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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no image |신학단상<32>| 역사의 교훈과 한 해의 마무리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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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9 2009-12-29
역사의 교훈과 한 해의 마무리 “그리스도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야” 성탄절과 함께 묵은해를 보내고 2010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신앙생활의 새로 운 도약을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난 한 해를 마무리하며 아쉬웠던 점 은 여전히 다 이루지 못한 일들과 좀 더 성실하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삶의 흔적들 때문이다. 지난 해 돌아보면 아쉬운 일 너무 많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심을 축하하는 성탄절 에 아름답게 장식된 성탄나무를 보면서 마음속에 잔잔한 기쁨과 감사가 솟아 났다. 아울러 지난 한 해를 돌아볼 때 그 어느 해보다도 많은 일들이 있었 던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첫째, 우리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일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그 리고 기억하기조차 끔찍스러운 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이다. 언제쯤이면 이 땅에 정 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을지 생각하면 벌써 한숨과 함께 눈물이 고인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살아간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너무도 무기력하고 나약한 모습이기에 더욱 가슴이 쓰리다. 더욱 안 타까운 일은 나와 관련이 없다는 한 가지 이유로 이 사건이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서 망각의 늪으로 빠져버리는 것이다. 둘째, 전직 대통령 두 분과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가진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이다. 금년에 우리는 진보적 가치와 함께 민주주의를 실천하려고 했던 고(故) 노무현 대통령과 행동하는 양심을 호소하며 민주주의 정부를 이룩한 고(故) 김대중 대통령을 떠나보냈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과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한 마디로 대답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 의 섭리가운데 운행되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세상에서 일어난 그 어떤 일도 의미가 없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은 우리와 신앙이 다른 천주교의 성직자이기에 쉽게 무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분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예수님을 가 장 많이 닮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분이기에 그의 죽음이 더욱 기억에 남 는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 면 그의 죽음은 그렇게 살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도전과 함께 부끄 러움을 주기 때문이다. 셋째, 헌법재판소가 미디어관련법에 대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하여 국 민들이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했던 일이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가 지난번 국회에서 논란 끝에 본회의에서 통과된 신문법, 방송법, IP TV법 등 모든 미 디어관련법에 대하여 IP TV법을 제외한 신문법과 방송법은 표결절차에 있어 서 분명히 위법을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인 결론에서는 이해 할 수 없는 논리로 합헌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을 존중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법 정신 과 상식에 어긋나는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헌법재판소의 결 정과 함께 우리 교회의 이러 저러한 일들은 불법이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교 회의 유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성도들을 호도하는 일은 없는지 세심하게 살 펴볼 사건이기 에 기억 속에 남아있다. 넷째, 또 다른 정치적인 사건으로 세종시 수정 논란이다. 국무총리의 발언으 로 점화(點火)된 세종시 수정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인 사건으로 그 해결이 그렇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정부는 온갖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국민들, 특 히 충청도민들을 설득하려고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과 정부를 국 민들이 앞으로 어떻게 신뢰할지 문제는 그렇게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정부와 청와대는 이미 세종시 수정이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그것을 어떤 방법 을 동원해서든지 끌고 가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풀리기 보다는 더욱 꼬이 고 있다. 국민들이 원하지 않으면 원안대로 실행한다는 말은 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거짓임이 드러나 버렸다. 이 일이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현재 진행형이라는 이유뿐만 아니 라,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가치를 무시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국민들 을 호도하며 진실을 가리고 있는 대통령과 이 정부의 모습이 대형교회를 꿈 꾸며 성도들을 무시하는 소수의 목회자 모습은 아닌지 염려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현재 진행 중인 국회의 2010년도 정부 예산안 통과 문제이다. 문 제 의 핵심은 정부가 제출한 4대강 사업의 예산안이다. 정부가 4대강 사업을 추 진한 것은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 절대 다수 국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기 때 문에 그 대안으로 ‘녹색성장’이라는 구호아래 제출된 사업이다. 이전까지 어느 정부도 환경을 정치적 구호로 내세운 적이 없었고, 녹색이란 단어는 시민단체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지극히 NGO적 구호였다. 이 정부 초기에 747, 대운하, 공기업 선진화 등등의 경제적 단어가 주로 언급되어 왔 었는데 갑작스럽게 녹색이란 단어가 불쑥 튀어나온 이유를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제는 모든 것이 ‘녹색’ 일변도이다. ‘녹색’이란 이름만 붙이 면 모든 환경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국민들을 호도하는 모습이다. 이 정부 초기에 추진한 대운하가 4대강 사업으로 대체 되면서 꿩대신 닭이라 고 대운하는 안되겠으니 4대강 정비 사업이라는 명분 아래 ‘녹색성장’이 란 구호로 대운하를 덮어서 진행하고 있다는 의심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 이 유는 정부가 제출한 4대강 사업의 예산이 처음 제출한 예산의 두 배가 되어 대운하의 예산과 거의 같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국회에서 정부의 예산안이 아직도 통과 되지 않고 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생각과 역사 가 주는 교훈을 망각하지 않기를 다짐해 본다. 역사를 교훈삼아 남은 생애 살아 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우 리들의 남은 생애가 되길 소망하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새해를 맞이하는 기 쁨이 독자들에게 가득하기를 기원한다.
240 no image |칼빈의 편지들(3)| 필립 멜란히톤 선생님께_장수민 목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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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6 2009-12-17
필립 멜란히톤 선생님께, 1 543년 2월 16일(금요일) "분열된 견해로 악마와도 같은 일들 일어나지 않기를" 개요: 멜란히톤을 향한 칼빈의 존경과 형제애 표현을 전달하고 있다. 칼빈 은 자신의 책을 통하여 멜란히톤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제네바에서 수행 하고 있는 자신의 수고에 대한 자세한 기술과 독일 및 이태리의 상황을 설명 하고 있다. 이 편지는 칼빈이 멜란히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다. 라티스본 회의 이래 로 우애로 뭉친 독일의 종교 개혁자들 무리에 합류한 멜란히톤은 존경과 존 중받을 만한 본보기를 많이 보여주었다. 비록 칼빈과는 서로 다른 교리와 능 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교제를 한번도 방해 받지 않고 잘 유지해 나갔다. 칼빈은 1543년에 멜란히톤에게 은총에 대한 교리에 반대하는 알버트 피기우 스(Albert Pighius)에 반박하는 내용으로 출판한 책을 헌사했다. 그리고 칼 빈은 몇 년 후에 멜 란히톤의 [신학총론](Loci Communes)을 프랑스어로 번역 했다. 이렇게 칼빈은 멜란히톤과의 관계에서 신실한 우정과 단결의 정신을 보여주었고 그러한 교제를 루터교와 개신교를 발전시키는데 적용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얼마나 게을러터진 사람에게 편지를 맡기셨는가를 보고 계십니 다. 편지 배달부가 제게 편지를 건네 준 데는 넉 달이 걸렸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의 편지를 함부로 다루어 마구 구겨지고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편지 가 어렵사리 꽤 늦게 도착한 것이 불만이지만 그래도 결국은 전달 받았으니 의미가 있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이곳에서 제가 수많은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상황 속 에서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지 거의 믿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제가 온갖 노력을 다 쏟아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알맞은 충분한 정도의 결실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주요 근심거리는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동료들과 떨어져 지내 게 되고보니 지금까지 저에게 특별한 도움이 되어 왔던 심적 위로를 받지 못 하고 있다는데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판단에 따라 주 님께 봉사하기에 좋아 보이는 그런 포도밭의 위치를 고를 수는 없는 것이겠 지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각자에게 정해주신 위치에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최근에 제가 발표한 작품에서 선생님의 존함을 부적절하게 언급한 것 에 대해서는 선생님께 대한 저의 존경과 선생님의 관대하신 성품에 따라 너 그럽게 보아주셨으면 합니다(멜란히톤은 1543년 2월에 서문을 썼다 … 그리 고 5월 4일자 답장에서 멜란히톤은 칼빈에게 그의 훌륭한 글을 칭찬하면서 그가 자신의 저서를 헌사한 데 대해 감사를 표했다. "친절하게 대해 주어 고 맙네. 그리고 이렇게 놀라운 자네의 저서에 내 이름을 넣음으로써 나에 대 한 자네의 경애를 보여주다니 정말 고맙네. 이 이름은 모든 세상이 보게 될 것이네"). 이곳에서 일어난 저희 자신에 대한 일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사안이 없습니 다. 이렇게 침묵하는 이유는 다른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한 번 말씀 드리기 시작하면 너무나도 많은 일들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어서, 결국 이 편 지를 끝맺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 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 게다가 프랑스에서의 고무적인 상황이 널리 이탈리아까지 퍼지고 있습니다. 다만 선생님이 계신 독일에서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니 그 점에 대해서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슬프기보다는 약간 심각한 정도에서 걱정거리가 있는데, 전해들은 말에 따르 면 투르크(Turk)가 또 더욱 큰 군사력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무조건 자기 마음대로 육지 전역을 행진하고자 하는데 누가 이에 맞서 고자 하겠습니까? …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쪽의 지도자들은 아직까지 잠에서 깨 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영광 돌리는 법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엄격하게 훈련을 받았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나마 저에게 희망을 주는 소식도 있습니다. 콜로뉴(Cologne)의 주교와 그의 동료들이 그들의 교회를 완전하게 개혁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기로 진정으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물론 제가 보기에는 이 일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태까지 주님께 영광을 돌린 신도가 아무도 없었던 이들 주교 무리가 이제는 손을 들고 로마의 우상이 가 진 오점 에 대해 공적으로 선언한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부지런히 그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분 열된 견해로 인해 괴악스럽고 악마와도 같은 일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 록 말입니다. 한편 로마의 대주교가 세상을 즐겁게 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조금이라도 연장 하기 위해 트렌트 공회라는 연극을 꾸몄다고 합니다(트렌트 공회는 개회 선 언과 휴회를 계속하다가 결국 1545년 12월 13일 시작되었다). 올해까지는 상 황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말씀드린 것 같습니 다. 그러니 여기서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아, 가장 훌륭하고 업적을 많이 남기셨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영광을 받으실 분으로 저에게 영원히 기억될 선생님이시여! 선생님께서 별 탈 없이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교회를 이끄실 수 있도록 주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 다. 선생님의 다니엘서 주석을 왜 아직도 출판하지 않으시고 책꽂이에 꽂아 두고 만 계신지 저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저로서도 그 책을 열독할 때에 손 을 떼기가 힘들 정도여서 잠자코 있기가 어려울진대 말입니다. 마틴 루터 박사님께 저의 이름으로 인사드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우리는 지 금 시에나(Sienna)의 베르나르디오(Bernardino)와 함께 있는데, 그는 매우 저명하고 훌륭한 인물로 그가 떠날 때 이탈리아가 꽤 술렁였다고 합니다. 그 가 선생님께 안부좀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 선생님의 존 칼빈 드림.
239 no image |신학단상<31>| 예배당 크기의 우상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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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3 2009-12-02
예배당 크기의 우상 "이자 갚는 비용 모두 합하면 분명히 상상 초월할 것" 한국 교회가 언제부터 대규모의 거대한 예배당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는지, 어느 교회가 가장 먼저 이런 시도를 했는지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다. 아마 도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예배당을 완공했을 때 그 규모가 이미 달라지기 시 작한 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대형 교회 예배당 줄줄이 들어서 하지만 예배당의 크기가 무슨 문제냐고 말할 수 있다. 큰 교회는 큰 대로 작 은 교회는 작은 대로 하나님이 적절하게 사용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가 점점 예배당 크기의 우상이라는 늪에 빠져들어 가는 느낌을 떨 쳐버릴 수 없다. 한국 교회의 거대한 예배당 건축을 보면서 연상되는 것은 창세기 11장에 기 록된 바벨탑 사건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이었던 사울을 버리고 다윗에게 기름 부어 왕 삼으신 사건이다( 왕상 16:1-13).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무엘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을 자를 확인할 때 겉모습만 보고 결정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예배당 크기 에 목숨을 거는 것과 비슷한 사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더 이상 다윗이 사용한 작은 조약돌을 믿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골리앗의 실 상만 의식하고 따라가는 것 같다. 금년 4월에 이계선 목사의 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한국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기에 자신의 다양한 목회 경험을 토대로 대형교회를 향한 독설 을 내뿜고 있다. 하지만 이런 책이 출판되든 말든 아랑곳 하지 않고 한국의 대형 교회들은 자기들의 갈 길을 재촉하고 있는 것 같다. 그 한 예로 금년 8월에 명성교회가 2011년 완공 목표로 예배당 건축을 위하 여 시공 회사인 서희건설과 497억원 규모의 예배당 신축공사 계약을 체결했 다. 예배당 건축의 필요성에 대하여 이 교회는 20년전 건축한 현재의 예배 당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분당의 할 렐루야 교회는 새 예배당 건축 에 12년 동안 총공사비 644억원이 들었다는 소식이다. 이 예배당은 최근 경 기도가 주관한 "제11회 경기도 건축문화대상"에서 대상을 차지하므로 경기도 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선정되었다. 예전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 예배당 건축비로 책정되고 있는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금년 9월에 출판된 신광은 목사의 은 교회의 크기에 문제를 제기한 책이다. 그는 현대교회의 가장 큰 죄악이 메가처치(Mega-Church) 현 상이라고 질타한다. 저자는 한국 교회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려면, 그리고 참된 교회 개혁을 실천하려면 한국 교회에 만연되어 있는 메가처치 현상을 다루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한국 교회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 다. 최근에 사랑의 교회가 서초동에 2,100억원의 예산을 들여 새 예배당을 건축한다고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새 예배당의 필요성에 대하여 이 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아마도 사랑의 교회가 새 예배당 건축을 완공하 여 사용하기까지 들어가는 제반 비용을 모두 합산하면 지금 발 표된 예산보다 는 훨씬 많은 액수가 소요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나중에 들어갈 제반 비용은 계산하지 않더라도 새 예배당 건축에 들어가는 비용은 그야말로 예배당 건축 예산 금액으로 세계 최대 규모가 되어 기네스 북(The Guinness Book of Records)에 올라갈 정도이다. 한국 사회는 이미 저출산(低出産) 고령화(高齡化) 사회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현재 정부는 저출산 대책을 위하여 실효성이 의심스러운 여러 가지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분명한 것은 한국 사회의 인구 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교회는 계 속 거대한 예배당 신축 공사판을 벌리고 있는 실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까? 이런 사회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회만은 예외적으로 젊은 부부들이 어린 아 이들을 많이 낳아서 성도들의 숫자가 계속 늘어날 것을 믿고 있기에 거대한 새 예배당을 미리 준비하는 것인가? 이제는 교회도 자신의 지역 사회에서 저 출산 고령화 사회에 대한 선교 전략을 세워야 할 때가 아닌가? 크기에 열광 하는 한국 교회의 모습은 교회의 본질을 외면하고 교회다움을 져버린 모습이 r 다. 대형 교회는 생리적으로 살아있는 교회의 양심이 되기 어렵고, 예언자 적 정의를 외치기 힘들다. 경제학자인 슈마허(E.F. Schumacher)는 서구세계의 경제구조를 혁명적으로 파헤쳐서 고찰한 책 (Small Is Beautiful)를 1973년에 출판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현대 경제의 이윤과 성장의 추구가 거대한 조직 과 전문화를 가속화시켜 결과적으로 거대 경제 체제의 비능률과 환경오염, 그리고 노동 조건의 비인간화를 낳았다고 비판하였다. 비록 서구 세계의 경제구조를 논하는 책이지만 한국의 대형 교회를 생각할 때 동일한 문제점인 비능율, 비인간화, 환경오염의 문제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런 문제들이 추상적인 것이라면 거대한 새 예배당을 지은 교회들 의 실제적인 문제는 성도들의 헌금이 건축을 위하여 금융권에서 빌린 대출 금 이자를 지불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한 예로 목동의 제자교회는 금년 지출 예산 가운데 금융기관 대출이자 지 출만 18억원이 책정되었다. 이것은 성도들의 헌금에서 매월 지출되는 이자 만 일억 오천만원이란 의미이다. 한국의 교회들이 크고 작은 예배당 을 건축하기 위하여 금융기관에서 빌린 대 출금의 이자를 갚기 위하여 매월 지불되는 비용을 모두 합하면 분명히 상상 을 초월하는 엄청난 금액이 나올 것이다. 헌금으로 이자 갚는 비율 너무 높아 이런 상황에서 교회 개혁의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 다.
238 no image |칼빈의 편지들(2)| 리옹 교회의 형제들에게_장수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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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1 2009-11-18
리옹 교회의 형제들에게(1542년 5월) "성직을 행함에 앞서 충분히 검증되고 인정하는 과정 필요해" 개요: 카르멜파(the Carmelite) 출신 설교자를 반대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날짜 불분명. 칼빈이 같은 주제와 관련하여 파렐에게 라틴어로 보낸 편지는 날짜가 밝혀져 있다(1542년 5월 10일). 이를 통해 이 백인 수사는 개신교의 직책을 거친 적이 있고 리옹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은 리옹의 신실한 교인들에게 이 거짓 설교자를 경계시키기 위하여 편지 를 보냈다. 리옹 교회는 프랑스 교회개혁의 영광스러운 현장의 하나로 1535 년 파리에서 순교한 쟈코뱅파(an old Jacobin monk)의 한 수도승인 알렉산 더 케머스(Alexander Camus)의 설교에 기원을 두고 있다. 리옹 교회의 초기 신자들은 상인들이었는데 주로 도시의 금속 세공인들이 주 축이 되어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다. 알렉산더 케머스가 일을 시작하고 이후 일반 신자 존 파브리(John Fabri, or Le Fevre)가 뒤를 이었는데 대규모의 핍박이 나타나기 전에 피터 포늘렛(Peter Fournelet)과 클라우드 모니어 (Claude Monnier)와 같은 신실한 후계자들이 나타났다. [Hist. Eccl.], tom. 1. pages 55, 56. 칼빈은 이 편지에서 제네바에 체류한 카르멜파 출신 설교자와 면담한 내용 과 그 결과 그를 복음의 사역자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들에 대해 조심스럽 게 설명한다.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 그 설교자가 도착한 지 며칠 후, 우리는 그에게 이미 개인적으로도 말을 해 놓았고 예의와 우정의 뜻을 표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를 불러 함께 만나면 서 그의 결심이 어떠한가를 물었습니다. 그가 자신은 하나님의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왔다고 분명히 말했고, 따라서 우리는 그가 도착한 바로 첫 날에 설교를 부탁하지 않은 것에 대해 너무 기 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맥락에서 앞으 로 설교를 요청할 때까지 얼마간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면서 서두르지 못하 는 여러 가지 상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먼저, 충분히 인정된 사람이 아닌 경우 그 사 람을 성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규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이를 어 기는 것은 합법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질서와 정책을 잘 유지하고 자 한다면 그 법을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우리가 아무런 조언도 받지 않고 서둘러 그를 받아들인다면, 다른 사 람들도 같은 대우를 받고 싶어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애초에 생각 했던 것보다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셋째, 우리가 지금까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우리의 양심에 따라 일을 처리해 온 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렇게 할 자유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을 해명해주었습니다. 넷째, 그가 먼저 여러 사람의 조언을 들어보고 성숙하게 과정을 처리하는 것 이 자신을 위해서도 더 좋을 것이라고 분명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는 사 이에 성직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볼 수 있고,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굳게 마음을 다지면서 장차 민 감하고 세밀한 사안에서 신도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도록(왜냐 하면 아무 리 교육을 적게 받고 예의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까 다로울 수가 있으므로), 그가 스스로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형식과 절차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덧붙여 그를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지치게 만들려고 의도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분명히 말해 주었습니다. 반대로 그가 하나님 께 봉사할 수 있도록 검증하고 승인하는 기간을 가능한 한 짧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제안은 너무도 합리적인 것이라서 그가 잘 참작해 주리라는 것이 우 리에게는 너무나 확실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우리가 지금까지 제시한 여러 가지 근거 있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에 대한 대답으로써 확신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우선 그는 지금 자신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자신에게 경비와 마차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친구들이 있기는 해도, 자신이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 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자신이 프랑스로 돌아갈 경우 자신이 이곳에 왔었다는 것이 공적으로 알려질 것이어서 매우 소 란스러 워질 것이므로 서두를수록 더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대답을 통하여 그가 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를 뿐 아 니라 성직에 대해서도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 그가 우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딱 세 가지 점이었습니다.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자만이었습니다. 둘째, 그는 급료에 대해 지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땅의 모든 것도 그를 만 족시킬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마치 하늘에 계신 주님도 그의 자양물을 만 족시켜주시기에는 모자라 보였을 정도입니다. 셋째로 그는 너무나 무지하여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습니다. 예배 시간에 우리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 은 여러 가지 신앙 원리들을 다양하고 아름답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에서 설교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 그는 바울이 말한 바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의도적인 것도 아니고 악의에 의한 것도 아니라 단지 그가 무지했기 때문이 라고 판단했습니다. 세속적인 허영과 같은 다 른 단점들을 그냥 덮어두고 언 급하지 않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신실한 자들의 진정한 목자되시는 주님께 서 여러분들을 항상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37 no image |신학단상<30>| 법 정신과 상식의 거리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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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8 2009-11-04
법 정신과 상식의 거리 “교회는 법 준수 통해 하나님의 통치 구현하는 공동체” 법과 상식에 어긋나는 일들을 일상생활에서 자주 볼 수 있지만, 그 일들이 공적 기관이나 신뢰를 받는 집단 또는 개인에게서 발생하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교회는 세상 법보다 우위에 서 있어야 교회 공동체가 법을 지키지 않아 불법 또는 탈법 지대처럼 되어버릴 때 신뢰 를 잃고 맛 잃은 소금처럼 밖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짓밟힌다. 교회는 세 상의 법과 상식에 머물러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보다 한 수 위 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세워져가는 거룩한 공동체이다. 하지만 교회의 불법과 탈법, 비상식적 일들을 보게 되면 세상의 단체나 공공 기관보다 못한 수준의 교회처럼 보여 씁쓸함이 있다. 교회가 아무리 입으로 거룩함을 말하고 희생과 봉사와 사랑을 강조할지라도 불법과 탈법을 저지르 거 나 비상식적인 행동을 한다면 그 속에는 복음 진리의 능력이 설 자리가 없 다. 최근 서울 목동에 있는 한 교회에서 벌어진 비상식적 일들에 대한 기사를 읽 으면서 아픈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 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 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 지 못하니 불법(不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분명하 게 말씀하신다(마 7:21-23). 입으로만 법치(法治)를 말하면서 정작 자신이 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겉모 양은 그럴듯하지만 속은 썩어 냄새나는 자들이다. 교회가 가장 법을 잘 지키 며 윤리 도덕적 모범을 보이며 예언자적 공동체로 상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서 실증적으로 보여주어야 함에 도 불구하고 오히려 온갖 불법과 탈법을 일삼는다면 교회의 문을 닫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최근에 헌법재판소의 미디어관련법 결정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2009년 10월 29일 오후 2시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지난 번 국회에서 논란 끝에 본회의에서 통과된 신문법, 방송법, IP TV법 등 모 든 미디어관련법에 대하여 야당이 법안가결을 무효로 해 달라는 청구를 기각 했다. 헌법재판소는 소결론에서 IP TV법을 제외한 신문법과 방송법은 표결절차에 있어서 분명히 위법을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인 결론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합헌을 결정한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신문법과 방송 법에 위법이 있었지만 국회에서 통과된 미디어 관련법을 모두 무효로 할 정 도로 심각한 위법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야당의 청구를 기각한 것이다. 이 일을 두고 세간(世間)에서는 “... 은 불법이지만, 그 불법 과정에서 발 생한 ... 이라는 결과는 유효하다”의 형식을 빌려서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조소(嘲笑)하고 있다. 심지어 “과연 성공한 소매치기는 처벌할 수 없는 것 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사람도 있다.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을 존중해야 함에도 불구 하고 많은 사람들이 법 정신과 상식에 어긋나는 결정이라고 생각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우 리 교회의 이러 저러한 일들은 불법이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는 수용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는 것들은 없는지 살펴볼 대목이 다. 법 정신은 법에서 규정한 내용들을 성실하게 지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기에 쉽게 알 수 있다. 얼마 전 정 운찬 총리가 불을 붙인 세종시 원안 수정론과 관련하여 여야가 합의하여 결 정했고, 대통령이 수차례 약속한 것이기에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목소리 가 힘을 얻는 듯하다. 세종시와 관련하여 원칙을 고수하지 않으려는 제안들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종시가 경제적으로 자족 도시가 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원 안에 미비한 부분을 추가하여 보충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이기 때문이다. 세종시 건설에 대한 원안 수정론을 제안한 총리는 국민들을 우습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전,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공개적으로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이 국민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며 민주정치의 기본이고 상식인 데 이제는 화장실 다녀온 뒤여서 급한 것이 없다는 것처럼 공약(空約)을 남 발하고 사기극을 펼쳤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한번 약속한 것들을 그럴듯한 명분으로 너무 쉽게 스스로 파기하는 일들이 없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도 소수의 목소리가 횡포를 부리지 않아야 하고, 다수의 결정이라고 소수의 견해를 무시하면서 모든 성도가 합의한 일들을 갑 작스럽게 취소하는 일들이나 계획에 없던 일을 급하게 추진하는 태도를 버려 야 할 것이다. 이런 일에는 항상 대의명분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이런 경우 거의 대부분은 합의한 약속이라는 법 정신과 상식에 어긋나는 경우가 대부분 이다. 법 정신과 상식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 헌법재판소의 미디어관련법 결정 과 세종시 원안 수정론이 대두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을 것 같다. 교회 안 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그 말씀대로 살 것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상 식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행동을 보인다면 세상과 교회의 차이가 크게 없을 것 같다. 소수의 견해 무 시하는 일은 없기를 교회 안에서도 상식이 통하고 오히려 세상의 상식보다 차원이 더 높은 거룩 한 법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되기를 기 대한다.
236 no image |신학단상<29>| 윤리 도덕의 기준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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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3 2009-10-07
윤리 도덕의 기준 조석민 목사_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도덕 불감증 증후군 교회에서는 없어져야” 우리 사회의 윤리 도덕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윤리 도덕의 기준 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의 윤 리 도덕 기준은 법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직자 인사청문회 윤리 의식 약해져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의 윤리 도덕 기준은 우리 사회의 법을 잘 지키는 문제 와 함께 한걸음 더 나아가 삶의 원리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 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을 말씀하시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 전하라”(마 5:48)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리스도인 들의 윤리 도덕 기준이 세상의 법을 지키 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위에 살면서 얼마나 거룩함을 유지하느냐의 문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최근에 이명박 정부의 고위 공직 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를 통해서 우리 사회 의 지도층 인사들 삶의 어두운 단면이 공개되었다. 처음 이 정부의 내각 구 성 때부터 공직 후보자들의 도덕성이 문제가 되었지만, 인사청문회를 하나 의 통과의례처럼 생각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드러난 부도덕함을 그렇게 문 제 삼지 않았다. 보통 시민이라면 주민등록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위장전입’이 현 정부에서 는 고위 공직자가 되기 위한 필수 이력(履歷)처럼 되어버린 느낌이다. 국무 총리 후보자를 비롯하여 대법관 후보자나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모두 예외 없이 ‘위장전입’을 한 부도덕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인사청문회 과정에 서 드러난 고위 공직 후보자들의 위장전입 논란과 관련해 국민의 절반 가까 운 46%는 공직자의 ‘결격 사유’로 보고 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9월 14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고위 공 직 후보자들의 위장 전입에 대해 “도덕성”이 중요하기에 위장 전입은 중대 한 결격 사유라는 의견이 전체 응답자의 46.0%이며, “업무 능력”이 더 중 요하기에 위장 전입은 결정적 결격 사유가 아니라는 의견은 35.9%였다. 또 한 인사청문회의 중요한 검증 사항으로 응답자의 47.6%는 “도덕성”을 그리 고 43.9%는 “업무능력”을 꼽았다. 국가의 고위직 공무원들이 일반인들보다 특혜와 부패, 뇌물과 청탁의 유혹 에 더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고, 이해관계의 문제를 공정하게 다루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란 점에서 고위 공직자들의 도덕성과 청렴성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우리 속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이 있듯이 국민들은 정부의 고위직으로 내정된 사람들의 도덕성과 자질을 중요하게 생 각하는 것이다. 고위 공직 후보자를 선정한 청와대는 ‘위장 전입’ 정도는 큰 잘못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업무 능력을 보다 중요한 자격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 울 수 없다. 만일 윤리 도덕적으로 잘못된 고위 공직자들이 ‘능력’이 좋 아 법과 국민들을 교묘히 잘 속이며 자신들의 이해득실(利害得失) 관계만을 위해서 일한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 아무리 능력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법을 무시하며 교묘히 법망을 피하여 잘못 된 방향과 옳지 못한 길로 계속 나간다면 능력이 좀 부족하지만 도덕성과 청 렴성 있는 사람보다 더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법을 집행하는 고위 공직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저지른 불법 과 탈법이 정당화한다면 모든 국민들이 그런 위법 행위를 쉽게 본받을 것이 며, 그런 사람들의 위법이 발견되었을 때 국가는 그들을 어떻게 법으로 다스 릴 수 있을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의 위법 및 탈법 불감증과 정부에 대한 신뢰가 붕괴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된다. 국회의 인사청문회에서 발생한 일들을 생각하면서 이와 같은 청문회가 교회 나 믿음의 공동체에서 발생한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해 본다. 한 교회의 목회자와 장로 및 안수 집사들, 신학교의 교수들, 선교 단체의 책임자들이 청문회의 자리에 앉는다면 우리가 보았던 국가의 공직 후보자들보다 나은 모 습일까? 자녀들의 학교 입학을 위한다는 ‘위장 전입’의 문제부터 부동산 투기를 재 테크로 알고 있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정서 속에서 교회의 목회자들과 장 로, 안수 집사들, 신학교 교수들, 선교단체들의 책임자들은 얼마나 윤리 도 덕적으로 깨끗한 것일까? 그리스도인들의 윤리 도덕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하게 주어졌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과 우리 사회의 함량 미달 잣대로 만족하고 있다면 비 난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사회의 윤리 도덕 기준이 낮아지고 급기야 무너질지라도 그리스도인들 만은 엄격한 잣대로 자기를 재보고 삶의 방향을 올바로 잡고 나아가야 할 것 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는 말에 너도 나도 모두 비슷하 니 교회나 믿음의 공동체에서 불법과 탈법이 있을지라도 그냥 대충 적당히 넘어가자는 사고는 도덕적 파멸의 지름길임을 자각해야 한다. “맑은 물에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은 잘못된 속담인 것을 분명히 알 아야 할 것이다. 맑은 물에 물고기가 잘 살고 있고,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 람도 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우리 사회와 교회 및 믿음 공동체 가 되기를 소망한다. 높은 윤리 의식 교회가 모범 보여야 사회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는 도덕 불감증의 증후군이 교회 안에서 만 은 나타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235 no image |신학단상<28>| 화해(和解)와 상생(相生)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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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6 2009-09-17
신학단상 화해(和解)와 상생(相生)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반목을 멈추고 화해와 용서 통해 과거 정리해야” 우리 사회가 반목(反目)과 질시(嫉視), 그리고 분열 없이 건전하게 유지되 기 위해서 화해는 가장 기초적으로 필요한 덕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필요한 덕목은 ‘화해’ 화해는 가해자가 화해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화해를 요청할 때 설득력이 있고 감동이 있다. 가해자는 화해를 요청하기 전에 잘못을 시인(是 認)하고 용서를 구한 후에 화해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일은 순리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 일상의 삶이지만 어찌됐건 서로 등 을 돌린 사람들이 화해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지친 삶에 힘을 주는 것이 사실 이다. 얼마 전 김대중 전(前)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북쪽에서는 특별 조문 사 절단을 남쪽에 파견했고, 분향소 앞에는 김정일이 보낸 조화(弔花)가 놓였 다. 북쪽의 조문 사절단은 단지 조문만 한 것 이 아니라, 우여곡절 끝에 이명 박 대통령을 예방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대화를 나누고 돌아갔다. 그 동안 단절되었던 남북관계가 가뭄 끝에 내린 단비처럼 오랜만에 다시 만 나 대화의 첫 단추를 만지작거렸다는 사실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 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화해가 아니더라도 꽁꽁 얼어붙은 남북 관계에 대 화가 오고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것은 사실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단절된 관계도, 이 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가로막힌 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 신 피로 말미암아 모두 허물어졌고, 화평이 이루어졌다. 바울은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그(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 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 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기 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 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a)고 말한다.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그리스도의 피흘림이란 십자가 희생이 필요했 던 것처럼 언제나 화해는 희생을 필수 조건으로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 지만 화해를 위하여 누가 어떤 희생을 감수할 것인가? 화해와 상생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가해자의 뉘우침과 잘못의 시 인이다. 실제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용기 가 필요하다. 피해자 역시 가해자를 용서하며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려고 할 때 희생이 따르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상생을 위하여 필요한 희생이 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화해의 손짓을 보내는 암시를 최근 벌어진 몇 가지 일들 을 통해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문제는 북한이 정말 화해의 진정한 손 을 내미는 것인지가 관건이다. 하지만 모처럼 찾아온 해빙(解氷) 기회를 놓 치는 실수가 없기를 기대한다. 기회란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다. 서로 등을 돌리며 상대방을 짓밟고 살아가기 보다는 함께 손잡고 살아가는 상생의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또한 우리 사회 속에 뿌리 깊은 갈등과 반 목 질시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증진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아직도 한 가지 풀지 못한 우리 사회의 숙제인 용산참사 문제에 대하 여 정부 는 투명하고 솔직한 태도와 행동으로 상생을 이끌어내는 발상의 대전 환이 필요해 보인다. 시간이 지나 모든 사실들이 서서히 국민들의 머릿속에 서 지워지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치유가 필요한 상처를 싸매어 주며, 잘 못 꿰어진 단추는 다시 풀고 새롭게 채워주는 따듯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다. 그 어떤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용서를 구하는 얼굴에 침을 뱉지 는 못할 것이다. 만일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 침을 뱉는다면 우리 사회는 미래가 없다. 왜냐하면 용서 없이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적 사실들은 당시에 힘과 권력에 의하여 묻혀버린 것 같지만 시간 이 지나면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어나듯 다시 살아나 잘못된 일들이 다 시 정리되며 감추어진 진실은 백주(白晝)에 들어나게 되는 법이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일들을 통해서 이미 경험하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는 진실화해 위원회를 설립하여 자기 나라를 치유했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반목과 질시 를 멈추고 화해와 용서를 통하여 과거를 정리하며 함께 살 아가는 상생의 삶 으로 한 걸음 전진하기를 기대한다. 자연도 인간의 편리한 삶만을 위하여 훼 손하며 파괴하지 말고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며 모든 것에 효율성의 잣대만 들이대며 일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공존하는 사회가 되도 록 노력해야 한다. 아무 철학이 없이 효율성, 수익성만 계산하여 인간을 기능화 시키는 죄악을 저지르지 말고, 맘몬 앞에 굽실거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 는 정부의 정책이 되기를 바란다. 때때로 잘못된 정책을 시인할 줄 아는 정 부, 그리고 잘못된 것을 다시 수정하여 새롭게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그 런 정부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가? 이런 점에서 교회는 맘몬을 숭배하고 사람을 기능화하고 약자를 더 약하게, 아니 처절하리만큼 나약하게 만드는 정책에 대해서 바로 알고 올바른 선지자 적 비판의 목소리를 아끼지 말아야 하며, 행동하는 양심을 위한 최후의 보루 (堡壘)가 되어야 할 것이다. 행동하는 양심의 보루 되어야 솔직히 잘못을 시인하며 용서를 구하고, 또한 용서를 구하는 자와 진실된 마 음으로 화해하는 사회가 되어질 때 우리에게 밝은 미래가 있다.
234 no image |칼빈의 편지들(1)| 칼빈이 쓴 편지들이 갖는 목회적 차원의..장수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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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8 2009-09-17
칼빈의 편지들(1) 칼빈이 쓴 편지들이 갖는 목회적 차원의 중요성 장수민 목사_칼빈아카데미 원장 “칼빈의 서신들은 칼빈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 성경적 삶의 원리, 실천 목회 현장 생생해” 오늘날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이상한 현상이 있으나 사실 칼빈 의 서신들이야말로 여러 면에서 참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그가 취해나간 신앙적인 태도,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목사로서 의 실천 목회관을 볼 수 있다. 칼빈의 진면목을 담고 있어 칼빈에 대한 평가를 어떤 식으로 내리든 간에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 기는 현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한 사람의 목사였다. 바로 이 절대적인 사실을 전제하지 않고는 어떠한 칼빈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는 어불성설이다. 오늘날 책상 머리에 앉아 머리로만 신학을 논하는 일부 현대 신학자들이 몇몇 개의 칼 빈의 작품들에 근거 하여 칼빈을 가르쳐 주겠노라면서 나서는 모습이란 얼마나 괴이한 현상인가! 교회를 섬기는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칼빈을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가 바로 그 의 서신들이다. 칼빈은 이런 저런 상황 속에서 위기나 특별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성경적인 삶의 원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그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서 편지를 썼다. 어 떤 날에는 하루에 네 통의 편지를 쓴 경우도 있다. 그것도 온 종일의 예배와 성찬과 여 러 사람들과의 상담으로 눈코 뜰새 없이 바빴던 주일에! 그가 쓴 서신에 나타나는 사상이나 대화 또는 지침들은 구구절절이 성경의 가르침에 근 거한 것으로,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 할 수 있는 교회를 이루는 구원 방식들을 제시해준다. 그야말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실천 목회 의 현장이다. 그러므로 칼빈 연구가라면 결코 이 서신들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칼빈 서신들 다양하게 출판돼 칼빈은 임종이 임박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유익하다고 판단될 경우 자신의 서신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자로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를 지명하였다. 베자는 샤를르 드 종 비예르(Charles de Jonviller)의 보조를 받아 칼빈의 사후 11년만인 1575년에 칼 빈의 서신들을 라틴어로 출판하였다. 이후 여러 종류의 칼빈의 서신 모음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쥴러 보네(Jules Bonnet)가 2권으로 구성한 프랑스어 번역판으로 ‘칼빈의 서신, 사필본에 근거하여 편 집한 최초 모음집’(파리, 1854)과 에르멩자르(Herminjard)가 9권으로 구성한 ‘프랑스 어권 나라들의 종교 개혁자들의 서신, 역사적이고 교회개혁과 관련된 다른 서신들과 해 석에 도움이 되는 각주(explanatory notes)가 포함된 출판 모음집’(제네바, 1866-97) 등은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훗날 헨리 비버리지(Henry Beveridge)는 보네의 작품을 포함하여 이후 여러 사람이 편 집한 칼빈의 서한들을 수집하여, 날짜가 정확하지 않은 18개의 서신을 포함하여 총 686 통의 서신을 담은 서한집을 펴냈다(AGES Software: 알바니, 1998). 하지만 해설에서 의 외로 상당수의 오류를 포함하고 있어 조심스럽다. 그러나 교회개혁사에 대한 어느 정도 의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부분들을 충분히 식별할 수 있을 것이어서, 이 작품에 서 상당한 유익을 얻을 것이다. 반면 에르멩자르의 작품은 중요한 해설을 담고 있어서 아주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지만 또한 1544년 이후의 서신은 출판에 포함시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 지금 도 이따금씩 빛을 보지 못했던 칼빈의 서신들이 발견되어 출판되곤 한다. 필립 멜란히톤과 율리히 츠빙글리와 칼빈의 저서들로 구성된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 어 판의 ‘종교개혁자들의 작품 전집’(Corpus Reformatorum)은 총 101권으로 구성되 어 있는데(Brunswick, 1863-1900), 이 중에서 칼빈의 작품은 무려 59권으로 구성되어 ‘칼빈 작품 전집’(Joh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을 구성한다. 여기 서 다시 칼빈이 당대의 다양한 사람들과 주고 받은 서신이 차지하는 분량은 무려 11권 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여기에는 4,302통의 서신이 실려 있는데 칼빈의 서신만 1,300여 통에 이른다. 많은 대상들에게 보내진 서신들 칼빈은 편지쓰기의 명수였다. 실제로 어떤 신학자도 칼빈만큼 양과 능력과 관심 면에 서 필적할 만한 서신을 남기지 못했다. 이 서신들을 통하여 칼빈은 개혁된 신앙의 심오 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는 신실한 목회자로서 권 면하기도 하고, 고통받는 형제들 에게는 위로를 주고, 친구들에게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으며, 현명한 정치가로서 베 른, 사보이, 프랑스와 제네바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어려운 정치적인 문제들을 해 결하기도 한다. 그의 편지의 수신자들에는 당시의 거의 모든 개혁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멜란히톤, 부 써, 불링거, 파렐, 비레, 슐처, 파브리, 크랜머, 체크, 녹스, 베자, 베르미리, 아 라스 코, 미코니우스, 쉬트롬, 오트만, 드 팔레와 그의 부인, 노르망디 기타 등등. 그리고 각국의 군주들도 있어서 프랑스 국왕 앙리2세, 나바르의 마르게리트 여왕, 부르 봉 왕과 그의 동생 꽁데 공, 페라라의 르네 공작부인, 폴란드의 지기스문트 아우구스투 스 국왕, 팔츠의 오토 하인리히 선제후, 뷔르템베르크의 크리스토퍼 공작 등이 있다. 또한 정치인과 고위 관리들로 영국의 섭정 서머싯 공작, 폴란드의 라지비우우 공, 프랑 스의 콜리니 제독과 당들로 그리고 취리히와 베른, 바젤, 장크트갈렌, 프랑크푸르트의 관리들 기타 등등이 있었다. 또한 칼빈은 다니엘, 뒤쉬맹, 루쎌, 로제, 리셔부르의 부친 등과 개인적인 서신을 주 고 받았을 뿐 아니라 , 감옥에 갇힌 수많은 개혁신앙 고백자들과 순교자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써 보냈는데 리용의 다섯 수감자들인 드 카니 부인, 그레이, 샹베리의 수감된 학생들 등이다. 당연히 전체 교회들 앞으로 보낸 서신들도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다. 역사적 가치 높은 서신들 이처럼 칼빈의 편지 대상의 국적과 대상과 계층이 너무 다양해서 아예 당황스러울 정도 이다. 칼빈의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들이 프랑스에서 독일까지, 스위스에서 네덜란드까 지, 이탈리아에서 스코틀랜드까지, 폴란드에서 영국에 이를 정도로 다양했으며 그럴찌 라도 칼빈은 시간을 내서 성실하게 답장을 써 보냈다. 이와 같은 칼빈이 서신 교류는 그의 보편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는 답신을 통하여 한 사람의 신실한 목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한 것이요, 그가 개혁교회에 물려준 중요한 다양한 신학적 원리들을 실제로 역사 현장에서 구현해 냈던 것이다. 한 가지 에피소드를 곁들인다면 칼빈이 그의 삼총사 동역자 중의 한 사람인 비레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서신 배달부로 자신을 시키지 않은 것을 질투하는 모습이 칼빈의 눈에 들어왔다. 그 러자 칼빈은 조용히 앉아서 아무런 내용이 없지만 마치 아주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 는 것처럼 반응을 보여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을 적어 그 학생을 시켜 편지를 전달한 일 도 있었다. 이처럼 칼빈은 하찮게 여겨질 수 있는 사람 하나의 감정까지도 배려해 주 는 아주 섬세한 사람이요, 곧 하나님의 신실한 목회자였다. 작은 부분까지도 배려하고 있어 칼빈은 편지쓰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고, 그러한 작업을 통하여 교회를 실제로 섬기는 실천 목회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 칼빈의 서신 속으로의 여행 을 떠나보자.
233 no image |손에잡히는교리강좌(25)| 그리스도의 연합과 열매맺음_김수흥 교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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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2 2009-08-18
그리스도의 연합과 열매맺음 김수흥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구원의 은총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여 있어” 디이슨(Thiessen)은 주장하기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열매 맺음을 의미한 다(요15:5). 이것은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이하; 참조 롬 6:22; 7:4; 엡 5:9). 전정하는 것은 과실 생산을 증식시키려는 주님의 방법 중 하나이다” (요 15:1이하)라고 했다. 열매 맺는 것으로 보이는 신자의 삶 과실이 무엇이냐에 대해 학자들은 두 부류로 갈린다. 한 부류는 과실이라는 것이 순전히 영혼을 효과적으로 구원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존 라이스(John R. Rice)는 말하기를 크리스천의 과실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라고 한다. 라이스는 요 15:2-8절을 설명하면서 주장하기를 “이 성구가 주장하는바 크 리스천이 맺는 열매와 갈 5:22-23절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를 혼돈하지 말 라.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 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성령 자신께서 맺으시는 열매이다. 다시 말해 서 성령 자신께서 크리스천의 성품에 맺으시는 장식품들이다. 그러나 성령 의 열매와 크리스천이 맺는 열매는 다른 것이다. 크리스천이 맺는 열매는 영 혼을 구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열매가 무엇이냐에 대한 또 다른 견해는 이 열매란 영혼의 구원을 포함한 선 행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포도나무의 비밀(Secrets of Vine)이라는 책을 저술한 브루스 윌킨슨(Bruce Wilkinson)은 요 15:1-2, 5, 8을 설명하면 서 “오랫동안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 크리스천들이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 도에게로 인도하는 일반적인 부름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열매가 무엇이 냐를 놓고 예수님께서 영혼 구원하는 것이라고만 제한할 이유가 없다”고 말 한다. 윌킨슨은 계속해서 “열매는 하나님께서 값있게 평가하시는 우리의 행위들 을 말한다. 우리의 삶에서 나오는 열매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땅위에서 마땅히 받으셔야 하는 영광을 얼마나 받으시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선언하시기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 버지께서 영광 을 받으실 것이요’(요15:8)라고 하신다”고 했다. 제이 칼 레이니(J. Carl Laney)는 요 15:5을 해설하면서 말하기를 “열매의 개념은 여러 신약성경 구절에서 증거되는 대로 가양각색이다. 열매란 그리스 도와 같은 성품을 말하기도 하며(갈 5:22-23; 엡 5:8-13), 혹은 찬미로 그리 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을 포함하며(히 13:15),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공 급하는 것도 열매이며(빌 4:17), 혹은 전도를 받고 회심하는 것도 열매이고 (요 4:31-36), 혹은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교제를 말하기도 하며(고전 14:14), 혹은 크리스천의 일반적인 행위(딤전 5:9-10; 딛 2:7-10)를 칭하기 도 한다”고 주장한다. ‘열매’라는 것을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예 수님께서 요 15:7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 다. 다시 말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이라는 말은 분명히 한 가지 이상을 포 함할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열매란 선행, 즉 선한 동기, 욕구, 태도, 의 향(신령한 덕), 말, 행위,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것들, 하나님의 법에 맞는 모든 것들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한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도날드 거트리(Donald Guthrie)는 그의 신약신약에서 요한문헌을 취급하면 서 주장하기를 “예수님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고 또 그것은 그대로 이루어진다고까지 말씀 하셨다”고 했다. 도날도 거트리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 과 연합되어 있는 신자들은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으며 또 그대 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뮬러(W. A. Mueller)는 그리스도의 연합 때문에 얻어지는 풍요로운 유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과 사랑, 성찬식과 찬미, 사명과 전도, 신학과 크리스천 윤리의 풍요로운 유산을 깨닫게 해주 고 있다”고 했다. 찰스 어드만(Charles Erdman)은 요 15:1-17을 해석하면서 말하기를 “연합이 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라고 보면 분명히 열매를 맺기에 이른다...열매가 반드시 따라온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성도는 결과적으로 참 제자라는 것이 들어날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동조하여 토마스 오덴(Thomas C. Oden)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열 매 맺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구원의 모든 은총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여진다. 모든 복음적인 특권은 똑같은 근원에 속해 있다. 그 많은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셨다(엡 1:3)”고 말한다. 신자들은 신령한 복 누리고 있어야 모든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오고 모든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 안에 응집되어 있으며 그리스도를 향하여 결국은 돌아가기 마련이다.
232 no image |신학단상<27>|소통(疏通)의 부재(不在)_조석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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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7 2009-08-05
소통(疏通)의 부재(不在) “정책을 반대하는 목소리에도 관용할 수 있어야”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소통(mutual understanding)이란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하는 것” 또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소 통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막힌 것이 있거나, 뜻이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 즉 영적 죽음 을 의미한다. 소통 부재는 영적 죽음 유발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단절은 인간의 일방적인 행동이나 태도 때문인 경우 가 대부분이다. 인간의 일방적인 행동이나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죄지은 인 간의 단적인 모습일 뿐이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을 향하여 소통의 문을 열어 놓고 있지만 사람들은 열려진 그 문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일방적인 방법으 로 하나님과 소통하기를 원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부재는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 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귀 기울여 듣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인정하 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의 관계에 대하여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라고 말씀하시며 진정 한 소통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을 위하여 사람들 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그 뜻에 귀 기울일 때 소통은 이루어질 수 있다. 소통의 문제는 종교적 상황뿐 아니라 이 사회의 중요한 화두(話頭)가 되었 다. 물론 종교적 소통의 문제와 사회적 소통의 문제는 차이가 있는 것이 분 명하다. 하지만 소통이란 본래 의미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소통의 문제가 자주 입에 오르내리며 특히 ‘소 통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소통의 부재를 해결하 기 위한 정부의 진정한 노력은 보이지 않고 일방통행식의 태도만 보여주기 에 실망스럽기만 하다. 왜 이 정부는 국민들과 원활한 소통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경향신문의 최 근 설문 조사에 의하면 “우리 사회의 소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으로 “반대 의견에 대한 관용 부족 ”을 가장 많이 지적했고, 진보와 보수 세력 사이의 이념 문제도 소통을 가로막는 원인 중 하나로 대답했다. 결국 진보 와 보수 세력들의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일방주의”가 소통의 부재를 가 져오는 주요 원인이란 분석이다. 우리 사회의 소통을 가로막는 중요한 장애물 중 하나는 반대 의견에 대한 관 용 부족과 이념 문제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깊숙이 배어 있는 “승자 독식주 의” 사상이다. 우리 사회는 승자가 독식(獨食)하는 정치체제가 받아들여지 고 있고, 이런 정치체제 아래에서 소통은 미덕이 아닌 불필요하고 거추장스 러운 것이 되고 만다. 누구든지 정권을 획득하는 세력이 상대방 진영을 철저히 배제하며 편 가르기 에만 몰두할 때 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정치 현실속에서는 승리를 위한 일사불란(一絲不亂)한 소통, 즉 일방통행만이 있을 뿐이며 소통을 목메 어 부르짖는 목소리는 일방통행식 소통속에 묻혀버린다. 이와 같은 일방 통행식 소통 현상은 권위주의와 맞물려 힘을 얻으며, 소통 의 부재를 키우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이런 현상이 현재 우리 정치 사회 현실에 나타나고 있어서 답답하기만 하다. 소통의 부재 를 체감(體感)하며 진정한 소통을 원하는 국민들과 권위주의에 뿌리내린 일 방 통행식 소통에 익숙한 정부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통의 부재는 이 나라의 정치 사회 현실 속에서 뿐 아니라 이제는 교회 안 에서도 예전보다 드물지만 쉽게 볼 수 있어서 안타깝다. 목회자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귄위를 입으로 말하지만 자신의 권위를 더욱 드러내며 일방 적인 태도로 성도들을 대할 때 이미 그 교회에서 목회자와 성도들의 소통은 단절되고 일방통행만 있을 뿐이다. 소통의 부재를 해결하지 못할 때 소통을 위한 두 당사자의 갈등은 깊어지고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소통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반대 의견에 귀 기울이는 관용이다. 어떤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만이 정 답이라고 주장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듣지 않고 배척할 때 소통은 단절되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교회 안의 다양한 목소리를 진심으로 들어야 하고, 더욱이 그 모 든 다양한 목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을 때 소통 은 시작될 수 있다. 정치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정답이 없는 것이 어쩌 면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서로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고집하며 반대 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 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다. 소통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는 국민들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어 야 하며 현 정부의 정책을 반대하는 목소리에도 관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 다. 반대 의견에 대한 관용 부족의 원인은 자신이 없고 자존감이 약할 때 자 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소통의 부재를 가져오는 권위주의적 태도는 자신의 약점과 단점에 대한 비판 을 수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이 다. 권위주의적 태도는 소통을 위한 독약이다. 승자독식주의 태도 역시 진정 한 소통을 위하여 청산해야 할 우리 정치의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소통의 부재를 해소하기 위하여 상대방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 울일 필요가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 일방통행식 소통과 권위 주의적 태도는 사람들이 원하는 원활한 소통을 가로막을 뿐이다. 더 이상 이 땅에서 편 가르기로 소통을 막는 일이 없기를 소망한다. 권위주의적 태도가 소통 방해해 이 나라 의 정치 사회속에서 또한 교회에서 원활한 소통으로 막힌 담이 허물 어지고 숨통이 트여서 두 팔을 하늘 높이 뻗어 올리는 계절이 속히 오기를 기대한다.
231 no image |손에잡히는교리강좌(24)|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영원한 안전_김수흥 교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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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6 2009-07-22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영원한 안전(Eternal security)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는 신자들 미래 보증되어 있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져다 주는 복된 유익은 성도들이 누리는 ‘영원한 안 전’에서 찾을 수 있다. 아무도 하나님 사랑에서 떼어낼 수 없어 헨리 디이슨은 주장하기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원한 안전을 의미한다. 세상에 아무 것도 믿는 자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디이슨은 성경적 신학적, 교회사적 문헌(Biblical, Theological, and Ecclesiastical Literature)에서도 역시 주장하기를 연합 의 열매들 중 하나는 “안전”(요 15장)이라고 강조한다. 나이약 대학의 성경교수 엘든 우드칵(Woodcock)은 성령의 인침에 대해 다음 과 같이 논술하고 있다. “성령의 인침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를 보증하고 있고 또 보 호를 보증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내주하기를 시작 하실 때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근거하여 시작하시 고 또 성령에 의하여 완성하시는 이 인침의 한 결과로서 성도의 구원이 이루 어진다. 하나님께서 소유하시는 것을 하나님은 보호하신다. 믿는 자들은 하 나님의 신성한 재산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신자들을 보호하시되 그들을 완 전히 소유하시는 종말까지 보호하신다. 그 결과 믿는 자들은 온전히 하나님 과의 관계에서 안전하다.” 우드칵은 믿는 사람들의 안전에 대하여 “바울은 내주하시는 성령을 신자의 보증이라고 기술한다. 상업세계에서 보증이라는 것은 상거래를 확보하기 위 해 지불하는 계약금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계약금은 하나님에게는 불필요 한 것이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자체가 약속하신 것을 확실히 보증하기 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믿는 신자에게 하나님이 분명히 그의 구원의 목적을 이룰 것이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상업적 표현을 사용했다. 이 말 은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의 프로그램 안에 있는 신자들의 미래가 보증되 어 있고 또 절대적으로 영원히 안 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강조 한다. 윌리엄 헨드릭슨은 말하기를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 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킬 수가 없다고 했다. “분명히 그리스도는 우리 를 사랑하시되 아무도 그리고 아무 것도 그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복자 이상이다. 우리는 단지 정복자만 아니라 우리를 대적하는 힘들은 무력화되고 무능하게 되어 우리는 정복자 이 상이다. 그래서 죽음도 삶도 천사도 현재일이나 장래일도 높음이나 깊음이 나 우리와 관계있는 모든 피조물도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 는 하나님의 사랑, 결코 아무도 그리고 아무 것도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는 사랑이 계시되고 있다”고 극명하게 주장한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알 때 시험으로 부터 보호를 받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남녀들 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세상과 육체의 시험과 유혹에 대항하여 싸울만한 가장 강력한 무기를 소유하고 있 는 것이다.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 어 있는데 감히 어찌 이런 시험에 질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신자들의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의 사랑 이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의 영원한 안전은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지식을 가질 때 가장 극명하게 증명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신 자들은 시험과 유혹 앞에서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230 no image |신학단상<26>| 시간당 최저임금 4,110원의 의미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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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8 2009-07-08
신학단상 시간당 최저임금 4,110원의 의미 “근로 조건 환경 개선에 교회가 앞장서야”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법(最低賃金法)을 제정(制定) 공포한 것은 1986년 12 월 31일이며, 이 제도를 실시한 것은 1988년 1월 1일부터이다. 그 이전까지 최저임금이란 1953년에 제정된 근로기준법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지만 당 시 우리 경제가 최저임금제도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이 규정을 운용하지 않았다. 저임금 근로자 256만 6천명 정부는 70년대 중반부터 지나치게 낮은 임금을 해소하기 위하여 행정지도를 했으나 저임금(低賃金)이 없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저임금의 제도적인 해소 와 근로자에게 일정한 수준 이상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주기 위하여 최저임 금제도의 도입이 불가피해졌던 것이다. 현재 최저임금의 법적 효력은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일률적이고 통일적 으로 적용된다. 외국인 근로자라 하여 예외가 되지 않으 며, 연소근로자 또는 고령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만 예외적인 경우 는 법으로 명시해 놓았다. 금년에 최저임금심의위원회는 경영계가 제시한 올해보다 5.8% 줄어든 3,770 원의 삭감안과 노동계가 제시한 올해보다 28.7% 인상된 5,150원의 인상안을 두고 수차례의 토론이 있었지만 아무 결정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 2009년 6 월 29일 오후 7시부터 30일 새벽까지 전원회의를 열어 공익위원 조정안에 대 한 투표를 통해 2010년 최저임금을 시간급 4,110원으로 결정했다. 노동부 장관은 이날 결정된 안을 7월에 고시해 근로자 대표와 사용자 대표 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기간을 10일 이상 준 후, 8월 5일까지 내년도 최 저임금을 확정한다. 최저임금심의위원회의 이런 결정은 올해 말까지 적용되 는 최저임금인 시간당 4천원보다 2.75% 인상되는 것으로, 외환위기를 겪었 던 1998년 2.7% 이후 가장 낮은 인상률이다. 최저임금위원회는 2010년 최저임금이 인상됨에 따라 전체 근로자의 50%가 훨 씬 넘는 저임금 근로자 256만 6천명이 새로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추산 했다. 이번 에 결정된 시간당 최저임금 4,110원은 월 단위로 환산하면 주 40 시간(월 209시간) 사업장에서 일하는 근로자에게 월급 85만 8천 990원을 의 미하고, 주 44시간(월 226시간)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월급 92만 8천 860원을 뜻한다. 야고보 사도는 말하기를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 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 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 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약 5:1-5)라고 한다. 이 말씀에 의하면 당시 밭을 가진 부자 지주(地主)가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 게 삯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오늘날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임금을 지불하지 않았거나 착취한 것에 해당한다.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 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다.’ 는 것은 근로자의 임금을 착취하고 땅에서 사치와 방종으로 자신만 살찌우 는 부자들에게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는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지 는 이유를 제공한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사업을 하며 근로자를 고용한 사 업주들이 귀담아 듣고 깊이 생각해야 할 말씀이다. 우리나라에서 근로자의 생계를 보호하기 위하여 시간당 최저임금제도를 도입 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최저임금이 근로 자와 그 가족이 행복을 누리며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 니다. 최저임금제도가 사용자의 자유권을 착취하는 법이라며 사업주의 사유재산을 국가가 약탈한다는 말 같지도 않는 헛소리를 하면서 최저임금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인간들이 우리 사회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 정부는 2009년 3월 27일 한승수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가정책조정회의에 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향후 2년간 한시적인 규제유예 조치를 취하겠다고 하면서, 최저임금제도 2년간 유예 검토를 거론했다. 정부의 최저임금제도 유예 또는 폐지 검토 발언은 이명박 정권의 친재벌(親 財閥), 반서민(反庶民) 성격 을 다시 한 번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경 제위기 때문에 최저임금제도 유예를 검토한다는 발상 자체가 한심하다. 이와는 달리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선거 때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발표한 ‘20개 주요 경제 이슈’ 중 하나로 ‘2011년까지 최저임금 시간당 9.5달러 인상(2008년 현재 6.55달러)’ 방침을 밝힌 바 있다. 2010년도의 시간당 최저임금 4,110원의 결정과 함께 목회자들은 교회에 출석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상황과 근로 조건 속에서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 지 깊이 인식하고 그들을 돌보며 섬겨야 할 것이다. 자신의 교회 안에 성도인 사업주가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으로 근로자들을 고용하고 있어서 근로자들이 낮은 임금의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가르칠 필요 가 있다. 자신의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 중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모 주식 회사처럼 무더기로 근로자들을 해고했던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도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교회 안의 성도 가운데 사업주가 근로자들의 임금을 착취 하여 이익을 남긴 돈으로 십일조와 다른 여러 종류의 헌금을 하지 않도록 가 르칠 필요가 있다. 최저임금제도 속에서 결정된 4,11 0원의 의미를 깊이 인식하며 이 땅에서 근 로자가 가장 기본적인 최저의 생활이라도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일에 교 회도 함께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터무니없이 낮은 최 저임금으로 자기 개발은커녕 당장 급하게 먹고 사는 것만 해결하면 된다는 식의 최저임금제도에 대한 문제도 깊이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기본적 생활 유지할 수 있어야 희망을 갖게 하는 최저임금제도가 아닌 당장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할 수 있 는 최저임금제도는 올바른 제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229 no image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23>|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 및 성화_김수흥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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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44 2009-06-11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 및 성화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신자의 연합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결과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스트롱(A. H. Strong)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신자에게 적법한 신 분이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칭의에 이르게 되는 성령 세례 디이슨(Henry Thiessen)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는 우리의 죄가 그리 스도에게 전가되고 그의 의(righteousness)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 리고 그런 결과들 안에 모든 은총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루이스 쉐이퍼 (Lewis Sperry Chafer)는 “신자가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믿는 단순한 조 건으로 신자에게 의(義)가 전가된다”고 말하고 있다. 로버트 팀 3세(Robert B. Thieme III)는 연합에 의한 칭의를 복음 신학협회 지에 제출한 그의 글에서 다른 방법으로 논술하고 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의(義)의 소유와 그리스도의 죽음 과 부활에서 연합하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의 내주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에릭슨(Erickson)은 그리스도와의 법정적인(judicial) 연합 때문에 신자는 의롭다고 여겨진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우리의 삶 을 위하여 몇 가지 결과가 뒤따라온다. 첫째로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다 … 우리의 법정적인 연합 때문에 우리는 법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눈앞에 서 올바른 신분을 얻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처럼 의롭 다”고 언명한다. 제임스 오르(James Orr)도 역시 신자의 칭의에 대하여 그의 의견을 말했다. “칭의는 용서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이것은 단지 사면이 아니 다. 이것은 죄인을 용서하되 옳다는 논거에서(on a righteous basis) 용서하 는 것이다. 그러면 이 옳다는 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를 위 하여 만들어주신 온전한 속죄이다. 죄인은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된 중에 서 실제로 죄가 없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선언을 받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는 성화의 삶을 살게 된다. 쉐이퍼 (Chafer)는 말하기를 “신자의 최초의 성화(A positional sanctification) 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로버트 팀 3세(Robert B. Thieme III)는 주장하기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최 초의 성화라고 일컬어진다고 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 아마도 최초 의 성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최초의 성화는 믿는 자로 하여금 예수 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셨을 때 시작된 생명의 새로운 질서를 소유한 한 지 체로 만드는 것이다(롬6:4; 고후 5:11)”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한 최초의 성화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 다. “성령 세례를 통하여 획득된 ‘새로운 생명’(newness of life)은 인간 의 선악을 산출해내지 않는다. 위치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환 경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의견에 동조하여 스트롱(A. H. Strong)은 “그리스도와 연합되면 믿는 자 는 계속해서 첫째 영혼을 위하여 그리고 둘째로 육체를 위하여 변화의 힘을 공급받는다 … 이 계속되는 영향이 현재의 삶에 미치는 한 우리는 그것을 성 화라고 부른다”라고 했다. 토마스 오덴(Thomas C. Oden)은 연합을 죄에 대한 죽음과 세상에 대한 죽음 과 연관 짖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 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내주하는 교제는 도덕적 결과를 가 져오는 법인데 바로 죄에 대해 죽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 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 리스도와의 연합은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 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뮬러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거룩한 삶을 위한 하나의 명료한 신호가 된다 고 말한다. 그는 “믿는 자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의 교리는 시험 중 에 처한 신자들에게 영원한 힘의 근원이 되며 또 언제나 거룩한 삶을 위한, 명쾌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이고 또 우리 주님과의 더 가까운 관계를 이루 게 하는 소환장이다”라고 말한다. 월터 마샬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거룩한 삶을 이룩한다고 말한다. “우리 는 그리스도로부터 새로운 거룩한 성품을 전수받아서 거룩한 삶을 살게 된 다”고 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거룩한 삶을 가져오며 또 영혼과 육신의 영광스러운 영원한 삶을 가져온다. 칭의와 더불어 성화의 길 들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세례 받아 연합되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 면 틀림없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게 되고 또 장차 영육간의 영광스러운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228 no image |신학단상(25)| 그리스도인 렌즈로 본 한국 민주주의_조석민 교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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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7 2009-06-11
신학단상 그리스도인 렌즈로 본 한국 민주주의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교수 “옳바른 판단만이 비민주적 요소 제거할 수 있어” 고(故) 노무현 제16대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 에 대한 염려와 관심이 봇물터지듯 각처에서 시국선언(時局宣言)으로 나타나 고 있다. 민주주의 후퇴 염려 커지고 있어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시작으로 중앙대 교수들 및 각 대학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교수들의 시국선언에서 빠지지 않 는 항목은 한국 민주주의 후퇴를 언급하며 이명박 정부가 집회와 결사의 자 유를 제한하지 않아야 한다는 목소리이다. 한국 민주주의 후퇴를 염려하는 시국선언은 교수들뿐 아니라 문인들, 종교계 와 지식인들, 각 대학의 학생대표들, 등 점차 다양한 단체들로 들불 번지듯 확산되고 있다. 이런 시국선언의 혼미한 정국 현상에 대하여 오히려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비 난하면 서 이 선언에 동참한 교수들의 수가 전체 숫자에 비하여 극히 적은 숫 자이기에 대표성이 없다고 폄하(貶下)하거나, 그들이 진보 개혁 성향의 인사 들뿐이라며 색깔론 또는 이념 대립의 렌즈로 보려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에 전국 대학의 법학 교수 165명이 ‘촛불 재판’ 개입 파문으로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 신영철 대법관에 대하여 국회의 탄핵소추권 발동을 촉구하 는 성명을 냈다. 법학 교수들이 이런 성명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법 관의 재판 독립권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보루(堡壘)이며 요체(要諦)이기에 자칫 노무현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묻혀버릴 위기에 처한 신 대법관 의 사건에 대하여 문제를 분명히 제기한 것이다. 성명을 발표한 법학 교수들은 신 대법관의 ‘촛불 재판’ 개입을 한국 자유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분명히 인식하며 법학 교과서에 있는 내용이 무시되는 현 시국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요소인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우려할 만한 수위에 놓 여있는 현실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하여 덕수궁 앞에 시민들이 자발 적으로 차려놓은 분향소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접근하지 못 하도록 경찰이 차 벽을 설치한 일이나, 서울 광장을 차벽으로 막아 놓은 사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런 일련의 현상은 이명박 정부가 시작된 이래 한국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 민주주의의 현 상황을 바라보 는 시각은 일반 시민들과 크게 다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나라 안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며, 자유 민주주의 정치 체제(體制) 아래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어울려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너 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 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 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 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9-10)고 말한 것이다. 물론 성경은 민주주의에 대하여 명확한 언급이 없고, 그리스도인은 자유 민 주주의가 반드시 절대적 으로 올바른 정치 제도이기에 지지하는 것이 아니 라, 다른 여러 정치 대안보다 현실적으로 가장 합리적이며 타당한 정치사상 이고 이념이기에 동의할 뿐이다. 최근 자유민주주의 정치사상과 연계하여 민주적 운영을 토대로 새로운 교회 정치 체제를 표방(標榜)하면서 시작된 작은 교회들이 있다. 이들은 교회가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믿고 성도들의 적극적 참여와 모 든 교회의 운영에 있어서 민주적 절차를 존중하며 현존하는 교회들의 비민주 적 요소와 관련된 부정적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물론 교회가 잘못된 부분은 항상 지적 받아야 하고, 개혁된 교회도 개혁되어 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만 민주주의 정치 이념을 교회에 그대로 적용 할 경우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모습에서 변질될 우려가 있다. 교회가 민주 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개념을 자칫 정치사상과 이념이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한다면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 다. 특히 민주적 교회 운영 및 성도의 참여를 다수결의 원칙과 이에 따른 여러 민주적 요소를 교회에 단순히 적용하면 교회는 정치 집단이 될 수 있을지 몰 라도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모습이 아닐 수 있어서 심히 염려된다. 민주적 인 교회 운영을 토대로 시작되는 교회 현상은 현재 한국 교회가 성도들의 의 견을 무시하는 목회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지극히 독단적이며 상식에도 어 긋난 교회 운영 때문임을 반증한다. 교회가 민주적인 의사 결정의 한 방법인 다수결의 원칙도 포용하지만, 다수 의 견해가 하나님의 진리를 무시하거나 위배될 경우 다수의 견해일지라도 따 르지 않아야 하고 오히려 소수의 견해가 진리를 드러낸다면 그것을 따라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인이 현재의 한국 민주주의를 바라볼 때 우려하지 않는다면 민주주 의 이념과 그 요소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현재의 시국선언 상황을 올바로 인 식하지 못한 경우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정치 상황 속에서 정치적 대안으로 민주주의 정부를 지지하는 것이라면 법학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자유민주주의 요소들이 무시되 지 않도록 현재의 상황을 함께 직시하며 내가 살아가는 문제로 인식할 필요 가 있다. 자유민주주의 요소들 존중돼야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시각으로 자유민 주주의를 인식하며 현재의 상황을 깊 이 인식할 때 교회의 비민주적 요소도 제거될 가능성이 있고, 이 나라를 위 한 기도와 이에 따른 적절한 행동도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227 no image |반듯하게성경읽기(5)| ‘하나님 문지기’_김영철 목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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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1 2009-06-11
반듯하게성경읽기 김영철 목사_미문교회 ‘하나님 문지기’(시 84:1-12)의 의미 “우리의 중심이 주님을 의지하고 있는가 깊이 생각해야” 시편 84편에서는 하나님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 와’, ‘나의 왕’, ‘방패’, ‘하나님’, ‘나의 하나님’ 등 이렇게 여 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묘사 나타나 그런데 이 시인은 어떻게 다른 곳의 천(千) 날과 이곳에서의 하루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이는 그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 고 그분의 어떠하심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 는 중심적인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여호와는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시 84:11). 여기서 ‘정직히 행한다’는 말은 ‘솔직하게’라는 뜻이라기보다 는 정말 전심(全心)으로 그분 앞에 서 행하는 것, 또 다른 말로 말하면 주께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시 84:12). 이처럼 여호와를 전심으로 의지하는 자에게는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좋은 것 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으로 알기에 그런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에 들어 가지 못하고 밖에서 밤을 새우면서 문을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다 른 곳에서 천 날을 지내는 것보다 낫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84편 10절은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저 막연히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라는 말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자세히 직역 (直譯)하면 이런 말입니다. “내가 문지기로 있기로 선택하였습니다(결정하 였습니다).” 이렇듯 자신의 다짐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확히 말해 서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도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기로 결정한 이 유는 무엇입니까? 주님계신 곳에서 주님을 뵙고 있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천 날을 지내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이 시편에서 묘사된 대로의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 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이론적으로 알뿐 아니라 정말 실제로 도 그렇게 의지하는 것인가? 그분을 순전히 의지하는 것인가? 하는 점을 생 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 시편을 기록한 시인은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그분이 다름 아닌 ‘나 의 왕 나의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그분 앞에서 비록 좀 멀리 떨어져 있는 문지기로라도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떠합니까? 그리고 덧붙이자면 ‘여호와의 장막’은 그분이 계신 곳을 의미하는데 신약 시대에 속한 우리는 참으로 그분이 계신 곳의 문간에 서서 기웃대는 것이 아 니라 그분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와 더불어 사는 삶을 누리는 것입니 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삶이 좋기 때문에 감격해 하고 고마워하기보다는 여기서 피해 도망가든지 아니면 ‘이렇게 발을 들여놓지 말걸’ 하고 후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문제가 생길까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 그분 안에서 모 든 것을 얻고 그분을 의지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 문일까요? 아니면 안다는 것이 단순히 이론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일까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눈물 골짜기”를 지 날 때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 믿게 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 니다. ‘왜 나를, 예수님 믿는 것이 내 힘으로가 아니라는데 왜 나를 부르셔 서 이렇게 힘들게 하시나’ 하면서 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정말 천사들도 귀히 여기고 사모할 만한 그런 행복 가운데, 복됨 가운데 있어도 전혀 그것을 맛 보거나 느끼거나 만족하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시 84:5), 그리고 이 렇게 순례의 길을 가는 자, 그것을 시편 기록자는 12절에서 한 마디로 “주 께 의지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과연 주님을 의지합니까? 아니면 무 엇을 의지합니까? 그저 결국에는 하나님 자신의 명예와 명성 때문에 우리를 버리지는 않으실 것이라는 그것 하나는 믿을 수 있고 그 나머지, 즉 우리가 거지가 되어 빌어먹든지 처박히든지 그저 다 내버려두실 것이라고 생각되는 하나님이라면 그분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에게서 모든 것을 얻 고,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살기를 원 하십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진정으 로 좋은 것을 많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 즉 ‘너희가 악한 아비라 할지라도 자식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 을 주겠느냐?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어찌하시겠느냐?’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머리 속에 그려 놓고 있는 하나님은 도대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이 십니까? 혹시 여러분의 필요에 따라 고무풍선 불듯이 늘렸다, 줄였다 하는 그런 하나님입니까? 좀 과하게 표현해서 우리 삶의 상황이 전개될 때 모든 희망이 사라진 절망 가운데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 다시 결정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바로 이것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자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할 수 있 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거든 ‘주를 의지한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많 은 사람들이 실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행함의 잘잘못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의 중심이 주님을 의지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움과 온갖 역경 가운 데서도 주 께서 주시는 이른 비와 모든 은택과 좋은 것을 누리기를 바랍니 다. 그래서 그분이 정말로 나의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외칠 수 있는 기쁨을 가슴에 간직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볼 수 있어야 우리들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자녀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 니하고 주시는 하나님. 그분이 비록 보이시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분을 늘 우 리 눈앞에 뵙고 살아갑니다. 그런 하나님을 볼 수 있음을 감사하면서 우리 의 평생을 살기를 소원합니다.
226 no image |신학단상<24>| 집 없는 서민들의 가정의 달_조석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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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7 2009-05-13
신학단상 집 없는 서민들의 가정의 달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새로운 주택 정책이 오히려 가슴 쓰리게 해” 5월은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부부의 날(21일)이 있는 가정의 달이 다. 먼저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께 감사하며, 장성한 남녀가 만나 부부로 한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달이 다. 가정의 달에 날아든 낭보같은 소식 하지만 감사에 앞서 가정의 달에 집 없는 서민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질 것 만 같아 걱정이다. 현재 마땅히 살 곳이 없어서 노숙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 이 아닐지라도 전셋집 또는 월세 집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가족들은 늘 말할 수 없는 불안과 피곤함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주택 서민들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알기에 말로 표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억지로라도 잊 어버리고 하루하루 현재의 형편에 맞추어 만족하며 살아갈 뿐이다. 물론 가정은 집이 없 어도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한 가족이 맘 편히 살 수 있는 자신들의 공간이 없는 설음은 겪어 보지 않으면 쉽게 말할 수 없 다. 그나마 전셋집 또는 월세 집에 살 수 있는 형편이라면 길거리에서 노숙 하는 신세가 아니기에 더 이상 불평하지 말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십 수 년을 온 가족이 고생하며 돈을 모아 보지만 하루가 달리 치솟 는 집값을 따라 잡을 수 없어서 평생 자기 공간을 마련할 수 없는 상황이라 면 불평 정도가 아니라 절망감에 휩싸여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얼마 전에 우리 사회의 무주택 서민들을 위한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 하여 새로운 주택청약 제도를 발표하였다. 다시 말하면 국토해양부가 통장 하나로 공공주택뿐 아니라 민영주택도 청약할 수 있는 새로운 ‘주택청약종 합저축’ 제도를 발표한 것이다. 주택청약종합저축은 기존의 청약저축, 청약예금, 청약부금을 모두 합해 놓 은 것으로 문자 그대로 종합저축의 성격을 띤다. 하지만 기존의 청약저축, 청약예금, 청약부금 제도는 그대로 유지되기에 결국 신구 통장이 공존하게 된 셈이다. 현재 중소형 공공주택 청약은 청약저축으로만 할 수 있다. 청약예금과 청약 부금으로는 중소형 규모 공공주택을 청약할 수 없다. 하지만 주택청약종합저 축은 기존의 제도와 달리 공공주택 및 민영주택에 모두 청약할 수 있다. 새로운 제도인 주택청약종합저축은 주택을 보유한 사람도 가입할 수 있다. 이전에는 집을 팔아야 청약저축에 다시 가입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미리 주 택청약종합저축에 가입한 뒤 나중에 집을 팔면 된다. 결국 주택청약종합저축에 가입한 사람들은 인기 있는 공공주택을 청약할 때 매우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게 된 셈이다. 더욱이 새로운 제도는 민법상 미 성년자(만 20살 미만)도 가입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나라에 태어나서 주민등록에 등재돼 있으면 된다. 물론 미성년자는 통장에 가입만 할 수 있 을 뿐, 성년이 될 때까지 청약은 할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 정부가 홍보한 대로 참 편리한 제도이며 무주택 서민들이 주 택을 마련할 수 있는 좋은 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택청약종합저축은 무 주택 서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제도일 수밖에 없어 보인 다. 이제는 이 땅의 가진 자들이 자기의 자녀들에게 미성년 때부터 합법적으 로 증여세를 내지 않고 주택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결과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제도인 주택청약종합저축은 무주택 서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가 입을 제한하지도 않았고, 한 세대에 한 사람만 가입하도록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린이날 다음 날인 지난 6일 주택청약 만능통장으로 일컬어지는 주 택청약종합저축이 출시되자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신한, 하나, 기업 은행 및 농협에 몰려들었다. 자기 집이 있는 부자들은 그들이 소유한 돈으로 그 가족 의 젖먹이를 포함하여 모든 가족 구성원이 이 새로운 주택청약종합저축에 가 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계에 따르면 시중의 다섯 은행이 5월 4일까지 받은 가입예약자 수는 이 미 200만 명을 넘은 것으로 추정됐다. 이제 가진 자들에게 민법상 성인이 된 자녀들의 이름으로 주택을 구입하고 그 값이 오르면 다시 팔아 양도차익 을 챙길 수 있는 부동산 투기의 새로운 장이 마련된 것이다. 정부는 얼마 전 에 부자들을 위한 종부세 감세 조치도 이미 시행하였고, 이것도 모자라서 양 도세 중과 폐지와 다주택자 양도세 인하를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주택 마련을 위한 새로운 제도 속에서 서민들이 아파트에 당첨되기란 더욱 어렵게 될 것이다. 주택청약종합저축에 가입한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경 쟁률이 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서민들은 높은 경쟁률 속에서 어렵 사리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어도 엄청난 돈이 필요하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 는 실정이다. 정부의 새로운 제도인 주택청약종합저축 출시 소식이 가정의 달을 맞이한 무 주택 서민들에게 더욱 가슴 쓰라린 달이 될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자신 들이 맘 편히 살아갈 공간이 없어 온 가족이 전셋집 또는 월세 집을 전전하 며 마음 졸이고 살아갈지라도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께 감사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에 눈물이 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 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 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 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레 25:35-37)고 말씀하신 다. 서민들 부담 줄이는 정책 펼쳐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무주택 서민들이 함께 웃으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먼저 ‘부동산 투기’라는 괴물에 대항하여 피 흘리기까지 투쟁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25 no image |신학단상<23>| 생태 환경 보존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역할_조석민 목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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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1 2009-04-01
신학단상 생태 환경 보존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역할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생태 문제는 함께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생존 문제” 지구온난화의 문제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이상 낯선 주제 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나라가 생태 환경 보존을 위하여 목청 을 높이며 대안을 내놓고 있다. 지구온난화 문제 갈수록 심각해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최신 위성자료를 근거로 북극 빙하의 전체 부피가 4년 전보다 절반 수준으로 감소한 사실을 근거로 북극 빙하가 5년 내에 다 녹을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2014년 이후에 북극 빙하를 다시 볼 수 없다. 이와 같은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감지되고 있다. 3월 24일 통계청이 발표한 ‘지구온난화에 따른 농어업 생산 변화’에 의하면 한 반도 연해에서 냉수성 어족인 명태와 도루묵은 사라지고 온수성 어족인 오징 어와 멸치의 생산량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아 열대 기후로 변화되면서 온대 과일인 사과의 재배 면적이 줄어드는 추세라 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생태 환경 보존 문제는 이미 나 자신뿐 아니라 함 께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생존 문제이기도 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생태 환 경 보존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도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임 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무분별한 국토 개발과 개간을 경제 살리기라는 미명아래 자 행하지 않도록 그릇된 경제 인식을 불식시키는 일에 그리스도인도 함께 힘써 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경제적 이득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 속에서 생태 공간을 훼손(毁損)하지 않고 자신과 그 자 손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일은 생태 환경 보존이 이 땅에서 호흡하며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 의 역할 중 하나라는 인식에서 출발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삶의 터전인 자연 속의 생태 환경을 훼손하는 일은 큰 죄악 중 하나임을 알 아야 한다. 생태 환경이 파괴되어 생물이 존재할 수 없는 터전 위에 인간 또 한 살아갈 수 없음을 명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극적 종말을 맞이할 수밖 에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 하신 후에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 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주셔서 먹을 거리가 되게 하셨다고 가 르친다(창 1:29). 하지만 처음 사람 아담이 죄를 지어 땅은 저주를 받아 가 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창 3:17-19). 이것은 인 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자연이 훼손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노아 홍수 후에 다시 사람들에게 새로운 자연 을 주시며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복을 주셨다(창 9:1-3).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새롭게 주신 이 자연을 보존하며 살아가는 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 잘못 된 생활 습관을 버리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며, 그 어떤 종류의 생태 환 경 파괴의 시도에 분명히 반대할 수 있어야 한다. 생태 환경 보존은 결코 인간의 안전한 삶 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 도 더불어 살아가기 위함이다. 그것은 인간과 함께 이 땅에 살아가는 생물들 이 하나 둘씩 자연 생태 파괴로 죽어갈 때 인간만이 홀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생태 환경 보존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역할은 아주 사소한 것 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삶에서 환경오염을 최대한 막기 위하여 노력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교회 공동체의 삶으로 옮겨가는 것 이며, 내가 일하는 직장과 터전까지 그 범위를 넓혀 가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생태 환경을 바라보는 의식이 변화되고 생활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더욱이 생태 환경 보존을 위한 노력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와 함께 삶으로 드리는 예배와 같은 중요한 의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생태 환경 보존이라는 시각으로 우리 주변의 일들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인으 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서해와 한강의 물길을 잇는 경인운하 수로 연결 공사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물론 경인운하 공사가 3월 25일 시작된 것이라고 하지만 굴포천 방수로 공사 r 는 이미 그 이전부터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경인운하라는 이름아래 그 동안 진행되었던 모든 일이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성 논란과 함께 환경단체의 반대 및 지역 주민의 줄기찬 찬반 토론에도 불구하고 경인운하는 결국 착공된 것이다. 정부의 4대강 살리기 사업과 함께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길고 짧은 운하들 이 각 지역에서 만들어져 이 작은 땅덩어리를 갈라놓을지 알 수 없다. 하지 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에 먼저 그 무엇보다 생태 환경 보존과 관련해서 관심을 갖고 필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생태보존 환경 위해 최선 다해야 운하의 문제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이 땅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생태 환 경 파괴와 관련된 일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간구하며, 이 땅의 생명을 사랑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교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먼저 생태 환경 보존을 위하여 앞장서야 할 것이다.
224 no image |반듯하게성경읽기(4)|‘불뱀과 놋뱀’(민 21:4-9)의 의미_김영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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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58 2009-03-18
반듯하게성경읽기 ‘불뱀과 놋뱀’(민 21:4-9)의 의미 김영철 목사_미문교회 “놋뱀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사건” 본문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여 불뱀에게 물린 자가 그 뱀의 모형을 보고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아는 것 만으로 그 의미가 저절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내용만으로는 의미까지 알지 못해 우리는 이 내용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 내 놓으신 계시(啓示)다’라는 입장에서 정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 고 이것은 마치 금이 들어 있는 원석(原石)에서 금을 추출하는 작업에 비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올바로 회개한 백성들을 즉각 치유하시지 않고 뱀의 모형을 만 들어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살아나도록 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광야에서 40년 간 그들에게 만나를 먹이심은 그들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 나 그들은 오히려 만나에 대해 혐오하고 그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습니 다. 이것은 그들이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전혀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그러한 의도를 멸시해 버린 자들을 심판하시면 서 동시에 그러한 의도를 깨달아 믿는 자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체험(體驗)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죽음을 코 앞에 둔 사람에게는 사실 아무런 소용이 없는 ‘뱀의 모형인 놋뱀을 바라 보는 행동’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 모형 뱀에게서 어떤 치유(治癒)의 마력(魔力)이 나올 것을 기대하 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보면 살리라” 하신 여호와의 말씀과 그분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요구한 명령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자를 살리신, 즉 생명을 주신 이 놀라운 일은 단 지 그 옛날 그 시대에만 가능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에 기록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역사 가운데서 어떻게 일해 나가시는 지 그 원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변치 아니하는 분 이시므로 지금도 그 때와 똑같은 원리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새 생명을 주신다’ 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새 생명은 단지 이 땅에서 우리가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 다. 바로 이런 점에서 불뱀과 놋뱀 사건에서 드러나게 된 하나님의 일하시 는 원리는 더욱 증폭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증폭된 원리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말씀을 나누신 내용에서 잘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는 가운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하나 의 요소를 비교한 것이 아닙니다. 비교되는 요소들이 그 성격상 서로 들어맞 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광야에서 들린 뱀은 주조(鑄造)된 놋뱀인 반면에 이에 비교되는 것 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놋뱀은 높은 받침대 위에 놓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 십 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서로 비교되는 것 은 적어도 표면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정 이 구절에서 비교되는 것은 ‘모세가 뱀을 든 사건’과 ‘예 수님이 들리는 즉 예수님의 죽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그 성격 상 서로 어울리는 것입니다. 놋뱀 사건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자에 게 새 생명을 주셨음’을 의미하는 반면에, 예수님의 죽음 사건은 요한복음 3장 15절의 표현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 게”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건의 의미가 갖는 동질성에 근거하여 구약의 놋뱀 사 건을 들어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써 놋뱀 사건은 예수님 사건의 그림자이며 예수님 사건은 놋뱀 사건의 실체인 것입니 다. 바꿔 말하자면 놋뱀 사건은 예표(type)이며 예수님 사건은 원형 (antitype)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이란 무 엇입니까? 영생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 서 시작되는 삶입니다. 하지만 영생은 이 세상의 기준에 비추어서 잘 살고 부자 되는 그런 삶은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 임지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생을 가진 자는 어려움이 전혀 없 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삶은 영생을 갖지 못한 자들보다 힘들고 핍박을 받는 삶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주님의 함 께 하심으로 인하여 세상을 이기고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 다. 이런 영생의 삶은 참으로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 님으로 믿는 자라야 소유할 수 있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삶이 더욱 풍 요로우려면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그분 을 믿는 믿음이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이 삶은 그분을 더 욱 많이 알아갈수록 그래서 그분을 신뢰할수록 더 튼튼해진다는 뜻입니다.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우리는 이미 그런 삶을 그분의 은혜로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 렵고 힘든 삶 속에서도 그분을 원망하는 마음을 버리고 도리어 그분을 신뢰 하며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 는 마음과 이제껏 우리를 이끌어 오셨으며 앞으 로도 우리를 신실하게 인도하실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 니다.
223 no image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_김수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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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8 2009-03-04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에 대한 확증” 1.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신자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연합되셨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는 성경의 진술 속에 들어있다. 골 1:27은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 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 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말씀한다. 바울은 주장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 안에 계시며 또 그 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소망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골로새 교 회의 교인들과 연합되신 그리스도는 온전한 구원의 근거가 되신다는 것이 다. 그리피스 토마스 (W. H. Griffith Thomas)는 골 1:27을 언급하면서 흥미있 는 주석을 달았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회개에 의해서 영혼 깊은 속으로 환영되어야 하고 사 람들이 그를 믿음으로 감정 속에서 왕좌에 앉으셔야 하 고 사람들이 굴복하는 중에 마음속에서 환대를 받으셔야 하며 사람들의 순종 에 의하여 생활 가운데서 들어내져야 한다”고 말한다. 에릭슨(Millard J. Erickson)은 설명하기를 “분명히 기독교인들이 영적으 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내재하신데서 오는 것이 다. 우리의 영광의 소망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의 영적인 활력은 그리스도의 내재에서 오는 것이다”고 말한다. 에릭슨의 말을 한마디 로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이 누리는 모든 복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 신데서 오는 것이라는 뜻이다. 2.그리스도와 동참함으로써 생명 얻은 신자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생명 안에 암시되어 있다. 요한복음 6:53-57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 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 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 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신 다. 이 마지막 구절을 언급하면서 오거스터스 스트롱(Augustus H. Strong)은 조 심스럽게 말하기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 참여하심으로 생명 을 가지신 것처럼 그리스도에 참여함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한다. 윌리엄 헨들릭슨은 믿는 자가 그리스도에게 참여함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표 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어도 요한복음 6:53-58을 주석하면서 그는 다른 말로 표현하여 똑같은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주장하기를 “영적으로 이 음 식[예수님의 찢겨진 몸과 피]을 영적으로 소화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아주 가 깝고도 아주 활력 넘치는 연합 안에 머무르게 된다”고 했다. 토마스 오덴(Thomas C. Oden)도 언급하기를 “아들이 아버지에게 참여함으 로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역시 신자들도 아들에게 참여함으로 생명을 얻게 된다(요6:53-57; 고전10:16-17). 개성을 잃지 않고 신자의 영은 그리스 도의 영에 의하여 활력이 넘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참여한 사람은 한 영이다”고 말한다. 3.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신자들 그 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진술 속에 암시되 어 있다. 요한복음 17:21-23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 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 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 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 다”고 하신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님 자신께서 하나님과 친한 교제 가운데 계 신 것처럼 그들도 예수님과 연합한 가운데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고 계신 다. 요한복음17:21-23을 언급하면서 스트롱(A. H. Strong)은 “모든 신자들 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하나이신 것처럼 신자 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합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고 주장한다. 이에 동조하여 에 드윈 블럼(Edwin Blum)은 “기독교인들의 연합(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은 아들이 아버지와 가지게 된 연합(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에 비교된다. 이 연합은 예수님께서 신자들 안에 내재하시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스미스(H. B. Smith)는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과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하 나님 사이의 연합과 같다. 만약 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의 연합이 부정된 다면 그리스도와 아버지 사이의 연합도 부정되는 것이다”고 언급한다. 알버트 반스(Albert Barnes)는 요 17:21(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 사)을 주석하기를 “하나님 안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는 것이고 또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 진술은 신 약 성경에 자주 나온다. 여기에 사용된 이 구절은 하나님과 구주와의 연합 에 근거하고 또 거기에서 결과하는 모든 기독교인들 사이에 있는 연합을 의 미한다”고 말한다.
222 no image |신학단상<22>| 정직한 토론과 자유의사(自由意思) 결정_조석민교수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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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1 2009-03-04
신학단상 정직한 토론과 자유의사(自由意思) 결정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최근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모습을 보 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안타까운 마음과 국민의 한 사람으로 부끄러운 마음 을 숨길 수 없다. 토론대신 쟁취 난무하는 국회 정직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자유로운 의사 결정보다는 정당의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소수의 의견들이 묵살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 모든 수단 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필코 쟁취하려는 작태를 보면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국회가 정말 필요 한 것인지, 국회의원을 국민의 대표라고 선출할 필요가 있는지 많은 회의(懷 疑)가 든다. 민주주의가 이 지구상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아닐지라도 현재까지는 대다 수의 사람들이 이상적인 정치제도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민주주의의 가장 핵 심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 만 그 중에 정직한 토론과 그 과정을 거친 후에 자 유로운 의사결정을 통해서 어떤 일들이 결정되고 진행되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활발한 토론을 통하여 동의하거나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을 서로 인내하면 서 합의에 이르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리고 그런 진지한 토론의 결과로 마지 막 합의에 이르러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은 민주주의 이거나 껍데기만 남은 민주주의일 것이다. 어느 정당이든지 자신들이 국민을 위하여 새로운 법을 제안한다면 사전에 공 청회를 통하여 여론을 수렴하고 국민들이 우려하거나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 지 귀 기울여 듣고 시간이 걸려도 인내하며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르기까지 기 다리며 국회에서 정직한 토론을 통하여 국민을 위한 법안이 되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국회 의사당 안에서 자유롭고 정직한 토론 없이 정당의 정치적이며 현실적 인 이익만을 위하여 수량적 힘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생각만을 관철시키려 한 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을 수 없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1주년 기념일인 2월 25일에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문화 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에서 방송법 일부 개정안 3건과, 신문 등의 자유와 기능 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 7건 등 모두 22건을 시간을 가지고 진지한 토 론과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따른 합의 없이 위원장이 전체 법안을 위원장 직 권 상정이라는 법규를 이용하여 기습 상정했다. 대한민국 국회 의사당 안에서 또 다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왜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이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야당의 주장이 너무 터무 니 없어서, 국민들이 다시 경제적 어려움에 빠질까봐 걱정 끝에 그런 것일 까? 이런 법안들이 속히 통과되지 않으면 국민들의 경제가 회복되지 못할 것 같아서 일까? 아니면 집권 여당으로서 대통령에게 집권 1주년 기념 선물 보따리가 필요해서 일까? 이번에 국회에서 벌어진 일은 또 다시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살아있는지 의 심스럽게 만든 사건이다. 국회의 난장판 모습을 본 것이 엊그제 같은데, 국 민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인가? 왜 우리나라 국회 의사당 안에서 의원들의 진 지한 토론을 생중계로 볼 수 없는 것일까? 왜 우리는 시간이 걸릴지라도 토 론과 의견 수렴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의견을 조율하고 합의에 이르지 못하 는 것 일까? 이런 일이 국회에서만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건들 을 보면서 교회의 일들을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교회 안에서는 정직한 토 론과 자유로운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교회가 민주주의 정치 제도를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성도들 의 정직한 토론과 자유로운 의사 결정이라는 과정은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 고 있다. 더욱이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고 교회는 소수일지라 도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어떤 사 람을 통해서 어떤 지혜를 주실지 아무도 모르기에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 사람의 지도자가 아무리 뛰어난 영적 지도력과 올바른 판단 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한 존재이며 나약한 인간이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따라가기 위해서는 진지한 토론과 자유로운 의사 결정이 필요한 것이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위한 토론과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이르기까지는 많 은 시간이 걸리고 여러 가지 종류의 아픔과 상처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을 무시하면 더 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모든 일을 신속히 해치 우려는 생각과 행동에서 독단이 나타나며 바로 그때 다른 사람들의 견해는 무시되고 진지한 토론 없이 어떤 결정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미명 아래 이 루어지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모든 사람에게 임하신 하나 님의 뜻을 헤아려서 가장 올바른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기 위한 진지한 토론 과 자유로운 의사 결정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 안에서도 진지한 토론을 무시하거나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무시하면 인 간적인 교만에 빠질 수 있고,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 다. 탁월한 영적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며 권고를 잘 듣고 시 간이 걸려도 인내하며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함께 모으기 위해 토론하는 과 정을 통해서 일을 결정을 하는 지도자이다. 타인의 의견에도 귀 기울여야 잠언에서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 를 듣는다”(잠언 12:15)고 교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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