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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70)-식사와 감사(딤전 4:3C-4b)
rpress
5152 2005-04-28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75jo.hwp식사와 감사 딤전 4:3C-4b 조병수 교수|합신 신약신학 학교의 교수식당에는 그림 한 점이 말없이 걸려있다. 그 그림은 비록 복사본 에 지나지 않지만 식사하러 그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영혼을 울리는 교 훈을 준다. 식탁 위에 놓여진 것은 고작 작은 빵 토막 그리고 수프 한 그릇 이지만, 그것을 앞에 두고 꽉 껴잡은 투박한 양손에 머리를 기댄 채 기도하 는 노인의 진심어린 모습은 아무리 자주 바라보아도 영락없이 감동을 일으킨 다. 봄이 기지개를 펴면 산과 들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아스팔트의 터진 틈에서 도 향긋한 봄나물이 돋는다. 봄나물은 하나님께서 식물을 창조하신 이치가 고스란히 표현되는 태초의 향기를 발하고, 우리의 후각은 놓칠세라 그 신비 한 냄새에 빨려든다. 사방에 풀이 생명력을 얻는 계절이 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여린 풀을 먹거리로 주셨다는 사실에 잔잔한 감사가 흐른다. 그래서 그런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열매보다도 이렇게 흔하디 흔한 풀들이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작고 시시한 풀로부터 시작해서 희귀한 먹거리까지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감사함으로 받도록 하기 위함이 다(3c). 하나님께서는 크고 작은 먹거리를 창조하시면서 사람들이 감사함으 로 받기를 원하셨다. 사람은 배부르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식사는 사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창조경륜에서는 식사 가 포만과 사치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창조경륜에서 식사가 진정으로 목적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식사는 감사이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총을 느끼고 누리고 있 다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감사하는 사람은 꾸준히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감사하는 사람은 식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선다. 그는 먹거리에 대하여 감사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을 가장 생생하게 체험한 다. 믿는 사람들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굉장한 산해진 미뿐 아니라 아주 보잘것없는 음식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진정한 신자는 사 소한 양식조차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믿기 때문 이며, 하루 먹을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주님의 뜻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빵 조각 몇 개와 작은 물고기 두어 마리를 손에 들고도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던 주님 의 모습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이 모든 음식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은 진 실이다(4b). 음식에 대하여 말하자면 사도 바울은 감사 그리고 감사밖에는 말할 것이 없다. 감사는 모든 먹거리를 귀하게 만들고, 감사하지 않는 것은 모든 먹거리를 천하게 만든다. 천한 음식물도 감사함으로 받으면 귀한 것이 되고, 귀한 음식물도 감사함으로 받지 않으면 천한 것이 된다. 감사하는 사 람에게는 값싼 음식도 약이 되고, 감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비싼 음식도 독 이 된다. 그래서 식사보다 중요한 것은 감사이다. 감사가 들어 있는 식사는 생명이며, 감사가 빠진 식사는 사망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보잘것없는 음식도 감사의 대상이 된다. 감사는 별볼일없는 음식도 맛있게 만든다. 맛은 음식의 값에 달린 것 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달린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음식의 가치는 차림 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 즐겁고 편안한 마음으로 먹는 음식이 가장 맛이 있다. 즐겁고 편안한 마음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상에 맛이 있지 않고 입에 맛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시시한 음 식물이라고 감사한다. 그리고 감사는 음식을 더욱 맛있게 만든다. 감사가 반 찬이다. 모름지기 음식의 맛과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을 먹느냐에 있지 않고 어 떻게 먹느냐에 있다. 그리고 어떻게 먹느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 께 먹느냐 하는 것이다. 원수와 자리를 같이 하면 진수성찬 앞에서도 맛이 떨어지고, 친구와 자리를 같이 하면 형편없는 음식에도 맛이 붙는다. 음식 에 감사하는 것은 음식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식사자리를 같이 하는 것이다. 감사하는 사람이 음식을 탓하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과 함께 식탁에 앉기 때 문이다.
120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69)-원점종교 (딤전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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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7 2005-03-31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63jo.hwp조병수의 목회편지(69)딤전 4:4-4 원점종교 특이하게도 기독교는 문제의 해결에서 자주 창세기로 돌아간다. 구약성경의 율법과 선지자들과 시가서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 도 문제를 해결할 때 창조사건으로 귀환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율법 과 선지자들과 시가서가 하나님의 창조와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이 하나님의 창조와 만난다. 이런 의미에서 계시록도 창세기와 만난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작게는 개인, 가정, 이웃으로부터 크게는 국가와 세계의 문제를 다루면서 습관처럼 창세기로 환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기 독교가 인간에게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가 창조사건에 들어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창조사건은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실 마리가 된다. 이렇게 기독교는 원점을 중요시하므로, 기독교를 가리켜 원점 종교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창조 중시하는 기독교 사도 바울은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폐하는 이단에 직 면하여 하나님의 창조사 건으로 돌아간다: “음식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라”(3b), “하나님이 지으 신 모든 것이 선하다”(4a). 사도 바울이 한 단락 안에서 연거푸 두 번 창조 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게다가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창조에 관한 이중적인 언급이 이단을 배격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창조신학이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음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창조신학이 미혹하는 영을 격퇴하는 결정타의 역할을 하기 때 문에 매우 중요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창조신학은 원점이다. 창조신학은 모든 바른 신학이 거기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원점이며, 모든 거짓 미혹 이 거기에서부터 배격되기 때문에 원점이다. 사도 바울의 기독교는 창조신학 에 기반을 두고 있는 원점종교이다. 창조 사상이 신학의 핵심 사도 바울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말로 창조와 창조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음식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라”(3b)는 말 로 하나님의 창조가 절대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창조에 는 실수가 없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 하늘과 땅 같은 엄청난 것을 만드실 때 아무런 실수가 없으셨던 것처럼, 시시하게 보이는 음식물을 만드는 일까 지도 실수가 없으셨다. 창조의 완전성은 하나님의 절대성에 기초한다. 하나 님께서 절대적이기 때문에 창조도 완전하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4a)고 말함으로 써 하나님의 창조물에는 본래부터 선한 성질이 있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 것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셨던 것 을 반영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모든 것이 선 하게 창조되었다. 선한 하나님은 선한 만물을 만드셨다. 하나님의 선성에서 창조물의 선성이 기인한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자면 선한 창조물은 하나님 의 선한 성품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선하신 하나님 보여주는 창조 음식을 폐하라고 주장하는 이단들은 창조의 신학을 알지 못한 것이다. 창조 의 신학에서 보면 음식은 악한 것이 아니다. 단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서 선하게 창조하신 음식을 자기의 배만 위하여 섭취하기 때문에 악하게 여 겨지는 것이다. 음식은 그 것을 먹는 타락한 사람 때문에 악하게 된다. 그래 서 정말로 문제삼아야 할 것은 음식이 아니라 사람이다. 음식이 악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창조신학을 가지고 있는 원점종교 의 입장이다. 신자가 때때로 금식을 하는 것은 음식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음식을 섭취 하는 사람이 악하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은 음식을 섭취하는 데 많은 시간 과 힘을 소비한다. 이것은 하나님만을 찾는 일에 엄청난 방해가 된다. 그래 서 신자는 때때로 금식하면서 음식을 거절함으로써 음식에 대한 타락한 욕심 을 끊고 하나님만을 바라본다. 기독교가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창조사건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창세기가 신화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중요하고, 창조 와 역사와 종말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무엇보 다도 이것이 중요한 까닭은 기독교가 원점종교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19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68)-빛보다 더 밝은 빛 (딤전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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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5 2005-03-03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71jo.hwp(딤전 4:3) 빛보다 더 밝은 빛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교회는 ‘하나님의 표준’에 서 있어야 열심은 부러움보다 두려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열심이 없는 것은 작 지 않은 문제이다. 열심의 결핍은 신자 뿐 아니라 교회에 냉랭한 기운이 감 돌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때 신자는 감동을 맛보지 못하며 교회는 능력을 발 휘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주 신자와 교회는 열심을 가지도록 권면을 받는 다. 하지만 열심이란 것이 언제나 당연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열심 때 문에 심각한 지적을 받는 사례가 비근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지나친 열심도 문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유별난 열심을 내세웠던 엘리야의 모습은 그렇게 칭 찬할 만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성전에 올라온 바리새인이 기도 중에 자신 의 열심을 죄다 늘어놓은 것을 주님께서 긍정적인 의미로 설명했다고 생각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 은 그들에게 열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열심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열심 이 지나친 것은 열심이 모자란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정말로 경계해야 할 것은 열심의 결핍 뿐 만 아니라 열심의 과도이 다. 지나친 열심의 뿌리에는 종종 교만한 마음과 과시의 의도가 도사리고 있 기 때문이다. 지나친 열심은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고 사람에게서 나온다 (롬 10:2-3). 그래서 경건보다 더 경건한 것은 불경이며, 빛보다 더 밝은 빛 은 어둠이고, 하나님보다 더 하나님인 체 하는 것은 사탄이다(살후 2:4). 더 경건한 것이나 더 밝은 빛, 그리고 더 하나님인 체 하는 것에 대하여 부러움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음 그 자체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집요하 게 따지는 외식함과 거짓말과 화인 맞은 양심이란 빛보다 더 밝은 빛을 내려 는 인본주의적인 시도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빛에 가까운 어둠도 문 제이지만 빛보다 더 밝은 빛도 문제라는 것이다. 진짜 같은 가짜도 위험한 것이지만 진짜보다 더 진짜도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 진리 곁에 있는 거짓 을 경계해야 하는 것만큼 진리보다 더 진리도 경계해야 한다. 지나친 열심은 인간적인 생각 n 디모데 앞에 등장한 어떤 사람들은 혼인을 금지하고 음식을 폐지했다. 이 것은 얼마나 경건하고 신앙적으로 보이는가. 남다른 경건과 엄청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고는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폐하는 이런 강렬한 행위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놀라운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사도 바울이 이 사람들의 독신추구와 금식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 않다 는 데 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이 사람들의 독신과 금식이 오류라는 것을 반영하듯 이 디모데전서 여기저기에서 혼인하는 것과 섭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임 을 천명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한 아내의 남편인 것(3:2), 한 남편의 아 내인 것(5:9)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말하며, 심지어 젊은 여자는 시집가 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라고 권면했다(5:14). 또한 사도 바울은 먹을 것 을 가지고 있을 때 자족할 줄 아는 자세를 요구하였고(6:8), 이 단락에서는 아주 간명하게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믿는 자들과 진리 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4:3).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스러움이 돋보여 사실 경 우에 따라서 사도 바울에게는 독신이나 금식이 경건과 신앙의 분량 이나 정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은사나 기능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사이기에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 람은 저러하다(고전 7:7). 고기와 같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형제를 실족 하지 않게 하는 기능에 적합한 것이다(롬 14:21; 고전 8:13). 그렇기 때문에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폐하는 것이 열심있는 경건과 신앙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인본주의이 다. 만일 독신과 금식이 그런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경건이 아 니라 불경건과 신앙이 아니라 비신앙이다. 근본적으로 볼 때 교회가 싸워야 할 대상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처럼 보인 다. 압축하면 교회의 싸움은 하나님의 표준에 미달하는 것과 과월하는 것에 대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단지 말씀이 가는 곳에 가고 말씀이 서는 곳에 설 때 승리한다.
118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67)-화인 맞은 양심(딤전 4: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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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30 2005-01-26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69jo.hwp(딤전 4:2b) 화인 맞은 양심 양심에서 각질 벗겨 내어야 만일에 남의 발등을 밟고는 왜 내 발 밑에다 발을 넣었느냐고 야단을 친다 면, 적신호 앞에 서있는 차를 뒤에서 들이박고는 왜 내 차의 진로를 방해하 느냐고 대든다면, 아랫집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데 윗집 사람이 우리 집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억지를 부린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양심이 잘못된 것 이다. 교회가 진실과 순결을 잃어버린 채 세상의 거짓과 죄악을 질책한다면, 목사 가 제대로 설교를 준비하지 않으면서 성도들이 설교에 은혜를 받지 않는다 고 화를 낸다면,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지 않 는다고 불평한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양심이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제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행위들이다. 사회의 악하고 패역한 경향이든지 광기에 사로잡힌 더러운 영이든지, 양심 이 무엇인가에 지배를 받지 않고는 이런 현상은 일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양 심이 부패한 것은 이미 무엇인가 부패한 것에 지배 를 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 하는 것이 된다. 지배받고 있는 부패된 양심 사도 바울은 말세에 벌어질 한 두려운 현상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다. 말세에 는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화인은 불에 시뻘겋 게 달군 쇠 연장으로 살을 지지는 것이다. 사도 바울 당시에 화인을 찍는 것 은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칼에 베이거나 창에 찔려 생긴 심한 상처부위를 불로 지 지는 것으로 그렇게 치료한 부위는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또 한 가지 경우 는 노예나 전쟁포로 또는 가축에 화인을 찍어 누구의 소유가 되었음을 나타 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화인을 맞는다는 것은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의미 와 누구에게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화인 을 양심과 관련하여 말함으로써 화인 맞은 양심이 얼마나 무감각해지고 남 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앞에서 말했듯이 어떤 사람들이 믿음을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 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 것은 실제 로 양심이 화인을 맞았기 때문이다. 또한 양심 이 화인을 맞은 사람들은 거짓 과 외식에 사로잡혀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아 어떤 사람들이 분명한 신학적인 근거도 없이 혼인을 금지하고 음식을 폐지하 라고 헛된 말을 퍼뜨리면서 문제감각이 없는 것도 역시 양심이 화인을 맞았 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은 사상이 마비되어 진리에 무디 어지고, 행실이 둔화되어 가식의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며, 헛된 말을 주절거 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언어의 무감각 상태에 빠진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 면 화인 맞은 양심은 총체적인 문제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양심이 화인 맞지 않았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성경에 서 떠난 잘못된 신학과 사상에 물들어 진리종교를 단순히 윤리종교로, 구원 의 종교를 단순히 웰빙의 종교로 변질시키면서 버젓이 목사노릇을 하고 있 는 사람들이나 그것을 듣고는 은혜를 받았노라고 떠들어대는 신자들은 양심 에 화인 맞은 것이 아닌가! 중세의 교회보다도 훨씬 더 심각할 정도로 교회당을 치장하는 데 혼신을 쏟 거나 기름때가 줄줄 흐르도록 신체와 외모를 가꾸는 데 온통 마음을 빼앗기 는 것,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를 향한 종교개혁의 외침을 고스란히 말아먹고 구원에 도 달하기 위해서는 헌신적인 행위가 필요하다고 부르짖는 것, 이것은 양심에 화인 맞은 것이 아닌가! 가정이나 건강 같은 것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어디에서 배웠는지 기 독교가 그저 가정의 행복과 건강의 보존 따위를 장려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모든 관심, 모든 메시지, 모든 행사를 총집중하는 것은 양 심에 화인 맞은 것이 아닌가! 총체적 문제를 안고 있어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살아있어야 한다. 우리는 화인 맞 은 양심으로부터 사회적인 의미에서는 물론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감각을 둔 화시키는 각질을 벗겨내야 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노력이었다.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 라” (행 24:16).
117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66)-거짓말과 외식(딤전 4: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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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8 2004-12-29
http://www.rpress.or.kr/files/sinhak/jo367.hwp(딤전 4:2a) 거짓말과 외식 연륜은 순수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 말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두 고두고 골똘하게 되새겨야 할 진실이다. 이것은 어느 특정한 영역에만 해당하 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바르고 숫하던 청년이 어딘가 입문하고 나서 얼마가 지나기도 전에 지저분해 지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본다. 심지어 신앙의 길에서조차도 시간이 지날수록 순수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처럼 엄청난 착각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믿음에 갓 들어선 새내기 시절에는 순수하 기 비길 데 없던 사람이 신앙에 경력도 쌓고 교회의 일을 많이 할수록 비누 로 씻기 어려운 때가 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순수함은 연륜과 비례하 지 않는다. 인간은 기필코 그런 존재이며, 신자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사람이 순수함을 잃는 길목에는 거짓말이라는 것이 있다. 비록 남을 괴롭히거나 망가뜨리는 고의적인 거짓말은 아닐지라도 가장 평범한 의미에서 거짓말마저 도 이미 순수함에서 이탈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우리는 거짓말에 가까운 변명에 익숙해있다. 이것은 정당한 변명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대부분 변명이란 것은 거짓말의 다른 언어이기 쉽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핑계라는 말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어느 모임에 늦었든지 약속을 지키지 못했든지 그 이유를 설명할 때면 거짓말 이 필연적으로 끼여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일을 사소한 것으 로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업무에 오래도록 종사하다보면 눈치와 요령을 터득 하게 되고 웬만한 일은 둘러치기로 때워나간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특히 경고하는 것은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행위이 다. 그냥 거짓말이 아니라 외식과 연관된 거짓말이다. 사실상 외식의 뿌리는 거짓이며 거짓의 표면은 외식이다. 거짓은 언제나 외식으로 표현되며, 외식 은 언제나 거짓에 근거한다. 이런 의미에서 거짓과 외식은 하나인 셈이다. 예를 들어 의사가 아닌 사람이 의사인체 하는 것은 거짓이자 외식이다. 그 는 거짓말하고 있기 때문에 외식하는 것이며, 외식하고 있기 때문에 거짓말하 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를 괴롭히는 문제이 다. 교회는 바로 이 문제에서 지속적으로 순수함을 잃어왔다. 우리는 교회의 연륜을 자랑하고 싶어하지만, 불행하게도 교회의 연륜은 교회의 순수함을 보 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거짓말과 외식이 정말로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것이 사람의 심성이 나 인격이 파손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사도 바울이 앞에서 바로 언급했듯이 거짓말과 외식의 배후에는 미혹하는 영과 귀 신의 가르침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이 현상은 믿음을 배신하는 사람들에게 서 짙게 드러난다. 그들은 겉으로는 기독교의 방식을 취하지만 속으로는 거짓의 영을 따른다. 입술로는 하나님과 할렐루야를 수없이 뇌까리고 눈가에는 부드럽다 못해 느끼 하기 한이 없는 미소를 흘리지만 속에서는 더러운 미혹의 영에 의하여 불의 를 부채질 받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 도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거짓과 외식에 빠져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양심 에 화인을 맞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눈으로는 미혹의 영에 의하여 부추김을 받는 거짓말과 외식을 분별해 내기가 어렵다. 신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순수함을 상실 하는 필연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거짓말 과 외식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출할 능력이 없기에 이런 거짓말과 외식을 스스 로 분별해낼 능력도 없다. 사도 바울도 틀림없이 이것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밝히 말씀하 시는 성령께 귀를 기울였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4:1). 오직 거룩하 신 영만이 미혹하는 영을 정확하게 분별하시며, 미혹하는 영을 확실하게 분별 하는 법을 가르쳐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수밖에 없 다. 성령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사도 바울의 시대에 주어진 거짓과 외식에 대한 경고는 거짓과 외식을 일삼고 밥먹듯 하는 우리 시대에는 더욱 매서운 경고이다.
116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65)-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딤전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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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7 2004-12-02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65-jo.hwp(딤전 4:1)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언젠가 잘 아는 여집사님으로부터 자기의 남동생을 꼭 한번 만나서 상담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동생은 어느 잘못된 종교단체에 발을 들여놓았는 데 결국은 지부장까지 되어 자기로서는 더 이상 그를 빼낼 수 없는 실정에 이 르렀다는 것이다. 여집사님의 간곡한 부탁을 따라 약속한 날에 나는 그 남동 생을 만났다.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나를 만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는 노트 크기의 종이 몇 장에 자신이 믿고 있는 내용을 빼곡이 정리해서 가 지고 왔다. 나에게 설복을 당하기는커녕 도리어 나를 설복시키고 말겠다는 심 사가 한 눈에 보였다. 어쨌든 이야기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나의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자기도 적지 않은 세월을 기독교에 서 보낸 적이 있었노라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는 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덕 망이 높은 사람이 어처구 니없이 허무맹랑한 사이비종교에 쉽게 빠져드는 것이 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아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가당치 않은 이론을 제 시하는 거짓된 종교단체들이 허다하게 많이 있다. 대체로 그런 것들은 윤리적 으로 볼 때 사람들의 지탄을 받기에 충분한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론도 부실하고 도덕도 부재하는 이런 헛된 종교단체 에 학문이 빼어난 사람들과 사회를 선도하는 사람들이 버젓이 소속되어 있다 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런 종교단체에 속해있다고 공공연하 게 떠들어대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다 찾아내기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기 정말로 어려운 것은 이것이 아니다. 내가 가장 당혹 스럽게 여기는 것은 기독교인이 한순간에 믿음에서 떠나 이단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이런 변절은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나 손을 쓸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 다. 그리고 한번 이단에 빠져들면 그것이 가르치는 헛된 이론과 거짓 생활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잘도 따른다. 이렇게 되면 이단의 가르침을 비판해 줄수 록 역반응이 일어나 더욱 이단에 밀착하고 만다. 소위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부서 저 부서에서 활동도 해 보고 지도자의 직분을 받았던 신자가운데 이런 이단에 빠지는 사례가 많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신앙생활의 연륜이 나 교회활동의 경력, 직분의 종류 이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것 들은 사람이 믿음에서 떠나는 것을 방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이비종교에 빠지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 다도 이런 종교단체가 내미는 유혹의 손이 매우 끈끈하다는 것이다. 이단들에 게서 전형적으로 발휘되는 달콤한 언변과 화사한 미소, 그리고 강력한 자기선 전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약점을 파내어 거미줄처 럼 조이며 들어오는 압박은 가공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외부의 유혹만으로는 사람이 이단에 빠지기가 쉽지 않다. 실상 은 사람의 내부에 사이비종교의 유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어떤 요소들이 있 다. 그 내부적 동기는 물질적인 것일 수 있고, 심리적인 것이나 육체적(성적) 인 것일 수 있다. 어떤 것이든지 마찬가지이다. 사람에게는 파우스트처 럼 외 적인 유혹에 자신을 개방하려는 내적인 충동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신자가 믿음에서 떠나 이단에 빠지는 데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사 도 바울은 신앙에서 탈선하는 일의 배후에는 영적인 세력이 있다는 것을 감지 하고는 그것을 가리켜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라고 불렀다. 신자 가 갑자기 이단에 빠지는 것을 어떻게 단순히 사회적인 현상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신자를 삼키기 위하여 악한 영들이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다 는 표식이 아닌가? 사도 바울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자가 경건의 비밀과 신앙고백을 확실하 게 소유하고 있다면(3:15-16), 미혹하는 영들이 아무리 세게 공격한다고 해 도 넉넉히 이길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의 문제 는 확실한 신앙고백이 없다는 것이다.
115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64)-경건의 비밀(딤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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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72 2004-11-05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63jo.hwp(딤전 3:16) 경건의 비밀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국가의 수반이 권위를 잃어버렸다고 해도 아 버지가 권위를 상실한 것처럼 위험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권위는 모든 권 위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친구로서의 아버지 모습이 크게 부각되어 자녀들이 별 무리 없이 아버지와 좋은 사이를 이룬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녀에게 친근하게 적응하려는 긍정적인 노력의 반대쪽에 서는 자녀가 아버지에게 아무런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그래서 결국은 아버지 의 권위가 실추되는 흉측한 현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버지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희롱의 대상 일 뿐이다.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성도들의 태도도 이런 현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다. 하나님을 복의 근원으로 믿고 있는 동안 하나님이 벌을 내릴 수도 있는 분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혀지고 만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께 복을 따내 기 위해서 온갖 투정과 때로는 사탕발린 말을 늘어놓다가 경건한 삶이 부족하 여 하나님으로부터 작은 책망이라도 받으면 금새 신앙의 길에서 이탈해버린 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진정한 경건이란 성립될 수가 없다. 했던 말 을 또 하는 것 같지만,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 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친근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친하심 은 언제나 두려움을 전제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경건은 두려운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경외심의 구체적인 표 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경건의 비밀"이라고 말했을 때 아마도 이 런 생각을 품고 있지 않았을까. 그가 바로 앞 절에서 교회에 관하여 설명하면 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볼 때 그 가능성은 매우 높다. 실 제로 사도 바울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을 단 한번 도 잃어버린 적이 없다. 바울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부터 경건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건이 언제나 비밀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입에서 "경건의 비밀이 크다"는 말이 흘러나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사도 바울은 경건 의 비밀을 알고 있었으므로 항상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경건의 비밀이 신앙고백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 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경건이 천국의 비밀처럼 진하게 농축되고 고도 로 심화되는 것은 깊고 진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 은 본문에서 구조적으로 볼 때 여섯 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진 정말로 정교한 신앙고백을 진술하고 있다. 육체로 나타나심, 영으로 의롭다 받으심, 천사들에게 보이심, 민족들 가운 데 전파되심, 세상에서 믿어짐, 영광으로 올려지심. 이 항목들 가운데 어떤 것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분명한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별 말을 다 동원해도 선명하게 깨달아지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런 항목은 하나님 의 세계에 대한 사도 바울의 이해가 얼마나 오묘한 것인지 알려준다. 어쨌든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에 의하면 경건의 비밀과 신앙 고백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인과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정 교하고 선명한 신앙고백은 깊고 진한 경건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후에 사 도 바울이 경건은 모양이 아니라 능력이라고 말할 때 (딤후 3:5) 신앙고백에 바 탕을 둔 경건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신앙고백이 있고야 비로소 경 건의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정확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신앙 고백을 따라 활력 있게 살지 않으면서 경건과 경건의 비밀을 운운하는 것은 얼마나 허탄한 일인가. 참으로 두려운 것은 경건과 경건의 비밀이 상실된 것이며, 더욱더 두려운 것은 신앙고백이 부재하고 신앙고백을 따르는 삶이 실천되지 않는 것이다. 오 늘날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을 가지고 회복하기 위해 서 몸부림쳐야 할 것은 경건과 경건의 비밀이며, 신앙고백과 신앙고백을 따르 는 삶이다. 지금 우리가 입을 열어 경건의 비밀이 크다고 말할 수 없다면 우 리는 이 길에서 모든 것을 잃은 것이며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114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63)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C)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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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8 2004-10-07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61jo.hwp(딤전 3:15c) 진리의 기둥과 터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교회들이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건축에 문외한이라도 예나 지금이나 집을 짓는 데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웬 만하면 다 안다. 바늘허리에 실 매어 쓸 수 없듯이 아무리 급해도 대지 없이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법이다. 예를 들어 공중에다 정원을 만들었다는 것은 불 가사의니 뭐니 하는 신화에나 나오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집이 어디에 자리잡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아는 우 리로서는 집터의 중요성을 조금치도 외면할 수가 없다. 그 뿐 아니다. 공법 이 놀랍게 발달한 오늘날에도 우리는 건물에 그것을 버티기에 힘이 넉넉한 기 둥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미 여러 차례 역사에서 증명되었 듯이 기둥이 부실한 빌딩은 심각한 재난을 불러일으켜 재산에만 아니라 인명 에도 결정적인 치명타를 가하기 때문이다. 터잡기가 바로 되어야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 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내친 김에 이 집은 진리의 기둥이며 터라고 규정하였다. 개념상 기둥은 수직적인 성격 을 가지며 터는 수평적인 성격을 가진다. 아무리 높은 빌딩이라도 기둥은 반 드시 수직이어야 하며, 아무리 넓은 건물이라도 터는 반드시 수평이어야 한 다. 참으로 건축의 철학은 수평과 수직의 조화에 의하여 결정된다. 건축은 가로와 세로의 미학이다. 건축은 하늘로 솟는 것과 땅으로 펴는 것 을 이해하는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수평과 수직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무시 하는 사람은 집을 지을 자격이 없다. 그런 사람은 가로와 세로가 무엇을 의미 하는지 뼛속 깊이 새겨 넣기 전에는 집을 지어서는 안 된다. 아무래도 사도 바울은 이 말로써 교회에서 수평이든 수직이든 어느 하나를 무시하면 안 된다 는 것은 넌지시 알려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수평, 수직 조화 이뤄야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진리는 교회의 기 둥이며 터라"고 말하지 않고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며 터라"고 말하고 있다 는 점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교회는 진리로 말미암아 그리고 진리 위에 선다 는 의 미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진리가 교회를 위한 버팀목과 설자리라 는 의미이다. 이때 진리가 없으면 교회는 터를 빼앗기고 기둥을 잃은 집처럼 무너진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함으로써 교회의 사명 이 무엇인지를 강조한다. 교회는 진리의 버팀목이며 설자리이다. 바꾸어 말하 자면 진리는 교회를 의지해야 하며 교회에 근거해야 한다. 교회는 진리를 유 지하고 진리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몸을 기대지 않고 교회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진리는 위험하다. 그래서 교회가 없으면 진리는 기반도 상실하 고 지주도 상실한 것이 되고 만다. 교회가 진리의 버팀목 되어야 사도 바울은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함으로써 진리를 떠난 교회가 위험한 만큼 교회를 떠난 진리도 위험하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다시 한번 힘주어 강조하거니와 진리를 잃은 교회가 위험한 것처럼 교회를 잃은 진리도 위험하다. 진리는 오직 교회로 말미암아 그리고 교회 위에 존재해야 하기 때 문이다. 교회 없이 존재하려는 진리는 기둥이 없기에 무 골신체와 같고, 교회 밖에 존재하려는 진리는 터가 없기에 공중누각과 같다. 교회와 관계를 끊은 진리 는 터와 기둥이 없는 집처럼 불안하고 위험하다. 진리는 오직 교회에 의존하 고 근거할 때만 안정하고 안전하다. 교회만이 진리를 진리 되게 만들기 때문 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표명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의 권위이다. 하나님 의 집인 교회의 권위는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를 진리 되게 하는 것이다. 진 리의 기둥이며 터이기에 교회는 찬란하게 빛난다. 교회와 진리는 불가분리의 관계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는 진리가 의지할만한 기둥이 되지 못하며 진리가 근거할만한 토대가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하다. 교회 가 진리를 유지하는 데 관심이 없고 진리를 보호하는 데 열심이 없기 때문이 다. 교회는 진리에게 지주도 기반도 제공하지 않는다. 교회는 부실한 기둥이 며 불안한 터전이라서 진리는 교회에 몸을 기댈 수도 없고 뿌리를 내릴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진리는 기둥도 터도 잃고 저렇게 애처롭게 방황하 고 있다.
113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62)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딤전 3:15b)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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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0 2004-09-10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59jo.hwp(딤전 3:15b)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모든 것이 신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해와 달 같은 것들에게서 초자연적 실재를 느끼는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으나, 일시를 사는 것으로 그만인 생물이 신격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금 이나 은 그리고 나무나 돌 같은 것들이 인위적인 기술로 가공되어 신으로 경 배를 받는 것은 너무나 우스운 일이다. 그래서 한시적인 생명을 가진 것들이나 생명이 없는 것들을 섬기는 행위에 대하여 예로부터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격렬하게 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우상 을 예배하는 것처럼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분노하게 만든 것이 없었다. 그들 이 여러 곳에서 우상의 허무함을 낱낱이 지적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지탄의 대상이었던 우상 숭배 우상은 정말로 교묘한 것이다. 해나 달이든지, 사람이나 동물이든지, 금은 과 목석을 신으로 삼는 사람들이 사실상 그것들의 실체를 모르는 바가 아니 다. 사람들은 실제로 하늘에서 운행하는 일월성진과 땅에서 움직이는 생물들 그리고 집안에 모셔둔 귀금속과 나뭇조각을 이성적으로는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자신을 세뇌하여 애써 그렇게 믿으려고 노력한다. 솔직히 말해서 우상은 인간의 욕심이 형상화된 것이다. 우상은 인간 욕심 의 거울이다. 이미 존재하는 형상을 그대로 취하든지 아니면 기술적으로 새로 운 형상을 만들어내든지 우상숭배에서는 인간의 욕심이 투영된다. 왜냐하면 우상숭배는 욕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상숭배에서는 타인은 없고 자신만 있다. 우상숭배가 어차피 죽은 것을 대상으로 삼거나 혹 살아있다 하더라도 한시 적인 것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는 자들도 생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생명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만 타인의 생명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살아있다는 것은 가치가 있지 만 살려낸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기적인 우상숭배자들 예를 들어 전쟁은 인간의 욕심이 극대화된 것인데 어떤 방식으로든지 전쟁 의 배후에 우상숭배가 자리잡고 있는 것은 이 때 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역사 로부터 부인할 수 없이 배운다. 그러나 생명은 살아있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 고 살려낸다는 것으로 이어질 때 진정한 가치를 가진다. 하나님을 묘사하는 말 가운데 가장 멋진 것은 "살아 계신"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한 단어에 지나지 않지만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의 영원성 뿐 아니라 창 조와 섭리와 구원의 능력까지 들어있다. 그래서 이 말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집약하고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살아 계신"이라는 수식어는 하나님이 어떤 종류든지 우상에게 서 극한적으로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히 거리상으로 먼 것이 아 니다. 하나님이 우상에게서 극한적으로 먼 것은 특히 생명의 문제에서 그렇 다. 살아있다는 자동사적인 성격에서도 하나님은 우상에게서 멀지만, 살려낸 다는 타동사적인 성격에서는 하나님이 우상에게서 훨씬 더 멀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살아있고 살려낸다. 하나님은 죽지 않고 영존하며, 죽 은 자를 영생으로 불러낸다. 생명과 관련하여 하나님에게서 살아있다는 자동 사와 살려낸다는 타동사는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살아있기에 살 려내고, 살려내기에 살아있다. 생명의 근원자이신 하나님 사람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생명을 얻는다(행 17:28).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욕심이라도 작용할 수가 없다. 하나님에 의하 여 생명과 활동과 존재를 결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고집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욕심에 의하여 인생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 혜에 의하여 인생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욕심을 버린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만일에 누군가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한 다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더 이상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죽은 우상처럼 되고 만 것이다. 하나님으로 인간의 욕심이 형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에 주어진 과제는 인간의 욕심을 제거하고 살아있 는 것과 살려내는 것을 얼마나 실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112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61)-하나님의 집 (딤전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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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9 2004-08-09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57jo.hwp (딤전 3:15) 하나님의 집 조병수 교수/ 합신신약신학 "교회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어" 집은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도 집은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을 가 리킨다. 거주공간은 사람이 굳이 힘을 들여 만들지 않고 천연적으로 형성된 것으로부터 시작해 흙과 나무를 사용해서 만든 친환경적인 건물과 더불어 최 신식 공법에 기반을 두고 세워진 매머드 건물에 이른다. 그러나 집은 이런 물 질적인 성격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집은 인간의 관계를 의미한다. 넓게는 한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사회적인 관계를 말할 수 있겠으나, 보통 집이라고 부를 때는 특히 부 모와 형제로 이루어진 혈연관계를 염두에 둔다. 그래서 만일에 참 좋은 공간 이 마련되었다 손치더라도 그곳에 혈연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이나 최소한 사회 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지 않는다면 집이라는 말을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 비록 공간이 협소하고 부실하지만 거기에 인격 적으로 통하는 사람들이 함께 산다면 그것은 달콤한 기쁨이 깃들은 집인 것이다. 집 안에는 사람이 살고 있어야 사도 바울이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을 때 그 의미의 함유량은 엄청 나다. 하나님의 집이 단순히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점에서 이미 초대기독교는 성전을 하나님의 집으로 신앙하 던 유대교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유대교가 초대기독교를 그토록 심하게 핍박한 배경에는 성전을 하나님의 집으로 믿는 유대교의 신앙이 공격받았다 는 사실이 있다. 그러나 초대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심각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집 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했다. 하나님의 집은 더 이상 성전과 같은 건물 이 아니라 이 땅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아래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몸을 이루는 관계라는 것이다. 이 관 계는 인격적인 것이며, 신앙고백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이다. 이 관계는 한 마디로 말해서 신적 가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이것은 교회를 가정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다. 마치 가정이 이익에 바탕을 두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바탕을 두 고 존재하듯이, 교회는 이익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있는 것이 다. 교회는 단체가 아니라 가정이다. 마치 가족이 사회적 관계로 형성되는 것 이 아니고 혈연적 관계로 형성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성 때문이 아니라 신앙 때문에 결합된다. 교회는 신앙으로 결합된 가족 그리스도인은 회원이 아니라 가족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간에 교우라고 부르기보다는 형제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 것은 이 때문이며, 동역자라고 부 르기보다 식구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수 평적으로 서로간에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세상의 어느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영적인 공동체를 이룬다. 그런데 여기에 결코 놓쳐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하 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 다. 교회는 하나님이 소유하시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그래서 아무리 그리스 도인들 사이에 수평적인 관계가 잘 되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신앙고백적 으로 영적인 관계를 확립하 고 있지 않다면 교회가 존재한다고 말하기가 어렵 다. 교회의 근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근원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 게 두는 기독교적 집단은 협회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는 될 수 없다. 교회를 지탱하는 것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다. 하나님의 은 총을 버리고 사람의 노력을 따르는 것은 경영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목회 는 될 수 없다. 교회는 사람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영광 대신에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는 사업가 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목회자는 될 수 없다. 교회의 근원은 하나님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교회는 집이기에 자유롭고 편안하고 행복하다. 그 것은 가족과 식구와 형제와 함께 사는 가정에서 누리는 자유와 편안과 행복보 다도 훨씬 더 큰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기 에 신성하고 은혜스럽고 영광스럽다. 그것은 어느 종교에서 느끼는 신성과 은 혜와 영광보다도 훨씬 큰 것이다.
111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60)-열정과 냉정 (딤전 3:14-1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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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2 2004-07-08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55jo.hwp열정과 냉정 (딤전 3:14-15)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처음부터 생각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글에 묘미가 없다. 내용이 어떻 게 전개될 것인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글을 읽을 때 재미가 더해지는 법이다. 물론 글의 성격에 따라서 아예 머리부분에 말하려는 주제를 선명하게 걸어놓 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는 뭔가 잡힐 듯 말 듯한 내용이 흘러야 한다. 그때 글을 읽는 사람이 긴장감을 늦추 지 않고 꾸준히 따라온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에서 꼭 중간쯤에 도달하면서 느닷없이 편지를 쓰는 목 적을 언급하고 있다. 언뜻 보면 이것은 정말 글 쓸 줄 모르는 사람의 작문이 겠거니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잠시라도 이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놀라운 기법이다. 사도 바울은 비로소 편지의 한 가운데서 글을 쓰는 목적을 적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편지는 전반부와 후반부를 예리하게 나누는 현상을 보여준다. 다 시 말하자 면 편지의 앞과 뒤를 분리시키는 경계지점에서 편지를 쓰는 사도 바 울의 목적이 환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디모데에게 속히 가기를 바라는 중에 이 편지를 기록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만일에 자신의 방문이 지연되면 이 편지가 디모데에게 목회를 가르치는 지침서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 면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뛰어난 신앙정신을 발견할 수가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외면적으로 드러난 편지의 목적보다도 그 아래 숨어있는 신앙정신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기 언급된 편지목적은 이 편지에만 해당되는 것이지만 신앙정신은 이 편지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의 모든 활동에 관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 만일 누군가가 사도 바울을 주님을 섬기는 데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을 고집하는 고집불통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큰 오해이다. 그는 주님을 섬기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기를 바라면서도 편지를 쓰고 있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사역의 다양성을 잘 보여 준다. 그는 사람을 찾아가야 할 때는 발을 사용하고, 편지를 보내야 할 때는 손 을 사용한다. 그는 경우에 따라서 발로 사람을 찾아갈 수도 있고 손으로 편지 를 쓸 수도 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정신이다. 그는 한 가지 방법이 통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좌절해 버리는 그런 사람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는 한 가지 방법이 막히면 다른 방법을 찾는 사람이다. 발이 아니면 손으로! 신앙이란 길이 막힌 듯이 보이는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여는 힘이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은사를 다양하게 활용하여 주님을 섬겼 다. 사도 바울의 영혼에는 불같이 타오르는 열정이 있다. 그가 디모데에게 가기 를 바라는 중에도 편지를 쓰는 것은 바로 이 열정이 그를 강권하고 있기 때문 이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언제나 적극적이다. 그는 선한 경우로는 절 대로 만족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최선이 아니면 주님을 위한 섬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선은 최선의 적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정신 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 은 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기를 희망하는 중에도 편지를 쓰는 또 다른 시도를 첨가한다. 그것이 최선이기 때 문이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주님을 섬기는 데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적극성을 보여주었다. 뜨거움과 더불어 냉정함은 사도 바울에게서 나타나는 신앙정신의 중요한 국 면이다. 사도 바울은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다. 그가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쓰 는 것은 방문이 지연될 때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 는 차분하게 방문이 지연될 가능성을 예상하였고 그럴 경우에 디모데가 어떻 게 대처해야 할지 설명해주는 이성을 발휘하였다. 사도 바울은 현실적인 상황 을 주시하지 못할 정도로 열정주의에 빠진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열정만으로는 안되고 반드시 이성이 동반되어야 한다.
110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59)-믿음의 담력 (딤전 3:13b)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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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1 2004-06-09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53cho.hwp믿음의 담력 (딤전 3:13b)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내가 아는 친구가운데는 무대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는 주일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어느 날 여름성경학교 강습회에 참석하였는 데, 무대체질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동료교 사 한 명과 함께 개회예배에서 이중창으로 특별찬송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청중 앞에 나서자마자 앞이 새하얗게 되면서 가사도 곡조도 증 발하여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피아노 반주만 요란스럽게 예 배당 안에 울려 퍼지고 말았다. 그러던 그 친구가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목사가 된 후에 누가 보아도 감복할 정도로 교회와 성도를 충성스럽게 섬겼다. 가끔 그의 설교를 듣노라면 메시지가 얼마나 강하고 힘이 있는지 옛날 사람들 앞에서 쩔쩔매던 모습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충성에서 용기가 나온다는 것을 입증한 사람이다. 충성에서 용기가 나온다는 것 은 꼭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 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 에게나 적용되는 진리이다. 그래서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이 그리스도 예 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는다"는 사도 바울의 말은 교회의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한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할 귀중한 말이다. 믿음의 담대함은 직분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주님의 모든 직분자에게 주어지는 위대한 선물이 다. 브리스길라가 그랬고, 스데반이 그랬으며, 베드로가 그랬다. 그런데 충 성이 용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은 사도 바 울 자신일 것이다. 틀림없이 사도 바울은 믿음의 담력에 관하여 말하면서 자신의 삶을 생각했 을 것이다. 그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놀랍도록 담대하 였고 (행 13:46; 14:3; 18:26; 19:8),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말 할 때도 참으로 담대하였다 (살전 2:2 - 개역성경에는 "담대하였다"가 번역 되지 않았음). 사도 바울은 심지어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아무 두려움이 없 이 담대하게 복음을 진술하였다 (행 26:26). 그는 죄인 의 몸으로 로마에 체 류하는 동안에도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쳤다 (행 28:31). 그는 성도들에게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면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는 것을 제목으로 내놓았다 (엡 6:19). 사도 바울은 실제로 자 신이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이유가 복음의 비밀을 전하는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말하는 것에 있다고 믿었다 (엡 6:20). 믿음의 담력은 오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만드는 데 총집중하기 때문에 사 도 바울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초월하게 만든다. "나 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 게 하려 하나니" (빌 1:20). 자기의 목이라도 내놓은 브리스길라가 그런 사 람이었고 (롬 16:3), 돌에 맞아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스데반이 그 런 사람이었으며 (행 7:58), 예수의 이름 때문에 채찍질 당하는 것도 마다 하지 않았던 베드로가 그런 사람이었다 (행 5:40). 믿음의 담력을 지닌 사 람은 그리스 도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발견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와 교회를 위하여 직분을 맡는 것을 손해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 가! 지금 많은 신자들이 봉사에 대한 손해감정에 사로잡혀 교회 일에 깊이 개입할수록 골치가 아플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로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비롯하여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경험했던 위대한 선 물, 교회의 직분을 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의 담력을 소개하고 있지만, 우리는 어떻게든지 이것을 듣지 않으려고 마음 의 귀를 막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초대교회로부터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다. 시간적으로 그럴 뿐 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109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58)-아름다운 지위 (딤전 3:13)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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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8 2004-05-12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51jo.hwp아름다운 지위 (딤전 3:13)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소년시절에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은 여름마다 친구 목사님들과 더불어 산상 집회를 열었다. 나는 어느 집회였던가 한번은 목사님의 분부가 있어서 집회기 간 내내 목사님의 심부름을 맡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강대상 바로 밑에 앉아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혜택을 얻을 수 있었다. 목사님은 구원의 감격을 설명하면서 어느 신사가 거지 아이를 데려다가 양 자로 삼아 기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신사는 아이를 기르면서 이 다음에 크 면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말을 거듭해서 일러주었지만, 아이는 나중 일은 둘째 치고 지금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자기를 데려다가 아들로 삼아준 신사의 호의 에 그냥 감격해서 하루종일 집안을 쓸고 닦고 섬겼다는 것이다. 목사님의 설 교를 들으면서 내 머리 속에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아이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충성은 구원의 감격으로 사실 우리가 어느 직분이든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은 이 직분을 잘 이행하 면 나중에 어떤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직분 을 잘 감당하면 이후에 어떤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은 둘째 문제이다. 그 이전에 우리가 맡은 직분을 신실하게 수행하는 까닭은 죄악과 암흑 속에서 고 스란히 죽을 운명에 처해있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영혼 을 격동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 1:12),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후 5:14). 사도 바울 이 직분을 수행하는 것은 장차 주어질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미 주어진 은혜를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도 바울의 직분 이행은 목적보다는 원인에 그 이유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직분을 잘 감당하는 사람에게는 선물이 수여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선물 가운데 한 가지가 "아름다운 지 위"이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잘 섬긴 사람들은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다. 비 록 직분 을 충성스럽게 수행하는 것이 처음부터 무엇을 얻으리라는 목적 때문 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 람에게는 어떤 결과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충성엔 마땅한 결과 따라 이것은 정말이지 하나님의 큰 은혜이다. 일할 곳이 없어서 하루종일 놀고 있 던 사람이 일자리를 맡은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결국은 하루종일 일한 사람 과 똑같은 삯을 받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큰 은혜인가! 그러므로 잘 섬긴 사람 에게 아름다운 지위가 주어진다는 것은 은혜 위에 은혜이다. 잘 섬긴 사람에게 "아름다운 지위" (이 말은 신약성경에 오직 한 번 사용되 었다)가 주어질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 것은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이 내세에서 특별한 자리를 얻게 될 것이라는 뜻 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선물이 "그리스도 예 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인데, 이것이 내세적인 의미보다는 현실적인 의 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아름다운 지위도 현실적인 것으로 이해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이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직분자에게 존경은 마땅한 것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취하기 위해서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지만, 잘 섬긴 결과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 이다. 이 두 가지는 선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자칫하면 우리는 사람에게서 영 광을 얻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에게 눈을 흘기다가 잘 섬긴 까닭에 마땅히 존 경을 받아야 할 사람까지 매도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그런데도 이런 현 상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신자들마저도 잘 섬긴 사람들을 존경하고 칭찬하는 데 인색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잘 섬긴 사람에게 아름다운 자리를 내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며, 교회 에서 잘 섬긴 사람이 아름다운 자리에 앉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아름다운 교 회가 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108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57)-여자의 문제 (딤전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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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9 2004-04-14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49cho.hwp여자의 문제 (딤전 3:11)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여자는 자주 마귀 짓을 한다. 이렇게 말해도 오해를 살 필요가 없는 까닭 은 그 경우가 남자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에서 여자 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자꾸 말하면 입만 아픈 일이다. 예수 그리 스도를 도왔던 여자들을 비롯하여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 수고한 뵈뵈나 브리 스길라 같은 여자들은 초대교회의 하늘에 별처럼 빛나는 인물들이었다. 아마 도 이들의 뜨거운 헌신이 없었더라면 복음이 확산되고 정착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초대교회에는 이렇게 신앙에 모범적인 여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 다. 한편에는 마귀 짓을 일삼는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나 사도들로부터 심각한 경고를 받을 정도로 악역을 담당했던 여자들이 심심지 않게 나온다. 양면성 가진 사람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마귀 짓은 여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앞 에서 감독의 직분과 관 련하여 남자들도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 수 있다는 것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고했다 (딤전 3:6-7). 신입교우에게 감독과 같은 중대한 직분을 맡기면 마귀처럼 교만에 빠 지게 되고, 외인에게서 선한 증거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탐내 면 마귀처럼 비방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마귀 짓에 여자들도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여자들이라고 해서 마귀 짓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여자들도 남자들 과 마찬가지로 마귀 짓을 할 위험성이 대단히 높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여자들에게 권면을 주면서 "참소하지 말라"고 말했 던 것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참소하다"는 단어가 마귀라는 단어와 똑같은 것 임을 알고 나면 사도 바울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이미 감독과 관련된 단락의 마지막 부분에서 두 번이나 사용을 하였고 (딤전 3:6,7), 또한 후에는 거역하는 자들에 대하 여 언급하는 단락에서 한 번 더 사용을 하였다 (딤후 2:26). '참소하다'는 '마귀짓'이란 말 그러므로 본래는 "마귀 짓을 하다"로 번역했어야 할 단어를 우리말 성경 은 "참소하다"로 번역함으로써 너무 강한 어조를 애써 감소시키려고 노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자들이 마귀 짓을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이었으 면 사도 바울이 디도서에서 또 다시 경고를 했겠는가 (딛 2:3). 아마도 사도 바울은 여자들에게 "마귀 짓 하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가장 먼 저 하와를 머리 속에 떠올렸을지 모른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 "아담이 꾀임 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딤전 2:14)고 말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와는 마귀에게 미혹을 받았을 뿐 만 아니라 아담 을 미혹하는 일을 했다. 마귀는 하와를 미혹했고, 하와는 아담을 미혹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와는 마귀 짓을 하고 만 것이다. 최초 마귀 짓은 '하와'가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길을 가시는 것을 가로막는 베드로의 행위 가 마귀 짓을 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마 16:23), 하나님의 뜻 을 따라야 할 길을 어그러뜨리고 만 하와의 행위도 마귀 짓을 한 것이라고 설 명할 수 있다. 하와는 아담을 미혹했을 때 하나님의 형상을 떠나서 마귀의 심 성을 따라간 것이다. 이것은 마귀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며, 마귀의 말을 하 는 것이며, 마귀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마귀 짓이란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인간의 뜻 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길을 가로막는 베드로에 게 말씀하셨던 것같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마귀 짓이다 (마 16:23). 마귀 짓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 을 우습게 여기고 사람의 영광에 집착하는 것이다. '마귀 짓'은 사람 위한 것 그래서 마귀 짓은 하나님의 영광을 비방하고, 인간의 영광으로 교만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여기에 사도 바울이 마귀라는 단어와 함께 교만과 비방이 란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있다 (딤전 3:6,7).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 익을 담당하는 여자들은 - 남자들도 그렇지만 - 목숨을 걸고 마귀 짓을 멀리 해야 한다.
107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56)-여자의 역할 (딤전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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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0 2004-03-17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47jo.hwp여자의 역할 (딤전 3:11) 조병수 교수/ 합신 여성은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 인구의 성비례를 균등하게 생각한다면 교회의 구성원에 최소한 절반이 여자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순전히 사회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남 자가 절반, 여자가 절반으로 이루어진 교회가 가장 이상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부분 우리나라 교회들의 좌석에 여자가 남자보 다 훨씬 더 많이 앉고 있다는 것은 문제시되어야 한다. 이런 현상은 교회들 이 구성원의 절반에 채워야 할 남자들에 대하여 그다지 큰 관심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남자에 관해서는 그렇다 손치고, 정상적인 교회라면 구성원의 나머 지 절반인 여자에게 깊은 관심의 시선을 주어야 한다. 교회는 여자가 교회의 구성원에 절반 이상 차지하는 것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치부하고 말 것이 아니 라 정당한 역할을 맡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성에 대한 관심 가질 때 사도 바울이 감독과 집사에 대하여 진술하는 중에 갑자기 여자들에 관해서 언급하는 것은 이런 의도에서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여 자에게도 교회에서의 정당한 역할을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임에 틀림없 다. 이것은 문맥을 살펴볼 때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우선 감 독의 자격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나서(3:1-7), 집사의 자격이 무엇인지 말한다(3:8-13). 그런데 집사에 대한 설명에서는 중간에 여자에 대한 이야기 가 들어 있다(3:11).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3:8-10 집사 - 3:11 여자 - 3:12-13 집사. 사도 바 울은 여자에 대한 진술을 감독과 집사에 대한 이야기를 다 마친 다음에 비로 소 시작한 것이 아니다. 만일에 사도 바울이 감독과 집사에 대한 논의 끝에 드디어 여자에 대한 말을 꺼냈더라도 그것은 의미심장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집사의 자격을 논하는 단락의 중간에 여자에 대한 이야 기를 기록한 것은 의미심장 이상의 것이다. 사도 바울의 의도는 너무나도 분 명하다. 그것은 여자도 집사와 같은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여 성 역할 중요해 그런데 사도 바울이 여자가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 로 여겼다는 사실은 문맥에서뿐 아니라 다음과 같이 여자에게 요구한 네 가 지 사항에서도 잘 드러난다: 단정할 것, 참소하지 말 것, 절제할 것, 모든 일 에 충성할 것. 단정함은 사도 바울이 이미 감독과 집사에게 구체적으로 요구했던 사항이다 (3:4,8). 말하자면 단정함이란 교회의 모든 일군에게 요구되는 공통적인 자 격 사항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단정함으로 장식한 여자는 감독과 집사 처럼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이다. 참소한다는 말은 마귀라는 단어와 동일한 형용사이다. 따라서 참소한다는 말 은 풀어쓰면 마귀짓 한다는 뜻이 된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 감독의 자격을 열 거하면서 마지막에 신입교우가 감독이 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가리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지거나 마귀의 올무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한 적 이 있다(3:6-7).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의 생각은 여자가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으려면 감 독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자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감독이 그러하듯이 마 귀짓을 버 린 여자는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여성들도 자질 갖춰야 사도 바울이 여자에게 요구한 셋째 사항인 절제함도 이미 감독에게 요구하였 던 내용이다(3:2).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여자에게 충성됨이 필요하다고 말 한다. 충성됨이라는 말은 사실상 믿음이라는 말에 대한 형용사이다. 사도 바 울은 믿음이란 단어를 두 번이나 집사에게 사용한다(3:9,13). 집사는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이어야 하며(3:9), 집사의 직분을 잘하면 믿음에 담력을 가지 게 된다는 것이다(3:13). 사도 바울이 여자에게 요구한 충성됨은 집사에게 요구한 믿음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만큼 자격에 있어서 여자는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집사 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충성됨을 지닌 여자는 집사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6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55)-먼저 시험을 받으라 (딤전 3: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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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3 2004-02-19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45jo.hwp먼저 시험을 받으라 (딤전 3:10)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치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사람 에 대하여 알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물론이고 심 지어는 측근에 있는 사람조차도 그 본심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 하다. 그런데 깊이 숨어있던 본심이 드러날 때면 대부분 관계가 회복되기 어 려운 파경으로 치닫고 만다. 엘리사에게 게하시가 그랬다면, 바울에게는 마가가 그랬다. 게하시만큼 엘리 사 곁에 그리고 마가만큼 바울 곁에 가까이 있던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하지 만 사람은 가까이 있다고 해서 절대로 잘 아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가 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내가 여러 곳에서 목회를 하면서 매번 속았던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입술에 는 연방 아멘과 할렐루야를 달고 다니는 사람, 요즘 교회들 가운데 건전한 교 회가 없다고 가슴을 치며 한탄하는 사람, 교우들의 결혼식과 장례식에 빠짐없 이 참석하는 사람, 집을 지으면서 창문을 교회 쪽으로 내서 매일같이 교회를 바라보며 기도한다는 사람, 전화통이 불나도록 인사치레를 잘 하는 사람, 말 끝마다 우리 목사님이 제일이라며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추켜세우는 사람, 교 회가 마치 제 집인 것처럼 들랑거리는 사람, 어느 교회의 좋은 점을 우리 교 회에도 도입해야 한다고 떠드는 사람,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거의 늘 속았 다. 교회의 일군을 세우려면 엄격한 시험을 통해서 사람을 가려야 하는 것인 데... 사도 바울이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정말 매서운 지적이다. 사도 바울은 이미 앞에서 집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다섯 가지를 언급했 다(8절-9절). 잠시 후에 가정과 관련하여 한 두 가지 측면을 더 말하게 되겠 지만 (12절), 사실 앞에 제시된 이런 조건들만 만족시켜도 교회의 일군이 되 기에 이미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사도 바울은 놀랍게도 이런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사람들조차도 먼저 시험하라고 요구한다. 아마도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은 교회 의 일군이 되기 위하여 또 다시 시험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무척 기 분이 나빠질지 모르겠다. 목회 초년시절부터 나는 매년 말이나 초에 제직수련회를 했다. 집회에 참석 하여 교육을 받으면 끝나는 일이지만, 사정상 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 게는 녹음테이프를 들은 후에 간단히 보고서를 써서 제출하게 했다. 그나마 못하는 사람은 적당한 시간에 교역자들과 함께 녹음을 듣고 열 문항 설문지 에 동그라미나 가위를 표기하는 것으로 교육을 대신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귀찮은 일을 치르게 한 것은 교육내용을 주지시키는 것 이상으로 직분을 사모하는(딤전 3:1) 신앙인격을 확인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 데 언젠가 한번은 어떤 분이 제직수련회를 여는 것에 대하여 발끈 화를 냈 다. 그의 주장은 이미 다년간 교회에서 일을 했는데 무슨 훈련이 필요하냐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끝끝내 교육을 받지 않았다. 이미 매사에 단정하고 말에 실수가 없으며 술을 멀리하고 청렴하며 깊은 신 앙을 지닌 사람이 다시 한번 시험을 통과해야 교회의 일군으로 활동할 수 있 다는 사도 바울의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떠했을까? 게다가 만일에 사도 바 울이 의미하는 시험이 매우 강도가 높은 것이었다면, "먼저 시험을 받으 라"는 말 앞에서 이런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든지 간에 사도 바울의 입장은 너무나 단호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엄격한 입장을 취한 까닭은 한 마디로 말해서 교회에 대한 이 념 때문이었다. 얼마 후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므로 (15절), 사도 바울은 교회의 일군을 정말로 엄선하고 또 엄선해서 세워야 한 다고 믿었던 것이다. 교회의 일군이 되려는 사람은 몇 번이고 시험을 받는다고 해도 전혀 기분 나빠할 것 없다. 오히려 진정한 교회의 일군은 모든 시험을 통과한 후에도 끊 임없이 스스로 훈련하고 스스로 시험해야 할 것이다.
105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54)-깨끗한 양심(딤전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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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4 2004-01-20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43jo.hwp깨끗한 양심 (딤전 3:9) 조병수 교수/합신 이런 말이 매우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목회자들은 동역자를 찾을 때 믿음이 좋은 사람보다는 마음이 착한 사람을 원한다. 얼마 전에도 목회를 잘하고 있는 친구가 쓸만한 부교역자를 한 명 추천해달라며 전화를 했다. 그 래도 어느 정도 구색이 맞는 사람을 소개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조건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한참을 빙빙 둘러대며 이런 저런 조건들을 내걸더니 결국 말미에 이렇 게 토를 달았다. "뭐,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믿음이 좋은 사람보다는 마음 이 착한 사람이야 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이유를 되묻는 나에 게 그는 정말 그럴 듯한 말로 대답을 하였다. "믿음은 말이야, 언제든지 좋아 질 수 있지만, 마음은 믿음이 좋아져도 착해지지 않더라구."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면 친구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이해하는 것이 별 로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교회의 일군이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n있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깨끗한 양심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 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믿음의 비밀과 깨끗한 양심은 서로 나란히 놓이는 병치의 관계가 아니라, 믿음의 비밀이 깨끗한 양심 안에 놓이는 포함 의 관계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깨끗한 양심 안 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이것은 교회의 일군에게는 믿음의 비밀보다 깨끗 한 양심이 우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깨끗한 양심이 있고 그 다음에야 믿음 의 비밀이 있다. 그래서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믿음의 비밀 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 게도 우리의 주위에는 이런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다. 교회가 어지러운 것은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믿음 좋은 사람들이야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가! 내로라 하는 믿음을 가진 사 람들은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도 많이 알고 기도도 잘하 며, 입술에는 말끝마다 아멘 할렐루야가 넘쳐흐른다. 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어지럽다. 교회가 어지러운 까닭 은 깨끗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 다.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어서 더러운 것을 멀리하며 불결한 것을 싫어하 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는 안정되며,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어서 겉보다 속을 가꾸고 외면보다 내면을 장식하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는 안전하다. 그러 므로 우리는 이쯤에서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면서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 하여 경계의 목적을 분명하게 정했던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경계 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 늘"(딤전 1:5). 깨끗한 양심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채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 는 것은 거짓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고 힘주어 말했던 야고보의 말을 슬쩍 패러디하자면 양심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 가 죽은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이라는 야고보의 말이 조금도 빗나 감이 없는 사실인 것처럼(약 2:20) 양심이 없는 믿음이 헛것이라는 말도 한 치의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주장하는 것이 영혼과 몸을 분리시키는 것 과 같은 어리석 은 짓이듯이(약 2:16) 양심이 없는 믿음을 주장하는 것도 목숨과 육체를 떼어 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믿음은 반드시 양심과 함께 일해야 하며, 양심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어야 한다. 이제 다시 바울의 생각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믿음은 반드시 양심 안에서 작용해야 한다. 깨끗한 양심이 선행되지 않은 훌륭한 믿음이란 것은 이미 거 짓이며 해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비밀을 구하기 전에 먼저 깨끗한 양심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바나바를 소개하면서 "착한 사람이요 성 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행 11:24)라고 믿음보다 성품을 앞세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동역자를 구하기 위해서 믿음이 좋은 사람보다 마음이 착한 사람을 찾 는 목회자의 심정이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님을 거듭거듭 확인한다.
104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53)-믿음의 비밀(딤전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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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2 2003-12-17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41jo.hwp(딤전 3:9) 믿음의 비밀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남자아이라면 어린 시절에 주위의 여자아이들을 골려먹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닐 것이다. 대개 남자아이들은 골탕을 먹은 여자아이들이 눈물방울을 폭포 수처럼 떨구는 것을 보면서 쾌재를 부른다.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 때 우리 반 에는 아무리 괴롭혀도 눈물은커녕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는 여자아이가 있었 다. 우리는 그 애가 우는 것을 보고 싶어서 정말 억지에 가까운 심술을 부렸 다. 하지만 그 애는 얼굴이 곱살한 만큼이나 행동도 반듯했다. 우리가 아무 리 심술을 부려도 그 애는 요지부동하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것은 거의 믿 을 수 없는 현상이었는데,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리는 그 이유를 알게 되 었다. 그 애는 놀라운 비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여자아이는 조선왕조 의 후손이었다. 선한 비밀은 힘이 된다. 우리가 흔히 읽는 동화나 신화의 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어떤 위대한 비밀을 가지고 있을 때 고난과 역경이 닥쳐와도 꿋꿋하 게 이겨나간다. 그냥 우리의 현실에서 생각해보아도 개인적으로 어떤 좋은 비 밀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조국이 광명을 찾는 데 필요한 비밀을 발견한 사람은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굴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선진들이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 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 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지만 세상을 가치 있 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까닭은 남이 알지 못하는 비밀, 곧 하나님께서 예비 해놓으신 하늘의 본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에 떡을 물려주면 평강을 외치는 거짓 선지자와 달리, 참 선지자들이 비 록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왕 앞에서라도 담대하게 죄악을 지적했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여호와의 회의에서 논의된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하여 천상의 비밀을 알고 있는 참 선지자들 을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 험이나 칼이라도 굴복시 킬 수 없었던 것이다. 하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땅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도 바 울이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 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였던 것은 보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의 비밀을 맡은 자였던 것이다 (고전 4:1). 사도 바울이 집사의 자격을 논하는 자리에서 느닷없이 집사는 믿음의 비밀 을 가진 자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이유가 없는 요구가 아니다. 집사 는 신앙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자기만의 비밀을 소유하고 있 어야 한다. 신앙의 세계를 환히 들여다보는 이런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있을 때 교회의 일군은 어지간한 어려움은 물론이고 심지어 목숨을 요구하는 환경 에서도 당당하게 이겨나갈 수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의 비밀을 지닌 일 군이 있어야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엄청난 위협과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 고 견고하게 서는 법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힘을 얻는 방법은 그다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에 교회의 일군이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바로 앞 절에 언급된 것처 럼 그저 세상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술타령이나 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다가 자 신도 망하고 교회도 망치고 말 것이다. 믿음의 비밀은 교회의 일군에게 힘이 된다. 그래서 역으로 말하자면 믿음 의 비밀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교회의 일군이 된다는 것은 이미 힘을 잃어버 린 채 몸을 움직이려는 삼손과 다를 바가 없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가 이 렇게 무력한 까닭은 머리의 비밀을 상실한 삼손처럼 교회의 일군들이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늘의 비밀을 지니고 있으면서 도, 조선왕조의 후손이라는 비밀을 지니고 있기에 남자아이들의 짓궂은 심술 앞에서도 당당했던 여자아이보다도 못한 교회의 일군이 많다는 것은 얼마나 더 불행한 일인가!
103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52)-오직 하나의 말(딤전 3: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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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1 2003-12-04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40rejo.hwp 오직 하나의 말(딤전 3:8)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말은 영혼의 길이지만 또한 영혼의 담이기도 하다. 언어가 있기에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또한 언어 때문에 사람들은 의를 끊 고 원수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제법 처세를 잘한다고 하는 사람 들이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이중언어를 구사함으 로써 요리조리 피하면서 살 길을 찾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에는 일구이언을 즐기는 언어의 마술사들이 한 두 명이 아니 다. 이런 현상이 사회 전반에 유행하는 까닭은 거짓이 사회의 배후에 검은 세력으로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언어란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현 상이 아니다. 언어 뒤에는 생각이 있고, 생각 뒤에는 인격이 있다. 결국 어 떤 사람이 일구이언을 한다는 것은 두 가지 생각이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 이며, 그리고 더 깊은 속에는 두 가지 인격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감독에 대한 권면을 마치고 집사에 대한 권면을 시작한다. 감 독과 집사에 대한 권면을 비교해보면 유사한 것들이 적지 않다. 교회를 잘 이끌기 위해서 감독이든 집사든 공통적으로 훌륭한 자질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감독 과 달리 집사에게만 해당하는 몇 가지 특이한 자질을 요구한다. 그 가운데 첫째가 집사는 일구이언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 울은 집사의 자질과 관련하여 언어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언어는 영혼의 길이며 또한 영혼의 담이다. 만일에 집사가 말에 성공하면 사람들이 좋은 관 계를 유지할 것이고, 만일에 집사가 말에 실수하면 사람들의 관계가 깨어지 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집사의 언어에 따라서 교회가 건강해질 수도 있 고 병약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구이언을 가장 단순하게 이해하자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말하는 것 처럼 완전히 상반된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야고보는 이런 현 상을 가리켜 샘이 한 구멍으로 단 물과 쓴 물을 내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약 3:10-12). 실제로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가운데 대 부분은 이런 상 반된 언행에서 비롯된다. 한 사안을 두고 이 쪽에 가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저쪽에 가서는 저렇게 설 명하거나, 한 사람을 놓고 여기에서는 칭찬의 말을 하고, 저기에서는 악평 의 말을 하는 행위는 성도에게 쓰라린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회복할 수 없는 분란으로 이끈다. 교회의 일군은 이런 언어를 멀리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언어의 배후에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일구이언이란 두 가지 생각이 교묘하게 혼합되어 있을 때 나오는 언어 플레이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으로부터 극단적인 경우로는 정신분열적인 횡설수설이 튀어나온다. 꼭 이렇게 심각한 경우는 아니더라도, 두 가지 생각 이 교묘하게 혼합되어 있는 사람에게서는 평범한 사람이 논리적으로 이해하 기 어려운 궤변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아마도 우리는 이중적인 의미를 띄고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이 범 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해석하기에 따라서 이 뜻이 될 수도 있 고 저 뜻이 될 수도 있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고도의 일구이언인 셈이다. 이 런 언어 플레이는 교회의 일군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를 조종하는 가장 은밀한 배후세력은 인격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일구이언이란 엄밀하게 말해서 인격의 이중적인 표현이라고 정의할 수 있 다. 이중적인 인격으로부터 일구이언이 나오는 것이다. 인격은 대체로 유익 과 손해에 민감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면 이 말을 하고, 자신에게 손해가 되면 저 말을 하는 것에 익숙하다. 인격이 손익에 달려있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진리를 고백하기 때문에 목숨까지도 내놓는다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일구이언이란 이 세 상에서 유익을 얻기 위하여 신앙고백을 버리면서까지 말을 바꾸는 처세이 다. 이런 치사한 일구이언은 진정한 신앙고백 신자에게는 결단코 적합하지 않는 것이다.
102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51)-이웃의 눈(딤전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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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3 2003-11-19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39jo.hwp(딤전 3:7) 이웃의 눈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늦은 밤에 낯모르는 이십대 청년이 예고도 없이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청년은 불쑥 자신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을 한 마디 던져놓고 는 의자에 앉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기 시작하였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의 부모가 어느 교인에게서 빚을 졌는데 이자를 가당치 않게 너무 많이 요 구할 뿐 아니라, 부모가 제때에 이자를 갚지 못하자 가차없이 자신의 월급에 차압을 가해 회사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청년은 나에게 눈물을 씹으며 말했다. "목사님, 예수 믿는 사람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빚을 안 갚겠다거나 이자를 안내겠다는 것이 아닌데... 조금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면 안되는 겁니까? 게다가 교회에서 무슨 집사라는 분 이...".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직분을 얻으려는 사람은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한다고 못박는다. 이만큼 사도 바울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시 각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웃들의 시선은 아무 런 가치도 없는 쓰레기가 아니다. 어찌 보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평가 는 하나님의 평가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통하여 신자를 바라보 는 눈길이라는 말이다. 사실 이것은 일상생활이 신앙생활의 표현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내용이다. 신앙과 일상은 같이 가는 것 이다. 그래서 신앙은 일상에서 증명된다. 다시 말해서 일상을 보면 신앙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삶을 보면 교회에서의 삶을 알 수 있다. 교 회에서는 잘 하는데 세상에서는 잘못 한다면 그것처럼 거짓된 것이 없다. 따라서 교회의 일군을 세우려면 교회에서 투표를 할 것이 아니라 동네에서 투표를 해야 한다. 교회의 일군으로 세우려고 하는 사람에 대하여 과일가게 아주머니는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경비원 아저씨는 뭐라고 평가하는지, 동네 꼬마들은 어떤 점수를 줄지, 편지를 배달해주는 우체부의 생각은 어떠한지, 옆집 학생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슈퍼마켓 점원의 의견은 무엇인지 들어보 아야 한다. 잃어버린 사람을 찾을 때 하는 것처 럼 교회의 일군으로 추천받은 사람의 사진을 크게 확대해 가지고 다니면서 동네사람들에게 설문지를 내밀 며 물어보아야 한다. 교회의 일군으로 세우려고 하는 사람의 생활전선으로 찾 아가서 그의 동료, 선배와 후배, 그가 상대하는 고객들과 업체들에게 과연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들어보아야 한다. 교회의 일군을 세우려면 교회 에서 투표할 것이 아니라 회사에서 투표를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감독과 같은 교회의 직분을 받으려는 사람은 교회 밖의 사람들 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교회 의 일군은 교회 밖의 사람들도 잘 사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는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아예 아무런 평가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 다. 오늘날 교회는 신자들이 불신자들과 사귀는 것을 터부시하고 있다. 이런 행위를 마치 죄를 짓는 것처럼 두려워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생각 은 다르다. 옳은 신앙정신과 바른 생활원리를 지닌 신자가 불신자를 만나는 것을 꺼려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매우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신자가 분명한 신앙고백과 정직한 생활윤리를 따라서 불신자들과 사귐으로써 선한 증거를 얻 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에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선한 증거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교회에서 일군이 된다면 마귀는 너무나도 즐거워할 것이다. 이것은 마귀가 불신자를 통 해서 교회를 비방할 빌미를 얻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야 말로 마귀에게 교 회를 올무에 빠뜨릴 절호의 찬스가 주어진 것이다. 마귀는 불신자를 통해서 교회를 공격한다. 교회가 사회보다도 못하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한 다. 교회가 하기에 따라서 세상은 복음을 받을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복음을 버릴 원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세상을 얻느냐 잃느냐 하는 것은 교회가 하기 나름인 것이다. 나는 불신 청년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게 한 그 신자 가 지금도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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