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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5 (11:11:11)

민주화된 사회 속의 교회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

 

 

“비민주적인 한국교회의 오만과 독선은 개선되어야”

 

 

국제적인 인권 자유 감시단체인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가 최근 발표한 ‘2011 언론자유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언론자유국’에서 ‘부분적 언론자유국’(partly free)으로 강등됐다.

 

한국은 세계 언론자유도 조사 결과 196개국 중 70위를 기록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언론 자유가 1980년대 군사정권 시대 수준으로 되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프리덤하우스가 밝힌 이유는 “정부의 검열 증가와 함께 언론매체의 뉴스와 정보콘텐츠에 대한 정부 영향력의 개입이 확대된 것”과 “최근 몇 년간 온라인상에서 삭제되는 친북 또는 반정부 시각의 글이 늘었고, 정부가 언론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형 언론사의 고위직을 받은 이명박 대통령의 동료들과 함께 대형 방송사의 경영에 개입해 온 것”을 지적했다. 현재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언론자유가 퇴보하고 민주화가 뒷걸음질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혹독한 시절과 80년대의 전두환-노태우의 무자비한 군사정권을 거치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정권 교체 속에서 상당히 민주화된 나라로 변화되었다.

 

한국 개신교는 이런 정치적 민주화 속에서 많은 변화를 함께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모습은 교회의 직제와 관련하여 최근 벌어지고 있는 각종 연구 발표와 세미나를 통해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2011년 1월 바른교회 아카데미는 ‘교회의 직제론’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발표자들은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개혁교회, 감리교회, 침례교와 회중교회의 직제에 대하여 집중 토의하였고, 그 결과에 대하여 ‘한국교회 직제 개선을 위한 제언’이라는 기자 간담회를 가졌다.

 

직제 개선을 위한 제안 중에서 한 가지는 “우리는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교회는 개인의 임의적인 결정보다는 집단적인 협의와 합의를 통한 결정(집단지도 원리)과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결정하고 행하는 것보다는 이미 합의되고 세워진 규범에 따라 결정하고 행하려고(법치주의) 노력해왔다고 확인하며, 교회가 이 두 원리를 굳건히 붙들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교회 안에서도 민주적 합의와 절차를 따라야한다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개혁교회 네트워크가 5월 22일에 개최한 제6회 ‘이런 교회 다니고 싶다’ 세미나는 정치적 민주화 속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성도들의 시각에 많은 변화가 있음을 보여준 세미나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세미나 발제자의 한 사람인 최우돈 장로가 ‘함께 세워져가는 교회’라는 발제에서 교회의 민주적 운영을 강조한 부분이다.

 

최 장로는 목회자가 제왕처럼 군림하는데서 교회의 모든 문제가 비롯된다고 지적하면서 목회자와 평신도는 서로 역할만 다를 뿐 대등한 자격으로 교회를 함께 만들어가는 동역자라고 말했다. 민주화된 사회 속에서 한국 개신교 성도들이 더 이상 목사의 전횡과 독점적인 지위, 오만과 독선을 두고 보지 않는다는 암시이다.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비리와 부패, 비민주적인 교회의 상황 속에서 오만과 독선으로 지탄받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전도가 어려운 것은 예외로 치더라도 오히려 실망한 교인들이 교회를 등지고 있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한국교회의 어두운 미래를 예견하는 것 같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가르쳤고 현재까지 모든 개신교의 교회론에서 매우 중요한 교리가 된 만인제사장주의는 교회 안에서 일반성도들을 배제한 독선적인 가톨릭사제주의로부터 성경적으로 민주화된 교회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루터의 가르침은 베드로전서 2장 4-10절에 근거하여 가르친 교훈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베드로전서 2장 5절,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와 9-10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가 핵심이다.

 

베드로가 ‘왕 같은 제사장’을 언급했을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적 정체성’으로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인 제의적 기능이다. 제사장은 신분적으로 거룩함을 유지하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구약성서에서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희생의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상황을 배경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공동체적으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른 것이다.

 

하지만 목사 중심의 개교회(個敎會)로 변질한 한국 교회는 실제로 만인제사장주의가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욱이 성도들 중에는 목사, 장로와 같은 교회 직제를 계급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많다.

최근 한국교회 탐구센터가 설문조사한 350명의 직분자 중 상당수는 직분자 사이의 위계서열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조사에서 직분자들은 ‘직제는 영적질서’(83.9%)이고, ‘명예’(60.3%)이자 ‘서열(55%)’이라고 대답했다. 무언가 잘 못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직제는 단지 직무와 기능이 다를 뿐 신분이 아니다. 민주화된 한국 사회 속의 교회 회원들이 민주적 합의와 절차를 무시하는 교회를 언제까지 그냥 두고 볼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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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no image |반듯하게 성경읽기 <6>| 타락한 인류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_김영철 목사
편집부
3106 2014-01-14
타락한 인류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 < 김영철 목사, 미문교회 > “죽음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마는 것으로 나타나” 하나님을 배반한 일로 생긴 결과는 사람 사이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서로 ‘상응하는’ 존재로서 조화를 이루며 일하던 동역자(同役者)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이지러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상응(相應)하는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방을 지배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1. 인류의 타락이 가져온 우주적인 부패 겉으로 보기에 남자는 단순히 아내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었으므로 이 범죄에 관한 한 ‘단순 가담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남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금지 명령(창 2:17)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 일에 관한 한 그는 자기 아내의 말을 들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조심시켜서 그 실과를 따먹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그 실과를 먹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경멸하고 배신하기로 결심하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이 직접 하나님에게서 들은 말씀보다도 아내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로 판단하였거나 그런 말씀을 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단순히 여러 동물 중의 하나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환경에 대한 진정한 책임자로 세워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음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한 사람의 책임아래에 있는 환경 전체가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었는데 불행히도 사람의 배신 때문에 환경 전체가 저주아래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죽음 아래 놓이게 된 인류 하나님께서 심판의 말씀을 하시는 현장에는 뱀과 여자와 남자가 있었습니다. 심판의 말씀은 참으로 준엄한 것이었고 이런 심판의 대상이 된 사람은 이제 저주 아래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저주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의도하신 대로 이제껏 에덴동산에서 누려 왔으며 장차 더욱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복을 전혀 누릴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갈 환경, 즉 땅과 온갖 생물들도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심판의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앞으로 행하실 일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이야말로 사람에게는 진정한 소망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하나님의 말씀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금지된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살 수 있습니다. 단순히 목숨만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 실과를 따먹음으로써 이러한 생명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단순히 목숨이 끝나는 것에만 적용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닙니다. 죽음은 살아 있기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하나도 누릴 수 없고 모두 다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여기서 의미하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에덴에서 복을 누릴 수 없게끔 단호한 조치를 취하십니다. 마치는 말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뱀의 말을 듣고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와의 말대로(창 3:13) 속은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같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동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며 모든 복을 누리는 존재였습니다. 부족하기는커녕 모든 면에서 풍성하고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탐욕이 그를 타락의 늪에 빠져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280 no image |반듯하게 성경읽기 <5>| 타락한 인류의 두 갈레길_김영철 목사
편집부
3016 2013-12-30
타락한 인류의 두 갈레길 < 김영철 목사, 미문교회 > “구원은 역사의 종말 때까지 하나님 자신이 주도해 나가시는 일” 창세기 3장 15절의 내용에는 놀라운 소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구원에 관한 소식입니다. 1. 사람을 유혹한 뱀에게 주어진 저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 말씀 속에는 사탄의 분신으로 등장한 뱀에게 가장 큰 저주가 되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것은 사실상 인간에게는 복된 소식입니다. 반면에 그 뱀의 입장에서 보면 이 내용은 엄청난 재앙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를 속인 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게 된 까닭은 그 뱀이 행한 일의 성격 때문입니다. 그 일은 단지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와 그녀의 남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게 만들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로써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좌절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가장 처음 선포된 복된 소식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사람으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더불어 거하시며 영원히 함께 교제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알고 있는 그 배후 조종자는 뱀을 도구로 삼아 인간에게 속임수를 사용하였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키려고 획책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반역적인 도전을 하나님께서 묵과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자신의 원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일해 나가시기로 하십니다. 이러한 그분의 사역의 성격은 한마디로 말하면 ‘구원’입니다. 논리상 먼저 인간을 비롯한 만물을 구원해 내셔야 자신이 원래 의도하신 목적을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누리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5절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는 최초의 복음(福音)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원복음(原福音), 또는 첫 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3. 창세기 3장 15절에 나타난 사실들 첫째, 이제 앞으로의 역사(歷史), 즉 인간의 타락 이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움직여 가시는 역사가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뱀의 등장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좌절될 위기에 놓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원래의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서 직접적으로 역사에 개입하셔서 그 주도권을 가지시게 된 것입니다. 둘째, 앞으로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사역(使役)은 ‘적의를 두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역은 사람을 사탄과의 관계에서 단절시키고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로 회복’시키려는 것이므로 ‘구원’ 사역입니다. 따라서 타락 이후에 진행될 역사는 구원의 성격을 가지며 그래서 이 역사는 그 전체가 한마디로 ‘구원 역사’입니다. 셋째, 이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인류 안에는 항상 두 부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한 계열은 사탄의 후손들로서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고 다른 한 계열은 “그녀의 씨”로 표현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처럼 타락 이후의 구원 역사에서 양분된 두 계열이 나타난 첫 번째 실례(實例)는 가인의 계열(4:17-24)과 셋 계열(5:1-32)의 기록입니다. 넷째, 이 구원 역사는 “그녀의 씨” 중 어느 한 분이 사탄에게 승리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절정이란 단순히 극적 효과의 최고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사역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마치는 말 개역 한글 성경의 15절 하반절은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로 시작되기 때문에 자칫하면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예언하고 있는 듯이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속한 계열에서 나올 어떤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제 구원은 역사의 종말 때까지 하나님 자신이 주도해 나가시는 일이며, 인류에게는 항상 두 계열이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사탄을 누르고 승리함으로써 그 성취를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 구절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279 no image |반듯하게 성경읽기 <4>|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졌다’는 말의 바른 이해_김영철 목사
편집부
3551 2013-12-17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졌다’는 말의 바른 이해 < 김영철 목사, 미문교회 > “벌거벗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수치감이 발생한 것” 1. 사람이 범죄하게 된 배경 불행히도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서 배은망덕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자신들을 지으시고 가장 아름답고 좋은 곳에서 가장 복된 삶을 누리게 해주신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영원하며 복된 삶을 스스로 포기하고 죽음에 이르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이들은 아무에게서도 강요받지 않았고,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그 길을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잘못은 몽땅 그들의 책임이며 그 대가는 고스란히 그들의 몫입니다.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것으로 입증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사람에게 사랑과 은혜로 변함없이 신실하게 대해 오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하나님께 불만을 품거나 그분의 말씀을 믿지 못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크게 흔들립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이 여인의 마음에는 이미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작은 제한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제한을 스스로 확대 해석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입니다. 2. 하나님 대신 뱀을 신뢰한 사람들 도저히 타협의 여지가 없는 정반대의 두 의견은 언제나 참과 거짓을 나눠 갖습니다. 하나는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입니다. 둘 다 참이거나 둘 다 거짓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의견을 취하는 것은 그 의견을 말한 자를 신뢰하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고(창 2:17), 뱀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여인은(결국 남편도) 뱀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이는 뱀을 진실한 존재로 인정한 것이며 그 대신 하나님은 거짓말로써 자신의 삶을 위협해 온 나쁜 분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뱀은 하나님께서 먹지 못하게 하신 이유를 하나님의 시기심 또는 견제(牽制)로 제시하였는데(창 3:5), 이들이 이러한 뱀의 말을 받아들여서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의 결정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하나님 같이 되는 길’을 막아 버린 나쁜 존재로 간주하였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진실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짓을 참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사람의 눈에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 진실 되게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이 진실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뱀의 말은 말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새빨간 거짓말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졌으나 못 볼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3. ‘눈이 밝아졌다’는 말의 의미 ‘눈이 밝아졌다’(직역 - “그들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는 것은 ‘이제껏 뜰 수 없었던 눈을 뜨게 되었다’든지 ‘어두웠던 눈이 밝아져서 잘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식(認識)의 변화를 뜻하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벗은 줄을 알고”(창 3:7)라는 말은, 자신들이 이제까지 벗은 줄 몰랐다가 이제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벗은 것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뱀의 말대로(창 3:5)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지혜롭게’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벌거벗음에 대해 부끄러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그들이 자신의 벌거벗음에 대해 상대방 앞에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창 2:25).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벌거벗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변했기에 부끄러움 정확히 말하자면 수치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생긴 이 변화는 그들 두 사람의 관계를 어색하고 거리감이 생기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생긴 치명적인 변화란 한마디로 말하면 친밀함이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아담에게 (물론 그의 아내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으로 바뀌었습니다.
278 no image |반듯하게 성경읽기<3>| 돕는 배필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이해_김영철 목사
편집부
4675 2013-09-24
돕는 배필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이해 < 김영철 목사, 미문교회 > “사람이 모든 복을 누리며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것”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셨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살 곳도 만드셨다. 그리고 사람의 배필을 만드셨다. 이로써 창세기 2장 4-25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베푸신 크신 은혜 세 가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참으로 좋으신 분이심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이미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창조주이심을 드러냄으로써 그분의 능력과 신분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사람이 만든 우상들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아무 것도 행할 수도 없으며 단지 사람들의 섬김만 받을 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런 우상들과는 전혀 다른 참 신이며,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선하신 신이며, 그러하기에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신이시다. 1. 돕는 배필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되 남녀를 불평등하게 지으신 것이 아니라 서로 상응(相應)하는 존재로 지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남자의 짝으로 지으실 때 남자보다 열등하거나 덜 필요한 존재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기신 ‘다스리는 일’을 함께 협력하여 수행해 나갈 수 있는 대등하고 필요한 존재로 지으셨던 것이다. 그러기에 ‘돕는 배필’이라는 말의 본뜻은 단순히 내조자(內助者)나 보조자가 아니라 ‘그 [남자]와 상응하는 돕는 자’이다. 그리고 여기서 쓰인 ‘돕는 자’라는 말에는 신분이나 수준 또는 가치의 낮음을 암시하는 개념이 들어 있지 않다. 바꿔 말하면 돕는 자란 곁에서 이것저것 거드는 조수(助手)의 역할을 하는 자를 뜻함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를 ‘돕는 자’이라고 표현할 수 있듯이(예. 시 10:14; 30:10; 33:20; 54:4) 능히 도울 ‘능력을 가진 자’를 뜻하는 것이다. 때문에 아담은 자신의 짝을 처음 만나자마자 과연 자신과 상응하는 존재임을 파악하고 자신의 흡족한 마음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창 2:23)며 노래했던 것이다. 2. ‘돕는 배필’에 담겨 있는 혼인의 정신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을 짓겠다고 말씀하신 후 곧바로 여자를 짓지 아니하고 각종 들짐승과 새를 먼저 지으셔서 아담에게 이끌어 내신 것은 더 시급한 일부터 처리하려 했거나 여자를 지을 계획을 잠시 잊으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는 아담으로 하여금 먼저 들짐승과 새들 가운데서 ‘돕는 배필’에 합당한 존재가 있는지를 찾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아담이 그것들 가운데서는 ‘돕는 배필’의 두 가지 조건인 ‘상응함’과 ‘능력’을 함께 갖춘 존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창세기는 하나님의 여자 창조 사건을 언급하면서 여자를 지으시려는 의도와 과정, 게다가 직접 창조하신 사실과 여자를 만난 남자의 반응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창 2:18-25). 이것은 기록자 당시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 당시에는 여성을 마치 물건과 같이 취급한 시대였다. 당시에는 여성의 존재 가치와 나아가서 혼인(婚姻)의 목적 역시 상실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죄악 된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분의 뜻을 분명하게 가르쳐 줌으로써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혼인에 이르도록 이끌고 있다. 3. 순수하게 보존해야 하는 혼인제도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사람은 홀로 하나님 앞에 서있도록 되어 있지 않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그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룰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그들이 국가이며 교회였다. 그러므로 아담 혼자로서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둘이 한 사회를 형성하고 그것이 국가로서 그리고 나아가 교회로서의 형태(form)를 갖추어야만 그 속에서 각각의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정을 이룸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형성할 때 비로소 온전한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고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혼인제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여주는 원리이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혼인제도는 언제나 교회 안에서 순수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277 no image |반듯하게 성경읽기<2>| 에덴동산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바른 이해_김영철 목사
편집부
3765 2013-09-10
에덴동산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바른 이해 < 김영철 목사, 미문교회 > “사람이 모든 복을 누리며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것” 1.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의미 창세기 2장 8-1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베푸신 크신 배려를 말해줍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그곳에서 사람이 온갖 복을 누리며 살도록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방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여기서 ‘창설하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만들다’ 정도의 뜻이 아니라 ‘심다’라는 것입니다. 마치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나무를 심듯이 ‘에덴’이라는 지역에 동산을 심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편의상 그 동산이 위치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에덴동산’이라고 할 뿐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에덴’은 동산의 이름이 아니라 지역의 이름이지만 이제는 ‘에덴동산’이 그 동산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에덴동산은 사람이 정착하여 조성해나갈, 그런 일종의 개척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완벽하게 조성된 최적의 삶터입니다. 창세기 2장 9-14절까지는 이러한 에덴동산과 그 주위 환경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이 묘사에는 모든 것이 샅샅이 담겨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일차 독자들에게 에덴동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만한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두 나무, 강(江), 보석입니다. 게다가 에덴동산에는 모양도 좋고 먹기도 좋은 온갖 나무들이 다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 9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땅으로부터 보기에 즐겁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나게 하셨다”(직역). 2. 에덴에서 왕으로 세움 받은 인류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사람의 최저 생계 수준을 위해 필요한 것들만 마련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사람의 최고 수준의 삶을 위한 환경을 갖추어 놓으신 것입니다. ‘보기에 좋은’ 온갖 나무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좋은’이라는 말은 ‘기쁨을 주는’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온갖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나무는 단지 관상용(觀賞用)이 아닙니다. 이것은 먹기에 좋은 열매들을 제공해 주는 식용(食用) 나무이기도 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미적(美的) 환경과 식생활 환경을 완벽하게 갖춰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복된 삶터에서 인간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시고 그들로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에덴동산에 들어와 하나님과 더불어 살게 하시고 그들에게 할 일을 맡기셨습니다. 따라서 이 일은 창세기 1:26, 28에서 계획하시고 말씀하신 일과 다른 성격의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는 일을 시작하도록 하면서 ‘다스리는 일’이 어떤 성격의 일인지를 분명하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이라고 해서 죽음이 도무지 끼어들어 올 수 없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가능성은 언제든지 사람의 불순종에 의해서 현실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동안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살도록 하려는 의도를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해 순종해야 할 일은 조금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쉽고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3.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이유 에덴동산에서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은 어떤 열매든지 먹을 수 있고, 무엇이나 할 수 있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놀라운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위임받아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자유에 비해 단 한 가지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되는 아주 작은 제한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 제한 때문에 사람의 삶에 조금이라도 불편이 생기거나 행여 보이지 않게 인권이 짓밟히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제한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영원히 살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일은 이처럼 간단한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기서 요구하는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신의 말씀을 순종하는지 아니 하는지를 알기 위한 시험으로서 이른바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진정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복을 누리며 하나님 자신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나무를 동산 중앙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자신의 의도를 이 나무를 통해 암시해 주신 것입니다.
276 no image |반듯하게 성경읽기<1>| 창세기의 '흙'과 '생기'에 대한 바른 이해_김영철 목사
편집부
4424 2013-08-27
창세기의 ‘흙’과 ‘생기’에 대한 바른 이해 < 김영철 목사, 미문교회 > “흙으로 공작품을 만드시듯 사람을 빚으셨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 1.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신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사람 창조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마치 찰흙으로 어떤 모형을 만들듯이 사람을 빚으셨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아마도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 2:7)라는 표현을 오해한 데서 생긴 듯합니다. 그러나 위의 직역에서 알 수 있듯이 ‘흙으로’라는 말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 땅으로부터 [취한] 티끌[로]”라는 문구입니다. 이 문구에서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재료가 이른바 찰흙과 같은 흙덩어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분은 땅에서 ‘티끌’을 취하셨습니다. 여기서 ‘티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아파르)는 우리말에서는 ‘먼지’로도 번역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이 용어에는 ‘먼지’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더러움’의 개념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 근본적인 개념은 ‘아주 작음’입니다. 따라서 ‘티끌’로 번역된 이 용어는 ‘세미한 알갱이’를 뜻하는 것입니다. 일차 독자의 시대에는 이른바 과학적 용어인 ‘분자’(分子)나 ‘원자’(原子)와 같은 미립자(微粒子)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어떤 물질의 원자나 분자를 발견한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 이지만 그렇다고 그 시대에 원자나 분자가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물질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원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의 문구를 우리 시대에 맞게 표현한다면 ‘땅에서 취한 어떤 원소들로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가 그릇되지 않았음은 죽은 사람이 매장되고 나면 흙 속에서 분해된다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셨다고? 일반적으로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라는 문구 역시 잘못 이해되고 있습니다. ‘생기’라는 단어를 ‘싱싱하고 힘찬 기운’(生氣)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신비한 영적 기운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위의 직역에서 보는 것처럼 ‘생명의 호흡’이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합성어입니다. 이 합성어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호흡’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생명이 있는 존재라야 호흡을 하기 때문에 이 호흡을 ‘생명의 호흡’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그 코에 불어넣었다’는 표현도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분들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잘 빚어서 사람 모습을 가진, 그래서 동상(銅像)과 같은 그 진흙 조형물을 눕혀 놓은 다음 하나님께서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히셔서 그 조형물의 코에 마치 인공호흡을 시키듯이 ‘후후’하며 숨을 불어넣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회화적 이해는 7절 상반절을 기계적으로 이해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 창조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 그것도 너무 그럴듯한 해석에서 빚어진 오해는 7절 하반절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는 문장에서 ‘생령’이라는 단어를 왕왕 ‘성령’과 연관시키거나 ‘영적’인 의미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영적인 존재임이 분명하고 특히 그리스도인은 성령님 안에 거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성경의 단어에다가 그런 뜻을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표현을 말하거나 쓴 분이 어떤 뜻으로 한 것인지를 찾는 것이지 자기 좋은 대로 생각해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의미 7절을 정리하여 보자면 그 뜻은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어떤 원소들을 취하셔서 그것으로 사람을 만들고 사람으로 하여금 호흡을 하도록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따라서 지음 받은 그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원소들로써 사람을 만드셨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가 그 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1) 하나님께서 흙으로 공작품을 만드시듯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피와 살과 뼈를 정교하게 만드신 것이라고 봄이 더 옳을 듯합니다. 마치 사람이 숨이 끊어진 후 매장되어 분해되기까지는 그대로 육체의 모양을 갖추고 있는데 바로 그런 모양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셔서 생명을 주시기 직전의 상태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2)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떤 방법으로 생명을 주셨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이 점에 관해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이 구절은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살아 움직이게 하신 분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그 여호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275 no image |신학단상<50>-마지막회| 인간의 욕망_조석민 목사 (210)
편집부
10993 2011-11-29
인간의 욕망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 “누구나 욕망 숨기면서 그것을 이루어보려는 심리 있어” 인간의 욕망이란 무엇일까? 욕망은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처럼 보인다. 인간이 때때로 좌절하지만 다시 힘을 내어 살아가는 것은 욕망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욕망이 있는 한 인간은 죽지 않고 살아간다. 몇 년 전 한국에 소개된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욕망 이론』을 해설하는 글 속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렇지만 허상을 실재라고 믿기에 그것을 얻으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특히 남을 조정하고 제도를 만들어 자신의 욕망을 대의명분 속에 숨기려 들 때 욕망은 권력자의 눈길처럼 음험해진다.” 자신의 욕망을 숨기면서 그것을 이루어 보려는 심리는 누구에게나 모두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현상이 보통 사람이 아닌 사회의 특수 계층과 직위의 사람에게 나타났을 때 그 반응은 폭발적일 수 있다. 인간이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 현재는 대부분 돈으로 나타나기에 모든 사람들이 그 돈을 쥐어보려고 혈안이 된 것 같다. 자신이 돈을 모을 수 있는 특별한 사회적 지위가 있으면 그 지위를 이용해서 돈을 모으고, 권력이 있으면 그 권력으로 돈을 모으려고 한다. 최근 들어 계속 보도되는 검찰의 비리는 인간 욕망의 끝이 어딘지, 정말 끝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게 만든다. 약육강식하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어느 정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약한 동물을 먹잇감으로 삼지 않고 사냥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떡 검사에서 성상납을 받는 검사로, 다시 벤츠를 받고, 명품 가방을 받는 검사로 진화하는 욕망의 사슬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국과 미국 사이의 자유무역협정은 미국이 한국을 우방으로 생각하고 도와주려고 협정을 맺은 것인지, 아니면 한국이 일자리의 창출과 미래의 도약을 생각하여 지혜롭게 결정한 일인지, 아니면 승자독식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결과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대기업의 욕망과 미국의 욕망, 그리고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의 욕망이란 삼박자가 서로 잘 맞아떨어진 것은 아닌지 매우 의심스럽다.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 정부의 불통이 너무 아쉽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다스려 보려고 어느 정도 욕망의 상한선을 정하고 달려가지만 대부분은 그 선을 쉽게 넘어선다.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은 종교적 열망 속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오늘날 서울과 대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형교회의 출현과 그 예배당은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몸부림인가? 아니면 교회의 지도자와 그와 함께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욕망의 표출인가? 교회의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종교적 경건으로 포장하면 그 속을 헤아려 알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 나라 정치인들의 욕망은 이제 더 말할 것이 별로 없다. 국회의원으로 대변되는 정치인들의 행태는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는 조금도 양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국민들은 오직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이용할 대상으로만 삼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국회의원을 다시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 뽑아주기에 답답하기만 하다. 여기에도 서로의 욕망이 어느 지점에서 잘 맞아 떨어져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 때문일까? 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이라면 욕망의 최고점을 찍은 것이리라. 대통령이 된 사람을 두고 이루고 싶은 것을 다 이룬 사람, 그래서 욕심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일까?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신축 터 매입 사건은 욕망의 충족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지나가기에는 문제가 매우 심각한 듯하다. 이미 민주당에서 지난달 19일 내곡동에 사저를 신축하려고 땅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정부 예산의 부당 지원 등 의혹과 저가 매입 의혹을 제기하며 이시형씨와 김인종 전 청와대 경호처장, 임태희 대통령실장 등 5명을 업무상 배임 및 부동산실명제법 위반 등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기 때문이다. 또한 보수성향의 이상돈 중앙대 법학대학원 교수가 21일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문제에 대해 “(임기 중) 수사와 탄핵 사유에 해당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검찰이 다른 사건과 비교해 볼 때 그렇게 속도를 내서 수사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이 문제가 심각한 것은 분명한데, 검찰이 늘 습관처럼 말하던 법과 원칙대로 수사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최근 교보문고에서 베스트셀러로 인기 절정을 누리고 있는 『닥치고 정치』의 저자인 김어준이 진행하는 <나는 꼼수다>에서 내곡동 사저 문제를 제기했다. 이 문제에 “내 주를 가까이”라는 찬송가를 패러디하여 “내곡동 가까이”로 개작하고, “내곡동 일대를 사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그린벨트 내 인생 소원은 재테크하면서 재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되어도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히 교훈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인간의 욕심은 그 생명이 끊어져야 멈출 것 같다.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은 죽음뿐인 것 같다. * 지난 2008년 2월부터 게재한 조석민 목사의 ‘신학단상’은 이번 호 칼럼으로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신학단상’을 애독해주신 독자 제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274 no image |신학단상<49>| 진실과 거짓의 싸움_조석민 목사 (19)
편집부
6253 2011-11-01
진실과 거짓의 싸움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 “거짓은 허상이기에 진실 앞에 정체 드러낼 수밖에 없어” 진실과 거짓의 투쟁은 인류 역사에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전혀 다른 양극단의 싸움은 항상 양적이며 물리적인 힘에 의하여 승부가 가려지는 듯하다. 진리가 항상 승리한다는 말은 오래된 역사 속에서 이미 빛 바랜 옷감처럼 더 이상 진리가 아닌 듯하다. 진실과 거짓을 증명하는 힘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인가? 거짓도 진실로 둔갑하고, 진실도 한 순간에 거짓으로 뒤집어지는 세상에서 과연 진실이 존재하는 것인가? 서울 시장 선거를 보면서 한 순간에 진실도 거짓으로 만들 수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부정적 이미지로 도색하여 상대 후보를 깎아내리는 흑색선전이 일반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흑색선전에 현혹되어 올바른 이성적 판단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무뇌 인간처럼 보인다. 거짓이 힘을 얻는 비결이 무엇인지 간접 교육 효과가 충분하다. 죄지은 자를 고발하여 법대로 처벌하여 달라고 호소하는 사람이 오히려 수감되는 경우를 보면 이 세상의 법은 정의의 편인지, 진실은 정말 힘이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죄지은 자에 대한 범죄를 증명할 증거자료를 제출하고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으면서 모든 사실을 말하여도 살아있는 권력에 붙어있는 피의자에 대한 조사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세상에 살아가야 하는 참담함은 삶의 의지를 꺾어 놓기에 충분하다. 그래도 매우 드물지만 진실의 힘을 믿고 굳건하게 버텨내는 사람들이 있기에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진실은 숨겨질 수 없고 그 누구도 깊이 묻어둘 수 없기에 결국 그 빛을 드러낼 날이 있을 것이다. 좁은 교도소에 수감되어 사람과의 단절을 피부로 느끼게 할지라도 진실이 거짓으로 바뀔 수는 없고, 진실을 덮어둘 수도 없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기에 힘이 난다. 지나간 역사 속에서 결국 거짓이 속속들이 드러나는 일들을 볼 수 있어서 그나마 살맛나는 세상이다. 군사 정권 속에서 간첩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조작된 간첩들이 사형 선고를 받고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기에 모든 것은 끝난 것처럼 여겼지만 진실은 생명력이 있어서 무고한 생명들의 희생이 만천하에 밝혀졌다. 거짓은 숨길 수 있을 때까지만 진실의 행세를 한다. 하지만 거짓의 생명력은 허상이기에 진실 앞에서 그 모습을 추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 땅에 아직도 밝혀져야 할 거짓이 너무 많이 있기에 그때를 기다리며 사는 재미도 있다. 너무도 뻔한 거짓을 말하면서 진실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정치권력을 얻었던 사람들이 이제 곧 진실게임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날이 가까워오니 기대가 된다. 하지만 진실과 거짓의 싸움은 그 자체로 공정한 심판이 없어서 언제든지 진실도 거짓이 되고, 거짓도 진실이 된다. 누구든지 자신의 본의가 아니라고 말하면 면죄부를 받는 세상에서 거짓도 본의가 아니라면 진실로 둔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본의가 아니라서 모든 일을 없었던 일로 하고 백지화하면 살인도, 강간도, 도적질도, 폭행도, 불법도, 그 어떤 일도 본의가 아니라고 말한 사람의 죄를 물을 수 없는 것인지 궁금하다. 몇 십 억대의 교회 재정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목사에게 “교인 다수가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담임목사는 자신의 뜻대로 재정을 집행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자 “경우에 따라 가능하다”라고 대답한 것을 보면 이 사회의 마지막 양심의 보루로 존재해야 할 교회도 진실과 거짓의 싸움에서 예외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거짓이 진실로 포장되어 많은 재정적 힘을 얻어 과대 선전되어질 때 사람들은 너무 쉽게 거짓된 진실에 항복한다. 진실과 거짓의 싸움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이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진실을 거짓으로 바꾸어 예수를 고발하는 유대종교 권력자들은 오늘날 정치권력을 얻어 진실을 거짓으로 바꾸어가며 행세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자신들이 거짓으로 예수를 고발하여 그 사실이 밝혀질까 봐 걱정하면서도 거짓을 끝까지 진실이라고 고집 부리던 당시의 종교권력자들은 오늘날 거짓을 목에 걸고 사는 목회자들의 모델이기도 하다. 진실과 거짓의 싸움에 동원되어 거짓을 진실이라고 변호하며 변명하는 사람들은 돈의 힘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는 마술사와 같다. 사람들은 신기한 마술의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자신의 거짓을 진실로 바꾸어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기존 정치권력과 손이 맞닿아있는 전직 판검사 중에서도 고위직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전관예우를 받으며 마술사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등장하기도 한다. 최근의 영화 ‘도가니’에 등장하는 전직예우를 받는 변호사를 보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임을 직감할 수 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 8:32)고 했는데 다시 그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돈의 노예가 되어 기쁨으로 죄의 종노릇하며 진실도 거짓으로 바꾸어버리는 세상에서 진실의 횃불을 높이 들어 올릴 사람들이 필요하다. 진실과 거짓의 싸움에서 나는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정직한 결단을 해야 할 것이다.
273 no image |칼빈의 편지들(11)| 섭정 시모어 경께_장수민 목사 (266)
편집부
12346 2011-09-07
섭정 시모어 경께 _ 1548년 10월 22일 < 장수민 목사, 칼빈아카데미 원장 > “교리문답 없이 주님의 교회는 지탱할 수 없어” <요 점> _ 섭정이 맡고 있는 고위직으로서의 호민관에게 부여된 임무. 영국에서의 완벽한 개혁 계획.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설교. 남용을 뿌리뽑음. 악행과 중상적인 공격 고치기. 시모어 경, 신중한 판단력과 넓은 아량, 그리고 그밖에 주님께서 당신에게 선사하신 그 지위와 당신 손에 맡기신 임무에 필요한 여러 가지 미덕을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것보다 따르고 싶어하는 그 주님의 아들의 종으로서 저를 여기신다면, 주님에 대한 그 사랑으로 경이 이 편지를 공손히 받아 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생략) 저는 달리 어떤 원칙을 선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그 선하심으로 당신을 주님의 순수한 진리를 깨닫게 하셔서 당신이 그것을 널리 설교하도록 지혜와 재량을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주님께 감사하고 싶습니다. (생략) 한편 우리 자신을 보면 우리 안에 온갖 비참함으로 가득하고, 감정과 정념이 타락하여 영혼 자체가 스스로를 절망으로 빠뜨리는 죄악의 구렁텅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주제넘은 지능, 가치, 권력에 대해 지쳤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수처럼 솟아나는 모든 복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는 모든 것, 즉 예수님의 죽음과 고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다시 하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깨끗이 씻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더러운 얼룩으로 인해 천국의 왕좌에서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해야 그 확실한 구원의 약속에 기대어 쉴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우리는 신성하게 되어 공의로우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힘을 얻어야 우리는 사탄과 이 세상과 육신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을 따르는 구성원이므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자식으로 바라보아 주시며,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뭐라고 말하고 무엇을 행하든지, 최선을 다하여 우리 마음 속에 항상 이 목적을 품어야 하고,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우리의 구원자와 함께 천국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오랫동안 반기독교주의자들로 인해 가려져 왔었지만 주님께서 당신에게 이 원칙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셨으니, 이 주제에 대해 저는 더 이상 깊게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교육방식에 대해 제가 제시한 것은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까지 감동이 되어 주님의 말씀이 양날의 칼처럼 모든 사상과 감정을 뼈 속까지 꿰뚫을 수 있다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말한 바가 실제로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시모어 경, 제가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제가 보기에 영국에는 성령이 살아 숨쉬는 것과 같은 설교가 거의 없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생략) 바울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설교의 생명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시모어 경도 이미 아시겠지요. 그가 얼마나 설교에 있어서 살아있는 에너지와 생명력을 강조하는지 말입니다. 그는 스스로 진실한 주의 종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자들은 세간의 존경을 받기 위해 텅 빈 말만을 늘어놓지 말고,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성령이 기적적인 힘으로 발화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고전 14장). (생략) 시모어 경, 제 말을 믿으십시오. 교리문답 없이는 주님의 교회는 지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리문답은 마치 좋은 씨앗이 시들지 않고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고 세대와 세대를 이어 번성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이 오랫동안 살아있고 쉽게 잊혀지지 않는 교화를 하고 싶다면 어린이들을 위한 좋은 교리문답을 준비하십시오. 그 어린 나이에 알맞은 수준의 언어로 짧더라도 진정한 기독교 정신이 살아 있는 그런 교리문답을 말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유용할 것입니다. 우선 모든 사람들이 복음의 기본적인 내용을 이해하여 기독교에 입문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어떤 뻔뻔스러운 자가 이상한 교리를 내 놓아도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교구 목사들과 부목사들도 이 교리문답을 서면의 양식으로 보관하게 하여 무지하고 결핍된 자들을 가르치는 데 사용할 뿐 아니라 모든 교회 사이에 맺어진 더욱 확고한 공동의 약속으로써 서로 잘 따르게 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는 하면 좋을 일일 뿐 아니라 진실로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오로지 자신만의 헛된 환상에 도취되고 싶어하기만 하는 자들에게 어떤 기이하고 그럴싸하게 꾸며진 교리를 가져오지 못하게 아예 그 근저에서부터 저지하기 위해서는 교리문답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망신을 주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략) 당신이 아무리 경건하고 신성하게 종교 개혁을 달성하더라도 강렬한 설교의 힘을 키우지 않으면 그 개혁에서 어떤 위대한 결실도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입만으로도 온 지구를 세게 두드릴 수 있고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결만으로도 사악한 자들을 멸하실 수 있다고 하는 말씀에 일리가 없지는 않은 것입니다(사 11: 4). (생략)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시모어 경, 귀하의 친절한 호의에 고개 숙여 저를 맡기겠습니다. 해 설 _ 에드워드 시모어(Edward Seymour)는 하트포드의 백작이자 서머셋의 공작으로서 영국에서 에드워드 6세 쪽의 소수파를 배경으로 섭정을 맡았다. 그의 영향력으로 영국에서 종교개혁의 성과가 성공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는 의회의 지지를 받아 헨리 8세가 사망한 이후 몇몇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하였고, 왕권을 우월한 위치에 확고히 자리잡게 하였으며, 우상숭배와 귀족들의 개인 미사를 폐지하였다. 칼빈은 그와 서신교환을 지속하면서 디모데전후서 주석을 그에게 헌사하였다(1548년 7월 25일). 시모어는 칼빈의 충고에 따라 부써, 파지, 오키노, 그리고 순교자 피터 등 유럽 대륙 국가들에서부터 종교적 이유로 인해 추방당했던 자들에게 도피처를 제공해 주었다. 그는 민중들로부터는 사랑 받았으나 귀족들로부터는 질시를 받던 중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와 벌이던 전쟁에서 패배하자 인기를 잃었고, 귀족들의 공모로 자리에서 물러나 런던탑(the Tower of London)에 수감되었다(1549년 런던). 다음 해에 겨우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그의 친척인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의 워윅(Warwick) 백작의 공모에 휘말려 1552년에 처형당하였다. 참고로, 시모어는 겔리선에 노예로 잡혀 있던 존 녹스를 구해내기도 했다.
272 no image |신학단상<48>| ‘공정사회’와 ‘공생발전’_조석민 목사 (129)
편집부
7179 2011-09-07
‘공정사회’와 ‘공생발전’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 “구체적인 정책이나 법률안 제정 및 개정 뒤따라야”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 ‘공정사회와 동반성장’을 주장한지 1년이 지났다. 금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공생발전’을 들고 나왔다. 공정한 사회로 가기 위한 발걸음을 이제 막 내딛은 것 같은데 이제는 ‘공생발전’을 제시한 것이다. ‘공생발전’의 ‘공생’이라는 의미를 살펴볼 때 ‘공정’과 ‘상생’을 뜻하는 합성어로 보인다. 이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매우 기대를 갖게 한다. 하지만 말만 앞세우는 정치가 되지 않도록 실천적 의지를 보여주어야 국민들은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나라당 정두언 국회의원이 그의 트위터에 올린 글을 한번 되짚고 가면 좋을 것이다.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은 “(대통령이 지난해 8.15 경축사에서) 공정사회를 들고나올 때 민간인 사찰사건이 터졌다”면서 “총리실 담당자만 처벌하고 누구나 아는 윗선은 수사조차 안 했으며, 심부름하던 담당 행정관은 모처에서 특별대우를 받으며 조사를 마쳤다. 총리실 압수수색은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준 다음에 실시했다. 이걸로 공정사회는 종쳤다”고 지적한 바 있다. 지금까지 이명박 대통령이 제시한 국정철학은 ‘녹색성장’(2008년), ‘친서민’(2009년), ‘공정사회’(2010년)로 국민들에게 요란하게 선전되었지만 그 실천적 성과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 말일 것이다. 결국 금년에 제시한 ‘공생발전’ 역시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염려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제 현란한 말과 구호보다는 대통령과 청와대가 앞장서서 솔선수범하여 진정성을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그렇다면 작년에 제시한 ‘공정사회’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이제 우리나라에서 ‘공정사회’를 잊어버릴 정도로 공정사회를 이루었는가? 아니면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이 어렵게 되었기에 ‘공생발전’을 들고 나온 것인가?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대통령은 ‘공생발전’의 내용으로 윤리경영, 자본의 책임, 생활의 정치, 포용적 성장 등의 개념을 제시하면서 “발전의 양 못지 않게 발전의 질이 중요하다. 기후변화에도 대응하고 생존 기반도 다지는 발전, 격차를 확대하는 게 아니라 줄이는 발전, 고용 없는 성장이 아니라 일자리를 늘리는 성장이 돼야 한다. 서로 보살피는 따뜻한 사회가 돼야 한다”고 그 의미를 밝혔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며 한 나라의 국가 원수로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갖게 하는 요지의 담화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공정사회’를 실천하지 않고 ‘공생발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자칫 사상누각(沙上樓閣)이요 뜬구름 잡는 격이 아닐까 하는 염려가 들지 않도록 이것도 놓치지 않고 저것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의가 올바른 것이며, 결국 승리한다는 믿음을 과연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며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물리적 힘과 다양한 현실적 권력일 것이며, 그런 힘과 권력이 정의로 오용되거나 남용되어 서는 안될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소리쳐 묻고 대답을 구하고 있지만 막상 정의는 눈에 보이지 않고 대답 없는 메아리만 돌아온다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일반 사회뿐 아니라 교회 속에서도 주장되어지고 실천되어져야 한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교회의 불미스러운 여러 가지 사태들을 보면서 교회가 공정사회를 위해서 보여줄 모범이 없다는 자괴감에 가슴이 쓰리다. 과연 우리 시대의 교회들이 ‘공정사회’를 위해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지, 또한 ‘공생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은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가 전국 1300여명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부패인식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조사의 결과를 보면 청소년의 30%는 “정직하게 사는 것보다 돈 많이 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심지어 청소년들의 76.8%는 “우리 사회가 부패하다”고 대답했다.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인식은 이제 청소년들에게까지 확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정사회’와 더불어 ‘공생발전’이라는 화두가 과거에 제시한 ‘녹색성장’이나 ‘친서민’과 비슷하게 말 잔치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를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정책이나 법률안의 제정 및 개정이 뒤따라야 한다. ‘공정사회’를 주장하면서도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 양극화 해소와 비정규직 문제 등에 대해서 구체적인 개선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공생발전’을 외치는 것은 공허한 말 잔치로 끝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교회도 이런 점에서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럴듯한 감성적 표어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교회가 먼저 ‘공정사회’와 ‘공생발전’을 위한 실천적 행동과 삶을 통하여 우리 사회 앞에 모범적 실례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 따로 없을 정도로 말로는 완벽하지만 실천이 없을 때 그 공허함은 슬픔을 넘어 분노로 바뀌게 되는 법이다. 돼지 목에 걸어준 진주목걸이가 되지 않도록 말로 주장하기보다는 실천적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271 no image |신학단상<47>| 성범죄와 노출이 심한 옷_조석민 목사 (101)
편집부
6416 2011-07-20
성범죄와 노출이 심한 옷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  “신자들은 몸으로 드러내는 일상의 삶에서 거룩함 지켜야” 무더운 여름철이 되어 여성이나 남성이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 것이 자연스러운 계절이다. 그런데 요즘 전 세계 여성들의 ‘슬럿 워크’(Slut Walk) 열풍이 언론에서 화제다. ‘슬럿 워크’는 여성들이 몸에 꼭 끼거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행진하는 시위다. 이런 시위는 지난 4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한 경찰관이 대학 강연 도중 “여성이 성범죄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헤픈 계집(Slut) 처럼 옷을 입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시작됐다. 이후 세계 곳곳으로 ‘슬럿 워크’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생의 성추행 사건을 시작으로 ‘슬럿 워크’ 시위의 불길이 서울 도심에 옮겨졌다. 성추행 사건을 두고 여성이 성추행 당할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인터넷상에 떠돌자 이에 대한 항의로 ‘슬럿 워크’ 1인 시위가 진행된 것이다. 결국 트위터와 인터넷을 통해 젊은 여성들이 ‘슬럿 워크’라는 시위를 주도했다. 이 시위는 어떤 여성단체가 기획하고 앞장선 행사가 아니라 익명의 젊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뜻을 모은 행사이기에 그 의미가 범상치 않다. 시위 참가자들이 항의하는 것은 “도대체 남자들이 생각하는 헤픈 여자란 무엇이며, 야하게 옷을 입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이다. 여성들은 “내가 무슨 옷을 입든, 어떤 행동을 하든,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성추행이나 성폭력을 허락한 적이 없다. 성추행이나 성폭력의 탓을 피해자인 여성에게 돌리지 말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위를 통해 여성들은 몸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까지 여성들의 몸이 남성들의 시선과 잣대에서 한 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그것이 여성들에게는 참혹한 고통이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여성들이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 것은 성범죄를 부채질하는 것일까?”라는 질문 자체가 남성 편향적 시각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 질문이기에 부적절하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은 연령별로 또는 신체부위별로 남자들의 시각에서 아가씨, 처녀, 아줌마, 정절녀, 헤픈 여자, 멋진 여자, 쭉쭉빵빵, 꿀벅지 등등으로 표현되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여성들은 거의 항상 성행위와 연결되는 존재로 시시비비의 대상이 되곤 했다. 심지어 성추행이나 성폭력조차 여자의 칠칠치 못한 행실 때문에 또는 여자가 유혹해서 생긴 범죄로 인식되어졌던 것이다. 우리나라 식자층 남성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떠벌리는 여성에 대한 말실수와 반성 없는 태도를 보면 이들은 여성들에 대해서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성범죄와 관련된 윤리도덕의 부재 및 남성들의 그릇된 선입관이 우리나라를 성범죄 공화국으로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에 대한 잘못된 문화와 사회 통념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준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냈을 때 그 당시 그리스 철학은 사람들에게 정신 혹은 영(spirit)은 순결하고 거룩하며 영원불멸한 것이지만, 육체(flesh) 또는 몸은 더럽고 불결하며 썩어 없어질 것이라고 가르쳤다. 당시 철학 사조(思潮)에 따라 사람들은 육체의 정욕을 따라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몸으로 행하는 일상적인 일은 현재의 일로 영원한 미래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사상은 사람들에게 육체를 소홀히 여기며 자유가 아닌 방종의 삶으로 쾌락을 따라 살아가게 하였다. 이런 상황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성(sex)에 대하여 영적인 일과 관계가 없는 것이기에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몸으로 짓는 죄, 특별히 음행의 문제를 가볍고 여겼고, 자유롭게 처리한 것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이런 윤리도덕의 부재(不在) 현상에 대한 바울의 진단은 그들이 갖고 있었던 “모든 것이 가하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사상이라고 진단한다(고전 6:12-13).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몸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고전 6:13)며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바울이 가르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권리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었다. 이어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몸으로 행한 불의한 일에 대하여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고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은 종교적 행위보다 몸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삶 속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남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몸으로 드러내는 일상의 삶에서 거룩함을 지켜야 하며, 여성들이 노출이 심한 옷을 입었을지라도 그것을 탓하지 않아야 한다.
270 no image |신학단상<46>| 무상급식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시각_조석민 목사 (20)
편집부
4590 2011-06-22
무상급식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시각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 “회심 통해 가난 종식시키려는 노력 기울이는 것이 그 목적” 무상급식(無償給食) 논쟁은 해가 바뀌어도 멈출 줄 모른다. 오히려 논쟁의 열기는 한 여름의 폭염처럼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무상급식은 이미 금년부터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확대 실시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논란을 낳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저소득층 자녀에 한정하여 무상급식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기준이 모호하고 불합리한 부분이 문제로 지적되었고, 무상급식을 제공받는 아이들에게 눈칫밥을 먹인다는 일부 지적이 있어왔다. 지난해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야당이 무상급식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본격적인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최근 서울시장이 주장하는 무상급식반대를 찬성하는 “복지포퓰리즘추방 국민운동본부”의 주민투표 청구인 서명부가 서울시에 접수되었다. 이 서명부에는 전체 서울시민 가운데 80만 1263명의 청구인 서명이 제출되었기에 유효서명 총수가 서울시 주민투표 청구권자 총수의 5%인 41만 8,000명은 넘길 것으로 보인다. 무상급식반대 주민투표 청구가 ‘주민투표청구심의회’에서 적법하다고 판단되면 이후에는 8월 말경에 무상급식반대 주민투표가 서울시에서 시행될 예정이다. 한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서울시가 접수한 무상급식반대 주민투표로 소요되는 비용이 약 182억 원이라고 한다. 이 엄청난 비용을 지출하면서 이 일을 반대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지, 서울시장은 무슨 의도로 무상급식 반대를 주민투표까지 끌고 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서울시장의 명분은 현재의 무상급식이 부자급식 또는 외상급식이라며 복지포퓰리즘으로 매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복지 요구가 갈수록 커지면서 정부는 재정지출 억제 원칙을 고수하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지난달 ‘만 5세 무상보육’을 정부 스스로 공식 발표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반값 등록금’에 대해서도 “전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은 아니며 균형을 찾는 데 노력할 것”이라며 재정부 장관은 한발 물러섰다. 재정부 장관은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사회안전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했다. 사회안전망을 내실화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도 복지 확대가 일정부분 불가피함을 인정한 셈이다. 정부는 감세, 재정건전성, 사회안전망 확충 등 서로 다른 방향으로 뛰는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보려고 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어느 정도 인식한 것 같다. 하지만 서울시장은 정부의 변화된 인식과도 큰 차이가 있어서 나 홀로서기를 고집하고 있는 모습이다. 과연 무상급식은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인가? 무상급식은 부자급식 또는 외상급식이며 복지포퓰리즘인가? 그리스도인은 무상급식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인가? 먹고 사는 문제인 무상급식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상급식에 대한 성경적인 올바른 시각이 필요하다. 성경에서 무상급식의 형태를 어느 정도 찾아 볼 수 있지만, 일차적으로 성경은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 많다. 가난한 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무상급식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가난한 자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생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생존할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기본 요소이다. 신명기는 가난한 자들이 농산물을 지주(地主)와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구체적으로 가르친다(참조. 신 14:22-29; 24:19-22). 가난은 모든 시대에 존재해 왔고, 가장 중요한 사회 문제 가운데 하나로 다루고 있다. 그 이유는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가난의 문제는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먹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에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신명기 15장 11절은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가르친다. 이런 구약성경의 가르침은 신약성경 속에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라는 표현으로 동일하게 나타난다(참조. 마 26:11; 막 14:7; 요 12:8). 성경은 가난에 대하여 사회가 서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며, 가난이 이 땅에 계속되고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가난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은 무상급식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무상급식의 한 모습은 구약성서 열왕기하 4:42-44에서 그 실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선지자 엘리사는 바알 살리사(Baal Shalishah)에서 온 사람이 가져온 처음 거둔 보리로 만든 빵 스무 덩이와 자루에 가득 담은 햇곡식을 백여 명의 사람들이 무상으로 배불리 먹고 남도록 하였다. 신약성경에서 무상급식의 형태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사건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은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사건으로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한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이 발생한 동기에 대하여 예수의 동정심과 관련하여 복음서 기자는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겼다”라고 간접적으로 알려 준다(마 14:14; 막 6:34).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의 생존에 필요한 먹을 것을 준비하여 무상으로 공급하였다면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노력을 실제로 기울여야 할 것이다. 가난에 대한 성경의 궁극적인 가르침은 무상급식이나 자선을 베푸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사람들이 회심하여 함께 가난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실제로 기울이는 것이다. 그 노력의 한 모습이 무상급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Selected no image |신학단상<45>| 민주화된 사회 속의 교회_조석민 목사 (79)
편집부
7620 2011-05-25
민주화된 사회 속의 교회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 “비민주적인 한국교회의 오만과 독선은 개선되어야” 국제적인 인권 자유 감시단체인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가 최근 발표한 ‘2011 언론자유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언론자유국’에서 ‘부분적 언론자유국’(partly free)으로 강등됐다. 한국은 세계 언론자유도 조사 결과 196개국 중 70위를 기록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언론 자유가 1980년대 군사정권 시대 수준으로 되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프리덤하우스가 밝힌 이유는 “정부의 검열 증가와 함께 언론매체의 뉴스와 정보콘텐츠에 대한 정부 영향력의 개입이 확대된 것”과 “최근 몇 년간 온라인상에서 삭제되는 친북 또는 반정부 시각의 글이 늘었고, 정부가 언론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형 언론사의 고위직을 받은 이명박 대통령의 동료들과 함께 대형 방송사의 경영에 개입해 온 것”을 지적했다. 현재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언론자유가 퇴보하고 민주화가 뒷걸음질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혹독한 시절과 80년대의 전두환-노태우의 무자비한 군사정권을 거치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정권 교체 속에서 상당히 민주화된 나라로 변화되었다. 한국 개신교는 이런 정치적 민주화 속에서 많은 변화를 함께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모습은 교회의 직제와 관련하여 최근 벌어지고 있는 각종 연구 발표와 세미나를 통해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2011년 1월 바른교회 아카데미는 ‘교회의 직제론’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발표자들은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개혁교회, 감리교회, 침례교와 회중교회의 직제에 대하여 집중 토의하였고, 그 결과에 대하여 ‘한국교회 직제 개선을 위한 제언’이라는 기자 간담회를 가졌다. 직제 개선을 위한 제안 중에서 한 가지는 “우리는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교회는 개인의 임의적인 결정보다는 집단적인 협의와 합의를 통한 결정(집단지도 원리)과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결정하고 행하는 것보다는 이미 합의되고 세워진 규범에 따라 결정하고 행하려고(법치주의) 노력해왔다고 확인하며, 교회가 이 두 원리를 굳건히 붙들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교회 안에서도 민주적 합의와 절차를 따라야한다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개혁교회 네트워크가 5월 22일에 개최한 제6회 ‘이런 교회 다니고 싶다’ 세미나는 정치적 민주화 속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성도들의 시각에 많은 변화가 있음을 보여준 세미나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세미나 발제자의 한 사람인 최우돈 장로가 ‘함께 세워져가는 교회’라는 발제에서 교회의 민주적 운영을 강조한 부분이다. 최 장로는 목회자가 제왕처럼 군림하는데서 교회의 모든 문제가 비롯된다고 지적하면서 목회자와 평신도는 서로 역할만 다를 뿐 대등한 자격으로 교회를 함께 만들어가는 동역자라고 말했다. 민주화된 사회 속에서 한국 개신교 성도들이 더 이상 목사의 전횡과 독점적인 지위, 오만과 독선을 두고 보지 않는다는 암시이다.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비리와 부패, 비민주적인 교회의 상황 속에서 오만과 독선으로 지탄받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전도가 어려운 것은 예외로 치더라도 오히려 실망한 교인들이 교회를 등지고 있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한국교회의 어두운 미래를 예견하는 것 같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가르쳤고 현재까지 모든 개신교의 교회론에서 매우 중요한 교리가 된 만인제사장주의는 교회 안에서 일반성도들을 배제한 독선적인 가톨릭사제주의로부터 성경적으로 민주화된 교회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루터의 가르침은 베드로전서 2장 4-10절에 근거하여 가르친 교훈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베드로전서 2장 5절,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와 9-10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가 핵심이다. 베드로가 ‘왕 같은 제사장’을 언급했을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적 정체성’으로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인 제의적 기능이다. 제사장은 신분적으로 거룩함을 유지하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구약성서에서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희생의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상황을 배경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공동체적으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른 것이다. 하지만 목사 중심의 개교회(個敎會)로 변질한 한국 교회는 실제로 만인제사장주의가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욱이 성도들 중에는 목사, 장로와 같은 교회 직제를 계급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많다. 최근 한국교회 탐구센터가 설문조사한 350명의 직분자 중 상당수는 직분자 사이의 위계서열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조사에서 직분자들은 ‘직제는 영적질서’(83.9%)이고, ‘명예’(60.3%)이자 ‘서열(55%)’이라고 대답했다. 무언가 잘 못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직제는 단지 직무와 기능이 다를 뿐 신분이 아니다. 민주화된 한국 사회 속의 교회 회원들이 민주적 합의와 절차를 무시하는 교회를 언제까지 그냥 두고 볼지 의문이다.
268 no image |칼빈의 편지들(10)| 비레에게 _ 1547년 7월 2일 _장수민 목사 (11)
편집부
5838 2011-04-06
비레에게 _ 1547년 7월 2일 < 장수민 목사, 칼빈아카데미 원장 > 내용 _ 이 편지는 아미 페렝의 부인이 컨시스토리에서 심문받은 내용과 그루에 사건, 그리고 독일의 부써에게서 온 소식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제 본격적으로 싸워야만 한다네. 희극 배우 가이사(Caesar)의 부인이*1 보인 거만한 행동 때문에 다시 치리회에 소환되었어. 처음부터 누가 화나게 한 것도 아니고 심한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그녀는 자신이 들은 말보다 더욱 심한 독설은 쏟아냈지. 우선, 그녀는 법정으로부터 조사를 받는 것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죄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네. 다음으로, 그녀는 타락하여 죄를 지은 자들만이 서는 것이 마땅한 자리에 자신이 억지로 나타나야 했기에 불명예스러운 낙인이 찍혔다면서 투덜댔지. 한 재판관이 그녀의 난폭한 행동을 자제시키려고 하자, 그녀는 이내 독설을 그에게 날렸어. 그 순간 아벨(Abel)이 개입하여, 그녀가 처음에는 상당히 온건한 태도를 보이면서 말하고 싶지 않아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제 보니 욕설에서라면 그녀를 따를 자가 없다면서 자신의 놀라움을 표현하였다네. 그러자 이 말에 다시 그녀의 분노는 끓어 넘치면서 또 쏟아냈지. “아니, 사실 그렇지 않아. 당신은 나의 아버지를 경솔하게 깎아 내린 욕설가야. 꺼져버려. 이 사기꾼아. 사악한 거짓말쟁이야!” 강제적으로라도 저지했기에 다행이었지만, 그녀의 천둥과 같은 목소리에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다네. 장로회는 그녀가 더 빨리 투옥되기를 희망하였지. 하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의 나쁜 모든 행실을 보호해주던 후원자인 사감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네. 그녀의 아들 한 명이 그녀의 도망에 동행하였어. 그런데 도시의 대문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서 우연히 아벨과 맞닥드리자, 또 다시 욕설을 퍼부으면서 전보다 더 부끄럽게 행동했다네. 아벨이야 치리회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최대한의 온건한 자세로 반응했지. 그 다음날 조용히 있지 않으면 우리를 죽이겠다는 협박장이 설교단에서 발견되었네.*2 여기 사본을 동봉하네. 이런 대담무쌍한 행위에 깜짝 놀란 치리회는 이 음모를 엄중히 조사하라고 명령내렸어. 그래서 몇 명이 조사를 받았네. 많은 사람이 그루에(Gruet)를*3 의심하면서 즉시 체포했지만, 필체가 달랐어. 하지만 그의 문서들을 조사해보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들이 많이 발견되었네. 거기에는 의회에 제출하려고 계획한 간절한 탄원서도 있었지. 그는 거기서 국가를 해롭게 하는 것 외의 기타 것들은 법이 처벌할 수 없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네. 그는 행정에 있어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베네치아에서도 그러한 정책이 실시된다고 하였어. 그러면서 이 도시는 우울기가 있는 한 사람의 머리로 통치 받기에 천 명도 넘는 시민들이 어떤 사건에 노출되어 파괴될지 모르는 위험에 놓여 있다고 했지. 주로 앙드레 필립(Andre Philippe)에게 보내진 편지들도 발견되었어. 몇몇 편지에서 그는 내 이름을 언급하기도 했더군. 또 어떤 때는 내 설교 일부를 포함시키기도 했지만, 누구라도 그가 무엇을 숨기고자 했는지 단번에 지적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너무 서투르게 조작되었더군. 게다가 라틴어로 쓴 두 장의 편지가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성경을 비웃는 내용이었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며, 영혼의 불멸을 꿈과 우화일 뿐이라고 하여, 결국은 기독교를 아예 갈기갈기 찢어 놓는 것이었네. 나는 그러한 내용을 그가 직접 지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필체는 그의 것이었으므로, 아마도 그는 자신을 변호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야. 자신은 생각 없이 그냥 단순하게 기록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재능을 보건대 그가 다른 이들로부터 주워들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문장이 얽혀있고 어법에도 맞지 않으며 야만적인 표현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야. 데 갈라(Des Gallars) 부인의 자매 자코바(Jacoba)가 체포되었는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네. 사실 같은 목적으로 그를 체포하라는 치리회의 명령이 있었다네. 방델(Vandel)에*4 대한 판결은 아직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여전히 상당한 위험에 있네. 이상이 지금 내가 편지를 쓰고 있는 이곳이 상황이야. 우리 행정관들의 판단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겠지. 그러니 치리회가 이 문제를 잘 처리할 것이라고 보네. (이하 지면상 독일에서 들려온 약간의 소식에 대한 내용은 생략함.) 그럼 이만 줄이겠네. 우리 부부가 자네 부부에게 주님 안에서 문안드리네. 존 칼빈. 해설 _ _ _ *1. 이 편지에서 칼빈은 줄곧 자신을 대적했던 아미 페렝(Amy Perrin)를 희극 배우 가이사라고 부르면서 그의 부인이 치리회에서 벌인 행패에 대해 털어 놓았다. 그녀는 치리회의 심문 과정에서 줄곧 아벨 목사에게 욕을 쏟아부었다(Registers of Council, 24th June). *2. 1547년 6월 27일에 발견된 당시 사보이 언어로 쓰인 협박문의 내용은 이렇다. “배뚱뚱아(big pot-belly), 너와 네 친구들은 주둥이 닥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네가 우리를 계속 더 몰아친다면, 수도원에서 도망치던 날을 저주하는 신세가 될 줄로 알라. 우리는 이미 너희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포섭해 놓았다. 도대체 너희 배교한 목사들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와서 우리를 망치려드느냐? 이제 많은 사람들이 복수할 준비를 다 갖추었다. 너는 프라이부르크(Fribourg)의 베를리(Wernly)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라. 우리는 너희들과 같은 선생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경고를 잊지 말라.” 마지막 문단은 죽이겠다는 위협과 마찬가지의 내용이다. 왜냐하면 베드로 성당의 참사회원인 Peter Wernly는 1533년 5월 4일, 프로테스탄트와의 싸움 중에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도망쳤지만 결국에는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3. 이전에 로마 카톨릭에 있었던 쟈크 그루에(Jacque Gruet)는 방탕하고 음탕하며 변태적인 교리를 만들어 내었고, 계속해서 목사들과 충돌하였으며 교회뿐 아니라 국가의 규칙들도 견디지 못하였다. 그는 1535년 비레를 독살하기 위한 음모를 선동한 죄로 고소를 당했었다(Histoire de la Suisse, volume 11, p. 364). 그루에는 3주 동안의 심문 절차를 거쳐 7월 26일에 사형에 처해졌다. *4. 피에르 방델(Pierre Vandel)은 하나님이 버리신 제네바 출신의 주요한 인물이다. 용모가 수려하고 영특했던 그는 시종들과 궁중의 신하들에 둘러싸여 손가락에는 반지를 끼고 가슴에는 금 목걸이를 두르고 자신을 뽐내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타락한 행위와 재판정에서 보인 거만한 태도로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
267 no image |신학단상<44>| 지진과 인간의 재앙_조석민 목사 (13)
편집부
5262 2011-04-06
지진과 인간의 재앙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 “미래 세대 위해 고난 감내하는 지혜로운 삶 절실해” 최근 발생한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특히 쓰나미로 인하여 지진 피해지역 인근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가 피해를 입고, 결국 심각한 방사능 오염이 보도되면서 사람들을 두려움 가운데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오염과 관련하여 인간이 만들어내는 재앙이 자연재해보다 몇 배나 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잘 가르쳐주고 있다. 실제로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보다 인간이 만들어낸 재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피해를 통해서 실물 교육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 동안 한국은 일본의 방사능 오염과 무관한 것처럼 발표했지만 결국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과 기상청은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4월 7일경에 봄철 기류 변화로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서 유출된 방사성 물질이 직접 우리나라로 유입될 수 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도 일본의 방사능 오염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시인한 셈이다. 자연재해보다 무서운 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나라의 원자력 발전소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의 원자력 발전소는 얼마나 안전한지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최근에 정부는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을 점검하고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에서 문제된 원자력 발전소와 비교하여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정말 이것을 믿는 국민들이 얼마나 될지 미지수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원자력 발전소 주변의 마을에서 출생한 어린아이 가운데 기형아 출생율에 대한 보고와 기형 가축, 예를 들면 기형소나 돼지의 출생 경우가 사실대로 보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형아 출생율 및 기형 가축의 출생에 대하여 조사는 되었을 지라도 보도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의 발표에 대하여 무엇을 근거로 믿어야 할지 답답하기만 하다. 일본의 대지진과 관련하여 종말론적 경고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지진과 관련된 성경의 말씀이 종말론적 경고와 더불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4:3-8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 “주께서 다시 오시는 때와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3절)라고 질문한다. 예수의 대답은 여러 가지를 말씀하시면서 “여기저기서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다”(7절)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러나 이런 모든 일은 진통의 시작”(8절)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지진이 종말에 대한 경고가 될 수 있기에 항상 조심해야 하지만 그 자체가 종말의 신호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발생한 일본 대지진과 관련하여 성경의 내용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인류의 심판을 알리는 경고라고 이해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지진은 오늘날보다 예전에 훨씬 더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며, 과거 지진에 대한 기록이 미비하고 정확한 자료가 많지 않을 뿐 실제로는 화산 활동과 관련하여 오늘날보다도 더 많은 지진 활동이 있었음을 성경의 기록과 일반 역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대지진과 관련하여 우리의 상황을 이해할 때 재앙은 자연이 주는 피해보다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피해가 더욱 극심하다는 사실이다. 이럼 점에서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를 현재처럼 계속 늘려나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욕심과 무한 소비적 삶의 형태는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욕심의 그릇을 키울 것이 아니라 더욱 작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쾌락과 편리함 그리고 안락함을 누리기 위하여 원자력을 의지하여 발전소를 계속 늘려나갈 때, 그 결과 초래되는 비극적 종말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우리들의 욕심 그릇을 작게 만들고 비울 때 우리는 평안을 누리며 오히려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욕심 그릇이 작을수록 자유롭다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무한정의 소비 지향적인 삶을 버리며 소박한 삶을 시작할 때 아닌가 생각한다. 인간이 때때로 자연 재해를 맞이하여 황폐한 삶의 정황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폐해는 자연재해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각 개인의 삶에서 에너지 절약을 생활화하고 소모적인 삶에서 탈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삶은 피곤해지고 답답하며 힘들어 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류가 함께 공존하는 길이며 상생하는 길이라면 기꺼이 우리는 이런 삶을 택할 수밖에 없다. 원자력 발전소를 늘려나가고 개발하는 일보다 안전을 추구하며 인간이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원자력 발전소를 지양하고 대체 에너지를 개발해야 할 때가 됐다. 모든 개인은 자원 낭비를 줄이며 에너지를 귀중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재앙보다 무서운 것이 인간이 창출한 재앙임을 일본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오염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에너지를 절약하여 사용하며 필요 이상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누리기 위하여 위험을 감수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연 재해보다 무서운 것이 인간이 만들어내는 재앙임을 기억하여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을 직시하며 이런 위험을 사전에 막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편리함과 안락함을 위하여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미래 세대를 위하여 고난과 불편함을 감내하는 지혜로운 삶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이다.
266 no image |신학단상<43>| 공정사회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책임_조석민 목사 (9)
편집부
4910 2011-03-09
공정사회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책임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 “보다 나은 미래 위해 공정사회 위한 책임 다하길” 지난해에 화제가 된 책 가운데 하나는 하버드 대학교의 마이클 샌델 교수가 쓴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인문사회학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은 이명박 대통령이 여름휴가 기간에 읽은 책이라고도 한다. 대통령의 연설 가운데 ‘공정사회’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도 이 책과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다. 공정사회는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과연 우리 사회가 현재 얼마나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공정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어떤 사회를 공정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얼마 전 정부는 다시 공정사회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정부가 지난 2월 19일 ‘1차 공정사회 회의’를 열었다. 대통령이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공정사회’를 처음 내건지 반년만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공정사회는 과연 가능한 것일까. 계간지 「역사비평」 2011년 봄호는 공정사회의 전제조건 가운데 하나로 세금 문제를 제기한다. ‘조세의 공공성을 묻다’라는 주제로 특집을 마련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공정해야 할 문제가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세금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정의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이 정의라고 이해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런 현실은 과거에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촉발된 삼성 그룹 수사에서 이미 경험했다. 검찰은 이건희 전 회장을 경영권 불법승계 혐의로 기소하고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천 100억 원을 선고하였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기소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를 사면하였던 것이다.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힘과 여러 종류의 현실적 권력이며, 그런 힘과 권력은 공평과 정의를 위하여 사용되기보다는 불의를 정의로 착각하는데 오용되거나 남용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정의가 이기는 모습을 과연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그동안 5년여 세월 속에 여러 가지 불법과 비리로 신음하던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의 교수들이 그렇게 원했던 학내 사태가 올바로 해결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의가 이기는 현실을 조금 보는 것 같아서 힘이 난다. 적지 않은 교수들이 학교의 불법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오랜 기간 동안 함께 마음과 뜻을 모아 법적 공방을 벌인 결과 이제야 잘못된 일이 드러나고 굽어졌던 것이 곧게 펴지게 된 것이다. 공정사회를 위한 하나의 신호탄이 되기를 바라며, 동시에 다른 모든 사립신학대학원대학교를 향하여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공정사회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바로 이런 점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라고 선포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와 직장, 단체 그리고 이 사회 속에서 정의가 물 같이 흐르도록 노력해야 하며,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 불법이 자행되며 정의가 굽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짐승처럼 침묵하면 그 사람은 스스로 살처분(殺處分)을 기다리는 구제역에 감염된 소와 돼지의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신구약성서는 공정사회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예수께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마 23:23)고 책망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당 안에서 예배를 드리며 봉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종교의식 행위에만 만족하며 그 속에 안주하고 있을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동일한 말씀은 화살처럼 날아올 것이다. 잠언 21장 3절은 아주 분명하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고 말한다. 공정사회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역할은 성서가 가르치는 정의의 목소리를 외치며, 불법과 불의를 고발하고, 그 현장에서 행동으로 정의와 공평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노해 시인이 최근 출판한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서 노래한 <침묵의 나라>의 한 소절, “정의와 진보를 거침없이 말하던/ 나의 대통령과 지도자들은/ 찬란하게 인류 앞에 침묵했다/ ... 오 거짓 국익 앞에만 다이내믹한 코리아여/ 네가 짓밟히고 피에 젖어 울부짖을 때/ 세계는 너의 침묵을 찬란히 돌려주리라”와 유사한 현실이 되지 않도록 그리스도인들은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동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공정사회를 추구하면서 가장 먼저 내가 속한 작은 사회인 교회와 직장, 내 삶의 터전에서 공평과 정의를 추구하며 스스로가 정의로운 삶을 구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내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공평과 정의가 흐르는 모습으로 세워져 갈 수 있도록 힘쓰고 노력해야 한다. 올바르지 못한 모습을 바로잡는 일에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때로는 성서가 가르치는 공평과 정의를 위하여 육신의 몸을 불살라버려야 할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안주하여 안정과 번영을 누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미래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면 공정사회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265 no image 칼빈의 편지들(9)쟝 프렐롱 경께_장수민 목사 (142)
편집부
9135 2011-02-23
쟝 프렐롱 경께 1546. 02. 13. < 장수민 목사, 칼빈아카데미 원장 > “무엇에 앞서 먼저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있어야” <내용> 세르베투스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잘못된 사상을 고쳐달라는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내용 영주님께. 제가 떠나는 순간에 받은 영주님의 최근 편지에 대해서 미처 시간이 없어 답장이 늦었습니다. 돌아와서 여유가 생기자마자 영주님께서 (세르베투스에게 글을 써 달라고) 바라시는 대로 편지를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최근의 특정인 한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한 번이라도 더 그를 다시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시도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혹시라도 주님께서 그를 위해 역사해 주신다면 큰 성과가 나타나 그가 아예 다른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제게 보낸 편지는 매우 교만한 어투였으므로 저는 의도적으로 더 호되게 꾸지람하여 그의 자만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다름 무엇에 앞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임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 겸손이라는 것은 주님의 성령으로부터 그에게 전달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우리가 지켜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와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하시면 현재의 대답이 그에게 유익이 될 것이고, 그러면 저는 기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여전히 지금과 같은 행동 방식을 고수한다면 귀하께서 저에게 그를 어떻게든지 설득해달라고 간청하셔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일 외에도 다른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공연히 더 바빠지지 않도록 깊이 주의할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더 쓸모 있는 여러 가지 독서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고 정신을 흩뜨리기 위한 사탄의 유혹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기에 말입니다. 그러니 다른 더 좋은 방책이 당장 떠오르지 않으신다면 이 문제에 관해서는 제가 지금까지 들인 노력만으로도 영주님께서 만족해 주셨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항상 영주님을 그의 품 안에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귀하의 종이자 진실한 친구, 샤를 데스페빌(Charles d'Espeville). <해설> 비엔느(Vienne) 대주교 고문헌 원본에 이 편지의 주소가 나와 있다. 이 고문헌은 아르티니의 대수도원장인 쟝 프렐롱(Jehan Frellon) 경이 처음으로 출판하였다. 쟝 프렐롱은 리옹의 자유 상인이자 레쒸 드 콜롱뉴(l'Eseu de Coulongne)의 교육자였다. 편지에서 언급된 이 신비스러운 인물은 바로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eal Servetus)이다. 그는 7년 후에 열린 재판에서 치명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세르베투스는 도피니(Dauphiny)의 비엔느(Vienne)에서 외과의사로 있으면서 존 프렐롱(John Frellon)이라는 가명으로 칼빈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기독교 회복(Christianismi restitution)이라는 제목으로 집필 중이던 자신의 작품 일부를 발췌하여 칼빈에게 보내주었다. 그러면서 제네바를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바로 이것이 칼빈이 파렐에게 편지를 쓸 때 자주 인용되던 문단이 나오게 되는 배경이다. “세르베투스가 최근에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자신의 정신착란적인 환상으로 가득 찬 두꺼운 책도 함께 동봉하였습니다. 그는 제가 괜찮다면 이쪽으로 오고 싶다고 했지만, 저는 그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그가 왔을 때 나의 권위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는 그가 살아서 돌아가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1546년 2월 13일의 같은 날자 편지에서 인용). 이후로 7년 뒤에 얼마나 끔찍한 위험이 발생했는지!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를 비난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머리가 셋 달린 괴물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먼저 로마 카롤릭 측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 대기 중에 탈출하였다가, 마치 불나방이 불꽃으로 달려드는 것처럼, 운명적인 매력에 이끌려 제네바를 방문하였다. 그는 1553년 8월 13일 일요일에 취리히로 가는 배 골든 로즈호의 예약 승객이었지만 이 날 마들렝 교회당에서 칼빈의 설교를 듣던 중 사람들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264 no image |영혼의두레박<8>| 사랑하는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_유순아 박사 (90)
편집부
6819 2011-02-09
사랑하는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 유순아 박사, 한국멤버케어연구소장 > “인생의 목표란 주님 위한 일이 아니라 주님 자신임을 알아야” 지난 몇 달간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아주 특별한 시간들을 주셨다.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을 허락하신 것이다.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편한 시간들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름만 여행이지 계속 옮겨 다녀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불안하고 외롭고 힘든 시간들이었다. 더욱이 기질적으로 한 곳에 정착해야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으로서는 더욱 그러했다. 낯선 곳에서 눈을 뜨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루 일정을 보낼 수 없고 주어지는 상황에서 일을 해야 하고, 때로는 존재하는 자 같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 자 같기도 하고, 말을 잊은 자처럼, 보지 못하는 자처럼, 듣지 못하는 자처럼, 맘도 생각도 없는 자처럼 된 것 같았다. 코로는 숨을 쉬지만 마음은 답답하고 생각은 있는데 머리 속은 텅 빈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거야? 내가 뭐 잘못된 건 아닌가? 제대로 가고 있나? 머리 속으로는 ‘이건 잘못된 생각이야’ 하면서도 마음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았나를 생각해 볼 때 이미 어두워진 나의 눈은 나를 아름답게 볼 수 없었다. 귀로는 나를 정죄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고 입으로는 현실을 비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내 몸은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은 아름다운 곳에 머물고 있는데 심령은 메마른 광야요 게달의 캄캄한 장막이었다. 계절적으로도 춥고 황량한 이 인생의 광야에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눈은 사물을 보고 있지만 눈동자는 주님을 찾았다. 귀로는 소리를 듣지만 내면의 주파수를 주님께 맞추려고 애를 썼다. 책을 보면서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도 주님의 은혜를 간구했다.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서도, 서서 걸으면서도 그 분의 임재를 갈망했다. 낯선 땅 외로운 곳에서 비로소 나는 새로운 영적 여행을(Spiritual Journey) 시작하게 되었다. 삶과 사역의 무너진 터 위에서 나를 돌아보았다. 열심히 살아 온 것 같은데 남은 것이 없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부지런히 주님을 찾는데 마음은 황폐해 갔다. 슬픔 가운데 탄식했다. “주님, 제가 이렇게 찾고 있는데 도대체 어디 계신 거예요? 난 더 이상 주님과 먼 관계로 살고 싶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아가서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딸아 너는 네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지만 아니야 내 눈에는 너무 사랑스럽단다. 게달의 장막처럼 새까맣다고 부끄러워하지만 그렇지 않단다. 마치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이 아름답구나”(아 1:5). 내 안에 기쁨이 충만해지며 온 세상이 내 것 같은 부요함과 자유함을 누리는 은혜를 체험했다. 하지만 이 은혜가 계속 지속되지는 않았다. 어느 날은 충만한 것 같은데 또 어느 날은 아무리 앉아 있어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마음이 냉랭해졌다. 또 다시 주님께 여쭈었다. 왜 이렇게 내 마음이 냉랭하냐고. 하나님께서는 내 속에 있는 것들을 영혼의 두레박으로 하나씩 퍼 올리기 시작하셨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누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다. 나의 부족함을 생각하며 수치심과 죄의식과 후회스러움에 한없이 눈물 흘릴 때 주님께서는 내 마음의 창 밖에서 나를 들여다보시며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9,14)라고 말씀하면서 나의 마음을 이끌어내셨다. “주님, 그런데 용기가 안나 못 일어나겠어요.” “네 속에 있는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15). 그럼에도 그 곳에 머물러 미래에 대한 염려로 불안해 할 때 주님은 이렇게 당신을 알려 주셨다.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의 비전이란다. 내가 너의 인생의 목표란다. 사랑하는 딸아 일어나서 함께 가자.” 난 지금까지 나의 비전은 현재 하고 있는 이 사역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왔다. 그 동안 얼마나 애를 쓰며 힘들게 살아왔는가? 그런데 주님은 나의 비전이 주님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나의 인생의 목표는 주님을 위한(for God) 일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제부터는 내가 뭘 하려고 애쓰지 말고 주님과 함께(with God) 있자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고 그것이 나의 가치라고 가르쳐 주신다. “주님, 주님께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 되기를 원합니다(아 4:12). 제 인생에 광야와 겨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조용히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셨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 가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 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14).
263 no image |신학단상<42>| 말 못하는 피조물(被造物)들의 신음소리_조석민 목사 (20)
편집부
5454 2011-01-19
말 못하는 피조물(被造物)들의 신음소리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 “식용 동물의 삶일지라도 최소한의 편의 제공해야” 구제역(口蹄疫)으로 인하여 많은 소와 돼지를 살처분(殺處分)하고 있는 현재의 암울한 상황은 이명박 정권의 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경북 안동에서 2010년 11월 23일에 최초로 구제역 의심 신고를 한 이후 대통령이 구제역 발생 50일만에 구제역 방제 현장을 찾은 2011년 1월 16일까지 살처분된 소와 돼지의 숫자는 188만 마리로 폭증했다. 구제역으로 살처분된 소와 돼지의 숫자가 축산업 붕괴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져 온 200만 마리에 육박하며 축산농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있다. 축산업 붕괴의 위기가 현실화됐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핵심들은 구제역에 대해 안이한 인식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말 못하는 동물이지만 살아있는 소와 돼지들이 살려고 발버둥치는 데도 사람들은 구제역 예방이라는 규정 때문에 멀쩡한 소와 돼지를 땅 속으로 밀어 넣어 생매장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게 과연 사람이 할 짓인가? 이제 막 태어난 돼지새끼들을 어미돼지와 함께 무차별 살처분하는 것이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인가? 살처분이 아니라 백신예방 접종은 해결책이 아닌가? 구제역 살처분 초기 때부터 시민사회단체들이 EU 등 선진국들은 무차별 살처분을 하지 않고 있음을 강조하며 살처분 중단을 촉구했지만 정부는 그 목소리를 묵살했다. 축산업 붕괴 위기와 함께 살처분 보상과 백신접종, 방역작업 등에 투입된 재정이 거의 2조원에 이른 상태다. 이 정부가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듯하다. 어미돼지와 이제 막 태어난 새끼돼지들을 함께 살처분하는 현장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이제 갓 태어난 새끼돼지들은 생애 처음으로 흙을 밟아보는 기쁨에 들떴겠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개보다 후각이 100배나 발달한 돼지들이 악취 가득한 돼지 우리에서 빠져나와 상쾌한 바깥 공기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행복 그 자체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환희였다. 어미돼지와 함께 새끼돼지들은 구덩이 속으로 우르르 내몰렸다. 어미돼지와 새끼돼지들 머리 위를 포클레인이 사정없이 내리쳤다. 순간 돼지들의 신음은 비명으로 바뀌며 귀청을 찢었다. 이것이 살처분 현장의 장면이었다. 이런 살처분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고통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돼지들의 신음소리와 소 울음소리의 환청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구제역 방역을 하고 있는 수의사 한 사람은 소 울음소리와 돼지의 비명 소리가 계속 귓속에 들려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이며, 잠을 자면 돼지들과 소떼에게 쫓기는 꿈을 꾼다고 말한다. 한국동물보호연합 이원복 대표는 돼지들이 지르는 비명소리에 보름이나 환청에 시달렸다고 한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출 23:19)고 가르친다. 말 못하는 동물이지만 생명을 존중해야 하며 인도적으로 다루라는 사상을 교훈하는 말씀이다. 하지만 구제역 살처분 현장에서는 “동물을 죽이더라도 고통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동물보호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다. 단기간에 100만 마리 이상의 가축을 살처분해야 하는 전대미문의 사건 현장에서 모든 동물을 안락사 시킬 여유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비록 인간의 먹거리가 될 식용 동물의 삶일지라도 최소한의 편의를 제공하고, 고통을 최대한 줄여줘야 한다는 인도적인 사상이 기본 원칙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축의 사육, 운송, 도축 등 전 생애에 걸쳐 동물복지가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동물복지의 주창자들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좁은 사육 공간이다. 겨우 일어서서 먹이를 먹고 누울 수 있는 공간에서 암퇘지가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은 보기에도 애처롭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동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돼지의 경우 자동 급여되는 사료를 먹고 축사 한 귀퉁이에 마련된 배설 장소로 이동해 용변을 본 뒤 돌아와 바닥에 엎드려 잠을 자는 것이 거의 전부다. 이런 단조로운 생활로 스트레스를 받은 동물은 대개 높은 공격성을 보이고 있다. 밀폐된 좁은 축사 내 공기 오염과 스트레스는 동물을 각종 질병에 취약하게 만들고, 면역성을 떨어뜨려서 구제역 등 동물 전염병의 전파 속도도 빨라진다는 것이다. 구제역은 어쩌면 인간이 일차 원인이 되는 가축 전염병일지 모르겠다. 단기간에 육용 동물들을 밀폐된 공간에서 사육하여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려는 사람들의 욕심이 수많은 소와 돼지들을 산채로 죽음으로 몰아낸 결과 일 수 있기 때문이다. A4 용지 한 장 크기의 배터리 케이지에선 암탉 두 마리가 평생 알만 낳는다는 보고이다.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서 키우는 닭이 조류 인플루엔자에 걸리면 집단 폐사하지만, 야생 철새가 조류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한국동물복지협회 조희경 상임대표의 설명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구제역과 살처분되는 동물들의 상황은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일까? 구제역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 엄청나서 경제 성장에도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만이 우리의 관심사일까? 성경을 알고 그 말씀을 조금이라고 묵상하며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동물을 먹거리로 주셨지만 그 동물들의 생명도 귀중함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기 때문이다.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출 34:26).
262 no image |영혼의두레박<7>| 우울증, 고통의 터널 지나 치유의 강가로_유순아 박사 (26)
편집부
6325 2010-12-15
우울증, 고통의 터널 지나 치유의 강가로 < 유순아 박사, 한국멤버케어연구소장 >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는 극도의 슬픔 느낄 수 있어” 요즘 뉴스 보기가 겁이 난다. 눈만 뜨면 누구 누구가 ‘자살’이라는 두 글자가 떡하니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비록 그 사자(死者)가 유명인이든 무명인이든, 크리스천이든 넌크리스천이든 표면상의 원인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장본인은 우울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느끼는 우울함과 우울증 장애는 다르다는 것을 밝혀둔다. 우울증은 오늘날 제일 많은 정서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서구 사회에서는 심장병에 뒤이어 두 번째로 많은 사망 원인이라고 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우울증을 ‘정신적 감기’라고도 표현한다. 삶의 맥락에서 원인만 제공되면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우울증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걸려도 모르고 치료되도 모른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우울증에 빠져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필요 이상의 큰 상처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울증은 왜 오는 것인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 주요 원인은 죄책감, 억압된 분노, 불안, 거절감, 실망, 비합리적 비교 의식, 중독, 낮은 자존감, 생리적 기능부전(예: 갑상선), 자녀 출산(산후 우울증), 과다 정신 활동(경쟁주의, 완벽주의, 과잉 성취),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좌절감, 실직, 배우자 상실, 상실감, 갱년기, 노년, 귀신 들림, 두뇌 속의 화학 변화 그리고 이로 인한 심각한 질환 때문이다. 우울증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계속되는 우울한 기분과 불안 혹은 공허감, 인간 관계에 있어서 분노와 미움, 그리고 타인을 정죄함,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능력과 무기력감, 불규칙한 식생활, 불면, 체중 증가, 힘이 없고 피로하며 몸이 처지는 기분, 이중적인 삶의 자각으로 인해 오는 죄책감, 두통, 소화기 장애 또는 만성 통증 등 치료에 잘 반응하지 않고 계속되는 신체 증상들이다. 이 우울증은 사소한 마음의 병쯤으로 여기며 무심코 방치하다가는 경우에 따라서 자살에 이르게까지 한다. 그럼 크리스천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가?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우울증에 대한 예방 접종 주사를 맞았다고 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고통을 숨기거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병원으로부터 받고도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 것이 두려워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거나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크리스천도 우울함을 느끼거나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의 숲 속을 거닐다 보면 신앙의 거장들이 뜻밖에도 사역으로 인해 탈진하고 우울해 하는 경험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모세, 엘리야, 욥, 다윗, 예레미야, 그리고 사도 바울을 들 수 있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죽음의 끝자락까지 떨어지는 극도의 슬픔을 느끼셨다. 오랜 세월을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21세기 기독교의 거장 헨리 나우엔도 성장 과정에는 기분부전장애로, 성인이 돼서는 주요 우울증으로 고통의 터널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자신과 함께 하시는(Here and Now)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상처입은 치유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 그래서 그는 우울증을 ‘기대하지 않은 선물’(Unexpected Gift)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우울증은 역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개인적인 우울증의 경험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갈 수 있는 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가 어떻게 하면 우울증으로 고통 당하는 성도가 ‘상처입은 치유자’로 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또 앞으로 앓을 수 있는 우울증을 어떻게 하면 예방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먼저 목회자가 우울증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상식 선이 아니라 그 분야의 전문 서적이나 교육을 통해서 전문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정직하게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우울증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전체 교인들을 교육함으로써 치료뿐만 아니라 예방도 할 수 있다. 또 교회 안의 치유 자원을 활용하여 상담실 운영, 지원 그룹과 의료 선교를 통한 도움, 물질적인 도움, 또한 소속감을 갖게 함으로써 밝고 건강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 교회가 이 모든 것들을 하기엔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몇 몇 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네트워킹을 통해 이 일을 이루어 나간다면 그 교회는 예배 공동체, 치유 공동체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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