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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90)_인명부
rpress
4458 2006-03-09
조병수의 목회편지(90) 인명부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우리에게는 고대문명을 얕잡아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크나큰 오 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대문명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서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문자가 나왔고 수학, 기하학, 천문학, 철학 그 외에 수많은 문명을 거기에 빚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주 초대교회 를 원시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이것도 오해 중의 오해이다. 초대교회를 절대로 허술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록 초대교회가 규모에 있 어서는 우리시대의 교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작은 것이었지만 질적 인 면에서 있어서는 여러모로 우리를 앞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앞 지름 가운데 하나가 교회의 조직 또는 구조와 관련된 것이었다. 최고의 비구조적 조직 갖춘 초대교회 초대교회는 조직적이며 구조적인 교회였다. 초대교회는 우리와 달리 그 나름 대로 탄탄한 체계를 소유하고 있었다. 사도들을 구심점으로 하여 아래로 퍼 져 가듯이 시리아, 이집트,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네트 워크는 정말 놀랍게도 정교한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사람의 머리에서 의식적 으로 구상된 조직과 구조는 아니었다.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 작한 신적 체계로서 비조직적 조직이었으며 비구조적 구조였다. 그러나 이것은 심지어 시스템으로 말하자면 가히 압권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로마정부조차도 두려워한 조직과 구조였다. 그래서 핍박의 시기에 로마정부 는 실낱같으면서도 산산이 땅 속 깊게 파고드는 나무뿌리처럼 잘 짜여진 초대 교회를 추적하기 위해서 전전긍긍했었다. 이 때문에 로마정부는 마침내 초대 교회의 비조직적 구조와 비구조적 조직 속으로 전문적인 스파이까지 침투시켰 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조직과 구조에 관해서 말하려면 지면이 모자란다. 단지 한 가지 만 언급하자면 그것은 특히 인명부와 관련해서 잘 드러난다. 초대교회에는 인 명부라는 것이 있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초대교회를 이끄는 사역자들의 인 명부 가운데 열두 사도 인명부는 아주 유명한 것이었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 에는 사도들 외에도 누구나 인정하 는 일곱 명의 사역자들이 있었고, 이와 비 슷하게 안디옥 교회에서도 다섯 명의 선지자와 교사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 당하였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마치면서 로마 교회를 대표하는 사역자들의 이름을 열 거하는 인명부는 매우 인상적이다.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을 마치고 아시아로 가는 길에 동행한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된다: 베뢰아 사 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 사람 가 이오와 디모데,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행 20:4). 이 인명부에서 흥 미로운 것은 사역자들의 출신지역까지 명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초대교회의 인명부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 다. 그것은 초대교회가 대적자들의 인명부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 를 들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에서 부겔로와 허모게네(딤 후 1:15), 후메내오와 빌레도(딤후 2:17), 구리 장색 알렉산더(딤후 4:14) 같 은 대적자들의 이름을 자세히 제시한다. 이것은 이들과 유사한 대적자들에 의 하여 공격을 당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대상을 적시하고 있 n는 것이다. 어쨌든 초대교회의 인명부를 살펴보면 초대교회가 얼마나 신중하고 정확했는 지 알 수 있다. 초대교회는 사도 인명부, 사역자 인명부, 동역자 인명부 등 을 작성함으로써 역사적인 교훈을 남겼다. 인명부는 후세의 신자들이 예수 그 리스도의 교회를 이루고 그의 복음을 위해 사역함에 있어서 어떤 사람을 모범 으로 여겨야 하는지 알려준다. 후세의 모범이 되는 초대교회 인명부 오고 오는 시대의 신자들은 초대교회의 인명부를 보면서 교회를 위하여 일하 면서 누구를 본받아야 할지 배우게 된다. 우리는 특히 인명부에 세밀하게 기 록된 적요(摘要) 사항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군들이 갖추어야 할 자격과 조 건을 교훈 받는다. 이런 점에서 초대교회는 인간의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체득한 신적 역사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는 바로 이런 인명부에서 절대로 경시할 수 없는 초대교회의 한 가지 체계를 본다.
140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89)_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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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0 2006-02-22
조병수의 목회편지(89)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기독교는 가정종교다.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렇 다. 기독교가 가정종교라는 사실과 관련하여 특히 초대교회가 가정에서 시작 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것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읽어보면 어김없이 알 수 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제자들 은 다락에 올라가서 기도에 전념하였고, 성령께서 임하신 후에는 성도들이 날 마다 집에서 떡을 떼는 교제를 나누었다. 초대교회가 가정에 얼마나 깊이 뿌 리를 두고 있었으면 사도 바울도 회심 전에 각 집에 들어가 신자들을 발본색 원하려고 했겠는가. 교회는 가정으로부터 시작돼 바울서신을 살펴보면 로마제국의 곳곳에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들이 활발 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가운데는 로마와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가정, 라오디게아에서 눔바의 가정, 골로새에서 빌레몬의 가정이 교회로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여러 지역에서 힘있게 성장하면서 자신의 선교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이런 가정들을 발견했 을 때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초대교회에는 신자들에게 가정과 교회가 별개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것은 한 편으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가 가정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기도 하 지만, 다른 한편으로 누구든지 가정을 신앙적으로 이끌지 못하면 교회에서 리 더로서 일할 자격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 게 보내는 첫째 편지의 중간에서 감독과 집사에 대하여 논하면서 가정을 잘 지도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실을 기억하자. 사도 바울에 의하면 감독은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 로 복종케 하는 자”(딤전 3:4)이어야 하며, 집사는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딤전 3:12)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가정과 교회의 긴밀한 관계 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는 법이 없다. 사도 바울은 가정이 신앙으로 바로 서야 교회도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사도 바울이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 을 돌아 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말한 이유 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기독교는 가정종교다. 기독교는 가정에서 출 발하였고, 기독교 지도자의 역할은 가정을 신앙으로 지도하는 것에서 시작되 었다. 그래서 가정을 돌보는 것은 기독교가 어디에서 출발하였는지 그리고 기 독교 지도자의 역할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가정을 돌보지 않는 것은 기독교의 뿌리를 부인하는 것이 며, 기독교 지도자의 역할의 원천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사도 바울은 가정 을 돌보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한 마디로 “믿음을 배반한 자”라고 불렀다. 이것은 얼마나 험악한 말인가! 가정을 돌보지 않는 자는 배도자와 다를 바가 없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가정을 돌보지 않는 행위는 인간의 윤리에만 어긋 나는 것일 뿐 아니라 신의 도리에도 거슬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험악한 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가정 을 돌보지 않는 사람을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규정했다. 이것은 사 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정말 무서운 표현이다. 세 상에 사 람의 말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별별 악한 일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사도 바울이 보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보다 더 악한 일은 또 다시 없었 다. 불신은 악 중에 악이며 죄 중에 죄다. 그러나 이런 악 중의 악이며 죄 중에 죄인 불신까지도 가정을 돌보지 않는 행위 앞에서는 자리를 양보한다는 것이 다. 가정을 돌보지 않는 행위는 더 이상 아무 것에도 비길 데가 없는 악이며 죄다. 도대체 가정을 돌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이면 사도 바울은 이런 거 친 표현까지 마다하지 않았을까. 가정 돌보지 않음이 가장 큰 죄 지금까지 사도 바울의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문장을 썼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다. 신자라면 마땅히 가 정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 하다.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진다. 기독교는 가정종교이기 때문이다.
139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88)_최상의 즐거움 주는 Win-Win..딤전5: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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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2 2006-02-16
“최상의 즐거움 주는 Win-Win 작전” 딤전5:6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문화의 최종목적은 쾌락이다. 사람은 땅을 갈고 양을 치든지, 옷을 입고 집 을 짓든지, 먹을 것을 팔고 마실 것을 사든지 결국은 자신을 즐기는 것을 목 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문화의 모든 형태의 밑바닥에는 쾌락을 지향하는 아 주 끈질긴 속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속성은 농업, 목축, 패션, 건축, 상 업, 무역 등등 모든 형태의 문화행위에서 예외 없이 발견된다. 쾌락 추구하는 문화생활 그래서 쾌락지향성을 무시한 채 문화를 논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 지금은 쾌락이 아예 문화상품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누구도 이런 이야기를 그릇되었다고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쾌락은 문화 의 최종목적이자 최종상품이다. 사람은 자신을 즐기는 것을 목적으로 문화를 형성하며 문화는 사람에게 자신을 즐기는 것을 상품으로 제공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쾌락은 신앙의 마지막 적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과 부와 관련하여 가르침을 주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 여성과 일락을 좋 아하는 여성을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다(딤전 5:5-6). 비록 논문 쓰듯이 말 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도 바울은 이런 대조를 통하여 일반적으로 신앙과 쾌락 이 조화되기 얼마나 어려운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사도 바울의 말마따나 대체로 신앙은 쾌락에 거슬리고 쾌락은 신앙과 부딪힌 다. 보통 하나님을 바라는 것과 자신을 즐기는 것은 완전히 서로 다른 일처 럼 보인다. 우리 주위에 실제로 많은 경우 이런 현상이 짙게 나타난다. 우리 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을 즐기는 쾌락을 추구하다가 안타깝게도 신앙을 고 스란히 말아먹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해설 은 매우 계몽적이다. 예수께서는 여러 곳에 뿌려진 씨들이 어떤 상황을 맞이 하게 되었는지 차례대로 설명해주시면서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들의 처지를 이 렇게 일러주셨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 (눅 8:14 개역개정). 이 비유에서 가시떨기는 염려와 재물과 향락을 의미하는데 이 세 가지는 어 느 정도 점진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처음에는 삶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있 다가 재물을 얻게 되면 결국 향락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에 따르면 신앙의 최종적인 적은 쾌락이다. 쾌락은 신앙을 말아먹기 때문 이다. 사도 바울은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다’고 말한다. 신앙을 잃 어버릴 정도로 쾌락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죽은 인생이다. 그는 살아있어 도 죽은 자이다. 자신에 대한 측면에는 살아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측면에는 죽었다는 말이다. 육적으로 보면 살아있으나 영적으로 보면 죽어있는 것이 다. 이것이 쾌락으로 신앙을 질식시킨 사람의 실체이다. 그래서 그의 쾌락이란 하부에 머물고 상부로 전진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에게서 즐거움을 찾기 때문 이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발견한 즐거움이 자신의 삶에 어떤 즐거움을 주는 지 알지 못한다. 진정한 신자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즐거 워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법 을 아는 사람이다.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자신에 대한 쾌락을 예리하게 분리시키는 이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 이 정작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즐거움을 알지 못한 채 겨우 자기 를 즐기는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이 얼마나 헛되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 사도 바울은 오직 자기만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비판함으로써 하 나님을 진정한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아 그것으로 자기의 인생을 즐거워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을 즐기는 삶, 헛될 뿐 이것은 하나님에 대하여도 살고 자신에 대하여도 사는 그야말로 영적인 윈윈 작전이다.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살아있기에 육적으로도 살아있다. 아니, 조 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런 사람에게는 영적으로 살아있는 것과 육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즐거움이다.
138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87)_불행의 행복 딤전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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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2 2006-02-16
불행의 행복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새옹지마는 있다. 나쁜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다지 슬퍼할 것이 아닌 이유 는 그 나쁜 일로 말미암아 도리어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 만 우리는 새옹지마의 법칙을 너무 크게 신뢰해서는 안 된다. 인생은 늘 그렇 게 법칙대로 되지 않는다. 불행한 일은 더 이상 좋은 일로 연결되지 않고 그 냥 그것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 법칙대로 되지 않는 인생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악한 처지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가져 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런 나쁜 형편에서도 하 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면서 산다. 왜냐하면 평안뿐 아니라 환난도 하나님 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믿음 안에서는 환난도 평안과 마찬가지 로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매우 역설적인 말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불행도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한 여성이 남편 을 여읜다는 것은 인생살이에서 가장 힘든 상황에 놓인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생계에 치명적인 어려움을 초 래하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그러했지만 사도 바울이 살았던 시대에도 여성 들에게는 사회활동이 그다지 넓게 허용되지 않았다. 평범한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허드렛일뿐이었다. 이런 시대에 남편을 여읜 여성의 인생은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매우 막막 한 것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혼자의 몸이 아니라 여 러 명의 자녀들까지 딸려 있다면 (4절을 참조할 때 이런 가능성은 매우 높 다) 미망인 된 여성이 헤쳐 나아가야 할 길이 얼마나 버겁고 험난할지 불 보 듯이 뻔하다. 사도 바울은 이런 여성을 가리켜 “참 과부”라고 불렀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양하겠으나 무엇보다도 일찍 남편을 여읜 상태에서 형언할 수 없이 숱 한 역경을 통과하면서도 꿋꿋이 견뎌낸 여성을 지시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 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여성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여성이 일생동안 싸워야 할 가장 무서운 대상은 외로움이란 적이다. 특히 남편 없이 혼 자서 힘들여 기른 자녀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곁을 떠나가고 홀 로 남게 되었을 때 매 순간 엄습해오는 외로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참 과부의 상태를 오직 한 마디 “외로 운 자”라는 말로 설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한 여성이 남편과 사별한 것, 게다가 이제는 외롭게 살 게 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추천한 말한 인생은 아니다. 정상적인 여성이라면 아무도 자신이 이런 인생 을 맞이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과부 됨과 외 로움을 반드시 불행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과부 되어 외로운 여성이 하나님 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눈다면 말이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 소개하는 한 여 성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 여성은 과부 되어 외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지 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였다. 이 여성은 과부된 후에 그냥 외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다. 이 여성은 과부 된 것으로 말미암아 무슨 좋은 일을 만난 것도 아니고, 외로운 인생으로 말미암 아 무슨 즐거운 삶을 얻은 것도 아니 다. 이 여성에게는 새옹지마란 없었다. 하지만 이 여성은 과부가 되어 외로운 나날을 사는 것을 원망하지 않고 그대 로 받아들이고 도리어 그 형편에서 믿음의 길을 차분히 걸어갔다. 인생의 ‘새옹지마’ 기대 못해 이 여성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의 모습 이 어떠한지 보여주었다. 이 여성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다는 표식으로 밤낮 간구와 기도에 힘을 썼다. 이 여성에게 불행은 그냥 불행이었다. 그러 나 이 여성은 불행에서 행복을 찾았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불행의 행복 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행을 행복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요즘 들어 자주 곱씹는 말씀이 있다. 잘 이해되지 않다가도 언뜻 언뜻 깨달아 지는 오묘한 말씀이다: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 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사 45:7).
137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86)_먼저 자기 집에서 딤전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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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1 2006-02-16
조병수의 목회편지(86) 딤전 5:3-4 먼저 자기 집에서 조병수 교수_합신,신약신학 기독교가 하늘의 종교만이 아닌 것은 가정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 실에서 자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기독교는 하늘의 종교이다. 하지만 어찌 보 면 기독교만큼 땅의 종교인 것도 없다.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땅의 부패에 대 하여 뼈저리게 아픔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아무 것도 아끼지 않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 가운데서 가정에 대한 기독교의 관심은 다른 어떤 것과 견줄 수 없 이 매우 무거운 중량을 가진다. 또 그 중에서도 부모에 대한 거의 절대적인 지지는 기독교가 얼마나 땅의 종교인지를 잘 보여준다. 사실 기독교는 인간 의 타락이란 하나님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부모에 대한 불효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땅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성격을 충분히 알고도 남을만하 다. 가정에 대한 관심 남달라 사도 바울은 이제 한동 안 과부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려고 한다. 사도 바울 이 살았던 시대는 성인 남자들이 생명을 오래도록 부지하기 어려운 시대였 다. 질병에는 남녀가 다같이 노출되어 있었으니 그것만 가지고는 남자의 수명 이 여자의 수명보다 짧은 이유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시대적으로 남자들이 빨리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 중에 하나는 사 고 때문이었다. 남자들은 농사와 목축과 수렵에서 잦은 사고를 만났다. 혹시 공사에 참여하거나 무역을 위해서 여행을 하게 되면 항상 불의의 사고가 남자 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 나아가서 사고 다음으로 남자들의 목숨을 앗아가 는 데 위협적인 것은 전쟁이었다. 군인으로 종사하든 그렇지 않든 전쟁이란 것은 남자의 씨를 말리는 무서운 재앙이었다. 이렇게 사고가 많고 전쟁이 많 던 시대의 결과는 과부의 다량생산이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과부에 대하여 많은 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사도 바울은 과부에 관한 단락을 열면서 효도의 정신을 고취시 킨다. 자녀나 손자는 과부 된 어머니나 할머니를 잘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말은 단락의 성격상 이 자리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엄격히 말해 서 과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홀로된 어머니 잘 섬겨야 이것은 결국 효도를 향한 사도 바울의 규범적인 천명이다. 사도 바울에 의하 면 효도란 배워야 할 성격을 가지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효도하는 마음을 소 지한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겠으나 많은 경우에 효도는 교육을 받아 익혀야 하는 것이다. 그만큼 효도는 교육의 산물이다. 자녀에게 효도를 가르치지 않 은 부모는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효도를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공경과 보답이다. “먼저 자기 집을 공경하라”, “(조)부모에게 보답하라”. 공경과 보답은 효 도에 있어서 마음의 측면과 물질의 측면이다. 그래서 효도는 물심양면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자녀의 마음은 언제나 부모에게 가 있어야 한다. 자녀는 자신 의 마음을 부모에게 이식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가 일반적으 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조)부모를 섬기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를 증명한다. 부모는 진심으로 부모를 높여야 한다. 더 나아가서 자녀는 부모가 물질적으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필요에 따라서 자녀는 부모에게 물질을 제공해 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부모에게 마음을 준다고 하면서 물질을 제공하지 않 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부모 쓸 것 제공해야 우리는 효도에 관한 사도 바울의 규범적인 말을 들으면서 아직 아멘을 말해서 는 안 된다. 한 마디 말이 더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 실만한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 말을 덧붙임으로써 효도를 윤리에서 신앙 으로 승화시킨다. 부모를 섬기는 것은 윤리가 아니라 믿음이다. 효도는 그 자 체로 영적인 성격을 가진다.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부모를 섬기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 보이는 부모에게 잘 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 는 부모에게 잘 할 수 없기 때문이다(참조. 마 15:3-6). 그래서 비록 제한된 의미이긴 하지만 부모는 보이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다. 이제 아멘을 말해 도 괜찮다.
136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85)_젊다는 것_딤전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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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6 2006-02-16
조병수의 목회편지(85) 딤전 5:1-2 젊다는 것 우리 아버지는 젊은 나를 우려했고, 나는 나의 젊은 아들들을 우려한다. 아버 지는 내가 귀를 훨씬 덮을 정도로 머리를 길게 기른 채 다 해진 통바지를 입 고 밤거리를 쏘다니다가 통금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귀가하는 것을 보실 때마 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꾸지람을 하셨다. 나는 아들이 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르고 신발 발꿈치를 가리다 못해 길거리를 쓸도록 긴 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다가 친구 집에서 잔다며 휴대전화를 걸 때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어른들은 언제나 청년들을 우려 하는 마음을 가진다. 아버지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잊어버렸고, 나는 나의 젊 은 시절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젊은이는 언제나 어른들에게 근심거리이다. 젊은이는 어른들의 근심거리 하지만 젊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래서 옛날부터 지금까지 청춘예찬 은 끊이지 않는다. 젊음은 신선함이다. 싱싱한 햇과일처럼 청년의 기개는 새 롭다. 젊은 이의 색깔은 푸른색이다. 청년은 생기발랄하다. 동작 하나 하나가 모두 활기찬 율동과 다름없다. 젊은이에게 알맞은 음악은 왈츠이다. 젊은 사 람들은 역동적이다. 그들은 웬만해서 지치지 않는다.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한 숨 자고 나면 다시 벌떡 일어난다. 수평선에 떠오르는 태양은 청년을 상징한다. 청년의 시간은 아침이다. 젊음 은 새벽이슬과 같다. 그래서 젊은이는 언제나 꿈과 희망을 의미한다. 청년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것에서 소망을 상실한다. 더 무엇을 말할까. 청춘을 예찬 하는 것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젊은 사람들에 대하여 보여준 관심은 보통 청춘예찬과 사 뭇 다르다. 물론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시각에서 젊은이들을 바라보았다. 여 기에서 우리는 디모데가 대략 어느 정도의 나이에 있었는지 추정해 볼 수 있 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젊은 사람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는 데, 이것은 결국 젊은이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를 선명하게 나타낸다. 달 리 말하자면 젊은이들에 대한 디모데의 처신에서 젊은이들에 대한 사도 바울 의 생각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젊은 남자 를 형제로, 젊은 여자를 자매로 간주한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젊은이는 남자 이면 형제이고, 여자이면 자매이다. 형제, 자매 인식 필요해 사도 바울에게 굳이 청년을 예찬할 이유가 있다면 형제와 자매라는 사실에 있 다. 사도 바울은 형제이기 때문에 젊은 남자를 좋아하고, 자매이기 때문에 젊 은 여자를 좋아한다. 형제와 자매라는 것은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는 점에 서만 성립될 수 있는 관계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아버지가 다르면 형제 도 자매도 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형제와 자매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 기는 사람들을 염두에 둔다. 젊은이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긴다면 사도 바 울은 그들을 가리켜 서슴지 않고 형제와 자매라고 부른다. 사도 바울은 하나 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젊은이들을 예찬한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형제이며 자 매이기 때문에 예찬한다. 사도 바울의 청춘예찬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순결이 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말했을 때, 이 말 은 젊은 디모데에게 순결을 요구하고 있을 뿐 아니 라, 청년들 (특히 여자 청년들)에게도 순결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들이 스스로 디모데에게 깨끗한 대우를 받을만한 깨끗함을 가지고 있어 야 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순결이야말로 청년들이 예찬을 받을 수 있는 진정한 조건이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순결을 조건으로 삼지 않고 다른 어떤 것으로 청년들을 예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젊다는 것의 가장 큰 가치는 순결에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의 가치 순결에 있어 청년이 어른에게 근심거리가 되기 전에 스스로 근심거리가 되어야 할 이유는 두발과 복장과 귀가시간 때문이 아니다. 젊은이가 어른들의 우려에 앞서 스스 로 우려해야 할 것은 순결이다. 순결은 젊다는 것의 가장 큰 가치이기 때문이 다. 진정한 어른은 다시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다만 젊은이들의 순 결을 우려할 뿐이다.
135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84)_네게 듣는 자_딤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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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4 2005-12-08
늙는다는 것 조병수 교수 합신_신약신학 늙는다는 것은 과히 나쁜 일이 아니다. 물론 노인이 되면 신체에 다양한 퇴화 가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피부는 늘어지고 뼈는 약해진다. 딱딱한 음식을 소 화하기가 힘들고 배설물을 몸에서 내보는 것도 거북스럽다. 시력은 떨어지고 듣는 것도 시원치 않다. 노인이 되면 행동에도 엄청난 변화가 온다. 말이 어눌하게 되고 걸음이 느려 진다. 손놀림이 부정확하고 무거운 물건을 나르기가 어렵다. 위급한 상황을 만나도 신속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위기에 대처하는 동작이 둔탁해진다. 노화는 곧 퇴화 의미해 게다가 노인이 되면 정신에 급격한 하강곡선이 그려진다. 판단력은 흐려지고 감정이 사라진다. 수를 계산하는 데 문제가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일 을 기억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무엇을 시도할 의욕이 감소되고 무슨 일에든지 자신감을 잃고 만다. 그러나 늙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니다. 노인에게는 긴 인 생의 오솔길을 걸어온 오랜 과 거가 있다. 노인의 과거는, 그것이 구름을 타 는 듯한 기쁨의 시간이었든지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의 세월이었든지, 인생에 아로새겨진 추억이다. 그것은 과거이기에 회상해 볼 만한 것이며 누구에게든 지 들려주어도 괜찮은 이야기 거리이다. 그래서 모든 과거는 노인의 영광스러운 훈장이며 기쁜 것이건 슬픈 것이건 추 억은 노인에게 밝은 색, 짙은 색으로 수놓은 상장(賞狀)과 다를 바 없다. 늙 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닌 것은 땀과 눈물로 가슴에 기록 한 두툼한 일기장이 남아있는 까닭이며, 세월의 비밀을 이마에 잔주름, 깊은 주름으로 보물지도처럼 그려둔 까닭이다. 그런데, 늙는다는 것은 과히 나쁜 일이 아닐뿐더러 역설적으로 정말 영광스러 운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면 청춘을 그리워하며 머리가 희어지는 것을 한탄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발끈 화를 낼지도 모른다. 노년기를 미화하는 것 도 유분수지 어떻게 늙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냐고 말이다. 세월의 주름, 보물지도 같아 하지만 이것은 노인이 된다는 것이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알지 못 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노인이 된다는 것 은 인생의 아비가 되고 사람의 어 미가 되는 것이다. 늙은 남자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며, 늙은 여자는 모든 인간의 어머니이다. 늙음은 그 자체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넉넉한 품위이다. 그래서 모든 노인에게는 인생의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품에 기대고 싶은, 이야 기 나누고 싶은, 곁에 있어도 보고 싶은 품위가 있다. 늙음은 깊은 무엇이며 넓은 무엇이다. 그것은 부모의 깊음과 넓음이다. 노인 의 깊음은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헤아림과 같고, 노인의 넓음은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넓은 베풂과 같다. 그래서 늙지 않은 사람들은 무조건 노인 앞에서 머리를 숙여야 한다. 청년이 란 얇은 것이며 청춘이란 좁은 것이다. 어린이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았어 도 노인의 지식에 비하면 종이장처럼 얇고, 젊은이가 아무리 많은 경험을 맛 보았어도 노인의 경험에 비하면 바늘귀처럼 좁다. 이 때문에 소년이 노인 앞에서 자랑스럽게 생각을 펼치는 것은 그 자체가 웃 음거리이다. 청년이 노인 앞에서 말해야 한다면 오직 부끄러움을 입을 열어 야 한다. 따라서 청년이 노인을 책망하는 것은 스스로 버러지 같은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젊은 사람이 스스로를 어리석은 자로 증명하는 것은 참으로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노인 앞에서 자랑은 금물 늙는다는 것이 과히 나쁜 일이 아니며 심지어는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일이라 는 것을 아는 사람은 늙은 남자를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늙은 여자를 어머니 처럼 존중할 것이 당연하다. 그런 사람은 항상 부모를 모시고 있는 것과 같다 는 점에서 형언할 수 없이 엄청난 행복을 얻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바꾸어 말 해서 어떤 노인에게서든지 부모의 모습을 발견하는 사람은 늙음의 오묘한 비 밀에서 보화를 캐낸 사람이다. 이쯤 말하면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쓰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이 급히 화제 를 바꾸면서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늙은 여 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애써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 아도 충분히 알아들을 것이다. 대책 없는 노후 대책과 그 해법 김수흥 목사 쪾합신초빙교수 최근 자녀들의 불효가 심해지면서 사람들의 노후 대책에 비상이 걸렸다. 신 문, 라디오 방송, TV 방송 등에서 자주 노후 대책에 대해서 사람들이 토론 하 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이 토론하면서 내놓는 대책을 들으면 첫째, 이제는 시대가 시대이 니만큼 자녀들을 향해서 기대를 많이 갖지 말아야 한다는 소극적 대책을 내 놓는 사람들도 있다. 둘째, 노인들이 끝까지 일을 해야 자녀들한테 손을 벌리 지 않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셋째, 현찰이나 부동산을 자녀들에 게 다 주지 말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얼마만큼 손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 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찍이 몽땅 다 주고 나 면 자녀들은 마음이 변하여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부모를 가볍게 여기 고 무시하기까지 하는 고로 죽기 조금 전에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 이 최고의 노후 대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노후 대책들을 가지고 우리가 만년(晩年)을 만족하게 살아 갈 수가 있을 것인가? 이런 정도의 노후 대책으로 만년을 평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턱없이 부족한 대책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노후를 준비해야 할 것인가? 첫째, 지금까지 우리들의 부모님을 잘 모시지 못했던 불찰과 죄를 하나님께 철저히 자복하는 일이 훌륭한 노후 대책이다. 부모를 학대한 사람으로서 만년 이 좋은 사람이 일찍이 없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뼈를 깎는 심정으로 죄를 자복해야 한다. 둘째, 평상시에 우리 자녀들을 교육할 때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교육해야 한다.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서 자녀들을 교육하면 훗날 부모를 귀하게 알고 공경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일찍부터 자녀 교육을 잘해야 한다. 우리는 자녀 들을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도록 교육해야 한다. “주님의 훈계로 교육하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녀들을 교육해 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자녀들이 하나님 의 사람이 되면 그 부모를 섬기고 봉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되어 있다. 셋째, 자신의 노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다윗은 기도하기를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라고 기도했다(시 71:9). 다윗은 자기가 기도한대로 최후를 복(福)되게 마쳤다. 성경은 말씀하 기를 “저(다윗)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매 그 아들 솔로 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했다(대상 29:28). 올바른 기도는 반드시 응 답되는 줄 믿고 기도에 힘을 써야할 것이다(막 9:29). 넷째, 최고의 노후 대책으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다. 이런 말씀은 참으로 이상한 말같이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이야말 로 최고의 멋있는 노후 대책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섬기면 우리 자신들이 귀한 존재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놀랍고도 확실한 노후 대책을 가지고 살아 야 한다. 노후를 은혜롭게 살고 기쁘게 살면서 염려가 없어야 할 것이다. 성 경은 우리를 향하여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거듭 지금도 부탁하고 있 다(요 14:1; 빌 4:4).
134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83)_네게 듣는 자_딤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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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2 2005-11-24
조병수의 목회편지(83) 딤전 4:16 네게 듣는 자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청중이 있다는 것은 즐거움 그 자체이다. 눈빛이 총명하게 빛나면서 귀를 기 울여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 말하는 사람의 기쁨은 헤아릴 수가 없다. 고 개를 끄떡이며 노트 위에 열심히 받아 적는 사람들을 보면 말하는 사람의 목 소리는 저절로 높아진다.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렇지, 그렇지 연발 하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사람은 준비하지 않은 것까지 토해낸다. 마침내 거기에는 폭발할 것 같이 뜨거운 열기가 끓어오른다. 그런 자리에서는 말하 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듣는 사람은 말하 는 사람의 생각을 알기에 웃으면 함께 웃고 울면 함께 운다. 청중과의 교감에 보람느껴 이 때문에 말하는 사람에게는 듣는 사람에 대한 책임이 있다. 물론 말하는 사 람이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가 없다.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은 디모데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에게는 더욱 절실한 문제였다. 디모데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져야 할 책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특히 구 원에 관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디모데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자로서 자기 자신 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못한다면, 특히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가 얼마나 많은 말을 할지라도 그 모든 말은 허사가 되고 말 것이 다. 그것은 공허한 씨부렁거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디모데가 자기 자신 뿐 만 아니 라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 대하여도 지대한 관심을 가질 것을 권면한다. 하 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하면서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할 것이 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하여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하나님의 말씀 을 듣는 사람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디모데는 그 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해야 한다. 디모데는 말로 끝나는 말을 해서는 안 된 다. 디모데의 말은 반드시 듣는 사람들을 구원에 도달하게 해야 한다. 최종 관심은 구원에 이르는 것 그러면 이런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친절한 조언을 주었다. “네 자신과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 일들을 고 수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 구원할 것이다”(필자역).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 는 사람이 자신의 구원 뿐 아니라 듣는 자의 구원에 대하여 책임을 지기 위해 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행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사돈 남 말하는 격이 되고 만다. 솔직히 말해서 듣는 사 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는 설교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설교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자신이 전하는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 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청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설교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 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허망하기 그지없다. 그런 설교는 청중의 귓가에서 쟁쟁거리는 소리로 끝나고 만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먼저 그 가르침에 설득될 때 비로소 하 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가 있다. 그래서 설교의 능력은 설교 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청중을 설득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 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설득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설교는 허망한 소리 안 되어야 반응하지 않는 청중 앞에서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죽음이다. 산만하게 사방 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조는 사람들 앞에서, 팔짱을 끼고 멍하니 앉아있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은 무덤을 파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청중이 반응하지 않는 까닭이 설교자에게서 바른 삶 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면 설교자는 지옥에 있는 것이다.
133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82)-진보를 나타내라_딤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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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5 2005-11-11
조병수의 목회편지(82) 딤전 4:15 진보를 나타내라 역사는 속도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꾸준히 진보 가 있었다. 발빠른 짐승을 탈것으로 이용하던 인간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 기 관을 발명하여 이동거리를 좁혔다. 소리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인간의 염원 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실현되기까지는 그 이전의 시간을 고스란 히 희생해야 했다. 그만큼 소리의 속도에 도달한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 이었다. 인류는 속도 향상 추구해 와 하지만 인간은 속도의 진보에서 속도를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아주 가까운 과거에 음속의 한계를 넘어서자마자 빛의 속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 고 그런 말을 쓴지 얼마 되지 않아 생각의 속도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인 간은 속도에서 진보한다. 사도 바울은 무한의 속도를 맛본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만세의 왕이신 하나님을 믿었고 영원한 생명을 담지하였다(딤 전 1:16-17) . 사도 바울이 하나님에게서 느낀 시간의 속도와 영원한 생명에 서 감지한 시간의 속도는 이미 인간의 계산방식을 넘어서 있는 것이었다. 하 나님의 빛이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이듯이(딤전 6:16) 하나님의 속도도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속도이다. 신의 속도는 영원의 속도이며, 영원에서는 속도가 순간보다도 빠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속도는 이 미 속도가 아니기 때문에 빠름도 느림도 없다. 그래서 구태여 비유하자면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을 뿐이다(벧후 3:8). 이런 사도 바울이 진보를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음속이나 광속 혹 은 생각의 속도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진보를 말한다면 신의 속도를 알고 있 는 사도가 진보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역으로 말해서 시간에서의 속도를 아는 사람들이 진보를 추구한다면 영원에서의 속도를 아는 사람들이 진보를 추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진보를 나타내는 것은 신의 속도와 영원의 속도를 알고 있는 신자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진보하는 것을 그렇게 힘썼을 뿐 아니라(빌 3:14) 신자들에게서도 믿음의 진 보가 이루어지기를 그렇게 힘썼던 것이다(빌 1:25).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 의 생각은 매우 간단하다. 신자는 마땅히 진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는 신자의 생명력 사도 바울은 신자들이 진보하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들을 주의하라, 이것들 안에 머물라” (나의 번역). 사도 바울은 “이 것들”로 앞에서 언급했던 읽는 것, 권하는 것, 가르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13). 진보를 위하여 신자가 고려해야 할 사항은 성경을 연구하 여 권면하고 교육하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소홀 히 하거나 태만히 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리고 성경연구와 그에 기초한 권면 과 교육은 신자들의 삶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일들은 신자에게 삶의 일부가 아 니라 삶 자체여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신자는 반드시 진보하며, 그의 진보 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게 나타난다. 오늘날 우리는 퇴보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불안한 자세로 현실을 지 탱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퇴보하지 않기 위해서 불쌍하게 몸부림친다. 게 다가 퇴보를 막아보겠다며 정말 기괴하고 이상한 방법들을 찾느라고 혈안 이 되어 있다. 정답은 신의 계시 속에 들어있건만 우리는 인간의 지혜에서 얻어 낸 오답을 선호한다. 그런데 더욱 불행한 것은 그런 행동이 우리의 퇴보를 얼 마나 더 부채질할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인간적 인 방법으로는 우리의 퇴보가 더욱 속도를 내고야 말 것임을 알지 못한다. 퇴보 염려보다 진보 관심가져야 물론 우리는 퇴보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 야 할 것은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는 퇴보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뿐 아니라 진보하지 못하는 것도 두려워해 야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은 우리 시대의 교회들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 럼 보인다. 왜냐하면 진보에 대한 아무런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는 생각의 속도는커녕 빛의 속도도, 빛의 속도는커녕 소리의 속도도, 소리의 속도는커녕 말굽의 속도도 못 내고 있다. 마치 신의 속도도 영원의 속도도 알 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132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81)-가볍게 여기지 말라_딤전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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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5 2005-10-28
조병수의 목회편지(81) 딤전 4:14 가볍게 여기지 말라 초심(初心)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말은 특히 나 에게 목사 안수를 받던 날을 기억나게 한다. 나는 신학교 동기생들보다 훨씬 늦게 목사가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 공부를 하다가 그만 번번히 기회를 놓치 고 말았기 때문이다. 목사 안수를 받던 날, 안수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 마침 내가 제일 나이가 많 다는 이유로 축도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귀한 직분 을 받는 것이 너무나도 송구스러워서 축도의 첫 마디를 꺼내놓고는 왈칵 눈물 을 쏟아내고 목이 메어 한참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다보니 지금은 그때의 감격이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첫 마음이 사라지 고 만 것이다. 처음 축도 감격 못잊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속에 있는 은사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개역개 정)고 권면한다. “네 속에 있는 은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실하지 않지 만, 문맥상 목 회의 은사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앞 단락에서 목회와 관련된 몇 가지 사항들을 디모데에게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디모데는 신자들에게 명하고 가르쳐야 하며(11), 신자들의 본이 되어야 하고 (12), 성경을 연구하여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13). 이런 모든 행위는 목회를 가리킨다. 목회는 디모데가 가지고 있는 은사이다. 디모데는 목회라는 은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네 속에 있는 은사”가 목회를 뜻한다는 것은 그것이 “장로회의 안수와 함 께 예언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장로회는 목 회자를 세우는 공식적인 기관이며, 안수는 목회자를 세우는 공식적인 방법이 다. 예언은 장로회가 목회자를 세울 때 행사하는 신기한 언어사건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목회자의 사명을 체계적으로 일러주는 설교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무리 가 없다. 이렇게 볼 때 디모데가 가지고 있던 은사는 장로회의 안수와 함께 예언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목회의 은사였던 것이다. 목회 은사 가진 디모데 디모데는 장로회의 안수와 함께 예언으 로 말미암아 목회의 은사를 받았다. 이 것이 디모데에게 목회자로서의 첫 걸음이었다. 이때 디모데는 목회자의 뜨거 운 소명을 받았을 것이다. 디모데는 목회의 은사로 말미암아 그 영혼이 불처 럼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을 목회자로 안수하는 장로회의 신뢰 앞에서 순결한 목회자의 삶을 각오했을 것이다. 신기한 언어사건으로든지 아니면 목회자의 소명을 일러주는 설교로든지 예언 을 들으면서 디모데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목회자의 길을 다짐했을 것이 다. 이런 것들이 목회자로서 디모데의 초심이었을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속에 있는 은사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권면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내다본 것 같다. 디모데도 초년병 목회자로서 가졌던 순수한 초심을 잃어버 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순수한 초심 잃을 수 있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건을 연습하라고 말하거나(7),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말하거나(13), 진보를 나타내라고 말하거나 (15), 이 일을 계속하라고(16) 다그치는 것 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사도 바 울은 시간이 지나면서 디모데의 초심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초심이 변하지 않도록 잡아주었다. 초심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다. 처음에 직분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업에 대 하여 순수한 열정을 가졌던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냉랭해지고 세속적인 모습 으로 변한다. 목회자는 교회의 생리를 환하게 배우면서 능구렁이 목사가 되 고, 성도들은 교회의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무감각한 각질 신자들이 된다. 열정 식지 않도록 노력해야 목회자에게서도 성도에게서도 처음으로 직분을 받을 때 맛보았던 감격이 사라 지고 모두 요령껏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된다. 교회의 타락은 이렇게 시작 된다. 교회의 타락의 성향은 초심의 감동을 상실한 매너리즘에서 극명하게 나 타난다. 교회의 회복은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초심 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131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80)_성경연구_딤전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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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1 2005-10-12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87jo.hwp딤전 4:13 성경연구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성경 읽기는 새 피를 공급하는 일” 어떤 교회에서 성경을 읽는 법에 관해서 특강을 했다. 여기에서 나는 성경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먼저 시력에 맞으면서 휴대하기 좋고 해설보다는 관주가 들어있는 성경을 마련할 것을 주문하였다. 성경을 읽 을 때는 지울 수 있는 연필, 지워지지 않는 펜, 색연필(형광펜) 그리고 자, 포스트잇을 갖추어야 하고, 기왕이면 노트를 곁에 두는 것이 좋다. 성경을 읽으면서 내용이 달라지는 부분에서 문단을 나누는 표식을 기입하고, 중요한 문장에 여러 가지 줄을 그어 체크하며, 기억해야 할 단어에는 동그라 미, 세모, 네모와 같은 도형을 그린다. 난외 메모는 아주 중요하다. 여기에 장(章)의 요점이나 단락의 요점을 적어두면 나중에도 유익하다. 요점 대신에 제목을 달아두는 것도 괜찮다. 가능하다면 들은 설교의 키포인트를 날자와 함 께 난외에 기입할 수도 있다. 이와 더불어 반복어, 문학기법, 신학적인 중 요 단어, 그리고 설교에서 강조된 말들을 주의 깊게 살펴 기록해 두어야 한다. 성경에 메모하는 습관 중요해 성경에 집착해야 하는 것은 성도들뿐 아니라 목회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너무나 분주하고 바쁜 일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연구하는 일을 게을 리 하거나 소홀히 한다. 그래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경을 읽지 못 한 것을 후회하지만 그 다음날이 되면 다시 까맣게 잊어버린다. 나는 평소에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 다. 우리는 성경을 독서해서는 안되고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 자면 성경은 밥이 아니라 피이다. 밥은 한두 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피 는 항상 공급받지 않으면 생명에 위험을 가져다준다.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 것은 끼니를 거르는 것이 아니라 피를 수혈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을 읽는 일에 착념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읽는 것에 착념하라고 말한 것은 이해하기에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읽으라는 말이다. 앞에서 사도 바울은 경 건을 연습하라고 일러주었는데(딤전 4:7), 경건의 연습에서 한 가운데 자리 를 차지하는 것은 성경을 연구하는 일이다. 성경을 연구하지 않은 채 다른 어 떤 방식으로 경건을 연습하는 것은 길을 바로 찾은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경건은 성경 연구로부터 시작해 성경연구는 사람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세우고 더러운 자신을 발견하게 만 든다. 사람은 성경을 연구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우신 분이며 자신이 얼 마나 죄악된 존재인지를 깨닫는다. 경건이란 인간의 불의로부터 하나님의 의 로 나아가는 것이다. 경건은 인간의 더러움에 대한 단절이며 하나님의 거룩함 에 대한 연결이다. 경건을 불러일으키는 성경연구로부터 진정한 권면과 교훈이 나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말한다. 성경 연구를 통하여 경건을 연습하는 사람이 권면하고 가르칠 때 큰 효력을 발휘한 다. 그래서 성경연구는 권면과 교훈을 힘있게 만드는 동력이라고 불러도 문제 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이토록 기독교회가 성장한 시기에도 권면이나 교훈이 별 능력을 나타 내지 못하는 이유는 경건의 동인이 되는 성경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권면도 받지 않고 교훈도 받지 않는다. 권면과 교훈이 거절되면 어느덧 기독교회는 쇠약해지고 만 다.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밥을 먹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피를 공급받지 못하 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읽는 것에 착념 하라”고 힘주어 말했다. 성경을 잘 읽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는 방법을 끊임 없이 개발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앞서 이런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열심히 배우기도 해야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성경연구방법을 개발하 는 데 힘을 써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과 같아 기계의 내부구조를 알아보겠다고 멀쩡한 기계 몇 대를 망칠 것도 각오하는 판 에 성경을 연구하기 위하여 성경책 몇 권쯤 망칠 것을 각오하지 않는 것은 매 우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하나님도 가까이 하시듯이(약 4:8), 성경을 가 까이 하는 사람에게 성경도 가까이 할 것이다.
130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79)_나이 어린 교사(딤전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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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97 2005-09-30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86jo.hwp조병수의 목회편지(79) 딤전 4:11-12 나이 어린 교사 내가 성경을 좋아하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 매우 작은 이유이기는 하지만 -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선다는 데 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경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할 뿐 아니라 교정한다. 우리가 그러해야 할 것이 라고 생각하는 것을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우리가 그렇지 않아 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성경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것과 다윗이 유다의 왕으로 세워진 것이 그 렇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다말, 라합, 룻, 밧세바가 포함된 것이 그렇 다. 아마도 이런 현상을 가장 잘 요약해놓은 것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 로 취하시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이것은 정말이지 사람의 상식을 완전히 뛰어넘는 신적인 발상이다. 상식을 뛰어 넘는 성경적 사고 사도 바울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 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고 선언하였을 때 신적 인 발상을 그대로 가져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선언 앞에서 인종과 신분과 성별의 장벽이 고스란히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도 기독교회에 지방과 학력과 직업 같은 나부랑이들이 패싸움의 요소로 군림하고 있는 것은 볼썽 사나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저 위의 선언에서 연령의 차이가 언급되 지 않은 것이 아쉽다 싶었는데 사도 바울은 우리의 마음을 읽었는지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이고 있다.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 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11-12절).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육의 사명을 부여하였다. 뒤에서 반복하겠지만 이 것은 디모데가 계속해서 힘써야 할 사항이다(13절). 그런데 이 사명을 감당해 야 할 디모데에게 한 가지 작지 않은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연소한 사 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연소함이란 복음을 위한 사역에서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디모데가 속한 교회에는 분명 히 아버지나 어머니와 같은 연배의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5:1-2). 그들 에 비하면 디모 데는 아들과 같은 나이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 리다고 해서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연소한 사람들이 세계를 뒤흔들었던 사건들을 적지 않 게 알고 있다. 이런 사례는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된다. 특히 종 교개혁 시대에 불링거나 칼빈은 이에 대표적인 인물이다. 불링거는 27세의 젊 은 나이에 저 유명한 쯔빙글리의 후계자로 취리히 시를 지도하는 목사가 되었 고, 불링거보다 다섯 살 아래의 칼빈은 27세에 개혁교회의 헌장과도 같은 기 독교강요 초판을 출판했다. 이 두 사람이 데뷔한 나이가 같은 것은 단순히 우 연일까? 지나가는 듯이 자문하자면 우리는 그들과 같은 젊은 나이에 무엇을 했는가? 연소한 나이에 큰 일을 한 것은 성경의 세계를 들여다 본 그들에게 오히려 범상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연소자도 큰 일 할 수 있어 중요한 것은 나이가 많고 적음이 아니다. 나이로 순위를 매기거나 자리를 결정하는 것 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어차피 인종, 신분, 성별의 장벽을 허문 사도 바울이 이제 와서 나이의 장벽을 허물지 못할 이유 가 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요소를 넘 어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본이 되는 것이다(12절). 본이 되어야 할 내용인 이 한 단어, 한 단어는 모두 심각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사실 이런 여러 가지 사 항에서 모범이 된다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만일에 이것들에 모범적인 사람이 된다면, 그는 나이와 상관없이 교사의 임무를 수행할 자격이 있다. 나이를 많이 먹고도 본이 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교사의 자격이 없고, 나이가 비록 어려도 본이 되는 사람 은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도 남는다. 사도 바울은 또 하나의 상식을 깨뜨렸다. 아니, 그것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반드시 깨져 야 할 상식이었다. 연소함은 교사가 되는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될 수 없다. 말을 맺기 전 에 한 가지 더 묻자면 우리는 나이 어린 교사를 존중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에게서 겸 손하게 배울 수 있을까?
129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78)_끊임없이 돌아가야 할 대상(딤전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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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3 2005-09-16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85jo.hwp조병수의 목회편지(78) 딤전 4:10 끊임없이 돌아가야 할 대상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죽음 앞의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 지난 주 사랑하는 벗의 아들이 죽었다. 21년하고 몇 달을 살고… 친구는 그 슬픈 소식을 안고 아들의 시신이 있는 영국으로 떠나던 날 아침 일찍 나에 게 전화를 걸어 밑도 끝도 없이 말했다. “너무 힘들어서 전화를 했어”, 그 리고 한 동안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더니 피를 토하듯 한 마디를 더했 다. “세윤이가 죽었어.”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뭐가 어쨌다고, 누구한테 무 슨 일이 일어났다고… 머리 속에서는 콩 볶듯이 여러 외침이 엇갈리며 충돌 했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침묵도 반응일까. 고통 가운데서 며칠이 지나 그가 기도하는 친구들에게 보낸 이메일의 한 구 절은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나를 또 다시 흔들어 놓았다. “평생 눈물 속에 서 두고두고 풀어야 할 한 가지 숙제를 받은 것 같습니다.” r 죽음 앞에서 던지는 질문 죽음 앞에서 우리에게 무슨 힘이 있는 것일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죽음의 공포를 이길 힘이 아니다. 인생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의미에서 죽음이 두렵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슬픔을 극복할 힘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이 죽는 것이야 무섭지 않다. 하지만 낳 고 기른 자식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고, 말을 나눌 수 없고, 살을 비빌 수 없게 되었다는 그 슬픔을 이길 힘이 우리에게 있는 것일 까? 그 옹알거리며 손짓발짓하던 아들의 모습을, 무릎이 깨져 방울처럼 눈물을 떨구던 아들의 모습을, 받아쓰기에 별 다섯 개를 맞고 입을 다물지 못하던 아들의 모습을, 밤샘공부로 얼굴이 새하얗게 되었던 아들의 모습을, 아르바 이트를 마치고 돌아와 피곤을 이기지 못해 코를 골던 아들의 모습을 내 친구 는 머리 속에서 지워버릴 힘이 있는 것일까?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10절)이다. 살 아계신 하나님, 그 분만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신다. 죽음이 두려움뿐 아니 라 슬픔이 라는 무기로 우리를 장악하려고 할 때, 우리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 님에게서만 평안을 얻는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고백은 백 번 옳다. “당신 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셨으니,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 할 때까지는 평안하지 않나이다”(Tu nos fecisti ad Te, et cor nostrum inquietum est, donec requiescat in Te).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죽음 의 슬픔 앞에서 끊임없이 돌아가야 할 대상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만 죽어야할 인간은 소망을 얻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는 복음을 전하는 길을 쉼 없이 달려갔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복 음을 위하여 숨을 다하고 힘을 다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사도 바울이 보여 준 모습은 수고와 진력이었는데, 그 원동력은 오직 한 가지였다. “우리 소 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하나님만이 그 해답일 뿐 아들의 시신을 보고 오열하는 친구에게 못할 말을 썼다. “그저 주님의 은총이 너와 네 가족에게 임하기를 빌 뿐이다. 말문이 막히 고 가슴을 에우는 이 슬픈 소식 앞에서 너에게 무슨 위 로를 하겠니. 하나님 께서 당신의 큰 뜻을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어리석음에 더 큰 어리석 음을 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네 아들은 내 아들과 같아. 그래서 마 음이 아프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내 아픔을 네 아픔에 견주겠 니. 너와 네 가족의 눈물에 내 눈물을 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와 네 가족은 세윤이를 하나님께 먼저 보내놓고 얼마나 오랫동안 슬퍼할까. 그 아 이의 싱겁게 웃는 모습이 눈에 아리게 떠오른다. 그래, 눈물을 참지 말아 라. 우리는 앞서간 아들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비로소 독생자를 주 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않겠니.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 서 너와 네 가족에게 정말 육체를 가지고는 도무지 이겨낼 수 없는 지독한 은혜를 주시는구나… 멀리서 외로이 슬픔을 견디어야 할 너와 함께 있지 못 하는 것이 무척 죄스럽다. 용서해라.”
128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77)_금생과 내생(딤전 4: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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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9 2005-09-01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84jo.hwp조병수의 목회편지(77) 딤전 4:8b “금생과 내생”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나는 성도들과 상담하면서 내용의 폭이 매우 크다는 것을 발견한다. 심지어 는 나의 상담은 이 사람과 말할 때와 저 사람과 말할 때 극심한 모순을 일으 키기도 한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먹고사는 일에 매달린 성도와 상담할 때 면 현실 세계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믿음의 조상들이 바라보았던 내생을 바 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반면에 세상을 한탄하여 집안일과 직장 일을 때 려 치고 여러 기도원으로 전전긍긍하면서 주님의 재림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성도와 상담할 때면 빨리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스스로 모순 을 느끼다가도 이 모순이야말로 참으로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확신한다. 현실과 이상의 모순 느껴 사도 바울은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전할 때 두 종류의 철학자들 을 만났다(행 17:18). 사실 한 마디로 설명하기에는 벅차지만 스토아 철학자 들은 이상세계를 사모하는 사람들이었고,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현실세계 를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사상들은 이데아(이상)를 추구하는 플라톤의 정신과 우시아(현실)를 부르짖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 과 관련이 없지 않다. 고래로 사람들은 현실과 내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려 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은 이 세상에 목매는 현실주의자 와 피안의 세계를 동경하는 내세주의자라는 두 종류로 압축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새로운 길을 갔다. 사도 바울은 경건의 유익을 언급한 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8절). 경건 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을 주는 육체의 연습과 달리 범사에 유익하다. 사도 바울이 ‘범사’라는 말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시간 적인 범위이다. ‘범사’는 경건의 유익이 포괄하는 시간을 말한다. 그래서 ‘범사’라는 말을 바로 이어서 금생과 내생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경 건은 현실에만 약속을 줄 뿐 아니라 내세에도 약속을 준다. 경건은 현실적 인 약속과 내세적인 약속의 기반이다. 경건은 현실과 내세를 위한 것 경건은 금생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 경건은 현실 생활에 유익을 준다. 경건 으로 말미암아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진다. 그는 아주 작은 일에도 기 쁨을 얻는다. 경건한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한다. 그래 서 그는 이 세상에서 매우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삶을 영위한다. 또한 경건 은 내생을 위한 약속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는 하나님의 나 라에 들어간다. 그는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 다. 경건한 신자는 천국에서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맛본다. 경건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도 바울의 시야에는 금생과 내생이 한꺼번 에 들어온다. 그의 눈은 금생에 가려 내생을 보지 못하거나, 내생에 가려 금 생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연습이 약간의 유익을 주는 것과 달 리 경건의 연습은 금생과 내생을 위한 약속을 허락하는 유익이 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건을 연습하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에 있다. 사실상 이 권면은 디모데뿐 아니라 온 세상의 신자들이, 그리고 오 고 오는 모든 시대의 신자들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미쁘다 이 말이 여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하도다”(9절). 미래는 현실의 연속선상에 있어 사도 바울은 단지 현실주의자도 아니고 종말론자도 아니다. 그는 현실과 내 세를 다같이 수긍한다. 그에게는 금생과 내생이 다같이 중요하다. 그는 금생 을 위해서 내생을 내버리지 않으며 내생을 위해서 금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금생을 중시하기 때문에 내생도 중시하며 내생을 중시하기 때문 에 금생도 중시한다. 그래서 그는 자주 “살든지 죽든지”라는 표현을 사용 했다. 육체를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육체를 가지고 성도들과 함께 있는 것도 귀한 일이다. 사도 바울이 전한 기독교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철학의 세계와 다른 길을 가 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몸의 부활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기독교는 스토 아 철학자들과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이 보기에도 새로운 종교임에 틀림없었다 (행 17:18-19).
127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76)_육체의 연단(딤전 4: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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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7 2005-08-18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83jo.hwp조병수의 목회편지(76)-딤전 4:8a “육체의 연단” 조병수 교수_합신 구약신학 나는 자주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내가 만일에 조선시대나 그 이전에 출생했더 라면 서른 살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하지만 이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누가 보든지 나의 왜소한 체구를 보면서 건강한 사람 이라고 생각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는 몸에 힘이 붙는 것을 느낀다. 다름이 아니라 거의 매일 밤 한 시간 이상 걷기 때문이다. 때로는 몸이 근질근질해서 또는 날씨 가 좋아서 걷기도 하지만, 그러나 사분지 삼 이상은 아내의 득달같은 성화 를 이기지 못해서 밤마다 천변을 걷는다. 처음에는 조금만 걸어도 숨이 가쁘 고 다리가 후들거렸는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걷다보니 허약하기만 하던 내 몸이 조금씩 좋아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운동 때문에 좋아진 몸 사도 바울은 육체를 연단하는 것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육체를 연단 하는 것에 “유익이 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달리기, 격 투, 레슬링과 같이 육체를 연단하는 법에 관해서 여러 가지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육체를 연단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창조원리와 관계 가 있다. 그 까닭은 육체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창조 와 관련하여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육체를 만드시고 그 다음에 영혼을 불어넣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하나님은 영혼뿐 아니라 육체를 만드신 분이시다. 또한 육체를 연단해야 하 는 이유는 구원원리와 관계가 있다. 그 이유는 육체도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 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우리의 육체에도 효과 적이다. 그래서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성령이 거주하는 곳이 된다. 사 도 바울은 이런 두 가지 원리에 기초하여 육체를 연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강하지 않은 것도 불경이다. 몸을 연단하지 않는 것은 몸을 창조 하시고 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결코 사 도 바울은 육체를 멸시하는 영지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 몸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하지만 사도 바울의 생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육체의 연단과 관 련해서 어떤 제한을 두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는 육체연단이 만사에 유익하다고 말하지 않고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토를 단다. 몸을 연단하는 것은 제한적인 의미에서 유익할 뿐이다. 이것은 몸을 연단하는 것 이상으로 다른 무엇을 연단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이미 바로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경건이다. 하지만 육체의 연단에 약간의 유익이 있다는 말은 육체의 연단을 부정적으 로 보는 시각이 아니다. 부정적이라면 경건의 연습에 비하여 그럴 뿐이다. 다시 말해서 육체의 연단이 부정적이라면 경건의 연습은 없이 육체의 연습 만 하는 경우에 그렇다. 바로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영혼을 부인하는 물 질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경건을 연습을 하는 사람은 육체도 연습해야 한다. 육체의 연습에도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은 육체를 연단하는 것은 때때로 경건 의 연습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육체가 약해지면 경건을 연습하는 것 에 문제가 생긴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자주 일어나 는 위장병을 위해서 포도주를 조금씩 사용하라는 말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 에서이다. 경건 위해 건강한 육체를 그러나 역으로 육체를 연단하는 사람은 경건을 연습해야 한다. 경건을 연습 할 때 육체를 연단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를 얻는다. 육체를 연단하지만 경건 을 연습하지 않는 것은 몸을 얻고 영혼을 잃는 것이 된다. 그것은 땅은 알지 만 하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소행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 게 성경연구와 기도와 전도에 착념할 것을 말한다. 사도 바울이 살았던 시대는 신화와 철학이 지배하던 시대로서 인간론에서 영 혼만을 중시하는 영지주의와 육체만을 중시하는 물질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 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경건의 연습과 육체의 연단을 강조함으로써 영지주의도 물질주의도 거절하고 기독교의 새로운 이상을 펼치고 있다.
126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75)_경건 없는 신자는 미신에 빠진다딤전(4: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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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2 2005-08-03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82jo.hwp딤전 4:7b “경건 없는 신자는 미신에 빠진다”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나는 수년 째 신학교의 신입생들에게 동계 그리스어 강좌를 지도하고 있다. 합격자들은 입학식도 하기 전에 고전어 강좌에 참석하려니 혹독한 대가를 치 러야 한다. 그 대가가 혹독한 이유는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 때문만은 아니 다. 단어를 외우고 문법을 익히며 문장을 깨우치기 위해서 강좌가 막 끝난 오후시간부터는 개인적으로든지 삼삼오오 그룹으로든지 새벽까지 공부를 하 면서 머리에 쥐가 나는 고통을 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중에 한동안 사회생활을 하다가 신학교에 입학하는 사람들은 훨씬 더 비 싼 값을 치르게 된다. 기도와 각오 끝에 은혜를 받고 목회자가 되겠다는 감 격을 안고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부푼 꿈은 그 강좌기간에 산산이 깨진 다. 고전어 강좌에는 은혜가 없다. 그렇게 동계강좌를 지옥같이 보내는 동 안 나는 독일사람들의 짧은 격언을 자주 반복해서 말해준다: “연습이 대가 를 만든 다” (�ung macht Meister). 연습 외에 왕도 없어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 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도 저절로 경건해지지 않는다. 날 때부터 경건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며, 가만있어도 경건하게 되었다는 것은 속 임수이다. 경건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경건은 자연발생적인 현상과 거 리가 멀다. 만일에 누군가가 가만히 있었는데도 경건해졌다면 그것 자체가 불경이다. 경건은 단순히 마음속에 소원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건을 소원하는 것과 경건 그 자체는 엄격하게 다른 것이다. 경건이란 심정 적인 무엇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건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는 너무나도 명쾌하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경 건은 연습의 결과일 뿐이다. 연습하지 않으면 경건은 없다. 경건에 도달하기 를 소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연습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경건 에 이르기를”이란 말보다 “연습하라”는 말에 더 강한 액센트가 있는 것으 로 생각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경건하라”고 권면하지 않고 “경건에 이 르기를 연습하라 ”고 권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건은 연습의 대가이다. 그 러므로 연습해야 한다. 경건 역시 연습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이 의도하는 경건의 연습은 육체의 연습과 비교할 때 큰 차이점에 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흡사한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경건의 연습을 말하면서 육체의 연습을 대조시킨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 이 있다”(딤전 4:8). 우리가 다 잘 알다시피 육체의 연습은 단련, 연마, 훈 련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선수들은 육체의 연습을 통해서 근육을 강화 하고, 지구력을 향상시키며, 민첩성을 얻는다. 그런데 이 같은 소득은 엄청 난 육체적인 노력을 전제로 한다. 피땀어린 훈련을 통과한 훌륭한 운동선수 만이 세인의 주목을 받는 법이다. 이런 사실은 경건의 연습에도 마찬가지이다. 경건의 전제는 연습이다. 비 록 그것이 방식에 있어서 육체적인 연습과 다르다 할지라도, 연습에 임하는 사람이 자기절제, 규칙적인 생활, 끝없는 도전, 이런 요건들을 피할 수 없다 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경건의 연습을 하는 사람도 잡다한 것들 에 대한 신경을 끊고 집중과 몰두를 필요로 한다. 최 소한의 생활시간표가 없 는 사람이 경건에 도달한다는 것은 거의 바랄 수 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 다. 영적인 목적을 설정하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경건의 연습과 상관이 없 는 것이다. 경건의 연습도 연습이기 때문에 육체의 연습과 비슷한 요건을 채 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연습 없는 경건은 환상일 뿐 조금 뒤에 사도 바울은 경건의 연습과 관련된 몇 가지를 디모데에게 일러줄 것이다(딤전 4:13). 경건의 연습에 많은 사항들이 있겠지만 대표적인 예를 들면 틀림없이 성경연구, 기도, 전도와 같은 사항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 야 한다. 이런 사항들에 전심전력으로 연습하지 않으면 결국 신자는 헛된 미 신 (신화)이나 따르는 한심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런 사람은 마치 경건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못할 것이다. 연습은 경건을 만든다. 칭찬 받을만한 경건은 칭찬 받을만한 연습의 결과이 다. 그러므로 연습하라.
125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74)_신화창조(딤전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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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0 2005-07-22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81jo.hwp조병수의 목회편지(74)딤전 4:7 신화창조 어린시절 우리는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동네형의 이야기를 듣느라고 시간가 는 줄을 몰랐다. 그 형이 훈련 중에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총알을 맨손으로 잡았다며 사방에 침을 튀기면서 말할 즈음에는 우리 모두가 자기도 모르게 야! 하고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한 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그 형이 골목길 을 지나가다가 아이들이 던진 야구공에 머리를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신화는 보기 좋게 깨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미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신화를 좋아할 뿐 아니라 또한 자기를 자랑하기 위하여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내기를 좋아한다. 신화는 인간이 자신 의 불만을 극복하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만을 표출하려는 시도이 기도 하다. 사람들은 신화를 좋아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건을 연습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먼저 망령되고 허 탄한 신화를 버리라고 권면한 것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사도 바울이 보기 에 경건의 가장 큰 적은 신화였다 . 신화는 경건의 방해물이다. 그래서 경건 을 연습하려면 반드시 신화를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뭔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님에 틀림없다. 사도 바울이 오래 전에 앞에서도 언급했거니와 신화는 당 시에 유행하던 창조설화와 같은 것이다(딤전 1:4). 하지만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신화를 구태여 경건에 거스르는 것으로 말하 는 데는 까닭이 있다. 그것은 신화가 그냥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설화 가 아니라는 점이다. 신화는 누군가가 자기를 위하여 만들어내는 이야기이 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하고 싶은 내용은 신화를 만들려고 애쓰지 말 고 경건에 이르려고 노력하라는 것이다. 신화는 망상이고 경건은 능력이다. 신화는 망상, 경건은 능력 목회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일 중 하나는 자기신화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 께 예배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하는 중에도 자기를 드러내는 데 힘을 기울인다. 자기가 얼마나 훌륭한 목회자인지, 또 자기의 설교가 얼 마나 감동적인 것인지, 자기가 없으면 한국교회가 무너진다느니 하는 것들 을 말하느라고 예배와 설교의 시간을 다 보내고 만다. 목회자들은 비단 이런 시간뿐 아 니라 사람이 모인 자리면 언제 어디에서든 지 공치사와 자화자찬을 늘어놓는다. 선교지의 공항에서 선교물품을 기적적 으로 통과시켰다든지, 포학한 원주민들을 설교 한 마디로 회개시켰다든지, 턱도 없이 부족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예배당을 건축했다든지, 귀신들 린 자들을 열 명이나 앉혀놓고 단번에 치료를 했다든지 … 자기신화의 창조 는 끊임없이 또 끊임없이 이어진다. 공치사는 신화의 혀이며, 자화자찬은 신 화의 입술이다. 설교자는 자기 신화에 빠지기 쉬워 그런데 더욱 꼴값인 것은 자기신화를 겸손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자신을 신화적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실컷 자기자랑을 늘어놓고 는 마지막에 닭살 돋는 겸손을 떨면서 이야기를 듣는 신자들에게 아멘을 유 도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마무리한다. 불쌍한 신자들 은 목회자들의 자기신화 창조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탄을 발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차없이 말했다. 신화를 버리고 경건을 연습하라 고. 신화는 인간이 드러나는 것이며, 경건은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 다. 신화는 인간이 나서는 것이라면, 경건은 인간이 물러나는 것이다. 신화 를 따르는 것은 사람이 자기를 따르는 것이며, 신화를 버리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부지런히 연습해야 할 경건 경건을 따르는 것은 사람이 자기를 버리는 것이며, 경건을 버리는 것은 인간 이 자기를 따르는 것이다. 신화가 경건과 발을 맞출 수 없듯이, 경건이 신화 를 벗으로 삼을 수 없다. 경건은 자기신화 창조를 거절하는 것이다. 신화를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망령되고 허탄한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 따 라서 자기신화를 만들어내는 데 관심을 가지지 말고 경건을 연습하라. 오늘도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지 보이기 위해서 새로운 자기신 화를 창조하는데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두렵다. 그리고 더욱 두려운 것은 그런 자기신화 창조가 우리의 경건을 얼마나 심하게 해치고 있 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124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73)_ 결국은 같은 길(딤전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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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7 2005-07-07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80jo.hwp조병수의 목회편지(73) 딤전 4:6-7 결국은 같은 길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기독교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그냥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사실만을 대 보아도 기독교의 위기는 금방 파악할 수 있다. 근 무일수의 축소가 주일예배를 축으로 삼는 기독교를 위축시킬 것임은 불 보 듯 뻔한 것이다. 대부분 현대과학은 상대주의의 극적 표현이기 때문에 절대 를 강조하는 기독교와 앞으로도 더 큰 마찰을 일으킬 것이다. 반기독교적인 개인과 단체가 광범위한 그리고 급속도의 정보전달을 이용하 여 기독교의 치맛자락을 들추고 있다는 것도 결코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 다. 게다가 대형집회며 정치적인 세력화 같은 기독교의 무분별한 잘난 체가 타종교의 의식화를 낳았고 그것은 역으로 기독교를 압박하는 것이 되었다. 절대 진리 갈수록 소외돼 그러나 이런 모든 요소들은 둘째로 치고 기독교의 위기는 솔직히 말해서 다 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 안에 있다. 아 버지가 내린 귀한 가훈 을 굳이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라고 우기는 어리석은 자식들같이, 성경을 하 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입증하는 것이 신학의 본질인 것처럼 생각하는 기독 교 신학자들이 온갖 대우를 받으면서 버젓이 행세를 하고 있다. 어느덧 우리 시대는 목회자들이 이벤트를 발상하고 기획하는 회사의 직원들 같이 되어 일년 내내 숨가쁘게 돌아가는 행사계획표를 짜내지 못해 안달하 는 시대가 되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의 몫은 나이를 따질 것 없이 모든 집회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 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는 듯이 보인다. 신 학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보석을 망치로 깨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목회자 들은 물질에 대한 욕심은 그만두더라도 도덕적 탈선마저 목회에 어쩔 수 없 는 것이라며 정당화하고, 신자들은 감성을 자극 받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 이겠거니 흡족해 한다. 기독교 내부 진통 우려돼 그래서 기독교의 타락은 무엇보다도 자체 안에 있지 다른 데 있지 않다. 회 개가 그러하듯이 타락이란 것은 안에서 시작되어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회개는 아무리 두 손을 모으고 입술로 종알거리며 죄를 고백한다고 해도 마 음속에 숨어있는 자기욕심을 끊어버리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다. 회개는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형식에 있어서 타락은 회개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타락도 밖으로 표출되기 전에 먼저 안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타락이 란 것은 아직 사회적인 것으로 표현이 되지 않더라도 존재 그 자체에서 얼마 든지 타락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결국은 같은 길 인 것처럼, 다른 무엇이 되려고 하는 것과 본래의 무엇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은 같은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무엇이 되려고 하는 것이 타락이며, 본래 의 무엇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이 타락이다. 교회의 부패는 본질 파괴로부터 사도 바울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한편으로는 믿 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으로 양육받기를 요청하고(6절), 다른 한편으로는 망 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기를 권면한다(7절). 말씀으로 양육받지 않으려 는 것이 타락의 길이며, 신화를 따르려는 것이 타락의 길이기 때문이다. 바 꾸어 말하자면 말씀으로 양육을 받지 않는 사람은 신화를 따르게 되어 있 고, 신화를 따르는 사람은 말씀으 로 양육을 받지 않게 되어 있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은 결코 다른 길이 아니다.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 곧 비진리를 따르는 것이며, 비진리를 따르는 것이 곧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참의 건너편은 바로 거짓됨이며, 거짓됨의 건너편은 바로 참이다. 이런 의미에서 참과 거짓 사이에는 중간지대란 것이 없다. 때때로 진리를 싫 어하는 사람에게 진리라고 위장된 비진리가 있고, 비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에 게 비진리라고 오해받는 진리가 있을 뿐이다. 참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짓을 말하면서 참이라고 왜곡하며, 거짓을 싫어하는 사람은 참을 말해도 거짓이라 고 오해받는다. 진리는 참과 거짓의 경계에 서 있어 기독교의 위기는 자신에게서 시작하고 심화된다. 기독교는 스스로 안전한 길 을 포기하고 위험한 길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것을 느끼지 못하 고 있다. 기독교는 안전에 대한 감각도 상실하였고 위험에 대한 감각도 상실 하였다. 안전불감증은 위험불감증과 같은 것이다.
123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72)-“형제를 깨우치면”(딤전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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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5 2005-06-24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79jo.hwp“형제를 깨우치면”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실력과 감화력은 서로 다르다. 목회자의 권위가 많이 후퇴한 것은 꼭 실력 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지금은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통로 로 엄청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정보의 시대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설교를 위해서 얼마든지 실력 있는 채 할 수 있다. 소위 말해서 지 식 베끼기가 놀랄 만큼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목회자의 권위는 꾸준히 실추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일 어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테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목회자가 진리 를 감화력 있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우마다 조금씩은 달라도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실력이 없다고는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감화력과 관련해서는 선뜻 머리를 끄덕이게 되지 않는다. 아 는 것은 많은 데 배울 것이 없다. 감화력은 실력과 다른 것이다. 아는 것은 많은데 배울 것이 없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 미 혹하는 영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근본적으로 분쇄하고 나서 디모데도 이 사실을 형제들에게 가르치기를 희망한다. 사도 바울은 디 모데가 이 사실을 형제들에게 “내놓으라”(개역성경에는 “깨우치다”로 번 역되었음)고 권면한다. “내놓다”는 말은 우선 사물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 것은 마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사도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신들 의 목을 내놓았던 것과 같은 의미이다(롬 16:4). 그런데 이 단어는 변환된 의미로 “가르치다” 또는 “깨우치다”를 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희망사항은 디모데가 거짓된 가르침의 문제 점을 정확하게 배운 후에 또한 정확하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배우는 자는 가 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디모데의 사명은 미혹하는 영들의 거짓 된 가르침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지적해서 성도들을 바른 교훈으로 깨우치는 것이었다. 먼저 정확하게 배워야 그런데 참으로 흥미롭게도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가르침이 형제들에게 어떤 효과를 일으킬 것인지는 말하지 않고 대신 디모데 자신에게 어떤 효과를 가 져다 줄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 은 디모데가 형제들을 가르치면 “그들이 이렇게 저렇게 될 것이다” 말하지 않고 “네가 이렇게 저렇게 될 것이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가르침이 형제들에게 줄 유익보 다 디모데 자신에게 줄 유익을 염두에 두고 있다. 사도 바울은 가르치는 노력이 디모데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확 신하였다. 사실상 가르치는 행위가 배우는 사람보다 가르치는 사람에게 주 는 유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형제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결 코 무익한 것이 아니며 귀찮은 것은 더욱이 아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가르치는 자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것은 내어놓는 것 사도 바울에 의하면 디모데는 가르치는 일로 두 가지 유익을 얻게 될 것이 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군이 되는 것이며, 둘째는 믿음의 말씀 과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는 것이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은 거짓이 아 니다. 많은 경우에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치는 행위로 좋은 인격과 성품을 쌓 는다. 바른 가르침은 배우는 사람을 바르게 만들기 전에 가르치는 사람을 바르게 만든다. 가르침의 진정한 효과는 배우는 사람보다 가르치는 사람에게서부터 먼저 나타나는 법이다. 진리가 가르치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배우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진리 앞에서 먼저 변화되어야 할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이다. 가르치는 자가 먼저 유익 얻어야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군이 되고 믿음의 말 씀과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지 않는다면 그의 가르침은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감화력 있는 가르침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진리 를 가르치는 자는 타인을 가르치기 전에 자신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며, 타인 을 변화시키려 하지말고 자신을 변화시키려 해야 하는 것이다. 배우는 자에게 가르치는 자의 정보와 지식이 아무리 많이 전달된다 할지라 도 가르치는 자의 인격과 성품이 배우는 자를 사로잡지 못한다면 그것은 가 르침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가르침이란 감화이지 정보가 아니기 때문이 다. 감화와 정보는 서로 다른 것이다.
122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71)-성속(聖俗) (딤전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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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9 2005-05-27
http://www.rpress.or.kr/files/sinhak/377jo.hwp조병수의 목회편지(71) 딤전 4:5 성속(聖俗) 조병수 교수|합신 구약신학 성속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것이다. 본래부터 속된 것은 없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모두 선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하 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딤전 4:4).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빛도 선하며 어둠도 선하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 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사 45:7). 빛과 어둠이 선하냐 그렇지 않느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으면 빛이 선한 것처럼 어둠도 선하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어둠뿐 아니라 빛도 악한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성속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것이다. 거룩과 속됨의 기준은 하나님 성속은 관계적인 것이라고 할 때, 한 가지 더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 지이다. 하나님께서 성과 속을 나누셨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리켜 거룩하 다고 하시면 거룩한 것이며, 속되다고 하시면 속된 것이다 (레 11장). 성속 은 하나님에 의하여 결정된다. 성속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은 사람에게 단지 순종을 요구한다. 사람은 성속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 앞에서 오직 순종해야 한다. 사람은 하나 님의 뜻에 순종하기 때문에 비록 어떤 것이 본질적으로는 속된 것이 아니더 라도 하나님께서 속되다고 하시면 속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은 사물의 본질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런 것 이다. 사람에게 속된 것으로 여겨지던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거룩하다 하시면 거룩한 것으로 여겨진다. 성스러움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 예를 들어 사도 베드로가 고넬료의 초청을 받기 전에 본 환상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일러준다. 사도 베드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 같은 그릇에 각 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는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에게 임한 소리는 간단하였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성속 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성속은 사물의 본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의 관계에서 이해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한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믿는 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에 감사한다.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사 람은 모든 것을 거룩하게 여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음식물과 관련하여 앞 에서 말한 내용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식물은 깨끗하다”(막 7:19)고 가르치신 교훈을 명확하게 재현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는 모든 음식이 거룩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어야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삶의 표식을 말씀과 기도라고 생각하였 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 과 사람의 친밀한 관계와 밀접한 연결을 의미한다. 물론 이 둘은 방향이 서 로 다르다. 말씀이란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시는 것이며, 기도란 사람이 하나 님께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표현하며, 기도는 하나님께 사람 의 생각 을 표현한다. 말씀으로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며, 기도로 하나님은 사람 을 받아들인다. 비록 말씀과 기도가 서로 방향이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와 연결을 의미한다는 사실에서는 공통된다. 이렇게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 연결된 사람은 하나님의 의지를 분명하게 파 악한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신 뜻을, 하나님께서 성속을 구별 하신 뜻을, 하나님께서 속되다 하신 것을 다시 거룩하다 하시는 뜻을 깨닫는 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시는 바탕에는 순종에 대한 요구가 있다. 하나님의 결정 순종해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에 밝음(평안)에도 어둠(환난)에도 순종할 수 있는 지, 하나님께서 구별하셨기에 거룩하다 하신 것과 속되다 하신 것에 순종할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 변경하셨기에 속된 것을 다시 거룩한 것으로 받을 수 있는지. 말씀과 기도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기 때문에 하나 님께 철저하게 순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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