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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no image |갈라디아서 강해 <3>| 우린, 이미 ‘무엇’이다_김근배 목사
편집부
1433 2016-09-06
우린, 이미 ‘무엇’이다 갈라디아서 1장 11-24절 <김근배 목사, 동해참빛교회> “율법조차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뒤에 설 때만 효과가 있을 뿐” 1. 들머리(발단) 그리스도께서 이룬 복음에 유대교 전통을 덧씌우려는 ‘거짓’ 형제들 때문에 바울이 화났다. 유대교 전통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여 놓고 도리어 유대인 조상 랍비들이 옛언약들(구약)을 재구성해서 재정립한 그들만의 문화이다. 하나님께서 보낸 ‘참사람’이 해낸 복음에다가 하나님의 참사람을 죽인 사람들이 만든 유대교 전통을 교회에서 함께 받겠다고 하니 화날 만 하다. 유대교 전통에서 만들어낸 랍비들의 율법 말고, 하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신 ‘율법’에 대해 고민해보자. 이 율법조차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뒤에 설 때만 효과가 있다. 율법은 복음 옆에 설 수 있는 무엇(존재)이 아니고 복음 뒤를 받쳐주는 어찌함(도덕교훈)이다. 모세가 받은 율법에는 ‘시민법, 의식법, 도덕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시민법과 의식법’은 유대국가의 것인 반면 ‘도덕법’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것이다. 유대 ’국가’와 유대’인’을 구별해야 했다. 2. 주제(전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인’으로 이루어진 교회들(1:22)이 자기 변화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고 말한다. 그들(1:22)은 유대인,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인 ‘그리스도 안’의 유대인이다. 그들이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을 전면에 내세우고 유대교 전통에서 떠났다. 이런 사람들을 바울은 4장에서 ‘종’이 아니요 ‘아들’이(4:7)라고 말하고, ‘여종의 아들’이 아니라 ‘자유본처의 아들’이(4:31)라 말한다. 곧 ‘이스마엘’이 아니요 ‘이삭’이며, ‘하갈’이 아니며 ‘사라’라는 것이다. 3. 전개(위기) 그런데 왜 사라가 하갈을 섬기며, 이삭이 이스마엘이 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바울은 가슴을 친다. 이것은 다시 천박하고 자유도 없는 종으로 되돌아가서, 종들이 주인을 위해 잔치 날인 날(days)과 달(months)과 절기(seasons)와 해(years)를 준비하며 애쓰는 것(4:10)이라 한다. “왜 율법에 다시 종노릇하려고 하는가, 왜 율법으로 주인에게 의를 얻으려 하는가, 왜 교회 안에 유대교 (또는 로마 가톨릭) 전통을 다시 들여놓으려 하는가?”라고 바울이 묻는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1:4)은 우리로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나게 하시려는(2:19) 희생이시다. 하나님께서 계신 집에 되돌아가서 아들로 살라는 몸짓이시다. 저들은 이런 희생과 몸짓을 헛되게 만들어버렸다(2:21). 4. 증거(절정) 교회는 막 하나님께 살아난 자녀들의 쉼터이다. 비인간(죄인)이 참인간(의인)으로 회복하며 치유 받는 집이다. 내 ‘어찌함’ 탓에 흉악하게 변했던 ‘어떠함’이 그리스도 덕분에 ‘무엇’이 되어 들어올 수 있었던 ‘하나님 가정’이다. 하나님 가정은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무엇’인 자녀들의 가족모임이다. 율법은 이 가정모임에서 대화와 노래며 춤과 웃음을 주는 어찌함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근엄하신 소리이다. 5. 마무리(결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근엄하신 소리를 즐겁게 경외하는 아들(거듭난 존재)이다. 어찌 종이 그 자리에 낄 수나 있겠는가? 종의 삶(의식)이 좋아보일지 몰라도, 하갈이 먼저 출세(자녀 낳음) 해서 힘들지 몰라도, 우리는 사라(거듭난 자유인)이다. 이스마엘이 빨리 장성(성공) 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삭(믿음의 후손)이다. 기다리자. 율법에 매여, 다시, 그 옛날 내 어찌함 탓에 흉악했던 그 어떠함으로 되돌아가려는가? 자유하자.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기에. 그리고 즐겨보자. 도덕법에 따라 덕스럽게.
300 no image |갈라디아서 강해 <2>| ‘그리스도 복음’에 더 보태지 말자_김근배 목사
편집부
1564 2016-08-23
‘그리스도 복음’에 더 보태지 말자 갈라디아서 1장 6-10절 < 김근배 목사, 동해참빛교회 > 1. 들머리(발단)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에게 꾸준히 말해왔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려고 우리 죄를 대신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셨습니다”(1:4). 그런데 그가 없는 동안 그들이 “너무나 쉽게 다른 복음 좇고 있다”(1:6)는 소식에 이상하다는 듯이 놀랜다. 그리고 확고하게 말해준다. “사실, 다른 (종류의) 복음은 없다”(1:7). 하지만 우리 시대를 돌아보면, ‘다른’ 복음이 너무 많다. 틀린 복음도 넘쳐난다. 오늘날은 사도 바울처럼 단호하게 말을 못하는 시대이긴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 이상하게 ‘다른’ 복음들과 함께 ‘참’ 복음 일부분만을 갖고 싶어 하는 속내가 있지 않아서일까 싶다. 2. 주제(전개) 참 복음(갈1:4)에 다른 것이 곁에 올 수 있을까? 마치 유일하고 참 하나님은 한분이신데(참 신지식은 하나뿐인데), 그분 곁에 다른 거짓 신(우상, 신념, 정신)들을 두려고 하는 시도처럼(제1계명). 그럴 수 없는데 그렇게 하고 있어서, 이상하다는 것이다. 세상(애굽)의 ‘종’이었던 사람들을 하나님의 ‘시민’(자유인)으로 꺼내 데려왔다. 그런데 그들이 ‘자유시민’ 권리와 ‘종’의 권리를 함께 갖고 싶다고 한 것이다. ‘두 주인’의 장점을 다 갖고 싶은 ‘win-win’ 전략이다. 3. 전개(위기) 거짓 선생(목자)들은 유대교 율법 규례(의식, 절기)도 구원의 필수조건에 포함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행위들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특별한 날(절기) 특별한 절차에 특별한 복장(의식)으로 주께 나아가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다시 질문한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것들(다른 거짓 신 혹은 정신)에 종노릇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믿음 덕에) 아시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여러분은 다시 무력하고 천박한 초보적인 것들(세상철학, 예전의식)로 되돌아가 또다시 그것들에 종노릇하려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아닌 것들의)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잘도 지킵니다”(갈4:8-10). 4. 증거(절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도 두 주인(하나님과 재물 곧 본성과 정신)을 섬길 수 없다”(마6:24) 하신다. 하나를 아끼고 사랑하면 다른 하나는 무시하고 버려두기 때문이다. 이것을 예수께서 몸소 보이셨다. 마귀가 육체의 근원적 본성을 시험할 때(운명을 사랑하라 말할 때), 말씀을 벗어나서 본성(식욕)을 충족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마4:4). 그러자 마귀가 성경말씀 갖고 흔들었다(세상과학과 철학이 더 믿을만하다). 말씀이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불신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의심거리(가설-실험-검증-이론)가 아니기 때문이다(마4:7). 마지막으로 마귀가 본성적 의지로 최고 권력을 지향하도록 유도할 때, 하나님을 넘어서려는 권력을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린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것으로 족한(마4:10) 하나님나라 자유시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5. 마무리(결말) 우리 죄를 대신한 것은 그리스도밖에 없다. 악한 곳에서 꺼낼 수단도 그리스도밖에 없다. 출애굽의 마지막도 어린양 피이었다. 어린양이 없어 애굽 황소로 대신 해도 되지 않겠냐고 묻지 말자. 그리스도 죽음에다 이런저런 인간도움(자칭 성인, 마리아 숭배)도 더 보태면 좋지 않겠냐고도 묻지 말자. 그들은 단지 우리들과 같은 피조물일 뿐이다. 다른 이질적인 무엇을 그리스도 곁에 두지 말자(제1계명).
299 no image |갈라디아서 강해 <1>| 언제 적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셨는지 아시는가?_김근배 목사
편집부
1569 2016-08-02
언제 적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셨는지 아시는가? 갈라디아서 1장 1-5절 < 김근배 목사, 동해참빛교회 > “세속을 상징하는 애굽 왕자병에 걸린 우리들은 단지 애굽 사람일 뿐” 1. 들머리(발단) 애굽에서 왕자였던 모세가 애굽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얼마 후 광야 한 켠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께서는 왜 애굽이 아닌 광야에서, 왕자 신분이 아닌 도망자(방랑자) 신분이었을 때에 모세를 만나셨을까? 하나님의 현존을 본 모세는 두려워하지만(출3:6),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출3:6)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되새기라고 하듯이 줄곧 반복하신다(출3:15, 16, 4:5 이후 계속해서 신약까지). 이 소개를 이렇게 본다. ‘나는 하나님이야. 내가 준 약속(창12:3, 7, 17:7, 18:18, 22:18, 갈3:8)을 아주 잘 믿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들의 하나님이다.’ 그 약속을 꼭 붙들던 그 믿음, 내가 기뻐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하나님, 그분께서 모세를 만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을 그렇게 만나신 것이다. 2. 주제(전개) 하나님께서 언제 적부터 ‘우리 아버지’(갈1:4)이셨는지 아시는가? 예수님께서 존재하셨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심을 알게 되었기(갈3:26) 때문이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언제 적부터 계셨는가? 영원 전부터 계셨다(요1:1-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우리 아버지이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주신 약속이다. 약속이란 너희 같은 자녀들을 ‘한 자손’(갈3:8)을 통해 하늘나라(하나님나라, 영생)로 데려오겠다(갈3:16, 4:7, 5:21)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우리들 아버지께서 계신 집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녀들을 아버지 집으로 데려오겠다는 것이다. 3. 전개(위기) 그래서 애굽에 있던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꺼내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애굽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또한 애굽에 물든 이스라엘은 더욱 만만치 않는다. 애굽을 굴복시키기도 힘들지만 애굽에 묶인 이스라엘은 더욱 버겁다. 왜냐하면 애굽은 그냥 굴복시키면 그만이지만, 애굽 정신을 가진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애굽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사람임을 설득시켜야 할 뿐 아니라 그들 마음에서 애굽 정신을 씻겨내고 복음 진리(하나님 언약백성)로 거듭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4. 증거(절정)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애굽 정신(갈1:4)이 무엇이겠는가? 애굽 또는 세상의 온갖 ‘부패와 악함과 욕망’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가장 심각한 문제가 죄를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미 애굽 사람인 이스라엘은 애굽(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함몰된 정신 상태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가 그들 조상의 하나님을 생각해내어 고통을 호소했다(출3:7). 그럴지라도 그들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을 소개받기 전에, 자기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자손 한 사람’에 대한 언약 내용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기다렸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기다림도 없었다. 이런 어린아이 같은 믿음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들을 지속적으로 보내주셨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도리어 죽여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자손 한 사람 그리스도까지도 죽여 버렸다. 그러고는 유대교를 만들었다. 5. 마무리(결말) 애굽정신에 함몰된 이스라엘은 이렇게 마음이 굳어있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는 마음이 닫혀 있고, 세상흐름에 대해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민해 있는 것 또한 현재 우리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다림,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세요”(계22:20)가 없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께서 모세가 왕자 신분에서가 아닌 도망자(방랑자) 신분에서 그를 만나셨는지 좀 감이 온다. 애굽 왕자병 걸린 우리들은 단지 애굽 사람일 뿐이리라!
298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 교회 표준 문서 <16>| 하나님의 속성과 신적 작정 교리_배현주 목사
편집부
1763 2016-08-02
하나님의 속성과 신적 작정 교리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자신의 행위 공로를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 교리에 배치되는 오류”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제2장 2절에 “그가 피조물 위에 절대 주권을 가지시고 그 스스로 기뻐하시는 무엇이든지 그들에 의해서 그들을 위해서 그들 위에 행하신다”고 고백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절대 주권으로 만물 위에서 만물에 의해서 만물을 위해서 행하신다고 진술한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 계시록에 관련하여서 이러한 말씀이 증거되고 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이러하다. “당신은 합당하십니다. 주님 곧 우리의 하나님이시여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받으시옵소서. 당신이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만물이 당신의 뜻을 인하여서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합당하시다”고 할 때 헬라어 “앜시오스”를 쓰고 있다. 이것은 “어울리는” 혹은 “-하기에 만족한”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러한 영광을 받으시기에 가장 잘 부합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신앙고백서는 이어서 계속 진술한다. “만물이 그의 눈앞에 모두 개방되어있고 드러나 있다. 그의 지식은 무한하시고 무오하시며 피조물에 대하여서 독립적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야 할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신다. 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앞에서는 만물이 벌거벗겨 지듯이 다 드러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우리를 모두 제대로 아신다. 그는 우리의 체질과 본질을 다 아신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거짓을 은폐하고 선한 척 하는 외식은 실로 혐오스럽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폐부까지 드러난 죄인들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 어떠한 행위와 공로도 자랑할 수 없다. 신자가 자신의 행위의 공로를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 교리에 배치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신자들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공로를 내세울 수 없다. 인생들은 모두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장 2절 후반부에는 “그래서 그에게는 우연적인 것이나 불확실한 것이 없으시다”(nothing is to him contingent or uncertain)고 진술한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말을 따라서 해석할 수 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변화시키시지만(mutabilia facientem) 자신은 홀로 변하지 않는 분(sine ulla sui commutatione)이시라는 진술이 있다. 또한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서 하나님께는 관계적인(relativus) 표현과 본질적인(substantia) 표현은 있으나 우연적인(accidens) 표현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는 우연에 따라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분 안에는 변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말이 본질에 대한 것은 아니다. 관계에 대한 말이 있기 때문이다”(De Trinitate.Lib.5.cap.5. ver.6). 우연성은 피조물에게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는 모두 필연적이다. 인간이 인식하는 우연성은 인식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는 필연적이다. 다만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의 비밀을 인간은 다 알 수 없기에 하나님께는 필연적인 것이 인간에게는 우연적이다. 그 만큼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두운 자들이며 무지한 자들이다. 여기에 신자들의 겸손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찬송함이 마땅히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은 그 자신은 변함이 없으면서 만물을 변화시키시고 그 자신은 시간 안에 동작이 없으시면서 피조물을 시간 안에 창조하시는 그자체로서 불변하신 속성이다(De Trinitate. Lib.1. cap.1.ver.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2절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계획, 그의 모든 행사 그리고 그의 모든 명령들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시다”라고 진술되어있다. “거룩하다”라는 의미는 히브리어로 “콰도쉬”이다. 이것은 “구별된다”라는 의미도 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계획과 행사와 그의 모든 명령들이 다른 피조물들의 그것과 구별이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의 계획과 행사와 명령들을 완전하고 불변하게 반드시 성취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신적 작정”의 교리를 다룬다. 하나님의 영원한 신적 작정은 역사 안에서 변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변함없이 그렇게 만물에 대하여서 역사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적 작정의 교리는 그의 속성의 교리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행사와 명령들은 사람의 계획과 행사와 명령들과 달라서 반드시 성취하신다. 이에 신자들은 그의 계명을 경외하며 그것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시 1:2). 실로 여호와의 계명은 완전하고 순전하다. 그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복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2절 맨 마지막 구절은 “마땅히 모든 천사들과 사람들과 모든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즐거이 요구하시는 무엇이든지 예배, 섬김 혹은 순종을 그에게 드려야 한다”라고 되어있다. 이 본문은 요한계시록 5장 13절과 연결된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모든 만물이 성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장면이 나와 있다. 요한계시록은 1-3장까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시는 형태로 되어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 4-5장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영광으로 충만한지를 계시하고 있다. 그때에 요한 계시록 5장 13절에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충만한 상태를 서술하고 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사도 요한은 장대한 대 서사시를 기술하듯이 그렇게 매우 장엄하게 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영광스러우며 이렇게 거룩하고 이렇게 장엄한 장면은 이 세상에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그 영광된 하나님 나라의 온전하게 거룩하고 찬송할 만한 고귀함을 노래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기술을 통하여서 신자들에게 마땅히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려야 할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다. 요한계시록이 증거하는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영역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통치의 개념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냐고 질의했을 때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7:20-21).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영역의 개념으로 간주하고 하나님 나라의 위치를 물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증거하시면서 주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7장 21절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서 말씀하셨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아래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들은 요한 계시록이 증거하는 그 영광된 나라를 현재적 실존 가운데 경험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모든 신자들에게 완성을 향하여서 달려가는 하나님 나라로서 이루어져 가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자에게 충만하게 임재하는 실재적인 나라이다(마 11:12).
297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 문서<15>| 인생의 최고 선이신 삼위일체 하나님_배현주 목사
편집부
1745 2016-07-05
 인생의 최고 선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하나님의 창조는 그의 충만하신 영광스러우시고 선하시며 복되심의 표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장 2절 첫 선언은 이러하다.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그리고 그로부터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하심과 복되심을 가지고 있으시다.” 하나님은 항상 살아계시다. 그는 날마다 역동적으로 생동감 있게 그의 영광을 위하여서 만물에 역사하신다. 18세기 이후에 유럽에서 발생한 계몽주의 사상은 이신론(Deism)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지만 섭리하시지 않으시며 다만 자연 법칙을 따라 만물이 스스로 운행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신론이란 신은 존재하지만 섭리하지 않는다는 교리이다. 그러나 성삼위일체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날마다 모든 피조물에게 그의 권능으로 밀접하게 그들 안에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은 선을 지향하시며 참으로 복되다. 하나님의 영광과 선과 복되심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잘 증거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에베소서 1장 3절 첫 부분에 “찬송하리로다”가 헬라어로 ‘율로게토스’(εὐλογητὸς)로 되어있다. 이것은 놀랍게도 그 절 후반부에 “우리를 복주시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사스’(εὐλογήσας)와 동일한 어원으로 되어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송함이 곧 복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 자체가 복이다. 아무런 가치 없는 우리를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자로 부르신 그의 은혜가 크다. 하늘의 신령한 복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것이다. 그래서 헬라어 동사 ‘율로게오’(εὐλογέω)는 주체에 따라서 의미가 바뀐다.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시면 “그가 우리에게 복을 내리신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주체가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하늘의 신령한 복이란 신자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에 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 언약의 약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 언약의 약속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다”(출 6:7; 렘 7:23).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셔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 하늘의 신령한 복이다. 그것이 인생의 최고의 선(Summum Bonum)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큰일”(Magnalia Dei)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인생의 최고 선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오직 하나님뿐이시다”(Des menschen hoogste goed is God, en God alleen). 그러므로 신자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하여서 요란스러운 제스쳐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알고 그 분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님께 찬송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4-5절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과 선과 복되심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심으로서 드러났다고 증거한다. 윌리엄 트위스는 그의 “예정론에 대한 존 코튼 씨의 분명한 어떤 의심점에 대한 논서”(A Treatise of Mr. Cottons, Clearing certaine Doubts Concerning Presdestination)에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의 백성들을 선택하신 것은 그의 영광을 위한 방편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의 첫 자리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순서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들을 선택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무슨 선과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1)라고 기술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창세전에 그리고 타락 이전에 그 타락조차 고려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의 은혜로 부르신바 되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증거한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제2장 2절은 에베소서 1장 3-14절의 의미를 잘 해석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장 2절이 증거 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선하심과 복되심은 그의 속성이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신 뜻 가운데 인류 중에 얼마를 선택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과 선과 복되심을 충만하게 드러내시고자 창세전에 미리 계획하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장 2절은 “하나님께서 홀로 그 안에서 그를 위해서 모든 충만함이 있으시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에게서 어떠한 필요도 채우시지 않으신다”라고 진술한다. 이것은 자충족적이신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충만하시기에 피조물의 어떠한 필요도 채우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그 자신의 필요를 인하여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창조는 그의 충만하신 영광스러우시고 선하시며 복되심의 표현이다. 이것을 헤르만 바빙크는 일반 계시(Algemeene Openbaring)라고 한다. 일반 계시에 이미 하나님의 생명과 선하심과 영광과 복되심이 충만하게 계시되어 있다. 시편 19편에서도 다윗은 자충족적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였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1-4). 이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로부터 어떠한 영광의 근원을 찾으시는 분이 아니시다”고 하면서 “오직 그 안에서 그에 의해서 그에게까지 그리고 그에게 그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는 홀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그를 통하여서 그리고 그에게로 만물이 있다”고 진술하였다. 이러한 진술은 사도 바울의 로마서 11장 36절과 연결된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을 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교리는 성경 전반에 걸쳐서 증거되고 있다. 특히 로마서 11장 36절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교리가 분명하게 증거되고 있다. 무엇보다 로마서 11장 36절이 로마서에 가장 중요한 주제 구절이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 신자들이 추구해야할 최고의 선이다. 그리고 로마서 1장 17절의 이신칭의 교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자들이 행하여야 할 은혜의 한 수단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의 최고의 복이다.
296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문서 <14>|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 담긴 은혜_배현주 목사
편집부
1992 2016-05-10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 담긴 은혜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2장 1항에서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데 살아 계시고 참되시다”고 진술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아버지 하나님께 마지막 간구를 드리실 때 영생에 대하여서 진술하셨다. 그것은 이러하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 그리스도의 간결한 진술에 영생이 무엇인가 드러나 있다. 영생이란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살아 계시고 참되시기(living and true) 때문이다. 여기에서 살아 계시다(living)는 의미는 모든 생명체가 의존하는 스스로 자충족적이시고 홀로 독립적이신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분이시다. 모든 존재들이 그분에게 의존하는 지존자이시다. 그래서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가 여호와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내라는 사명을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이 여호와께 여쭈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 그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그렇다. “여호와”라는 의미는 지존자라는 의미이다. 스스로 존재하여 계시면서 만물이 그로부터 존재케 된 바로 그 존재자이시다. 지존하시고 영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홀로 존재 그 자체로 불리우시기에 합당하시다. 유일신론이란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에 대한 교리적 진술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신다. 그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고 무한하시며 영원하신 생명으로 존재하여 계신다. 그러므로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존 칼빈은 그가 작성한 “제네바 요리 문답”의 제1문답에서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묻고 그 답변으로 “인생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다. 그것이 영생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가는 삶이 영생의 삶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가는 삶이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에 부합하는 삶이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신자들의 생애 최고의 목적이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다. 인생들이 살아 있음은 그와 함께 동행함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자라가는 것이다. 인생의 최고의 선(Summum Bonum)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를 알아가는 것이 최고의 선을 이루어 가는 삶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장 1항에는 “그는 몸이 없으시고 부분이 없으시다”(without body, parts,)는 진술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성에 대한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시기에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몸이 없으시고 부분도 없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가해하시다”(incomprehensible)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 계신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서 알아가려고 할 때에는 그가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떠하신 분이 아니신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속성은 인간 편에서 불가해하기에 다만 하나님께서 어떠하신 분이 아니신가를 아는 것이 먼저 중요하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어떠하신 분이 아니신 것을 알게 될 때 그 반대로 희미하게나마 하나님께서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은 변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신다.” 그렇게 신자들은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아 가게 될 때에, 하나님의 불변성을 희미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계가 없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한하시다”고 우리는 신앙으로 고백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무한성은 자연 과학을 통하여서 측량한 우주의 무한성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자연 과학이 측량한 우주의 광대함이란 단지 인간이 우주의 크기를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무한성은 우주의 광대함을 뛰어 넘어 그 우주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무한하심이다. 단지 수량적으로 거대한 크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무한성을 상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주의 광대함조차도 하나님 편에서는 없는 것과 같다. 하물며 우주의 먼지 보다 작은 인간이야 더 할 나위 없다. 그 무소부재하시고 편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주의 먼지만도 못한 우리 인생들이란 실로 없는 것과 동일하다.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물며 우리를 구속하신 그 크신 사랑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주의 먼지보다 작은 인생들이 자기 마음대로 헛되이 사고하고 자기 멋대로 헛탄하게 행동하는 것은 크나큰 죄악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오직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이 있으므로 인류가 진멸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2-23). 그렇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셔서 지금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 크신 은총에 감사할 따름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장 1항에는 “하나님께서는 가장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우심이 넘치신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어서 “선하심과 진리가 풍성하시다”고 진술한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우심은 선하심과 진리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곧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우심이고 하나님의 진리가 곧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우심이다. 하나님의 선이 곧 진리이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진리가 풍성하시다. 이것은 신자들의 삶과도 연결 되어있다. 선하지 않는 자는 진리가 없는 자이다. 그것은 원래 하나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풍성한 자는 반드시 선함이 풍성하다. 왜냐하면 선함이 곧 진리이며 진리가 선으로 드러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가 풍성하신 자로서 선하신 행적이 풍성하시다. 참된 신자들은 진리를 자양분으로 하여서 선한 삶을 이루어낸다. 그러한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신자들이 진리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삶 자체가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는 삶의 열매이다.
295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문서 <13>| 삼위일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_배현주 목사
편집부
2237 2016-03-29
삼위일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이며 위격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제2장 1절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을 고백하고 있다. “오직 하나이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 계시다”(but one only living and true God)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이시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구약이 계시하고 있다. 신명기서에서 모세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이 하나이시라고 선포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구약 히브리어는 성경은 “하나이신 여호와”를 “아도나이 에하드”로 기록하고 있다. 70인경은 “퀴리오스 헤이스”(κύριος εἷς)로 역본하였다. 신명기서가 증거하는 “하나이신 하나님”에 대한 선언은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하나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식하는 형태의 한계로 인하여서 다양하게 표현된 것뿐이다. 개혁 교의학(Reformed Dogmatics)은 하나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서술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incommunicable attributes)과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이란 오직 하나님께 만 있는 절대적 속성이다. 하나님께만 있는 비공유적 속성으로는 불변성, 무변성, 무한성, 완전성, 절대성, 영원성, 불가해성, 전능성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비공유적 속성은 하나이다. 그것은 이렇게 표현하면 이해하기 쉽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기에 불변하시고 불변하시기에 영원하시며, 영원하시기에 완전하시다.” 이렇게 표현하면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은 한 속성에 대한 단지 다양한 표현일 뿐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이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마음 안에 매우 희미하게 남아 있는 속성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와 긍휼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의 속성이다. 이 모든 공유적 속성도 하나이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공의로우신가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으로 드러난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증거하였다(요일 4:3). 그렇다.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은 이 사랑이라는 속성 안에 포함되어있다. 왜냐하면 공의로우시고 엄위로우신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넘치신다고 할 때에 이 조화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도 요한의 진술을 따라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의와 공의가 함께 계시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비가 충만하신 것만큼이나 공의로우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자비와 공의로우심으로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단번에 완전하게 계시된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완전한 속죄의 제사를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드리심으로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온전하게 드러내셨다. 그리고 동시에 죄인들을 위하여서 자신이 직접 완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다.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분명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 것이 드러났으며 동시에 그 사랑이 엄위로우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 시키는 형태로 드러났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긍휼과 자비와 함께 엄위로우심과 공의로우심이 공존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모세를 통하여서 율법이 먼저 온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 것을 드러내고자 하심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서 온전하게 성취하시는 사랑이셨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함께 온전히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자비의 속성을 드러나는 형태로 우리 가운데 주어졌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완전한 형태로 그 백성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히 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속성은 온전하게 드러났다. 그렇다면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은 어떻게 하나의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답변은 이러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이 함께 이해가 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에 대한 진술을 해 보면 이러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와 긍휼과 지혜와 사랑과 은혜와 선하심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시고 절대적이시다.” 이러한 진술을 통하여서 볼 때,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하나님의 속성을 사람들이 풍성하게 인식하도록 다양한 표현으로 나누어서 서술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다양한 표현은 하나의 속성을 그렇게 서술한 것뿐이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이다. 다만 위격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신다. 그리고 그 삼위일체는 동일 본질이시고 동등 영광이시며 항상 여상하시다.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신자들은 반드시 하나이신 하나님이심으로 신앙을 고백하여야 한다. 신자들은 하나이신 하나님을 이해할 때, 한 실체(Substantia)로서 한 본질(Essentia)로서 한 속성(Attribute)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실체 안에 세 위격이 계시는 것도 동시에 인식해야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로 계신다. 그 좋으신 하나님께서 영원무궁토록 우리의 왕이시고 목자이시고 아버지이시며 빛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294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문서 <12>| 바른 성경 해석과 정통 교리의 중요성_배현주 목사
편집부
1980 2016-02-29
바른 성경 해석과 정통 교리의 중요성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정통 교리 거부는 교회의 보편성과 통일성 파괴하는 분파주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10항은 “모든 종교적 논쟁의 결정과 종교 회의 결정과 고대 저술가들의 견해와 사람들의 교리들과 사적인 정신을 살필 때에 오직 최종 결정권자는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시다”라고 고백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모든 종교적 논쟁의 결정”(all controversies of religion are to be determined)과 “종교 회의의 결정”(all decrees of councils)과 “고대 저술가들의 견해”(opinions of ancient writers)와 “사람들의 교리들과 사적인 정신”(doctrines of men and private spirits)을 살필 때 최종적인 판단자는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시라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모든 인간의 결정 위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최고의 주권자 되심을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거룩한 보편 교회가 역사적으로 받은 정통 교리가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결정된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어떠한 종교 회의의 결정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구약 성경에 기초하지 않는 다면 정통 교회 안에 어떠한 권위도 가질 수 없다는 근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살펴볼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10항은 지나온 역사 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거짓 교리들을 결정했을 때 그러한 모든 결정을 정죄할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비록 종교 기관의 회의 결정이 만장일치로 처리되었다고 해도 신구약 성경에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결정은 무효이다. 그러한 사례로서 왜정 시대 말엽 일제 압력으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결정한 신사 참배 결정은 불법이다. 일제 치하였던 193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은 일제의 압력에 굴복한 거짓된 결정이다. 그러므로 이후 거룩한 보편 교회는 그때의 조선 예수교 장로교 총회의 결정을 정죄하여야 마땅하다. 그 결정은 인간의 압력에 굴복한 사사로운 결정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당시에 장로교 총회가 결정을 하였다 해도 신구약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불법적 결정이기에 그 자체로서 거짓되다. 신구약 성경을 따라서 세워진 정통 교리에 일치하지 않는 모든 치리회의 결정은 불법이다. 또한 신구약 성경으로부터 전혀 증거를 받을 수 없는 로마 카토릭 교회의 여러 가지 거짓된 교리들도 거룩한 보편 교회의 신앙고백으로서 받아들여 질 수 없다. 16-17세기 종교 개혁자들은 이러한 교리적 입장을 따라서 교회 개혁을 시행하였다. 지금의 종교 개혁의 원리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 종교 개혁을 해야 한다. 오직 성경으로부터 지금도 항상 가시적 교회는 개혁이 되어야 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신구약 성경을 따라서 결정된 거룩한 보편 교회의 역사적 정통 교리도 성경과 함께 살펴야할 성경 다음의 권위를 가진다. 그러므로 거룩한 보편 교회의 정통 교리들은 교회가 진리를 참되게 인식하는 지침서이다. 또한 성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대 정통 교회의 신조들은 지금의 모든 교회들도 반드시 수납해야 할 참된 교리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모든 시대에 걸쳐서 진리에 대한 최종의 동일하신 판단자이시기에 성경을 따라서 결정된 정통 교회의 신조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참된 신자들은 그러한 거룩한 보편 교회의 신앙고백서를 따라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성경론 다음에 성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진술한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 교리는 전적으로 성경으로부터 추론된 정통 교리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사도 신조로부터 시작해서 니케아 신조와 칼게돈 신조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통 교회의 교리적 진술을 토대로 형성된 정통 교회의 신조이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은 사사로이 해석이 되는 문헌이 아니다. 신구약 성경은 축자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역사적으로 거룩한 보편 교회가 성경을 따라서 결정한 모든 정통 교리는 후대 모든 보편 교회들이 따라가야 할 거룩한 보편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정통 교리를 거부하는 모든 행위는 교회의 보편성과 통일성을 파괴하는 분파주의이다. “모든 종교적 논쟁의 결정과 종교 회의 결정과 고대 저술가들의 견해와 사람들의 교리들과 사적인 정신을 살필때에 오직 최종 결정권자는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시다”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리적 입장은 사사로운 성경 해석을 반대한다는 교리적 입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으며 역사적 예수를 신구약 성경 밖에서는 찾으려고 하는 현대 비평 신학은 그 자체가 이미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거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신비주의자들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경험주의적 성경 해석은 거짓되다. 그러한 사사로운 성경 해석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따라서 볼 때 지극히 위험한 성경 해석이다. 그들은 성경 본문을 자신들의 신앙 체험을 지지해주는 구절로만 삼는다. 그래서 그들의 성경 해석은 거짓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10절의 의미는 이것이다. 고대 거룩한 보편 교회가 결정한 공교회의 신조를 따라서 신구약 성경을 한 가지로 해석하라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10절은 비평 신학을 정죄하며 동시에 사사로운 성경 해석도 정죄하고 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10절은 모든 종교적 논쟁의 결정과 종교 회의 결정과 고대 저술가들의 견해와 사람들의 교리와 사적 정신을 살필 때 그 최종 결정권자를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께 돌림으로써 거룩한 보편 교회의 교리적 통일성을 지지한다. 교부 시대부터 공교회의 종교 회의를 통하여서 결정된 정통 교리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이다. 후대 거룩한 보편 교회도 동일한 교리적 입장을 따라서 사사로이 성경을 해석하지 말고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근거로 하여 공교회의 보편 교리를 따라가야 한다.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데 참여하였던 대영제국 장로교 퓨티턴들은 진리의 선한 체계가 있음을 믿었으며 그러한 선한 체계를 세워주신 분은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 성령님이심을 고백한 것이다. 신구약 성경은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크신 은총의 계시이다. 그리고 성삼위일체 하나님은 지금도 신구약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진리의 유일한 최고의 판단자이시다.
293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문서 <11>|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_배현주 목사
편집부
2033 2015-12-29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 배현주 목사, 주교장로교회 > “해석하기 어려운 성경 본문은 좀 더 평이한 성경 본문으로 해석해야”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제1장 7항에서 “성경 안에 모든 것들이 그 자체 안에 서로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두 동일하게 명료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구원을 위하여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며 살펴야 하는 것들은 성경의 몇몇 본문이나 다른 본문 안에서 그렇게 분명하게 제시하고 열려있다. 그것은 학식있는 자 뿐만 아니라 학식이 없는자까지도 정규적인 방법들을 합당하게 사용함으로서 충분하게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모든 성경 본문이 항상 모든 신자들이 일정하고 평이하며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성경 안에는 난해한 구절이 있고 평이한 구절이 있다. 그래서 난해한 구절은 다른 평이한 구절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자들이 구원에 이르기에 충분한 지식을 제공하며 단지 학식있는 자들만이 성경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언급한다. 누구든지 “정규적인 방법들을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서”(in a due use of ordinary means) 성경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매우 중요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의 교리적 입장이다. 신구약 성경은 전문적인 신학 수업을 해야 해석할 수 있는 문헌은 아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정규적인 방법을 적절하게 사용하기만 하면 충분히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 정규적인 방법이 바로 종교 개혁 시대에서는 일반 신자들을 가르쳤던 요리문답 교육이다. 모든 신자들은 적절한 정통 교리를 학습하여 깨닫고 그 터 위에서 다양한 성경 이해의 접근법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신자들은 서로 올바르게 이해하게 된 성경의 교리를 나눌 수 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한 성도의 교제이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단지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 성도의 교제가 아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로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참된 성도의 교제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실로 우리 시대의 교회는 정통 개혁 교리의 문답서에 대한 교육의 부실로 인하여서 신자들이 성경에 접근도 못하고 있다. 모든 교회들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여러 방도들이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제9항에서 성경 해석의 원리를 잘 가르치고 있다. “불멸하는 성경 해석의 법칙은 성경 그 자체이다”(The infallible rule of interpretation of Scripture is the Scripture itself.). 이는 달리 표현하면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가 된다. 이러한 원리는 관주 성경과 관련이 있다. 난해한 본문의 해석의 어려움을 다른 평이한 본문으로 보충하는 것이다(it must be searched and known by other places that speak more clearly). 이는 난해한 구절에 대한 더 명확한 해석 구절이 있다는 것이다. 17세기 스위스 쮜리히 개혁주의 신학자 요하네스 하인리히 하이데커(Johannes Heinrici Heidegger:1633-1698)는 그의 저서 “기독교 신학 통론”(Corpus Theologiae Christianae)에서 “모호하고 난해한 말씀에 대하여서 명백하고 분명한 본문을 따라서 판정한다”고 정의한다. 이어서 어거스틴의 저서를 따라서 진술한다. “어거스틴은 그의 [그리스도 교리]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성경의 가장 평이한 본문에서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난해한 다른 성경 본문은 없다.” 19세기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 박사가 편집한 [순수 신학 통론](Synopsis Purioris Theologiae:1625)에서도 동일한 진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조망 안에서 우리에 의한 모든 논쟁이 구성되는 것은 성경의 다른 명확한 본문으로 정확하게 이러한 조망이 대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인식하고 깨달을 수 있다. 그것들이 인식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한다.” 요한 하이데커는 어거스틴의 저서를 따라서 성경의 분명한 본문으로 다른 난해한 본문을 해석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라서 볼 때에 신구약 성경에 대한 개혁주의 교리로서 “모든 성경”(Tota Scriptura)의 정신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신구약 성경이 어느 한 본문도 버려지지 않고 모두 일정한 방향의 교리적 진술을 지향한다고 하는 개념이다. 칼빈은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따라서 신구약 성경을 해석해야 할 것을 가르쳤다. 그것은 성경으로부터 지나쳐서 성경을 해석해서도 안 되고 성경 어느 본문을 버리면서까지 성경을 해석해서도 아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직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개혁주의 성경 해석의 원리는 변할 수 없는 정통 교리이다. 로마 교회는 그 원리를 너무나 쉽게 버림으로써 점차적으로 미신으로 전락하였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의 교리는 성경 해석의 중요한 원리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를 배우게 되면 누구든지 성경을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다. 무엇보다 요한 하이데커는 그의 저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마태복음 11장 25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실로 그 당대의 로마 제국은 그 이전 헬라 제국 시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헬라 철학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헬라인들은 지혜를 사랑한다고 말하였다(고전 1:22).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하였다(고전1:23).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서 알 수 있는 것은 당대의 헬라 철학의 사고 구조를 따라서는 성경이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헬라 철학과 구약을 혼합시켰을 때에 그 부류들은 기독교 분파주의로 전락하였다. 노스틱주의자들이(Gnostics) 그 대표적인 기독교 분파주의자들이다. 성 어거스틴이 그의 저서에서 진술한대로 오직 성경은 성경으로서 해석하며 좀더 평이한 성경 본문으로 난해한 구절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다른 여러 세속 철학의 복잡한 사색의 구조로서는 성경 해석 되지 않는다. 마태복음 11장 254절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란 헬라 철학자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란 순전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실한 주의 제자들을 의미한다. 모든 사도들을 포함한 사도 시대 성도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하였으며 사도들을 통하여서 구약이 제대로 해석이 되면서 신약 성경으로 기록이 남았다.
292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문서 <1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성경관_배현주 목사
편집부
2059 2015-12-0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성경관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기록된 신구약 성경 66권 외에 더 이상 성령의 계시는 없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6항은 “성경 안에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사람의 구원과 믿음과 삶에 필수적인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 경륜이 분명하게 세워져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여하한 경우에도 성령의 새로운 계시라거나 인간의 전통이 첨가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종교가 깊게 타락했었던 중세 교회 시대는 매우 미신적인 신앙이 퍼져 있었다. 그래서 신비한 체험이라든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하고 인간의 종교성을 통하여 신을 명상하는 신앙 형태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중세 시대에 세워진 수도원이 그러한 역할을 하였다. 지금 시대 신비주의도 중세 시대 신비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수님의 성의를 찾아다니거나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다니는 행위는 모두 로마카톨릭주의이다. 이러한 로마 카토릭 교회의 신비주의는 종교 개혁으로 인하여서 그 근원으로부터 단죄되었다. 그리고 종교 개혁의 신앙고백적 유산으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분명한 정통 교리적 입장이 선언되었다.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성령의 새로운 계시나 인간의 전통이 신구약 성경과 대등한 자리에 위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신구약 성경을 벗어나서 새롭게 계시가 첨가 될 수 있다거나 가시적 교회가 신구약 성경을 벗어나서 새로운 전통을 세울 수 있다는 교리를 배격한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2세기에 발생한 기독교 분파주의자들 중에 몬타누스 주의자들은 대표적인 신비주의 분파들이다. 그들은 주후 1세기 사도시대에 있었던 놀라운 이적들을 재현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기존 교회가 타락했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계시가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사도적 이적을 추구하였다. 결국 그들은 거룩한 보편 교회로부터 이탈되었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사도적 이적을 계시적 이적이라고 정의한다. 하나님의 직접 계시가 활동하던 시대에 기록 계시가 종결될 때까지 교회의 비상 직원들이었던 사도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표적들이다. 그것은 사도시대 이후 교회 시대가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도적 표적은 기록 계시의 종결과 함께 사라졌다. 지금 시대에도 많은 분파주의자들은 직접 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 하며 사도적 표적을 추구한다. 그래서 종교적 신비한 체험을 자신들에게 임한 신의 계시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가장 비진리적인 주장이다. 무엇보다 사도시대의 오순절의 역사가 다시 재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비주의 종교 집단들의 허탄한 주장은 정죄 받아 마땅하다. 그러한 주장은 기독교 역사에서 주후 2세기 거룩한 보편 교회에 의해서 정죄된 몬타누스주의자들의 거짓된 주장과 동일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분명하게 “성령의 새로운 계시가 첨가 수 없다”고 진술한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따라서 볼 때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신 그 사건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과 부활과 승천과 연결되는 일련의 구속사의 한 과정이다. 오순절 사건은 새 언약의 교회가 세워지는 하나님의 경륜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이 반복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오순절 사건도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다. 나아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정통 교리가 무질서하게 광풍에 휘말려 있는 분파주의 교회 시대에 참된 교회가 어떠한 질서를 따라서 세워질 것을 가장 정확하게 진술하고 있다. 곧 거룩한 보편 교회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신구약 성경의 말씀을 원리로 하여서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신구약 성경 말씀이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법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6항 후반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씀 안에 계시된 것에 대하여서 구원하는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고 진술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구약 성경을 참되게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 조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을 조명이라고 부른다. 이제 영감된 신구약 성경의 기록은 신자들은 조명을 통하여서 깨닫게 된다. 그것은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비추어주시는 진리의 빛이다. 신자들은 믿음으로 중생한 이성을 통하여서 성경의 계시를 깨닫게 된다. 그러한 성령의 내적 조명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신자들의 이성을 중생한 이성이라고 부른다. 그 중생한 이성은 하나님을 찾아간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분명하게 특별 계시의 종결을 고백한다. 그 외에 성령께서 자기에게 말했다고 하는 직통계시나 꿈 혹은 예언과 같은 방식으로 첨가되는 계시는 더 이상 없다. 오로지 중생한 신자들에게는 성령의 내적 조명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건전하게 세워지려면 새로운 계시나 인간의 전통을 따라 세워지지 말아야한다. 오직 신구약 성경으로부터 세워져야 한다. 그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증거하는 성경론이다.
291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문서 <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성경론 2_배현주 목사
편집부
2307 2015-09-0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성경론 2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신구약 성경 66권의 범주는 이미 사도 시대에 결정되어진 것”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제1장 2항에 신구약 성경의 범주를 결정해서 고백서에 진술했다. 구약 39권 신약 27권이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은 66권이다. 이러한 결정이 왜 중요한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개혁 교회는 예배시에 성경 이외에 외경을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성경과 함께 외경을 사용하고 있다. 로마 카토릭 교회는 반동 종교 개혁의 일환으로 트렌트 공의회를 개회하여서 트렌트 공의회 결정 문헌(Canones et Decreta Dogmatica Concilii Tridentini: A.D. 1563)을 작성하였다. 그 결정 문헌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구약 성경 39권 외에 외경으로 알려진 토비아스(Tobias) · 유디트(Judith) · 지혜서(Wisdom) · 바룩서(Baruch) 등을 구약 성경 목록에 넣었다. 여기에 로마 카톨릭의 성경관을 엿볼 수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가시적 교회의 완전성을 주장하며 로마 교회가 완전하며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 회의에서 외경을 구약의 목록에 넣으면 성경만큼의 권위가 있다고 믿는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결정을 절대적으로 믿는 그들의 심각한 오류가 성경에 외경이 포함되게 되었던 원인이다. 로마 카토릭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 이전까지 고대 정통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고 있었던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의 성경의 범주를 트렌트 공의회에서 다르게 결정한다. 몇 권의 외경을 포함시켜서 성경과 동일한 위치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지금도 고치지 않고 있다. 로마 카토릭 교회는 그들이 결정한 교회의 전통을 무오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첨가된 외경도 로마 카토릭 교회가 성경으로 결정하면 정경이 된다고 본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경이 교회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후대에 첨가된 경전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결정에 따라서 정경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정경이 되는 것을 로마 카톨릭 교회가 결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실로 어리석다. 신구약 성경의 범주는 이미 사도 시대에 결정되어 있었다. 다만 긴 세월이 지난 후에 정통 교회의 종교 회의에서 그것을 수납한 것에 불과하다. 구약 성경의 범주는 예수님 당대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랍비들은 구약 성경 39권을 “손을 더럽히는 책”이라고 하여서 함부로 손 대면 아니 되는 거룩한 문헌이라고 알고 있었다. 이는 구약 시대 랍비들이 구약 성경의 범주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눅 24:44)고 말씀하셨다.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구약의 범주를 말씀하셨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은 그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구약 성경의 범주였다. 이미 그 당대에 구약 성경의 범주가 공인되어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외경은 말라기서 이후에 기록되었다. 중간기 때에 유대 묵시 문학의 한 부분으로서 발생하였다. 당대 유대인들은 성경과 외경의 확연한 차이를 알고 있었다. 구약은 말라기서를 마지막으로 성경 기록이 종결되었다. 그것이 구약 성경 39권이다. 신약 성경은 고대 종교 회의로서는 힢포 대회(The Synods at Hippo:A.D. 393)와 카르타고 대회(Carthage: A.D. 397)에서 27권으로 결정되었다. 로마 교회는 이러한 고대 정통 교회의 종교 회의 결정을 따라서 성경의 범주가 정하여졌기에 성경이 교회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속사도 시대부터 여러 교부들의 증언을 통해서 신약 성경의 범주가 이미 27권으로 널리 공인 되어있었다. 고대 교부로서 [이단 논박]이라는 저서를 기록한 이레니우스(A.D. 170)는 그의 저서에서 신약 성경 전체를 거의 인용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A.D. 200)도 신약 성경 거의 전체 목록을 인식하고 있었다. 여러 증언들을 통해서 볼 때 신약 성경 27권은 후대에 결정에 의해서 정경이 된 것이 아니라 정통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널리 공인되었다. 다만 여러 분파주의자들이 신구약 성경의 범주에 대하여서 논란을 일으키게 되자 정통 교회가 종교 회의를 통해서 그 당시에 널리 공인된 신구약 성경의 범주를 정경으로 추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범주는 교회의 공적 종교 회의가 정하여 준 것이 아니다. 이처럼 성경의 범주는 이미 사도들 시대부터 공인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의 범주는 후대 교회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역사적으로 공인된 신구약 성경의 범주를 따라서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을 성경으로 고백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1장 4항은 다음과 같이 성경의 권위를 고백하고 있다. “성경의 권위는 교회나 인간의 증거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직 전적으로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 그분에게 의존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여져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성경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고 진술한다. 그것이 성경의 자증성이다. 이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2 항은 후반부에 성경에 대하여서 “그것은 신앙과 삶의 법칙으로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서 주어졌다”고 고백한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어있다. 그것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영감을 받아서 기록한 것이다. 사도들의 권세는 신약 성경의 권위에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다. 신약 시대 사도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신약 성경의 범주는 이미 기록이 종결되었을 때 결정되었다. 그것은 요한 계시록 22장 18-19절에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신구약 기록 계시의 종결을 선언한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 본문이 단지 요한 계시록에 국한된 것으로 볼 수 없다. 신구약 기록 계시의 마지막 문헌으로서 요한 계시록은 신구약 계시의 종결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8세기 이후에 발생한 계몽주의 신학은 이러한 정통 교회 소중한 유산을 폐기 처분시키고 문서설과 역사 비평 그리고 양식사 비평 역사적 예수 연구 등으로 신구약 성경을 난도질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보다 인간의 이성을 더 우위에 두었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그리고 급기야 신구약 성경을 자신들이 임의로 판단하고 절단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문헌이라고 헛되이 주장하였다. 그래서 모세 오경의 저작설을 부인하고 후대에 편집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이사야서를 제 1 이사야서와 제 2 이사야서로 나누면서 저자가 두 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Q 문서설을 통하여서 신약 복음서의 사도들의 저작설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각 저자들의 신학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며 구약에서 신명기 신학과 이사야 신학 그리고 신약에서 바울 신학과 요한 신학을 주장하며 신구약 성경을 난도질 하였다. 그리고 심지어 구약 신학과 신약 신학은 전혀 교류할 수 없는 별개의 신학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참된 신자들은 동일한 신앙 고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러하다. “신구약 성경은 신앙과 삶의 법칙으로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러한 신앙 고백적 유산을 버리는 순간 기독교는 이방 종교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신구약 성경의 기록 계시로서의 권위와 신구약 성경의 축자 영감설을 부인하는 순간 기독교는 그 기반에서부터 무너진다. 그러므로 개혁 교회는 신구약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견지해야한다. 그것은 거룩한 보편 교회의 신앙 고백적 유산이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는 신구약 성경의 목록을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서 후대 신자들에게 성경의 이외에 외경을 성경처럼 읽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은 현대 개신교도들에게 친숙한 신구약 성경 66권의 범주를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정경으로 결정하여서 남겼다.
290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문서 <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성경론 1_배현주 목사
편집부
2921 2015-07-0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성경론 1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성경을 제외한 학문, 예술, 문화, 자연 등 모두는 일반 은총에 속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성경론 제1항은 “자연의 빛”을 언급한다. 여기에서 “자연의 빛”(Lumen Naturalis)이란 중세 시대부터 이성의 빛(Lumen Rationis)으로 표현되는 자연을 탐구하는 인간의 지성을 말한다. 이 자연의 빛으로부터 자연법이 발생하였다. 세속법은 모두 자연법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인류가 전적으로 타락한 이후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양심을 따라서 발생한 법이다. 자연법(Lex Naturalis)은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법이다. 그것은 고대 사회에서도 있었다. 고대 사회에 대표적인 자연법에는 함무라비 법전이 있다. 그러한 법전들은 모두 자연의 빛을 따라서 형성된 자연법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성경론의 제1조는 그러한 자연의 빛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비록 자연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사역이 사람으로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하나님의 선과 지혜와 능력을 드러낸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것들은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과 그의 뜻의 지식을 충분하게 주지는 못한다”고 고백한다. 이 부분은 로마서 1장 19-21절과 연결된다. 사도 바울은 다음같이 선언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사도 바울은 자연의 빛을 따라서 신을 사색할 때에 겨우 고대 그리스 철학의 수준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연의 빛으로 인간이 신에 대하여서 탐구할 때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신의 존재에 대한 희미한 지식일 따름이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진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자연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사역이 사람으로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하나님의 선과 지혜와 능력을 드러낸다”는 부분과 일치하는 교리이다. 그리고 요한 칼빈은 기독교 강요 최종판 제1권 제5장의 표제에서 “하나님의 지식이 세상의 창조와 그의 계속적인 통치에서 빛난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처럼 로마서와 요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동일한 교리적 입장을 진술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신의 존재를 피할 수 없을 만큼은 자연의 빛이 신에 대한 지식을 비추어 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여전히 그것들은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과 그의 뜻의 지식을 충분하게 주지는 못한다”고 고백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연의 빛을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라고 선언하고 있다. 요한 칼빈은 제1권 5장 14절에서 “불타오르는 등잔들이 창조자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이 세상의 솜씨로 우리에게 비추어주고 있는 것이 모두 헛되다. 그와 같이 그것들이 어디에서나 우리에게 비추일찌라도 그것들을 통해서는 우리가 올바른 도리로 이끌림을 받지 못한다”라고 진술한다. 결국 자연법으로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데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치리할 교회법을 주셨다. 그것이 신구약 성경이다. 신구약 성경은 최고 권위의 교회법이다. 정통 교회는 성경으로부터 나왔다. 성경이 교회의 기초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 시대에 여러 모양으로 그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 본문은 히브리서 1장 1-2절을 상기 시킨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셨다.” 그것이 신구약 성경이다. 로마 카토릭은 성경이 교회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며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동등한 위치에 둔다. 그러나 개혁 교리는 성경을 벗어나는 모든 인간의 전통을 배격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1장에서 칼빈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Notitia Dei)에 대한 진술을 그대로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제1장의 교리적 진술은 300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헤르만 바빙크에게서 “일반 계시의 불충분성”으로 진술된다. 헤르만 바빙크는 [하나님의 큰일](Magnalia Dei) 제4장 일반 계시의 가치에서 “우리가 일반 계시 영역 전체를 개관해 볼 때 우리는 한편으로는 높은 가치가 있다는 것과 부요한 열매들을 산출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가 그 빛으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1항을 정확하게 그 시대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자연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사역”(the Light of Nature, and the works of Creation and Providence)을 “일반 계시”(Algemeene Openbaring)로 개념화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된 우주에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셨기에 일반 은총이라 보았다. 학문과 예술과 문화와 자연 그 모두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다. 나아가 헤르만 바빙크는 일반 은총으로는 하나님의 존재 만을 희미하게 알 수 있을 뿐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얻기에 불충분하다고 말한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제1항과 동일한 교리적 입장이다. 신앙고백서 제1장 1항은 일반 계시의 불충분성과 특별 계시의 필요성 그리고 특별 계시의 총화로써 신구약 성경의 필연성을 고백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1장 1항은 맨 마지막 부분에 계시 종결을 분명하게 고백한다. 그것이 “지금은 그의 백성들에게 그쳐진 그의 뜻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이전의 방식들”이라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이전의 방식들”은 직접 계시를 말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에게 직접 임재하셨고 선지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셨으며 사도들에게도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셨던 특별 계시의 현현을 말한다. 그러나 “지금의 백성들에게는 그것을 그치셨다”고 고백한다. 이는 특별 계시가 성경으로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다시는 새로운 특별 계시가 없다. 특별 계시는 성경 안에서 종결되고 보존되었다. 이제 성령의 영감을 통한 특별 계시의 첨가는 없다. 다만 기록된 계시를 해석하는 조명이 남아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이후에 모든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각자의 신학 저서 안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해설하고 있다. 헤르만 바빙크, 찰스 핫지, 윌리엄 쉐드, 루이스 벌코프 등으로 이어지는 교의학 저서들은 약간의 교리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장로교회 역사에 있어서 후대 교의학 저서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해설서라고 할 수 있다.
289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문서 <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구조_배현주 목사
편집부
3671 2015-03-0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구조 < 배현주 목사, 주교장로교회 > “교회에서는 교리가 가르쳐지고 성례와 권징이 적절하게 시행되어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구조는 요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 최종판(1559년)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가장 먼저 성경론(1)을 시작으로 신론(2,3), 인간론(6), 언약론(7), 기독론(8), 구원론(9-18), 율법(19),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20),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21), 합당한 맹세와 서원(22), 세속권세(23), 혼인과 이혼(24), 교회론(25-31), 종말론(32-33)으로 되어있다. 왜 신앙고백서 구조에 성경론이 가장 첫째 자리인가? 그것은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유일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신구약 성경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사색하는 것은 모두 공허한 오류에 빠진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속하시고자 구약과 사도 시대 역사를 통하여서 그 자신을 스스로 알리셨다. 그때 교회의 기초 직원이셨던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역사 속에 사라지면서 모든 계시는 종결되었다. 신구약 성경은 종결된 특별 계시이다. 그리고 그것을 구속 계시라고 말한다. 사도와 선지자들만이 계시의 기록자이다. 사도 시대로 특별 계시는 종결되었다. 신구약 성경 이외에 특별 계시는 없다. 모든 특별 계시는 최종적으로 성경 안에 보존되었다. 신구약 성경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사색하는 것은 검증할 수 없는 위험한 신앙행위이다. 그 다음으로 신론이다. 신론은 정통 신학의 기초이다. 정통 신학의 모든 원리들은 신론에 기초한다. 그 신론은 삼위일체론이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로부터 정통 신학의 모든 주제들이 추론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성경론 다음으로 신론을 진술한 것은 매우 합당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따라서 살펴보는 정통 신학의 구조는 이러하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신적 작정과 예정 그리고 그 예정의 실현(display)으로서 창조와 섭리 그리고 그 신적 섭리 아래에 인간의 타락과 은혜 언약과 은혜 언약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 고난 · 부활 · 승천이 자연스럽게 추론된다. 그 다음으로 은혜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신자들의 구원이 추론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실체이시다.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래서 복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런데 구원이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기초하기에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전적 은혜이다. 선택을 받은 자의 어떠한 이점(merits)도 고려되지 않았다.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신 뜻에 의존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구원의 서정을 따라서 구원론을 진술한다. 그때에 소명 · 중생 · 회심 · 믿음 · 칭의 · 성화 · 영화에까지 이르는 전 과정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에 있다. 구원의 서정 전체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화조차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달려있다. 성화까지도 인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구원의 서정 전체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다. 그래서 구원의 전과정에 인간의 자리는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화가 신자의 의지로 발휘되는 것처럼 보여도 그러한 선한 의지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라고 진술한다. 성화는 신자들의 선한 의지에 앞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의 성화는 성령의 역사의 열매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화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돌린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화가 특별한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로 항상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없는 일상 가운데서 부단히 참된 선을 지향하는 것이 성화라고 진술한다. 성화란 신자 편에서는 끊임없이 최고의 선(summum bonum)을 지향하는 것이다. 거기에 신자들의 삶이 곤고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참된 선을 이루기에 신자들은 너무 연약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도덕법은 완전한 선을 이루라고 명령하신다. 그 두 간극 사이에 신자들의 큰 영적 싸움이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능히 하시리라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교리적 입장이다. 그 다음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율법(19)을 해석하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20),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21), 합당한 맹세와 서원(22), 세속권세(23), 혼인과 이혼(24)이라는 주제로 그리스도의 삶의 부분을 다룬다. 그리고 이어서 교회(25-31)에 대하여 다룬다. 가시적 교회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예정으로부터 발현된 지상의 하나님 나라이다. 그것은 신구약이 통일적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가시적 교회이다. 새 언약의 교회 공동체도 가시적 교회이다. 이 두 경륜의 차이로 나누인 신구약 교회는 실체적으로 하나의 교회이다. 신구약 교회는 은혜 언약 아래에서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보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이 된 택자들의 모임이다. 참된 교회는 가르침과 모임이 모두 있어야 한다. 사람만 모아 놓는다고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르침이 있는 모임이 교회이다. 요한 칼빈은 교회의 표지에 대하여서 참된 교회는 건전하고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모임이라고 말한다. 참된 교회란 올바른 교리가 가르쳐지고 성례가 제대로 시행되며 권징이 적절하게 시행되는 교회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교회(25-31) 다음으로 종말(32-33)을 다루고 있다. 그때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가르치는 종말은 항상 나그네 신앙이다. 참된 신자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날을 나그네와 같이 여기고 살아가야 하리라. 최고의 선이신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으로 만족하는 삶이다. 성 어거스틴은 신국론에서 신자들은 두 도성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지상의 도성에 발을 딛고 살되 항상 하늘 도성을 바라보며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이 되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신국론의 교리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잘 드러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론으로부터 시작해서 종말론까지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이루는 교리 진술서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장로교회 신자들이 반드시 학습해야할 중요한 신앙고백서이다.
288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문서 <6>| 사보이 선언과 회중교회주의자_배현주 목사
편집부
4234 2014-12-16
사보이 선언과 회중교회주의자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정통 교리가 없다면 회중이 있어도 정통 교회라고 할 수 없어” 1659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했던 회중교회주의자 성직자들이 주축이 되어서 사보이 선언을 주장하였다. 이 사보이 선언은 회중교회주의를 고백하고자 함이었다. 많은 부분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따라간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교회 정치 부분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달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기간에 대다수의 장로주의 퓨리턴들과 교회 제도에 있어서 의견을 달리 하였던 회중교회주의 퓨리턴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웨스트민스터 총회 석상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다섯 명의 형제들(dissenting brethren)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한 독립 교회 제도의 주창자들은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80), 예레미야 버로우(Jeremiah Burroughs: 1600-1646), 필립 나이(Philip Nye:1595-1672), 시드락 심슨(Sydrach Simpson: 1600-1655), 윌리엄 브릿지(William Bridge:1600-1670) 등이다. 이렇게 의견을 달리하는 회중교회주의 퓨리턴들은 후에 독립교회파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들은 뉴잉글랜드에 이주하여 있던 존 코튼(John Cotton: 1585-1652)과 존 오웬(John Owen: 1616-1683)과 함께 회중교회주의자들로 분류가 된다. 그들은 교회 제도에 있어서 분리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 대하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성직자로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총대로 파견되었던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1613-1648)는 그들의 교회 정치에 대한 견해를 분파주의로 정죄하였다. 그리고 다니엘 코드레이(Daniel Cawdry:1588-1664)는 그의 저서 “독립교회파: 위험한 분리주의자들로 입증된 존 오웬의 변론에 대하여서”(Independence, a Great Schism, proved against Dr. John Owens' Apology, 1657)에서 그들을 분리주의자들(Separatist)로 정죄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석상에서 대다수 장로주의 퓨리턴들의 교회 정치에 대한 일치된 견해를 통하여서 회중교회주의자들의 분파주의적 교회관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회중교회주의자들은 교회관에 있어서 분리주의적이었다. 무엇보다 퓨리턴 초기 역사, 즉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토마스 카트라이트(Tomas Cartwright:1537-1603)의 영향을 받은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e: 1550-1633)에 의하여서 주도된 극단적 분리주의자들은 이미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프리머스에 정착하여서 자기들만의 독립 교회를 세웠다. 이들을 브라운주의자들(Brownist)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 분리주의자들과 또 다른 부류의 뉴잉글랜드의 온건한 분리주의자들을 함께 회중교회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이 회중교회주의자들은 교회 제도에 대한 분리주의적 입장으로 인하여서 17세기에 이미 신대륙에 정착해서 퓨리턴 정신을 심었지만 18세기 초에 신대륙에 세워진 장로교회보다 더욱 빨리 급속도로 정통 교리로부터 이탈하였다. 무엇보다 회중교회가 신대륙에 자유주의 신학의 첫 유입지가 되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신학이 19세기에 회중교회 구빛파(Old Light)를 통하여서 신대륙에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회중교회 구빛파는 신대륙에 자유주의 신학의 교두보였다. 이렇게 회중교회가 정통신학으로부터 이탈이 빠른 것은 회중교회 교리가 처음부터 정통 교리로부터 이탈하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1967년 미합중국 주류 장로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폐기시켰을 때에 미합중국 안에 정통 신학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훨씬 이전에 회중교회주의자들은 정통 개혁 교리로부터 아주 쉽게 이탈하였다. 무엇보다 회중교회주의자들과 전혀 무관할 수 없었던 신대륙 장로교회조차도 신학파(New School)의 타일러를 중심으로 자유주의 신학이 장로교회에 유입되어서 구학파(Old School)의 구 프린스턴 신학교의 정통주의 신학자 찰스 핫지와 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그런데 신학파는 회중교회주의자들과 매우 친밀하였고 결국 이는 장로교회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 경로가 회중교회주의자들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회중교회는 정통 교리로부터 이탈하여 있었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하였던 성직자들을 존중한다. 그분들은 그 시대에 최고의 석학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정치에 있어서 회중교회주의자들이 선언한 사보이 선언은 아쉽게도 분파주의자적 선언이었다. 교회의 보편성을 파괴시키며 단일한 개교회가 완전한 교회라고 주장하는 회중교회주의는 잉글랜드에서는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을 통하여서 그 열매가 만발하였다.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은 철저하게 실패한 혁명이다. 그런데 청교도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에 모든 분파주의자들이 자기의 권리를 가지고 정통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결국 청교도 혁명은 교회 몰락의 혁명이 되고 말았다. 단지 크롬웰 본인의 독재 체제 구축의 수단일 뿐이다. 왕정 복고 이후 잉글랜드 교회의 감독교회로의 회귀는 청교도 혁명의 반작용이다. 회중교회주의자들의 분리주의적 교회관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심각한 보편 교회관의 몰락을 촉진시켰다. 그래서 북 아메리카의 회중교회주의는 정통 신학의 몰락을 자초하였다. 유니테리언,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등등 모든 분파주의자들이 잉글랜드로부터 이주해서 북 아메리카에서 자양분을 얻고 동아시아의 피선교국에 막대한 종교적 피해를 남겼다. 결국 회중교회주의는 교회의 보편성보다 개교회주의를 그리고 교리의 정통성보다 외양의 부흥을 추구하는 개신교 분파주의자들의 시조가 되었다. 비록 회중교회주의자들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의 분리주의적 교회관은 정통 교회의 모든 신앙의 유산들을 유실시켜 버리는 오류를 범하였다. 무엇보다 분리주의적 교회관은 정통 교회관이 아니다. 사도 신조의 네 번째 부분 “나는 거룩한 보편 교회를 믿습니다”(Credo in Sanctam Catholicam Ecclesiam)라고 할 때 “거룩한 보편 교회”(Sanctam Catholicam Ecclesiam)란 달리 해석하면 “세상과 구별되는 보편 교회”를 말한다. “거룩하다”라는 의미가 히브리어 “콰도쉬”(שׁדק)에서 왔다면 그것은 세상과 구별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이 된다. 세상 한 가운데 있으나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이 거룩한 보편 교회이다. 그런데 거룩한 보편 교회란 사도 시대 이후로 결정된 보편 교회의 정통 교리에 기초한다. 사도적 가르침(διδακη)의 보편성을 잃어버리면 그 교회는 분파주의 교회가 된다. 그것은 사도 신조(Apostle Creed) 이후에 니케아 신조(Nicene Creed:A.d. 325), 칼게돈 신조(Chalcedonian Creed: A.D. 451), 아타나시우스 신조(Athanasian Creed: A.D. 4th Century)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신조들은 보편 교회가 진리를 따라 결정한 정통 교회의 표준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정통 교리를 상실한 교회는 더 이상 정통 교회가 아니다. 참된 교회란 정통 교리가 있는 교회이다. 정통 교리가 없다면 회중이 있어도 정통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정통 교리는 교회 성립의 가장 중요한 기초이다. 회중교회주의는 여하한 경우에도 사도 신조가 증거 하는 거룩한 보편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통일성과 보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287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문서 <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스코틀랜드 성직자들_배현주 목사
편집부
4524 2014-10-2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스코틀랜드 성직자들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에 있어 지대한 영향력 행사해”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스코틀랜드 총대들은 성직자 4명과 평신도 귀족 2명이 참관인(Obsever)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성직자들의 활동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성직자 참관인은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 1583-1646),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1600-1661), 로버트 베일리에(Robert Baillie:1602-1662),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1613-1648) 등이다. 알렉산더 헨더슨은 평신도 귀족 와리스톤의 아치발디 존스톤 경(Sir Archibald Johnston, of Warriston:1611-1663)과 함께 국민 언약(National Covenant)을 입안하였다. 그리고 1638년 2월 28일 스코틀랜드 총회가 국민 언약을 결정할 때 총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던 분이다. 알렉산더 헨더슨이 웨스트민스터 총대로 참석할 때 60세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총대원으로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16세에 세인트 앤드류 대학교를 입학했으며 20세에 석사를 마쳤다 그리고 그 대학교에서 교수로 30세까지 십년 간 철학과 수사학을 가르쳤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기간 그는 모든 논쟁에서 높은 식견을 가지고 큰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1646년에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떠나 스코틀랜드로 돌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소천하였다. 사무엘 러더포드는 스코틀랜드 장로주의 신학의 대변인과 같다. 그는 17세에 에딘버러 대학교에 입학해서 21세에 석사를 마치고 그의 나이 27살에 앤워드(anwoth)의 목사로 섬겼다. 1636년 그는 알미니우스주의에 대한 논박서를 출판하였으나 알미니우스를 신봉하는 그 지역 감독 시드세프(Sydserff)에 의해서 주교들의 법정(Bishop's High Commission)에 소환되어 그의 직무를 박탈당하고 감금당하였다. 그는 특히 알미니우스 세력이 강하였던 애버딘의 박사(Aberden Doctors)들과 몇 번에 걸친 논쟁을 하였고 그 결과 애버딘의 사람들(Aberden people)의 호감을 얻었다. 1643년 그의 나이 43세에 웨스트민스터 총대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때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그의 저서 중에 [장로회의 정당한 권리](Due Right of Presbytery)라는 작품은 노회 제도에 대한 신적 기원을 논증한다. 그리고 [교회 정치의 신적 권리](The Divine Right of Church Government)라는 작품은 에라스투주의자들을 논박한다. 그는 [장로회의 정당한 권리]라는 장로주의 논증서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사도 시대 첫 노회(Presbytery)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사마리아 노회와 안디옥 노회가 사도들에 의하여서 개척이 되었고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노회에서 수년간 복음으로 가르치다가 안디옥 노회 파송 선교사로 소 아시아 지방의 갈라디아, 고린도, 에베소, 데살로니가 지방에 노회를 개척한 것으로 본다. 사무엘 러더포드는 바울 서신에 언급되는 지역 교회들을 모두 노회로 본다. 무엇보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회를 최초의 장로회 대회(Juridical Synode)로 보고 있다. 사무엘 러더포드는 [은혜 언약](A Treatise of the Covenant of Grace)이라는 저서에서 구속 언약(The Covenant of Redemption)을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God and the Mediator Christ)이라고 말한다. 그는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키지 않고 복음 안에 율법을 종속시키면서 율법도 복음의 한 형태라는 칼빈의 신학적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 조지 길레스피도 사무엘 리더포드에 못지않은 탁월한 장로주의 신학자였다. 그의 저서 “아론의 싹난 지팡이”(Aaron's Rod Blossoming)는 당대의 에라스투주의자들에 대한 정확한 논박서로 유명하다. 조지 길레스피가 노회석상에서 기도하였던 그 기도 내용이 소요리 문답 4문의 답이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즉석으로 요청받은 기도에서 “오 하나님! 당신은 존재에 있어서 영시이며 지혜와 권세와 거룩과 공의와 선하심과 진리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십니다”라고 기도하였고 그것이 소요리 문답 4문의 답이 되었다. 24살 때인 1637년 “스코틀랜드 교회를 질식시키는 잉글랜드의 교황주의 의식들 ”(The English Popish Ceremonies, obturded upon the Church of Scotland)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잉글랜드 국교회를 비판하였다. 1638년 국민 언약에 서명할 때 그는 키르크칼디(Kirkcaldy) 노회의 웸시(Wemyss) 사역자로 있었다. 그해에 그는 글래스고우 총회에서 25세 나이로 설교하였다. 1643년 그의 나이 겨우 30세에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스코틀랜드 총대로 파송되어서 에라스투주의자들과 논쟁하여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탁월한 에라스투주의자 존 셀던은 그 와의 논쟁 후에 “내가 십년 동안 수고하여 이룬 학식을 한 순간에 날려 버렸다”고 치욕스러운 고백을 하였다. 조지 길레스피는 실로 “무서운 신동”이었다. 1647년 그는 웨스트민스터 총회 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34살의 나이에 스코틀랜드 애딘버러에서 개회된 총회에서 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중병에 걸려서 35세의 나이로 소천하게 된다. 그렇게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그가 하나님 앞에서 수고 하여 얻은 열매는 교회 역사에 매우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스코틀랜드 성직자 중에 잉글랜드 교회와 종교적인 협상을 주로 감당하였던 로버트 베일리에는 15세에 글래스 고우 대학교에 입학해서 19세인 1620년에 석사를 취득했다. 1631년 성직 서임을 받고 킬위닝(Kilwinning) 교회의 사역자로 임명되었다. 1638년 그는 그가 속한 어빙(Irvine) 노회로부터 글래스고우 총회 총대로 선임되었다. 1643년 웨스트민스터 총대로 부름을 받고 그해 11월에 잉글랜드 런던에 도착하여서 3년간 수고하였다. 그는 열정적인 장로주의자였고 강력하게 고위 성직자 제도와 알미니우스주의를 반대한 인물이었다. 1651년 글래스 고우 교수로 재직하다가 1660년 왕정 복고 이후에 스코틀랜드에 감독 교회를 강요하려는 찰스 2세에 맞서서 죽는 날까지 저항하며 싸웠다. 그는 연로한 나이에 감독 제도를 세우려는 찰스 2세와 맞서다가 병으로 소천하였다. 스코틀랜드 장로주의 성직자들은 그 시대에 위대한 인물들이며 조국 교회를 진정 사랑한 목회자들이고 심오하고 보편적 학문이 있는 신학자들이었다.
286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문서 <4>| 웨스트민스터 잉글랜드 총대들 인물 단평_배현주 목사
편집부
3970 2014-06-24
웨스트민스터 잉글랜드 총대들 인물 단평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목회자는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는 그 시대 선비이며 학자” 웨스트민스터 잉글랜드 총대들은 주로 성도들인 사정관들(Lay Assessors)과 목회자들(Divines)로 구성되어 있었다. 1. 사정관 총대들 사정관들 중에 상원 의원(House of Lords)이 10명이었다. 주로 백작(Earl)들과 경(Lord)으로 불리는 귀족들이었다. 그리고 하원 의원(House of Commons)이 20명이었다. 주로 향신층(Gentry)이었다. 잉글랜드 의회 하원 의원 중에서는 존 셀던(John Selden:1584-1654)과 존 핌(John Pym:1584-1643)이 유명하다. 학식이 풍부한 존 셀던이 총회 석상에서 에라스투주의(Erastism)를 주장하다가 스코틀랜드 총대였던 조지 길레스피(Geroge Gillespie:1613-1648)의 반론에 할 말을 잃어버린 사건은 웨스트민스터 총회 역사에 유명하다. 그러나 하원 의원이었던 존 셀던의 신학적 수준은 지금의 대부분의 신학자 수준을 능가한다. 존 핌도 유명하다. 그는 잉글랜드 의회의 지도자적 인물이었다. 그래서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에게 난적이었다. 존 핌은 찰스 1세가 장기 의회(Long Parliament:1640-1648)를 열었을 때에 체포하고자 하였던 5명의 하원 의원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국왕이 하원 의원 체포를 시도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잉글랜드 시민전쟁(Civil War:1642)이 발발했다. 2. 목회자 총대들 목회자 총대들은 121명이었다. 그중에서 결원이 되어서 후에 첨가된 인원들도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목회자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의장(Prolocutor)이었던 윌리엄 트위스(William Twisse:1578-1646)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의장직을 맡았던 그는 안식일 논쟁에 대한 저술은 매우 탁월하다. 윌리엄 트위스는 총회기간에 소천하셨는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1575-1653)는 방대한 분량의 ‘히브리서 주석’(A Learned and very useful Commentary on the whole Epistle to the Hebrews)을 저술하였다. 그 히브리서 주석은 원문 석의가 철저하면서 교의학 전체 교리를 담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윌리엄 구지 박사는 1647년에 잉글랜드에서 장로 정치 제도를 따라서 런던에서 개회 한 첫 대회(Synode)에서 의장직을 맡았던 인물이다. 스테판 마샬(Stephen Marshall: 1594-1655)은 ‘유아 세례 논쟁’(A defence of infant baptism)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조셉 카알(Joseph Caryl:1602-1673)은 그의 전생에 걸쳐서 방대한 분량의 욥기서 주석을 저술하였다. 탁월한 왕당파 퓨리탄 신학자 제임스 어셔(James Ussher:1581-1656)는 삼위일체론을 잘 정리한 “기독교 종교의 총체 혹은 신적 본체”(A Body of Divinity or the Sum and Substance of Christian Religion)라는 저서를 남겼다. 어드먼드 스토운톤(Edmund Staunton:1600-1672) 박사는 웨스트민스터 총회 기간에 잉글랜드 하원에서 “이스라엘의 반석”(The Rock of Israel)이라는 유명한 설교를 남겼다. 그리고 에라스투주의자인 존 라이트 푸트(John Lightfoot:1602-1675)가 있다. 교회의 열쇠권에 대한 논쟁서를 저술한 다니엘 코드레이(Daniel Cawdrey:1587-1664)도 있다. 다니엘 코드레이는 “자의적 예배”(Will Worship)라는 주제로 하나님 앞에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잘못된 예배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그밖에 대다수의 장로주의 총대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5명의 형제들(Dissenting Bretheren)이 있다. 이들은 회중 교회주의자들이었다.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1600-1680), 필립 나이(Philip Nye:1595-1672), 시드락 심슨(Sidrach Simpson:1600-1655), 예레미야 버로우(Jeremiah Burroughs:1600-1646), 윌리엄 브릿지(William Bridge:1600-1670)등이다. 3. 당대 최고의 석학들인 총대들 잉글랜드 하원(House of Common)에서 어드먼드 스토운톤 박사가 설교한 “이스라엘 반석”(The Rock of Israel)이라는 제목의 강설은 유명하다. 그가 신명기 32장 31절 “대적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니 대적도 스스로 판단 하도다”라는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그 시대 교회의 상황을 잘 표현한 유명한 어록이 있다. 그 어록은 이러하다. “애굽의 어두움은 외면적 어두움이지만 로마의 어두움은 내면적이며 영적인 어두움이다”(Egypts darknesse was external; Romes inward, and spiritual;). 이 의미는 이러하다. "이스라엘에게 애굽은 전혀 다른 나라이다. 그래서 애굽의 어두움은 이스라엘 공동체 밖에 있는 외면적인 어두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시대를 지나서 점차 타락해가 버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어두움은 내면적이고 영적인 어두움이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어드먼드 스토운톤 박사의 설교는 어쩌면 지금 시대 교회를 더욱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현대 교회 시대처럼 분파주의 교회가 난립하는 상황에서는 정통 교회가 무엇인지 그 기준 조차 마련하기 불가능해져 버린 교파 교회 시대에 교회의 어둠은 내면적이고 영적인 어두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드먼드 스토운톤 박사의 시대를 뛰어넘는 교회 타락의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력은 관심을 가지게 한다. 이렇게 탁월한 시대 인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이처럼 잉글랜드에서 장로주의 퓨리탄들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었다. 대다수가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대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서기로 수고한 존 왈리스(John Wallis:1616-1703) 목사는 대수학을 정리한 수학자였다. 아이삭 뉴튼보다 한 세대 앞선 수학자였다. 참으로 장로주의 퓨리탄들은 한 시대에 목회자요 신학자요 과학자요 그 시대의 선비로서 고귀한 삶을 살다가 가셨다. 4. 마치는 말 우리는 장로주의 퓨리탄들을 통해서 목회자가 무엇인가 하는 그 직분에 대한 본질을 볼 수 있다. 목회자는 계시 해석자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는 그 시대의 선비이며 학자이다. 그래서 다음 세대를 이어갈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서 가르쳐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목회자는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은 자들이다. 이러한 사명에 대한 각성이 없이 목회자의 길을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에게도 본인에게도 우리 시대에게도 불행이다.
285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문서 <3>| 표준문서와 장로교회_배현주 목사
편집부
3396 2014-05-13
표준문서와 장로교회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장로교회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따라서 이루는 교회이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장로교회법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로교회 표준문서가 작성되기 전까지 공식적으로 장로교회는 없었다. 1. 장로교회의 태동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작성되기 전에 짧은 역사 동안 프랑스 개신교 위그노(Huguenot)들이 장로교회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프랑스 개혁교회가 공식적으로 장로교회 표준문서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였지만 프랑스 개혁교회는 장로교회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각 지방에 치리회가 있었고 그 지방 안에 지교회 안에도 치리회가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프랑스 개혁교회 위그노들의 교회 제도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정리되어 있다. 프랑스 개혁교회는 요한 칼빈이 섬긴 스위스 제네바 개혁교회의 지도 아래에 데오도레 베자의 수고를 통하여서 프랑스에서 위그로라는 이름으로 장로 정치 제도를 이루었다. 원래 위그노라는 뜻이 연맹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프랑스 개혁교회는 장로교회라는 명칭을 갖지 못하였지만 개신교 최초의 장로교회였다. 프랑스 개혁교회의 장로 제도적 형태는 그보다 이후 세대에 속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작성 세대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 최초의 장로교회 잉글랜드 퓨리탄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장로주의 퓨리탄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1535-1603)와 존 낙스를 이은 다음 세대로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형성의 기초를 세운 스코틀랜드 장로주의 신학자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1545-1622)은 프랑스 개혁교회로부터 장로 정치 제도를 배울 수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와 장로교회는 건축물 등기부와 건축물과의 관계였다. 장로교회가 건축물이라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건축물의 등기부이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버리는 순간 장로교회는 그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장로교회에게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중요하다.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따라 세워져야 한다. 장로교회 성직자라면 누구든지 장로교회 표준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따라 교리를 가르치고 대소요리 문답을 교육해야 하리라. 장로교회 표준문서는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교회를 이끌지 못하도록 교회를 올바르게 지켜주는 교회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종교 회의에서 결정된 교회법은 매우 중요하다. 속사도 시대에는 니케아 신조와 칼게돈 신조가 결정되었다. 그것은 모든 교회의 정통 교회법이다. 사도 시대 이후 결정된 모든 정통 교리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안에 담겨 있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정통 신학의 결정체이다. 3. 장로교회 문서로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장로교회 신자가 장로교회법을 존중하는 것은 불법을 행하지 않으려는 겸손한 자세이다. 장로교회법을 무시하는 초법적이거나 무법적인 행위는 결코 참된 신자의 자태는 아니다. 장로교회법은 신구약 성경을 잘 요약하였다. 그것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이다. 따라서 장로교회법에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설교하거나 가르치거나 교회를 이끌어가면 확실이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장로교회 성직자들은 그 신앙고백을 따라서 교회를 세울 것으로 선서를 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장로교회 성직자들이 그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다. 장로교회법은 잉글랜드 장로주의 퓨리탄들의 피뭍은 신앙고백서이다. 그것이 그렇게 쉽게 작성되어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신앙 유산이 아니다. 지금도 장로교회 법대로 교회를 이루려고 하면 많은 고난과 인내가 필요하다. 장로교회는 가장 보편적인 교회 정치 형태를 추구한다. 장로교회 제도는 감독교회 제도처럼 신자 개인의 권리를 말살시키지도 않으면서도 회중교회 제도처럼 교회의 보편적 통일성을 거부하고 분파주의적으로 나가지도 않는다. 4. 장로교회의 특성 회중교회는 회중들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운다. 회중교회는 통일된 교리서든지 신앙고백서가 굳이 필요하지 않는 교회 구조이다. 각 개교회가 정한 신앙고백과 교회 규칙과 예배모범을 따라서 그 회중들의 교회를 세우면 그만이다. 회중교회는 개교회 난립을 방조하는 교회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른 지교회와의 교리적 일치와 제도적 통일성을 거부한다. 이것이 회중교회이다. 회중교회주의는 개교회주의다. 그래서 회중교회는 교회의 보편성과 통일성에 대한 통일된 신앙고백이 없다. 단일한 개교회 안에 모든 치리 권세가 위임되기 때문에 상회 치리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회중교회는 다른 회중교회와 일치된 신조도 필요 없고 일치된 교회 규칙도 불필요하다. 오직 그 회중들 만의 교회이다. 그래서 분파주의이다. 지상의 모든 가시적 교회의 제도적 연결성을 거부한다. 그것이 회중교회의 위험성이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치리회 중심의 보편 교회를 지향한다. 장로교회는 보편적 신앙고백을 따라서 우주적 교회를 지향한다. 장로교회에 대한 이해의 폭이 깊어질수록 하나님께서 지상의 교회를 통해서 얼마나 큰 복을 내리시려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는 말 장로교 신자들이 장로교회법을 알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 제도를 철저하게 시행 하려는 데 있지 않다. 장로교회 표준문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왜냐하면 장로교회 표준문서를 이해하면 장로교회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장로교회 표준문서에는 보편교회가 무엇이며, 교회의 통일성이 무엇이며, 보편교회에게 교리적 일치가 왜 중요하며, 지상의 교회가 왜 올바른 교리로 세워져야 하는 가를 진지하게 답변하고 있다. 장로교회 표준문서는 장로교회를 드러낸다.
284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문서 <2>| 장로교회 표준문서 변천사_배현주 목사
편집부
4158 2014-04-03
장로교회 표준문서 변천사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표준문서는 후에 미합중국 장로교회 표준문서가 된다. 잉글랜드 국왕의 종교 정책에 반발하여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과 북아일랜드 얼스터 장로교도들이 17세기 말엽부터 미주 신대륙으로 대거 이민을 가게 된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그 이민자들의 신앙을 보살필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서 선교사들을 함께 보낸다. 그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가 미주 신대륙 장로교회이다. 1. 미국 장로교회의 태동과 표준문서 1706년 신대륙 장로교회는 첫 독노회를 설립한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이민자들의 증가에 따라 교회가 늘어나면서 1729년에 신대륙 장로교회 최초 대회를 개회하기에 이른다. 이 대회에서 신대륙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 문답] [교회 정치] [예배 지침서]를 표준문서로 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1789년 미합중국 장로교회 최초의 총회가 개회된다. 이후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표준문서를 지속적으로 수정하면서 19세기까지 이른다. 그리고 1903년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3장을 35장으로 확대 개정한다. 선교적 상황에 맞추기 위함이라는 이유를 근거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대폭 수정하기에 이른다. 1924년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어번 선언’이 있게 되었다. 이 선언의 여파로 1929년대에 프린스턴 신학교가 개혁주의 신학을 포기하고 다수의 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따르는 교수들에 의해 신학이 변질 된다. 그래서 1929년 이전의 프린스턴 신학교를 구프린스턴 신학교라고 부른다. 이렇게 프린스턴 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으로의 노선 변경으로 정통주의 신학자 메이쳔은 프린스턴 신학교를 사임하고 필라델피아에 구프린스턴 신학 노선을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한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인준 신학교로 하는 정통 장로교회(OPC)가 세워진다. 다행히도 정통 장로교회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전통을 이어간다. 1967년 미합중국 연합 장로교회는 장로교회 표준문서를 전면 개정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화합]이라는 주제로 작성한 새로운 신앙고백서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현대 신학에 기초한 매우 위험한 신앙고백서이다. 1967년 이후에 미합중국 연합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버리고 전면 개정한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갖게 되었다. 이는 역사적 정통 장로교회 표준문서와 완전히 결별한 것이다. 2. 한국 장로교회의 태동과 표준문서 조선 예수교 장로교회는 1907년에 독노회를 설립한다. 그때에 조선 예수교 장로교회 독노회가 채택한 장로교회 표준문서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와 매우 다르다. 그때에 채택된 조선 예수교 장로회 표준문서는 이러하다. [12신조] [소요리 문답] [정치] [예배 모범] [권징조례] 등이다. [12 신조]는 그 당시에 인도 장로교회 신조를 그대로 채택한 것이다. [소요리 문답]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한 부분을 채택한 것이다. [교회 정치] [예배 모범] [권징조례]는 미국 장로교회 헌법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실정에 맞게 정리해서 채택한 것이다. 초창기 평양에 있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에서 강의한 미국 장로회 선교사들은 구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칼빈주의 교리를 배워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아닌 인도 장로교회의 신조를 가져다가 [12 신조]로 작성하고 [소요리 문답] 만을 채택하였다. 그 당시에 나이 어린 조선 예수교 장로회에 대한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후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는 더 나은 신앙고백을 채택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조선 예수교 장로교회법 체제는 1938년 신사 참배가 가결되고 이후 장로교회가 일제의 식민지 종교 정책으로 폐쇄되고 다른 교단과 통합될 때까지 지속된다. 1945년 해방 이후에 장로교회가 대거 분열 할 때 각 교단은 상황에 따라 약간씩 다른 장로교회 표준문서를 가지게 되었다. 1960년 장로교회 합동측과 통합측의 분리 이후에 두 교단은 장로교회 표준문서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합동측은 조선 예수교 장로교회 전통을 그대로 받지만 통합측은 미국 장로교회의 수정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받으면서 동시에 자체 신앙고백서를 낸다. 이렇게 달라진 장로교회 표준문서와 함께 합동측과 통합측은 WCC 문제와 여성 안수 문제 등에서 서로 다른 교리적 입장을 제시하였다. 합동측은 WCC와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반면 통합측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주도하며 WCC 를 찬성하고 여성 안수를 허락한다. 3. 유일하게 정통 장로교 표준문서를 가진 예장합신 1980년대 초반 고 박윤선 박사를 중심으로 합동신학교가 세워지고 그때에 함께 세워진 교단이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이다. 대한예수교장로교회(합신)은 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설립 이후 전혀 채택하지 못하고 있었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판을 신앙고백서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헌법은 [12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판] [대 ·소요리 문답] [교회 정치] [권징조례] [예배 모범]을 채택한다. 이러한 대한예수교 장로회(합신) 헌법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표준문서에 가장 가깝다. 아쉽게도 그후에 권징조례가 세속법의 체계를 따라서 형법 처럼 개악이 되는 바람에 장로교회 표준문서의 모양새가 뒤틀려 버렸다. 권징조례는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사역적이고 종교적 성격의 재판 절차를 다룬 조례이다. 권징은 공권력처럼 인신을 구속하고 물리적으로 강제하는 세속의 사법부 제도가 아니다. 장로교회 표준문서는 장로교회 신학이며 신앙의 원리이다. 그리고 성직자와 신자들의 삶의 방향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로교회 표준문서는 자연법의 원리로 개정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증거를 받아 개정될 수 있다. 개악된 권징조례는 원상 회복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우여곡절이 있다고 해도 대한예수교장로교회(합신) 헌법은 17세기 장로주의 퓨리턴들이 작성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가장 가까운 헌법이라는 것이다. 지금 사라져 버린 17세기의 종교개혁의 역사를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이어가게 되었다는 가치로 여전히 남아 있다. 개혁된 교회는 지금도 개혁 되어야한다. 장로교회 표준문서는 종교개혁의 역사를 지속하기 위해 보존되고 계승되어야 할 개혁 장로교회의 소중한 유산이다.
283 no image |반듯하게 성경읽기 <7>| 가인이 드린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_김영철 목사
편집부
3807 2014-02-11
가인이 드린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 < 김영철 목사, 미문교회 > “사람이 죄의 지배를 받는 것, 즉 죄를 짓는 것은 사람의 책임” 비록 에덴에서 내쫓긴 삶을 살지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약속(창 3:15)을 잊지 않고 그 약속에 소망을 걸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녀의 씨’(우리말 - ‘여인의 후손’)를 기다렸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 4:1)는 말씀처럼 하와는 자식을 낳자 그러한 소망과 기대를 아들 ‘가인’의 이름을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인류의 두 갈래 ‘가인과 아벨’ 창세기 4장은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일어난 일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 부부의 삶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들의 두 아들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 두 아들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언급한 인류의 두 계열, 즉 ‘뱀의 후손’과 ‘그녀의 후손’을 대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을 통해 두 계열이 어떤 특성을 지닐 것인지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까닭은 피 있는 제물이었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린 사람 자체에 있었습니다(창 4:7). 이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제사에서 드러난 마음의 태도가 옳지 않았음을 지적하시면서 회개하고 바르게 행할 기회를 주십니다. 또한 바르게 행치 않으면 죄의 먹이가 될 것임을 경고하십니다. 2.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가인의 삶 죄는 사람을 지배하려는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사람이 죄를 대항하여 밀쳐 내기는 힘들지라도 사람에게는 죄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죄의 지배를 받는 것은 죄와 싸워서 이길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힘을 최대한 발휘하지 않고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로써 죄에게 양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이 죄의 지배를 받는 것, 즉 죄를 짓는 것은 사람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또한 죄의 위험을 경고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해 버립니다. 죄에게 왕좌(王座)를 양보한 가인은 이제 죄의 충실한 신하가 되었습니다. 죄의 통치를 받게 된 것입니다. 동생을 쳐죽였을 뿐만 아니라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의 물음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항변합니다. 회개를 포기하고 스스로 죄의 통치를 받기로 결정한 가인은 그런 사람다운 특징을 보입니다. 자기 잘못에 대한 진정한 뉘우침이나 후회를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순간에도 오직 이기적인 생각뿐이어서 형벌의 무거움만을 탓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극악(極惡)함에 대해 반성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오히려 하나님께서 가혹하다는 원망만 내뱉고 있었습니다. 3.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 아담이 범죄함으로 땅은 저주를 받아 사람이 땀을 흘리도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창 3:17-19). 그러나 가인은 이제부터 아무리 수고하여도 땅에서 아무런 소산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가인이 받은 저주입니다. 이 저주로 인하여 그는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살 수 없게 됩니다. 가인은 이곳저곳을 쉬지 않고 다니면서 농사 이외의 일을 해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인이 두려워한 것은 자신이 보복(報復)당하여 죽을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에는 보호할 가치가 없어 보이는 살인자의 생명마저도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므로 보복을 금하심으로써 가인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긍휼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282 no image |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문서 <1>| 장로교회 표준문서 작성의 역사적 배경_배현주 목사
편집부
4139 2014-01-28
장로교회 표준문서 작성의 역사적 배경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16세기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8세(Henry VIII of England: 1491-1547)가 종교개혁을 시도했었다. 그가 수장령(Act of Supremacy: 1534)을 발표하면서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국교회를 세웠다. 1. 잉글랜드에 불어 닥친 종교개혁의 바람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 6세(King Edward VI: 1537-1553)는 잉글랜드 종교개혁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나 병약하여 일찍 서거했다. 그 바람에 피의 메리(Mary 1st of England: 1516-1558)로 알려진 에드워드의 누이가 에드워드를 계승하면서 잉글랜드에는 피바람이 일어나게 되었다. 피의 메리는 에드워드 6세와 달리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그녀는 종교 정책에 관하여서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를 원하였다. 이로 인해 그녀의 피비린내 나는 개신교 핍박은 수많은 순교자들을 내었다. 메리 여왕이 죽고 누이동생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1st of England: 1533-1603)가 그 다음 왕위에 올랐다. 엘리자베스 1세는 통일령(Act of Uniformity: 1558)을 발표하며 그녀의 부친 헨리 8세의 종교 정책을 고수하였다. 반면에 이미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는 퓨리턴(Puritans)들이 크고 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활동한 퓨리턴 중에는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1535-1603)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 1세는 화이트기프트(John Whitgift: 1530-1604)를 통하여서 잉글랜드의 퓨리턴들을 핍박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서거하고 그녀의 긴 통치가 끝났을 때 후사가 없던 엘리자베스의 왕권을 계승한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국왕을 겸임하였다. 그가 바로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James VI and 1st: 1566-1625)이다. 제임스 1세는 퓨리턴들을 더욱 거세게 핍박했다. 제임스 1세는 “오락의 책”(Declration for Sports on the Lord's Day: 1618)이라는 책자를 유포하면서 주일에 그 책자를 공적 예배 시에 읽을 것을 강요하였다. 퓨리턴 성직자들은 그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러한 퓨리턴들의 국왕에 대한 종교적 저항은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Charles 1st of England: 1600-1649) 때 더욱 격렬한 종교 분쟁으로 발전하였다. 찰스 1세는 대감독 라우드(Whilliam Laud: 1573-1645)를 통하여서 잉글랜드 퓨리턴들을 더욱 거세게 핍박했다. 알미니우스주의자였던 윌리엄 라우드에게 퓨리턴들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퓨리턴들의 경건과 학문적 명성은 잉글랜드 교회 전체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2. 종교개혁의 기수 스코틀랜드 ‘언약도들’ 대감독 라우드의 종교 정책은 폭군적이었다. 이러한 전횡적이고 폭군적인 대감독 라우드의 종교 정책에 대항하여서 잉글랜드 퓨리턴들은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기치로 싸웠다. 퓨리턴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을 지켜야 하는 것이 퓨리턴들이 싸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국민 언약(the National Covenant: 1637)을 통해서 장로교회를 세워가던 스코틀랜드의 신자들인 ‘언약도들’(Covenanters)은 잉글랜드의 찰스 1세와 종교 정책에 갈등을 빚었다. 결국 찰스 1세의 종교 정책에 저항하면서 투쟁을 하였다. 스코틀랜드 의회와 잉글랜드 찰스 1세와의 싸움이었다. 이것을 주교 전쟁(Bishop's War: 1639)이라고 부른다. 찰스 1세는 처음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 단기 의회(Short Parliaments: 1640.4.13.-5.5)를 열었다가 바로 닫고 의회 도움 없이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도무지 승산이 없자 군비 마련을 위한 비준을 얻으려고 다시 장기 의회(Long Parliaments: 1640.11.3.-1648.12.5.)를 열었다. 그때부터 장기 의회는 왕이 임의로 의회를 닫지 못하게 하는 입법을 마련했다. 그리고 퓨리턴에 대한 폭군적 핍박을 일삼았던 대감독 라우드를 체포해서 사형에 처해 버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왕에게 불쾌한 일이었고 찰스 1세는 의회를 무력으로 제압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의원 중에 왕에게 불만을 가진 주동자 5명의 의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의회도 지금까지 형성된 무력을 바탕으로 왕과 정면 대결을 하였다. 이 무렵 잉글랜드에서 시민전쟁(Civil War: 1642-1651)이 발생했다. 잉글랜드에서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뉘어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 의회는 명망 있는 성직자들을 소집해서 잉글랜드에게 적합한 신앙고백서를 작성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 신앙고백서를 따라서 국민 교회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그때에 모인 121명의 성직자와 일부 평신도 사정관들은 3년에 걸쳐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Westminster Standards)를 만들었다. 그 표준문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Confession of Faith), 대요리문답(Larger Catechism), 소요리문답(Shorter Catechism), 교회 정치(Church Government) 및 예배 지침서(Directory of the Worship)였다. 3. 뿌리내린 장로교회 표준문서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불행히도 잉글랜드 의회에서 비준 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시민전쟁이 의회파의 승리로 끝난 이후 잉글랜드 의회 의원이며 신기군(New Model Army)의 사령관이었던 독립 교회파였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처형하고 다수의 장로주의 의회 의원들을 교만의 숙청(Prides' Purge: 1648)이라 하여서 해산해 버리고 그 후속 조치로 잔부 의회(Rump Parliament: 1648.12.6.-1653.4.20)를 세워 스스로 호국경(Protectorate)에 올라 독재 정치를 하였다. 이렇게 해서 잉글랜드에서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비준해야 할 의회가 사라지고 말았다. 독립 교회파였던 올리버 크롬웰은 장로교회법으로 제정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 국민 교회의 신앙고백 표준문서로서 그 위치를 얻지 못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비준되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법이 되었다. 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로 인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긴 세월 여러 풍파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고 신실하게 개혁 신앙을 보존하였다. 놀라운 사실은 장로교회 퓨리턴들의 노고로 결정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긴 세월이 지난 후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헌법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헌법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판을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다. 이는 실로 감사한 일이다.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사라져 버린 종교개혁의 역사가 이 땅에서 계승되어 지속될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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