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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no image |칼빈의 편지들(8)| 파렐 형제님께_장수민 목사 (111)
편집부
6924 2010-12-08
파렐 형제님께 < 장수민 목사, 칼빈아카데미 원장 > “어느 시대나 군주에게 아양떨려는 비굴한 자들 있어” 내용 _ 파렐의 형제 고티에(Gautier)가 투옥된 데 대한 안타까움과 제네바에 창궐한 역병과 관련한 소식. 형님께서도 이미 그 슬픈 소식을 들으셨겠지요. 이 편지를 전하는 사람이 형님의 형님 고티에께서 붙잡혀 족쇄를 차고 있으면서 아주 급박한 생명의 위기에 처해 계신다는 것을 전해드릴테니 말입니다. 제가 항상 예견하면서 두려워했던 일이 그만 실제로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로서는 이렇게 불길한 일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불평을 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큰 형님을 돕는 문제에 있어서 저로서는 베른 사람들의 힘이 과연 얼마만큼이나 미칠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게다가 현재의 시점에서 그들이 과연 이 어려운 일에 발벗고 나서 줄런지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습니다. 이 모든 상황들에 대해서는 저보다야 형님께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장 슈트름(Jean Sturm)을 통하지 않는 한, 독일로부터 시기적절한 어떤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슈트름이 아무리 이 대의를 위하여 노력한다고 해도, 상황이 그렇듯이 큰 형님과는 사이가 안 좋지 않습니까. 형님께서 시간이 있는 동안 잘 생각하셔서 뛰어난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생각해 보실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게다가 이 기회에 군주에게 아양을 떨려는 비굴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형님도 모르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여하튼 그 지역에서 무언가 시도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고 생각하신다면, 형님께서 슈트름에게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장 효과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형님 곁에는 지금까지 그 어떠한 것도 함부로 거절한 적이 없는 부써(Martin Bucer) 선생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부써께 다녀오시라고 하기에는 길이 너무 먼 듯 합니다. 그러니 부써께 부탁하셔서, 해결책이 너무 늦지 않도록 인편으로라도 베른 사람들을 독력하시라고 부탁하십시오. 그건 그렇고 형님과 관련한 소식이 아무 것도 없었기에 우리는 매우 놀랐습니다. 비레는 형제들이 모두 결정을 다 내렸다는 것을 저에게 알려왔는데, 그의 편지를 종합해본 최대한의 정보에 의하면, 의회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문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불투명한 상태에 놓여 있겠습니까? 형님도 아시듯이 이곳의 우리들 역시 아주 힘든 문제에 봉착해 있지만, 형님은 우리와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십니다. 마테우스(Matthaeus)는 병원에서 역병 환자들을 위해 열심히 땀흘리고 있습니다. 형님을 부르고 있는 동안 우리의 가장 뛰어난 형제이자 신실한 동료인 제니스톤(Geniston)을 잃었습니다. 이제 다른 이들도 이렇게 역병으로 계속 우리를 떠난다면 어째야 좋습니까? 만약 단 한 명만이 살아난다면요? 그것이 바로 제가 된다면요? 목사들이 이곳 마을 사람들의 말도 안 되는 미신에 휩쓸려 스스로 폐쇄적으로 변한다면 또 어떻겠구요? 최근에 많은 목사들이 다소간 제한적인 생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형님께서 우리를 돕는 것을 더 이상 미루시지 않도록,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들에 대해서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레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바로 형님쪽 형제들이 형님께서 우리가 투쌩(Toussain)의 계승을 가져올 수 있다는 조건 하에서 우리에게 동의했다는 말을 덧붙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우스운 일입니다. 우리가 그 문제에 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혹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그 일을 시도할 수 있겠습니까? 요약하자면, 우리는 절대로 어떤 특정한 시간을 정하지 않을 것이고, 형님께서 최대한 부지런히 움직여 뇌샤텔을 떠나시기만을 바랍니다. 형님께서 즉시 족쇄에서 풀려나 우리에게 오시도록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파렐 형님께서 이곳에 오시기만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을 보아서도 형님께서 충분히 아실 것입니다. 제니스톤의 아내는 거의 죽을 만큼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그의 어린 딸도 지쳐만 가고, 아들은 다른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편지의 나머지 부분 소실됨) 1545년 9월 칼빈 드림 해설 _ 이 편지는 날짜를 알 수 없고 결미 부분 역시 생략되어 있다. 아마 유럽을 휩쓴 흑사병 창궐 시기, 즉 1545년 9월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티에 파렐(Gautier Farel)은 개혁자 파렐의 형으로 복음 때문에 투옥되었지만, 예상 외로 곧 자유의 몸이 되었다. 목사 루이 드 제니스톤(Louis de Geniston)은 앞서 역병으로 삶을 마감한 피에르 블랑셰(Pierre Blanchet)의 고귀한 본을 따라 자발적으로 병원으로 달려가 역병에 걸린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지만, 헌신적으로 일하던 중에 1545년에 역병에 걸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아내와 두 자녀들과 떨어져 지내야 했고, 결국에는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의 역병은 너무도 심각하여 몇몇 도시는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할 정도였다. 칼빈은 당시 어려움에 처해 있던 파렐에게 제네바로의 망명을 간청했지만, 파렐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후로도 20년 넘게 뇌샤텔 교회를 지키면서 꿋꿋하게 활동하였다.
260 no image |신학단상<41>| ‘공정(公正)한 사회’라는 거울_조석민 목사 (24)
편집부
5547 2010-09-29
‘공정(公正)한 사회’라는 거울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 “인맥, 학맥 등과 같은 연줄문화가 부패의 온상” 지난 8.15 광복절에 이명박 대통령이 경축사를 통해서 “공정한 사회야말로 국가 선진화의 윤리적 인프라”라고 언급하며 “앞으로 공정한 사회라는 원칙이 확고히 준수되도록 해야 한다”고 선포하면서부터 ‘공정한 사회’는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다.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 대통령은 어떤 의미로 공정한 사회를 말한 것일까? 정직한 사회도 아니고 정의로운 사회도 아닌 공정한 사회를 위하여 따뜻한 마음과 나눔의 실천이 매우 중요하며,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불공정한 관행을 없애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 그의 말에서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공정한 사회란 그 표현 자체에 해석이 들어 있기에 그 의미가 분명한 것 같다. 다시 말해서 공정한 사회란 공평(公平)하고 정의(正義)로운 사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사회가 모든 면에서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목표로 제시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원정>(原政)에서 “정치를 하는 자는 공정하게 하는 것이며 백성들이 균등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政也者 正也 均吾民也)이라며, 정치의 본질이 공정과 균등에 있음을 이미 오래전에 역설했다. 늦었지만 이 정부가 이제야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기에 진심으로 환영한다. 구약성서의 시편 기자는 “능력 있는 왕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시 99:4)라고 교훈한다. 하지만 공정한 사회가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키는 무서운 회오리바람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앞선다. 공정한 사회라는 구호는 우리 사회에 그렇게 새로운 화두는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부정부패척결, 정의 사회 구현, 등등 수없이 많은 유사한 구호가 난무했던 것이 우리 사회이다. 특히 이런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일수록 전혀 공정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한 것을 우리는 역사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공정한 사회는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 이전에 이 구호를 제창하는 자가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경재적인 부와 각종 기득권(旣得權)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차별한 반칙을 합법적으로 자행하면서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리는 사회 속에서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고위 공직자들, 특히 사법부의 공직자들이 먼저 이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은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가 전국 1300여명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부패인식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조사의 결과를 보면 청소년의 30%는 ‘정직하게 사는 것보다 돈 많이 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대답했고, 심지어 청소년들의 76.8%는 ‘우리 사회가 부패하다’고 답했다.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청소년들에게까지 확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정한 사회라는 구호는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도 이루어가야 할 윤리적 모습이기도 하다. 신구약성서는 공평과 정의, 그리고 인애와 평화가 넘치는 믿음의 공동체와 사회를 이루어 나가야 할 책임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음을 교훈한다. 공정한 사회라는 거울에 비춰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떤지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이 거울에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을까? 목회자들과 교회의 직분자들은 이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고 잘못된 부분을 고쳐야 할 것이다. 공정한 사회라는 구호가 단지 정치적 구호이기 이전에 공평과 정의의 실천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구약성서가 가르치는 교훈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잠언과 시편 기자는 각각 다음과 같이 교훈한다.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느니라”(잠언 21:21).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시 89:14). 신약성서에서 바울도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 4:1)라고 교훈한다. 우리 사회가 공정한 사회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인맥(人脈)과 학맥(學脈) 등등의 연줄문화 때문임을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연줄문화는 우리 사회의 부정한 거래를 양산하며, 정직하고 공평한 사회를 저해하는 나쁜 뿌리이다. 이런 못된 뿌리가 교회 공동체에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 모이는 곳이어서 연줄문화는 다양한 모습으로 여전히 존재하며, 빈부의 격차 또한 교회 안에 그대로 존재한다. 서울의 한 교회는 주중에 모여 예배와 교제를 나누는 소그룹 편성을 할 때 비슷한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끼리 모아 놓거나, 비슷한 재산의 소유자끼리 모아 놓아 아파트의 평수가 비슷한 가정끼리 한 그룹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변형된 연줄문화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공정한 사회와 교회의 본질을 저해하는 연줄문화를 교회에서부터 제거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 안에 연줄문화를 방치하면 교회는 곧 부정한 거래의 온상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아는 사람이 교회에서 만난 사람뿐이기에 같은 교회의 성도들에게 일을 맡기면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이것이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면 그것은 오히려 부정부패의 온상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부정한 거래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뿌리 내리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 결국 우리 사회의 부패행위를 막는 일이며, 동시에 공정한 사회를 이루어가는 방법일 수도 있다. 교회 공동체 안의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모두 한 가족이기에 향우회, 동창회, 동호회 등등의 특정집단이나 연줄 모임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259 no image |영혼의 두레박<6>| 빗물에 쓸려간 반지하 서민들의 추석_유순아 박사 (13)
편집부
5500 2010-09-29
빗물에 쓸려간 반지하 서민들의 추석 < 유순아 박사, 한국멤버케어연구소장 > “교회는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소망 전달해야” 올해는 유난히도 무덥고 잦은 비바람과 강풍으로 인해 힘겹게 여름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그 어느 해보다도 긴 추석 연휴가 기다려졌다. 이 기간 동안 가족과 친지들을 방문하면서 좀 쉬고 싶었다. 그런데 추석 명절을 앞둔 연휴 첫날, 수도권 지역에 9월 하순 강수량으로는 103년 만에 최고치에 달한다는 300mm에 가까운 폭우가 쏟아졌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마치 양동이로 퍼붓는 것처럼 아니 하늘에서 물 폭탄이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배수 기능을 마비시킬 정도로 비가 내리면서 하수가 솟구쳤고 결국 도시 곳곳에서 침수 피해가 속출했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니 기습 폭우로 인해 일부 지역 도로가 물에 잠기고 그 물이 고스란히 저지대 반 지하 방으로 휘몰아쳐갔다. 아무 것도 모르고 반 지하 부엌에서 추석 음식을 준비하던 한 아주머니는 밖에서 물이 들어온다는 급박한 소리를 듣고 가까스로 문을 열였는데 순식간에 물이 쏟아져 들어와 온 집이 물에 잠겼다고 망연자실해하며 말도 잇지 못했다. 배수가 안되니 물이 욕실과 싱크대의 하수구로 역류해 치솟아 올랐다. 게다가 추석 연휴라 집을 비운 집들이 많아 사람들이 돌아왔을 때 그 황망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종일 쏟아지는 빗줄기를 내다 보면서 곳곳에서 속출하는 비 피해 소식을 들었다. 빗물에 쓸려간 반 지하 서민들의 애환을 보면서 쉬고 싶다는 마음이 싹 사라졌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피해를 당하는 사람을 없을까? 그런 환경에 처할만한 사람은 누굴까? 이 사람 저 사람 생각해 보며 전화를 하고 통화가 안되면 문자를 보냈다. 그러면서 직전에 전임 사역자로 사역했던 교회의 당회장이셨던 고 옥 한흠 목사님이 생각났다. 심방 사역을 한지 몇 년 안돼서였다. 양재동 화훼 공판장에 화재가 나서 비닐하우스 몇 동이 전소됐다. 그 곳에서 장사를 하는 분 중에 구역 성도가 있어 화재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갔다. 그 분은 안타까워하는 나를 보며 오히려 웃으면서 와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그 곳에 우리 교회 성도 두 가정이 더 있다고 하면서 그들을 데리고 오셨다. 위로하며 함께 예배를 드리고 왔다. 그 날 밤이었다. 옥 한흠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유 전도사, 양재동 담당이지? 오늘 양재동 화훼공판장에 화재 난 것 아니?” “예, 제 구역과 다른 구역 성도 세 가정이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오늘 오전에 다녀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그리고는 끊으셨다. 다음 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시고 사모님과 두 분이 그곳을 찾아가서 우리 교회 성도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위로해 주셨다. 새까맣게 다 타 오그라들고 녹아버린 화재 현장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것도 몸이 편찮으신 당회장 목사님께서 찾아 오셨으니 그 분들에게는 얼마나 큰 힘과 위로와 보상이 되었겠는가! 강대상 위에 계셔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아니라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 기울여 주는 여유 있고 따뜻한 아버지, 평생 잊을 수 없는 목사님으로 마음에 새기지 않았을까! 그 분께서는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말없이 도우셨다. 심지어 누가 봐도 ‘거짓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데도 와서 도와달라면 번번히 속아주면서 도와주셨다. 보다 못한 부교역자가 옆에서 화를 낸 적도 있었다. 매일 아침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지하 본당 강대상 밑에서 무릎 꿇고 울며 기도하시던 그 모습이 생각난다. 그 분께서 이번 이 일을 보셨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제 옥 목사님은 다시 우리에게 내려올 수 없다. 그러나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기 원하셨던 그 분의 정신은 교회의 정책 위에, 사역자의 손과 발로, 성도들의 일상의 삶에서 되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로 위의 물들이 저지대 반 지하 서민들과 반 지하 교회의 추석을 순식간에 앗아갔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연합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와 소망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강한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각 교회에서 준비하고 있는 가을 전도집회를 조금 앞당겨 슬픔을 당한 우리의 이웃을 찾아 가는 것은 어떨까? 추수감사주일 감사를 조금 앞당겨 그들을 위해 사용한다면 어떨까? 크리스마스를 조금 앞당겨 선물을 미리하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 본다.
258 no image |칼빈의 편지들(7)| 멜란히톤 목사님께_장수민 목사 (19)
편집부
5497 2010-09-15
멜란히톤 선생님께. < 장수민 목사, 칼빈아카데미 원장 > (내용) 루터의 횡포에 대해 불평하면서, 멜란히톤이 더 큰 결단력과 단호한 태도를 보여줄 것을 요청함. " 우리는 후손들에게 적당한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할 것 " 제가 선생님께 위안이 될 수 있어서, 마음의 짐을 함께 느끼는 동료애로써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나 선생님의 슬픔을 덜어 드릴 힘이 될 수 있을지요? 취리히의 사람들이 걱정거리라고 말할 정도로 그 문제가 중요하다면, 그들이 시간을 내어 편지를 쓸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페리클레스(루터)는 자신의 천둥 같은 사랑으로 모든 부담의 한계를 넘어서려 하시는 것 같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의 경우가 둘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께 어느 정도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제 자신의 뜻을 거스려 굴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루터 박사께서 중대한 변화를 견디셔야 할 것입니다. 그분이 절도 있게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인간에게 지나친 존경을 표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든 것보다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선생님을 아무리 기쁘게 하더라도, 교회는 모든 권위 위에 있습니다. 특히 자신이 얼마나 나아가도 되는지 그 한계에 대한 도덕관념이 없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렇게 각기 다른 사람이 다른 주장을 하고 있고, 견해의 차이도 큰 상황에서는 문제가 되고 있는 물길을 틀어 냉정함을 회복하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온 정신을 집중한다면 일말의 치유책이 발견될 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우리는 후손들에게 적당한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한 사람을 조금 성가시게 하는 것보다는 아예 자유 전체를 던져 버리는 것을 오히려 더 선호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의 성격이 다혈질이어서 그의 성급함을 제대로 다스릴 길이 없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격렬함은 어떠한 강한 무력으로라도 다스릴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두들 루터 박사께는 너무 관대한 것 같아, 박사께서 제 마음대로 하시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이제야 교회가 다시 살아나 봄을 맞이하려고 하는데 이와 같이 우쭐해 하는 독재자의 표본이 벌써부터 발견된다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해야 합니까?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오히려 더 악화되지 않을런지요? 그러니 이제 교회에 닥친 재앙에 대해 슬퍼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슬픔을 침묵으로 삼켜버리지 말고 자유를 위해 신음하는 일에 과감하게 나서십시다. 게다가 주님께서 선생님으로 하여금 바로 이 논문에 더욱 충만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선생님을 이러한 협곡에 놓으신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항상 동의하듯이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은 항상 진실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선생님께서는 항상 친절한 교육 방식으로 고난과 논쟁에 빠진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부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오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신중함과 절제에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지금 어떤 숨겨진 암초가 나타나 이 문제에 끼어들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너무 집착하신 나머지, 선생님으로부터 어떤 견고한 기초를 얻어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을 여전히 혼란과 긴장 속에 팽개쳐 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제가 여러 번 상기시켜드렸듯이 우리가 많은 성인들이 피로써 맹세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던 교리에 대해 잉크로라도 서명하기를 거부했던 것은 매우 명예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이제 주님께서 선생님의 마음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도록 선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선생님의 권위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영원한 의심과 망설임을 벗어나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듯이 이러한 사람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행동의 자유를 자극할 목적이나 마음의 위안을 드리기 위해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이러한 안타까운 붕괴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저는 깊은 절망에서 완전히 지쳐 버릴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일이 평화롭게 잘 마무리 되도록 인내로 기다리십시다. 이는 주님이 허락하시도록 기쁘게 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답장을 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클로드(Claude)에게 보여주신 친절에 대해서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친구가 장담을 하면서 그쪽 사람들의 호의를 제게 전해주었습니다. 제 친구에게 그토록 깊은 예의를 갖추어 친절을 베풀어 주신 것을 보건대 정말로 선생님께서 저를 얼마나 소중히 여겨주시는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는 주님께 감사를 돌리고 싶습니다. 선생님과 제가 함께 검토해 본 문제들에 관해 상호 아무런 견해 차이 없이 동의할 수 있었던 데 대해서 말입니다. 물론 특정 세부 사항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인 관점에 있어서는 동의를 했기 때문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545년 6월 28일 존 칼빈 해설: 루터가 주의 만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짧게 고백하는 자리에서, 취리히 교회 목사들의 교리에 반대하는 말을 함으로써 새롭게 시작된 루터의 공격에 충격을 받은 취리히의 목사들은 1545년에 반박서를 출판하였다. 하지만 루터의 공격적인 자세에 감정이 상해 취한 취리히 목사들의 이러한 대응은 열성적인 루터 교파들의 심기를 건드렸고 멜란히톤까지도 감정을 상하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칼빈이 멜란히톤에게 편지를 보내어 루터와 취리히 사람들 간의 갈등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이 문제에 대해 취리히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반박할 이유는 있다는 입장을 밝힌다. 칼빈은 루터의 태도가 불만이어서 좋은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칼빈이 보기에 벼락 같은 소리나 지르고 있는 루터를 진정시키려고 애쓰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멜란히톤이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혀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멜란히톤의 우유부단한 생각에 대해 의문을 품으면서 아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57 no image |신학단상<40>| 거짓말이 통하는(?) 세상_조석민 목사 (101)
편집부
6668 2010-09-08
거짓말이 통하는(?) 세상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 “누구나 쉽게 거짓말에 농락당하게 된다는 사실 명심해야” 우리 사회는 거짓을 말해도 별 문제없이 통하는 사회처럼 인식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거짓을 말하거나 다른 사람을 눈속임하여 행동하여도 그 실체가 거짓으로 들어나기 전까지는 진실로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황우석 사건을 통해서 거짓에 대한 윤리 도덕적 판단과 기준이 어느 정도 확립되었으리라 믿었지만 이것은 지나친 기대인가보다. 아직도 거짓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를 보면 거짓 불감증에 걸린 병든 사회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함께 거짓말로 병든 사회 속에 존재하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지 매우 궁금하다. 정말 교회는 거짓이 없는 순결을 유지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고 있을까? 비록 어렵고 힘들지만 거짓을 말하지 않고 사람의 눈속임을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거짓과 불의에 항거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거짓말이 통하는 사회가 되었다면 그 사회 속에 존재하는 교회의 역할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거짓말이 통하는 세상을 보면 교회 공동체와 그리스도인들이 거짓을 말하는 사회와 그 속에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못했다는 결론이다. 며칠 전에 이명박 정부 인사의 도덕성과 업무 수행 능력을 검증하기 위한 인사청문회가 국회에서 끝났다. 이번 청문회에서도 예전과 다르지 않게 업무 수행 능력 보다는 도덕성을 검증하는 도덕성 검증 청문회가 되고 말았다. 청문회에서 드러난 후보자들의 불법, 탈법, 위장전입, 투기적인 만행들은 일반 시민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인 것을 보면서 역시 우리 사회는 아직도 힘 있는 자들만의 세상이란 생각이 저절로 든다. 청와대는 고위 공직의 후보자로 지명할 때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모두 도덕적으로 문제투성이의 사람들을 후보자로 내세웠다. 후보자에 대한 최종 지명권자의 도덕적 수준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이미 밝혀진 후보자들의 도덕적인 문제를 인지하고도 고위 공직자 후보로 지명을 하였다면 최종 인사 지명권자의 도덕성은 후보자와 동일하거나 오히려 더 낮은 도덕적 수준과 기준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청문회 후에 결국 총리 후보자와 두 사람의 장관 후보자가 스스로 퇴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총리 후보자의 거짓 증언이었다. 그나마 본인이 스스로 후보 자리를 사퇴하였기에 불행 중 다행이었다. 최근 국새(國璽) 제작과 관련하여 불거진 민홍규씨의 전통 기술 보유 여부가 논란에 휩싸였다. 국새란 나라를 대표하는 도장을 뜻하는데, 역사적으로는 국권의 상징으로 국가적인 문서에 사용하던 임금의 도장을 뜻한다. 왕정시대가 끝난 현재 국새는 국가 문서의 중심에 낙관을 찍어 나라가 공증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제4대 국새를 제작한 민씨는 의혹이 제기되자 자신이 국새를 제작하는 전통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 힘주어 항변했다. 하지만 며칠 못가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밝혀졌다. 모든 것이 거짓으로 판명되기 전까지 거짓을 진실로 포장하여 거짓이 통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문제이지 모든 거짓은 분명히 밝혀진다. 아직도 논란 중에 있는 오은선씨의 히말라야의 카첸중가 등정 문제가 거짓으로 드러나지 않기를 기대한다. 이런 사회 속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깨끗한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한 사회가 거짓말로 병들어 가고 있는데, 그 병든 사회 속에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가 건강하게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속이 썩어가고 있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 문제가 작은 거짓말에서 출발한 것을 보면 거짓을 말하고, 거짓으로 행동하는 것이 결국 작은 불씨 같아서 결국 전체 교회 공동체를 큰 불로 삼켜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거짓말에 대한 성서의 교훈은 너무도 분명하다. 시편 기자는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시 34:12-13)라고 교훈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조차 때때로 거짓을 입에 달고 사는 경우를 본다. 그 사람이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대표하거나 인도하는 지도자라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거짓말이 통하는 사회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거짓을 말하지 않고 거짓된 행동을 진실이라는 포장지로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이상(理想)은 좋지만 때때로 좋은 거짓말(white lie)도 필요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신념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를 입고, 피해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에게 불이익이 있어도 거짓을 말하면 안 된다는 굳은 신념이 없으면 누구든지 쉽게 거짓말에 농락당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소한 한 가지의 거짓말은 그것을 포장하기 위한 또 다른 거짓말이 필요하고 이런 상황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나중에는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시간이 지나면 만천하에 들어나게 될 일을 잠시 덮어 두려는 어리석음을 보게 된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시 5:6)라고 말한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56 no image |영혼의 두레박<5>| 당신은 성공적인 마침을 원하는가? _유순아 박사 (24)
편집부
5698 2010-09-08
당신은 성공적인 마침을 원하는가? < 유순아 박사 , 한국멤버케어연구소장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궁극적인 모습 스스로 살펴 보아야” ‘끝까지 잘 마친다는 것’은 잘 시작하고, 잘 달리고 그리고 잘 마치는 것의 기능적 표현이다. 그렇다면 끝까지 잘 마치는 것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어느 한 순간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의 전 과정과 책임과 반응 모두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신의 은사를 충분히 발휘하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궁극적인 공헌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지난 번 글에서 ‘잘 마치기’ 위한 삶을 생각하면서 지도자로 하여금 끝까지 잘 마치지 못하게 막는 장애요인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았다. 그것은 재정, 권력, 교만, 성, 가정, 안주, 그리고 침체였다. 그 중 어느 하나의 요소만으로도 지도자들을 무력하게 만든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끝까지 잘 마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이 필요한가? 성경의 지도자들과 역사적 인물들 그리고 현 시대에 활동하는 지도자들 중 사역을 잘 마친 지도자들을 비교 연구해 보면 그들로 하여금 성공적인 마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촉진 요소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효과적인 관점(Perspectives), 영적 회복(Renewal), 영적 훈련(Disciples), 배움의 자세(Learning Posture), 맨토링(Mentoring)이다. 1. 평생의 관점을 가지라 지도자는 관점이 필요하다. 지도자와 추종자의 차이는 관점이다. 지도자와 효과적인 지도자의 차이는 보다 더 좋은 관점이다. 더 나아가 잘 마치는 지도자들은 현재의 사역을 평생의 관점에서 본다. 그러므로 끝을 마음에 두고 시작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2. 영적 회복을 기대하라 잘 마치는 지도자들은 평생토록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생명을 공급받고 새로운 도전과 비전 확인이 개인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갱신의 경험은 평생에 걸쳐 기대해야 한다. 이러한 영적 경험들은 사역을 지속적으로 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3. 영적 훈련들을 개발하라 지도자들은 모든 종류의 훈련이 필요하다. 특별히 영적인 훈련은 더욱 그렇다. 영적 성장과 성숙의 삶과 관련해서 말씀 훈련, 성경 공부, 기도, 고독, 묵상, 금식, 순종, 섬김, 절제, 구제, 그리고 비밀 엄수 훈련 등을 권한다. 이런 훈련의 도구들을 갖지 않은 지도자들은 죄나 영적 침체를 통해 실패하는 경향이 있다. 4. 배움의 자세를 유지하라 배움에 대한 완고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부끄러운 끝맺음을 할 수 있다. 성공적인 지도자들은 평생에 걸쳐 배움의 자세를 갖는다. 침체를 피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방범은 배움의 자세를 개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에서의 정규적인 교육뿐 아니라 독서 그리고 다양한 정보와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컨퍼런스, 세미나, 워크샵 등 비정규적인 훈련 과정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좋다. 5. 맨토를 가지라 끝까지 잘 마치기를 원한다면 맨토가 필요하다. 자신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능력있는 맨토, 자신의 영적인 삶과 사역에 책임감을 갖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궁극적인 공헌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맨토가 필요하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채워줄 수 없다. 효과적이고 잘 마치는 지도자는 그들의 삶에서 그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도움을 주는 10명-15명의 맨토들과 네트워킹을 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과 사역을 끝까지 잘 마치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들을 살펴보았다. 평생의 관점을 가지는 것, 영적 회복을 기대하는 것, 영적 훈련들을 개발하는 것, 평생 배움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맨토를 통해 맨토링을 받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끝까지 잘 마치는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다. 하지만 그 ‘잘 마침’이 오늘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주님은 내년이 아니라 올해, 내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성공적으로 마치기를 원하신다. 당신은 성공적인 마침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 마침을 위해 준비하라.
255 no image |칼빈의편지들(6)| 비레에게_장수민 목사 (145)
편집부
6700 2010-08-18
비레에게 |번역 장수민 목사, 칼빈 아카데미 원장| "그리스도를 떠나 통치하려는 정치가들 많아" 이렇게 늦게야 답신을 보내는 나의 뻔뻔스러움을 좀 보게나! 여하튼 나는 편지 쓰기의 고민으로부터 안심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고안하였다네. 그래서 앞서 루터 박사님과 멜란히톤 선생님께 보냈던 편지를 복사하여 자네에게 보내네. 그러면 자네는 내가 왜 클로드를 그분들께 보냈는지 알게 될 걸세. 자네의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파렐 형님이 출판사 지라르에 보냈던 책을 텍스토가 크리스토퍼에게서 받아왔다네. 빨리 인쇄된 덕분이라네. 나는 아직 루이 베르나르와 말을 해 본 적은 없네. 그는 이미 내가 설교하는 예배에 두 번이나 빠졌어. 하지만 내일이나 모레라도 만나면 자네의 사과를 전하겠네. 자네가 올 때에 라 콩에 관하여 들을 수 있겠지. 내 생각에 나의 귀들은 현재를 향해 있고, 그들은 타인들의 험담을 억지로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나는 어둠 속에서 위선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지. 앙블라르 콘은 자신의 치리회 위원과 제네바 행정 부장직을 쉬게 해줄 것을 위원회에 요구 중이야. 왜냐하면 그는 지금까지 위원회의 비밀 회의에서 숨겨왔던 서민들의 문제를 발견하였기 때문이지. 위원회는 나도 이 일을 알고 있지는 않은가 하여 의심하고 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어떤 적대감은 보이지 않고 있어. 하지만 나는 그들이 얼마나 사악한지 알고 있고, 열 번의 설교를 통해서 이미 도시의 내부 상황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내가 이 미로로 들어가야 하는 것인가? 이번에는 직접 와서 귀로 들어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자네가 눈으로 직접 보게나. 그리고 행정장관들이 정해졌네. 아미 퀴르텟, 아미 페렝, 도멘느 아를로, 쟈크 드 토르톤느, 루이 베르나르, 피터 베른,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이 위원회에 들어가도록 섭외 중이라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좋은 기대를 하고 있네. 하지만 그리스도 통치 아래 있으면서도 정작 이제는 그리스도 없이 통치하고 싶어 하니, 우리로서는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그럼 이만 줄이겠네. 나의 친애하는 형제이자 친구여, 우리 동료들 모두 자네와 자네 식구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한다네. 나를 대신해서 리비티와 엥베르에게도 인사해 주기 바라고, 엥베르의 아내가 페로에게 보내고 싶은 것이 있는지 자네가 확인해 주었으면 싶어. 왜냐하면 선한 친구 페로가 매우 열망적으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야. 1545년 2월 12일 제네바에서, 존 칼빈 해설: 칼빈의 생애에서 1548년 9월 14일(금)에 칼빈이 트롤리에(Trolliet)와 함께 시의회의 소환에 출석하여 시의회에 사과하여야만 하는 특이한 일이 있었는데, 칼빈의 전기들마다 한결 같이 소개하고 있는 독특한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칼빈이 1545년 2월 12일(목)자로 비레에게 썼던 오늘 이 편지를 페렝 가문의 한 사람이 훔쳐 편지에 기록된 내용을 문제 삼아 칼빈을 대항하는 무기로 활용하였다. 트롤리에는 이 편지를 아예 모든 시민이 알아볼 수 있게끔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여러 곳에 뿌리고 다녔다. 편지에는, 내용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칼빈이 행정관들의 선출에 관해 언급하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 없이 기독교를 가장하여 통치하려 한다는 투의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시의회의 분노를 샀던 것이다. 이것을 문제 삼아 한 때 칼빈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원들까지 있었으나 파렐과 비레가 9월 말과 10월 중순 이전에 시의회에 출석하여 개별적으로 의원들을 설득하면서 이해를 시키는 등으로 활약한 덕에 위기를 모면하였다. 엎치락뒤치락 하던 끝에 10월 18일(목)에 시의회는 두 사람에게 사이 좋게 지내라고 훈계하면서 사건을 종결지었다.
254 no image |신학단상<39>| 아파트 공화국의 붕괴 조짐(兆朕)_조석민 목사
편집부
4276 2010-08-18
아파트 공화국의 붕괴 조짐(兆朕)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 "거대한 콘크리트 괴물로 변할 가능성 미리 대비해야" 대한민국의 주거 형태는 이제 거의 대부분 아파트로 바뀌고 말았다. 이런 현상은 주거형태라는 관점에서 도시와 농촌의 차이도 없애 버린 듯하다. 시골의 논과 밭 사이에도 아파트가 괴물처럼 건축되었다. 아마도 빠르면 100년 쯤 뒤에는 '한국의 주거형태는 아파트였다'로 이해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집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우 특별한 것으로 단순히 사는 공간의 개념을 넘어선다. 예전의 기와집과 초가집 형태의 한국 전통 주거 문화 속에서 부족한 집을 마련하여 자기 소유의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정부에서 아파트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원래의 취지는 사라지고 집이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변화하여 '부동산 불패신화'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 사회에서 주택 소유욕은 크고 이런 환경 속에서 주택가격 하락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한국사회를 연구하는 젊은 연구자인 발레리 줄레조(Val rie Gel zeau)가 1990년 처음 서울을 방문했을 때, 아파트단지의 거대함에 충격을 받고 연구를 시작하여 탄생된 책이 {아파트공화국}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아파트 대량생산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국가와 재벌, 그리고 중산층의 이익연합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손낙구는 {부동산 계급사회}에서 우리나라의 부동산 소유와 관련된 자료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2006년 행정자치부 자료를 근거로 2005년 8월 12일의 현황으로 다주택 소유자 상위 100인의 실태는 1위가 1,083채를 소유하고 있고, 100위에 해당하는 사람이 57채를 소유하고 있었다. 상위 100인이 소유한 집의 전체 합계는 1만 5,464채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아파트 50채를 소유해도 100위에 들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파트가 단순히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 아니라, 재산증식의 수단이기에 부동산 불패신화 속에서 부동산 소유를 통해 부자가 되려고 기를 쓰고, 그 결과 아파트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동산 불패신화에 찬물이 부어지면서 아파트 공화국의 붕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경제연구소들 가운데는 현재 나타나는 아파트 가격 하락 현상을 그동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아파트 가격의 거품붕괴로 이해하며 절반 가까운 가격으로 하락할 것을 예측하고 있다. 이런 조짐들을 이미 감지하고 방송에서는 아파트 가격 하락을 주제로 특집 방송을 시작했다. 최근 부동산 경기 침체에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재무구조 악화로 수도권 2기 새도시 조성 역시 곳곳에서 휘청거리고 있다는 소식도 또 다른 붕괴 조짐이다. 아파트를 지어도 분양이 되지 않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 토지를 계속 개발하여 아파트를 짓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이다. 단순히 살기 위한 아파트이지만 작은 공간의 아파트에서 좀 더 넓은 공간의 아파트로 이사하는 풍토로 말미암아 융자금의 이자는 눈덩이처럼 늘어나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는 아파트를 다시 싸게라도 되팔아서 융자금을 갚아 보려고 몸부림치지만 구매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제는 아파트가 더 이상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신호이다. 바울은 당시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목회적 권고와 더불어 여러 가지 실제적인 삶의 교훈을 서신으로 적어 보냈다. 그 내용 가운데 경제 문제와 관련하여 주는 교훈은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매우 의미있는 내용이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람 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7-10). 아파트 가격하락으로 숨죽이며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아마도 이들 가운데는 단순히 주거용 목적으로 아파트를 구입하고 나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파트 가격의 하락과 상승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파트가 단순히 주거 공간이지 재산 증식의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구입하여 재산을 늘려보려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융자금으로 아파트를 구입한 사람들은 뼈저린 교훈을 받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파트 가격 하락을 보면서 손뼉치며 좋아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바울의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파트 가격 하락은 곧 아파트 공화국의 붕괴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 붕괴 조짐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우리의 미래를 불안하게 한다. 하지만 미래의 한국 아파트는 단순히 가격 하락만이 문제가 아니다. 미래의 아파트는 결국 도시 문제로 나타날 것이며, 건물 수명을 20-30년으로 볼 때 앞으로 2030-40년부터는 골칫거리가 되는 거대한 콘크리트 괴물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에서 일상처럼 되어버린 재개발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아파트를 짓지도 않았는데 그 아파트를 보지도 않고 돈을 미리 지불하는 선분양의 이상한 주택정책 구조 속에 엄청난 수익을 맛보았던 건축 재벌들, 그리고 그 구조를 유지해 준 정부의 주택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불안한 미래는 계속 될 것이다. 더욱이 살기 위한 주거 공간으로서의 아파트가 아니라, 재산 증식의 수단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욕심이 잉태한 결과를 맛보야 할 것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전강수 교수는 {부동산 투기의 종말}에서 지금은 아파트 가격이 하락하지만, 인간의 탐욕은 부동산 경기를 다시 끌어올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아파트 공화국의 붕괴 조짐을 바라보며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
253 no image |영혼의두레박<4>| 끝까지 막아서는 장애물_유순아 박사 (120)
편집부
6146 2010-08-03
끝까지 막아서는 장애물 < 유순아 박사 * 한국멤버케어연구소장 > “자신의 성장에서 오는 안정감마저 떨쳐 버리길”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 중 좀 더 신중하고 책임있게 사용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끝까지 잘 마쳐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끝까지 잘 마친다는 것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신의 은사를 충분히 발휘하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궁극적인 공헌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 이러한 소원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소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드는 사실은, 30% 이하의 소수의 사람이나 지도자만이 그들에게 주어진 삶과 사역을 끝까지 잘마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지난 30여년 동안 5천여 명의 지도자들을 연구해 온 클린턴은 유종의 미를 거둔 성공적인 지도자와 그렇지 못한 지도자들을 비교 연구하면서 지도자들이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을 가로막는 일곱 가지 장애물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재정, 권력, 교만, 성, 가정, 안주(Plateauing) 그리고 침체이다. 이러한 것들 중에 어느 하나의 요인만으로도 지도자들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연구 결과 한 영역에서 실패한 지도자는 또한 다른 영역들 가운데도 실패하게 된다고 한다. 1. 재정의 남용 물질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못 사용할 때 지도자는 추락하게 된다. 성품적으로 물질에 대한 욕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 탐욕이 내면에 깊이 뿌리박혀 있을 때 시험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재정에 관해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오르고 힘을 얻게 될 때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재정을 사용하거나 남용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많은 지도자들이 돈과 관련된 문제들로 실패했다. 2. 권력의 남용 성공을 향해 달려 온 지도자들은 그들의 사역 성취를 위해 여러 가지 권력의 힘을 사용하게 된다. 또한 제도 속에서 정상에 오른 지도자들은 그들의 지위와 함께 특권을 누리는 경향이 있다. 권력이 유용하지만 매번 같이 사용될 때 그것을 남용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일반적으로 그들은 자신을 통제할 책임있는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3. 부적절한 교만 자신에 대해서 자존감을 가져야 하지만 부적절하고 자기중심적인 교만은 지도자를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다. 4. 성적인 유혹 이 잇슈는 성경과 서구 사회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에 있어서 주된 몰락의 원인이다. 비합법적이고 부정한 성적인 관계는 지도자의 리더십이 다시 온전히 회복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5. 가정의 문제 배우자 간에 혹은 부모와 자녀들 간에 혹은 형제들 사이에 있는 문제들이 지도자의 사역을 파괴할 수 있다. 6. 안주(Plateauing) 그리고 침체 지도자에게 있어서 안정감은 중요하다. 그러나 지도자가 현실에 안주하려고 할 때 고원 현상이 일어난다. “작은 성공이 미래를 망친다”는 말처럼 지금까지 유능하게 사역했던 그 경험이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성장에서 오는 안정감과 죄악이나 비전의 상실로 오는 안주감 사이에는 역동적인 긴장감이 유지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도자는 침체에 빠지게 된다. 지금까지 지도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사역을 성공적으로 잘 마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이 모든 것들은 어떤 형태로는 죄와 관련돼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성경 속의 지도자, 역사 속의 지도자, 현존하는 많은 지도자들을 믿음의 경주에서 물러나게 한 장본인들이다. 우리 안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잘 마치기를 원하는 겸손한 소원이 있다면 매 순간 위의 요소들을 기억하면서 주의해야 할 것이다.
252 no image |칼빈의편지들(5)| 멜란히톤 선생님께_장수민 목사
편집부
4778 2010-07-21
1545. 01. 21. 멜란히톤 선생님께 | 번역 장수민 목사, 칼빈 아카데미 원장 | "주님께서 그어 놓으신 선, 느슨하게 여길 수 없어" 내용: 루터에게 보내는 자신의 편지와 논문을 멜란히톤이 먼저 읽어 본 후 그 자신의 의견을 보내줄 뿐만 아니라, 기회를 보아 루터 박사에게도 의견을 물어봐달라는 부탁. 먼저 이 경건하고 고귀한 젊은이가 왜 저의 부탁에 따라 선생님을 찾아뵙게 되었는지부터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복음을 접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성모독으로 가득한 가톨릭의 의식 절차를 아직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는 행동을 비판하는 프랑스어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복음의 진리를 아는 신실한 사람이 교황주의자들 틈에 있을 때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소논문]). 선생님께서는 분명 제가 그 문제에 대해 너무 엄격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하실 테지요. (중략) 그러나 문제 자체가 저들에게는 혼란스럽기 때문에 선생님과 루터 박사님의 확신을 얻을 때까지는 그 점에 있어서 아직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들은 선생님께서 저보다 관대하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됩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선생님께서 진정으로 옳다고 생각하시는 방향으로 신실하고 온전한 조언을 주실 것이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이 요청하는 바에 따라 적절한 사람을 선생님께 보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결론 내리기로는 선생님께서 직접 저의 견해가 어떠한지 정확하게 아시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근거들에 대하여 모르시면 안 되기 때문에 특별히 라틴어로 번역한 저의 소고를 보내드립니다([니고데모파 제군들이 본인이 너무 심하게 엄격하다는 하소연에 대한 존 칼빈의 유감]). 이러한 일을 자처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주제 넘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수고스럽겠지만 선생님께서 저의 동료의 입장에서 그 논문들을 검토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선생님의 고견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며, 따라서 선생님께서 허용하시지 않는 어떤 일에 착수한다는 것 자체가 꺼려집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매우 관대하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여러 가지 행동에 대해 가급적 용인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그어 놓으신 선에 있어서는 절대로 느슨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께서 모든 사안에 있어서 저와 동조해 주시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매우 주제넘은 일이겠지요. 혹은 저를 위해서 선생님 자신의 자유로운 판단을 유보하시는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수고스러우시더라도 저의 견해를 한 번 꼼꼼히 읽어봐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선생님과 저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여 자그마한 토씨 하나라도 다른 부분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이상 바랄 여지가 없겠지요.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저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는 선생님의 올바른 판단을 계속 이끌어 나가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제가 선생님을 대할 때 얼마나 마음을 터놓는지는 선생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유지해야 할 존경의 선을 넘어서려는 뜻도 진정 없습니다. 저에 대한 선생님의 친절과 선의 안에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지는 선생님과 함께 지내면서 겪었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존 칼빈 드림. 해설: 칼빈은 1543년에 [복음의 진리를 아는 신실한 사람이 교황주의자들 틈에 있을 때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소논문]을 써서 프랑스에서 교회 개혁 신앙에 접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양심의 위기를 다루었다. 그러자 파리에서 앙뚜안 퓌메(Antoine Fum e)가 칼빈의 논문이 자신을 비롯하여 프랑스의 많은 니고데모파 사람들을 근심시켰던 기본적인 입장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지적하는 편지들을 보내왔다. 이들은 자신들이 경비를 부담할 터이니 과연 루터와 멜란히톤도 같은 생각인지 물어보자면서 칼빈에게 두 사람을 만나러 갔다 오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칼빈은 당시로서는 왕복 40일이나 걸리는 여행에 시간을 낼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1545년 1월에 그는 대신 편지를 써 인편으로 보내면서 방금 저술한 [니고데모파 제군들이 본인이 너무 심하게 엄격하다는 하소연에 대한 존 칼빈의 유감]을 동봉하여 검토해 줄 것을 부탁했다. 여기에서 칼빈의 입장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더욱이 칼빈이 니고데모파를 비판하면서 날린 결정타는 그들이 자신들을 '니고데모파'라고 주장하는 명칭 자체를 아예 인정하지 않겠다고 한 점이다. 칼빈은 니고데모의 옷자락 아래 숨을 권리가 그들에게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들은 어느 모로 보아도 니고데모에 비할 바가 못된다. 칼빈에 따르면 니고데모는 처음에 무지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밤에 찾아 갔으나 후에는 사도로서 예수님의 장례식장에서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즉 니고데모는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니고데모파들은 니고데모의 진정한 추종자들이 아니었다. 칼빈은 이들을 비판하기를, "니고데모에게 호소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점에서는 그와 닮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장사 지내기 위해 애쓴다는 점이다"라고 했다. 칼빈은 1549년에 본서의 두 번째 판을 라틴어로 내면서 제목을 [거짓 니고데모파에게 주는 변호](Excusatio ad Pseudo-nicodemos)로 바꾸었는데 멜란히톤, 부써, 그리고 피터 마터의 승인을 받아 출판되었다.
251 no image |신학단상<38>| 사상(思想)과 양심(良心)의 자유 _조석민 목사
편집부
4212 2010-07-21
사상(思想)과 양심(良心)의 자유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 “개인의 자유는 완벽한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어야” 사상과 양심의 자유란 각 개인의 판단이나 가치관으로서의 확신을 외부에 표명하도록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와 양심에 반하는 행위를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를 의미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갖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헌법은 1948년 7월 17일에 제정되어서 금년이 제헌절(制憲節) 62주년 되는 해이다. 우리 헌법에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규정이 별도로 명문화 되어있지 않지만 양심의 자유 속에 암시되어 있다는 폭넓은 해석을 수용하고 있다. 양심의 자유는 첫째, 양심상 결정의 자유, 즉 자신의 도덕적, 논리적 판단에 따라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확신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내적 작용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제한될 수 없는 절대적 자유이다. 따라서 양심상의 결정과정에 국가권력이나 타인이 관여하여 그 결정을 방해하거나 일정한 양심상의 결정을 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둘째는 침묵의 자유, 즉 양심상의 결정을 외부에 표명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자유이다. 침묵의 자유는 개인의 기본 권리로 어느 누구도 강제할 수 없다. 침묵의 권리를 물리적인 억압으로 강제하는 것이 일상화되면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폭력인 고문(拷問)도 대의명분(大義名分)이란 옷으로 치장하고 교묘하게 등장한다. 오랫동안 단어조차 잊어버렸던 ‘고문’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수도인 서울에서, 그것도 양천경찰서 경찰관 다섯 명에 의해서 실제로 발생했다는 소식이 얼마 전 보도되었다. 현 정권의 인권의식 수준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참혹한 인권침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고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피의자나 피고인을 굴복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것이 고문일 수 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천안함 사건과 관련된 민군합동조사단(이하 합조단)의 발표와 관련해서도 보장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천안함 침몰의 원인을 북한 어뢰로 지목한 합조단의 발표를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은 한 개인의 양심과 사상의 자유에 해당한다. 천안함 사건은 종교가 아니다. 국가는 천안함 사건과 관련된 내용의 발표를 국민에게 믿도록 강요할 수 없다. 합조단 발표 당시에 의심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의심하다 보면 끝이 없다, 믿을 수 없는 게 아니라 믿고 싶지 않은 게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합조단의 발표 이후에 천안함 사건의 ‘결정적 증거’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이제 ‘의혹’ 수준을 넘어선 것 같다. 왜냐하면 발표의 내용이 과학과 상식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고, 합조단의 발표 내용도 이미 여러 차례 번복되었기 때문이다. 사건 발생 초기 이명박 대통령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 제시의 필요성을 언급했듯이, 천안함 사건은 과학이어야 복잡하게 꼬인 문제를 풀 수 있다. 더욱이 천안함 사건과 관련하여 합조단의 발표를 믿지 않고 의심하면서 다른 가설과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법으로 다스리려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인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다. 천안함 사건이 이제 국내의 발표를 거쳐서 카나다에서 개최된 G8 정상회담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논의를 끝으로 출구를 찾아 빠져나오려는 듯하다.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천안함 사건의 조속한 해결로 이어져서 이 땅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다시없기를 기대하며, 이 사건의 발표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불법적으로 억압하는 일 또한 없기를 소망한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셨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빛을 나타낸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고,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자유의 가치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종 된 상태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을 얻었기에 우리는 감사하며 다른 이들의 자유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인간의 자유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속박되어서도 안 된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이단 종교의 모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 개인의 자유는 타인과 관련되지 않으며 해를 끼치지 않는 일, 온전히 자기에게만 책임이 돌아오는 것에 대하여 완벽한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오늘날처럼 신장되지 못했던 중세시대와 종교개혁 시대에 개인의 자유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억압되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한 사례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의 책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 잘 나타나있다. 이 책의 부제(副題)에서 보여주듯이 그 내용은 종교개혁 당시 카스텔리옹(Sebastian Castellion)이 세르베투스가 산채로 화형당한 일에 대하여 칼빈의 독재와 폭력을 고발한 것이다. 제네바에서 신정국가(神政國家)를 건설한 칼빈의 종교적 권력에 맞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며 관용을 부르짖은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옹의 역사적 사건은 독재를 되돌아보는 거울로 삼을만하다. 오늘날 교회 안에 종교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독재를 사용하여 개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구속하는 일은 없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진리를 구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그것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범죄가 아니다. 아무도 어떤 신념을 갖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 신념은 자유다”라고 외친 카스텔리옹의 말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관용하지 못하고 잘못된 사람으로 몰아세우는 오늘의 현실에서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50 no image |<영혼의 두레박 3>| 끝을 잘 마치는 지도자_유순아 박사
편집부
4457 2010-07-07
끝을 잘 마치는 지도자 | 유순아 박사, 한국맴버케어연구소장 | "훌륭한 지도자란 하나님 앞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 지난 주 '복음과 비전'이라는 주제로 열린 합신총동문회 30주년 수련회가 은혜 가운데 성료되었다. 9백 여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동문과 그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수련회를 가져보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수련회의 규모에도 놀랐지만 이 수련회가 있기까지 그리고 마치기까지 임원진과 진행팀이 얼마나 수고를 했을까를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지면을 빌어서 그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함께 모인 모두를 알아보고 반가워하기에는 2박 3일이라는 일정은 아쉽고도 짧았다. 하지만 몇 몇 동문들과 함께 그 동안 살아왔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상의 삶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표명해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와 가치가 있는 시간들이었다. 또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함께 수련회에 참석하신 은사들과 선배들을 보면서 하나의 중요한 이슈를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은 '끝을 잘 마치는 지도자'(Finishing well as a leader)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의 이슈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개혁주의 신학을 모토로 출발한 합신과 교단 전체의 이슈가 아닐까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우리 모두는 처음 입학할 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귀한 것들을 합동신학원에서 배웠다. 그 당시 합동신학원과 교수들과 선후배들을 통해서 배운 것, 즉 합동신학원 스프릿이 지금의 우리로 형성되기까지 영적으로(Spiritual formation), 사역적으로(Ministerial formation), 전략적으로(Strategic formation), 학문적으로(Scademic formation) 생각하는 방법과 가치관 그리고 여러 가지 컨셉 등에 대해서 좋은 결과로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난 30년 간 남서울 교회의 지하 캠퍼스에서, 서대문 아세아연합신학원의 강의실에서, 그리고 수원 원천동 캠퍼스에서 학생으로 배우며 누렸던 특권들을 잊지 말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시각에서 보면 각자 자신이 하는 사역들을 마무리하고 은퇴 이후의 삶과 사역을 위해서 준비하고 실행에 옮겨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번 수련회에서 몇 분 은사들을 통해서 그것을 보았다. 개인적으로 만나뵐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30주년 회고와 전망' 심포지움을 통해 한 분 한 분 겸허하고 진솔하게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30년전 학생의 신분으로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크고 넓고 깊어지셨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분들뿐 아니라 당시 합신의 모든 교수들은 합신의 태동기에서부터 바른 세움의 아픔과 비전을 학생들과 함께 공유한 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은 교수들의 가르침과 스피릿을 배우기 위해 여러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기꺼이 그 분들을 따랐다. 30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교수들이 학교와 목회 현장에서 은퇴를 하셨다. 배우가 무대 밖에서는 정해진 시간과 틀 속에 메이지 않고 더 자유롭게 예술혼을 불태우는 것처럼 계속해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연구하는 분도 계시고, 어떤 분은 자비량으로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제자들을 돌아보고 격려해 주신다고 한다. 그야말로 현장에서 다 하지 못했던 '나머지 사역'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분들은 30년 전 당시 그 시대의 신학교와 목회와 선교 현장에서 우리가 따라가야 할 새로운 패러다임(New paradigm)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3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들에게, 특별히 은퇴를 앞두고 사역의 마무리를 위해 고민하는 우리들에게도 역시 새로운 패러다임(Next paradigm)이 되고 있다. 지도자가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마무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궁극적인 공헌을(Ultimate contribution) 이루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중요한 이슈이다. 하지만 많은 지도자들이 이 부분을 간과하는 것 같다. 클린턴은 유종의 미를 거둔 성공적인 지도자들을 비교 연구하면서 극 소수의 지도자만이 성공적으로 삶을 마무리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획기적인 경고이다. 하지만 경고를 받는다는 것은 미리 준비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 소수의 지도자들만이 성공적으로 자신의 사역을 마치게 되는 것일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제대로 마칠 수 없도록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성공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는 말이 있다. 합신 30년을 회고하면서, 그리고 향후 30년을 바라보면서 우리 모두가 끝까지 자기 사역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기를 기대한다.
249 no image |신학단상<37>| 평화를 위한 기도회_조석민 목사
편집부
4759 2010-06-23
평화를 위한 기도회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 “6.25와 같은 동족간의 전쟁 재발하지 않아야” 천안함 사건 이후 한반도의 긴장 고조는 정점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듯하다. 천안함 사건 이후 소망교회 현직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이 현재의 남북 긴장 국면에 대하여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전쟁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이번 군사적 도발에 대해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며 이는 북한이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바른 길로 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규정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국방부는 비무장지대에 그 동안 중단되었던 대북 심리전을 위한 스피커를 설치하였고, 북한은 대북 심리전을 위한 방송이 재개될 경우 스피커를 조준 타격하겠고 선언하였다. 그 동안 듣지 못했던 ‘전쟁’이란 단어가 실감나는 현실이다. 천안함 사건의 발표 이후 지난 10년 동안 유지되었던 한반도의 평화 기조가 하루아침에 흔들리고 있는 느낌이다. 이런 와중에 참여연대가 천안함 사건 발표에 의혹을 제기하며 유엔안전보장 이사회 의장 및 회원 국가들에게 서한을 보낸 것이 이념 논쟁으로 변질되고 있다. 보수 단체들은 참여연대 앞에 모여 시위를 하며 이 단체를 파멸시키려고 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활동하는 비정부 단체(NGO, nongovernment organization)들은 국민의 입장에서 정부의 정책과 여러 가지 상황을 비판적으로 살피며,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특징이다. 아마도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전 세계의 수많은 NGO 단체 가운데 하나인 참여연대의 서한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진지한 눈길을 주지 않을 것이다. 천안함 사건으로 말미암아 남북의 평화 시대가 끝난 것처럼 느끼게 하는 현재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 6.25 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6월 22일 서울상암월드컵 경기장에서는 평화 기도회가 열렸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회를 개최하는 것은 암울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어려운 시기에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평화를 위한 기도회에 초청되어 간증한 인물이 미국 전직 대통령 조지 부시(George Bush)라는 데서 우려를 하게 된다. 그 이유는 평화를 위한 기도회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획책하여 미국 군인만 수천 명이 희생되었고, 침략 대상 국가의 군인과 민간인까지 합치면 수십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를 초청했기 때문이다. 평화를 위한 기도회에 조지 부시가 초청되어 염려스러운 일은 그가 획책한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은 전쟁에 대하여 한국교회가 그와 함께 공범의 반열에 오르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건의 발표와 함께 북한을 응징해야 한다는 보수 단체들의 ‘전쟁 불사’의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 속에서 부시의 간증을 통하여 한국 교회가 잘못된 메시지를 전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정당한 전쟁도 미화되고 용납될 수 없는 상황인데, 너무 쉽게 전쟁을 말하는 현재의 상황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마음의 평화를 빼앗아 버린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전쟁을 막을 수만 있다면 막아야 하고 그래서 평화를 이루어나가야 하는데 자칫 정당한 전쟁은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상황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평화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모습으로 제시되면서 윤리적 명령으로 주어지고 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권고한다. 그리스도인이 화평함을 따르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분명히 강조한다. 야고보서 3장 18절에서도 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는 열매라고 말하면서 평화를 위하여 살아가야 할 것을 교훈한다. 베드로전서 3장 11절도 화평을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실천해야하는 윤리적 실천 항목으로 제시하며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명령한다. 마태복음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은 종말론적 평화의 왕이 세상에 임한 것으로 묘사하면서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한다(참조. 마 1:23). 바울의 서신인 로마서 14장 17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화의 나라이다. 남북의 긴장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기도회에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을 기도회의 주빈처럼 초청한 주최 측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만든 사람을 초청한 이유를 말해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 9.11 사태 이후에 국무 위원들이 모여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난 후에 전쟁을 획책했다는 소식이 기억난다. 하나님을 부르고 찬송하며 기도한 후에는 전쟁을 통하여 살육을 감행하고 무고한 피를 흘려도 정당한 것인가?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이 땅에 6.25 전쟁과 같은 피 비린내 나는 동족간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깃들기를 위하여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자.
248 no image |영혼의 두레박<2>| 평생동안 빚어져 가는 리더십_유순아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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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0 2010-06-09
평생동안 빚어져 가는 리더십 < 유순아 박사, 한국맴버케어연구소장 > "우리 모두는 리더로서 날마다 훈련받고 있어" 지난 주에 6.2 지방선거가 끝났다. 처음 집으로 배달된 후보자에 대한 안내 문을 받았을 때 도대체 누구를 뽑아야 할지 선택이 어려웠다. 각각의 후보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자 신의 공약대로 일을 잘할 수 있을지 안내문만 보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선 거 날 다시 안내문을 자세히 읽어보고 나서야 나의 선책이 바른 선택이기를 바라며 8명의 후보자의 이름을 메모해 가서 투표를 했다. 이제 새로운 일꾼 들이 결정되었고 그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지도자들을 만나게 되고 많은 지도자들을 세우게 된 다. 올 봄에는 대중매체의 영향이 큰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이미 역사 속의 인물이 된 몇몇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지나온 삶과 철학을 공중파를 통해 서 재조명해 볼 수 있었다. 비취어진 것이 다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긍정적 이든 부정적이든 한 사람의 지도자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숙고할 수 있었다. 지도자는 한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클린턴은 말한다. 평생에 걸 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지도자에 대해 말할 때에는 단순히 어느 한 순간을 보고 판단할 수 없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생을 되 집어 보면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사역해 왔는지, 그리고 이미 역사 속의 인물이라면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등등 그의 생애 전반을 펼 쳐 놓고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분석들을 통해서 보면 먼저 그 지도자의 훌륭한 인격이나 자질, 즉 리더십이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 다. 지도자의 리더십은 평생을 통해서 형성되어 왔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평생의 관점에서 지도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 그 지도자의 리더십이 형성된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섭리와 밀 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지도자를 부르시고 그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끝까지 효과적으로 잘 마치기를 원하신다. 그 래서 평생토록 개인의 삶과 사역에 그에게 적합한 계획을 가지고 의도적으 로 개입하셔서 그 사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도록 간섭하 신다. 한 지도자를 만들어 가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어느 특정한 몇몇 사람 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원칙은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적용 된다. 왜냐하면 리더십의 원천은 예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히 13:7-8). 성경의 지도자들을 세우셨고 과거 역사 속의 지도자들을 세우셨던 예수께서 는 오늘을 사는 우리를, 그리고 미래의 지도자들을 이와 동일한 원리와 방법 으로 세워가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지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안을 한다면 우리 자신이 지나온 삶의 여정을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나를 부르셨는가?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하기 위해 어떤 장기훈련개발계획을 (life-long development) 가지고 계시는가를 특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살아 온 삶의 과정에는 결코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과정들이 자신을 지도자로 개발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 데 있다. 그 가운데서 주어진 사역을 끝까지 잘 마치는 지도자가 되게 하기 위해 개인의 삶과 사역에 의도적으로 개입하셔서 여러 훈련 과정들을 허락하 시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주어진 훈련의 필수 과정들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 이러한 훈련 과정들을 통과하면서 영적 침체도 경험하게 된 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주어진 사역을 효과적이고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능력과 리더십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였음을 깨 닫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삶과 사역을 돌이켜 조명해 보면 하 나님의 섭리를 경험적으로 배울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삶에 의도적으로 간섭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적 사건들 속에 담겨 있는 어떤 일관성도 파악하게 된 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장래에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 시는지를 가능하다면 정확하게 예상할 수 있도록 깊이 묵상해 보는 것이 좋 을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각자 우리의 삶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인식한다면 우리는 날마다 더 좋은 지도자로 빚어지고 있음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247 no image |신학단상<36>| 특권계층(特權階層)의 존재_조석민 목사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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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7 2010-05-26
' 특권계층特權階層의 존재 '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 “교회 직분은 성도 위해 온전하게 봉사하기 위한 것” 특권계층이란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특권을 누리는 계층이나 또는 그런 사람들을 의미한다.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특권계층 우리나라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 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 다. 국민이 주인인 우리나라에 특권계층이 존재하는 것인가? 믿기 어렵지만 특권계층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 다. 이미 세상에 다 알려진 바대로 검찰의 권력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 력으로 특권계층의 상징이 된 듯하다. 최근 문화방송이 보도한 검찰의 스폰서 문화가 공개되면서 검찰이 어느 정 도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지 그 일부분이 드러난 것이다. 문제는 드러난 검찰 의 스폰서 문화는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검찰의 시각은 스 폰서 문화를 ‘온정주의로 인한 인간관계의 일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 럼 보이는데, 이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특권계층은 검찰만이 아니다. 국회의원 역시 국민이 선출한 국민을 위한 의 정 활동을 하는 사람들인데, 정치권력을 누리는 계층이 되고 말았다. 특권계 층답게 국회의원이 누리는 특혜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 도이다. 그 한 가지 예로 국회의원은 국회법 31조에 따라 국유의 철도, 선박, 항공기 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국회 폐회(閉會) 중에는 공무의 경우에 한한다 고 되어 있다. ‘국유 철도’에는 한국고속철도(KTX)도 포함된다. 국민을 위 한 의정 활동으로 꼭 필요한 경우라면 특별 혜택이라도 베풀어 주어서 의정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전교조교사 명단 공개 금지와 관련된 법원의 판결을 두고 한 국 회의원이 ‘조폭판결’이라는 표현을 써서 판사의 판결을 비하(卑下)해 버 린 사건은 말 그대로 입법 활동을 하는 국회의원이 조폭이 아니라면 입에 담 을 수 없는 말이다. 국회의원이 법원을 향하여 이런 발언을 하고 법을 지키 지 않는다면 일반 국민은 어찌하란 말인가! 국회에서 법을 만들면 법원은 그 법을 근거로 위법한 사항을 판단하여 양형 하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삼심 제도가 있고, 또한 헌법 소원 등 법원 의 판결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다시 판결받을 수 있는 권리 를 제도적으로 잘 마련했는데, 국회의원들이 앞장서서 법을 지키지 않는 것 은 특권의식 때문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특권계층은 이 정도뿐 아니라 한국의 2%에 해당하는 재벌들 역시 재벌 권력 을 휘두르는 특권계층에 속한다. 이들이 소유한 부는 권력을 창출하는 원천 으로 그 힘은 방향을 알기 어려울 정도이다. 재벌의 특권은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정의’에 대한 개념조차도 ‘정의는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다’고 바꾸어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우리는 재벌이 얼마나 특권의 식 속에서 살아가며 무소불위의 힘으로 세상을 주무르는지 알 수 있다. “유 전 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은 재벌과 변호사 및 검찰의 합작품이라고 해 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부를 소유한 것으로 특권계층이 되기 위한 재산은 어느 정도일까? 그들의 부동산 소유를 통해서 살펴보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손낙구 의 ‘부동산 계급사회’에서 알려 주는 정보에 의하면 집을 여러 채 소유한 집부자 100명이 소유한 전체 주택 수는 1만 5,564채로 1인당 평균 156채를 소유하고 있다. 100명의 다주택 소유자 가운데 가장 많은 주택을 소유한 사람은 혼자 1,083 채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 이 정도라면 부동산 및 주택 소유의 윤리 도덕 적 기준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종교 속에서도 특권계층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종교는 잘 모르겠 지만 특히 개신교 안에 특권계층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종교 속의 특권 계층은 유대인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1세기 당시 유대인 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과 족보를 앞세워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거 룩한 백성이라는 사상 속에서 특권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이방인들을 차별하 였다. 하지만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2:10)고 선언하고, 유대인 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예수 그리 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참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특권의식에 대하여 분명하게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 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에다가 할례 받았다고 해서 할례 가 아닙니다”(롬 2:28, 표준 새번역)라고 선언한다. 바울은 기독교 안에서 특권계층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고 선언하면서 특권계층을 부인한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 종교에서 사제들이 누렸던 특권을 거부 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직자들이 특권계층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은 목사라는 직분이 특별한 사회적 신분과 계층 이 되어 버린 것 같고, 실제로 특권계층으로 존재하며 교회 안에서 무소불위 (無所不爲)의 권력으로 군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목사뿐만 아니라, 장로나 안수집사, 권사 등의 모든 직분이 마치 특권계층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버렸다. 교회 안의 모든 직분은 하나님의 교회인 성도를 섬기며 보살피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가난하 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맡은 것인데 이제는 명예와 특권을 누리는 직분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교회에 특권계층 있을 수 없어 교회의 여러 직분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 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고 교훈한 바울의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246 no image |영혼의 두레박<1>| 과거의 경험을 해석하는 원리_유순아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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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8 2010-04-28
과거의 경험을 해석하는 원리 “자기 경험 속에 담긴 의미 찾기 위한 노력 기울여야” 다윗이 평소에 사용하던 물맷돌로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에서 보듯이 과거의 우리 경험은 미래에 있을 사역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단초가 된다. 과거의 경험은 미래를 결정하는 실마리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나 교훈, 지혜나 기술 등을 미래의 사역 에 전략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긍정적 경험은 물론 부정적인 경험까 지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게 된다. 문제는 그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느냐와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이다. 따라서 지도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파악하고 그 경험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확인하고 새롭게 경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적어 도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즉 ①이론과 ②멘토와 ③노력 및 시간 투자이다. 첫째, 이론이 있어야 한다. 크리 스천이라면 과거에 있었던 우리의 경험이 모 두 하나님의 은혜요 복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 은혜와 복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인정하며 나아가서 그것을 미래 사역의 밑거름으로 활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믿음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며 과거의 경험 속에 담겨 있는 은 혜와 복을 찾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긍정적 믿음뿐 아니라 그 믿음을 구체 적으로 경험하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경험하는 방법 중에 하 나를 소개하자면, 우리에게 저서로 잘 알려진 클린턴 (J. Robert Clinton) 교수의 리더십 이론(Leadership Emergence Theory)이 다. 그의 이론은 지도자로 하여금 개인의 삶의 전 과정(Time-line)을 관찰하고, 자신의 경험을 인식하고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개념을 제공한 다. 그 개념들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개인의 정체성과 소명, 독특한 은사, 궁극적인 공헌 등을 파악하게 함으로써 주어 진 사역을 잘 마무리하고 은퇴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데 안목과 기술을 갖게 한다. 그의 이론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리더십을 이해했고 많은 교회 단 체들이 그 이론을 활용하면서 지도자들을 맨토링하고 리더십의 발전을 돕고 있다. 이론 없이 자신의 과거 경험을 이해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고 객관성 도 없으며 재생산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려고 한다면 이론이 있어야 한다. 둘째, 맨토가 필요하다. 하나의 이론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는 경우에 따라 서 내 경험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그 이론 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과정이나 그 이론의 적용을 통해서 얻은 결과에 대해 서 신뢰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맨토가 필요하다. 맨토로부터 이론에 대한 이해 와 통찰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지도자 자신의 경험에 대한 이해의 정확성 여부나 그 수준에 대해서 재확인 단계(double confirmation)를 갖게 된다. 이런 맨토와 더불어서 파트너쉽을 갖고 함께 노력하지 않는 한 스스로 이론 을 이해하고 그것을 적용해서 결과를 갖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통 과해야 할 터널이 많기 때문에 출발은 하지만 목 적지에 도달하는 사람은 많 지 않다. 결국 무엇을 이루었다 할 때 그것은 내가 아니라 맨토이다. 오늘날 은 “당신은 누구십니까?”를 묻지 않고 “당신의 맨토가 누구십니까?”를 묻는다. “당신의 맨토는 누구인가?” 셋째,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이론과 맨토의 역할은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조건, 즉 필수 조건들이다. 이런 준비 외에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경험 속에 담겨 있는 은혜와 복을 인식하는 것의 필요를 인정하고 이를 위해서 방법 또는 이론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될 때 현 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시간을 투자하고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서 노력이란 그 이론을 이해하는 시간, 맨토를 만나 맨토링을 받는 시 간, 또 그것을 자기가 글로 써보는 시간,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교정해 보 는 시간 등을 뜻한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고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서는 결과 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삶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글이 필 요하다. 지도자는 힘든 과정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힘든 과정을 경험하는 것 그 자체가 어떤 명분을 주거나 계급을 주거나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건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를 인식하게 될 때 비로소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힘들어 하지만 말고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 를 찾기 위해서 방법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혼자 고민만 하지 말고 맨토와 대화를 가져야 할 것이다. 자신의 지나온 경험을 숙고하고 기도 하는 것이 최소한 요구되는 방편이다. 경험에 대해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그렇게 될 때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나 지혜나 기술이 미래의 사 역에 원동력이 됨을 인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 즉 경험이 하 나님의 은혜와 복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245 no image |칼빈의 편지들(4)| 불링거 목사님께_장수민 목사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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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1 2010-04-14
1544. 11. 25. 불링거 목사님께 "사람들 칭찬이 자신을 무너뜨리는 계기 될 수 있어" 내용: 프로방스의 발도파를 위해 취리히 영주에게 호소한 다음, 루터의 성격 에 관해 예리하게 판단하면서, 그가 행해 나온 탁월한 봉사를 고려함으로써 그가 드러내 보인 일부 부족함을 용서하자는 호소. (생략) 제가 듣기로는 루터 선생께서 마침내 격렬한 비판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것은 목사님측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 전체를 향한 것이겠지 요.* 지금의 시점에서는 침묵을 지키자는 부탁을 목사님께 감히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고한 사람들이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것 역 시 정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신중한 것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 어려 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 저는 진정 목사님을 처음으로 머릿 속에 떠올렸습니다. 목사님은 루터가 얼마나 저명하고 얼마나 뛰어난 재능 을 갖추었으며, 정신력과 끈기가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훌륭한 기술과 효율 성 그리고 말씀에 관한 지식의 힘으로써 지금까지 적그리스도의 통치를 타도 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헌신해 왔는지 충분히 고려하실 수 있을 것 입니다. 동시에 그가 저를 마귀(devil)라고 불렀다 할지라도 저는 그가 '주 님의 뛰어난 종'이라고 선언하는 데 익숙해 있겠습니다. 하지만 루터 선생께서 아무리 보기 드물고 뛰어난 미덕을 갖추었다 하더라 도 동시에 심각한 잘못(serious faults)을 범하였습니다. 그렇게 어느 방향 으로 튈지 모르는 그러한 불안하고 침착하지 못한 기질을 조금만 궁리하여 개선시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한 루터 선생께서 언제나 자신의 본성적 기질에서 나오는 열성을 진리를 대적하는 적군들에게나 보여줄 일이지, 우리 측의 사역자들에게는 그같은 성 질을 부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그가 자신이 지 닌 단점을 스스로 조심스럽게 관찰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참으로 아 쉽기 짝 이 없습니다. 루터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여러 가지 칭송들 때문에 더욱 잘못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관용하는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어떤 안 좋은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부여받은 놀 라운 재능과 능력들에 대해서도 동시에 고려해주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몫 일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님께서 루터 선생님을 생각하실 때 우선적으로 그분이 우리 동역 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주의 종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모두 그에게 아주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그리고 목사님 의 입장에서도 루터 선생님과 다투는 것은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단지 그들이 복음주의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그렇게 쉽게 이길 수 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 약간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가 서로 떨어져 각자 물고 뜯는 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것을 충분히 이용할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합의를 이루어 한 목소리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면, 그들은 분 명 우리의 본래적인 나약함 을 이용하여 우리의 신앙에 대해 비난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님께서는 루터가 그렇게 폭력적인 발언을 했던 것에 대해 집착하 기보다는 이러한 점들을 미리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도 바울이 경고하 는 것과 같이 서로가 서로를 헐뜯으며 먹고 먹히는 일이 목사님에게 일어나 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가 우리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일으켰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러한 경쟁 을 사절하는 것이, 범교회적인 난파를 초래하여 상처를 더 크게 하는 것보다 는 나을 것입니다. 그만 이만 줄이겠습니다. 존 칼빈 드림 * [주의 만찬에 관한 짧은 고백](Short confession concerning the Supper; Kurzes Bekenntness vom Abentmahl)에서 루터는 자신의 성찬식에 대한 이론 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다시 욕설을 퍼부으면서 특별히 츠빙글리를 비난 하였다. 그리고 오이콜람파디우스의 박식하고 경건한 학설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보내지 않았다(Hospinian, Hist. Sacramant. Tom3, pp. 326-331). 이러한 폭력에 화가 난 멜란히톤은 개신교를 분열시킨 무질서한 슬픈 장면 을 없애려고 은퇴를 고려하기까지 하였다. 멜란히톤은 1544년 8월 24일에 부 써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언젠가 자네에게 쓴 편지에서 페리클레스(Pericles, 루터)에 대해 언급했 던 것을 기억하겠는가! 그도 역시 주님의 만찬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반응했 던 사람이었어. 그래서 사납게 공격하는 말을 쏟아냈었지. 그러한 공격 때문 에 자네와 나는 멍이 들었어. 나는 꽤나 온순한 새라네. 만일 우리를 방해하 는 자가 나를 억제할 경우, 나는 기꺼이 이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기를 갈망 한다네"(Ph Melanchthonis Opera, edit, of Breischneider, tom5, p. 464).
244 no image |신학단상<35>| 신뢰(信賴)를 잃어버린 시대_조석민 목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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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0 2010-04-14
신뢰(信賴)를 잃어버린 시대 |조석민 목사(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불신의 요소 제거하려는 뼈깎는 고통 함께 감수해야” 신뢰는 한 사회가 존재하는 근본 뿌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우리 사회에 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소식들, 예를 들면 성인들의 어린이 강제 성추행 사 건, 아버지가 딸자식을 성추행한 사건,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끔찍한 소 식 등을 들으며 살아가고 있다. 비극적인 사건들 잇달아 발생하고 있어 이 세상에 가장 불행한 일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서로에 대한 신 뢰가 무너지는 것이다. 성인들이 연약하고 새싹이 돋듯이 자라나고 있는 어 린이를 돌보며 보호하여 잘 성장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데, 오히 려 짐승처럼 돌변하여 어린이를 성추행하고 생명까지 빼앗아가는 비극적인 시대가 되고 말았다. 어린이 성추행범의 대부분이 면식범이란 통계는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얼굴을 평소에 잘 알 고 있기에 어린이는 그 사람을 전적으로 믿은 것인데, 말 그대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셈이다. 아버지가 친 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사건 또한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가장 처참한 절대적 신뢰 의 붕괴 그 자체이다. 더욱이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며 보험금을 탐낸 경우도 가장 기본적인 사회 적 신뢰의 붕괴를 보여주는 비극적 사례이다. 이 모두가 국가와 사회를 구성 하는 토대이며 신뢰로 이루어진 가족의 견고한 성이 무너진 경우이다. 최근 발생한 백령도 근해에서 우리 해군함정 천안함이 침몰한 사건은 국민 적 비극이다. 이 사건의 발생 시각과 원인을 놓고 군의 발표를 신뢰하지 못 하는 국민들의 반응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뿌리 깊은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절감한다. 군이 천안함 침몰 사고 시각과 관련하여 잦은 말 바꾸기로 이미 신뢰를 잃어 버렸다. 풀리지 않는 의혹과 불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이제는 사고 원인을 제대로 밝힌다 해도 국민들이 곧이 믿어줄지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천안함이 침몰하여 수많은 고귀한 생명이 실종되고, 시신으로 발견된 것도 슬픔이지만, 이 가슴 아픈 사건을 두고 우리 사회를 덮고 있는 불신의 검은 그림자를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이런 상황을 만든 배후에는 자주 말을 바 꾼 군의 발표도 문제지만, 신문 방송 기자들의 사건에 대한 사실 보도와 함 께 추측에 의한 분석 보도도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 침몰한 천안함의 선체를 인양하면 보다 분명한 원인 등을 알 수 있겠지만, 인양된 선미(船尾)의 절단면은 공개하지 않겠다는 군의 발표는 또 다시 신뢰 를 잃어버리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군을 믿고 안전 하게 살아가는 국민들이 그 군의 공식적인 발표를 믿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처참한 비극 그 자체이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불신 풍조를 없애려면 모든 면에서 가능한 한 투명성 을 높여야 하고, 정보의 독과점을 해제해야 한다. 하지만 남북의 대치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국가의 안보와 관련된 정보의 무분별한 공개는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은 물론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알권리와 관련하 여 남북의 상황이 정치적으로 악용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남북이 통일되 지 못한 우리 민족의 비극이다. 이런 점에서 남북통일은 통일이 되는 그날까 r 지 우리 민족의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지상과제이다. 우리 사회의 불신 풍조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약속의 실천이 신뢰의 작은 나무를 심는 일과 같은 것인데 작은 약속들이 실천되지 않으면서 보다 큰 약속들은 대의명분을 내세워 파기되는 상황이기에 불신을 자초하고 있 다. 국민의 상당수가 정부의 여러 가지 정책 발표를 믿지 못하는 이유는 정 부가 이미 상당 부분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가 한반도 대운 하에서 비롯된 4대강 개발 문제 및 세종시 수정안 문제, 한명숙 전 총리의 뇌물수수 사건의 무죄 판결 등이다. 우리 사회 속에 드리워진 불신의 그림자는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이 함께 모여 이룬 신뢰의 공동체가 불신의 공동체로 점차 바뀌어 가는 모습 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이런 현상은 얼마 전에 발표된 종교의 신뢰도 조사 에서 발표된 교회의 신뢰도 추락에서 볼 수 있다. 또한 교회의 문제가 세상 법정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현실과 그 법정 다툼의 수가 상당한데에서도 찾 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그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닮아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모 인 믿음의 공동체가 서로 불신하고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 또한 성도와 성 도들 사이에 서로 세상 법정에 고소 고발을 하며 교회를 불신의 공동체로 세 상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이 교회의 지도자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작은 일들에 대하여 이미 거짓이 들어나 불신을 경험했거나, 교회의 일들이 투명성과 객관성을 잃어버 린 경우, 정보의 통제와 소통을 위한 대화가 아닌 일방통행식의 의사 전달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뢰의 회복은 우리 사회가 신속히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이 런 신뢰의 회복은 교회가 먼저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교회는 이 사회 속에서 신뢰의 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어야 할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 다.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신뢰를 잃어버릴 때 그 부정적인 효과가 사회에 주 는 영향은 너무나 크다. 세상에서 불신을 완전히 제거하기란 현실적으로 매 우 어렵다. 하지만 불신의 요소가 되는 많은 것들을 제거하려는 실제적인 노 력과 함께 의심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서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때 우리 교회와 사회 는 보다 더 밝은 미래를 내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경 유다서 22절은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교훈하 고 있다. 정신과에서 의심은 치료하기 어려운 심각한 병이지만 많은 노력으 로 그 병을 치료하기도 한다. 교회가 먼저 신뢰 회복 모범 보이길 의심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나무랄 것이 아니라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함께 신뢰하는 믿음의 공동체와 우리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243 no image |신학단상<34>| 맑고 깨끗한 삶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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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5 2010-03-17
맑고 깨끗한 삶 |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 “위장된 거짓된 삶으론 행복 맛볼 수 없어” 예수께서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면을 쓰고 거짓으로 행하고 말하 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5-26)고 꾸짖으셨다. 탐욕은 부패한 지도자의 척도 오늘날도 세상의 정치 경제 지도자들과 종교,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세상 적인 특권에 너무 젖어 살면서 자신을 망각하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듯하 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경건을 가르치며 자신은 이미 경건한 사람이 된 것으 로 착각하며, 자신이 생각하고 계획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 고 확신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세상 지도자들도 자신이 지도자의 위치 에 있을 때 큰 업적을 자기의 이름으로 남기려고 발버둥치며 사람들을 향하 여 진실을 감추며 위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고 통계 숫자를 제시하며 국민들로 하여금 무지갯 빛 소망을 꿈꾸게 하는 책임자들은 그 숫자를 진실로 믿고 있는 것일까? 최 근에 부도 위기를 맞이한 성원건설은 법정관리, 즉 기업회생절차를 공식적으 로 신청했다. 이로 인하여 중소형 건설업체의 줄도산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 동안 걱정하던 한국 경제의 실상이 수면 위에 떠오른 것 같아서 불안한 상황이다. 이미 미분양 아파트 물량이 대략 12만여 가구라는 통계 수치가 발표되며 이 런 상황은 올해 들어 계속 증가 추세에 있어서 건설 업체들을 더욱 압박하 고 있다는 것이다. 아파트의 가격과 땅 값의 하락만 막으면 부동산 경기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측은 이미 빗나가고 있다. 부동산 경기의 하락을 막 기 위한 정부의 막대한 금융방출 정책은 물가의 불안 요인을 키우기에 통화 량을 조절해야 한다는 판단아래 금리 인상의 필요를 암시했던 한국은행 총재 는 결국 자신의 판단을 의지적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 다. 우리 경제 상황에서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일자리 창출을 슬로건처럼 내놓은 정부의 계획과 통계청의 발표는 숫자상으 로 실업률(失業率)이 점차 감소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통계청의 실업률 통계가 실제 고용 상태를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꾸준히 지적해 온 단 체들은 이에 대한 보완으로 실질실업률을 계산하여 발표하고 있다. 실업자 가 계속 증가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실업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실질실업자의 경우 이미 400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소식이다. 4대강 사업이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특히 일자리 문제를 해소할 것이라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지만 아직도 일자리가 없어서 헤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不知其數)이다. 4대강 살리기 사업과 관련된 진실은 무엇일까? 지금 4대강 은 공사판으로 모든 물과 자연이 죽어 가고 있는데 과연 누구를 위한 사업인 가?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정부의 4대강 사업과 관련하여 “이 나라 전역의 자연 환경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것으로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3월 12일 밝혔다. 진실을 잠시 숨길 수 있지만 그것은 정말 시간 문제일 뿐이 다. 시간 이 지나면 거짓된 일들은 자연스럽게 드러나며 거짓으로 인한 대가는 오랜 기간 동안 눈물을 삼키며 어렵사리 되갚아야 할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의 한명숙 전 총리의 뇌물수수 사건이 진실 공방에서 어떻게 끝날지 아직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3월 11일 한명숙 전 총리의 2차 공판 법정은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이목이 집중됐다. 그 이유는 한 전 총리가 돈 봉투를 보거나 그것을 챙기는 것을 직접 목격하 지 못했다는 증언이 나왔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진실이 가려지겠지만 그 결 과가 매우 궁금하다. 과연 누가 거짓의 가면을 쓰고 말하고 있는지 시간이 지나면 모두 분명히 밝혀 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진실 공방이 법정에서 진행되는 요즈음에 우리와 종교가 다르지만 맑 고 깨끗한 삶을 살아온 법정 스님이 지난 3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법정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며 일체의 장례의식 을 거행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법정의 대표 산문집 는 179쇄 를 거듭한 우리 시대 최고의 스테디셀러(steady seller)가 되었지만, 이 책 뿐 아니라 자신의 모 든 책을 절판하라고 유언했다는 것이다. 무소유의 유산 을 남기길 소원한 것이리라. 우리와 종교가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쉽게 생각하거나 불필요한 비판을 해서 는 안 될 것이다. 우리에게 거짓 없는 진실한 삶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 일까? 맑은 물에 물고기가 살 수 없다는 논리로 만족해야하는 것일까? 털어 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이 없으니 그냥 적당히 살면 되는 것일까? 우리의 삶 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참된 모습으로 꾸밈없이 매일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짓의 껍질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는 것은 그렇게 쉬 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진실로 위장된 거짓된 삶이 행복을 맛볼 수 없 게 한다면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마땅할 것이 다. 참된 기쁨은 진실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들먹거리고 자신의 의도를 숨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며 반대하는 일을 추진하는 어리석음은 버려 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꾸짖으신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는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 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참된 기쁨은 참된 진실의 열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따라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거짓의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맑고 깨끗한 삶을 기대해 본다.
242 no image |신학단상<33>| 공평(公平)과 정의(正義)_조석민 목사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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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3 2010-02-17
공평(公平)과 정의(正義) “손해 보더라도 정직해야 한다는 신념 잃지 않아야”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한 가지 소망한 것은 공평과 정의가 물같이 흐르 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맛보는 것이었다. 무한 경쟁 부추기는 사회 공평(impartiality)이란 어느 한 쪽에 기울지 않고 공정한 것을 뜻하며, 정 의(justice)란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를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 간들에게 보여주신 성품의 한 부분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나타나 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아직도 공평과 정의에 대한 소망의 불씨는 희미하지만 여전히 꺼지지 않았 다. 이런 소망의 불씨를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함께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 속에서 공평을 찾는 일은 쉽 지 않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며,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공평을 말하지만 가진 자들과 기득권자(旣得權者)들 대부분이 공평한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공평과 정의가 물같이 흐르는 세상을 소망하는 것이다. 새로운 정부가 시작되면서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동물적 무한 경쟁 사상이 도입되었다. 무한 경쟁 시대가 되면서 공평은 한 낱 무릉도원을 꿈꾸는 자의 액세서리가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을 경쟁이라는 렌즈로 들여다보는 세상에서 공평은 더 이상 현대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단 어처럼 보인다. 실력과 능력 있는 사람들이 대우를 받아야 하고, 그런 차등 (差等) 대접을 정의로운 것으로 이해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와 함께 정의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환영받는 단어가 아닌 것처럼 보인 다. 왜냐하면 정직하면 항상 손해 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세상은 정의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이 정의라고 이해한다.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 는 것은 눈에 보이는 힘과 여러 종류의 권력이며, 그런 힘과 권력은 공평과 정의를 위하여 사용되기 보다는 불의를 정의로 착각하는데 오용되고 있다. 이런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한 가지 실례가 삼성 그룹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촉발된 삼성 그룹의 수사는 이건희 전 회장 을 경영권 불법승계 혐의로 기소하고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천 100 억 원을 선고하였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기소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를 사면하였다. 그를 사면한 이유에 대하여 정부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와 대한민국 경제 회복이라는 국익 차원의 관점에서 결정한 것이라고 밝 혔다. 하지만 2010년 2월 7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윤리위원회는 이건희 IOC 위원에 대하여 앞으로 5년 동안 IOC내 어떤 위원회에도 참여하는 권리를 중 지시키는 징계를 결정하였다. IOC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징계인 제명을 제 외한 가장 강력한 징계이다. 대한민국의 경제 회복이 죄인 한 사람의 특별사면으로 가능할지에 대한 문제 는 예외라고 할지라도, IOC로부터 징계를 받은 그가 2018년 평창 동계 올림 픽 유치에 성공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우리는 공정하고 정직하며 반칙과 특권이 있을 수 없는 것이 올림픽 정신임을 다시 되새겨야 할 것이다. 결국 삼성 재벌의 비리를 공개한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은 이제 역사 속 에서 사라 지게 될 운명이 되었다. 삼성 비리와 관련된 결과는 결국 “혹시 나”에서 “역시나”로 끝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양심고백으로 1년여 동안 나라를 소란스럽게 한 김용철 변호사가 최근에 라는 책을 출판하여 그 동안의 일을 정리했다. 그는 이 책에서 “아이들에게 ‘정직하게 살라’고 권해도 불안하지 않은 사 회가 되면 좋겠다고 피력했다.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본다’는 생각이 현명 한 것으로 통하고 ‘손해 보더라도 정직해야 한다’는 생각은 순진한 어리석 음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운 아이들이 커가 는 일을 차마 지켜볼 자신이 없다”(p. 447)고 한다. 그는 이 책을 쓴 이유 를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게 정 의’라는 생각을 할까봐 두려워서”(p. 448)라고 밝힌다. 구약 성경은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 서 기쁘게 여기신다”(잠언 21:3)라고 말한다. 공평하게 행하는 것은 세상 속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드러나야 할 윤리 덕목 가운데 하나이며 정의를 행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나 타나야 한다. 하나님께 예배 (제사)를 드리지만 공평과 정의를 일상의 삶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증한 종교 의식일 뿐이요,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다. 공평과 정의를 행하기에도 부족한 우리의 물질과 시간인데, 강남의 도시 한 복판에 거대한 예배당 건축 계획을 발표하고 모든 성도들을 ‘거룩한 땅 밟 기’와 ‘성전 건축’으로 몰아가는 S 교회 모습을 보면 씁쓸하기만 하다. 과연 그렇게 거대한 예배당 건축이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서 기뻐하실 일일지 의심스럽다. 예배당 건축에 앞서 ‘거룩한 땅 밟기’와 ‘성전 건축’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마치 세계 선교와 한국 교회를 위 하여 거룩한 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모습을 보면 할 말을 잊 게 한다. ‘거룩한 땅’은 이 세상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S 교회는 예배당 건축 부지 가 마치 거룩한 땅인 것처럼 성도들을 호도하며, 오늘날의 예배당이 구약 성 경의 ‘성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부르고 있다. S 교회 예배당 건축에 대하여 지역 내의 여러 크고 작은 교회들과 적지 않 은 사람들이 걱정과 우려 속에서 건축에 대한 부 정적 의견을 표출하고 있 다. 공평과 정의는 힘의 균형이 깨질 때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힘의 균형 깨질까 염려돼 세상의 소금과 빛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영역에서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는 한 해가 되기를 다시 한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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