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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no image |반듯하게성경읽기(3)|‘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_김영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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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6 2009-02-25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열하5:1-19)의 의미 김영철 목사_미문교회 “선지자라면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전해줘야” 성경은 한 마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 지를 알 려주는 그분 자신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런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하신 하나님을 바로 섬기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 다. 성경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목적 있어 그러기에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강조하며 따라서 우리는 오 늘 본문에서도 그런 흐름을 놓치지 말고 내용을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제 그런 흐름을 좇아서 본문의 내용을 굵게 되짚어 보겠습니다. 본문 1절은 나아만이 크고 존귀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사람들은 나아 만이 그 나라를 구원한 것은 그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라고 평가했을 것입니 다. 그러나 성경 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 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나아만’이 가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점은 이것입 니다. “저는 큰 용사지만 문둥병자였더라.” 여기서 우리는 본문의 흐름이 ‘어떻게 이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게 되는가?’를 알려 주는 방향으로 전개 될 것임을 짐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3절에서 어떤 이름 모를 소녀가 등장합 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는 고칠 수 있다는 것이 그 소녀가 전해 준 정 보였습니다. 그래서 장군은 모든 것을 준비하여 이스라엘 왕 앞에 나아갑니 다. 반면에 이스라엘 왕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문둥 병을 고치는 것은 마치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일과 같이 도저히 불가능한 일 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것이 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며 이렇게 절규합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데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7절). 이 러한 왕의 말속에서 우리는 문둥병에 대한 왕의 견해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왕은 오 직 하나님만이 문둥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드디어 ‘나아만’은 임자를 만날 수 있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엘리사는 아람 장군을 자기에게로 오게 하라는 전갈을 왕에게 보냈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8절 끝 부분에 보면 그 목적이 표현됩니다.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 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단순히 ‘이스라엘 안에도 선지자가 있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 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왔기 때문입 니다. 둘째, 엘리사 자기만이 진짜 선지자임을 드러내겠다는 뜻일까요? 이것도 아 닙니다. 사실 나아만은 이방 종교에서 하던 행사가 자기 앞에서 벌어질 것 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 행사는 한 마디로 신이 신접(神接)한 자를 사용하 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신접한 자가 신을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무당의 예를 들자면 무당이 자신이 필요한 대로 조상귀신들을 불러 내서 사용합니다. 이처럼 신접한 자가 신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불러다가 사 용하는 것이므로 이런 행사에서는 신접한 자의 능력 이 돋보일 수밖에 없습니 다. 그런데 이 선지자, 하나님의 선지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기대했던 치료를 위한 종교 의식도 전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바꿔 말하자 면 엘리사는 자신의 능력을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과시(誇 示)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한 전할 말조차도 심부름꾼을 통해 보냈습니 다. 이렇게 하여 그 자신은 결코 전면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게 하겠다”는 말씀 의 뜻은 엘리사 자신이 진짜 선지자임을 드러내겠다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14절에서는 어떻게 해서 문둥병이 깨끗해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행하므로 깨끗 해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선지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 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입 니다. 따라서 선지자가 전한 말은 그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선지자, 즉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행하니까 낫게 되었다는 말씀 은 문둥병이 나은 것이 요단강 물의 효능 때문도 아니며 또한 선지자의 능 력 때문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이 선지자 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 자신의 말씀 때문에 문둥병은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8절 뒷부분에 나온 “이스라엘에 선 지자가 있음을 알게 하겠다”는 의미는 선지자 자신은 나타나지 않고 오직 그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만 전함으로써 하나님만이 드러나도록 하겠다는 것 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바꿔 말하면 선지자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로지 그 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 지를 드러내겠다 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엘리사 선지자의 의도가 성공하였습니까? 일단은 성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왔던 나아만은 잔뜩 화를 내고 후퇴해 버렸기 때 문입니다. 그러나 후에 나아만은 자기 종들의 충고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대 로 행함으로써 문둥병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모두 겪은 나아만은 무엇을 알고 깨달았을까요? 15절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나아만의 말속에서 우리는 그가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것은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며 유일한 신이시라는 사실입 니다. 물론 나아만이 전에도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고칠 까 하였도다”(11절)라고 생각한 것을 보아서 그가 이스라엘의 신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음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유일한 참 신이신 ‘하나님’ 알아야 나아만은 비로소 하나님을 아는 참된 신앙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그분의 말씀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220 no image |반듯하게성경읽기(2)|'열린 눈, 닫힌 눈'..._김영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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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8 2009-02-25
'열린 눈, 닫힌 눈'(왕하 6: 8-23)이 주는 의미 김영철 목사, 미문교회 "세상에 속한 것과 하늘에 속한 것 구분할 줄 알아야" 본문은 마치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발생한 '두 나라간의 전쟁 이야기구 나'라고 쉽게 생각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싸우거나 아람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가 싸운 것이 아닙니다. 싸움의 성격부터 분명히 알아야 이 본문은 '아람 왕'과 '하나님의 사람'간의 싸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싸 움에서 아람 왕은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 하 나 만을 동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싸움의 실제적인 주체는 아람 왕이라는 한 인간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싸움의 1회전은 머리 대 머리, 즉 지혜의 싸움입니다. 왕은 자신의 참모 들과 머리를 맞대고 작전 회의를 하며 작전을 세워 그대로 시행하려고 합니 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자기 사람을 시켜 그 작전을 무 효화시킵니다. 번번이 그랬습니다. 일방적인 싸움이었습니다. 2회전(14절부터)은 몸 대 몸, 즉 능력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 아람 왕은 많은 말들과 병거로 중무장하고 잘 훈련된 정예 부대를 투입하였습니다. 하 나님은 단지 한 사람만을 투입하였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맨손으로 투입 된 것입니다. 물론 불 말과 불 병거들도 등장하지만 이들은 유사시에 필요 한 예비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 니 다. 그래서 이 싸움에 직접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3회전(20절부터)에 이르러 싸움은 이미 끝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벼운 시 범 경기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어떠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특 별히 마련하신 무대(舞臺)인 것입니다. 시범 경기이므로 이번에는 이스라엘 왕을 잠시 시범 조교로 사용하십니다. 포로된 자들을 다 죽이려 하는 이스 라 엘 왕의 청을 거절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포로 된 자를 긍휼히 여 기는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하신 결과는 무엇입니까?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아람 왕과의 싸움에 개입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백성들이 전쟁 에 져서 비참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 기에 기록자는 이 이야기 끝 부분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대로 이루어졌음 을 시사하는 말을 달아 놓습니다.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 라"(23 절). 이처럼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자를 통해 자기 백 성을 보호하십니다. 그분은 모세를 통해서도 그리하셨고, 사사들을 통해서 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왕들을 세워서 그렇게 하셨습 니다. 그러나 왕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적과 정반대로 나갈 때에는 강력 한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못되고 악한 왕 아합 때에는 엘리야를 세우셨고, 이제 아합의 아들 여호람 이 왕이 된 때에는 엘리사를 세우셔서 불쌍한 자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신 것 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이르매 진정한 의미에서 오직 하나 뿐인 '하나 님의 사람'을 보내셨 습니다. 구약 시대의 모든 사역자들은 바로 이 '하나님 의 사람'의 그림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 아니 정확히 말해서 '하 나 님이신 사람', 이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정작 문제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탄에 대한 싸움 이 라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는 사람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것은 보이 지 아니하는 존재인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뜻을 추종하는 사 람들을 사용하여 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우리 자신의 악한 죄성 (罪 性)과 못된 옛 성품을 교묘히 조종하여 싸움을 하도록 부추기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싸움은 조용한 것 같으나 치열하고 심각한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격렬한 싸움 - 하지만 닫힌 눈을 가진 자에게는 전혀 보이지 아니하 는 싸움 - 의 한가운데 우리 모두가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싸움을 느끼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편 어떤 사람은 이 싸움에 질 까 봐 심히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이 싸움은 길고 험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 리스도에게 모든 능력과 권세와 지혜를 다 주셔 서 하나님의 백성을 철저히 보호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분은 이 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고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은 연약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며 또한 기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토록 중요한 사실을 알진대 과연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 가고 있는 것일까? 내 눈에 보이는 것,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인간이 가진 것, 이른바 자신의 재물이나 능력만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그 렇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닫힌 눈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아니하 시 지만 온 세상을 지으시고 여전히 다스리고 계신 하나님, 특히 자신의 백성 인 우리를 철저히 보호하시는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열린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이것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그분께서 행하시 고 행하실 모든 일들을 볼 수 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이 믿음을 갖고 있다 면 우리의 눈은 분명히 열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눈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눈을 갖느냐에 따라 달라져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닫힌 눈을 갖고 보이는 것들, 이 세상에 속 한 것들, 잠시 뿐인 것들이 전부인 양 안달복달하며 살아갈 것인가? 열린 눈 을 갖고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에 속한 것들, 영원한 것들, 영원하신 하나님 과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 하 며 살아갈 것인가?
219 no image |신학단상<21>|용산 철거민 참사와 그리스도인의 시각(視覺)_조석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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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9 2009-02-11
신학단상 용산 철거민 참사와 그리스도인의 시각(視覺)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종교의 사사화(私事化)가 바로 타락의 지름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아있는 인간의 생명보다 귀한 가치는 없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 귀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하 늘로부터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믿고 있으 며 오늘도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해 그런 귀한 생명이 이번 용산 철거민 농성 현장에서 경찰의 무리한 강제 진 압 결과, 원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화재로 경찰관 한 명을 포함하여 모두 여섯이나 처참하게 사라졌다. 경찰은 화재로 죽은 농성자들의 신원을 확인한다는 이유로 가족의 동의도 없이 부검을 했는데, 죽은 사람의 몸에서 나왔다는 한 장의 서류는 불에 그슬리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 으로서 농성자들의 죽음은 단순히 사회를 향하여 불법을 행사한 대가로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 교회 밖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너무 깊이 개입하지 않아야 하기에 정부의 공권력이 다스리도록 놔두면 되는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이 남의 일이고 사회의 한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기 에 더 이상 상관하지 말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면 되는 것인 가? 이 세상에서 교회와 목회자의 역할은 이런 일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 는 것이기에 이런 일들에 대하여 침묵하며 지나가면 되는 것인가? 용산 철거민 참사를 바라보며 교회와 신학이 현실을 외면할 수 있는지 자문 하게 된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교회와 세상의 역사는 서로 다른 궤도를 달 리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소망하고 부 단히 노력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은 교회 안에서 뿐 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 사회 속에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해설하며 삶에 적용하는 설교 속에서 현 실을 외면하는 것은 위선이다. 용산 철거 민 참사와 관련하여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2월 2일 저녁 7 시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에서 시국미사를 열고 ‘용산 참사’의 진상 규명 과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의 처벌을 요구했다. 불교계는 2월 5일 ‘용산 참 사 희생자를 위한 시국법회’를 조계사에서 진행하였다. 시국법회의 위원장 은 ‘사람이 죽었다. 무력도 불사하는 정부의 개발 정책이 부른 예고된 죽음 이었다. 생존권을 외치는 힘없는 국민을 마치 전쟁터의 적군 대하듯 공권력 을 남용한 결과다’라고 경찰의 과잉진압을 비판했다. 용산 철거민 참사를 바라보는 우리 개신교 그리스도인의 시각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같은 궤도를 달리는 역사의 현실 속에서 자신만의 안전과 평안 을 지키기 위하여 역사를 외면한다면 훗날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의 공적 책임은 역사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가 이 땅에 드러나도록 힘쓰는 것이다. 용산 참사의 본질은 국민의 기본권 을 가볍게 여긴 정부의 천박한 인권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통치자와 권 력자들이 철저히 책임지도록 예언자적 정의의 목소리를 발해야 한다. 목회자 가 예언자적 양심의 소리를 발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하나님이 햇빛과 비를 만인에게 골고루 내려 주시듯이 하나님 안에서 교회 와 세상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다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기독교를 사적 영역으로 만들어 자기 종교화한 사람들에게만 교회와 세상은 분리되어 있 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에 대한 공적 책임이 있고, 기독교가 현실 문제에 대하여 역사적 책임 의식을 갖고 있다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면할 수 없을 것 이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성속(聖俗)을 구별하지 않듯이, 기독교 세계관 속에서 교회와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교회의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성전 안에 가두어 두려고 했던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아덴 사 람들에게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 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행 17:24-25)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예배당 안에 가두어 두려고 하지 않아야 하며 기독교를 교회당 안 에 가두어 두고 사유화(私 有化)해서는 안 된다. 종교의 사사화(私事化)는 곧 타락의 길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역사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고 현실에 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이미 기독교의 사사화는 시작되었다 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배당 건물을 유지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예배당 건물이나 교회의 부속 수양관, 교회의 공원묘지 등을 유지하기 위하여 힘쓰 느라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을 때 종교의 사사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복음의 능력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 찬란한 빛으로 비춰질 때 드러난다. 예수 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 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 을 돌리게 하라”(마 5:14-16)고 하셨다. 교회는 용산 참사 기억해야 세상의 빛된 그리스도인들은 용산 철거민 참사를 분명히 기억하 며 어두운 세 상을 밝게 비취는 사명을 책임 있게 감당해야 한다.
218 no image |신학 단상<20>| 역사 인식(認識)과 그리스도인의 삶 _조석민 교수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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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6 2009-01-21
역사 인식(認識)과 그리스도인의 삶 조석민목사(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올바른 역사 인식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일 뿐" 2009년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를 깊이 생각 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에 책임을 느끼고 평화, 정의, 자유를 위해 행 동하며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소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 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인식과 함께 깊이 고민하는 사람이 다. 신자들은 역사 앞에서 깊이 고민해야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역사 인식의 필요를 암시한다. 올바른 역사 인식의 출발은 그 리스도인에게 자신의 삶에 책임지는 행동의 터전을 마련해 준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 현실 속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의 현장 속에서 r 나타나야 한다. 그 이유는 교회가 생명의 물을 공급한다고 그 우물 안에 머 물러 있다면 그 우물은 곧 더 이상 생명의 장소가 아니라 사망의 결과를 가 져오는 무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장소는 교회가 아니 라 삶의 현장인 가정, 학교, 직장, 각자의 일터 및 다른 사람들과 하루하루 부딪치며 살아가는 바로 그곳이다. 교회 안에서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천사처럼 행동하며 법(法)이 없어도 윤리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교회의 문을 나서 는 순간 그 모든 환상적인 모습의 그림은 거의 대부분 너무도 험악하게 얼룩 지고 만다. 한국 사회 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 다는 어두운 현실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조사한 결과에서 이미 밝혀졌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현실은 모 든 그리스도인이 싫던 좋던 현재의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오늘 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역사 인식은 그리스 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올바른 역사 인식이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 점검할 수 있 고, 올바른 삶을 위하여 고민하며 행동할 수 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마 5:13-15)이라고 말씀하신 것 은 현실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왜냐하 면 소금과 빛은 그것이 사용되어야 할 장소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 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교회 안에서 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 타나야 할 것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 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 게 하라"(마 5:16)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교회 만 아니라 세상 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에도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세상 속에서 영 향을 미치며 살아가야 할 당위성을 제공하는 말씀이다. 올바른 역사 인식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가 속한 교회 공동체는 물론이거니 와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도 관심을 갖고 성경으로 그 문 제들을 보려고 노력하며 대안을 창출하기 위하여 고민하는 사람이다. 현실 상황의 문제들은 대한민국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 세계 여러 나라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이다. 이 나라 안에서 나타나는 현실 문제들은 예를 들면, 경제의 위기 속에서 나 타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 이랜드 및 기륭전자 등의 노동자 문제, 경제 대통 령으로 불렸던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구속과 관련된 일들, 중 고등학교 역 사 교과서 개편, 최근에 일어난 YTN, KBS, MBC 방송 및 언론과 관련된 문 제, 최근 국회에서 일어난 비정상적인 일들, 남북경색으로 인하여 파생하는 상황들, 계속되는 국세청장의 비리 문제, 등등 수없이 많은 일들이다. 세계 속으로 눈을 돌리면 먼저 아프가니스탄의 전쟁 상황, 러시아의 가스 공 급 중단 문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무차별 공격 등등 평화가 무참히 부서 지는 암담한 상황과 공의와 정의가 깨진 많은 상황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역 사 인식은 이런 모든 문제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고에서 출발하며 이 나라 안과 밖에서 현재 일어나는 교육, 노동, 방송, 언론, 환경, 정치, 경 제, 문화 등등 거의 모든 분야의 상황을 올바로 인식하며 실천적으로 살아가 는 삶에서 나타난다. 이런 삶 속에 그리스도인의 회심이 있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결정하게 만든다. 이런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역사의 분명한 인식 속 에서 읽고 묵상한 결과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회심하면 그 결과는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 있고, 적어도 세상 을 바꾸는 기초를 놓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회심은 하나님 앞에서 세상 을 새로운 관점으로 똑바로 보는 것이며, 그 속에서 교회의 역할과 그리스도 인의 삶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또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주일 예배 시간 에 "예수 믿고 부자 되세요"라는 짝퉁 복음, 거짓 복음에 현혹되어 역사에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올바른 역사 인식 없이 살아가 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바로 짝 퉁 그리스도인이다. 교회의 역할 깨닫고 실천에 옮겨야 개혁된 교회도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주의 사상은 올바른 역사 인식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217 no image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20>|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_김수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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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8 2009-01-2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 김수흥 교수, 합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에 대한 확증" 성경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여러 가지 진술을 가지고 있 다. 요 6:56에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과 신자들은 영원한 한 몸 이뤄 예수님은 주장하시기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도 그 신자 안에 거하신다고 말씀한다. 아더 핑크(Arthur W. Pink)는 진술하기를 "예수님은 그의 살을 먹는(믿는) 사람의 복된 결과에 대해 몇 가 지를 진술하고 계신다"고 밝히고 "최초의 복은 구원받은 죄인이 그리스도와 의 생명적인 연합에 들어가는 것이고 또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운 교제를 즐 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연합의 직접적인 진술은 요 14:20에서도 보인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 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 을 너희가 알리라." 본 절을 해 설하면서 에드윈 불럼(Edwin A. Blum)은 " '그날에는'이라는 말은 오순절 날 을 지칭한다. 성령은 믿는 자들에게 오실 것이며(17절), 또 그들에게 그들 이 예수님과 연합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고 해설한다. 헨드릭슨(Hendriksen)은 "하나님의 아들과 신자들 사이에는 윤리적이며 영적 인 연합이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를 사랑한 다. 이 연합은 성장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의하여 신자들의 마음속 에 실제로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에 그렇다는 말이다"라고 말한 다. 로마서 8:1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 다"는 구절은 신자들의 계속되는 영적인 의로움의 상태가 그리스도와의 연합 에 달려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이 구절에서 신자들의 그리스도와 의 연합이 곧 하나님에 의한 구원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밀라드 에릭슨(Millard J. Erickson)은 신자들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무수한 구절 들을 성경에서 끌어내어 인용하고 있다. 에릭슨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엡 1:3-4에 보면 두 개의 관련 구절이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 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 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이 한 절 속 에 연합을 말하는 두 구절이 있다-역자주). 바울 사도는 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우리 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 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 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 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고전 1:4-6) '아 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 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 리라'(고전 15:22). 고전 1:30은 말하기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 고"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고후 5:17은 주장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 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 었도다"고 말씀한다. 앨버트 반스(Albert Barnes)는 말하기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구절은 분명 히 믿음에 의해서 예수님과 연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가지가 포도 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예수님 안에 있는 것, 다시 말해서 포도나무와 연합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엡 2:13은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말씀한다. 찰스 하지(Charles Hodge)는 그리스 도 예수 안에서를 해석할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덕택으로"라고 해석한 다. 순종이나 믿음에 대한 확신은 요일 2:5-6이 언급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 안 에 있을 때 발견된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 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 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확신 가져야 요일 5:20은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다.
216 no image |신학 단상 <19>| 절망 속의 소망_조석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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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1 2009-01-06
절망 속의 소망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국민들에게 신용 불량자로 보일 수는 없어" 2009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누구나 작은 소망(所望)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人 之常情)이다. 더욱이 소망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상황에서 소망 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어두움 속에서 한 줄기 빛을 기대 하는 애타는 심정이 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미래를 내다보려는 것이다. 누구나 밝은 미래 바라게 돼 2008년 한 해 동안 너무도 앞이 꽉 막힌 절벽과 같은 정치 경제 및 사회적 상황을 많이 만났지만 그 때마다 그 절벽은 도약의 발판과 계단이 되어 우리 의 사고를 발전시켰고 새로운 가능성을 내다보게 했다. 비록 아직까지 많이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이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사물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사고의 변화가 있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한 가지 긍정적인 점은 절망 속에서 시간이 멈추어버릴 것 같고 거꾸 로 가 는 시계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소망은 놀라운 생명력을 지닌 채 바람 앞에 서도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새해의 한국 경제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통계 수치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 다. 한국 사회 및 경제가 부정적이며 불투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 절망적 인 것만은 아니고 긍정적인 모습도 감지되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현실의 상황을 직시하며 적절히 대처해 나가지 못하고 낙 관론에 빠져서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어리석음의 장애물들이 다. 아무 근거 없는 무지갯빛 소망을 입술로만 말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큰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할 수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예상되는 어려움을 미리 예측하여 준비하도록 하 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소망이 현실 속에 이루어지려면 어떤 예기치 못한 부분에서 고통스러운 대가 를 지불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망을 위하여 치르는 대가가 설득력을 잃어버리면 사람들은 더욱 큰 절망의 공황장애(恐慌障碍, panic disorder) 를 맞이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 다. 지난해 말경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발표했는 데, 대한민국 국민 18.4%만이 '한국 교회를 신뢰한다'고 응답했다. 이번 조 사에서 발표된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한국 교회의 신용에 대한 절 망적 공개 선언과도 같다. 이것은 2009년을 시작하는 한국 교회에 대하여 절 망적 상황을 예견하는 한 단면이다. 한국 사회가 경제적 위기 속에서 절망의 바다 가운데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한국 교회는 그 보다 더 심각한 신뢰도의 위기 속에서 국민들에게 신용불량 자 취급을 받으며 절망의 벼랑에 서게 된 것이다. 세계 경제 및 한국 경제가 위기를 맞이하게 된 원인은 스스로 뿌린 욕심이라 는 악의 열매를 거둔 결과이듯이, 한국 교회의 신용 불량 판정은 교회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 본래 모습을 잃어버리고 사회의 이익 단체처럼 행동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조사를 통해서 스스로의 모습을 다시 확인하고 하나님께 돌아선다면 절망은 한 줄기 소망 의 빛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절망적 상황을 바꾸 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 만, 지속적으로 노력하면 긍정적 결과는 귀한 열매로 돌아올 것이다. 한국 교회가 신뢰를 받기 위해서 개선해야 할 점에 대해서 42%의 사람들 은 '교인과 교회 지도자들의 언행일치'라고 대답했다. 결국 신실한 실천적 행동은 없고 말만 무성한 한국 교회 및 지도자의 모습과 그리스도인들의 언 행 불일치의 삶에 식상했다는 것이다. 절망 속에서 소망을 노래하는 한국 교회의 모습이 사람들의 삶에 성실한 실 천으로 나타나 보인다면,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말보다 진실 된 행동이 먼저 이루어진다면 어두움 가운데 헤매는 사람들도 빛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1:1-18에 언급된 것처럼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빛으로 오신 예수 그 리스도께서 평화를 선언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한 걸음씩 그 평 화를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가신 모습처럼 우 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간다면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예수의 성육 신에서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셨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요 1:4, 9- 10). 절망 속에서 소망을 노래하기 전에 먼저 상황을 잘 파악하도록 정보를 투명 하고 정직하게 공개하며, 소망이 현실이 되도록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인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금년 한 해 동안 한국 사회의 어두운 경제적 전망 속에서도 소망을 노래할 수 있으며, 불신의 늪에 빠진 한국 교회도 소망을 갖고 앞으로 헤엄쳐 나아 갈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소망의 실현을 위하여 필요한 조건은 정확한 현 실 인식이며, 겸손한 자기 비평적 실천적 태도임을 명심해야 한다.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대안과 유효 적절한 처방을 제 시하지 못하면서 입술로 만든 소망의 포장지로 현실을 덮어 두려한다면 언젠 가 그 포장지가 찢겨지는 날 더 큰 불행의 폭탄이 폭발하고 말 것이다. 교회가 소망의 등불 되어야 절망 속에서 소망을 바라보며 이 새해에 새로운 힘을 모아보려는 사람들에 게 한국 교회가 소망의 등불로 높이 비춰지기를 기대한다.
215 no image |반듯하게 성경읽기<1>|‘하늘의 양식’(출 16:1-12)이 주는 의미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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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4 2009-01-06
‘하늘의 양식’(출 16:1-12)이 주는 의미 김영철 목사, 미문교회 “하나님은 참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분” 출애굽기 16장 1-12절에서 강조하려는 중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 메 시지는 한 마디로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 즉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시 다’라는 것입니다. 살리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만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에도 불구하고 이 기회에 자신이 어떠 한 분인지를 그들로 하여금 체험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고 기와 떡을 주어 배불리 먹게 하십니다. 그들의 하나님 되심의 의미가 무엇인 지를 피부로 느끼게 하시려고 이런 일을 베푸신 것입니다. 사실 그들의 경험 속에서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생성되고 축적된 사고 속에 서는 하나님의 일면(一面)만 또는 그분의 왜곡된 모습이 각인(刻印)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금까지, 바로 이 사건 직전까지 경험한 일들은 주로 하나님의 심판적 측면과 연관되었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한 실재(實在)의 두 측면, 예를 들 어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느 하나를 생각하든지 다른 하나를 떼어놓 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특히 출애굽의 과정에서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바 로와 애굽에 대한 심판은 곧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타락 이후에 흐려지고 좁아진 인간의 인식적 한계 와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봄으로써 보이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의 어떠하심 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적 수준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의 능력을 그분의 심판과 연관지어 이해할 뿐입니다. 그 이상을 뛰어 넘어 그분의 심판 속에 담긴 구원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온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 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그들이 광야에서 보여준 삶의 모습에서 여실하게 드러납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크신 일들을 심판과 구원의 양 측면에서 올바로 풍성하게 이해했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간의 머무름을 필요로 할 만큼 불신앙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아야 했습니다. 또한 그분에 대 해 간간이 내뱉 는 원망조차도 보이지 않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 이다’라는 사실의 어떤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시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말, 즉 원망의 말이라 할지라도 들으시고 먹을 것을 주 셔서 그들을 살리심으로써 그들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심으로써 자신이 ‘살 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로써 그분은 자기 백성의 하나 님 되심의 의미에 속한 다양한 측면 중 한 면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렇다 면 이제 우리,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무엇을 주셔서 또는 어떻 게 자신이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고 계십니까? 만나를 주신 일은 가나안 변경에 이를 때까지만 계속됩니다(출 16:35).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에는 그들에게 그 땅에서 나는 좋은 것들을 먹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살리시는 하나님이심 을 드러내시려 합니다(참고. 신명기 8:7-10). 이처럼 만나는 잠정적(暫定的)인 것입니다. 가나안 땅 에서는 다른 것으로 대 체되고 맙니다. 그러나 ‘살리시는 하나님’ 되심의 의미는 육신의 필요를 공급해 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8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신 의미를 이렇게 말씀하십니 다.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 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 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이 시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전히 사는 데는 떡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온전히 살려면 반드시 ‘여호와의 모든 말 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여호와의 말씀이므로 여호 와 하나님 그분이 아니시면 아무도 공급해 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전히 살리시려면, 바꿔 말해서 그들을 ‘살리시 는 하나님’이 되시려면 그분은 육신의 양식뿐만 아니라 진정한 하늘의 양 식, 참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만나가 하늘에서 왔듯이 이 참된 생명의 양식도 하늘에서,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제 새 언약(新約)시대의 하나님 백성들인 우 리에게 더 이상 ‘만나’는 공 급되지 않습니다. 사실 ‘만나’는 옛 언약(舊約)시대의 백성들에게조차 잠 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만 필요하였습니다. 따 라서 만나는 참되고 영원한 양식(糧食)의 그림자인 셈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고 표현된 참되고 영원한 생명 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해답은 요한복음 6장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곧 양식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 이 인격화하여 사람으로 이 땅에 거하신 분이시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 켜 ‘생명의 양식’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생명의 양식으로 친히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그런 양식이 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께서 자기 백성 을 위한 양식이 되는 방법은 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야 하 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양식을 먹음으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 고,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하나님 되심을 체험하고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 되 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214 no image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19>| 믿는 사람들과 예수님의 연합_김수흥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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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6 2009-01-06
믿는 사람들과 예수님의 연합 김수흥목사_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그리스도와의 신령한 연합은 칭의의 근거”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에 대해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은 남 편과 아내의 연합을 비유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기 희생적 사랑에 근거한 연합 “남편과 아내의 연합은 다른 어떤 인간관계보다 더 강한 관계가 되었다. 심 지어 부모와 아이들 관계 보다 더 강한 관계가 되었으므로 남자는 그의 부모 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럼으로 사실상 둘은 둘 이 아니라 하나이다. 우리가 이런 가까운 부부 법령이 여기 깊고도 자기 희 생적이며 부드러운 사랑의 문맥관계 안에 놓여서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 랑을 모방하게 된 것을 고려할 때 분명히 남편과 아내의 관계보다 더 고상 한 묘사가 제출된 적이 없으며 또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기독교 신학’이라는 책의 저자 밀라드 에릭슨(Millard J. Erickson)도 주 장하기를 “두 사람은 육체적으로 하나일 뿐 아니라 이상적으로도 하나이 다. 그들은 또한 영적으로 너무 가깝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 기 위하여 동정심을 가지며 또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다”고 말한다.” 믿는 사람들과 예수님의 연합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머리가 되신 교회와 얼 마나 가깝게 연합되었다는 데서 설명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12에 바울은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 스도도 그러하니라”고 말하고 있다. 청교도 신학자이며 유명한 설교자인 토마스 제이콤(Thomas Jacomb)은 “자연 적인 몸에 있어서 이 둘 사이에는 참으로 가까운 연합이 있다. 이 둘은 서로 가 붙어있고 연합되어 있다. 그 둘은 똑같은 한 몸을 형성하고 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와 믿는 자들도 신비한 몸 안에서 똑같이 연합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고린도전서 12:12을 해설하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유기적인 인간의 몸과 비교하고 있다. 그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그 의 교회에서 불리할 수 없는 것처럼 몸을 머리에서부터 분리할 수 없는 것 과 같다”고 주장한다. 이와 연관해서 댑니(R. L. Dabney)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몸에 있어서 머리 와 지체가 연합되어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5:22에서 바울은 선언하기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한다. 이 구절의 첫 부분(“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에서는 첫 사람 아담은 그의 후손과 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스미스(HB. Smith)는 “인류는 아담 안에서 하나이다. 그럼으로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타락할 수 있었다. 우리의 인간성은 아담 안에서 오염되었다. 그럼으로 우리는 정죄되었다. 아담과의 자연적인 연합은 이 타락의 근거가 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의 신령한 연합 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지고 또 의롭다함을 받는 근거이다”라고 주 장한다. 찰스 하지(Charles Hodge)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아담과의 연합을 이렇게 비교하고 있다. “우리는 아담 때문에 죽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산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 에 있기 때문이다. 아담과의 연합은 죽음의 원인이 되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은 삶의 원인이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생명얻어 이처럼 모든 인류가 아담과 밀접하게 연합된 것은 믿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 와 연합된 것에서 비추어졌고 또 충분히 실감되었다.
213 no image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18>|예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관계(2)_김수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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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9 2008-12-17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관계(2)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성령은 말씀을 통해 신자들에게 역사하셔” 1.성령님은 말씀을 신자들에게 해설하신다. 이 점에 관하여 브루몰(Broomall)은 “성경은 성령에 의하여 기록되었다. 이 말은 논리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곧 성령님은 성경을 이해 하게 하는데 있어 우리의 최선의 안내자”라고 말한다. 성령의 조명으로 성경 말씀 알게 돼 윌리엄(John William)은 성령에 대해 “성경에 대한 우리의 현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책임을 지시는 신적인 해설자”라고 묘사한다. 캘빈(John Calvin)은 “말씀이란 성령님의 조명이 분배되게 만드는 도구이다”(The word is the instrument by which the illumination of the Spirit is dispensed)라고 주장한다. 커밍(James Elder Cumming)도 역시 신자들로 하여금 말씀을 이해하게 만드 는 성령님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 고 있다. 그는 “영감하신 성령님은 반드시 말씀을 해석해주신다. 성령님께서 영감 하셨다는, 거역할 수 없는 증거는 성 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거하시면서 우리가 전에는 전혀 깨달을 수 없었던 것 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만들어주실 때 확실히 증명된다. 참으로 이 둘-말 씀과 성령-이 공동으로 역사하실 때 우리는 배우게 된다”고 말한 다. 2.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분이시다. 블로쉬(Donald G. Bloesch)는 “그(성령)는....말씀을 전파하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는 역시 말씀의 봉사자이시다. 성령님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주장한다. 이 의견과 동조하여 브루몰(Broomall)은 “성령의 역사를 떠나서는 복음전파 에 성공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해 두겠다. 성령은 결정적인 결과를 이루기 위 해서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신다”고 말한다. ‘교리와 생활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이라는 책의 저자 그레이(James M Gray)는 “성령님은 하나님 말씀의 설교자이다”라고 주장하고 또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는 분은 성령이라고 했다. 또한 그레이(Gray)는 “초자연적인 복음은 철두철미 성령님에 의하여 기록되 었고 계시되었으며 전파되고 있다. 복음이 기인한 것이나 설명이나, 그리고 전파하는 것은 한결같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파했다. 그리고 다른 사도들도 복음을 전파했고 제자들 도 복음을 전파했다. 복음을 전파하신 분은 전적으로 성령님이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은 전파되지 못했다”고 강변한다. 결론적으로 “성령님은 말씀 안에서 역사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말씀은 성령에 의하여 더욱 견고하게 된다. 말씀을 견고하게 하는 것은 성령 님이시지 교회가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말씀과 함께 해야 한다. 그래야 말 씀이 버려지지 않고 성도들이 성령에 의하여 인도를 받게 된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 요 3:1-15에서 신자들의 중생의 역사에서 예수님의 말 씀의 역사를 언급하시지 않으신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만약에 니고데모가 성령에 의해서 새 생명을 받았다고 하면(요 19:39 참조) 예수님의 말씀이 니고데모의 중생의 도구로서 역할을 한 것이다. 요 15:1-17의 경우는 요 3:1-5의 경우와 서로 보완적이다. 요 15:1-7에 서 예 수님은 말씀의 역사만 말씀하시고(3절) 신자의 중생을 위하여 역사하신 성령 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신 것이다. 3.연합에 대한 개관 성경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진술을 개관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작 업이다. 그리고 연합의 성격과, 연합을 시키는 매체, 연합의 범주, 연합의 시간 그리고 연합의 열매들을 전체적으로 개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성경 이외의 다른 여러 문헌들을 살펴보면 성경 안에 연합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진술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비유적 진술과 다른 하나는 직접적 인 진술이다. 에베소서 5:23-32를 주해하면서 왈보르드(J. F. Walvoord)는 말하기를 그리 스도와 교회의 혼인관계 비유는 아내와 남편의 연합에 비유된다고 말하고 있 다. 왈보르드(Walvoord)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관계의 비유가 에베소 서 5:23-32에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그 관계가 아내와 남편의 연합과 비유 되고 있는데 그들이 ‘한 몸’이라고 하는데서 언급되고 있다”고 말한다. 뉴올리언스 침례교 신학교 교회사 교수, 윌리엄 아저 뮬러(W. A. Mueller) 는 주장하기를 “신부와 신랑의 관계, 남편과 아내사이의 관계보다 더 부드 럽고 친한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보여주는 결혼 제도 ‘하나님의 몸’이라는 책의 저자, 존 길(John Gill)도 역시 결혼 제정을 그 리스도와의 연합의 그림자로 취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택함 받은 사람 들 사이에는 부부 연합이 있다. 결혼 제정에 의해서 서로 계약을 맺은 사람 들은 아담과 하와처럼 한 몸이 되는데 이 이상 더 가까운 연합을 상상할 수 는 없다”고 주장한다.
212 no image |신학단상<18>|새해 예산안(豫算案)_조석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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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6 2008-12-17
새해 예산안(豫算案)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턱없는 예산, 결코 믿음의 행위라 할 수 없어” 매년 이맘때쯤이면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서 새해 예산안을 심의하고 결정하 게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규모 있고 절제된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 치고 있기에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삶의 계획을 세운다. 예산안은 절제된 규모 갖춰야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 16:1, 3, 표준새번역). 이 런 점에서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일 년 동안의 살림살이에 대한 새해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믿음의 행위이며 올바 른 일이다. 물론 우리가 계획을 세우지만 모든 결정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생각과 우리 가 계획한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겸손히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 아야 한다. 정부도 새해 예산안을 국회에 이미 제출하였고, 심의 통과만을 기다리고 있 다. 예산안은 수입 지출의 균형과 더불어 씀씀이가 얼마나 유효 적절한가를 세심하게 고려하면서 결정해야 할 부분이다. 특별히 예산안을 확정하기 위하 여 세수(稅收) 부분을 심각하게 고려하면서 지출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예 산안을 다루는 일이 단순한 작업은 아니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새해 예산안 규모는 숫자상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일 반 서민들이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정부의 예산안은 모든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투명하고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한 근거 가 제시되어야 한다. 더욱이 일반 국민들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전달되는 분석 평가된 자료와 정보를 통해서만 그 내용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정부의 예산안은 세부 항목 에 대한 투명성과 그 근거 제시가 매우 중요하다. 신문 지상을 통해서 현재 알려진 정부의 예산안 가운데 최대 쟁점이 되고 있 는 부분은 4대강(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하천 정비 사업비 7,900억 원 이다. 정부는 이 예산안이 홍수 대비용 물길 정비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한 다. 신문을 통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예 산 내역이 어떤 강의 어떤 사업에 얼마 를 쓸지 등의 구체적인 내용이 없고, 전체 예산은 금년의 예산(1,836억 원) 과 비교해 볼 때에 비해 무려 243%가 늘어났으며, 4대강 가운데 낙동강에 전 체 예산의 절반이 넘는 4,469억 원이 책정돼 있다. 그래서인지 이 사업은 한반도 대운하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정부의 꼼수가 아닌가하는 의심의 눈초리가 있다. 국회는 이런 점들을 세심하게 고려하여 국민들을 대표해서 그 내역을 꼼꼼하게 점검하면서 예산을 신중하게 확정해 야 할 것이다. 특히 국회는 4대강 정비 사업 예산에서 숨어 있는 부분을 철저하게 찾아내 야 하며, 불필요한 부분에 대한 예산을 과감하게 삭감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삭감된 예산은 경제위기를 맞아 고통을 당하게 될 사회의 가난하고 어려운 계층을 돕기 위한 사회 안전망 구축과 복지 예산 등으로 사용되도록 해야 한 다. 교회의 새해 예산안도 이런 점에서는 정부의 예산안을 확정하는 일과 일반적 인 원칙에서 크게 다를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새해 예산안도 그 항목 에 있어서 할 수 있는 만큼 보다 구체적이며 투명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더 욱이 예산을 세 운 항목들과 함께 수입 부분을 고려하면서 꼭 필요한 지출 계 획을 세워야 한다. 교회의 새해 예산안에서 항상 어려운 것은 수입보다 거의 대부분 지출 부분 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지출 예산안 가운데 담임목회자 및 여러 사역자들 의 한 달 생활비에 해당하는 교역자 사례비 책정이 가장 어려운 항목일 것이 다. 실제로 교회에서 목회자 사례비 항목의 지출 예산안을 논의하며 결정하 는 가운데 일반 성도들 또는 장로들과 목회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빚 어내기도 한다. 교회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새해 지출 예산 항목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어 떤 항목보다 담임목회자와 함께 일하는 사역자들의 생활비이다. 교회의 한 교육 부서를 맡아서 일하는 사역자들은 결혼한 경우에 한 가정의 가장으로 처와 자식을 부양해야하는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지출되는 한 달 생활비 명목의 사례비는 한 부서만 책임지고 있고, 일주일 에 한번만 사역하는 소위 파트타임(part-time) 사역자라고 해서 최저 생계 를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인 경우가 너무 많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받는 한 달 사례비로 실제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액수이지만 교회에서는 아무도 그 부분을 말하 지 않고 당연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지출되어야 하는 한 달 생활비 지출 예산은 최소한 매 년 이맘때쯤이면 정부가 발표하는 한 달 최저 생계비가 기준이 되어야 할 것 이다. 교회의 사역자 가족이 최소한의 생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교회가 지 출 예산을 책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턱없이 낮은 예산을 세워 놓고 아무런 어려움이나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기대하는 것은 결코 믿음의 행위 가 될 수 없다. 교회는 사역자들에게 그들이 일한 노동 시간의 대가로 임금을 계산하여 지불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의 사역자들은 단순한 시간 노동자가 아니고 소 명을 갖고 하나님의 일을 교회에서 책임 있게 감당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지출되는 한 달 생활비를 회사원들에게 매월 노동의 대가로 지불되는 월급이나 봉급으로 말하지 않고 교역자 사례비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서로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 다. 하나님의 은사 골고루 나눠야 하나님 께서 새해에도 우리에게 쌓아둘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 주시기를 기도 드린다.
211 no image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17>|예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관계_김수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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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3 2008-12-03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관계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성령님은 말씀의 참된 저자이며 참된 해설자” 비록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은 서로 다르지만 또 말씀과 성령 사이에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모울(H. C. G. Moule)은 “우리는 성령님은 기록 된 말씀의 참 저자이실 뿐 아니라 또한 최고 권위의 해설자이시며 참된 해설 자이시다”고 말한다. 말씀과 성령은 결코 분리될 수 없어 특히 성령님은 말씀의 저자라는 점에서 말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련을 가 진다. 위얼스비(Warren W. Wiersbe)는 “성령님은 말씀을 기록하셨고 성령님 은 말씀을 믿음으로 취하고 사용할 때 말씀을 사용하신다”고 말한다. 브루몰(Wick Broomall)은 “성경에서 모든 교훈, 약속, 예언들의 저자는 성 령이시다. 사람들이 축자영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안한 어려운 이론들 이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 이론들 중의 어느 하나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만 약에 성경이 축자적으로 영감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 다. 그것은 잘못을 저지르고 과오를 면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말일뿐이고 따 라서 역사, 과학과 도덕 문제에 있어서 실수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 다. 월볼드(John F. Walvoord)는 ‘성령님은 오늘도 역사하신다’는 그의 책에 서 성령님은 구약 성경의 저자라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그는 “성경의 영감 을 위한 증거들은 내적이며 외적인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구약 성경의 저자 들이 영감에 의해 성경을 쓰고 있다는 신념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많이 있다 (삼하 23:2-3; 사 59:21; 렘 1:9). 선지자들이 사용했던 어휘들과 많은 경우 에서 발견되는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라는 표현들 은 성경 저작에 있어서 하나님의 손길을 증거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워필드(B. B. Warfield)는 “교회는 처음부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해왔다. 그 말씀이 비록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었고 또 사람들에게 지 워질 수 없는 정도로 성경이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하는 특징들이 새겨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영 향 아래에서 기록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주장해왔다. 빠케(Rene Pache)는 “축자영감, 완전영감의 정의는 원본을 쓸 때에 거룩한 저자들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정확한 메시지를 온전하 게 실수 없이 전하도록 인도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무디 성경학원 학장 그레이(James M. Gray)는 “성경을 저작하기 위해서 성 령님께서 사람들에게 내려오신다는 것을 우리가 말씀할 때 사람이 영감된 것 이 아니라 책이 영감되었다고, 다시 말해 저자가 아니라 글이 영감되었다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령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사상은 성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모세는 “발람 이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 친 것을 보는데 그 때에 하나님 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 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한다”고 말한다(민 24:2-3). 하나님의 영이 발람 위에 임했고 또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이 예 언의 저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다윗은 죽음에 임박하여 다음과 같이 그의 마지막 말을 하고 있다. 곧 “여 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2). 성령님은 종종 에스겔을 인도하여 그가 예언을 할 수 있도록 특별한 장소로 데려갔다. 예를 들면 겔 11:5에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 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도다” (겔 37:1-10 참조). 신약성경도 역시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의 저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 3:34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 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 씀을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 씀을 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행 4:6-8에 보면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 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 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 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라고 말씀한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백성의 장로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다고 말한다(행 5:17-20, 23-31 참조). 행 6:8-7:53에 보면 빌립 집사도 역시 성령이 충만하 여 그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행 9:1-22에서 바울 사도 역시 아나니아가 그에게 안수한 후 성령이 충만하 여 다메섹 회당에서 예수님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울은 바보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 곧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을 주 시하며 말했다(행 13:4-11). 성경 저자들은 성령으로 말씀 전해 이런 내용들은 성령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음을 입증 해 주고 있다.
210 no image |신학단상<17>| 물신숭배(物神崇拜)의 세상_조석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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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5 2008-12-03
물신숭배(物神崇拜)의 세상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이 땅에 평화주신 그리스도의 길 따르길” 세계 경제가 점점 예측할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경제 위기가 얼마 동안 계속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것 이다. 예측이 어느 정도 가능한 경제 지표가 발표되어도 그 내용들은 모두 어두운 그늘만 보여준다.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세계 경제 한국의 경제 성장률이 7%가 될 것이라는 꿈을 약속하던 이 나라의 정부는 이 제 더 이상 그 수치를 입에 올리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내년에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률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경 제가 성장할 수 있다면 다행일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부는 내년은 좋아질 것이라고 국민들을 부추기며, 대통령 은 지금 주식을 사면 1년 안에 부자가 된다고 말을 했다. 미래에셋의 박현 주 회장이라는 사람도 지금이 100년 만에 한번 올까 말까하는 절호의 기회라 고 말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좋은 경제 정보를 왜 남들에게 알려주는 것일까 매 우 궁금하다. 그렇게 좋은 기회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혼자 먼 저 나서서 주식을 사고 투자를 하는 것이 이 사회의 상식이 아닌지 모르겠 다. 그 동안 이런 좋은 투자의 기회를 남들보다 먼저 얻기 위하여 많은 정보 를 분석하고 잔머리를 돌린 것이 아니었던가! 세상은 이제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돈을 가진 사람들이 힘을 쓰는 구조 가 되고 말았다. 우리 사회에서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 힘을 정의와 약 자를 돌보는 일에 사용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삶의 안정을 위하여 사용 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인 것을 여러 가지 정보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이런 모습들을 사회의 여러 구석에서 보며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물신숭배 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사회 부적응자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세상은 물 신숭배를 당연시한다고 할지라도 교회에서조차 간혹 그런 모습의 그림자를 발견할 때면 섬뜩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몇몇 교회에서 장로와 목사 가 나누어져 세력 다툼을 하 는 일들이 인터넷에 올라오는 것은 단지 돈 때문 만은 아닐 것이라고 자위해 본다. 물신숭배의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모든 그 리스도인들은 이미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믿 고 천명한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세상은 경제의 법칙에 따라 돌아가고 있 고, 그 속에 싫던 좋던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함께 맞물려서 살아가고 있다. 입으로는 돈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고 외치고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 이 아니라고 목에 힘줄을 세워보지만 그 목소리는 점점 가늘어지고 있는 현 실이기에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앞으로 2-3년 동안 세계 경제가 어려워 질 것이라는 발표는 우리 모두가 사 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경제적 위기를 맞이하면서 교회 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 일들이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먼저 우리 각자가 개인의 삶을 돌아보며 그 동안 꼭 필요하지 않은 부분에서 낭비한 것은 없는지를 살펴보며 재정 지출에 신중해야 할 것이다. 교회 역시 그 동안 필요 이상의 지출은 없었는지 확인하며 모든 부분에서 절 약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경제 위기를 맞이해서 사회는 여러 방면에서 소위 구조 조정이라는 조치를 취하려고 한다. 교회와 우리 개인이 스스로 우리의 삶의 모습을 점검하며 먼 저 조정하고 재고할 일들이 없는지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현재의 경제 위기가 자칫 물신숭배의 길로 들어서는 첩경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하 며 바울이 가졌던 삶의 비결을 배워야 할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 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물질의 많고 적음이 자신에게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물신숭배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삶의 모습이다. 앞으로 더 험악하게 몰아쳐 올 경제적 위기는 세상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 에게 더욱 혹독한 삶을 요구할 것이 분명하다. 이미 여 러 가지 어두운 그늘 이 비쳐지고 있는 가운데 사채 빚을 사용하고 갚지 못해서 빚 독촉의 압박 에 시달리다 자살했다는 사람들의 소식이 들려오고, 주식과 펀드에 투자하 여 실패한 사람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예사로 듣고 사는 세상이 되었다. 최근의 불안한 경제 소식과 함께 남북의 정치 문제로 말미암아 그 동안 개성 공단에 입주하여 사업을 하며 남북 경제에 힘을 보태던 사람들을 생각해 본 다. 그래도 그들은 가진 자들이어서 어렵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어쩌면 그들의 아픔과 깊은 걱정은 우리가 전혀 상상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등장한 이 계절에 우리들의 손이 부끄러운 빈손이 아니 기를 기대해 본다. 한 교회의 장로 직분을 갖고 있는 대통령이 집 한 채 외 에는 가진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공언한 말이 늦었지만 이번 기 회에 실천된다면 그나마 박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인데, 그렇게 될 수 있을 지 궁금하다. 가난한 자들 돌보는 계기되어야 물신숭배의 세상 속에서라도 마음이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평화를 선물로 주 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 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되었으면 좋 겠다.
209 no image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16>|예수님의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_김수흥 목사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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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78 2008-11-12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성도들의 삶에 적용하시는 분” 예수님은 요 3:1-5에서 중생하게 만드는 말씀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지 않고 성령님의 역할에 대해서만 언급하신다. 예수님은 사람이 천국에 가 기 위해서 성령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신다. 말씀과 성령이 역사하는 중생의 사역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 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3:5). 예 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가하면 야고 보는 약 1:18에서 그리고 베드로는 벧전 1:23에서 중생은 말씀에 의해서 일 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다른 점도 있고 같은 점도 있다 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말씀과 성령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r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님은 존재론적으로 다르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뜻과 행위를 계시하신 반면 성령님은 삼위 중 제 3위(位)이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의지를 사람들에게 알리시는 수단이고 성령님은 예수 님의 말씀을 성도들의 삶에 적용하시는 분이시다(고후 13:13). 사 59:21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서로 다르다고 말씀한다. “여호와 께서 또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 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사 59:21). 방금 기록한 장절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성령님을 성도들에게 두시고 또 그 의 말씀을 성도들의 입에 영원히 두신다고 약속하신다. 다시 말해 여호와께 서는 성도들에게 주실 성령과 또 성도들의 입에 두실 그의 말씀을 구별하고 계신다. 이점에 관하여 캘빈은 사 59:21을 해설하면서 성령과 말씀을 구분하고 있 다. 그는 주장하기를 “그(하나님)는 교회로 하여금 ‘말씀’과 ‘성령’으 로 만족하도록 분부하신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약 속에만 매달리는 것이 큰 행복인 것처럼 말이다”고 주장한다. 달라스 신학교 주해교수인 말틴(John A. Martin)도 역시 성령과 말씀을 구분 한다. 그는 “메시아께서 심판하러 오실 때 그는 그의 영을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으실 것이고 그의 말씀을 그들 속에 스며들게 하실 것이다”라 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동조하여 그로간(Geoffrey W. Grogan)은 “성령과 말씀은 하나님 에 의해서 교회에 주어진 ‘두 언약들’이고 교회에 서약하신 두 가지의 ‘은사들’이다”라고 말한다. 벌코프(Hendrikus Berkhof) 역시 성령과 말씀을 구분한다. 그는 “성령은 말 씀 밖에서도 역사하실 수 있으나 전파된 말씀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효과가 없다. 전파된 말씀이 효과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님의 추가적인 역사 때문이 다”라고 말한다. 말씀은 성령님이 쓰시는 도구이다. 벌코프는 “말씀은 성령의 도구이다. 그 러나 말씀에 매인 분은 아니시다. 그리고 말씀은 자동적으로 역사하시지 않 는다. 말씀은 성령을 사람들의 마음에 가져다주고, 성령은 말씀을 마음속으 로 가져간다”라고 주장한다. 영(Edward J Young)도 역시 성령과 말씀 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 는 “언약의 내용이 위로부터 내리신 성령님과 이스라엘의 입에 둔 말씀이 영원히 그들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데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이에 동의하여 리델보스(J. Ridderbos)는 말하기를 성령님은 말씀과 다르다 고 말한다. 그는 “언약의 내용은 성령과 여호와의 말씀의 언약이라”고 주 장한다. 이 점에 있어서 영국 브리스톨 트리니티 대학 전임 교장 모티어(J. Alec Motyer)는 “내 성령(My Spirit)과 내 말씀(my words)은 각각 주님의 생명과 주님의 진리이시다”고 말한다. 투쎄인트(Stanley D. Toussaint)는 주장하기를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성령을 받기 전에 사도들을 기다렸다(행 8:14-17)고 하면서 그 는 “아마도 사도들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성령을 내 리시는 일을 억지하신(withholding) 일의 가장 중요한 면은 분쟁을 막으시려 는 것이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분쟁에 대한 자연적인 경향 때문 에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신자들을 공식적으로 교회 안으로 환영하는 것 이 중요했다”고 설명한다. 렌스키(R. C. H. Lenski)는 빌 립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 마리아 사람들이 두 사도(베드로와 요한)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렌스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누가가 사마리아가 말씀을 받았다고 쓴 것은 과장이 아니다. 이 말은 ‘모 든 사마리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구별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씀은 유대인들로부터 사마리아 지역으로 간 것이다. 이 것이야말로 아주 의미 있는 발전이었다.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한 후 이 두 민족 사이에는 하나의 큰 간격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다리가 놓이고 있었다. 그것은 사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집사들 중 하나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것은 확실히 사도들 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두 사도를 빌립에게 보냈다. 그들이 전달해야 하는 생각은 모든 신자들은 그들이 유대인 신자이든 사마리 아 신자이든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를 이루어야 하는 것 은 베드로와 요한의 사명에 의하여 이룩된다. 말씀과 믿음을 통해 함께 하시는 성령 그런데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성령 이시다. 성령께서 말씀과 믿음을 통 하여 모든 신자들 안에 거하실 때 그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한 몸이 되고 또 말씀의 중요한 사역자들인 사도들과 영적으로 한 몸이 되는 것 이다.
208 no image |신학단상<16>| 변화를 기대하는 사회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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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9 2008-11-12
신학단상 변화를 기대하는 사회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근본적 변화는 모두가 평등하며 사랑 실천하는 것”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 버락 오바마가 제44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되었 다. 매번 그랬지만 특히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 켰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인종 차별이 아직도 심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는 미 국에서 흑인 대통령 후보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극적인 변화 몰고 온 미국 대통령 선거 선거 결과는 ‘변화’(Change)를 구호로 외치며 미국의 변화 가능성을 역설 했던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되었다.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 하여 미국 시민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환영했고, 미래에 대한 큰 변화 를 기대하고 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아시아의 국가들도 선거 결과를 환 영하며 당선자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고 긍정적인 역할과 변화를 기대하 고 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오 바마는 꿈이 이루어 낸 결과라고 말할 수 있 다. 그 꿈은 미국의 변화가 가능하고 실현 될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며 미국 시민들은 그 변화를 선택한 것이다. 미국의 새로운 변화는 이제 시간이 문제 일 뿐이며 이미 시작되었다. 미국의 변화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가장 신속하게 이루어 질 것으로 예측된 다. 왜냐하면 오바마는 그 동안 신자유주의 사상에 깊이 뿌리내린 미국 경제 와 국제금융가가 변화되어야 할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의 경제 정책의 핵심은 시장에서 정부의 역할을 중시하고 부자들에게서 세 금을 많이 걷어서 경기를 부양시키고 저소득층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이 런 정책은 그 동안 시장의 자율과 개방화 및 감세에 치중해왔던 신자유주의 와는 직접적으로 배치되는 놀라운 변화이다. 한 사람이 간직하고 있었던 꿈과 사상이 한 나라와 세계를 변화시키기에 충 분한 것임을 미국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어느 정도 확인하게 된다. 오바마 가 선거 기간 내내 역설한 ‘변화’는 오늘날 우리 교회와 사회에도 요구되 는 필수 요소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거의 모든 면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긍정적인 변 화는 사람이 사람 자체로 인격적 대접을 받으며 생명의 가치가 존중되는 사 회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물질의 소유로 사람을 저울질하는 사회가 아니며, 학벌과 지연 및 혈 연으로 구조화된 사회가 아니고, 20퍼센트의 가진 자가 80퍼센트의 사람들 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사회가 아니라 자기의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하 는 것 자체만으로 인정을 받으며, 모두 함께 더불어 평균되게 살아가는 사회 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 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 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말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의 삶에 익숙해지며 잘 적응하는 것을 경계하며 오히려 세상의 삶의 방식을 본받지 말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변화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변화는 하나 님의 신실하신 뜻을 헤아리기 위함이다. 이런 삶의 방식은 마음과 생각이 완 전히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변화는 마음과 생각이 완전히 바뀌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근본적인 변 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삶의 방식 정도가 아니라 모든 관점, 시각, 세계관, 철학, 등이 완전히 바뀐 것을 의미한다. 이런 근본적인 변화는 사람의 의지 와 결단으로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거의 불가능한 것이 다. 이런 변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하여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근본적으로 변화된 사람이라는 것을 “새 로운 피조물”이 된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변화된 사람 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 세상과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로 운 공동체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교회 공동체를 향한 변화의 요구는 오늘날 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목회자로부터 시작해서 일반 성도에 이르기까 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일상의 삶에 익숙해지듯이 이제는 교회 가 세상의 여러 가지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기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세 상은 교회를 향하여 손가락질하며 기독교를 X독교로 부르고 압박과 집중적 인 공격을 늦추지 않는다.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전히 반응 하여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워나가지 않 으면 파멸은 그렇게 멀리서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교회의 근본적 인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서로 사랑을 실천하 고, 세상의 지위나 학벌 및 세상의 물질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데 있다.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교회가 진정 변화되기를 바란다면 최소한 교회 의 투명한 재정 예산과 지출 및 감사 결과의 공개, 교회의 인사 및 여러 가 지 행정의 투명하고 적법한 절차 및 시행, 모든 회의에서 의제에 대한 활발 한 논의 및 다양한 견해의 수용과 합리적 결론 도출, 등을 실천하는 일을 심 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근본적 변화 없는 교회 퇴출 대상일 뿐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죽음을 맛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7 no image |손에잡히는교리강좌<15>|'그 말씀'(요15:3)에 담긴 의미 이해_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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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4 2008-10-29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 '그 말씀(요15:3)에 담긴 의미 이해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말씀’이 예수님의 전 체 메시지 혹은 전체 계시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으로서 ‘그 말씀’ 펜톤(J. C. Fenton)은 “제자들이 깨끗해진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 하신 말씀에 기인한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과 교제하신 때 문이다”라고 말한다. 태스커(R. V. G. Tasker)는 “열한 제자는 이미 열매를 맺도록 준비된 정결 한 가지가 되었다. 말씀, 곧 예수님의 교훈 안에서 그들에게 알려진 하나님 의 뜻의 전체 계시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는 효과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왓킨스(H. W. Watkins)는 요 15:3을 주해하면서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에 게 주신 계시였다. 말씀의 도덕적 힘에 의해서 그들은 깨끗해졌다.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의 성경 말씀에 국한 시켜서는 안 되고 오히려 주님께서 말씀 하신 전체 계시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와이틀러(Thomas Whitelaw)도 역시 “우리 주님은 단순히 지금 저녁 식사자 리에서 그가 제자들과 대화하고 있으신 것이나, 혹은 그가 13:10에서 말씀하 신 특별한 말씀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전체의 교리를 언급하 고 계신다”고 주장한다. 맥그레골(G. H. C. MacGregor)은 ‘말씀’(the word)을 예수님의 전체 메시 지로 보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는 기구 역 할을 감당해왔다 -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그의 전체의 메시지와 계시인데 -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들의 잘못을 보여 왔고 또 그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결점들을 그들로부터 제거했다”고 말한다. 쌔들러(M. F. Sadler)는 요 15:3을 논하면서 “그 말씀은 무엇인가? 어떤 특 별한 말씀, 예를 들면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같은 말씀이 아니 라 차라리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말씀해 오신 전체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전체의 말씀이 그들에게 받아졌고 그들로 하여금 현재의 그들이 되도록 만드 는데 공헌했다”고 말한다. 애버트(Lyman Abbott)는 ‘그 말씀’(요 15:3)이 무엇인가를 넓은 영역에서 진술하고 있다. 그는 “그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특별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의 언약과 교훈을 포함한 그의 전체 사역이다. 그리고 그 사역은 그의 용서와 평화의 은사를 포함하며, 기독교인의 활동으로 불러준 것을 포 함한다.” 이상에서 말한 모든 주장들은 그리스도의 전체의 메시지 혹은 전(全) 계시 가 그의 윤리를 포함하며 전체의 교리를 포함하기에 받을만한 학설이다. 그 리스도의 전체의 메시지는 그의 십자가의 희생도 포함하는 고로 받을만한 학 설이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 15:3의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을 지칭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몇몇 학자들이 15:3의 ‘그 말씀’은 예수님의 전체 의 메시지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의 행위를 계시하는 ‘활동하는 말씀’ (active word)이거나 혹은 예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유효한 능력’ (effectual power)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배렛(C. K. Barrett)은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이루시는 구원의 메 시지이고, 예수님 안에 있 는 구원의 메시지이다. 요한의 관점으로 보면 사람 이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형식(a formula)에 의하여 깨끗해진다고 상 상하는 것은 소위 세례라고 불리는(called) 물속의 잠김으로써 깨끗해진다 고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잘 못된 것이다. 깨끗하게 만드는 것은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러나 그의 행동의 의미는 그의 행동하는 (active) 말씀에 의해 계시된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 15:3의 ‘말씀’에 대해 설명하면서 필립스(John Philips)는 예수 님의 말씀은 깨끗하게 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교회와 그 회원들을 다루시는 위대하신 농부(예수님 지칭)는 언제나 전정하는 칼에 만 의존하지 않는다. 보다 더 온유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 이 소유하고 있는 깨끗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제자들과 또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교회는 말씀의 효력 있는 능력(effective power)에 의하여 깨끗함을 유지한다. 말씀은 영혼을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는 원천이다. 이 말씀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보호한다. 또 사기꾼들을 몰아낸다. 그리스도 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는 것은 포도나무 안 에서 영적인 생명의 원천이 다”라고 주장한다. 제자들과 교회는 그 능력 있고 깨끗하게 하는 말씀을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적용해야 한다. 히브리서 4:12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 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말한다. ‘그 말씀’으로 정화되는 교회들 이처럼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효력 있는 말씀이라고 선언하고 있 다.
206 no image |신학단상<15>| 기독교 윤리의 가치_조석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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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0 2008-10-29
신학단상 기독교 윤리의 가치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최근에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경제의 불안정과 최악의 금융 상황은 이 미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사고의 여파가 한국뿐 만 아니라 온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 파급 효과가 전문가의 예단 (豫斷)을 불허하는 듯하다. 세계적 경제대란 몰고 온 미국 금융 지금 지구촌의 모든 구석에서 싫든 좋든 신자유주의의 몰락을 피부로 경험하 고 있는 중이다. 황금만능의 사상과 금융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 는 사상이 세계를 제패(制覇)한 듯 했다. 하지만 부의 축적만을 위하여 브레 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가 달려가듯 신자유주의는 가난한 자를 소외시킨 윤 리 도덕의 부재 속에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미국은 꺼져 가는 경제 불황에 불씨 를 지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이 지금까지 제시한 경제 불황의 다 양한 해결책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음을 날마다 눈과 귀로 확인하게 된다. 윤리 도덕이 부재한 경제 구조 자체를 새롭게 바꾸려 는 대안이 제시되기 전에는 밑 빠진 독에 물 붙기 일 뿐이다. 한국의 경제 역시 미국과 비슷한 길을 걸어가면서 최악의 경제 상황이란 직 격탄을 맞았지만 정부의 입장은 ‘우리는 미국과 다르다’는 말을 연발한 다. 아직은 우리 경제 상황이 어렵지 않고 위기가 아니어서 얼마든지 극복 할 수 있다는 말로 국민을 설득하고 있다. 오히려 위기가 최상의 기회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 뱉으며 경기 부양 정책들을 쏟아놓는다. 그렇지만 그 정책들은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인 종부세 및 양도소득세의 완 화 또는 폐지, 임직원 연봉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은행 구제를 위 한 자금 지원, 그 동안 엄청난 수익을 낸 건설 회사들의 미분양 아파트 해결 을 위한 국민의 혈세 지원, 투기 금지 지역의 해제 등등 모두 서민들과는 직 접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윤리 도덕의 부재 속에 부의 축적만을 지상 목표로 알고 사는 사람들만을 위 한 정책은 멸망을 향해 꺼져 가는 불씨에 기름을 붓는 행위 와 같다. 윤리 도 덕이 부재한 경제 구조 속에서 부의 편중으로 인한 경제 양극화의 현상이 심 화(深化)되면 될수록 신자유주의 사상은 종말을 향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고 교훈 했다. 부의 축적만을 위하여 달려가는 인생은 이미 악의 뿌리를 그 속에 깊 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악의 뿌리는 자라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게 악한 열매를 거두게 하며 함께 멸망을 자초(自招)한다. 악한 열매의 모습은 최근에 일어난 소위 ‘묻지 마 방화 살인 사건’의 희생 자들을 통해서도 이미 확인되고 있는 듯하다. 경제적인 압박 속에 세상을 향 하여 분노하며 자신의 삶을 혐오하여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무차별 살인한 젊은이를 바라볼 때 망연자실(茫然自失)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분노하며 그 살인자를 향하여 돌을 들어 던지기 전에 윤 리 도덕의 부재 속에 부의 편중을 가져온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 구조의 혜택 을 받은 자들은 결코 마음 편하게 함께 돌을 들고 던질 수만은 없을 것이 다. 윤리와 도덕을 도외시한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 구조 속에서 부의 편중( 偏重) 이 만들어낸 경제의 양극화 현상은 어떤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킬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올바른 윤리와 도덕의 기준이 없을 때 그 결과는 사회의 모든 구석에서 다양하게 부정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 경제 구조 속 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기독교 윤리의 가치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요소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 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 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7-18)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 윤리의 기초는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제자매를 생각하 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본주의 경제구조 속에서 나만의 배를 만족시키기 위 하여 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면 그렇게 쉽게 무너지 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에 문제가 된 쌀 직불금을 불법으로 신청하여 수령한 사람들 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은 우리의 경제 역시 이대로 흘러간다면 그 멸망의 끝 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암시 하는 것이다. 경제 윤리와 도덕을 상실하고 자신들의 배만 불리기 위하여 사는 사람이 그렇게 많기에 농민들은 피눈물 을 흘리며 절망감 속에 탄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기독교 윤리의 가치를 인정하고 수용하여 부의 축적만을 위 해 질주하지 않고 분배와 나눔을 통하여 상생(相生)을 위한 적극적인 몸부림 을 친다면 오히려 생명력을 갖게 된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경제 위기 속에 서 기독교 윤리의 가치를 다시금 강조하여 가르치며 교회가 그 가치를 적극 적으로 실천하여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함께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나눔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 할 때 최악의 경제적 위기 속에서도 삶은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그 감미로운 맛을 만끽할 수 있다. 세상의 없어질 재물로 땅을 사랑하여 땅을 산다고 소가 웃다가 입이 찢어질 핑계를 말하지 않고 춥고 배고파 울고 있 는 이웃을 생각하며 기꺼이 그들에게 베풀고 나누어주는 우리 사회가 되어지 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윤리 가치 상실한 경제의 말로 보여줘 아울러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기독교 윤리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 고 함께 실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5 no image |신학단상<14>| 인간의 생명과 죽음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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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9 2008-10-08
신학단상 인간의 생명과 죽음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 바라보아야” 우리는 최근 여러 가지 자연재해(自然災害)와 인재(人災), 살인과 자살을 통 하여 인간의 생명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소식을 듣고 있다. 잇따른 죽음, 충격 가져와 필리핀에 가난한 학생들을 위하여 대안학교를 세우려고 현지답사를 갔던 목 사 부부들의 죽음의 소식은 우리의 가슴을 한없이 슬프게 하였다. 일본에서 는 소위 ‘묻지마 살인’이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가고 있다. 아무 원한 관계 도 없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을 아무 이유도 없이 살해하는 일이 우리 사회 에서도 이미 발생했다. 인간의 죽음이 노쇠하여 기력이 다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은 자연재해 와 인재로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살인으로,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로 죽음의 소식을 듣는 현실이 되었다. 지난해에 미국에서 일어난 버지니아 대학 의 참사는 한 인간이 일으킨 죄악 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고귀한 생명 들이 아침 이슬처럼 사라졌다. 인간에게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세상은 우리가 원 하고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런 암담하고 처참한 살인 사 건을 바라보면서 범죄를 일으킨 원인을 규명해 보려고 노력한다. 범죄자에 대한 초기의 정신과 치료의 부재, 외국인으로서 겪은 교육적 환경 의 어려움, 총기 소지를 쉽게 허락한 법규, 주변의 사람들의 무관심 등등을 이 범죄의 배경과 원인으로 말한다. 범죄의 원인을 규명한 것이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 다.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에게 동정을 할 수 있으나, 그 이전에 인간 의 타락한 본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을 바라보는 신학적 인간론이 다. 최근에 계속되는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침울하게 한 다. 이유가 어떠하든지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작정을 하고 그 일을 실행 하기까지의 과정을 잠시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아프다. 최근에 자살로 자기 생명을 끊는 연예인들이 그리 스도인이라는 사실은 또 다른 충격을 주기에 충 분하다. 자살할 만한 이유와 상황, 여러 가지 말못할 일들이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 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살하지 않는다는 통념이 무너진 느낌이어서 더욱 허탈하다. 총기를 소지하여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불 가항력적인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자살을 하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 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사회의 여러 가지 상황이 자살을 방조하도록 내 버려두었는지 몰라도 그 사회 속에 있는 교회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자살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 하고 있는 것이 우울증이라고 한다. 대부분 자살을 한 경우는 우울증 환자 로 주변에서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예수를 믿는 사람 들도 우울증 환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예수를 믿고 있어도 자살할 가능성 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런 사실을 시인하고 우울증 환자 및 그와 같은 증상으 로 고통당하 고 있는 사람들을 잘 살펴서 자살을 미리 방지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소 위 ‘묻지마 살인’의 경우도 사회의 부적응 환자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 가 있고, 교회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이런 사람들의 편에 서서 이들을 돌 보고 보살펴야 한다. 인간은 교육적 환경이 좋고,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고 모두 악에서 떠나 선 을 행하지 않는다. 확률적으로는 그런 결과의 가능성은 있겠지만 그것은 언 제나 무수한 변수가 있다. 좋은 부모 밑에서 자라났다고 모두 훌륭한 인간 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교육적 환경이 열악하고 사회적으로 열악한 부모와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라고 모두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미국에서와 같은 참극이나 ‘묻지마 살인’이라고 부르는 현상은 인간 의 악한 본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한 사례일 뿐이다. 자살을 간접적으로 방조하는 현대의 구조적 모순이 내재한 사회 속에서 생명 경시 풍조는 상승 작용을 일으켜 인간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만든다. 생명 경시 풍조 는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 때 아무 감각이 없다면 이미 그런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n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 여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맛볼 수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성경은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 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 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가르친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는 것이 진리이다. 그러나 타인의 생명을 취하는 자나 비록 자기의 생명이지만 자기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을 창조하 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악한 행위일 수밖에 없기에 더욱 가슴 아픈 것이다. 스스로 죽음 결정할 수 없어 하나님이 생명 주셨음을 감사하고 살아있는 동안에 생명의 기쁨을 풍성하게 누리는 은혜가 넘치면 좋겠다.
204 no image |손에잡히는 교리강좌(14)| 예수님의 ‘말씀’의 성격_김수흥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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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4 2008-09-23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 예수님의 ‘말씀’의 성격 (The nature of Jesus’ Words)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총체적인 하나님의 은혜 담고 있어” 예수님의 말씀의 성격에 대하여 여러 학자들은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를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의 성격을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양하게 번역되는‘그 말씀’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연합을 이룬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요한복음에서 ‘말 씀’이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살펴보면 영어 번역판 성경에서는 세 가지로 번 역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때로는 “말씀”(1:1, 14, the Word-대문자)으로 번역되었고 또 때로는 소문 자 “말씀”(2:22; 4:41, 50; 5:24, 38; 8:31, 37, 43; 10:35; 12:48; 14:23-24; 15:3, 20, 25; 17:6, 14, 20-the word) 또 때로는 “말씀”(the saying)으로 번역되었다(4:37, 39; 6:60; 7:36, 4 0; 8:51-52, 55; 10:19; 12:38; 14:24a; 15:20b; 18:9, 32; 19:8, 13; 21:23).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 열한 제자들이 그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 해졌다고 주장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러 주신 말씀에 대하여 몇 몇 학자들은 그 말씀(the word)은 예수님께서 성찬 예식 후에 제자들에게 말 씀하신 교리 혹은 말씀을 지칭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여러 학자들의 주 장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 다. ① 5:3의 말씀은 제자들을 도덕적으로 교훈하신 말씀이라는 학설 고데이(Frederic F. Godet)는 15:3의 “말씀”을 주해하면서 “열한 제자들 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도덕적인 교훈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순결의 원리 (the principle of perfect purity)가 그들 속에 숨겨졌다. 왜냐하면 예수님 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까이 하는 영혼에게 역사하시는 매일의 심판 의 도구이며 동시에 항상 계속되는 엄격한 훈련의 도구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15:3의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일러 준 말”을 제자들이 예수님 으로부터 받은 도덕적 교훈을 위한 말씀으 로 제한하는 것은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을 단번에 깨끗하게 만든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 중 에 다른 말씀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 말씀은 교리일 수도 있다. 캘빈(John Calvin)은 주장하기를 “그(예수님)는 그들에게 그들이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경험했다 는 것을 상기시킨다. 곧 그들이 이미 예수님 안에 뿌리를 박았고 또 깨끗해 졌음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은 깨끗하게 하시는 방법, 곧 교리를 지적하신 다. 그리고 그는 의심 없이 설교에 관하여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 ② 15:3의 말씀은 두 가지 이상의 것이 섞여있다는 학설 다른 학자들은 15:3의 “말씀”이 두 가지 이상의 것이 섞여 있다는 학설을 주장한다. 래니(J. Carl Laney)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말 씀”이 예수님의 인격(Jesus’ person)이나 혹은 그의 행동(His action)을 지칭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들(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메 시지에 응답함으로써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칼슨(D. A. Carson)은 “말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곧 “예수님의 말씀 에 마술적인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차라리 예수님의 가르침(“말씀”이 요 14:23에서 해석되는 것과 같이)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인격과 예수님의 행동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의 추종자들의 생활 속에 이미 묻어있다”고 말한다. 터너(George Allen Turner)와 맨테이(Julius R. Mantey)는 15:3을 주해하면 서 “말씀”에 대해 다른 학설을 내세우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깨끗하게 만든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여 효과가 나타난(effectuated)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한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중재된 (mediated)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깨끗해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 렌스키(R. C. H. Lenski)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셔서 제 자들을 깨끗하도록 만든 말씀은 “전체의 복음”(the entire Gospel)과 “성 찬 예식에서 말씀되는 말씀”(the word in the Sacrament)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인격과 행동 포함돼 이상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학설은 대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여러 가지 효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고로 복합설(mixed theory)로 보아야 할 것이다.
203 no image |신학단상| 평화의 복음_조석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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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7 2008-09-23
평화의 복음 “평화의 혜택은 그것을 위한 희생보다 훨씬 커” 조석민 목사 쪾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금년 2008년은 대한민국 건국 90년, 광복 63년, 정부수립 60주년이 되는 해 이다.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남북 통일 근거되는 대한민국 건국 90년 자랑스러운 이름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연호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19 년 4월 13일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부터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 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시작 된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憲法 前文)은 대한민국 헌법의 조문 앞에 있는 공포문 (公布文)으로 헌법 제정의 역사적 과정, 목적, 헌법 제정권자, 헌법의 지도 이념이나 원리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일본의 침략에 분연히 항거한 이봉창 의사의 결의 선서문에는 “대한민국 13 년 12월 13일 선서인 이봉창”이라고 쓰여 있고,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결의 한 선서문에는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이라고 쓰여 있 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가 2008년을 건국 60주년이라고 계속해서 강조한다 면, 북한이 붕괴되었을 때 우리가 북한을 같은 민족이라고 말할 논리적 근거 가 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2008년이 대한민국은 북한과는 완전히 다른 건국 60주년을 맞이하 는 신생국가가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정부의 논리라면 독도는 1948년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이 탄생하기 전에 일본이 점령했던 땅이기에 일본에 게 돌려줄 수밖에 없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최근 북한 소식 가운데 김정일의 건강 악화 소식은 북한의 정치적 불안을 예 측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지속된 남북의 평화적 관계도 위협 받을 수 있다는 걱정을 하게 만든다. 더욱이 지난 10년 간의 남북관계를 잘못된 비정상 관계로 인식하고 있는 이 명박 정부는 남북관계의 지속성을 하루아침에 무력화 시켰다. 이런 정치적 기류 속에서 북한 김정일의 건강 악화 소식은 막연하지만 평화를 위협하는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의 거의 유일한 대북정책인 ‘비핵개방 3000’은 북한의 비핵화 와 개방을 전제로 10년 이내에 북한의 일인당 국민 소득을 3천불로 만들어 주겠다는 구상이다. 그렇지만 이런 정책의 성공은 적지 않은 난관이 예상되 기에 남북평화에 대한 소망은 더욱 간절해진다. 북한의 비핵화와 개혁개방은 모든 국민이 동의하는 정책이며, 이것을 통해 서 남북이 평화를 유지하며 결국 통일의 날을 꿈꾸며 소망하는 것이다. 오늘 날 한반도의 상황은 해방이후 지금까지 계속된 남북분단의 상황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런 남북분단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 복음이 함의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평화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남북의 평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지금까지 겨우 유지된 남북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모든 노력은 이 시대의 기 독교가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향하여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마 5:9)이라고 교훈한다. 우리가 실제로 매일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평화를 이루어내며 그것을 유지하는 일은 때 때로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마 10:34-37). 더욱이 평화를 이루는 것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화평하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다. 이런 점에서 신약성경에서 평화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 으심으로만 가능한 평화임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갈등이 있는 사람들 사이를 화평하게 하려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이 가신 고난과 죽음의 길을 따라가 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평화를 실제적으로 경험하기 위하여 치른 대가 는 평화를 누리는 특권에 비교해 볼 때 그렇게 큰 것은 아니다. 신약성경에 사용된 평화의 개념은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평화의 의미보다 는 영적 개념이 우선한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평화는 하나님과 예수 그 리스도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다. 분단국가라는 상황 속에 살아가는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평화의 상태 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남북의 평화 적 관계가 살얼음판 같은 느낌을 받는 현시점에서 군사적, 정치적, 이념적 대치 상황 이 더욱 심화되지 않도록 정부와 국민은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 다. 평화의 복음을 소유한 한국 교회가 이런 남북의 갈등 상황에서 화평하게 하 는 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일이며 복음이 가르치는 일이기에 실천적으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가르치고 있 는 평화의 개념을 정치적이며 군사적인 의미로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현재 한국교회가 남북의 정치적, 군사적, 이념적 대치 상황에서 그 갈등을 해소하고 남북의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 은 매우 중요한 과제로 모든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할 일이다. 남북 평화 유지 위해 교회가 노력해야 평화의 복음을 소유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를 소망한다.
202 no image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13)|포도나무 비유와 성령의 약속_김수흥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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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1 2008-09-03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 포도나무 비유와 성령의 약속 김수흥 목사_합신 초빙교수 “예수님과의 연합은 성령님의 역사에 속해” 성경 해석가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다락방 강화(요 14-16장)에서 주로 제자들 에게 성령을 약속하셨다고 동의한다(요 14:16-16, 26; 15:26; 16:7-8, 13). 그래서인지 요한복음 14:16-16:33을 언뜻 보면 포도나무 비유가 이곳에 잘 못 끼여든 내용으로 여길 수도 있다. 포도나무 비유가 어색한 다락방 강화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15:1-17안에 ‘성령’이란 낱말이나 혹은 ‘성령’ 을 암시하는 낱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실 15:1-17을 제외하고는 14:16-16:33에는 성령에 관한 언급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a.14:16-21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성령을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b.14:22-24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령에 의하여 새로운 계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c.14:25-31에서, 예수님은 성 령의 역사에 대해서 언급하신다. d.15:18-16:4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박해를 받는 세상에서 성령의 도우심 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e.16:5-15에서, 예수님은 그가 떠나신 이후에 성령이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 고 성령님은 예수님을 대신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f.16:16-24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조금 있으면 성령을 받을 것이라 고 말씀하시고 그의 제자들은 그날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무엇이든지 아버지 께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g.16:25-33에서, 예수님은 성령님께서 오순절 이후에 아버지를 계시하실 것 이라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 씀하신다(14:13-14; 15:16; 16:23-24, 26). 따라서 요한복음 15:1-17에 ‘성령’이란 낱말이나 혹은 ‘성령’을 암시하 는 낱말이 없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 중에서 성령님이나 또는 성령님의 역사를 제외하셨다고 증언할 수는 없다. 15:1-17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연합을 지칭하고 또 많은 열매를 맺는 문제를 지칭한다는 사실은 이 부분의 말씀이 성령님의 역사를 전제하는 말씀이고 또 성 령님의 역사를 제외시키지 않고 있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이런 분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포도나무 비유를 다른 문맥 속으로 옮겨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브라운(Raymond E. Brown)은 주장하기를 “15:1-6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원래 다른 문맥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 한다”고 했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1-6절에는 마지막 강화의 병행 절이 없고, 7-17절에는 마지막 강화의 병행 절이 있다는 근거에 의해 구분되어졌다는 전 제는 다른 논증들을 보아도 지지를 받고 있다. 1-6절은 2인칭을 몇 개정도 사용하고 있을 뿐 주로 3인칭이 사용되어 있는 반면, 7-17절은 2인칭이 주종 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이유를 들어 1-6절과 7-17절을 구분하는 것은 논리성을 잃고 있다. 이유는 1-6절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를 선포하기 때문인 반면, 7-17절은 제자들에게 진리를 적용하는 내용이기 때문 에 1-6절은 주로 3인칭이 사용된 것이고 7-17절은 2인칭이 사용되었다고 보 아야 한다. 예수님은 종종 글의 흐름을 깨시고 일반적인 진리를 선포하실 때 는 문법적인 인칭을 변경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요 6:35; 8:12; 10:9-18; 11:25; 14:6). 그런고로 1-6절이나 혹은 1-17절을 다른 문맥으로 옮길 필요가 없고 성령의 약속을 주로 다루고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 강화로부터 포도나무 비유를 제거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예수님과의 연합 강조하고 있어 포도나무 비유는 바로 제 자리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유는 포도나무 비유가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성도와 예수님의 밀접한 연합 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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