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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no image |신/학/논/단| 장로 정치 제도의 기원_배현주 목사
편집부
1138 2017-11-21
신/학/논/단 장로 정치 제도의 기원 < 배현주 목사_주교개혁장로교회 > 사도들은 구약을 계승하면서 그 장로 제도를 새 언약의 교회를 세우는 원리로 삼음 사도적 보편 교회의 치리회로서 장로회 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며 사도적 교회를 세우는 원리로서 중요 장로 제도(the Presbytery System)는 구약 이스라엘 공동체 지파들의 족장 정치 제도에 기인한다. 어려서부터 유대인으로 자라온 사도들은 구약 정치 제도를 잘 알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 아래에 오셔서 모든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을 때 구주의 복음을 전파하여서 새 언약의 교회를 세우라는 사명을 받은 사도들은 각처에 장로교회를 세웠다. 사도들은 구약을 계승하면서 새 언약의 교회를 세웠다. 이는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과 그러한 거룩한 보편 교회를 다스리는 통치 원리로서 사도들은 구약 장로 제도를 그대로 새 언약의 교회를 세우는 원리로 삼았다(엡 2:20-22). 신약 시대 첫 노회는 예루살렘 교회이다(행 2:42-47). 예루살렘 교회(Jerusalem Church)는 하나의 노회(Presbytery)로서 모든 이방인 교회의 모체 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 노회로부터 각처에 교회가 세워졌다. 장로 정치 원리를 따라서 볼 때에 지교회(particular church)는 노회가 세워 주는 것이다. 노회로부터 파송 받은 목사가 노회의 지도를 받아서 세우는 교회가 장로교회이다. 사도 시대부터 지교회를 섬기는 목사는 노회로부터 안수받았다(딤전 4:10-15). 그리고 노회로부터 안수를 받아서 장립된 목사는 지교회로 파송을 받았다. 그리고 대체로 안수 받은 목사와 교사들은 그가 안수 받은 그 노회의 목사로서 평생을 살았다. 그리고 전도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도들의 명령을 받아 각 노회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디모데가 그 대표적이다(빌 2:19). 그러나 사도들이 역사 속에 사라지면서 선지자들과 전도자들도 함께 사라졌다. 모두 사도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직분들이 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시대에 교회의 비상직원으로서 선지자직과 전도자 직무는 사도직과 함께 그쳐졌다. 무엇보다 신구약 기록 계시의 종결과 함께 계시적 표적들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그러한 계시적 표적을 시행하는 직분들도 함께 사라졌다(고전 12:4-11). 그러나 목사와 교사 그리고 치리 장로와 안수 집사 제도는 남았다. 그들은 거룩한 보편 교회의 항존 직원으로서 남았다. 사도 시대 세워진 노회 중에서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직접 세워진 노회는 사마리아 노회와 안디옥 노회이다. 사마리아 노회는 사도들이 직접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안디옥 노회는 이방 교회를 세우는 전초 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다하였다(행 11:19-30). 안디옥 노회는 초기에 바울과 바나바가 매우 중요한 교회 교사로 있었다. 안디옥 노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초대 선교사로 파송하여서 이방 교회를 세우도록 하였다. 그 시대에는 지중해 전체가 로마 제국 통치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국내 선교사와 같은 형태였다. 안디옥 노회는 주를 섬겨 금식하면서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웠다(행 13:1-3). 그리고 그 두 사도는 안디옥 노회로부터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안디옥 노회의 교사였던 두 사도는 그렇게 이방인 교회를 개척하는 선교사가 되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일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에 돌아 왔을 때 안디옥 교회 안에 큰 분란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를 설파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행 14:26-15:2). 그러므로 안디옥 노회의 당면한 문제로 인하여서 촉발된 교리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안디옥 노회는 예루살렘 노회로 총대들을 파송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새 언약 교회에 첫 총회(the First General Assembly)로서 성격이 있다. 물론 두 노회의 총대들이 모여서 안디옥 노회의 안건을 다룬 대회(Synode)의 성격이 있지만 그 당시에 사도 시대 교회 전체 노회가 겨우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안디옥 외에 없다고 할 때에 예루살렘 공회의 성격은 최초의 총회라는 성격도 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 공회는 안디옥 노회에서 헌의한 그 안건만을 다루었던 임시회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안건은 할례 제도에 대하여 교회가 취해야 할 시행의 유무의 결정이었다. 사도행전은 그 안건을 성령과 치리회가 결정하여 가결하였다고 진술하였다(행 15:28). 그리고 이러한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은 사도 시대 첫 규례가 되었다. 그것은 거룩한 보편 교회의 법령이다. 그러므로 이후로 누구든지 교회 안에서 할례를 시행하면 이단이 된다. 이렇게 진리를 따라서 결정된 거룩한 보편 교회의 법령은 후대 교회에게도 항구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치리회의 권능이다. 이러한 교회 열쇠권의 발휘는 니케아 종교 회의와 칼게돈 종교회의에서 빛을 비추었다. 사도 신경과 함께 니케아 신경과 칼게돈 신경은 거룩한 보편 교회의 법으로서 그것은 하나의 법령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편적인 정통 교리와 다른 가르침을 가르치면 이단이다. 그렇게 사도 시대 전통을 따라서 교부 시대는 거룩한 공회의 종교 회의를 통해서 사도적 교리를 확립하고 보존하였다. 이러한 거룩한 보편 교회의 종교 회의는 사도적 교회의 열쇠 권으로부터 유래된다. 사도들은 그렇게 사도들의 치리회로서 장로회를 통하여서 매고 푸는 권세를 시행하였다. 그래서 모든 가르침과 성례와 권징의 권세는 장로회에 그 권세가 있다. 사도 시대부터 장로회는 성직 임명권과 지교회를 세우며 감독하는 권세를 부여받았다. 그것은 가르침과 성례와 권징을 시행하는 권세이다. 그리고 그 치리회의 모든 권능은 교회법으로부터 나온다. 항상 최고의 교회 헌법은 신구약 성경이다. 신구약 성경에 위배되게 어떠한 교회의 결정도 그 자체로서 무효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가시적 교회의 완전성을 주장하면서 치리회의 결정을 절대화하여서 큰 오류에 빠졌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수많은 법령을 세워서 교회를 어두움으로 몰고 갔다. 그러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거짓 교리에 대하여서 오직 성경으로 저항하고자 한 것이 종교 개혁의 역사이다. 그렇게 거룩한 보편 교회(Sancta Catholica Ecclesia)는 신구약 성경을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최고의 교회법(Summa Lex)으로 삼고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원천으로 고백한다. 거기에 위배되는 어떠한 인간적인 교훈도 받을 의무가 없다. 그리고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그 원리를 보존하고자 마련된 모든 성경(Tota Scriptura)의 원리를 따라서 결정된 거룩한 보편 교회의 공적 선포로서 사도 신경과 니케아 신경과 칼게돈 신경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경 등이 있다. 그래서 정통 교부 시대에 결정된 거룩한 신조들은 모든 시대 교회에 항구적 구속력을 가진다. 사도적 교회(Apostolica Ecclesia)란 거룩한 보편 교회를 추구하는 교회이다. 그와 같이 사도적 보편 교회(Apostolica Catholica Ecclesia)의 치리회로서 장로회 제도(the Presbytery System)는 하나님의 말씀(Verbum Dei)을 보존하며 사도적 교회(Apostolica Ecclesia)를 세우는 원리로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회중교회(the Congregational Church)는 이 모든 규례와 법령을 모두 버렸다. 회중교회주의란 개교회주의이며 분파주의이며 분리주의이다. 그래서 회중교회는 거룩한 보편 교회가 고백하는 일치된 신앙 고백서와 장로 정치 제도를 거부한다. 회중교회(the Congregational Church)는 거룩한 보편 교회가 결정한 모든 법령과 규례와 권징의 제도를 거부한다. 그리고 기독교를 개인 구도의 종교로 전락시킨다. 회중 교회는 보편적인 교리도 규례도 법령도 제도도 없다. 각 개인 신자들의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보편 교회로서 사도적 정통 교회는 장로제도 안에서 빛난다. 장로 제도는 감독 교회 제도를 거부하며 회중 교회를 거부한다. 그래서 고위 성직자 개념을 거부한다. 그래서 장로회 제도는 각 직분의 수평성을 주장하며 그와 같이 각 지교회 상호간에 수평성을 추구한다. 오직 장로회로부터 지교회를 세우고 목사와 치리 장로로 구성된 당회를 세워서 지교회를 지도하고 치리하는 교회가 장로교회이다. 감독교회는 사역자들 위에 감독 제도를 두어서 지교회 사역자를 지배하는 구도이다. 회중교회는 교회의 보편적 통일성과 일치성을 훼손시키는 교회이다. 이미 정통 교부 시대에부터 알려진 분리주의적이며 분파주의적인 교회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보편 교회의 통일성은 오직 진리에 기초한 통일성이며 그것은 장로회(Presbytery) 제도를 통해서 구현된다. 장로회 제도의 신적 기원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확증되었다. 사도적 교회는 장로교회였다. 장로회제도를 무력화 시키는 감독교회(the Bishop Church)를 추구하거나 거룩한 보편교회의 통일성을 훼손시키는 분파주의적 회중교회(the Congregational Church)를 지향하는 것은 오류이다. 사도 시대부터 알려진 거룩한 보편교회는 장로교회이다. 종교 개혁의 역사란 거룩한 보편교회를 회복하고자 하는 역사였다. 그것은 장로 제도로 드러났다. 장로교회의 제도 안에는 거룩한 보편교회를 세우는 원리가 모두 담겨 있다. 거룩한 보편교회(Sancta Catholica Ecclesia)는 사도적 정통 교리와 장로 제도를 통해서 구현된다.
320 no image |신/학/논/단|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_김인석 목사
편집부
1175 2017-09-18
신/학/논/단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 < 김인석 목사_칼빈장로교회 > 권세나 명예를 가진 자는 양심의 자유를 빌미로 부당한 권세를 행사하기 쉬우니 조심해야 양심의 자유를 구실로 합법적인 권세나 실행을 반대하는 자는 하나님의 제도를 반대하는 것 우리 교단 헌법 제3부 제1장 제1조는 “양심의 자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양심의 주재자는 하나님뿐이시다. 그가 신자들에게 신앙 양심의 자유를 주사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성경을 위반하거나 이탈한 인간적 교훈이나 명령을 받지 않게 하셨으니, 그리스도인의 이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각기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은즉 아무도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러한 규정을 근거로 양심의 자유가 아무런 제한 없이 행사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과거 군부독재 시절 양심의 자유는 한 개인이 저항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의 성격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장로회 정치에서 양심의 자유는 더욱 근원적이며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행사되어야 한다. 이런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 교단 교회법의 배경이 되는 미국장로교회법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해당 항목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 헌법 조항의 각주는 이것이 본래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에서 작성된 것이 아니라 미국장로교회 뉴욕대회(1878)에서 작성한 것을 한국장로교회가 1917년 총회에서 받아들였다고 밝힌다. 미국장로교회는 J.A.핫지의 책 “장로교회법이란 무엇인가?”(What is presbyterian law)를 기초로 교회법을 제정하였다. 한국장로교 총회는 곽안련 선교사를 통해서 J.A.핫지의 책을 번역하도록 하여 교회정치 모범의 기초로 삼았다. J.A.핫지는 그의 책에서 우리 헌법이 ‘교회 헌법의 8대 원리’라고 표현한 여덟 가지 조항들이 1788년 뉴욕-필라델피아 대회에서 작성되었다는 것을 밝힌다. 이 시기에 미국장로교회는 1차 부흥운동으로 인해서 Old Side와 New Side로 첫 번째 장로교 분열이 발생(1741)한 후 서로의 필요에 따라 교리적 차이를 수면 아래 둔 채 재연합을 하였다(1758). 더욱이 1787년 미국장로교회 뉴욕-필라델피아 대회는 신학적 논란을 만들게 된 신앙고백서 수정(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J.A.핫지의 책은 이러한 시기에 작성되고 채택되었다. 따라서 미국장로교 교회정치가 장로교 표준문서를 작성했던 웨스트민스터 총회 당시의 장로교 신학을 얼마나 계승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양상으로 접어드는 시기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A.핫지의 책 “원리”편에서 제시한 양심의 자유는 보다 구체적이었다. “I. 첫 번째 원리는 무엇인가?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재가 되시어 신앙 혹은 예배에 관련한 문제에 대하여 혹은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사람의 교리와 명령으로부터 사람의 양심을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 자유가 무엇인지 부연설명하고 있다. “기독교인의 자유는 무엇인가?” “자유란 국가권력이나 교회 권력, 또는 합법적인 권력이나 어떤 합법적인 권력의 시행 그 어떤 것이라도 반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율례에 항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신앙이나 예배, 혹은 교제와 관련하여 기독교 원리나 자연의 빛에 반대하는 의견을 고수하거나 펼치는 것 역시 그 권리가 아니다. 기독교인의 자유는 하나님의 뜻이 자연과 계시에 의해 알려진바 된 것처럼, 하나님께 제한 없이 온전히 순복하는 것이다. 그 결국은 원수의 손아귀에서 구원함을 받아 우리가 인생의 모든 순간에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두려움 없이 주님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 우리 헌법의 조항은 J.A.핫지의 원문에 비해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더 강조하는 것이라고 오인할 여지를 준다.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성경을 위반하거나 이탈한 인간적 교훈이나 명령을 받지 않게 하셨으니”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문제는 후반부 인데 예컨대, “그가 신자들에게 신앙 양심의 자유를 주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이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는다”라든가 “모든 신자들은 각기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은즉 아무도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는 부분은 마치 개인이 절대적 자유를 가진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우리 헌법과 J.A.핫지의 책 모두 “양심의 자유”란 아무런 기준 없이 자기 소견대로 행할 자유가 아니라 “성경을 위반하거나 이탈한 인간적 교훈이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자유의 고귀한 가치를 말한다. 그런데 J.A.핫지는 더욱 분명하게 허용된 자유의 한계를 명확히 지적한다. “자유란 ... 그 어떤 것이라도 반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합법적인 질서에 반대하는 것을 “하나님의 율례(the ordinances of God)에 항거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양심의 자유란 “하나님께 제한 없이 순복하는 것”이며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 두려움 없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양심의 자유가 어떻게 행사되어야 하는지를 밝힌다. 한편 J.A.핫지는 이 조항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0장과 연결 짓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양심의 자유를 무분별하고 각 개인들에게 맡겨진 전횡적 자유라고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자유의 목적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과 의로움으로써 두려움 없이 평생 하나님을 섬기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자유의 거룩한 목적이란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려는 데 말씀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부당하고 불법적인 힘에 저항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실질적이든 명예로든 권세를 가진 사람은 양심의 자유를 사용할 때 삼가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권세나 명예를 가진 사람은 자유를 빌미로 제약 없이 부당한 권세를 행사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록 양심의 자유의 행사이지만 자유의 거룩한 목적에 일치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양심의 자유를 구실로 합법적인 권세나 합법적인 실행을 반대하는 자는 실제에서 하나님의 제도를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권세는 세상 권세만이 아니라 교회 권세를 포함하는 권세다. 교회 권세란 장로회 정치 아래에서는 개인의 권세가 아니라 치리회의 권세를 말한다. 이는 모든 권세가 주께로부터 나온다는 말씀(롬13:1-)을 따라 성직자들을 포함한 모든 신자들은 합법적이고 정당한 치리회의 권세 아래 순복해야 한다. 그러나 치리회의 권세는 전횡적이거나 임의적으로 부당하게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질서가 교회 역사 가운데 장로회 정치 원리가 공적 교회의 고백 안에서 채택되도록 섭리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장로회정치 표준문서에서 말하는 원리이다. 또한 그릇된 선전이나 행동은 성격으로 보든 행위로 보든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평화와 질서를 파괴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엄중한 문책을 말한다. 교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치리회에 순복하지 않으며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항의하거나 혹은 교회의 문제를 사회법으로 즉시 가져감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심각한 불명예와 해를 끼치는 행위는 양심의 자유를 가장 부당하고 불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양심의 자유는 우리 교회법이 가진 원리를 더 높이고 명료하게 드러내는 일에 사용되어야만 한다. 자유를 빌미로 말씀에 위배되거나 교리에서 이탈한 가르침이나 세상 원리를 따르는 잘못된 운동이나 선전임에도 불구하고 추종하는 것은 명백하게 양심의 자유를 오남용하는 것이다. 심지어 치리회의 판결에 불복할 뿐만 아니라 사회법을 통해 억압하려는 시도는 교회의 평화와 질서 그리고 거룩성을 파괴시키는 행위이다. 물론 치리회는 발생하는 모든 사안들에 있어서 공정했는지, 편벽되지 않고 말씀에 충실한 책무를 다 했는지 먼저 돌아보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양심의 자유의 목적을 “원수들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눅1:75)는 사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치리회의 권세는 군림하고 압제하는 권세가 아니라 선언하고 수종드는 권세이다. 동시에 양심의 자유는 언제든 그것이 발휘 될 때에 주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평생 섬기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지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한 사도의 교훈을 삼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319 no image |신/학/논/단| ‘성도의 교제’의 참 의미_박동근 목사
편집부
1395 2017-09-06
신/학/논/단 ‘성도의 교제’의 참 의미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중심으로 - < 박동근 목사_한길교회 > 진정한 성도의 교제에는 복음 안에 정체성의 일치, 사랑의 일치, 섬김의 일치를 나타낸다 성도의 교제의 참 의미는 무엇일까?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에 따르면, 성도의 교제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유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제’라는 용어는 어떤 동일한 것이나 소유를 공통으로 지닌 둘 이상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교제의 기초 혹은 근거는 바로 그 공통이 되는 그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공통으로 소유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 그러므로 우르시누스는 그 공통의 소유를 이렇게 요약한다. “성도의 교제란 복음의 모든 약속들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 혹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들과 또한 교회의 구원을 위하여 각 지체들에게 주어지는 은사들을 공통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교제가 성립하려면 다음과 같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먼저,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연합시키는 띠가 되어 주신다. 이 연합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예수님 안에서만 성도는 진정한 성도가 되며, 예수님 안에서만 성도들은 구원에 속한 신령한 복을 공유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구속 사역은 성도의 교제의 기초가 되며, 연합을 통해 이 기초를 가지게 된다(요 15:5; 고전 12:13; 롬 8:9; 고전 6:17; 요일 4:13). 둘째,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한다. 성도의 교제는 이 공통으로 소유된 은덕을 함께 공유할 때 발생한다. 성도의 교제는, 각 성도들이 한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한 신앙 고백 안에서, 한 성령의 내주와 교통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구속의 신령한 복들에 함께 참여하고 나누는 것이다. 셋째, 또한 성도의 교제는 한 몸 안에 연합된 성도들이 이 복된 신령한 은혜들을 누리도록 자신이 받은 은사로서 서로 서로를 섬기는 것이다. 성도들이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구속의 신령한 복들은 화목, 구속, 칭의, 성화, 생명과 구원 등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들이다(엡 4:4).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각자 받은 은사를 통해 지체들의 구원을 위해 섬긴다. 또한 세상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아 교회를 세우는 데 헌신한다. 은사는 다양하지만, 언제나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강건하게 하는 목적 위에 주어진다(엡 4:7). 그러므로 이러한 세 가지 기초 위에서 성도들은 의무를 갖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은덕과 은사를 받은 자들은 이제 성도들 간에 서로 돕고 섬기므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야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저마다 연약한 영혼들을 돌보고, 주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애쓰는 일들 가운데 매진해야 한다. 따라서 성도의 교제가 성립하려면,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 안에 구속의 신령한 복들을 향유하는 실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신령한 복들을 공유하고 나누는 일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강건하게 세워 가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성도의 교제는 이와 같은 것이다. 성도의 교제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분의 구속을 각 성도에게 적용하시는 성령의 은총에 토대한다. 이 은혜 안에서 하나 된 지체들은 구속의 기업을 나누고 공유하므로, 전체 몸을 살찌워가고 강건하게 세워간다. 진정한 성도의 교제는 복음 안에 정체성의 일치, 사랑의 일치, 섬김의 일치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들을 온전히 수행하도록 은사를 제공하신다. 은사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가 성도의 교제라면, 한국 교회 안에서 이해되는 성도의 교제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많은 성도들이 교제를 생각할 때, 그 교제의 기초와 내용이 세속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성도의 교제는 인간적인 정을 나누는 모임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때로는 레크레이션이나 이벤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성도의 교제를 서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임 정도로 이해한다. 심지어 운동이나 취미나 강습회 같은 류의 모임을 만들어 동호회 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교제를 나누며 이를 성도의 교제와 동일시한다. 심지어 성도의 교제의 구심점이 학연, 지연, 생활의 수준에 놓여 질 때도 있다. 성도의 교제가 이익집단의 형태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도의 교제는 너무나도 성경의 의미와 동떨어진 것이다. 성도의 교제의 기초는 그리스도와 그 안에서 받은 것들을 공유하고, 그것으로 나누고 섬기고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 안에 주어진 신령한 복들이다. 사람의 본성이 연약하여 늘 성도의 교제의 구속적 기초를 망각하기 쉽다. 즉, 교회는 언제나 성도의 교제를 세속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다시금 현재 이해하고 추구하는 성도의 교제가 성경적인 기초 위에 서 있는지 돌아보고 참된 의미와 실천의 모습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가 주신 바가 약해지거나 사라지면 그곳에 성도의 교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성도의 교제의 구심점은 그리스도와 구속을 통해 주어진 기업들이어야 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55문답은 성도의 교제의 이러한 본질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제55문 _ “성도의 교제”를 그대는 어떻게 이해합니까? 답 _ 첫째로, 모든 신자들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보화와 은사들에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각 신자는 다른 지체들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은사들을 기꺼이 기쁨으로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318 no image |주제성경공부| 동성애에 관하여 (고전 6:9-11)_이은상 목사
편집부
1267 2017-09-06
주제성경공부 동성애에 관하여 (고전 6:9-11) < 이은상 목사_동락교회 > 동성애자들에게 복음이 들어가면 ‘탈동성애 그리고 구원’이 이루어질 것 동성애 이슈는 정치적인가 문화적인가? 의학적인가 윤리적인가? 아니면 인권인가 영권인가? 이슈가 어느 편에 있든지 주장하는 자의 편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에 대한 결론적 해답은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절).’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물론, 전후방부대, 우리 동네, 내 집 안방까지 진격해오는 동성애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동성애는 죄인가? 9절. ‘불의’라는 단어가 나오고. 그리고 다음에 죄의 목록이 나옵니다. 음란, 우상숭배, 간음, 탐색, 남색 등등. ‘불의’라는 단어는 포괄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그러므로 그 다음 죄의 목록들은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통적이라 함은? (1) 모든 것이 다 같은 죄라는 것. (2) 그러므로 동성애만 더 큰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탐색과 남색이란 단어는 남창과 동성애자(homosexuals, sodomites)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리고 10절의 ‘도적’이라는 단어를 좀도둑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동성애는 분명히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동성애에 대한 확실한 의지를 선언하고 발동해야 합니다. 반동성애 집회 및 서명에 엉거주춤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할 것은 동성애자들만 죄인 취급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좀도둑이나 욕심쟁이나 술주정뱅이나 동성애자들이나 다 동일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을 인간 이하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 반동성애를 외치면서 자기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지는 않는지요?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야. 나는 깨끗하고 의롭다.’ 아닙니다. 욕심쟁이인 나도 동성애자처럼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2. 동성애자들에 대한 치료가능성 11절. 고린도교회에 동성애자들이 있었는데 거듭나고 고침 받은 자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동성애든지 무슨 죄든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고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마19:25절).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 중 하나는 동성애자들은 유전적 형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학적 이론은 얼마 전부터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동성애는 선천적이 아닙니다. 남아프리가 공화국에는 비교적 최근까지 아프리카 흑인들 사이에서는 남성 동성애자들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대규모 산업도시를 개발하면서 법령으로 요하네스버그 근처에 남성만 거주하는 도시를 정했다고 합니다. 가족이나 아내를 데려올 수 없는 도시입니다. 그 이후로 아프리카 남성들에게 전혀 없었던 동성애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동성애의 원인이 유전적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동성애의 원인이 환경적 영향인지, 유전적인지, 혹은 어린 시절 가정의 잘못된 분위기 때문인지 우리보다 하나님께서 더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분명 동성애가 죄라고 단언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고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3. 탈동성애 그리고 구원(Exodus) 동성애자들은 에이즈에 많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것을 비꼬아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AIDS(아 이제 다 살았다). 그러나 그것보다 ‘아 이제 다시 살았다’라는 말이 더 마음에 와 닿아야 하지 않을까요? 동성애자들에게 복음이 들어가면 ‘탈동성애 그리고 구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동성애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엑소더스(Exodus)를 믿어야 합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과 같은 동성애자들에게 비난과 정죄의 돌보단 다윗의 물맷돌 즉 믿음과 구원의 돌을 던져 그들을 괴롭히는 골리앗을 쳐 죽이고 속히 액소더스를 이루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317 no image |신/학/논/단| 존 포베스의 칭의론 분석_배현주 목사
편집부
1140 2017-08-02
신/학/논/단 존 포베스의 칭의론 분석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복음 안에 포함된 어떠한 것도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수단들이 없다.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존 포베스의 칭의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칭의를 그리스도와 신자의 동기화로 설명하는 것 존 포베스는 17세기 스코틀랜드 노회 개척자이다. 그는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에 의하여서 대륙으로 추방을 당하여서 미델부르그에서 잉글랜드 이민자 교회를 섬기며 살았던 장로주의 청교도이다. 존 포베스의 칭의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칭의론에 영향을 주었다. 그 만큼 그의 칭의론을 살피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칭의론의 신학적 입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존 포베스는 그의 칭의론을 교부 시대에 중심적인 신학 주제였던 삼위일체론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저서 칭의론 제 10장에서 그는 삼위일체 교리를 진술한다. “첫째로 은혜의 모든 사역은 전 삼위격의 사역이다.” 존 포베스는 그의 칭의론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외적(ad extra) 사역의 통일성의 교리를 진술하였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사역 모두 전 삼위격의 사역이다. 그 다음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의 질서에 대하여서 진술한다. “둘째로 사역의 질서는 삼위일체 실존의 질서를 따른다. 모든 사역의 질서에 있어서 아버지가 첫째이시고 아들이 둘째이시고 성령께서 셋째이시다.” 그리고 이어서 진술한다. 존 포베스는 그의 칭의론에서 있어서 삼위일체 교리를 따라서 신적 작정 교리를 다룬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변개 될 수 없다고 진술한다. 그 선택의 대상은 결정이 되었고(determinate) 그 모두는 완결된 숫자이다.(complete number of all) 그리고 그 택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그리고 진리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and never can so fall away from grace and from the truth of God) 존 포베스는 택자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수단에 대하여서 진술한다. “하나님의 작정의 실체 안에 표지되는 세 번째는 수단이다. 그 수단에 의해서 우리가 작정에 이른다.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우리를 입양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 수단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입양이 되도록 예정되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 원인이 아니시다. 그분은 입양의 수단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를 수단으로 하여서 우리를 양자로 작정하셨다.” 존 포베스는 신적 작정 안에 양자됨의 교리로서 칭의론을 전개한다. 무엇보다 그의 칭의론은 기독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신자들의 칭의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한다고 진술한다. “지금 세 번째로 다시 정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의 실체에 대한 세 번째 논점 안에서 동일한 배경의 진리를 시도한다. 수단들 안에서 그것으로 우리는 입양으로 예정되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원인이 없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죽음에 그리스도를 넘겨 주신 아버지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혹은 우리 구원의 맏형이시고 우리를 위해서 그 생명을 내려놓으신 그리스도를 움직일 수 있는 원인이 우리 안에도 없다.” 그리고 이어서 진술한다. 신자들의 선택과 입양의 유일한 원인은 오직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이러한 입양을 예정하셨다. 택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예정의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분 안으로 우리를 입양하시는 것이다.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엡 1:4)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신자들의 입양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존 포베스는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과 “그의 인성”이 그 배경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인성 안에 이루신 그리스도의 순종이나 당하신 고난도 그 배경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직 그의 위격성과 실존이 그 배경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역은 신자들의 입양에 있어서 전적으로 그의 위격적 실존이 배경이다. 중보자로서 신인(God·Man)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신자들의 입양에 직접적인 배경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도 그의 신성과 위격적 결합을 사려하지 않고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격성과 그 실존은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성과 실존은 그가 아버지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유업을 계승할 자가 되어서 그의 공로를 따라 신자들을 입양하는 배경이 된다. 신자들의 입양은 약속의 유업을 계승하실 맏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실존이 그 배경이다. 존 포베스는 기독론과 칭의론을 입양의 교리로 연결해서 설명한다. “지금 아들 됨의 이러한 복은 우리에게 작정된 것이다. 그 위격적 연합은 아버지에게도 성령에게도 고유하지 않다. 오직 두 번째 위격이신 아들에게 고유하다. 그 고유성에 의해서 아버지와 성령과 구별된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비록 아버지와 성령께서 아들과 함께 우리의 입양을 정하시고 우리를 입양하는 것까지 행하셔도 여전히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오직 아들 외에 다른 어떠한 위격으로서도 우리의 입양을 결정하시지 않으신다.” 존 포베스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과 신자들의 구원의 복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를 예정하신 것에 있어서 그 자신 안에서 그 자신을 통하여서 세워질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모든 작정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로서 모든 그의 자비의 수단으로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분이시다.” 존 포베스의 칭의론 29장에 다음과 같이 믿음과 칭의 교리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믿음이 없다면 복음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르도록 도울 수 없다. 약속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속한 의가 될 수 없다. 복음 안에 포함된 어떠한 것도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수단들이 없다.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그와 동일한 원인으로서 우리의 의는 믿음으로 있는 하나님의 의이다. 그 의는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서 있다. (빌 3:9) 즉 믿음은 그 자체로서 우리의 의가 아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우리의 의를 얻게 하는 수단이다.” 존 포베스는 믿음이 하나님 나라를 얻게 하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단이 지향하는 목적은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믿음의 대상이다. 이제 칭의 교리의 핵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의 교리를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우리에게 전가시키심으로서 우리의 의로서 동기화시키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 의해서 시행되고 행하여진 것으로서 동기화하셨다.” 존 포베스는 신자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동기화에 시작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우리에게 전가시키심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의로 동기화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우리에게 동기화시키심으로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진술한다. “그 동기화는 그 자체 안에서 충만하고 완전한 충분한 의의 대상을 취할 뿐 아니라 우리의 것으로 우리에게 이르는 완전한 의의 동기화를 취할지라도 오직 그것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지불을 하셨을 때 그것이 우리의 의가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우리의 의가 아니다. 오직 그의 동기화와 전가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은 신자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동기화 되었을 때 신자들에게 효력이 발휘된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입양되기로 예정된 택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동기화 되어서 그 효력이 발휘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동기화는 칭의로부터 시작하여서 신자들이 영화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의 교리이다. 그의 칭의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칭의를 그리스도와 신자의 동기화로 설명하는 것이다. 칭의 이후에 입양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양자들이 된 신자들은 그 부패한 본성이 거룩함에 완전케 될 때까지 끊임없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기화되어 간다. 칭의는 동기화의 시작이고 영화는 그 완성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거룩한 인성은 온전하게 신자들 안에 이루어 질 때까지 성령을 통하여서 계속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동기화가 완성될 때에 그 신자는 즉시 영화로움에 이른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신자들의 생애 모든 과정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동기화 과정이다. 칭의와 영화 사이에 있는 성화란 단지 그리스도와의 동기화 과정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신자들의 삶 자체가 영화에 이르는 과정이다. 신자들이 칭의를 통하여서 성취해 가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동기화란 결국 신자들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점차로 사라져 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316 no image |신학논단| 사도에 관한 신약의 이해 _노승수 목사
편집부
1143 2017-07-19
<신학논단> 사도에 관한 신약의 이해 < 노승수 목사, 강남성도교회 > 사도는 교회의 기초 직원이며 교회사에서 다시 있을 수 없다 신약의 ‘사도’는 '사자'라는 일반적인 의미이며 복음 증거를 위한 원 사도직의 확고한 명칭이다 사도의 권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있으려면 신약 전체 본문 속에서 사도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특별히 에베소서는 사도의 직무를 이해함에서 결정적 본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8). 이는 시편 68:18절의 인용인데, 시편에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예물을 받으셨다’로 되어 있다. 이는 바울이 탈굼역 본문을 인용한 것으로 봐야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데 유대 랍비들의 성서 해석법에 따라 모세가 한 것과 같은 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다. 모세가 유월절에 시내산에 올라 40일을 있으면서 율법을 받아 내려와서 오순절에 주었다고 유대인들은 믿는다. 이 전통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 것이다. 즉, “당신은 하늘로 올라가서... 토라를 받아 사람들에게 선사했도다”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해서 유월절에 하늘에 오르셔서 오순절에 성령과 그 은사들을 선물로 주심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문맥에서 11절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가 나온다. 이는 성도와 교회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 베푸셔서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라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성령만을 선물로 주신 것이 아니라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말씀을 받아 40일 만에 유대 전통에 의하면 유월절은 시내산에 모세가 오른 절기로 오순절은 말씀을 받아 전하여 준 절기로 이해 된다. 따라서 성령을 그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시면서 그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도록 말씀의 수종드는 자들을 선물로 주셨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알다시피 교회는 기구로 이해해야 하고 그것의 핵심은 교회의 직원이다. 막 3:14에서도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고 해서 ἐποίησεν δώδεκα 에포이에센 도데카’(문자적으로 ‘열 둘을 만드셨다’)로 참으로 예수님 자신께서 새 이스라엘을 통치하시기 위해 열 두명의 성직자회(college)를 세우셨다는 것을 확증한다. 이 말씀을 선포하는 기구로서의 교회의 직원으로서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를 주셨다는 말이다. 성경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 2:20)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도와 선지자를 장로교회 헌법에서도 <기초직원> 혹은 <비상직원>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를 세우실 때, 이 복음을 사도와 선지자에게 위임하셔서 세우셨다는 것이다. 에베소서는 교회를 설명하는 메타포(은유)로 집을 세우는 것으로 설명한다. 집을 짓는데, 사도와 선지가가 그 기초가 되는 터라는 말씀이다. 이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들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맡아 가졌기 때문이다. <신사도 운동>이 계시를 운운함이 터무니없는 것은 그리스도가 최종 계시이며 그 최종 계시를 사도들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최종 계시라는 것은 신약 곳곳이 증거한다(히 1:1-3 외). 건물을 지으면서 그 터를 3-4층 올린 후에 다시 닦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사도와 선지자는 기초 직원이며 교회사에서 다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늘날 다시 교회의 터를 그리스도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것으로 둘 수 없음을 확증해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바나바가 사도라는 점이 논란이 대상이 된다 해도 역사적 신앙고백적 교회가 2,000년 동안 세워져 왔는데 근 1,900년 이상 나타난 적이 없는 사도가 21세기 들어서 갑자기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출현했다? 납득하기 힘들지 않는가? 이는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갈 1:7)이며 이를 전하는 자는 천사라도 저주를 받는다 한 말씀을 생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도는 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서신에서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묘사하는 반면 디모데를 “형제”라고 묘사합니다(참조: 롬 16:23; 고전 1:1; 고전 16:12). 다른 곳에서는 디모데가 사도이지만(참조: 살전 2:6), 바울과 동일한 사도가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참조: H. M. Carson) 즉, 성경의 사도는 다양한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사도를 한 가지 의미로 국한해서 생각할 때 오해가 생긴다. 말의 의미는 항상 그 말의 사용법에 의해서 결정되는 법이다. 사도를 뜻하는 아포스톨로스(apostolos)는 누가복음에서 6회, 사도행전에서 28회, 바울서신에서 34회, 히브리서에서 1회, 베드로서에서 3회, 유다서에서 1회, 요한계시록에서 3회 발견된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서는 각 1회씩 사용된다. 이 사용 빈도의 통계가 보여 주는 시사점은 사도에 관한 성경의 언급이 주로 바울과 누가에 의해서 체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오직 ‘사자’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의 특정한 직무 즉, 주님께서 복음 증거를 위해서 세운 원 사도직에 대한 확고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누가의 경우 이 단어는 더 사도직에 대한 의미로 국한해서 사용한다. 눅 11:49; 행 14:14의 경우를 제외하고 누가는 12제자와 바울에게만 사용한다. 누가에게 있어서 아포스톨로스(apostolos)라는 말은 12제자직의 칭호이다. 그런 누가가 왜 행 14:14의 말씀에서 바나바를 사도라 칭하였을까? 이는 누가의 기록이 그의 표현에서 나타난 것처럼 “처음부터 미루어 살핀 것”임으로 자신의 글이 아니라 다른 자료에 나타난 표현에 대한 인용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는 인용의 차원으로 이해해야지 누가가 성경의 저자로서 영감된 말씀을 집필할 때, 그가 가졌던 신학이었다고 보기 는 어렵다. 다시 말해서, 바나바에 대한 사도의 언급과 신약에 언급된 12사도와 바울, 야고보를 제외한 이들에 대해 쓴 ‘사도’는 사도의 일반적 의미 곧 ‘사자’라는 의미로 봐야 한다. 왜냐면, 이미 언급한 대로 누가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맡은 특정 직무로서 사도직으로 14:14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누가는 16장의 드로아의 소위 <we-text>라 불리는 곳에서부터 바울과 합류한다. 14장은 그 이전에 남겨진 자료를 참고하여서 기록하였다는 뜻이다. 즉, 성령께서 누가에게 영감하셔서 사도를 그런 의미로 국한하여 사용토록 하셨음을 말한다. 누가의 이런 빈번한 사용에 비해 나머지 세 복음서에는 단 세 번 각각 한 번씩 이 단어가 등장함은 주목할 만하다. 직무로서 사도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이 된다. 요 13:16에 나타나 있는 그 말은 ‘직무’로 이해될 수 없다. 왜냐면 여기에선 그 말이 사자를 의미할 뿐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참조: K. H. Rengstorf, TDNT 1, 421; R. Bultmann, The Gospel of John, 1971, 477n. 4). 그래서 개역성경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라고 해서 ‘사도’가 아닌 보냄 받은 자로 번역했다. 마 10:2에서 그 말은 12 제자들이 세우기 전의 그들의 명단 맨 앞에서 발견되며 막 6:30에서 그들은 과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 즉, 그들의 보냄 받은 사역과 관련하여 이 명칭이 사용된다. 바울서신은 누가-사도행전의 기록보다 앞서며 여기 등장하는 바울의 사도의 직무에 관한 개념은 신학화되었고 누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사도에 관한 표현은 아래 몇 가지 신학적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사도에의 부름과 임명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및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갈 1:1; 참조: 롬 1:5; 고전 1:1; 고후 1:1). 2. 사도직에의 부름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복음의 전파해야 할 의무와 결속되어 있다(롬 11:13; 갈 2:8; 참조: 롬 10:15; 고전 1:17). 3. 고난은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고전 4:9-13; 고전 15:30이하; 고후 4:7-12; 고후 11:23-29). 4.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고전 4:1; 엡 3:1-6). 5. 사도라는 특별한 지위(고전 4:16; 빌 3:17 등)가 교회보다 더 존귀하게 여겨진다거나 영적 은사들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고 언급하지 않는다(고전 12:25-28; 참조: 엡 4:11; 롬 1:11이하). 6. 바울은 마지막 사도로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데(고전 15:8) 본문에 “맨 나중에”라는 말이 참으로 그런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사도직에 부름을 받음으로써 그 직분을 계속 수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315 no image |신학특강|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섬김”_박상봉 교수
편집부
1410 2017-07-05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섬김” < 박상봉 교수_합신, 역사신학 > 이신칭의 ‘교리’의 유익을 얻는 데서 나아가 믿음의 자유를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죄에 맞서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이 중요 이웃을 섬기는 선행은 ‘이신칭의’의 실천적인 은사이며 열매 루터가 말하는 이웃사랑은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 속에서 자유롭게 행하는 것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지극히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을 위하여 봉사하는 지극히 충성스러운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다.” 1520년 11월에 출판된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신칭의에 대한 인간론적이고, 실천적인 서술이다. 루터는 ‘성경이 말하는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어거스틴과 펠라기안 논쟁 이래로 등장한 행위구원을 붙들고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비판하면서 ‘이신칭의’의 정당성과 그것의 실천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특별히, 이러한 이해 속에서 우리는 결론적으로 루터가 말하는 기독교 윤리의 핵심적인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쓸 당시 상황은 로마 교황청의 압박 속에서 삶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를 때였다. 1520년 6월 15일에 교황의 파문위협교서인 “주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가 공포되었을 때, 그의 심리적인 압박은 극에 달했다. 루터는 오직 성경과 자신의 양심에 근거하여 종교개혁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교황주의자들에 대항하는 영적인 전쟁에 돌입해야만 했다. 결국,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자들과 논쟁 속에서 교황제도가 적그리스도적인 권력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교황제도를 위해 견고한 체계를 이루고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적인 허상도 직시했다. 비록 작센(Sachsen)의 귀족 출신이자 교황의 시종인 칼 폰 밀티츠(Karl von Miltitz)의 간곡한 중재 속에서 로마 교황청과 화해할 수도 있는 일말의 기대감 속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해도,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근본적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와 투쟁 속에서 성경에 근거한 참된 신앙의 본질을 규명한 글이다.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진정한 자유와 섬김이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먼저, 이 자유는 믿음 안에서 인간을 얽매고 있는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는 ‘영적인 자유’이다. 죄, 사망, 저주, 지옥, 행위, 율법 등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것이며, 또한 고난, 박해, 죽음 등을 이겨내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정죄할 수 없으며, 심지어 스스로 짓는 죄도 이 자유를 빼앗지 못한다. 이와 동시에, 이 자유는 믿음을 통해 자유롭게 된 그리스도인이 결코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섬김’으로 귀결된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이르게 된 그리스도인이 이 믿음의 충만함과 풍성함 속에서 사랑과 기쁨을 통해 지극히 자유롭게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루터는 교황주의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의 존폐가 달린 신앙의 싸움을 기꺼이 수행했다. 그리고 새롭게 세워진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시의 모든 종교적인 억압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는 ‘이신칭의’의 구원을 알려주기 위해 목숨을 건 신앙의 걸음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성경의 가르침과 신앙의 양심에 근거하여 자신 앞에 놓인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큰 위협과 두려움 속에서도 믿음이 주는 진정한 자유와 섬김을 확신하며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삶의 자태는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통해서 확인시켜 주는 ‘이신칭의의 실천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믿음에 대한 바른 지식은 근본적으로 성경에 기초되어 있지만, 동시에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관련하여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에 기대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현실은 루터가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서 세상에 밝힌 이신칭의 같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는 ‘교리’에 대한 유익을 얻는 데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그 대신에 믿음의 자유를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죄에 맞서 치열하게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에 대해서는 주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신칭의를 통해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그 믿음을 이웃에게 증거는 하지 않고, 이웃사랑을 통해 배려를 받고 있지만 그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내세의 소망을 확신하고 있지만 그 소망을 가지고 모험적인 삶은 살지 못한다. 특별히,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기꺼이 이웃을 섬기며 살 수 있는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에 두고 있다. 비록 구속주와 죄인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두 인격적인 존재가 영적으로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인격을 가진 분(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믿음이라는 반지 때문에 신부의 죄, 죽음 그리고 지옥에 참여하시고, 이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신다. 그리고 이것들이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또 자신이 죄를 지으신 것처럼 행동하셨다. ... 그러므로 믿는 영혼은 그의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보증을 통해 모든 죄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며, 죽음으로부터 안전하게 되고, 지옥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믿는 영혼에게는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 생명 그리고 구원이 선물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죄와 그분의 의를 교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연합은 이신칭의가 단순히 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인격적인 관계에 대한 의미도 담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라는 존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으며, 부활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가 발생하는데, 즉 이러한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나’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나’의 ‘죄, 사망 그리고 형벌’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그분의 의, 생명과 구원은 ‘나’의 것이 된다. ‘나’의 죄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지워지고, 그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더욱이,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우리가 연합했다는 사실은 그분과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공유한다는 것도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잘 아시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빌 2:5)’을 잘 알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도우시고, 긍휼이 여시기며, 우리의 억울함을 신원하여 주신다(살전 4:6).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겸손함으로 남을 낫게 여기고, 이웃의 일을 돌아보며, 이웃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살아간다(빌 2:1-11). 구원의 조건으로써 이웃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과 기쁨 안에서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이다. 감사를 받든 비난을 받든, 이익이 되든 손해가 되든 아무런 상관없이 섬긴다. 친구와 원수를 구별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우리의 의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은사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자유롭게 섬기는 종으로서 행하는 것이다. 결국, 이웃을 섬기는 선행은 ‘이신칭의’의 실천적인 은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의롭게 될 때, 우리는 성령을 소유하고, 이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돕고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처럼, 선행은 그리스도인의 이신칭의의 열매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앞서의 모든 논의에 근거하여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가 아닌 믿음의 종교로 규정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아담의 타락 아래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이 주신 계명 중에 어느 것 하나도 바르게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믿음의 종교라고 할 때 강조점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는데 놓여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 받고, 당신은 타자(他者)의 공로로, 즉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롭다함을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루터는 한편으로 기독교를 윤리 없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종교로 이해한 것이다. ‘믿음’만 있으면 칭의를 위해 어떤 인간적인 행위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루터는 ‘이웃사랑’이 없는 믿음을 거짓된 것으로 인식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자신의 이웃을 위해 산다. 그렇지 않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믿음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끌어올려지고, 사랑을 통해 이웃에게로 내려간다. 칭의를 제공하는 믿음은 이웃을 섬기는 사랑을 그 열매로 드러낸다. 당연히, 루터가 말하는 이웃사랑은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 속에서 자유롭게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나에게 내어주신 것처럼 나 자신을 나의 이웃에게 마치 하나의 (작은) 그리스도처럼 내어 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 때, 내 이웃에게 필요하고, 유익이 되며, 도움이 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루터는 다른 한편으로 윤리 없는 기독교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된다. 이웃을 섬기는 사랑이 구원을 이룰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 사랑은 이미 칭의를 얻는 그리스도인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루터는 ‘어떤 선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이미 앞서 선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 속에서 기독교 윤리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했다. 즉,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합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선명히 밝힌 것이다. 그래서 루터의 다음과 같은 외침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리스도인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모든 일을 기꺼이 기쁨으로 행해야 한다.”
314 no image |신학논단| 성도의 선행의 의미_박동근 목사
편집부
1433 2017-06-02
<신학논단> 성도의 선행의 의미 < 박동근 목사, 한길교회 > 우리는 불완전해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선행을 추구할 수 있다 교회 역사를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언제나 두 극단에 의해 공격과 왜곡을 받아왔음을 안다. 그것은 공로신학과 방종주의였다. 전자는 은혜만이 아니라 행위를 공로 삼아 구원받는다는 세미-펠라기안주의적 율법주의고, 후자는 오직 은혜의 구원을 방종의 기회로 삼는다. 개혁교회는 이 둘을 철저히 배격한다.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구원이 칭의와 성화로 ‘분리’가 아닌 ‘구분’되는 이중은총이라 했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인은 값없이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다. 칭의는 이처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한 법적 구원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죄인은 성화의 은총으로 거룩을 추구해 간다. 칭의의 목적은 ‘거룩한 자녀’에 있다.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구원 적용이기 때문에 분리될 수 없다. 또 두 은총이 구분되어야 함은 한편은 법적이고 한편은 갱신적이며, 칭의가 성화의 토대가 되고 원인이 되는 논리적 인과적 순서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칭의를 받은 자에게 당연히 성화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신학과 실천은 오직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거룩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은 ‘오직 은혜’ 의식을 명확히 정립하는 동시에 그들이 추구하는 선행 혹은 성화의 열매의 의미를 바로 정립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로 시작했다가 행위로 끝내려는 경향을 보인다. 교회사 속에서 체계적으로 이런 신학과 실천들이 나타난 바 있다. 혹 체계적이지는 않더라도 이런 행태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다. 오늘날엔 바울이 경계한 거짓 복음이 신학적 체계를 갖추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한다. 어느 분이 칭의는 과정이며 종말적 구원은 은혜만이 아니라 행위로 결정된다고 설교하는 걸 보고 당황한 적이 있다. 개혁교회의 선행관은 개혁교회 신조들과 신학적 유산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2문은 선행이 성도의 칭의의 원인이나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 이유는 성도 안에 남겨진 죄(여죄)와, 언제나 완전한 순종을 엄중히 요구하는 율법의 본성 때문이다. 레위기 18:5, 신명기 27:26 등을 비롯 특히 갈라디아서는 하나님 앞에서 율법이 완전한 것을 모두에게 요구함을 증거한다. 율법의 요구는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으로 그리고 동기 면에서까지 완전히 지켜져야 한다. 율법의 본성대로 하면 누구나 그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다. 율법의 완전성에 비해 우리는 불완전하다. 우리는 완전을 향한 여정에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사실을 이렇게 밝힌다. “62문. 왜 선행을 통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왜 선행은 의로워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답.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그것은 불완전하며 여전히 죄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행이 늘 그 완전한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할 때, 우리는 포기해야 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선행을 거부하실까? 그렇지 않다. 이렇게 불완전한 선행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용서 때문이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가 불완전한 선행을 행할 때, 거기에 섞인 불의를 씻어내시고 용서하신다. 불의가 섞인 불완전한 선행을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 받아 주시는 것이다. 이 은혜 로 우리는 불완전해도 지속적으로 선행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다음과 같은 신학과 태도로 추구되어야 한다. 첫째, 선행을 행할 때 철저히 공로 의식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격만이 아니라 우리의 불완전한 행위를 용서하시므로 받아주셔서 우리의 행위도 칭의하신다. 둘째, 성도의 선행에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느냐 물으면 긍정할 수 있다. 성도가 순종할 때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서 복을 누린다. 그러나 그것은 기복적, 공로적 상급은 아니다. 성도의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은혜적인 것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3문답 참조). 셋째, 성도의 선행의 동기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여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4문답은 이 교리가 성도들을 선행에 무관심과 방종으로 이끌지 않느냐는 반론을 반박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와 가치를 안다면 결코 방종하지 않는다. 우리의 죄로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의 고통을 대신 감수하신 것, 그리고 십자가에 내려진 하나님의 공의의 엄중함도 깨닫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다. 진정한 복음을 성경을 통해 정립하고 경험했다면 우리를 용서, 용납하신 궁극적 이유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심인 것을 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의 생활이란 감사의 생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에 감사하여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목표로 살아가게 된다. 우리의 부족함 중에도 용서에 기대어 더 거룩한 삶을 추구해 간다.
313 no image |신춘 - 성경공부| “너희는 거룩하라”_이복우 교수
편집부
1933 2017-01-25
신춘 _ 성경공부 “너희는 거룩하라” - 레위기 19장의 분석적 묵상 - < 이복우 교수, 합신 신약학 > “신자는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수고하고 애써야” 레위기 19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함이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한다. 본 장은 그 내용에 따라 전반부(1-18)와 후반부(19-37)로 구성되어 있다. 1. 구조적 특징 먼저 본 장의 구조는 두 개의 괄호(inclusio) 구조 또는 이중 북엔드(bookend) 구조로 되어 있다. 첫 번째 괄호 구조는 2절과 36절이 이루고 있다. 레위기 11:45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한다. 여기에 출애굽에 관한 언급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이 함께 나온다. 그런데 레위기 19장은 이 내용을 역순으로 하여 2절에서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끝 부분인 36절에서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한다. 따라서 본장은 레위기 11:45를 따르는 괄호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거룩에 대한 요구와 출애굽에 대한 언급 사이에 거룩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약 42개의 항목으로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구조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거룩에의 요구가 출애굽과 그것의 근간인 하나님의 언약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두 번째 괄호 구조는 19절과 37절에서 나타난다. 19절은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라고 말씀하며, 37절은 “너희는 내 모든 규례와 내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고 말씀한다. 19절의 내용이 37절에서 확대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함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2. 내용적 특징 이어서 본 장의 내용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나타난다. 첫 번째 특징은 “너희”와 “나 여호와” 사이의 병행이다. “너희”라는 말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또는 “나는 여호와이니라”는 말씀이 주제 구절인 2절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병행은 전반부인 2-18절에서 7번 나타나고 후반부인 19-36절에서도 7번 나타나며, 결론구절인 37절에서 다시 한 번 언급된다. 이렇게 하여 본 장에는 “너희”와 “나 여호와” 사이의 병행이 무려 16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어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소유하신 분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다(2. 참조, 벧전 1:16; 2:9). “너희”는 소유된 자이며 “나 여호와”는 소유하신 분이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소유된 백성이 소유하신 하나님과 병행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어 자신의 소유된 백성으로 만드신 것은 그들을 노예나 종으로 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신 것은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미천한 우리를 창조주이신 하나님처럼 존귀한 자로 세우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어떤 말로도 다 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며 구원받은 신자의 지고한 영광이다.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그의 백성의 거룩함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2절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거룩해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소유하신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소유된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함의 원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원인이 되어 신자의 거룩함을 이룬다. 그런데 이 말은 곧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의 백성의 거룩함이 동질의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처럼 거룩한 자들이 되도록 기대하셨다. 신자는 ‘하나님처럼’ 거룩하도록 구원받았고 또 그렇게 살도록 요구받고 있다. 그래서 신자의 구원은 거룩함으로의 구원이다. 세 번째 특징은 신자는 일상의 행위를 통해 거룩함을 계속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언제나 온전히 거룩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거룩해야 한다(거룩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해서 거룩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법도와 규례는 무엇을 “하라”와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신자는 계속해서 거룩을 이루어야 하는 자이다. 이 때 하나님은 신자의 거룩함의 표준이 되신다. 이 말은 하나님의 거룩함은 완전한 것이고 불변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신자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표준삼아 지속적으로 거룩함을 성취해야 한다. 신자는 본문에 나타난 많은 규례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일상의 삶에서, 매일의 행실에서 하나님처럼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자리에 있다. 베드로는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고 말씀하셨다. 신자가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돼야 하는 근본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 바로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의 구원은 ‘행실의 구원’이다. 그리고 신자의 행실은 일상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신자는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수고하고 애쓴다.
312 no image |갈라디아서 강해 <10>| 육체 아래로 ‘스스로’ 들어간다_김근배 목사
편집부
1989 2016-12-27
육체 아래로 ‘스스로’ 들어간다 갈라디아서 3장 1-5절 < 김근배 목사, 동해참빛교회 > “육체의 일은 성령의 일을 방해하고 추락시키는 수고일 뿐” 1. 들머리(발단)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즐기라고 허락한 재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엡1:3) 것을 성령을 사회자로 세워두고 노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놀이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롬12:1) 예배(성찬)이다. 이게 재미있을 놀이인가? 어쩌면 경건하게 짓누르는 듯한 의무일 것이다. 성경이 가장 힘주어 말하는 교훈으로 어찌 놀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의무(duty)로 어찌 즐길 수(웨민소요리 제3문) 있겠는가? 이런 교훈과 의무를 이 정도 경지에서 재미로 노는 사람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 ‘오직 하나님께 영광’(웨민소요리1문)을 아무렇지 않게 일상에서 하루하루를 그냥 그렇게 이루어내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사람을 ‘절대 고수’라고 한다. 2. 주제(전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를 향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 와서 육체로 마치려고 하는”(갈3:3) 일을 하고 있다고 혼내고 있다. 갈라디아서 5-6장에 가면 ‘성령의 일과 육체의 일’의 재미와 결과를 말해 놓는다. 한마디로 성령의 일은 자유롭게 놀면서 신령한 열매(하나님께 영광)를 맺게 한다. 반면에 육체의 일은 죄에 곧 사탄의 손아귀에 속박된 채 들어간 것을 모르고 제 육체의 만족을 추구한다. 성령께서 사회를 보고 함께 노는 일은 고귀하고 완전하고 자유로운 즐김이라고 말하고, 제 육체를 사회자로 놓고 노는 일은 비천하고 불완전하고 텅 빈 즐김이라고 말한다. 성령께서 사회를 보며 주려는 즐거움은 칭의의 고귀한 목적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은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함”(갈5:1)을 이루는 데까지 여러분을 끌고 가는 수고이다. 반면 육체가 보는 사회는 성령의 일을 방해하려고 여러분을 반대 방향으로 데려가서 추락시키는 수고일 뿐이다. 3. 전개(위기) 제 육체의 만족을 억압된 채로 텅 비게 채우려고 노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또는 그런 식으로 놀고 싶다고 목적 삼아 노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모두가 자유롭고 완전하게 방해 받지 않고 놀려고 한다. 부모라도 목사라도 성령이라도 누가 옆에서 간섭하는 것을 속박으로 본다. 이런 사람을 ‘어리석고 쪼잔한 절대 하수’라고 한다. 그 결과가 뻔하기 때문이다(갈5:21). 4. 증거(절정) 그 뻔한 결과를 아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마음을 쏟았다. 다시금 쏟는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신 것은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입니다”(갈3:5). 갈라디아교회가 받은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려고 우리 죄를 대신해 자신의 몸을 내 주셨습니다”(갈1:4)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이 복음이 갈라디아교회 사람들 눈앞에 분명히 있다(갈3:1)고 한다. 또한 우리들도 받아 우리들 눈앞에 펼쳐놓을 수 있는 복음이다. 5. 마무리(결말) 우리들 눈에 들어있는 이 복음 때문에 갈라디아사람들처럼 육체(율법)의 꼬임에 다시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복음 위에 율법(육체놀이)을 얹고 싶은 ‘그 재미, 그 환상’을 전혀 재미 보지 않을 자제력이 있는가 말이다. 성령께서 열심히 사회를 보시는데, 우리는 가만히 있거나 딴 짓 하면서 협조 안 하는 인간들이지 않을까? 너희를 위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다(눅7:32)는 책망을 받을 뿐이다.
311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 문서<20>| 하나님의 영광 나타내는 ‘창조’_배현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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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5 2016-12-14
하나님의 영광 나타내는 ‘창조’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타락하기 이전부터 인간의 존재 방식”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로 시작한다. 창세기 1장 1절의 이 말씀은 만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증거하고 있다.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피조되었다(시 33:6). 그때에 우 주 창조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적 사역이다. 웨스트민스터 제4장 1절에는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한 능력, 지혜 그리고 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태초에 무로부터 세상과 그 안에 만물을 만드시고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다”라고 고백하였다. 성부 하나님께서 창조의 시초이실지라도 성자 하나님께서 말씀과 지혜가 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효력과 능력이 되신다. 요한복음 1장 1-3절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주 창조에 함께 하신 창조주이심을 증거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존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만물을 지으신 분이심을 증거한다. 창세기 1장 2절은 성령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증거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 본문은 성령 하나님을 “하나님의 신”으로 계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부께서 성자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서 우주를 창조하셨다. 우주 창조에 있어서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빛을 발한다. 그런데 우주 창조 자체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 Revelation)이다. 그가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우주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난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 박사는 그의 저서 [개혁 교의학] 제1권에서 “창조는 하나님의 첫 번째 계시이다. 그리고 모든 후속 계시의 시작과 기초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창조 계시”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창조 계시가 일반 계시이다. 이러한 일반 계시는 일반 은총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 자체가 은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현현 자체가 은총이다. 고대 사회에서 왕이 행차할 때 백성들은 “성은이 망극하다”고 하며 엎드린다. 옛 고대인들이 왕에 대하여서 갖춘 이러한 예절은 놀랍게도 일반 은총의 의미를 드러낸다. 고대 사회에서 왕이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을 “성은”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신 것 자체가 은총이다. 그래서 일반 계시는 일반 은총이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다. 그런데 만물은 하나님과 즉명적 관계에 놓인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매 존재하였다. 그것은 창세기 1장 3절이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3절의 구문의 구조는 이후에 계속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사물이 존재하는 형태로 되어있다. 만물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피조되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만물은 존재하였다. 그렇게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의 즉명적 관계는 만물의 존재 방식이다. 그러므로 우주 창조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발현이다.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 우주 창조에서 빛난다. 우주 창조가 하나님의 일반 계시라면 우리는 창조된 우주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광대하시다. 그래서 우주도 광대하다. 하나님께서는 섬세하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도 섬세하다. 자그마한 생명체 하나라도 분석해 보면 얼마나 섬세한지 모른다. 그래서 나노 세계(Nano World)로 들어가 보면 가시적으로 간단해 보이는 물체들도 굉장히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인체는 어떠한가? 다양한 신경 조직망으로 매우 섬세하게 연결되어 있는 인체는 하나님의 섬세하신 창조의 손길을 엿볼 수 있다. 온 우주와 그 우주 안에 활동하는 만물은 모두 전능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우주 만물과 인간 존재를 살펴보면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온 우주 만물에 하나님의 신성적 능력이 충만하다”(롬 1:20)고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그의 영원하신 지혜로 우주를 창조하셨다. 만물에는 하나님의 속성이 희미하게 계시되어 있다. 시편 19편 1-4절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이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인간 창조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피조물을 조성하신 후에 이성있는 불멸의 영혼으로 남자와 여자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을 덧입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마음 안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할 능력도 받았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즉명적 관계는 인간 창조에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자마자 첫 사람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창 2:17)는 계명을 내리신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받은 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도록 피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이다. 인간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되었다. 창세기 1장 26절은 인간 창조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인간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되었다. 그렇게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그 모양대로 만들어진 인간들은 더욱 하나님과 즉명적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순종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것이 인간 존재의 최고의 가치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락하기 이전에 인간의 존재 방식이었다. 천하 만물이 하나님과 사이에서 그 명령에 순종하는 관계라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피조된 인간들은 더욱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할 존재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도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속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였다. 그 크신 은총을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이 선하다.
310 no image |갈라디아서 강해 <9>| 너에게 칭의를 주어 네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신다_김근배 목사
편집부
1787 2016-12-14
너에게 칭의를 주어 네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신다 -갈라디아서 2장 14-21절 < 김근배 목사, 동해참빛교회 > “피조물은 단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처럼 살아야” 1. 들머리(발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자주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냈다. 나는 (이제 그리고 다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민15:41, 출20:2 등등).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떻게 하셨는가를 묻기 전에 이스라엘이 이 일을 원했는가를 물어본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애굽 해방 직후 홍해에서부터(신앙 시작) 광야에까지(신앙 과정) 줄곧 모세와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불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줄곧 ‘애굽에 무덤이 없어서 이곳 광야에서 ‘적들에게 또는 목마르게 해서 또는 배고프게 해서 또는 하나님 분노로’ 죽이느냐?’고 불평했다. 2. 주제(전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말하길 “지금 내가 육체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 때문입니다. 이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갈2:20)라고, 모세가 광야 이스라엘에게 자주 말하고 싶었을 것 같은 말을 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다른 이유와 목적(애굽에 있을 때보다 더 좋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민16:13-14)을 갖고 육체로 사는 것(교회에 나가는 것)이라면, 광야를 걷는 내내 원망과 불평을 가진 이스라엘처럼 우리 영혼에는 하나님의 참 은혜를 치웠고(set aside)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참 희생을 헛되게(for nothing) 했다고 하는 바울의 말(갈2:21)을 듣게 될 것이다. 3. 전개(위기) 정말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갈2:20)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죄 가운데 머물면서 죄인처럼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롬6:2)라고 말하는 사도 바울의 말을 따라,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움으로 죄 된 인생을 해체한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죄 된 인생을 해체하고 그리스도를 내 안에 살게 하려 할까(그래야 한다고 깨닫게 됐을까)? 현실(영혼 상태)은 여전히 목마르고 배고프고 힘들고 지쳐가고 있는데 말이다. 즉 내 마음은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데. 물론 광야에서 구름기둥, 불기둥(하나님 사랑)에 만족하는 대신 에어컨과 온풍기(애굽문명)도 함께 가졌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은 이런 상태가 아니니 빼고 말이다. 4. 증거(절정) 당신, 새로워진 본질(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로 칭의를 얻고 성화를 걷는 거룩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이 기쁜가? 즉 하나님께서 내 하나님이 되셨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내 주님이 된 것이 그렇게 좋은가? 이것이 좋아서 더 좋아지도록 물질문명이나 자기성질을 애굽에 놔두고 광야에서 그렇게 팍팍하게 사는가? 그렇다고 피조물의 이런 태도가 창조주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을까? 죄인이 의인처럼 완전히 변화해서 따라갈 수 있을까? 자식이 부모의 의중대로 완벽히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최소한, 어쩌면 최대한일지 모르지만, 피조물은 단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처럼만 살면 될 것 같다. 죄인은 단지 ‘오직 은혜로’ 의인의 모양만이라도 내면 될 것 같다. 자식은 부모가 준 생명만이라도 아끼고 유지하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신은 ‘거의 매일’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5. 마무리(결말) 하나님께서 너(잃어버린 죄인 그러나 아들)의 하나님이 되려고 하나님 자신, 어쩌면 그것을 넘어서는 희생, 하나님 아들을 주셨다는 사랑을 깨닫고 너희들 마음에 받아주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괜찮다, 그 정도로라도 올바르다) 하신단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조금이라도) 잘 지켜주는, 원망이나 불평불만 없이 그리고 물질문명 욕심이나 자기성질 냄 없이 하나님 아버지와 늘 교회(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살았던 그 큰아들(눅15:31)이 몰랐던 것을 알면서 즐겁게(웨민소요리 제1문답) 살지 않을까. 율법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나를 죽일 듯이 내 마음을 지배하려 하고(롬7:1), 그러면서 율법은 내가 죄를 죄로 악을 악으로 깨닫게 하는데 도움을 주고(롬7:7), 그래서 율법은 나를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할 필요를 강하게 느끼게 한다(롬7:10). 이런 삶의 광야가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받아 성령을 따라 살면서(롬8:4,14) ‘하나님께서 내 하나님이심’을 아주 조금 알아가는 고난인 것 같다.
309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 문서<19>|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_배현주 목사
편집부
2240 2016-11-16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하나님의 작정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불변적인 것”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3절에 다음과 같이 선택론을 선언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들과 천사들 가운데 얼마는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예정하셨고 또 달리 얼마는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전택설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의장이었던 윌리엄 트위스의 개혁주의 예정론에 “하나님의 신적 작정의 첫 자리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고 진술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하여서 하나님의 나라(De Civitate Dei)를 작정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시는 택자들이 유업을 받을 나라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택자들을 선택하셨다(엡 1:4). 그것은 당연히 타락 이전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되었다. 그것은 대상을 고려함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신 뜻에 따라서 된 것이다. 선택의 원인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신 뜻이다. 다른 어떤 것도 원인이 아니다. 그래서 타락전 선택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인류 중에 얼마를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다. 그리고 나머지를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다. 폴라누스는 그의 저서 [Syntegma]에서 “예정의 근원적인 유효적 원인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예정의 행위가 있었다”라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로마서 9장 18절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작정의 유일한 원인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이다”라고 증거하였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 그러면서 폴라누스는 하나님의 작정의 목적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고 진술한다. “그것은 최고의 목적이 있고 그 다음 목적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두 번째는 택자들의 구원이다.” 그때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그 택자들의 수는 분명하고 확실하여서 증가도 축소도 되지 않는다고 진술한다(제3장 4절). 그리고 이어서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이 증거한 말씀을 해석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엡 1:4). 헬라어 본문은 “그가 선택하셨다”라고 하여서 과거형 중간태로 되어있다. 헬라어 중간태는 주어가 동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형태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책임성을 가지시고 그 동작에 참여하시는 형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3장 4절에 “생명으로 예정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의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목적과 비밀스러운 경륜 그리고 그의 뜻의 선한 기뻐하심을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으로 선택하셨다”라고 진술한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불변적이다. 그것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는 변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불변성이라는 속성으로부터 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작정론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는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서만 구원을 받는 교리를 의미한다. 지금 인간 스스로 무엇을 의도하여서 산출할 수 있는 선한 열매는 없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모든 열매들은 하나님 그분으로부터 나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 5절은 도르트 신조가 선언한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의 교리를 담고 있다. 웨신은 “생명으로 예정된 자들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목적과 비밀스러운 경륜과 그의 뜻의 선하신 기뻐하심을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으로 선택하셨다. 그것은 믿음이나 선행이나 그 어느 것의 견인이나 그 밖에 그를 움직이는 원인이나 조건으로서 피조물 안에 어떠한 일이 있을 것을 예견 없이 그의 순전하고 자유로우신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찬송하기 위함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도르트 신조의 정문은 이러하다. “선택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순전한 은혜로부터 그 자신의 뜻의 주권적 선하신 기뻐하심을 따라서 전체 인류 중에 얼마를 선택하셨다”(1장 7절). 그리고 “선택의 은혜에 대한 유일한 원인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다”(1장 10절)라고 진술한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도르트 신조를 살펴 볼 때에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인간의 어떠한 공로나 가치나 업적들은 사려 대상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기뻐하심이 택자들의 선택의 유일한 원인이다. 전적으로 절대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것에 선행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전택설에 입장이라는 가장 확고한 진술은 이러하다. “선택된 자들이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이 되었다”(3장 6절). 무엇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중 예정설을 주장한다. “나머지 인류에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으로서 그 자신의 뜻의 헤아릴 수 없는 목적을 따라서 그가 기뻐하시는대로 그의 자비를 거두셨다. 그래서 그의 주권적 권능의 영광을 위해서 지나치시고 그들에게 죄로 인한 진노와 불명예를 쏟아 부으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래서 그의 공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셨다”(3장 7절). 아울러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신적 작정의 교리가 매우 신비로운 교리이기에 신중하게 다루어야 될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무엇보다 신적 작정 교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진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가는데 까지 가고 하나님의 말씀이 멈추는 그곳에서 우리도 사색을 멈추는 것이다. 존 칼빈이 말한대로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따라서 신적 작정 교리는 다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개혁주의 작정론이다. 신적 작정 교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교리적 진술로 들어왔지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부분은 우리도 침묵해야 한다. 그래서 신적 작정의 교리는 불필요한 사색의 확장을 거부한다. 오직 진리 안에서 사색하고 멈춘다. 이러한 원리를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3절에서 성도들에게 권면하였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사변적으로 신학을 정립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거룩한 보편 교회 신앙 고백서는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따라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나아가는데 까지만 나아갔다. 그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의 교리적 입장이며 도르트 신조의 교리적 입장이다. 이러한 거룩한 보편 교회가 결정한 공적 신앙고백서를 버리고 개인이 함부로 성경을 헤집고 들어가서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가장 어리석은 오류를 드러낼 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신자들을 건전하고 정통적인 성경 해석으로 인도하는 규범적 지침서이다.
308 no image |갈라디아서 강해 <8>|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칭의>_김근배 목사
편집부
1625 2016-11-16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칭의> - 갈라디아서 2장 14-21절 < 김근배 목사, 동해참빛교회 > “칭의는 종말론적이지만 현재 여기에서 실행되고 있는 값비싼 은혜” 1. 들머리(발단) 갈라디아서 2장 16절,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에 대해서 말해야겠다. 이 구절은 ‘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사람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으려고’ 대답한 모양새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왜 ‘의’를 확보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이 대답하길, “내가 하나님을 향해 살게 되었다”(갈2:19)고 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의롭게) 회복되었다는 의미이다. 2. 주제(전개)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회복되었단 말인가? 우리 안에서는 여전히 성령과 육체가 화해 없는 전쟁(벧전2:11, 갈5:17)을 계속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대답은 ‘그렇다’이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부패성이 남아 사탄의 유혹에 끌려 죄와 죽음으로 빠져 들어가는 죄인이나, 내 마음에 믿음으로 접붙여 옮겨놓은(전가됨)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의’(빌3:9) 덕택에 하나님께서 죄인의 인격을 의롭다고 하시고 받아들이셨다. 그런데 이렇게 받아들인 은혜가 언제 일어날까? 하나님의 최후 심판인 종말에,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나라 백성이 된 지금에 일어난다. 종말에는 무죄선언으로 구원을 완성함으로, 지금은 죄용서(죗값을 치러 하나님 공의 만족)로 관계회복(새언약 관계)을 이뤄 성령과 말씀(도덕법)으로 내 죄 된 인격을 거룩하게 정화하는 의로운 길에서 일어난다. 3. 전개(위기)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받아주시는 것이 좋아할 만한 은혜인가? 솔직히 우리는 잘나가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맺게 하는 ‘의’를 잃어버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는데도 지금까지 사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었다(갈3:10)고 성경은 말하는데, 정말 저주 아래서 비참들 했을까? 성경이 말하는 비참은 사람이 더 이상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신령한 선(any spiritual good)을 원하거나 행할 의지가 없어졌다는 데서 오는 절망이었다. 죄인이었을 때는 몰랐다가, 복음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점점 더 알아가면서 더욱 분명해진 미안함이었다. 4. 증거(절정)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선을 원하거나 행할 의지가 생겼을까? 이 의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긴단다. 의지가 내 것이나 그리스도의 것으로(갈2:20) 돌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럼 이 의지는 죽은 의지요 죄의 의지이다. 이 상태로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오직 은혜는 전적으로 피동적이다. 사람을 그 모양으로 그냥 내버려두면 온갖 악을 행하는 능동적 성향만을 띤다. 즉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생각을 전혀 갖지 않고 단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고상한 생각들을 괜찮다고 실천하며 산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퍼주려고 계획했고 실행했고 성취했다. 사람은 받기만 했다. 5. 마무리(결말)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살려면 오직 은혜 안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 일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당신 안에 당신 말고 그리스도께서 계시는가?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따라갈 것이고, ‘여기에서부터’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말들을 지키려고 할 것이고,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칭의의 현재(여기)와 미래(종말)가 아닐까 싶다.
307 no image |갈라디아서 강해 <7>| 이방인_김근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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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 2016-11-01
이방인 -갈라디아서 2장 14-21절 < 김근배 목사, 동해참빛교회 >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은 이방인들처럼 살지 않아야” 1. 들머리(발단)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이방인들과 구별한 근거가 ‘율법의 의무’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지킬 의무조차 없는 사람들을 이방인이요 죄인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율법을 의무로 준수했다. 율법의 의무를 지지 않았던 이방인들은 이방인의 뜰에서만 하나님을 섬기게 했다. 이것이 유대교이다. ‘이것이 유대교이다’라는 말에 주목하자. 유대인들은 유대교 아래 있을 때 유대인이 된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사도 베드로를 혼낸 근거가 되었다. “당신(그리스도인)은 유대사람으로서 유대사람(유대교 율법의무)처럼 살지 않고 이방사람(율법해방 자유인)처럼 살고 있다(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덕에 얻은 자유 때문에 그렇게 됐다). 그런데 이방사람(그리스도인)에게 어떻게 유대사람(유대교 율법)처럼 살라고 강요합니까?(이것은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에서 흔들려 율법의 의무에 매여서 나온 행동 때문에 나온 책망이다)”(2:14). 2. 주제(전개) F.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는 유대인으로서 유럽(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라하(현재 체코 수도)에서 태어나 독일어(독일인)를 쓴 이방인이었다. 카프카는 네 개의 변신이 겹쳐진 경계인이었다. 유대인 태생, 유럽인 선망, 독일어 교육(유대 흔적 탈피), 그런데 결국은 이방인이었다. 카프카는 모든 것에 소속되었으나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이방인이 갖는 좌절이다. 이방인은 오늘 왔다가 내일 떠날 수 있지만 내일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사람을 말한다. 이방인은 오늘도 여기 살고 내일도 여기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주변의 모든 것에 친숙함을 못 느낀다. 항상 낯설다. 그들은 안다. 모든 걸(태생, 모국어) 버리고 왔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기 자신을 알고 있다. 3. 전개(위기) 어떤 존재가 되어 어디 소속하겠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에서 단절하겠다는 각오를 하게 한다. 사도 바울은, 본래 자기는 유대사람인데 유대교에서 가르친 대로 율법의 의무를 지켜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에서 단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인정받겠다(2:16)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유대사람이면서 그리스도인이 되겠다(칭의)는 고백이며, 그리스도인처럼 살면서 이방죄인들처럼 살지 않겠다(성화)는 다짐이 들어있다. 전자는 아예 존재를 바꾸겠다는 의지이고, 후자는 새로 바꾼 존재답게 살겠다는 자태이다. 4. 증거(절정) 그래서인지 그리스도인들에겐 몇 개의 변신이 겹쳐진 모호한 경계지역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직 의로움(칭의)과 거룩함(성화)을 맹세(고백)한 중생인만 우뚝 선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소속이며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자기의 새로운 자신이 되는 형상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 후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더 이상 내가 나로 살지 않습니다 (나는 없고 그리스도만 있습니다)”(2:20). 5. 마무리(결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비그리스도인들과 구별할 근거는 ‘나는 없고 그리스도가 있음’이다. 만약 나(자아)도 있고, 육체의 욕망도 있고, 선망의 대상(Role model)도 있고, 복음의 진리에선 탈피(외면)가 있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면서 비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오늘은 여기 있지만 내일은 떠날 수 있는 교회(믿음)의 이방인이다. 그래서 당신을 볼 때마다 항상 낯설다. 이방인이니까!
306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 문서<18>| 하나님의 신적 작정_배현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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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2016-10-18
하나님의 신적 작정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하나님은 그 대상의 어떠한 상태를 조건으로 하여 작정하시지 않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3장 제1절에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그 자신의 뜻의 의논을 따라서 자유롭게 그리고 불변하게 되어질 모든 것들을 작정하셨다”라고 진술한다. 17세기 바젤의 신학자 요하네스 볼레비우스는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으로부터 계획된 것이다.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일반적인 것과 특별한 것이 있다. 일반 작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우주 안에 권능의 영광과 지혜와 선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특별 작정은 예정이라고 불리운다. 그것은 이성 있는 피조물 안에 선택과 유기의 작정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은혜와 자비의 영광과 공의의 영광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 작정이다. 이러한 절대적 관점에서 그 모든 유효적 원인은 택자도 그 택자의 신앙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이다”라고 진술하였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의 관련 구절로서 시편 33편 11절에서 다윗은 선포한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이를 직역하면 이러하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원토록 서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의 계획은 대대에 서 있을 것이다.” 70인경을 역본하면 이러하다. “주님의 의논은 영원히 거한다. 그의 마음의 생각이 대대로 있다.” 이 본문으로부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하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 가운데 변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무쌍하게 적응하여 가신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변하지 않고 다만 시대와 역사 안에서 다양한 경륜을 통하여서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신자가 신적 작정의 교리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계획이 어느 정도 보여 알 수 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작정의 최고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 하나님의 신적 작정의 첫 자리이다. 그로부터 모든 만물이 되어지도록 작정되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것은 변개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말씀하신 것이다. 신자들은 여호와의 계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알아가면서 인류의 마지막까지 보게 되며 그로부터 세상의 육신적 가치를 최종적인 가치로 삼고 살지 않는다. 그것이 개혁 신앙이 증거하는 나그네 신학이다. 신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허망한 명성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참된 신자들은 모두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감추어져 있고 주와 동행함으로서 감사하다. 그것이 참된 신앙이다. 자기를 내세우며 자랑하는 자는 모두 거짓 신앙이다. 오직 여호와의 율례를 사모하며 그 율례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복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3장 1절 후반부에 “그러나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죄의 저작자는 아니시다. 그래서 피조물의 의지에 대하여서 강제적이지 않으시다. 두 번째 원인자의 자유나 우연성을 제거하시지 않고 오히려 세우신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죄의 책임까지도 인간에게 전가되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한 인간의 죄책은 인간에게 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죄의 저작자가 아니시다. 시편 기자는 증거한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시 5:4). 그렇다. 하나님은 죄에 책임을 지셔야 하는 죄의 창시자는 아니시다. 시편의 말씀처럼 죄악이 주와 함께 거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보고 기뻐하셨으나 아담의 범죄를 기뻐하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죄악은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그 창조 행위에 속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죄는 인간 편에서 스스로 이끌려서 범죄한 것이다. 그 책임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다. 사도 야고보는 그의 저서 1장 13-14절에 이렇게 진술하였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3-14).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범죄를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피조물의 의지에 대하여서 강제적이지 않으시다. 두 번째 원인자의 자유나 우연성을 제거하시지 않고 오히려 세우신다”라고 진술한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스스로 자기 의지로 범죄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신적 작정 아래에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 제2절에는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예상되는 조건으로 되어질 것을 아셨다고 해도 여전히 그가 어떤 것을 그가 장래에 그것을 혹은 그러한 조건으로 되어질 것을 예지하셨기 때문에 작정하신 것은 아니시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그의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신 뜻에 기초한다. 결코 그가 작정하시고자 하시는 그 대상의 어떠한 상태를 조건으로 하여서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 이에 반대하여서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그 대상에 대하여서 예지하시고 그 조건을 따라서 예정하셨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인간 편에서 구원을 받을 만한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 편에서는 자유의지라든가 선행 등을 앞서 행하는 것이 구원을 얻는 조건이 된다. 이러한 조건적 선택 교리는 매우 위험한 거짓 교리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어떠한 상태도 예지하시기 전에 그의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신 뜻을 따라서 예정하셨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11-16절에서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 은혜로 선택하시고 유기하셨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진술을 따라서 볼 때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은 거짓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인간의 자유나 우연성을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책임성을 돌리는 형태로 세우신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자신의 행위에 하나님 앞에서 핑계치 못할 것이다(롬 1:20).
305 no image |갈라디아서 강해 <6>| 흔들린 베드로<반석>_김근배 목사
편집부
1884 2016-10-18
흔들린 베드로<반석> -갈라디아서 2장 11-14절 < 김근배 목사, 동해참빛교회 > “교회에 덕지덕지 붙여놓았던 가면들(hypocrisy) 용기 있게 벗어야” 1. 들머리(발단) 사도 베드로는 게바(굳건한 반석)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2:14)에서 흔들렸다(hypocrisy, 가면 쓰기). 사도 바울이 그것을 보았다. 그래서 바울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베드로를 나무란다. 베드로의 위선이 교회 안으로 유대교 프로그램이 들어올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사도 베드로는 율법의 멍에(저주)가 풀어졌음(갈3:13, 5:1)을 복음의 진리로 확신했는데도, 율법의 유효성을 이야기하는 ‘힘 있는’ 사람들이 오자 슬그머니 복음의 진리에서 빠져나왔다. 2. 주제(전개) 갈라디아서 2장 14절 “복음의 진리”는 ‘그 복음이 (유일한 단 하나의) 진리(길)이다’이다. 무슨 말인가? 베드로는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 디도는 헬라인인가 히브리인인가? 당신은 한국인인가 북한인인가? 당신은 좌파인가 우파인가?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됐습니다. 유대 사람도 없고 그리스 사람도 없고 종도 없고 자유인도 없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3:26-29).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로 있는 것’이 진정한 게바이다. 교회에서 만든 절기, 행사, 사업, 세미나, 시스템(구역별 세대별) 구성 등으로 끼리끼리 하나가 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3. 전개(위기) 어떤가? 당신은 흔들린 베드로인가, 굳건한 베드로인가? 흔들린 베드로라면 한 몸을 이렇게 쪼갠 일로 꾸중을 들어야 할 것이고, 굳건한 베드로라면 우리 서로 한 몸이므로 교제의 악수를 나눌 것이다. 나는 꾸중을 들어야 한다. 밖에 있을 때의 모습과 안에 있을 때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고 있단다(갈2:14). 밖에선 선한 사마리아 사람(굳건한 베드로)처럼 보이려고 양의 탈을 쓰고(hypocrisy), 안에선 강도 만난 사람(흔들린 베드로)처럼 맥없이 쓰러져 산다. 4. 증거(절정) 그것뿐이겠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자기 생명(장래)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자기 몸(즐거움)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마6:25) 늘 걱정한다. 걱정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마6:27)고 주께서 말씀하셔도 마음속에선 걱정이 샘솟는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나무라신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이런 걱정은 이방 사람들이나 추구하는 것이다”(마6:30, 32). ‘머리’ 되신 주님을 믿지 못하고 ‘몸’인 자기만을 걱정하므로 이런 사람들은 흔들린 베드로다! 5. 마무리(결말) 흔들리고 있다. 이런 괴로움은 오늘도 내일도 찾아오겠지.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품에 안아 주실 안식 때까지 끝내 내려놓지 못하고 질질 끌고 가겠지. 가나안이 가까워지니 하나님께서 힘내시겠구나! 본 모습으로 얼른 돌아가자. 교회 안으로 들어온 ‘흔들린 베드로 프로그램들’을 털어버리자. 그리스도의 몸(교회)에 덕지덕지 붙여놓았던 가면들(hypocrisy)을 용기 있게 벗을 때가 됐다. 우리 마음에 샘솟는 걱정들도 벗어버리자. 이것들, 이렇게 하기가 참 어렵다. 주여, 우리(교회)가 ‘게바(반석) 베드로’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게(begin again) 하소서. 아멘.
304 no image |갈라디아서 강해 <5>| 천국복음을 확신하는 달음박질 비결_김근배 목사
편집부
1869 2016-10-04
천국복음을 확신하는 달음박질 비결 - 갈라디아서 2장 1-10절 < 김근배 목사, 동해참빛교회 > “성도는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가는 사람들이어야” 1. 들머리(발단) 1960년대 소설가 최인훈 <광장>은 남한의 자유주의 유토피아 ‘코케인(Cockaygne)’과 북한의 사회주의 유토피아 ‘아르카디아(Arcadia)’가 모두 실패했다고 고발한다. 자유주의 유토피아는 결국 부도덕한 짓을 자유롭게 보장하는 어두운 개인 밀실(사생활)을 낳게 하고(유토피아를 위한 개인들의 연대광장은 없다), 사회주의 유토피아 또한, 결국은 집단의 이념을 위해 개인의 모든 자유의식을 막는 잿빛 광장(숙청)만을 낳게 한다(유토피아를 위해 개인들의 밀실을 없앴다). 그 결과 자유주의 ’코케인’은 무한한 물질적 풍요와 끝없는 쾌락을 즐기려는 ‘가진 자들만’의 밀실 천국을 꿈꾸게 되었고, 사회주의 ‘아르카디아’는 인간의 욕망을 공산당 아래 묶어두고 노동을 통해 분배와 평등을 실현시키려는 ‘그들 집단만’을 위한 광장을 꿈꾸게 되었다. 2. 주제(전개) 이런 유토피아(이상사회)는 실현시킬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각자 시작한다고 한다. ‘유토피아(Utopia)’라는 어원 자체가 그걸 벌써 암시했다. 유토피아는 ‘U’ + ‘topia’이다. ‘U’는 좋다(eu), 없다(ou)를, ‘topia’는 장소를 뜻한다. 좋은 곳이지만 세상엔 없는 곳, 이 땅에 존재해 본 적이 없지만 좋은 곳, 즉 유토피아는 ‘가상의 섬’일 뿐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늘복음(하나님나라)을 알리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이 천국복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갔을 때에 받은 자유’를 마음에서 꼭 붙잡았다(2:4).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하늘나라를 확신했을까? 왜 그렇게 열심히 달음박질을 했을까?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유토피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상의 장소’ 하나를 만들어놓고 개인천국과 집단천국을 꿈꿨다. 사도 바울도 그런 것인가? 3. 전개(위기)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꾸는 꿈은 무엇이며 어디서 이룰까? 답은 ‘하나님나라(천국)’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향해서 가는 사람은 저 하늘에서 하나님나라에 있다. 그래서인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제20장 “기독교 신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그런가 보다.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사람은 지금도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차츰 가까워지는 걸음걸이가 마냥 좋은 사람들이다. 제20장은 구약 백성보다 신약 자녀가 훨씬 더, 뛸 듯이 미칠 듯이 기뻐할 거라 고백한다. 왜냐하면 “제 두 눈이 (직접)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눅2:30)라고 말한 시므온 같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므온 같으려면 시므온처럼, 성령에 이끌려야 한다(눅2:27, 갈3:2). 4. 증거(절정) 성령에 이끌려 마음에서 생수의 강(요7:38, 성령과 말씀)이 넘치면, ‘그리스도를 알아 본다’.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온 거짓(false)들은 이걸 혼란하도록 유혹했다. 그리스도께서 이룬 하늘 길을 유토피아 섬으로 돌리려고 했다(3:3). 이 땅에는 없지만 행복(물질적 유토피아)이 가득한 섬. 구원 받을 수 없지만 의(정신적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는 종교. 성령은 없지만 말씀에 은혜 받을 수 있는(미신적 유토피아) 교회. 5. 마무리(결말) 하늘나라와 유토피아, 이 둘의 구분은 사실상 힘들다. 구별하자면, ‘나(개인)와 가족(집단)’을 위한 꿈(섬)이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꿈(하늘)이냐 이다. 사도 바울은 이 땅 유토피아 유혹에 맞서 평생 선한 싸움을 싸웠고 믿음을 지켰다(딤후4:7) 한다. 이런 믿음은 성령을 따라 사는 동안 육체의 욕망(유토피아)을 채우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기(갈5:16)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이제라도 자기 육체를, 그 육체의 정욕과 욕망(코케인과 아르카디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경주를 시작한다면, 차츰 하늘나라를 두 눈으로 보고 확신하지 않을까 싶다.
303 no image |갈라디아서 강해 <4>| 그만 빨아대고 이젠 뱉어내자_김근배 목사
편집부
1928 2016-09-21
그만 빨아대고 이젠 뱉어내자 갈라디아서 1장 6-10절 < 김근배 목사, 동해참빛교회 > “그리스도의 영광을 풍성하게 받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복음 때문” 1. 들머리(발단) 갈라디아 교회는 거짓 형제들이 슬그머니 집어넣은 의식규례들 때문에 점점 유대화 되어갔었다. 유대화는 참복음에 유대교의 누룩을 넣어 부풀어 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형국이다. 마치 교회에 자본주의(황금만능), 샤머니즘(지성감천), 유교(권선징악), 불교(인과응보)들의 누룩이 이미 예배 설교를, 교인들의 마음을 차지해버린 것처럼 말이다. 복음의 순수성이 위험해져 버렸다. 복음의 순수성이 뭐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려고 우리 죄를 대신해 자신의 몸을 내 주셨다”(1:4)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을 내 몸에 익숙하게 만들어 ‘복음이 주는 자유’를 누리는 것에 대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두렵고 무서워한다. 이 상태를 진정시키려고 우리 몸 안에다 자본주의 주사도 넣고 샤머니즘 주술도 그린다. 그리고 거짓(false)을 말하는 악령들과 손잡고 둘러댄다. 2. 주제(전개) 사도 바울은 슬며시 죄를 집어넣은(롬5:20) 사람들을 ‘거짓(false)’(2:4)이라 부른다. 거짓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빼앗아 간다.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거짓’(false)은 우리 마음(믿음)에 세 가지를 넣어 참(true) 복음을 없애버린다. 첫째, ‘그런 말(fact)이 아니다’이다. 사도(목사)들이 전하는 그리스도 복음은 사실(fact)과 다르다. 진짜 사실은 내가 지금 주는 이것이라고 속삭이듯이 집어넣는다. 둘째, ‘그게 다(reality)가 아니다’이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에 빠트리는 것이 있다. 진짜(reality) 복음의 맛을 경험해보려면 이것을 체험해봐야 한다고 부추긴다. 셋째, ‘지금 받아야 한다(actuality)’이다. 일부 교회에서 십자가 복음을 강조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낮춤, 비움, 받듦, 희생’과 같은 고난의 길을 성화랍시고 걸어가라고 말하는데, 그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지금’ 내 인생과 삶에서 풍성하게 받아 남부럽지 않도록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3. 전개(위기) 이 세 가지 거짓은 ‘우리 정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밖으로 꺼내버린다. 그리곤 거짓들과 섞인 복음에 매달린다.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말한다. “복음의 진리가 (내 마음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해, (나는) 그들에게 잠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2:5). 그러나 ‘거짓’의 유혹은 사도 바울의 설교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안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할례를 행하는 교회들, 음식을 가려먹는 교회들, 절기들을 지키는 교회들이 늘어만 갔다. 오늘날 우리네 한국교회들도 그렇지 않은가! 어떻게 해서든 세례(침례)를 주려는 교회들, 오는 대로 사람들을 받는 교회들, 교회력이라고 불리는 온갖 절기들을 지키는 교회들 ─ 우리는 그처럼 누룩이 부풀어 오를 때로 올라버린 교회에 앉아있다. 4. 증거(절정)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새 포도주(복음)는 새 포대(교회)에 담자.”(눅5:36-38, 마9:16-17) 일상생활에서 새 포도주를 낡은 포대에 담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신다. 포도주도 포대도 망가져 없어져버리길 알기 때문이란다. 즉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도 다 알잖은가? 5. 마무리(결말) 이제라도 자본주의는 세상에게, 샤머니즘(박수무당)은 귀신들에게, 온갖 교회절기들은 로마가톨릭에게 돌려주자. 우린 그저 순수한 복음교리와 거룩한 주일을 나름 지키자. 우리 마음(믿음) 안에 들어온 ‘거짓’들 ─ 그리스도께서 주신 ‘참’ 자유를 빼앗아 감에도, 우린 버리지 못했다. 못 하기(능력부족)도 하지만 안 하기(의지상실)도 한다. 사탕을 입 속에서 빼지 못하는 세 살배기처럼. 오늘 내가 그런 ‘거짓(fact)’을 세 살배기처럼 진짜(reality) 빨아댔다(actuality). “달음질하고 있는 것이나 달음질하는 것이 헛될 까봐”(2:2) “복음의 진리가 마음에 머물도록”(2:5) 자기 몸을 쳤던 사도 바울을 ‘물끄러미’ 본다.
302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 문서<17>| 하나님의 거룩한 삼위일체 이해_배현주 목사
편집부
2090 2016-09-06
하나님의 거룩한 삼위일체 이해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웨신은 간결하지만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장 3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신성의 통일성 안에 하나의 본체, 권능 그리고 영원성의 세 위격으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 이어서 각 위격의 고유성에 대하여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성부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나시거나 나오시지 않는다. 성자는 영원히 성부로부터 나신다. 성령은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 이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간결하게 삼위일체 교리를 담고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가장 분명한 진술을 하고 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의 통일성은 이미 앞의 두 절에서 다루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라는 것과 그것이 다양한 진술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제2장 3절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의 관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성부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나시거나 나오시지 않는다. 성자는 영원히 성부로부터 나신다. 성령은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 이러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을 따라서 볼 때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위격적 관계는 그러한 순서로 표현되며 다른 순서는 불가하다. 그렇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 위격 상호간에 질서의 순서가 있다.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신다. 그러나 이것은 삼위일체 본질의 차이는 아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우연성에 관한 말은 없으며 오직 본질과 관계에 대한 말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변하시는 것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모든 말이 그의 본질에 관한 말이 아닌 것은 하나님의 세 위격의 관계에 대한 말 때문이다. 곧 성자에 대한 성부의 관계나 성부에 대한 성자의 관계가 있다. 이 관계에 대한 말은 우연성에 대한 말이 아니다. 한편은 항상 성부이시고 한 편은 항상 성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아들을 낳으셨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나셨다”는 표현은 삼위일체 상호간에 관계에 관한 표현이다. 오직 아들이 있기에 아버지를 성부라 부르고 아들도 오직 아버지가 있기에 성자라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삼위일체 본질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표현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성호들은 우연성에 대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부로 불리는 분이나 성자로 불리는 분은 그 자신이 영원하며 변하심이 없기 때문이다. 17세기 개혁주의 신학자 헨리쿠스 알팅(Henricus Alting)은 그의 신학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서 진술하였다. “아버지는 삼위일체 신성의 첫 위격이시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발생하신 신성의 두 번째 위격이시다. 아들은 피조된 것으로 진술되지 않는다. 오히려 만물이 그 자신을 통하여서 피조되었다. 성령은 신성의 세 번째 위격이시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하신다. 성령은 피조되었거나 생명이 없으신 분이 아니시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의 영, 혹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 혹은 여호와의 영,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리운다. 신성의 세 위격으로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모두 전 신성이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며 동등하시다.” 이러한 헨리쿠스 알팅의 신학 저서의 진술은 고대 교부 아타나시우스의 신조(Athanisan Creed)로 알려진 그 신조의 교리적 입장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거룩한 아버지이신 한 위격이 계시고, 거룩한 아들이신 다른 한 위격이 계시며 거룩한 영이신 다른 한 위격이 계신다. 그러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성은 모두 하나이시다. 그 영광이 동등하시고 그 엄위하심이 함께 영원하시다.” 이러한 교리적 입장은 삼위일체에 대한 매우 정통적인 견해이다. 요하네스 하이데커는 [기독교 신학 통론]에서 다음과 같이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삼위일체 안에 각 위격 상호간에 질서의 구별이 있다. 아버지는 첫 번째, 아들은 두 번째 그리고 성령은 세 번째에 위치하신다.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만물에 행하시는 내적인 사역의 방식이 있다. 아버지는 아들과 성령을 통하여서 역사하신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통하여서 일하신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일하신다.” 프란시스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도 그의 신학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삼위일체론을 전개하였다. “삼위일체 위격의 상호 관계에 있어서 아버지는 신성의 근원이시다.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첫 위격이신 아버지는 그의 영원한 신적 본질을 통하여서 오직 독생자를 낳으셨다. 삼위일체 관계에 있어서 아들은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이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발생하셨다.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또한 성령과 함께) 하나이시다. 성령은 세 번째 위격이시다. 영원한 신적 본질을 통하여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교통하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성령은 하나이시다. 성령은 위격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에 대하여서 작지 않으시다.” 종교 개혁 시대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이러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진술은 정통 신학의 시금석이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개혁주의 정통 교리는 고대 정통 교부들의 신학을 재정립한 그대로이다. 1647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결정된 신앙고백서 제2장 제3절의 삼위일체 교리는 개혁주의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그대로 받아서 간결하게 진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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