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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잡히는 교리강좌<7>


예수님의 메시아성(Messiahship) 침묵에 담긴 의미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마태복음 12장 10-21절에는 예수님께서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을 때 많
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모두 고쳐주신 기사가 나
타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다.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아성 숨기셔

예수님의 이 경고에 대하여 칼슨(D. A. Carson)은 “예수님은 종종 반대가
심하면 후퇴하셨다(마 4:12; 14:13; 15:21; 16:5 참조). 그가 그렇게 피하
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기까지 습관적으로 되풀이되었다(마
26:45; 요 7:8 참조)...이렇게 하여 그의 사역은 연장되었다”(마 4:23;
8:16; 9:35 참조)고 주장한다.
맥아더(John F. MacArthur)는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
신 이유에 대하여 말하기를 “지금은 그가 높아지시는 때가 아니고 낮아지시
는 때였기 때문
이다”고 주장한다.
마태복음 16장 13-20에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
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라고 신앙을 고백했을 때 그의 제자들에
게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20절)고
말씀하신다.
세상에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하
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경고에 대하여 므기(J. Vernon McGee)는 “주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신 이유는 그가 누구이신가를 아는 단순한 지식만으로는 사람이 구원을 받
지 못하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와 그가 무엇
을 하셨는가를 알아야 하며,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 영접해야 하기 때문이
다”(막 8:27-30; 눅 9:18-21)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이런 부탁을 두고 딕슨(David Dickson)은 “예수님께서 다른 명령
을 주실 때까지 제자들 자신들만 이런 명령을 간직하실 것을 명령하신다. 그
런고로 예수님은 그 자신의 신비한 일들을 계시하실 자신 나름의 때를 가지
고 계심을 배우라.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아무에게도 자기가 그리스도이심
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만약에 그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
더라면 그들은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의 진리가 너무 빠른 시기에 알려지심으로 그의 죽음이 방해받는 것을 원하
시지 않았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명령에 대해서 힐(David Hill)은 “예수님이 구주이심에 대하여 침
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메시아
(Messiahship)라고 아는 지식은 오직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해야 할 사람들에
게만 주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누구라고 하는 참되고 충분한 이해는 빨
리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혹은 예수님을 얼핏보아서 성취되는 것도 아니다”
라고 말한다.
마가복음 3장 7-12절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들에게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
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마가복음 3장 11-12절은 “더러운 귀신들도 어
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
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고
보도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 명령과 관련하여 웨슬(Walter W. Wessel)은 주장하기를 “귀신
들의 부르짖음을 잠
잠하게 하셨다(12절).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계시
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으며 또한 귀신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합당한 사신들
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잠잠케 하신 명령에 대하여 그래스믹(John D.
Grassmick)은 기록하기를 “예수님께서 귀신들이 때도 되지 않아서 너무 일
찍이 소리 지르는 것을 잠잠케 하셔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 곧 예수님
의 정체성과 사역을 점진적으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전적으로 순종
하신다는 것을 확인하셨다”(막 1:29-34; 눅 4:38-41)고 말한다.
마가복음 5장 35-43에 보면 예수님은 죽은 소녀를 고치시고 주위 사람들에
게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부탁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막 5:43). 예수님의 이 명령에 관하여 레인(William L. Lane)은 다음과 같
이 주석했다 :
이들 다섯 사람(소녀의 부모와 세 제자-역자 주)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나
누어서는 안 되는 특별계시를 받는 특권을 받았다. 따라서 그 비밀은 ‘증언
된 비밀’(a witnessed secret)이었다. 이 증언된 비밀은 예수님께서 금지하
신 다른 사람들과는 나우어서는 안 되었다
.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특별한
동기는 조롱 섞인 웃음으로 예수님을 비웃은 사람들의 순전한 불신앙 때문이
었다. 마가복음 전체를 통하여 관찰해보면 예수님은 그의 메시아성
(Messiahship)을 조건부로만 보이신 것이 확실하다.

조건부로 예수님은 메시아성 보이셔

예수님께서 자신을 야이로의 집밖에 모였던 불신앙적인 사람들에게는 보여주
시기를 원치 않으신 것은 예수님의 일관된 행위로 보아서 아주 타당하다. 예
수님은 예수님의 구원의 행위가 집 밖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모르는 채 있
기를 원하셨다.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201 no image |신학단상<12>| 뇌물(賂物)과 선물(膳物)_조석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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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5 2008-09-03
신학단상 뇌물(賂物)과 선물(膳物) 조석민 교수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깨끗한 사회는 뇌물 통하지 않는 사회” 금년 추석(秋夕)은 예년과 비교해 볼 때, 좀 빠른 느낌이다. 추석이 되면 사 람들은 살아오면서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을 기억하며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 하여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마음을 쓴다. 준비된 선물은 사람을 기쁘게 해 준비된 선물을 주고받는 마음 씀씀이는 참 귀하고 선물을 받는 사람을 기쁘 게 한다. 이런 경우에 선물을 준비하여 감사한 마음과 함께 전달하는 사람이 나 그 선물을 받는 사람 모두 즐겁고 유쾌하다. 그러나 추석 선물이 진정한 선물이 아니라 선물로 포장된 뇌물의 성격을 지녔을 때, 그 뇌물의 부정적이 며 파괴적인 힘은 인간의 정신을 피폐(疲弊)하게 만든다. 우리는 추석과 같은 명절이 되면 진정한 선물보다는 선물로 포장된 뇌물이 활개를 치며 사회 여러 구석에서 극성을 부리고 있는 것을 안다. 성경은 교 훈하기 를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 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 23:8)고 했다. 명절이 지나서 고위 공직자들이 받은 선물이 많은 경우에 참된 선물이 아니 라 뇌물인 것이 드러나서 뉴스로 보도되면 그 소식을 접한 모든 사람들의 입 에서 한숨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진정한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기에 청탁(請 託)이 따르고 그 청탁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선물로 위장된 뇌물을 주고받 은 당사자들 사이에 잡음이 생기며 결국 그 일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감사와 함께 주고받는 선물이 아닐 경우에 선물로 포 장된 뇌물로 쉽게 변질될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선물 과 뇌물의 차이는 백지 한 장 차이도 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선물을 받는 사람에게 선물 자체가 큰 부담이 되어 당황스러울 때 선물의 진정한 의미가 퇴색(退色)되기 마련이다. 명절에 감사의 선물로 떡값을 주고받았다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말한 금액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인 것을 듣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 은 그것이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안 다. 일반적으로 선물은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이 선물 받을 사람을 생각하며 준비 할 때 마음에 기쁨이 넘친다. 선물을 받는 사람 역시 전혀 예상하지도 기대 하지도 않았던 것이기에 감사와 기쁨이 넘친다. 본래 선물의 의미는 선물을 받는 사람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으로 선물 을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일방적이다. 그래서 선물을 받는 사람 역시 때때로 일방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성 경은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로 비유해서 설명했다. 바울은 에베소서 2:8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 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구원이 선물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적인 섭리 속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선물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이 선물을 받을 만한 어떤 조건 이나 이유 때문에 선물을 받는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상이다. 그러나 반 대로 어떤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데 그 사람이 잘 할 것을 기대하거나 바라면 서 선물을 준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뇌 물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창세기 32:13-20에 기록된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준비한 예물 은 선물이라기보다는 뇌물이다. 왜냐하면 야곱은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 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창 32:20)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야곱은 그의 형 에서를 위한 선물을 준비한 것 이 아니라 뇌물을 준비하여 에서의 마음을 달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야곱의 뇌물은 에서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수량적인 면에서 어마어마 했다. 창세기 32:13-15에 의하면 야곱이 선물로 보낸 것은 가축만 모두 합해 서 550마리나 된다. 이 정도면 에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그 많 은 분량의 뇌물성 선물을 보고 마음이 변했을 것이다. 어쩌면 야곱은 잠언 21:14의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 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 게 하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의 형 에서에게 뇌물성 선물을 보낸 것일 수도 있다. 추석을 앞두고 교회 안에서 주고받는 선물이 너무 형식적이거나 관례를 따르 기보다는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전달되는 소박한 것이기를 바란다. 교 회 공동체는 교회의 지도자들인 목회자들에게 그 동안의 수고에 감사하면서 그 마음을 담아 선물을 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힘겹 게 살아가는 다른 성도들, 즉 성경의 표현대로 ‘고아와 과부들’을 기억하 며 그들을 격려하는 정성이 담긴 추석 선물을 준비하여 전달하는 것이 필요 할 것이다. 명절에 선물을 주고받는 우리의 풍습이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려 면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짐이 되지 않아야 하고, 선물을 받는 사람도 그것 을 받으면서 너무 부담되어 당황스럽지 않아야 한다. 맑고 깨끗한 사회는 뇌 물이 통하지 않는 문화와 풍토가 정착된 사회일 것이다. 당황스럽지 않은 선물이어야 교회 공동체가 실천적으로 앞장서서 뇌물이 없는 사회, 뇌물이 통하지 않는 사회의 풍토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0 no image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12>| 요한복음의 목적과 포도나무 비유_김수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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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3 2008-08-20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 요한복음의 목적과 포도나무 비유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복음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주어진 것” 요한이 복음을 쓸 때 이방인을 위해서 썼는가 아니면 유대인 신자들을 위해 서 썼는가 하는 것에 관해서 요한 사도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 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고 말한다(요 1:9-10). 기독인들을 위해 기록된 요한복음 그리고 세례 요한은 1:29에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로다”라고 말하고, 또 요한 사도는 3:17에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 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 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위에 언급한 세 구절을 살펴보면 “세상”이란 낱말이 쓰여 있음을 볼 수 있 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은 유대인만을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 를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빌라도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를 알리는 죄 패를 기록하여 십자가에 붙였는데 당시 세상나라 사람들이 다 읽을 수 있는 세 나라말로 기록했다. 곧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 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 라 말로 기록되었더라”(19:19-20)고 전한다. 이 모든 구절들은 예수님의 복 음은 세상의 많은 사람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브라운(Raymond E. Brown)은 “아마도 우리는 복음이 대체적으로 유대인이 나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고 기독교인들을 겨냥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 다”고 말한다.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20:31)이 라고 두 가지로 표현한 것을 보면 요한복음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유는 “그리스도”란 이름은 유대인을 위 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름은 이방인들을 위한 이름이기 때문이 다 (마 8:29과 병행구절; 27:54 참조). 요한복음이 누구를 위해 기록되었느냐 하는 것을 두고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과 동의한다. 헨드릭슨은 “요한복음이 지향 한 독자는 (비록 요한복음이 궁극적으로는 모든 시대의 교회들을 위해 저작 되었다고 보더라도, 17:20-21 참조) 당시 에베소와 주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이었다. 그들은 주로 이방으로부터 온 기독교인들이었다. 요한이 이방으로부 터 온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관습과 형편들을 언급 할 때 자세한 설명을 붙였다(2:6; 4:9; 7:2; 10:22; 18:28; 19:31, 41-42)” 고 말한다. 요한복음의 저작 목적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누구든지 믿음으로 영 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요한복음 전체의 기록목적은 15장의 포도 나무와 가지 비유에 잘 어울리는가? 다시 말해 15장의 비유는 요한복음 전체 의 기록 목적과 잘 어울리는가 하는 것이다. 분명히 비유에서 포도나무는 그리스도 자신이시고 가지들은 제자들이다. 그 리고 또 분명한 것은 “요한은 그리스도와 제자들과의 연합에 대해서 말하 고 있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제자 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 다. 이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확증되었는데 신자들 측의 사랑과 순종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 다.” 이와 관련하여 허치슨(George Hutcheson)은 “요한복음 15장에서 그리스도께 서는 제자들에게 송별설교를 계속하시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 을 배우도록 간절히 소원하시고 그 교제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예수님의 임재 를 향유할 뿐 아니라 열매 맺기를 소원하신다. 예수님은 그들이 열매 맺을 때 기뻐하시고 또 특별히 그들이 서로 사랑하시기를 역설하신다”고 말한 다. 참 포도나무의 비유의 목적에 관하여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도 역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거할 때만 열매를 맺을 수 있음같이 신자들 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포도나무 비유 에 깔려있는 교훈은 ‘너희가 열매를 맺기 위하여 내 안에 거하라’는 내용 이다”라고 주장한다. 고데이(Frederic Louis Godet)도 요한복음 15:1-17의 개요를 쓰면서 “예수 님과 포도나무를 비교해보면 그 요점이 드러나는데 유기 적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유기적 연합에 의하여 포도나무의 생명은 가지의 생명이 된다” 고 주장한다. 예수님과 연합된 생명 잘 보여줘 요 15:1-17에서 말하는바 예수님과 제자들의 연합은 산(living) 연합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15:26; 요일 5:7), 이 연합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 인 상호 연합을 통하여 많은 열매를 가져온다(13절). 그러므로 요 15:1-17 의 이 연합은 “요 15장 전체의 근거가 되고 또 주제가 되고 있는데” 요한 복음의 목적과 밀접하게 상응하고 있다.
199 no image |신학단상<11>|올림픽과 그리스도인의 사고(思考)_조석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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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9 2008-08-20
신학단상 올림픽과 그리스도인의 사고(思考)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그늘 속에 있는 이들에게도 소망 주어야” 중국 베이징의 올림픽 주경기장 냐오차오(鳥巢, 새 둥지)에서 2008년 8월 8 일 제29회 여름 올림픽이 성대하게 막을 올린 이래 요즈음 뉴스의 대부분이 올림픽에 관한 내용이다.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는 올림픽 대부분의 국민들은 올림픽 경기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선수들의 소식을 들으 면서 기분 좋게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올림픽 경기 장면에서 선수들이 승리 하기까지 실제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들을 볼 때만큼은 선수와 온 국민 들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된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 선수가 한 경기에서 우승하여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모든 국민들 은 박수를 치며 마치 자신이 금메달을 획득한 것처럼 좋아한다. 그렇지만 이 와는 반대로 금메달을 따지 못하는 선수들의 경우에 그들이 올림픽을 위하 여 준비한 땀과 노력은 아무런 평가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씁쓸하다.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가 그 기쁜 순간에 웃음보다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 는 이유가 메달 권에 들어가지 못한 선수들의 이름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리 는 승자 독식의 문화를 잘 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고대올림픽은 기원전 776년 이래 주기적으로 매 4년마다 올림피아 언덕에서 제우스신에게 바치는 그리스 사람들의 제전행사로 종교, 예술, 군사훈련 등 이 삼위일체를 이룬 헬레니즘 문화의 결정체였다. 그렇지만 그리스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대올림픽은 헬레니즘 문화와 함께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정한 테오도시 우스 황제(Theodosius I)는 393년 올림픽 제전을 이교도들의 우상숭배로 규 정하고 이를 폐지하는 칙령을 선포함으로써 고대올림픽의 역사는 막을 내리 게 되었다. 이후 오랜 기간이 지나서 근대 올림픽이 1896년 그리스의 아테네 에서 처음 시작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쿠베르탱(Pierre Fredy, Baron de Coubertin)은 1908년 제4회 런던 올림 픽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 한 것이 성공보다는 노력인 것처럼 올림픽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 가 아니라 참가다.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잘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올림 픽 정신의 정수(精髓)가 담겨 있는 말을 했다. 그렇지만 이런 올림픽의 순수한 정신은 많이 흐려졌고, 자본주의의 정신과 맞물려 상업성만 난무하고 정치적인 이용으로 얼룩지게 되었으며, 선수들의 무한 경쟁만이 남아서 활개를 치고 있다. 올림픽은 이제 단순히 국제간의 평화와 우의를 다짐하는 순수한 경기가 아니 라 정치와 경제가 함께 뒤섞인 이상한 행사가 되고 말았다. 올림픽이 열리 고 있는 중국에서도 평화의 빛보다는 불안의 그림자가 더 짙어 보인다. 신장 (新疆) 위구르 자치구에서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폭탄테러로 베이징은 초 긴장 상태다. 올림픽의 상업화는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된 일이어서 새삼스럽지도 않다. 올 림픽의 정치적 이용도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정치적 으로 불리하고 민감한 사건을 깊숙이 잘 묻어두었다가 올림픽 개막을 전후 로 뉴스거리가 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올림픽에 정신이 팔려있어 문제 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들이 올림픽의 정치적 이용의 한 모습 이다. 바울은 당시 그리스에 있었던 운동경기에 비유하여 그리스도인의 믿음 생활 을 교훈한다. 고린도전서 9:24에서 바울이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 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교훈한 것은 고대 운동경 기 종목 가운데 하나인 달리기를 비유한 것이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교훈 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상을 얻는 것이기보다는 상을 받기 위하여 절제하고 목표를 바라보고 끝까지 잘 달리라는 것이다. 또한 바울이 고린도전서 9:26에서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 며”는 고대올림픽의 한 종목이었던 격투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 의 삶을 격투기에 비유하면서 삶의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 다. 바울은 승리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일에 절제하여 승리의 월 계관을 얻는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와 같아야 함을 비유로 교훈 한다(고전 9:25).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준비하고 노력하는 것은 당 연하지만 “이기는 것만이 아니라 잘 싸우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는 올림픽 의 순수한 정신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메달을 획득한 선수들을 칭찬하는 것처럼 그렇지 못한 선수들에 대해서도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 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하지 못한 선수들이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다시 4년을 기다리며 다음 올림픽을 준비하도록 격려하는 것 이 중요하다. 메달 못 딴 선수들에게도 격려를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런 선수들과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을 격려하며 소망을 주는 일을 깊이 생각하며, 올림픽의 메달 소식에 일희일 비(一喜一悲)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직시하는 안목을 가져야 할 것이다.
198 no image |손에잡히는 교리강좌(11)|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_김수흥 목사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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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75 2008-07-29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믿음으로 영생 얻었음을 밝히 보여주고 있어” 요한복음만큼 기록 목적을 분명히 밝히는 책도 없을 것이다. 요 20:31에 보 면 요한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 려 함이니라”라고 기록한다. 그리스도이심을 믿도록 하기 위해 여기 “믿는다”는 낱말이 요한복음에 여러 가지 형태로 99번이나 나타난 다. 그리고 “생명”이란 낱말과 “살다”는 낱말이 요한복음에 54번 나타난 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믿는다”는 말과 “영생”이란 말을 여러 차례 사용하고 있다(요 3:14-16, 36; 5:24; 6:40; 11:25-26; 17:3). 요 20:31을 해석하면서 렌스키(R. C. H. Lenski)는 “요한은 자신이 요한복 음을 쓰면서 재료를 선별했음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요한의 의도는 ‘하나의 복음’을 쓰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님 에 관한 사실들을 배열 시켜서 독자들로 하여금 신자가 아닌 사람들 속에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또 믿는 사람들 속에 믿음을 공고히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리스(Leon Morris)는 요한복음의 목적을 말해주는 여러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 곧 “요한이 공관복음을 보충하기 위해 썼다”는 견해, “그가 영지주 의와 싸우기 위해 시도했다”는 견해, “요한의 목적중의 하나는 가현설적 (假現設的)인 거짓 가르침과 싸우는 것이었다”는 견해, “요한은 불신앙적 인 유대인들을 대항하는 논쟁에 관심이 있었다”는 견해, “요한은 너무 지 나치게 관심을 두거나 아니면 너무 적게 관심을 두는 기독교인 교사들을 반 대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는 견해, “요한의 중요한 목적은 세상에 일종 의 헬라화 되어버린 기독교(Hellenized christianity)를 제시하는 것이었 다”는 견해를 포함하고 있다. 모리스는 요한복음의 목적으로 20:31을 가장 적당한 것으로 삼고 있다. 모리 스는 “요한은 분명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고 보여주기 를 목적한다. 요한은 그의 독자들에게 어떤 흥미 있는 정보를 주기 위해서 가 아니라 독자들 로 하여금 믿음의 자리에 두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새 생명을 얻게 하려고 그리스도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배렛(C. K. Barrett)은 제4복음서의 목적에 관하여 말하는 중에 “그 복음 의 목적이나 저자(요한)의 신학은 바로 이 구절 속에 요약되어 있다...이 구 절은 원래 계획된 대로 그 복음의 결론이고 절정이다”라고 말한다. 제4복음서의 목적과 관련하여 블럼(Edwin A. Blum)은 그의 요한복음 서론에 서 “20:31에 언급된 요한복음의 목적은 예수님의 표적을 기록하여 독자들 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다. 의심 없이 요한은 다른 목적들을 말 한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이 회당 유대주의나 혹은 영지주의나 혹은 세례 요 한의 추종자들을 대항하기 위해서 복음을 썼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은 요한이 다른 복음서들을 보충하기 위해서 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은 분명히 전도적인 목적으로 썼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그 목적을 위해서 교 회 역사상에서 위대하게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한 다. 제4복음서는 20:31에서 분명한 목적을 나타내고 있다. 곧 “예수께서 하나님 의 아 들 그리스도이심”(20:31)을 믿음으로 영생을 가지게 하려 한다는 분명 한 목적을 진술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되었는가 아니면 이미 믿는 사람 들의 믿음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로 기록되었는가? 요한복음은 이방인을 위 해 기록했는가 아니면 유대인 신자들을 위해 기록했는가? 이 문제를 풀기 위 해서는 다음의 사항들을 살피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요한복음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기록하였는가 아니면 이미 믿는 사람들 을 위해 기록하였는가에 대해서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은 이 문제에 관하여 가장 잘 증명된 읽기는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해서’란 문장 을 가지고 있다....요한 사도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그의 복음을 쓰되 교 회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 기록했다”고 말한다. 그린(Oliver B. Greene)은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느냐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요한은 여기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섞여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불신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 도 아니다. 그는 신자들만을 위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 메시지는 열 한 제자 에게 주어진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분명한 것은 요한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1:12), 곧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들”(1:13)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 위한 복음 요한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과 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20:31)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해서 복음서를 썼다는 사실이다.
197 no image |신학단상<10>| 단식(斷食)과 삭발(削髮)_조석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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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1 2008-07-29
신학단상 단식(斷食)과 삭발(削髮)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항의와 투쟁의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단식과 삭발은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 안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 한 투쟁의 수단과 무기 또는 항의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등장하였다. 한국의 정치 현장과 노동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한국의 민주화 투쟁과 노동 운동 속에서 단식과 삭발은 빠지지 않는 투쟁과 항의를 위한 단골 메뉴로 등장했 다. 항의의 표시로 사용되는단식과 삭발 최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하여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자기의 머리털 을 밀어 삭발하며 항의하였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법률적으로 분명히 대한민국의 영토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일본중학교 사회과 교과서 학습지 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을 명기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주권을 훼손 한 도발행위이며 역사 왜곡이다. 이 분통이 터질 일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광우병 쇠고기 문제로 시끄러운 나 라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속을 긁어서 뒤집어 놓은 것이다. 일본의 과거 잘 못에 대하여 다시 사과하라고 요구하지 않겠다던 이명박 대통령의 말이 사그 라져 가던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결과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분명한 사 실은 일본의 과거 불치병과도 같은 독도 영유권 주장이 치료되지 않고 다시 재발한 것이다. 단식과 삭발은 항의와 투쟁을 위한 전투적 수단의 전형으로 사람들의 뇌리 속에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있다. 최근까지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해 서 단식을 하는가 하면,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를 반대하기 위하여 삭발로 항의하기도 했다. 지난 해 한국과 미국 사이의 자유무역협정(Free Tread Agreement)에 대한 협 상이 이미 끝나서 지금은 국회의 비준 동의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만 한미 (韓美) 간의 자유무역협정의 과정에서도 FTA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삭발로 투 쟁했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지난번 사학법 개정이 되었을 때에도 이 것에 반대하는 목회자들이 삭발을 했던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얼마 전에는 도롱뇽의 생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하여 경부 고속 전철의 천성 r 산 터널을 막겠다는 의지로 지율이라는 여성 승려가 100일간 단식을 하였 다. 이 일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어 환경 문제에 커다란 화두를 던지기 도 했다. 환경 파괴를 이유로 터널 계획에 반대하는 시위를 단식이라는 수단 으로 무기를 삼아 투쟁한 실례이다. 이렇듯이 단식과 삭발은 어떤 주장을 관 철시키기 위한 투쟁의 수단과 무기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삭발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욥기 1:20(“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과 사사기 16:19(“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 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 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에 나타난다. 욥의 경우는 극한 고통과 슬픔을 표현한 경우로 하나님께 투쟁한 것이 아니 고 오히려 그 후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삼손은 자기 머리털을 스스로 삭발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제사장들에게 머리를 삭발하여 대머리처럼 하 지 말 것을 요구한다(참조. 레 21:5; 겔 44:20; 미 1:16).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단식과 삭발보다는 금식이 익숙한 단어이다. 단식이나 금식은 모두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의미한 다. 그러나 금식은 기도의 다양 한 모습 가운데 한 가지 형태로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의 수단 과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축복을 얻어냈다는 내용을 오해하 여 하나님과 투쟁하듯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금식하며 끈질기게 매달려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싸우는 투쟁의 도구가 아니다. 금식은 전적으로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겸손하고 경건한 행위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띠지 말아 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한다. 내가 진정 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받았다”(마 6:16)고 말씀 하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금식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무기로 사용되지 않아야 한다. 금식은 하나님과 투쟁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투항(投降)하는 것이다. 금식은 우리가 하나님께 항복 하는 것, 우리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 이 다. 삭발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표시여야 그리스도인들에게 금식이 하나님과 투쟁의 도구로 오용(誤用)되지 않기를 소 망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삭발과 금식 또는 단식을 너무 감정적으로 항의와 투쟁의 수단으로 삼지 않기를 바란다.
196 no image |손에잡히는 교리강좌(10)| 예수께서 자신을 숨기셨던 이유_김수흥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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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8 2008-07-16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 예수께서 자신을 숨기셨던 이유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공관복음에 기록된 표적들을 많이 생략했다. 아마 도 성령님은 요한 사도로 하여금 공관복음에 기록된 바 예수님께서 은닉하려 고 하신 표적들이나 사건들을 포함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이적 많이 생략된 요한복음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두서너 차례 자신을 유대인들에게 숨기셨다. 이유는 십자가 죽음에 대한 그의 교훈이 죽음의 시간이 오기 전에 자신을 핍박하는 군중들에 의하여 왜곡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요 8:59; 12:36b). 요한복음 8:59에 보면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 서 나가셨다”고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고 하신 말 씀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고 선 언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심히 노하여 “돌을 들어 치려하였기” 때문이었 다(10:31, 39; 11:8). 예수님은 아직 잡혀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 반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 다음 번 유월절에 죽으셔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숨어 성전에서 나가셨다” (눅 4:30). 예수님은 필요할 때 숨기도 하시고 또 피하기도 하셨다(요 10:31-33). 예수님은 죽으실 때를 택하여 죽으시기 위하여 그 이전에는 숨 고 피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2:36도 역시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피하여 숨으신 사실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모리스(Leon Morris)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그가 방금 말씀하신(‘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 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35절) 말씀을 끝내시고 그들에게서 멀 리 가서 숨으셨다. 방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은 분명히 그가 죽으실 것 이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원하시는 때가 되어 죽으실 것이다. 그는 그 때 이전에는 결코 잡히시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펜티코스트(J. Dwight Pentecost)는 “그리스도는 군 중들로부터 물러가셨다. 그가 그렇게 군중들로부터 물러가신 이유는 그들이 계속해서 불신앙했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언급하기를 ‘예수님께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놀라운 표적을 행하신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으려 고 하지 않았다’(37절)”고 말한다. 예수님은 그의 메시야성 혹은 신성을 그들로부터 은닉하지 않으셨다. 요한복 음 7:1에서 요한은 말하기를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 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고 말한다. 예수님께 서 유대에서 다니려고 하지 않으신 이유는 유대인의 명절, 곧 장막절이 왔 을 때 그 형제들이 조롱하듯 예수님을 향하여 도전하는 말에 암시되어 있 다. 그 형제들은 예수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 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라고 했다(요 7:3- 4). 유대인의 초막절이 가까웠 을 때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못하는 예수님의 형 제들(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막 6:3)은 예수님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라고 주문한다(마 12:40; 막 3:31; 행 1:14). 곧 ‘당신이 행하시는 기적들을 제자들도 보게 유대로 가시 지요’라는 부탁이다. 여기 “제자들”은 12제자들을 제외한 ‘일반적인 제자들’을 지칭할 것이 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들(4:1)과 또 예수님 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사모하여 따라다니는 사람들일 것이다(2:23). 예수 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시골에서 묻혀서 이름 없이 썩지 말고 한번 출세해 보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형제들의 부탁이 아무리 선의의 부탁이라고 양해한다 할지라도 예 수님으로서는 참으로 황당함을 느끼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못했기에 이렇게 세상 중심적인 말을 한 것이다(막 3:21).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결코 그의 메시야성 혹은 그의 신성을 숨기지 않으셨 다. 그의 죽음의 때가 오기까지 그 자신을 숨겼을 뿐이다. 그가 요한복음 8:58에서 그 자신 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후에 그는 자신을 은닉하셨다. 이유는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였기 때문이었다(요 8:59). 그는 이 이 상 더 유대인들 가운데 계속해서 공공연히 다니지 않으셨다. 이유는 베다니 의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후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를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었다(요 11:53-54). 이와 같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숨기신 것은 자신의 메시야적 역할을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때가 오기 전에 일찍 죽지 않기 위하여 피하 신 것뿐이었다. 십자가의 죽음을 기다리신 예수님 예수님은 자신을 유대인들로부터 숨기셨으나 결코 메시야성을 숨겼거나 혹 은 그가 하나님 되심을 숨기신 것은 아니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메시야로 아주 당당히 드러내신다.
195 no image |신학단상<9>| 신뢰(信賴)할 수 있는 지도자_조석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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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2 2008-07-16
신학단상 신뢰(信賴)할 수 있는 지도자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거짓된 속내와 말 바꾸기는 들통나고 말아” 지도자를 신뢰할 수 없을 때 그 공동체는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며 결 국 신뢰받지 못하는 지도자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와 근거를 잃게 된다. 지 도자를 신뢰할 수 없는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은 그 자체로 이미 불행을 맛 보고 있는 것이며, 그 공동체는 식물인간처럼 기능이 마비된 채 겨우 생명 을 부지하고 있을 뿐이다. 신뢰 없는 지도자는 불행 가져와 정치 지도자가 신뢰를 받지 못하면 그 나라의 백성은 이미 참담하고 비극적 인 삶에 허덕이게 되고 정치는 실종된다. 교회의 지도자를 신뢰할 수 없을 때 성도의 삶은 비극 그 자체이며, 그 교회는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 다. 이런 점에서 신뢰는 지도자의 자질로서 하나의 덕목이기 이전에 가장 중 요한 필수 요소이다. 공동체의 분열은 지도자를 신뢰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초기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공동체의 지도자가 신뢰를 받지 못하면 그 공동체는 분열 되기 시작하며 결국 송두리째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 속에 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바울은 이미 1세기에 존재했던 고린도 교회가 사람 지도자를 따라 편을 가르 고, 저 마다 “나는 누구의 편이다”라고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 을 들었을 때,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 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 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 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 냐”(고전 1:11-13)라고 반문하며 고린도 교회 공동체의 일치를 호소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질책하며 또한 애정 어린 말로 권면하며 호소 한 것은 단순히 말다툼이나 싸움을 그만 두라는 정도가 아니라, 같은 마음 과 같은 생각으로 공동체의 일치를 위하여 힘쓰라는 것이었다. 고린도 교회 가 분열 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로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이것은 거짓 사도들이 그들을 속였기 때문 이었다. 지도자가 신뢰를 잃게 되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거짓으로 공동 체의 지체들을 인도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사람이 거짓을 말하 면 어느 일정 기간 동안 그 거짓을 숨기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결국 그 거짓된 속내와 말 바꾸기가 드러나고 시간이 지나면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된다. 그렇지만 거짓을 일상의 삶으로 살아왔던 사람은 그 거짓된 것이 드러나도 그 사실을 속히 인식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거 짓된 삶이 자신의 자연스러운 삶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거짓을 말하는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여 말을 바꾸면서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속담처럼 거짓 의 본색은 시간이 문제이지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다. 더욱이 거짓은 감추려 고 하면 할수록 또 다른 거짓이 동원되며 결국 무의미한 시간 낭비일 뿐이 지 드러나게 된다. 그렇지만 사람은 어리석어서 자신의 거짓을 포기하고 시 인하며 회개하기보다는 말 바꾸기와 또 다른 거짓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신 뢰를 유지해 보려고 몸부림친다. 교회의 지도자가 신뢰를 잃어버리면 그 교회의 성도는 모두 비극을 맛보게 된다. 그런 공동체는 불신의 깊은 늪 속에서 병들어 신음하며 식물인간처럼 모든 기능이 마비된 채 목숨만 유지하게 된다. 이런 경우 교회의 지도자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하여 솔직하게 자신의 거짓을 시인하고 회개하면 그 지도 자와 공동체가 새롭게 회복 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거짓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징계하고, 자신이 저지른 거짓을 은폐하려고 하거나,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동원하 여 신뢰 회복을 부추기면 결국 그 공동체는 더욱 깊은 불신의 수렁으로 빠져 들며, 그 지도자는 존재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되는 불행을 맛볼 수밖에 없 다. 교회의 지도자가 신뢰할 수 없는 자리에 떨어져서 회개하지 않고 또 다른 거 짓의 몸부림을 칠 때 결국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경우를 드물지만 찾아 볼 수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를 소유한 공동체는 행복 그 자체이다. 한 나라 뿐만 아니라, 교회와 어느 작은 단체일지라도 그 지도자가 신뢰를 잃어 버리면 소속된 모든 사람들은 불행을 맛 볼 수밖에 없다.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가져올 뿐 사회가 악해지고 불신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질 때일수록 교회의 지도자들이 신뢰를 잃지 않고 한 줄기 빛처럼 모든 성도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94 no image |손에잡히는 교리강좌<9>|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메시아성_김수흥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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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3 2008-06-25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메시아성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을 메시아라고 분명히 드러내신다. 예 수님은 자신의 메시아성을 은닉하시지 않고 나다나엘이 예수님에게 “랍비 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 백했을 때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고백을 받으셨다(요 1:49).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된 예수님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 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라고 대답하신다(요 1:50). 나다나엘의 고백을 두 고 블럼(Edwin A. Blum)은 “예수님의 초자연적 지식이 나다나엘로 하여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고백하게 만들었다. 나다나엘이 이렇게 고백했다고 해서 나다나엘이 일찍이 삼위일체를 충분히 이해했다거나 혹은 그리스도의 화육의 진리를 충분하게 이해했다는 것을 의 미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우리의 구 주가 되시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므기(J Vernon McGee)는 “주 예수는 그가 뽑은 사도들 중에 두 사람의 의심쟁이들이 있었다. 하나는 초창기의 나다나엘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역의 마지막에 도마가 의심쟁이였다. 도마는 회의론자였는데 선 한 것이 나사렛으로부터 나올 수 있느냐고 의심했다. 그는 예수님과의 대담 이 끝나기 전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시라고 고백 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스라엘의 왕이시라고 고 백한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 나사렛으로부터 나오게 된 것을 보여주고 있 다”고 천명한다.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인 니고데모와 예수님께서 대화하실 때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메시아성 을 분명하게 선언하신다(3:14-15). 예수님의 들리심(“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두고 허 치슨(George Hutcheson)은 주장하기를 “예수 님은 여기서 자신을 죄인들의 구주로 드러내신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성(罪性)과 비참함을 치료하실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셨기에 죄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에게 피하게 하 시고 그들을 멸망하지 않게 지켜주시며 그들을 구원하신다. 예수님은 불 뱀 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의 치료를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광야에서 들려진 구리 뱀의 모형 아래에서 이 구원 사역을 하신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 성 여인과 대화하시는 중에 그들로 하여금 자신 을 믿을 수 있도록 자신이 세상의 구주라고 소개하신다(요 4:3-26). 예수님 은 특별히 자신이 구주되심을 확언하신다. 그는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고 하신다(요 4:26). 이 구절들을 해석하면서 모리스(Leon Morris)는 “예수님은 아주 단순한 권 위 있는 말씀으로 그 자신이 누구이심을 드러내신다(9:37 참조). 이 말씀은 그가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그의 메시아성을 인정하신 한 경우이다. 그는 그 자신이 구주이심을 아셨다. 그러나 유대인 사회에서 자신이 구주이심을 공개적으로 확언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기대한 대로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 인(誤認)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마리아의 이런 시골지역 같은 데서는 구 주라는 말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똑같은 구절(요 4:26)을 주해하면서 핑크(Arthur W. Pink)는 “사마리아 여 인이 구주를 갈망하자 예수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고 하신다. 죄악 이 백일하에 드러난 죄인과 백일하에 드러난 구주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게 되어 만사는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해결되고 말았다. 사마리아 여자는 자기 에게 물 좀 달라고 하시던 분이 바로 자기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아신다는 놀 라운 사실을 알았다. 바로 그 분이 자기가 과거에 행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그 구주는 그 여자에게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 여자 는 무엇을 더 원하겠는가? 아무것도 더 원하는 것이 없게 되었다”고 해석한 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다음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 과 동등 되신 분으로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다(요 5:17). 요한복음 5장 18절을 주해하면서 태스커(R. V. G. Tasker)는 “예수님은 참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이시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과 독립되어 있다 는 뜻에서가 아니다. 반대로 그는 그 혼자는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으시다. 그가 듣는 대로 그는 심판하신다. 예수님은 더욱이 그 자신을 위하여 자랑하 거나 혹은 거만한 주장을 결코 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그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주장하시고(요 6:41) 공개적으 로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 되게 하려 함이라”고 주장하신다(요 9:39).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아로 밝혀 이 모든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셨음을 말씀하고 있다.
193 no image |신학단상<8>| 무한 경쟁 시대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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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7 2008-06-25
무한 경쟁 시대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교회는 상생과 봉사의 모범 보여줘야” 오늘날 한국 사회는 무한 경쟁 시대의 꽃이 만발한 모습이다. 정부의 경제 정책이 신자유주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만 승리 자가 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다. 신자유주의 사상의 기초가 되는 무한경쟁 정부의 경제 정책 기조는 시장 자유주의라는 배경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오 히려 당연한 논리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정부는 이와 같은 경쟁 지향적인 삶의 구조를 경제뿐만 아니라 교육과 사회 및 일상생활 전반에 도입하려는 것처럼 보이기에 매우 우려된다. 실제로 교육의 경우 이미 경쟁의 구조 속으로 기존의 틀을 바꾸어 버렸다. 그 동안 사라졌던 초, 중, 고등학생들의 전국 일제 고사가 부활하고, 학교 의 교육 자율 정책의 보호라는 미명아래 학생들을 성적 순위로 줄 세우고 입 시 경쟁으로 내 몰고 있다. 학교의 교육 이 협동을 통해서 공동체를 이루는 삶을 가르쳐야 하는데, 성적과 입시라는 지나친 개인주의와 경쟁주의를 조장 함으로 이기주의를 더욱 부추긴다. 정부는 교육뿐만 아니라 의료보험의 민영화를 추진하려고 하며 수돗물, 전 기, 가스, 철도의 민영화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문들은 단순히 풍 문이나 괴담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인다. 정부가 일반 국민을 위한 모든 사회의 공공 서비스를 민영화하여 경쟁을 유 도하고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것으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경쟁에서 뒤쳐지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것도, 물과 전기와 가스를 사용 하여 일상의 삶을 사는 것도, 철도를 이용하여 고향집에 다녀오는 것도 경쟁 에서 밀려난 서민들에게는 힘든 시대가 눈앞에 닥칠 것을 생각하면 두렵기까 지 하다. 정부의 경쟁 지향적인 사회구조로의 변혁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신자유주 의시대의 조류를 따라서 적지 않은 교회들이 경쟁의 구조로 변화를 시도하 며 교회 본연의 모습을 버리고 성도들을 무한 경쟁의 장으로 인도하는 것이 다. 교회가 경쟁적인 단체로 모습을 바꾸기 시작한 것은 물론 어제오늘 의 일은 결코 아니다. 이런 현상은 미국의 ‘교회 성장학’이 한국 교회에 소개되면 서부터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성장 지향적인 모습으로 교회의 구조를 바꾸 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교회 성장학’에서 교회 성장의 개념은 질적 성장보다는 양적 성장에 더 강조점이 있다. ‘교회 성장학’을 교회의 중요한 신학 사상으로 받아들인 모든 교회들이 성도들을 경쟁의 자리로 몰아내었고, 교회는 일반 사회의 기 업체처럼 경쟁적으로 서로 마지막 승자가 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게 되었다. 이런 경쟁 중심의 교회 속에서 ‘부흥’(revival)의 개념은 질적인 의미보다 는 수량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졌고 본래 ‘부흥’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부 흥’이란 ‘다시 살아나는 것’(re-vival), ‘영적으로 병들었던 자가 회생 하는 것’ 등을 의미하는 질적이며 영적인 개념이지만 그런 의미는 거의 모 두 사라지고 말았다. 교회가 신자유주의에 물들어 버리면 교회는 쉽게 경제학과 경영학의 개념들 을 도입하게 되며, 이런 경우 성도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기보다는 고 객으로 이해되고, 교회는 예배와 설교, 찬양, 등에서 소비자의 만족을 위하 여 노력하며 고객의 100% 만족을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게 된 다. 교회는 귀가 즐거운 설교를 위한 음향 시설, 조명, 안락함 등을 위하여 모 든 투자를 아끼지 않고 가슴을 울리는 찬양과 멋진 예배를 위하여 전문가들 을 초청하고 예배와 찬양, 설교에 만족한 소비자들은 자신들이 무한 경쟁 속 에서 쟁취한 승리의 전리품들을 감사와 은혜라는 이름으로 내어놓는다. 예수께서 분명히 교훈하시기를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 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고 했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 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7; 막 10:44)고 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 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 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고 말했을 때, 바울은 그 들이 서로 경쟁을 하여 상을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라는 것이 아니 라 왜 한 사람만 상을 받게 되었는지 생각하여 법을 지키며, 절제하며, 분명 한 삶의 목적을 이 해하고 서로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을 경기자의 비유를 통해 서 교훈한 것이다(참조. 고전 9:25-27). 성경은 어디에서도 무한 경쟁을 부추기거나 권고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돕고 사랑하며 나보다 남을 더욱 높이 평가하며, 누구든지 으뜸이 되려고 하 면 맨 나중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경쟁하며 상 받는 것 거부해 신자유주의의 사상에 뿌리를 둔 무한 경쟁이 미덕이 되고 있는 이 시대에 교 회만은 주님 안에서 상생(相生)하는 삶, 나보다 남을 더욱 높이는 섬김의 삶 을 보여야 하는 막중한 사명이 있다.
192 no image |손에잡히는 교리강좌(8)| 예수께서 메시아성을 은닉하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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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1 2008-06-11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 예수께서 메시아성을 은닉하신 이유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십자가의 죽음 왜곡되는 것 원치 않으셔” 마가복음 9장 30-31절은 예수님께서 그의 열두 제자에게 그의 앞으로의 사역 을 교훈하실 때 자신을 은닉하신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 곳을 떠나 갈릴 리 가운데로 지날 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 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막 9:30-31). 십자가 숨겨진 예수님의 메시아성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화하신 후 그 산을 떠나서 갈릴 리를 통과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자신이 갈릴리를 통과하고 있음 을 알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미래의 십 자가 죽음에 대해 교훈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은닉에 대하여 죤스(J. D. Jones)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대체로 예수님은 마을이나 복잡한 거리나 또는 사람이 많은 회당에 자주 찾 아가셨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셔야 했기 때문이었 다. 그러나 이번의 특별한 여행에서는 아주 은밀히 하기를 원하셨다. 마가가 말하는 대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교훈하고 계셨기’ 때문이 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교훈의 주제였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막 9:31). 구원자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통과하신 것은 그가 승리했기에 왕좌로 나가시 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배척으로 십자가에 죽으시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 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교훈의 주제였다. 예수님의 은닉(막 9:30-31)에 대하여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은 “예 수님의 은둔 사역은 끝나가고 있기는 했었지만 아직도 분명히 계속되고 있 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열두 제자를 훈련시키는 일에 헌신 하고 있는 때였다. 그래서 그는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리기 원치 않으셨다. 그는 열두 제자들을 교육하시기 위해서 시 간 과 기회를 가지시려면 잠시 조용한 때가 필요하셨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이 예수님과 그의 왕국에 대한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 게 잘 전달할 수가 있었다”고 말한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왜 자신의 메시야성(Messiahship)을 은닉하셨는 지를 판단하기란 어려운 문제이다. 모든 점을 고려해보면 아마도 예수님은 두 가지 이유로 그의 메시야성을 은닉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교육하시기를 원하셨다 는 것이다. 마태는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이 변화산에서 내려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자(the Son of Man)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아무에게도 본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마 17:9). 예수님은 그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교훈이 단지 치유나 이적만을 추구하는 군중들에 의해서 왜곡되기를 원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수난주 간 이전에 그의 메시야성을 자주 은닉한 것으로 보인다(마 8:4; 9:30; 12:15-16; 16:20; 막 1:34, 44; 3:12; 5:43; 7:36; 8:26, 30; 9:30; 눅 4:41; 5:14; 8:56; 9:21). 공관복음에서 예 수님은 여리고를 통과하신 이후에는 결코 그의 메시야성을 숨기시지 않으셨다(마 20:29-28:20; 막 10:46-16:20; 눅 19:1-24:53). 왜냐 하면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죽음에 대하여 더 이상 교훈할 시간이 필요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성을 은닉한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는 그의 메시야성을 드러내시고 혹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닉하셨다는 사실 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그의 메시야성을 두고 사람을 구별하셨다는 점이 다. 예수님은 그의 주변의 사람들을 “너희”(you)와 “그들”(them)로 구분하셔 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교훈하셨다.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다”(마 13:11)고 말씀하신 다. 예수님은 “너희” 그룹에게는 그의 메시야성을 드러내셨고 “그들” 그 룹에게는 그의 메시야성을 은닉하셨다. 예수님은 가다라 지방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한 사람을 고치신 다음 “집으 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고 하신다(막 5:19; 눅 8:26-39 참조). 아마도 이 사람의 친구들은 “너희” 그룹에 속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비가 주 어졌다. 한편 어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표적을 구하였을 때 예수님 은 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 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마 12:39; 눅 11:29). 바리새인들이 다시 예수님에게 표적을 구하였을 때 하나의 표적도 보여주시 지 않으셨다. 이유는 그들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속해있기 때문이라고 하 신다(마 16:1-4; 막 8:11-12). 특수한 계층에게 보여진 예수님의 메시아성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사람들 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떤 개인이나 단체를 향하 여 그의 메시야성을 은닉하셨다.
191 no image |신학단상<7>| 믿음과 확률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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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5 2008-06-11
신학단상 믿음과 확률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믿음은 무모한 모험에 도전하는 것 아니다” 요즈음 온 나라가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결과를 놓고 매우 시끄럽 다.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게 되어 국민들이 값싸고 질 좋은 먹을거 리를 확보했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이와는 반대로 정부가 발표한 미국산 쇠 고기 수입 협상 결과는 국민들이 광우병 위험에 결코 안전할 수 없으니 재협 상하라는 주장 때문이다. 확률 앞세우는 것으로 신뢰 얻을 수 없어 정부를 신뢰하라는 목소리와 더 이상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목소리가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안전하다는 정부의 홍보 는 국민들이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매우 낮다는 것과 다른 사고의 위험보다 확률이 적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국민들을 설득하고 있으나 국민들은 정부의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다. 확률을 근거로 광우병의 위험을 축소하면 서 그 위험을 감수하 라고 설득하는 정부의 눈물겨운 노력이 매우 안타깝고 실망스럽다. 확률을 근거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은 교회 안에서도 자주 보게 된다. 특 히 그 확률을 믿음과 연결시켜서 말하면 사람들은 확률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예를 들면 예배당을 새로 짓기 위하여 수억 또는 수십 억의 융 자금을 얻으려고 할 때, 여러 성공적인(?) 사례들을 나열하면서 어느 어느 교회가 수억 또는 수십 억을 융자받아 예배당을 지었지만 몇 년 안에 모두 융자금을 상환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놀랍고 위 대한 믿음이라고 말하면서 확률적으로 실패할 수 없음을 말하면 교회의 성도 들은 쉽게 설득 당한다. 확률을 믿음에 접목시켜서 성도들을 설득할 때, 성 도들은 그 허상을 보고 사실을 착각하며 그것을 믿는 것이 위대한 믿음이라 고 생각하는 것이다. 광우병에 걸릴 위험을 확률적으로 말하면서 로또에 당첨되기보다도 어렵다 고 말하는 이 나라의 정부 관료들이나, 예배당을 새로 지으려고 융자금을 얻 기 위하여 교인들을 설득하면서 수억 또는 수십억의 융자금을 수년 내에 갚 을 수 있는 확률을 제시하면서 설득하는 목 회자들이 너무 유사한 모습처럼 보여서 씁쓸하다. 확률을 근거로 믿음을 요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확률을 요약하 여 정의하면 하나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수(數)로 나타낸 것으 로 같은 원인에서 특정의 결과가 나타나는 비율을 의미한다. 여러 가지 확률 이 제공되는 것은 신뢰를 얻기 위함이지만 진실이 확률로 왜곡되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 확률을 근거로 하는 믿음은 허상을 붙잡을 가능성이 오히려 많음에도 불구하 고 사람들은 확률을 의지한다. 사람들이 확률을 신뢰하는 것은 확률이 과학 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과학적 진리를 절대 진 리로 알고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한다. 그러나 현재 알려진 과학적 진리는 더 이상 알려지지 않은 영역과 알 수 없 는 영역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을 뿐이며 이런 점에서 절대 진리이기보다는 상대적 진리이다. 어제까지 과학적 진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 오늘 밝혀진 또 다른 과학적 발견에 의하여 하루아침에 진리의 목록에서 사라지는 경우 를 많이 본다. 참된 믿음은 확률을 근거의 터전으로 삼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 는 믿음은 확률을 근거로 하고 있지 않고 분명한 진리에 근거한 것이다. 예 를 들면 예수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부활했을 가능성이나 확 률을 의지해서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분명한 사실에 기초하고 있고 분명한 객관적 증거가 있기에 믿음을 갖고 있다. 성경은 믿음에 대하여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 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 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3). 확률을 동원하여 사람들의 믿음과 신뢰를 독려하는 것이야말로 사기 행각이 다. 예배당 건축을 하면서 다른 교회들이 이런 방식으로 일을 했고 모두 성 공했기에 우리도 그렇게 하면 확률적으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예 배당 건축을 독려하는 것은 성도들을 속이는 것이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어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은 무모한 모험이 아니며 모험 에 도전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상식에서 벗어난 모험 을 강요하거나 그런 모험적 개척 정신을 확률과 함께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 은 더 이상 위대한 믿음도, 능력 있는 믿음도 아닌 확률로 포장된 사기행각 임을 알아야 한다.
Selected no image |손에잡히는 교리강좌(7)| 예수님의 메시아성 침묵에 담긴 의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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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9 2008-05-28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 예수님의 메시아성(Messiahship) 침묵에 담긴 의미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마태복음 12장 10-21절에는 예수님께서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을 때 많 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모두 고쳐주신 기사가 나 타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다.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아성 숨기셔 예수님의 이 경고에 대하여 칼슨(D. A. Carson)은 “예수님은 종종 반대가 심하면 후퇴하셨다(마 4:12; 14:13; 15:21; 16:5 참조). 그가 그렇게 피하 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기까지 습관적으로 되풀이되었다(마 26:45; 요 7:8 참조)...이렇게 하여 그의 사역은 연장되었다”(마 4:23; 8:16; 9:35 참조)고 주장한다. 맥아더(John F. MacArthur)는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 신 이유에 대하여 말하기를 “지금은 그가 높아지시는 때가 아니고 낮아지시 는 때였기 때문 이다”고 주장한다. 마태복음 16장 13-20에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 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라고 신앙을 고백했을 때 그의 제자들에 게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20절)고 말씀하신다. 세상에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하 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경고에 대하여 므기(J. Vernon McGee)는 “주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신 이유는 그가 누구이신가를 아는 단순한 지식만으로는 사람이 구원을 받 지 못하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와 그가 무엇 을 하셨는가를 알아야 하며,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 영접해야 하기 때문이 다”(막 8:27-30; 눅 9:18-21)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이런 부탁을 두고 딕슨(David Dickson)은 “예수님께서 다른 명령 을 주실 때까지 제자들 자신들만 이런 명령을 간직하실 것을 명령하신다. 그 런고로 예수님은 그 자신의 신비한 일들을 계시하실 자신 나름의 때를 가지 고 계심을 배우라.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아무에게도 자기가 그리스도이심 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만약에 그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 더라면 그들은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의 진리가 너무 빠른 시기에 알려지심으로 그의 죽음이 방해받는 것을 원하 시지 않았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명령에 대해서 힐(David Hill)은 “예수님이 구주이심에 대하여 침 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메시아 (Messiahship)라고 아는 지식은 오직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해야 할 사람들에 게만 주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누구라고 하는 참되고 충분한 이해는 빨 리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혹은 예수님을 얼핏보아서 성취되는 것도 아니다” 라고 말한다. 마가복음 3장 7-12절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들에게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 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마가복음 3장 11-12절은 “더러운 귀신들도 어 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 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고 보도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 명령과 관련하여 웨슬(Walter W. Wessel)은 주장하기를 “귀신 들의 부르짖음을 잠 잠하게 하셨다(12절).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계시 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으며 또한 귀신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합당한 사신들 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잠잠케 하신 명령에 대하여 그래스믹(John D. Grassmick)은 기록하기를 “예수님께서 귀신들이 때도 되지 않아서 너무 일 찍이 소리 지르는 것을 잠잠케 하셔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 곧 예수님 의 정체성과 사역을 점진적으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전적으로 순종 하신다는 것을 확인하셨다”(막 1:29-34; 눅 4:38-41)고 말한다. 마가복음 5장 35-43에 보면 예수님은 죽은 소녀를 고치시고 주위 사람들에 게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부탁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막 5:43). 예수님의 이 명령에 관하여 레인(William L. Lane)은 다음과 같 이 주석했다 : 이들 다섯 사람(소녀의 부모와 세 제자-역자 주)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나 누어서는 안 되는 특별계시를 받는 특권을 받았다. 따라서 그 비밀은 ‘증언 된 비밀’(a witnessed secret)이었다. 이 증언된 비밀은 예수님께서 금지하 신 다른 사람들과는 나우어서는 안 되었다 .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특별한 동기는 조롱 섞인 웃음으로 예수님을 비웃은 사람들의 순전한 불신앙 때문이 었다. 마가복음 전체를 통하여 관찰해보면 예수님은 그의 메시아성 (Messiahship)을 조건부로만 보이신 것이 확실하다. 조건부로 예수님은 메시아성 보이셔 예수님께서 자신을 야이로의 집밖에 모였던 불신앙적인 사람들에게는 보여주 시기를 원치 않으신 것은 예수님의 일관된 행위로 보아서 아주 타당하다. 예 수님은 예수님의 구원의 행위가 집 밖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모르는 채 있 기를 원하셨다.
189 no image |손에잡히는 교리강좌(6)| 예수님은 메시아성을 숨기셨는가?_김수흥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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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6 2008-05-07
예수님은 메시아성을 숨기셨는가?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질병 치유 아닌 영혼 치유에 그 목적 있어” 그리스도의 말씀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연합에 미친 영향에 대해 연구하기 위 해서는 몇 가지 고찰할 것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요한복음 15장의 참 포 도나무와 그에 관련된 문제들에 관하여 살펴보는 일이다. 메시야성 숨겨진 것처럼 보여 포도나무 비유는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은닉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결코 그 렇지 않다. 은익하고 있는 인상을 주는 이유는 “나는 참 포도나무라” (15:1), “내 아버지는 그 농부요”(15:1a),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 지는 농부라”(15:1b), 또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 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 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15:1)는 말씀들 때문에 언 뜻 보면 예수님의 구주 성(Messiahship)을 숨기고 있는 듯이 보인다. r 예수님께서 공관복음에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나서 종종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셨기에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숨기신 명령을 연구할 필 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그의 메시야성을 은닉하 셨는지 아니면 공개하셨는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 8장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신 산에서 내려오신 후 한 사람의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그 나병환 자에게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 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하신다(마 8:4). 예수님의 이 명령을 두고 알버트 반스(Albert Barnes)는 주장하기를 예수님 께서 이 나병환자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신 목적은 그 나병환자가 제사장에게 가서 보고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소모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 “나병환자는 즉시 제사장에게 가야 했다(레 14:2). 자기가 병 나은 사실을 말하기보다는, 모세의 법을 순종하여 제물을 드려 감사하기 위해 제사장에 게 즉시 가야 했다. 그 나병이 치유된 곳은 갈릴리였고 그런데 갈릴리는 예 루살렘으로부터 40 내지 45마일이나 되었다. 제사장이 있는 곳까지 빨리 가 서 병이 다 나았다는 것을 제사장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그의 의무였 다.” 펜티코스트(J Dwight Pentecost)는 예수님께서 이 나병환자에게 내리신 명령 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 “그 사람은 갈릴리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증언하기 위해 지체할 필요 가 없다. 그가 더 증언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이름이 갈릴리 근 방에 많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인품에 대하여 더 이상 증언 을 더하는 것은 거의 필요 없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명령하시기를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 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하 셨다(눅 5:14). 모세의 법은 나병환자나 나병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받은 사 람들은 그 사회에서 인정을 받기 위하여 정결 예식을 거쳐야 한다. 만약에 나병환자가 정결 예식을 거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하여 갈릴리에 서 시간을 지체한다면 그는 계속해서 부정한 자로 여겨질 것이며 그의 증언 은 무효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 9장 27-31절에서 마태는 예수님께서 두 사람의 맹인을 고치신 것 을 말씀하고 또 예수님께서 그 맹인들에게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 도 알리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함구령에 대하여 알포드(Henry Alford)는 “우리 주님께서 함구령 을 내리신 목적은 두 가지인 것 같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필요한 시간이나 힘을 못 가지실 만큼 분주하시거나 또는 압박을 받 으시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이미 흥분하고 있는 군중 들이 공공연하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해서 바리새인들의 시기 질투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늘 메시야로 활약하셔 예수님의 함구령에 대해서 바비에리(Louis A. Barbieri)는 “예수님의 경고 는 아마도 군중이 병 치유에만 전념하여 달려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 을 것이다. 예수님은 병 치유를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영혼을 치료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주장한다.
188 no image |신학단상<6>| 가족의 의미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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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2 2008-05-07
신학단상 가족의 의미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 한 가족 되어야”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5월은 어린 자녀를 둔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을 생각해서 시간을 내 어 그들과 함께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는 달이다. 연로하신 부 모님이 멀리 떨어져 사시는 경우 그 자녀들은 그 동안 자주 찾아뵙지 못한 부모님을 찾아가 뵙고 안부를 물으며 효(孝)를 조금이라도 실천하려고 노력 하기도 한다. 부모와 자녀들 돌보는 5월 대부분의 교회들은 5월에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 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며, 어린 자녀들을 생각하고, 연로하신 부모님의 은혜 에 정성껏 감사의 표시를 한다. 이런 점에서 5월은 가족을 생각하며 보내는 가정의 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1년 중 이 한 달만이라도 가족의 의미를 한 번쯤 되새겨보며 하나님 앞에서 삶의 지혜를 구하며 살아가는 것은 매우 유 익하고 필요한 일이다. 오늘날처럼 핵 가족화 되어 가는 시대에 가족의 의미가 자칫 이기적인 모습으 로 변질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워질 때가 많다. 가정의 모든 일이 잘되고 평안할 때 가족의 모습과 그 의미는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해야 할 경우가 되거나,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여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면 비로소 가족의 의미가 새롭게 느껴지게 된다. 아마도 이런 경우들을 만났을 때 비로소 핵가족이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 을 조금은 알게 될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자기들만의 울타리를 쌓 아 놓고 그림처럼 살다가 그 그림에 가족의 어려움이라는 먹물이 튀면 가족 이라는 이름으로 쌓아 놓은 담벼락이 순간 암담한 절벽이 되는 것을 실감하 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가족이 없으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경우 실제로 암담할 때 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예전의 대가족 제도가 큰 힘이 될 것이다. 부부가 어린 자녀들과 부모님을 모시고 살 때 어려움도 있겠지만, 온 가족 이 오히려 삶의 지혜를 서로 배우고 어려움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활력소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 만 오늘날 이런 모습을 아파트의 숲 속에서 비둘기가 제 집을 드나드는 것처럼 살아가는 도시의 가정 속에서 찾아보기란 어려운 상황이다. 어쩌면 이제는 더 이상 사회적 여건과 형편이 우리의 옛 대가족 제도라는 삶 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젊은 부부들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모두 결 혼시킨 부부들도 결혼한 자녀들과 함께 살기보다는 부부끼리만 살아가는 것 을 더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든 부부일지라도 몸이 건강 해서 생활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때 구태여 자녀들과 함께 살려고 하 지 않기 때문이다. 대가족 제도의 해체라는 급격하게 달라져 가는 새로운 환경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 역할은 각 기 다른 가정을 이루며 서로 다른 집에서 살아가지만 한 가족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교회 안에는 가족이 없이 홀로 살아가는 노인 인구들이 적지 않고, 젊은이들이 부모와 멀리 떨어 져서 혼자 살아가며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가족의 의미를 생각할 환경도 여유 도 없이 홀로 살아갈 뿐이 다. 이런 사람들에게 믿음의 가족이 되어주어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 도와주고 위로와 격려를 하며 함께 살 아가는 것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이 될 것이다. 피를 나 눈 형제나 자매로서의 가족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 이상으로 한 가족처럼 살 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 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20)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 로 한 분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형제 와 자매는 새로운 차원의 가족 관계를 형성해 주고 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신앙으로 고백하며 같은 기독교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은 한 가족이다.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약 1:27) 이라고 했다. 믿음의 형제는 모두 한 가족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5월을 맞이하 면서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며, 외롭고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을 가족처럼 살펴서 얼어붙은 그들의 가슴과 마음을 따 뜻하게 녹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187 no image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5>| 성경의 기록과 축자 영감_김수흥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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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99 2008-04-16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 성경의 기록과 축자 영감 김수흥 목사 ·합신 초빙교수 “성경은 성령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계시” 신약성경도 구약 성경과 똑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 신약 성경의 권위는 예 수님의 인격에서 발견되며 또한 그의 제자들의 전도에서 발견된다. 예수님 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여 믿도록 해주었고 또 주님과 의 산 교제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어주었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서 무엇을 행하셨는가를 줄 곳 선전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은 똑같이 살아 계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살아있는 신탁(oracles)이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은 창조주 하 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또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생성케 하신 전능 자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성경은 인간 창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인류의 범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 대해서 말 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신탁 경건한 기독교인들은 주저할 것 없이 담대하게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 영 감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공언한다. 경건한 기독교인들은 결코 두려움 없 이 성경의 권위는 바로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라고 믿는다. 성령의 인격과 사역(The Person and Ministry of the Holy Spirit)의 저자, 에드윈 팔머(Edwin H Palmer)는 “성경은 중생한 사람에 의해서 기록되었 다. 성경의 각 책 하나 하나는. . . .완전히 영감 되었고 따라서 무오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극명하게 주장한다. 성경은 거룩한 저자들이 성령에 의해 영감 되어 기록했다는 실증, 다시 말 해 하나님께서 저자들에게 그의 말씀을 불러주었다는 실증으로 풍부하다(민 22:38; 신 4:10; 사 51:16; 59:21; 렘 36:4; 호 1:1; 암 1:1). 그러나 거룩 한 저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된 방법은 소위 기계적 구술(口述)과는 사 뭇 다르다. 이 점에 대해 마이클 버리(Michael C. Bere)는 “하나님께서 성경의 단어들 을 불러주었다고 믿는 많은 학자들(Francis Pieper, R. Laird Harris, Edward J. Young, Gr esham Machen, Theodore Engelder 등)은 하나님께서 성 경을 구술해 주셨다는 데는 기계적인 점은 없다고 공언하고 있으며 소위 기 계적인 구술(Mechanical dictation)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고 매우 분명하게 지적했다. 기계적인 구술은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주장 인데 이것은 성경의 축자영감을 믿는 사람들을 비꼬기 위해서 만들어낸 신조 어(新造語)이고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그 구절을 자 주 사용함으로 많은 폐해를 끼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성경 저자들은 그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그들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충분하 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성령에 의해 사용된 것만은 틀림없다. 이에 대하 여 버리(Bere)는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하 나님께서 기술하시고 있다. 하나님은 그 정보를 모세를 통하여 인류에게 주 셨다. 모세나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하나님의 창조를 본 사람이 없었다. 하 나님은 모세가 알지 못하는 것을 모세에게 불어넣으셨다. 다니엘도 가끔 그 가 기록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인정했다(단 12:8-9). 쉐이퍼(Lewis Sperry Chafer)도 그의 저서 조직 신학에서 영감의 방법으로서 의 구술(Dictation)을 지지한 바 있다. 쉐이퍼는 “성경의 인간저자들은 자 기들의 기록의 요지를 다 깨닫지는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모세도 아담, 에녹, 아브라함, 이삭, 요셉의 역사에 잠재해있는 특유의 중요성을 거의 깨 달을 수 없었고 또한 그가 산에서 지시하심을 받아서 기록한 장막 묘사에 숨 겨있는 그리스도의 예표에 대해서도 거의 알 수가 없었다. 모세는 멜기세덱 에 대해서 조상들에게 말씀이 주어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히 7:1-3)”고 주장한다. 오직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축자적으로 영감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출 4:10-12; 34:27; 민 22:38; 23:26; 신 4:2; 삼하 23:2; 사 1:10; 렘 1:6-9; 겔 3:10-11; 단 10:9; 호 1:1; 욜 1:1; 암 3:1; 옵 1:1; 욘 1:1, 미 1:1; 나 1:12; 합 2:2; 습 1:1; 학 1:1; 슥 1:1; 말 1:1; 막 13:11; 요 12:49, 50; 고전 2:13; 살전 2:13). 성경은 일률적으로 축자 영감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
186 no image |신학단상<5>|숫자와 인간의 마음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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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4 2008-04-16
신학단상 숫자와 인간의 마음 조석민 목사·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기드온 삼백 용사처럼 하나님 능력보이길” 제18대 국회의원 선거가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끝났다. 신뢰할 만한 올바른 정책과 국민을 위한 적절한 정치 공약이 실종(失踪)된 선거에 46.1%의 투표 율은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 표심 보여 준 절묘한 투표 이번 선거는 여당인 한나라당도, 제1야당 통합민주당도 모두 마음을 놓을 수 없도록 국민의 표심이 절묘하게 반영된 선거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각 정당에서는 이번 선거의 결과인 이 숫자를 놓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해석을 하며 국민을 호도(糊塗)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그렇게 쉽게 당할 국민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선거는 결국 투표의 결과인 그 숫자가 말한다. 이번 선거에서도 많은 사람들 이 그 숫자에 울고, 웃고, 요동친 것이 사실이다. 민주주의 원리가 다수(多 數)의 결과를 따르 는 원칙에 입각한 것이지만 항상 다수가 옳은 것만은 아니 라는 진리를 모두 알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와는 다르지만 한국의 거의 모든 장로 교단들도 총회에서 해마 다 총회장을 선출하고, 각 노회에서 노회장을 선출하는 선거를 한다. 또한 각 교회에서는 담임목사의 청빙과 위임, 장로와 안수집사, 권사의 직분을 세 우기 위하여 선거가 실시된다. 이런 모든 선거에서도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원칙이 적용되어 실시되고 있다. 특히 교회의 선거에서는 투표자의 다수의 유효 투표 결과를 얻는 정도나, 과 반수의 유효 투표 결과를 얻는 정도가 아니라, 투표자의 2/3 이상의 유효 투 표 결과를 얻도록 요구하는 선거가 많아서 숫자에 더욱 민감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여러 선거들에서도 유권자의 표를 많이 얻어야 하는 상황은 역시 현 실 정치에서 보는 것과 거의 다름이 없다. 인간의 마음이 선거와 관련해서 숫자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것을 보면서 숫자의 신비와 위력을 느 낀다. 일반적으로 선거에서는 숫자가 매우 중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한 교회의 성도 의 숫자나 교회 재정의 통계 숫자가 선거에서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신비하 게 작용하는 것 같아서 어리둥절할 때가 있다. 교회는 사람의 숫자나 재정의 통계 숫자로 그 힘을 과시하거나 말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사람이 모이는 교회와 교회 재정의 통계 숫자 가 재정의 많음을 나타내는 교회들이 큰 목소리를 내고 그 힘을 과시하는 것 같이 보여서 아쉽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의 놀라운 능력과 세상이 소유하지 못한 복음의 위대한 능력 은 교회에서 사라지고 사람들의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숫자에 민감한 교회 가 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는 교인들이 교회에 모이는 숫자에 민감한 것이 사실이며, 어느 정도 그 마음을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목회자가 숫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그 숫자를 의지하면 결과적으로 거 의 모든 성도들을 하나님과 복음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로 양육하기 보다는 숫자에 민감한 사람들로 교육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교회는 교인들의 많은 숫자나 교회의 많은 재정 규모의 통계 숫자로 그 힘 을 과시하려고 하면 할수록 스스로 복음의 능력을 부인하는 결과가 될 수밖 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숫자를 의지하지 말 것을 성경에서 여러 번 분명히 교훈하셨다. 예를 들면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을 준비할 때에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나타 나셔서 사람의 숫자를 의지하지 말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사사기 7장 2절 은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 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 하였 다. 결국 이 말씀에 복종하여 기드온은 그 숫자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 하여 미디안과 전쟁하려고 처음 모인 사람들 중에 이만 이천 명을 돌려보내 고, 남은 군사들이 만 명이었지만 하나님은 이 숫자도 많다고 하셔서 결국 삼백 명이라는 적은 숫자로 미디안과 싸워 승리하였다. 이것은 기드온의 군 사 삼백 명을 통해서 미디안과 싸워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 로 승리하게 하신 것을 보여준다.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승리 비결 통계 숫자가 거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시대 속에서 많은 숫자가 능력을 과시 하지만, 교회는 숫자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신비한 모습이 계속 유지되어 복음의 참된 능력이 드러나길 소망한다.
185 no image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4>|하나님의 ‘영감’과 여호와의 ‘말씀’_김수흥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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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8 2008-03-26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 하나님의 ‘영감’과 여호와의 ‘말씀’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보여줘” 이 글을 쓰는데 있어서 몇 가지의 중요한 가정들을 내세운다. 첫째로 성경은 하나님의 무오하고 영감된 계시라는 점이다. 마이클 버리(Michael C. Bere)는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1,500년 넘게 대 략 40명의 특별히 선택하시고 준비하신 사람들에게 불어넣으셨다. 그들은 우 리에게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주기 위하여 성경을 썼다. 음악가가 트럼 펫에다가 입김을 불어넣어서 그가 원하는 소리를 내듯이 하나님은 40명의 선 택하신 성경 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하여 보존되기를 원하시 는 정확한 말씀을 불어넣으셨다”고 주장하고 있다. 존 머리(John Murray)는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통하여 왔다고 해 도 이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의 사역이라고 해서 결코 그들의 메시지, 즉 하나 님의 말씀을 받는 일을 방해하지 못한다”고 말 한다. 둘째, 성경은 축자적으로 영감된 고로 믿음과 행위를 위하여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또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들 중에 첫째는 여 호와의 말씀(utterance) 혹은 선언(declaration)이라는 표현이다. “여호와 의 말씀”이라는 기본적인 관용 표현에는 여러 가지 변이(變異)들이 있다. 예를 들면 ①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 “주 여호와의 말씀,” ③ “주 만 군의 여호와의 말씀,” 그리고 ③“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의 말 씀”등이다. 이 예들 중에는 권위의 고리(ring)가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 서 말씀하셔야 하는 것을 듣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땅히 들 려져야 한다. 하나님의 권위를 주장하는 두 번째의 표현은 동사로서 ‘말씀하시다’라는 표현이 있다. 기본적인 관용 표현으로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 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 기본적인 관용 표현에도 역시 여러 가지 변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히브리인의 하나님 여호 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 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으므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 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 를,”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 그의 구속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 를,” “이스라엘의 구속자요 그의 거룩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주 여호와시요 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 내 하나님께 서 말씀하기를” 등이다. 이러한 예(例)들은 그의 백성에게 들려주시는 하나 님 편의 장엄한 말씀이시다. 히브리어 동사 다발(dah-var)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또 하나님 자신의 말 씀의 권위를 증거하고 있는 것을 암시해주는 히브리어 용어이다. 이 동사의 의미는 칼(Qal)형에서나 피엘(Piel)형에서 다 같이 ‘말씀하시다’는 뜻이 다. 이 동사의 주어는 “여호와,” “하나님,” “주,” “여호와의 영” 그리 고 “여호와의 입”이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며, 그의 선지자 중 한 사람에게 말씀하시며, 혹은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히브리어 동 사 ‘다발’(말씀하시다)은 그의 백성 중에 임하시는 그의 임재를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는 일에나 복을 내리시는 일에 다 함 께 그 백성 중에 계신다. 구약 성경이 권위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 중에 하나로 명사 ‘다발’(dah- vahr)이 있는데 이 기본적인 의미는 ‘말’(speech) 혹은 ‘말씀’(word)이 다. 구약 성경에 394번이나 나타나는 ‘여호와의 말씀’(word of God)이라 는 단어의 의미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 단어로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실 때 백성들과 교제하시고, 또 예언을 하실 때 백성들과 교제하시고, 또한 도 움과 위로를 주실 때 백성들과 교제하신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여호와의 말씀’(word of God)이라는 단어들은 여러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 형식들을 살펴보면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에게 임하여,” “여호 와의 말씀이 ...에게 임하여,” “여호와의 말씀이 ...를 통하여 임하시기 를,”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를 통하여 임하시기를,” “...에게 임 하신 여호와의 말씀,” 그리고 “...에게 임하신 여호와의 말씀” 등이 있 다.
184 no image |신학단상(4)|고난(苦難) 후에 영광(榮光)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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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7 2008-03-26
신학단상 고난(苦難) 후에 영광(榮光) 조석민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모든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망 전할 수 있어야” 매년 부활절 때쯤이면 산에는 온통 연분홍빛으로 물들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금년에는 부활절이 예년보다 이른 시기여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없 는 것이 아쉽다. 왜냐하면 산속에 피어있는 철쭉꽃, 진달래꽃들의 붉은 빛 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붉은 피 흘리시며 돌아가신 모습이 연상되 기 때문이다. 봄에 피는 꽃에서 십자가 보혈 느껴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은 로마의 전형적인 사형제도 가운데 하나인 십자가 형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살아난다. 예수 당시 로마의 사형제도는 십자가형(十字架刑), 화형(火刑), 교수형(絞首刑)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 십자가 사형제도는 죄인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한 수단으 로 채택되었다. 이런 십자가 처형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실시되어 모든 일반 사람들이 자신 의 눈과 귀로 그 고통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여 로마에 대한 반역을 꿈도 꾸 지 못하도록 하는 정치적 압박 수단과 효과를 위한 제도였다. 또한 십자가형 은 죄인이 처형이 되면 반드시 그 죽음이 확인된 후에야 그 형틀에서 내려 올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고난 속에서 죽으시고 자신이 예언하신 대로 다시 살 아나신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 얻으신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 고난 후에 주어 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이면 고난 후에 영광이 주어지기에 이 땅에서 영광 얻을 것을 기대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 에 기꺼이 동참해야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고난을 기꺼이 감내(堪耐)할 필요 가 있다. 부활절이면 교회들은 잠시나마 교단과 교파의 벽을 넘어서 한 지역의 교회들 이 연합하여 기쁨과 감사한 마음으로 부활절 기념 행사를 한다. 예수 그리스 도의 부활을 되새기며 부활의 소망을 확인하는 뜻 깊은 행사를 교단과 교파 의 벽을 넘어서 함께 하는 것은 분명 매우 뜻 깊은 일이다. 그러나 부활절 행사가 말 그대로 행사 자체로 끝나는 모습을 볼 때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 n활의 의미가 점점 퇴색해져 가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부활절 행사의 의미가 무엇인가? 예수 부활의 놀라운 소식을 온 세상에 알리 며, 이 땅에서 고난 가운데 살아가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소망 을 다시 되새기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리라. 부활절 행사를 앞두고 교단과 교파 간에 행사 순서 담당자와 후원 문제, 어떤 이름으로 행 사를 개최할 것인가를 놓고 설왕설래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교단과 교파 의 벽을 허물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 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각 교회에서도 부활절 행사를 준비하면서 연례 부활절 음악 발표회를 하는 것처럼 행사 자체에 너무 치중하여 예수 부활의 참된 의미를 잊어버리지 않 도록 조심해야 한다. 더욱이 연중 행사로 한번 지나가는 부활절 행사이기보 다는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하며, 우리가 현재 고 난 가운데 있지만 결국 부활의 영광이 약속으로 보장되어 있음을 확인하며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계속 돌보며 다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하 는 계기가 되는 절기여야 할 것이다.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이미 영적 부활을 경험한 사람이 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2장 1절은 그리스도인들이 본래 자기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인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 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 에서 영적 부활을 이미 경험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영적 부활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마지막 육체의 죽음 이후에 몸의 부활을 맛 볼 수 없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요 11:25-26) 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땅에서 믿는 자들이 이미 부활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이런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 는 사람들이기에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과 핍박을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 부활 소망 안에서 고난도 감내할 수 있어 부활절에 예수 부활의 의미를 보다 더욱 뜻 깊게 되새기기 위하여 로마의 십 자가 사형제도 속에 무고하게 고난당하시며 처참하게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모든 교회들의 부활절 행사 속에 예수께 서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순서들이 함께 있어서 소망이 없 는 이 땅에서 여러 가지 고통 속에 힘없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활 의 소망을 굳게 붙잡고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183 no image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3)|_현대주의 혹은 현대의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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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2 2008-03-12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 현대주의 혹은 현대의 자유주의 김수흥 목사·합신 초빙교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되어야”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으나 성경 전체 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과 하나님의 말 씀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즉 성경과 하나님 의 말씀이 똑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주의는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해 그들은 성경을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유 는 성경이 사람에 의해서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진리를 위한 정해진 규준이 없다. 현대주의는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의 권위를 경시하고 있다. 오순절파는 대체적으로 말해서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성령 운동을 펼치는 흑 인 기독교 연맹(Alliance of Black Christianity)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의 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오순절 운동에 속해있 는 설교자들이나 성직자들은 만장일치로 선언하기를 자기들은 신조(creed)가 아니라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경건한 성경엄수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데이빗 스미스(L. Smith)는 주장하기를 동시에 실제로 많은 오순절파 의 사람들은 성경 권위에 대한 주관적이고도 경험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The Lord told me)는 말을 자주 사용 하여 마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의 말씀’ 설교 자들('word of faith' preachers)은 종종 그들의 계시가 성경에 맞먹는 것이 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순절파는 실제로 두 가지 종류의 계시, 즉 하나님의 개관적인 말씀과 그들 자신의 경험적인 예언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분명히 하 나님의 무오한 말씀의 권위를 가볍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은사운동에는 거의 반드시 공통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신학에 근거를 두지 않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고 또 보통 방언 을 말하는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 현상은 어디에서든지 일어나고 있 다. 많은 은사 운동 측 기독교 인들은 권위를 가진 기록된 원천인 성경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원천인 성령, 즉 기독교인 단합의 원천인 성령에 게 반드시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파노라마 시(Panorama city) 소재 은혜공동체교회(Grace Community Church) 의 목사인 존 맥아더(John F. MacArthur)는 “은사운동 측의 사람들은 하나 님께서 자기들에게 방언, 예언 및 환상을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수없이 주장 하고 있다”고 말한다. 맥아더는 또 “은사운동 측으로부터 ‘성경에 무엇 을 더하기, 즉 예언적인 발언, 하나님으로부터의 새로운 계시’라는 외침이 나오고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한국 교회의 보수주의 지도자들 사이에도 복음을 전할 때나 혹은 성 도들을 돌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취급하는 경향이 더해가고 있다. 학 자들이나 목사들은 점점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 말씀의 연구를 소홀히 하 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능력을 잃어가 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별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한국교인들은 대체적으로 철학적이고 인문주의적이며 과 학적인 설교 듣기 를 선호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앞으로 힘 빠진 복음에 실 망할 것이며 나아가 교회를 떠나게 될 것이다. 현대 교회는 말씀의 능력 상실하고 있어 이 시점에서 하나님 말씀이 연합에 미치는 역할을 연구하는 것은 절대적으 로 필요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 다.
182 no image |신학단상(3)|입술과 삶의 신앙 고백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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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7 2008-03-12
신학단상 입술과 삶의 신앙 고백 조석민 목사·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서 매주일 예배 시간이면 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 이 ‘사도 신경’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순서를 갖는다. 그리스도인으 로서 자신이 믿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 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며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입술로 시 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꼭 필요한 것이다. 사도신경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성도들이 이런 신앙 고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 도 안에서 하나 됨을 늘 확인하고 서로 격려하며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 것 이다. 이런 점에서 공적 예배의 순서 가운데 행해지는 신앙 고백은 눈을 감 고 드리는 기도가 아니기에 일반적으로 기도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 고백 시간에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함께 입술로 ‘사도 신 경’ 을 고백할 때 서로가 믿음을 격려하며, 입술로 고백한 것을 다시 확인하 고 다짐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9-10절에서 ‘네가 만일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 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 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교 훈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은 신앙 고백이 입술의 고백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입술로 고백할 뿐 아니라 삶으로 고백되어져야 한다. 개인의 신앙 고백이 입술에서 뿐만 아니라 삶으 로 고백되어질 때 온전한 신앙의 고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신앙 고백은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입술로 시 인하며 고백하고, 자신이 믿고 고백한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고백 속에는 자신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한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 러므로 이제는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며 그 주 인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다. 개인의 신앙 고백은 공적 예배를 통해서 함께 공동체적으로 고백되어져야 한 다. 예배를 통해서 드러나는 개인의 신앙 고백은 한 주간의 삶이 바탕이 되 어져서 나타날 때 비로소 참된 고백이 될 수 있다. 한 주간 동안의 삶을 예 배드리는 자의 모습으로 살지 않았으면서 주일 예배 시간에 참석하여 ‘사도 신경’을 입술로 암송하는 것은 면죄부를 받는 행위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 이며, 가식적인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주간 동안의 삶이 어찌되었든지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일 수 있으실 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 주간 동안의 삶 속에서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한 그대로 살아가면서 몸부림칠 때 우리의 삶은 조금씩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드리 는 고백은 곧 그 고백의 장소가 우리의 가정이며, 일터이고, 내가 사역하는 현장이다. 이런 점에서 신앙 고백은 곧 윤 리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신앙 고 백이 단순히 입술로 고백되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실천적으로 삶 속에서 나타 나는 것, 입술로 말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입술로 고백한 것과 시인한 것이 그 사람의 삶과 전혀 다를 때 우리는 그 고백이 거 짓이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의 신앙 고백이 삶 속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며, 하나님을 기만하고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믿음으로 고백하 는 사람들 가운데 그 신앙 고백이 전혀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계, 의료계, 학계 및 심지어 종교계 속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입술의 신앙 고백이 윤리 도덕적 삶의 고백 이 되어져야 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윤리적 삶의 고백으로 항상 확인되어야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가 하는 일 속에서 삶으로 실천하며 다른 사람들에 게 보이는 삶의 고백이 우리들의 신앙 고백이기를 소망한다. 이런 삶의 고백 을 기초로 주일마다 공적 예배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사도 신경’ 을 통하 여 입술로 고백할 때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눈짓으로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 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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