녀들에게 탈무드를 가르치면서 선민의식을 각인시켜 왔 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린이 교육의 오류를 없애고 사악한 사회를 극복 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적 DNA를 지닌 어린이로 양육할 수 있는 국민적 각성 은 교회가 이 일에 앞장서야 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교육이란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주는 것으로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교육을 말하는 것이지만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 과 성경이라는 인격과 교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이다.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에 기초하여 성 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영적으로 성숙된 자가 영적으로 미숙한 자를 교회 생 활뿐 아니라 사회 생활에서도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이라 할 수 있 다. 이처럼 기독교 교육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케 하 여 어떤 일을 하든지 주 예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께 감사하 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다 . 때문에 대입을 위한 과 외보다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부터 갖게 해야 한다. 그리고 생생한 신앙체 험을 주기위해 예배에 꼭 참여시켜야 한다. 각종 집회에서 하나님과의 만남 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 중심의 생활, 영적으로 명석한 어린이로 되어지 게 된다. 바른 신앙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사람은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설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인격자만이 건강한 DNA를 지닌 미래를 책임지는 씨앗이요 꽃이며 열매가 될 수 있다.
338 no image 하나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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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8 2009-06-11
하나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한 개인이 어떤 사회나 단체에 소속되었을 때 그 곳에서 요구하는 특정한 의 무가 주어진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 부름 받은 성도에게도 자신을 불러내신 주의 뜻에 적합한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그 의 무 중 하나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 님의 부르심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 때 비로소 조화롭고 일치된 모습을 이루 게 된다. 근대에 와서 공산주의가 무너지면 온 세상이 한 이념으로 뭉쳐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세상은 갈수록 반목과 갈등이 심 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이 계속되고 있고, 북아일랜드에서는 신· 구교간의 무력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의 분쟁도 해 결의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교회는 과연 하나가 되고 있는가? 이 질문에 긍정 적인 대답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인 대답이 더 많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왜 냐하면 성도 들 자체도 실제로 모두가 하나 되기를 원하기보다는 맘에 맞는 사람들끼리만 모이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교회 일치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서 세계적 교회 연합을 말하였 다. 두 개 이상의 것을 합하거나 잇는 것을 연합이라고 하는데 연합은 다양 한 색깔의 조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한 가지 색깔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한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연합을 이루었 다고 할 수 없다. 진정한 연합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연합을 이루는 것이 다. 바울 사도는 예배소 교회에게 말하기를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 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 노력하기만 하 면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고 하였다. 교회의 분열은 바울이 지적한 바와 같이 영적인 미숙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 정한 복음 위에 서있지 못하고 잘못된 교리와 신학 그리고 개인의 공적과 자 랑을 앞세우는데 그 원인이 있다. 오늘날 교회의 진정한 통일과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조직이 나 정치상의 가시 적인 일치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이보다 먼저 성령 안에서 사랑과 화평으 로 내면적인 하나됨과 하나님을 중심한 삶을 살아가도록 힘써야 한다.
337 no image ‘전직 대통령의 자살’과 한국 기독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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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7 2009-05-27
‘전직 대통령의 자살’과 한국 기독교 자살은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용납될 수 없다. 그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유 와 명분도 합리화되지 않는다. 당사자의 공과여부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 다. 생전에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것은 참작될 필요가 없다. 설령 한평생 올곧은 삶을 살았다 치더라도 자살로 인생을 마무리 했다 면 결코 책임 있는 삶을 산 것으로 볼 수 없다. 가족과 이웃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 을 하지 못한다. 자기로 말미암아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당하게 될 고통을 무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전적으로 이기적인 판단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타인의 자살을 용납하는 듯한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반사회적 일 수밖에 없다. 지난 5월 23일 전직 대통령이었던 분이 자신의 고향에서 자살한 것으로 발표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당사 자가 전임 대통령이었던 만큼 상당수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정치적인 감 정을 배경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에게 호감을 가졌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상당한 차이 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아는 성도로서 그에 대해 객관적이고 냉철한 접근 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무분별한 동정심을 유발하게 하는 말 과 행위는 극히 조심해야 한다. 전임 대통령의 자살을 미화하려는 분위기는 절대 금물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마치 한 영웅의 서사시적 용기 있는 인 생 마무리라도 되는 양 해석하는 자들이 있다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 다. 다수의 사람들은 오죽 괴로웠으면 그런 끔찍한 결단을 내리고 행동에 옮겼겠 느냐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말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 상상 을 초월하는 고통 가운데도 가족과 이웃을 기억하며 어려운 현실을 견뎌내 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많다. 자신의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클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직 미성숙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극한 혼란의 시대에 처해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그에 대한 냉정한 해석을 해 야만 한다. 그런데 기독교계의 관련 논평들을 보 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고인이 마지막까지 느꼈던 참담한 고통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치유되고 영원한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기독교교회협의회). “故人께서 는 주님의 품안에서 고통 없이 쉬시기를 바란다”(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 화위원회). “고인의 참담한 고통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치유되고 영원한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한기총 총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서도 영원한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 는 종교인들의 태도를 견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누 리는 영원한 평안’은 무엇이며, ‘주님의 품안에서 고통 없이 쉬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살한 사람에 대해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여간 위험하지 않은 터에 불신자에게 천국을 보장하는 듯한 기독교 단체들 의 배도행위는 교회의 근간을 뿌리 채 흔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장 중에 있는 다음 세대를 염두에 둔다면 자살은 무조건 나쁜 행동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살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 키며, 그런 온정적인 태도가 마치 사랑의 표현인 양 분위기를 조성해서는 안 된다. 자살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명백한 죄악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야 한다. 성숙한 성도들은 직면한 현실을 무마하고자 하는 미시적 안목이 아 니라 거시적 안목을 가지고 세태를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스스로 생명을 끊은 전직 대통령에 대해 저마다 애도를 표하고 있지만 그것은 겉치장일 뿐 속으로는 그 불행한 사건을 정략적으로 이용하 려 한다. 그런 자들은 그 파장이 저들의 정치적 행보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 인가에 대해 골몰하여 분석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상당수 기독교인들도 포 함되어 있을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자살이 무서운 죄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 다. 미성숙한 아이들에게 그 점을 분명히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세속화를 추구하며 감언이설을 내뱉고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에 대한 본질이 아니라 현실에 치우친 무책임한 말과 행동을 보이고 있다 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자살한 사람에 대해 천국을 약속하는 듯한 애매한 태도를 보이며 하 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의 허망한 교훈을 견제해야 할 것이다.
336 no image 우리는 가라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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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9 2009-05-13
우리는 가라앉고 있다 총회 산하에 전국의 모든 노회가 정기 봄노회를 마쳤다. 이번 회기에도 화기 애애한 가운데 여러 안건들을 결의함으로써 우의를 다지고 건덕에 모범을 보 인 노회들이 있다. 그런데 노회 후에 들려오는 뒷이야기들이 꼭 기쁜 승전보 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 가운데는 입맛을 씁쓸하게 만드는 소식들이 있 기 때문이다. 몇 가지만 추려서 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노회는 예리한 판단을 발휘하여 아주 과감하게 이단으로 규정된 단체 에 연루된 목사를 면직했다고 한다. 대단한 용단을 내렸다고 생각된다. 하지 만 이 소식을 접하면서 마음이 불편한 것은 면직된 목사가 합신 초기 출신이 라는 충격적인 사실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어느 노회는 너무 관용적이었다 고 한다. 해외에서 우리 교단의 교회를 쪼갠 일로 말미암아 여러 해 동안 노 회의 골머리를 아프게 했던 목사를 간단히 용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노회에는 교리논쟁이 발생해서 총회의 신학위원회로부터 대답을 들었는데 문 제의 당사자인 목사가 여전 히 불복하여 시끄럽다고 한다. 이 모든 사건들은 서로 사안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것들의 원인을 곰곰이 따 져보면 세 가지 불안한 요소에 기인하고 있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 다. 첫째는 신학의 불안이며, 둘째는 교회정치의 불안이며, 셋째는 목회자 윤리의 불안이다. 첫째, 때때로 교단 내에 많은 목회자들이 우리 신학을 결핍하고 있거나 우 리 신학에 대하여 왜곡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노회에서 교리 논쟁이 터지면 목회자들이 오류를 분별하지도 못하고 진리를 표명하지도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만다. 목회자들이 성경과 신학을 부지런 히 연구하지 않고 도대체 무엇에 시간을 쓰고 있는 것인지 의아스럽다. 둘째, 교회정치에서는 법을 따르는 것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교단에서도 많은 경우에 법보다 인심이 앞 서는 정치가 행해지는 것 같으며, 그 결과 진리가 인간관계에 의해 무참하 게 질식되는 악한 일들을 보게 된다. 특히 목사를 살리기 위해서 교회를 죽 이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때 인맥에 대한 집착이 진리에 대한 집착보다 질 기 다는 것을 보게 된다. 셋째, 여기저기에서 도덕성을 잃어버린, 아니 조금 세게 말하면 도덕성을 경 시하는 목회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하지만 목사가 윤리적이지 않다 면 목사에게 더 이상 요구할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임 에도 불구하고 거짓에 능수능란한 목사를 눈감아줌으로써 회개도 권징도 그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게 실종한 경우들이 이미 우리 앞에 너무나 많다. 위에 열거한 대로 지난 봄노회에서 발생한 몇 노회들의 대표적인 사건들에 관해서 들을 때, 그리고 그 사건들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원인들을 살펴 볼 때 한 가지 생각을 뿌리칠 수가 없다. 우리는 지금 가라앉고 있다. 우리 가 침몰하고 있다는 현실을 그다지 실감나게 느끼지 못하여 정말 그런가 하 고 반문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이 예전부터 늘 있어왔으니 지금이라고 해서 무슨 특별한 문제가 되겠느냐고 물을지도 모 른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모든 사건들을 보면서 두려워하는 것은 침몰의 가속도 때문이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던 손상이 큰 배를 순식간에 가 라 앉게 만든다. 본래 침몰이란 가속도 때문에 치명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침몰의 가속도이다. 교회에서도 경우는 다를 바 없다. 성경에서 이스라엘과 초대교회가 그랬고, 역사에서 소아시아의 교 회들과 유럽의 교회들과 신대륙의 교회들이 그랬다. 그러므로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전 면적인 가속도를 제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 그리고 다시 바르 고 힘차게 부상하기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절실하게 요청된 다. 신학과 정치와 윤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기회를 잃기 전에 미스바에서 있었 던 사무엘의 결단이든 성전 앞 광장에서 있었던 에스라의 결단이든 당장 우 리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
335 no image 총회 임원은 현재 진행형 봉사가 필요하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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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5 2009-04-29
총회 임원은 현재 진행형 봉사가 필요하다 교회도 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끌어가야 할 조직 사회임은 틀림없다. 이러한 조직에 있어서 일정한 규율과 규범은 많은 사람 들에게 불편함을 주기보다는 유익을 더 많이 줘야 한다. 교통법규를 아는 것이 운전자에게 안전을 담보하고 질서를 주어 편안함을 주 며 규범 안에서의 자유를 주는 것처럼 내각적인 요소의 민주적인 대의 정치 의 하나인 장로회 헌법을 잘 이해하고 운용하면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 더 나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총회장은 총회소집기간에는 교단의 의결 기구인 총회의 사회를 맡은 의장이 되지만 파회되면 총회에서 맡겨준 사항에 대하여 집행할 때 집행권(임원회 가 가동될 때)을 가지면서 대외적으로 교단을 대표하게 되는 것이고, 총회 가 비상설체 회의 조직으로 하여 임원회, 상비부, 이사회, 특별위원회 등을 두어 총회의 수임 사항을 1년간 총회를 대행토록 하고 있는 것이 장 로회의 정치적 입장이요 총회 운영의 전통적 방법이다. 총회 임원의 임기를 1년으로 하고 임원회를 총회 임원으로 조직하고 총회에 서 위임한 일과 총회의 사무적인 사건을 처리하게 한 것은 총회 개회 중에 는 총회장을 비롯한 임원이나 총대가 입법부의 의원으로 일하고 총회가 파하 면 의원의 자격은 없어지되 총회가 맡겨준 사안에 대하여 행정부의 일, 즉 상비부와 위원회와 임원회 등과 같은 집행 기구의 일원이 되어 총회가 맡겨 준 업무를 집행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총회의 치리협력위원회에 총회 임원을 포함하는 것은 임원회를 집행기구의 일원으로 보기 때문이다. 총회의 중요한 직무 중 하나가 노회와 노회 사이 그리고 지교회와 지교회 사이 또는 소속기관 및 산하 단체 사이의 연합을 공 고히 함에 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소극적인 정적 활동보다는 적극적인 동적 활동이 요 청되는바 총회는 노회로부터 제한적으로 듣는 것보다는 제한없이 실제적 애 로나 건의를 듣는 것이 탈권위적이고 실용적 봉사 자세임을 알고 가급적 현 장 방문을 통하여 청취하는 기회를 갖는 것도 좋다고 본다. 장로회 정치 의 성격상 당회가 적은 노회일수록 총회원으로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저들의 애로, 건의를 표현하거나 전달할 수 없음을 알아 소외 된 위치에 있는 노회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살피며 봉사하는 것이 총회 임원회의 또 다른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복지부동의 모습으로 권위를 나타내는 것보다 열심히 일하는 종의 모습에서 더 아름다운 봉사의 모습을 찾게 되기를 바란다.
334 no image 올바른 개혁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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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5 2009-04-29
올바른 개혁의 길 종교사전에서 개혁이란 “결점이나 악습을 제거하고 이전의 선한 상태를 회 복함으로써 변화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새롭게 변화한다는 것은 타락한 것에서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모든 성도들이 하 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사는 신앙의 실천운동이다. 개혁의 과제는 그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개인이든 국가이든 간 에 타락한 길에서 신앙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비추어 죄를 회개하는 것이 최우선이라 하겠다. 오늘날 우리 개신교에 요구되는 개혁은 무엇일까? 아마도 교회 본질의 회복 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성경적 삶의 회복이라 하겠다. 이것은 먼 저 하나님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자녀됨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회복하 는 것이고, 또한 형제에 대해서는 섬김을, 이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서의 성실함과 신실함의 회복이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는 사회의 리더로서 사회의 여론과 의식을 주도하는 선도자로서의 역할 회 복이다. 초대교회는 오직 은혜로, 오직 성령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주제와 헌금을 통한 구제와 섬김이 있었다. 오늘의 개혁도 초대교회에 있었던 교리 와 사역의 회복은 물론 세상을 섬기는 대 신뢰적 회복이 시급하지만 그보다 먼저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영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를 사모한 것에서부터 이스라엘 온 족속이 영적 변화가 시작된 것처 럼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취시키고 우상숭배를 비 롯한 죄의 회개를 부르짖으며 신앙 각성운동을 전개하여야 한다. 사회적 부 조리와 정치적 모순에 침묵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끼칠 수 있 는 모범적, 표준적 윤리의식을 스스로 창조하고 실천하는 그 의지를 보여주 어야 한다. 빠르게 변화되고 있는 사회에서 종교적 파워나 복음적 내용이 없이 참신한 개혁은 요원한 일이다. 각별한 각오와 결단 없이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 에 부응할 수 없다. 참신한 개혁주의적 신앙운동을 펴나가기로 한 바른 신 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로 표현되는 교단 3대 강령의 실천을 통하여 한국 교회 개혁을 주도적으로 이루 어 나가자. 하나님과 인간에 대하여 책임있는 총회가 되자.
333 no image 총회 임원(임원회)의 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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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2 2009-04-15
총회 임원(임원회)의 직무 얼마 전 본지에 1월 8일 충청노회에서 시작된 총회 임원 방문에 의한 노회원 과의 간담회가 3월 31일 부산노회를 끝으로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20여 가지의 다양한 건의를 받았다고 보도한 바 있다. 앞으로도 계속될 것같은 총회장과 임원들의 그러한 의욕과 열심과 수고와 희 생에 대해서 이견을 다는 것은 결례가 될 뿐만 아니라 찬물을 끼얹는 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나, 앞날을 위해 다음 몇 가지를 건의하고자 한다. 첫째, 총회와 총회 임원회는 단회적(單回的)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다. 노회와 달리 총회에 개회와 폐회 의식을 법으로 정한데는 그만한 이유와 목 적이 있다. 그것은 총회가 총회장의 개회 선언으로 생겼다가, 총회장이 폐회 를 선언하면 1년 후 새 총대로 조직되는 새 총회가 회집될 때까지 없어지는 단회적인 회(會)임을 밝히기 위해서이다(정치 17장 10조). 같은 임원회라도 노회 임원회는 상비부적 성격 곧 임원 교체부터 다음 회기 의 임원 교체 때까지 1년 동안은 노회 폐회 중에도 존재하여 그 직무를 수행 할 수 있는데 비해, 총회 임원회는 원칙적으로 그 총회가 없어질 때 동시에 없어지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둘째, 총회 임원의 본 직무는 회의를 위하여 봉사한다는 점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총회는 단회적이다. 그리고 총회장은 총회의 의장이다. 그 러므로 총회장을 돕는 총회 임원의 직무도 자신들을 임원으로 선출한 그 회 의가 규칙과 회의 법대로 진행되도록 봉사하는 일과 다음의 새 총회에서 새 로운 임원들이 선출될 때까지 봉사하는 준비위원 성격을 가지고 봉사하는 것 이다. 때문에 회의를 위한 철저한 준비와 효율적인 회의 진행으로 회기 내에 모든 안건이 처리되게 하여 폐회 후 임원들이 할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셋째, 총회 임원은 법과 규칙이 정한 본 직무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임원과 총대 모두의 부족 때문에 총회가 일을 다 처리하지 못하고, 중요한 위원의 선정과 회의록 채택 등 소위 잔무를 매년 임원회에 위임하다 보니 총회 임원회가 상존하는 것처럼 인식되어 왔었다. r 그러나 과거처럼 총회 임원회가 교권의 상징이 되고, 그 총회 임원이 되기 위한 세속적 정치행태가 부활하기 전에 총회 임원들은 총회가 위임한 안건 만 처리하고, 총회치리협력위원회(규칙 10조 1항)와 상임위원회(규칙 10조 3 항)의 위원으로서의 직무만 수행해야 하며 총회장에게 교단을 대표할 일(한 기총 등)이 있을 때에 돕는 일을 하는데 그쳐야 한다(규칙 7조 1항). 넷째, 노회의 독자성과 상비부의 직무를 침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 이미 언급한대로 총회 임원회는 자의적으로 안건을 내고 처리하는 상비부가 아니라 정해진 대로 회의가 진행되도록 봉사하는 회의 진행위원의 성격을 가 지고 있다. 그 의도와 목적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안건을 제안하고, 제안 받 고, 시행하는 것은 노회와 상비부의 직무를 축소하거나 침해할 수 있으므로 지양(止揚)되어야 한다. 어느 때인가부터 모처럼 총회임원이 된 사람들이 ‘별 것 아닌 진행위원’으 로 그 역할이 끝나는 것이 아쉽게 생각되었든지, 아니면 무슨 업적과 함께 명성을 남기려는 생각 때문이든지, 아니면 주님의 말씀처럼 총회 임원이 되 는 것이 ‘세속의 집권자 들과 고관들처럼 임의대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릴 수 있는 권세 집단이 되는 것’으로 오해했는지 몰라도 점점 월권 행위를 하 게 되었고 나아가 권력 단체로 오인받게 되었다. 그 결과 세속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총회 임원이 되려고 사람들이 늘어나 게 되었고, 마침내는 성총회(聖聰會)에 교권이라는 말과 함께 주류, 비주류 라는 세속적 집단마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교단은 그것이 싫어서, 그것을 고치기 위해 세워진 교단이다. 그 명분 을 위해서라도 총회임원회가 특별한 권위나 세력이 있는 권력 단체나 기관 인 것 같은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처신해야 한다. 이상의 논조는 ‘총회임원을 별 것 아닌 존재로 만들고, 임원들의 의욕에 찬 물을 끼얹는 것’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총회임원은 봉사자에 그쳐야 한다. 심지어는 원만한 회의진행 외에는 다른 의욕을 가질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의 개인 인격과 경륜과 봉사와 1년 간 총회를 대표한다는 사실 때 문에 신뢰와 존경, 감사와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지만 총회 임원이 되었 기 때문에 그것을 요구해서도 기대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 총회장과 임원들이 모든 교단의 총회장과 임원들에게 그러한 본을 보 여 주고 도전을 줌으로써 세속화된 교회 정치 행태의 개혁에 이바지해 주기 를 기대한다.
332 no image 능력이 되는 십자가 곁에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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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9 2009-04-01
능력이 되는 십자가 곁에 서자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체험을 통해 알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그 리고 이 체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그 유형과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믿는 자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의 구체적 의미는 믿는자가 먼저 자신의 옛 생활을 장사지내고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 이 자연적인 출생으로 맺어지는 아담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되었던 옛사람 곧 죄에게 종노릇하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던 행동,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하기 이전의 거듭나지 못한 본성과 행동들이 그 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은 옛 생활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으 로 묘사되며 동시에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신 것처럼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에게 있어서 미래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이 아 니다. 성도들은 현재의 삶에 있어서도 주님의 부활의 능력에 힘입어 하나님 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영위하려면 다음과 같은 삶의 근본 원칙을 정립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을 전인격적으로 사모해야 하며, 하늘나 라의 일들에 마음을 두고 그 일들에 대하여 애정을 가져야 하며, 오직 선한 일에 주력해야 한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능력을 현재의 삶에서 발휘하지 못하고 살 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 난 받으심과 부활한 날 사이에서 머무르고만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주 님의 부활의 능력과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출애 굽하여 자유를 얻었으나 약속의 땅이며 복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고 하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고 기념해야 하지만 그의 고난도 함 께 기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지 않았다면 부 활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고난에 대해 승리할 만한 힘이 없지만 능력이 되는 십자가 곁에 서기만 하면 그 십자가가 거둔 승리가 우리 의 승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시몬 베드로는 약했다. 그러므로 세 번이나 주를 부인했고 저주했으나 베드로가 승리를 거둔 십자가 곁에 섰을 때 주님이 마신 잔을 마실 수 있었 다. 우리 육신의 소욕은 평안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님을 따르자면 자기 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 승리를 거둔 십자가 곁에서야 한다. 새에게는 날개가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날고, 선박에 돛대가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운행되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십자가가 무거우나 그것이 천국을 향해 전진케 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고귀한 인격을 형성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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